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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화 봉인된 역전의 검(1)

A급 게이트.

사실상 대부분의 헌터들이 목표로 삼고 있는 지점이었다. B급보다는 보상이 훌륭하고, S급보다는 안전하기 때문이다.

'내가 A급 게이트를 이렇게까지 압도하다니.'

반면 S급 게이트는 선택 받은 소수의 헌터만이 공략할 수 있는 장소. 그 위험성은 다른 게이트와 비교할 게 못 된다.

대형 길드에서 공략대를 꾸려 공략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

쿠구구구!

땅을 휩쓸고 지나가는 거대한 나무 용 한 마리. 사나운 다크 오크들이 발악하듯 달라 붙지만, 소용 없다.

몸을 한 번 세차게 털어내자 우수수 떨어져 내린다. 바닥에 떨어진 다크 오크들은 그대로 즉사.

압도적인 체급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 오르티마의 레벨이 74 상승합니다. 』

『 목룡 몰테인(오르티마) Lv.1 → 75 』

오르티마의 새로운 형태의 레벨업도 순조로웠다. 새끼용의 레벨은 현재 115. 몰테인의 형태도 레벨업을 충분히 해놔야 했다.

파괴력이 강해지는 게 눈에 보일 정도다. 나는 녀석에게 명령했다.

"오르티마 하늘을 날아라."

"······."

오르티마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목룡 몰테인의 모습으로 그런 행동을 하니, 괴리감이 장난 아니다.

"스읍, 못하는 건가."

아직 본래 성능을 100% 끌어내지는 못하는 것 같다. 본판은 하늘을 날아다니며, 마기의 구체를 폭격하는 그야말로 괴수였다.

유적 필드가 아니었다면 놈을 쓰러뜨리는 건 꿈도 못 꿨을 거다.

'애초에 격의 차이 때문에 변신을 오래 할 수 없다고 했었지.'

그런 상황에서 하늘까지 날라는 건 확실히 무리한 요구일지도. 다만, 레벨이 충분히 오른다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지금 저 엄청난 용이 저희 편이라는 거죠······. 지난 일주일 동안 저걸 잡으려고 사라지셨던거에요?"

"그걸 노린 건 아닌데,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윤서현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쿠구구구!

땅을 헤짚으며 다크 오크들을 향해 돌진하는 오르티마. 흡사 불도저가 따로 없다. 검은 나무로 된 몸이라 공격을 받아도 큰 데미지가 없다.

오크들을 잡을 때마다 엄청난 양의 경험치와 포인트가 내게로 흘러 들어온다.

『 430 포인트를 획득하셨습니다. 』

『 398 포인트를 획득하셨습니다. 』

『 410 포인트를 획득하셨습니다. 』

···

..

.

『 452 포인트를 획득하셨습니다. 』

『 아룡종의 비늘 갑옷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

『 아룡종의 비늘 갑옷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

『 아룡종의 비늘 갑옷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

'이게 진짜 사냥이지.'

나는 아무것도 안하는데 오르티마 혼자서 1인분 아니 몇 십 인분 이상을 척척해낸다. 변신 시간 끝나기 전에 최대한 굴려야 한다.

"거기 왼쪽에 애들 빠져나간다. 잡아. 한 놈도 놓치지 말고."

"뀨우······."

"어허, 빨리 빨리."

윤서현은 허탈한 표정으로 오르티마에게 지시를 내리는 날 바라봤다.

"이거 저 필요해요?"

"네, 필요합니다."

협회 사람이 있어야지 게이트 공략 도중 난입이 인정 된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다.

"지한씨, 저 아직 B급인 거는 알고 계시죠? A급 게이트라 지원이라기보다는 조사차 나온 거였는데······."

"알고 있습니다."

나는 품 안에서 황금빛 구체 하나를 꺼내 들었다. 발전의 마족의 연구소에서 발견한 아이템.

『 마도 : 마력 증폭 제어 장치 (유니크) 』

윤서현은 세계에서도 존재가 드문 공간 능력의 사용자. 재능을 타고나지 않으면 사용 자체가 불가능한 경우였다.

"그건 뭐에요?"

"팔을 내밀어 보시죠."

그녀의 언니인 윤지은은 최후의 11인이었다. 자매인 윤서현에게도 그만큼의 재능이 잠들어 있음은 이미 확인했다.

『 타재간파의 서를 발휘합니다. 』

『 대상 윤서현의 재능 '초공간인지'를 선택하셨습니다. 』

『 해당 재능의 개화 난이도는 S입니다. 』

지난 공략때 그녀가 개화할 수 있는 재능은 이미 파악해 두었다.

『 대상을 마력 폭주 상태로 만들 것 』

마력 폭주.

끓어 오르는 마력을 주체하지 못하고 각종 스킬이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 없이 난사되는 그런 상태를 의미한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내기엔 대단히 위험한 상태지만······.

증폭 제어 장치가 있다면 괜찮다.

"뭐, 뭔가 수상쩍은데요."

"이상한 거 아닙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윤서현은 순순히 팔을 내밀었다.

찰칵.

새하얀 손목 위에 구체를 가져다대자 자연스럽게 팔찌가 되어 손목에 붙었다. 팔찌의 틈새를 따라 푸른 불빛이 차오른다.

"이건······."

『 동료 윤서현이 마력 폭주 상태가 됩니다. 』

『 '마도 : 마력 증폭 제어 장치'에 의해 해당 상태가 제어 됩니다. 』

이윽고, 윤서현의 몸에서 푸른 마력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취익, 취이익!

때마침 뒤쪽에 매복하고 있던 다크 오크 한마리가 튀어나왔다. 윤서현은 그쪽을 바라보지도 않고 마력 탄환을 날렸다.

퍼엉!

오크의 심장이 그대로 꿰뚫렸다. 본래 B급 헌터인 윤서현의 능력으론 몇 대를 맞춰야 쓰러뜨릴까 말까한 상대였다.

하지만 중요한 건 위력이 아니었다.

그녀가 파악하고 있는 모든 '공간'.

그게 핵심이었다.

『 타재간파의 발동 조건을 만족하였습니다. 』

『 윤서현의 재능 '초공간인지(超空間認知)'가 개화합니다. 』

게이트 전체를 샅샅히 파악할 수 있는 능력.

게임으로 따지자면 맵 전체를 파악할 수 있는 맵핵과도 같은 능력.

"게이트 전체의 구조가 한눈에······. 이 아이템 진짜 사기네요."

"아뇨, 그건 서현씨의 능력입니다."

"네? 제 능력이라고요?"

그게 초공간인지였다.

* * *

대한민국 7위 하루 길드는 고전하고 있었다. 아니, 고전 수준이 아니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방패 들어! 절대로 내리지마! 거기 무너지면 전부 끝장이야!"

"힐, 힐이 부족해!"

"미안해요, 마력이 모자라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자신만만하게 시작한 A급 게이트 공략.

초반만해도 공략은 순조로웠다. 입구에서부터 다가오는 다크 오크들을 각개 격파하면 됐으니까.

게이트 클리어 목표는 마수 처치 1000마리

길드원의 수는 총 12명.

대한민국 7위인만큼 노련한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자신감은 몰려오는 다크 오크 앞에서 무너졌다.

'미치겠네, 이 정도면 S급 게이트 아니냐고.'

초반에 멋모르고 다가오던 놈들은 미끼였다. 놈들을 잡는다고 전진하다보니 어느새 그들의 기지 앞에 도달했다.

그건 함정이었다.

기지의 앞으로 다가서자마자, 매복하고 있던 다크 오크들에게 포위 당했던 것이다.

취익! 취이익!

주술사, 전사, 궁수들로 구성된 다크 오크들은 진형을 갖춰서 길드를 압박했다.

이 정도 조직력을 갖춘 마수는 흔치 않은데 개체 하나하나의 전투력도 뛰어났으니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길드장은 결단을 내렸다.

"후퇴 해야한다, 활로를 뚫어!"

투웅! 퉁! 쿠웅!

넓게 펼쳐진 방어막을 두드리는 다크 오크 주술사들이 마법. 저게 무너지면 전부 끝장이었다.

그 전에 끝을 봐야 했다.

투우웅!

"길드장, 지금이야!"

탱커가 방패로 전열을 크게 무너뜨린 순간.

"간다!"

콰아아앙!

길드장 채하루가 길을 뚫어내는데 성공했다. 그의 도끼에서 뻗어나간 섬광이 다크 오크들을 몰아냈다.

길드원들은 재빨리 그 틈을 통해 오크 무리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놈들이 따라오지 못하게 충분히 거리를 벌리고 나서 그들은 쓰러지듯 바닥에 앉았다.

"허억, 헉."

"하아······."

"이게 맞아? A급 게이트 수준이 언제부터 이렇게 올라간 거야?"

"특수 게이트란 걸 감안해도 이건······."

길드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볼멘소리. 그럴만했다. 지금까지 공략했던 게이트들과는 너무 달랐다.

"잠깐."

그때였다. 홀로그램창을 살피던 누군가가 의아한 듯 말했다.

"마수 처치 수가 늘어 있는데? 전투 시작 전에 120마리 정도 아니었어?"

『 게이트 클리어 조건 』

- 목표 : 마수 처치 ( 353 / 1000 )

- 분류 : 몰살

길드장 채하루의 눈이 가늘어졌다. 전투 도중에 정말 많이 쳐서 30마리 정도 처치했다고 쳐도······.

그 사이에 200마리가 넘게 늘어 있었단 소리였다.

"대기조가 들어와서 사냥을 했을 리는 없고."

하더라도 이 짧은 시간에 200마리를 잡는다는 게 말이나 되나.

"통신석으로 연락 좀 해봐. 누군가 들어 온 사람있는지."

"알았어, 잠깐만······."

통신 담당이 통신석을 들어 올리는 순간이었다.

빠직!

허공에서 스파크가 튀어 오르며 통신석에 금이 갔다.

"젠장, 오크 주술사 놈이······."

"야, 저기 좀 봐······."

저 멀리서 흙먼지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멧돼지를 타고 달려오는 다크 오크들.

거리가 빠르게 좁혀지고 있었다.

길드장은 판단을 내렸다.

"추격조가 따라 붙었어! 후퇴, 후퇴해!"

"야, 그게 문제가 아니야······."

쿠구구구······.

대지가 진동하고 있었다.

달려오는 오크들의 맞은편.

거대한 용 한마리가 미친듯이 돌진해오고 있었다. 주변에 걸리적거리는 장애물은 전부 치워버린 채.

길드원들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미, 미친······! 용이라고?"

"대체 뭐가 어떻게 된거야. 저런 건 사전 조사때 없었잖아!"

그들의 얼굴이 절망으로 굳어졌다.

앞쪽에는 용, 뒤쪽에는 다크 오크 부대.

"여기서부터는 각자 도망치자. 한 명이라도 살아야지."

"아니, 그럴 수는······."

그들이 결의를 다지는 순간.

콰아앙!

용이 바닥을 박차고 뛰어 올랐다. 거대한 그림자가 길드원들을 뒤덮고 지나갔다.

그 찰나의 순간이 길드원 모두에겐 몇 시간처럼 느껴졌다.

이윽고 다시 땅으로 떨어진 용은 다크 오크 부대를 휩쓸었다.

콰아앙—!

꼬리에 맞은 다크 오크 전사가 멧돼지와 함께 저 멀리 날아갔다. 이어지는 몸통 박치기에 오크들의 진형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멍하니 상황을 지켜보던 길드장 채하루가 간신히 입을 떼었다.

"여, 영역 다툼인가?"

게이트 내부의 마수들끼리의 영역 다툼. 이따금씩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이 기회였다.

도망갈 기회.

그런데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크 오크들을 순시간에 처리한 목룡이 이쪽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 스산한 눈빛.

채하루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젠장······.'

다른 길드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오크 부대를 가볍게 정리한 용 마수.

모두가 섣불리 발을 떼지 못했다.

자칫 잘못 움직였다간 놈을 자극할 수 있었다.

'저 놈을 상대로 도망치는 게 가능할까?'

방금 직접 봐서 알 수 있었다. 크기에 걸맞지 않은 엄청난 속도였다. 도망가는 건 불가능하다.

채하루는 용기를 냈다.

이렇게 된 거 이판사판이었다.

"다들 무기 들어."

"기, 길드장."

"크윽."

전멸을 각오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럴 바엔 조금이라도 싸워봐야 했다. 눈물을 머금고 그들이 무기를 들어 올리는 때였다.

저벅, 저벅.

뒤쪽에서 걸어오는 남자와 여자.

"이리와 오르티마."

스르르······.

순식간에 줄어든 목룡은 회색빛의 슬라임이 되었다. 녀석은 남자에게로 통통 튀어 다가갔다.

그 광경을 바라 본 길드원들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소환수였던건가? 그 무지막지한 놈이? 허탈해진 그들의 시선을 알아챈 여자가 품 안에서 신분증 꺼내들었다.

"많이 놀라셨죠. 협회 소속 헌터 윤서현입니다."

"하, 하하······."

"다, 다행이다."

다리에 힘이 풀린 헌터들이 제자리 주저 앉았다.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살아난 기분. 길드에서 많은 경험을 했지만 오늘만큼 다이나믹한 적은 없었다.

'정말로 끝나는 줄 알았어.'

한숨 돌린 길드장 채하루의 시선이 자연스레 남자에게로 향했다.

'저 사람은 누구지?'

저만한 소환수를 부리는 사람이라면 보통 인물은 아닐 거다.

그래도 채하루 자신은 대한민국 7위 길드의 길드장이다. S급 헌터 중에 모르는 사람은 없는 게 당연하다. 특히 저만한 거물은 자신이 모를 수가 없는데.

채하루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통성명을 하기 위함이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네요. 저는 하루 길드 길드장 채하루라고 합니다."

그리 말하며 명함을 내밀었다. 남자는 채하루의 얼굴과 명함을 번갈아 바라봤다. 뭔가 떠올리려는 표정이었다.

덥썩.

그러다 갑자기 채하루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 쪽 여동생있죠. 소개 좀 받을 수 있을까요?"

"네? 그게 무슨······."

그 순간이었다.

투욱.

협회 소속 헌터인 윤서현이 들고 있던 무기를 떨어뜨렸다. 어쩐지 그녀에게서 맹렬한 눈빛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아니, 실제로 쳐다보고 있다.

'뭐, 뭔데.'

당황한 채하루와 달리.

이지한은 확신했다.

'이 사람은······.'

대한민국 최후의 5인 중 하나인 성녀 채아연.

그녀의 오빠다.

94화 봉인된 역전의 검(2)

성녀 채아연.

최후의 5인 중 하나인 그녀는 힐러이자 버퍼로서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목숨만 붙어 있다면 전부 살릴 수 있는 기적의 소유자.'

우리는 경외심을 담아 그녀를 성녀라고 불렀다. 일대 전체를 치유 시키는 광역 힐링은 그야말로 기적의 발현 그 자체였으니까.

그뿐이 아니었다. 그녀가 걸어주는 버프 마법은 일반인의 신체조차 헌터급으로 만들어줬다.

뭐, 그렇다곤 해도 워낙 멸망한 세계의 마수들이 강력해서 큰 의미는 없었지만.

'그녀를 빨리 발견한다면 큰 전력이 될 수 있을 거다.'

다만 그녀가 배신자인가? 라는 것에 대한 답이 확실치 않다.

당장 유력한 배신자는 대마법사 김민수지만, 다른 이도 가담 되어 있지 않다고 확신할 수는 없는 법.

'그래도 미리 접근해 두는 게 좋다.'

아직 마족이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하기 이전.

어쩌면 배신 자체를 막을 수도 있는 일이니까.

근데, 어째 분위기가 이상하다. 볼을 긁적인 채하루가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제 동생은 아직 고등학생인데요······."

"······."

졸지에 고등학생을 소개해달라는 사람이 되버렸다. 윤서현의 시선이 따갑다.

나는 오해를 정정했다.

"동생 분이 헌터가 아닌가요?"

"네, 그건 맞아요. 별로 알려지지 않은 길드에서 활동 중이기는 한데."

"재능이 있는 것 같아서요. 동생 분만 좋다면 더 좋은 길드를 추천해주려고 하는데요."

"더 좋은 길드라면······?"

"은빛의 날개요."

"으, 은빛의 날개요? 거기하고 커넥션이 있으신 건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다 은날로 보내는 게 좋다. 전력이 분산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윤지은이 상당히 바빠지겠지만 어쩔 수 없다.

"으음, 근데 제 동생이 그 정도 실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요. 그랬다면 저희 길드에서 활동하고 있었겠죠."

채하루는 미묘한 표정이었다.

"그래도 동생에게 의견은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윤서현이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설마 그 사람도 천성호나 신아람 같은 천재는 아니죠?"

"맞을 겁니다."

"······대체 어디서 알아보고 사람을 구해 오는 거에요? 언니가 좋아서 죽겠네요."

그래도 성녀 채아연과는 이야기를 직접 나눠봐야겠지. 내 기억 속의 그녀는 단호하면서도 결단력 있는 성격이었다.

천성호가 없었다면 그녀가 리더였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어떨지······.'

최소한 천성호보다 괴리감이 심하지는 않겠지.

"그러면 이제 다시 공략을 재개 할까요."

나는 저 멀리 보이는 다크 오크들의 거주지를 바라봤다. 조악하게 만들어진 마을이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다.

내 말에 지친 기색의 채하루가 대답했다.

"저희 길드는 여기서 철수하려고요. 게이트는 아깝지만 일단은 살고 봐야죠. 상위 길드에게 게이트를 넘기고 전력을 보강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길드를 오랜 시간 이끌어 온 길드장인만큼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하지만 그건 너무 아쉽다.

"절 용병으로 고용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요, 용병이요? 협회 소속 아니셨나요?"

"여기 윤서현 헌터는 협회 소속이 맞지만, 저는 아닙니다. 이지한이라고 합니다."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 나와 저 멀리 오크들을 번갈아 봤다. 게이트를 공략하는데 투자한 비용과 앞으로 회수해야 할 비용까지 생각하는 모양.

'실력은 충분히 보여줬다.'

이내 채하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고용하겠습니다. 다만 저희는 전투에 참여하지 않을 건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오히려 바라던 바다.

간단한 서류를 작성하고서 길드 전용 통신석을 건네 받았다.

"문제가 생기면 연락 주시면 바로 지원 나오겠습니다.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렇게 채하루와 길드원들이 물러갔다. 나는 뚜둑하는 소리와 함께 목을 풀었다.

"정말 우리 둘이서 공략하는 거에요?"

"아직도 절 못 믿으시는 겁니까?"

"그런 건 아니지만······."

그녀의 시선이 다크 오크들의 거주지로 향했다.

"저건 너무 많아요."

마치 그 안에 있는 오크들이 보이는 것 같은 말. 실제로 윤서현은 보고 있었다.

『 특수 스킬 '초공간인지 Lv.10'을 발휘합니다. 』

타재간파를 통해 개화 시킨 윤서현의 재능. 그건 일시적이지만 나에게도 적용되고 있다.

지도를 보는 것처럼 게이트 내부가 한 눈에 파악 된다. 위기에 빠진 하루 길드를 도와줄 수 있었던 것도 이 능력 덕이었다.

'원한다면 오크 하나 하나를 살필 수 있을 정도로 사기적인 능력.'

그걸로 파악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오크들이 모여 있는 장소는 크게 세 군데다.

독 늪지대, 거주지, 호수.

오르티마가 목룡으로 변할 수 있는 시간은 끝났다. 그래도 윤서현과 힘을 합치면 괜찮다.

나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무조건 가능합니다."

* * *

나는 윤서현의 순간이동을 통해 단숨에 오크 거주지 앞에 도달했다.

취익? 취이익!

갑작스레 나타난 내 모습에 다크 오크들이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그들도 한때나마 용맹한 전사였다. 금세 무기를 쥐고서 나를 향해 달려 들었다.

나는 정면돌파를 택했다.

촤아악!

마력을 두른 내 검이 다크 오크의 가죽을 갈랐다. 옆쪽에서 치고 들어 오는 도끼 하나.

나는 일부러 피하지 않았다.

까앙!

거구의 다크 오크가 휘두른 도끼가 힘없이 튕겨져 나왔다. 놈의 눈이 휘둥그레해지는 순간.

촤악!

나는 놓치지 않고 녀석의 목을 베어냈다.

연이어 다른 오크들이 달려들었지만 그들의 공격도 전혀 먹히지 않았다.

윤서현의 보호막도 있었거니와.

오크들을 잡으며 만렙이 된 갑옷도 있거든.

『 아룡종의 은빛 비늘 갑옷 Lv.100 』

효과 : 방어력 110 ( 50 + 60.0 )

특수 효과 : 독 저항력 10% ( 5% + 5.0% )

만렙이 된 갑옷에는 '은빛'이라는 수식어까지 붙었다. 레전더리급의 압도적인 스펙.

거기에 무패의 반지 25의 방어력까지 합쳐졌다.

까앙! 까앙!

다크 오크들의 공격은 일절 통하지 않는다. 나는 놈들의 공격을 죄다 무시한 채 대검을 휘둘렀다.

촤악! 촤아악!

일방적인 학살이 이어졌다. 공격이 통하지 않음에도 다크 오크들을 계속해서 달려 들었다.

마치 자신은 다를 거라는 듯. 불나방처럼 나를 향해 뛰어든다. 그러나 그 결과는 당연스럽게도 동일하다.

놈들의 목이 연달아 허공으로 솟구쳤다.

허탈한 표정의 윤서현이 중얼거렸다.

"진짜 어마무시하게 더 강해졌네요. S급이라고 해도 믿겠어요."

S급이라. 진짜 S급은 이 정도가 아니다.

아직 내 랭크는 B다. 스킬과 능력치 보너스를 받아 체감 될 정도로 강해지긴 했지만.

내가 전방에서 훌륭하게 어그로를 끌었기에 윤서현은 뒤쪽에서 안정적으로 방어막과 견제를 넣을 수 있었다.

취이이익!

뒤쪽에 있던 다크 오크 족장이 크게 함성을 질렀다. 놈의 함성에 흥분해 있던 오크들 또한 조금씩 물러나기 시작했다.

하루 길드를 상대할 때처럼 대열을 갖추기 시작했다.

'마음대로 하게 놔두겠냐.'

콰앙!

나는 과감하게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압도적인 방어력 덕분에 오크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이곳저곳에서 다크 오크 주술사들의 마법이 날아왔지만, 그 방향과 행동이 전부 파악된다.

『 스킬 '초공간인지 Lv.10'을 발휘합니다. 』

마치 뒤에 눈이라도 달린 기분이다.

슈우—!

맹렬하게 날아오는 불덩이. 나는 땅을 박차며 불꽃 마법을 피했다.

콰아앙—!

마법에 휘말린 오크들이 까만 숯덩이가 되었다.

정돈 되지 않은 상황에서 사용한 마법은 오히려 팀을 휘말리게 할 뿐이었다.

나는 과감하게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취익, 취익!

분노한 오크 족장이 뒤늦게 도끼를 들어 올리지만 한참 늦었다.

서걱—!

푸른 빛의 일자베기가 놈의 목을 잘라냈다.

* * *

사냥은 끝나지 않았다.

다크 오크 거주지, 호수를 정리한 뒤 나와 윤서현은 독 늪지대 근처로 자리를 옮겼다.

『 게이트 클리어 조건 』

- 목표 : 마수 처치 ( 743 / 1000 )

- 분류 : 몰살

이제 남은 오크의 마리수는 총 257마리.

열심히 나를 따라오던 윤서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 지치지도 않아요? 일주일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거에요?"

"수련을 좀 하다 왔습니다."

야수의 체력과 자연 회복이 합쳐지니 지칠 줄을 모르겠다. 윤서현은 질린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무슨 수련을 하면 이렇게 되는 거에요······."

환상계에서 훈련하고 돌아 온 나를 완벽하게 따라다니며 보조하는 윤서현도 절대 보통 사람은 아니다.

여기는 A급 특수 게이트. 윤서현의 등급이 B라는 걸 감안하면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진짜 천재는 윤서현이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독 늪지대 앞으로 다가 갔다. 근처에 가자마자 독한 냄새가 느껴진다.

'그래, 이거지.'

나는 포션 병을 사용해 독을 퍼올렸다. 넉넉하게 세 병 정도 담았다.

"그건 왜 담으시는거에요?"

"쓸 때가 있을 것 같아서요."

"독을 쓸 때라······. 암살?"

"수련을 하는 거죠."

"그 수련 진짜 궁금하네요."

내가 입은 갑옷에는 독 내성이 붙어 있다. 이걸 잘 활용하면 독 내성 스킬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상위 게이트부터는 부조리한 환경이 많다. 아예 독 안개로 가득 들어찬 대지라던가, 끊임없이 불타오르는 땅이라던가.

미리미리 준비를 해놔야한다.

그때였다.

피슝—! 파악!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내 가슴팍에 명중했다.

"지한씨!"

윤서현 헌터가 놀란 눈으로 소리쳤다. 물론 화살은 내 가슴팍을 꿰뚫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방어구 효과가 확실히 사기기는 하다.

'화살이 내가 반응 못할 정도다.'

다크 오크들 중에서도 특히 강한 존재가 있다. 엘리트 오크라고 불리는 존재. 그러나 이건 그 수준이 아니다.

마력이 담긴 화살의 속도가 내 반응 속도를 뛰어 넘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권속이다.'

마족의 부하 권속.

여기에 온 목적은 하위 마족의 처치였다. 놈을 잡고 중위 마족의 세력을 약화 시켜야 했다.

게이트 전체를 휩쓸기 시작한 나를 견제할 목적으로 권속을 보낸 건가?

'어디에 있는거지?.'

나에게 화살을 쏜 권속은 숲의 어둠 속 어딘가에 숨어 있었다.

화살이 쏘아졌던 장소로 달려갔지만, 놈의 기척은 어디에도 없다.

피슝—!

반대쪽에서 화살이 날아온다. 여러군데에서 번갈아 화살이 쏘아져 놈의 위치를 짐작하기 어렵다.

'잘도 숨어 다니는군.'

초공간 인지 스킬의 지속시간이 끝나서 놈의 위치를 파악하기 어렵다.

다만.

"저기 나무 왼편에 숨어 있어요!"

윤서현은 초공간인지를 계속해서 사용할 수 있다. 그게 그녀의 재능이니까.

나무 왼편 미묘하게 일렁이는 어둠이 보였다.

파악!

나는 망설이지 않고 땅을 박차고 달려나갔다.

"어떻게······?!"

피잉! 피잉!

어둠 속에서 마력이 둘러진 화살이 두 발 쏘아졌다. 위협 사격에 불과하다. 윤서현의 방어막을 믿고 돌진했다.

화살은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한 채 그대로 튕겨져 나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놈의 정체가 드러났다.

후드를 뒤집어 쓴 다크 오크.

"쳇."

놈은 곧바로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 휘둘렀다. 근접전까지 염두에 둔 아주 좋은 자세지만.

『 스킬 '거인의 힘 Lv.11'을 발휘합니다. 』

촤아악!

대검 마족학살자를 막기엔 너무 작았다. 놈은 별다른 저항 없이 쓰러졌다.

『 1310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

하위 마족의 권속치고는 너무 허무한 죽음이었다. 아니, 이건 내가 강해진 거라고 보는 게 맞겠지.

나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제 윤서현 헌터만이 해줄 수 있는 일을 할 차례였다.

"이 부근에 독특한 기운이 느껴지는 장소가 있을 겁니다. 지하에 있는 것 같은데. 거기로 순간이동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아셨어요?"

"그냥 감으로요."

나와 윤서현은 순식간에 지하에 위치한 붉은 비석 앞으로 이동했다. 이전에 보았던 초월의 비석과 비슷한 생김새다.

여기가 하위 마족의 은신처로 이어진 곳이었다.

"여기 맞나요? 잠깐만요 어둠 속에 뭔가가 숨어 있어요."

적의 위치를 파악한 윤서현이 조용한 목소리로 내게 이야기했다.

나는 모르는 척 다가가 어둠 속에 검을 찔러 넣었다.

푸욱!

『 1440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

입구에도 권속을 배치해 놓다니. 치밀한 녀석이었다. 그러면 여기서부터는······.

비석 위에 손을 가져다 대려는 순간이었다. 윤서현이 목소리가 들렸다.

"어, 지한씨? 그거 빛이 나는데요?"

샤아아—!

등에 매고 있던 봉인된 역전의 검. 녹으로 뒤덮인 검에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 무성(無星)등급 아이템 '봉인된 역전의 검'의 잠재 능력이 해방됩니다. 』

그 놈을 마지막으로 필요한 경험치가 전부 모였던 것이다.

95화 봉인된 역전의 검(3)

투둑, 투두둑.

봉인된 역전의 검에 붙어 있던 녹이 떨어졌다. 빛과 함께 새하얀 검의 모습이 드러났다.

검의 종류는 투핸드소드.

내가 쓰던 대검 마족학살자보다는 가볍지만, 중요한 건 무기의 외형이 아닌 성능이다.

"아이템인가요······? 정보 확인이 안되는데요."

윤서현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렇습니까? 특수한 무기라 그런 것 같습니다."

해당 무기의 등급은 무성(無星).

우리 세계에 존재하는 아이템의 등급 체계가 아니다. 본래 아이템들은 일반, 레어, 유니크, 레전더리와 같은 등급을 가지게 되지만.

'이건 이계 규율의 보상.'

이계 규율에 따라 내게 주어진 무기다.

따라서 윤서현에게는 정보가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한테는 보인다.'

나는 검의 정보를 확인했다.

『 아이템 정보 』

- 이름 : 역전의 검 오르티시아

- 등급 : 무성(無星)

- 능력치 : 공격력 200

- 특수 효과 : 역전의 기회 ( 불리한 상황에서 1회 선공권을 가져옵니다. ) [ 활성화 ]

『 해당 아이템은 잠재 개방의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

아이템을 살피는 내 눈이 커졌다.

'이, 이 수치가 맞나?'

내가 가지고 있던 대검 마족 학살자의 공격력이 60이다. 여기에 마(魔)속성을 상대할 때 한정으로 공격력이 +40이 되어 100의 공격력인데.

이건 200이란다.

단순 계산으로 따져도 2배.

멸망한 세계 이후에나 나올 법한 공격력의 수치였다. 레전더리 이후의 등급인 '에픽'을 떠올리게 한다.

'아니, 에픽과 비교할 정도는 아닌가.'

그래도 레전더리를 상회하는 능력치인 것만큼은 확실했다.

'근데 이건 무슨 효과인거지?'

특수 효과에 적힌 '역전의 기회'.

1회 선공권을 가져 온다고 적혀 있는데, 이런 아이템 설명은 처음 듣는다.

헌터 아이템에 대해서라면 줄줄 꿰고 있다. F급일 때부터 헌터 관련 정보만큼은 열심히 모았었으니까.

일단 내가 모른다는 건 이 세계에는 없는 효과일 가능성이 크다.

'대강 먼저 공격할 수 있게 해준다는 걸텐데, 어떤 식으로 발휘되는 건지는 직접 사용해 봐야 알겠구만.'

윤서현이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지한씨가 그런 표정 짓는 거 처음 봤어요. 되게 좋은 건가 보네요."

검에 대한 게 아니라, 나에 대한 이야기였다. 너무 무기를 넋놓고 보고 있었나.

"네, 생각보다 꽤 좋네요. 이번 공략에 확실히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대검 마족 학살자를 집어 넣고, 오르티시아를 들어 올렸다. 무기에 적응할 시간은 따로 필요하지 않다.

『 유니크 스킬 '웨펀 마스터 Lv.3'을 발휘합니다. 』

내게는 스킬이 있으니까.

"그러면 이제부터가 진짜입니다. 윤서현씨는 여기 계셔도 됩니다. 내부에는 마족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여기까지 와서 무슨 소리에요. 당연히 가야죠."

"그런가요. 그러면 가겠습니다."

나는 붉은 비석 앞에 손을 얹었다. 차원을 연결하는 초월의 비석과는 다르게 이건 그저 공간을 연결해주는 매개체에 불과하다.

주변의 공간이 일렁이며 변하기 시작했다.

『 아공간의 틈새에 입장하셨습니다. 』

'마계의 틈새가 아닌건가.'

독특한 취향이다, 필드 마계의 적용을 못 받게 되는 건 아쉽다. 하지만 이번 공략은 처음부터 그런 걸 기대하고 온 게 아니다.

어차피 나중에 전투의 마족을 상대하려면, 칭호의 필드 효과 없이 싸워야 한다.

'놈은 싸움 그 자체를 즐기는 놈이니. 마계 근처로 숨는 짓 따위 하지 않지.'

검은 숲의 한 가운데. 저 멀리 탑 하나가 보인다. 그리고 우리의 바로 앞에는······.

취익, 취이익!

열 마리가 넘는 권속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방패를 들어 올린 오크들과 뒤쪽에서 마법을 시전하는 수인들.

나는 역전의 검 오르티시아를 들어 올렸다. 도신이 새하얗게 빛나며 가볍게 떨린다.

"어디 무기 성능 좀 확인해 볼까."

* * *

전투의 마족에게는 세 명의 부하가 있었다.

그 중 하나가 하위 마족인 지력의 마족.

왜소한 몸을 가진 그는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탑 위의 전망 좋은 자리에 섰다.

"쥐새끼들이 기어들어왔네. 으음, 가끔 있을 수 있는 일이지. 구경거리로는 이만한 게 없지."

그는 와인과 치즈를 음미하며 탑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게이트를 공략하던 인간 놈들이 주제를 모르고 자신의 공간에 들어 온 것이다.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따라서 권속들을 보내 여흥을 즐기려고 했다.

"응? 멍청한 놈."

느긋하게 아래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감상하려던 지력의 마족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인간 남자 한 놈이 권속들을 향해 무작정 앞으로 달려들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키운 방패 오크 전사들을 상대로 돌진을 한다고? 저런 멍청한 놈이 다 있나.'

물론 그 미소는 오래 가지 않았다.

촤아악!

남자의 새하얀 검이 방패를 둘로 갈라 버리는 순간, 그의 얼굴에 진한 균열이 생겼다.

잘 단련된 오크 권속은 방패와 함께 반으로 나뉘어 바닥에 몸을 뉘였다.

"뭐, 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힘에서 차이가 난다면, 방패를 든 오크가 밀려날 수는 있다. 하지만 마기를 불어 넣은 방패 자체가 갈라지는 건 불가능했다.

현 시점 인류가 가진 무기의 수준은 고작해야 레전더리.

무기가 무기를 자르는 일은 있을 수가 없다. 정말로 지대한 차이가 존재한다면 가능한 일이긴 했지만.

'내가 키운 오크 전사들이 그렇게 수준 미달이라고?'

그럴리가 없었다.

하지만 마수들 사이로 뛰어든 남자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방패가 갈라지고 오크들의 단단한 가죽이 두부처럼 잘려나갔다.

무모하다고 밖에는 보이지 않던 돌진.

그러나 그게 강력한 전차라면? 하나의 전략이 되는 법이었다. 남자는 내부에서부터 권속들을 무차별적으로 베어냈다.

후웅—!

남자가 검을 휘두르자, 새하얀 잔상과 함께 검이 닿은 장소에 있던 모든 것들이 잘려나갔다.

방패 같은 건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우왕좌왕하며 도망치는 권속들. 지력의 마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치욕도 이런 치욕이 있었다.

"허······!"

이러다간 권속들이 전부 죽게 생겼다. 마족은 권속을 노예쯤으로 생각하긴 하지만, 노예는 재산 아니던가?

시간과 비용을 들여 키워 놓은 놈들이 무참히 당하고 있자니 속이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인간 주제에 무슨 저런 말도 안되는 무력이냐.'

거기까지 생각한 지력의 마족은 깨달았다.

'설마······.'

프로젝트 마기, 메이저 게이트에 이어 발전의 마족까지 살해한 인간.

마족의 계획을 막기 위해 움직이는 존재.

그게 저 인간인 것 같았다.

'여기에 온 건 우연이 아니라, 날 잡기 위해서 온 건가?'

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피어났다. 가소롭기 그지 없었다.

'제발로 와주다니,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지. 이건 오히려 내가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다.'

어차피 권속들을 모조리 때려잡는 놈을 두고만 볼 생각은 없었다.

지력의 마족은 곧바로 땅을 박차고 탑 밖으로 뛰어 내렸다. 그의 망토가 펄럭이며 내려오는 그를 보조했다.

휘익.

그가 마기가 섞인 휘파람을 불자 검은 숲에 숨어 있던 모든 마수들이 달려나왔다.

트롤, 오크, 늑대인간, 놀.

각종 마수들이 물밀듯 인간들을 향해 돌진했다.

'아무리 강하다해도, 물량 앞에는 장사 없는 법이지.'

열심히 키워둔 권속들이 갈려나가는 건 아까웠지만, 여기서 세울 수 있는 공을 생각하면 남는 장사였다.

촤악! 촤아악!

검을 휘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글우글 모여든 마수들의 틈바구니에서 참으로 열심히 발악하고 있구나 싶었다. 마수들도 지지 않고 미친 듯이 달려들고 있었다.

이내 검 휘두르는 소리가 사라졌다.

"크하하, 그래. 결국 그래봤자 인간. 얘들아, 그만해라! 시체 조각은 남겨둬야 할 거 아니냐."

지력의 마족은 미소를 지었다. 승리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머리 위에서 푸른 빛 줄기가 떨어졌다.

서걱—! 핑그르르.

마족의 팔이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크아악!"

지독한 격통에 지력의 마족이 팔을 부여 잡았다.

돌연 공중에서 나타난 남자와 여자.

윤서현의 순간이동을 사용한 기습적인 일격이었다.

이지한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잡을 뻔 했는데 말이야."

그는 검에서는 푸른 오러 블레이드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동시에 몸에서 솟아나오는 붉은 기운 광화까지.

이미 타재간파의 서를 발휘한 상태였다.

"이, 이 놈······!"

지력의 마족의 눈이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 * *

"인간 주제에 건방지구나."

마족에게 신체의 손상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마기로 수복하면 그만이니까.

순식간에 팔을 회복한 녀석은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주변으로 수십 개의 유리판이 생겨나며 검은 마기의 광선이 수십 갈래로 나뉘어져 발사 되었다.

치이이익!

땅을 녹이는 강력한 공격이었다.

『 스킬 '환상종의 민첩 Lv.11'을 발휘합니다. 』

『 스킬 '신속 Lv.10'을 발휘합니다. 』

나는 도망가는 대신 안으로 파고드는 것을 선택했다. 내 수를 알아차린 지력의 마족이 광선의 각도를 바꿨다.

'들어갈 수 있는 각도가 없다.'

나는 옆으로 회피하며 광선을 피했다. 그러나 광선은 허공에서 꺾이며 집요하게 나를 노린다.

콰아아앙!

강렬한 충격이 나를 덮쳤다. 마족이 정면으로 쏘아낸 마력의 탄환이 내게 명중했다.

검은 연기와 함께 나는 뒤로 크게 밀려났다.

스스스······.

무패의 반지로 만들어낸 방어막이 단번에 깨질 정도의 위력이었다.

장비의 방어력이 높지 않았다면 나도 큰 데미지를 입었을 거다.

"내 팔을 한 번 베어낸 걸 자랑스럽게 여겨라. 그게 네 놈의 처음이자 마지막 공격이었을테니까."

지력의 마족은 제약에 있어선 별 거 없지만, 순수하게 마기를 다루는 능력이 뛰어났다.

윤서현의 순간이동은 허를 찌르는 게 아니라면, 오히려 위험해 질 수도 있다.

"지한씨, 뒤쪽에서 마수들이 몰려와요! 제가 버텨볼게요."

"그 쪽은 부탁하겠습니다! 오르티마!"

새끼용으로 변한 오르티마와 윤서현이 권속들을 막기 위해 움직였다.

거리를 벌리자, 완전히 여유가 생긴 지력의 마족이 입가를 비틀었다.

"그냥 죽여도 상관은 없지만, 확인 해둬서 나쁠 건 없겠지. 네 놈. 우리 마족의 계획을 방해한다는 인간이 맞지?"

"글쎄,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거기에 대답해 줄 이유는 없다.

"저런 사실대로 말하면 가는 길을 곱게 보내주려고 했건만. 권속들을 상대로 조금 이겼다고 자신만만 해졌나보구나."

마족의 손짓 한 번에 다시금 광선이 쏟아졌다.

'피해다니기만 해서는 답이 없다.'

속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녀석은 들어갈 틈 자체를 주지 않고 있었다.

'뚫어내야 한다.'

콰아아앙!

내 검과 놈의 마기가 격돌했다. 광선처럼 뻗어나온 여러 갈래의 마기를 침착하게 튕겨내고, 막아낸다.

궤도를 예측하고 움직이면 충분히 대응이 가능했다.

『 레어 스킬 '요격 Lv.1'을 획득합니다. 』

『 스킬 '요격 Lv.2'을 획득합니다. 』

『 스킬 '요격 Lv.3'을 획득합니다. 』

···

..

.

『 스킬 '요격 Lv.10'을 획득합니다. 』

나는 점차 앞을 향해 발을 내딛을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막고, 튕겨내고, 잘라내고.

미친듯이 마기를 쏘아대는 마족을 향해.

한 발자국씩 앞으로 다가갔다.

"네 놈은 스스로 함정에 뛰어든 꼴이다. 내가 아무런 대비도 없이 공격만 퍼붓고 있다고 생각했나?"

내 발 밑에서 보랏빛의 마법진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콰아앙—!

바닥에서 솟아난 시퍼런 창날이 나를 향해 쇄도했다. 마기를 가득 둘러 더 없이 위협적인 공격이었다.

나는 가라앉은 눈으로 다가오는 마법을 응시했다.

이걸 막으면 앞에서 사방에서 날아오는 광선에 대응할 수 없게 되겠지. 반대로 광선을 막으면 창이 날 노릴 거고.

일반적인 검술론 막을 수 없다.

"죽어라!"

광선이냐, 창날이냐.

둘 중 하나는 감수해야 하는 양자택일의 상황.

그렇게만 보인다.

그래도 활로는 있다. 일자베기를 사용한다면 모든 공격을 받아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기다렸다.

역전의 검이 말하는 불리한 상황.

그것이 어느 정도인지 밝혀내야 했다.

앞으로 사용할 역전의 검의 능력을 확인해 두어야 했으므로.

'좀 더. 끝까지 버틴다면······.'

나는 회피하거나 검을 휘두르는 대신.

발을 한걸음 앞으로 내딛었다.

"멍청하긴!"

마족이 조소하는 그 순간이었다.

『 역전의 검이 불리한 상황을 인지합니다. 』

『 특수 효과 '역전의 기회'가 발휘됩니다. 』

내 주변으로 흐르던 광풍이 사라지고.

사방에서 터져나오던 기이한 소음이 소멸했다.

고요한 적막만이 내 세상을 뒤덮었다.

슬로우 비디오의 한장면처럼 모든 것이 천천히 흘러간다.

'아······.'

나를 향해 다가오는 마기의 창날이나 광선조차도. 한없이 느리다.

당황한 표정의 윤서현이 다급하게 나에게 손을 뻗는 게 보인다.

보호막을 걸어주려는 모양. 그 때문에 오히려 뒤쪽의 마수들에게 노려지게 되었다.

걱정할 필욘 없었다.

그 뒤에서 오르티마가 브레스를 내뿜어 윤서현을 보호해 주는 것도 보이니까.

나는 저기에 개입할 수 없다. 저쪽으로 움직이는 순간, 이 시간이 끝나리라는 게 감각적으로 느껴진다.

'역전의 기회.'

불리한 상황에서 거머쥘 수 있는 단 한 번의 선공권.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불리한 상황에서 능력은 확실하게 발동했다.

그야말로 무성(無星) 등급에 걸맞는 사기적인 능력이었다.

이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는 명확했다.

나는 손에 쥔 역전의 검을 들어 올렸다.

승리를 확신하는 지력의 마족의 얼굴이 보인다. 그런 놈의 면상을 향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상의 공격을 날렸다.

『 각성 스킬 '일자베기 Lv.13'을 발휘합니다. 』

본질조차 집어 삼키는 궁극의 일자베기가.

지력의 마족을 덮친다.

96화 대형 레이드(1)

일자베기.

신태양이 만들어낸 이 기술은 단순하고 기교 또한 없다. 그저 공간 위에 하나의 직선을 만들어 낼 뿐이다.

그러나 단순하기 때문에 내게는 더없이 잘 어울렸다.

재능 없는 나조차도 그 끝에 도달할 수 있었으니까. 심지어는 그 끝을 너머 새로운 경지에 발을 디뎠다.

생물의 본질을 훼손하는 13레벨의 일자베기.

각성 기술과 합쳐진 궁극의 기술.

그것이 지력의 마족을 갈라냈다. 벼락과도 같은 검은 줄기가 하늘과 땅을 이었다.

느릿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지력의 마족은 어떠한 반항도 하지 못한 채 그 공격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마기로 이뤄진 빛줄기도, 날카롭게 벼려진 창날조차도 일자베기를 막아설 순 없었다.

『 역전의 검의 특수 효과를 발휘합니다. 』

『 1회의 선공권을 사용합니다. 』

새하얀 도신이 지력의 마족을 완벽히 베어냈을 때.

시간은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콰아아앙——!

거센 충격파와 폭풍이 숲 전체로 퍼져나갔다. 나뭇잎이 부산스럽게 흔들리고 하늘의 검은 구름이 걷혀졌다.

뒤쪽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던 권속들조차 그 순간은 움직임을 멈췄다. 주인의 죽음을 누구보다 빨리 알 수 있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얼빠진 표정으로 지력의 마족이 있었던 자리를 바라봤다.

'크윽.'

순간적으로 빠져나가는 체력과 마력. 동시에 정신력까지도 앗아가는 것 같은 탈력감이 몰려 온다.

『 스킬 '불굴의 정신 Lv.11'을 발휘합니다. 』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지탱했다. 제자리에 서 있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 앉았다.

'후, 반동이 이 정도로 심할 줄이야. 예상은 했지만.'

정말로 아무것도 못하겠다. 필살기가 괜히 필살기가 아닌 이유였다.

『 역전의 검 특수효과 '역전의 기회'가 비활성화 됩니다. 』

『 일정량의 경험치를 획득하여 재활성화 시킬 수 있습니다. 』

"괜찮아요?!"

전투를 벌이면서도 내 상태를 확인하던 윤서현이 순간이동으로 단번에 내쪽으로 다가왔다.

초공간인지 덕분에 그녀는 주변을 직접 보지 않아도,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빨리 이거 마셔요!"

윤서현은 다급하게 인벤토리에서 고급 포션을 꺼내더니, 다짜고짜 내 입에 들이부었다.

『 스킬 '포션 체질 Lv.11'을 발휘합니다. 』

탈력감은 그대로지만 체력과 마력이 쭉쭉 차오르는 게 느껴진다.

윤서현이 전장에서 이탈했기에, 나머지 권속들과 전투를 벌이는 건 오르티마의 몫이었다.

콰아아—!

입에서 뿜는 마공학 브레스 앞에 권속들이 녹아내렸다.

새끼용 상태의 오르티마는 권속들 상대로도 밀리지 않았다.

콰득! 콰드득!

목룡 몰테인만큼의 파괴력은 없지만, 적들 자유자재로 누비며 이빨로 목덜미를 물어 뜯고 브레스로 몰아냈다.

그 결과.

『 마공학 드래곤의 레벨이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

『 마공학 드래곤(오르티마) Lv.120 』

- 모든 능력치 30% 상승

- 브레스 1단계 강화

- 하위 마법 면역

'효과가 미쳤잖아.'

오르티마의 레벨이 최대가 되었다. 동시에 녀석의 움직임이 확연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마력을 두른채 권속을 뚫고 지나가는가 하면, 하늘 높이 올라가선 강력한 브레스를 내뿜는다.

그 마력의 밀도가 훨씬 높아졌음은 말할 것도 없다.

콰아아—!

"크아악! 저 새끼 잡아!"

"개소리 말고 도망쳐!"

"사, 살려줘!"

권속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주인인 지력의 마족이 이미 당한지라 전의도 상실한 상태였다.

윤서현이 혀를 내둘렀다.

"진짜 장난 아니네요."

띠링!

『 마공학 드래곤(오르티마)이 성장의 가능성을 느낍니다. 』

『 상위의 격을 가진 대상을 먹이로 삼으십시오. 』

'오.'

일종의 퀘스트 같은 것이 메시지창 위로 떠올랐다. 이걸 클리어하면 최대 레벨도 늘어날 것 같다. 신체적으로 성장할 수도 있어 보인다.

'권속들 처리도 마무리 된 것 같고.'

나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움직여도 괜찮겠어요?"

"네, 괜찮습니다."

승리했으면 보상을 챙겨야 한다. 나는 지력의 마족이 있었던 장소로 향했다.

지력의 마족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깊게 패인 땅 위에 검은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

나는 그곳을 들여다봤다.

'남아 있다.'

푸른 보석 하나가 남아 있었다. 마정석은 아니었고, 녀석이 들고 있던 아이템인 것 같았다.

13레벨의 일자베기는 적의 본질을 베어낸다. 아이템은 남는 것이 당연했다.

나는 보석을 들어올렸다.

『 이계규율의 상점 : 레시피에 존재하는 아이템을 감지 했습니다. 』

『 재능환 레시피 ( 2,000 Point )를 구매하시겠습니까? 』

재능환의 재료라니.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일시적으로 내게 재능을 부여하는 재능환.

'와, 대박인데?'

예상치 못한 수확이 있었다.

그걸 주머니에 욱여 넣고선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허리를 폈다. 오르티마가 권속들을 전부 정리해놨다.

"그러면 이제 돌아갈까요. 아직 게이트 공략도 남아 있으니까요."

여기는 마족이 거주하는 아공간의 틈새.

게이트로 나가서 다크오크 100마리 가량을 더 잡아야 한다.

"여기서 공략을 더 한다고요? 그래도 조금 쉬어야 하지 않을까요?"

윤서현의 말에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어서 손가락으로 오르티마를 가리켰다.

카오오—!

녀석은 제법 드래곤 같이 포효하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만렙을 찍어서 그런지 자신감이 충만하다.

소환수가 괜히 좋은 게 아니었다.

* * *

『 게이트 클리어 조건을 달성하셨습니다. 』

- 목표 : 마수 처치 ( 1000 / 1000 )

윤서현의 초공간인지 덕분에 숨어 있는 오크들의 위치를 샅샅이 파악할 수 있었다.

순간이동으로 게이트 내부를 돌아다니며 사냥하니 2시간도 안 되어서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휴우, 이제 돌아가면 되겠네요."

게이트 출구로 다가가자, 초조한 표정으로 기다리던 채하루가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이렇게 빨리 클리어하실 줄이야. 진짜, 대단하시네요."

마족을 처치하는 시간을 포함해도 경이로운 기록이었다. 며칠을 계획하고 시작된 게이트 공략을 하루만에 끝냈으니까.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바깥으로 나오자, 어둑해져 있었다. 간이 천막을 펼친 채 대기하고 있던 하루 길드의 사람들이 우리에게 모포와 커피를 건네주었다.

커피를 홀짝이려는 윤서현. 나는 내가 받은 커피를 윤서현에게 건네었다.

"잠시만요, 이거 한 번 드셔보세요."

"똑같은 커피 아니에요?"

"아닐겁니다."

요리 스킬을 쓸 때마다 마력이 감도는 데서 착안해 응용해 봤다.

『 특이한 재능 파편의 효과가 발휘됩니다. 』

내 마력이 가볍게 커피에 스며들었다. 윤서현은 의심스러워하면서도 커피를 마셨다.

그녀의 눈이 커졌다.

"어, 엄청 맛있어요."

나도 커피를 슬쩍 마셔보니 확실히 풍미가 차원이 다르다. 밤이라 날씨가 쌀쌀해져 있었다.

몸을 녹이고 있는데, 뒷정리를 마친 길드장 채하루가 다가왔다.

"아까 주신 마정석도 전부 정리가 끝났습니다. 정산되는대로 보내드릴게요. 저희는 사실상 한 게 없으니까, 최소 경비만 제외하고 지한씨 몫으로 갈 거에요."

채하루는 손해를 면한 것만으로 감지덕지라는 말도 덧붙였다.

"아, 저희 동생을 보고 싶다고 하셨죠. 편하신 시간 알려주시면 연락 드리겠습니다. "

"네, 알겠습니다."

그녀의 여동생 채아연은 미래의 성녀다. 미리 발굴해두는 편이 좋다.

이것저것 수확이 많은 공략이었다.

하루 길드는 물러가고 나와 윤서현 둘만 남았다. 사는 동네가 같아서 공간이동으로 같이 돌아가면 되겠지.

"이거 빌려줘서 고마웠어요."

윤서현은 팔에 끼고 있던 마력증폭장치를 돌려주며 말했다.

"오늘 지한씨 덕분에 저도 새로운 경지를 확인할 수 있었어요. 되게 신기한 기분이네요."

실제로 그녀에겐 유의미한 변화가 될 거다. 타재간파는 타인의 재능을 개화 시켜줄 뿐만 아니라, 영향을 받은 대상이 더 많은 경험치를 얻게 해주니까.

"신아람양도 그렇고 천성호도 그렇고······. 생각해보면 세아도 범상치 않네요. 숨겨진 재능을 찾게 해주는 능력이라도 있나요? 아니면 천재는 천재를 알아본다 뭐 이런 건가."

"전 딱히 한 거 없습니다. 윤서현씨도 천재니까요."

"기분 좋은 농담이네요."

"······."

농담 아니다. 타재간파로 살펴 본 윤서현의 재능 또한 다른 이들 못지 않았다.

이윽고 공간이 뒤바뀌며 익숙한 우리 동네가 되었다.

"하여튼 오늘 고생했어요. 다음에 또 봐요."

나는 그대로 사라지려는 윤서현을 붙잡았다.

"이번 게이트에서 마족을 잡은 일은 비밀로 해주세요."

"또 비밀이에요?"

협회에 숨어 있는 마족의 끄나풀들. 그들이 귀에 내 행적이 들어가는 건 좋지 않다.

김상욱을 스파이로 계속 써먹어야 하니까.

슬슬 윤서현에게 말해줘도 괜찮을 시점이 되었다.

"협회에도 마족이 숨어 있습니다. 인간으로 변장한채로요."

"그, 그 말 진짜에요?"

"언제는 제가 거짓말하는 거 봤습니까. 너무 깊이 파고들지 않는 게 좋을 거에요."

그 말에 윤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거였군요. 어쩐지······."

뭔가 짚히는 게 있는 것 같다.

"마성철 팀장님! 맞죠! 어쩐지 인간 같지 않더라. 기계 같달까."

"아뇨, 그 사람은 확실히 아닙니다."

"아앗······."

그 사람은 백묵의 부하다. 나는 몇가지 당부사항을 덧붙였다.

"머리가 복잡해지네요. 일단은 알았어요."

"네, 그러면 담에 뵙죠."

어디서 알아냈냐는 질문을 하기 전에 빨리 윤서현과 헤어졌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오는데.

빌라 앞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지적인 외모에 안경을 걸친 미남.

멸망한 세계의 정보상 백묵이었다.

그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되게 간만에 만나는 기분이네요. 긴히 할 이야기가 있어서 찾아왔어요. 마족에 관해서요."

그가 손짓하자 빌라 내로 검은 차가 들어왔다. 자동으로 문이 열리더니 백묵이 탔다.

"타시죠, 길거리에서 이야기하기엔 좋은 내용은 아니라서요. 아, 그걸 잊을 뻔했네."

그가 스마트폰에 대고 무어라 지시를 내리자, 내 스마트폰의 알림이 울렸다.

- 1,240,574,000 원이 입금되었습니다.

무려 12억 4천만원이라는 돈이 내 통장에 꽂혔다.

"정산이 밀려 있어서 바로 처리해드렸어요."

"좋네요."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차에 탑승했다. 마족에 관한 이야기였나.

"본론부터 이야기하죠. 마족, 정말로 실제하더군요. 이전 은빛의 날개 채용 시험에서부터 마족의 존재를 알고 계셨던 거 맞죠?"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죠."

내 반응을 확인한 백묵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은날 채용 시험의 흔적을 따라 움직이다보니 마족과 마주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는 차에 달린 태블릿 pc의 화면을 조작했다. 그러자 마족의 모습이 담긴 이미지가 나타났다.

"일반 마수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이종족. 조사를 거듭하다보니 이들의 목적을 어렴풋이 알 수 있겠더군요."

잠시 말을 멈춘 백묵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들은 이 세계를 노리고 있다.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이어서 대한민국 대표 길드들의 아이콘이 떠올랐다.

"그래서 저는 상위 길드들을 불러 마족의 존재를 알렸습니다. 정보를 구입할 용의가 있는 길드에게는 더 깊은 정보를 제공했죠."

백묵의 행동이 내 의도와 맞아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나 혼자서는 아무리 외쳐도 해낼 수 없는 일을 백묵이 대신 해준 셈이다.

"이 모든 걸 알아낸 방법. 지한씨가 예언 스킬을 가졌거나, 어쩌면 전지(全知)의 능력을 가졌을 지도 모르죠. 어쩌면 전 지한씨의 예상대로 움직여주고 있을 뿐일지도 모르죠."

그는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상관 없습니다."

그는 다른 화면을 띄웠다. 나에 대한 정보가 적혀 있는 보고서였다. 호라이즌 길드에서 단독으로 수집한 정보였다.

"이지한씨의 성장 능력. 한 달 사이에 이만한 성장이라니. 그런데 아무도 주시하지 않더군요. 거듭 되는 초신성들의 발굴, 그들의 출현이 오히려 이지한씨를 숨겨주고 있었어요."

백묵은 처음으로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의도한겁니까?"

그 질문에 나는 미소로 대답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셈이다.

내 미소에 백묵은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결론은 간단합니다. 지한씨에게 투자하고 싶다는 거죠."

투자라. 거기에 대해 내가 입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지이잉.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 큰일났습니다. 전투의 마족이 직접 움직입니다.

김상욱의 문자였다. 예상보다 이른 시기에 움직였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백묵에게 물었다.

내 성장 가능성.

백묵은 나를 자신의 편으로 삼고 싶어하는 게 보인다. 그렇다면 그걸 미끼로 내 의도를 펼쳐야겠지.

"음."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대규모 공략에 대한 계획이 있는데 참여하시겠습니까? 저에 대한 투자는 그 다음에 생각하고요."

마족을 나 혼자만 잡으란 법은 없었다.

97화 대형 레이드(2)

아공간의 연회장. 그곳의 분위기는 참으로 살벌했다.

"커허억!"

피를 뿜으며 쓰러지는 무력의 마족. 그 옆에는 지시의 마족이 널부러져 있었다. 두 하위 마족은 전투의 마족의 직속 부하였다.

"성과가 없잖아, 성과가. 네 놈들이 여기서 하는 게 뭐냐 이 말이야. 협력해서 알아내라고 했더니 지력의 마족은 뒤져버렸고. 감사해야 할 거야. 이대로 뒀다간 네 놈들 둘 다 죽을 것 같아 내가 친히 온 거니."

전투의 마족은 손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바닥에 쓰러진 두 명의 하위 마족에 비해 키는 작고 아담했다.

그러나 가지고 있는 힘의 격차는 아득했다. 중위 마족의 벽이 이렇게나 높은 것이었던가.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두드려 맞으니 새삼 실감하게 된다. 무력의 마족은 이를 악물며 머리를 바닥에 박았다.

당장할 수 있는 일은 그게 전부였다.

"부디 용서를······."

"최, 최대한 빨리 찾아내겠습니다."

지시의 마족도 무력의 마족을 따라 머리를 조아렸다. 힘의 차이는 그렇다고 쳐도 이런 치욕이 없었다. 수십 쌍이나 되는 권속들의 눈동자가 그 둘에게 쏟아지고 있었으므로.

지시의 마족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젠장, 고작 일주일만으로 뭘 어쩌란거야.'

심지어 전면에 나서지 말라고 한 것은 전투의 마족 본인이 아니던가. 물 밑에서 단서를 모으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데.

그 뭔지 모를 인간은 정체를 꽁꽁 숨긴 채 마족을 습격하고 있었다.

전투의 마족은 그런 고생 따위 알 바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전투의 마족이 행차한 이유는 간단했다.

지력의 마족이 멍청하게 죽어 버린 게 그 발단이었다.

"무능하다, 무능해. 인간 하나를 못 잡아서 쩔쩔매는 꼴이라니. 쯧."

전투의 마족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하위 마족 둘을 내려다봤다.

"특별히 내가 방법을 알려주지. 귀를 열고 잘 들어라."

속으론 열불이 나지만 지시의 마족은 귀를 세웠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전투의 마족.

그는 수 백 년을 살아 온 유서 깊은 존재였다. 또한 이전 환상계의 침공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유능한 인물. 차기의 군단장의 자리를 노리는 자이기도 했다.

그의 의견은 참고할만 했다.

"네 놈들이 움직일 게 아니라 인간들을 불러라."

"그 말씀은······?"

"멍청하긴, 윗쪽 영감들께서는 시끄러운 일이 벌어지는 것을 싫어하시잖냐. 나도 어느 정도는 동의 하는 편이고. 그러니 게이트를 열어라. 네 놈들 둘이 들어가 있으면 아무리 멍청한 인간 놈들도 눈치채겠지."

잠자코 듣던 지시의 마족이 슬며시 물었다.

"저희들을 미끼로 쓰시겠다는 그런 말씀이십니까?"

손가락을 튕긴 전투의 마족이 씨익 웃었다.

"그래, 잘 아는구만. 지력의 마족이 당했다는 게 뭘 의미하겠냐? 네 놈 둘의 목숨도 노려지고 있단 거겠지. 역으로 함정을 파라 이 말이야."

그는 어깨를 휙휙 돌린 다음 날개를 펼쳤다.

"적당한 시기에 날 불러라. 대체 어떤 미친 인간이 우리의 계획을 방해하는지 보고 싶거든."

콰아앙—!

굉음과 함께 자욱한 연기를 흩뿌리며 전투의 마족이 아공간을 벗어났다. 그가 사라지자 뒤쪽에 대기하고 있던 권속들이 차례차례 쓰러졌다.

중위 마족이 내뿜는 격 앞에 숨조차 못 쉬고 있었던 것이었다.

"크윽. 빌어먹을."

지시의 마족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게이트를 열어서 적당한 시기에 부르라고? 일이 수틀리면 개입하지 않겠다는 말이나 다름 없었다.

"후우, 이거야 원."

무력의 마족은 아예 대자로 드러누워버렸다. 직접적인 명령이 떨어진 이상 선택지는 없었다.

"거기, 너. 이리 와봐라."

지시의 마족은 권속들 사이에 있는 인간을 향해 손짓했다. 그의 부하들 중 유일한 인간인 김상욱이었다.

"부르셨습니까."

김상욱을 유심히 쳐다보던 지시의 마족은 미간을 좁혔다.

'설마 이 놈이 배신했나?'

지력의 마족이 위치한 장소가 그리 쉽게 들켰다는 건 충분히 의심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의심은 금세 거두어졌다.

장소 정도는 특수한 스킬이 있다면 특정할 수 있는 것이고.

가장 큰 이유는 이거였다.

김상욱의 인성.

'이 놈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같은 종족조차 배신할 놈이다.'

지난 일주일 간 지시의 마족도 놀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필사의 마족이 남겨 놓은 김상욱의 행적을 살펴 봤다.

마족의 힘을 재빨리 알아본 눈치.

빌런 길드를 운영하면서 처리해 온 갖가지 더러운 일들.

같은 인간들조차 제물로 바치는 악독함.

김상욱은 악인 중에서도 악인. 배신의 재능을 타고난 놈이었다. 놈의 몸을 타고 흐르는 마기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인간 중에서 이렇게 마기를 잘 다룰 수 있는 놈은 없을 거다. 마족의 힘을 직접 목격한 그가 배신을 할 이유는 찾기 어려웠다.

그건 돈도 안 되고, 미래도 없는 일이니까.

마족의 계획을 저지하려는 자와 붙었을 거라고는 더더욱 생각할 수 없었다.

'이번 일에서 중요한 카드로 써먹는 게 낫겠어.'

대강 생각을 정리한 지시의 마족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상욱, 너도 A급 헌터이니 이번 공략에 참여할 수 있겠지. 아니, 무슨 일이 있어도 참여해라. 특별히 네게는 마기를 더 나눠주도록 하지."

침략 중인 세계의 주민을 권속으로 만드는 것은 암묵적으로 금기시 되고 있었다. 예외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일단은 마기를 부여하고 경과를 살피는 게 먼저다.

지시의 마족의 손에서 뻗어나간 검은 기운이 김상욱의 심장으로 스며 들었다. 자신의 몸에서 솟아나는 새로운 힘을 바라보는 김상욱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맺혔다.

"감사합니다. 지시의 마족이시여."

"그래, 인간들 틈에 숨어 이번 게이트 공략을 방해해라. 실패는 용납되지 않는다."

"물론입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인간 쪽에 스파이를 하나 심어둔 것.

이것이 이번 일을 수월하게 해줄 것이다.

지시의 마족은 그렇게 확신했다.

* * *

- 흥미롭네요. 그 정보가 확실하다면······. 꽤 의미 있는 사건이 되겠는데요.

내 제안에 고개를 끄덕인 백묵.

어제의 만남은 그걸로 끝이었다.

간만에 푹 잠을 자고 일어난 나는 찬장에 놓아둔 육포를 꺼내 오르티마에게 던져줬다.

"아침밥이다."

슬라임 상태에서도 밥을 먹는지는 모르겠다. 나도 육포를 뜯으며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 '은날 천성호' 수호 길드 맹추격

- 대형 신인들의 등장, 헌터계에 부는 새바람.

- 수호 길드 마스터 사최헌, S급 게이트 단독 격파 도전

'백묵이 마족의 존재를 대형 길드에 전달했다고 했지.'

다만, 아직 그 규모나 힘에 대해선 전부 파악하지 못했을 확률이 크다. 마족의 힘은 대형 길드에서 안일하게 대처할 수준이 아니니까.

'김상욱의 정보에 따르면 조만간 게이트가 열린다.'

해당 게이트에는 하위 마족 둘이 대기하고 있고, 중위 마족인 전투의 마족도 참여할 확률이 크다고 했다.

'오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들어야지.'

내 목적은 미래의 군단장이 될 전투의 마족 처치.

해당 목표를 달성하면 나는 보상과 함께 A등급에 오를 수 있게 된다. 당장은 게이트가 생길 때까지 대기다.

환상계에 있던 일주일 동안 밀린 정보를 확인하고 있을 때였다.

똑똑.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올 사람이 없는데. 문을 여니 다크 서클의 짙은 윤지은이 서 있었다.

예상대로 많은 업무에 치이고 있는 모양이다. 신아람에 천성호에, 진세아도 은빛의 날개에 들어간다고 했으니까.

윤지은 뒤편에는 동생인 윤서현도 서 있었다.

"또 보네요!"

"······."

근데 집 주소를 알려준 적이 없는데. 내가 눈을 가늘게 뜬 채 쳐다보자, 윤지은이 해명했다.

"세아가 알려주던데요?"

······진세아한테도 알려준 적이 없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정보를 도둑 맞았나. 잠시 정적이 흐르자 목을 가다듬은 윤지은이 먼저 말을 꺼냈다.

"흠흠, 오늘 아침에 A급 게이트가 출현했어요. 근데 특수 게이트고 마족이 출현할 가능성이 있다네요."

백묵에게서 정보를 구매한 길드 중 하나에 은빛의 날개가 있었다. 돈을 꽤 썼겠는데.

"서현이 말에 의하면 지한씨가 마족에 관해선 아주 전문가라고 하던데, 맞나요?"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네요."

"그리고 어떤 사람의 추천도 있고요······. 그래서 말인데 지한씨를 용병으로 고용하고 싶어서 직접 왔어요."

어떤 사람이란 건 당연히 백묵일 거다. 나야 마족을 처치하는 공략대에 합류할 수 있다면 땡큐다.

"참여하는 인원은 어떻게 됩니까?"

"애매하게 A급 게이트이다보니까, 길드의 S급 헌터들은 나설 수 없는 상황이거든요. 정부에선 아직 마족의 위험성을 제대로 모르고 있고요. 그래서 지한씨를 더욱 고용하려는 거기도 해요."

S급 헌터들은 S급 게이트를 공략해야 할 의무가 있다. 마음 같아서는 이번 공략에 S급 헌터들을 전부 불러 모으고 싶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저희 공략 인원은 지한씨가 잘 알고 있는 친구들로 구성했어요. 아직 경험은 부족하지만, 지한씨가 함께 해주신다면 괜찮을 거에요."

윤지은은 간절한 눈빛이었다.

은빛의 날개의 전력은 막강하다. 신아람, 천성호, 진세아. 멸망한 세계에서도 살아남은 천재들.

그러나 윤지은이 보기엔 아직 미숙할지도 모른다. 그들을 이끌어 줄 구심점이 될만한 인물이 은빛의 날개에는 없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와드리겠습니다."

"정말요? 다, 다행이다."

윤지은이 안도의 한숨과 함께 가슴을 쓸어내렸다.

오히려 내가 용병으로 고용해달라고 부탁해야 하는 입장이었건만, 백묵 덕분에 그게 반대가 되버렸다.

"그러면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금방 나오겠습니다."

나는 장비와 오르티마를 챙겨서 밖으로 나왔다. 윤서현의 도움으로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이번 게이트에선 전투의 마족과의 싸움이 벌어질 확률이 크다. 절대로 져서는 안된다.

『 동료 윤서현이 '공간이동 Lv.6'를 발휘합니다. 』

이동한 장소는 한적한 들판이었다. 멀리 보이는 거대한 게이트. 그 앞으로 천막들이 늘어서 있다.

'총 세 개의 길드인가.'

수호, 은빛의 날개 그리고 영광.

이번에는 3위 길드인 오성이 참가하지 않았다. 대신 4위 길드인 영광 길드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은빛의 날개 천막 아래로 가니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오빠! 진짜 왔네요?!"

나는 진세아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녀석이 머리를 부여잡았다.

"남의 개인 정보는 유출하는 거 아니다."

"그래, 내가 그럴 줄 알았다."

그걸 고소하다는 듯 지켜보는 천성호.

"형도 같이 공략하는 거에요?"

"그래."

"그 동안 제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보면 놀랄 거에요."

그 옆에 긴장한 채 서 있는 버서커 신아람도 보인다. 그녀도 나를 알아보고서 손을 흔들었다.

"선배."

"잘 부탁드릴게요."

나는 고개를 가볍게 숙여 인사했다.

은빛의 날개 공략 인원은 이 사람들이 전부인 모양이다.

'직접 만나고나니까 확실히 알겠다.'

천성호는 중학생이고 진세아는 고등학생, 신아람은 자신의 능력을 깨달은지 얼마되지 않았다.

재능은 출중하다고하나,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다. 윤지은이 불안해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일반 헌터라면 몰라도.'

나는 걱정하지 않는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보통이 아니다.'

모두 내가 걱정을 할만한 수준이 아니거든.

"그러면 여길 봐주세요."

인사가 끝난 것을 확인한 윤지은이 앞으로 나섰다.

"이번 게이트 공략에 대해서 가볍게 브리핑하고 갈게요. 다들 집중해주세요."

요약하자면 게이트를 공략 하되, 마족을 만나면 다른 길드와 협동하여 토벌하라는 것이었다.

약 1시간.

모든 길드의 준비 사인이 떨어지고 나서야 우리는 게이트 내부로 들어 갈 수 있었다.

드넓게 펼쳐져 있는 새하얀 대지.

『 게이트 클리어 퀘스트 』

- 목표 : 마수 처치 ( 0 / 2000 ), 보스처치 ( 0 / 1 )

- 분류 : 몰살

이곳은 A급 특수 게이트다.

* * *

수호 길드 진영.

신태양은 불만가득한 표정으로 반대편을 바라봤다. 거기에는 이지한을 포함한 다수의 은빛의 날개 길드원들이 있었다.

"저기로 합류하면 안됩니까?"

"당연히 안되죠. 그러고보니 저기 있는 사람 그때 그 사람 아닌가요? 신태양군의 스승?"

이수연의 물음에 신태양은 고개를 저었다.

"그쪽한테는 아무 말도 안 할겁니다."

"스승님이 입단속 하라고 했나보죠?"

"······."

이수연 때문에 신태양은 수호 길드의 마스터로부터 지속적인 압박을 받고 있었다. 이지한을 수호 길드로 꼬셔서 데려오라는 그런 이야기였다.

"그 사람이라고? 오호, 대체 얼마나 대단한지 구경이나 하자."

"무기가 처음 보는 건데? 저런 무기가 있었나?"

"주문 제작한 거겠지. 이 거리에선 등급 확인이 안된다."

그러다보니 이지한은 수호 길드 내에서도 유명인이었다. 수호 길드의 몇몇 인원들이 이지한에게 관심을 가지는 건 당연했다.

신태양의 선배 중 하나가 그런 소란을 잠재웠다.

"다들 이번 목적을 잊은 건 아니지? 마족에 대한 데이터 수집이 먼저야. 은빛의 날개가 뭘하든 우리랑은 상관이 없다고."

지난 게이트 합동 공략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게이트가 갑자기 붕괴하려는 것도 아니고, 언론이 주시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안전하게 공략을······."

수호 길드의 선배가 다시 한 번 목표를 되새겨 주려는 순간이었다.

콰아아아—!

먹구름이 드리운 하늘 위로 한줄기 선이 지나갔다. 하늘이 갈라지며 시원한 푸른 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벼운 돌풍이 그들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지한의 일자베기가 작렬하는 것을 보고 있던 수호 길드.

모두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선배는 어이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뭐, 뭐냐 저건."

98화 대형 레이드(3)

'아예 전부 죽여버리겠다, 이 속셈인가.'

나는 포션을 들이마셨다.

시작부터 각성 일자베기를 쓰게 될 줄이야.

땅 속에 숨어 있던 권속 한 마리 때문이었다. 일반 권속이었다면 상황을 지켜봤겠지만.

'자폭하는 권속은 선 넘지.'

폭화 두꺼비.

멸망한 세계에서도 골머리를 썩는 놈이었다. 어중간한 데미지를 먹였다가는 자신과 함께 일대를 폭발 시킨다.

그 강력함은 S급조차도 애먹을 정도.

물론 그 사실을 우리 일행들은 모른다.

"형, 반응 속도 미쳤네요. 이전보다 더 강해지다니."

천성호는 나를 졸졸 따라오며 말했다.

"다음에 나오는 마수는 제가 처리할게요. 은빛의 날개에서 훈련 좀 했거든요."

천성호는 양손검을 빼어들었다. 도움이 되는 일행이 있다는 건 안심이 된다.

각성 일자베기를 고민 없이 쓸 수 있던 것도 뒤쪽에 일행이 있기 때문이었다. 신아람, 천성호. 이름만 들어도 든든하다.

"오빠, 일주일 동안 어디갔던거에요?"

진세아도 있었다. 아직 일주일 밖에 안 지나서 전투적으로 녀석에게 기대할만 한 게 있을지는 모르겠다.

"뭐에요, 그 눈빛? 개인 정보 유출은 미안하다니까요."

저 멀리 다른 길드 두 무리가 보인다. 드문드문 나오는 마수들을 처리하고 있다.

"야야, 못 움직이게 하라니까!"

"그대로 죽여버려!"

맨 좌측에 수호 길드, 중앙에 영광 길드다. 영광은 오성 다음으로 강한 대한민국 4위의 길드.

그 안에 익숙한 얼굴 하나가 보인다.

배신자 김상욱.

이젠 마냥 배신자라고 부르긴 그렇다. 인간과 마족 사이의 이중 간첩이니.

그도 용병 신분으로 이번 게이트 공략에 참여했다. 마족들은 그를 조커 카드로 사용하려는 심산인가본데.

'그렇게는 안 되지.'

김상욱은 마도 계약으로 맺어진 내 부하니까. 배신할 염려는 없다.

"이쪽에도 나왔어요!"

그렇게 외친 천성호가 검과 함께 달려나갔다. S급 헌터다운 빠른 속도로 마수의 지근거리까지 다가가간 녀석은 단칼에 사자 마수를 베어냈다.

촤아악!

이어지는 사냥도 시원시원했다. 사실상 A급 게이트에 S급 헌터가 온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아직 수습 기간이라는 명목하, S급 취급은 못 받고 있지만. 그건 천성호를 제대로 보지 못한 거다.

'압도적인 천재.'

녀석이 휘두르는 검이 정답이자, 가장 효율적인 길이다. 은빛의 날개는 무지막지한 속도로 평원을 나아갈 수 있었다.

드드드······.

새하얀 대지 위로 진동이 느껴졌다.

땅이 점차 솟아나더니 탑 하나가 우뚝 섰다. 그곳에서 쏟아져 나오는 검은 덩어리들.

그것들은 땅으로도, 하늘로도 퍼져나갔다. 그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마수들이다.

"오우."

"진짜 많네. 저 놈들을 전부 잡아야 한다는 거죠?"

"그래."

땅을 박차고 달려오는 마수의 행렬. 전부 야수계열의 마수들이었다. 사자나 호랑이 늑대와 같은 놈들.

하늘 위로 날아오르는 수 백 마리의 괴조들.

놈들의 몸에 두른 검은 기운과 붉은 눈이 보인다.

'광폭화의 전조 증상.'

여기에 마족이 가세하기까지 한다면 전황은 크게 불리해질 수밖에 없다. 각 마수들이 S급 하위의 무력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니.

'일반적인 파티라면 굉장히 애먹었겠지.'

지금 은빛의 날개의 전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천성호와 신아람의 무력은 말도 안되는 수준이다.

그런데 가장 먼저 나선 것은 의외로 진세아였다.

"좋았어. 오빠, 잘 봐요. 일주일 동안 수련 엄청했거든요?"

"괜찮겠어?"

마기를 두른 마수들은 강하다. 어떤 수련을 했는지는 몰라도.

'쉽게 잡기는 어려울텐데.'

그런데 진세아의 자신감에는 이유가 있었다.

눈 앞에서 잔상을 남기며 사라진 진세아가 허공에서 나타났다. 녀석은 품 안에 숨기고 있던 단검 다섯 개를 일시에 던졌다.

파박, 파바박!

단검은 불똥처럼 튀어나가 공중의 괴조들에게 명중했다. 진세아는 허공을 딛고 다시 뛰어올랐다.

녀석은 괴조들을 밟으며 허공을 자유자재로 누볐다. 진세아가 지나가는 자리에 붉은 잔상이 남으며 괴조들이 우수수 떨어져내렸다.

'돌았네.'

일주일 전까지만해도 진세아는 B급 수준의 헌터였다. 아무리 타재간파의 경험치 증가가 있다고 해도, 움직임의 차원이 다르다.

착.

"어때요? 대박이죠?"

땅에 착지한 진세아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런 진세아를 천성호가 비웃었다.

"그 정도야 나도 한다고."

"저도 시작할게요."

검 위로 오러블레이드를 발산하는 천성호.

특수한 물약을 마셔 바로 광화 상태에 돌입하는 신아람.

내가 나설 것까지도 없었다.

굉음과 함께 튀어나간 그들의 앞에, 평범한 마수들은 종이장처럼 찢어졌다.

* * *

'누가······. 누가 우리의 계획을 저지하려는 놈이지?'

지시의 마족의 얼굴이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하나 같이 강했다. 보통 강한 게 아니라 미친 듯이 강했다. 한 명을 골라내는 게 불가능할 정도다.

"분명, 인간 놈들의 힘은 보잘 것 없다고 하지 않았나? 언제부터 헌터들이 저만큼 강했던 거냐?"

무력의 마족이 탑 바깥을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 끝없이 쏟아지는 마수들을, 아무렇지 않게 뚫고 달려오는 헌터들.

"쓰읍. 이럴 수가 있나."

지시의 마족이 혀를 찼다.

전력으로 상정했던 것은 마족의 계획을 저지하고 다니는 딱 한 명. 그 놈만 예외적으로 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일부러 A급 게이트를 열었건만.'

여러가지 상황을 전부 고려한 게이트 선정이었다. S급 게이트가 아닌 A급을 생성함으로써 각 길드의 2군을 불러 모으려는 전략.

'훼방을 놓는 인간 놈의 등급도 그리 높지는 않을테니까.'

마족의 계획을 저지하려는 인간. 사실상 그 놈을 잡기 위한 계획이었다.

'놈은 S급이 아니야.'

힘의 수준은 그만큼일지도 모르지만, 실제 등급은 더 낮을 것이다.

지난 발전의 마족이 죽었을 때 생성되었던 게이트는 A급.

거기에 있던 헌터들 중 하나가 자신이 찾는 인간이라는 건데.

'조급해 할 필요는 없다.'

마수들 조금 잘 잡는다고 초조할 필요도 없었다. 놈들만 잘 끌어들인다면, 전투의 마족을 부를 수 있다.

"제약을 사용하자."

거기까지만 간다면 모든 게 해결 된다.

"일단 헌터들을 각개 격파할 수 있는 상황부터 만드는 게 좋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저 놈들은 한꺼번에 상대하는 건 위험 부담이 클테니."

"어이,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지 말아라. 나는 내 식대로 한다. 한 놈씩 끌고 가서 잡아 죽이면 충분하겠지."

"어이, 내 말이 그말······."

붉은 너클을 양 손에 장착한 무력의 마족이 탑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곳을 잠시 바라보던 지시의 마족이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뭐,전투력만큼은 확실 하니까.'

무력의 마족이 활개치기 좋은 상황을 만들어 놓는 게 중요했다.

스스스······.

그는 마기를 사용해 사람들 사이에 숨어든 자신의 부하. 김상욱에게 연락을 취했다.

"김상욱, 움직여라. 네가 활약할 차례다."

* * *

'쳇.'

마족의 연락을 받은 김상욱은 남몰래 몸 안의 마기를 발산 시켰다.

쿠구구······!

이곳의 새하얀 대지는 마기에 의해 자유자재로 변형이 가능한 장소. 김상욱의 마기의 반응해 근처의 땅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뭐, 뭐야?!"

"함정인가? 다들 침착해."

이윽고 미로 같은 벽이 드높게 솟아 올랐다. 5m가 넘는 새하얀 벽들.

그 목적은 길드 간의 도움을 차단 시키는 것이었다.

『 마(魔)를 따르는 자의 권역에 진입하셨습니다. 』

『 마도 : 계약에 의거하여 제약이 발생합니다. 』

『 저공 비행 : 5m 이상의 높이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

게이트를 뒤덮는 제약.

처음보는 제약의 형태에 영광 길드의 사람들이 소란스러워졌다. 그러나 이들은 백묵에게 돈을 주고 정보를 구매한 길드.

제약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는 알고 있었다.

『 길이 제한 : 50cm 이상의 무기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

그러나 그 제약이 겹쳐졌을 때까지는 대비하지 못했다.

쿠구구······!

땅을 뚫고 나온 골렘 한 마리가 영광 헌터들을 몰아냈다.

콰앙! 쾅!

무자비하게 몰아치는 주먹 세례 앞에서 영광 헌터들은 뒤로 도망가는 것 말고는 할 게 없었다.

"뭐해 마법사들!"

"보고도 몰라? 가벼운 마법은 안통해, 앞에서 버텨야 뭘 할 텐데······!"

"크윽, 무기도 없이 뭘 어쩌라는 거야."

방패, 스태프, 검······. 무기라고 할만한 것들은 죄다 50cm가 넘었다.

골렘은 미친 듯이 치고 들어왔고, 영광 길드원들은 도망치기 바빴다.

그들을 바라보는 김상욱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이, 이게 대한민국 4위 길드?'

물론 A급 게이트인지라 급이 떨어지는 놈들을 보냈다곤 하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어이, 조심해라!"

영광 길드가 너무 위태위태해서 오히려 마기로 골렘의 움직임을 억제해야 했다.

"어이, 비켜!"

"으아앗!"

길드원 하나를 밀쳐내고 김상욱이 대신 공격을 막아냈다. 김상욱의 무기는 단검.

"가,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콰앙!

김상욱은 단검을 휘둘러 골렘을 밀어냈다. 지시의 마족이 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사람이 죽게 내버려두지는 말라고?'

이지한이 한 말 때문에 자신의 행동에 제약이 생겨 버렸다. 자기도 모르게 몸이 튀어나가 헌터들을 지키고 있었다.

'젠장, 이딴 놈들 죽든 말든 내 알 바 아닌데.'

웃긴 건 지시의 마족이 그런 자신의 모습을 흡족해 한다는 거였다.

- 오, 좋아. 일단은 그런 식으로 신뢰를 쌓아놔라. 다른 길드까지 박살 내려면 신뢰가 필수적이니까.

"예에."

건성으로 대답한 김상욱.

하지만 이 이상은 무리였다. 골렘으로부터 영광 길드를 보호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사, 살려줘!"

이 놈들 너무 오합지졸이다. 미궁에서 흩어지면 그건 곧바로 죽음을 의미한다.

김상욱이 고민을 거듭하던 그 순간이었다.

콰아앙!

미로의 벽이 부숴지며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어, 설마 저 녀석 골렘?"

"내 주먹 맛을 보여줘야겠네."

위기감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5명의 사람들. 도망치던 영광 길드 사람들이 멈춰섰다.

"은빛의 날개가 지원을 왔다!"

"다들 정신차려!"

"오면 어쩔 건데? 상황 안 보여?"

의견이 시시각각으로 나뉘고 있는 가운데.

콰아앙!

한달음에 뛰어 오른 천성호가 골렘의 머리를 강하게 찼다. 무기 없는 순수한 각력. 3m 크기의 골렘이 기울어졌다.

그것을 놓치지 않고 달려드는 붉은 기운의 버서커 신아람.

그녀는 아예 골렘과 전신을 부딪혔다. 쩌저적하는 소리와 함께 놈의 외갑에 커다란 금이 갔다.

"이제 내 차례!"

재빠르게 달려나간 진세아가 골렘의 심장 부근에 손을 올렸다. 발악하려던 골렘의 움직임이 일시에 멈췄다.

어느덧 골렘의 핵은 진세아의 손에 들려 있었다.

저벅저벅.

그곳을 천천히 걸어오던 이지한.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영광 길드원들을 향해 그가 발했다.

"지금부터 수호 길드와 합류합니다."

드드드······!

말을 마치기도 전에 땅 속에서 서너 마리의 골렘이 솟아올랐다.

한 마리를 상대하는 것도 버거웠는데, 서너 마리라니. 영광 길드원들이 소리쳤다.

"일단 도망이나 쳐요!"

"······."

이지한은 미리 진세아로부터 받아 놨던 단검을 들어 올렸다.

『 유니크 스킬 '웨펀 마스터 Lv.3'을 발휘합니다. 』

『 스킬 '일자베기 Lv.12'를 발휘합니다. 』

일부러 탈력감을 불러 일으키는 13레벨이 아닌 12레벨 일자베기를 사용했다.

단검으로부터 그려진 여러 줄기의 직선이 골렘들을 단번에 도륙냈다. 조각조각 나뉜 골렘들이 바닥에 흩어졌다.

잠깐 동안 이어진 침묵.

그제서야 영광 길드원들은 상황을 파악했다.

살아남으려면 은빛의 날개의 지시를 따라야한다는 것을.

99화 마족 학살자(1)

나는 흩어지려 했던 영광 길드를 한곳으로 모았다.

앞서 골렘을 쓰러뜨리는 모습을 보여줘서인지 다들 내 지시를 따라줬다.

"제약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계시죠? 여기서 몇 개의 제약이 더 추가될 수도 있으니 모여 있는 게 낫습니다. 대응할 방법이 늘어나니까요."

따로 다녀봤자, 마족이나 권속 놈들에게 각개 격파 당할 뿐이다. 영광 길드의 리더로 보이는 남자가 질문했다.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건가요?"

"네."

"그런······."

말도 안된다는 표정이었다. 나도 동의한다. 미래의 영웅들도 이 제약 때문에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만큼 사기적인 힘이다.

'마족 본인도 포함 된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지만······.'

제약을 발동시키는 마족은 그 성질을 이해하고 있으니 당하는 사람이 불리한 건 마찬가지다.

최하위 마족들은 오히려 자신의 제약에 얽매이는 경우가 있지만, 놈들의 위계가 높아질수록 그런 일은 적어진다.

제약을 활용하고 능숙하게 사용하기 시작한다.

『 저공 비행 : 5m 이상의 높이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

『 길이 제한 : 50cm 이상의 무기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

현재 걸려 있는 제약은 두 가지.

저공비행은 미궁의 탈출을 의식한 것 같고.

길이 제한은 짧은 무기를 사용하는 마족이 있단 의미다.

김상욱에게 전해 들은 정보에 따르면, 무력의 마족이 너클을 사용하는 무투파.

나는 영광 길드 사이에 자연스레 끼어 있는 김상욱을 잠시 바라봤다.

'김상욱은 여차할 때 쓸 수 있는 카드로 남겨둔다.'

아직 마족들은 그를 배신자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걸 이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나는 영광 길드의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수호 길드를 찾아서 이동하죠. 공간 파악 능력이나, 천리안 계열의 스킬을 가지고 계신 분 있으십니까?"

"······."

내 질문에 전부 조용해졌다. 흔히 있는 스킬은 아니긴 하다.

이거 직접 돌아다니면서 찾는 수밖에 없는 건가.

'진세아의 미래예지를 이용하는 건 어려우려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김상욱이 턱짓으로 반대편을 쓱쓱 가리키고 있었다.

"크흠, 큼."

아무래도 각 길드의 위치를 처음부터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다. 마기를 다룰 줄 알기에 가능한 일이다.

"적당히 아무데나 찾아보죠."

김상욱이 가리킨 벽 앞에 섰다. 일자베기를 발휘해 미궁의 벽을 부수려는 순간이었다.

"저, 저기 마수 출현!"

"젠장, 또냐. 무기도 없는데."

미궁의 길 한쪽에서 마수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대부분이 다크 골렘이었다.

"벽을 뚫어주세요, 저희가 골렘들을 막겠습니다."

"아, 알겠어요. 그 정도라면······."

나는 우리 일행의 옆으로 다가갔다.

상대는 단단하고 파괴력 높은 다크 골렘이다.

제약 때문에 제대로 된 무기를 사용하기 힘들단 점을 노린 거겠지.

단검이나 작은 무기로는 제대로 된 피해를 주기 힘들고, 반대로 골렘은 주먹만으로 헌터들에게 큰 피해를 입히니까.

근데 우리 파티에는 해당이 안 되는 말이다.

"어때? 해볼만하겠어?"

"물론이죠."

단검을 든 진세아가 자신만만하게 달려나갔다.

녀석은 날렵한 몸놀림으로 골렘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가면서 스킬 '절대 강탈'로 놈들의 동력인 코어를 모두 손에 넣었다.

쿠웅, 쿠웅!

심장을 잃은거나 마찬가지인 골렘들이 바닥에 빈 몸뚱이를 뉘였다.

"무기 같은 거 없어도 저 놈들은 제 밥이죠."

뒤이어 천성호와 신아람이 돌진했다.

붉은 마력을 뿜어내며 쏘아져 나간 신아람이 먼저 골렘에게 닿았다.

헌터로서 익숙해진 무기를 사용하지 못한다. 이건 치명적일 수밖에 없는 핸디캡.

콰아앙—!

그러나 전신이 무기인 버서커 신아람에게 그 정도는 사소한 문제일 뿐이었다.

그녀의 발차기에 맞은 골렘이 산산조각으로 분해되어 미궁의 벽을 두드렸다.

콰앙, 콰앙!

천성호는 자연스럽게 손에 마력을 부여해서 전투하고 있었다.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골렘에게 큰 타격을 주는 법을 체득해 사용하고 있다.

"든든하구만."

『 해당 일행과 관련된 타재간파의 기록이 존재합니다. 』

『 일행이 쓰러뜨린 마수가 포인트로 전환됩니다. 』

···

『 365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

『 371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

『 352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

각자가 쓰러뜨린 마수가 포인트가 되어 내게로 흘러들어 오고 있었다.

물론 나도 놀고 있을 생각은 없다. 나도 전투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 레어 스킬 '진(眞) 쾌속 단검술 Lv.1'을 발휘합니다. 』

투두두두!

진세아에게 배운 단검술의 레벨을 올려야 했다. 이계 규율의 상점에서 구매한 단검을 사정없이 휘둘러 골렘을 베어낸다.

그렇게 정리가 얼추 되었을 때였다.

콰아앙——!

미궁의 벽 너머 치솟는 폭발이 보였다. 수호 길드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장소다.

영광 길드원들이 고생하며 미궁의 벽을 뚫어놨다. 굉장히 헉헉대고 있지만 쉴 틈은 없다.

나는 그들에게 손짓했다.

"빨리 가죠."

뒤쪽에선 다시 마수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 * *

"미궁과 제약이라······."

영광과 달리 수호 길드의 사람들은 침착했다. 당황하기보단 현상을 분석하고 정보를 수집했다.

"미궁 자체가 제약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 진 것 같네요."

"마족은 게이트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도 있는 건가. 이건 도움이 되겠는데요."

그들과 함께 미궁을 확인하던, 신태양의 눈썹이 일순 일그러졌다.

『 스킬 '초감각 Lv.8'을 발휘합니다. 』

아주 강력한 무언가가 이쪽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신태양은 즉시 앞서나갔던 선배의 목덜미를 잡아당겼다.

"커헉!"

콰아앙!

선배가 서 있던 자리에서 강력한 폭발이 치솟았다. 한순간만 늦었더라면 선배가 폭발에 휘말릴 뻔했다.

연기가 걷히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근육질의 남자.

그러나 일반적인 인간과는 그 외관이 달랐다.

보랏빛 피부와 붉은 눈. 머리에 달린 두 개의 뿔.

"마족······."

이미 백묵으로부터 관련된 정보를 받아 들었기에, 길드원들 모두 놀라지 않았다.

그러나 몸이 굳어지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길드원 중 하나가 가까스로 입을 뗐다.

"뭐가 저리 강해 보이냐."

놈이 뿜어내는 위압감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정보에 의하면 마족의 강함은 일반 마수와는 비교 할 수 없다.

'무기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이길 수 있나?'

지금껏 상대 했던 어떤 마수보다도 눈 앞의 상대가 강하다. 신태양의 초감각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흐음, 인간들치곤 나쁘지 않은 기운이군."

길드원들의 면면을 둘러 보던 무력의 마족은 손가락으로 신태양을 가리켰다.

"특히 네가 눈에 띄는구만. 네가 우리의 계획에 훼방을 놓는 놈이냐?"

"훼방······?"

"모르는 척을 하는 건지, 아니면 진짜 모르는 건지. 나는 그런 걸 밝혀내는 데 소질이 없는지라. 전부 죽이면 되겠지."

그 말과 함께 바닥을 박차고 뛰어오른 무력의 마족. 놈이 박찬 땅이 움푹 패이고 가벼운 충격파가 일었다.

신태양은 반사적으로 놈을 막아내려고 검을 들어올렸다.

'큭.'

아니, 들어 올리려고 했다. 몸에 새겨진 습관 때문에 나온 행동이었지만 몸이 굳어진 듯 움직이지 않았다.

콰아앙!

"다들 무기를 바꿔 들어!"

다행히 동료 이수연이 만들어낸 황금 방패가 무력의 마족의 주먹을 막아냈다.

허나, 마족의 주먹질 몇 방에 방패 위로 깊은 금이 새겨졌다. 이수연이 스태프를 들고 있지 않기에 방어력이 심히 떨어진 것이다.

"시시하군."

콰앙!

다음 주먹질 한 번에 방패는 완전히 부숴졌다. 무력의 마족은 미끄러지듯 길드의 한복판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수호 길드의 촉망 받는 인재들이다. 전부 S급을 바라보고 있는 헌터들이었기에 무기가 없어도 버텨볼만 했다.

그런 판단하에 수호 길드 전원이 달려들었지만.

휘익, 휙!

스텝을 밟으며 다가온 무력의 마족은 몸을 좌우로 흔들며 헌터들의 공격을 전부 흘려냈다.

"커허억!"

헛점이 보일 때마다 그들의 복부에 마족의 주먹이 꽂혔다. 가벼운 잽이었지만, 그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크아악!"

퍼벅, 퍼버벅!

처참한 결과였다.

힘, 스피드, 근접전의 경험. 모든 부분에서 차이가 났다.

뻐억!

마족의 주먹이 수호 길드원의 머리를 강타했다.

"호영 선배!"

그대로 허공으로 솟구쳐 오른 길드원은 미궁의 보이지 않는 천장에 부딪혀 떨어졌다. 5m 제약이었다.

"빌어먹을 제약 때문에 뭘 할 수가 없네!"

"젠장, 조심해!"

신태양은 몸 위로 마력을 끌어 올렸다. 호신강기 급은 아니지만, 충격을 완화시키는 데에는 도움이 될 거란 판단.

'좋았어, 한 번 해보······."

뻐억!

그러나 한 대 쳐맞고 나니 알 수 있었다. 무의미했다. 무기가 없이 맞서 싸운다는 것부터가 멍청한 짓이었다.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자신은 검에 재능이 있을 뿐, 주먹질엔 재능이 없다.

'그래, 이건 아닌 것 같다.'

전신을 울리는 격통. 신태양의 입에서 울컥 피가 터져나왔다.

'제대로 싸워봤으면 억울하지라도 않은데······!'

스승님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이 말도 안되는 부조리한 상황에서 뭘 해야.

분명 말도 안되는 일을······.

그런 신태양의 머리를 불현듯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신태양은 일단 뒤로 물러났다. 난장판이긴 해도 탱커 역할을 맡은 헌터가 버텨주고 있다.

쳐맞고 있기는 하지만.

그리 쉽게 죽을 사람은 아니다.

"위대한 마족의 계획에 손을 대고도 무사할 줄 알았느냐! 무지한 인간들아!"

피가 튀기는 싸움 속에서 무력의 마족이 소리쳤다.

신태양의 미간이 좁혀졌다.

'계획?'

뭔 개소리인지는 몰라도, 일단 저 놈을 쓰러뜨리는 것부터 생각해야 했다.

"선배, 예비용 단검 주세요!"

"뭐? 이걸론 안 돼. 해체 할 때 쓰려고 가져온 거라고!"

"그거면 충분하니까요!"

신태양은 빼앗다시피해서 든 단검을 들어 올렸다. 오러를 둘러도 한계가 있다. 무기의 성능 자체가 가진 한계.

'그러니까 내 검을······.'

신태양은 마기를 두른 단검으로 자신의 검을 내리쳤다.

'부순다.'

"야, 제정신이야?! 아무리 급해도······!"

선배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까앙! 까앙!

몇 차례 전력을 다해 충격을 가하자 검의 윗부분이 떨어져나갔다. 거의 손잡이만 남은 상태.

신태양은 그것을 집어 들었다.

"제정신이고 말고요."

부러진 검. 그 크기는 50cm를 넘지 않는다. 검날이 없다시피하지만 차라리 그게 나았다.

이제 이 무기는 사용할 수 있다.

콰아아—!

오러블레이드가 발화했다. 눈부신 마력의 빛은 검날을 대체하기엔 충분했다.

무력의 마족이 시선이 신태양에게로 옮겨졌다. 그는 흥미롭단 표정과 함께 말했다.

"아무래도 네 놈이 맞는 것 같군."

* * *

다시금 벌어지는 전투.

신태양은 우월한 사거리를 바탕으로 차분하게 전투를 풀어나갔다.

마족이 조금씩이지만 밀려나고 있었다. 아무리 녀석이라고 해도 사거리의 차이를 쉽게 좁히진 못했다.

마족에게 입히는 상처가 조금씩 누적되고 있었다.

전투를 바라보는 길드원들의 표정에 희망이 감돌았다. 어쩌면 이길지도 모른다.

"크하하!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 방해를 하는 거겠지. 전투의 마족께서도 좋아하시겠어."

그러나 신태양은 알고 있었다. 놈은 수세에 몰려 있지 않다. 오히려 기뻐하고 있었다.

콰앙!

마족은 검은 마기를 발산시켜 신태양을 한 번 튕겨낸 뒤, 목을 두두둑 꺾었다.

우우우—!

"이제부터 진심을 다해볼까."

그의 전신을 검은 마기가 휘감기 시작했다. 전투의 양상이 달라진 것은 그때부터였다.

"무슨······!"

콰앙! 콰앙! 콰앙!

신태양이 마족의 공격을 한 번 막아 낼때마다 크게 뒤로 밀려난다. 갑자기 무기의 사거리 차이가 무의미해졌다.

"크으윽."

오러 블레이드가 검 자체를 구성하는만큼 소모 또한 극심했다. 신태양의 기력과 체력이 순식간에 떨어지고 있었다.

"어디 더 없나? 마족을 살해한 네 놈이 고작 이 정도라는 건가?"

"아까부터 무슨······."

콰아앙!

마기가 짙게 실린 주먹 한 방에 신태양이 미궁의 벽에 내다 꽂혔다.

"태양아!"

"신태양!"

길드원들이 달려오는 게 보인다. 신태양은 쓴 웃음을 지었다. 이런 절망감과 무력감은 처음이었다.

이루말할 수 없는 지대한 격차.

지금 시점에선 아무리 해도 이길 수 없다.

'시간이 좀만 더 있었다면······.'

시간이 더 주어졌다면 저런 마족쯤은 뛰어넘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나 여기서 끝인 것 같았다.

"팔다리는 떼어두는 게 좋겠지."

저벅저벅.

무력의 마족은 천천히 신태양을 향해 다가왔다.

놈의 주먹 위로 검은 마기가 모여든다. 신태양은 몸을 조금도 가눌 수가 없었다.

달려드는 수호 길드원들이 종잇장처럼 나가 떨어졌다.

'젠장.'

너무 분했다. 고작 여기서 죽어야 한다는 게. 겨우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야 하는 건가.

신태양이 이를 악문 그 순간이었다.

서걱—!

푸른 궤적을 그리며 날아온 단검이 마족의 팔을 잘라냈다.

"뭣?!"

단검이 날아 온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단검은 새끼용으로 변해 반대편 팔을 물어뜯었다.

콰아앙!

브레스에 의해 연기가 치솟았다. 동시에 반대편 벽에서 걸어나오는 이지한.

"스, 스승님!"

신태양의 눈이 커졌다. 절망으로 가득했던 그의 마음에 기적처럼 희망이 샘솟았다.

"저 사람은······!"

"지원이다!"

수호 길드 헌터들의 시선이 모두 이지한에게로 모였다. 게이트 초반에 보여준 일자베기도 그렇고, 신태양에게 들어 그의 실력을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크으······."

무력의 마족은 그런 이지한을 매섭게 바라봤다. 놈의 눈이 붉게 빛났다. 양 팔을 잃었지만 그 위압감은 여전했다.

"허, 더 강한 놈이 있었을 줄이야."

무력의 마족이 비틀거리면서 일어섰다.

"희망 따위 갖지 말아라. 이런 상처 따위 이 몸에게는 무의미하니."

전투의 마족은 마기를 끌어 모아 양 팔을 재생 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아무리해도 팔 한 쪽이 재생되지 않는다.

처음으로 마족의 얼굴에 당혹의 빛이 스쳤다. 그런 놈을 바라보며 이지한은 씩 웃었다.

"안되는 게 당연하지."

일자베기의 후유증으로 탈력감이 밀려오지만, 이런 상황에선 세게 나가줘야 하는 법.

"그럼 쳐맞을 준비는 됐나?"

본질의 훼손.

13레벨 일자베기의 효과.

한 번 훼손된 본질은 복구 될 수 없다.

마족들의 특기인 재생은 이걸로 봉인이다.

이지한은 마족을 향해 비릿한 미소를 흘렸다.

"팔 하나 없는 마족은 너무 쉬운데."

100화 마족 학살자(2)

한 팔을 잃은 무력의 마족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네가? 나를 죽이겠다고 말하는거냐?"

기가 차다는 헛웃음.

놈의 입장에서 인간이란 그저 정복해야 할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고귀하신 마족은 모든 종족의 정점에 선 존재니까.

"그래."

그러니 더욱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자신의 유불리를 따지지 않는다.

내 도발은 훌륭하게 먹혀 든 셈.

콰아앙!

놈은 땅을 박차고 나를 향해 뛰어 들었다. 마기로 감싸여진 한 쪽 주먹이 흉흉하게 빛나고 있다.

그럼에도 마족이 인류를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

그 과신이 과신이 아니게 될 정도로 강했기 때문이다.

『 타재간파의 서를 활성화 합니다. 』

『 스킬 '광화 Lv.10'을 발휘합니다. 』

『 스킬 '신속 Lv.10'을 발휘합니다. 』

『 스킬 '오러블레이드 Lv.10'을 발휘합니다. 』

『 3만 포인트를 소모합니다. 』

『 잔여 포인트 : 98,150 』

내 손에 들린 단검 위로 길게 뻗은 오러 블레이드가 형성됐다. 나는 검을 휘둘러 놈의 주먹을 받아냈다.

콰아아—!

강렬한 충격파가 일대를 뒤덮었다. 주변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헌터들이 주춤할 정도의 기세.

놈은 한 팔로도 쉼 없이 공격을 개시해왔다. 나는 그것들을 단검으로 전부 쳐냈다.

단검에 실려오는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조금씩 손이 아려온다.

'과연 무력의 마족이라는 건가.'

마족의 이름은 그가 가진 재능이나 능력에 따라 붙여진다. 때문에 마족이 가진 제약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고작 한 팔에서 나오는 힘이 이 정도였으니, 신태양이 고전하는 것도 당연하다.

"아람씨!"

내 말에 뒤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버서커 신아람이 쏘아지듯 날아왔다.

"잔챙이의 공격 따위 무시하면 그만이다!"

팔 하나가 없기에, 마족의 선택지는 제한 되는 게 당연하다. 놈은 나를 가장 큰 적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신아람의 발차기는 그대로 무력의 마족에게 작렬했다.

"커허억!"

놈의 허리가 꺾이며 눈이 커졌다. 미안한데, 신아람은 잔챙이가 아니거든. 얼마나 오만하면 적의 공격을 맞아준단 판단을 하는 건지.

나는 그틈을 놓치지 않고 단검을 휘둘렀다. 마족은 타격을 입은 상태에서도 몸을 비틀어 나와의 거리를 벌렸다.

내 단검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나는 전투가 지속 될 수록 빨라진다.

『 스킬 '신속 Lv.10'을 발휘합니다. 』

기어코 놈을 따라가 단검을 박아 넣으려 했다. 자세를 잡은 놈의 주먹이 다시 한 번 내 단검을 막아냈다.

스르륵! 파악!

시야의 사각에 위치하던 진세아가 마족의 등에 단검을 꽂아넣고 사라졌다.

놈이 무언가 해보려고 하면, 나는 단검을 들어 일자베기를 쓰는 자세를 취했다.

한 번 잘리면 재생 되지 않는 궁극의 일자베기.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순 없었다.

놈이 주춤한다면 다시 우리의 차례다. 진세아가 찌르고, 신아람이 두드려 팬다.

마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크윽, 이 쥐새끼 같은······!"

마수의 입장에서 토벌 당하는 기분을 듬뿍 느낄 수 있을 거다.

이어지는 건 그러한 단조로운 공격의 반복.

내 일자베기를 의식한 무력의 마족을 계속해서 깎아내리는 전략.

대형 마수를 사냥할 때와 같은 방식이다.

"이, 빌어먹을 새끼들이! 크아아!"

만신창이가 된 마족이 발악하며 소리쳤다. 온 몸이 상처와 멍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나는 끝까지 놈을 주시했다.

콰아앙!

신아람이 발로 땅을 내려찍었다. 강한 균열이 생기며 땅이 솟아올랐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 몸을 돌린 무력의 마족.

놈은 뒤쪽에서 나타난 진세아에게 시선을 잠시 빼앗겼다.

야금야금 파고드는 공격이라곤 해도, 맞다보면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실수는.

『 스킬 '일자베기 Lv.13'을 발휘합니다. 』

목숨과 직결 되는 법이다.

마족의 몸을 양단하는 13레벨의 일자베기가 허공에 아로새겨졌다. 새하얀 빛 줄기가 놈을 완벽히 베어냈다.

털썩.

둘로 나뉜 놈이 바닥에 쓰러져 중얼거렸다.

"이럴 리가······."

놈의 몸에서 검은 마기가 안개처럼 솟아난다. 그러나 조금도 재생되지 않는다.

일자베기가 놈에게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을 남겼으므로.

놈의 떨리는 손이 툭 떨어졌다.

우리의 승리였다.

* * *

"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지시의 마족은 할 말을 잃었다. 무력의 마족이 이리 간단하게 죽다니?

그를 쓰러뜨린 남자.

'저 녀석이 우리의 계획을 방해하는 놈인가?'

본디 무력의 마족에 의해 각개 격파 되었어야 할 각 길드를 하나로 규합하고 미궁을 부숴 길을 개척했다.

동시에 하위 마족을 죽일만큼의 무력을 가지고 있다.

'내가 너무 안일하게 보고 있었군.'

두 눈으로 보고서야 깨달았다.

프로젝트 마기를 담당하던 최하위 마족. 놈의 죽음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최하위니까.

발전의 마족이나 지력의 마족이 당할 때도 감흥이 없었다. 놈들은 전투에 특화 된 마족들이 아니었으니까.

'무력의 마족은 나보다 강하다.'

적어도 대인전에서 패배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고 말았다. 그것도 무참하게.

'저 남자 주변의 인간들도 굉장히 강하다. A급 게이트에 들어올 수준이 아니야.'

혀를 찬 지시의 마족은 망토를 걸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자신이 나설 차례였다.

"움직여라, 내 권속들이여."

그의 명령 한 마디에 탑 아래로 검은 마기의 구름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권속들.

검은 갑옷을 걸친 언데드 군사였다. 그들은 손에 쥔 무기를 들어 올리며 대열을 형성했다.

그 수는 무려 300 마리.

그 하나하나가 권속이라는 걸 생각하면 대단한 수였다. 하위 마족 중에서도 권속의 수로 따지면 단연코 1위.

'전투의 마족께서 기뻐하실만한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

무기가 없으면 전투력이 떨어지는지라, 무력의 마족과의 상성은 좋지 않다. 그래서 바로 보내지 않았던 건데.

더 이상 아껴봤자 무의미했다.

권속들을 전부 불러낸 지시의 마족은 전투의 마족에게 연락을 보냈다.

"나의 주인시여, 계획의 저지자를 발견 했습니다. 그 강대한 힘의 편린을 조금이나마 빌려주시길 간청합니다."

전투의 마족이 직접 행차할지는 알 수 없다. 명령은 전투의 마족이 내렸지만, 워낙에 기분파인지라 권속이 대신 올 수도 있다.

앞으로 벌어질 상황 자체가 그 분의 마음에 드는 게 중요했다.

'나쁘진 않다. 아니, 오히려 내가 유리하다고 봐야겠지. 인간들 사이에 숨겨둔 스파이. 김상욱을 사용하면 놈들을 철저히 유린할 수 있다.'

지시의 마족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 손에서 뻗어나간 검은 기운이 언데드 병사들을 뒤덮었다.

진군이 시작되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