[papapa] 황실의 망나니 스승이 되었다 132 연재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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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국지색 >
#001화. 경국지색
나라가 망하기 직전이다.
저 능선 너머로 보이는 군세가 이 성벽에 닿는 순간이 바로 천년 제국 오르테어의 최후다.
제국은 남은 병력이 거의 없었다.
정예 기사단은 하나같이 저 군세에 짓밟혀 모가지가 날아갔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일어났던 병사와 백성들은 포로가 되거나 무참히 죽어버렸다.
하다하다 죄수들을 옥에서 꺼내 병력으로 쓸 정도라면 이 심각성이 이해될까.
그리고 이쯤 되면 누군가는 눈치챘을 것이다.
맞다.
내가 바로 그 죄수 병사다.
그리고 그 죄수 병사조차 이제는 죽기 직전이고.
상념에 빠져있던 중 지휘관이 말했다.
"암만 생각해봐도 말일세."
"또 무슨 헛소리를 하시려고."
"내가 황제가 됐다면 나라가 이렇게 망하진 않았을 걸세."
또 시작이군.
참 듣기 싫은 말이지만, 저게 마냥 헛소리는 아니었다.
금빛 봉두난발에 푸르고 탁한 눈.
수염이 덥수룩하고 몸은 상처투성이인 게 꼭 노숙자 같지만, 이래 봬도 이 인간은 과거 제국의 태자였다.
동시에 최정예조차 다 죽은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있는 이유인 제국 최후의 그랜드 마스터이기도 하고.
"부관, 자네가 생각해도 내가 황제였다면 지금보단 상황이 낫지 않았겠나?"
껄껄 웃으며 하는 말이 헛소리임은 안다.
그렇기에 나 또한 헛소리로 답했다.
"개뿔이. 여자 하나에 미쳐서 국무까지 다 내팽개친 인간이 황제였으면, 제국이 지금보다 더 빨리 망했겠지요."
"신랄하군."
"맞지 않습니까. 당신뿐만 아니지. 차기 제국의 지도자라는 인간들이 하나같이 여자 하나에 헤롱대다가 병신 됐잖습니까."
생각하니 또 화가 나는군.
이 전쟁에서 진 이유가 그것이었다.
20년 전인가. 아직 내가 귀족 영식이고, 이 인간이 태자이던 시절의 이야기다.
태자는 웬 평민 여자 하나에 빠져 직무를 내팽개쳤다.
황제 교육도 받지 않았고, 검술 수련도 하지 않았고, 하다못해 연회와 같은 공석도 빠졌다.
그러면서 한다는 게 권력으로 그 여자 비위를 맞춰주는 것 하나.
그 끝이 어떻게 되었겠나.
이 인간은 자격을 상실하고 태자위를 박탈당했다.
그것에 앙심을 품고 날뛰다가 옥에 투옥되었고, 전쟁이 돌이킬 수 없게 된 지금에서야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잔 의견에 풀려나게 된 것이다.
다른 인간들도 마찬가지였다.
북부 전선을 지키던 대공의 적자, 암흑가의 주인, 법황청의 성자와 차기 마탑주가 모두 그 여자에게 빠져 몰락했다.
그 결과가 이것이다.
쭉쩡이만 남은 제국, 침략에 의한 몰락.
그걸 표현하자면··· 그래.
"경국지색이었네요. 그 여자는."
그 여자는 나라를 흔드는 여자였다.
황자는 내 말에 허허 웃었다.
"그리 이쁜 얼굴은 아니었네. 그냥 귀엽게 생긴 것이었지."
"나라를 흔들긴 했잖습니까."
"귀여움으로 나라를 흔들었지."
"그 염병할 년이 어떻게 됐더라. 결국 평민 남자랑 눈맞아서 애 낳고···."
"···잘 살았지. 그래도 불쌍한 여인이네. 이런 인간들에게 휘말려서."
아직도 이러는군.
그놈의 첫사랑이 뭔지, 내가 그 여자를 욕하면 이렇게 씁쓸하게 웃는다.
그것이 죄의식 때문이지 미련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여하튼, 지난 일을 더 말해봐야 무엇하겠나.
"···그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나는 태자에게 마지막 말을 건넸다.
나라를 무너뜨린 최악의 황족이었으나, 그 덕분에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게 되었다.
감옥에서 황자에게 비전 검술도 배워 경지를 올린 까닭이다.
황자는 허허 웃었다.
"신세 많이지긴. 미안할 뿐이네. 자네가 감옥에 간 것도 내 젊은 날의 치기 때문이지 않던가."
"지난 이야기를··· 됐습니다."
"그래도 미안허이."
별 이야기는 아니다.
내가 옥에 들어온 이유.
한창 태자가 미쳐 있던 시기에 그 여자의 뺨을 갈겨버렸고, 그게 태자의 분노를 불러일으킨 것이었다.
분명 이 인간 때문에 인생의 반을 옥에서 살았지만 그게 원망스럽진 않았다.
애초에 옥에 들어가며 짚었던 죄목들은 실제 내가 행했던 죄들이었으니까.
"전하가 아니라면 전 여전히 철부지였겠죠. 제가 좀 망나니였습니까. 옥에서 혼자 생각할 시간이 많아지니 그제야 생각이 트이덥니다. 내가 잘못 살았구나 하고."
나는 망나니였다.
위대한 가문의 후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책임 없이 권리만 누리던 구제불능.
행했던 죄를 되짚으면 서류가 모자랄 그런 인간.
그런 나를 일깨워준 것은 옥에서의 시간이었고, 나를 완성시킨 것은 황자였다.
새삼 원망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보다, 이젠 원망할 시간도 없었다.
"오는군요. 야만족들."
"그렇군."
저 멀리, 이젠 육안으로 저들의 선두에 선 야만족의 왕이 보였다.
이자크 라 보데타.
위대한 혼이라나 뭐라나, 구리빛 피부의 근육질 사내는 징글징글하게도 환하게 웃고 있었다.
"전하, 저 새끼 웃는데요."
"냅두시게. 황성 먹는 꿈이라도 꾸나 보지."
"진짜 냅둡니까?"
"아니."
황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국이 망하는 건 용납해도, 저 새끼가 옥좌에 앉는 건 용납이 안 되네."
그의 검에 시리도록 빛나는 황금색의 검기가 맺혔다.
언제봐도 파괴적인 기운이었다.
제국 최후의, 그리고 초대 제국의 황제 이후로 처음 나온 두 번째 그랜드 마스터.
그런 그가 내게 말했다.
"시간을 돌리고 싶군."
"갑자기?"
"그래, 오늘 그런 생각을 했네. 시간을 돌려서 과거로 가고 싶네. 내가 그녀에게 빠지기 전으로."
"또 빠지지 않겠습니까?"
"그 생각도 했지. 그래서 말인데, 내가 고민 끝에 완벽한 답을 찾았다네."
"뭡니까."
황자가 히죽 웃으며 날 봤다.
"자네를 과거로 보내는 걸세."
"···예?"
"자네가 과거로 가 나를 패버리는 걸세. 정신 좀 차리게 해달라는 말이지."
무슨 헛소린가 싶어 쳐다보니 황자가 개구지게 웃으며 말했다.
"자네 주둥이가 참 자유분방하지 않던가. 옥에서였다지만 자네가 날더러 애미가 창녀냐고 물었을 땐 기함 했네. 황후마마를 욕되게 하는 인간이 살아있다는 게 참 신기했고."
"···먼저 저희 가문을 욕보이셨습니다."
"아무튼, 그 정도로 주둥이가 자유로운 인간이 필요하단 말일세. 내 주변엔 날 우러르는 것들밖에 없었어. 그러니 내가 정신을 못 차렸지. 선망에 취해있었다는 말일세."
탁, 탁!
황자가 검기가 맺힌 검으로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니 자네야. 이 땅에서 나를 제일 잘 알고, 나한테 개기고도 살아있을 수 있는 자네."
어차피 헛소리라지만, 그럼에도 꽤 흥미로운 주제라 나는 답했다.
"제가 왜 그래야합니까?"
"검술 가르쳐줬잖나."
"가르쳐주기는. 하루가 멀다 하고 그 검술로 두드려 맞으니 눈에 익어버린 거죠."
"대련이었네."
"지랄마십쇼. 전하."
"덕분에 자네도 소드 마스터가 됐잖나."
"그럼 뭐합니까. 아직 전하는 못 패는데."
황자는 끔찍하게도 강한 인간이었다.
그가 말한 '제국이 망해도 저 인간 목은 따야 한다'는 말이 그저 각오는 아닐 정도로 말이다.
그런 인간과 또 엮이라니, 죽어도 사절이다.
"안 합니다. 꺼지십쇼."
그러자 황자가 말했다.
"아니, 자네는 할 걸세. 젊을 적 내 얼굴을 보면 열이 뻗쳐서라도 나한테 욕을 할 거거든."
"반박을 못하겠네."
우리의 대화는 그게 끝이었다.
평소와 다른 점은 하나.
우리는 이제 죽으러 가리라는 것.
또한,
"···전하?"
황자의 눈이 시리도록 눈부신··· 그의 검기와 같은 황금으로 물들었다는 것이다.
황자가 전선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하며 말했다.
"부탁하네."
무엇을 부탁하는 것인지는 모른다.
다만 내가 기억하는 것은 하나다.
황자는 야만인들의 왕과 싸웠다.
강풍이 일었고, 지진이 일었고, 하늘이 쪼개졌다.
한낱 검수에 지나지 않는 나는, 그 속에서 어떻게든 한 놈이라도 더 데려가기 위해 발악했다.
폭음과 비명, 그리고 쇠와 피.
그런 것들이 내 영육을 뒤흔들어 정신이 아득해졌다.
어느 순간에는 감각조차 사라졌다.
'아.'
죽는구나.
나는 이렇게 끝이구나.
그렇게 비로소 나의 최후를 직감한 후.
그러고도 한참이 지난 후.
이윽고, 다시 감각이 돌아왔을 때는 고개를 갸웃했다.
"유렌 파로스. 자, 할 말이 있다면 들어주지. 어디 한번 변명해보게."
장소는 폐창고.
눈앞에는 아직 태자이던 시절의 젊은 황자가 있었다.
내 몸은 묶여있었고.
* * *
언젠가 하반신이 통째로 날아가 퇴역한 부하 놈 하나가 그런 말을 했다.
-죽기 직전까지 몰리니까 인생의 가장 후회되던 순간이 꿈처럼 보였습죠.
이렇게 보니 그 말이 맞는 듯하다.
폐창고에 묶여있는 나. 날 보며 웃는 황자, 칼리오스 반 오르테어.
이건 내 인생이 바닥에 꼬라박히는 날의 광경이었다.
이날 나는 황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평민 계집의 뺨을 때렸고, 그 이유로 황자의 분노를 사 감옥에 갇히게 된다.
시기를 따지자면 갇히기 직전의 시점.
나를 찾아온 황자가 준 최후 변론 시간이었다.
"남길 말은 없나? 어떤 말이든 들어줄 용의는 있네."
꿈이라고 생각하니 여유로워졌다.
나는 황자··· 아니, 이 시점엔 태자인 그의 얼굴을 살폈다.
이렇게 보니 참 놀라웠다.
'이 얼굴이 그 노숙자 꼴이 된다라···.'
지금 태자의 얼굴은 어떤 영애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모든 소녀의 망상을 그러모아 둔 듯한 얼굴' 그 자체였다.
솔직히 내 입장에서야 남색가나 환장할 법한 생김새였으나, 그럼에도 잘난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한데 세월도 야속하지.'
어쩌다가 이 얼굴이 그 노숙자 꼴이 되는가.
무상함은 잠시였다.
"내 말이 들리지 않나?"
태자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나로선 별 감흥이 없었다.
말하라고 해봐야···.
'···어차피 꿈인데 뭘.'
지난 일을 생각해봤다.
실제론 무슨 대답을 했더라?
-고작 평민 계집 하나가 아닙니까! 전하! 저는 억울합니다! 그년이 아니라 절 두둔하셔야지요! 저는 위대한 가문의 후계자입니다! 폐하의 우군이란 말입니다아악!!!
···음, 그리 좋은 답은 아니었군.
망나니 시절의 일은 몇 번을 생각해도 부끄러움이 치솟는다.
여하튼, 꿈이라면 빨리 끝났으면 한다.
썩 잘 살진 못했지만 그래도 나라 지키다 죽었으니 주신 품으로 갈 것 아닌가.
거기서 맛난 과일도 먹고 술도 먹으면서 유유자적 살아가고 싶다.
인생 절반을 감옥, 또 나머지 절반 중의 절반을 전장에서 지냈다 보니 자유와 평화가 이렇게 그리울 수가 없었다.
'언제 끝나려나.'
라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흠, 대답이 없군. 겁에 질린 겐가? 그 정도로 담이 약한 인간이 어찌 아녀자에게 폭력을 휘두른 겐가. 아니라면 자네의 힘은 약자에게 밖에 휘두르지 못하는 허접한 힘인가?"
그 말에 헛웃음이 삐져나왔다.
'내가 나보다 약한 사람한테 검을 휘둘러 봤나?'
단언컨대 없다.
당연하지, 내 검을 가장 많이 상대한 인간이 미래의 이 인간인데.
그 외에 검을 휘둘러본 이라고 해봐야 전쟁에 미친 야만인들밖에 없다.
따지고 보자면 약자에게 검을 휘두르는 건 이 인간 쪽이었다.
전장에 이 인간만큼 검을 휘두르는 놈은 야만인의 왕 말곤 없었으니까.
내가 웃기지도 않는다는 표정으로 태자를 보자, 태자가 비릿하게 웃었다.
욱하게 만들려는 속셈임이 너무 잘 보였다.
'어휴.'
참을 수 있다.
내가 애도 아니고 덜 큰 태자의 말에 부동심이 흔들리기야 하겠나?
이 정도야 미래 황자의 '자네는 애미도 애비도 없잖나. 얼굴은 기억하나?'라는 욕의 절반의 절반도 안 된다.
···이어진 말만 아니었더라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쫄보 같은 놈이군. 담도 없고 답도 없어. 이딴 게 제국의 미래 중 하나였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돋네. 오늘 자네를 쳐내는 건 제국을 위한 선택이겠지."
덜컥 몸이 멎었다.
무언가 뜨거운 것이 머릿속에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이르길 깊은 빡침, 혹은 억울함.
그놈의 '제국의 미래를 위한 선택'이라는 단어가 날 아주 대차게 긁어버렸다.
'저 인간이 제국의 미래를 걱정했다고? 이 시기에?'
지랄 중의 개지랄이다.
이것은 본인 입으로 직접 답을 들어서 확신한다.
-그때의 나는 꼭 홀린 듯했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 그녀 말고는··· 정말 무엇도 보이지 않았어.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
입이 멋대로 움직인 것은.
"그게 전하 입에서 나올 말입니까?"
"-"
"평민 계집 하나에 홀려서 국무도 내팽개치는 인간이, 제국의 미래를 논하는 게··· 이게 맞습니까?"
사실, 이 정도면 불경죄로 다스릴 법도 하건만 크게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어차피 꿈인데 뭐.'
한풀이도 할 겸 그냥 저질러버리자.
결심하니 입이 자유분방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꽤 오랫동안 응어리져있던 말이었다.
"전하, 정신 좀 차리십쇼. 제발 사고 회로에서 하반신을 떼란 말입니다. 아니면 제가 떼드립니까?"
태자의 표정이 쩌저적 굳었다.
아오, 속 시원해.
< 경국지색 > 끝
ⓒ papa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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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풀이 (1) >
#002화. 한풀이 (1)
돌이켜 보면 이 인간에게 쌓인 게 좀 많긴 했다.
내가 황자 때문에 오죽 고생을 했던가.
그 정도를 말해, 세상에서 가장 싫은 사람이 누구냐 물으면 '칼리오스 반 오르테어'라는 말이 뇌를 거치지 않고 나올 정도다.
옥에 들어온 것도 이 인간 때문.
옥에서 그렇게 몸을 혹사 당한 것도 이 인간의 수련 때문.
옥을 나와서 전쟁터를 전전한 것도 이 인간이 끌고 간 것 때문.
물론, 사과야 다 받아냈다.
중년의 칼리오스는 지금보다는 성격이 유했으며, 자신이 병신이라는 걸 아는 병신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이다.
세상 일이 사과로 끝나면 경비대는 왜 있나?
물론 사과로 안 끝날 거면 사과가 왜 있냐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어야 사과로 끝나는 법이다.
사람 감정이라는 게 참 무섭지.
인생이 나락으로 박히는 순간을 꿈으로 꾸니 그때의 억울함도 함께 몰려오는 듯했다.
그러니까, 울분에 말이 좀 거칠어졌다는 말이다.
"자아알~ 하는 짓입니다. 연회도 안 나와, 학문도 게을리해, 수련은 나갈 생각도 없어, 한다는 짓은 잠행이 끝이군요. 아주 백성의 삶에 관심이 깊은 성군 그 자체십니다."
한쪽 입꼬리만 올리며 웃자 태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네놈, 입을 조심···."
"어이쿠, 죄송합니다. 이게 주둥이가 아니라 똥꼬라서."
"무슨···."
"방구가 안 멈춥니다. 양해 좀 해주십쇼. 아니면 왜, 찔리십니까? 사실 안 찔리면 양심이 없는 거긴 합니다."
그리고 이 태자는 양심이 없다.
이 또한 미래의 그가 보증한다.
-난 내가 그렇게 게을러진 줄 몰랐네. 다 지난 지금 생각해 보면 실로 방만한 황족 그 자체였지. 머릿속이 그녀로 꽉 차서 뭘 해야 하는지도 생각지 못했던 걸세.
대단한 사랑꾼 납셨다.
물론 지난 일.
내 알 바는 아니다.
나는 내가 아는 사실, 그에게 들은 사실, 그리고 들어왔던 소문이나 이야기를 총합해 사실을 기반으로 빈정댔다.
전력을 다한 욕이었다.
"요즘 사교계에서 전하를 보는 눈이 참 재밌습니다. 국무도 돌보지 않는 방만한 태자. 암군의 그림자. 제국의 검은 태양. 혹은 제국 최후의 황제··· 예정."
그 순간 태자의 몸이 멈칫했다.
뭐랄까, 20년 묵은 체증이 쏙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끝낼 수는 없지.
"오늘 일만 해도 그렇습니다. 자, 제 이름이 뭡니까. 유렌 파로스. 위대한 가문 파로스의 후계자. 이 제국의 정통성을 증명하는 이름."
다시 생각해봐도 내가 가문 하나는 참 잘 타고났다.
물론 전쟁이 한창인 시기엔 이미 망하고 없는 가문이 됐지만 말이다.
뭐, 그것도 뭐 슬픈 과거고.
일단 지금 일에 최선을 다해야지.
"자, 따져보겠습니다. 전하께선 평민 계집 하나의 뺨을 후렸다는 이유로 이 저를 겁박하셨습니다. 사교계는 소문이 빠르지요. 아니면 전하의 수행인인 저 기사 중 누군가가 오늘 일을 소문낼 수도 있겠습니다. '전하가 계집에 미쳐 위대한 가문'을 겁박했다···라고 말입니다."
없는 말을 지어낸 게 아니다.
실제로 오늘의 일은 저 인간이 폐위되고, 옥에 갇히는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가 된다.
정치적인 알력 관계라는 것이다.
평소 태자를 마땅찮게 보던 다른 황자의 세력, 혹은 그에게 약점이 잡힌 세력은 언제나 태자를 끌어내리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암만 책봉을 마친 태자라지만, 모든 행동이 용서받는 것은 아니지 않나.
이 일은 훗날 두고두고 그의 정치적 약점이 된다.
물론 다른 패악질도 꽤 일삼은 게 유효했다.
"전하께선 입지를 잃으실 겁니다. 전하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이들조차 진절머리를 치며 마음을 돌리기 시작할 테지요."
그래도 태자가 머리는 좋은 인간이다.
내 말을 잘 이해할 것이고, 실제로 그것이 표정에 보이고 있었다.
'자, 어떻게 결정타를 때릴까.'
어떻게 해야 저 인간의 기분이 좆같아 질까.
카타르시스를 동반한 발상이 여러 문장을 엮었다.
그 결과, 나는 그가 가장 싫어할 만한 말을 찾을 수 있었다.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대체 뭘 하시는 겁니까. 어디에 정신이 빠져 있는 겁니까."
태자의 표정이 굳었다.
"사리 분별이 그리도 안 됩니까? 그딴 평민 계집 하나를 감히 태자위와 같은 저울에 올리는 겁니까?"
그의 주먹 위로 힘줄이 돋아났다.
"가지는 바람에 흔들릴 수 있습니다. 하나 뿌리는 흔들려선 안 되는 법입니다. 한데, 전하께선 지금 뿌리가 흔들리는 나무와 다름이 없으십니다."
나는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쐐기를 박았다.
"뒤를 돌아보십시오. 당장 저 기사들의 표정이 어떤지를, 그들이 전하를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는지 확인하십시오."
-내 주변엔 날 우러르는 것들밖에 없었어. 그러니 내가 정신을 못 차렸지. 선망에 취해있었다는 말일세.
미래의 그만이 뒤늦게 깨달은 현실을 태자에게 보여줬다.
태자의 시선이 삐걱삐걱 뒤를 향했다.
잠행복을 입은 채 그를 수행하던 기사들은 흠칫 몸을 떨었다.
그들은 내가 입을 열던 내내 그랬듯, 부끄러움이나 두려움을 얼굴 위로 떠올리고 있었다.
표정을 가다듬을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 말이 당황스러워 그 충격에서 헤어나지도 못한 이유였다.
"······."
뒷모습이지만 알 수 있었다.
저들을 살피는 태자는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리란 것을.
만인이 자신을 선망한다는 망상을 처음 깨고 나와, 혼란스러우리란 것을.
내 생각은 맞았다.
다시 나를 향하는 태자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그 어떤 미혹에도 흔들리지 않던 미래의 그와는 다르게, "후우" 하고 불면 쓰러질 것 같은 비루한 기세였다.
나는 말했다.
"이거 푸십시오. 그리하면 오늘 일은 기억에서 지울 테니."
"전하···!"
후일이 걱정되기 시작한 기사들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태자의 입이 꽉 물렸다.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충격이 꽤 큰 듯했다.
하나, 그 감정은 분노와 달랐다.
이것은 한없이 혼란과 닮은 기세였다.
이윽고 태자는 말했다.
"···풀어주어라."
쇳소리가 얽혀 갈라진 목소리가 끝.
나는 기사들의 도움으로 구속에서 풀려났다.
"그럼 저는 이만."
굳어버린 태자를 뒤로한 채 그런 인사를 남기고 설렁설렁 폐창고를 떠났다.
바깥 공기가 아주 시원했다.
상쾌함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나는 기지개를 켰다.
'얼마 만이지?'
이리도 상쾌한 공기를 쐬는 것이.
옥에서는 퀴퀴한 공기를, 병사가 된 후엔 언제나 시취 속에서 살았다.
기억 깊은 곳에 잠들어있던 기억은 그제야 먼지를 털어내고 내게 말했다.
'···그래.'
전쟁 전의 제도는 이런 곳이었다고.
'아름답다.'
밤중에도 대로를 밝히는 빛이 있다.
치안을 위해 늦은 밤까지 순찰을 도는 경비가 있다.
혈기 넘치는 제국의 청년들은 술에 만취해 거리를 거닐었고, 그들을 보며 웃는 노년들이 있었다.
"하, 하하···!"
웃음이 나왔다.
다름 아닌 나의 병신같던 과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런 세상 속을 살았음에도 무엇이 그리 불만스러워 망나니처럼 살았을까.
무엇이 그리도 화가 나 패악질을 부리고 다녔을까.
하지만 후회는 언제 해도 늦는 법이다.
나는 고개를 털어 생각을 지웠다.
'아직 꿈속이다. 그러니 조금은 더 즐겨도 되겠지.'
이후는 죽음이다.
안식, 혹은 징벌일 테지.
그렇다면 최대한 이 순간을 즐겨두어야 하지 않겠나.
나는 제도의 밤거리를 걸었다.
반지 하나를 팔아 길에서 싸구려 럼주를 샀고, 밤의 제국민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다.
"자, 즐겨. 평화로운 날이니까."
"우오오! 파로스 공자님! 역시 통이 크십니다!!!"
"별말씀을."
그렇게 잔뜩 취해서 잠들었다.
다음 날이 되었다.
숙취는 죽을 듯이 힘들었고,
'···왜 아직 꿈속이지?'
꿈은 깨지 않았다.
나는 그제야 무언가 잘못됐음을 느꼈다.
* * *
황성의 아침은 이르다.
그것은 비단 사람들이 그만큼 바삐 움직인다는 말 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물리적으로 햇볕이 빨리 든다.
제도를 넘어 제국 전체에서 황궁의 높이가 가장 높기 때문이다.
개중에서도 황제가 기거하는 태양궁 다음으로 높은 곳이 바로 태자의 여명궁.
떠오르는 해가 가장 잘 보이는 궁이며, 오늘 그 궁의 최상층의 테라스엔 여명을 바라보는 유려한 외모의 사내가 있었다.
바로 궁의 주인인 태자 칼리오스였다.
그의 눈 밑엔 거뭇한 그늘이 져 있었다.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땅거미가 지는 시간부터 지금까지 줄곧, 칼리오스는 이 최상층의 테라스에서 흘러가는 천체를 바라보기만 했다.
누구도 그를 방해하지 못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면 말이다.
쿵쿵!
유난히 성난 발걸음으로 그곳에 다다르는 이가 있었다.
칼리오스의 예민한 감각은 들려오는 소리를 포착했다.
-화, 황녀 저하! 잠시···.
-비키거라.
이윽고,
쾅!
최상층의 문이 열렸다.
칼리오스는 흘긋 시선을 옮겨 문을 바라봤다.
신경질적인 인상, 자신과 같은 금발에 푸른 눈,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인은 자신의 누이인 1황녀 에릴다였다.
"···이리 이른 시간에 어찌하여."
"어찌하여? 어찌하여?!"
그녀는 여전한 성난 걸음으로 칼리오스에게 다가갔다.
직후 대뜸 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칼리오스. 이 병신 같은 새끼야."
그녀의 어조는 숫제 으르렁거리는 맹수의 울음과 닮아있었다.
본래도 화가 많은 그녀이지만, 이 정도의 분노는 이례적이었다.
"황실에 눈과 귀가 몇 개지? 눈 뜨는 순간부터 잠드는 순간까지 항상 행동거지를 조심하라고 말한 건 너 아니었어?"
"···무슨 말인지."
"위대한 가문을 건드려놓고도 아무 생각이 없다? 네가 진짜 미쳤구나?"
에릴다가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칼리오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벌써 이야기가 퍼진 건가.'
그것은 칼리오스의 심중에 불쾌함을 자아냈다.
다음으로 불쾌함을 덮을 수준의 목메임을 자아냈다.
전날 밤 만났던 사내의 시리도록 무표정한 얼굴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사교계는 소문이 빠르지요. 아니면 전하의 수행인인 저 기사 중 누군가가 오늘 일을 소문낼 수도 있겠습니다. '전하가 계집에 미쳐 위대한 가문'을 겁박했다···라고 말입니다.
와중에도 에릴다의 말은 이어졌다.
"네가 건드린 게 위대한 가문이야. 이게 무슨 뜻인지 몰라? 왜 하필 파로슨데! 왜! 왜 그 많은 가문을 두고 하필 파로스였냐고!!!"
높아진 언성은 어느새 고함이 되었다.
분노와 원망, 두 가지가 그녀의 얼굴 위를 덮었다.
그에 칼리오스는 자신이 건드린 게 무엇인지를 상기했다.
'위대한 가문 파로스.'
제국의 건국 이전부터 존재했던 가문이자, 초대 황제와 함께 이 땅을 개척한 개국 공신의 가문.
그리고, 초대 황제의 태사(太師)를 맡았던 가문.
그들에겐 작위가 없다.
그들에겐 직책이 없다.
그 무엇으로도 그들이 이뤄온 위업을, 그리고 이뤄낼 위업을 제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파로스는 그저 '위대한 가문'이었다.
또한 황제의 어명에 재고(再考)를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가문이었다.
칼리오스가 건드린 것이 그런 가문이었다.
그러니 그녀의 분노는 정당했다.
칼리오스와 동맹 관계인 에릴다의 파벌은, 그가 몰락한다면 누구보다 큰 피해를 받을 터였다.
즉, 이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그녀까지 나락으로 몰아가는 선택이었다.
또 한 번 유렌의 말이 칼리오스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사리 분별이 그리도 안 됩니까?
그는 괴로운 기분을 느꼈다.
에릴다의 분노는 와중에도 이어졌다.
"귀족파가 네 흠결을 찾고 있어. 2황자의 개들도 마찬가지지. 사방이 적이야. 빌어 처먹을 새끼들이 이 궁을 지금도 넘보고 있다고."
"······."
"그런데 너는··· 너는 대체 뭐하는 건데. 응? 어쩌자고 평민 계집 하나에 빠져서 약점만 보여줘. 그거? 그래, 이해할 수 있어. 한창 사랑이 좋을 나이지. 그 경험이 너를 성숙하게 만들 거라고 생각했어. 근데 이게 뭐야···."
멱살을 쥔 그녀의 손에서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왜 거기까지 가는데. 그 계집 하나가 뭐라고. 대체 뭔데 위대한 가문하고 척을 지는 건데? 대체 왜···!"
어제까지의 자신이라면 이에 무어라 답했을까.
칼리오스는 금방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망나니 하나를 치웠다. 위대한 가문에 여태 없었던 실패작이 나왔다. 그러니 제국의 미래를 위한 결단을 내린 것뿐이다.'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을 것이다.
이 말을 에릴다의 면전에 했겠지.
그리한다면 그녀는 아득바득 이를 갈다가도, 자신의 선택을 존중하곤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이제껏 그래왔듯이.
하나, 지금은 그리 말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실망감을 띠기 시작하는 에릴다의 표정이 쐐기를 박듯 어제의 일을 회상시켰다.
-전하께선 입지를 잃으실 겁니다. 전하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이들조차 진절머리를 치며 마음을 돌리기 시작할 테지요.
단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그저 밤이 지나 아침이 되었을 뿐이다.
한데도 그가 이르렀던 말은 모두 실현되고 있었다.
칼리오스는 혼란스러웠다.
'···망나니였다. 분명히.'
그가 이전까지 보인 행적도 그러했고, 잡혀 온 그 순간도 그는 망나니였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며 소리치기 바쁜, 이것 풀라고 악을 쓰기 바쁜.
그러다 덜덜 떨며 잡혀 오던.
한데, 자신이 정체를 드러낸 직후 그의 기색이 바뀌었다.
그 순간의 그는 칼리오스가 봐왔던 망나니 유렌과 같은 사람이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냉소적이고 무감했다.
그가 하는 말은 하나하나가 서늘한 비수와 같았으며,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것들이었다.
그의 태도를 무어라 해야 할까.
···그래.
'평가당했다.'
생각한 순간이었다.
에릴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번 일은 쉽게 덮을 수 있어. 납치 당한 당사자인 파로스의 소가주가 밤새 거리에서 술을 마시는 모습을 제도 백성들이 봤으니까. 납치는 결국 음모론자들의 루머로 끝날 거야."
아니었다.
칼리오스는 그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이거 푸십시오. 그리하면 오늘 일은 기억에서 지울 테니.
즉, 그런 말이다.
'알리바이를···.'
만들었다.
누구도 그날의 일로 칼리오스를 겁박할 수 없는 완벽한 알리바이를 말이다.
칼리오스는 자문했다.
'그는 진정 망나니인가?'
아니, 그건 말이 안 된다.
차라리 망나니의 행적이 가면이라 치는 게 더 신빙성이 있었다.
하나가 의심되니 모든 게 의심되는 게 사람이다.
칼리오스도 다르지 않았다.
'유렌 파로스는 어째서 그녀의 따귀를 친 거지?'
의도적이었나?
전날 밤의 독대할 수 있는 자릴 만들기 위해?
그렇다면 그 말을 전하는 게 목적일 것이다.
또한, 그게 목적이라면.
'나의 행동 양식을 모두 꿰뚫고 있다.'
이어서 의문 하나.
'···나는, 잘못하고 있는 건가?'
혼란스러웠다.
칼리오스는 이 답답함을 해결하지 못하면 무엇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고개를 들어 밖을 바라봤다.
하나, 눈부시도록 찬란한 동궁의 여명조차 가슴 속에 드리운 그림자를 걷어내지 못했다.
그림자의 이름은 의혹이었다.
< 한풀이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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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풀이 (2) >
#003화. 한풀이 (2)
자, 상황을 정리해보자.
나는 분명 제국 최후의 전장에 섰고, 그곳에서 황자의 전투에 휘말려 죽었다.
다시 눈을 뜬 것은 옥에 들어가기 전 시점의 꿈속.
마침 눈앞에 황자도 있었겠다, 그동안 쌓였던 것을 풀어보겠다고 신나게 욕을 했다.
이후엔 왜인지 흥에 취해 술을 마시다 길거리에서 잠들었다.
그렇게 지금, 다음 날이다.
아침 햇살이 따스하고 바닥은 서늘하다.
길을 가던 행인들과 눈을 마주치면 주정뱅이를 보는 듯한 그들의 시선이 따갑게 꽂힌다.
'어.'
···이쯤 되니 알만하지 않나.
'꿈이 아니다?'
즉, 이건 현실이다.
나는 죽음 이후의 꿈속이 아닌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그걸 인지하니 문득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부탁하네.
죽기 전 그 인간이 했던 말이 의심스럽다.
유난히 금빛으로 빛나던 눈동자가 의심을 확신으로 만든다.
'진짜야? 진짜 보냈어?'
허탈함과 별개로 수용은 쉬워졌다.
고작 황자가 무슨 힘이 있다고 시간까지 거스르겠냐 싶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 인간이면 할 만하다 싶어진 까닭이다.
자잘한 건 다 제치고 하나만 봐도 그랬다.
초대 황제 이후 천년 만에 나타난 그랜드 마스터.
황자는 전설이나 다름없던 경지를 아무렇지 않다는 듯 넘는 인간이었다.
정말, 숨 쉬듯 당연하게 말이다.
-음, 곧 뚫겠군.
-예?
-생각보다 쉽군. 전설.
-또 뭔 헛소립니까. 잠이나 퍼질러 자십쇼. 노망난 노인네 마냥 새벽에 혼자 중얼거리지 말고.
-내일 놀라지 마시게.
놀라지 마시게는 개뿔이.
그날 전투에선 턱이 빠지게 놀랐다.
전장에 웬 황금색 검기 다발이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데, 그걸 해낸 인간이 노숙자 같은 행색으로 껄껄 웃어대니 놀라지 않을 수가 있겠나.
덕분에 한동안 황자를 인간처럼 보지도 못했고, 나는 그가 똥을 싸던 중 휴지가 떨어졌다며 병영이 떠나가도록 외친 후에나 전처럼 그를 대할 수 있었다.
여하튼 그런 인간이다.
전설이란 벽도 휙휙 넘어가는데 시공간 너머로 사람 하나를 못 보내겠는가.
"허, 허허···."
허탈한 웃음 끝으로, 그런 중얼거림이 튀어나왔다.
"···이 미친 인간이?"
의도는 궁금하지 않았다.
이미 이 일을 벌인 사람이 말해줬으니까.
-자네가 과거로 가 나를 패버리는 걸세. 정신 좀 차리게 해달라는 말이지.
웃기고 있네.
과거로 보낸 것? 오케이, 진짜든 아니든 그럴 만한 인간이니까.
뭐 죽지 않고 살아났다니 도리어 고맙지.
그런데 말이다.
현실을 보면 그 인간의 부탁은 정말 말도 안 되는 부탁이었다.
지엄한 제국법상, 황족만 패도 극형이다.
그런데 그 인간은 태자가 아닌가.
태자한테 개긴다?
태자를 주먹으로 패서 반병신으로 만든다?
바로 사형이다.
교수대에 목이 매달려서 뎅겅~ 하고 머리가 몸과 애틋한 결별을 선언한단 말이다.
실실 웃으며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이었다.
'맨정신이면 못 개기···.'
우뚝-
'···지?'
몸이 멎었다.
문득 생각난 게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거 꿈 아니잖아.'
그럼···.
'···어제 일은?'
내가 했던 말이 하나씩 돌이켜졌다.
-전하, 정신 좀 차리십쇼. 제발 사고 회로에서 하반신을 떼란 말입니다. 아니면 제가 떼드립니까?
일단 성추행.
-자아알~ 하는 짓입니다. 연회도 안 나와, 학문도 게을리해, 수련은 나갈 생각도 없어, 한다는 짓은 잠행이 끝이군요. 아주 백성의 삶에 관심이 깊은 성군 그 자체십니다.
다음으로 빈정거림.
-방구가 안 멈춥니다. 양해 좀 해주십쇼. 아니면 왜, 찔리십니까? 사실 안 찔리면 양심이 없는 거긴 합니다.
능멸.
거기에 끝으로.
-이거 푸십시오. 그리하면 오늘 일은 기억에서 지울 테니.
···황족에게 명령.
깨달은 직후였다.
오소소-
전신에 소름이 돋아왔다.
손끝부터 떨림이 올라와 전신으로 퍼졌다.
혼이 몸을 떠나는 듯한 충격이 머릿속에서 콰광, 하고 일었다.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어···."
···좆됐네.
* * *
회귀하자마자 사형 위기에 처한 건에 대하여.
이 명제에 대해서는 깊은 고민이 필요했으나, 우선 다시 생을 살아도 그놈의 범죄자 낙인이 지워지지 않는 처지가 새삼 억울하게 느껴졌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냐?'
하늘에 물어도 답이 돌아올 리가.
애초에 답을 줄 하늘이었으면 제국이 그리 망하게 두지도 않았을 거다.
아니, 답이 없어서 망하게 둔 건가?
아무튼,
꾸르륵-
배가 아팠다.
해장이 하고 싶었다.
하나, 식당에서 밥을 먹자니 전날 밤 얼마나 취했던 것인지, 일어나보니 끼고 있던 갖은 패물들이 전부 사라져 있었다.
어디서 구걸하기엔 내 처지가 처지다.
위대한 가문 파로스의 유렌.
암만 망나니로 지냈다곤 하나, 내 기억을 다 뒤져봐도 망나니 유렌이 구걸을 하고 다닌 적은 없었으니 이제와 새삼 구걸이나 하고 다닐 수는 없겠다 싶은 것이다.
그리 사고가 이리저리 부상하던 중이었다.
'···어.'
그 생각이 문득 치밀었다.
'집 가면 되지 않나?'
20년 전 시점인 지금.
아직 파로스가 건재한 지금.
놀랍게도 나 유렌 파로스는 집이 있는 주택 보유자였다.
아니, 저택 보유자였다···!
'맞네. 나 집 있었네. 왜 이걸 생각 못했지?'
···왜긴, 성인이 되고는 감옥에서 쇠창살 뒤에서만 지냈고 감옥을 나와서는 병영에서만 지냈다.
20년은 내 머릿속에서 집이라는 개념을 지우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여하튼 감회는 딱 거기까지.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 방향이···.'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대로 중심으로 가면 황성이 있다.
오른쪽으로 가면 귀족들의 부띠끄가 있고, 왼쪽으로 가면 귀족가들의 저택이, 아래로 가면 제국민들의 땅이다.
거기까지 기억해낸 나는 뒤늦게야 내 집의 위치를 떠올릴 수 있었다.
'아.'
파로스의 저택은 근처에 없다.
시선을 멀리 잡았다.
저택은 제도 최외곽.
황성을 지켜볼 수 있는 언덕 위에 있었다.
* * *
길을 걷다 보니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새벽에 이 거리를 많이 다녔지.'
밤새 술을 먹은 날엔 제국민들의 터전을 지나 동쪽 성벽을 바라보며 집으로 갔다.
그리하다 보면 저 성벽 너머로 떠오르는 해가 보였기 때문이다.
자연의 장엄함을 보면 사람이 감상적으로 변하지 않나.
나 또한 마찬가지인지라, 그럴 때면 근처 주점에서 싸구려 럼주를 사 걸으면서 마셨다.
이곳이 그 골목이었고, 거기서 더 움직이니 꽃밭이 보였다.
'여기부터 가문의 땅이었지.'
귀족의 땅임에도 이곳엔 울타리가 없었다.
뭐라더라, 백성과 사이에 담을 쌓아선 안 된다는 선조의 가르침 때문이라고 했나.
그런 주제에 막상 저택 주변에는 꼼꼼하게 울타리를 쳐 뒀으니 그게 좀 우습긴 하다.
여하튼 관리하는 화원이 아닌 외부인의 출입이 자유로운 화원인 만큼, 꽃은 이리저리 제멋대로 피어있었다.
아직은 시기가 아니지만, 얼마 후엔 만개한 꽃들을 보러 제도의 젊은 연인이나 아이들이 이 근처를 많이 찾을 터였다.
그런 것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그리고 그 끝에서, 나는 볼 수 있었다.
'···집이네.'
거의 20년 만이다.
옥에서 나온 후 찾았을 땐 잿더미도 남기지 않고 다 타버렸던.
그곳에 무언가가 있었다는 것만 어렴풋이 알 수 있을 정도로 처참하게 망가졌던 집.
바라보고 있으니 새삼스러운 감상이 차올랐다.
'이렇게 작았나?'
내 기억 속 저택은 조금 더 컸다.
조금 더 숨이 막히고, 조금 더 갑갑했다.
한데 보라.
언덕 위엔 어떤 다른 건물 하나 없이 3층짜리 석재저택 하나가 다소곳하게 자리할 뿐이었다.
울타리는 쉬이 넘을 수 있을 정도로 낮아 보였고, 적당히 꾸며둔 정원은 소담한 기운이 물씬 풍겼다.
문득 스스로에게 그런 의문이 들었다.
'여기가 뭐가 그리 답답했다고.'
대체 과거의 나는 뭘 하는 놈이었던 건가.
얼마나 삐뚤어졌길래 이것조차 답답하다며 매번 집을 뛰쳐나갔나.
생각하니 헛웃음이 나왔다.
그리하며 또 걸음을 옮기니, 그리운 얼굴이 날 반겼다.
"소, 소가주님···!"
"···벤터."
가문의 가신인 벤터 엘리엇 남작.
그가 초조하게 정원을 걸어 다니다 날 발견하곤 눈을 휘둥그레하게 떴다.
성성한 백발이나 주름진 얼굴이 반갑다.
곧게 펴진 허리나 바른 걸음걸이는, 그가 얼마나 꼬장꼬장한 사람인지 따위의 정보를 시간을 넘어 다시 한번 느끼게 해줬다.
벤터가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나는 중얼거렸다.
"오랜만이네."
그러자 벤터가 답했다.
잔뜩 성난 답이었다.
"예, 예! 참 오랜만이십니다! 어찌 오늘도 이리 아침까지 외유를 하신 겁니까!"
향수가 차오르는 잔소리에 다른 무엇보다 먼저 그것을 깨달았다.
'아, 그랬구나.'
나는 이들에게 그저 어젯밤 술을 마시고 아침에 기어 들어온 망나니 소가주겠구나.
잠시 고민해봤다.
내가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다가 소드 마스터도 해보고 죽어 회귀했다면 믿을까.
'···안 되지.'
역시 고개를 젓게 된다.
그런 이야기를 해봐야 미친 사람 취급이나 받겠지.
그리움은 온전한 나의 몫이었다.
'어디 보자···,'
과거의 내가 어떤 사람이었더라···.
그래, 얼추 이런 느낌이었을 터다.
"취하고 싶은 기분이었어."
"안 취하고 싶을 때가 있긴 하십니까?"
"······."
"소가주님, 제발···!"
벤터의 얼굴 위로 울상이 그려졌다.
괜히 찔리는군.
시선을 피하니 벤터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소가주님."
"벤터, 나 속이 안 좋아. 뭐라도 먹고 좀 자고 싶은데."
"안 됩니다. 소가주님."
"내가 이대로 속이 뒤집혀서 쓰러져야 하나?"
"그래도 안 됩니다. 소가주님!"
벤터가 드물게 언성을 높였다.
이상하다.
내 기억 속에서 벤터가 이만큼이나 단호했던 적은 그다지 없었는데.
"왜 그래?"
기억이 추억으로 미화된 건가.
그런 생각까지 차오른 순간이었다.
"아씨께서 밤새 소가주님을 기다리셨습니다. 한숨도 주무시지 않은 채로요!"
건네진 말에 내 사고가 멎었다.
* * *
20년 만에 저택에 입성했다.
하나 내 마음은 그리 평온하지 못했다.
저택의 장식이나 물건, 구조 따위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지도 못했다.
지금 3층 집무실에 있을 사람을 떠올리면, 그런 생각은 모두 흐릿해지기만 했기 때문이다.
벤터는 와중 그런 이야기를 했다.
"아씨께서 정말 많이 걱정하셨습니다."
"···그렇겠지."
"혹여 소가주님이 시간을 잊은 줄 알고 한 시간이 넘도록 식탁 앞에 앉아 계셨습니다."
"···그렇겠지. 그런 분이니까."
"끝내 식기도 들지 못하셨습니다. 식은 음식은 사용인들이 먹었고, 아씨께서는 소가주님께 변고가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침실도 못 드셨지요. 소가주님께서 거리에서 놀이를 즐긴다는 말을 듣고서도 마찬가지셨습니다. 정말··· 정말 안도하시면서도 어찌 그리 슬퍼 보이시던지요."
참으로 누님다운 행동이었다.
그에 나는 잊었던 것 하나를 떠올렸다.
'그랬었지···.'
옥에 갇혔던 그날은, 드물게도 내가 누님의 저녁 식사 요청을 받아들인 날이었다.
끈질기게 부탁하는 모습에 진절머리가 나 그러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고 나서는 어쨌더라···.
'전하께 봉변을 당했지.'
직후 바로 옥에 갇혔다.
누님은 이틀이 지난 뒤에야 그 사실을 알았고, 곧장 나를 찾아오셔선 그리 말씀하셨었다.
-소가주, 아픈 곳은 없습니까?
한껏 수척해진 채로, 그렇게나 미련하게 웃으면서 말이다.
어린 나는 그런 것을 몰랐다.
나의 죄를 깨달은 것은 한참 뒤였다.
이것은 심장을 콕콕 찌르는 기억이었으며, 몇 번을 돌이켜도 사라지지 않는 죄악감이었다.
물론 과거의 일을 회상하는 것에서 끝났다면 다행인 일이다.
하지만, 오늘은 과거가 아니었다.
오랜 나무 향이 느껴지는 목재 문이 보였다.
이 뒤에 누님이 있다.
벤터가 똑똑 문을 노크했다.
"소가주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리하자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시라 하거라.
내 눈빛은 떨렸다.
저 스러질 듯 희미한 어조가 귓가에 다시 새겨질 것임이 이제야 실감 된 까닭이다.
문이 열렸다.
이제는 눈으로 보게 됐다.
나와 같은 회색빛 머리칼을 길게 늘어트리고. 나와 같은 쪽빛 눈동자를 빛낸다.
하나, 성난 망아지 같은 나와는 다르게 누님은 너무나도 여리고 청초한 인상이었다.
내가 아닌 세간의 평가가 그랬다.
이어, 내 눈에는 툭 치면 부러질 것처럼 얇은 누님의 팔뚝이 들어왔다.
또한 눈그늘이 깊게 패여 초췌한 낯빛이 들어왔다.
세실리아 파로스.
망나니인 나를 대신해 이 가문을 지키던 여인.
일평생 옥에서 나올 못난 동생을 기다리다, 끝끝내 가문과 함께 산화해버린 여인.
나는 차오르는 감상들을 억눌러냈다.
고개를 숙이려 했다.
하지만 그러기 전에 발소리가 들렸고, 어느덧 이 사람은 내 코앞까지 와 있었다.
누님이 내 뺨에 손을 얹었다.
이어서 조용히 입술을 달싹였다.
"소가주."
그렇게 이 사람은,
"아픈 곳은 없습니까?"
웃었다.
미련하고 초췌하게, 그러나 안도하며.
내가 옥에 갇히던 그날처럼.
누님은 내 기억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모습이셨다.
"길에서 주무셨다 들었습니다. 속은 괜찮으시구요?"
언어가 목에 걸린다.
숨도 턱턱 틀어막힌다.
속에 있던 아주 무거운 돌덩이가, 폐를 찌부러뜨리는 기분이었다.
누님이 너무 가엾어서, 누님을 그리도 가엾게 만든 것이 나이기에.
또한, 이 얼굴을 다시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가증스럽게도 감사했기에.
그리 범람하는 감정의 끝.
나는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예, 저는 괜찮습니다."
그런 말이다.
나의 누이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나를 죄인으로 만들 수 있는 여인이었다.
< 한풀이 (2) > 끝
ⓒ papa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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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답 (1) >
#004화. 해답 (1)
이번 대의 파로스는 가주가 없다.
나의 부모인 가주와 부인이 이 시점으로부터 10년 전 타계하신 까닭이다.
사고였다는 말은 들었으나 내막은 알지 못한다.
위대한 가문의 가주가 명을 달리한 사건인 만큼 황실이 직접 조사에 나섰으나, 그것은 내가 죽던 순간까지 해명되지 않았을 정도로 의문스러운 사고였다.
당시 8세에 불과하던 나는 그 인과를 알 리가 없었다.
또한 8살짜리 소가주에게 가문의 통치를 맡길 정도로 가신들이 생각이 없진 않았다.
하여 지난 10년, 그리고 내가 옥에 갇힌 후 멸문의 순간까지 가주 대리로서 가문을 통치한 것은 나보다 5살이 많은 나의 누이.
세실리아 파로스였다.
누이는 모든 것이 나와 달랐다.
어려서부터 의젓했고 품위 있었으며 영민했다.
표현하길 그림으로 그려둔 듯한 귀족 영애였다.
대표적인 몇 가지 특징을 상기하자면 그렇다.
누이는 그 어떤 상황에도 언성을 높이는 일이 없는 사람이었다.
반대로 어떤 상황에도 경박하게 웃는 일이 없는 사람이었다.
가문에 대한 마음은 또 얼마나 깊던가.
한 번씩 느끼길, 세실리아 파로스에게 파로스라는 가문은 그녀의 존재 이유와도 같았다.
하여 누이는 가문의 모든 것에 경애를 다 했다.
부모에게 지극하며, 가신에겐 자비가 넘쳤고 사용인들에겐 친절했다.
끝으로 나에겐 너무나 자애로웠다.
그 자애가 누이의 유일한 단점이었다.
누이는 나를 그리 아껴선 안 됐다.
-소가주, 오해가 있을 겁니다. 제가 입궁하여 내막을 잘 파악한 후 석방을 요구해 보겠습니다.
누이는 어릴 적부터 나를 유독 이뻐했다.
내가 어떤 사고를 쳐도 항상 나를 먼저 걱정했으며, 둘만 남은 이후엔 그 정도가 더욱 심해졌다.
돌이켜 보면 내가 세상을 홀로 보기 전부터 언제나.
항상 누이는 삶의 모든 순간을 날 위해 쓰고 있었다.
옥에 갇힌 후에도 그랬다.
누이는 꾸준히, 내가 옥에 갇혀있던 17년 중 약 12년간 한 달에 두 번씩 나를 찾았다.
그리하며 희망적인 이야기만을 속삭였다.
-전하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분노가 지극하신 것이 당장은 힘들겠지만, 조금 시간이 흐르면 그 감정도 녹아내리시겠지요. 태자 전하는 어릴 적부터 현명하신 분이셨지 않습니까.
처음에는 태자를 설득하려 했다.
-전하께서 옥에 갇히셨지요. 화해는 하셨습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어릴 적부터 소가주를 자주 입궁시켰어야 했는데···. 그리 면이라도 텄으면 이런 사고도 없었을 것을 생각하니 다 제 불찰입니다. 하지만 이젠 폐하께 직접 청을 드릴 수 있을 터입니다. 전하의 방만으로 억울하게 갇혔다 호소하면 폐하께서도 재고해 드릴 테지요.
태자가 옥에 갇힌 후엔 다른 방도를 찾았다.
잘 되진 않았다.
애초에 태자가 나를 옥에 넣는 과정부터가 치밀했다.
평소 행실이 좋지 못해 짚을 죄목은 너무 많았고, 나는 내가 증명할 수 있는 무죄가 없었다.
내 배경 탓에 누구도 꼬집지 않았을 뿐이지, 나는 옛적에 옥에 들어갔어야 할 만큼 범법을 많이 저질렀었다.
훗날 태자의 폐위 이후로 치자면 그랬다.
여러 과정으로 인해 제국은 손 쓸 수도 없을 정도로 빠르게 무너지기 시작했었다.
죄인 하나의 석방을 위해 관료를 배치할 여력조차 없을 정도로 말이다.
그럼에도 누이는 꾸준했다.
나조차 포기했음에도, 누이는 내 석방을 포기하지 못했다.
몇 년간, 매번 그렇게 나를 찾았다.
-바깥은 봄입니다. 올해 파로스의 화원은 연인들이 웃는 모습이 참 어여뻤습니다. 내년엔 꼭 함께 보도록 하지요. ···아니, 그땐 소가주께서도 혼인을 약속한 사람이 생길 터이니 두 분이 함께 보는 것도 좋겠군요.
누이는 내가 옥을 나와 혼인을 하고, 승계를 마쳐 가주가 될 것이라 믿었다.
-벤터 남작은 이제 퇴임하였습니다. 아무래도 나이가 나이다 보니··· 후임자는 벤터 남작의 장자가 맡게 되었습니다. 다음엔 그와 함께 오도록 하지요.
하여 가문의 바뀐 인선을 이르거나, 제도의 정치적인 흐름을 일러주었다.
내가 뒤처지지 않기를 바란 것이다.
-겨울이 왔습니다. 옥은 춥지 않습니까? 귀족들을 수용하는 곳인 만큼 환경이 나쁘진 않겠으나··· 어찌 저택보다 따스하겠습니까. 내 이곳의 간수들에게 청해 불을 조금 더 넣어달라 했습니다. 아, 식사는···.
내 건강을 챙겼다.
지독하리만큼 그것에 집착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랬다.
누이는 언젠가부터 스스로의 건강을 챙기지 않았다.
몇 해간 누이의 안색은 점점 나빠지기 시작했었다.
눈그늘은 심연을 들여다보는 듯했으며, 패인 뺨은 꼭 기아로 죽어가는 빈민촌의 어린아이 같았다.
손목은 또 어떻던가. 뼛골이 다 드러나 흉측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죽음이 언제나 누이를 뒤따라 그 목을 조르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엔 그런 것을 몰랐다.
옥에 갇힌 내 신세를 한탄하거나, 나를 이렇게 만들고 옥살이 동기가 된 태자와 칼질하는 일에 미쳐 있었으니, 그것만으로도 머릿속이 꽉 차 있었다.
하지만 뒤늦게 깨닫길 그 순간만이 나의 유일한 위로였다.
내게 희망을 준 사람은 언제나 누이 하나였다.
그걸 나는, 누이가 사라진 이후에나 깨닫게 되었다.
-이보게, 내 면회는 없나.
-···예.
-누님께 변고가 있던가. 언제나 못 오는 시기가 있다면 편지를 남겼던 터라.
-그···.
간수는 외부의 정보를 말할 수 없다.
황명이자, 그들의 철칙이었다.
그렇기에 어느 날부터 누이가 나타나지 않음에 혼란을 느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당시도 나는 모자란 인간이었다는 것이다.
이젠 나타나지 않는 누이의 빈자리를 느끼기 시작했을 때의 나는 누이가 나를 포기했다고 생각했다.
부끄럽게도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나는 누이에게 분노를 표했다.
생각해보면 태자가 조금 거들긴 했다.
-12년도 길었지. 자네 같은 병신 폐급을 그만큼이나 돌봐준 것도 이미 신격 이상의 자비였네. 겸허히 받아들이게. 그런데 자네 누이가 안 온다는 말은 이제 간식을 넣어주는 사람이 없어졌단 뜻이 아닌가. 큰일이군. 큰일이야···.
그날 어쨌더라··· 그래, 자고 있던 태자에게 다가가 방 전체에 불을 질렀다.
물론 태자는 멀쩡했다.
-어휴, 자네는 여름에 왜 장작을 때나. 덕분에 땀이 나서 깼지 뭔가.
괴물 같은 그 인간은 옥에서의 명상만으로 이미 그랜드 마스터를 목전에 둔 상태였기 때문이다.
여하튼, 당시의 날 이끈 감정은 분노였다는 게 골자다.
그 시기는 조금 거칠었었다.
태자를 향한 언행이 본격적으로 불경해진 것도 그 시기였던 것 같다.
버려졌다는 생각이나 하며 분노에 검을 휘둘렀다.
이곳을 탈옥한다면 꼭 날 버린 당신께 복수하리란 병신 같은 생각을 했다.
분노는 좋은 연료가 되었다.
-에잉, 이제 겨우 소드 마스터인가.
태자의 검술 수업을 받은 지 13년이 된 날.
나는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
당대 제국에선 황실 기사단장과 북부 전선의 대공, 태자를 이어 네 번째였다.
그것이 새삼스럽게 기쁘진 않았었다.
머릿속엔 누이를 향한 배신감만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검을 더욱 날카롭게 벼렸다.
검기엔 스치는 것만으로도 살갗을 찢어발기는 사나운 이빨이 돋아났다.
그리고 내게 그럴 자격이 없음을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2년 뒤, 전쟁이 심화되던 시기였다.
-제국에 힘이 필요하네. 손을 빌려준다면 전쟁이 끝난 후 모든 죄를 사면해주겠네.
죄수 병사 유렌 파로스.
나는 그런 이름으로 태자와 함께 세상을 맞이하게 됐다.
그날 가장 먼저 한 일이 파로스의 저택을 향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보고말았다.
잿더미조차 남지 않고 타버린 저택을.
더 이상 무엇도 남지 않은 파로스를.
누이를.
-···어찌 된 것이냐.
-큰 화재가 있었습니다. 가신단과 가주 대리께서 밤늦은 시간까지 회의하던 날이었는데 그만···.
-흉수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전쟁 초입 시기라 조사 인력이 모자랐습니다.
꼭 나의 부모와 같이 가문 전체가 사라졌다.
누이는 그리 나를 떠났다.
그 순간 느낀 감정은 허탈함이 아니었다.
흉수를 향한 분노와 원망도 아니었다.
후회.
그리고 후회를 감싼 절망.
-아···.
목을 매달고 싶을 만큼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끝까지 어리석었던 것이 죄스러웠다.
어찌하여 우둔하게 누이를 원망하기만 했을까.
준 것도 없이 받기만 하다, 받지 못하게 된 것을 배신이라 여겼을까.
그런 이유로 나는 진정 죄인이 되었다.
항상 억울하기만 했던 나는 드디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죄를 품게 되고 만 것이다.
태자는 말했다.
-검으로 갚으시게. 우리는 그리해야 하네.
나는 따랐다.
그렇게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그러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아서.
-전쟁이 끝나면 파로스를 다시 이끌게 해주십시오.
다음 대의 황제에게 간청했다.
허락을 받아냈다.
뒤늦게나마 누이가 지키고자 한 모든 것을 되돌려야만 한다는 생각에 미쳐서 그리했다.
하나, 비극이었지.
나라는 망했고 나는 죽었다.
끝끝내 누이를 위한 무엇도 해주지 못했다.
그 죄악감이 내 심장을 짓이기는 듯했다.
이렇게, 다시 만난 누이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게 만들었다.
"소가주, 정말 괜찮으신 게 맞습니까?"
뺨에 닿는 손이 너무나도 가냘프다.
궂은일이라곤 해본 적도, 할 수도 없는 나약한 손이었다.
이것이 나를 지킨 손이었다.
"···예."
누이가 그런 손을 한 채로 물어온다.
"역시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쉬러 가지요. 자, 하루는 푹 쉬고··· 그리한다면 모레는 저와 식사를 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어찌 어제는 나타나지 않았냐 묻지 않으십니까.
"너무 귀찮다 여기지 마시고 한 번만 청을 들어주시지요."
어찌 스스로 낮아져 간청하십니까.
"건강이 우선입니다. 소가주의 건강이 곧 파로스의 미래이니."
그리 스스로를 버려가면서까지 이 나를, 이 가문을 지키려 드십니까.
왜 이게 살아있는 이유라도 되는 것처럼 그리하십니까.
분통이 터졌다.
그리할 자격이 없음에도 목구멍까지 말들이 솟아났다.
일말의 양심이 그를 막았고, 나는 뒤늦게야 고개를 들었다.
누이는 수척했다.
고작 하루만으로 이랬다.
이런 그림자를 십 년이 넘도록 짙게만 만들었고, 죽음의 순간까지 그러도록 만들었다.
하여, 누님의 미련함을 향한 답답함이 목끝까지 차올라 있음에도.
나를 위해 그러지 말라 말하는 것이 우선임에도.
"···죄송합니다."
사과의 말이 먼저 나왔다.
지난 생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던.
죽음을 거스른 지금에야 할 수 있게된 사과를 건넸다.
"죄송합니다. 걱정을 끼쳐드려서."
물론 이리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내 심장이 이를 기억하는 한 난 영원한 죄인일 테니.
"소가주···?"
누이의 눈이 조금 커졌다.
누이치고는 참으로 노골적으로 표하는 당혹의 감정이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참···.'
"제가 사과하는 게 그리 놀라우십니까?"
"그것이 아니라···."
누이가 처음으로 내 시선을 피했다.
얼굴 위론 당혹스러움이 짙어지고만 있었다.
그를 보니 문득 깨달음이 치밀었다.
'아, 그리해야겠구나.'
입을 열었다.
"누님,"
시간이 되감겼다.
나의 의지는 조금도 없음에도, 그것이 다른 이의 부탁으로 인한 것임에도 이미 되감겨버렸다는 사실만은 변치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어찌해야 하는가.
그저 태자를 황제로 만들면 되는 것인가.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막거나, 일어난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 되겠는가.
아니다.
그런 것들은 내게 하등 중요치 않았다.
내게 중요한 것은 하나였다.
미래의 태자에게 말했다.
들릴 리는 없겠지만.
'마음대로 보내셨으니 저도 마음대로 하렵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잘하겠습니다."
"소가주? 정말 괜찮으십니까···?"
속죄하자.
이런 못난 인간을 위해 평생을 고통받아온 누이를 위해, 가문이 삶의 이유인 이 사람을 위해.
이번은 내 평생을 가문에 바쳐 누이에게 속죄하는 것이 옳다.
누이가 더 이상 걱정하지 않도록.
가문이 아닌 자신의 삶을 살수 있도록.
나는 드디어 내가 할 일을 오롯이 알 수 있었다.
< 해답 (1) > 끝
ⓒ papa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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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답 (2) >
#005화. 해답 (2)
제도 번화가의 고급 정식당 아나모네.
그곳의 2층은 한산했다.
장사가 안 되는 게 아니었다.
도리어 이곳은 몇 달 전부터 예약하지 않으면 출입도 불가할 정도로 인기가 많은 식당이었다.
특히 전망이 좋은 2층은 귀족들조차 치열한 예약 경쟁을 해야 할 정도로 귀했다.
그럼에도 이곳이 지금 한산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태자 칼리오스가 2층 전체를 대관했기 때문이다.
칼리오스의 시선은 창밖의 백성들을 향했다.
표정은 수심이 가득했다.
며칠 전 유렌에게 들었던 말이 영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까닭이다.
―대체 뭘 하시는 겁니까. 어디에 정신이 빠져있는 겁니까.
그 말이 속을 할퀴는 순간이었다.
"전하, 괜찮으셔요?"
여린 목소리가 칼리오스의 귀에 박혔다.
흠칫, 몸을 떤 칼리오스는 시선을 정면으로 향했다.
레베카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하여 칼리오스는 애써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아아, 미안하네. 잠시 생각할 일이 있어서."
그녀에게 집중했다.
분홍빛의 머리칼이나 녹색의 눈동자가 파스텔 톤으로 망막에 새겨졌다.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개중 특히 동그랗고 커다란 눈은 꼭 어린 새를 연상케 해 보호욕을 자극하고 만다.
저 얼굴에 걱정을 그리게 한 것이 죄스러워 칼리오스는 말했다.
"식사하지. 내 오랜 시간 이날을 기다려 왔으니."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그녀와 둘만 남을 수 있는 얼마 되지 않는 날이다.
오늘을 얼마나 애타게 기다려왔던가.
'그래.'
틈만 나면 나타나 훼방을 놓는 마탑주도, 시비를 걸어대는 암흑가의 주인도 오늘은 제도에 없다.
북부의 대공자는 훈련을 떠났으며, 법황청의 성자는 교회의 행사로 바쁜 와중이다.
오늘이 아니라면 이런 오붓함이 또 언제 있겠는가.
'행복, 이게 행복이다.'
레베카.
사랑을 일깨워 준 여인이다.
그녀를 놓친다면 평생을 후회할 것만 같았다.
그녀는 그런 확신을 이번에도 어김없이 확고하게 만들었다.
"이것도 드셔 보세요!"
레베카가 자신의 접시에서 고기를 덜어 칼리오스의 접시에 얹었다.
귀족의 예절에 맞지 않는 행동이었으나, 칼리오스는 그런 걸 생각하지 못했다.
"···이걸 왜. 좋은 고기인데."
"그러니까요."
레베카가 해사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전하께서 더 드셔야 해요!"
아아, 이 얼마나 고운 마음씨인가.
어떤 허례허식도 없이 그저 상대를 위하는 순수한 마음은 아름답다.
역시 그녀여야 한다.
다른 누구도, 어떤 것도···.
―사리 분별이 그리도 안 됩니까? 그딴 평민 계집 하나를 감히 태자위와 같은 저울에 올리는 겁니까?
흠칫, 또 손끝이 떨렸다.
그 순간의 시리도록 차가운 눈빛이 다시금 자신을 쏘아보는 듯했다.
"전하···?"
"···미안하네."
칼리오스는 그 목소리를 지우려 했다.
입을 틀어막고, 시선을 떨궜다.
하나, 지워지지 않았다.
머리에 새긴 듯, 혹은 가슴에 새긴 듯.
그가 내뱉은 말 하나하나가 날이 갈수록 선명해지고만 있었다.
시선은 저도 모르는 사이 창밖으로 향했다.
또 백성들의 미소가 망막에 아로새겨졌다.
태자위의 의미.
그것이 되새겨진다.
칼리오스는 멍청하지 않았다.
도리어 유렌조차 인정할 정도로 두뇌가 비상했다.
아무렴, 명상만으로 그랜드 마스터에 오르는 미래를 보았을 때 오성이나 직관이 떨어지는 것이 말이나 되겠는가.
그러니 칼리오스에게 자신이 태자위를 포기함으로써 벌어질 일 따위는 쉬이 상상할 수 있는 종류였다.
'누구도 날 대신할 수 없다.'
호시탐탐 이 자리를 노리는 2황자는 야심은 창대하나 시야가 좁다.
여러 방면의 정책을 고루 실행하기엔 역량이 부족하다.
3황자? 너무 유약하다.
녀석은 분명 대신들에게 휘둘려 갈피를 잡지 못하겠지.
그렇다면 또 누가 있나.
여러 얼굴이 뇌리를 스쳤으나 역시 없다.
칼리오스가 보는 풍경은 오로지 그만이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그런 거시적인 이야기를 떠나서, 가깝게 봐도 그랬다.
'내가 태자위를 잃게 된다면?'
황위 쟁탈전이다.
천년 제국의 황제라는 자리가 얼마나 지고하던가.
그것을 손에 쥐려는 이들의 욕심은 또 얼마나 지독하던가.
물밑의 전쟁이라곤 하나 전쟁이다.
전쟁은 자금을 필요로 한다.
귀족들의 자금 출처는?
백성들의 노동력과 세금이다.
저들끼리 벌이는 전쟁은 영지전으로 발전할 수도 있고, 사업의 밑천으로 활용될 수도 있다.
뭐가 됐든 그것들이 실행되는 순간 고통받는 것은 백성이란 말이다.
―가지는 바람에 흔들릴 수 있습니다. 하나 뿌리는 흔들려선 안 되는 법입니다. 한데, 전하께선 지금 뿌리가 흔들리는 나무와 다름이 없으십니다.
이 선택이, 이 흔들림이 그 비극을 만든다.
그녀를 붙잡기 위해 노력할수록 그런 일들은 현실성을 띠기 시작한다.
칼리오스는 그런 것을 문득 깨달았다.
꽈악―!
식기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눈앞에 미소 짓는 백성들이 있기에, 죄악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덩치를 불리고 있었다.
'나는···.'
어찌해야 하는가.
사랑과 백성이 있다.
둘 중 무엇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한데 왜, 어째서.
현실은 선택을 말하는가.
"전하···?"
그녀가 다시 자신을 걱정함에 칼리오스는 시선을 돌렸다.
'아아···.'
너무나도 앙증맞고 사랑스러운 여인이다.
그럴진대,
"······."
더 이상, 그녀와 함께 하는 미래가 아름답게만 보이지 않았다.
속이 너무 안 좋았다.
먹은 것이 도로 올라올 것만 같았다.
태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하네. 정말 미안하네."
이 공간을 떠나고 싶었다.
하여 자리를 떴고, 그럼에도 혼란은 좀처럼 줄 생각을 않았다.
여전히 목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답을, 답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칼리오스가 판단키로 이 답을 아는 자는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그의 시선이 제도 외곽 언덕 위의 저택을 향했다.
'유렌 파로스.'
의문을 던진 것이 그이니, 답 역시 그에게 구해야만 하리라.
* * *
근 사흘, 파로스의 저택은 믿을 수 없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 얘기 들었어? 소가주께서 사흘이나 술을 안 드시고 있대."
"들었지··· 진짜 무슨 큰 일 생기는 거 아냐? 술뿐만 아니야! 사흘이나 밖에 나가지 않았다고!"
"아아, 그 얘기도 있었어! 소가주가 한 번도 고함을 지르지 않았대!"
"나, 나도 들었어! 소가주의 전속 시녀가 그러는데···."
"엠마? 네 짝사랑? 아직도 미련 못 버린 거야?"
"···아무튼, 소가주가 시녀한테 '고맙다'라고 말했다는데?"
"히익···!"
무시무시한 괴담을 들은 듯한 반응이 연신 쏟아졌다.
누군가는 '고작 저 정도로?'라고 할 법한 일들이었으나 가문의 사용인들에겐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유렌 파로스가 누구던가.
제도 최고의 망나니를 꼽으라면 부동의 일인자로 꼽히는 최악의 망나니였다.
사용인들에게 일삼는 폭언은 기본이오, 길거리에 나가면 패싸움을 하거나 도박을 하는 일도 잦았다.
소가주로서의 책무는 저 멀리 던져두는 게 당연한 지경에 음주는 또 어떻던가.
그는 하루라도 술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사람처럼 굴곤 했다.
그런 사람이 하루아침에 홱 바뀐 것이다.
그것이 사뭇 공포스러운 게 사용인들의 심경.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기색은 밝았다.
유렌이 정신을 차렸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었다.
그저 그의 그런 행동이 지금의 가주 대리, 이들이 마음으로 섬기는 주인인 세실리아 파로스의 미소를 되찾아주었기 때문이다.
"아씨께서 요즘엔 잠을 잘 주무신대."
"아씨께서 웃는 모습을 봤대."
"엠마가?"
"···아무튼 웃으셨대."
가문의 모든 사람은 세실리아 파로스를 경애한다.
그녀가 언제나 자신들을 그렇게 대했기 때문이다.
혹여 가문이 화를 입는다면, 온몸을 불살라서라도 그녀를 구하겠다 마음먹을 정도로 그 지극함은 엄청났다.
그런 그녀가 웃는 것이다.
눈그늘은 날이 갈수록 줄어들며 식사도 거르는 일이 없어졌다.
그게 사용인들의 마음을 따스하게 만들었던 만큼, 그들은 바라는 것이다.
"아, 무슨 바람인지 모르겠지만···."
"소가주님께서 조금만 더 저래 주시면···."
제발 유렌이 조금만 더 얌전하게 지내주기를.
"그래서 소가주님이 지금은 뭐 하고 계시는데?"
누군가의 의문에 엠마를 짝사랑하는 남자가 답했다.
"칩거 중이라는데? 하루 중 밖을 나오는 건 아씨와의 식사 때뿐이래."
유렌은 칩거 중이었다.
* * *
숨을 들이쉬고 내쉰다.
그리할 때마다 마나가 전신을 휩쓸며 노폐물을 걷어낸다.
방에는 지독한 악취가 한가득이다.
하지만 이렇게 해도 모자라다.
나는 더욱 빠르게 마나를 휘감아 노폐물을 쓸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피잉―!
마나가 척추를 관통해 지나갔다.
나는 호흡을 거두고 눈을 떴다.
'···익스퍼트.'
사흘이나 걸렸다.
내가 가진 것을 생각하면 꽤 오랜 시간을 쓴 셈이다.
내겐 소드 마스터 급의 깨달음과 마나의 운용 능력이 있다.
어려서부터 극성맞았던 누이 덕에 온갖 영약을 다 먹으며 자랐다.
무엇보다 비전.
회귀 전의 태자는 황실의 직계 후계자에게만 전해져 내려오는 초대 황제의 [제국 검술]을 내게 전수했다.
그냥 한 것도 아니고, 본인이 깨달음을 통해 개선한 사안까지 더한 최종 해본을 전한 것이다.
물론 시간도 없었고 재능도 태자에 비하면 후달리는 편이라 닿진 못했지만 그건 다른 얘기.
여하튼, 그런 배경이 있는 만큼 이 몸은 하루 만에 익스퍼트에 도달해야 했다.
그러지 못한 것은 어디까지나 지독한 생활 습관 덕분이었다.
'술독이 이렇게 쌓였었구나.'
노폐물이 마나의 통로를 모두 막고 있었다.
어쩐지 회귀 후 내내 몸이 무겁다 했다.
그저 수련이 덜 되어서 그런 줄 알았건만 생활 습관으로 인한 병폐였다.
기지개를 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까맣게 굳어 나온 노페물을 수건으로 닦아낸 후, 창문을 열었다.
"엠마!"
부르니 엠마가 곧장 문을 열고 나타났다.
밤색 머리칼에 푸른 눈.
수수한 분위기와 동그란 눈이 특징인 녀석이었다.
"네···!"
"방 좀 치워줘. 나 씻고 올게."
"시, 시중은···."
"됐다. 너희도 바쁠 텐데 내 몸 하나 스스로 못 씻겠냐."
"-"
엠마의 표정이 공포로 일그러졌다.
전신이 와들와들 떨리고 있었다.
'업보구만.'
대체 난 얼마나 병신이었던 걸까.
새삼 미안해진다.
특히 엠마에게 더 그렇다.
'유능한 녀석인데.'
옥 중에서 누이에게 들은 소식으로, 녀석은 결국 하녀장 자리까지 오르게 된다던가.
머리가 영민한 녀석이란 말을 많이 들었다.
한데 이 녀석이 나 때문에 지금은 기를 못 펴고 있다.
잘해줘야 하지 않겠나.
엠마의 어깨를 두들겨 치하했다.
"고생 많다. 고마워."
"히익!"
엠마가 눈물을 글썽이며 몸을 웅크렸다.
···그건 상처받는데.
"···가볼게."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그렇게 씻으며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정리했다.
'가문을 지킨다.'
생각할수록 가슴은 차가워진다.
지난 생엔 끝끝내 풀지 못했지만, 왜 파로스는 화마에 스러졌는가.
왜 누구도 그 밖으로 나오지 못했나.
'이상해.'
암만 전쟁 초입의 혼란스러운 시기라 한들 파로스의 화재는 말이 안 된다.
황실에서 파로스 쪽으로 돌리는 경비만 제도 전체의 2할 언저리다.
그것은 파로스의 정치적 위치 탓에 어떤 경우에도 바뀌지 않는 명제였다.
그만큼 이 근처의 치안은 확실히 잡혀있단 말이다.
한데 어째서 그날은 누구도 그 화재를 잡지 못했나.
아니, 잡지 못한 게 아니지.
'근방의 경비병들도 다 죽었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파로스에 원한을 품은 게 누구인가.
'만약 그런 놈이 있다면···.'
죽여야지.
내가 아는 가장 끔찍한 방법으로.
살기가 치솟는 순간이었다.
쩌적!
욕조가 갈라졌다.
'아.'
낭패.
괜히 뺨을 긁적이게 됐다.
이런 생각은 당장 깊게 해선 안 될 것 같다.
'마나가 아직 안정권이 아니구나. 하긴, 깨달음을 몸이 못 따라오고 있으니.'
그러니 이 문제는 차차 생각해 보자.
시간도 많이 있고, 내가 있는 이상 같은 일은 절대 벌어지지 않게 할 터이니.
더해서 그보다 급한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나 어떡하지.'
며칠 전 일이 떠올랐다.
회귀하자마자 시원하게 태자에게 욕을 싸갈겼다.
꿈이었다면 통쾌하다 생각하고 지나갔겠지만, 이건 현실.
극형도 모자란 죄를 저지른 차다.
'아아, 이래서 말조심을 해야하는 건데.'
이놈의 성격이 문제다.
눈이 질끈 감겼다.
미래의 태자에게라면 '니 애미 재상이랑 바람났잖아.'라고 해도 서로 웃으며 넘겼겠으나, 지금의 태자가 어디 풍파를 다 겪은 미래의 그와 같던가.
평민 여자에게 눈이 돌아가 사리분별이 안 되는 시기다.
그 여자와 멀어지고 부린 패악질의 수준을 생각하면 지금 어떻게든 날 묻으려 그 인간이 뒤에서 수를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앞에서 본격적으로 조지려 들던가.
'어떻게 해야 하나.'
홀몸이었으면 그냥 냅다 튀면 된다.
아니면 태자를 죽기 직전까지 패고 튀던가.
하지만 내겐 해야 할 일이 있다.
나로 인해 오명을 쓴 파로스를 다시 위대하게 만들어야 했다.
누이의 웃음을 되찾아줘야 했다.
'어떻게···.'
고민이 깊어지는 순간이었다.
엠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똑똑―
―소, 소가주님. 손님이 오셨는데요?
"음? 누님 손님?"
―아뇨, 소가주님 손님이요.
날 찾을 사람이 있나?
"누구?"
한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그런 직후 답이 나왔다.
―···태자 전하요.
"어."
앞에서 조지러 오는 쪽인가.
심장이 쿵쿵 뛰었다.
머리가 빠릿빠릿하게 돌아갔다.
'극형을 피할 방법.'
혹은 화해할 방법.
욕조에서 몸을 일으키고 마나로 물기를 날려버렸다.
머리는 대충 털고 옷은 깔끔하게 입었다.
"가볼게."
성큼성큼 접견실로 갔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게 있었다.
나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전하를 뵙습니다."
멀끔한 칼리오스.
다시 봐도 미래의 태자가 안쓰러워지는 얼굴이다.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정신을 차렸다.
태자는 기사 둘은 거느린 채 굳은 얼굴로 날 보고 있었다.
여기서 말 잘못 하면 좆된다.
일단 사과부터 하자.
"그날은 죄송했습니다."
그러니까···.
"···술 한잔 했습니다."
맨 정신이 아니었다면 정상참작까지는 힘들어도 감형 정도는 해주지 않을까.
간절함이 배인 판단으로 건넨 말이었고, 그에 태자가 입을 열었다.
"···경들은 나가계시게."
기사들을 향한 말이었다.
"하오나 전하!"
"나가계시게. 독대하고 싶으니."
기사들이 불안하다는 듯 날 바라봤다.
하나 태자의 명을 불복할 정도로 그 불안함이 크진 않은 듯하다.
쿵!
기사들이 나가고 접견실의 문이 닫혔다.
직후였다.
그제까지 굳은 표정으로 있던 태자는,
"이제 망나니 흉내는 그만둘 수 있겠나?"
힘없이 피식 웃으며 대뜸 그리 말했다.
"-"
뭔 소리야 저게.
< 해답 (2) > 끝
ⓒ papa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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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답 (3) >
#006화. 해답 (3)
망나니 흉내는 그만 내라니.
이게 뭔 헛소리인가 싶다가도, 상대가 태자라는 걸 새삼 깨닫자 그러려니 하게 됐다.
생각해 보면 저 인간이 한 말 중 헛소리가 아닌 게 더 드물었다.
'개중엔 정말 허를 찌르는 말도 몇 있었지만···.'
적어도 그게 지금은 아니었다.
그렇지 않나, 요 며칠 집에 있었다 뿐이지 이 시간대를 기준으로 난 망나니짓만을 일삼는 인간이 아닌가.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말하자 황자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나오시겠다···. 알겠네. 자네도 이유가 있을 테니. 일단 앉게."
"예."
자리에 앉았다.
왜 저러는지도, 왜 찾아왔냐고 묻지 않았다.
황족에게 함부로 질문을 건네는 것은 불경인 까닭이다.
물론 내가 그런 걸 신경 쓸 인간은 못 된다.
고분고분한 건 태자의 분위기가 나쁘지 않으니 드는 생각은 있어서 그렇다.
'이거 잘하면 그냥 넘어가지나?'
어쩌면 지난 일을 잘 덮고 갈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거다.
하나, 침묵은 길었다.
이 인간이 무게를 잡으러 온 건지, 대화를 나누러 온 건지 감이 안 잡힐 정도였다.
나는 꾸준히 참았다.
목 끝까지 '그래서 왜 왔는데.'라는 말이 차오를 때까지 말이다.
태자가 입을 연 것은 슬슬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할 때쯤이었다.
아주 진지한 태도였다.
"···묻고 싶은 게 있네."
"그날은 술에 취해···."
"그런 게 아닌 걸 자네도 알지 않나."
···모르는데.
태자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래, 단도직입적인 답을 원한다는 것이겠지. 부끄러움을 이겨내지 않으면 답을 들을 가치도 없다는 겐가?"
이 새끼 뭐라는 거지?
생각한 순간 태자가 말했다.
"그래, 솔직히 말하지. 그날 자네가 했던 말들의 저의를 알고 싶네. 자네는 왜 그런 말을 한 건가? 나는 어찌해야 했던 건가?"
이 얘기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
'아니, 꼽 주는 건가?'
결국 사과하란 말이잖아.
이마 위로 핏대가 솟았다.
다행이다. 앞머리를 내리고 있어서.
나는 고개를 숙였다.
"거듭 죄송합니다. 그날은 술기운에 취해···."
"자네."
···왜 말을 끊고 지랄이야. 사람 빡치게.
주먹을 꽉 쥐었다.
"옙···."
아, 미래로 돌아가고 싶다.
이 인간 면전에 쌍욕을 처박던 그때가 처음으로 그리워졌다.
태자는 입을 꾹 다문 채 나를 노려봤다.
잠시간의 대치 상태.
그 정적을 깬 것은 태자였다.
"···그래, 인정하지. 자네가 맞았어. 그녀에게 집착할수록 나는 태자에서 멀어지고 있네. 그녀를 바라는 마음이 제국을 위하는 길과는 다른 쪽에 있었던 것이네."
그 말을 들은 순간 떠오르는 게 있었다.
'아, 그 여자.'
이제야 생각났다.
내가 회귀한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지 참.
'태자 패 죽이기···.'
···가 아니라 그 여자를 포기하게 만들기.
당시엔 이 인간 속을 긁어야 한다는 생각에 깊이 고민하지 않았으나, 분명 그때의 말은 태자의 현실을 들이미는 종류였다.
그게 속에 남아 있던 건가?
확실히 미래 태자의 말대로 처맞으면 알아듣긴 하나 보다.
생각하는 중에도 태자의 말은 이어졌다.
"그녀를 위해선 안 되네. 나도 그를 아네. 한데 그녀를 놓을 수 없어. 내가, 그녀가 없이는 살 수 없을 것 같네."
태자가 가슴에 손을 얹더니 옷깃을 꽉 움켜쥐었다.
"그게 욕심임을 알면서도, 포기가 안 돼."
헛웃음에는 짙은 혼란이 묻어있었다.
"내 안에 두 가지의 내가 있네. 그녀를 사랑하는 사내로서의 나와, 태자로서의 내가. 그래, 나도 아네. 태자로서 행동하는 게 맞지. 모르지 않아. 하지만, 그리했다간 평생이 너무 괴로울 것 같네. 그게 내 이유라네."
태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간절한 얼굴이었다.
"자네는 말했지. 감히 평민 계집을 태자위와 같은 저울에 올리느냐고. 정신을 어디에 두고 있는 거냐고."
"······."
"그런데 말일세. 나는 그리하고 싶네. 그래선 안 되나? 나는 한 명의 사내로서 누군가를 순수히 사랑할 수 없는 건가? 그런 걸 바라선 안 되는 거냔 말일세."
긴 서론 끝에, 진짜 질문이 나왔다.
"정녕 태자는 사랑이 허락되지 않는 직위인 겐가?"
그것은 사라진 시간대의 언젠가, 그의 회한 어린 푸념을 떠오르게 만드는 질문이었다.
-그때는 사랑이 개인 대 개인의 것이라 착각한 시기였네.
나는 입을 다물고 태자를 바라봤다.
여전히 저 얼굴과 미래의 노숙자 같은 얼굴은 겹치지 않는다.
하나, 그럼에도 저 인간이 그 인간이라는 걸 실감하고 만다.
이런 배부른 고민이나 하며 괴로워하는 게 또 몇 명이나 있겠나.
"나는, 나는 다만 사랑을 원하네. 어떤 이해관계도 얽히지 않은 사랑을."
태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곧 무너져 내릴 모양새였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자네가 과거로 가 나를 패버리는 걸세. 정신 좀 차리게 해달라는 말이지.
태자는 내게 그런 부탁을 했다.
웃기지도 않는 부탁이었다.
대관절 멀쩡한 태자를 패 죽이라는 부탁이라니.
그냥 과거로 가서 처형당해 죽으라는 말이 아닌가.
하지만 이런 형태라면.
언어로 그를 납득시켜 태자가 그 여자를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뭐···.'
이 정도는 해도 되지 않을까.
단순히 태자의 부탁이라서가 아니라, 적어도 이 인간이 멀쩡히 태자 짓을 한다면 전쟁이 그만큼 밀리진 않았을 것이니까.
이 인간만큼 유능한 이가 통치자라면 제국이 전보단 나아질 테니까.
그것은 결국, 파로스가 지난 생보단 안전해진다는 말이니까.
고민이 끝났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커튼이 쳐진 창가를 향했다.
'한 번만 해주지 뭐.'
내게 두 번째 기회를 준 옛 상관에 대한 처음이자 마지막 경의로.
-때로는···.
미래의 그가 내린 해답을 과거의 그에게 전해주었다.
* * *
"때로는, 너무 당연하기에 놓치는 것들이 있습니다."
칼리오스는 유렌의 뒷모습을 봤다.
그의 표정은 볼 수 없었다.
하나 억양만큼은 진중했고, 그것은 꼭 폐창고에서의 그를 연상케 했다.
내내 인상을 찌푸리거나 모르쇠로 일관하던 그가 드디어 진심을 보였다.
그 사실은 칼리오스로 하여금 어떤 희망을 보게 만들었다.
스스로도 왜 그런지 몰랐다.
하지만, 그라면 답을 가르쳐주리란 묘한 확신이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사랑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사랑이기에 더욱 익숙해질수록 놓치기 쉬운 법이지요."
"···그게 무슨 말인가. 내가 놓치고 있는 게 있다고?"
"아마도, 어쩌면 확실히 그럴 것입니다."
유렌은 확언하며 덧붙였다.
"전하, 그 여자를 사랑하는 이유가 진정 사랑입니까."
"···의심치 않네."
"그렇다면 그 사랑은 그녀만이 줄 수 있는 것입니까."
"그 또한··· 의심치 않네."
"어째서입니까."
어째서냐니.
그 답은 칼리오스가 너무나도 쉬이 내어줄 수 있었다.
"나를 온전한 나로서 봐주었네. 황태자 칼리오스 반 오르테어가 아닌, 인간 칼리오스를 봐주었어. 나를 순수하게 바라보고, 순수하게 판단해주었네. 어떤 이해관계도 없이 말일세."
그것이 위로였다.
궁중의 암투는 피를 말린다.
와중 자신의 뒤에 선 이들의 기대 어린 눈빛엔 중압감을 느낀다.
귀족들은 어떠한가.
그들에게 자신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두렵거나 가증스러운 하늘일 뿐이었다.
모든 것이 칼리오스를 지치게 만들었다.
그런 것들을 벗어던지고 웃을 수 있는 순간은 레베카의 곁에 있을 때뿐이었다.
그 사실을 말했다.
"···나는, 다만 짧은 순간이라도 그리 순수한 호의를 느끼길 원했네."
하나,
"그럼 전하께선 틀리셨습니다. 분명히."
그는 부정했다.
순간적으로 울컥하는 마음이 있었다.
무어라 항변을 해보려 했다.
그러나, 할 수 없었다.
"저는 물었습니다. 그 사랑을 줄 수 있는 것이 그녀뿐인지를. 또한 말했습니다. 때로는 너무 당연하기에 놓치는 것이 있고,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그는 너무 늦지 않게 해답을 주었다.
그는 커튼을 손에 쥐며 말했다.
"전하, 그를 아십니까? 전하는 세상 누구도 하지 못하는 특별한 사랑을 허락받은 분이십니다."
직후였다.
촤르르륵―!
창의 커튼이 걷혔다.
칼리오스의 눈빛이 떨렸다.
그 뒤로 보이는 것은 다름 아닌 태양 아래 빛나는 제도 전체의 전경이었다.
귓가에 유렌의 말이 때려 박혔다.
"전하께선 이 오르테어를 사랑하는 일을 허락받았습니다. 그저 태어났다는 이유로. 그저 황실의 장자라는 이유로."
"아···."
"그들의 사랑을 허락받았습니다. 당신이 그들을 이끌 것이라는 이유로."
"아아···."
"순수한 사랑을 물으셨습니까? 그럼 답하겠습니다."
유렌의 손가락이 제도를 가리켰다.
"당신이 웃길 바라면 웃고, 울길 바라면 우는 저 백성들보다 순수한 이가 어디에 있습니까. 당신이 작은 사랑을 주는 것만으로도 넘칠 만큼의 사랑을 부르짖는 이들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그 순간이 되어서야 칼리오스는 유렌의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없다.'
내내 고민해 보았으나 역시 없었다.
누구도, 어떤 개인으로도 이 수많은 백성이 표하는 감정보다 큰 것을 줄 수는 없었다.
그들만큼의 원성을 낼 수 없었고, 그들만큼의 환호성을 낼 수 없었다.
이 수많은 인간의 군집, 사회로서의 현상을 개인으로는 충족시킬 수 없다.
그러니 유렌의 말대로였다.
'나만이···.'
오로지 자신만이 이 모든 사랑을 받는 일을 허락받았다.
그저 황실의 장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태자라는 이유로.
유렌이 칼리오스를 내려다봤다.
불경이다.
하나, 불경하지 않았다.
칼리오스는 한없이 낮은 자세로 그를 올려다봤다.
그것이 당연한 일이라는 듯이 말이다.
"자, 다시 묻겠습니다."
이어서 타이르듯, 혹은 질책하듯.
"그딴 평민 계집을 감히 태자위와 같은 저울에 올리시겠습니까?"
그는 칼리오스가 외면했던 사실을 읊었다.
회색 머리칼 아래,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눈매와 쪽빛 눈은 답을 촉구했다.
하여 칼리오스는 처음으로, 순수하기 그지없던 파스텔톤 소녀의 미소와 자신만을 바라보며 울고 웃을 수많은 제국 신민을 같은 저울에 올렸다.
무게추는 순식간에 기울었다.
'레베카와의 미래가 행복할까?'
분명 그렇겠지.
그녀의 미소는 마음속에 들러붙은 찌꺼기조차도 지워낼 그런 미소였으니.
하나, 그때의 자신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나아갈 수 있을까.
혹여나 자신의 그릇된 선택으로 그들이 울게 된다면, 그들을 사랑하지 않았던 순간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반대로 제국을 선택한다면?
그녀를 잃어 아플 것이다.
시름에 고통스러워 울부짖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아픔 속에서만 살아가진 않을 터다.
칼리오스는 스스로를 알았다.
그는 나아가지 않고선 버틸 수 없는 사람이었다.
잘못된 것을 본다면 바로잡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답은 명징했다.
칼리오스는 그제야 웃을 수 있었다.
허탈하고 수치스럽게.
"···아니."
내내 혼란으로 뒤엉키던 마음은, 갈증으로 짓이겨지던 심장은 이제야 정상의 궤도를 찾았다.
"올릴 수 없네. 내게 어떤 것을 들이밀어도, 백성들의 마음과는 같은 저울에 설 수 없네."
그것이.
"태자이니. 유일한 사랑을 허락받은 자의 의무이니."
답을 낸 직후였다.
"정답입니다."
유렌 파로스가 처음으로 웃었다.
꽤나 불량하게 말이다.
* * *
칼리오스는 여명궁으로 돌아왔다.
하나, 그의 표정은 파로스의 저택을 떠나기 전과는 극명하게 달라져 있었다.
어딘가 허허로운, 그러나 개운하게 느껴지는 미소였으며 그는 그날의 칼리오스를 본 여인들이 하나같이 얼굴을 붉히게 만들었다.
"뭘 그렇게 봐?"
1황녀 에릴다가 퉁명스레 물었다.
칼리오스는 짧게 답했다.
"창밖."
정확히는 저 창밖으로 보이는 제도와, 그 끝에 걸친 파로스의 저택을 보고 있었다.
"···괜찮아? 머리 다친 거 아냐?"
"오라비에게 못 하는 말이 없구나."
"아니, 내내 죽상이다가 갑자기 실실대니까 소름 끼치잖아."
"불경하다."
"블갱해대~."
에릴다는 무엇이 그리 못마땅한지 빈정거리며 칼리오스를 따라했다.
그러다 말했다.
"보나 마나 또 그 계집 일이겠지. 왜, 이번엔 손이라도 잡아주디?"
"아니다."
"···응?"
"레베카와는 더 이상 만나지 않을 것이다. 내게 해가 되는 만남임을 깨달았으니."
쿵!
에릴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흘긋 살피니, 에릴다는 멍한 얼굴을 하다 천천히 함박웃음을 그리기 시작했다.
"칼리오스! 네가 드디어 정신을 차렸구나!!!"
와락 에릴다가 안겼다.
그리 환호하며 안겼을진대, 어느덧 깨달아 보니 에릴다는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칼리오스는 그 모습에 헛웃음을 흘렸다.
'내가 그리도 미쳐 있었나?'
다시 생각해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이리 정신을 차리게 되니 참 부끄럽고, 또한 부끄럽다.
그러니 칼리오스의 시선은 또 창밖을 향했다.
'유렌.'
그의 덕이겠지.
시선은 결국 제도 끝 파로스의 저택에 닿았다.
'저택이 저 위치에 있는 이유가···.'
분명 황실을 지켜본다는 의미였다.
반대로는 황실이 파로스의 눈 안에 있겠다는 의미였고.
역사와 구전은 말한다.
태사(太師)의 가문 파로스는 오래 전, 인간이 이종족의 노예이던 시절 검을 뽑아 든 초대 황제의 스승이 세운 가문이라고.
황제가 이종족들로부터 인간을 해방할 당시 초대 파로스는 그가 잘못된 선택을 할 때면 회초리를 들길 주저하지 않았다고.
언제나 바른길로 그를 이끌기 위해 힘을 써왔다고.
그것은 초대 파로스 개인의 영달을 위한 선택이 아니었다.
그는 황제가 내려주는 모든 작위와 직책을 거부하였으며, 또한 가문 대대로 그것들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두 가지 권한을 얻어냈다.
'황실에 대한 재고, 반려 요청권. 그리고 황실의 교육자 직책.'
그리하여 직위도 작위도 없는 귀족가, 위대한 가문 파로스가 생겨났다.
물론 황실의 교육자로서 나선 것은 역사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적었지만 말이다.
'황실의 스승 되는 가문이라···.'
칼리오스는 그 말이 참으로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유렌 파로스는 분명 몰락으로 가는 길 앞에서 자신의 멱살을 붙잡은 구원자였다.
자신에게 옳은 사랑을 일러준 스승이었으며, 동시에 나아갈 길을 일러준 길잡이였다.
그에게는 천 마디의 감사를 해도 모자라리라.
하나, 그것과 별개로 칼리오스에겐 욕심이 생겼다.
"에릴다."
"으응?"
"파로스에게 내 교육을 맡기려 한다."
배워야 한다.
아직 자신은 모자랐으며 스스로 바른길을 갈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러니 조언자가, 길잡이가 필요했다.
그 역할로는 파로스의 망나니 흉내나 내는 괴인이 어울릴 테다.
'왜 망나니 흉내를 내는 건진 모르겠지만···.'
그걸 알아가는 것도 재미겠지.
칼리오스는 길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준비해 주거라."
그러자,
"···파로스면 그 망나니?"
에릴다의 미소가 쩌저적 굳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보이는 얼굴이었다.
< 해답 (3) > 끝
ⓒ papa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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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수 (1) >
#007화. 복수 (1)
태자가 다녀간 지도 벌써 나흘째다.
정신머리 빠져 있는 놈에게 몇 마디 말을 해줬고, 그걸 충분히 알아들은 기색이라 태자를 더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내 삶에 충실하게만 지냈으니, 이를 이르자면 그랬다.
'최고다.'
단언컨대 최고.
내 생애 이렇게까지 평안했던 날이 또 있었던가.
옥에서의 삶은 말할 것도 없다.
그나마 자유가 주어졌던 전쟁기와도 당연히 비교가 안 된다.
아침에 눈을 뜨면 햇살이 나를 맞이한다.
가만 누워있어도 시종이 알아서 침구를 정리해주고 아침도 착착 차려준다.
그러고 나면 온전히 내 시간.
'아, 며칠만···.'
며칠만 이렇게 지내자.
가문의 영광이고 뭐고, 20년이나 그렇게 고생했는데 이런 일말의 여유 정도는 허락되는 것 아닌가.
물론, 그렇다고 정말 아무것도 안 하는 건 아니었다.
"좋은 아침이네."
"조, 좋은 아침입니다. 소가주님!"
가문의 병사 열 명이 아침부터 연병장을 뛰고 있기에 그 대열에 합류했다.
녀석들은 내가 아침부터 운동하는 모습에 하나같이 얼이 빠져 있었다.
"소, 소가주님 왜 저러시지···?"
"정말 다른 사람이 저 몸에 들어가 있는 거 아냐?"
속닥거리기는.
'다 들린다. 이 녀석들아.'
하지만 무어라 반박은 못 하겠다.
'미래의 나'라는 자아가 현재의 나에게 깃들었으니, 그걸 같은 사람이라고 하기도 참 이상하지 않던가.
그를 제하고 생각해도 망나니 같던 지난 삶을 반성하게 되는 말들이다.
그러니 전과는 다름을 보여줘야 하겠지.
게다가 운동은 앞으로도 빼먹어서는 안 되는 일과다.
'몸이 이렇게 허접할 수가 있나···.'
마나의 운용 정도는 이미 익스퍼트에 들어갔으나, 몸은 단련이라곤 모르는 허접쓰레기 그 자체다.
누군가는 마나만 잘 쓰면 되는 거 아니냐고 하지만, 그건 뭘 모르는 소리.
기본적으로 기사의 전투력은 육체 능력과 마나 운용 능력의 곱셈이다.
빼어난 육체로 잘 벼린 마나의 검을 이용하는 것이 곧 기사란 말이다.
애초에 마나만 잘 써서 될 수 있는 거면 그게 마법사지 기사겠나.
여하튼, 그런 방면에서 지금의 나는 반쪽짜리 기사다.
육체의 정련이 완성되지 않는다면 전투력은 두말할 것도 없고, 이대로 깨달음만 더 수집했다간 마나를 버티지 못한 육신이 '뻥!' 하고 터져버릴 터다.
괜한 생각에 몸에 소름이 돋아온다.
나는 그것을 애써 수습하고 말했다.
"난 여기까지. 다들 수고해라."
뛰었더니 잠기운이 다 달아났다.
몸이 한결 개운해진 기분.
방으로 돌아오니 엠마가 씻을 거리와 갈아입을 옷을 준비해둔 채였다.
아, 역시 최고구나. 귀족의 삶···!
"고맙다."
말하고 씻으러 가려는 순간이었다.
"아, 아! 소가주님!"
"엉?"
"이거요! 황실에서 편지가 왔어요!"
"웬 편지?"
"태, 태자 전하십니다!"
태자라, 그 이름을 듣자마자 개운했던 기분이 한 순간에 좆같아졌다.
그 인간하곤 더 엮일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지.
편지를 받아 드는데 엠마의 눈빛이 묘하게 반짝거렸다.
나는 조금 불안해졌다.
"···무슨 내용인 줄 알아?"
"네, 대충은요···! 황실의 전령분이 어엄청 근엄하신 말투로···."
"말투로?"
엣헴, 엣헴!
엠마가 헛기침을 하더니 이내 꼰대 아저씨 같은 표정을 만들었다.
그리고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황실에서 파로스에 가르침을 청한 것은 근 300년 만의 일이오! 교류의 장에 있어서 현명한 대처 바라오!"
꼰대 엠마의 눈초리가 날 향했다.
나는 시큰둥하게 되물었다.
"그렇게 말하디?"
"네!!!"
"그래."
휙, 하고 편지를 내던지곤 씻으러 들어갔다.
뒤에서 화들짝 놀란 엠마가 외쳤다.
"소, 소가주님! 편지는요?!"
"대충 던져놔. 아님 처리하든가."
황실 스승 같은 소리하고 있네.
그 인간이 약을 처먹었나?
'귀찮게 그런 걸 왜 해?'
내 일도 바빠 죽겠는데 덜 자란 태자 뒤치다거리나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놈이 "해라!"하고 말하면 어쩌냐고?
어쩌긴,
'좆이나 까잡수라 해야지.'
그래도 된다.
우리가 어떤 가문인가?
황실의 명령에 유일하게 '재고 및 반려'를 청할 수 있는 위대한 가문 파로스다.
내가 저 귀찮은 일에 끼일 일은 없으리라.
그런 마음을 품은 채 몸을 씻었다.
이후 나는 내가 미처 계산하지 못했던 일이 있음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그러니까, 누님과의 점심 식사 자리에서 말이다.
"소가주, 소식 들었습니다. 전하의 스승으로 초청을 받으셨다지요? 이 누이는 참으로 감격스럽습니다."
수저를 들기도 전에 누님이 먼저 말씀하셨다.
그 기색이 참으로 경이롭다.
눈꼬리가 처지는 옅은 웃음, 뺨 위로 돋아있는 생기 어린 홍조.
그리고 평소보다 약 반 박자 정도 빨라져 있는 말의 속도.
말했던가, 내 누이는 일평생 감정 표현이라곤 하질 않는 사람이었다.
그나마 하는 감정적 표현도 모두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 구분이 힘들 정도로 미약했다.
그런 사람이 노골적으로 좋아하고 있었다.
아니, 신나서 설레하고 있었다.
···그래, 간과했다.
이 가문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저 촉새 같은 아랫놈들 탓에 다 누이의 귀로 들어간다.
그리고 내 누이, 세실리아 파로스는 가문과 혼연일체가 되는 사람으로서, 가문의 위광이 살아있는 이유인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이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들은 나는 누이의 바람이라면 모든 걸 들어줘야만 하는 사람이다.
"어··· 그···."
"소가주, 저는 소가주가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음.
* * *
제도의 황성.
여명궁의 접견실은 소란스러웠다.
사람이 많이 몰린 것은 아니고, 그냥 거기서 떽떽대는 에릴다가 소란스러운 것이었다.
칼리오스는 귀가 아팠다.
"진짜? 진짜 하는 거야? 아니, 장난이 아니고 진짜 파로스를 스승으로 들인다고? 그 개망나니 파로스를?"
"개망나니라니, 위대한 가문의 후계자네. 말을 조심···."
"조심 같은 소리하고 있네! 망나니 맞잖아!"
차마 부정할 수 없음이 칼리오스의 유일한 슬픔이었다.
그도 그럴게, 유렌 파로스의 대외적 인식이 어떻던가.
제도 유흥의 중심.
음주 도박으로는 그 정도를 따라올 자가 없다는, 또한 길 가던 아이의 간식을 빼앗아 먹는다는 극악한 인물이다.
'현시점에서 그가 망나니가 아닌 혜안을 가진 귀인임을 아는 건 내가 유일하다.'
그러니 이 선택으로 궁이 시끄러운 것도 칼리오스의 이해 범위 내에 있는 일인 것이다.
들려오는 소문은 칼리오스도 알았다.
여자에 미쳐 날뛰더니, 이젠 망나니와 합심해 유흥이나 즐기러 갈 것이라던가.
곤란하긴 했다.
이제 정신을 차리고 태자로서의 직무를 바로 수행하려는 찰나이건만, 그 일로 인식이 더 아래로 처박는다면 향후의 행보에 꽤 차질이 생길 테니.
한숨이 삐져나왔다.
'···업보겠지.'
이제와 맑은 정신으로 돌이켜보면, 레베카에게 매달리던 자신은 확실히 비이성적이었다.
그녀만이 세상의 전부라는 듯 망아지마냥 앞뒤 안 가리고 날뛰어댔으니 주변에서 얼마나 걱정이 많았겠나.
그게 이번 사태에도 영향을 끼친 것일 뿐이다.
애초에 레베카에게 미치지 않았다면 유렌의 진면모를 몰랐겠지만, 그런 속 편한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에릴다."
"왜!"
"잔소리나 듣자고 부른 게 아닐세. 그리고 오라비에겐 경어를 쓰고."
"내가 쓰게 생겼냐고! 요!"
"방법을 함께 찾아달라는 말이네."
칼리오스는 눈을 좁히고 에릴다를 노려봤다.
에릴다는 분통이 터진다는 듯 흰자위로 핏발을 세운 채 부들거리며 칼리오스를 노려봤다.
그러다, 칼리오스가 절대 뜻을 굽히지 않겠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이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에릴다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엔 부탁을 들어주고 마는 마음 약한 사람이었다.
"···방법이야 뭐가 있겠어. 그 인간을 들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남한테 납득시키는 거지."
"그거야 나도 아네. 그 방법이 뭔지를 의논하고 싶은 걸세."
"뭐냐니···."
에릴다의 얼굴 위로 고민이 떠올랐다.
칼리오스도 마찬가지였다.
제도 최고의 망나니가 스승이 되어야만 하는 이유.
도대체 그게 뭐란 말인가!
칼리오스는 문득 유렌이 원망스러워졌다.
그런 순간이었다.
"···파로스가 너보다 나은 점, 배울 점이 있단 걸 남들에게 보여주면 되는 거 아닌가?"
"배울 점은 있네. 분명히."
"아니, 그러니까 남들한테 그걸 보여주면 되는 거 아니냐고요."
칼리오스는 눈을 끔뻑였다.
"보여준다라? 파로스가 나보다 나은 점을?"
"그치, 그게 없다는 게 문제지만."
진짜 없을까?
생각하면서도 에릴다의 고민은 이해했다.
칼리오스는 자기객관화가 안 된 사람이 아니었다.
도리어 선현의 말씀을 잘 따라 자신의 능력치를 꽤 정확하게 판단하는 편에 속했다.
그럼에도 칼리오스는 개체로서 모든 방면에서 우월했다.
타고난 전방위적 재능.
그것이 범상한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에릴다는 칼리오스가 고민에 빠지자 은근슬쩍 물었다.
"아무래도 없지? 그럼 이쯤에서 포기···."
"···아니."
"···응?"
"모르는 건 알아내면 되는 일이지."
"응"
칼리오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에릴다를 향해 상큼하게 웃으며 말했다.
"직접 물어보면 될 거 아닌가?"
그것이 사건의 전말이었다.
* * *
"그래서 이 자리에 온 것이네."
저택 접견실.
주둥이를 갈겨버리고 싶을 정도로 시원스레 웃는 태자 놈과 딱밤을 갈기고 싶을 만큼 불퉁하게 쳐다보는 황녀가 눈앞에 있다.
이 새끼들은 왜 남의 집에 와서 이러고 있는 건가.
아니, 그걸 떠나서.
"제가 태자 전하보다 잘난 점이 하나라도 있냐는 말입니까?"
"그런 의미는 아니네만···."
"아니, 그 말 맞지 않습니까?"
대뜸 와서 '네가 나보다 잘난 게 뭐지?'라고 묻는 저 당당함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지?
자신감이야 태자로서 필요한 덕목이긴 하다만, 듣고 있자니 왜인지 화가 치솟는다.
"시비 거십니까?"
묻자, 태자가 진지하게 말했다.
"그런 게 아니네. 정말 중요한 문제야. 자네를 원만하게 스승으로 들이기 위해선 주변을 충분히 납득시킬 필요가 있다네."
"그 스승질 한다는 말도 없었습니다만?"
"안 할 건가?"
우뚝, 몸이 멎었다.
―소가주, 소식 들었습니다. 전하의 스승으로 초빙받으셨다지요? 이 누이는 참으로 감격스럽습니다.
왜 이 순간 누이의 웃는 얼굴이 떠오르는 걸까.
"······."
순간적으로 답을 못하자 태자가 환하게 웃었다.
"하핫! 사실 자네도 원했던 것이군! 정말이지, 부끄럼이 많은 친구로구만!"
"조···."
좆까.
"좋다고?"
"씨···."
씨발.
이상하다.
재고 및 반려권이 왜 안 나오지.
아, 그렇구나.
누이의 미소가 재고 및 반려권보다 위에 있구나···!
눈이 질끈 감겼다.
'염병.'
하지만, 그리 짜증 나면서도 달리 생각해보면 이것은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태자를 상대해야 한다는 단점을 미뤄두고 보자.
파로스는 그 근간부터가 황실의 스승으로서 태어난 가문이다.
우리 가문에선 최고의 영예로 꼽는 것은 당대의 가주가 황실 스승직을 맡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마지막이 무려 300년 전이다.
정치적 알력이라는 것이 있다.
파로스의 위치가 특이한 만큼, 정계에 발을 들이는 일이 많아선 안 되는 것이다.
하여 선대들은 이 일에 신중해 왔다.
정말 필요한 순간이 아니면 나서지 않는 게 골조.
하여 가문 내에 생긴 규칙이 '황실이 부탁하지 않으면 나서지 않는다.'였다.
그런 상황에서 딱 나한테 태자가 스승 역을 부탁해왔다.
가문의 가장 큰 영광을 수행할 기회였다.
"휴···."
호흡을 길게 내쉬었다.
머리가 맑아졌다.
태자가 물었다.
"그래서, 자네가 유달리 자신 있는 분야가 있나? 날 이길 수 있을 정도면 되네. 뭐든 좋네! 아, 내가 자신 없는 것은 미식 분야나···."
주절주절 말이 많다.
나도 진지하게 고민해봤다.
'내가 태자보다 재능있는 분야?'
···있겠냐고.
20년이나 넘게 저 인간과 푸닥거리를 했다.
그럼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다.
태자는 인간이 태어나 가질 수 있는 재능의 총량을 아득히 넘어선 인간이다.
정말··· 정말 그 평민 계집만 아니었다면 제국의 향후 천 년 동안 저 인간을 넘을 황제는 다시 나오지 않으리라 생각될 정도로.
그나마 내가 자신 있는 분야라고 해봐야 칼질.
'하지만 그것도···.'
우뚝―
몸이 멎었다.
'···잠깐.'
지금은 20년 전이잖아.
황자의 지금 경지가 어느 정도였지?
'익스퍼트 초입? 중입?'
나랑 비슷하다.
그걸 깨달으니 떠오르는 사실 몇 가지가 있었다.
'저놈이 이 시점에 제국 검술을 뜯어고쳤었나?'
아니, 그건 태자가 투옥된 이후 명상을 통해서 보완한 부분이었다.
'저놈이 이 시점에 검의(劒意)를 다루던가?'
그것도 절대 아니지.
검의는 미래 태자의 '신 제국검술'에서나 등장하는 개념이니까.
자, 정리해보자.
경지는 우리 둘 다 비슷하다.
육체는 내가 못났다.
하지만, 검이라는 분야에서 한정해보자.
'제국검술하고 신 제국검술은 극상성이지.'
애초에 제국 검술을 티끌까지 해부해 약점을 모두 보완해버린 게 신판이다.
그렇다면, 그 모든 비전을 머릿속에 박아둔 나는.
'지금의 태자를 이길 수 있다···?'
그러니까,
'···저 새끼를 팰 수 있다?'
심장이 뛰었다.
지난 생에서는 끝까지 바람으로만 존재했던 염원인 '태자를 죽기 직전까지 패고 싶다'가 어쩌면 이뤄질지도 모른다.
그걸 깨달은 순간에 입은 절로 움직였다.
"전하."
"음?"
아, 이러면 안 되는데.
"···혹시 칼 좀 치십니까?"
왜 이렇게 웃음이 나오지.
< 복수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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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수 (2) >
#008화. 복수 (2)
어휘 선택이 품위 있진 못하나, 유렌의 말은 참 직설적으로 뜻을 전하고 있었다.
그에 저 한쪽 입꼬리만 올려서 웃는 모습은 말에 함의된 뜻을 몇 배는 증폭시키고 있었다.
한 마디로 '내 검이 당신보다 낫다.'라는 말을 도발에 가까운 형태로 전한 것이다.
칼리오스는 헛웃음을 흘렸다.
"자네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검술 교육을 명목으로 삼겠다고? 자네가? 나를?"
되묻는 이유는 하나였다.
칼리오스 반 오르테어.
그는 군림하기 위해 태어난 재목이라 일컬어지는 만큼 거의 모든 분야에 정통하였다.
하나 사람의 능력치가 모든 방면에서 일정할 수 없듯, 개중에도 유달리 잘나거나 못난 분야가 있을 터.
개중 잘난 분야가 바로 검술이었다.
그는 가히 초대 황제의 재림이라 불러도 아깝지 않은 수준의 검재를 타고난 남자였다.
그 검재를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가 있었다.
바로 칼리오스가 14세에 익스퍼트에 올라 제도를 들끓게 했던 이야기.
그는 우수한 재능을 지닌 기사가, 날 적부터 체계적인 교육을 받아야 25~30세 사이에 도달한다는 경지를 사춘기에 시달리며 도달했다.
역대 황실의 혈통 중 가장 빠른 속도.
아니, 오르테어 제국 역사를 다 뒤져도 세 손가락 안에 꼽을 수준이었다.
그 사실이 알려지지 않은 것도 아니다.
정확한 무력 수위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가 익스퍼트인 것 정도는 전 제국민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한데 어찌 유렌의 말이 어이없지 않을 수 있을까.
칼리오스는 유렌의 몸을 살폈다.
'마나가 몸에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귀족가 자제라면 어릴 적부터 영약이란 영약은 다 달고 다니는 게 보통이다.
유렌의 경우 다른 귀족 자제보다 그 양이 조금 더 많아 보이긴 했다.
하나, 그게 끝.
'···육신의 단련 수준은 떨어진다.'
근육보단 살이 많다.
또한 자세에서 굽어있거나 휘어있는 부분이 보인다.
검수라면 저래선 안 된다.
기세도, 기도도 없다.
칼리오스는 판단했다.
'검을 잡아본 적이 없는 몸. 잡았다 한들 교양 수준.'
정확한 진단이었다.
상대가 시간을 회귀해 온 유렌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번복할 기회를 주겠네."
칼리오스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가 무슨 자신감으로 이런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것을 단순한 오만으로 치부하기엔 그도 생각한 바가 있으리란 추측에.
그의 도움으로 미쳐있던 상태를 벗어났으니, 그 은혜에 걸맞은 대우 정도는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하나, 유렌은 칼리오스가 예상하지 못한 답을 건넸다.
"도박판에서는 말입니다."
"···?"
"후달리는 쪽이 말이 많덥니다."
우뚝, 칼리오스의 몸이 멎었다.
그의 입가에 떠오르는 것은 누가 봐도 억지로 짓는 웃음이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겐가?"
"흠, 아실 텐데."
유렌은 삐딱한 자세로 괜히 손톱을 매만지며 말했다.
그 여유가, 저 태도가 왜인지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쫄?
레베카와 다니며 하나 얻은 것.
칼리오스는 평민의 문화나 평민의 언어에 꽤나 박식하게 됐다.
그런 만큼 저 태도의 의미를 잘 알았다.
머릿속에 무언가 격정적인 것이 차오르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하, 하하, 하하하!!!"
탕! 탕! 탕!
정말 웃기다는 듯, 칼리오스는 손바닥으로 탕!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허벅지를 두드리며 잇몸이 보이게 웃었다.
하지만 핏발 선 눈은 말하고 있었다.
제대로 긁혔다.
칼리오스는 유렌의 말에 피가 거꾸로 솟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이건 범상한 자존심 문제가 아니었다.
다른 것도 아닌 검술.
그의 정체성과도 같은 검술을 평가절하당한 것이다.
천박한 말로, '너 좆밥이잖아'를 당한 것이다···!
"재밌군! 참 재밌어! 에릴다!"
"아, 깜짝이야!"
"시연이 필요하다 했지! 자격 증명은 누구에게 하면 되는가!"
흥분한 칼리오스의 목소리에 에릴다가 멍한 얼굴을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답은 성실하게 했다.
"화, 황실 기사단장이죠···? 지금 전하 검술 교육도 그 사람이 해주고 있으니까."
외인 앞이라고 존댓말을 해주는 모습은 참 칭찬해 줄 만하나, 지금의 칼리오스는 그런 걸 눈치챌 만큼 시야가 넓지 못했다.
"자네도 들었나! 지금 교육을 기사단장이 해주고 있네! 날 교육할 만큼 우위에 있는 사람이 소드 마스터밖에 없어서!"
"예, 그렇군요."
"괜찮겠나?! 나야 자신감 넘치는 자네에게 교육받는 것도 흥미롭지만! 그리하기 위해선! 기사단장 앞에서 자네가 나보다 뛰어남을 보여줘야 하는데! 대련해야 하는데!!! 혹시 부끄러운 상황이 펼쳐지진 않겠나?!?!"
이젠 반쯤 소리를 지르는 구도가 되었다.
이런 반응은 칼리오스 스스로도 몰랐던 일면이었다.
당연했다.
세상 누가 태자의 검술 실력을 평하며 '내가 해도 너보단 낫겠다'라고 말하겠나.
설령 정말 태자보다 강한 사람이어도 황실에 대한 예의라는 게 있다.
태자를 알면서도 유렌처럼 말하는 이는 세상에 또 있을 수가 없단 말이다.
여하튼,
"흠, 그렇군요."
"그래, 자네도 다시 생각···."
"미처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래도 태자 전하신데 남들 앞에서 맞으면 위신이···."
뚜둑-
태자의 이성이 끊어졌다.
"···에릴다. 기사단장이 오늘 다른 일정이 있던가?"
"어··· 아뇨, 아마 막사에서 훈련 중일···."
"자네, 따라오시게."
"지금 합니까?"
"왜, 쫄았나?"
"어이쿠, 전하. 언어의 품위를···."
"따라오시게!"
쿵쿵 칼리오스가 흥분한 걸음으로 응접실을 나섰다.
유렌은 뒤늦게야 일어나 그를 뒤따랐다.
그런 구도였기에, 칼리오스는 보지 못하고 에릴다만 본 것이 있었다.
유렌은 웃고 있었다.
아주 행복하게, 혹은 아주 께름칙하게 말이다.
* * *
황실 기사단장 드레노어 체바르는 업무 중 그런 연락을 받았다.
"음? 전하께서 날 공증인으로 세우고 싶어 하신다는 말인가?"
"예, 그···."
"아아, 대충 알겠군. 파로스의 소가주 얘기가 맞는가?"
부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오스의 파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이야기다.
사랑놀음을 관둔 칼리오스가 파로스 공자를 측근으로 들이려 한다는 것.
파로스를 측근으로 들이는 법은 오로지 하나다.
그를 스승으로 받드는 것뿐이다.
다만, 칼리오스는 이미 모든 분야에서 따로 스승을 두고 있는 만큼 그를 위한 자리를 만들기 위해선 전임자의 허락이 필요하다.
자격 증명이라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흠."
어련히 생각이 있겠거니, 어릴 적부터 칼리오스를 봐온 만큼 그가 허튼 짓거리를 하지 않으리란 믿음이 있는 드레노어였으나 이 이야기는 의외였다.
'스승으로 들일 빌미를 찾으려는 것이겠지. 한데 분야가 하필 검술?'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는 인과였다.
맥락상 자신이 공증인으로 서야 할 종목이라면 검술, 방법이라곤 대련뿐이니까.
그게 의문인 것이다.
그를 원한다면서 왜 가장 힘든 길을 선택을 하는 것일까.
드레노어는 멋들어지게 기른 갈색 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해 봤다.
'동 나이대에 전하를 이길 사람이 있긴 한가?'
아니, 동나이가 아니라 완숙한 기사들을 데려와도 그들 대부분이 칼리오스의 털 끝 하나를 건드리지 못한다.
그의 경지가 익스퍼트 중입임은 중요치 않았다.
그저 그의 검재가 너무나도 빼어나 상대하는 검식을 순식간에 파악해 버리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다.
제국 검술은 황실의 후계자에게만 내려져 오는 전천후의 비급이다.
그것을 익히고 있는 이상, 현존하는 모든 검술에서 일정 부분 우위를 점할 수 있게 된다.
즉, 가진 것을 생각해봤을 때 파로스의 소가주는 그를 이기지 못한단 말이다.
그렇다면 대련은 그를 공개 처형하는 일에 지나지 않았다.
"흠···."
어찌할까, 칼리오스가 나쁜 장난을 치려는 것이면 말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스승으로서 드레노어도 들은 말이 있었다.
-뭔가, 있네. 파로스의 소가주에게는 우리가 모르는 비밀이 있어.
며칠 전 정신을 차린 칼리오스가 확신에 차 그런 말을 했다.
호기심을 동하게 하는 말이었다.
그 눈빛은 절대 나쁜 장난을 계획하는 눈빛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눈으로 보는 것만큼 확실한 방법이 또 있겠나.
드레노어는 결정을 마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도록 하지. 전하께선 대련을 언제로 계획하셨다던가?"
"지금입니다."
"-"
그 순간이었다.
똑똑!
문을 노크하는 소리.
뒤이어 그런 말이 들려왔다.
-다, 단장님! 전하께서 연병장에 오셨습니다. 되도록 빨리 모셔와 달라는 청을 하셔서···.
급한 일인 건가.
드레노어는 상황이 영 이해되지 않는 중에도 걸음을 옮겨 연병장으로 향했다.
그렇게 보게 된 것이 있었다.
"전하를 뵙습니다."
"아아, 잘 와주었네."
어딘가 흥분한 것처럼 보이는 칼리오스.
"기사단장님을 뵙습니다. 파로스의 소가주 유렌입니다."
"아아···."
여유로운 태도의 유렌 파로스.
잿빛 머리칼이 흐트러져 있고, 그 밑의 눈매는 영 불량한 것이 신경질적인 면모가 돋보였다.
겉으로만 보면 그린 듯한 망나니였다.
하나, 조금만 깊게 들어가 보면 다른 점이 보였다.
드레노어의 눈썹이 슬쩍 들렸다.
'흠, 기도가 깔끔하군.'
육체 단련은 영 시원찮지만, 마나의 흐름이 도도하다.
명상을 즐기는 쪽인가.
그렇다면 확실한 게 있었다.
'전하의 말대로인가?'
망나니라는 소문은 거짓일지도 모르겠다.
그도 아니라면 저자의 의도이거나.
꽤나 호기심이 돋아났다.
드레노어는 그를 억누르며 칼리오스에게 물었다.
"진정 소가주를 검술 스승으로 들이실 생각이십니까?"
"자격이 있다면 말이지. 자격이."
자격이란 단어를 거듭 반복하는 이유를 드레노어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가 이성적이지 않다는 것은 그를 보며 이마를 짚는 에릴다의 행색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도발이라도 당하신 겐가.'
그렇다고 저렇게 사람이 휙 돌아버리나?
아니, 태자가 도발에 약한 사람이었나?
'···시도해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군.'
어쩌면 칼리오스의 약점 하나를 찾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걸 찾은 게 유렌 파로스라면 이는 인정할 만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 되는 게 있었다.
'검술 스승이다. 그렇다면 검으로 증명할 수밖에.'
황실 기사단장 씩이나 되는 드레노어가 칼리오스의 교육을 담당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그가 제국 유일의 소드 마스터이며, 황성에서 칼리오스만큼의 검술적 이해를 가진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일은 어찌 되었든, 태자의 검술 스승은 공직이다.
즉 유렌이 칼리오스의 검술적 기량을 상승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드레노어는 칼리오스가 무엇을 바라든 지극히 이성적인 관점에서 유렌을 판단할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기사단장, 내 바로 대련을 시작해도 되겠는가? 우리 둘 다 이리 목검을 쥐고 있다네."
칼리오스가 독촉했다.
드레노어는 유렌의 의중을 살폈다.
그는 목검을 두어 번 허공에 휘두르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저도 바로 시작해도 될 듯합니다."
관중이 꽤 많았다.
에릴다, 자신, 그리고 황실 기사단의 기사들.
'전하께서 손속에 사정을 두셔야 할 텐데.'
그런 걱정을 하는 순간이었다.
"아."
유렌이 문득 말했다.
"전하, 먼저 약조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무엇을?"
"대련의 결과로 뒤끝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뿌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살벌하게 울려 퍼졌다.
드레노어는 확신했다.
'전하는 도발에 약하시군.'
훗날 교육에 참고해야 할 터다.
그 사고를 했다는 것인즉슨, 여전히 드레노어는 유렌의 참패를 확신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좋네. 그리하지. 꼭! 꼭 뒤끝은 없는 걸세!"
칼리오스가 저리 살벌한 미소를 지은 적이 있던가.
아무래도 유렌이 멀쩡한 꼴로 돌아가진 못하리란 생각이 확고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대련은 시작됐다.
"가시지요."
쿵!
드레노어의 말과 동시에 칼리오스가 마나를 풀었다.
봐줄 의향은 조금도 없는 듯했다.
아니, 그 이상으로 유렌을 찍어 누를 생각이 만만해 보였다.
'폭풍식?'
제국 검술의 대표격인 맹공의 검식.
이것은 같은 익스퍼트의 기사라 한들 당해내지 못해 상처를 입는 검식이었다.
드레노어의 손이 검 위로 향했다.
혹여 일어날 불상사를 막기 위함이었다.
"가겠네!"
쾅!
칼리오스가 출수했다.
기사들이 환호했다.
하나, 그 분위기는 찰나도 가지 못했다.
유렌이 아무렇게나 들어올린 검에,
툭-
폭풍식이 파훼 되었기 때문이다.
"아···?"
칼리오스의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뜨였다.
당황한 듯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기사들이, 사용인들이, 또한 에릴다가 아득한 침묵을 자아냈다.
누구도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단 한 명, 드레노어를 제외하고 말이다.
그는 숨을 멈췄다.
경악, 혼란, 그런 감정들이 뇌리를 지배했다.
그 끝으로 느낀 감정은 다름 아닌 '경이'였다.
'뭐지?'
아득한 충격이 드레노어의 뇌리를 강타했다.
그것은 마치 동굴 속의 어둠이 세상의 전부인 줄로 알던 이가, 처음 동굴 밖 세상을 본 것과 진배없는 충격이었다.
드레노어는 이해하려 했다.
'마나로 맞불을 놓은 게 아니다.'
드레노어가 본 것은 심드렁한 눈빛으로 칼리오스의 몸을 살피던 유렌의 시선과, 이어진 그의 '검을 들어 올리는 행위' 뿐이었다.
그 과정에 칼리오스의 마나를 상쇄하는 거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한데도 그에 폭풍식이 막혔다.
'어떻게?'
소드 마스터씩이나 되어서도 드레노어는 유렌의 수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느꼈을 뿐이다.
저것이 식을 벗어던진 어떤 묘리라는 것을.
그렇기에 드레노어는 스스로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고 말았다.
'저건···.'
봐야만 하는 검술이라고.
그리하여 복기해야만 하는 검술이라고.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리해서 알아낼 수 있는 건 없었다.
유렌이 보인 기예인 검의(劒意).
그것은 아직 세상에 등장하지 않은, 10년 뒤의 태자가 지극한 명상 끝에 깨달아 정립할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런 충격의 한가운데서.
"끝나셨으면 제가 갑니다."
유렌이 출수했다.
< 복수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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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수 (3) >
#009화. 복수 (3)
검의에 관한 것을 설명하려면 역시 과거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니까, 회귀 전의 과거로 말이다.
-자네, 들어보시게.
옥에서의 태자는 하루의 대부분을 명상에 할애했다.
그러다가 명상을 끝내면 깨달음을 시험해야 한다며 날 괴롭혔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검에 미학이 없네.
-예?
-작금의 제국 검술에는 미학이 없단 말일세. 아니, 잃어버렸다고 해야 할까? 뭐가 됐든 이 검술은 껍데기뿐이네.
태자는 명상을 하고 와선 웬 뜬구름 잡는 소리를 했다.
나는 답했다.
-또 헛소리 할 거면 저리 가십쇼. 저 졸립니다.
-싫네. 자네가 아니면 이 이야기를 이해하는 인간이 없네.
-아오, 진짜.
-하여튼 들어보게.
그날의 태자는 유독 신나 있었다.
눈을 반짝이며 설명하는 꼴이 꼭 다섯 살배기 남자아이 같았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그렇게 들은 이야기는 평소와 달리 참 흥미로웠다.
-제국 검술은 야만적이네. 아니, 제국 검술로 비롯된 인간의 모든 검술은 야만적이네.
-그거 검술 창시한 당신 선조 욕이잖습니까.
-아니! 칭찬이네! 이 검술은 야만적이기 위해 태어난 검술이니까!
태자는 '인간의 검술'이라는 것의 유래를 설명했다.
-자, 나의 선조인 초대 황제는 이종족의 노예이던 인간을 해방하기 위해 검을 들었네. 자네의 선조가 그 길을 함께했지.
-그 이야기가 지금 왜 나옵니까?
-계속 들으시게. 그러니까, 선조는 검을 들어 검술을 제창하는 과정에서 그 상대를 '이종족'으로 지정해 두었단 말이 되는 걸세. 여기까지 이해했나?
-···예, 대충은.
-그 이야기의 연장이지. 그것을 염두에 두고 제국 검술을 파헤쳐 보면 각 검식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알 수 있네. 자, 제국 검술의 대표 검식 중 하나인 폭풍식은 하피를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졌네. 폭풍이란 이름대로 바람의 흐름을 건드릴 수 있도록 설계되었거든!
-···그럼 다른 것은?
-파마식은 밤의 종족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었네. 천뢰식은 엘프의 발걸음을 쫓기 위해 만들었고, 괴뢰식은 드워프의 강건함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었네. 모두가 그 목적성이 있는 것이지.
그리 말한 후, 태자는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자! 그런데 지금의 상황을 보게. 우리가 이종족과 싸우고 있던가?
-아니지요. 도리어 우호 관계인 종족도 있으니.
-그래! 시대는 더 이상 이종족에 대항할 힘을 필요로 하지 않네. 그럼 검식에 새겨져 있던 뜻들은? 그 의미는 어떻게 되는 거지?
-이제 필요가 없게 됐다?
-그걸세!
결론을 내린 태자는 이어 그렇게 말했다.
-우리는 더 이상 이종족으로부터 발버둥 치기 위한 검은 필요로 하지 않아! 하지만 제국 검술, 그로부터 파생된 모든 인간의 검술은 초대 황제가 남긴 뜻 아래서 멈춰 있네. 여전히 야만적으로 투쟁하기 위한 검술이란 말일세! 그렇다면 뜻을 잃고 상대를 잃은 검술엔 무엇이 남나?
-저야 모르죠.
-아무것도 남지 않네! 그러니 미학이 없네!
지금 모든 검술은 길을 잃었다.
인류 최초이자 최후였던 그랜드 마스터.
오르테어의 초대 황제가 이종족을 상대하며 검을 정의했던 그때에 멈춰 있었다.
그것을 깨달은 태자는 이어서 어떤 목표를 잡았다.
-그러니 우리는 새로운 미학을 정의해야만 해.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새로운 뜻이 검에 필요하다네.
-흠, 예. 잘해보십시오.
-음? 자네랑 같이 할 것이네만.
-?
-내가 뭣하러 필요도 없는 사람한테 입 아프게 설명했겠는가.
-본인이 신나서 얘기한 거 아닙니까?
-들었으면 책임도 같이 지게나.
-이 씨발새끼가?
-어허! 말본새를 보니 또 대련이 필요할 것 같군! 덤비시게!
나는 어떻게든 빠지고 싶었다.
수련만 해도 힘들고 그걸 떠나서 옥에서 나갈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뭣하러 괜한 일에 심력을 쓰겠나.
심지어 그때는 아직 누이가 내 면회를 찾아오던 시기였다.
더 그 일을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놈의 태자는 막무가내였다.
어떻게든 두들겨 패서라도 날 담론에 끼웠고, 내 의견을 들으려 했다.
어쩌면 내 성격이 뒤틀린 가장 큰 원인은 그 인간일지 모른다.
여하튼, 그리하여 우리는 검의(劒意)라는 것을 정의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기존의 검식을 모두 뜯어고치는 지난한 작업이었다.
내가 한 일이라곤 태자의 헛소리를 받아주며 의견을 내거나 바뀐 검식의 시험을 도운 것이 끝이지만··· 여하튼 돕긴 도왔으니 우리라고 치고.
결과가 나온 것은 딱 10년 차였다.
-하하! 그래! 이걸세!
깨달음이 빛을 발하였다.
새로운 검의는 '검술을 상대하는 검술'이었다.
작금의 시대는 검과 검이 맞붙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가 '신 제국검술'이다.
그런 이유였다.
내가 태자의 검을 이리도 쉽게 파훼할 수 있는 것은.
빠악!
올려치기로 태자의 턱을 갈겼다.
태자는 눈을 부릅뜨며 천뢰식을 예비했다.
속공으로 칠 생각이군.
나는 검을 역수로 쥐었다.
-자! 엘프의 발걸음을 쫓기 위한 천뢰식이네! 하지만 이젠 엘프와 싸우지 않아! 그럼 천뢰식은 뭘 쫓아야겠나!
-이건 검의 길로 하죠.
-좋군! 천뢰식은 숲속에서 엘프가 걷는 길을 파악하는 것에 묘리를 뒀지! 그걸 '검의 길을 쫓는다'로 교정하면 되겠어!
상대의 검이 지나는 길을 쫓는 검.
즉, 추살의 검.
필요한 것은 이해, 그리고 속도.
-흠···. 검의 길을 쫓는다, 라.
-그럼 상대의 근육이 일으키는 변화를 보는 건 어떻습니까? 사람 육신이라는 게 동작에 전조가 있지 않습니까.
-그것만으로는 모자라지! 그래! 마나의 흐름도 함께 쫓아야겠군.
-···그건 너무 어렵지 않습니까?
-그럼 검이 어렵지, 쉬운가?
-에휴, 그럼 제대로 쓰려면 마스터 정도는 되어야 한단 말이 되잖습니까.
-눈이 좋은 놈들은 익스퍼트에도 쓸 수 있네. 자네만 해도 금방 쓸 수 있을 거면서 왜 엄살인가.
나는 태자의 검을, 몸을, 마나를 감각으로 인지했다.
내 몸으로 연결되는 태자의 검로를 읽었다.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검의란 '뜻을 부과하는 것'이다.
'추살.'
그 의지를 담는다.
상대를 읽고 약점을 파악해 그 길로 짓쳐 든다.
그리하여 상대를 해하는 찌르기를 행한다.
그것이 새로운 천뢰식.
이미지를 구체화하자 몸속의 마나가 박동했다.
둥, 둥, 둥!
의지와 마나가 합일하여 하나의 동작을 완성한다.
이것이 검의의 핵심이었다.
검의가 검식의 강제력을 끌어올리는 것이다.
나는 검을 내질렀다.
검식에 걸맞은 의지가 배인 검.
껍데기뿐인 검식.
승부는 뻔하지 않나.
사아아-
태자의 천뢰식을 흘렸다.
그리고,
빠악!
"끄헉?!"
태자의 명치를 목검으로 찔렀다.
마나를 둘둘 두른 터라 그리 타격이 크진 않겠지.
애초에 내가 한 것도 마나를 검에 두르는 검술이 아니었고.
하지만 괜찮다.
'태자는 검의를 다루기 전까지 절대 내게 닿을 수 없어.'
단순히 검의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사실 검의보다 더 큰 원인이 있었다.
생각해 보라, 검의만 안다고 마나도 안 두르고 마나를 두른 검을 이기는 게 가능하겠나?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이게 가능한 이유는 하나였다.
'애초에 신 제국검술이 제국 검술 반격용인 걸 어쩌겠냐.'
제국 검술만 아는 태자나, 태자에게 배운 검술이 제국 검술뿐인 내가 검의를 시험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기존의 제국 검술을 상대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니까, 제국검술은 신 제국검술에 상성을 맞는다는 말이다.
여하튼, 이 승부는 내 승리.
나는 내 할 일을 했다.
그러니까, 연신 태자를 두들겨 팼다.
그리할수록 속에 샘솟는 감정이 있었다.
'아휴, 속 시원해.'
하지만 뭔가 모자라다.
그것은 내가 쌓아온 원한의 크기가 있기에 더욱 크게 와닿는 모자람이었다.
'내가 어떻게 당했지?'
회상해봤다.
일단 전신을 골고루 두들겨 맞았다.
자다가 일어나서 맞았고, 하루를 끝내고 자려다가 맞았다.
그뿐인가? 하도 때려대길래 반격 좀 하려고 했더니 불경하다면서 또 맞았다.
'···그래.'
이건 20년 치의 원한이다.
손맛이 더 필요했다.
'아, 목검은 안 되겠다.'
툭, 목검을 놓았다.
태자의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뜨였다.
이내 분노로 물들어 갔다.
검을 쓸 가치도 없는 상대로 여겨졌다고 생각하는 걸까.
'근데 맞긴 해.'
주먹을 뻗었다.
빠악!
인중에 한방.
빠악!
명치에 한방!
빠악!
광대뼈에 한방!!
빠악!
끝으로 갈빗대에 한방!!!
그렇게 여러 군데를 골고루 두드렸다.
태자를 패면 팰수록 입가의 미소는 더욱 번져나갔다.
나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그런 일이 끝난 후였다.
풀썩.
태자가 쓰러졌다.
속이 뻥 뚫리는 것만 같았다.
"끄어억···!"
더 일어나지도 못할 수준으로 팼건만 정신을 잃지 않은 것을 칭찬해야 할까.
그리 앓는 소리를 내는 와중에도 눈은 날 향하고 있다.
놀라운 점이 있었다.
태자의 눈 속에 든 건 분노뿐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태자가 가쁜 숨이 섞인 목소리로 물어왔다.
"그 검은···."
소름이 끼쳐왔다.
'징글징글한 새끼.'
그 와중에 검의를 느낀 듯하다.
하기야 창시자가 미래의 이 인간이니 아주 모르는 것도 이상하지.
뭐라고 둘러대야 하나···.
미래의 네가 만들었다곤 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
그게 좋겠다.
나는 손을 털며 말했다.
"가전 무술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련히 더 캐묻진 않겠지.
사실을 따지면 거짓말도 아니었다.
내가 창시 과정에 지분이 있으니 가전도 어느 정도 맞지 않나.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한 후에 기사단장에게 물었다.
"증명은 이만하면 됐습니까?"
스트레스를 풀었더니 배가 고파졌다.
그보단 이 썩을 몸뚱어리로 날뛰었더니 전신이 쑤신다.
티 내진 않을 거지만.
'집에 가서 누님이랑 밥이나 먹어야지.'
그러는 김에 검술 지도 하게 됐다는 소식도 전하고.
기뻐할 얼굴을 생각하니 마음이 다 훈훈해진다.
기사단장은 잠시 멍하게 날 보다가, 이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 위로 떠오른 표정은 왜인지 기분 나쁜 미소였다.
"···증명이 더 필요하다고 말하면 내가 너무 못난 사람이 되겠지. 자네는 짓궂은 사람이군."
뭐라는 거야.
여하튼 집에 가도 된다는 말이겠지.
"그렇다면 가보겠습니다. 전하, 차후 일정은 편지로 해주십시오. 귀한 걸음이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정양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나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떠났다.
* * *
여명궁의 의무실은 침묵 속에 있었다.
몸져누운 칼리오스와 그를 지키는 드레노어가 모두 입을 꾹 다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길 잠시, 먼저 입을 연 것은 드레노어였다.
"승부의 결과에 대해서는 입막음을 잘해두었습니다. 좋은 승부였고, 그 속에서 파로스 소가주의 검술적 혜안이 전하를 교육할 수준이었다. 정도로 정리될 것입니다."
칼리오스는 그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추하게 패배하고도 그를 승복하면 안 되는 스스로의 입장 탓에 부끄러움이 치솟은 것이다.
하나, 그리해야만 했다.
제국의 태양은 고개를 숙여선 아니 되기에.
"···수치스럽군."
"패배란 그런 것입니다."
"얼얼하네. 몸도 마음도."
"고통이란 그런 것입니다."
그리 답하던 드레노어가 이어 말했다.
"도발에 대한 대책을 가르치지 않은 제 불찰입니다."
"그러지 마시게."
칼리오스는 끅끅 웃으며 답했다.
"그깟 도발이 아니어도 그의 검술엔 닿을 수 없었을 것이네. 자네도 알지 않나."
"······."
드레노어의 침묵은 곧 긍정이었다.
칼리오스는 창밖을 보며 대련을 회상했다.
이질감.
그리고 정합성.
그의 뛰어난 검재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유렌의 검이 검으로서 나아가야 할 바른길을 나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그 경이는 머리끝까지 차오른 분노도 내리누를 정도였다.
검수로서의 순수한 호기심이 마지막 순간에나마 이성을 되돌려준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칼리오스는 유렌의 검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어떤 감정을 강렬히 느꼈다.
'비슷했다. 제국 검술과.'
유렌의 검식은 제국 검술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구태여 표현하자면 그 뿌리가 한 곳에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인간의 모든 검술은 제국 검술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알고서도 '뿌리가 같다'라고 할 정도면 유독 그 유사성이 짙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상성 또한 극명했다.
'제국 검술을 상대하기 위한 검술.'
검재는 그리 말했다.
틀릴 가능성은 0에 수렴했다.
무엇보다 제국 검술을 다루는 칼리오스이기에 그런 결론을 낼 수 있었다.
'왜? 어째서?'
두 검술은 닮았으며, 제국 검술이 유렌의 검술에 져야만 하는가.
그런 의문이 머릿속을 떠돌아다녔다.
칼리오스의 손끝을 움찔거리게 만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태자는 문득 떠올릴 수 있었다.
'···파로스.'
그 가문의 근원을.
그 순간, 칼리오스는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태사의 가문."
"예?"
"그래, 그랬었지."
유렌은 말했다.
-가전 무술입니다.
그 검술이 파로스에 전해져 내려오는 검술이라고.
또한 구전은 말했다.
파로스의 시조는 건국 황제가 엇나가려 할 때면 회초리를 들길 주저하지 않았다고.
그것이 비단 잔소리의 영역이었겠는가?
그랜드 마스터의 초인을 잔소리만으로 온전히 잡아둘 수 있겠나?
'아니.'
아니다.
그보다 정합성이 있는 답이 있었다.
'파로스의 시조가···.'
그랜드 마스터였다.
또한, 건국 황제의 스승이라는 말은 그가 건국 황제에게 검술 '또한' 가르쳤을 것이라는 말이 된다.
그리 생각해 보면 모든 게 이해된다.
'아아, 그런 것이었군.'
칼리오스는 결론에 닿았다.
그리하여 크게 웃었다.
'제국 검술이 아니다.'
인간 검술의 근원은 제국 검술이 아닌, 그 전의 무언가다.
그것이 바로 파로스의 검술이었다.
'역사에 드러나지 않은 이유는 황제의 위엄을 지켜주기 위해서일 터!'
칼리오스는 머릿속이 환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또한 새삼스러운 선조의 비밀에 놀라거나 실망하기 보다 기쁨을 느꼈다.
'나는, 나는 더 나아갈 수 있다.'
아직 나아질 수 있다는 확신.
자신보다 더 대단한 것이 있다는, 벽이 있다는 확신이 있는 까닭으로.
'파로스.'
그 벽을 깨면 자신은 성장할 것이라고.
그렇게,
'역시 그를 스승으로 두는 건 최선의 선택이었다!'
오해는 쌓이고 있었다.
< 복수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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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물 황녀 (1) >
#010화. 제물 황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