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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196화

"유일신이라...어쨌거나 시시포스와 프레이야. 그리고 구시온의 목표는 전부 같다는 거네요."

"뭐, 그런 셈이죠."

반나절 넘게 이어진 대화.

생각을 정리하는 로제에게서 시선을 돌린 아카샤가 빈 찻잔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벌써 시간이 다 됐네요. 아쉬워라. 제가 거주하는 곳에는 이런 게 없단 말이죠."

차원의 틈새 너머로 느껴지는 프레이야의 에테르. 이를 감지한 아카샤가 자리에서 슬며시 일어났다.

"콜라라고 했던가요? 그것도 기회가 되면 한 번 먹어 보고 싶네요."

"...다음에 오실 때 준비해보도록 할게요. 이제 돌아가시는 건가요?"

"아, 배웅은 안 해주셔도 괜찮아요. 하이고...천하의 아카샤가 전령 역할이나 하고 말이죠. 이러면 안 되는데...."

뒤따라 일어난 로제를 제지한 아카샤가 표정을 굳히며 들릴 듯 말 듯 작게 중얼거렸다.

"중립의 아카샤라...저에겐 어울리지 않는 이명이네요."

푹 가라앉은 목소리.

이유가 어찌 되었건, 순리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는 책무를 어기고 한쪽으로 치우친 판단을 내렸다.

그러한 판단의 기저에는 대의를 위한 것이 아닌 자신의 저급한 생존 욕구가 깔려있음을 아주 잘 알고 있기에.

밀려오는 자조감을 억누른 아카샤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카식 레코드와 이어진 통로의 틈새 너머로 전해지는 에테르.

기억의 화랑에 보관된 수천 개의 전생 중.

대략 절반 이상을 회수했음을 확인한 아캬샤가 손뼉을 짝- 쳤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머리가 터져버릴 때까지 화랑에 머물려 하실 테니...어쩔 수 없네요. 그럼 저는 이만."

곧이어.

로제가 뭐라 할 새도 없이 푸른 스파크와 함께 아카샤와 승현의 위치가 뒤바뀌었다.

"좋아, 아직은 견딜 만해. 한 번 더...어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승현이 상황을 파악한 듯, 가볍게 눈살을 찡그렸다.

"아직 다 못 끝냈는데. 내가 그렇게 못 미더운 건가?"

"어, 어어...?"

"뭘 그렇게 당황하고 그래. 별일 없었지?"

"네? 네. 벼, 별다른 일은 없었어요."

묘하게 달라진 분위기.

당황한 로제가 승현의 주변에서 은은히 풍겨오는 위압감에 허둥대던 그때.

"네가 그 빌어먹을 두 녀석의 아이로군."

승현의 그림자 속에서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흉내쟁이 씨?"

"누가 멋대로 튀어나오래?"

그와 동시에. 퉁명스럽게 중얼거린 승현이 뒤꿈치로 땅바닥을 꾹 밟았다.

"아무리 권능의 대부분을 상실했다고는 하나, 감히 더러운 흙발로 날 짓밟다니. 무엄하다."

"내가 말했지. 불카누스는 몰라도, 너는 원래 주인한테 허락부터 받은 다음 튀어나오라고. 세입자 주제에...그리고 뭐? 빌어먹을 두 녀석?"

"그 둘은 만신전 휘하에 소속된...."

"그건 옛날 일이잖아. 그리고 애초에...어휴, 아니다. 말을 말아야지. 앞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손들고 얘기해."

"은혜도 모르고...감히 이 나에게...."

"그건 흉내쟁이의 몸을 빌려주는 거로 충분히 갚았다고 생각하는데? 싫으면 거기서 나오던가."

"이렇게 하면 되는 건가."

그림자 속에서 쑥- 솟아오른 손바닥을 본 승현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로제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되게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

"반나절 정도 지났어요."

"그거밖에 안 지났어? 좀 더 있었어도 될 것 같은데. 하여간 그 자식, 걱정만 많아서는...."

묘하게 뒤바뀐 말투.

이를 자각한 승현이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미안, 좀 어색하지?"

"아카샤 님에게 듣긴 했지만...솔직히 반신반의했거든요."

"이게 연륜이 쌓였다고 해야 하나...음...솔직히 아직은 조금 혼란스러운 기분이야."

프레이야의 파편들이 거쳐온 수천 개의 전생.

액자 하나하나에 담긴 각각 다른 파편들의 기억을 흡수한 승현은, 불과 반나절 전의 일을 까마득한 과거처럼 느끼고 있었다.

"...왜 그렇게 봐요?"

"굉장히 오래간만에 보는 것 같아서."

승현이 신기한 듯 로제의 얼굴을 훑어보던 그때. 그의 그림자 안에서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발언권을 요청한다. 네 녀석이 멀쩡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내 덕분이란 걸 잊지 마라. 프레이야."

"이게 또 멋대로...후우. 그래, 마음에 안 들지만 그건 인정."

못마땅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승현이 불과 조금 전까지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자신의 내면에 잠든 불카누스의 격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전생의 기억들.

이를 흡수할 수 있도록 그의 정신에 방벽을 마련해 준 것이 현재 흉내쟁이의 몸에 들어간 굴베이그의 사념이었으니까.

"흉내쟁이 하나로도 버거운데, 골칫거리가 더 늘었네."

"골칫거리라니. 말이 심하군."

"저...이분은 흉내쟁이 씨가 아닌 건가요?"

티격대는 둘을 바라보던 로제가 조심스레 입을 열자, 그림자 속에서 새까만 인영이 툭 튀어나왔다.

"...시시포스!"

매끈한 얼굴과 흑요석 같은 몸.

시시포스를 빼다 박은 듯한 굴베이그의 형체에 로제가 놀란 얼굴로 소리치자.

카앙-

그림자의 오른팔이 일그러지며 날카로운 칼날이 튀어나왔다.

"그따위 버러지와 나를 비교하다니. 모욕이다."

곧이어.

빠악- 그림자의 정강이를 걷어찬 승현이 로제를 향해 안심하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자, 앞으로 자주 보게 될 사이인데 인사 정도는 해야지. 안 그래?"

"지금 나더러 감히 미천한 필멸자에게 고개를 숙이라는 건가? 게다가 그 둘의 자식에게?"

"싫으면 나가던가."

"굴베이그다."

승현의 손짓에 머뭇거리던 굴베이그가 로제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당신이...굴베이그 님?"

"정확히는 권능이 빠진 사념이긴 하지만."

승현의 답변에 로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비록 권능이 거의 사라진 사념일지라도, 근원의 존재라 불리던 굴베이그가 대체 왜 흉내쟁이의 자리에?

로제가 품은 의문을 알아차린 듯, 승현이 부연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이 녀석도 시시포스에게 이를 갈고 있거든. 그것도 아주 박박."

"표현이 저급하군. 와신상담의 자세로 훗날을 도모하는 중이다."

"...사자성어는 대체 언제 배운 거야?"

"이 몸의 본래 주인이 가진 기억을 읽었다."

"동의도 없이?"

"미천한 구시온의 피조물에게 동의를 얻을 필요는...."

"나갈래?"

"앞으로 주의하겠다. 숙지하도록 하지."

도망치듯 그림자 안으로 사라진 굴베이그.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던 로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대체 왜 굴베이그 님께서 흉내쟁이 씨의 몸에...제가 알기론 프레이야 님과 대립점에 서 있던 것이 굴베이그 님이라고...."

"아카샤가 전부 이야기를 해 준 모양이네. 뭐, 저놈도 한동안은 우리 편이야."

"어쩔 수 없이 이런 미천한 피조물의 육신에 들어오긴 했지만, 너와의 동맹은 증오스런 시시포스를 찢어 죽일 때까지만이다. 프레이야."

"그래, 그래. 마음대로 해라."

귀찮다는 듯 건성으로 답한 승현이 로제의 허리춤에 꽂힌, 반으로 쪼개진 일몰을 가리켰다.

"나한테 궁금한 게 많을 것 같은데. 일단은 일몰도 수리할 겸 불칸 왕국으로 돌아가서 얘기하지 않을래?"

* * *

카앙- 카앙-

일정한 리듬에 맞춰 울려 퍼지는 경쾌한 금속음.

손에 쥔 망치로 연신 모루를 내려치던 승현이 이마의 땀을 닦았다.

"음...나한테 궁금한 게 많은 건 알겠지만...이건 좀 부담스러운데."

주변에서 느껴지는 다수의 인기척.

불칸 왕국으로 돌아온 이후.

일몰을 수리하기 위해 곧바로 뷜란트를 향해 직행한 승현 일행을 말없이 뒤따라온 드워프들이다.

그를 향해 쏟아지는 시선을 애써 못 본 체한 승현이 굴베이그를 향해 인상을 찡그렸다.

"거기, 좀 더 꽉 못 잡아?"

"감히 이 굴베이그 님을 부집게 따위로 써먹다니...."

집게를 쥔 채 그의 옆에 선 그림자, 굴베이그가 불만을 토로했지만. 가볍게 이를 무시한 승현이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시시포스는 본래 만마전의 가장 밑바닥. 지옥에서 끊임없는 형벌을 받던 놈이란 말이지."

"거기까진 들었어요."

이제는 이 상황에 제법 익숙해진 듯, 의자에 앉아 점점 제 형체를 되찾아가는 일몰을 구경하던 로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랬나? 두 가지를 동시에 하려니 정신이 없네. 아무튼...억겁의 형기를 마치고 지옥에서 출소한 시시포스가 찾아간 건."

"나였다."

"자꾸 말 끊을래? 어휴...그래. 네가 얘기해 봐라."

승현의 허락이 떨어지자, 기다렸다는 듯 굴베이그가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놈은 내 수하를 자처했다. 이를 받아들인 것이 내 최대의 실수였지."

까마득한 과거를 떠올린 굴베이그의 이야기 사이로 까드득- 이 가는 소리가 섞여들었다.

지옥의 밑바닥에서 상대를 먹어치워 능력을 흡수할 수 있는 권능인, 포식의 권능을 각성한 시시포스.

당시 프레이야가 수장으로 있던 만신전과의 오랜 전쟁으로 인해 절반 이상의 전력을 소실한 굴베이그는.

자신을 찾아와 죄를 뉘우치고 수하가 되길 원하는 시시포스를 받아들였다.

"포식의 권능을 가진 놈은 순식간에 근원의 바로 아래 단계. 마신의 격에 도달하게 되었지."

하지만.

시시포스의 참전에도 전세는 역전되지 않았다.

근소한 차이로 인해 패배한 굴베이그는 스스로의 패배를 인정하고 프레이야의 결정에 따르기로 했으나.

"오랜 전쟁으로 인해 약해져 있던 그때. 놈은 나에게 이빨을 드러냈다."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가볍게 몸을 떤 굴베이그의 눈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놈은 나를 먹어치웠다. 하나도 남김없이."

"굴베이그 님의 권능이라면...소멸의 권능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권능을 잃은 나에게 남은 건 한 줌의 사념뿐. 하지만, 나는 기필코 놈을 찢어 죽일 것이다. 굴베이그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그러니까 최선을 다해 날 도우란 말이야. 어제의 적은 오늘의 친구라는 말, 몰라?"

"예전부터 너의 그 뻔뻔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프레이야."

"저도 조금 어색...흠흠."

헛기침을 내뱉은 로제가 슬그머니 승현의 눈치를 보았다.

승현의 정체를 알게 된 이상, 어떻게 대해야 할지 도저히 감이 잡히질 않았기 때문이다.

"뭘 그렇게 당황하고 그래. 원래 하던 대로 해."

"...정말요?"

그녀의 속내를 알아차린 듯, 기계적으로 일몰을 향해 망치를 내리치던 승현이 씨익 웃어 보였다.

혼란스럽던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느낀 로제가 입가에 미소를 띠자.

무언가가 생각난 듯 손가락을 탁, 튕긴 승현이 망치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아, 맞다! 너한테 줄 선물이 있었는데!"

"선물...이요? 이거?"

로제가 자신의 목에 걸린 투박한 목걸이. 브리싱가멘을 가리켰다.

"저 빌어먹을 목걸이는 썩지도 않는...."

"시끄러워."

말 한마디로 손쉽게 굴베이그의 입을 틀어막은 승현이 몸을 일으켜 로제에게 다가갔다.

곧이어.

브리싱가멘에 박힌 붉은 보석을 움켜쥔 승현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브리싱가멘이 가진 힘에 대해 알고 있어?"

"아, 아뇨. 저는 그저 아카샤 님에게 전달받기만...."

"흐음, 그렇단 말이지?"

짓궂은 미소를 지은 승현이 의아해하는 로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건 말이야, 육신을 가진 채로 만신전과 만마전에 드나들 수 있게 해 주는 아티팩트야. 정확히는 과도한 마기와 에테르에게서 착용자의 육신을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하는 거지."

"...네?"

어딘지 모르게 뿌듯한 표정.

이유를 모르는 로제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물끄러미 승현을 바라보던 와중. 그녀의 머릿속을 무언가가 스치고 지나갔다.

"잠깐, 설마...."

막스에게 듣기를.

초월체들이 거주하는 차원.

만신전과 만마전에 들기 위해선 육신을 버려야 하기에, 이를 위해선 한 차례의 죽음을 겪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승현은 지금 브리싱가멘을 이용해 육신을 가진 채로 그곳에 방문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아버지와...어머니를 만날 수 있다는 건가요? 육신을 포기하지 않고도?"

"그래. 뭐, 지금 당장 통로를 여는 건 무리겠지만."

"고맙습니다!"

와락-

기쁨을 이기지 못한 로제가 저도 모르게 승현을 힘껏 끌어안았다.

우드득- 신장 급에 도달한 그녀의 근력에, 비명을 참아내는 승현의 뼈마디에서 무언가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뿜어져 나왔다.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197화

아레스 클랜 사옥 최상층.

자신의 집무실에 앉아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던 단탈리온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준비는 다 끝난 겁니까? 아직 한 분이 도착하지 않으신 것 같군요."

의자에 앉은 채 등을 돌린 단탈리온을 향해 부복한 네 명의 인영.

그들의 선두에 있던 바빌론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마스터. 다만 울산 지역을 관리하던 로키에게 기별을 넣어두긴 했으나, 아직 회신이...."

"연락 두절이라...일단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로키 님은 추후에 제가 따로 불러들이도록 하죠. 그보다 어느 분이 먼저 하시겠습니까?"

"제가 하겠습니다. 그런데...."

잠시 머뭇거리던 바빌론이 한 마디를 덧붙이자.

의자를 뒤로 돌린 단탈리온이 싸늘한 시선으로 그녀를 훑어보았다.

"이번 결정은 주군의 뜻. 일체의 항명은 불허하도록 하겠습니다."

"항명이 아닙니다. 다만 저를 비롯한 모두가 주군의 의도를 도무지 짐작할 수 없어...."

늘 여유 넘치던 바빌론답지 않게 딱딱히 굳은 목소리.

자리에서 일어난 단탈리온이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주군의 뜻에 의문을 품으시는 겁니까?"

"...아니라고는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왜 지난 수년간 공을 들여온 울산 지역을 포기하는 건지. 그리고 왜 지금 같은 시기에 철수를 명하시는 건지."

얼마 전의 일이 떠오른 모양인지, 그의 손에 턱을 잡힌 채 작게 몸을 떠는 바빌론.

그런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둔 단탈리온이 다른 이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다른 분들도 같은 생각입니까?"

기다렸다는 듯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는 둘.

그리고.

유일하게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는 거구의 사내, 강철규를 향해 다가간 바빌론이 그와 눈을 맞추었다.

"당신은 아닌 모양이로군요."

"저는 그저 따를 뿐."

흐리멍덩한 목소리.

강철규의 초점 잃은 시선이 허공을 움켜쥐었다.

"유천호의 대체품이라기엔...당신은 아직 좀 부족하군요. 유신애였다면 어땠을까...."

"노력하도록 하겠습니다."

기계적인 답변.

그의 허리춤에 매여진 단검을 힐끗 바라본 단탈리온이 다시금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에 몸을 기댔다.

"여러분이 품은 의문은 충분히 이해하는 바입니다. 그간 들여온 공과 시간이 있는데, 갑작스러운 철수 명령이 떨어지니 혼란스럽기도 하시겠지요."

"...."

"일단, 물질계의 시간으로 사흘 전. 주군과 프레이야가 조우했습니다."

단탈리온의 이야기에 강철규를 제외한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주군은 저희를 이곳. 지구에서 일 년간 철수키로 협약을 맺으셨죠."

곧이어.

바빌론의 뒤에 부복해 있던 노인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어, 어째서 그런...아니, 그 전에...그 말씀은, 프레이야가 벌써 자신의 신격을 각성했단 뜻이오?"

"예상보다 약 일 년 정도 빨라졌더군요.

단탈리온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부에르라 불린 노인이 고개를 푹 숙였다.

아니, 그뿐만 아니라 모두가 겁에 질린 눈으로 땅바닥에 시선을 내리깔았다.

"왜, 막상 신격을 되찾았다니 이름만 들어도 겁나십니까?"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은 집무실.

그러자, 단탈리온이 조금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위로하듯 모두에게 말을 건넸다.

"여러분들의 심정은 저도 압니다. 특히, 부에르 님 같은 원로분들은 더더욱 그럴 테고."

"...."

"또한. 다른 분들도 당시의 악몽을 잊지 않으셨을 겁니다."

성난 폭풍처럼 자신들을 몰아치던 판테온의 군세.

그리고.

자신을 따르는 다섯 신장들과 함께 최전방에서 그들과 맞부딪혔던 창조의 근원, 프레이야.

단탈리온의 이야기가 뜻하는 바를 알아차린 모두가 몸을 떨었고.

꿀꺽.

마른침을 삼킨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해 집중되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단탈리온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우...일단 이 이야기는 뒤로 미뤄두도록 하고, 먼저 이곳을 떠나 판데모니움으로 복귀하기 전에 여러분께 전해드릴 사항이 몇 가지 있습니다."

"사항이라고 하시면...?"

"일단 첫 번째. 구시온이 시시포스 님을 배신했습니다."

"배신했다고?"

정적을 뚫고 커다랗게 외친 것은, 바빌론과 비견될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붉은 머리의 여성이었다.

"그렇습니다. 판도라. 시시포스 님의 눈을 피해 몰래 무언가 일을 벌인 모양이더군요. 아주 미약한 양이지만, 시시포스 님의 '존재' 자체가 소실되었다고 합니다."

"씹어 죽일 새끼...그럼 구시온 그 새끼는 프레이야 쪽에 붙은 거야?"

판도라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여린 외모에 걸맞지 않은 거친 언행.

곧이어, 그녀의 주변으로 에테르가 사나운 폭풍처럼 휘몰아쳤고.

손을 휘저어 그것을 상쇄한 단탈리온이 가볍게 주먹을 말아쥐었다.

"정황상 프레이야 측에 가담한 것은 아니라고 판단됩니다."

"그럼 뭐야?"

"판도라. 아무리 시시포스 님의 총애를 받는 당신이라고 해도 마스터앞에서 언행을...."

"닥쳐, 부에르. 그럼 뭔데? 어?"

"상관없습니다. 부에르. 구시온의 의도는 아직 파악되지 않았습니다만, 일단 그자가 시시포스 님께 등을 돌린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빌어먹을 새끼...."

부드득- 판도라가 재차 이를 갈았다.

분노에 뒤덮인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던 단탈리온이 손가락으로 가볍게 의자의 팔걸이를 톡톡 두드렸다.

"뭐, 구시온은 어차피 이용 가치가 떨어졌으니 나중에 제가 직접 찢어 죽이도록 하죠. 그보다 중요한 건, 이번 협정에 아카샤의 개입이 있었다는 겁니다."

"아카샤 말이오?"

"그렇습니다. 부에르. 아카샤가 프레이야와 시시포스 님 사이의 공증인이 되어주었다더군요."

"하지만...."

시간과 기록의 아카샤.

겉으로는 중립을 표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기 모인 이들 중 그러한 사실을 곧이곧대로 믿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 계집이 프레이야를 알음알음 지원한다는 걸 모르는 분이 계신가요? 애초에 그 규정이라는 것도...망할 년. 꼴에 근원이랍시고 거들먹거리는 꼴이...."

꽈앙-

격앙된 동작으로 힘껏 주먹을 내리치는 판도라.

요란한 폭음과 함께 사옥의 최상층이 세차게 흔들리며 바닥이 마른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졌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근원의 격을 걸고 아카식 레코드 내부에서 약조한 일이니, 만일의 사태는 없을 겁니다."

"...그래서. 조건을 수락하는 대신 프레이야 측에서 내건 대가는요? 아무리 봐도 저희에게 불리한 협약인 것 같은데."

모두의 심정을 대변하는 바빌론의 질문. 단탈리온이 신중한 표정으로 답을 내놓았다.

"만마전과 연결된 통로의 개방."

"...!!!"

모두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져갔다.

아무리 적이라고는 하나, 도저히 프레이야의 의도를 짐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간 저희가 해왔던 모든 일이 통로를 열기 위함이었는데...대체 왜?"

거기에 더해, 무슨 꿍꿍이가 있을지 모르는데 이에 응한 시시포스의 의도 또한 그들로서는 짐작기 어려웠다.

그들의 속마음을 파악한 듯.

흐릿한 입술로 작게 미소지은 단탈리온이 말을 이어갔다.

"프레이야의 속셈은 저도. 그리고 시시포스 님도 짐작하지 못했습니다만, 이번 협정은 결코 저희에게 손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손해가 되지 않는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부에르의 질문에 단탈리온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점점 짙어져 갔다.

"아레스의 마신화가 시작되었다는 시시포스님의 전언이 있었습니다."

"...!!!"

과거.

만마전과의 전쟁에서 시시포스에게 패배한 주신 아레스.

다섯 신장을 이끌고 전장을 누비던 전신(戰神)의 모습을 떠올린 모두가 침묵에 잠겼다.

"그리고, 진정한 아레스를 완성하기 위해선 지금껏 저희가 이룩해놓은 모든 것이 필요합니다."

애초에 아레스가 창립된 이유이자 목적은 두 가지.

첫 번째는 만마전과 물질계가 완벽히 연결된 통로를 개방하는 것과.

두 번째는 프레이야와의 결전에 대비해, 전신(戰神)이라 불리던 아레스를 물질계에서 구현하는 것.

키메라 프로젝트의 최종 단계.

아레스 프로젝트를 떠올린 단탈리온이 흡족한 미소를 내걸었다.

"그러므로 기존에 진행했던 아레스 프로젝트는 취소되었습니다. '진짜' 아레스에 집중하자는 주군의 뜻이죠."

"프레이야 측은 아직 눈치채지 못한 겁니까?"

"아마 그럴 겁니다. 아레스는 과거 신마대전 당시, 완전히 그 존재가 영멸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까요."

그제야 모두의 입가에 안도의 미소가 내걸렸다.

시시포스가 가진 소멸의 권능에 아레스가 가진 신력.

그리고 인간의 몸이 아닌, 온전한 초월체로 이곳에 강림할 자신들의 존재까지.

입가에 미소를 띠며 승리를 확신하는 그들을 향해 다가간 단탈리온이 한 명 한 명의 어깨를 짚었다.

"여러분들이 시시포스 님을 따르게 된 계기는 각자 다를 겁니다."

곧이어.

고통과 절망. 그리고 분노가 뒤섞인 끈적한 마기가 주변을 잠식해나가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일국을 뒤흔들 탕녀로 몰려 흉포한 짐승에게 먹이로 던져지고."

퍼억-

바빌론의 손날이 망설임 없이 자신의 머리를 수박처럼 터뜨렸다.

"누군가는 스스로의 의도와 상관없이 목숨처럼 아끼던 동료와 함께 참혹한 전쟁터로 떠밀려야만 했죠."

푹-

부에르의 손에서 튀어나온 마기의 칼날이 자신의 복부를 꿰뚫었다.

"그리고. 누군가는 신들의 간악한 꼬드김으로 세상을 혼란에 빠트릴 존재가 되어, 일생 모든 이들의 지탄과 비난을 한 몸에 받아야만 했습니다."

"개 같은 새끼들. 그래놓고 뭐? 영광으로 알라고? 내가 병신으로 보인다 이거지?"

악에 받친 목소리로 고함을 내지른 판도라가 바닥에 떨어진 부에르의 칼을 쥐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한테 모든 죄업을 뒤집어씌우고, 신장 자리에 앉혀놓으면 내가 좋아할 줄 알았냐, 이 개새끼들아!"

서걱-

눈을 부릅뜬 판도라의 머리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남은 건 흐리멍덩한 눈으로 부복한 강철규뿐.

그에게 다가간 단탈리온이 허리춤에 꽂힌 단검을 가리켰다.

"당신의 선택은 자유입니다."

"...."

푹-

딘탈리온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날카로운 단검이 순식간에 강철규의 목을 꿰뚫었다.

정적이 내려앉은 공간.

숨이 끊어진 채 널브러진 네 구의 시체를 훑어본 단탈리온의 전신이 서서히 풍선처럼 부풀기 시작했다.

"그럼, 일 년 뒤에 뵙도록 하죠."

곧이어.

꽈앙-

대전의 중심부에 세워진 아레스 클랜의 사옥 최상층에서 버섯구름이 피어올랐다.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198화

[아레스 클랜 사옥 최상층에서 일어난 의문의 폭발 사고.]

- 어제 오후 3시경, 대전 서구 아레스 클랜 사옥의 최상층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폭발이 일어났다. 사상자는 아직 집계되지 않았으나 사고 당일이 주말인 점과 건물의 붕괴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사옥에 설치된 술식의...

산처럼 쌓인 몬스터들의 시체.

그 꼭대기에 걸터앉아 여유롭게 신문을 읽던 무명이 눈살을 찡그렸다.

제피로스 사옥의 붕괴에 이어, 아레스 사옥에서 벌어진 폭발.

근 며칠 새 연이어 터진 사고가 일간지에 빼곡히 적혀있었다.

"제피로스와 아레스라...단순한 사고는 아닐 테고, 이것도 단탈리온이 개입된 일인가."

일간지를 덮은 무명이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자, 미하일이 어이없다는 듯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대체 신문은 매번 어디서 그렇게 구해오시는 겁니까?"

"영감 걸 슬쩍했다. 그 영감, 보기보다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이 많거든."

"카론 님이? 의외...윽!"

쐐애액-

반문하는 미하일의 코앞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가는 주먹.

재빨리 허리를 뒤로 젖힌 미하일이 무명을 흘겨보았다.

"...신문 다 보셨으면 좀 도와주시죠. 아무리 저라고 해도 S급에 근접한 상대를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건 어렵습니다."

"약속은 약속. 나는 밤을 대비해 힘을 아껴두어야 한다."

단호한 거절.

어쩔 수 없다는 듯 머리를 긁적인 미하일이 그를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럼 무기라도 빌려주시죠. 설마 그 정도 부탁도 안 들어주시는 건 아니겠죠?"

"그 정도는 어렵지 않다."

고개를 끄덕인 무명이 허리춤의 단검을 뽑아 던짐과 동시에. 미하일의 명치와 하반신을 향해 두 줄기 권격이 날아들었다.

"이크!"

가볍게 외친 미하일이 허공으로 몸을 피하자, 그의 발밑에서 두 남녀의 외침이 들려왔다.

"코쟁이 놈!"

"감히 우리를 앞에 두고 여유를 부려?"

키가 크고 체구가 단단한 두 남녀.

무명의 옆으로 착지한 미하일이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동구 쌍둥이라고 했던가...판데모니움에도 저런 놈들이 몇 있었는데. 본신이라면 몰라도 이 몸으로 둘을 동시에 상대하긴 상당히 까다롭네요."

"초월체도 형제가 있나?"

"초월체라고 해서 필멸자 시절의 기억마저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요."

무명의 질문을 가볍게 답한 미하일이 단검을 역수로 쥐었다.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듯 영 어색한 느낌.

"젠장, 성검이 있었더라면...."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몇 차례 이리저리 단검을 휘둘러 본 미하일이 쌍둥이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당신들이 마지막인 거 알고 계시죠? 약속은 지키셔야 합니다."

"약속? 다짜고짜 찾아와서 밑으로 들어오라는 게 협박이지 약속이냐?"

"흥, 다른 지역 머저리들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남매는 그렇게 만만...."

스윽-

동구를 지배하는 쌍둥이 중 긴 머리를 질끈 묶은 동생, 이지현이 황급히 말끝을 흐렸다.

눈앞의 아름다운 청년.

미하일이 단검을 천천히 들어 올림과 동시에 모공이 얼어붙어 버릴 듯한 위기감이 그녀의 전신을 짓눌렀기 때문이다.

"이제부턴 조금 다를 겁니다. 로제 님조차도 무기를 쥔 저한테는 손끝조차 대지 못했으니까요."

"로제라면...얼마 전에 S급 헌터로 발탁되었다던?"

"아시는 모양이군요."

"그분 완전 내 이상형인데! 어떻게 좀 만나볼 수 있을...."

"오빠! 쪽팔리니까 좀 닥쳐!"

퍽-

머리를 박박 민 사내. 이지훈의 정강이를 걷어찬 이지현이 자세를 바로잡았다.

"우릴 네 밑으로 끌고 가려는 의도가 뭔진 몰라도, 헌터 나부랭이 말은 순순히 안 듣지."

"그리고 아저씨! 헌터라면 그렇게 이를 갈던 사람이 어찌 그럴 수가 있수? 딸이 불쌍하지도 않으쇼?"

"협조할 만해서 협조한 거다. 혜진이에 관해선 나중에 얘기하도록 하지."

자신의 말을 한 귀로 흘린 무명이 다시금 신문에 시선을 고정하자.

으드득- 어금니를 깨문 이지훈이 미하일을 노려보았다.

"아무튼! 우릴 꺾기 전까진 네놈 밑으로 기어들어 갈 생각 없다. 그리고 당신들! 쪽팔리지도 않수? 아무리 상대가 강하다 해도 그렇지. 동구를 제외한 전 지역이...."

이지훈의 일갈에 저 멀리서 이쪽의 상황을 지켜보던 이들이 재빨리 시선을 회피했다.

그 수는 모두 셋.

동구의 쌍둥이와 마찬가지로 각자의 구역을 대표하던 각성자들이자, 미하일에게 패배한 뒤 충성을 맹세한 이들이다.

"당신들도 곧 저분들 자리에 서게 될 겁니다. 정확히는 제가 아니라 사장님의 아래겠지만요."

"그 사장이란 새끼가 뭐 하는 놈인진 몰라도...헙!"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콧잔등을 찢고 지나가는 톱날 단검.

대경실색한 이지훈을 지나친 이지현이 미하일을 향해 몸을 날렸다.

"뒈져!"

미하일이 단검을 쥐는 순간부터 느껴지던 위압감.

'여유를 부리고 있을 때 빠르게 몰아치지 않으면...반드시 패배한다.'

지난 7년간, 울산에서 목숨을 건 수많은 전투를 겪어온 이지현의 모든 감각이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코쟁이 새끼. 좀 반반하게 생겼다고 우리를 얕봐?"

동생의 생각을 읽은 이지훈이 그녀를 따라 커다랗게 외치며 돌진하자.

콰앙-

그의 발자국을 따라 땅이 움푹 파이며 사방으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힘 하나는 제법이시네요. 수인화한 춘식 형님보단 한참 부족하지만."

"그건 또 누구...억!"

각력을 이기지 못하고 점점 모양새가 바뀌어 가는 주변의 지형.

대지를 뒤엎으며 코뿔소처럼 돌진하던 이지훈이 발등에서 느껴지는 화끈한 통증에 비명을 삼켰다.

"이 씨...."

마나로 보호되는 피부를 뚫고 소리 없이 그의 발등을 관통한 단검.

지금껏 겪어왔던 일반적인 관통상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격통에 이지훈이 바닥을 나뒹굴자.

이를 본 이지현이 이를 악물었다.

'오빠를 한 방에...저놈은 누구지...대체.'

한껏 단련된 그녀의 동체 시력으로도, 조금 전 일격을 전혀 간파할 수 없었다.

게다가.

어지간한 대포도 맨몸으로 받아낼 수 있는 이지훈이 단 일격에 전투 불능 상태가 되었다.

그렇다는 건, 조금 전 일격에는 속도뿐만 아니라 충분한 위력까지 더해졌다는 뜻.

"하여간 둔해서는."

고개를 돌려 주저앉은 자신의 오빠를 흘겨본 이지현이 한층 더 속력을 높였다.

본래는 힘은 세지만 상대적으로 느린 이지훈에게 맞춰 협공을 가하려 했으나.

그가 전투 불능이 된 이상, 자신의 장기인 속도전으로 판세를 이끌어나가기로 작전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때마침 그의 유일한 무기인 무명의 단검도 이지훈의 발등에 꽂혀있는 상황.

재빠르게 판단을 마친 이지현의 주먹이 잔상을 남기며 미하일의 안면을 향해 쏘아졌다.

하지만.

"개자식, 무기는 좀 다루는 것 같지만 지금은 빈손...어?"

서걱-

한 차례 푸른 빛이 번뜩임과 동시에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작열통.

"어, 언제 다시...."

미하일의 손에 쥐어진.

시퍼런 불꽃을 뿜어내는 단검을 본 이지현이 옆구리를 움켜쥔 채 침음성을 흘렸다.

"잘 썼습니다."

단검을 원래의 주인에게 던진 미하일이 바닥에 놓아둔 가방을 집어 들었다.

"뭐, 제가 무기를 쥔 이상 당신들의 패배는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건방진 놈."

"다시 붙어! 아직 안 졌어!"

이를 악물며 통증을 참아내는 쌍둥이. 그들을 향해 다가간 미하일이 포션을 건네며 씨익- 미소지었다.

"다시 붙어도 결과는 같을 겁니다. 펜타그램 나이츠에서조차 무기를 쥔 저를 이길 수 있는 분은 없으니까요."

미하일의 능청스런 답변에 두 쌍둥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울산에 고립된 채 세상과 단절되다시피 지내던 그들이었지만.

전 세계 최고의 헌터 집단이라 불리는 펜타그램 나이츠는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이름이었으니까.

"펜타그램 나이츠? 당신이 그 미국의 펜타그램 나이츠라고...요?"

"앗, 그러고 보니 제 소개가 늦었군요. 펜타그램 나이츠의 백기사, 미하일 슬리먼입니다."

"자, 잠깐. 왜 그걸 이제야 말하는 거요? 지미럴, 알았으면 애초부터 안 덤볐지...미쳤다고 우리가 백기사한테...저 작자들, 상대가 백기사인 걸 알았으면 귀띔이라도 좀 해줄 것이지...으아아악! 아파서 뒈지겠네!!!"

"호, 혹시 청기사 님이나 적기사 님은 안 오셨나요? 적기사 님이 완전 제 롤모델인데!"

"왜 하필 적기사...흠흠. 아무튼, 나머지 분들도 조만간 이곳에 방문하실 겁니다."

분한 듯 멀리서 이쪽을 지켜보는 각성자들에게 고함을 내지르는 이지훈과.

적의를 불태우던 아까와는 달리 동경심으로 가득한 눈을 빛내며 미하일을 향해 달라붙는 이지현.

슬쩍 몸을 뒤로 뺀 미하일이 상처에 포션을 들이붓는 그들을 향해 말을 건넸다.

"제법 쓸만하시죠? 금방 나을 겁니다."

"이거 그거 아니요? 그 치유 가속 포션인가 그거. 엄청 비싸고 구하기도 어렵다던데. 역시 백기사는 다르구만."

치이익- 환부에서 피어오르는 새하얀 연기를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던 이지훈이 감탄을 내뱉자.

미하일이 짐짓 근엄한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포션까지 드렸으니, 아까 하신 약속은 지키시리라 믿습니다."

"쳇...어쩐지 사기당한 기분이지만...진 건 진 거니. 구워 먹든 삶아 먹든 맘대로 하쇼."

"그래도 백기사 밑으로 들어가는 거면 좋은 거 아니야? 그 씹어먹을 헌터 협회 소속도 아니고 말이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정확히는 제가 아니라 제가 모시는 사장님 밑으로 들어가게 되실 겁니다."

미하일이 이야기를 정정해 주자, 남매의 시선이 그를 향해 집중되었다.

"그...아까부터 사장 사장 하는데, 그 사장이 대체 누구요? 백기사 정도 되는 양반이 모시는 분이라니"

"그러게. 내가 알기론 국내에 그 정도 인물이 없을 텐데."

"조만간 여러분들도 만나 뵙게 되실 겁니다. 아주 음...굉장하신 분이죠. 여러 의미로요."

"...?"

쌍둥이의 질문에 갑작스레 복잡해진 미하일의 표정.

그의 머릿속에선, 얼마 전 승현을 감금했던 일과 에트나 화산에서의 300년이 교차되어 지나가고 있었다.

'불카누스 님은 잘 있으려나. 지금쯤 사장님...아니, 프레이야 님과 조우했을 텐데.'

환생 후 일어날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프레이야가 에트나 화산의 불꽃을 이용해 인위적으로 창조한 초월체 불카누스.

프레이야의 지식과 정보.

그리고 중요한 기억들이 백업되어있는 불카누스를 흡수한다면, 자신의 소심한 복수를 프레이야가 알아차렸을 확률이 높았기에.

후환이 두려운 미하일은 연신 마음속으로 스며드는 불안감을 애써 억눌러야 했다.

"...어떻게든 되겠죠. 그보다 이제 마지막으로 여기서 해야 할 일이 남았는데...끄응."

뒷일에 관해 생각하기를 포기한 미하일이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남은 일은 하나.

단탈리온의 명을 받고 이곳을 관리하는 로키를 처단하는 것.

"놈을 잡기 위해선 울산의 절반 정도가 불타버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가진 힘은 가장 약하지만.

근원을 제외하면 누구보다 넓은 영역에 영향력을 펼칠 수 있는 존재가 만신전의 악동, 로키이니까.

그렇기에 결심을 굳힌 미하일이 로키의 거주 구역으로 추정되는 남구를 다음 행선지로 정하려던 그때.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바싹 말라 뺨이 움푹 들어간 사내와 눈매가 사납고 키가 큰 여성을 발견한 미하일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어이! 아저씨, 오래간만이네? 여기 계신 분들이 승현이가 말한 그분들인가?"

"그...간...안녕하셨습니까."

"저건...."

유신애와 오신우.

아직 실제로 만난 적은 없지만, 그들의 존재는 이미 충분히 자각하고 있다.

"저자가 어떻게...!!!"

하지만.

미하일이 놀란 이유는 본래 대전에 있었어야 할 그들의 등장 때문이 아니었다.

"놔라, 이 빌어먹을 계집! 죽인다! 락샤사!"

유신애의 손에 목덜미를 붙잡힌 채 버둥거리는 소년.

만신전의 악동이자.

시시포스에게 충성을 맹세한 장난의 신을 향해 미하일의 신형이 바람처럼 쏘아졌다.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199화

콰직-

로키의 안면을 향해 내리꽂힌 미하일의 주먹. 그의 손목을 잡아챈 유신애가 눈썹을 찡그렸다.

"다짜고짜 무슨 짓이야?"

"그런...건...맞기 전에...."

움푹.

안면이 함몰된 로키가 억울한 듯 중얼거렸지만, 그의 목소리에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유신애의 주변을 불꽃처럼 휘감은 마기. 그것의 성질을 파악한 미하일의 눈에 이채의 빛이 담겼다.

"완전히 각성하셨군요. 축하드립니다."

"뭐, 며칠 됐어. 오래간만이다 미카엘? 아, 여기선 초면이지 참."

"그렇군요. 그런데 여기엔 대체 왜?"

"지시가 있었거든. 아니지. 부탁이라고 해야 할까."

의미심장한 미소를 띤 유신애가 간단히 설명을 끝마치자. 조금 못마땅한 표정이 된 미하일이 작게 중얼거렸다.

"로키쯤은 저 혼자서도 충분한데...아무리 기억을 완전히 되찾지 못한 상태였다지만, 괜한 걱정을 하셨군요."

"그것도 그렇지만, 네가 못 미더워서 아닐까? 성질 급하지. 눈 돌아가면 앞뒤 안 가리지. 위아래도 없어지고 말이야."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둘 사이에 갑작스레 흐르는 심상치 않은 기류.

곧이어.

빠지지지직-

유신애의 주변을 둘러싼 마기와 미하일의 에테르가 허공에서 충돌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신마대전 이후로 얼굴을 마주하는 건 처음이던가?"

"종전 이후에 당신이 절 찾기 위해 프레이야 님께 브리싱가멘을 빌려 판테온을 방문했단 소식은 들었었습니다."

"전쟁이 끝났더라도 승부는 마저 내야지. 기껏 찾아갔더니 겁쟁이처럼 자리를 비운 게 누구였는데."

"아쉽게도 그땐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말이죠. 300년 정도 자리를 비웠어야 했습니다."

에트나 화산에서의 지옥 같은 기억을 재차 상기시키는 유신애.

그녀를 향해 미하일이 조소 섞인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나찰 락샤사. 당신은 이미 저에게 다섯 번 패배했습니다. 언제부터 패자가 그렇게 말이 많았습니까?"

"여섯 번째는 다를지도 모르지. 원래 마지막에 이기는 놈이 진짜 승자인 거 몰라?"

"으악!"

콰당탕-

손에 쥐고 있던 로키를 거칠게 내던진 유신애가 미하일을 향해 저벅저벅 다가갔다.

"내가 요즘 원기를 실컷 충전해서 기운이 좀 넘치거든? 어때. 여기서 아예 결판을 내는 게?"

"필멸자의 껍데기를 쓰고 결판을 내는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정 원하시면 프레이야 님의 허락부터 받아 오시죠."

"쳇, 비겁하게 프레이야...님을 내세워? 두고 봐. 이번 일만 끝나면 너랑 우리엘을 쌍으로 묶어서 흠씬 두들겨 줄 테니까."

"우리엘 누님을 두들겨 패는 건 저도 찬성입니다."

자신의 누이이자 펜타그램 나이츠의 적기사, 우리엘을 떠올린 미하일이 고개를 끄덕이자.

얼굴을 일그러트린 유신애가 그의 의견에 동조하며 기다렸다는 듯 말을 꺼냈다.

"그렇지? 그 계집애, 예전부터 좀 재수가 없었어. 꼴에 신장이라고 거들먹거리는 것도 그렇고. 하는 짓거리도 그렇고."

"게다가 내숭은 얼마나 심한지...평소에는 그렇게 난폭하던 작자가 프레이야 님 앞에선 '갑옷이 너무 무거워서 못 움직이겠어요.' 하는 거 보셨습니까? 몸까지 배배 꼬아가면서 말이죠."

"...으엑. 마수들을 맨손으로 잡아 찢던 걔가? 그건 몰랐네."

"그뿐만이 아닙니다. 천사 출신인 주제에 음습하기는 또 얼마나 음습한지. 판데모니움에 계시던 락샤사 님은 모르시겠지만, 전에 판테온에서...."

어느새 의기투합해 우리엘의 험담을 늘어놓는 두 사람.

내던져진 채 바닥을 나뒹굴던 로키가 이들을 보며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난 대체 왜 저런 놈들한테...."

"뭐?"

"저런 놈이라고 했습니까?"

에테르와 마기를 피워올리며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두 사람.

당황한 로키가 영역을 펼치려던 그때. 만면에 악랄한 웃음을 띤 유신애가 그의 멱살을 잡아챘다.

"또 해봐. 어제처럼 투신전에 가둬놓고 온몸의 뼈를 다 분질러 줄 테니까."

"...."

유신애의 협박에 대번에 입을 다문 로키.

자신을 몇 차례 고전케 한 나찰 락샤사의 고유 영역, 투신전을 떠올린 미하일이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로키를 사로잡은 건 당신 솜씨였군요."

"뭐, 투신전을 발동한 이상 일 대 일로는 절대 안 질 자신이 있으니까."

바짝 겁먹은 로키를 노려보던 유신애가 마지못해 한 마디를 덧붙였다.

"...몇몇만 빼고."

그 몇몇 중 하나인 미하일을 향해 또다시 화살이 돌아가려던 찰나.

분위기를 감지한 미하일이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로키의 처분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일단 덤벼들길래 잡아 오긴 했는데...이놈 원래 만신전에 있던 놈 아냐? 에테르가 낯이 익은데."

"그런 셈이죠."

"아! 기억났다! 그 겁쟁이 로키 놈. 그냥 죽이자. 뭘 재고 있어. 어차피 풀어줘 봐야 단탈리온한테 돌아가서 다 일러바칠 텐데."

"죽여도 딱히 득 될 건 없지 않습니까. 어차피 육신을 버리고 다시 시시포스에게 돌아간 뒤 인간으로 환생할 텐데. 다시 찾으려면 골치 아픕니다."

"그런가? 흠...."

자신의 처분을 놓고 토론을 벌이는 두 사람.

가만히 그들의 대화를 엿듣던 로키가 기다렸다는 듯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그래! 차라리 죽여라! 빨리 날 죽여!"

과장된 목소리로 목에 핏대를 세우는 로키. 대화를 멈춘 미하일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죽이라고요?"

"그래! 죽여! 구차하게 목숨을 연명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

"아픈 게 무섭다는 이유로 신마대전 당시에도 몸을 뺀 겁쟁이가 스스로 죽음의 고통을 받아들이겠다?"

"그,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신념을 위해서라면 육신의 죽음 따위는 두렵지 않다!"

어딘지 모르게 수상한 변명.

미하일이 유신애를 향해 슬쩍 눈짓을 보내자, 그의 의도를 알아차린 유신애의 만면에 흉흉한 미소가 내걸렸다.

"신념이 아니라 제 몸의 안위겠지. 그러고 보니 이 자식, 마장 중에서도 구시온을 제일 무서워했었던가."

"히익...!!!"

고통의 마장, 구시온을 떠올린 로키가 황급히 머리를 감싸 쥐며 몸을 웅크렸다.

자신의 의심이 맞아떨어졌음을 알아차린 미하일이 재차 유신애에게 눈짓을 보내자.

"구시온은 무섭고, 락샤사는 안 무섭다 이거지?"

사납게 날뛰는 마기를 전신에 휘감은 유신애가 로키를 향해 바짝 얼굴을 들이밀었다.

"홍아랑 애아가 있었더라면 아주 포를 떠놨을 텐데. 아쉽지만 그냥 주먹으로 해 줄게."

"...."

"내가 또 때리는 건 기술적으로 잘 해줄 자신이 있거든. 투신전에 가둬놓고 한 사흘 밤낮은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해줄 테니 각오하도록 해."

저건 진심이다.

광기와 살기가 뒤엉킨 유신애의 눈동자를 본 로키의 바지춤이 축축이 젖어 들기 시작했다.

곧이어.

"아, 알고 있는 걸 전부 말할 테니...제발 그것만은...."

땅바닥에 머리를 파묻은 로키가 유신애를 향해 파리처럼 손바닥을 비비기 시작했다.

* * *

"두 분의 협정에 따라 육신을 버리고 판데모니움으로의 귀환하라는 명령이...."

바닥에 무릎을 꿇은 로키의 자백이 이어지던 와중.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된 다른 이들과 함께 멍하니 그들을 지켜보던 이지훈이 고개를 돌렸다.

"오신우 형님이라고 하셨던가. 제피로스의?"

"그렇습니다. 이지훈 씨."

"그냥 지훈이라고 불러주쇼. 보아하니 나이도 내가 한참 아래인 것 같은데. 그나저나 저게 다 무슨 얘기요? 단체로 정신이 나가버린 건가."

신이니 악마니 하는 내용을 얼굴색 하나 안 바꾸고 떠들어대는 세 사람.

만일 저 앞에서 대화를 나누는 게 백기사가 아니었다면.

그리고 A급 최상위권 헌터로 널리 알려진 유신애가 아니었더라면 그저 망상으로 치부했을 내용이다.

혼란스러워하는 그를 향해 작게 한숨을 내쉰 오신우가 입을 열었다.

"이해해. 혼란스럽겠지."

"그렇수다. 솔직히 애들도 아니고 뭔 저런 이야기를 진지하게...요즘 같은 세상에 신이 어딨고, 악마가 어딨수."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는데 말이야...아니다. 직접 보면 믿을 수밖에 없을 거다."

보문산 균열에서 조우한 단탈리온과 마기에 물들었던 두 팀장.

그리고.

그들 중 행방이 묘연해진 강철규를 떠올린 오신우의 얼굴에 깊은 그늘이 생겨났다.

심상치 않은 그의 표정을 본 이지훈이 인상을 찡그리며 반짝이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끄응, 뭔가 있긴 있는 모양인데...분위기를 보아하니 앞으로 한솥밥을 먹게 될 것 같은데, 알고 있는 게 있으면 말 좀 해 주슈."

"그래요. 혼자만 알고 있지 말고. 신우 오빠도 사장님인가 하는 사람 밑에 계신 거 아니에요? 우리도 알 건 알아야죠!"

이때다 싶었는지 이지현이 은근슬쩍 대화에 끼어들자, 잠시 고민하던 오신우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문을 열었다.

"딱히 밑으로 들어간 건...음...어차피 앞으로 같이 행동하게 될 테니 상관없으려나."

"같이 행동? 우리는 앞으로 뭘 해야 하는 거유? 들은 게 없어서...."

"그래! 우리도 궁금하다!"

"좀 들어봅시다! 저쪽 얘기는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

그의 주변으로 미하일에게 패배한 각성자들이 하나둘 몰려들기 시작했다.

"흠흠, 본론으로 전에 앞서...울산을 이렇게 만든 역귀의 정체부터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자신을 둘러싼 그들을 보며 목소리를 가다듬은 오신우가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차근히 풀어놓기 시작했고.

잠시 후.

꽈앙- 분노한 이지훈의 주먹이 폭음과 함께 대지를 파고들었다.

"아레스 그 개자식들이 인위적으로 역귀를 만들었다고? 형님, 그 얘기에 책임질 수 있소?"

"증인도 있다. 당시에 영문도 모른 채 역귀 제작에 동원되었던...."

천윤기를 떠올린 오신우가 말꼬리를 흐리자, 혼란에 빠진 주변 각성자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역귀를 만든 아레스의 대가리가 단탈리온이라는 악마고. 그놈의 윗대가리가 지금 저기서 말하는 시시포스란 새끼라는 거지?"

"그리고 백기사에게 사장이라 불리는 분이 시시포스란 놈의 대척점에 선 분이시고?"

"이런 개새끼들!"

"거기다 협회장이란 놈은 시시포스한테 바짝 쫄아들어서 울산을 봉쇄해? 황정호 이 개만도 못한 놈이...!!!"

진실이 밝혀진 후,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소란스러워진 주변.

이들을 진정케 만든 건 이지훈과 이지현의 주변으로 흘러나온 진득한 살기였다.

"오신우 형님. 방금 하신 말씀은 꼭 책임지셔야 할 거요. 만일 거짓이라면 오늘 여기 있는 이들에게 맞아 죽을지도 모르니까."

"거짓이라고 할 것도 없다. 전부 나와 저기 있는 신애가 보고 듣고, 겪은 사실이니까."

"망할...처음부터 시시포스랑 단탈리온이란 놈을 상대하는 게 목적인 줄 알았으면 알아서 백기사한테 기었지. 괜히 발등에 구멍만 났네."

"신우 오빠는 그거 아세요?"

뿌드드득-

이지훈이 허탈한 듯 읊조리자. 말을 이어받은 이지현의 어금니에서 무언가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저기 있는 무명 아저씨는 눈앞에서 역귀에게 아내를 잃었고. 하나뿐인 딸, 혜진이는 아직도 투병 중인 데다가. 저기 있는 윤지 언니는 남편을, 그리고 창호 아저씨는...."

처음엔 셋이었지만 어느새 불어난 주변 각성자들의 숫자.

그들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이를 갈던 이지현이 마지막으로 자신과 이지훈을 가리켰다.

"저희는 어릴 때부터 우리를 키워주신 할머니를 눈앞에서 보내드려야만 했어요."

"게다가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협회 놈들은 우리의 생존 사실을 감췄지. 야왕 영감이 아니었더라면, 진즉에 우린 다 죽었을 거야."

분노로 인해 붉게 물든 눈을 쓱쓱 비빈 이지훈이 감정을 추스르던 와중.

"얘기는 끝난 거야?"

조금 떨어진 곳에서 로키를 심문하던 유신애가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그러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이지훈이 그녀의 어깨를 덥석 움켜쥐었다.

"누님. 락샤사라고 했던가? 악마? 나찰? 뭐 그런 거라고 들었수다."

"어째 넌 말투가 박덕기 같다? 그나저나 악마는 좀 그렇네. 이왕이면 마장이라고 불러줄래?"

"박덕기? 뭐 아무래도 상관없수. 그보다 정말 형님과 누님. 그리고 그 사장이란 분에게 협조하면 단탈리온이란 놈을 만날 수 있는 거요?"

"그렇겠지. 그에 관해서 안 그래도 울산에 들어오기 직전에 추가로 연락을 한 통 받았는데 말이야."

"연락?"

"당신들이 사장이라 부르는 프레...아니, 한승현한테 말이야. 왜 그런 소리를 했는지 이해가 안 됐었는데, 로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제야 알 것 같네."

한승현?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름에 모두가 동시에 고개를 갸웃거렸고.

"안 그래도 당신들을 데리고 해야 할 일이 생겼거든."

그들을 한 차례 훑어본 유신애가 핸드폰을 꺼내 액정에 떠오른 문자를 큰 소리로 읽었다.

"어디 보자...그러니까, 세상에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각성자들을 데리고 아레스 클랜 사옥 지하 10층에 보관된 일출을 탈환해 주십시오. 아마 큰 저항은 없을 겁니다. 라는데?"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200화

늦은 밤.

승현과 함께 통로를 넘어선 로제가 기다렸다는 듯 냉장고를 찾아 부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 역시 불칸 왕국보단 여기가 좋아요. 먹을 거 없...앗, 지난번 남겨놨던 햄버거다."

"...사흘 정도 지났나. 그런 거 놔뒀다가 먹으면 배탈 나."

"전자레인지가 있으니까 괜찮아요! 불칸 왕국에 있는 동안 패스트푸드가 얼마나 먹고 싶었다고요."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듯, 행복한 표정으로 전자레인지에 포장지를 벗긴 햄버거를 집어넣는 로제.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승현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지금쯤이면 울산에 도착했으려나. 전파가 닿을지는 모르겠지만...."

굴베이그의 사념을 통해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유신애에게 문자를 보낸 승현이 소파에 털썩 주저앉자.

양손 가득 먹을거리를 들고 그를 뒤따라 온 로제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그나저나 정말 이렇게 돌아와도 괜찮은 거예요? 하다못해 경과라도 확인하고 가는 편이...."

"부탁은 확실히 해 뒀으니까 약속은 지키겠지. 뭐, 그리고 아쉬운 쪽은 아무래도 드워프들일 테니까."

"그래도...오크들이 순순히 드워프들을 따라 넘어와 줄까요? 하다못해 하프 오크인 다이크 씨라도 어떻게...."

"내가 기억하기론, 오크는 동족 간의 유대감이 그리 강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다이크 씨가 가더라도 딱히 결과는 바뀌지 않을 거고."

"그런가요. 흐음...."

승현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인 로제가 다시금 햄버거에 온 신경을 집중하자.

구시온과의 첫 조우 당시 받았던 퀘스트, [고블린의 품격]을 재차 확인한 승현이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를 걸었다.

[고블린의 품격-마지막]

- 퀘스트가 제시한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해 고블린의 생활수준을 높인 후, 사용자의 관리 하에 있는 [AR-001] 채널의 등급을 [6등급]까지 끌어올리자

1. 농업 방식 전파하기(0/1)

2. 건축 방식 전파하기(0/1)

3. 무기 제작술 전파하기(0/1)

제한 시간 : 무제한

보상 : 에테르 [20000]

오로지 생존 수단이라고는 수렵과 채집에만 집중된 높은 산 부족.

게다가 자원조차 극히 부족한 탓에, 지금까지 굶주림에 시달려왔었다.

'퀘스트는 둘째 치더라도, 구시온으로 인해 생활수준이 바닥까지 떨어진 고블린들을 구제해 줄 필요가 있으니까.'

그렇기에.

자신이 관리자가 된 채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승현이 택한 방법은 간단했다.

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문명 수준을 가진 드워프와 오크들을 높은 산 부족에 초빙하는 것.

'드워프들의 건축 기술이나 무기 제작 기술은 말할 것도 없고. 오크들 또한....'

드워프들마저 반할 만큼 독보적인 양조 기술을 가진 오크들은, 당연한 이야기지만 농작물을 재배하는 기술 또한 탁월하다.

'높은 산 부족의 대지가 척박한 게 문제지만...그건 내가 에테르를 사용해 기적을 일으키면 개선될 수 있는 사안이고.'

그들이라면 높은 산 부족에게 농업 기술을 전파하고, 자급자족하며 살아갈 방법을 전수해 줄 수 있으리라.

시시포스와의 총력전까지 남은 시간은 일 년.

그 전까지 모든 수단을 동원해 전력을 보강해야 한다.

"뭐, 목숨이 걸린 일이라 다들 협조적으로 나와줄 테니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고...그보다 구시온 덕분에 생각지도 못한 능력을 얻었네."

파지직-

소파에 몸을 묻은 승현이 가볍게 손가락을 뻗자, 붉은 스파크와 함께 허공에 자그마한 균열이 생성되었다.

균열의 너머로 어렴풋이 보이는 라피스 해변의 풍경. 이를 확인한 승현이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 설마 불카누스를 흡수하며 세계수의 능력까지 같이 옮겨올 줄이야."

그의 아버지이자 프레이야의 조각 중 하나인 한기호가 만들어낸 아티팩트, 프레이야의 정수.

이를 통해 [차원교류자]가 된 승현 또한 차원을 넘나들 수 있는 능력이 생기긴 했으나.

'그건 거의 일방통행인 데다가, 통로의 생성 장소도 오로지 쪽방 뒷문으로만 한정되어 있었지.'

그런 점에 있어서, 새로이 얻은 세계수의 힘은 승현의 부족한 점을 완벽히 보완해주었다.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통로를 열 수 있는 능력은, 그의 행동반경을 훨씬 더 넓게 만들어줄 수 있을 테니까.

"발언권을 요청한다. 차원의 통로에 간섭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건 폭주한 불카누스를 피해 사념을 유지한 내 덕이 크다. 프레이야."

"아직 말해도 된다고 허락 안 했어."

"...."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근원이란 놈이 더럽게 소심하단 말...잠깐!"

의기소침하게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는 굴베이그를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던 승현이 무언가가 떠오른 듯 그를 황급히 불러 세웠다.

"뭐냐, 프레이야."

"너, 분명 흉내쟁이와 기억을 공유한다고 했지?"

"그렇다. 그러한 일이 가능한 이유는 이 흉내쟁이라는 도플갱어를 만들어낸 재료가...."

"그건 됐고. 그렇다면 혹시, 흉내쟁이의 아공간에 남은 사념이나 영체가 있는지 확인해 줄 수 있어? 그 왜, 내게 종속된 불카누스처럼 말이야."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으려는 굴베이그의 말을 자른 승현이 다그치듯 묻자, 잠시 침묵하던 굴베이그가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로 답했다.

"이 녀석의 권능으로 흡수한 것 중, 영체는 대략 서른 개 정도가 존재한다."

"그중 인간의 영체는?"

"셋. 성별로 보자면...남성이 둘에 여성이 하나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승현의 입가에 걸린 의미심장한 미소.

오전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 굴베이그가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또 뭔가 꿍꿍이가 있는 모양이로군."

억겁의 세월 동안 만신전의 수장, 프레이야와 대립해온 굴베이그.

셀 수 없을 만큼 부딪혀온 만큼.

그리고 양면의 성질을 가진 빛과 어둠인 만큼, 그 누구보다 프레이야에 관해 잘 알고 있는 굴베이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가 저런 표정을 짓는 경우엔 무언가 시커먼 속내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그 중 특히 독기가 강한 한 놈이 있을 거야. 그렇지?"

"독기가 강한 놈이라...저놈인가."

그림자 밖으로 상반신을 내어놓은 채. 승현의 이야기에 흉내쟁이의 내면을 들여다보던 굴베이그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만마전의 가장 하부.

죄인들을 수용하는 지옥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듯한 흉내쟁이의 내면.

그 안에서 승현을 향해 처절하게 증오와 저주의 외침을 내뱉는 한 영체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인간치고는 제법이군. 이 안에서 의식을 유지하고 있을 줄이야."

"역시, 그놈이라면 그럴 줄 알았어. 부탁이 하나 있는데 말이야. 들어줄 거지?"

"부탁? 네가 나에게?"

의아하다는 듯 굴곡 없는 얼굴로 승현을 응시하는 굴베이그.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간 승현이 작게 속삭였다.

"그놈만 빼고 전부 영계(靈界)로 성불시켜 줘. 네 힘이면 아카샤를 통하지 않고도 충분히 가능하지?"

"어렵진 않지만, 이자의 영체는 내가 소유하고 싶군. 비록 부정적인 감정에서 뽑아낸 하찮은 것이긴 해도, 드물게 마기를 품은 영체인 데다가...."

"꼭! 좀 '부탁'하자!"

승현이 고개를 숙이며 '부탁'에 힘을 주어 말하자. 쇠를 긁는 듯한 굴베이그의 목소리가 조금 들뜬 듯 가벼워졌다.

"부탁? 그 프레이야가 나한테 부탁을 한다 이거냐. 고개까지 숙여 가며?"

"좀 들어 줘라. 어려운 것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좋다. 대신 조건이 있다."

"...뭔데?"

"비록 전쟁에서 패배하긴 했지만, 나 굴베이그가 프레이야 따위보다 위대하다는 사실을 네 스스로가 인정해라."

"아, 예. 어둠과 소멸의 근원이신 굴베이그 님이 미천한 저보다 훨씬 위대하십니다."

"...."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인정.

기대하던 것과는 다른 결과에 잠시 당황했던 굴베이그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팔짱을 끼며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위대하신 굴베이그 님께서 특별히 자비를 베풀어 미천한 프레이야의 부탁을 들어주도록 하지."

'하여간, 예나 지금이나 단순한 새끼라니까. 어떻게 저런 놈이 만마전의 수장이 된 건지....'

승현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 굴베이그가 내면의 영체들을 분류해 나가기 시작했다.

곧이어, 성불이 결정된 이들을 한 곳으로 모아둔 굴베이그가 마지막으로 남은 하나를 확인한 뒤.

승현을 향해 질문을 건넸다.

"그런데, 마기를 가진 영체를 네 녀석이 왜 필요로 하는 거지?"

"쓸 곳이 좀 있거든."

"표정을 보아하니 또 무언가를 만들어낼 생각이로군."

"골렘. 코어의 재료로 그 녀석을 사용할 거야."

"골렘이라면...구시온이 가지고 놀던 그 인형?"

"그래. 그러니까 잃어버리지 말고 잘 보관해 줘. 꼭 그놈이어야 하거든."

천윤기와 천수연.

불카누스에게 저장된 골렘의 제작 도면과 함께, 두 부녀를 떠올린 승현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내걸렸다.

* * *

다음 날.

겨울숲 부족과 이어진 통로 앞에 선 로제가 제 몸보다 커다란 보따리를 가볍게 등에 짊어졌다.

"돌아갈 준비는 다 한 거지?"

"네. 식량도 챙길 수 있을 만큼 챙겼고...일몰도 잘 챙겼고...고마워요. 완전히 부서진 줄 알았는데...."

곧이어.

길이가 조금 줄어들긴 했어도, 이전의 모습을 되찾은 일몰을 재차 확인한 로제가 승현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뭘, 그럭저럭 복구는 했지만, 한 번 파손된 터라 예전만 한 성능은 안 나올 거야. 그러니까 새로운 일몰이 완성되기 전까진 불편해도 조금만 참아."

"하지만 전 이게 좋은걸요. 어머니한테 물려받은 거기도 하고."

"그럼 두 개를 다 쓰면 되잖아?"

"아! 그런 방법이 있었네요!"

승현의 이야기에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눈을 커다랗게 뜨며 손뼉을 탁, 친 로제가 멋쩍음과 아쉬움이 뒤섞인 웃음을 지었다.

"필요한 시간이 최소 육 개월이라고 했죠?"

"아마도. 절반 정도의 조각은 흡수했지만, 앞으로 남은 게 좀...존재감이 큰 것들이거든."

"할 수 있을 거예요! 저도 승현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센티넬의 재건을 위해 최선을 다해 볼게요!"

"그래. 고마워. 믿고 있을게."

"음...그럼, 육 개월 뒤에 다시 봐요! 잘 지내고 있어야 해요!"

해맑게 손을 흔든 후.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통로 안으로 진입한 로제.

이내 완전히 사라진 그녀의 뒷모습을 확인한 승현이 아쉬운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좀 허전하긴 하네."

곧이어.

바닥에 벌렁 드러누운 승현이 상태창을 불러내었다.

자신이 가진 각종 스킬과 특성이 세세하게 설명되어있는 홀로그램.

"아버지도 참...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주실 줄이야."

이를 향해 승현이 손을 휘젓자.

날카로운 경고음과 함께 여러 줄의 메시지가 주르륵- 떠올랐다.

- [튜토리얼 모드]를 종료하시겠습니까?

- 모든 메시지 기능과 퀘스트를 비롯해 사용자의 각성을 보조해 줄 장치가 사라집니다.

- [튜토리얼 모드] 종료 시, 사용자의 리미트가 해제됩니다.

곧이어.

잠시 망설이던 승현이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 [튜토리얼 모드]가 종료됩니다.

마치 전원이 꺼지듯 모든 메시지와 알림이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후우. 길잡이가 없으니, 이제는 내 판단을 믿는 수밖에."

앞으로 일 년.

그간 해야 할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한 승현이 몸을 일으켜, 공사가 한창인 가게 밖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201화

[속보] 대성 클랜 2차 클랜원 모집 일정 떴다!

- 10월 20일부터 25일까지라니까 생각 있는 놈들은 지원ㄱㄱ

┗대성이 거기지? S급 제작자 한승현이 운영하는 곳? 로제 헌터도 거기 소속이랬던가?

┗ㅇㅇ

┗지원하고 싶은데 등급 제한 있음? 찾아봐도 나오질 않네ㅠㅠ 심사는 어떻게 보는지 아시는 분!!!

┗나 전 제피로스 출신 현 대성 클랜원인데 딱히 제한은 걸린 거 없음. 그리고 입단 심사는 그간의 실적보단 면접 비중이 크니 알아두셈.

┗그게 끝? 그 외에는 준비해야 할 서류 같은 거 있음?

┗ㅇㅇ딱히 범죄 이력만 없으면 오케이고 실적이나 등급 같은 거 크게 안 봄. 서류는 지원서만 제출하면 끝.

가을이 성큼 다가온 10월의 어느 날. 의자에 앉아 안경을 고쳐 써 가며 모니터를 바라보던 최수근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이고. 다음 달부터 또 바빠지겠구만. 쯧쯧...요즘 눈도 침침한데 말이야."

그러자.

옆에서 한참 지원자들이 보낸 서류 분류 작업에 열중하던 전창수가 인상을 찡그리며 그를 흘겨보았다.

"영감님이 바빠질 게 뭐가 있습니까. 사전 준비는 내가 다 하는데. 벌써 이틀째 잠도 못 자고 이러고 있는 거 안 보입니까?"

"이놈이 또 어르신 말씀하시는데 토를 달아? 그래서 불만이다, 이거냐?"

"아니, 막말로 영감님이 하는 게 뭐가 있습니까. 모집 기간 내내 팽팽 놀고 있으면서."

"이 자식이 자꾸 하늘 같은 인사팀장한테 대드네? 야 인마, 내가 젊은 시절 클랜에 몸담았을 때는 말이야. 팀장님이 말씀하시면 그저 네네...."

"하늘같은 인사팀장은 개뿔. 그 헤르메스의 눈인지 뭔지 하는 능력 덕에 낙하산으로 단 직책이면서. 젠장, 나는 왜 전생에 초월체인지 뭔지가 아니었던 거지."

전창수의 거침없는 비난.

무어라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가 내뱉은 말은 모두 사실이었기에.

몇 차례 움찔거리던 최수근의 입이 조개처럼 꾹 닫혔다.

"하여간 요즘 젊은것들은 말이야...."

그래도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긴 싫었던 모양인지 작은 목소리로 끝내 한 마디를 덧붙이는 최수근.

하지만. 프리 마켓에서의 생존을 위해 단련된 전창수의 예민한 청력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그 '젊은 것'에 승현 형님. 아니, 사장님도 포함인 거 아십니까? 로제 누님이나 신애 누님 오시면 그대로 일러드릴까요?"

"어흠, 내가 무, 무슨 말을 했다고 그래?"

"제가 젊은 놈이라 귀가 밝아서 그런지 다 들리더군요."

"아이고 눈이야. 안과에서 스트레스는 시력 저하의 원흉이라고 하던데...."

서랍에서 안약을 꺼내 과장된 몸짓으로 눈에 집어넣는 최수근.

그런 그를 향해 전창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여간, 당일에는 영감님이 다 해야 하니까 미리미리 관리 잘 해 두십쇼. 지난번처럼 했다가 수연 누님한테 한 소리 듣지 말고."

"그, 그땐 처음이어서...잠깐. 왜 자꾸 네놈이 내 윗사람처럼 행동하는 거냐? 팀장은 난데?""기분 탓일 겁니다. 며칠 안 남았으니 도와주실 거 아니면 컴퓨터 그만 보고 눈 관리나 잘 해 두십쇼."

최수근에게서 시선을 뗀 전창수가 다시금 서류에 신경을 집중하자.

멋쩍은 듯 몇 차례 헛기침을 내뱉은 최수근이 다시금 모니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크흠. 그래도 내가 대(大) 대성 클랜의 인사팀장인데, 외부에서 우리 클랜의 평가가 어떤지는 알아야 할 거 아니냐. 뉴스 몇 줄만 더 보고 도와주마."

"하여간 핑계는...그래서. 영감님이 보시기엔 요즘 여론이 어떱디까."

흥미가 생긴 듯 전창수가 의자를 당겨 옆으로 다가오자.

이때다 싶었는지 최수근이 들뜬 목소리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뭐, 아직은 반반이지. 너도 알다시피 우리 클랜이 비정상적인 속도로 성장했잖냐. 그거 때문인진 몰라도 별의별 의혹이 다 터져 나오더라."

"하기야...그건 그렇죠. 당장 얼마 전 완성된 이 사옥만 해도...."

고풍스런 장식이 가득한 창문을 향해 힐끗 시선을 돌린 전창수가 머리를 긁적이자.

그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최수근이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어떻게 해명할 수도 없고 말이지. 이 건물을 그렇게 빨리 올렸다고 하면 누가 믿겠냐."

"그것도 기존에 공사에 참여하던 인력들을 몇몇만 빼고 다 외부로 돌리고 말이죠."

"게다가 임금까지 전부 정상적으로 지급했다더라. 물론 돈은 미하일 그 친구 지갑에서 나갔지만."

"...미하일 형님도 가만 보면 불쌍하단 말이죠. 그건 그렇고 승현 형님이 데려온 드워프라는 영감님들, 듣자 하니 장난이 아니더만요."

"그러니까. 그 양반들은 공사판에 취직했으면 아마 돈을 갈퀴로 쓸어 담았을 거야."

승현의 가게가 있던 자리에 세워진, 마치 신전을 연상케 하는 호화로운 대성 클랜의 사옥.

대성 클랜의 몇몇 클랜원과 건설에 참여한 극소수의 인부들을 제외하면, 이 예술적인 건물이 전부 승현이 데려온 드워프의 작품이란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았다.

"게다가 일당을 현금 대신 싸구려 양주로 받아가다니...그때 소장 얼굴을 네가 봤었어야 했는데 말이야."

제발 저희와 함께 일해 달라며.

막스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원하던 건설 소장의 얼굴을 떠올린 최수근이 배를 잡고 낄낄대자.

전창수가 안타깝다는 듯 주먹으로 책상을 가볍게 내리쳤다.

"젠장, 그때 출장만 아니었으면...그나저나 다음에 기회가 되면 나중에 내가 살 집도 지어달라고 해 볼까...."

"나는 이미 조니 워커 다섯 병을 볼프강 형님께 바치고 약속을 받아놨지. 조만간 그 지긋지긋한 텐트 생활도 끝이다. 끝."

"왜 혼자만 합니까. 비겁하게."

"그러니까 누가 좋다고 자원해서 가랬나. 그래서, 직접 두 눈으로 본 엘프들은 어떻디? 상상하던 거처럼 예쁘더냐?"

"...앞으로는 제 앞에서 다시는 엘프 얘기 꺼내지 마십쇼. 그리고 근육 얘기도."

씹어뱉듯 이야기한 전창수의 머릿속에, 당시 방문했던 겨울숲 부족에서의 악몽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승현의 지시에 따라 인스턴트 식품과 보충제를 전해주러 겨울숲 부족을 향해 자원해서 떠난 전창수.

물론, 그의 속셈은 따로 있었다.

'하프 엘프라는 로제 누님이 그 정도이니....'

게다가 로제는 늘 입버릇처럼 겨울숲 부족에서 외모가 가장 떨어지는 것은 자신이라고 이야기하곤 했었다.

그렇다는 건, 겨울숲 부족에는 로제를 능가하는 미인들이 즐비하다는 뜻.

그렇기에.

부푼 가슴을 안고 승현이 열어준 통로를 넘어 겨울숲 부족으로 향하는 전창수의 입가에는 해맑은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흐흐, 돌아가기 싫어지면 어쩌지...내가 없어지면 승현 형님이 섭섭해 하실 텐데.'

딱 겨울숲 부족의 입구에 도착할 때까지만 이었지만 말이다.

"오!!! 네가 한승현이 보낸 심부름꾼 인간이로군! 반갑다! 카레랑 라면은 챙겨왔겠지?"

"심부름꾼이라니...실례입니다, 록타 씨."

"그, 그런가?"

"반갑습니다. 저는 겨울숲 부족의 장로, 이안입니다. 보충제는 챙겨오셨습니까?"

기대와는 달리 그를 반겨준 건 땀내 나는 거구의 사내와 오거였으니까.

"게다가 그 둘뿐만 아니라 다른 엘프들도 전부...젠장. 그건 그렇고, 영감님이 보시기엔 이번 모집에 몇 명이나 몰릴 것 같습니까?"

"흠...아무리 못해도 기백은 넘지 않을까 싶은데. 여기저기서 말이 많이 나오긴 하지만, 어쨌거나 요 반년 새에 전국구급 클랜으로 급부상한 게 우리 대성이니까 말이야."

머릿속에서 악몽 같은 기억을 떨쳐버린 전창수가 화제를 돌리자, 최수근이 가만히 턱을 매만졌다.

수뇌부의 잠적과 사옥에서의 폭발 사고로 인해 혼란에 빠진 아레스 클랜.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각성자들의 습격을 받은 아레스는 단 반년 만에 제 위상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제피로스와 함께 대전을 양분하던 클랜답지 않은 허망한 최후.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그 자리를 꿰찬 것이 바로 승현이 세운 대성 클랜이었다.

"그땐 진짜 난리도 아니었지. 본래라면 대전을 통째로 먹었어야 할 제피로스가 자처해서 대성 클랜의 산하로 들어왔다는 걸 누가 믿겠어."

모두를 충격에 빠트린 오신우의 기자회견.

당시의 기억을 떠올린 최수근이 몸을 돌려 벽면에 장식된 육망성 형태의 엠블렘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요즘은 많이 좋아진 것 같아서 다행이더군. 한때는 진짜...."

지난 몇 달간.

대성 클랜은 수많은 의혹 제기와 각종 헛소문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아무리 S급 제작자가 설립한 클랜이라고는 하나.

전국구급 클랜인 제피로스가 아무런 기반도, 활동 내역도 없는 대성의 산하로 들어온다는 걸 순순히 납득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대성의 여론은 최악이었다.

"그땐 진짜 별의별 얘기가 다 나왔었죠. 제피로스의 자금 세탁용으로 세운 페이퍼 클랜이라느니, 뇌물 수수라느니...."

"망할 놈들. 자금 세탁용이면 우리가 제피로스 산하로 들어가야지, 왜 제피로스가 우리 아래로 들어와?"

"그래도 승현 형님이 묵묵히 견뎌주신 덕분에 요즘은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최악으로 치닫던 여론이 서서히 대성 측으로 기울기 시작한 건, 승현의 파격적인 행보 덕분이었다.

본래라면 거금을 주고 구해야 하는 치유 가속 포션을 저렴하게 시중에 풀어버리는 것도 모자라.

고블린에게서 추출한 마석에 형질 변환을 적용해 하급 치유 가속 포션을 제작할 수 있는 레시피를 아무런 대가 없이 풀어버렸으니까.

"거기다가, 본래는 대성 클랜이 운영하는 상점가가 되었어야 할 땅을 교육 단지로 지정하기까지...대단하긴 해."

대성 클랜에 소속된 상급 연금술사들이 교육에 열을 올리고 있을.

사옥 아래의 마을을 유리창 너머로 바라보던 최수근이 나지막이 감탄을 내뱉었다.

"나는 아까워서 저렇게 못 할 것 같은데 말이지. 저기에 든 돈이 다 얼마인데."

"그게 전부 미하일 형님의 지갑에서 나온 돈이긴 하지만 말이죠."

"주인이 누구든지 간에 아까운 건 아까운 거야. 나한테 반만 줬으면...."

"거, 참. 영감님은 헤르메스인지 뭐시깽인지라는 양반이 뭐 그리 욕심이 많습니까? 초월자면 초월자답게 구십쇼. 좀."

"내가 도둑과 장사꾼의 신이라 그런다, 이 새끼야. 진짜 이게 아까부터 자꾸 기어오르네."

"아, 왜 때립니까! 이거 직장 내 폭력입니다!"

빠악-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손바닥으로 전창수의 뒤통수를 후려친 최수근이 씩씩대며 책상 위에 쌓인 서류를 가리켰다.

"너는 프레...아니, 사장님 오기 전까지 저거나 다 정리해 놔. 끝나기 전까진 집에 못 갈 줄 알아, 알겠냐?"

"하여간 영감님은 꼭 꼰대 티를...어? 승현 형님 오신답니까?"

인상을 찌푸리며 뒤통수를 문지르던 전창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가 이러한 반응을 보이는 건 결코 승현을 보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그럼 수연 누님도 오시겠...아, 또!"

빠악-

최수근의 커다란 손바닥이 재차 전창수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너는 인마. 속내가 다 보여."

"씨...그냥 순수한 마음으로 수연 누님이 보고 싶어서 그런 건데."

"씨? 씨이? 이놈 이거 말버릇 좀 보게? 씨이?"

"아, 쓸데없는 거로 트집 그만 잡으십쇼. 그래서 형님은 언제 오신답니까? 얼마 전까지 울산에 계신다더니."

의자를 돌린 전창수가 퉁명스럽게 중얼거리자,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 최수근이 안경을 고쳐 쓰며 문자를 확인했다.

"어디 보자...그러니까. 신제품 테스트도 해 볼 겸 균열에 잔류한 마수 몇 마리만 처리하고 온다는데?"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202화

가을이 성큼 다가왔음을 알리듯, 낙엽으로 붉게 물든 해운대 근처의 장산.

우뚝 솟은 바위에 앉아있던 A급 헌터 강태훈이 손목에 찬 시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에이 씨,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현재 시각 17시 49분.

약속한 시각보다 벌써 이십 분이나 지났음을 확인한 강태훈이 인상을 찡그리던 와중.

저 멀리서부터 두리번거리며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사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승현 씨?"

벌떡 일어난 강태훈이 남자를 향해 소리치자, 그를 발견한 사내가 헐레벌떡 달려와 멋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안녕하십니까, 아까 헌터넷으로 연락드린 한승현입니다. 길을 착각하는 바람에...."

"허, 참. 착각이요? 저 같은 고위급 헌터는 시간이 곧 돈인 거 모르십니까?"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주의하겠습니다."

훤칠하게 생긴 외모와는 달리 어딘지 모르게 어수룩해 보이는 행동.

미안한 기색을 내비치며 연신 고개를 숙이는 상대를 향해 강태훈이 날카롭게 쏘아붙이려던 그때.

"주의한다고 될 게 아니라...."

"어휴...힘들어라. 같이 가 오빠! 걸음이 뭐 그렇게 빨라!"

승현을 뒤쫓아 온 여성을 발견한 그의 동공이 걷잡을 수 없이 확장되었다.

"...."

이십 대 중반쯤 되었을까.

조금 서투른 화장 따위는 흠조차 되지 않을 만큼 수수한 아름다움.

그가 있는 곳을 향해 사뿐사뿐 다가온 여성이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허리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분명 지름길인 줄 알았는데...정말 죄송합니다."

"그래. 네 말만 믿고 따라왔다가 괜히 늦었잖아. 얼른 사과...."

"하핫, 초행이시면 그러실 수도 있죠. 저도 가끔 그럴 때가 있으니 너무 괘념치 마십시오."

승현의 말을 끊고 수연을 향해 호탕하게 웃어 보인 강태훈이 자신의 라이센스 카드를 쓱 내밀었다.

"A급 헌터 강태훈입니다."

"B급 헌터 천수연이에요."

"저는 연금술사...."

막 품속에서 라이센스 카드를 꺼내려는 승현을 제지한 강태훈이 수연을 향해 바짝 다가갔다.

"아, 확인은 됐습니다. 그보다 수연 님은 무기를 안 가져오신 같은데. 혹시 지원 계열이십니까?"

"아뇨. 저는 골렘을 다뤄서 무기는 딱히...."

"아! 골렘! 대단하십니다! 저도 예전에 한 번 도전해 본 적 있는데 엄청 어렵더라고요. 보아하니 승현 님의 가디언이신 모양이군요."

"아, 네."

"팔목에 차고 계신 게 제어 장치입니까? 이야...세 줄씩이나. 저는 처음 봤을 때 악세사리인 줄 알았습니다. 너무 잘 어울리시네요."

"아...감사합니다."

떨떠름하게 답하는 수연에게 잔뜩 상기된 얼굴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강태훈.

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슬슬 수연의 얼굴에 짜증의 기색이 올라올 무렵.

드디어 한발 물러난 강태훈이 승현을 향해 몸을 돌렸다.

"아차. 시간이 너무 많이 지체되었군요. 가시죠."

"...예. 헌터넷에 올라온 글에는 발견하신 균열의 입장 조건이 최소 3인 이상의 인원이라고 들었습니다만."

"그렇습니다만, 전투는 제가 할 테니 두 분은 그저 저만 따라오시면 됩니다. 아, 그리고 게시해둔 대로, 전리품 배분은 8:1:1로 하겠습니다."

"상관 없습니다. 그런데 특이사항으로 균열의 입구를 맴도는 박쥐와 비슷한 수인형 몬스터가 있다고 하셨는데. 혹시 구체적인 생김새를 알 수 있을까요? 브레이크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몬스터가 균열 밖으로 나온 겁니까?"

"그냥 박쥐 날개를 단...일일이 설명하기 번거로우니 직접 가서 확인해 보시죠."

연이어 질문을 던지는 승현이 귀찮은 듯, 건성으로 손을 휘저은 강태훈이 미리 발견해 둔 균열의 입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잠시 후.

붉은 스파크를 뿜어내는 균열의 입구에 도착한 강태훈이 자랑스럽게 가슴을 쭉 폈다.

"여기가 제가 발견한 균열입니다. 아직 협회에 신고가 들어가지 않았으니, 재빨리 클리어하고 전리품을 챙기면...."

"아까 입구를 맴돈다는 녀석은 보이질 않네요?"

"뭐, 어디로 날아 가버렸나 보죠. 그리 강해 보이는 녀석은 아니었으니 별다른 문제는 안 될 겁니다."

"흐음...."

자신의 답변에 진중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는 승현.

'쯧, 연금술사들은 원래 다 저런가.'

유난스러운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젓던 강태훈이 별안간 미간을 찡그렸다.

"아까 연금술사라고 하셨는데. 혹시 저희 어디서 뵌 적이 있습니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른 분이랑 착각하신 게 아닌지...."

분명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와 착각할 만큼 흔한 외모를 가진 것도 아니다.

'뭐지. 왜 낯이 익은 거지?'

잠시 고민하던 강태훈이 이내 고개를 휘저어 잡다한 생각을 떨쳐버리고는, 주변 탐색에 여념이 없는 승현을 강하게 잡아끌었다.

"시간 없으니 쓸데없는 짓 그만하시고 빨리 들어갑시다. 아, 수연 씨는 천천히 오셔도 됩니다.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세요!"

* * *

"자, 보십시오! 수연 씨. 이게 바로 W.K 클랜 본사에서 직수입한 특제 나이트스코프고, 제가 걸친 이건 관절 부위마다 가공된 마석이 삽입된 유틸리티 수트인데, 가격이 무려...."

균열에 입장한 이후.

한시도 쉬지 않고 떠들어대는 강태훈을 질렸다는 듯 바라보던 수연이 승현의 귓가를 향해 작게 속삭였다.

"오빠. 그냥 우리 둘이 하면 안 돼? 머릿수는 채웠잖아."

"왜?"

"저 사람 좀 별로야. 아까부터 날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도 그렇고. 눈빛도 느끼해."

"너한테 반한 모양인데? 인기 많아서 좋겠다. 부럽다야."

"오빠 너는 그게 나한테 할 말이니? 하여간, 그러니까 맨날 지현 언니랑 지훈 오빠한테도 눈치 없다고 욕을 얻어먹지."

"내가 언제 욕을 먹었냐?"

별다른 반응이 없는 승현을 향해 미간을 찌푸린 수연이 툴툴거리며 거리를 벌렸다.

"하여간 저 인간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괜히 땅바닥을 툭툭 걷어찬 수연이 앞장서서 가는 강태훈을 향해 바짝 달라붙어 넌지시 말을 붙였다.

"보스 룸은 얼마나 남았나요?"

"앗, 수연 씨. 대화는 다 끝나신 겁니까? 제가 이 W.K 특제 디텍터로 확인해 봤을 때 마력의 파장이 가장 짙게 퍼져 나오는 장소는...."

얼굴을 붉히며 또다시 번쩍번쩍한 장비를 꺼내 자랑을 늘어놓는 강태훈.

그에게서 시선을 뗀 천수연이 승현을 힐끗 바라보았다.

"오...여긴 화산이랑 비슷한 성질을 가진 균열인가 보네. 어디 보자. 뭐 쓸만한 게...."

그러거나 말거나.

수연에겐 관심조차 주지 않은 채 주변 탐색에 여념이 없는 승현.

"...앓느니 내가 죽지 그냥."

그런 승현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쉰 수연이 땅바닥을 바라봄과 동시에.

"예? 무슨 말씀...앗, 수연 씨! 위험합니다!"

피슉-

어둠 속에서 날아든 쇠침이 그녀의 발치를 스치고 지나갔다. 황급히 그녀의 몸을 옆으로 잡아당긴 강태훈이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균열에 서식하는 아이언 헤지호그인 것 같은데. 수가 많은 것 같지 않으니 제가 금방 처리...."

슈슈슈슉-

강태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수많은 쇠침이 그들이 있는 자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흥, 이까짓 거."

자신의 주특기. 경질화를 발동한 강태훈이 코웃음을 치며 양팔을 쭉 벌려 수연의 앞을 가로막았다.

카카강-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사방으로 비산하는 금속의 파편들.

"고작 이 정도론 경질화가 적용된 W.K 클랜의 명품 유틸리티 수트를 뚫을 수 없...아차!"

손쉽게 모든 공격을 쳐낸 그가 어둠 속에서 눈을 빛내는 몬스터들을 향해 외치다 말고는 탄식을 내뱉었다.

"이런...."

뒤따라왔어야 할 승현의 모습이 보이지 않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수연과 친분이 있어 보이는 그가 내심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그래도 헌터로서. 그리고 이 일행의 리더로서 동행인의 안위를 책임져야 할 책무가 있는 강태훈이었기에.

"젠장, 전투 능력이 없는 연금술사라는 걸 잊고 있었어."

다급히 나이트스코프를 착용한 강태훈이 승현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라진 걸 보니 잡혀간 건가. 보통 균열의 식량 창고는 보스 룸 근처에 위치하는...억!"

바스락-

갑작스레 그의 등 뒤에서 감지된 인기척.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강태훈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벌러덩 자빠졌다.

"왜 그러십니까? 어디 안 좋으십니까?"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태연히 자신을 내려다보는 승현을 발견한 그가 바닥에 주저앉은 채 반쯤 넋이 나간 목소리로 답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갑작스런 기습에 온 정신이 집중되어 기척을 감지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렇다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A급 헌터인 자신이 같은 헌터도 아니고, 연금술사의 움직임을 놓친다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니까.

"흠흠. 제가 얼른 처리하고 올 테니 두 분은 여기서 대기...어라?"

거기에 더해.

이해할 수 없는 일이 한 가지 더 벌어졌다. 그가 몸을 움직이기도 전에 순식간에 자취를 감춰 버린 몬스터들.

어안이 벙벙한 듯 나이트스코프를 벗으며 눈을 동그랗게 뜨는 그를 향해 승현이 말을 건넸다.

"몸을 피하며 얼핏 보니 전부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더군요. 헌터님의 기세에 잔뜩 겁을 먹은 모양입니다."

"그, 그렇습니까? 하하. 저도 모르게 '진심'을 발휘해 버렸군요."

"...."

"따라오시죠! 보스 룸이 머지않았습니다!"

승현의 이야기를 진심이라고 받아들인 건지, 기분 좋은 웃음과 함께 앞장서서 걸음을 옮기는 강태훈.

어이없다는 듯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수연이 승현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오빠 짓이지? 다 쫓아낸 거."

"굳이 불필요한 전투를 벌일 필요는 없잖아. 착각하는 것도 나름 귀엽고 말이야."

"귀엽기는 개뿔...저런 아저씨가 귀엽냐? 나한테도 그런 칭찬 좀 해줘 봐. 맨날 나한테는 못되게 굴고."

"내가 언제 못되게 굴었냐?"

"듣자 하니 반년 전에도 로제 언니만 데리고...어휴. 말을 말자. 그리고 가만 보니까 옷은 왜 이렇게 더러워? 빨래는 언제 한 거야?"

"무명 아저씨가 구해다 준 세제가 다 떨어져서...그리고 전기가 끊긴 울산에서 세탁기를 돌리려면 귀찮게 발전기를...."

"그 잘난 창조의 권능인가 뭔가로 전기랑 세제는 못 만드니? 하여간 내가 못 살아. 클랜마스터란 인간이 말이야. 돌아가면 빨래부터 해! 또 굴베이그 씨한테 빨랫감 잔뜩 쌓아놓다 걸리기만 해봐라."

"...."

이러한 상황이 익숙한 듯.

연신 잔소리를 퍼부어대는 수연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승현이 능청스레 정면을 가리켰다.

"강태훈 헌터님. 저기가 보스 룸 아닙니까?"

동굴 형태를 띤 균열의 기나긴 통로. 그 끝의 투박한 철문을 발견한 강태훈이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모양입니다. 생각보다 규모가 작군요. 제가 먼저 진입해 내부 구조를 파악할 테니, 두 분은 천천히 뒤따라오십시오."

끼이이익-

가까이 다가선 그가 팔에 힘을 주자, 낡은 경첩의 마찰음과 함께 천천히 철문이 개방되었다.

곧이어.

안으로 들어선 그의 앞에 나타난 건. 어림잡아 야구장 절반 크기 정도의 거대한 공동이었다.

"보스 룸의 크기를 보아하니 거인형 몬스터가 이곳의 주인인 것 같은데...어디로 간 거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보스 몬스터의 모습.

의아한 듯 나이트스코프를 착용한 채 주위를 둘러보던 강태훈이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뭐, 뭐야 이건...."

드넓은 공동 전체를 뒤덮은 채 말라붙은 핏자국. 당황한 강태훈이 보스 룸을 빠져나가려던 찰나.

등골이 서늘해지며 머리카락이 쭈뼛 설 정도의 위기감이 그의 전신을 뒤덮었다.

치이익-

재빨리 뒤로 물러난 그의 발치로 떨어진 액체가 새하얀 연기를 뿜어내며 맹렬한 기세로 바닥을 녹였다.

당황할 새도 없이 등 뒤에서 들려온 두 사람의 목소리.

"이런...벌써 잡아 먹혀버린 모양인데. 아깝다. 테스트 횟수가 한 번으로 줄었어."

"늦게 왔으니 어쩔 수 없지. 뭐."

자신을 뒤따라온 승현과 수연을 발견한 강태훈이 다급히 그들에게 고함을 내질렀다.

"위험합니다! 여기엔 정체가 파악되지 않은 몬스터가...."

"알아요. 알아."

건성으로 답하며 그를 지나쳐간 수연이 허리춤에 장착된 바디캠을 떼어 벽면에 설치했다.

"셋 중에 뭐로 하지...하나는 지난번에 했고...'그 새끼'는 어지간하면 꺼내고 싶지 않고. 그래. 장소도 넓으니까 그게 좋겠다!"

"지금 무슨 짓을...당장 보스 룸 밖으로 대피하십시오!"

"됐다. 녹화 준비는 끝났고. 아아. 잘 찍히고 있겠지? 예쁘게?"

바디캠의 렌즈를 보며 중얼거리는 수연.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강태훈이 그녀를 잡아끌려던 그때.

쐐애애액-

천장에서 날아든 거대한 그림자가 쇄도함과 동시에.

"불카누스 mk4. 3차 가동 테스트 시작합니다."

세 줄의 팔찌가 채워진 오른손을 앞으로 뻗은 수연의 낭랑한 목소리가 공동 내부에 퍼져나갔다.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203화

"역시, 실패작답게 포식으로밖에 마기를 보충하지 못하는 모양이네. 이왕 하는 거 보스 몬스터랑 같이 묶어서 해보려 했는데...쯧."

천장에서 샛노란 안광을 빛내며 이쪽을 노려보는 박쥐형 마수.

놈의 입가에 덕지덕지 붙은 살점과 핏자국을 확인한 승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여간, 이놈이나 저놈이나 실패작들 짱박아놓는 건 똑같단 말이지."

구시온, 단탈리온에 이어 로키까지.

그간 쓰러트려 온 그들의 실패작들을 떠올린 승현이 한숨을 푹 내쉼과 동시에. 날카로운 굉음을 내지른 그림자가 바닥을 향해 내리꽂혔다.

키이익-!!!

샛노란 안광을 흩뿌리며 달려드는. 일견 박쥐처럼 보이는 거대한 몬스터.

상위권 몬스터인 오거를 한참 웃도는 크기와 위압감을 감지한 강태훈이 황급히 경질화를 발동했다.

'내가...막아낼 수 있을까.'

승산은 장담할 수 없다.

아니, 극도로 희박하다.

게다가 지금은 혹까지 둘 붙어있는 상황. 저들을 지키며 눈앞의 괴물을 쓰러트리는 건 불가능하다.

"젠장, 여긴 제가 막고 있을 테니 빨리 도망...."

하지만.

이러한 자신의 걱정이 기우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단 일 분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불카누스mk4. 3차 가동 테스트 시작합니다."

천수연의 낭랑한 외침과 함께 터져나온 섬광.

찰나의 시간이 지난 후.

빛이 사그라들며 펼쳐진 광경을 본 강태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쓱쓱 비볐다.

"...."

우드득-

단 일격에 절명해버린 균열의 주인. 너무나도 손쉽게 상대의 모가지를 움켜쥔 골렘을 본 강태훈의 입이 쩍 벌어졌다.

"저건...."

수없이 많은 전장을 헤쳐온 그조차 제 눈을 의심할 만큼 비현실적인 광경. 눈 깜짝할 새에 나타난 골렘도 골렘이지만, 그보다 그를 당황하게 만든 것은 비상식적인 골렘의 체장이다.

'10m? 15m?'

눈대중으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크기. 아니, 그 전에. 전신에 묵빛 갑옷을 두른 저 거신을 과연 골렘이라 부를 수 있을까?

"괴물."

지금껏 수많은 괴물들을 상대해 온 강태훈이지만. 눈앞의 저 거신은 그들을 넘어선 진정한 괴물이다.

게다가.

더 놀라운 것은 자신을 B급 헌터라 지칭한 천수연이 저런 괴물을 자유자재로 다룬다는 것.

또한, 그간 수없이 봐온 기계적인 골렘들과는 다르게 천수연이 조종하는 불카누스의 움직임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우드득-

단 일 합 만에 허무하게 끝난 전투. 대번에 상대의 목을 비틀어버린 불카누스가 마치 쓰레기처럼 사체를 바닥에 내던졌다.

"윽. 먼지...아직 세세한 컨트롤은 좀 어렵구나. 그나저나 너무 빠르게 끝나버렸네. 이래서야 제대로 작동하는지 알 수가 없는데...."

손을 휘저어 눈앞의 흙먼지를 대강 날려버린 천수연이 안타까운 듯 중얼거리자.

팔짱을 낀 채 여유롭게 상황을 지켜보던 승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저 정도면 됐어. 어때? 코어랑 마력 회로 부분을 좀 개선했는데."

"확실히 이전에 써봤던 버전보다 부담이 적게 걸리는 느낌이야. 가동에 필요한 마력 소모도 줄어든 것 같고."

"얼마나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내가 가진 마나로는 지금처럼 단순히 움직이는 건 오 분 정도? '포격'을 사용하면 일 분도 어렵겠지만...."

"그 정도로는 안 돼. 아무래도 무명 아저씨한테 훈련량을 늘려달라고 얘기해 둬야겠네."

"악! 그건 좀 봐줘...그러다 나 죽어...차라리 보정 능력을 상향해 주는 게...."

"안 돼. 이 이상 보정치를 올리면 불카누스의 영체에 손상이 갈 수도 있어."

당연한 결과라는 듯 바닥에 널브러진 사체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

경악을 금치 못한 강태훈이 온몸을 뒤덮은 흙먼지를 털어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목소리를 떨며 그들을 가리켰다.

"다, 당신들. 대체 뭡니까."

"아. 갑작스런 상황에 놀라셨을 텐데...죄송합니다. 어서 사과드려, 수연아."

"죄송합니다. 미리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자신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두 사람.

그들의 가슴께에 새겨진 육망성 형태의 엠블렘을 발견한 강태훈이 숨을 집어삼켰다.

'어쩐지 낯이 익다 했더니.'

눈앞의 청년이 대전 지역을 양분하던 아레스와 제피로스를 밀어내고 왕좌를 차지한 대성 클랜의 주인이자.

파격적인 행보로 인해 고위급 각성자들의 주목을 한 몸에 받는 최연소 S급 연금술사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렇다는 건, 조금 전 그 골렘도 한승현 연금술사님의 작품...잠깐."

곧이어. 혼란에 빠진 채 중얼거리던 그의 머릿속에 승현을 알게 모르게 무시하던 조금 전 자신의 모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망했다.'

등 뒤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

아무리 그가 경험과 관록이 쌓인 A급 헌터라고 해도.

그리고 눈앞의 승현이 아무리 아직 자질이 완벽히 검증되지 않은 풋내기라고 해도.

A급과 S급이 가진 영향력은 극명한 차이가 있으니까.

"미, 미리 말씀을 하시지. 왜 정체를 숨기셨습니까?"

"네? 딱히 숨긴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만. 숨길 생각도 없었고...."

승현의 머쓱한 답변에 강태훈의 등줄기가 축축이 젖어가기 시작했다.

'만일 이대로 협회에 방문해 내 험담이라도 늘어놓는다면...그러고 보니 여기도 협회에 발견 신고조차 안 한 채로 몰래 들어온 곳이잖아.'

각성자들의 부정행위를 관리하고, 감시하는 협회의 규정은 엄중하다.

이러한 사실이 적발된다면 징계는 물론이거니와, 행여 입소문이라도 나게 된다면 한동안 일거리가 끊겨버릴지도 모른다.

평생 홀로 다닌다면 모를까.

소문이 안 좋게 난다는 건 팀 단위로 움직이는 것이 유리한 헌터에겐 치명적이기에.

'최대한 두 사람에게 잘 보여서 아까의 실책을 무마해야 한다!'

재빨리 머릿속으로 계산을 끝마친 강태훈이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두 분. 번거로운 뒷정리는 12년 차 헌터인 저, 강태훈에게 맡겨주십시오!"

* * *

균열을 빠져나온 이후.

박쥐형 몬스터의 가죽과 뼈 등.

바닥에 늘어놓은 전리품들을 바라보던 강태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정말...이걸 제가 다 가져도 됩니까?"

"어차피 저런 걸 노리고 온 것도 아닌데요, 뭐."

"그래도 아까 얼핏 보아하니 상당한 고위급 몬스터인 것 같던데...자세한 건 감정을 해 봐야 알겠지만, 값도 상당히 나갈 것 같고...."

"상관없습니다. 저는 이거면 충분하니까요."

그간 모아둔 마기가 집약된 코어. 마수에게서 채취한 검은 구슬을 품속에 집어넣은 승현이 가볍게 답하자.

입이 귀에 걸린 강태훈이 재빨리 부피 축소 술식이 걸린 아티팩트에 전리품들을 밀어 넣었다.

"그럼, 사양하지 않고 감사히 받아가겠습니다!"

그리고는 경직된 미소를 지으며 승현을 향해 슬그머니 다가갔다.

"어휴...이 먼지 좀 봐. 목마르실 텐데 물이라도 드시겠습니까? 이게 알프스에서 공수해온 에비앙...아니지. 오래 걸어 다니시느라 피곤하실 텐데, 다리라도 좀 주물러 드릴까요?"

의도가 뻔히 보이는 행동.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던 승현이 한숨을 내쉬며 말을 건넸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있었던 일은 협회에 비밀로 해 드릴 테니 너무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말입니까?"

승현이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대번에 얼굴이 밝아진 강태훈이 콧노래를 부르며 전리품을 갈무리하기 시작했고.

그가 멀어진 것을 확인한 천수연이 가까이 다가와 승현을 장난스레 흘겨보았다.

"왜, 창수나 무명 아저씨, 아니면 최수근 영감님처럼 컬렉션에 하나 추가하지."

"무슨 말이야?"

"모르는 척하지 마. 오빠 취미가 부하 수집인 거 소문 다 났거든? 좋게 말해서 부하지, 다들 꼬붕이라고 하더라."

"누가 그러디?"

"창수가."

"...."

"걔뿐만 아니라 미하일 씨도 그랬고, 무명 아저씨도 그랬고. 신애 언니도 그랬어. 아, 신우 오빠랑 굴베이그 씨도."

"...굴베이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놈이 대체 왜?"

"예전엔 둘이 아는 사이였다며. 요즘 울산에선 오빠를 지배와 착취의 근원이라고 하던데?"

"그거 굴베이그가 퍼트린 소문이지? 그리고 그놈은 그렇다 치더라도 내가 그 인간들한테 얼마나 잘 해줬는데...."

밀려드는 배신감에 승현이 몸을 부르르 떨자. 그런 모습이 재밌다는 듯 배를 잡고 낄낄거리던 천수연이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니까 나한테 잘 하란 말이야. 어? 거기서 유일하게 나만 오빠 편들어준 거 알아?"

"그래. 눈물 나게 고맙네."

"어째 좀 감사 인사가 삐딱하다? 다시 해 봐."

팔짱을 낀 천수연이 거만하게 콧대를 세우며 승현을 쳐다보던 그때.

전리품을 모두 갈무리한 강태훈이 쭈뼛대며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저...대화 중에 죄송합니다만. 실례가 안 된다면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 말입니다."

"예? 괜찮습니다. 말씀하시죠."

이때다 싶었던 승현이 반색하자, 잠시 고민하던 강태훈이 조심스레 수연을 가리켰다.

"한승현 연금술사님의 위명은 익히 들었습니다만, 제가 세상 물정에 어두워서인지 천수연 헌터님에 관해서는 들은 바가 없어서 말입니다."

요컨대.

빙빙 돌려 말하긴 했지만, 결론은 대체 어디서 저런 실력자가 뚝 떨어졌냐는 뜻이다.

"아, 그건 수연이의 마지막 등급 갱신이 3개월 전...."

그의 속내를 짐작한 승현이 부연 설명을 덧붙이려던 와중. 그보다 한 박자 먼저 강태훈의 입이 열렸다.

"혹시 천수연 헌터님이 그...몇 달 전 한승현 연금술사님과 함께 S등급을 취득하신 로제 헌터님 아니십니까?"

그의 의문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상식을 뛰어넘는 크기의 골렘을 자유자재로 조종할 능력을 가진 데다, 상당히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젊은 여성 헌터.

그가 아는 한 이러한 조건에 부합하는 인물은 반년 전에 S급 라이센스를 취득한 로제뿐이었으니까.

"아닌데요."

문제는, 멋모르고 내뱉은 그의 발언이 그간 남모르게 화를 쌓아두었던 수연의 복장을 터지게 했다는 것.

'하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듣자 하니 한승현 쟤랑 로제랑 불칸 왕국에서 한방을 썼다더라? 침대도 하나였다던데?"

"게다가 매일 술도 마셨다는데. 둘이 무슨 일이 있었을까~?"

"내가 우리 그이를 그렇게 잡아챘었지. 술과 밤이 있으면 불가능은 없는 법이거든."

"수연이 불쌍해서 어쩌니...힘내렴. 나중에 돌아가면 언니가 근사한 곳에서 술 한잔 정도는 사줄게."

안 그래도 울산에 머무는 동안 반복되는 유신애의 놀림에 약이 바짝 올라있던 차였는데.

당연히 모르고 한 얘기겠지만, 강태훈이 그간 차곡차곡 쌓여있던 스트레스에 기름을 부어버렸다.

"로제 언니는 저랑 다른 사람이에요."

어쩐지 조금 어색해진 분위기. 이를 눈치 챈 강태훈이 머리를 긁적였다.

"...제가 뭔가 실례를 저지른 겁니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 그러고 보니...이건 진짜 실례가 될 수도 있는 질문이지만...조금 전 천수연 헌터님께서 가동하신 골렘은 한승현 연금술사님의 제작품입니까?"

승현의 이야기에 손뼉을 탁, 친 강태훈이 눈을 커다랗게 뜨며 또다시 질문을 던졌다.

조금 추레한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그 또한 지금껏 몬스터와 맞서가며 수많은 전장을 거쳐 온 베테랑 헌터.

비록 병과가 다르다고는 해도 헌터인 그가 그런 어마어마한 체급과 위력을 가진 병기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건 어불성설이었으니까.

"맞습니다."

그의 질문에 딱히 숨길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승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조금 전 수연이가 가동한 불카누스는 제가 손수 제작한 초대형 골렘이죠."

흉내쟁이의 몸에 자리를 잡은 굴베이그를 참고해 불카누스의 영체를 코어에 담아낸 것이 바로 수연이 조종하는 초대형 골렘. 불카누스다.

'녀석이 동의해 줄지가 관건이었지만....'

구시온이 벌인 짓이 있기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으나, 예상과는 달리 의외로 불카누스는 승현의 제안에 순순히 응해 주었다.

육신을 잃고 영체만 남아 승현의 내면에 머무는 것보다, 비록 제한된 시간일지라도 물질계에서 활동하는 편이 자신에게도 이득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직 성대의 기능을 수행하는 파츠가 없어 말은 못 하는 게 단점이네...조만간 하나 만들어서 달아줘야겠네. 하는 김에 장갑에 각종 방어 술식도 추가해 둬야 하고....'

불카누스에게 추가해둘 기능을 떠올린 승현이 머릿속에 이를 메모해두던 와중.

그의 귓가에 놀란 듯한 강태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다는 건, 조금 전의 그 골렘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단 겁니까?"

"그건...아마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불카누스를 흡수하며 기술은 충분히 확보해 두었지만, 대량 생산이 불가능하단 것 또한 사실이다.

어지간한 각성자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할 만큼 가동에 어마어마한 마력이 소모되는 초대형 골렘.

상상을 초월하는 마나 소모량을 수백분의 일로 줄여주는 게 코어에 봉인된 관리자급 영체의 역할이고.

현재 승현이 가진 관리자급 영체는 불카누스 단 하나뿐이었으니까.

이러한 내용을 한 마디로 응축한 그의 답변에 강태훈이 작게 탄식을 내뱉었다.

"이런...."

"아쉬우십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만일 저걸 대량 생산할 수만 있다면...."

"지금껏 많은 헌터들이 목숨을 잃었던, 고등급 균열 공략 난이도가 대폭 내려갈 거란 말씀이시죠?"

"...."

헌터는 헌터인 모양인지, 승현의 답변에 축 늘어진 강태훈의 어깨.

그의 속마음을 알아차린 승현이 입가에 미소를 내걸었다.

"그런 의견에는 저도 동의하는 바이니, 그런 표정 짓지 않으셔도 됩니다. 보급형으로 개발해 둔 건 따로 있으니까요."

"보급형이요...?"

눈을 동그랗게 뜬 그의 질문에, 승현이 품속에서 탁구공 크기의 검은 구체를 꺼내 들었다.

"안 그래도 돌아가면 몇몇 분들에게 시제품을 배포하려고 했었는데. 마침 잘됐네요. 이것도 인연인데 하나 받으시죠."

"그건 뭡니까?"

"신체 탈착형 골렘. 이름은...아이네아스 정도가 적당하겠네요."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204화

강태훈을 돌려보낸 후.

승현과 함께 밤 기차에 몸을 실은 수연이 의문스럽다는 듯 말문을 열었다.

"아이네아스를 그렇게 막 줘도 괜찮은 거야?"

"아이네아스는 가칭...그보다 어차피 그건 시제품이고, 돌아가면 협회 소속의 헌터들한테 우선적으로 배포하려 했으니까."

"아무리 보급형이라고 해도 공짜로 그 귀한 걸 막...으...아까워라. 게다가 그 사람, 나한테 은근슬쩍 추근대는 게 영 마음에 안 들었는데."

"왜. 얘기 좀 나눠보니까 괜찮은 것 같던데. 나름 헌터로서의 사명감도 있고. 알아서 입소문도 내줄 테니 우리로서는 좋은 거지."

"그래도...난 그 사람 별로야."

"마음은 알겠는데,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 마."

조금 부루퉁해진 수연에게 피식 웃으며 답한 승현이 창밖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전과 다를 것 없는 평화로운 풍경. 하지만, 시시포스가 강림한 이후엔 이곳이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그 전까지 최대한 많은 전력을 끌어모아야 해."

지난 반 년간.

기억의 화랑에서 흡수한 자신의 조각들을 상기한 승현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통로가 열리는 순간, 판데모니움에 발이 묶여있던 마수들이 벌떼처럼 침공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시시포스 또한 외신의 격을 얻기 위해선 인간들의 힘이 필요하기에 곧바로 극단적인 행동은 취하지 않을 것으로 보이나.

최소한 전장이 될 한국은 쑥대밭이 될 것이 분명했다.

'미하일을 비롯한 초월자들이 협력해준다 하더라도...우리 쪽 머릿수가 압도적으로 불리해.'

그렇기에 승현이 택한 방법은 고위급으로 분류되는 B급 이상 각성자들의 전력을 강화하는 것.

이를 위한 첫걸음이 아이네아스의 갑옷을 응용한 신체 탈착형 골렘이다.

"생산량을 따라갈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그건 가주님들이 알아서 해 주겠지."

울산의 모처에서 피골이 상접한 채로 열심히 작업에 몰두 중인 세 가주를 떠올린 승현이 작게 웃음 지었다.

"겉으로는 좀 그래 보여도 다들 지도자는 지도자란 말이지."

높은 산 부족을 포함한 모든 채널의 지도자에게 현재의 상황을 전달한 이후.

막스를 비롯한 세 가주는 드워프들을 이끌고 울산으로 넘어와 장비 생산을 맡아달라는 승현의 부탁을 수락했다.

시시포스와 적대하는 순간 죽어도 죽지 못하는 처지가 될 위험성이 있음에도, 이를 순순히 받아들인 이유는.

승현이 근원의 지위를 내세워 그들을 강제로 이끌었다거나, 혹은 권능을 사용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로지 한 가지 조건.

기존의 차원을 떠나, 안전히 지구에 정착하게 해주겠다는 승현의 제안 덕분이다.

"이제 그곳은 전부 수명이 다해가고 있으니...."

길어야 수백 년.

어쩌면 그보다 짧은 시일 내에 그들이 머무는 차원 자체가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

"애초에 굴베이그랑 박 터지게 싸운 것도 그 때문이고 말이지."

"결과엔 승복하겠지만, 난 아직도 내 판단이 옳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프레이야."

발치에서 머리를 빼꼼 내밀며 분하다는 듯 중얼거리는 굴베이그.

그를 발견한 천수연이 의외라는 듯 말을 건넸다.

"그렇게 막 모습을 드러내도 괜찮아요? 굴베이그 씨는 사람들의 눈에 띄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나에게 말을 붙이고 싶으면 발언권을 요청해라. 하찮은 인간. 그리고 아무리 사념만 남았다고는 하나, 이 내가 인식 왜곡 하나 제대로 펼치지 못할 것 같나."

"또 하찮은 인간 타령...질리지도 않냐, 너는?"

"하찮은 건 하찮은 거다. 게다가 프레이야 네 녀석 또한 지금은 하찮은...."

머리 위로 올라온 승현의 뒤꿈치를 발견한 굴베이그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곧이어 슬그머니 그림자 안으로 사라지는 굴베이그. 그런 그를 안쓰럽다는 듯 바라보던 천수연이 고개를 내저었다.

"불쌍해. 맨날 오빠한테 괴롭힘이나 당하고."

"...매일 저런 놈이랑 붙어있어야 하는 내 심정도 생각해 줘. 게다가 맨날 입버릇처럼 하찮은 인간 운운하는 놈이 불쌍하다니."

"그래도 말만 저렇지 행동은 안 그렇던데? 지난번에도 혜진이가 아파하니까 자기가 가진 마기를 나눠주기도 했고."

"...굴베이그가? 의외네."

"그땐 마기를 너무 과하게 흡수해서 그랬던 거다. 절대 하찮은 필멸자를 도와주려 한 게 아니다."

재빨리 나타나 수연의 말을 정정하는 굴베이그.

그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피식거린 승현이 천수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나저나 혜진이는 좀 어때? 요즘 영 신경을 못 써서...."

"얼마 전에 붕대도 풀었고. 이제는 스스로 몸도 일으킬 수 있던데?"

"아직 그 정도야? 최소한 지금쯤 걸어 다닐 정도는 되었을 거라 예상했는데."

"그래도 많이 나아진 거야. 처음이랑 비교해 보면...."

"하긴, 어쩔 수 없지. 워낙 오랜 시간이 지체되었으니까."

신혜진.

역귀에게 감염된 채 하루하루 연명해가던, 이제 열여덟 살이 된 무명의 딸을 떠올린 승현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천천히 회복되고 있다니까...다행이다."

울산에 도착한 이후.

야왕에게 보호받고 있던 무명의 딸을 만난 승현은 그 참혹함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진물과 피가 엉겨 붙은 붕대. 초점이 사라진 눈. 그보다 가장 시급한 건...완전히 붕괴되어 버린 정신이었다.

'거의 유아 상태로 돌아간 수준이었던가.'

사실상 생명체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수준.

그녀는 눈조차 자신의 의지대로 감지 못했다.

그녀의 몸 주변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악취를 감지한 승현은 이내 그 원인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역귀가 내뿜은 병균과 뒤섞인 채 소녀의 몸을 좀먹어가는 단탈리온의 마기.

세상의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뒤섞여 탄생한 저급한 마기는, 당시 고작 열 살도 안 된 소녀의 정신을 산산이 부숴놓은 것이다.

물론, 승현에게 해결책이 없는 건 아니었다.

아직 완벽하지는 않다고 하나. 성역을 펼친 후 그 안에서 창조의 권능을 사용해 신혜진의 육체만을 재창조하면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오랜 기간이 지나 이미 손상될 대로 손상되어버린 정신은 도무지 손쓸 방법이 떠오르질 않았다.

만일 육체를 재구성한다 하더라도, 이를 움직이는 신혜진의 정신은 지금의 승현이 어찌 건드릴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육체는 재구성하면 끝이니 그렇다고 쳐도, 마기로 인해 망가진 정신에 에테르를 들이부으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확률이 크기도 했고."

"역시, 혜진이를 치료하는 데엔 오빠보단 굴베이그 씨의 공이 컸어."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그건 맞아."

천수연의 이야기에 마지못해 동의한 승현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덕분에 아저씨 앞에선 이놈을 대놓고 갈구지도 못하겠고."

신혜진의 치료 방법을 놓고 머리를 맞댄 이들에게 해결책을 내놓은 것은 굴베이그였다.

"멍청한 놈들. 그냥 마인(魔人)으로 만들어버리면 간단할 것을."

물론, 이에 가장 크게 반발한 사람은 무명이었다.

"지금...내 딸을 너와 같은 악마 따위로 만들라는 거냐?"

"보아하니 네 녀석도 어느 정도 마기를 다룰 수 있는 것 같은데.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건가?"

굴베이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간단했다.

온갖 감정의 쓰레기통이나 마찬가지인 단탈리온의 마기의 잔여물 따위는, 순수한 마기를 흡수한 마인이 되면 어렵지 않게 짓누를 수 있다는 것.

"멍청한 필멸자들 같으니라고. 좀 귀찮긴 하지만, 특별히 직접 증명해 주도록 하지."

반신반의하는 이들을 향해 조소를 날린 굴베이그가, 미처 손쓸 새도 없이 침대에 누워있는 신혜진에게 다가가 자신의 마기를 불어넣었다.

곧이어.

꿈뻑. 죽은 듯 꽉 닫혀있던 그녀의 눈꺼풀이 팔 년 만에 미세하게 움직였고.

그날부터 굴베이그는 무명의 하나님이요, 부처님이 되었다.

무명이 승현에게 보이는 태도가 같은 목표를 가진 이를 향한 동질감에 가까운 것이라면, 굴베이그에게 보이는 태도는 신앙에 가까운 것.

"으...."

얼마 전.

굴베이그의 말버릇을 고쳐주겠답시고 녀석을 몇 번 쥐어박았다가, 무명에게 낭패를 당할 뻔했던 기억을 떠올린 승현이 인상을 찡그렸다.

"어차피 권능을 사용하면 쉽게 재생되니까 칼 좀 맞아도 된다는 게 말이야? 누가 청부업자 출신 아니랄까 봐...굴베이그 좀 갈궜다고 이러는 게 말이 되나?"

"아빠한테 얘기했더니 오빠가 맞을 짓 했다는데? 그러길래 왜 눈앞에서 은인을 괴롭히고 그래."

"아저씨마저...그래도 아저씨는 믿고 있었는데. 게다가 굴베이그를 데려온 건 나잖아."

천수연의 대답에 조금 풀이 죽은 승현이 창밖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저 멀리 보이는 기차역. 기나긴 반년간의 여정을 끝내고 드디어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온 것이다.

"여기도 오래간만이네. 가게...아니지. 클랜은 잘 돌아가고 있겠지?"

"그쪽은 신우 오빠가 잘 하고 있을 거야. 근데 굳이 번거롭게 직접 움직이지 않아도 오빠가 가진 능력을 이용...헙. 아무것도 아니야."

자신의 실언을 자각한 수연이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그건 그렇긴 하지. 같은 차원끼리 이어진 통로를 여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

"미하일의 말대로 이렇게 직접 돌아다니면서 인지도를 높이는 방법도 나쁘진 않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편이 더 효율적이긴 하지."

합법적으로 승현과의 여행을 만끽하라는 미하일의 배려를 잊고, 저도 모르게 괜한 소리를 꺼냈다.

'이 바보. 병신.'

이를 깨달은 천수연이 괜한 입방정을 떤 자신의 머리를 주먹으로 콩콩 때리던 와중.

스피커에서 여행의 끝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 이번역은 대전. 대전 역입니다.

"끄응...."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신 천수연이 승현을 따라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제 곧바로 클랜으로 갈 거야?"

"음...그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그 전에 먼저 들러야 할 곳이 있어. 같이 갈래?"

"가봐야 할 곳? 어딘데?"

천수연의 눈에 약간의 기대감이 서렸다. 곧이어, 핸드폰을 꺼낸 천수연이 황급히 무언가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이 늦은 시간에 갈 곳이라면...그렇지. 심야 데이트도 나쁘지 않지.'

얼마 전 SNS에서 보았던.

조금 음침하고 어두운 분위기의 술집을 기억해낸 천수연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걸렸다.

'신애 언니가 그랬지. 기회는 예기치 않은 상황에 불현듯 찾아오는 거라고.'

오신우를 꽉 잡고 사는 유신애.

그녀에게 받았던 교육을 상기한 천수연이 상상의 나래를 펼쳤지만. 승현의 입에서 나온 것은 그녀의 예상을 한참 벗어난 답변이었다.

"헌터 협회. 6개월이나 시간을 줬으니, 앞으로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할지 지금쯤은 결정을 내렸겠지. 어차피 너도 조만간 라이센스 갱신 건으로 방문해야 하잖아. 같이 가기 피곤하면 나 혼자 가고."

"...쳇. 그래. 가자, 가."

"뭐야? 왜 그래?"

자신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승현의 얼굴.

그를 향해 콧방귀를 뀐 천수연이 데이트 코스를 물색 중이던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205화

늦은 밤.

불 꺼진 자신의 집무실에 앉아있던 황정호가 괴로운 듯 얼굴을 감싸 쥐었다.

"젠장...."

[협회장 황정호]

책상 위에 놓인 명패가 자꾸만 눈에 들어온다. 신경질적으로 그것을 움켜쥔 황정호가 손아귀에 힘을 주자.

우지직- 고가의 원목으로 제작된 명패가 그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산산이 부서졌다.

"나보고 어쩌라는 거냐. 빌어먹을."

8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생생한 그 날의 기억.

새파란 하늘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던 시시포스의 존재감을 떠올릴 때마다, 황정호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을 떨어야만 했다.

"이길 수 있을까?"

아니, 몇 번을 생각해 보아도 불가능하다. 아무리 그가 인류의 최정점에 선 S급 헌터라 하더라도.

산 하나 둘쯤.

대도시 하나쯤은 손쉽게 날려버릴 수 있는 인외의 경지에 올랐다 하더라도.

자신을 벌레처럼 내려다보는 초월적인 존재에게 대적할 수 있을 거란 엄두가 나질 않았다.

"내 목숨 하나로 끝난다면 상관없겠지만...."

그날.

시시포스가 보여준 것은 앞으로 반년 뒤 반드시 인류가 맞닥뜨리게 될 두 가지 미래였다.

끊임없는 고통과 번뇌에 시달리며 지옥 같은 삶을 연장하거나, 그의 강림과 동시에 모든 생명이 죽음을 맞이하거나.

그리고.

대번에 인류의 운명을 짊어지게 된 황정호가 택한 것은 구차한 삶의 연장이었다.

살아야 한다.

아득바득 살아남아만 어떻게든 훗날을 도모하고 기회를 잡아낼 수 있다.

그러한 결단을 내린 그에게 시시포스가 내민 요구 조건은 울산의 완전한 봉쇄.

거기에 더해, 아레스 클랜을 향한 전폭적인 지원이었다.

물론, 이러한 내막을 전부 알고 있는 것은 오로지 그뿐이었다.

"아니지. 이제 '있던' 것이라고 해야 하나?"

자신의 친우이자 마이스터 협회를 이끄는 S급 제작자 이화수.

유신애의 각성 이후.

어쩔 수 없이 이화수에게 모든 사실을 남김없이 털어놓은 그는 하나뿐인 친우와의 관계 또한 소원해져 버렸다.

"어쩐지 이상하더라니...울산만 넘겨주면 조용히 끝날 거라면서. 몇 번만 눈감아 주면 될 거라면서. 왜 사실대로 내게 말하지 않았지? 나는 지금껏 그런 줄도 모르고...."

그날.

그렇게 집무실을 떠난 이화수는 대외적인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칩거에 들어가 버렸다.

"지미럴...남은 건 결국 나 혼자네."

친구의 빈 자리를 느끼며 허무한 듯 중얼거린 황정호가 습관처럼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신문 한 부.

그 위에 대문짝만하게 적힌 대성 클랜의 기사를 본 황정호가 탄식을 내뱉었다.

"한승현이라...."

한승현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 못한 것은 아니다.

최연소 S급 연금술사이자, 아레스와 제피로스가 양분하던 대전을 단 6개월 만에 통일한 대성 클랜의 주인.

그리고, 시시포스의 대척점에 선 자.

유신애에게 그의 정체에 관한 보고를 받긴 했지만, 하나같이 황정호로서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뿐이었다.

"시시포스와 동급이라고?"

절대 그럴 리 없다.

승현이 조금. 아니, 많이 유능한 제작자이긴 해도 결국은 자신과 같은 한낱 인간일 뿐.

거대한 자연과도 같은 시시포스에게 대항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역시, 후손들이 대대손손 내 무덤에 침을 뱉더라도...."

그렇기에 인류의 생존을 위해선, 훗날 쏟아질 모든 비난을 감수하고 자신이 총대를 메야 한다.

차마 꺼내지 못한 뒷말을 가슴속에 묻은 황정호가 소파에 몸을 깊게 묻던 그때.

똑똑- 누군가가 불 꺼진 그의 집무실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돌아가십시오."

이 늦은 시간에 누군진 모르겠지만, 지금은 누군가를 만날 기분이 아니다.

하지만, 이에 상대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재차 문을 두드렸다.

"돌아가시라고 말씀드렸소."

조금 짜증 섞인 목소리로 답한 그가 인상을 찌푸리던 와중. 달칵- 문이 열리며 한 쌍의 남녀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역시, 여기 계셨군요. 황정호 협회장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아, 안녕하세요. 저 기억하시죠?"

"...!!!"

밝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승현과.

몇 달 전 B급 헌터로 승격한 천윤기의 딸, 천수연을 본 그의 눈동자에 놀라움과 당황스러움이 뒤엉켜 떠오르기 시작했다.

"...자네들이 여긴 대체 어떻게? 분명 울산에 있다는 얘기를...."

"걸어오기엔 거리가 멀어서 기차 타고 왔습니다."

"또 아빠랑 협회장님한테 배운 걸...진짜 아저씨 같으니까 밖에서 써먹지 말랬지."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한 승현의 농담에, 눈을 흘기며 그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수연.

"왜, 듣다 보니 재밌던데. 앉아도 됩니까?"

그녀의 어깨를 툭툭 쳐준 승현이 집무실 소파에 몸을 묻었다.

"일단 제가 찾아온 목적은 대강 파악하셨으리라 생각하고...일단 사과부터 드리겠습니다."

"사과라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어쨌거나 저도 대한민국의 각성자인 입장으로서, 협회장님의 지시를 어기고 멋대로 울산에 진입했으니까요."

묘한 가시가 들어있는 한 마디.

황정호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걸 보니 자네도 내막은 다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네만."

"뭐, 그렇습니다. 8년 전 역귀 공략에 참여했던 락샤...아니, 유신애 팀장님에게 대강의 전말을 들었으니까요."

"그래서. 지금 날 비난하러 온 겐가? 비겁한 생존을 택한 나를?"

"그럴 리가요."

태연히 답한 승현이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컵을 집어 들었다.

곧이어.

마치 거짓말처럼 새하얀 연기를 피우며 빈 컵 안에 가득 찬 인스턴트 커피를 발견한 황정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그건 대체...?"

"협회장님도 한 잔 드립니까?"

"...."

승현이 보인 것은 일견 간단해 보이지만, 형질변환으로는 절대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말문이 막혀버린 황정호가 침을 꿀꺽 삼켰다.

"유신애 팀장님께 듣자 하니 아직 제가 못 미더우신 모양이더군요."

"그야...."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도 그렇다.

분명 조금 전 본 장면은 경악할 만한 것이었으나, 고작 저런 잔재주로 시시포스를 상대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그의 속내를 읽은 듯, 대번에 커피를 들이켠 승현이 자신만만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어디 보자...제가 당시 자리에 없어서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화아악-

불 꺼진 방을 환히 밝히는 새하얀 빛. 승현의 온몸을 감싼 광휘에 황정호가 입을 쩍 벌렸다.

"녀석이 '격'을 이런 식으로 내보이던가요? 이것보단 훨씬 더 큰가?"

시시포스에게 느낀 것이 무력감을 느낄 정도의 압도적인 공포와 절망, 냉혹함이었다면.

승현에게선 지금까지의 고민과 걱정을 일거에 날려버릴 정도의 따스함과 벅차오름을 느꼈기 때문이다.

반쯤 넋이 나간 황정호가 홀린 듯 승현을 바라보던 와중, 그의 발치에서 마치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작 이 정도 에테르에 흔들리다니. 이 녀석도 멍청한 필멸자로군."

"누, 누구요?"

황급히 시선을 내린 그의 눈에, 바닥에서 상반신만을 밖으로 내놓은 그림자가 보였다.

"이게 그...흉내쟁이인가 한다던...."

"그런 저급한 피조물과 나를 비교하지 마라. 필멸자."

"시끄러워, 굴베이그. 중요한 얘기 중이니 좀 들어가 있어."

그림자를 향해 가볍게 쏘아붙인 승현이 황정호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뭐, 길게 끄는 건 원치 않으니...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저에게 협조하시겠습니까?"

"그건...."

황정호는 쉽사리 답을 내릴 수 없었다.

방금의 경험으로 인해 승현이 범상치 않은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 거대한 존재감을 가진 시시포스에게 대항할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머뭇거리는 황정호의 속내를 알아챈 듯, 승현이 빙글빙글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시시포스가 강림한 이후, 놈에게 복종하며 숨죽여 지내실 생각입니까?"

"그렇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도 자네가 이길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아."

"지금은 시시포스의 존재를 그 누구도 믿지 않을 테니. 훗날 놈이 강림한 뒤에 각성자들을 모아 세력을 구축하고, 레지스탕스를 결성해 기회를 엿볼 계획이시고요."

"..."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셨습니까?"

확신이 가득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풀어놓는 눈앞의 사내.

그의 질문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황정호가 반쯤 죽은 눈으로 승현을 바라보았다.

"...유신애에게 들은 건가?"

"아뇨, 단순한 추측이었습니다."

"싸움이 시작되기도 전에 가랑이 사이로 꼬리를 집어넣는 걸 보니, 저건 그저 한심한 패배자일 뿐이다. 프레이야."

또다시 발밑에서 들려온 목소리.

아까와 다른 건, 이번에는 승현이 그를 전혀 제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건 나도 동의. 시시포스는 협회장님께 이런 조건을 내걸었겠죠. 자신이 강림할 장소인 울산을 완전히 봉쇄하고, 단탈리온이 이끄는 아레스의 뒤를 봐줘라."

"...."

"대신, 이 자리에 있는 모두를 살려주고. 더 나아가 자신이 강림한 뒤 본래는 말살했어야 할 모든 인류의 생명을 보전해 주겠다고."

마치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것처럼, 승현의 이야기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전부 사실이었다.

말문이 막힌 황정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승현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절망적인 이야기부터 해드리자면, 협회장님께서 마주하셨던 시시포스의 존재감은 본체가 가진 것의 백 분의 일도 안 될 겁니다."

"백 분의...뭐라고?"

"무엇보다 그날 모습을 드러낸 건 시시포스의 자그마한 그림자 하나일 뿐이고, 당시의 놈은 그곳에 강림할 수단과 능력이 없었습니다."

"나더러 그걸 믿으란 말인가? 내가 속았다고?"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아직 정해지지 않은 미래를 이용한 같잖은 협박에 넘어가신 거죠. 악마들이 자주 애용하는 수법입니다."

"그럴 리가. 난 분명 그 녀석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고, 놈이 내게 보여준 건...."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는 그의 이야기를 끊고 땅바닥에서 솟아오른 그림자.

"우습군. 고작 필멸자라곤 해도 우두머리란 녀석이 고작 그 정도 장난질에 넘어갈 줄이야."

순식간에 발밑으로 옮겨온 그것이 미처 대응할 새도 없이 그의 전신을 집어삼켰다.

단 1초도 되지 않는 찰나의 순간.

그 짧은 시간 동안 그가 느낀 것은 완전한 무(無)로의 회귀.

"끄어...끄어억."

영혼의 한 조각마저 산산이 바스러져 제 존재를 지워버리는, 도저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근원적인 공포의 단면이었다.

"한 줌도 안 되는 권능의 끝자락을 엿본 것만으로도 저런 꼴이라니. 한심하군. 한심해. 저러니 시시포스 같은 버러지에게 휘둘린 거겠지. 멍청한 엘프들이 훨씬 강단이 있어."

"...."

당시의 악몽을 고스란히 재현한 조금 전의 상황에, 거친 숨을 내뱉는 황정호의 전신이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 축축이 젖어버렸다.

"이전의 네가 본 건. 그리고 지금 내가 한 건 마음가짐에 따라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는 눈속임 수준이지만, 마나의 씨앗이 개화하는 반년 뒤에는 상황이 다를 거다."

귓속을 세차게 파고드는 목소리.

반쯤 넋이 나간 그를 한심한 듯 내려다보던 그림자가, 한마디를 덧붙이고는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 버렸다.

"저, 저자...아니, 저분은 누구인가?"

"굴베이그. 협회장님이 맞닥뜨렸던 시시포스의 전대 근원이며, 놈이 가진 권능의 원래 주인입니다."

"...권능? 주인?"

생전 처음 듣는 명칭들.

전신의 식은땀을 닦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멍하니 같은 내용을 읊조리는 황정호를 향해, 표정을 굳힌 승현이 말을 꺼냈다.

"일단 그건 협회장님도 아셔야 하는 부분이긴 하지만...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절망적인 사실을 한 가지 더 알려드리죠."

"백 분의 일인 것도 모자라...더 절망적인 상황이 있다는 건가?"

"협회장님은 놈이 강림한 이후에도 각성자들의 능력이 온전히 보존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뜬금없는 승현의 이야기.

잠시 의도를 파악해 보던 황정호가 황당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야 당연한 거 아닌가. 30년 전 격변이 일어난 이후, 지금까지 능력을 잃은 각성자는...."

"아닙니다. 이건 그저 뭐라고 해야 할까. 의도치 않았던 부산물이라고 할까요? 튜토리얼? 적응 기간?"

"무슨 뜻이지?"

"각성자들이 보이는 초인적인 힘의 근원은, 조금 전 이야기한 마나의 씨앗이 만들어낸 부산물이란 뜻입니다."

"그렇다. 본래 신체에 축적된 마나란 뼈를 깎는 노력에 따른 결과물. 마나의 씨앗이 온전히 개화하는 순간, 별다른 노력 없이 손쉽게 마나를 얻은 대다수의 인간들은 때가 오면 제 능력을 환원하게 되겠지."

"그리고. 근원 간의 협약에 따라 그 마나의 씨앗이 개화하는 순간, 시시포스는 현세에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겁니다."

믿을 수 없다.

아니, 헛소리여야만 한다.

만일 저게 사실이라면...지금까지 죄책감을 견뎌오며 지낸 시간과 앞으로의 계획이 전부 무산되는 거니까.

그렇기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황정호가 우악스러운 손짓으로 승현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딴 헛소리로 날 속일 생각 하지 마라! 여태껏 각성 이후 불의의 사고를 제외하면 마나를 잃은 각성자는 단 한 명도 없었...어?"

"이제 믿으시겠습니까?"

순식간에 힘을 잃은 그의 손아귀.

자신의 모든 능력이 소실되었음을 깨달은 황정호의 얼굴에 당혹감이 번져갔다.

"제 몸에 깃든 세계수의 힘을 이용해 협회장님의 마나를 잠시 거둬들였습니다. 이건 제가 섭리에 억지로 개입한 거지만, 반년 뒤엔 각성자의 95%가 그렇게 될 겁니다. 음...등급으로 치면 B급 상위권 이하는 전부 일반인으로 돌아간다고 봐야겠군요. 어쩌면 B급도 어려울 수도 있고요."

부지불식간에 평범한 50대 중년의 몸으로 돌아간 황정호.

"그리고. 이게 그때를 위한 대비책입니다.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하신 것 같으니, 우선 먼저 사용해 보시죠."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말문이 막힌 그의 능력을 되돌려준 승현이, 그림자 속에서 탁구공 크기의 검은 구체가 담긴 가방을 꺼냈다.

"이건...?"

"신체 탈착형 골렘의 시제품입니다. 본래는 열 개였지만, 하나가 줄어 버렸네요."

"골렘? 골렘이 마나를 잃었을 때의 대비책이라고? 아니, 그 전에 내가 자네의 말이 사실인지 믿을 수 있는 근거는? 그날 내가 본 건 분명...."

황정호의 말을 끊고 총 아홉 개의 구체를 테이블 위에 늘어놓은 승현이 손바닥 위에 턱을 괴고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놈이 목적을 달성하고 나면, 인류를 비롯해 지성을 가진 필멸자들의 대다수는 자연스레 소멸할 테고요."

"...."

"복종으로 인해 달라지는 게 있다면 종말의 시기뿐이겠죠. 단순히 자신의 계획을 좀 더 쉽게 이끌어나가기 위한 얕은 협박이었을 뿐. 놈이 협회장님께 보여준 미래의 끝은 결국 하나로 귀결됩니다."

강한 확신이 담긴 눈빛과 목소리.

조금 전의 믿을 수 없는 경험과 그의 태도가 겹쳐 황정호의 머릿속에 혼란의 소용돌이를 피워올리기 시작했다.

"...그래. 자네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고 친다면 나더러 어쩌라는 건가? 자네에게도 모든 손쉽게 모든 마나를 빼앗기는 일개 인간이?"

"그래서 제가 이 시제품들을 가져온 겁니다. 비용은 청구하지 않을 테니, 대신 테스터를 좀 구해주십시오."

그의 앞으로 한층 더 바짝 다가온 아홉 개의 검은 구체. 그것들에게서 손을 뗀 승현이 소파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어지간하면 마나 사용에 능숙한 B급 이상 헌터로. 입은 가벼울수록 좋고, 활동량은 많을수록 좋습니다."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206화

"바, 반갑습니다. 여러분. 저는 오늘 하루 충북 각성자 아카데미 원생 여러분을 안내하게 된 대성 클랜의 전창수입니다."

어설픈 동작과 조금 더듬대는 목소리.

손에 들고 있는 메모를 힐끔거리며 낭독한 전창수가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았다.

"우와...진짜 대성 클랜원인가 봐."

"대박."

"나 실제로는 처음 봐."

"로제 언니는? 나 그 언니 보러 온건데."

"난 한승현 형님."

"나는 예전에 직접 본 적 있지롱. 키도 크고 잘 생겼던데."

"진짜? 근데 우린 왜 저런 아저씨가 마중 나온 거냐고...."

십 대 중후반쯤 되었을까.

자신을 앞에 두고 수군대는 아이들.

'아저씨는...내가 그 둘보다 한참 연하다 이것들아. 그나저나 이건 몇 번을 해도 적응이 잘 안 된단 말이지.'

서른 명쯤 되는 이들은 모두 충북에 위치한 각성자 아카데미에서 이곳을 찾아온 재학생들이다.

오늘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견학차 이곳에 방문한 각성자 아카데미의 학생들에게 대성 클랜을 소개하는 것.

본래는 최수근이나 오신우가 담당하던 업무이건만.

창립 멤버 중 가장 막내란 이유로 한두 번 떠넘겨지다 보니 어느새 그의 전담 업무가 된 것이다.

'한두 번도 아니고...신우 형님은 본래 제피로스 대장이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팀장...아니, 그 영감은 나하고 몇 달 차이도 안 나면서.'

아무리 생각해도 불합리하다.

끓어오르는 짜증을 꾹꾹 눌러 담는 그에게, 삐죽삐죽 수염이 자라난 중년 사내가 다가왔다.

"반갑습니다. 인솔 교관 함재석입니다."

"전창수입니다."

입가에 말라붙은 침 자국과 만사가 귀찮은 듯 심드렁한 눈빛.

그의 입에서 풍기는 술 냄새를 감지한 전창수가 곧바로 손가락을 뻗어 클랜의 사옥을 가리켰다.

"피곤해 보이시는데, 학생들 인솔은 제가 할 테니 교관님께서는 눈 좀 붙이고 오시는 게 어떠십니까?"

"오...정말 그래도 됩니까?"

"이 정도 유도리는 있어야죠. 다른 아카데미에서 오신 교관님들도 다들 그렇게 하셨고. 휴게실은 사옥 2층입니다."

"흐흐...눈치가 빠르시네. 감사합니다. 그럼, 믿고 실례하도록 하겠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숙취가 채 가시지 않은 걸음으로 사옥을 향해 걸어가는 함재석 교관.

'교관들은 어딜 가나 다 똑같구만. 하긴...저러는 쪽이 나도 편하니까. 은퇴한 양반들은 이런 쪽에 관심이 없기도 하고.'

대부분이 퇴역 헌터 출신인 교관을 데리고 다녔다가 한 교관이 괜한 트집을 잡아대는 바람에.

온종일 진땀을 빼야 했던 기억을 떠올린 전창수가 고개를 들었다.

"야, 교관 갔다."

"냅둬. 또 술 퍼먹고 온 모양이지."

"잠이나 퍼 자라고 해. 없는 편이 나아."

한두 번이 아닌 듯 태연히 대화를 나누는 학생들.

한참 교관을 씹어대던 그들의 시선이 동시에 전창수를 향해 모여들었다.

"그래서, 저희 이제 어디로 가는 거예요? 선생님?"

"사옥 구경시켜 주세요!"

"저는 마이스터 타운! 거기 미스틱 클랜 출신이었던 저희 형이 들어갔다고 하던데 시설이랑 설비가 장난 아니라던데요?"

"박태선 이 멍청아. 그런 곳을 클랜원도 아닌 우리가 구경하러 갈 수 있겠냐? 그러니까 나는 로제 누나부터!"

"나도 로제 언니! 헌터넷 보고 완전 팬 됐잖아. 그 얼굴에 S급 헌터라니, 개 멋있어."

"야, 아무리 그래도 한승현 형님이지. 역대 최연소 S급 연금술사에 치유 가속 포션의 창시자...그 광역 형질변환이라는 거 직접 한번 보고 싶은데."

"나는 이번에 A급으로 올라간 장춘식...."

취향이 독특한 한 명을 빼고는 아무래도 승현과 로제를 보기 위해 모인 이들이 대다수인 모양이다.

'내가 바로 그 둘이 있는 대성 클랜의 창립 멤버다 이거야.'

어쩐지 어깨가 으쓱해진 전창수가 조금 거만해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쉽게도 두 분은 일정 때문에 오늘은 여기 못 오실 것 같네요. 아쉽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도록 합시다."

"아...."

"그건 싫은데."

여기저기서 탄식이 터져 나오던 와중. 가장 앞에 있던 소년이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럼 장춘식 헌터님은요?"

"...그분은 잘 모르겠네요."

한 달 전쯤 수인화 컨트롤 능력을 단련하기 위해 남미 오지로 떠난다고 했던가.

"사나이 장춘식, 조만간 남자 중의 남자. 사나이 중의 사나이. 짐승남이 되어 돌아와 주마. 아, 갈아입을 팬티도 챙겨야지."

희희낙락하며 비행기 표와 함께 승현이 제작해 준 신형 에고 아머를 챙기는 장춘식.

잔뜩 들뜬 그의 마지막 모습을 잠시 회상하던 전창수가 말문을 열었다.

"그러니, 저희는 지금부터 마이스터 타운으로 이동하도록 하겠습니다."

"진짜?"

"진짜로 거길 볼 수 있다고요?"

"연구시설이나 마찬가지 아니야? 다른 클랜에선 절대로 안 된다고 하던데."

"에이, 그냥 주변만 둘러보다 오는 거겠지. 아니면 교육 시설만 돌아보거나."

자신의 한 마디에 웅성대기 시작하는 학생들. 전창수의 입가에 우쭐한 미소가 내걸렸다.

'요놈들아. 조금 있다 놀라 자빠지지나 마라.'

제작 클랜의 핵심이나 마찬가지인 연구 및 교육 시설은 본래 비공개로 운영되는 법이지만, 이곳 대성만큼은 다르다.

클랜의 창립자인 승현의 의사에 따라 숨김없이 공개된 내부 시설.

모든 것이 개방된 이곳에서 그들이 갈 수 없는 장소란 존재하지 않는다.

'어차피 진짜 중요한 연구들은 외지에서 진행되는 중이기도 하고 말이지.'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울산에 세워진 두 번째 지부를 떠올린 전창수가 의기양양한 동작으로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자, 다들 절 따라오시죠. 지금부터 마이스터 타운의 내부를 견학시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 *

본래는 마을 회관과 우체국으로 쓰이던 교육 1동.

전창수를 따라 붉은 벽돌로 세워진 허름한 건물 안으로 들어선 학생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미쳤다...미쳤어."

"이게 다 뭐야?"

노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바둑이나 장기 등으로 시간을 보낼 듯한 외관과는 다르게.

대성 클랜의 엠블렘이 새겨진 새하얀 가운을 입고 바삐 돌아다니는 사람들.

그들 중.

한 손에 차트를 든 채 연구에 몰두하는, 피부가 까무잡잡한 거구의 외국인을 발견한 몇몇 학생이 비명을 내질렀다.

"저, 저 사람. 아니, 저분...W.K 1팀장 조나단 허드슨 아냐?"

"어?"

"에이, 설마. 그 유명한 사람이 왜 여기에 있어?"

"맞는 것 같은데? 연금술사 중에 저런 덩치가 또 있나?"

주변의 분위기를 감지한 듯. 연구에 몰두하던 조나단이 새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교육 1동을 견학하기로 한 학생들? 반갑습미다. 화이트 나이츠의 A급 마이스터, 조나단 허드슨입니다."

학생들에게 가볍게 손을 흔든 그가 전창수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Oh, 전창수 매니저님. 늘 수고가 많으십니다. 매니저님이 힘을 써주신 덕분에 얼마 전부터 경비 업무에서 이쪽으로 보직이 변경되니 한층 업무가 즐겁습니다."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의 아부.

A급 마이스터가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진귀한 장면에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들었어?"

"화이트 나이츠 소속 A급 연금술사가 경비원을 맡을 정도면...대체 대성 클랜은 어느 정도라는 거야?"

물론. 이것은 W.K 클랜과 제법 저명한 연금술사인 조나단의 명성을 이용한, 다분히 의도된 상황이었다.

아직 세상 경험이 부족한 아이들이 대성 클랜에 동경심을 품게 만드는 가벼운 연기.

물론, 이건 도둑과 장사꾼의 신.

헤르메스 최수근 영감의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였다.

"우와...그럼 저분, 되게 대단한 분 아니야? 보직도 막 변경해 주고."

"그러고 보니 방금 매니저라고 했잖아. 매니저면 높은 직책 아니야?"

덤으로.

순식간에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선망의 시선들을 느낀 전창수의 어깨가 다시 한 번 불쑥 솟아올랐다.

"그래. 아, 아니지. 그래요. 열심히 해 주세요. 사장...아니, 클랜마스터께서 신입 클랜원 교육에 거는 기대가 크십니다."

"당연합니다! Sir! 분골쇄신하여 한층 더 노력하도록 하겠습니다!"

미하일에게 불려와 가게의 수문장 노릇을 하던 몇 달 전과는 달리 부쩍 늘어난 한국어 실력.

전창수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인 조나단이 물러가자.

이번에는 이십 대 중반, 승현의 또래로 보이는 젊은 사내가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반갑습니다. 교육생 대표. A급 연금술사 박태수...어? 태선아?"

"어? 형!"

그를 발견한 남학생이 반가운 듯 눈을 빛내며 무리에서 뛰쳐나왔다.

"여기에 있었어?"

"뭐야, 오면 온다고 말이나 해 주지. 어떻게 된 거냐?"

"못 만날 줄 알았지. 와...형 장난 아니네. 집에서 보던 거랑은 완전 딴판이야."

제법 사이가 좋은 듯,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두 형제.

그들을 지켜보던 전창수의 눈이 반짝, 빛났다.

'형이 교육생으로 있다라...이번 기수는 좀 쉽겠는데.'

그가 부여받은 임무의 궁극적인 목표는 대성 클랜의 홍보.

"시시포스를 쓰러트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뒤를 생각해 새로운 인재를 키워내는 것도 중요한 일이거든."

"형님, 아니. 사장님. 시시포스인지 뭔지를 쓰러트리면 끝 아닙니까. 뭐가 더 있다고...."

"놈의 강림과 동시에 일어날 두 번째 대격변. 너도 때가 오면 알게 될 거다."

그 속에 담긴 뜻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승현의 눈빛은 전에 없이 진지했기에.

그의 의지에 따라 곧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헌터나 제작자가 될 새싹들을 대성 클랜으로 영입하는 것이 클랜 견학 행사의 주된 목적이다.

'저 소심해 보이는 녀석이 박태수의 형이라 이거지?'

본래 첫 단추를 꿰는 것이 가장 어려운 법.

저 둘에게 이목을 집중시키면 쉽게 아이들에게 다가갈 수 있을 것 같다.

머릿속으로 계산을 끝마친 전창수가 인위적인 미소를 지으며 학생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은 지금 저 박태선 학생의 형이 어떤 분인지 아시나요?"

"A급 연금술사요!"

"미스틱 클랜 출신이라던데."

"얼마 전 대성으로 왔다면서요. 근데 A급이 교육생이라니...좀 이상한데요."

"맞아. A급이면 어지간한 클랜의 클랜마스터거나, 아니면 대규모 클랜의 팀장급 정도를 맡고 있을 등급인데."

"뭐야, 그럼 여기는 대우가 좀 안 좋은 거 아냐? A급이 교육생? 팀장도 아니고?"

조금 실망한 듯한 목소리.

학생들의 분위기를 보며 자신이 의도한 상황이 도래했음을 눈치챈 전창수가 한층 더 목소리를 키웠다.

"아니죠. A급 연금술사가 교육생을 자처할 만큼 이곳에서 배울 수 있는 게 무궁무진한데. 예를 들면...."

쾅-

자랑스레 커리큘럼을 소개하려던 전창수의 귓가에 무언가가 부서지는 듯한 둔탁한 소음이 들려왔다.

"아, 씨. 시끄러. 밤새 비행기 타고 와서 이제 막 잠들려던 차였는데."

그와 동시에 책상을 내리치며 몸을 일으킨.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의 여성.

조금 어설픈 한국어로 중얼거린 그녀가 옆구리를 북북 긁으며 학생들을 흘겨보았다.

"뭐? 뭘 봐. 이 꼬맹이들아. 하여간 기다리는 분은 안 오고...웬 이상한 녀석들만 짜증 나게 하루 종일 왔다 갔다 하고."

"뭐야, 당신. 처음 보는 사람인데 외부인이 왜 여기서...."

자신의 위엄을 보여주어야겠다 생각한 전창수가 삿대질과 함께 날카롭게 한 마디 쏘아붙이려던 찰나.

"안 된다! 매니저님!"

총알처럼 앞으로 튀어나온 조나단이 황급히 몸을 날려 그를 넘어트렸다.

콰당탕탕-

럭비의 태클을 연상케 하는 강맹한 공격. 꼴사납게 바닥을 나뒹군 전창수가 황당하다는 듯 조나단을 바라보았다.

"뭐야. 조나단. 왜 이래?"

"쉿. 조용히 넘어가라. 제발. 저분에게 뭐라고 하면 우리 다 죽는다. 사장님 빼고는 진짜 다 죽는다."

어느새 예전처럼 돌아온 말투.

하지만, 지금 조나단은 그런 것 따위를 신경 쓸 상태가 아니었다.

"누군데? 저 여자가."

"여자 아니다. 괴물...몬스터이다. 미하일 클랜장님의...그러니까...시스터. 올더 시스터."

"시스터? 누님?"

"그렇다. 누님."

"누님이면 누님이지 왜 여기서 멋대로 행패를 부려? 우리가 그렇게 만만...."

"쉿! 들린다. 조용히 해라. 매니저님."

학생들 앞에서 얕잡혀보일 순 없었기에, 목소리를 높여 역정을 토해내는 전창수.

그의 입을 다급히 틀어막은 조나단이 눈치를 살피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펜타그램 나이츠의 적기사, 에리얼 슬리먼 님이시다."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207화

"여러분들이 지금껏 상대해온 울산의 마수들은 몬스터와의 교배를 거친 잡종입니다."

"그러니까...그게 전부 잡종이라고?"

"그렇습니다. 전부 이 작자가 만들어낸, 마수라고 부를 수도 없는 조악한 것들이죠. 하여간...."

폐허가 된 교회 첨탑.

꼭대기에 거꾸로 매달린 로키를 가리킨 미하일이 고개를 가로젓자.

주변을 둥그렇게 둘러싼 각성자들이 성난 목소리로 로키를 향해 소리치기 시작했다.

"이 새끼. 신이란 놈이 악마한테 들러붙은 것도 모자라, 괴물들을 만들어냈다고?"

"진짜 별짓을 다했구만."

"내가 그것들을 상대하느라 몇 번이나 죽을 뻔했는지 알아?"

"너도 한 번 뒈져봐라!"

휘익-

첨탑의 십자가를 향해 날아드는 돌멩이들.

로키를 죽이면 안 된다는 미하일의 당부가 있었기에 마나가 실리진 않았지만.

승현의 손에 의해 거의 모든 힘을 금제 당한 로키에게는 하나하나가 충분히 위협적인 공격들이었다.

"그만...내가 잘못했으니 풀어줘. 제발! 반성하고 있다고! 진짜야!"

세상에서 고통을 가장 두려워하는 그였기에, 로키는 눈물까지 흘려가며 애절하게 소리쳤다.

"어랍쇼? 또 질질 짜네?"

하지만, 이미 지난 반년간 그의 연기에 속을 대로 속아온 울산의 각성자들은 저것이 악어의 눈물임을 잘 알고 있었다.

"포션도 넉넉하겠다. 오늘이 날인 거 같은데 푸닥거리 한번 해 보자."

"얼굴은 내 거야. 오빠."

점점 험악해지는 분위기.

우득우득 손목을 꺾으며 돌멩이를 주워든 이지훈과 이지현이 로키를 노려보았고.

"헤, 헤헤...선생님들. 한 번만 봐 주십쇼."

자신의 미래를 직감한 로키가 대롱대롱 매달린 채로 손바닥을 싹싹 비벼대기 시작했다.

그 비굴한 모습에 마음이 약해지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들의 리더인 미하일은 로키라면 넌더리를 내는 자였다.

"아직 반성의 기미가 보이질 않는군요. 여러분들, 제가 허락할 테니 교육 좀 해주시죠."

"좋지! 대장이 허락한 거다?"

"사장한테 잘 말해줘야 해. 알겠지?"

"그런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사양 않고...."

쐐애액-

그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쏜살같이 로키를 향해 날아드는 돌멩이들.

"으악! 제발! 그만...!!!"

로키의 처절한 비명이 맑은 하늘 아래 울려 퍼졌고. 이를 지켜보던 미하일이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좀 잔인한 것 같지만...이참에 버릇을 단단히 고쳐놔야 해."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보다 인류에게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게 로키였기에.

조금 불쌍하더라도, 정신머리를 철저히 뜯어고쳐 두어야 한다.

"물론, 개인적인 원한도 좀 섞인 거긴 하지만...이렇게라도 안 하면 또 언제 뒤통수를 칠지 모르니까."

띠링-

팔짱을 낀 채 연신 애처로운 비명을 질러대는 로키를 구경하던 와중, 갑작스레 주머니에서 울린 알림음.

"응? 문자? 이틀 전에 온 거네."

잠깐 전파가 잡힌 모양인지 뒤늦게야 도착한 문자.

핸드폰을 꺼내 내용을 확인하던 미하일의 얼굴이 삽시간에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누님이...왔다고? 한국에?"

판테온의 신장 우리엘의 현신이자, 자신의 누이인 적기사 에리얼 슬리먼.

"...한가롭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어. 젠장."

가는 곳마다 사고를 불러일으키는 그녀가 도착했단 소식에. 초조하게 발을 동동 구르던 미하일의 신형이 한 줄기 빛이 되어 쏘아졌다.

"여러분, 저 본사에 좀 다녀오겠습니다!"

"뭐야, 뭔 일인데. 대..."

휙휙 지나가는 주변의 풍경.

순식간에 멀어진 각성자들을 뒤로하고 전력을 다해 울산 외곽을 향해 달려나가던 미하일이 간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발...사장님이 오시기 전에...아니, 내가 수습할 수 있을 정도로만...."

펜타그램 나이츠의 이미지 덕에 세간에 알려지진 않았지만. 철없는 그녀의 사고방식을 아주 잘 알고 있는 그였기에.

전력 질주에 모든 능력을 해방한 미하일의 등 뒤에서 한 장의 날개가 솟아올랐다.

* * *

부스스한 머리. 아직 잠이 덜 깬 눈.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해대던 붉은 머리의 여성이 입가에 흘러내린 침을 쓱쓱 닦았다.

"뭘 봐, 병아리들아. 마빡에 털도 안 난 것들이. 적기사 처음 봐? 으그그극...졸려 죽겠네."

잠이 덜 깬 얼굴로 기지개를 켜며 옆구리를 북북 긁어대는 에리얼.

어딘지 모르게 한심한 그녀의 작태에 학생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들었어?"

"적기사래."

"적기사라고? 저 사람이? 그 펜타그램 나이츠의?"

"티비에서 봤던 거랑 비슷하게 생기긴 했는데...."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와 아름다운 외모는, 분명 펜타그램 나이츠의 일원으로 잘 알려진 적기사와 동일하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은 평소 온화하기로 소문난 이미지와 전혀 부합되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안 믿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야! 조나단! 이리 와 봐."

그녀의 가벼운 손짓에 전 세계적으로도 제법 유명한 A급 연금술사가 손바닥을 싹싹 비비며 후다닥 달려갔으니까.

"부르셨습니까!"

머리를 땅에 들이받을 기세로 허리를 굽힌 조나단.

팔짱을 낀 채 그를 내려다보던 에리얼이 눈썹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미하일 어딨어. 분명 내가 미리 전달해 두라고 했을 텐데?"

"그, 그게...미하일 클랜장님이 계신 지역은 전파가 닿질 않아서...일단 기별을 넣어 두긴 했지만 아마 수신에 차질이 생긴 것 같습니다."

"너 한국말 많이 늘었다? 그나저나 그 자식. 감히 내 연락을 씹었다 이거지?"

"정확히는 적기사님이 아니라 제 연락...."

"적기사님? 뭐가 빠졌다? 우리 조나단이 아직 한국어를 덜 배웠나? 아니면 우리 사이가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건가?"

"아...'섹시한' 적기사님. 죄송합니다."

"그렇지. 이왕이면 뷰티가 더 좋은데."

"예. '뷰티한' 적기사님. 오늘도 여전히 아름다우십니다."

적기사를 향해 굽신거리며 전력을 다해 아부를 떨어대는 조나단.

"...."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그들의 작태에 학생들의 얼굴에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던 에리얼이 귀찮다는 듯 손을 휙휙 내저었다.

"됐어. 그보다 이 꼬맹이들은 다 뭐야. 소풍 왔니? 누나는 피곤하니까 방해하지 말고 저기 가서 놀렴. 나 애들 싫어해."

"여기 있는 학생들은 대성 클랜을 견학 온 충북 각성자 아카데미의...."

보다 못한 전창수가 용기를 내어 그녀의 행동을 제지하려던 찰나.

한발 먼저 나선 조나단이 황급히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여기 있는 학생들은 전부 사장님께서 '직접' 부르신 아이들입니다."

"...그래?"

"그뿐만 아니라 사장님께서는...."

조용히 그녀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댄 조나단이 몇 마디를 더 속삭이자.

"오호. 그렇단 말이지? 흐흐. 이참에 점수 좀 따 놔야겠네."

가만히 경청하던 에리얼의 표정이 점점 부드럽게 녹아가기 시작했다.

"어머, 귀여워라. 역시 애들은 좀 시끄러운 맛이 있어야지. 몇 살이니? 너희들? 열여섯? 열일곱? 전부 다 잘 생겼다야."

손바닥 뒤집히듯 순식간에 전환된 태도.

벙찐 학생들에게 다가간 에리얼이 교육생 대표 박태수의 동생, 박태선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딱 보니까 네가 여기 대장이구나? 그렇지? 네가 제일 세지?"

"아, 아닌데요...."

"에이, 거짓말. 내가 보기엔 이 중에서 네가 제일 자질이 있어 보이는데? 혹시 나중에 프...아니, 사장님 뵐 일 있으면 꼭 여기 들어오고 싶다고 얘기해. 내가 추천해 줬다고."

추천?

뜬금없는 이야기에 당황한 박태선이 눈알을 데룩, 굴렸다.

곧이어, 그의 귓가를 타고 웅성이는 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상에, 적기사가 직접 말을 걸어줬어."

"쟤가 제일 세다고?"

"아무리 봐도 아닌데. 박태선 쟤, 전투 분야도 그렇고 제작 분야도 그렇고. 딱 중간 정도 아닌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의문과 부러움이 뒤섞인 시선들.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가라앉힌 박태선이 적기사를 향해 말을 덧붙였다.

"마, 말씀은 감사하지만...저는 그쪽으론 소질이 없어서...형을 따라서 제작자가...."

"제작자? 마이스터? 그건 안 돼. 너는 헌터가 딱이야."

"?"

"이리 와 봐."

자신만만한 표정.

의아해하는 박태선의 손목을 잡아끌어 학생들 앞에 세운 에리얼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여기서 얘 이길 수 있는 사람?"

"네? 그게 무, 무슨...."

"넌 좀 가만히 있어 봐. 한창 나이에 뭐가 그렇게 무섭다고. 내가 너만 할 때는 어? 하루에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어? 무슨 말인지 알지?"

"...."

잔뜩 당황한 듯한 태선의 모습.

물론, 다른 이들 또한 그녀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기에. 순순히 앞으로 나서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어휴. 요즘 애들답지 않게 왜 이렇게 겁이 많은 건지."

머뭇거리는 학생들을 보며 답답한 듯 미간을 찌푸리던 에리얼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주머니에서 새빨간 장갑을 꺼냈다.

"만약 여기 있는 어리버리한 친구를 이기는 친구가 나오면, 요 녀석을 가져가도 좋아."

"어?"

"저건...나 헌터넷에서 본 적 있어!"

"레드 로즈를요?"

"진짜 준다고요?"

레드 로즈.

펜타그램 나이츠의 다른 멤버들과는 달리, 이미 여러 매체에서 활발히 자신의 활동 내역을 드러내고 다녔던 적기사였기에.

그녀의 독문 병기인 레드 로즈 또한 모두에게 잘 알려져 있었다.

현재 공개된 등급 중 가장 최상위권인, 유니크 등급을 넘어선다는 전설적인 성능을 지닌 아이템.

구경조차 어려운 진귀한 보물을 본 학생들의 눈에 탐욕의 빛이 서리기 시작했다.

"지, 진짜 주시는 건가요? 정말로?"

"그럼. 뒤끝 없이 이 자리에서 바로. 원한다면 보증서도 써 줄게. 지장도 찍고. 너희도 지루한 시설 견학보다 이게 더 좋지 않아?"

쿨하게 땅바닥에 장갑을 내려놓은 에리얼. 그녀의 입가에 도발적인 미소가 내걸렸다.

곧이어. 한 남학생이 자신만만하게 손을 번쩍 들며 앞으로 나섰다.

"제가 해보겠습니다!"

커다란 덩치에 잘 단련된 몸. 형형한 눈빛. 얼핏 보아도 학생들 무리에선 가장 강한 녀석이다.

"제 이름은...."

"소개는 됐고. 어디 보자...그래. 보아하니 너도 잘만 하면 A급 정도까진 어렵지 않게 올라가겠구나."

"A, A급이요?"

"그래. 내 이름을 걸고 보증할게. 정식 헌터가 되고 나면, 너는 십 년 안으로 A급에 오를 수 있을 거야."

자신감이 가득 묻어나오는 그녀의 목소리와 표정. 앞으로 나선 소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A급이라니...내가?'

전체 각성자 중 상위 0.1퍼센트의 경지라는 A급 헌터.

게다가 이를 보증하는 게 다른 이도 아닌 펜타그램 나이츠의 일원, 적기사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순진한 소년의 마음에 순식간에 불을 지핀 에리얼. 그녀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내걸렸다.

'역시. 애들은 다루기가 쉽다니까. 뭐, 딱히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고. 프레이야 님께 도움이 되는 거기도 하니까. 지루하던 차였는데 잘됐네.'

물론, 그녀가 순수한 의도로 이런 상황을 만든 건 아니었다.

본래의 목표였던 쓸만한 인재의 포섭과 더불어, 승현이 오기 전까지 자신의 무료함을 채워 줄 좋은 오락거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조나단. 분명 사장님은 며칠 뒤에나 오신다고 했었지? 확실하지?"

"마지막으로 연락이 왔을 때, 미하일 클랜장님께 그렇게 전달받았습니다."

"그으래?"

조나단의 답변에 그녀의 입꼬리가 한층 더 둥글게 말려 올라갔다.

곧이어, 마주 선 두 소년을 향해 다가간 에리얼이 손을 뻗어 둘의 어깨를 짚었다.

"다만, 두 가지 조건이 있어."

"조건 말인가요?"

"그게 무슨...그리고 제가 인식이를 어떻게 이겨요. 쟤는 저희 학년 수석인데."

"쟤 이름이 인식인가 보구나. 별 건 아냐. 내가 버퍼형 헌터인 건 너희도 알고 있지?"

"?"

금시초문이다.

세간에 알려진 적기사는 분명 체술을 이용해 싸우는 근접 전투형 헌터일진대.

"뭐,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여기 있는 태...뭐랬지?"

"태, 태선이요."

"그래. 태선이란 이 친구가 나 같은 버퍼형 헌터랑 궁합이 아주 좋다는 거지. 뭐, 그 외에도...아니다. 이건 지금 말할 건 아니고."

어리둥절해 하는 두 소년.

그들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던 에리얼의 몸 주변에서 붉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조건은 간단해. 내가 너희 둘에게 똑같은 버프를 걸어줄 테니까, 동일한 조건에서 신나게 붙어볼 것."

"...그게 끝인가요?"

"그리고, 여기서 지는 놈은 졸업 후에 대성 클랜에 군말 없이 들어올 것. 아, 여기서 인식이 네가 이기면 레드 로즈를 가져가도 좋아. 태선이 너는...음...뭐, 누나가 쓸만한 거 하나 줄게."

눈 깜짝할 새에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둘의 대결.

당황한 표정으로 이를 지켜보던 박태선의 형. 박태수가 황급히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저, 적기사님. 이게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아무리 당신이라고 해도 아이들끼리 싸움을...."

"에이. 친구들끼리 한 번씩 하는 '장난'인데 뭐. 만일 위험한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내가 있으니까 괜찮아. 그렇지?"

자신을 향해 해맑은 눈웃음을 보내는 에리얼.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무형의 기세에 눌린 박태수의 몸이 거미줄에 걸린 것처럼 빳빳하게 굳어버렸다.

"...."

"자, 보호자님도 동의하셨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여기 있는 치킨 보이를 이긴 녀석이 레드 로즈를 가져가는 거야."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붉은 장갑.

레드 로즈의 아름다운 자태를 재차 확인한 인식의 눈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눈앞의 보물은 거래소에 내다 팔기만 해도 대대손손 놀고먹을 수 있는 거금에 팔릴 것이 분명하다.

물론, 헌터를 지망하는 그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지금 그의 머릿속을 가득 메운 것은, 레드 로즈를 착용한 채 몬스터를 도륙하는 늠름한 자신의 모습.

'무조건 이긴다.'

게다가 상대는 아카데미의 열등생인 박태선. 전 학년 수석인 자신이 패배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표정을 보아하니 준비는 다 된 모양이고. 그럼...시...작!"

적기사가 시전한 버프가 적용된 모양인지, 의욕으로 가득한 그의 전신에 알 수 없는 기운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이건...대단하네요."

그 누구와 맞붙어도 지지 않을 것 같은 어마어마한 힘.

맞은편의 박태선 또한 같은 버프를 적용받은 모양인지, 조금 겁먹은 듯한 그의 숨소리가 점차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미안하다. 태선아. 좀 아플 거...."

주먹을 꾹 말아쥔 인식이 잔뜩 움츠러든 태선의 얼굴을 가격하려던 그때.

"히, 히익. 하지 마...."

우드득-

무언가가 어긋나는 듯한 소리와 함께 손목에서부터 시작된 강렬한 통증이 그의 뇌리를 강타했다.

"어, 어어...?"

못 박힌 듯 허공에 멈춰 선 자신의 주먹.

놀랍게도 자신의 손목을 잡아챈 것은, 제작자를 지망한다던 태선의 연약한 손아귀였다.

게다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악력이라니.

"잠깐. 잠깐만. 놔 봐. 아악! 아프다고!"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인식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교육 1동 내부를 쩌렁쩌렁 울렸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채 이를 바라보던 에리얼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내걸렸다.

"역시, 고만고만한 녀석들 싸움 구경이 제일이란 말이지. 구시온 자식, 하는 짓은 마음에 안 들어도 나랑은 어느 정도 통하는 부분이 있어. 어디 팝콘 없나?"

어차피 부상을 당하더라도 가벼운 골절상 정도는 자신의 에테르로 말끔히 치료할 수 있다.

"무, 무슨 힘이...적기사 님. 진짜 똑같은 버프를 걸어준 거 맞습...아악! 놔! 아프다고!"

"네, 네가 주먹을 치워야 내가 놓지."

"아니, 놔야지 주먹을 빼지! 야, 진짜 부러져. 부러진다니까?"

"짜식들. 보기 좋구만. 원래 좀 투닥거리면서 크는 거지. 힘 좀 더 써봐! 인식아!"

눈앞에서 벌어지는 두 소년의 촌극에 에리얼이 흐뭇한 미소를 짓던 그때.

"지금 뭐 하는 거지?"

혼란에 빠진 교육 1동의 문이 벌컥, 열리며. 그 안으로 한 쌍의 남녀가 들어섰다.

이번 생에선 초면이지만.

억겁의 시간 동안 충성을 다해 모셔왔던 자신의 주인.

"프, 프레이야 님...?"

그가 가진 고유의 기운을 감지한 에리얼의 낯빛이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208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