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 건강한 정신은 건강한 신체를 만든다(1)>
헬피온 공작령에서 일하기 시작한 것도 이 주일이 지났다.
공작령의 삶은 세계에서 가장 치열하게 싸우는 영지란 별명이 무색할 정도로 단조로웠다.
오전에 해가 뜰 즈음 하녀가, 아니 하녀장님이 날 깨우러 오신다.
공작령의 모든 직무는 한 명씩만 뽑는다고 한소리가 이런 뜻일 줄은 몰랐지.
처음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땐 얼마나 부끄럽던지.
막 고용된 사무관이란 놈이 오랫동안 복무한 하녀장님에게 방으로 밥을 갖다 달라느니 뭐니 잡무를 시켜 댔으니.
내 사과를 받은 하녀장님이 괜찮다고 하긴 했지만.
워낙 표정 없이 꼼꼼하고 단정한 사람이라 속마음을 읽을 수 없어서 진짜 괜찮은 건지 잘 모르겠다.
오전엔 공작과 함께 식사를 한 뒤 서류 처리를 한다.
2주 동안 이것저것 고생을 한 덕분인지.
처음 봤을 때보다 서류의 양이 1/10이 줄어 있었다.
고작 1/10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야.
앞으로 20주.
그러니까 4개월만 일하면 묵힌 서류들은 다 처리할 수 있을 거야!
"사무장님, 여기."
"오늘도 감사합니다."
그렇게 서류 처리를 하다 보면 하녀장님이 차를 내온다.
대형 마물의 시체 근처.
마물이 내뿜은 마나와 이슬을 양분으로 자란 셀비너스 잎을 우린 차다.
워낙 귀하고 수량이 없기로 유명한 특상품인지라 제국에서 이걸 먹으려면 금 한 냥은 줘야 한다.
그런 상품이 마을에 나가면 밥 먹고 입가심하는 냉수마냥 널려 있으니.
도대체 이 영지의 경제관념은 어떻게 된 것인지.
얼른 상단이 제대로 들어와서 한몫해야 한다.
로네는 편지를 받긴 했나? 반응이 없냐 왜.
어쨌거나 좀 더 빨리 와 줬으면 좋겠는데.
영지 발전 계획엔 상단이 필수다.
이 상황이면 아무것도 못 할 거다.
"서류가 많이 줄었군요."
"하하, 아직 갈 길이 멀었죠. 그건 그렇고 하녀장님. 차 정도는 제가 가져다 먹어도 된다니까요."
"아뇨. 이 지저분한 전투광 새끼들 사이에서 그나마 사람 구실해 주시는 분인데 이런 거라도 해 드려야죠."
"아, 하하하...."
묵묵하고 진지한 얼굴로 그런 이야길 하시면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안 되잖아요.
하녀장님은 앳되고 단정하며 차분한 얼굴로 무시무시한 악담을 퍼부을 때가 있단 말이지.
얼핏 보기엔 나보다 어려 보이지만, 실제 나이는 나보다 연배가 높다던가?
저렇게 비밀이 많고 신기한 사람이니 공작령에서 하녀장을 하는 걸지도 모르지.
"사무장님이 오셔서 참, 정말로 참 다행입니다."
"하하하, 좋아해 주시니까 감사하네요. 제가 하는 일이라곤 서류 정리랑 편지 쓰는 것 정도인데."
"덕분에 공작님도 좀 더 사람다워지시는 것 같고."
그건 제 의견과 다르군요.
제가 보기에 공작님은 여전히 훈련에 미쳐 있는 전투 골렘이랑 다를 바 없는데 말이죠.
나는 공작님을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세상에서 제일 고급스럽다는 차 맛이 썼다.
* * *
공작의 일과는 단조로웠다.
식사 후엔 훈련을 한다.
점심 식사를 하면 다시 훈련을 한다.
저녁 식사를 하면 훈련을 한다.
그러다 밤이 깊으면 잠을 잔다.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멀리 사냥을 나가기도 한다.
마족이 인류의 영토로 넘어오지 않도록 조절하는 것이다.
그날만큼은 영지 전체가 부산스럽다.
공작뿐만 아니라 집사, 그리고 마을의 전사들까지 전부 사냥을 떠나니까.
많은 사람이 죽고, 많은 사람이 다치는 날이지.
그러던 공작의 일상이 변했다.
나 때문에.
점심 식사를 하고 훈련을 하기 전, 나와 1시간의 미팅을 갖는다.
미팅의 이유는 단 하나. 연애편지를 쓰기 위함이었다.
더군다나 오늘은 특별한 날이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보내던 편지에 처음으로 답변이 온 날이었으니까.
"왔는가!"
집무실의 공작은 평소보다 잔뜩 흥분한 기색이었다. 얼굴도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숨도 거칠었다.
그런 공작이 벌떡 일어나 나에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저기, 공작님. 지금 굉장히 위험해 보이시는데요. 좀 진정하시죠.
아니나 다를까.
나는 급히 다가오는 공작의 기세에 눌려 뒷걸음질을 쳤고, 이내 발이 꼬여 버렸다.
몸이 비틀거리며 크게 기운다.
그리고 막 넘어지려는 순간 공작의 손이 내 팔을 잡아 몸을 지탱해 주었다.
"어이쿠, 미안하네. 내가 너무 서둘렀군."
"아, 아닙니다. 제가 원체 덤벙거려 잘 넘어지니까요. 고맙습니다. 그것보다 편지는 읽어 보셨나요?"
"여기 있네!"
날 놓아준 공작이 냉큼 편지를 내 쪽으로 내밀었다.
편지의 내용은 좋게 말해서 굉장히 단정하고 평범하고, 그리고 격식 있었다.
그리고 나쁘게 말하자면, 구차한 수사를 제외하면 별 얘기가 없었다.
그냥 티타니아 영애가 누구인지, 그날 구해 줘서 감사하다는 말이랑, 편지를 이렇게 많이 보내 주셔서 좀 놀랐다는 말 등등.
하긴.
2주 동안 매일매일 편지를 보냈으니 질릴 만하겠지.
"라워드, 이 편지 내용 말일세."
"뭐 평범하...."
"애를 둘 낳자는 소리겠지?"
"네?"
이건 무슨 개떡 같은 소리야.
오매불망 기다리던 편지를 받은 탓에 미쳐 버린 걸까?
공작의 표정은 무척이나 진지했다.
"스콰렛 영애도 동생이 하나 있다고 하지. 그리고 스콰렛 공작 역시 동생과 함께 영지를 운영한다고 하고, 어머니의 가문도 이모님이 한 분 있다고 하지 않나."
"설마 그게 애를 둘 낳자는 걸로 보였단 겁니까?"
"...아닌가?"
"당연히 아니죠!"
이 미친 사람아!
마지막 말은 내 사회적 품위를 위해서라도 속으로만 삼켰지만.
공작이 날 의심스럽다는 눈빛으로 살펴보았다.
"정말로?"
"공작가 누구에게 물어도 똑같은, 아니, 공작령 누구에게 물어도 똑같은 답을 할 겁니다!"
"끄응. 그래도 괜찮네. 그럼 이 부분은 확실하겠지. 신혼여행은 마왕성에서 하고 싶다는...."
"미친 소리 좀 하지 마세요!"
"미친, 뭐?"
아, 실수했다. 하지만 욕을 참을 수 없었다고.
"아뇨,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도대체 이 편지 어디에 신혼여행 같은 소리가 있다는 겁니까!"
마왕성 얘기?
분명 나오긴 한다.
공작을 처음 보았을 때 드레이크를 단칼에 베는 모습을 보고 마왕성에서 있었던 혈투가 얼마나 치열했을지 떠올리게 했다.
그런 내용이었지.
얼마나 교양 있고 상식적인 이야기야. 나 당신에 대해서 들어 봤어요. 정도잖아!
그걸 보고 무슨 마왕성에 신혼여행 같은, 어후.
"공작님. 명심하십쇼. 지금 우리는 그냥 사교 편지를 주고받는 정도라구요."
"내가 사귀자고 했고, 스콰렛 영애는 편지부터 시작하자고 했으니, 편지를 통해 서로 미래를 계획하는 게 아닌가?"
"그런 걸 보고 마차가 급발진했다고 합니다."
공작은 한풀 꺾인 표정으로, 그러면서도 미심쩍다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정말 이럴 때마다 환멸이 든다.
아카식 레코드까지 들어가 세상의 비급들을 쓸어 왔는데, 그 지식으로 멍청한 공작 뒷바라지나 하는 것이 맞나?
끄응.
그래도 돈을 많이 주니까 하긴 해야지.
2주 동안 벌어들인 돈이 벌써 얼마야.
"얼른 편지나 쓰게 오늘 있었던 일과 수련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세요."
나는 공작을 채근하며 앉았다.
그리고.
"큼큼, 최근 내가 고민하는 화두가 있네. 바로 하나의 선에 관한 것이네. 이건 예전에 첫 편지에서 보낸 깨달음과 연결된 것이지."
오늘은 편지는 어떤 난제일까.
공작이 문제를 내면 연애편지로 풀어내야 한다.
"과연 검을 휘두른다는 것이 무엇일까. 가장 빠른 선은 직선이란 통념이 사라지고, 곡선과 직선이 뒤섞이는 것이 검술이라는 총체라면, 그 총체를 어떻게 구성하는 것이 궁극의 검술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오늘 역시 하나도 모를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문제가 있다면....
"오오, 오늘의 이야기는 결국 검술이라는 총체로 가는군요. 그렇지요. 하나의 궁극이 있다면 궁극을 묶어 낸 궁극들이 있는 법이지요! 소인, 감동했습니다."
최근 편지 내용을 주고받을 때 집사장이 옆을 계속 기웃거리며 추임새를 넣어 댄다.
오늘은 요 며칠 중에서 가장 가관이네.
도대체 저 이야기 어디에 감동적인 포인트가 있는 거지?
집사장의 눈시울이 붉게 젖어 드는 게 아닌가.
저 내용 어디가 심오한 거지?
신성한 맥주 대결처럼 아무 내용 없는데 그저 공작의 말이니까 신성한 것처럼 여기는 거 아냐?
"공작님."
"음."
"죄송하지만 하나도 못 알아듣겠습니다."
그러자 두 사람의 황당하다는 시선이 나에게 꽂혔다.
아니, 왜 나를 그렇게 한심하게 보십니까?
"정말입니까?"
집사장님 당신까지 비상식인을 보는 눈빛으로....
정말 하녀장님 말이 맞다.
허구한 날 싸움만 해 대는 야만인들. 그리고 그 야만인 부족장이 헬피온 공작 같다.
"이거 문제군. 이래서야 내 진심이 스콰렛 공작영애에게 제대로 닿을 리 없잖은가."
"아뇨, 근본적인 문제는 그게 아니라 연애편지에 검 얘기와 수련의 화두를 던지는 공작님께...."
"할 수 없지. 사무관. 이건 명령일세. 오늘부터 자네는 검을 익히게."
"네?"
"매일 두 시간. 내가 자네에게 특별히 검을 가르쳐 주겠네."
공작님 어디서 헛소리하는 법 과외라도 받고 계십니까?
나날이 이상한 말을 참신하게 하시네요.
"그게 무슨...."
이번만큼은 집사장도 의외였는지 헬피온 공작을 바라보았다.
"공작님. 공작님을 찾아온 수많은 전사와 기사들의 지도조차 거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왜 하필 사무관을.... 아! 그만큼 스콰렛 영애에 대한 마음이 깊고 뜨거우시단 소리군요."
사람에 대한 감정 깊이를 그런 기준으로 판단하지 마!
공작은 부끄러운 것인지 붉게 물든 뺨을 숨기며 큼큼 헛기침을 했다.
"물론 그런 것도 없진 않지만, 다른 의도도 있네."
"뭐죠?"
"자네, 몸의 밸런스가 망가져 있더군."
"저뿐만 아니라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대부분 그랬는 걸요. 매일 책상에 앉아 구부정하게 문서만 작성하고 있으니 허리도 아프고, 어깨도 구부정하고."
"그런 뜻이 아닐세. 자네 혹시 체술이나 박투술, 검술 비기와 비급 같은 걸 이론으로나마 익혔나?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 영약을 섭취하거나 고대의 신전이나 제단 같이 영적인 힘이 가득한 곳에서 오래도록 힘을 흡수한 적 있었나?"
공작의 눈이 나를 꿰뚫듯 훑었다.
흔들림 없는 눈.
공작령에서 일한 후부터 간간이 보던 그 눈동자였다.
세상의 진리에 닿은 자들이 종종 보여 주는 깊은 눈동자.
델피 아카데미에서 현자라고 칭송받던 극소수의 교수님들이나 보여 주던 눈빛이었다.
"자네의 몸놀림이나 가끔 보여 주는 반응, 그리고 근육이나 신체의 밸런스에서 반짝거리는 영감을 얻을 때가 있네. 그런데 정작 사무관 자네는 너무 형편없는 몸을 갖고 있어."
"형편없는 신체라니요. 저는 제 신체로 25년을 잘살고 있는데요."
당신들이 괴물 같은 신체 능력을 갖고 있는 거죠.
"잘살고 있다? 자네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군. 하지만 그것도 길어야 10년일 걸세."
"...네?"
"자네가 본 비급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영성이 섞인 마나가 자네의 신체를 미약하게 맴돌고 있네. 그런 상황에서 신체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나?"
"어떻게 되지요?"
"많은 물을 담으려면 우선 크고 단단한 그릇을 준비해야지. 그릇도 없는 상태에서 물만 잔뜩 모을 수는 없는 법일세."
어떻게 되냐고 물었는데 명쾌한 답은 안 하고 선문답만 하다니.
그러니까 더 무섭잖아.
"공작님이 혹시 잘못 보셨을 가능성은...."
"저번에 자네가 그랬지. 잘 비틀거리고 자주 발을 헛디딘다고. 당장 오늘도 그랬잖은가."
그거야 당신이 배고픈 트롤이 먹잇감을 본 것마냥 뛰쳐나와서 그런 거고.
"끄응. 알겠습니다. 운동하죠, 뭐. 제 목숨이 걸린 일이라는데."
"잘 생각했네. 운동은 충분히 도움이 될 거야. 몸이 밸런스를 찾아가면 지금 자네의 몸에서 휘몰아치는 힘을 제대로 다룰 수 있겠지. 그렇게만 된다면 소드마스터 초입까지는 무리가 아닐 게야. 힘을 낸다면 소드마스터 중급까지도 노릴 수 있을지 모르지. 그럼 내 말도 잘 이해할 걸세."
소드마스터라니, 생각지도 못한 도달점을 이야기하시네.
조금 신기한 마음도 든다.
내가 아카식 레코드에 집착한 것은 마법이나 초능력 위주의 능력 개발이 가능할지도 모른단 일말의 가능성 때문이었는데.
정작 내가 얻게 될 능력은 마법이 아니라 소드마스터로의 길이라.
세상만사 정말 알 수 없구나.
"하나 더. 자네가 열심히 해 주길 바라며 나도 제안 하나 하겠네. 운동하는 시간도 편지 쓰는 업무의 영향이니 추가 근무에 대한 보너스를 주겠네."
보너스는 못 참지.
"두 시간이 아니라 네 시간 어떠신가요?"
"하하하. 그럼 자네 죽네. 두 시간은 딱 자네가 반만 죽게끔 짜여진 훈련 코스니까."
지금 뭐라고 하셨죠?
그리고 그날 저녁.
나는 정말로 훈련 코스를 돌다 정확히 반죽음 상태가 된 채 침대까지 업혀 들어왔다.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9화
<9화 - 건강한 정신은 건강한 신체를 만든다(2)>
아펠 집사장의 훈련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짧은 시간, 효율 좋게 날 괴롭히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한 결과물의 총체가 이 훈련 아닐까.
애초에 나는 검을 배우기 위해서 훈련을 시작한 거 아니었나?
공작님이 말하는 내용을 잘 이해하고 글로 녹여 내야 한다며. 그렇기 때문에 훈련을 시킨다며.
그런데 왜 이런 일들을 해야 하지?
"건강한."
"근긍흔!"
"신체에는."
"슨츠으는!"
"건강한."
"근긍흔!"
"정신이 깃든다."
"증슨으... 으아아아."
나는 철푸덕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허, 일어나십니다."
안 돼. 못 해.
돈이고 나발이고 나 그만둘래.
수백 골드를 벌면 뭐해, 한 푼도 못 쓰고 죽을 텐데.
"살려 주세요."
"하하하, 저는 훈련을 하는 거지 고문을 하는 게 아닙니다."
진짜?
방금까지 내가 하던 자세 이름이 뭐더라, 마보 자세?
손을 앞으로 나란히 뻗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1시간 동안 서 있으라고 하지 않나.
그게 아니면 숨 쉬는 것부터 잘못되었다며 호흡하는 방법을 익히라지 않나.
저기요, 제가 숨을 제대로 못 쉬었으면 이미 죽었겠죠.
그중에서 제일 무식한 건 달리기다.
입에 거품을 물고, 속에 있는 걸 다 게워 낼 때까지 무작정 달리게 한다.
처음? 끝? 시간이나 거리? 그런 거 없다.
오로지 훈련을 담당하는 아펠 집사가 만족할 때까지.
거기다가 뭐?
자세가 좋아야 제대로 달리는 거지, 그게 아니면 그저 체력을 소비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그래서 무릎이나 허벅지 자세 같은 게 엉망진창이 되었다면서.
'지금까지 달린 건 모두 리셋입니다.'
같은 이야기를 해 대는데.
그런 게 어딨어! 그냥 달려서 체력을 키우면 그걸로 좋은 거 아냐?
리셋이고 뭐고, 그냥 내가 싫은 게 분명하잖아!
아펠은 훈련대장은 원래 이런 거라며.
어디서 벌겋게 녹슨 투구까지 갖춰 쓸 정도로 훈련에 진심이었다.
누가 저 사람을 집사장이라고 하겠어.
훈련대장이라고 해도 믿겠다.
"이건 뭔가 잘못되었어요. 저는 건강을 위해서 운동을 하는 게 아니라, 잘못된 신체를 바로잡고 검을 잘 이해하기 위해 운동을 하는 거잖아요. 그럼 검술을 배우거나, 아니면 신체를 다스리는 뭔가를 배워야 하는 거 아닌가요?"
"신체가 다져지지 않으면 검을 휘두르다가 제 검에 자기가 죽는 법이지요."
하아.
될 대로 되라지. 손 하나 까딱할 힘이 없어.
파업이다 파업!
나는 완전히 바닥에 퍼져 버렸다.
"진짜로 힘이 하나도 없어요. 으으."
"흠...."
나는 힐끗, 아펠 집사장의 눈치를 살폈다.
고민하는 것 같은데.
훈련을 피할 겸 슬쩍 찔러나 볼까?
"집사장님. 저는 이렇게 계속 체력 훈련만 하게 되는 건가요?"
"아닙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지금 하는 체력 훈련은 검을 휘두르고 운신을 하기 위한 기초운동이죠."
"혹시 한 번 보여 주시면 안 돼요?"
"네?"
"계속 체력 훈련만 하자니 너무 힘들고, 이걸 왜 해야 하나 목적의식이 약간 떨어져서 그래요. 그러니까 내가 앞으로 이런 훈련을 할 거다. 요런 것도 할 수 있게 될 거다. 확실히 알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아서요."
"음. 일리가 있군요."
오, 집사장이 고민을 시작했다.
진짜로 이번 훈련은 좀 농땡이 피울 수 있는 건가?
"좋습니다. 그럼 한 번 체험해 보시죠."
"좋아요, 네?"
"직접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설픈 신체로 검술 훈련을 한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직접 느껴 보는 것도 좋겠지요."
어라, 이게 아닌데.
나는 적당히 아펠 집사장의 시연이나 보면서 박수나 적당히 치고 수업을 끝내려 한 건데?
결국 내가 몸을 움직이는 거잖아.
그것도... 방금 전까지 몸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하지 않았어?
내 위험까지 담보로?
어느새 아펠은 연무장 구석에 세워져 있던 목검을 두 개 가져와 그중 하나를 나에게 내밀었다.
"받으시죠."
일단 받으라니까 받는데....
처음 손에 쥔 목검의 질감은 무겁고, 생각보다 매끈했다.
한 손으로 계속 휘두르는 건 확실히 조금 힘들 것 같은데.
나는 시험 삼아서 두 손으로 검을 중단세로 잡은 뒤 휘둘러보았다.
부웅,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이 휘둘러지긴 했는데, 뭐랄까.
검을 휘둘렀다기보다는 그냥 몽둥이를 휘두른 느낌?
뭔가 손끝부터 팔 전체가 어색하기만 하다.
"검을 배우신 적 있습니까?"
"네? 아뇨, 당연히 없죠. 아카데미에 들어가기 전까진 상단에서 일을 좀 도왔고, 아카데미에서도 체육 수업은 피해 다녔거든요."
"그런 것치곤 동작이 매우 깔끔, 아니, 뭐랄까... 이야기가 좀 어렵군요. 균형이 망가져 있다던 공작님의 말씀이 이해가 갑니다."
하하하, 그런 것도 보이나요.
그렇게 웃고 넘어가려는데 아펠 집사장님의 표정이 애매했다.
뭔가 고민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의심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던 집사장이 갑자기 양손으로 검을 비스듬하게 쥐더니 자세를 꼿꼿이 세웠다.
"헬피온 공작가는 따로 가문 비전이 없습니다. 기실 기사단조차 없으니까요. 그래서 보통 델피 왕국의 검술 중 가장 보편적이고 기초에 충실하다는 왕국검형을 가르쳐 드릴 예정입니다."
그러곤 집사장의 검은 깔끔한 직선을 그렸다.
위에서 아래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그리고 다시 아래에서 위로. 왼쪽에서 아래로.
그리고 횡으로 비스듬하게 막고.
비스듬한 곡선에서 마치 새가 먹이를 낚아채듯 찌른다.
전체적인 흐름은 단어의 획을 하나하나 그어 나가듯 유기적인 흐름으로 이어져 있었다.
"변형이 많지만, 가장 근간이 되는 기초는 이 정도의 움직임들입니다. 해 보실 수 있겠습니까?"
에? 이걸 한 번 보고 해 보라고?
할 수 있으려나.
나는 일단 아펠 집사장의 말에 목검을 꽉 쥐었다.
그리고 혼났다.
"검을 쥘 때는 그렇게 검을 몽둥이 잡듯이 꽉 쥐는 것이 아닙니다. 검 손잡이를 새끼, 약지, 중지 순으로 달걀을 잡듯 조으고 엄지와 검지는 가볍게 덧붙이듯 놓는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왼손은 끝을 감싸듯이 쥐시고요."
"넵, 알겠습니다."
끙, 검 쥐는 법의 기초부터 혼날 줄이야.
어쨌거나 다시 심기일전을 하고, 천천히 양손으로 검을 들어 올렸다.
처음 집사장님의 자세가, 대충 이렇게였던가?
비스듬하게 검을 빗겨 들고선. 천천히 목검을 위로 당긴 후.
아래로 쏟아지는 폭포처럼 올곧으면서도 강력한 힘으로 내려찍었다.
훙-.
바람을 좌우로 밀어내는 강한 소리가 울렸다.
여기서 그다음은 오른쪽에서....
어라, 왜 세상이 기울어지지?
으악!
나는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널브러졌다.
검을 휘두른다는 것이 정말로 힘들구나.
집사장이 보여 준 자세 하나를 흉내 내는 것조차 힘들다니.
그건 그렇고 집사장님도 참 너무하시지. 공작님은 이렇게 비틀거릴 때 잡아 주시기도 하고 그러셨는데!
그런데 집사장님의 표정이 좀 이상하다.
입을 떡하니 벌리곤 멍하니 내 표정만 바라보고 있는 거 아닌가.
"집사장님?"
"허허허, 정말, 공작님은 대단하시군요."
네? 왜 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공작님 칭찬으로 점프해서 넘어가시나요.
"저는 전혀 보지 못했는데, 이걸 보시고 그런 얘기를 하셨군요. 몸의 밸런스가 이상하게 뒤틀려 있다더니."
"그냥 발을 좀 헛디딘 걸 가지고 너무 호들갑이신 거 아녜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펠 집사장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보법(步法)을 익히신 적 있습니까?"
내가 익힌 체술은 아카식 레코드에서 찾은 <신체활용비기총람> 같은 제목의 책 한 권이었다.
보법을 따로 익혔다기보단 거기에 나와 있는 걷는 법을 익힌 것뿐.
거기엔 팔 휘두르는 법, 숨 쉬는 법, 서는 법, 앉는 법 등 다양한 양생술이 있어서 딱히 보법이라고 일컫긴 부족해 보인다.
"비슷한 건 익혔을 수도 있고요. 정확히 보법을 익혔다고 하긴 좀 그래요."
"검을 휘두르는 무게 중심과 자세, 그리고 손을 움직이는 자세가 굉장히... 뭐라 말을 못 하겠군요. 깊이가 있으면서도 세련된 묘한 느낌입니다."
말을 하는 집사장은 진지한 얼굴이었다.
"더군다나 발을 옮기는 걸음이 굉장히 신묘했습니다. 앞으로 걸어가는 듯하면서도 교묘히 무게 중심을 양옆으로 흩어 놓았어요. 아마 그런 현상이 일상에서도 반복되었을 겁니다. 그렇다 보니 발을 잘 헛디디고 넘어지시는 겁니다. 발뿐만이 아닙니다."
그의 분석은 계속되었다.
"팔을 쓰거나 손목을 움직이는 방식, 그 외에 미세한 근육들을 움직이는 방식들에서 아주 오랫동안 숙성된 무술의 흔적이 녹아 있습니다."
나는 집사장의 말에 잘 몰라 입을 멍하니 벌리고 있었다.
"그럼 제가 고수란 소린가요?"
"그렇진 않습니다. 세 살짜리가 단도를 들고 있다고 제압 못 할 건 없죠. 딱 그런 상태입니다."
그래도 나, 성인 남성인데 너무 무시하시는 거 아닌가.
"한 번 예전에 읽었던 책 내용대로 걸어 보시겠습니까?"
책 내용대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 책의 내용에서 보법을 뭐라고 설명했더라.
차분히 생각해 보자.
처음은....
[처음은 하늘의 위치를 잡는 것으로 시작한다.
사람이 가고자 하는 방향에서 나아감은 하늘이오, 뒤로 물러섬은 대지니, 인간은 하늘과 대지를 이어주는 뿌리이자 나무가 되어야 한다.]
나는 지금 다시 떠올려 봐도 알 수 없는 내용을 천천히 되새기며 한 발자국씩 조심스럽게 내딛었다.
발꿈치로 발을 디디는 자리부터 발끝의 위치, 그리고 발과 발의 거리를 차분히 계산하면서 걸어야 한다.
그리고.
아카식 레코드에서 연습하던 때와 마찬가지로, 채 여섯 걸음을 걷지 못하고 넘어져 버렸다.
"으앗!"
오늘 하루만 이게 몇 번째야.
그래도 넘어질 것을 아니까 이번에는 제대로 손을 짚고 버티긴 했는데, 나는 다시 집사장을 바라보았다.
이번에 좀 놀란 표정을 하고 있으려나.
"어떻습니까?"
"신묘하군. 보법을 그대로 익혀 내는 것에 불과할 터인데 왜 처음과 끝이 없지? 아니, 오히려 첫걸음을 딛는 순간 처음이 꽃피는 것 같았어. 첫걸음은 현재, 디뎌 온 걸음은 과거, 그리고 나아갈 걸음은 미래. 그것을 그리는 것인가!"
집사장이 이상하다. 반개한 눈은 살짝 풀린 채였고.
내가 있는 것도 까먹은 채로 혼잣말을 끊임없이 되새김질한다.
마치 머릿속에 메모장이 하나 있고, 그 선 위로 문장을 하나하나 꼭꼭 눌러 적듯이.
"그렇지. 직선도 처음과 끝이 있고 곡선도 처음과 끝이 있고 단지 그 궤도가 그때그때 다를 뿐이지. 그런데 그걸 하나로 합치는 순간 직선과 곡선이라는 틀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거 아니었나."
집사장의 중얼거림이 심해졌다.
좀 무서워지는데?
"그렇군! 공작님의 말은 그 뜻이었어! 가장 빠른 선은 직선이라는 통념이 사라진다는 건 직선과 곡선으로 다시금 나눠지는 게 아니라 선이라는 것 하나만 남고 나머지 모든 제약이 없어지는 거야! 나는 왜 이름과 명칭 자체에 집착하고 무술을 만들려고 했지?"
저기요, 집사장님?
여기 사람 있어요.
왜 의식의 흐름대로 이상한 소리를 하고 계시나요.
저거 내가 동기들이랑 논쟁하던 그런 개똥철학 같은 건가?
그때.
아무도 없던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이 할아범은 길거리에서 독버섯이라도 잘못 먹었나? 왜 갑자기 깨달음을 얻고 지랄이지?"
하녀장이 갑자기 등장한 것이다.
그러곤 내 목덜미를 잡곤 하늘로 치솟았다.
"으아아아악?!"
"어머, 사무장님 미안합니다. 사전에 말이라도 했어야 했는데, 너무 급해서."
"사, 사, 사람이 하늘에 오는 것보다 급한 일이 뭐가 있습니까?"
"목숨?"
하녀장님이 평소처럼 인자한 얼굴로 생긋 웃었고.
동시에 집사장의 몸에서 솟구친 기가 폭풍 한가운데처럼 펑, 하고 폭발했다.
"맞지요? 목숨."
"감사합니다."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10화
<10화 - 건강한 정신은 건강한 신체를 만든다(3)>
아펠 집사장이 깨달음을 위해 명상에 들어간 것도 이틀.
그동안 연무장에선 부지런히 폭풍이 몰아쳤다.
그리고 이튿날 오후.
서서히 폭풍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이건 내 체력 훈련 휴가가 끝나 간다는 소리기도 하지.
이제 다시 지옥 같은 훈련이 시작되다니.
게다가 이번엔 더 레벨업 하고 강력해진 아펠 집사가 할 거 아냐.
으으, 그건 싫은데.
그런 마음으로 서류를 처리하고 있었는데 하녀장이 들어왔고, 나는 마치 속마음이 들킨 것처럼 움찔, 긴장해 버렸다.
"죄송합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아, 괜히 미안하네.
하녀장님은 그때 급히 날아와 제 목숨을 구해 주셨는데.
저란 놈은 하늘을 날던 때의 그 무서움을 떨치지 못하고.
하녀장님만 보면 움찔움찔, 마치 고양이 앞의 쥐가 된 기분이 되고 마는 걸.
얼른 긴장을 좀 풀어야 할 텐데.
"오늘 업무를 마치시면 연무장으로 오시란 공작님 전언입니다. 그쯤이면 집사장의 깨달음이 끝날 것 같다고 하더군요."
"네, 알겠습니다. 늦지 않게 내려가죠."
하녀장님은 그렇게 전언을 마치고는 언제나처럼 샐비너스 차를 남겨두고 나갔다.
잘 우려진 차의 향이 그윽하게 집무실을 채웠다.
그래. 이게 헬피온 공작령의 일반적인 모습이겠지.
하녀장이 하늘을 날고, 집사장은 갑자기 각성을 하고, 가장 상등품의 차를 일상에서 즐기는.
내가 익숙해져야지 뭐.
나는 차를 한 모금 음미하며 다시 서류 작업을 시작했다.
* * *
그날 저녁.
이틀 밤을 꼬박 휘몰아치던 연무장의 바람 소리가 잦아들었다.
대신 아펠 집사장의 웃음소리와 울음소리가 뒤섞여 울렸다.
"허허허허허, 말년에 이렇게 소드마스터 중급이라, 으헝헝!"
"좀 추슬렀는가?"
"흐허허, 네, 그렇습니다!"
헬피온 공작은 연무장의 바람이 잦아들 무렵부터 모든 식구를 대동하고 연무장을 찾았다.
집사장의 깨달음을 축하해 주기 위함이었다.
"확실히 마나의 흐름이나 신체가 훨씬 균형을 잡았군. 축하하네."
헬피온 공작의 말처럼 아펠은 외모는 이전과 달리 보다 젊어진 듯했다.
수염과 주름살이 자글자글하던 60대의 얼굴이었으나 지금은 40대 중년의 외모가 되었으니.
잠깐.
하녀장님의 외모도 엄청 동안이시지.
설마 하녀장님, 집사장님보다 더 강한 거 아냐?
에이... 설마.
소드마스터 중급은 제국을 통틀어도 드문 경지인걸.
그 바로 위의 경지가 소드마스터 최상급, 즉 그랜드 소드마스터 아냐.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헬피온 공작만이 갖고 있는 칭호.
그런 사람이 이 좁은 집안에 둘이나 있다고?
억측이겠지.
그렇게 혼자 생각을 정리하고 있던 내 앞으로 불쑥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아펠 집사장이었다.
"집사장님?"
내 부름에 집사장은 그대로 바닥으로 엎드려 절을 했다.
아니 이게 무슨, 너무 과하잖아!
나는 급히 집사장의 어깨를 붙잡아 일으켜 세우려고 했는데.
이게 뭐야. 무슨 바위, 아니 성벽을 가져다 놓은 것 같네.
꼼짝도 안 하잖아!
"소인, 깨달음을 얻게 해 준 분에게 당장 해 드릴 거라곤 헬피온 공작가에 해를 끼치지 않고, 제 업무나 의지를 져 버려야 하는 일이 아니라면 어떤 일이든지 세 번 도와드리겠습니다."
"아니, 저는 진짜 학창 시절 동기들이랑 술 먹으면서 하던 개똥철학 얘기를 나불거린 것밖에 없는데...."
"사무장의 말이 맞았습니다. 직선도 곡선도 그저 연결되어 있으면 하나의 선일 뿐인데 왜 그리도 집착했었는지. 소인이 집착한 이름은 그것뿐만이 아닐 겁니다. 이 늙은이가 사무장의 지혜를 알아보지 못해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지금이라도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아니, 정말로, 일어나세요, 제발! 진짜 저는 괜찮다니까요?"
정말 사람 당황스럽게 만드네.
옆에 사람들까지 잔뜩 모인 상황에서 이렇게까지 해야 해?
"이 사람아. 사무장이 괜찮다고 하지 않나. 그러니 마음 풀고 일어나게."
집사장은 공작의 말이 있고서야 자리를 일어섰다.
후, 진땀 빠진다 진짜.
"자, 그것보다도 이제 검을 휘둘러 봐야 하지 않겠나?"
헬피온 공작의 이야기에 기다렸다는 듯 집사장이 검을 빼 들었다.
다른 두 명의 가신들도 이 시간을 기다렸다는 듯, 드물게 눈을 반짝이며 연무장 구석으로 움직였다.
나 역시 도망치듯 구석으로 쭈그러졌다.
갤러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관람할 준비를 모두 마쳤을 무렵, 대련의 당사자 두 명 역시도 모두 준비를 마친 것 같았다.
아펠 집사장은 잔뜩 긴장한 채 양손으로 중단세를 취했고, 그 앞의 헬피온 공작은 자연스럽게 검을 내려놓은 채 마치 밤공기를 즐기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순간.
아펠 집사장의 검이 천천히 호선을 그리며 움직였다.
그래, 천천히.
집사장의 검은 무척이나 신비로웠다.
집사장의 팔이 검을 채 휘두르기 전인데도 집사장의 근처에 검광이 번뜩였다.
검을 베기도 전에 헬피온 공작을 찌르며 쇄도했고, 검집 안에서부터 수백 개의 잔영을 꽃피웠다.
마치 새싹에서 시작한 나무가 거대한 고목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빠르게 지켜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펠 집사장은 검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이게 중급 소드마스터의 수준이구나.
더 압도적인 것은.
아펠 집사장의 검술을 그저 가벼운 선 하나로 모조리 지워 버리는 헬피온 공작의 검술이었다.
그것은 세상을 지워 버리는 절대적인 힘이었다.
"엄청나다."
솔직한 감상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고.
어느덧 아펠 집사장과 헬피온 공작은 서로 거리를 벌린 후 납검하고 있었다.
"두 번이 아니라 세 번이라, 놀랍군."
헬피온 공작은 흥미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세 번이라뇨, 그건 무슨 소리죠?"
"집사장의 검술을 세 번의 검짓으로 막아 냈다는 소리입니다."
"어, 대단하긴 한데, 그러니까, 대단한 건가요?"
제대로 알 수 없어 혼란스러운 마음을 다잡고 질문을 했더니, 아펠 집사장이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일평생 공작님이 두 번 검을 휘두르게 만드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단숨에 세 번을 휘두르게 만들었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을 듯합니다."
"쯧쯧, 죽기는 왜 죽나. 이제 몸도 더 건강해졌으니 앞으로 열심히 정진하여 열 번은 휘두르게 만들어야지."
두 번과 세 번, 그리고 열 번이란다.
중급 소드마스터와 최상급 소드마스터.
단순히 한 단계의 차이일 뿐인데 그 정도의 격차가 난단 말이지.
새삼 대단하네. 내 앞에 있는 고용주가 그 정도로 강한 사람이었다니.
"처음과 끝에 얽매여 있지 않은 자유로운 검술이었어. 열 번 검을 휘두르게 만들 거란 소린 허언이 아니야. 정말로 검을 정진한다면 1~2년 안에 그렇게 되지 않을까."
어이쿠, 집사장님 울겠다.
"이게 다 사무장의 도움 덕분이지요."
집사장님이 공을 내게 돌렸고,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로 박혔다.
거기 요리장님, 그리고 하녀장님.
시선이 조금 무서워요.
땅에 떨어진 금화를 보는 눈빛이거든요?
그때 헬피온 공작이 다가와 제안해 왔다.
"그래서 말인데, 사무장. 자네 새로 일 좀 하나 할 생각 없는가?"
"일이요?"
지금도 편지 쓰고, 서류 쓰고, 이것저것 일을 열심히 하고 있지 않나요?
"자네의 사고는 확실히 나나 집사장 같은 무인들의 사고와 달리 자유롭더군. 그래서 말인데, 자네 나에게 공부를 좀 가르쳐 줄 수 있겠나?"
이건 또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십니까?
"부끄러운 얘기네만 나도 약 10년 가까이 벽을 눈앞에 둔 채 별다른 깨달음 없이 그저 묵묵히 수련만 반복하고 있네. 집사장의 사례를 보아하니 혹시 나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드는데."
이건 좀 의외의 제안인데.
사무장의 역할에 그치지 않고 공작의 개인교습 선생이 되는 거잖아.
사회적인 지위가 올라갈뿐더러, 확실한 뒷배가 생기는 것이기도 하지.
게다가 부수적으로.
이 무식한 전투 괴물이 상식이란 걸 좀 받아들이면 편지 쓰기가 더 편해질 것 같기도 하고.
"건강한 신체에는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 좋은 말이지. 그런데 어쩌면 그 반대도 성립될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어. 건강한 정신에 건강한 신체가 깃들지 누가 알겠나."
나는 내 생각을 모두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공작님."
"그래."
"혹시, 돈은 많이 챙겨 주십니까?"
내 말에 공작과 주변 사람들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실소를 지었다.
아니 왜들 그러실까. 돈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데.
적어도 나에겐 생존이 걸린 문제거든?
"하하. 좋아. 사무장만 남고 다들 물러가 보게. 나는 사무장과 조금 더 할 이야기가 있으니."
공작의 말이 끝난 후.
집사장은 공작에게 한 번, 그리고 나에게 한 번 더 인사를 하고 물러갔다.
요리장과 하녀장도 집사장과 함께 연무장 바깥으로 향했다.
서로 말은 없었지만 오가는 눈빛이 뜨겁게 성취를 축하하는 듯했다.
"라워드 고르뎀 사무장."
"네, 넵!"
왜 풀네임으로 날 부르신대. 무섭게끔.
공작은 날 또렷이 바라보았다.
"돈 얘기가 나오니 생각나는군. 어제 자금 대출을 요청했었지? 그것도 1만 골드나."
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동생에게 편지를 보낸 것도 시간이 꽤 흘렀겠다.
슬슬 여유 자본을 만들어 둘 필요가 있을 것 같았거든. 헬피온 공작령의 엉망진창 시세를 정상화하고.
주점을 제외한 나머지 두 세력.
그리즐리 용병대와 마을부녀회랑 맞장 뜰 준비를 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기초 자금이 필요했다.
1만 골드 정도를 투자한다면, 10배, 아니 15배 정도는 벌 수 있지 않을까.
"네, 그게...."
"알겠네."
"자금이 있으면 무역도 쉽게, 네, 뭐라고요?"
"10만 골드를 투자하지. 알아서 사용해 보게."
공작의 통은 내 생각보다 무척이나 컸다.
이게 사실이라는 걸 믿기 힘들 정도로.
"진심이신가요?"
그래서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놀리는 게 아닌지. 사실이 맞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그러자 공작은 뒷짐을 진 채 느긋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사실 나는 자네에게 한 달의 기회를 주긴 했지만 별 기대가 없었네."
갑자기 너무 뼈를 때리시는데요.
"무관만 가득한 내 영지에서 문관이 아등바등 해 봤자 이룰 게 빤해 보였네. 그래서 큰 기대를 하진 않았거든. 그런데 자네가 펼쳐 낸 일들은 늘 기대를 뛰어넘는군. 아니, 그보다는 늘 경이롭다는 말이 맞겠군."
나는 헬피온 공작을 따라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시릴 정도로 하얀빛을 내며 깊은 달과 촘촘한 별이 떠 있는 아름다운 밤하늘이었다.
"그래서 이번엔 기대를 해 보기로 했네. 그럼 자네는 어떤 모습을 보여 줄까. 기대한 만큼의 결과를 가져올까, 아니면 이번에도 기대 이상의 결과를 가져올까?
어쩌면 마족들 때문에 봉쇄된 거 같은 공작령에 새로운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
나는 헬피온 공작의 말에 일단 침묵했다.
쉽게 대답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카데미에서 데온 크라피에게 괴롭힘을 당하기 시작하고, 그 누구도 나에게 기대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으니까.
모든 학교의 사람들이 날 원망하거나 증오했으며 나를 기대하던 교수나 후원자는 실망하며 떠나갔다.
나를 믿어 주던 부모님은 돌아가셨을 뿐 아니라 동생에겐 오랜 세월 원망을 받았었지.
그렇다 보니.
누군가에게 이렇게 기대받는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어떻게 부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단지.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정말로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해 보겠다고 다짐만 할 뿐이었다.
* * *
오늘은 정말로 진귀한 구경을 했다.
소드마스터들의 대결이라.
아카식 레코드에서도 소드마스터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있었지.
하늘을 가르고, 바다를 자르는 검술의 소유자들.
일반인들은 그 검술을 눈으로 좇는 것조차 어렵다고 했는데.
그랬던가?
그렇진 않은 것 같은데.
두 사람의 검술을 전부 다 본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중급 소드마스터에 올라 깨달음을 수습했다던 아펠 집사장의 검술이.
그리고 딱 한 번.
헬피온 공작의 검이 그린 선이 확연하게 보였으니까.
어쩌면 따라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나는 침대에 누운 채로 오른손만 들어 선명한 선의 궤적을 따라 그렸다.
"응?"
이상하다.
예전에 파리를 베었던 그 곡선은 쉽게 잘 됐었는데.
왜 이 선은 따라할 수 없지?
이렇겐가? 아닌가, 요렇겐가?
그 후로도 몇 번.
나는 계속 헬피온 공작의 선을 구현하기 위해 손을 휘둘러 보았지만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한 채 잠들었다.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11화
<11화 - 현자님은 더러운 지식도 뛰어나시다면서요?(1)>
내가 달밤에 헬피온 공작과 나란히 앉아서 다짐했었던가?
열심히 해 보겠다고.
나는 지금, 그때의 결심은 완전히 구겨 내던져 버리고.
다시 한번 공작에게 펜을 집어던지는 중이다.
"적당히 좀 하라고!"
"아니, 이건 정말로 우리 영지의 경사가 아닌가? 중급 소드마스터가 생겼다는 기쁜, 영지의 비밀이라고 할 수 있는 정보까지 적어 보내는 건 마치, 그, 프, 프, 프로포...."
"아니라니까! 이건 그냥 멍청하게 기밀을 넘기는 거에 불과해요! 아니, 어떤 사람이 이제 막 편지를 주고받는 단계의 귀족 여성에게 '나 중급 소드마스터 부하 생겼다~ 좋겠지~ 중급이다~ 전 세계에 몇 명 없다~.' 같은 걸 적어 보낸단 말입니까!"
나는 정말로 열심히 잘 해 보려고 했다.
다짐하고 다짐했는데.
이 빌어먹을 공작은 머리가 꽃밭, 아니, 꽃밭 정도가 아니라 거의 발할라에 가 있는 게 분명하다.
"음, 역시 이런 비밀은 서로의 관계가 좀 더 돈독해진 다음에 보내는 것이 옳은가."
"그렇다니까요."
"그렇다면 집사가 깨달음을 얻었던 그 지점에 대해서 논해 보는 것은 좋겠지. 그래! 티타니아 영애도 지적 교양이 풍부하다 들었네. 그러니 검술의 묘리와 무형(無形)의 극의를 적어 주면 좋은 논의가 펼쳐지지 않을까?"
"세상 어디, 어떤 교양으로 검술을 배웁니까? 그건 교양이 아니라 전투 기술이라구요!"
"자네도 사무관이지만 무술을 배웠지 않나? 도서관에서 배웠다면서."
그 도서관이라는 게 아카식 레코드면 말이 다르잖아요!
끄응, 내가 있던 그 아카식 레코드에 대해서 함부로 이야기를 발설할 수도 없고.
그 바바라조차 아무리 설명해도 믿지 않았던 일이다.
'고작 라워드 너 따위가?'
같은 소리나 들으면서.
"괜찮네. 어차피 나란 사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는 한정적이야. 지금 와서 내가 델피 왕국의 연가나 제국의 사랑시 같은 걸 읊는 것도 어처구니없지 않겠는가? 그러니 써 주게. 스콰렛 재상도 문무를 겸비한 사람이니, 티타니아 영애도 이 정도의 이야기는 알아들을 걸세."
왜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연애편지잖아! 그럼 연가나 사랑시 같은 구절 하나둘 따와서 써먹고 그래야 성의 표시가 되는 거 아냐?
그러나 공작은 근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끄응.
어쩔 수 없지.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리는데 어쩌겠어.
이번 편지로 이 사람의 연애가 망하더라도, 그건 내 잘못이 아니다.
고집을 부린 당신의 잘못이지.
* * *
오늘도 더욱 강력해진 아펠 집사장 마크 투와 지옥의 훈련을 반복하고 있을 때 갑작스럽게 하녀장이 연무장을 찾아왔다.
"사무장님."
"네?"
"사무장님을 찾는 손님이 오셨습니다. 가 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하녀장. 아직 훈련이 덜 끝났는데 말일세."
"닥치세요. 정식으로 사무장님을 찾아온 손님이 있다는데 사람을 반죽음 상태로 보내실 생각인가요?"
오, 방금 집사장 움찔한 거 맞지.
하녀장님 대단해. 저 아저씨를 말로 쏘아붙여서 쫄게 만드네.
"하지만...."
"훈련은 밤에도 할 수 있잖아요. 일단은 공무부터 처리하는 게 우선이니까요. 자, 가시죠."
아무렴요. 훈련은 밤에도... 네?
지금 가서 일하고, 다시 돌아와서 훈련을 또 해야 한다고요?
그러나 하녀장은 내 질문에 답하지 않은 채 앞장서 걸어갈 뿐이었다.
하녀장이 안내한 곳은 접객실이었다.
"손님은 누구죠?"
"여성 분이셨습니다. 자신을 고르뎀 상단의 상단주라고 이야기하더군요."
"고르뎀 상단주...."
드디어 왔구나.
하녀장은 접객실까지 날 안내해 주었고.
나는 하녀장에게 생긋 웃으며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이제 가셔서 볼일 보셔도 돼요. 제가 아는 사람인데, 오랜만에 봐서 좀 시끄러울 것 같거든요."
"아하."
하녀장은 뭔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접객실에서 소란이 일더라도 긴급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네. 기다리고 있는 사람의 성격이 좀 지랄 맞아서."
"후후, 해후 잘하시길."
하녀장은 드물게 웃는 표정을 지으며 물러났다.
아마 '고르뎀' 이라는 상단명을 들었을 때부터 대충은 짐작하고 있었겠지.
그럼, 각오를 다지고.
문을 열어 볼까?
나는 천천히 문손잡이를 돌렸다.
곧.
퍽.
하는 소리가 났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보였던 풍경이 무릎이었나 팔꿈치였나.
잘 모르겠다.
빙글빙글 세상이 돌았고, 동시에 블랙아웃, 눈앞이 새까매졌다.
삐- 하고 이명이 세상의 소음을 뒤덮었고, 이내 모든 감각이 다시 제정신이 되었을 때.
내 멱살을 붙잡은 파란색 머리의 아가씨가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잔뜩 열감이 올라 붉게 달아오른 채 찡그려진 얼굴.
양 눈가에 맺힌 눈물은 이 사람이 분노한 것인지, 또는 슬퍼하는 것인지 구분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이 개자식아!"
화난 거였구나.
"우리 부모님이 같은데. 그거 패륜이다."
"패륜은 네가 한 짓이 패륜이고 망할 놈아!"
하하하.
드디어 영지발전 계획을 실행할 만한 핵심 키워드가 모두 완성되었다. 바로 이 사람이 도착함으로써.
내 동생이자, 고르뎀 상단의 상단주 로네 고르뎀.
"나는, 나는 정말로 네가 죽은 줄 알고... 6년이야, 6년! 아카데미 졸업식 때 갑자기 실종되었다고 들었을 때 어떤 심정이었는지 알아?! 그 후작 망나니 새끼한테 찔려 죽었나, 아니면 흑마법 실험이라도 하다가 폭사됐나, 수백 번 안 좋은 생각을 반복했다고!"
"그, 이게 사정이 있어서 말이야. 내가 편지를 보내기도 했잖아?"
"사정이 있어서 5년 동안은 연락이 잘 안 될 거라고, 걱정하지 말라는 게 말이나 돼?! 그런 편지를 받으면 당연히 5년 동안 얼굴만 잘 못 본다고 생각하지 누가 진짜 5년 동안, 아니 6년 동안 연락을 안 할 거라고 생각하냐고!"
이로 보나, 저로 보나, 내가 나빴다.
"나는 정말로 네놈 새끼가 보낸 편지가 맞는지 아닌지 의심하고, 또 의심하다가... 엄청, 엄청... 걱정했다고, 이 멍청한 오빠야...."
로네의 얼굴이 천천히 내 가슴께로 숙여졌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표정이 어떤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알 수 있었다.
훌쩍이는 소리와 함께 가슴 언저리가 축축이 젖어 들고 있었으니까.
화난 게 아니라 슬퍼하는 거였구나.
6년이란 세월은 헛된 원망이나 분노도 다 없애 준 모양이다.
다행이야.
"미안해. 힘을 기르느라 좀 늦었어."
"힘?"
"복수를 위한 힘. 그리고 다시는 누군가에게 휘둘리지 않을 힘."
"그게 헬피온 공작이라는 뒷배야?"
로네는 진지한 이야기에 마음이 좀 진정된 모양이다.
눈물을 닦아 내곤 눈을 마주치며 일어섰다.
나도 함께 일어나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일단은 그래."
"일단이 뭐야."
내 말뜻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로네가 입을 비쭉거렸다.
이런 건 구구절절한 설명보다 화끈한 방법이 있지.
바로 직접 한 번 보여 주는 것.
나는 집무실 한쪽에 숨겨 두었던 어음 증서를 꺼내 들었다.
"자."
"그 종이쪼가리는 뭐야, 어음처럼 생겼네. 뭐? 어음이 맞아? 아, 헬피온 공작님이 발행해 주셨다고? 그래도 일하는 직원이라고 챙겨 주는가 보네."
하지만 어음에 설명하자 그녀의 눈이 점점 커졌다.
"이거 월급이 아니라 투자금이라고? 그래서 일단 뒷배가 맞다고 한 거구나."
아직 금액을 말하지 않았다.
"자자잠깐, 10만 골드?! 야, 이거 돈이 좀 이상해! 이렇게 큰돈을 고작 사무관에게 투자한다니, 공작 미친 거 아냐?! 누가 10만 골드를 고용된 지 한 달도 안 된 사람한테 투자해!"
와, 재미있는데?
어음 종이 한 장이 이렇게 그라데이션 놀람, 경악, 분노를 끌어낼 수 있다니.
눈을 동그랗게 뜬 로네는 이게 진짜가 맞냐는 듯 수차례 확인을 거듭했다.
"진짜 10만 골드네."
"그래. 이 정도면 우리 가문의 빚도 다 갚고, 새로운 사업을 투자할 수 있어. 그러고 보니 우리 빚은 얼마 남았지?"
6년 만에 만나다 보니 빚의 규모도 모르고 있었네.
내가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가 1만 골드였는데.
아마 열심히 상단 일을 했다 하더라도 한 9천 골드는 남지 않았을까?
로네는 아직까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천."
"응?"
"천 남았다고."
진짜?
이번에는 내 쪽이 놀랐다.
정말로 1만 골드 중에 90%의 빚을 탕감했단 말야?
"대단한데. 고르뎀 상단의 규모가 그렇게 크지도 않은데, 9천이란 돈을 벌었다니."
"온 세상을 돌아다녔거든. 새로운 거래처도 이곳저곳 많이 뚫어 놨고. 그래서 그래."
내 동생은 내 예상보다도 더욱 뛰어난 상인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나 보다.
하하, 좋네.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는 계획의 규모를 좀 더 키워 볼 수 있지 않을까?
"어쨌거나 빚은 그렇다 치자. 이건 나중에 좀 더 얘기해. 도대체 오빤 저런 물건들을 왜 박박 긁어 오라고 한 거야?"
아, 물건들!
로네랑 너무 오랜만에 본 탓에 깜빡 잊고 있었네.
로네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 집무실 구석을 바라보니 그곳에는 부탁한 물건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나는 보따리 중 하나로 다가가 내용물을 확인했다.
정확하군.
"이 물건들이 제대로 활약하잖아? 그럼 공작은 우리의 뒷배 정도가 아니라 날개가 되어 날게 해 줄 거거든."
* * *
<...하여 사무장과 집사장은 논의를 마치며 깊이 마음을 교류하였습니다.
사무장의 기지와 지혜는 참으로 번뜩이는 구석이 있습니다. 일평생 무예에만 헌신한 이들도 뛰어넘기 힘들었던 문턱을 어찌 그리 쉽게 허문단 말입니까?
저는 학문이 가진 힘을,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격언을 다시금 통감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학문적 통찰은 삶에 면밀히 맞닿아 있는 듯합니다. 그간 저 헬피온은 문예로서 일가를 이룬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었으니, 그를 만난 건 그야말로 가문의 홍복이 아니겠습니까.>
"오늘은 편지가 좀 바뀐 것 같아요."
스콰렛 공작가의 장녀 티타니아는 한 달 전부터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바로 헬피온 공작이 보내온 정체불명의 연서를 읽는 것이다.
아니, 이런 편지를 연서라고 할 수 있을까.
써 있는 거라곤 하나같이 무술과 검, 지식과 가신들의 이야기뿐.
티타니아는 이미 여러 번 귀족 가문의 자제들로부터 연서를 받은 경험이 있었다.
나이가 결혼적령기를 살짝 지난 감도 있을뿐더러, 그녀의 외모는 델피 왕국에서 스콰렛 재상이 전 재산을 주어도 바꾸지 않을 보물이라며 이미 소문이 자자하게 나 있으니 말이다.
그런 사람들의 연서는 보통 티타니아의 외모를 칭찬하거나, 스콰렛 재상이라는 뛰어난 아버지가 있음을 축복하거나, 그녀를 만난 순간 자신의 가슴이 얼마나 뛰었는지.
이 만남과 자신의 감정이 얼마나 운명인지를 구구절절하게 늘어놓곤 했다.
조금 더 나아가서는 자신의 가문이나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곤 했는데.
이 편지는 완전히 궤가 다르다.
"이 남자는 정말로 나랑 친구부터 시작하려는 걸까?"
생각해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세상 어떤 친구가 이런 검술 이야기만 주구장창 보낸단 말인가.
그래, 이건 마치.
검술 스승이 제자를 지도하는 것 같다.
그것도 아주 늙고 죽음을 앞둔 검술 스승이 자신의 일생을 회고하는 비급이라도 만드는 것 같지 않은가.
실제로 스콰렛 가문의 기사단장에게 이 편지 내용을 슬쩍 보여 준 적 있었다.
'오오, 이, 이게 그 헬피온 공작의 심득이란 말입니까! 역시 심오하군요.'
'심오한가요?'
'그렇습니다, 아가씨. 여기에 적혀 있는 이야기는 제 실력으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깊은 무학을 담고 있습니다.'
티타니아는 고작 연애편지 몇 장에 들어 있는 내용이 그렇게 뛰어나다는 것에 놀랐다.
기사단장은 소드마스터를 눈앞에 둔 고수로, 델피 왕국에서는 이름난 기사였으니까.
그 정도의 기사도 이해할 수 없는 무학이라니.
그렇게 생각하면 이 편지의 내용이 정말로 깊게, 진심으로 모든 것을 바치며 사랑하는 남자의 열렬한 구애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아가씨, 호, 혹시 이 편지를 빌려 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일까.
가문의 기사단장이 어마어마한 열망에 찬 눈동자로 자신에게 요청을 해옴에도 불구하고.
'음... 그건 안 돼요.'
거절을 하게 된 까닭은.
티타니아는 거의 울상이 되어버린 기사단장을 방에서 내쫓은 뒤, 조용히 하녀 한 명을 방으로 불렀다.
그리곤.
"목검 하나만 구해 주겠니."
"갑자기요?"
"응. 오늘부터 검을 조금 배워 보고 싶어졌어."
라고.
델피 왕국의 구석, 누구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소드마스터의 제자 한 명이 생겨나고 있었다.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12화
<12화 - 현자님은 더러운 지식도 뛰어나시다면서요?(2)>
나는 그 길로 로네와 함께 주점을 찾았다.
어쩐지 아펠 집사장님이 '훈련은!'이라고 외친 것 같았지만, 사뿐히 무시해 주었다.
훈련도 중요하지만 이 일이 훨씬 더 중요하다구요.
헬피온 공작이 나에게 준 기한은 한 달.
로네를 기다리면서 3주나 썼으니 실질적으로 남은 건 10일 정도밖에 없었다.
그러니 기회가 있을 때 부지런히 움직여야지.
아직 이른 오후였지만, 주점은 벌써부터 음주를 시작한 전사들로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현자님 오셨는가!"
"저번에는 그냥 갔었지. 오늘은 맥주 대결 리벤지를 하려는 거야?"
"크, 저 샌님이 그 현자란 말이지? 이봐! 내 철퇴를 걸고 맥주 대결 한판하자고!"
로네는 주점의 전사들이 보여 주는 관심과 소란스러움에 조금 기가 질린 모양이었다.
"현자?"
"별명 같은 거야. 동네에서 영웅이니 현자니 역할 놀이 같은 거 많이 하잖아."
"뭐야, 유치하게."
나는 로네의 반응에 씩 하고 웃어 주곤 카운터로 갔다.
헬피온 공작령에는 다른 도시의 지역과 달리 길드가 없었다.
전 세계에 존재하는 기사단이나 용병 길드, 모험가 길드의 길드마스터 급 실력자들이 바글거리는 곳이다.
이들이 찾아온 건 오로지 헬피온 공작의 위명 때문.
헬피온 공작의 아래가 아니라면 그 어디에도 속하고 싶지 않았던 그들의 자존심이.
이처럼 길드 청정구역을 이룬 것이지.
덕분에 이렇게, 그들의 아지트가 된 주점의 카운터가 일종의 용병 길드 카운터처럼 기능하게 되었다고.
서류를 처리하다 보니 얻게 된 잡지식이지. 내가 '주점'을 하나의 세력으로 인식했던 계기이기도 하고.
"어서 오세요."
카운터는 젊고 쾌활한 하프 엘프 여성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일을 하나 의뢰하고 싶어."
"의뢰 말이시죠? 공무이신가요 사무이신가요?"
"공무. 공작령 주변의 몬스터를 정리하고 타 영지와의 교역로를 확보하려고 하거든."
"교역로요?"
카운터에 있던 엘프가 깜짝 놀란 듯 귀를 쫑긋거렸다.
기분 탓일까. 주변의 소음이 조금 잦아든 것만 같았다.
"마물의 땅에서 몬스터들이 시도 때도 없이 내려오는 만큼, 마물에게서 안전한 교역로를 만드는 건 힘드실 텐데요. 혹시 방책이라도 세우거나 치안대를 유지하실 건가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공작을 추종하는 전사들이지만, 이런 인재들을 고작 치안대 같은 걸 시키기엔 여러모로 리스크가 크다.
지불될 돈도 만만찮을 것 같고 무엇보다 교역로의 수익을 온전히 얻긴 힘들지.
주인 없는 황금이 눈앞에 굴러다니는데 그걸 왜 나눠.
독식하기도 모자랄 판에.
"주변 지리에 밝고 눈과 기감이 좋은 용병 하나. 그리고 힘에 자신 있는 용병 둘. 그리고 몬스터의 습성에 대해 잘 아는 용병 하나 정도? 연금술이나 마법에 능한 사람도 있으면 더 좋겠는데."
"제가 하죠."
의뢰를 채 마치기도 전에 먼저 자원한 사람이 있었다.
마침 내가 잘 아는 사람이었다.
"케인 경!"
3주 전, 나와 함께 헬피온 공작령으로 오는 동안 날 호위해 주었던 기사, 케인이었다.
케인 경이라면 나도 환영이지.
여행 내내 날 존중해 주고, 젠틀한데다가 무엇보다 눈과 기감이 뛰어났었거든.
"현자 나으리가 하는 일이라면 분명 재미있는 일이겠지."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그렇게 케인 경이 나서 바람을 잡아 준 덕분일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음에도 사람을 쉽게 모을 수 있었다.
심지어 사람들의 면면이 얼핏 보아도 심상치 않았다.
내 머리통만 한 팔근육을 뽐내는 전사부터, 한눈에도 범상치 않은 기세를 내뿜는 마법사까지.
나는 케인 경을 비롯한 다섯 명 앞에 서서 일정을 안내했다.
"의뢰비는 공작가에서 지불될 겁니다. 이틀 정도는 야영을 해야 할 수도 있으니, 짐을 넉넉히 챙긴 후 서문에서 뵙겠습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일정을 안내한 뒤 로네와 함께 주점을 나섰다.
그때까지 가만히 침묵을 지키던 로네가 질문했다.
"이렇게 많은 인원을 모아서 뭘 하려는 거야?"
"말했잖아. 교역로를 뚫을 거라고."
"언제 어디서 마물이 나올지 모르는 곳이잖아. 과연 그런 길을 상인들이 사용할까?"
"마물이 나타나지 않게 하면 되지."
"뭐라고?"
"설명을 해 주고 싶은데, 나도 잘 될지 몰라서 확실하게 얘기를 못 하겠어."
어지간하면 아카식 레코드의 지식을 신뢰하고 싶지만, 진짜 써먹는 건 처음이니까.
로네는 양미간에 주름을 잡고 날 삐뚜름하게 쳐다보았다.
"일단 가자. 설명해 주는 것보다 가서 보는 게 빠를 거니까."
* * *
"어이, 현자 나으리. 아펠 집사장이 깨달음을 얻었다면서? 젠장맞을, 더럽게 부럽네."
자신을 찰스라고 소개한 용병은 초면부터 걸걸한 말투로 아펠을 비아냥거렸다.
처음 주점에서 봤을 때 상체를 탈의한 채 울룩불룩한 근육을 자랑하던 사내였다.
말투가 지저분한 것은 찰스뿐만이 아니었다.
오늘 모인 용병 중 대부분이 아펠 집사장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으니까.
"영감쟁이, 공작님한테 뭘 받아먹고 그런 깨달음을 얻었으려나."
"흥, 헬피온 공작가의 개가 돼야 이루는 깨달음 따위가 필요해?"
"크흐흐, 맞아, 맞아. 수련이라면 모름지기 몬스터의 피와 살로 이루어져야지. 골방에 있으면 제대로 된 깨달음이 생겨날 수 있나."
"어쩌면 깨달음이 아닐지도 모르지. 사무장도 들어왔겠다, 세력을 뺏긴다고 생각해 의도적으로 헛소문을 흘린 거 아냐?"
듣다 보니 비아냥의 수위가 꽤 심했다.
소싯적에 아펠 집사장에게 훈련이라도 받거나 돈이라도 뜯겼나?
"현자님, 이리로."
어느덧 내 곁으로 다가온 케인은 날 무리의 구석으로 데려갔다.
"케인 경."
"저들의 이야기에 너무 신경 쓰지 마십쇼. 대부분은 질투심 때문에 그런 거니까."
"왜 저런 걸로 질투를 하죠? 다 강해지면 좋은 거 아닌가요?"
케인은 씁쓸하게 웃었다.
"헬피온 공작이 변경백으로 자리 잡은 게 얼마나 되었는지 아십니까?"
"20살의 공작이 마왕성에 단신으로 들어가 마왕의 목을 베었던 게 벌써 12년 전이죠."
"맞습니다. 그럼 헬피온 공작의 제자가 몇 명인지도 아십니까?"
헬피온 공작의 제자?
그러고 보니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
소드마스터, 그것도 그랜드 소드마스터에 근접했다는 사람의 제자라면 분명 소문이 났을 텐데.
"헬피온 공작은 12년 동안 단 한 명의 제자도 받아들인 적이 없습니다. 대신 가신을 받았지요."
"집사장이나 하녀장님처럼 말이죠?"
"그마저도 단 세 명에 불과했죠."
케인 경은 말을 덧붙였다.
"사람들은 그 세 명에 대해 제자가 아니라 그저 사용인일 뿐이라며 위안을 삼았습니다."
문제는 거기부터 발생했다.
"하지만 말로만 그럴 뿐, 그 세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죠. 소드마스터 초급인 아펠 집사장, 암살 길드의 마스터였던 셰리나 하녀장, 그리고 거대한 용병대의 S급 용병이었던 요리장 체트록스까지."
어마어마한 인물들.
"더군다나 아펠 집사장이 깨달음을 얻어 소드마스터 중급이 되었다? 심사가 복잡할 겁니다."
그 세 사람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었다고?
하녀장님은 암살 길드 마스터 출신? 으으. 내가 혹시 하녀장님에게 실수한 거 없겠지.
"그런 사람들이 왜 영지에서 가신을 하고 있는 건가요."
"듣기론 마왕 퇴치 과정에서 모두 공작님께 생명빚을 졌다고 하는데 자세히 알려진 바는 없습니다. 그리고...."
케인 경이 주저하며 내 눈치를 살폈다.
"저는 집사장의 깨달음에 공작님이 아니라 현자님이 개입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움찔하고 몸이 반응해 버렸다.
"저요?"
"저는 사무장님과 함께 헬피온 공작가를 방문했으니까요. 아직까지도 사무장님이 던져 주었던 검술의 화두를 잡고 있습니다. 하루하루 훈련할 때마다 제 벽이 서서히 무너지는 걸 느끼고 있죠. 집사장님께도 비슷한 일을 하신 거 아니겠습니까."
"전 그냥 사무장인데요."
"하하하. 알겠습니다, 모르는 척을 하지요."
케인 경이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 전혀 믿는 눈치가 아니잖아.
"검에 미친 전사들이란."
옆에서 우리 이야기를 듣던 마법사가 혀를 찼다. 가장 뜨겁게 불타오르는 붉은색 장발에 눈매가 사나운 아가씨였다.
이름이 제이미라고 했던가?
"당신은 다르단 건가요?"
"사람들이 현자라고 불러 주던데, 눈뜬장님인가 봐. 나, 지금 어딜 봐도 마법사로밖에 안 보일 텐데?"
하긴. 퀘퀘한 로브에 긴 나무 지팡이, 그리고 눈에 쓴 안경까지.
당신 모습이 누가 봐도 마법사 같긴 하죠.
"난 헬피온 공작의 가르침 같은 건 아무 관심이 없어. 의미도 없고. 대신 내가 온 건 그저 희귀한 마물을 연구하기 위해서니까. 그건 저기 꼬맹이도 마찬가지일걸?"
제이미가 가리킨 사람은 자기 키보다도 큰 배낭을 멘 채 따라온 작은 키의 소년이었다.
덥수룩한 머리카락이 얼굴 전체를 뒤덮고 있어 얼굴을 제대로 파악하긴 어려웠지만, 머리카락 너머로 어렴풋이 느껴지는 풋풋한 분위기가 있었다.
목소리도 앳된 느낌이 나고.
아마 15~6세 정도가 아닐까?
하지만 파티에서 그가 어리다고 무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자신이 무려 상급 알케미스트라고 밝혔으니까.
전 세계에 상급 알케미스트가 100명 정도 된다고 하니, 소드마스터 초급 수준의 실력자라고 이해하면 되겠지.
이름은 얀이라고 했던가.
"거참 계집애랑 꼬마, 그리고 샌님이 모여서 뭐가 그렇게 시끄러운지."
우리가 이야기하는 내용을 들은 건지, 찰스가 큰 소리로 비아냥대기 시작했고.
"뭐가 어쩌고 어째? 잠자다 질식해 뒈지고 싶냐?"
제이미 씨가 지지 않고 응수했다.
"어쭈, 마법사는 심장에 칼이 박혀도 퍼덕일 수 있나 보지."
사실 이런 으르렁거림은 출발 때부터 계속 있었던 일이라.
아무래도 제이미 씨의 성격이나 찰스 씨의 성격이 둘 다 괄괄하다 보니까 말이야.
그나마 기사 출신의 케인 경이 둘 사이를 중재했기에 큰 분쟁으로까지 퍼지진 않았다.
나와 로네를 알게 모르게 챙겨 주니 안전하게 말다툼을 구경할 뿐.
그러나 이런 소모적 다툼도 여기까지다.
"현자 나으리. 이제 말 좀 해 봅시다. 도대체 이 먼 곳까지 우리를 데려온 이유가 무엇이유?"
지금 우리가 도착한 곳은 헬피온 공작령에서 반나절 정도 떨어진 협로였다.
타 영지와 헬피온 공작령을 이어 주는 통로이자, 다양한 중대형 몬스터가 출몰하는 위험지대이기도 하지.
"그냥 위험한 정도가 아니잖아. 여긴 샌드웜 출몰지라고!"
그래. 헬피온 공작령에서 5년간 굴렀다던 찰스가 정확히 알고 있듯, 이곳이 바로 샌드웜의 출몰지라는 점이다.
샌드웜은 지렁이를 수백 배 키워 놓은 듯한 크기를 가진 몬스터다.
성체의 지름은 약 4m, 몸길이는 20에서 50m에 다다르는 압도적인 체구를 가졌다.
무엇보다도 턱 힘이 매우 강력하다는 것이 특징이다.
무려 갑주를 입은 기사를 한입에 씹어 먹을 수 있다니까.
보통은 땅 밑 깊숙한 곳의 지반을 뜯어먹으며 생활하는데, 바로 그 점 때문에 사람들이 샌드웜을 상대하는 것을 힘들어 했다.
땅 밑 깊숙한 곳에서 생활하는 놈들이다 보니 어지간한 감각으론 샌드웜의 존재조차 감지하기 힘들었으니까.
그러다 보니 여행자들은 샌드웜을 '땅속에서 솟구치는 죽음'이라고 부르며 두려워하고, 서식지가 밝혀지면 꽤 먼 곳까지 빙 둘러 피해 다니는 것이 상식이 됐지.
우리는 바로 그 샌드웜의 서식지 위로 온 것이다.
"다 죽자고 우릴 불러온 건 아니겠지?"
이번만큼은 제이미 씨도 찰스 씨와 의견이 일치했는지 미심쩍은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당연하죠. 저는 길고 가늘게 살 겁니다. 어차피 제이미 씨가 알람 마법을 쓰고 계시잖아요."
"쯧, 이래서 샌님들이란. 저년이 설치한 알람 마법이 울리면 뭐하려고. 그땐 뭐 빠져라 튄다고 되는 줄 알어?! 샌드웜 새끼들이 얼마나 악랄하고 재빠른데. 포위라도 당하면 그냥 세상한테 굿바이 인사하는 거야!"
찰스 이 사람 엄청 틱틱거리네.
무시하는 게 정신건강에 더 낫겠어.
"네네, 로네, 부탁한 짐들 좀 가져다줄래?"
내 부름에 로네는 어깨가 잔뜩 움츠러든 채로 짐을 가져왔다.
얜 또 왜 그런데.
"너 왜 이렇게 쫄았냐."
"안 그러게 생겼어?! 여기 샌드웜 출몰지라며!"
분명 말투는 닦달하며 강하게 책망하는 식인데 목소리의 크기는 모기 소리만 하다.
이거 완전히 쫄았구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오빠를 믿어라, 좀. 내가 하나밖에 없는 동생을 사지로 밀어 넣을까 봐?"
로네는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싶다는 눈빛이었다.
내 신뢰가 이렇게 바닥에 떨어져 있다니.
나는 로네가 가져온 짐을 바닥에 늘어놓았다.
자, 보시라!
이것이야말로 오늘 여러분들을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이니까 말이야.
"이건...."
"그냥... 돌멩이 아녀?"
짐을 본 사람들의 반응이 시원찮다.
"그냥 돌이라뇨. 무슨 섭섭한 말씀을. 이 돌은 볼프리온 화산의 마석이라구요."
"볼프리온 화산의 마석?"
내 말에 가장 적극적으로 반응한 사람은 지금까지 별다른 말없이 묵묵히 뒤를 따라오던 얀이었다.
어느새 짐더미 근처까지 다가온 얀이 마석을 집어 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하지만 이건, 그."
머리카락 때문에 잘 보이진 않았지만 얀이 내 눈치를 보는 것만 같았다.
"그냥 단단한 쓰레기인데...."
"오, 이걸 알아요?"
얀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망치로 내려쳐도 잘 부서지지도 않고, 그렇다고 형상을 변환시키기도 힘들고. 무기로 쓸 수도, 건축자재로 쓸 수도 없고...."
얀은 그답지 않게 진지한 목소리고 마석에 대한 평을 이어 갔다.
와, 연금술사들은 재료에 대해 저만큼 다양한 실험을 해 보는 모양이군.
그래도 이 마석이 가진 진짜배기 효과는 아직 모르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알려 줘야지.
이 돌 안에 감춰져 있는 비밀, 샌드웜을 쫓아내고 교역로를 확실히 뚫을 힘을.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13화
<13화 - 현자님은 더러운 지식도 뛰어나시다면서요?(3)>
나는 얀의 손에 들려 있던 마석을 다시 받아 제이미 씨에게 내밀었다.
"제이미 씨. 여기에 얼음 계열 마법을 써 줄 수 있나요? 돌 안에 화기가 배여 있다고 생각하시고, 그 화기를 얼음 마법으로 중화한다는 느낌으로. 파괴되거나 얼리는 건 안 됩니다. 좀 섬세하게."
"되게 귀찮은 일을 시키네. 잠시만 있어 봐."
제이미 씨는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마석을 감싸 쥐었고, 곧 마석의 겉 표면에 희미하게 푸른빛이 맴돌다 사라졌다.
"마나를 흡수하는 거예요? 그렇구나. 화산지대의 마석 내부의 열기를 중화시키면서 원상태로 복구하여 돌이 가지고 있던 성질을 복원하는 건가요?"
마석의 독특한 반응에 얀이 들뜬 듯이 발을 동동거렸다.
이제 좀 제 나이같이 보이는군.
"정확합니다. 제이미 씨, 마석 내부에 잠재되어 있는 열기를 다 빼낼 때까지 계속 작업을 반복해 주실 수 있습니까?"
이것은 일종의 인챈트 작업으로 그냥 마법을 구사하는 것보다 난이도가 요구된다.
그러니 5써클 이상의 인력을 구한 것이지.
마침 제이미 씨 같은 인력을 구해서 다행이다.
헬피온 공작령 대단해.
5써클 마법사 구합니다, 하고 주점에서 외치면 턱턱 나온다니까.
"이 물건을 어디다 쓰려고?"
홀로 소외되는 느낌인지, 찰스가 슬쩍 다가와서 입을 열었다.
"찰스 씨는 몬스터들의 습성에 대해서 잘 아신다 하셨죠."
"그럼 그럼! 헬피온 공작령에서 찰스 하면 다들 몬스터의 전문가로 꼽는다니까! 내가 그리즐리 용병대에서 몬스터에 대해선 세 손가락 안에 꼽는 실력자라고!"
"보통 약한 몬스터들은 절대로 강한 몬스터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죠. 그런데 도대체 약한 몬스터는 강한 몬스터의 서식지를 어떻게 알아보는 걸까요?"
찰스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콧바람을 씩, 하고 내뱉었다.
"냄새야 냄새. 몬스터 놈들은 종족별로 고유한 냄새가 나거든! 그 향을 통해서 영역을 구분할 수 있지. 분변부터 피부 아가리에서 나는 냄새로 알 수 있지. 고도의 훈련을 한 나 같은 전문 헌터들만이 그걸 구분할 수 있거든!"
좋아, 그게 바로 내가 원하는 대답이었다.
잘 설명해 줬어.
"사실 이 물건이 그런 용도거든요."
사람들은 내 말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눈을 끔뻑였다.
"이걸로 뭐 향이라도 피우려고?"
"아하하, 좀 노골적으로 얘기드리자면 이 마석이 몬스터의 분변이거든요."
내 말에 찰스가 경악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이 쪼끄마한 게 몬스터 똥이라고?!"
똥이라는 노골적인 단어 때문일까.
방금 전까지 마석을 건네주던 로네의 손 또한 딱딱하게 굳었다.
자기가 구해다 준 건데, 설마 몰랐나?
양손으로 마석을 감싼 채 마나를 넣던 제이미 씨의 표정도 썩어 들어갔다.
둘의 눈빛이 날 향했고.
나는 둘의 눈빛만으로도 나에게 전달되는 수많은 악의와 욕설을 글자로 읽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지금... 내 손에 똥을 묻혔다고 얘기한 거지?"
"제이미 씨, 진정하세요. 손에 모으고 계신 마나, 공격 마법 맞죠? 저 촉 좋거든요. 돌이에요, 돌! 똥이 용암 때문에 잔뜩 굳어서...."
"똥똥거리지 말고 얘기할 수 없어?!"
제이미는 끔찍하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면서도 돌덩이를 버리지 않는 것 하나만큼은 정말로 칭찬해 주고 싶다.
지금 하는 일이 무슨 작업인지 좀 더 알려 준다면 의욕이 생기시지 않을까?
"지금 하는 작업은 용암으로 굳어 버린 분변 속 체취와 마나를 되살리는 작업이에요. 분변을 용암이 뒤덮고, 그게 굳어서 마석이 되죠. 그걸 얼음 마나를 부어 넣어서 생전 상태로 복원하고...."
"보, 복, 으웩."
"닥쳐, 마나고 의뢰고 나발이고 다 죽여 버리기 전에."
어이쿠, 제이미 씨, 반응도 격하셔라.
그렇다고 정말로 돌이 똥이 되는 건 아니고, 그저 은폐되어 있던 몬스터의 기운이 복원되는 것에 불과한데.
그나마 내 설명을 흥미롭게 듣고 있던 얀이 안타까운 듯 입을 살짝 벌리곤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나는 조용히 얀에게 나중에 설명해 준다고 약속했고, 얀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봐, 이거 정말로 효과 있는 거 맞어? 냄새를 복원했다고 해도 어설픈 몬스터면 어쩔 거야. 여긴 세상에서 가장 흉포한 몬스터들이 나오는 곳이라고!"
"그래서 여러분을 고용한 거죠."
사람들의 머리 위로 다 같이 물음표가 떴다.
"몬스터의 습성을 잘 알고, 힘 좋은 용병. 왜 구했겠어요?"
"설마...."
뭔가 짐작 가는 것이 생긴 걸까.
찰스 씨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몬스터 한 마리만 생포해 오세요."
나도 아카식 레코드에서 읽기만 한 정보라서 이게 진짜로 작동하는지 확신이 없거든.
그러니 확인 작업은 해 봐야지.
나는 생긋 웃으며 찰스 일행을 손짓으로 내몰았다.
찰스 일행은 한참 똥 씹은 표정을 짓더니 곧 털레털레 자리를 떴다.
쯧쯧.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인데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하면 얼마나 좋아.
그렇게 그들이 떠나고 얼마 뒤.
로네가 입을 열었다.
"오빠. 그런데 도대체 저 똥... 은 어떤 몬스터에서 나온 거야?"
로네의 질문에 얀과 제이미, 그리고 경호를 위해 남은 케인의 시선이 나에게로 모였다.
"어라, 내가 아직 얘기 안 했었나?"
"그냥 분변이라고만 했지."
"볼프리온 화산이라고 했잖아요. 그걸로 대답이 다 된 줄 알았는데."
"하지만 볼프리온 화산은 그 어떤 몬스터도 살지 않는데."
제이미가 미심쩍다는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바로 거기에 답이 있죠. 왜 볼프리온 화산이 몬스터가 살지 않는 청정구역임에도 불구하고 12대 험지에 들어갈까요?"
"그야 화산지대의 환경이 극악하기도 하고, 볼프리온 화산은 예로부터 광룡 볼프리온이 살던 영토 였... 설마 이게? 야, 진짜, 너 이 새X 진짜 미친놈 아냐!"
말씀 도중 답을 찾으신 모양이네.
나는 어처구니없어 하는 네 사람을 보며 생긋 웃었다.
"네, 맞아요. 드래곤입니다."
내 말에 일행들의 눈이 커졌다.
설마 싶던 일을 확신시켜 줬던 것이다.
"물론 드래곤 똥이 꼭 효과가 있으리라는 보증은 없죠. 그래서 검증을 해 보고 싶긴 한데. 용병분들이 몬스터를 잡으러 가셨죠. 마음 같으면 샌드웜이라도 나왔으면 하지만 설마 그런 행운까지 일어나진 않겠죠?"
* * *
찰스와 동료들은 수변 수풀을 신경질적으로 헤치며 돌아다녔다.
"헬피온 공작가에 현자가 나타났다더니, 사람들이 미쳤지. 저런 미치광이를 보고."
"뭐? 몬스터의 분변? 볼프리온 사막에 무슨 몬스터가 산다고 그런 헛소리를 해! 세상에서 가장 험악한 금지 중 하나라 바퀴벌레 한 마리도 얼씬 안 하는 곳이구만!"
"술 좀 잘 마시는 걸로 뻐기기나 하고 말이야. 전쟁터에서 만나면 칼질 한 번으로 슥, 삭- 이겠구만!"
용병들은 자신의 칼로 수풀을 헤쳐 나가며 잔뜩 불평불만을 늘어놓았다.
당장 사악한 샌드웜 서식지에 들어와 있는 것도 신경질 나는데, 거기에 몬스터까지 생포해 오라니.
자신들은 영지 최고의 세력인 그리즐리 용병대 소속의 엘리트.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용병이며 세상 어디를 가더라도 최고급 대우를 받을 인재들인데, 마치 E급 용병마냥 잡부 취급을 하고 있지 않은가.
도저히 괘씸해서 참을 수 없었다.
"어이 찰스. 우리 이러다가 임무 대금도 못 받고 덤터기만 쓰는 거 아냐? 저기에서 샌드웜이라도 만나면 정말로 엿 되는 거라고."
찰스 역시 동료의 생각과 다를 바 없었다.
잘난 척하는 사무장의 꼴도 보기 싫고, 그보다 더 잘난 척하는 마법사 년은 확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
그러니.
이 정도 장난쯤은 괜찮으리라.
"뭐 어때. 우리만 살아남으면 되지. 이런 험지에선 다양한 사고가 일어나는 법이잖아?"
찰스는 이를 드러내며 사악하게 웃어 보였다.
그가 바라본 곳에는 샌드웜 한 마리가 상체를 드러낸 채 사슴을 씹어 먹고 있었고.
"사무장이 정체를 꽁꽁 감춰 놓고 싶은 모양인데, 샌드웜 이빨 앞에서도 그럴 수 있는지 확인해 보자고."
곧 찰스를 따라왔던 용병들의 표정 역시 찰스와 비슷하게 변했다.
* * *
샌드웜은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인간들에게 샌드웜 서식지가 밝혀진 것도 오래전인 만큼, 이 서식지에는 살아 있는 생물이 오는 경우가 참으로 드물었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길 잃은 어린 사슴이 들어왔고, 샌드웜은 동족보다 예민하고 기민한 감각으로 솟구쳐 승자가 된 것이다.
오랜만에 살아 있는 생물의 피와 고기 맛을 본 탓일까.
샌드웜은 아쉬움에 쉬이 땅굴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지상에서 여운을 맛보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단숨에 씹어 먹었을 고기를 천천히 씹으며 음미하며 햇빛을 즐기고 있을 때.
마치 마왕님이 부지런하고 우수한 몬스터인 자신을 어여삐 여기기라도 한 듯 타이밍 좋게 주변을 알짱거리던 찰스 일행을 발견한 것이다.
새로운 먹이다!
맛 좋은 생명체가 저기에 있다!
두 덩이 정도는 단숨에 삼켜 먹어도 괜찮을 정도로 푸짐한 양이야!
샌드웜은 괴성을 지르며 눈 깜짝할 사이에 바닥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찰스 일행은 바로 그때를 노리고 있었다.
"좋아, 튀어!"
그리고 찰스 일행의 달음박질이 시작되었다.
"크헤헤헤! 잡아 오라는 게 살려서 데려가기만 하면 되는 거 아냐!"
"샌드웜이 어디서 어떻게 나올지 누가 알겠어!"
"그래도 우린 임무를 완수했다! 우리는! 샌드웜을! 피해서 도망치는 게 아니라! 여기까지 데려오느라! 개고생했다 이 말씀이야!"
생명체를 눈앞에 둔 샌드웜은 정말로 공포스러웠다.
땅은 지진이라도 난 듯 마구잡이로 파헤쳐졌고.
폭발 마법이라도 맞은 것처럼 사방 곳곳의 흙더미가 허공으로 비산했다.
무엇보다 거대한 두께와 길이의 샌드웜.
녀석이 마치 파도라도 치는 듯 끊임없이 솟구쳤다 가라앉기를 반복하는 것이 매우 끔찍했다.
괴수의 아가리와 이빨이 용병들의 옷자락을 스치기 일쑤였고, 때때로 의도치 않은 씽크홀이 푹 꺼지는 탓에 용병이 발을 헛디딜 때도 많았다.
그러나 썩어도 준치라는 말처럼, 찰스와 동료들은 겨우겨우 라워드 일행의 근처까지 달려가는 데 성공했다.
'잔뜩 당황한 모양인데?'
워낙 소란스럽게 달려온 탓일까.
라워드 일행은 잔뜩 굳어 있는 듯한 모양이었다.
'크크크. 그럼 이때쯤 한 번 양념질을 해 볼까?'
찰스는 한 차례 큼큼, 목을 가다듬곤 외쳤다.
"사, 살려 줘! 샌드웜이 쫓아와!"
찰스의 동료들은 찰스의 의도를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그리즐리 용병대에 함께 입대해 5년 동안 함께 손발을 맞춰 오던 동기들이었다.
싸울 때나 이렇게 나쁜 일을 할 때나 척하면 척하고 알아먹었으니.
"빌어먹을! 이러니까 샌드웜 서식지라 위험하다고 했잖아!"
"사무관, 알아서 피하슈! 우리는 도망갈 거니까!"
"야박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렇게 용병들은 격려인지, 아니면 조롱인지 모를 말을 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아니, 흩어지려고 했다.
"그러니까 임무 포기라는 거죠?"
꽁지 빠져라 뛰어다니는 자기들과 달리 너무나도 여유 넘치는 라워드의 모습을 보기 전까지 말이다.
처음은 긴장과 두려움 때문에 몸이 굳은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주변을 보니 그렇지도 않았다.
베테랑 용병인 제이미도, 얀도, 그리고 케인까지.
단 한 명도 긴장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으니까.
그제야 그들은 깨달았다.
방금 전까지 자신들의 옷자락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솟구치고.
단단한 대지를 거센 풍랑이 인 파도처럼 헤집으면서 쫓아오던 바로 그 샌드웜.
녀석이 내던 요란한 소음이 완전히 그쳤다는 사실을.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14화
<14화 - 현자님은 더러운 지식도 뛰어나시다면서요?(4)>
이게 되긴 되네?
샌드웜은 마치 용병대에 막 입대한 신병이라도 된 듯,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아니, 완전히 굳어 있는 건 아니군.
얼굴에 달린 12개의 눈동자는 사방으로 번들거렸고, 이내 몸은 사정없이 덜덜 떨렸다.
그리고.
"아, 도망간다."
로네의 말처럼 샌드웜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드드드, 하는 샌드웜 도망치는 소리가 멀어진다.
멀리멀리.
곧, 거대한 괴물이 만들던 인위적인 소음이 모두 사라진 공간에 다시 자연의 소리, 곤충과 새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마음이 평온해지는 자연의 합창에 귀 기울이며 청량해진 마음으로 용병들에게 통보했다.
"여러분들은 지금부터 돌아가 주시면 됩니다. 물론 대금은 없고요."
"아, 아니, 잠깐만! 그게 무슨 소리야!"
당연히 찰스와 용병들은 펄쩍 뛰기 시작했지.
"이봐, 이거 무슨 착오가 있는 모양인데.... 우리도 일을 하려고 하긴 했는데, 갑자기 샌드웜이 나와 가지고 말이야...."
"그래도 우리는 현자님 말을 잘 들었다고! 생포를 해 올 수는 없을지언정 목숨을 걸고 몬스터를 몰아온 거 아냐!"
"맞아, 맞아! 그래서 어떻게 됐냐. 검증했잖아. 검증된 거 아냐? 그런데 쓸 거 다 써먹고 갑자기 의뢰를 취소한다고 한다고?! 날강도 아냐 그거!"
"사람이 그러는 거 아냐! 이거 그리즐리 용병대에 가서 이야기하면 큰 문제가 된다고! 감당할 수 있겠어?"
"나 참."
지금의 상황이 어처구니없었는지, 제이미 씨의 입에서 헛웃음 소리가 튀어나왔다.
고맙네. 사실 나도 헛웃음을 참기 힘들었거든.
용병들의 사나운 눈빛이 제이미에게 꽂혔다.
"어디서 웃고 지랄이야, 썩을 년이."
"샌드웜한테 뒤지기 싫어서 양심을 던져 줬구만? 어이, 꼬맹아!"
제이미는 용병들과 대립각을 세우는 대신 얀을 손짓해 불렀고, 그들에게 다가간 얀은 작은 소라껍데기를 하나 들어 올렸다.
"이게 뭔지는 다 알지?"
제이미는 노골적일 정도로 혐오감을 드러내며 이야기했다.
얀이 꺼내 든 마도구는 음성증폭 저장전달 장치.
비싸긴 하지만 귀족가나 용병 길드의 본사 등에서 워낙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물건이다.
그럼 도대체 이걸 왜 꺼내 들었느냐.
얀은 마도구 바깥의 다이얼을 돌리자 마도구에서는 녹음되었던 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이 찰스. 우리 이러다가 임무 대금도 못 받고 덤터기만 쓰는 거 아냐? 저기에서 샌드웜이라도 만나면 정말로 엿 되는 거라고.'
'뭐 어때. 우리만 살아남으면 되지. 이런 험지에선 다양한 사고가 일어나는 법이잖아?'
워낙 우리를 고깝게 보던 용병들이다 보니 그냥 보내기엔 뒤통수가 저릿저릿하더라구.
내가 아카데미 시절 제국 후작 가문의 다양한 중상모략에 시달렸었거든.
그래서 이렇게 상시 녹음을 하는 좋은 버릇이 들었다 이 말이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제이미 씨와 얀 씨에게 부탁해 용병 중 한 녀석에게 도청마법을 걸어 놨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정말로 중상모략이 일어나고 있는 거 아닌가.
전달 장치에서 생생히 흘러나오는 자신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용병들의 얼굴은 점점 사색으로 물들었다.
"그리즐리 용병대에서 정식으로 문제를 삼겠다고요? 좋네요. 아마 저도 정식으로 그리즐리 용병대 측에 문제를 삼을 것 같아요. 물론 제 이름이 아니라 헬피온 공작의 이름으로요."
"그거 좋네. 화끈하네. 공작이랑 그리즐리 용병대가 한판 뜨는 거야?"
제이미의 비아냥에도 용병들은 더 이상 아무런 말을 잇지 못했다.
분위기가 점차 험악해지는 것을 느낀 것일까.
케인이 방패를 앞으로 슥 내밀며 저들의 시야를 차단했다.
"자네들의 죄는 자네들이 잘 알고 있으리라 믿네."
방랑기사 출신의 굳건한 등과 어깨가 굉장히 믿음직스러웠다.
"선택해. 더 쪽 팔다가 뒈질래, 아니면 그냥 순순히 썩 꺼질래?"
제이미 역시 양팔에서 강렬한 화염을 내뿜으며 언제라도 싸울 수 있음을 알렸고, 어느덧 얀 역시 양손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약병 여러 개를 들었다.
아무리 그리즐리 용병대의 용병들이 뛰어나다고 한들 이 조합을 쉽사리 뚫기란 요원할 것이다.
방어를 전담하는 기사 한 명에 원거리에서 마력으로 포격을 가할 마법사, 그리고 다양한 의외성을 창출할 수 있는 연금술사까지.
마치 제국전술교본에 나올 법한 훌륭한 조합 아닌가.
덤 두 명이 있다는 건 넘어가더라도 말이지.
그리고 그 사실은, 저기 있는 용병들이 누구보다도 잘 알 것이다.
대응하기 위해서 무기를 꺼내든 저들의 동공이 이리저리 흔들거렸고, 낯빛은 시꺼멓게 변했으니까.
"젠장, 두고 보자."
결국 찰스와 일행들은 침을 퉤 뱉고는 샌드웜이 사라졌던 숲속으로 털레털레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는 그들이 떠난 후에도 혹여 모를 습격을 대비하며 한참을 경계태세로 대기했고.
제이미 씨가 그들이 완전히 떠났음을 마법으로 확인해 주고 나서야 우리는 긴장을 풀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으아, 죽겠다!"
어후, 심장이 쫄깃하네.
사실 여유 있는 척하긴 했지만 샌드웜도 쫄깃했고 용병들도 쫄깃했다.
로네 역시 엄청 긴장되었던 건지, 내 팔에 완전히 늘어지듯 드러누웠다.
나는 로네를 진정시키기 위해 로네의 어깨를 툭툭, 하고 두드려 주었다.
그런 우리 둘의 모습을 바라보며 얀이 먼저 말을 걸었다.
"처음 마을에서 현자님이 나왔다고 했을 땐 늘 도는 풍문인 줄 알았는데 정말 현자님이셨네요."
케인 경도 한 마디를 덧보탰다.
"예전 헬피온 공작령에 함께 오던 기억이 떠오르는군요. 그때도 이런 기똥찬 아이디어들을 줄줄 내며 몬스터들을 농락하셨죠."
"기똥찬인지 똥찬인지 구분은 잘 안 가지만 말야."
제이미 씨, 오늘 똥에 단단히 원한이 생기신 모양이네.
"그래서 어떡할 거야. 교역로 따라 마석을 쭉 깔아 놓으려고?"
나는 로네의 말에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기엔 위험 요소가 많다.
지금 당장 몬스터의 위협은 사라질지 모른다.
하지만 도적이라든가, 용병이라든가.
교역의 위험 요소는 언제나 존재하는 법이지.
혹시 드래곤의 분변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무식한 몬스터가 나올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고.
나는 착한 오빠라, 동생의 위험을 알면서도 내버려 둘 순 없거든.
"교역로도 안 만들 거면 이 고생을 왜 했어?"
"누가 안 만든다고 했어? 만들 거야, 아니, 거의 만들어져 있는 걸 빌리는 거지만."
"빌려?"
나는 생긋 웃으며 검지를 펼쳤다.
그리고 천천히 손가락을 아래로 내렸다.
내 손가락을 따라 사람들의 시선이 서서히 바닥으로 내려갔고.
마침내.
"아?"
너나 할 것 없이 탄성을 터뜨렸다.
"우리는 지상과 더불어 샌드웜이 뚫어 놓은 지하 토굴에 볼프리온 마석을 설치할 겁니다."
사람들은 상상도 못 했다는 표정이었다.
난 차근차근 설명해 나갔다.
"샌드웜의 영역은 공작령에서 서쪽에 있는 아프나이 백작령까지 넓더라고요. 탐색해 보면 분명 쭉 이어지는 길이 있을 겁니다."
여전히 못 믿겠다는 표정.
이 사람들이 내가 거짓말만 하는 사람인 줄 아나.
...로네의 경우는 충분히 이해해 줄 수 있지만.
"다시 말하면, 공작령과 백작령을 잇는 허브 하나가 생기는 셈 아닐까요?"
내 설명이 끝나자 케인 경이 우려하며 물었다.
"샌드웜이 뚫어 놓은 토굴인데 과연 거기가 안전할까요?"
"물론 위험 변수는 존재하지. 그래서 내가 한 사람을 섭외해 온 거 아냐."
내 말에 사람들은 모두들 한 사람을 쳐다보았다.
바로 얀.
상급 연금술을 지닌 그라면 샌드웜이 뚫어 놓은 허접한 흙 동굴의 성질을 변형시켜, 수백 년은 유지될 법한 교역로로 만들어 줄 수 있을 테지.
물론, 그 과정에서 도구나 마나의 소비는 어마 무시하겠지만.
"이틀 정도는 야영을 해야 할 수 있으니 짐을 챙기라던 게 그럼 설마...."
"그럼요. 지금부터는 즐거운 노가다 작업 시작입니다!"
자신의 신세를 짐작한 얀의 안색이 흙빛으로 물들어 갔다.
* * *
헬피온 공작은 집사장, 하녀장과 함께 오전 운동을 겸하여 샌드웜 서식지를 찾았다.
어젯밤 올라온 서류, '아프나이 영지와의 교역로 건설 진행 보고서'를 보자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교역로의 입구는 흙과 수풀, 바윗돌 등으로 잘 은폐되어 있었다.
서류와 함께 별첨된 지도가 아니었다면 한참을 뒤졌으리라.
"지도를 그릴 수 있는 재능이라. 델피 아카데미에서는 이런 것도 배우나?"
"사무장은 역사도 함께 수강했다 들었습니다. 그럼 전쟁사도 배웠으니 기본 전략을 배우지 않았겠습니까?"
"정말로 복이 굴러 들어온 셈이군."
헬피온 공작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라워드 사무장은 여러모로 신기한 사람이었다.
마나와 신체가 불안정해 뒤틀려 있는 모습이나, 가끔 보이는 번뜩이는 지혜까지.
그래서 암살길드 출신의 하녀장을 통해 뒷조사까지 마친 게 아니던가.
"아카데미 시절이 순탄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어떤 식으로?"
"제국 후작의 아들과 트러블이 있었답니다. 학교의 학생 대다수가 그를 싫어했고, 지독한 괴롭힘을 당했다고 하더군요. 그러다 학기말부턴 별다른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고 쥐 죽은 듯 살았다고 합니다."
헬피온 공작과 하녀장은 천천히 교역로로 진입했다.
사람의 힘으로 판 것도 아니고 자연이 만든 것도 아닌, 오로지 괴수가 뚫어 놓은 길이라 그럴까.
사용하는 사람에 대한 배려가 전무한 길이었다.
어설프게나마 계단을 만들려고 한 흔적이 보였지만, 일반인이 사용하기 위해선 아직 보강할 부분이 많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단단하게 강화된 벽면이나, 듬성듬성 박혀 있는 발광석 등은 형식적으로나마 이곳이 갱도 같은 곳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저릿저릿하군."
"소름 돋는 기분이네요. 거대한 짐승이 이빨을 드러내며 언제라도 목덜미를 씹어 삼킬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드래곤의 분변을 곳곳에 숨겨 놓았다지? 그렇다면 이게 분변에 잠재한 드래곤 피어겠군."
공동 전체에 오싹한 기운이 돌았다.
볼프리온 화산을 서식지로 삼았던 드래곤의 기운 탓일까, 마치 열기가 느껴지는 착각도 들었다.
아니, 착각만은 아닐 것이다.
헬피온 공작은 자신이 소드마스터 최상급이 된 이후 한 번도 흘리지 않았던 땀을 흘리고 있었으니까.
'긴장한 건가?'
그렇지는 않을 터였다.
일반 성룡의 힘과 맞먹는다는 마왕조차 단신으로 베어 버린 그였다.
그러니 이건 긴장이라기보다는 호승심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으리라.
고작 분변의 기운일 뿐인데 마음이 동하는 게 신기했다.
"야생의 기운에 둔감한 인간조차 이렇게 느낄 수 있으니, 몬스터들은 얼씬도 안 하겠군. 도대체 사무장은 이런 지식을 어디서 배운 건지."
"정말로 실력을 숨긴 고수가 아닙니까?"
하녀장의 질문에 헬피온 공작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보였겠지."
오만한 말 같았지만 헬피온 공작에겐 자명한 진리였다.
그는 그랜드 소드마스터 칭호까지 받은 최강자였다.
그런 그가 볼 수 없는 경지가 있을 리 없었다.
사무장의 몸에서 헬피온 공작이 발견한 건 몸을 망가뜨릴 정도로 불균형한 마나와 신체의 균형밖에 없었다.
그 어떤 고수도 자신의 신체를 저딴 식으로 관리하진 않는다.
"졸업 이후 5년간의 공백이 있으니, 그 기간을 집중적으로 조사해 볼까요?"
하녀장의 질문에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 검을 익혔는지, 그게 아니라면 마법을 익힌 것인지. 혹시 흑마술이나 주술 계열을 익힌 것은 아닌지. 행적을 완벽하게 뒤져 보게."
사무장이 유능한 것과 별개로,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지식을 보유한 것은 주의 대상이었다.
근원을 알아 둘 필요가 있어 보였다.
"사무장이 인력을 요청했다지?"
"네. 투자해 주신 자본을 고르뎀 상단에 투자함으로써 몬스터 부산물의 시세를 특산품화하고 제대로 된 교역로를 뚫으려 한다더군요."
"그리즐리 용병대와 한판 붙겠군."
하녀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령을 부흥시킬 대규모 프로젝트인 만큼 마냥 환영받을 것 같았으나, 이권이 걸린 자들은 민감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특히 그리즐리 용병대는 악연이 깊었다.
교역로를 뚫을 때 사무장을 위험에 빠뜨렸던 찰스와 일행들이 그리즐리 소속이었으니.
여러모로 사무장은 그리즐리 용병대의 원한을 산 셈.
순탄한 일정은 아니리라.
그걸 우려해서일까.
공작은 결단을 내렸다.
"자네와 집사장, 그리고 요리장이 개인적으로 키우는 제자들이 있지?"
하녀장의 눈동자가 조그맣게 흔들거렸다.
"그들을 내줍니까?"
"사무장이 필요하다고 요구한다면."
그렇게 사무장의 지원을 결정한 공작은 마지막으로 교역로를 한 차례 둘러보았다.
샌드웜이 어찌나 알차게 교역로를 뚫어 놓았던지.
지름 4m 정도 크기의 굴은 구불구불 끝없이 이어졌다.
헬피온 공작은 저 멀리, 어둠이 내려앉은 공동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저 어둠을 완전히 걷어 내면. 무엇이 펼쳐져 있을까.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15화
<15화 - 고장 난 마도구, 무기, 몬스터 부산물 삽니다(1)>
나는 로네와 함께 민간인 거주구로 이동했다.
오늘 우리가 방문할 곳은 엘시아 부인이 운영한다는 식료품점이다.
"정말로 식료품점이 이 거대한 공작령의 중심이 맞을까?"
"고작? 너 거기 가 보면 그런 소리 안 나올걸."
어라, 왜 그렇게 불신 가득한 눈빛이야.
이제 좀 오빠를 믿어 봐라. 너 앞에서 도대체 얼마나 증명을 해야 해.
교역로 뚫고 별별 짓까지 다 성공했으면 된 거 아냐?
"그래 봤자 그냥 가게에 불과할 텐데."
그걸 그냥 가게라고 할 수 있을까.
역시 세상만사 백문이 불여일견.
나는 군말 않고 로네를 식료품점으로 데려갔다.
마침내 식료품점을 보게 된 로네는 입을 떡 벌린 채 굳어 버렸다.
"엄청나다."
엘시아 부인이 운영한다는 식료품점은 무려 5층짜리 거대한 탑이었으니까 말이다.
"뭐야, 뭐야! 식료품점이라며!"
"어. 식료품점이긴 하지. 창고형 식료품점. 보존마법이 걸려 있는 거대한 탑에 여러 식자재를 늘어놓고 판매하는 거니까. 여기 주인인 엘시아 부인이 6써클의 대마법사거든."
그러니까 이 식료품점은 마법사 엘시아가 세운 일종의 마탑인 셈이다.
"도대체 왜 6써클의 대마법사가 마을에서 민간인으로 사는 건데?"
그건 나도 모르지.
그저 남편의 죽음이 그녀에게 큰 상처로 남았던 것은 아닐까 하고 짐작할 뿐.
"이 영지 진짜 이상해!"
그건 너보다 이 영지에 더 먼저 도착한 내가 잘 알고 있단다.
"일단 들어가자."
나는 로네를 이끌고 마탑, 아니 식료품점 안으로 들어갔다.
식료품점 안은 말 그대로 시장통이었다.
공작령에 이만큼이나 사람이 많았나 싶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장을 보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싸다 싸, 싱싱한 배추가 단돈 1실버!"
"산나물과 약초들을 팝니다. 무게에 맞춰서 가격은 흥정 가능해요."
"산양의 젖으로 만든 치즈 팝니다."
"고급 와인을 가져왔어요! 헬피온 공작령에서 10년간 꾸준한 인기를 유지하는 데드암입니다!"
호객을 하는 사람부터 중간중간 널린 좌판 근처에서 대화를 하며 잡담하는 사람들까지.
왜 이곳이 소문의 온상지인지 아주 잘 알 것 같다.
"정말로 시장이 열린 것 같네."
"진짜. 마탑이라곤 상상도 못 할 것 같아."
"일반적인 식료품점이라고 생각하기도 힘들고."
나와 로네는 서로 감상을 공유하며 계속 걸었고, 이내 파란 고깔모자를 쓴 마법사 앞에 도착했다.
"어서 오세요! 어디로 가실 건가요?"
"혹시 엘시아 부인을 만날 수 있을까요."
"대표님 말씀이시군요. 혹시 대면 약속을 하셨나요?"
"아뇨, 약속은 안 했는데, 그, 제가 헬피온 공작령에 새로 부임한 사무장이거든요. 인사차 들렸습니다."
스스로 이런 소개 하는 거 좀 부끄러운데.
내 말에 마법사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나를 요모조모 살폈다.
"마치 패왕과 같은 기세만으로 샌드웜을 쫓아냈다는 전설의 현자님?!"
뭐가 어쩌고 저째?!
어찌나 마법사의 고함 소리가 컸던지, 주변에서 장을 보던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마치 인간 마을에 내려온 엘프가 된 느낌이다.
사람들이 쑥덕거리기 시작했고, 그 대화 내용 속에는 계속 '현자', '샌드웜', '똥', '주점', '초토화' 같은 이야기들이 섞여 있었다.
"오빠 주점에서도 더러운 짓 했어?"
"닥쳐, 그런 거 아니니까. 저기...."
이 이미지를 어떻게든 수습해야 했다.
급히 마법사를 부르려고 했더니, 녀석은 혼비백산하여 급히 수정구를 꺼내 도망치기 시작했다.
아니, 잠깐만요, 내가 뭘 잘못했는데!
주변 사람들의 쑥덕거리는 소리가 더욱 커졌다.
도대체 누가 어떻게 소문을 퍼뜨리고 다닌 거야.
케인 경? 아니면 제이미? 설마 얀?
그렇게 시장 바닥 가운데에서 쪽이란 쪽을 다 팔고 있을 무렵.
급히 도망쳤던 마법사가 빠른 걸음으로 슬쩍 다가와 귀엣말했다.
"대표님이 올라오시랍니다. 5층으로 바로 올라가시면 될 거예요."
그리곤 다시 도망쳤다.
"...가자."
"가까이 붙지 말고 떨어져서 걸어 줘."
나는 로네와 함께 사람들을 피해 마법 원반 위로 도망쳤으나 원반은 우리 속도 모르고 천천히 상승했다.
아하하하.
지금이라면 경매장에 예쁘게 진열된 상품들이 어떤 느낌인지 이해할 수 있겠어.
그렇게 나와 로네가 정신적으로 완전히 무너졌을쯤, 우리는 5층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은 방금 전까지 사람들로 인해 소란스러웠던 공간이 거짓말인 것처럼 고요하고 아늑한 가정집이 펼쳐져 있었다.
아담한 벽난로에는 타닥거리는 소리를 내며 불이 붙어 있었고, 바닥의 러그는 직접 손으로 짠 듯, 엉성하면서도 포근한 느낌이었다.
"반갑수다. 이 식료품점의 대표 엘시아라고 하우."
우릴 맞이한 탑주 엘시아는 하얗게 센 머리가 인상 깊은 노인이었다.
얼굴 곳곳에는 세월을 증명하듯 검버섯과 주름이 가득했고, 동시에 그런 '늙음'이 범접하기 힘들 정도의 아우라가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흔들의자에 앉아 담요를 덮고, 그 위로 책 하나를 덮어 놓았다.
"독서 중이셨나 보군요."
"몸이 늙으니 취미라곤 이렇게 정적인 것밖에 못 하게 되우. 그래도 어려서부터 책을 봐 버릇했더니 적적하진 않더구먼."
"프리드먼. 좋은 마법 이론가지요."
엘시아 부인의 얼굴에 인자한 미소가 감돈다.
"현자라고 하더니, 마법서도 읽을 줄 아시우?"
"마나를 다루진 못해 마법을 발현할 수는 없지만, 이론적으로 어떤 방식인지 이해는 합니다. 많이 읽었거든요. 프리드먼의 마법 공식은 늘 저항적이고 진보적이어서 좋아했죠."
"후후. 나 같은 노인네에겐 이런 메시지가 너무 과격하우. 물론 싫지만은 않지. 먼 곳에서 응원해 주고 싶달까."
관심사가 비슷하다는 걸 알아서일까.
엘시아 부인의 얼굴에서 미미한 호의가 느껴졌다.
"좋구먼. 간만에 대화가 통하는 젊은이를 만나다니. 늙어서 호강을 하는 게지. 그래, 어쩐 일이우?"
"소문을 풀어 주셨으면 합니다."
엘시아 부인은 더 이야기해 보라는 듯 빤히 날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헬피온 공작령과 아프나이 백작령 사이에 교역로를 뚫었습니다. 공작가는 다음 주부터 해당 교역로를 이용해 상단을 운영하려고 합니다. 그럼 자연스럽게 헬피온 공작가 전체 물품의 시세가 변화하겠죠. 이를테면 몬스터 부산물 같은 것들이요."
그런데 엘시아 부인의 반응이 이상하다.
수십 년 동안 존재하지 않았던 교역로를 뚫었다는 얘기인데 별달리 반응이 없다.
심지어 상단 운영이 시작되면 몬스터 부산물뿐 아니라 다양한 식료품의 가격도 변화할 텐데.
왜 이렇게 무덤덤하지?
"역시 그 문제인가."
"역시...라고 하시면 이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던 겁니까?"
엄청나네.
이건 그때 함께 갔던 사람들밖에 모르는 1급 비밀인데.
그날 이후 찰스 일행은 헬피온 공작령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고.
케인이나 얀, 제이미에게도 비밀유지를 신신당부했다.
도대체 이런 소문은 어떻게 파악하는 거야.
6써클의 마법 실력을 바탕으로 공작령 곳곳을 도청이라도 하나?
내 의아함을 알아본 것일까.
엘시아 부인이 싱긋 웃었다.
"처음 딸아이가 교역로니 뭐니 떠들 때부터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우. 역시 그런 일을 준비했던 건가."
"딸이요?"
"저런, 자기소개도 제대로 안 했나 보구먼. 딸아이 이름은 제이미라고 하우."
헐.
그 성격 나쁜 마법사의 어머니가 엘시아 부인이었단 말야? 전혀 어울리지 않잖아!
엘시아 부인은 좀 차분하면서도 고수의 포스가 넘실거리는 사람인데.
그 딸은....
음, 말을 아끼자.
"듣자 하니 교역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그리즐리 쪽이랑 트러블을 만들었다지. 여러 가지 일이 펼쳐지겠구먼, 끌끌. 하고 싶은 대로 하시우. 나와 내 제자들, 그리고 직원들은 현자 나으리가 하는 일에 대해 어떤 간섭도 없을 터이니."
엘시아 부인은 그렇게 말하곤 다시 덮어 두었던 책을 펼쳤다.
"그럼 나는 책을 좀 더 읽으려고 하는데, 혹시 더 할 이야기가 남았는감?"
"아, 아뇨. 가 보겠습니다."
완곡한 축객령이었다.
나와 로네는 멍한 상태로 다시 원반 위에 올라탔고, 곧 1층을 통해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뭐랄까, 이렇게 쉽게 흘러가도 되는 게 맞나?
어라, 잠깐.
제이미 씨가 엘시아 부인의 딸이라고?
그럼 그 패왕이니 전설의 현자니 뭐니 하는 거, 제이미 씨가 소문을 낸 거야?!
제기랄, 다음에 만나면 가만두지 않을 테다!
* * *
다음 날.
우리는 아침 일찍 엘시아 부인의 마탑을 찾았다.
부인의 지원은 화끈했다.
무려 식료품 마탑의 1층의 중앙 섹터를 통 크게 내어 주었으니까.
"정말로 여길 다 써도 된다는 건가요?"
"그러게. 드디어 할망구가 미쳤나."
심지어 자신의 딸을 가이드로 붙여 주기까지 했으니.
제이미 씨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어디선가 주워 온 나뭇잎 대를 질겅질겅 씹으며 삐딱하게 선 채 우리를 바라보았다.
"아하하. 그럼 염치 불구하고 쓰겠습니다."
"어차피 탑의 일은 할망구 권한이라 내가 뭘 하진 않겠는데, 여기서 저번처럼 더러운 걸 팔아 대면 그대로 쫓아내거나 죽여 버린다."
"더러운 거라뇨."
"닥쳐. 지금도 가끔 내 손에서 그 감촉이나 냄새를 떠올릴 때가 있으니까."
고작 마석의 화기를 뺐다고 해서 마그마가 굳어 생긴 경질이 갑자기 말랑말랑해지고 푸석푸석해지고 그랬던 것도 아닌데.
"솔직히 말해 봐요. 패왕이니 뭐니 소문낸 거 제이미 씨죠."
"어? 그런 소문이 났어? 몰랐네."
"덕분에 저는 마을에서 이미지가 완전히 이상한 놈으로 찍혔다구요!"
"이상하긴. 정체불명의 고수. 얼마나 좋아. 뭔가 있어 보이지 않아? 멍청한 검사 놈들은 환장할 텐데."
"그러니까 본인이 내셨다?"
"아니, 그런 거 내주는 사람 있어서 좋겠다고. 그러고 보니까 억울하네, 너 왜 나만 의심해? 그 케인이라는 기사도 떠벌이 기색이 있던데? 너 나 마음에 안 드냐?"
어후, 내가 이 아가씨랑 말해 뭐하겠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자 제이미 씨의 기분이 좀 좋아진 모양이다.
"그래서 정확히 여기서 뭘 하려는 거야?"
내가 하려는 짓?
비정상적인 물건의 시세를 다시 정상적으로 되돌리는 것.
바로 가격 정상화다.
"로네."
"준비됐어."
로네는 준비해온 거대한 입간판을 매장 앞에 세워 놓았다.
거기에 적혀 있는 건 단 한 줄의 멘트.
[고르뎀 상단. 몬스터 부산물과 약초, 무기와 포션 등 잡다한 물건, 되는 만큼 다 삽니다. 정! 가! 매! 입!]
"다?"
입간판의 멘트를 읽던 제이미가 놀라서 날 바라보았다.
멘트가 너무 파격적이었나.
하지만 정말인걸.
상행을 오갈 여정비를 제외해도 약 8만 5천 정도의 비용을 사용할 수 있다.
이걸 모조리 투자한다면?
아무리 헬피온 공작령에 고급 물건들이 넘쳐난다고 해도 하루 이틀 정도는 감당이 가능하지.
자, 그럼 이쯤에서 바람잡이가 등장해야 하는데.
내가 영지에서 알고 있는, 그리고 그나마 믿을 만한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바로 방랑기사 출신의 케인.
나와 눈이 마주친 케인이 쭈뼛쭈뼛 나와 입을 열었다.
"이봐요, 현자님. 여기, 있는, 정가, 매입이, 무슨 뜻이까?"
으엑, 무슨 이런 개떡 같은 연기가 다 있어.
뜻이까? 뜻이까는 또 뭐야. 뜻입니까지. 당신 지금 혀 깨물었지!
교과서 읽어?! 이래서야 당신이 바람잡이인 게 다 티 나잖아.
옆을 보니 제이미는 웃음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킥킥거리고 있었고.
로네는 잠깐 죽상이 되더니, 이내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고 앞으로 뛰쳐나갔다.
"어서 오세요! 물건을 판매하시려는 건가요?"
"아, 네, 그게...."
"오, 이건 샐비너스 찻잎이군요!"
로네는 정말 필사적으로 우다다 대사를 뱉어 내더니 케인이 우물쭈물하며 들고 있던 주머니를 제멋대로 낚아채곤 그 안을 뒤져서 샐비너스 잎을 꺼내 들었다.
로네의 목소리는 어찌나 우렁차고 또렷한지.
이곳에 관심 없던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샐비너스 찻잎은 구하기가 힘들고 그 향이 우아하여 교양 있는 귀족들이라면 꼭 한 번은 마시고 싶어 할 정도로 인기 있는 상품이지요."
"그, 가격은...."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는 늘 정가로만 매입합니다! 제국의 주요 5대 상단에서 취급하는 샐비너스의 평균 가격은 1골드! 운송료와 보관료를 제외하고! 1골드의 30%! 300실버를 드리겠습니다! 괜찮으시죠. 손님?"
리드미컬하고 경쾌한 로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질수록 주변의 소음은 점차 줄어들었고, 어설프게나마 준비해 둔 톱니바퀴가 제 자리를 찾아간다.
거대한 흐름을 움직이는 바퀴가 중심에서.
로네와, 케인과, 샐비너스 찻잎이란 바퀴가 그 바깥에 하나씩, 하나씩.
마침내 모든 바퀴가 제자리를 찾았을 때.
"히끅."
하는 딸꾹질 소리가, 톱니바퀴가 돌면서 거대한 흐름이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16화
<16화 - 고장 난 마도구, 무기, 몬스터 부산물 삽니다(2)>
샐비너스 찻잎의 가격이 공개되자 어설픈 케인의 연기와 로네의 화려한 화술에 이끌려온 사람들에게서 소란이 일었다.
"뭐, 뭣?! 고작 저런 풀떼기가 300실버나 한다고?"
"1골드? 동네 앞에 널려 있는 풀떼기가 제국에선 1골드나 한단 말야?!"
"저게 샐비너스 찻잎이었어? 제국에 있을 땐 말로만 들어서 실물을 본 적이 없었는데."
헬피온 공작령에서 거래되는 물건은 대부분 10에서 50실버 내외.
식료품점에서 거래되는 식재료들이 1~2실버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렇게 비싼 가격이 아니다.
그런데 하찮아 보이는 잡품을 10배의 가격이나 부르고 사는 사람이 있다면?
"자, 잠깐! 아가씨, 이 물건의 가격은 얼마인가?"
"상태가 괜찮은 바실리스크의 비늘이네요. 마침 북해의 전사들이 몬스터 토벌을 위한 갑옷을 만들기 위해 이 비늘을 대규모로 매입하고 있죠. 지금이라면 비늘 1kg당 500실버는 드릴 수 있어요."
"500실버라고?! 바실리스크의 비늘이라면 우리 집에 한 100kg은 있어! 아니, 젠장! 어디에 쓸지 몰라서 다 내버렸던 것까지 합하면 1톤은 될 거야!"
"하하하. 다 가져오세요. 대신 1톤이나 매입해 드리니까 조금 할인해서 4천 골드밖에 못 드려요. 운반에 더 힘이 들 테니까."
"아가씨, 이건, 이건!"
"이건 오우거의 심줄인가요? 대단하네요. 이 정도 상태의 심줄은 본 적 없어요. 이거라면 엘프들의 머리카락으로 땋는다는 엘븐보우보다도 뛰어난 활시위가 만들어지겠네요. 이 정도라면 1골드는 능히 쳐 드려야죠."
"허허, 동네 애들 줄넘기에 쓰던 심줄이 1골드씩이나 나간다니! 애들이 금줄로 놀고 있었구만."
"어디에 뭘 쓴다고요?"
본격적으로 장이 열리고 로네의 능력이 빛을 발했다.
포션 거래부터 시작해 전 세계를 쏘다니며 여러 가지 상품을 닥치는 대로 취급했다고 했던가.
그래서인지 어지간한 물건은 대충 슥 보는 것 같은데도 정확한 견적이 나왔다.
게다가 가격 협상도 능숙하다.
우리의 예산 안에서 살 수 있는 물품과 없는 물품을 명확하게 판가름하니까.
"오빠, 좀 도와!"
"어어, 알았어."
사람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우리는 다른 식료품점이 문을 다 닫을 때까지 장사를 이어 갔다.
고작 오픈 첫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게의 소문은 무섭게 퍼졌고.
마침내 밤.
우리는 약 4만 3천 골드 치. 그러니까 단 하루 만에 자본금 절반 수준의 아이템을 대거 매입하는 데 성공했다.
더군다나 수익은 자본금의 몇 배 수준이니까.
"이거... 다 팔면 30만은 족히 나올 것 같아."
마침 로네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30만이라. 몇 배가 아니라 거의 10배의 돈을 번 거구나.
실감이 잘 나지 않는다.
"너, 혹시 사람들에게 30%라고 말한 것도 후려친 거 아냐?"
"무슨 소리야. 나는 정확히 제국 5대 상단의 평균 거래 시세를 이야기했지. 평균."
아하, 평균.
함정이 있었구만.
"그리고 너는 그 평균 거래 시세로 팔 생각이 없겠지?"
"당연하지. 여기에 있는 물건들은 다 물량이 희귀한 것들이라고. 가장 필요하다는 사람에게 가장 비싸게 팔아 치울 거야, 흐흐흐흐흐."
어우.
나랑 떨어져 있는 동안 정말 진성 상인이 다 되었구나.
어쩐지 동생의 모습이 낯설다.
"정말로 이 물건들은 여기 놔두고 퇴근해도 되죠?"
"우릴 못 믿는 거야? 우리 마탑은 신뢰가 자산이라고!"
"아뇨, 물건이 너무 많아서...."
"쓰잘데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꺼지기나 해. 소드마스터가 와도 못 뚫게 할 테니까."
"아하하, 그럼, 제이미 씨, 잘 부탁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마탑을 나서서 집을 향했다.
밖은 이미 완연하게 어둠이 내려앉은 한밤중이었다.
아름다운 달과 별이 반짝거리고, 멀리서 마물의 울음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아후."
동시에 하루 종일 생글생글 웃으며 물건값을 흥정하고 사람을 상대하면서 뛰어다니던 로네의 한숨 소리도 들렸다.
"고생했어."
"고생은. 내가 왕년에 게자일 공국에 갔을 땐 이것보다 훨씬 고생이었거든? 이런 건 고생 축에도 안 들지!"
나이도 어린 게 '나 때는', '왕년에는' 팔이라니.
애늙은이도 아니고 말이야.
나는 녀석의 머리를 한 차례 헤집어 주었다.
"오늘은 첫날이라서 좀 덜했지만 내일은 더 시끄러울 거야."
"걱정 마. 어떤 트러블이 일어나더라도 난 자신 있으니까!"
글쎄,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내가 걱정하는 건 단순한 손님과의 트러블이 아니라 거대한 곰 새끼 한 마리랑 생사를 다투는 싸움이거든.
내일이 되면, 곰이 자기 굴에서 웅크리고 있던 겨울잠을 깨고 나와서 시비를 걸어 주려나.
* * *
다음 날 마탑에 출근한 우리를 기다리던 건 곰이 아니라 한 마리, 아니 세 마리의 고릴라였다.
2m 20cm은 되어 보이는 거대한 키.
머리카락부터 발톱까지 근육으로 덮여 있을 것만 같은 우람한 체구.
그리고 반짝이는 대머리까지.
찾아온 세 사람이 모두 공통적으로 대머리인 건 좀 독특하군.
"고르뎀 상단? 상단주 좀 나와 보게."
"제가 상단주인데요!"
그는 로네를 힐끗 보더니 고개를 내젓곤 정확히 날 바라보았다.
"그럼 대표 말고 현자 나으리 좀 나와 보게."
사람을 눈앞에 두고 그렇게 기 싸움까지 하려고?
징글징글한 사람들이군.
"저를 찾으시나요?"
"반갑네. 그리즐리 용병대의 대장 다렌버그라고 하네."
"헬피온 공작가의 사무장 라워드 고르뎀입니다."
"잠깐 시간 되나?"
"아뇨. 바쁠 것 같은데요. 지금도 벌써부터 기다리는 손님들이 꽤 있어서."
고릴라의 머리에 불끈, 하고 힘줄이 나타났다.
지가 그리즐리 용병대의 대장이면 어쩔 거야.
나는 공작가의 사무장이거든?
"샌드웜 하나 쫓아냈다고 아주 기고만장하군. 숨겨 둔 힘이 엄청난가 보군."
"힘없는 사람은 당당하면 안 되나요? 그럼 전 찌그러져야겠네요?"
"...지금 당장이라도 네놈으로 아코디언 연주를 할 수 있어."
"그냥 아코디언을 사세요. 5실버면 됩니다."
와우, 눈빛이 살벌하다.
몸만 고릴라인 줄 알았는데, 눈빛도 야생의 맹수, 몬스터의 느낌 그대로네.
다렌버그는 한참 날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왜 잘 흘러가는 시장을 들쑤시는 거지?"
"헬피온 공작령의 시장이 정말로 잘 흘러가고 있었나요?"
"상인은 시장의 독이야.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전사들의 부산물을 싼값으로 흡수하며 제 배를 불리지. 그렇기에 전사들만의 시장을 만든 것이다."
"제가 보기엔 그 전사들도 상인과 다를 바 없던데요? 아니, 상인은 물건을 가공, 생산해서 팔기라도 하지, 그냥 물건만 뺑뺑이 돌릴 뿐이잖아요."
다렌버그의 입에서 으득, 하고 이빨 갈리는 소리가 났다.
슬슬 건드리신다 이거지?
그럼 나도 시작해 볼까.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제가 재미있는 일을 겪었거든요. 공무 때문에 용병을 몇 명 고용했었죠. 그런데 부탁한 일을 완수하기는커녕 절 묻어 버리고 돈만 챙기려고 한 사람들이 있었거든요. 그거 용병 세계에서 심각한 룰 위반 아닌가요?"
다렌버그와 두 호위의 눈빛이 한층 더 매서워졌다.
그럴 수밖에.
내가 개인적으로 좀 알아봤지.
용병 세계에서 제대로 일을 완수하지 못하고 더 나아가서 고용주까지 위협하게 된다?
그건 용병이 오랫동안 구축해 놓은 신뢰를 완전히 깨뜨리는 행위지.
용병의 세계는 좁다.
워낙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발 없는 소문이 정말로 전 세계 규모로 퍼지기 일쑤라든가.
더군다나 그리즐리 용병대라고 하면 전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은 용병대 아닌가.
주목을 받는 만큼 소문도 더욱 빨리 퍼지는 법이지.
그런 곳에 소속된 용병이 고용주의 목을 노린다?
그럼 그때부터 최고의 용병대란 명성은 싸그리 무너지는 거다.
당장 용병대에 소속된 용병들 중 명예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우르르 나가기 시작한다던데?
평생 여기서만 먹고산다면 상관없겠지만....
이렇게 자기 목숨줄을 위협받는 상황에선 다른 방식으로 들리겠지.
"그만하지."
"그 용병이 계속 거들먹거리더군요. 자신은 그리즐리 용병대 소속이라고, 저 하나 정도는 엿 먹여도 될 거라고."
"어디서 사기꾼한테 걸린 모양이군. 긍지 높은 우리 용병대에 그런 놈은 없다."
잔뜩 깔린 목소리가 불편한 심기를 대변해 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주변 반응이 심상찮았거든.
엘시아의 마탑은 헬피온 공작령에서 유일한 식료품점이자, 소문이 집결되는 곳.
어제의 열풍 탓인지 아직 이른 아침이지만 물품을 팔기 위해 대기하는 사람들이 꽤 많거든.
저들 중에선 분명히 용병들도 있을 것이고, 어쩌면 그리즐리 용병대에 안 좋은 감정을 가진 자들도 있을지 모르지.
아직까지는 다렌버그의 기세 때문인지 직접적으로 입방아를 찧는 사람은 없었지만.
술렁거리는 공기만큼은 피부를 통해 저릿저릿하게 전해져 온다.
그 속에 섞여 있는 다렌버그의 살기까지도.
아마 이러한 반응으로 보면 여기까지가 다렌버그가 용납할 수 있는 도발 범위의 마지노선이 아닐까.
한 걸음 더 넘어서는 순간, 이러한 긴장은 완전히 깨지겠지.
그렇기에 나는 망설임 없이 선을 넘었다.
"그래요? 찰스, 테일러, 프레드릭. 최근 그리즐리 용병대 소속 세 용병의 얼굴이 보이지 않던데요."
주저 없이 한 걸음을 성큼 내딛었다.
그 순간 다렌버그의 살기가 한순간 폭발하듯 증폭했다 사라졌다.
그것은 마치 다렌버그의 이성이란 벽이 무너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세 명은 며칠 전 용병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며 낙향했다. 만일 정말로 그들이 그런 짓을 벌였다면 사과하지. 하지만 진실은 아무것도 모르는 거 아닌가."
"그렇죠. 진실은 모르는 법이죠."
"곧 가게를 오픈할 시간 같은데, 말싸움은 여기까지만 하고 물러나도록 하지. 다음에 만났을 때 대가리가 쪼개져도 실실 쪼갤 수 있는지 기대하겠네."
"고맙네요. 헬피온 공작님 다음으로 저한테 기대가 된다고 해 주시는 분이라서. 역시 신뢰받는 건 기분이 좋네요."
"너 이 새X, 진짜 끝까지 보자 보자 하니까!"
도발이 잘 먹혔던 건가.
옆에서 엄청 부들부들 떨던 새끼고릴라 한 마리가 결국 참지 못하고 내 멱살을 잡았다.
아니, 잡으려고 했다.
왜일까.
갑자기 번뜩이며 헬피온 공작의 선이 눈앞에 떠오른 것은.
나는 나도 모르게 손날을 세워 마치 검처럼 선을 따라 움직인다.
세상에 가득한, 추잡하고 지저분한 낙서를 지우는 고고한 선.
그 선으로 날 잡으려던 용병의 손목을....
"그만!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나대는 거야!"
앙칼진 고함이 그와 날 막아섰고, 동시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내가 방금 무슨 짓을 하려고 한 거지?
"다렌버그. 지금 우리 마탑과 본격적으로 한판 뜨겠다는 건가?"
목소리의 주인공은 제이미 씨였다.
"엘시아 할망구의 딸인가. 지랄 맞은 성격 하고는."
"제이미다! 이름을 불러 멍청한 새끼야!"
"쯧. 어쨌거나 우리가 한 경고를 잊지 말도록. 얘들아, 가자."
다렌버그는 그렇게 엄포를 놓더니 성큼성큼 부하들과 함께 사라졌다.
후.
"고맙습니다. 제이미 씨."
"고맙긴. 어디 함부로 우리 할망구 마탑에서 저딴 짓을 해 대고 지랄이야. 어이, 사무장. 저런 놈들 또 오면 말해. 아주 조사 버릴라니까."
하하.
나는 실없이 웃으며 슬쩍 손을 내려 보았다.
마지막에 그 선을 따라 그렸던 내 손.
만약 내 손이, 그 용병의 팔에 닿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나의 고민은 이내, 밀려든 손님들의 아우성에 묻혀 사라졌다.
이날.
우리는 오후가 채 끝나기 전 남은 자본금 전부를 소진한 채 조기 마감했다.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17화
<17화 - 고장 난 마도구, 무기, 몬스터 부산물 삽니다(3)>
"대장, 진짜로 참아야 합니까?"
"지금이라도 당장 가서 저 녀석들 담가 버릴까요? 가서 주먹으로 머리만 내려쳐도 바로 뒈질 것 같은데."
"닥쳐, 이것들아. 대갈빡 굴리는 중이니까."
부하들의 아우성에 다렌버그는 쯧, 하고 한 차례 혀를 찼다.
'사무장 새X, 아가리는 마왕보다 잘 터는 것 같던데.'
툭툭 건드리면서 비아냥거리는 게 일품이었다.
더군다나 마지막.
선을 넘을 듯 말 듯 줄타기하던 녀석이 날린 마지막 펀치는 의도적으로 선을 넘은 게 분명했다.
성질 같아서는 그곳에서 단매에 쳐 죽이고 싶었지만 걸리는 게 너무 많았다.
하나는 그가 헬피온 공작가의 가신이라는 점.
두 번째 이유는.
"어라? 너 그 손목 왜 그러냐?"
"이거 뭐야. 피 아냐. 나 어디서 긁혔나."
"미친놈아,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네가 어디 긁힌다고 핏방울 흘릴 몸이야?"
부하들의 호들갑에 다렌버그는 부하의 팔을 바라보았다.
마탑에서 사무장 녀석에게 손을 뻗었던 부하의 팔.
그곳은 마치 뭉툭한 둔기에 스친 것마냥 찢어진 상처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아까 그 마법사 년이 뭔 짓을 한 건가?"
"크크, 너 한 방 먹었구나?"
"젠장, 당장 마탑으로 쳐들어가서...."
다렌버그는 다시 방금 전 상황을 복기했다.
부하 녀석이 손을 뻗었었지. 그때 마나의 움직임이 있었나?
아니, 그런 기색은 없었다.
제이미의 실력은 고작 5써클.
뭔가를 했다면 소드마스터인 자신의 기감을 속이지 못했을 거다.
움직인 거라고는 고작 사무장의 허둥거리는 손짓... 손짓?
다렌버그의 양미간이 좁혀졌다.
부하 녀석의 실력은 소드 익스퍼트 상급.
고작 일반적인 샌님이 반응할 수 없는 속도였을 터.
그런데 그걸 반응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손까지 거의 잡을 뻔하지 않았나?
설마 저잣거리에 떠도는 그 소문이 진짜일까.
사무장이 기세만으로 샌드맨을 쫓아낸 어마어마한 고수라는 소문.
상대는 무려 헬피온 공작가의 가신.
자신조차 파악하지 못한 숨겨 둔 비밀이 있을지도 모른다.
"어이."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다렌버그는 두 사람의 잡담을 중지시켰다.
"찰스가 교역로의 위치를 알고 있댔지. 녀석들에게 원한이 있다고 했고."
"네, 그렇습니다. 지금은 공작령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근처에서 야영을 하고 있죠."
"사무장을 치는 건 관둬. 아무리 개 같아도 헬피온 공작가의 가신이야. 후환을 생각해라."
"몰래 처리하면 안 되나요?"
"야, 그게 되겠냐!"
손에 상처를 입은 부하가 멍청하게 되물었고, 다른 한 녀석이 버럭 하고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다렌버그의 생각 역시 처음 이야기한 부하와 같았다.
"물론 우리가 받은 수치를 그냥 넘기겠다는 소린 아니야. 그건 그리즐리 용병대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이지."
그의 표정에서 저열함이 묻어 나왔다.
"사무장 옆에 있던 계집. 사무장의 동생이라고 했나. 그쪽을 노린다. 어제오늘 제법 큰돈을 쓴 것 같던데, 그 돈을 그대로 우리가 받아먹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다렌버그는 멀리 공작성을 바라보았다.
희미하게 보이는 공간.
저곳에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 있다.
그 강함에 매료되어서 영지에 찾아온 것도 벌써 12년이다.
그러나 공작은 자신의 가신만을 한정적으로 만날 뿐, 자신을 찾아온 전사들을 지도하기는커녕 대련 한 번조차 제대로 해 준 적 없었다.
너무 오랫동안 버티고 있었나 보다.
저런 새파란 것들에게조차 무시를 당하니 말이지.
"용병대의 정예를 몇 명 추리고 마차와 함께 찰스 녀석들에게 보내. 일을 처리하면 공작령을 뜨고 바로 아프나이 백작령으로 넘어가고 죽은 듯이 살라고."
명령을 들은 부하들이 고개를 숙이고 빠르게 움직였다.
모두 떠난 그 자리에서 다렌버그는 한참을 더 서 있었다.
해가 지고, 긴 그림자가 공작성을 향한 미련처럼 길게 뻗을 때까지.
* * *
헬피온 공작은 연무장에서 수련에 한창이었다.
벗은 상체에는 수십 년 동안 함께한 상처들이 훈장처럼 곳곳에 수놓아 있었고.
상처조차 가리지 못한 단단하고 오밀조밀한 근육들이 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최근 공작의 수련 방법은 다시금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느린 속도로 검을 움직인다.
횡베기를 오전 내내 꼬박 하거나, 찌르기를 오후 내내 하기도 한다.
아주 미세하게 검이 움직이는 순간의 전신 근육과 주변 환경의 변화를 집중하면서.
자신의 움직임이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지 일일이 몸에 새겨 넣는 작업이었다.
"공작님."
그런 그의 훈련을 중단시킨 건 아펠 집사장의 목소리였다.
"사무장의 예상이 맞았습니다. 하녀장이 막, 다렌버그가 식료품점을 찾았고, 이후 부하들에게 로네 아가씨의 습격을 명했다고 알려 왔습니다."
"그런가. 사무장의 예측이 정확했군."
헬피온 공작은 한 차례 호흡을 정돈하며 검을 내려놓았다.
오늘 오전 식사 시간, 사무장이 자신을 찾아왔었다.
'그리즐리 용병단에서 절 찾아올 겁니다. 오늘 그들을 도발할 거거든요. 도발을 당한 그들의 행보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녀장님이 암살자 출신이라고 들었는데, 오늘 하루만 빌려주실 수 있나요?'
무려 가신 한 명을 빌려달라는 요청이었다.
자기보다 공작가에서 일한 시간이 긴 선배이자 무려 소드마스터 상급을 목전에 둔 암살자를.
일단 한 번 믿기로 하면 꾸준히 믿는 편이라 군말 없이 빌려주긴 했는데 정말 그때그때마다 건수를 잡아낼 줄이야.
그것도 단 하루 만에.
"세력 하나를 몰아내게 생겼군."
"스스로 나가는 거죠."
"내가 그들에게 너무 무심했던 걸까?"
아펠은 말을 아꼈다.
누군가의 탓을 하기에 현실은 너무 복잡했으니까.
헬피온 공작은 공작령 모두를 평등하게 대우했다.
그 안에서 엘시아 같은 사람은 자신만의 마탑을 건축해 공작의 아래에서 편안한 노후를 보내고 있었고.
다렌버그 같은 자들은 만족하지 못했을 뿐이다.
단지.
"공작님의 휘하에 있는 사람들만큼은 진심으로 믿고 맡기시지 않습니까."
"그렇지. 지금도 그렇고."
공작은 연무장 구석에 내버려 둔 자신의 상의를 걸쳤다.
"가지."
"직접 처리하실 생각이십니까?"
"사무장 가족이잖은가. 안전한 게 좋겠지. 내 일은 내가 매듭짓는 것이 깔끔하고 말이야."
* * *
나는 입구에서 로네를 배웅했다.
무려 마차 다섯 대, 그리고 일꾼 열 명을 고용한 대규모 상행이었다.
"내가 안 따라가도 될까?"
"걱정하지 마. 내가 언제까지 어린아이인 줄 알아? 내가 오빠보다 더 상단 생활을 오래했다구."
아무리 로네가 당차게 이런 말을 하지만, 한 번 동생은 영원한 동생이지.
"분명 습격이 있을 거야. 몸조심해야 해."
"벌써 100번은 더 말했어. 걱정 마. 알아서 잘해. 설마 내가 상단행을 하면서 습격 한 번 안 당해 봤을까 봐? 오빠가 그렇게 걱정하니까 공작님도 병력을 내주신 거 아냐."
그렇긴 하지만.
아무리 공작님의 병력이라고 해도 상대는 그리즐리 용병대다.
아펠 집사장이나 하녀장이 직접 오는 게 아니라 그 부하들을 보내는 것에 불과하다면 불안한 게 당연하지.
"아프나이 백작령을 지나 어디로 갈 거야?"
"북해 쪽으로 먼저 가려고. 바실리크의 비늘을 비싸게 매입하고 있다니까 거기 가면 아마 1kg당 3골드까지는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가는 길에 제국에 들려서 샐비너스 차도 팔고, 무기들도 팔고 뭐도 팔고...."
정말로 긴 여정이다.
"시간은?"
"1년 정도 생각하고 있어."
"믿을 만한 상단으로 보내 줘야 한다. 너도 가급적이면 6개월 안에 와 주고."
"알고 있어. 이렇게 좋은 시장을 놔두고 남 좋은 일만 할 수는 없으니까."
"내가 그때 부탁한 품목들은 기억하고 있지?"
로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헬피온 영지는 이제 막 걸음마를 마쳤다.
공작의 힘을 약하게 만드는 마을 내 세력을 치워 버렸고, 비정상적으로 막혀 있던 교역로를 뚫었다.
지금 당장이야 몬스터들의 부산물로 먹고사는 게 문제없겠지만 아직까지 갈 길이 멀었다.
좀 더 규모를 넓혀서, 진짜 공작령이라고 할 정도까지 세력을 굳건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몬스터들의 영지를 지금보다 더 왕국령 바깥까지 밀어낼 필요가 있다.
그 계획이 완성되기 위해선 로네에게 부탁한 도구들이 필수였으니.
"그럼 오빠 다음에 봐."
로네는 그렇게 가벼운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아니, 저 인사를 가볍다고 할 수 있을까.
'다음에,'
또 만날 것을 기약하는 인사는 무게를 지녔다.
"그래. 또 봐."
나는 로네가 떠난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공작가 건물로 돌아갔다.
* * *
과거 샌드웜의 서식지였던 숲속은 무척이나 고요했다.
며칠 전 고요함의 이유가 몬스터 출몰지였기 때문이었다면, 지금은 샌드웜이라는 서식지의 주인이 모조리 빠져나갔기에 생긴 적막이었다.
단지 하나 비슷한 점이 있다면.
숲 곳곳에는 날카로운 예기와 살기가 공기를 묵직하게 눌러 왔다.
"왔다."
숲속에 은폐한 채 조용히 숨죽이고 있던 찰스의 눈에 말과 마차가 들어왔다.
다섯 대의 마차.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하나둘셋 하면 최대한 빠르게 합공해서 생존자를 제거하고 물건만 챙겨서 뜬다."
찰스는 오늘을 위해 잘 갈아 놓았던 자신의 검을 꺼내 들었다.
'감히 그날 나를 엿 먹였겠다.'
이미 찰스의 머릿속에 자신이 그들을 먼저 골탕 먹이려 했다는 사실은 사라졌고, 오로지 복수하겠다는 일념 하나만 남아 있었다.
"쳐."
찰스의 신호가 떨어진 즉시 매복해 있던 자들이 움직였다.
나무와 나무 사이를 거구에 어울리지 않는 날랜 몸짓으로 통과하더니, 무기를 들고 단숨에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챙!
날카로운 무기의 파공음이 울렸고.
풀썩.
하는 소리와 함께 사람이 쓰러졌다.
그리고 찰스는 예전, 샌드웜 때와 비슷한 이질감을 느꼈다.
일이 잘못되어 간다는 감각이었다.
왜냐하면 일수에 쓰러진 것이 자신의 동료였기 때문이다.
"마차에 물건은 없고 사람만 있어!"
"없어! 도구도 없고 사무장 동생도, 아무것도 없다고!"
곳곳에서 비명이 울렸다.
그들의 말대로였다.
마차 안에는 어떠한 물품도 찾아볼 수 없었고 단지 수십 명의 훈련받은 전사들의 무기가 흉흉히 빛나고 있었을 뿐이다.
곧이어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지며. 그리즐리 용병대는 명성과 달리 허무하게 픽픽 쓰러졌다.
사람들과 용병들 사이의 실력 격차가 큰 것은 아니었다.
단지 압도적인 실력자 세 명이 마차 측에 존재했을 뿐.
한 명은 소드마스터 중급의 벽을 넘은 아펠 집사장.
다른 한 명은 암살 길드의 악몽이라고 불렸던 셰리나 하녀장.
마지막으로 온몸을 무기처럼 쓴다는 S급 용병 체트록스까지.
숲 곳곳에서 채 비명조차 되지 못한 단말마가 계속되었다.
이내 다렌버그와 30년가량을 함께 싸워 왔던 그리즐리 용병대의 정예 중 살아남은 사람은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 * *
헬피온 공작은 라워드가 서류로 보고한 계획을 떠올렸다.
<공작령의 발전을 위해 모든 권력은 공작과 공작가가 다시금 회수하여야 한다.>
이 단순한 명제를 성립시키기 위해 어디까지 설계한 것일까.
로네는 엘시아 부인의 마탑에서 5천 골드나 주고 구입한 대용량 마법주머니에 모든 교역품을 넣고 홀로 유유히 떠났다.
즉, 대형 상단과 마차, 그리고 교역로에 집착했던 다렌버그나 찰스는 함정에 빠진 것이었다.
애초에 그 많은 물품들을 습격하기 쉽게 마차로 옮긴다는 발상 자체가 순진했다.
더군다나 찰스가 그리즐리 용병대 소속이었던 만큼 교역로에 대한 정보가 그리즐리 용병대에 퍼졌을 것이고, 그 교역로에 그리즐리 용병대가 잠복할 거라는 사실은 어린아이도 유추할 수 있었다.
다렌버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역을 위해선 교역로를 사용할 수밖에 없을 거라 판단했던 모양인데 그것이 실책이었다.
과연 그 실책이 단순히 멍청했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자신이었더라면 올바른 판단을 내렸을까?
헬피온 공작은 자신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헬피온 공작은 훌륭한 전략을 세운 사무장을 존중하는 마음에 직접 나선 것이다.
공작은 자신의 애병 스톰브링어를 바닥으로 늘어뜨렸다.
어찌나 빠르고, 간결하게 움직인 것인지 수십 명의 용병을 상대하면서도 단 한 방울의 핏방울이 묻지 않았다.
고요하게 널브러진 죽음들 사이에서.
"다렌버그. 가급적이면 도망치지 말아 주게. 모든 일은 여기서 끝내고 싶으니 말이네."
"제기럴, 간밤에 꿈자리가 사납더라니...."
다렌버그와 헬피온 공작이 마주했다.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18화
<18화 - 칼보다 강한 펜(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