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들통나다
지금 이 일에 연루된 운 왕가의 사람들이 불려와 어제와 오늘, 이틀 동안 있었던 일을 고하게 될 것이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안주인 역할을 해 온 봉 측비의 위세에 짓눌린 그들은 자연스레 그녀의 편에 서게 될 것이 자명했다. 천월에게 있어선 불리한 싸움임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양면이 있다. 밝은 면이 있으면, 그림자도 함께 존재하는 법. 아직은 봉 측비의 승리도, 그리고 자신의 패배도 쉽게 예단할 수 없었다.
또한 운왕께선 진심으로 운천월을 총애하시기에 자신이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을 보고만 계시진 않을 것이다. 이 점을 이용해 봉 측비에게 가벼운 희망을 주었다가 단번에 무거운 절망을 선사하겠다. 이 싸움에서 마지막에 웃게 되는 자가 누구인지 똑똑히 보여주고 말 것이다.
“부왕, 소자가 이 일을 마무리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가화만사성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모든 사람에게 다 잘못이 있으니, 여기서 제가 마무리 짓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한참을 말이 없던 소왕이 침묵을 깨트렸다. 이는 왕가에서 오랫동안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봉 측비를 위함이 아니었다. 운천월을 위한 마음임이 분명했다.
봉 측비의 안색이 급격히 나빠졌다. 그러나 그녀는 감히 자신의 감정을 내비칠 수 없었다.
천월은 부왕의 행동이 고맙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더는 부왕에 대한 호감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넌 물러나 있거라! 이 일을 결코 이렇게 끝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운 왕가는 네 어머니와 천월의 어미가 작고한 이후, 지난 10년간 아주 난장판과 같았다. 내 아직 죽지 않았으니, 지금 이 상황을 분명히 해결해야겠다.”
운왕이 지팡이로 바닥을 내리치며 말했다.
“이 나약한 녀석, 이 늙은이 아직 죽지 않았다! 이대로 운 왕가가 다른 이의 손에 넘어가게 둘 수는 없다!”
소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천월은 운왕의 말에 안도하며 살며시 입 꼬리를 올렸다. 그녀 역시 이번 기회에 운 왕가 사람들에 대해 좀 더 상세히 알고 싶었다. 이대로 모든 이를 찬찬히 지켜보면, 결국 얼룩이 걷히고 진실이 드러날 것이다. 반드시 그들의 색을 낱낱이 파악하여, 자신의 입지에 튼튼한 밑거름으로 사용할 생각이었다.
봉 측비 역시, 당연히 반대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늘 운천월을 반드시 제거하리란 결심을 단단히 품었다. 모든 이가 분란의 원인으로 운천월을 지목한다면, 제 아무리 운왕이라도 별수 있으랴.
각자 다른 생각에 빠져있을 때, 바깥에서 운맹의 공손한 음성이 들려왔다.
“운왕전하께 아뢰옵니다. 태자전하께서 태자 측비를 모시고 행차하시었습니다. 어제 큰 아가씨께서 손을 다쳤다는 소식에 특별히 큰 아가씨를 뵈러 행차하셨다 합니다.”
봉 측비의 안색이 더욱 밝아졌다. 자신의 조카까지 이리 든든히 행차해 주었는데, 이제 그 어느 누가 자신을 괴롭힐 수 있겠는가!
이내 봉 측비는 득의양양한 눈빛으로 천월을 바라보았다. 이 상황에서 태자 측비의 지지가 더해진다면, 이제 운천월이 어떻게 내쳐지는지 지켜보는 일만 남은 셈이었다. 봉 측비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밖을 향했다.
“어서 태자전하와 측비를 모시지 않고 뭣 하고 있느냐!”
천월은 봉 측비의 득의양양한 눈빛은 보지 못한 채, 다른 걱정에 잠겨 있었다. 태자와 그 측비가 왔다고? 저 자들이 지금 운 왕가를 들쑤시러 온 것인가? 자신이 황궁에서 온전히 돌아왔기에 태자가 여기까지 와서 저를 다시 형부에 보내려는 것일까? 말도 안 돼……!
“무슨 소리요! 지금 이 상황에 태자전하와 태자 측비를 이곳에 들게 하여 이 꼴을 모두 보이겠단 말이오?”
봉 측비를 꾸짖은 소왕이 다시 바깥을 향해 명했다.
“태자전하와 태자 측비를 큰 아가씨가 있는 향하원(香荷院)으로 모시도록 해라!”
“소왕야, 태자전하와 측비가 오셨는데, 어찌 이쪽으로 먼저 들이시지 않으시는 것이옵니까?”
봉 측비가 어디 이대로 물러설 위인이던가. 그녀의 친정 식구인 태자 측비를 문 앞에 두고 그냥 돌아설 봉 측비가 아니었다. 운왕이 여전히 운천월만 감싸는 것을 보면, 이대로는 전혀 가망이 없었다. 봉 측비에겐 지금 그들의 지지가 절실했다.
소왕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봉 측비. 어디 집안 망신시킬 일 있소? 지금 이 상황이 전혀 파악이 안 되는 것이오?”
“소왕야, 태자전하와 측비가 어디 남이옵니까? 그들 역시 신첩의 집안 식구들 입니다!”
“봉 측비……!”
소왕의 눈에 노기가 가득 찼다. 그는 지금껏 줄곧 순종적이었던 봉 측비가 이렇게까지 자신에게 대들 수 있는 품성을 가지고 있었는지 미처 알지 못했다. 자신의 안목이 완전히 빗나간 것이었다. 지금 자신의 앞에서도 이런 매서운 언행을 보이는 여인이 어찌 평소에 유순한 태도를 보이겠는가?
봉 측비는 소왕의 눈빛에 깜짝 놀라 다급히 의기양양한 표정을 거두고 눈물을 글썽였다.
“소왕야, 태자전하와 태자 측비 같은 귀빈을 어찌 작은 향하원에 모실 수 있겠습니까? 태자전하의 존귀한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곳입니다. 향하(香荷)가 손을 다치긴 했지만, 걸을 순 있으니 이곳에 오도록 해 주십시오! 그리고 소왕야께서도 향하가 어느 정도로 다쳤는지를 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뛰어난 재능이 그 모든 빛을 잃고, 앞으로 더는 금(琴)을 켤 수 없게 되다니…….”
큰 여식 향하가 더는 금을 켤 수 없다는 소식에 소왕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다. 봉 측비의 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탄식했다.
천월이 암암리에 도리에 맞지 않는 일들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다행히도 선을 넘은 적은 없었기에 여태껏 눈감아 주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에게도 점점 버릇없이 구는 천월을 보고 있자니 퍽 속상했다. 하여, 봉 측비에게로 점점 마음이 기울어져 그녀에게 왕가의 은위 절반 이상을 넘겨주기도 했다.
그렇다 해도 천월은 자신의 여식이었다. 그는 오늘에서야 천월이 예전과는 달라졌음을 느꼈다. 그간 자신은 여식이 어떻게 지내왔는지도 모르는 무심한 아비였다.
한편으로, 그는 오늘 태자전하와 태자 측비가 어떤 목적을 안고 이곳에 온 것인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태자전하는 천월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태자 측비는 봉 측비와 같은 핏줄이었다. 그가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기왕 이렇게 됐으니, 태자 전하와 태자 측비를 바깥 대청으로 모시 거라! 그리고 향하에게도 이리 건너오라 전하라!”
“소왕야!”
봉 측비가 놀란 눈으로 소왕을 바라보았다. 그가 이렇게 말할지는 생각도 못한 탓이었다. 자신의 요구는 늘 언제고 무엇이든 들어주던 이였다. 그런 그가 하루아침에 변모하여 나 아닌 운천월을 도와준다고? 설마 방금 운천월이 도리를 따지며 꺼내든 고작 몇 마디 말들에 그의 마음이 동요한 것인가?
분노한 봉 측비가 다시 입을 열었으나, 소왕이 먼저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더는 말하지 마시오. 어서 바깥 대청에 모시도록 해라!”
소왕의 단호한 태도에 봉 측비는 내색할 수 없는 분노를 속으로 삼켰다.
“태자전하와 태자 측비 모두 외부인이 아니라 봉 측비의 친정 식구이십니다. 그런 두 분을 어찌 안으로 모시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일이 금방 마무리될 것 같지 않음이 자명한데, 존귀한 신분의 태자전하를 오래 기다리게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어서 안으로 모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할아버님 생각은 어떠신지요?”
줄곧 침묵을 지키던 천월이 입을 열었다. 그녀는 연신 눈을 깜빡이며, 운왕의 동조를 구했다.
“그래. 천월의 말이 맞다! 남도 아닌 두 분이 집 안의 허물을 소문낼 리가 있겠느냐! 어서 모셔 오거라!”
운왕은 연이어 명했다.
“대총관. 어서 두 분을 안으로 모시거라. 큰 손녀 향하도 이리 불러 오거라. 어제 사건의 전말을 다 함께 이야기 하여, 시시비비를 가려봐야겠구나. 태자전하와 태자 측비께도 방증(傍證)을 부탁드려야지.”
“부왕!”
소왕은 깜짝 놀랐다. 천월이 자발적으로 태자와 태자 측비를 이곳에 들일 줄이야. 설마 태자가 천월의 편을 들어줄 것이란 생각에 내린 결정인가? 아니면, 정말 결백해서?
허나, 아무리 결백하다 한들, 왕가의 사람 중 그 어느 누가 봉 측비 앞에서 천월을 도와주려 하겠는가. 소왕은 즉시 말을 이었다.
“소자, 그 명은 적절치 않다 사료됩니다.”
“뭐가 적절치 않다는 것이냐? 내 보기엔 전혀 문제없어 보이는데! 어서 안으로 모시거라! 소왕은 이제 그만 얘기하라.”
듣기 싫다는 듯 손사래를 친 운왕이 밖에 선 운맹에게 다시 한 번 분부했다.
“안으로 모시거라!”
“네.”
소왕은 천월과 봉 측비를 번갈아 바라보다 이내 한숨을 쉬었다. 그는 곧 뒤를 돌아 의자에 앉았다.
봉 측비는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운천월, 이 모든 건 네가 자초한 것이다. 잠시 후면, 울고 싶어도 울 수 없게 되겠지. 그때서야 내가 모질다 탓하지 말거라.’
얼마 지나지 않아 각 처소의 사람들이 모두 운왕의 처소로 모였다. 운왕이 옥탁에게 분부한대로 각 처소의 아가씨, 시비, 하인뿐 아니라 이 일과 관련 없는 소왕의 귀첩, 서모들까지 모두 온 것이었다. 순식간에 운왕의 처소는 사람들로 붐볐고, 밀려드는 이들의 머리카락에 온통 주위가 어둑해졌다.
봉 측비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주변을 바라보았다.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자신이 이 운 왕가의 안주인이라는 걸 똑똑히 알고 있다. 이들은 분명, 자신을 도와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운천월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선 애써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감정과 생각들이 투명하게 드러났다.
소왕은 심기가 불편해져 눈살을 찌푸렸으나, 더는 할 말이 없었다.
* * *
이윽고 태자 야천경이 그의 측비와 함께 운왕의 침전으로 들어섰다. 두 사람의 뒤엔 함께 들어온 운맹과 더불어 또 다른 이가 한 명 더 있었다. 바로 야경염이었다.
야경염을 본 천월은 방긋 웃었다. 오늘 운왕을 뵈러 올 것이란 야경염의 말이 떠올랐다. 그가 이 좋은 구경거리를 놓칠 리 없었다.
천월은 많은 인파가 전혀 두렵지 않았다. 오늘은 오히려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본래 많은 관중이 있어야 공연할 의욕이 생기지 않는가. 또한, 그래야만 보다 더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봉 측비는 태자 전하와 태자 측비를 보며 반색했다. 그러나 뒤이어 등장한 야경염을 보자, 순간 그녀의 얼굴 위로 그늘이 졌다.
운왕은 야경염을 보며 즐거운 듯 말했다.
“오늘 우리 왕가에 무슨 바람이 분 게지? 종일 시끌벅적 할 것 같구나!”
“부왕, 오늘 일어난 일은 이 쯤에서 끝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어찌 됐든 집안의 일이 아닙니까.”
소왕은 다시 한 번 운왕에게 청을 하였다.
“무얼 끝내자는 것이냐? 다들 잘 왔다. 모두들 증인이 되도록 하라!”
그 말에 소왕도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봉 측비는 조용히 다른 사람들을 훑어보고 있었다. 이내, 어두웠던 얼굴에 화색이 감돌기 시작했다.
천월은 줄곧 봉 측비를 주시하고 있었다. 운천월에게 반드시 복수하고야 말겠다는 그녀의 의지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천월은 조용히 냉소를 지었다. 결국 모든 방법을 총동원해서라도 봉 측비를 운 왕가에서 내쫓는 게 최선이란 생각에 도달했다. 지금 이대로 그녀에게 무너진다면, 앞으로 운 왕가에서 운천월이 설 자리는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