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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높은 산 부족의 족장, 검은 바위가 묻는다. '삽'을 사용할 수 있는 고블린은 더 없는가!"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터덜터덜 돌아가는 고블린들 사이로, 검은 바위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이번에는 용맹한 고블린, 붉은 눈이 도전한다."

앞으로 나선 고블린이 기세등등하게 제 키만 한 삽을 움켜쥐었다.

몇 번 보아서 낯이 익은 고블린이다. 내가 알기론, 높은 산 부족에서도 꽤 이름난 전사라던데.

"붉은 눈은 용맹한 고블린. 족장과 밝은 귀가 다루는 삽은, 붉은 눈도 다룰 수 있다!"

마치 전설의 신검을 휘두르듯, 내가 가져온 삽을 있는 힘껏 땅에 쑤셔 넣는 붉은 눈.

기세 하나만큼은 일류다.

콰당탕탕-

물론, 결과는 처참했다.

땅에 삽날을 채 꽂아 넣기도 전에, 데굴데굴 바닥을 구르는 붉은 눈.

어깨가 축 늘어진 붉은 눈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높은 산 부족의 엘리트 전사마저도 저 꼴이다.

그냥 내가 하고 말걸.

괜히 검은 바위에게 부탁했나.

"이봐, 검은 바위. 이제 그만하면 안 될까."

"높은 산 부족의 현명한 족장, 검은 바위가 말한다. 모든 고블린에게 기회는 공평하게 돌아가야 한다."

고지식한 놈 같으니라고.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 장면을 언제까지 봐야 하는 걸까.

속이 터질 지경이었지만, 내색할 순 없었다.

일이 이렇게 된 데에는 내 게으름 탓이 컸으니까.

'씨앗을 성공적으로 싹틔우려면, 땅을 깊게 파는 것이 중요합니다.'

조상신에게 전해 들은 팁 아닌 팁. 이때, 잔머리를 굴리지 말았어야 했다.

"처음 보는 물건이지? 이거 한 번 써보지 않을래?"

단순히 삽질이 하기 싫어 검은 바위를 불러낸 나는, 흉내쟁이의 [이면의 공간]에 보관해두었던 삽을 꺼냈다.

'역시, 사람은 준비성이 철저해야 해.'

씨앗을 심을 때 필요할까 싶어 챙겨온, 창고에서 굴러다니던 낡은 삽 한 자루.

"이대로 하면 돼. 어때, 쉽지?"

도구를 사용해 땅을 파는 모습을 보여주니 검은 바위의 눈이 별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오오! 손을 안 쓰고도 땅을 파다니. 이것 또한 인간 한승현이 모시는 조상신의 지혜인가."

"그렇지? 이 삽, 가지고 싶지 않아? 부탁 하나만 들어주면 줄 수 있는데."

"강인한 고블린, 검은 바위는 삽을 원한다. 인간 한승현. 무엇이든지 말해라!"

분명 나는 그저 힘 안 들이고 땅을 팔 속셈이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높은 산 부족의 삽질 경연 대회가 열려있었다.

주최자는 당연하게도, 족장인 검은 바위.

그들에겐 생소한 도구인 삽 사용법을 가르친다는 명목으로 모든 고블린을 모아둔 자리에서, 흙을 한 삽 뜬 검은 바위가 선언했다.

"현명한 검은 바위처럼 삽을 다룰 수 있는 고블린에겐, 검은 바위가 '사료'를 하사하겠다."

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내 의문은 고블린들의 우레와 같은 함성에 묻혀버렸다.

그런데, 더 기막힌 일이 일어났다.

"키에엑-!"

"삽질, 어렵다. 둥근 모래는 삽질에 성공한 검은 바위 족장을 존경한다!"

"밝은 귀가 삽질에 성공했다!"

"어린 고블린들에겐 삽질은 너무 위험하다. 뒤로 물러나라."

눈에서 불꽃을 피우며 달려드는 고블린들.

하지만 성공한 건, 밝은 귀와 검은 바위뿐이었다.

나머지는 바닥을 나뒹굴거나 삽날로 허공을 가를 뿐.

멀리서 보니 희극도 이런 희극이 없다.

물론, 실패한 고블린들에겐 비극이겠지만.

"흙 한 삽 뜨는 게 그렇게 어렵나."

아무리 작은 신장을 고려하더라도, 새로운 도구 사용 능력이 저렇게까지 미숙할 줄이야.

결국, 반나절이 더 지나서야 검은 바위의 테스트가 종료되었다.

합격자는 단둘.

검은 바위와 밝은 귀뿐이다.

"후우, 다 끝났어?"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팔짱을 낀 채 구덩이를 파는 밝은 귀의 모습을 지켜보던 검은 바위가 말했다.

"새로운 도구의 사용법을 가르치는 건 족장의 숙명이다. 검은 바위는 충실한 고블린이다."

지금까지의 광경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가르치는 건 거의 불가능할 것 같은데.

이쯤 되니 이들이 사냥을 해 온 방법이 궁금해졌다.

"날렵한 고블린, 밝은 귀가 해냈다. 인간 한승현!"

그때.

깊게 파인 구덩이 안에서 외침이 들렸다.

사료 한 봉지를 대가로 받은 밝은 귀가 순식간에 일을 끝마치곤 밖으로 기어 나왔다.

"어디 보자...잘 해놨구만."

"밝은 귀는 성실한 고블린이다! 사료를 받았으니 인간 한승현을 위해 몸을 움직인다!"

낑낑대며 빠져나온 밝은 귀가 흙을 털었다.

그 뒤로 보이는 구덩이가 제법 깊다.

대략 2m는 되는 깊이.

이 정도면, 씨앗을 심기엔 충분하겠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작은 감자 크기의 푸른 보석을 꺼냈다.

조상신에게 넘겨받은 어머니 나무의 씨앗이다.

"그럼, 시작해 볼까?"

구덩이 안으로 씨앗을 던져넣고, 삽을 이용해 파냈던 흙을 꼭꼭 덮었다.

그리고, [만드레이크의 정념]이 담긴 포션병을 꺼냈다.

- [만드레이크의 정념]을 사용합니다.

- 식물의 생장 속도가 믿을 수 없을 만큼 빨라집니다.

[발아까지 남은 시간 : 3시간]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20화

[AR-001] 채널에 어머니 나무의 씨앗 심기. [1/1] [완료]

발아한 씨앗을 일정 크기까지 재배하기 [2/2m] [완료]

메마른 땅에 씨앗을 심은 지 불과 하룻밤.

순식간에 퀘스트가 완료되었다.

"예상은 했지만 어마어마한 속도네. 몇 병 더 가져다 부으면 천 년 묵은 은행나무도 안 부럽겠어."

대나무도 형님 할 속도로 자라나는 어머니 나무.

아니지. 갓 발아한 녀석이니 어머니 나무라는 호칭이 맞는 걸까.

"아기 나무...는 조금 아닌 것 같고. 일단 결과물을 확인해봐야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자, 허리에서 둔중한 통증이 느껴졌다.

침낭을 깔고 잤는데도 동굴 바닥이 워낙 딱딱해서인지 온몸이 뻐근했다.

"어째 집보다 여기서 더 많이 자는 것 같단 말이지. 아예 침대를 가져다 놓을까?"

요즘 자주 머물러서인지, 검은 바위의 동굴이 친숙하게 느껴진다. 이러면 안 되는데.

밖으로 나가자, 씨앗을 심어둔 자리에 모여있는 고블린들이 눈에 들어왔다.

"밝은 귀는 믿을 수 없다. 하루 만에 어머니 나무가 밝은 귀보다 커졌다!"

"인간 한승현은 대단하다! 지금까지 어떤 족장도 성공하지 못한 어머니 나무의 씨앗을 싹틔웠다."

"족장이 돌아왔다! 족장, 어머니 나무가 자라났다!"

둥그렇게 원을 그리고 모여있는 그들의 한복판에 시커먼 방수포가 불쑥 솟아나 있었다.

나무에 방수포를 씌운 이유는 약효가 유지되는 12시간 동안 절대 햇빛을 받으면 안 되기 때문에.

햇빛을 받으면 생장 속도가 반으로 줄어버린다.

그것도 충분히 빠르긴 하지만, 두 집 살림 중인 나에게 시간은 금이니까.

"그럼, 한 번 확인해 볼까."

어젯밤 검은 바위를 통해 고블린들에게 단단히 언질을 준 덕분인지, 아무도 방수포를 건드리지 않았다.

마치 새로 지은 빌딩의 테이프 커팅식을 진행하는 기분으로, 방수포를 움켜쥐었다.

"오오, 이야기로만 듣던 어머니 나무다. 거친 불은 감격했다!"

"붉은 눈은 명석한 고블린. 지금 이 순간을 절대 잊지 않는다!"

"높은 산 부족의 족장, 검은 바위는 위대한 어머니 나무를 칭송한다."

"밝은 귀는 자비로운 고블린. 어머니 나무에게 인간 한승현에게 받은 팬티를 선물한다!"

아냐, 그건 제발 하지 말아줘.

어지간하면 그 흉물은 불태워주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럼, 어디 얼마나 잘 자랐나 볼까?"

"키에엑-!!!"

"크르르륵-!!"

방수포를 움켜쥔 손에 힘을 주자, 고블린들의 기쁨 섞인 함성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그리고.

촤르륵-

어머니 나무를 덮고 있던 시커먼 방수포가 제거되자.

"...…"

사위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고, 모두가 눈을 내리깔았다.

어느 정도 예상한 반응이다만...그래도 조금 미안하네.

"...인간 한승현. 정말 이게 선대로부터 전해진 어머니 나무인가."

'높은 산 부족' '족장'의 수식어에 이어, 이름마저 생략한 검은 바위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고개도 못 드는 다른 고블린과는 다르게, 그래도 족장이라 이건가.

제법 용기 있는 모습이다.

"맞아. 어머니 나무."

아마도...라는 뒷말은 생략했다.

생긴 건 좀 그래도, 본질은 어머니 나무가 맞을 테니까.

"그럼, 저건 대체...무엇인가. 검은 바위는 지금까지 저, 저런 나무를 한 번도 본 적 없다. 검은 바위는 처음으로 나무에게 두려움을 느꼈다."

검은 바위의 두꺼운 손가락은, 이파리가 무성한 나무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몸통에 불쑥 튀어나온 얼굴을 가리키고 있었다.

사람의 얼굴과 동일한 그것.

입을 뻐끔거리며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는 것이 보기 썩 좋은 모습은 아니다.

'역시....'

아버지가 개발하신 [만드레이크의 정념]. 그 비약의 부작용이 발현된 것이다.

인면초(人面草)의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난 나무.

본래 작물의 생장 속도를 증가시키기 위해 개발된 비약이지만, 저 부작용 때문에 폐기되었지.

독성은 없다고 해도, 누가 얼굴 달린 감자나 고구마를 먹고 싶겠어.

그래도 이 정도는 봐줄 만하다.

방학 숙제로 가져갔던 나팔꽃은, 꽃 대신 얼굴이 피어있었으니까.

"그날은, 지옥이었지...."

햇볕을 쬐면 안 된다는 아버지의 당부를 철석같이 믿고, 검은 비닐로 꽁꽁 싸맨 화분을 들고 등교했을 때.

그때까지만 해도 손쉽게 숙제를 해결했다는 기쁨에 콧노래가 절로 나왔었지.

딱 비닐을 뜯기 전까지만.

"사람 얼굴 모양의 나팔꽃은 지금 생각해도...."

화려한 보랏빛 나팔꽃 대신 붙어있던 건 머리를 풀어 헤친 남자의 얼굴이었지.

그날.

반 아이들 절반이 울음을 터트렸다. 경기를 일으켜 기절한 놈도 있었고.

학교에 구급차가 세 대나 왔었지.

덕분에 아버지는 학부모 소환, 교내 봉사, 기절한 아이들의 부모님께 구구절절한 사과와 치료비 지원까지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셨고.

지금 생각하면, 다 추억이네.

"그래도 얘는 좀 봐줄 만하네. 그냥 몬스터 정도..."

내가 나름의 위로랍시고 손으로 나무를 툭툭 건드리는 순간.

끼에에에엑-

- [만드레이크의 정념]의 강화된 옵션이 발동됩니다.

- [어머니 나무]의 묘목이 한 단계 진화합니다.

꿈에 나타날까 무서운, 날카로운 쇳소리가 귓가를 찢어발기고 지나갔고, 나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으악, 진화라는 게 이런 식으로 나타나는 거였어?"

단순하게 외형만 변화하는 부작용, '변이'에 대해선 아버지에게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설마 변이에서 업그레이드된 옵션, 진화로 인해 이런 결과물이 만들어질 줄이야.

"이거...완전 몬스터네. 춘식이가 보면 기절하겠어."

모두가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생생하게 움직인다.

신생아 정도의 크기부터 성인 남자의 크기를 훨씬 웃도는 커다란 안면(顔面)들까지.

굵은 나무줄기 곳곳에 돋아난 얼굴들은, 제각각의 표정을 지은 채 입을 모아 소리쳤다.

끼에에엑-

꺄아아악-

끄으아아아아-

"나, 사고친 건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꺄아아아악-

반쯤 넋을 놓은 내 등 뒤에서, 인면목(人面木)의 무시무시한 비명이 연신 메아리쳤다.

* * *

"새, 생긴 건 저래도 어머니 나무가 확실하다니까."

높은 산 부족에 온 이래, 처음으로 죄를 저지른 기분이다.

게거품을 물고 기절한 고블린이 열셋, 그렇지 않은 고블린들은 대부분 꽁지가 빠져라 도망갔다.

검은 바위를 비롯한 용감한 몇몇은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어머니 나무를 향해 달려들었다.

다행히도 내 필사적인 제지로 벌목 당하진 않았지만.

꺄아아악-

소름 돋는 비명을 내지르는 나무를 바라보는 고블린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

"높은 산 부족의 족장, 검은 바위는 믿을 수 없다. 저건 어머니 나무가 아니다. 고블린을 잡아먹는 괴물이다. 흉내쟁이보다 더 흉악하다."

아무리 그래도 몬스터인 너희가 쟤보고 괴물이라니. 너무한 거 아니야?

생긴 건 좀 험악해도, 꿈틀거리는 미간이 기분 나쁘긴 해도.

본성은 나쁘지 않을 거야.

아마도....

아이템의 옵션 강화가 무조건 좋은 쪽으로 이뤄지는 건 아니었구나. 이렇게 또 하나 배워가네.

끼에에엑-

"이런...."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버렸다.

어찌 보면 내 손으로 창조한 녀석이지만, 도저히 맨정신으로 쳐다보기 힘들다.

시도 때도 없이 끔찍한 비명까지 질러대는 게 영락없는 몬스터다.

그것도 지옥에서나 자생할 법한, 무시무시한 비주얼의 식물형 몬스터.

"인간 한승현이 높은 산 부족에 괴물을 심어놨다!"

"높은 산 부족의 지혜로운 고블린, 밝은 귀가 말한다. 인간 한승현은 나쁜 인간이다."

"높은 산 부족의 족장, 검은 바위는 조상신을 뵐 면목이 없다."

"용맹한 전사, 붉은 눈이 저 괴물을 쓰러트리겠다. 족장!"

고블린들의 비난이 칼날처럼 나를 난도질한다.

어쩔 수 없지.

지금은 자리를 피하는 수밖에.

"아, 아차. 해야 할 일이 생각났네."

후다닥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힐끗 주위를 둘러보니 어린 고블린들은 가까이 다가올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몇몇은 얼굴빛이 검푸르다.

미안, 그래도 계속 보다 보면 괜찮아질 거야.

사죄는 나중에 하도록 하고.

일단 지금은 조상신이 얹은 숟가락부터 확인해 볼까.

[높은 산 부족의 소망-3]

- 검은 숲에 들어가 [하얀 샘물]를 퇴치하라.

- (추가) 어머니 나무의 씨앗을 발아시켜 높은 산 부족에 적용된 디버프를 완화하라. (진행 중)

* 클리어 시 [높은 산 부족의 소망-4]로 연결됩니다.

* 사용자의 능력에 비해 난이도가 조금 높습니다. 충분한 능력의 성장을 권합니다.

보상 : 유대 포인트 [30], [???]

바로 어제.

조상신의 개입을 허가하자 놀랍게도 메인 퀘스트의 진행 항목이 추가되었다.

디버프가 무엇인지는 조상신도 명확히 알고 있지 못했다.

그저 퀘스트가 완료되면 다시 한번 찾아오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

"뭐, 아직 완료되진 않았지만...나무가 자라났으니 곧 뭔가 효과가 나타나겠지."

[고블린의 정신적 지주]

[AR-001] 채널에 어머니 나무의 씨앗 심기. [1/1](완료)

발아한 씨앗을 일정 크기까지 재배하기 [2/2m](완료)

퀘스트가 클리어되었다.

비약을 사용했기에 행여라도 실패하면 어쩌나. 조금은 걱정했는데.

안도감이 들었다.

"그럼, 보상을 확인해 볼까."

장비의 숨겨진 옵션을 일깨우면 하얀 샘물의 처지도 수월해지겠지.

하얀 샘물을 처치하면, 조상신의 정수를 얻어 나도 [치유 가속] 포션의 제작이 가능해질 테고.

기쁜 마음으로 보상을 수령하기 위해 손을 움직였다.

- [척추분쇄자]의 숨겨진 옵션이 개방됩니다.

- [접붙이기]가 개방되었습니다.

[접붙이기]

[척추분쇄자]는 어머니 나무의 품으로 돌아가 본래의 힘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개방된 능력이 이상하다.

"이게 무슨 소리야? 이미 깎은 나무를 어떻게 다시 돌려보내라는 건데?"

땅에 묻어버리라는 얘기는 아닐 테고.

불친절한 설명에 툴툴대던 와중, 내 시야에 무언가가 포착되었다.

"설마...[접붙이기]라는 게?"

지금도 연신 비명을 지르는 인면목의 얼굴.

쩍 벌린 입이 왜 이리도 커다랗게 보일까.

"내 상상력 때문이겠지. 진짜로 그럴 리가...."

그래도 혹시 모르는 법.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장 커다란 얼굴에 다가가 척추분쇄자의 손잡이를 연신 비명을 내지르는 입에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달칵-

딱 들어맞았다.

- [접붙이기] 가 발동됩니다.

* * *

나무에 튀어나온 수없이 많은 인면(人面) 중, 가장 크고 가장 선명한 얼굴.

그곳에 쩍 벌어진 입을 향해 승현이 척추분쇄자를 밀어 넣는 순간, 검은 바위의 외침이 허공을 갈랐다.

"안 된다! 인간 한승현-!!! 당장 그만둬라!"

비록 승현에게 척추분쇄자의 소유권을 양도했다고 하나, 그것은 엄연히 높은 산 부족의 상징과도 같은 보물.

머나먼 선대 족장 시절부터 내려온 보물을, 정체도 모를 괴물의 아가리 속에 처넣는 꼴을 볼 순 없었다.

콰앙-

검은 바위가 힘껏 땅을 박참과 동시에 굉음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한발 늦었다.

뿌드득- 뿌드득-

시커먼 입속으로 서서히 사라져가는 척추분쇄자.

검은 바위가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서, 선대의 보물이...족장의 기개가...조상신의 가호가...."

이런 식으로 사라질 줄이야.

차라리 잃어버린 채로 까맣게 잊고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검은 바위는 높은 산 부족의 족장으로서, 위대한 조상신과 용맹한 선대 족장들을 뵐 낯이 없다

뿌드드득-

고 생각했다.

"거, 검은 바위는 믿을 수 없다. 어떻게 이런 일이...."

뿌득, 뿌득.

둔기를 집어삼키던 턱의 움직임이 멎었다.

곧, 눈알을 굴리던 흉면(凶面)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우드득-

새까만 척추분쇄자의 표면에서, 새싹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21화

- [접붙이기]에 성공하였습니다!

- [척추분쇄자]의 각성까지 남은 시간 : 12시간 00분

돋아나는 새싹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도 내 추측이 맞았던 모양이다.

"만약 헛발질이었으면...망신당할 뻔했네."

설마 목구멍에 척추분쇄자를 집어 넣는 게 정답일 줄이야.

그리고, 퀘스트를 해결해서 한 가지 더 좋은 점은.

꺄아악-

끄아아아-

가장 커다란 입을 틀어막아서 기운이 빠진 건지.

나머지 얼굴들이 끊임없이 내지르던 소음이 작아졌다는 것이다.

"휴우, 한숨 덜었어...너, 거기서 뭐 하는 거야?"

바닥에 주저앉은 검은 바위에게 물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대신 돌아온 건.

- [척추분쇄자]에 누적된 기운을 바탕으로, [어머니 나무]가 [높은 산]에 적용된 광역 디버프를 분석합니다.

- 분석 완료!

- 현재 단계에선 디버프의 완전한 해지가 불가능합니다.

- [디버프 : 지식의 통제]의 레벨이 다운됩니다.

시스템의 메시지였다.

* * *

"우선, 한승현 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자신의 거처로 찾아온 내게 조상신이 허리를 꾸벅 숙였다.

"뭘, 이 정도쯤이야.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어. 약간의 소득도 있었고."

퀘스트는 쉬웠지만, 고블린들의 눈총이 따가웠지.

예상은 했는데, 그 정도일 줄은 나도 몰랐다고.

인간의 모습을 취한 조상신이 흑발을 쓸어넘기며 나를 바라보았다.

"한승현 님.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개인적인 궁금증입니다."

"뭔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디버프를 해제하셨습니까. 무슨 방법을 사용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마법? 아니지. 마법이 통할 리가 없는데...."

기관총처럼 쏟아지는 질문을 보니 제법 놀란 모양이다.

은근히 뿌듯하네, 이거.

"말씀해 주시기 곤란한 부분입니까?"

방법이 궁금해 견딜 수 없는 모양이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 조바심이 가득 담겨있는 걸 보니.

뭐, 이 정도쯤이야 알려줄 수 있지.

"척추분쇄자를 입에 꽂아 넣으니까 쉽게 해결되던데?"

"...예?"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지적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군.

아니, 납득 자체가 안 된다는 표정이다.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건 딱 질색인데.

"입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무에 눈코입이 달려 있지 않다는 건 상식 중의 상식인데. 검은 바위도 그 정도는 압니다."

"그 상식, 오늘부터 바꾸어야 할 것 같다."

내 대답을 곱씹던 조상신이 힘겹게 말했다.

"...제가 오랜 시간 동굴 안에서 지내긴 했어도, 바보는 아닙니다."

아무래도 납득 대신 이의 제기를 택한 것 같군.

하지만 내가 추가로 설명해 줄 수 있는 부분은 없다.

"궁금하면 확인해 보던가. 고블린들은 네 눈과 귀나 마찬가지라며."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한승현 님."

조상신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시 후.

"...어, 어머니 나무가...? 왜? 왜 저렇게 되었습니까?"

표정을 보니 생각보다 충격을 심하게 받은 모양이다.

모닥불의 은은한 빛이 가득 찬 공동에 침묵이 지나간 뒤.

조상신이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뭐, 세월이 지나면 다들 모습이 변하는 법이죠. 나무에 눈코입이 생기는 것쯤이야...이해했습니다!"

아무리 봐도 이해가 아닌, 반강제적인 수긍 같지만.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수긍이라도 했다니 다행이네.

그럼 이제 내가 질문할 차례인가.

고개를 돌려 모닥불을 쬐고 있는 조상신에게 말했다.

"거두절미하고, 일단 가장 묻고 싶은 건 이거. [지식의 통제]라는 디버프가 대체 뭐야?"

- [광역 디버프 : 지식의 통제]의 레벨이 다운됩니다.

퀘스트 알림창에 또렷이 적혀있는 문구.

지난번 흉내쟁이 때와는 달리 [이해와 분석]으로 감지해내지 못한 디버프다.

현재 [지식의 통제]의 상태는 소멸이 아닌 약화.

즉, 나 또한 적용을 받을 수도 디버프라는 이야기인데.

만약 심각하게 부정적인 영향을 가진 효과라면 각별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최악의 경우에는 해결책을 찾을 때까지 높은 산 부족의 방문을 자제해야 할 수도 있고.

"그게 말입니다."

조상신이 머리를 긁적였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당당한 얼굴로 뻔뻔한 답변을 내놓은 조상신.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내 질문에 문제를 해결하라는 답변만 하더니.

막상 디버프를 발견하고 문제를 조금이나마 해결하고 돌아오니, 대답이 영 시원치 않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하는 얼굴로 놈을 바라보자, 조상신이 뻣뻣한 동작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저거, 지금 비웃은 거 맞지?

"농담이란 건 이런 기분이었군요.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기분입니다."

"...아무도 농담이라고 생각 안 할걸. 재미도 없었어."

"저는 재미있었습니다. 하여튼. 지금의 제가 아는 수준에서 말씀드리자면 [지식의 통제]라는 건 말입니다...."

조상신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꽤나 긴 설명을 짧게 요약하자면.

1. 멸망 이후 살아남은 고블린들에게 저주가 내려졌다.

2. 그것의 명칭이 바로, [지식의 통제]. 다행스럽게도 나와는 관련이 없는 저주이지만, 고블린들의 존폐가 달린 심각한 문제다.

3. 저주의 내용은 간단하지만 악랄했다. 그 어떤 고블린도 선대로부터 세습되는 지식을 익힐 수 없다는 것.

4. 또한, 언어를 제외한 새로운 무언가를 익히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다. 그저 하루하루 족장의 지시에 따라 살아갈 뿐.

5. 그나마 그들이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소수의 고블린들이 다른 부족원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지식을 익힐 수 없다라.

조상신의 이야기를 듣자, 어렴풋이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간단한 삽질조차 배우지 못하고, 기름을 둘러 튀기거나, 굽는 것조차 매번 실패하던 고블린들.

단순히 머리가 나빠서 실패한 게 아니라, 저주 때문이었다니.

거대 곤충 사냥에 나서는 인원이 극히 제한된 것도 그 때문일까.

"그나마 저주에서 조금이나마 자유로운 건 멸망 이후 살아남은, 족장들의 피를 이은 고블린들뿐입니다."

"그 족장들의 피를 이었다는 게 설마?"

"그렇습니다. 검은 바위와 밝은 귀. 그리고 '전사'라 불리는 고블린들이죠."

짐작이 맞아떨어졌다.

일명 원로 고블린들. 그들은 어설프게나마 흉내 정도를 낼 수 있는 수준이었으니까.

검은 바위와 밝은 귀는 그들 중 독보적인 수준이었고.

그동안 답답하게 생각했던 게 조금 미안해지네.

태생이 모자란 녀석들이 아니라, 전부 디버프 때문이었어.

"하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피는 옅어지는 법. 승현 님이 아니었다면, 머지않은 시간 내에 그들은 살아가는 법을 하나씩 잊게 되었겠죠. 설마 이렇게나 빨리 해결하실 줄은 몰랐는데. 정말 감사합니다."

꾸벅-

조상신이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감사드릴 부분은."

우우웅-

어제처럼 주변의 마나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한 가지 다른 점은.

어제 느꼈던 게 가벼운 불쾌감이라면, 지금 느껴지는 건 상당한 위압감.

발끝에서 가벼운 진동이 느껴졌다.

[항복.]

[전의 상실.]

움직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고 있는 흉내쟁이.

"이건...?"

싸아-

내 질문과 동시에 위압감이 사그라들었다.

조상신이 정중하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한승현 님께서 저주를 약화시켜주신 덕분에, 사라졌던 힘을 조금 되찾았습니다."

"그래서, 날 상대로 힘자랑을 한 건가. 이건 좀 마음에 안 드는데."

"하하, 그래도 역시 안 통하네요. 평범한 인간이었더라면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었을 텐데. 이상하리만치 높은 격(格)입니다."

"격? 지난번부터 네가 얘기하는 그 '격'이라는 게, 대체 뭔데?"

"차차 알게 되실 겁니다."

거, 참. 되게 비싸게 구네.

속으로 투덜거리던 내게 옅은 미소를 지은 조상신이 다가왔다.

"그보다, 지금 되찾은 힘은 어차피 이 안에 갇혀있는 지금의 저에겐 불필요한 것. 그래서 말입니다..."

따악-

조상신이 손가락을 튕겼다.

- [AR-001] 채널의 관리자가 메인 퀘스트, [높은 산 부족의 소망-3]의 클리어 보상 추가를 신청합니다.

- 수락하시겠습니까? [Y/N]

"숟가락 한 번 더 얹어도 되겠습니까?"

* * *

힘뿐만 아니라 잃어버린 지식 일부를 회복한 조상신.

그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전해 들은 나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의 거처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위험한 놈이야...저 페이스에 말려들어서 하루 종일 붙잡혀 있을 뻔했어."

힘과 함께 지식을 회복한 조상신은 의외로 입담이 좋았다.

설마 내가 고블린 부족의 역사를 흥미롭게 듣는 날이 올 줄이야.

뭐, 절반 이상은 영양가 없는 이야기였지만.

지나고 보니 후회되는 시간이다.

"신선놀음에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른다더니, 딱 그 꼴이네."

조상신을 찾아간 건 이른 아침.

이야기를 듣다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해가 저물 시간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조상신의 거처에서 나왔지만, 검은 바위의 동굴 안엔 이상하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족장의 거처를 지키는 고블린 한둘쯤은 상주하고 있는 게 일반적인데. 왜 텅 비어있는 거지.

어두컴컴한 동굴 속엔 오로지 나 혼자뿐이었다.

"사냥을 나간 건가."

아니면, 어머니 나무 때문에 일부러 이러는 건가?

오만 가지 생각과 함께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기던 그때.

"와아아아-!!!"

"굉장하다, 이번엔 도끼가 나왔다!"

고블린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함성을 따라 헐레벌떡 동굴 밖으로 뛰어나간 내 눈에 들어온 건.

"또 넣어보자! 어쩌면 더 좋은 게 나올지도 모른다!"

"현명한 고블린은 어서 무기를 가져온다. 빨리!"

"더는 넣을 게 없다...둥근 모래는 멍청한 고블린이다...."

인면목의 주변을 빙 둘러싼 높은 산 부족의 고블린들이었다.

"쟤들이 왜 저러지?"

연신 환호성을 내지르는 그들에게선 아까까지 보이던 두려움의 빛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열심히 그들을 지켜보던 그때.

"이번엔 붉은 눈이 해볼 차례다! 다들 비켜라! 선조에게 물려받은 무기를 가져왔다!"

나무를 깎아 만든 짧은 단검을 손에 쥔 붉은 눈이 앞으로 나섰다.

"붉은 눈은 신중한 고블린...붉은 눈이 가진 무기는 이게 마지막이다. 용맹한 전사에게 조상신의 가호가 있기를!"

커다란 외침과 함께 단검을 높게 들어 올린 붉은 눈은.

"용맹한 고블린 붉은 눈은, 마지막 무기를 어머니 나무에게 바친다!"

인면목에 돋아난 수많은 얼굴 중 하나를 골라, 뻐끔대는 입에 그것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키이이이-

기괴한 외침과 함께 작은 입이 쩍- 찢어질 듯 벌어졌다.

곧이어, 줄기를 타고 입을 향해 무언가가 꾸물꾸물 올라오기 시작했다.

비명을 질러대던 아침보다 훨씬 더 기괴한 광경.

하지만 고블린들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아니, 오히려 기뻐 보였다.

몇몇을 제외하고는.

"오오- '키이이이'다!"

"좋은 물건이 나올 징조다!"

"밝은 귀는 모든 무기를 다 날렸다! 붉은 눈도 다 날려야 한다! 용서할 수 없다!"

"두, 둥근 모래는 한 번 더 하고 싶다. 어머니 나무의 선택을 받아야 한다! 누, 누가 둥근 모래에게 칼을, 도끼를...."

툭-

둥글게 모인 고블린들의 한가운데에 시커먼 덩어리가 떨어졌다.

"저게...뭐야 지금?"

검은 박을 연상케 하는 모양새.

일반 성인 남성 크기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 믿을 수 없을 만큼 거대하다.

"와아아-"

"나왔다! 어서 확인해라!"

"높은 산 부족의 족장, 검은 바위는 성격이 급한 고블린이다. 검은 바위가 대신 확인해 준다!"

앞으로 나선 검은 바위가, 맨손으로 그것을 내리치자.

쩌억-

대번에 두 동강이 났다.

그 안에서 나온 건, 놀랍게도.

"도끼다, 도끼가 나왔다!"

"어머니 나무가 도끼를 내려주었다!"

"높은 산 부족의 용맹한 고블린, 붉은 눈은 새로운 도끼를 얻었다!"

"돌멩이를 얻은 밝은 귀는 배가 아프다...밝은 귀도 화려한 무기를 가지고 싶다."

희비가 교차하는 순간.

랜덤 박스가 된 인면목(人面木)을 중심으로, 높은 산 부족에 도박장이 열렸다.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22화

"그러니까, 여기에 무기를 집어넣으면 내용물이 바뀌어서 나온다는 거지?"

"그렇다. 어머니 나무가 밝은 귀의 보물들을 다 빼앗았다. 밝은 귀는 불행한 고블린이다...."

잔뜩 풀이 죽은 밝은 귀가 중얼거렸다. 빼앗긴 게 아니라 네가 탕진한 거겠지.

"도박 중독에 걸린 고블린이라. 살다 보니 별꼴을 다 보네."

땅바닥에 주저앉은 밝은 귀를 쳐다보던 그때.

만면에 웃음꽃이 핀 고블린이 다가왔다.

"오오, 인간 한승현! 부유한 고블린, 붉은 눈은 인간 한승현에게 감탄했다!"

오늘의 승리자, 붉은 눈이었다.

"인간 한승현이 키운 어머니 나무는 굉장하다! 어머니 나무에게 얻은 도끼를 잡으면 힘이 넘친다!"

[단단한 나무 도끼]

등급 : 일반++

옵션 : 근력+2

붉은 눈이 자랑스럽게 내민 손도끼를 보았다. 이전에 조잡한 무구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괜찮은 물건이다.

밝은 귀뿐만이 아니라, 몇몇 고블린들의 허리춤과 등 뒤에는 예전보다 훨씬 우월한 무기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머니 나무는 굉장하다!"

"선조들이 남긴 보물보다 더 값진 것을 얻었다!"

높은 산 부족의 공기가 한껏 달아올랐다.

몇몇만 빼고는.

"불쌍한 고블린, 밝은 귀에게 보물을 빌려줄 친절한 고블린을 찾는다...."

"어머니 나무는 나쁘다..."

"모든 보물을 잃었다. 둥근 모래는 산의 품으로 돌아갔을 때 선조들을 볼 용기가 없다."

전 재산을 탕진한 고블린들이 구석에 모여 앉아 침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내용을 듣자 하니, 대대로 물려받은 가보(家寶)까지 가져다 넣은 모양이다.

도박으로 패가망신한 고블린들을 계속 보고 있다간 나까지 우울해질 것 같다.

한동안 거리를 좀 두어야겠군.

슬금슬금 집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그간 까맣게 잊고 있던 일이 떠올랐다.

"아차, 척추분쇄자는 괜찮겠지? 설마, 그것도 뽑기에 포함되는 건...."

설마 홀라당 집어 삼켜버린 건 아니겠지?

황급히 어머니 나무를 향해 달려갔다. 흉측한 입에 멀쩡히 꽂혀있는 둔기가 보인다. 다행이다.

- [척추분쇄자]의 각성까지 남은 시간 : 11분

각성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네. 이대로 돌아가기는 아까운데.

이렇게 된 거, 오늘 하루도 높은 산 부족에 신세를 지는 편이 좋겠군.

"흉내쟁이, 침낭 꺼내줘."

[무급 노동 거부.]

[대가 지불 요망.]

...분명, 내 지식을 바탕으로 언어를 습득한다고 하지 않았나.

왜 저러는 거지. 대체.

"잔말 말고 침낭이나 꺼내 놔, 인마."

[근로자 인권 보장 요구.]

[무임금 무노동 원칙 준수.]

[악덕 고용주 규탄.]

악덕 고용주?

내가?

애초에 마음대로 나한테 들러붙은 게 누군데?

흉내쟁이의 헛소리를 무시하고 막 침낭을 꺼내려는데, 묘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가 뒷덜미를 잡아끄는 듯한 느낌. 낯설지 않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익숙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환장하겠네...."

- [뒤틀린 신령목]이 창조자에게 귀속됩니다.

- [뒤틀린 신령목]의 정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름 : 뒤틀린 신령목

종족 : 신령목 [E등급]

[보유 스킬]

[숲의 제단]

보조 슬롯에 [일반] 등급의 아이템을 투입하면, [폐기물]-[매직] 등급 사이의 아이템을 소환합니다.

* [일반] 이외 등급의 아이템은 자동으로 반환됩니다.

* 낮은 확률로 [일반]-[매직]등급의 씨앗이 등장합니다.

[접붙이기]

메인 슬롯에 아이템을 장착하면 잠재된 능력을 해방할 수 있습니다.

단, [신령목] 계통의 본체를 사용해 제작된 아이템에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현재 슬롯에 장착된 아이템

- [척추분쇄자]

- 각성까지 남은 시간 : 6분 32초

[만드레이크 로어]

공포스러운 외침을 내지릅니다.

허약한 대상은 겁에 질리거나 기절합니다.

[보유 특성]

[거목의 후예]

땅속 깊이 뿌리 내린 나무는 움직일 수 없습니다.

대신, 엄청나게 단단합니다.

방어력+100

[정화의 대지]

신령목을 중심으로 반경 10km의 디버프를 정화합니다.

디버프의 등급이 신령목의 등급보다 높을 경우, 효능을 한 단계 다운시킵니다.

나무의 상태창이다.

아무래도 이름 앞에 [뒤틀린]이 붙은 건 나 때문인 것 같다.

괜히 미안해지네.

"흠흠. 뭐, 이미 벌어진 일. 어쩔 수 없지."

자기합리화를 시도하며 시간이 다 되어 각성이 완료된 척추분쇄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처음 [접붙이기]를 사용했을 때 돋아났던 싹이 어느새 무럭무럭 자라있었다.

이파리가 빼곡하게 자란 둔기를 보며 눈살을 조금 찌푸렸다.

"이거, 한 번 다듬어야 하나? 이대로 쓰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투두두둑-

괜한 기우였다.

꽉 깨물려 있던 둔기를 꺼내자, 허물을 벗듯이 두꺼운 껍질과 이파리가 전부 떨어졌으니까.

"이게 척추분쇄자의 본래 모습인가."

기존에 투박한 둔기에서 탈피한 1m가 조금 넘어 보이는 봉(棒).

외형뿐만 아니라 옵션도 달라졌다.

[해방된 척추분쇄자]

등급 : 레어+

옵션 : 근력+5, 민첩성+5

[1] 스킬 - [배쉬] 사용 가능

[2] 스킬 - [카운트 스매시] 사용 가능

- [200] 유대 포인트로 숨겨진 퀘스트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배쉬]

상대를 강하게 내리쳐 데미지를 입히고 잠시 기절시킵니다.

(1일 3회 제한)

[카운트 스매시]

[패시브] 열 번째 공격마다 마나를 소모해 치명적인 피해를 줍니다.

마나 소모량 : [5]

확연히 올라간 신체 능력과 추가된 스킬.

이 정도라면 하얀 샘물을 퇴치할 수 있지 않을까. 자신감이 솟아오른다.

* 사용자의 능력에 알맞은 난이도입니다.

내용이 달라진 퀘스트 알림창. 홀로 던진 질문의 답이 내려졌다.

곧바로 침낭을 흉내쟁이의 뱃속에 집어넣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장비부터 챙기러 가야겠다."

그때.

동굴 안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검은 바위가 위대한 어머니 나무에게 바칠 제물을 가져왔다!"

커다란 보따리를 둘러멘 채 반쯤 눈이 돌아간 검은 바위였다.

결과는 뻔했다.

* * *

도박 소동이 일어난 지 어느덧 3일이 지났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무기들마저 전부 탕진해 버린 검은 바위는 동굴 안에 틀어박혀 버렸다.

얼마 전 춘식이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건 왜일까.

실의에 빠진 높은 산 부족을 내버려 두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 상대방의 만족도는 [★★★☆]입니다.

- 채널 등급과 만족도를 바탕으로 보상을 책정 중입니다.

[보상 목록]

1. 마나 [4] 획득.

2. 유대 포인트 [35] 획득.

3. 거래 대상 중 로드(Lord) 클래스가 있습니다. 마나[1] 의 보너스가 지급됩니다.

별점 3개 반.

리뷰에 고통받는 자영업자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런 결과가 나온 이유야 뻔하지만. 조금 억울하다.

"젠장, 빠꾸 없이 뽑아댄 건 본인들이면서. 왜 불똥이 나한테 튀는 거야."

디버프도 해제하고, 조상신의 힘도 회복해 주고, 어머니 나무까지 훌륭하게 키워내는 업적을 이루었는데도 3.5점이라니.

한 번에 200포인트를 모아, 척추분쇄자의 마지막 옵션을 해제하려고 했더니만.

내 계획이 물 건너 가버렸다.

그래도 메인 퀘스트를 클리어하기엔 부족하지 않겠지.

아쉽지만 지금은 여기서 만족해야겠다.

지난 3일간 제피로스 길드에서 받은 대금, 5천만 원 중 절반을 사용해 장비를 구매했다.

"아깝긴 하지만...이건 투자니까."

잔액 중 천만 원을 채무 상환에 사용하고 나니, 순식간에 통장이 텅 비어버렸다.

남은 빚은 약 9억 7천.

아직도 까마득한 금액이다.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

"유틸리티 벨트, 베스트 전부 완벽하고. 마나 라이트도 챙겼고. 비상식량도 전부 챙겼고. 가장 중요한 가스마스크도 문제없고."

장비에 나름대로 거금을 투자했다. 그 중, 가장 신경을 많이 쓴 건 가스마스크. 즉, 방독면이다.

왜냐.

숲 내부에서 나는 악취도 문제지만, 지난번의 경험을 바탕으로 시야 확보의 중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으으, 이게 하나에 천만 원이 넘는다니."

[나이트비전] 옵션이 붙은 렌즈가 부착된 가스마스크.

3시간마다 마석 배터리를 갈아주어야 하는 게 조금 번거롭지만.

어둠 속을 훤히 볼 수 있으니, 그 정도 단점쯤은 참아줄 수 있다.

"역시, 사람은 도구를 사용할 줄 알아야 해."

검은 숲의 입구에 선 나는, 마지막 점검을 끝마친 후 숨을 들이마셨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은.

"척추분쇄자의 새로운 스킬을 아직 사용해보지 않았는데."

열 번 공격하면 자동으로 발동된다는 [카운터 스매시].

"한 번 발동할 때마다 마나가 5씩 소모된다라...."

현재 내가 가진 마나의 총량은 31. 총 여섯 번을 사용할 수 있는 수치다.

내 의지로 적재적소에 사용할 수 있었던 [배쉬]와는 다르게, 마구잡이로 휘두르다간 가진 마나를 전부 탕진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위급한 상황에 대비해 최대한 침착하게 무기를 휘둘러야 한다.

"위력 정도는 파악해 둘걸. 적당한 상대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네."

딱 한 번.

만약 상대가 나타난다면, 한번은 고민 없이 마음껏 휘둘러 보자.

재차 다짐한 나는, 캄캄한 어둠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와, 이거 물건인데? 대량생산품이 이 정도 성능을 낸단 말이야?"

숲으로 들어오자마자, 방독면에 인챈트 된 [나이트비전] 옵션에 감탄하고야 말았다.

무슨 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검은 숲에서 사물을 명확하게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시야를 확보해주다니.

제작한 사람의 기술력이 돋보이는 제품. 아니, 작품이다.

"분명, W.K사의 생산품이었지."

W.K

미국의 5대 헌터.

일명 펜타그램 나이츠라 불리는 이들 중 한 명인 백기사(White Knight)가 운영하는 기업이다.

백기사라. 들리는 얘기로는 제작자와 헌터 생활을 겸임하는 천재라던데.

기회가 된다면 한 번쯤은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다.

워낙 정체가 모호한 사람이라 쉽지는 않겠지만.

"그나저나 어디로 가야 하는 거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무작정 걷던 와중, 하얀 샘물이 거주하는 곳을 모른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사전 준비에만 신경 쓰느라 가장 기본적인 부분을 잊고 있던 것이다.

"이런, 네비게이션도 작동을 안 하는데...어쩐다."

미니맵에도 목표 지점 따위는 나오지 않았다.

넓은 이 숲을 샅샅이 뒤지는 수밖에 없나.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까.

제자리에 선 채 고민하던 와중 발밑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불쑥 올라왔다.

[250M 직진 후 좌회전.]

쥐 죽은 듯 숨죽이고 있던 흉내쟁이였다.

"오호, 그러고 보니 네가 있었지. 하얀 샘물이 정확히 어디 있는지 알아?"

[오차 범위 20m 내외.]

[좌회전 후 바위를 끼고 좌회전.]

처음엔 몰랐는데, 생각보다 쏠쏠한 활약을 해준다.

들고 다니기 번거로운 아이템도 보관해 주고, 길 안내도 해 주고.

[초과 근무 중.]

[급여 지급 요망.]

저거만 빼면 말이지.

뭘 자꾸 달라는 거야? 막상 물어보면 대답도 안 하는 놈이.

흉내쟁이의 안내를 따라 한참을 걸어가자, 서서히 공기가 바뀌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뭐야, 왜 이렇게 습해?"

입고 있던 옷이 몸에 달라붙고,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해진다.

게다가 가장 심각한 건 방독면을 뚫고 들어오는 악취.

세상의 모든 오물을 모아둔 하수구 속에 들어온 기분이다.

불쾌함을 꾹 참고 몇 걸음 더 걸어가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우욱, 여긴...원래 호수였던 자리인가."

눈 앞에 펼쳐진 건.

모든 게 죽어 시커멓게 썩어버린 늪.

가까이 다가가 보니 마치 용암처럼 늪 전체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완전히 죽어버린 땅.

그곳을 향해 한 걸음 더 내딛는 순간.

부웅-

바람을 가르며, 무언가가 머리 위를 스쳐 갔다. 반사적으로 허리를 뒤로 꺾었다.

렌즈 너머로, 나풀나풀 떨어지는 머리카락 몇 가닥이 보인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만약 스텟이 향상되지 않았더라면, 방금의 기습으로 머리카락 대신 목이 날아갔다.

[전방에 적 출현.]

"말 안 해도 알아."

다급히 자세를 바로잡자 역삼각형의 머리가 보였다.

낯익은 얼굴이다.

"지난번에 봤던 녀석이군. 동족인가."

검은 바위의 사냥에 따라나섰을 때 보았던 거대한 사마귀.

3m에 달하는 거대한 곤충이, 수천 개의 겹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새로운 스킬을 시험해 볼 때인가."

이전 같았으면 당장 도망쳤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정면을 응시하며 척추분쇄자를 꼬나쥔 나를 향해.

푸드득-

거대한 날개를 한 차례 퍼덕인 놈이 달려들었다.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23화

꽈앙-

거대한 폭음이 숲을 뒤흔들었다.

"크윽, 이 정도로 강할 줄이야...열 번째 공격이라는 게, 이런 의미였나."

한참을 물러난 뒤에도 힘이 채 상쇄되지 않아 악취 나는 바닥을 나뒹굴어야만 했다.

"미리 사용해 보길 다행이군. 하마터면 낭패를 볼 뻔했어."

생각보다 강한 [카운트 스매시]의 반동. 삐그덕대는 관절을 추스르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유틸리티 벨트에 걸어 둔 방독면을 보니 후회가 밀려들었다.

"...호흡에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쓴 채로 싸울걸. 꼴이 말이 아니네."

퉤.

생수를 꺼내 입안을 가득 메운 썩은 진흙을 헹궈냈다. 악취 때문에 눈이 따갑고 코끝이 찡하다.

괴롭지만 참자. 유의미한 소득이 있었으니까.

[47m 직진 후 좌회전]

해방된 척추분쇄자의 위력을 되새기며, 흉내쟁이의 안내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 * *

"검은 숲으로 떠나시겠다는 겁니까? 지금 당장?"

"당장은 아니고, 이삼일 정도 준비 기간을 가진 뒤에."

"안 됩니다. 지금으로서는 너무 위험해요. 하얀 샘물은 한 부족을 이끌던 족장.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닙니다. 최소 여러 달은 준비 기간을 거쳐야..."

삼 일 전.

검은 숲으로 떠나겠다는 나를 조상신이 극구 만류했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무리 척추분쇄자가 각성했다고 해도. 추가 스텟과 스킬이 생겨났다고 해도. 족장인 하얀 샘물과 나 사이에는 분명한 격차가 있을 테니까.

하지만, 신령목이 부활하며 돌아온 조상신의 기억에 해결책이 있었다.

"아까 뭐라고 했었지?"

"족장급인데다, 마법을 사용하니 만만한 고블린이 아니라고..."

"아니, 그거 말고."

"다른 고블린보다 유달리 호기심이 많고, 탐구욕이 강하다는 거 말입니까?"

"그렇지, 그리고?"

"흉내쟁이 씨와는 다르게, 이성을 유지한 채 숲에 남겨졌다고...했습니다."

"그거면 됐어. 이길 수 있어."

왕성한 호기심과 탐구욕.

그리고 습성의 보존.

이거면 됐다.

- 사용자의 능력에 알맞은 난이도입니다.

퀘스트 알림창을 재차 열어보며 웃었다. 시스템은 생각보다 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정확한 분석을 내리는 걸 보니.

* * *

[목표 지점 도착 임박.]

[경계 태세 강화.]

흉내쟁이가 경고를 보냈다.

잔뜩 긴장한 모양이다.

하기야, 오랜 기간 검은 숲에서 지내던 녀석이니. 하얀 샘물의 강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겠지.

"너무 걱정하지 마. 절대 안 질 자신 있으니까."

단순한 완력, 그리고 눈에 보이는 스텟만이 전투력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특히, 연금술사는 더욱더.

[사장, 전투력 미흡.]

흉내쟁이의 호칭이 바뀌었다.

고객들이 나를 부르는 모습을 보고 배운 모양이다.

"사장님이면 사장님이지, 왜 그냥 사장이야?"

[님.]

"...그냥 사장이라고 해라."

아무래도 묘하게 반항하는 것 같단 말이지. 서열 정리를 위해 발뒤꿈치에 힘을 꾹 주었다.

[물리력 감지.]

[근로자 탄압 반대.]

버둥대는 흉내쟁이를 무시하고, 유틸리티 벨트에 미리 준비한 물품들을 가득 채웠다.

자신의 뱃속에서 이런저런 물건들을 꺼내는 나에게, 흉내쟁이의 불만 가득한 그림자가 날아들었다.

[전투에 불필요한 도구, 과반수.]

[BETA-0702. 사장 이해 불가.]

[패배 확정. 도주 경로 탐색 중.]

흉내쟁이의 반응을 보아하니 승리에 대한 감정이 한층 더 확실해졌다.

이따가 두고 보자. 건방진 놈.

[목표 지점 도착.]

흉내쟁이가 그림자를 움직였다.

고개를 들어보니 저 멀리 나뭇가지를 엮어 만든 움막이 보였다.

곳곳에 장식된 썩어서 시들어버린 꽃과 마른 이파리들 때문인지 음침한 분위기였다.

막 한 걸음을 더 내딛으려는 찰나.

삐이이익-

날카로운 경고음이 울려 퍼졌다.

"키이이익-!!"

그와 동시에 먼지 가득 낀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오는 고블린 한 마리.

놈과 눈이 마주친 나는, 곧바로 정체를 직감할 수 있었다.

"하얀 샘물...."

쫙 째진 눈에 밝은 귀보다 더 자그마한 체구.

황백색의 피부 위로는 거뭇거뭇한 딱지가 가득 덮여 있었다.

움막 안에서 뛰쳐나온 하얀 샘물이 나를 향해 으르릉거렸다.

"인간, 나가라. 이곳, 하얀 샘물의 영역. 떠나지 않으면, 마법, 사용한다."

더듬거리긴 했지만 확실한 언어 구사 능력. 조상신의 말대로였다.

나는 이빨을 드러낸 하얀 샘물에게 피식 웃어주었다. 많은 대화는 필요 없다.

"그럴 생각 없어. 나는 오늘 너를 죽이러 온 거니까. 덤벼."

"죽여? 하얀 샘물? 감히? 인간, 건방지다. 인간, 마력 약하다. 마법 못 쓴다. 한심한 인간. 안 나가면, 죽인다."

화르륵-

하얀 샘물의 손바닥 위로 머리통 크기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이런 것도 사용할 줄 알았어?"

이건 조상신에게 듣지 못했는데.

뒤로 한 걸음 물러나자, 내가 겁먹었다고 생각했는지 놈이 콧대를 세웠다.

"하얀 샘물, 자비로운 고블린. 인간, 이대로 돌아가면 '무서운 불'을 사용하지 않는다."

고블린다운 작명법이다. 본인은 진지한 것 같지만....

"무서운 불, 뜨겁다. 인간, 마력 약하다. 맞으면, 죽는다."

하얀 샘물이 히죽히죽 웃었다.

자신의 마법이 어지간히 자랑스러운 모양이다.

"언제까지 웃을 수 있나 보자고."

내용물이 가득 찬 유틸리티 벨트에 손을 넣으며, 나 또한 놈을 향해 입꼬리를 올려주었다.

"인간의 마법을 보여주지."

찰칵-

손가락에 힘을 주자, 작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라이터 끝에 피어난 작은 불꽃을 본 하얀 샘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키이익- 불을 불러냈다. 인간, 마력 약하다. 마법, 사용 못 한다. 어떻게?"

"그걸 내가 알려줘야 할 이유가 있나?"

"하얀 샘물, 마력, 어렵게 쌓았다. 인간, 마력 없이 불을 만들었다. 이해할 수 없다."

"그거야, 네까짓 놈이 쓰는 마법보다 내 마법이 훨씬 우월하기 때문이지."

역시.

저런 부류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본인이 납득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면 무조건 그 원인을 파악해야 직성이 풀리는 타입.

그리고, 그 해답을 얻기 위해선 본래의 목적마저 상실하는 타입.

게다가 단순한 고블린 특유의 성격이 합쳐져, 최악의 약점이 되었지.

조상신의 이야기를 들으며 예상했던 모습 그대로다.

"믿을 수 없다. 인간, 불, 보여줘라. 하얀 샘물, 확인한다."

하얀 샘물이 주춤주춤 걸어왔다. 벨트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준비해 둔 매끈한 포션병이 손에 잡혔다.

"그렇게 보고 싶어?"

"하얀 샘물, 인간의 마법 본다. 인간의 불, 보여주면, 늦게 죽인다."

늦게 죽여?

그딴 걸 위협이라고. 고블린다운 협박이네. 그렇다면 보여줘야지.

포션병을 꺼내 심지에 불을 당겼다. 매캐한 냄새가 악취를 뚫고 코끝을 간질였다.

"자, 이게 바로 내가 만든 불이다. 잘 받아!"

화르륵-

가연성 액체가 가득 든 화염병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오, 오오. 하얀 샘물, 확인한다. 인간의, 불!"

하얀 샘물이 반색하며 달려왔다. 기다리던 순간이다. 척추분쇄자를 꼬나쥔 나도 질퍽한 땅을 박찼다.

콰앙-

"키에에에엑-!!!"

치솟는 화염과 함께, 하얀 샘물의 비명이 어둠을 가르고 퍼져나갔다. 썩은 진창을 나뒹구는 고블린을 향해 힘껏 팔을 휘둘렀다.

- [배쉬]가 발동됩니다.

- 오늘 남은 사용 횟수 (2/3)

퍼억-

분명 적중했는데.

휘두른 팔에 전해지는 느낌이 미묘하다.

"키이이익-! 인간, 얕은수를...!"

"쳇, 막혔군."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힌 척추분쇄자. 하얀 샘물이 송곳니를 드러냈다.

방어 마법이 있던 모양이다. 그 덕분인지 타격도 거의 받지 않은 상황.

"인간, 어리석다. 약한 공격. 하얀 샘물이 만든, 둥근 벽, 뚫을 수, 없다."

아까 상대한 거대 사마귀의 껍질보다 단단하다. 아무래도 [배쉬]로 뚫는 건 무리일 것 같다.

하지만 다 방법이 있지.

"인간, 하얀 샘물, 화나게 했다. 빨리 죽인다. 무서운 불로, 뜨겁게, 태운다."

"그래? 아직 보여줄 게 더 남아있는데. 후회 안 하겠어?"

하얀 샘물을 도발하며 유틸리티 벨트에 손을 넣었다.

묵직한 그립감이 만족스럽다. 호신용품점에서 비싼 돈을 주고 구해 뒀던 녀석인데.

이런 데서 쓰게 되네.

"이게 아주 신기한 물건인데 말이야."

파직- 파직-

작동 버튼을 누르자 시퍼런 빛이 사방으로 튀었다. 하얀 샘물이 작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력, 없는...빛을, 만들었다. 어떻게?"

그럼 그렇지.

무조건 먹혀들 수밖에 없지.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던 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때, 신기하지? 이게 바로 인간의 마법이다."

"아니다. 하얀, 샘물은. 현명한, 고블린. 두 번 속지 않는다."

말은 그렇게 해도 몸은 솔직하네. 하얀 샘물이 홀린 듯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자, 잘 봐. 신기할 거야."

오른손을 놈에게 들이밀었다.

빠지지지지직-

효과는 굉장했다.

"키에에에에엑-!!!"

"스턴건 맛이 어때? 특별히 제일 비싼 녀석으로 구해 왔는데."

모르면 당해야지.

요란한 비명과 동시에 하얀 샘물이 경련을 일으키며 엎어졌다.

원래는 대(對) 몬스터용으로 제작된, 마나 배터리가 내장된 제품을 가져오려 했지만.

"역시, 내 판단이 맞았어."

마법을 사용하는 고블린답게 마력 감지 능력이 탁월했다.

그렇기에 오히려 더 손쉽게 속여넘길 수 있었다.

만약 마나 배터리를 사용한 스턴건을 가져왔다면, 애초에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겠지.

바닥에 자빠져 움찔대는 놈을 있는 힘껏 걷어찼다.

빠각- 콰당탕-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근본은 작은 고블린.

내 발길질에 얻어맞은 작은 몸뚱이가 데굴데굴 굴러갔다.

그리고.

오물로 범벅이 된 하얀 샘물이 벌떡 일어났다.

잔뜩 분노한 모양인지, 백황색을 띠던 피부가 적록색으로 바뀌었다.

"인간. 고블린, 속였다. 하얀 샘물, 용서 못 한다. 숲의 족쇄로, 괴롭힌다. 그리고, 죽인다."

- [중급 숲의 족쇄]에 피격당했습니다. 신체 전면부에 [55kg]의 압력이 가해집니다.

덜컥-

메시지가 나타남과 동시에 주변의 마나가 움직였고, 몸이 무거워졌다. 하얀 샘물이 킬킬 웃었다.

"하얀 샘물, 척추분쇄자, 알고 있다. 열 번, 안 맞으면 안 아프다. 인간, 하얀 샘물을 한 번 때렸다."

끈적한 기운이 온몸을 뒤덮었다.

하얀 샘물의 주특기, 디버프 마법이 발동된 것이다.

위력적이지만, 위기감은 없었다.

이렇게 빨리 숨겨둔 카드를 꺼내면 나야 고맙지.

가져온 도구들을 전부 못 보여주는 건, 조금 아쉽지만.

"크으윽...."

있는 힘껏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어색한 신음이 어금니 사이로 빠져나왔다.

놈은 그런 나를 보며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었다. 기쁜 모양이다.

"인간, 멍청하다! 한 번 때리고, 잡혔다! 하얀 샘물, 영리하다! 영리한 고블린이다!"

"제기랄...디버프가 이 정도였다니, 방심했다...여덟 번만 더 때렸으면!"

온 힘을 다해 어색한 연기를 펼쳤다. 수치심이 밀려들었다. 디버프보다 이게 더 괴롭다.

"하얀 샘물, 자비로운, 고블린. 멍청한, 인간에게. 몇 대, 맞아준다."

툭툭-

한 번 쳐보라는 듯 하얀 샘물이 지저분한 자신의 얼굴을 툭툭 건드렸다.

방어 마법까지 풀어버린 것이 영락없는 도발이다.

이래서 단순한 놈들은 안 돼.

툭-

"한 대 때렸다, 인간! 간지럽지도, 않다! 인간, 약하다! 하얀 샘물, 강하다!"

두 대.

세 대.

네 대.

다섯 대.

몸이 무겁다. 입에서 단내가 올라왔다. 의도했던 상황이지만 힘든 건 힘든 거다.

하얀 샘물이 입을 쩍 벌렸다.

"나온다, 하품. 약한 인간, 이제 볼 일 없...…끼엑!"

그리고 마지막.

여섯 대.

- [카운트 스매시]가 발동됩니다.

- 마나가 [5] 소모됩니다.

꽈앙-

요란한 폭음이 숲을 뒤흔들었다. 천근만근 무겁던 몸도 가벼워져 있었다.

"키엑, 키에엑-!! 어떻게! 하나에 여섯 대를 더 때렸는데, 어떻게!"

오물에 처박힌 하얀 샘물이 눈을 까뒤집은 채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통증도 통증이지만 지금 이 상황 자체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배쉬로 한 번. 화염병으로 한 번, 스턴건으로 한 번. 그리고 발길질로 한 번. 마지막으로 네놈이 맞아준 여섯 대. 도합 열 대다."

이미 거대 사마귀를 이용해 검증해 둔 사실이다.

"마지막 열 번째 공격만 이걸로 때리면 되는 거였거든. [배쉬]를 안 막고 피했으면, 한 대 더 때려줘야 할 뻔했어."

부웅-

오른손에 든 척추분쇄자로 허공을 휘저으며 빙긋 웃어주었다.

무식하게 달려들던 흉내쟁이보다 쉬운 상대였다.

"단순한 놈 같으니라고."

몇 군데 부러진 모양인지. 하얀 샘물이 지렁이처럼 바닥을 기었다.

"인간, 하얀 샘물, 살려준다. 하얀 샘물, 검은 인간에게 속았다. 불쌍한, 고블..."

- [배쉬]가 발동됩니다.

- 오늘 남은 사용 횟수(1/3)

빠악-

하얀 샘물의 목이 축 늘어졌다.

어디 감히 감성팔이를 하려고.

- [검은 숲]에 적용된 [하얀 샘물의 저주]가 해제됩니다.

만족스럽게 웃으며 메시지를 확인했다. 한 가지 조금 아쉬운 점은.

- 정화가 불가능한 대상입니다.

행여라도 흉내쟁이처럼 부하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저 녀석은 예외인 모양이다.

이성이 남아있어서일까.

"뭐, 안 되면 어쩔 수 없지."

이제 하얀 샘물이 빼돌렸던 조상신의 정수만 취하면, 고블린들은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

나도 고블린의 마력을 얻어 포션을 제작할 수 있을 테고.

"안 그러냐? 흉내쟁이. 아까는 뭐, 도주 경로 탐색? 인간은 인마, 도구랑 머리를 쓸 줄 알아서 인간인 거야."

[BETA-0702의 판단 오류.]

[사장에 대한 존경심 상승.]

그림자를 주억거리는 흉내쟁이.

자식, 진작 그럴 것이지.

"그럼, 이제 조상신의 정수만 찾으면 되는 건가."

막 퀘스트를 완료하려는 찰나.

-드드드드득-

숲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몸이 세차게 휘청였다. 어쩔 수 없이 썩은 진창을 짚고 균형을 잡아야만 했다.

"...지진?"

콰과과과-

숲 전체가 흔들렸다. 발밑이 휘청이고, 늪이 출렁거렸다.

그렇게 혼란스러운 상황이 일 분간 지속되었고.

"이게 뭔 난리래. 젠장."

오물이 뒤범벅된 손을 툭툭 털며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기분 나쁜 소리가 바람을 타고 전해졌다.

그으으윽-

끄으으으윽-

첨벙, 철퍽. 철퍽.

기괴하고 느릿한 메아리가 울렸다. 그와 동시에.

파지지짓-

허공이 갈라지며 한 사내가 튀어나왔다.

"한승현 님, 도망치셔야 합니다!"

"조상신? 갑자기 이게 무..."

뭐라 말할 새도 없이 무지막지한 완력으로 나를 잡아끄는 조상신.

내가 본 마지막 풍경은.

- [메인 퀘스트]의 내용이 변동됩니다.

시스템의 메시지와.

그으으으윽-

오염된 늪 밑바닥에서 기어 올라오는, 새까맣게 부패한 고블린 떼였다.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24화

"깨어나셨습니까."

익숙한 음성이 들렸다. 눈을 떠 보니 익숙한 모닥불이 보였다. 조상신의 거처였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두리번거리는 나를 향해 조상신이 침울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왔다.

"...저희는 실패했습니다."

잘못 들은 건가 싶어 조상신을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뜻이야?"

"한승현 님께서 알고 계실진 모르겠지만, 조금 전 처치한 하얀 샘물은 숲의 관리자였습니다."

"알고 있어. 놈을 처치하고 검은 숲을 원래대로 돌려놓는 것. 그게 너희들이 원하던 것 아니었어?"

"맞습니다. 그런데 문제는...그의 역할입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조상신이 입을 열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한승현 님의 활약으로 기억이 어느 정도 돌아왔습니다."

* * *

조상신의 이야기는 꽤나 길게 이어졌다. 요점은 간단했다. 하얀 샘물을 처치하기엔 시기가 너무나도 일렀다는 것. 대비가 부족했다는 것.

"그러니까, 그 썩은 늪지 아래에 잠들어있던 게..."

"그렇습니다. 일명 '실패작'들입니다."

실패작.

하얀 샘물을 꾀어 이 사달을 만든 인간은 늪지의 그것들을 실패작이라 불렀다.

그리고.

동족을 배신한 푸른 숲의 족장이자 숲의 관리자에게 주어진 임무는.

"실패작들이 쭉 폐기장에 머물 수 있도록 관리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철저히."

"설마, 숲 전체에 걸린 디버프가...."

머릿속의 퍼즐이 맞춰졌다.

고블린의 스탯을 대폭 깎아버리는 [하얀 샘물의 저주]는, 처음부터 높은 산 부족의 침입을 막기 위한것이 아니었다.

늪지의 그것들이 힘을 쓰지 못하도록. 평생 밖으로 기어 나올 수 없도록 펼쳐놓은 일종의 억제제제였다.

"그럼, 저주가 사라졌으니 그 많은 것들이 전부 이곳으로?"

"당장은 아니지만..."

조상신이 말꼬리를 흐렸다. 확실한 건, 그는 동요하고 있었다.

이곳으로 전이하기 전 얼핏 본 숫자만 해도 수백.

그게 끝이 아니다.

나는 분명 놈들의 뒤에서 번쩍이던 서슬 퍼런 안광을 보았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단순한 고블린이 아니다.

아무리 검은 바위가 강하더라도. [지식의 통제]가 깨어졌더라도. 높은 산 부족의 생존을 장담할 수 없다. 아니, 이대로라면 멸망은 확정적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고민에 빠져있던 그때. 조상신이 결정을 내린 듯 입술을 깨물었다.

"어쩔 수 없군요. 지금부터 제가 하얀 샘물의 역할을 대신하는 수밖에..."

"네가? 무슨 방법으로? 동굴 밖으로 나가기도 힘들다며."

"...그건, 일시적으로 제가 저이기를 포기하면 가능합니다."

"그게 무슨...?"

덤덤하게 이야기하는 조상신의 안색이 좋지 않다.

"관리자로서 부끄러운 일이지만...지금 저희가 의지할 수 있는 건, 유일한 인간인 한승현 님뿐입니다."

그런 것쯤은 이미 알고 있다. 모른 체할 생각도 없고. 어찌 보면 나로 인해 벌어진 일.

처음부터 내가 검은 숲에 들어가지 않았더라면...고블린들은 평범한 일상을 유지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내 손으로 해결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와중. 조상신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는 손바닥을 내밀었다.

곧이어 조상신의 손바닥 위로 붉은 기운이 일렁였다. 그 위로 나타난 건.

이런 방식은 법칙을 무시하는 거지만...제가 선택한 최후의 수단입니다. 받아 주십시오."

"구슬...? 이걸 왜 나한테?"

"마력 필터입니다."

손바닥 위로 붉은 구슬을 꺼낸 조상신의 낯빛이 창백하다.

"그리고, 승현 님이 원하시던 '조상신의 정수'이기도 합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당황했다.

이런 식으로 얻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데. 기쁨과 당혹감이 함께 찾아왔다. 피가 다 빠져나간 듯 얼굴이 새파래진 조상신을 향해 물었다.

"...너, 진짜 괜찮은 거야?"

"조금 버겁긴 하지만, 이 정도는 견딜 만합니다. 괜찮습니다."

피식.

조상신이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웃어 보였다. 구슬을 받아들자 메시지가 나타났다.

- [마력 필터]를 흡수하시겠습니까? [Y/N]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것은 순식간에 붉은 액체가 되어 녹아들듯 내 손바닥 안으로 흡수되었다.

[마력 필터]

* 사용자의 마나를 등록된 슬롯의 마력으로 치환할 수 있습니다.

* 마력 필터를 추가로 흡수하면, 슬롯을 확장할 수 있습니다.

현재 슬롯 : [1]개

1. [고블린]

그리고, 새로운 퀘스트가 나타났다.

[새로운 대지를 향해]

- 현재 채널에선 사용자의 성장이 불가능합니다. 눈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채널을 탐색하십시오.

보상 : 유대 포인트 [100]

멍하니 순식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정리했다. 그러자, 조상신이 어서 가보라는 듯, 넋 나간 내 등을 가볍게 떠밀었다.

그리고는 무언가가 떠오른 듯 손뼉을 탁, 쳤다.

"아참, 한 가지 더 챙겨가실 게 있습니다."

"...?"

"검은 바위에게 언질을 줘 두었습니다. 마력 필터를 얻은 김에, 높은 산 부족의 비전 중 하나인 치유 포션 제작법도 함께 받아가시죠."

* * *

[AR-001] 채널을 빠져나온 지 일주일이 지났다.

교류 보상으로 받은 유대 포인트를 이용해 채널의 탐색을 신청해 두었지만.

- [채널 탐색 중...…]

아직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리고.

- [AR-001] 채널은 현재 대규모 개편 중입니다.

- 관리자의 요청으로 접근이 차단되었습니다.

채널 또한 봉쇄되었다.

생각지도 못한 강제 휴가. 그간 몇 가지의 소득이 생겼다.

가장 큰 두 가지는 치유 가속 포션의 제작이 가능해졌다는 것과.

[이해와 분석]의 숨겨진 기능이 발견되었다는 것.

[붉은 벌레의 체액] : 5%의 농도로 희석한 [트롤의 피]로 대체 가능.

[질긴 도끼풀의 이파리] : 건조된 [하급 피안화]로 대체 가능.

덕분에 재료 수급에 차질을 빚지 않을 수 있었다. 게다가 생각지도 못한 행운이 두 가지 더 있었으니.

- 재료의 정확한 계량에 성공하셨습니다!

- 포션 제작에 소모되는 마나가 절반으로 감소합니다.

- 메인 옵션의 등급이 한 단계 상승합니다.

[중급 치유 가속 포션]

등급 : 매직++

옵션 : [중급 외상 치유], [하급 치유 가속]

높은 옵션과 줄어든 마나 소모량.

[장인의 손길]이 가진 실패율 보정 효과와 [은퇴한 알케미스트의 장갑]에 붙은 손재주 스탯이 불러온 행운이다.

"[중급 외상 치유]라면, 골절상까지도 회복이 가능할 텐데."

말 그대로 대박이었다.

헌터들이 눈에 불을 켜고 탐낼 만한 옵션.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 보유한 마나를 [마력 필터]에 등록된 [고블린]의 마력으로 치환하시겠습니까?

- [치유 가속 포션] 제작 시 마나가 [20] 소모됩니다.

절반으로 줄어들었음에도 여전히 마나 소모량이 어마어마하다는 것.

현재 내가 보유한 마나는 31.

즉, 하루에 제작할 수 있는 포션은 한 개뿐이란 소리다.

그렇게 해서 지금까지 총 일곱 병의 포션이 제작되었다. 조만간 기회를 봐서 풀어버릴 생각이다.

물론, 백색의 연금술사라는 가면 뒤에서 말이다. 아직 세상 밖으로 나가기엔 시기상조이니까.

그리고 한 가지 더 신경 쓰이는 걸 꼽자면.

"...맛있냐?"

[소화 중 : 하얀 샘물(42%)]

대체 언제 주워 먹은 건지. 하얀 샘물은 흉내쟁이의 뱃속으로 사라졌다. 소화가 끝나면 무언가 유의미한 변화가 일어날 것 같긴 한데, 지금으로서는 알아낼 방법이 없다.

그림자 속에 틀어박힌 흉내쟁이를 보며 고개를 젓던 나는,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생활 속 인챈트 : 인챈트의 기초와 조화로운 옵션.』

『저자 : 한기호』

공방을 뒤져 찾아낸, 아버지의 독창적인 인챈트 방법이 서술된 책이다.

내용적인 측면에서 실질적인 아이템의 대량 생산 효율이 떨어지는 방식이기에 안타깝게도 출간되진 못했지만.

제작자의 단계를 밟아가는 지금의 나에겐 성서와도 같은 물건. 일주일 내내 시간이 날 때마다 독서에 열중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성과를 확인할 시간이다. 경건한 마음으로 슬리퍼를 벗어 책상에 올려두었다.

"오늘은 꼭 성공한다..."

하루에 한 번.

포션을 제작한 뒤 남는 마나를 사용하는, 나만의 소소한 도전이다.

오늘 도전할 항목은 가장 쉽다는 충격 완화.

옵션을 부여하기 위해 슬리퍼의 구조를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분명, 충격 완화에 최적화된 부위는..."

이미지를 끊임없이 떠올리며 마나를 움직였다. 손끝을 타고 변형된 마나가 슬리퍼를 향해 스며들어 간다.

- 마나가 [10] 소모됩니다.

결과는.

펑-

실패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터져버린 슬리퍼. 파편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이런 씨, 어제 사 온 건데...."

실패 요인은 명확했다. 마력 부여범위 지정 미숙과, 이미지가 불투명했던 것.

일개 슬리퍼에 옵션을 불어넣는 것도 이렇게 어려운데, 아버지는 어떻게 제작과 인챈트, 두 가지를 병행하셨던 걸까. 알면 알수록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그건 그렇고, 가게는 어떻게 한다."

주섬주섬 잔해를 치운 나는, 새 신발로 갈아신은 뒤 카운터에 앉아 고민에 빠졌다.

새로운 채널이 열리면 높은 산 부족처럼 무언가 퀘스트가 주어질 확률이 높았다.

당연히 가게를 비우는 시간이 길어질 테고. 무언가 대책이 필요한데.

"춘식이한테 도움을 요청해 봐? 아니, 아니지. 가게 접을 일 있나."

춘식이에게 맡겼다간 어떤 대참사가 일어날지 모른다. 간단한 사칙연산도 버거워하는 놈이니까.

본인의 말을 빌자면 사나이는 구구단만 외울 줄 알면 된다던가.

"그건 절대 안 돼. 조만간 구인 공고라도 올려야겠다. "

한숨을 내쉬며 낡은 가죽 소파에 몸을 묻었다.

스마트폰을 꺼내 인터넷을 뒤적거리던 와중, 지역 신문에 올라온 기사의 제목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 [속보] 제피로스 클랜, 대전 보문산에 발생한 6급 균열 공략 신청. 승인 대기 중.

1급부터 10급까지의 등급 중 6등급이면 상당한 난이도다.

어지간한 클랜은 공략 엄두조차 낼 수 없는 규모. 저게 얼마 전 다급하게 포션을 매입한 이유였군.

실시간 랭킹에 올라가서인지 기사에는 댓글이 활발히 작성되고 있었다. 손가락을 슥슥 움직이며, 댓글을 훑어봤다.

└아레스가 두 눈 뜨고 있는데 제피로스가 선수를 치네ㅋㅋㅋ들어가 봐야 전멸할 게 뻔한데 왜 하는 거임?

└솔직히 제피로스라도 아레스한테는 못 비비지. 저러다 뱁새 가랑이 찢어진다.

└위에 두 놈 아레스 소속이지? 다 티난다ㅋㅋㅋ

└포세이돈인데? 제피로스가 간부급 헌터들을 제외하면 아레스에 비해 수준이 떨어지는 건 팩트 아닌가? 실패할 게 뻔하지 뭐

└얘 말이 맞음. 대규모 균열 공략은 머릿수도 중요한데 몇몇 간부들만 실력이 좋으면 뭐 해? 나머지가 하자인데.

└들리는 소문으로는 백색의 연금술사인가 하는 사람이 제조한 포션을 대량으로 구했다던데? 특수 포션을 대량으로 구한 거면 해볼 만하지 않을까?

└그 얘길 아직도 믿음? 제피로스에서 낸 헛소문 때문에 인력낭비 제대로 했다고 아레스에서 이를 갈고 있다던데?ㅋㅋㅋ조만간 한 번 부딪힐 듯

└그럼 그게 다 구라였다는 거? 헌터넷에 뜬 게? 머저리 새끼네 그거 쓴 놈ㅋㅋㅋㅋㅋㅋ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

반응을 보아하니 대다수의 헌터들이 치유 가속 포션의 존재를 부정하는 듯했다.

하기야. 제피로스와 춘식이를 제외하곤 포션을 본 사람이 없으니. 그럴 만도 하지.

"뭐, 어쨌거나 이렇게 되면 나야 좋지. 필요 이상의 주목을 안 받아도 되고."

확실한 실력을 갖추기 전까진 지나친 관심은 독이 될 수 있으니까.

"흐음, 제피로스에 관한 기사는 이게 끝인가."

손가락을 움직여 스크롤을 슥슥 내렸다. 그때, 시선을 잡아끄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 각성자의 일탈 행위. 어디까지 용납되어야 하나.

주간 랭킹 3위. 실시간 랭킹 5위. 댓글 3.2만 개.

화제성 짙은 기사의 메인 사진을 장식한 건...하반신이 모자이크된 반나체의 사내다.

"100M 밖에서 봐도 장춘식이구만."

기사를 캡쳐해 춘식이에게 보냈다. 곧바로 띠링- 수신음이 울린다.

- 모자이크 사이즈 보이지? 앞으로 형님이라고 불러라.

와, 이 대책 없이 긍정적인 새끼.

나였으면 10박 11일을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었을 텐데. 감탄밖에 안 나온다. 존경스럽다. 존경스러워.

- 씹냐?

- 형님이라고 부르라고

- 야

어디 내놔도 부끄러운 놈이다.

내가 다 창피하다.

"어쩌다 쟤랑 친구가 됐을까..."

- 그나저나 그거 아냐? 네가 준 갑옷, 진짜 개쩔던데?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기분이야

메시지를 보니 아무래도 이상한 쪽으로 눈을 뜬 것 같다. 어쩐지 찝찝해져 차단 목록에 춘식이를 추가했다.

"너 많이 입으세요..."

연신 진동이 울리는 핸드폰을 구석으로 치워버린 나는 소파에 몸을 묻었다. 요 며칠간 영 잠을 못 자서인지 피로가 몰려왔다.

"손님도 없는데 눈 좀 붙일까?"

번쩍-

스르륵 눈을 감자 어둠 속에서 한 쌍의 불빛이 나타났다. 잠이 확 달아났다.

"망할...."

늪지대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악취가 뒤섞인 어둠 속에서 푸르게 빛나던 안광.

부정하고 싶은 사실이지만.

그때의 나는 놈에게 위축되었다.

일주일간 시달린 불면의 원인을 떠올리자 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다음에 마주쳤을 땐..."

절대 이렇게 물러나지 않는다.

썩은 늪지에 묶여있는 놈과 다르게, 나는 연금술사이자 차원 교류자니까.

퀘스트. 차원 상점. 새로운 문물.

승산은 충분했다.

"이번 채널에서 반드시 돌파구를 찾아낸다."

재차 다짐하던 그때.

- 띠링.

일주일 내내 기다리던 알림음이 울렸다.

- 신규 채널, [BR-372]를 발견했습니다.

- 해당 채널의 임시 통행증이 발급됩니다.

- [중급 이해와 분석]이 시전됩니다.

- 채널의 추가 정보가 표시됩니다.

*[BR-372]

* 채널 등급 : [6등급]

* 채널 위험도 : [보통]

* 주요 거주 종족 : [엘프]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25화

새로운 채널에 진입한 나는.

길을 잃었다.

"환장하겠네, 진짜."

삭풍이 부는 새하얀 설원을 걸었다. 걷고 또 걸었다.

순백의 사막.

절경(絶境)을 보며 감탄하던 반나절 전의 내가 원망스럽다.

"대체 여기가 어디야?"

한풍이 스쳐 가는 이마 위로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배낭에 가득 찬 식료품과 도구들로 어깨가 무겁다.

만능 운송 수단인 흉내쟁이가 있는데 왜 이런 고생을 하냐 하면.

[소화 중 : 하얀 샘물(61%)]

[흡수 전까지 [이면의 공간] 이용 불가.]

일신상의 문제로 휴업 중이시기 때문이다. 평소 같았으면 한 번 밟아줬겠지만....

[완료 후 변이 예정.]

이번엔 넘어가기로 했다.

나에게 있어서 흉내쟁이는 중요한 인벤토리, 아니. 전력이니까.

지금 나를 진정 답답하게 만드는 건 따로 있었다.

[새로운 대지를 향해(완료)]

현재 유대 포인트 : [268]

텅 빈 퀘스트 알림창이다. 목적지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 [미니맵]과 [네비게이션] 기능은 현재 사용할 수 없습니다.

길잡이도 없는 상황이다.

뭐가 있어야 교류라도 할 텐데, 보이는 것이라곤 허허벌판뿐이다.

"거주 종족이 엘프라고 했으니까...숲을 찾아야 하나? 이런 곳에 숲이 있을까?"

주변이 탁 트여 있음에도 나무 한 그루조차 보이지 않는다.

있는 거라고는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바싹 말라버린 잡초들뿐.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큰일이다.

"일단 불부터 피우자."

이대로 포기하고 돌아가기엔 아쉬웠다. 배낭에 고정해 둔 침낭을 꺼낸 뒤 불쏘시개로 쓸만한 것들을 긁어모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건조한 기후 덕에 쓸만한 것들이 제법 있었다.

마른 잔가지와 이파리들을 주워, 바닥의 눈을 대강 밀어낸 뒤 이제는 필수품이 된 파이어스틸을 사용했다. 곧이어 화르륵- 불씨가 피어오른다.

"후우, 좀 살 것 같네."

간혹 불어오는 한풍이 문제였지만, 못 견딜 정도의 추위는 아니다.

이 정도라면 파카와 모닥불. 그리고 침낭으로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옷깃을 여미며 파카에 붙어있는 모자를 뒤집어쓰던 와중,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온종일 굶었네."

뒤늦은 허기가 찾아왔다. 가방을 뒤져 컵라면과 작은 냄비를 꺼냈다.

"생수는 아껴야지. 언제 필요할지 모르니."

냄비에 눈을 가득 채운 뒤 모닥불에 올렸다. 금방 녹은 눈이 보글보글 끓었다.

뜯어 둔 컵라면에 물을 붓고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어두워진 하늘엔 맑은 별이 가득하다.

아름다운 광경이다.

"이것도 나름대로 운치 있네. 캠핑 온 기분도 나고."

어두운 밤하늘에 까마득하게 피어난 별이라.

확실히 내가 살던 곳과 다른 세계라는 게 체감이 된다.

"달은...하나네. 판타지 소설이나 영화에선 보통 두세 개씩 뜨던데. 그래도 지구의 달보다는 조금 더 큰가?"

귀에는 이어폰. 손에는 젓가락.

별을 보며 배를 채웠다.

늘어졌던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여기에 술만 있으면 최고일 텐데. 이왕이면 소주로."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가방의 공간은 한정적이니까.

아쉬운 마음을 털어버리며 컵라면으로 시선을 돌린 순간.

스릉-

턱 아래로 느껴지는 서늘한 감촉. 날카로운 예기.

시선을 내리자 새하얗고 가냘픈 손이 보였고. 그 손에 쥐어진 시퍼런 단검이 내 목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대체 언제....'

아무런 기척도 못 느꼈는데.

외통수다. 이건 못 빠져나간다.

공격 의사가 없다는 걸 알리기 위해 양팔을 천천히 머리 위로 들었다.

그러자.

귀에 꽂은 이어폰의 볼륨을 뚫고 맑고 차분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 누구시죠?"

"신분을 묻기 전에 먼저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게 예의 아닐까?"

나도 모르게 쏘아붙였다.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는지 상대의 칼끝이 조금 흔들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후회했다.

행여라도 손이 미끄러졌다면 교류고 나발이고 다 끝날 뻔했으니까.

잠시 뜸을 들이던 상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는 로제. 겨울숲 부족의 입구를 지키는 파수꾼입니다."

"한승현이다. 잡화상 주인이지."

목에서 칼이 거두어졌다. 상대가 의아한 듯이 말했다.

"한승현? 생소한 형식의 이름이네요?"

내 이름이 어때서.

천천히 손을 내리는 나를 향해 로제라는 여자가 경계심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얼굴을 확인해야 하니 쓰고 있는 후드를 벗어주시죠."

나 또한 상대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그리고, 조금 놀랐다.

'이게...엘프?'

20대 초 중반 정도 되었을까.

길게 물결치는 흑발에 새하얀 피부. 새까만 눈동자.

가벼운 경갑 위로 두꺼운 망토를 걸친 로제란 여인은 상상 속의 엘프. 그대로였다.

그리고, 시선을 옮기던 내 눈에 들어온 건.

'짧은 귀?'

엘프가 긴 귀를 가졌다는 건, 단순히 허구적인 상상력이 가미된 설정일 뿐이었나.

여러 생각이 교차하던 찰나.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을 더 동그랗게 뜬 로제가 물었다.

"인간이에요? 엘프가 아니라?"

* * *

"그게 정말이에요, 실프? 확실한 건가요?"

오두막을 나선 로제가 허공을 바라보았다. 새하얗게 쌓인 눈 위로 포근한 바람이 한차례 불어왔다.

"오래간만의 일거리네요. 고마워요. 실프."

오로지 계약자인 그녀만이 들을 수 있는 정령의 의념. 대략적인 이야기를 전해 들은 로제가 긴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생긋 웃었다.

"마음은 안 좋지만...이번에 성과를 올리면, 마을 안에 들어오는 걸 허락해 주실지도...."

생각만 해도 행복하다.

입을 가리고 킥킥거리던 로제가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그러면 맛있는 과일을 먹을 수 있지 않을까요. 감자는 이제 지겨워요. 그리고 또, 다른 엘프들이랑 같이 이야기도 하고. 마을에는 새로운 책도 많이 있겠죠?"

실프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이 난 로제가 허리춤에 매여진 단검을 만지작거렸다.

"그렇게 되었으면...좋겠네요."

꼬르륵-

중얼거리던 그녀의 배가 작게 울렸다. 그러고 보니 내내 독서에 집중하느라 하루를 공복으로 보낸 게 떠올랐다.

가방 안에서 감자를 꺼낸 로제가 껍질을 대강 떼어낸 뒤 한 입 베어 물었다.

"어머니가 그러셨는데, 예전에는 감자에 소금이라는 걸 찍어 먹었대요. 바다라는 곳에서 구할 수 있는 건데, 신기하죠? 실프는 소금을 본 적 있나...어라?"

허공을 향해 재잘대며 걷던 로제의 걸음이 멈췄다.

"이 좋은 냄새는...어디서 나는 걸까요?"

어딘가 자극적이고 인위적이지만 식욕을 돋운다. 절로 침이 고인다.

'생전 처음 맡아보는 종류의 향인데.'

열심히 감자를 우물거리던 로제를 향해 실프가 무언가를 속삭였다. 눈을 동그랗게 뜬 로제가 반문했다.

"그러니까, 이곳에 방문한 분에게서...나는 거라고요?"

긍정의 의미를 실은 바람이 따스하게 불어왔다. 침입자의 정체가 뭘까. 궁금해진 로제가 발걸음을 바삐 움직였다.

잠시 후.

저 멀리 작은 불빛이 보였다. 모닥불을 확인한 로제의 얼굴이 굳어졌다.

"저분인가요. 불을 사용하는 걸 보니 마법...은 아니네요."

가만히 마력을 탐지하던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법사 특유의 마나 배열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자연적으로 발화한 불에 더 가깝다. 그렇다는 얘기는....

"정령사였군요. 저 이외의 정령사는 처음 보는데, 신기하네요. 그런데 왜 저분에게선 정령의 향기가 느껴지지 않을까요?"

가까이 갈수록 앉아있는 상대의 모습이 명확하게 드러났다.

불 가에 앉아 후드를 뒤집어쓰고 무언가를 먹는 사내.

손에 들고 있는 작은 그릇에서 그녀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향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꿀꺽.

작게 침을 삼킨 로제가 은밀하게 그의 뒤로 돌아갔다. 붉은 수프가 눈에 들어왔다.

감자와 물, 그리고 몇몇 채소가 들어간 그녀의 주식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호화스러운 수프.

꿀꺽. 로제가 재차 침을 삼켰다.

재료가 뭘까. 어떻게 만든 거지.

수프 위로 나타난 유혹의 정령이 그녀에게 속삭였다.

어서 날 먹어 줘. 한 입이면 넌 행복해질 수 있어.

'이러면 안 돼....'

하마터면 넘어갈 뻔했다.

자신의 본분을 떠올린 후 마음을 다잡았다.

지척까지 다가온 로제의 기척을 느끼지 못한 듯 식사에 열중하고 있는 사내.

스르릉-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기 위해, 로제가 허리춤에 매달린 단검을 뽑았다.

* * *

"그러니까, 당신은 혼혈 엘프라는 겁니까?"

"맞아요. 아버지가 엘프, 어머니가 인간. 과거에는 하프 엘프라고 불렸지만...뭐, 이 얘기는 넘어가도록 해요!"

다행이다.

처음 만난 이 채널의 거주민은 나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보다 설마 이곳에서 인간을 만날 줄이야...!!!"

로제는 퍽 기뻐 보였다.

조금 전까지 내 목에 시퍼런 칼날을 들이댄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한승현은 어디서 왔어요?"

"으음. 한국이라는 곳인데, 여기서 좀 먼 곳입니다."

"한국은 인간들의 왕국인가요? 인간이 많이 살고 있나요? 한승현은 한국에서 얼마나 살았나요? 한국의 인간은 뭘 먹고 살죠? 감자? 아니면, 과일? 인간들은 책을 많이 읽는다던데, 저도 인간이 쓴 책이 궁금해요!"

질문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대다수가 인간의 생활에 관한 질문이었다. 적당히 대답해 주는 나에게 로제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겨울숲 부족을 찾아오신 건가요?"

겨울숲 부족이라.

대강 유추해보자면 높은 산 부족처럼 엘프들이 사는 곳으로 보이는데.

적당히 넘겨짚으며 고개를 끄덕이니 로제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그렇군요...."

무언가 풀이 죽은 목소리다. 이유를 묻자, 로제가 손사래를 쳤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로제가 생긋 웃었다.

확실히 엘프의 피가 섞여서 그런 건진 몰라도, 초월적인 아름다움이다. 주변이 환해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그보다, 오늘은 시간이 너무 늦었네요. 지금은 부족에 방문하긴 어려울 테니. 내일 날이 밝았을 때 다시 찾아가시면 될 거예요."

"날이 밝으면...이라. 어쩔 수 없군요. 늦은 시간에 찾아가는 것도 예의가 아니니. 오늘은 여기서 밤을 지새우는 수밖에."

그런데, 겨울숲 부족은 어떻게 찾아가야 하지. 종일 걸었음에도 흔적조차 찾질 못했는데.

내 속마음을 읽은 듯, 로제가 허공을 향해 슬쩍 손을 휘저었다.

"뭐, 인간이니 상관 없겠죠. 지금 풀어드릴게요. 실프, 부탁해요."

눈가에 한 차례 따스한 바람이 머문 뒤 지나갔고. 잠시 후, 주변이 일렁이며 새하얀 벌판 위로 작은 길이 나타났다.

"이 길을 따라 쭉 걸어가시면 될 거예요."

"..."

지그재그. 갈팡질팡.

바닥에 찍힌 발자국의 배열이 바뀌었다. 전부 내가 남긴 흔적이다.

반경 백여 미터 안에 어지러이 흩어진 흔적들은, 쳇바퀴처럼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지금까지 한 곳을 향해 똑바로 걷고 있는 줄 알았는데. 발자국을 보니 귀신에 홀린 기분이다.

"정령들을 이용해서 할 수 있는 간단한 눈속임이에요. 감각을 비트는. 한승현이 인간인 줄 알았더라면 진작 풀어드렸을 텐데. 죄송해요."

로제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지금까지의 고생을 떠올리니 조금 허탈해졌다. 그래도 화는 나지 않았다. 로제는 자신의 본분에 충실했던 것뿐이니까.

그보다 신경에 거슬리는 건.

"굳이 그렇게 이름을 다 부를 것 없이, 편한 대로 부르셔도 됩니다."

계속 어색하게 성과 이름을 합쳐 나를 부르는 로제다. 매번 안간힘을 쓰는 얼굴로 미뤄보니 발음에 어려움을 겪는 듯했다.

"정말요? 으음...그럼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한. 한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이게 가장 자연스러운 것 같아요."

내 제안에 로제의 표정이 밝아졌다. 추측이 맞아떨어진 모양이다.

"편한 대로 하시죠."

적당히 대답하며, 차게 식어버린 컵라면의 내용물을 땅에 파묻었다.

조금 아깝다. 아직 반도 못 먹었는데.

그때.

"아앗..."

등 뒤에서 옅은 탄식이 들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로제가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왜 그러십니까?"

"그, 그거...그냥 버리는 거예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언뜻 드러난 로제의 얼굴은 조금 화가 난 것 같기도 했고, 아쉬운 것 같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보자,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이런, 내가 큰 실수를....'

일반적으로 알려진 상식이 정확했던 모양이다. 엘프는 자연을 사랑한다고 했던가.

그걸 망각하고 하프 엘프인 로제의 앞에서 음식물 쓰레기를 맨땅에 파묻다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당황한 나를 향해 로제가 다가왔다.

어쩌지, 사과해야 하나.

입술을 꽉 깨문 걸 보니 단단히 분노한 모양인데.

응당 잘못한 게 있으면 용서를 구해야 하는 법. 넙죽 허리를 숙였다.

"별생각 없이 그만. 정말 미안합니..."

"방금 땅에 묻으신 저 수프. 더 없는 건가요?"

"....예?"

손가락으로 빈 컵라면 용기를 가리키는 로제의 새하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잔뜩 익은 홍시가 된 로제가 더듬더듬 말했다.

"혹시 더 있으면...저한테도 조금만 나눠주시면...안 될까요?"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26화

겨울숲 부족의 젊은 엘프이자 차기 장로 후보, 이안이 하늘을 바라보며 기분 좋게 웃었다.

"오늘 날씨가 유달리 포근한 걸 보니, 좋은 일이 생길 모양이야."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아래로, 따사롭게 내리쬐는 햇살을 만끽하며 걷던 그의 눈앞에 약 5m 높이의 장벽이 나타났다.

마을 입구를 지키는 외벽.

그 위에서 나지막한 외침이 들려왔다.

"공사가 다망하신 이안 님께서 여긴 어쩐 일이지? 혹시 몸이 근질근질해서 나 대신 근무라도 서려고 나온 건가?"

귀에 익은 목소리.

그의 친우이자 겨울숲 부족의 외벽 경비 담당. 에크만이었다.

그를 발견한 이안이 몸을 날려 단번에 외벽 위로 올라섰다.

"그냥 바람이라도 좀 쐬러 나왔네. 근무는 잘 되어가나?"

"몸이 근질거려 죽을 것 같네. 이러다가 삭신이 다 녹슬어버릴까 걱정이군. 안 쓰면 병기든 몸이든 고장 나기 마련이니까."

툴툴거리던 에크만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이어갔다.

"그나저나 너무 평화로운 것 같단 말이지. 다크 엘프 놈들은 코빼기도 안 보이고. 가끔 드는 생각인데, 이참에 시원하게 한 판 붙었으면 좋겠구만."

"그런 소리 말게. 이게 어디 쉽게 얻어진 평화인가. 자네 지난번 일 기억 안 나나?"

"농담일세. 그리고, 엘븐 아르테스의 달인인 자네가 그런 약한 소리를 하면 쓰나. 모르긴 몰라도, 놈들이 한 무더기로 와도 자네가 다 이길 걸세."

"그거야, 실제로 해 봐야 알 일이지. 다크 엘프를 만만히 보지 말게나."

이안이 저 멀리 펼쳐진 끝없는 설원을 보며 중얼거리던 그때. 두 엘프의 뾰족한 귀가 동시에 움직였다.

"자네, 들었나?"

"자네도? 지금 잘못 들은 거 아니지?"

낯선 목소리.

중저음인 거로 보아 분명 지난달에 외출한 대사제는 아니었다. 두 엘프가 다시금 귀를 기울였다.

-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컵라면 네 개에 봉지라면 세 개를 다 먹어? 혼자서?

확실했다. 남자의 목소리다.

이안과 에크만. 두 엘프가 경계 태세를 갖추며 인상을 찡그렸다.

"목소리가 아주 쌩쌩하군. 로제, 그 망할 계집이 또...."

"침입자를 멀쩡히 보낸 죄는 차후에 내가 묻도록 하겠네. 자네는 장로님께 이 소식을 전하게나. 저자는 내가 막도록 하지."

"알겠네. 자네의 실력은 잘 알고 있지만, 혹시 모르니 조심하게나."

휙-

외벽 아래로 뛰어내린 에크만을 바라본 그의 시선이 설원을 향해 움직였다.

"어디, 얼마나 간 큰 녀석인지 한 번 봐야겠군."

불청객이 마지막으로 방문한 게 언제였더라. 여튼 꽤 지난 일이지만, 그들이 가진 외형적 특징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아니, 그 누구라도 다크 엘프를 처음 보는 순간 알 수 있으리라. 엘프와 다크 엘프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그런데, 저 멀리 보이는 침입자는 그가 기억하던 다크 엘프의 특징에 전혀 부합하지 않았다.

"신종 다크 엘프인가."

놈은 로브와 비슷한 옷을 입고, 부드러운 짐승의 털이 달린 후드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있었다.

이안이 인상을 찌푸렸다.

저 더러운 발걸음이 신성한 대지를 밟도록 내버려 둘 순 없다.

이안이 침입자를 향해 훌쩍 몸을 날렸다. 극에 달한 윈드워크가 발동되며, 허공을 한 차례 차올린 그가 가볍게 바닥에 착지했다.

"멈춰라. 네놈!"

이안이 호기롭게 주먹을 말아쥐며 외쳤다.

상대는 다크 엘프, 부족 최고의 전사인 그라도 방심해선 안 될 상대였다.

막 몸을 움직이려던 그때, 침입자가 입을 열었다.

"여기가 겨울숲 부족입니까?"

"그렇다! 아, 아니. 그렇소.... 당신은 누구시오?"

침입자가 취할 태도가 아니다. 당황한 이안이 황급히 말을 높였다.

누구일까.

이안이 막 의문을 품던 그때. 상대가 천천히 후드를 벗었다.

"안녕하십니까, 여행자인 한승현입니다. 한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으헙...!!"

사내의 모습을 확인한 이안이 비명을 삼켰다.

그가 알기로 엘프와 똑같은 피부를 가진 존재는. 로제, 그리고.

"인간...?"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사내를 보며, 이안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냥 들여보내 준 이유가 있었군.'

아침부터 무언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더라니.

이제는 원로 엘프들의 기억 속에만 남은 종족. 인간.

본래 모든 종족 중 엘프와 가장 교류가 활발하고, 호의적이었던 인간이 방문했다.

어느 순간 이 땅에서 자취를 감추었다고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마주하게 될 줄이야.

이안이 감격에 젖어 있던 그때. 사내가 입을 열었다.

"혹시, 오늘 하루만 이 마을에서 묵어가도 괜찮겠습니까?"

조심스러운 승현의 질문.

이안은 자신도 모르게 있는 힘껏 외쳤다.

"어서 오십시오! 겨울숲 부족은 언제나 인간을 환영합니다!"

* * *

비상식량으로 가지고 있던 라면 전부를 대가로, 로제에게 겨울숲 부족의 엘프에 관한 정보를 조금 얻을 수 있었다.

그중 가장 흥미로웠던 이야기는.

"그러니까, 그 기술 이름이...."

"엘븐 아르테스에요. 엘프를 대표하는 체술이죠."

엘븐 아르테스. 자연을 이용한 엘프의 고유 체술이라는데, 아쉽게도 시간이 없어 자세한 내용은 듣지 못했다.

"저 멀리 보이는 외벽 안쪽이 겨울숲 부족의 마을이에요."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견고한 석벽으로 둘러싸인 대지가 보였다. 그런데, 특이한 점 한 가지가 눈에 띄었다. 이곳과는 다르게 따스한 햇볕이 마을을 비추고 있다는 것.

"여긴 겨울인데, 외벽 너머는 완전히 봄이네요...아니, 봄이네?"

"신기하죠? 저곳은 에포나 님의 축복이 내려진 땅이거든요. 이곳과는 다르게 언제나 따스한 기후가 유지되고 있어요.

"그렇군요. 아니, 그렇구나. 신기한 곳이네."

친절히 설명을 곁들여 주는 로제를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존대를 들어본 적이 없어 어색하다는 로제의 고집에 어쩔 수 없이 응하긴 했지만, 다짜고짜 말을 놓으려니 영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런 나를 보며 킥킥 웃던 로제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럼, 안내가 끝났으니 저는 이만 돌아가 볼게요."

"왜? 같이 마을로 들어가지. 여기에만 있으면 안 추워? 저긴 따뜻해 보이는데."

"저는...괜찮아요. 여기가 편하거든요. 이만 돌아가 볼게요. 한 덕에 오늘 재미있었어요! 그럼, 다음에 또 봐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로제의 신형이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새하얀 설원에 발자국조차 남기지 않으며 돌아가는 것이 마치 무협지의 한 장면 같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방향을 돌려 정문으로 보이는 곳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출발할 땐, 가득 차 있던 가방이 한층 가벼워진 것이 느껴졌다. 문득 어제의 일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투덜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컵라면 네 개에 봉지라면 세 개를 다 먹어? 혼자서?"

대체 그 많은 게 다 어디로 들어간 걸까. 로제는 사실 흉내쟁이와 동족이 아닐까? 도저히 그 가녀린 몸으로 수용할 수 있는 양이 아닌데.

그나저나 식량도 다 떨어졌는데 어쩌지. 엘프들에게 먹을 걸 좀 얻을 수 있으려나.

여러 고민을 거듭하며 걸어가던 그때. 하늘이 어두워졌다.

"멈춰라. 네놈!"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듯 쩌렁쩌렁한 목소리. 고개를 들어보니, 붉은 머리의 거인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 [새로운 퀘스트가 도착하였습니다.]

- [시작은 가볍게]

- 겨울 숲 부족과의 교류에서 만족도 [★★★★]이상을 달성하자.

- 보상 : 유대 포인트 [300]

애타게 기다리던 시스템 메시지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 * *

이안을 따라 외벽 안으로 들어오니, 바깥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따사로운 햇살 아래 지어진 통나무 주택들과 카펫처럼 깔린 푸른 잔디. 저 멀리 보이는 설산까지.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이다.

"그러니까...한 님께서는 인간들의 국가인, 대한민국이라는 곳에서 오셨단 말씀이십니까?"

"맞습니다. 현재는 견문을 넓히기 위해 세상을 돌아다니는 중입니다."

"오오, 저는 평생 이곳에서만 살아온지라 바깥세상에 관한 지식이 전무한데. 세계를 돌아보고 계신다니...부러울 따름입니다!"

새하얀 이를 드러낸 이안이 엄지를 치켜세웠다. 호의적인 태도를 보니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어젯밤 로제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며 마을을 거닐던 내 눈에 이상한 점이 포착되었다.

"마을 주민들이 한 명도 안 보이네요."

질문을 건네자, 이안이 자랑스런 얼굴로 마을의 중앙부를 가리켰다.

"아아, 지금 시간이면 전부 광장에 모여있을 겁니다. 한 번 둘러보시겠습니까? 인간이라면 저희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친절한 목소리.

본래 엘프와 인간은 우호적인 관계라던 로제의 말이 사실인 것 같다. 그리고, 지금은 높은 산 부족과 마찬가지로 교류가 끊긴 상태로 추정되고.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와중, 앞장서서 걷던 이안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여기서 조금 더 들어가면 광장이 나옵니다. 지금 시간이면 슬슬 시작했겠군요."

"시작하다니, 무엇을 말입니까?"

그리고는 투박한 손을 움직여 머리를 쓸어넘기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무릇 올곧은 정신은 강인한 육체에서 나오는 법. 한 달에 한 번씩. 그간의 수행 성과를 증명하는 마을의 월례 행사입니다."

자신만만하게 말한 이안이 몸에 힘을 주며 자신의 태산 같은 승모근과 갑옷 같은 대흉근을 강조했다.

"그리고 자랑은 아니지만, 저는 겨울숲 부족에서 장로님을 제외하고 가장 수행이 깊은 엘프입니다."

드러난 팔뚝에선 핏줄이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그 위압감에 나도 모르게 흠칫,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아무리 봐도 내가 상상하던 엘프의 이미지가 아닌데, 어쩌면 이안은 돌연변이가 아닐까.

'뭐, 그럴 수도 있지.'

어딜 가나 예외는 있는 법이니까. 앞장서서 걷던 이안이 정면을 가리켰다.

"여깁니다. 아, 마침 시작하는군요."

고개를 돌리자, 중앙에 원형으로 모인 인파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두 번째로 눈에 들어온 건. 이곳저곳에 굴러다니는 거대한 바벨과 덤벨들. 그보다 눈에 띄는 건.

"하하, 다들 열심이군요. 보기 좋지 않습니까?"

어떠한 장면을 목도 한 나에게는 그 어떤 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이 내 상식과 고정관념을 깨부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이게...엘프?'

내가 상상하던 엘프는 본래 하늘하늘한 미(美)의 상징. 로제만 보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런 고로.

우락부락한 이안은 당연히 특이 케이스일 것으로 생각했다.

"여긴 대체...."

"근육을 단련하는 건 엘프로서의 당연한 본분. 우람한 근육이 곧 에포나 님을 향한 신앙심의 증거입니다."

아니었다.

세상이 온통 식스팩이었다.

'풀 업 스쿼트...?'

열기를 뿜으며 잔상이 남을 정도로 몸을 움직이는 여성 엘프의 팔뚝이 내 허리보다 굵다.

덤벨을 들어 올리는 어린 엘프의 복근이 돌덩이처럼 단단해 보인다.

예외란 없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여기 있는 모두가 단단한 육체를 지니고 있었으니까.

이 어처구니없는 광경을 보며 반쯤 넋이 나간 나를 향해 이안이 말했다.

"저희 엘프들이 모시는 조화와 평화. 그리고 숲의 여신이신 에포나 님께선 늘 강조하셨습니다. 근육의 크기는 곧 마음의 크기요, 이는 곧 나를 향한 신앙의 깊이이다. 모두가 단련에 정진하는 모습을 보니 뿌듯하기 그지없군요."

엘프들이 몸을 움직이는 걸 좋아한다는 이야기는 로제에게 대강 들었지만...가벼운 운동 정도라 생각했거늘.

이건 도를 넘어섰다.

마을 주민 전체가 육체에 거대한 탑을 쌓아 올렸다.

심지어 이렇게 인파가 몰려있는데도 광장 내부엔 숨소리와 몸을 움직이는 소리를 제외하면, 어떠한 잡음도 들리지 않았다.

경건함마저 느껴지는 광경. 마침 한 청년이 양손으로 바벨을 잡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와 같은 곳을 보던 이안이 부연 설명을 덧붙여주었다.

"저건, 고목(古木)의 형(形)입니다. 마치 오래된 나무를 옮겨 심는 듯한 자세라 하여 붙은 이름인데, 아름답지 않습니까?"

컨벤셔널 데드리프트.

헬스에 미친 춘식이 덕에 눈에 익은 자세다.

다만, 놀라운 건.

'들고 있는 무게가 수백kg은 되겠는데?'

금속제 봉이 휘는 모습으로 보아 어마어마한 무게라는 걸 유추할 수 있었다.

흡-

청년의 짧은 기합과 함께 팔뚝이 부풀며 바벨이 땅에서 떨어졌다.

가만히 그 광경을 바라보던 이안이 손뼉을 치며 찬사를 보냈다.

"역시! 완벽한 자세입니다! 잔뜩 부푼 근육에서부터 깊은 신앙심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청년 엘프를 바라보는 표정에선 자부심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나는. 그를 보며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저거, 저렇게 하다간 허리 다 나갈 텐데."

"그게 무슨?"

아차.

지난 일 년간 하도 시달렸더니 나도 모르게 물들어버린 모양이다.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지만 이미 늦은 상황.

"지금...뭐라고 하셨습니까?"

재차 차갑게 되묻는 이안의 목소리가 들렸고.

그와 동시에 주위가 고요해졌다.

이안이.

아니, 광장의 모든 엘프가 움직임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27화

"야, 야! 그렇게 하는 거 아니라고! 허리 펴고! 어어? 발, 발, 발, 발, 발! 중립 유지해! 그런 어설픈 자세로 나처럼 될 수 있겠어? 데드리프트란 건 말이야, 경건한 마음으로..."

지금도 귓가를 생생하게 맴도는 목소리. 무려 일 년이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지겹도록 시달렸다.

악몽의 시작은 가벼운 제안이었다.

아버지를 보내드린 이후. 막 서울에서 내려와 죄책감에 시달리던 어느 날.

나를 찾아온 춘식이가 말했다.

"그렇게 축 처져있지만 말고, 너도 나처럼 운동 한번 시작해보는 게 어떠냐? 몸을 움직이면 안 좋은 생각은 금방 날아갈 거다."

썩 내키진 않았지만, 나를 걱정하는 마음이 느껴졌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땀이라도 흘리면 기분이 좀 나아지겠지. 하자, 운동."

나는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사나이라면 고중량 고반복! 근성이 있으면, 한승현 너처럼 비쩍 마른 놈도 나처럼 멋진 사나이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잊고 싶은 기억이다.

기껏해야 가벼운 트레이닝이나 유산소 정도를 생각했건만.

친구, 아니지. 원수나 마찬가지인 장춘식은 날 사지로 몰아넣었다.

"자, 이번엔 컨벤셔널 데드리프트 10회 10세트. 올바르지 못한 자세가 나오면 처음부터 다시 한다. 실시!"

"야, 야! 나 이러다 죽어 진짜. 내가 150kg 15회 10세트를 어떻게 해! 진짜 죽는다니까? 안 그래도 지난번에 다친 곳이..."

"사나이가 고작 부상 정도로 앓는 소리를 낼 셈인가? 내가 아는 한승현은 그렇게 나약한 놈이 아니다!"

"...근육이 찢어졌다니까?"

"포션이 있으니까 괜찮아!"

미친놈이다.

장담하건대, 나는 살면서 저보다 미친놈을 본 적이 없다.

"복명복창한다! 사나이는! 고중량! 고반복! 지금 네가 하는 건, 어린애 장난일 뿐이다!"

"그만, 그만...제발 그만...."

정말로 죽을 뻔했다.

춘식이네 집 뒷마당에서 하루도 안 거르고 이뤄지는 단련은 나를 피폐하게 만들었다.

만약 균열의 발생 빈도가 늘어나 춘식이가 바빠지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직도 그 지옥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겠지.

그런데 설마.

그 끔찍했던 경험에 의존하게 될 줄이야.

* * *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한 자세였습니다. 어디가, 어떻게 잘못되었다는 겁니까."

이안의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를 후벼팠다.

"당신이 인간이라도 이건 좌시할 수 없는 발언입니다. 방금 발언은 겨울숲 부족의 전통에 대한 모욕이자, 에포나 님을 향한 신앙심의 부정입니다."

이안이 나지막이 말하자 광장에 모인 엘프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뭐야, 인간? 저자가 책에서만 보던 그 인간이라고?"

"젊은 엘프들은 잘 모를 수도 있겠군. 내가 어릴 때 봤던 인간이랑 비슷한 생김새이긴 한데...."

"인간이라곤 해도 외지인이 무슨 권리로 끼어드는 거지? 게다가 대대로 내려오는 겨울숲 부족의 형(形)을 무시해?"

"뚫린 입만큼 실력도 자신 있는 모양이지? 오만이 하늘을 찌르는군. 알량한 몇 마디 말 대신 거기 있는 바벨을 들어 너의 가치를 증명해 봐라!"

날 선 비난이 나를 향해 쏟아졌다. 이안은 그저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때. 바벨을 들었던 청년 엘프가 나를 향해 저벅저벅 다가왔다.

"만약 실력을 증명하지 못하면, 당신이 아무리 인간이라 해도 그 대가를 똑똑히 치러야 할 거요."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주워 담는 법은 단 하나.

'원래 오늘은 엘프들의 니즈만 파악한 뒤 돌아가려 했는데...일이 제대로 꼬여버렸군.'

조용히 숨을 들이마신 나는, 손가락으로 무지막지한 바벨을 가리키며 청년 엘프를 향해 말했다.

"저에게는 저걸 들 만한 근력이 없습니다."

"...."

순간.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하지만 이에 개의치 않고 또박또박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좀 더 올바르고, 효율적인 방식을 알려드릴 순 있습니다."

"이런, 건방진!"

누군가가 외쳤다.

광장이 고요해졌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서 있던 이안이 바벨 앞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그 오만한 가르침, 어디 한번 내려보시죠."

그 목소리는 고요했으나, 차가운 분노가 가득 담겨있었다.

나는 직감했다. 여기서 실패한다면 겨울숲 부족에는 평생 발도 들이지 못할 거라는 걸. 무슨 일이 있어도 성공해야만 한다.

"우선, 발의 너비는 어깨 정도로...."

춘식이의 가르침을 빙자한 잔소리를 복기하며, 천천히 이안의 자세를 잡아주었다.

"허리는 중립을 유지하고, 팔이 아닌 하체의 힘으로 땅을 밀어내듯이...."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 속에서 묵묵히 내 지시를 따르는 이안.

"흡-"

곧, 짧은 기합과 함께 그의 허벅지가 터질 듯 부풀어 올랐고.

쿵-

곧이어 바벨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시선이 한곳으로 집중된 광장엔 적막이 흘렀다.

한 번, 두 번.

말없이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이안. 그가 꺼낸 첫마디는.

"울고 있습니다...."

뜬금없는 소리였다.

"대둔근, 대둔근이...."

이안이 조금 붉어진 얼굴로 바벨 봉을 잡았다.

쿵-

조금 전 장면의 반복. 달라진 건, 이안의 눈가가 젖어가기 시작했다는 것.

"대둔근이, 대퇴사두가...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지금...지금 이 떨림이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구원받은 근섬유의 외침이 들리지 않으시냔 말입니다!"

단단히 미친놈이다. 장춘식과 비견될 정도로.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이안이 바벨을 내려놓자, 주변을 둘러싼 엘프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저, 정말인가? 이안!"

"이 사람아, 그렇다면 그런 게지. 언제 이안이 거짓말하는 거 봤나!"

"비켜! 내가 먼저 할 거야!"

"어허, 내가 먼저 잡았네. 예의와 법도를 지키게!"

여기저기 흩어진 바벨을 향해 엘프들이 일제히 질주하기 시작했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바벨을 움켜쥔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안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

"그, 근육이...."

"뒤꿈치로 대지를 밀어내는 이 쾌감! 이 두근거림! 그래, 나에게 부족한 건 척추 중립이었어!"

"수백 년 만에 맛보는 떨림이네. 방해하지 말게나!"

"고목의 형이 가진 본질은, 팔을 단련하는 수련법이 아니었어. 허벅지...허벅지다!"

엘프들의 붉어진 눈이 일제히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 안에 담긴 기이한 열기에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나던 그때.

짝-짝-짝-

등 뒤에서 짧지만 강렬한 박수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이마가 벗겨진 젊은 엘프와 이안보다 더 거대한 체구의, 백색 수염을 길게 기른 노년의 엘프가 서 있었다.

"실로, 실로 완벽한 고목의 형이었네. 내 오랜 시간을 살아왔지만, 모든 종족을 통틀어 자네 만큼 완벽히 본질을 이해한 자는 처음 보는구만."

노년의 엘프가 잔뜩 감격한 얼굴로 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리고는, 솥뚜껑만 한 손을 내밀었다.

"반갑네. 겨울숲 부족의 장로, 룬드그렌일세. 함께 온 저 친구는 에크만이고."

"아, 안녕하십니까. 여행자 한승현입니다. 편하게 한이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에크만이라 불린 엘프 또한 나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벗겨진 이마에 햇빛이 반사되어 눈이 따가웠다.

인상을 슬쩍 찡그리던 그때, 룬드그렌 장로가 나를 향해 열띤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한, 자네는 고목의 형을 어디서 배우게 되었는가. 혹시 거암(巨巖)의 형이나, 창공(蒼空)의 형도 알고 있는 겐가! 혹시 그 외에도 다른 단련법을 알고 있는 게 있다면, 아끼지 말고 풀어주게!"

장로의 질문이 쏟아짐과 동시에, 수백 쌍의 눈동자에 담긴 기이한 열망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 머릿속에 떠오른 단 한 가지의 생각.

'까딱 잘못하다간, 큰일 날 수도 있겠구나.'

어쩌면 영영 여기에 붙잡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그들의 목소리와 표정은 간절했다.

"아니면, 자네가 스스로 독학하고 깨우친 겐가. 엘프의 단련법을 몇 단계나 발전시켜서? 고목의 형이 가진 본질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 겐가!"

장로의 질문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하지만 내가 답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웨이트 트레이닝에 관한 지식은 춘식이에게 주워들은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무표정을 유지하며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던 그때.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최대한 무거운 표정을 지은 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것이 말입니다...."

싸아-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광장이 얼어붙었다. 모두가 내 입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스승님이 계십니다."

"뭐, 뭣! 스승이라니. 그게 정말입니까? 그보다 더 완벽한 형(形)을 깨우치신 분이 정말로 존재한단 말입니까?"

"경거망동하지 말게, 에크만! 지금 귀빈과 대화 중일세!"

"죄, 죄송합니다. 장로님."

장로가 눈알이 튀어나올 듯 질문을 던지는 에크만을 향해 일갈했다. 그의 반짝이는 정수리를 힐끗 쳐다본 나는, 다시금 말을 이어갔다.

"그렇습니다. 저따위는 스승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그분의 성함이 무엇인가. 자네와 같은 인간인가! 단련, 단련은 얼마나 해오신 겐가!"

장로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나머지 엘프들은 귀를 쫑긋 세운 채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능력 또한 연금술사가 가져야 할 덕목 중 하나라고 하셨다.

그렇기에, 나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성실히 이행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스승님께선 속세를 등진 몸이신지라, 제가 마음대로 이야기를 해도 괜찮을지...."

일부러 말꼬리를 흐렸다.

이들과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선 더욱더 애태워야 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내 예상은 적중했다. 말하기 주저하는 나를 향해 장로가 애원했다.

"노년에 형(形)의 본질에 통달하여 더는 배울 게 없다고 생각해왔는데,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된 기분이네. 부탁이니, 이 늙은이도 자네의 스승에게 가르침을 얻을 기회를 주지 않겠는가!"

다른 엘프들 또한 입만 열지 않았을 뿐, 장로와 같은 표정이다.

내가 침묵을 유지하자, 장로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자네의 스승님께선...어느 정도의 경지에 이르신 겐가."

"저도 배움이 얕아, 그 깊이를 감히 짐작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저따위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라는 것. 그뿐입니다."

"그, 그 정도인가? 그 정도의 경지에 오른 달인인 자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라고...?"

"그렇습니다. 스승님께선 일평생을 단련에 매진하신 분이기에, 고작 1년 남짓 배운 저를 감히 스승님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크나큰 실례입니다."

"1, 1년? 자네, 고작 그 기간 만에...?"

오오오오오-

탄성이 쏟아졌다.

작게 느껴지는 양심의 가책을 털어버렸다. 뭐, 새빨간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니까. 실제로 춘식이는 운동 중독이기도 하고.

생각에 잠긴 나를 향해 애원하는 장로의 목소리가 한층 더 다급해졌다.

"자네, 제발...제발 부탁이니, 자네의 스승님이라는 분께 한 수 가르침을 받을 수 있게 다리를 놓아 주면 안 되겠는가? 내 그렇게만 된다면, 자네가 원하는 건 뭐든 한 가지 들어주겠네."

우위를 점하는 건 이 정도면 되겠지? 여기서 더 간을 봤다간, 역효과가 날지도 모르니까.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더 이상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군요. 기회가 된다면, 스승님께 한번 여쭤보도록 하겠습니다."

"오오! 정말인가! 인생 말년에 새로운 배움의 기회가 찾아오는구나. 이 모든 것이 조화와 숲의 여신, 에포나 님의 축복이 아니겠는가!"

"출타하신 대신관님께서도 이 사실을 접하신다면 굉장히 기뻐하실 겁니다."

"이안 자네는 당연한 말을! 그보다 한 군, 자네 스승님의 존함이...어떻게 되시는가?"

"장춘식. 발음이 어려우시면, 편한 대로 부르셔도 괜찮습니다."

"과연...! 이름에서부터 깨달은 자의 고고한 면모가 엿보이는군. 어찌 감히 한 분야에서 대업을 이룬 분의 존함을 마음대로 부를 수 있겠는가! 내 머릿속에 똑똑히 새겨두겠네!"

그냥 헬스 좋아하는 근육 돼지라 그럴 필요까진 없지만.

뭐, 본인이 만족하면 된 거지.

이 정도면 좋은 이미지 따기는 성공한 것 같다.

* * *

"후우. 고된 하루였다."

차원의 통로 앞에 선 나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온종일 굶었더니 배는 등가죽에 붙을 것 같았고, 쉴 새 없이 설원을 가로질러 온 팔다리는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본래는 겨울숲 부족에서 하루를 묵고 난 뒤 돌아오려 했으나.

"제발 제 자세 좀 봐주십시오! 한 님!"

"저도, 저도 좀 부탁드립니다! 요즘 대흉근 크기가 도무지 늘어나지 않는데, 지혜를 조금만 나누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어허! 자네들! 순서를 지키게! 한 군. 내 상완삼두근 좀 봐주게나. 요즘 집중하고 있는 부위인데, 어떤가. 아름답지 않나!"

나는 도저히 저들의 질문에 대답할 만한 지식과 경험을 갖추지 못했기에. 서둘러 마을을 빠져나왔다.

만약 거기 계속 머물렀더라면 밑천이 다 드러났을 게 뻔하니까.

이미 그들의 니즈는 파악해 두었고, 좋은 이미지도 만들어 두었다. 이것만으로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

뒤를 한 차례 돌아본 후 통로를 지나서자, 메시지가 나타났다.

- [BR-372] 채널과의 교류가 종료되었습니다.

- 상대방의 만족도는 [★★★★★]입니다.

- 채널 등급과 만족도를 바탕으로 보상을 책정 중입니다.

[보상 목록]

1. 마나 포인트 [25] 획득.

2. 유대 포인트 [200] 획득.

- [시작은 가볍게] 퀘스트를 클리어하셨습니다!

- 기준치 이상의 만족도를 달성하셨습니다.

- 추가 보상이 지급됩니다.

퀘스트의 보상을 확인했다. 예상치도 못한 추가 보상까지. 완벽하다.

그리고.

- 다음 차원 통로 개방까지 남은 시간 : [186시간 23분 17초]

연이어 나타난 메시지를 확인하며, 머릿속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28화

- 추가 보상으로, [주간 반복 퀘스트]가 오픈되었습니다.

"반복 퀘스트?"

퀘스트 알림창을 확인하자, 새로 추가된 항목이 눈에 들어왔다.

- [주간 반복 퀘스트 : 장인의 길 (1)]

- 매직++ 등급 이상의 아이템 제작하기(0/2)

- 보상 : 영구적으로 마나 [10] 증가

* 주간 퀘스트는 주 1회만 클리어 가능합니다.

* 남은 시간 : 167시간 59분

* * *

"이러면 안 되는데...."

테이블 위에 놓인 포션 두 병과 시스템 메시지를 번갈아 쳐다보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 매직++ 등급 이상의 아이템 제작하기(1/2)

- 퀘스트 수행을 위해 제작한 아이템은 각기 다른 종류여야 합니다.

두 병을 제작했는데 카운트는 하나밖에 올라가지 않는다.

지금 내가 만들 수 있는 건 치유 가속 포션. 그리고 보편적인 레시피의 저급 포션 몇몇.

"그중 매직 등급 이상은 치유 가속 포션밖에 없는데. 이를 어쩐다...."

즉, 지금으로선 반복 퀘스트 수행이 어렵다는 뜻이다.

아이템 제조 레시피를 구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다. 매직 등급 이상의 레시피는 연금술사가 소속된 클랜 차원에서 엄중히 관리되고 있으니까.

간혹 매물이 나온다고 해도, 구매하는 순간 판매한 클랜의 감시망에 들어가게 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아직 세상에 나설 실력이 아닌 지금의 나로서는 지양해야 하는 방법이란 뜻이다.

"어떻게 해야 한다...."

고민에 빠져있던 와중.

아버지의 저서에 수록된 한 구절의 문단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 무릇 인챈트란 마나를 매개체로 본래 아이템이 가지고 있던 성질을 증폭, 혹은 축소하는 일련의 과정으로서, 이는 사용되는 마나의 성질에 따라...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단순히 옵션을 부여한다는 것에 치중한 나머지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나는, 핸드폰을 꺼내 인터넷에 접속했다.

"좋아, 한번 해 보자. 안 그래도 시험해 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새로운 도전은 언제나 환영이다.

* * *

똑똑똑-

한 차례 심호흡을 마친 박진성이 잠긴 유리문을 가볍게 두들겼다.

"계십니까, 한승현 사장님!"

슬쩍 둘러본 가게 안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또 자리를 비운 걸까.

미리 전화해보고 와야 했는데.

마음이 급한 나머지 지난번과 같은 실수를 저질러 버렸다.

문 앞에 선 박진성이 머뭇거리던 그때. 다행히도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박진성 팀장님 아니십니까? 여긴 어쩐 일로...포션 필요하십니까?"

가게 옆에 딸린 가건물에서 후다닥 뛰어나온 사내. 대성 잡화점의 사장 한승현이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박진성이 흠칫,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뭘 하다 왔는진 몰라도 머리를 비롯한 온몸이 새하얀 가루로 범벅이었기 때문이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다름이 아니고 전해드릴 것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그런 박진성을 보며 승현이 멋쩍게 웃어 보였다.

"이런,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뒷정리를 안 하고 나온 터라..."

그리고는 후다닥 뛰어 가건물로 돌아갔다. 발걸음이 제법 다급하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박진성이 슬쩍 미소지었다. 뭘 하고 있었는진 몰라도, 그것에 집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열정을 가진 사람에게는 언제나 무한한 성장 가능성이 열려있는 법.

만약 그에게 헌터나 연금술사로서의 재능이 있었다면 스카웃 제의를 넣어볼 만했을 텐데. 조금 아쉽다.

"아무리 그래도, 저 정도 마나량으로는...음?"

그때. 승현을 향해 습관적으로 탐지 능력을 발동하던 박진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미약하지만 유의미한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번보다 조금 늘어난 것 같은데."

기분 탓일까.

더 자세히 알아보고 싶었지만, 원거리에서 탐지를 발동하기엔 명확한 한계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대놓고 당신의 마나를 측정하겠습니다. 하는 것도 굉장히 실례되는 행동.

그렇기에 그는 머릿속에서 일어난 작은 의구심을 억지로 떨쳐버렸다.

승현과의 관계가 틀어지는 건,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니까.

"앉으시죠.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로 방문하셨는지...?"

가게로 들어간 승현이 커피를 내오며 어색하게 묻자, 박진성이 들고 온 쇼핑백을 두 손으로 집어 공손히 내밀었다.

"클랜장님의 작은 성의입니다. 부담스러워하지 마시고, 편히 받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게...뭡니까?"

쇼핑백 안에 곱게 포장된 두 개의 상자를 발견한 승현이 묻자, 박진성이 목소리를 조금 낮추었다.

"흰색 상자는 연금술사님께 드리는 물품이고, 검은색 상자는 사장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무엇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우선, 연금술사님께 드릴 물건은 클랜장님께서 균열 공략 중 격퇴한 몬스터의 부산물입니다."

"그 정도 몬스터의 부산물이라면 상당한 고등급 재료일 텐데, 그걸 대체 왜...?"

"이런 말씀 드리기는 조금 그렇지만, 최신형 디텍터로도 등급 측정이 안 됩니다. 지금까지 이런 경우가 없었는데...."

"그러니까, 의뢰를 통해 재료의 사용처와 가치에 대한 정보를 얻고 싶다. 이 말씀이십니까?"

박진성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묵직한 상자.

몇 차례 그것을 들어보던 승현이 이번에는 검은 상자로 시선을 돌렸다.

"뭐, 좋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진 모르겠지만 한번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보가 파악된 아이템은 연금술사님께서 사용하셔도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사장님께 드리는 건 저희가 맞춤 제작해 온 보안 아티팩트입니다."

박진성의 말을 들은 승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안 아티팩트라 하심은, 클랜과 계약을 맺은 상점들이 설치하는 그거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상점에 설치해 두시면 사장님께 위급한 일이 생겼을 때 곧바로 저희에게 통보가 오게 됩니다. 행여 무언가 의심이 가시면 디텍터를 사용해 보셔도...."

"오호라, 안 그래도 요즘 균열 발생 빈도가 늘었다던데. 감사히 사용하겠습니다, 팀장님."

승현이 웃으며 상자를 쇼핑백에 집어넣었다. 그 광경에 오히려 당황한 건 박진성이었다.

"디텍터...사용 안 하십니까? 저희가 아이템에 손이라도 써 두었으면 어쩌시려고...?"

"뭐, 박 팀장님께서 주신 아이템인데, 설마 그럴 일이야 있겠습니까?"

너무나도 태연하다.

행여라도 도청 장치를 숨겨놓았다면 어쩌려는 걸까.

대범한 건지, 순진한 건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잠시 생각에 빠졌던 박진성이 대화 주제를 돌리며 승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보다, 사장님과 백색의 연금술사님 덕에 협회에서 중구 균열의 공략 승인이 떨어졌습니다. 클랜장님께서도 대단히 흡족해하셨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리겠습니다."

"아, 아닙니다.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는...제가 부담스럽습니다."

어색하게 손사래 치는 승현을 향해 연신 감사를 표하던 그의 시선이 한 곳에 고정되었다.

"그런데, 저건...처음 보는 건데, 치유 계통의 포션입니까?"

진열장 한구석에 놓인, 제작자 라벨이 붙지 않은 포션. 외형은 하급 치유 포션과 동일했지만, 그의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저건 다른 것과 궤를 달리하는 물건이라고.

그의 모든 감각이, 지금까지 쌓아 올렸던 경험이 빠른 속도로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잠시 후, 침묵을 지키던 승현이 입을 열었다.

"연금술사님께서 제작하신 시제품입니다. 팀장님께서 보신 대로 치유 포션인데, 워낙 극소량만 들어온지라...."

시제품.

박진성은 하마터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지난번 제품도 파격적이었는데, 이번엔 과연 어느 정도일까.

그의 속마음을 알아챈 듯 승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연금술사님께서 말씀하시길, 작용 속도는 지난번 포션과 같지만, 치유 효과를 한 단계 끌어올리셨다고 하시더군요."

거기서 한 단계 더?

믿기지 않는 답변이었다. 박진성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그, 그게 사실입니까? 그렇다면 중급의 치유 옵션이 붙은 데다가, 작용 속도까지 빠른...?"

승현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박진성의 태도가 다급해졌다.

뜻밖의 횡재다.

황급히 품속으로 손을 넣은 그는, 자신의 지갑을 꺼냈다.

"몇 병이나 보유하고 계십니까, 사장님!"

간절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

그런 그를 향해, 승현은 손가락 다섯 개를 펴 보였다.

"전부 사겠습니다!"

박진성 팀장의 커다란 외침이 고요한 가게 안에 메아리쳤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