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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약상자

2화. 약상자

“어머, 응향 언니? 대낮부터 우리 집엔 무슨 일로 오셨어요?”

설응향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고교 때문에 깜짝 놀랐다.

“네가 왜 여기 있어?”

고교는 웃으면서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여기가 우리 집인데, 내가 있는 게 이상한 일인가? 뭘 그리 실망해요?”

설응향은 말문이 막혔다. 소육랑을 만나지 못했으니, 그녀는 당연히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설응향이 다시 고교를 쳐다봤다.

사람은 그대로인데, 어쩐지 낯설어 보였다. 예전처럼 어리바리해 보이지도 않고, 눈에는 생기가 돌았다. 온몸이 흥건히 젖어있어도 초라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어딘가 무서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눈이 침침해진 게 분명했다. 바보가 어떻게 변하겠어?

설응향은 턱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소선비님을 보러 왔어!”

고교는 담담하게 웃어 보였다.

“소선비님이라고 부르다니, 다정하기도 하셔라. 저희 서방님과 친하신가 봐요?”

“비켜!”

설응향은 그녀를 상대하기 귀찮았다.

“안 비키면?”

고교가 그녀를 막아섰다.

그러나 설응향은 고교를 안중에도 두지 않고, 있는 힘껏 밀어버렸다.

고교는 살짝 비키면서 발을 걸었다.

“아야!”

설응향이 바구니와 함께 바닥에 엎어졌다.

“이 멍청이가! 내 발을 걸어?”

이렇게 발을 거는 수법은 예전부터 해 온 것이지만, 그때와 달리 이번에는 넘어진 상대가 설응향이었다.

고교는 팔짱을 끼고 문짝에 기댄 채 그녀를 쳐다봤다. 마치 ‘재주가 있으면 내 발을 걸어보시든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설응향은 자신의 눈이 잘못된 게 아닌지, 심각하게 의심했다.

사실 설응향은 고교와 처음부터 맞지 않았다. 바보 고교, 젊은 과부 설응향. 두 여자는 마을에서 가장 구설에 많이 오르내리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설응향은 예쁜 외모와 부지런한 성정을 가진 본인이 스스로 고교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사실 처음에 소육랑이 마을 어귀에서 쓰러졌던 것도, 두 사람이 함께 발견한 것이었다. 두 사람이 달랐던 게 있다면, 설응향은 문제를 일으킬까 봐 마을로 가서 사람을 불렀다는 것이고, 고교는 남자를 집으로 데려갔단 것이었다.

이후 소육랑이 청렴결백한 선비라는 것이 밝혀지자, 설응향은 무척 후회했다.

설응향이 목을 다듬고 욕을 하려 할 때, 소육랑이 차가운 표정으로 걸어 나왔다.

설응향은 그를 보자 갑자기 얼굴색을 바꾸고 연약하게 울기 시작했다.

“소선비님, 고교가 제 발을 걸면서 저를 괴롭혔어요!”

고교는 소육랑을 보며 아무 죄가 없다는 듯 손을 놓았다.

“저 여자가 먼저 나를 밀었어.”

설응향은 순간 흥분하여 소리쳤다.

“소선비님, 지금 발을 걸었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거 들으셨죠?”

“응향 부인, 저희 집엔 무슨 일로 오셨나요?”

소육랑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설응향은 잠시 멍해졌다.

그녀는 소육랑과 고교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리고 바닥에 있는 바구니를 주워 올리며 말했다.

“그…… 지난번에 선비님이 저를 도와 서신을 읽어주셨잖아요. 줄곧 감사 인사를 드리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려 찾아왔습니다. 집에 먹을 게 없죠? 제가 고구마를 몇 개 캤는데, 그걸 드리려고…….”

소육랑이 말했다.

“괜찮습니다, 응향 부인. 집에 옥수수 가루가 있습니다. 고구마는 부인이 가져가서 드시지요.”

설응향이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고교는 눈썹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

“가져가라는데, 안 들려요?”

그녀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웃는 듯 마는 듯한 눈빛에는 사람을 놀라게 할 만한 한기가 숨어 있었다.

설응향은 머리가 저려왔다. 결국 더 이상 그 자리에 서 있지 못하고, 바구니를 끼고 풀이 죽은 채 떠났다.

고교는 웃으면서 자신의 서방님을 쳐다봤다.

“절름발이인데도 여자한테 인기가 많으셔요?”

소육랑은 고교를 가볍게 흘겨보고, 지팡이를 짚어 방으로 돌아갔다.

픽-

상처가 또 아파왔다.

고교는 머리를 부여잡고 방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의자에 앉아 상처를 만져봤다. 깊은 상처는 아니지만 제때 소독하지 않으면 십중팔구 감염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는 고대였다. 도대체 어디로 가서 소독할 것들을 구한단 말인가?

“내 약상자가 그대로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생각이 스쳐 지나감과 동시에, 머리가 심하게 쑤시기 시작했다. 통증 때문에 그녀는 곧바로 기절했다.

* * *

그리고 그녀가 다시 깨어났을 때, 책상 위에는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크지 않은 크기의 상자는 아주 오래된 것처럼 보였다. 마치 어디에 심하게 부딪힌 것처럼 울퉁불퉁했다. 칠도 벗겨져 있어, 언뜻 보면 쓰레기 더미에서 주워온 것 같았다.

그리고 낡고 작은 상자는, 어쩐지 굉장히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고교는 우두커니 상자를 열었다. 안에 있는 약들을 보자, 그녀의 머리가 곧바로 띵해졌다.

설마, 아니지?

그녀의 약상자다!

이게 왜 여기 있지?

“꿈인가?”

고교는 자신을 꼬집어봤으나, 진짜 아팠다. 꿈이 아니었다.

상자도 진짜고, 안에 있는 약도 백 퍼센트 진짜였다.

고교는 비행기 사고가 났을 때, 작은 약상자가 옆에 있었던 것을 기억해 냈다. 그렇다면 그 약상자가 같이 딸려온 것인가?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낡았지? 눈부시게 빛나던 금은 어디로 가고?

예전의 약상자가 금빛으로 반짝였을 때, 고교는 못생겼다고 싫어했다. 그러나 너덜너덜해진 지금의 모양보다는 나았다.

고교는 마음 깊숙이 끓어오르는 친숙함을 참지 못하고 상자를 품에 꼭 껴안았다.

“못생겨도 이제 싫어하지 않을게. 이 언니가 앞으로 잘해줄 거야!”

고교는 약상자를 한 번 닦았다. 다행히 겉만 좀 깨졌을 뿐, 안에 있던 것들은 하나도 훼손되지 않았다.

고교는 약상자에서 거즈 몇 개와 식염수 한 병을 가져와 상처를 소독했다. 그리고 항균 연고를 바르고 소염제 두 알을 먹었다. 면포까지 감아야 할 줄 알았는데,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다.

상처를 처리한 후, 고교는 배가 고파왔다. 약상자를 궤짝에 넣고 부엌에 가서 먹을 것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그 전에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어야 했다.

고교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청을 지나 소육랑의 방문을 두드렸다.

“무슨 일이지?”

방 안에서 소육랑의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교가 말했다.

“옷을 좀 빌리려고요. 옷장 안에 있는 옷이 다 더러워서, 바꿔 입을 게 없어요.”

소육랑은 한참 동안 대답을 하지 않았다. 옷을 빌리는 걸 포기하려던 찰나에, 방문이 열렸다. 소육랑은 보송보송한 장삼을 그녀에게 건네줬다.

색도 낡고, 옷감도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지만, 풀이 깨끗하게 먹여 있었다.

전생이었다면, 고교는 남자의 옷을 입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어쩔 수 없었다. 이걸 입지 않는다면 옷장 속에 있던 곰팡이 슬은 옷을 입어야 했다.

옷을 갈아입은 후, 고교는 더러운 옷을 빨고 부엌으로 갔다.

부엌이 깨끗한 걸 보니, 아무래도 소육랑이 치운 것 같았다.

쌀독은 텅 비었지만, 소육랑이 말한 것처럼 옥수수 가루가 반 단지 있었다. 찬장에서 계란 두 개와 쪽 파 한 줌도 발견했다.

고교는 계란을 꺼내 옥수수 가루를 반죽해서 전 두 장을 구웠다. 다진 파를 뿌리고, 조금 남은 면으로 옥수수 면 수제비를 끓였다.

만든 음식을 들고, 고교는 안채로 향했다.

소육랑의 방문은 잠겨있었다.

기억 속에서, 두 사람은 항상 따로 밥을 먹었다. 하지만 사실 소육랑은 밥을 만들 때 항상 솥 옆에 고교가 먹을 수 있게, 한 그릇씩 남겨두고 있었다. 그러나 원래 몸의 주인은 대부분 친정집으로 건너가서 밥을 먹었다.

고교는 잠시 멈칫하다가, 계속 소육랑의 방문을 두드렸다.

“무슨 일이지?”

또다시 방 안에서 소육랑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교가 말했다.

“저녁 만들었는데, 같이 먹을래요?”

고교는 요리를 거의 하지 않았다. 한다고 하더라도 그의 몫은 만들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고교가 부엌에서 나오기를 기다린 후, 스스로 먹을 것을 만들려고 했었다.

소육랑은 굳게 닫힌 방문을 의심스럽게 바라봤다.

“안 먹을 거면 나 먼저 먹을게요.”

고교는 그를 기다리고 싶었으나, 배가 너무 고파 뱃가죽이 등에 들러붙어 쓰러질 지경이었다.

그녀는 가능한 한 빨리 체력을 보충해야 했다.

고교가 앉아 젓가락을 채 들기도 전에, 방문이 삐걱거리며 열렸다.

소육랑이 방에서 나왔다.

그러나 소육랑은 결코 밥을 먹으러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의 시선은 무심코 고교의 몸 위로 떨어지며 멈추었다.

고교에게 준 옷은, 이미 작아져 그가 입을 수 없는 옷이었다. 하지만 고교가 입으니 너무 커 보였다. 여윈 몸에 긴 장삼을 입으니, 허전해 보이는 것이 어딘지 어벙해 보였다.

편하게 움직이기 위해 그녀는 머리카락과 소매를 모두 걷어 올렸다. 마른 손목과 희고 가는 목이 드러났다.

지난날 제멋대로 미쳐 날뛰던 기운은 사라지고 없었다. 고교는 조용히 앉아 그릇에 담긴 음식만 열심히 먹고 있었다.

도무지 그 여인 같지 않아.

소육랑의 눈동자는 잠시 멈춰 있다가, 다시 차갑게 돌아섰다.

고교는 그를 발견하고 말했다.

“왔어요? 빨리 앉아서 먹어요.”

고교의 맞은편에는 또 다른 그릇과 수저가 놓여 있었다. 그녀는 두 번 다 입바른 소리를 한 게 아니라, 정말로 소육랑에게 먹을 것을 만들어 준 것이었다.

그러나 소육랑은 움직이지 않았다.

고교는 그가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원래 몸의 주인과 그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밥을 해주니, 의심스러운 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고교는 자신이 이미 예전의 그 사람이 아니라고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생각 끝에 고교가 입을 열었다.

“집에 땔감이 많지 않아요. 이따가 또 밥을 하면, 땔감을 낭비하게 돼요.”

이 말에 설득된 건지, 소육랑은 결국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원래 몸의 주인은 첫 만남에서부터 소육랑의 미모에 놀랐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를 주워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소육랑이 다리를 절기 때문에 원래 주인이 그를 싫어한다고 생각했지만, 고교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원래 주인은 바보지만, 고교는 바보가 아니다. 어떤 일들은 원래 주인이 제대로 보지 못한 것들이 있었다. 고교가 다시 기억을 뒤집어보면 모든 것은 명백했다.

소육랑은 고의적으로 원래 몸의 주인을 화나게 했다.

그는 첫날밤을 보내고 싶지 않았고, 고교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도 원치 않았다.

사실 잘된 일이었다. 그녀도 그럴 뜻이 없었다.

고교가 말로 소육랑에게 집적거리는 것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 두 사람에게 정말 밤을 같이 보내라고 한다면, 그녀는 할 수 없었다.

고교는 금방 배가 불러왔다. 식사를 마친 고교는 자신의 그릇과 수저를 부엌에 가져다 놓고, 바구니 하나를 업고 나왔다.

항상 그래왔듯이, 소육랑은 그녀에게 무엇을 하러 가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그녀도 아무 말이 없었다.

문 앞에 도착한 고교가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방금 거짓말은 아니었어요. 장작이 정말 다 떨어질 것 같아요. 아직 날이 어둡지 않으니, 뒷산에 가서 나무를 좀 베어 올게요. 조금 뒤 비가 올지도 모르니까 그때까지 내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옷을 좀 거둬줘요.”

소육랑은 그녀를 지그시 쳐다봤다.

예전의 고교는 날씨가 변하는 것을 알아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행방도 말하지 않았다.

고교가 집을 나선 후, 방 안에는 소육랑과 먹을 수 있는지 없는지 모를 음식만이 남아 있었다.

집안 살림이 가난했기 때문에, 소육랑은 고교가 싫어도 음식은 지나칠 수 없었다.

그는 눈살을 찌푸린 채 젓가락을 들어 파계란전 하나를 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