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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왜 먼저 가 놓고 네가 더 늦게 와?"

"...."

"...자냐?"

"...."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빨리 잠들 수 있는 걸까.

* * *

서청용 선생님이 던전 공략의 대가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시기는 비교적 최근이었다.

그는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나 공략 불가 던전들을 연이어 격파하며 유명세를 떨쳤고, 용살학원의 공략전 담당 교사로 초빙되었다.

서글서글한 인상에 성격도 모난 곳 없어 학생들이 편안함을 느끼게 했고, 그의 공략전 수업 역시 다른 과목들보다 훨씬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 진행되었다.

"던전이 무엇을 위해 만들어졌을까 생각해 보자."

칠판에 이름 모를 던전의 지도가 떠올랐다.

입구를 통해 입장하는 모험가 파티.

얽히고설킨 미로를 뚫고 중앙까지 도달하면, 보스 몬스터가 보물 상자를 끌어안고 있다.

"왜 바로 보스방이 나타나지 않을까? 왜 던전은 미로처럼 복잡해야만 할까? 대답해 볼 사람?"

제일 앞줄의 여학생이 손을 들어 올렸다.

서청용의 지목을 받고 입을 연다.

"...그래야 침입자들이 고생하니까요."

"정답이야."

던전 지도 곳곳에 몬스터들과 함정들이 배치되었다.

안 그래도 미로 같은 곳에 장애물까지 잔뜩 늘었으니 공략이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던전이 복잡한 이유는 중심부에 도달하기 전까지 너희를 최대한 소모시키기 위해서야. 너희가 가진 자원들, 예를 들면 장비나 물약 같은 아이템, 마력과 체력, 혹은 너희 파티원이 소모될 수도 있겠지. 그리고 목적지에 도달하기 전에 모든 자원이 고갈되면...."

칠판 위 모험가 파티가 몬스터들의 공격을 받고 픽 쓰러졌다.

"공략 실패. 후퇴해야 하거나, 최악의 경우 파티가 전멸하겠지?"

"...!"

"너희가 가진 자원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얼마나 절약하느냐가 던전 공략의 핵심이야. 그래서! 이번 주에 너희가 절약해 볼 자원은,"

MAP:[고블린 늪지대]

RULE:[타임 어택][5분 제한]

[1인/2인 던전][강적]

"시간. 던전을 클리어하고 남은 시간을 보면 너희들의 행동이 얼마나 효율적이었는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지."

칠판 위 지도가 지워지고, 대신 조잡하게 통나무를 깎아서 만든 고블린 조각상이 나타났다.

고블린 토템이라는 상징물이다.

"5분 내로 목적지까지 도달해서 토템을 파괴하면 클리어야. 물론 가는 길이 썩 순탄하지만은 않겠지? 길을 잘못 들어서 늪에 빠지거나, 몬스터들을 상대하다 보면 그만큼 클리어 시간이 길어지니 주의해."

"질문 있습니다."

학생 하나가 손을 들어 올렸다.

서청용이 미소를 띤 채 고개를 까딱이자 입을 연다.

"저... [강적]은 무슨 규칙입니까?"

"조옥순 선생님의 수업에 힌트가 있었단다. 복습은 충분히 해 놨겠지?"

"했... 죠...."

손이 슬며시 도로 내려갔다.

저거 수업 중에 졸았구만.

싱긋 웃어 보인 서청용이 설명을 마저 했다.

"자, 그리고 이게 중요한데. 지상층 던전들은 '연습 모드'로 여러 번 도전할 수 있어."

모두 인공 던전들로만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출입도 자유자재, 재도전도 자유자재다.

"하지만 점수를 낼 기회는 단 한 번. 그러니 너희가 생각하는 가장 효율적인 루트를 찾고, 익숙해질 때까지 여러 번 연습해 본 다음에 실전에 들어가는 게 좋을 거야.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모두 점심 맛있게들 먹어요!"

서청용이 교실을 나서자마자 신병철이 허겁지겁 고현우에게 달려왔다.

"야야야! 고현우! 나랑 2인 던전 같이하자!"

이번 공략전은 1인 던전과 2인 던전으로 나뉘며, 각기 점수가 따로 산정된다.

2인 던전에서 고득점을 얻고자 한다면 당연히 파트너를 잘 골라야 한다.

해서 눈치 빠르게 공략전 1위인 고현우에게 붙은 것이다.

"으음...."

침음을 하면서 슬쩍 내 쪽을 보는 고현우.

마치 허락을 받으려는 모양새다.

내가 그렇게 하라는 제스처를 보내자 고개를 끄덕인다.

[고블린 늪지대]라면 두 사람의 조합이 나름대로 잘 먹혀들어 갈 것이다.

"좋소. 이번에는 신 형과 합을 맞춰 봅시다."

"밥 먹고 바로 갈까?"

"그편이 좋겠군."

당장 점수를 내지 않더라도 연습 모드는 많이 해 볼수록 좋다.

그리고 내 파트너는....

내 소매를 슬슬 잡아당기고 있는 서예인이었다.

"나랑 같이 가."

"그럽시다."

서포터가 다 해먹음

35화 2주 차 공략전 (2)

이번 공략전에서 내 목표는 두 가지.

하나는 수업 중에 도착한 퀘스트다.

[서브 퀘스트:2주 차 공략전]

▷목표:공략전 던전 클리어

▷기한:~일요일 자정

▷보상:남은 시간에 따라 차등 지급 (?/5분)

시간을 많이 남기고 클리어할수록 좋은 보상이 지급된다.

덧붙여 퀘스트 내용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1인 던전과 2인 던전 모두에서 좋은 성적을 낸다면 보상이 더욱 강화된다.

내 목표는 당연히 최고 보상.

'둘 다 1분 이내에 끝낸다.'

성공한다면 강력한 직업 특성 하나를 가져갈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내가 가진 스킬과 특성의 개수는 다른 학생들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

[복사]로 돌려 막고는 있지만, 계속 남의 스킬을 빌리기만 해서는 언젠가 한계에 부딪히게 마련.

일정 수준 이상으로 올라가려면 나 자신만의 스킬/특성 세트가 필요하다.

서로 간에 유기적으로 연계되며 시너지를 일으키는 세트가.

이번에 얻을 특성이 그 첫 번째 조각이다.

두 번째 목표는 서예인의 성장.

[고블린 늪지대]는 닳고 닳도록 해 봤기에 내 입장에서는 새로울 게 없다.

반면 서예인은 이번 던전을 처음 접해 볼 터.

2인 던전이랍시고 지름길과 꼼수들만 덜컥 알려 줘 버리면 끝나기야 빨리 끝나겠지만, 그래서는 서예인 본인이 충분한 경험을 쌓지 못한다.

진정한 고인물은 혼자 앞서가는 게 아니라 뉴비가 알아서 가도록 기다려 주고 끌어 주는 법.

진득하게 서포트해서 함께 고득점을 달성할 생각이다.

간단한 점심 식사를 마치고.

서예인과 던전동 지상층으로 향하니 이미 1학년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대인전은 졌을 때 바로 점수를 잃지만, 공략전은 나만 잘하면 되니까 남 눈치 볼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시간 여유가 날 때 연습 모드 한 번이라도 더 하는 게 이득이라는 계산을 했을 것이다.

- 2인 던전 같이 갈 사람!

- 저기.... 나랑 한 판만 같이 해 주면 안 돼?

- 그럼 마법사만 둘인데?

- 저랑 [강적] 잡아 보실 분 계신가요!

사전에 파트너를 구하지 못한 학생들이 애타게 짝을 찾는다.

이 외침 저 외침이 뒤섞이고 합쳐져 시장통이 따로 없다.

한쪽에서는 벌써 연습 모드로 들어갔다 나온 팀들도 눈에 띈다.

- 아니이.... 그걸 왜 달려드냐고....

- 몇 번을 말해! 안 잡으면 반대쪽으로 한참 돌아가야 된다니까?

- 그럼 돌아가면 되지! 싸우면 잡을 수나 있어?

티격태격거리는 걸 보니 의견 충돌이 일어나는 것 같다.

사람 두 명이 협동하다 보면 흔히 벌어지는 일이지.

"우리도 들어갈까?"

"그래."

번갈아서 단말기에 학생증을 스캔하자 근처에 순간이동 포탈 하나가 입을 열었다.

내가 먼저 입장하고 서예인이 따라 들어온다.

등 뒤에서 포탈이 닫힘과 동시에 시끌시끌하던 소음이 일시에 잦아들고 적막이 찾아왔다.

고블린 늪지대.

휘어진 나무들이 하늘을 가로막아 빛이 잘 들지 않으며, 크고 작은 늪들이 시야 끝까지 이어진다.

[↑]

발밑에 새겨진 화살표가 옅은 빛을 발하고 있다.

초보들을 위한 최소한의 이정표인 셈이다.

어떻게든 이 방향으로만 가면 공략전 목표인 토템이 나온다고.

뒤이어 알림 메시지가 떠올랐다.

[곧 타임 어택이 시작됩니다.]

[남은 시간 5:00]

"남은 시간은 무시해. 첫 시도니까 급하게 가지 말고 천천히."

"응."

서예인은 내 말대로 알림 메시지를 치워 버렸다.

익숙하지도 않은 곳에서 시간에 쫓기다 보면 시야가 더 좁아진다.

타임 어택은 전체적인 그림을 파악한 뒤에나 생각해 볼 일이다.

해서 남들이 죽어라 달릴 시간에 우리는 걸었다.

느긋한 산책 분위기까지는 아니고, 조금 빠른 걸음으로.

늪 웅덩이를 헤엄쳐 다닐 수는 없으니 주변을 빙 둘러 걷고, 또 다음 늪을 피해 방향을 틀어 걷는다.

자연스레 동선이 S자처럼 구불구불해졌다.

"...."

서예인은 말없이 이동하면서도 주변 환경을 꼼꼼히 살피는 기색이었다.

일단 여기까지는 잘 하는 중이군.

"케르륵."

"케켁,"

인기척을 느끼고 고블린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늪에 머리만 내놓고 잠겨 있다가 어기적어기적 기어 나온다.

몸에 끈적하고 질척한 것들을 잔뜩 묻힌 채로, 손에는 날카롭게 갈아 놓은 뼈칼을 들었다.

숫자는 총 다섯.

"어쩔래?"

전투를 벌일 것인가, 피할 것인가.

상황 판단은 전적으로 서예인에게 맡긴다.

서예인은 홀스터에 끼워 둔 권총들을 양손에 쥐었다.

"잡고 갈래."

"그러자. 내가 앞라인 선다."

나도 [대지의 스태프]를 꺼내 어깨에 턱 걸쳤다.

이번에 내 역할은 원거리 딜러가 안전하게 화력을 쏟아부을 수 있도록 지키는 것이다.

"케에엑!"

고블린 한 놈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것을 시작으로, 서예인의 권총들이 번갈아 푸른빛을 뿜어 댔다.

- 투투투투투!

마력탄을 연사하며 차례차례 한 마리, 두 마리... 네 마리까지 처치하고,

마지막 다섯 마리째가 서예인을 뼈칼로 찌르려 했으나,

"어딜."

내가 옆구리를 뻥 걷어차서 늪에 빠뜨렸다.

몸이 반쯤 잠겨서 허우적대는 놈에게 마력탄이 꽂히며 마무리.

"케륵케륵."

"키륵."

소란을 듣고 더 많은 고블린들이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숫자는 어림잡아 수십.

슬슬 고블린 늪지대다워지는 것이다.

또 서예인에게 판단을 넘긴다.

"갈까? 잡을까?"

"가면서 잡을래."

목적지를 향해 이동하면서, 가까이 접근하는 고블린들만 요격한다.

- 투투투투투!

"케레엑!"

어떤 놈들은 손에 든 날카로운 뼛조각을 단검처럼 집어 던지기도 했다.

서예인이 피할 수 있는 건 알아서 피하게 두고, 어려워 보이는 것들만 쳐 냈다.

이렇게 지켜 주면서 보조만 하면, 원거리 딜러는 막강한 화력으로 적들을 모조리 갈아 마신다.

물론 갈아 마신다고 표현하기에는 아직까지 상대가 고블린들뿐, 특별할 것은 없는 전투다.

'이제 슬슬 특별해지겠지.'

- 쿵!

그런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우리 앞길에 커다란 덩어리가 내려앉았다.

그 고블린은 다른 놈들보다 확연히 덩치가 컸으며, 팔다리가 두껍고 근육질이었다.

한 손에는 크고 넓은 식칼을 쥐었는데, 녹슨 칼날에 푸른 마나가 맺혀 넘실거린다.

"그르르륵...."

참수자 고블린.

이 고블린 늪지대의 보스 몬스터이자 이번 공략전의 [강적]이다.

- 투투투투!

서예인은 놈을 보는 즉시 쌍권총을 난사했다.

참수자는 식칼을 방패처럼 눕혀 날아오는 마력탄들을 튕겨 내고, 일부는 몸으로 맞았다.

그럼에도 별 피해는 없는 듯하다.

"잡아?"

"피하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럽시다, 그럼."

우리는 누가 말하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자리를 바꿨다.

서예인이 전열에서 고블린들을 뚫고 나가고, 내가 후열에서 참수자 고블린을 견제하는 쪽으로.

서예인이 등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막 우리를 추격하려는 참수자 고블린에게 뇌전의 벌새가 날아들었다.

"그륵?"

놈은 달려오던 그대로 식칼을 휘둘러 허밍버드를 갈라 버리려 했다.

그 움직임이 일개 몬스터의 것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 쾌속하며 절제되어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네가 양지홍보다 낫다.'

걔는 뭐에 어떻게 당하는지도 모르던데.

물론 그렇다고 참수자 고블린이 허밍버드를 베어 내는 데 성공했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벌새가 식칼에 닿기 직전 가볍게 휘어지면서 놈의 팔뚝에 적중했다.

- 파지직!

"그르륵...!"

나름대로 저항력을 갖춰서인지 몸이 완전히 마비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전보다 움직임이 둔해진 것은 분명하다.

지금 거리를 벌려 두는 게 좋겠지.

속도를 높여 서예인과 합류했다.

나란히 발을 맞춰 달리며 물었다.

"왜 피하자고 했어?"

"잡는 데 오래 걸릴 것 같아."

단순히 강해 보여서, 잡기 어려워 보여서 피한 게 아니라, 상황을 저울질해 보고 더 유리한 쪽을 선택한 것이다.

그런대로 합격점은 줄 만한 대답이었다.

잡는 것보다는 잡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냐가 중요하기는 하지.

'거의 다 왔군.'

시야 저편에 어설프게 깎은 고블린 조각상이 보였다.

마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처럼 그 주변에만 밝은 햇빛이 내리쬐는 중이다.

저 토템만 파괴하면 끝이다.

"케르륵!"

그것만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고블린들이 토템을 지키기 위해 바글바글 몰려든다.

수십 마리를 뚫고 나가야 파괴할 수 있을 것이다.

"...."

서예인이 돌연 발걸음을 멈추었다.

권총 두 자루가 순식간에 라이플로 재조립된다.

"지켜 줘."

"알았다."

제자리에 자세를 잡고 토템을 조준하는 서예인.

나는 덮쳐 오는 고블린들을 대지의 스태프로 후려치고, 걷어차고, 허밍버드로 마비시키며 시간을 끌었다.

한편 등 뒤에서는 강한 존재감이 시시각각 가까워져 오는 중이다.

아마 참수자 고블린이 우리를 따라잡은 것일 테지.

그러나 놈이 이곳까지 도달하기 전에,

- 퉁—!

라이플이 푸른빛을 뿜고, 탄환이 고블린 토템에 꽂혔다.

조각상의 상반신과 하반신이 분리되며 산산 조각난다.

그러자 몰려들던 모든 고블린들이 한순간에 증발해 버렸다.

던전 클리어.

"잘했어. 이제 시간 확인해 봐."

"응."

첫 시도 중에는 일부러 남은 시간을 의식하지 않도록 했지만,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지는 확인할 필요가 있다.

[남은 시간 0:17초]

+ [처치한 고블린 수:22]

—————

[남은 시간 0:39초 = 39점]

+[클리어 보너스:500점]

—————

[총 점수:539점]

제한시간 5분을 거의 다 소모했다.

거기에 처치한 고블린 한 마리당 1초를 추가해 주고,

남은 시간 1초당 1점으로 환산한다.

전부 더해서 39점.

희소식은 클리어만 해도 무려 500점이나 준다는 것.

공략전 첫 주인 만큼 배점이 후한 편이다.

물론 연습 모드라 이 점수는 저장되지 않는다.

"나가자."

순간이동 포탈을 타고 밖으로 나오자 즉시 시끄러운 소음이 고막을 덮쳤다.

서예인은 말없이 두 귀를 손으로 덮었다.

- 참수자 저거 잡으라고 만든 거 맞냐? 너무 센데?

- 잡으라고 만들었겠냐, 알아서 잘 튀라는 소리지.

- 아씨, 동선 꼬이는 거 너무 짜증 나는데.

- 익숙해질 때까지 연습해 보자.

참수자 고블린에게 당한 피해자들이 속출하기 시작한다.

놈의 실력은 대인전으로 따지면 900점대 이상.

기본적인 개체 값부터 일반 고블린보다 월등히 높은 데다, 마나를 통해 강화된 육체, 그리고 늪지대에서 모든 능력이 상승하는 특성까지 들고 있다.

그러니 멋모르고 맞붙었다간 된통 깨질 수밖에.

괜히 [강적] 꼬리표가 붙은 게 아니다.

"좀 쉬었다 들어갈까, 아니면 바로?"

"바로 가도 괜찮아."

아직까지는 서예인에게서 졸린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수업 중에 푹 자 둬서 그런 거겠지.

두 번째로 던전에 입장했다.

방금 전과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똑같은 고블린 늪지대가 우리를 맞이했다.

[곧 타임 어택이 시작됩니다.]

[남은 시간 5:00]

"자, 지금부터는 조금씩 속도를 내 볼 거예요."

"알았어요."

[3]

[2]

[1]

[Start!]

[남은 시간 4:59]

서예인과 내가 동시에 달려 나갔다.

늪 웅덩이들을 피해 가며 굽이굽이 꺾인 길을 질주한다.

두 번째이기에 훨씬 망설임이 적다.

"케르륵."

"크륵."

- 투투투투!

막 인기척을 느끼고 늪에서 기어 나오려는 고블린들에게 마력탄 세례가 쏟아진다.

한 번 겪어 봤으니 두 번째부터는 굳이 놈들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 기다려 줄 이유가 없다.

마력총의 격발음을 듣고 곳곳에서 나타나는 고블린들.

그리고,

- 쿵!

"그르륵...."

유일하게 다른 위치에서 내려앉는 참수자 고블린.

다른 건 몇 번을 시도하든 동일한 반면, 이놈의 등장 시기와 위치만 무작위로 결정된다.

"이번에도 피해서 갈까?"

"...."

서예인은 약 3초 정도 나와 참수자를 번갈아 보다가, 무언가 떠올랐는지 되물었다.

"...쟤도 잡으면 점수 줘?"

나는 슬며시 미소 지었다.

아주 기꺼운 질문이었으니까.

'눈치가 빨라.'

보통은 상대가 강하다는 사실에만 정신이 쏠려 깨닫는 게 늦는데, 서예인은 두 번째 시도 만에 의문을 갖는다.

일반 늪지대 고블린을 잡으면 한 마리당 1초 추가.

그렇다면 [강적] 꼬리표까지 붙은 참수자 고블린을 쓰러뜨렸을 때는 몇 초가 추가될까?

"120초."

"...!"

"어쩔래?"

무려 2분이나 되는 보너스를 받는다.

서예인이 권총을 라이플로 바꿔 들었다.

"...잡아 볼래."

서포터가 다 해먹음

36화 2주 차 공략전 (3)

서예인이 투명 길리를 뒤집어쓰고, 나와 참수자 고블린이 대치하는 구도.

"그르륵...."

참수자가 낮은 울음을 위협적으로 흘리자, 일반 고블린들은 끼어들지 못하고 멀찍이서 눈치만 봤다.

놈이 막 땅을 박차며 녹슨 식칼을 휘두르려는 찰나,

- 퉁—!

어디선가 날아든 마력탄이 미간에 정통으로 꽂혔다.

안면이 찌그러지며 고개가 뒤로 홱 젖혀진다.

그러나 참수자는 그 상태 그대로 고개를 원위치시켰다. 터프한 놈이군.

놈의 눈알이 데굴 구르더니 탄환이 날아온 곳을 응시한다.

"아저씨, 한눈팔지 말고 이쪽 봐요."

서예인이 안전하게 약점을 노릴 수 있도록 계속 이목을 끌어 주어야 한다.

참수자에게 돌진하며 대지의 스태프(물리)를 휘두르고, 동시에 허밍버드를 시전했다.

스태프와 허밍버드가 양쪽에서 놈을 노린다.

"그르륵!"

참수자의 몸이 제자리에서 흐릿해지며 분신술을 쓰듯 둘로 나뉘었다.

식칼 역시 둘로 나뉘어 스태프와 허밍버드를 동시에 갈라 버리려 한다.

나름 보스 몬스터라 스킬도 쓸 줄 안다.

'오히려 좋아.'

어차피 둘 중 하나만 적중시킬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전력을 분산시켜 주면 나로서는 땡큐다.

직전에 스태프를 회수하며 슬쩍 물러나고 허밍버드를 조작한다.

- 파지직!

참수자는 이 정도 마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기색으로 나에게 식칼을 휘둘렀다.

몸을 뒤로 젖히자 녹슨 칼날이 스쳐 지나간다.

도로 파고들어 옆구리를 스태프로 후려쳤지만 별 피해는 없는 듯하다.

육체 능력 위주의 스킬과 특성을 둘둘 말고 있는 놈인데, 나는 마나만 담아서 후려쳤으니 대미지가 안 들어가는 것도 당연하다.

- 퉁—!

두 번째로 꽂히는 서예인의 마력탄.

또다시 안면에 명중이다.

고개가 젖혀지면서도, 놈의 부릅떠진 눈은 마력탄이 날아온 방향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한눈팔지 말라니까."

"그아아아—!"

스태프를 뻗어 방금 마력탄을 맞은 부분을 톡 건드리자, 참수자가 제대로 열이 받아서 나에게 돌진해 왔다.

얼마나 화가 났으면 식칼에서 도기(刀氣)가 줄기줄기 뿜어져 나온다.

나는 [도둑걸음]을 쓰고 아슬아슬한 거리를 유지하며 놈의 공세 사이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 퉁—!

또다시 참수자 고블린의 머리를 강타하는 마력탄.

놈은 나를 상대할지, 서예인을 잡을지 잠시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열 받는 건 내 쪽이지만, 실질적인 위협을 가하는 건 서예인 쪽.

후자를 먼저 잡기로 정했는지 제자리에서 두 다리를 굽히고 몸을 웅크렸다.

크게 도약할 생각인 듯했다.

"못 가지."

['증폭'을 사용합니다.]

['허밍버드'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E->C)]

- 파츠츠츠츠!

C급 허밍버드에 정통으로 얻어맞자 참수자의 움직임이 완전히 정지했다.

— 퉁—!

네 번째 마력탄이 얼굴에 꽂히고,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리기 시작하는 참수자.

놈이 마나를 있는 대로 끌어모아 식칼에 담더니, 서예인이 숨은 곳으로 힘껏 집어 던졌다.

날아간 식칼이 일대를 사정없이 찢어발겼다.

- 카가가가각!

늪과 축축한 토지가 마구 뒤엎어진다.

허공이 꾸물거리며 서예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 난리 속에서도 서예인은 제자리에 미동도 없이 서서 라이플을 조준한 채였다.

- 퉁—!

다섯 번째 저격이 적중했다.

참수자 고블린이 한쪽 다리를 굽히고, 이어서 완전히 두 무릎을 꿇었다.

"그... 륵...."

그리고 끝내 털썩 쓰러져 버렸다.

육신이 잿가루가 되어 흩어진다.

"잡았다. 가자."

"응."

우리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라이플이 즉시 쌍권총으로 재조립되고 푸른 불을 뿜어낸다.

- 투투투투!

"케르륵? 케륵!"

"켁켁??"

보스 몬스터가 처치된 탓에 우왕좌왕하는 고블린들.

어떤 놈은 앞길을 막아서지만 어떤 놈은 도망치거나 늪 웅덩이 안으로 뛰어든다.

서예인이 지나가면서 처치할 수 있는 놈들은 처치하게 두고, 다가오는 놈들만 쳐 내면서, 곧장 토템을 목표로 달렸다.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서예인이 마력총을 난사해 토템을 박살 냈다.

[남은 시간 0:18초]

+ [처치한 고블린 수:11]

+ ['강적' 처치:120]

—————

[남은 시간 2:29초 = 149점]

+[클리어 보너스:500점]

—————

[총 점수:649점]

첫 시도보다 빠릿빠릿하게 움직였지만, 참수자 고블린을 잡는 데 시간을 제법 잡아먹었기에 소요 시간은 비슷했다.

고블린 역시 지나가면서 걸리는 것만 처치해서 숫자가 적고.

그래도 이번에는 [강적]을 해치운 덕에 120초나 추가됐다.

첫 시도에 비해 100점 이상 올랐다.

"꽤 단축했네. 더 줄일 수 있겠다."

"...."

서예인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무표정한 얼굴에 알게 모르게 불만족스러운 기색이 떠올라 있다.

이유는 금세 눈치챘으나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는 노릇.

짐짓 모르는 척 물었다.

"왜?"

"...."

서예인은 머뭇거리며 입을 열려다 말았다.

참을성 있게 기다려 주었더니 마침내 말문을 연다.

"...있잖아."

"어."

"...마력탄 특강 또 해 주면 안 돼?"

자신의 마력탄에 부족함을 느낀단다.

참수자 고블린의 맷집이 엄청나게 좋기는 했다.

근거리 계열 보스 몬스터라 단단한 게 정상이다.

그럼에도 놈을 처치하는 데 라이플을 다섯 발이나 쏴야 했다는 사실이 서예인의 마음에는 안 들었나 보다.

하기야 단순한 다섯 발이 아니라 정확히 급소에, 정로 다섯 발이다.

특별히 방어가 견고하지도 않았다.

내가 완벽하게 마킹하며 허점을 노출시킨 상태였으니까.

사실상 과녁에 대놓고 쏜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도 한참 걸렸으니,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했으리라.

'은근히 승부욕이 있다니까.'

저 [강적]이라는 장치는 본래 신입생들을 엿 먹이기 위해, 조금 더 점잖은 표현을 쓰면 벽을 체감시키기 위해 설치된 것이다.

한 번쯤은 좌절을 느끼도록.

서예인도 [강적]을 상대로 벽을 느끼기는 했지만, 좌절하기는커녕 곧바로 이 벽을 넘어서고 싶다는, 성장하고 싶다는 의욕을 불태운다.

나로서는 달가운 일이다.

배우는 사람이 의욕이 있으면 가르칠 맛도 나거든.

"그럼 오늘 공략전은 여기서 끊고, 트레이닝 센터 갈까?"

"응, 그럴래."

* * *

트레이닝 센터.

오늘은 마나연공실이 아니라 개인 사격장에 자리를 잡았다.

사격에 필요한 어떤 장애물이든 소환할 수 있다.

"지금부터 3차 마력탄 특강을 시작하겠습니다."

"와—"

서예인이 소리 없는 박수로 반겼다.

"우선 어디까지 진도가 나갔나 볼게. 지금 [마력탄] 랭크가 E급이지?"

"응."

"D급까지 얼마나 더 걸릴 것 같아?"

지난 마력탄 특강부터 지금 사이에 혼자서도 수련을 했을 터.

서예인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을 열었다.

"...오늘 밤? 거의 다 했어."

"빠르네. 좋아, 그건 그것대로 진행하고. 오늘은 새로운 스킬을 배워 볼 거예요."

"알았어요."

조금 떨어진 곳에 큼지막한 나무토막 하나를 장애물로 세웠다.

한 손에는 마력탄을 만들어서 들고, 반대쪽 손에는 엄지와 검지를 말아 쥐어 딱밤을 날리는 모양을 만들었다.

"이게 마력총이라고 칩시다."

딱밤에 마력탄을 끼워 넣은 뒤, 나무토막에 대고 손가락을 튕겼다.

힘없이 날아가서 나무토막을 툭 건드리고 바닥을 구르는 마력탄.

"지금 네가 이 상태야. 마력탄은 흠잡을 데 없고, 마력총도 좋은 걸 쓰지만, 아직까지는 도구로만 사용하는 상태."

검사로 치면 잘 드는 명검과 초식 등을 익혀서 '휘두르기만' 하는 상태다.

더 강해지고자 한다면 거기에서 한 단계 발전해야 한다.

왜, 검사는 검을 몸의 일부처럼 여긴다는 말도 있고, 검이란 팔의 연장선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총사와 마력총의 관계도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시 봐."

다시 딱밤을 만들고 마력탄을 끼웠다.

이번에는 나무토막을 조준하면서, 검지에 마나를 집중시켜 마력탄과 같이 쏘아 보냈다.

- 딱!

날아가는 속도, 울리는 소리부터가 다르다.

나무토막이 충격의 여파로 흔들흔들거린다.

"[사출]이라는 스킬이야. 이걸 익혀 보자."

마나를 손에 그러모으고, 그 마나를 날려 보낼 부위, 즉 검지에 집중시킨다.

그리고 검지를 튕기는 타이밍에 맞춰 마나도 함께 날린다.

무인들이 지풍(指風)을 날릴 때의 원리와 비슷하다.

"...."

서예인이 어색하게 딱밤 모양을 만들었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 마력탄을 끼워 넣고, 마나를 집중시킨 후 튕긴다.

- 팅

마력탄이 커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엉뚱한 곳으로 날아갔다.

조준이 서툴다기보다 딱밤이라는 행동 자체가 익숙지 않은 듯하다.

나는 곧바로 수련 내용을 수정해야 했다.

이래서는 연습할 필요도 없는 딱밤에서 막히게 생겼다.

"...마력탄 없이 해 보자. 마나만 날려 보낼 줄 알아도 성공이거든."

서예인이 열심히 허공에 손가락 딱밤을 날려 댔다.

마나를 검지에 모으는 것까지는 얼마 시도하지 않고 성공했지만, 날려 보내는 부분에서 약간의 어려움을 겪는다.

손가락을 튕기고도 검지에 마나가 맺혀 있거나, 그보다 한 박자 일찍 마나를 날려 보내곤 했다.

날려 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타이밍을 맞추는 것도 중요하다.

궁극적으로는 마력총을 격발하면서 쓰는 스킬이니까.

- 툭

시행착오 끝에 서예인의 손가락 끝에서 미약한 마나 덩어리가 튕겨 나가 나무토막을 건드렸다.

날려 보낸 양보다 검지에 남은 마나가 더 많지만, 그 점을 감안해도 상당히 진도가 빠른 편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하고 있다. 그대로 계속해."

"알았어."

* * *

저녁 시간 즈음에는 수련이 더욱 진척되었다.

이제 딱밤으로는 어렵지 않게 마나를 날려 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는 본인의 마력총을 써서 수련하도록 했다.

여기까지 끝낸다면 [사출] 스킬이 주어질 테고, 그다음 D랭크 마력탄으로 넘어가면 되겠지.

"그런데 우리 저녁은 어떡할까."

"...?"

서예인은 다소 애매한 태도가 되었다.

한창 수련하던 도중이라 계속 집중을 이어 가고 싶은데, 아예 끼니를 걸러 버리기에는 배가 고프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다.

하는 수 없이 내가 심부름을 해 주기로 했다.

"그냥, 학생식당 가서 먹을 거 몇 개 집어 올게."

"고마워."

서예인이 계산은 이걸로 하라며 자기 카드를 건넸다.

검은 광택을 뿌리는 묵직하고 두툼한 블랙 카드를.

* * *

학생식당에서 빵 여러 개를 종류별로 집었다.

초코, 소시지, 슈크림, 머핀, 고로케....

이만하면 요깃거리로는 충분하겠지.

음료까지 몇 개 챙기고 발걸음을 돌리다가,

"안뇽!"

한쪽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하던 한소미와 눈이 마주쳤다.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걸 보면 열차에서의 일은 더 이상 마음에 담아 두지 않나 보다.

나 역시 한소미에게 이렇다 할 악감정은 없다.

따지고 보면 쟤는 선도부로서 자기 할 일을 하는 거고, 교칙을 어기는 건 내 쪽이니까.

게다가 같은 3반으로서 인사 정도는 하고 다니면 좋지 않나 싶어서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

한소미가 손을 흔들자, 맞은편의 송천혜가 누구한테 인사를 하는지 확인하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케이크를 한입 머금고 만면에 행복한 미소를 지은 채였는데, 나를 보자마자 대번에 표정 관리를 했다.

그렇게까지 정색할 필요는 없지 않니?

어쨌든 인사하는 김에 송천혜에게도 건성으로 손을 흔들어 준 다음 갈 길을 가는데,

"저! 저기요!"

송천혜가 나에게 다가왔다.

"왜?"

"그게.... 손 좀 보여 주세요."

서포터가 다 해먹음

37화 2주 차 공략전 (4)

뜬금없이 손은 왜 보자고 하느냐.

보나 마나 곽승재한테 뭔가 전해 들었겠지.

- 이 학교에 인페르노 피스트를 익힌 학생이 있다.

- 그리고 그 학생은 십중팔구 사라진 금지 아이템들과도 관련이 있다.

선도부 입장에서는 한시라도 빨리 범인을 색출해 내고 싶을 것이다.

단서는 도둑걸음, 허밍버드, 투명 길리슈트, 그리고 인페르노 피스트를 썼다면 반드시 손에 남았을 화상.

우선 도둑걸음은 유효한 단서라 보기 어렵다.

로그 계열 클래스 외에도 상당수의 원거리 딜러들이 즐겨 쓰는 범용 스킬이라, 그걸로 누군가를 특정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허밍버드와 투명 길리는 비교적 범위를 좁히기 쉬운 편이다.

허밍버드를 배운 사람은 꽤 있을지 몰라도, 곽승재의 가드를 뚫을 만큼 컨트롤하는 사람은 아마 이 학교 내에서도 열 명 안팎일 테니까.

투명 길리슈트 역시 값비싼 아이템이라 구비한 사람이 많지는 않을 터.

이 두 가지를 송천혜의 입장에서 보면.

나는 허밍버드를 꽤 잘 쓰는 편이고, 마침 친하게 지내는 서예인이 투명 길리를 보유하고 있다.

그렇다면 혹시 투명 길리를 빌린 건 아닐까?

어쩐지 아귀가 들어맞는 느낌이 들 것이다.

의심이 갈 수밖에 없지.

그래서 유력한 용의자인 내 손에 화상이 남아 있나 확인하려는 모양인데....

과연 그게 뜻대로 될까?

나는 순진한 표정을 가장하고 물었다.

"손? 내 손은 왜?"

"그냥 보여 주시면 안 되나요?"

막무가내로 가까이 다가서면서 시선을 내리길래 뒷짐을 져서 손을 감췄다.

송천혜의 눈에 깃든 의구심이 더욱 강해졌다.

재빠르게 내 뒤로 돌아들자 나는 거기에 맞춰 제자리에서 빙글 회전했다.

송천혜가 다시 내 뒤로 이동하고 나는 회전하고.

그렇게 두어 바퀴쯤 돌다가 주머니 속에 손을 쑥 집어넣었다.

"아!"

"왜 이리 남의 손에 집착하시는지 모르겠네. 이유를 알아야 보여 주든지 말든지 하지."

"그건...."

변명거리가 궁색한지 쉽게 답하지 못한다.

솔직하게 '의심 가는 사람을 찾고 있다'고 말해도 되지만, 그건 곧 '네가 범인 같다!'라고 털어놓는 것이나 마찬가지.

입학식 때도, 밴 웨이브 때도 나를 추궁했다가 허탕을 쳤는데, 이번에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은근히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날 것이다.

'보여 주기는 해야지.'

계속 이런 식으로 선도부의 이목이 집중된다면 내 운신에도 적게나마 제약이 생길 터.

지금 멀쩡한 손을 확인시켜 줄 필요는 있다.

그래서 슬쩍 구실을 만들어 주었다.

"왜, 손금이라도 봐 주게?"

송천혜의 얼굴이 환해졌다.

"맞아요. 손금입니다!"

이걸 덥석 무네....

생각해 보면 대뜸 손금을 봐 준다는 것도 이상함 레벨로는 동급 아닐까?

하지만 이것까지 태클을 걸면 다시 원점이라 그냥 모른 척하기로 했다.

송천혜가 깨달음을 얻고 이불을 걷어차는 건 제법 나중 일이 될 듯하다.

"...."

부드러운 손 두 개가 내 손을 붙잡았다.

송천혜는 내 손을 열심히 주물거리며 살피기 시작했다.

혹시 마법이나 아이템을 덧씌워 위장하는 건 아닌가, 은근슬쩍 마력까지 불어 넣어 가면서 확인한다.

결과는 말할 것도 없이 깨끗하고 건강한 맨손 그 자체.

"...반대쪽 손도 볼게요."

"예, 그러십쇼."

손금은 두 손을 다 보는 거니까.

하지만 반대쪽 손이라고 상처투성이일 리가 없었다.

처음부터 대미지 자체를 안 받았거든.

송천혜의 얼굴에서 의구심이 빠르게 줄어들어 간다.

내 손을 놓으며 질문을 던진다.

"지난 주말에 뭘 하셨죠?"

"너한테 그런 것까지 말해 줘야 되나?"

"...아닙니다. 제가 실언을 했어요."

내가 언짢은 기색을 드러내자 송천혜는 뜨끔해선 곧바로 잘못을 인정했다.

이런 상황에서 취조하듯 질문하는 건 본인이 보기에도 도를 넘었다고 생각했겠지.

결국 꾸벅 고개를 숙이고 물러난다.

"실례했습니다."

"잠깐만."

"...네?"

자리로 돌아가려는 송천혜에게 장난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손금 결과는 말해 주고 가야지. 나 연애 운은 좀 있냐?"

"...앞으로 고생하시겠네요. 엄청."

건성으로 답하고 걸음을 옮기는 송천혜였다.

이걸로 일단 용의 선상에서는 제외되었다.

그러나 송천혜가 자리로 돌아가서도 나를 몰래 힐끔거리는 걸 보면, 완전히 의심을 거두지는 않은 것 같았다.

* * *

- 통-! 통-!

서예인은 한 손으로만 권총을 발사하는 중이었다.

반대쪽 손은 빵 봉투와 입을 오가며 조그마한 미니 도넛을 집어 먹는다.

평소에 입이 짧다는 점을 감안해서 많이 사 오지는 않았는데, 오늘은 웬일로 빵이 계속 들어간다.

수련에 마나를 잔뜩 소모하는 만큼 몸이 에너지를 요구하는 듯하다.

- 통-! 통-!

마력탄을 쓰지 않도록 지시해 두었기에 총구에서 마력줄기만 뿜어져 나오며 표적을 때린다.

어떻게 보면 물총을 쏘는 모습과 비슷하다.

얼마나 반복했을까, 서예인의 눈썹이 슬쩍 치켜 올라갔다.

"...!"

나에게 고개를 돌리지만 아직 입 안에 든 게 있다는 걸 깨닫고 한동안 우물거리기만 한다.

내가 건넨 음료수까지 천천히 들이켜고 나서야 겨우 입을 연다.

"...익혔어."

"벌써? 빠르네."

시작한 지 반나절도 안 돼서 [사출]을 익혀 버린 것이다.

이번에도 내 예상을 웃도는 속도였다.

재능이 그냥 말이 안 된다.

D랭크 [마력탄] 작업은 굳이 내가 옆에 붙어 있지 않아도 괜찮을 듯하다.

본인 입으로 거의 끝났다고도 했고.

"난 먼저 들어갈게. 나머지는 알아서 할 수 있지?"

"응. 내일 봐."

서예인이 손을 살살 흔들었다.

트레이닝 센터를 나서는 내 등 뒤로 마력총 격발 음이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 * *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서예인은 평소보다 두 배는 졸려 보이는 모습으로 등교했다.

입을 작게 벌려 천천히 하품을 하고,

늘어지는 말투로 한다는 말이,

"한 단계 더 올렸어...."

"[사출]을?"

"응...."

[마력탄] D랭크, 거기에 어제 막 배운 [사출]까지 제힘으로 E랭크를 달성했단다.

재능도 재능이지만, 간밤에 내가 안 보는 곳에서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을지 머릿속에 그려진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어."

'이러면 하루 벌었지.'

원래 [사출]에 하루를 더 들일 예정이었지만, 서예인이 자력으로 그 과정을 뛰어넘은 이상 지체할 이유가 없다.

"수업 끝나고 바로 가자."

점수 갱신하러.

* * *

방과 후.

수업 내내 엎어져서 잠만 자던 서예인을 흔들어 깨웠다.

비몽사몽 한 서예인을 이끌고 던전동으로 향했다.

다행히 도착할 즈음에는 잠이 거의 다 달아난 듯했다.

던전에 입장하기 전에 대략적인 작전을 세우고, 순간이동 포탈에 발을 집어넣는다.

[곧 타임 어택이 시작됩니다.]

[남은 시간 5:00]

"해 봅시다."

"네."

[3]

[2]

[1]

[Start!]

[남은 시간 4:59]

- 투투투!

시작과 동시에 서예인이 허공에 마력총을 몇 발 발사했다.

고요한 늪지대에 격발 음이 울려 퍼지고,

"케륵?"

"크르륵. 켁!"

곧 일대가 벌집을 들쑤신 듯이 시끄러워졌다.

고블린들이 초장부터 이곳저곳에서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풀을 때려서 뱀을 놀라게 한다.

놀란 뱀은 몸을 더욱 웅크리거나, 상대를 물어뜯기 위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리고 예상대로 대장 뱀이 나타났다.

- 쿵,

"그르륵...."

소란을 듣고 내려앉기는 했지만, 고블린 참수자는 우리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고 두리번거렸다.

반면 서예인은 허공에 마력총을 발사한 순간부터 이미 준비를 시작했다.

길쭉한 총구가 놈에게 겨누어진다.

놈이 우리를 발견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 퉁—!

마력탄이 막대한 힘을 싣고 쏘아져 나갔다.

라이플과 참수자의 머리 사이에 한 줄기 푸른 선이 그려지고,

- 쾅!!

놈의 고개는 물론 허리까지 뒤로 꺾이며 나자빠졌다.

위력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뒤로 자빠진 뒤에도 몇 번이나 데굴데굴 구른다.

"그으어억...."

참수자 고블린은 한 방 만에 그로기 상태에 빠져 정신을 못 차렸다.

머리 위에 체력바가 나타났다면 거의 0%에 가까웠겠지.

연달아 네다섯 발을 얻어맞고서야 겨우 쓰러졌던 이전과 대조적이다.

바닥을 짚고 허우적거리며 기어 다니는 놈에게 인정사정없는 막타가 꽂혔다.

- 쾅!!

'어지간한 900점대는 그냥 바르겠는데.'

고등급 마력총, 완벽하게 조형한 D랭크 [마력탄], E랭크 [사출]이 더해져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뿜어낸다.

다른 부분은 아직 많이 보완해야 하지만, 한 방의 화력만 놓고 보면 유망주들과도 견줄 만하다.

기습의 묘리만 잘 살리면 900점대까지는 파죽지세로 올라가지 않을까 싶다.

"잘했어. 가자."

- 투투투투투!

쌍권총의 위력 또한 급상승했다.

이전에는 고블린 한 마리를 잡을 때도 급소에 여러 발을 박아 넣어야 했는데, 이제는 한두 발이면 나가떨어진다.

서예인이 사방으로 흩뿌리듯 권총을 난사하니 고블린들이 픽픽 쓰러진다.

곧 시야에 토템이 들어왔다.

서예인이 달리는 속도를 유지한 채 권총만 겨누어 빠르게 연사했고.

- 투투투!

토템이 산산이 부서지며 흩어졌다.

던전 클리어.

[남은 시간 1:20초]

+ [처치한 고블린 수:28]

+ ['강적' 처치:120]

—————

[남은 시간 3:48초 = 228점]

+[클리어 보너스:500점]

—————

[총 점수:728점] * 0.8배율

= 582 pt

참수자 고블린을 단숨에 처치하며 시간을 많이 절약했다.

지나가면서 잡은 고블린들도 많아서 이전 시도들보다 훨씬 앞당겨진 기록을 달성할 수 있었다.

내 공략전 퀘스트 역시 가뿐히 달성했다.

"완벽했어. 하이파이브."

내가 손바닥을 펴서 들어 올리자 서예인도 자기 손을 들어 가볍게 맞댔다.

소리 없는 하이파이브. 짝.

"어? 웃었다."

"...?"

서예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본인은 깨닫지 못한 것 같지만, 입가에 알아차리기 힘들 만큼 살짝 미소가 걸렸었다.

말없이 손가락으로 제 입매를 매만지는 서예인이었다.

* * *

다음은 1인 던전.

2인 던전과 비교하면 지형 구조와 몬스터의 배치 등에 약간씩 차이가 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각자 해결해야 한다.

"1인 던전도 크게 어려운 부분은 없을 거야. 너라면 충분히 혼자서도 고득점을 낼 거다."

"응."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연습 모드 몇 번 해 보고 들어가."

"알았어. 고마워."

서예인이 순간이동 포탈을 타고 연습 모드에 입장했다.

나 역시 단말기에 학생증을 스캔했다.

다만 나는 연습 모드가 아니라 초장부터 실전이다.

이미 머릿속에 다 들어 있으니까.

[곧 타임 어택이 시작됩니다.]

[남은 시간 5:00]

'뉴비 애호는 성공적이고.'

지금부터는 고인물의 시간이다.

서포터가 다 해먹음

38화 2주 차 공략전 (5)

2인 던전에서 서예인이 해 주었던 역할을 오롯이 나 혼자서 해야 한다.

고블린들을 뚫고 나가고, 참수자를 견제하고, 토템을 파괴하는 것까지 전부.

그 과정에서 모자라는 부분은,

'아이템으로 때워야지.'

학생 상점은 이런 데 쓰라고 있는 것이다.

먼저 포인트가 얼마나 모였는지부터 확인했다.

(2,249pt)

지난주에 양지홍과 대인전을 치렀었고, 저장된 리플레이를 다른 사람들이 열람하며 포인트가 꽤 쌓였다.

바닥을 치는 내 평판 때문에 거의 챙겨 보는 사람이 없으리라 예상했는데, 첫날 기록한 리플레이라서인지 조금은 수요가 있었나 보다.

그래 봤자 허밍버드 갈기고 두들겨 패는 게 끝이라 영양가는 없었을 텐데.

아무튼 아이템 목록을 쭉 훑어 내려가며 필요한 것들을 고른다.

(2,249pt) -60pt

['폭죽'x3을 획득합니다.]

(2,189pt) -50pt

['휴대용 부표(무한리필)'을 획득합니다.]

줄을 잡아당겨서 발사하는 폭죽 세 개,

물 위에 던지면 둥둥 뜨는 조그마한 부표를 구매했다.

'준비 끝.'

폭죽 줄을 붙잡고 전방으로 겨누었다.

곧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3]

[2]

[1]

[Start!]

[남은 시간 4:59]

- 슈우우우—

- 팡!!

폭죽을 쏘아 보냄과 동시에 앞으로 뛰쳐나갔다.

내 앞에 시커멓게 입을 벌리고 있는 늪 웅덩이로 직진한다.

늪 웅덩이에 발을 내딛기 직전, 휴대용 부표를 집어 던졌다.

둥둥 뜨는 부표를 사뿐히 밟고 뛰며 손으로는 다음 부표를 던지고, 또 그것을 밟으며 다음 부표를 던진다.

던지기와 밟기가 자연스럽게 연결되니 늪 위를 달리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

'시간 단축의 비결은 직진이거든.'

늪 웅덩이를 피해 구불구불하게 꺾다 보면 좀처럼 속도가 나질 않는다.

그 불편한 동선을 간결하게 만들고자 한다면?

늪을 그대로 횡단하면 되는 것이다.

휴대용 부표를 징검다리로 써 가면서.

"케르륵!"

"케에엑!"

폭죽은 서예인의 마력총이 격발되는 소리보다 훨씬 더 요란했다.

온 동네 고블린들을 다 불러 모은 것은 당연지사.

폭죽 하나를 더 터뜨려서 내 존재감을 모두에게 알렸다.

- 팡!

나를 노리고 몰려드는 수십 마리의 고블린 떼.

가까이 붙은 놈이 휘두른 뼈칼을 [도둑걸음]을 쓰며 가뿐히 흘려보낸다.

스쳐 지나가면서 이마에 딱밤 한 대.

놈이 약이 바짝 올라서 추격하지만, 나처럼 부표를 밟으려다 실패해서 늪 속을 허우적거린다.

- 쐐애액!

"오."

등 뒤에서 섬뜩한 파공음이 들리길래 부표를 앞이 아니라 옆으로 던지며 뛰었다.

마나가 듬뿍 담긴 녹슨 식칼이 나를 앞질러 날아갔다.

"그르륵!"

낮게 으르렁대는 참수자 고블린.

나는 놈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로 앞만 보며 달렸다.

그게 놈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는지, 한층 더 격분한 기세로 나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그래 봤자 도둑걸음을 최대한 활용하며 달리는 내 속도에는 못 미쳐서 거리가 계속 벌어졌다.

늪 웅덩이를 넘으며 질주하자 보통 1학년들은 절반도 못 갔을 시간에 고블린 토템에 도달했다.

'마지막 하나.'

- 팡!

폭죽을 터뜨리며 토템을 한 손에 쥐었다.

바로 부수지 않고 위로 던졌다, 받았다 하며 기다린다.

빨리 안 오면 이거 부숴 버린다고 시위하는 것처럼.

"케륵륵!"

"그륵!!"

효과는 매우 훌륭했다.

선두의 참수자를 비롯해 고블린 수십 마리가 바글거리며 몰려든다.

놈들이 쏘아 대는 살기가 나에게 집중되었다.

죽일 듯한 살기를 태연하게 넘기며 생각했다.

'사냥은 역시 몰이사냥이지.'

토템을 들지 않은 빈손을 꽉 움켜쥐었다.

주먹 안쪽 깊은 곳에서부터 검붉은 불꽃이 타오른다.

"그아아—!"

거리가 어느 정도 좁혀지자, 참수자가 땅을 강하게 박차며 나에게 짓쳐들었다.

나는 산책하는 것처럼 느긋하게 마주 걸었다.

놈이 내지르는 식칼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하며 깊숙이 파고들었고, 이글거리는 불주먹이 놈의 안면에 꽂혔다.

- 콰콰콰쾅!!

전방의 모든 것이 깨끗하게 삭제되었다.

참수자, 고블린들, 그리고 늪 웅덩이까지.

곽승재를 상대할 때처럼 힘을 조절한 게 아니라서, 인페르노 피스트가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나는 내가 만들어 낸 참상을 눈에 담으며, 엄지손가락에 힘을 주어 고블린 토템의 모가지를 뚝 부러뜨렸다.

"리플레이 저장은 안 하는 걸로."

[남은 시간 2:44초]

+ [처치한 고블린 수:71]

+ ['강적' 처치:120]

—————

[남은 시간 5:55초 = 355점]

+[클리어 보너스:500점]

—————

[총 점수:855점] * 0.8배율

= 684 pt

보너스를 극한까지 받는 바람에 남은 시간이 오히려 제한 시간 5분을 넘어 버렸다.

퀘스트 역시 한참 초과 달성했고.

[서브 퀘스트:2주 차 공략전](완료)

▷목표:공략전 던전 클리어.

1인 던전(남은 시간 5분 55초/5분)

2인 던전(남은 시간 3분 48초/5분)

▷보상이 강화됩니다.

[보상을 선택해 주십시오.]

▷풍요의 씨앗

▷환상의 눈

▷서풍의 가호

세 가지 특성 중에 하나를 선택해서 습득할 수 있다.

풍요의 씨앗은 회복이나 버프 계열 스킬에 보너스,

환상의 눈은 디버프 스킬, 특히 환상계 디버프에 보너스,

그리고 서풍의 가호는 바람 계열 스킬에 보너스를 주는 특성이다.

'고민할 필요도 없지.'

['서풍의 가호'를 습득합니다.]

처음부터 이 특성을 노리고 퀘스트를 진행한 거니까.

앞으로 나아갈 노선 역시 확정 지은 상태다.

나 자신의 무력도 어느 정도 챙기는 동시에, 고현우와 서예인을 보조하는 역할도 충실히 해내는 올라운더형 서포터.

바로 바람 계열 서포터다.

물론 특성이 있어 봤자 정작 바람 마법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지만,

'마법은 뜯어내면 돼.'

[생명의 큐브]에 프리미엄을 잔뜩 붙여서 바꿔 먹는다.

당규영에게 언급했다시피, 시즌 패스 4개 이상의 값어치는 받아 내야 셈이 맞다.

최소한 내 기준에서는 그렇다.

'슬슬 저쪽도 움직일 때가 됐지.'

자신 있게 실력 행사에 나선 곽지철을 한 대 쥐어박고 돌려보냈으니, 에메랄드 쪽은 십중팔구 뒤집어졌을 터.

같은 방식을 또다시 시도할 가능성은 작고, 한번 얼굴이나 보러 오지 않을까?

* * *

"크...윽!"

곽지철은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을 벽에 밀어붙이고 있는 커다란 나무손을 떼어 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손 하나의 크기가 사람 몸뚱어리만 한 육중한 나무골렘.

그리고 그 골렘을 부리는 에메랄드 부장 목종화는,

"이게 무슨 개애—망신이야—!!"

엄청난 분노에 빠져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중이었다.

나무골렘이 잠시 손을 느슨하게 하자 곽지철이 그 자리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 퍼억!

"억!"

그러나 다음 순간 골렘이 휘두른 손에 얻어맞고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목종화가 곽지철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아주 형제가 쌍으로 내 얼굴에 먹칠을 하는구나? 형이라는 놈은 선도부 달고 도둑놈한테 깨지질 않나."

곽지철의 형인 곽승재는 2학년 중에서도 출중한 실력으로 차기 선도부장 자리까지 거론되던 마당이었다.

하지만 지난주 임시 보관소 침입 사건에서 정체불명의 복면인에게 패하며 그 자리가 크게 흔들렸다.

아무리 상대가 인페르노 피스트를 사용했다 한들, 무패의 상징인 선도부가 한낱 도둑놈에게 지고 다닌다는 건 말이 안 되니까.

그 사건으로 에메랄드 마탑의 위신이 바닥으로 추락했는데, 이번에는 곽지철마저 지고 들어왔다.

심지어 정수지의 서포트를 받으며 이 대 일로 붙어 놓고 사이좋게 기절까지 했단다.

"그놈 실력 물어보니까 네가 자신 있게, 뭐라고? 유명한 겁쟁이? 그딴 놈은 한 트럭이 와도 상대가 안 돼?"

- 퍼억!

나무골렘이 또다시 곽지철을 후려쳤다.

"그런데 그 유명한 겁쟁이한테 박살이 나? 내가 마탑회에서 얼굴을 어떻게 들고 다녀 이 새끼야!!"

- 퍽! 퍼억!

대자연 동아리 부장 하수연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곽지철을 보낸 일이 어떻게 처리됐나 확인 차 찾아와 봤더니 이 꼴이다.

'어쩐지 시작부터 예감이 안 좋더라니.'

목종화가 실력 행사를 택한 순간부터 크든 작든 충돌은 정해진 셈이었다.

하지만 그 김호라는 1학년이 곽지철과 정수지를 동시에 상대해서 깨부술 줄은 몰랐다.

두 사람 모두 600점대임을 감안하면 나름 실력이 있다는 뜻.

최소한 '겁쟁이'라는 별명이 상당히 저평가된 것임은 분명하다.

게다가 김호의 태도.

두 사람을 제압한 뒤 당당하게 이렇게 말했단다.

- 용건 있으면 사람 오라 가라 하지 말고 직접 와라.

신입생들은 대개 3학년 선배가 부르면 어지간해서는 얌전히 따라오는데.

도발하듯 이런 말을 했다는 건 자기도 한 성깔 한다는 시위임과 동시에, 의문의 상자를 거래함에 있어 조금의 저자세도 보이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아이템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아무래도 상대하기 쉬운 자는 아닌 것 같다.

'방식을 바꾸는 게 낫겠어.'

지금도 길길이 날뛰는 에메랄드 부장이 몸소 증명한바.

이런 자는 꺾기도 어려울뿐더러, 설령 꺾는 데 성공한다고 쳐도 피해가 크다.

게다가 그녀의 목표는 박나리에게 좋은 아이템을 구해다 주는 것이지, 1학년과 불필요한 신경전을 벌이는 게 아니다.

'어떻게 달래 볼까....'

선물을 준비하는 게 좋겠다.

잘못 낀 첫 단추를 바로잡을 만큼 괜찮은 아이템으로.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만큼 의문의 아이템에 대한 하수연의 호기심이 컸고, 박나리를 아끼는 마음도 컸다.

"어쨌든 한번 만나 봐야 하지 않겠어요?"

- 퍽!

마지막으로 곽지철을 한 대 후려친 목종화가 골렘을 회수했다.

크게 심호흡을 하며 화를 삭인다.

상자에 관심이 있는 건 여전하지만 목종화의 목표는 하나 더 늘어났다.

"후... 그렇지. 만나 봐야지. 에메랄드의 위신이 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이제 아이템만으로는 못 끝내."

곽지철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제가 만회... 쿨럭! 만회하겠습니다."

"넌 뭘 잘했다고 입을 열어?"

골렘한테 한 대 더 맞을세라 곽지철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때는 방심하다가 속임수에 걸려들어서 진 거예요. 그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진지하게 임했다면 제가 졌을 리가 없어요.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면...."

"정수지, 네가 보기에는 어땠나."

목종화는 한구석에서 두 손을 들고 벌을 서던 정수지를 불렀다.

정수지는 사적인 감정을 완전히 배제하고, 자신이 본 대로만 답했다.

"전투가 길지 않아서 많이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움직임은 좋았어요."

"움직임은 좋았다라...."

속임수에 걸렸다. 움직임은 좋았다.

말로만 들어서는 제대로 판단할 수가 없는 노릇이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리플레이."

목종화의 말에 곽지철이 즉시 김호의 리플레이를 모조리 구매했다.

대인전 2회, 그리고 오늘 막 클리어한 공략전 2인 던전까지.

이런 데다 300포인트나 쓰는 게 뼈아프기는 했지만 지금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모두 리플레이 수정구 앞으로 모여들어 대인전부터 확인했다.

김호와 양지홍의 대결.

- 파지직!

허밍버드로 마비 걸고, 스태프로 두들겨 패고 끝.

곽지철은 뒷골이 당겨 오는 것을 느꼈다.

가뜩이나 아까운 포인트인데 겨우 이걸로 끝이라고...?

공략전은 더욱 가관이었다.

파트너인 서예인의 활약이 눈부시기는 했다.

- 쾅!

저격 한 발로 참수자 고블린을 전투 불능으로 만드는 모습.

목종화와 하수연이 감탄할 정도였다.

"강하군."

"저런 실력자가 숨어 있었네요."

곽지철도 얼마 전에 저 마력탄에 당한 적이 있었다.

뒤로 고꾸라지는 참수자 고블린의 모습에 자신이 겹쳐 보여서 괜스레 오한이 든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압도하는 서예인이었다.

한편 그 와중에 김호가 한 것이라곤 간간이 허밍버드를 날리거나 가까이 다가오는 고블린들을 걷어차는 등의 가벼운 견제뿐.

버스를 탔다는 것 외에 표현할 길이 없다.

물론 두 부장은 3학년답게 리플레이를 보는 시각이 더 넓었다.

"움직임이 좋다는 말은 사실이군."

"허밍버드 컨트롤이 수준급이네요."

"허나 그것들 외에는 뛰어난 구석을 못 찾겠어."

"실력을 숨긴 게 아닐까요?"

하수연이 조심스레 의견을 냈지만 목종화는 고개를 저었다.

"굳이 꽁꽁 감추고 다닐 이유가 없어. 허밍버드 외에 별다른 스킬이 없다는 가설이 더 유력하다."

문제는 그것만으로도 제법 까다로운 상대라는 점이다.

목종화가 판단하기에는 이대로 곽지철을 내세워서 설욕전에 나섰을 경우 질 가능성이 제법 컸다.

잠시 생각하던 목종화가 정수지에게 지시했다.

"정수지."

"네."

"토파즈 쪽에 가서 전해라. 내가 마비 저항 장신구를 대여해 달란다고."

"...!"

그렇다면 아예 마비에 걸리지 않도록 해서 허밍버드를 원천 차단한다.

다음으로 곽지철의 부족한 근접전을 보완해 줘야 할 터.

"내 골렘을 빌려주겠다. 이길 수 있겠지?"

"...필승입니다. 이건 지고 싶어도 못 져요."

곽지철이 반색을 하며 수긍했다.

진지하게 임하기만 해도 자신이 질 리가 없다고 자신하던 터였다.

거기에 마비 저항 장신구와 목종화의 골렘까지 빌린다면 자신은 무적이다.

"김호에게 결투를 신청해라."

"알겠습니다."

"네가 한번 패한 이상 이건 이겨 봤자 본전이다. 압도적으로 쓰러뜨려야 할 것이다."

"당연하죠.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와.... 치사해.'

상황을 지켜보던 하수연은 혀를 내둘렀다.

아무리 에메랄드 마탑의 체면이 걸려 있어도 그렇지, 1학년한테 3학년 골렘을 빌려주면서까지 이기려 들다니.

에메랄드와 대자연이 협력 관계라지만 이것만큼은 좋게 봐 줄 수가 없다.

하수연의 마음속에서 목종화의 비호감지수가 쭉쭉 상승했다.

김호와 따로 이야기를 나눠 봐야 될 듯했다.

서포터가 다 해먹음

39화 결투 (1)

수업이 끝나니 교실 밖에 나를 찾아온 손님들이 있었다.

우선 한 쪽에는 곽지철.

같이 다니던 정수지는 오늘 안 보인다.

나에게 적의가 가득한 눈빛을 쏘아 보내는데, 마치 무언가를 벼르는 듯한 기색이다.

나는 잠시 반성하는 시간을 가졌다.

바로 골목 벽에 머리를 박아 버리는 게 아니었다고.

'조금만 더 패고 기절시킬걸.'

조만간 다시 기회가 생길 것 같기는 하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박나리가 자기 고양이를 한 팔로 안은 채 슬슬 쓰다듬고 있었다.

근처에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불안한 표정으로 몸을 움츠린다.

두 사람은 각각 보호자를 한 명씩 두고 있었다.

곽지철의 곁에는 만사에 짜증이 가득할 것 같은 신경질적인 표정의 남학생,

박나리의 곁에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여학생.

둘 다 넥타이에 3학년 핀을 꼽았다.

에메랄드 마탑과 대자연 동아리겠지.

네 사람이 나에게 다가왔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에메랄드 마탑 선배였다.

"네가 김호냐."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에메랄드 부장 목종화다."

"대자연 동아리 부장 하수연이에요."

대놓고 사람을 낮추어 보는 태도의 목종화와는 달리 하수연은 예의 바른 태도와 존대를 유지했다.

물론 예의'만' 바른지는 앞으로 두고 볼 일이다.

목종화가 대화를 이었다.

"용건 있으면 직접 오래서 왔다."

"고마운 일입니다. 메신저랑 얘기하려니까 급이 안 맞더군요."

곽지철과 목종화의 얼굴이 동시에 딱딱하게 굳어졌다.

곽지철은 급 안 맞는 메신저 취급에, 목종화는 1학년 따위가 자신과 동급이라는 말에.

발끈해서 한마디 하려는 곽지철을 목종화가 손을 들어 다물게 했다.

"신입생이라 눈에 뵈는 게 없나 보군. 선배로서 충고 하나 해 주마. 항상 겸손해라. 우물 밖 세상은 네 생각보다 넓다."

"충고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선배님께서 우물 밖에 계신 것 같지는 않군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네 안목이 부족한 것이다. 상대의 실력을 제대로 가늠하는 것 또한 실력이다."

"그래서 떨거지 두 명을 보내신 겁니까?"

"...!"

순간 목종화의 말문이 막혔다.

본인 말대로 안목이 출중해서 내 실력을 제대로 가늠했다면, 곽지철과 정수지가 나를 제압했어야 했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멀쩡히 서서 건방을 떨고 있지 않은가.

제 얼굴에 침을 뱉은 격이었다.

보다 못한 하수연이 중재에 나섰다.

"두 분 다 이만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말다툼하려고 온 건 아니잖아요."

목종화가 한마디 더 쏘아붙이려다 말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부장급이 두 명이나 나타난 탓에 지나가는 1학년들의 이목이 집중된 상태다.

다들 무슨 구경거리라도 생겼나 기웃거리는 중이니, 여기서 더 화를 내서 좋을 게 없다는 판단이 섰으리라.

"대화하기 좋은 장소는 아니군. 자리를 옮기지."

* * *

매점에서 마실 거리를 하나씩 사 들고 2층 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다.

생각보다 학생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이다.

곽지철과 박나리는 뒤로 슬쩍 빠져 있고, 대화를 나누는 건 나와 목종화, 하수연 셋이었다.

하수연이 말문을 열었다.

"특별한 아이템을 갖고 계시다고 들었어요."

"그것 때문에 오셨으리라 짐작했습니다."

사실은 짐작한 게 아니라 내가 이들을 오게 만든 거지만.

[생명의 큐브]를 꺼내 테이블에 올렸다.

덮개를 열지도 않았는데 은은한 생명의 파동을 뿜어내는 상자를 보고 모두의 눈빛에 이채가 어린다.

박나리의 고양이가 품에서 빠져나와 테이블 위로 펄쩍 뛰어 올라가더니, 큐브 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범아, 안 돼! 빨리 나와!"

"괜찮아. 그냥 놔둬."

"...미안."

황급히 고양이를 회수하려는 박나리에게 손을 저어 보였다.

어차피 주인 되실 몸인데 팍팍하게 굴 것 있나.

고양이가 생명의 큐브 덮개를 툭 쳐올려서 열었다.

한가운데에 앉아서 한 말씀 하신다.

"애옹."

"사실이었군...."

"정말 범이가 좋아하네요...."

보면서도 안 믿기는지 불가사의하다는 표정을 짓는 목종화와 하수연.

그러다가 하수연이 다시 표정을 관리하고 대화를 이어 간다.

"얼핏 봐도 아주 강력한 생명 계열 아티팩트 같네요. 아이템 설명을 봐도 괜찮을까요?"

"으음...."

나는 잠시 침음하는 척했다.

아이템의 성능은 곧 소유자의 무력.

함부로 보여 준다면 곧 자신의 밑천을 공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결국에는 판매할 생각이기는 하지만, 보여 달란다고 냉큼 보여 주면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까, 일부러 뜸을 들이는 것이다.

내 고민을 덜어 주겠다는 듯 하수연과 목종화가 덧붙였다.

"이 정보는 절대로 새어 나가지 않게 하겠어요. 대자연 동아리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죠."

"나 역시 에메랄드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겠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나는 마지못해 수락하는 척 아이템 정보를 공개했다.

네 사람이 큐브 가까이 몰려들었다.

설명을 읽으며 눈이 경악으로 치켜떠진다.

"수납하는 생명 계열 아이템의 성능... 1.3배?"

"개수에 제한도 없어. 이 용량이라면 최소 10개 이상은 넣을 수 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물건이...."

"이게 B랭크일 리가 없어요. 대체 어디에서 구한 거죠?"

성능이 생각보다 충격적이었는지 네 사람이 흥분에 가득 차서 떠들었다.

소심하며 말수가 적은 박나리마저 적극적으로 대화에 참여한다.

나는 아이스커피를 홀짝거리며 느긋하게 기다렸다.

조금 흥분이 가라앉은 후, 하수연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눈빛 속에 불타는 열기는 숨기지 못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릴게요. 이 큐브를 양도하실 의향이 있나요?"

"글쎄요. 갖고만 있어도 충분히 좋은 아이템이라."

목종화가 거만한 어조로 말했다.

"물건은 제대로 활용할 줄 아는 자의 손에서 빛을 발하는 법. 네가 갖고 있어 봤자 생명 아이템 두어 개겠지.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다. 그런 데에 썩히지 말고 우리에게 넘겨라. 분에 넘칠 만큼 가격을 쳐주지."

"목종화 부장님 말씀이 지나치시기는 한데, 저도 어느 정도는 동의해요."

하수연이 열심히 부연 설명을 곁들였다.

"에메랄드와 대자연 동아리는 생명 계열 아이템을 넉넉하게 보유하고 있답니다. 이 큐브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는 말이죠."

반면 내가 앞으로 열심히 생명 계열 아이템을 모으더라도, 등급이나 개수에서 저들보다는 떨어질 것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내가 활용할 수 있는 비슷한 가치의 장비 등으로 교환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 라는 것이 두 부장들의 논지였다.

'이러면 너무 고마운데.'

내가 큐브를 판매하기로 정한 이유와 상당히 비슷하다.

생명 계열 아이템은 나와 상성이 잘 안 맞으니까.

물론 이유가 비슷하다 한들, 그 말을 파는 사람 입장에서 하는 것과, 사는 사람 입장에서 하는 것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내가 필요 없어서 판매하는 모양새가 되면 값어치가 떨어지지만, 지금처럼 저들이 원해서 구매하는 구도라면 내가 계속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는 것이다.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습니다. 그래도 망설여지는 건 어쩔 수가 없군요."

"원하는 걸 말해 보세요. 최대한 맞춰 드릴게요."

"으음...."

나는 팔까 말까, 얼마나 주면 팔까, 고뇌에 가득 찬 신입생을 연기했다.

모두가 말없이 내 눈치만 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내 대답은 고현우에게 시즌 패스 이야기를 꺼냈을 때부터 정해진 지 오래였다.

고민하는 척 끝에 손가락 4개를 펴 보인다.

"특수연공실 시즌 패스 4개. 이 정도는 돼야 넘길 것 같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곧바로 목종화가 대꾸했다.

"욕심이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시즌 패스 2개라면 바로 거래하지."

"흥정은 없습니다."

"...."

목종화가 인상을 쓰고, 하수연이 대화를 받았다.

"시즌 패스가 4개나 필요할 리는 없을 테고, 동급의 아이템으로 교환하시려는 거겠죠?"

"정확히는 시즌 패스 1개, 나머지 3개는 아이템으로 받고 싶습니다."

"총 3개까지는 손해 보는 셈 치고 거래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4개는 제가 보기에도 과하네요."

"그럼 죄송하지만 이 거래는 없었던 일로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수연의 눈썹 역시 조금 찡그려졌다.

나는 아쉬울 것 없다는 티를 팍팍 내면서 말했다.

"처음 말씀드렸던 것처럼, 저는 이 큐브를 갖고만 있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굳이 판매를 하겠다면 검술 동아리나 백마법 동아리를 찾아가도 되고.... 경매에 부쳐도 되겠죠."

"...!"

"...!"

순위를 논하자면 에메랄드와 대자연의 수준은 중상위권.

전통적인 강호인 검술 동아리나 백마법 동아리의 위세에 비하면 한 수 접어 줘야 한다.

그들에게 [생명의 큐브]를 가져갔을 때 시즌 패스 3개 이상의 값어치를 받으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세력 차이가 있다 보니 하수연의 입장에서는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겠지.

경매 역시 비슷한 맥락이다.

그렇게 다른 이의 손에 큐브가 들어간다면, 시즌 패스 4개보다 비싼 값을 치러야 할지도 모른다.

하수연이 난감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하.... 그 전에 한번 들어 보고 싶네요. 시즌 패스 3개는 어떤 아이템으로 교환하실지."

만에 하나 자신들이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는 아이템이라면, 손해를 더욱 감수하고라도 거래할 의향이 있다는 뜻.

하지만 세상일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공백 스킬북]을 원합니다."

"...!!"

공백 스킬북.

백지 수표의 스킬북 버전이라 보면 된다.

내용을 채워 넣으면 스킬북이 만들어지고, 사용하면 스킬을 배울 수 있다.

이미 존재하는 스킬을 작성하더라도, 작성하는 사람의 입맛에 맞도록 커스터마이징 할 수 있다는 게 큰 강점.

당연히 지극히 희소하다.

지금 용살학원 내에 대여섯 권은 존재할까 의문이다.

그런 아이템이니 구하는 노력까지 합치면 3.5시즌 패스 정도는 되겠지.

두 부장들 역시 그 사실을 알았기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보자 보자 하니까 끝이 없군. 그 조건은 들어줄 수 없다."

"저희도 조금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네요."

"예, 생각이 바뀌시면 말씀하십시오."

나는 태연하게 답했다.

아마 이번 주말 중에 바뀌지 않을까 싶다.

1.3배가 계속 눈앞에 아른거릴걸.

그런데,

"저, 저기!"

박나리가 갑자기 대화에 끼어들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목소리가 순식간에 모기만 해진다.

"저한테... 한 권... 있는데...."

"나리야, 잘 생각해 봐. 스킬을 제작해 볼 기회는 흔치 않아. 이렇게 쓰기는 아깝지 않을까?"

하수연이 만류했으나 박나리는 심호흡을 한 뒤 결심을 굳힌 표정을 지었다.

"제가.... 저 공백 스킬북을 얻은 지가 엄청 오래됐는데요...."

"그랬지."

"그런데 아직까지 괜찮은 스킬이 안 떠올라요. 이대로라면 앞으로도 계속 인벤토리에 넣어만 둘 거예요."

공백 스킬북은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품은 만큼 사용자에게 방대한 창의력을 요구한다.

어설프게 다루면 그 잠재력을 온전히 살리지 못하고 기껏해야 하급 정도의 스킬을 만들게 될 수도 있다.

낭비도 그만한 낭비가 없으니, 만드는 입장에서는 엄청난 고민을 거쳐야 한다.

박나리는 여태까지 이렇다 할 스킬을 못 만들고 헤매는 상황.

이렇게 인벤토리에만 고이 모셔 두느니 생명의 큐브와 교환하는 게 낫다고 주장하는 것이고.

"그리고.... 범이가 저렇게 좋아하잖아요."

"애옹."

고양이 범이가 짧은 울음소리로 맞장구를 쳤다.

큐브 모서리에 턱을 부벼 댄다.

극한의 효율충인 나로서는 고작 그런 이유로? 라는 생각이 없잖아 들었지만, 집사의 마음이란 그런 게 아닐까?

반려 고양이... 호랑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 주고 싶은 마음.

아주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게다가 박나리의 표정이 꽤 진지한 걸 보면 나름대로 숙고하고 내린 결정인 듯했다.

하수연도 박나리의 눈에서 그것을 읽었는지, 잠시 마주 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그래. 정 네가 그걸 바란다면."

"고마워요, 언니."

하수연이 나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

"지금 바로 거래하실 건가요?"

"한다면 오래 끌 이유가 없죠."

"좋아요."

박나리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으며 백색 일색으로 빛나는 스킬북을, 하수연은 멋들어진 기울임체로 Season Pass라고 적힌 카드를 나에게 건넸다.

그것으로 [생명의 큐브]는 박나리와 대자연 동아리의 소유물이 되었다.

박나리가 기쁜 표정으로 큐브를 꼭 껴안자, 큐브 안의 고양이도 만족스러운 오토바이 소리를 냈다.

자기 주인 물건이 됐다고 벌써부터 벅벅 긁어 대기 시작한다.

"그, 긁지 마! 긁지 마!"

그 광경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표정이 다 똑같은 걸 보니 아마 생각도 비슷할 것 같다.

'진짜 지랄묘가 따로 없네....'

"쯧."

목종화가 혀를 찼다.

그 역시 나중에라도 생각이 바뀌어 시즌 패스 4개를 지불했을지 모르지만, 소유권이 넘어간 이상 다 끝난 일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아직 할 말이 남은 듯했다.

"우리가 너를 찾아온 건 저 큐브 말고도 용건이 있어서다."

"예, 말씀하시죠."

또 무슨 용건으로 왔느냐,

다음 말은 곽지철이 대신 했다.

"너에게 결투를 신청하겠다."

서포터가 다 해먹음

40화 결투 (2)

목종화의 입김이 상당히 많이 닿은 듯한 결투 신청.

대충 그림이 그려진다.

에메랄드 마탑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설욕전이겠지.

다만 저들이 놓친 게 있다면,

"싫은데?"

"뭐?"

내가 굳이 이 결투를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는 점이다.

나는 귀찮음이 가득한 태도로 의자에 등을 기댔다.

"너 나한테 뭐 맡겨 놨냐. 네가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고, 싸우자면 싸워 줘야 돼?"

"결투는... 명예로운 것이다."

"그렇게 명예 좋아하는 놈이 둘이서 덤볐니?"

"그건!"

곽지철과 정수지가 나를 협공했다가 패배한 사건은 에메랄드 마탑에게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남았다.

2 대 1로 졌다는 점도 문제고, 상대가 '겁쟁이'라는 점도 문제다.

나중에 내 평가가 어떻게 바뀌든, 당장 겁쟁이라 불린다는 게 중요하다.

그 오점을 덮으려면 공식적인 자리에서, 결투로 나를 쓰러뜨리는 모습을 보여 주고 리플레이로 남겨야 한다.

그러니 어떻게든 나를 링 위로 끌어올리고 싶어 하는 것이다.

내 입장에서는 딱히 아쉬울 거 없고.

"아무튼 나는 받을 생각 없다. 이미 내가 이겼는데 뭐 하러 쓸데없이 시간 낭비하냐."

"...."

"정 뭐하면 진 걸로 쳐 줄 테니까, 자랑하고 다녀."

겁쟁이한테 부전승했다고.

에메랄드가 그 정도로 납득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곽지철로서는 이 상황을 헤쳐 나갈 뾰족한 수가 안 떠오르겠지.

눈빛으로 목종화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목종화는 쓸모없는 버러지를 보듯 곽지철을 노려보더니, 나에게 말했다.

"겨우 한 번 이기고 도망치는 게 그야말로 겁쟁이답구나. 지는 게 두려운가?"

"겁쟁이 맞는데요. 너무 두려운데요."

목종화가 승부사들의 도발 스킬인 '쫄?'을 시전했으나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미 평판이 바닥이면 이런 때 편리하다.

목종화 역시 이건 안 먹히겠다 싶었는지, 방식을 달리해서 이번에는 나에게 미끼를 던졌다.

"쓸데없이 시간 낭비는 안 한다고 했지. 판돈이 걸린다면 받아들일 건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면요."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결투를 받아들이고 곽지철을 두들겨 패고 싶다.

그럼에도 계속 저들의 도발을 흘리면서 버틴 이유는.

'그래야 더 이득이니까.'

에메랄드는 무슨 수를 써서든 반드시 설욕을 해야 하는 입장.

미끼를 제시해서라도 결투를 성사시키려 들 것이다.

그리고 그 미끼는 내가 안 물고는 못 배기는 먹음직스러운 것일 터.

물론 실제로 미끼를 문 게 나인지, 목종화인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말이다.

목종화가 인벤토리에서 작은 티켓 한 장을 꺼내 테이블에 탁 내려놓았다.

"이걸 걸지."

끼어들지 않고 상황을 관망하던 박나리와 하수연이 놀란 기색을 비쳤다.

그만큼 목종화가 강수를 두었다는 뜻.

[제작 VIP 티켓]

용살학원의 장인들은 쉽게 제작 의뢰를 받지 않는다.

공급에 비해 수요가 지나치게 많은 탓에 매우 제한적으로만 받고, 그마저도 대기열이 한참 뒤까지 밀린다.

이 VIP 티켓을 사용하면 그 대기열을 무시하고 최우선으로 아이템을 제작해 준다.

특수연공실 시즌 패스와 같은 용살학원의 여러 이권 중 하나였다.

'이렇게 감사할 데가.'

안 그래도 장비가 부족하던 차였는데, 이런 귀한 티켓을 준비해 주다니.

"단, 이겼을 때만이다."

"그런 걸 거셔도 괜찮겠습니까?"

"상관없다. 이기면 그만이니까. 받아들일 테냐?"

"좋습니다. 성사된 걸로 하죠."

내가 결투를 받아들이자 목종화는 팔짱을 끼고, 곽지철이 다시 나섰다.

"날짜를 정해라."

"이틀 뒤가 좋겠네."

"...왜 이틀 뒤냐?"

나는 방금 거래한 [공백 스킬북]을 슬슬 흔들어 보였다.

"이거 익혀야 되거든."

"뭐?"

"...?"

모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공백 스킬북으로 스킬을 만드는 것도 어려운데, 그렇게 만들어서 익힌다고 끝이 아니다.

오히려 그때부터 시작이라 봐야 한다.

직접 제작한 스킬에 익숙해지고, 실전에 쓸 만큼 랭크도 올려야 되는데, 그 모든 것을 이틀 만에 해낸다니.

얼마나 터무니없게 들리겠는가.

"크크크크...."

목종화가 낮은 웃음을 흘리며 얼굴을 쓸었다.

적잖이 열이 받았는지 입가에 사나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곽지철 따위는 이틀 익힌 스킬로도 이길 수 있다고 해석했나 보다.

"에메랄드가 이렇게 얕보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

"제 실력에 자신이 있는 거죠."

얕보는 생각이 아예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곽지철."

"네, 형."

"이놈한테 지면 너는 퇴부다."

"...반드시 승리하겠습니다."

곽지철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용건이 끝난 이상 불편한 자리에 계속 앉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하나둘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다.

"이틀 뒤를 기대하지. 어디 재주껏 익혀 봐라."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티켓 잘 간수하고 계십쇼."

"...."

떠나는 순간까지도 나에게 사나운 눈길을 보내는 목종화였다.

"나, 나도 갈게. 다, 다다음에 보자!"

"애옹."

박나리가 더듬더듬 나에게 인사를 건네고, 고양이 범이도 앞발을 두어 번 허공에 저었다.

'바로 트레이닝 센터나 가야겠군.'

가서 얼른 스킬부터 만들어야지.

반쯤 남은 아이스커피를 원샷하려는데, 하수연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잠시 둘이서 대화할 수 있을까요?"

"...그러죠."

나는 엉덩이를 도로 의자에 붙였다.

플라스틱 빨대 끝을 물고 있자니 하수연이 한숨과 함께 말문을 열었다.

"먼저 사과드릴 게 있어요. 목종화 부장이 그쪽한테 지철이랑 수지 보내는 거, 눈앞에서 보고도 모른 척했어요."

"저를 시험하신 겁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맞아요. 두 사람을 상대로 어떻게 대처하나 보고 싶었죠."

'그럼 그렇지.'

내가 처음 선전을 한 사람은 분명 박나리였는데, 대자연 동아리는 움직이지 않고 곽지철-정수지 듀오가 나를 찾아왔다.

대자연과 에메랄드의 사이가 나름 돈독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하수연도 분명 이 일에 한 발을 걸쳤으리라 확신했다.

지금처럼 솔직하게 털어놓을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나도 솔직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이해는 합니다. 한 동아리를 맡는 부장으로서 신중하셔야 했겠죠. 그래도 조금 서운하군요."

"미안해요. 이걸로 화가 풀리실지는 몰라도, 받아 줬으면 좋겠어요."

하수연이 사과의 표시라며 양피지 한 장을 건넸다.

[랭크 업(F)].

지난주에 대인전 3연승 보상으로도 나왔던 아이템이다.

하나가 거저 생기면 나로서는 땡큐지.

'통이 크시네.'

나를 상대로 간을 봤다는 점이 괘씸하기는 했다.

하지만 에메랄드와는 달리 나와 직접적으로 마찰을 빚지도 않았고, 쓸 만한 아이템까지 얻었으니 너그럽게 넘어갈 수 있는 일이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런데.... 이러면 대자연 동아리 쪽이 손해 아닙니까?"

"손해죠. 원래는 큐브 거래에 더할 생각이었는데, 나리가 끼어드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쳤어요. 그래도 괜찮아요."

하수연이 부드럽게 웃었다.

손해를 봐서 아쉽다는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큐브를 거래하면서 나눴던 대화, 그리고 결투와 관련해서 나눴던 대화에서 무언가 눈치챈 모양이다.

내가 소문처럼 겁쟁이가 맞았다면, 한참 선배에다 동아리 부장까지 맡는 목종화를 그렇게 스스럼없이 대하지는 못했을 테니까.

그렇다면 혹시 모를 미래를 대비해 미리 우호적인 관계를 다져 두는 게 좋다 판단했을 테고, 그 값으로 F급 [랭크업] 한 개면 싼 편이다, 라는 계산이 돌아갔으리라.

좋은 선택이다.

앞으로 4대 세력과 거래할 아이템은 [생명의 큐브] 말고도 한참 남았으니까.

"결투는 자신 있나요?"

"백 프로입니다."

내가 일 초도 고민하지 않고 답하자 하수연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정도일 줄은 몰랐네요. 그래도 미리 경고해 둘게요. 목종화 부장과 곽지철은 그쪽의 리플레이를 전부 분석하고 대처법을 준비해 두었어요."

"그거야 기본적인 전략 아닙니까?"

"아니요. 이번에 곽지철은 동아리 차원의 지원을 받게 될 거예요."

'그렇겠지.'

결투를 신청하는 곽지철의 모습이 이상하게 자신만만하길래, 믿는 구석이 있구나 싶었다.

동아리 차원에서 내 약점을 찌르는 아이템들을 준비해 온다.

곽지철이 쓰던 장비 역시 2, 3학년용으로 교체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무소속인 내가 이렇다 할 지원을 못 받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불공평한 결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 건 온당치 못하다 생각해요. 원한다면 대자연 동아리의 아티팩트를 대여해 주겠어요."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괜찮습니다."

공백 스킬북을 들어 보였다.

"이걸로 충분하니까요."

"...!"

이틀 만에 스킬을 제작하고 익혀서 써먹는다는 말은 진담이었다.

그러나 하수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었는지 재차 묻는다.

"...정말 새로 만든 스킬로 승부를 낼 생각이신가요?"

나는 길게 설명하지 않고 그저 웃어 보였다.

"보면 놀라실 겁니다."

* * *

트레이닝 센터.

나는 큼지막한 훈련실 한가운데에 홀로 앉아 있었다.

내 앞의 목각 인형은 지시만 내리면 언제든 나를 공격하려 들겠지만, 당장은 미동도 없이 정지한 상태다.

손에 펼쳐 든 [공백 스킬북]에서 푸른빛이 흘러나온다.

마나를 불어넣으며 원하는 단어나 문장을 떠올리면 저절로 입력되는 방식이다.

보통 스킬을 새로 제작한다면 고민을 거듭하고 한 글자 한 글자마다 심혈을 기울일 텐데, 내 스킬북은 속기사가 타자 치듯이 거침없는 속도로 채워져 가는 중이었다.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공백 스킬북을 몇 번이나 써 봤더라.

너무 많아서 세는 걸 포기한 지 오래다.

물론 몇 번 썼는지는 잊었을지언정,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쌓인 데이터는 내 머릿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공백 스킬북으로 구현할 수 있는 최적의 스킬이 작성되고 있었다.

- 어떤 서포터가 가장 유용한가?

이 질문에는 정답이 없다.

유용함이란 상황에 따라 바뀌기 마련이니까.

어떤 경우에는 회복이, 어떤 경우에는 보호막이, 어떤 경우에는 버프나 디버프가 더 유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 가장 상대하기 까다롭고, 짜증 나는 서포터는 무엇인가?

- 당했을 때 '저 새끼 게임 더럽게 하네'가 절로 튀어나오는 서포터 1위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는 정답이 있다.

'강제이동 서포터.'

['스킬북 - 윈드포스'를 사용합니다.]

['윈드포스(F)'를 습득합니다.]

[윈드포스]

▷바람에 물리력을 부여합니다.

똑바로 서서 목각 인형을 마주했다.

밀폐된 공간에 한 줄기 바람이 불며 머리카락을 간질이고 지나갔다.

목각 인형이 돌연 끼긱거리더니 나에게 원투 펀치를 날려 댔다.

그에 맞춰 오른쪽, 왼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인형의 가슴팍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 팡!

목각 인형이 훈련실 끝까지 날아가서 처박혔다.

서포터가 다 해먹음

41화 결투 (3)

['랭크 업(F)'을 사용합니다.]

['군주'의 등급이 상승했습니다. (F->E)]

군주.

EX급 환생 퀘스트를 시작하며 남겨졌던 내 밑천 중 하나다.

증폭과 복사만큼이나 막강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조건이 안 맞아 빛을 못 보는 상황.

그래도 이렇게 기회가 될 때 올려 두는 게 좋다.

다른 방법으로는 성장시키는 게 거의 불가능한 특성이니까.

[김 호]

▷스킬

윈드포스(F+)

인페르노 피스트(C)

증폭(E)

복사-스킬[2/2]

1. 허밍버드(E)

2. 도둑걸음(B)

▷특성

서풍의 가호

코어(D)

군주(E)

복사-특성[1/1]

1. 원소 저항(S)

▷장비

교복(D)

대지의 스태프(E)

▷인벤토리

10실버

심뢰옥x2

[대인전:386점]

[공략전:2,266점]

(3,123pt)

상태창에 팔려 있던 시선을 다시 정면으로 돌렸다.

목각 인형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열심히 나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한참 전부터.

조금 가까워졌다 싶으면 [윈드포스]가 부여된 맞바람에 뒤로 밀려나고, 또 조금 접근하면 뒤로 밀려나기를 반복하니 결국은 계속 제자리걸음만 할 뿐이다.

- 후웅—

앞으로 손을 내밀자 정면으로 불어가는 바람이 강해졌다.

목각 인형이 하릴없이 뒤로 날아가선 훈련장 벽에 부딪힌다.

[윈드포스]는 이제 막 익혔기에 F랭크지만, 바람 마법이라 [서풍의 가호]의 보너스를 받는다.

그래서 F+랭크.

F와 E의 중간쯤인 셈이다.

'결투에서 써먹으려면 최소 D+.'

스킬의 랭크가 상승하면 위력도 함께 올라간다.

윈드포스의 경우 랭크를 올릴수록 제어하는 바람의 양이 늘어나고, 부여하는 힘도 거세진다.

단순히 곽지철을 제압하는 것은 E+만으로도 가능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내 성에 안 찬다.

'아주 바닥에 패대기를 쳐 버려야 돼.'

그래서 목표를 D+로 잡았다.

공백 스킬북을 통해 작성한 스킬이라 일반 스킬보다는 랭크를 올리기가 더 까다로운 편이지만, 이틀이나 시간이 남았으니 넉넉하게 달성하리라.

훈련실 한쪽 벽에 붙은 단말기를 조작하자, 바람 부는 방향을 따라 이리저리 굴러다니던 목각 인형이 사라지고 철 인형이 나타났다.

목각 인형보다 훨씬 무겁기 때문에 [윈드포스]로 밀쳐 내기도 더 어렵다.

'어려워야 단련이 되지.'

나는 돌진하는 철 인형을 향해 바람을 집중시켰다.

물리력이 실린 강풍이 철 인형을 조금씩 주춤거리게 만들었다.

* * *

['윈드포스'의 랭크가 상승했습니다. (F->E)]

날이 밝을 때까지 윈드포스를 수련해서 기어이 E+랭크를 찍었다.

기숙사에서 아주 잠깐 휴식을 취하고 서예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김호:깸?]

[서예인:....]

[서예인:(하품하는 토끼 이모티콘)]

[김호:밥?]

[서예인:ㅇㅇ]

[김호:식당앞 ㄱ]

오늘 아침 식사 메뉴는 동글동글한 미니 주먹밥.

종류가 꽤 다양하다.

궁금한 게 생길 때마다 서예인이 나에게 물었다.

"이건 뭐야?"

"멸치 같은데."

"이건?"

"글쎄. 뭔진 몰라도 매워 보인다. 너 매운 거 잘 먹냐?"

"아니."

그러면서도 호기심이 동하는지 새빨간 주먹밥을 한 개 집는다.

서예인과 여러 가지 맛 주먹밥들을 골고루 접시에 담고, 테이블로 이동하는데,

"...!"

공교롭게도 곽지철과 정수지 듀오를 딱 마주쳤다.

정수지는 가벼운 눈인사만 하고 얼른 자리를 뜨려는 기색인 반면, 곽지철은 입가 가득 비웃음을 머금고 이죽거린다.

"스킬은 잘 만들고 계신가? 결투가 바로 내일인데 맞출 수 있을런가 모르겠네."

벌써 만들었는데.

랭크도 하나 올렸는데.

하지만 그걸 지금 말해 버리면 흥이 깨진다.

나는 짐짓 괴로운 척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게 말이다. 이게 생각보다 쉽지가 않네."

"괜히 어중간한 스킬에 낭비하지 말고 공백 스킬북은 아껴 두지? 다 너 생각해서 하는 말이다."

"아냐. 계속 해 볼란다."

"뭐 그러든가."

"너도 준비 잘해 놔. 지면 에메랄드 퇴부라며. 나도 너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이죽거리던 곽지철의 얼굴이 삽시간에 딱딱하게 굳어졌다.

"...걱정하지 마라. 나는 절대로 안 지니까."

"준비 많이 하셨나 봐요."

"당연하지. 무려 골—"

정수지가 옆구리를 쿡 찔러서 곽지철의 말을 끊었다.

곽지철은 그제야 자기가 매우 중요한 정보를 흘릴 뻔했다는 걸 깨달았는지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내일 방과 후다. 늦지 마라."

곽지철은 그 말까지만 하고 정수지와 함께 주먹밥을 고르기 시작했다.

서예인이 물었다.

"결투해?"

"그렇게 됐다."

"쟤 약해."

생각해 보니까 서예인도 600점대, 곽지철도 600점대였지.

지난주 대인전에서 붙었나 보다.

"그래, 애가 허접하기는 하더라."

"두 방이었어."

...곽지철 저 녀석 두 방 컷이었구나.

암만 봐도 누구한테 시비를 걸고 다닐 실력은 안 되는 것 같은데, 자신감 하나는 유망주급이다.

서예인이 미니 주먹밥을 우물거리며 나를 빤히 보다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말한다.

"나 줄 거 있어."

"줄 거?"

"응."

인벤토리에서 주섬주섬 직사각형 모양 상자를 꺼내 내 쪽으로 밀어 넣는다.

상자를 열자 고급진 운동화 한 켤레가 나왔다.

문득 지난주에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 갖고 싶은 거 있어?

- 갑자기?

- 받는 게 있으면 주는 것도 있어야 된대. 우리 집사가.

- 지금 제일 필요한 거라면 이동 속도 쪽일까. 신발이 하나 있었으면 해.

그걸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어련히 무난한 신발 하나 갖다 주겠거니 했는데, 내 예상보다 몇 단계는 좋은 물건이 왔다.

서예인의 운동화와 약간의 색감 차이 말고는 거의 같았다.

쟤가 평소에 차고 다니는 장비 수준을 생각해 보면 엄청난 고급품이라는 뜻이었다.

흰색 베이스에 깔끔한 푸른색 계통 배색이 들어갔으며, 곳곳에 마법공학이 가미된 흔적이 엿보인다.

[구름밟이(B)]

▷이동 계열 스킬에 보너스.

▷관성 무시(C) 적용.

▷내구도 자동 회복.

▷업그레이드 가능.

▷업그레이드 가능.

'엄청나군.'

무려 B등급 신발.

바람 마법에 보너스를 주는 [서풍의 가호]처럼, 이 신발을 착용하면 이동 계열 스킬에 보너스를 받는다.

[도둑걸음]이 B+가 된다는 뜻이다.

[관성 무시]는 달리다가 급정거를 하거나 방향을 틀 때 무게 중심이 쏠리는 것을 일정량 무시하게 해 주는 스킬.

움직임이 훨씬 매끄러워지고 빈틈이 줄어든다.

이 두 옵션만 해도 대단한데, 거기에 업그레이드 슬롯이 두 개나 더 있다.

무엇을 추가하느냐에 따라 A급, S급도 노려볼 수 있는 아이템이라는 뜻.

"이건 너무 좋은데. 받아도 되나 모르겠다."

"고마운 만큼 좋은 선물을 주랬어."

"집사님이?"

"응."

집사님, 새삼 다시 생각하는 거지만 아주 훌륭한 마음씨를 가진 분이시군요.

나는 서예인의 집사에게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감사 인사를 전했다.

"고맙다. 잘 신고 다닐게."

"...."

"?"

"...!"

서예인이 갑자기 말이 없었다.

서서히 커져 가는 동공을 보고 접시를 확인해 보니, 새빨간 주먹밥이 사라져 있었다.

"여기 물 마셔, 물."

"...! ...!"

* * *

훈련실.

철 인형 여러 기가 사방에서 나를 노린다.

뒤로 슬쩍 물러나자 육중한 회색 주먹이 허공을 강타했다.

계속 주먹들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물러나다가, 다리에 마나를 그러모으고 [도둑걸음]을 발휘해 땅을 강하게 걷어찼다.

- 탕!

단 한 걸음으로 철 인형들의 포위망을 벗어난다.

착지하며 속도를 급격히 줄이는데 다리에 부하가 거의 걸리지 않는다.

[관성 무시]가 적용되어서 그렇다.

'신발 성능 훌륭하고.'

가장 가까이에 있던 철 인형이 치고 들어왔다.

빈틈을 드러낸 철 인형의 어깨를 툭 밀치자, 메치기라도 걸린 것처럼 공중을 크게 회전하며 나가떨어진다.

- 카가가각!

뒤이어 달려드는 철 인형에게 손을 내밀었다.

바람이 내 쪽으로 불며 철 인형이 끌려온다.

손 뻗으면 닿을 만한 거리까지 끌어당긴 후, 가슴팍을 밀치며 다시 바람을 앞으로 강하게 쏘아 보낸다.

날려 보낸 철 인형이 다른 철 인형들과 충돌하며 볼링 핀 쓰러지듯 와르르 쓰러진다.

- 카가가가각!

['윈드포스'의 랭크가 상승했습니다. (E->D)]

서풍의 가호를 받아 D+.

'준비 끝.'

* * *

아레나는 한산하기 이를 데 없었다.

공략전 주간이라 학생들 대부분이 던전동에서 시간을 때운다는 게 첫 번째 이유.

김호와 곽지철 둘 다 그다지 네임 밸류가 높지 않아서 관심이 없다는 게 두 번째 이유다.

궁금하면 나중에 리플레이는 챙겨 볼지 몰라도, 아레나까지 찾아오긴 귀찮다는 것.

해서 이번 결투의 참관인은 대개 김호와 곽지철의 지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에메랄드 마탑에서는 부장 목종화와 정수지.

동생의 결투를 관전하러 선도부에서 찾아온 곽승재.

대자연 동아리에서는 부장 하수연과 박나리.

그리고 무소속인 김호는 친구 몇몇이 전부.

...였어야 했는데.

목종화가 인상을 썼다.

"네가 여긴 무슨 볼일이냐."

"무슨 볼일이겠냐, 우리 후배 보러 왔지."

당규영이 씩 웃으며 답했다.

일전에 김호와 나눈 대화로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는 대강 파악하고 있었다.

에메랄드 혹은 대자연 동아리와 [생명의 큐브]를 거래한다고.

아무리 그래도 시즌 패스 4개는 어렵지 않겠나 했는데,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그걸 해냈단다.

놀라는 것도 잠시,

- 누님, 김호랑 곽지철이랑 결투 잡혔는데요?

- 아니, 거래를 했으면 한 거지 결투는 왜?

신병철이 전달하는 소식을 듣고 의아해졌다.

조사해 보니 아주 개판이 따로 없다.

발단은 목종화였다.

거래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의도로 곽지철과 정수지를 보내 무력시위를 했는데, 그대로 김호한테 박살이 났단다.

그것도 이 대 일로 붙어서.

'당연한 거 아니야?'

김호 쟤 곽승재도 일대일로 이겼잖아?

2학년 선도부인 곽승재와 1학년 두 명을 붙여 보면 비교가 더 쉽다.

아예 상대가 안 된다.

아무튼 그렇게 지고 끝냈으면 차라리 덜 구차했을 텐데, 설욕전을 한답시고 결투를 신청했단다.

당규영이 마구 삿대질을 해 댔다.

"으유, 쫌팽이 같은 자식. 초록색 풍뎅이 같은 자식. 그걸 또 애들끼리 결투를 시켜?"

"...도둑년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

"왜 아니야? 얘는 내가 아끼는 후배인데."

당규영이 친근한 투로 김호의 어깨에 팔을 척 올렸다.

김호가 눈빛으로 부담스러움을 표현했다.

'선배님, 우리 그 정도로 친하지는 않잖아요.'

'아이씨, 그냥 일단 쫌 친한 척해.'

다시 목종화에게 삿대질을 한다.

"하여간 너네 개수작 부렸다간 봐. 다 엎어 버릴라니까."

"...."

목종화는 미간만 찌푸릴 뿐 대답이 없었다.

평소에 혀가 아주 매끄럽게 굴러가던 하수연도 뒤로 빠져선 한숨만 푹푹 내쉰다.

당규영은 대강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고 작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벌써 부려 놨나 보네?

잠시 김호를 끌고 나온다.

"야, 너 어쩌자고 이거 받았어?""

"이길 만하니까 받았죠."

"이길 만한 거 맞아? 저 음흉한 놈이 온갖 술수를 다 부려 놓은 것 같던데."

"다 알고 받은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쇼. 저도 생각이 있어요."

옅은 미소에서 넘치는 자신감이 드러난다.

당규영이 이 맹랑한 후배를 많이 겪어 본 건 아니지만, 여태까지 봐 왔던 모습들을 생각해 보면 어떻게든 제 앞가림은 하는 놈이었다.

자기가 끼어들면 오히려 모양새가 이상해질 것 같다.

"에잉, 알았어 그럼."

그럼에도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당규영을 뒤로하고, 김호가 다시 곽지철 앞에 섰다.

목종화가 VIP 티켓을 꺼내 보이며 운을 띄웠다.

"시작 전에 마지막으로 조건을 확인하겠다. 김호가 승리할 시 나 목종화는 이 티켓을 양도한다."

반대로 패배할 경우에는 승리한 에메랄드가 떨어진 체면을 조금이나마 수습하게 되겠지만.

목종화가 말을 이었다.

"또한 이 결투는 리플레이로 기록되며 누구나 열람할 수 있다. 동의하나?"

"동의합니다."

"좋다. 그럼 시작하지."

무대 위 알림판에 지형과 규칙이 떠올랐다.

MAP:[암석 지대]

RULE:[데스매치][10분 제한]

곽지철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

무작위로 결정되는 많고 많은 지형 중에 암석 지대가 걸린 것이다.

토 속성 술사의 주 무대라고 해도 좋은 곳.

모든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의기양양해서 김호에게 도발을 던진다.

"이거 어쩌나, 지형 정도는 내가 불리해야 싸움이 될 텐데. 순식간에 끝나게 생겼네."

"...."

"갑자기 말수가 적어지셨네? 이제 좀 정신이 들어?"

김호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유지할 뿐이었다.

아직도 자기 처지를 깨닫지 못했나 본데, 곧 뼈저리게 느끼게 될 것이다.

두 사람은 순간이동 마법진을 타고 경기장에 입장했다.

보이는 것도 돌, 밟히는 것도 돌.

곳곳에 바위부터 자갈까지, 온통 크고 작은 돌들이 가득했다.

[김 호 100% vs 곽지철 100%]

[3]

[2]

[1]

[Start!]

- 뻐억!

바닥을 굴러다니던 주먹만 한 돌덩이가 곽지철의 안면에 작렬했다.

서포터가 다 해먹음

42화 결투 (4)

고현우는 관중석에서 서예인, 신병철과 함께 결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짧은 감탄성을 흘렸다.

"허어. 실로 고절한 수법이 아닌가."

고현우가 연마하는 무공 역시 바람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기에, 바람의 흐름을 읽는 안목이 남들보다 뛰어났다.

김호의 손 부근에서 일순간 빠르고 강맹한 흐름이 보이는 것도 곧바로 알아챘다.

그러나 그 뒤의 일까지는 그로서도 완벽하게 읽어 내지 못했다.

"...."

서예인 역시 평소답지 않게 두 눈을 똑바로 뜨고 결투에 집중하고 있었고,

"뭔데? 뭔데?"

신병철만이 아예 감도 못 잡는 중이었다.

고현우는 자신이 아는 대로 설명을 하려다가, 문득 저번에 당한 것을 떠올렸다.

- 안 알려 주지~ 내일의 즐거움으로 남겨 두는 걸로.

- 허허, 강호의 도리가 땅에 떨어졌도다....

"궁금하오?"

"궁금해. 갑자기 웬 짱돌이래?"

"끝나고 알려 드리리다."

"아니, 아, 쫌."

'그때 신 형이 이런 기분이었군.'

즐겁게 웃는 고현우였다.

곽승재와 3학년 부장급들은 경험이 더 풍부했기에 보이는 것도 많았지만, 그들 역시 상황을 완벽하게 파악한 것은 아니었다.

암기(暗器)의 이해도가 높은 당규영이 가장 정답에 근접했다.

'바람 마법이네?'

김호는 결투가 시작됨과 동시에 극도로 압축된 한 줄기 바람을 쏘아 보냈다.

그 바람으로 돌덩이를 때리고, 때린 돌덩이가 정확히 곽지철의 얼굴로 날아가도록 유도했다.

머리로는 이해했으나 솔직히 말이 안 된다.

먼 거리의 작은 표적을 맞히는 정도야 기본 중의 기본이지만, 맞힌 표적으로 또 다른 표적을 맞힌다?

당규영으로서도 쉽지 않은 일이다.

자연스레 이전에 가졌던 의문을 또 갖는다.

'저거 진짜 1학년 맞나?'

"크으윽...."

짱돌에 얼굴을 얻어맞고 한참이나 제정신을 못 차리는 곽지철.

사실 이 시점에서 이미 승부가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실전이었다면 저 시간에 목숨이 몇 개는 날아갔으리라.

그러나 김호는 느긋하게 그 자리에 서서 기다렸다.

마치 처음 한 방은 맛보기였다고, 이제 시작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빌어먹을... 뭐였지? 또 속임수인가?'

당사자인 곽지철로서는 매우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순간 눈앞에 불이 번쩍하고,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았다.

선배들에게 빌린 방어구가 아니었다면 아마 그대로 기절했을 것이다.

필사적으로 자세를 다잡는 곽지철의 눈에 김호의 손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또 아무것도 못 하고 얻어맞을까 봐, 허겁지겁 마나를 끌어올려 대응 마법을 시전한다.

꼴은 다급했지만 술식이 완성되는 속도는 빨랐다.

[어스 클러스터]

지면에 잔뜩 깔려 있는 크고 작은 돌들이 자석에 이끌리듯 허공의 한점으로 이끌리고, 척척 뭉치며 커다란 구체를 형성했다.

대지를 공처럼 뭉쳐서 공격과 방어 모두에 써먹는 마법이다.

곽지철이 구체를 움직여 전방을 보호했다.

다음 순간 딱! 하는 소리와 함께 돌 하나가 튀긴다.

보나 마나 저놈이 날려 보냈겠지.

곽지철이 손으로 어스 클러스터를 슬쩍 훑자 구체가 점점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뭉쳐 있던 암석들이 하나둘 쏘아져 나간다.

김호는 산책하듯 느긋한 걸음으로 날아드는 투사체들을 지나쳤다.

그러면서 보내는 눈빛이 어쩐지 도발하는 것 같아서 곽지철이 이를 갈았다.

'어디 언제까지 여유로운가 보자.'

스태프에 박힌 에메랄드가 빛을 발했다.

돌들이 뭉치며 [어스 클러스터]가 하나 더 만들어졌다.

확실히 장비가 좋기는 좋다.

2, 3학년급 장비를 둘둘 말고 있으니 어떤 마법을 시전하든 평소보다 훨씬 빠르고 강력하다.

원래 실력으로는 [어스 클러스터] 두 개를 유지하는 것도 버거웠을 텐데, 지금은 가뿐하고도 남는다.

'이 정도라면 세 개도 가능하겠군.'

짐작대로 어렵지 않게 세 개째 구체를 완성했다.

어스 클러스터 셋이 회전하며 기관총처럼 암석들을 쏘아 냈다.

- 두두두두두!

"그래, 이거지!"

막대한 힘을 휘두르는 감각.

계속 쓰다 보니 남에게 빌린 힘이라는 자각이 조금씩 옅어지는 중이다.

나는 강하다.

질래야 질 수가 없다!

- 두두두두두!

느긋하던 김호의 발놀림이 빨라진 것만 봐도 기분이 좋았다.

지금은 요리조리 잘 피할지 몰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둘 유효타를 허용하고 쓰러지겠지.

김호 역시 자신에게 별로 시간이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적어도 곽지철이 보기에는 그랬다.

쏟아지는 자갈 세례를 피하면서 조금씩 거리를 좁혀 온다.

어느 정도 가까워졌을까, 김호의 손에 전류가 모여들었다.

곽지철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드디어 쓰는구나?'

뇌전의 벌새가 허공을 가로지른다.

곽지철은 피하거나 막을 생각도 하지 않고, 가슴팍을 활짝 열어젖힌 채 허밍버드를 맞이했다.

- 파지직!

"통할 줄 알았나? 유감이군."

"...."

마비는커녕 살짝 감전된 기색조차 없는 곽지철.

일이 틀어졌다 생각했는지 김호가 다시 거리를 벌린다.

[어스 클러스터] 세 개가 쏘아 보내는 암석들을 피하기 급급하다.

곽지철은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을 받으며 신나게 웃어 젖혔다.

"흐하하하! 이제 남은 밑천이 뭐가 있으신—"

- 쾅!

그리고 얼굴이 바닥에 처박혔다.

관중들의 눈에는 투명한 손이 곽지철의 머리를 붙잡고 힘껏 바닥으로 내던진 것처럼 보였다.

하수연이 눈빛에 이채를 머금었다.

'저게 그 스킬인가 보네.'

박나리에게 넘겨받은 [공백 스킬북]으로 직접 작성한 스킬.

정확한 효과는 모르지만, 바람을 뭉쳐서 망치처럼 내리찍었다.

저런 스킬을 만들어 내고 활용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 설계였던 거야.'

김호는 저 이름 모를 바람 마법을 활용하기 위해 함정을 팠다.

허밍버드를 미끼로 써서.

에메랄드 마탑 측에서 대응책을 가져오리라는 사실을 그가 몰랐을 리 없다.

그럼에도 그는 보란 듯이 허밍버드를 시전했다.

리플레이와 비교해 보면 모든 면에서 엉성한 허밍버드.

처음부터 별 기대를 걸지 않고, 보여 주기용으로 던진 것이다.

반면 곽지철은 자신이 마비 저항 아이템을 보유했다는 사실을 강하게 의식하고, 또 과시하려는 의도로 허밍버드를 맞았다.

그렇게 곽지철이 눈앞의 벌새에 한눈판 사이, 머리 위에는 바람이 모여들고 압축되고 있었던 것이다.

본신의 실력에 더해 치밀한 심기까지.

적으로 돌리면 반드시 피곤해질 상대다.

하수연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새삼 [랭크 업]을 선물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김 호 100% vs 곽지철 86%]

"크으윽...!"

곽지철은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얼굴에 흙이 범벅이 되다 못해 아주 가면을 만들어 썼고, 코피 한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린다.

몸을 지탱하는 두 팔이 덜덜 떨리는 것은 단순히 충격의 여파 때문만은 아니리라.

그가 겨우 몸을 일으켰을 때, 김호는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 퍼억!

힘차게 뻗은 주먹을 맞고 곽지철의 턱이 돌아갔다.

정신없이 뒤로 물러나다가 투명한 벽 같은 것에 가로막혔다.

그것의 정체가 뒤쪽에서부터 옅게 불어오는 바람이라는 사실은 알 도리가 없었다.

- 퍼억!

다음으로 복부에 발차기가 꽂힌다.

곽지철의 허리가 격하게 접혔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대체 뭐가, 어디에서, 어떻게 잘못된 거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200% 승리를 자신하고 있었는데.

- 퍼억!

원인을 파악할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듯, 김호가 그의 얼굴을 다시 후려쳤다.

곽지철이 비틀거리며 생각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이대로 가면 뭘 해 보지도 못하고 흠씬 두들겨 맞기만 하다가 끝난다.

그의 머릿속에 목종화와의 대화가 스쳐 지나갔다.

- 골렘은 가능하면 꺼내지 마라.

- 예? 왜요?

- 장비는 외관만 수수하면 3학년 것을 써도 별로 티가 안 난다.

하지만 골렘은 아니야.

- ...!

- 누가 봐도 3학년 골렘인데, 보는 놈들이 뭐라 생각하겠나?

에메랄드의 위신을 세우는 데에는 별로 도움이 안 돼.

- 이해했습니다. 골렘 없이 이겨 볼게요. 압도적으로.

...그러나 지금 자신은 압도적으로 두들겨 맞는 중이다.

골렘을 쓰고 이기면 본전치기.

하지만 이대로 아끼기만 하다가 패배하면?

에메랄드는 향후 몇 년은 비웃음거리로 전락할 것이다.

리플레이의 주인공인 자신 역시.

그리고 퇴부. 너무나 무서운 단어다.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

'그래... 좀 친다는 건 인정해 주마. 그래도 마지막에 웃는 건 나다!'

따라붙으며 주먹을 휘두르던 김호가 갑작스레 땅을 걷어차 물러났다.

- 쿠웅!

그리고 그 자리에 사람 몸통만 한 나무 주먹이 떨어졌다.

지면에 깔린 돌들이 더 잘게 부서지며 사방으로 비산했다.

거대한 나무골렘.

상체가 하체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크며, 특히 손의 크기가 비대했다.

"오오, 저것이 그 골렘이라는 것이오?"

"뭐야, 처음 보냐?"

신병철이 되묻자, 고현우는 나무골렘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확실히 용살학원에 입학하고 처음 보는 게 많구려. 헌데, 골렘은 본래 지형지물을 이용해 만드는 것으로 알고 있소만.... 본인이 잘못 안 거요?"

나무는커녕 풀 한 포기 안 보이는 지형에서 나무골렘이 솟아난 건 무슨 영문인가.

신병철은 방금 고현우의 괘씸한 행태를 되갚아 줄까 하다가, 그냥 설명해 주기로 했다.

"네가 알고 있는 게 맞아. 기본적으로는. 근데 지형지물에만 의존하다 보면 재료가 없을 때 아무것도 못 하게 된단 말이야. 그럴 때를 대비해서 저렇게 미리 만들어 놓는 거지."

양질의 재료, 긴 시간, 그리고 무수한 마법을 겹겹이 부여하여 정제한 골렘.

즉석에서 소환하는 것에 비해 차원이 다르게 강력하다.

그리고 저 나무골렘은 결코 1학년이 정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게 됐으면 마탑회의 유망주는 홍연화가 아니라 곽지철이었겠지.

당규영이 보자마자 욕지거리를 내뱉은 것도 당연했다.

"야! 이 양심도 없는 자식들아! 이건 아니지!"

"...."

목종화는 대꾸하지 않고 앞만 바라보았다.

곽승재는 목종화가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는 듯 복잡한 표정이었으나,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당규영이 잠시 고민했다.

'이거 중단시켜야 하는 거 아닌가? 저거 잡을 수는 있나?'

김호가 [인페르노 피스트]를 배웠다는 건 당규영만 안다.

하지만 인페르노 피스트는 엄연한 금지 스킬.

지금 같은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못 쓴다.

리플레이도 돌아가고 있고, 선도부 곽승재가 시퍼렇게 눈을 뜨고 지켜보는 마당 아닌가.

결국 불주먹 없이 해결해야 한다는 뜻인데....

'일단 애가 멀쩡해 보이기는 하는데....'

김호의 안색을 살펴보니 이전과 다를 것 없이 평온하다.

몸은 쉴 새 없이 움직이며 골렘의 주먹들을 피하고 있지만.

당규영은 조금만 더 지켜보기로 했다.

한 대라도 맞으면 끼어들든가 해야지.

- 부웅!

묵직한 나무 팔이 바닥을 쓸었다.

뒤이어 반대쪽 나무손이 주먹을 쥐고 바닥을 내리친다.

크고 육중한 몸에 걸맞지 않게 움직임이 민첩하다.

저 육중함에 저 속도. 한 대라도 맞으면 즉시 전부불능이 되리라.

곽지철의 입가에 서서히 미소가 돌아온다.

"골렘만 있는 줄 아나? 이것도 피해 봐라."

- 두두두두두!

움직임을 멈췄던 어스 클러스터가 다시 회전하기 시작했다.

김호는 골렘을 피해 도망치랴, 날아드는 돌덩이들을 피하랴 전보다 훨씬 바쁘게 발을 놀리고 있었다.

[김 호 100% vs 곽지철 74%]

그런 와중에도 체력이 100%에서 떨어지지 않은 건 인정해 줄 만했다.

모든 공격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피했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과연 그게 얼마나 갈까?

골렘은 무한히 유지되지만, 저놈의 체력은 유한할 터.

곽지철이 어스 클러스터에 박차를 가하자, 구체가 더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때, 김호가 정확히 곽지철을 보며 손을 저었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강풍에 곽지철의 몸이 강하게 밀쳐졌고,

빠르게 회전하는 구체에 처박혔다.

"크아아아악!"

서포터가 다 해먹음

43화 결투 (5)

"크아아악!"

빠르게 회전하는 어스 클러스터가 곽지철의 얼굴을 마구 갈아 버렸다.

보호 마법이 적용되지 않았다면 어떤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지 모른다.

다급히 어스 클러스터를 해제하여 고통에서 벗어난다.

바닥에 엉망으로 흩어진 잔해들이 그의 심리 상태를 대변하는 듯했다.

비슷한 수에 서너 번쯤 당하고 나면, 아무리 시야가 좁은 사람이라도 조금은 감을 잡는 법이다.

곽지철 역시 몸이 고생한 덕분에 김호의 수법을 꽤 정답에 가깝게 알아낼 수 있었다.

'바람! 바람이다!'

바람으로 자신을 밀고 당기며 농락한 것이다.

그로 인해 보였던 추태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고, 더욱 급격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정말 사람 열 받게 만드는 데에는 도가 튼 놈 아닌가.

또다시 공격 마법을 시전하려는 순간,

- 휘이잉—

미약한 산들바람이 곽지철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몸이 움찔 떨리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아무 대비 없이 공격에만 치중하면 방금 전과 같이 저놈에게 빈틈을 내줄 뿐이다.

일단은 바람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고 봐야 한다.

곽지철의 스태프가 녹빛을 발했다.

방금 해제한 어스 클러스터의 잔해가 척척 쌓이며 둥그런 담벼락이 세워졌다.

- 후웅-!

그러나 다음 순간, 뒤쪽에서 갑자기 불어온 강풍이 곽지철의 등을 강하게 떠밀었다.

그는 자신이 소환한 벽에 얼굴 박치기를 하고 말았다.

"크엑! 이 개, 개... 같은 놈이!"

타의적으로 벽을 끌어안은 와중에도 스태프를 움직여 등 뒤에 벽 하나를 더 세웠다.

마지막으로 뚜껑을 덮고 빈틈을 보완하자 돌로 지은 작은 요새가 완성되었다.

다행히도 바람은 요새 안까지는 침범해 들어오지 못했다.

'한숨 돌렸군.'

지금부터는 바깥을 살피면서, 나무골렘과 원거리 마법으로 소모전을 유도하면 될 터.

"이야.... 저건 진짜 할 말을 잃게 만든다."

당규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주 방어, 거북이 전법.

치졸하기는 하지만 승리를 위해서는 곧잘 쓰이는 전법이기는 했다.

문제는 그 거북이 전법을 쓰는 사람이 곽지철이라는 점이다.

3학년 골렘을 빌렸으면 시종일관 완전히 압도해도 욕을 퍼먹을 텐데, 우주 방어?

당규영이 무대를 가리키며 목종화를 놀려 댔다.

"야, 솔직히 내가 저거보단 더 남자답겠다. 그치?"

"...닥쳐라."

목종화가 씹어 뱉듯이 대꾸했다.

그로서도 곽지철의 행태가 몹시 마음에 안 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에메랄드의 위신을 세우고자 한다면 결투에서 승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투의 내용도 중요하다.

그런데 저런 추한 꼴이라니.

이제는 이겨도 본전치기조차 못한다. 그냥 무조건 손해다.

한편 당규영은 턱을 괸 채 생각했다.

'저건 어떻게 뚫으려고.'

치졸하기는 하지만 냉정하게 평가했을 때 곽지철의 요새는 제법 견고한 편이었다.

평소에도 자주 써왔는지 숙련도가 높고, 거기에 2, 3학년들 장비의 보너스까지 더해져서 더욱 강화된 상태.

- 쿵! 쿠웅!

요새 밖에서는 나무골렘이 땅을 모조리 뒤엎어 가며 공격을 퍼붓고, 곳곳에서 만들어진 어스 클러스터들이 자갈을 쏘아 보내기 시작한다.

김호는 재빠른 움직임으로 그 모든 공격들을 회피한다.

너무 빨라서 운동화 발이 흐릿하게만 보인다.

'결국에는 우리 후배님이 이길 거 같긴 한데.'

골렘을 처음 본 순간의 걱정은 이제 많이 희석되었다.

[김 호 100% vs 곽지철 68%]

[남은 시간 4:57]

김호의 체력이 100%였으니까.

여태까지 단 한 번의 유효타도 허용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반면 곽지철은 꽤 피해가 누적된 상태.

이대로 계속 피하면서 제한 시간을 모두 쓰고, 판정승으로 마무리 지어도 되겠지.

'근데 그걸로 만족할 인간 같지는 않단 말이야.'

곽승재가 보는 앞에서 인페르노 피스트를 갈기면 갈겼지, 지지부진 판정승으로 끌고 갈 성격은 아닌 듯하다.

분명 더 준비해 놓은 게 있으리라.

"...!"

"서 소저, 무언가 보이는 게 있소?"

"...!"

가장 먼저 이변을 눈치챈 것은 서예인이었다.

그녀의 '눈'에는 여전히 김호의 정보 대부분이 물음표로 보였다.

[증?]

[??포?(?+ -> B?)]

그러나 정보는 수치화되어 표시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서예인에게는 보였다.

김호의 기세가 순간 급격히 치솟는 것이.

[도둑걸음]을 극한까지 활용하며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던 운동화 발이 멈추고.

김호가 제자리에 서서 나무골렘을 똑바로 마주했다.

누가 봐도 무모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금방이라도 커다란 나무 주먹을 맞고 나가떨어질 것 같았다.

그러나 나무 주먹에 얻어맞기 직전, 김호가 자신의 손을 들어 가볍게 갖다 댔다.

- 텅-!

나무골렘의 주먹이 높이 튕겨져 올라갔다.

한 손을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올린 자세.

상반신이 무방비하게 노출되었다.

그 빈틈투성이 가슴팍을, 김호가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서며 툭 밀쳤다.

"어, 어어?"

요새 안의 곽지철이 본 것은, 육중한 나무골렘의 두 발이 바닥에서 붕 떠오르더니, 자신을 향해 무섭도록 빠르게 가까워져 오는 광경이었다.

의문이 가득 담겼던 '어어'가 금세 비명으로 바뀌고,

"어어!? 어어어!! 으아아아악!!"

- 쿠쿠쿠쿵!!

곽지철의 작은 보금자리는 날아드는 나무골렘에 형편없이 짓뭉개져 버렸다.

그 안의 곽지철도.

"저...!"

"무슨...!"

지켜보던 모든 이들이 순간 경악에 말문이 막혀 버렸다.

하수연 역시 한참 동안이나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다.

'맙소사.'

등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김호가 [공백 스킬북]으로 만들어 낸 것은 바람의 망치 따위가 아니었다.

그보다 수십 배는 강력한,

육중한 나무골렘을 짚 인형처럼 날려 버리는 태풍이었다.

조금 전에는 김호에게 선물을 주었다는 사실에 안도했었으나, 지금은 오히려 자신이 더 실수한 것은 없나 되짚어 보고 있었다.

'우리 화해한 거... 맞지?'

[김 호 100% vs 곽지철 61%]

그럼에도 경기가 진행 중이라는 것은, 아직 곽지철이 전투 불능이 되지 않았다는 뜻.

과연 무너진 돌무더기가 들썩거리더니 곽지철이 어기적어기적 힘겹게 기어 나왔다.

그의 얼굴은 전의를 상실하고 하얗게 질려 있었다.

"...!"

그리고 나오자마자 김호와 시선이 마주쳤다.

곽지철은 김호가 왜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손가락이 위쪽을 향하자,

- 부웅!

엄청난 부유감이 들었고, 다음 순간 그는 수 미터 높이에 떠올라 있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 쾅!

그리고 그대로 바닥에 패대기쳐졌다.

투명한 거인이 그를 붙잡고 아래로 내던진 것 같았다.

"크...어억...!"

겨우 몸을 일으킨 곽지철의 시야에, 김호가 또다시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키는 게 보였다.

그의 눈이 커졌다.

"아, 안 돼—"

- 부웅!

곽지철이 공중에 떠오른 상태에서 다급하게 외쳤다.

"내... 내가 졌다! 항복할 테-"

- 쾅!

"...!"

- 부웅!

- 쾅!

세 번째로 패대기쳐지자, 곽지철은 결국 간신히 붙들고 있던 정신의 끈을 놓치고 말았다.

* * *

[김 호 Win vs 곽지철 Lose]

"프흫흐흫흫!!"

당규영이 신나게 웃어 재끼며 내 어깨를 찰싹찰싹 때렸다.

이긴 건 나인데 본인이 더 기뻐한다.

"잘했다, 잘했어! 아주 그냥 속이 뻥~! 프흫흫흐흫흫!"

관중석의 고현우, 서예인, 신병철 역시 멀찍이서 승리를 축하하며 다가오는 중이다.

반면 에메랄드 마탑 진영은 완전 초상집 분위기였다.

곽승재가 기절한 동생을 수습하고, 목종화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대자연 동아리 쪽은 왠지 모르게 내 눈치를 살피는 듯하다.

아무튼, 이제 수금할 시간이다.

"...."

내가 다가가자 목종화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화를 삭였다.

그러나 약속은 약속, 인벤토리에서 [제작 VIP 티켓]을 꺼내서 넘긴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보면 어지간히도 넘기기 싫은가 보다.

하긴 저게 어떤 아이템인데.

나는 티켓을 품 안에 갈무리한 뒤 말문을 열었다.

"제안 하나 할까요."

"...뭐냐."

"이번 결투 리플레이. 비공개로 돌리는 건 어떻습니까?"

"...!"

이번 결투가 공개되면 에메랄드 마탑은 이미지에 엄청난 타격을 입을 것이다.

1학년끼리의 결투에 3학년 장비와 골렘을 지원해 주었고, 그러고도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기만 했다.

이리저리 밀쳐지고 당겨지고 날아다니는 곽지철의 행위 예술은 덤.

가능하다면 없던 일로 하고 싶겠지.

그래서 내가 먼저 동아줄을 내밀어 주었다.

잠시 침음하던 목종화가 되물었다.

"결투도 판돈이 걸리고서야 받아들인 놈이 우리에게 유리한 제안을 던진다라."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습니까?"

"장사치가 따로 없군."

"어디 가서 굶어 죽진 않겠죠. 받으실 겁니까?"

목종화로서는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어떻게든 내 입막음을 하는 게 이미지가 박살 난 뒤 수습하는 것보다는 싸게 먹힐 테니까.

"쯧. 원하는 걸 말해라."

"지금은 딱히 없고, 나중에 작은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면 됩니다."

"내가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이라면."

"좋습니다. 그럼 저는 비공개로 돌릴게요."

선심 쓰듯 말했지만, 리플레이를 비공개하는 건 나 역시 바라는 바다.

[윈드포스]에 대한 정보는 천천히 퍼질수록 유리하니까.

목종화가 이 제안을 수락하리라 확신했기에 결투에서 윈드포스를 온갖 방식으로 펑펑 써 댄 것이기도 하다.

다른 이유로는 목종화에게 빚을 지워 두기 위해서.

에메랄드와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여기서 더 나가면 싸움이 지저분해질 가능성이 크다.

교칙 위반은 기본이요, 그 위의 위험한 선까지 넘나드는 진흙탕 싸움.

오는 족족 쓰러뜨릴 수는 있어도, 그것 때문에 내 성장이 방해를 받는다면 바람직한 결과는 아니다.

괜히 서예인이나 고현우가 피해를 보는 것도 원치 않는다.

그래서 이번에는 나도 반걸음 양보했고, 그 대신 목종화의 발을 묶었다.

나에게 일말의 부채감을 느끼는 동안은 섣불리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물론 양반은 못 되는 인간이라 나중에는 생각이 바뀔지 모르지만,

'그때는 내가 충분히 성장한 뒤겠지.'

에메랄드 마탑 정도는 가볍게 짓밟아 버릴 수 있을 만큼.

서로의 속내야 어떻든, 겉으로는 임시 휴전이었다.

목종화가 나에게 턱짓으로 인사를 하고 등을 돌렸다.

그새 정신을 차린 곽지철은 내 눈을 감히 마주치지도 못하고, 시선을 아래로 내리깐 채 비틀거리며 목종화를 따라갔다.

곽승재는 나에게 담담한 시선을 한번 보낸 후 에메랄드 일행에 합류했다.

그 뒷모습들을 잠시 지켜보고 있는데, 손가락 두 개가 살며시 내 볼을 꼬집더니 주욱 잡아당겼다.

"이거이거, 보면 볼수록 완전 능구렁이네?"

"슨배님, 이거 노코 애기허시조."

당규영의 손을 볼에서 떼어 냈다.

원래도 묘하게 거리감이 가까운 사람이었지만, 동아리 영입 제안을 한 뒤로는 더 가까워진 느낌이다.

"리플레이 비공개 그거 다 계산하고 던진 거잖아. 그러면서 손해는 하나도 안 봤고."

"눈치가 빠르시네요."

"괜히 부장이겠냐. 근데 목종화한테는 뭐 부탁할 거야?"

"나중에 차차 생각해 봐야죠. 선배님한테 했던 거랑 비슷한 수준일 겁니다."

"아, 맞다. 네가 말하니까 생각나네."

당규영도 [생명의 큐브]의 정보를 열람하는 대가로 내 '작은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었다.

그 작은 부탁이란,

- 마법공학 동아리 부장한테 소식 하나만 전해 줘요.

-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가면 더 좋고.

- 신입생이 10x10x10 큐브를 완성시켰다고.

"어디까지 진행됐어요?"

"흘리는 건 진작에 흘렸지. 나한테 의뢰도 들어왔어."

"의뢰요?"

"한번 만나 보게 자리 좀 마련해 달라더라. 어쩔래?"

"잘됐네. 만나 보죠."

다음 아이템으로 넘어가기 전에, 딱 하나만 더 해 먹자.

서포터가 다 해먹음

44화 결투 (6)

"퇴부는 재고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목종화는 계속 일정한 걸음걸이를 유지한 채, 고개만 돌려 곽승재를 흘긋 보았다.

그러다가 다시 앞을 보고 걸으며 입을 연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결투 보시지 않았습니까."

"봤지. 아주 형편없는 쓰레기 같은 결투였다."

목종화의 말투에는 은은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

힘없이 바닥만 보고 걷던 곽지철이 어깨를 움츠렸다.

곽승재는 그런 못난 동생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았지만, 말로는 계속 변호를 이어 갔다.

"지철이가 잘했다고는 못하겠습니다만, 이건 불가항력이 아닌가 싶습니다. 부장님의 골렘을 상대로 퍼펙트게임. 그게 가능한 자가 1학년 중 몇이나 되겠습니까?"

3학년 골렘에 [어스 클러스터]를 활용한 원거리 공격까지.

그 모든 것을 완벽하게 피하며 끝까지 100% 체력을 유지하는 것은 1학년은 물론, 2학년이 하기에도 어려운 기예였다.

곽승재가 김호의 입장이었더라도 몇 번 정도는 유효타를 허용했을 터.

다시 말해, 김호는 그것이 가능한 실력자라는 뜻이다.

이번 결투만 놓고 평가하면 유망주급, 혹은 그 이상.

"지철이가 패할 만한 승부였습니다. 퇴부는 지나친 처사가 아닐지요."

"그렇다 한들 저놈이 에메랄드에 먹칠을 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 먹칠이 정말 제 동생 혼자서 한 것입니까."

주제 모르고 날뛰다가 처맞은 것은 분명 곽지철의 잘못이다.

하지만 원인을 되짚어 보면 일을 과격하게 밀어붙인 목종화의 잘못 역시 분명히 존재한다.

목종화 역시 내심 그 사실을 인정했다.

다만 자신의 치부가 들춰진 것이 불쾌했기에, 말없이 제자리에 서서 곽승재를 노려보았다.

"학생선도부가 에메랄드 마탑의 행사에 관여하는가?"

"아니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조언을 드리고자 하는 겁니다."

"그 조언이 동생의 실수를 눈감아 달라는 말이냐? 곽승재는 매사 사적인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칼같이 일 처리를 한다더니, 그것도 옛말이군."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부장님께서 공정한 판단을 내리시길 바랄 뿐입니다."

곽승재의 얼굴은 아무 변화도 없이 무덤덤했다.

그 얼굴을 마주하고 있자니 어쩐지 화를 내 봤자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어, 목종화는 점차 화를 누그러뜨렸다.

목종화도 바보는 아니었다.

용살학원에서 3학년까지 살아남고, 한 동아리의 부장 자리까지 오르는 것은 요행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가끔씩 폭급해지는 성격과는 별개로 최소한의 사리 분별은 가능한 자였다.

곽씨 가문은 에메랄드 마탑의 한 축을 이루는 유서 깊은 토 속성 술사 가문.

태어날 때부터 에메랄드 마탑의 일원이었으며,

입학하기 전부터 동아리에 이름을 올렸다.

에메랄드 마탑에 심각한 누를 끼쳤다면 모를까, 이만한 일로 퇴부시키면 뒷감당이 안 된다.

"그래서 나더러 어떻게 하라고."

"기회를 달라는 겁니다."

어떤 기회를 얼마나 줄지는 목종화의 재량에 맡긴다.

더 억지를 부린다면 퇴부를 완전히 번복하게 만들 수는 있겠으나, 그것은 동아리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이다.

어디까지나 조언하는 선에서 그쳐야 한다.

또한 곽지철이 에메랄드의 체면을 구긴 것은 사실이었고, 응당 그 대가는 치러야 한다고 여겼다.

잠시 침음하던 목종화의 입이 열렸다.

"두 달. 앞으로 두 달간 랭킹을 보고 결정하겠다. 불만 있나?"

"충분합니다."

"흥."

목종화는 곽승재, 곽지철 형제를 한번 일별하곤 그들을 두고 걸어 나갔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눌 시간을 주기 위함이 절반, 둘 다 꼴도 보기 싫어서가 나머지 절반이었다.

"...."

곽지철은 여전히 의기소침하여 고개를 못 들어 올리고 있었다.

망나니처럼 무서울 것 없는 놈이지만 제 형 앞에서는 기가 죽는다.

형이 보는 앞에서 그 추태를 보였고, 형의 도움 덕에 퇴부를 면했으니, 여러모로 면목이 없으리라.

곽승재가 무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그를 잘 아는 사람이 들었다면 평소보다 다정하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나머지는 너에게 달렸다."

"...미안해, 형."

"사과보다는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이 듣고 싶구나."

"...최선을 다할게."

"그래, 이만 가라."

"...."

곽지철은 애써 힘찬 발걸음으로 나아갔다.

곽지철마저 보내고, 곽승재는 홀로 섰다.

그러다가 허공에 대고 말을 걸었다.

"송천혜."

"!"

골목 너머에서 흠칫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송천혜가 천천히 고개부터 내민 다음, 쭈뼛거리면서 다가왔다.

"...알고 계셨어요...?"

"전에도 말했지. 너는 몸을 숨기는 재주가 없다고."

송천혜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붉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곽승재는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아레나에는 무슨 일로 찾아왔나?"

"그냥 지나가다가 들렀는데... 요...."

"네가 시작하기 한참 전부터 관중석에 숨어 있는 걸 봤다."

"...."

속이 꽉 찬 돌직구를 얻어맞고 송천혜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이렇듯 곽승재의 성격은 솔직하지 못한 송천혜와는 완전히 상극이었다.

이어서 직설적인 조언을 던진다.

"너는 학생선도부다. 부끄러워하지도, 두려워하지도 말고 당당히 너 자신을 드러내라. 적어도 어설프게 숨다가 들키는 것보다는 낫겠지."

"...명심할게요."

곽승재는 거기까지만 하고 본론으로 넘어갔다.

"결투 내용은 어떻던가."

"대단하더군요."

"직접 붙으면 제압할 수 있겠나?"

"...확신은 못 하겠습니다."

"확신은 못 한다, 라...."

송천혜의 실력은 단연코 1학년 최상위권.

곽지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

그런 송천혜조차 백 프로 승리를 자신하지는 못한다.

김호가 무엇을 더 숨기고 있을지 모르니까.

당장 이번에 선보인 바람 마법만 해도 그들이 듣도 보도 못한 것이었다.

그런 자가 300점대에서, 겁쟁이 소리를 들으며, 바짝 몸을 낮추고 있다?

곽승재와 송천혜가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았다.

"손은 깨끗했다고?"

"네, 꼼꼼히 확인했어요."

김호가 그날 밤의 복면인일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었다.

[인페르노 피스트]를 썼다면 고위 대신관이 치료 마법을 들이부어도 며칠은 흔적이 남을 텐데, 그의 손에는 아주 작은 생채기 하나 없었단다.

원래는 이 시점에서 다른 용의자로 눈을 돌려야 옳지만....

자꾸만 그 신입생의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모든 것을 자신의 아래로 두는 오만한 눈빛.

복면인을 마주했을 때의 분위기와 매우 흡사했다.

그러나 이 또한 심증에 불과하다.

[돋보기] 사용 허가를 받기 위해서는 하나라도 뚜렷한 증거를 잡아내야만 한다.

"미안하다. 네가 더 수고를 해 줘야겠구나."

"제가 원해서 하는 일이에요."

"부탁하마."

송천혜는 마음속으로도 의욕을 불태웠다.

'반드시 꼬리를 잡고 말 겁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