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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익수(溺水)



3화. 익수(溺水)

빠르게 거처의 문을 나선 남궁월 앞에, 광대한 풍경이 확 펼쳐졌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마치 어제 봤던 것처럼 익숙했다.

이곳은 바로 황도(皇都)에 있는 남궁가의 저택이었다.

이 해에 남궁월의 백부 남궁진(南宮秦)이 새로운 황제의 손에 종3품 어사대부(御史大夫)에 봉해지자, 일가 전부가 황도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그렇게 10여 년 동안 방치되어 있던 이 옛집으로 돌아왔던 것이었다.

놀랄 만큼 넓은 저택의 긴 회랑이며 처소와 화원 사이에 격조 있게 꾸며져 있는 인공 산, 연못 등은 기억 그대로의 모습이었지만 한편으론 낯설었다.

그런 저택 안을 지나는 동안 남궁월은 어쩐지 자신이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원래 여기에 속해 있어야 마땅하다고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감상에 젖을 여유 따윈 없었다. 남궁월은 빠르게 걷다가 나중엔 달음질까지 치기 시작했다.

약한 몸으로 무리한 탓에 흐릿해지는 시야 뒤로, 지난 삶에서 이맘때 생겼던 일들이 빠르게 스쳐 갔다.

이 모든 것은 바로 현황영롱삼(玄黄玲瓏參)에서 비롯한 일이었다.

현황영롱삼은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소문이 돌 만큼 약효가 뛰어난 영약인 데다, 천하를 다 뒤져도 보기 힘들 정도로 귀해서 세간에선 엄청난 보물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남궁월의 모친 임씨(林氏)가 혼수품으로 갖고 와 여태 함부로 사용하지 않고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며칠 전 황제의 총비인 류비(柳妃)가 갑자기 괴질에 걸려 태의도 고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러자 고모 남궁운(南宮雲)은 남궁월의 할머니 소씨(蘇氏)에게 임씨의 그 현황영롱삼을 황제에게 헌상하면 어떻겠냐고 물었었다.

임씨 역시 혼수로 갖고 온 현황영롱삼을 기꺼이 시어머니 소씨에게 내놓았지만, 그 후 남궁월이 갑자기 고열이 나면서 며칠째 앓아누웠다.

게다가 하필 그녀의 아버지 남궁목(南宮穆)과 백부 남궁진(南宮秦)도 출타 중이라 달리 도움을 청할 데가 없자, 임씨는 결국 딸을 위해 소씨에게 현황영롱삼을 돌려달라고 부탁하러 간 것이었다.

하지만 현황영롱삼은 소씨가 황제에게 잘 보이기 위해 바치려던 것이었고, 남궁월은 할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약골 손녀에 불과했으므로 소씨가 가문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어떤 결정을 내리려 했을지는 길게 생각해 볼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비록 여러 해가 지났지만 남궁월은 이날 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할머니에게 애원하고 있던 그때, 오라버니 남궁흔이 화원에 있다가 물에 빠지고 만 것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닿은 남궁월은 초조해져서 있는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

안 유모는 그런 남궁월을 쫓으면서 내내 걱정을 늘어놓았다.

“아가씨, 천천히 가세요! 아직 몸이 낫지 않으셨다고요!”

‘이제 거의 다 왔어!’

기억 그대로인 길을 따라 달리는 동안 남궁월은 숨이 점점 더 가빠졌지만, 죽을 힘을 다해 계속 발을 움직였다.

때는 초봄이라, 남궁월이 스쳐 지나가는 화원의 나뭇가지마다 꽃봉오리들이 앉아 있었고. 그중엔 벌써 화사하게 만개한 꽃들도 제법 많았다.

거기다 겹겹이 늘어서 있는 인공 산들이며 작은 다리가 놓여 있는 물줄기 등은 저택의 운치를 한층 더하고 있었다.

화원 깊이 들어선 남궁월은 여종들과 잡역노비 몇 명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연못 근처의 인공 산 앞에 서서 연못 쪽을 바라보고 있는 걸 발견하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결국 늦은 듯했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남궁월은 다급히 소리부터 질렀는데, 곧 어느 듬직한 체격의 아낙이 남색 옷을 입은 소년을 안고 헤엄쳐 와서는 아이를 물가로 올려 보내려 애쓰는 걸 보고 미친 듯이 달려갔다.

“오라버니!”

남궁월은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연못가로 뛰어가면서, 눈에 익은 누군가가 슬쩍 뒷걸음질 치다가 마지막엔 인공 산을 돌아서 사라지는 걸 곁눈으로 바라봤다.

‘저건……!’

한눈에도 남궁월은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지만, 왜 그녀가 여기 있었던 건지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우선은 길게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안 유모, 그리고 체격 좋은 아낙과 함께 소년부터 땅 위로 끌어올려 눕혔다.

“도련님! 도련님!”

안 유모가 조심스럽게 소년의 어깨를 흔들며 외쳐도 소년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곁에 있던 아낙은 겁에 질린 채 소년의 코 밑에 자신의 손가락을 갖다 댔다가 돌연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숨, 숨을 안 쉬셔!”

“빠, 빨리 가서 의원을 불러와!”

누군가의 외침에 여종 하나가 허둥지둥 화원 밖으로 달려갔지만 남궁월의 정신은 온통 안 유모의 품에 안겨 있는 소년에게만 쏠려 있었다.

이제 겨우 열한 살 된 이 소년은 부모를 닮아 고운 외모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백옥 같던 뺨이며 뭔가 중요한 게 담겨 있는 듯 꽉 쥐고 있는 손은 새파래져 있었고, 복부도 살짝 부풀어 올라 있었다.

“아가씨!”

안 유모의 몸이 놀람과 슬픔으로 덜덜 떨렸다.

‘오라버니…….’

남궁월은 눈가를 붉히며 남궁흔 옆에 털썩 앉았다.

한눈에도 오라버니의 호흡이 멎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지만, 지금은 당황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남궁월은 설사 물에 빠진 사람의 호흡과 맥박이 일시적으로 멎더라도 그를 구할 희망이 없지는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빨리 필요한 처치를 할수록 오라버니를 살릴 가능성도 커질 것이었다.

급히 남궁흔의 맥을 짚어 본 남궁월은 눈을 반짝이며 외쳤다.

“아직 맥이 잡혀! 맥이 잡힌다고!”

안 유모 역시 남궁월의 말에 바로 희색을 띠더니 뒤의 여종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의원은! 의원은 왜 아직도 안 오는 거냐!”

‘의원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간 늦을 거야!’

빠르게 판단한 남궁월은 즉시 손수건을 꺼내 남궁흔의 코와 입에 들어 있던 물, 진흙, 수초 같은 이물질을 빼낸 뒤 그의 혀를 입 밖으로 끌어내고, 옷깃까지 느슨하게 해 주고는 아낙에게 지시했다.

“오라버니 몸을 뒤집어서 배가 안 유모의 다리 위에 놓이도록 엎드리게 해. 등이 위쪽으로 가게 하고, 머리는 아래로 늘어뜨려야 돼!”

체격 좋은 아낙은 얼떨떨한 얼굴로 남궁월을 바라봤지만, 시퍼렇게 빛나는 보검(寶劍)처럼 위엄을 지니고 자신을 바라보는 남궁월의 시선에 결국 자신도 모르게 그 지시를 따랐다.

주위에 있던 다른 여종들은 이 광경을 보고 목소리를 낮춰 수군거렸다.

“지금 뭘 하시는 거지?”

“의원은 왜 안 오는 거야? 지금쯤이면 도착했어야 하는 거 아냐?”

“저렇게 함부로 행동하다 아가씨 때문에 큰일이라도 벌어지면…….”

하지만 남궁월은 주위의 말 같은 건 하나도 들리지 않는 듯 집중해서 남궁흔의 등을 평평하게 만든 뒤, 그가 기도와 입 안에 가득한 물을 토할 수 있도록 등 쪽 혈도(穴道)를 꾹 눌렀다.

남궁흔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지만, 유일하게 안 유모만은 희망을 품고 남궁월을 지켜봤다.

그렇게 한번, 다시 한번 남궁월의 처치가 반복되던 어느 순간.

“쿨룩!”

갑자기 가벼운 기침 소리가 나자 화원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번쩍 눈을 빛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남궁흔을 바라봤다.

“쿨룩쿨룩! 우욱…….”

남궁흔은 폐까지 뒤틀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심하게 기침을 하면서 더러운 물을 죄다 토해냈다.

남궁흔이 물을 다 뱉고 나자 남궁월은 아낙과 함께 서둘러 그를 바로 눕혔다. 어렵게 눈을 뜬 남궁흔은 그 선명한 검은 눈동자로 동생을 바라보며 햇살처럼 환하게 웃었다.

남궁흔의 눈은 아직 물에 빠졌던 충격 탓에 약간 흐린 상태였지만, 그 미소 덕분에 원래도 곱던 얼굴이 더 사랑스러워 보였다.

남궁흔은 뭔가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움직였다. 비록 제대로 된 말이 나오진 못했지만, 그 입 모양을 봐서는 여동생을 부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남궁월은 그런 오라버니의 손을 꼭 잡았다. 남궁흔의 몸은 흠뻑 젖어 있었지만 그 따뜻한 체온에서는 확실한 생명력이 느껴지고 있었다.

“오라버니, 괜찮아. 이제 괜찮아…….”

남궁흔은 맛있는 것, 좋은 것이 있으면 언제나 가장 먼저 여동생에게 주고 싶어 했다.

남들은 발달이 멈춰 버린 남궁흔을 은근히 무시했지만, 남궁월에게 있어 그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오라버니였다.

상황을 지켜보던 안 유모가 기뻐하며 외쳤다.

“됐어! 살아나셨어! 도련님께서 살아나셨다고!”

긴장이 탁 풀린 남궁월은 탈진한 듯 휘청거리다 뒤에 있던 여종이 서둘러 부축해 준 뒤에야 겨우 중심을 잡고 서서는,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라앉힌 뒤 주위를 둘러봤다.

“운 유모는 어디에 있지?”

남궁흔의 유모로서 마땅히 오라버니 옆에 있어야 할 운 유모가 보이지 않자 남궁월의 미간은 저도 모르게 찌푸려졌다.

남궁월의 물음에, 주위의 여종들도 그제야 둘째 도련님이 물에 빠져 죽을 고비를 넘기는 동안 그의 유모와 여종 모두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다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도련님! 도련님!”

그제서야, 40여 살 정도로 보이는 아낙과 연녹색 치마를 입은 여인이 급히 이쪽으로 달려왔다.

남궁월은 차가운 눈으로 남궁흔의 유모인 운 유모와 상급 여종 권벽(卷碧)을 노려봤다.

“도련님!”

쓰러지듯 주저앉은 운 유모는 남궁흔의 몸에 엎드려 통곡했다.

“왜 여기까지 오신 거예요! 이 유모가 얼마나 놀랐는지…….”

짜악!

구구절절한 핑계 따위 들어 줄 생각이 없었던 남궁월은 운 유모의 팔을 잡아당긴 후, 고개를 든 그녀의 뺨을 매섭게 내리쳤다.

지난 생의 모든 원한을 거의 다 쏟아부은 듯한 남궁월의 손길에 운 유모가 뒤로 훌렁 넘어지면서, 그녀와 부딪힌 울타리까지 살짝 흔들렸다.

순간, 이곳에 모여 있던 여종들이 겁먹은 얼굴로 남궁월을 바라봤다.

그간 유순하다고만 생각했던 셋째 아가씨가 갑자기 이런 위엄을 보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토끼가 호랑이로 변한 것만큼 놀라운 일이었다.

운 유모 역시 맞은 충격 때문인지, 아니면 상대가 남궁월이라는 놀라움 때문인지 한참 동안이나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권벽은 다음 차례가 자기라는 걸 눈치채고는 급히 애원했다.

“아가씨, 제발 소인을 용서해 주십시오. 둘째 도련님께서 꼭 숨바꼭질을 하고 놀고 싶다 하셔서 그만…….”

“주인을 제대로 모시지도 못한 주제에 무슨 핑계가 그리 많으냐!”

차갑게 여종의 말을 자른 남궁월은, 직접 벌을 내리기에는 너무 허약한 자신의 몸을 탓하며 할 수 없이 주위의 몸집 좋은 잡역노비들에게 명령했다.

“여봐라! 직분을 소홀히 해 감히 모시는 도련님을 위험에 처하게 한 이 천것들을 단단히 혼내거라!”

“감히 누구한테! 물러서지 못해?”

드디어 정신을 차린 운 유모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아낙들을 보며 소리쳤다.

운 유모가 만만치 않은 배경을 갖고 있는 데 비해, 이 아낙들은 하급 여종보다도 못한 잡역노비에 불과했으므로, 결국 다들 우물쭈물 망설이기만 할 뿐 누구도 운 유모에게 손대지 못했다.

운 유모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흥, 난 노마님 사람인데 누가 저 천덕꾸러기 셋째 아가씨 말을 듣고 날 때릴 수 있겠어?’

운 유모가 속으로 비웃고 있을 때, 남궁월 역시 냉소하더니 갑자기 목에 걸려 있던 금목걸이를 풀어 높이 들어 보이며 말했다.

“잘 보아라! 저 계집에게 제대로 교훈을 내리는 자가 이 금목걸이의 주인이 될 것이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궁월이 목걸이를 위쪽으로 휙 던지자 아낙들의 눈이 생선을 본 고양이처럼 반짝였다.

그리고 곧, 어느 투실투실한 아낙 하나가 옆 사람을 밀치고 뛰어오르더니 목걸이를 홱 낚아채 품에 넣고는 운 유모의 멱살을 잡고 뺨을 호되게 후려쳤다.

짜악! 짝! 짜악!

두툼한 손바닥에 몇 번이고 얻어맞은 운 유모의 뺨은 금세 빨갛게 부어올랐다.

“억울합니다! 소인은 정말 억울해요!”

운 유모가 진심으로 억울한 것처럼 하소연했지만 남궁월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왔다.

“흔아, 월아!”

남궁월은 흠칫 몸을 떨다가 천천히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뒤쪽에서 익숙한 모습의 누군가가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채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바로 남궁월의 어머니 임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