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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망 플래그밖에 없는 악역에 빙의했다 >

* 글: 서하가

* 책 소개

가만히 내버려 둬도 알아서 죽어버리는 게임 속 악당 NPC, 류리크.

그게 나였다.

***

◈ 001

『…그렇게, 이야기는 끝이 난다…

…Thank you for 한유진

』천천히 내려오던 엔딩스크롤이 이내 멈추더니, 텍스트 파일의 커서처럼 점멸했다.

"하."

감탄인지 탄식인지 모를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모니터에 무언가 반짝거린다.

[ 업적 달성 : 플레이어 ]

게임의 모든 엔딩을 보았을 때 주는 업적, 아마 전 세계에서 내가 유일할 터였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채팅창이 무서운 속도로 올라갔다.

―세계 최초 퍼펙 엔딩 업적! 겟또다제!

―스트리머, 당신은 인간이 맞습니까?

―이런 미친. 결국 황제로 진엔딩을 봤네.

―클리어 스펙 좀 올려줘요!

―방송 다시보기로 확인해요.

―볼 것도 없어. 특성이 죄다 S로 도배야. 하도 많아서 A급은 아예 보이도 않더만.

―점심 나가서 먹고 싶어지는 혐짤.jpg

가슴은 격하게 두근거렸지만, 동시에 짙은 허탈감도 느껴졌다. 모든 엔딩을 보고 나니, 이 다음에 무슨 방송을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내가 할 줄 아는 건, 루시아사가라는 게임뿐이니까.

'컨셉 플레이, 혹은 스스로 페널티를 주고 플레이하는 방송을 해야 하나….'

잠깐 동안 그런 생각들이 떠올랐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방송시간이 24시간을 넘긴 뒤로 숫자 세길 멈췄는데… 밖을 보니 아침이었다.

머리가 멍해지면서 뒷골이 땅겨왔다. 엔딩이 코앞이라고 너무 달린 모양이었다. 몰려드는 졸음에 나는 슬슬 방송을 끝내기로 했다.

"엔딩도 봤으니까, 오늘 방송은 여기까지…."

그때 눈에 띄는 채팅이 하나 올라왔다.

―안녕하십니까. 루시아사가를 개발하고 있는 아스트로 게임즈입니다.

그 한마디에 채팅창이 다시 뜨겁게 타올랐다.

―어그로 오지네 ㅋㅋㅋ 머기업 되더니 별 관종이 다 꼬여 ㅋㅋㅋ

―저거 찐임. 가끔 개발사에서 루시아사가 스트리머 모니터링함. 아마 최초 업적 때문에 찾아온 듯.

―헐? 저게 진짜라고?

―외쳐! 월클! 스트리머!

나는 채팅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현재 저희 아스트로 게임즈에서는 루시아사가의 DLC를 개발하고 있습니다. 게임 내에서 플레이했던 NPC로 루시아사가의 세계를 모험하는 경험을 선사하고자 합니다.

―NPC로 플레이한다고? 와 대박.

―아제스 눈나로 무쌍 플레이 가즈아아!

뜬금없는 소식에 피로가 가시며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DLC라면 아직 더 할 것이 남아 있다는 것 아닌가.

그리고 루시아사가의 DLC라면 새로운 스토리가 있을 게 분명했다.

―저희 아스트로 게임즈는 최초로 '플레이어' 업적을 획득하신 스트리머 님께, DLC의 테스트 플레이를 요청 드리고 싶습니다.

최초. DLC. 테스트 플레이.

아마 테스트 플레이라니 방송으로 송출은 못 하겠지만, 게임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나는 흥분감을 감추며 침착하게 물어봤다.

"DLC는 NPC로 플레이하는 거라고 하셨는데, 저는 어떤 NPC를 테스트하게 되죠?"

듣자마자 수많은 NPC들이 떠올랐다. 검성 아제스, 거신 욘, 수왕 알파스… 강력한 NPC들로 게임을 진행한다면, 치트 수준의 플레이가 가능할 터다.

사기 캐릭터들로 게임 할 생각을 하니, 손가락이 좀처럼 가만히 있질 못 한다.

그러나 개발사에서 들려온 대답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류리크로 가능할까요?

―류리크면… 아스트레이의?

―네. 현재 저희는 류리크로 하는 플레이를 최고 수준의 난이도라고 측정하고 있습니다. 난이도 테스트를 위한 것도 겸하고 있어서, 이쪽으로 플레이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류리크 바타체스 폰 드라스카 아스트레이. 초중반에 주인공의 모험을 방해하는 악역 NPC로 나 역시 여러 차례 겪어본 적 있는 NPC였다.

다만 굳이 공략을 찾아볼 만한 악역이 아니라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나는 일단 류리크에 대해 알아보고자 루시아사가 꺼무위키에 들어갔다.

―――― 『 류리크 바타체스 폰 드라스카 아스트레이 』 ――――

▶ 직업 : [ 황족, 조각가 ]

▶ 성향 : [ 악 ]

▶ 특성 : [ 8개 ]

▶ 평판(악명) : [ 1,380 ]

―――――――――――――――――――――――――――――――

―――― 『 특성 일람 』 ――――

▶ 검치 (A)

▶ 조각 (A)

▶ 예술적 안목 (A)

▶ 신동 (A)

▶ 마도 (E-)

▶ 악인 (C)

▶ 폐인 (A)

▶ 약물 중독 (A)

――――――――――――――――

뭔가 A가 잔뜩 있었지만, 전혀 좋지 않았다. 오히려 생각보다 훨씬 처참한 능력치였다.

시청자들의 반응도 부정적이었다.

―이건 쌉 에바 아냐?

―특성이 구린 정도가 아니라, 완전 페널티로 떡칠해 놨잖아. 검치 A는 선 넘었지.

박치, 몸치처럼 검을 못 다룬다고 해서 검치劍癡, 그것이 무려 A였다. 이 정도면 검과는 평생 인연을 끊는 편이 좋았다. 거기에 근접 무기에 대한 페널티도 상당할 터.

그뿐만이 아니었다.

―약물 중독 A는 처음 봤음. 약물을 쓰면 계속 스탯이 떨어지는데, 그렇다고 끊으면 끊는 대로 금단 현상 때문에 뒈지잖아. 플레이가 가능하긴 함?

―아니, 야발. 그게 말이 됨?

―팩트임. C까지는 어떻게 끊는 거 봤는데, B부턴 답도 없음. 근데 얘는 심지어 A잖아.

그 밖에도 평판(명성)을 평판(악명)으로 바꾸는 악인도 있고, 폐인이 A도 만만치 않았다. 폐인이 A랭크 정도 되면, 운동하다가 골로 갈 수도 있는 수준이니까.

―그래도 조각술이 높으니까, 조각가 엔딩은 볼 수 있지 않을까?

―ㅋㅋ그것도 미적 감각이 있어야 하는 거지. 여기 주인장도 작품성이 아니라, 시세조작으로 작품 가치 끌어올려서 겨우 엔딩 본 거잖아.

―하긴 우리 주인장 그림 실력은 ㄹㅇ 현대미술 수준이었음. 점 하나 찍고 몇십억 받는 그런 거.

채팅창이 시청자들의 갑론을박으로 시끄러워졌다. 류리크로 플레이가 가능하긴 한 건가. DLC로 발매할 거면 상향을 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

한편 나는 전혀 다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다. 이 캐릭터의 진짜 문제점은 달리 있었으니까.

"이 캐릭터의 사망 플래그는 해결이 된 겁니까?"

애당초 이건 죽으라고 만든 캐릭터였다.

―어, 그러게. 류리크는 원래 가만히 내버려 두면 알아서 죽어버리잖아.

―ㅇㅇ. 그거 때문에 류리크 살리기 프로젝트 하던 스트리머도 있었음.

―그거 김아무개수무개지? 걔 106회차 하다가 샷건 치면서 때려쳤잖아. 이 새낀 성녀가 와도 못 살린다고.

―그래도 그때 찍은 류리크 사망씬 모음집으로 조회수 300만임 빨았음ㅋㅋㅋ

―엌ㅋㅋ 그거면 쌉이득 아닌감?

류리크는 플레이어가 초반에 죽일 수 없는 NPC다. 대신 초반만 넘기면 알아서 죽어버리기에, 대다수의 유저들이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스트리머 님께서 테스트하실 캐릭터는 본편의 류리크와 동일한 스펙입니다. 그걸 감안해서, 가능하겠습니까?

불가능하다. 나는 즉답할 수 있었다. 이건 캐릭터가 구리다는 개념을 넘어 숨만 쉬어도 스탯이 깎이고, 사망 플래그가 특성보다도 많은 놈이었다.

이걸로 엔딩을 보라는 건, 애당초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 무렵 영상 도네가 하나 도착했다.

「 류리크 사망씬 모음집 」

예의 그 300만 조회수를 찍었다는 영상이었다. 나는 그걸 재생하면서 스트리머답게 말했다.

"물론 쌉가능이죠."

* * *

게임 하는 동안에는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커뮤니티의 반응이 뜨거웠다. 전 세계 최초로 업적을 달성한 덕분에, 해외에서도 많이들 찾아봐 최고 시청자를 찍은 것이었다.

사람들도 레전드니 뭐니 역대급이라는 반응이 많았다.

한편 DLC의 테스트 플레이를 한다는 떡밥도 뜨거웠다.

'테스트 플레이면 아스트로 게임즈 본사에 가서 하는 건가?'

본사로 찾아가는 방송은 켜도 되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메일함을 정리하는데 낯익은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아스트로… 게임즈?"

가끔가다 창사 1주년, 루시아사가 서비스 1주년 등 이벤트 때마다 연락을 줬었기에 그다지 낯설진 않았다.

나는 별 다른 의심 없이 메일을 열었다.

―딸각.

메일을 열자 어떤 웹페이지가 떠올랐다. 순간 바이러스인가 싶었지만,

[ 아스트로게임즈의 '루시아사가'를 플레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귀하께서 DLC의 '플레이어'로 선정되신 바, 앞서 간단한 설문 조사를 진행하고자 합니다. ]

간단한 소개말을 뒤로 선택지가 두 개 나타났다.

[ 1. 현재의 류리크로도 정상적인 플레이가 가능하다. ]

[ 2. 현재의 류리크로는 정상적인 플레이가 불가능하다. ]

후자를 택했다.

시청자들 앞에서야 '쌉가능'이라 말했지만. 내가 봐도 답이 없는 캐릭터였으니까.

[ 류리크를 상향한다면, 어떤 것이 필요하겠는가. ]

[ ]

마치 주관식처럼 써도 된다는 것처럼 공란이 주어졌다. 혹시 1대1로 상담사가 붙어 있는 건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을 적어 넣었다.

[ 약물 중독 특성 삭제 ]

숨만 쉬어도 능력치를 갉아먹는 최악의 특성이자, 종국에는 목숨마저 앗아갈 수 있는 극악무도한 특성.

사실 이것만 없어도 류리크는 '꽤 할 만한 캐릭터'가 될 수 있을 터였다. 허나,

―삐빅.

웹페이지에서 그런 경고음이 들리더니, 이내 메시지가 떠올랐다.

[ 불가 ]

[ 불가 사유 : 류리크 캐릭터의 개연성 파괴 ]

그 뒤, 새로운 것을 입력하라는 양 공란이 다시 떠올랐다.

[ ]

나는 잠시 고민한 끝에 새로운 특성을 적어 넣었다. 혹여나 이번에도 불가 처리를 당할까 싶어 조금 구체적으로 적어 넣었다.

[ 철인 특성 E 랭크 부여 ]

박카스라고도 불리는 특성으로, E랭크의 효과는 '회복력이 약간 증가한다.' '피로를 덜 느끼게 된다.' 정도밖에 없다.

나중에 랭크가 높아지면 굉장한 사기 특성이 되지만, 어쨌거나 내가 제시한 건 E 랭크. 이 정도면 줄 만하지 않냐, 나는 의기양양하게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삐빅.

[ 불가 ]

[ 불가 사유 : 폐인 특성과의 관계성으로 인한 개연성 파괴 ]

거참 까다롭군.

그놈의 개연성 때문에 캐릭터를 쓸 만하게 바꾸는 건 포기해야 할 듯싶었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는 대신 개연성으로 납득시킬 수 있는 요구를 꺼내 들었다.

심지어 이번에는 읽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구체적인 서술까지 덧붙였다.

[ 위엄 특성 추가. 이는 황족이라는 설정이 있기에 개연성이 성립함. ]

―띠링!

[ 허가 ]

[ '위엄' 특성 추가 ]

어라, 이건 또 쿨하게 추가해줬다. 이걸 보니 개연성만 성립한다면, 꽤 관대하게 상향을 해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철인-폐인의 관계성처럼 기존의 설정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황족에게 위엄이 있다.' 같은 개연성이 성립하는 특성.

무엇이 있을까, 나는 꽤 오랜 시간 고민했다. 그러다가 번뜩이며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 파마의 성흔 특성 추가 ]

조금 무리한 요구인가, 잠깐 그런 생각을 하자니 눈앞에 파마의 성흔에 관한 정보가 떠올랐다.

―――― 『 파마(破魔)의 성흔 』 ――――

▶ 분류 : 고유 특성

▶ 등급 : -

▶ 설명

: 고대 바타체스의 혈족에게 계승되던 고유 특성.

: 세대를 거듭하면서 자연히 사라졌지만, 아주 드물게 바타체스의 일족에게서 발현된다.

▶ 효과

: 최대 3획의 성흔을 가진다.

: 획을 소모하며 마술(魔術)을 무효화한다.

: 소모된 성흔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회복된다.

――――――――――――――――――――

네가 얼마나 무리한 요구를 했는지 깨달으라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알람이 울렸다.

―띠링!

[ 허가 ]

[ '파마의 성흔' 특성 추가 ]

오, 이걸 허가해준다니. 이 정도면 상향 패치치고 나쁘지 않다.

[ 이상으로 긴급 밸런스 패치를 종료하겠습니다. ]

뭔가 더 요구하고 싶었지만, 더는 없는 모양이었는지 웹페이지는 그대로 종료되었다. 그런데 웹페이지가 꺼지고 남은 메일함에 이상한 것이 떠올랐다.

내가 방금 전 열었던 것과 같이 '아스트로게임즈'에서 보낸 메일이었다.

―안녕하십니까. 한유진 님, 방송에서 채팅 쳤던 GM라기온입니다.

이상했다. 나는 방금 설문을 끝냈는데, 왜 또 메일이 와있는 것인가.

"방금 메일은… 뭐였던 거지?"

혹시 DLC와 별개로 광고 의뢰 같은 건 아닐까, 나는 얄팍한 기대감을 품으며 메일을 눌렀다. 다만 메일의 내용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사뭇 다른 것이었다.

―방송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저희는 현재 DLC를 개발하고 있어, 이에 관해….

뒷 내용은 말 그대로 DLC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것도 이전에 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들이었다.

"아니, 방금 DLC 어쩌고 하면서 설문 조사까지 했는데 그러면 아까 건…."

그리고 이변이 일어났다.

―파밧.

돌연 컴퓨터의 전원이 내려가면서, 모니터도 꺼진 것이었다.

"어, 어? 이게 왜…!"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검게 변한 것은 모니터뿐만이 아니었다.

내 주변의 모든 것이 검게 물들어버렸다.

그리고,

[ '플레이어'가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

아득해지는 시야에 익숙한 디자인의 메시지가 떠오른다.

[ 난이도가 루나틱(Lunatic)으로 설정됩니다. ]

[ 난이도에 따라 일반 엔딩이 삭제됩니다. ]

[ 난이도에 따라 특성 '악당의 말로'가 추가됩니다. ]

그건 이 현실에선 나타날 수 없는, 루시아사가 게임 '속'에서 보던 것들이었다.

[ … 돌아오신 걸 환영합니다. 류리크 님. ]

◈ 002

아스트레이가(家)의 별장은 폭풍전야를 맞이한 듯 고요했다. 망나니로 소문난 류리크 바타체스 폰 드라스카 아스트레이가 쫓겨나듯 이곳에 온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주색과 음주가무에 미쳐 사는 류리크가 조용하다는 것은, 미지의 공포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혹여 저 망나니가 미쳐버린 것은 아닐까.

―갑자기 우리에게 칼부림을 하는 건 아닐까.

시종들은 별장 안에서 발소리 내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고참들은 이것이 피바람의 전조라며 일찌감치 어머니의 노환을 운운했다. 휴가를 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남은 신참들은 더더욱 떨 수밖에 없었다.

"대체 무슨 대형 사고를 치려고…."

"우리 몰래 사람이라도 죽이신 건…."

"쉿. 그러다가 혹시 듣기라도 하시면 네가 죽을지도 몰라."

모두가 류리크의 그림자조차 보기를 두려워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도 있었다.

"오늘 식사 당번은 노엘인데…."

"아침에 그만뒀어. 심장이 아파서 더는 일 못 하겠다더라."

"그러면… 어쩔 수 없이 가위바위보로 정해야겠네. 안 내면 진 거, 가위바위보!"

5분 뒤, 가위바위보에서 진 신참 메이드 유엔은 바들바들 떨며 류리크의 침실 앞에 섰다. 누군가는 류리크에게 식사를 가져다 주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유엔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다리를 애써 다독이며 노크했다.

―똑똑.

"주, 주인님… 식사를 준비…."

"이런 빌어먹을…!"

쾅! 안쪽에서 주먹으로 벽을 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실제로 그리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잔뜩 겁먹은 유엔에겐 벼락이 치는 것처럼 들렸다.

"꺄악!"

와장창!

너무 놀란 나머지 유엔이 바닥에 쓰러졌고, 그녀가 가져온 식사 역시 먹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 순간 유엔은 자신의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이번 생은 여기까지구나. 연애 한 번도 못 해 보고 죽는다니… 흑.'

그리고 문이 열렸다.

안쪽에서 검은 그림자와 함께 장신의 남자가 걸어 나왔다.

약간 굽은 허리, 신경쇠약과 히스테릭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는 듯 초췌한 얼굴. 그럼에도 올려다보게 만드는 큰 키와 초췌를 퇴폐미라는 단어로 승화시킬 수 있는 것 같은 부조리한 외모.

남자의 눈에서 형용할 수 없는 위압감이 밀려들었다.

"뭐냐."

"저, 저, 저, 그, 그게…."

남자는 쓰러져 있는 유엔과 바닥에 쏟아진 음식물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곤 후, 작게 한숨을 쉬었다.

"오늘 식사는 되었다."

"…네, 네… 네!"

유엔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엎지른 음식을 치워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도 않았다.

그저 깊은 숲속에서 만난 늑대로부터 도망치듯, 헐레벌떡 뛸 뿐이었다.

돌아온 유엔은 동료들에게 자신이 겪었던 무용담(?)을 풀었다.

"…그렇게 됐는데 그냥 방으로 돌아가시는 거 있지?"

"진짜 죽이려 했는데 네가 잘 도망친 건 아니고?"

"예전 같았으면 쫓아와서 매질을 했겠지! 그런데 너… 엎지른 건 치웠어?"

"앗!"

미친놈이 작은 선행을 베풀면 개과천선한 것처럼 보인다. 딱 그 말이 맞노라, 휴가에서 돌아온 고참은 그리 말했다.

아스트레이 별장의 고요는 조금 더 이어질 모양이었다.

* * *

류리크 바타체스 폰 드라스카 아스트레이, 본래 지구에서 한유진이었던 나는 으득, 이를 갈았다.

이곳에 온 지도 어느덧 일주일이 지났다. 이젠 꿈에서 깨자는 망상을 그만둘 때가 된 듯싶었다.

루시드 드림이고 자시고, 일주일이나 계속되는 꿈이란 건 있을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이건 몰래카메라 같은 독특한 기획도 아니었다. 그 명확한 증거로,

"성냥 불꽃."

짧은 시동어와 함께 그의 검지 위에서 촛불 정도 크기의 불이 나타났다.

―마법魔法.

이 세계에는 마법이 실존했다. 그것만으로도 앞서 있던, 그리고 뒤에 이어질 모든 가설들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돌아와 지금, 나는 최종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나는 루시아사가의 악역, 류리크 바타체스 폰 드라스카 아스트레이가 되었다고.

"젠장."

이유도 원리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짚이는 구석이 있다면, 내가 정신을 잃기 전 보았던 몇 가지 문구들.

―'플레이어'가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난이도가 루나틱(Lunatic)으로 설정됩니다.

―난이도에 따라 일반 엔딩이 삭제됩니다.

―난이도에 따라 특성 '악당의 말로'가 추가됩니다.

그리고,

―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류리크 님.

어딘가 섬뜩하게 느껴졌던 마지막 말.

마치 한유진인 내가 원래는 류리크였다는 것처럼, 시스템 메시지는 말했다.

'착각… 이겠지.'

어쨌건 이것들을 미루어 보아 여긴 말 그대로 게임이었다. 또 일반 엔딩이 삭제되었다는 건, 다른 형태의 엔딩을 봐야 한다는 말일 텐데.

'그게… 과연 가능할까.'

―――― 『 악당의 말로 』 ――――

▶ 분류 : 고유 특성

▶ 등급 : -

▶ 설명

: 악당에겐 악당에게 어울리는 말로가 기다리고 있다.

▶ 효과

: 불합리한 죽음이 다가온다.

: 불합리한 운명이 다가온다.

: 죽음의 징조를 느낄 수 있다.

――――

새로이 추가된 고유 특성. 처음 보는 것이기에 조금 당황스러웠고, 효과를 읽고 나서는 암담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이미 사망 플래그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류리크에게 '불합리한 죽음'이라니. 해도 해도 너무한 것 아닌가.

상황은 암담했지만, 그래도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난이도 어렵다고 투덜거리면서 그대로 죽어줄 순 없는 것이고, 어쨌거나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에.

'본래 게임의 난이도는 하드(Hard)가 끝이었는데, 루나틱(Lunatic)이라는 난이도가 등장했다.'

아무리 긍정 회로를 굴려 봐도 루나틱이 하드보다 쉽다는 생각은 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이건 현실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었다.

'난이도가 듣도 보도 못한 루나틱인 시점에서 죽을 일은 널리고 널렸다고 봐야 한다. 그러니 악당의 말로는 그냥 위기감지 스킬이 생긴 셈 치자.'

지난 일주일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그간 나는 류리크에 대한 신상, 현재 상황, 별장 내의 인물 관계 등을 파악해왔고, 이제 움직여야 할 때가 되었다.

옷장에서 외투를 꺼내 입었다. 본래에는 고개만 까닥해도 시종들이 입혀주어야 하겠지만,

―오늘은… 식사 당번 어떡하지?

―노엘 바보, 왜 그만둬 가지고!

―순번이 다 돌 때까진 가위바위보로 하는 수밖에….

엿들은 바에 의하면, 시종들이 나 보기 싫다고 저들끼리 가위바위보를 한다는 앙큼한 짓거리까지 하고 있는 마당이었다.

나 역시 나보다 어린 애들이 파들파들 떨면서 내 옷 입혀주는 걸 바라보는 취미는 없고, 애당초 옷은 내 손으로 입는 게 편했다.

그때 바깥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바닥에 쏟은 것을 치우러 온 건가 싶었는데, 노크 소리가 이어 들려왔다.

"식사는 되었다 하지 않았느냐."

"그럼에도 식사는 하셔야 합니다."

익숙한 목소리에 나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감히 망나니의 말에 대꾸하는 저 기개와 용기. 심지어,

―끼이익.

"실례하겠습니다."

내가 허락하지 않았음에도 문을 열어버리는 막무가내.

나는 약간 귀찮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리아. 본인이 외투를 입는 것이 아니라, 옷을 벗고 있었다면 참 실례되었을 상황이라 생각하지 않나."

"그렇기에 미리 실례하겠다, 말씀드렸습니다."

단정하게 자른 단발.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 단정하게 빼입은 집사복에, 절도가 배어 있는 몸 동작.

외모는 이제 갓 스물은 되었을까 싶은 얼굴이었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매우 무미건조했다.

세상의 풍파에 흔들리지 않는 물결처럼, 소녀의 눈빛은 깊고 잔잔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속된 말로 '무표정'이었다.

"하다못해 그 표정을 좀 풀어보면 어떻겠나. 대화할 땐 상대방에 대한 예의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송구하오나, 류리크 님께서 소인을 리아라고 부르시는 것이 아직 거북살스럽습니다. 고블린발닦개, 천민, 쓰레기라 불린 세월이 자그마치 3년이기에."

그렇다. 류리크는 상상을 초월하는 쓰레기였다.

"예전처럼 편하게 고블린발닦개라 부르시지요."

"네가 나를 주인님이라 부르면 그리할 것을 고려해 보마."

"아뢰옵게 황송하오나, 제 주군은 오롯이 류미엘 님 단 한 분이기에."

주군(主君). 이 세상에서 윗사람을 그리 부르는 직종은 단 하나뿐이 없다.

리아는 기사였다.

거기에 아스트레이 가문의 차기 당주로 꼽히는 류미엘을 빽으로 두었기에, 이렇게 막무가내로 행동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 주군은 너라는 인재를, 기사라는 고급 인력을 고작해야 류리크라는 망나니에게 던져 놓아버렸군. 보기 좋은 주종관계야."

"진흙 속에서 진주를 발견하신 류미엘 님의 안목과 천민으로 태어났음에도 기사로 서임 받은 소인의 유능함에 탄복하게 되는군요. 보기 좋은 주종관계입니다."

"자네는 아카데미 출신도 아니고, 류미엘이 개인적으로 서임해준 것뿐이잖나."

"기사 서임의 행정권은 황족에게 주어진 고유 권한입니다."

"하하. 본인 역시 황가의 일원이니, 내 그대를 본인의 기사로 임명하면 꽤 볼만하겠어."

그것만은 죽도록 싫겠지.

얼음장 같던 리아의 표정에 살짝 균열이 일었다. 그녀는 화제를 돌렸다.

"이제 예전 같은 말투는 사용하지 않으시는군요."

"뭐, 정신을 차린 게지."

사실은 특성 때문이다.

―――― 『 위엄 』 ――――

▶ 분류 : 특성

▶ 등급 : A

▶ 설명

: 존경할 만한 위세가 있어 점잖고 엄숙함. 또는 그런 태도나 기세.

▶ 효과

: 타인의 기세를 억누를 수 있다.

: 타인에게 존경심을 이끌어낼 수 있다.

: 위엄에 걸맞는 행동이 강제된다.

――――

대한민국의 평범한 20대 남성이 쓸 만한 말이나, 씨발 같은 비속어조차도 위엄의 필터에 걸렸다. 그런 말을 하려면 묘한 거리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덕분에 일주일 만에 이 세계에, 내 신분에 어울리는 말투가 입에 배게 되었다.

"발음하시는 말이 정상으로 돌아왔으니, 이젠 몸도 정상으로 되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리아는 나를 담당하고 있다. 그리고 그 말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선 넘는 망나니짓을 막고, 사고 치지 않게 막고, 주기적으로 동향을 보고하고… 그리고 '죽지 않게 만드는 것' 역시 포함된 것이었다.

"약물을 끊으면 생기는 금단 증세 중 하나가 식욕 감퇴라지. 그 대가라 여기거라."

"약물에서 손을 떼시는 것은 바람직하나, 그 대가가 아사(餓死)여선 곤란합니다."

―꼬르륵.

때마침 시의부적절하게 뱃속에 든 거지가 꿍얼거렸다. 하지만 리아도 나도 표정에 변화는 없었다.

리아는 원래 그런 족속이었고, 나는 그런 리아를 보며 일주일 동안 체득한 것이었다. 물론 표정만 그럴 뿐, 입은 달랐다.

"입으로는 아니라고 하셔도, 몸은 솔직하시군요."

그건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니야, 나는 투덜거리면서 입으려던 외투를 마저 걸쳤다.

"내일. 내일은 식사를 할 참이다."

"창관에서 원기 회복을 한 뒤 말씀입니까?"

"그대는 본인이 일주일 동안 마약도, 창관에도 손대지 않음을 보고도 아직 걱정하는가."

"마약은 끊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참는 것이라 하였기에. 그리고 고기 맛을 본 짐승이 어찌 고기를 잊을 수 있겠습니까."

"너 지금 나를 짐승이라 말한 것이더냐."

"비유일 뿐입니다."

하여튼 한 마디를 지지 않아요. 나는 리아를 지나쳐 방문을 열었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고, 쏟아진 음식물은 여전했다.

이놈의 별장은 진짜.

망나니인 나도 문제지만, 리아를 비롯해 시종들도 정상은 아니다.

"네가 말했듯이 약물은 영원히 참는 것이고, 고기 맛을 본 짐승은 그를 잊지 못한다. 허나 본인은 그것을 잊어 보고자 한다."

"......."

일주일 동안 약물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에 따른 금단 증세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건 단순히 식욕 감퇴를 운운할 수준이 아니었다.

―약물 중독 A는 처음 봤음. 마약을 하면 계속 스탯이 떨어지는데, 그렇다고 약물 끊으면 금단 현상으로 뒈지잖아. 플레이가 가능하긴 함?

―아니, 야발. 그게 말이 됨?

―팩트임. C까지는 어떻게 끊는 거 봤는데, B부턴 답도 없음. 근데 얘는 심지어 A잖아.

시청자들이 괜히 그런 말들을 한 게 아니었다. 약물 중독 A는 꽤나 심각한 일이다. 참아서 될 일도 아니고, 가만 내버려 뒀다간 내 목숨을 앗아갈 것이 분명했다.

"차라리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금단 증세가 올 때마다 기절할 때까지 술을 드시지요. 고급주라면 소인이 어떻게든 구해 보겠습니다."

"아니, 나는 근본적인 해결을 할 셈이다."

"약물 중독을… 그것도 잿빛수정에 빠진 중독을 벗어난다는 건,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들어보지 못했다 하면, 혹 어려운 것이라 하면… 본인이 그것을 포기해야 하는가. 겨우 약물 따위에 패배해 평생 그 노예로 살아가야 하는가?"

리아의 눈동자에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다만 그 감정은 수사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로밖에 보이지 않았으나, 어쨌건 내 말에 동(動)한 것은 분명했다.

"방도가 있는 것입니까."

"아무렴."

나는 슬쩍 웃으면서 무언가를 들어 보였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입학 원서다."

"…예?"

잘 모르는 눈치다.

나는 설마 그것도 모르냐는 눈치를 주며 말했다.

"마법 대학에 낼 입학 원서다."

◈ 003

"제정신이십니까?"

그리 말하는 리아의 눈빛은 그야말로 기형학적인 것이었다. 무표정을 베이스로 하면서도 순수한 놀람과 경멸, 자신의 귀에 대한 의심과 함께 진실로 궁금해하는 호기심까지.

그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그야말로 기묘한 표정이 되었다.

나는 그 경이에 가까운 무언가를 보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본인은 늘 그렇듯, 놀랍도록 냉정하고 이성적이라네."

"기사 대학은 가지 못할망정, 마법 대학이라니… 부디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십시오."

"본인의 위치가 어때서 그런가?"

"아스트레이가(家)가 어떤 가문인지 정녕 모르신단 말씀이십니까?"

설마 그럴 리가.

아스트레이는 루시아사가에서도 아주 유명한 네임드 가문이다.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지.

나는 그저 너무 상식적인 것을 물어보기에, 정말 그걸 몰라서 묻는 건지 의심한 것뿐이다.

"모를 리가 있나. 현(現) 제국의 제 3황자이자 대장군(大將軍)인 류오넬 바타체스 폰 카롤링거 아스트레이가 일궈낸 가문 아닌가."

류오넬은 후에 벌어질 황자의 난에서 비껴가기 위해 일찍이 황실에서 벗어나 북방의 군무에 투신했다. 그리고 아스트레이 가문을 세워, 현재는 북방의 맹주로 군림하고 있다.

'북방에서만큼은 황제를 압도하는 영향력을 지니고 있지.'

어떤 루트에서, 누가 황제가 되든 북방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언젠가 정적이 될 거라 의심하며 형제들을 죽이고 죽이는 게 황좌의 원리라지만, 북방만큼은 예외였다.

그만큼 대단한 가문이 아스트레이였다.

"그걸 아시는 분이, 마법 대학에 진학하겠다 말씀하신 겁니까?"

당연 아스트레이는 절대적으로 무가(武家)다. 장남은 제국을 지키는 수호기사고, 장녀인 류아라도 용병단을 이끌고 있다. 그리고 이 세계관에서 기사와 마법사는 별로 사이가 좋지 않다.

마치 고려 시대 문신과 무신을 보듯 하는 느낌이랄까.

"당주께서 윤허하실 리가 없습니다."

"허면 리아, 네가 생각하기에 나는 기사 학교에 가야 하는가?"

"그것은…."

미안하지만 나는 검치 A다. 기사 학교에 가 봐야 병신 취급받으면서, 비뚤어지기만 할 뿐이다. 원작의 류리크가 딱 그러했다.

"본인을 비웃고자 함이라면 거기서 멈추거라."

"그런… 뜻이 아닙니다. 소인은 진실로 류리크 님을 걱정하는 것뿐이옵니다."

"걱정할 것 없다."

"…그것이 아니라, 류리크님은 검에 경이로울 만큼 재능이 없을뿐더러 마법에도 놀라울 만큼 재능이 없지 않습니까."

뼈가 아프다.

사무치게 아프다.

"......."

굳이 따지자면 검치 A는 재능을 깎아 먹는 페널티고, 마도 E-는 아주 개미만 한 수준이긴 하나 어엿한 재능이다!

…라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정말로 그렇게 말할 순 없었다.

'나한테만 보일 특성을 어쩌고저쩌고 떠들었다만 미친놈 소리밖에 더 들을까.'

나야 '플레이어'로서 검치 A와 마도 E-의 가치를 구분할 수 있다지만, 그걸 모르는 제 3자의 입장에서는 '그거나 이거나 둘 다 못났지.'로밖에 보이질 않는 것이었다.

"정 뜻이 그러하시다면, 평민들만 입학한다는 녹스론 마법 대학은 가능할지도…."

리아가 진지하게 그런 생각을 하는 것 같아서 무척 슬펐다.

"그대의 진심이 느껴져 마음이 아프다만, 본인은 샤프란 마법 대학에 갈 것이다."

"…거긴 귀족가의 자제들 중에서도 최소 벨테인 등위를 얻은 이들만 갈 수 있는 최고의 마법 대학입니다만?"

"본인은 바타체스의 이름을 가진 황족이다. 그리고 제국의 모든 대학은 황족 특별 전형이 있지."

당연히 그 특별 전형은 시험, 자격 요건, 심지어 과락조차 없는 문자 그대로 '신의 전형'이다. 그냥 입학 원서만 넣으면 100% 합격한다는 말이다.

"......."

리아의 시선에서 경멸의 기색이 짙어졌다.

"어쨌건 류리크 님의 진로는 제 소관은 아니니 알아서 잘 하시리라 믿습니다만… 그래서 약물 중독과 입학 원서는 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 겁니까."

나는 지금까지 꿀꿀했던 기분을 한 번에 날리듯 상큼하게 웃었다.

"그건 비밀이라네."

* * *

약물 중독 랭크가 높을 경우, 그것이 치사에 이르는 이유는 금단 증세가 지독하기 때문이다. 개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은 광증(狂症).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씩 약물의 쾌락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것을 참으려 하다가 그대로 미쳐버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광증이 나한테는 생기지 않았다.'

그밖에 갖은 상태 이상은 지금도 달고 있지만, 어찌 되었든 가장 치명적인 광증이 없다는 게 중요했다.

아직 명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대충 짐작 가는 바는 있었다.

―류리크가 아닌 한유진은 잿빛수정이라는 약물을 취하기는커녕, 본 적도 없다.

류리크의 몸이 약물에 절어 있을지 몰라도, 내 정신과 기억은 아주 맑고 순수한 한유진의 것이었다. 그렇기에 가장 치명적인 상태 이상인 광증이 없는 게 아닐까.

'덕분에 시간을 꽤 벌 수 있었다.'

약물에 손대지 않는 일주일. 나는 여러 가지 실험을 하면서 알아낸 것이 있었다.

'체내의 마력을 순환시키면서 몸 안에 깃든 약물의 기운을 배출하면 금단 증세를 완화시킬 수 있다.'

사실 '게임' 루시아사가에서는 전혀 먹히지 않는 방법이었다. 그렇지만 이곳은 시스템이 아닌 현실(現實)의 법칙으로 움직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게임 시스템상 마력 수련은 마력의 최대치를 늘이거나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효과밖에 없었다. 애초에 주된 목적도 그것이니까.'

하지만 현실에는 몸에 좋은 뭐가 있다고 하면, 별의별 세세한 부가 효과들이 존재한다. 이를테면 간에 좋은 음식을 먹으면, 간뿐만 아니라 별의별 질병에 도움 되는 것처럼.

마력 수련 역시 어떻게 마력을 움직이고, 운용하느냐에 따라 몸 안의 불순한 무언가를 배출할 수 있었다.

'꾸준히 마력 수련을 하다 보면 언젠간 약물 중독 자체가 사라지겠지.'

의외로 간단한 해결책이 나와 버린 셈이었다. 물론 모든 게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류리크의 마도 특성이 E-에 불과하다. 그래서인지 마력 수련하는 시간 대비 효과가 너무 낮아….'

신동 A가 있음에도 효율이 바닥을 기는 수준이었다. 그런 현실에 대해 한탄을 하고 있자니, 리아가 짜게 식은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래서 얼음물에서 마력을 수련하고 계신 겁니까?"

"그러… 하… 하다. 얼… 음물에서 수련… 하는 것은 정… 정신 집중에 도… 도움이 되… 되니까."

"적어도 지금의 류리크 님께는 전혀 쓸모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춥다.

더럽게 춥다.

"지… 금은 이… 이렇게 하지만, 마법… 마법 대학에 들어가면… 괜… 괜찮을 거다."

마법 대학은 시스템상으로 버프 효과가 있다. 재학하는 것만으로도 '마법 대학 학부생'이라는 직업이 주어지고, 그에 따라 마력 수련에 보너스를 준다.

이것도 대학의 수준에 따라 다른데,

"트… 특히… 샤… 샤프란 마법 대… 학이 최고…."

제국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는 샤프란은 모든 마법 대학을 통틀어 가장 높은 수련 보너스를 준다. 그렇기에 무조건 샤프란에 가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법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매일매일 얼음물에서 마력 수련을 하시겠다… 이 말씀인거군요."

"......."

앞날이 조금 암울하게 느껴졌다.

* * *

아스트레이 공작령, 주도(主都) 할카데르에 특이한 소식이 도착했다. 다름 아닌 가문의 망나니가 개과천선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물론 대다수의 사람들은 전혀 믿지 않았다.

―헛소문이겠지. 그 또라이가 하루아침에 변하겠어?

―허! 그 망나니가? 어지간히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믿지.

―변할 거였으면 진즉에 변했어야지!

―별장으로 쫓겨났으니 대충 그런 시늉만 하고 돌아올 셈인 게 분명해!

하지만 적어도 한 사람은 조금 다르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류리크가… 마법 대학에 진학할 셈이라고?"

류미엘은 이맛살이 저절로 찌푸려진다는 신비로운 체험을 하고 있었다. 그만큼 이번 소식은 충격적이었다.

그 앞에 선 그녀의 심복은 딱딱한 표정으로 자신이 들은 바를 전달했다.

"지금은 한창 마력 수련에 몰두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약물은? 저번에는 약물을 끊는다면서, 별 난리를 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 역시 계속 지키고 있다 합니다."

류미엘이 저도 모르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다.

"카엘. 잿빛수정에 빠진 중독을, 자력으로 끊은 사례가 있던가?"

"들어본 적은 없으나, 리아가 거짓을 고하는 것이 아니라면…."

리아의 충성심은 믿을 만했다. 그리고 그녀의 성격상 류리크 같은 망나니에게 붙어먹을 가능성은 전무(全無)하다고 봐도 무방했고.

"가문의 망나니가 망나니짓을 때려치우더니, 그만두는 게 불가능하다는 약물을 끊고, 이젠 대학까지 들어가겠다… 인가."

언뜻 듣자면 무척 좋은 소식이다. 사고만 안 쳐도 감사한 망나니가 알아서 개과천선한다니. 이보다 더 좋은 소식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류미엘의 입장은 조금 달랐다.

"흐음…."

류미엘은 잠시 말끝을 흐린 뒤, 카엘에게 물었다.

"이게 과연 희소식일까?"

"......."

"아니. 매우, 매우 유감스러운 소식이지."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카엘이 표정으로 그리 말했지만 류미엘은 이미 깊은 회상에 빠진 상태였다.

"본녀는 아직까지도 그가 했던 미친 짓거리를 잊지 못한다네."

그녀의 머릿속엔 어릴 적 류리크에게 당했던 기억들이 아직 생생했다. 그때 그녀는 수치심이 무엇인지를 알았고, 분노라는 감정을 이해했다.

"하. 하핫. 어처구니가 없군. 나는 아직도 그 자식 때문에…."

과거를 되새기던 류미엘의 눈동자에서 차가운 분노가 피어올랐다.

"그자는 결국 당주의 자리에 미련을 놓지 못한 모양이로고."

장남은 오로지 황가와 제국을 위해 사는 수호기사가 되었다. 장녀는 경이로운 무위를 타고 태어났으나 출가한 뒤 용병단을 꾸렸다.

자연히 후계는 차남으로 내정되었으나, 그는 기대를 저버리고 폐인이 되었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와서 본녀의 자리를 빼앗고자…."

바라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만 했기에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렇게 당주가 되는 것에 모든 것을 바쳤건만.

진즉에 기권패로 도망쳤던 망나니가, 반칙처럼 링으로 돌아오려는 게 아닌가.

"류리크 님이 당주가 될 심산인지 아닌지는 아직 모르는 일입니다."

"놈이 뜻이 없더라도, 주변이 그리 부추기겠지. 주류에 밀려난 놈들이 꼭 그렇게 할 터."

친족 간의 치열한 혈투는 뭇 황위 계승에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평민들도 작은 집 한 채를 누가 갖느냐고 피 터지게 싸우는 것이 이 세상이었다.

헌데 아스트레이 공작령은 소왕국에 비할 영토를 자랑하며, 그 권위와 영향력은 북부에 한해 황제마저 능가한다.

"류리크가 당주가 되겠다, 선언하는 순간 아스트레이 공작령은 반 토막 난다."

그건 확정된 미래라고 봐도 무방했다.

현재 공작령의 내정은 당주 대리인 자신이 꽉 잡고 있다지만, 주류에서 밀려난 세력들이 단합하면 일이 복잡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사실 정당한 계승 서열을 논하자면, 막내인 자신보다 셋째인 류리크가 우위에 있기에.

그때 류미엘의 머릿속에 무언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류아라 언니는 요즘 뭐 하고 지내지?"

"지금 예르파드의 승급 심사를 기다리는 중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 그래. 아버지의 입김 때문에 계속 미뤄지고 있다지?"

순간 류미엘의 눈이 반짝였다.

"오랜만에 언니에게 부탁을 좀 해야겠군."

북방의 맹호(猛虎)라는 아버지의 성정을 가장 빼닮았다 불리는 장녀 류아라. 그녀라면 류리크 따윈 묵사발을 낼 수 있으리라.

'최상은 눈 돌아간 언니가 류리크를 패 죽이는 것. 차상은 어디 하나 박살 내서 병신으로 만드는 것. 그리고 못해도….'

즐거운 상상이 떠오른 듯 류미엘이 미소 지었다.

"지레 겁먹고 제 분수를 깨닫겠지."

류미엘이 마음속으로 간곡히 바랐다.

'형제여, 부디 더 이상 세상에 해악을 끼치지 말고, 그 시궁창에서 영원히 살아다오.'

◈ 004

"푸엣취!"

얼음물에서 명상을 시작하고 다음 날, 바로 감기에 걸려버렸다.

이불을 잔뜩 끌어안은 채 오들오들 떨고 있자니, 리아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날 바라본다.

"따뜻하게 데운 꿀물입니다."

"…신관은 아직이더냐?"

"감기는 잘 씻고 푹 자면 충분히 나을 수 있는 것입니다만."

"본인의 강철 같은 정신과 다르게 육신은 나약해서 말이지. 그리고 자네는 본인이 현재 약물을 끊어 금단 증세에 시달리고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너도 어디 한번 폐인 A를 달고 있어 봐라. 폐인 A는 사실 숨쉬기 빼고 아무 운동도 못 하는 수준의 페널티다.

게다가 상태 이상 일람을 보면 정신이 아득해지는 수준이라니까.

'가만히 앉아서 하는 명상은 괜찮을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리아가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금단 증세에 시달리는 분치고는 식욕 감퇴를 빼면 정말 그런 증상이 있기는 한지, 소인은 의심스럽습니다만."

"앞서 말했듯, 그것은 본인의 정신력이 강철보다 단단하기 때문이다."

"육신의 나약함을 알고서도 그런 무리를 하시는 것은, 뇌의 나약함에 대한 반증이라 사료되옵니다만. 그리고 보통 이럴 경우 정신력이 강하다기보다는 옹고집이 세다는 표현을…."

"…얼음물은 시행착오다. 시행착오."

게임으로 플레이할 때 명상, 즉 마력 수련은 '마나가 짙은 명당'에서 하는 것이 제일 효율이 좋고, 그 다음은 폭포, 여건이 어려우면 냉탕에서 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지구에서의 나는 사우나에서도 온탕 냉탕을 가리지 않던 몸이라 당연히 괜찮을 줄 알았는데….

'냉탕은 도저히 못 해 먹겠다.'

류리크의 신체는 나와 다르다는 당연한 사실을, 몸으로 직접 체득하고서야 깨달았다. 문제는 여기서 깨달음을 얻고 앞으로 안 하면 되겠구나, 하고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별장에 좋은 환경만 주어졌다면 그런 무식한 짓거리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애당초 류리크 님의 재능이 절망적이라는 점을 기억해주셨으면 하옵니다만."

사실 그 말이 맞았다. 마도 E-의 수준을 너무 과대평가했다. 그저 꾸준히 수련하면 뭐라도 될 줄 알았는데, 이 바닥을 기는 재능은 그야말로 개미만 한 성장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얼음물에서 하지 않고서는 효과가 없는 수준이라니… 대체 E-는 얼마나 구린 거야?'

리아는 조금 감탄한다는 얼굴로 날 보았다.

"뭐, 마력 수련을 통해 체내의 약기운을 정화한다는 발상은 놀랍습니다만… 정말로 그걸 하고 계시는지 소인은 다소 의문이 듭니다. 그러한 운용은 엘베드 등위의 고위 마법사들에게도 쉽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대는 본인이 어렸을 적 신동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류리크 님께서 어여쁜 소년이실 적, 소녀는 음식물 쓰레기를 주워 먹던 천민이었기에."

그놈의 천민 타령은 무적의 치트키냐.

나는 투덜거리면서 다른 얘기를 꺼냈다.

"어제 알아보라는 것은 알아봤느냐."

"예, 확인해 보긴 했습니다만…."

리아는 품 안에서 어떤 책자를 꺼내 들었다. 어제 요청했던 경매 카탈로그였다. 다만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경매 물품 옆에 가격들이 적혀 있었다.

"이 가격들은 무엇인고?"

"류리크 님이 가격을 보자마자 단념하실 수 있도록, 대략적인 시세까지 적어 놓았습니다."

쓸데없는 짓을, 내가 중얼거리자니 리아가 말을 덧붙였다.

"경매에서 무엇을 얻으려 하시는지는 모르겠으나, 제일 값싼 것을 사려 해도 십만 리브라는 필요할 것입니다."

"알고 있다."

"소인이 파악하기로 현재 류리크 님의 전 재산은 300 리브라 정도 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만."

"…그대가 내 지갑 사정은 어찌 아는고."

"류리크 님의 모든 것을 파악하는 것이 소인의 임무이기에."

비밀이 없구만.

나는 쯧, 혀를 차며 카탈로그를 죽 훑었다. 그리고 아주 유감스럽게도 내가 바라던 것을 찾아버렸다.

―영월화. 예상 낙찰가. 200만 리브라.

한화로 따지자면 20억.

꽃 한 송이치고 정말 터무니없이 비쌌다.

'이 정도 가격대인 건 이미 알고 있긴 했지만….'

D-랭크 이하에 한해 마도 특성을 높여주는 영약으로, 그 밑의 등급이 어찌 되건 섭취하는 순간 마도를 D 랭크까지 조정해주는 효과를 갖고 있었다.

비록 사용하는데 제약도 있고, 진짜배기 실력자들에겐 전혀 쓸모없는 물건이지만,

'오히려 재능 없는 이들에겐 가장 절실한 최고의 영약이지.'

이거 하나면 현재의 정체된 상황에서 엄청난 도움이 되겠지만… 쉽지 않아 보였다.

"혹여나 말씀드리자면 류리크 님께선 제국 중앙 금고에서 백칠십만 리브라를 대출하신 상황이고, 별장에 있던 모든 예술품은 전당포에 저당 잡히셨습니다."

알고 싶지 않은 정보였다.

"보석류는 진즉에 팔아치우신 지 오래고, 상점가의 모든 가게에서 집 한 채 값씩 외상도 하셨으므로… 이 점 유념해주시기 바랍니다."

더 알고 싶지 않은 정보였다!

"그딴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기억하니, 자네의 유능함에 탄복하게 되는구나."

"유능함이 소인을 여기까지 이끌어온 덕목이므로."

"그대는 비꼰다는 언어적 표현을 모르는가."

"세상사 뭐든 좋게 해석하라는 것이 어머니의 유언이었기에."

젠장.

얘는 치트키를 몇 개나 쓰는 거야!

나는 바구니에 석 달 동안 방치해둔 치즈 냄새를 맡은 듯한 표정으로 리아를 바라보았다.

"나는 자네가 좋다."

"저도 류리크 님이 좋습니다."

"우리는 빌어먹게 잘 어울리는군."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끝끝내 한 마디도 지지 않는 것이, 이 망할 인연이 꽤 오래갈 거라는 걸 암시하는 듯했다.

* * *

나는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광증이 없으니 당분간 아주 위험할 일은 없을 테고, 마력 수련의 효율이야 대학만 들어가면 어느 정도 해결될 일이었으니까.

'지금은 약물 중독을 현상 유지만 시킨다는 생각으로 해야지.'

다만 약간 우려스러운 점은 있었다.

―――― 『 상태 이상 일람 』 ―――――

▶ 식욕 부진

▶ 호흡 곤란

▶ 손 떨림

▶ 우울증

…▶ 무력감

▶ 감기

――――

생각해 보면 리아가 내 금단 현상을 의심할 법도 했다. 이딴 정신병 종합 세트를 가지고도 겉으로는 전혀 문제없고, 멀쩡한 척 움직이고 있으니까.

'매일 악몽을 꾸고 밤잠까지 설치긴 하지만, 그 정도야 뭐.'

본래의 류리크라면 하루를 못 견뎠겠지만, 나는 류리크이기 이전에 한유진이었다. 인터넷 방송을 하면서, 루시아사가의 대표 스트리머로 활동하면서 악플은 지겹도록 많이 봤다.

위에 있는 상태 이상 정도는 이미 현실에서 수도 없이 겪었고, 모두 극복해 낸 것들이었다.

'유일한 걱정은 혹시나 이 상태 이상들이 무언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내 몸에 해를 끼칠 수 있다는 것인데….'

제발 그런 일은 없었으면 좋겠군,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이불을 껴안았다.

"푸엣취!"

그놈의 상태 이상 감기 탓에 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우울증이니 무력감이니 하는 정신적인 것들은 견딜 만했지만, 오히려 감기 같은 단순한 질병이 더 괴로웠다.

'신관은 대체 언제 오는 거야.'

그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리아와 함께 낯선 노인이 들어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신관이 도착했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목젖까지 닿을 법한 긴 수염에 정갈한 사제복을 입은 노인이었다. 언뜻 보아도 신관으로서의 역량이 꽤 될 듯싶었다.

'하긴 황족을 치료하라고 보낸 것인데, 어설픈 이를 택하진 않았을 터.'

리아는 가볍게 목례를 한 뒤 밖으로 나갔다. 신관은 내 근처로 다가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소인 라이미라크 성당에서 파견을 나온, 가울이라고 합니다."

가울. 모르는 NPC다.

처음 듣는 이름이라 그다지 비중 있는 캐릭터는 아니겠거니, 나는 편하게 말했다.

"본인이 불의하게 감기에 걸려 그대를 불렀다. 콜록."

"상태가 과히 좋지 않아 보여, 바로 치료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신관은 내게 양해를 구한 뒤 손목을 가볍게 잡았다. 그러자 새하얀 광채와 함께 따뜻한 기운이 흘러들어왔다.

그에 따라 몸 안에 잠들어 있던 미미한 마력이 준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게임에서 볼 때는 몰랐는데, 힐 받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나는 조금 신기한 기분이 들었지만, 내색치 않았다. 그렇게 10여 초쯤 지났을까, 가울이 손을 뗐다.

헌데 그의 표정이 어딘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상하군요."

"뭐가 말인가."

"잿빛수정에 손을 대신 듯한데… 오랫동안 참으신 것 같습니다."

"치료를 하면서 그런 것도 알 수 있는 건가?"

"소인이 잿빛수정에 대해 조금 들은 바가 있어서 그렇습니다만… 그것을 참고 버티는 경우는 처음 봅니다."

순간 이걸 돈이라도 줘서 입막음을 시켜야 하는 건지를 고민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보다 신경 쓰이는 말이 있었다.

'잿빛수정에 대해 조금 들은 바가 있다?'

나는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가울에게 물었다.

"잿빛수정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것이 있나?"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그저 심장 안쪽에 혈석을 만들어, 체내의 마력을 빨아들인다고만 알고 있습니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게임을 할 당시 잿빛수정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려 노력한 건 아니지만, 모든 엔딩을 보면서도 들어본 적 없는 정보였다.

"…자세히 말하라."

"방금 말씀드린 것이 전부입니다. 그저 그 혈석 때문에 결국 잿빛수정에 중독된 자는 체내에 모든 마력을 잃은 뒤 사망한다는 정도지요."

거대한 착각과 오해가 있었다.

'시스템상으로는 스탯이 깎이고 건강이 나빠지니, 단순한 쇠약사라고만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혈석에게 마력을 빼앗겨서….'

당연하지만, 게임에서 캐릭터의 인체를 해부해서 볼 기회는 없다. 죽으면 죽고, 불구가 되면 불구가 되었지 그렇게까지 정신 나간 기능을 지원하진 않는다.

일반적으로는 알아낼 수 없는 사실인 셈이었다.

'그래서 신동 A를 갖고도 수련의 효율이 바닥을 기었던 것인가.'

이쯤 되니 궁금한 것이 생겼다.

"그 혈석이 마력을 빨아들인다면, 그 안에 엄청난 마력이 담겨 있는 것 아닌가?"

"소인이 직접 본 것이 아니기에 확실하진 않으나, 상당한 마력이 깃들어 있을 터입니다."

내가 채근하자 가울은 몇 가지 아는 것들을 더 말해주었다. 잿빛수정은 체내의 모든 기관을 마력 흡수에 활용해, 마법을 모르는 이도 절로 마력을 쌓는다고.

다만 그것이 과도해 인간을 폐인으로 만들고, 종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고.

'수련 없이도 마력을 쌓을뿐더러, 그 정도가 생명을 쥐어짤 수준이라면… 내 심장의 혈석에 얼마나 큰 마력이 있는 거지?'

다른 가능성이 생겼다. 약물 중독에 휘둘리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이용할 수 있는 가능성.

나는 내 머릿속에 담겨 있는 루시아사가의 수많은 정보와 지식들을 취합, 정리하면서 필요한 것들을 추려내기 시작했다.

그때 가울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제 짧은 지식이 작게나마 도움이 되었다면, 혹 무언가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좋다. 본인이 답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알려주겠다."

덕분에 새로운 활로에 대한 실마리를 얻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답해주지 못할까.

"류리크 님은, 잿빛수정의 충동을 어찌 견디고 계신 것입니까?"

* * *

떠나기 전 가울이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약수(藥水)입니다.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겁니다."

나는 조금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신성력과 포션, 회복마법이 존재하는 이 세계에서 의술은 극도로 퇴화되었다.

약(藥)이라는 용어 자체가 거의 사용되지 않을 정도이다.

'잿빛수정에 대해 아는 것도 그렇지만, 이런 걸 들고 다닌다는 것은….'

나는 거절하지 않고 약수병을 받았다.

"고맙네."

"소인은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나는 시종을 불러 그에게 금화를 챙겨주라 했지만, 가울은 괜찮다며 그대로 별장을 나갔다.

―――― 『 약수(藥水) 』 ――――

▶ 분류 : 아이템

▶ 등급 : 중상급

▶ 설명

: 영험한 대지에서 약초의 기운이 흘러 들어간 물.

▶ 효과

: 섭취 시 건강 회복에 효과가 있을 듯하다.

: 섭취 시 생명력이 조금 늘어날 것 같다.

――――

특수 효과가 모두 가정이었지만, 등급부터가 중상품이었다. 평범한 신관이 쉬이, 그것도 대가도 없이 꺼낼 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나는 가울이라는 NPC의 이름을 기억해 두기로 했다.

[ 약수의 기운이 미약하게나마 몸을 정화합니다. ]

[ 건강이 소폭 회복됩니다. ]

치료 덕분에 감기도 나았고, 약수의 효과로 상태 이상도 완화되었다. 덕분에 몸에 활력이 샘솟는 것 같았다.

"몸은 좀 나아지셨습니까."

"아, 그래. 급히 신관을 수배하느라 고생했다. 리아."

"건강한 육체의 소중함을 깨달으셨다면, 이제 얼음물에서 명상한다는 생각은 접어 두셨으면 좋겠군요."

기껏 칭찬을 해주는데도 왜 그리 비뚤어지게 구는 거냐, 나는 투덜거리면서 답했다.

"…안 그래도 그럴 참이다."

수련의 효율이 왜 그렇게 나쁜지, 원인도 어느 정도 파악이 되었다. 이젠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할 차례였다.

'아니, 오히려 새로운 가능성을 찾았다. 잿빛수정의 마력을 녹여 내 것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그때였다.

―쿵… 쿵…!

저 멀리서 예사롭지 않은 진동이 느껴진다.

설마 이 대낮에 침입자가 발생한 것인가, 하고 생각을 하던 와중이었다.

[ 불합리한 죽음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

이런 미친.

다급하게 장식용 검을 빼 들자니, 문 바깥에서 시종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주, 주인님! 손님께서 오셨습니다."

마치 전차가 달려오는 듯한 굉음. 그리고 그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 손님.

짧은 순간 나는 그 두 가지를 조합했다.

―쾅! 쾅! 쾅!

류리크의 손님으로 올 인간 중에 이런 몰상식한 행태를 벌일 작자가 있는가.

맹렬하게 회전하는 두뇌에서 한 가지 이름이 떠올랐다.

"류, 류아라 님께서…."

"비켜."

―콰앙!

문이 부서졌다. 그리고 누군가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 씨발. 쳐 죽이고 싶은 동생 새끼야?"

자신의 몸집보다 큰 거대한 바스타드 소드를 등에 맨 여인. 그 모습이 무척 낯익었다.

'류아라 카바예르 폰 예르파드 아스트레이….'

그녀는 유명한 네임드 NPC였다. 그리고 생각보다 최근에 그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다름 아닌 스트리머 김아무개수무개가 올렸던 '류리크 사망씬 모음집' 영상에서 말이다.

조회수 300만짜리 영상에서 류아라는 그런 말을 했다.

―아, 씨발. 갑자기 이름을 부르니까 나도 모르게 역겨워서 그만.

류리크의 누나이자,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고 무심결에 그를 죽여 버리는 NPC.

나의 사망 플래그가 눈앞에 서 있었다.

◈ 005

류리크가 류아라에게 살해당하는 루트는 이미 널리 알려진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가문의 이름에 먹칠하는 망나니를 훈계하러 왔는데, 순간적으로 눈이 뒤집혀서 힘 조절을 실패했다… 라지?'

어처구니없지만 그것이 정사(正史)였다. 그리고 이 터무니없는 사건을 납득시키는 개연성도 존재했다.

'무력 특성 S랭크의 소유자.'

다른 부가적인 특성을 논할 것도 없이, 무력 특성만 놓고 봐도 황실 기사보다 한 급수 더 쳐주는 괴물이다.

그쯤 되면 나뭇가지로 강철을 꿰뚫을 수 있는 수준이라고 봐야 한다.

'그런데 나는 그쪽 사망 플래그를 건드린 것이 없을 터인데.'

나는 지금 약물 중독을 극복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정신줄 놓고 미친 짓을 벌이지도 않았다. 음주가무는 커녕 창관에도 다니지 않으니까.

오히려 개과천선했다는 소문이 퍼졌으면 퍼져야지, 새삼스레 류아라가 눈 뒤집고 찾아올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어쭈, 이 씹새끼가 이제 누나한테 인사해야 한다는 예절도 말아먹었냐?"

이렇고 저렇고를 판단할 시간이 없었다.

짧은 순간 나는 리아와 눈으로 대화를 나눴다.

시간으로 따지자면 0.3초쯤.

―한 번만 날 지켜다오.

―당신을 위한 고기 방패가 되느니 차라리 자결하겠습니다.

―빌어먹을.

짧은 눈의 대화를 마친 나는 곧장 고개를 돌려 류아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 씨발, 너는 안 봐도 뻔하다. 넌 일단 좀 처맞고 시작…."

그리고 말했다.

머리를 굴리면서, 일단은 지르고 봤다.

"류미엘에게 휘둘리는 건 여전하군."

"뭐? 너 방금 뭐라고…."

"류미엘에 휘둘리는 건 여전하다고 했다."

류아라의 눈썹이 매섭게 휘어졌다. 그녀는 입으로 말하고,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아주 솔직하게, 진심을 담아.

"너 씨발, 쳐 돌았니?"

나는 그녀의 프로필을 떠올렸다.

―아스트레이 가문의 둘째이자 장녀.

―출가외인.

―예르파드 용병단의 단장.

―무력 S.

―말보다 주먹.

강하기로는 괴물이고, 대화하기에는 단순하다. 설득과 논리보다 선동과 날조가 먹히는 타입.

'확실한 건, 격퇴는 물론 도망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점.'

남은 방법은 오로지 어떻게 말로써 이 괴물을 구워삶느냐는 것. 그리고 내 선택지는 '류미엘에게 휘둘렸다.'는 논리 아래로 좁혀졌다.

'그런데 나는 왜 류미엘을 언급한 거지?'

생각과 무관하게 말이 이어진다.

"돌은 것마냥 멍청하게 행동하는 건 너다. 류아라 카바예르 폰 예르파드 아스트레이."

아주 짧은 시간. 류아라는 진심으로 내 말을 해석하려는 듯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그 직후, 그녀의 주먹이 움직였다. 현재 내 눈으로는 제대로 좇는 것조차 불가능한 속도.

다만 그녀의 주먹이 아닌 눈이 움직인 순간, 내 입술은 이미 말을 내뱉고 있었다.

"나는 약물을 끊었다."

바람이 일었다.

코앞에 멈춘 주먹이 멈추고, 반 박자 늦게 밀려든 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린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에, 나는 눈 하나 깜짝 않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약물을 끊었다고?"

"그렇다. 네가 생각하고 있을, 약물에 절어 패악질을 일삼으며 도시의 여인들을 간음하는 쓰레기 류리크는 이제 없다는 말이다."

"헛소리! 네가 그렇게 쉽게 바뀔 놈이…."

나는 리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리아, 내 말이 틀린가."

구태여 내 편을 들어줄 것도 없다. 그저 흐림 없는 눈으로 진실만을 말해 다오.

나는 눈으로 말했고, 마음으로 호소했다.

리아는 잠시 주저하는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류리크 님은 약물에서 손을 떼셨습니다. 오늘로 열흘이 되었군요."

"이런 씨발."

"거기서 왜 감탄사처럼 씨발이라는 말을 하는지는 의문이다만, 이로써 알겠지. 나는 약물을 끊었다. 그리고 그 뒤로 네가 생각했을 패악질은 단 한 번도 행한 적이 없다."

류아라의 노도와 같던 기세가 수그러들었다. 일단 고비는 넘긴 건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류아라의 눈빛이 사냥감을 포착한 맹수처럼 빛난다.

"…그런데 내가 류미엘에게 휘둘린다는 건 무슨 말이지?"

"가문의 일에 신경 끄고 출가외인이 된 네가 구태여 이 위르겐하이까지 발걸음을 한 이유가 무엇일까."

나는 의미 없는 말을 내뱉으며, 약간의 시간을 벌었다. 당장에 뭐라도 말을 하지 않으면 '아주 불합리하게' 주먹이 날아올 걸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약간의 시간에서, 해답을 찾았다.

"당연히 누군가 나에 대한 말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가 그랬을까. 새삼스레 우리 아버지가 그럴 일은 없겠지. 어떻게든 기사 대학에 집어처넣을 생각밖에 없을 테니까. 그러면 첫째인 류네온은? 유감스럽게도 그는 너보다도 가문에서 멀어진 수호기사다. 제국의 수호기사가 가문의 일에 개입할 리가 없지."

급조로 지어낸 말이 아니다. 짧은 시간 단서들을 모아 내린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누구인가?"

생각해 보면 스트리머 김아무개수무개가 '류리크 살리기 프로젝트'를 할 때, 어김없이 류리크를 죽이는 이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막내인 류미엘. 류리크의 친동생이었다.

"류… 미엘? 설마 류미엘이 의도적으로 그런 말을 흘렸다고? 왜?"

"나는 가문의 차남이고, 그녀는 막내이자 차녀다. 현재 당주 자리를 이을 유력한 후계자로서 거론되고 있지만, 글쎄. 폐인이었던 차남이 개과천선하여 멀쩡하게 돌아온다면 퍽 곤혹스럽겠지."

거기에 그녀와 나 사이의 개인사는 참으로 지독한 편이지, 내가 말을 덧붙이자 류아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니 씨발, 니가 쓰레기 같은 짓을 많이 하긴 했지만 류미엘이 그렇게까지…."

"아직도 모르는가. 류네온이 수호기사가 된 순간, 사실 당주에 가장 유력한 이는 너였다. 황실 기사를 웃도는 무력에 너의 '신의'는 북부의 모든 혈맹들이 인정하는 것이었으니까."

약간의 칭찬을 섞어 넣자 류아라의 얼굴이 조금 빨개졌다.

참 알기 쉬운 여자였다.

"그런 네게 정략혼과 가문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으라고 입김을 불어넣은 것이 누구인가."

"그건 내 의지였거든?! 난 정략혼 따윈 싫었고, 자유롭게 살고 싶었으니까!"

"맞다. 그것은 네 의지이고 바람이었다. 허나 거기에 말을 보탠 이가 있었지."

류미엘.

물론 당시의 류미엘은 정말 순수하게 류아라를 위해 그런 말을 했겠지만, 지금은 내가 그 아름다운 추억을 더럽혀야만 했다.

―살아남기 위해.

"씨발. 네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래서? 내가 이번에 오해하긴 했어도, 괜히 부추겨져서 오긴 했어도, 네가 쳐 죽이고 싶은 씨발 새끼라는 건 사실이잖아?"

사실 아스트레이 가문의 가정사에 대해 이렇게까지 아는 것은 류미엘과 류아라 때문이다. 훗날 아스트레이가(家)의 당주가 되는 류미엘이기에.

훗날 전 세계에서 단 3개 용병단에게만 허락되는 백패(白牌) 등급의 용병단 이끄는 류아라이기에.

"맞다. 네 말이 맞다."

그래서 나는 류아라를 이용하는 방법 또한 잘 알았다.

"이것은 류미엘의 잘못도, 네 잘못도 아니다. 그저 모든 것이 내 자신의 업보일 뿐. 하! 생각 해 보면 통탄할 일이었다. 가문의 망나니가, 그 패악질을 일삼던 쓰레기가 이제 와 개과천선을 한다니 누가 그 말을 믿을까."

"그래, 이 개새끼야. 너는 지금까지 한 개짓거리들을 참회하면서…."

"허나 슬프구나. 내 역사는 모른 척할 수 없는 죄의 연속이고, 씻을 수 없는 오명의 굴레였다. 그걸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달라지고자 했다. 약물을 끊고, 창관을 끊고, 이 끔찍한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때마침 눈가에 맺힌 눈물이 또르륵, 볼을 따라 흘러내렸다. 고등학생 때 연극영화과 가겠다고 지랄했던 보람이 느껴졌다.

"아, 너…!"

"네 덕분에 깨달았다. 새사람이 되겠다는 것은 모두 내 이기심이고 오만이었다. 류리크는 쓰레기다. 류리크 바타체스 폰 드라스카 아스트레이는 절대로 용서받지 못할 망나니고, 영원히 악마로 기억될… 아니 기억되어야 할 개자식이다."

―스릉.

류아라가 방에 닥치기 직전 챙겨두었던 장식용 검을 빼 들었다. 비록 장식용이기는 하나, 실전에 쓰기엔 강도가 약할 뿐, 장난감이 아니었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죽겠다. 살아서 영원히 바뀔 수 없는 것이라면, 차라리…!"

나는 진심으로 검을 내 목에 찔러 넣었다. 여기에 허위나 기만 따윈 섞일 수 없었다.

어설프게 한다면 류아라의 눈을 속일 수 없을 터이고, 내겐 '극적으로 검의 궤도를 바꾸는 실력' 따윈 없기에.

류아라가 나를 막지 않으면, 분명 죽을 수 있었다.

"야! 이 미친 새끼야!"

―챙강!

내 목을 찌르던 검신이 부러짐과 동시에 뒤통수에 묵직한 타격이 가해진다. 다행스럽게 내 두개골은 무사했다.

의도 다분하게 힘이 조절된 공격이었다.

'풀렸다.'

확실히 화가 풀린 게 느껴졌다. 아프긴 더럽게 아팠지만, 애초에 류아라가 눈 뒤집혀서 날 팼다면 그대로 죽었어야 했으니까.

"이 미친 새끼가 왜 갑자기 급발진해서 염병 지랄이야?! 썅!"

속으로는 살아남았다는 것에 대한 충만감이 들었지만, 아직은 좀 더 연기를 계속해줄 필요가 있었다.

"왜 말리는가! 나는 죽어 마땅한 개자식이다! 약물을 끊어도, 바뀌고자 해도 너는 나를 쓰레기로밖에 보지 않았다. 피로 이어진 가족이 그렇게 볼 진데, 다른 이들은 오죽할까!"

"아니, 씨발놈아. 그건 내가 좀! 좀!"

"좀? 좀 뭐?!"

"내가! 그러니까… 씨발! 오해를 한 거고!"

류아라가 내 양손을 붙잡았다. 순간 그대로 손목이 으깨지는 게 아닌가 싶은 압박감이 느껴졌다.

한시라도 빨리 이 상황을 끝내고 싶어졌다.

"그러면 나는…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내가 아무리 노력한들 바뀌는 것이 없는데! 사람들은 여전히 나를 쓰레기로만 볼 텐데!"

"후우, 일단 그 약물 확실하게 끊고 착하게 살면 되지? 어? 안 그래?"

완연하게 누그러진 류아라의 목소리에 나는 확신을 가졌다.

슬슬 작업 들어가도 될 분위기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약물을 참는 것도 한계였다. 하긴 잿빛수정을 참는다니… 말도 안 되는 얘기였지."

"아니, 야. 씨발. 너 이미 일주일인가 열흘인가 참았다면서? 그걸 이렇게 쉽게 포기해? 어? 그러지 말고 좀만 더 해 보자. 응?"

"하지만 이제 나 혼자서는…."

"아오! 씨발 내가 도와줄 테니까! 어?! 그 병신 같은 생각은 때려치우란 말이야!"

도와준다, 분명 그 말이 류아라의 입에서 나왔다. 그 말인즉, 게임이 끝났다는 말이었다.

북부 혈맹이 인정하는 그녀의 '신의'는 말에서 비롯되는 것이니까. 덕분에 그에 관한 류아라의 별명이 생길 정도였다.

'류아일언중천금. 그녀는 결코 자신이 내뱉은 말을 어기지도, 무르지도 않지.'

얻어낼 걸 얻어냈으니, 이제 쓸데없는 연기는 집어치울 때였다.

"알겠다. 네가 그렇게까지 말을 하니, 좀 더 노력해 보겠다."

"그래. 씨발. 기왕 마음 착하게 먹은 거, 좀 잘 지켜서 인간 구실 좀 해 보라고."

나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경매장 카탈로그를 집으며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얼마 정도 갖고 있는가?"

* * *

"뭔가 이상해."

미끄러지듯 도로를 달리는 차량 안에서 류아라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나는 시치미를 뚝 뗀 듯, 능청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뭐가 말인가?"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

"그야 본인을 돕기로 했으니까?"

"이런 씨발! 그게! 말이! 안 된다고!"

순간 운전기사가 놀랐는지 차량이 흔들렸다. 적당히 눈치를 주자니 운전기사가 거듭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고, 류아라도 목소리를 낮췄다.

"아니, 나는 분명…! 니가 뒈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왜? 왜 이렇게 된 거지?"

맞다. 류리크와 류아라의 관계는 분명 파탄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리 쉽게 돕고 어쩔 관계가 아니었다.

다만, 그녀는 극적인 상황에 약했다.

순간적인 분위기에 홀리고, 감언이설에 쏠랑쏠랑 넘어가는 위인이다. 그래서 사실 무력과 신의를 빼면 당주에 그닥 어울리는 인물은 아니기도 했다.

'물론 충신들만 곁에 두고 당주로 활약하는 루트도 있긴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마음을 곱게 가져라. 동생의 개과천선에 네가 도움을 주겠다, 직접 말하지 않았던가."

"…야, 너 그런데 왜 아까 전부터 나한테 '너'라느니 '네가' 같은 소리를 하는 거냐? 내 입으로 말하긴 역겹지만, 내가 누나거든?"

나는 한없이 절대영도에 가까운 표정을 짓되, 목소리만큼은 여성의 그것을 흉내내는 양 어설픈 하이톤으로 말했다.

"누~나아?"

순간 류아라의 주먹이 내 안면이 있던 자리로 움직였다.

―파삭.

주먹은 내 몸에 닿지도 않았으나, 거기서 발현된 풍압이 차량 옆면의 유리를 작살냈다. 아름답게 금이 간 것이 톡 치면 깨질 것처럼 보였다.

다행히도 나는 '아'를 발음할 시점에서 고개를 옆으로 꺾었기에 간신히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까닥 실수하면 골로 갈 테니, 놀리긴 적당히 놀려야겠군.'

나는 최대한 그녀의 감정선을 건드리지 않고자 덤덤하게 말했다.

"아직도 내가 너를 누나라 부르길 바라는가."

"아니, 됐어… 씨발. 씨발. 씻빠아아알!!"

차량이 다시 한번 흔들렸다. 운전기사가 죽을죄를 지었다며 용서를 구하자, 류아라가 머쓱한 듯 내 눈치를 봤다.

그렇게 서로 말없이 5분 정도 지났을까, 그녀가 조금 진정된 듯 입을 열었다.

"후. 그래서 경매장을 간다고?"

나는 카탈로그를 살펴보며 말했다.

"그래. 거기서 얻을 물건이 있다. 뭐, 겸사겸사 돈이 될 법한 걸 구하는 것도 괜찮겠지."

"꼭 얻어야 할 건 뭔데?"

나는 류리크의 안면근육과 잘 어울리지 않는, 미소라는 것을 띄웠다.

"영월화(永月花)."

◈ 006

제도 중심가에 위치한 『 파르넨 시어 』 경매장은 거대한 극장과도 같았다. 그 주변에도 명품관이니 보석상이니 하는 것들은 많았지만, 그 위세가 이곳만은 못했다.

놀라운 것은 이 거대한 파르넨 시어가 제도 제일인 것도 아니라는 점이었다.

'규모만 따지자면 『 샹데리아 옌 』 그리고 『 미드가르드 로어 』가 더 훌륭한 편이지.'

세상 만물이 모여든 제도(帝都)이기에 하다못해 경매장까지도 경쟁이 치열했다.

"어서오십시오. 류리크 바타체스 폰 드라스카 아스트레이 님. 그리고 류아라 카바예르 폰 예르파드 아스트레이 님."

경매장에 도착하자마자 수행원 둘이 따라붙었다. 오롯이 바타체스의 황족만을 위해 상주하는 이들이었다.

뒤에 따라붙은 이들을 보며 류아라가 입술을 비죽였다.

"언제 올지 모르는 황족을 수행하겠다고 인력을 배치하다니, 돈 낭비도 지랄이야."

"언제 올지 모르는 황족을 미흡하게 대접하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

제도의 경매장 세 곳은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거기엔 어떤 경매품을 준비하느냐도 중요하지만, 얼마나 고귀한 이들이 방문하는지도 중요했다.

'대귀족과 황족이 애용하는 경매장이라는 소문만큼 바라는 것도 없을 테니까.'

물론 류리크가 이용하는 게 도움이 될진 모르겠지만.

"이곳입니다. 류리크 님."

일반인들은 접근조차 할 수 없는 비밀 통로를 지나 대기실에 도착했다. 앞에는 01 이라는 현판이 조그맣게 달려 있었다.

시선을 멀리 두면 02, 03 등의 방들도 존재했다.

'생각해 보니 나도 01은 처음인데?'

나는 약간의 두근거림을 느끼며 대기실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조금 과하다 싶을 만큼 값비싼 장식들로 가득했다.

'화려한 것 빼고는 다른 방과 다를 것도 없군.'

넓은 소파의 정면에는 스크린에 마법투사기로 '경매 물품 목록'을 보여주고 있었다. 거기에는 카탈로그에서 찾아볼 수 없는, 비공개 경매품까지도 버젓이 소개되고 있었다.

"황족과 후작가 이상의 대귀족만 계실 수 있는 VVIP 대기실입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언제든 저희에게 말씀 주시면 되겠습니다."

수행원은 그대로 방문 앞에서 대기했다.

조금 전부터 어딘가 불만스러워 보이는 류아라는 볼을 부풀리며 소파에 드러누웠다.

"씨이발. 기분이 뭣 같네. 씨이발."

"혼자 올 때는 못 받을 대접이니 섭하던가?"

"뭐가!"

"너는 바타체스의 이름을 버렸으니, 01번 방에는 못 들어오지 않나."

류아라의 이름에는 '바타체스'가 없다. 그것은 그녀가 출가외인이 되면서 그 이름을 버렸기 때문이다.

"씨발. 시비 거냐?"

"그냥 하는 말이다. 아버지가 정 용병단을 차리려면 바타체스의 이름을 버리라 했지만, 사실 설득만 잘했어도 괜찮았을 테니까."

"니가 알긴 뭘 안다고!"

버럭 성을 내는 걸 보면, 역시 미묘한 열등감이 남아 있긴 한 모양이다. '플레이어'로 접근할 때는 긴가민가할 만큼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었는데.

'상대가 거리낄 것 없는 망나니니까 숨길 필요도 없다는 것인가.'

작은 소득을 얻은 나는 슬쩍 화제를 돌렸다. 어쨌건 쩐주의 심기가 괜찮아야 내가 살 수 있는 물건도 많아질 테니까.

"너는 사고 싶은 물건 없는가?"

"관심 없어. 예술품이니 뭐니 하는 쓰잘데기없는 것들."

"하기사 너는 명검도 별로 선호하지 않으니까."

"용병은 야영이랑 노숙이 일상인데, 그딴 금덩이를 들고 다니면 괜히 표적만 될 뿐이라고."

류아라는 애초에 무척 검소한 편이었다. 위와 같은 이유로 값비싼 장비를 사용하지 않을 뿐더러, 먹는 것도 평범한 용병단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덕분에 돈이 상당히 많지.'

출가하면서 갖고 있던 자산을 모조리 처분했고, 용병단으로서 버는 수입도 있었다. 자본금도 넉넉하고, 수입은 있는데 지출만 없다는 소리다.

"그래도 전술용 아티팩트라면 만일을 생각해서 살 법하지 않은가."

"돈 없다."

"대충 3,000만 리브라 정도 있지 않던가?"

"…너 씨발, 그걸 어떻게 알아?"

플레이어니까 알지.

"감으로 말한 것이었는데, 꽤 근접했던 모양이야?"

"너한테는 그 영월환지 뭔지 그것만 사줄 거거든?!"

사실 영월화만 해도 적정가 200만 리브라짜리 물건이니, 한화로 하면 20억. 그저 감지덕지긴 하지. 하지만 그걸로 만족하기엔 류아라의 지갑이 너무 두껍다.

무려 한화로 약 300억짜리 쩐주를 두고 양심을 지키기엔 내 현실이 가혹해서 말이지.

그때였다.

―똑똑.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정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락하자 수행원이 들어와 경매가 곧 시작됨을 알려주었다.

* * *

〔 …그리하여 현재 류리크는 류아라 님과 함께 경매장으로 향했습니다. 〕

류미엘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의 손에는 방금 전 문서전송기계로 도착한 서신이 들려 있었고, 아무리 봐도 그 내용은 뭔가 이상했다.

"이게 말이 되는 건가?"

그녀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류아라 언니가 류리크랑… 대화를 할 정도로 친했었나?"

그녀의 성미라면 다짜고짜 주먹부터 나갔을 터였다. 그리고 류리크는 그걸 보는 순간 오줌을 지리며 머저리임을 인증했을 터이고.

적어도 그녀가 아는 류리크라면 그래야 했다.

"아니, 류리크를 직접 손보지 않았다는 것까진 그렇다 쳐도, 어떻게 경매장에 데려간 거지?"

"리아가 보낸 서신에는 '화술'이 대단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화술은 무슨, 그놈이 할 줄 아는 건 오만과 허세뿐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 혼란스러웠다. 대체 어떻게 망나니 류리크가 류아라를 구워삶은 건지.

"이대로면 마법 대학에 진학하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 되겠군. 하물며 영월화까지 산다면…."

지금은 다들 잊어버렸지만, 어렸을 적 류리크는 나름 신동이었다. 장래가 촉망받는 인재였고, 그의 오만은 거기서 비롯되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러니 방심할 수 없었다.

"샤프란 마법 대학으로 가는 걸 막을까?"

"류리크가 지원한 황족 특별 전형은 과락이 없는 전형입니다."

"거기 총장이 샤르미넨이잖나! 대충 부탁하면 통할 터!"

샤르미넨 바타체스 폰 멘체스터 레일라인. 그녀는 황족임과 동시에 제국 최고의 마법 대학 총장이기도 하다.

그러니 류리크를 거부하자면 얼마든지 할 수 있을 터였다.

"아가씨가 류리크를 노골적으로 견제를 하면, 별생각 없는 가신들까지 괜한 동요를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고 기사 대학이 아닌 마법 대학입니다. 가신들의 입장에서는 아스트레이 가문의 후예가 마법 대학에 진학하는 게 좋게 들리진 않을 겁니다."

"그렇군. 마법 대학이면 아버지도 탐탁찮게 여기겠지."

집사인 카엘은 조심스럽게 류미엘을 설득했다.

"또 대학에 진학한다는 것은 어쨌건 최소 4년 동안 학업에 매진한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그것도 그렇지만… 역시나 괘씸한걸."

"아가씨."

끄응, 류미엘은 어딘가 마뜩잖았지만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괜히 먼저 날을 세우는 것일 수도 있다. 아직 류리크가 당주의 자리를 노리는지도 확실치 않고, 간다는 것도 마법 대학이니.

하지만,

'가만히 내버려두기는 싫단 말이지.'

류미엘은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빙긋 웃었다.

"…내 손만 더럽히지 않으면 된다는 거지?"

생각해보면 간단한 일이었다.

그녀가 직접 나설 것도 없이, 류리크의 적은 이미 사방에 깔려 있었으니까.

* * *

파르넨 시어의 주 경매장은 뭇 예술극장의 그것과 비슷하게, 1층과 2층에서 모두 스테이지를 바라볼 수 있는 형태였다.

다만 가까울수록 좋은 좌석이라는 개념과 다르게, 1층은 평범한 경매장의 그것처럼 좌석들이 늘어져 있었고, 2층은 작은 라운지 형태로 만들어져 있었다.

널찍하게 좌석이 배치되고, 사교를 위한 테이블 및 춤을 출 수 있는 공간까지 마련되어 있다. 여유롭게 환담과 음료를 즐기며 경매에 참여하라는 것이었다.

"이게 바로 그 마공학 망원경이야?"

"그래. 그 덕분에 2층이지만, 1층보다도 더 자세히 경매 물품을 확인할 수 있지."

"와 씨발. 이거 하나만 있으면 정찰한다고 좆 빠지게 고생할 필요도 없겠다."

나는 망원경을 이리저리 들여다보는 류아라를 보며 말했다.

"그렇지도 않다. 이건 경매장 안에서나 쓸 만하지, 전장에서는 네 눈이 더 좋을 테니까."

"그런… 가?"

"군용으로 설계된 건 그나마 쓸 만하겠다만, 가볍게 500만 리브라를 가볍게 웃도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이 씨발! 그 돈 주고 살 바엔 그냥 발로 뛰어서 정찰을 하고 말지!"

한편 1층의 좌석들은 어느새 만석이었고, 2층의 라운지에도 VIP들이 속속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와 류아라는 VVIP였기에 라운지 중에서도, 외부에서 보이지 않는 비밀스러운 방을 안내받아 구태여 저들과 마주칠 일은 없었다.

다만 목소리는 조금씩 들려왔다.

"3년 만의 더 시크릿이라니 무척이나 설레는군요."

"그러게 말이에요. 무슨 물건이 나올지 무척 궁금하네요."

"오를레앙 공작부인께서는 아실 거 같은데…."

"호호. 미리 말해 버리면 재미가 없지 않습니까. 무엇이 나올지 지켜보는 것 또한 재미지요."

더 시크릿.

파르넨 시어에서 처음 시작한 이벤트성 경매로, 당일까지 밝히지 않은 비공개 경매품을 내놓는 행사이다.

당연히 높은 가치의 품목이 나오기 마련이고,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게 된다.

'더 시크릿은 경매 마지막에 하는 이벤트이니, 그를 위해 많은 이들이 돈을 아끼겠지.'

나로서는 다행스런 일이었다. 조금 전 01번 방에서 확인해 본 바, 이번 더 스크릿의 비공개 경매품은 조각상이었다.

내겐 하등 쓸모없는 것이지만 경쟁자들의 눈을 현혹시킬 터였다.

'영월화는 무난하게 얻을 수 있을 것 같군.'

―파르넨 시어의 경매에 참석해주신 귀빈 여러분들께 먼저 감사의 인사를 올리겠습니다.

경매사의 음성이 넓게 퍼지면서, 주 경매장 안의 빛들이 사라졌다. 1층에서는 입을 다물었고, 라운지에서 말을 주고받던 이들도 조금 목소리를 낮췄다.

물론 나와 류아라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우리가 있는 방은 방음 마법까지 펼쳐진 밀실이었으니까.

"후, 벌써부터 재미없네."

"이제 시작한 참이다. 좀 더 참아라."

"씨발, 집에 가고 싶어. 아니, 용병단으로 돌아가고 싶어. 몬스터 썰고 싶다고!"

누가 보면 살육에 미친 사이코인 줄 알겠다.

나는 차분하게 쩐주를 달랬다.

"적어도 영월화까지는 기다려라. 그리고 영 갑갑하다면 그 드레스는 벗어도 좋고."

―찌익.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류아라가 드레스를 찢어버렸다. 내가 가문의 위신을 운운하며 겨우 입혀 놨던 8,000 리브라짜리가 평범한 걸레 조각이 되었다.

"…후, 씨발 살 거 같네."

"드레스 안에 경갑을 입고 있으니까 그런 거다. 평범하게 의복만 입으면 될 것을…."

"그건 니가 온실 속 화초처럼 살아서 그런 거다. 이 머저리 새끼야. 니가 적진 한가운데서 야영을 해 봐라. 갑옷이 벗어지나 안 벗어지나."

하여튼 뇌가 이상한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니까.

그때였다.

―자, 이번 물품은 꽤 특별한 물건입니다. 라기온 공방에서 만든 라기온 반지, 17호입니다. 그가 만든 109개의 반지 중 가장 효과가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죠!

라기온 공방에서 주기적으로 제작하는 물품이니만큼, 경매에 올 만한 물건은 아니었지만 17호라는 부분이 남달랐다.

어떤 우연에서인지 17호에는 다른 반지들에 비해 성능이 더 뛰어났으니까.

―경매 시작가는 40만. 호가는 5만입니다!

나는 좌석에 배치된 버튼을 눌렀다.

―79번. 40만 리브라!

경매사의 외침에 멍 때리고 있던 류아라가 화들짝 놀랐다.

"뭐, 뭐야? 79번? 그거 우리 번호 아냐?"

"맞다."

순간 뇌에 과부하가 걸린 듯 류아라가 멍하니 있었다. 그러다 3초쯤 지났을까, 뒤늦게 반응을 보였다.

"야, 이 똘추 새꺄! 니가 뭔가 호가를 불러?!"

"동생을 위한 입학 선물이라고 생각해라."

"아니, 씨발. 선물을 주면 내가 주는 거지 니가 왜 내 돈으로 쳐 사는 건데?!"

물론 류아라가 순순히 사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 그녀는 딱 영월화까지만 사줄 생각이었겠지.

하지만 여기 온 시점에서, 이미 네 지갑 거덜나는 건 확정된 이야기다.

나는 슬쩍 떠보듯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네 용병단 예르파드의 승급 심사가 계속 미뤄지고 있다지."

"씨발. 염장 지르냐?"

"용병길드에 아버지의 입김이 닿은 탓에 꽤 곤란한 걸로 알고 있는데… 내가 그걸 해결해주겠다."

류아라의 눈동자가 커졌다.

"씨, 씨발. 니가 무슨 재주로!"

"다 방법이 있다. 이번 달 내로 예르파드의 승급 심사가 진행되지 않는다면, 내 목숨을 걸지."

"목숨을 걸기는 씨발! 개소리는 집어치우고... 지, 진짜 가능한 거야?"

반신반의하는 눈치지만 그녀의 눈빛은 '만일'에 추가 기울어 있었다. 그만큼 그것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소리였다.

예르파드는 훗날 동시대 단 세 개만 존재할 수 있는, 백패(白牌) 등급의 용병단이 된다. 그리고 동패인 지금도 은패로 승급하기 충분한 실력과 공적을 갖고 있다.

다만 미뤄지는 것은 오롯이 류오넬의 눈치를 보는 용병 길드 때문.

"믿어라."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는다. 예르파드는 2주일 뒤면, 내가 건드리지 않아도 알아서 승급한다.

'하지만 류아라는 그 사실을 모르지.'

나는 만족스런 웃음을 지으며 좌석의 버튼을 눌렀다.

"79번, 60만 리브라! 60만입니다!"

"씨발! 야!"

"왜, 승급 심사를 영원히 못 해도 상관없나?"

"아니… 씨발… 적당히… 사라고…."

역시 남의 돈으로 하는 쇼핑이 제일 재밌다.

◈ 007

샤이먼 엘베드 폰 위네스 마스체니는 연신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는 오늘 가문의 명운(命運)을 걸었다는 각오로 경매장에 참석했다. 가뜩이나 좋지 않은 재정상황에서 대충 긁어모을 수 있는 돈은 죄다 가지고 나온 것이었다.

'미술품들을 비롯해 가문의 물건들을 처분한다면 더 돈을 들이는 것도 가능은 하겠지만, 거기까지 가면 마스체니는 끝이다.'

다른 게 아니라, 귀족으로서 끝난다는 소리였다. 영약 구하자고 집안의 물건을 팔아넘기는 것은, 고고한 귀족과 엄청난 거리가 있는 것이었으니까.

물론 지금 긁어모은 돈만으로도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을 터였다.

'영월화의 예상가는 200만. 그리고 내가 준비한 건 400만 조금 안 되지. 거의 2배 가까이 준비했으니, 절대 놓칠 리가 없다.'

심지어 요 근래에는 마스체니처럼 마법사를 길러내겠다고 성화인 가문도 없었다. 경쟁자도 없을 테니, 영월화는 어렵지 않게 입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79번, 250만!"

무언가 잘못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그가 식은땀을 흘리는 원인이었다.

덜덜덜, 샤이먼이 어렵사리 팻말을 들었다.

"143번, 255만!"

하지만 그가 호가를 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경매사의 입에서 다른 번호가 튀어나온다.

"79번, 260만!"

무언가 잘못되었다.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

샤이먼은 밀려오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하지만 동시에 생각했다. 여기선 죽어도 물러설 수 없다.

그는 이를 악물며 팻말을 들어 올렸다.

"143번! 270만! 270만입니다!"

자신은 한 번 손을 들 때마다 심장이 덜컥 주저앉는데, 저쪽은 망설이지도 않고 호가를 한다.

"79번, 275만!"

으그극, 절로 이가 갈렸지만 온 사방에 귀족들이 깔려 있으니 티를 낼 수도 없었다. 로브를 썼다곤 해도 여차하면 들킬 수 있는 것이기에.

샤이먼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팻말을 쥐었다.

'도대체 어떤 새끼가…!'

* * *

한참 전부터 류아라가 입에서 게거품을 물고 있었다.

"야 이 미친 새끼야! 그만, 그만하라고!"

나는 대답하는 대신 종이에 적은 '예르파드 승급'이라는 글씨를 보여줄 뿐이었다. 그때마다 류아라의 게거품이 점점 늘어났다.

꽤 보는 재미가 있었다.

"갸아아아아악!!"

뭉크의 절규처럼 무릎을 꿇고 절망하는 류아라를 즐기는 것도 잠시, 나는 조금 놀란 눈으로 경매사의 손짓을 바라보았다.

"143번, 280만!"

낙찰 예상가 200만 정도를 예측했던 영월화의 가격이 생각보다 많이 뛰었다. 물론 여기서 포기할 순 없었다.

나는 지지 않고 버튼을 눌렀다.

"79번! 285만! 285만입니다!"

"씨, 씨발. 이건 미친 짓이야. 미친 짓이라고!"

옆에서 류아라가 뭐라뭐라 떠들어댔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좌석 옆에 있던 위스키 잔을 건네며 경매장을 주시했다.

"143번, 290만!"

내가 재차 버튼을 누르는 순간, 류아라가 내 손을 붙잡았다. 거의 반쯤 넋이 나간 것이, 수많은 회차에서도 보지 못했던 새로운 표정이었다.

"그만… 그만하자! 제발, 그만하자고!"

"여기까지 와서 포기할 수 없다. 영월화는 꼭 필요한 물건이다."

내가 덤덤히 말하자 류아라가 분노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야 이 미친 새끼야?! 아무리 필요해도 그렇지, 웃돈으로 100만을 얹어서 사는 건 뭐하는 병신 새끼냐! 하다못해 다음 회차에 사든가!"

"영월화는 귀한 물건이다. 파르넨 시어 경매에 나온 지 3년만인 매물이며, 이 뒤로 언제 나올지 알 수 없는 물건이기도 하지."

"씨발! 그러면 다른 걸 사든가! 영약은 뭐 많잖아!"

사실 마도 E-를 D까지 올려줄 영약은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그런 귀물(貴物)은 애당초 경매에 나오지도 않는다."

마력 회복에 약간의 도움을 주는 라기온 반지가 80만 리브라였다. 헌데 무려 마도 특성의 랭크를 올려주는 아이템은 얼마나 귀할까.

영월화는 D- 이하만 쓸 수 있다는 제약이 있기에 경매로라도 나오는 것이고, 200만 리브라라는 '상식적인' 가격대가 형성된 것이었다.

물론 이번에는 예상보다 많이 뛰었지만.

"아, 아니면 저택의 수장고에 있는 요정 여왕의 눈물이라든가…!"

"그걸 건드리는 순간 아버지가 척살령을 내리겠다만, 그걸 감내해서라도 네가 구해준다면 뭐… 영월화 정도는 포기하지."

"씨발… 씨발… 씨바아알!"

마도 특성을 조정할 만한 수준의 영약들은 애초에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만큼 수가 적고, 철저하게 관리된다.

즉, 돈으로도 못 구한다는 말이다.

'단순히 돈만 많다고 영약 다 빨고 강해질 수 있었으면 루시아사가는 망겜이었겠지. 그나저나….'

나는 슬슬 걱정되는 눈빛으로 무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79번, 320만! 아앗, 바로 들어옵니다! 143번, 330만!"

경매사의 얼굴에 탐욕스런 희열이 감돌기 시작했다. 다른 객석에서도 꽤나 흥미로워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건 물건을 낙찰받으려는 이에겐 별로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운이 좋으면 180만, 나빠도 220만쯤이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액수가 이미 상정한 범위를 넘어도 한참 넘은 상황이었다. 이쯤 되니 문득 궁금해졌다. 본래의 역사에서 영월화를 가져갔을 사람이 누구인지.

시선을 밖으로, 나는 물끄러미 1층으로 시선을 옮겼다. 거기엔 두터운 로브로 온몸을 감싸고 있는 누군가가 143이라 적힌 팻말을 이제 막 내리고 있었다.

'로브 때문에 누군지도 모르겠고, 더 끌면 지지부진 계속 올라가겠군.'

나는 한 번에 가격을 올려 승부를 보기로 했다.

"7, 79번… 400만… 400만 리브라입니다! 대단하군요. 400만입니다!"

400만이라는 숫자가 나온 순간, 류아라가 자신의 무릎을 그러안은 채 VVIP실의 구석으로 향했다.

그리고 손톱으로 북북, 벽을 긁어내리기 시작했다.

"시발. 들었어? 400만이래. 400만. 시발. 망했어. 내 인생은 망했어. 다 망했어. 흑."

저래놓고 예르파드가 승급하는 순간, 기뻐 날뛰면서 사흘 동안 내리 술 파티를 벌이겠지. 나는 익히 아는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며 1층의 로브를 확인했다.

다행히 그쪽의 총알이 400만을 넘지는 못하는지, 부들부들 몸이 떠는 게 보였다.

"더 없습니까? 재능 있는 마법사들의 꿈, 영월화는 3년 만에 등장한 상품입니다! 이후엔 얼마나 시간이 지나야 생길지 알 수 없는 물건입니다!"

경매사가 마지막으로 경매의 불꽃을 살리려 노력했지만, 143번의 탄환은 거기서 끝인 듯싶었다.

"다른 입찰자분, 안 계십니까?"

경매장이 조용했다. 143번도 어깨를 축 늘어뜨릴 뿐, 별다른 반응이 없다.

"마지막으로 세 번 호가하겠습니다! 400만에 하나, 400만에 둘, 400만에 셋. 낙찰되었습니다! 이로써 영월화의 주인은 79번 귀빈입니다!"

예상치보다 한참을 웃돈 낙찰가 때문일까, 경매장 곳곳에서 박수가 흘러나왔다.

―짝짝짝!

나는 어차피 저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VVIP석이기에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여전히 쭈그리고 앉아 벽을 긁고 있는 류아라에게 말했다.

"슬슬 가지."

"이제… 끝인 거야? 내 지갑… 이제 무사?"

"그래. 더 살 것도 없다."

"…그래서… 지금까지 쓴 총액이… 얼마야?"

음.

나는 그녀가 놀랄 것을 대비해 10% 정도 낮은 금액으로 답했다. 그러자,

"씻빠아아아알!!"

* * *

"…솔직히 류리크 님께서 이런 경매에 참여해주실 줄 몰랐습니다."

VVIP 실을 빠져나와 경매장 뒤편으로 향했다. 그러자 경매장 무대에 섰던 이와 다른 경매사가 따라붙었다.

그는 낙찰받은 물건에 관해 이런저런 설명과 잡다한 얘기들을 했다.

'내가 참여할 줄은 몰랐다… 인가.'

나는 그 미묘한 말의 안쪽을 읽을 수 있었다.

'황족이라 경매장 안으로 들이긴 했으나, 돈 한 푼 없을 망나니가 정말로 대금을 지불할 수 있는 거냐, 라는 거겠지.'

그의 뒤통수로 흐르는 식은땀을 보면 대충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걸 간파한 나는 약간 불쾌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내가 이 경매에 참석하면 이상한 일인가?"

"아닙니다. 그저 바타체스의 황족께서 참여해주신 것이 너무도 영광스러워서 드린 말씀입니다. 부디 오해하지 않으시길."

표정을 감추는 기술에 비해 처세는 빠르군, 나는 적당히 그를 채점하면서 걸음을 옮겼다.

"낙찰받으신 물건들은 저 앞에 모아 놓았습니다."

VVIP룸의 통로를 나와 5분 정도 걸었을까, 30m쯤 떨어진 곳에 물건들이 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가드로 보이는 남자 둘이 거대한 벽처럼 서 있었다.

충격적인 건, 그 가드 둘의 가슴팍에 베너렛의 훈장이 달려 있다는 점이었다.

'지랄났군.'

설마 내가 물건을 훔치거나 손상 시킬까 봐 걱정이라도 한 것일까, 정예기사 수준의 떡대를 둘이나 배치해 놓았다.

"자, 확인하시지요."

경매사가 물건들의 앞쪽에 서며 장갑 낀 손으로 천들을 치웠다. 그러자 경매장에서 본대로 유리관에 밀봉되어 있는 물건들이 나타났다.

"라기온 반지 17호, 요정의 날개 부적, 줄라포트의 속삭임… 그리고 영월화까지. 모두 7점입니다. 어떻게… 유리관을 열어서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형식상 말은 그렇게 하지만 경매사의 식은땀이 조금 더 많아졌다.

나는 그를 괴롭히는 대신 그냥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필요 없다."

"그렇다면, 송금을 확인하는 대로 인계해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경매사의 눈가가 아주 미약하게 떨렸다. 여기까지 와서 돈이 없다고 할까 봐 퍽 겁나는 모양이었다.

나는 품 안에서 아스트레이의 어음을 몇 장 꺼냈다. 그리곤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하는 경매사에게 친절하게 설명했다.

"사인은 이쪽에서 할 거다."

류리크의 사인이라면 애매하겠지만, 류아라의 사인이 들어간 어음이라면 그냥 현금 그 자체라고 봐도 무방할 터.

그제야 경매사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그렇군요. 물품들은 직접 가져가시겠습니까?"

"본인의 별장으로 배송해주게."

"예, 알겠습니다."

하나하나가 워낙 고가의 물건들이기도 하고, 경매사의 배송 시스템은 도중에 분실 시 저쪽에서 다 보상해주니 이용하는 편이 나았다.

나는 그 길로 류아라와 함께 경매장을 나가려 했는데,

―끼릭. 끼리릭.

뒤편에서 카트에 실린 조각품이 옮겨지고 있었다. 별생각 없이 잠깐 쳐다봤는데, 그 형태와 모습이 어딘가 낯익었다.

나는 그쪽을 향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보게, 저게 그 비공개 경매품인가?"

"예, 그렇습니다. 더 시크릿에 나올 조각상 '그림자의 눈물'입니다. 류리크님께서 참여해주셨으면 정말 영광이었겠습니다만…."

뭐, 나랑은 상관없는 물건이지.

조각상 따위 가지고 있어 봐야 큰 쓸모가 없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걸음을 옮기는데, 불현듯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 예술적 안목이 미묘한 변위(變位)를 감지합니다. ]

내 예술적 안목 특성이 무언가 반응을 보였다.

'이상하군. 예술적 안목에 이런 기능이 있었나?'

게임에서 예술가 엔딩을 볼 당시 내 예술적 안목은 E랭크였다. 그때는 별 기능이랄 만한 게 없었기에, 여기서도 대충 훑어보고 넘겼었는데….

나는 잊고 있던 내 특성을 확인해 보았다.

―――― 『 예술적 안목 』 ――――

▶ 분류 : 특성

▶ 등급 : A

▶ 설명

: 조각, 그림, 공예 등의 예술품을 보고 그 가치를 분별할 수 있는 견식.

▶ 효과

: 예술품의 예술적 가치를 알아볼 수 있다.

: 예술품의 숨겨져 있는 가치를 알아볼 수 있다.

: 자신의 수준에 맞는 작품에 한해, 위작을 판별할 수 있다.

――――

'위작 판별이 가능하다고?'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그림자의 눈물'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경매사의 몸이 움찔거리고,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 저기… 류리크 님? 출구는 이쪽이옵니다만…?"

두 명의 기사가 언제라도 날 제압할 수 있는 거리까지 접근하고, 경매사는 반쯤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내가 3m 남짓한 거리까지 '그림자의 눈물' 근처로 다가서자,

[ 예술적 안목이 해당 예술품이 위작임을 간파합니다. ]

◈ 008

―이 작품, 위작이로군.

내 한 마디에 경매사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물론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저희 경매장의 감정사가 직접 확인한 물건입니다."

"그러니까 문제인 거다. 조각품을 어찌하여 감정사에게 맡기는가. 한시 빨리 조각가를 수배해 이 작품의 위작 여부를 살펴보도록."

이 세계의 감정(鑑定) 스킬은 순전히 가치를 판별하는 능력이다. 아이템을 살펴보면 효과나 위력 정도를 알아보는 것이지, 물건이 언제 만들어졌고, 무슨 재료를 썼느니 같은 것은 해당 사항에 없다.

'예술적 지식 없는 감정사가 감정 스킬을 쓴다고 예술품의 연혁, 화풍, 작가를 알아낸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소리지.'

물론 감정사도 어느 정도 위작을 판별할 수 있긴 하다.

'애당초 위작에 큰 가치가 있을 수 없으니, 보통은 감정 스킬에 다 걸러지기 마련이지. 그래서 지금까지 문제없이 경매장이 운영된 것일 테고.'

다만 그럼에도 이러한 일이 벌어진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 말인즉, 이것이 위작임에도 진품에 버금갈 만큼의 가치가 있다는 소리지.'

아티팩트처럼 효과가 있는 건지, 안에 무슨 마법이라도 걸려있는 건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상당한 가치 있는 물건이라는 건 확실했다.

잠시 후, 경매사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류, 류리크 님의 말씀이 맞았습니다. 조각가를 불러 확인해 본 결과 위작이었다고…!"

"조각품은 조각가가 확인해야지. 문외한인 감정사에게 맡기면 제대로 된 가치를 파악할 수 있겠는가."

"소, 송구하옵니다! 저희는 그저…."

새하얗게 질렸던 경매사의 얼굴이 이번엔 거무죽죽하게 죽어갔다.

"내게 송구할 것이 무엇이 있는가. 나는 이 물건을 사지도 않았거늘. 다만 감정사의 죄는 없을 테니 그에게 책임을 묻지 말라."

"예? 예? 하지만…."

"잘못이 있다면 앞서 말했듯, 조각품을 조각가에게 확인하지 않게끔 한 경매장 주인의 책임일 터이니."

나는 할 만큼 했으니 슬슬 떠나려 했다. 그런데 서서 기절할 것처럼 바들바들 떠는 경매사가 자꾸 눈에 밟혔다.

아니, 정확히는 어떻게 위작 따위가 감정 스킬로 가치를 인정받았는지가 궁금했다.

"이보게, 경매사. 내 하나 물어볼 것이 있네."

"뭐, 뭐든 말씀하십시오. 저는… 그저…."

"내 보아하니 자네들은 지금 더 시크릿에 낼 물품이 없어 곤란해하는 것 같네. 맞는가?"

"그, 그렇습니다. 원래 '그림자의 눈물'을 내보낼 생각이었고, VVIP룸에도 그렇게 정보를 제공했으니… 이제 돌이킬 수도 없는데…!"

나는 슬쩍 그에게 다가서며 조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혹, 본인이 그 곤란을 해결해준다면,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류… 리크 님께서… 말씀이십니까?"

아직도 나를 망나니 프레임에 씌워 보는가.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품 안에서 병을 꺼냈다. 얼마 전에 '가울'에게서 받은 약수병이었다.

"그대는 이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겠는가?"

"물… 아니 빈 병 아닙니까?"

"더 자세히 보게."

"…병의 형태를 보아하니, 성수가 들어 있던 병이로군요."

"그것도 아니다. 이는 약수가 들어 있던 병이다."

약간의 기대감을 보이던 경매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 들어본 적이 있긴 합니다만… 평범한 병을 비밀 경매에 출품할 수는…."

"이 약수병을 준 이가 누구인지 알면, 꽤 놀라울 걸세."

라이미라크 성당의 파견 신관, 가울.

그는 무려 '잿빛수정'에 대해 알고, '약수'를 들고 다니는 NPC다. 나는 가울이 돌아가는 즉시 리아를 시켜 그의 정체를 알아오게끔 했고, 얼마 뒤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는 라이미라크 교단의 추기경, 가울 예하께서 건네준 물건이라네."

그는 무려 추기경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그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은,

'본격적인 플레이가 시작될 무렵엔 이미 은퇴한 사람이기 때문이지.'

실제 가울은 이미 추기경 자리에서 물러났고, 현재는 조용한 곳에서 적적히 지낸다고 했다. 현역으로 있을 당시에도 이름을 알리지 않고 조용히 신을 섬기는 신관이었으며, 이후에도 그와 같은 삶을 이어간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이 약수병은 추기경 가울이 마지막으로 남긴 물건이란 말이지."

"그, 그렇군요. 분명 대단한 물건이기는 한데…."

아직은 부족하다. 나도 그 부분을 이해하기에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나는 이 병에 들어 있던 약수를 마신 뒤, 잿빛수정 중독을 이겨 냈지."

"…그, 그게 정말입니까? 아니… 진… 아니, 그… 정말이십니까?!"

"본인이 바로 그 살아 있는 역사임을, 곧 모두가 알게 될 것이다."

아주 극적인 스토리를 섞어주니 경매사의 얼굴에 희망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원래 이런류의 물건들은 '역사'가 아주 중요했다.

누가 소유했고, 어떤 풍파를 겪었으며, 마침내 어찌 되었는지.

"이 모든 것이 한 치의 거짓 없는 진실이네. 그리고 자네가 알지 모르겠지만, 나는 본래 조각가였다네. 그러니 이 밋밋한 병에 내가 조금 손을 봐준다면 상당히 그럴싸한 물건이 나오지 않겠나?"

나는 예술적 안목과 함께 잊고 있던 특성을 하나 떠올렸다.

―――― 『 조각 』 ――――

▶ 분류 : 특성

▶ 등급 : A

▶ 설명

: 재료를 새기거나 깎아서 입체 형상을 만드는 행위.

▶ 효과

: 조각도를 이용하여 나무, 돌, 금속 등의 재료에 도안을 하거나 조각 작품을 창조한다.

: 연마기, 끌, 정, 망치 등의 도구에 대한 보너스가 발생한다.

: 수준 높은 예술적 감각으로 작품을 만들 경우, 아이템에 대한 가치를 높일 수 있다.

――――

예술 계열 특성인 만큼 별 볼 일 없게 여길 수 있지만, 여기엔 괄목할 만한 효과가 하나 있다.

'아이템의 가치를 높일 수 있다.'

나는 경매사에게 말했다.

"어서 조각도를 하나 구해오게. 무엇이든 좋으니 빨리!"

"예, 옙! 알겠습니다!"

잠시 뒤 경매사가 조각도 하나를 들고 왔다. 장식이 꽤 화려한 것이, 싸구려는 아닌 듯 보였다.

나는 찬찬히 조각도를 살펴보았다. 도(刀)라고는 하지만, 사실 생긴 건 전혀 칼과 다른 모양새였다. 쇠로 된 날 부분은 고작해야 몇 센티에 불과하니까.

'내가 조각을 할 수는 있을까.'

사실 진짜 조각을 해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별장에 있을 적엔 잿빛수정을 해결하기 바빴고, 주변에 조각도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류리크가 아닌 한유진은 예술과 철저히 무관한 삶을 살았다. 예술가 엔딩을 볼 적에도, 예술에 힘을 쏟지 않고, 시세조작으로 억지로 가치를 끌어올려 달성했었으니까.

'예술가 엔딩을 볼 때 예술가 특성이 F였으니 말 다 했지.'

그런 마당에 여기서는 마우스가 아닌 진짜 조각도를 잡고 뭔가를 만들어 내야 한다. 그게 분명 쉬운 일은 아닐 터.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조각도를 쥐었다.

[ '조각' 특성이 반응합니다. ]

[ '신동' 특성이 반응합니다. ]

[ 잊고 있던 예술적 감각이 되살아납니다. ]

조각도를 쥐자마자 형용할 수 없는 기묘한 감각이 전신에 밀려들었다. 약간의 흥분. 떨림. 당장에라도 무언갈 창조해 내고 싶다는 충동.

'손이 제멋대로 움직인다는 게 이런 느낌인 건가.'

눈앞의 약수병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병이었지만, 예술품으로 만들고자 바라본 순간 시야가 달라졌다.

그것을 어떻게 깎고, 다듬어야 할지. 재료로 무엇을 만들어야 가장 좋을지. 그러한 것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내가 마약을 해 본 적이 없는데도 마약 중독 특성의 금단 현상에 시달렸던 것처럼, 예술가 특성도 나를 추동하는 것인가.'

나는 손길이 이끄는 대로 조각도를 움직였다.

[ 조각도에 예술성이 깃듭니다. ]

* * *

―본 경매장을 찾아주신 귀빈 여러분. 드디어 마지막 경매이자 피날레, 더 시크릿을 시작하겠습니다.

―더 시크릿을 시작하기에 앞서, 귀빈 여러분께 사죄의 말씀을 올리고자 합니다.

―그간 본 경매장에서는 귀빈들의 즐거움을 위해 더 시크릿을 통해 비공개 경매품을 선보여 왔습니다. 헌데 몇몇 귀빈들께 이에 관한 정보들을 미리 알려드려 즐거움을 반감시켰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 누구도 몰랐던 비공개 경매품을 선보이고자 합니다.

내가 주문한 대로 경매사의 멘트가 이어진다.

―이번 더 시크릿의 비공개 경매품은 '약수병'입니다.

좌석들에서 웅성거림이 피어난다. 귀족들은 순간 혼란스러울 테지. 약수병이라는 게 무엇인지, 그리고 그게 '더 시크릿'에 등장할 만큼 귀한 것인지.

―신사 숙녀 여러분, 우리는 지금까지 오랜 역사(歷仕)를 지닌 물건들에 그 가치를 부여했습니다. 이미 작고한 누군가의 유품, 이제는 없는 누군가의 작품… 하지만 살아 있는 역사에도 그 가치가 있지 않을까요?

―이 약수병은 전(前) 라이미라크 대성당의 추기경, 가울 예하께서 직접 축성하신 물건입니다. 그리고 이 물건으로 말미암아, 고귀한 황손의 한 분께서 잿빛수정의 중독을 이겨내셨지요.

몇몇은 그가 말하는 황손이 누구인지 알아차린 듯 작은 탄성을 흘렸다.

하긴 방계까지 포함하면 득시글거릴 그 수많은 바타체스 중에서도 '잿빛수정'에 중독되어 허우적거리는 얼간이는 하나뿐일 테니.

―여러분 주목해주십시오. 이번 물품은 분연히 일어나 한 생명과 미래를 구해낸, 살아 있는 역사 그 자체입니다!

사실 이 부분은 다분히 나를 홍보하고자 넣은 멘트이기도 했다. 류리크는 더 이상 너희들이 아는 그런 망나니가 아니다.

제발 류아라처럼 그딴 머저리 같은 오해는 더 이상 집어치워라.

―귀빈 여러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을 것입니다. 제 3황자, 류오넬 각하의 아스트레이 가문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한때 신동으로 불리며, 제국을 이끌어갈 촉망받는 인재였던 남자가 어떻게 추락하였는지.

―류리크 바타체스 폰 드라스카 아스트레이.

―제국에서 최연소로 베너렛 훈장을 수여받은 무인(武人)이자, 최연소로 헤루인 등위를 얻어 낸 마법사, 그리고 지금도 황궁에 남아 있는 '세계의 종말'을 조각해 낸 예술가!

그리고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경매사의 설명이 무언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저 부분은 내가 시킨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아는 '정보'도 아니었다.

―그저 세상을 등지고 타락했던 그가, 더 이상 돌아올 길 없이 먼 곳으로 갔다 여겨졌던 그가. 자신을 세상으로 돌아올 수 있게끔 도와준, 추기경 예하에 대한 감사함을 담아 '조각'을 새긴 작품. 불가해의 절벽을 기어 올라와 새로운 역사를 조각해 낸 작품!

―이것이 바로 그 '약수병'입니다.

경매사의 설명이 끝나자 객석에서 떨떠름한 박수가 조금 흘러나왔다. 선동꾼 몇이 추가되자 금세 들어줄 만하게 바뀌었지만.

그리고 그때 나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 * *

"낙찰가는 30만 리브라입니다."

약수병의 최종 가격은 그 정도였다. 한화로 3억, 고액이라면 고액이지만 경매의 대미를 장식한 '더 시크릿'에서 나올 금액은 아니었다.

나는 경매사를 다독였다.

"자네의 언변은 훌륭했네. 물건이 그저 그랬던 것뿐이지."

"아, 아닙니다. 류리크 님께서 내어주신 작품은 엄청난 가치가 있었습니다. 30만 리브라라는 가격은 오롯이 제 불찰입니다. 차라리 시작가를 높게 잡았으면 어땠을지…."

"이미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높은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네. 사실… 평범한 병이지 않았는가."

실제 그러했다. 이래저래 말을 꾸며 내고 뭔가 있어 보이는 척했지만, 결국은 그냥 병이었다. 그 품질도 사실은 라이미라크에서 공병처럼 널리고 널린 평범한 유리였을 테고.

"그래도 경매가 끝난 뒤, 논란은 없었습니다. 낙찰가와 별개로 새로운 시도였다는 반응이 많았고, 참석하신 귀빈들도 모두 '즐거움' 부분에서 만족하셨다고 말씀주셨으니까요."

"면피는 했다는 거군."

"이 모든 것이 류리크 님 덕분입니다. 류리크 님, 본 파르넨 시어 경매장은 이 은혜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 훗날 '그 물품'을 입수하게 된다면 경매에 올리기 전에 미리 알려주게."

어차피 당분간의 생활비라면 30만 리브라로 충분했으니(경매 수수료는 떼지 않기로 했다.), 대신 미래에 투자하기로 했다.

'물건 찾기에 한해서는 경매장이 최고니까.'

나는 30만 리브라의 낙찰금을 받으며, 퍼뜩 기억났다는 듯 위작 '그림자의 눈물'을 가리켰다.

"저 위작은 어찌할 셈인가?"

"저희 주인께선 부숴버리라 하셨습니다."

"음, 그래도 완성도가 꽤 있는 위작이거늘."

"그래도 경매장에서 위작을 다룰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경매사의 눈에서는 '한시라도 빨리 저 저주받은 물건을 치워야 한다!'라는 느낌이 팍팍 묻어났다.

나는 그를 슬쩍 떠보았다.

"어차피 파기할 물건이라면, 내 가져갔으면 하는데 괜찮겠는가."

"송구하옵니다만 저희 주인께 먼저 여쭙고, 답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처세술 때도 보긴 했지만, 제대로 교육받은 작자다.

잠시 후, 나는 그림자 눈물의 위작을 들고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조용했던 류아라가 입을 열었다.

"야, 그건 왜 챙긴 거냐?"

"쓸데가 있을 것 같아서."

"......."

"왜 날 그런 눈으로 보는 거지?"

류아라가 휘어진 눈썹으로 날 바라보았다. 다분히도 무언가를 의심하는 티가 역력했다.

"…너 이상해."

"뭐가 말이냐."

내가 먼저 자동차에 타자, 류아라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며 같이 올라탔다.

"너가 원래 이렇게… 똑똑했었나?"

"후우, 너는 내가 어렸을 적 신동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사람이 달라진 건가?"

사람 말을 듣질 않는군.

'그나저나 신동이라….'

이 세계에 온 뒤로 많은 것을 깨닫고, 알아가는 중이었다. 잿빛수정에 대한 착각이 그러했고, '게임'과 '현실'의 괴리를 이해했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몰랐던 설정이… 착각하고 있던 이야기가… 있단 말이지?'

경매사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최연소로 베너렛 훈장을 수여받은 무인(武人).

―최연소로 헤루인 등위를 얻어낸 마법사(魔法師).

'베너렛이면 상급기사, 정예기사 취급이다. 그보다 한 단계 높은 리테르면 능히 기사단을 이끌 단장까지도 될 수 있지.'

그 사이의 한 단계 한 단계가 범인(凡人)은 평생토록 넘지 못할 벽이라지만 어쨌건 충격적인 재능이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면 카바예르, 현재 류아라의 수준이다.

물론 카바예르 훈장과 별개로 무력 S인 류아라와 대등할 순 없겠지만.

'거기에 최연소 헤루인 등위까지 취득했단 말이지.'

최고의 인재들만 가는 샤프란 대학의 입학 요건이 그보다 낮은 벨테인이다. 헌데 헤루인이라면, 이미 자격으로도 차고 넘친다는 소리다.

류리크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대단한 신동이었다.

'마도 특성 랭크는 고작해야 E-인데. 어떻게….'

고민이 깊어졌다.

아무래도 류리크의 비밀에 대해, 더 알아볼 것들이 많아진 것 같았다.

◈ 009

샤이먼은 마치 악몽을 꾸는 기분이었다.

"…류리크… 아스트레이…."

얼마 전 경매장에서 영월화를 빼앗겼다. 평균 낙찰가가 200만인 걸 고려해 400만 조금 안 되는 돈을 챙겨갔다.

그런데 다른 놈이 400만을 불러 빼앗겼다. 거기서부터 무언가 일그러진 기분이었다.

'차라리 내가 먼저 400만을 불렀더라면, 혹시 낙찰받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그 영월화를 가져간 사람이 류리크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 증오와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감히… 네놈이… 감히!"

그리고 류미엘을 통해 그가 샤프란 마법 대학에 들어갈 거란 걸 알았을 땐, 미쳐버릴 것 같은 기분마저 느껴야 했다.

―들으셨습니까? 류리크가 마법 대학에 들어간다고 하더군요.

―무슨 말인지 도무지 모르겠군요.

―기사 학교에 가길 바랐으나, 마법 대학 그것도 샤프란에 들어가겠다 하니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당주의 아우인 샤이칸이 샤프란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지 않습니까.

후에 개인적으로 조사를 해 보니, 이미 입학 서류까지 제출했다는 것이 아닌가.

"감히… 감히 마스체니를… 우롱하는가!"

그와의 질긴 악연이, 겨우 잊을 법했던 과거가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가문의 장자가 깊은 잠에 빠지면서 드리운 몰락의 그림자.

그걸 알기에 도무지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영월화를 빼앗긴 데서 비롯된 증오.

그리고 몰락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대소 비롯되는 원념.

'네놈이 태연하게 마법 대학에 들어가게 둘 순 없지!'

* * *

샤프란 마법 대학 입학처는 한가했다. 정시를 포함한 대부분의 입학 전형이 완료된 터라 직원 모두가 여유를 만끽하는 시즌이었다.

그런 분위기 가운데 입학처장이 한턱 쏜다고 하자 다들 들떠서 바람 같이 사라졌다. 하지만 최소 인원은 남아야 했기에, 2년 차인 막내 로운이 우울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것이 불운의 시작이었다.

"류리크의 지원 서류를 파기… 하라는 말씀입니까?"

"그래."

말을 들으면서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눈앞의 남자는 평범한 학부형이 아니었으니까.

"샤이먼 백작님. 그건 제 권한 밖의 일입니다!"

샤이먼 엘베드 폰 위네스 마스체니. 무려 고귀의 13가문이자, 백작가의 당주인 그가 직접 찾아온 것이었다. 그것도 터무니없는 부탁을 들고.

"때마침 자네가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네. 자네도 마스체니의 일원이라면 부디 협조해주게."

"그렇게 말씀하셔도…."

로운이 격렬하게 거부하자, 샤이먼이 눈살을 찌푸렸다.

"대단한 것도 아니네. 그저 그놈의 지원 서류가 '도착'하지 않았다고만 하면 되네."

"마법 문서전송장치로 도착한 서류입니다. 어떻게 받은 걸 못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거 담당이 자네이던가?"

"…그건 아닙니다만."

"그러면 서류가 어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는 것이지."

대체 무슨 사고회로를 굴려야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인지, 로운은 그저 답답했다.

"하다못해 평민이라면 모를까, 류리크 님은 바타체스의 황족입니다."

"그래 봐야 방계이지 않던가? 1황자도 아닌, 3황자의 아들이며, 장자도 아닌 차남이다. 그 아들부터는 바타체스의 이름도 쓰지 못하지."

"그래도… 지금은 엄연한 황족 아닙니까? 이게 발각되면 저는 끝장입니다!"

로운의 눈동자에 두려움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잘못한 직원들이 어떤 처분을 받는지 이미 숱하게 봐왔기 때문이다.

"샤르미넨 총장이 어떤 사람인지 아시지 않습니까!"

"......."

"분명 그럴 겁니다. '헤에, 그런 일이 있었어요? 와 정말 대다내~.' 이러면서 절 개구리로 만들 거란 말입니다!"

그 뒤로는 개구리의 모습으로 운동장을 돌게 만들겠죠! 로운이 처절한 표정으로 외쳤다. 하지만 샤이먼은 싸늘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래서 하지 않을 건가?"

"그야…!"

"여기서 거절한다면 네놈은 더 이상 마스체니의 이름을 달 수 없을 것이야. 허나, 가문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면… 내 너를 가문의 사람으로 받아들이겠다."

로운의 눈동자가 초조하게 흔들렸다. 그는 류리크와 마찬가지로 방계였다. 촌수가 가까워 마스체니라는 이름은 간신히 달고 있으나, 그마저도 눈치가 보이는 판국이었다.

샤이먼이 독사 같은 눈을 빛내며 속삭였다.

"내 이번 일만 잘 되면 화려한 사교계의 데뷔를 약속하지. 그러면 혹시 아나? 마음 맞는 여식을 만나 '진정한 귀족'이 될 수 있을지."

* * *

별장은 언제나처럼 조용했다. 그리고 리아는 평소처럼 무표정이었다.

"파르넨 시어에서 재미난 일을 벌이셨다 들었습니다."

"본인의 소문을 들었는가."

"예, 가울 성하께 받았던 약수병을 꽤 후한 값에 팔았다고 들었습니다."

"소문이 빠르군."

나는 파르넨 시어에서의 용무가 끝난 뒤 지체 없이 돌아온 참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일어난 일을 리아는 이미 알고 있었다.

'역시, 너는….'

리아가 내 외투를 건네받으며 말을 이어갔다.

"파르넨 시어에 빚을 지워 두셨겠군요."

"글쎄, 무슨 말인지."

"파르넨 시어의 비공개 경매품은 본래 '그림자의 눈물'이었습니다. 헌데 그 대신 류리크 님의 평범한 약수병이 그 자리를 꿰찼으니, 전말은 뻔한 얘기지요."

나는 자연스럽게 연기력을 담아, 아주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비공개 경매품은 경매 당일, VVIP룸의 마법투사기로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만."

리아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소인의 장기랄 것은 유능함뿐이므로."

"그 유능함을 알기에 묻겠다만, 내게 그 말을 해서 얻는 이익은 무엇이 있을꼬."

"그것은…."

"필시 본인의 칭찬을 바란 것이렸다."

나는 스위치가 발동한 악동처럼 옅은 미소를 띄웠다.

"제가 무슨 칭찬을 바란다는 것인지요."

"저택에 남아 있으면서도 내 주위에서 일어난 일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던 것 아니더냐. 필시 무언가의 위협이 있었다면, 나를 구해줬을 터이고."

리아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으며 완강히 부정했다.

"오해입니다. 명백한, 오해입니다."

나는 씨익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고생했다."

"하, 하지 마십시오!"

화들짝 놀란 리아가 뒤로 물러서며 피했지만, 그녀의 머리는 약간 헝클어진 뒤였다. 그리고 나로선 그게 조금 의외였다.

'아무리 방심했다 한들 기사인 그녀가 내 손길을 못 피할 리가 없는데… 진짜로 칭찬이 고팠던 것인가.'

조금 더 리아를 놀리고 싶었지만,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갔다간 지뢰를 밟을 것이 뻔히 보였다.

나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별장에는 별일 없었는가."

"사실 별일이 있긴 했습니다."

그 짧은 사이에 별일이라는 게 있을 수 있는 건가.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표정을 정리한 리아가 덤덤하게 얘기를 꺼냈다.

"좋은 소식과 좋지 않은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선문답이더냐?"

리아는 지그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 무언의 시선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진짜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는 모양이었다.

"안 좋은 것부터 듣겠다."

"일단 샤프란 마법 대학에 떨어지셨습니다."

"이상한 일이군. 황족 특별 전형에 인원수 제한이라도 있었나?"

"아닙니다. 보내온 서신에 의하면, 마감 기한을 놓치셨다고 하더군요."

그럴 리가.

아무리 바쁜 시간을 보냈다 한들 대학 서류접수 기한을 놓칠 만큼 멍청하진 않다. 심지어 나는 마감에 맞춰 보낸 것도 아니었다.

충분히 여유를 두고 서류를 보낸 것이었는데.

"우편이 아닌 마법 문서전달장치를 썼으니 늦게 도착했을 리도 없거늘…."

말끝을 흐리며 리아의 눈치를 살피자니 그녀가 표정으로 이미 답을 말해주고 있었다.

"누군가 손을 썼나 보군. 류미엘인가."

"아닙니다. 아마도…."

"그렇다면?"

"그 답이 좋은 소식입니다. 누가 손을 썼는지 파악했습니다."

얘는 진짜 뭐하는 애지.

내가 경매에 갔다 오는 그 짧은 시간에. 경매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거의 실시간으로 파악하며, 대학에 떨어졌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 배후에 누가 있는지까지 파악을 했다고?

나는 괴이쩍은 무언가를 보는 듯한 눈으로 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평소처럼 예를 갖춰 살짝 허리를 굽힐 뿐이었다.

"소인의 장기랄 것은 유능함뿐이므로."

"그래서 누구더냐. 감히 아스트레이의 비위를 거스르는 자가."

류리크님이 아스트레이를 대표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리아가 작게 중얼거리며 답했다.

"마스체니였습니다."

"마스체니?"

"예. 고귀의 13가문, 마스체니입니다."

마스체니… 인가.

생각해 보면 마스체니에 의해 죽는 장면도 '류리크 사망씬 모음집'에 있기는 했다만. 영상에는 전후 사정 없이 죽는 장면만 있었기에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내가 거기와 엮인 악연이라도 있던가?"

"악연이라면 물론 있습니다만. 설마 기억하지 못하시는 것인지요."

"......."

류리크, 너는 대체 무슨 인생을 살아온 거냐.

"마법 대학에 떨어진 김에 기사 대학을 생각하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정녕 그리 생각하는가."

"얼음물에서 수련하신 그 각오를 보여주신다면, 예전처럼…."

리아는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그 뒷말이 무엇인지는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류리크가 검치A라는 특성을 갖기 이전에 얻었을 베너렛 훈장. 그 경지까지 도달할 실력이 있다면. 그리고 내가 과거와 결별해 새 인간이 된 것이라면.

다시 그 영광을 되찾는 것도 가능하리라… 그녀는 생각하는 것이겠지.

"싫다."

"…그렇습니까."

검치 A를 달고 기사가 되려면, 너무도 먼 길을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루나틱(Luntaic)이라는 난이도는 나를 한가롭게 내버려 두지 않을 터.

결국 마법사로 가는 것이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길인 셈이었다.

"나는 샤프란 마법 대학에 들어가야 한다."

"허나 특별전형은 끝났습니다. 그리고 샤르미넨 총장이 예외를 허용할 리도 없습니다."

"대학의 입시 전형은 꽤 여러 가지가 있지. 그리고 그중 아직 남은 것이 하나 있다."

리아의 눈에서 약간의 놀람이 묻어난다.

"설마."

"마스체니가 날 물 먹인 것도 있고 하니, 겸사겸사 그놈들이 가진 '후인의 반지'를 뺏으면 어떻겠나."

나는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말 그대로 겸사겸사, 일석이조인 셈이었으니까.

그런데 리아의 반응은 별로였다.

"제정신이십니까?"

"늘 그렇듯 본인은 놀랍도록 이성적이고 냉철한 판단력을 유지하고 있다네."

"마스체니는 후계자 문제로 가문 전체가 반쯤 정신 나간 상황입니다. 하다못해 로스월드에 가서 양해를 구하십시오. 그들이라면 후인의 반지를 내어줄 수도 있습니다."

리아의 말이 옳았다. 상식적으로 옳은 말이었고, 훨씬 현실적인 의견이었다. 그렇지만 문득 '마스체니'라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어떤 이름이 떠올랐다.

―샤일라 벨테인 폰 예미리야스 마스체니.

'류리크 사망씬 모음집'에 등장해, 그의 심장에 검을 찔러 넣은 여인. 지금은 '벨테인'이지만 나는 그녀가 어떤 존재가 될지 알고 있다.

그렇기에 본래라면 그녀를 견제하고 억압하는 것이 정석이겠으나.

'어쩌면 그 반대가 가능하지 않을까.'

이 세계에 오기 전, 알 수 없는 그것은 내게 이런 선택지를 보여주었다.

[ 1. 현재의 류리크로도 정상적인 플레이가 가능하다. ]

[ 2. 현재의 류리크로는 정상적인 플레이가 불가능하다. ]

사실 여기서 후자를 고른 내 선택이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취향을 물어본 것일 수도 있고, 실제 무언가 변화가 있었던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저 '긴급 밸런스 패치'를 위한 구실이었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어찌 되었든, 나는 거기서 고른 답에 따라 전혀 다른 길을 가 보기로 했다.

"류아라를 불러라. 그녀와 함께 마스체니를 방문하겠다."

* * *

고귀의 13가문, 이는 제국의 건국 공신이었던 13명의 마법사들이 각자 일궈낸 가문이다.

무가가 그러하듯 이들은 전통적인 마도(魔道) 가문으로 그 자식들은 모두 마법사의 길을 종용받게 된다.

한편 오래전 이 13가문의 마법사들은 최초의 마법 대학인 샤프란 마법 대학을 설립하면서 한 가지 약속을 나눴다.

―자신들이 발견해 내는 빛나는 후인에게 마법 대학의 길을 열어 주어, 마법계의 미래를 밝히자고.

마법이 귀족들의 전유물이 되다시피 해버리니 내린 결정이었다. 그렇게 13가문은 각각 후인의 반지라는 것을 만들어, 각 가문에서 출신과 신분을 막론하고 1명의 추천인을 대학에 입학시킬 수 있도록 하였다.

"지금은 변질되어 '가문의 모자란 놈'을 대학에 입학시키는 편법이 되어버렸지만."

"그런데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그 쓰잘데기없는 설명이랑 나랑 무슨 상관인 거냐. 이 망할 동생 자식아?"

매끄럽게 가도를 달리는 차량 안에서 류아라가 험악하게 으르렁거렸다.

"그야 네가 나를 마스체니한테 데려가 줄 테니까."

"저기, 나 지금 니가 무슨 소리하는지 전혀 모르겠거든?"

"후인의 반지는 말 그대로 재능 있는 후인을 위한 것. 정당한 결투를 통해 양도받을 수 있다."

여기까지 말하자 대충 눈치챈 듯 류아라가 입을 쩍 벌린다.

"너 설마, 마스체니한테서 후인의 반지를 빼앗겠다는 소리냐?"

"그 얘기를 지금 10분째 하고 있는 것이다만, 누이여. 이런 말 하기 뭐하지만 책이라도 읽으면서 교양과 상식을…."

"야 이 똘빡 새끼야! 어떤 미친놈이 13가문에 쳐들어가서 결투를 신청해?!"

절레절레, 나는 고개를 저으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본인은 바타체스다. 더없이 고귀한 황족이다."

"너라도 마찬가지야! 걔네가 널 만나주기나 하겠냐?!"

다짜고짜 찾아간다 해도 마스체니가 내게 해를 끼치거나 노골적으로 문전박대 하진 못한다. 하지만 어떤 수를 써서라도 후계자와 못 만나게 할 것도 분명하다.

마스체니라면, 아니 그뿐 아니라 모든 마도 가문들이 입학식까지 그렇게 할 터.

"앞서 말했듯이, 그래서 네가 필요한 거다. 나는 저쪽의 덩치들이 길만 막아도 뚫고 가지 못하나, 너는 다르지 않나."

"농담이지?"

"한 올의 거짓조차 없는 진심이다."

그녀는 카바예르의 훈장을 받은 기사다. 험악한 사병들이 몰려와 몸으로 길을 막아도, '뭐 이 씹새끼들아.'하면서 그래도 밀고 갈 수 있는 괴물이다.

"싫어. 싫다고!"

"어차피 예르파드의 승급 심사 전까지는 할 일이 없다 하지 않았나. 그래서 내 별장에서 밥만 축내는 중인 거고."

"아니, 씨발 그건…."

"밥값이나 해라."

"야 이 미친 새끼야! 이게 밥값으로 퉁칠 얘기냐?!"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닌 건가.

쯧, 나는 가볍게 혀를 차며 다른 조건을 꺼내 들었다.

"음. 그렇다면 용병으로서 널 고용하지."

"뭐? 용벼엉? 웃기고 자빠졌네. 류미엘이 너 용돈 끊은 지가 언젠데 무슨 돈이 있…."

말을 하던 중 멈추는 것을 보니 그녀도 무언가를 떠올린 모양이다.

나는 옅은 미소를 내비치며 산뜻한 어조로 말했다.

"얼마 전에 30만 리브라를 벌었는데, 내가 참 돈 쓸데가 없어서 말이지…."

으극, 류아라가 주먹을 쥐며 부들부들 떨기 시작한다. 대체 이 맥락에서 왜 분해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내가 그녀의 지갑 사정을 슬쩍 찔러보자 금방 항복했다.

"…얼마 줄 건데."

◈ 010

―어쩌다 저런 덜떨어진 아이가…!

―고귀의 13가문에서 우리 마스체니가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너는 마스체니의 수치다! 그런 실력으로 샤프란 대학에 입학은 할 수 있을까!

―마탑에게 뇌물을 줘 벨테인 등위는 따냈다지만….

―후인의 반지로 샤프란에 입학을 하더라도, 금방 들통날 게 뻔하다!

―샤일러만 멀쩡했어도…!

마스체니의 연무장.

지난 과거를 떠올리며 샤일라 벨테인 폰 예미리야스 마스체니는 검을 휘둘렀다. 잡념을 떨치고자 육체를 혹사시키는 것이었지만, 한 번 피어난 생각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오라버니….'

가문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유망주, 샤일러 헤루인 폰 올고랜드 마스체니. 그는 어려서부터 영약을 먹고, 고위 마법사의 1대1 과외까지 받는 등 가문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성장했다.

덕분에 어린 나이에 헤루인 등위를 얻는 영애를 거머쥐기까지 했다. 하지만 어느 날 모종의 사건에 휘말려 큰 내상을 입고, 깊은 잠에 빠지게 되었다.

―미안… 하다…. 샤일… 라….

마스체니 가문이 사활을 걸고 키웠던 그가 혼수상태에 빠지자, 모든 짐이 동생인 샤일라에게로 쏟아졌다.

―네가 우리 가문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

―이대로 가다간 샤이칸 그놈에게 가문을 빼앗기게 된다!

―마법을! 똑바로! 쓰란 말이다!

그녀는 열심히 공부했고, 또 노력했지만, 선천적인 재능이 압도적으로 모자랐다. 적어도 마도에는 그러했다.

휙, 휘익!

진검이 아닌 목검을 휘두르는데도 그 검세가 날카롭다.

―아가씨의 재능은 정말 탁월합니다. 검술 교사인 제가 보증합니다. 이대로 꾸준히 수련하시고, 제대로 된 교육만 받으신다면 카바예르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정말? 내가 카바예르의 훈장을 받을 수 있다고?

―어쩌면… 슈발리에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고요!

그때는 웃어넘겼다.

―잠깐만. 그 말은 알테온까진 안 된단 말이잖아?

―하하, 알테온은 마법사로 따지면 이테아 같은 위치. 평범하게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 아니니까요.

그런 얘기를 주고받던 것이 어제 같은데.

"…어째서!"

격해진 감정에 검세가 흔들리고, 그와 동시에 누군가 연무장으로 들어왔다.

"또 검을 휘두르는 것이더냐."

"아버지…."

샤일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버지의 얼굴이 노기가 가득했기 때문이다.

"…영월화를 빼앗겼다. 이제 네 마도에 대한 재능을 높일 수 있는 건 오로지 수련뿐이다. 그러니 이따위 검을 휘두를 게 아니라 한 번이라도 더 마법을 써야 할 것 아니더냐!"

"아버지, 제가 정녕 마법사가 되어야겠습니까?"

흠칫, 샤이먼의 어깨가 떨렸다.

"마스체니는 마도의 명가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래왔다."

"최고의 기사 대학, 칼라모르라면 윤허한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때는…! 그때는 샤일러가… 멀쩡했을 때의 얘기다!"

샤일러. 그 이름이 나온 순간, 샤일라는 숨이 멎는 것 같은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그리고 그것은 샤이먼 역시 다르지 않았다.

마스체니의 당주는 참담한 심정을 억눌러가며 입을 열었다.

"네가 검을 좋아하는 것은 알지만, 그 한계를 생각하거라! 당장에 베철러 훈장조차 받지 못하지 않았더냐!"

"그건 기사 가문들의 압력 때문에…!"

기사와 마법사는 오래된 견원지간. 서로의 영역에 침범하는 걸 극도로 꺼린다. 그렇기에 샤일라는 자신의 실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훈장도 얻지 못했다.

샤이먼은 그 부분을 날카롭게 찔렀다.

"그래서 결국 네가 훈장을 얻었느냐? 칼라모르에 들어갈 자격을 얻기라도 했느냐?"

"......."

"들어가서는 고립당할 것이고, 시기 질투에 휩싸일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왜 어리석은 길을 택하느냐!"

샤일라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마법 대학이라고 다를까요."

"무어라?"

"마탑에 뇌물을 줘서 벨테인 등위를 따내고, 실력을 속여 들어간들 거기서라도 뭐가 다르겠습니까! 언제 제 실력이 들통날지 노심초사하며 하루하루 살아가겠죠!"

비극, 그 밖에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가문을 이어야 할 후계가 깊은 잠에 빠지고, 그 권좌를 노리는 이들은 사납게 이를 갈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짐을 짊어지게 된 딸에게는 저만의 사정이 있다.

샤이먼은 차오르는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쓸데없는 짓은 그만하고, 마법 수련이나 하거라!"

화륵.

샤일라가 쥐고 있던 목검에 불이 붙었다.

"아버지!"

하지만 그녀는 검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단단하게, 굳건하게 그를 쥐고 있었다.

"뭐, 뭐하는 것이냐! 빨리 검을 버리거라!"

"......."

"이익!"

결국 다급한 마음에 불을 끈 건 샤이먼이었다. 하지만 거세게 번진 불은 이미 샤일라의 손을 검게 그을린 뒤였다.

샤이먼은 토해낼 수 없는 답답함을 씹어 삼키며 치유사를 불렀다.

"치료… 해 주거라."

* * *

마스체니 가문의 저택은 일견 평온해 보였다. 정문에는 아무도 지키고 있지 않았다. 안에 말을 넣는 거라면 마법 통신 구슬이 저택 정문에 설치되어 있고, 경계는 높은 수준의 마법 결계가 이미 그 역할을 하고 있었으니까.

"쉽게 문을 열어 줄 거 같진 않은데, 어디 한번 부숴 보겠나?"

"너 저거 씨발, 요새 도시의 성문급 결계인 건 알고 하는 소리냐?"

"못 하면 말고."

으그극, 류아라가 이빨 가는 소리가 들린다. 자존심에 사소한 스크래치가 난 듯 분한 기색이었지만, 그래도 결계에 주먹을 때리는 무식한 짓거리는 하지 않았다.

"일단은 처음이니 정중하게 가 보도록 할까."

나는 차에서 내리며 류아라에게 고갯짓했다. 그녀의 얼굴이 산뜻하게 일그러졌다.

"뭐, 내가 하라고?"

"그럼 내가 해야겠나."

자세한 경위는 모르나 리아의 말에 따르면 류리크는 마스체니와 그다지 좋은 관계가 아닌 듯했다.

그리고 이미 망원경으로 내 모습을 봤을 테니 어지간해선 문을 열어주지 않겠지.

"아니, 씨발 반지는 니가 얻는 거니까 니가 말해야 하는 거 아냐?!"

"음, 너에게 지불하기로 했던 의뢰 대금이 얼마더라…."

이익, 류아라가 뭔가 마뜩찮은 듯 성질을 냈지만 곧 저택의 정문 앞에 섰다. 그리곤 통신 구슬에 손을 얹었다.

"열어."

어우, 짧군.

역시 예상대로였다. 여기선 막무가내로 불도저처럼 밀어붙일 수 있는 인재가 필요했단 말이지.

한편 저쪽에서 뭔가 곤란하다는 대답을 한 건지, 문은 열리지 않았고 대신 류아라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너, 씨발 지금. 이걸로 나랑 얘기하자는 거냐?"

"......!"

"너 이름이 뭐니, 개새끼야?"

"......!"

"찾아서 죽여 버리기 전에 열어. 씨발 새끼야."

상대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대충 대화의 맥락은 유추할 수 있었다. 마침내 저택의 문이 열리고 류아라가 '이러려는 게 아니었는데…' 라며 푹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터져 나올 것 같은 웃음을 참으며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차 안에서는 13가문에 쳐들어가는 걸로 뭐라 하지 않았던가?"

"씨, 씨발. 이건 그냥 돈 값한 거지."

맞다. 나 혼자 여기 왔다면 저 통신 구슬 단계에서 막혔을 터다. 이건 류아라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류아라를 다독이며 저택의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마스체니 저택의 정원에는 화엽(火葉)의 수목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잎들이 불타 사라지고, 소생하며, 다시 불타는… 그 일련의 과정을 영원히 반복하는 나무들.

마치 죽고 다시 날아오르기를 반복하는 불사조처럼, 나무들은 유구의 순환을 이어가고 있었다.

"겁나… 예쁘네."

"연기도 나지 않고, 불티가 마치 축포처럼 흩날리는 걸 보니 상등품이로군."

"이것도 등급이 있어?"

"여기 있는 화엽목들은 자연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 마법적 처리를 거쳐 만들어낸 인조의 산물이다. 성공과 실패에 따라 등급이 나뉘어지지."

진짜 화엽목이 이런 곳에 나뒹굴 리가 없지, 나는 그대로 정원을 가로질러 걸었다. 그렇게 30초 정도 지났을까, 정원의 저 너머에서 누군가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류, 류아라 카바예르 폰 예르파드 아스트레이 님! 마스체니엔 어인 일로…."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류아라가 씨익 웃으면서 답했다.

"이 집 딸 면상 좀 보러왔다."

"아, 아니. 샤일라 님은 현재 부재중… 아, 아! 그 옆에 계신 분은…."

나는 시종으로 보이는 이를 흘겼다.

"미쳐 돌았군."

미안하지만 난 여기에 한가롭게 수다나 떨자고 온 것이 아니었다. 내 얼굴을 몰라 이름을 묻는다는 약간의 불경죄, 그리고 기선 제압의 의미를 담아 그를 노려보았다.

"감히 본인의 이름을 묻는가?"

장난기 없는 뚜렷한 적의를 품는 순간, 자연스럽게 A랭크의 위엄이 발동되면서 그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어, 으윽, 그… 죄, 죄송…."

"본인의 시간을 낭비하게 만들지 말라."

시종은 입에서 거품이라도 물 것처럼 바들바들 떨며 움직이질 못했다. 평범한 이가 감당하기엔 위엄 A의 효과가 상당한 모양이었다.

나는 재빠르게 용건을 설명했다.

"본인은 마스체니에 후인의 반지를 걸고 결투할 것을 요청한다. 이 말을 당주와 결투 상대인 샤일라에게 전하도록."

"아니, 그… 저…."

"연무장에서 기다리겠다."

그 말을 끝낸 즉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아쉬운 듯 화엽목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류아라가 샐쭉였다.

"야, 근데 연무장이 어디 있는지 알아?"

"물론이다."

"…왜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하는 건데."

까놓고 말해 이 집 수장고가 어디 있는지도 알고 있다. 물론 거길 털 생각은 없지만.

나는 익숙한 길을 걷듯 앞장서 마스체니의 저택을 가로질렀다. 뒤따르던 류아라는 저택 여기저기를 죽 훑으면서 넌지시 물었다.

"야, 근데 너 진짜로 이길 수 있어?"

"무슨 소리냐."

"…너 병신이잖아."

그 말은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내가 검을 제대로 휘두를 수 없다는 점. 그리고 현재 마법사로서의 역량이 벨테인은커녕 에일레르만도 못한 수준이라는 점까지도.

그녀는 이미 알고 있을 터였다. 그만한 실력자니까.

"이건 생사결이 아니다. 평범한 마법 결투이고, 어지간해선 누군가 죽을 일은 없겠지."

"그러면 질 수도 있단 생각으로 왔다고?"

"현재 내 수준은 대강 짐작하고 있잖나."

"아니 씨발. 나는 뭔가 계획이 있는 줄 알았지!"

계획은 물론 있다. 네가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겠지만.

"썅! 니네 집에 리아인가 뭔가 그랬다면서. 후인의 반지를 노릴 거면, 차라리 로스월드를 찾아가라고!"

"후인의 반지만이 목적이었다면 그랬겠지."

"뭐? 반지만이 목적… 씨발, 그건 또 무슨 븅딱 같은 소리야?"

"나는 마스체니에서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리고 그 순간, 연무장의 입구에 누군가 나타났다.

"그 해야 할 일이 속죄라면, 이미 늦었습니다."

붉은 장발에 주근깨 있는 여인… 아니, 소녀. 내 기억에 있던 그녀의 모습은 지금보다 더 성숙한 나중이었기에, 지금의 모습이 조금 낯설었다.

하지만, 그녀가 그녀라는 것은 알아볼 수 있었다.

"샤일라 벨테인 폰 예리미야스 마스체니."

나는 그녀를 알았다.

마도 가문의 자녀로 태어나, 그 운명을 강요받은 자. 하지만 훗날 마법사가 아닌 '기사'로서 카바예르를 넘어 슈발리에의 훈장을 거머쥐게 될 자.

샤일라 슈발리에 폰 예리미야스 마스체니.

―당신을, 죽이겠습니다.

영상에서 봤던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류리크의 심장은 타닥타닥 불티를 날리며 타들어 가고 있었다.

나는 그 운명을 바꿔보기로 했다.

"네게 베철러의 훈장을 내어주겠다. 그 대가로, 후인의 반지를 요구한다."

◈ 011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군요."

그녀의 얼굴엔 분노, 후회, 원망 등 온갖 어두운 감정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내 기억 속의 샤일라보단 나아 보였다.

"아직은 그래도 사람 같군."

"뭐라고요?"

나는 그녀와 주변의 모습을 가볍게 훑었다.

손의 화상.

불에 그을린 목검.

"또 수련을 하다 아비가 검을 태웠군. 너는 미련하게 붙잡고 있었을 테고."

"그걸… 어떻게?"

류아라, 너까지 '그걸 어떻게?'라는 표정을 지으면 어떡하냐. 나는 속으로 한숨 쉬었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표정을 이어갔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너는 검을 좋아하고 칼라모르 대학에 가고자 한다. 그리고 나는 마법을 사랑하며 샤프란 대학에 가고자 하지. 상부상조 아닌가?"

"베철러의 훈장은 사고파는 물건이 아닙니다. 그리고 저는 장식품인 훈장이 아니라, 기사로서의 자격을 필요로 하는 겁니다!"

여기가 참 재미있는 부분이다.

나는 예전이 리아를 놀려먹을 때 썼던 화제를 그대로 꺼내 들었다.

"기사 서임의 행정권은 황족에게 주어진 고유 권한이다. 사실 기사 학교나 기사단에서 훈장을 주는 것 역시 황족의 권한을 대리하는 것뿐이지."

"설마…."

"베너렛부터는 대리를 한다 해도 결국 황제 폐하의 이름으로만 서임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칼라모르의 입학 조건인 베철러의 훈장은 황족이라면 누구든 내어줄 수 있다."

나는 여기 오기 전에 준비해 두었던 베철러의 훈장을 꺼내 보였다.

"어떤가. 이제 합리적인 거래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

"그런…."

그때였다.

"네놈이 무슨 낯짝으로 여길 찾아온 것이냐."

연무장의 입구에 또 다른 얼굴이 나타났다. 그리고 황족에게 말하는 저 말투만 보아도 그가 누군지는 뻔했다.

나는 마치 내 집에 찾아온 손님을 환대하듯 말했다.

"당주. 어서 오시게."

"뭐, 뭐? 지금 나한테…!"

샤이먼에게서 서슬퍼런 분노가 느껴진다. 이쪽이 막무가내로 들어왔다곤 하나, 쉽게 내보일 태도는 아니었다.

어지간히도 화가 났구나, 나는 재빠르게 샤일라를 끌어들였다.

"샤일라. 본인은 같은 설명을 하는 취미가 없어서, 그대가 설명을 했으면 하네만."

모쪼록 이건 자네의 일이기도 하니, 내가 덧붙이자 샤일라는 어딘가 불만스러워하면서도 당주의 옆에 붙었다.

제 딸이 붙자, 당장에라도 덤벼들 듯 씩씩거리던 당주도 조금은 진정한 모양새였다.

그동안 나는 무엇으로 저들과 싸울지, 말을 고르기 시작했다.

* * *

샤일라에게 얘기를 들은 샤이먼은 전보다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대노했다.

"터무니없는 소리! 마스체니는 마도의 명문이다! 마도 가문의 후예가 기사 대학에 들어간다니 말이 될 소리를 하라!"

"흐음, 마스체니는 지금 직계의 위신조차 흔들리는 상황이 아니던가?"

"네, 네놈이…!"

"자네의 동생, 샤이칸이 그 자리를 호시탐탐 노린다는 게 어디 비밀이던가. 이미 마법계에는 파다하게 퍼진 소문인 것을."

샤이칸은 샤이먼에게 당주 자리를 내어준 뒤 샤프란에서 교수직을 맡고 있다. 아마 본래에는 평범하게 교수생활을 하면서 살아갈 생각이었겠지만.

'마스체니의 장자 샤일러가 식물인간이 되면서 기회를 잡았다 생각하는 거지.'

그의 자식들은 아카데미에서 집중적인 교육 아래 마법을 배워가고 있다. 아직은 견습 마법사인 에일레르지만 나름 두각을 드러내는 편이기도 하고.

어느 쪽이든 후계 문제로 마스체니가 반쯤 정신 나갔다는 건, 틀린 말이 아닌 것이다.

"결국 당주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그 자리에 걸맞은 자격을 갖춰야 하는 것인데. 샤일라가 마법사로서 그것을 이뤄낼 수 있을까."

"내, 내 딸은 이미 벨테인 등위의 마법사다. 충분히 우수한 인재이고, 샤프란 마법 대학에서 대성하여 엘베드, 아니 샴하인 등위까지 얻을 게 틀림없다!"

"당주, 진심으로. 정말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는가?"

유감스럽게도 나는 이미 그 미래를 알고 있다. 샤일라는 노력해 봐야 벨테인 다음인 헤루인에서 그칠 마법사다.

그리고 그건 어떻게 보더라도 마도 명가의 당주에 걸맞지 않은 실력이다.

샤일라가 나를 날카롭게 노려보며 말했다.

"당신이 저에 대해 뭘 안다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반대로 묻지. 본인이 왜 너에 대해 모를 거라 생각하나?"

"그건…!"

슬슬 딴소리가 나오는 걸 보니, 화를 돋우는 건 이쯤 해야 할 듯싶었다.

나는 본론을 꺼내 들었다.

"이보게, 당주. 재미있는 사실이 뭔지 아시오? 자네가 마탑과 무슨 얘기를 했건, 샤일라는 이미 벨테인이라는 게지."

"마탑과 무슨 얘기라니! 넌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잘 들어보게. 에일레르의 풋내기가 샤프란을 포기하고 기사 대학에 들어간다면 웃음거리밖에 안 되겠지. 하지만 샤프란에 충분히 들어갈 수 있는 벨테인이 기사 대학에 들어간다면 사뭇 다른 느낌이 나지 않나?"

모의고사 9등급이 수능은 이 사회의 모순이라며 대학 입학을 포기하는 것과 모의고사 1등급이 같은 모습을 보이는 건 전혀 다른 얘기다.

내 얘기는 거기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마법사인 그녀가, 그것도 명문 샤프란에 들어갈 수 있는 유망한 그녀가 기사 대학에 들어가 재능을 뽐낸다면 어떨까?"

"어, 어떻다니…."

"기사들의 콧대를 뭉개주는 걸로 마도 가문으로서의 위신이 서겠지. 엘베드에서 아등바등하는 가문들 사이에선 그야말로 독보적일 테고."

이건 분명한 사실이다. 미래에 샤일라는 드높은 영광의 슈발리에가 되어 마스체니의 위신을 독보적으로 끌어 올린다.

당주직을 획득하는 건 당연하고.

"헛소리… 헛소리하지 마라! 그건 네가 칼라모르를 우습게 생각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내 딸이 검을 좋아하긴 하나, 그렇게 대성할 실력은 아냐!"

"글쎄."

샤이먼은 모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샤일라의 재능이라곤, 수련장에서 홀로 검을 휘두르는 것뿐이 보질 못했으니.

나는 그걸 일깨워줄 생각이다.

"당주. 당신은 지대한 착각을 하나 하고 있소."

나는 수련장 구석에서 하품을 하는 류아라를 불렀다.

"류아라, 검을 다오."

"검?"

그녀는 별말 없이 허리춤에서 검을 꺼내 주었다. 쉽게 검을 내어주는 걸 보면 역시 기사보다는 용병에 익숙한 모습이었다.

나는 그 검을 샤일라의 발치에 던졌다.

"쥐어라. 그리고 싸워라."

"싸우라… 니요? 갑자기 무슨."

혼란해하는 그녀를 보며 나는 눈짓으로 류아라를 가리켰다. 그러자 다시 쉬러 가던 류아라도 샤일라도 무척 당황스런 표정을 짓는다.

"제, 제가 류아라 님과요?"

"얼레레. 씨발. 이건 또 무슨 소리래? 나보고 이 풋내 나는 애송이랑 싸우라고?"

"대신 너는 저쪽에 불탄 목검이다."

"아니, 씨발. 목검이라고 해도 그렇지! 야 너 내가 카바예르인 건 알지?!"

지랄병이 도지기 시작했군,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류아라에게 목검을 휙 던졌다.

"죽이진 말되, 방심도 마라."

"허! 씨발, 얼척이 없네? 아, 됐어. 애송이랑 무슨 칼 놀이를…."

"흠, 내 기억에 너는 지금 나와 용병 계약을 한 상태일 텐데… 이건 계약 위반 아닌가 모르겠군."

그제야 류아라가 똥 씹은 표정으로 목검을 쥐었다.

"아니 썅. 실화냐?"

류아라가 검을 쥔 채 연무장 가운데로 다가왔지만, 샤일라는 여전히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기색이었다.

결국 나는 발치에 떨어진 검을 들고 그녀에게 직접 건네며 조그맣게 속삭였다.

―이건 네 진심을 아버지께 보여줄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다. 네게 진정 의지가 있다면, 일어서고자 하는 바람이 있다면. 쓰러질지언정, 검을 쥐고 쓰러져라.

"......."

그녀의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물끄러미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흘렀고,

"......."

파문은 이내 잦아들었다.

"하겠습니다."

샤일라는 검을 쥐었다. 그리고 천천히 류아라의 반대편에 섰다.

철검과 불타 그을린 목검이었지만, 그 둘 사이엔 카바예르와 기사 지망생이라는 격차 또한 존재했다. 그걸 감안하자면, 사실 말이 안 되는 결투이기도 했다.

"어, 어어… 잠깐만.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겐가?!"

반쯤 넋이 나갔던 샤이먼이 뒤늦게 입을 열자, 나는 가볍게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다독였다.

"잠자코 지켜보게. 당주."

류아라와 샤일라.

둘이 서로를 마주 보며 대치했다. 태도의 차이는 분명했다. 류아라는 하품을 하면서 늘어뜨리듯 검을 쥐고 있었고, 샤일라는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탄탄하게 자세를 잡았다.

"하암, 뭐하냐. 빨리 들어와라. 후딱 끝내고 낮잠이나 자게."

"들어… 가겠습니다!

불필요한 서론은 없었다. 샤일라는 곧장 빠르게 정면으로 치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녀의 몸에 새기고 새긴 익숙한 검세에 따라, 검이 움직였다.

"하압!"

"어쭈, 몸은 꽤 빠르다?"

하품을 하던 류아라가 조금 의외라는 눈빛을 하며 검을 휘둘렀다.

―슈슉! 쉬익!

한 호흡의 순간에 몇 번 검을 휘두르는 걸까, 그야말로 맹공이라는 말이 떠오를 만큼 샤일라는 적극적인 공세를 펼쳤다.

한편으로 더 신기한 것은, 이미 반쯤 불타 금방 부러져야 할 류아라의 목검이 그걸 받아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채챙! 챙챙!

저게 목검과 철검이 맞부딪치며 날 소리인가.

"나름. 꽤. 하는데?"

류아라는 시종일관 장난스러웠고 여유로워 보였다. 그녀는 적당히 놀아주듯 한 손으로 목검을 휘두른다.

하지만 그 공방의 매서움은 여기서도 절절히 느껴졌다.

"어떤가. 샤이먼. 자네도 꽤 많은 기사들을 봐왔을 테니, 딸의 실력이 어느 정도일지 대충 감이 오지 않나?"

"…속단할 수 없다. 애초에 류아라를 당황조차 못 시키고 있지 않나."

"그러면 이렇게 내기를 해 보면 어떨까. 샤일라가 카바예르인 류아라를 이기는 것은 불가능할 터. 하지만 옷깃을 건드리는 정도라면…."

샤이먼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두 눈은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게 자신의 딸을 바라보고 있었다.

"크윽!"

수비로 일관하던 류아라가 가볍게 공세를 취하자, 샤일라가 단번에 열세에 몰렸다. 검을 한번 받아낼 때마다 몸 전체가 뒤로 밀려날 정도였다.

"뭐야, 아까의 기세는 어디 갔냐? 평생 막다가 끝날래?"

"그렇지, 않습니다!"

이를 악문 샤일라가 어렵사리 공세를 펼쳐낸다. 그녀의 쾌검이 물 흐르듯 동작을 이어가며 종횡으로 베어낸다.

하지만 류아라는 이제 막지도 않고 가벼운 몸동작으로 그를 피해냈다.

그런 공방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슬슬 샤일라의 호흡이 거칠어지는 게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헉. 허억…."

"얼래. 벌써 지친 거냐?"

"아닙, 니다!"

샤일라의 맹공 슬슬 속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모든 공격에 최대한의 속도와 최대한의 힘을 실어 휘두르니 체력의 소모가 큰 것이었다.

"아니긴 뭘, 숨찬 게 눈에 보이는데."

"흐윽, 아직… 입니다!"

"하아암, 볼 만큼 본 거 같으니까 끝내 볼까?"

류아라가 하품을 하며 검을 위로 들었다. 허점이 많은 큰 동작이었지만, 거기에 마력이 깃드는 순간 얘기가 달라졌다.

'저건 못 막는다.'

그 자리의 모두가 그런 생각을 했을 터였다. 헌데 샤일라는 떨어지는 그 검을 보면서 피하지 않고 오히려 파고들었다.

그리고,

―화륵.

검에서 불길이 일었다.

"......!"

정면으로 짓쳐들며 간신히 류아라의 검을 흘려냄과 동시에, 이제까지 보여주지 않았던 비장의 한 수를 던진 것이었다.

거기서 비롯된 찰나의 간극이, 류아라의 당황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스걱.

류아라의 옷자락에 아주 작은 상처가 났다. 하지만 그 대가는 혹독했다.

―빡! 빡! 빠악!

류아라의 목검이 샤일라의 종아리와 배, 어깨를 연달아 때리며 그녀를 무릎 꿇렸다.

"커흑!"

단번에 자세가 무너졌지만, 그 와중에도 샤일라는 검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더 논할 것도 없었다.

―꾸욱.

류아라의 목검은 그녀의 목젖을 가볍게 누르고 있었으니까.

"어쭈. 너… 꽤 한다?"

"헉… 허억… 제가… 졌군요."

패배를 시인하면서도 샤일라의 얼굴은 흥분과 열정으로 가득했다. 실제 기사 훈장을 받은 이와, 그것도 카바예르와 검을 나눠볼 일이 얼마나 있을까.

심지어 호되게 당했긴 해도 자신의 검이 상대의 옷깃에라도 닿았으니.

"…크, 흐!"

눈이 충혈될 듯, 결투에 집중하던 샤이먼은 탄식을 터뜨렸다. 불끈 쥐어져 있던 그의 주먹에는 땀이 배어나고 있었고, 그의 눈동자는 아쉬움이 짙게 묻어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류아라는 카바예르라네. 기사의 훈장이 8개로 나뉘고, 마도의 등위가 8개인 걸 생각하자면, 대충 자네와 동급이지."

"그, 그걸 그렇게 비교하는 사람이 어디 있…."

"그러면 이렇게 생각하지. 마법사로서 샤일라가 자네의 옷깃이라도 건드릴 수 있겠는가."

불가능하다.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일반적으로 한 단계의 격차라면 여럿이 모여 상대할 수 있으나, 두 단계의 격차는 어지간한 숫자로는 넘을 수 없는 차이를 보인다.

그게 훈장의 격차이고, 등위의 격차였다. 그렇기에 지금의 결과물이 보여주는 건 사실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샤일라는 이미 저 나이에, 체계적인 훈련도 없이 저 실력을 갖고 있다네. 그녀는 훗날 슈발리에까지 도달하겠지."

"슈발리에… 자네도 그 검술 교사와 같은 소리를 하는군."

"그만큼 샤일라의 재능이 빛난다는 것이지."

그 검술 교사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설득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다.

나는 마무리를 짓듯 말을 보탰다.

"마도 가문의 슈발리에. 이보다 더한 역설적인 영광이 있겠는가. 그리고 그 누가 슈발리에의 위신을 부정하겠는가."

"......."

샤이먼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아마 많은 생각들이 어지러이 교차하고 있겠지.

하지만 나는 알았다.

결국 그가 선택할 길은 하나뿐이라는 걸.

마침내 샤이먼이 말했다.

"딸아, 네가 바라는 길을 택하거라."

* * *

나는 샤일라와 물건을 교환했다. 나는 베철러의 훈장을, 그녀는 후인의 반지를.

그렇게 바라는 바를 얻었으니, 집으로 돌아가려 했는데….

"이게… 당신의 속죄인가요."

갑자기 샤일라가 그런 말을 했다. 나는 류리크의 업보와 관련된 이야기일까 싶어,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래서 영월화를 빼앗아가고, 저를 기사로 만들려고… 이렇게까지 한 거군요."

…전혀 생뚱맞은 소리였다.

하지만 그 방향이 나쁜 것 같진 않아, 멋대로 오해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빛나는 재능은 애당초 네 것이었고, 너 자신을 증명한 것도 너였다."

"고맙… 습니다. 그리고 잊지 않겠습니다. 제가 누구의 기사인지, 그리고 누가 제 미래를 바꿔주셨는지."

거창한 소리 하지 마라.

나는 그냥 나중에 내 심장에 칼만 안 꽂으면 감지덕지다.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말 대신, 나는 작게 미소를 지었고 그대로 연무장을 빠져나왔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마스체니의 저택은 고요했다.

"야, 나 고생했는데 저 나무 하나만 뽑아 가면…."

"의뢰 대금이 반으로 깎이기 싫으면 조용히 나와라."

"으윽!"

나는 칭얼대는 류아라를 다독이며, 정문을 빠져나와 차량에 올랐다.

―부릉.

"별장으로 돌아가지."

"예, 알겠습니다."

운전기사의 대답과 함께 마력 기관으로 움직이는 차량이 매끄럽게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금세 마스체니의 저택은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진다.

나는 여전히 화엽목 때문에 중얼중얼거리는 류아라에게 툭 말을 건넸다.

"눈치는 있더군."

"뭐가."

기사든 마법사든 한 단계의 격차는 그럭저럭 숫자로 뭉갤 수 있다. 하지만 두 단계의 격차부터는 숫자의 의미가 무색해진다.

그 말은, 문자 그대로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다는 뜻이다.

"적당히 봐준 거 말이다."

"아, 그거? 그냥 뭐 씨발. 분위기 보니까 왠지 살짝 져줘야 할 거 같아서."

"너는 그 씨발이라는 말을 감탄사처럼 쓰는 걸 그만둘 필요가 있다."

"아니, 씨발. 이 새끼가 이제는 내 말투 가지고 염병을 하네? 용병 계약도 끝났겠다, 너 진짜 뒤져 볼래?!"

"…예르파드의 승급 심사가 아직이었던 거 같다만."

"아오! 씨바아아알!!"

◈ 012

―씨발. 시간 존나 빠르게 가네. 그동안 좆같았고, 나는 존나게 고생했으니까 우리 웬만하면 다시 보지 말자.

류아라는 그 말을 끝으로 별장을 떠났다. 예르파드의 승급 심사가 결정된 것이었다. 아마 이 뒤로도 예르파드 용병단은 자신들의 실력에 걸맞게 승승장구를 할 터였다.

'언젠간 또 볼 일이 있겠지.'

나는 잠시 창가에 기댄 채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문득 지난 열흘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벌어졌던 일들이 떠오른다. 이 세계에서 눈을 뜨자마자 느꼈던 당혹감, 그리고 시한부라는 압박감.

어디에도 내 편은 없고, 피했다 생각했던 사망 플래그인 류아라가 찾아오기까지 했다.

천천히 튜토리얼하면서 레벨업을 해야 할 초반부터 얼마나 고생이 많았던가.

'사망 플래그였던 류아라와 샤일라가 중립적이게 된 것만으로도 수확은 크다.'

눈앞까지 닥쳐왔던 죽음이 멀어지니, 그저 숨 쉬는 것만으로도 세상에 대한 감사를 깨닫게 된다.

"하늘이 맑구나."

"의외로 감상적인 면도 있으시군요."

돌연 끼어든 목소리는 어처구니없게도 열리지 않은 문 저편에서 들려온 것이었다.

―똑똑.

"류리크 님. 실례하겠습니다."

언제나처럼 차가운 듯, 평온한 목소리에 마음이 놓이게 된다. 다만 나는 괜히 심술 난 아이처럼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다못해 내게 말을 걸고자 하면, 옆에서 서 있기라도 하거라. 무슨 문밖에 있으면서, 마치 옆에 있는 사람처럼 말을 한단 말인가."

"류리크 님의 청력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는지 파악하고자 간단한 실험을 한 것이옵니다."

"갖다 붙이는 것도 가지가지구나."

그 역시 소인의 유능함이므로, 덧붙이는 리아의 얼굴은 뻔뻔 그 자체였다.

"그래서 무슨 일이냐."

"경매장에서 주문하셨던 물품들이 도착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내 책상 위에 여러 개의 상자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그 총합은 리아의 키를 훌쩍 넘는 수준이었다.

거기에 내 기억이 맞다면, 저 상자 안에는 유리관+금고의 형태로 물품을 보관했을 텐데.

"혼자 들고 왔느냐?"

"유감스럽게도 류리크 님은 아직도 시종들에게 신망이 없으시기에."

"......."

"왜 그러십니까?"

어떻게 저 가녀린 몸에서 저만한 힘이 나오는 걸까. 이런 걸 보면 새삼 판타지 세계구나, 라는 걸 느끼게 된다.

나는 그런 속내를 가린 채 덤덤하게 말했다.

"열어 보거라."

"예."

예상대로 상자 안에는 저마다 금고가 있었고, 그것들을 여니 경매품들이 유리관 안에 담겨 보관되어 있었다.

나는 유리관까지 개봉하도록 지시했다.

"......."

하나하나 꺼내 열던 리아의 눈에 이채가 서린다. 나는 그 눈빛이 어디에 머물렀는지 유심히 바라보았다.

"뭘 그리 놀라는가. 그대의 뒷조사로 이미 경매장에서 무엇을 구매했는지 알 텐데."

"이런 고가의 물품들을 실물로 보는 것은 처음이기에."

"너 줄 거 아니니 그런 표정은 짓지 말라."

사실은 아니다. 이 중 하나는 내게 쓸모가 없되, 어떤 NPC의 호감도를 올리는데 쓸모 있는 아이템이 있다.

물론 그 NPC는 류미엘의 기사 '리아'와 전혀 다른 캐릭터이다.

다만,

'리아는 내가 들어본 적도 없는 류미엘의 기사 7 같은 엑스트라라고 보기엔… 너무 유능하다.'

의심의 발로는 그것이었다. 리아는 너무 유능했다. 그리고 이 정도로 능력 있고 뛰어난 캐릭터를 내가 모를 가능성은 무척 낮았다.

물론 가울처럼 메인 스토리가 진행될 시점에 은퇴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왠지 모르게 리아와 닮은 캐릭터를 알 것 같단 말이지.'

겉모습의 얘기가 아니었다. 외형으로 따지자면 지금과 현격히 다른 누군가였다. 하지만 그 유능함과 성격, 말투가 묘하게 떠오르는 NPC가 있었다.

아직은 가능성의 얘기지만, 그리고 리아가 내가 예상한 아이템을 고른다 해도 100% 맞을 얘기는 아니지만.

'말 그대로 소소한 도박이지.'

맞추면 리아의 정체에 대한 확률이 조금 올라가고, 덧붙여서 호감도도 얻는 셈일 테고. 틀리면 류아라의 돈이 쓸모없게 날아버리는 소소한 도박.

나는 리아를 채근했다.

"무엇 하느냐. 열었으면 어서 물러가지 않고."

"예."

리아가 천천히 물러섰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시선이 끈덕지게 향하는 무언가를 확인했다.

"혹 여기서 원하는 것이라도 있느냐."

"......."

"입으로 욕망을 말하지 않되, 눈으로 사람을 이해시키는 것이 참으로 너답구나."

리아가 입을 열었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저와의 돈독한 관계는 류리크님께 상당한 이득이 될 터입니다."

"허어,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소작농이 지주가 아닌 세리(稅吏)에게 뇌물을 주는 건 흔한 일이었지요."

"허, 이제는 본인을 농노에 비유하는가."

"비유일 뿐입니다."

나는 경매품 중 '나브릭스 홍차'라는 글자가 쓰인 철제 케이스를 손에 쥐었다.

저 멀리 서대륙에서도 고급 사치품으로 취급되며, 정기적인 거래량도 없고 몇몇 모험가들이 배낭에 넣어 가져오는 것이 물량의 전부인 희귀품이었다.

리아의 눈동자가 아주 미미하게 흔들렸다. 역시 이걸 눈독 들이고 있었던 것이리라.

"그래 봐야 너는 류미엘의 기사이지 않느냐."

"기사의 충성은 영원한 것입니다. 제가 류리크 님께 드릴 수 있는 건 소소한 호감뿐입니다."

"눈으로 확인조차 할 수 없는 호감으로 나브릭스 홍차를 가져간다라? 그녀의 양심이 안녕한지 묻고 싶군그래."

"......."

내가 놀리듯 그런 말을 하자, 리아는 아쉽지만 포기한다는 눈빛을 내비친다. 아는 아예 토라질까, 재빨리 조건을 걸었다.

"좋다. 거래를 하자."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그걸 고려해서 말씀해주십시오."

나는 그녀가 동요하지 않도록, 되도록 평이한 어조로 말했다.

"네 주군이 너를 버렸을 때, 너는 그를 받아들여라."

"......."

리아의 눈이 사납게 휘어졌다. 무표정이 트레이드 마크인 그녀에게서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은 아니었기에, 그 분노를 어림짐작케 했다.

나는 사나운 기세를 흘려넘기며, '별거 아니잖아?'라는 투로 설명했다.

"기사들은 영원한 충성을 마치 덕목처럼 여기지. 물론 나도 그 뜻은 존중한다. 허나 주군이 버렸다 하면, 그를 받아들일 필요도 있지 않을까."

"그것은 거래로서 성립하지 않습니다. 류미엘님이 저를 놓아주실 가능성은 그야말로 0으로 수렴하기에."

"그러면 잘된 일이군. 너는 공짜로 나브릭스 홍차를 얻겠구나."

원하던 것을 갖게 된다 말했건만, 리아의 표정은 얼어붙은 겨울 바다처럼 차가웠다. 거기엔 단순한 적의를 넘어 의심과 증오마저 일렁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이십니까. 혹 류미엘님께 무언가…."

"내가 네 주군을 겁박해 너를 내려놓게 만든다. 그리고 버려진 너를 내가 거둔다… 혹 이런 생각을 했느냐?"

"…류리크 님께서 평소 저를 바라보는 눈길로 미루어 보아, 그 의심을 저버릴 순 없군요."

얼씨구. 요놈 봐라.

벌써부터 자기 가치는 자기가 안다는 양 저리 말한다.

"내가 그리하면 너는 내게 충성을 바칠 수 있겠느냐."

"절대. 단연코."

"그러면 내가 그것을 모르겠느냐. 너라는 사람을, 네가 가진 신념과 의지를 내 진정 몰라 그런 말을 하겠느냐."

"......."

나는 리아와 2주에 가까운 시간을 함께했다. 그리고 그 시간의 밀도는 무척이나 깊었다. 리아의 말에 따르자면, 지난 3년간 합친 것보다 많은 말을 나눴다고 했으니까.

그러니 나도 알았고, 그녀도 알 터였다.

리아는 말을 않았다. 나 역시 그녀가 입을 열기를 기다릴 뿐,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

"......."

나는 끈기 있게 기다렸다. 그녀를 채근하지 않고, 지그시 바라보며 부담을 주지도 않았다. 그저 경매품들을 살피는 시늉을 하며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리아의 입술이 어렵사리 떨어졌다.

"제가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만… 솔직히 말해 두렵습니다."

"내 말이 진실이 될까 봐, 그런 것이더냐?"

"예. 하지만 동시에 저는 류미엘 님을 믿겠습니다. 그분이 건네주신 은혜와 온정을… 믿겠습니다."

그거면 되었다, 나는 리아에게 홍차를 건네주었다.

오늘부터 네 별명은 홍차 괴인이다.

* * *

하여튼 빌어먹을 난이도 때문에 성장은커녕 주변 NPC들의 호감도 관리조차 벅차다.

그냥 루시아사가를 플레이하는 거였다면, 주인공에게 처음부터 호의적인 NPC들을 이용할 수 있었을 텐데.

나는 리아를 내보내고 겨우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주변 정리가 겨우 끝난 이제야, 레벨업의 첫 단계가 되어줄 아이템을 꺼내들 수 있었다.

―영월화(永月花).

아마 이걸로 류리크도 어느 정도 쓸 만한 캐릭터가 될 수 있을 터였다.

―――― 『 마도魔道 』 ――――

▶ 분류 : 특성

▶ 등급 : E-

▶ 설명

: 마력으로 주술, 마술, 마법 등의 술법을 펼치는 재능.

▶ 효과

: 마도와 관련된 수련에 미미한 이점을 제공한다.

――――

언제 봐도 처참한 랭크다. 특히나 이전에 플레이했던 캐릭터가 엔딩 무렵, 어지간한 특성을 S로 도배했던 만큼 괴리감도 컸다.

'하지만 이것도 안녕이다.'

지금까진 터무니없이 낮은 랭크 탓에 명상과 수련을 해도 약물 중독을 어쩌지는 못했다. 마력의 운용이 그만큼 힘들었고, 느렸기 때문이다.

허나 랭크가 몇 단계나 올라간다면, 그리고 곧 마법 대학에 입학한다면 이 문제는 눈 녹듯 사라지리라.

"......."

나는 영월화를 씹었다.

[ 영월화의 영험한 기운이 체내에 스며듭니다. ]

[ 마도 특성이 E 랭크로 격상됩니다. ]

[ 마도 특성이 E+ 랭크로 격상됩니다. ]

…[ 마도 특성이 D 랭크로 격상됩니다. ]

연달아 떠오르는 수많은 시스템 메시지들. 나는 그 하나하나를 또렷이 눈에 새겼다. 그리고 곧장 직접 확인해 보았다.

―――― 『 마도魔道 』 ――――

▶ 분류 : 특성

▶ 등급 : D

▶ 설명

▶ 효과

: 마도와 관련된 수련에 약간의 이점을 제공한다.

――――

'미미한'이라는 수식어가 '약간의'로 바뀌었다. 하지만 여기엔 세세히 기재되지 않았을 뿐, 세부적인 혜택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을 터다.

대표적으로는 마력의 총량 증가, 마력 회복 속도 증가, 마력 수련에 대한 보너스가 있을 테고,

'마력 운용에 대한 보너스도 있겠지.'

혈석의 기운을 상대하는데 가장 필요할 효과.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리아를 불렀다.

"여봐라."

"부르셨습니까."

호감도가 상승했다는 반증일까, 부르자마자 문밖에서 리아의 대답이 들려왔다.

"얼음물을 준비해 두거라."

"......."

그녀의 침묵에서 '제정신이십니까?'라는 말이 들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말을 덧붙였다.

"그 옆에 난로도 함께 둘 수 있도록."

이것 역시 약간의 실험 정신을 가미한 도전이었다.

'폭포, 얼음물에서 하는 명상은 시스템에 의한 보너스일까, 아니면 순전히 정신 집중을 잘 되게 하는 부가적인 요소일까.'

잘은 몰라도 이제 알아가야 할 일이었다.

* * *

"수고했다. 나가 보거라."

"신관을 수배해 놓을까요?"

"필요하면 부르도록 하겠다."

평소보다 아주 조금 더 공손해진 리아가 욕실 밖으로 나갔다.

나는 천천히 욕조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

뼈에 스미듯 시린 한기가 밀려왔다. 당장에라도 빠져나가고 싶은 욕구가 샘솟았지만, 내 의지는 그것보다 단단했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깊은 세계의 무언가를 조망하며, 마력을 움직였다.

평범한 인간 한유진에겐 불가능한 일이겠으나, 신동 A라는 특성이 마력의 운용력만큼은 고위 마법사의 수준만큼 높여주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절대적인 마력의 총량 차…!'

붓에 묻은 물감 조금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과 백지에 페인트 통을 들이부으며 그리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였다.

그리고 거기서 비롯된 명확한 차이가, 몸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큭!"

전신에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당장 마도 특성이 올라갔을 때는, '몸이 가벼워졌다.'라는 느낌밖에 없었지만.

실제 마력을 운용하는 순간, 그 어마어마한 차이가 피부로 와 닿았다.

"...…!"

마력으로 인해 느껴지는 압박감부터가 달랐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마력에 전신은 물론 뇌리까지 뜨겁게 들끓었다.

눈을 감은 세계에서, 나는 마치 어느 거대한 물줄기가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무언가의 위를 흐르고 흐르며 요동치던 내 시계(視界)가 저 멀리, 무언가를 직시한다.

―혈석(血石).

실제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내 심상에서 조망하는 개념적인 무언가일 테지만.

'엄청나군.'

단순히 내가 느끼는 심리적인 무언가일까, 아니면 내가 가진 마력과 혈석에 들어 있는 마력의 총량에 이만한 격차가 있다는 것일까.

베너렛에 이른 육체를 폐인 A가 될 때까지 좀먹으며, 모든 생체기관을 마력 흡수에만 몰두하게 만든 마성(魔性)의 무언가.

그렇게 모으고 모은 마력의 총체(總體).

나는 거칠게 그것을 들이받았다.

―쿠쿠쿠쿠쿠쿠!

흐르는 마력의 파도를 날카로운 창처럼 벼려내 혈석을 찔러댔다. 찌르고, 찌르고, 또 찌르고….

마치 기사와 결투라도 벌이듯 끊임없는 맹공을 펼쳤다.

그 끝에 거대한 혈석의 아주 일부가 깨졌다.

"하아."

깨진 혈석의 조각은 마력의 파도에 휩쓸리듯 스몄고, 그것이 곧 내 힘이 되었다.

[ 마력이 소폭 증가합니다. ]

[ 정순한 마력의 순환에 따라 체내의 약기가 배출됩니다. ]

[ 약물 중독 특성이 B+ 랭크로 격하됩니다. ]

[ 업적 '불가능에 대한 도전'을 달성하였습니다. ]

연달아 떠오르는 시스템 메시지들에 나는 차오르는 고양감을 느꼈다. 마력의 총량이 받쳐주니, 단순히 순환시키는 것이 아니라 혈석을 '공략'하는 것이 가능했다.

거기에,

'드디어 약물 중독의 랭크가 떨어졌다.'

새로운 업적은 의외의 선물이었다. 효과에 대해서는 이후 확인해 봐야겠지만, 척 봐도 나쁜 효과는 아니었다.

다만, 시스템 메시지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 튜토리얼이 완료되었습니다. ]

[ 퀘스트 커맨드가 활성화되었습니다. ]

[ 퀘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

◈ 013

―튜토리얼이 완료되었습니다.

―퀘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과부화된 뇌에 혼동이 찾아온다. 주인공 캐릭터가 아닌, NPC에게 튜토리얼이라는 개념이 있을 수 있는 것인가.

하물며 퀘스트가 생성되었다는 건 또 무슨 소리인가.

류리크라는 NPC는 주인공 캐릭터와 전혀 다른 환경을 지니고 있으니 '퀘스트'라는 걸 진행할 수 있을 리가 없는데.

나는 '튜토리얼이 완료되었습니다.'라는 메시지를 자세히 확인해 보았다.

―――― 『 생존 』 ―――――

▶ 분류 : 튜토리얼 퀘스트

▶ 등급 : -

▶ 설명

: 사망 요인 2개 이상 회피

: 특성 '약물 중독'의 랭크 격하

▶ 보상

: 메인 퀘스트 진행 자격 획득

――――

이런 게 있었던 것인가. 나는 내가 처했던 환경이 튜토리얼이라는 인식조차 없었다. 애초에 퀘스트 커맨드조차 활성화가 되어있지 않았으니까.

거기에,

'본래 튜토리얼 퀘스트는 이런 내용이 아니었다.'

나는 이어 새로 생긴 퀘스트도 확인해 보았다.

―――― 『 준비 』 ――――

▶ 분류 : 사이드 퀘스트

▶ 등급 : -

▶ 설명

: 직업 특성 C랭크 이상 획득.

: 캐릭터 기본 특성 중 C 랭크 이상인 것은 포함하지 않음.

▶ 보상 : 무작위 보조 특성

――――

이쪽은 생각보다 별거 아니었다. 분류도 사이드 퀘스트였고, 내용 역시 평이했다. 보상은 꽤 관심이 갔지만, 당장 급한 건 아니었다.

'기간 제한도 없고, 단순히 C랭크를 달성하는 거라면 마도가 상당히 근접해 있다.'

보조 특성으로 무엇이 나올까. 마도 특성을 최대한 빨리 C까지 달성해야 할까. 메인 퀘스트는 언제 등장할까.

생각할 것들이 많아지니 머리가 복잡해졌다.

"후우. 일단 좀 씻을까."

생각을 정리할 겸, 샤워를 하기 위해 욕실로 갔다. 옷을 벗고 샤워기를 틀자 따뜻한 온수가 쏟아졌다.

그제야 달아올랐던 몸의 긴장이 노곤노곤 풀리기 시작했다.

'…찬물은 이제 진짜 그만해야지.'

확인한 결과, 유감스럽게도 찬물은 시스템 보너스가 없었다.

"푸엣취!"

그날 오후, 신관의 힐링 값으로 200리브라가 지출되었다.

* * *

3월, 겨울이 지나고 신입생의 계절이 다가왔다. 위르겐하이의 곳곳에서 교복을 입은 이들이 곧잘 보이기 시작했다.

잠깐 밖을 걷노라하면, 기차역으로 가는 이들과 그들을 배웅하는 가족들이 눈물의 이별을 고하고 있었다.

저택에 돌아온 나는 문득 궁금한 것이 생겨 리아에게 물었다.

"후인의 반지를 갖고만 있으면, 특별한 전형 없이 입학식에 참여할 수 있던가?"

"제게 물으신 것입니까?"

"혹시 지금 내 옆에 너 말고도 다른 이가 있는가?"

리아가 조금 의외라는 어투로 말한다.

"…샤프란의 입학 전형이라면 이미 통달하신 줄 알았기에."

나라고 모든 것을 아는 건 아니다. 하물며 나는 마법사 캐릭터로 플레이할 때, 후인의 반지를 보지도 못했다.

그저 그런 '전형' 존재한다는 것만 알았을 뿐.

"지금까진 나 홀로 많은 것을 해왔다만, 이제 너에게 짐을 좀 덜어보려 한다."

"저는 류리크 님의 수족이 아니옵니다만."

"홍차값은 해야지. 그리고 자네는 지금 본인의 집사임을 기억했으면 좋겠군."

홍차값의 거래는 끝난 줄 아옵니다만, 리아가 눈으로 쏘아붙였다.

그에 대해 나는 '내 옆에 붙어 있으면 귀한 홍차가 떡고물로 떨어질 수 있네만.'이라고 표정으로 답했다.

"…입학식 당일에, 아침 일찍 입학처에 반지를 보여주면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무언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니, 어쩌면 리아와 나는 천생연분이 아닐까.

나는 그런 멍청한 생각을 하면서 되물었다.

"시간은?"

"6시부터 8시 사이. 그전까진 반지를 꼭 지니고, 입학처까지 가셔야 합니다."

"그렇군."

특별한 절차는 없었다. 입학식 전까지 뭘 준비해야 할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갑자기 리아가 그런 말을 했다.

"이제 안녕이군요."

그녀는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으로 창밖을 보았다. 마치 곧 이별이라도 할 것 같은 태도였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녕이라니, 마치 우리가 헤어질 것처럼 말을 하는구나."

"실제 헤어지는 게 맞지요."

실로 황당무계한 소리였다.

"그게 무슨 소리인고? 나는 앞으로도 그대와 계속 함께 할 생각이다만."

이번에는 리아가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샤프란은 기숙사제를 채택한 대학입니다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소인은 생물학적으로 여성으로 분류되기에, 류리크 님과 같은 기숙사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그런 걸 생각하고 있었던 건가.

네겐 유감스러운 소식이겠지만, 그렇게 쉽게 놔줄 생각은 없다. 이런 식으로 헤어질 것 같았으면, 나브릭스 홍차를 주지도 않았겠지.

나는 회심의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샤프란에는 후작가 이상의 자제들에 한해 사택에서의 통학을 허용한다, 라는 교칙이 있지. 학교에도 미리 말을 해 놓았다."

"…그걸 아시는 분이 후인의 반지에 관한 절차를 물으신 겁니까?"

"그거야 자네의 실력을 테스트할 겸이었지."

사실은 그때 물어본다는 걸 깜빡했었다.

"잘 부탁하네. 어차피 자네의 역할은 나를 감시하고, 주기적으로 동향을 보고하는 것 아닌가."

"......."

리아의 얼굴에 당혹감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목소리에서도 조급함이 묻어났다.

"샤프란의 커리큘럼은 상당히 체계적이고 복잡합니다. 기숙사제를 택한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말이지요."

"내 어찌 그것을 모르겠는가. 샤프란은 방과 후의 연구회, 동호회 활동이 상당히 중요하지. 사교를 위해서도 필요할뿐더러, 그곳에서의 활동을 평가하기까지 하니까."

"그걸 아신다니 그나마 다행이군요. 류리크 님께서 앞서 말씀하신 이유들이 있는 만큼, 기숙사제에 순응하심이 옳을 줄 아옵니다만."

그건 또 다른 얘기다. 내가 무슨 고등학교 동아리 활동하는 것도 아니고, 연구회나 동호회 같은 것에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순 없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입회는 하되 꼭 필요한 상황에나 가끔 참석할 생각이다. 적어도 1학년 때는 말이지.

"벌써 잊어버린 것 같은데, 본인은 아직 약물 중독자라네. 그리고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매일 상당한 시간을 명상에 투자해야 하지."

자네가 질색하는 그 얼음물에서 한 것처럼 말이지, 내가 덧붙였다.

"황족이라는 것만으로도 학부생들의 관심이 모일 텐데, 내 어찌 기숙사 같은 곳에서 마음 편히 명상을 할 수 있겠는가."

"…샤프란의 기운이 영험하여 그곳에서 하는 명상이 도움이 된다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구나."

샤프란에 재학하면 생기는 '마법 대학 학부생' 직업이 마도 수련에 어드밴티지를 제공하는 거지, 꼭 거기서 수련해야 하는 건 아니다.

물론 리아에게 그런 설명을 해줄 순 없기에, 기억이 나지 않는 척 넘겼다.

"......."

그나저나 리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나와 함께 한다는 걸 진심으로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포커페이스를 잃어버린 걸 의식도 못 할 만큼 깊은 생각에 빠진 것이, 조금 귀여웠다.

"뭐, 더 할 말 없다면 본인은…."

"아뢰옵게 황송하오나, 이곳은 위성도시 위르겐하이입니다. 제도의 대학까지 통학하기엔 상당히 거리가 있습니다. 이는 오히려 시간 낭비를 야기할 가능성이…."

리아가 불안한 듯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쥐어 짜낸 마지막 한 방을 날렸지만,

'나는 이미 네 머리 위에서 놀고 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답을 돌려주었다.

"통학은 물론 제도에서 할 예정이다."

"…무슨 수로 말씀이신지요? 류리크 님의 잔고로는 제도의 조그마한 가정집도 구할 수 없…."

"제도에 류네온이 수호기사로 서임 받기 전 쓰던 아스트레이의 사저(私邸)가 있다 들었다. 거기를 이용할 생각이다."

리아의 얼굴이 보기 좋게 구겨졌다.

나는 흐뭇하게 1승의 채점표를 기억하며, 놀리듯 말했다.

"네가 정 기숙사제를 바란다면, 예외 조항을 들 수도 있다."

"예외 조항… 말씀이십니까?"

"황족은 호위를 대동할 수 있고, 그로 너를 지명한다면야… 금녀(禁女)의 구역인 샤프란 대학 남자 기숙사에서 우리가 혼숙을 할 수도 있겠지. 어떤가? 조금 관심이 동하느냐."

리아는 자신이 내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경멸을 담아 말했다.

"차라리 절 죽이시지요."

"그러면 결론이 나왔군."

나는 여유롭게 소파에 걸터앉으며 리아에게 손짓했다.

"시종들에게 모두 모이라 이르거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