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식사를 하다
주묘랑은 당염원의 담담한 표정에 다소 어이가 없었다.
‘주모님은 주모님께서 하신 말이 얼마나 영향력 있는지 모르시는군요! 주모님에 대한 장주님의 소유욕이 얼마나 강한지 아신다면 말을 조심히 하셨을 텐데 말이에요. 다행히 증 선생님이 여기에 안 계셔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증 선생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안 봐도 뻔해요!’
주묘랑은 속으로 한탄했지만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앞쪽의 작은 방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당염원을 향해 더욱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장주님이 안에 계십니다. 한번 몰래 가서 보시겠습니까?”
“몰래 가서 본다고?”
당염원에게서 신중함이 엿보였다. 무슨 일이길래 몰래 가서 봐야 하는 걸까?
주묘랑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당염원은 주묘랑의 표정을 자세히 살폈다. 보아하니 악의라곤 조금도 없는 듯했다. 정말 말 그대로 몰래 가서 보자는 거였다. 그녀는 사릉고홍에게서 배운 신법(身法)과 정교한 통제력 덕분에 삼백 척의 거리를 순식간에 이동했다. 마치 눈송이가 땅에 떨어지듯 아무런 소리도, 기척도 나지 않았다.
당염원은 방에서 그리 멀지 않은 나무 뒤에 숨어 눈을 반쯤 뜨고 영식(靈識)을 펼쳤다. 그러자 방 안의 풍경이 눈앞에 선명히 펼쳐졌다.
주방으로 보이는 곳에는 사방에 식자재들과 약재가 쌓여 있었다. 부뚜막에서는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그 위에 올려진 검은 솥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안에 담긴 오색의 채소들은 좋은 냄새를 풍겼다.
본디 이것은 지극히 평범한 장면이었지만, 이와 어울리지 않는 것이 있다면 바로 흰옷을 입은 달빛을 닮은 사내일 것이다. 당염원은 고도로 집중한 무표정의 사릉고홍을 보았다. 그는 한 손에 뒤집개를 들고 계속해서 솥 안의 음식들을 뒤적이며 볶고 있었다. 백옥같이 희고 기다란 그의 손가락은 까만 솥 안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당염원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바로 그때 사릉고홍의 눈빛이 모든 사물을 뚫고 곧장 그녀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당염원은 놀라 황급히 영식을 거두고 소리 없이 주묘랑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왜 그러세요? 무엇을 보셨나요?”
주묘랑은 사실 사릉고홍이 안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무얼 만드는지는 알 수 없었기에 호기심이 증폭했다. 주묘랑은 처음에 사릉고홍의 계획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매우 자연스럽게 이를 합리화했다.
‘장주님께서 주모님 때문에 관례를 어기신 게 이미 한두 번이 아닌데, 주방에 드나드는 것 정도야 별일 있겠어?’
당염원은 다소 이상한 표정으로 다시 되돌아갔다. 주묘랑의 호기심 가득한 물음은 뒤로한 채 정원에 이르러 혼잣말을 내뱉었다.
“고홍이 뭔가에 자극을 받았나 보네?”
그녀가 아는 바로, 늙은 괴물은 무언가에 자극을 받았을 경우에만 과거에 하지 않았던 이상 행동을 보이곤 했다. 그녀가 가진 상식이 비록 일반 사람들과 조금 다르긴 했지만, 보통의 사내들이 주방에 잘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쯤은 일반 상식이었다.
비록 당염원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처음 사릉고홍을 보고 놀라워하던 모습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주묘랑은 이러한 의문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주모님도 참, 장주님은 주모님을 위해 요리를 하시는 겁니다!”
‘주모님께서 다른 이를 그리워해서 자극을 받으신 거라니까요.’
“나를 위해?”
당염원이 반문했다.
주묘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당연히 주모님을 위해서죠. 주모님께서 한매주거의 음식을 마뜩잖게 여기셔서 장주님이 직접 요리를 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녀는 당연히 당염원이 감동 받으리라 생각했다. 하나 그녀가 오히려 어이없다는 듯 되물을 줄 누가 알았을까.
“이런 식으로?”
이런 식으로? 주묘랑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주모님의 반응이 ‘이런 식으로?’라니. 쑥스러움에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감동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당염원이 다시 물었다.
“심심하신가?”
그녀는 주묘랑의 반박은 기다리지 않고 그저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응, 보아하니 정말 한가하신 것 같았어. 매일 나와 같이 있는 것 빼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잖아.’
이처럼 단호한 당염원을 보고 주묘랑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녀는 잠시 당염원의 사고방식이 여느 사람과 다르다는 걸 잊고 있었다. 호의로 나쁜 일을 저지를 수도 있는 분이라는 걸. 그녀는 사릉고홍이 이 말을 듣지 못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들었다면 분명 상처받았을 것이다.
“다른 곳도 좀 가 봐야겠어.”
당염원이 갑자기 말했다.
주묘랑은 계속해서 자신의 경솔함을 반성하다가 당염원의 말을 듣고 정신을 다시 차리며 말했다.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괜찮아.”
당염원은 생각하다가 아까부터 계속 말없이 그들을 따라오던 수람을 가리키며 말했다.
“수람만 함께 가도 돼.”
‘주모님의 표정이 그냥 다른 곳을 가 보려는 게 아니라 무슨 특별한 일을 벌일 거라고 말하고 있다구요!’
주묘랑은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내고 싶었다. 하지만 당염원이 이미 그러겠다 말했으니 이를 말릴 방도는 없었다.
“너무 멀리까지 가지는 마세요.”
당염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려 북쪽의 매림을 향해 걸어갔다. 반짝거리는 그녀의 눈동자에서 은은하게 푸른 물결이 흘렀다. 수람은 그녀의 뒤에 바짝 붙어 과감하게 한마디를 던졌다.
“아가씨, 무슨 재미난 일이라도 있나요?”
어떻게 알았지?
당염원은 의아하다는 듯 수람을 바라봤다. 수람은 생각했다.
‘아가씨가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당염원은 이에 대답하지 않고 그저 마음속으로 녹녹에게 말을 걸었다.
‘녹녹아, 거기 있니?’
「앞에…… 저기 앞에…….」
녹녹이 신나서 펄쩍 뛸 듯이 말했다.
「점점 향기로워져요. 너무 좋은 냄새예요! 곧 무르익을 거예요!」
당염원의 얼굴에 웃음기가 더욱 짙어졌다. 그녀는 이미 신법을 통해 가벼운 바람처럼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때 녹녹이 별안간 천지의 진보(珍寶)가 곧 무르익을 거라고 말한 것이다. 녹녹이 맡을 수 있는 냄새라면 필히 영약의 한 종류일 터였다.
“아가씨…….”
뒤에서 따라오던 수람의 눈이 놀라움에 더욱 커졌다. 아가씨가 언제 이렇게 대단해지셨지?! 수람은 모든 원력을 썼음에도 당염원을 따라가지 못했다. 이윽고 당염원의 뒷모습은 점점 더 작아지다가 매화 숲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
.
.
“원이?”
당염원의 발걸음이 더욱 가벼워지고 신법은 점점 더 빨라지고 있을 때였다. 별안간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맞은편에서 어떤 그림자가 그녀의 가는 길을 막아섰다.
당염원이 발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무슨 일이죠?”
맞은편에서 오던 사람은 바로 어제 보았던 관자초와 당추생이었다. 조금 전 당염원을 부른 건 관자초였다. 관자초는 자신의 부름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 당염원을 보며 미소와 함께 물었다.
“원아, 이렇게 급하게 어딜 가는 게니?”
그저 별 뜻 없이 내뱉은 안부 인사였지만, 당염원은 살짝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용건이 없으면 이만 가 보겠습니다.”
“원아, 관형에게 어찌 이리도 무례하게 구는 게냐!”
당추생은 오라버니로서 가볍게 꾸짖었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가던 길을 가려는 당염원을 붙잡았다.
우지끈-
당염원이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뿌리치자 잠재되어 있던 약력이 분출되었다. 당추생은 놀란 눈을 크게 치켜떴다. 그의 손이 부러지고 만 것이다. 동시에 몇 척 밖으로 날아가 떨어졌다. 주변에 있던 매화나무 몇 그루가 쓰러져 그를 깔고 뭉갰다.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꽃이 흩날렸다.
“당염원!”
어제 입었던 상처가 채 낫기도 전에 하마터면 당추생은 혼절할 뻔했다. 그는 분노가 가득 담긴 얼굴로 당염원을 노려보았다. 그의 부러진 손이 비정상적으로 뒤틀려 있었다. 약사의 손은 목숨처럼 소중한 것이었다. 약사의 손을 망가뜨리는 것은 가장 사악한 행위라는 것을 세상 모든 사람이 알 정도였다.
당염원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게 왜 피하지 않아서는……. 정말이지 하찮군.’
그녀는 그대로 지나가면서 당추생에게 단약 한 알을 먹이더니 차갑게 말했다.
“누가 저에게 손대는 걸 싫어해서요.”
관자초의 눈이 번뜩였다. 그는 어제 그녀가 설연산장 장주의 품에 고양이처럼 얌전히 안겨 있던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염원이 아직도 분노에 차 있는 당추생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그에게 일렀다.
“다치고 싶지 않으면 자신보다 강한 사람을 자극하지 마세요. 그 손은 절 건드린 대가입니다. 그러니 치료는 해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녀는 심지어 이유까지 조목조목 설명했다.
당추생은 분노에 휩싸이다 못해 또다시 피를 토할 뻔했다.
당염원은 더 이상 그들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하면 이들도 더는 자신을 따라오지 않을 터였다. 천지의 진보를 생각하면 그녀는 당장이라도 발걸음을 재촉하고 싶었다.
“잠깐만 기다려!”
관자초가 소리치자 당염원이 성가시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예의 있게 말했다.
“원이 너도 약사지? 우리 가문이 비록 엄청난 약사 집안은 아니지만 다양한 인맥 덕분에 진귀한 보물들이 꽤 많다. 만약 원한다면 우리 집에 와서 한번 구경해도 좋단다.”
약사라면 진귀한 보물에 큰 관심을 보이곤 했다. 설령 설연산장에 진귀한 보물이 수없이 많다 하더라도, 그것이 전부 당염원의 것은 아니었다.
역시나 당염원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녀가 관자초에게 물었다.
“그쪽 집안에 진귀한 약초가 많습니까?”
관자초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를 들면요?”
“운해혈산호, 백금자로초, 장춘석죽, 심파영삼, 총생풍령초, 남릉연…….”
관자초가 하나씩 열거할수록 당염원의 눈은 점점 더 빛나고 미소는 더욱 깊게 퍼져갔다. 그녀는 이내 매우 밝고 단호하게 말했다.
“갈게요!”
관자초는 당염원이 이렇게 환하게 웃는 것을 처음 보았다. 마치 새벽이슬처럼 꾸밈없이 순수한 자연 그대로의 웃음이었다. 어두웠던 마음에 알 수 없는 기쁨이 용솟음쳤다.
“원이 네가 오기만을 기다리마.”
당염원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몸을 돌려 매림 깊은 곳으로 다시 길을 떠났다. 그녀는 언젠가 반드시 관자초의 집으로 가서 그 약초들을 빼앗아 오겠다고 다짐했다.
관자초는 아마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가 조금 전 초대한 사람은 귀빈이 아니라 고기를 먹으면 뼈도 뱉지 않는 강도라는 걸.
물론 지금 가장 안타까운 사람은 어제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또 다른 상처를 입은 당추생이었다.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좋은 약들이 있었지만 통증은 심해져만 갔다. 여동생에게 무시를 당했을 뿐 아니라 형님마저 자신을 소홀히 했다. 그가 자기 자신을 군자라고 칭하지 않았더라면 진즉에 욕을 퍼부었을 것이다. 그래서 욕은 못했지만 얼굴은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올라 무섭게 변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