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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140화

"오셨습니까. 사장님!"

"..."

이른 아침.

손에 쥔 싸리비로 소복이 쌓인 눈을 치우는 미하일과 눈이 마주친 승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미치겠네....'

며칠 전, 자신에게 열변을 토하던 미하일의 모습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사장님의 부친이신 한기호 마이스터님은 어릴 적부터..."

비장한 표정과 눈빛.

승현이 허락해 주기 전까지 절대 물러나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

미하일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어릴 적부터 한기호는 자신의 롤모델이었기에.

시간이 허락하는 한, 그의 마지막 유산인 잡화점에 머물며 그의 정신과 기술을 마음속에 새기고 싶다는 거였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편한 대로 하십시오."

"정말입니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그러한 이유로 먼 곳에서 찾아온 데다, 한국엔 딱히 연고지가 없어 한동안 장춘식의 집에 머물며 가게 일을 돕겠다는 그의 고집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긴 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펜타그램 나이츠의 일원이 잡일꾼을 자처하다니.'

그의 머리로는 도저히 지금의 상황을 순순히 받아들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왕 이렇게 된 김에 그가 알고 있는 제작 기술에 관한 가르침이라도 한 수 받아보려 했으나.

"감히 저따위가 한기호 마이스터님의 아드님이신 사장님을 가르치란 말입니까? 노, 노! 양심이 있지. 절대 그렇게는 못 합니다. 차라리 막일을 시켜주십시오. 여기에 머무는 동안, 청소. 빨래. 뭐든지 다 하겠습니다!"

그런 얘기를 할 때마다 모두가 들으라는 듯 양손을 휘저으며 저런 소리를 지껄여대는지라 결국 그마저도 포기해야만 했다.

'분명 저놈은 날 멕이는 거야. 아버지를 존경한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고, 뭔가 원한 관계가 있는 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뻔뻔하게 저런 소리를 내뱉을 리가 없지.'

즉, 결과적으로 보자면 그저 화려한 이력을 가진 식객 하나가 더 늘어난 셈이다.

'게다가 상대가 상대인지라 마음껏 부려먹을 수도 없으니....'

승현의 현재 입장에서는 미하일이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조용한 거지?"

뭔가 이상했다.

미국의 S급 듀얼 클래스가 이런 시골 촌구석에 방문했음에도, 헌터넷을 비롯해 그 어떤 곳에서도 미하일의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게다가 얼굴까지 드러내고 나타났는데 말이지."

그간 자신의 신상을 숨긴 채 활동하던 백기사의 행적을 떠올린 승현이 가만히 턱을 매만졌다.

"그날 미하일을 본 사람이 몇이었는데...."

소문이 나지 않을 리가 없다.

만일 미하일이 진짜 백기사가 아니라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가 될 법한 사안이었고.

그게 아니라면 대한민국. 더 나아가 전 세계적으로 이슈가 될 법한 사안인데. 이상할 정도로 모든 언론은 그를 언급하지 않고 있었다.

"뭔가 손을 쓴 건지 원...말을 안 해주니 모르겠다. 될 대로 되겠지."

반쯤 체념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던 승현이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곁눈질로 지켜보던 미하일의 입가에 웃음기가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다행이다. 한동안 눈치 안 보고 여기 머물러도 되겠어. 사장님이 귀찮아지지 않게 뒷수습도 잘 해놨으니, 별다른 문제는 없겠지."

며칠 전. 가게에서 자신의 모습을 본 사람들에게 시전한, [광역 인식 저하]를 떠올린 미하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그의 목표는 하나.

때가 되어 승현이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기 전까지, 옆에 머물며 최대한 그를 보좌해야 한다는 것.

"원래는 일 년쯤 더 시간이 지나야 했겠지만...."

우연히 만난 장춘식의 입에서 승현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도저히 흥분을 참지 못한 미하일은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가장 먼저 이곳을 찾아온 것이다.

"뭐, 조만간 다른 녀석들도 알아서 이곳으로 오겠지. 일단 주변인들 중에서 존재가 확실히 드러난 건...영감. 아니, 헤르메스뿐인가."

얼마 전 확인한 최수근의 본질을 떠올린 미하일이 인상을 찡그렸다.

헤르메스.

사기꾼, 도둑. 거짓말쟁이의 신.

승현의 곁에 머물게 두기엔 조금. 아니, 많이 격이 떨어지는 녀석이었지만, 그 덕에 가장 먼저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게 될 것이 확실했다.

"뭐, 그런 녀석이라도 어쨌거나 도움은 될 터이니 내가 함부로 참견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물론 누나가 봤으면...그 자리에서 허리를 반으로 접어버렸겠지만."

험상궂은 누이의 얼굴을 떠올린 미하일이 신경질적으로 빗자루를 움직였다.

"그나저나 가게에 들어온 순서대로 서열이 정해진다고 했었지. 어디 한 번 오기만 해봐라."

그간 펜타그램 나이츠의 막내란 이유로 당해온 수없이 많은 부조리를 떠올린 미하일이, 상급자의 권력을 마음껏 휘둘러 주겠다고 다짐하며 빗자루를 꾹 쥐었다.

* * *

"자, 나는 여덟 끗. 너는 다섯 끗. 내가 이겼지? 차용증 써. 이거 봐, 인생 한 방이라니까!"

"..."

"방금 이백삼십 개를 땄으니까...지금까지 쌓인 게 몇 개더라? 반년 내내 햄버거만 먹어도 되겠네. 크하하하하!"

열 시가 넘어가는 늦은 밤. 문을 닫은 가게 안에 장춘식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퍼져나갔다.

물끄러미 모포 위에 올려놓은 패를 바라보던 로제가 애절한 표정으로 승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월급 가불은 안 될까요?"

"벌써 일주일 치 받아 갔잖아. 다른 건 몰라도 도박 자금은 안 돼."

냉정한 승현의 답변.

어쩔 수 없다는 듯, 로제가 울상을 지으며 옆에 놓여져 있던 책자를 장춘식에게 건넸다.

"...저기, 그럼 차용증 대신 이거라도...가진 게 이거뿐이어서...."

"뭐야, 이건. 어린이 한글 공부? 나 한글 다 뗀 지 오래라 이런 거 필요 없어. 빨리 차용증 써."

"하지만...방금 전 것까지 더하면 벌써 빚이 삼백 개가 넘었는데...."

"억울하면 이겼어야지. 사나이 장춘식, 먹을 게 걸린 일생일대의 승부에선 절대 지지 않는다!"

허리춤에 손을 올린 장춘식이 자신의 우람한 대흉근을 꿈틀거리며 우쭐대듯 말했다.

그 얄미운 모습에 어금니를 깨문 로제가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며 입을 열었다.

"대스승님이라더니...너무해요."

"대스승? 그게 무슨 소리야?"

"...아무것도 아니에요."

일단 당분간은 겨울숲 부족의 존재를 비밀로 해 달라는 승현의 당부를 떠올린 로제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는 울상이 된 얼굴로 자신이 빚진 햄버거의 가격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햄버거 하나에 오천 원이라고 치고, 지금까지 총 삼백 개를 빚졌으니까...."

"어허, 어디 단품으로 계산하려고!"

"서, 설마...세트인가요?"

"당연한 거 아니야? 사나이 장춘식, 감자튀김과 콜라가 없는 단품은 취급하지 않는다!"

"...한 번만 봐 주세요."

"안 돼. 돌아가. 안 봐줘."

모든 걸 잃어버린 얼굴이 된 로제를 향해 의기양양하게 큰소리를 쳐대는 장춘식.

"내가 어지간하면 모른 척해주려고 했는데 말이야."

이를 보다 못한 승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뭐야. 저리 가. 저리 안 가 인마? 어디 외부인이 신성한 섯다판에 끼어들려고...."

당황한 장춘식이 승현을 밀쳐내려 했으나. 승현의 움직임은 그의 손놀림보다 빨랐다.

"잘 봐, 로제. 이 산 그림이 그려진 게 1월이고, 이 새가 그려진 게 4월이지."

"맞아요. 그러니까 둘이 더해서 다섯 끗. 그리고 저건 2월이랑 6월이니 여덟 끗. 제 숫자가 더 낮으니까...제가 진 거예요."

"아니지. 잘 봐. 이거, 다섯 끗이 아니라 독사...읍."

황급히 승현의 입을 틀어막은 장춘식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하하, 괜한 소리 하지 말자, 친구야. 우리가 몇 년 친구냐. 응? 그냥 좀 넘어가 줘라. 어어...이놈 이거, 힘이 왜 이래?"

"치워 인마. 어디 신성한 가게에서 사기도박을 하려고. 그러니까 잘 봐, 이게 제대로 된 족보인데 말이야."

대번에 장춘식의 손을 뿌리친 승현이 로제를 향해 인터넷으로 검색한 족보를 내밀었다.

그리고. 표정을 굳힌 채 진중한 눈으로 이를 읽어보던 로제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지금까지 절 속인 건가요? 1월이랑 2월은 세 끗이 아니라, 광땡을 빼면 가장 높은 알리였네요?"

"..."

"게다가 2월이랑 8월은 열 끗이 아니라 망통이었고."

"..."

"차용증 내놔요."

"...여기."

분노와 배신감으로 가득한 로제의 시선을 애써 피한 장춘식이 품속에서 삐뚤빼뚤한 글이 가득 적힌 종이 뭉치를 꺼냈다.

"그러니까 적당히 해 먹었어야지."

햄버거 한두 개쯤은 사회의 쓴맛을 보여준다 생각하고 모른 척 눈감아주려 했건만.

정도를 모르는 장춘식은 아예 로제의 기둥뿌리를 뽑아갈 생각이었던 것 같았기에, 더 이상 이를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던 승현이 나선 것이다.

"미안...잘못했다."

"쯧, 자업자득이네. 사나이는 무슨, 사기꾼이야 저거 아주."

바닥에 엎드려 로제에게 사죄하는 장춘식을 한심하게 바라보던 승현이 열심히 선반을 닦는 최수근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나저나 영감님은 갑자기 무슨 돈이 생겨서...."

찬란한 빛을 내뿜는 금목걸이와 금팔찌. 그리고 온몸을 휘감은 명품.

그리고 마당 한구석에 설치된, 명품 브랜드의 모노그램 로고가 박힌 텐트.

"저건...또 뭐야. 저딴 걸 살 바에야 그냥 집을 하나 구해서 나가면 되지 않아?"

요 며칠 새 부쩍 늘어난 최수근의 씀씀이를 의아하게 여긴 승현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영감님. 혹시 저 몰래 또 어디서 사기 치고 다니는 거 아닙니까? 협회장님 말씀, 벌써 잊으셨습니까?"

현재 최수근의 수입은 승현에게 받아가는 것 외엔 일절 없었기에, 그거 말고는 도저히 저 씀씀이를 설명할 수 없다.

그런데. 승현의 짐작과는 달리 최수근은 펄쩍 뛰며 이를 부정했다.

"무슨 소리! 사장 자네는 이 최수근을 뭘로 보는 겐가! 이건 다 계약금으로 받은...흠흠. 아무것도 아닐세."

창밖에서 자신을 향해 조용히 하라는 제스쳐를 보내는 미하일을 발견한 최수근이 황급히 말을 바꾸었다.

- 아무것도 묻지 마시고, 지금까지 해온 대로 사장님 옆에서 가게를 잘 돌봐 주십시오.

며칠 전. 장춘식을 피해 도망가려는 그를 붙잡은 미하일이 대뜸 꺼낸 제안이다.

최수근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기에, 당연히 이유를 물으려 했으나.

- 이건, 비밀 엄수와 약속을 지켜주시는 대가로 드리는...그렇지. 계약금 정도로 생각해 주시면 됩니다.

요즘 금전난에 시달리는 최수근이 의문을 갖기엔 미하일이 내민 금액이 너무나도 컸다.

'흐흐. 뭐, 아무렴 어떠냐. 장춘식 저놈도 미하일이 철저히 관리해 준다고 했고. 나는 돈만 받으면 되는 거지.

그렇기에 순순히 그의 제안을 수락한 최수근은, 최근 통장에 불어난 자산으로 인해 안락한 생활을 보내고 있던 것이었다.

"아무튼, 내가 정당한 방법으로 번 돈이니 신경 끄시게나!"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머쓱해진 승현이 손에 걸레를 쥔 채 방방 뛰는 최수근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일에 몰두하려던 그때.

띠리링-

그의 핸드폰이 요란히 울리기 시작했다.

"누가 이 시간에 전화를...유신애 팀장님? 여보세요?"

- 어, 승현이니?

아무래도 이 시간에 전화한 걸 보니,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저한테 전화하셨으니...아니다. 그보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렇게 판단하곤 용건을 묻는 승현에게, 유신애 팀장은 설렘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답했다.

- 4구역 공략 일정 정해졌어. 내일 로제랑 함께 사옥으로 와. 꼭 로제랑 같이 와야 한다! 아, 그리고 오늘 낮에 진성이랑 철규도 깨어났으니까. 문병 선물도 사 오고!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141화

"그러니까, 바로 내일 공략에 들어간다는 겁니까? 왜 그리 급히?"

다음 날.

제피로스의 사옥에서 승현을 만난 유신애의 입에서 조금 뜻밖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그렇게 됐어. 좀 급한 감이 있긴 한데, 균열에서 흘러나오는 마력 파장을 측정해 보니 더 시간을 끄는 건 아무래도 위험할 것 같더라고."

"하기야, 그러고 보니...."

현재 제피로스가 공략 중인, 보문산 균열이 나타난 시기를 가늠하던 승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규모 균열의 유지 기간은 최대로 잡아도 6개월. 물론 예외는 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예외일 뿐이다.

'딱히 준비할 게 없는 나와 로제는 그렇다 치더라도...제피로스 클랜원들은 죽어나겠구만.'

지난번 2 구역 같은 특이 케이스를 제외하면, 저등급 소규모 균열 공략만 해도 짐꾼 대여섯이 동행하는 것이 일방적일진대.

심지어 이번 공략은 그저 그런 균열이 아닌, 무려 7등급 판정을 받은 대규모 균열이다.

그 말인즉슨, 준비해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란 뜻이다.

"일단, 너와 로제. 그리고 나를 비롯한 팀장급 헌터들이 먼저 4구역으로 진입할 거야."

"그러니까, 저희가 선봉으로 진입해 먼저 길을 뚫으면 된다, 이겁니까?"

"그렇지. 본래는 충분한 시간을 두고 정찰대를 보내 내부 지형과 몬스터의 전력을 분석한 뒤 입장해야겠지만...."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로제가 눈을 빛내며 대화에 껴들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붕괴가 임박했으니 충분한 분석이 어렵다는 거군요!"

"역시 대사제님이야! 똑똑해. 예뻐 죽겠어!"

"..."

로제가 손뼉을 탁, 치며 답하자 유신애가 다짜고짜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연신 검집을 향해 움직이는 손. 투기와 욕망으로 이글거리는 유신애의 눈동자.

이를 본 승현이 혀를 내둘렀다.

'...아직도 저 상태인가.'

당장이라도 로제와 전력을 다해 검을 맞대어 보고 싶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참아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에게 안겨 있는 로제 역시 그러한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기에,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띠며 일몰을 향해 손을 가져갔다.

"그...정 원하시면 언니가 원하시는 대로 해 드릴 수도 있어요."

입으로는 마지 못한 듯 답하긴 했지만, 로제 또한 어느 정도 유신애와의 대련을 원하고 있었다.

'시시포스....'

그리고 구시온.

그녀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굴욕을 안겨 준 두 악마. 그들을 넘어서기 위해선 지금보다 한층 더 강해질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점에 있어서 경험이 풍부하고 즉흥적이며, 변칙적인 움직임을 사용하는 유신애는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줄 좋은 교보재였다.

'전력을 보진 못했지만...장로. 아니, 룬드그렌 님과 비슷하거나 약간 우위일 것 같은데. 기술이나 의외성 면에서는 확실한 우위일지도.'

지금껏 그녀가 상대해 온 이들 대다수가 엘븐 아르테스를 사용하는 서리감옥 부족의 하프 엘프들이었기에.

일정 수준을 넘어선 그녀에게 있어 그들의 존재는 실력 증진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록타 씨를 제외하면 다들 너무나도 정직하고 올곧아요. 그에 비해 구시온은....'

예상치도 못한 타이밍에 구시온의 등 뒤에서 튀어나온 마력의 칼날.

만일 승현이 자신을 제지하지 않았더라면, 평생 한쪽 다리를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을 수도 있다.

상부상조라고 하던가.

유신애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자신의 실력 증진과 그녀의 갈망을 동시에 채울 방법이라 판단한 로제가 조심스레 제안을 건네자.

"그래도 목숨을 걸고 하는 건 위험하니까, 생명에 지장이 가지 않는 선에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정말? 진짜야? 언제?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좋으니 지하 연무장을...아니지. 아니야. 끄응...."

화들짝 놀란 유신애가 반색을 띠며 그녀를 쳐다보고는. 이내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로제를 단단히 껴안고 있던 손을 풀었다.

"일단 균열 공략부터 끝내고...젠장. 팀장이 뭐길래...확 때려치워 버릴까?"

"...당신 마음은 이해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런 걸 대놓고 말하는 건 좀 그렇지 않아?"

"어라? 언제 왔어? 당연히 농담이지! 쯧, 하여간. 저런 데서 이상하게 소심하다니까."

어느새 자신의 등 뒤에 나타난 오신우를 발견한 유신애가 피식 웃으며 옆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래서. 진성이랑 철규는 좀 괜찮아?"

"그...포션 덕에 몸은 완전히 회복된 것 같은데. 정신적인 충격이 조금 큰 것 같아."

"충격? 혹시 무언가 잘못된 겁니까?"

"그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당시의 일을 생생히 기억하는 모양입니다."

갑작스레 대화에 끼어든 승현에게 오신우가 무거운 목소리로 답했다.

"아무리 무기에 조종당했다고는 하나, 제 손으로 클랜원들을 위험에 빠트렸다는 죄책감 때문인지...아무래도 한동안은 외부인과의 접촉 없이, 안정을 취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아...."

승현이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 그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클랜원들을 이끌어야 할 팀장급 헌터가 제 손으로 그들을 공격한 셈이니....

게다가 전부는 아니더라도, 오신우에게 어느 정도 그들을 잠식한 무기에 관한 설명은 들었을 터.

* 침식 속도는 사용자가 보유한 마력의 크기에 따라 달라집니다.

3구역에서 획득한 전리품에 공통적으로 붙어있던 옵션을 떠올린 승현이 쓰게 웃었다.

'그렇다면...더더욱 괴롭겠지.'

결국, 자신들이 약한 탓에 더욱 빠르게 마기에 침식당한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렇기에 한동안은 그들과 접촉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한 승현이 오신우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이번 공략은 두 팀장님 없이 진행되는 겁니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사장님과 로제 양이 참여해 주셔서 공략에 문제는 없을 것 같군요. 아, 로제 양은 아직 정식 헌터가 아니니, 만일 이러한 부분에서 문제가 생겼을 시 작성해야 할 서류를 준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서류? 그거 펜으로 싸인하는 그거 맞죠? 드라마에서 봤어요! 한 번쯤 해 보고 싶었는데!"

오신우의 이야기에 반색을 띠며 주머니에서 언제 챙겨왔는지 모를 볼펜을 꺼내는 로제.

"..."

그리고, 빼꼼히 열린 회복실 문틈으로 그들을 지켜보던 강철규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

* * *

오너라.

어김없이 찾아온 환청. 박진성과 함께 회복실에 누워있던 강철규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나는....'

여전히 손에 남아있는 익스플로전 포션의 촉감. 곧이어 자신을 덮친 후끈한 열기. 사정없이 튀는 유리 파편. 클랜원들의 비명.

그리고. 그것들과 함께 느껴지던 열망과 쾌감.

"대체 내가 왜 이러지...."

다시금 오신우의 이야기를 떠올린 강철규가 자신의 단단한 주먹을 꾹 쥐었다.

"악마라고 했던가."

얼핏 듣기에는 허무맹랑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턱대고 부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의 의지를 배신하고 제멋대로 움직이는 육체.

그리고, 클랜원들의 비명과 함께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기묘한 쾌감.

"그건 분명...."

평소의 자신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던 모습이었기에, 어쩌면 정말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에게 조종당한 게 사실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진정하자. 진정해."

물론, 이건 제피로스의 2팀장으로서 절대 품어서는 안 될 감정이다.

자신이 지켜주고, 이끌어 주어야 할 클랜원들에게 상해를 입히고 즐거워하는 팀장이라니.

지난 세월, 제피로스의 팀장으로 지내온 그의 경험과 기억이 그때의 감정을 맹렬히 부정하고 있었다.

"후우...진성이 형은 괜찮은 건가."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돌린 강철규가 회복실 침상에 누워 잠든 박진성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안색이 좋지 않다. 그와 같은 고민에 괴로워하다 하다 잠이 든 걸까.

"아니야. 형은...."

그럴 리 없다.

아니, 애초에 그러한 짓거리를 저지르며 쾌락 따위를 느꼈을 리가 없다.

본래 뒷골목 건달로 살아오다 우연한 기회에 각성자가 된 자신과는 다르게, 박진성은 처음부터 올곧았으니까.

아마 지금도 자신이 상해를 입힌 클랜원들에게 마음속 깊이 속죄하는 중일 것이 분명하겠지.

그에 비해 자신은....

"한심한 놈 같으니라고."

다시금 자신의 감정을 애써 부정한 강철규가 자리에 벌러덩 드러눕던 그때.

오너라.

또다시 지긋지긋한 환청이 그의 귓가를 간질였다.

'뭐야. 대체.'

정말로 정신에 문제가 생긴 걸까.

아니면...지금 이것도 오신우가 이야기한 악마의 농간일까.

확실한 건 지금의 속삭임엔 이전과는 달리, 한층 더 강렬한 유혹이 담겨있다는 거였다.

오너라.

오너라.

오너라.

연이어 울리는 환청.

정체가 불분명한 목소리는 안 그래도 불안한 강철규의 정신을 사정없이 흔들어놓기 시작했다.

'대체 뭐냐고. 씨팔.'

베개로 귀를 틀어막은 강철규가 괴로운 듯 몸부림쳤다.

거대한 그의 체구가 들썩임과 동시에, 그의 체중을 지탱하던 침대가 삐걱대며 비명을 내질렀다.

'진성이 형도...나와 같은 일을 겪고 있는 건가.'

안색이 좋지 않기는 해도, 깊게 잠들어 있는 걸 보니 그렇게 보이진 않았다.

그렇다는 건. 분명 자신에게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뜻인데.

"분명 신우 형의 말로는 한승현...사장님이 날 치료해 줬었다고 했으니...끄으윽."

무심코 승현의 얼굴을 떠올림과 동시에 그에게 찾아온 강렬한 두통.

솥뚜껑 같은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쥔 채 괴로워하던 강철규의 통증이 잦아든 건, 그로부터 약 십여 분이 지난 후였다.

"허억...허억...."

어느새 땀에 푹 젖은 환자복.

거친 숨을 몰아쉬는 강철규의 동공이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곧이어.

제피로스 클랜 공략팀. 오늘 오전 8시 보문산 균열 4구역 진입 예정.

핸드폰을 꺼내 포털 사이트 메인에 뜬 뉴스 기사의 제목을 바라보던 강철규가, 옷걸이에 걸려 있던 만년빙산의 피풍의를 꺼내 걸치고는.

"앞으로 4시간...."

시계를 확인한 뒤, 홀린 듯 문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142화

"여기가...균열?"

이른 아침.

일정에 따라 보문산 균열의 내부로 진입한 로제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름 모를 식물들이 빼곡히 자라난 밀림.

그리고 주변을 가득 메운 후덥지근한 열기.

보스 몬스터가 존재한다는 균열의 4구역은 로제가 상상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균열 내부는 테레비에서 보던 것처럼 동굴 같은 곳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네요."

"그러게. 나도 이런 곳은 처음 와봤어. 그나저나 저긴 아직도 해결이 안 된 건가."

로제와 함께 밀림을 둘러보던 승현이 자신의 뒤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니, 누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철규 형님이랑 진성이 형님이 빠진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게다가, 저 둘을 데리고 공략을 진행하겠다고요?"

"네가 그날 못 봐서 그러는 모양인데...어휴, 내 입으로 직접 말하긴 좀 그렇지만. 쟤들이 철규랑 진성이보다 훨씬 더 세다니까."

"그러니까 저는 못 믿겠다, 이겁니다. 한승현 사장님이 박덕기를 이긴 것도 솔직히 못 믿겠습니다. 그런 대단한 양반이 헌터 라이센스도 없이 대체 뭐 하는..."

"동석아...이제 말대꾸도 하고. 너 많이 컸다?"

"원래 키는 제가 더 컸습니다. 선아 누님. 뭐라고 말 좀 해보십쇼. 이런 일에 철규 형님이 빠지는 게 말이 됩니까? 그깟 일정, 하루 이틀쯤 미루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누님이 어찌 철규 형님한테 그럴 수가 있습니까!"

"..."

"야, 왜 괜한 선아를 걸고넘어져. 너 진짜 이럴래?"

"또 때리시려는 겁니까? 마음대로 하십쇼! 이 고동석, 납득하기 전까진 한 발도 움직이지 않겠습니다!"

벌써 이십 분째.

강철규의 부팀장. 고동석과 한참 언쟁을 벌이던 유신애가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쳤다.

"어휴, 짜증 나. 우린 갈 테니까 따라오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해 인마!"

그리고는 자신들을 지켜보던 승현과 로제에게 다가와 씩씩대며 입을 열었다.

"뭐 저런 게 다 있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철규가 괜찮아질 때까지 균열 공략을 미루자니. 사정도 뻔히 아는 놈이 왜 저러는 거야? 저걸 확 쥐어팰 수도 없고."

같은 클랜원에게 차마 무력을 사용할 순 없었기에.

순전히 말로만 고동석을 설득해야 했던 유신애의 짜증은 하늘 끝까지 치솟아 있는 상태였다.

지금까지 이러한 언쟁을 벌인 이유는 하나.

승현과 로제가 균열 공략에 참여하는 것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강철규와 박진성.

특히 자신이 모시는 강철규가 빠지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는 부팀장 고동석의 강렬한 주장 때문이었다.

"뭐, 고동석 저 친구는 며칠 전의 상황을 자세히 모르니 저러는 게 대강 이해는 되지만...그래도 어쩔 수 없지."

그들의 대화에 끼어든 오신우가 턱을 매만지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러자, 별안간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린 유신애가 도끼눈을 뜨며 오신우를 노려보았다.

"어이고, 이해? 우리 클랜장님께서는 속도 넓으셔라. 밴댕이 소갈딱지인 1팀장은 도저히 이해를 못 하겠네요."

"...왜 괜히 나한테 화풀이를...설득하겠다고 나선 건 본인이면서...."

"시끄러워! 뭘 그렇게 쫑알거려! 빨리 따라오기나 해!"

괜한 불똥이 튄 오신우가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는 쿵쿵대며 앞장서는 유신애를 바라보다가, 민망한 듯 승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조금 답답하시더라도 이해해 주십시오. 원칙대로라면 고동석 부팀장을 제외한 뒤 균열 공략에 들어가야겠지만. 유신애 팀장이 어떻게든 설득해 보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뭐, 클랜 내부의 일이니 저희는 크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만. 대체 왜 저러시는 겁니까? 전리품 배분 때문입니까?"

"그보다는...실적 때문입니다. 본래 이번 균열 공략만 온전히 끝마쳤으면 강철규 팀장은 A급 라이센스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질 수 있었을 테니까요."

"흐음...."

오신우의 설명을 듣고 있던 승현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A급 헌터로 진급하기 위해선 일신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B급 헌터로 활동하며 쌓아 올린 실적도 중요하다고 했었지.'

라이센스 취득 조건을 떠올린 승현이 팔짱을 낀 채 4팀장 유선아와 이야기를 나누는 고동석을 응시했다.

"선아 누님. 신애 누님좀 설득해 주십시오. 철규 형님 사정 뻔히 아시는 분이..."

"언니의 결정인걸. 나도 어쩔 수 없어. 게다가 균열이 붕괴할지도 모르는데, 철규 때문에 일정을 미룰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하지만...철규 형님이 오늘만을 얼마나 오매불망 기다리셨는데. 선아 누님도 너무하십니다!"

강철규를 생각하는 마음이 뚝뚝 묻어나오는 고동석의 외침.

험상궂은 외모와는 다르게, 고동석은 강철규를 진심으로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저게 만약 나랑 춘식이였다면....'

잠깐 머릿속에 장춘식의 얼굴을 떠올리던 승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잘 모르겠다. 친구는 또 만들면 되는 거니까."

"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아무것도 아니야. 그보다 너는 뭔가 알아낸 거 없어?"

"으음...잠시만요."

승현의 말에 담긴 뜻을 알아차린 로제가 자신의 후각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나, 느껴지는 건 습한 공기와 밀림 특유의 짙은 풀 내음뿐.

마기가 발하는 특유의 악취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역시...나도 그래."

승현 또한 인상을 찡그리며 로제의 말에 동조했다.

균열에 들어오면 무언가 단서를 잡을 수 있으리란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지금껏 지나온 모든 구역에선 단 한 줌의 마기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건, 오로지 전리품에만 손을 썼다는 얘기가 되는데...."

마기로 뒤덮였던 검은 숲을 떠올린 승현이 가만히 생각에 잠기려던 그때.

"흥,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두 분이 얼마나 대단한진 모르겠지만, 균열 공략은 헌터의 영역이니 그냥 돌아가십쇼."

옆으로 지나가던 고동석의 가시 돋친 한 마디가 승현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저에게 불만이 많으신 것 같은데. 뭘 어떻게 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됐수다. 중간에 낙오하지 말고, 똑바로 따라오기나 하십쇼. 나 원, 요즘은 개나소나...됐다. 말을 말아야지."

승현의 물음에 바닥에 침을 탁, 뱉은 고동석이 거친 발걸음으로 지나쳐갔다.

곧이어, 그를 뒤따라오던 유선아가 승현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해요. 원래 저런 친구가 아닌데...철규와 관련된 일에는 눈이 뒤집혀서."

"신경쓰지 마십시오. 그나저나 두 분이 아주 각별한 사이이신가 봅니다."

"그렇죠. 둘은 프리 마켓 출신...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갑작스레 대화를 중단한 유선아의 손이 허공을 가볍게 휘젓자, 그녀의 소맷자락에서 생성된 새하얀 빛줄기가 사방으로 쏘아졌다.

그와 동시에.

퍼버버버벙-

작은 폭발음과 함께,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나무 사이에서 불꽃이 일어났다.

"버닝 스파이더...예요. 하나하나는 큰 위력을 갖지 않지만, 여럿이 뭉쳐 달려들면 제법 귀찮아져서...."

점점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자신의 돌발 행동에 관해 설명한 유선아가 민망한 듯 고개를 푹 숙였다.

'확실히 들은 것 그대로네.'

듣기로는, 헌터로서의 실력과 재능은 상위권이지만 언니인 유신애와 달리 사람을 대하는 걸 어려워한다고 하던가.

지금의 모습을 보니 소문들이 과장은 아닌 듯하다. 실력 뿐만 아니라, 성격에 대한 부분까지도.

아마 이미 안면이 있는 승현에게 말을 거는 것조차 그녀에게 있어선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으리라.

'그리고, 내심 강철규 팀장한테 마음이 있다고 했었지. 그거 때문에 말을 꺼낸 건가? 행여라도 내가 강철규 팀장을 나쁘게 생각할까 봐?'

유선아에 관해 쓸데없는 이야기까지 전부 주절거리던 유신애를 떠올린 승현이 속으로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강철규 팀장님이 프리 마켓 출신이라는 겁니까?"

"네? 네. 맞아...요. 원래는 고동석 부팀장과 같이 음. 그러니까. 자선 관련 사업을...."

프리 마켓에서 만만한 이들의 돈을 뜯고 다녔다는 말을 한참 돌려서 하던 유선아가, 결국 할 말을 잃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과거가 어찌 되었건, 지금은 정신을 차렸으니까...너무 나쁘게 생각하진 말아 주세요."

"뭐, 결코 옳은 일은 아니지만 크게 신경 쓰진 않습니다. 당장 제가 데리고 있는 녀석 중에 하나도 똑같은 짓을 하고 다녔으니까요."

"...그런가요? 아무튼. 고동석 부팀장은 그때부터 강철규 팀장을 따르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괜히 사장님에게 심술을 부리는 거예요."

"이해합니다. 저는 크게 신경쓰지 않으니, 너무 그렇게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도...."

유선아가 불안한 듯 무언가 자꾸 말을 덧붙였다.

고동석의 돌발 행동으로 인해, 제피로스와 긴밀한 관계에 있는 승현이 행여라도 강철규를 나쁘게 볼까 걱정하는 것이 분명했다.

"강철규 팀장이 과거에 그런 일을 벌이긴 했어도, 사람 자체는 썩 나쁘지 않은..."

"그렇군요."

"그리고, 조만간 A급 헌터로 올라갈 전도유망한...."

"대단하네요."

처음엔 변호와 인식 개선이 목적인 듯했으나. 어느새 말문이 트인 모양인지 '철규 자랑'으로 변해버린 대화.

이에 건성으로 대답하며 걷던 승현이 걸음을 멈추게 된 건, 코를 간질이는 익숙한 내음 때문이었다.

"이건...."

말없이 그들을 뒤따라오던 로제 또한 승현과 같은 것을 느낀 모양인지, 일몰을 향해 천천히 손을 가져갔다.

"착각인가?"

하지만. 그들의 반응이 무색하게도. 순간적으로 스쳐 간 마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그 흔적을 감추어 버렸다.

곧이어.

"어라...형님. 여긴 어떻게?"

어색한 분위기를 유지한 채, 말없이 걷던 오신우 일행의 앞으로 누군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철규 형...님?"

환자복 위로 만년빙산의 피풍의를 걸친 강철규.

그의 커다란 주먹이 다짜고짜 고동석의 머리를 향해 번개처럼 쏘아졌다.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143화

카가가가강-

유신애의 허리춤에 꽂혀있던 애아가 강철규의 주먹을 막아낸 것과.

승현의 손에서 뻗어 나간 와이어가 고동석의 몸을 세차게 끌어당긴 것은, 거의 동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 새끼가."

충격의 여파로 인해 파르르 떨리는 검신을 바로잡은 유신애가 어금니를 세차게 깨물었다.

강철규의 주먹에 담긴 분명한 살의.

만일 자신과 승현의 대응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고동석의 머리가 통째로 날아갈 뻔했다.

"뭔진 몰라도...지난번이랑 비슷한 상황이다, 이거네."

유신애와 마주한 강철규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연신 흔들리는 눈동자. 얼마나 물어뜯었는지 새빨간 피가 뚝뚝 흐르는 손톱.

잔뜩 더럽혀진 맨발. 만년빙산의 피풍의 안으로 드러난 헐렁한 환자복.

그리고, 평소 조금 무식하긴 해도 클랜원들을 끔찍이 아끼던 그가 내뿜는 진득한 살의.

눈앞에 있는 사내는, 평소 그녀가 아는 강철규의 모습이 아니었다.

'또다시...무언가에 조종당하는 건가.'

행색을 보아하니 그럴 확률이 높았다.

그렇기에 상황을 파악하기보단, 우선 강철규를 제압하기로 마음먹은 유신애가 그를 향해 몸을 비스듬히 기울이던 찰나.

"강철규 팀장.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지?"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오신우가 그녀보다 먼저 앞으로 나섰다.

"..."

대답 대신, 말없이 오신우의 얼굴을 바라보던 강철규가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쐐애액-

곧이어 망설임 없이 오신우의 안면을 향해 쇄도하는 강맹한 일격.

하지만, 상당한 위력이 담긴 그의 공격은 너무나도 허무하게 가로막혔다.

파아앙-

강철규의 발치에서 솟아오른 물기둥이 그의 주먹을 쳐낸 것이다.

곧이어, 전신으로 퍼져가는 은은한 반탄력에 오신우가 입술을 깨물었다.

'진심으로...날 죽이려 한 건가.'

조금 전 고동석에게 내지른 일격으로 확인한 사실이었지만, 강철규의 공격은 하나하나가 진심이었다.

유신애나 자신쯤 되는 헌터였기에 손쉽게 받아낼 수 있었던 것이지. 같은 B급 헌터라도 강철규보다 한참 실력이 뒤떨어지는 고동석은 단 일격에 절명할 수도 있었다.

그와 일 합을 겨룬 유신애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터.

'그러니...내가 나서는 편이 좋겠지.'

자칫 강철규의 살의에 반응한 그녀의 특성이 끝까지 개방되어 버리면, 같은 A급 헌터인 자신조차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재차 혼란한 정신을 바로잡은 오신우가, 여전히 살기를 내뿜는 강철규를 향해 진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클랜장으로서 다시 한번 묻겠다. 강철규 팀장.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지?"

그러나. 오신우의 질문에도 강철규는 대답 대신 불안한 듯 눈알을 굴리며 손톱을 물어뜯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너희가...아니야."

꽈앙-

알 수 없는 중얼거림과 함께, 세차게 땅을 박찬 강철규가 피어오른 흙먼지에 몸을 숨긴 채 빛살 같은 속도로 우거진 밀림을 향해 몸을 날렸다.

"거기 안 서? 야. 강철규!"

재빨리 검풍을 일으켜 흙먼지를 걷어낸 유신애가 황급히 그를 뒤쫓으려 했으나. 강철규의 모습은 이미 울창한 수풀 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야. 한승현. 너는 무슨 일인지 알고 있지? 마기인가 뭔가 그거. 철규가 또 거기에 홀린 거야?"

물끄러미 그가 사라진 자리를 응시하던 유신애가 습관처럼 승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지금까지의 경험상 그녀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대부분 승현이 답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닌 듯했다.

"..."

말없이 와이어를 회수한 승현이 천천히 조금 전의 상황을 되짚어 보았다.

"분명...정화에 성공했을 텐데."

불과 며칠 전 에테르를 사용해 마기를 전부 몰아내었건만.

조금 전 갑작스레 나타난 강철규의 전신에선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진한 마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정화에 실패했다는 건가.'

그럴 리가 없었다.

시스템의 메시지는 분명 승현의 정화가 성공적이었음을 알렸고.

마지막으로 그를 본 오신우의 말에 따르자면, 강철규는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을지언정 이성은 원래대로 돌아온 상태였다고 했으니까.

믿었던 동료이자 신뢰하던 팀장이 망설임 없이 내지른 살수.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아직도 반쯤 넋이 나간 듯 보이는 제피로스의 헌터들을 지켜보던 승현이 로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실프. 불러낼 수 있지?"

지금은 사라진 강철규를 찾는 게 우선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 * *

"..."

길도 나지 않은 수풀을 전속력으로 돌파하던 강철규가 걸음을 멈추었다.

"...여긴. 어디지?"

지금까지 뭘 하고 있었는지.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왜 여기에 있는지. 당최 생각이 나질 않았다.

"분명, 아까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흐릿한 기억 너머로 자신을 향해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던 사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사이사이로 끼어든 낯익은 이들의 모습. 그리고 자신의 주먹을 받아치던 익숙한 칼날.

마치 엉망으로 잘려나간 필름처럼, 그에게 남은 기억들은 모두가 극히 단편적인 것들뿐이었다.

"...모르겠어."

어떻게 된 건진 몰라도, 바로 조금 전의 일도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기에 잠시 기억을 더듬던 강철규가 고개를 휘저었다. 고작 그런 사소한 일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너라.

현재 그의 목표는 단 하나.

그의 귓가를 간질이는 목소리의 주인을 만나야 한다는 것.

그렇기에 목소리의 인도를 따라가던 강철규가 걸음을 멈추었다.

"여긴가."

날카로운 뿔과 송곳니가 돋아난, 거대한 산양이 양각된 낡은 문.

한참 전부터 그를 부르는 목소리는 굳게 닫힌 문 너머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보스 룸? 음? 보스 룸이 뭐였더라? 분명 내가 아는 단어였던 것 같은데."

멍하니 중얼거린 강철규가 무심코 오른손을 들었다. 아릿한 통증과 함께 피가 뚝뚝 떨어지는 엄지손가락이 보였다.

"다친 건가?"

기억에 없는 부상이다.

하지만, 이런 사소한 것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다.

지저분한 발을 이끌고 문 앞에 선 그가, 홀린 듯 쩍 벌어진 산양의 입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콰지직-

그와 동시에 초승달처럼 휜 산양의 눈꼬리.

뼈가 보일 정도로 강철규의 손가락을 세게 깨문 산양이, 마치 젖병처럼 그의 피를 빨아대기 시작했다.

"..."

강철규는 이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분명 통증은 있었지만, 이상하게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산양에게 상당한 양의 피를 빼앗긴 강철규가 서서히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할 무렵.

굳게 닫힌 문이 덜컥, 열렸다.

메에에에-

기쁜 듯한 울음을 내지르는 산양을 뒤로한 채 안으로 진입한 강철규.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널찍한 공동의 천장을 별처럼 수놓은 마석들이었다.

서서히 기억을 잃어가는 그가 보기에도 너무나 아름다운 광경.

홀린 듯 잠시 이를 바라보던 강철규가 이내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어디로 가면 되는 거지."

공동 한구석에 웅크린 거대한 무언가가 보였다. 그로서도 생전 처음 보는 생물이다.

고개를 끝까지 들어도 꼭대기가 보이지 않는 나선형으로 빙빙 꼬인 채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날카로운 뿔.

그리고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 모피처럼 부드러워 보이는 갈기.

녀석에게 알 수 없는 친밀감을 느낀 강철규가 저도 모르게 가까이 다가가려는데.

"오셨습니까?"

저 높은 곳에서 누군가가 그를 향해 말을 걸어왔다.

귀에 익은 목소리다.

상대가 지금껏 그를 부르던 존재임을 알아챈 강철규가 본능적으로 털썩, 땅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아이고, 그러실 필요는 없는데. 지체 높으신 유신애 팀장님께서...응? 유신애 팀장이 아니잖아?"

강철규를 보며 조금 당황한 듯한 사내가 곤히 잠든 녀석의 머리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제법 높이가 있음에도 발소리 하나 없이 바닥에 착지한 사내가 말없이 무릎을 꿇은 강철규의 얼굴을 천천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어라. 기억에 있는 얼굴인데...강...하여튼. 여긴 대체 왜?"

"저는 그저 당신의 부름에 응했을 뿐입니다."

"부름? 그럴 리가 없는데...조건에 맞는 사용자에게만 발동하도록...잠깐. 당신, 설마?"

가만히 강철규의 면면을 훑어보던 사내가 이마를 탁, 쳤다.

"이런...한 명이 더 있을 줄이야. 상상조차 못 했네. 이런 기본적인 실수를 저지를 줄이야."

"..."

"하기야. '문'을 통과한 걸 보니, 유신애와 마찬가지로 자격은 갖추고 있는 것 같은데...대체 왜 일이 꼬인 거지? 한승현 그놈 때문인가?"

어딘지 모르게 안타까워 보이는 사내의 모습. 강철규와 자신의 등 뒤에서 잠든 생물을 번갈아 쳐다보던 사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게다가 반응을 보아하니 유신애에 비하면 한참 격이 떨어지는 것 같고. 이거 큰일인데. 어쩐다...시간도 없는데. 거 참."

"..."

상황을 전혀 모르는 강철규였기에, 사내가 내뱉은 탄식의 의미를 짐작할 순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사내는 지금 자신에게 크게 실망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은 사내를 흡족하게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

그렇기에 강철규는 당연하다는 듯, 상대를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제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는 모르겠으나.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끄응...최선이고 나발이고, 아깝네. 아까워. 이만한 재료를 구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나? 아니야. 그건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고...모르겠다. 일단 한 번 해봅시다. 어차피 당신은 신호탄 역할만 충분히 해 주면 되는 거니까."

혼자서 알 수 없는 소리를 연신 중얼거리던 사내가 강철규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일단 일어나시죠. 꼴을 보아하니 손님 맞을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네요."

강철규가 멍하니 그와 손을 맞잡았다.

사내와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마치 머릿속에 지우개가 든 것처럼 새하얗게 변해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강철규가 서서히 자신의 이름마저 잊어가기 시작하던 그때.

사내가 그를 향해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뭐, 과정이 어찌 되었건 동업자가 되었으니 통성명 정도는 해 두는 게 좋겠죠."

"...제 이름은..."

"뭐, 그런 건 별로 안 궁금하니 뒤로 치워두시고. 제 이름은 단탈리온. 지금부터 당신의 주인이 될 자의 이름이니. 잘 기억해 두시길 바랍니다."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144화

"이제 돌아가도 좋아요, 실프. 고마웠어요."

로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창공을 배회하던 반투명한 비둘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곧이어 주변을 둘러보던 로제가, 저 멀리 보이는 거대한 암석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저기인 것 같네요."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킨 건, 입을 쩍 벌린 산양이 양각된 녹슨 철문.

적지 않은 시간 동안 균열에 출입해 온 제피로스의 클랜원들에겐 낯설지 않은 광경이다.

"저건 아무리 봐도 보스 룸인데. 강철규 팀장이 혼자서 저기로 들어갔단 말입니까?"

"실프가 똑똑히 봤다고 하니, 틀리지 않았을 거예요."

"보스 룸이라...손쉽게 찾아온 건 좋지만, 곧바로 입장하는 건 조금...."

말꼬리를 흐린 오신우가 유신애를 쳐다보았다.

"보스 룸이라 이거지? 철규는 저기로 들어간 거고."

피와 오물을 뒤집어쓴 채 거친 호흡을 가다듬던 유신애가,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정면의 철문을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좀 쉬었다가 들어가는 게 어떨까. 이대로는 좀...."

"안 돼. 이제 막 달아오르려던 참이란 말이야. 지금이 딱 좋아."

물론, 그녀가 뒤집어 쓴 것 중 대부분이 4구역 안에 서식하는 몬스터들의 피와 체액이다.

갑작스러운 강철규와의 일전으로 발동한 투귀의 본능을 완전히 제어하지 못한 유신애가, 그들을 향해 달려드는 몬스터를 전부 혼자서 처리해 버린 것이다.

"당신 마음은 이해하지만...그래도 안 돼. 우린 먼저 입장 조건을 파악하고 있을 테니, 당신은 일단 체력을 회복하고 있어."

"끄응...그렇다면야."

아쉬운 듯 피딱지가 엉겨 붙은 머리를 긁적이던 유신애가 자신의 유틸리티 벨트에서 생수를 한 통 꺼냈다.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그것을 벌컥벌컥 들이키는 모습을 확인한 오신우가 승현을 향해 다가갔다.

"만일 강철규 팀장이 지난번과 같은 상황에 처한 거라면, 혹시 이번에도 원래대로 돌려놔 주실 수 있는 겁니까?"

"그건...."

오신우의 질문에 머뭇거리던 승현이 말꼬리를 흐렸다.

지난번과 달리 강철규의 상태창에는 아무것도 표기되어 있지 않았거니와.

설사 정화가 가능한 상태라 하더라도 현재 승현에게 남은 에테르는 1500 남짓.

정화가 가능하다고 확답을 내리기엔 아슬아슬한 수치다.

"일단 노력은 해 보겠습니다."

그렇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긍정적인 대답을 해 보인 승현이 정면에 보이는 보스 룸의 입구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러니까. 이 안에 이번 일의 원흉이 있다는 건데...."

마기가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철문.

그 위로 양각된 산양의 머리를 바라보던 승현이 조심스레 문의 손잡이를 움켜쥐자. 찌릿한 느낌과 함께 메시지가 나타났다.

조건이 충족되지 않아 통로를 개방할 수 없습니다.

신선하고 맛있는 혈액[0/50mL]

"혈액 50mL? 문을 열기 위해선 피가 필요한 모양인데. 그냥 뿌리면 되는 건가?"

이를 확인한 승현이 작게 중얼거리자, 옆으로 다가온 오신우가 놀랍다는 듯 그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벌써 입장 조건을 간파하신 겁니까? 대체 어떻게? 또 저희가 모르는 아티팩트라도 개발하신 겁니까?"

"어...뭐, 비슷합니다."

상태창과 메시지에 관해 구구절절 설명할 시간이 없다고 판단한 승현이 적당히 얼버무리자, 오신우가 눈을 빛내며 감탄을 내뱉었다.

"역시...대단하십니다. 적어도 두세 시간은 걸릴 일을 한 번에...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조금 전의 그 아티팩트도 저희 클랜에 납품을..."

"신우 형님. 지금은 그러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맞아...요. 형부."

조금 흥분한 듯한 오신우의 행동을 저지한 건, 뒤에서 가만히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고동석과 유선아였다.

"마, 맞아. 그렇지. 지금은 일단 철규의 생사부터 확인해 봐야지. 흠흠."

날카롭게 쏟아지는 그들의 눈살에 머쓱해진 오신우가 머리를 긁적이며 품속에서 자그마한 단검을 꺼냈다.

오랜 헌터 생활로 단련된 그의 직감이 방법을 알려준 것이다.

"50mL라...뭐, 헌혈한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군요."

쓰윽-

날카로운 단검으로 자신의 팔뚝을 길게 그은 오신우가 뚝뚝 떨어지는 피를 빈 포션병에 담기 시작했다.

곧이어 적당한 양이 채워졌음을 확인한 그가 문에 양각된 산양의 입에 그것을 흘려 넣었고.

퉤-

뻐억-

피를 뱉은 산양이 별안간 자신의 발굽으로 그의 안면을 후려갈겼다.

"..."

순간적으로 주변의 습기를 끌어모아 만들어낸 장벽으로 놈의 공격을 막아낸 오신우가 멀뚱멀뚱 승현을 바라보았다.

"그...신선한 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저도 모르겠습니다."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습니다.

눈앞에 나타난 메시지를 확인한 승현이 머리를 긁적였다.

'양이 부족한 것 같지도 않고, 방금 뽑아냈으니 당연히 신선한 피인데. 대체 왜?'

머리를 굴려보아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렇기에 승현이 이번에는 제 피를 뽑아 건네자.

메에에에에-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산양이 승현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퉤, 퉤, 퉤, 퉤-

그리고는 다급하게 입에 머금고 있던 승현의 피를 뱉어내기 시작했다.

"이거...은근히 기분이 나쁜데...."

오신우 때보다 훨씬 더 격한 반응. 마치 오물을 삼킨 듯한 모습에 승현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렇다면, 이번엔 내가 한번 해보겠소."

다음은 고동석이었다.

승현이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이후.

전보단 조금 그에게 호의적으로 변한 고동석이 승현이 쥐고 있던 단검을 받아 들었다.

"이거나 처먹고, 얼른 철규 형님을 내놔라."

뻐억-

피를 흘려넣자 마자 발굽에 얻어맞은 채 몇 바퀴를 데굴데굴 굴러간 고동석.

이후로, 유선아와 로제가 연이어 도전해 보았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메에에에-

황당해하는 그들을 향해 길쭉한 혀를 날름거리는 산양.

마치 자신들을 약 올리는 듯한 모습에 로제가 일몰을 움켜쥐었다.

"그냥 부수고 지나가죠."

"그건 안 됩니다."

새까맣게 물들어가는 일몰을 본 오신우가 황급히 그녀를 제지했다.

문을 부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겠지만, 문제는 그 이후다.

"그런 짓을 하면...보스 룸 자체가 붕괴되어 버릴지도 모릅니다."

다른 때였더라면 모를까.

지금은 강철규가 먼저 진입해 있는 상황이다.

만일 입장 조건을 충족하지 않고 완력으로 문을 부수어버리면, 내부에 있는 보스 몬스터와 함께 강철규 또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란 뜻이다.

"으음...그렇다면야...."

오신우에게 간략한 설명을 들은 로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일몰을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모두가 머리를 맞댄 채 무엇이 문제인지 고민하던 그때.

"뭐야, 아직도 문 하나 못 딴 거야?"

몸에 묻은 오물을 전부 씻어낸 유신애가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걸레처럼 쥐어짜며 나타났다.

"흐음...그러니까. 신선하고 맛있는 피가 필요하다 이거네. 그러니까 인간들아. 평소에 나처럼 관리 좀 하고 살지 그랬어."

"..."

"로제 너도. 어? 맨날 햄버거만 먹고 사니까 콜레스테롤 때문에...쯧. 역시 깨끗한 피를 가진 건 나밖에 없는 건가."

"당신도 맨날 사장님 가게 소파에 누워서 과자만 까먹..."

"말대꾸?"

"죄송합니다."

찔끔한 오신우가 뒤로 물러나자, 단검으로 손끝을 찌른 유신애가 의기양양하게 산양의 입을 향해 손을 들이밀었다.

"그래 봐야 당신도 똑같을...어라?"

그녀의 새빨간 피가 들어갈수록 갈구하듯 점점 크게 벌어지는 산양의 입.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문지기]가 대단히 만족하였습니다!

곧이어 승현의 눈앞에 메시지가 나타남과 동시에, 달칵- 굳게 닫혀있던 문이 활짝 열렸다.

"봤지? 인간들아. 하여간...따라와."

허리춤에 손을 얹은 채 거만한 자세로 보스 룸을 향해 들어가는 유신애.

어쩐지 유신애에게 패배한 기분이 든 오신우와 승현. 그리고 로제가 인상을 찡그리며 그녀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 * *

내부로 진입한 그들이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거대한 공동 이곳저곳에 박힌 마석들이었다.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마석을 본 로제가 입을 쩍 벌리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우와...엄청 예뻐요. 별 같다."

"이게 다 얼마야? 뽑는 것도 일이겠다. 클랜장님. 이거 전부 회수가 가능한 것들입니까?"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균열을 클리어한 후 곧바로 회수팀에 연락을 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대략적인 비용이 아마도...."

주변 풍경의 아름다움에 연신 눈을 반짝이는 로제.

그리고 주변에 널린 마석의 가치를 측정하는 오신우와 승현.

극명히 대조되는 두 부류의 사람들을 본 유신애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쯧쯧...낭만도 없는 놈 같으니라고. 하여간 오신우 저 양반도 그렇고, 한승현 저놈도 그렇고...로제 너도 힘들겠구나."

"네? 뭐가요?"

"아무것도 아니야. 그보다 철규는 어디 있는 거지? 보스 몬스터는?"

천진난만하게 묻는 로제를 귀엽다는 듯 바라본 유신애가 슬며시 주변을 훑었다.

'그런데, 왜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 거지.'

강철규의 모습도, 보스 몬스터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이중 균열 식으로 미로처럼 구성된 통상적인 보스 룸과는 다르게, 그들이 있는 이곳은 거대한 하나의 공동.

탁 트인 곳이었기에, 몸을 숨길 장소 따위는 없었다.

"그렇다는 건, 여기가 아니라는 건가."

"그럴 리가요. 실프는 분명 강철규 씨가 이곳으로 들어왔다고 한 걸요?"

"그렇지만 지금 여기엔 우릴 제외하면 아무도 없는데. 실프인지 하는 그 친구가 너한테 거짓말 한 거 아니야?"

"아니에요! 정령은 거짓말 안 해요!"

"쟹럥은 걔쟷말 안 햬얘~~~"

"또...어라? 저게 뭐죠?"

자신을 놀려대는 유신애를 향해 발끈하려던 로제가 그녀의 머리 위를 가리켰다.

"뭐야. 날 속이려면 아직 십 년은...뭐야, 저게!"

채앵-

눈을 커다랗게 뜬 유신애가 재빨리 쌍검을 뽑았다.

"저건...."

"산양? 염소?"

"생전 처음 보는 몬스터인데...아무래도 저게 이곳의 주인인 것 같습니다."

매에에에─

물리 법칙을 무시하듯, 허공을 찢고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거대한 염소의 머리.

이를 본 승현과 오신우.

그리고 고동석과 유선아 또한 각자의 무기를 꺼내 들던 그때.

"어라? 벌써들 도착하셨군요. 빠르시네요. 예상보다 훨씬 더."

놈의 어깨 위에 앉아있던 사내가 아래로 훌쩍 뛰어내림과 동시에. 그들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거야 원. 기다리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손님 맞이를 위해서 이것저것 준비할 게 많은지라."

"뭐야 당신. 누구야."

"뭐, 그건 차차 알아가면 될 거고."

적의를 줄기줄기 피워올리는 유신애를 향해 어깨를 으쓱해 보인 사내가 등 뒤에 기립한 산양을 가리켰다.

"보스 몬스터. 안 잡으실 겁니까?"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145화

매에에에-

사내의 손짓에 반응한 산양이 한 차례 포효하자.

공동 내부가 우르릉-진동하며 마석이 우박처럼 떨어지기 시작했다.

"너...뭐야."

한 차례 검을 휘둘러 자신을 향해 떨어지는 마석을 가루로 만든 유신애가 사내를 노려보았다.

"글쎄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닐 텐데요."

분명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임에도 이상하게 흐릿한 사내의 얼굴.

"뭐 하는 놈인데 여기...."

그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안력을 집중하려던 찰나.

승현이 그녀의 말을 자르며 불쑥 앞으로 나섰다.

"맞아.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시시한 눈속임은 그만두는 게 어때?"

촤르르륵-

승현이 팔을 쭉 뻗자, 쏜살같이 쏘아진 와이어가 거대한 산양의 목을 한 차례 훑고 지나갔다.

"와우."

사내의 감탄사와 함께 너무나도 허무하게 분리된 몬스터의 머리통.

쿠웅-

흙먼지를 흩뿌리며 바닥에 쓰러진 몬스터의 시체는, 이내 점점 크기가 줄어들며 형태가 변해가기 시작했다.

"..."

이를 본 모두가 입을 꾹 다물었다.

화살촉 같은 꼬리. 박쥐의 그것과 흡사한 날개. 그리고 잿빛으로 번들거리는 피부.

승현의 손에 숨통이 끊어진 그것은, 모두가 흔히 알고 있는 악마의 모습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임프]

근력 : [0.4] 민첩 : [0.2]

체력 : [0.2] 마력 : [0.4]

산양이 나타날 때부터 떠올랐던 상태창을 치워버린 승현이 이번에는 연신 깜빡이는 퀘스트 알림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탐색]

- 한국에서 활동하는 만마전의 초월체를 처치하라.

보상 : 에테르[3000], [???]

이전에 받았던 퀘스트의 안내 문구. 그곳에서 초월체를 발견하라는 조건이 사라졌다.

뿐만 아니라 사내가 나타난 순간부터 공동 안을 가득 메운 마기.

이를 확인한 승현이 그의 정체를 짐작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단탈리온."

"어어? 어? 제 진명을 아십니까? 어떻게? 왜? 벌써?"

대답 대신 승현은 익스플로전 포션을 들이켜며 단탈리온을 향해 다가갔다.

조금 전. 놈을 마주하는 순간부터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 속에서 치솟아 오르는 불꽃.

구시온에게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땐 크게 와닿지 않은 분노가, 놈의 정체를 확신하는 순간 가슴 속에서 산불처럼 번져나갔기 때문이다.

"벌써 자각이 끝났을 리는 없는데. 하기야, 워낙 상식 밖의...이크."

화르르륵-

한껏 달아오른 블레이즈 와이어가 황급히 허리를 뒤로 젖힌 단탈리온의 코앞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거, 참. 성질도 급하시지. 아니, 다짜고짜 왜 이러시는 겁...."

재차 날아드는 블레이즈 와이어를 회피한 단탈리온이 승현을 향해 억울하다는 듯 입을 열던 찰나.

"너 때문에."

우드득-

뱀처럼 궤도를 바꾼 블레이즈 와이어에 휘감긴 단탈리온의 목이 기괴한 방향으로 꺾였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림자 속에서 익스플로전 포션을 대량으로 꺼낸 승현이 단탈리온을 향해 그것을 전부 집어던졌다.

쾅- 쾅- 콰르릉- 꽈앙-!!!

천장을 찌를 듯 솟아오른 불기둥. 열기를 가득 머금은 폭풍이 연이어 공동의 내부를 휘저었다.

하지만, 승현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연기가 채 걷히기도 전에 그림자 속에서 강철의 결의를 꺼낸 승현이 윈드워크를 사용해 번개처럼 단탈리온을 향해 쇄도한 것이다.

"너 때문에 아버지가. 그리고 윤기 아저씨가. 내가."

꽈지직-

방패의 모서리가 단탈리온의 머리통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며 고약한 악취가 퍼져나갔다.

"무명 아저씨가. 그리고 아저씨의 딸이. 수십만의 사람들이."

콰지직- 콰직-

승현은 손을 멈추지 않았다. 오른손으로 블레이즈 와이어를 단단히 움켜쥔 채, 기계적으로 팔을 움직일 뿐이었다.

평소의 승현과는 다른, 감정이 가득 담긴 폭력.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새까맣게 탄 채 곤죽이 되어버린 단탈리온을 발로 걷어찬 승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화풀이는 다 끝나셨습니까?"

"..."

기다렸다는 듯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다시금 발치를 향해 고개를 내린 승현의 눈에 들어온 것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이겨진 임프의 사체였다.

"거 참. 어디서인진 몰라도 저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신 것 같은데."

콰직-

몸을 채 돌리기도 전에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충격.

한 손으로 승현의 목을 잡고 들어 올린 단탈리온이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너. 개같이 못생겼구나."

"이런 상황에서 그런 말씀이 나옵니까?"

눈도, 코도, 입도 흐릿하다.

단탈리온의 얼굴을 바라보던 승현이 기습적으로 가이아 크래셔를 응용해 그의 얼굴을 걷어차려 했으나.

"후우...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주셔야지."

내지른 공격은 너무나도 무기력하게 그의 손에 붙잡혀 버렸다.

"자꾸 제 성질을 건드리시네요. 아...규칙이고 나발이고 그냥 여기서 죽일까."

"지랄하네."

씹어뱉듯 말한 승현이 슬쩍 단탈리온의 뒤편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시선은 충분히 돌려놓은 것 같으니, 로제나 유신애 팀장. 혹은 오신...어?'

없다.

분명 그와 함께 이곳으로 들어왔던 이들의 모습이 보이질 않는다.

"뒤에서 찌르실 생각이었습니까? 동료를 시켜서?"

이미 다 예상하였다는 듯, 단탈리온의 흐릿한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아...보아하니 아직 '영역'의 개념조차 되찾지 못하신 것 같은데...아무리 제가 장난을 좀 쳐두었다고 해도...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저를 이렇게나 실망하게 만드실 줄이야."

"...영역?"

대답 대신 승현을 내려놓은 단탈리온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커윽...."

땅에서 솟아오른 날카로운 바위의 창날이 순식간에 승현의 옆구리를 찢어발기고 지나갔다.

"아프십니까?"

"개자식이...그걸 말이라고...."

부웅-

옆구리가 움푹 파인 승현이 단탈리온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엘븐 아르테스의 기운이 가득 담긴 일격이 그의 턱에 작렬하며, 우드득- 하는 소리가 고요한 공동에 울려 퍼졌다.

"진짜...오늘은 대용품만 마련한 뒤 돌아가려고 했는데. 왜 자꾸 이러실까."

"대용품?"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은 모양인지, 고개를 까딱거리며 태연히 이야기하는 단탈리온.

재미있다는 듯 턱을 매만지던 그가 재차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이 분 말입니다."

공간이 갈라지며, 초점 잃은 눈으로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강철규가 나타났다.

"...강철규 팀장?"

"이런 쓰레기를 유천호의 대용으로 가져가겠다는데, 손해도 보고 욕도 먹으니 억울하려고 하네요. 눈물이 날 것 같습니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냐."

"당신이 모르는 부분까지. 전부."

별안간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 그리고 급격하게 내려가는 주변의 기온.

"솔직히 놀랐어. 유신애를 노리고 파둔 함정인데, 설마 이 녀석이 걸려들 줄이야. 네 짓이지? 이걸 알아차릴 수 있는 놈은, 너뿐일 테니까."

"...유신애 팀장을? 대체 네놈이 왜?"

"네가 죽인 유천호의 공백을 메꿔주기엔 유신애만한 대체품이 없었거든. 뭐, 이 녀석도 그럭저럭 나쁘진 않지만 말이야."

자연스레 하대로 바뀐 단탈리온의 말투.

곧이어, 손날을 꼿꼿이 세운 단탈리온이 승현을 향해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아직은 후폭풍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어지간하면 때가 되기 전엔 직접 손을 안 대려고 했었어."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리는 마기. 고저 없는 목소리로 단탈리온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런데, 내 계획을 틀어버린 걸 보니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 죽이진 않더라도, 손 정도는 써 놔야겠네."

"..."

"그러니까, 나는 계약에 저촉되지 않는 선에서 지금부터 널 망가뜨릴 거야. 쥐도 새도 모르게. 여긴 내 '영역'이고, 이 안의 나는 절대적이니까."

갑작스레 태도가 변해버린 놈에게서 흐르는 적의를 감지한 승현이 다급히 정신을 집중했다.

자신의 모든 공격이 단탈리온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 그가 택할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기 때문이다.

- [동기화]를 시전합니다.

승현의 의식이 쭉 빨려 나감과 동시에 단탈리온의 뒤편에서 그림자가 은밀히 솟아올랐다.

"...어? 이건?"

푹-

흉내쟁이와 동기화한 승현이 보관해 두었던 요르문간드의 어금니를 있는 힘껏 찔러넣었다.

"이야. 유신애 팀장을 꼬시려고 넣어두었던 건데...웬 엄한 녀석이 쓰고 있네? 우와."

물론, 큰 데미지를 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승현이 노린 부분은 바로 단검에 붙은 패시브 효과.

- [고대의 맹독:부패]가 시전됩니다.

- 상대의 저항력이 높아 디버프 적용에 실패하였습니다!

- 마기가 침투합니다. 정화를 위해 에테르가 [200] 소모됩니다.

마기가 가득 담긴 아이템을 직접적으로 사용해서인지, 그냥 쥐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에테르가 소모된다.

"그나저나 이 그림자...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아닌가? 일단 혹시 모르니 이건 압수."

단검에 찔렸음에도 피 한 방울 나지 않는 단탈리온.

신기한 듯 흉내쟁이의 몸에 빙의한 승현을 살펴보던 단탈리온이 팔을 뻗어 요르문간드의 어금니를 움켜쥐려던 찰나.

"그렇게는 안 되지."

자신의 본래 몸으로 돌아온 승현이 와이어를 뻗어 흉내쟁이가 쥐고 있던 단검을 휘감았다.

곧이어 블레이즈 와이어에 묶인 채 승현의 손짓에 따라 빛살처럼 허공을 가르는 요르문간드의 어금니.

- [고대의 맹독:출혈]이 시전됩니다.

- 상대의 저항력이 높아 디버프 적용에 실패하였습니다!

- [고대의 맹독:환각]이 시전됩니다.

- 상대의 저항력이 높아 디버프 적용에 실패하였습니다!

.

.

.

.

"어라? 그림자와 육체를 옮겨다닌 건가? 그럼 이건 네 아바타 같은 개념? 과거에는 없던 기술인데. 새롭게 습득한 건가 봐. 재밌네. 더 발악해 봐."

날카로운 뱀의 어금니가 연신 단탈리온의 몸을 난도질했지만, 승현의 눈에 떠오르는 메시지는 전부 실패를 알리고 있었다.

"..."

"그나저나 지금 네 수준으로 마기가 주입된 무기를 계속 사용하는 건 자살 행위..."

연이어 쏟아지는 공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히 승현에게 다가온 단탈리온이 손을 뻗어 단검을 잡아채려던 그때.

'지금이다.'

눈을 빛낸 승현이 요르문간드의 어금니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 [절삭]이 시전됩니다.

- 마나가 [150]소모됩니다.

푹-

처음으로 유의미한 타격을 입히며 단탈리온의 손바닥을 관통한 요르문간드의 어금니.

그와 동시에, 승현이 애타게 기다리던 메시지가 나타났다.

- [고대의 맹독:마비]가 시전됩니다.

- 잔여 에테르 : [98]

"어? 어어? 뚫렸어?"

손바닥을 시작으로 몸이 서서히 굳어감을 느낀 단탈리온이 흐릿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분명 너는 아직 마기에 저항할 방법이 없을 텐데...? 설마. 자력으로 에테르를 다루는 법을 습득한 거냐?"

"대답해줄 이유가 있나?"

언제 마비가 풀릴지 몰랐기에 길게 끌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그렇기에 마지막 남은 에테르를 쥐어짜 대번에 단탈리온의 목을 향해 단검을 찔러넣으려던 찰나.

"후우...어쩔 수 없네. 뒷감당 때문에 어지간하면 직접 손대는 것만큼은 피하려 했는데."

한숨을 내쉰 단탈리온이 승현을 향해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

- [긴급] 시스템이 사용자를 보호하기 위해 자체 필터링을 적용합니다!

기이한 울림을 머금은 단탈리온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다급한 시스템의 메시지와 함께 삐익- 하는 요란한 소음이 승현의 뇌리를 뒤흔들어 놓았다.

퍼벙- 머릿속에서 연신 작은 폭탄이 터지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극심한 고통으로 몸을 부르르 떠는 승현.

그의 눈앞이 뿌옇게 변하고, 코와 입에선 핏물이 쉴새 없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뭐, 이 정도는 괜찮겠지. 잘 가라. 인간 한승현. 그리고...■■■■"

털썩.

피범벅이 된 채 땅에 무릎을 꿇은 승현의 모습을 힐끗 바라본 단탈리온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강철규에게 몸을 맡겼다.

"인간의 정신으로 제 진명을 들은 이상, 죽지는 않더라도 결코 멀쩡할 수는 없을 테니까."

곧이어, 완전히 무너진 승현을 뒤로한 채 강철규와 함께 공간을 찢으며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146화

"..."

정신을 차린 승현이 처음 발견한 것은,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짙은 어둠이었다.

"여긴...단탈리온은? 로제는,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끝없이 펼쳐진 어둠. 그 한복판에 덩그러니 서있는 건 오직 자신뿐이었다.

계속 이러고 있을 순 없었기에 막 몸을 움직이려던 찰나.

촤르르륵-

별안간 그의 눈앞으로 각양각색의 그림이 그려진 수많은 액자가 나타났다.

"뭐야, 이건?"

그 수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끝없이 늘어선 그림들.

'시스템은.... 반응하지 않는 건가?'

늘 이런 알 수 없는 현상을 설명해주던 시스템이 침묵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천천히 다가간 승현이 그중 가장 가까이에 있는, 화려한 망치를 든 손이 그려진 액자를 매만지자.

까앙-

금속과 금속이 세차게 부딪히는 소리가 그의 고막을 강타했다.

그와 동시에 시야가 하얗게 물들며, 눈앞의 풍경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폐 속을 뜨겁게 달구는 열기. 사방에는 불꽃들이 너울거리며 춤을 춘다.

까앙- 까앙-

어느새 그림에서 보았던 화려한 보석과 금박으로 세공된 망치를 쥔 자신의 오른손.

그것은 승현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능숙한 동작으로 모루 위에 놓인 붉은 금속을 내리치고 있었다.

'윽....'

이를 인지하자 갑작스레 머릿속을 휘젓는 둔중한 통증.

승현이 가볍게 눈살을 찌푸리자, 그 다음 액자에 걸려있던 그림으로 눈앞의 풍경이 바뀌었다.

"...!!!"

"..."

"...…!!!"

이번에는 만면에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는, 화려한 금발의 사내가 나타났다.

이해와 분석을 사용해도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승현을 향해 연신 떠들어대는 사내.

승현 또한 같은 언어로 사내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누군진 모르겠지만 낯익은 얼굴이다.

이를 본 승현이 기억을 더듬으려던 찰나.

"으윽...."

한층 더 강한 두통이 그의 머리를 압박해왔다.

그와 동시에 또다시 전환되는 눈앞의 광경.

이번에는 화려한 갑옷을 걸친 자신의 모습이었다.

다음은 알 수 없는 약재와 도구들을 매만지는 자신. 그리고 다음은....

"...!!!"

장면이 바뀔 때마다 누적되듯 점점 심해지는 두통.

참지 못하고 머리를 감싸 쥔 채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아직도 그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늘어선 액자들이 보였다.

"죽는다..."

이러한 점을 파악한 승현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저걸 전부.

아니, 백 분의 일이라도 보게 되는 순간, 정말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강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를 깨달은 승현이 필사적으로 눈을 감은 채 저항하려 했으나.

"끄아아악-!!!"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연이어 전환되는 풍경들.

머리가 쪼개질 듯한 고통을 견디지 못한 승현이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만...."

수백만 개의 바늘이 사정없이 두뇌를 찔러대는 느낌이다.

머리에 구멍이라도 내면 조금 편해질까.

아니, 아예 터뜨려 버리면 이 지옥에서 해방되지 않을까.

"..."

인간이라면.

아니, 생물이라면 응당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에 대한 의지마저 스스로 포기하게 만들 정도의 고통.

이를 견디지 못한 승현이 품속에서 익스플로전 포션을 꺼내려던 찰나.

귀에 익은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부드럽게 맴돌았다.

그만두거라. 아이야. 그 후로는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단다.

"당신은...?"

고통으로 정신이 흐릿한 와중에도 상대의 정체를 알아차린 승현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만년빙산에서 조우했던 푸른 빛.

구체화된 그것이 주위를 한 차례 맴돌았다.

그러자 눈앞을 스쳐가던 풍경이 다시금 이전의 짙은 어둠으로 돌아오며 지옥 같던 통증이 조금씩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대체 이게 무슨...분명 저는 단탈리온과 만나...."

- ...단탈리온? 역시, 그랬던 거였어. 뱀 같은 놈! 규정을 어기고 이런 짓을 벌일 줄이야....

조금 편안해진 승현이 단탈리온의 이름을 꺼내자. 자애로운 태도를 유지하던 푸른 빛이 고함을 내질렀다.

무언가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승현이 입을 다물자. 그의 옆으로 다가온 푸른 빛이 다시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미안하구나. 아이야. 네게 한 이야기가 아니란다.

"당신은 대체 누구십니까. 그리고, 단탈리온을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게다가 여긴 어디고, 저것들은 다 무엇입니까?"

질문에 답해주고 싶지만...아직은 때가 아니란다.

이야기를 멈춘 푸른 빛이 끝없이 늘어선 액자를 향해 다가갔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여기에 있는 모두가 과거의 '너'라는 것.

"...?"

그리고, 언젠가 때가 오면 온전한 네 자신을 찾아야 한다는 것.

곧이어, 한 차례 자신을 빛낸 구체가 서서히 허공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궁금한 게 많겠지만, 지금의 너에게 해줄 수 있는 이야기는 여기까지란다.

"잠깐만요. 아직...으윽."

승현이 그를 향해 손을 뻗으려던 그때. 다시금 눈앞의 장면이 전환되며 지옥 같은 고통이 엄습해오기 시작했다.

"...!!!"

대못으로 머리를 쪼개는 듯한 격통에 주저앉은 승현의 귓가에, 푸른 빛이 남긴 마지막 한 마디가 또렷이 박혀 들었다.

계약에 묶인 몸이기에 많은 도움을 주는 건 불가능하지만, 길을 인도할 등불 정도는 밝혀주마.

"..."

대답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점점 빨라지는 시점의 전환. 격통에 몸부림치는 승현을 향해 푸른 빛이 마지막 인사를 건넴과 동시에.

만나서 반가웠단다. 아이야. 기회가 된다면 또 보자꾸나.

승현이 걸친 유틸리티 자켓 안에서 무언가가 밝은 빛을 내뿜으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원시 정령 계약서]가 사용되었습니다.

[기억의 정령]이 사용자의 부름에 응답합니다.

* * *

보문산 균열 공략 후 한 달. 오신우 클랜장 측. 추후의 활동 계획은 미정....

소수정예 클랜의 대규모 균열 단독 격파는 이례적인 일...헌터 협회. 제피로스의 클랜 종합 평가에 대해 '조율 중'이라는 답변을 남겨. 긍정적인 평가를 기대해 보아도 좋을 듯.

제피로스는 단 여섯의 인원으로 어떻게 7급 균열을 클리어했나.

제피로스의 숨은 조력자를 향한 관심 급증. 백색의 연금술사. 그는 누구인가.

보문산 균열을 클리어한 지 어언 한 달.

여전히 제피로스의 이야기로 도배된 뉴스 기사들을 훑어보던 유신애가 참지 못하고 손아귀에 힘을 주자.

우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최신형 스마트폰이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성공은 개뿔이 성공이야...망할."

당시의 기억을 떠올린 유신애가 부드득 이를 갈았다.

눈을 뜨는 순간 그들을 향해 들이밀어 진 수많은 카메라.

"공략 성공 축하드립니다!"

"사망자는 없는 겁니까?"

"오신우 클랜장님. 유신애 팀장님.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옆에 계신 여성분과 쓰러진 남성분은 누구신가요? 클랜원 명단에 없는 분이신데. 개인적인...."

연이어 파도처럼 밀려드는 질문. 예상치도 못한 상황에 당황한 건 유신애 뿐만이 아니었다.

거의 동시에 정신을 차린 고동석과 유선아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완전히 닫혀버린 균열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붕괴되지 않고 통로가 닫혔다는 건 균열의 주인이 사라졌다는 것.

그런데,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보스 몬스터를 상대한 기억이 없다.

놈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리는 없으니, 그들이 모르는 새에 무언가 일이 벌어졌단 뜻이다.

게다가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철규 형님이...."

"철규...가 없어."

한 번 닫힌 균열의 입구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다시 열 수 없다는 것.

이를 깨달은 고동석과 유선아가 풀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함께 보스 룸에 입장했던 인원들 중, 가장 먼저 지금의 상황을 파악하고 대처에 나선 것은 오신우였다.

바닥에 쓰러진 승현을 발견한 오신우가 재빨리 그를 향해 다가갔다.

"부상자가 있으니 인터뷰는 나중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물러나 주십시오."

일단은 이 자리를 벗어나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장님의 상태가...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연신 경련을 일으키는 몸과 허옇게 뒤집힌 눈동자. 그리고 코와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심상치 않은 출혈.

'이대로 두었다간 생명이 위험하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승현을 죽게 만들 순 없었기에, 재빨리 피투성이가 된 승현을 들쳐 메고 기자들 사이를 빠져나가려는데.

"오신우 클랜장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단 여섯의 인원으로 균열을 공략한 비결은 무엇이었나요."

먹잇감을 발견한 취재진들이 그를 쉽사리 놓아줄 리 없었다.

"비켜 주십시오. 지금은 부상자 치료가 우선입니다."

"가시기 전에 한 말씀만..."

순간 정적이 흘렀다..

"꺼져."

언제나 정중한 태도를 고수하던 오신우의 입에서 튀어나온 욕설.

"어, 어어...끄윽. 끅."

전신을 압박하는 살기에 그를 향해 마이크를 바짝 들이대던 기자가 바지춤을 적시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지만, 겨우 그 정도로 물러날 기자들이 아니었다.

"지금 비각성자를 위협하신 겁니까?"

"오신우 클랜장님. 공적인 자리에서 이러한 행동은 충분히 논란거리가...."

"꺼지라고. 사람 죽어가는 거. 안 보여?"

뒤이어 상황을 파악한 유신애가 홍아와 애아를 뽑아 들며 흉흉한 기세를 내뿜고 나서야, 상황이 정리되었다.

"후우...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그로부터 한 달.

한 달이 지났음에도, 그들의 의문은 해소되지 않았다.

"분명 처음 보는 놈이 나타났고...이어서 보스로 보이는 놈이...."

모두의 기억은 딱 거기까지였다.

장비했던 바디캠을 돌려 보아도 재생되는 건 검은 화면뿐.

마치 귀신에라도 홀린 듯한 기분에 유신애가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게다가 철규는...죽은 건지...산 건지...."

홀연히 나타났다 사라졌던 강철규. 평소 그를 잘 따르던 유선아와 고동석은 애써 그가 가짜 강철규일 거라며 위안을 삼는 듯했지만.

직접 부딪혀 보았던 유신애는 알 수 있었다.

"녀석은 진짜였어."

그렇다는 건, 균열이 소멸함과 동시에 강철규 또한 그 여파에 휩쓸려 사망했을 확률이 높다는 것.

팀장이기 이전에 오랫동안 봐온 동생을 잃었음을 직감한 유신애가, 북받치는 감정을 추스르며 관자놀이를 매만졌다.

"후우...오늘은 좀 괜찮으려나."

멍하니 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새 회복실 앞에 도착했다.

달칵- 문을 열고 들어가자 죽은 듯 누워있는 승현의 모습이 보였다.

"오늘은 좀 어때?"

"그나마 발작 횟수는 조금 줄어든 것 같고...나머지는 똑같아요."

침상 옆에 걸터앉아 있던 로제가 그녀를 발견하고는 힘없이 미소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럼, 오늘도 잘 부탁드려요."

"나야 좋지만...정말 괜찮겠어? 병간호에, 가게 일에, 그것도 모자라서 하루도 안 빼놓고...."

"괜찮아요. 다 제가 원해서 하는 일인 걸요."

그리고는 주섬주섬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일몰을 챙기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늘 야간 간호 당번은 장춘식이에요. 아, 마침 저기 오네요."

"차라리 네가 하루 더 있는 게...쟤는 좀 못 미더운데."

"안 돼요. 하루라도 대련을 거를 순 없어요."

유신애가 대련을 조르던 이전과는 180도 달라진 상황. 갑작스레 변한 그녀의 태도가 의아하긴 했으나.

도저히 이유를 물을 분위기가 아니었기에, 유신애는 말없이 그녀의 요청에 응해야만 했다.

"그럼, 오늘도 주변에 여파가 미치지 않게 적당한 선에서..."

사옥 안으로 들어서는 장춘식의 모습을 확인한 로제가 일몰을 꾹 움켜쥔 후.

가만히 홍아와 애아를 매만지는 유신애를 향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뇨, 오늘은 전력으로 부탁드려요."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147화

막 해가 저물어가기 시작한 늦은 오후.

일과가 끝난 후 승현의 회복실로 들어선 천수연이 장춘식을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일찍 왔네! 웬일이래? 맨날 늦던 인간이. 대체 밤에 뭘 하고 다니길래 오후까지 퍼질러 자는 거야?"

"비밀이다, 인마. 다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거야."

"쯧쯧...또 밤새 성인 사이트 같은 거 봤구만. 친구가 아파서 누워있는데 그러고 싶니? 응?"

"어허! 사나이 장춘식. 살면서 단 한 번도 불건전한 매체에 손을 댄 적이 없다."

"얼씨구? 남들 앞에서 십 년 전 썰 한번 거하게 풀어줘?"

"..."

"숨길 거라면 똑바로라도 숨기던가. 그때 오빠네 집 컴퓨터 즐겨찾기에 있던 사이트 목록, 아직도 안 까먹었거든?"

"...나만 본 거 아니야. 그때 한승현 저놈도 같이...."

"승현이 오빠는 그래도 돼."

"?"

"중학생이면 한참 호기심 많을 나이잖아. 이해해. 당연한 거지. 나도 아빠 몰래 친구들이랑 가끔 보곤 했는걸."

"나는?"

"오빠는 안 돼. 상상만 해도 징그러워. 더러우니까 가까이 오지 마."

"..."

"그리고 여기 들어오기 전에 손 씻고. 손 소독제로 빡빡. 평소에 뭘 만지고 다니는지도 모르는데 승현 오빠한테 세균이라도 옮으면 어쩌려고 그래?"

"나 참...."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차던 장춘식이 손바닥으로 누워있는 승현의 이마를 짝, 때렸다.

"만졌다. 어쩔래? 예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네. 이놈이 그렇게 좋냐?"

"뭐, 뭔 소리야! 헛소리하지 마! 누가 들으면 오해할라! 그리고 괜히 왜 가만히 있는 승현 오빠한테 화풀인데!"

"쯧쯧, 다 보인다. 다 보여. 오죽하면 여기 건물 청소하시는 분들도 알고 계시더라."

"...그분들이 대체 어떻게?"

"하루가 멀다하고 뺀질나게 여기 드나드는데 모르시겠냐? 하여간, 이런 기생오래비처럼 비리비리한 놈이 뭐가 좋다고. 남자라면 적어도 나처럼..."

"그래서. 남자 중의 남자. 장춘식 님께서는 살면서 지금까지 여자 손이라도 한 번 잡아본 적은 있고?"

천수연의 묵직한 팩트에 장춘식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버렸다.

"그래...그렇지. 이왕 이렇게 된 거 억울해서 안 되겠다. 이놈도 나와 똑같이 남자 다운 얼굴로 만들어주마."

번갈아 가며 벽에 매달린 거울과 승현을 바라보던 장춘식이 막 그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으려던 찰나.

"야! 손 안 치워?! 어딜 감히!"

뻐억-

별안간 천수연의 팔찌에서 거대한 주먹이 튀어나와 그의 안면을 후려갈겼다.

"협회장님이 만들어주신 신형 아티팩트다. 이 안에 골렘 한 기가 통째로 들어있거든? 한 번만 더 아픈 승현 오빠 괴롭히기만 해 봐. 그땐 아주...알지?"

"으윽, 저놈의 성질머리는 예전이랑 변한 게 없네."

"시끄러. 그나저나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원."

장춘식에게 으름장을 늘어놓은 천수연이 표정을 바꾸어 승현을 바라보았다.

"의사 말로는 코...뭐시기라던데. 코마였던가? 외상은 전부 치유됐는데. 의식이 돌아오질 않는대."

"그건 나도 들었어. 원인을 알 수 없으니까 답답한 거지."

"뭐, 알아서 일어나겠지. 하여간 헌터도 아닌 놈이 무슨 균열엘 들어간다고 설쳐서는. 다 자업자득이야. 멍청한 놈 같으니라고."

"야! 오빠 너는 무슨 말을 그렇게...."

역정을 내던 천수연이 꾹 쥐어진 장춘식의 주먹을 보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어릴 적 몬스터에게 부모님을 잃고 혼자 자라오다시피 한 장춘식에게 있어 승현은 형제나 다름없는 존재일 테니까.

"...하긴, 오빠가 제일 답답하겠지."

조금 어색해진 분위기.

말없이 침대 모서리를 만지작거리던 천수연이 대화의 주제를 바꾸었다.

"그나저나 로제 언니랑 신애 언니는?"

"오늘도 똑같지 뭐."

장춘식이 씨익 웃으며 손가락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오늘도? 진짜 대단하다...."

유신애와 함께 지하 연무장으로 향했을 로제를 떠올린 천수연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같은 여자가 보아도 넋을 잃을 정도의 아름다움.

게다가 딱 보아도 자신과 비슷한 나이에 유신애 팀장과 쌍벽을 이룰 정도의 실력.

그러한 실력을 갖추고도 하루도 빠짐없이 대련에 임하는 성실함.

모든 면에서, 로제는 완벽했다.

'게다가...승현 오빠를 따라다닌다고 했던가.'

대체 저런 사람이 뭐가 부족해서?

잠시 고민에 빠져있던 천수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계속 생각해 봐야 자신만 초라해질 뿐이었기 때문이다.

"에이 씨...모르겠다. 나는 구경이나 가련다. 오빠는 여기나 잘 지키고 있어. 또 멋대로 놀러 나가지 말고."

그렇기에 괜히 장춘식에게 툴툴거린 천수연이 막 지하 연무장을 향해 움직이려는데.

우르릉-

심상치 않은 진동이 건물 전체를 한 차례 흔들어 놓았다.

"시작했나 보네. 오늘은 안 가는 게 좋을걸? 위험할 것 같다."

"왜? 밖에서만 구경할 건데."

천수연이 앞을 가로막는 장춘식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난번 테러 사건 이후.

제피로스의 사옥 전체에 대규모의 방어 술식이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작업을 주도한 것은 천윤기와 이화수 협회장이었기에.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빌딩인 제피로스의 사옥은 포탄 세례쯤은 손쉽게 견뎌낼 수 있는 요새가 되었다.

게다가 한술 더 떠서.

유신애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연무장에 설치된 방어 술식은, 성화에 이기지 못한 천윤기와 이화수가 몇 날 며칠 밤을 새워 가며 새긴 것들이다.

그러므로 그녀를 향해 미사일이라도 발사하지 않는 한 대련을 관람하는 수연이 다칠 일은 없다.

'레어 등급 코어를 장착한 골렘이 온 힘을 다해 후려쳐도...흠집 하나 나지 않았지.'

물론 A급 헌터 정도라면 어찌어찌 깨부술 수 있을 것 같지만. 적어도 한두 방의 공격은 버텨낼 수 있을 터.

두 사람이 수연을 죽이려고 마음먹은 게 아닌 이상, 그 전에 대련이 중지될 것이 당연한 일이었기에.

"그럼, 난 언니들한테 가 볼게. 잘 지키고 있..."

아무런 걱정 없이 회복실을 나서려던 수연의 뒷덜미를 장춘식이 거칠게 잡아끌었다.

"이럴 줄 알았다."

콰당- 꼴사나운 모양새로 엉덩방아를 찧은 수연이 장춘식을 노려보았다.

"악! 이게 무슨 짓이야!"

"하여간, 적당히가 뭔지 모르는 인간들이구만. 너, 다섯 걸음만 더 갔으면 죽을 뻔했어."

장춘식이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이며 어깨를 으쓱거림과 동시에.

파아앗-

소리 없이 바닥을 뚫고 솟아오른 빛의 기둥이 그녀의 시야를 새하얗게 물들였다.

* * *

"조금 전 그거...대체 뭐야?"

"아직 어설프긴 해도 어찌어찌 성공했네요. 고마워요. 다 신애 언니 덕분이에요."

흥분으로 인해 쿵쿵 뛰는 심장을 한 차례 억누른 유신애가 고개를 들었다.

투두둑. 그녀의 머리 위를 향해 떨어지는 건물의 잔해와 천장을 향해 곧게 뚫린 구멍 너머로 보이는 푸른 하늘.

지하 연무장에서 결코 볼 수 없는. 아니, 보여서는 안 되는 광경이다.

'이래서 전력을 다해 달라고 했던 거였어. 상대가 나였기에 망정이지....'

주변을 새하얗게 물들이며 그녀를 향해 덮쳐든 순백의 일격.

전력을 다해 쳐내지 않았더라면 이 자리에서 불구가 되거나,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래서 더 좋아.'

유신애가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등골을 타고 전해지는 스릴과 자칫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 더, 더 하고 싶어. 조금만 더. 한 번만 더.

오랫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내면의 목소리가 그녀의 마음을 간질였다.

지금껏 살아오며 이러한 유혹을 마주한 건 두 번째.

지금 당장 로제를 향해 달려들어 쾌락의 파도에 몸을 맡기고 싶었으나. 그보다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갑자기 바닥에 구멍이...."

"지하 연무장 같은데. 거긴 1 팀장님이 계신 곳 아니야?"

갑작스레 벌어진 상황에 놀란 클랜원들이 웅성거리며 이곳을 향해 몰려드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조금만 참자. 오 분. 아니, 삼 분이라도.'

그렇기에 온 힘을 다해 이성을 컨트롤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유신애가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별일 없어. 대련 중 일어난 사고니까 신경 쓰지 말고 돌아가도록 해."

"하, 하지만 팀장님...건물이...클랜장님이 아시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돌아가 줘. 제발. 나중에 얘기하자. 응? 누나 상태 보이지? 응? 지금 그만두면 내가 어떻게 될지 나도 몰라."

"예, 옙! 알겠습니다, 실례했습니다! 좋은 시간 되십쇼!"

한껏 달아오른 얼굴과 귀신처럼 치솟은 눈꼬리. 유신애의 흉흉한 모습을 본 클랜원들이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며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러한 모습을 지켜보던 로제가 결의에 찬 얼굴로 주먹을 꼭 쥐었다.

'드디어...성공했어.'

백야(白夜).

극야에 이은 멜리사 라셀러스의 두 번째 고유 기술.

지금까지 유신애와 벌인 대련은, 머릿속으로만 알고 있던 백야를 실제로 체득하기 위한 밑거름이었다.

'아직은 미숙하지만.'

두 사람은 넉넉히 들어갈 정도로 뻥 뚫린 구멍.

본래는 극야의 힘을 극한까지 압축시켜 쏘아내는 기술이었기에.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두께까지 줄어드는 멜리사의 백야에 비하면 아직은 한참 모자랐다.

'세인트 캐논이...이를 응용한 기술이었다고 했었죠.'

에포나의 이야기를 떠올린 로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직 가야할 길이 멀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음엔 다를 거예요."

단탈리온과 조우한 승현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쓰러지던 그 날.

함께 있던 이들 중, 유일하게 단탈리온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로제는 똑똑히 보았다.

그들과 자신 사이를 가로막은 거대한 무형의 장벽을.

이를 인지하는 순간. 로제는 비로소 그것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이게...구시온이 말한 격...."

힘의 차이가 아니었다.

애초에 다른 세계로 분리된 것처럼. 승현과 단탈리온. 그리고 그녀 사이에 놓인 벽은 견고하고 단단했다.

"왜. 대체 왜 나는 또다시 아무것도...."

그리고.

피범벅이 된 채 쓰러진 승현을 보며, 자신의 무력함에 절망하는 로제에게.

그 벽을 넘어설 기회가 주어졌다.

[흑과 백]

멜리사 라셀러스의 두 가지 고유 기술. 극야와 백야의 숙련도를 일정 수준 이상까지 끌어올리십시오.

* 극야 : (52/100)

* 백야 : (2/100)

보상 : 신규 스킬 : [???]

드디어 어설프게나마 백야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기에. 퀘스트를 클리어할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

"이제 남은 건."

같은 상황을 반복하지 않는 것.

클랜원들을 물린 후.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다가오는 유신애를 보며 기쁜 마음으로 일몰을 꽉 움켜쥐었다.

"계속해야지. 많이 기다렸어? 할 거지? 응?"

"얼마든지요."

"그래! 다행이다! 백야라고 했던가? 다음 건 조금 더 세게 부탁할게!"

굳이 백야를 습득했다고 해서 대련을 그만둘 이유가 없었다.

제대로 발동이 걸리기 시작한 유신애의 무력은 룬드그렌을 상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육체적인 능력은 로제보다 조금 떨어지지만, 이를 만회하고도 남을 풍부한 경험.

유신애와의 대련은 지금껏 겨울숲 부족이라는 우물 안에 갇혀있던 로제를 바깥세상으로 꺼내어 주고 있었다.

"두 번 이상은 힘들 것 같지만...한번 노력해 볼게요."

"좋았어! 그럼, 간다!"

로제의 수락에 입꼬리를 쭉 찢은 유신애가 애아를 앞세우며 빛살처럼 달려들었다.

"이런...."

조금 전보다 한층 더 빨라진 속도. 코앞까지 다가온 홍아의 검날을 인지한 로제가 황급히 일몰을 비스듬히 세우자.

카가가가가강-

무수한 연격이 그 위를 후려갈겼다.

하나하나가 상당한 위력을 품은 일격이었기에,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고 판단한 로제가 윈드워크를 사용해 뒤로 물러났다.

"윈드워크라고 했던가? 그거. 나도 가르쳐 줘. 응? 어떻게 하는 거야?"

"...언니는 못 배워요."

흥분이 가득 담긴 숨을 내뱉은 유신애가 로제를 바짝 따라붙었다.

"그런 게 어딨어!"

그리고는 짐짓 억울하다는 듯 외치며 있는 힘껏 정면을 향해 일검을 내질렀다.

파아앙-

공기를 찢어발기며 일직선으로 쇄도하는 홍아의 검날.

몸을 틀어 피해낸 로제가 연이어 날아드는 이격을 감지한 뒤. 유신애의 위치를 가늠해 일몰을 휘둘렀으나.

'없어...?'

카앙-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저 멀리 날아가는 유신애의 두 번째 칼. 애아의 모습이었다.

"역시, 아직 미숙하구나!"

두 번째 일격을 미끼로 내어준 유신애가 자세를 바짝 낮추어 파고든 뒤.

"내가 검사라고 해서 칼만 쓸 거라고 생각했으면 큰 오산이지!"

양손으로 로제의 오금을 움켜쥔 후. 있는 힘껏 앞으로 끌어당겼다.

"어...?"

콰당-

중심을 잃으며 손쓸 새도 없이 뒤로 넘어진 로제.

그녀의 위로 올라탄 유신애가 파운딩 자세를 취하며 주먹을 치켜들었다.

"오늘은 내가 이겼지?"

"...아직은 아니에요."

현재까지의 전적 14승 16패.

목숨을 걸지 않는 단순한 대련이었기에. 경험이 풍부한 유신애의 근소한 우위였다.

'그래도 오늘은 질 수 없죠.'

뱀처럼 자신의 몸을 조이는 유신애의 하체를 뿌리치기 위해 로제가 마력을 끌어올리려던 찰나.

"훗, 날 뭘로 보고!"

꽈앙-

수직으로 내리꽂힌 유신애의 주먹이 로제의 쭉 뻗은 콧날을 후려쳤다.

순간적으로 머리가 멍해질 정도의 타격. 로제의 코에서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

하지만, 로제 또한 가만히 얻어맞고 있던 건 아니었다.

뻐억-

손에 쥐고 있던 일몰의 손잡이가 유신애의 턱을 후려쳤다.

"호오...."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내며 조각난 치아가 섞인 핏물을 뱉어낸 유신애.

곧이어, 약속한 듯 무기를 내려놓은 두 사람이 난타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뻐억- 뻐억-

고요한 연무장 내부에 주먹과 주먹이 부딪히는 흉흉한 타격음이 퍼져나갔다.

"좋아. 좋아!!! 더 세게 때려줘! 더 독하게! 사정 봐 주지 말고!"

"얼마든지요."

쾌락에 물들어가며 점점 강해지는 유신애와, 그녀의 목숨을 해하지 않을 정도로 자신의 힘을 조절하며 공격을 맞받아치는 로제.

"..."

뒤늦게 보고를 받고 달려온 오신우가 피투성이가 된 그녀들의 모습을 보며 입을 쩍 벌렸다.

"이런, 단순한 대련이라더니...."

지나치게 흥분한 두 사람.

아무리 포션이 있다고 해도, 저대로 내버려 두는 건 안 될 일이다.

그렇기에 사고가 일어나기 전, 막 앞으로 달려나가려던 그때.

그보다 한발 먼저, 천장에 뚫린 구멍으로 뛰어내린 누군가가 그들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러다 큰일납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죽은 듯 회복실에 누워있던 승현이었다.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148화

"이쯤 하시는 게 어떨까요."

난데없이 나타나 그들의 공격을 가로막은 승현이 로제를 향해 치유 가속 포션을 건넸다.

"잘 지냈어? 많이 다쳤네. 이거 써. 얼굴도 좀 닦고."

"어? 어어...?"

그리고는 그림자에서 손수건을 꺼내 로제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준 후.

몸을 돌려 유신애를 향해 포션을 휙- 던졌다.

"팀장님도 잘 지내셨습니까? 이거 쓰시죠. 많이 아프실 것 같은데."

"...어째 대우가 미묘하게 다르다?"

"기분 탓입니다."

"기분 탓은...쯧. 이거 서러워서 살겠나. 저 인간은 뭘 하는 건지...."

멍하니 서 있는 오신우를 한 번 노려본 유신애가, 포션을 사용한 뒤 소매로 얼굴을 쓱쓱 문질렀다.

"그래서. 이젠 괜찮은 거고? 갑자기 픽 쓰러지는 거 아니야?"

"팀장님 상태나 걱정하시죠. 무슨 대련을 이렇게 격하게 하십니까?"

"많이 컸다? 누나한테 말대꾸도 할 줄 알...응?"

피식 웃던 유신애가 무언가 위화감을 느끼고는 미간을 찡그렸다.

'언제 가라앉은 거지?'

불과 몇 분 전까지 끊임없이 그녀의 몸을 달구던 전의가 씻은 듯 사라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세히 보니, 승현의 분위기 또한 어딘지 모르게 달라져 있었다.

"오신우 클랜장님도 잘 지내셨습니까?"

"예? 예...저야 잘 지냈죠. 하, 하하."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 차분한 표정. 그리고, 이전엔 느낄 수 없었던 은은한 위압감까지.

'뭐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지금껏 본 적 없는 분위기에 유신애가 의문을 품던 그때.

쿠웅-

천장의 구멍으로 뛰어내린 장춘식이 승현을 향해 버럭 소리쳤다.

"이 새끼가! 버릇없이 일어나자마자 형님한테 인사도 안 하고."

"뭐야, 있었냐."

"있었냐? 있었냐라고? 이 새끼 확 뒈져버렸어야 했는데. 아깝...끄억!"

"또!"

뻐억-

계단으로 내려온 천수연의 팔찌에서 튀어나온 주먹에 얻어맞은 장춘식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괜찮아? 진짜 괜찮은 거야?"

"어? 어어...괜찮아. 멀쩡하네."

역시. 그럴 리가 없지.

자신을 향해 바짝 다가선 천수연을 보며 머리를 긁적이는 승현.

이전과 달라진 것 없는 모습에, 의문을 접어버린 유신애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 * *

"그래서 말이죠. 제가 처음으로 백야를 사용하니까 신애 언니 표정이..."

"봐봐. 이거 협회장님이 만들어주신 신형 아티팩트라니깐? 어때. 장난 아니지? 그리고 아빠가 오빠한테..."

"내가 말이야. 어? 너 기절한 동안 드디어 브론즈..."

시끄러워 죽겠네.

지치지도 않고 그간의 일을 떠들어대는 로제와 장춘식. 그리고 수연이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려버린 나는.

정신을 잃은 동안 겪었던 일을 다시금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기억의 정령이라....'

푸른 빛이 사라진 후.

그간 전혀 반응하지 않던 원시 정령 계약서가 밝게 빛나며 나에게 찾아온 것은.

"...책?"

로제의 실프와 운디네.

그리고 록타의 바위의 정령과는 유사점이 전혀 없는, 말 그대로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듯한 오래된 책 한 권이었다.

말없이 나풀나풀 다가온 그것은, 이내 자연스레 내 안으로 스며들어왔다.

기억의 정령이 사용자의 데이터를 분석합니다.

현재 진행도 : [2%]

이내 떠오른 메시지와 함께 점점 줄어드는 두통.

빠른 속도로 올라가는 진행도를 보며, 지금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던 와중.

분석이 완료되었습니다.

삐익-하는 소리와 함께 눈앞이 한 차례 흔들렸다.

[경고] 사용자의 '격'이 기준점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레벨에 따라 데이터를 분류합니다.

레벨? 데이터?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눈앞에 있는 액자들과 관련이 있는 이야기일까.

입력된 요청에 따라, 기억의 정령이 사용자에게 가장 적합한 형태로 작업을 완료하였습니다.

현재 사용자가 흡수 가능한 데이터의 레벨은 [1]입니다.

잔여 데이터를 저장합니다.

다시 밖으로 튀어나온 기억의 정령. 그러니까, 낡은 책이 자신의 책장을 열자.

촤르르륵-

무수히 늘어선 액자들이 그 안으로 빨려들기 시작했다.

"뭐, 뭐야.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눈 깜짝할 새에 전부 사라져버린 액자들. 그와 동시에, 허공이 갈라지며 작은 꼬마 아이가 튀어나왔다.

커다란 마녀 모자를 눌러쓴. 성별을 짐작하기 어려운 꼬마다.

"아이고, 간신히 잡았다. 요놈! 어딜 허락도 없이 맘대로 나돌아다니려고!"

멀뚱멀뚱 주변을 둘러보던 녀석이 이내 동그랗게 눈을 뜨며, 자그마한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어라? 당신이 왜 여기에? 아직은 때가 아닐 텐데...아닌가?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 어휴, 나도 참."

주먹으로 자신의 머리를 콩 때린 꼬마가 파라락- 낡은 책의 책장을 넘기고는, 눈을 꿈뻑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네. 역시, 내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니까."

"누구야 넌? 날 알아?"

"당연히 알죠. 짬밥이 몇 년인데. 고작 일이천 년 된 신출내기도 아니고."

일이천 년이라니.

태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태연히 늘어놓는 꼬마.

예전 같았으면 믿지 않았겠지만...나는 이미 생명체의 한계를 벗어난 존재들과 수차례 조우한 적이 있다.

"그렇다는 건. 너도 시시포스나 에포나와 같은 초월체라는 거야?"

"어? 시시포스를 알아요? 어떻게? 에포나는...잘 모르겠다. 그런 녀석이 있었던가. 나중에 돌아가서 찾아봐야겠네요."

"...대체 누구야. 넌."

시시포스를 아는 걸 보니 판데모니움의 초월체일 거란 짐작에 녀석을 지긋이 쳐다보자.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은 녀석이 나를 향해 손가락을 휙휙 흔들었다.

"뭔진 몰라도 벌써 불미스러운 일을 겪으셨던 것 같네요. 하기야, 시시포스 그 녀석이 보통 독종이어야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너도 만마전의 악마인 거냐?"

"악마라니. 아닌데요. 저는 아카샤. 음...그러니까. 지금의 당신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자면. 저는 세상의 세 가지 '근원' 중 하나에요."

"근원?"

"다른 두 분과 달리 저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중립된 입장에서 세상의 모든 일을 기록하는...그렇지. 서기라고 생각해 주세요."

서기?

뜬금없는 이야기에 멀뚱멀뚱 아카샤를 바라보자. 녀석이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리고, 모든 기억의 정령을 관장하는 존재이기도 하고요."

[아카샤의 도서관]에 입장하였습니다.

메시지와 함께 순식간에 바뀐 풍경.

"쨔잔. 여기 있는 친구들이 모두 기억의 정령이랍니다. 엄청 많죠?"

그 끝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높게 솟아오른 책장들과 그 안에 가득 채워진 책자들이 보였다.

"도서관? 도서관이라고 해야 하나?"

"분명 이쯤에 있을 텐데...어디 뒀더라?"

내 말을 무시하고 근엄한 동작으로 책장 사이를 걸어 다니던 아카샤가 가장 아래에 있는 깨끗한 책을 한 권 꺼내 펼쳤다.

"찾았다! 음...그러니까. 단탈리온이 먼저 꼼수를 부렸네요. 쯧쯧. 딱 협약을 어기지 않을 정도로만. 하여간, 얘들은 꼭 이러더라."

"협약?"

"그런 게 있어요. 지금의 당신은 알면 안 되는."

단호히 이야기한 아카샤가 이번에는, 옆에 꽂힌 책을 꺼냈다.

"어디 보자...이름. 한승현. 국적은 대한민국. 그리고 가족 관계가...흠흠. 이건 넘어가고. 직업이 연금술사? 푸하하! 역시, 당신답네요. 그리고 또...."

아카샤의 입에서 나에 관한 이야기가 줄줄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같은 반 친구에게 고백을 받았으나, 부끄러운 나머지 '즐'이라고 외쳐서 상대를 울린 적이 있으며..."

차마 밝히기 싫은 내 어린 시절의 흑역사까지도.

"뭐야, 그 책. 이리 내...어라?"

당황한 나머지 녀석의 손에 들린 책을 빼앗은 내 눈에 들어온 것은, 텅 빈 백지였다.

"푸하하, 이건 오로지 저만이 읽을 수 있는 거라구요. 제가 보안에 얼마나 신경을 많이 썼는데."

재미있다는 듯 배를 잡고 땅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던 아카샤가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자.

내 손에서 벗어난 책이 다시금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

"흠흠. 뭐, 남의 과거를 보고 웃는 것도 그리 바람직한 일은 아니니. 여기까지만 할게요."

그거 참 고맙네.

어쩐지 얄미운 녀석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충동을 자제하던 그때.

"이리 와 봐. 어디, 얼마나 되는지 좀 보자."

아까의 그 낡은 책자. 기억의 정령을 불러들인 아카샤가 녀석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음...역시, 에이스야. 그래도 분류는 깔끔하게 해 놨네. 마음에 들어. 뭐라고? 그건 안 돼. 버릇없는 놈 같으니라고."

곧이어 녀석과 알 수 없는 대화를 나누던 아카샤가 책장을 덮고는 그것을 가볍게 흔들었다.

"이게 뭔지 아세요?"

"기억의 정령이라면서. 그보다 이게 다 무슨 상황인지 설명 좀 해 줄래?"

"거 참,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더럽게 재미없는 분이네요. 뭐, 나는 내 할 일만 하면 되는 거니까. 자, 귀를 깨끗이 닦고 잘 들으세요."

"...?"

"아까 보았던 장면들은, 모두 당신의 기억들이에요."

"...내 기억이라고?"

그럴 리가.

나는 살면서 풀무질을 해본 적도, 그렇게 휘황찬란한 갑옷을 입어본 적도 없는데. 대체 저게 무슨 소리지.

"당신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격이 낮은 단탈리온은 손쉽게 본질을 되찾은 것 같지만...아이고, 내가 또 입방정을 떨었네. 서기는 입이 무거워야 하는데."

"잠깐. 다시 말해봐. 본질? 기억?"

"뭐, 그거야 차차 알게 되실 거고. 어쩐지...그동안 당신 것만 계속 비어 있더라니. 여기가 아니라 무의식 속에 보관하고 계셨던 거였네요."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들.

녀석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머리를 굴리려고 하자. 다시금 강한 두통이 찾아들기 시작했다.

"아이고, 안 돼요. 본인이 제어를 걸고 스스로 그걸 풀려고 하면...쯧. 하여간, 예전부터 손이 많이 가는 양반이었다니까."

손에 들고 있던 낡은 책. 기억의 정령에서 몇 장을 뜯어낸 아카샤가 손에서 불을 일으켜 그것을 태워버리자.

[■■■■]의 데이터 중, [레벨 1]의 데이터가 사용자와 융합됩니다.

머릿속에 생소한 관념들이 주입되며, 눈앞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언젠가 경험한 적 있는. 시야가 탁 트이고 인식의 범위가 확장되는 듯한 그런 감각.

이건 형질변환을 처음 깨달았을 때 느꼈던 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이거 어째 내가 말려드는 기분인데. 뭐, 단탈리온도 한 번 꼼수를 부렸으니 이 정도는 상관없겠죠. '어머니'도 그걸 노리고 이 녀석을 부르신 것 같고."

잠시간 이어지던 이 현상은, 이내 아카샤의 한숨과 동시에 종료되었다.

"후우. 지금 당신의 상태로는 딱 여기까지가 한계네요."

머릿속을 맴도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추상적인 관념들이었기에 정확한 건 알 수 없었으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난 누구지?"

지금까지 알던 나는, 온전한 내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푸른 빛'의 이야기대로 아까 보았던 모든 것은, 전부 '나'라는 것.

그리고.

본래의 '나'는 내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는 것.

"그 답은, 스스로 찾도록 하세요."

내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손을 흔드는 아카샤. 녀석이 떠난 자리에 남은 것은 한 줄의 메시지뿐이었다.

사용자의 잔여 데이터는 [아카식 레코드]에 보관됩니다.

'그리고...정신을 차린 게 조금 전이었지.'

포크를 이용해 테이블 위에 놓인 사과를 집은 나는, 아까부터 머릿속을 맴도는 관념을 직접 사용해 보기 위해 가볍게 마나를 끌어 올렸다.

"얼씨구? 앓아누웠던 놈이 과일은 입에 들어가나 보네."

"아! 왜 자꾸 오빠한테 뭐라고 하냐고! 성질만 고약해서는."

"맞아요. 장춘식은 너무해요. 제가 본 인간 중 제일 나빠요."

"흥, 사나이는 원래 이런 식으로 우정을 표현...어? 그거 원래 과도였냐? 포크 아니었어? 아니었나? 맞나?"

내 손에 들린 포크. 아니, 모양새가 바뀌어 과도의 형태가 된 것을 바라보던 장춘식이 어울리지 않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어? 잠깐. 그거 설마...."

"맞아. 이런 것도 될 것 같더라고. 좀 더 연습이 필요하겠지만."

곧이어 스르륵 액체처럼 녹아들며 내 피부에 스며드는 금속.

"미친놈."

이화수 협회장의 주특기.

극에 달한 형질변환을 목격한 장춘식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149화

"정말 가게에 안 들려도 괜찮겠어? 그래도 얼굴 정도는 비추고 와야 하는 거 아니야? 한 달을 누워 있었는데...."

"로제한테 대강 사정을 이야기해 두었으니 괜찮을 거야. 그보다 윤기 아저씨가 지금 여기 계신다고 했지?"

"뭐, 그렇다면야. 나야 좋...헙.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다음 날.

수연과 함께 마이스터 협회에 방문한 승현이 응접실 소파에 몸을 묻으며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곧이어 그가 꺼낸 것은, 겨울숲 부족에서 가져온 세계수의 껍질이었다.

[힘을 잃은 세계수의 껍질]

등급 : [레어++]

옵션 : 없음

* 가공 방식에 따라 마력 저장의 매개체로 사용할 수 있는 아이템입니다.

* 마력 흡수율 : [63%]

'일단 내가 가진 게 대략 백여 개쯤이고. 겨울숲 부족에 쌓인 게 더 있을 테니까...절반 정도는 수업료로 드려도 괜찮겠지?'

천윤기에게 그간의 소식을 전함과 동시에, 약속했던 각인술을 배우기 위함이었다.

'레벨 1이라고 했던가.'

이것만으로도 온몸에 힘이 넘치고, 세상이 밝아지는 기분이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자신에게 돌아온 것이 구체적인 이미지를 지닌 것이 아닌, 추상적인 관념과 감각이라는 것.

'그 이상의 등급을 넘보기엔...아직은 내 격이 부족하다고 했지.'

무의식 속에서 만난 근원의 존재. 아카샤의 이야기를 떠올린 승현이 주먹을 꾹 쥐었다.

고작 레벨 1.

가장 낮은 등급으로 분류된 기억을 되찾았을 뿐인데도 형질 변환의 경지가 대폭 상승하였다.

아이템에 부여된 옵션을 증폭하는 수준에서 그치던 이전과는 달리, 지금은 이화수 협회장에 근접할 정도의 경지에 오른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지.'

이전에 비해 능력이 대폭 상향된 몇몇 특성을 떠올린 승현이 가볍게 미소짓자.

그와 마주 앉아 열심히 무언가를 떠들어대던 수연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서 말이야. 뭐야, 왜 웃어?"

"아무것도 아냐. 아, 오셨나 보다."

때마침 밖에서 감지되는 인기척에 승현이 고개를 돌림과 동시에. 벌컥- 문이 열리며 두 중년인이 응접실 안으로 들어섰다.

"제자야. 몸은 좀 괜찮아졌느냐."

"...아직 포기 안 하신 겁니까?"

마이스터 협회의 협회장 이화수와. 요즘 들어 부쩍 그와 친분을 쌓기 시작한 천윤기였다.

"미련한 놈, 그런 대규모 균열에 겁도 없이. 제작자란 본디...잠깐. 그런데 수연이 너는 왜 아침부터 이놈이랑 같이 있는 거냐."

천윤기가 근엄한 목소리로 승현을 꾸짖으려던 찰나.

한껏 멋을 부린 채 그와 마주 앉은 수연을 발견하고는 별안간 표정을 바꾸어 승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게다가 또 화장에 치마까지? 한승현 이놈! 내가 수연이는 안 된다고 했지!"

"아니거든요! 그리고 몸도 안 좋은 사람한테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이제 막 일어난 참인데."

"이제 막 일어나?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한승현 이놈! 솔직하게 말해라!"

"아빠! 그 뜻이 아니잖아요!"

"하, 하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두 분."

멱살을 잡힌 승현이 어색하게 고개를 숙이자. 한층 더 얼굴이 붉어진 천윤기가 그를 채근했다.

"역시, 말을 돌리는 걸 보니...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내 당장 네놈을 반으로...."

"진짜 아무 일도 없었다니까요! 그리고 왜 아빠는 승현 오빠한테만 뭐라고 그래요! 예전엔 남자친구 좀 만들라면서 그렇게 성화를 부리시더니!"

"뭐? 남자친구? 한승현 이놈이랑 벌써 그런 사이까지 간 거냐! 서, 설마...너희. 소, 손도...잡은 거냐?"

"좀!!!"

충격을 받은 듯 멍하니 중얼거리는 천윤기.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이화수가 슬쩍 한마디를 거들었다.

"선배님. 요즘 애들은 저희 때랑 달라서 손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요샛말로 썸이라고 하던가요. 썸만 타도 뽀뽀 정도는..."

"뭐? 뭐뭐뭐뭐라고?"

"협회장님!"

말리는 시누이가 더 얄밉다더니.

옆에서 천윤기의 분노를 부채질해대는 이화수를 노려본 수연이, 재빨리 대화의 주제를 바꾸었다.

"하여간...그나저나 오빠. 아빠랑 협회장님한테 드릴 말씀이 있다면서."

"아, 그렇지. 아저씨. 일단 이것부터 받아 주십시오."

"이게 뭐냐? 나무껍질? 보아하니 아이템인 게로군. 이걸 왜 나한...잠깐."

세계수의 껍질을 못마땅한 듯 건네받은 천윤기의 표정이 점점 굳어가기 시작했다.

"...대강 보아도 흡수율이 50%는 넘는 것 같은데. 네 녀석, 어디서 이런 걸 구한 거냐."

정확한 수치는 디텍터를 사용해 봐야 알겠지만. 손끝으로 느껴지는 감각으로 미뤄보았을 때 최소치가 50%다.

마력 흡수율이 35%만 넘어가더라도 상당한 고급 재료로 분류될진대.

눈앞에 있는 보잘것없는 나무껍질은 그를 한참 넘어서고 있었다.

"역시, 대번에 알아보시는군요. 수업료입니다. 대략 오십 개 정도가 준비되어 있으니, 제 작은 성의라 생각해 주시고 받아 주십시오."

"오십이라니...이런 게 오십 개가 있다고?"

게다가, 이러한 재료가 한두 개도 아니고 무려 오십이란다.

'그 정도 수량이라면...클랜 규모로 움직여도 구하는 게 거의 불가능할진대. 이놈은 대체 어떻게...제피로스의 협조를 얻은 건가?'

그럴 리가 없다.

제피로스는 얼마 전까지, 대규모 균열 공략에 모든 힘을 쏟고있었으니까.

'그렇다는 건. 이놈 혼자서 이러한 물량을 오십이나 확보...아니지. 나한테 모든 걸 다 넘겼을 리는 없으니, 적어도 그 두 배는 가지고 있단 건가? 그게 가능한 일인가?'

경악으로 인해 잠시 입을 쩍 벌렸던 천윤기가 자신의 모양새를 깨닫고는, 다시금 표정을 바꾸며 말을 이어갔다.

"...흠흠. 그보다 수업료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각인술을 가르쳐주시겠단 약속. 잊으신 건 아니리라 믿습니다."

"그래. 그런 약속을 했지."

승현의 자신만만한 표정을 본 천윤기가 미묘한 표정으로 의수를 매만졌다.

'그 한기호의 아들이 나에게 가르침을 청하다니. 게다가 이놈의 재능은....'

뿌듯함과 아쉬움이 공존하는 표정. 지금까지 딱히 입 밖으로 이러한 사실을 꺼내진 않았지만.

승현은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자력으로 치유 가속 포션과 익스플로전 포션을 만들어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천재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연금술에 발을 들여놓은 지 일 년도 안 된 애송이가 말이지.'

대략적인 승현의 과거는 이화수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한기호가 제작한 아티팩트의 힘을 빌렸다고는 해도, 그가 가진 재능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는 법.

그렇기에 더욱 아쉬웠다.

'기호 이놈아. 네놈이 살아있었으면 우리 둘이서 제대로 한 번 키워봤을 텐데.'

떠난 사람은 떠난 사람. 아쉬워도 어쩔 수 없다.

이미 결정은 내린 지 오래였기에, 막 제안을 수락하려는 천윤기를 향해 승현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아저씨에게 드릴 선물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선물?"

"제자야. 이 스승에게 줄 선물은 없는 게냐."

"...일단 받으시죠."

서운한 표정을 짓는 이화수를 애써 외면한 승현이 내민 것은 자그마한 USB였다.

"이게 뭐냐?"

"유천호를 죽였습니다."

마치 별거 아니라는 듯 담담하게 내뱉은 한 마디.

그러나, 듣는 이들은 그렇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

잠시간 응접실에 침묵이 흘렀고.

"뭣?!"

"말도 안 돼."

"네가...유천호를 죽였단 말이냐? 정말로? 아니, 그럴 리가 없을 터인데...."

뒤늦게 승현의 말에 담긴 의미를 알아채고는 경악하는 천윤기와 천수연.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묻는 이화수.

그들의 반응을 한 차례 살핀 승현이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그리고. 이건 그 당시 착용했던 바디캠의 영상이 담긴 USB입니다."

"어디, 이리 내놓아 보거라!"

승현의 손에서 빼앗듯 USB를 가로챈 천윤기가 재빨리 응접실 테이블 위에 놓인 노트북을 앞으로 당겼다.

"이거. 이거 어떻게 하는 거냐. 분명 봤던 것 같은데...."

"제가 할게요!"

기계 조작에 서투른 천윤기를 대신해 노트북을 잡은 수연이 재빨리 저장된 영상을 재생하자.

- 끄아아아악!!!

이내, 마이스터 협회의 응접실은 유천호의 끔찍한 비명으로 가득 메워지기 시작했다.

"..."

모니터 너머에서 끊임없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는 것은. 천윤기가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유천호의 목소리였다.

"다시. 다시 돌려보거라. 앞부분으로."

"다시."

"10분만 앞으로."

몇 번이나 영상을 반복해서 돌려보던 천윤기가 의수를 분리하며 소파에 몸을 묻은 것은, 그로부터 약 삼십 분이 지난 후였다.

"정말...죽은 거냐? 이놈이? 이렇게 쉽게?"

"늦게 말씀드려 죄송합니다."

"아니다. 아니야...."

이내 자신의 의수로 눈을 가린 천윤기가 숨을 내뱉었다.

지난 시간의 설움과 억울함. 그리고 분노와 기쁨이 뒤섞인 깊은 한숨이었다.

말없이 생각에 잠긴 천윤기를 대신해, 정적을 깬 건 이화수 협회장이었다.

"잠깐. 그런데 분명...유천호는 얼마 전에도 클랜장을 대신해 공식 석상에 얼굴을 비추었을 터인데. 게다가 협회 데이터베이스의 활동 내역도..."

"역시...그건, 아레스에서 내세운 유천호의 대역일 겁니다."

"...대역?"

"이야기가 길어지기에 자세한 건 천천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만...확실합니다. 지금 활동하는 유천호는 절대 본인이 아닙니다."

보문산 균열에서의 일을 떠올린 승현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자그마한 임프도 거대한 보스 몬스터로 탈바꿈시키는 단탈리온에게 있어, 유천호의 사망을 감추는 일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울 터.

지금 유천호의 탈을 뒤집어쓰고 활동하는 자는 단탈리온의 측근일 것이 확실했다.

'그렇다는 건, 아레스 내부엔 단탈리온을 제외한 다른 악마가 존재한다는 건가.'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이 많이 남았다.

강철규의 행방과 보문산 균열에 있어야 할 진짜 보스 몬스터의 행방.

그리고, 가장 중요한 단탈리온의 진정한 목적.

'이를 파악하기 위해선...힘을 더 키워야 해.'

제작 기술. 그리고 일신의 무력과 아레스를 능히 넘어설 세력까지.

제작 기술을 제외하면 아직은 모든 면에서 단탈리온에 비해 확실히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기에.

재차 이곳에 온 목적을 상기한 승현이 천윤기를 바라보았다.

"지금 제게는 아저씨의 각인술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현재 그에게 주어진 보조 퀘스트.

A급 라이센스 취득뿐만 아니라, 아레스를. 더 나아가 단탈리온을 꺾고 놈의 악행을 세상에 까발리기 위해서라도.

일반적인 각인술사와 그 격을 달리하는 천윤기의 기술은 승현에게 꼭 필요한 것이었다.

"녀석, 누가 안 가르쳐준다더냐."

가만히 승현의 눈을 들여다보던 천윤기가 품속에서 낡은 종이를 한 장 꺼내 펼쳤다.

"내 일생을 바쳐 만든 역작, 공(空)의 술식이다."

"이건...."

복잡한 기호와 도형 수백 개가 이리저리 얽힌. 평범한 제작자라면 따라 할 엄두조차 낼 수 없는 복잡한 술식.

"이걸 익히기 위해선 아무리 네 녀석이라 해도 일 년은 걸릴 것이니,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그렇기에 다시 품속으로 술식이 그려진 종이를 집어넣는 천윤기. 그의 손을 붙잡은 승현이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일 년이라.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이전의 저였다면.

뒷말을 생략한 승현이 공의 술식을 향해 눈을 돌리자. 특성이 발동되며 그의 시야가 탁 트이기 시작했다.

- [이해와 분석]이 발동됩니다.

- [장인의 눈]이 발동됩니다.

아카샤를 만난 이후.

1레벨의 데이터를 되찾으며 형질 변환과 더불어 크게 상향된 두 가지 특성들.

- [공의 술식]을 스캔합니다.

- 분석이 가능한 대상입니다!

이들이 발동됨과 동시에, 복잡한 술식이 하나의 공식처럼 자연스레 풀어지는 것을 확인한 승현이 자신만만하게 답했다.

"일주일이면 충분합니다."

차원을 넘는 연금술사

15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