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우진이 집에서 도시락통에 음식을 담았다.
차유리가 그걸 보고 입맛을 다셨다.
"뭐야? 이건 진짜 고급 음식점 도시락처럼 좋은데?"
"특별히 신경 써서 만들었지."
"맛은?"
"비싼 재료 썼는데 당연히 맛있어야지."
떡밥이 좋아야 계획의 성공 확률이 올라간다.
차유리가 물었다.
"네가 나 주려고 도시락을 싸? 시키지도 않았는데? 너 사고 쳤냐?"
"그럴 리가 없지?"
"아니야?"
"내가 일하러 나갈 때 가져갈 도시락이야."
차유리가 눈을 껌뻑였다.
"일하러 나가? 너 백수 아녔어?"
"나 요즘 공사 현장 뛰잖아."
"너 주식 부자잖아."
"그건 안 팔 거야. 현금이 필요하면 돈 벌어야지."
차유리가 도시락을 보며 말했다.
"그런데 점심 도시락을 너무 공들여 싼 거 아니냐?"
"배고픈 어린 양에게도 좀 먹여야 해서?"
"내가 어린 양 소리는 좀 듣지."
"누나는 맹수지."
"양의 탈은 썼잖아."
"그 탈이 어딜 봐서 양이야?"
"그럼 여우?"
"양심 없네."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내 도시락도 있지?"
"남은 거 담아줄 테니까 가져가든가."
"수연이 줄 도시락은?"
"없다고 하면 걔한테 이를 거지?"
"당연하지. 내가 먹는 거 보면 당장 너한테 전화해서 화낼걸?"
"벌써 시끄러운 목소리가 들리는 기분이다. 누구는 입이고 누구는 주둥이냐고 하겠지. 누나나 수연이는 왜 이렇게 먹는 데 진심인 거냐고."
"우리 식탐이 어디 너만 하겠냐. 그래서 있어? 없어?"
"많이 만들었어."
***
딥어스테크 개발 2팀 연구원 박효정이 점심시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구소는 연구동 하나만 먼저 지어서 가동 중이다. 그런데 그 연구동도 아직 부족한 게 많았다.
"구내식당은 도대체 언제 완성되는 걸까요?"
곽수혁 개발 2팀장이 도시락을 꺼내며 대답했다.
"조만간 된다더라."
"그거 다 만들면 밥은 맛이 있을까요?"
"예전 구내식당 수준이겠지?"
"에휴. 어차피 큰 기대는 하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오늘은 도시락이 없어서 그거라도 아쉽네요."
"응? 내 도시락은 안돼."
"안 빼앗아 먹어요."
***
박효정이 연구동 앞 공터 벤치에서 컵라면을 열었다.
지금 지은 연구동 근처에는 식당이 몇 개 없다. 거기 가서 먹으려면 줄을 길게 서야 한다.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동안은 출근할 때 편의점에 들러 도시락을 샀다.
그런데 오늘따라 그 편의점에 남은 도시락이 하나도 없었다. 출근 시간에 늦지 않으려면 다른 곳에 들르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컵라면을 샀다.
그녀가 앉은 벤치는 가운데에 기다란 테이블이 있고 맞은편에는 벤치가 하나 더 있는 구조였다.
그녀의 맞은편 대각선 방향 벤치에 차우진이 앉았다. 차우진이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박효정이 고개를 들다가 그의 도시락을 보았다. 벤치 사이에 있는 테이블에 올려둔 도시락이라 눈에 바로 들어왔다.
'거의 찬합 수준이네?'
그녀의 눈이 자연스럽게 차우진의 배로 향했다.
'많이 드시긴 하겠다.'
그녀의 눈이 다시 도시락으로 향했다.
'고급 요릿집의 음식을 담아놓은 것처럼 맛있어 보인다.'
그녀가 자기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차우진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얼른 그녀의 컵라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옷을 보면 공사하는 분인가 보다.'
차우진은 옷은 깔끔했지만, 신발은 작업용 안전화를 신고 있었다.
그녀가 컵라면 뚜껑을 열었다.
"왜 하필 오늘 편의점에 도시락이 다 떨어져서."
그녀가 작게 툴툴대며 젓가락으로 라면을 휘저었다. 정말 맛있어 보이는 요리를 먹는 사람 옆에서 컵라면을 먹으려고 하니 입맛이 돌지 않았다.
'내가 이러려고 공대에서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나 싶다.'
차우진이 맞은편에서 물었다.
"같이 드실래요?"
"네?"
그녀가 생각했다.
'나한테 관심 있나? 하여간 이 미모는 정말 어쩔 수 없다니까.'
그러면서 차우진의 얼굴을 확인했다.
'괜찮은데?'
박효정이 도도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초면에 어떻게 도시락을 나눠 먹겠어요? 괜찮아요."
"같은 도시락을 나눠 먹자는 건 아니고요."
차우진이 가방을 가리켰다.
"도시락이 하나 더 있는데, 오늘은 야간 근무를 안 하게 돼서 남네요."
"그래요?"
"물론 공짜는 아니고."
그녀가 입맛을 다셨다. 차우진의 도시락이 너무 맛있어 보였다.
"얼마예요?"
"만 원?"
박효정이 차우진의 도시락을 보았다.
'저 요리가 겨우 만 원이면 개꿀이네?'
"콜!"
차우진이 도시락을 하나 더 꺼내 박효정에게 주었다.
그녀가 뚜껑을 열었다. 차우진의 것과 똑같은 구성이었다.
"맛있겠다. 어디서 사신 거예요?"
"직접 만들었습니다."
"와. 파는 건 줄 알았어요."
그녀가 젓가락으로 반찬을 하나 집었다. 다양한 채소가 얇은 고기로 감싸져 있었다. 고기에서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그녀가 그걸 집어 입에 넣고 씹었다. 고기가 얇은데도 육향이 진하게 났다. 진한 육향 뒤로 속에 들어 있던 채소의 깔끔한 맛이 느껴졌다. 그 맛이 고기의 기름진 느낌을 중화시켰다.
거기다 채소를 씹을 때 아삭 소리까지 들렸다.
그녀가 진심으로 감탄했다.
"와…."
그녀가 이번에는 튀긴 요리를 먹었다. 바삭거림이 느껴졌다.
그녀가 물었다.
"요리사세요?"
"전기 기술자입니다만?"
"아니, 이 실력으로 왜 식당을 안 하시고…."
"식당은 아무나 하나요. 그리고 내 요리는 근본이 없어서 팔 생각이 없어요."
"그래도…."
너무 맛있었다.
"어디서 판다면 매일 사 먹고 싶은 맛이네요."
차우진이 씩 웃었다. 이런 반응을 기대했다.
맛있는 음식이 초면의 어색함을 빠르게 없애주었다.
차우진이 그녀의 목에 걸린 직원카드를 보았다.
'박효정. 개발 2팀 연구원.'
카드에는 이름과 사진만 나왔지만, 그녀가 개발 2팀 소속인 건 이미 알고 있다. 그건 미래 정보가 아니라 최근에 조사해서 알아냈다.
차우진은 조만간 이 연구소에서 사고가 발생해 개발 2팀이 모두 사망하고 탐지기 프로젝트는 완전히 폐기된다는 걸 안다.
'그 사고를 막지 못하면 이 아가씨는 일찍 죽겠는데?'
사고를 막지 못하면 박효정은 10년 후의 멸망급 재난이 아니라 당장 다음 달에 죽는다.
31. 내부 탐색
차우진과 박효정이 도시락을 먹는 곳은 딥어스테크 연구동 앞이다. 게다가 박효정이 먼저 차우진에게 요리사냐고 물었고 전기 기술자라고 대답도 했다.
차우진이 자연스럽게 물었다.
"여기서 일하십니까?"
그녀가 도시락을 먹으며 대답했다.
"네. 개발팀에 있어요."
일상 대화를 몇 번 더 한 후에 탐지기에 관해 물었다.
박효정이 대답했다.
"그것도 저희 팀에서 하는 거긴 한데."
그녀의 팀이 진행하는 프로젝트 중에 그런 것들이 있다.
"요즘은 그건 주력이 아니에요. 그건 다른 거 하다가 시간 남으면 하는 거예요."
"시간이 남습니까?"
"아뇨. 앞으로도 안 남을 거 같아요."
차우진이 가볍게 혀를 찼다.
"그럼 곤란한데…."
"네?"
"많이 바쁘신 거 같아서."
"직장인이 다 그렇죠."
그래서 혀를 찬 게 아니다. 지구 멸망을 막기 위해서는 이 연구소의 개발 2팀은 지하 탐지기 개발에 주력해야 한다.
"개발하는 탐지기가 하나입니까?"
"아뇨. 개발이 중단된 것들까지 포함하면 여러 개 있어요."
"그러시구나."
어느새 식사가 끝났다.
박효정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게 즐거웠다. 그런데 도시락이 너무 맛있어서 음식이 빠르게 사라졌다.
그녀가 텅 빈 도시락을 보며 아쉬워했다.
"맛있었어요."
차우진이 제안했다.
"그럼 내일도?"
연구소 내부 상황과 개발 2팀의 정보를 수집하려면 오늘 하루에 모든 걸 물어봐서는 안 된다. 너무 많이 물어보면 의도를 가지고 캐묻는 것처럼 보인다.
오늘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내일 새로운 질문을 해야 한다.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의 이성은 여기서 한 번 튕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난 도시락 하나에 넘어가는 쉬운 여자가 아닌데.'
그런데 함부로 튕기기엔 밥이 너무 맛있었다. 게다가 차우진의 얼굴도 그녀의 취향에 맞았다.
"네. 그럼 내일도…. 아. 도시락값 드릴게요."
그녀는 지갑을 가져오지 않았다. 현금이 없었다. 오늘 도시락값은 만 원이다.
사실 만 원으로는 재료비도 나오지 않는다. 오늘 도시락은 최고급 재료로 만들었다.
차우진이 말했다.
"돈은 톡으로 보내줘요."
"네!"
차우진은 메신저를 이용해 돈을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그녀의 번호를 땄다.
차우진이 도시락통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난 커피나 마셔야겠네요."
"아! 커피는 제가 살게요."
이 연구소는 아직 짓는 중이다. 근처에는 카페가 없다.
"연구동 안에 휴게실이 있긴 한데…."
오늘 처음 보는 사람을 거기로 데려갈 순 없다. 대신에 자판기는 밖에도 있었다.
그녀가 물었다.
"자판기 커피 괜찮으세요?"
"좋죠."
차우진은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대놓고 그 탐지기를 물으면 의심할까 봐 이번에는 일상 이야기를 주제로 삼았다.
"저기 저 창문 있는 데서 근무하시는구나."
"네. 제 자리는 창가는 아니지만요. 거긴 팀장님 자리예요."
어느새 점심시간이 끝나갔다. 그녀가 인사했다.
"저는 이제 가서 일해야 해서요."
"저도 일하러 가야 합니다. 그럼 내일?"
"네! 내일 이 자리에서요."
그녀가 밝아진 얼굴로 연구소를 향해 걸어갔다.
차우진이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그 사고를 막으면 박효정 씨도 안 죽겠지."
***
그날 밤에 차유리가 집에 들어오자마자 물었다.
"이게 뭐야? 왜 편의점 도시락 껍데기가 이렇게 많아?"
편의점 도시락이 내용물 없이 케이스만 탁자 위에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차우진이 대답했다.
"아침에 샀어."
차우진은 오늘 아침에 박효정이 출근길에 들르는 편의점에 먼저 가서 도시락을 전부 샀다.
편의점에 도시락이 보충되려면 물류 트럭이 와야 한다. 그런데 그 차는 박효정이 출근한 후에나 온다.
그래서 박효정은 텅 빈 도시락 매대를 보고 컵라면만 하나 사서 출근했다.
박효정이 그 벤치에서 도시락을 먹는다는 건 이미 조사해서 알고 있었다. 그녀는 어제도 거기서 편의점 도시락을 먹었다.
차유리가 물었다.
"아침에는 명품 도시락을 만들더니 지금은 편의점 도시락? 왜 이렇게 갭 차이가 크지?"
"도시락은 맛있었어?"
차유리가 엄지를 세웠다.
"끝내줬다. 수연이하고 같이 먹었는데 걔도 대박이라고 했다."
차우진이 스마트폰을 보았다. 민수연의 톡이 엄지 두 개를 세운 이모티콘과 함께 와 있었다.
- 내일도 유리 언니 통해서 도시락 보내라.
차우진이 톡을 남겼다.
- 맡겨놨냐?
- 어. 내 도시락 내놔.
차유리가 물었다.
"이 편의점 도시락들은 진짜 뭐야?"
"오늘 저녁은 이걸 재료로 다시 요리를 만들었거든. 내일은 이거 가져갈 거야."
차유리가 얼른 주방을 확인했다. 이미 만들어둔 게 많았다.
"오! 그럼 인정. 저녁 안 먹고 들어왔는데 잘 됐다."
"누나가 왜 인정하는데?"
"어차피 너 혼자 다 못 먹잖아. 먹어는 줄게."
차유리가 콧노래를 부르며 접시에 요리를 몇 개 담았다. 그녀가 식탁에 앉아 젓가락으로 음식을 하나씩 맛보면서 칭찬했다.
"편의점 재료로 만든 거 맞아? 왜 이렇게 맛있어?"
"그걸 베이스로 하고 재료를 추가해서 업그레이드했거든."
"이건 거의 재창조 수준 아냐?"
"내가 좀 하지?"
차우진은 멸망한 세계에서 어쩌다 괜찮은 식재료를 획득하면 정성을 다해 요리해서 맛을 즐겼다.
멸망한 세계에서 박창수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우진아. 넌 세상이 안 망했으면 요리사 했을 거야.'
'감각 스킬까지 써서 만드니까 맛있는 거야. 세상이 안 망했으면 스킬 각성도 없어.'
'아. 그렇지.'
'그리고 난 원래 요리사가 아니라 전기 기술자였다고.'
멸망한 세계는 언제 다시 맛있는 걸 먹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곳이다. 즐길 게 많은 세상도 아니다.
그래서 요리할 기회가 오면, 미각이나 후각 같은 감각 관련 스킬까지 사용하며 정성을 들여 음식을 만들었다.
생존자 커뮤니티와 교류할 때는 요리 기술을 서로 가르치고 배웠다.
차우진의 요리 기술들은 그때 배운 것들이다. 요리 기술을 공유한 사람 중에는 전문 셰프도 여러 명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물자가 풍족한 시대다. 조리할 시간도 많았다. 냉장고와 찬장에 대충 쌓여 있는 식재료는 멸망한 세계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최고급 식재료로 치던 것들이다.
차우진은 그 식재료를 사용해 정성을 다해 조리했다. 오감을 강화하는 스킬을 써가면서 만든 요리는 완벽했다.
차유리가 편의점 도시락 재료로 만든 요리를 아예 퍼먹으며 엄지손가락을 세웠다.
"역시 취사병 출신."
"그래서 잘하는 거 아니라고."
***
차우진은 딥어스테크 건설 현장에서 일주일쯤 일하며 정보를 수집했다.
달력이 넘어가고 날짜는 1일이 됐다.
"사고는 수요일에 날 테고."
요일을 아는 건, 꿈속 미래에서 수요일의 참사라고 했던 게 기억났기 때문이다.
"그게 이번 주인지 다음 주인지는 모르는데."
이번 주 수요일일 수도 있고 마지막 주 수요일일 수도 있다.
"내가 그 양아치들을 치웠다고 해서 날짜가 바뀌지는 않을 테고."
건축 자재를 빼돌리던 양아치들은 공사 중인 현장에 배치됐었다.
반면에 사고는 이미 가동 중인 연구동에서 일어난다.
차우진이 장비를 대충 정리하고 일어났다. 같이 일하던 목수가 물었다.
"어디 가?"
"점심 먹으러요."
"아직 점심시간이 아닌데?"
"오전에 하려던 일 다 끝냈어요."
전기기술자에게 목수 일을 도와달라고 할 수도 없다. 이 현장은 그날 할당량이 끝나면 퇴근을 일찍 해도 되는 방식으로 돌아간다.
"부럽다. 차 기사는 그 실력으로 왜 여기서 일하는 거야? 돈 더 주는 곳에도 갈 수 있지 않아?"
"그냥 할만해서요."
차우진이 연구동으로 걸어갔다.
연구소는 그 특성상 외부인이 함부로 들어가지 못한다. 옆에서 공사하다 온 사람이라도 마찬가지다.
연구소 경비 직원이 물었다.
"공사하는 분이 더 오신다는 말은 못 들었습니다만?"
"그런 건 아니고요. 박효정 연구원님을 잠깐 만나러 왔습니다."
1층 로비 한쪽에는 방문객이 잠시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은 있었다. 차우진에 그곳에서 박효정을 기다렸다. 그러면서 내부를 둘러보았다.
"자재는 제일 싼 것만 썼네. 건물 짓는 데 쓴 시멘트가 아깝다. 아. 그 시멘트도 물 탄 거지."
잠시 후에 박효정이 나왔다.
"차우진 씨. 아직 점심시간도 아닌데 오늘은 왜 벌써…."
차우진이 도시락을 위로 들었다.
"오늘은 점심때 일이 있어서요."
박효정이 발을 동동 굴렀다.
"앗. 어쩌죠? 저는 지금 근무시간이라 진짜 안 되는데."
"음. 그럼 이 도시락만 가져가요. 나도 오늘은 따로 먹을 테니까."
그녀가 아쉬워했다.
"안 되는데…."
"그럼 커피라도?"
"아! 안쪽 휴게실로 가실래요? 잠깐은 괜찮아요."
로비는 앉을 곳만 조금 있고 자판기가 없다. 자판기가 있더라도 여기서 손님을 만나면 지나가는 사람이 다 보기 때문에 좋지 않았다.
외부인은 내부로 함부로 들어갈 수 없지만, 직원은 손님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차우진이 박효정을 따라 연구소 안으로 들어갔다.
박효정이 휴게실로 안내한 후에 자판기에서 병 커피 두 개를 뽑아왔다.
두 사람은 커피를 마셨다.
박효정이 말했다.
"구내식당 공사가 끝났으면 거기서 커피 팔지도 몰랐는데."
"구내식당이요?"
"임시 구내식당이요. 목요일에 시험 운영을 시작한다고 들었어요."
"이번 주 목요일?"
"네."
박효정은 혹시 차우진이 도시락을 그만 가져오는 건 아닐까 싶어서 얼른 설명했다.
"근데 어차피 밥은 맛없을 거예요. 연구소가 전에 있던 곳에서도 맛이 진짜 없었거든요."
"그 정도입니까?"
"거기서 나오는 돈가스 몇 번 먹고 나면요. 밖에서 사 먹는 돈가스까지 싫어하는 음식이 될 거 같다니까요. 차우진 씨처럼 요리 잘하는 분은 그거 먹느니 차라리 굶을 걸요?"
"아니요. 잘 먹을 겁니다."
멸망한 세계에서는 소화 시킬 수 있고 죽지만 않으면 다 먹었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박효정이 말했다.
"이쪽 건물에는 원래 구내식당을 만들 계획이 없었대요. 사장님이 직원들을 위해 임시로 만들라고 지시하셨다는데, 그래서 크기도 작대요."
커피를 마신 후에 차우진이 도시락통을 넘겨주며 말했다.
"이제 가서 일하셔야죠."
박효정이 방긋 웃으며 도시락을 받았다.
"네. 내일 봐요."
"먼저 가요. 난 내가 알아서 나갈 테니까. 들어온 곳으로 도로 나가면 되잖습니까?"
"아. 그렇죠. 네."
박효정이 손까지 흔든 후에 개발 2팀 사무실로 돌아갔다.
차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그는 연구소를 나가지 않았다.
"오전에는 공사장에서 날 찾는 사람은 없을 테고."
이 건물에는 경비 직원이 있지만, 그가 언제 나가는지 쫓아다니면서 감시하지는 않았다. 아직은 덜 완성된 것도 많고 오가는 사람도 많아서 엄격하게 출입을 제한하지는 않았다.
"내가 몰래 침입한 게 아니라 절차 밟아서 들어온 거는 목격자가 있고."
차우진이 주변을 슬쩍 보았다.
"문제는 CCTV인데."
지금까지 CCTV는 출입구에서만 볼 수 있었다.
"내부에 CCTV가 거의 없어. 이건 아직 마무리가 덜 된 건물을 써서 그렇다고 하면 말이 안 되는 건 아닌데…."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기 때문에 그게 수상해 보였다.
차우진이 연구소 내부를 돌아다녔다. 이번 달 수요일에 일이 터진다는 건 아는데 몇 번째 주 수요일인지는 몰랐다.
"빠르면 이번 주에 터지려나."
그렇게 복도를 걷다가 전기 기술자 김양석과 마주쳤다.
김양석은 이 건물에서 일하고 차우진은 아직 짓고 있는 저쪽 현장에서 일한다. 그래서 같이 일한 적은 없다.
그래도 아침에 모였을 때 서로 얼굴 정도는 본 사이다. 둘 다 상대가 전기 기술자라는 것도 안다.
김양석이 인상을 확 썼다.
"너 뭐야? 여기 왜 있어?"
"밥 먹으러 왔는데?"
"구내식당은 아직 공사 중인데 무슨 개소리야?"
"아는 사람이 여기서 일해서 도시락 전해주러 왔다고."
김양석이 차우진을 노려보았다.
"이젠 오지 마라. 여긴 내 구역이다. 또 나타나면 내가 그냥 안 넘어간다."
김양석이 차우진의 어깨를 툭 치며 지나갔다.
차우진이 복도에서 멀어지는 김양석을 돌아보았다.
"쓰읍. 그냥 지나가다 마주친 건데도 반응이 지나치게 거친데?"
그래서 의심이 갔다.
"저놈 인성이 쓰레기거나, 숨기는 게 있거나. 만약 둘 다라면?"
차우진이 결론을 내렸다.
"그러면 여기서 수요일에 일어날 일은 사고가 아니라 살인사건이겠지."
32. 설계
연구동 내부에는 박효정이 말한 구내식당이 있었다.
연구소 근처에는 식당이 몇 개 없다. 그래서 직원들은 그 식당에서 줄을 서서 식사하거나 도시락을 가져와 점심을 해결한다.
그러니 구내식당을 만드는 것 자체는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 결정을 한 사람이 이상했다.
"여기 사장놈이 직원을 위해 임시로 구내식당을 설치한다고? 공사장에 싸구려 자재만 넣고, 그나마도 양아치들 시켜서 빼돌려 비자금을 만드는 놈이?"
그런 사장이 나중에 철거해야 하는 임시 구내식당을 돈을 들여 만들었다.
"이건 이상하지."
차우진이 구내식당 앞을 지나가며 내부를 슬쩍 확인했다.
조리에 필요한 장비는 들어와 있었다.
"창가 쪽에서 불이 나면 그게 어디로 가나…."
차우진이 구내식당의 위치를 확인했다. 바로 위층에 박효정이 소속된 개발 2팀이 있었다.
그 팀은 이번 달 수요일에 터지는 사고로 모두 사망할 예정이다.
"맞네. 여기서 터지겠네."
***
며칠이 지나 수요일이 되었다.
차우진이 말했다.
"당연히 근무시간에 터지겠지."
직원들이 출근한 후에 터져야 개발 2팀의 연구원들이 다 죽는다. 꿈속 미래에서 본 기사에는 그 사고 후에 탐지기 개발이 완전히 취소됐다고 했다.
이 연구동 건물은 이미 사용 중이지만 내부 공사가 끝난 건 아니다. 대충 허가부터 받고 쓰는 건물이라 내부에 추가 작업이 필요했다.
그중에는 전기 관련 작업도 있었다.
누가 이 연구동에서 전기 공사를 하는지는 안다.
'김양석.'
김양석은 며칠 전에 연구동 복도에서 차우진과 마주쳤을 때 굉장히 예민하게 반응했다.
공사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인원 확인을 위해 아침 일찍 모였다. 연구동에서 일하는 김양석도 일단은 이곳에 왔다.
김양석이 차우진을 알아보았다.
'저 새끼. 내가 경고하니까 이제 안 오네.'
그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넌 밖에서 뺑이 쳐라. 나는 안으로 간다."
차우진의 옆에 있던 사람들은 주변이 시끄러워서 김양석의 말을 듣지 못했다.
차우진은 듣지 않아도 그 정도는 입 모양만 보고 알 수 있다.
차우진이 피식 웃었다.
"안으로 못 들어갈 텐데."
김양석이 연구소로 걸어가며 욕을 했다.
"건방진 새끼. 저 새끼만 보면 그냥 기분이 나빠."
김양석이 연구동을 보며 손바닥을 비볐다.
"오늘 한 몫 단단히 잡아보자고."
그가 걸어가는 방향으로 금속 베어링이 도르르 굴러갔다.
김양석은 베어링을 보지 못했다. 그가 걷는 방향과 베어링이 굴러가는 길이 중간에 겹쳤다.
그의 안전화가 베어링을 밟았다. 오른발이 앞으로 휙 미끄러졌다.
"어?"
김양석은 버티지 못하고 옆으로 벌러덩 넘어졌다.
베어링을 밟고 미끄러진 장소가 너무 딱딱했다. 바닥에 돌아다니는 잡동사니도 좀 있었다. 그대로 넘어지면 다친다.
김양석이 황급히 오른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손목이 삐끗했다.
"끄윽!"
통증이 확 올라오면서 오른팔이 힘을 잃었다. 그가 옆으로 자빠졌다.
사람들이 김양석을 돌아보았다.
그가 오른손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나려고 했다.
"씨발. 쪽팔리게 왜 미끄러졌…. 악!"
손목을 삔 줄 모르고 오른손으로 바닥을 짚었더니 통증이 확 올라왔다. 김양석이 옆으로 다시 넘어졌다.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김양석이 왼손으로 바닥을 다시 짚고 일어났다.
"씨발. 내 손…."
현장 공사 관리자가 다가왔다.
"김양석 씨. 괜찮아?"
"예. 괜찮아요."
"오른손 좀 봅시다. 다쳤으면 병원 가야지."
김양석이 오른손을 뒤로 가렸다.
"아니, 괜찮다니까요?"
"다친 거 맞네. 오늘 일한 거로 쳐줄 테니까 병원 가봐."
평소의 김양석이라면 일당 주면서 쉬라고 하는데 안 갈 리가 없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반장님. 나 일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왜 고집을 부려? 오늘 일한 거로 쳐준다니까?"
현장에서 안전사고가 발생하면 누군가 책임져야 한다. 현장 관리자가 제안했다.
"대신에 손은 그냥 밖에서 살짝 삔 거로 하자고. 겨우 그런 거로 서류 작업하면 서로 피곤하잖아?"
김양석은 오늘 연구동에 가야 한다.
"씨발. 일할 수 있는데…."
책임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 씨발? 김양석 씨. 미쳤어?"
김양석이 어깨를 움찔했다. 현장 관리자에게 찍히면 이 일자리가 날아갈 수도 있다. 그러면 연구동에 못 들어간다.
"아닙니다. 일이야 뭐 오후에 하면 되죠."
"빨리 병원이나 가. 오늘 오지 마."
"오후에 오겠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 아니었잖아. 오늘따라 왜 이래?"
김양석이 머뭇거리다가 결국 병원으로 가기 위해 현장을 떠났다.
현장 관리자가 투덜댔다.
"손 많이 삐었으면 오후에도 일을 못 할 텐데 왜 고집이야? 그나저나 연구동 전기 공사는 어쩌나?"
차우진이 다가왔다.
"반장님. 제가 가서 작업하겠습니다."
"차우진 씨가? 우진 씨 원래 일은?"
"오늘 작업까지 어제 끝냈습니다. 바짝 당겨서 일하고 주말에는 쉬려고 했는데, 땜빵이나 하죠 뭐."
관리자의 얼굴이 환해졌다.
"이야아. 우진 씨 진짜 일 잘하네. 나중에 나랑 같이 계속 공사 현장 다닐 생각 있어?"
"없습니다."
"아. 없구나."
차우진이 김양석 대신에 연구동으로 걸어갔다.
중간에 굴러다니는 동그란 베어링이 보였다. 김양석이 밟고 넘어진 베어링이 멀리 굴러가 있었다.
차우진이 그 베어링을 집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가 조금 전에 이 베어링을 김양석의 발밑으로 던졌다. 베어링은 예비로 더 가져왔지만 한 개만 써도 충분했다.
"꿈속에서 하던 구슬치기가 이럴 때 도움이 되네."
김양석을 병원으로 쫓아냈으니 오늘 연구동에서 전기 작업을 할 사람은 차우진뿐이다.
그가 김양석이 떠난 방향을 돌아보았다.
"일당 다 쳐준다는데 굳이 연구소로 가서 일하겠다? 저 인간이? 하필 오늘? 이러면 뭐, 확실하지."
차우진은 김양석이 작업하던 곳부터 확인했다.
그런데 작업 계획과 현장 상황에 차이가 있었다.
"보는 사람 없다고 일 진짜 대충 했네."
차우진은 직원들이 출근하기 전에 임시 주방으로 이동했다.
주방은 겉보기엔 멀쩡했다.
차우진이 전투보조 스킬을 사용해 후각을 높였다.
주방에서 미세한 가스 냄새가 났다.
"가스가 폭발할 정도는 아니야. 보통 사람은 이 냄새를 못 맡을 정도로 유출량이 약해."
그런데 이 냄새가 조금이라도 난다는 건, 어디선가 가스가 샌다는 뜻이다.
그가 주방으로 들어가 창가를 확인했다.
여기서 불이 나면 불길이 창문을 통해 위층으로 올라간다.
"바로 위층이 탐지기를 개발하는 2팀."
이 회사는 하필 탐지기 개발팀 바로 아래층에 임시 주방을 만들었다.
게다가 여기에도 CCTV는 없었다.
"아직 내부 공사 중이라는 핑계를 대고 일부러 안 깔았겠지.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아무도 몰라야 하니까."
그런 일을 말단 직원이 지시할 수는 없다.
"이것도 사장놈 짓이구나. 핑계는 비용 절약일 테고."
자재를 빼돌리던 양아치들을 잡았을 때, 두목인 김태욱은 딥어스테크 사장이 뒤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 장소에서 그 말이 사실인지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그래도 상관없다. 누가 시켰는지만 알면 되지, 증거가 필요한 건 아니다.
차우진이 주방 내부를 조사했다. 수상한 장치를 찾는 건 쉬웠다.
"타이머네?"
기계식 타이머가 주방 설비의 일부로 위장되어 설치되어 있었다.
타이머 자체는 양산품이긴 한데 상태가 이상했다.
"오류가 발생하게 고장 낸 타이머."
차우진이 타이머와 연결된 전기 배선도 확인했다.
"이 배선을 살짝 손보면 누전으로 인해 열이 발생할 테고, 기름에 젖은 휴지와 기름통을 근처에 두면 불이 나겠지."
그러려면 누군가 휴지를 기름에 적셔서 갖다놓고 전기 배선도 화재 후에는 증거가 사라지는 방식으로 조작해야 한다.
"그걸 김양석이 하기로 했을 테고."
차우진이 불이 난 후에 일어날 일을 예상했다.
"기름에 불이 붙어도 잘만 대처하면 건물이 다 타기 전에 끌 수는 있어."
여기서 난 불이 주방만 적당히 태우고 꺼진다면 위층에 있는 개발 2팀 연구원들이 몰살당할 리 없다.
"역시 가스가 터져야 해."
그래야 고장 난 타이머를 작동시킨 김양석이 도망을 못 친다.
"그렇게 해야 2팀도 죽고 김양석도 죽어."
누군가 김양석을 죽이려는 이유는 뻔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까, 전부 다 김양석에게 뒤집어씌우겠지."
가스통은 발화 예상 지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차우진이 가스 배관을 조사했다. 주방 설비 안쪽에도 배관이 있었다.
차우진은 지금 전투보조 스킬로 후각을 예민하게 만든 상태다. 미약하게 나던 가스 냄새가 여기서는 조금 더 많이 났다.
게다가 바닥에는 기름이 묻어 있었다.
"그럴 줄 알았다."
차우진이 가스 배관에 스마트폰 불빛을 비춰보았다. 표면에 미세한 실금이 보였다.
"화재가 발생하면 즉시 파열되게 미리 손을 봤구나."
이게 찢어지면 실내로 가스가 뿜어진다. 이미 화재가 발생한 곳에 가스가 공급되면 불길은 더 거세진다.
차우진이 위를 올려다보았다. 바로 위층에는 개발 2팀이 있다.
아래층에서 불이 크게 나도 그 불길이 위층으로 번지려면 시간이 약간은 필요하다. 위층 사람들은 그사이에 대피하면 그만이다.
"개발 2팀 사람들을 죽이려면 연구실 출입문을 잠가야겠는데?"
범인이 어떤 방식으로 화재 사고를 설계했는지는 알아냈다. 꿈속 미래 정보에는 개발 2팀이 사고에 휘말려 모두 사망했다는 것만 나오지 이렇게 자세한 과정까지는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김양석이 없단 말이야."
이 설계대로 사고가 나려면 누군가 여기서 불이 잘 나게 조작을 좀 해야 한다.
그런데 그 일을 해야 할 김양석은 지금 병원에 가 있다.
***
김양석은 병원에 와서 손목을 치료받았다. 그가 의사에게 물었다.
"진통제를 맞으면 오후에는 일할 수 있습니까?"
"오늘은 쉬시는 게 좋습니다. 무리하면 덧납니다."
김양석이 팔을 치료받고 반깁스도 한 후에 병원을 나왔다.
"아이. 씨발. 오늘이 디데이인데, 일이 꼬였네."
그는 오늘 임시 주방에 수작을 부리기로 하고 선금을 받았다. 일이 잘 끝나면 잔금도 받기로 했다.
그런데 이러면 그 일을 할 수가 없다.
그가 차에 가서 대포폰을 꺼냈다. 그건 상대가 먼저 전화를 걸 때나, 아니면 문제가 생겼을 때만 쓰는 대포폰이다.
그가 전화를 걸었다. 상대는 전화는 받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양석이 먼저 말했다.
"내가 오늘 손을 좀 다쳤습니다. 지금 병원에 갔다 오는 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 일을 하기 어렵습니다."
상대가 입을 열었다.
- 지금이라도 가서 일을 처리한다면?
"손이 이 상태인데도 억지로 일하면, 불이 났을 때 나만 의심받을 텐데? 평소의 나는 그렇게 책임감이 넘치는 사람은 아니라서."
- 끄응. 실망스럽군. 하필 오늘 다치다니.
"이미 일어난 일인데 어쩌겠습니까? 그리고 이거 꼭 오늘 해야 하는 건 아닐 것 같은데. 내일 불이 나도 화재보험료는 받을 수 있을 테니까요."
- 화재보험료가 목적이라고는 말 안 했는데.
김양석이 실실 웃었다.
"내가 바보도 아니고, 새로 지은 건물에 일부러 불을 지를 이유가 돈 말고 뭐가 또 있을까. 뻔하지."
- 이유를 알려고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아아. 물론입니다. 난 묻지도 따지지도 않을 겁니다. 잔금만 확실히 치러주면 됩니다. 그러니까, 내일 합시다. 내일."
- 끄응. 세팅해놓은 게 문제가 되겠군. 준비를 다시 해야 하니까 내일은 곤란하다. 일단 기다려라.
"뭐, 그럽시다."
김양석이 전화를 끊었다.
오늘은 일이 없다. 불 지르는 날짜도 늦췄다. 어차피 일당은 나온다.
시간이 비었다.
그는 술, 도박, 여자를 좋아한다. 그걸 한꺼번에 할 수 있는 곳이 있다.
"하우스나 가야겠다."
***
차우진이 기계식 타이머와 화재 유도 장치의 구조를 변경했다.
부비트랩은 멸망한 세계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많이 만들어봤다. 기계식 타이머 정도는 간단히 손볼 수 있다.
게다가 전기 쪽은 원래 차우진이 전문가다.
"김양석은 없지만 사장놈이 설계한 대로 오늘 불이 나야지. 내가 이렇게 친절하다니까. 불도 대신 질러주잖아."
만약 김양석이 여기서 오늘 작업했다면 고장 난 타이머 때문에 화재에 휘말려 죽기 딱 좋았다.
작업을 마친 차우진이 수리된 타이머를 작동시키고 주방을 나왔다. 이제 세팅은 끝났다.
그가 복도를 걸어가며 오른손 손가락 다섯 개를 모았다가 폈다.
"파이어."
이제 저 타이머가 끝까지 돌아가면 임시 주방에 화재가 발생한다.
33. 파이어
차우진이 연구동 내부 외진 곳으로 이동했다.
연구동에 몇 대밖에 없는 CCTV 중 하나가 그곳으로 가는 길 중간에 있었다. 차우진이 단거리 공간이동 스킬로 CCTV 구역을 건너뛰었다.
차우진이 연구동 구석에서 내부 전기 공사를 시작했다.
지금 이 작업은 그가 오전에 여기서 일했다는 근거를 남기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아침 일찍부터 여기서 일한 것처럼 보이려면 할 게 많았다.
이제야 사람들이 출근하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이 원래 그날이 맞겠지만, 아니면 또 어떠냐. 오늘 불이 나면 그게 그거지."
***
개발 2팀 연구원 박효정은 오늘은 편의점 도시락을 사지 않았다. 점심때 차우진과 도시락을 먹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점심 도시락을 생각하며 입맛을 다셨다.
"정말 너무 맛있어. 그 요리 실력으로 장사 하면 대박 날 텐데."
옆에서 여자 동료가 물었다.
"뭐가 그렇게 맛있어?"
"응? 아. 점심 말이야. 점심."
"구내식당은 내일부터 열 텐데? 그리고 우리 회사 알잖아. 예전 구내식당도 그 지경이었는데, 임시로 만든 구내식당에 맛있는 게 나오겠어?"
"도시락 먹을 거야."
"또 편의점 도시락?"
"아니. 아는 사람이랑 같이…."
동료가 갑자기 의자를 밀며 쓱 다가왔다.
"누군데?"
"응?"
여자 동료의 눈이 반짝였다.
"남자친구야?"
"아, 아냐. 그냥 알게 된 사람이야."
"탕비실로 가자. 제대로 들어야겠다."
2팀 연구실 구석에는 커피믹스와 현미 녹차, 정수기가 놓여 있었다.
커피와 녹차는 팀원들이 돈을 모아 산 것이다. 회사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2팀 사람들은 그곳을 탕비실이라고 불렀다.
탕비실 공간에서 동료가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만난 사람이야?"
박효정이 창문 밖을 가리켰다. 아직 공사 중인 건물이 보였다.
"저기 공사하러 온 분인데 우연히 이 앞에서…."
"난 이 결혼 반대일세."
"왜 오버하고 그래?"
"아니야?"
"아니야. 아직은 점심만 같이 먹는 건데 무슨."
"농담한 거야. 잘생겼어?"
"살 빼면 잘생겨질 것 같긴 해."
"살 빼면?"
"긁지 않은 복권 같은 거지. 먼저 긁는 사람이 임자인 거고."
"긁어봤는데 꽝이면?"
"에이. 설마 꽝이겠어?"
***
차우진이 작업을 멈추고 방진 마스크를 교체했다. 그건 단순 방진 마스크가 아니라 연기도 막을 수 있는 고급품이다.
그가 손목에 찬 스마트워치로 시간을 확인했다.
임시 주방에 있는 건 기계식 타이머라 초 단위까지 정밀하게 계산할 수는 없다. 그래도 언제 터질지 대충은 알 수 있다.
시간이 다 됐다. 차우진이 짧게 말했다.
"꽝."
***
임시 주방에 있는 타이머가 딸각 소리를 냈다.
곧바로 가느다란 전선이 빨갛게 가열됐다. 바로 옆에 떨어져 있는 기름 묻은 종이에 순식간에 불이 붙었다.
그 불이 주변으로 조금 번지다가 조리 기구 안쪽에 모여 있던 약간의 가스에 옮겨붙었다.
작은 폭발이 일어나면서 미리 수작을 부려놓은 가스 배관이 파손됐다.
즉시 주방 화재에 가연성 가스가 공급됐다. 그리 크지 않던 불길이 화염방사기로 쏘는 것처럼 거세졌다.
불이 난 곳은 창가 쪽이다. 화염이 임시 주방 내부를 태웠다. 화염 일부는 창문 밖으로 빠져나가 위층으로 외벽을 타고 올라갔다.
***
박효정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디서 화재경보기 소리 안 나? 소방 훈련이라도 하나?"
"경보기 고장 아냐?"
"잠깐. 어디서 타는 냄새가 나는데?"
갑자기 창문 너머로 검은 연기가 올라왔다. 열려 있는 창문으로도 연기가 들어왔다.
연기 사이로 시뻘건 불길이 보였다.
박효정이 비명을 질렀다.
"꺄악! 불이야!"
두 사람이 탕비실 구역을 벗어나 사무실 사람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불났어요! 불!"
개발 2팀 사람들도 문제가 생긴 건 알았다.
"빨리 문 열어!"
팀장 곽수혁이 소리를 질렀다.
"일단 여기서 나가!"
2팀 사무실의 문은 철문이다. 그것도 가정용 현관처럼 얇은 철판이 아니라 두꺼운 보안 철문이다.
그 철문은 열쇠로 문을 여닫는 방식이 아니다. 전자식 잠금장치를 해제해야 문이 열린다. 문을 여닫는 것도 모터의 힘으로 한다.
젊은 남자 팀원이 급히 잠금 해제 버튼을 눌렀다.
"안 열립니다!"
"그게 왜 안 열려! 다시 해봐!"
팀원이 아예 손바닥으로 해제 버튼을 탁탁 쳤다. 소용없었다.
곽수혁이 달려왔다.
"비켜!"
그가 사원증을 비상 해제 패드에 댔다. 반응이 없었다.
"이거 왜 이래!"
"전기가 끊겼나 봅니다! 전원이 아예 안 들어옵니다!"
"젠장!"
곽수혁이 뒤를 돌아보았다. 창문 밖으로 검은색 연기와 시뻘건 불길이 보였다.
"이런 문은 원래 전기가 끊겨도 안에서 수동으로 열 수 있잖아! 누구 강제로 여는 법 아는 사람 없어?"
"비상개폐장치가 있긴 할 텐데,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이 연구동으로 옮겨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 보안 시스템은 개발팀에만 설치되었다.
개발 2팀에는 이 문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모른다고 구경만 할래? 시설팀 기다리다가 다 타죽을 거야? 비켜!"
곽수혁이 근처에 있는 의자를 들고 잠금장치를 찍었다.
소용없었다. 다른 팀원 세 명이 책상을 번쩍 들고 달려와 문과 충돌했다.
철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곽수혁이 화를 냈다.
"젠장! 구두쇠 회사가 이 문은 왜 이렇게 튼튼한 걸 설치한 거야!"
"팀장님! 이제 어떻게 합니까?"
곽수혁이 뒤를 다시 돌아보았다. 연기가 사무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창문 다 잠가서 연기라도 막아!"
박효정이 당황한 얼굴로 외쳤다.
"창문 중에 고장 난 거 있잖아요! 아직 안 고쳐졌어요!"
"뭐?"
"저 창문 안 잠겨요! 완전히 닫히지도 않아요! 그래서 열려 있는 거예요!"
이제 창문으로 불길이 슬슬 들어오고 있다. 불길과 연기를 뚫고 창문으로 접근해도 닫을 방법이 없다. 사무실에 있는 집기로 창문을 막으면 불쏘시개만 늘어난다.
곽수혁이 다시 소리를 질렀다.
"뭐라도 가져와서 이 문 부숴!"
"보안 철문인데 어떻게 부숴요!"
"그래도 두들겨 봐! 이대로 죽을 순 없잖아!"
***
임시 주방의 실내 화재경보기가 먼저 작동했다. 그런데 그건 소리가 작았다.
차우진이 벽에 설치된 화재경보기로 저벅저벅 걸어가 보호 커버를 깨고 버튼을 눌렀다.
건물 전체에 화재 경보가 요란하게 울렸다.
임시 주방에서 연기가 많이 나고 가연성 가스도 공급되는 중이지만 아직 화재는 초기 단계였다.
"불이 났으니까 이제 꺼야지."
차우진이 임시 주방으로 뛰어갔다.
그가 뛰어가는 모습이 몇 대 없는 CCTV에 찍혔다.
차우진이 주방 근처에 있는 소화전을 열었다. 소화 호스도 꺼냈다.
이제 물만 뿌리면 된다. 차우진이 소화전의 밸브를 열었다.
"어?"
물이 나오지 않았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네."
임시 주방이 있는 층은 아직 사용하지 않는다. 그 핑계로 스프링클러에 수작을 부릴 줄은 알았는데, 소화전까지 막혀 있었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 미리 봐둔 소화기가 있다.
차우진이 소화 호스를 던져버리고 복도 끝으로 달려가 소화기를 가져왔다.
불이 난 걸 알고 다른 층에서 달려온 사람들은 예상보다 거센 불길을 보고 당황한 소리만 냈다.
"어? 어?"
차우진이 그 사람들에게 말했다.
"소화기 닥치는 대로 챙겨와요."
"예?"
"소화전은 고장 났고."
차우진이 소화기를 들었다.
"이거 하나로는 불을 못 끄니까."
"저, 저기 들어가시게요? 지금 활활 타는데요?"
"그래도 불은 꺼야지요. 소화기 더 가져오라니까요?"
"제가 가져오겠습니다!"
뒤에 있던 사람이 소화기를 가지러 뛰어갔다.
차우진이 밀폐형 보안경으로 눈을 보호했다. 특수 방진 마스크도 얼굴에 썼다.
그건 방진 등급이 워낙 높아 화재 현장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이다. 당연히 보급품이 아니라 차우진이 개인적으로 가져왔다.
차우진이 소화기를 들고 주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사람들은 당황했다.
"어? 어? 위험해요!"
차우진이 내부에서 발화 지점을 확인했다. 그가 불을 냈기 때문에 발화 지점이 어디인지는 정확히 알았다.
그는 먼저 가스통의 밸브부터 잠갔다. 그런 후에 소화기의 손잡이를 당겨 소화용 분말을 뿌렸다.
가연성 가스 공급이 끊기자 불길은 약해졌다.
하지만 소화기 하나로는 부족했다. 이미 불이 너무 커졌다.
차우진이 바깥을 향해 외쳤다.
"소화기 하나 더!"
소화기를 가져온 직원이 옷소매로 입을 막고 임시 주방으로 들어오려고 했다.
누가 안에 있으면 차우진이 일을 마무리하기 어려워진다.
"방진 마스크 없는 사람은 밖에 그냥 있어요!"
차우진이 직원에게 다가가 새 소화기를 받았다.
직원이 가져온 소화기는 한 개가 더 있었다.
"그건 밖에서 안으로 뿌려요!"
"예?"
"난 방진 마스크가 있으니까 밖에서 그냥 뿌리라고!"
"네!"
차우진이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밀폐형 고글과 연기도 막는 특수 방진 마스크 덕분에 소화기 분말은 호흡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런데 실내에 산소가 좀 부족해졌다.
'그래도 불구덩이에서 싸울 때보다는 낫네.'
차우진이 두 번째 소화기를 사용했다. 발화 지점부터 창가까지 번진 화재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임시 주방 밖에서 다른 사람이 뿌리는 소화기는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대신에 차우진이 안에서 뭘 하는지 밖에서는 볼 수 없게 해주었다. 일종의 연막 효과였다.
소화기에서 나온 분말은 임시 식당으로만 들어가는 게 아니다. 일부는 복도로 확산하는 중이다.
사람들은 그 분말 때문에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다. 문에서 소화 분말을 뿌리던 사람도 숨을 쉬기 어려워서 소화기만 바닥에 내려둔 채 바깥쪽으로 대피했다.
차우진은 혼자서 화재를 진압했다.
가스도 잠갔고 화재 초기부터 소화기를 충분히 사용했다. 그래서 화재 진압은 어렵지는 않았다.
차우진은 아직 잔불이 남아 있을 때 타이머를 이용한 발화 장치를 확인했다.
누전으로 인한 화재 흔적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화재를 조기에 진압한 덕분에 누전이 일어난 원인은 전문가가 조사하면 확인할 수 있다.
"딱 적당하네."
플라스틱으로 만든 타이머는 불에 완전히 타서 형체도 알 수 없었다.
차우진이 그 타이머였던 잔해를 아직 타고 있는 플라스틱 더미에 던져넣었다.
그러고 나서 여기저기 조금씩 남은 불들을 소화기로 진압했다. 플라스틱 더미의 불은 마지막에 껐다.
임시 주방 밖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소화 분말이 자욱하게 퍼져 있어서 아무도 들어가지 못했다.
"어떻게 된 거야?"
"창밖을 보면 연기는 확실히 줄었는데…."
"어? 누가 나온다!"
차우진이 자욱한 분말을 헤치며 저벅저벅 걸어 나왔다. 그가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뭐 구경났습니까? 아. 불구경 났지."
"저기, 화재는…."
"다 껐습니다."
"우와아!"
사람들이 환성을 질렀다.
"그걸 진짜로 껐어!"
"대단하십니다!"
차우진이 물었다.
"119는 불렀지요?"
사람이 많을 때 소방관이 와야 화재 설계자가 증거를 인멸하지 못한다.
직원 몇 명이 손을 들었다.
"제가 신고했습니다!"
"저도 했습니다!"
"잘하셨네요."
회사 직원이 마스크를 쓰고 걸어와 차우진을 지나가려고 했다.
차우진이 손을 뻗어 그 사람을 막았다.
"어디 가시려고?"
"안전관리팀 직원입니다. 제가 안에 가서 상황을 확인하겠습니다. 비켜주시죠."
"안됩니다."
"예?"
"누군가 불을 질렀을지도 모르잖습니까? 소방관들이 올 때까지 기다려요."
"아니, 그게 무슨…. 누가 불을 질렀다는 겁니까?"
"그거야."
차우진이 불을 질렀다.
불을 낼 준비를 한 건 다른 놈이지만 불을 지른 건 차우진이다.
"경찰이나 소방에서 찾아내겠죠."
***
소방관들은 곧 도착했다. 차우진은 현장을 넘기고 그곳을 벗어났다.
바로 위층에 있는 개발 2팀 사무실 문은 아직도 잠겨 있었다.
관리실 사람들은 아래층 화재 현장으로 몰려갔다. 누가 봐도 아래층 사건이 더 급했기 때문이다.
개발 2팀은 사무실에 갇혔다. 철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곽수혁 팀장이 문을 두드렸다.
"이거 도대체 왜 안 열리는 거야?"
내부에서 열어보려고 시도하던 팀원이 말했다.
"팀장님. 전기가 끊겨서 잠금장치가 완전히 먹통입니다. 뭘 해도 안 됩니다."
"환장하겠네."
박효정이 말했다.
"그래도 화재는 진압된 것 같으니까 우린 살았잖아요."
"아래층에서 불 못 껐으면 우린 다 죽었어."
"알죠. 죽다 살아난 거."
탄내가 여전히 올라오고 있지만 조금 전에 사무실을 집어삼킬 것처럼 올라오던 불길은 사라졌다.
곽수혁이 창문을 보았다. 유리창에 검댕이가 코팅이라도 한 것처럼 진하게 묻어 있었다.
"오늘 저녁때는 다들 술이나 마시자. 죽다 살아난 기념으로. 오늘 회식이다."
2팀 연구원이 반대했다.
"팀장님. 오늘은 다른 곳으로 안 새고 집에 바로 가려고요."
"이런 일을 겪고서?"
"이런 일을 겪으니까 처자식 생각이 나네요."
"아…. 그래. 네 말이 맞다. 나도 오늘은 집에 가서 밥 먹어야겠다."
옆에 서 있던 박효정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그녀가 발신자를 확인했다.
차우진이었다.
"여보세요."
차우진이 말했다.
- 오늘 점심 약속 알죠?
"네? 아, 그럼요. 그런데 오늘은 어려울 것 같아요. 지금 불이 난 데다가 사무실 문이 잠겨서요."
"불은 껐고, 문은 이제 열릴 겁니다."
- 네?
문의 잠금장치를 확인하던 직원이 외쳤다.
"앗! 전기가 들어왔습니다!"
"뭐? 빨리 문 열어!"
안에서 뭔가 하기도 전에 잠금장치가 밖에서 해제됐다. 문이 전기모터의 힘으로 스르륵 열렸다.
차우진이 문앞에 서 있었다.
34. 설계자
차우진의 옆에는 시설팀 직원도 보였다. 그 직원은 비상용 전원공급장치를 들고 있었다.
시설팀 직원이 사과했다.
"아래층에 불이 나서 거기부터 확인하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곽수혁이 활짝 웃었다.
"아이고. 괜찮습니다. 살았으면 됐죠. 으하하하!"
불이 났을 때는 다들 겁에 질렸었다.
그런데 불이 꺼진 후에 구출될 때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다. 아래층 화재가 확실히 진압됐다는 건 외부에 있는 사람들의 연락을 받고 알았다.
팀장인 곽수혁은 그사이에 정신을 차렸다.
그는 팀의 리더인 자신이 겁먹으면 팀원들이 동요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행동했다.
차우진이 문 안쪽으로 쓱 들어왔다. 특수 방진 마스크와 밀폐형 고글은 벗어서 목에 걸고 있었다.
박효정은 차우진을 보고 눈이 동그래졌다.
"우진 씨가 여기를 어떻게…."
차우진이 가볍게 손을 들어 그녀에게 인사했다. 그런 후에 철문의 보안 잠금장치 안쪽을 확인했다.
"쯧. 좀 파손됐네."
곽수혁이 설명했다.
"문을 열어보려다가 그런 겁니다. 의자로 찍어도 소용없었지만요."
"그러신 이유가?"
"탈출하려면 뭐라도 해야 하니까요. 예를 들면 우리 배터리를 긁어모아서 연결해보던지요."
"이게 좀 단단하긴 하죠? 열에는 약해 보이지만."
"아. 그럼 불로 지져볼걸."
차우진이 곽수혁에게 말했다.
"이걸 누가 조작했을 수 있습니다. 경찰이 올 때까지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이 안에 계신 분 중에서…."
이 안에 있는 사람은 모두 죽을뻔했다. 그렇다고 그게 결백하다는 뜻은 아니다.
'김양석처럼 여기서도 하수인을 죽여서 입을 막으려 했을 수 있지.'
게다가 개발 2팀은 모두 공대 출신이다. 누군가 방법만 알려준다면 이 잠금장치를 조작할 수 있다.
차우진이 2팀에서 매수됐을 확률이 가장 낮은 사람을 찾았다. 그는 박효정이 아니라 곽수혁을 골랐다.
"팀장님이 책임지고 경찰이 올 때까지 아무도 손대지 못하게 하시죠."
곽수혁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 도대체 뭘 의심하는 겁니까?"
"아래층에 불이 나자마자 위층에 있는 이 문이 잠겼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거야 화재로 인한 전기고장으로…."
"그럴 수도 있지요. 아니면 이 시간에 이 문이 고장 나게 누가 미리 손을 댔을 수도 있고요."
"증거가 있습니까?"
"당연히 없죠."
"예?"
"혹시 모르니까 대비하자는 것뿐입니다. 이 시간 이후로 여기 손댄 사람은 경찰이 조사할 테니까 알아서들 조심하시고요."
"어? 어…. 예. 알겠습니다."
"그럼 팀장님만 믿겠습니다."
곽수혁은 멈칫했다.
"그런데, 처음 뵙는 분인데 제가 팀장인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지난 며칠 동안 개발 2팀에 관해서 조사를 좀 했다. 팀장이 누구인지 정도는 당연히 안다.
"음…. 나이가 제일 많아 보이셔서?"
"제가 어디 가면 동안 소리 듣는 사람인데요."
"설마요."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경찰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시는 걸 보면 경찰은 아니신 것 같은데, 누구십니까?"
"점심 먹으러 왔습니다."
"예?"
박효정이 얼른 손을 들었다.
"팀장님. 저랑 오늘 점심 먹기로 한 분이에요."
"어? 그게 무슨 소리야?"
"저도 이 상황이 당황스럽긴 한데요. 저쪽 건물 공사 현장에서 일하는 분이에요."
차우진이 설명했다.
"오늘은 이 연구동에 전기 공사가 있어서 대타로 들어왔습니다."
곽수혁의 표정이 밝아졌다.
"아! 전기 전문가라서 이 문의 전력 문제를 해결해주신 거군요!"
"그렇죠."
"고맙습니다. 하마터면 계속 갇혀 있을 뻔했습니다."
차우진이 박효정에게 말했다.
"지금은 밥을 먹을 상황이 아니고, 난 일이 또 있어서요. 오늘 약속은 취소해야겠네요."
"괜찮아요. 저도 지금은 점심을 챙겨 먹을 때가 아니니까요. 다들 같이 움직여야 할 것 같아서요."
차우진이 박효정을 향해 손을 살짝 흔들어주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차우진이 떠난 후에 여자 팀원이 박효정에게 물었다.
"저 사람이야? 요즘 같이 점심 먹는 사람이?"
"응."
"배가 좀 나왔는데?"
"그래서 긁지 않은 복권이라고 했잖아."
팀원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민했다.
"흐음. 일단 인상은 착해 보이는데, 이 결혼 아직 찬성하기가 좀…."
"도시락 몇 번 먹은 게 다라니까 왜 이래?"
"그래도 하나는 인정."
"뭘?"
"긁지 않은 복권. 살 빼면 당첨될 수도 있겠어."
"그치?"
"뺄 생각은 있대?"
"없어 보이더라."
***
출동한 소방차가 연구동에 도착했다. 소방관들이 올라와 임시 주방부터 확인했다.
"불은 잘 껐는데, 여기에 가스통이 있었네?"
"이거 터졌으면 위험했겠어."
"잠깐 불난 정도로 보기엔 상태가 너무 심하잖아."
"가스가 샜었나 본데?"
"가스통 잠긴 거 맞아?"
"제가 확인했습니다. 확실히 잠겨 있습니다."
"와…. 이거 화재를 빨리 진압했으니까 다행이지, 하마터면 대형사고가 될 뻔했다."
"저 가스통이 터졌으면 여기 내부는 다 날아갔을 겁니다."
"여기 이 층은 쓰는 부서가 없다지만, 화재가 커졌으면 위층은…."
"위층에 누가 가서 확인해봐."
***
소방관과 경찰관이 위층으로 같이 올라갔다.
곽수혁 팀장은 경찰에게 철문의 보안 장치가 먹통이 된 이야기를 했다.
"비상 전원을 연결해서 문을 열어준 전기 기술자가 그러는데, 이거 조사해봐야 한다던데요."
"조사요?"
"누가 일부러 고장 냈을 수도 있다고…. 제가 아니라 그 사람이 한 말입니다."
"전문가를 불러서 확인해야겠군요. 여긴 이제 우리가 맡겠습니다."
곽수혁이 현장을 경찰에 넘기고 밖으로 나왔다.
연구원들은 이미 연구동 건물을 나와 공터에 모여 있었다.
먼저 나와 있던 팀원들이 다른 직원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
"팀장님. 우리 사무실 문 열어준 그분 말이에요."
"전기 기술자?"
"네. 그분 덕분에 우리가 산 거래요."
곽수혁이 손을 흔들었다.
"에이. 그건 아니지. 그 사람은 불이 다 꺼진 후에 문만 열어준 건데."
"그게 아니라던데요?"
"응?"
"우리 아래층에 임시 구내식당 말이에요. 내일 오픈하기로 한 거기요. 거기서 불이 났대요."
"그건 나도 들었어."
"그런데 그 불이 우리 창문까지 올라왔다가 꺼졌잖아요?"
"그때 진짜 죽는 줄 알았지."
"그게 그분이 소화기를 들고 불이 난 곳으로 뛰어든 덕분에 꺼진 거래요."
곽수혁은 당황했다.
"어? 그걸 소화기 하나만으로 껐다고?"
"하나는 아니고 소화기 세 개를 썼대요."
"어쨌든 소화기로 껐다는 거잖아. 위험한데 왜 그렇게까지…."
거기에 불이 나도록 설계한 건 다른 놈이지만, 불을 지른 건 차우진이다.
차우진이 불을 지르지 않는다고 해서 불이 안 나는 건 아니다. 설계자가 나중에 불을 지를 게 뻔했다.
차우진이 없을 때 그곳에서 불이 나면 개발 2팀은 다 죽는다.
그리고 증거도 모두 사라진다.
그래서 차우진이 불을 지르고, 다시 그 불을 껐다.
그러면 범인은 같은 수법은 다시는 못 쓴다. 그래야 개발 2팀이 산다.
그 사람들이 살아야 탐지기를 개발할 수 있다.
팀원이 열심히 설명했다.
"몰라요. 소화기 들고 척척 걸어오더니 불이 막 난 곳에 들어갔대요. 다른 사람들은 접근도 못 하는데, 방진 마스크 쓰고 들어가서 소화기 세 개로 싹 다 정리한 거죠."
"왜 목숨을 걸고 그렇게까지 했냐고."
"저야 모르죠."
여자 팀원이 박효정을 쿡 찔렀다.
"효정 씨 구하려고 그런 거 맞지?"
"에이. 설마. 아닐 거야."
"이거 그린 라이트인가? 이 정도면 그냥 라이트가 아니라 그린 서치라이트 아냐?"
"아니라…. 아닐걸?"
곽수혁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분은 오늘 대타로 온 거라며. 원래 이 연구동에서 전기 작업하던 사람이 오늘 안 나온 게 천만다행이네."
여자 팀원이 말했다.
"전에 작업하던 그 사람은 좀 이상했어요. 저를 보는 눈빛이 좀 그랬거든."
박효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곽수혁이 박효정에게 물었다.
"그분하고 아는 사이라고 했지?"
"그냥 도시락만 몇 번 같이 먹은 사이라서 잘은 몰라요."
"그럼 알아가는 사이인가?"
"아니, 그게…."
"자리 마련해주면 내가 소고기 쏜다."
"말은 해볼게요."
여자 팀원이 눈을 반짝이며 박효정에게 말했다.
"효정 씨는 관심 없다고 했지? 그 복권 내가 긁어보고 싶으니까, 내가 만나보면…."
"메이야?"
"생각이 전혀 없는 건 아니구나?"
"몰라."
***
소방관과 형사들은 방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현장을 조사했다. 과수대도 현장에서 단서를 수집했다.
소방관이 현장을 손으로 가리키며 설명했다.
"여기서 누전이 일어나서 화재가 시작됐을 겁니다."
형사가 물었다.
"그럼 이게 방화일 가능성은 없는 겁니까?"
"있죠."
"예?"
"물론 비공식적이고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제가 알아서 듣겠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소방관이 전선을 가리켰다.
"여기서 누전이 됐는데, 전선의 배치가 인위적으로 보이거든요. 누군가 불을 내려고 일부러 선을 깔아서 누전시킨 느낌입니다."
"일부러요?"
"예. 여기 이 층은 낮에만 전기를 켜놓는다더군요. 아침에 전기가 들어오고, 누전이 조금씩 되다가 오전에 발화됐을 수 있습니다."
형사가 잠시 생각하다 물었다.
"만약 저 가스통이 터졌으면, 저 단서가 남아 있었을까요?"
"아니요. 다 쓸려나가서 알아보지 못했을 겁니다."
***
개발 2팀 사무실도 형사들이 조사했다.
과수대 요원이 말했다.
"보안 철문의 전기가 나간 거, 진짜로 누가 손대서 그럴 수도 있겠는데?"
형사가 물었다.
"확실해요?"
"손상이 심해서 확실한 건 아니야."
"만약 이 사무실이 다 타버렸으면 증거가 남아 있었을까요?"
"철문까지 불이 번졌으면 조작 증거쯤은 타버렸겠지."
"그러면 아래층하고 상황이 비슷하네요?"
***
딥어스테크 사장 장호철이 골프연습장에서 골프채를 옆으로 던지며 화를 냈다.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 회사 연구소에서 불이 나다니!"
비서 김태훈이 보고했다.
"주방에서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장호철이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안전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그게, 임시로 만든 구내식당의 주방이라서, 관리가 조금 부실…."
장호철이 화를 버럭버럭 내며 골프연습장을 떠났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나! 당장 책임자 소집해!"
그 골프연습장에는 낮에도 이용하는 손님이 많았다.
그 손님들은 장호철이 누구인지는 모른다. 그래도 무슨 일이 났는지는 방금 들었다.
"회사에 불이라도 났나?"
"화재보험은 들었겠지?"
골프장 직원 중에는 장호철이 딥어스테크 사장이라는 걸 아는 사람도 있었다.
"회사에 불이 났으면, 주식 조금 산 거 팔아야 하나?"
***
장호철이 승용차 뒷좌석에서 말했다.
"김 비서야."
방금 화재 소식을 보고한 김태훈이 운전하며 대답했다.
"예. 사장님."
"왜 오늘 불이 나?"
"파악 중입니다."
장호철이 몸을 앞으로 기울여 김태훈의 귓가에 대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야 이 새끼야. 오늘 계획은 취소했잖아. 상황을 보고 다시 세팅한다더니, 왜 오늘 거기서 불이 나냐고."
김태훈이 긴장한 얼굴로 대답했다.
"확인해보겠습니다."
"넌 확인 안 하면 아는 게 없어?"
"제 생각에는 아무래도…."
"의심 가는 놈이 있냐?"
"매수한 전기 기술자 말입니다. 그놈이 수상합니다."
"왜? 약쟁이에 도박꾼이라서 그렇지 실력은 확실하다며?"
"약이라도 빨고 일하다 실수를 한 게 아닐까 합니다."
장호철이 인상을 구겼다.
"그 새끼는 오늘 불이 났을 때 죽었어?"
"아닙니다. 손을 다쳐서 오늘은 출근하지 않았습니다."
"그 새끼가 없는데 불이 왜 나?"
"제 생각에는 어제 미리 작업한 부분에 문제가 있다가 오늘 터진 게 아닐지…."
장호철이 뒷좌석 시트에 등을 기대며 욕을 했다.
"씨발. 계획대로 된 게 하나도 없네. 그 약쟁이 새끼 지금 어디 있어?"
"출근하지 않는 날은 보통 관악구에 있는 도박장에 갑니다."
"그 새끼한테 사람 붙여둬."
"알겠습니다."
***
불이 난 연구동은 형사들이 조사하는 중이다. 그 조사가 끝날 때까지 연구동 전기 공사는 중단됐다.
차우진은 형사의 질문에 적당히 대답한 후에 연구동을 나오며 말했다.
"동굴에 불을 질렀으니까, 쥐새끼든 사장놈이든 뭐라도 튀어나오겠지."
35. 추적
화재 현장을 조사한 형사들이 각자 알아온 걸 팀장에게 보고했다.
"화재 원인이 고의 누전일 수도 있겠던데요?"
"그 위층 사무실 출입문의 전동 개폐장치도 누군가 손대서 고장 났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팀장이 물었다.
"그러니까 이게 방화 살인미수라는 거야?"
"아직 증거는 없지만 정황만 보면 그렇습니다."
"위층 사무실에 열 명쯤 있었지?"
"예."
"하마터면 대형 살인사건 될 뻔했단 말이지. 어휴. 식은땀 난다."
팀장이 생수병의 뚜껑을 따서 벌컥벌컥 마신 후에 물었다.
"전기를 잘 아는 사람 짓이겠지? 용의자는 특정했어?"
"여기가 연구소 건물이라서 전기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도 우선순위는 있어야지. 이 건물 전기 공사는 누구 담당이야?"
"대상자가 두 명 있습니다."
형사가 노트북 화면에 사진을 띄웠다.
"이름은 김양석. 원래 연구동 내부 전기 공사를 하던 사람입니다."
"용의자 1순위군. 그리고?"
사진이 바뀌었다.
"차우진. 김양석이 오늘 손을 다치는 바람에 땜빵으로 들어온 사람입니다."
"평소에는 없다가 화재 당일에만 여기 있었다? 그럼 이 사람이 제일 유력한 용의자잖아."
"그게 그렇지가 않습니다."
"왜?"
형사가 CCTV에 찍힌 사진을 띄웠다.
"아침에 출근해 구석진 곳으로 작업하러 간 영상은 있습니다. 중간에 그곳에서 나온 적은 없습니다."
팀장이 노트북 화면을 가리켰다.
"여기 이 뛰는 모습은 뭐야?"
"그건 구내식당 내부 화재 경보기가 울린 후에 뛰어가는 모습입니다."
차우진이 구내식당에 몰래 갔다 올 때는 공간이동 스킬로 CCTV를 피했다. 반면에 불을 끄러 갈 때는 대놓고 CCTV에 찍혔다.
"우리가 모르는 길로 빠져나갔다가 돌아왔을 수도 있잖아."
"팀장님. 이 사람이 혼자서 화재를 진압했습니다. 만약 범인이 아닌데 잘못 건드리면 후폭풍은 팀장님이 다 맞아야 할 겁니다."
팀장이 손을 흔들었다.
"야. 아니네. 딱 봐도 이 사람은 아니야. 그럼 김양석은 어때?"
"오늘은 현장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땜빵으로 들어온 겁니다."
"왜 하필 오늘 없었는데?"
"아침에 넘어져서 손을 다쳤답니다."
팀장이 의심했다.
"일부러 넘어진 거 아니야?"
"목격자들 말로는 혼자 넘어졌다고 하니까, 일부러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전기 전문가니까 오늘 불이 나게 어제 세팅 끝내놓고, 오늘은 일부러 살짝 다치고 자리를 피했다?"
"소방관 이야기로는 불가능한 건 아니랍니다."
"김양석은 전기 기술자니까 사무실 문의 전기 시스템도 손댈 수 있겠지?"
"아마도요."
"들킬 걸 생각 못 했나?"
"소방관 말로는 화재가 조기 진압되지 않았으면 가스통이 터졌을 거고, 그러면 지금 찾은 단서는 다 날아갔을 거랍니다."
팀장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
"김양석 지금 어디 있어?"
"병원으로 간 후에 사라졌습니다."
"휴대폰 위치추적은?"
"휴대폰이 꺼져있습니다."
"현대인이 하필 오늘 휴대폰을 꺼 놔? 이리 봐도 저리 봐도 제일 유력한 용의자 맞네. 김양석 빨리 찾아."
***
딥어스테크 사장 장호철이 화재가 발생한 연구소 건설 현장에 도착했다.
"젠장. 일부러 골프연습장까지 가서 남들 눈에 뜨였는데, 이렇게 되면 알리바이 만들 기회가 하나 날아가잖아."
비서 김태훈이 차 문을 열어주었다.
장호철이 뒷좌석에 내리며 짜증을 냈다.
"기분 참 엿 같아."
"죄송합니다."
장호철의 눈에 연구동 앞을 빠른 걸음으로 서둘러 지나가는 여자가 보였다.
장호철의 얼굴이 더 구겨졌다.
"저게 지금 나를 보고도 인사 안 한 거지?"
"그런 것 같습니다."
"안 그래도 기분이 엿 같은데. 저거 누군지 확인해서 내 회사 직원이면 중징계하고, 협력업체 직원이면 쫓아내."
김태훈이 물었다.
"조용히 처리할까요?"
"공식적으로는 조용히 처리하되, 비공식적으로는 소문이 퍼져야지. 그러니까 카더라 수준으로 알게는 해야 회사 기강이 잡히지."
"알겠습니다."
장호철이 짜증을 확 냈다.
"너 나랑 일 하루 이틀 하냐? 이런 것까지 내가 설명해줘야 해?"
"아닙니다. 제가 확실히 처리하겠습니다."
***
장호철은 불이 난 임시 구내식당에 들렀다. 그가 큰 소리로 질책했다.
"관리자들은 뭐 한 거야? 이거 담당자 누구야? 평소에 일을 어떻게 했길래 내 회사에 불이 나!"
그는 직원들을 상대로 한바탕 쇼를 한 후에 형사들을 만났다.
"아이고. 수고가 많으십니다. 나 장호철입니다. 소방서에서만 온 게 아니라 형사님들도 오셨네. 뭐 나온 거 있습니까?"
형사팀장이 간단히 인사한 후에 질문했다.
"사장님과 평소에 원한 관계인 사람이 있습니까?"
장호철이 살짝 경계했다.
"그건 왜 물으십니까?"
"누군가 일부러 화재를 일으키려고 전기 설비를 조작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일부러요?"
"그 위층 사무실 문에도 문제가 있더군요. 계획적인 방화가 아닌지 조사 중입니다. 혹시 생각나는 사람이 있으십니까?"
장호철이 잠시 생각하는 시늉을 하다 대답했다.
"사업을 하다 보면 괜히 나를 질투하고 공격하는 놈들이 생깁니다. 그런 놈들은 자기가 망한 것도 다 내 탓이라고 하지요. 그래서 누구 하나 짚기가 어렵군요."
팀장이 명함을 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생각나는 사람이 있으면 꼭 연락 주십시오."
***
장호철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연구동을 떠났다. 그가 근처에 주차해놓은 차로 걸어가며 으르렁댔다.
"그 약쟁이 새끼가 실력은 확실하다며? 그런데 일을 이따위로 망쳐놔서 경찰이 의심하게 해?"
"죄송합니다."
"그 새끼 아직 도박장에 있나?"
"예. 신림동 하우스에 있습니다."
장호철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경찰이 그 새끼를 잡으면 우리가 위험해진다. 너나 나나 엿 되는 거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 처리해."
그들이 설계한 대로 일이 진행됐으면 전기 기술자 김양석은 오늘 화재 사고에 휘말려 사망했어야 했다.
그런데 상황이 변했다. 화재는 진압됐고 김양석은 살아있다.
김태훈이 말했다.
"사장님. 이제 화재 사고는 못 써먹는데, 어떤 방법으로 처리할까요?"
"수사망이 좁혀오니까 압박감에 자살한 거로 해. 경찰이 찾기 전에 서둘러서."
"알겠습니다. 사람을 보내서 김양석을 확보한 후에 상황 세팅하고 깔끔하게 처리하겠습니다."
차우진은 연구동 근처 벤치에 앉아 있었다.
장호철과 김태훈은 조금 먼 곳에서 걷고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의 대화가 들리지는 않았다.
"김양석을 만날 때까지 미행해야 하나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입 모양을 보고 무슨 대화를 했는지 대충은 알아들었다.
"신림동 하우스란 말이지."
***
전기 기술자 김양석이 신림동 사설 도박장에서 담배를 입에 물고 킬킬댔다.
"난 왼손으로 하는데도 내가 다 따네?"
그는 오른손을 다치긴 했지만 뼈가 상한 것도 아니고 움직이지 못할 정도도 아니다.
게다가 왼손만 멀쩡해도 도박하는 데 큰 문제는 없었다.
오늘은 김양석의 패가 잘 붙었다. 그만큼 그의 앞에 쌓이는 돈이 늘어났다.
김양석이 웃었다.
"앞으로는 카드는 꼭 왼손으로 해야겠어. 그래야 오늘처럼 운수가 좋지. 으흐흐흐."
***
차우진이 신림동 고층빌딩 옥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하우스라고 했으니까."
이 넓은 신림동에서 도박장이 있을 만한 곳을 찾아야 한다.
"이쪽일 듯싶은데."
그가 보는 방향에는 단독주택이나 작은 건물이 많았다.
"집이 참 많다."
멸망한 세계에서 생존 커뮤니티가 살아남으려면 식량을 만들어내야 한다. 좁은 지역에 도시 수준으로 사람이 몰려 있으면 그 사람들을 다 먹여 살릴 식량을 구할 수가 없다.
대부분의 생존 커뮤니티는 여기저기에 작은 규모로 흩어져 있었다. 대형 커뮤니티라 해도 마을 수준이지 이런 대도시 밀집 형태는 아니다.
그런데 지금 차우진이 보고 있는 곳은 집과 건물, 도로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이러면 하나씩 수색해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차우진이 방법을 바꿨다.
"이 동네에 하우스가 어디 있는지 아는 놈이 있겠지."
***
차우진은 골목에서 담배를 피우며 침을 뱉는 양아치를 하나 찾았다.
차우진이 물었다.
"이 근처에 하우스가 있다던데."
"하우스? 도박장? 아저씨 혹시 형사…."
"그러면 이렇게 대놓고 묻고 다니겠냐?"
"아닐 거 같더라. 몰라. 씨발. 알면 나한테도 좀 가르쳐줘."
"됐다."
양아치가 갑자기 화를 벌컥 냈다.
"야. 씨발. 말만 걸어놓고 어딜 가? 내가 우스워? 어이. 지금 지갑에 있는 거 다 꺼내…. 켁!"
차우진이 양아치처럼 보이는 놈을 하나 더 찾아냈다. 그런데 그놈은 일부러 빈틈을 보여도 차우진에게 시비를 걸지 않았다.
오히려 존댓말까지 쓰면서 도로 물었다.
"네? 이 동네에 도박장이 있어요? 그런 건 라스베이거스에 있는 거 아니에요?"
차우진이 상대를 빤히 쳐다보았다.
"너 학생이냐?"
"아닌데요? 대학교 다니는데요?"
"고딩이구나."
"앗. 표 나요?"
"넌 양아치도 아니면서 왜 양아치처럼 하고 다니냐? 헷갈리게."
"패션인데요?"
"피아식별 좀 되게 입고 다녀라."
"이 옷이 어때서요?"
"너 그러고 다니면 그냥 사채업자 밑에 있는 일수꾼이야."
"에이. 제가 어딜 봐서…."
"누가 봐도 그렇게 보인다."
차우진이 다음 대상을 찾기 위해 옥상으로 올라갔다.
"분명히 하우스 위치를 아는 놈이 있을 텐데."
***
조명식은 신림동에 사는 양아치다.
그는 직업은 없지만, 종종 술 취한 사람을 상대로 소매치기나 아리랑 치기를 하며 유흥비를 번다.
조명식이 입맛을 다셨다.
"술 땡긴다."
그가 서 있던 골목으로 비틀거리는 남자가 걸어왔다. 마스크를 쓰고 있는 남자였다.
조명식의 눈이 반짝였다.
'호구가 걸어오는구나. 현금이 좀 있으면 좋겠는데.'
예전에는 술 취한 사람의 지갑을 털어 돈을 챙기기 쉬웠다. 그런데 요즘은 사람들이 현금을 많이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옷 입은 걸 보면 금목걸이는 없겠어. 시계나 반지라도 있으면 좋은데. 결혼반지든, 커플링이든.'
시계와 귀금속은 조명식이 아는 장물아비가 잘 처리해준다.
조명식이 비틀거리는 차우진을 향해 다가가 부축하는 시늉을 했다.
"어휴. 아저씨 많이 취하셨네. 여기 좀 앉아봐요."
차우진이 술에 잔뜩 취한 목소리를 냈다.
"응? 내가 좀 마셨지."
"자. 자. 이쪽으로 와서, 어디 보자. 시계는 없고, 반지도 없고. 뭐야. 개털인가?"
조명식이 차우진의 지갑을 찾으려고 손을 주머니에 넣으려 했다.
차우진이 그 손을 덥석 잡으며 물었다.
"지갑 찾냐?"
조명식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차우진의 목소리가 너무 선명했다. 조금 전의 취한 듯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조명식이 팔을 잡아빼며 뒤로 물러났다.
"당신 누구야?"
"누굴까?"
"겨, 경찰?"
차우진이 피식 웃었다.
"짭새라고는 안 하네?"
조명식이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다.
"아뇨. 제가 왜 그러겠습니까? 저 그런 놈 아닙니다."
"너 내 시계도 노리고 반지도 노리고 지갑도 노리더라?"
"제가요? 아닌데요?"
"그래. 그건 뭐 상관없지. 난 너 단속하러 온 거 아니니까."
조명식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아니시구나. 그럼 저는 가보겠…."
"선택해라."
"네?"
차우진이 경찰처럼 말했다.
"현행범으로 체포되든지, 아니면."
"아니면…."
"내가 도박장을 단속 중인데 말이야. 이쪽에 하우스 있지? 어디냐?"
조명식이 눈알을 굴렸다.
"모르…."
"눈알 굴리는 거 보니까 아네?"
조명식은 사설 도박장이 어디 있는지 안다. 한탕 제대로 했을 때면 찾아가서 놀았는데 모를 리가 없다.
조명식이 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말했다는 게 알려지면 나도 좋은 꼴 못 볼 텐데?'
조명식이 차우진과의 거리를 가늠했다. 몇 미터는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는 달리기에 자신이 있었다.
'내가 빨라!'
조명식은 소매치기나 아리랑치기를 할 때는 마스크를 쓴다.
'내 얼굴도 못 봤어!'
그는 결론을 내리자마자 뒷걸음치며 엄지를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 차우진을 향해 흔들었다.
"씨발! 몰라! 이거나 먹어라!"
차우진이 피식 웃었다.
"너 그러다 처맞는다."
"능력 되면 잡아보든가! 내가 얼마나 빠른데!"
조명식이 뒤로 휙 돌아서서 후다닥 달렸다. 달리기 속도가 빨랐다.
그가 도망치며 생각했다.
'내가 옛날에는 100미터를 12초에….'
차우진이 블링크 스킬을 사용해 공간을 건너뛰었다. 그러면서 발을 내질렀다.
차우진의 발이 도망치는 조명식의 등에 꽂혔다.
"켁!"
조명식이 앞으로 엎어졌다. 달리다가 엎어지는 바람에 바닥을 두 바퀴나 굴렀다. 온몸이 아팠다.
차우진이 조명식에게 걸어가며 말했다.
"느리구나."
조명식이 비틀비틀 일어나며 항의했다.
"씨, 씨발. 경찰이 사람을 이렇게 폭행해도 돼?"
"말이 짧구나."
"경찰은 시민을 폭행하면 안 되잖아요."
"그렇지. 안 되지. 그런데 말이야."
차우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너는 아직도 내가 경찰로 보이냐?"
"예?"
36. 경쟁
조명식은 뒤늦게 깨달았다.
'경찰 신분증을 본 적이 없어. 명함도 못 봤어.'
그가 도망치려고 했던 건 차우진이 경찰이라고 생각해서다.
조명식은 기가 살아서 목소리를 키웠다.
"이러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그래. 달라져야지."
"경찰도 아니면서 나를 걷어차? 이 새끼야! 내가 바로 신림동 불주먹이야!"
"신림동은 불족발보다는 백순대 아니냐?"
"불주먹이라고!"
조명식이 차우진을 향해 주먹을 크게 휘둘렀다. 주먹의 속도는 그저 그렇고 움직임도 단순했다.
양아치 하나 상대할 때는 시간 가속 스킬을 쓸 필요도 없다.
차우진이 조명식의 팔을 툭 쳐냈다.
"어?"
다리도 걷어찼다.
체중은 차우진이 더 무겁다. 힘도 더 강했다. 조명식은 무게중심조차 흐트러져 있다.
주먹을 휘두르던 조명식의 몸이 옆으로 회전하면서 바닥에 거칠게 나가떨어졌다.
"케엑!"
차우진이 조명식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죽고 싶으면 무슨 짓이든 못할까?"
조명식은 딱 한 번 충돌한 것만으로도 확실히 깨달았다.
'고수다. 난 상대도 안 돼.'
게다가 차우진의 목소리에 담긴 기세가 살벌했다.
조명식은 겁이 덜컥 났다. 그가 즉시 무릎을 꿇고 공손하게 말했다.
"제가 형님을 못 알아 뵙고 건방지게 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예의는 좀 아는 놈이네."
"저기, 그런데 누구신데 저를…."
"예의만 알지 머리는 나쁘구나. 내가 누구인지 알면 너한테 좋을까?"
조명식은 등골이 서늘했다.
'사람이라도 죽일 것 같은 목소리야.'
조명식이 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아, 아닙니다! 모르고 싶습니다!"
차우진은 이 동네에서 두 놈을 먼저 확인했다. 한 놈은 양아치고, 다른 놈은 양아치처럼 꾸미고 다니는 고등학생이었다.
둘 다 사설 도박장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다.
그런데 조명식은 아는 게 있어 보였다.
차우진이 짧게 말했다.
"야. 주소."
"넵!"
조명식이 급히 주소를 하나 불렀다.
차우진이 조명식의 주머니를 확인했다. 지갑은 있는데 신분증이 없었다.
대신에 스마트폰은 있었다.
"잠금 풀어라."
"넵!"
조명식이 즉시 엄지손가락으로 스마트폰의 잠금을 해제했다.
차우진이 그 휴대폰의 전화번호를 확인했다.
그런 후에 경고했다.
"그 주소에 하우스가 없으면, 내가 너 찾아간다. 그때는 이번처럼 친절하게 넘어가지 않아."
조명식이 즉시 말을 바꾸었다.
"사, 사실 그 주소는 예전 하우스고, 최근에 옮겼다고 들었습니다!"
"그걸 이제 이야기하는 거 보면, 살기 싫구나?"
조명식이 겁에 질려 두 손을 휘저으며 찾아가는 길을 설명했다.
"저쪽으로 쭉 가셔서 편의점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으신 후에, 안으로 들어가다가 세 번째 골목에서 왼쪽으로 가시면 오래되고 작은 상가 건물이 나옵니다. 얼마 전에 거기 지하실로 옮겼습니다!"
***
전기 기술자 김양석이 사설 도박장에서 웃음을 터트렸다.
"으하하하. 오늘 패 좀 붙는다!"
이 사설 도박장은 평소에는 두 명이 관리한다. 한 명이 하우스 관리자를 맡고, 한 명은 도박판 심부름을 한다.
그런데 지금은 한 명이 더 있었다. 권태환이 데려온 타짜가 손님으로 위장해 판에 끼어 있었다.
심부름하는 부하가 도박장 관리자 권태환에게 조용히 말했다.
"형님. 김 씨한테 너무 많이 잃어준 거 아닐까요?"
"돈 따는 맛을 제대로 봐야 더 많은 돈을 꼬라박지. 뼛골까지 빨아먹으려면 한 번씩 이렇게 맛을 보여줘야 해."
"그럼 더 잃어줄까요?"
"아니다. 맛은 충분히 보여준 것 같으니까, 슬슬 투자금 회수해."
심부름꾼이 김양석에게 다가가 냉커피를 내려놓았다.
"사장님. 많이 따셨나 봅니다."
"흐흐. 오늘 패가 붙는다니까? 얼마냐?"
"이건 서비스입니다."
"흐흐. 서비스 좋지."
서비스로 냉커피를 주는 것은 타짜에게 보내는 신호였다. 그 서비스 커피를 받은 사람의 돈을 도로 빨아들이라는 뜻이었다.
그런 신호는 매번 바뀌는데, 오늘은 커피 서비스가 회수 신호였다.
타짜가 점퍼 주머니에서 5만 원짜리 지폐 한 묶음을 꺼내며 말했다.
"빨리 패나 돌려. 내가 오늘 다 빨리든 다 따든 끝장을 볼 테니까."
김양석의 입꼬리가 쭉 올라갔다.
"그래. 우리 오늘 누구 하나 개털 될 때까지 가…."
갑자기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리며 외쳤다.
"단속이다! 문 열어!"
현장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됐다.
권태환이 다급히 CCTV를 확인했다.
화면이 까맸다. 카메라가 먹통이 되어 있었다.
"씨발. 카메라부터 막았어. 진짜 단속인가?"
그가 손님들을 향해 다급히 외쳤다.
"뒷문으로 빠져!"
권태환은 도박장을 만들 때는 비상 탈출구가 있는 곳만 이용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이 장소는 원래는 지하실에서 술집을 하다 폐업한 곳이다. 그 술집도 합법적으로 장사하는 곳은 아니었다. 그래서 단속을 대비한 탈출구가 있었다.
도박꾼들이 황급히 자기 판돈을 챙겨 넣었다.
부하가 권태환에게 작은 소리로 물었다.
"형님. 그럼 김 씨가 딴 돈은 어떻게 합니까?"
오늘은 김양석을 호구로 만들려고 일부러 돈을 잃어주었다. 그 작업을 위해 타짜까지 동원했다.
오늘 각자 딴 돈을 가져가면 김양석만 이익을 본다.
"투자금이 너무 많이 들어갔어. 네가 미행 붙어라. 회수해야지."
"알겠습니다."
부하가 타짜가 포함된 도박꾼들을 탈출구로 안내했다. 부하도 그들을 안내한다는 핑계로 같이 밖으로 나갔다.
실내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간 후에 권태환이 문을 열었다. 그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디서 오셨…."
문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 씨발?"
권태환이 아예 밖으로 나가서 확인했다.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그는 당했다는 걸 깨달았다.
"어떤 새끼가 구라를 친 거야! 여기서 전에 돈 잃은 새끼야?"
권태환이 CCTV가 녹화된 영상 파일을 불러냈다. 소용없었다. 영상이 결정적인 순간에 먹통이 됐다.
"투자금 회수하고 나면, 그 새끼 찾아서 죽여버린다!"
***
전기 기술자 김양석은 검은색 비닐봉지에 돈을 담아 도망쳤다. 그는 정신없이 뛰어서 골목 몇 개를 지나갔다.
"씨발. 숨이 차서 못 뛰겠다."
앞쪽에 막다른 골목이 보였다.
"저기서 잠깐 숨 좀 돌리자."
그가 골목 구석으로 몸을 숨긴 후에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허억. 씨발. 오늘 패 진짜 끝내주게 붙었는데, 막판에 조질 뻔했네."
그가 검은색 비닐봉지를 열어보았다. 도박장에서 쓸어담은 지폐가 가득 들어 있었다.
"흐흐. 역시 도박은 한 방이지. 내가 이 맛에 못 끊는다니까."
권태환이 먼저 나간 부하와 만났다.
"김 씨는 어디 있어?"
"저 앞 골목으로 들어갔습니다."
"저기는 막다른 골목이잖아."
"예. 숨이 차서 더 못 뛰고 저기로 들어갔습니다."
권태환이 실실 웃었다.
"알아서 도망칠 길이 없는 구덩이로 들어갔다고? 저 새끼 꿩인가?"
"그러니까 호구 짓만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권태환이 도박장에서 가져온 복면을 하나 내밀었다.
"너도 써라. 투자금만 회수해야지 나쁜 소문까지 나면 곤란하니까."
"알겠습니다."
그들은 얼굴에 복면을 뒤집어쓴 후에 골목으로 들어갔다.
김양석이 비닐봉지의 안쪽에 손을 넣고 실실 웃고 있었다.
도박장 관리자 권태환이 건들거리며 시비를 걸었다.
"어이. 너 돈 많구나?"
김양석은 화들짝 놀라 손을 빼내며 검은색 비닐봉지를 닫았다.
"뭐, 뭐야!"
"강도다. 돈 내놔."
김양석이 잡아뗐다.
"이거 돈 아니야! 콩나물이야!"
"콩나물이 그렇게 각진 형태로 비닐을 누르겠냐? 딱 봐도 지폐 뭉치잖아."
"아니야! 신문지다!"
"믿을 소리를 해야지."
도박장 관리자 권태환은 잃어준 돈만 회수하면 된다. 김양석이 또 도박장에 찾아와서 돈을 잃게 하려면 사지 멀쩡하게 보내야 한다.
권태환이 제의했다.
"돈보다는 목숨이 소중하잖아? 그거 그 자리에 내려놓고 가면 목숨은 살려준다."
김양석은 뒤로 주춤 물러났다. 등 뒤에 벽이 닿았다.
"씨발. 이걸 밑천으로 본전 차려야 하는데…."
김양석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내가 저 새끼들을 뿌리치고 골목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을까?'
고민은 짧았다. 앞으로 뛸 준비를 했다.
'안 되도 해봐야지. 그냥 돈을 빼앗기는 것보다는 그게 낫….'
하지만 뛰지는 못했다.
권태환의 뒤에서 세 명이 더 나타났다. 셋 다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김양석이 욕을 했다.
"씨발! 무슨 강도가 다섯이나 몰려다녀!"
권태환은 무슨 소리인가 했다.
"다섯이라니? 우리는 둘…."
권태환은 뒤늦게 그게 무슨 소리인지 깨닫고 뒤를 휙 돌아보았다.
남자 셋이 골목에 들어와 통로를 완전히 막았다. 셋 다 마스크와 모자를 쓰고 있었다. 누가 봐도 경찰은 아니었다.
권태환이 주머니에서 잭나이프를 꺼내며 소리를 질렀다.
"어디서 온 새끼들이야! 너 내가 누군지 알아?"
그들은 딥어스테크 사장 장호철의 비서 김태훈이 보낸 놈들이다. 앞에 서 있는 놈이 우두머리이고 나머지 둘은 부하다.
우두머리가 말했다.
"너 강도라며? 우리도 강도인데."
"뭐?"
"같은 강도끼리 서로 피 볼 필요는 없잖아? 그러니까 이렇게 하자."
그가 김양석을 가리켰다.
"저 사람을 넘기고 꺼져라. 그냥 보내줄 테니까."
권태환이 김양석을 힐끗 보았다. 그가 쥐고 있는 비닐봉지에 오늘 도박장에서 작업 치느라 쓴 돈이 들어 있었다.
김양석은 오늘 돈을 너무 많이 땄다. 권태환은 그 돈도 회수하고, 앞으로도 김양석의 돈을 계속 빨아먹고 싶었다.
그런데 상대가 셋이다. 분위기도 심상치 않았다.
'돈만 회수하고 저 호구는 버려야겠다.'
권태환이 협상을 걸었다.
"저 비닐봉지는 우리가, 저 사람은 당신들이 데려가자는 거지?"
남자가 소리를 내서 웃었다.
"크흐흐. 그럴 리가 있냐? 우리도 부수입은 챙겨야지?"
"씨발. 싫다면?"
우두머리가 칼을 꺼냈다.
"목격자를 두는 게 불편했는데 잘 됐어. 그럼 죽어야지."
그의 부하들도 칼을 꺼냈다. 날이 시퍼렇게 선 단검이었다. 칼날의 크기가 잭나이프보다 컸다.
그들이 골목 안으로 저벅저벅 들어왔다.
권태환의 눈에는 상대가 모두 칼잡이로 보였다. 칼도 적의 것이 더 컸고, 분위기도 살벌했다.
'진짜 칼잡이다.'
권태훈은 칼잡이 셋을 상대로 이길 자신이 없었다. 도박장을 운영하는 건 돈이 좋아서지 싸움이 좋아서가 아니다.
게다가 돈은 살아있어야 쓸 수 있다.
권태환이 잭나이프를 슬그머니 집어넣으며 말했다.
"아니다. 데려가라. 우린 못 본 거로 하겠다."
"주제를 아는 놈이군."
김양석이 겁을 집어먹고 외쳤다.
"히익! 다, 당신들 대체 뭐야! 왜 다들 나를 노리는데! 내가 뭘 잘못했다고!"
칼잡이들은 설명하지 않았다.
김양석이 비닐봉지를 내밀며 말했다.
"내가 오늘 돈을 좀 많이 땄어. 이거 다 줄게. 그러면 되지? 나 보내줄 거지?"
골목 입구에 차우진이 나타났다. 그가 말했다.
"야. 소용없어. 그 돈 줘도 넌 죽어."
칼잡이 셋이 뒤를 휙 돌아보았다.
우두머리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넌 누구냐?"
차우진이 피식 웃었다.
"너네랑 자기소개나 하러 온 사람은 아니겠지?"
37. 골목
지금 이 막다른 골목에는 일곱 명이 있다.
전기 기술자 김양석은 제일 안쪽에서 현금이 들어 있는 검은색 비닐봉지를 움켜쥐고 있었다.
그 앞에서는 사설 도박장 관리자 권태환과 부하가 눈알을 굴렸다.
그들보다 더 앞에서 칼잡이 셋이 시퍼런 칼날을 쥐고 차우진을 노려보았다. 중간에 있는 칼잡이는 권태환 쪽도 수시로 확인했다.
그 골목의 유일한 출입구에 차우진이 서 있었다. 그쪽으로는 아무도 못 빠져나간다.
칼잡이들은 도망칠 생각이 없다.
권태환은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담을 넘으려고 등을 보이면 칼이 꽂힐까 봐 무서워서 그러지 못했다.
김양석도 마찬가지였다.
칼잡이 셋은 골목을 따라 앞뒤로 서 있었다. 김양석을 잡으러 왔을 때는 우두머리 윤기태가 제일 앞에 서 있었다. 차우진으로 상대가 바뀐 지금은 그가 제일 뒤였다.
윤기태가 머리를 굴렸다.
'내 뒤에 두 놈은 돈이 목적인 듯한데….'
"넌 목적이 뭐지?"
"나도 너랑 비슷해."
차우진이 김양석을 가리켰다.
"저놈 만나러 왔지."
"누가 보냈지?"
"너부터 말해보던가."
윤기태가 인상을 썼다.
"난 청부 받을 때 의뢰인의 정체를 묻지 않아. 그건 중개인이 책임질 일이니까."
"뭐, 난 프리랜서라고 하자."
윤기태가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건 차우진이 여유롭게 구는 모습이 의심스러워서다.
'믿는 게 있나? 변수가 뭐가 있지?'
김양석이 제일 구석에서 소리를 질렀다.
"왜, 왜 다들 나한테 이러는 건데! 내가 뭘 어쨌다고!"
차우진이 설명했다.
"오늘 딥어스테크 연구소에서 화재가 발생했잖아."
김양석은 당황했다.
"뭐? 아, 아니야. 오늘이라니! 그럴 리가 없다!"
그 불은 원래는 김양석이 오늘 지를 예정이었다. 그런데 아침에 손을 다쳐서 그럴 수가 없게 됐다.
'그 계획은 연기됐는데 어떻게….'
김양석은 그렇게 알고 있었다.
차우진은 일부러 그 이야기를 꺼냈다. 이건 듣는 사람이 많을수록 좋다.
차우진이 말했다.
"네가 발화 장치를 작동시키지 않으면 불이 안 날 줄 알았냐? 그러게 세팅할 때 실수를 하지 말았어야지."
"시, 실수라니?"
"네가 불 지르려고 세팅한 곳에서 너 없을 때 누전으로 불이 났다고."
김양석이 눈알을 굴렸다.
'내가 거기에 세팅할 때 뭘 실수했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걸 대놓고 물어보면 방화를 인정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가 다급한 표정으로 물었다.
"불은 껐지? 거기서 불이 나 봤자 큰불은 아닐 거야. 그렇지?"
"도박하느라 뉴스도 못 봤나 보네. 불은 빨리 껐는데."
"그러면 문제 없…."
"현장에 네 짓이라는 증거가 많이 남았어."
김양석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세팅을 아직 마무리하지 않아서 뒷정리를 덜 했어. 뭔가 남겨놨나 보다!'
"아, 아니야. 그건 내가 한 게 아니라…."
"체포된 후에도 그렇게 말해라. 형량이 아주 화끈하게 나올 거다. 방화에 살인미수니까."
김양석은 깜짝 놀랐다.
"사, 살인미수라니?"
"위층 사람들이 다 죽을 뻔했다. 불이 조금만 늦게 꺼졌어도 그렇게 됐겠지."
김양석의 손이 덜덜 떨렸다.
그는 이번 일이 보험금을 노린 방화 사기 사건이라고 생각했다. 돈도 방화 사기 수준으로 받기로 했다. 살인까지 생각하고 일을 저지른 건 아니다.
"난 몰랐어. 나는 그냥 시켜서…."
"그래. 너는 경찰에 체포되면 그렇게 즉시 자백하겠지. 그래서 저놈들이 네 입을 막으러 온 거야."
"뭐?"
차우진이 칼잡이들을 가리켰다."
"저놈들이 널 죽이러 왔다고."
김양석이 욕을 내뱉었다.
"이런 씨발! 날 이용만 해먹고 죽여? 개새끼들아!"
칼잡이들의 눈빛이 빠르게 오갔다. 이미 한두 번 해본 일이 아니라 눈빛만으로도 뜻이 통했다.
윤기태는 결론을 내렸다.
"더 떠들게 두지 마라. 처리해!"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셋이 거의 동시에 움직였다. 공격 목표는 차우진이었다.
차우진의 현재 몸 상태는 배도 나오고 단련도 안 됐다. 멸망한 세계에서처럼 고속으로 움직이며 싸우면 근육통에 시달린다.
시간 가속 스킬은 유효 시간이 짧다. 목격자 앞에서 공간이동 스킬을 대놓고 쓸 수도 없다.
이럴 때는 칼잡이 셋을 동시에 상대하는 게 아니라 하나씩 잡아야 움직임을 줄일 수 있다.
차우진이 왼손을 휙 흔들었다.
그의 손에서 끈이 날아갔다. 끈의 양쪽에는 굵은 금속 나사가 하나씩 묶여 있었다. 이 간단한 수제 무기는 오는 길에 나사 두 개와 끈으로 간단히 만들었다.
차우진은 이 무기를 멸망한 세계에서 곧잘 만들어 썼다. 주로 사냥용으로 사용하던 도구이지만, 이런 근거리 전투라면 무기로 써먹을 수 있다.
나사 두 개가 날아가면서 좌우로 벌어졌다. 그 두 개를 묶고 있는 끈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세 놈 중에 중간에서 달려오던 칼잡이의 다리에 끈이 걸렸다. 굵은 나사가 끈에 매달린 채로 칼잡이의 다리 주변을 원을 그리며 회전했다.
순식간에 끈이 칼잡이의 다리에 칭칭 감겼다.
기세 좋게 달려들던 놈이 엎어졌다.
"켁!"
중간에서 뛰던 놈이 앞에서 엎어지는 바람에 제일 뒤에서 움직이던 윤기태는 급히 멈춰야 했다.
제일 앞에 있던 놈만 차우진에게 돌진했다.
이제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놈이 하나밖에 없다.
그럼 쉽다.
칼잡이가 차우진을 향해 칼을 내질렀다.
"죽어!"
칼날의 속도가 빠르고 칼에 담긴 힘도 상당했다. 사람을 찌를 대 망설임이 없었다.
차우진은 그걸 보고 판단했다.
'사람 찔러본 놈이네.'
찌르는 속도는 빠른데 그게 다였다. 속도에 너무 치중하는 바람에 칼날이 날아오는 경로가 너무 단순해졌다.
차우진이 시간 가속 스킬을 사용하며 적의 칼을 슬쩍 피했다. 그러면서 옆으로 지나가는 적의 팔을 왼손으로 붙잡았다. 오른손으로는 붙잡은 팔의 손목 관절을 때렸다.
그런 후에 두 팔을 교차하며 적의 팔꿈치를 반대 방향으로 콱 꺾었다.
회피와 반격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손목을 때리는 소리와 팔이 꺾이는 소리가 거의 동시에 들렸다.
칼잡이가 비명을 질렀다.
"끄아악!"
차우진이 적의 손에서 단검을 잡아챘다.
"머릿속은 비열한 놈들이 칼은 참 정직하게 찌른다. 이런 정직한 칼로 살아남을 수 있냐? 아. 지금 시대라면 살 수도 있겠구나."
팔이 꺾인 놈이 욕을 내뱉었다.
"이 새끼. 죽여버…."
차우진이 방금 빼앗은 칼로 적의 어깨를 푹 찔렀다.
"으, 으아악!"
"넌 칼 든 분 앞에서 말이 험하다는 생각 안 하냐? 간은 큰가? 확인해줘?"
칼잡이는 칼에 찔리고 나서야 차우진의 말이 진심이라는 걸 깨달았다. 칼잡이가 공포에 질렸다.
"사, 살려…."
그가 적의 다리에도 칼을 박았다. 적의 다리에 힘이 빠졌다.
"아악!"
차우진이 칼잡이를 옆으로 툭 밀었다. 적이 옆으로 나자빠지며 또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아. 그 새끼 시끄럽네. 목부터 조질 걸 그랬나?"
적이 황급히 왼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다리에 끈이 감겨 넘어진 놈이 칼로 끈을 끊고 급히 일어났다. 윤기태는 그 뒤에서 차우진을 향해 칼을 겨누고 있었다.
윤기태는 차우진의 움직임을 보고 경악했다.
'그렇게 간단히 칼을 피하고 손목을 제압하고 팔까지 꺾어?'
그는 차우진의 움직임을 눈으로 볼 수는 있었지만 따라 할 자신은 없었다. 차우진처럼 간발의 차이로 칼을 피하는 것만 해도 목숨을 걸어야 한다. 그러면서 반격하고 제압까지 하는 건 무리였다.
윤기태가 소리를 질렀다.
"너, 너 이 새끼 누구야!"
"알면 죽는데, 알고 싶냐?"
여기에는 칼잡이들만 있는 게 아니다. 도박장 관리자 권태환과 심부름꾼인 부하도 있다.
도박장 심부름꾼이 화들짝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아, 아니야! 난 듣고 싶지 않아!"
권태환은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가 급히 물었다.
"자, 잠깐! 혹시 좀 전에 단속 왔다고 소리친 게 선생님이십니까? 우리를 밖으로 유인하려고?"
차우진이 칼날을 손가락 대신 흔들었다.
"그건 저 칼잡이들. 너희들을 유인하려고 단속인 척하더라. 저놈들도 너희들을 여기서 마주칠 줄은 몰랐겠지. 저놈들 목표는 너희가 아니라 김양석이니까."
"씨, 씨발."
권태환이 김양석에게 소리를 질렀다.
"너 이 새끼! 도대체 무슨 일에 엮인 거야?"
전기 기술자 김양석도 맞받아쳤다.
"씨발! 그러는 너는! 말하는 꼬라지 보니까 너 그 하우스에 있던 새끼지? 누구냐! 권 사장이냐? 내가 딴 돈 찾으러 왔냐?"
"씨발. 이게 아닌데."
"이러고도 장사 계속할 수 있을 거 같아? 내가 이 바닥에 소문 쫙 낼 거다!"
"너를 그냥 확 죽여버리면 소문이 안…."
"히익!"
차우진이 말했다.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한 거 보니 개판이구나."
권태환이 급히 입을 다물고 눈치를 보았다. 김양석도 마찬가지였다.
칼잡이 우두머리 윤기태가 차우진을 보며 눈동자를 굴렸다.
'저 새끼는 고수다'
그가 뒤를 슬쩍 보았다. 도박장을 관리하던 두 놈과 김양석이 작은 목소리로 욕하며 싸우고 있었다.
'저 새끼들과 손을 잡기도 어렵….'
갑자기 앞에서 소리가 들렸다. 그가 뒤를 슬쩍 돌아보는 사이에 차우진이 전진했다. 부하 칼잡이가 차우진을 노려보고는 있었다.
칼잡이가 다가오는 차우진을 향해 칼을 크게 휘둘렀다.
칼잡이는 확신했다.
'베었다!'
손이 허전했다. 눈으로 볼 때는 벤 줄 알았는데 칼날이 차우진의 몸에 닿지 않았다.
"어?"
칼잡이는 차우진의 움직임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뭔가 이상….'
하지만 의문을 해결할 틈이 없었다. 차우진이 칼잡이의 어깨에 칼을 박았다.
"으아악!"
어깨가 찔리면서 팔이 마비됐다. 휘두르던 칼이 손에서 벗어나 골목 벽에 부딪혔다.
차우진이 적의 다리에도 칼을 박은 후에 옆으로 툭 밀었다. 그놈도 다른 놈처럼 비명을 지르며 옆으로 나자빠졌다.
윤기태가 뒤를 잠깐 보는 사이에 일이 벌어졌다. 그가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렸지만 대응하기엔 늦었다.
그땐 이미 차우진이 윤기태를 보면서 부하의 다리에 칼을 꽂고 있었다.
윤기태는 당황했다.
'저 새끼는 속도가 왜 이렇게 빨라!'
그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이미 부하 둘이 당했다. 혼자서 차우진과 싸워 이길 자신은 없었다.
윤기태가 뒤로 뛰었다.
도박장 관리자 권태환이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윤기태는 권태환을 지나쳐 김양석에게 달려갔다.
전기 기술자 김양석은 당황했다.
"어? 헉!"
윤기태가 김양석을 붙잡으려 했다. 김양석이 두 손을 휘저으며 반항했다.
윤기태가 칼로 반항하는 감양석의 팔을 그었다. 피가 튀었다.
김양석이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그 틈에 윤기태가 김양석을 뒤에서 붙잡고 목에 칼을 들이댔다. 그런 후에 차우진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칼 버려! 이 새끼야!"
김양석이 벌벌 떨며 외쳤다.
"히이익! 카, 칼 버려! 버려줘. 제발!"
차우진이 피식 웃었다.
"내가 왜?"
윤기태가 협박했다.
"칼 안 버리면 이 새끼 죽여버린다!"
"그러든가!"
"이게 장난 같나!"
윤기태가 김양석의 목에 대고 있던 칼을 어깨에 꽂았다. 김양석이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윤기태가 차우진을 노려보며 말했다.
"봤지? 칼 버려!"
김양석도 사정했다.
"사, 살려줘!"
차우진이 어깨를 으쓱하며 윤기태에게 물었다.
"너는 내가 그놈을 살리러 온 거 같냐?"
"뭐?"
"왜 그런 착각을 했을까?"
"거짓말 마! 이 새끼야! 너도 이 새끼가 필요해서 이러는 거잖아! 누가 보냈는지 몰라도 이 새끼 자백이 필요하잖아!"
"그렇기는 한데."
"그러니까 칼 버려!"
"네가 그놈을 죽여도 증거는 남아."
윤기태는 당황했다.
"뭐?"
차우진이 피식 웃었다.
"현장에 단서를 많이 남긴 유력한 용의자가 살해당했다? 누가 죽이라고 시켰을까? 살인을 저지른 놈은 현장에서 기절한 채로 발견될 텐데 그놈이 알겠지."
차우진이 칼끝으로 윤기태를 가리켰다.
"그러니까 너 말이야, 너. 살인을 저지르고 기절한 채로 발견될 놈."
"이 새끼…. 난 분명히 중개인을 통해 의뢰를 받았다고 말했다. 의뢰인의 상황은 모른다."
"그런다고 뭐 달라지냐? 우리나라니까 이 정도로는 사형이 안 나올 수도 있지만, 이번 사건이 어디 좀 커야지."
차우진이 윤기태를 향해 다가가며 말했다.
"너 교도소에서 환갑 맞겠다?"
"씨이발! 칼 버리라고!"
윤기태가 김양석의 어깨에서 칼을 뽑아 다시 찔렀다. 또 어깨였다.
김양석이 비명을 지르며 차우진에게 부탁했다.
"으아악! 사, 살려줘!"
차우진이 말했다.
"살려달라는 놈이 말이 짧구나."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십쇼! 사람 살려!"
"방향이 틀렸어. 내가 아니라 네 목에 칼을 들이댄 놈한테 살려달라고 해야지."
"그, 그게 무슨…."
"상식적으로 생각해. 내가 너를 위해서 칼을 버리고 저놈한테 당해줄 리 없잖아? 우리 오늘 처음 보는 사이인데."
김양석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38. 골목 II
칼잡이 윤기태가 전기 기술자 김양석의 목에 칼을 바짝 들이댔다.
김양석은 겁에 질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히익! 사, 살…."
차우진은 그걸 보고도 반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진짜로 찌르는지 구경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윤기태는 인질을 잡아봤자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다.
"진짜 아니야? 진짜 이 새끼 자백이 필요한 게 아니냐고!"
"그놈이 불을 질렀다고 자백하면 자기 목숨은 건질 테니까 그것도 나쁘지 않은데."
원래 그 불을 지르려 했던 김양석이 자백하면 일이 편해진다.
"자백 안 하고 네 칼에 죽는다고 해서 결과가 달라지진 않아. 나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씨발. 이게 아닌데."
"확인하고 싶으면 그냥 죽이던가."
윤기태는 차우진이 김양석을 지키러 온 게 아니라는 걸 확실히 알았다. 칼날에 목을 파고들어도 차우진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러면 김양석을 칼로 더 찔러봤자 효과가 없다. 김양석을 죽인다 해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살인으로 현장에서 체포되면 교도소에서 장기 복역해야 한다.
윤기태가 결론을 내리고 김양석을 옆으로 밀었다. 김양석은 밀려나자마자 골목 벽으로 허우적거리며 달려가 등을 바짝 붙였다.
윤기태가 칼을 앞으로 겨누었다.
차우진을 죽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 골목을 빠져나가면 방법이 있다.
'이 빌어먹을 골목에서 탈출하면 중국으로 밀항했다가 동남아로 뜨자.'
그의 눈에서 핏발이 섰다.
"내가 너 죽이고 이 엿 같은 골목에서 나간다."
어차피 골목 출구는 하나뿐이다. 고수 앞에서 담장을 넘으려고 등을 보이면 담장 위에 올라가기도 전에 당한다.
차우진이 손가락을 까닥였다.
"그래. 시도는 해봐야지."
윤기태가 자세를 낮추며 돌진했다. 차우진과의 거리가 칼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즉시 다리에 힘을 주고 허리를 펴며 칼을 크게 휘둘렀다.
칼날이 아래에서 시작해 위로 올라가며 공간을 갈랐다. 빨랐다. 허공에 가느다란 직선이 쭉 그어졌다.
시간 가속은 유효 시간이 짧은 대신에 재사용 대기 시간인 쿨타임도 짧다. 이만큼 떠들었으면 충분하다.
차우진이 시간 가속 스킬을 사용했다. 윤기태의 칼날이 상대적으로 느려진 것처럼 보였다.
차우진이 전진하며 몸을 기울였다. 날카로운 칼날이 그의 몸 한 뼘 앞을 가르고 지나갔다.
윤기태는 차우진이 몸을 기울이는 순간 칼이 빗나갈 거라는 걸 깨달았다.
'이걸 피한다고?'
그는 차우진이 어떻게 그 타이밍에 그렇게 몸을 젖힐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 이 공격이 빗나간다는 것만 알았다.
윤기태가 칼을 끝까지 휘둘러 차우진을 견제하며 다리로 땅을 박찼다. 급히 뒤로 물러나려 했다.
늦었다.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차우진이 더 빠르게 전진했다. 칼은 이미 빗나가 견제 효과도 없었다.
차우진이 윤기태를 스쳐 지나가며 팔, 어깨, 허리, 다리에 칼을 푹푹 박았다.
1초도 안 되는 시간에 네 번의 칼질이 들어갔다. 전기 기술자 김양석이나 도박장 관리자 권태환의 눈에는 차우진의 손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차우진이 윤기태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뒤늦게 윤기태가 비명을 지르며 칼을 떨어뜨렸다.
"끄아악!"
보통 사람은 칼을 그렇게 많이 맞으면 버티고 서 있을 수 없다. 윤기태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차우진이 앞으로 성큼 걸어갔다. 뒤는 돌아볼 필요도 없었다. 칼에 맞은 놈의 상태와 움직임은 뒤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제 이 골목에 서 있는 놈은 김양석과 권태환, 그리고 심부름꾼까지 셋만 남아 있었다.
차우진이 도박장 관리자 권태환을 보았다. 눈빛이 서늘했다.
권태환은 겁을 덜컥 집어먹었다. 칼잡이 셋이 순식간에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권태환이 벽에 달라붙으며 다급히 외쳤다.
"우린 아닙니다! 저놈들하고 한패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의 부하도 황급히 맞장구쳤다.
"저는 저놈들을 본 적도 없습니다!"
차우진이 물었다.
"내가 그걸 믿어야 하나?"
권태환이 황급히 복면을 벗었다.
"우리는 저쪽에서 작은 하우스를 하는 선량한 시민입니다! 그냥 돈을 회수하러 온 것뿐입니다!"
김양석은 어깨에 칼을 두 번이나 맞았지만 기절하지는 않았다.
그가 소리를 질렀다.
"권 사장 이 개새끼들아! 내가 이럴 줄 알았다! 그동안 잃어준 돈이 얼마인데!"
김양석이 권태환에게 달려들었다. 오른쪽 어깨는 칼에 찔린 상태라 움직이지 않았다. 왼팔이라도 휘둘렀다.
권태환도 화를 내면서 김양석을 걷어찼다.
"씨발. 저 새끼들이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든 건 너 때문이잖아! 넌 왜 우리 하우스에 와서 이 난리가 나게 하는데!"
차우진이 그들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누가 싸우라고 허락…."
권태환이 김양석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그런데 맞지 않았다. 빗나간 주먹이 다가오는 차우진을 향해 날아갔다.
차우진이 주먹을 가볍게 피했다. 권태환은 당황했다.
"어?"
"네가 죽고 싶구나?"
"서, 선생님. 그게 아니라…."
차우진이 권태환의 턱을 올려쳤다. 권태환의 고개가 덜컥 젖혀졌다.
"켁!"
권태환은 그 자리에 무너지는 것처럼 쓰러졌다.
옆에 있던 부하가 당황한 얼굴로 주춤거리다가 도망치려고 뒤로 돌아섰다.
"으아…."
차우진이 그놈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컥!"
그놈도 엎어졌다.
김양석은 권태환의 주먹을 피하다가 넘어졌다. 칼에 찔린 어깨가 미친 듯이 아팠다.
"끄아악!"
그 고통이 조금 지나가고 나자 바닥에 자빠진 권태환이 보였다.
"꼴 좋다! 개새끼야!"
차우진이 김양석에게 다가갔다.
"어이."
김양석이 왼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으으. 살려줘서 고맙습니다.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구하러 온 건 확실…."
"내가 누군지는 알 거 없고, 너 구하러 온 것도 아니야."
"예?"
"네가 이제 뭐 해야 하는지 알려주러 왔지."
"예? 뭘…."
"넌 이제 경찰에 가서 자백해야지. 네가 연구소에 불 질렀잖아."
김양석이 변명했다.
"아, 아니, 그건…. 화재보험료를 노리는 줄 알고…."
"그럼 남이 시켰다고 하고, 누가 시켰는지도 자백해. 그러면 되겠네."
김양석이 침을 꼴깍 삼켰다. 눈알이 저절로 굴러갔다.
'어쨌든 내가 필요해서 온 거 아닌가?'
"그러면…. 자백하는 대가로 얼마나 줄 수 있습니까?"
"살려주잖아."
"네? 아. 네. 오늘 구해주신 건 정말 고맙습니다. 그런데 자백하면 저도 빵에 가야 하는데, 미래를 준비하려면 남는 게 있어야…."
차우진이 피식 웃었다.
"도박과 약에 절어도 돈에 대한 집착 하나는 대단한 놈이네. 그래. 이번에는 내가 너 살려는 줬다."
"물론 알고 있습…."
"근데 너 이대로 가면 결국 죽어. 죽을 놈이 미래를 왜 준비해?"
"예?"
"머리가 있으면 생각을 해라. 너한테 불을 지르라고 시킨 놈들한테 죽는다고."
차우진이 칼잡이들을 가리켰다.
"저놈들은 딱 봐도 청부업자인데, 설마 너랑 차나 마시려고 칼 가지고 찾아왔겠냐?"
"그렇지만 저놈들은 이미 박살이 났으니까…."
"세상에 청부업자가 저놈들밖에 없겠냐?"
김양석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방금 죽다 살아났다. 차우진이 없었으면 끌려가서 산에 묻히거나 저수지에 빠질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늦게 방화 청부를 받은 게 후회됐다.
"내 계획은 이게 아니었는데…."
차우진이 경고했다.
"너한테 일을 시킨 놈이 살면, 네가 그놈에게 죽는다."
"저기, 제가 자백하면 그놈들이 보복을…."
"가만히 있다가 그놈들에게 죽는 것보다는 낫겠지. 그러니까 최선을 다해서 자백해. 그놈들을 감방에 보내야 네가 산다."
김양석의 얼굴이 꺼멓게 죽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멀쩡히 빠져나갈 방법은 없었다.
그가 고개를 숙이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머리를 들었다.
"알겠습니…. 어?"
그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차우진이 보이지 않았다.
"어, 언제 간 거야?"
이게 다 꿈인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 어깨에 칼도 맞았고, 골목에는 다섯 놈이나 쓰러져 있다. 칼잡이들도 지금은 기절한 상태였다.
그는 겁이 덜컥 났다.
자백을 안 하면 이번 일을 시킨 놈들이 칼잡이를 또 보낼 것 같았다. 그때도 차우진이 나타나 도와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오늘 화재로 아무도 죽지 않았다는 말이 생각났다.
"난 이용당한 거야. 자수하면 빵에 오래 있지는 않을 거야. 내가 살려면 경찰서에 빨리 가야…."
그는 오늘 사설 도박장에서 딴 돈이 생각났다.
"가기 전에 돈부터 숨겨야 해!"
그 돈이 담긴 검은색 비닐봉지를 찾았다.
"어? 내 돈…."
아무리 골목을 둘러봐도 비닐봉지가 보이지 않았다.
"설마 그 사람이 내 돈을 먹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