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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세르게이가 2층 실험실에서 소리를 질렀다.

"빨리 불 꺼!"

"예? 불이 난 건 아닙니다."

"전등 끄라고! 이 개새끼들아! 밖에서 누가 내부를 보면 곤란해진단 말이다!"

장비 시험 도중에 작은 폭발이 일어났지만 불은 나지는 않았다. 대신에 연기가 내부를 채웠다.

"창문 열고 연기 다 빼내!"

부하들이 서둘러 전등을 끄고 창문을 열었다.

천장의 전등을 꺼도 비상조명이 있어서 사물은 구분할 수 있었다.

세르게이가 방독면을 쓰며 말했다.

"씨발! 왜 터진 거야?"

"장비 때문입니다. 이번 장비는 성능이 너무 떨어집니다."

"지난번에 잃어버린 게 좋았는데. 젠장."

그들이 예전에 쓰던 장비는 서해안 사건 때 경찰이 찾아냈다.

이미 경찰 손에 들어간 장비를 도로 가져올 방법은 없다.

"신형 장비를 다시 입수해야 합니다. 이런 장비로는 레드 크리스털을 못 만듭니다."

"못 만들기는 왜 못 만들어? 품질이 떨어져서 그렇지 만들 수는 있잖아! 새 장비를 구할 때까지는 이걸로 버텨!"

"이 장비로 약을 만들면 독성 문제가 생기는데, 그걸 아직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세르게이가 의자에 앉았다.

"그만큼 싸게 팔면 돼. 이미 약에 중독된 놈들은 품질이 좀 떨어져도 사야지 어쩌겠어? 다른 데서는 구할 수 없는 약이잖아."

그의 뒤에서 차우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가 생산자구나?"

세르게이가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였다. 그가 벌떡 일어나며 뒤로 돌아섰다.

"누, 누구야!"

차우진이 물었다.

"장비를 바꿔도 약을 만들 수 있다는 건, 제조법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다는 뜻인데…."

세르게이는 차우진이 누구인지 모른다. 그렇지만 침입자라는 건 확실히 깨달았다.

세르게이가 소리를 질렀다.

"저 새끼 죽여!"

뒤쪽에 있던 부하가 권총을 꺼냈다.

부하의 행동이 너무 느렸다. 권총을 믿기 때문이었다.

차우진이 바로 옆에 있던 유리 재떨이를 잡아서 강하게 던졌다. 묵직한 재떨이가 날아가 적의 얼굴에 처박혔다.

"케엑!"

권총을 뽑던 놈이 뒤로 넘어갔다.

다른 놈들이 황급히 권총을 꺼냈다.

차우진은 이미 2층 출입문의 바깥으로 이동한 후였다.

"야밤에 총이라니. 뒤가 없는 새끼들이네."

세르게이가 급히 부하들에게 외쳤다.

"이 새끼들아! 소음기!"

부하들이 허겁지겁 소음기를 꺼내 권총 앞에 끼웠다.

그 틈에 차우진이 쓱 나타나 손을 앞으로 뻗었다.

이번에는 단검이 날아가 조직원의 가슴에 박혔다. 그 단검은 재떨이 옆에 놓여 있던 것이다.

"컥!"

권총에 소음기를 끼운 다른 놈이 급히 차우진을 향해 사격했다.

차우진은 이미 문밖으로 사라졌다. 총탄에 벽에 퍽퍽 꽂혔다.

차우진은 이 건물의 2층 창문이 열리는 걸 보고 공간이동 스킬을 사용했다.

그때는 2층 내부에 연기가 차 있었다. 그래서 안쪽에 CCTV가 있다 해도 제대로 찍히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다.

"내부에는 CCTV가 아예 없네."

아래쪽에서도 소리가 들렸다. 계속 문앞에 있으면 포위된다.

차우진은 2층은 난리가 나게 놔두고 계단을 통해 1층으로 내려갔다.

1층에 있던 놈들이 권총을 챙긴 후에 계단으로 뛰어왔다.

"위층이 습격당했다!"

"빨리 올라가!"

"모르는 놈이 보이면 쏴!"

123. 실내전투

1층에 있던 놈이 권총을 앞으로 향한 채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이동했다. 그는 모르는 사람이 보이면 즉시 쏴버릴 생각으로 손가락을 방아쇠에 걸어놓고 움직였다.

앞으로 내민 권총이 몸보다 먼저 계단 모퉁이를 지나갔다.

차우진이 그 손을 덥석 잡아 꺾으며 권총을 가로챘다. 적의 손가락이 방아쇠에 걸리는 바람에 총탄이 발사됐다.

소음기를 통과한 총탄이 계단 벽에 박혔다.

적이 뒤늦게 놀란 소리를 냈다.

"억?"

그때는 이미 적의 몸도 모퉁이를 돌아 차우진과 마주친 상태였다.

차우진이 권총을 빼앗자마자 적을 걷어찼다. 적이 뒤로 밀려나 계단 벽에 처박혔다.

"켁!"

사람이 다가오는 소리가 더 들렸다. 한 놈을 오래 상대할 수는 없다.

이 계단에 머물면 적에게 대비할 시간을 주게 된다. 적이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을 때 쳐야 한다.

차우진이 시간 가속을 사용하며 계단에서 1층으로 뛰었다.

이미 계단을 향해 총을 겨눈 놈이 하나 있었다.

먼저 조준하고 있다고 해서 꼭 먼저 쏠 수 있는 건 아니다. 벽 뒤에서 나온 게 아군인지 적군인지부터 판단해야 한다.

그걸 무시하고 방아쇠부터 당긴다 해도 사물을 인식하고 손가락에 명령을 내리려면 약간의 시간은 필요하다.

시간 가속을 사용하고 있는 차우진의 반응속도가 미리 조준하던 놈보다 빨랐다.

차우진이 계단을 벗어나자마자 방아쇠를 당겼다. 고속으로 날아간 총탄은 적이 방아쇠를 반쯤 당겼을 때 상대의 가슴을 뚫었다.

"켁!"

차우진의 발이 바닥에 닿았다. 즉시 바닥을 밀며 몸을 옆으로 돌렸다. 다른 놈이 보였다.

차우진이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두 번째 총탄이 권총을 앞으로 들어 올리던 놈의 몸통에 박혔다.

"끄악!"

차우진이 권총을 옆으로 젖혔다. 시간 가속 스킬의 효과가 끝났다.

차우진이 재빨리 두 발을 더 쏘았다. 이번에는 정확히 조준한 게 아니라 방아쇠를 두 번 당겼다.

옆으로 뛰려던 놈이 총알 두 발을 모두 얻어맞고 나자빠졌다.

"으아악!"

방금 계단에 처박아둔 놈이 뒤늦게 계단 밖으로 튀어나왔다.

잘못된 판단이었다. 차라리 위로 도망쳤어야 했다.

차우진이 총구를 계단 쪽으로 돌리며 방아쇠를 연달아 당겼다.

적은 계단을 벗어나자마자 총탄을 두 발이나 맞고 도로 뒤로 넘어갔다.

"켁!"

차우진은 방금 제압한 세 놈에게도 권총을 한 발씩 더 발사했다.

차우진의 전투 센스에 섬뜩한 느낌이 걸렸다. 그가 즉시 기둥 뒤로 이동했다.

1층에는 안쪽으로 유리 창문이 달린 별도의 방이 있었다. 그 유리창이 와장창 부서지며 총탄이 튀어나왔다.

차우진 쪽으로 총탄이 쏟아졌다. 건물 기둥의 콘크리트가 총탄에 맞아 퍽퍽 파여나갔다.

권총탄이 철근 콘크리트 기둥을 관통할 순 없다. 적도 그걸 깨달았다.

사격이 멈췄다.

방문이 벌컥 열리고 그곳에서 두 놈이 나왔다. 두 놈 다 권총으로 기둥 쪽을 조준한 상태로 움직였다.

차우진이 상황을 분석했다.

'발사된 건 열 발. 각각 다섯 발씩 쐈다고 보면, 탄창에 탄약이 남아 있겠네.'

두 놈 다 총구를 기둥 쪽으로 겨누고 노려보고 있었다. 기둥 뒤에 갇혔다가 2층 놈들이 내려오면 전투가 피곤해진다.

차우진이 방독면을 벗어 기둥 왼쪽으로 쓱 내밀었다.

곧바로 적의 총탄이 날아와 방독면에 명중했다. 작은 구멍이 퍽퍽 뚫리면서 방독면이 흔들렸다.

차우진은 적의 사격 간격을 확인했다. 두 발이 거의 동시에 날아왔다. 총구 두 개가 모두 왼쪽을 향했다는 뜻이다.

차우진이 오른쪽으로 튀어나가며 적을 향해 사격했다.

한 놈이 가슴에 총을 맞고 나자빠졌다.

"끄악!"

그 틈에 다른 놈이 차우진을 향해 사격했다.

차우진도 옆으로 뛰며 마주 쏘았다. 허공에서 총탄이 교차했다.

차우진의 총탄이 적의 가슴에 꽂혔다.

"큭!"

적은 비틀거렸지만 쓰러지진 않았다. 오히려 옆으로 움직이며 방아쇠를 계속 당겼다. 총탄 한 발이 차우진의 옆을 스쳤다.

'방탄조끼!'

차우진이 책상 위로 뛰어오르며 사격했다. 총탄이 면적이 넓은 방탄조끼에 박혔다. 총탄에 담긴 에너지가 적의 몸통에 충격을 주었다.

적의 몸이 흔들렸다. 적어도 피격된 그 순간에는 방아쇠를 당길 수가 없었다.

차우진이 책상 위에서 적을 향해 정확히 조준해 사격했다.

총탄 세 발이 방탄조끼를 피해 적의 양쪽 어깨와 다리를 뚫었다.

"끄아악!"

적이 비명을 지르며 나자빠졌다.

차우진의 탄창에는 이제 남은 탄약이 별로 없다.

그가 그 총은 버리고 책상 아래로 뛰어내렸다. 바닥에 널브러진 놈의 옆에 권총이 떨어져 있었다.

그가 그 권총을 집었다.

'러시아제 반자동권총. 천상칠이 쓰던 것과 같은 모델. 이놈들이 공급했구나.'

갑자기 아래층에서 비명이 들렸다.

"아악."

비명이 그리 크지는 않았다. 그런데 비명에 생기가 별로 없었다.

차우진이 위층을 보았다. 1층으로 내려오는 놈은 없었다.

위쪽에 세르게이가 있다.

'저놈이 두목일 텐데.'

1층에도 방탄조끼를 입은 놈이 하나 있었다.

'저놈은 간부급일 테고.'

그런데 아래층에도 누군가 있다. 이 시점에 비명이 들린 게 우연일 리 없다.

'문제가 생기니까 제거하려는 건가?'

어차피 지하실도 정리해야 한다. 이미 비명이 들렸다. 죽게 놔둘 게 아니라면 내려가야 한다.

지하실에 몇 놈이 어디 있는지 파악하려면 상대가 움직이게 해야 한다.

차우진이 1층에 걸려 있는 겉옷을 하나 챙겨 계단을 내려갔다. 그걸 지하실 안으로 던졌다.

"누구냐!"

안에서 사람의 목소리도 들리고 움직이는 소리도 들렸다.

총탄은 날아오지 않았다. 위층에서 누가 내려오는 건지 판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신에 대응하려고 너도나도 움직이는 바람에 소리가 여러 곳에서 났다.

차우진의 전투 센스가 소리를 분석해 적의 위치를 판단했다.

'넷.'

동작이 큰 움직임은 넷이었다. 위치도 대충 가늠이 됐다.

그런데 사람이 더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조금 전의 생기 없는 비명이 생각났다.

'하나. 또는 둘. 움직임이 거의 없지만, 생존자다.'

지하실에 있던 놈들은 상황을 판단하지 못하고 우왕좌왕 댔다.

"뭐야? 위에서 무슨 일이 난 거야?"

소음기를 장착해도 총소리는 난다.

"누가 쳐들어온 거야?"

"방금 움직인 건 뭐지?"

한 놈이 고개를 뒤로 돌렸다. 뒤쪽에 납치한 사람 두 명이 있었다.

"야. 저것들부터 확실히 처리하고 올라…."

차우진이 시간 가속 스킬을 사용하며 지하실로 뛰어들었다. 스킬 쿨타임을 억지로 줄이는 바람에 체력 소모가 컸지만, 지하실의 CCTV 배치 상황을 모르는 상태에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예상한 위치에 적들이 보였다.

한 놈은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두 놈은 차우진이 던진 옷 쪽으로 총구가 돌아간 상태다.

그런데 총구 하나가 차우진 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놈이 놀란 소리를 냈다.

"어?"

적이 뒤늦게 방아쇠를 당기려 했다.

그렇게 늦게 반응하면 시간 가속 스킬을 쓰는 차우진을 잡을 수 없다.

총탄이 날아가 적의 가슴에 꽂혔다.

"켁!"

두 발이나 세 발쯤 박아주면 더 확실히 제압할 수 있지만 그럴 여유는 없다. 차우진이 바로 옆에 놈도 쏘았다. 두 번째 적도 고꾸라졌다.

그 틈에 세 번째 적의 총구가 차우진 쪽으로 돌아왔다. 적이 소리를 지르며 방아쇠를 당겼다.

"으아아!"

차우진이 계단 모퉁이 너머로 몸을 피했다. 시간 가속 스킬이 끝났다.

적이 쏘는 총탄이 날아와 벽에 퍽퍽 박혔다.

반자동권총은 방아쇠를 당겨야 총탄이 나간다.

요령이 있으면 더 빠르게 쏠 수는 있지만, 보통은 손가락질 한 번에 한 발씩이다. 발사 순간의 반동 때문에 권총을 고속으로 쏘는 건 숙련자가 아니면 하기 어렵다.

차우진이 적의 사격 간격을 셌다.

'0.5초.'

총탄이 벽에 박히는 순간 차우진이 모퉁이를 벗어나며 사격했다. 거기까지 0.4초가 걸렸다.

"켁!"

적이 뒤로 나자빠지며 방아쇠를 당겼다. 적이 쏜 총탄이 천장으로 날아갔다.

인질 쪽을 돌아보던 놈은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는 갑자기 총소리가 난무하는 걸 듣고 급히 몸부터 숙였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때는 이미 동료 셋이 총에 맞아 고꾸라진 후였다.

"어? 어?"

차우진이 그놈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적이 공포에 질려 소리를 냈다.

"히이익. 사, 살려…."

"저 사람들은?"

남녀 두 명이 의자에 묶여 있었다. 둘 다 의식이 없었다.

그 옆에는 주사기가 굴러다녔다.

2층에서 조직원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사람을 납치해서 독성 테스트를 했나? 선을 넘었구나."

"아, 아닙니다. 저는 그냥 시켜서 한 겁니다. 이런 건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차우진이 두 사람의 상태를 확인했다.

'상태가 안 좋아.'

차우진은 멸망한 세계에서 총에 맞거나 칼에 찔려 죽어가는 사람을 많이 봤다. 둘 다 이대로 놔두면 사망한다는 건 확실하지만, 적어도 오늘 밤은 넘길 수 있어 보였다.

'병원에서 해독하고 살릴 수 있으면 좋겠는데.'

지하실에는 조직원이 넷 있었다. 그중 셋이 총에 맞았다.

마지막 한 놈은 차우진이 납치된 사람들의 상태를 살피는 것을 보다가 슬그머니 총을 들었다.

'지금 쏘면 내가 이기….'

차우진이 권총을 옆으로 뻗으며 방아쇠를 당겼다. 총탄이 적의 어깨를 관통했다.

"으악!"

적의 손에서 권총이 떨어졌다.

차우진이 돌아서며 말했다.

"한 번만 물어볼 테니까 대답 잘해라. 레드 크리스털 제조 기술자가 누구냐."

적이 어깨를 붙들며 다급히 대답했다.

"두, 두목입니다! 두목! 우리는 그냥 두목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겁니다!"

"두목 이름은?"

"세르게이!"

"러시아 놈인가?"

러시아에는 다양한 인종이 산다. 그중에는 동양인도 있다.

"그, 그렇습니다!"

"지금 위치는?"

"2층에 있습니다!"

"그놈이 맞구나."

"대답했으니까 살려…."

"네가 방금 이 사람들을 처리하자고 말한 놈이지? 너뿐이 아니다. 여기 있는 새끼들은 전부 공범이야. 그러면 다 죽어야지."

적이 황급히 왼손으로 권총을 잡았지만 소용없었다. 차우진이 방아쇠를 당겼다.

"켁!"

지하실에 있던 마지막 적이 총에 맞아 고꾸라졌다.

차우진이 지하실 한쪽으로 이동했다. 그곳에 CCTV 장비가 있었다. 건물 외부를 감시하는 장비였다.

건물 내부를 보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2층에서 지하실을 내려오는 동안에도 내부를 촬영하는 CCTV는 보이지 않았다.

차우진이 저장기록을 확인했다. 건물 외부 영상만 남아 있었다.

"내부에서 일어난 일은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는 구조구나."

***

세르게이가 부하 셋과 함께 귀를 기울였다.

부하가 물었다.

"아래층이 조용해졌는데요? 우리 애들이 이긴 거 같습니다."

"이겼는데 왜 조용해?"

"네?"

"이겼으면 소리라도 지르겠지."

"아…."

그들이 있는 곳은 2층이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지요? 여기서 버티다가 경찰이 오면 우린 다 끝장입니다."

"젠장. 내려가긴 해야겠는데…."

겁이 났다.

"아래층이 다 당했으면, 계단으로 가는 건 위험한데…."

그가 옆을 보았다. 창문 하나가 폭발로 깨져 있었다. 다른 창문들도 활짝 열린 상태였다.

"신나 한 통 가져와."

"예?"

"저 새끼가 올라올 때를 노린다."

***

차우진이 1층으로 올라왔다가 인상을 썼다.

"신나 냄새?"

상대의 의도가 짐작이 갔다.

"이 새끼들이 증거를 없애려고?"

차우진이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그러다 문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느낌이 싸했다.

'장비가 아니라 내가 목적인가?'

그 판단을 하자마자 벽을 박차며 계단 아래쪽으로 점프했다.

곧바로 그가 있던 2층 계단으로 신나가 뿌려졌다.

그 직후에 지포 라이터도 날아왔다. 라이터가 계단에 떨어지자마자 불길이 치솟았다.

세르게이가 계단을 타고 올라오는 불길을 보며 말했다.

"해치웠나?"

"이제 어떻게 합니까?"

"일단 소화기로 불을 꺼봐! 저 새끼가 신나를 뒤집어썼으면 불에 타서 죽었거나 바닥을 뒹굴고 있겠지!"

차우진이 불타는 계단을 보며 말했다.

"부하들이 살아있을지도 모르는데 불을 질러? 빌런이네."

불은 보통 아래에서 위로 올라간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기도 하는데, 올라가는 쪽 화력이 훨씬 강하다.

연기도 마찬가지다.

2층에서 소화기를 뿌려대던 부하가 외쳤다.

"부, 불이 위로 올라옵니다. 연기도 계속 위로…. 쿨럭."

"이, 이게 아닌데…."

"어떻게 합니까?"

"계속 꺼! 소화기 더 동원해!"

세르게이가 소리를 지른 후에 창문으로 이동했다. 다른 부하가 세르게이를 따라왔다.

"일단 빠져나가자."

2층에서 1층으로 뛰어내리는 건 가능한 일이다. 물론 잘못 뛰면 다리가 부러진다.

"네가 먼저 내려가라."

"예? 저부터요?"

"어서!"

세르게이의 부하가 먼저 난간에 대롱대롱 매달렸다가 뛰어내렸다.

그는 부하가 안전하게 내려가는 걸 보고 같은 방식으로 뛰어내렸다. 그런 후에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사용한 신나가 많지 않고 소화기도 빨리 사용한 덕분에 화재는 대충 진압됐다. 그런데 건물 위쪽으로 연기가 계속 올라가고 있었다.

"이렇게 하려던 게 아닌데…."

갑자기 1층 문이 벌컥 열렸다.

세르게이와 부하들이 급히 문을 향해 사격했다. 총탄이 철판을 관통했다.

124. 전멸

세르게이와 조직원들이 1층 문을 향해 사격했다.

이 건물은 세르게이나 백희선이 지은 게 아니다. 비어 있던 건물을 구해 아지트로 쓰던 것뿐이다.

그래서 건물 1층 방화문은 얇은 철판 두 장으로 만들어진 평범한 문이었다.

총탄에 맞을 때마다 얇은 철판에 구멍이 숭숭 뚫렸다. 반대편에 사람이 있었다면 총탄을 피하기 어려울 정도로 구멍이 여러 개 났다.

세르게이가 방아쇠에서 손가락을 떼며 소리를 질렀다.

"사격 중지!"

부하들도 사격을 멈췄다.

세르게이가 문을 겨누며 말했다.

"이번엔 해치웠겠지?"

알 수 없다. 확인해야 한다.

그가 문을 노려보며 부하에게 지시했다.

"네가 가서 누가 나오려던 건지 확인해."

"예? 또 제가요?"

"빨리 가! 총 맞아 뒈졌는지도 확인…."

갑자기 그들의 뒤쪽에서 총소리와 함께 총탄이 날아왔다. 지시받던 조직원이 옆으로 나자빠졌다.

"케엑!"

"뭐, 뭐야!"

세르게이와 부하들이 황급히 뒤로 돌아섰다.

차우진이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두 번째 조직원의 몸에도 총탄이 박혔다.

"컥!"

차우진은 두 놈을 잡고 나서 뒤로 훌쩍 물러난 후에 모퉁이 너머로 사라졌다.

뒤늦게 위에서 아래로 총탄이 쏟아져 맨땅에 꽂혔다.

2층에 있던 놈은 복도의 화재를 겨우 진압하고 창문으로 탈출하려고 했다. 그러다가 차우진을 발견하고 급히 권총을 꺼내 사격했다.

하지만 그가 사격할 때는 차우진은 이미 모퉁이 너머로 사라진 후였다. 총탄이 애꿎은 땅바닥에 퍽퍽 박혔다.

2층에 있는 놈이 급히 다른 쪽 창문으로 이동했다. 그쪽에서 아래로 사격하려고 상체를 내밀었다.

"어?"

차우진이 이미 위를 겨누고 있었다. 아래에서 위로 날아간 총탄이 적의 몸통에 박혔다.

2층에서 총에 맞은 놈이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차우진이 모퉁이를 다시 돌아 정문 쪽으로 이동했다. 이번에는 시간 가속 스킬을 사용했다.

이미 한 놈이 방화문 뒤에 숨어서 권총만 내밀고 있었다.

차우진이 철판으로 만들어진 문을 향해 사격했다. 총알이 철판을 숭숭 뚫으며 적의 몸에 박혔다.

"커억, 컥!"

총탄은 철판을 뚫으면서 위력이 많이 떨어졌다. 그래서 더 많이 쏘았다.

총탄 네 발이 적의 몸에 꽂혔다. 적이 뒤로 나자빠졌다.

차우진이 방화문을 지나가며 권총을 옆으로 향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네 발이나 맞은 놈의 몸에 한 발이 더 박혔다.

"두목은 튀었네?"

세르게이는 부하들이 차우진과 싸우는 사이에 차를 향해 뛰어갔다. 차는 몇 대가 있지만 세르게이의 주머니에는 자동차 키가 없었다.

"제, 젠장!"

그가 뒤를 보았다. 마지막 부하가 뒤로 나자빠지고 있었다.

세르게이가 차는 포기하고 건물 뒤쪽에 있는 산으로 도망쳤다. 산속을 숨이 헐떡거릴 정도로 뛰었다.

"헉헉. 도대체 어디서 보낸 킬러야?"

그는 차우진이 2층에 나타났을 때는 놀라기는 했어도 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한 명에게 당하기엔 그의 부하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1층과 지하에서는 총소리가 여러 번 났다. 그런 후에 차우진이 나타났다. 누가 이겼는지는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떻게 한 놈이 내 부하들을 다 죽여! 그게 말이 되냐고!"

그가 산속을 허겁지겁 달리다 발이 나무뿌리에 걸렸다.

"컥!"

세르게이가 앞으로 엎어졌다가 몸을 일으켰다.

"씨발. 되는 게 없…."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까지 온 거냐?"

"으헉!"

기겁한 세르게이가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총구를 돌리며 방아쇠를 당겼다. 총탄이 날아가 나무에 꽂혔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 어디…."

"여기다."

이번 목소리는 뒤에서 들렸다. 세르게이가 뒤로 돌아서며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 죽어!"

세르게이가 뒤쪽으로 팔을 뻗으며 총을 쏘려고 했다. 차우진이 적의 오른손을 잡아 꺾었다.

권총이 손에서 빠져나가 땅에 떨어졌다.

"끄아악. 손목…."

차우진이 세르게이를 걷어찼다. 세르게이가 나자빠졌다.

"케엑!"

세르게이는 싸워봤자 상대도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젠장. 도대체 왜 S급 킬러가 나를…."

"의뢰를 받았으니까."

"어디서…."

"네가 생각하는 거기서."

"뭐? 거기서 왜…."

"돈을 많이 주더라고."

"왜 나를…."

차우진이 상대의 말에서 정보를 얻었다.

'더 큰 조직을 배신하고 갈라선 건 아닌가?'

정보를 얻으려면 세르게이가 믿을만할 시나리오를 들려줘야 한다.

'이놈들은 서해안 사건 때 마약 생산 장비를 대부분 잃었지?'

그 마약 생산 장비는 경찰에 넘어갔다.

차우진이 권총을 세르게이의 얼굴로 향했다.

"네가 장비를 빼돌려서 독립하려고 하니까?"

세르게이가 화들짝 놀라 변명했다.

"아니야! 빼돌린 게 아니라고! 한국 경찰이 찾아내서 빼앗아갔단 말이다!"

"의뢰인이 그것까지 알긴 어렵겠지?"

"맞아! 그래서야! 프라하에서 여기 소식을 자세히 알기는 어렵…."

세르게이가 멈칫했다.

"어? 그런데 너 왜 한국말로…."

"나는 한국에서 활동하는 프리랜서니까?"

세르게이가 의심했다.

"보, 보스가 보낸 거 맞아?"

"내가 그것까지 알아야 하나? 난 그냥 돈 주니까 일하는 거지. 비즈니스야. 너한테 유감은 없다."

세르게이는 그걸 따질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가 다급히 제안했다.

"사, 살려줘. 돈 줄게. 내가 돈 더 많이 줄 테니까 살려줘!"

"얼마나 줄 수 있냐?"

"이, 일억!"

"십억."

"헉!"

"없으면 죽던가."

"주, 줄게! 그런데 10억을 내가 들고 다닐 리가 없잖아! 대신에 레드 크리스털을 빼돌린 게 있어! 그걸 팔면 10억보다 많이 받을 수 있다!"

"역시 의뢰인이 널 신뢰하지 않을 이유가 있구나."

"아니야! 약만 조금 빼돌린 거야! 장비는 아니라고! 독립할 생각은 없었어!"

"난 돈만 받으면 네가 배신했더라도 상관하지 않아. 그 약은 어디 있지?"

세르게이가 눈치를 살폈다.

"그걸 가져오려면 시간을…."

차우진이 방아쇠를 살짝 당겼다. 총에서 끼릭 소리가 들렸다.

"지금 줄 수 있는 게 아니라면 필요 없다."

세르게이가 급히 자백했다.

"주, 줄게! 지금 줄게! 이 근처에 있어!"

차우진이 말했다.

"앞장서라."

세르게이가 몸을 일으킨 후에 산에서 내려갔다.

"저 건물 쪽에…."

"내부에?"

"그러니까…."

뒤통수에 총구가 닿았다. 세르게이가 다급히 외쳤다.

"말하고 있잖아! 자꾸 뒤통수에 총 대지 좀 마! 심장 떨어지니까!"

"어디냐."

"건물에서 좀 떨어진 저쪽에 묻어놨어. 유리병에 건조제랑 같이 넣어놓고 촛농으로 밀봉까지 해서 묻어놨다고!"

"정확한 위치는?"

"그걸 말해주면 나를 살려줄지 어떻게 알고 내가 말해?"

"그럼 네 손으로 땅을 파라. 그리고."

"그리고?"

차우진이 진짜 정보를 요구했다.

"의뢰인이 누구냐?"

세르게이가 다시 의심했다.

"의뢰를 받은 건 넌데 왜 나한테…."

"너를 살려준 후에는 내 뒤통수도 조심해야지. 누군지 정확히 알아야 나도 대비하니까. 두목이 누구냐?"

세르게이는 차우진이 청부업자라고 생각했다. 한국 경찰이 혼자 쳐들어와서 조직원들을 다 죽일 리는 없기 때문이다.

'서로 싸우는 게 나한테는 유리한가?'

차우진이 권총 총구로 세르게이의 뒤통수를 다시 건드렸다.

"난 살아서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이 일을 한다. 레드 크리스털이 탐나긴 하지만, 네가 입을 다물면 난 의뢰받은 대로 해야겠지."

"총으로 머리를 건드리는 거 좀 그만하라고! 스컬스가 나를 여기로 보냈다!"

"구체적으로."

"유럽에 있는 조직인데, 러시아 사람들이 가서 만들었다."

"유럽에서 왜 러시아 사람을 한국으로 보냈지?"

"한국에는 그 약을 양산할 기술이 있으니까."

"양산 기술을 가진 나라는 한국 외에도 있을 텐데?"

"한국은 바로 옆에 중국도 있고 일본도 있고 동남아도 있고, 약을 팔 시장이 많다."

"그러니까 한국을 아시아 거점으로 쓰겠다?"

"그, 그렇지."

"어디 가면 스컬스의 두목을 만날 수 있냐?"

"어? 그건 나도 잘…."

차우진이 혀를 찼다.

"쯧."

"히익! 프, 프라하! 스컬스는 체코 프라하에 있는 조직이다!"

"경찰이 벌써 왔네."

"어? 어?"

세르게이가 산 아래를 보았다. 경찰이 이미 현장에 도착해 있었다.

세르게이가 욕을 했다.

"아, 씨발. 왜 놀라게 혀를 차서…."

"씨발?"

"자, 잘못 들었겠지. 내가 감히 어떻게 그런 욕을 당신에게…."

"야. 조용히 약만 챙겨라."

"어?"

"약 챙기라고."

"저기에 한국 경찰이 있는데…."

"안 들켜야겠지?"

세르게이가 침을 꼴깍 삼키며 산을 좀 더 내려갔다.

한국 경찰과 소방서에서 현장에 출동해 있었다. 세르게이가 약을 묻어둔 곳은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장소였다.

세르게이가 그곳에 도착해 땅을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팠다. 그러면서 뒤를 힐끗 보았다.

차우진은 뒤쪽으로 20m는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거기 있으면 경찰에게 발각되지 않는다.

'한국 경찰에 걸리면 나만 잡히게 하려고 저기 있구나.'

땅속에서 플라스틱으로 만든 통이 하나 나왔다. 그가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그가 말한 약이 유리 용기에 들어 있었다. 유리 용기가 꽤 컸다.

그가 그걸 두 손으로 꺼내 옆에다 놓았다.

"자. 이게 레드 크리스탈이다."

그런데 그 플라스틱 통에는 다른 것도 있었다. 장전된 권총이었다.

세르게이가 눈알을 굴렸다.

'저 새끼가 돈과 약을 챙기면 나를 죽이겠지? 내가 저 새끼였어도 그냥 죽이고 약만 챙겼을 테니까.'

경찰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가 권총을 슬그머니 잡았다.

'체포되는 게 죽는 것보다는 낫잖아?'

그는 경찰에 체포되면 킬러의 총구는 피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세르게이가 차우진이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어이. 킬러. 그거 아나? 네가 나를 쏘면 총소리가 나고, 그러면 저기 있는 한국 경찰들이 달려온다. 그럼 너도 큰일 나는 거야."

"그래서?"

세르게이가 휙 돌아서며 총구를 차우진 쪽으로 향했다.

"난 너랑 상황이 다르…."

차우진의 손이 더 빨랐다. 그의 오른손에서 단검이 날아가 세르게이의 가슴에 푹 꽂혔다.

"컥?"

"부하들은 다 죽었는데 너만 살면 좀 그렇잖아?"

세르게이가 차우진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려다가, 그대로 고꾸라졌다.

차우진이 그 옆에 있는 밀봉된 유리 용기를 보며 말했다.

"이번에는 레드 크리스털이 대놓고 뉴스에 나오겠지."

***

형사들이 2층 건물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주 전쟁을 했구나."

"이 사람들은 누군데 여기서 총을 맞고 죽은 걸까요?"

"한국에서 총격전을 한 걸 보면 일반인은 아니겠지."

"2층에 무슨 실험실 같은 게 있던데요?"

"너한테는 실험실로 보였냐? 나는 뭔가 만드는 생산 시설처럼 보였는데."

지하실에서 발견된 두 사람은 이미 병원으로 이송했다.

형사가 말했다.

"병원에서 연락이 왔는데, 그 두 사람은 하루만 더 늦었어도 죽었을 거라더라."

"사람을 가지고 약물 실험이라도 한 걸까요?"

"그 두 사람이 살아서 깨어나면 물어볼 수 있겠지."

건물에서 조금 떨어진 곳을 수색하던 형사가 소리를 질렀다.

"여기 시체가 있습니다!"

"어? 시체가 더 있었어?"

형사들이 그쪽으로 뛰어갔다.

"이 사람은 칼을 맞았는데요?"

"2층에도 칼 맞은 사람 하나 있잖아."

"그런데 옆에 이건…."

"알약?"

"무슨 약인데 땅에 파묻었다가 캐낸 걸까요? 그러다가 칼을 맞았나 본데…."

"총이 나오고 약이 나왔다. 그러면 이게 무슨 약이겠냐?"

"아…."

"게다가 양 많은 거 봐라. 아무래도 저 건물은 마약 공장인가 보다."

***

마약 조직이 장비를 갖춰놓고 마약을 생산하려고 했다. 그것 자체는 가끔 있는 일이다.

그 조직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그것도 가끔 있는 일이다.

그런데 그 전투에 권총이 사용됐다. 칼을 맞은 놈도 있었지만 총에 맞은 놈이 훨씬 더 많았다.

게다가 조직 전체가 전멸했다. 살아있는 놈이 하나도 없었다.

거기까지 가면 공중파 뉴스에 나오고도 남을 사건이 된다.

그 조직은 마약 제조 장비 세팅을 위해 남녀를 납치한 후에 독성 실험을 했다. 그 남녀는 약물 중독으로 중환자실로 이송됐다.

기자들이 현장에 몰려갔다.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온 기사에 댓글이 붙었다.

- 난리 났네.

- 우리나라 마약 청정국 맞나요.

- 옛날이야기 하시네.

- 난 옛날에도 청정국이었다는 말은 안 믿었음.

- 얼마 전에 서해안 사건 때도 비슷한 마약 생산 시설이 발견됐다고 하지 않았나요?

- 그때 그 생산 시설을 관리하던 놈들일 수 있답니다.

- 그건 어떻게 알았어요? 경찰 발표에는 없는 이야기인데.

- 게시판에 그런 이야기가 잠깐 올라왔는데, 지워졌는지 찾을 수가 없네요.

125. 계약

차유리가 입에서 불을 뿜었다.

"왜 또 그 사건이 다시 튀어나오는데!"

차우진이 물었다.

"왜?"

"이번에 경기도 마약 공장에서 총격 사건 난 거!"

"TV에서 봤어. 그 기사가 안 나오는 뉴스가 없더라."

"그러니까! 그게 이렇게 크게 터지면 위에서 또 옛날 사건들을 재조사하라고 할 거란 말이야!"

차우진이 빌런을 잡으면 차유리의 일이 늘어나곤 했다. 이미 그런 일이 몇 번이나 있었다. 가끔은 차유리 대신에 민수연의 일이 늘어났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차유리가 분노했다.

"그거 다 내가 해야 한다고!"

세르게이 일당을 쓸어버린 차우진이 제안했다.

"어…. 야식이라도 챙겨줄까?"

"나 출근하니까 도시락 싸서 가져와!"

"알았어."

"많이!"

차우진은 오늘 낮에는 가야 할 곳이 있다.

"나도 오늘은 출근하니까, 밤에 밀폐용기로 가방 하나 가득 채워갈게."

"수연이 것도!"

"수연이도 이번 일에 말려들었구나. 이번에는 일타쌍피네."

"뭐라고?"

"알았다고."

차유리가 갈아입을 옷을 가방에 넣다가 차우진을 휙 돌아보았다.

"뭐지? 너 왜 이렇게 말을 잘 듣냐?"

"이번엔 누나랑 수연이가 고생 좀 오래 할 것 같아서?"

"아주 그냥 저주를 하는구나. 내가 이번에 오래 고생하면 다 너 때문이다."

"눈치챘구나?"

"닥쳐!"

***

라이프레인 제약의 백희선은 뉴스를 보고 경악했다.

"저, 저기가 왜!"

그녀가 보는 뉴스에는 대단한 정보는 없었다. 경기도 외진 곳에서 마약 조직이 전멸했다는 것 정도였다.

납치된 사람 두 명이 구출돼서 병원 중환자실에 있다는 것도 뉴스로 나왔다.

백희선은 뉴스에 나오지 않은 것도 알고 있다. 기자 뒤쪽에 보이는 건물은 세르게이가 마약 생산을 준비하던 곳이다. 그녀는 거기 뭐가 있고 뭘 만들려고 했는지 아주 잘 알았다.

"국내 다른 마약 조직이 저기에 쳐들어간 건가? 기존 시장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아예 레드 크리스털의 제조 기술을 빼앗으려고?"

어느 쪽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확실한 건 세르게이와 조직원들이 전멸했다는 것뿐이다.

백희선이 화를 냈다.

"세르게이 저 등신 새끼! 그렇게 죽어버리면 난 어디서 돈을 만들라는 거야!"

***

현장에서 구출된 남녀는 병원 중환자실에서 치료받았다.

형사가 의사에게 질문했다.

"피해자들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남자 환자는 계속 집중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많이 다쳤습니까?"

"부상도 부상인데, 몸에 주입된 약물이 문제입니다. 현장에서 발견됐다는 마약…. 그게 이름이…."

"레드 크리스털입니다. 신종 마약이라 저도 이번에 처음 들어봤습니다."

"예. 알려진 게 별로 없는 마약이라서, 지금은 환자 상태가 나빠지지 않게 하면서 치료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그럼 여자 피해자는요?"

"상태가 호전됐습니다. 약물이 몸에 완전히 흡수되기 전에 구출됐더군요. 천만다행이죠."

"그럼 저희가 그분에게 질문을 좀 해도 되겠습니까? 이게 워낙 큰 사건이라서…."

"음…. 짧게 질문하시는 정도는 괜찮을 겁니다."

형사들이 구출된 여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우린 그냥 등산하다가 그 건물 앞에서 사진을 찍었던 것뿐이에요. 그런데 그놈들이 우리를 납치해서 때리고, 주사기로 찌르고…."

"누가 두 분을 구출했는지 혹시 보셨습니까?"

"아니요. 정신을 잃기 전에 총소리가 많이 들렸어요. 그놈들은 총소리가 계속 나니까, 갑자기 저한테…. 저, 저 죽을뻔했어요!"

"지, 진정하시고요. 그래서 구해준 사람을 보셨습니까?"

"눈도 못 뜨고 있었는데 어떻게 보겠어요? 아. 비몽사몽 간에 누가 선을 넘었다는 말을 들은 것 같기는 한데…."

***

사건 관할 경찰서 형사팀에 광역수사대 형사들이 찾아왔다. 경기도 광역수사대와 서울 광역수사대 양쪽에서 방문했다.

형사팀장이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

"이거 우리 사건입니다만?"

광수대 형사가 어색하게 웃었다.

"조만간 저희 쪽으로 넘어오지 않겠습니까?"

"아직 안 넘어갔습니다."

"알지요. 그래도 일단 정보 공유가 필요하실 것 같아서 방문했습니다. 빨리 해결하면 서로 좋잖습니까?"

"무슨 정보 말입니까?"

"누가 그 마약 조직을 전멸시켰는지 알아내셨습니까?"

"조사 중입니다."

"이게 도움이 될 겁니다."

경기도 광역수사대 형사가 화면에 사진과 문서를 띄웠다.

"얼마 전에 발생한 서해안 사건 아시죠? 단 한 명이 국내 조직 상칠파와 중국 조직원 넷을 처리했습니다."

"아. 그 사건은 들어봤습니다. 그럼 우리 사건도 설마…."

"서해안 사건 때 마약 생산 시설을 하나 찾았습니다. 그 장비와 이번에 발견된 장비는 용도가 비슷하더군요. 이번 장비가 성능이 많이 떨어진다는 차이점이 있긴 합니다만."

"그럼 이번에 그놈들을 전멸시킨 사람도…."

"저희 팀에서는 같은 인물로 보고 있습니다."

관할 경찰서의 팀장이 인상을 썼다. 광수대가 이미 관련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데다가, 아는 것도 많아 보였다.

"도대체 누가 저지른 겁니까?"

"모릅니다."

"예?"

"저희도 찾는 중입니다. 어쨌든, 이게 이 지역에서만 일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위에서 조정이 들어올 겁니다."

"그야…. 끄응."

팀장이 서울 광수대 형사를 돌아보며 물었다.

"상황은 알겠습니다. 그런데 서울에서는 왜 경기도 사건에 온 겁니까?"

서울 광수대 형사가 대답했다.

"우리가 예전부터 찾던 사람이 있습니다. 혹시 같은 사람이 그들을 전멸시킨 건지 확인하러 온 겁니다. 수사에는 개입하지 않을 겁니다."

"누구를 찾는다는 겁니까?"

"살인청부업자 김준배와 연쇄살인마 마상국을 죽인 사람입니다."

팀장도 그 이름은 들어보았다.

"어? 마상국이요? 그 연쇄살인마 새끼…."

"그 외에도 몇 건의 사건에 같은 사람이 개입했다고 추측하는 중입니다."

"증거가 나왔습니까?"

"아니요. 추측만 하는 겁니다. 증거가 있으면 직접 수사를 했지 이렇게 구경만 하겠습니까?"

팀장이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도대체 어떤 사람입니까?"

"모릅니다. 우리 팀에서는 빌런 킬러라는 별명으로 부릅니다."

"빌런 킬러…."

"아마 지하세계에서 칼 한 자루에 의지해 움직이는 고독한 칼잡이일 겁니다."

***

차우진이 오전에 딥어스테크 조사팀을 소집했다.

"서해안 사건 때 횡령된 우리 장비로 마약을 만들다가 사라진 놈들이 발견됐습니다."

그가 관련 기사를 화면에 띄웠다.

"놈들은 구형 장비를 긁어모아서 제조 시설을 새로 만들려 했습니다."

비서실 송미소가 질문했다.

"차 이사님. 말씀하신 기사는 저도 봤는데요. 이번에 전멸한 조직이 서해안 사건 때 우리 장비를 썼던 그놈들이라는 내용은 없었어요."

"그동안 수집한 정보와 이번에 나온 기사를 종합 분석해서 내린 결론입니다. 이놈들이 그때 도망친 놈들입니다."

"아. 차 이사님이 직접 분석을…. 그럼 맞겠네요."

"이 사건에 관한 첩보, 근황, 그 외에도 수집할 수 있는 건 모두 수집하세요."

차우진이 선언했다.

"이건 우리 사건입니다."

***

차우진은 오후에는 SL 제약 분석팀을 소집해 선언했다.

"이건 우리 사건입니다."

성혜리가 물었다.

"그 사건은 그냥 마약 조직 간의 싸움 아닌가요?"

"현장에서 전문가나 다룰만한 장비들이 발견됐습니다."

"앗! 혹시 백희선이 저놈들하고 한패인가요?"

"역시 성혜리 대리는 내 마음을 잘 아는군요."

"제가 아니면 누가 알아주겠어요? 호호호."

"난 이 둘은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니까 백희선과 저놈들이 한패인 경우를 가정하고 정보를 수집합시다."

다른 팀원이 질문했다.

"만약 한패가 아니라면…."

"그러면 이건 그냥 평소 첩보 수집 활동 중 하나가 되는 거지요."

***

사건 발생 이틀 후에 나인세븐 엔터 출신 조연 배우 김상훈이 백희선을 찾아갔다.

김상훈이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백 이사님. 저 왔습니다."

백희선이 주차장에서 물었다.

"너 내가 지금 회사에서 퇴근하는 거 어떻게 알았니?"

"형님이 가보라고 하던데요? 미리 약속되신 거 아니었습니까?"

"그 사람 부하가 너 말고도 있나 보다?"

"그건 저도 잘…."

"정체가 뭐니?"

"그것도 잘…."

"넌 아는 게 뭐니?"

김상훈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너랑 잘 아는 사이는 아닌가 봐?"

"예? 아. 그게…."

김상훈의 눈이 갑자기 반짝 빛났다.

'그 새끼가 분명히 이 여자가 그 약을 공급한다고 했는데?'

김상훈이 입맛을 다시며 제안했다.

"누님. 제가 좀 알아볼까요?"

"갑자기?"

"물론 대가를 좀 주셔야지요."

"돈?"

"아니요. 그…."

백희선이 씩 웃었다.

"아. 나인세븐에서 너한테 준 그 약? 이제 나인세븐이 망했으니까 구할 곳이 없겠네?"

나인세븐도 망하고 상칠파도 망했다. 약을 만들던 세르게이 일당은 전멸했다.

이제 국내에는 그 약을 구할 곳이 없다.

그건 백희선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마약이 아니라 돈과 권력에 중독됐다.

그녀는 그 약을 생산하는 방법은 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만들 장비가 없다.

백희선이 김상훈을 보며 생각했다.

'나한테도 약이 없다는 걸 얘는 모르네?'

그녀가 씩 웃으며 제안했다.

"가서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오렴. 그럼 네가 원하는 걸 줄 테니까."

"지금 몇 개만 선불로…."

없는 걸 미리 줄 수는 없다. 그녀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죽고 싶니?"

"아, 아닙니다. 일 끝나고 받겠습니다. 그리고 형님의 메시지 말인데요. 지난번 그 장소에서 만나자고 하던데요?"

백희선이 명함에 몇 자를 적어서 바닥에 툭 떨어뜨렸다.

"여기로 오라고 해."

백희선이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차를 향해 걸어갔다.

김상훈이 바닥에 떨어진 명함을 주우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씨발. 그냥 줘도 될 걸 왜 바닥에 던져? 내가 진짜 약이 아쉬워서 참는다. 아쉬워서…."

갑자기 백희선의 차가 김상훈을 칠 듯이 달려왔다.

"어? 어?"

차는 김상훈을 들이받기 직전에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김상훈은 겁에 질려 털썩 주저앉았다.

"으, 으헉…."

백희선이 창문을 내리며 물었다.

"내 욕했니?"

"아, 아닙니다!"

"비켜."

"예? 예!"

김상훈이 바닥을 짚으며 옆으로 도망치듯 피했다.

창문이 다시 올라가며 차가 출발했다.

김상훈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무슨 눈빛이…. 진짜 나를 죽이려고 했나?"

***

차우진이 한강공원에서 한밤중에 백희선을 만났다. 밤이 늦어 공원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조금 멀리서 지나가는 몇 명만 보였다.

차우진이 물었다.

"지난번에 말한 이틀을 기다렸는데, 레드 크리스털 제작자와의 미팅은 어떻게 된 겁니까?"

백희선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사소한 문제가 생겼어요."

"문제라…. 백 이사님. 라이프레인 제약의 주식이 필요 없습니까?"

"이봐요. 문제가 생겼다고 했잖아요."

"내 거래 조건은 간단했습니다. 레드 크리스털의 생산자를 만나게 해달라는 것뿐이었지요. 백 이사님에게 문제가 생겨도 계속 거래할 수 있도록."

"바로 그 문제가 생겼다고."

"이렇게 멀쩡히 서 있는 걸 보면, 내가 납득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닐 것 같은데."

백희선이 입술을 깨물다 말했다.

"그 약을 만들던 놈들이, 전멸했어요."

"음?"

"다 죽었다고. 이틀 전 뉴스 못 봤어요? 크게 터졌는데."

"아. 그 뉴스."

"그래요. 그 뉴스에 나온 놈들이 제작자예요."

차우진이 손을 내밀었다.

"그럼 돌려줘야지."

"뭘?"

"내가 계약금으로 맡겨놓은 증권 계좌와 통장. 계약은 파기한 쪽에서 두 배로 보상하는 게 국룰인 거, 당연히 알지요?"

증권 통장은 네 개였다. 그중 하나는 계약금 명목으로 이미 백희선에게 넘겼다.

백희선이 반발했다.

"계약 파기라니! 누구 마음대로!"

"약을 공급할 방법이 없으면, 내가 이 거래를 계속할 이유가 있나?"

백희선은 라이프레인 제약의 주식이 필요하다.

그녀가 살벌한 눈빛으로 차우진을 노려보았다.

'이 새끼를 납치해서 협박하면 주식을 다 빼앗을 수 있을까?'

욕심이 났지만, 함부로 실행할 순 없다.

오늘 김상훈이 그녀의 퇴근 시간에 맞춰 기다리던 게 생각났다. 김상훈은 지난번에도 퇴근 시간에 맞춰 기다렸다.

'만만한 놈이 아니야. 약을 팔려는 걸 보면 당연히 부하들이 있겠지.'

그녀가 다른 방법을 꺼냈다.

"이번에 털린 곳은 한국 지사 같은 개념이에요. 세르게이는 출장 나온 놈이고요. 사실 본사가 있어요."

차우진이 말했다.

"유럽?"

백희선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

126. 입국

세르게이는 체코 프라하의 스컬스라는 러시아계 조직이 레드 크리스털을 만들었다고 했다.

백희선은 유럽이라는 말에 반응했다.

차우진이 백희선의 반응을 더 보기 위해 미끼를 다시 던졌다.

"출장 나온 놈 이름이 세르게이라며."

"미국에서 왔을 수도 있잖아? 나에 대해 알아봤다면 내가 미국에도 연줄이 있다는 걸 알 텐데?"

차우진의 전투 센스는 적의 표정에서 미세한 변화나 눈동자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공격 의도를 분석할 수 있다.

지금처럼 상대가 공격적으로 나오면 전투 센스를 사용해 진짜와 연기를 파악하기 쉬워진다.

전투 센스가 언제나 정답만 알아내는 건 아니다. 그런데 지금 백희선의 예민한 반응은 가짜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내가 왜 유럽이라고 말했는지에 집착하는 걸 보면, 유럽, 그중에서도 체코가 맞겠네.'

차우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 약이 한국에서만 팔리는 게 아니니까."

백의선은 자신의 말투가 너무 날이 섰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녀의 말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생산은 한국에서만 하는데? 여기가 시험 생산 기지니까."

차우진은 그것까지는 몰랐다.

'본격적으로 팔린 시기는 지금보다는 나중이구나. 아직은 국내 생산만 가능하단 말이지. 그나마 다행이네.'

차우진이 다시 둘러댔다.

"수입하는 쪽에서 소문을 들었습니다."

백희선이 캐물었다.

"그 소문은 어느 나라에서 들었나요?"

상칠파는 레드 크리스털을 중국에 팔았다. 그런데 상칠파와 중국 조직원들이 서해안 사건에서 죽었다는 건 이미 뉴스로 나왔다.

'중국이라고 하면, 뉴스에서 본 거 아니냐고 또 의심하겠지.'

지금 시기에 중국 외에도 수출한 나라가 있는지는 모른다.

'초기에 몇 나라에는 팔았다니까, 지금도 파는 나라가 더 있겠지.'

차우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혹시 중국을 생각한 겁니까? 거기는 아닙니다. 그런데 어느 나라인지 캐묻는 건 내 뒤를 캐보려는 건가? 이러면 곤란한데."

"그럼 지금 나만 정보를 내놓으라는 건가요?"

"오늘 약속을 어겼으니, 거래 조건을 만족하려면 그러셔야지."

지금 아쉬운 건 백희선이다. 차우진의 대답은 술술 나왔다. 더 캐물었다가 거래가 깨지면 곤란하다.

그녀가 입술을 깨물며 머리를 굴렸다.

'그 증권 계좌는 진짜였어.'

그녀는 차우진이 넘겨준 차명계좌의 주식을 다시 세탁해서 다른 차명계좌로 옮겼다. 차우진이 도로 빼가지 못하게 하려고 일부러 그렇게 처리했다.

차우진에게 그런 계좌가 세 개 더 있다. 백희선이 그것까지 손에 넣으면 경영권 싸움에 도움이 많이 된다.

그녀가 결론을 내렸다.

'어차피 약을 대신 팔아줄 영업망은 다시 구축해야 하니까….'

그녀가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국내 생산 책임자는 세르게이였어요. 원래는 그놈을 소개해주려고 했죠."

"죽었다면서."

"세르게이의 진짜 임무는, 국내에서 그 약의 시험 생산 기술을 확보하는 것이었어요."

차우진도 안다. 세르게이가 죽기 전에 그 정보를 뱉었다.

차우진이 물었다.

"시험 생산을 왜 한국에서 하지?"

"양산할 기술력이 되니까."

차우진이 히죽 웃었다.

"그 기술 그거 백 이사님에게서 나왔군."

"그 조직에서 그 약을 개발했지만, 대량생산 기술은 또 다른 이야기예요. 전문 제약회사의 기술력이 필요하죠."

그녀가 자랑했다.

"우리 회사의 의약품 양산 기술은 세계적인 수준이니까요."

"그래서 그 조직의 기술을 받아다가 마약의 대량생산 기술을 연구했다?"

백희선이 도청탐지기를 슬쩍 보았다. 파란 불이 켜져 있었다. 그런데도 대답은 두루뭉술하게 했다.

"누군가는 그렇게 했을지도 모르죠."

멸망한 세계에서 레드 크리스털이 본격적으로 퍼진 시기는 올해가 아니다. 2년 후다.

차우진도 그 약이 벌써 퍼지기 시작했다는 건 최근에야 알았다.

'역시 지금은 약을 시험 생산하고, 그걸 적당히 뿌려서 반응을 테스트하는 중이구나. 본격적인 생산은 2년 후부터고.'

차우진이 말했다.

"세르게이가 죽었으니 양산 작업은 중단되겠군."

"그래서 본사에서 사람이 올 거예요.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

"호오."

"그때 자리를 만들어줄게요."

차우진이 씩 웃었다. 스컬스가 한국을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세르게이가 총을 쏘려고 할 때 피하지 않고 칼을 던져 죽였다.

그의 예상대로 빈자리에 새로운 사람이 온다. 그것도 본사에서 직접 온다.

"기대되는군."

'본사에서 오는 놈이면 진짜 개발자의 정체를 알겠지. 그게 아니라도 최소한 어디 있는지 정도는 알겠지.'

백희선이 말했다.

"대신에 나도 계약금이 필요해요. 내가 당신을 믿으려면 그 정도는 쥐고 있어야 하니까."

차우진이 피식 웃었다.

"지난번에 준 증권 통장. 그게 계약금이었는데?"

"저번에는 한국에 파견 온 세르게이를 소개하려던 거지만, 이번에는 본사와 직접 연결해주는 거니까 당연히 계약금을 올려야지."

"협상할 줄 아는군."

차우진이 증권 통장을 하나 더 던져주었다.

백희선이 그걸 받아 열어보았다. 지난번처럼 증권 계좌 정보가 안쪽에 끼워져 있었다. 그녀가 히죽 웃었다.

그들은 공원에서 헤어졌다.

백희선은 차를 운전하며 혼잣말을 했다.

"드미트리는 부하들과 함께 들어오니까."

그녀는 차우진을 믿지 않았다.

"저 새끼가 감히 나를 배신하지 못하게 나한테 어떤 힘이 있는지 보여줘야겠어. 천 사장 때처럼."

백희선은 상칠파 두목 천상칠과 거래할 때 세르게이와 그의 부하들을 데려가 힘을 과시했다. 그들이 모두 권총으로 무장한 것도 보여주었다.

그런 후에 서비스로 천상칠에게 권총도 한 자루 선물했다. 러시아에서 만든 권총이었다.

그건 권총 한 자루쯤 넘겨줘도 될 만큼 이쪽에 총이 많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천상칠은 백희선을 납치해 협박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는 그러다 잘못되면 벌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백희선이 운전하며 실실 웃었다.

"너도 천 사장처럼 내 하청이나 해. 주식도 다 내놔."

차우진이 멀어지는 백희선의 차를 보며 말했다.

"미끼로 걸린 고기에 눈이 멀면 함정을 못 보는 법이지. 미끼가 너무 탐스러워서 물지 않을 수가 없었을 거다."

***

체코에 있는 러시아계 범죄조직 스컬스의 조직원들이 한국으로 들어왔다.

그 조직의 간부인 드미트리는 동아시아계 외모를 가진 러시아인이다. 그래서 스컬스의 동아시아 쪽 현장 업무는 드미트리가 주도했다.

백희선이 드미트리를 만났다. 간단한 인사와 상황 정보가 오갔다.

드미트리가 물었다.

"그래서, 누구 짓인지 모른다는 건가?"

백희선이 대답했다.

"나는 기업가이지 경찰이 아니야."

"한국 수사기관에 연줄이 있다더니?"

"그 연줄로 알아봤지만, 경찰도 범인이 누구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어."

드미트리가 인상을 찌푸렸다.

"예전에 거래하던 한국 조직은? 욕심을 부릴 수도 있는데."

백희선이 고개를 흔들었다.

"상칠파는 두목은 죽었고 조직원은 체포되거나 뿔뿔이 흩어졌어. 거긴 그럴 힘이 없어."

"그 조직은 누가 날렸지?"

"아마 레드 크리스털이 자기들 시장을 위협한다고 판단한 한국 마약조직이겠지."

"타당한 추측이군."

"그게 제일 말이 되니까."

드미트리가 물었다.

"그럼 그 한국 마약조직이 상칠파를 없앨 때 세르게이의 위치도 알아낸 건가?"

"아마 그럴 거야. 상칠파 두목이 따로 수집한 자료 때문에 레드 크리스털 생산 공장을 한국 경찰이 찾아냈으니까."

드미트리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 한국 마약조직이 어딘지 알아내라."

"왜? 복수라도 하게?"

"물론이지."

"한국에서 총을 또 쏘면 일이 복잡해질 텐데."

"그래도 복수는 해야 한다. 그게 스컬스의 방식이다."

백희선이 인상을 썼다.

"당신들은 일을 저지르고 떠나면 그만이지만, 그러면 나는? 나한테 피해가 오면? 내가 누구인지 몰라서 그래?"

스컬스에게 백희선은 중요한 인물이다. 레드 크리스털은 스컬스가 개발했지만, 양산 기술은 백희선이 라이프레인 제약의 연구소를 이용해 개발하는 중이다.

이미 성과가 꽤 나왔다. 이대로 팔 수도 있다.

하지만 스컬스의 두목은 더 많은 물량과 더 큰 이익을 원했다. 전 세계에 약을 뿌릴 정도로 대량생산하려면 기술을 더 개선해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

드미트리가 말했다.

"세르게이의 복수는 우리가 따로 하겠다. 백 이사. 당신은 현장에 있을 필요가 없다. 그러니까 일이 잘못돼도 경찰은 당신을 찾아내지 못해."

"그래? 그러면 괜찮지만…."

백희선이 표정을 펴며 말했다.

"상칠파 대신에 레드 크리스털을 팔겠다는 놈이 있어.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해."

백희선은 차우진이 진짜 마약상이길 바란다. 그래야 그가 가진 증권 통장 두 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권과 상관없는 드미트리는 차우진을 의심했다.

"하필 이 시기에?"

"상칠파 대신에 판매망을 맡을 놈은 필요하잖아."

"그놈이 요구하는 건 나를 만나게 해달라는 것뿐인가?"

"어. 그거 하나야. 나한테 문제가 생겼을 때 직접 공급받을 루트가 필요하다고 했어."

드미트리는 차우진이 의심스러웠다. 증거는 없지만, 범죄조직은 증거로 움직이지 않는다.

백희선이 제안했다.

"일단 만나는 봐. 아니다 싶으면 그때 방법을 찾든가."

"혼자 오라고 해라."

"응?"

"그럴 배짱이 있으면 만나준다고 해라."

"그럼 드리트리는…."

"물론 나는 혼자가 아니지. 만나본 후에, 수상한 낌새가 보이면 제거한다."

"드미트리. 난 판매망이 필요해."

"수상한 놈과 거래할 수는 없다. 한국 거점은 우리에게 무척 중요하다."

그녀가 잠시 고민했다. 판매망이 필요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당장 급한 건 회사 지분이다.

그녀는 차우진이 가진 차명 증권 통장 두 개가 필요하다. 이미 받은 두 개도 쏠쏠했다. 거기에 두 개를 더하고, 그녀가 가진 다른 차명계좌들까지 계산하면 상당한 지분이 모인다.

'백재원과 백재우를 상대하려면 그 정도는 있어야지.'

그녀가 입맛을 다시며 요구조건을 걸었다.

"알았어. 그런데 그놈이 수상해 보여도 바로 죽이지는 마."

"어째서?"

"내가 그놈한테서 받을 게 있거든."

***

이튿날 저녁때 백희선이 회사에서 퇴근했다.

조연 배우 김상훈이 주차장에서 백희선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백 이사님."

그는 오늘은 차우진의 메신저로 온 게 아니다. 백희선을 만나러 왔다.

백희선이 인상을 썼다.

"너 내 옆에 사람 심어뒀니?"

"어휴. 그럴 리가요."

"그런데 내가 퇴근하는 건 어떻게 알았니?"

"다섯 시부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

"예."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낸다더니, 성공했니?"

"죄송합니다. 아직 알아보는 중입니다."

"그런데 왜 내 앞에 나타나?"

"저기, 그게…."

"일도 하지 않고 약을 받아가게?"

김상훈이 다급히 말했다.

"아니, 그게, 몇 알만 주시면 제가 진짜 열심히…."

"됐고, 그 사람한테 이거나 전달해."

그녀가 밀봉된 봉투를 넘겨주었다. 그 안에는 차우진과 드미트리가 만날 장소가 들어 있었다.

이번에는 명함에 약속장소를 적지 않았다. 명함에 적으면 김상훈도 그 장소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김상훈이 물었다.

"이게 뭐…."

"그거 열어보면 너 죽는다?"

"절대로 열어보지 않겠습니다!"

그녀가 차를 향해 또각또각 걸어갔다.

"저기, 백 이사님."

"왜? 남은 용건이 있니?"

김상훈이 어색하게 웃었다.

"나인세븐에서는 즐거우셨습니까?"

"나쁘진 않았지. 그런데 그게 왜? 나인세븐은 이미 망했잖아."

"회사는 망했어도 제가 이사님을 모시는 건 계속할 수 있어서요."

"프리랜서로 뛰게?"

김상훈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거죠. 네. 오직 이사님만을 위한 프리랜서입니다."

백희선이 김상훈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얘가 잘하긴 했지?'

그녀가 명함을 한 장 꺼내 몇 자 휘갈겨 쓴 후에 바닥에 툭 떨어뜨렸다.

"CCTV 때문에 버리는 거야. 알지?"

"아! 역시 그러셨군요. 알고 있었습니다. 하하하."

"웃지 말고."

"네."

"내일 그 시간에 그 호텔로 와."

"내일이요?"

"왜? 너도 그 사람하고 같이 일하니?"

"아니요! 저는 그냥 메신저입니다. 전서구 같은 거죠."

백희선이 차로 걸어갔다. 김상훈이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

김상훈이 봉투를 차우진에게 넘겨주었다.

"이걸 주라던데요."

차우진이 봉투를 열고 안에 들어 있는 내용물을 확인했다. 종이가 한 장 나왔다. 내일 밤에 보자는 연락이 들어 있었다. 장소도 적혀 있었다.

"네가 올 걸 예상하고 이걸 미리 적어놨네. 준비도 해놨겠어."

"그거 혹시 중요한 겁니까?"

"백희선이 너한테 경고했을 텐데?"

"열어보면 죽는다고…."

"그 여자는 진짜로 죽일 거야."

"히익!"

127. 점프

차우진이 집에서 중화풍 요리를 만들어 거실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물었다.

"이번 사건으로 당분간 바쁜 거 아녔어?"

차유리는 TV를 보면서 요리를 먹었다.

"형사라고 맨날 야근하면 사람이 살 수 있겠냐? 며칠 했으면 됐지."

민수연이 옆에서 맥주와 함께 요리를 먹으며 물었다.

"이거 맛있다. 이름이 뭐야?"

"멸망식 팔보채."

"응? 이게 어딜 봐서 팔보채인데?"

"먹을 수 있는 거면 뭐든 상관없이 여덟 종류를 넣어서 만들면 그게 멸망식 팔보채야. 냉장고를 털었지."

"생긴 건 다르지만 맛있으니까 오케이."

"그런데 왜 너도 야근을 안 해?"

"우리 관할 사건이 아니니까. 며칠 지원해줬으면 됐어. 그 사건은 이제 광수대가 알아서 할 거야."

"실망인데."

"왜?"

"뭐라도 주워들을 줄 알았는데."

"궁금하면 뉴스를 봐."

차우진이 다른 걸 물었다.

"그런데 너 왜 여기서 밥 먹냐?"

"아빠가 너한테 가서 밥 좀 얻어오래."

"아줌마는?"

"엄마는 친구분들이랑 꽃구경 가셨어."

"배달 음식이라는 옵션도 있잖아."

"그래서 배달하러 왔잖아. 네가 만든 거."

차우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아무래도 네가 아저씨를 부추긴 거 같은데…."

민수연이 배시시 웃었다.

"이거 많이 만들었지?"

"밀폐용기에 담아줄 테니까 갈 때 가져가라. 많이 만들었으니까 당분간 오지 마라."

"콜."

차우진이 상황을 정리했다.

'이러면 수연이는 내일 집에 찾아오진 않을 텐데.'

차유리는 별다른 일이 없으면 내일 정상적으로 퇴근한다. 그러면 집에 들어왔다가 스킬을 써서 나가는 방식으로 알리바이를 만드는 건 불가능해진다.

'다른 수단이 필요해.'

알리바이를 만드는 데 적극적으로 협조할 사람이 생각났다. 레드 크리스털의 성분 분석을 도와준 이선정 박사다.

'안돼. 이선정 박사가 괜한 의심이나 조사를 받으면 곤란해. 그러다 오메가 바이러스 치료제 개발에 차질이 생기면 큰일이지.'

차우진이 스마트폰으로 이메일을 확인했다. 드라마 '친구와 연인 사이'의 촬영 일정표가 첨부되어 있었다.

차우진이 그 드라마를 몇 번 도와줬지만, 배우로 참여하거나 스태프가 된 건 아니다.

그런데도 차우진에게 일정표가 계속 날아왔다.

'내일 야간 촬영 장소가….'

오늘 밤과 내일 밤의 야간 촬영은 백희선이 알려준 장소에서 좀 먼 곳에서 진행됐다. 그렇다고 못 갈 정도로 멀지는 않았다.

'애매한 거리네.'

갑자기 톡이 들어왔다. 정예지가 보낸 톡이었다.

- 야간 촬영 힘들어. 혼자 노니까 좋아요? 맛있는 거 들고 위문이라도 좀 와봐요.

정예지도 그 드라마에 조연으로 출연한다.

차우진이 톡을 보냈다.

- 장소가 어디입니까?

- 오게요?

- 아니요.

- 놀리냐?

정예지가 야간 촬영 현장의 사진을 보냈다. 양평에 있는 카페를 통째로 빌려놓고 촬영 중이었다.

- 기다릴 테다. 쫄쫄 굶으면서 기다릴 테다.

- 기다려 보던가.

차우진이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가 방금 만든 요리가 담긴 밀폐용기를 챙겼다.

민수연이 물었다.

"야. 그거 왜 가져가는데? 그거 우리 아빠 거잖아."

"아저씨가 아니라 네 밥을 빼앗기는 표정이다?"

"아니거든?"

"밀폐용기 세 개 중에 하나만 가져가니까, 나머지 두 개는 아저씨 가져다 드려. 최소한 하나는 드려라. 네가 다 먹지 말고."

"쳇. 그래서 이 시간에 어디에 가는데?"

"이거 사겠다는 사람이 있어서."

***

차우진이 야외 촬영장에 도착했다.

사전 정찰은 중요하다. 이 촬영을 알리바이로 사용하려면 현장을 확인해야 한다.

지금은 촬영 중간에 잠깐 쉬는 시간이었다. 정예지는 막 간식을 먹으려던 참이다.

차우진이 말했다.

"쫄쫄 굶으면서 기다린다더니?"

"앗! 우진 오빠? 진짜로 왔어요?"

"가야겠다."

"아니에요! 어서 여기 앉아요!"

차우진이 탁자 위에 밀폐용기를 열었다.

정예지가 물었다.

"이게 뭐예요?"

"멸망식 팔보채."

그녀가 먼저 맛을 보았다.

"와. 이거 못생겼는데 맛있다. 어디서 샀어요?"

"오다가 주웠는데?"

"진짜요?"

"만들었다고요."

"와. 요리 대박 잘해."

조연 배우 진소영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저기, 안녕하세요?"

차우진이 물었다.

"소영 씨도 먹을래요?"

"네!"

정예지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나 먹으라고 만들어온 거 아니에요?"

"혼자 다 먹진 못할 텐데?"

"평소라면 가능한데, 오늘 그러면 촬영 망쳐요. 오늘은 배 나와서 망치고 내일은 팅팅 부어서 망치고."

"그럼?"

"아껴 먹다가 내일 밤에 먹으려고 했죠. 모래는 촬영이 없거든요."

"내일은 다른 거 만들어올 테니까 그냥 먹어요."

정예지가 신나서 주문했다

"앗! 그럼 내일은 맛있는데 살도 안 찌고 붓지도 않는 거로 해줘요."

"그런 건 현실엔 없어요."

"없구나. 있으면 진짜 좋을 텐데."

정예지는 차우진이 내일 또 음식을 만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사람들을 더 불러모았다.

"다들 맛이라도 봐요. 우진 오빠가 저를 위해서 직접 만든 건데, 진짜 맛있어요."

차우진은 밀폐용기는 정예지에게 넘기고 주변을 확인했다.

'스태프가 많으니 목격자도 많고, 촬영 일정도 바쁘니까 중간에 안 보여도 찾는 사람이 없을 텐데.'

문제는 거리다.

'스컬스 놈들이 보자고 한 곳이 조금 멀단 말이야.'

***

차우진은 이튿날도 촬영장에 방문했다. 이번에는 어제보다 조금 더 일찍 도착했다.

정예지가 호들갑을 떨었다.

"난 오늘 점심도 저녁도 다 안 먹고 기다렸어요."

"밥을 왜 안 먹을까?"

"그래야 야식을 많이 먹으니까?"

"고기 가져왔는데."

"소고기?"

"돼지고기?"

"설마 삼겹살은 아니죠?"

"오래 구워 부드럽게 만든 돼지고기 바비큐에 소스를 발랐는데, 채소랑 같이 먹어봐요."

차우진이 보냉 가방에서 커다란 밀폐용기를 꺼냈다. 접시도 꺼내서 고기를 조금 잘라주었다.

정예지가 잘 구워진 돼지고기를 한 조각 먹어보았다.

"웅?"

"맛은?"

그녀가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대박. 진짜 부드럽고 고소하고 기름지고 맛있어요. 캐나다 촬영 갔을 때 구워 먹은 것보다 더 맛있어요."

"기름진 맛이 장점이자 단점이라서, 원래는 맥주랑 같이 먹어야 하는데…."

"진짜 맥주를 부르는 맛이네요."

"무알콜 맥주로 때워봐요."

오늘은 정예지나 진소영만 온 게 아니다. 드라마 작가 유소진도 나타났다.

"어머. 맛있겠다."

차우진이 제안했다.

"많이 만들었으니까 작가님도 같이 드시죠."

"고마워요! 앗! 난 맥주 마셔도 되겠죠?"

"일하러 오신 거 아니신지?"

"대본은 다 완성됐고, 난 현장 참관 느낌이라 괜찮아요."

"맥주는 안 사 왔는데."

"소품으로 많이 있어요."

정예지가 손뼉을 쳤다.

"맞다! 오늘 맥주 마시는 장면. 그때 진짜 맥주 마신다고 했으니까 안주로 이거 쓰자고 해야겠다."

차우진은 술을 마실 생각에 신난 정예지를 보며 말했다.

"어…. 뭐, 그러던가."

차우진은 먹을 걸 맡겨놓고 그의 차로 가면서 말했다.

"난 차에서 쉴 겁니다. 오늘 일이 많아서 피곤하니까, 촬영 다 끝나면 불러요."

정예지가 얼른 말했다.

"네에."

그녀는 배우라서 남의 목소리를 따라 하는 것도 잘한다. 방금 목소리는 유소진이 저번에 식당에서 냈던 것과 똑같은 톤이었다.

"차 문 잠가놓고 잘 거니까 괜히 중간에 깨우지 말고."

"알았다고요."

차우진이 차로 걸어갔다. 그의 차는 틴팅을 진하게 해서 내부가 보이지 않았다. 그가 차의 문을 열었다가 닫았다.

차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차 밖에서 문을 닫으며 자세를 낮추었다.

그는 차를 촬영장 한쪽 공터에 세워두었다. 다른 차의 블랙박스에 차의 오른쪽이 찍히는 위치였다.

차우진이 몸을 숨긴 왼쪽에는 블랙박스나 CCTV가 없었다.

거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 촬영용 장비를 싣고 온 대형 트럭이 서 있었다.

그 트럭에 사람이 없다는 것도, 차량용 블랙박스는 트럭의 앞쪽만 찍는다는 것도 이미 확인했다.

그 트럭의 뒤로 가면 사람들의 시선을 완벽하게 피하면서 이 촬영 현장을 빠져나갈 수 있다.

그런데 그 트럭까지의 거리가 살짝 멀었다.

단거리 공간이동 스킬로 저기까지 가려면 체력이 많이 소모된다. 쿨타임도 길어진다.

차우진이 잠시 숨을 고른 후에 스킬을 사용했다. 그의 몸이 차 옆에서 사라졌다가 트럭 뒤쪽에 나타났다.

"배가 또 들어가겠네."

***

백희선이 알려준 장소는 오래전에 폐업한 공장 시설이었다. 기계나 쓸만한 집기는 이미 처분한 상태라서 공장은 벽과 지붕만 남아있었다.

바닥에는 쓰레기만 굴러다녔다.

벽도 단단한 콘크리트가 아니라 조립식 벽체였다.

차우진이 폐공장에 도착했다.

입구에 조직원 두 명이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차우진의 몸을 간단히 수색했다.

그런 후에 차우진과 조직원들이 폐공장으로 들어갔다.

몸수색을 맡은 부하가 보고했다.

"총은 없습니다."

드미트리가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했다.

"후우. 나를 보자고 했다고?"

폐공장 내부는 텅텅 비어 있었다. 탁자나 의자도 없었다.

차우진이 드미트리의 맞은편에 서서 물었다.

"레드 크리스털을 만든 분인가?"

"한국의 생산 기지는 내 지배하에 있지."

"기존의 생산 기지는 날아갔다던데."

"새로 만드는 생산 기지도 내 밑에 있게 될 거야."

"고위층인가?"

"당신이 뭘 원하든 한국 거래를 결정할 수 있을 만큼은 되지."

"좋군."

드미트리가 히죽 웃었다.

"거래하기 전에, 내가 먼저 확인할 게 있는데 말이야. 넌 누구지?"

"그게 중요한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과 거래할 수는 없으니까."

차우진이 피식 웃었다.

"나도 확인할 게 있는데 말이야."

"음?"

"당신네 보스가 우리 거래를 보장해줬으면 좋겠는데."

"보스를 만나게 해달라?"

"가능한가?"

드미트리의 입꼬리가 조금 움직였다.

"조건이 맞으면?"

"들어볼까?"

"라이프레인 제약의 주식 계좌를 가지고 있다면서?"

"물론이지. 이미 두 개는 넘겨줬고, 두 개는 지금 가지고 있지."

드미트리의 웃음소리가 커졌다.

"흐흐흐. 생각보다 멍청하군."

"무슨 뜻이지?"

"그건 안전한 곳에 숨겨두고 왔어야지. 그랬으면 더 살 수 있을지도 몰랐는데."

"나와 거래하러 온 게 아닌가?"

"거래할 생각이 없던 건 아니야. 조건만 맞으면 하려고 했지. 그런데."

드미트리가 차우진을 가리켰다.

"네가 두목을 만나야겠다고 한 게 문제야. 나를 만나고 다시 두목까지 찾는 건 아무래도 수상하지?"

"음…. 역시 그것까지는 어려웠나?"

"넌 정체가 뭐지? 한국 경찰인가? 아니면 인터폴? DEA?"

"내가 경찰이면 라이프레인 제약 주식을 그렇게 많이 사들여서 이런 자리를 마련하지는 않겠지. 경찰 예산이 썩어나진 않으니까."

드미트리가 소리 내어 웃었다.

"크흐흐흐. 어차피 다 말하게 될 거다. 손가락이 하나씩 잘려나가다 보면 다 털어놓게 되어 있지."

차우진이 주변을 쓱 훑어보며 물었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나?"

"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러려고 했지. 넌 함정에 빠진 거야."

지금 이 낡은 폐공장에는 스컬스 조직원 여덟 명이 있다. 드미트리가 엄지를 아래로 내렸다. 차우진의 뒤에 서 있던 조직원이 권총을 꺼냈다.

차우진이 말했다.

"글자 하나만 바꾸면 우리 의견이 같구나."

"뭐?"

"너희들이 함정에 빠진 거야."

조직원이 차우진의 뒤통수를 향해 권총을 겨누었다.

차우진이 팽이처럼 회전하며 뒤를 겨눈 놈의 손목을 꺾었다. 동시에 적의 목을 후려쳤다.

"켁!"

차우진이 적의 손에서 권총을 잡아채자마자 총구 방향을 돌려 적의 가슴을 향해 사격했다. 뒤로 비틀거리던 놈이 총탄을 맞고 나자빠졌다.

"커억!"

다른 조직원들이 깜짝 놀라며 권총을 뽑았다.

차우진이 시간 가속 스킬을 사용하며 몸을 돌렸다. 먼저 제압할 수 있는 놈이 아니라, 총을 먼저 뽑는 놈부터 노렸다.

'문 쪽에 하나.'

차우진이 그쪽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폐공장 입구 쪽에 있던 놈이 권총을 뽑다가 총탄에 맞고 뒤로 나자빠졌다.

"컥!"

다음 타깃은 왼쪽에 있었다. 차우진이 돌던 방향으로 한 바퀴 회전하면서 사격했다. 회전 속도가 너무 빨라서, 확실히 잡기 위해 두 발을 발사했다.

한 발은 권총을 뽑은 놈의 몸통에 꽂혔다. 다른 한 발은 어깨에 박혔다.

"끄악!"

순식간에 여덟 중에 셋을 잡았다. 네 번째 놈은 드미트리 쪽에 있다. 이대로 회전하면서 쏘면 늦는다.

차우진이 바닥을 박찼다. 그의 몸이 공중에서 떠올랐다. 바닥을 박찰 때 역회전도 걸었다.

차우진이 공중에서 사격했다.

총탄 두 발이 적의 가슴에 퍽퍽 꽂혔다.

"커컥!"

차우진은 시간 가속 스킬을 써서 순식간에 넷을 잡았다.

아직 넷이 남았다. 스킬의 유효 시간이 끝났다.

드미트리와 조직원들의 권총 총구 네 개가 공중으로 점프한 차우진을 조준했다.

드미트리가 소리를 질렀다.

"갈겨!"

조직원들이 거의 동시에 방아쇠를 당겼다.

차우진이 공중에서 단거리 공간이동 스킬을 사용했다.

차우진이 사라졌다.

뒤늦게 발사된 총탄들이 허공을 가르고 날아가 창고 벽과 천장을 뚫었다.

조직원들은 기겁했다.

"헉!"

"뭐, 뭐야! 분명히 눈앞에 있었는데!"

"고, 공중에서 갑자기 사라졌어?"

128. 점프 II

차우진이 공중에서 갑자기 사라졌다. 차우진을 향해 사격했던 놈들은 기겁했다.

사라진 차우진이 드미트리의 바로 뒤에서 나타났다.

맞은 편에 있던 놈이 제일 먼저 차우진을 발견했다. 거리는 제일 멀었다.

적의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헉!"

차우진은 공간이동 스킬을 쓰자마자 적을 향해 사격했다. 총탄이 제일 멀리 있는 놈의 몸통에 박혔다.

"켁!"

적이 고꾸라졌다.

드미트리는 갑자기 뒤에서 들린 총소리에 깜짝 놀랐다. 다른 놈들도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 번째 놈은 차우진이 뭘 어떻게 한 건지 이해하진 못했지만, 뭘 해야 하는지는 알았다. 그놈이 허공을 향하던 총구를 차우진 쪽으로 돌렸다.

늦었다.

차우진의 공격 순서는 먼저 총을 쏘려는 놈부터다. 총탄이 차우진을 쏘려던 놈의 가슴에 박혔다.

"케엑!"

적이 옆으로 돌면서 자빠졌다. 방아쇠에 걸려 있던 손가락 때문에 총탄이 옆으로 발사돼 쇠로 된 기둥을 때렸다.

이제 서 있는 놈은 드미트리와 부하 한 놈뿐이다.

두 놈이 총에 맞는 동안 마지막 부하의 총구가 차우진을 조준했다.

그런데 차우진의 앞에는 드미트리가 서 있었다. 드미트리는 뒤쪽으로 몸을 돌리던 중이다.

평소라면 이런 때는 드미트리가 맞을까 봐 총을 쏘지 못해야 한다.

하지만 적은 이미 공포에 질린 상태였다. 그런 걸 고려할 여유가 없었다.

"으아아!"

적이 방아쇠를 연달아 당겼다.

차우진의 권총은 탄약이 떨어졌다. 장전 슬라이드가 뒤로 젖혀진 채로 고정됐다.

드미트리는 그걸 보자마자 차우진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이, 이 새끼! 너 이 새끼 뭐야! 어떻게 허공에서 갑자기 사라져?"

"신기하지?"

"어떻게 갑자기 내 뒤에 나타나! 너 정체가 뭐야!"

"네가 생각하는 그거."

드미트리의 총구가 덜덜 떨렸다.

"악마?"

"잘 아네. 지은 죄가 너무 많이 생각나지?"

드미트리가 악을 썼다.

"진짜 뭘 어떻게 한 거냐! 어떻게 눈앞에서 사라졌느냔 말이다! 마술사냐! 눈속임이냐!"

"악마라니까. 어떤 마술 공연도 눈앞에서 사라질 수는 없다는 거, 너도 알잖아."

차우진이 드미트리의 손을 보며 말했다.

"아니까 손이 그렇게 떨리는 거잖아."

"왜, 왜 악마가 날…."

"너는 내 목적이 아니다."

"그러면?"

"스컬스와 레드 크리스털."

"뭐?"

차우진이 말했다.

"두목의 위치. 개발자의 이름과 현재 위치. 그 둘을 말해. 그러면 지옥 불구덩이에 떨어지는 건 면하게 해주지."

드미트리는 멈칫했다.

"자, 잠깐. 악마라며? 악마가 그걸 왜 몰라? 다 알 수 있는 거 아니야?"

"아. 그런가?"

드미트리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이, 이 새끼! 역시 사람이었어!"

사람이라면 총에 맞으면 죽는다. 그게 드미트리의 상식이다.

드미트리가 차우진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죽어!"

차우진이 그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단거리 공간이동 스킬이 다시 사용됐다.

스킬 재사용 시간은 아직 더 필요하다. 이렇게 짧은 간격으로 그 스킬을 사용하는 건 어렵다. 쿨타임을 채우려면 대화를 좀 더 끌었어야 했다.

그렇다고 스킬을 사용할 수 없는 건 아니다. 이 정도면 연속 재사용은 아니라서, 체력과 정신력을 크게 소모하면 한 번 더 이동할 수 있다.

총탄은 허공을 가르고 날아가 폐공장의 조립식 벽에 박혔다.

"또, 또 사라졌어. 어디로…."

차우진이 드미트리의 등 뒤에서 말했다.

"나를 찾나?"

"히익!"

드미트리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돌아섰다. 총구는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했다.

늦었다.

차우진이 뒤로 돌아서는 드미트리의 손목을 꺾으며 권총을 빼앗았다.

그런 후에 발을 내질렀다. 드미트리의 배에 체중을 실은 발차기가 깊게 박혔다.

드미트리가 뒤로 날아가 바닥에 처박혔다.

"케엑!"

차우진이 자빠진 드미트리를 향해 말했다.

"너 아직 대답을 안 했다."

"뭐, 뭘…."

"스컬스의 보스와 레드 크리스털 개발자."

"그, 그건 나도 모르…."

차우진이 방금 빼앗은 권총으로 드미트리의 다리를 쏘았다. 총탄이 다리를 꿰뚫었다.

"으아악!"

"네 부하들은 아직 다 죽은 건 아니다. 살아있는 놈이 있으니, 대답할 놈도 있겠지."

"너, 너 도대체 정체가 뭔데, 어떻게…."

"악마라니까."

"사, 사람이잖아!"

"그렇지. 사람이지. 불길한 힘을 다루는 사람."

"그, 그게 무슨…."

"너에게 저주를 걸 수 있는 마법사다."

"히익!"

"두목은 어디 있지?"

드미트리는 겁에 질렸다. 죽고 싶지도 않았다. 저주에 걸리는 것도 무서웠다.

이미 차우진은 두 번이나 그의 눈앞에서 사라졌다가 등 뒤에서 나타났다.

한 번은 착각이나 눈속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두 번은 아니다.

게다가 두 번째는 드미트리가 바로 앞에서 권총으로 정확히 조준하고 두 눈으로 노려볼 때 사라졌다.

겁에 질린 드미트리의 입이 열렸다.

"허, 헝가리에…."

세르게이는 스컬스가 체코에 있다고 말했다.

차우진이 방아쇠를 당겼다. 총탄이 드미트리의 어깨를 뚫었다.

"으아악!"

"온몸이 썩어들어가는 저주에 걸리고 싶나?"

"히익! 아, 아니야! 그것만은 제발!"

"스컬스의 두목은 어디에 있지?"

"체코의 본부에…."

"체코 어디?"

"프라하."

거기까지는 지난번에 세르게이가 털어놓았다. 더 정확한 위치가 필요했다.

차우진이 말했다.

"다른 놈을 깨워서 물어봤을 때 위치가 다르면, 네가 그 대가를 치러야지?"

"프, 프라하 맞아!"

"안다. 네 옆을 맴도는 저주의 망령이 이번에는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하는군."

"히이익!"

"정확한 주소."

드미트리는 스컬스 본거지의 정확한 주소도 말해주었다.

차우진이 물었다.

"러시아 사람이 어떻게 체코에서 조직을 만들었지?"

"체코로 밀입국해서, 신분을 세탁했다."

차우진도 그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체코에 있는 러시아 출신 마약조직.'

이제 진짜 중요한 질문을 할 차례다.

레드 크리스털은 멸망급 마약인 블러드 크리스털의 핵심 원료로 사용된다. 그걸 누가 개발했는지 알아내야 한다. 이 질문을 위해 드미트리가 공포에 질리게 만들었다.

"레드 크리스털을 개발한 사람은?"

드미트리도 모른다. 그가 다급히 대답했다.

"두, 두목이 알아! 박사는 두목이 직접 관리한단 말이다!"

"박사?"

"그냥 그렇게 부른다. 레드 크리스털을 개발한 사람이다."

"백희선과 손을 잡은 이유는?"

"박사가 약을 개발했지만, 대량생산 기술이 없어서…."

"백희선은 어떻게 아는 사이지?"

"우리가 러시아에 있을 때, 백희선의 청부를 처리해준 인연이 있다."

그런 관계라는 건 예상했다. 드미트리의 자백은 그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차우진이 생각했다.

'역시 프라하에 들러야겠어.'

드미트리는 차우진이 잠시 생각에 잠긴 걸 보며 눈알을 굴렸다.

'사실대로 말했으니까 살려줄까? 아니야. 그럴 리가 없지.'

드미트리도 이런 때는 상대를 살려두지 않는다.

그의 손이 다리 쪽으로 향했다. 거기에 22구경 2연발 소형 권총이 숨겨져 있었다. 22구경이라 화력은 약하지만 그래도 총이다. 근거리에서 맞으면 크게 다치고 급소에 맞으면 죽는다.

차우진은 여전히 생각 중이다. 드미트리가 오른손으로 권총을 슬그머니 잡았다가 재빨리 뽑았다.

"죽어라! 저주술사!"

차우진이 그 손을 콱 밟았다.

"으악!"

"너를 보고 있지 않다고 해서 네가 뭘 하는지 모르는 건 아니다."

"사, 살려줘."

차우진이 드미트리를 걷어찼다. 드미트리가 옆으로 나가떨어졌다가 두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그쪽에 부하가 쓰던 권총이 떨어져 있었다.

드미트리가 허겁지겁 권총을 잡았다.

차우진이 방아쇠를 당겼다. 총탄이 드미트리의 심장을 관통했다.

"컥!"

드미트리가 엎어질 때 손에 쥔 권총의 방아쇠가 당겨졌다. 총탄이 부하의 몸통에 박혔다.

"교차 검증을 못 하는 게 좀 아쉽지만."

차우진이 권총을 옆으로 뻗으며 방아쇠를 연달아 당겼다. 총탄 세 발이 세 놈에게 꽂혔다.

이제 이곳에 살아있는 스컬스 조직원은 없다.

차우진이 안주머니에서 증권 통장 두 개를 꺼냈다. 통장은 비닐 지퍼백에 들어 있었다.

그가 통장을 꺼내 드미트리의 주머니에 넣었다.

"누가 총소리를 듣고 신고해줬으면 좋겠는데."

***

아무리 폐공장이라 해도 총소리가 여러 번 들리면 누군가는 신고하기 마련이다.

근처에 있던 경찰이 신고를 받고 현장에 도착했다.

"헉! 시, 시체?"

"김 경사님. 저, 전쟁이 터졌나 봅니다!"

"뭐야? 다 무장공비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지원 요청할까요?"

"아직도 안 했냐? 빨리, 아니다. 내가 할게! 넌 여기 지켜!"

"저 혼자요?"

"어…. 같이 차로 갈래?"

"예!"

현장에 관할 경찰서 형사들이 도착했다.

구급차도 왔지만 할 일이 없었다. 생존자가 없었다.

형사가 팀장에게 보고했다.

"전부 사망했습니다."

팀장이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젠장. 이게 무슨 난리냐. 이 사람들 다 누구야?"

"그게…. 한국인이 아닙니다."

"어?"

"근처에 주차된 차에서 체코 국적 여권이 발견됐습니다."

"얼굴은 한국인인데? 아니, 최소한 동아시아계 동양인인데?"

"저도 어떻게 된 건지…."

***

정예지는 조연이라서 오늘 촬영 분량은 많지 않다.

촬영은 주연배우 위주로 진행됐다. 정예지는 그 스케줄에 맞춰 필요할 때마다 촬영했다. 그러다 보니 그녀의 촬영이 끝난 건 밤 11시쯤 됐을 때였다.

아직 오늘 촬영이 완전히 끝난 건 아니다. 그녀는 끝났지만 다른 배우들의 촬영이 몇 신 더 남아있었다.

그녀가 촬영 현장을 벗어나 차우진의 차로 걸어갔다.

그녀가 차 문을 톡톡 두드렸다.

"우진 오빠? 나 촬영 끝났는데."

대답이 없었다. 그녀가 차 손잡이를 당겨보았다. 잠겨 있었다.

"뭐지? 문 닫아놓고 지금까지 자나?"

그녀가 차우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바로 뒤에서 벨소리가 들렸다.

"어머! 깜짝이야!"

그녀가 뒤로 돌아섰다. 차우진이 걸어오고 있었다.

"전화를 걸어놓고 놀라긴."

"차 안에서 소리가 날 줄 알았죠. 어디 갔던 거예요?"

차우진이 봉투를 들어서 보여주었다.

"편의점에 가서 간식 좀 샀습니다. 고생했으니까 달달한 거라도 사주려고요."

그녀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어머. 나한테요?"

"당연히."

"근데 왜 봉투가 묵직해요?"

"넉넉히 사서?"

"솔직히 말해봐요. 누구 거 샀어요?"

"아까 도시락 먹은 사람들?"

"쳇. 유소진 작가님이랑 진소영 씨구나."

그 사람들에게도 나눠줘야 알리바이를 더 확실히 만들 수 있다.

정예지가 투덜대며 봉지 안쪽을 확인했다. 일반 아이스크림 사이에 5천 원짜리 프리미엄 아이스크림이 하나 있었다.

"응? 이건요? 우진 오빠가 먹으려고 산 거예요? 뭐예요? 혼자만 좋은 거 먹고."

"그건 예지 씨 주려고 산 건데."

"네?"

"전에 그 아이스크림 좋아한다고 한 게 생각나서. 편의점에 딱 하나밖에 없더라고요."

"어머어. 내 것만 특별히 이걸로 샀구나!"

그녀가 아이스크림을 꺼내며 생글생글 웃었다.

"맛있겠다."

"촬영 중에는 그거 다 먹으면 안 되지 않나? 나눠 먹…."

"내 거예요! 아무도 안 나눠줄 거야! 내가 다 먹을 거야!"

"어…. 그 아이스크림 진짜 좋아하는구나."

***

백희선이 호텔 객실에서 TV를 켰다.

'증권 계좌만 내 손에 들어오면 그놈은 죽어도 상관없어. 지금 내 알리바이는 이 호텔에 있으니까.'

나인세븐 엔터 출신 김상훈은 호텔 욕실에서 샤워하는 중이다.

'만약 내가 의심받아서 이 알리바이를 써야 하는 상황이 오면, 젊은 남자와 놀았다는 걸 숨기려고 그동안 말 안 했다고 하면 돼.'

TV에서 뉴스가 나왔다. 그런데 뉴스의 배경이 그녀가 아는 곳이다.

"어?"

그녀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저기는…."

드미트리가 차우진과 접선하는 장소가 TV에 나왔다.

그녀는 물류창고를 지을 곳을 찾다가 저 지역을 검토했던 적이 있다. 그때 저곳에 폐공장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 일은 검토만 하고 진행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추적당할 위험도 없었다.

"왜 저기가 뉴스에…."

기자가 TV 화면 속에서 상황을 설명했다.

"여덟 명 모두 총상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여덟?"

드미트리와 그 부하들의 숫자가 여덟이다.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총으로 무장한 여덟이… 다 죽었어?"

129. 차명 계좌

망해버린 나인세븐 엔터 출신 김상훈이 욕실에서 나오며 물었다.

"누님. 저는 준비 다 됐습니다. 안 씻으십니까? 저는 그냥 해도 괜찮은데, 대신에 약 하나만…."

라이프레인 제약 이사 백희선이 소리를 빽 질렀다.

"야 이 새끼야!"

"네?"

"네 뒤에 있는 그 새끼! 정체가 뭐야!"

"그, 그게 무슨…."

백희선이 TV를 가리켰다.

"저거 안 보여? 저거 그 새끼가 한 짓이라고!"

김상훈이 TV를 돌아보았다.

체코 국적의 외국인 여덟 명이 총에 맞아 죽었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김상훈은 기겁했다.

"히이익!"

"너 그 새끼 알지? 누구야!"

"모, 몰라요."

"왜 몰라!"

김상훈도 겁을 집어먹고 소리를 질렀다.

"갑자기 나타나서 일만 시키고 사라진단 말입니다!"

"누군지 뒷조사한다고 했잖아!"

"그거야 누님한테 약 좀 받아먹을 수 있을까 해서 뻥 친 거…."

"이 사기꾼 새끼야! 그럼 지금부터라도 빨리 조사해! 빨리 저 새끼가 누구인지 알아내라고!"

"어, 어떻게 그럽니까?"

"왜? 의리 때문이야?"

"그게 아니라, 저렇게 무서운 사람을…."

김상훈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뒷조사하다 걸리면 저도 저렇게 죽을 텐데요."

"너 약 필요 없어?"

"필요하지만, 그래도 저는 목숨이 더 소중합니다."

"꺼져! 이 새끼야! 나가!"

****

유소진은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물었다.

"그런데 정예지 씨의 아이스크림만 우리 거랑 다르네요?"

정예지는 아이스크림의 상표가 잘 보이게 탁자에 올려놓고 먹으면서 말했다.

"편의점에 갔더니 이건 하나밖에 없었대요. 제가 이거 좋아하는 거 알고 우진 오빠가 일부러 사온 거니까 어쩔 수 없어요."

"우리 드라마 아직 안 끝났는데 그거 계속 드셔도 되려나?"

"남은 건 얼려뒀다가 나중에 다 먹으려고요."

"여기는 냉동칸 있는 냉장고가 없을 텐데?"

"로드 매니저한테 드라이아이스랑 보냉백 사오라고 시켰어요."

"로드 매니저가 그런 거 하는 사람인가요?"

"그거 사오면 나 집에 데려다줄 필요 없이 바로 퇴근하라고 했더니 꼭 사오고 싶다던데요?"

"그럼 정예지 씨는 집에 어떻게 가게요?"

"우진 오빠가 차 가져왔잖아요."

차우진이 옆에서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물었다.

"내 차?"

"오빠 차 타고 가야죠. 난 오늘은 차가 없으니까."

유소진이 말했다.

"나도 차 없는데 잘됐다. 나도 저 차 얻어타고 가야지."

정예지는 당황했다. 둘이서 오붓하게 가려고 했는데 유소진이 끼어들었다.

"네? 작가님은 차가 없으면 여기에 어떻게 오셨어요?"

"택시 타고요."

"그럼 갈 때도 택시…."

"예지 씨도 택시 타게요?"

"저 차 같이 타고 가죠."

차우진이 물었다.

"왜 내 차인데 두 사람이 결정하지?"

그녀들은 그 질문은 들은 체도 안 했다.

차우진도 기사 역할을 거절할 생각은 없다. 두 사람을 집에 데려다주면 알리바이가 더 단단해진다.

"뭐, 그럽시다."

신인 배우 진소영은 두 사람 사이에서 눈치만 보면서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누구 하나 편들었다간 나한테 폭탄 떨어지겠다. 난 아이스크림이나 먹어야지. 근데 예지 선배 아이스크림 나도 먹고 싶다.'

***

외국인 여덟 명이 경기도에서 총에 맞아 죽었다.

사건은 결국 관할 경찰서가 아니라 광역수사대가 맡았다.

팀장이 물었다.

"신원확인은 됐어?"

"체코 쪽에서 공식 답변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만."

"비공식은?"

"체코에 있는 러시아계 범죄조직의 조직원으로 보인답니다."

팀장이 혀를 찼다.

"쯧. 단순한 관광객은 아닐 줄 알았지. 예상대로네."

"그렇죠. 사망자들의 손에 권총을 발사한 흔적이 대놓고 남아있으니까요. 권총을 쥔 채로 죽은 놈도 한둘이 아닙니다."

팀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왜 다 동아시아 사람처럼 생겼어?"

"러시아에는 동양인도 삽니다."

"그래?"

"땅이 워낙 넓잖습니까. 옛날에 강제로 이주당한 사람들도 있고요."

"아. 하긴."

팀장이 다른 팀원에게 물었다.

"현장에 남은 다른 단서는? 몇 놈하고 싸운 거래?"

"알 수 없다던데요?"

"응?"

"족적이 다 지워졌답니다. 지운 자리가 워낙 많습니다."

"그래도 조사하면 뭔가 나오지 않아?"

"나오겠죠. 계속 조사 중이랍니다."

"한 명일 확률은 있대? 그러니까 그 빌런 킬러 말이야."

"모르겠다던데요. 한 명이라고 보기엔 말이 안 되는 흔적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온다고…."

"젠장. 다른 건? 두목이 가지고 있던 통장 있잖아."

"그건 증권 통장입니다만, 아무래도 대포 통장 같습니다."

"확인했어?"

"예. 명의자는 그 계좌에 있는 주식을 살 돈이 없습니다."

"두 개 다?"

"예. 두 개 다요."

팀장이 지시했다.

"그 대포 통장을 누가 어디서 만들었는지 찾아. 지금 단서가 그것밖에 없다."

그 대포 통장은 서해안 사건 때 사망한 상칠파 두목 천상칠이 업자를 통해 만들었다.

"샅샅이 뒤지다 보면 걸리는 대포 통장 업자가 한 놈은 있겠지."

"알겠습니다."

회의가 좀 더 진행된 후에 팀장이 말했다.

"그 주식도 조사해야지."

"라이프레인 제약 주식 말입니까?"

"그래. 왜 체코 조직원들이 한국 제약회사의 주식을 가지고 있었을까? 이유가 있지 않겠어?"

"라이프레인은 중견기업인데, 어떻게 접근하시려고…."

"수색영장부터 치는 건 좀 그렇지?"

"그 회사의 어디에 영장을 쳐야 하는지조차 모르는데요."

"그럼 일단 경영진을 찾아가서 정중히 협조를 요청하자고."

광수대 팀장이 팀원들에게 지시했다.

"상대는 중견기업이다. 어설프게 건드리면 나한테 전화가 쏟아지니까, 정보 안 새어나가게 신경 써라."

***

차우진이 말했다.

"통장 두 개를 남겨놨으니까, 경찰이 그걸 보면 라이프레인 제약을 조사하겠지."

그러라고 증권 계좌 정보가 사이에 끼워진 통장을 그곳에 남겨뒀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라이프레인에서는 당연히 수사를 막으려고 할 테지. 고춧가루를 좀 뿌려야겠다."

***

차우진이 도인선 기자를 만났다.

"그 현장에서 차명계좌 통장이 발견됐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도인선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네? 우진 씨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수사팀에 도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아. 그쪽으로 정보망이 있으시지."

차우진이 슬쩍 제안했다.

"찔러보면 좋은 기삿거리가 나올지도?"

"알았어요. 내가 직접 찔러볼게요."

"정보원이 나라는 건 비밀로 해요."

"당연하죠. 내가 정보원 보호를 얼마나 확실히 하는데요."

***

광역수사대가 기자들을 모아놓고 드미트리 사건을 브리핑했다. 도인선은 그곳에서 남들이 질문하는 걸 듣기만 했다.

기자회견이 끝난 후에 도인선이 팀장에게 접근했다.

"팀장님.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브리핑할 때 질문하시지. 난 바빠서 이만."

"현장에서 통장이 발견됐다면서요?"

팀장이 휙 돌아섰다.

"그건 어디서 들었습니까?"

"어머. 놀라시는 거 보니까 진짜인가 보다."

팀장은 그 정보가 광수대에서 새어나갔다고 판단했다.

"환장하겠네. 이 새끼들은 입조심 하라니까 또…."

"이미 소문이 돌고 있는데 말해주시죠?"

"아니, 증권 통장이 꼭 주식과 연결되는 건 아니잖습니까?"

"어? 증권 통장이었어요?"

"응?"

"차명계좌 통장인 줄만 알았는데요."

팀장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하아. 미치겠네. 내가 내 발등을 찍었어."

도인선이 신나서 물었다.

"그 계좌에는 어떤 회사 주식이 들어 있어요?"

"그건 공개할 수 없습니다."

"잠깐만요. 내가 이상한 글을 어디서 봤는데."

도인선이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을 검색했다.

"아. 여기 있다. 오늘 라이프레인 제약에 형사들이 찾아왔다는 목격담이 있던데…. 이 회사 주식이에요?"

팀장이 다시 한숨을 쉬며 물었다.

"이 정도면 다 알고 오셨네?"

"몰랐다니까요? 근데 이대로 기사 내도 되죠?"

"난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

도인선이 기사를 냈다. 현장에서 증권 계좌와 연결된 통장이 발견됐다는 내용이었다.

[수사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그 계좌에서 중견 제약회사인 A사의 주식이 대량으로 발견됐다고 합니다.]

회사 이름은 적지 않았다. 라이프레인 제약이라는 건 알지만 그렇게 판단한 근거로 내세울 게 좀 약했다.

확실한 증거 없이 회사 이름을 걸었다가 역풍을 맞으면, 소리언덕처럼 작은 곳에서는 뒷감당이 쉽지는 않다.

도인선이 아쉬워했다.

"L사라고 쓰고 싶었어요. 그 정도는 해도 되잖아요. 그런데 편집장님이 기사에 L을 박고 싶으면 자기를 밟고 가라고 해서 할 수 없이 A사라고 했어요."

차우진이 말했다.

"라이프레인 제약이 맞을 겁니다."

"역시 그렇죠?"

"그 체코 조직은 백희선이 관계가 있을 테고요."

"굳이 백희선인 이유가 있어요? 경영진에는 백재원과 백재우도 있잖아요."

"이번에 죽은 놈들은 국적은 체코이지만 러시아계 범죄조직입니다. 백희선은 러시아 기술을 가져다 썼죠."

그 이야기는 도인선도 알고 있다.

"그쵸. 우리가 백희선을 인터뷰했을 때 그걸 물어보니까 말을 돌렸잖아요. 맞네. 어? 그럼 혹시 레드 크리스털도…."

"지난번에 죽은 세르게이도 러시아계인데 체코 국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발견된 장비는 서해안 사건 때 발견된 것과 비슷한 종류입니다."

"우진 씨가 전에 백희선은 서해안 사건의 장비와 관련이 있다고 했으니까…. 역시 그 계좌에는 라이프레인 제약의 주식이 있겠네요."

***

차우진이 SL 제약 사장 성기호와 성혜리를 만났다.

"차 이사. 이번 주말에 바다에 갈까? 우리 한동안 바다낚시 안 했잖아."

"그날 이후로는 바다에 발 끊으신 거 아니었습니까?"

"아니, 그게 잘 안 되더라고. 차 이사가 가면 혜리도 같이 간다고 하고."

성혜리가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꼭 간다고 한 건 아니고요."

"그럼 넌 빠질 거야?"

"아뇨. 가야죠."

"회의부터 하시죠."

"어? 그럴까? 무슨 일인데 갑자기 불렀어?"

회의실에는 그들 세 명만 있었다. 차우진의 직속 부서인 SL 제약 정보분석팀도 부르지 않았다.

차우진이 화면에 뉴스를 띄웠다.

"최근에 경기도 폐공장에서 체코 국적의 조직원 여덟 명이 죽은 채로 발견됐습니다."

성혜리가 손을 들었다.

"저도 저거 알아요. 총격전이 벌어졌다면서요? 외국 조직원들이 국내에서 총을 쏘면서 싸웠다던데요."

"그렇게 알려졌군요. 더 아는 거 있습니까?"

"아뇨. 언론사에 있는 친구한테 그렇게 들었는데…."

성기호가 물었다.

"차 이사. 갑자기 그 뉴스는 왜 보여주는 거야?"

"백희선이 관리하는 사업부들을 칠 때가 왔거든요."

"어?"

차우진이 도인선 기자의 기사를 화면에 띄웠다.

"사건 현장에서 A사의 주식이 들어 있는 차명계좌가 발견됐습니다. 저 A사가 라이프레인 제약입니다."

"진짜야?"

"저 기자와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입니다. 기자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분석팀에 교차 검증을 지시했습니다만, 결론은 같을 겁니다."

"기사까지 나갔으니까 경찰이 백희선을 수사하겠네?"

"외부의 조사만이 아니라, 내부에서도 견제가 들어올 겁니다. 백희선의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거지요."

"하긴. 라이프레인은 경영권을 놓고 싸우는 중이니까 내부에서도 공격하겠지."

"백희선은 이제 우리를 상대할 여유가 없습니다. 이럴 때 밀어붙여야 합니다."

성기호가 박수를 쳤다.

"역시 차 이사. 드디어 반격할 때가 왔어! 지금 바다낚시를 갈 때가 아니었어!"

"낚시는 전투에서 이기고 나서 가시죠."

"좋지!"

성혜리가 신나서 말했다.

"그때는 저도 같이 가요."

"바다는 이제 무서운 거 아니었습니까?"

"차 이사님이랑 같이 가면 안 무서워요."

세 사람은 SL 제약이 라이프레인 제약의 어떤 곳을 어떻게 치고 들어갈지 의논했다.

차우진은 제약업계의 전문가는 아니다. 그렇지만 백희선이 어떤 사람인지는 안다. 그래서 조언할 게 많았다.

회의를 마친 후에 성기호는 신나서 회의실을 나갔다.

"내가 본때를 보여주겠어! 감히 우리 아들을 이용해?"

차우진과 성혜리만 회의실에 남았다.

차우진이 물었다.

"동생은?"

성혜리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에휴. 군대로 복귀해서 조사받는 중이이에요."

"고생이 많겠네요."

"그래도 그놈들한테 이용당하고 협박당한 거라서, 교도소에 가진 않을 거래요."

"그래도 예전 같지는 않을 겁니다."

"의무대에서 나와서 다른 부대로 옮겨야 할 거래요. 제 생각에 걔는 군대에서 좀 많이 굴러야 돼요. 훈련이 엄청 힘든 특수부대 같은 데로 가서요."

"그런 부대는 아무나 안 받을 텐데?"

"앗. 차 이사님도 그런 부대를 아시죠? 역시 특수부대 출신인가?"

"취사병 출신이라니까요. 그런 부대를 나온 형을 알긴 합니다."

130. DNA

차우진이 라이프레인 제약 연구소의 연구원 손하은을 만났다.

그녀는 연구소 내부에서 정보를 전해주는 임무를 맡았다. 백희선의 심리 상태와 퇴근 시간은 손하은 덕분에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차우진이 물었다.

"상황은 어떻습니까?"

손하은이 동네 편의점 앞에서 캔맥주를 마시며 대답했다.

"거미가, 그러니까 백희선 이사가 성질을 엄청나게 부려요. 형사들도 회사에 찾아왔었어요."

"회사 분위기 개판이겠네."

"그쵸."

차우진이 제안했다.

"하은 씨도 슬슬 이직 준비를 해요."

"이직이라…."

"라이프레인 제약이 이번 일로 망하진 않겠지만, 하은 씨가 거기 계속 다닐 이유는 없으니까."

손하은은 백희선이 그녀를 어떻게 이용했는지 알게 된 후부터 회사를 그만둘 생각이었다.

"그러려면 엄마가 퇴원하셔야 하고, 그러려면 백희선이 먼저 망해야 하잖아요."

"그날이 얼마 안 남았습니다. 그러니까 슬슬 준비해야지요."

"우리 엄마는 퇴원하면…."

"잘 치료받으시면 금방 건강해지실 겁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표 써놓고 다녀야겠어요. 어느 회사로 옮겨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손하은 씨 실력이면 갈 곳은 많을 겁니다."

그녀가 캔맥주를 꿀꺽꿀꺽 마셨다.

"또 이용당하는 게 무서워서 그러죠. 옮긴 곳에서도 나중에 후회할 약을 만들게 하면 어떻게 해요?"

"음…. 그러지 않을 믿을만한 회사가 필요하겠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