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자비로운 마음씨 (1)
강소심이 손을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리 분별에 훤한 계집이구나. 보아하니, 셋째 아가씨께 푸대접을 받진 않겠어.”
백하가 다시금 감사 인사를 올렸다.
“그럼 묵자, 너는?”
강소심이 묵자를 지목하며 물었다.
오랫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어 목덜미가 아팠던 묵자는 강소심의 말에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저도 백하 언니와 같은 생각입니다.”
그러며 묵자는 속으로 투덜댔다.
‘이 마님은 정말 쓸데없는 한담만 하잖아? 시녀들의 혼인에 관해 묻다니, 너무 꼬치꼬치 캐묻는 것 아닌가?’
게다가 자신과 백하는 본인의 시녀도 아닌데 말이다.
“네 아씨가 참으로 부럽구나. 어떻게 너희처럼 속 깊고 얌전한 시녀가 다 있지?”
강소심이 또다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돌아가서 제대로 알아봐야겠다. 성실하고 선량한 사내가 있으면 너희와 연을 맺어줘야지.”
묵자와 백하가 그녀의 말에 대답하려던 찰나, 안순과 시녀 하나가 물건을 빠짐없이 챙겼다며 궤짝 하나를 내려놓았다.
백하가 이 틈을 타서 말했다.
“집에서 다들 채비를 하고 있어서,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그래, 나 대신 너희 아씨께 안부 좀 전해줘.”
강소심은 인사를 올리려던 두 사람을 말리며 휘휘 손을 저었다.
두 사람은 궤짝에 달린 고리를 하나씩 잡아 들었다. 둘은 겉모습처럼이나 무거운 궤를 들고 곳간을 빠져나왔다.
“묵자야, 춘귀원 마님께서 설마 진심으로 우리 배필을 찾아주시려는 건 아니겠지?”
걱정하던 백하는 손에 들린 궤가 무거운 것인지, 아니면 마음이 무거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춘귀원 마님께서 언니를 칭찬하시는 걸 보니까, 장담하지 못하겠던데. 듣자 하니, 춘귀원 마님께서 혼인하실 때 데려온 시녀들이 지금은 춘귀원 마님을 도와 가게나 집안을 돌본다 하더라고. 대부분 적령기의 아들을 두고 있어서, 며느리를 들이고 싶어 하나 봐. 만약 저분이 언니를 마음에 들어 하신다면, 혼인해서 손해 볼 건 없지.”
묵자는 춘귀원 마님의 관심이 다소 갑작스럽긴 했지만, 주인이 아랫것에게 배필을 찾아주는 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저분이 왜 나를 좋아하시겠어? 네가 마음에 드셨겠지.”
묵자가 놀린다고 생각한 백하는 쳇 하고 콧방귀를 뀌더니 대꾸했다. 그러자 묵자가 말했다.
“언니. 우리가 나란히 서 있으면, 앞이 안 보이는 사람도 언니를 고를 거야.”
사실 묵자는 백하를 놀리는 게 맞았다.
“앞이 안 보이는데 왜 나를 골라?”
불행히도 백하의 머리는 묵자만큼 빨리 돌아가지 않았다.
“언니한텐 하얀 연꽃(白荷) 같은 향이 나잖아.”
묵자가 백하의 이름을 갖고 놀리며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인권이 보장되지 않는 곳에 살고 있으니, 고생 속에서 즐거움을 찾아야 했다.
“이게!”
백하가 묵자를 흘겨보며 외쳤다. 매섭게 흰자를 보이던 그녀가 갑자기 샘물처럼 맑은 눈을 뜨며 말했다.
“아무튼, 춘귀원 마님께서 우리 넷은 고르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우리는 아씨의 혼수로 따라가야 하잖아.”
“그러니까 말이야. 그리고 언니는 혼인하더라도 왕부의 집사장쯤이랑 혼인해야 위풍이 살지 않겠어?”
그리 말한 묵자는 쉼 없이 웃음을 지었다. 천하의 여인은 귀천을 떠나, 모두가 하나뿐인 제 짝을 만나기를 바랐다. 묵자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인연이라면 언젠가 만나게 될 것이라는 촌스러운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백하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그녀가 매섭게 묵자를 노려보았다. 당장 묵자를 때리고 싶었으나,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반박하려던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그녀는 입을 열지 못했다.
“아이고, 할머니들이 따로 없네. 내가 뒤에서 목청이 터질 듯이 소리를 질렀는데, 어째 고개 한 번 돌아보지를 않아?”
백하가 뒤돌아보니 안순이 두 시녀를 데리고 허겁지겁 뒤를 쫓아오고 있었다.
“안 아주머니, 담소를 나누느라 못 들었어요. 길이 좁고 골목마다 높은 돌담이 쌓여 있어서, 정말 안 들렸어요.”
백하는 할 수 있다면 최대한 미움을 사지 않으려 애썼다.
“왜요? 뭐 잘못 들어간 물건이라도 있어요?”
“내가 이 눈썰미로 먹고사는 사람인데, 물건이 잘못될 리 있나. 바닥에 떨어진 얇은 바늘 하나도 찾아내는 사람이라고.”
안순은 때를 놓치지 않고 제 자랑을 늘어놓았다.
“춘귀원 마님께 쥐엄나무 열매가 있대. 안 그래도 셋째 아씨께 나눠드리려고 했는데, 너희가 물건을 가지러 온 김에 전해드리려나 봐. 내가 대신 궤를 옮길 테니까, 둘 중 아무나 춘귀원 마님 처소로 가봐.
묵자는 백하의 대답을 기다렸다. 다른 사람 앞에선 위아래에 맞는 규율을 제대로 지켜야 했으니 말이다.
“그럼 묵자야, 네가 가서 가져와. 춘귀원 마님께 감사 인사 올리는 거 잊지 말고.”
녹국와 소의가 일 배정을 기다리고 있으니, 백하는 묵자에게 이 일을 맡기기로 하였다.
안순이 데려온 두 시녀가 가뿐하게 궤를 들어 올려준 덕에, 묵자와 백하는 괜한 힘을 쓸 필요가 없었다. 춘귀원 마님의 처소는 이곳에서 멀지 않으니, 굳이 이를 사양할 연유가 없었다.
구씨 가문 넷째 부부의 처소는 춘귀원(春歸園)이라고 불렸다. 이름도 좋고, 이 저택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수와 숲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좋은 곳에 있었다. 문 앞에는 말을 달릴 수 있는 길을 닦아놓았는데, 언젠가 구수운이 이를 보고 어처구니가 없다며 욕을 한 적이 있었다. 구씨 가문 넷째가 저택 밖에서 말을 타고 이곳까지 들어오는 것만 보아도, 그가 이 집의 장자로서, 그리고 적자로서 장 씨에게 존중받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윽고 말 울음소리가 들려오자, 가볍던 묵자의 발걸음이 순간 무거워졌다. 묵자는 일말의 희망을 품었다. 나타난 것이 서신을 전하러 온 시종이기를, 그것도 아니면 춘귀원 마님의 시종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녀가 구씨 가문의 넷째와 다섯째를 마주치기 싫어하는 까닭은, 오로지 그들의 풍류가 지나치기 때문이었다. 비천한 신분의 시녀들은 다섯째의 손아귀에서 마음대로 놀아났다.
넷째는 집안 여인들을 건드리진 않았지만, 집 밖에서 안은 기생이 족히 다섯은 되었다. 언젠가 그도 입맛을 바꾸어 집안 여인들을 건드릴지도 몰랐다.
묵자처럼 세속에 물들지 않고 순결을 지키는 여인이 그들을 피하지 않고 배기겠는가?
모퉁이를 돌아선 묵자는 문 앞에 서 있는 얼룩무늬 말을 보고 몰래 욕을 읊조렸다. 구명의 시종인 제서(齊書)와 곱상하게 생긴 계집아이 하나가 하하 호호 웃으며 떠들고 있었다.
묵자는 불과 며칠 전, 넷째 나리의 모친을 화나게 하였다. 그러니 혹시 두 부부가 자신을 불러 혼쭐을 내려는 건 아닌지 걱정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춘귀원 마님이 일부러 나를 부른 것일까? 하지만 안순은 마님께서 누구를 부른다고 지목한 적이 없잖아.’
지금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건 불가능했다. 묵자는 그저 제자리에 서서 발만 동동 굴렀다.
“거기 누구야?”
제서와 이야기를 하던 계집아이가 묵자를 발견하고 물었다.
“춘귀원 마님께서 쥐엄나무 열매를 가지러 오라고 하셔서…….”
묵자는 이곳을 찾은 목적만 말하였다.
“여기에 왜 왔는지 물은 게 아니라, 이름이 뭐냐고 물은 거야.”
아이의 치마 색을 보니, 등급이 없었다. 말투 또한 상당히 횡포했다.
“셋째 아씨 댁에서 온 묵자야.”
대답하며 묵자는 속으로 짜증을 냈다.
‘이제 만족하냐?’
그러자 아이가 눈꺼풀을 깜빡이며 말했다.
“얼마 전에 마님께 뺨을 맞은 그 묵자?”
묵자는 뒷골이 당기는 기분이었다. 묵자는 자신을 위해서라도 얼른 구수운에게 배필을 찾아주고 싶었다. 묵자는 이제 이 저택에서 구수운만큼이나 유명해졌고, 수많은 이목을 끌었다.
“따라와, 마님께서 아까 분부하셨어.”
말을 마친 아이는, 제서를 향해 손을 저어 보이더니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문을 들어섰다.
거만하게도 어른 흉내를 내는 계집아이를 보니, 묵자의 복잡했던 심경이 다소 편안해지며 웃음이 나왔다. 고작 열세 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아이를 굳이 경계할 필요가 있을까?
구명의 처소에는 작은 정원과 정자, 연못이 있었고, 동남서 쪽으로 향한 사랑채에는 방이 열 개가 넘었다. 구수운의 조그만 처소에 비해서 서너 배는 큰 크기였다.
계집아이는 그녀를 남쪽 사랑채에 있는 커다란 방 앞으로 데려갔다. 때마침 이등 시녀 하나가 안에서 나왔다.
“금주(金珠) 언니, 셋째 아씨네 묵자 언니가 쥐엄나무 열매를 가지러 왔어.”
아이가 여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제야 묵자는 이 아이가 천박하고 거친 게 아니라, 사실 무척 영리한 아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묵자의 이름을 들은 금주라는 여인은 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묵자는 시녀를 가르치는 춘귀원 마님의 능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금주는 아이를 일주문(一柱門)으로 돌려보내려고 입을 열었다.
“채주(彩珠)야, 내가 마님께 말씀드릴 테니까…….”
그때, 방 안에서 춘귀원 마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리께서 다과를 드셔야 하니, 교서(喬書)를 데리고 일주문에서 기다리다가 과자를 내어오도록 해.”
채주는 교서와 친해지고 싶은 모양인지, 잔뜩 신이 난 목소리로 대답한 뒤 깡충깡충 뛰어갔다.
“마님, 묵자가 왔습니다.”
채주라는 아이가 사라지고 금주가 소식을 전했다. 비록 조금 전 채주의 목소리가 꽤 커서, 이미 춘귀원 마님은 묵자가 왔다는 것을 알겠지만 말이다.
“들어오거라.”
춘귀원 마님이 분부하였다.
‘왜 나더러 들어오라는 거지? 물건을 전해주는 거라면, 채주나 금주 같은 시녀를 통해서 전해주면 되잖아.’
묵자는 금주가 바로 옆에 있는데도, 문 앞에 서서 머뭇거렸다.
금주는 그 모습을 보고서도 재촉하지도 않고 조용히 그녀를 기다렸다.
묵자는 절대 피하지 않기로 했다. 이제 피할 수도 없었다.
‘별다른 선택지가 없으니, 그저 안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방 안은 무척이나 밝았고, 가구는 춘귀원 마님 강소심의 취향에 맞게 굉장히 정교했다. 배나무 탁상에 놓인 두 개의 찻잔은 진한 녹색의 차를 품은 채, 향긋한 차향을 풍기고 있었다. 그 옆에 놓인 작은 접시들에는 각양각색의 간식들이 담겨 있었다.
묵자는 탁상 양옆에 앉은 넷째 부부에게 다가가 예의를 갖추었다.
“넷째 나리, 춘귀원 마님, 강녕하신지요.”
묵자에게 눈길 한 번을 주지 않던 구명은 ‘일어나라’는 짧은 인사말을 끝으로 줄곧 차만 마셨다.
춘귀원 마님이 웃음을 지었다.
“내 시녀들이 아직 어리숙해서, 쥐엄나무 열매를 어디에 뒀는지 잊었단다. 지금 찾는 중이야.”
묵자는 그저 덩달아 웃음을 지었다. 말이 많아 봤자 실수만 할 뿐이었으니, 최대한 소리 없이 미소만 지으려 애썼다.
“좀 전엔 사람이 많아서 내가 묻지 못하였는데. 얼굴은 괜찮니? 나한테 어혈을 없애는데 좋은 연고가 있는데, 이따 한 병 챙겨주라고 말해두마.”
춘귀원 마님은 묵자가 침묵하려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고, 묵자를 살펴보는 제 부군의 시선을 빠짐없이 파악하였다.
“마님.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이제 다 나았습니다.”
묵자가 황급히 사양하였다. 춘귀원 마님의 의도가 좋든 나쁘든 간에, 신세를 지면 소신을 지키기 어려웠다. 구수운을 위한 것이라면 상관없지만 말이다.
“이이 말을 들어보니, 네가 옥릉의 사람이고 부모를 모두 잃었다더구나.”
춘귀원 마님이 질문을 이어갔다.
“다른 형제자매나 가족은 있니?”
“없습니다.”
묵자가 얌전히 눈을 내린 채 대답했다. 평소에는 같은 집 웃어른과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는데, 오늘따라 힘겹게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녀는 목덜미에 경련이 일어날 판이였다.
“참으로 안타깝네.”
춘귀원 마님이 고개를 저었다.
이때, 보주가 뒷방에서 나무상자 하나를 가지고 나왔다.
“찾았니?”
나무상자를 열어본 춘귀원 마님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표정이 드러났다. 그녀는 보주를 통해 묵자에게 나무상자를 건네주었다.
목자가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나무상자를 건네받으며 인사했다.
“아씨를 대신해서 넷째 나리와 춘귀원 마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러며 묵자는 눈치를 봤다.
‘이제 슬그머니 물러나서 나가면 되겠지?’
“같은 집 식구끼리 고맙긴. 얼른 가봐, 셋째 아가씨네가 한창 바쁘잖아.”
춘귀원 마님은 드디어 그녀를 놓아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