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15

* * *

다음 날.

포지드 씨의 집을 나선 후, 나와 함께 불칸 왕국을 돌아다니던 로제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부싯돌로 불을 붙이면 되지 않을까요? 아니면 라이터라든지."

"그 정도로는 씨알도 안 먹힐 것 같은데."

"그럼 익스플로전 포션을 던져보는 건 어때요? 아니면 에트나의 폭염이라든지."

"...그거 왕국의 문화유산이래. 통째로 날리면 퀘스트는 고사하고 여기서 쫓겨날지도 몰라."

"그럼 가게로 돌아가 화염방사기를 구매해 오는 건...."

의욕에 가득 찬 로제가 무언가 이것저것 의견을 내고는 있지만, 딱히 쓸만한 건 없다.

'어떻게 해야 하지.'

막스 씨가 오랫동안 가동되지 않았던 뷜란트를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해서 일단 약간의 여유가 생기긴 했지만....

영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질 않는다.

'내일쯤이면 정리가 완료될 거라던데.'

남은 시간은 하루.

반드시 해내겠다고 약속한 이상, 그 안에 뷜란트의 불씨를 되살릴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렇기에 무언가 실마리를 찾기 위해 온종일 불칸의 대장간을 전부 돌아보았으나, 딱히 이렇다 할 소득을 올리지는 못했다.

"휴우...그냥 부딪혀 봐야 하려나. 일단은 조금 쉬었다 가자."

"그럴까요? 하루종일 돌아다녔으니...저도 조금 힘드네요."

어느새 왕국 중앙의 광장까지 와버린 우리는 한구석에 마련된 고풍스러운 장식이 가득한 벤치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곧이어, 벤치에 앉은 우리를 바라보는 드워프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어라? 인간들이네."

"그 포지드 씨네 집에 머문다는 사람들인가 봐."

"인간을 직접 보는 건 처음인데. 확실히 크구만. 음. 길어."

각자 한 마디씩을 내뱉으며 지나가는 이들.

여길 돌아다니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겨울숲 부족과는 달리 드워프는 인간에게 그리 격한 반응을 보이진 않는다.

굳이 비유하자면. 길에서 조금 생소한 동물을 만난 정도의 반응 정도라고 해야 할까.

'그러고 보니 포지드 씨의 동료들도 내가 인간이어서가 아니라, 술을 가지고 있어서 호감을 보였었지.'

뭐, 나로서는 가는 곳마다 시선이 집중되는 것보단 이쪽이 더 편하긴 하지만. 흉내쟁이는 아닌 모양이다.

- [겨울숲 부족 방문 요망.]

- [백색의 연금술사 활동 재개 요청.]

요즘 들어 존재감을 드러낼 기회가 아예 없다 보니 저러는 모양인데.

'마음은 이해하지만...지금 당장은 네가 좀 참아라.'

정 불만이 쌓일 것 같으면 나중에 제피로스에서 기자회견이라도 한 번 열어달라고 하지 뭐.

아직 공식적으론 백색의 연금술사가 제피로스 소속인 거로 되어있으니 말이야.

"그나저나 이럴 때가 아닌데. 얼른 방법을 찾아야...뭘 보는 거야?"

"귀여워라. 꼬마 드워프들인가봐요."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띤 채로 시선이 고정된 로제.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자, 지난번 보았던 거대한 동상 아래에서 장난감 칼과 망치를 든 채 뛰어다니는 꼬마 드워프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받아라, 불의 심판이다!"

"그럼 나도 불의 심판!"

"내가 불인데, 너는 왜 불을 쓰냐! 내가 먼저 했으니까 너는 다른 거 해!"

확실히 애들은 애들이구나.

고작 저런 이유로 싸움을 벌이다니.

"내가 먼저라니까!"

"아니야! 악! 너. 지금 나 때렸어?"

"그러니까 누가 고집부리래?"

투닥투닥.

어느새 살벌한 기세로 치고받기 시작하는 두 꼬마 드워프. 녀석들을 바라보던 로제가 사색이 되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말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괜찮아. 다 저러고 크는 거야. 나도 저랬거든."

"그, 그런가요?"

나랑 춘식이도 저만할 때 장난감 하나로 피 터지게 싸우곤 했으니까. 저러다 화해하고 더 친해지고 하는 거지 뭐.

"저는 어릴 적에 친구가 없어서 잘 모르지만, 그래도 저건 좀 심한 거 아닐까요?"

"코피 정도는 괜찮...응?"

다시 보니 평범한 애들 싸움이 아니다.

화르르륵-

서로를 노려보는 두 녀석의 장난감 칼과 망치에서 타오르는 화염.

황급히 이해와 분석을 발동한 내 눈에, 녀석들이 가진 무기의 옵션과 등급이 표시되었다.

"둘 다 레어 최상위급...."

대체 어떤 부모가 애들한테 저런 흉기를 쥐여 준 거야?

"드워프들이 아무리 튼튼하다고 해도 애들한테 저런 걸...빨리 말리자."

"역시, 그렇죠?"

팟-

동시에 윈드워크를 시전한 나와 로제가 바람처럼 두 녀석을 향해 달려들었다.

곧이어, 내 손에서 뻗어 나간 와이어와 로제의 일몰이 막 서로를 향해 날아드는 두 녀석의 무기와 충돌했다.

쾅- 쾅-

녀석들의 손에서 벗어나 허공으로 날아간 망치와 칼.

"어, 어어...?"

곧이어, 허리춤에 손을 올린 로제가 놀란 녀석들을 향해 눈꼬리를 치켜세웠다.

"친구끼리 사이좋게 지내야죠. 그러면 돼요, 안 돼요."

"..."

"친구란 건 귀중한 거예요. 그러니까 서로 다투지 말고...."

겁에 질린 듯한 표정으로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녀석들을 향해 훈계를 늘어놓는 로제.

의도는 좋지만, 저 나잇대 애들한텐 저런 훈계는 오히려 반감만 살 뿐이다.

"아니지. 그렇게 얘기하면 안 되고. 얘들아. 적어도 싸울 땐 주먹으로...내 말 듣고 있니?"

그렇기에 춘식이와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를 들려주려는데. 별안간 한 녀석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난 몰라...인간 형이랑 누나 때문에 신상이 부서졌어."

"경비대한테 잡혀갈 텐데...."

"엄마...나 어떻게 해."

신상이라면, 설마.

고개를 들자, 거대한 석상 정중앙에 틀어박힌 녀석들의 무기가 보였다.

분명, 포지드 씨는 이것을 '잊혀진 신'이 조각된 석상이라고 했지.

"누구냐! 성스러운 신상을 훼손한 것이!"

이를 떠올리는 순간, 미처 대응할 새도 없이 중갑으로 무장한 수십의 드워프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165화

불칸 왕국의 전체적인 행정과 치안을 담당하는 벨로우 일가의 수장, 펠릭스 아이언벨로우.

"그러니까. 광장의 신상을 부순 범인이 이 녀석들이란 건가."

"그렇습니다! 가주님!"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던 그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평소 온화하던 그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이유는, 꽁꽁 결박당한 채 자신의 집무실로 끌려온 두 인간과 두 꼬마 드워프 때문이다.

"피해 현황은?"

"그것이...다른 부분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으나, 신상의 발목 부분이 완파되었습니다. 최대한 빨리 아이언해머 일가에 도움을...."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한 듯, 머뭇거리며 이야기를 꺼낸 경비병의 모습에 펠릭스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필이면 왜.

대체 왜 자신이 가주일 때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차라리 그럴싸한 사정이라도 있었으면 이해라도 할 것을....'

고작 애들 칼싸움에 불칸 왕국의 보물이 훼손되다니.

이대로는 죽어서 도저히 선대 가주들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다.

"너희는 분명, 아이언해머 일가의 녀석들이었었지."

"잘못했어요, 가주님...."

"제발 본가에는 알리지 말아주세요...저희는 진짜 장난만 치려고 했는데, 저기 있는 형아랑 누나가 끼어드는 바람에...."

결박당한 채 눈물을 펑펑 쏟아내는 두 꼬마 드워프. 녀석들을 바라보던 펠릭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너희가 무슨 잘못이 있겠느냐."

선대의 유지를 받들어 상시 개방해 두었다고는 해도, 석상이 있는 중앙 광장은 엄연한 성소.

그런 곳에서 막무가내로 뛰어놀 정도로 철없는 아이들한테 저런 흉기를 쥐여준 놈들이 잘못된 거다.

'하여간, 그 두 가주 놈이 항상 문제라니까. 특히 막스 놈.'

푸른 수염을 쓰다듬으며 껄껄 웃는 막스의 얼굴을 떠올린 펠릭스가 부드득- 이를 갈았다.

"하여간, 고질병이야 그것도...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 게 저 두 인간이라고?"

깊은 한숨을 내쉰 펠릭스가 이번에는 강철 밧줄에 꽁꽁 묶인 승현과 로제를 바라보았다.

"한승현과 로제...분명 포지드 녀석의 집에서 머무는 인간들이라고 했었지."

"그렇습니다."

"네...."

그들에 관한 소문은 익히 들었다.

펠릭스 또한 드워프의 피를 타고난 몸. 맛좋은 술을 가져온 인간들에게 관심이 생기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조만간 시간을 내어 찾아가 보려 했건만....'

설마 이런 인연으로 마주치게 될 줄이야.

게다가 아이들과는 달리 저들은 어엿한 성체 인간이다.

아무리 이곳의 문화와 풍습에 관해 무지했다고는 해도.

그리고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고는 해도,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두 가주 놈만으로도 머리가 아픈데.'

생각지도 못한 골칫거리가 하나 더 늘었다. 밀려오는 두통에 머리를 감싸 쥔 펠릭스가 전방을 향해 힘없이 손을 뻗었다.

"내 조만간 너희들의 처분을 결정해 아이언해머 일가에 통보할 테니, 일단은 돌아가 있도록 하여라."

"그, 그렇지만...."

"어서!"

"네...가주님."

펠릭스의 엄포에 죽상이 된 채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는 두 꼬마. 이 광경을 지켜보던 승현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희가 끼어들어 벌어진 일이니, 저 아이들은 용서해 주십시오."

"뭐, 어쨌거나 사리 분별이 어려운 애들이 저지른 잘못이니까...녀석들에게 책임을 물을 순 없는 노릇이기도 하고."

"앗, 그렇다면 저희도...."

복잡한 표정으로 턱을 매만지던 그가 자신을 향해 눈을 반짝이는 로제를 향해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자네들은 안 돼."

"..."

끓어오르는 감정을 제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주먹을 꾹 쥐던 펠릭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애들 칼싸움을 말리다가 신상을 부숴 먹었다고? 그것도 발목 부분을 뎅겅? 대체 뭘 어떻게 하면 그런 짓을 벌일 수 있는 거지? 응?"

"그게...상황이 급박한 나머지...."

"젠장, 지나가던 개가 웃겠군. 그 신상이 어떤 물건인 줄 아나? 당장 이 두 인간을 지하 감옥에...."

고요한 집무실 안에 펠릭스의 고함이 쩌렁쩌렁 메아리치던 그때.

벌컥- 문이 열리며 거대한 망치를 걸머진 푸른 수염의 드워프가 들이닥쳤다.

"푸하하,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러나. 물건이라는 건 세월이 지나면 자연스레 녹이 슬고, 부서지는 법인데."

두 번째 원인 제공자이자 그의 평정심을 밥 먹듯이 깨부수는 원흉. 막스 아이언해머가 나타난 것이다.

그의 뻔뻔한 낯짝을 본 펠릭스가 더이상 참지 못하고, 벽면에 걸린 자신의 철퇴를 집어 들었다.

"막스 이노옴...!!! 너희 일가에서 애들한테 쥐여준 장난감 때문에 이 사달이...."

"어이쿠, 이 친구. 성질 급하기는 여전하구만. 나잇값 좀 하는 게 어때?"

부웅-

자신의 머리를 향해 날아든 철퇴를 피한 막스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승현과 로제를 가리켰다.

"거. 모르고 저지른 일 같은데 저 친구들은 좀 용서해 주는 게 어떤가? 응? 자네는 불칸 왕국에서 자비롭기로 이름난 펠릭스 아이언벨로우 아니던가."

"막스 네놈, 제정신이냐! 저 두 인간은 벨로우 일가의 보물인 신상을 훼손했어!"

"그럼 너희도 뷜란트를 좀 부수게 해 주지. 공평하게. 어때? 문짝 하나 정도는 내어줄 수 있네만."

"..."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내뱉는 막스를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던 펠릭스가, 다시금 자신의 머리 위로 철퇴를 치켜들었다.

"명색이 아이언해머의 수장이란 놈이 왕국의 보물인 뷜란트를 그리 쉽게 이야기해?"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나저나 자네는 저 둘이 어떤 녀석들인지는 알고 이러는 겐가?"

"흥, 인간이라는 이유로 특별 대우를 받을 거라면...."

"아니지.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

장난스레 어깨를 으쓱거린 막스가 손가락을 뻗어 로제를 가리켰다.

"저기 꽁꽁 묶인 아이는 멜리사의 딸이고."

"메, 멜리사라면...내가 아는 그...멜리사 라셀러스 말인가?"

"당연한 걸 왜 묻나. 왜, 자네도 인연이 꽤 있잖아. 그 친구랑은."

멜리사 라셀러스.

오랫동안 잊고 있던 이름을 들은 펠릭스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파랗게 변해버렸다.

"저 얌전해 보이는 녀석이...그 멜리사의 딸이라고?"

"머리 색이랑 외모를 보면 모르겠나. 딱 봐도 멜리사랑 판박이구만."

"드, 드워프인 내가 인간의 생김새를 어찌 알겠나. 내 눈에는 다 비슷비슷해 보인다고."

"푸하하! 펠릭스 자네, 눈썰미 없는 건 여전하구만."

허둥대는 펠릭스의 반응을 보며 재미있다는 듯 낄낄거리던 막스가 이번에는 승현을 가리켰다.

"그리고 저 녀석은 얼마 전 구시온이 언급한 인간이다. 기억나지?"

"그...뷜란트의 불씨를 되살려준다던?"

"그래."

움찔.

막스의 입에서 나온 구시온의 이야기에 승현과 로제의 몸이 동시에 경직되었다.

"그러니까 이번엔 좀 넘어가 주게. 응? 내 잘생긴 얼굴을 봐서라도 말이야. 신상은 내가 말끔히 고쳐놓을 테니까."

우드득-

승현과 로제의 몸을 속박한 강철 밧줄을 끊어버린 막스가 펠릭스를 향해 능청스레 손을 흔들었다.

"고작 오래된 석상 발모가지 하나로 뷜란트의 불씨를 되살리는 거면 남는 장사 아닌가."

"..."

너무나도 뻔뻔한 태도에 펠릭스가 할 말을 잃어버린 순간. 승현과 로제의 뒷덜미를 붙잡은 막스가 바람처럼 몸을 날렸다.

"그럼, 다음 정기회의 때 보세!"

* * *

"이놈들아, 어떻게 그런 사고를 치냐. 어? 펠릭스 저놈이 마음이 약해서 그렇지 전대 가주였으면...으. 너희는 화산 밑바닥 감옥에 처박히고도 남았어."

"단순히 애들 싸움을 말리려다 일이 그렇게 될 줄은...몰랐습니다."

"쯧, 그리고 다른 일가 놈들이라면 몰라도, 강인한 아이언해머의 피를 이어받은 놈들은 그런 거 맞는다고 안 죽어. 적어도 요 녀석 정도는 되어야지."

내 변명에 혀를 차며 자신의 망치를 가리키는 막스 씨.

다짜고짜 로제에게 망치를 휘두를 때부터 느낀 거지만, 하는 행동을 보아하니 이 사람도 정상은 아니다.

"그나저나...그 석상이란 거, 되게 중요한 물건인 것 같던데. 괜찮을까요?"

"까짓거 고쳐놓으면 되는 거지. 하여간 벨로우 놈들은 너무 고지식하다니까. 어차피 장식용인 석상을 가지고...쯧."

로제의 질문에 막스 씨가 인상을 찡그렸다.

'난처한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 준 건 고맙지만....'

명색이 불칸과 역사를 함께 한 석상을 두고 저렇게 이야기해도 되는 걸까.

그것도 불칸을 대표하는 아이언해머 일가의 수장이 말이야.

"어디 보자. 얼마나 부서졌는지 구경 좀 해 볼까? 어이쿠, 벌써 소문이 쫙 퍼진 모양이로군."

우리를 이끌고 다시금 광장에 방문한 막스 씨가, 석상 주변에 잔뜩 몰려든 드워프들을 발견하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너희들은 욕 좀 먹을 것 같은데. 나는 딱히 신을 믿는 게 아니어서 별 상관이 없지만, 불칸 왕국에는 저 석상을 신성시하는 놈들이 꽤 되거든."

"...전부터 궁금하던 건데, 저기에 조각된 잊혀진 신이라는 게 대체 뭡니까?"

"나도 그건 잘 몰라. 저 석상에 관한 이야기라면 선대 가주에게 들은 게 좀 있지만."

내 질문에 머리를 긁적이던 막스 씨가 먼 곳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먼 옛날, 위대한 존재를 따르던 녀석이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조각한 물건이라고 하던데."

"위대한 존재라면?"

"뭐, 그걸 알았으면 잊혀진 신이라고 불리지 않았겠지. 그보다...어라?"

발목이 날아간 신상을 향해 다가가던 막스 씨가 별안간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시선이 고정된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린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저건...?"

발목이 반쯤 부서진 신상 옆에 가득 쌓인, 녹이 잔뜩 슬어 형체를 알아보기조차 힘든 무기들이었다.

"상태나 양식을 보아하니 세월이 많이 지난 것 같은데. 저런 게 어디서 나온 게지? 이봐, 거기 자네. 아이언해머 일가의 드워프 맞지?"

"누구...헉. 막스 어르신!"

"저게 다 무엇인가?"

곧이어.

앞으로 다가간 막스 씨가 무기 분류 작업에 열중하는 드워프 사내의 어깨를 붙잡자. 눈이 휘둥그레진 사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것이...펠릭스 어르신의 요청에 따라 파손된 신상에 지지대를 덧대기 위한 작업에 들어가려는데...안에서 저런 것들이...."

"호오...내가 한 번 봐도 되겠는가?"

"무, 물론입니다! 어르신!"

인파를 헤치고 안으로 다가간 막스 씨가 녹이 툭툭 떨어지는 검을 한 자루 들고는 나에게 다가왔다.

"네 녀석들이 사고를 쳐준 덕분에 내부에 보관되어 있던 유물이 발굴된 모양이다. 이러면 펠릭스 녀석에게 큰소리칠 명분이 생기겠는데? 자식들, 운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구만."

"...그거 다행이군요."

"그나저나 무기로서의 가치는 거의 없는 것들이군. 툭 치면 부러지겠...어라. 이게 뭐야."

곧이어, 미간을 찌푸리며 녹슨 검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막스 씨가 별안간 손을 멈추었다.

"왜 그러십니까?"

"여기 무언가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혹시 아는 문자인가? 나한테는 생소한데."

"어디, 한 번 봐도 되겠습니까?"

손바닥으로 대충 녹을 털어낸 막스 씨가 그것을 나에게 들이밂과 동시에, [완전한 소통]이 발동되었다.

- 개자식아! 이제 그만!

검신에 새겨진 문자에는 황당하게도 짤막한 욕설이 적혀있었다.

이를 확인한 내가 막스 씨를 향해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

"이게 뭐...."

별안간 눈앞이 깜깜해지며, 익숙한 목소리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어라, 또 오셨네요?"

커다란 마녀 모자를 눌러쓴 꼬마.

아카샤였다.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166화

낡은 책장이 끝없이 이어진 익숙한 공간. 그리고 눈앞의 낯익은 꼬마.

이곳이 아카샤의 도서관임을 확인한 승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또 여기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지난번과는 달리 아무런 전조 증상도 나타나지 않았는데. 대체 왜?

"나는 그저 막스 씨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을 뿐인데."

멍하니 중얼거리는 그를 향해 앞으로 한발 다가선 아카샤가 가볍게 눈썹을 찡그렸다.

"식사 시간은 좀 피해주시면 안 될까요? 찾아보니 한국 속담 중엔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는 말이 있던데."

"...내 맘대로 안 되더라고. 그보다 뭘 먹는 거야. 붕어빵?"

승현이 아카샤의 작은 손에 들려있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붕어빵을 가리키자.

그것을 한입에 털어 넣은 아카샤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흠흠, 요즘 부쩍 지구의 문물에 관심이 생겨서 말이죠. 제가 직접 갈 순 없는 노릇이라 최대한 비슷하게 구현만 해본 거지만...."

짙은 아쉬움이 남은 표정을 보아하니 썩 만족스럽진 않은 모양이다.

곧이어, 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승현이 무언가가 떠오른 듯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 질문에 답해준다면 네가 원하는 걸 구해다 줄 수도 있는데."

"정말요? 아, 아니지. 흠흠. 어딜 감히 뇌물을 먹이시려고! 서기는 공정해야 하는 법. 안 됩니다!"

말은 저렇게 해도 표정은 솔직하다.

고개를 돌린 채 힐끔힐끔 자신을 곁눈질하는 아카샤를 향해 승현이 재차 제안을 건넸다.

"그럼 이렇게 하자. 대답하기 곤란하거나, 규정에 어긋난 질문이면 대답 안 해도 돼. 대신 나도 들어주기 어려운 부탁이면 거절하도록 할게. '공평'하게."

"..."

승현이 '공평'을 힘주어 강조하자, 잠시 고민에 빠져있던 아카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단탈리온이 한 짓도 있으니...흠흠. 대신 기회는 한 번. 규정에 어긋나는 질문이라면 바로 기각입니다."

어차피 밑져야 본전.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승현이 아카샤를 바라보았다.

"네가 원하는 걸 먼저 말해. 나도 기회는 한 번. 내가 못 구하는 걸 이야기하면 너도 기각이야. 어때. 공평하지?"

"어? 어어...그렇네요."

승현의 태도에 조금 당황한 아카샤가 눈을 데룩, 굴렸다.

지금껏 근원의 격을 가진 자신 앞에서 저렇게 당당한 모습을 보이는 자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시시포스 녀석도 몸을 사리기 바빴는데....'

세월이 많이 흘렀어도 본질은 풍화되지 않는 모양이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아카샤가 도서관 바닥에 느긋이 앉아있는 승현을 향해 느릿느릿 시선을 돌렸다.

"제가 원하는 건 말이죠. 음...뭘 말씀드려야 하려나."

"천천히 생각해 봐."

웬만하면 빨리 말했으면 좋겠는데.

짐짓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하고는 있지만, 승현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젠장, 그때도 한 달이란 시간이 지났는데.'

시간이 촉박하다.

막스와의 약속도 약속이지만,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단탈리온은 자신의 목표를 차근차근 이뤄나가고 있을 것이 분명할진대.

'여기서 한 달이란 시간을 더 손해 보게 된다면....'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그렇다고 이런 기회를 쉽사리 놓칠 순 없다.

겉으론 작은 꼬마처럼 보이지만, 아카샤는 세상을 이루는 세 가지 근원 중 '시간'을 관장하는 절대적인 존재.

그 말은 자신이 원한다고 해서 함부로 만날 수 있는 자가 아니라는 뜻이다.

'기회가 왔을 때 최대한 정보를 얻어가야 해.'

결정을 내린 승현이 초조한 마음을 억눌렀다.

그렇게 억겁 같은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아카샤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책이요."

"...책? 책은 여기에도 많이 있잖아. 정확히는 책이 아니라 기억의 정령이긴 하지만."

"그러니까, 음...여기 있는 건 전부 '실제로' 일어났던 일들을 기록한 거잖아요."

"그야 그렇지."

"저는 인간들의 책이 보고 싶어요. 저희에겐 없는, 인간들 특유의 끝없는 상상력이 가미된. 그...뭐라고 하더라. 소설? 그래! 그거요!"

황당한 부탁이다.

절대적인 힘을 가진 초월체들조차 두려워하는, 시간과 기록의 힘을 가진 아카샤가 원하는 것이 고작 소설책이라니.

승현의 눈을 의식한 듯, 조금 얼굴을 붉힌 아카샤가 말을 덧붙였다.

"웬만하면 무협지...로 부탁할게요. 유명한 거로 두 작품 정도. 에세이 같은 부류는 여기에도 잔뜩 있으니 필요 없고, 다른 건...."

변명하듯 이유를 덕지덕지 붙이는 아카샤의 이야기를 듣던 승현이 더이상 참지 못하고 말을 잘랐다.

"무협지 두 작품. 오케이. 잊지 않고 챙겨뒀다가 다음번에 이곳에 올 일이 있으면 줄게."

"정말요? 약속하신 거...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어요. 당신이 이곳에 계속 드나드는 건 모양새가 영 안 좋기도 하고...제가 사자를 보내도록 할게요."

"사자?"

"네. 제게 소속된 녀석 중, 짧게나마 현세를 오갈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자가 있거든요."

그렇다는 건, 아카샤 또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다는 뜻인가.

아카샤의 이야기에 담긴 의미에 대해 생각하던 승현이, 시간이 제법 많이 흘렀음을 깨닫고는 급히 화제를 바꾸었다.

"그럼, 이제 내 차례지?"

"말씀하세요. 약속대로 형평성에 어긋나는 질문이라면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아, 그리고 제가 질문에 답하지 않더라도...."

"알고 있어. 약속은 지킨다."

"그래도 웬만하면 적당한 질문으로 해주셨으면 좋겠네요. 저만 무언가를 받는 건 영...내키질 않아서요."

빼꼼, 눈치를 보는 아캬샤를 향해 확신이 담긴 목소리로 답한 승현이 목소리를 바꾸었다.

"나는 오늘 왜 이곳으로 오게 된 거지?"

사실, 진심으로 하고 싶었던 질문은 이게 아니었다.

자신의 정체. 시시포스의 목적. 그리고 아버지는 대체 어떤 분이신지.

규정이라는 건 대체 어떤 것이고, 시스템은 대체 무엇인지.

세상의 모든 일을 기록하는 아카샤라면 전부 알고 있을 것이 분명한 것들이지만, 승현은 이를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대답해주지 않을 게 뻔하니까

'모처럼 얻은 기회를 헛되이 날릴 바에야, 다음을 기약할 수 있게 확실히 아카샤를 만날 방법을 알아내는 편이 낫지.'

승현의 의중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아카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나는 또 별거라고. 그건 간단해요. 오늘 당신이 이곳에 오게 된 이유는, 과거의 흔적과 마주했기 때문이죠. 음...심연에 가라앉아있던 당신의 본질이 자극을 받았다고나 할까."

"과거의 흔적? 나는 지금껏 불칸에 방문한 적이 없었는데."

"질문은 한 가지였을 텐데요."

"그래도 물어본 건 제대로 알려줘야지."

"안 돼요. 약속은 약속."

"그렇게 나오시겠다? 좋아, 그럼 나도 똑같이 해 주지."

"...?"

"정식 발매본 대신 불법 스캔본도 괜찮지? 어쨌거나 내용은 같으니까. 그리고 글자 크기는 1pt. 맨눈으로 보면 점인지 글자인지 구분하기 어려울걸? 표지는 장춘식한테 대신 그려달라고 부탁하면 될 테고...아니지. 굳이 표지가 필요한가?"

"..."

황당한 승현의 협박에 아카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사실 알려주어선 안 될 정도의 질문은 아니다.

진명을 직접 언급하는 것도 아니고, 과거의 흔적에 관한 힌트를 주는 것쯤은 단탈리온에게도 이미 베풀었던 혜택이니까.

'하지만 여기서 지고 들어가면....'

앞으로도 승현에게 휘둘릴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잠시간 맹렬한 기세로 아카샤의 마음속 저울이 움직였고.

곧이어, 결단을 내린 아카샤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드워프의 왕국, '불칸'이 있던 자리는 본래 당신과 연이 깊은 땅이니까요. 오랜 세월이 지났다고는 해도 흔적 하나둘쯤은 남아있을 법하죠."

"...?"

고작 책 몇 권에 근원의 존재라 칭송받는 자신이 이게 무슨 꼴인지.

한심한 스스로의 모습에 탄식이 절로 나온다.

"그러니까...어휴. 약속은 지켜야 해요."

"걱정 마. 빳빳한 양장본으로 구해다 주지. 계속 얘기해 봐."

어쩐지 조금 거만해진 태도.

자꾸만 예전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알고 계실진 모르겠지만, 제 입으로 당신의 진명을 밝힐 순 없어요. 그나마 규정 내에서 한 가지 힌트를 드리자면...불칸 왕국에 있는 화산의 이름을 알고 계시나요?"

"이름? 아니, 그러고 보니...."

정작 화산에서 온갖 광물을 채취하는 드워프들도 그저 화산이라 칭할 뿐. 딱히 이름을 들어본 적은 없다.

"그렇겠죠. 오래전 이름이 지워진 곳일 테니."

심상치 않은 분위기.

잠시 머뭇거리던 아카샤가 멀뚱멀뚱 자신을 바라보는 승현을 향해 목소리를 낮추며 입을 열었다.

"에트나."

"...?"

"물론 기억은 못 하시겠지만, 에트나 화산은 본래 당신과도 연이 깊은...어?"

아카샤가 이야기를 끝마치기도 전에, 별안간 승현이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뭐야. 왜 이래. 고작 이 정도로...야, 잠깐만. 네가 왜 튀어나와! 아니야, 아직 아니라고!"

곧이어, 서서히 흩어지는 승현의 몸 위로 날아든 낡은 종이 몇 장.

이를 발견한 아카샤가 황급히 가로막았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기억의 정령 일부를 흡수한 후, 완전히 사라진 승현의 영체를 확인한 아카샤가 허무한 듯 중얼거렸다.

"설마, 여기까지 미리 안배를 해두었던 건가. 아니면 그냥 얻어걸린 건가?"

곧이어,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던 아카샤가 신경질적으로 모자 위를 벅벅 긁었다.

"아이 씨...이래도 되는 건가 모르겠네."

* * *

"저주야. 그 칼에는 저주가 걸린 게 분명해. 내가 괜히 이놈한테 그걸 보여줘서는...."

승현이 쓰러진 지 반나절.

아이언해머의 본가로 그를 데려온 막스가 굳은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정신을 잃은 승현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로제가 화들짝 놀라 막스에게 반문했다.

"저, 저주요?"

"그래. 아마도 구전으로만 전해 내려오던 룬 문자인 것 같다. 읽기만 해도 저주에 걸리는...어떤 놈이 이딴 걸 만들었는지 몰라도...망할 놈 같으니라고."

콰앙- 거칠게 자신의 책상을 내려친 막스가 죽은 듯 잠든 승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다행히도 미약하게 숨을 내쉬는 걸 보니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 같지만...제기랄. 내 탓이야."

죄책감으로 인해 잠시 괴로워하던 막스가, 별안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렇게 된 이상, 내키진 않지만 아이언해머 일가의 가주들에게 전승되는 인공호흡법으로 이놈을 치유...억!"

결심을 다진 후. 승현을 향해 다가가던 막스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정신을 차리며 몸을 일으킨 승현의 이마와 그의 코가 세차게 부딪힌 것이다.

"으악, 뭡니까! 저한테 지금 무슨 짓을...."

코피를 줄줄 쏟으며 바닥에 주저앉은 막스를 황당하다는 듯 바라보던 승현이 다급히 자켓을 걸쳤다.

"지금 당장, 뷜란트로 안내해 주십시오."

"아이고 내 코...일어나자마자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제가 쓰러진 후 시간이 얼마나 지났죠?"

"그...반나절 정도 지났는데."

"반나절이라, 좋네요."

꿈이라도 꾼 걸까.

갑작스레 쏟아지는 승현의 질문에 반쯤 넋이 나간듯한 막스와 로제.

어느새 준비를 끝마친 승현이 그들을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뷜란트의 불씨를 되살려드리죠. 지금 당장."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167화

불칸 왕국이 건립된 이후부터 현재까지 제작을 가업으로 삼아온 아이언해머 일가의 지하 통로.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모양인지, 묵은 먼지 특유의 퀴퀴한 냄새만이 가득한 이곳을 걷던 로제가 침을 꿀꺽 삼켰다.

"끝이 보이질 않는데...더, 더 가야 하나요?"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얼굴. 창백해진 피부. 불안한 눈동자. 평소답지 않게 잔뜩 긴장한 눈치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본 막스가 등에 메고 있던 커다란 보따리를 내려놓으며 헛기침을 내뱉었다.

"크흠. 이놈들...미리미리 쫓아내 두라니까. 그래도 해를 끼치는 녀석들은 아니니까 너무 겁먹지 않아도...."

"아마 이십 분 정도면 도착할 거야."

막스의 말을 자르며 로제의 질문에 답한 건, 맨 앞에 서서 묵묵히 걸음을 옮기던 승현이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는 거냐?"

"감입니다. 직감. 로제는 힘들면 먼저 돌아갈래?"

"아, 아니에요. 왔던 길을 혼자 다시 되돌아가느니...그, 그냥 따라갈래요."

직감?

울상이 된 채 승현을 뒤따라가는 로제.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막스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저놈 저거. 어떻게 된 거지.'

아이언해머 일가의 일원이 아닌 이상, 이곳에 방문하는 이들은 로제처럼 덜덜 떨며 맨 뒤에서 자신을 따라오는 게 일반적일진대.

승현은 태연히 구불구불 이어진 통로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걸어나간다.

그뿐이랴.

꺄아아악-

"히이이익!!! 귀신이다. 또 나왔어요!!!"

날카로운 괴성과 함께 갑작스레 벽면에서 튀어나온 희끄무레한 형체.

곧이어, 피눈물을 흘리는 여성의 모습이 된 그것은 승현 일행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뭐야, 저리 비켜."

비명을 내지른 로제가 막스의 등 뒤로 숨어 버린 것과는 반대로, 승현은 태연히 그것을 지나쳐버렸다.

'대체 뭔데 부기를 보고도 저렇게 태연해? 펠릭스 놈도 처음엔 거품을 물고 기절했었는데 말이야.'

부기.

뷜란트의 불씨가 꺼진 이후로 나타난, 그저 지나가는 이들을 놀라게 만드는 것이 전부인 초자연적인 존재.

육신이 없는 만큼 기척도 없기에 처음 부기와 마주친 이는 로제와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이 일반적일진대.

지금까지의 경험과는 달리 승현은 부기와 마주치고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웃어?'

승현의 입가에 희미하게 걸린 미소를 발견한 막스가 질렸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한편.

일행의 선두에 서서 걸음을 옮기는 승현의 머릿속에선, 끊임없이 단편적인 기억이 재생되고 있었다.

[레벨 2]의 데이터 중 일부가 사용자와 융합됩니다.

아카샤와의 재회 후 나타난 메시지. 비록 온전한 것은 아니라지만.

불칸 왕국.

정확히는 에트나 화산과 관련된 기억이 어느 정도 돌아온 것이다.

- 마, 말씀과는 다르지 않습니까. 저는 그저 비상시를 대비해....

- 안 되지. 이왕 배울 거면 확실히 하고 가는 편이 좋지 않겠어? 게다가 내가 널 위한 작업실까지 손수 마련해 줬는데 말이야.

- 아무리 그래도...이건 너무하다고 생각합...으악! 가두지 마십쇼. 제발!

화산의 분화구에서 연신 간절한 비명을 내지르는 금발의 미청년.

과거의 자신이 그를 향해 짓궂은 미소를 짓는다.

- 십만 개다. 쉽지? 물론 전부 내가 봤을 때 어느 정도 쓸만한 것들이어야 해.

- 십만 개라니. 저는 한 번도 무언가를 만들어 본 적이 없단 말입니다! 게다가 당신 눈에 들 정도의 물건들이라니....

- 그럼 이십만 개. 기초가 부족하니까 그 정도는 해 줘야지.

- 이, 이십만...안 됩니다. 제가 오랫동안 모습을 비추지 않으면 누님이....

- 걔한테는 내가 잘 말해줄게. 오히려 좋아할걸?

누님이란 게 누군지. 그리고 자신의 진명이 무엇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과거의 자신을 향해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어대는 녀석의 정체다.

등 뒤로 활짝 펼쳐진 열세 장의 날개와 태양을 그대로 녹여낸 듯한 찬란한 금발.

그리고, 얼굴은 지금과 다르지만 영체에 각인된 익숙한 에테르의 향기까지.

"미하일...아니, 미카엘."

상대의 정체를 확신한 승현이 가볍게 어금니를 깨물었다.

S급 라이센스를 취득하기 위해 한 달간 골방에 감금당한 것은, 전부 미카엘의 소심한 복수란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영역을 깨닫게 해줄 목적이라면 다른 방법도 충분히 있었을 텐데. 그나저나 이 녀석들도 오래간만이군."

꺄아아악-

또다시 나타난 두 마리의 부기를 지나친 승현이 피식, 웃음 지었다.

이곳에 서식하는 부기는 모두 수백 년간 에트나 화산에 갇혀있던 미카엘의 원념(怨念)이 모여 만들어낸 허상.

"예전엔 훨씬 더 많았었던 것 같은데...흠흠. 조금 미안해지네."

어찌 보면 자신 때문에 생겨난 녀석들이나 마찬가지란 뜻이다.

퇴치법 또한 잘 알고 있지만, 부기들은 딱히 별다른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무시하고 지나쳤는데. 아무래도 로제는 아닌 모양이다.

"히익, 이, 이번엔 두 분이 또...저리 가요!"

둥둥 뜬 채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두 마리의 부기를 향해 로제가 일몰을 붕붕 휘둘렀다.

그러나, 매서운 기세로 허공을 가른 일몰은 허무하게 그들을 통과할 뿐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공포 영화를 보는 게 아니었는데."

그들이 지나간 후. 눈가에 눈물이 잔뜩 고인 로제가 가쁜 숨을 내뱉었다.

눈앞이 하얘지고,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이 머릿속에서 자꾸만 빙빙 맴돌았다.

게다가 결정적인 것은. 처음 부기를 마주쳤을 때 지나가듯 흘린 막스의 한 마디였다.

"이놈들을 조심하라고. 마음에 드는 녀석이 있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달라붙는 모양이니까. 나도 적응하기 전엔 고생 좀 했었지. 몇 년은 쫓아다닐 걸?"

저런 녀석들이 시도때도 없이 몇 년동안이나 쫓아다닌다고?

생각만 해도 소름이 오소소 돋는다.

'무기도 안 통하고...잠들었을 때 나타나면 어쩌지. 침대 밑에 이런 것들이 숨어있으면? 아니, 화장실 천장에 붙어있을지도....'

지금은 그나마 막스와 승현이 옆에 있기에 정신을 유지할 수 있지만, 혼자 남았을 때 부기가 나타난다면...자신이 어떻게 될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반응을 지켜보던 막스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 그래도 네가 멜리사보단 낫구먼. 멜리사는 여기에 처음 왔을 때, 엉엉 울면서 자리에 주저앉았었지. 명색이 성기사라는 녀석이 말이야."

"...어머니가요?"

"그래. 한 걸음도 못 걷겠다며 자리에 주저앉은 녀석을 베일이 들쳐메고는...."

막스가 잔뜩 굳어버린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막 베일과 멜리사의 이야기를 꺼내려던 그때.

"삼촌, 잠깐 좀 도와주시지 않겠습니까?"

"나 말인가?"

별안간 걸음을 멈춘 승현이 막스를 향해 손짓했다.

곧이어, 단단한 암석으로 이뤄진 통로의 한쪽 벽면을 가리킨 승현이 막스의 볼케이노 해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여길 좀 무너뜨려 주셨으면 합니다만. 딱 저희가 드나들 만한 크기 정도면 됩니다."

"...?"

"뷜란트의 불씨를 되살리기 위해선, 꼭 필요한 선행 작업입니다."

"통로를 부숴달라고?"

황당한 부탁이다.

승현을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던 막스가 자신의 투박한 손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뭐, 이왕 믿기로 한 거 그렇게 하도록 하지. 뷜란트를 부숴달라는 것도 아니고 고작 통로쯤이야."

평범한 드워프라면 제대로 된 장비 없이는 불가능하겠지만, 세 가주 중 가장 강한 힘을 가진 막스에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에잉, 땅 파는 건 아이언픽 놈들이 제격인데."

한 차례 투덜거린 막스가 볼케이노 해머에 각인된 스킬, 분화구를 사용하자.

꽈앙-

어마어마한 폭음과 함께, 통로 전체가 진동하며 단단한 암석의 표면이 두부처럼 으깨어져 버렸다.

"으음...얼마나 더 해야 하는 건가?"

"잠시만요."

곧이어.

부서진 벽면에 손을 가져다 댄 승현이 이질적인 냉기를 감지하고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막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반대편 공간이 나타날 때까지. 부탁드리겠습니다."

* * *

"여긴...나도 처음 보는 곳인데. 이런 곳이 있었던가?"

수십 차례의 망치질이 끝난 후.

숨을 헐떡이는 막스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한쪽 벽면이 새까맣게 물든 거대한 공동이었다.

"오래전에 뚫어놓았던 곳인데. 아직 건재하네요."

"오래전? 으으, 그나저나 여긴 대체 어디인가. 뭐가 이리 추워?"

의미를 알 수 없는 승현의 이야기.

고개를 갸웃거리며 공동 안으로 들어선 막스가 느낀 것은 온몸이 얼어붙을 듯한 냉기였다.

휘이잉-

분명 이곳은 바람 한 점 들지 않는 화산의 내부일 텐데.

뼈가 시릴 정도의 냉기를 실은 칼바람이 막스의 전신을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대체 왜 여기에 이런...으으으. 추워라."

"서리감옥 부족이 살던 곳이랑 비슷한...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겠네요."

겨울숲 부족에서 지내던 로제조차도 순간적으로 몸을 웅크릴 정도의 추위.

이들 중 유일하게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은, 체온 조절 옵션이 달린 유틸리티 자켓을 걸친 승현뿐이었다.

"오래간만...아니지. 오래간만이라고 하는 게 맞는 건가?"

의미를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중얼거리며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던 승현이 빙긋 웃으며 별안간 로제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잠깐 빌려줄래? 잠깐이면 돼."

"어떤 걸...일몰이요?"

승현이 시선이 자신의 허리춤을 향해 고정된 것을 알아챈 로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요르문간드의 어금니도 어쩌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그건 너무 도박이어서 말이야."

"승현에게라면 뭐, 얼마든지 빌려줄 수 있지만...어디에 쓰려구요? 어차피 제가 아니면 일몰을 다룰 수 있는 분은...."

머뭇거리던 로제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멜리사의 피를 이어받은 자신을 제외하면, 지금껏 아무도 일몰을 다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물며 천하의 에포나조차도 일몰을 사용하지 못했는데. 대체 뭘 하려는 걸까.

"보면 알 거야."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한 승현이 촤르륵- 일몰을 펼쳤다.

새하얀 자태를 뽐내는 일몰을 치켜든 승현이 부드러운 손짓으로 허공에 그것을 살살 흔들었다.

"분명, 이렇게 하면 나타났던 것 같은데."

"...지금 뭐 하는 거예요?"

"그 녀석, 이런 신병 종류의 물건에 환장하거든."

마치 숙련된 낚시꾼 같은 동작이다. 의미를 알 수 없는 행동에 막스와 로제가 서로를 바라보던 그때.

꺄아아아악-!!!

별안간 그들의 머리 위쪽에서 부기와는 차원이 다른 어마어마한 괴성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순간적으로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굉음.

"...!!!"

반사적으로 귀를 틀어막은 막스와 로제의 모습을 확인한 승현이 익스플로전 포션을 들이켰다.

"젠장, 미하일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이야. 돌아가서 두고 보자."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168화

* * *

꺄아아악!!!

머리 위에서 들려온 찢어질 듯한 괴성. 반사적으로 고개를 든 로제가 제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

길게 늘어트린 흑발 사이로 드러난 반쯤 찢어진 입.

반투명한 피부와 희번득 뒤집힌 동공.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

새까만 상복을 걸친 그녀를 보는 순간, 로제는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귀신이다. 저건 분명...그때 봤던....'

승현의 가게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보았던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로제의 주변 배경이 순식간에 바뀌어버렸다.

끼익- 끼익-

일본식 주택의 삐걱대는 낡은 현관문과 깜빡이는 조명을 배경으로, 찢어질 듯한 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여인.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지금의 상황은, 그녀의 이성을 완전히 마비시켜 버렸다.

"히익...."

비명을 삼키며 양손으로 눈을 가린 채 바들바들 떨던 로제가 간절한 마음을 담아 중얼거렸다.

"자, 잘못 본 거겠죠? 분명 여긴 뷜란트랑 이어진 통로였는데...."

꿀꺽.

마른침을 한 차례 삼킨 후 용기를 내어 천천히 손가락을 벌리자.

"안녕?"

"꺄아아악-!!!"

기괴한 방향으로 고개를 꺾은 채, 미소를 띠며 자신을 바라보는 '그것'.

'그것'과 눈이 마주친 로제가 찢어질 듯한 비명을 내질렀다.

"음...보고 있자니 나름대로 재밌긴 한데. 저대로 내버려 두면 안 되겠지?"

공처럼 몸을 웅크린 채 와들와들 떠는 로제의 모습을 지켜보던 승현이 고개를 돌렸다.

"으악! 말도 안 돼. 내가 제련할 수 없는 광물이 있다니...이건 꿈이야!"

"제발 저리 가 주세요...나무아미타불. 하늘에 계신 아버지...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아니, 에포나 님...아악! 오지 마세요! 한 번만 봐 주세요...!!!"

웅크린 채 절규하는 막스와 손바닥을 싹싹 비비며 온갖 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로제.

그녀의 머리 위에는. 온몸이 얼어붙을 정도로 차가운 냉기를 내뿜는 새하얀 구체가 떠올라 있었다.

"하여간...이번에도 저놈들 짓이었구만."

스펙터.

수백, 수천 마리의 부기가 합쳐져 탄생한 초자연적인 존재.

고작해야 대상이 가장 무서워하는 존재나 상황을 생생히 구현해내는 것이 능력의 전부인 놈들이다.

이러한 부분만 놓고 보면 단순히 악질적인 장난을 치는 게 끝인 녀석이지만. 문제는 스펙터가 태생적으로 품고 있는 냉기다.

"확실히 신장급 초월체의 원념이 모여 만들어진 놈이라 그런지 위력도 보통이 아니네...화산의 화도(火道)가 굳어버릴 정도라니."

일몰을 앞세운 승현이 한 걸음.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어렴풋이 돌아온 기억 속에서 과거의 자신이 스펙터를 퇴치했던 방법을 떠올린 것이다.

"이왕 기억을 돌려줄 거면 다 돌려주지. 이게 뭐야."

작게 투덜거린 승현이 감각을 집중하자, 그의 머리에 응집되어있던 부드럽고 따뜻한 기운이 전신을 향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에테르를 움직이는 법이...이렇게 하는 거였던가."

우우웅-

승현의 손에 쥐어져 있던 일몰이 짧게 진동하며 한 차례 반짝였다.

곧이어, 자신의 에테르로 일몰을 감싼 승현이 스펙터를 향해 손을 뻗자.

꺄아아악-

막스와 로제의 머리 위에 떠 있던 놈들이 승현을 향해 괴성을 지르며 날아오기 시작했다.

"역시, 예전이나 지금이나 정신을 못 차리는구만. 주인을 닮은 건지 뭔지...."

신병(神兵)의 성질을 띤 일몰은 에트나 화산에 서식하는 스펙터에게 제법. 아니, 굉장히 매력적인 미끼가 된다.

"하기야, 수백 년을 여기에 갇혀있던 미카엘의 원념을 양분 삼아 태어난 놈들이니...."

미카엘의 원념을 흡수한 녀석들인 만큼, 놈들에겐 무기를 향한 집념 또한 녹아들어 있을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요르문간드의 어금니도 비슷한 역할을 할 수 있겠지만...미끼로서의 효능은 신병(神兵)급 무기인 일몰이 더 확실하다.

"어디, 한 번 해볼까."

강한 원념이 뭉쳐 생겨난 녀석들을 없애는 법은 두 가지.

그 중 보편적인 것은 스펙터가 품고 있는 한을 달래주어 조용히 성불하게 만드는 것이지만.

"내가 무당도 아니고. 그런 걸 어떻게 해."

일단 과거의, 그리고 현재의 승현에겐 불가능한 방법이다.

그렇기에 승현이 택한 방법은 두 번째.

"좀 무식하지만...."

일몰과. 그 위로 덧씌워진 에테르의 진한 향기에 이끌려온 놈들을 향해 승현이 가볍게 손짓했다.

"그래. 이리 와. 마음껏 구경하고 싶지? 이해해."

꺄아악-

기쁜 듯한 비명을 내지르며 일몰의 주변을 뱅글뱅글 맴도는 스펙터들.

에테르를 끌어올리며 몇 차례 부드럽게 녀석들을 어루만지던 승현이 별안간 손을 높게 치켜들었다.

"누가 그랬더라...아직은 기억이 안 나는데."

우우웅-

미세하게 울리는 공명음에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은 한 녀석이 황급히 뒤로 물러나려 했으나.

"귀신한텐 매가 약이래."

쩌억-

그보다 빨리, 환하게 빛나는 승현의 손바닥이 녀석을 후려갈겼다.

에테르가 가진 정화의 힘에, 익스플로전 포션의 근력 강화 효과가 더해진 일격.

- ....

풍선처럼 터져버린 자신의 동료를 보며 바들바들 떠는 남은 한 녀석을 향해, 승현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너도 이리 와. 좋은 말로 할 때."

* * *

"부기의 상위종이라니...그 스펙터란 놈들이 뷜란트의 불꽃을 꺼트렸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저런 곳에 몸을 숨기고 있었으니...원인을 파악하지 못한 것도 당연한 거죠."

"그런데, 네 녀석은 어떻게 알고 있던 거냐. 게다가 물리력이 안 통하는 놈들을 어떻게 완전히 없애버린 거고?"

"뭐, 그냥 되던데요?"

"...?"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승현의 답변에 막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묻고 싶은 게 많은 듯, 연신 달싹이는 막스의 입술을 본 승현이 그를 애써 외면했다.

"하여간...할 수 있는 거라고는 악질적인 장난이랑, 주변의 기온을 떨어트리는 것뿐이지만...하필 놈들을 구성하는 원념의 주인이...크흠."

까마득한 과거의 일이긴 하지만, 따지고 보면 자신에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는 일이기에. 재빨리 말꼬리를 흐린 승현이 이번에는 로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괜찮아?"

"...그런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다니...."

"뭘 그 정도로.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벌써 두 번째...그냥 죽을까요."

승현의 시선을 피한 로제가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두 번째.

지난번 만취 사건에 이어. 이번에는 승현 앞에서 환상에 속아 눈물, 콧물 다 짜내며 무릎을 꿇고 허공을 향해 손바닥을 싹싹 비비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 것이다.

"그나저나 의외네...귀신을 볼 줄이야."

얼굴에 먹구름이 가득 드리워진 로제를 바라보던 승현이 작게 중얼거렸다.

분명, 악질적인 장난을 업으로 삼는 스펙터는 상대가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나 상황을 생생히 보여준다.

'그런데 시시포스가 아닌 단순한 귀신을 보았다는 건....'

마음속 깊숙이 숨어있던 공포를 드디어 극복해낸 걸까.

당장은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그가 '영역'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노력하던 지난 한 달간. 로제에게도 무언가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는 거다.

'그러고 보니...로제의 영역을 마주한 헌터 협회장이 몸을 피할 정도였다고 했었지.'

S급 헌터 중, 최강의 방어력을 가졌다는 황정호 협회장이 몸을 피할 정도라면...로제는 대체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걸까.

"으악! 또 나타났어요!!!"

"이제는 좀 적응할 때도 되지 않았나 싶은데...."

또다시 부기와 마주친 로제가 내지른 비명을 뒤로하고. 이런저런 생각에 빠진 채 걸음을 옮기던 승현의 앞을 두꺼운 철문이 가로막았다.

"여기가 뷜란트다. 흠흠. 우리 아이언해머 일가가 맡아서 관리하는 불칸 왕국의 성소지."

자랑스레 이야기를 늘어놓는 막스를 보며, 이곳 또한 기억에 있는 장소임을 깨달은 승현이 팔짱을 낀 채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분명, 내가 이 안에 미카엘을 억지로 밀어 넣고....'

그 뒤로는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단순히 녀석을 괴롭히기 위해 벌인 짓이 아니었다는 거다. 분명 무언가 목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뭐, 그래도 제법 즐거웠던 것 같긴 한데 으, 기억이 불완전하니...."

"혼자 뭘 그렇게 중얼거리나?"

"...아무것도 아닙니다."

막스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승현이 천천히 문을 열어젖혔다.

드드드득- 바닥에 가득 쌓인 먼지를 밀어내며 철문이 열리자, 차게 식어버린 뷜란트의 내부가 드러났다.

커다란 화덕을 중심으로 여기저기 널브러진 각종 제련 도구들과 벽면에 가득 새겨진 알 수 없는 문자들.

털썩- 등에 메고 있던 보따리를 내려놓은 막스가 벽면을 가리키며 가슴을 쭉 펴 보였다.

"보이나.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저기에 새겨진 문자는 고대의 지혜가 담긴 성스러운 문자라더군."

"...그렇습니까?"

물론, [완전한 소통]을 발동한 승현의 눈에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살려줘.]

[햇빛을 보고 싶어!]

[날 내보내 줘!]

[벌써 300년째. 끝이 보이질 않는다.]

[■■■■개자식. 나가면 꼭 복수해 줄 테다.]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나쁜 마음 안 먹겠습니다....]

누가 새겼을지 안 봐도 뻔한 낙서들. 이를 둘러보던 승현이 피식, 웃음 지었다.

'보아하니 시스템의 필터링이 적용된 부분은 내 진명인 것 같은데...아직은 부족하다는 건가.'

그래도 2레벨의 데이터를 일부 흡수한 덕분일까. 지난번과는 달리, 다행히도 정신을 잃거나 하는 사고가 벌어지진 않았다.

"이 정도라면...단탈리온이 일을 벌이기 전에 온전한 기억을 되찾을 수 있겠는데."

확신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중얼거린 승현이 막스가 가져온 보따리를 풀어헤쳤다.

챙그랑-

애처로운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을 나뒹구는 녹슨 무구들을 본 막스가 의아한 듯 승현을 향해 물었다.

"맞아. 그러고 보니 그걸 대체 어디에 쓰려고 한 거냐."

보따리 안에 있는 건 전부, 승현이 부숴버린 신상 내부에서 발견된 무기들이다.

"가주의 권한을 앞세워 어찌어찌 가져오긴 했다만...본래는 아이언벨로우 일가에 귀속되어야 할 물건들인 것을...."

막스는 도저히 승현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고작 유물에 불과한 저것들을 어디에 쓴단 말인가.

막스의 질문에 잠시 침묵하던 승현이,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장작으로 쓸 겁니다."

"...장작?"

"그렇습니다. 뷜란트의 불꽃을 되살리기 위해선 이만한 장작이 없거든요."

"...?"

막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을 내놓은 후.

바닥에 늘어놓은 무구들을 끌어모은 승현이 그것을 전부 싸늘한 냉기가 감도는 화덕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멀뚱멀뚱 자신을 바라보는 막스와 로제를 향해 손을 휘저었다.

"위험할지도 모르니 둘 다 멀찍이 물러나십시오."

"아니, 뭘 할지 설명 정도는...응?"

촤르륵-

막스의 이야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복잡한 문양을 그리며 주변으로 뻗어 나가는 은빛의 실.

"저건 분명...네놈과 처음 만났을 때 보았던 건데? 그걸로 불씨를 되살리겠다고?"

자신의 목을 휘감았던 은사임을 알아챈 막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때.

대장간 내부의 공기가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지금 안 물러나시면, 머리카락 다 탈지도 모릅니다."

"이런. 네 녀석, 지금 뭘 하려는...."

심상치 않은 열기가 모여드는 것을 느낀 막스가 막 몸을 날리자마자.

콰아아아아-

승현의 앞으로 쭉 뻗어 나간 거대한 화염의 파도가, 냉기가 감도는 뷜란트의 화덕을 무시무시한 기세로 집어삼켰다.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169화

아카샤와 만난 이후.

소실되었던 기억이 흡수되는 순간, 승현은 그의 말이 사실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설마, 뷜란트가 내 작품이었을 줄이야...."

승현이 알아낸 사실은 두 가지.

드워프들의 성소 뷜란트는 자신이 직접 미카엘에게 제작을 가르치기 위해 에트나 화산의 열기를 끌어와 만든 대장간이라는 것과.

원인은 알 수 없으나, 그런 뷜란트의 근간이 되는 에트나 화산은 화덕의 불씨가 꺼지기 전부터 힘을 잃어버린 상태라는 것.

"그러니 고작 그 정도 냉기만으로도 화도가 굳어버릴 수밖에."

게다가 그나마 남은 잔불마저 미카엘의 원념을 먹고 자란 스펙터가 완전히 꺼뜨려 버렸다.

즉, 모든 열기가 사라진 에트나 화산은 완전한 사화산(死火山)이 되어버린 것이다.

승현이 알고 있는 한 이를 조금이나마 되살릴 방법은 하나.

"에트나 화산을 다시 활화산으로 되돌리는 건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하겠지만...."

적어도.

[에트나의 폭염]과, 미카엘이 만든 무기들을 이용하면 뷜란트 정도는 재가동할 수 있다.

콰아아아-

공의 술식을 통과한 불꽃의 파도가 화덕을 향해 쏘아지자, 무지막지한 열기가 뷜란트의 내부를 집어삼켰고.

곧이어, 화덕 안에 쌓인 무기들이 점점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초고온의 열기에 서서히 제 형체를 잃어가는 무기들. 이를 확인한 승현이 침을 꿀꺽 삼켰다.

"좋아."

겉으로 보기엔 녹슬고 볼품없는 것들이지만 저것들은 결코 평범한 물건이 아니다.

하나하나에 미카엘의 에테르가 듬뿍 담겨있는. 로제의 일몰과 같은 신병(神兵)계통의 무구들인 것이다.

"뭐, 전부 일몰보단 좀 떨어지는 것 같지만...."

에트나의 폭염에 완전히 녹아버린 미카엘의 무구들을 지켜보던 승현이, 이번에는 자신의 그림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걸 여기서 써먹게 될 줄이야."

이번에 꺼낸 것은. 얼마 전 입수한 요르문간드의 어금니를 비롯한 마병(魔兵)들이었다.

휙-

미련 없이 모든 무기를 뷜란트의 화덕 안으로 집어 던진 승현이 씨익 웃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고맙다, 단탈리온. 네녀석이 준 선물은 요긴하게 써 줄게."

곧, 활활 타오르는 화덕 안으로 던져진 무구들은 서로 얽히고설키며 한 덩이의 금속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저건...."

한편.

로제와 함께 황급히 통로로 몸을 피한 막스가 넋을 잃은 채 멍하니 중얼거렸다.

폐부가 타들어 갈 듯한 열기.

눈썹과 수염, 그리고 머리카락이 파지직-거리며 말려 들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평범한 드워프라면 단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화상을 입어버릴 정도의 고온을 품은 불길.

하지만, 지금의 막스에게는 저 흉악한 불꽃이 그 어떠한 것보다 아름답게 보였다.

"..."

평생을 불과 함께 지내온 그였기에, 저것의 정체를 가늠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뷜란트의 불꽃.

성스러운 화산의 힘이 담긴 화염이 승현의 손끝에서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저놈이 어떻게...."

얼마 전.

이에 관한 이야기를 구시온에게 들었을 때, 막스는 황당한 나머지 코웃음을 쳤었다.

"헹, 인간이 이곳에 온다는 건 둘째 치고. 놈이 뷜란트의 불꽃을 되살릴 수 있다고?"

지금껏 셀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시도를 반복해 왔지만.

그때마다 뷜란트의 화덕은 싸늘한 냉기로 화답할 뿐이었기에, 어찌 보면 이러한 막스의 반응은 지극히도 당연한 것이었다.

"믿기 싫으시면 안 믿으셔도 됩니다만...후회하실 텐데요."

"큭큭. 이 막스 님이 후회 따윌 할 것 같으냐. 뭐, 만약 네 녀석 말대로 된다면 내 한번 이야기는 꺼내 보지."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기에 별다른 생각 없이 구시온의 제안을 받아들였건만.

설마, 녀석의 말이 사실이었을 줄이야.

"오, 오오...."

막스에게 각인된 드워프의 본능이 꿈틀거린다.

당장이라도 화덕으로 달려가 온몸으로 뜨거운 불길을 만끽하고 싶다.

온 힘을 다해 망치를 쥐고, 비 오듯 땀을 흘리며 쇳덩이를 내리치고 싶다.

"어, 언제 끝나는 거냐. 대체 언제...."

끓어오르는 본능을 억제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눈을 감고 발을 동동 구른 지 얼마나 지났을까.

서서히 열기가 사그라들며, 탈진한 듯한 승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들어오셔도 됩니다."

"어디, 어디 보자!"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은 기분이 이러할까.

대번에 안색이 밝아진 막스가 짧은 다리로 번개같이 땅을 박찼다.

"마나를 전부 탕진해 힘들어 죽겠습니다. 저 좀 일으켜 주시죠."

탈진한 채 바닥에 주저앉은 승현이 그에게 손을 뻗었지만, 막스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한테도 신경 좀 써 주시죠."

"수고했어요. 마나 포션이라도 좀 줄까요? 미하일 씨에게 받은 게 있는데."

"...아냐, 그건 됐어. 괜찮아."

바람처럼 발을 놀려 승현과 로제를 지나친 막스가 화덕을 바라보았다.

화르르륵-

모든 것을 집어삼킬 기세로 무시무시하게 타오르는 불꽃.

빨갛게, 파랗게, 그리고 노랗게.

화덕이 품은 불꽃의 색깔이 시시각각 변해가는 것을 보며, 막스는 확신할 수 있었다.

"진짜, 진짜 뷜란트의 불꽃이 되살아났어. 꾸, 꿈은 아니겠지?"

그저 그런 대장간의 평범한 불꽃으로는 스스로가 자랑스럽게 내어놓을 작품을 만들어낼 수 없다.

불칸 왕국 최고의 대장장이라 자부하는 자신이 작품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것은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

남들 앞에선 딱히 내색하지 않았지만...얼마나 많은 밤을 괴로움과 고뇌로 지새웠던가.

"한때는 망치를 손에서 놓을까도 생각했었지."

그간 무슨 수를 써도 화덕에 불을 지필 수 없었건만.

승현의 손에 의해 숨이 다한 줄 알았던 아이언해머 일가의 성역이 다시금 생명을 얻게 된 것이다.

"...촌. 막스 삼촌!"

무한한 황홀감을 느끼며 멍하니 화덕을 바라보는 막스의 귓가에 승현의 외침이 들려왔다.

"어, 어? 불렀느냐."

"막스 삼촌,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

부탁?

그깟 부탁쯤이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하나가 아니라 열 가지. 백 가지라도 들어줄 수 있다.

"뭐든지 말해봐라. 이 자식아."

여전히 화덕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투박하게 답하는 막스를 향해 승현이 손가락을 뻗었다.

"저거, 보이십니까?"

"응? 어떤 거 말이...헉."

이를 따라 천천히 시선을 내리던 막스가 숨을 집어삼켰다.

맹렬한 기세로 타오르는 불꽃 한복판에 놓인, 은은한 백광을 내뿜는 금속 한 덩어리.

불칸 왕국 최고의 대장장이인 막스가 이를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저건...일몰을 만들 때 사용했던...!!!"

오리하르콘.

오로지 만신전과 만마전에서만 채굴되는 전설 속의 금속을 발견한 막스가 경악성을 내뱉었다.

* * *

뷜란트의 화덕을 되살린 후, 며칠의 시간이 지났다.

요양을 위해 가만히 침대에 누워있던 나는,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으며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그냥 마나 포션을 사용할 걸 그랬나."

설마 에트나 화산도 아니고.

고작 자그마한 화도 하나를 되살리는 데에 이 정도의 마나가 필요할 줄이야.

형질 변환을 처음 깨달았을 때와 비슷한 정도의 후유증. 그래도 많은 소득을 얻었다.

"퀘스트 보상도 보상이지만...."

그보다 더 좋은 건, 예상치도 못한 업적을 달성했다는 거다.

- [새로운 업적, 신화 속 화염의 재현]을 달성하셨습니다!

- 보상으로 마나 [200]이 지급됩니다!

- [상급 이해와 분석]이 [초월자의 눈]으로 각성합니다.

업적을 달성함에 따라, 새롭게 바뀐 특성인 초월자의 눈.

다른 부분은 이해와 분석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확연히 눈에 띄는 두 가지 변화가 있었다.

- [전설] 등급 이하의 숨겨진 아이템 정보를 곧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초월체를 향해 특성을 발동하면 상대의 [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유니크 등급을 넘어선, 그 다음 단계의 아이템 옵션을 볼 수 있는 것과, 초월체의 격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그간의 고생에 대한 보상으론 차고도 넘칠 정도지만.

아직 나에겐 한 가지가 더 남았다.

"막스 삼촌은 잘 하고 계시려나."

마기가 담긴 단탈리온의 무구와 에테르가 담긴 미카엘의 무구. 그리고 뷜란트의 화덕을 보는 순간.

물 흐르듯 자연스레 그것들을 사용할 방법이 떠올랐다.

"오리하르콘이라...."

마기와 에테르가 뒤섞이며 만들어진 전설의 금속, 오리하르콘.

마음 같아선 제련 기술을 배운 후, 내 손으로 직접 만들어내고 싶었지만. 연이어 나타난 퀘스트는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드워프 왕국의 반가운 손님-3]

- 오랜 시간 제작을 향한 갈망에 시달리던 막스 아이언해머에게 오리하르콘의 제련을 맡기도록 하자.

보상 : 에테르 [8000]

조금 내키지 않는 퀘스트였으나,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퀘스트도 퀘스트지만...오리하르콘을 발견한 막스 삼촌의 반짝이는 눈을 보니 도저히 거절할 마음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검 형태로 만들어달라고 부탁하긴 했는데. 잘 되겠지?"

잔뜩 신이 난 채 대장간에 틀어박힌 막스 삼촌을 떠올리며 다시금 침대에 몸을 눕히려던 찰나.

"안에 있는가?"

문밖에서 익숙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대의 정체를 알아차린 나는 억지로 피곤한 몸을 일으켰다.

"펠릭스 씨. 안녕하십니까."

"흠흠. 그간 잘 지냈나?"

"그간이라기엔...하루도 안 지난 것 같습니다만."

작업을 방해받고 싶지 않단 막스 삼촌의 부탁에 따라, 뷜란트의 불꽃이 되돌아왔다는 사실이 아직 공표되진 않았지만.

그래도 언제나 그렇듯 알 사람은 다 아는 법. 아이언벨로우 일가의 수장인 펠릭스 씨 또한 그중 하나였다.

"크흠흠...자네가 설마 정말로 그런 일을 해낼 줄이야...몸은 좀 괜찮나?"

일견 내 공을 치하하기 위해 찾아온 것처럼 보이나, 벌써 며칠째 그에게 시달려온 나는 대번에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오늘은 뭘로 드립니까? 보드카?"

"어허, 이 펠릭스를 어떻게 보는 겐가. 나는 정말로 자네가 걱정되어서...."

"그럼 오늘은 하루 쉬어가는 거로 하시죠."

"크흠, 그렇다고 안 마시겠다는 얘기는 아니고. 오늘은 위스키가 땡기는구만. 좀 꺼내 보게나."

"..."

말없이 술병을 꺼내 건네자, 대번에 그것을 한 모금 들이킨 펠릭스 씨가 슬금슬금 내 눈치를 보았다.

"크으... 그나저나 부탁이 있는데 말일세...친구 놈이 자기도 이걸 맛보고 싶다고 해서 말이야...혹시 함께해도 되겠는가? 일단 데려오긴 했는데 말이야...."

"뭐, 그러시죠."

"오오...다행이구만. 들어오게나!"

이왕 이렇게 된 거. 입 하나쯤 더 늘어도 상관없겠지.

내 답변을 들은 펠릭스 씨가 반색하며, 문 너머를 향해 커다랗게 외쳤다.

'...어차피 한 번 가게에 다녀올 생각이었으니까. 그나저나 친구라니. 혹시 아직 만나보지 못한 아이언픽 일가의 가주인가?'

가만히 상대를 유추하던 그때.

끼익- 천천히 문이 열리며 들어선 사내가 나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촤르륵-

능글맞게 웃는 그와 눈이 마주친 나는, 반사적으로 자리를 박차며 블레이즈 와이어를 펼쳤다.

"구시온...."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170화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앗, 뜨거워라."

뱀처럼 쏘아진 블레이즈 와이어를 가볍게 낚아챈 구시온이 장난스레 손바닥을 털며 자리에 앉았다.

"앉아도 되겠습니까?"

"벌써 앉았으면서 뭘 물어?"

"...자네들, 사이가 안 좋은 겐가?"

나 또한 순순히 블레이즈 와이어를 거둬들이며, 놈에게 퉁명스레 답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모양인지, 당황한 기색을 내비치는 펠릭스 씨의 질문에 구시온이 어깨를 으쓱였다.

"저희 친합니다. 그렇죠?"

"...."

친하기는 개뿔이.

지난번에 보았을 때보다 한층 더 능글맞아진 것 같다.

"발은 좀 내리지?"

건방진 자세로 의자에 기댄 채 테이블에 발을 올린 녀석을 노려보자.

녀석이 말없이 펠릭스 씨의 위스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좋네요. 이게 얼마만의 술인지. 음...확실히 불칸 왕국의 무식한 독주보단 풍미가 살아있네요."

"앗, 아앗...내 위스키가..."

대번에 내용물이 절반 이상 사라진 술병.

어깨가 축 늘어진 펠릭스 씨를 향해 구시온이 예의 그 뻔뻔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잠시 승현 님과 단둘이서 할 이야기가 있는데. 죄송하지만 자리를 좀 비워주시면 안 될까요?"

"어, 어어...꼭 그래야만 하나?"

"그렇게만 해 주시면, 그걸 구해다 드리죠."

"...'그것' 말인가?"

"최상품으로, 약속드리겠습니다."

"좋은 시간 보내시게들. 나는 이만 빠져주겠네."

그거?

그게 뭔데 저러는 거지. 바람처럼 문을 열고 나가는 펠릭스 씨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때.

구시온이 탁, 비어버린 술병을 내려놓았다.

"솔직히 몇 대 얻어맞아 드릴 각오 정도는 하고 왔는데. 아까 그 일격이 끝이라니...예상 밖이네요."

"승산이 없는 싸움을 굳이 이어나갈 필요는 없으니까."

"호오...드디어 제 능력을 인정해주시는 겁니까? 이거 기쁘네요. 당신께 인정을 받다니."

"시끄러워."

내가 순순히 블레이즈 와이어를 거둬들인 이유는 하나. 구시온을 향해 [초월자의 눈]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구시온]

등급 : 마장(魔將) / 상(上)

간결히 떠오른 한 줄의 메시지.

이를 확인하는 순간, 흡수된 과거의 기억이 나를 향해 맹렬한 경고를 보냈다.

'마장. 그중에서도 상급이라면....'

내 기억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겉모습과는 달리. 구시온은 신장(神將) 급으로 평가되는 미카엘의 본신과 동급의 힘을 가진 최상위권의 강자라고.

'반면, 나는....'

나에 관한 것은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내 기억에 있는 상급 마장의 힘은 홀로 불칸 왕국 따위는 일격에 날려버리는 것이 가능한.

지금의 내가. 그리고 로제가 힘을 합쳐 전력을 다해 덤벼도 티끌만 한 상처 하나 낼 수 없는 존재라는 거다.

'기억이 온전히 돌아왔더라면 좀 더 객관적인 비교가 가능했을 텐데....'

아쉬울 따름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지금은 구시온의 전력을 가늠한 정도로 만족할 수밖에.

"로제 님은 외출하신 모양입니다. 오래간만에 인사라도 드리려고 했는데...이거 아쉽네요."

여유롭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구시온이 나를 보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견문도 넓힐 겸, 그리아 씨와 함께 왕국을 돌아보고 온다더군."

나로서는 다행이다.

만일 로제가 이 자리에 있었더라면, 구시온과 사생 결단을 내기 위해 죽자사자 달려들었을 테니까.

지금의 로제를 내가 제지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이고. 차라리 잘 된 셈이다.

"뭐, 됐습니다. 어차피 제가 볼일이 있는 건 승현 님이니까요."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이지?"

"지금 제 방문 의도를 물어봐 주신 겁니까? 이렇게나 따듯한 대접이라니...감개가 무량하네요. 드디어 제 진심이 통한 모양이군요"

"...."

사족이 너무 길다.

가만히 표정을 굳히자, 그제야 놈은 내 마음을 알아차린 듯 머쓱하게 웃으며 본론을 꺼내놓았다.

"뭐, 축하도 드릴 겸...정보도 드릴 겸. 부탁도 드릴 겸. 겸사겸사 찾아왔습니다."

"축하?"

"아카샤 님을 만나셨더군요."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어느새 위스키를 다 비워버린 구시온이 입맛을 다시며 말을 이어갔다.

"아카샤 님을 만나셨다는 건 승현 님이 자신의 본질을 어느 정도 자각하기 시작했다는 뜻. 당연히 축하를 드려야 마땅하지요."

"...네가 왜?"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승현 님께서 격을 끌어올려 하루빨리 본질을 각성하시길 진심으로 바라는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대체 왜 네가 그걸 바라는 거냐고."

"제가 그걸 순순히 말씀드릴 것 같습니까?"

"...됐다. 말을 말자. 본론이나 얘기해, 길게 끌 생각 없으니."

인상을 찌푸리며 답답해하는 나를 가만히 훑어보던 구시온이 손가락을 탁, 튕겼다.

"그렇지. 이 말씀을 드리려고 했는데. 승현 님께서는 현재 불칸 왕국의 왕좌가 공석이란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왕좌가 공석이라고?"

"네. 그럼요. 대강 몇백 년은 되었을 겁니다."

저건 또 무슨 소리지.

드워프의 문화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렇게 오랜 기간 왕이 없던 국가를 왕국이라 부를 수 있는 건가?

"그리고, 불칸 왕국의 국왕은 이곳의 관리자였죠. 겸직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렇다는 건...."

"보통 거주민들에게 자신을 차원의 주신, 혹은 위대한 존재로 각인하는 다른 관리자와는 달리, 제법 소탈한 친구였습니다. 고작 국왕이라니."

그 말인즉슨.

이곳 또한 겨울숲 부족과 마찬가지로 관리자가 사라진 차원이라는 건가.

지금까지의 경험에 빗대어 원인을 짐작해 보자면....

"또 네 녀석이 관련된 일이겠군."

"뭐, 부정은 안 하겠습니다만...변론을 좀 해 보자면, 관리자 본인을 포함한 세 가주가 동의한 일입니다. 결과가 좀 안 좋긴 했지만요."

내 짐작이 들어맞았는지, 구시온이 딴청을 피우며 헛기침을 내뱉었다.

"흠흠, 혹시 '섬'을 보셨습니까?"

"섬이라면, 라피스 해변에 있는...."

"그게 이곳의 관리자입니다."

저건 또 무슨 개소리지.

차갑게 식은 내 눈을 본 구시온이 다급히 말을 이어갔다.

"저렇게 만들 생각은 없었는데...정말입니다. 저는 그저...."

그러니까.

구시온의 장황한 변명을 요약하자면 이거다.

자신이 연구하던 실험체들을 통솔할 존재를 만들어내기 위해, 이곳의 관리자를 재료로 삼아 진행했던 실험이 실패했다는 것.

그리고, 그 이유는 실험에 협조했던 세 가주들의 책임이 크다는 것.

"책임을 떠넘기는 게 아닙니다. 정말 일이 그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다들 너무 의욕이 넘치는 바람에...."

"미친놈."

"상호 동의하에 이뤄진 일이니 따지고 보면 상부상조 아니겠습니까. 세 가주님들도 아주 즐거워하시더군요."

"그렇다고 해도...."

관리자를 제물로 삼다니.

미쳤다. 다들 미친 게 분명하다.

구시온도, 그리고 이곳의 드워프들도. 게다가 관리자까지. 절대 제정신이 아니다.

'다른 곳과 달리 멀쩡한 차원인 줄 알았더니...젠장, 구시온 같은 미친놈과 왜 친분을 유지하는지 알 것 같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지금까지의 경험상, 백 퍼센트. 아니, 이백 퍼센트의 확률로 이와 관련된 퀘스트가 나타날 게 분명하다는 거다.

'차라리 이럴 바에야....'

놈이 제 발로 나를 찾아온 지금, 최대한의 정보를 얻어내는 편이 낫다.

원래부터 미쳐있던 구시온을 비난해 봐야 남는 건 없을 테니까.

그렇기에 나는, 굳어있던 표정을 풀며 놈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날 찾아온 거냐."

"정답! 눈치가 아주 빨라지셨군요. 부탁 좀 드려도 될까요? 그런 실패작을 계속 내버려 두는 건 아무래도 마음이 괴롭단 말이죠."

"...왜 네가 직접 하지 않고 나에게 떠넘기는 거지? 네 능력이라면 섬을 통째로 날리고도 남을 텐데."

"어라? 그걸 어떻게...설마 벌써 '눈'을 얻으신 겁니까? 이야...축하드립니다!"

답하기 싫은 모양인지, 또다시 말을 빙빙 돌리는 구시온.

어차피 예상했던 일이기에. 이제는 짜증도 나지 않는다.

"그나저나 의외네요. 승현 님의 성격상,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엄청 분노하실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뭐, 그다지."

그야, 지난번과는 다른 경우니까 그렇지. 아직 드워프들과 깊은 친분을 쌓은 것도 아니고.

게다가 높은 산 부족이나 겨울숲 부족처럼 무고한 희생자가 나온 것도 아니니까.

물론, 내가 관리자의 자격을 취득해서 그런지 몰라도 곱게 보이지 않는 건 사실이다.

아무리 본인이 동의했다고는 하나, 관리자를 제물로 삼아 실험을 진행하다니.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머릿속이 궁금하네. 진짜.'

그렇다곤 해도 지금 당장 그들을 붙잡아놓고 캐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일단 다른 의문들을 억누른 나는 구시온을 향해 눈을 돌렸다.

"그래서, 네 부탁을 들어주면 나에게 무슨 득이 되는 거지?"

"음...저희 사이에 꼭 무언가 대가가 오가야 하는 겁니까? 제법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슬픕니다."

"개소리 그만하고."

여전히 짜증 나는 놈이다.

잠시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치며 침묵을 유지하던 구시온이 머뭇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래도 되는 건진 모르겠지만...에라, 모르겠다."

나를 향해 다가온 구시온이 목소리를 낮추며 작게 속삭였다.

"제가 알고 있는, 한기호 님에 관한 정보를 한 가지 드리겠습니다."

"...!!!"

콰앙-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놀란 나머지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내려치자.

우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고풍스런 장식이 가득한 테이블이 두 동강 나버렸다.

제법 값이 나가는 물건 같지만, 지금 그런 것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다.

"만약 지금의 이야기가 거짓이라면, 난 널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다."

나에게 멱살을 틀어 잡힌 구시온이 태연히 말을 이었다.

"악마들은 숨기는 부분이 있을지언정, 거짓말은 하지 않습니다."

미심쩍긴 해도, 일단은 믿어보는 수밖에.

시시각각 색이 변하는 놈의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또박또박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섬에 관한 걸 알고 있는 대로 말해. 하나도 빠짐없이."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171화

이른 아침.

예고 없이 자신의 집으로 들이닥친 방문객에 볼프강이 멍하니 눈을 끔뻑였다.

"...누구냐, 너희들은."

눈 밑이 퀭한 사내와 어딘지 모르게 부루퉁해 보이는 긴 흑발의 여성.

빤히 그들을 바라보자, 새벽 공기를 맞으며 가만히 서 있던 두 사람이 허리를 꾸벅 숙였다.

"한승현입니다."

"안녕하세요, 로제에요."

"그쯤은 나도 안다."

물론 상대의 신분을 물은 것은 그저 형식적인 질문일 뿐이었다.

아이언픽 일가의 가주인 볼프강이 최근 불칸 왕국에서 큰 화젯거리인 저 둘을 모를 리 없었으니까.

"...."

자신의 대답에 머쓱한 표정을 짓는 두 사람. 그들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선 볼프강이 기억을 더듬었다.

'저 사내놈이 한승현이고, 그 옆에있는 녀석이 로제인가.'

지난 한 달 내내 광산에 틀어박혀 있던 그였지만.

승현과 로제의 이야기는 이미 광산에 드나드는 이들의 입을 통해 귀가 닳을 정도로 전해 들었다.

그의 둘째 아들인 포지드의 집에 머물고 있다는 것과.

마력 폭풍에 휩쓸려 이곳에 오게 된 것과, 맛좋은 술이 잔뜩 들어있는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아직 왕국에 공표되진 않았지만....'

뷜란트의 불씨를 되살린 것 또한 저 둘의 업적이라는 것을 떠올린 볼프강이 약간의 호기심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내가 묻고 싶은 건, 이른 아침부터 여길 찾아온 이유가 뭐냐는 거다."

"그건...."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물쭈물하며 앞으로 나선 로제를 제지한 승현이 똑바로 볼프강의 눈을 바라보았다.

"아이언픽의 힘을 빌리고 싶습니다."

"…대체 왜?"

"섬을 없애고, 오크들의 부락과 연결된 해로를 수복하기 위해서입니다."

"섬을 없애?"

뜬금없이 흘러나온 황당한 이야기에 볼프강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불칸 왕국의 큰 골칫거리인 섬에 관한 이야기야 공공연한 비밀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갑작스레 나타난 인간이 이를 해결해 준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게다가, 불칸 왕국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네 녀석들이 나서는 거냐."

"…구시온의 부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묘한 표정으로 답하는 승현을 본 볼프강이 펠릭스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저 녀석, 구시온과 친분이 있다고 했었지.'

어느 정도의 친분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대강은 납득할 수 있는 이유였다.

'섬'은 자신들이 저지른 실수의 결과물이기도 하지만, 완벽주의자인 구시온의 치부이기도 하니까.

"무슨 수로 섬을 없애겠단 거냐. 거긴...."

"불칸 왕국의 국왕이자, 이곳의 관리자이신 불카누스 님께서 지배하시는 독립적인 영역인 거죠."

"...그걸 아는 녀석들이 섬을 없애겠다고? 그 구시온 녀석마저 포기한 곳을?"

담담한 로제의 목소리에 볼프강이 인상을 찡그렸다.

불카누스.

불칸 왕국이 건립될 때부터 지금까지. 수천 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온 초월체.

그리고, 스스로의 과욕으로 인해 '섬'이 되어버린 비운의 관리자.

눈앞에 있는 둘은, 너무나도 담담히 그 불카누스를 없애겠다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무슨 얘기를 하나 했더니...들을 가치도 없다."

지금껏 세를 불려가는 섬을 없애기 위해 수많은 시도를 반복해왔다.

각양각색의 신병이기를 손에 쥔 드워프들이 아낌없이 몸을 던졌지만. 결과는 늘 똑같았다.

완벽한 패배.

몇 명이라도 목숨을 부지한 것을 기적이라 부를 정도로, 불칸 왕국의 정예 병사들이 손도 쓰지 못한 채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 것이다.

'섬이 가진 능력도 능력이지만....'

결정적인 패인은 그 섬의 심부를 지배하는 불카누스의 존재.

강인한 드워프들도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는데, 연약한 인간이 신장(神將) 급의 격에 오른 불카누스와 맞붙는다는 건 자살행위다.

"심지어 네가 그 개망나니 멜리사와 베일의 피를 이었다고 해도 말이지."

"개망나니라니...."

"보아하니 요 녀석의 힘을 믿고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 같은데."

가볍게 눈썹을 찡그리는 로제를 가리킨 볼프강이 말을 이어갔다.

"너도 제법 강한 것 같지만 멜리사나 베일에 비하면 아직 애송이일 뿐. 역부족이다."

멜리사와 베일.

그 둘이라면 능히 불카누스를 제압할 수 있겠지만, 그들에 비하면 로제는 한참 부족하다.

심지어 완전히 이지를 상실한 지금의 불카누스는 대화조차 통하지 않았기에 더더욱 그렇다.

수많은 드워프들의 희생이 증명한 사실이며, 눈앞에서 불카누스의 무시무시한 힘을 목도한 볼프강이 그 산 증인이다.

"그건...."

"그러니 아까운 목숨 버릴 생각 하지 말고 그냥 돌아가라. 아침부터 무슨 소릴 하는 건지 원. 못 들은 거로 하겠다."

우물쭈물하는 로제를 등진 볼프강이 귀찮다는 듯 기지개를 켜며 자신의 자택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려던 그때.

묵묵히 서 있던 승현이 그의 어깨를 잡았다.

"계획이 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계획?"

"이를 위해선 아이언픽 일가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강한 확신을 가진 눈빛.

약간의 흥미를 느낀 볼프강이 말해보라는 듯 걸음을 멈추자, 승현이 말을 이어갔다.

"섬의 중심과 이어진 해저 터널을 뚫을 겁니다."

"...?"

승현의 입에서 나온 황당한 이야기에, 순간 볼프강은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뭘 뚫겠다고? 해저 터널?"

"최고의 채광 기술을 가진 아이언픽 일가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물론,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과장을 조금 보태서, 보름이면 작은 산 하나를 통째로 들어낼 수 있는 독보적인 채광 기수를 가진 게 아이언픽 일가였으니까.

게다가 해저의 광물 또한 그들의 채굴 목록 중 하나였기에.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섬과 이어진 해저 터널을 뚫는 건 그리 어려운 작업이 아니기도 하고.

'어찌 보면 섬에 접근하기엔 최적화된 방법일 수도 있겠군.'

승현의 이야기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 볼프강이 생각에 잠겼다.

해상은 불카누스의 영역이기에, 배를 띄우는 순간 숯덩이가 되어 버린다.

그렇기에 그의 눈을 피해 해저 터널로 섬에 잠입하는 것까진 그럴싸한 계획이지만....

그래 봐야 섬에 잠든 불카누스와 마주치고 나면 모든 게 도루묵이다.

구시온에게 이야기를 들었다면 승현 또한 이러한 사실을 모를 리 없을 터.

"만약 해저 터널을 뚫고 나면, 그다음은 어떻게 할 생각이냐?"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승현이 보이는 태도는 너무나도 당당했다.

"...?"

의아해하는 승현의 손바닥 위로 가느다란 은사가 천천히 모양새를 갖춰가기 시작했다.

곧 복잡한 무늬를 그리며 완성된 축약된 공의 술식.

"저에겐 불카누스를 진정시킬 수단이 있으니까요."

화르륵-

그 위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열기에, 볼프강의 동공이 순식간에 확장되었다.

* * *

"정말 괜찮을까요?"

나와 함께 뷜란트와 연결된 지하 통로에 들어선 로제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아무래도 구시온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 마음에 걸린 모양이다.

"믿을 수 없는 놈이지만...지금은 믿는 수밖에.... 그래도 순순히 따라줘서 고마워."

"고맙긴요. 승현의 아버...님과 관련된 일이라고 하니, 어쩔 수 없죠."

내 이야기에 조금 어색하게 답한 로제가 시선을 피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처음부터 로제가 순순히 따라준 것은 아니다.

집으로 돌아온 로제와 구시온이 마주친 순간.

다짜고짜 놈에게 달려드는 그녀를 뜯어말리기 위해 진땀을 흘려야 했으니까.

'물론 구시온 따위는 어찌 되던 내 알 바가 아니지만...끝까지 갔으면 위험했겠지.'

그래도 다행히 녀석이 나에게 내건 조건을 확인한 로제가 한발 물러남으로써 상황은 종료되었다.

'뭐, 막스 삼촌이 말씀하신 것처럼 로제의 부모님이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라는 점도 한몫한 것 같지만. 게다가....'

결정적인 것은, 구시온이 로제를 향해 내뱉은 한 마디였다.

"로제 님은 지금 일몰의 힘을 절반밖에 사용하지 않고 계십니다."

녀석의 이야기를 곱씹으며 뷜란트의 지하 통로를 걷던 그때.

언제 또 튀어나올지 모를 부기를 경계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로제가 일몰을 꺼내 들었다.

"절반이라니, 그게 무슨 뜻일까요."

아무래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모양이다.

"일몰의 형태에 관해 잘 생각해 보시면, 제 말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로제를 향해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남긴 녀석은, 늘 그렇듯 바람처럼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하여간 말을 해 주려면 그냥 속 시원하게 이야기를 해 주던가. 구시온 그 자식, 우리가 답답해하는 걸 즐기는 게 분명해."

"...맞아요."

다시 생각해도 짜증 나는 녀석이다.

그나마 섬의 지배자, 불카누스가 가진 힘의 근원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려주었기에 망정이지.

그것마저 저런 식으로 꼬아 답했더라면...아마 내 입에서도 좋은 말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나저나 형태가 대체 어쨌다는 건지...."

로제가 사용하는 일몰은 평소엔 삼단봉의 형태를 띠지만, 마력을 집어넣으면 순식간에 거대한 칠흑의 랜스로 변한다.

그 길이만 해도 대략 2M. 로제의 키를 훌쩍 뛰어넘는 길이다.

게다가, 두꺼운 몸체 덕에 무게 또한 장난이 아니다. 가볍게 휘두르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풍압이 몰아칠 정도니까.

물론, 이러한 형태가 결코 전투에 적합한 것은 아니다. 크고 무거운 만큼 기동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이다.

'유신애 팀장도 한 번 그걸 지적한 적이 있었지.'

물론, 로제의 압도적인 근력과 엘븐 아르테스의 존재가 이를 커버하고 있긴 하지만. 결코 효율적인 무기는 아니란 뜻이다.

'그런데 형태를 잘 생각해 보라니, 무슨 뜻일까.'

설마 별생각 없이 내뱉은 이야기에 너무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는 거 아닐까.

그럴지도 모르지만...어쨌거나 밑져야 본전.

일몰의 제작자가 이곳에 있으니, 직접 물어보면 될 일이다.

"히익! 또 부기가...!!!"

"이제는 좀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나...오거도 때려잡는 네가 고작 부기를...."

아무래도 겁이 많은 로제는 부기의 좋은 장난감인 것 같다.

지하 통로를 벗어난 이후에도 자신에게 들러붙은 부기들 때문에 밤잠을 설치곤 했으니까.

"오거는 때릴 수 있지만, 부기 님은 그게 안 되니까 그렇죠...."

"이제는 '님'까지 붙이는 거야?"

겁에 질린 채 울상을 짓는 걸 보니 아무래도 무언가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 같다.

'분명, 그런 쪽으로 특출난 능력을 보이는 녀석이 있었던 것 같은데...누구였더라.'

머나먼 과거의 기억을 더듬으며.

등 뒤에 숨은 로제를 데리고 뜨거운 열기가 몰아치는 뷜란트를 향해 걸음을 옮기던 그때.

"완성했다-!!! 크흐흐...!!!"

환희에 가득 찬 막스 삼촌의 고함이 들려왔다.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172화

이제는 완전히 제 모습을 되찾은 뷜란트.

모루 위에 놓인 단검을 바라보던 막스가 어린아이처럼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크흐."

그의 시선이 고정된 곳은 모루 위에 놓인 연보랏빛 검날의 단검 한 자루.

지난 며칠간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은 막스의 온몸에서는 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고 있었다.

"좋구나...!!!"

얼마 만에 느껴보는 감정인가.

백 년? 이백 년?

오랫동안 잊고 있던 거대한 충족감이 막스의 공허했던 마음을 가득 채워나갔다.

게다가, 승현이 막스에게 넘긴 것은 단순한 오리하르콘이 아니다.

"거 참. 어디서 이런 귀한 물건을...."

오리하르콘 중에서도 최상급으로 분류되는 혼이 담긴 광물.

이를 아낌없이 사용해 제련한 단검을 홀린 듯 쓰다듬던 그때.

"끝나신 겁니까? 이렇게나 빨리?"

"안녕하세요. 막스 삼촌."

뷜란트의 견고한 철문이 열리며, 로제와 함께 나타난 단검의 주인이 그를 향해 다가왔다.

"흐흐, 딱 맞게 왔구나."

화덕을 등지고 희번득 웃는 막스.

그와 눈이 마주친 승현이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났다.

"...."

산발이 된 머리, 땀으로 뒤범벅된 수염. 열기로 인해 벌겋게 달아오른 피부. 핼쑥해진 두 뺨.

그리고.

얼마나 쉬지 않고 망치를 두들겼는지, 손바닥이 전부 터져 피범벅이 된 두 손.

결코 정상적인 몰골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신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리는 막스를 향해 포션을 건넨 승현이, 황당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대체 얼마나 이러고 계셨던 겁니까?"

"응? 별거 아니야. 앗, 포션이로군. 손바닥이 좀 얼얼했는데 잘 됐구만. 이야, 이거 효과 끝내주는데."

치이익-

새하얀 연기와 함께 순식간에 아물어가는 상처를 확인한 막스가 승현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네 녀석이 만든 거냐? 제법 실력이 있군그래. 볼프강 놈이 보면 좋아하겠어."

"안 그래도 조금 전에 볼프강 씨를 뵙고 오는 길입니다."

"그놈을? 네가 왜? 아, 그 전에 먼저 이 녀석부터 봐라. 이 막스 님께서 네놈을 위해 손수 벼려낸 걸작이다, 이 말이야."

무언가 이야기를 꺼내려는 승현을 제지한 막스가 자랑스레 단검을 건네려는데.

승현의 옆에 서 있던 로제가 당황한 기색을 내비치며 재빠르게 일몰을 움켜쥐었다.

"어...? 이거 왜 이래요?"

우우우웅-

로제의 의사와 상관없이 제멋대로 해방된 일몰이, 알 수 없는 공명음을 내뿜기 시작한 것이다.

거대한 랜스에서 느껴지는 범상치 않은 떨림. 이를 본 막스가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 저놈 저거, 제 동족을 알아보는구만."

"동족이라니, 그게 무슨...?"

"자, 인사 정도는 받아줘야지."

대답 대신, 승현의 손에 연보랏빛 단검을 쥐여준 막스가 일몰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이놈아. 대신 적당히 해야 한...어이쿠, 성질도 급하지."

쐐애애액-

막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로제의 손을 떠난 일몰이 대기를 찢어발기며 정면을 향해 쇄도했다.

"위험...!!!"

로제가 다급하게 외치며 몸을 날렸으나. 일몰은 눈 깜짝할 새에 승현의 코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아무런 대비 없이 저걸 맞으면...."

극야와 견주어도 크게 밀리지 않는 위력. 만약 저것과 승현이 충돌한다면,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제멋대로 날아간 일몰을 잡아내기 위해 로제가 전신의 마나를 끌어 올리려던 찰나.

카앙- 날카로운 쇳소리가 뷜란트의 내부를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갔다.

"이건...."

힘없이 바닥을 나뒹구는 일몰.

멍하니 중얼거리는 승현에게 다가선 막스가 씨익 웃으며 그의 팔뚝을 붙잡았다.

"어떤가. 마음에 드나?"

"...예."

막스를 향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승현이 일몰을 향해 [초월자의 눈]을 발동했다.

[일몰]

등급 : [전설++]

옵션 : 민첩+50, 근력+45, 체력+40, [해방] [일각수 강림]

[해방]

- 인증된 사용자가 마력을 주입하면 일몰이 본래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 해방 시, 사용자의 모든 스텟이 50% 향상됩니다.

*현재 등록된 사용자 : [멜리사 라셀러스], [베일], [로제]

[일각수 강림]

- [해방]을 시전한 후, 시동어를 사용하면 일몰에 각인된 일각수의 영혼을 불러들일 수 있습니다.

초월자의 눈을 얻게 됨에 따라, 드디어 확인이 가능해진 일몰의 옵션은 승현의 예상을 훨씬 웃도는 것이었다.

말도 안 되는 스텟도 스텟이지만, 가장 눈에 띄는 건 사기에 가까운 [해방]의 성능.

단순히 마력을 주입하는 것만으로 아무런 페널티와 제한 시간 없이 스텟이 1.5배나 늘어난다는 건.

승현이 아는 한 지금껏 전례가 없는, 말도 안 되는 사기적인 옵션이다.

"하지만...."

막스에게 받은 단검, [에이트] 또한 그에 못지않은 성능을 내보이고 있었다.

[에이트]

등급 : [전설+]

옵션 : 민첩+60, 근력+35, 체력+20, [오버랩], [에이트]

[오버랩]

- 에이트에 각인된 요르문간드의 영혼을 사용자의 마나가 담긴 신체와 기물에 덧씌울 수 있습니다.

* [오버랩] 발동 시 모든 스킬의 위력이 40% 증가하며, [에이트]를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에이트]

판데모니움의 마수, 요르문간드의 체내에서 배합된 맹독을 주변에 살포합니다.

* 최소 효과 범위 : 사용자를 중심으로 반경 [50M]

* 소모된 마나에 따라 효과 범위가 변경됩니다.

* [에이트]의 효과는 랜덤으로 적용되며, 사용자가 아군으로 지정한 대상에겐 랜덤한 버프 효과가 부여됩니다.

일몰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능력.

하지만. 가장 눈에 띄는 건 무기의 이름과 동일한 스킬, [에이트]에 등록된 마지막 옵션이었다.

* 에테르를 [1000] 소모하여, [에이트]에 임의로 효과를 추가할 수 있습니다.

* 효과를 추가하기 위해선 사용자와 동일한 마나를 지닌 아이템이 소모됩니다.

* 옵션이 변경된 에이트의 사용 횟수는 1일 1회로 제한되며, 그 이후엔 옵션이 초기화됩니다.

그 말인즉슨.

단발성이긴 하나 사용자의 입맛대로 스킬을 편집할 수 있다는 뜻이다.

지금까지의 상식을 정면으로 깨부수는 옵션에 승현이 나지막이 탄성을 내뱉었다.

"대단한데...."

띠링- 퀘스트가 클리어되었다는 알림음은 반쯤 넋이 나간 그의 귓가엔 들리지 않았다.

그 대신, 그의 머릿속을 가득 메운 건 수없이 떠오르는 응용법이었다.

연금술사란 자신의 특성과 맞물려, 무궁무진한 활용이 가능한 것이 바로 에이트가 가진 능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지금의 상황도 잊고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던 그때.

철썩-

막스의 투박한 손바닥이 승현의 등을 강타했다.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정신 차려라, 이놈아. 계속 그러고 있으면 도로 가져간다?"

"예? 예."

등에서 느껴진 강한 충격에 정신을 차린 승현이 막스를 향해 눈을 돌렸다.

"그런데...정말 제가 이걸 받아도 되는 겁니까?"

"뭐, 안 될 이유가 있나. 나도 오래간만에 재미있었고 말이지. 흐흐...불카누스 님을 해체하고 조립할 때 이후로 이런 느낌은 오래간만...."

싸아-

자신의 반응을 확인하며 눈을 빛내는 막스. 그의 입에서 무심코 흘러나온 이야기에 승현의 주변 공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이곳을 찾아온 본래의 목적을 떠올린 것이다.

한 차례 정신을 가다듬은 승현이 흥분을 가라앉히며 막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듣기로는 섬의 제작에 삼촌을 비롯한 나머지 두 가주님들이 관련되어 있다던데. 사실입니까?"

"응? 그걸 누구에게 들었나?"

"...구시온이요."

바닥을 나뒹구는 일몰을 주워든 로제가 대화에 끼어들자, 막스가 의아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응? 구시온과 너희가 그런 이야기를 나눌 사이였던가."

"말씀드리자면 길지만...아무튼, 막스 삼촌께 묻고 싶은 게 몇 가지 있어서 찾아온 거예요."

"뭐야, 이놈을 가지러 온 게 아니었어? 에잉...그래, 어차피 시간도 넉넉하니 얘기나 좀 하다 나가자꾸나."

로제를 보며 가볍게 혀를 찬 막스가 한구석에 있는 의자를 끌어와 털썩, 주저앉았다.

"일단...그전에 술 가져온 거 없나? 며칠간 안 마셨더니 목이 타는구만."

"받으시죠."

승현이 가방 안에서 보드카를 꺼내 막스에게 건네자, 대번에 그것을 들이킨 막스가 소매로 입가를 쓱쓱 닦았다.

"크으...달다, 달아. 뷜란트에서 마시는 술이라니...그나저나 궁금한 게 뭐냐. 피곤하니 짧게 짧게 하자꾸나."

"대체 왜 세 가주님은 '섬'의 제작에 참여하신 겁니까? 듣자 하니 섬의 주축이 되는 불카누스는 이곳을 다스리는 국왕..."

"응? 그거야 당연히 재미있을 것 같아서지. 초월체를 뜯어볼 기회가 어디 쉽게 오는 건 줄 아나?"

"...."

너무나도 태연한 막스의 답변에 승현과 로제가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도저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의 마음을 알아차린 듯, 막스가 껄껄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어쨌거나 불카누스 님이 동의하신 일이다. 결과적으로 실패하긴 했지만 말이지."

"아무리 그래도...여러분들을 이끄는 국왕님한테 어찌...악!"

콰앙-

조금 세차게 로제의 머리를 쥐어막은 막스가 재차 보드카를 들이켰다.

"이놈아, 그건 너희들의 기준이지. 드워프들의 기준이 아니지 않느냐."

"...."

"우리는 우리만의 방식으로 불카누스 님께 경의를 표한 것뿐이다."

점차 딱딱하게 굳어가는 표정.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승현이 재빨리 대화의 주제를 돌렸다.

"그렇다면...일몰에 각인된 일각수의 영혼을 불러내는 방법을 알고 싶습니다."

"일각수? 그게 뭔가요?"

"...일각수를 모른다고? 그럼 지금까지 일몰은 어떤 식으로 사용한 거냐?"

"그야 당연히...무기로...."

"아니, 그걸 묻는게 아니라. 지금껏 저걸 그냥 붕붕 휘두르고 다닌 게냐?"

"네...안 되는 건가요?"

점점 기어들어가는 로제의 답변에 황당하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던 막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허...참. 내 살다 살다 이런 경우는 처음 보는구나. 마상전에 사용되는 랜스를 맨손으로 휘두르다니. 멜리사가 안 가르쳐 주더냐?"

"네? 네. 어머니가 가르쳐주신 건 일몰을 해방하는 방법이랑...백야랑 극야, 그리고...."

"에잉, 쯧쯧. 내가 그렇게 경고했건만...결국 멜리사도 철이 들긴 드는구나."

우물쭈물하는 로제를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차는 막스를 향해 승현이 말을 건넸다.

"일몰을 해방한 상태에서 시동어를 사용하면 일각수를 불러낼 수 있다고 하던데. 혹시 막스 삼촌은 알고 계십니까?"

"알다마다. 그걸 정한 게 멜리사인데."

"정말요? 저도 알려주세요!"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로제가 일몰을 해방하며 막스에게 바짝 다가섰다.

"...그냥 모르고 사는 편이 나을 것 같다만."

"알려주세요! 알고 싶어요!"

자신을 향해 눈을 반짝이는 로제를 보며, 잠시 머뭇거리던 막스가 그녀의 귓가에 작게 무언가를 속삭였고.

"...평생 안 불러낼게요."

귀까지 빨개진 로제가 고개를 푹 숙였다.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173화

[드워프 왕국의 반가운 손님-4]

- '섬'에 진입해, [DQ-884]채널의 관리자인 [불카누스]를 만나도록 하자.

보상 : 에테르 [12000], [DQ-884 채널의 영구 통행증]

"역시, 예상대로네."

"휴우...."

에이트를 얻은 이후.

하루가 지난 오늘에서야 나타난 다음 퀘스트를 확인한 나는, 해변가를 걸으며 탄식을 내뱉는 로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일각수를 불러내는 시동어가 대체 뭐였길래 그래?"

"...."

"궁금한데...."

"절대, 죽어도. 절대로 말 못 해요."

내 질문에 잔상이 보일 정도로 고개를 가로젓는 로제. 반응을 보아하니 평범한 시동어는 아닌 모양이다.

"어머니는 대체...왜...악! 생각 안 할래요...."

솔직히 궁금한 건 사실이지만, 저렇게까지 싫어하는데 캐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시동어를 향한 의문을 애써 접어버린 나는, 저 멀리 보이는 드워프들의 행렬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확실히 행동력 하나는 끝내주네."

커다란 곡괭이와 삽. 그리고 생전 처음 보는 장비들을 걸머진 채 해변을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그들은, 모두 아이언픽 일가의 드워프들이다.

볼프강 씨를 만난 지 고작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건만.

벌써 섬과 해변을 잇는 해저 터널 공사가 시작된 것이다.

"도와드리지 않아도 괜찮을까요?"

"뭐, 초짜인 우리가 끼어들어 봐야 방해만 된다고 하니까...어쩔 수 없지."

딱히 도울 일이 없음에도 우리가 이곳에 온 이유는, 슬슬 바닥을 보이는 술과 물품을 보충하기 위함이다.

가게와 이어진 통로가 있는 곳이 이곳, 라피스 해변이니까.

"뭐, 공사 기간이랑 쿨타임도 대강 맞을 것 같고...자리를 비우는 이유도 대강 둘러댔으니 괜찮겠지?"

볼프강 씨가 이야기한 해저 터널의 공사 기간은 대략 일주일.

지금까지의 경험상, 영구 통행증을 발급받기 전의 재접속 쿨타임도 대략 그 정도일 테니까.

마침 이곳에 오기 전 클랜 창설 신청도 해 두었으니, 가게에 다녀오기 딱 좋은 타이밍이다.

"영구 통행증을 얻고 나면 드워프 분들에게 사실대로 말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저는 상관없지만...."

"그편이 좋겠지. 언제까지 거짓말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야."

"그, 그렇죠? 그럼...적당한 타이밍에 이야기하는 편이 좋을까요?"

"그렇겠지. 그건 그렇고, 일단 돌아가면 뭘 먼저 해야 하려나."

가게에 머무는 동안 해야 할 일을 떠올리며, 오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로제와 함께 통로를 넘어서자.

순식간에 주변의 풍경이 바뀜과 동시에 익숙한 메시지가 나타났다.

- [DQ-884] 채널과의 교류가 종료되었습니다.

- 상대방의 만족도는 [★★★★]입니다.

- 채널 등급과 만족도를 바탕으로 보상을 책정 중입니다.

[보상 목록]

1. 마나 포인트 [80] 획득.

2. 에테르 [4500] 획득.

채널의 등급이 올라서인지 확연히 늘어난 보상.

만족스럽게 이를 수령 한 후, 쪽방을 나선 내 눈에 들어온 광경은.

"...?"

굳게 닫힌 가게의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시멘트 포대와 각종 건자재를 들고 바쁘게 돌아다니는 인부들과.

"아저씨, 거기 조심하쇼!"

"어허, 대충대충 할 생각하지 말게들!"

그들을 지휘하는 최수근. 그리고 전창수의 모습이었다.

* * *

폐허가 되어버린 울산.

띠리리링-

무명과 함께 잡초가 가득 자라난 도로 위를 걷던 미하일의 핸드폰이 요란히 울어대기 시작했다.

"오...사장님께서 돌아오신 모양입니다. 제 선물이 마음에 드셨을지 모르겠네요."

발신자를 확인하고 흐뭇한 표정을 짓는 미하일. 곧이어, 수화기 너머로 싸늘한 승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설명해.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다.

분명 전화를 받자마자 자신을 향해 감사를 표할 줄 알았는데....

당황한 미하일이 머리를 긁적이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하하...그게 말입니다. 이왕 클랜을 창립하는 김에 그럴싸한 사옥과 함께 선물을...."

- 대체 왜 마음대로 이런 짓을...이러면 한동안 가게를 완전히 닫아야 하잖아. 게다가 아직 클랜 개설 허가도 안 떨어졌는데 벌써 부터....

"어...신호가 잘 안 잡히는군요. 조만간 뵙겠습니다! 사장님!"

아무래도 예상이 빗나간 것 같다.

약한 신호를 핑계로 황급히 승현의 전화를 끊어버린 미하일이 눈살을 찡그리며 툴툴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하시는 거 아닙니까. 다 사장님을 위해서 한 일인데...비용도 만만치 않게 들었고."

그의 옆에서 말없이 통화를 엿듣던 무명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허락도 없이 멋대로 그런 짓을 하면 누구라도 싫어한다. 게다가 스케일이...차라리 쓸만한 장비를 사주지 그랬나."

"아...!!!"

무언가를 깨달은 듯 손뼉을 탁, 치는 미하일의 모습을 본 무명이 고개를 내저었다.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없군.'

처음엔 그리도 명석해 보였던 미하일은, 알면 알수록 어딘가 나사가 하나 빠진듯한 모양새다.

이번 일만 해도 그렇다.

승현이 S급 라이센스를 취득한 이후.

협회에 신규 클랜 개설 신청을 해 놓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미하일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놀랍게도 가게 주변의 토지를 모두 매입하는 것이었다.

"곧 클랜마스터가 되실 사장님을 위해, 대규모 연금술 단지를 조성하도록 하겠습니다."

게다가 정작 당사자인 승현에게는 비밀로 한다는 조건까지 내걸고.

"물론, 서프라이즈입니다."

막대한 자금력을 이용해 불과 사흘도 안 되어 주변의 땅을 전부 사들인 미하일은,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이를 실행에 옮긴 것이다.

"뭐, 그래도 가게를 철거하거나 한 건 아니니까. 따지고 보면 딱히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그놈도 당황해서 그런 거겠지."

"...그렇겠죠?"

불안한 듯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던 미하일이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시선이 멈춘 곳은, 잔뜩 녹이 슨 표지판이었다.

"저 글자가 그러니까...태화...강. 맞습니까?"

"맞다. 저 너머의 대나무숲이 그 영감의 영역이지. 과거엔 십리대밭길이라 불렸었고."

표지판 너머로 보이는, 반쯤 무너진 다리와 울창한 대나무숲.

무명의 스승이자 현재 그의 딸을 돌봐주고 있는 울산의 지배자. 야왕(夜王)이 거주하는 곳에 들어선 것이다.

첨벙-

곧이어, 폐허가 된 다리 위를 건너던 그들의 귓가에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후...제가 할까요?"

"내가 하지. 괜히 힘 빼지 마라."

한숨을 내쉬는 미하일을 뒤로하고, 자신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톱날 형태의 단검을 손에 쥔 무명이 난간 아래를 향해 몸을 날렸다.

"꼴을 보아하니 그 영감은 자리를 비운 모양이군."

강가에 착지한 무명이 여유롭게 주변을 둘러봄과 동시에.

촤아악- 별안간 거대한 물기둥이 솟아나며, 그의 머리 위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키아아아악-!!!"

날카로운 괴성과 함께, 강에서 튀어나와 그를 향해 달려드는 어인형의 몬스터.

놈의 손에 쥐어진 날카로운 삼지창을 발견한 무명이 눈살을 찌푸리며 자신의 단검을 역수로 틀어쥐었다.

"망할 영감 같으니라고. 게을러터져서는."

슬쩍 옆으로 고개를 돌려 창을 피한 무명이 가볍게 단검을 사선으로 긋자.

툭-

흉흉한 기운을 품은 적광이 소리 없이 번뜩이며, 묵직한 어인의 머리통이 힘없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난간에 걸터앉아 이를 관람하던 미하일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탄성을 내뱉었다.

"오...확실히 빠르십니다. 그래도 오거 급은 되는 녀석인 것 같은데."

"영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미하일의 칭찬에 건성으로 답한 무명이 몬스터의 시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지금껏 본 적 없는 녀석인데...또 한 종류가 늘어난 건가."

실시간으로 균열이 제거되는 다른 도시와는 달리, 완전히 버려진 이곳. 울산에선 하루에도 수십 번의 균열의 붕괴가 일어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빠져나온 몬스터들은 각자의 생태를 이루며 번식하고, 새로운 개체를 만들어 낸다.

야왕을 필두로 모인 각성자들이 최대한 그 수를 줄이고는 있지만, 고작 수십에 불과한 그들의 힘만으로 이를 막아내는 것은 역부족이기에.

몬스터의 천국인 울산에선 끊임없이 새로운 개체가 탄생하곤 하는 것이다.

"망할 협회 놈들...."

이러한 사태의 원흉 중 하나인 헌터 협회장, 황정호를 떠올린 무명이 이를 부드득 갈았다.

"아레스를 처단한 이후, 네놈의 모가지도 함께 따 주마."

단검을 매만지며 황정호를 향한 증오를 불태우던 그때.

난간에서 뛰어내려 그에게 다가온 미하일이 빙긋 웃으며 말을 건넸다.

"느껴지시는 게 있습니까?"

느껴지는 것.

그의 이야기에 담긴 뜻을 알아차린 무명이 지금의 감정을 유지하며, 자신의 내면을 향해 정신을 집중했다.

"...마기라고 했던가. 아직은 모르겠군."

하지만, 느껴지는 건 오로지 그의 몸속을 흐르는 뜨거운 마나 뿐.

미하일이 이야기한 이질적인 힘, '마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흐음...제가 봤을 때 아저씨도 충분한 '자격'이 있어 보였는데. 왜 안 되는 걸까요."

"...정말 내게 그런 힘이 내재 되어 있다는 거냐?"

"정확히는 그럴 가능성이 크다는 겁니다. 유천호라고 했던가요? 그자도 아마 아저씨와 같은 이유로 단탈리온에게 선택되었을 테니까요."

감정에서 비롯된 힘인 마기를 다루는 재능.

미하일은, 유천호와 마찬가지로 무명에게 그러한 재능이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악마라...뭐, 놈들의 목을 딸 수 있다면 상관없긴 하다만. 솔직히 믿기 어렵군."

물론, 쉽사리 믿을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각성자라고는 해도 인간의 범주에 속하는 그가 받아들이기엔 거리가 있는 내용이었으니까.

"선례가 있으니까요. 어디 보자...얼마 전 새로이 본질을 각성한 분 성함이...유신애 팀장님이셨던가요? 아저씨와 안면이 있는 분으로 알고 있는데 말이죠."

"그 여자가?"

"뭐, 그렇다는군요. 그분도 해내셨는데 아저씨가 못 해내실 리가 없죠."

미하일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름에 조금 당황한 무명이 고개를 들던 찰나.

"큭큭. 애송이 놈. 언질도 없이 무슨 일이냐. 게다가 이런 귀한 손님까지 달고 말이야."

심상치 않은 파동과 함께,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이 미하일의 뒤편에서 유령처럼 솟아올랐다.

"어라? 당신이 왜 여기에...?"

무명의 스승이자 울산에 모인 각성자들의 주축.

야왕과 눈이 마주친 미하일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가운 표정으로 그를 가리켰다.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174화

"그간 무탈하셨...이 표현이 맞나 모르겠습니다만. 잘 지내셨습니까?"

"나야 잘 지냈지. 어디 보자, 마지막으로 자네를 본 게 대략 팔백 년쯤 된 것 같은데. 맞나?"

"그것보단 조금 더 되었을 겁니다. 그런데...뱃사공인 당신이 왜 여기에?"

야왕을 향해 인사를 건넨 미하일이 별안간 표정을 굳히자.

그의 주변으로 열풍이 휘몰아침과 동시에, 천천히 흐르던 강물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청부업자 일을 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만."

"작게나마 할당량도 채울 겸. 겸사겸사. 요즘은 손을 털었지만 말이야."

"할당량이라...현세에 강림하신 걸 보니, 당신도 참전하시는 겁니까?"

뜨겁다.

인내심 강한 무명마저 인상을 찡그릴 정도의 무시무시한 열기.

한데, 이를 정면으로 받아내는 야왕은 태연했다.

"그렇다고 한다면?"

"당신은 어느 쪽입니까."

능글맞은 야왕의 태도에 한층 더 주변의 온도가 상승하던 그때.

"글쎄다. 예나 지금이나 성질 급한 건 똑같구나."

우두둑- 구부정한 허리를 편 야왕이 가볍게 손을 떨치자, 맹렬한 기세로 끓어오르던 강물이 순식간에 차게 식어버렸다.

"쯧쯧...일거리가 또 늘었구만."

반쯤 익은 채 허옇게 배를 까뒤집은 물고기들.

이를 보며 혀를 찬 야왕이 다시금 허리를 굽혔다.

"내가 모시는 분이 어떤 분이신지 잊은 게냐."

"그렇다는 건...?"

"그래, 구경이나 할 겸 내려온 거다. 보다시피 이 몸도 단순한 아바타이고 말이지. 장난 좀 쳤기로서니 그렇게 이를 드러낼 것까진 없지 않은가."

미하일을 향해 눈을 가늘게 뜬 야왕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과거에 그분께 그렇게 혼쭐이 나고도 아직 고치지 못한 모양인데, 주의하는 게 좋을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다소 무거워진 분위기.

이를 환기하듯, 다시금 표정을 되돌린 야왕이 뒤편에 서 있는 무명을 가리켰다.

"그런데, 네가 왜 이 녀석과 같이 있는 거냐. 이놈은 내 후임으로 키울 생각이었는데."

"그게 말입니다...어쩌다 보니 그분과 연이 닿은지라...."

"으잉? 이 녀석이? 허, 참...신기한 일이로세."

미하일을 향해 눈을 동그랗게 뜨는 야왕. 묵묵히 이야기를 듣던 무명이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영감도 미하일과 같은 존재인가. 초월체...라고 하던가."

"응? 몰랐나? 내가 네 녀석에게 말을 안 했던가? 딱히 숨길 생각은 없었는데 말이지."

"...아무래도 들어야 할 이야기가 많은 것 같긴 하지만, 일단은 먼저 우리 쪽의 용건부터 얘기하도록 하지."

"쯧, 버릇없는 건 여전하구나. 어디 보자...네 녀석이 먼저 나를 찾아올 만한 일이라면...대략 다섯 가지쯤 있는데...."

무명을 향해 천천히 손가락을 접던 야왕이, 단 하나만을 남기고는 씨익- 절반쯤 빠진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옳거니, 혜진이 때문이로군."

"...나잇값 좀 하지, 영감."

"원래 늙으면 애가 되는 법인 거 모르나?"

하늘을 향해 곧게 선 그의 가운뎃손가락. 이를 흔들며 낄낄 웃는 야왕을 향해 인상을 찡그린 무명이 말을 이어갔다.

"영감 휘하에 있는 놈들의 힘이 필요하다."

"그 녀석들을?"

"이야기하자면 길지만...."

승현과의 인연.

그리고 역귀를 만들어낸 원흉과 현재의 상황을 간략히 설명하자, 가만히 듣고 있던 야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그래서 이곳을 택한 게로구나. 하기야, 단탈리온 그 녀석의 성격이라면...벌써 주변인들 둘 셋은 목이 날아갔겠는데?"

"그럴 뻔했지. 최수근이라는 사기꾼 영감은 실제로 반쯤 날아갔고 말이야."

애초부터 대강 사정을 알고 있는 야왕으로선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이유였다.

자신의 영역이자 단탈리온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이곳이라면, 충분히 아레스에 대항할 만한 세력을 구축할 수 있을 테니까.

"뭐, 내가 개입하지 않는다는 전제가 붙는다면 그다지 상관은 없다만...."

지금까지 살아남은 울산의 각성자들은 하나하나가 A급 헌터와 비견될 정도의 실력을 지닌 강자들.

치열한 생존의 갈림길에 선 그들이 따르는 것은, 오로지 압도적인 무력을 지닌 야왕뿐이다.

"단탈리온이 관계된 것을 알게 된 이상. 중립을 지켜야 하는 나로서는 네 녀석을 도와줄 수 없다."

그 말인즉슨.

야왕의 협조가 없는 이상, 그들의 협조를 얻기 위해선 그에 걸맞은 힘을 보여줘야 한단 뜻이다.

"보아하니 이전보다 좀 나아진 것 같지만, 네 녀석의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을 텐데?"

"영감의 도움은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내가 할 일도 아니고."

무뚝뚝하게 답한 무명이 고개를 돌리자, 그의 시선을 받은 미하일이 멋쩍게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러니까...제가 할 생각입니다."

* * *

"망할 미하일 자식...내 동의도 없이 이런 짓을 벌여?"

"뭐 어떠냐. 나는 좋은데 말이지. 호텔비도 다 대준다고 하잖냐."

"너야 집이 밀렸으니 그렇겠지만...나는 계속 거기서 살아야 한다고."

뭐,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쁜 건 아닌 것 같지만...그래도 마음에 안 드는 건 안 드는 거다.

'뷜란트도 그렇고...지난번 일도 그렇고...두고 보자. 진짜.'

부드득-

미하일을 떠올리며 이를 가는 나를 향해 낄낄 웃어 보인 장춘식이 경쾌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미하일의 돈으로 드워프들에게 줄 각종 주류를 구매하고, 남는 돈으로 제 몫까지 챙긴 덕에 제법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그나저나 오늘은 로제가 안 보이냐. 맨날 네 뒤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더니."

"따라다닌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뭐, 제피로스에 간다고 하던데."

아침 일찍 찾아온 오신우 클랜장은, 내가 아닌 로제를 제피로스의 사옥으로 데려갔다.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던데. 무슨 일이지?'

이유를 물었지만, 오신우 클랜장은 난처한 표정으로 가만히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하는 수 없이.

정말 내키지 않지만, 이 녀석을 끌고 시내로 나온 거고.

"너는 좀 그만 봤으면 좋겠는데."

"인마, 나도 싫어. 그래도 너랑 다니면 바빌론 씨를 만날 수 있지 않겠냐?"

"바빌론이 악마라는 거랑 네 목을 노리고 찾아왔다는 거. 미하일한테 못 들었어?"

"흥, 그까짓 것쯤이야. 이 사나이 장춘식, 첫사랑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내어줄 수 있다."

"...미친놈."

첫사랑만 오십 명이 넘는 장춘식을 향해 가볍게 욕을 뱉어준 나는, 정면에 보이는 마이스터 협회 건물을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안녕하십니까. 용무가 있어 찾아왔습니다만."

"어서오십...헉...!!!"

곧이어.

안으로 들어선 후 가볍게 인사를 건네자, 안내 데스크에 앉아 꾸벅꾸벅 졸던 안내원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하, 한승현 연금술사님...!!! 맞으시죠? 한 번쯤 꼭 뵙고 싶었는데...!!! 영광입니다! 정말 영광입니다!"

"하하, 네.... 반갑습니다."

과도할 정도로 연신 허리를 숙이는 그녀의 반응에 머쓱해진 나는, 시선을 내리깐 채 가만히 머리를 긁적일 수밖에 없었다.

'여기 오는 내내 이런 식이었지....'

나와 로제가 다른 차원에 머무는 동안, 우리는 각성자들 사이에서 제법 큰 이슈가 된 모양이다.

헌터와 마이스터.

각각의 분야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S랭크 각성자가 새로 탄생한 것만 해도 커다란 화젯거리인데.

'게다가 한 명은 전직 E급 제작자, 한 명은 아예 각성자 라이센스까지 없는 완전 초짜....'

이런 전례 없는 상황에 더해, 우리 둘 다 라이센스 수여식까지 불참해 버렸으니...화제가 안 되는 게 이상하긴 하다.

그래도 동경이 가득 담긴 시선을 보아하니, 다행히 인식이 그리 나쁘게 박힌 건 아닌 것 같다.

"협회장님은 지금 외출 중이신데...혹시 한승현 연금술사님께선 어떠한 용무로 오셨는지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아, 협회장님을 뵈러 온 건 아니고, 클랜 개설 신청을 하기 위해서 찾아왔습니다."

클랜 개설.

굳이 시간을 들여 여기까지 온 이유다. S랭크 라이센스를 취득함과 동시에 자격이 주어졌으니까.

사고가 정지된 듯, 잠시 나를 바라보던 안내원이 허둥지둥 서랍을 뒤적였다.

"클랜 개설 말씀이십니까? 당장 필요한 서류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다만 이를 위해선...실례지만 동행하신 분께서는 등급이 어떻게 되십니까?"

"C급 헌터, 장춘식이올시다."

"C급이라면...."

난처한 듯 나와 장춘식을 바라보는 안내원. 그녀가 이러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분명, 클랜 창립 신청을 위해선 최소 B급 이상의 각성자 둘이 필요했었지.'

여기서 조건을 충족하는 건 나 혼자뿐. 물론, 이를 모르고 온 건 아니다.

"아, 이 친구는 그냥 한가해서 절 따라온 거니까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한가하다니. 바쁜 몸이시다."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장춘식을 외면한 뒤, 안내원에게 이화수 협회장님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직접 방문 대신, 대리인이 라이센스 카드를 제출해도 상관없다고 하던데. 맞습니까?"

듣자 하니 거의 잊혀진 규정이라고는 하지만 말이지.

이유는 간단했다.

신분증과 마찬가지로. 아니, 그보다 더 악용될 여지가 다분한 라이센스 카드였기에.

본인이 직접 방문했으면 방문했지, 이를 대리인에게 맡기는 각성자는 없으니까.

"그런 규정이 있긴 합니다만...관련 부서로 안내해 드릴까요?"

"굳이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서류만 간단히 작성하면 되는 일인걸요."

"그럼 일단은 사본을 복사해야 하니, 라이센스 카드를...."

"받으시죠."

"여, 영광...아니, 감사합니다!"

검은 금속 테두리로 장식된 카드. S랭크 각성자의 신분증을 받아든 안내원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잠깐 넋이 나간 듯 손을 덜덜 떨던 안내원이 뒤늦게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한 장뿐인데...."

"아, 제 것도 드려야 합니까?"

"그게 무슨...히익!"

곧이어, 시선을 내려 카드의 내용을 확인한 안내원이 의자를 박차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콰앙-

급하게 일어난 나머지, 무릎과 책상이 부딪치며 요란한 소리가 로비에 울려 퍼졌다.

"...괜찮으십니까?"

"예! 예! 괜찮습니...그런데, 여기에 적힌 로제 님이라면...!!!"

새하얗게 질린 얼굴.

어느 정도 놀랄 건 예상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얼마 전의...그, 그럼 S급 각성자 두 분이 클랜을...?"

"그렇습니다."

"...!!!"

충격을 크게 받은 모양인지, 연신 덜덜 떠는 그녀를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건넸다.

"아, 클랜명은 대성(大星)으로 신청 부탁드리겠습니다."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175화

어느 따스한 봄날의 늦은 오후.

헌터넷에 올라온 한 줄의 속보에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다.

- [속보] S급 마이스터 한승현, 신규 클랜 대성(大星) 창립.

┗ㄹㅇ?

┗한승현이면 얼마 전에 그 사람 아니야? 수여식 불참한 S급 마이스터?

┗맞음. E급 출신이라던데? 한번에 몇 단계를 뛰어오른 거냐?

┗다섯 단계네ㅋㅋㅋㅋ미친거 아닌가? 저게 가능한 일임? 게다가 E급 제작자 라이센스를 따기전엔 그냥 짐꾼이었다면서?

┗그게 일 년 전이라더라.

┗그리고 몇 달 전에 암시장에 나타났던 것도 저 사람이고ㅋㅋㅋ 개쩌네. 진짜 어떻게 한자리 안 나려나.

┗S급 마이스터가 클랜장이면 장난아니겠는데ㅋㅋㅋ전국 제작자들 다 저리로 몰릴 듯.

┗국내에서 협회 빼고 S급 마이스터가 운영하는 단체는 저기가 최초 아님?

┗그렇지. 저 정도쯤 되는 제작자들은 대부분 프리랜서로 활동하니까. 이화수 협회장은 예외지만.

┗와...인간승리네 완전. 그동안 자기 재능을 몰랐던 건가?

┗부럽다.

┗나도.

정작 본인은 모르는 사실이지만, 댓글 여론의 대부분은 승현에게 호의적인 반응이었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헌터넷의 이용자는 전체 각성자의 90%를 차지하는 D, E급이 대부분이었기에.

밑바닥에서 대번에 국내 최정상에 오른 승현을 동경하게 된 이들이 다수 존재했기 때문이다.

물론, 인터넷 여론이 늘 그렇듯 반대쪽 의견도 존재했다.

정확히는 순식간에 신분이 뒤바뀐 승현을 향한 시기 섞인 댓글들이긴 했지만.

┗E급에서 1년만에 S급? 지나가던 개가 쳐웃겠네ㅋㅋㅋ요즘 마이스터 협회가 자금난이라던데 돈 먹인 거 아님?

┗알아보니까 저놈 애비도 한 십 년 전쯤에 국내에서 엄청 유명했더만. 한기호라고 아는 사람 있음?

┗나 앎. 그땐 헌터넷이 없어서 아는 사람만 아는 제작자였는데 아마 S급이었을걸? 지금은 죽었다고 들었는데.

┗ㅋㅋㅋㅋ죽은 애비 후광으로 S급 딴 모양이네ㅋ 이화수 협회장 나이대면 딱 그 시절일텐데

┗신경ㄴㄴ어차피 저런 새끼들이 세운 클랜 금방 망함. S급 마이스터 혼자서 굴리기엔 한계가 있지. 진짜 S급인지도 의문이지만.

┗하긴ㅋㅋ부모빨로 S급 따냈으면 그냥 닥치고 프리랜서로 지원금이나 타 먹을 것이지 뭔 클랜을 만든다고 설쳐?

질투에 눈이 먼 몇 명의 의견이 게시판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대기 시작했다.

┗님들 저분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렇게 말하심? 내가 봤을 땐 충분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자격 같은 소리하네ㅋㅋㅋS급이 뉘집 개이름임? 1년만에 뚝딱 달게?

┗들어보니까 테스트도 이화수 협회장님이 직접 보셨다고 하시는데. 그분이 거짓말을 하시겠음?

┗이 새끼 제피로스 마크달고있네ㅋㅋㅋ

┗제피로스랑 한승현이랑 친하다매

┗지인이네.

┗지인이야ㅋㅋㅋㅋㅋ

┗본인인가?ㅋㅋㅋㅋ

승현과 승현을 옹호하는 의견을 사정없이 비난하는 댓글들.

소수의 인원이지만, 상대를 깎아내리는 데에 진심인 이들은 순식간에 여론을 헤집어 놓았다.

┗그러고 보니 기사에 나온 건 꼴랑 혼자잖아. 보아하니 돈 좀 쥐어주고 C급, B급 헌터 몇 데려다가 만든 클랜 같은데ㅋㅋ

┗저기랑 뭐 할 생각하지 마셈. 백 보 양보해서 한승현이 S급이라고 해도 밑에 있는 놈들이 꼴랑 B급이면 어디다 쓸거임ㅋㅋ

┗꼴랑 B급? 라이센스 인증해봐. 한승현 발끝에도 못 미치는 새끼들이ㅋㅋㅋ

┗라이센스 안 까면 말도 못 함? 축구선수 욕하면 대신 뛰라고 할 새끼네ㅋㅋㅋㅋ

┗ㄹㅇㅋㅋ그리고 빨거면 차라리 로제를 빨지. 황정호 협회장이 아예 테스트 영상까지 깔끔하게 공개했더만.

┗나 그거 봄. 겁나 예쁘던데ㄷㄷ 배우인줄 알았어.

┗실력도 장난 아니더라, 대번에 시험장 반으로 가른 거 봤음? 거기다 화면 너머로도 공기 달라진 게 보이더라.

┗클랜장한테 들어보니까, 그게 영역이라는 개념이라더라. 마이스터든 헌터든 S급 각성자들은 다 쓴다던데.

┗한승현 그 새끼는 못 쓸걸?ㅋ 애비 후광은 쓸 수 있어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기사가 올라온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대부분의 댓글이 승현을 비난하고, 로제를 찬양하는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승현에 관한 욕과 허위 사실로 도배된 게시판.

"구역질이 나는군요."

이러한 내용으로 가득한 모니터를 바라보던 단탈리온이 인상을 찡그리던 그때.

"우와...마스터께서 그런 말씀을?"

그의 뒤에서 유령처럼 나타난 바빌론이 가벼운 농담을 던졌지만, 단탈리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의자를 돌려 가만히 그녀를 응시했다.

"어머, 부끄럽게."

온몸으로 그의 시선을 받으며 가볍게 두 뺨을 붉히는 바빌론.

자리에서 일어난 단탈리온이 그녀의 얼굴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앗, 여기는 조금 그런데요. 침대도 없고...커윽."

콰직-

빙글빙글 웃는 그녀의 울대를 틀어쥔 단탈리온. 순식간에 주변 공기가 싸늘히 얼어붙었다.

"왜 그냥 돌아오셨습니까? 그것도 이런 뻔뻔한 낯짝으로."

"갑자기...무슨...?"

"모르는 척하는 겁니까?"

그의 손끝에 매달린 채 허공에 뜬 바빌론의 안색이 점점 파랗게 질려가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은 모습. 하나 단탈리온은 전혀 개의치 않은 듯, 담담히 말을 이어갔다.

"유신애 팀장 말입니다. 사정 봐 줄 것 없이 죽이라고 했을 텐데요? 당신이라면 어렵지 않았을 텐데? 제 명을 무시하는 겁니까?"

현세로 넘어온 이후 처음 듣는 싸늘한 목소리. 단탈리온은 진심으로 그녀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위험하다.'

그의 감정을 형상화한 듯, 순식간에 거센 기세로 집무실을 가득 메워가는 마기.

위기를 감지한 바빌론이 점점 검게 죽어가는 입술에 간신히 힘을 주었다.

"제가 찾아갔을 땐...이미 유신애가...각성한 뒤였습니다."

"각성?"

털썩-

단탈리온이 손아귀의 힘을 풀자, 바닥으로 추락한 바빌론이 목을 부여잡으며 켁켁, 마른기침을 내뱉었다.

"제대로 말씀해 보시죠."

"크읍...그게...얼마 전 마스터께서 보내신 안드라스와의 전투가 계기로 작용한 모양입니다."

"그럴 리가...?"

안드라스.

얼마 전 유신애의 손에 목숨을 잃은 아레스의 4팀장이자, 자신의 충직한 부하를 떠올린 단탈리온이 침묵에 빠져들었다.

'분명, 마지막으로 보았을 땐 아직 한참 부족했던...젠장.'

가만히 생각에 잠겨있던 단탈리온이 뿌드득- 이를 갈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완전한 실패다.

자신의 본질을 되찾은 유신애를 처치해 봐야 아무런 득도 되지 않는다.

육신은 사라질지언정, 그녀의 존재 자체가 소멸될 일은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남은 건 장춘식과 로제, 그리고 그 최수근이라는 자뿐이로군요."

"...일단 파악해 둔 바로는 그렇습니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아직 유신애가 '락샤샤'로 완전히 각성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렇다는 건...스스로 자멸할 확률이 높다는 뜻입니까."

"아마 그럴 겁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짐승'의 소환을...."

딩동-

머뭇거리며 말을 이어가던 바빌론의 귓가에, 책상 위에 놓인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작은 알림음이 들렸다.

반사적으로 모니터를 향해 시선을 돌린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두 줄의 뉴스 속보였다.

- [속보] 신규 S급 헌터 로제, 대성 클랜에 영입 확정.

얼마 전 S급 라이센스를 취득한 로제의 기사와.

- [속보] 대전 서구, 제피로스 사옥 완파.

나찰(羅刹)락샤샤의 현신인 유신애의 자멸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기사였다.

* * *

"이건...."

제피로스의 사옥 내부로 들어온 로제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한 듯, 가만히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응시했다.

은은히 느껴지는 진동.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 보이지만, 계단 너머에선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게...신애 언니의?"

"그렇습니다. 어젯밤부터 상태가 급격히 안 좋아지더니...별안간...."

대략적인 상황을 설명하는 오신우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로제가 자신의 감각을 집중했다.

'마기...인 것 같은데, 미묘하게 다르다.'

익숙한 느낌.

지하에서 흘러나오는 끈적한 기운은 분명한 마기였지만, 구시온이나 시시포스의 그것과는 달리 악취가 느껴지진 않았다.

'왜일까요.'

차이점을 찾기 위해 가만히 자신의 감각에 온 신경을 집중하는 로제를 향해 오신우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일단은 내려가시죠. 두 분 협회장님께서 최대한 힘을 쓰고는 있지만...아무래도 오늘을 넘기기 힘들 것 같습니다."

표정이 잔뜩 굳은 오신우가 앞장서서 제피로스의 지하 연무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일단 다른 클랜원들은 모두 대피시켜 두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부턴 천윤기 선생님의 공간 왜곡 술식이 적용된 장소이니 이 점 숙지해두시기 바랍니다."

그를 따라 로제가 계단을 밟는 순간, 사방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침착하게 지하를 향해 발을 옮긴 그녀의 눈에 들어온 광경은.

"망할, 야! 화수야! 더 조여! 윤기 형님도 속도 좀 내주십시오!"

"이게 한계다 이놈아!"

"영역이 깨진다! 잔말 말고 집중해라!"

완전히 폐허가 된 연무장 내부에서 악을 쓰는 두 협회장과 하나뿐인 팔로 연신 술식을 보강하는 천윤기.

"부족해, 부족하다고!"

그리고.

마치 귀신과도 같은 몰골로 황정호 협회장을 향해 홍아와 애아를 휘두르는 유신애의 모습이었다.

"일단, 얘기는 나중에 해요."

심상치 않은 상황이라고 판단한 로제가 일몰을 뽑았다.

촤르륵-

이를 앞세운 로제가 바람처럼 땅을 박참과 동시에, 황정호의 영역 안으로 들어간 그녀의 발밑에서 강철의 벽이 솟아올랐다.

카앙-

그것을 가볍게 쳐낸 후 바닥에 착지하자, 그녀를 발견한 황정호의 안색이 대번에 밝아졌다.

"오! 자네였구만! 언제 오나 했지! 오신우 저 친구가 확실히 행동이 빨라."

땀과 피로 범벅이 된 얼굴.

S급 헌터 중에서도 방어에 특화된 그답지 않게 난처한 기색이 역력하다.

"한눈팔지 말라고, 이놈아! 위!"

"이크...."

쐐애애액-

소리 없이 그의 목을 노리고 날아든 유신애의 참격.

고개를 숙여 간신히 이를 피해낸 황정호가 발을 구르자, 다시금 솟아오른 강철의 벽이 유신애를 뒤덮었다.

"야, 화수야. 좀 맡기자! 힘 좀 써봐!"

"망할 놈...."

황정호를 죽일 듯이 노려본 이화수가 정신을 집중하자, 유신애를 뒤덮은 강철의 벽이 점점 압축되어 그녀를 짓뭉개기 시작했다.

"후우...숨 좀 돌리겠구만. 한 일 분 정도? 그나저나 잘 왔네. 나 혼자서는 벅차던 참이거든."

"아, 안녕하세요. 협회장님."

이마의 땀을 닦은 황정호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나하고는 상성이 안 좋아. 어떻게 된 건진 몰라도...내 영역 안에서 저렇게 움직일 수 있다니. 직접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군."

황정호의 독자적인 영역이자, 십수 년 전 나타난 초월급 몬스터. 검은 뱀의 일격을 받아낸 강철의 영역.

거기에 더해, 이화수의 광역 형질 변환이 적용되었음에도 유신애는 너무나도 쉽게 이를 파훼해냈다.

"그런데...대체 왜 이런 일이?"

"낸들 아나. 평소에 좀 거칠긴 해도 정신은 멀쩡하던 친구였는데...이런 씨, 벌써 끝인가."

로제의 질문에 대답하며 호흡을 가다듬던 그때.

콰과과광-

자신을 속박한 수십 겹의 강철을 두부처럼 베어버린 유신애가 잔상을 흩뿌리며 이화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어디, 이쪽은 베는 맛이 있나 볼까?"

"아뿔싸!"

당황한 황정호가 자리에서 튕기듯 일어났다. 설마 자신이 아닌 이화수를 노릴 줄이야.

"그만둬!"

다급한 외침에도 이미 반쯤 눈이 돌아간 유신애의 검 끝은 이화수의 지척까지 도달한 상황.

'이렇게 된 이상....'

저지는 불가능. 더 이상의 피해를 막아내기 위해선 유신애를 죽이는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판단을 끝마친 황정호가 유신애를 통째로 부숴버리기 위해 전신의 마나를 끌어 올리려는데.

카앙-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홍아와 일몰이 충돌하며 사방으로 파편이 흩날렸다.

"어어...?"

붉게 물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 토막이 난 홍아를 바라보는 유신애.

그녀를 가만히 응시하던 로제가 일몰을 꾹 움켜쥐었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언니를 원래대로 되돌릴 방법은 알 것 같네요."

"방법을? 어떻게?"

"지난번엔 중간에 그만두었지만, 이번엔 다를 거예요."

스스스슥-

작게 중얼거리는 로제를 중심으로 주변의 색이 전부 모여들기 시작했다.

서서히 흑백으로 물들어가는 공간.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로제가 반쯤 넋이 나간 이화수를 향해 가볍게 손짓했다.

"모두 여기서 나가주세요. 지금 당장."

그와 동시에, 로제의 눈앞에 한 줄의 메시지가 나타났다.

- 사용자의 영역, [모노크롬]을 시전합니다.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176화

"한신애. 이 망할 년."

유신애. 아니, 한신애.

흐릿한 기억 속 어머니는 항상 그녀를 '망할 년'이라고 부르곤 했다.

딱히 의문을 품거나 불만을 가진 적은 없었다.

어린 그녀가 느끼기에도 자신은 결코 정상이 아니었으니까.

사이코패스. 혹은 분노조절 장애. 어쩌면 둘 다.

"뜨거워...."

일곱 살.

어린 나이의 그녀는 하루라도 피를 보지 않거나, 사람을 해하지 않으면 극심한 작열통을 앓곤 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딸아이를 잘못 키우는 바람에...."

홀로 그녀를 키우는 어머니의 허리는 언제나 다른 사람을 향해 굽어 있었다.

모두 그녀가 저지른 일 때문이다.

저명한 아동 심리학자도, 용하다는 무당도. 그리고 TV에 자주 얼굴을 비치던 정신과 의사도.

그 누구도 어린 그녀의 광증을 막아낼 수 없었다.

가세가 점점 기울어가고, 가구가 점점 줄어들고, 세 칸짜리 방이 단칸방으로 바뀌었을 무렵.

"...."

[유가 보육원]

어머니의 곁에서 오랜만에 깊게 잠들었던 열 살의 유신애가 깨어난 곳은, 반쯤 쓰러져 가는 대전의 한 보육원이었다.

'유신애로 이름이 바뀐 것도...그때부터였지.'

잠시 과거를 회상하던 유신애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든 색이 사라지고 흑백으로 변해버린 공간.

그 중심에는 고고하게 일몰을 세운 로제가 있었다.

온몸이 덜덜 떨릴 정도의 압박감. 흥분과 기대감으로 인해 전신의 혈류가 미친 듯이 끓어오른다.

"이게 얼마 만이야...."

그녀를 향해 찢어질 듯한 미소를 입가에 건 유신애가 애아를 비스듬히 세웠다.

"...."

오묘한 로제의 눈빛을 본 유신애가 가볍게 입술을 깨물었다.

현재의 자신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쯤은 충분히 자각하고 있다.

'언제부터였지.'

백야를 습득한 로제와 미친 듯 주먹을 나누었을 때부터였던가.

아니면 얼마 전 자신을 찾아왔던 아레스의 4팀장과의 치열한 전투 끝에 놈의 목을 따버린 이후였던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더 이상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살의와 투지. 그리고 파괴욕과 전의가 그녀의 이성을 집어삼켰다는 거다.

투기에 잡아먹혀 오신우를 공격하던 그 순간, 본능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뜨거운 열기를. 온몸을 불태우는 작열통을. 미칠 듯 몰아치는 갈증을 해소할 방법은 단 두 가지.

"만족할 만큼 죽이거나, 내가 죽거나."

그리고. 한층 더 강해진 로제는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완벽한 먹잇감이었다.

"방심한 상황이었다고 해도, 홍아를 부수다니...제법이구나, 로제야."

스으윽-

유신애가 애아를 쥔 손을 힘껏 휘두르자, 그녀의 의지를 품은 참격이 허공을 격하며 쏘아졌다.

어지간한 각성자는 일격에 목숨을 잃을 정도의 위력.

"아직은 서투니까...좀 다치더라도 이해해 주세요."

담담히 중얼거린 로제가 일몰의 끝자락을 앞으로 겨누었다.

피슝-

흑백으로 물든 허공을 가르는 한 줄기 백광.

반월의 형태로 날아드는 참격을 찢어버린 백야가 유신애의 뺨에 한 줄기 상흔을 남기고 지나갔다.

"호오...."

핏기가 비치는 얼굴을 문지르며 탄성을 내뱉는 유신애.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린 로제가,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재차 확인했다.

- [모노크롬]이 시전됩니다.

- [신규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각성]

- 각성 도중 폭주한 나찰(羅刹) 락샤샤에게 승리할 것.

보상 : 락샤샤의 각성, [???]칭호 획득.

영역의 발동과 함께 나타난 퀘스트.

이것이 가리키는 '락샤샤'는, 유신애를 지칭하는 것이 분명했다.

'신애 언니의 각성이라....'

이미 미하일에게 이야기는 들었기에, 각성에 관한 대략적인 개념은 알고 있다.

'그렇다는 건, 각성을 위해선 지금의 언니를 죽이지 않고 제압해야 한다는 뜻인데.'

이전에 비해 한층 더 흉흉한 기세를 내뿜는 유신애였기에, 성공 여부는 불투명하다.

하지만, 로제는 망설임 없이 이를 수락했다.

단탈리온과 조우한 승현이 쓰러진 이후.

또다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괴로워하던 로제를 가장 잘 챙겨주었던 사람이 유신애였으니까.

"그러니 모른 척할 수는 없죠...대신, 좀 아프실 수는 있어요."

- [모노크롬]이 발동되었습니다!

흑백으로 나누어진 공간. 그 경계선에 선 로제가 일몰을 횡으로 길게 그었다.

동작은 가벼웠지만, 그 결과물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

"...!!!"

모든 것을 찢어발기며 나아가는 극야의 검은 파도.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한층 더 강해진 위력에, 짙은 미소를 입가에 건 유신애가 애아를 등 뒤로 집어 던졌다.

"무기 따위."

곧이어, 그녀의 손가락 위로 서서히 자라나기 시작한 검은 손톱.

마기가 넘실대는 손을 뻗은 유신애가 맨손으로 해일처럼 밀려드는 극야를 움켜쥐었다.

"흐읍...!!!"

짧은 기합성과 함께 두 손으로 극야를 붙잡은 그녀의 팔이 풍선처럼 부풀었고.

콰과과과광-

반으로 찢어진 검은 파도가 각종 방어 술식이 적용된 연무장의 한쪽 벽면을 통째로 날려버렸다.

방어 술식과 함께 적용된 공간 왜곡 술식이 해제되며 서서히 드러나는 콘크리트 벽면.

이를 등지고.

흥분과 통증으로 인해 떨리는 양팔을 부여잡은 유신애가 재촉하듯 다급히 외쳤다.

"이게 끝이니? 더 없어? 다른 걸 꺼내봐. 어서!"

한층 더 붉어진 눈. 입가를 타고 흐르는 침. 숨이 턱 막힐 정도로 한층 더 진해진 광기와 살의.

악마가 연상되는 그녀의 모습이었지만 로제는 태연했다.

"전에도 같은 일이 있었죠."

우우웅-

구시온과의 일전을 떠올린 로제가 가볍게 손을 까딱이자 로제의 영역이 점차 진동하기 시작했다.

심상치 않은 마나의 흐름.

유신애 또한 마기를 끌어 올리며 흥분이 가득 담긴 숨을 몰아쉬었다.

"뭘 보여줄 거니? 백야? 극야? 지금이라면 쉽게 받아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녀의 도발에도 로제는 답하지 않았다.

마치 그녀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무심한 반응. 오히려 애가 타는 건 유신애였다.

"뜨거워...더는 못 참아!!!"

온몸을 집어삼킨 투기를 견디지 못하고 쥐어짜듯 외친 유신애가 발을 세차게 굴렀다.

콰앙- 땅이 움푹 꺼지며 쏘아진 그녀의 신형이 로제를 덮치려던 그때.

"조심하셔야 할 거예요."

척추를 타고 흐르는 서늘한 감각. 본능적으로 허리를 뒤로 젖힌 유신애의 콧잔등 위를 무언가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마기를 주입해 안력을 돋운 유신애의 눈에 그것의 정체가 드러났다.

로제의 영역에서 떨어져 나온 새하얀 빛 한 줄기.

손가락 한 마디 두께의 그것은 소리 없이 방어 술식이 적용된 연무장의 두꺼운 석벽을 관통한 뒤 자취를 감추었다.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기술.

흥미로운 듯 이를 바라보던 유신애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백야?"

비슷하지만 다르다. 지난번에 그녀가 목도한 백야에 비하면 절반 이하의 위력이다.

"흥, 빠르긴 하지만 고작 이 정도로 이 언니를 막을 수...."

코웃음을 치며 다시 로제를 향해 고개를 돌린 유신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말씀드렸죠? 좀 아프실 거라고. 부디 언니가 견뎌내시길 바랄게요."

"...."

수백 발? 아니, 수천 발?

도저히 육안으로는 셀 수 없을 정도의 수량.

모노크롬에서 분리되어 나온 수많은 흑백의 탄환이 로제의 주변을 고요히 맴돌고 있었다.

"그럼, 갑니다."

허공을 가득 메운 탄환들이 일몰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몸을 틂과 동시에.

"이런 씨...!!!"

재빨리 몸을 날린 유신애가 바닥을 나뒹구는 애아를 집어 들었다.

곧이어. 거대한 폭발이 주변 일대를 고요히 집어삼켰다.

* * *

"그래서 말이야. 내가 딱 로제의 영역이 발동된 걸 느끼는 순간에...."

"같은 얘기를 몇 번 하는 거냐. 그만 나불거리고 좀 돕기나 해라. 이걸 언제 다 치우냐."

"하여간 늙은 놈이 성질도 급해요. 나 아니었으면 최소한 이 일대가 통째로 날아갔다니까?"

"그게 어디 네 공이냐. 내 형질변환이 아니었으면 막아낼 수도 없었어."

"흥, 그깟 형질변환."

"그깟? 지금 그깟이라고 한 거냐?"

폐허가 된 제피로스의 사옥 앞에서 연신 투닥거리는 두 협회장.

바쁘게 돌아다니는 구조대와 그들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던 오신우가 참지 못하고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지금 이러실 때입니까?"

두 협회장은 조금 전까지 유신애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태평하다.

게다가, 유신애와 로제가 그대로 건물 잔해에 매몰되었음에도 그들은 신경조차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미리 클랜원들을 대피시켜 둔 덕에 그 둘 빼고는 부상자나 실종자가 없지 않은가. 뭐, 그럼 된 거지."

"맞아. 이게 다 내가 펼친 영역 덕분이라고. 민간인들이 다치기라도 했어 봐라. 상상하기도 싫다."

"그래서, 그 둘은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 이겁니까!"

평소 차분한 오신우답지 않게 잔뜩 흥분한 모습. 조금 전 광경을 떠올린 오신우가 주먹을 꾹 쥐었다.

'아까의 일격은....'

고요히 제피로스의 사옥 전체를 집어삼킨 잿빛의 폭발.

재빨리 각자의 영역을 펼쳐 건물 전체를 감싼 황정호와 이화수의 활약 덕에 다행히도 주변 민간인들에게 피해가 가진 않았지만.

고스란히 이에 휩쓸렸을 것이 분명한 로제와 유신애의 기척은 그 어디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망할, 빌어먹을...."

평소 좀 과하게 잡혀 산단 소리를 듣긴 해도, 언제나 믿을 수 있는 동료이자 평생의 동반자인 유신애다.

그렇기에 연신 초조하게 발을 구르는 오신우를 향해, 이화수가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 둘이라면 안 죽었으니 걱정 말게. 물론 그거랑은 별개로 돈 좀 들겠군. 완전히 무너져 버렸으니 원...."

"돈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죽겠구만. 야, 화수야. 와서 이 형님 허리 좀 주물러 봐라."

"형님 같은 소리 하네. 왜, 자재도 많은데 지게 하나 만들어 주랴? 저기 대둔산에 버려 줘?"

"...."

그런 그녀가 죽었을지도 모르는 이 상황에 한가히 농담 따먹기나 하고 앉아있다니.

아무리 자신의 부탁을 받아 이곳에 온 두 협회장이라지만, 도저히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할 수 없었다.

"두 분 다 지금 상황 파악이...!!!"

그렇기에 막 그들을 향해 소리치려던 그때. 등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다 무슨...상황입니까?"

"이야, 장난 아니네. 습격이라도 받은 건가?"

"협회장님 말씀으로는 인명 피해는 없다고 하시던데."

이화수의 연락을 받고 달려온, S급 연금술사 한승현과 그의 친구 장춘식이었다.

"안녕하십니까, 클랜장님."

"안녕하슈. 지난번에도 뵈었던 장춘식이올시다. 아이고...이걸 어쩌나. 완전히 다 무너져 버렸네."

"...."

자신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 승현과 건들거리며 손을 흔드는 장춘식.

끓어오르는 속을 달래며 그들을 등지던 그때.

와르르- 산더미처럼 쌓인 철근과 콘크리트 더미가 무너지며 두 명의 여성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아오...깔려 죽기 전에 폐병 걸려서 죽겠네. 그나저나 보험처리가 되려나, 이거?"

"언니는 어디 다친 곳은 없어요?"

"크게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은데, 각성이 조금만 늦었으면 죽을 뻔...어?"

로제와 유신애.

흙투성이가 된 채 서로에게 몸을 의지한 그들이 잔해를 걷어내고 나타난 것이다.

"여, 여보...!!!"

여기저기 생채기가 가득하긴 해도 멀쩡한 모습인 유신애를 향해 바람처럼 달려간 오신우.

"뭐야, 나 안 죽었어. 얼씨구? 걱정했나 보네? 평소에 좀 마누라한테 그렇게 해 보지?"

"...."

그런 오신우를 가볍게 껴안아 준 후. 그를 지나쳐간 유신애가 승현을 향해 다가갔다.

"괜찮으신 겁니...마기?"

그녀의 주변을 맴도는 검고 묵직한 기운. 마기를 감지한 승현이 조금 당황하며 고개를 들자.

"이게 얼마 만인지...반갑다!"

철썩-

손바닥으로 그의 등을 때린 유신애가 붉게 물든 눈동자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아, 이제는 존댓말을 써야 하나. 반갑다...요."

그와 동시에, [초월자의 눈]이 발동된 승현의 시야에 유신애의 상태창이 표기되었다.

[유신애]

진명 : 나찰(羅刹) 락샤샤

등급 : 마장(魔將) / 하(下)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177화

"솔직히 악마니 신이니 반신반의했는데 말이야. 진짜 이렇게 될 줄은 몰랐네? 이야. 각성이라니."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뭐, 이 유신애가 그 정도로 죽을...뻔하긴 했네...요."

폐허가 된 사옥의 잔해 위에 앉아 자신의 상태를 점검하던 유신애.

승현의 질문에 어색한 존대로 답하는 그녀의 머릿속엔 조금 전의 상황이 반복적으로 재생되고 있었다.

'모노크롬이라고 했던가?'

흑백의 영역 안에서 쏟아진.

극야와 백야를 잘게 나눈 수천, 수만 개의 탄환은 사정없이 그녀의 전신을 유린했다.

이전의 자신이었다면 수십 번, 수백 번은 죽었을 정도의 위력.

마기로 전신을 보호했음에도 의식이 날아갈 정도의 무자비한 타격이었다.

"게다가, 그게 전력이 아니란 말이지?"

확실했다. 로제는 분명 두 번째 일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첫 번째 일격을 간신히 견뎌낸 유신애가 억지로 흐려지는 의식을 붙잡던 그때.

"이 정도로는...부족했나요."

작게 중얼거린 로제의 일몰이. 흑백으로 나뉜 영역의 경계선을 정확히 가르려던 것을 보았으니까.

패도적인 기운을 품은 채 사방으로 몰아치는 마력의 폭풍.

시시각각 의식을 잃어가던 와중에도 그녀의 본능은 끊임없이 경종을 울려댔다.

'저건...죽는다.'

만일 자신이 조금만 늦게 의식을 잃었더라면...어떤 결과가 나왔을지 등골이 오싹하다.

'뭐, 지금 붙으면 달라질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패배는 패배.

하지만, 딱히 분하진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인 덕인지, 온몸이 저릿할 정도의 충만감을 느꼈다.

게다가 패배를 인정함과 동시에 몸을 끊임없이 불태우던 작열통이 씻을 듯 사라졌기에, 유신애는 이러한 결과에 딱히 불만을 품지는 않았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마음껏 붙어볼 수 있는 상대가 생긴 건 좋지만...애아까지 가버렸구만. 쯧. 좀 살살 다뤄주지."

수명이 다해버린 자신의 두 자루 애검을 떠올린 유신애가 가볍게 혀를 찼다.

원래의 자신이 쓰던 무기와는 조금 거리가 있는 것들이었지만, 그래도 제법 정이 든 탓에 아쉬운 감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동안은 맨손으로 다녀야 하나."

"저기...."

인상을 찌푸리며 마기로 인해 검게 물든 자신의 손톱을 바라보던 그때.

머뭇거리며 그녀를 향해 다가간 오신우가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아니...당신, 어떻게 된 거야? 왜 이런...."

"뭐야, 왜 그래, 갑자기?"

"그게 말이지...."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순 없었지만.

불과 하루 새에 완전히 달라진 유신애의 모습에 강한 이질감을 느낀 것이다.

붉게 번들거리는 눈동자와 한층 더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눈매.

이전과는 달리 창백해진 피부와 180cm에 가까울 정도로 늘어난 신장.

그리고, 그보다 큰 변화는.

'기세가....'

단지 바라만 보았음에도 수십 개의 칼날이 자신을 향해 사정없이 휘몰아치는 느낌.

그녀의 주변에서 흘러나오는 예기 때문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지경이다.

'반응을 보아하니 내 착각은 아닌 것 같은데.'

승현과 로제를 포함한 몇몇 이들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유신애의 근처에 올 엄두조차 내질 못하고 있었다.

"...무서워."

"유신애 팀장님은 대체...."

심지어 그녀의 친동생인 유선아와 팀장급 헌터인 박진성마저도.

뒤늦게 이러한 분위기를 알아차린 유신애가 흙투성이가 된 머리를 긁적였다.

"이런...아직 조절이 익숙하질 않아서 그래. 적응되면 괜찮아질 거야."

조금 누그러진 압박감.

이를 감지한 승현이 가만히 그녀의 진명을 읊조렸다.

"락샤사."

무언가. 아주 희미하게 작은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두 자루의 거도(鋸刀)를 들고 무자비하게 상대를 썰어버리던 투귀이자, 나찰녀(羅刹女)란 이명을 지닌 만마전의 마장.

"그리고 시시포스와의 대척점에 서 있던 초월자이자. 미카엘과 마찬가지로 날 따르던...으음."

더이상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승현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을 들은 유신애가 눈을 빛냈다.

"기억하는구나...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겁...니까? 설마 진명까지 되찾으신 건가요?"

"아직은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불편하시면 그냥 평소대로 하시죠."

"그럴까? 뭐, 네가 허락한 거다? 나중에 두말하기 없기다? 흠흠. 할 얘기가 많지만 먼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유신애가 두 협회장과 천윤기가 있는 쪽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일단 세 분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리고 싶네요."

"뭐, 협회장으로서 당연한 일을 한 거지. 그보다 오신우 저 친구는 조금 더 정진해야겠어. 자네 기척도 못...."

흔히 볼 수 없는 유신애의 정중한 태도에 황정호가 어색해하며 답하던 그때.

유신애가 대뜸 그의 말을 잘랐다.

"두 분 협회장님."

"응?"

"오늘 일은 감사하지만, 입장을 분명히 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A급 헌터 유신애가 아닌, 종말에 개입된 자로서 부탁드리겠습니다."

의미심장한 한 마디.

두 협회장의 표정이 순식간에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갔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글쎄요. 뭐, '그걸' 보셨을 테니 이해는 갑니다만. 이러한 스탠스를 계속 취하면 정말 후회하실 일이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그거? 그거라니?"

의아해하는 천윤기와 입을 꾹 다문 두 협회장.

말없이 그들에게서 몸을 돌린 유신애가 오신우와 승현이 있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다음 날.

어제의 일과, 향후의 방향을 의논하기 위해 유신애 팀장과 오신우 클랜장이 가게에 찾아왔다.

뺨이 쏙 들어간 오신우 클랜장과 어쩐지 얼굴이 반질반질한 유신애 팀장.

"음...확실히 감각이 예민해져서 그런지, 커피가 쓰다. 단 거 없어? 믹스도 괜찮고. 드라마 재밌는 거 안 하나?"

사옥이 무너진 건 안중에도 없는 모양인지.

소파에 앉아 티비를 켜며 느긋이 커피를 홀짝이는 유신애 팀장은 태연히 리모컨을 뒤적거릴 뿐이었다.

'어째 각성 이후에도 성격은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은데.'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원래 저랬던 것 같기도 하고...잘 모르겠다.

오히려 유신애 팀장의 각성 이후, 눈에 띄게 큰 행동의 변화를 보이는 건 오신우 클랜장이었다.

"사장님, 여기 믹스 있습니까? 아니지, 당장 나가서 내가 사 올게."

"당신이 웬일이래? 평소엔 먹고 싶다는 거 있어도 귓등으로도 안 듣더니만."

"그게...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아서. 커, 커피 마시면 밤에 잠이 안 올지도 모르니까, 차라리 다른걸...."

마치 뱀 앞에 선 개구리 같은 모양새다. 슬금슬금 시선을 피하던 오신우 클랜장이 나를 향해 도움의 눈빛을 보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며칠만 여기서 재워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의 눈빛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린 나는,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분명...락샤사한테도 서큐버스의 피가 흐르고 있었지.'

움푹 들어간 뺨과 퀭한 눈동자.

몰골을 보아하니 각성한 유신애 팀장에게 엄청나게 시달린 모양이다.

"제발...."

연신 옷깃을 여미는 오신우 클랜장을 보며 약간의 동정심이 솟아올랐지만, 나는 이들의 대화에 끼어들 수 없었다.

어쨌거나 그건 저 둘이 알아서 해결해야 할 문제니까.

아무튼. 판데모니움의 나찰 락샤사로 각성한 유신애 팀장은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을 꼽자면, 역시 그녀의 주변을 구름처럼 둘러싼 마기.

이유는 모르겠지만, 유신애 팀장의 마기에선 전혀 악취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본인도 이유를 모르니 원....'

어쨌거나 확실한 점은, 마기를 사용한다고 해도 유신애 팀장은 결코 우리의 적이 아니라는 것.

아카샤와의 재회 후 흡수된 기억 일부가 이를 확실히 보증하고 있었다.

"일단은, 제피로스의 사옥이 홀라당 무너져 버린 거, 알지?"

커피가 도저히 입에 안 맞는지, 인상을 찡그리며 찻잔을 내려놓은 유신애 팀장이 천천히 입을 열자.

옆에 있던 오신우 클랜장의 얼굴이 급속히 어두워졌다.

"젠장, 보험사에서도 난처해하던데...이건 우리 쪽 과실이라고...."

"뭐, 아무튼. 그거야 해결될 때까지 여기서 지내면 될 일이고."

"?"

저게 무슨 소리야?

어디서 지내겠다고? 여기?

황당해하는 나를 향해 어깨를 으쓱인 유신애 팀장이 뻔뻔하게 말을 이어갔다.

"설마, 네 부하인 나를 모른 체할 생각은 아니겠지?"

"부하라니, 그런 건...."

"부하? 그게 무슨 소리야?"

"있어 그런 게. 아무튼, 춘식이에게 듣자 하니 여기에 대규모 연금술 단지를 조성한다며?"

모든 것을 알고 있는 표정.

아무래도 장춘식에게 무언가를 주워들은 모양이다.

"어차피 미카엘 돈으로 짓는 거잖아, 우리가 들어온다고 해도 딱히 문제될 건 없고."

"그야 그렇지만...."

"미카엘은 내가 설득할게."

"미카엘? 외국인? 그건 또 누구...."

"나중에 다 설명해 줄 테니까, 당신은 좀 가만히 있어. 억울하면 오늘 밤에라도 날 좀 이겨보던가."

"...어, 언니는 어떻게 그런 얘기를 이런 데서 해요...."

"안 될 건 뭐 있겠어. 어차피 알거 다 아는 다 큰 성인인데."

"미, 미안...."

유신애 팀장의 말에 담긴 뜻을 알아차렸는지, 얼굴을 붉히는 로제와 고개를 푹 숙이는 오신우 클랜장.

"사장님은 꼭 늦게 하십시오. 이건 유부남 선배로서의 진심 어린 조언입...."

"뭐?"

"아니야. 아무것도."

분위기를 보아하니 완전히 휘어 잡힌 가장의 표본이다.

나를 향해 눈치 없는 소리를 내뱉는, 철없는 남편을 한 번 흘겨본 유신애 팀장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아무튼, 그건 천천히 생각하도록 하고. 오늘 내가 여기 온 이유는 그게 아니라...어느 정도 퍼즐이 맞춰졌거든."

잠시 뜸을 들이는 유신애.

생각을 정리하는 듯, 눈을 감은 채 몇 차례 자신의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던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말문을 열었다.

"이화수 협회장이랑 황정호 협회장. 아니지...이화수 아저씨는 아직 확실하지 않은데 말이야."

갑자기 그 두 사람은 왜?

그러고 보니 어제, 유신애 팀장이 그들에게 다가가 무언가 알 수 없는 대화를 나누었던 기억이 난다.

그와 관련된 일일까?

모두의 시선을 느낀 듯, 잠시 머뭇거리던 유신애 팀장이 탄식과 함께 말을 이어갔다.

"후우...7년 전, 아니지. 이제 8년 전인가? 울산 역귀 사건, 기억하지? 아레스와도 깊게 연관된."

"당연한 거 아닙니까?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그때, 황정호 협회장은 단탈리온이 불러낸 시시포스의 '일부'와 접촉했을 거야."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178화

헌터 협회 본부 최상층에 위치한 협회장실.

머리를 감싸 쥔 채 소파에 앉아있던 황정호가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유신애가 대체 어떻게...."

"...."

대답 대신,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든 이화수가 창밖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곧이어 그들을 감싼 무거운 적막.

침묵을 지키는 황정호의 머릿속엔 8년 전 일이 생생히 재생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거였잖아....'

수백의 헌터를 이끌고 역귀의 숨통을 끊던 그 순간. 황정호는 똑똑히 보았다.

하늘이 쩍 갈라지며, 그 틈새로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그리고. 그것과 눈이 마주친 황정호는 직감할 수 있었다.

저건 몬스터 따위가 아니다.

아니, 결코 살아 숨 쉬는 생물이 아니다.

그것은 악의로 똘똘 뭉친. 세상을 그대로 짓뭉개버릴 정도의 분노를 담은 초월적인 무언가였다.

'인외(人外)의 경지에 오른 S급 헌터? 그딴 게 다 무슨 소용이야.'

세상이 너무나도 작아 보였다. 자신의 존재가 개미보다 하찮게 느껴지고,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스스로 숨을 끊고 싶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협회장님!"

"하늘에 뭐가 있길래...."

반쯤 넋이 나간 그에게 헌터들의 외침은 들리지 않았다.

도망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제자리에서 멍하니 그의 존재를 바라보던 그때.

고고히 모두를 내려다보던 놈이, 황정호를 향해 자신의 의지를 전해왔다.

그와 함께 전해진 수많은 정보들.

"알아도 모르는 것이며, 보아도 못 본 것이다."

과거의 일을 회상하던 황정호가 무심코 중얼거리자.

그 안에 담긴 뜻을 알아차린 이화수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시 후방에서 지원을 맡던 그였기에 직접 그 존재를 목격하진 않았지만, 황정호와 오랜 친분을 유지했던 이화수는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S급 헌터를 두려움에 떨게 할 초월적인 존재의 등장과.

당시 참전했던 각성자 전원의 생환을 조건으로 황정호에게 전해진 의지.

이를 다시금 떠올린 이화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제 어찌할 생각이지? 유신애가 알게 된 걸 보니 때가 도래한 것 같고...."

"그 말은, 이제 우리도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거겠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진실을 밝히느냐, 아니면. 비겁한 생존을 이어가느냐.

'우리의 목숨만이 걸린 일이라면 망설임 없이 전자를 택했겠지만....'

자칫 일이 잘못되는 순간, 수많은 인명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선택의 기로에 놓인 두 협회장의 고뇌는 한층 더 깊어졌다.

* * *

"그럼, 부탁한 거 잊으면 안 돼! 우리는 바빠서 이만!!! 조만간 준비가 끝나면 이리로 넘어올게!"

"...."

가게를 나서며 쾌활하게 손을 흔드는 유신애 팀장과 말없이 그녀에게 뒷덜미를 잡힌 채 질질 끌려가는 오신우 클랜장.

"도축장에 끌려가는 소 같네."

"그러게요."

그들을 배웅한 우리는, 다시금 가게로 돌아와 유신애에게 들은 정보를 재취합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당시 B급 헌터였던 내가 역귀 공략에 참여했을 때의 이야기인데...."

락샤사의 힘과 기억을 되찾은 유신애 팀장의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역귀가 퇴치되는 순간, 놈의 육신을 매개체로 만마전과 연결된 통로가 잠시 열렸고.

"아바타 따위가 아니었어. 직접 제가 강림할 세계를 염탐하러 온 거지. 음흉한 새끼 같으니라고."

그 안에서 도사리고 있던 시시포스의 '일부'가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그리고.

당시 공략에 참여했던 헌터들 중 시시포스의 존재를 '자각'할 수 있을 정도의 경지에 올랐던 건.

"말해 뭐해."

당시 최전선에 서 있던 황정호 협회장뿐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황정호 협회장이 시시포스에게 받은 제안이...."

울산의 완전 봉쇄와 기밀 유지.

역귀 공략에 함께 했던 수백 명의 목숨을 보장받는 대신, 황정호 협회장은 이러한 조건을 받아들였던 거였고.

"그런데 시시포스는 왜 울산의 완전 봉쇄를 조건으로 내건 걸까요."

"그건...."

아직은 막연한 추측이긴 하지만.

내게 흡수된 기억과 유신애 팀장의 이야기를 조합해 보았을 때.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한 가지였다.

"완전히 유령 도시가 된 울산에 판데모니움과 연결된 통로를 열기 위해서일 거야."

"통로를? 그것과 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 거죠?"

"그야, 사람의 발길이 끊긴 곳은 마기가 잠식하기 쉬운 환경으로 변하게 되니...잠깐, 그렇다는 건."

로제와 이야기를 나누던 와중, 갑자기 머릿속이 밝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미하일은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아니,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울산의 각성자를 끌어모아 아레스에 대항할 세력을 구축하고, 그곳을 정상화하도록 하겠습니다."

녀석이 떠나기 전 남긴 의미심장한 한 마디.

"세력을 구축하는 것까진 그렇다 치겠는데. 거기서 계속 머물 생각인 거야? 굳이 그 유령 도시에?"

"그렇습니다. 울산이 안정화되면 화이트 나이츠 전원을 그곳으로 불러들일 예정..."

당시엔 대수롭지 않게 지나갔지만, 기억이 돌아온 지금. 녀석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아레스의 시선을 피해 남아있는 각성자들을 끌어모음과 동시에, 판데모니움과 연결된 통로의 개설을 최대한 막아내겠다는 거지."

"그런데, 미하일 씨는 이런 중요한 일을 왜 저희에게 한 마디도 이야기해주지 않은 걸까요. 저희와 함께 가면 한층 더 수월해질 텐데."

"그건...."

로제의 질문에 딱히 대답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솔직히 나 또한 같은 의문을 품고 있었으니까.

'신장급 초월체인 미하일이 이러한 사실을 모를 리 없을 텐데. 규정 때문인가? 아니면...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

이런저런 이유를 떠올려 보았지만, 전부 막연한 추측일뿐.

아직 온전히 기억이 돌아오지 않은 지금으로선 녀석의 의도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좀 어리숙하긴 해도 모자란 놈은 아니니까...뭔가 중요한 이유가 있었겠지.'

과거의 나에 관해서 알고 있는 놈이니까...일단은 알아서 잘 해 내주길 바라는 수밖에.

그보다 미하일의 의도를 대강 짐작한 지금. 신경이 쓰이는 부분은 따로 있었다.

"...단탈리온이 과연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을까?"

그럴 리 없다.

단탈리온이 바보가 아닌 이상, 무려 8년이나 공을 들인 요충지를 아무런 대비 없이 방치해 두었을 리 없다.

"전파가 닿질 않으니 연락을 취할 방법도 없고...뭔가 방법이 있는 건가."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지금 당장 알아낼 방법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불칸 왕국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내가 직접 갈 순 없는 노릇이고.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하나다.

- 뭐야, 한참 분위기 좋았는데.

- 살려줘...그, 그만. 이러다 나 죽어....

잠깐의 신호음 이후.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유신애 팀장의 아쉬움이 가득 묻어나오는 목소리와 반쯤 죽어가는 오신우 클랜장의 절규.

대강 저쪽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

좀 민망한 상황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DQ-874] 채널의 개방까지 남은 시간 : [05:41분]

알림을 확인한 후.

얼굴에 철판을 깔기로 마음먹은 나는, 짐짓 무심한 태도를 유지하며 입을 열었다.

"두 분께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 * *

"우와...!!! 대단하네요. 어떻게 이렇게 빨리...."

그날 저녁.

통로를 넘어 나와 함께 라피스 해변에 도착한 로제가 탄성을 내질렀다.

나 또한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로제와 같은 마음이었다.

'저게 일주일 만에 가능한 거야?'

따지고 보면 일주일도 아니다.

불과 6일.

6일 만에 건설된 해저 터널은 마치 예술품과도 같은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수십 명은 충분히 드나들 수 있는 너비와 반질반질한 대리석이 깔린 바닥.

그리고 중간중간 설치된 받침목에는 섬세한 조각이 새겨져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입구에 세워진, 망치와 곡괭이를 든 채 호탕하게 웃고 있는 두 드워프의 석상을 발견한 로제가 황당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리 봐도 막스 삼촌이랑 볼프강 씨네요. 대체 왜 저걸 저기에...."

"...그러게. 저건 좀 과한 거 아닌가. 우린 그냥 두 명이 지나갈 통로면 충분한데."

황당한 나머지 반쯤 넋을 놓고 그것들을 바라보던 그때.

불쑥, 지면의 모래가 솟아오르며 낯익은 두 명의 드워프가 나타났다.

"어허, 과하다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뭘 모르는구만. 이 녀석들. 이게 바로 예술이란 거다."

"...대체 왜 모래 속에서 나타나시는 겁니까."

얼굴이 불콰하게 달아오른, 막스 삼촌과 볼프강 씨였다.

내 질문에 가슴을 쭉 펴보인 막스 삼촌이 당당한 목소리로 답했다.

"네 녀석들을 기다리며 볼프강 녀석과 한잔 마시다가 깜빡 잠들었다."

"...여기서 말입니까? 분명 여긴 밟으면 터지는 조개랑...광선을 쏘는 게가...."

"응? 그런 것쯤이야 뭐. 다른 놈들한텐 치명적일지 몰라도 우리한텐 좀 따끔한 정도여서 말이지."

"그렇지. 그나저나 그동안 대체 어디에 있다가 오는 건가. 포지드 녀석의 집에도 없는 것 같던데."

맞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마력 폭풍인가 뭔가에 휩쓸려 온 표류자였지.

"그게...."

로제 또한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인지, 난처한 표정으로 우물거리며 시선을 돌렸다.

딱히 변명거리를 생각해 두지 않았는데. 그냥 사실대로 말하는 게 좋으려나?

"응? 왜 말을 안 하나? 말하기 곤란한 곳에 다녀온 건가?"

우리를 향해 질문을 던지는 그들을 보며, 사실을 이야기하기 위해 막 입을 떼던 그때.

"하하, 그간 두 분은 저와 함께 계셨습니다. 저희가 보통 사이여야 말이죠."

등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로제와 나는, 상대를 보며 동시에 인상을 찡그렸다.

"또 너냐. 구시온."

"...."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179화

"판데모니움과 연결된 통로...?"

"그렇습니다. 그게 제가 이곳을 거점으로 삼으려는 이유입니다. 울산에 최대한 많은 각성자를 끌어들여야 통로를 온전히 개방하기 어려워질 테니까요."

무명의 질문에 답한 미하일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강가에 피워놓은 모닥불 위로, 어느덧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해가 보였다.

"벌써 밤이네요."

"또 지긋지긋한 놈들의 습격이 시작되겠군. 망할 영감 같으니, 스승이란 작자가 제자한테 방 한 칸 내주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뭐, 카론 님께서 보이신 반응도 이해는 갑니다. 어쨌거나 그분은 중립을 지키셔야 하니까요. 아저씨의 따님이 휩쓸릴수도 있는 일이고."

카론.

미하일이 무심코 야왕의 진명을 입 밖으로 내뱉자, 가만히 모닥불을 뒤적이던 무명이 인상을 찡그렸다.

"카론이라, 그 썩을 노친네하고는 영 안 어울리는데."

"푸핫, 썩을 노친네라니...아무리 아저씨가 그분과 친밀한 사이라고 해도, 용기가 대단하시네요."

무명의 이야기를 듣던 미하일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뱃사공 카론.

죽은 이를 명계로 인도하는 존재이자 상급 신장인 미하일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초월자.

놀랍게도, 무명은 야왕의 진정한 정체를 알고 난 후에도 변함없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저 그 영감에겐 약간의 재주를 배웠을 뿐이다. 그보다 묻고 싶은 게 있다만."

"?"

연신 폭소를 터트리는 미하일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바라보던 무명이 목소리를 조금 낮추었다.

"왜 사장과 로제에게 통로가 열릴 거라는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았지? 그 둘이 가진 힘이라면 네게 상당한 도움이 될 텐데?"

"뭐, 틀린 말은 아닙니다. 까놓고 얘기하자면 그 두 분이 지금의 무명 아저씨보다 적어도 열 배는 더 강할 겁니다."

"인정하지. 딱히 듣기 좋은 얘기는 아니다만."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오. 아저씨도 마기를 각성하기만 하면, 결코 그 둘한테 뒤처지진 않을 테니까요."

"위로 한 번 더럽게 고맙군. 그보다 내가 묻고 싶은 건 왜 그 둘을 떼어놓고 왔냐는 거다."

미하일에게 그런 목적이 있었더라면, 그들을 데려오는 것이 훨씬 효율적인 방법일진대.

굳이 미하일은 이러한 사실을 그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무명으로선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흐음...뭐, 복합적인 이유가 있긴 한데...확실히 그 부분만 놓고 보면 비효율적이긴 하죠."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턱을 매만지던 미하일이 타오르는 모닥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곳에 오기 전, 제 휘하에 있는 이들을 통해 어느 정도 조사를 해 두었습니다."

"조사?"

"평소에 성질이 급하다는 이야기는 자주 듣지만, 그렇다고 해서 적지나 마찬가지인 이곳에 무턱대고 들어올 머저리는 아니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게 무슨 연관이 있는 거지?"

"이곳의 지배자와 두 분은 상성이 안 좋습니다."

"지배자? 그 영감을 말하는 건가?"

"그럴 리가요. 제가 말씀드리는 건, 단탈리온에게 이곳의 관리를 위임받은 녀석입니다."

지배자라니.

울산이 봉쇄된 이후. 지난 7년간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온 무명조차도 처음 듣는 이야기다.

그의 의문을 알아차린 듯, 미하일이 조금 심드렁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워낙 음습한 녀석이니 모르실 만도 합니다. 카론 님께서는 알고 계셨을지도 모르...아니, 백 퍼센트 알고 계셨겠지만요."

"하기야, 그 영감이 미주알고주알 말해주는 사람은 아니니까."

"그렇습니까? 아무튼, 사장님께서 온전한 각성을 끝마치신 후라면 몰라도...지금 당장 그자를 상대하는 건 무리입니다."

"그만큼 강하다는 건가."

"아뇨. 뭐, 본신이 강림한 것도 아니고...현재의 무력만 놓고 보자면, 두 분이 힘을 합치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왜?"

"성향이 올곧은 두 분과는 그냥 상성 자체가 안 좋습니다. 아주 짜증나는 녀석인 데다...비겁하고...후우. 누님이 있었더라면 좀 더 쉬웠을 텐데."

생각만 해도 골머리가 아픈 듯.

미하일이 사정없이 인상을 구김과 동시에, 두두두- 하는 규칙적인 진동이 그들에게 전해지기 시작했다.

"슬슬 시작될 모양이군요."

"체력을 보존해라. 밤은 내가 책임지도록 하지."

단검을 뽑은 무명이 고개를 들어 상대의 수를 가늠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조금 적은 편이군."

저 멀리서부터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수백 쌍의 붉은 광채.

역귀가 퇴치된 이후.

매일 밤 폐허가 된 울산을 방황하는 존재들이 나타난 것이다.

"안 도와드려도 됩니까?"

"저것들 정도쯤이야. 그보다 네가 말한 녀석이 누구지?"

"로키."

모닥불을 등진 채 단검을 역수로 쥐고 앞으로 걸어가는 무명.

그를 향해, 미하일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장난의 신, 로키입니다."

* * *

"...."

불편하다. 숨이 턱턱 막힌다.

지금 우리가 걷는 이곳이 산소가 희박한 해저 터널이어서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지금 나를 가운데에 두고 양옆에서 신경전을 벌이는 구시온과 로제. 둘 때문이다.

"왜 따라오는 건데?"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는 따로 섬에서 회수할 것이 있다고."

"근데 왜 우릴 따라오는 거냐고. 알아서 혼자 갈 것이지."

"편한 길이 있는데 굳이 그래야 합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 친분도 좀 쌓고. 얼마나 좋습니까?"

"그걸 말이라고 해?"

좌불안석.

싸늘한 로제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대침이 수백 개 꽂힌 바늘방석에 앉아있는 기분이다.

'그나마 로제가 이해해 줘서 다행이지.'

뷜란트를 정상화한 이후.

막스 삼촌이 약속대로 로제의 부모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내가 없었더라면, 벌써 사달이 나도 한참 전에 났을 것이 분명하다.

"흠...로제 님은 아직도 저한테 앙금이 남으신 모양입니다?"

아니, 연신 로제를 도발하는 구시온의 행동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곧 사달이 날 것 같다.

"당연한 거 아니야? 당신이 나라면 어땠을 거 같아?"

"속도 좁으시지. 전부터 몇 번이나 사과를 드렸는데. 게다가 막스 님이 말씀하셨듯 로제 님의 양친이신 베일 님과 멜리사 님은 완전히 소멸하신 것이 아니니...."

"이 뻔뻔한 개자식이!!!"

촤르륵-

결국. 도발을 견디지 못한 로제가 일몰을 뽑았지만, 구시온은 여유로운 태도로 빙글빙글 웃으며 손을 휘저을 뿐이었다.

"집어넣으시죠. 설마 로제 님은 여기가 어딘지 벌써 잊어버리신 겁니까? 겨울숲 부족 출신이신 로제 님께서 수영을 할 줄 아셨던가요."

"그만하지?"

"앗, 죄송합니다. 로제 님과의 대화가 즐거운 나머지...."

보다 못한 내 제지에 구시온이 너스레를 떨며 허리를 꾸벅 숙였고.

으드드득-

로제의 양 뺨에서 흘러나온 어금니 가는 소리가 어두운 터널을 맴돌았다.

'끄응...그냥 데려오지 말 걸 그랬나.'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동행.

이런 상황이 벌어진 이유는, 구시온이 우리를 향해 대뜸 건넨 제안 때문이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통로가 생긴 김에 저도 섬으로 데려가 주십시오."

도저히 속내를 알 수 없는 부탁.

뻔뻔한 낯짝 너머로 무슨 꿍꿍이가 숨어있을지 몰랐지만, 나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무슨 생각으로 날 돕는 건지 알아둬야 하니까.'

[AR-001]채널의 관리자 권한을 넘겨주고, 단탈리온에 관한 정보를 알려주고.

분명, 지금까지 구시온은 나에게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아니, 협조를 넘어선 일방적인 지원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곧이곧대로 놈을 신뢰하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다.

검은 숲에서 시시포스를 등지겠다고 선언한 구시온은, 이런 이야기를 덧붙였었으니까.

'자신의 이상을 이루기 위해선 시시포스보단 내 힘이 필요하다고 했었지.'

즉. 대놓고 날 이용하겠다고 선언한 거나 마찬가지란 거다.

바꾸어 생각하자면, 이용 가치가 떨어지는 순간 내 등 뒤에 칼을 꽂을지 모른다는 뜻이기도 하고.

'아카샤의 규정이란 보험이 있긴 하지만...그게 구시온에게 적용될지는 미지수니까.'

만에 하나.

놈에게 '규정'이 적용되지 않는다면, 지금의 우리로서는 구시온을 저지할 수 없다.

그렇기에 최대한 기회가 닿을 때 놈에 관해 파악해 두어야 하므로. 지금의 불편한 동행을 수락한 것이다.

"섬에서 회수할 게 있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드디어 저에게 관심을 가져주시는 겁니까? 기쁘군요."

"쓸데없는 소리 말고. 회수할 물건이 뭔데?"

"하하, 승현 님께서 관심을 두실 만큼 대단한 건 아닙니다. 그보다 불카누스를 상대할 작전은 생각해 두신 겁니까?"

태연히 말을 돌리는 구시온. 여전히 짜증 나는 녀석이다.

물론, 나는 여기서 물러날 생각이 없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해. 그보다 질문에 좀 답하는 게 어때?"

"까칠하신 모습도 멋지시군요. 단탈리온의 탕녀, 바빌론이 이 자리에 있었더라면 당장에라도 사장님을 껴안았을 겁니다. 음...어쩌면 그 이상을 저질렀을지도?"

"바빌론이라면, 단탈리온의 수하라던...."

"어라? 로제 님도 아시는군요. 벌써 만나신 건가요? 음욕의 화신인 그자가 사장님 같은 분을 보고 그냥 지나쳤을 리 없는데...설마, 벌써?"

"무슨 소리야?"

"뭐, 아무리 적이라고 해도 본능적인 욕구는 거스르기 어려운 거니까요. 좋으셨겠습니다?"

"...묻는 말에나 답하지?"

까드드득-

어깨를 으쓱이며 장난기 가득한 얼굴에 능글맞은 미소를 띠는 구시온.

활활 타오르는 눈으로 놈을 노려보던 로제가 또다시 세차게 어금니를 갈았다.

금방이라도 구시온을 향해 영역을 펼칠 기세다.

곧이어, 슬그머니 뒤로 물러난 놈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휴우...장난이 안 통하는군요. 뭐, 별거 아닙니다. 그저...섬을 구성하는 부속품 같은 건데, 그냥 내버려 두기엔 신경이 좀 쓰여서 말이죠."

부속품?

설마, 불카누스가 끝이 아닌 건가?

자세한 내용을 듣기 위해 녀석에게 추가적인 질문을 던지려던 찰나.

철퍽-

터널 저편에서 진득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그림자가 우리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18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