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현대의 던전 공략에는 크나큰 단점이 있다.
너무 안전하다는 것이다.
게이트에 대한 공략법과 각종 아이템, 전투에 대한 개념 등이 정립된 지금 게이트 공략은 지극히 안전해졌다.
심지어 S급 게이트조차도 공략 성공률은 대단히 높다.
'안전한 게 나쁜 건 아니지만.'
마족들의 침공을 앞둔 세계에서는 오히려 독이 된다.
목숨을 걸고 전장을 누벼 온 영웅과 안전한 장소에서 전투를 관망하는 간부의 경험이 같을 리가 없다.
특히 신태양과 같은 천재에게는 더더욱 그 차이가 실감될 수밖에 없다.
'강해지기 위한 적절한 환경이라 이건가······.'
온실 속에서 애지중지 길러지던 화초.
미래의 신태양은 과거의 자신을 그리 평가했다. 더 강해지기 위해선 사선을 넘나들어야한다고 강력히 이야기했다.
결과적으로 그 효과는 대단했다.
『 타재간파 : 대상의 능력을 꿰뚫어 봅니다. 』
『 대상 '신태양'의 현재 레벨은 118입니다. 』
두번째 재능을 개화한 대상에 한해서 레벨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성장세였다.
게이트에 들어 올 때 신태양의 레벨이 100대 초반 정도였으니까. 레벨업이 무서울 정도다.
나는 신태양을 보조하며 위쪽에서 오르티마를 조종했다.
콰앙! 쾅!
와이번으로 변한 오르티마가 쏘아낸 마력의 구체가 뱀파이어들을 불태우고, 얼렸다. 두 가지 속성의 정령을 흡수한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 와이번(오르티마)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
『 와이번(오르티마)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
···
..
.
『 와이번(오르티마)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
신태양이 타재간파의 영향을 받았다고는 하나, 내 무재조정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20만 배의 경험치 앞에서 와이번은 순식간에 최대 레벨인 120 레벨을 달성했다.
S급 게이트라 그런지 경험치가 쭉쭉 오른다.
스스스······.
신태양의 펼치는 현란한 무위는 계속 되었다. 뱀파이어들의 공격은 결코 신태양에게 닿지 못했다.
녀석이 지치는 것 같다 싶으면 와이번의 고도를 낮췄다.
『 스킬 '투척 LV.11'을 발휘합니다. 』
이어지는 포션 투척.
병이 깨지면서 내부의 액체가 신태양에게 스며 들었다.
S급의 단단한 몸인지라 이런 사용법이 최고다.
적당히 주위가 정리된 것 같으면 다시 상승.
"믿기지가 않네요. 저 만한 수의 마수들을 혼자서 상대하다니."
내 뒤에 찰싹 달라붙은 엘리스는 카메라를 꺼내서 사진을 찍었다. 그러다가 나를 쳐다봤다.
"사부님은 신태양군보다 훨씬 강한거죠? 아니, 당연히 강하겠죠."
게이트 내부에서의 일을 떠올린 듯 엘리스가 몸을 살짝 떨었다.
"대한민국은 대체 무슨 나라에요······?"
"글쎄."
엘리스가 생각하는 것만큼 나와 신태양의 격차가 지대하진 않을 거다.
신태양의 화려한 기술은 다수를 상대하는 데에 특화되어 있다.
나는 대인전 관련한 기술이 더 강한 편이다. 타재간파를 모두 활성화하면 나도 신태양 같은 무위를 펼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내 목적은 상위 선혈의 마족이다.
체력을 온존해 둘 필요가 있다.
그리고 지금 신태양이 매우 잘 해주고 있기도 하다. 내가 잡아선 얻을 수 없는 막대한 경험치를 신태양이 모조리 흡수하고 있다.
"도망가고 있어요······!"
앞에 뱀파이어들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무의미한 죽음이란 걸 깨달은 거겠지.
'아쉽군.'
적도 생각이 없는 건 아닌 모양. 아니, 이미 상당수의 뱀파이어가 죽어나간 시점에서 퇴각 시점이 한참 늦은 걸지도 모른다.
그만큼 신태양은 강해졌을테니.
내 시선이 허공의 붉은 마기를 향했다.
그곳에는 여전히 퇴각하지 않고 남아 있는 뱀파이어 하나가 있었다.
순혈 뱀파이어 '드라구트'.
노인의 모습을 한 그는 강력한 존재다. 선혈의 마족이 거느린 권속 중에서도 특히 강하다고 들었다.
'하지만 지금의 신태양이라면 이길 수 있다.'
와이번을 탄 채로 상황을 지켜봤다.
드라구트가 붉은 검을 빼어들었다. 놈의 등 뒤로 어마어마한 선홍빛의 마기가 방출되었다.
"대적자! 여기가 네 무덤이 될 거다."
콰아아—!
쏘아지듯 신태양을 향해 돌진하는 드라구트.
'대적자? 그러고보니 전에 상대한 용인족도 나한테 그런 말을 했었지.'
그러다면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콰아앙!
드라구트와 신태양이 격돌하며 강한 충격파가 퍼져나왔다. 신태양의 푸른 마력과 놈의 붉은 마기가 합쳐진 보랏빛의 파동이 밤하늘을 잠시 밝혔다.
"우왓!"
그 충격에 떨어질 뻔한 엘리스.
나는 손을 내밀어 엘리스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가, 감사합니다. 휴우."
떨어진다고 죽지는 않겠지만, 전투에 휘말릴 염려가 있었다.
전투는 치열했다.
"크하하, 대적자여! 네가 아무리 뛰어난 검술을 가지고 있다한들 수천 년을 살아 온 내 경험에 비할 바는 아니다."
드라구트는 즐겁다는 듯 검을 휘둘러왔다.
"대적자······? 무슨 소리를 하는건지."
신태양은 성가시다는 듯 상대의 검을 받아냈다.
카앙! 카앙!
드라구트는 자신만만하게 검을 뻗어 왔지만, 우위는 신태양에게 있었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신태양은 조금씩 전진했고, 드라구트는 물러나고 있었다.
"별 거 없는데."
"큭, 건방진 인간이······."
웃고 있던 드라구트의 얼굴에 균열이 생겨나고 있었다.
'수 천 년의 경험조차도 따라잡는 재능이라.'
같은 팀인 나도 기가 찰 노릇이니, 검을 받아내는 드라구트는 오죽했으랴.
콰득!
신태양의 검이 놈의 팔을 박살냈다. 그 충격파에 뒤쪽의 숲이 통째로 갈려나갔다. 드라구트의 여유롭던 미소는 사라져 있었다.
"크윽, 이 새끼가······."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걸까. 놈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혈귀(血鬼).
용인족 하렐이 사용했던 주술이다. 선혈의 마족이 권속들이 사용하는 강제 자기 버프.
콰아아아—!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마기가 드라구트의 몸에서 소용돌이쳤다. 모든 신체 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했음은 물론이다.
"읏?!"
그 기세에 신태양이 잠깐 주춤한 그 사이.
콰앙!
드라구트가 땅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콰악!
순식간에 놈의 이빨이 신태양의 목에 박혔다. 드라구트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이걸로 대적자, 네 놈은 우리의 것이다."
권속화.
이것이 뱀파이어의 무서운 점이다.
붉은 피를 가진 자에 대한 압도적인 강점이기도 했다.
스스스······!
목을 붙잡은 채 쓰러진 신태양의 몸 주위로 붉은 기운이 옭아매듯 퍼져나왔다. 신태양의 미간이 좁혀졌다.
"크으윽······."
붉은 피를 가진 존재를 권속으로 삼아 노예로 부리는 뱀파이어.
S급 헌터라고 해도 예외는 없었다.
"크하하, 검술에 있어서는 내가 졌을지도 모르지만. 싸움이란 건 정정당당할 필요가 없는 거지. 안 그러냐?"
드라구트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는 듯 했다.
신태양의 눈동자에 붉은 각인이 새겨진다. 이 순간, 권속화는 피할 수 없었다. 신태양의 이빨이 날카롭게 변화하고 있었다.
"어, 어떻게 해요?!"
"어쩌긴."
나는 엘리스와 함께 와이번에서 뛰어 내렸다.
콰앙!
착지와 함께 옅은 흙먼지가 솟아올랐다. 드라구트는 별 거 아니라는 듯 손을 저었다.
"흐음, 네 놈들은 대적자의 부하인가? 미안하지만 네 놈들의 대장은 내 노예가 되었다. 너희들도 얌전히 부하가 되어라."
"비겁해요······!"
"어린 계집. 잘 모르나보군. 목숨을 건 전투 앞에 비겁하고 말고가 있나?"
그래, 전투에 비겁한 게 어디있겠나.
권속화에 저항하려는 듯 비척거리는 신태양.
나는 엘리스의 손을 신태양의 등 위에 올렸다.
"시간을 되돌려라."
"아······!"
엘리스가 그제서야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동료 엘리스가 스킬 '시간 조작 Lv.5'를 발휘합니다. 』
황금빛 시계의 형상이 신태양의 몸을 감쌌다.
그리고 다음 순간.
권속화의 증상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신태양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방심했습니다."
그런 우리를 멍하니 쳐다보는 드라구트.
"궈, 권속화를 풀었다고······? 어떻게······? 신성력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는데."
엘리스의 능력 덕이다. 있었던 일을 없었던 것으로 만들어버리니까.
나는 와이번에 엘리스와 함께 올라탔다. 신태양은 금방 정신을 차렸다.
"이번에는 지지 말아라."
"예, 스승님."
각오를 다진 신태양이 검을 바로 잡았다. 그런 녀석의 눈에 푸른 이채가 떠올랐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동료 신태양이 특성 '리미트 해제'를 발휘합니다. 』
『 일시적으로 대상의 레벨이 30 증가합니다. 』
푸른 빛이 신태양의 전신을 감싼다.
『 대상 '신태양'의 현재 레벨은 151입니다. 』
『 레벨 150을 달성하여 등급이 한단계 상승합니다. 』
『 대상 '신태양'의 현재 등급은 SS 입니다. 』
"······?"
일순 신태양을 바라보는 드라구트의 눈에 공포심이 깃들었다. 나는 만족스런 미소와 함께 와이번을 타고 하늘 위로 날아 올랐다.
이 세계 최초의 SS급 헌터의 탄생이다.
막을 수 있다면 막아봐라.
128화 붉은 피가 흐르는 세계(4)
레벨이 오르면 등급이 오른다.
게이트가 생성된 초기부터 세계가 멸망할 때까지 통용되는 하나의 법칙이다.
'등급이 오르면 헌터가 가지는 격이 달라진다.'
격(格).
생물이 가지는 본연의 위치.
피식자가 포식자를 바라보며 공포를 느끼듯, 상위의 격을 가진 존재에게 두려움과 경외심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멸망 이전의 세계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다.
'인간보다 높은 격을 가진 존재가 없으니까.'
강한 마수나 보스 몬스터라고 해도 그 본질을 헌터가 사냥해야 할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멸망한 세계에서 영웅들은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된다.
상위의 격을 가진 존재.
형언할 수 없는 격의 차이를 가진 마족을.
보는 것만으로도 몸이 떨려오는 불가해한 일이 일어난다.
'일반인이었던 나는 그곳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조차 불가능했었다.'
그러한 격에 대한 이해가 가능한 것은 SS급부터라고.
영웅들은 입을 모아 말하곤 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SS급부터가 격을 소유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인간이 아닌, 상위의 존재로서의 존재감을 뿜어내는 시기.
"하, 이 내가······. 수 천 년을 살아 온 드라구트가 고작 인간 앞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단 말인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는 순혈 뱀파이어 드라구트.
"아무리 게이트에 종속 되어 제약을 받는다고는 하나······. 화가 치미는군."
이곳은 S급 게이트.
뱀파이어 마수인 드라구트는 능력치에 제한이 생긴다. 마족과 마찬가지로 본래의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거다.
'그게 우리가 가진 유일한 이점이지만.'
놀라기는 엘리스도 마찬가지였다. 엘리스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내 어깨를 붙잡았다.
"사, 사부님······. 숨이 잘 안 쉬어져요."
"신태양한테서 고개를 돌려."
"그, 그러면 사진을 못 찍는데······."
"······."
SS급에 오른 신태양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강한 압박감이 느껴진다.
물론 미래에서 얻은 영웅의 힘 스킬 덕에 나한테 부담은 없었다. 힘뿐만 아니라 영웅으로서의 '격'까지 올려주는 스킬이니.
'굴린 보람이 있군.'
푸른 마력이 신태양의 주변으로 타오른다.
그 맹렬한 기세는 그야말로 위풍당당.
현 시점 어디에도 SS급을 달성한 헌터는 없을테니.
저벅.
신태양이 드라구트를 향해 걸어갔다. 이번에는 방심하지 않으려는 건지 신중한 태도였다.
"건방진······."
드라구트 또한 혈귀로 변해 있었기에 만만이 볼 상대는 아니었다. 드라구트가 피를 흩날리며 신태양을 향해 달려들었다.
놈이 처음에 들고 있던 붉은 검은 땅바닥에 내던져 둔지 오래였다.
콰아아앙!
주변의 나무들이 뽑혀 나갈 정도로 강한 폭발이었다. 비릿한 향이 섞인 강풍이 숲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신태양은 멀쩡했다.
드라구트의 붉은 손톱을 가뿐하게 검으로 받아냈다. 오히려 검과 부딪힌 놈의 손톱 위로 금이 가기 시작했다.
서걱—!
반월형의 푸른 잔상이 드라구트의 왼팔을 잘라냈다.
서걱—!
다시 한 번 푸른 기운이 오른팔을 잘라냈다. 이어지는 연격 앞에 드라구트는 무력했다. 신태양은 무자비하게 검을 휘둘렀다.
서걱—!
결코 빈틈을 보이지 않겠다는 듯 깔끔하고도 정교한 검술이었다.
"크허어억!"
사지가 잘려나가 바닥에 떨어진 드라구트.
그의 얼굴은 이미 공포심으로 잔뜩 물들어 있었다.
"이, 이게 대적자란 말인가. 이해가 가지 않는 힘이구나. 도무지 같은 인간으로 느껴지지 않아. 하, 이런 일이 다 있단 말인가."
그런 놈의 주변으로 마기가 모여들고 있었다.
회복을 위해 마기를 끌어모으는 듯 했으나.
"쫑알쫑알 말 많네."
신태양은 조금의 빈틈도 허락하지 않았다.
콰아앙!
푸른 섬광이 밤하늘 높이 치솟았다.
저 멀리 숨어서 전투를 지켜보던 뱀파이어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드라구트는 죽었다.
신태양의 완벽한 승리였다.
더할 나위 없이 깔끔했다.
신태양의 특성 '리미트 해제'가 풀리며 머리카락이 차분해졌다.
녀석은 지금까지 맺혔던 응어리를 날려 보낸 듯 후련한 표정이었다.
"이겼습니다. 스승님."
그리 말하는 녀석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맺혀있었다.
* * *
사냥할 뱀파이어들도 모두 도망쳤으니, 남은 건 하나다.
저 멀리 보이는 칠흑의 성.
놈의 기운이 느껴진다.
드라구트의 뒷처리를 마친 뒤,
우리들은 와이번을 타고 밤하늘을 활공하며 나아갔다.
머리를 쓸어 넘긴 신태양이 말했다.
"후우, 더 이상 무슨 상대가 와도 질 거라는 생각이 안드네요. 아, 맞다. 제 사진 찍었죠? 나중에 나도 좀 줘요."
"싫어요. 제 개인 소장용이란 말이에요······."
"얼마면 됩니까? 제 팬들도 제 사진을 누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드라구트에게서 압도적으로 승리해서일까. 신태양의 눈에 있던 독기도 조금 가라앉은 느낌이다.
"모두 스승님 덕분입니다."
"그래. 근데 아직 끝난 거 아니다."
"마족이 남아 있는거죠······. 지난번에 스승님께서 상대하셨던 놈 같은."
"그 놈보다 더 강할 거야."
이전에 쓰렸던 것은 중위 전투의 마족.
지금 쓰러뜨릴 것은 상위 선혈의 마족이다.
"뭐가 되었든 스승님과 함께라면 두렵지 않습니다."
"자신감은 좋네."
본디 검성이었던 신태양은 이른 시기에 목숨을 잃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그의 자신감 때문이었겠지.
그러나 나와 함께 한 미래에서 신태양은 끝까지 살아남았다.
'심지어 과거보다 더 빠르게 강해지고 있다.'
앞으로의 성장 또한 기대 되는 부분이다.
"저, 저기······!"
한창 잘 나아가고 있던 도중 엘리스가 밤하늘의 달을 가리켰다. 달을 확인한 신태양의 눈도 가늘어졌다.
"무슨······."
핏빛의 달에서 붉은 피가 흘러 내리고 있었다. 괴이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다.
'권속이 전부 죽은 걸 눈치 챈 모양이군.'
게이트 자체가 놈이 만들어낸 허상세계(虛像世界)나 다름 없다. 놈이 분노하고 있단 뜻으로 받아들이면 되겠지.
그래서였을까.
하늘을 나아가는 동안 우리를 가로막는 존재는 없었다.
뱀파이어들로 들끓던 숲은 적막에 휩싸인 채 고요함을 유지했다.
그리고 그 끝에 있던 칠흑의 성.
선혈의 마족은 그 꼭대기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범상치 않은 존재라는 건 보자마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 녀석이 선혈의 마족······."
"제가 생각했던 마족하고는 뭔가 다르네요. 굉장히 아름다워요······."
감탄하는 엘리스의 말대로였다. 붉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미인. 그러나 그녀의 미소는 냉혹하기 그지 없었다.
"실로 훌륭하구나. 내 권속들을 모두 쓰러뜨리고서 올 줄이야."
이내 광기어린 웃음을 내뱉기 시작한다.
"하하하! 네 녀석이야 말로 틀림 없는 대적자!"
그녀의 손가락이 우리를 향했다.
"한 판 붙자! 귀찮은 것들은 전부 잊어버리고서 정정당당하게!"
콰아아아——!
달에서 흘러내린 방대한 양의 핏물이 거대한 기둥을 만들며 성 주위로 솟아 올랐다. 우리는 순식간에 수십 개의 기둥으로 둘러 쌓였다.
"오르티마, 위로······!"
와이번이 날개를 크게 펄럭여 상승했다.
쏴아아!
어디선가 솟아난 핏빛 기둥이 와이번을 향해 돌진해 왔다. 오르티마의 양 날개에서 푸른 마력이 방출된다.
솟아오르는 기둥을 피해 빠르고 날렵하게 하늘 위로 날아오르는 와이번.
그러나 뒤쪽에서 달려드는 기둥을 피하기엔 속력이 부족했다.
"따, 따라잡히겠어요!"
내 허리를 꽉 붙잡은 엘리스가 남은 한 손으로 권총을 마구 쏘아댔지만 다가오는 기둥을 막을 순 없었다.
신태양이 검을 들어올렸다.
"제가 베어내겠습니다! 붙잡아주세요!"
수직 상승 중인 와이번의 위에서 검을 휘두르기란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으나. 오르티마의 일부가 슬라임처럼 늘어나 신태양을 붙잡았다.
콰아아아—!
신태양이 만들어낸 반월형의 검기가 핏빛 기둥을 반으로 갈랐다. 그러나 기둥은 기세를 잃지 않고 더욱 빠르게 우리를 쫓았다.
콰드득!
두 개의 기둥이 와이번의 꼬리를 붙잡았다. 오르티마가 고통에 몸을 뒤틀었다.
"우아아!"
"크윽."
매달려 있는 우리 또한 마구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쓸데없이 도망치지 말고 한 번 붙자니까!"
핏빛의 기둥은 사정 없이 오르티마를 휘둘러 내리쳤다. 이렇게 되면 방법이 없다.
'가급적이면 정면 승부는 하고 싶지 않았는데.'
『 형상기억마수 와이번(오르티마)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옵니다. 』
스르륵.
오르티마를 빠르게 회수하고서 성 위로 착지했다. 엘리스와 신태양도 따라서 제대로 착지했다.
"하하하! 그래, 비겁하게 도망치지 말고 붙자고!"
만족스런 표정의 선혈의 마족이 소리쳤다.
"자, 덤벼라. 대적자!"
선혈의 마족은 손가락을 뻗어 한 사람을 지목했다.
그녀가 가리킨 건 다름아닌 신태양이었다.
"?!"
콰아아—!
핏빛의 기둥이 신태양을 위로 들어 올렸다. 선혈의 마족은 신태양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핏빛의 검이 강렬한 마기를 내뱉었다.
콰아아앙!
이어서 솟구치는 피가 성 전체를 집어 삼켰다. 피비린내가 느껴지지 않는 장소가 없다.
드높이 솟은 핏빛의 기둥이 점차 이어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딛고 선 하늘과 땅을 전부 메워버린다.
'이게 상위 마족의 힘이란 건가.'
게이트 자체를 아예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는 수준이었다.
결국 선혈의 마족은 우리를 완벽히 가두는데 성공했다.
핏물로 이뤄진 거대한 반원형의 장소.
빠져나갈 수 있는 틈은 어디에도 없다.
콰앙! 콰앙!
신태양과 선혈의 마족은 계속해서 맞부딪히고 있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상황은 완벽한 호각.
스르르······.
나와 엘리스의 주위로는 피로 만든 인형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탕! 탕! 탕!
엘리스의 총구가 화염을 내뿜었지만 미동도 않는다.
"전혀 안 통해요!"
"내 뒤에 붙어. 신태양에게로 간다."
"넵!"
마력을 베어내는 12레벨의 일자베기로 하나씩 인형들을 제거하며 나아갔다.
엘리스의 시간조작은 편리하지만 만능이 아니다.
소모되는 마력도 어마어마하거니와, 적에게 사용하려면 엘리스의 레벨이 충분히 높아야 했다. 진세아의 절대 강탈과 비슷한 맥락이었다.
'중요한 때에만 사용하게 해야겠어.'
아직은 그 능력도 완벽하지 않으니 아껴둬야 한다.
"크하하, 인간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정말 강해! 즐겁구나! 진작에 이렇게 할 것을!"
선혈의 마족이 웃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온다.
촤아악!
바닥에서 솟아난 핏물이 신태양의 옷을 적셨다. 신태양이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휘두르는 검이 느려지고, 숨이 가빠지기 시작한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위태한 모습이었다.
"크으윽······."
"왜 그러냐?! 벌써 지치는 거냐? 인류의 운명을 짊어진 대적자가 겨우 이 정도에 지쳐서 되겠어?!"
촤악!
눈 앞의 핏물 인형을 베어내자 내게도 피가 튀어 올랐다. 그것이 몸에 닿자 각기 다른 고통이 엄습했다.
시리고 뜨거우며 치명적인 독성이 정신을 뒤흔든다.
신태양이 견디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얼음, 화염, 독, 정신 간섭.
선혈의 마족이 만들어내는 피에는 네 가지의 속성이 깃들어 있다.
SS급에 오른 신태양조차도 버거운 디버프.
"에잇, 떨거지들은 뒤쪽에서 찌그러져 있어!
전투를 방해받고 싶지 않은 선혈의 마족이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붉은 피의 파도가 나와 엘리스를 향해 쏟아졌다.
"엘리스 내 뒤에 딱 붙어."
"넵!"
그러나 나에겐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 나는 인벤토리에 있던 방패를 들어 올렸다.
『 스킬 '냉기 면역 Lv.11'을 획득 및 발휘 합니다. 』
얼음 속성에 대한 대비는 완벽하다.
『 스킬 '독 면역 Lv.11'을 발휘 합니다. 』
독에 대한 준비도 게이트를 공략하며 해왔고.
『 유니크 스킬 '지고의 정신 Lv.1'을 발휘 합니다. 』
정신력에 관해선 유니크 스킬까지 보유하고 있다.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화염 저항 정도인데.
『 스킬 '화염 저항 Lv.11'을 획득합니다. 』
그것 마저도 이전에 샐러맨더를 상대하며 키워놨다.
그리고 견딜수만 있다면.
『 레어 스킬 '화염 면역 Lv.1'을 획득합니다. 』
『 레어 스킬 '화염 면역 Lv.2'를 획득합니다. 』
『 레어 스킬 '화염 면역 Lv.3' 획득합니다. 』
···
..
.
『 레어 스킬 '화염 면역 Lv.10'을 획득합니다. 』
내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촤아악!
가볍게 핏빛 파도를 뚫고 나왔다. 바로 앞에 경악한 표정의 선혈의 마족이 보였다.
"뭐야, 어떻게······?!"
찰나의 빈틈.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신태양과 내가 동시에 달려들었다.
선혈의 마족이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그녀는 고민하고 있었다.
이 짧은 순간.
누구의 공격을 막아내야 할지.
정답은 정해져 있었다.
수 백의 뱀파이어를 학살하고, 순혈 뱀파이어 드라구트마저 쓰러뜨린 신태양.
그가 대적자가 아니면 누구겠는가?
선혈의 마족은 신태양을 향해 자신의 핏빛 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 순간 이 전투의 승패가 결정 되었다.
『 타재간파의 서의 모든 항목을 발휘합니다. 』
나는 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 각성 스킬 '일자베기 Lv.13'을 발휘합니다. 』
수명을 소모하는 궁극의 일격.
본질베기가 선혈의 마족을 갈랐다.
핏빛으로 가득 찬 반원형의 공간을 꿰뚫는 푸른 선 하나.
화아악—!
검 끝에서 피어난 거센 폭풍이 핏빛의 장막을 걷어내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악!"
붉은 피와 함께 비명을 지르는 선혈의 마족.
"사부님!"
『 동료 엘리스가 '시간 조작 Lv.5'를 발휘합니다. 』
내 뒤에 붙어 있던 엘리스에 의해 시간이 되돌려진다. 줄었던 체력과 마력이 단숨에 차오르고, 사라졌던 수명이 되돌아 온다.
[ 이, 이 빌어먹을······! 어떻게 이런······! 대적자가 둘이었나?! ]
반쯤 잘려진 몸으로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난 선혈의 마족이 소리쳤다. 그것은 더 이상 기도를 통해 나오는 음성이 아니었다.
마기와 격이 동시에 담긴 진언(眞言).
"크윽, 무슨······."
"으앗!"
그 격 앞에서 엘리스가 머리를 붙잡고 주저 앉았다. 신태양은 얼굴을 찡그리는 수준이었지만 피의 디버프가 겹쳐지니 견디기 힘든 모양.
『 유니크 스킬 '영웅의 힘 Lv.11'을 발휘합니다. 』
『 유니크 스킬 '지고의 정신 Lv.2'를 획득합니다. 』
그러나 나에게는 영향이 없다. 이 순간을 위해서 미래에서 굴렀으니까. 상위 마족의 격도 받아낼만 하다.
"빨리 마무리를······!"
"아니, 기다려."
나는 손을 뻗어 신태양의 앞을 막아섰다.
저 앞에 보이는 건 상위 마족의 껍데기.
이미 쓰임새를 다 한 껍질에 불과하다.
비틀거리던 선혈의 마족의 심장 부근에서 피가 소용돌이 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점점 커지더니 그대로 마족을 집어 삼키었다.
[ 따라올테면 따라와봐라. ]
요약하자면 자기가 졌으니, 이제 자기가 유리한 장소에서 싸우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소용돌이 앞에 섰다.
허공에서 게이트처럼 부유하는 핏빛의 소용돌이.
들어오라는 듯 손짓하고 있다.
"서, 설마 들어가시려는 건 아니죠······? 아무리 그래도 이건······."
신태양이 나를 말렸다. 피를 한 번 뒤집어 썼기 때문에 더욱 그런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가야지."
선혈의 마족은 전투의 마족처럼 정정당당하지 않다. 자기가 불리하면 얼마든지 마계의 틈으로 숨어드는 놈이다.
그래도 껍데기를 벗겨냈으니 많이 약화된 상태일 거다.
나는 두 사람을 가리켰다.
"오르티마, 이 둘을 먹어라. 삼키지는 말고."
"우와앗!"
"자, 잠깐······!"
이 앞은 마계나 다름 없다.
정확히는 마계와 문명계의 중간이지만.
어쨌거나 선혈의 마족은 잘못된 판단을 했다.
놈의 본거지인 마계의 틈.
그곳에선 나를 더더욱 막지 못할 것이다.
『 무성(無星)등급 칭호 '마계의 재앙'이 발휘됩니다. 』
『 마계 필드에서 데미지가 1,000% 상승합니다. 』
『 1★ 칭호 '마(魔)의 대적자'를 발휘합니다. 』
『 마계 필드에서 모든 능력치가 3배 상승합니다. 』
"들어가자."
상위 마족을 사냥할 시간이다.
129화 붉은 피가 흐르는 세계(5)
『 마계의 틈 : 초목계 』
우리의 앞으로 드넓게 펼쳐진 평원.
저 멀리 보이는 푸르른 초목의 숲.
햇살은 따사롭고, 산양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어먹는 평화로운 광경.
"여, 여기는······?"
거대해진 슬라임 오르티마의 안에서 기어나오는 신태양의 눈이 커졌다.
핏빛의 소용돌이 속을 지나오자 완전 딴판인 세계가 펼쳐졌다.
"스승님, 여기에 선혈의 마족이 있는 게 맞나요? 아니면 내가 환각을 보고 있는 건가······."
방금 전까지 칠흑의 성 위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단 게 믿기지 않을 정도. 주변을 가득 메우던 비릿한 혈향도 온데 간데 없다.
향긋한 풀내음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시간의 흐름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이 공간은 대체······."
엘리스는 경계를 늦추지 않고 주변을 살폈다.
이내 두 사람의 시선이 내게로 모였다.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이다.
'나도 직접 오는 건 처음이지만.'
당황하지 않을 수 있는 건 미래에서 얻은 지식 덕분이었다.
"대부분의 마족들은 마계의 틈이란 고유한 장소를 소유하고 있어. 이 장소는 선혈의 마족이 소유한 공간이겠지."
"공간이라기보단 세계 아닌가요? 끝이 보이지 않아요."
엘리스의 말대로다.
녀석은 하나의 세계를 통째로 소유물로 삼고 있는 거다. 중위 마족이 소유하는 것이 공간에 그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미래의 엘리스의 말에 따르면 이곳은 누군가가 잃어버린 세계라고 했던가.'
마족에게 점령 당해 잊혀지고 사라진 세계.
"여기 어딘가에 선혈의 마족이 숨어 있을 거다."
"그 마족하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장소네요. 한가해 보이는 양들도 있고. 귀엽긴하네."
신태양이 무심코 근처의 산양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다.
"잠깐······."
내가 미처 말리기도 전이었다.
콰아앙!
"커허억!"
산양이 힘껏 휘두른 뿔 박치기.
갑작스런 공격에 신태양이 허공을 날았다. 그대로 땅을 주욱 그으며 밀려났다.
"이, 이게 무슨······?"
흙투성이가 된 신태양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산양을 쳐다봤다. 자신을 함부로 만지려했다는 사실이 맘에 들지 않는지 발을 퉁퉁 구르는 산양.
"마, 마수인건가요?"
엘리스도 한발자국 물러섰다.
리미트 해제 상태가 아니라곤 해도, S급 헌터가 산양의 박치기 한 방에 날아갔다. 도저히 정상적이라고 보이지 않는 상황.
그러나 이곳은 마계의 틈이다.
"함부로 만지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여기 생물들은 가지고 있는 힘 자체가 다르니까."
알게 모르게 마기를 듬뿍 머금어서 마계에 동화 되어 간다. 겉모습은 평범해도 마계와 가까운 장소라는 걸 잊어선 안된다.
나는 산양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당연하게도 녀석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산양이 발광하려는 찰나.
뻐억!
머리에 꿀밤을 한 대 먹여줬다.
산양은 그대로 기절했다.
"스, 스승님은 괜찮으신겁니까?"
"난 괜찮아."
"여, 역시······."
역시는 뭐가 역시야.
이계 규율 칭호의 영향을 받아 나는 본래 세계에 있을 때보다 훨씬 강해졌다.
격의 차이는 딱히 없다. 개인이 가진 강함과 격이 일치하는 건 아니다.
'실제 등급은 아직 A급 헌터에 불과하기도 하고.'
모든 스킬을 다 발휘한다면 모를까.
어쨌든 신태양이 감탄하는 것에 비해 이 산양은 강하지 않다.
신태양도 기습 공격에 당했을 뿐이다. 금방 털고 일어났다.
"중요한 건 이 세계의 존재들이 약하지 않다는 거. 그것만 기억하면 된다."
"예, 명심겠습니다."
"어? 저기 누가 다가오고 있어요!"
방금 전 소동 때문일까.
저 멀리 양치기 하나가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뙤약볕에 그슬린 피부가 이국적인 소년이었다.
"거기서 뭐하시는 겁니까!"
순식간에 우리 앞까지 달려 온 양치기 소년은 숨을 몰아쉬었다.
소년의 시선이 바닥에 기절한 산양에게로 향했다.
"지, 지금 저희 양한테 무슨 짓을······!"
거품을 물고 쓰러진 산양의 몸을 부둥켜 안은 소년이 우리를 쏘아봤다.
"당신들 뭐에요?! 경비대에 신고 할 거에요!"
마족이 다스리는 세계에 존재하는 주민.
'탑'에도 존재하는 이러한 이들을 우리 헌터들은 흔히 이렇게 부른다.
"이 남자애는 NPC 인건가요?"
None Player Character
게임 속에서 플레이어에게 퀘스트를 주는 역할을 맡은 이들.
그러나 마계의 틈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그 성질이 다르다.
정말로 존재하는 사람이다.
물론 당장은 그 구분이 중요하진 않지만.
나는 소년의 앞으로 나서면서 말했다.
품 안에서 마정석 하나를 꺼내 내민다.
몬스터의 마력이 풍부하게 담긴 마정석은 이곳에서 보석이나 다름 없게 취급 된단다.
"어어······?"
마정석을 바라보는 소년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그래, 경비대를 불러줄래? 서쪽의 마녀에 대해 할 말이 있거든."
* * *
"더 드세요! 많이 있어요!"
양치기 소년은 우리를 집으로 안내하더니 극진한 대접을 해주기 시작했다.
산양젖으로 만든 치즈와 스튜, 벌꿀잼과 잘 구운 식빵 같은 음식들을 내왔다.
그 맛으로 말할 것 같으면.
"다, 달아여. 이러케 맛있을 수가 있다니······?"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토스트를 냠냠 먹어치우는 엘리스.
"기가 막히네요······. 지금 저희가 게이트 공략을 나온 건지. 소풍을 나온 건지 모를 정도네요. 피로가 확 풀리는 맛입니다."
신태양도 벌써 스튜를 다섯 그릇째 비웠다.
게이트를 공략하는 동안 대부분의 전투를 신태양이 도맡아서 했다. 선혈의 마족과 싸운 것도 사실상 녀석이었다.
음식을 먹어서 피로가 풀린다면 다행이다.
'맛있네.'
맛이 없을 수가 없었다.
『 달콤하고 고소한 풍미가 당신의 정신을 일깨웁니다. 』
『 일시적으로 지력 + 1% 』
『 스튜의 따스한 기운이 당신의 몸을 데웁니다. 』
『 일시적으로 체력, 힘 + 1% 』
음식을 먹는 것만으로도 능력치가 상승한다. 이걸 가능하게 하는 건 스킬 밖에는 없다.
그것도 최소 중급 요리.
'내가 찾던 요리 스킬을 가진 사람이 여기에 있었군.'
미래에서 얻은 정보 중 하나.
- 사부, 상위 마족이 가지고 있는 마계의 틈이나 SS급 게이트에서 얻을 수 있는 건 보상 뿐이 아니에요. 다른 사람이라면 불가능하겠지만······. 사부라면 더 많은 걸 얻을 수 있을 거에요. 예를 들면 스킬이라던지.
미래 엘리스의 말대로였다.
어차피 경비대가 올 때까지는 시간이 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양치기 소년에게 향했다. 녀석은 마정석을 받아서 싱글벙글이었다.
우리 세계보다 이곳에서 그 가치가 높은 모양이다.
"음식은 입에 맞으신가요? 필요한 게 있으시면 팍팍 말씀해주세요."
"네가 가진 요리 스킬이 혹시 중급 요리인가?"
"아, 네. 제가 자랑하는 기술이랍니다."
스킬에 관해선 말이 빨라서 다행이다. 스킬에 관한 것 자체를 모른다면 설명하기가 더욱 복잡해지니까.
"내가 요리를 배울 수 있을까 하는데."
"네? 나으리께서 직접요?"
마정석 하나로 대접은 제대로 받는구나 싶다. 현 시점 우리쪽 세계에서 중급 요리 스킬을 가진 사람은 없다.
있어봤자, 일반 요리 스킬이다.
때문에 전수 가능 여부를 모른다.
'만약 전수가 안된다면 아쉽겠어.'
이미테이션 장갑은 아직 사용할 수 없다. 1주일의 대기 시간이 끝나지 않았다. 하루 정도가 남았지만 엘리스의 시간조작으로 되돌리기엔 너무 길다.
다행히 양치기 소년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알려드리고 말고요! 전수 가능한 기술입니다. 몇가지 비법만 알고 계신다면 어렵지 않답니다. 나으리 덕분에 제가 집을 새로 장만하게 되었는데 못 해드릴 게 뭐가 있겠습니까!"
집을 장만한다라······.
이곳에서 마정석의 가치가 어마어마하긴 한 모양이다.
"오······."
내가 요리 스킬을 배운다는 말에 어째 엘리스와 신태양이 더 기쁜 표정이었다.
스킬을 배우는 건 금방이었다.
마력의 부여와 온도의 조절이 관건이었다. 그 방식만 제대로 익힌다면 어려울 건 없었다.
'이건 혼자서는 절대 못 했겠는데······.'
물론 그 독학이 불가능한 수준의 창의성을 요구했다.
"나으리는 불속성 친화력도 소유하신 것 같네요? 그러면 더욱 쉽습니다."
오르티마가 먹은 정령 덕분일까. 스킬 획득을 알리는 메시지창이 금세 떠올랐다.
『 레어 스킬 '중급 요리 Lv.1'을 획득했습니다. 』
"빠, 빠르시네요. 나으리께서 요리에 재능 있으신 것 같습니다."
"그런가."
20만배의 경험치가 없는 재능도 있게 만들어 줄 뿐이다.
『 스킬 '중급 요리 Lv.2'을 획득했습니다. 』
『 스킬 '중급 요리 Lv.3'을 획득했습니다. 』
···
..
.
『 스킬 '중급 요리 Lv.10'을 획득했습니다. 』
"나, 나으리······?"
내게 요리를 가르치던 양치기 소년의 눈이 미친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달그락, 달그락.
치익, 치이익.
달걀을 한 손으로 까서 프라이를 만들고, 다른 한 손은 식빵 위에 우유를 적정량만큼 붓는다. 동시에 마력을 적정량 부여한다.
내 손은 두 가지 요리를 자연스럽게 해내고 있었다.
『 스킬 '중급 요리 Lv.11'을 획득했습니다. 』
『 추가효과 : 요리에 부여되는 능력치가 2배로 증가 합니다. 』
그렇게 11레벨 요리까지 완벽하게 배운 순간.
끼익. 쾅!
"이 시간에 경비대를 찾는 이방인 놈들이 누구냐? 으응?"
거나하게 술에 취한 경비대장이 요란하게 등장했다.
* * *
"서쪽 땅 끝에 있는 죽음의 땅. 그 악독한 마녀를 토벌해주시겠다는 겁니까? 이런 영웅분들이······."
마정석을 손에 쥔 경비대장은 굉장히 공손해져 있었다.
"마을의 공간이동 장치로 충분히 이동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제가 직접 안내해드리죠."
양치기 소년과 작별 인사를 하고서 우리는 경비대장을 따라 움직였다.
"사부님. 여기는 선혈의 마족이 다스리는 세계인 거 아닌가요? 이곳에서도 마녀라고 불린다니······."
"그런 걸 즐기는 거겠지."
"즐긴다고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마계의 틈에 존재한 세계의 구성은 전적으로 마족의 취향에 따라 갈린다.
선혈의 마족의 유흥을 위해 존재하는 장소니 당연하다.
한마디로 부수기 위해 유지되는 평화라는 말. 이곳은 놈이 심심할 때 언제든지 파괴될 수 있는 위태위태한 장난감에 불과하다.
마족의 노리개로 전락한다는 게 이런 뜻이겠지.
'만약 우리 세계가 끝이 난다면······.'
그 끝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도착했습니다. 경비본부에서 곧바로 공간이동을 이용할 수 있게 준비해두겠습니다."
한적한 시골길에서 벗어나자 그럴듯한 중세의 마을이 나타났다. 경비대원들이 우리를 보고 주춤하자, 경비대장이 허리를 꼿꼿히 폈다.
"어이, 나야 나. 문 열어. 어허, 괜찮으니까."
마정석이라는 뇌물이 가진 효과는 대단했다. 우리는 이방인임에도 아무런 방해 없이 마을 내부까지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러면 부디 살아서 돌아오시길."
평평한 바위 위에 새겨진 마법진 위에 섰다. 마법사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곧이어 밝은 빛과 함께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익숙한 변화였다.
우리 앞에 죽음의 땅이 모습을 드러냈다.
핏빛 강물과 검게 변한 땅.
저 멀리 보이는 검은 탑.
신태양이 심호흡을 했다.
"후우, 다시 전투가 시작되는 거군요."
"이번 전투는 방금 전하고는 다를 거다. 상위 마족의 본체와 겨루게 되는 거니까."
"각오는 하고 있습니다."
"사부님을 보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게요."
두 사람이 각오를 다졌다.
내 심장도 요동치고 있었다. 미래에서 도착한 뒤, 전력을 다하는 첫 싸움이다.
스윽.
나는 장갑을 바꿔꼈다.
붉은색의 이미테이션 장갑에서 푸른색의 초회의 장갑으로.
이전에 얻었던 레전더리급 장갑이다.
그 효과는 이러하다.
『 첫번째 공격의 데미지가 250% 상승합니다. ( 쿨타임 : 24시간 ) 』
처억.
『 오르티마가 '회수의 창'으로 변화 합니다. 』
『 타재간파의 서를 활성화 합니다. 』
화르륵!
회수의 창 위로 푸르른 오러가 타올랐다.
『 무성 등급 칭호 '마계의 재앙'이 발휘 됩니다. 』
『 1성 등급 칭호 '마(魔)의 대적자'를 발휘 합니다. 』
타앗, 탁.
두 번의 도움 닫기 이후.
『 유니크 스킬 '영웅의 힘 Lv.10'을 발휘합니다. 』
『 유니크 스킬 '초가속 Lv.10'을 발휘합니다. 』
나는 모든 힘을 실어 창을 던졌다.
콰아아아—!
혜성처럼 푸른 꼬리를 그리며 날아간 창이 저 멀리에 있던 검은 탑에 부딪혔다.
콰아아아앙!
귀가 찢어질 듯한 굉음과 함께 붉은 핏물이 하늘 높이 솟구쳤다. 검은 탑은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쿠구구구······.
마기가 조금 사그라든 기분이다. 적지 않은 피해를 입혔다는 게 느껴진다.
휘이익—! 타악.
회수의 창이 다시금 내 손에 안착했다. 오르티마도 방금 전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듯 살짝 떨리고 있었다.
"가보자."
"예, 스승님."
"네, 사부님!"
실수는 용납되지 않는다.
처음부터 전력으로 간다.
130화 붉은 피가 흐르는 세계(6)
무너져 내리는 검은 탑.
'이렇게 빨리 왔다고······?'
잔해와 함께 추락한 선혈의 마족은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한동안 잔해 속에 몸을 뉘인 채 멍하니 누워 있을 정도였다.
'대체 어떻게······.'
고작 이만큼의 시간을 벌자고 추하게 마계의 틈으로 도망쳐 온 게 아니었다.
심지어 아직 상처를 제대로 수복하지도 못했다.
'젠장, 설마 대적자가 둘이었을 줄은······.'
그녀는 아직도 그런 착각을 하고 있었다.
투두둑.
선혈의 마족이 잔해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어깨 죽지에 새빨간 상처에선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분명 본체가 아닌 껍데기에 입은 상처건만 그 피해는 고스란히 본체에까지 미쳐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되먹은 공격인지.
마기를 아무리 쏟아부어도 회복되지 않고 있었다. 이런 공격을 본체에 받기라도 한다면 끝장이었다.
자연스레 이를 악물게 되는 고통이었다.
'이런 굴욕이 다 있나······.'
무너진 탑에서 일어난 선혈의 마족이 침입자들을 바라봤다. 그녀의 붉은 눈이 세 명의 인간을 응시했다.
세 명의 인간은 빵 쪼가리를 꺼내서 먹고 있었다.
그 실상은 이지한이 '중급 요리' 스킬로 만든 요리를 섭취해 능력치를 높이기 위함이었지만.
선혈의 마족이 그런 것을 알 리가 없었다. 그녀의 속 깊은 곳에서 분노가 끓어 오르기 시작했다.
[ 이것들이······. 감히 나를 능멸해······? ]
드드드···.
마기에 의해 주변의 잔해들이 허공으로 떠오른다. 잔잔하던 핏빛의 호수 위로 수 백의 핏빛 환영들이 몸을 일으켰다.
[ 후회하게 해주마. ]
선혈의 마족이 발산하는 격.
마계의 틈으로 오면서 그녀의 격 또한 강해져 있었다.
인간의 수준으론 이 격을 감당하는 것만으로 피를 쏟아낼 터.
분명 그랬어야 했는데.
[ 하······. ]
앞으로 나선 차가운 눈매의 남자.
그는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격을 받아내고 있었다. 그런가하면 살기를 띄고서 검을 들어 올리기까지 한다.
이것이 인간이 수준이 맞단 말인가?
[ 뭐가 됐든 상관 없다. 전부 죽여주마. ]
선혈의 마족이 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핏빛의 기둥이 그녀의 등을 떠밀어줬다.
고오오오—!
짙은 마기가 그녀의 붉은 검에 깃들었다. 마기는 아지랑이를 만들어내는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피처럼 액화되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문명계에서 감당할 무력이 아닌 것만큼은 명확했다.
물론 이지한 또한 물러설 이유가 없었다.
타재간파를 통해 모든 능력을 개방한 상태.
역전의 검을 들고서 전속력으로 달려들었다. 이윽고 두 개의 검이 충돌했다.
콰아아앙!
강렬한 충격파가 일대를 뒤덮었다. 호수의 강바닥이 드러나고, 허공으로 높이 떠오른 핏물이 비가 되어 떨어졌다.
[ 아무리 대적자라고 한들 고작해야 인간! 운명을 얌전히 받아들여라! ]
강렬한 격을 담아 소리쳤다. 뒤쪽에 있는 인간 두 놈이 비틀 거릴 정도로 격의 차이가 났지만.
이지한은 굳건하게 검을 밀어 붙였다.
"개소리가 따로 없군."
콰아앙! 콰앙!
검을 나누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선혈의 마족의 미간이 좁혀지고 있었다.
선혈의 마족은 자신의 패배를 생각하지 않았다. 순수한 힘만큼은 자신이 인간을 압도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당연했다.
인간과 마족의 차이는 그러한 것이었으니까.
더욱이 게이트에서 본 대적자의 움직임 자체는 특별할 건 없었다.
그러나 이곳 마계의 틈에서.
콰아앙!
이 대적자의 공격은 차원이 달랐다.
이지한이 휘두르는 한 방, 한 방이 묵직하게 전해졌다. 검을 부여잡은 선혈의 마족의 손에서 피가 흘러나올 정도였다.
쩌저적!
심지어는 그녀가 쥔 무기 위로 거미줄 같은 균열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쯤 되자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 무슨······. ]
잠깐의 뒷걸음질.
그것이 선혈의 마족을 더욱 불리하게 만들었다.
핏빛 기둥을 가르는 푸른 섬광. 동시에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수십 발의 매직 미사일. 목룡이 내뿜는 브레스.
콰아아앙—!
강렬한 충격이 선혈의 마족을 덮쳤다.
[ 크아아악! ]
호수의 땅바닥을 헤짚으며 밀려난 자리에 크레이터와 같은 거대한 웅덩이가 생겨났다.
[ 이럴 수는 없다······. ]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선혈의 마족.
이래선 마치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아지고 있는 게 아닌가.
······매직 미사일이라니.
그런 기초 마법으로 자신을 상대한다는 것 자체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주르륵.
그녀의 눈가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피로서 자신을 강화하는 주술 '귀화'였다.
[ 나를 능멸한 대가를 똑똑히 치르도록 해주마. ]
강대한 마기가 그녀의 몸에서 발산되어 퍼져나갔다. 호수에 존재하는 모든 핏물이 그녀를 향해 모여든다.
그리고 다음 순간.
드드드드······.
마기에 의해 형성된 거대한 핏빛 해일이 인간들을 향했다.
* * *
능멸은 무슨.
최선을 다하는 중이다.
내가 쓸 수 있는 마법 스킬이 매직 애로우 뿐이라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겠다. 아니면, 전투 시작할 때 토스트를 먹어서 그랬을 수도 있고.
어쨌든 선혈의 마족이 분노만큼은 진짜였다.
"어, 어떻게 해요?!"
30m가 넘게 형성된 거대한 해일이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촤아악! 촤악!
뒤쪽에서 핏빛 환영들을 상대하던 신태양이 달려왔다.
"스승님! 이건······."
"뚫어낸다."
나는 역전의 검을 들어 올렸다.
이만한 수준의 대규모 공격이다. 선혈의 마족도 분명 상당한 마기를 투자한 공격임에 틀림 없다.
'그렇다면 더더욱 몰아칠 때다.'
나는 다가오는 해일을 향해 뛰어들었다.
『 각성 스킬 '일자베기 Lv.12'를 발휘합니다. 』
땅과 하늘을 잇는 한 줄기의 푸른 직선.
콰아아아아—!
그렇게 생겨난 선에 의해 해일은 좌우로 나뉘어 갈라졌다.
내 몸에서 순식간에 체력과 마력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진다. 그러나 멈춰있을 시간은 없다.
『 동료 엘리스가 '시간조작 Lv.5'를 발휘합니다. 』
빠르게 다가온 엘리스가 내 등을 밀어줬다. 사라진 체력과 마력이 순식간에 복구되며 몸에 힘이 감돌았다.
"사부님, 저는 이제 끝이에요······."
비틀거리는 엘리스를 신태양이 부축했다.
'충분하다.'
엘리스의 역할은 여기까지다.
이 뒤는 내 손에 달렸다.
홍해처럼 갈라진 해일을 뚫고서 나는 선혈의 마족을 향해 달려갔다.
신아람의 광화.
신태양의 오러블레이드.
진세아의 신속.
스킬들은 활성화 되어있다.
[ 이 자식······! ]
콰과과과—!
내 돌진을 막기 위해 선혈의 마족이 날린 수백 개의 핏빛의 칼날이 나에게 쇄도해 왔다.
『 스킬 '초공간인지 Lv.10'을 발휘합니다. 』
공간을 자유자재로 파악하는 윤서현의 재능이 내 손에 있다.
그게 끝이 아니다.
5일 간의 훈련.
그동안 나에게도 큰 진전이 있었다. 신태양이 새로운 재능 개화? 그것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타재간파를 통해 엘리스의 재능 또한 내 손에 들어왔다는 것.
나는 타재간파의 새로운 항목을 발휘했다.
『 스킬 '초시간인지 Lv.10'을 발휘합니다. 』
초공간인지가 해당 시점의 공간을 보여준다면,
초시간인지는 짧은 미래와 과거의 가능성까지 예측하게 해주는 능력.
『 두 개의 스킬이 통합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
『 해당 스킬을 통합하시겠습니까? 』
그 두 능력을 합친다면.
『 특수 스킬 '초시공인지 Lv.10'을 획득하셨습니다. 』
더 이상 내가 피할 수 없는 공격은 없다.
콰과과과—!
휘몰아치는 수백 개의 칼날이 다가올 위치와 방향이 감각적으로 이해 되기 시작했다. 공격의 뒤에 숨어 있는 선혈의 마족까지도 생생하게 그려진다.
왼쪽, 오른쪽 또다시 오른쪽.
가볍게 피하며 놈을 향해 달려나간다.
[ 도대체, 네 놈은 정체가 뭐냐······! 인간일 리가 없어. ]
경악한 선혈의 마족이 필사적으로 마기를 쏘아대지만 그 중 어느것 하나도 나를 스치지 못했다.
콰아앙! 콰앙!
애꿎은 땅이 비산하며 허공에 흩뿌려질 뿐이다.
베어내고, 잘라내며 쉼 없이 전진한다.
상위 마족의 격으론 나를 막아내지 못한다.
[ 죽어, 죽으란 말이다! ]
녀석은 마기가 전부 떨어졌는지 직접 검을 들어 올렸다.
콰아앙!
선혈의 마족의 검과 내 검이 맞부딪혔다. 그녀의 검 위에 새겨진 실금이 눈에 들어 온다. 아까 전 내 공격으로 생긴 균열이었다.
나는 다시 크게 검을 휘둘렀다.
『 스킬 '리미트 해제 Lv.10'을 발휘합니다. 』
『 일시적으로 레벨이 40 상승합니다. 』
이번에는 좀 더 강하게.
『 한계돌파에 의해 2배의 능력치 증가량이 적용됩니다. 』
『 이계 규율 칭호에 의해 능력치가 3배가 됩니다. 』
그리고 증가한 능력치는 이계 규율의 영향을 받아.
『 칭호 '마계의 재앙'을 발휘합니다. 』
다시 1,000%의 데미지가 된다.
콰아앙!
핏빛의 칼날이 균열을 따라 조각 조각 나뉘어졌다. 허공으로 비산한 조각들을 바라보는 선혈의 마족의 눈이 허망하다.
[ 이······. 이······! ]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선혈의 마족.
이제 놈과 나 사이를 방해하는 장애물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역전의 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전 세계의 어떤 헌터보다 강하다.
『 각성 스킬 '일자베기 Lv.13'을 발휘합니다. 』
전에 없이 강렬한 섬휘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 * *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빛 기둥.
그것은 마계의 틈새에 존재하는 모두가 확인할 수 있었다.
기분 좋게 몰아치는 시원한 바람이 마기를 걷어내며 세계 전체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양을 치고 있던 양치기 소년은 자신의 모자를 붙잡았다. 줄곧 기절해 있었던 산양은 몸을 떨었다.
"설마, 아까 그 분들이······."
술에 취해 있던 경비대장은 더더욱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대, 대장! 나와보세요! 지금 서쪽에서······!"
"미, 미친······. 정말로 마녀를 토벌했단 말인가······?"
언젠가 마족에 의해 침공 당해 역사마저 잃어버린 초목의 세계.
그곳에 한줄기 희망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저기는 마녀가 있는 장소잖아."
"무슨 일이 일어난거야······?"
"뭔가가 바뀌었어."
아무런 일면식이 없던 사람들마저 그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니 그 자리에서 직접 모든 것을 눈에 새긴 신태양은 기절초풍할 수 밖에 없었다.
마족을 상대하는 스승의 모습.
기적에 가까운 무위.
"하······."
그저 실소를 내뱉는 게 최선이었다. 뒤늦게 몰아치는 후폭풍을 온 몸으로 받아내는 신태양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맺혔다.
'스승님, 이건 진짜 굉장하잖아요.'
스승이 나아간 길.
그건 더 이상 벽이라기보단 하나의 가능성이었다.
자신도 더 강해질 수 있다는 의미였다.
신태양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이 뚜렷이 보이고 있었다.
엘리스 또한 눈을 빛내고 있었다. 마력 고갈에 가까운 상태였지만, 그게 상관이 없을 정도였다.
"정말로 운명의 사람······."
예언 하나에 의지에 한국까지 날아온 보람이 있었다. 5일 간의 훈련 동안에는 뭔가가 잘못 되었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 그런 생각은 싹 사라져 있었다.
'사부님을 반드시 붙잡아야 해.'
엘리스는 속으로 다짐했다.
* * *
상위 선혈의 마족은 죽었다.
나는 검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압도적인 승리였다. 운이 좋았다.
녀석이 마계의 틈으로 도망쳐 준 게 오히려 기회가 되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좀 더 처절한 싸움이 됐을 거다.
'한편으로는 아쉽군.'
처절한 싸움에선 오히려 얻어가는 게 있기 마련이었으니까.
그러나 압도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 상위 선혈의 마족을 처치하셨습니다. 』
『 이계 규율이 업적을 정산합니다. 』
내 주변으로 무수한 알림이 떠올랐다.
내 오른손에 차고 있던 초월의 팔찌 위로도 황금빛 글자가 새겨졌다.
『 첫번째 초월의 길에 어슴푸레한 빛이 스며듭니다. 』
'그러고보니 이게 있었지.'
이계 규율의 보상으로 획득한 아이템.
'초월의 길이라······.'
상위 마족을 잡는 것으로 그 길이 열렸다고 보면 되는 걸까. 뭔가 점점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은 확실히 알겠다.
팅!
『 해당 업적을 정산합니다. 』
- 업적명 : 상위 선혈의 마족 처치
- 기록 : 성장력 SSS, 데미지 SSS, 회피 SSS······.
- 종합평가 : SSS
『 해당 업적의 달성 가능성은 0%입니다. 』
『 행성멸망급 인과 조정에 해당합니다. 』
『 해당 기록이 아카식레코드에 영원불멸 기록 됩니다! 』
거창한 메시지들이 주르륵 떠오른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 납득하기 어렵다. 업적의 달성 가능성이 0%에 불과하는 것도. 나는 이렇게 상위 마족을 처치하지 않았는가.
'대체 어떤 기준으로 정해지는 건지.'
『 극소수의 초월자들이 당신에게 큰 관심을 가집니다. 』
어쨌거나 선혈의 마족을 잡았다고해서 내가 해야할 일은 끝나지 않는다.
프로젝트 아포칼립스의 완전 저지.
그걸 위해선 또다른 상위 마족인 '나약의 마족'을 처치해야 한다.
선혈의 마족이 당했으니, 녀석들의 경계도 한층 강해질 거다.
『 보상을 지급합니다. 』
이번 보상이 더욱 값진 이유였다.
파지직, 파직!
『 이계 규율이 해당 보상을 지급하기 위해 시스템에 간섭합니다. 』
오색찬란한 빛이 미친듯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 '무재조정 : 타재간파'의 새로운 능력이 개방됩니다! 』
131화 오버 더 레전더리(1)
『 새로운 장(章)이 추가됩니다. 』
『 타재간파의 서(書) : 제 2장 』
- 타인에게 깃든 가능성의 '결말'을 엿볼 수 있습니다.
『 타재간파의 서(書) : 이계 규율의 장 』
- 이제 동료가 아닌 타인의 재능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메시지를 읽어내려가는 내 눈이 가늘어졌다. 시야가 흐릿해졌다. 각성 기술과 일자베기의 후유증이 동시에 밀려왔다.
'으윽.'
일단은 포션부터 마셨다.
본질베기를 사용한 뒤라 수명도 감소했을 거다. 감소하는 수명의 양이 어느 정도인지 미래의 엘리스는 말해주지 않았다.
그 양이 적다면 내가 무리하게 사용할 것이고, 그 양이 많다면 너무 소극적으로 될 수도 있다나 뭐라나.
'당장은 불가능하지만 엘리스의 능력이 성장하면 깎여나간 수명도 복구할 수 있을테니 괜찮다.'
난사하는 것까진 어렵더라도 중요한 순간에 수명을 희생할 가치는 충분했다.
'일단은 능력부터 확인하자.'
두 가지 능력이 추가 되었다.
백문이 불여일견.
'직접 사용해보는 게 좋겠지.'
나는 멍하니 서 있는 신태양을 향해 타재간파를 발휘했다.
『 해당 존재의 가능성을 확인하시겠습니까? 』
녹색 빛의 기운이 신태양을 향한다. 녀석의 신체를 한바퀴 맴 돈 녹색의 빛이 내 앞에서 메시지 창으로 변화했다.
『 신태양 - 저주 받은 검성(SSS) 』
『 해당 인과의 실현 가능성은 96%입니다. 』
'오······.'
신태양이 미래에 도달하게 될 경지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는 기능이었다.
'근데 저주 받은 검성이라니.'
타재간파의 능력으로 확인했던 신태양의 재능은 총 세 개였다.
오러 블레이드, 저주 받은 재능, 리미트 해제.
그 중 하나가 저주 받은 재능이었다. 정확히 무슨 재능인지 몰라 대신 리미트 해제를 개화했던 건데.
미래의 신태양에게서 딱히 저주 받았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내가 모르는 미래로 향하고 있다는 건가.'
일주일 동안 너무 많이 굴렸나 싶어진다. 다만, 저주 받았다는 수식어가 마냥 나쁘다고는 볼 수 없다.
저주류의 스킬도 사용하기에 따라 그 효용이 달라지는 법.
'결국엔 구를 운명이란 걸지도 모르지.'
내가 쳐다보자 신태양이 불안한지 내게 물었다.
"스승님, 하실 말씀이라도······?"
"아니, 딱히 없어."
그러면 엘리스의 미래는 어떨까.
『 A급 헌터 엘리스의 가능성을 간파합니다. 』
『 엘리스 스튜어트 - 시간 조율자(SSS) 』
『 해당 인과의 실현 가능성은 93%입니다. 』
이변 없이 평범하다.
어쨌든 타재간파의 서 제 2장의 능력은 이러했다.
'이런 식으로 사용되는 거란 말이지.'
단순하지만 활용도가 높은 능력이었다. 사실상 미래 예지급의 스킬이나 다름 없다.
'굉장한데.'
각 영웅들의 성장 방향성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을 뿐더러, 다른 사람들 중에 재능을 가진 사람을 골라낼 수도 있는 거였으니까.
내가 확인한 미래에서 활약한 것은 최후의 10인이 전부였다.
'이 세계에는 아직 만나지 못한 재능을 가진 헌터들이 분명 존재할 거다.'
어쩌면 최후의 10인을 뛰어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고.
스윽.
나는 다시 메시지 창으로 시선을 옮겼다.
'다음 능력은······.'
『 타재간파의 서(書) : 이계 규율의 장 』
- 이제 동료가 아닌 타인의 재능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아군말고도 다른 존재의 재능을 간파할 수 있다는 건데.
'설마, 적에게도 사용이 가능하단 건가······?'
이전에도 시험삼아 적에게 사용해 본 적이 있었지만 발동 되지 않았다. 당장은 적이 없어서 시험해 볼 수 없겠지만.
'정말로 그게 가능하다고 해도······.'
적의 재능을 개화 시켜주는 건 위험 부담이 크지 않은가.
어쨌든 차차 확인해 볼 일이다.
시스템 메시지를 전부 닫은 그 순간이었다.
팅.
『 업적 달성 추가 보상을 수여합니다. 』
『 초월의 코인을 지급합니다. 』
내 앞으로 새하얀 빛과 함께 순백색의 코인 하나가 생성 되었다.
『 초월의 코인 』
- 최상위 존재들과의 거래에서 통용되는 화폐
나는 코인을 인벤토리에 집어 넣었다.
이걸로 두 개째다.
'이것도 쓸모가 있겠지.'
내 기록이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 되고 있다는 메시지와 함께, 몇 초월자가 내게 관심을 가진다는 알림이 있었다.
조만간 어떤 형태로든 만나게 될 확률이 높다.
"대적······. 자여······."
선혈의 마족이 죽은 자리에는 붉은 핏덩이 하나만 남아 있었다. 심장처럼 생긴 기이한 고깃 조각.
"아아······. 후회······."
희미한 목소리로 무언가 말하고 있었다. 중위 전투의 마족과 마찬가지로 그 잔재가 남아 있는 것이다.
덥썩!
뒤쪽에서 뛰어든 오르티마가 고깃덩이를 한 입에 먹어치웠다.
녀석의 몸이 붉게 빛나더니 퐁하는 소리와 함께 내 쪽으로 파편 하나를 내뱉었다.
『 신기한 재능의 파편 』
'이것도 순식간에 세 개가 모였군.'
용인족 하렐을 잡고 하나. 뱀파이어 드라구트를 잡고 하나. 그리고 상위 마족을 잡아서 마지막 하나.
미약한 재능, 특이한 재능 그리고 신기한 재능.
'파편의 합성은 김건에게 맡기면 되겠어.'
미래에서도 기계를 만들어뒀을 정도니 지금의 김건도 해낼 수 있을 거다.
"다들 고생했다."
"후우, 고생하셨습니다. 스승님."
마기의 끈적함이 사라지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 왔다. 검은 땅 너머의 푸른 초목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사부님, 이 세계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엘리스가 아쉬운 듯 내게 물었다. 그런 녀석의 손에는 빵이 들려 있다. 양치기 소년이 싸준 음식 중 하나였다.
"글쎄······."
당분간은 주인 없이 마계의 틈을 떠돌게 될 거다. 미래에서 전해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그랬다.
하지만 마족이 멸절 되지않는 한 어떠한 세계도 안전하지 않다.
그것은 우리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그러면 돌아가자."
그래도 선혈의 마족을 처치함으로써 일시적인 평화는 얻어냈다.
이 세계에도, 우리 세계에도 조금은 말이다.
* * *
"결국······. 결국 그런 식으로 일을 그르치는군."
어린 소년이 나이에 걸맞지 않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나약의 마족이었다.
그는 가죽 소파에 몸을 뉘인 채 씁쓸하게 허공을 응시했다.
선혈이 마족이 죽었다는 소식이 그의 귀에 들어가기까지 하루가 걸렸다.
"너무 상심하지 말게나. 선혈을 대신할 마족은 많으니 말일세."
그런 나약의 마족을 위로하는 노인.
단정한 수트에 깔끔하게 자른 수염이 그를 훨씬 젊어보이게 했다.
나약의 마족은 짜증이 난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어줍잖은 위로는 집어치워. 네 놈이 무능한 탓이잖나."
소파에서 일어난 소년은 테이블에 앉아 있는 노인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네 놈은 대적자의 행적 하나 찾아내지 못하면서 뭣하려고 문명계에 숨어 있었던거냐."
그는 짜증난다는 듯 테이블 위의 명패를 집어 던졌다. 바닥에 떨어진 명패가 산산조각이 났다.
"헌터 협회의 부회장씩이나 되면서 말이야. 인간 놀이가 참 즐거우셨겠어?"
"허허, 대적자를 찾아내지 못한 건 유감스럽게 생각하네. 아무래도 대적자의 동료가 협회에도 있는 것 같네. 정보는 아래쪽 직원들이 더 가까운 법이거든."
노인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손자의 응석을 받아주는 할아버지로만 보였겠지만, 그 정체는 상위 환상의 마족이었다.
환상의 마족은 협회의 부회장직을 맡고 있었다. 게이트 발생 초기에 인간 사이에 숨어들어 힘을 키워 온 것이었다.
"뭐, 자네가 이리 화내는 것도 오랜만에 보는군. 슬슬 화를 가라 앉히게. 그래도 프로젝트 아포칼립스에 차질은 없지 않은가."
"쯧,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예상보다 대적자의 힘이 강력하다. 게이트 내부의 모든 권속이 토벌 당한 거야 그렇다지만, 선혈이 그렇게 쉽게 당했을 리가 없어."
선혈의 마족은 마계의 틈에 고유 공간을 소유하고 있었다. 불리한 상황이 된다면 도망칠 정도의 사리분별은 하는 놈이었다.
그리고 마계의 틈에서 선혈의 마족이 패배하는 그림은······.
나약의 마족이 아무리 계산해도 나오지 않는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거냐.'
고작 인간이.
무슨 수로.
나약의 마족의 입에서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그런 소년을 바라보는 노인의 입가엔 지긋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자자, 자네와 내가 힘을 합친다면 대적자도 충분히 제거 할 수 있을 걸세."
"말은 잘하는군. 모르긴 몰라도 그렇게 말한 마족들이 전부 죽었다는 건 알겠군."
"크하하, 재밌는 농일세."
노인은 한동안 배를 잡고 낄낄 웃더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의 입가엔 미소가 맺혀 있었다.
"아니지, 지금까지와는 다를걸세. 협회의 부회장이라는 지위를 이용하는 이는 없었을테니. 지도자의 어리석은 판단은 헌터들을 사지로 내몬다. 이런 시나리오 어떻겠는가?"
그리 말하는 노인의 눈동자가 섬뜩하게 번뜩였다.
* * *
게이트를 공략하고 하루가 지났다.
신태양, 엘리스와의 훈련 기간인 일주일 동안 꽤 많은 일이 있었다.
- 은빛의 날개 길드장 천상혁 돌연 사퇴
- 은날의 새로운 미래 '윤지은'
- 부마스터였던 그녀가 마스터로······.
은빛의 날개 길드장이었던 천상혁이 물러났다.
따라서 본래 부길드장이었던 윤지은이 길드장으로 올라섰다.
S급 게이트 최초 공략의 공로.
적절한 시기의 지원과 현명한 판단.
미래를 책임질 인재들을 등용한 선구안까지.
윤지은이 길드장이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른데.'
본래대로라면 꽤 길드장에서 오래 버티다가, 악재가 거듭되고 나서야 사퇴를 결심하는데. 이번 공략의 충격이 꽤 컸던 모양.
'그리 나쁜 사람은 또 아니었지.'
나름대로 최선의 판단을 내리려고 했으나, 그게 잘 되지 않았다는 걸 확실히 인지한 모양이었다.
어쨌든 윤지은이 길드장이 되었다.
"지한씨, 어서와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한층 짙어진 다크 서클의 윤지은이 두 팔 벌려 나를 환영해줬다. 그럼에도 그녀의 미모를 가리지는 못했지만.
"굉장히, 굉장히 바빠졌어요."
길드장이 되며 부길드장이 잠시 공석이 되었다. 두 업무가 윤지은에게 쏟아지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단 게 그녀의 설명이었다.
"전부 지한씨 덕분이에요.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세요. 정말로요! 여기가 지한씨 집이다 생각하고 편하게······. 아, 또 연락이 왔네요. 잠시만요."
돈도 들어와 있었다.
지난번 S급 게이트 고용 비용으로 내게 지급된 돈이 약 60억이었다.
'부자 됐네.'
덕분에 현재 내가 소유한 현금은 약 110억 원. 김건에게 아이템 제작 비용으로 50억을 맡겼는데도 이 정도였다.
워낙 계좌에 찍힌 숫자가 크다보니 현실 감각이 없다.
'아이템에 재투자 할 걸 생각하면 이것도 많은 돈은 아니지.'
다시 한 번 느끼지만 비빔면 사먹을 돈이 없었던 게 얼마 전이다. 사람 욕심이 끝이 없는 걸까.
그렇게 살짝 여운에 젖어 있는 찰나.
"사부님!"
뒤쪽에서 나를 발견한 엘리스가 달려왔다. 엘리스 또한 내 소개로 은빛의 날개에서 머무르고 있다.
- 네? 제가 있던 길드요? 저 엘리스. 오늘부로 과거는 잊고 사부님을 위해 올인 할거에요! 대한민국에 뼈를 묻겠습니다!
어차피 스카웃 해올 생각이기는 했지만, 그 각오가 남다르다. 꿈 속에서 받았다는 예언에 대한 신뢰가 정말 높은가보다.
엘리스를 향해 손을 들어 올리는 순간이었다.
휘이익!
뒤쪽에서 강한 풍압이 느껴졌다. 동시에 날아차기가 날아왔다.
나는 가볍게 몸을 틀어 피해냈다.
쿠당탕!
"으윽, 왜 피해요······."
진세아가 허리를 붙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넘어지면서도 끝까지 양 손에 든 아이스크림을 사수하고 있었다. 은빛의 날개 복지 시설이 좋기는 한가보다.
"그때 뵀었던 분이네요! 사부님하고 아는 사이인가요?"
마침 엘리스가 진세아를 알아봤다.
"아, 그때 그 귀여운 외국인! 아니지, 그게 아니라."
다시 진세아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일주일 동안 나 두고 어디 갔었던 거에요! 나도 데려갔어야죠!"
"······그 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있어?"
"와, 와우······."
옆에 있던 엘리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손에 든 버블티도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지난 일주일 간의 훈련이 떠오른 모양.
그 정도였나.
진세아도 엘리스와 내 눈빛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나보다.
"뭐, 뭐에요. 둘 다 왜 그런 눈으로 봐요?"
어차피 다음 공략을 위해서는 진세아가 필요한 상황이다. 게다가 진세아에게도 리미트 해제의 재능이 잠들어 있으니.
"그러면 훈련 좀 할까."
상위 나약의 마족이 움직이기 전까지.
해야 할 일은 많다.
"아싸."
진세아가 기뻐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물론 그 말이 후회로 바뀌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132화 오버 더 레전더리(2)
선혈의 마족을 죽였으니 마족들의 경각심도 커질 것이다.
'지금까지는 인간을 무시하는 놈들이 대부분이었지.'
놈들은 인간을 그저 지배해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었다. 애초에 나에게 죽는 놈들 모두 자신의 패배를 예상하지 못했다.
'내 존재를 인지하기 시작했다.'
마족들은 나를 대적자라고 불렀다.
'신태양과 계속해서 착각한 걸 보면 나에 대해 자세히 아는 건 아니고.'
백묵이 계속해서 정보를 차단해준다고 보는 게 맞겠지.
본래대로라면 소리 소문 없이 진행 되었어야 할 놈들의 침략 활동이 나에 의해 하나 둘 저지되고 있다.
내가 가진 미래에 대한 지식.
그 덕에 놈들의 계획을 한 발 앞서 무너뜨릴 수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 진행 될 일들을 생각하면······.
'역시 나 혼자로는 부족하다.'
전 세계에 닥친 마족의 침공을 막아내려면 인류 자체가 강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그 첫걸음은 대한민국의 전력을 강화하는 것.
"그래서 지금 어디가는거에요?"
"아이템 제작자 김건. 이번에 은빛의 날개가 새로 영입한 장인이야."
나는 진세아, 엘리스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띵.
은빛의 날개의 건물에서 두 개의 층이 통째로 아이템을 제작하는 공방이었다.
"우와, 여기는 처음 와 봐요. 이런 곳이 있었구나."
"대한민국의 장인들이 만드는 아이템을 직접 볼 수 있다니······!"
엘리스가 눈을 빛내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딱히 대한민국이라고 아이템 만드는 게 다를 것 같지 않다만.
건물 내부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 장소였다.
그 중 한켠에 있는 구역으로 향했다. 각 구역은 벽으로 분리되어 있어 장인 거리를 연상케 한다.
"어, 어! 이지한씨!"
용접 헬멧을 끼고 있던 김건이 나를 발견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주변에는 각종 마수의 부산물들이 널려 있었다.
김건은 헬멧을 벗으며 나를 반겼다.
"오셨군요! 아이템은 완성해 뒀습니다. 그보다 정말 감사해요. 여기 진짜 천국이에요. S급 게이트에서 회수한 희귀 소재를 마음껏 만질 수 있다니. 크윽, 처음부터 끝까지 받기만해서 어쩌죠. 정말, 정말······."
흥분해서 다가오는 김건을 나는 슥 밀어냈다.
"만족하신다니 다행이네요. 그보다 말씀 드렸던 아이템은 어떻게 됐나요?"
"아, 그거 말인데요."
내 말을 들은 김건이 심각한 표정으로 미간을 좁혔다.
"뭔가 문제라도 생긴겁니까?"
"아, 아뇨······. 이걸 문제라고 해야 하나······. 잠시만요, "
새로운 장비를 제작해 달라는 의뢰 비용으로 50억을 맡겼었는데.
설마 뭔가 잘못 된 건 아니겠지.
"주현양! 창고 좀 열어줄래? 그것 좀 가져와줘."
"네네, 갈게요!"
지난번에 봤던 직원이 공방에서 나와 황급하게 나와 창고를 열고 들어갔다. 김건은 머리를 긁적였다.
"지한씨 전용 아이템을 만들던 와중 은빛의 날개로 이사하는 기간이 겹쳐져서요······."
내가 묻는 순간, 공방에서 여직원이 낑낑대며 갑옷을 들고 나왔다. 검은색 철제 갑옷이었다.
김건은 갑옷을 받아서 들어올렸다.
"이사오고 나서 더 좋은 장비로 하다보니까······. 이런 게 나와버렸습니다."
갑옷을 구성하는 흑색의 금속이 매끈하게 빛나 세련된 느낌을 준다. 그 위로 검은 기운이 희미하게 넘실 거린다.
"우와······."
"이, 이걸 직접 만드셨다고요?"
엘리스가 못 믿겠다는 듯 나와 김건을 번갈아봤다. 현시점에서 레전더리 아이템을 제작할 수 있는 제작자는 세계적으로 손에 꼽는다.
"대, 대한민국에는 이런 분이 평범하게 있는 건가요······?"
"그렇게 대단한거야?"
"네, 무척이나요. 은빛의 날개가 이런 분을 채용하셨을 줄이야. 진작에 기사가 났어도 이상하지 않은데······."
기인 김건.
『 대상의 가능성을 파악합니다. 』
『 김건 - 신이 내린 마도공학자(SSS) 』
미래에서 최후의 10인이 거주하는 기지를 건설한 것도 그다. 이른 시기에 그에게 투자한 것은 성공적이었다.
그리고 그가 만들어낸 아이템은 확실히 범상치 않은 물건이었다.
『 묵빛 마기가 서린 풀 플레이트 메일(레전더리) 』
- 방어력 : 200
- 마기 복구 : 신체적 피해를 서서히 복구합니다.
- 마기 침습 : 갑옷의 마기가 사용자의 정신을 장악합니다.
- 다수의 스킬이 인챈트 되어 있습니다. (더보기)
'무슨 능력치가······.'
200이란 방어력도 기존의 레전더리를 상회하는 수치였다.
특히 마기 복구라는 효과.
'이건 마족들이 사용하던 거잖아.'
팔나 다리가 잘려도 그대로 수복하던 걸 똑똑히 기억한다.
'부산물로 마족의 마정석을 많이 넘겨 주기는 했지만······.'
이런 레전더리를 뽑아낸 것은 순전히 김건의 능력이었다.
그러나 김건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이건 실패작이나 다름 없어요. 여기 마기 침습이라는 효과. 이것 때문에 이건 입을 수가 없거든요."
"마기 침습이라······."
갑옷의 마기가 정신을 장악한다고 쓰여 있다.
"몇 번이나 거듭해서 입어 보려고 했지만 도저히 안되겠더라구요. 시험삼아 길드의 S급 헌터 몇 분에게도 시착을 부탁드렸는데······. 3분을 넘기는 분이 없었어요."
"설마 폭주하고 그런 건가요? 완전 위험하잖아요!"
진세아의 호들갑에 김건이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 아뇨. 활동이 불가능한 거지 폭주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런 아이템이었으면 저 영웅 협회에 끌려 갔을 거에요."
"그러면 내가 한 번 도전해 볼래요! 정신력하면 나거든요!"
진세아가 다짜고짜 갑옷을 몸에 걸쳤다. 착용 인챈트 덕분에 갑옷은 녀석의 신체 사이즈에 맞게 줄어들었다.
그리고 진세아는 곧바로 주저 앉았다.
"으아아······."
"괘, 괜찮으세요?"
"아이요······."
몸을 가누기 힘든지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워버렸다.
애초에 진세아의 멘탈은 그리 강한 편이 아닐 거다. 멸망한 세계에서 이 녀석은 환세의 도둑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기인이었다.
쑤욱.
나는 진세아가 입고 있는 갑옷을 벗겼다. 갑옷이 없어졌음에도 진세아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떨고 있었다.
"으엑······."
엘리스가 시간을 되돌려 주고 나서야 겨우 일어났다.
"주, 죽는 줄 알았네. 이거 진짜 위험하잖아요! 오빠 그거 당장 가져다 버려요!"
"이 좋은 걸 왜 버려."
나는 곧바로 갑옷을 장착했다.
"사, 사부님!"
착용하자마자 끈적하고 불길한 기운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 오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런 기분은 정말 잠시 뿐이었다.
『 스킬 '정신력 Lv.11'을 발휘합니다. 』
『 레어 스킬 '불굴의 정신 LV.11'을 발휘합니다. 』
『 유니크 스킬 '지고의 정신 Lv.2'을 발휘합니다. 』
내 스킬들이 마기 침습을 깔끔하게 몰아냈다. 오히려 침습이 더 강하지 않은 게 아쉬울 정도다.
지고의 정신의 레벨을 올릴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아주 좋네요. 잘 쓸게요."
"저, 정말로 괜찮으신건가요······?"
믿기지 않는지 두 눈을 깜빡이는 김건. 나는 시험삼아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봤다. 걸리는 부분 없이 쾌적하다.
"네. 괜찮습니다. 완벽하네요."
게다가 김건의 장비는 성장형이다.
'여기서 더 강해질 수 있다니.'
집에 돌아가서 마력 소나무 진액에 장비를 담구면 진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그 사실을 슬슬 밝힐 때가 되긴 했다.
"이상하다. 저건 제정신으로 견딜 수가 없는데······."
"역시 사부님!"
"······."
나는 두 사람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내 아이템만 받으려고 여기에 온 게 아니다.
"이 두 명의 장비를 우선적으로 제작해주시죠."
김건의 실력이 소문나기 전에 미리 주문을 맡겨 놔야 했다.
"사부님······!"
"진짜요······?"
감격하는 두 사람.
뭔가 착각하나본데 그렇게 좋아할 건 없다.
내 돈 아니다.
김건은 이제 은빛의 날개 소속이다. 그리고 너희는 은빛의 날개 길드원이니까 아이템을 받는 게 당연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떠나기 전 나는 김건에게 타재간파를 발휘했다.
『 대상 김건의 재능 '오버 더 레전더리'를 선택하셨습니다. 』
『 해당 재능의 개화 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
『 레전더리급 아이템 제작 : 0 / 50 』
지금부터 50개의 레전더리.
나는 김건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파이팅입니다."
앞으로 더욱 바빠질 예정이다.
대한민국의 전력을 크게 높여 줄 유일무이한 제작자.
그게 김건이 될테니.
* * *
다음날.
한적한 지하철역.
나는 새로운 갑옷을 입고 나왔다.
『 묵빛 마기가 서린 풀 플레이트 메일(레전더리) Lv.1 』
성장형 아이템으로 만들어놨다. 오르티마가 군침을 흘리며 노려보는 것을 막느라 고생 좀 했다.
'먹인다면 레벨 더 높이 올릴 수 있겠지만 오르티마를 자유롭게 쓸 수가 없으니까.'
착장 인챈트 덕분에 겉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상당히 만족스럽다.
A급 게이트 앞에서 기다리고 있자니, 진세아가 엘리스가 얼굴을 비췄다.
"오늘부터 훈련이라 이거죠!"
"잘 부탁드립니다."
뒤이어 기둥 뒤에서 쭈뼛쭈뼛 한 사람이 더 나왔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성녀 채아람이었다.
그녀의 재능은 이 중에서도 단연 탑급이다. 무려 최후의 5인 중 한 사람이니까.
이 세 사람의 현재 등급은 A급.
'나약의 마족이 움직이기 전까지 S급으로 올려 둬야 한다.'
이번에 나타날 게이트는 지금까지의 게이트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만큼 각자의 역량이 중요하다는 의미기도 하다.
'전체적으로 다들 어리군.'
채아람도 고등학생이다. 진세아, 엘리스도 그 정도고.
뭐, 나이는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재능이니까.
"그런데 하나만 질문해도 되나요?"
채아람이 손을 들어올렸다.
"이지한 헌터님은 은빛의 날개 소속이 아니라면서요? 저를 영입한 건 추천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해도, 제 훈련까지 맡아서 하는 건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채아람다운 딱 부러진 지적이었다. 나는 엘리스에게 손짓했다.
"자자, 일단 들어가서 생각하죠! 사부님께 배우고 나면 생각이 달라지실 거에요!"
"자, 잠깐만요. 엘리스······!"
채아람과 엘리스가 먼저 게이트 내부로 들어갔다.
"그러고보니 왜 안들어와요?"
"할 일이 많아서."
나는 가볍게 답해주고 게이트를 향해 발을 내딛었다.
『 A급 게이트 : 한이 서린 공동묘지 』
공포 영화에 나올 법한 공동묘지가 시야에 들어왔다. 검푸른 하늘 위에 떠오른 달. 그 아래로 보이는 수 천 개의 묘.
드드드······.
묘 앞의 땅이 들썩이더니, 앙상한 손 뼈가 빠져나왔다. 땅을 딛고 올라오는 수 천 마리의 해골들.
진세아가 팔을 휙휙 돌리며 앞으로 나섰다.
"해골 정도는 문제 없죠."
녀석은 빠르게 해골들을 향해 달려 갔다. 진세아의 손이 닿은 순간, 해골의 골반이 사라졌다.
진세아가 뼈의 일부를 훔쳐낸 것이다.
무게 중심을 잃은 해골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녀석이 달려나가는 길 위로 해골들의 잔해가 순식간에 쌓였다.
'진세아는 절대은밀기동과 리미트 해제를 개화해야 한다.'
엘리스 또한 양 손에 권총을 들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콰과과과—!
엘리스의 총구에서 쏘아진 금빛 탄환이 해골들의 머리를 깨부쉈다.
'엘리스의 재능에도 리미트 해제가 존재하고.'
두 사람의 리미트 해제는 신태양과는 다르다. 두드려 패는 야만적인 방법은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
각자에게 맞는 재능 개화 방법이 존재한다.
진세아는 더 수준 높은 아이템을 강탈하는 것.
엘리스는 극한까지 시간 조작을 끌어 올릴 것.
기회만 주어진다면 언제든지 개화할 수 있는 재능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채아연.
『 채아연의 재능 '절대 신성 부여'의 개화 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
『 언데드류의 마수 처치 : 0 / 10000 』
『 네임드 언데드 처치 : 0 / 1 』
언데드에 대한 절대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사기적인 재능.
이곳 한이 서린 공동묘지는 사실상 채아람을 위한 게이트였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이거다.
"그러면 시작해 볼까."
나 또한 검을 들고 눈 앞의 해골을 향해 달려 들었다.
콰드드득!
역전의 검이 열 마리의 해골을 동시에 쳐부수는 순간.
『 묵빛 마기가 서린 풀 플레이트 메일에 막대한 양의 경험치가 깃듭니다! 』
『 장비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
『 장비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
···
..
『 장비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
무수한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133화 오버 더 레전더리(3)
공동묘지의 끝자락.
무수한 뼈가 쌓여 만들어진 언덕 위.
우우웅.
검은 게이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양 이마에 검은 뿔을 가진 금발의 남성 마족. 그는 주위를 두리번 거리면서 게이트 빠져나왔다.
검은 보자기로 감싼 물건을 조심스레 든 채로.
혹시라도 물건이 어떻게 될까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었다.
"후우······. 이거 쫄리는데."
"마의 권역을 다스리는 분이시여, 기다리고 있었나이다."
"아이씨, 깜짝이야. 크흠."
그런 그를 맞이하는 것은 목없는 기사 듀라한이었다. 뼈만 남은 말 위에 올라탄 듀라한의 검은 갑옷이 달빛에 번뜩였다.
마족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듀라한에게 물었다.
"너, 이름이 뭐라고 그랬지?"
"제올입니다. 예언의 마족께서 내리신 명에 따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 그래. 별 일 없지? 제발 없어라."
"그것이······."
금발의 마족의 말에 듀라한이 잠시 망설이다 답했다.
"게이트에 침입한 인간들이 있지만, 크게 신경쓰지 않으셔도 될겁니다. 일반 공략자에 불과합니다."
"정말이지? 쯧, 최근 마계의 분위기도 흉흉하단 말이야. 오죽하면 예언의 마족께서 우리한테 직접 명령을 내리셨겠어."
"걱정이 과하십니다."
듀라한의 말에 금발의 마족이 기겁했다.
"과하기는 무슨! 상위 마족인 선혈의 마족도 죽었단 이야기 못 들었어? 예언의 마족께서도 예상하시지 못한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어. 대적자가 당장 여기에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다니까?"
중위 반전의 마족.
그는 마계에 존재하는 무기의 일부를 문명계로 가져오는 중이었다.
예언의 마족이 프로젝트 아포칼립스를 위해 급하게 파견한 인물이었다.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하지만 게이트에 들어 온 이들의 수준은 그리 높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도 있고요."
듀라한은 손에 검으로 공동묘지 방향을 가리켰다. 드넓게 펼쳐진 땅 위로 1만에 가까운 해골들이 바글대고 있었다.
"그래. 괜찮겠지. 하기야, 아무리 대적자가 이런 곳까지 올 리가 없지."
반전의 마족은 품 안에 들고 있는 검은 보따리를 조금 풀어 헤쳤다. 물건이 안전한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파직, 파지직.
검은 스파크가 물건의 주변으로 튀어 올랐다.
"후우, 일단 손상은 없어 보이네. 게이트만 잘 빠져나가면 되겠어."
"외람되지만, 그 안에 담긴 게 무슨 물건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듀라한의 질문에 금발의 마족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뭐긴, 지금 이 세계 그러니까 문명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등급의 아이템이지."
"허, 그게 정말로 가능한 겁니까? 문명계의 억지력이 작용하지 않습니까?"
억지력.
시스템은 그런 불합리한 존재를 걷어내고 약화 시킨다.
막대한 힘을 가진 마족이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 문명계로 넘어와야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아이템도 마찬가지였다.
현 시점에서 레전더리 이상 등급의 아이템이 차원을 넘게 되면 크게 약화되거나 고유의 능력을 잃게 되어 있었다.
반전의 마족은 씩 웃었다.
"예언의 마족께서는 방법을 알고 계시더군. 일종의 편법이지.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건 본래 아이템의 절반 뿐이야. 다른 운반책이 절반을 옮겨서 나중에 합칠 거라는데."
마족은 저 멀리 해골들과 싸우고 있는 헌터들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근데, 너희 해골들 엄청 죽어나는데. 괜찮냐?"
"문제 없습니다. 예언의 마족께서 하사하신 마기로 만들어진 공간이니까요."
"혹시 니가 이 게이트의 보스냐?"
"아닙니다, 그런 멍청한 짓을 할 리가 없지요."
"그래, 그러면 걱정할 필요는 없겠네. 알아서 잘 해라. 대적자 때문에 흉흉하니까."
반전의 마족은 검은 보따리를 잘 쥐고서 두 날개를 펼쳤다. 땅을 박차고 날아 오르는 그의 얼굴은 여전히 초조했다.
'어휴, 빨리 전달하고 손 떼야지. 대적자한테 잘못 걸릴까봐 무서워서 살겠나.'
* * *
콰득, 콰드드득!
훈련을 겸한 게이트 공략은 순조로웠다. 진세아도 엘리스도 빠르게 새로운 재능의 달성 조건을 채워가고 있었다.
나도 해골들을 부수다보니, 필요한 경험치를 전부 채울 수 있었다.
『 묵빛 마기가 서린 풀 플레이트 메일이 최대 레벨을 달성했습니다! 』
『 현재 장비의 레벨 : 100 』
레벨 100이 되기 위해선 엄청난 양의 경험치가 필요하다. F급 헌터가 S급에 도달할 때까지 필요한 경험치를 합산한 양.
20만배의 경험치 덕분에 가뿐하게 달성할 수 있었다.
『 갑옷의 숨겨진 성능이 드러납니다. 』
『 마기 침습이 30% 강해집니다. 』
『 마기 복구의 성능이 30% 증가합니다. 』
마기 복구가 강해졌다.
시험삼아 장비를 벗고 긁힌 상처를 만들었다.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질 정도다.
스르륵.
다시 장비를 착용하니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었다.
'굉장한데. 이거면 내가 가지고 있던 자연치유 스킬보다 훨씬 좋겠어.'
덩달아 정신에 영향을 주는 마기 침습이 강해지긴했지만 유니크 스킬인 지고의 정신 덕분에 끄떡 없다.
『 현재 장비의 방어력 : 200 + 50.0 』
본래 레전더리 갑옷들의 방어력이 100 중후반인 걸 감안하면 엄청난 수치다. 이미 레전더리를 뛰어 넘었다.
'미친 수준이다.'
내가 사용하는 역전의 검의 공격력이 300이다. 규격외 등급인 1★ 아이템의 공격력과 맞먹을 정도란 의미.
나는 해골들 사이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쾅! 쾅! 쾅!
내가 무기도 들지 않은 채 있자 수 십 마리의 해골이 동시에 눈을 번뜩이며 달려들었다.
그러나 내 몸에는 생채기 하나 생기지 않는다.
해골들이 아무리 잡몹이라지만 A급 게이트의 마수다. 그들 상대로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는다는 건 굉장한 일이었다.
'아예 전투에서 배제할 수 있을 정도군.'
덜그럭, 덜그럭.
어느새 해골들이 내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내가 장비를 시험하고 있단 걸 모르는 엘리스가 놀란 눈을 하고서 달려왔다.
"사부님! 구해드릴게요!"
엘리스가 낑낑대며 해골들 틈에서 나를 꺼내려고 했다. 나는 팔을 휘둘러 해골들을 쳐냈다. 녀석들은 힘 없이 나가 떨어졌다.
장비의 성능이 아니더라도 나도 많이 강해졌다.
"괜찮아."
"까, 깜짝 놀랐어요."
내가 무사한 걸 확인한 엘리스는 다시 전투로 복귀했다.
채아연과 진세아는 몰려드는 해골들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콰득, 콰드득!
붉은 잔상을 남기며 단검을 휘두르는 진세아. 녀석은 필사적이었다.
"으으, 끝이 없잖아! 이 놈들 잡다가 우리가 먼저 지쳐서 쓰러지겠어요! 오빠는 왜 안 도와주고 구경만하는 거에요?"
"내가 도우면 훈련이 안되잖아."
엘리스는 묵묵히 총을 쏘며 해골을 부수고 있었다. 엘리스가 진세아에게 해맑게 말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요! 그래도 두들겨 맞지는 않잖아요!"
"······? 오빠, 엘리스를 때렸어요······?"
"아, 아뇨. 사부님이 절 때렸을 리가 없잖아요!"
오해 할만한 소리는 하지 마라.
그리고 그렇게 말하면 진짜 때린 줄 알거다.
"······그건 신태양을 위한 훈련법이었고. 너희를 위한 훈련법은 따로 있어."
미래의 너희들로부터 받아 온 방법이니 효과는 확실할 거다. 일단은 레벨부터 확실히 올려두는 게 중요하지만.
"그리고 지치고 싶어도 못 지칠 걸. 채아람이 있잖아."
옆으로 시선을 옮기니 채아람이 철로 만든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지팡이에서 나온 금색 기운이 진세아와 엘리스를 감쌌다.
"쉬는 시간은 대체 언제에요······?!"
"저거 다 잡으면."
"우아아—!"
팔팔해진 진세아가 해골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단순히 버프를 주는 게 끝이 아니었다.
채아연을 중심으로 뻗어나간 반원형의 빛. 거기에 닿는 해골들은 그 즉시 산화되어 사라졌다.
"우와아, 언니 나이스!"
"채아람양, 멋져요."
백 마리가 넘는 해골들이 단숨에 재로 변한 것이다.
물론 채아연 역시 상당히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후우······. 상위 길드는 이런 극한의 상황에서 사냥하는 게 일반적이란 거군요.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이지한 헌터님, 이거 정말 맞아요?"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회복시켜 드릴게요!"
타닷, 타악!
땅을 박차고 뒤로 물러선 엘리스가 채아람의 등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이걸로 채아람이 소모한 신성력도 복구가 되었을 거다.
불만은 어느새 사라지고 쌩쌩한 채아람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엘리스와 채아람.
두 사람이 번갈아 움직인다면 거의 무한 동력이나 다름 없었다. 실제로 우리는 게이트에 들어 오고나서 단 한 번도 쉬지 않았다.
"진짜 끝이 없잖아······!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건지도 모르겠네."
이만한 수의 마수가 나오는 게이트는 흔치 않다. 실제로 모두가 막대한 양의 경험치를 얻고 있을거다.
『 채아연의 재능 '절대 신성 부여'의 개화 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
『 언데드류의 마수 처치 :2521 / 10000 』
『 네임드 언데드 처치 : 0 / 1 』
'많이 잡기는 했는데 1만은 역시 쉽게 채울 순 없는 건가.'
절대 신성 부여 스킬을 가지게 되면 언데드에 대한 완전 면역을 가지게 되는거나 마찬가지다.
효과를 생각하면 개화하기 힘든 재능인 것도 맞다.
실제로 채아람이 이 재능을 깨닫게 되는 건 세계가 멸망한 뒤일 거고.
'제약에 막힐 수는 있다곤해도 사실상 언데드에 대한 대비는 끝나는 건데.'
그때였다.
저 멀리 언덕 위로 일반 해골들과 다른 기운을 가진 마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목 없는 기사 듀라한.
"저거 보스에요······?"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져요."
듀라한은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다.
번쩍!
하늘에서 떨어진 검은 벼락이 그의 검에 꽂혔다. 동시에 듀라한이 서 있던 언덕 위로 검은 기운이 퍼져나오기 시작했다.
콰아아아—!
파도처럼 밀려 나온 검은 기운은 해골들을 뒤덮으며 전진했다.
『 스킬 통찰 Lv.11을 발휘합니다. 』
"다들 숨 참아!"
내 지시에 다들 뒤로 물러서며 숨을 참았다. 검은 기운은 그대로 우리를 훑고 지나갔다.
물리적인 피해는 없다시피 하다.
하지만 검은 기운이 만들어낸 여파는 굉장했다.
덜그럭, 덜그럭!
덜그럭, 덜그럭!
검은 파도가 휩쓸고 간 자리, 해골들의 색이 검게 변하기 시작했다. 백골이었던 녀석들이 흑골로 변한 것이다.
뼈는 더 단단해지고, 움직임 또한 빨라졌다.
"그래봤자 해골이잖아요!"
콰득!
"뭐?!"
그 강함은 진세아의 단검을 막아낼 정도. 당황한 진세아가 해골을 발로 차고서야 단검을 빼낼 수 있었다.
'나도 슬슬 움직여야겠는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꿈틀, 꿈틀.
방어구로 변해 있던 오르티마가 난리를 치기 시작했다. 슬라임으로 변한 녀석은 나를 마구 흔들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왜 그래?"
밤하늘 위로 날아가는 검은 형체가 보였다.
'마족······?'
나라고 모든 정보를 다 알고 있는 건 아니었다.
'이 게이트에 마족이 있다는 정보는 없었는데.'
뀨우!
오르티마가 답답한지 내 어깨에서 뛰어올랐다. 그대로 와이번의 형상으로 변한 녀석은 입 주위로 마력을 끌어 모았다.
이내 강력한 불덩이가 놈의 입에서 발사되었다.
『 스킬 '투척 Lv.11'의 효과가 발휘됩니다. 』
『 스킬 '명중 Lv.11'의 효과가 발휘됩니다. 』
내 스킬이 오르티마에게 적용되며 불덩이는 곧고 빠르게 밤하늘을 나아갔다.
콰아앙!
멋지게 날아가던 물체를 격추했다.
『 레어 스킬 '명사수 Lv.1'을 획득합니다. 』
『 스킬 '명사수 Lv.2'을 획득합니다. 』
『 스킬 '명사수 Lv.3'을 획득합니다. 』
···
..
.
『 스킬 '명사수 Lv.11'을 획득합니다. 』
『 추가효과 : 원거리 공격이 가벼운 유도 성능을 가집니다. 』
동시에 엄청난 속도로 메시지창이 떠오른 건 덤이었다.
푸시이—! 쿠웅!
불덩이에 맞은 마족은 그대로 땅으로 추락했다. 멀지 않은 장소였다.
"다들 전투에 집중해!"
나는 오르티마에게 흑골을 막도록 지시하고, 마족이 떨어진 장소로 다가갔다.
그곳엔 새까맣게 탄 금발의 마족이 쓰러져 있었다.
"크으윽······. 이게 무슨 날벼락······. 안전하다며 제올 이 개새끼야······."
놈은 검은 보따리를 소중하게 품고 있었다.
'뭐지?'
나는 마족을 발로 밀어내고선 보따리를 들어 올렸다. 마족은 정신이 오락가락한 와중에도 보따리만큼은 꼭 쥐고 있었다.
『 스킬 '영웅의 힘 Lv.11'을 발휘합니다. 』
뻐억, 뻐억!
"크허억!"
주먹으로 몇 대 쥐어패니 마족의 손에 힘이 풀리면서 가져올 수 있었다.
보따리를 풀어내자 검은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파직, 파지직!
'큭, 뭐야 이거.'
시스템이나 이계 규율의 창에서 터져 나오는 스파크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척봐도 보통 물건이 아니다.
샤아아—!
보따리를 완전히 걷어내자 찬란한 노란빛이 쏟아져 나왔다.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온전하지는 않지만 이건 분명하다.
'······.'
상상 이상이다. 아이템을 바라보는 내 눈이 커졌다. 그것을 확인하는 내 심장이 두근 거리고 있었다.
왜나하면 이건
레전더리 위의 등급이자
아직 이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에픽' 등급의 아이템이었으니까.
134화 오버 더 레전더리(4)
에픽(EPIC).
멸망한 세계의 누구나가 탐하는 사기적인 아이템.
헌터, 네임드 마수에 마족까지.
예외는 없다.
모두가 에픽 아이템을 갈망했다.
'하지만 내가 에픽 아이템을 얻지 않은 이유가 있다. 아니, 정확히는 얻지 못한 거지.'
현재까지 알려진 아이템의 등급은 일반, 레어, 유니크, 레전더리이다. 그 다음 등급은 알려지지 않았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SS급 게이트가 없는 지금 에픽 아이템을 구할 수 있는 장소는 어디에도 없었으므로.
'그런데 이 녀석이 에픽 아이템을 들고 있었을 줄이야.'
까맣게 그슬린 금발의 마족이 몸을 일으켰다. 놈의 붉은 눈이 나를 응시했다.
"으으······. 내놔라······."
그래도 아직은 움직임이 굼뜨다. 오르티마에게 맞은 불덩이가 꽤 효과적이었나보다.
'흐음.'
나는 놈을 유심히 바라봤다. 기억 속에 있는 놈이었다.
'중위 반전의 마족 아멜.'
이런 장소에서 에픽 아이템을 운반하고 있었다니.
'에픽 아이템을 활용한다는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여기로 가져올 줄은 몰랐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운이 좋았군.'
오르티마가 이 녀석의 기운을 잘 캐치하고 떨어뜨려 준 덕도 있다. 나는 검은 보따리에 감싸인 아이템을 다시 확인했다.
『 훼■된 ■이템의 일부 (■픽) 』
시스템 메시지의 일부가 깨져서 보인다. 이 세계에 존재할 수 없는 물건이란 의미겠지.
"······인간, 그 물건을 얌전히 내려놔라. 네 놈이 하기에 따라 목숨을 살려줄 수도 있다."
비틀거리면서도 몸을 완전히 일으킨 반전의 마족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
"싫다면?"
"하, 왠만하면 아무일 없이 넘어가고 싶었는데. 이건 네가 자초한 일이니 후회하지 마라!"
놈의 움직임은 재빨랐다.
잔상을 남긴 반전의 마족은 어느새 내 앞에 도달해 있었다.
서걱—!
놈이 손에 든 단검이 내가 있던 자리를 베어냈다. 단순히 휘두른 공격이었으나, 그 여파는 대단했다.
콰아아앙—!
뒤쪽 뼈다귀와 비석의 잔해가 하늘 높이 솟구쳤다. 그러나 내게는 닿지 못했다.
"어······? 뭐야. 이걸 피해? 나름 진심이었는데."
중위 마족의 움직임은 얕볼 것이 아니다. S급 헌터도 가뿐하게 제압할 능력을 가진 게 그들이다.
상위 마족에 비하면 약하다지만······.
마족을 상대로 적당히 할 생각은 없었다.
『 타재간파의 모든 항목을 활성화합니다. 』
『 활성 목록 : 광화, 오러블레이드, 신속, 초시공인지······. 』
순식간에 내게 잠들어 있던 힘이 개방되며 이전과 다른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촤아악—!
"우와앗!"
녀석은 내가 휘두른 검을 공중제비로 피해냈다.
"뭐, 뭐야······. 내가 잘못 보는 건가······?"
녀석은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위기 감지 하나는 잘하는 놈인 것 같다.
"설마, 정말 설마해서 물어보는 건데 네 놈 대적자냐?"
녀석은 얼빠진 질문을 던져왔다. 그 대적자라는 호칭은 너희들이 나를 부르는 호칭이잖냐.
저벅. 저벅.
나는 대답하지 않고 놈을 향해 다가갔다. 당황한 녀석이 손사래를 쳤다.
"어이어이! 날 죽이고 에픽 아이템을 빼앗가려고 해도 소용 없어! 어차피 그건 에픽 아이템의 일부에 불과하다고! 그거 하나로는 아무런 도움도······. 헉!"
거기까지 말한 반전의 마족이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아니, 방금 건 못 들은 걸로 해라. 아니지. 저 놈이 여기에 있다는 건 어차피 우리의 계획을 알고 있는 거잖아."
어쩌란건지. 오락가락하는 놈이구만.
"하으, 예언의 마족께서도 골머리 썩으시겠어. 진짜 궁금해서 묻는 건데. 어떻게 우리 계획을 전부 알고 있는 거냐?"
"······."
나는 조용히 검을 움켜쥐었다.
말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란 걸 깨달은 반전의 마족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하여튼······. 그 물건 돌려줘라. 여기는 너 혼자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
놈의 시선이 앞쪽의 내 일행들을 향했다.
흑색 해골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진세아, 엘리스 그리고 오르티마까지.
반전의 마족이 자신만만해 하는 이유가 있었다. 놈이 가진 특유의 제약. 나는 그게 뭔지 알고 있다.
녀석이 자신의 금발을 쓸어 넘기는 그 순간.
"그렇게는 못 두지."
나는 땅을 박차고 뛰어 올랐다.
콰아앙!
반전의 마족과 단숨에 거리를 좁힌 뒤, 놈의 멱살을 잡고 끌고 달려나갔다.
"뭐엇?!"
한발 늦게 놈의 제약이 펼쳐졌다.
『 마(魔)를 따르는 자의 권역에 진입하셨습니다. 』
『 마도 : 계약에 의거하여 제약이 발생합니다. 』
『 약자 반란 : 100m 이내의 모든 생물은 약함에 비례하여 강해집니다. 』
놈이 반전이 마족이라고 불리는 이유.
그것은 불리한 전쟁 상황을 한순간에 뒤집기 때문이다.
"엘리스, 거기 조심해!"
"고마워요, 아연양!"
"나한테 버프 부탁해!"
수 천 마리의 흑골이 몰려드는 앞쪽에선 지금도 가까스로 균형이 유지되고 있었다.
갑자기 흑골들이 강해기라도 하면 저쪽이 무너진다. 반전의 마족이 노리는 게 그거였을 거다.
콰과과과—!
나는 놈의 머리를 바닥에 쳐박은 채 최대한 멀리 끌고 갔다. 단단한 땅 위에 녀석이 파헤친 길이 쭉 이어졌다.
"크아악!"
피투성이가 된 반전의 마족이 마기를 방출해냈다.
콰아앙!
그 마기의 강함은 내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나는 그대로 땅을 굴러 밀려났다.
반전의 마족은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닦아냈다. 놈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단검을 들어 올렸다.
"너 실수 한거야. 약자라는 건 언제나 상대적인 거거든? 그리고 제약의 범위 내에 존재하는강자와 약자는 너와 내가 유일하다. 이게 무슨 말인지 알겠어?"
녀석에게 비하면 나는 상당한 수준의 강자.
그 차이만큼 약자에게 부여되는 힘도 강해진다. 그야말로 약자의 반란이었다.
'항상 느끼지만 저 놈의 제약은 말도 안되는군.'
방금 전 놈이 폭발 시킨 마기에 팔이 저릿저릿할 정도였다.
'새로운 방어구가 아니었으면 팔이 그대로 날아갔겠어.'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반전의 마족이 내 쪽으로 달려들었다. 놈의 단검이 이리저리 휘둘러지고 그때마다 강력한 마기가 뒤쪽의 묘지를 강타했다.
콰앙! 콰앙! 콰앙!
"보따리를 내놔라!"
역전의 검으로 모두 막아내고는 있지만 확실히 놈의 힘이 우세하다. 나는 점차 밀려나고 있었다.
'큭, 무슨.'
움직임이 나와 동등하거나 그 이상이다.
콰드득!
심지어는 갑옷을 뚫고 내 팔에 상처를 낼 정도로 강해져 있었다. 게다가 나는 보따리를 한 손에 쥐고 있어서 제대로 된 반격이 불가능했다.
'이것만 인벤토리에 넣을 수 있었어도.'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이거 할 만한데?! 네 놈이 진짜 대적자라면······. 이건 오히려 대박이야. 내 손으로 네 놈의 목을 가져다 바치겠어!"
아주 흥에 겨워서 마구 단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놈의 몸에서 피어 오른 마기가 다수의 분신을 만들어냈다.
"이것도 막아봐라!"
다섯의 분신이 일제히 나를 향해 뛰어 올랐다.
각 단검의 끝에 시커멓게 맺힌 마기가 흉흉하다.
'이 놈을 살려둬선 안되겠어.'
나는 손을 뻗어 시스템창을 불러왔다.
사실상 불합리하게만 보이는 반전의 제약.
이 제약에 대항하기란 지극히 간단하다.
내가 약해지면 되는 일이다.
『 타재간파의 서를 해제합니다. 』
『 비활성화 항목 : 광화, 오러블레이드, 신속······. 』
이것 하나로 충분하다.
중위 마족은 그 자체로 약하지 않다. 본디 마족이랑 종족 자체가 강력한 힘과 마기를 타고나는 이들이니.
타재간파가 없다면 약한 쪽은 나다.
『 제약의 영향을 받아 능력치가 200% 상승합니다. 』
『 반전의 마족에게 적용되던 능력치 보정이 사라집니다. 』
"어, 어······?"
순식간에 느려진 놈의 분신들.
반면 내 움직임은 이전과 다름 없이 빠르고 강력하다.
『 스킬 '일자베기 Lv.12'를 발휘합니다. 』
『 스킬 '절대 일격 Lv.2'를 발휘합니다. 』
서걱—!
푸른 선이 좌에서 우로 모든 분신들을 일격에 베어냈다.
"크아아악!"
피와 함께 바닥에 굴러 떨어지는 본체.
"뭐, 뭐냐?! 무슨 짓을 한 거냐!"
당황한 녀석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래도 소용 없다. 네가 약해졌다면 다시 제약을 해제하면 그만이니까!"
놈의 몸에서 마기가 빠져나가며 주변 구역에 걸려 있던 제약이 흩어졌다.
『 마(魔)를 따르는 자의 권역이 소멸합니다. 』
『 마도 : 계약에 의거하여 제약이 소멸합니다. 』
"그래?"
그렇다면 나는 다시 타재간파의 서를 발휘할 뿐이다.
『 타재간파의 서 모든 항목을 발휘합니다. 』
『 제 1장 : 1일 무료 이용 가능한 횟수를 소모하셨습니다. 』
『 5만 포인트를 소모합니다. 』
화르륵!
마력의 불길이 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뭐, 뭐······? 뭐 이런 놈이······!"
그걸 바라보는 반전의 마족에 눈에 공포심이 솟아났다. 제약을 사용하는 데에도 마기는 소모된다.
나는 포인트가 남아 도는데.
지금 가진 것만해도 약 300만 포인트다.
콰앙! 콰아아앙!
나는 압도적으로 녀석을 몰아 붙였다.
"크아아악! 제올! 제올! 나를 구해라!"
궁지에 몰린 반전의 마족이 소리쳤다. 마기가 서린 그의 목소리가 묘지 전체에 울려퍼졌지만 구하러 올 리가 없다.
와봤자 개죽음이 될테니.
그러나 반전의 마족의 외침이 헛된 것만은 아니었다.
저 멀리 언덕 위로 검은 번개가 다시금 내리쳤다. 이전과는 다른 하얀 안개가 파도처럼 해골들을 집어 삼켰다.
"네 놈의 동료를 돕지 않아도 괜찮겠어?"
흑골들 위로 새하얀 서리가 덮혔다. 그걸로 놈들의 움직임이 완전히 바뀌었다.
덜그럭, 덜그럭!
덜그럭, 덜그럭!
해골들은 바닥에 떨어진 무기와 방어구들을 하나씩 걸치기 시작했다. 이가 빠진 검을 들어 올리고, 닳고 닳아 구멍이 뚫린 투구를 뒤집어 썼다.
전체적인 공격력과 방어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뭐, 뭐야?!"
"당황하지 말고 다들 뭉쳐요!"
"내 신성력도 잘 안먹혀!"
수세에 몰리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크하하! 빨리 가서 동료들을 도와야 하지 않겠나?!"
저벅, 저벅.
나는 땅에 쓰러진 마족을 향해 다가갔다.
"아, 아니······. 도와야하지 않겠습니까? 저기요······?"
오히려 당황한 녀석이 얼빠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내가 도와줄 필요는 없다. 저기에 있는 녀석들은 내가 아는 가장 재능있는 놈들이다.
그러니 여기서 반전의 마족을 막는 게 내가 할 일이다.
나는 조용히 역전의 검을 들어 올렸다.
"에잇!"
협박이 먹히지 않는단 걸 알아챈 마족이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단검을 내질렀다. 아직도 힘을 숨기고 있었던 모양이다.
『 스킬 '일자베기 Lv.12'를 발휘합니다. 』
내 일자베기와 녀석의 단검이 맞부딪혔다. 녀석의 단검은 힘없이 깨져버렸다. 이어지는 날카로운 칼날이 놈의 어깨죽지를 베어냈다.
"크아아악!"
엘리스가 없는 상황에서 굳이 본질 베기로 내 수명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 녀석을 처리하는 건 일자베기로 충분하다.
마무리를 하려는 그 순간이었다.
다그닥, 다그닥!
"반전의 마족이시여, 제 손을!"
말을 타고 나타난 듀라한이 반전의 마족을 낚아챘다. 놈이 타고 있는 말은 땅에서 벗어나 하늘 위로 날아 올랐다.
"이대로 퇴각하시겠습니까?"
"미쳤냐?! 저 아이템 안 가져가면 우리 전부 죽은 거나 다름 없어!"
"그러면 일단 부상을 회복하실 안전한 장소로 가겠습니다!"
저 멀리 뼈로 이뤄진 언덕을 향해 날아갔다.
오르티마가 전투 중인지라 뒤쫓을 수가 없다.
'도망 한 번 빠르군.'
그래도 어차피 아이템은 내 손에 있다. 나는 일행들이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고 있는 장소로 돌아왔다.
진세아를 향해 떨어지는 철퇴를 가볍게 쳐냈다. 달려드는 해골들도 전부 짓이겨 버렸다.
콰드드득! 콰득!
"고, 고마워요. 진짜 죽을 뻔 했네!"
"사부님!"
"이대로 계속 싸워야 하는 건가요?"
나는 저 멀리 뼈언덕을 바라봤다. 반전의 마족이 정신을 차리고, 제약을 재개하면 해골들이 압도적으로 강해질 게 틀림 없다.
『 대상 진세아가 재능 개화를 앞두고 있습니다. 』
『 대상 엘리스가 재능 개화를 앞두고 있습니다. 』
'그렇다면······.'
일행의 상태를 확인한 뒤, 나는 해골들을 쳐부수며 앞으로 나아갔다. 확실히 이 해골들은 내 상대는 아니다.
종잇장처럼 부숴지며 금새 넓은 자리가 생겨났다.
"내가 맡을테니 잠시 쉬고 있어."
"후와······."
"우으······."
"고생했어. 아직 많이 남았지만."
세 명이 동시에 자리에 주저 앉았다. 목룡이었던 오르티마도 슬라임의 형태로 돌아와 있었다.
뀨우.
녀석은 내가 들고 있는 보따리에 달라 붙었다.
나는 한 손으로 검을 휘두르면서 보따리를 오르티마에게 던져줬다.
어쩌면 오르티마가 이번에도 아이템을 삼켜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최소한 오르티마가 삼킨다면 마족에게 뺏길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되니까.
덥썩!
검은 보따리를 벗기자 강렬한 노란빛이 퍼져나왔다.
스파크가 터져나왔지만 오르티마는 아랑곳하지 않고 에픽 아이템의 일부를 삼켰다.
『 형상기억마수 오르티마가 불완전한 아이템을 흡수합니다. 』
『 해당 아이템의 치명적인 오류를 발견했습니다. 』
『 아이템의 오류를 자가판단 하에 수정합니다. 』
오르티마의 둥근 몸 전체로 퍼져나가는 금빛!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우, 우와아······!"
"이게 뭐에요? 에, 에픽?"
뒤쪽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콰아앙!
해골들을 한 번 밀어낸 뒤 고개를 돌렸다.
『 이계 규율이 해당 아이템에 대한 예외성을 발휘합니다. 』
『 오르티마에 의해 해당 아이템의 인과적 타당성이 인정됩니다. 』
일행 세 명이 도란도란 모여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찬란한 금빛을 내뿜는 구체.
의심할 여지 없는 에픽 아이템이었다.
아무래도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잘 된 모양이었다.
135화 오버 더 레전더리(5)
에픽 아이템은 전투의 판도를 뒤바꾼다. 한 부위 한 부위가 강력한 무기나 다름 없다.
『 찬란한 성배(불완전 에픽) 』
- 소유자의 마력양을 3배 증가 시킵니다.
- 해당 아이템은 불완전한 상태입니다.
구체의 내부에는 보석이 잔뜩 박힌 잔이 둥둥 떠 있다.
완전히 훼손되어 있던 아이템을 오르티마가 복원한 것이다.
'진짜 에픽으로 만들려면 다른 파편이 필요하다는 건가.'
그래도 상관 없다.
마력양 3배라는 말도 안되는 옵션.
그것만 봐도 에픽 아이템으로써의 가치는 충분했다.
콰아앙—!
눈 앞의 해골들을 밀쳐낸 뒤 나는 성배를 집어 들었다. 내 시선은 채아연에게로 향했다.
『 '절대 신성 부여' 재능 개화 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
- 언데드류의 마수 처치 :3468 / 10000
- 네임드 언데드 처치 : 0 / 1
메시지 창을 확인하는 내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예상보다 더 빨리 재능 개화가 가능하겠어.'
물론 그 전에 선행 되어야 할 것들이 있다.
나는 다가오는 해골들을 향해 검을 크게 한 번 휘둘렀다.
콰아앙!
『 스킬 '영웅의 힘 Lv.11'을 발휘합니다. 』
『 일정 수준의 격을 발휘합니다. 』
『 스킬 '위압 Lv.11'을 발휘합니다. 』
흑색의 해골들이 주춤 거리며 물러서기 시작했다. 우리를 중심으로 원형의 큰 공간이 생겨났다.
"쉬는 시간은 이제 끝이야. 해골들을 돌파해서 언덕까지 간다."
"······아까 오빠가 상대한 거 마족 맞죠? 괜찮은 거에요?"
진세아는 조금 초조한 듯 내게 물었다.
"물론이지."
반전의 마족을 놓치기는 했지만 상정 범위 이내다. 어차피 그 자리에 바로 처리하는 건 어려웠을 것이다.
마계의 틈으로 도망치려하거나, 권속들을 불러냈을테니까.
듀라한이 갑작스레 나타나 놈을 구출한 건 의외였지만.
'오히려 나쁘지 않다.'
저 멀리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뛰어 내리는 언데드 세 명.
쿠우웅! 쿵! 쿠웅!
놈들이 착지한 자리에 서 있던 해골들이 부숴지며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 셋은 썩은 피부를 가진 언데드 종족. 푸르죽죽한 피부를 가진 3m 크기의 거인이다.
그들은 각자 등에 대검을 맨 채로 우리를 노려보았다.
크르르······.
모두 반전의 마족이 거느리는 권속들이었다. 자신이 회복하는 동안 시간을 벌기 위해 불러 온 거겠지.
"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 저 녀석들도 똑같은 마수다. 그리고 우리한테는 채아연의 신성력이 있잖아."
"저기요, 제 이름 막부르지 말아주세요······."
그런 부분을 지적할 줄은 몰랐는데. 미래에서 친하게 지내다와서 헷갈렸다. 나는 정중히 말했다.
"아연양, 버프 부탁드립니다."
"네, 알겠습니다."
채아연의 지팡이에서 흘러나온 빛이 우리 세 명을 감쌌다.
『 신성한 빛이 전신에 감돌기 시작합니다. 』
덜그럭, 덜그럭······.
슬슬 내가 내뿜는 격에 익숙해진 해골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럼 시작하자."
내 말에 진세아와 엘리스가 땅을 박차고 튀어 나갔다.
콰과과과—!
신성력이 깃든 무기를 들고 일행은 빠르게 전진해나갔다. 흑골들은 무기를 들고 우리를 막기 위해 달려 들었지만, 더 이상 우리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수 백의 파편이 되어 이리저리 솟구칠 뿐이다.
"잠깐 쉬었다 왔더니 완전 할만한데요?!"
진세아가 해골 사이를 미친 듯이 누비며 소리쳤다.
"사부님이 있으니까, 든든해서 더 잘 되는 거 아닐까요?"
둘 다 틀렸다.
두 사람은 쏟아지는 해골들을 전차처럼 부숴대고 있었다. 몰려드는 해골을 감당하지 못하던 방금 전과는 천지차이.
잠깐 쉬었다고 이 정도까지 달라질 리가 없잖은가.
'미친 성장 속도야.'
두 사람이 내가 마족을 상대하던 잠깐 사이에 성장한 것이다. 레벨, 스킬, 전투감각까지도 한차원 달라져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내가 다 기가 찰 정도.
'눈 깜짝하면 성장해 있다는 건가.'
『 진세아의 재능 개화가 머지 않았습니다. 』
『 엘리스의 재능 개화가 머지 않았습니다. 』
덜그럭, 덜그럭!
공동 묘지의 땅 속에서 해골들이 끊임 없이 쏟아져 나왔다.
'시간이라도 끌어보겠다는 심산인가보군.'
해골들의 수가 줄어들 기미가 안 보인다. 네임드 마수가 게이트 내부에 마기를 불어넣고 있단 증거였다.
반전의 마족을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
'놈을 못 죽인 게 이런 식으로 돌아갈 줄이야.'
이 말인 즉슨.
'엄청난 성장이 가능하겠어.'
경험치 이벤트나 마찬가지란 의미였다.
콰드득! 콰과과!
일반적인 파티였다면 몰려드는 해골들의 해일에 집어 삼켜졌을 거다. 체력의 한계는 어쩔 수 없으니까.
그러나 우리에겐 미래의 성녀 채아연과 시간의 능력자 엘리스가 있다.
채아연의 버프가 우리를 회복 시키고, 엘리스는 또다시 채아연의 컨디션을 되살린다.
한마디로 무한동력!
강화된 해골이어도 결국에는 잡몹인 해골들이다. 이걸로는 우리를 막을 순 없다.
"비켜라, 이 쓸데 없는 놈들아!"
그 사실에 눈치 챈 걸까.
권속 중 하나가 높이 뛰어 일행의 바로 앞에 착지했다. 놈은 대검으로 주변에 있는 해골들을 쓸어버렸다.
푸른 피부를 가진 언데드였다.
다른 두 마리의 권속은 멀찍이서 우리를 관찰하고 있었다.
"다른 놈들은 겁쟁이어서 말이지. 난 대적자라는 놈이 얼마나 강한지 궁금하기도 했고······. 그래서 대적자가 누구냐?"
대답해 줄 이유는 없다.
"오빠, 이 녀석도 권속이에요······?"
"그래."
지금의 진세아라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건 진세아 본인도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한 번 해 볼게요."
"예의 없는 꼬맹이구나!"
핑그르!
단검을 돌려 역수로 잡은 진세아가 공중으로 뛰어 올랐다. 가볍고 경쾌한 몸놀림이었다.
"어딜!"
쐐액!
언데드의 대검이 진세아를 노리고 휘둘러졌지만, 진세아는 가볍게 몸을 틀어 대검을 피해냈다.
촤아악!
신성력이 담긴 단검이 언데드의 목덜미를 베어냈다. 치익하는 연기와 함께 언데드가 목을 붙잡았다.
"크아악! 이 쪼끄만 놈이······!"
녀석은 다른 한 손으로 마구잡이로 대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마기가 담긴 강력한 공격이었지만 진세아는 차분하게 피해냈다.
언데드를 바라보는 진세아의 눈동자에 선홍빛의 이채가 피어 올랐다.
푸욱! 푸욱! 푹!
이어지는 건 일방적인 유린이었다.
진세아의 단검이 쉴 새 없이 언데드의 급소를 찔렀다.
언데드는 진세아를 뿌리치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진세아는 얄미울 정도로 거리를 유지하며 공격을 퍼부었다.
쿠웅······.
언데드는 그대로 바닥에 몸을 뉘였다.
"후우."
한숨을 내뱉은 진세아의 눈빛은 달라져 있었다.
"생각했던 거하고 다르게 별 거 없네요. 혹시 저기 있는 놈들도 내가 상대해도 돼요?"
그리고 그 순간.
『 대상 진세아의 자신감이 최대치에 달합니다. 』
『 진세아의 재능 '리미트 해제'의 개화에 성공하셨습니다. 』
진세아의 한쪽 눈동자에 맺힌 이채가 더욱 진해졌다. 불꽃이 일렁이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질 것 같지가 않아서요."
진세아에게 부족했던 것은 하나다.
'자신감.'
그녀 또한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은 천재적인 재능의 소유자다.
주변의 무수한 천재들이 이미 그녀를 앞서나가고 있었기에, 진세아는 자신을 가질 기회가 없었을 거다.
자신이 강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한계를 깨부수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진세아는 스스로 그 증명을 해내었다.
『 타재간파의 서에 존재하는 리미트 해제의 성능이 상승합니다. 』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다 죽여버려."
"오케이, 잘 봐줘요!"
스슷!
진세아가 눈 앞에서 사라졌다. 리미트 해제는 단순히 레벨을 높이는 게 아닌 그 사람의 잠재력을 끌어낸다.
진세아가 남긴 붉은 잔상이 해골들을 빛살처럼 가르며 쏘아져 나갔다. 해골들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이었다.
어느새 권속의 코앞까지 도달한 진세아.
서걱—!
그녀의 단검이 언데드의 목을 잘라냈다. 중위 마족의 권속이 제대로 된 반항조차 못하고 허무하게 목숨을 잃은 것이다.
"뭐에요······? 어떻게 저렇게 갑자기······."
그런 진세아를 바라보던 채아연이 경악했다. 지금까지 같이 전투를 하고 있었기에 더 잘 알거다.
진세아가 말도 안되게 성장했다는 걸.
"아연양도 곧 저렇게 될겁니다."
"네······?"
쿠구구구······.
진세아의 이어지는 폭주!
해골로는 녀석의 움직임을 따라잡을 수도, 방해할 수도 없었다. 무수한 양의 파편이 묘지를 메울 뿐이다.
두 개의 재능을 개화한 진세아의 경험치는 무려 수십 배.
해골들을 부수는만큼 계속해서 성장을 거듭한다.
『 채아연의 '절대 신성 부여' 재능 개화 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
- 언데드류의 마수 처치 :4268 / 10000
- 네임드 언데드 처치 : 1 / 1
숫자 또한 빠르게 증가했다.
진세아가 해골들을 부수는만큼 새로운 수의 해골들이 계속해서 보충 되고 있었다. 마족에게 고마울 지경이다.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처치 판정은 꽤 너그럽다.
채아연 본인이 직접 잡지 않아도 된다. 채아연의 신성 버프가 걸려있다면 처치 카운트가 올라간다.
그런 의미에서 권속의 등장은 호재였다.
'권속은 네임드 마수거든.'
덕분에 저 멀리에 있는 듀라한을 잡을 필요가 없어졌다.
진세아가 급격한 성장을 이룩한 가운데.
"와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엘리스의 눈가에도 이채가 어리기 시작한다. 때론 바라보는 것만으로 깨닫는 게 있는 모양.
나는 엘리스에게 에픽 아이템을 건넸다.
"엘리스, 이걸 사용해서 날 보조해라."
"네, 네?"
성배를 받아든 엘리스가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을 했다.
마력양을 세 배 증가 시키는 에픽 아이템.
나는 한 손을 앞으로 들어 올렸다.
'미래의 채아연이 이 기술은 크게 몸을 망친다고 했지만······.'
엘리스가 옆에 있으니 괜찮다.
"진세아, 돌아와! 아연양은 버프 부탁할게요."
"넵."
"사부님, 지금 뭘 하시는 건가요······?"
우우웅.
내 뒤로 복잡한 문양을 가진 검은 마법진 하나가 떠오른다.
불길한 기운이 나를 중심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왜 불렀어요? 한참 좋았는데."
진세아까지 돌아온 것을 확인했다.
"얻어야 할 게 있어서."
『 스킬 '초마도파괴광선 Lv.6을 발휘합니다. 』
위력은 미래와 비교한 한참 약할 거다. 마력으로 변환할 마기가 현저히 옅기 때문이다.
그래도 충분하다.
저 해골들을 쳐부수기에는.
* * *
살아남은 언데드 권속 렌달은 허겁지겁 언덕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말도 안돼. 말도 안된다고······!'
단 한 명의 꼬맹이한테 동료들이 무참히 살해 당했다. 심지어 그 둘 중 하나는 자신보다 강했다.
그런데 그렇게 무력하게 당하다니.
심지어 그가 보기엔 그 꼬맹이는 대적자가 아닌 것 같았다. 남다른 격을 가진 존재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대적자의 일행 전체가 괴물들이야······. 우리의 손에서 벗어난 존재다. 아무리 임무가 중요하다고 해도 이건 미친 짓이라고."
빨리 돌아가서 반전의 마족에게 알려야 했다.
그는 어렵지 않게 뼈가 쌓인 언덕에 도착했다.
뼈로 만들어진 침대 위에서 누워 있던 금발의 마족이 몸을 일으켰다.
"크윽, 뭐야. 시간이나 끌라고 내가 말했잖아!"
"주인이시여, 큰일 났습니다. 벌써 두 명의 권속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큭, 대적자. 이 새끼······."
"대적자가 아닙니다. 그 부하한테 당했습니다."
"뭐?"
반전의 마족이 상황을 자세히 물으려던 그 순간이었다.
콰아아앙!
강렬한 충격이 언덕 전체를 뒤덮었다. 온 몸이 찢어지는 듯한 마력이 반전의 마족과 권속을 지나쳤다.
츠즛, 츠즈즈···.
먼 거리에 있는 권속과 마족의 목숨을 앗아갈 정도는 아니었다. 피부가 새까맣게 타는 정도로 그쳤다.
"하······."
반전의 마족이 이를 악물었다.
"나를 얼마나 우습게 아는거야······? 이딴 공격이 통할 거라고 생각하나?"
"그, 그게 아닌 것 같습니다."
"응?"
권속이 떨리는 손을 들어 공동묘지 쪽을 가리켰다. 해골들이 빽빽하던 땅에 고속도로가 쭉 나 있었다.
마력 광선이 해골들을 전부 집어 삼킨 것이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콰아아앙——!
콰아아아——!
광선은 두 번이나 더 묘지를 뒤덮었다. 땅을 가득 메우던 해골들이 사라졌다.
"······."
유일한 이점이던 물량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 것이다.
빠득.
이를 악문 반전의 마족의 입가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여기까지 오는 것도 시간문제입니다!"
"······."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반전의 마족이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근데 말이야. 넌 왜 여기에 있냐."
"예?"
"말했잖아. 앞에서 시간이나 끌라고. 근데 그걸 못했네?"
콰득!
반전의 마족의 손이 언데드의 심장을 꿰뚫었다. 언데드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쯧."
손에 묻은 검은 피를 털어낸 반전의 마족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능한 권속만큼 짜증나는 것도 없었다.
"마의 주인이시여,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느새 다가온 듀라한이 그의 뒤에 섰다.
"아이템을 회수하지 못하면 죽은 목숨이나 다름 없다. 다른 마족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내 무능을 인정할 뿐이고."
그는 듀라한이 준비한 다른 뼈다귀 말 위에 올라탔다.
"모든 마력을 사용해서 해골들을 소환해라. 내 마기도 빌려주마."
"해골들로 저들에게 대항할 수 있을지요."
"아, 그건 상관없지. 오히려 약할수록 좋다."
반전의 마족은 모든 마기를 끌어 모았다. 몸에 난 상처를 치료하는 동안, 마계의 틈에 모아두었던 마기를 전부 가져왔다.
"나는 반전의 마족이니까."
중위 마족이 상위 마족보다 나은 점 하나.
그것은 마기의 운용이 자유롭다는 것.
문명계의 억지력이 중위 마족에게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드드드드······!
깔끔하게 정리 되었던 땅 위로 무수한 수의 해골들이 솟아났다. 땅에 손을 짚고 올라오는 모습은 공포 그 자체.
1만에 가까운 해골들이 바글거리는 광경에 발전의 마족이 광소를 터트렸다.
"이번에는 다를 거다!"
그는 가지고 있는 모든 마기를 터트렸다. 불길하고 음습한 기운이 게이트 내부로 퍼져나갔다.
『 마(魔)를 따르는 자의 권역에 진입하셨습니다. 』
『 마도 : 계약에 의거하여 제약이 발생합니다. 』
『 약자 반란 : 게이트 내부의 모든 생물은 약함에 비례하여 강해집니다. 』
약함과 강함은 상대적인 것.
대적자와 일행의 힘이 강할수록.
해골들은 높은 수준의 버프를 획득한다.
덜그럭, 덜그럭!
덜그럭, 덜그럭!
1만의 해골들이 일사불란하게 정렬한다. 그들의 눈가에 지성이 깃들고, 뼈 위로는 붉은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들이 주워든 무기에도 제약은 어김없이 적용된다. 낡았던 방패가 튼튼해지고, 이가 빠진 검이 날카롭게 벼려진다.
그야말로 1만 명의 잘 훈련된 군사나 다름 없는 모습.
"어떠냐!"
"마족이시여, 잠시 뒤쪽으로."
듀라한이 말을 움직여 반전의 마족 앞으로 나섰다.
콰아아앙—!
아까와 같은 강렬한 검은 광선이 일대를 훑고 지나갔다. 듀라한은 몸으로 공격을 받아냈다.
듀라한은 멀쩡했다. 그 뿐이 아니었다.
덜그럭, 덜그럭!
덜그럭, 덜그럭!
해골 병사들도 꿈쩍않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조금 그슬린 것을 제외한다면 아무런 피해도 없었다.
훌륭하게 공격을 버텨냈다.
심지어 그들 하나하나가 가진 무력은 A급 헌터에 맞먹는다.
A급 잡몹이 아니라, 게이트를 공략하는 헌터.
그러한 존재가 1만이 모였다.
"크하하하하!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을 후회하게 해주마!"
반전의 마족은 입이 찢어져라 웃어젖혔다.
"그래, 예언의 마족께서 나를 여기로 부른 것은 전부 이유가 있었던 거였어! 고작 운반이나 시키려고 날 보냈을 리가 없지. 대적자여! 나는 널 죽이고 상위 마족이 되겠다!"
마기를 담은 그의 목소리가 게이트 전체로 퍼져나갔다.
"자, 가라! 내 충실한 해골 군사들이여!"
쿠웅! 쿠웅!
발을 맞추어 진격하는 해골 군사들.
그 압도적인 존재감은 반전의 마족 본인도 전율을 느끼게 할 정도였다.
모든 마기를 이곳에 끌어다 썼다. 실패란 용납되지 않았다.
"대적자의 일행에 신성력을 가진 자가 있었으니, 그 자를 먼저 처치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괜찮다. 방금도 봤잖아. 어지간한 신성력은 통하지 않는다고."
남은 것은 대적자 일행을 그대로 쓸어버리는 일 뿐.
"으하하, 이제 이 승리를 만끽하자고!"
반전의 마족이 그리 말하는 순간이었다.
샤아아아—!
황금빛의 오로라가 밤하늘을 뒤덮기 시작했다.
"뭐야 이건?"
오로라는 죽음이 감도는 공동묘지의 땅 전체로 천천히 내려 앉기 시작했다. 황금빛의 가루가 반짝이며 떨어지는 광경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최후의 발악인가? 이해 못할 짓을 하는군."
반전의 마족이 비웃음을 머금은 그 순간.
"크아아아아······!"
옆에 있던 듀라한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뭐, 뭐냐?! 갑자기!"
"크아아! 마, 마의 주인이시여······!"
츠즈즈즈즈!
황금 가루에 닿은 듀라한의 색이 옅어지고 있었다. 동시에 몸 전체가 녹아내리고 있었다.
황급히 듀라한에게 마기를 불어넣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회복은 커녕 상태는 악화될 뿐이었다.
반전의 마족이 얼굴이 새하얘졌다. 그제서야 알아챈 것이다.
"서, 서, 서, 설마······!"
이 빛은 그냥 빛이 아니었다.
언데드에 대한 절대적인 우위를 가진 '절대 신성' 그 자체였다.
반전의 마족, 그는 짐작도 못했겠지만.
일반 해골들이 쓸려 나갔을 때 거기서부터 승패는 결정되어 있었다.
그 순간, 성녀 채아연의 재능 '절대 신성 부여'은 이미 개화했다.
1만에 달하는 군사들이.
샤아아——!
녹아내리고 있었다.
136화 오버 더 레전더리(6)
절대 신성.
그것은 일반 신성과는 궤를 달리한다.
신성력이 언데드에게 추가 피해를 입히는 정도에 그친다면, 절대 신성은 언데드의 존재 자체를 멸하는 극상성이다.
언데드에 대한 절대적인 우위.
그 앞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언데드는 없다. 최고위 언데드조차도 그 힘 앞에선 무릎을 꿇을진데, 일반 해골 병사가 아무리 강하다 한들 버틸 리가 없었다.
츠즈즈즈······!
"우와아······."
엘리스는 눈 앞의 대군이 녹아 내리는 모습을 넋을 놓은 채 바라보았다.
"이, 이거 사기 아니에요······? 내가 제대로 보고 있는 거 맞죠?"
진세아도 눈을 깜빡거릴 뿐이었다.
샤아아—!
그런 기적을 행사하는 채아연의 뒤로 찬란한 후광이 비치고 있다. 허공에 떠오른 그녀는 에픽 등급의 성배를 꼬옥 쥐고 있었다.
그야말로 성녀 그 자체였다.
덜그럭······. 덜그럭······.
우리를 향해 진격하는 해골들은 머리에서부터 녹아내려 몇 걸음 걷지도 못한 채 그대로 금빛 가루가 되었다.
흉흉한 기세를 뿜어내던 해골들이 한줌의 가루로 변한 것이다. 그 위에 살포시 놓인 자그마한 마정석까지. 녀석들은 완벽히 처리 되었다.
'이 정도 규모로 절대 신성을 펼칠 수 있을 줄이야······.'
채아연이 가진 신성력이 얼마나 방대한지 가늠할 수도 없다. 미래의 채아연의 말에 따르면 마력을 변환하여 신성력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했으니.
본래 계획은 절대 신성을 부여 받아 초마도파괴 광선을 사용하는 것이었는데 말이다.
'역시 최후의 5인이라 이건가.'
단순히 적을 쓰러뜨렸다에서 끝나는 게 아니다.
재능 개화를 한 채아연의 경험치는 약 5배. 해골들이 가진 막대한 양의 경험치가 전부 채아연에게 깃들 거다.
『 타재간파의 서에 '절대 신성 부여'가 기록됩니다. 』
나 또한 언데드에 대한 절대 상성을 지니게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
이윽고 채아연이 허공에서 내려왔다. 자신이 한 일이 믿기지 않는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이지한 헌터님······. 대체 뭐하는 사람이에요······?"
초마도광선으로 해골들을 쓸어버린 뒤 채아연에게 차례를 넘겼다. 그녀는 훌륭하게 자신의 역할을 수행해냈다.
그게 전부였다.
나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재능이 보였거든요."
실제로 그러했다. 타재간파는 타인의 재능을 간파하고 개화시키는 능력이니까.
"자세한 이야기는 저 녀석을 쓰러뜨리고 하죠."
나는 역전의 검을 들어 앞쪽을 가리켰다.
반짝이는 땅 위로 반전의 마족이 덩그러니 남아 있다. 금빛 가루를 잔뜩 뒤집어 쓴 채 홀로 서 있는 미남.
녀석의 표정이 볼만했다.
"아니, 아니······. 이런 일이 있을 리가 없잖아. 대적자가 무슨 신이라도 된다는 거야······?"
녀석은 멍한 표정으로 중얼대고 있었다. 그만한 수의 병력을 단숨에 잃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참모 역할을 하던 듀라한도 절대 신성에 녹아 보이지 않는다.
"무슨 수를 쓴거냐! 인간에 불과한 네 놈이 대체 무슨 수로!"
저벅, 저벅.
나는 반전의 마족을 향해 다가갔다. 녀석은 이미 전투 의지를 상실해 있었다.
"어이, 오지마라! 저리가······! 가란 말이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반전의 마족은 뒷걸음질치다 바닥에 넘어졌다.
나는 녀석의 목에 검의 끝을 겨눴다.
"에픽 아이템의 나머지 부분은 어디에 있지?"
"모, 몰라······! 나도 모른다고! 나는 그냥 예언의 마족님의 명령을 받고 움직였을 뿐이다!"
"······그런가."
그렇다면 볼 일은 없다.
반전의 마족.
그의 제약은 성가시기 그지 없다.
약하디 약한 해골조차 강력한 군사로 만들어버리는 사기적인 제약.
놈을 살려둘 이유는 조금도 없다.
나는 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이번에는 놓치지 않는다.
『 각성 스킬 '일자베기 Lv.13'을 발휘합니다. 』
콰아아아——!
푸른 기둥이 하늘 위로 솟아 올랐다. 나를 중심으로 시작된 광풍이 금빛 가루와 뒤섞여 게이트 전체로 퍼져나갔다.
이렇게 게이트 공략이 끝났다.
* * *
공략을 마치고, 우리는 마정석을 주웠다.
이게 다 돈인데 아무리 급해도 그냥 두고 갈 수는 없다.
"으아, 마정석 줍다가 죽는 줄 알았네!"
"그래도 진세아양 덕분에 빨리 끝났네요!"
"다들 고생했어."
재능을 개화하기 전까지는 전투가 긴박하기는 했다. 헝클어진 머리를 한 엘리스는 방어구도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우으으······. 원래는 쉬는 시간에 먹으려고 했는데······."
그리 말하면서 품에서 약과를 꺼내 먹는 엘리스.
"그거 뭐야? 약과? 나도 주라."
"여기요, 많이 있어요······."
이계 규율의 업적 보상은 없었다.
이제 중위 마족을 잡는 정도로는 받을 수 없는 모양.
아쉽지만 오르티마도 딱히 무언가를 뱉어내지 않았다.
'그래도 예상치 못한 이득이 있었어.'
프로젝트 아포칼립스에 사용될 에픽 아이템을 미리 차단했다. 그 뿐인가, 오르티마를 통해 일부 복원까지 성공했다.
'모두의 성장까지 생각하면 얻은 게 많은 공략이었다.'
진세아는 재능 '리미트 해제'를 개화하고, 레벨 업을 통해 S급 헌터가 되었다. 채아연 또한 '절대신성부여'를 획득했다.
이번 공략으로 두 사람 다 S급에 도달했다.
'목적은 전부 달성했다.'
엘리스가 재능을 개화하지 못한 건 조금 아쉽지만, 앞으로 계속 데리고 다닐거니 문제 없다.
그때였다.
"저기요······."
채아연이 쭈뼛쭈뼛 내쪽으로 다가왔다.
"처음 게이트 공략할 때 의심해서 미안해요. 제가 괜히 까칠했던 것 같아서요. 이지한 헌터님, 진짜 실력있네요. 인정."
나는 어깨를 으쓱여 대답을 대신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지한 오빠라고 불러도 되죠?"
"?!"
그 순간, 엘리스와 간식을 먹던 진세아가 획 돌아봤다.
"왜 그래?"
"······아뇨, 아무것도 아닌데요?"
갑자기 뭐가 튀어 나오는 줄 알고 깜짝 놀랐다. 진세아의 위기 감지 능력은 무시할 수가 없으니까.
나는 다시 채아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면 나도 말 편하게 할게. 괜찮지? 부르는 건 마음대로 하고."
"네, 지한 오빠!"
"그래, 그래. 이제 나가자."
게이트 바깥으로 나가자 지하철 역에 은빛의 날개 관계자들이 모여 있었다.
들어 올 때는 없었던 사람들이다. 윤지은이 보내 준 사람들인 모양.
"고생하셨습니다! 소식을 늦게 들었습니다."
"사진 몇 장만 찍어도 될까요? 길드 내부 기록용으로 쓸 겁니다."
사람들이 따뜻한 차와 담요를 가져다 줬다.
우리는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은빛의 날개 본사로 돌아올 수 있었다.
- 수호 길드 S급 게이트, 최단기 공략!
- 초신성 '신태양'의 본격적인 활약······.
- "이번 공략의 주인공은 신태양" 단독 길드장 인터뷰
돌아 오는 길에 차 안에서 확인한 기사였다.
'잘하고 있구만.'
재능을 개화한 신태양이 제대로 활약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제 마족과의 전투에서도 충분히 힘을 발휘 할 수 있을 거다.
은빛의 날개 본사.
로비에서 사람들이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은빛의 날개 관계자가 아닌 사람도 몇 보였다.
"우리가 공략하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봐요?"
"수호 길드에서 최단 공략을 해서 그런 게 아닐까요? 아까 기사 봤어요."
"그런 일이 있었어?"
아마 그것 때문은 아닐 거다.
"오늘 하루는 푹 쉬고, 내일 보자."
"하루요? ······완전 지옥의 일정인데요. 뭐, 지금 이 느낌이면 뭘해도 될 것 같기는 해요."
"매일 매일 사부님과 훈련이라니, 야호······."
진세아가 자신만만하게 가슴을 폈다. 채아연도 이번 공략에서 성장을 경험 했기에 불만은 없었다. 오히려 기대된다는 눈치다.
엘리스는 조금 풀이 죽은 것 같기도 하다.
너무 굴렸나.
일단 모두가 각자의 숙소로 돌아간 사이 나는 은빛의 날개 장인 공방으로 향했다. 김건이 나를 맞이해줬다.
"아, 지한씨. 방어구는 어떠셨나요? 설마 부작용이 있었던 건 아니죠?"
"아뇨, 아주 잘 썼습니다. 성능 확실하던데요."
"뭔가 제가 만든 것보다 더 좋아진 것 같은 느낌이······."
착용 중인 아이템의 정보는 일반적으로 볼 수 없다. 슬슬 성장형 아이템에 대해 알려줘도 괜찮을 시기이긴하다만, 조금 더 상황을 봐야겠다.
나는 김건의 정보창을 살폈다.
『 김건의 재능 '오버 더 레전더리' 개화까지 5 / 50 』
굉장히 빠른 속도로 레전더리를 찍어내고 있었다. 이 정도 속도라면 조만간 능력을 개화할 것 같다.
여기에 온 목적은 따로 있었다.
스윽.
품 안에서 청색의 파편을 꺼내 김건에게 건네었다.
『 신기한 재능의 파편 』
"혹시 이 세 개를 합성해 주실 수 있습니까?"
파편을 확인한 김건의 눈매가 변했다.
"오······. 이건 굉장히······. 신기한 아이템이네요."
미래의 김건은 파편을 합성하는 제작대까지 만들어 놨었다.
"한 번 해볼게요. 아니요, 꼭 제가 하게 해주세요!"
내 옷을 붙잡고 흔드는 김건.
"어차피 그럴 생각으로 들고 온 겁니다. 놔주시죠."
"아,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흥분해서."
파편은 김건에게 맡겼다. 저것까지 조각으로 만든다면 내 미천한 재능도 조금 더 나아지겠지.
"그러면 이제 할 일은······."
기다리는 것 뿐이다.
* * *
- 아니, 미쳤어요? 지한씨 대체 어떤 방법을 쓴 거에요?
이제는 명실상부 은날의 길드장 윤지은.
그녀의 음성이 스마트폰을 넘어 들려왔다.
"왜 이렇게까지 해주는 거에요? 저기요, 이제는 무서울 지경이거든요?"
"그냥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네요."
"저희 돈 별로 없어요······. 큰일이네. 이거 얼마를 드려야하지."
"······딱히 돈을 바라고 한 일 아닙니다."
다음날 점심.
채아연과 진세아는 다시 능력 테스트를 받았다. 그 정보를 들은 윤지은에게서 득달 같이 전화가 온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전화 드리려고 하긴 했어요. 아직 언론에는 나가지 않았는데, 조만간 대규모 공략이 있을 것 같아요. 자세한 사항은 나중에 만나서 알려 드릴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뭘요, 지한씨가 한 일에 비하면 별 거 아니죠."
보글보글.
통화를 종료하고 나니 냄비에 올렸던 물이 끓고 있었다. 나는 비빔면의 봉지를 뜯어, 면을 물에 집어 넣었다.
"사부님께서 직접 요리를 해주신다니. 어떤 요리인가요?"
그 앞에는 엘리스가 앉아 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라면."
게이트에서 진세아와 채아연의 활약이 너무 두드러졌던 탓에, 엘리스가 나설 일이 거의 없었다.
그 탓에 묘하게 풀이 죽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 스킬 '중급 요리 Lv.11'을 발휘합니다. 』
위로도 하고, 요리 스킬의 위력도 확인할 겸 불렀다.
"사, 사부님이 좋아하는 라면······."
이곳은 은빛의 날개에 마련된 주방.
'이번 공략은 이전과는 다른 대규모 공략이다.'
그걸 대비해서 나도 대량의 식재료를 준비해뒀다. 꽤 이전에 마정석을 담기 위해 샀던 공간 배낭이 톡톡히 제 역할을 했다.
치이익.
옆에 놓인 후라이팬에 대패 삼겹살을 올리자, 기름 소리와 함께 맛있는 냄새가 올라왔다.
요리 스킬 덕에 별 다른 주의를 들이지 않고 비빔면과 삼겹살을 동시에 완성할 수 있었다.
"와아······."
군침을 흘리는 엘리스에게 음식을 내밀었다.
『 추가효과로 인해 적용 능력치가 두 배가 됩니다. 』
『 정성스럽게 조리된 비빔면 』
- 모든 능력치 12% 증가 (3시간)
- 피로 회복 100%
『 환상적으로 구워진 대패 삼겹살 』
- 영구적인 체력 증가 0.1% (1회 한정)
- 체력의 3%에 해당하는 보호막 획득합니다.
두 개의 음식은 정보창으로 확인할 수 있는 아이템이 되어 있었다.
'효과가 미쳤는데······.'
중급 요리 스킬의 성능은 끝내줬다. 다른 세계에서 구해 온 스킬이라 그런지, 말도 안되는 가성비를 자랑했다.
이 정도면 게이트 내부에서도 충분히 요리 해볼만하다.
"사부님 혹시 영약을 넣어서 만드신 건가요······? 이전에 게이트 안에서 먹었던 것보다 효과가 훨씬 좋아보여요."
간혹 사치스러운 헌터들이 그런 일을 한다곤 들었다만, 그럴 바에는 영약을 그냥 마시지.
"어쨌든 잘먹겠습니다."
그리 말한 엘리스가 능숙한 젓가락질로 비빔면과 삼겹살을 입에 넣었다.
투둑.
젓가락을 떨어뜨린 엘리스는 충격을 받은 것처럼 굳어졌다. 뭐가 잘못 됐나?
"뭐야? 괜찮아?"
"너무 맛있어요······."
뭐야, 그런 거였나.
"고마워요, 사부님. 완전 힐링이에요······. 너무 맛있어서 눈물이 날 것 같아요. 헤헤."
눈물을 글썽이는 엘리스.
따지고보면 대한민국까지 무턱대고 건너 온 거다. 분명 원래 있던 곳에서 아는 사람들이 있었을텐데.
예언 하나에 의지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의도치 않게 고생만 시키고 있다.
엘리스가 열심히 비빔면을 먹는 사이.
다시금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 백묵
스마트폰을 확인한 나는 주방에서 빠져나와 전화를 받았다.
'슬슬 연락이 올 거라고 생각했다.'
윤지은이 말한 대규모 게이트 공략.
이건 단순한 게이트가 아니다.
- 아, 지한씨. 어쩌다보니 예상보다 일찍 전화드리게 됐네요. 예상보다 일찍 판이 준비될 것 같아요.
헌터 협회에 숨어 있는 '환상의 마족'.
백묵은 그를 끌어내기 위한 작전을 계획하기로 했었다.
- 의외로 그쪽에서 먼저 움직여주더라구요, 저희한테는 절호의 기회죠. 알고 계셨을지도 모르겠지만 유례없는 대규모 게이트가 출현했어요.
윤지은이 말했던 그 게이트일 거다. 현재 대중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게이트.
- 그냥 크다고만 말씀드리면 와닿지 않겠죠. 이게 말도 안되는 규모여서요, 의견을 종합하는데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나는 그 게이트의 정체를 알고 있다.
프로젝트 아포칼립스를 위한 최후의 게이트.
상위 나약의 마족과 환상의 마족의 합작품.
- 이번 공략에는 네 개의 단체가 참여합니다. 수호, 은날, 오성 그리고 협회. 정말 말도 안되는 규모에요.
백묵이 말을 이었다.
- 심지어 협회 쪽에서는 그 부회장이 직접 공략에 참가한다더군요. 재밌어졌어요.
협회의 부회장.
그 정체가 바로 환상의 마족이다.
그는 살짝 들뜬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 그래서 말인데요, 지한씨는 어느 단체에서 공략에 참여하시겠습니까?
원하시는 장소 어디에서든 공략이 가능하게 만들어드리겠습니다.
백묵은 그렇게 말했다.
137화 연합을 이끄는 네 개의 별(1)
"그러면 협회에서 하겠습니다."
나는 백묵에게 그리 말했다.
이번 게이트는 그야말로 초대형.
그러나 각 길드들은 이번 공략에 모든 인원을 전력 투구할 순 없다.
대한민국의 모든 S급 헌터가 하나의 게이트에 투입 된다면, 유사시에 가용할 인원이 사라지는 게 되므로.
'특히 협회에는 S급 헌터의 수가 많지 않다.'
따라서 협회 산하의 길드들이 모자란 전력을 대체하게 될 것이다. 이는 수호 길드나 은빛의 날개도 마찬가지다.
'즉, 외부인이 섞여 들어가기엔 최적의 상황이라는 거지.'
마족들도 내 존재에 대해선 파악하고 있다. 정확히 내가 누군지는 몰라도 '대적자'라고 부르는 방해자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안다.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가면서도, 마족인 부회장을 견제하려면 협회가 제일이다.'
인류의 진짜 배신자인 대마법사 김민수가 있는 '오성' 길드도 끌리지만, 당장은 마족이 우선이다.
프로젝트 아포칼립스의 저지만큼 중요한 것도 없으니까.
"그러면 그렇게 준비하겠습니다. 협회 산하 길드인 '길몽'에서 공략에 참여하시게 될 겁니다. 거기 사람들 전부 믿을만한 사람이니 걱정 안하셔도 되구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이라지만,
"자세한 사항은······. 당일 그 친구들이 설명해줄 겁니다. 참고로 이번 건은 꽤 크거든요. 부협회장이 마족이었다. 이 사실로 대한민국 전체가 들썩일 거에요."
협회의 부회장이 마족이다.
이것을 증명하는 게 백묵의 목적이다.
그러나 상황은 더 복잡하게 돌아갈 거다. 그 게이트 안에는 한 명의 마족이 더 있거든.
"지한씨는 원체 능력 있는 사람이니, 잘 해주실거라 믿습니다."
그걸 내가 막으러 가는 셈이니 결과적으로는 백묵의 기대가 맞아떨어진다고 봐야하는건가.
"혹시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아, 사람 하나만 더 추가해줄 수 있습니까?"
"사람이요? 그거야 어렵지 않습니다."
백묵과의 전화를 마치고 나는 은빛의 날개의 주방으로 돌아왔다.
비빔면을 전부 다 먹은 엘리스가 어디선가 찾은 식혜를 마시고 있었다.
"엘리스, 너는 나랑 가자."
"네? 어디를요?"
엘리스는 아직 은빛의 날개와 정식 계약을 맺진 않았다. 내 수명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이상 엘리스와 떨어질 순 없었다.
'이미테이션 장갑으로 베낄 수 있는 스킬은 유니크까지.'
엘리스의 시간 조작 같은 고유 스킬은 레전더리급인데다가, 이미테이션 장갑으로도 베끼기 어려운 영역이다.
한동안 엘리스와 함께 다녀야 한다.
녀석의 성장도 봐줄 겸.
"후, 훈련은 아니죠······?"
엘리스가 흠칫 몸을 떨었다.
* * *
다음날.
은빛의 날개 브리핑이 열렸다.
길드장인 윤지은이 직접 관련 내용을 설명했다. 대형 프로젝터가 띄워 올린 화면에는 각종 자료가 즐비했다.
"협회의 조사 본부에 의하면 이번 게이트는 유례 없는 규모에요. 믿기 힘들겠지만 하나의 세계나 다름 없는 수준이라고 해요. 나오는 마수들도 당연히 만만치 않고요."
"그래봤자 S급 게이트면 똑같은 거 아닌가요?"
지난 S급 게이트 공략으로 자신만만해진 천성호가 손을 들고 질문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몰라도 천성호는 그리 말해도 된다.
그만한 실력과 재능을 갖췄으니까.
"일반적인 게이트였다면 성호 말이 맞아. 다만······."
틱.
그녀가 화면을 넘기자 마족의 모습이 찍힌 사진이 나왔다.
윤지은이 길드원 전체를 향해 말했다.
"갑작스레 발생한 대규모 게이트인만큼, 마족이 관여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마수도 인간도 아닌 제 3의 세력. 이들이 인간에게 매우 적대적이란 것만큼은 확실하니까요."
마족이라는 말이 나오자, 자리에 적막이 가라앉았다.
"······."
그 강함은 이미 이전 중위 전투의 마족과의 싸움에서 경험했다. 은날 내부에도 정보가 남아 있을 터.
"그······. 마족은 정말로 저희 세계를 노리고 있는 건가요······?"
앞자리에 앉아 있던 신아람이 조심스레 손을 들어 올렸다.
"지금까지의 정보에 의하면 그래요. 뭐, 확언할 수는 없죠. 마족을 직접 잡아서 물어 본 건 아니니까요. 그래도 상당히 위험할 수 있다는 것만큼은 알아두는 게 좋을 거에요."
이러한 마족에 대한 정보는 대부분 백묵이 대형 길드에게 팔아 치운 것이다. 딱히 이견은 없다.
윤지은의 주도하에 게이트 내부의 식생이나, 마수들에 대한 정보 브리핑이 이어졌다.
회의가 끝나고 나는 윤지은에게 찾아갔다.
그녀가 쓴 안경 너머 다크 서클이 짙다. 조만간 피로 회복 음식이라도 만들어줘야겠다 싶다.
"정말이에요? 이번에는 다른쪽에서 공략에 참여할거라고요?"
내 말에 윤지은은 충격 받은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협회에서 공략하게 될 것 같습니다. 윤지은씨만 알아두세요."
"그, 그게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문제던가요? 아니지. 혹시 페이가 모자랐던건가요? 두 배로 드릴테니까 저희 쪽에서······."
"아뇨, 이번에는······."
"세, 세 배······!"
윤지은이 간절한 표정으로 세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런 게 아니라니까.
길드장이 되고 나서 불안한 마음도 이해는 하지만.
이번 공략에서 가장 위험한 건 협회 쪽이다. 부협회장도 부협회장이지만, 공략이 무너지는 것도 거기서부터다.
내가 직접 그걸 막아야한다.
······라고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
나는 간단하게 말했다.
"협회에는 윤서현 헌터도 있으니까요."
아침에 백묵으로부터 명단을 받았다. 윤서현 헌터가 공략에 참여한다는 사실은 언니인 윤지은이 당연히 알고 있을테고.
그제서야 윤지은의 눈빛이 한결 차분해졌다.
"그렇게까지 말하면 어쩔 수 없네요. 아쉽지만 포기할게요. ······동생을 잘 부탁할게요."
* * *
그 다음날인 레이드 당일.
게이트의 위치는 도심의 한가운데였다. 그 크기가 20m가 넘어 보기부터 심상치 않다.
"우와, 이렇게 큰 게이트는 처음봐요."
전에 없이 많은 기자들과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심지어 대한민국의 3대 길드가 또다시 전부 모이다니. 정말로 역사적인 날이네요! 이 순간을 놓칠 순 없죠."
찰칵, 찰칵.
엘리스가 스마트폰으로 열심히 사진을 찍어댔다. 녀석은 한국문화 전반 뿐 아니라, 각종 길드에 관해서도 빠삭했다.
과거의 나 수준으로 관심이 많았던 모양이다.
오성, 수호, 은날.
거기에 더해 협회까지.
콘서트 수준의 인파가 모여들었다. S급 게이트 공략 성공률이 100%에 달하는 현 시점 이런 광경은 오히려 흔하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인기를 구가하는 것은.
"꺄아악! 신태양! 여기 좀 봐줘요!"
"신태양, 신태양!"
"수호자의 검 신태양 파이팅!"
신태양이었다. 녀석은 훈련 이후 S급 게이트를 빠르게 격파하며 주가를 크게 올렸다. 녀석은 마구 손을 흔들어주며 자신의 인기를 누렸다.
"이전하고 인상 바뀐 것 같지 않아?"
"확실히······. 이전보다 더 눈빛이 깊어졌다고 해야 하나."
일반 대중들이 변화를 느낄 정도로 성장했다고 봐야 하나.
"사인 해드릴게요. 자, 자. 악수도 좋죠. 다들 종이 들면 한 번에 해드릴게요!"
샤샤샥—!
펜을 든 신태양이 바리케이트 너머로 순식간에 사인을 마쳤다. S급 헌터다운 빠른 움직임이었다. 재능을 낭비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야야, 적당히 해. 공략 전이잖아. 그런 건 네 팬 사인회에서나 하라고."
"길드장님, 그건 팬에 대한 예의가 아니죠."
수호 길드 마스터인 사최헌의 핀잔에도 꿋꿋이 사인을 해주며 이동한다. 이전의 시끄럽던 모습을 되찾은 것 같아 다행이다.
물론 반대편 은빛의 날개의 인기도 만만치 않다.
"천성호, 신아람, 윤지은······! 대한민국의 스타 헌터들을 한눈에 볼 수 있다니. 너무 좋아요!"
은빛의 날개 건물에서도 실컷 봤잖냐.
"근데 오성 길드장은 안 보이네요. 아쉬워라."
어쨌든 사진을 전부 찍은 엘리스가 만족하며 내쪽으로 다가왔다. 묘하게 들뜬 모습이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준비도 철저히 했어요. 약과도 챙겼고, 한국 과자도 많이 챙겼어요. 식혜랑 수정과도요!"
"······."
꽤 오래 있게 될테니 필요한 걸 챙기라고 하긴 했다만.
우리는 비교적 한적한 천막으로 향했다.
협회 산하 소규모 길드 '길몽'.
백묵의 부하로 보이는 사람들이 미리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중 진한 눈썹을 가진 남자가 우리를 맞이했다.
"두 분 어서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정진수라고 합니다. 천막 안으로 깊히 들어와주세요. 방음 마법이 걸려 있거든요."
가볍게 악수를 나눈 뒤, 설명을 들었다.
대략적인 개요는 이러했다.
공략이 중반에 이르렀을 즈음에 부협회장을 공격해서 마족의 모습을 끌어낸다는 작전이었다. 그 상황을 특수한 장비로 녹화할 예정이었고.
심플하지만 부협회장의 정체를 파악한 상황에선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이 작전에서 제일 핵심이 되는 건 이지한씨입니다. 마족에게서 살아나가야 결국 의미가 있는 거니까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당연히 행동을 함께 할 엘리스에게는 미리 설명해 놨다.
'사부님은······. 비밀결사 같은 거였군요. 이해했어요!'
대강 이해해줬다.
"게이트에 입장하고 나서는 협회의 지시를 받아 움직여 주시면 됩니다. 저희 작전에 주축이 되는 건 협회의 마성철 팀장입니다."
게이트 공략 조건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때문에 각 길드가 흩어져 내부를 탐사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거란다.
"저희는 마지막에 입장할테니, 그때까지 자유롭게 기다려주시면 됩니다."
입장 전까지 시간이 남아 천막 바깥으로 나왔다. 엘리스가 사진을 찍고 싶어하기도 했고.
때마침 협회의 천막 아래에서 물을 마시는 윤서현이 보인다.
'저기 있네.'
우연히 그녀와 시선이 마주쳤다.
콜록, 콜록.
윤서현이 사레에 들린 듯 물을 쏟았다. 무어라 말하지만 거리가 있는데다, 사람들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는다.
대충 왜 여기에 있냐는 표정이었다.
그때였다.
큰 덩치의 노인 하나가 나타나 윤서현을 가렸다.
"으음, 잠깐 괜찮겠나. 이번 협회의 공략을 도와줄 친구들이라고 들었는데."
부협회장이었다.
나이가 지긋하게 들었지만, 노인이라기보단 나이든 중년처럼 보이는 남자. 그 풍채에서는 어렴풋한 위압감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그의 위장은 완벽했다. 마족 특유의 불길한 마기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아이고, 부회장님 오셨습니까!"
천막 아래에 있던 길몽의 헌터들이 허겁지겁 뛰쳐 나왔다. 아니, 그런 척을 하는건가.
짙은 눈썹의 정진수가 고개를 숙였다.
"이번 공략 직접 이끌어주신다고 들었습니다. 영광입니다."
연기가 제법인데. 방금 전까지 부협회장을 공격하니마니 했던 게 잊힐 정도다.
부협회장은 길몽의 사람들을 천천히 훑었다. 당연히 그의 시선은 내게도 머물렀다. 아니, 내 쪽에서 정확히 멈췄다.
"흐음, 자네······."
나를 바라보며 미간을 좁힌 부협회장.
'뭔가 눈치 챈 건가?'
단순히 사람들을 격려해주려고 온 것은 아닐거다. 게이트 내부에 존재할 대적자를 의식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툭툭.
"어깨에 먼지가 묻었군."
부협회장은 내 어깨를 털어줬다.
"다들 눈빛이 좋아. 이번 공략은 자네들의 역할도 매우 중요하니, 잘 부탁하겠네."
"저희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 말하고선 뒤를 돌아 사라졌다.
한 번 둘러 보려고 온 건가.
정진수는 살짝 한숨을 내쉰 뒤, 내 쪽을 바라봤다.
"슬슬 입장할 때가 된 것 같네요. 잘부탁드리겠습니다."
"사부님, 저 왔습니다!"
다리 밑을 가득 채운 거대한 게이트가 보인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려 왔다. 헌터들이 게이트 내부로 들어가고 있다.
나는 마지막으로 시스템창을 확인했다.
『 <A등급> 한계돌파 퀘스트 』
- 목표 : 프로젝트 '아포칼립스' 저지
- 클리어 보상 : ???
이들 모두 모르고 있겠지만······.
대한민국, 더 나아가 인류의 미래를 결정지을 중요한 공략이.
지금 이 순간 시작 되었다.
138화 연합을 이끄는 네 개의 별(2)
『 '인접환상계 : 불안정 지대'에 입장하셨습니다. 』
커다란 게이트 너머로 들어오자, 드넓은 산림이 펼쳐졌다. 그러나 보이는 환경은 각양각색이다.
가장 먼저 보이는 녹림의 숲을 넘어서면 곧바로 극한의 환경이 펼쳐진다.
산전수전 겪어 온 헌터들이 입을 벌리고 구경할 정도였다.
"오우······. 다이나믹하구만."
나무째 얼어붙은 빙결의 숲, 이글이글 타오르는 화염의 숲과 화산, 검게 죽어 있는 나무들이 가득한 땅······.
"뭐, 이런 장소가······. 게이트들을 전부 합쳐 놓은 것 같네요."
"허어······. 저기 저 화산 설마 폭발하지는 않겠지?"
"추운 건 질색인데."
『 '칭호 - 환상계의 영웅'의 효과가 발휘됩니다. 』
『 환상계에서 모든 능력치가 250% 상승합니다. 』
떠오르는 메시지창과 함께 붉은 기운이 내게로 스며 들었다.
'이건 예상 못했는데. 여기 인접 환상계에서도 적용될 줄이야.'
이전 엘프 학자 세레네를 도와 목룡 몰테인을 처치했을 때 획득한 칭호였다. 얻어 놓은 보람이 있다.
"이거 출발을 어디로 하느냐에 따라 많이 달라지겠는데."
"일단 예정했던대로 탐색 위주의 공략을 해야겠네요."
모든 길드가 입장해서 풍경을 살피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가볍게 한바퀴 둘러봤다.
'오성의 김민수는 이번엔 참가하지 않았다.'
알고 있는 그대로였다. 신경 쓸 게 줄어서 좋기는 하다만. 노란빛의 망토를 걸친 오성의 길드원들.
그들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전) 인류의 배신자 김상욱이었다. 자연스럽게 그 틈에 녹아들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원래 넋살 좋은 녀석이긴 했다.
'그 사이에 오성의 1군까지 올라 온 건가. 빠른데.'
그를 오성의 스파이로 보낸 것은 나다. 그간 연락이 없었기는 하다.
'연락하지 못할만한 상황인가? 어쩌면 감시를 받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대마법사 김민수는 철저한 인물이다. 최후의 순간까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인물이었으니.
그 철두철미함 아래 아무도 그의 배신을 눈치 채지 못했다.
'흐음.'
두루마리의 계약으로 맺어진 주종 관계 하에 김상욱은 나를 배신할 수 없다.
"······."
김상욱과 살짝 눈이 마주쳤다. 잠깐 시선이 내게 머물렀지만, 정말 짧은 순간이었다.
그는 나를 무시하고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 길드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일단은 지켜보는 걸로 하고.'
각 길드 간의 의견 조율이 계속 되는 가운데.
"형!"
은빛의 날개에 있던 천성호가 나를 향해 다가왔다. 녀석의 손에는 청색 조각 하나가 들려 있었다.
"이거 길드장님이 전해달래요. 가져다 드리면 알거라고 하시던데요?"
『 신기한 재능의 조각 』
푸른 조각 위에는 알 수 없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걸로 신기한, 특이한, 미미한 재능의 조각 세 개가 모였다.
'당장 느껴지는 변화는 없다만.'
분명 내적으로는 무언가 변화했을 거다.
"고맙다."
"형, 다음에는 꼭 저희랑 공략해요. 저 많이 강해졌거든요? 형한테 못 보여줘서 진짜 아쉽네. 맞다, 형이 지원 요청하면 무조건 갈게요. 무조건."
올 일 없을 거다. 그리고 네가 빠지면 은빛의 날개에 전력에 큰 구멍이 생긴다.
근데, 진세아가 보이지 않는다. 이번 공략에는 내가 아는 영웅들 전부가 모였어야 할텐데.
"진세아가 안보이는데."
나는 자연스레 떠오른 의문을 물었다.
"아, 걔요? 원래 가는 거였는데, 오늘 아침에 급하게 빠졌어요. 가족 사정이랬나······."
가족 사정이라고 하니 단박에 이해가 간다.
진세아의 아버지는 하이테크 사의 회장이다. 딸인 진세아가 위험한 게이트 공략에 참여하는 걸 막고 싶었겠지.
'내가 아는 미래의 정보하고 다른 것 같은데.'
당연하지만 내가 모든 사항을 낱낱이 꿰고 있는 건 아니다. 내가 경험한 일이 아니라 어디까지 들은 정보니까.
'조금 달라질 수도 있는 거겠지.'
그리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사삭.
뒤쪽의 수풀이 부자연스럽게 흔들렸다. 미묘한 기척이 느껴진 것 같기도 했으나, 다시 살펴봤을 때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몰래 온 건가?'
혹시나 싶어 수풀로 다가가 살펴봤지만 아무런 흔적이 없다.
내 기감으로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면 단순한 기우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저는 돌아갈게요!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형이 부르면 무조건 갈게요!"
천성호는 내게 손을 흔들며 돌아갔다. 날 도와주러 올 정도로 상황이 여유롭지는 않을 거다.
"사부님, 저 왔어요. 무려! 사최헌 헌터의 싸인을 받았어요!"
엘리스가 자랑스레 싸인이 담긴 종이를 보여줬다.
"······대단한데."
"후후, 감사합니다."
"······."
이 상황에서 싸인까지 받아 올 줄이야. 보통 집념이 아니다.
"아, 정보도 확실히 받아왔어요! 게이트 공략 조건이 밝혀지지 않아서, 주변을 탐색하는 것부터 시작하기로 했다네요."
일반적인 게이트라면 보스를 처치하는 걸로 공략이 클리어 되지만, 여기는 S급 게이트다.
그것도 갑작스레 생성된 대규모 게이트.
변칙성을 염두에 둔 안정적인 공략이 진행된다.
"그러면 공략 개시합니다!"
가장 먼저 출발하는 건 수호 길드.
길드장 사최헌을 필두로한 푸른 깃발이 전진하기 시작했다.
뒤를 따르는 길드원들의 표정은 여유로우면서도 자신감있는 미소가 감돌고 있다.
"수호 길드는 중앙을 탐색하기로 했대요. 은빛의 날개는 가장 우측. 저희가 속한 협회는 그 사이에서 출발이에요."
늘어놓고보면 3번째 위치였다.
좌측에 수호길드, 우측으로는 은빛의 날개가 있어 유사시에 지원 받기가 가장 용이한 자리.
'반대로 뭔가를 일으키기에도 가장 좋은 자리지.'
협회의 인원은 약 50명.
나와 엘리스는 후미에서 행렬을 따라갔다.
"그나저나 진짜 큰 게이트네요. 이런 대규모 공략은 미국에 있을 때도 해 본 적 없어요."
"그래? 그러고보니 넌 원래 어떤 길드에 속해 있었다고 그랬었지?"
엘리스의 과거에 대해선 자세히 알지 못한다. 내가 만난 엘리스는 미래에서 본 게 전부였으니까.
"레거시 길드였어요. 다들 좋은 분들이셨죠. 길드 마스터가 비트코인에 길드 자금을 몽땅 날려먹는 바람에······."
가벼운 담소를 나누며 걷고 있는데 앞쪽에서 윤서현이 다가왔다. 엘리스가 그녀를 보며 한마디했다.
"와, 예쁜 사람이네요. 근데 왠지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것 같은데요······?"
같은 게 아니라, 이쪽으로 오는 게 맞다.
"왜 여기에 있는 거에요?"
눈을 가늘게 뜨고 다가온 윤서현이 내게 물었다.
나는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이번에는 협회 측에서 공략하는 게 유리한 것 같아서요. 마침 잘 됐네요. 같이 가시죠."
"그거야 상관 없지만······."
윤서현의 시선이 엘리스에게로 향했다. 어느샌가 내 옆에 착 달라 붙어 있는 엘리스. 윤서현이 질문했다.
"이 애는 누구에요?"
"저는, 사부님의 운명의 사람이랄까······."
"그냥 제자입니다."
"흐음······."
내가 빠르게 정정하자, 윤서현이 흥미롭단 표정으로 엘리스를 바라봤다.
"지한씨, 아는 사람이 참 많네요."
진세아도 그런 소리를 했던 것 같은데.
그 순간이었다.
콰과과과과——!
왼편의 숲 너머로 굉음과 함께 십자 모양의 섬광이 마구 솟구쳤다. 푸른 하늘 아래로 뻗어나가는 청색의 광휘.
가벼운 충격파와 산뜻한 바람이 이곳까지 불어온다. 그 광경을 지켜본 협회의 헌터들이 한마디씩 내뱉었다.
"수호 길드 신태양한테 큰 변화가 있었다곤 들었는데."
"저 정도야? 이제 진짜 기존 헌터들하고 비교해도 손색 없겠어."
윤서현도 꽤나 놀란 눈치다.
"······신태양도 지한씨 제자라고 하지 않았어요?"
"뭐, 그런 셈이죠."
"후후, 신태양씨도 사부님의 특훈을 받아서 저렇게 성장한 거에요."
엘리스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윤서현의 근황도 들을 수 있었다. 급격히 증가한 변칙 게이트 때문에 협회에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고 한다.
으어어어······.
울창한 숲을 지나치자, 본격적인 장소가 나타났다. 협회가 나아간 방향에 있던 건 어두운 숲.
양 옆에서 수 십 마리의 언데드가 비척 비척 걸어나왔다.
"구울이군요."
"제가 처리할게요."
우우웅!
윤서현의 주변에서 형성된 보랏빛의 구체가 쏘아졌다. 주변의 공간을 왜곡시키며 날아간 구체는 단 한 방에 구울을 꿰뚫었다.
구체는 사라지지 않고 윤서현의 손짓에 맞춰 구울을 차례차례 쓰러뜨렸다.
'윤서현도 그 사이에 성장했나.'
잡몹이지만 S급 게이트의 마수들이다.
"거기 도와줘! 가까운 놈들부터 처리해!"
"기다려봐. 이쪽도 지금······. 너무 많은데 이 놈들?"
애를 먹고 있는 협회 헌터들에 비교하면 굉장한 수준이었다. 그래도 차분히 대처하면 못 쓰러뜨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이쪽도 50명이나 있다.
헌터들을 도와 구울들을 정리해 나갈 무렵.
그어어어——!
검은 숲의 나무들을 뚫고 거대한 뱀 마리가 나타났다. 눈에는 생기가 없고, 가죽도 벗겨져서 떨어질 것 같다.
언데드 뱀의 일종이었다.
자연스레 50명의 인원이 뱀을 둘러싸듯 움직였다. 그러나 언데드 뱀의 움직임도 만만치 않았다.
콰앙!
"으아아악!"
놈의 꼬리에 맞은 헌터 세 명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언데드 뱀은 머리를 뻗어 그들을 낚아채려는 찰나.
『 동료 윤서현이 스킬 '공간조작 Lv.6'을 발휘합니다. 』
윤서현이 공간을 변형 시켰다.
콰아앙!
뛰어오른 언데드 뱀이 별안간 땅바닥에 처박히고, 허공에 떠오른 헌터들은 어느새 땅에 살포시 내려와 있었다.
"허억, 감사합니다."
"후우, 역시 협회의 자랑 윤서현 헌터!"
"뭘요."
쓰러진 언데드 뱀을 향해 다수의 헌터들이 달려들었다. 놈의 몸을 칼로 베어내고, 둔기로 내리쳤지만 언데드 뱀은 더욱 발악했다.
통각이 없는 언데드는 몸이 완전히 망가지기 전까지 활동을 멈추지 않는다.
"벌써부터 쉽지 않네."
"일단 다친 사람들은 뒤로 물러나!"
"독은 없지? 그러면 괜찮아."
나는 앞으로 나서지 않고, 부협회장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그는 양 손에 장갑 고쳐 끼며 천천히 앞으로 나왔다. 그의 넓직한 풍채는 결코 나이든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다들 물러나게."
크게 말한 것도 아니었건만 그의 기백에 헌터들이 자연스레 길을 내주었다.
그어어어—!
눈 앞에 보이는 먹음직스런 먹이를 향해 언데드 뱀이 아가리를 치켜드는 순간.
콰아아앙!
부협회장의 주먹이 뱀의 머리에 내리 꽂혔다. 땅에 처박힌 뱀의 꼬리가 하늘 위로 솟아올랐다가 떨어졌다.
꿈틀, 꿈틀.
거대 언데드 뱀은 조금씩 꿈틀거릴 뿐 더 이상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전신이 손상을 입었을 거다.
"와우······. 역시 부협회장님이셔."
"말했잖아. 헌터의 힘은 나이랑 상관 없다니까."
"든든하네."
헌터들이 쩔쩔매던 언데드 마수를 단 한 방에 정리했다.
한순간 긴장 되어 분위기가 순식간에 풀어졌다.
'저런 강자가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 그런 느낌이겠지.'
그도 그럴게 마수를 단 한 방에 제압했으니까.
저런 인물이 아군이라면 무서울 게 없다.
문제는 저 사람은 아군이 아니라는 거다.
"뭘하고 있나. 계속해서 움직이지."
부협회장은 자연스레 우리들을 숲의 내부로 이끌었다.
"부협회장님만 믿고 가면 되겠네."
"우리 협회도 꿀릴 거 없다니까."
이 시점에서 협회에 속한 헌터들은 안심할 수밖에 없었다.
'의도가 노골적이군.'
협회의 전력은 다른 세 개의 길드와 놓고 봤을 때 가장 약하다. 협회 사람들도 그걸 알고 있었을 거고.
부협회장은 그런 분위기를 한 방에 잠재웠다.
콰앙! 콰아앙!
마침 나타나는 구울들의 수준도 그리 높지 않았다. 차분하게 구울들을 제거하며 앞으로 나아가다보니 어느새 검은 숲의 내부까지 들어왔다.
뭔가가 잘못 됐다고 느끼는 사람은 없었다.
앞을 막아서는 검은 벽이 나타날 때까지도.
"여기서 막혀 있군요. 다른 길드에 보고하겠습니다."
협회의 마성철 팀장이 부협회장에게 보고 했다. 부협회장은 검은 벽을 손으로 슬쩍 쓸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하지. 이 이상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없어보이니."
"잠깐만요······! 구울들이 다가옵니다!"
"뭐야, 갑자기 이 많은 수가 어디에서 나온 거야?!"
검은 숲을 가득 메운 구울들이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봤자, 구울이잖아. 그냥 쓰러뜨리다보면······."
콰득!
그리 말한 헌터의 검이 구울의 이빨에 가로막혔다.
"뭐야? 이 놈들······."
구울들의 눈에는 붉은 기운이 떠올라있었다.
마기의 영향을 받은 광폭화 상태.
그 힘도 능력도 기존의 구울에 비해 월등히 강해졌다.
"다들 집중! 천천히 진형을 갖추고 상대하게나."
뻔뻔하게 그리 명하는 부협회장.
애초에 광폭화 상태의 구울들을 이쪽으로 불러 온 것도 그일텐데 말이다.
진형이고 나발이고 애초에 힘이 부족한 경우다.
협회의 모두가 점차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어어어—!
설상가상으로 다른 종류의 거대 뱀도 두 마리가 튀어나왔다.
"부협회장님, 이대로는 안될 것 같습니다!"
"지원 요청할까요?!"
잠시 고민 하는 척 하던 부협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겠군. 자칫하면 피해가 커질 수 있을테니."
부협회장이 그리 말하는 순간이었다.
"혀, 부협회장님!"
"위험합니다!"
"응?"
푸화악!
부협회장의 뒤쪽으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검은 땅에서 솟아난 거대한 부패한 손.
그것이 부협회장을 움켜 잡은 것이다.
"크윽, 이게 무슨······?!"
나는 눈 앞의 구울을 몇 마리 베어넘기며 무표정하게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패한 손을 만들어낸 것은 저주 받은 리치.
금단의 주술로 영생을 갈구하는 대마법사다.
콰드득!
리치가 만들어낸 부패한 손이 부협회장을 끌고 바닥으로 들어갔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아무도 대처하지 못했다.
"이, 이게 뭔 일이야······?"
"부협회장님이 끌려가셨다!"
"지원 연락은 안돼?"
"여, 연락 자체가 안됩니다!"
협회 전체가 순식간에 패닉에 빠지는 순간이었다.
부협회장을 공격할 계획을 가지고 있던 백묵의 부하들도 멍해지기는 마찬가지.
"뭐,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일단 여기 구울들에게서 벗어날 생각부터 합시다!"
팀장 마성철이 방패와 검을 든 채로 소리쳤다.
윤서현의 눈동자도 흔들리고 있었다.
"어, 어떻게 하죠······? 지하에 거대한 공간이 있어요. 부협회장님은 거기로 끌려 가신 것 같아요! 지금도 계속해서······."
그녀의 재능 초공간인지.
근처의 공간을 전부 파악한 모양이다.
"괜찮습니다."
"네?"
"부협회장이 없어도 문제 없을 겁니다."
『 타재간파의 서를 발휘합니다. 』
『 특수 스킬 '절대 신성 부여 Lv.1'를 활성화 시킵니다. 』
이 순간을 위한 스킬을 준비해 왔으니까.
황금빛의 장막이 어두운 숲 위에 드리운다.
"엘리스."
"네, 사부님!"
내 말에 엘리스가 부협회장이 사라진 장소로 향했다.
그 위에 손을 올리자 새하얀 빛이 흘러나온다.
『 동료 엘리스가 스킬 '시간 조작 Lv.7'을 발휘합니다. 』
드드드드!
푹 가라앉은 바닥이 다시 되돌아오기 시작한다. 부회장을 데리고 사라졌던 부패한 손이 다시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
변화를 감지한 헌터들이 뒤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부협회장은 계획에도 없던 구출을 당해야 할 거다.
139화 연합을 이끄는 네 개의 별(3)
"엘리스."
"네, 사부님!"
사부 이지한의 말에 따라 엘리스는 부협회장이 사라진 장소에 손을 올렸다.
엘리스의 고유 스킬 '시간조작'은 말 그대로 시간을 움직일 수 있는 강력한 힘이었다.
『 절대신성이 대상 엘리스의 몸에 깃듭니다. 』
그렇다고 만능은 아니다. 자신보다 훨씬 강한 적이나 특정한 상황에 대해서는 발휘 할 수 없다.
그러나 지금.
절대신성이 엘리스의 몸을 덮었다.
부협회장을 끌고 들어간 부패한 손은 분명 언데드처럼 보였다. 엘리스가 우위를 가지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사부님이 어떻게 채아연양의 스킬을······?'
한순간 그런 의문이 들었으나 정말 잠시 뿐이었다.
시간을 조작하는 능력도 있는데, 그것이 사부님의 고유한 능력이란 것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샤아아—!
그녀의 능력이 시간을 되돌리기 시작했다.
해당 공간의 시간이 과거로 돌아간다.
부협회장이 부패한 손에 붙잡히기 이전으로.
인간 모습의 부협회장은 엘리스의 시간 조작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드드드드!
시간이 역행하며 살포시 땅에 내려진 부협회장.
"이게 어찌된······."
그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반면 협회 사람들은 환호했다.
"부협회장님이 돌아오셨다!"
"뭔가 잘 모르겠지만 언데드들도 사라지고 있어!"
"다행이다······!"
숲 전체에 내리 깔리는 황금빛의 가루들.
거기에 닿은 언데드들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부협회장을 잡았던 부패한 손도 마찬가지였다.
부협회장의 미간이 좁혀졌다.
'무슨 해괴한 일이······?'
환상의 마족.
그는 리치에게 잡혀간 척 자연스럽게 전장에서 이탈할 예정이었다. 이후 마수들을 보내 협회 측 인간들을 궁지로 몰아넣고 상황을 지켜볼 생각이었건만.
꼼짝없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심지어 언데드들은 절대 신성에 의해 녹아내리고 있었다.
"부협회장님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협회의 마성철 팀장이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아아, 그래. 누가 날 구한거지?"
"부협회장님께서 자력으로 탈출 하셨던 것 아닌가요? 제 눈에는 그렇게 보였습니다만."
전투 중이었던데다가, 엘리스의 스킬을 모르는 협회 사람들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지금 대화를 나누는 상대는 백묵의 수하인 마성철이다.
사실을 안다고 해도 그대로 말해 줄 리가 없었다.
"그러면 이 신성력은 누가 한 거지······?"
"그것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길드에서 지원을 준 게 아닐까요?"
"지원? 그럴 리가······."
"연락이 안되는 상황에서 이런 지원을 보내주는 것도 이상하기는 합니다만. 부협회장님께서 무슨 수를 쓰신 줄로만 알았습니다."
부협회장의 이마에 주름이 새겨졌다.
"아니, 그런 게 아니었네."
어쩐지 마성철의 말이 자신을 긁어대는 것처럼만 들렸다. 부협회장은 혀를 한 번 찬 뒤에 표정을 가다듬었다.
"어쨌든 잘 되었군. 상황이 정말로······. 유리하게 되었어."
"아직 아닙니다."
숲에 머물던 황금빛 장막은 금새 사라졌지만, 숲 속에 숨어 있던 언데드들은 계속해서 다가오고 있었다.
"적은 아직 많습니다. 부협회장님께서 힘을 보여주실 때입니다."
"······. 그래, 그래야지."
이미 어그러진 계획.
다시 끌려 들어간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누가봐도 부자연스럽다.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그의 목적은 게이트 공략 실패이지, 자신이 마족임을 온 천하에 들어내는 게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부협회장은 장갑을 손에 끼고서 앞으로 나섰다.
콰앙! 콰아앙!
분노 섞인 그의 주먹 앞에 언데드들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오! 역시 부협회장님이셔!"
"다들 뒤쪽으로 붙어!"
부협회장은 언데드들을 쳐부수면서도 눈을 굴렸다. 분노한 그의 눈이 조금 붉게 변할 정도였다.
'대적자의 짓인가······? 그 놈은 절대 신성까지 보유하고 있단 말인가?'
아직도 대적자의 정체는 베일에 쌓여 있었다. 이들 중에 대적자가 있는가? 아니면 다른 곳에 있는가?
"거기 대형 언데드입니다! 부협회장님 부탁드립니다!"
콰아앙!
"와우."
"역시 부협회장님이셔!"
환호하는 헌터들.
그럴수록 부협회장은 이를 꽉 깨물었다.
'빌어먹을. 완전히 놀아나고 있군."
그러한 혼돈 속에서 부협회장은 언데드들을 차례차례 부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