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뭐냐, 저놈....'
란타스는 어안이 벙벙해져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겉보기에야 그냥 덩치 큰 청년일 뿐이지만 오러 능력자인 그는 상대의 전신에 맴도는 산악 같은 기세를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뭐야, 이 엄청난 기운은?'
레펜하르트가 살기 흐르는 표정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어느 누구도 감히 그의 앞을 가로막지 못했다. 그렇게 실란에게 다가가 쓰러진 시리스를 내려다 본 레펜하르트의 두 눈에 불꽃이 튀었다. 그가 애써 흥분을 억누르며 실란에게 감사를 표했다.
"시리스를 지켜 주어 고맙다."
문득 실란이 얼굴을 붉혔다. 사실은 시리스가 실란을 지킨 것이었지만 막판만 본 레펜하르트 입장에선 착각할 법도 하다. 게다가 마지막에 자기도 모르게 일어난 것은 심각한 정조의 위기를 느껴서이지, 딱히 시리스를 생각해서가 아닌 것이다.
"아, 네. 뭐...."
말을 더듬다가 실란은 그냥 쓰러진 시리스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치유술을 펼쳤다.
"필라넨스시여, 당신의 어린 양을 다시 일으키시어 상처를 거두소서."
그동안 레펜하르트는 굳은 눈으로 로마드 일행을 노려보고 있었다.
여관으로 돌아올 때까지 레펜하르트는 전혀 상황을 짐작하지 못했다. 텅 빈 방, 없어진 실란과 시리스의 옷가지, 그리고 열린 창문을 보고도 그냥 '애들이 방에만 있기 싫어 놀러 나갔나?'라고 속 편하게 생각했다.
이변을 깨달은 것은 여관 주인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 때문이었다. 왠지 꺼려하는 그 모습에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그는 바로 여관 주인을 다그쳤다. 한 방에 여관 기둥을 뭉개는 그 주먹 앞에 주인은 순순히 모든 일을 털어놓았다.
한 무리의 일행이 와서 그를 매수하고 여관을 비우게 한 것, 그리고 그 틈에 시리스와 실란을 노렸다는 것까지 모두 들은 레펜하르트는 당장 여관 밖으로 뛰쳐나갔다.
분노와 함께 그는 거리를 누비며 시리스를 찾아다녔다. 자신의 어리석음에 어이가 없었다. 그는 경험 없는 20대 애송이가 아니었다. 그런데 노리는 자가 있음을 알면서도 그녀를 곁에서 떼 놓다니? 스스로가 믿기지 않았다. 왜 이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을까?
후회하고 또 후회하며 제플린 시내를 이 잡듯 뒤졌다. 문득 거리 안쪽 골목에서 강렬한 오러의 파동을 느꼈다. 혹시나 싶어 달려가니 시리스가 쓰러져 있고 사내 둘이 실란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너무 급해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던졌다. 그게 잘 달려 있던 남의 집 문짝이란 건 던지고 나서야 알았다.
"네놈들이 감히 시리스를 노렸단 말이지...."
살의 가득한 레펜하르트의 말에 로마드 일행은 모두 굳어 있었다. 저것은 이미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차라리 자식을 잃은 맹수의 으르렁거림이었다. 뱀 앞에 선 개구리처럼 그 기세만으로 전신이 마비되어 움직일 엄두가 나질 않는다.
하지만 흥분할 대로 흥분한 와중에도 레펜하르트는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다. 로마드 일행 곁에 있는 저 검 쥔 중늙은이의 존재 때문이었다.
'강하다, 저자.'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이것이 무인 특유의 감각이란 걸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강하다는 확신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열이 머리끝까지 뻗쳤음에도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로마드가 레펜하르트를 보더니 호들갑을 떨었다.
"란타스 님, 저놈입니다! 저놈이 저 슬레이어를 산 놈이에요."
시선을 돌리지도 않은 채, 란타스가 입맛이 쓰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애송이라더니...."
저게 무슨 애송이냐! 그냥 척 보기만 해도 전신의 감각이 경종을 울리고 있는데! 오러 능력자인 그가 상대의 실력을 파악하지 못할 정도면, 상대도 최소 오러 능력자란 소리다.
'하지만 저렇게 어린 나이에 어떻게?'
레펜하르트는 아무리 봐도 20대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덩치가 워낙 좋아 20대 후반인가 싶었지만, 얼굴이 상당히 앳된 것이 사실은 초반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느 쪽이건 간에 이런 엄청난 기운을 가질 나이는 절대 아니었다.
'혹시 엄청난 동안인가?'
얼굴만 팽팽하고 사실은 중년 나이가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 이름 높은 필라넨스 에스틱 살롱에서 매일 스킨케어를 받아도 저렇게는 안 된다. 하지만 20대에 오러를 각성한 자가 있다는 사실보단 차라리 필라넨스의 미용 실력이 기적적이더라는 쪽을 택하는 게 좀 더 란타스의 상식과 맞았다.
'겉보기엔 저래도 최소 30대 후반은 되겠지.'
그가 오러를 각성한 것이 딱 그때쯤이었다. 란타스가 진지한 얼굴로 검을 들었다.
"오랜만에 진정한 강자를 만났군."
레펜하르트가 싸늘한 표정으로 비아냥거렸다.
"애들만 덮치는 변태 늙은이가 꼴에 기사 흉내 내기는."
란타스란 이름을 들었을 때 바로 알 수 있었다. 왜 오러 유저씩이나 되는 존재가 여기서 저러고 있는지. 란타스의 악명은 하도 유명해 레펜하르트 역시 익히 들었던 것이다.
상대의 비웃음에 란타스의 얼굴이 굴욕으로 일그러졌다.
"크윽!"
실란이 비꼬았을 때야 무시할 수 있었지만 같은 무인, 그것도 강자에게 비아냥을 당하는 것은 전혀 느낌이 다르다. 그가 빠드득 이를 갈며 검을 세웠다.
"이 자식이...."
붉은 오러가 란타스의 칼날을 타고 섬뜩하게 흘러내렸다.
"왜? 욕을 먹으니 꼴에 열은 받나 보지? 아니면 취향입니다, 존중해 주시죠~ 라고 우겨 보게?"
레펜하르트도 두 주먹을 들어 자세를 잡았다. 황금빛 오러가 흘러나와 양손 가득 불꽃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더 이상 대화는 없었다. 두 사람 다 말없이 상대를 살피고 또 살폈다.
"헙!"
순간 레펜하르트가 땅을 박차며 몸을 날렸다. 란타스도 검을 들고 마주 돌진해 갔다. 눈부신 황금빛이 붉은 빛과 격돌하며 요란한 폭음을 뿜어냈다.
파아앙!
적색과 금빛의 파문이 사방으로 퍼지며 제플린의 밤하늘을 환하게 밝히기 시작했다.
☆ ☆ ☆
붉은 검무가 사방을 휘젓는다. 눈부신 검광이 허공을 가르고, 그 자리에 실크 커튼처럼 붉은 장막이 드리워진다.
그 장막을 황금의 빛이 찢어발긴다. 웅혼하게 날아오는 펀치 하나하나마다 가공할 기세가 담겨 있다. 오러의 장막을 가볍게 뚫고 대포처럼 연신 쏘아져 온다.
"이잇!"
"타아앗!"
연거푸 기합을 터트리며 레펜하르트와 란타스는 수십 차례나 공방을 주고받았다. 양쪽 다 인간의 상식을 벗어난 몸놀림이었다. 붉은 칼날이 쉴 새 없이 허공을 수놓고 펀치와 킥이 수십 차례나 허공을 뒤흔들었지만 둘 다 상대의 육체에 적중시키지는 못했다. 대신 일렁이는 오러가 서로 마찰하며 그 여파로 주위를 부수고 있었다.
공격을 퍼붓고 또 피할 때마다 오러와 오러가 부딪쳐 빛의 파문이 사방으로 퍼진다. 파문이 닿는 곳마다 석재 바닥이 뒤엎어지고 벽이 무너지고 나무 물통이 박살나 물방울이 여기저기 흩어진다.
"으아아...."
"도, 도망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도망가다 휘말리면 그냥 죽는 거야, 임마!"
끔찍한 파괴의 참상 속에서 로마드 일행은 그저 벌벌 떨고만 있었다. 충돌해 터져 나오는 빛의 파문, 상쇄되는 오러의 잔여 파괴력만으로도 공터는 이미 전쟁터처럼 폐허가 되어 있었다. 오러 능력자의 힘은 실로 가공한 것이다.
그래서 로마드 일행은 반파된 우물 뒤에 숨어 감히 머리도 못 든 채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다. 저 오러의 파동에 재수 없게 휘말리기라도 하면 그대로 즉사다. 감히 도망갈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반면 실란과 시리스는 상대적으로 편안한 상태에서 전투를 보고 있었다.
"...레펜하르트 님이 오러 유저였나요?"
"응? 내가 말 안 했던가?"
레펜하르트는 란타스와 싸우는 와중에서도 절대 그들에게는 여파가 미치지 않도록 조절하고 있었다. 파문이 날아갈 것 같으면 몸으로 막거나 기격탄을 날려 공격을 상쇄시킨다. 대등한 전투를 벌이는 와중에 저런 묘기까지 부리다니? 란타스가 기가 막혀 중얼거렸다.
"뭐야, 이 자식? 갓 오러를 각성한 솜씨가 아니잖아!"
란타스가 오러를 각성한 지 어언 10년이 넘었다. 비록 주색잡기에 빠져 많이 게을러진 그였지만, 그래도 보내 온 경험과 세월이 있었다. 오러로 육체를 강화하고 무기에 덧씌우는 가장 기본적인 경지는 이미 지나 란타스는 오러 그 자체를 운용하는 레벨에까지 발을 디디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처럼 오러를 길게 늘려 채찍처럼 휘두르는 용법도 구사할 수 있는 것이다.
차르륵!
붉은 오러가 3미터 가까이 늘어나 뱀처럼 꿈틀거리며 상대의 등 뒤를 노린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바로 몸을 돌려 기격탄을 쏘아 내 채찍을 파괴했다. 기가 막혔다. 란타스가 오러 자체를 운용하는 경지에 다다르기까지는 7년이란 세월이 필요했다. 그런데 이 새파랗게 어린 놈이 비등한 경지의 기술을 구사하는 것이다. 자신이 많이 논 걸 감안해도, 저 경지는 최소 2, 3년간 죽어라 수련에 매진해야 가능한 수준이다.
즉, 저놈은 10대에 이미 오러를 각성했든가, 아니면 저 얼굴에 마흔이 넘겼다는 소리가 된다!
"젠장! 어느 쪽이건 말이 안 되잖아!"
이를 갈며 란타스가 연신 공격을 퍼부었다. 차분히 피하며 레펜하르트가 혀를 찼다.
'빌어먹을! 애만 덮치는 변태 자식이 뭐 이리 강해?'
추악한 악명과 달리 란타스의 검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고 강력했다. 게다가 레펜하르트는 제대로 된 검사와 싸워 본 적은 이번이 처음인 것이다. 제라드와 그토록 대련을 해 오긴 했지만, 검술과 권술은 용법이 상당히 다르다. 그래서 아직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아으, 열받아.'
감히 시리스를 납치하려 한 놈이다. 마음 같아선 단매에 패 죽이고 싶은데, 소아 성애자 변태 주제에 이토록 검이 예리하다니? 뭔가 억울한 감마저 들 정도였다. 허리를 접어 횡으로 날아오는 검격을 피하며 레펜하르트는 이를 갈았다.
'앞으로 무술이 인격 수양에 도움 된다고 떠드는 놈 만나면 반드시 패 준다.'
생각해 보면 애초에 인격자는, 다툼이 생기면 말로 해결하지 주먹을 쓰지 않는다. 역시 무인들이 잘난 척하려고 만든 말이 분명한 것 같았다. 편견 가득한 상념 속에서 레펜하르트는 연신 기격탄을 쏘아 댔다.
"가라!"
하지만 란타스는 소드 패링을 펼쳐 기격탄을 모조리 터트려 버렸다. 레펜하르트의 표정이 구겨졌다.
"쳇!"
역시 아직 그는 오러 자체를 다루는 경지가 얕아 제라드처럼 강렬한 기격탄을 쏠 수가 없었다. 물론 지금도 강철을 우그러트리고 바위를 부수기에 충분한 위력이지만, 역시 오러 능력자 상대로는 손색이 있다.
란타스가 곧바로 반격했다. 붉은 칼날이 정교하게 허점을 노리며 방어를 비집고 들어온다. 예리한 오러가 강렬한 기운을 담고 레펜하르트의 신장을 노렸다. 잠깐 몸으로 버텨 볼까 했지만 차마 엄두가 나질 않았다. 예상이 빗나가면 옆구리로 오줌 싸는 처지가 될 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피할 틈은 없고....'
결국 레펜하르트는 스파이럴 가드를 펼쳐 칼날을 튕겨 냈다. 양 팔뚝에 황금빛 오러를 감싸 회전시키는 방어법에 란타스의 표정이 굳었다.
'방어구도 안한 맨 팔뚝으로 검을 튕겨 내?'
물론 양쪽 다 오러가 실려 있긴 하지만, 그렇다 해도 무식하게 단단한 팔뚝이었다. 칼날을 막았는데 상처는 고사하고 긁힌 흔적조차 없다니? 저렇게 말도 안 되게 몸뚱이 단단하게 만드는 무문이라면 란타스도 익히 들은 바가 있었다. 워낙 유명한 양반이라 모를 수가 없었다.
그가 순간 경악으로 멈칫거렸다.
"...설마!"
그때 레펜하르트가 갑자기 몸을 날렸다. 그 거구로 허공에서 몸을 빙글 돌리며 오러가 실린 발 뒷굽차기를 날린다. 리버스 섬머 솔트 킥이 란타스를 노리고 내리찍혔다. 타이밍이 절묘해 채 피할 틈이 없었다. 란타스가 전신의 오러를 끌어 올리며 검신을 손으로 받쳤다.
오러와 오러가 격돌하며 폭음이 울렸다.
3
바람이 불었다. 파괴의 힘이 맞붙어 대기를 끓어 올리니 그것만으로 공터 곳곳에 작은 회오리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 속에서 두 오러 능력자는 상대의 반응을 살피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실란이 그걸 보며 혀를 찼다.
'끄응, 보통 무사들의 싸움이라면 내가 할 일이 있을 텐데.'
실란의 가공할 신성력이라면 전사의 모든 능력을 한계 이상으로 증폭시켜 줄 수 있다. 그러므로 저들이 평범한 무인들이었다면 벌써 가호를 내려 승패를 결정지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성력은 오러 능력자에겐 통용되지 않는다. 정확히는 통하긴 하는데 효과가 없다는 쪽이 옳다. 이미 오러 능력자는 오러로 자신의 능력을 극한까지 증폭시킨 후다. 그 증폭도는 신관의 신성 가호를 훨씬 뛰어넘는다. 그러니 오러 능력자들에겐 가호를 내리나 마나 별 차이가 없는 것이다.
그래도 부상을 입게 된다면 바로 치유시킬 수는 있으니 아까부터 치유술을 쓸 틈만 노리고 있었다. 그런데 원체 몸뚱이 하나는 단단한 양반이다 보니 아직 긁힌 흔적 하나 없다.
그렇게 서로를 노려보고 있을 때였다. 문득 란타스가 입을 열었다.
"권왕 제라드의 제자였소?"
말투부터가 달라졌다. 레펜하르트가 마법사다 보니 업계가 달라 미처 몰랐을 뿐, 사실 제라드의 명성은 무인들 사이엔 엄청났던 것이다. 어지간한 무인치고 권왕 제라드를 모르는 이는 없었다.
"...."
레펜하르트는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제라드 기피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란타스는 이미 그가 제라드의 제자임을 확신한 듯했다. 원체 알아보기 쉬운 무문이었으니까.
란타스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젓더니 다시 물었다.
"대체 그대 정도 되는 강자가 왜 고작 노예 따위에 연연하는 것이오?"
자기 정도 되는 강자가 노예 납치 따위에 연연하고 있다는 사실은 싹 무시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굳이 지적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보다 더 분노할 부분이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이를 갈았다.
"누가 노예냐...."
순간 그의 전신에서 진득한 분노가 흘러나왔다. 란타스가 흠칫거렸다. 살기나 적의야 아까부터 철철 흐르고 있었지만, 이 기세는 뭔가 달랐다.
이건 보다 순수하고 직접적인 분노다!
"너희가 노예랍시고 끌고 다닌 이들도 이성이 있고 감정이 있다!"
레펜하르트가 몸을 날렸다. 연신 땅을 박차며 란타스의 정면으로 무식하게 돌진해 간다. 란타스가 인상을 쓰며 3단 찌르기로 응수했다. 세 줄기 오러의 창이 적색 잔상을 남기며 상대의 급소를 찔러 간다.
"한 번이라도 그들과 제대로 이야기해 봤느냐? 한 번이라도 그들이 노예라는 사실에 의문을 가져 본 적이 없냐는 말이다!"
극심한 분노를 터트리며 레펜하르트가 손을 크게 휘저었다. 황금의 오러로 날아오는 창을 모조리 박살 내며 수소처럼 란타스를 쇄도해 간다. 당황해 란타스가 뒤로 물러나며 외쳤다.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건가?"
몰이해라는 단어를 얼굴 가득 떠올리는 란타스를 보며 레펜하르트는 바드득 이를 갈았다.
모두가 저랬다. 전생에서도 모두가 저런 반응이었다.
인류 전체에 뿌리박힌 저 불합리! 인간 외의 모든 것은 천하다는 저 굳은 인식!
두 발로 걷고 사람처럼 생각하고 사람처럼 말하고 사람처럼 웃고 울고 기뻐하고 슬퍼하는 이들을 보고도, 그들에게 감정이 있고 이성이 있을 거라곤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인간이 엘프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기에 노예로 부리는가!"
순간 란타스는 어이가 없었다. 자신도 솔직히 도덕, 도리 따지며 살아온 놈은 아니지만 저렇게 어이없는 생각은 처음 듣는 것이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으로 지음받았기에 다른 종족을 모두 노예로 삼는 것이 합당하다. 이것은 주신 세이어가 정한 정명한 이치다.
"아니, 그럼 노예로 타고난 이들이 뭐 다른 것이라도 된단 소린가?"
멍청한 란타스의 반문에 레펜하르트의 기세가 더욱 날카로워졌다.
"위대한 요정의 후예였던 이들이 어째서 노예로 타고났단 말이냐!"
무자비한 공격이 연거푸 들어온다. 란타스는 당황하면서도 냉정하게 반격에 들어갔다. 칼날의 춤 앞에 레펜하르트의 피부 곳곳에 붉은 흔적이 남는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치명상은 없었다. 흥분한 와중에도 그토록 단련한 그의 육체는 스스로 최선의 공격과 방어 형태에 들어가고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울분을 터트리며 말을 이었다.
"세계를 지배하는 자가 엘프였다면 인간이 노예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 보지도 못했나?"
권력자가 오크들을 노예로 삼았을 때 인간들은 환호했다. 자기는 오크가 아니니까.
권력자가 드워프들을 노예로 삼았을 때 인간들은 환호했다. 자기는 드워프가 아니니까.
권력자가 엘프들을 노예로 삼았을 때 인간들은 환호했다. 자기는 엘프가 아니니까.
그리고 노예 제도가 대륙에 뿌리박힌 지금, 인간들조차 힘없고 약한 이들은 반노예가 되어 힘든 삶을 살기 시작했다. 농노 제도가 그것이다.
이미 한번 바뀐 그릇된 패러다임은 결국 스스로에게 돌아오는 것인데, 어리석은 인간들은 그것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다른 이들을 노예로 삼는 걸 허용하면, 결국은 자신 역시 노예가 될 수 있단 말이다!"
이미 레펜하르트의 분노는 란타스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힘없는 자신, 불합리에 가득 찬 이 세상에 대한 분노였다. 하지만 란타스는 여전히 이해 못 하고 있었다. 그가 시리스를 힐끔 보더니 기막힌 얼굴로 뇌까렸다.
"아니, 그럼 엘프 따위가 인간과 같단 말이냐? 그대, 제정신인가?"
레펜하르트는 결국 폭발해 버렸다.
"시리스는 노예가 아니다!"
허공에서 몸을 돌리며 그는 바닥을 재차 박찼다. 울분에 찬 의지가 주먹에 실려 파괴의 힘으로 화했다.
란타스의 표정이 다급해졌다. 점점 더 상대의 몸놀림이 좋아지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이성을 잃고 강해진다는 건 모험담 속에서나 나오지, 보통은 이성을 잃으면 약점만 수두룩하게 나타날 뿐이다. 그런데 레펜하르트는 오히려 살짝 맛이 간 쪽이 더 움직임이 예리하다!
"뭐, 뭐야!"
하지만 란타스가 모르는 것이 있었으니, 사실 레펜하르트는 오히려 지금이 더 냉정한 상태였다. 아까까지는 그저 단순 무식한 이 육체, 테스론의 감정에 휘둘려 익힌 대로 체술을 구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전생의 마왕 레펜하르트, 마법사로서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마법사는 아무리 분노해도 이성을 잃지 않는다. 마법사였던 자신을 되찾은 그는 분노와는 별개로 냉정하게 상대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었다.
연거푸 잽과 스트레이트를 날려 상대를 압박한 뒤 하단을 노려 스텝을 제압한다. 그리고 그 위로 오러가 실린 권격을 퍼부어 움직임을 제한한다. 슬슬 란타스의 검술에도 익숙해졌다. 상대는 오러 능력자지만, 몇 년이나 주색잡기에 빠져 제대로 수행한 몸이 아니다. 그토록 죽어라 단련한 이 육체에 비하면 모든 면에서 뒤떨어진다!
거미줄에 걸린 먹이의 힘을 빼 놓는 것처럼 레펜하르트는 연신 란타스를 압박해 갔다. 두 눈이 분노로 이글이글 타올랐다.
그토록 사랑하고 사랑하던 이가, 목숨보다 더 소중하고 소중한 상대가 노예라 불리고 있다. 용납할 수 없다. 결코 이런 세상은 용납할 수 없다.
"젠장!"
욕설을 토하며 란타스가 힘겹게 검을 휘둘러 3연속 베기를 날렸다. 연달아 회전해 공격을 피하며 레펜하르트는 그대로 팔꿈치 회전 치기를 날렸다. 바위도 베어 버릴 예리한 엘보 블로에 란타스가 후퇴하다 발이 꼬였다.
그 순간 레펜하르트가 미들 킥을 날렸다. 상대의 가드를 부수고 타격을 주는 킥이었다. 팔을 들어 막는 순간, 란타스는 온몸이 마비되는 걸 느꼈다.
'아, 안 돼!'
순간 그의 눈동자에 절망의 빛이 떠올랐다.
"타아앗!"
강렬한 기합과 함께 레펜하르트의 주먹이 란타스의 명치에 꽂혔다. 단 일격에 척추가 박살 나고 전신 가득 통증이 퍼져 갔다.
"크어억!"
피를 토하며 란타스가 쏘아진 포탄처럼 건물 벽에 처박혔다. 벽이 무너지며 박살 난 벽돌 파편이 바닥 가득 나뒹굴었다. 그 위로 한 자루 롱 소드가 떨어져 챙그랑 쇳소리를 냈다.
쓰러진 란타스를 향해 걸어가며 레펜하르트가 중얼거렸다.
"바꾸고 말겠다...."
반드시 바꾸겠다.
어느 누구도 시리스를 노예라 부르지 못하게....
어느 누구도 노예란 것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도록....
그녀를 위해 이 세상을 바꾸겠다!
☆ ☆ ☆
시리스는 넋이 나간 얼굴로 눈앞의 전투를 보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오러 능력자의 힘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했다. 여태껏 그녀는 피와 살로 이루어진 몸이 저런 위력을 낼 수 있을 것이라곤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엘븐하임에서 오러 유저에 대한 말도 안 되는 여러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역시 인간은 허풍이 세다고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 허풍조차 너무 미약하게 표현한 게 아닐까란 생각만 들 뿐이었다.
'저것이 무武의 궁극에 달한 자의 영역!'
시리스는 감동으로 몸을 떨었다. 인간을 증오하는 그녀였지만, 무술을 익힌 이로서 어쩔 수 없이 경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그녀를 산 덩치 큰 주인의 외침이 들렸다.
"시리스는 노예가 아니다!"
그때 시리스의 생각은 딱 이것이었다.
'저거, 제대로 미친놈이었구나.'
엘프가 노예가 아니라고? 역할 놀이에 얼마나 푹 빠졌는지 헛소리가 아주 일품이었다. 역시 오러를 각성해도 변태는 어쩔 수 없이 변태인 것 같았다. 하긴, 저 란타스란 작자도 오러를 각성했지만 더러운 소아 성애자가 아닌가?
그 순간 시리스는 모든 경외감을 버렸다. 이제 그녀의 눈에 저 놀라운 전투는 덜한 변태와 더한 변태가 피터지게 싸우는 광경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지며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건 막을 수가 없었다. 저 덩치 큰 주인의 목소리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비록 변태의 역할 놀이라지만, 저 인간은 진심으로 시리스를 노예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는 위대한 요정의 후예였단다.
"위대한 요정의 후예였던 이들이 어째서 노예로 타고났단 말이냐!"
지금 저 정신 나간 덩치 큰 주인은, 일족의 어른들과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 ☆ ☆
"으으으으...."
벽돌 더미에 깔린 채 란타스는 신음을 흘렸다. 다른 이였다면 즉사할 공격이었지만 미세한 오러의 힘이 아직 그의 숨통을 붙여 주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당장 신관의 치유를 받지 못하면 얼마 못 갈 것임은 분명했다.
그가 레펜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사, 살려주시오."
순간 레펜하르트는 어이가 없었다. 아니, 이놈은 그동안 자신이 저지른 죄악이 있는데 설마 살려 줄 거라 생각하나?
"애들 덮치는 변태 놈을 살려 둘 필요가 뭐가 있지?"
그러자 란타스가 진지한 얼굴로 선언했다.
"검에 걸고 약속하겠소. 남은 인생 모두 선한 일에 쓰겠소. 내 죄악을 반성하며 평생을 보내겠소!"
피를 흘리면서도 란타스는 진심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무심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표정만 보면 정말 회개하는 것 같긴 한데...."
"그, 그렇소!"
주름진 얼굴에 반성의 빛이 가득하다. 지금 표정만 보면 정말로 반성하는 것 같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코웃음을 쳤다. 문득 그가 딴소리를 했다.
"내가 세이어 교단을 참 싫어해. 특히 그 고해성사란 거, 정말 마음에 안 들더라."
죽어 가면서도 란타스가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있는 짓 없는 짓 다 해 놓고 신전 가서 몰래 말하고 회개하면 땡이냐? 진짜 회개할 거면 치안대 가서 자수를 해야지, 왜 세이어 신전으로 가는 건데?"
"물론 자수도 하겠소!"
"하긴 뭐, 내가 딱히 살인에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왠지 살려 줄 것 같은 말투다. 란타스가 초조하게 외쳤다.
"나 같은 놈을 굳이 죽여서 손을 더럽힐 필요는 없지 않소!"
그러자 레펜하르트가 싸늘한 비웃음을 던졌다.
"그런데 이미 피는 많이 묻었거든?"
살인에 취미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만, 사실 레펜하르트가 전생에 죽인 사람 숫자는 네 자리를 넘어서서 다섯 자리 가까이 된다. 괜히 마왕으로 불린 것이 아니다. 칼잡이와 달리 진정 강력한 마법사는 광범위 주문으로 수천 단위의 인명을 한 순간에 앗아 갈 수 있다.
"좋아, 진짜로 회개했다고 믿어 주지."
갑자기 레펜하르트가 너그럽게 고개를 끄덕인다. 란타스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때였다.
"진심으로 회개했으니 죽어도 싸다고 느끼고 있겠지? 응? 죗값을 치르기 위해서 막 자기를 죽여 달라고 하고 싶지 않아? 응? 반성했다며?"
"그, 그건!"
비아냥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섬뜩한 살기, 란타스가 당황하며 말을 더듬는 순간이었다.
퍼억!
황금빛 오러가 그의 머리통으로 내리찍혔다.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란타스의 머리였던 부분이 피떡이 되어 사라져 버렸다.
손을 거두며 레펜하르트가 차가운 눈으로 뇌까렸다.
"회개라는 단어를 남발하지 마라. 너 같은 놈이 쓸 단어가 아니다, 그건."
그렇게 란타스는 길거리 개처럼 죽었다. 그래도 명색이 오러 유저로서, 한때 테이칸 왕국에 명성이 자자하던 기사의 최후치고는 너무나 비참했다.
"그러게 사람이 사람답게 살았어야지."
중얼거리다 말고 레펜하르트는 문득 쓴웃음을 지었다. 어째 전직 마왕이 할 소린 아니었다.
란타스를 박살 낸 뒤, 레펜하르트는 바로 실란과 시리스에게 다가갔다. 시리스의 전신을 이리저리 살피며 그가 걱정스레 물었다.
"몸은 괜찮아? 다친 데는 없고?"
이미 시리스는 실란의 치유술로 모든 상처가 말끔히 사라진 후였다. 실란을 돌아보며 레펜하르트는 자신의 혜안(?)에 감탄했다.
'아! 역시 이 최고급 약통을 데려오길 잘했어!'
잘했다며 레펜하르트는 실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애 취급 하지 말라며 실란이 신경질을 내며 빠져나간다. 그때 시리스가 머뭇거리더니, 살짝 입을 열었다.
"몸은... 괜찮은 건가요, 레펜하르트 님?"
조금 전 그의 외침은 분명 그녀의 가슴을 일순 뒤흔들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말을 건넸다. 그런데 레펜하르트의 두 눈이 그렁그렁해졌다.
"시리스!"
그는 감동으로 몸을 떨었다.
'아! 시리스가 내게 말을 걸었어! 물론 여전히 목소리는 차갑지만, 그래도 말 건 게 어디야? 까칠하던 고양이가 손에서 먹이 받아먹는 걸 처음 본 기분이 이런 걸까?'
왠지 표정이 영 요상 야릇하다. 시리스는 흠칫거리며 다시 거리를 벌렸다.
'역시 이 사람 이상해....'
다시 그녀의 표정이 딱딱해진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실망하지 않았다. 어차피 바로 마음을 열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으니까. 시리스가 고개를 돌려 공터 한쪽을 바라보았다. 박살난 시미터의 잔해가 그곳에 있었다. 문득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아무리 변태가 사 준 것이라지만, 그래도 마음에 쏙 드는 물건이었는데....'
어떻게 눈치를 챈 건지 레펜하르트가 바로 그녀를 달랬다.
"걱정 마라, 훨씬 더 좋은 걸로 구해 줄 테니까."
나름 표정 관리를 했는데 어떻게 알아본 것인지 모르겠다. 새삼 놀라며 시리스가 더욱 표정을 굳혔다. 어쨌거나 새로 사 준다는 데 굳이 반대할 이유는 없다.
"네, 레펜하르트 님."
그때였다. 실란이 날카로운 어조로 말을 건넸다.
"레펜 씨, 저 작자들 도망가는데요?"
우물 뒤에서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던 로마드 일행이 딱 굳었다. 레펜하르트가 느긋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응, 알고 있다."
고개를 돌려 로마드를 바라보며 레펜하르트가 빙그레 웃었다.
"이리 와."
석상처럼 굳은 로마드 일행이 하체는 뒤로한 채, 상체만 돌리는 유연성을 보여 주었다. 레펜하르트가 피식 웃었다.
"도망가게?"
험악한 사내들이 일제히 풍 맞은 것처럼 부르르 떤다. 그가 말을 이었다.
"가 봐. 좋은 거 보여 줄 테니까."
로마드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좋은 거란 게 결코 자신들에게도 좋지는 않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저만치 상체가 날아간 란타스의 시체를 보니 더더욱 그 확신이 굳어졌다.
로마드 일행이 슬금슬금 레펜하르트에게 다가왔다. 다들 좀비나 구울과 안색 대결을 펼칠 수 있을 얼굴이었다. 도살장 가는 돼지도 저것보다는 안색이 밝을 것 같았다.
"누구냐?"
"네?"
로마드가 멍하니 반문했다. 레펜하르트의 전신에서 자욱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누가 시켰냐고."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로마드 일행의 정신력이 레펜하르트의 살기를 감당할 정도로 투철해서는 절대 아니다. 그만큼 그들은 테리크 역시 두려워하고 있었다. 여기서 테리크의 이름을 불어 버리면 무슨 꼴을 당하게 될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단지 그들의 불운은, 여기서 테리크의 이름을 안 불면 무슨 꼴을 당하게 될지는 미처 몰랐다는 점이었다.
레펜하르트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래, 쉽게 불진 않겠지. 나도 그럴 거라 생각했어."
그가 뚜벅뚜벅 걷더니, 근처에 떨어진 나무 막대기 하나를 집어 들었다. 막대기를 들고 레펜하르트가 관대하게 말했다.
"너희에겐 그래도 자비를 베풀어 주마."
자비를 베푸는데 왜 몽둥이를 드시나요? 모두가 억울함에 인상을 구겼지만 레펜하르트는 떳떳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도 없었다.
"그래도 네놈들은 그저 수하일 뿐이니 죽이진 않겠다."
신 나게 팼다. 더도 덜도 말고 자기 맞은 만큼만 팼다.
1분 뒤 다시 물었다.
"어떤 놈이 사주했냐?"
다들 전신의 뼈가 박살 나 일어나지도 못하는 상태, 그럼에도 입은 살아 있다는 것이 바로 이 구타 수련법의 신비다.
"테, 테리크 님입니다!"
"롤페인 상회의 당대 회주입니다!"
"주소는 제플린 남쪽 외곽의 저택입니다."
"가시는 법은 남쪽 성문을 통해 10분쯤 가시다가 삼각로가 나오는데 거기서 좌측으로 가시면 됩니다!"
대답이 나오는 데 1초도 안 걸렸다. 역시 짐 언브레이커블의 구타 수련법은 고문법으로 탁월했다. 그토록 뻗대던 이들이 '오전 수련'만으로도 정신줄 놓고 모든 것을 술술 불었다. 오후 수련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테리크?"
익숙한 이름이었다. 도저히 모를 수 없는 이름이기도 했다.
'전생에 시리스를 10년 동안이나 학대했던 그 중년 뚱땡이의 이름이잖아!'
시리스를 구할 당시에 레펜하르트는 바로 테리크부터 죽여 버리려 했다. 그 당시에도 이미 레펜하르트는 대마법사급이었다. 테리크를 징치할 능력쯤은 충분히 있었다.
그런데 허무하게도, 막상 가 보니 이미 테리크는 지방간에 당뇨가 겹쳐 사망한 것이다. 이야기를 듣자 하니 엘프 노예 배 위에서 복상사했다고 한다. 그때 얼마나 분노하고 허망했는지 아직도 그 느낌이 생생하다.
"그 자식인가!"
전생에서의 원한에 현재의 분노까지 겹쳤다. 레펜하르트의 두 눈이 무섭게 타올랐다. 그 반응에 로마드가 놀라 물었다.
"설마... 찾아갈 생각이오?"
아무리 눈앞의 이 청년이 굉장한 오러 능력자라지만, 롤페인 상회의 이름을 들으면 흥분을 가라앉힐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테리크의 이름을 불면서도 살짝 이대로 풀어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했다.
그런데 어째 반응을 보니 풀어 주는 건 고사하고 저택까지 찾아갈 분위기다!
"무리요! 아무리 당신이더라도...."
그 저택에는 무려 오러 능력자가 수호 기사로 있단 말이오! 라고 말을 이으려다 잘 생각해 보니, 그 저택의 수호 기사가 저기 박살 난 저 란타스 경이었다.
로마드는 당황했다. 생각해 보니 이 무식한 괴인이 저택 습격한다고 뭔 일 당할 것 같진 않았다. 오러 능력자의 능력이 얼마나 가공한지는 란타스를 봐서 잘 알고 있다. 현재 테리크의 저택은 평상시의 경계 태세만 갖추고 있으니, 단신으로 싹 쓸고 테리크 목 따는 것쯤은 별로 어렵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테리크가 죽게 내버려 둘 순 없다. 이 나이에 직장 잃으면 다시 잡기도 힘들다. 특히나 칼 밥 먹은 놈은 더더욱.
"테리크 님은 차탄 공국 내에서도 2위의 상회를 가진 분이오! 만약 테리크 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차탄 공국의 공적이 될 거요!"
엄포를 놓았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다.
"응, 다 알아."
바드득 이를 갈며 레펜하르트가 중얼거렸다.
"어떤 놈인지 자알 알고 있지."
레펜하르트가 막대기를 버렸다. 그리고 '구타 수련'에 의해 일어나지도 못하고 그저 붕어처럼 입만 뻐금거리는 로마드 일행을 내려다보았다.
"약속대로 죽이진 않으마."
로마드가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으으으으...."
천하의 레펜하르트도 저렇게 두들겨 맞으면 한동안 꼼짝도 못했다. 그런데 이들을 이 겨울 추위에 그냥 버려 두면? 기어갈 힘도 없으니 그대로 얼어 죽을 것이다.
절로 욕설이 흘러나왔다.
'차라리 단숨에 죽여, 이 개자식아!'
그래도 너무 겁이 나 입 밖으로 내진 못했다. 그리고 그것이 로마드 일행을 살렸다. 레펜하르트는 정말로 죽이지 않겠다는 약속은 지킬 생각이었다. 그래서 자빠진 놈들을 모두 들어다 차곡차곡 포갰다.
"자, 네놈들끼리 살 비비고 있어. 그럼 얼어 죽진 않을 거다."
악랄한 건지 자비로운 건지 애매한 처사였다. 그리고 시리스와 실란을 대동한 채 레펜하르트는 공터를 떠났다. 멀어지는 레펜하르트 일행의 등 뒤로, 뭔가 굉장히 눈뜨고 보기 힘든 광경이 연출되기 시작했다.
"아, 비집고 들어오지 마! 아프다고!"
"거기 누르지 마요! 뼈 부러진 데란 말입니다!"
"안 부러진 데가 어디 있다고 그래!"
"로마드 님, 의외로 가슴이 따뜻하시네요."
"시끄러! 이 자식아! 얼굴 붉히지 마! 말라고!"
낚시꾼 미끼통의 지렁이들처럼 서로 엉겨 붙은 채, 가련한 로마드 일행은 열심히 겨울 추위에 맞서 생을 부지하려 노력했다. 실로 자업자득이었다.
4
제플린 서쪽 외곽의 롤페인 저택.
금실로 수놓은 침구가 어지러이 널린 커다란 침실, 그 한가운데에 발가벗은 어린 엘프 두 명이 벌벌 떨며 서 있었다. 이제 마흔이 갓 넘은, 인간으로 치면 고작 열 살 정도의 아이들이었다. 그런 어린아이들의 나신을 두 성인 엘프 여성이 온갖 음란한 손놀림으로 희롱하고 있었다.
침실 한쪽에서 테리크와 베레트가 술잔을 기울이며 그 음탕한 광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둘 다 알몸에 얇은 실크 가운만을 걸친 차림이었다. 문득 베레트가 물었다.
"이런 어린 엘프들을 왜 샀나? 너무 어려 별 쓸모가 없지 않나?"
말을 하며 베레트가 턱짓을 했다. 곁에 서 있던 다른 엘프 노예가 잽싸게 포도를 한 알 따 입에 넣어 준다. 테리크가 술을 한 모금 마시며 피식 웃었다.
"괜찮네. 란타스 경 월급이니까."
"허? 남의 월급에 먼저 손대도 되는 건가?"
"란타스 경은 어리기만 하면 처녀인지 아닌지는 상관 안 하거든. 적당히 가지고 놀다 내줘도 별말 안 하더군."
"허! 그것참 변태로군."
저 어린애들을 데리고 저 짓거리 하고 있는 주제에, 베레트는 진심으로 란타스의 변태성을 욕했다. 기막히게도 테리크 역시 진지하게 동의했다.
"그러게 말이야. 하여튼 변태 영감이라니까. 아니, 처녀도 아닌 어린 것을 따먹는 게 무슨 재미가 있다는 건지."
"그러게 말일세. 역시 고상함을 몰라."
누가 친구 아니랄까 봐 두 놈 다 생각하는 것이 똑같다. 괜히 유유상종이란 말이 생긴 것이 아니다. 둘 다 지금 자신들이 하고 있는 짓거리는 변태 성욕과는 거리가 멀다고 굳건하게 믿고 있었다. 그 믿음의 강도는 실로 고위 성직자의 신앙과도 비견될 정도! 그야말로 구제 불능이었다.
하지만 이 자리엔 저 두 놈을 성토할 이가 아무도 없다. 음란한 연회를 즐기다 말고 문득 베레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나저나 그 반품 엘프 암컷은 언제 오나?"
테리크가 인상을 구기며 대꾸했다.
"그러게. 왜 이리 늦어, 로마드 이 자식?"
지금 테리크는 자신이 엘프 노예 길들이는 모습을 자랑하기 위해 특별히 베레트를 초대한 것이었다. 베레트도 자신이 당한 굴욕을 테리크가 당하는 꼴을 보기 위해 흔쾌히 초청에 응했다. 저러고도 무슨 친구냐 싶겠지만, 차탄 공국의 돈 많은 것들에게는 이 정도면 굉장히 우정 어린 사이에 속한다.
"음, 그동안 저거나 시식해 볼까?"
기다리다 지쳤는지 베레트가 가운을 벗고 어린 엘프 아이에게 다가간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지만 테리크 앞에서 거침없이 알몸을 드러낸 것이다. 하지만 두 놈 다 부끄러운 기색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었다. 아이가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악!"
아이가 벌벌 떨며 '어른'들에게 구원의 눈빛을 보낸다. 하지만 다른 엘프들은 애써 그 시선을 외면했다. 열 살도 안 되어 보이는 애를 강간하려는 이 추악한 상황, 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던 중이었다. 문득 베레트가 귀를 기울였다.
"왠지 밖이 소란스러운 것 같은데?"
호사스러운 침실답게 이곳은 완벽한 방음 시설이 되어 있었다. 한창 그 짓거리 하다가 시끄러워 흥 깨지는 일이 없도록 테리크는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은 것이다. 그런 만큼 베레트도 그저 희미한 소음만을 인식할 뿐이었다.
테리크가 별거 아니란 듯 술잔을 들었다.
"아랫것들 소란 떠는 것이 뭐 하루 이틀인가?"
"그것도 그렇군, 하하하."
신경 끄고 다시 베레트가 엘프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아이의 얼굴 가득 공포의 빛이 떠올랐다.
☆ ☆ ☆
검과 방패를 든 건장한 사내 셋이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복도를 질주한다.
"으아아아아!"
그리고 외친 기합을 그대로 비명으로 이으며 뒤로 날아간다.
"아아아악!"
레펜하르트가 손에 든 창대를 매만지며 혀를 찼다.
"거참, 안 죽이는 게 더 어렵네."
덤벼든 호위병 셋을 가볍게 때려눕힌 뒤 레펜하르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과연 차탄 공국 2위의 대상회답게 이 롤페인 저택도 보통 넓은 것이 아니었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저택 안에서도 길 잃기 십상일 것이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마치 이 저택에서 살아온 사람처럼 거침없이 길을 찾고 있었다.
"이쪽으로 가면 3층 올라가는 계단이 나오겠군."
그는 왕년, 안타레스 제국의 황성에서 살았던 몸이다. 이 저택이 아무리 넓어 봤자 가이라크 황궁, 세인들에겐 대마궁이라 불렸던 그곳에 비하면 화장실 수준일 뿐인 것이다. 어차피 귀족가 저택이란 건 그 구조가 빤한지라 저택 외각을 보는 것만으로 대부분의 구조를 파악해 버렸다.
"자, 실란. 부탁해."
"네, 네."
날아간 경비병들에게 다가가 실란이 기도를 올렸다.
"필라넨스시여, 당신의 어린 종들을 보살피사 이들의 아픈 기억을 지워 주소서."
신성한 힘이 쓰러진 경비병들의 머리 위로 어른거리고 이내 사라진다. 이걸로 그들은 오늘 있었던 침입자의 정체에 대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원래는 실연당한 연인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상대방에 대한 기억을 흐릿하게 만드는 신성 주문이지만 실란의 가공할 신성력이 보태지면 이렇게 기억 제거술로 쓰는 것도 가능했다. 어쨌건 '아픈' 기억인 것은 사실이니까.
레펜하르트가 감탄하며 실란을 칭찬했다.
"편하네, 그거."
정신을 조작하는 것은 굉장히 고위 마법에 속하는지라 지금의 레펜하르트로서는 이론만 알 뿐 시전할 마력이 없었다. 실란이 어깨를 으쓱였다.
"공격용으로는 못 써요. 기절한 사람에게만 먹히는 거라. 아니, 근데 제가 없었으면 목격자는 어쩌려고 했어요?"
아무리 레펜하르트가 오러 능력자라지만 롤페인 상회씩이나 되는 대상회의 회주를 죽이고도 무사할 거란 보장은 없다. 물론 목격자를 모조리 죽이는 수도 있긴 하지만, 실란이 본 레펜하르트는 그렇게까지 막 나가는 인간은 아니었다.
레펜하르트가 싱긋 웃었다.
"몰래 잠입해서 테리크란 놈 모가지만 딸 생각이었지."
"그렇다면 제가 기억 제거술을 쓸 줄 아는 게 참 다행이군요. 그 개자식이 맞아 죽는 모습은 저도 꼭 보고 싶으니까!"
실란이 이를 바드득 갈았다.
레펜하르트가 '당장 롤페인 저택으로 달려가 테리크를 때려죽이겠다!'라며 길길이 날뛸 때 실란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 자신도 피해자가 될 뻔했는데 말릴 리가 있나. 남자건 여자건, 자기 몸에 허락 없이 이상한 거 꽂으려는 놈을 관대히 용서할 사람은 절대 없다. 말리기는커녕 옆에서 열심히 부추겨 주었다.
레펜하르트 일행은 바로 제플린 외곽의 롤페인 저택으로 달려갔다.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담을 넘고 정문으로 정면 돌파, 걸리적거리는 걸 모조리 때려눕히며 전진했다. 과연 저택의 경비 수준도 보통이 아니었지만, 오러 능력자의 앞길을 막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어찌나 빠르게 밀고 들어갔는지 경비병들이 채 테리크에게 침입을 알릴 틈도 없었다.
3층 계단을 오르니 길게 이어진 커다란 복도가 보인다. 경비병은 없었다. 순찰도 보통 3층까진 돌지 않는다. 레펜하르트는 기감으로 테리크가 있는 곳을 파악했다. 과연 3층 한 침실에 여러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 난리가 났는데도 아무것도 모르는지 꽤나 평안한 감정 상태였다.
"하긴, 담 넘고 여기까지 오는 데 5분도 안 걸렸으니까."
저들이 상황을 파악하려면 누군가 알리러 가야 하는데, 알리러 갈 사람보다도 레펜하르트 일행이 더 빨리 도착한 것이다. 레펜하르트가 씩 웃으며 복도를 걸었다. 그때 복도 앞에서 거구의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오크 검투사, 탈카타였다. 말 안 듣는 란타스를 제외하면 그는 이 저택 최강의 전사다. 당연히 가장 중요한 테리크를 직접 호위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검과 방패를 꺼내 자세를 잡으며 탈카타가 으르렁댔다.
"탈카타, 침입 인간 막는다!"
레펜하르트가 살짝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인간 호위병들이야 대충 패서 기절시키면 되지만, 오크 검투사의 경우엔 그게 힘들다. 몽둥이로 해결할 레벨이 아니니 주먹을 써야 하는데, 그럴 경우 죽이지 않고 제압한다는 보장이 없었다.
난처해하던 레펜하르트가 갑자기 어조를 바꿔 오크어로 말을 걸었다.
"전사의 피를 가진 자여, 그대가 지키는 자는 그대의 호위를 받을 자격이 없다. 어찌 그를 위해 검을 드는가?"
인간이 오크어를 구사하자 탈카타가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뜬다. 하지만 그는 이내 냉정을 되찾았다. 다시금 검을 강하게 쥐며 탈카타가 오크어로 마주 말했다.
"나는 전사, 검 쥔 자로서의 의무가 있다. 시류에 휩쓸려 의지를 꺾는다면 어찌 전사임을 자처하겠는가!"
"노예로서 살아가는 것이 그대의 의지인가? 저자는 그대의 멘토가 아니다."
"멘토가 아닐지라도 현재 내게 주어진 책무는 분명하다. 임무를 행하는 것이 전사의 의무다."
"그것이 강요된 책무라 해도 말인가?"
"그렇다."
투박하고 상처 가득한 탈카타의 얼굴 가득 전사의 긍지가 떠오른다.
"강한 인간 전사여. 그대의 힘이 실로 놀랍다는 것은 이미 내 영혼이 느끼고 있다."
그가 레펜하르트에게 검을 겨누었다.
"내 검을 꺾어라, 인간. 그렇다면 뜻을 이룰 것이다."
탈카타가 흔들림 없는 태도로 전투태세를 취했다. 레펜하르트가 혀를 찼다.
"쩝, 역시 오크는 오크구먼."
검에 걸린 의무는 결코 저버리지 않는다. 그것이 설사 그릇된 의무라 할지라도. 그것이 오크 전사의 긍지. 이미 전생에 그 강철 같은 약속을 충분히 맛봤던 레펜하르트였다. 그래서 혹시나 하고 말을 걸긴 했지만, 속으로 안 먹힐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어휴, 이 순박한 마초들....'
한 편이었을 땐 참 믿음직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니 골치 아프다.
'내가 저걸 안 죽이고 제압할 수 있을까?'
내심 불안해하며 레펜하르트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뒤에서 실란이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레펜 씨, 오크어도 할 줄 알아요?"
저 으르렁대는 소리가 오크어라는 건 실란도 알 수 있었다. 오크 노예들이 저희들끼리 저런 식으로 대화하는 것은 본 적이 있으니까. 하지만 오크어를 직접 구사하는 인간은 극히 드물었다. 기껏해야 오크 노예 사육장 교관이 간단한 명령어 몇 개를 구사할 뿐이다. 그런데 레펜하르트는 마치 오크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으르렁대고 있는 것이다.
시리스가 복잡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오크어를 할 줄 알다니...."
점점 더 저 덩치 큰 주인의 정체가 아리송해진다. 그냥 변태인 줄 알았더니 오러 능력자였고, 거기에 오크어를 본토 발음으로 구사한다.
'...신기한 사람....'
레펜하르트가 주먹을 들어 자세를 취하고 탈카타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시리스는 동요했다. 지금까지 그녀는 레펜하르트를 따라다니기만 했을 뿐, 딱히 싸움에 끼어들지 않았다. 명령이 없었으니까 굳이 검을 들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직접 나서고 싶었다. 자신도 레펜하르트와 함께 검을 휘두르고 싶다는 강한 충동이 느껴졌다.
당혹스러웠다.
'내가 왜 이런 생각을?'
왜 이런 마음이 드는지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물론 슬레이어로서, 주인에게 애교를 떨기 위해 검을 휘두르고 싶다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시리스는 자신을 슬레이어로, 노예로 만든 인간을 증오하고 있었다. 결코 그런 이유로 이런 마음이 들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무심코, 그의 이름을 불러 버렸다.
"레펜하르트 님."
"응? 왜 부르니, 시리스?"
다정한 응답이 돌아온다. 가슴 한구석이 흔들렸다. 애써 냉정을 유지하며 그녀는 검을 쥐었다.
"저자는 제가 처리할게요."
실란이 당황해 물었다.
"응? 괜찮겠어, 시리스?"
"이번엔 무기가 다르니까요."
자신만만하게 대꾸하며 시리스는 롱 소드를 뽑아 들었다. 박살난 시미터 대신 들고 온, 란타스가 쓰던 검이었다. 시미터와는 느낌이 좀 다르겠지만 같은 장검 계열이라 자신 있는 분야인 것은 마찬가지다. 게다가 오러 능력자가 쓰던 검답게 미스릴과 아다만티움 합금으로 만들어진 최고급품, 항상 예리함를 유지시켜 주는 마법까지 걸려 있으니 무기로 인한 손해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과연 탈카타도 시리스의 변화를 느꼈는지 표정이 굳었다. 단검만 들고 있을 때와는 기세부터가 달랐다.
"약한 엘프, 강해졌군."
다시 인간어로 말을 바꾼 탈카타가 심각해진 눈으로 시리스를 노려보았다. 시리스가 검을 마주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저자와는 승부를 끝내지 못했지.'
왜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 알 것 같아. 생각해 보면 검사로서, 승부에 연연하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잖아?
납득할 만한 이유를 찾았다. 시리스의 표정이 한층 후련해졌다. 그녀의 전신에서 예리한 칼날 같은 기세가 뻗어 나왔다.
"그럼 원하는 대로 해, 시리스."
당황하면서도 레펜하르트는 순순히 물러섰다. 걱정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시리스의 의견을 존중해 줄 생각이었다. 그녀는 검사다. 품 안에 보듬고 마냥 보호해야 하는 그의 소유물이 아닌 것이다.
물론 몰래 실란에게 속삭이는 것도 잊지는 않았다.
"실란, 뒤 좀 봐 줘. 위험하다 싶으면... 알지?"
"걱정 마요. 그쪽이 내 전공이에요."
시리스와 탈카타가 서서히 거리를 좁힌다. 엘프 슬레이어와 오크 검투사가 서로의 허점을 노리며 매서운 칼날을 번득인다. 레펜하르트는 말없이 그 대치를 보다가 갑자기 복도 저편으로 걸어갔다. 탈카타가 눈을 부라렸다.
"강한 인간이여! 나의 싸움을 무시하는가? 바로 테리크 님을 노릴 셈인가?"
레펜하르트가 태연스레 오크어로 마주 받았다.
"그대의 대적자는 눈앞의 엘프 소녀일 터. 내게 신경 쓰는 것은 대적자에 대한 예의가 아닐 텐데?"
탈카타가 당황하며 다시 시리스를 노려보았다. 레펜하르트의 말은 전사의 도리에 한 치의 어긋남도 없었다. 눈앞의 저 엘프는 분명 전력으로 맞서 싸워야 할 강자였다. 그런데 다른 일에 신경을 쓴다는 것은 강자에 대한 심각한 모욕이다!
"그 말이 옳다."
탈카타가 레펜하르트에게 신경을 끄고 시리스만 노려보기 시작했다.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래서 오크들이란.'
오크 전사의 가르침은 강자와의 전투가 약자를 지키는 것보다 우선시된다.
'그래서 전사로서는 참 쓸모가 많은데 호위병으로는 완전 실격이지.'
그래서 전생에서도 호위 병력은 드워프를 주로 하고 오크들은 돌격대나 특공대처럼 운용했었다. 그는 그렇게 탈카타를 지나쳐 문고리를 붙잡았다. 그 순간, 등 뒤로 시리스의 날카로운 기합 소리가 들려왔다.
"하압!"
탈카타도 전사의 포효를 터트리며 마주 달린다.
"크오오오!"
강렬한 격돌이 강철의 외침을 터트린다. 사투를 뒤로한 채 레펜하르트는 방문을 열었다.
☆ ☆ ☆
방문을 여니 지옥이 펼쳐져 있었다.
지독한 마약의 연기, 그 속에서 한 청년이 소녀라 칭하기도 부끄러운 어린 엘프 위에 올라타 허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그 옆에는 가운을 풀어 헤친 채 뚱뚱한 청년 하나가 알몸을 드러내고 다른 엘프들의 애무를 받고 있다.
레펜하르트의 목소리가 절로 섬뜩해졌다.
"정말이지 살면서 추잡한 꼴 많이 보긴 했는데... 이 정도면 워스트 3위 안에는 족히 들어가겠구나."
그제야 베레트가 고개를 돌리더니 멍한 표정을 지었다.
"어? 뭐야, 저놈?"
이 상황이 되어서도 저 두 놈은 아직 분위기 파악을 못 하고 있었다. 레펜하르트는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보기만 해도 강해 보이는 거구의 청년이 무시무시한 눈길로 자신들을 바라보며 다가온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테리크와 베레트가 호들갑을 떨었다.
"누, 누구냐!"
"여봐라! 아무도 없느냐!"
둘 다 성기를 덜렁대며 소리를 질러 대고 있었다. 레펜하르트는 방을 둘러보았다. 두 놈의 발치에 사타구니에서 피를 흘린 채 숨을 꼴딱거리는 어린아이가 쓰러진 모습이 보였다. 방구석을 보니 이미 숨이 끊어져 사후경직이 시작되는 다른 아이의 시체도 있었다.
절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후, 세상엔 살려 두어선 안 될 놈이 왜 이리 많은 것이냐...."
자욱한 살기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그 살기만으로도 정신적으로 예민한 엘프 노예들이 픽픽 기절해 쓰러진다. 테리크와 베레트의 얼굴에 공포가 가득 떠올랐다. 곱게 자란 이들이 이런 살기를 받을 일이 언제 있었을까? 지옥 한복판에 떨어진 것처럼 전신이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있었다.
"탈카타! 어디 있느냐, 탈카타!"
물론 그 탈카타는 시리스와 싸우느라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상태다. 테리크가 이를 딱딱 부딪치며 레펜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어떻게 된 거야! 왜 침입자가 여기까지 오도록 아무 경보도 없었던 거냐!"
비록 레펜하르트에 의해 간단히 박살 나긴 했지만, 그렇다고 롤페인 저택의 경비가 부실했다는 소린 절대 아니다. 애초에 이래저래 죄 많이 짓고 사는 인간이 자신의 안전에 불감할 리가 없는 것이다.
테리크는 큰돈을 들여 오십 명이나 되는 경비병을 고용하고 비싼 오크 검투사까지 배치하는 한편, 각종 마법적인 방지 역시 저택에 충실히 걸어 놓았다. 이 정도면 어지간한 군대가 와도 버틸 수 있을 정도,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 도망갈 여유 정도는 생겨야 정상이었다.
'오러 능력자가 아닌 이상, 이렇게 쉽게 돌파당할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설마 한 생각이 진실이었음을 테리크는 몰랐다. 아무리 방비에 방비를 거듭하는 그라 해도 오러 유저의 침입까지 대비하진 않았다. 그가 무슨 일국의 왕도 아닌데, 그 희귀하고 자존심 세고 오만한 오러 능력자가 굳이 자신을 잡으러 올 일 따윈 결코 없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사실, 저것이 이 시대의 상식이기도 했다.
아무리 이해가 안 간다 해도 눈앞의 저 침입자는 현실로 존재하고 있다. 바들바들 떨던 테리크가 문득 희망을 안고 소리쳤다.
"뭘 원하는 거냐? 돈이냐?"
레펜하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태도에 테리크가 깨달았다는 듯 다시 소리를 질렀다.
"그럼 상권인가? 제길! 타오반 상회의 짓이로구나!"
역시 대답은 없었다. 자신의 추측이 사실이라 확신한 테리크가 조금 안심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렇군. 이봐, 자네. 대체 얼마를 받았나? 내가 그 두 배를 주겠다. 상인의 약속이다. 롤페인의 이름을 걸고 약속한다. 지금 이 자리에서 증서를 써 줄 수 있다. 아니면 금화를 원하나? 롤페인의 이름을 걸고 절대 보복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마."
테리크는 계속 롤페인의 이름을 팔았다. 자신이 공국 2위의 대상회의 주인이라는 것을 계속 어필하는 것이다. 은근슬쩍,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롤페인 상회가 보복할 것이란 의미도 살짝 비쳤다.
하지만 저 침입자의 표정은 전혀 변화가 없었다. 롤페인의 이름에도 조금의 동요도 없다.
"정말이지 변함이 없구나."
테리크를 내려다보며 문득 레펜하르트가 감회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말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어...."
전생에도 이놈은 이랬다. 온갖 엘프며 인간 여자를 사다 고문하고 강간하고 죽이며 그 고통에 찬 표정을 보는 걸 즐기던 놈이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생기면 그저 돈으로 전부 해결했다.
'이런 추악한 괴물 밑에서 시리스는 10년 동안이나....'
온갖 고문과 능욕을 당해 반쯤 미친 상태였던 그녀의 모습이 떠오르며 가슴속에서 분노가 이글이글 타올랐다. 레펜하르트가 주먹을 가볍게 들었다.
"그때는 놓쳤었지."
그 단순한 동작만으로도 테리크는 절로 뒷걸음질을 쳤다. 동작 하나하나에 살의와 적의가 묻어 나오고 있었다. 둔하디둔한 그조차도 선명히 느낄 가공할 살기였다.
'누구지? 전에 알던 놈인가?'
말투가 어째 자신을 아는 눈치다. 테리크는 열심히 과거를 떠올렸다. 원체 원한 살 짓을 많이 하고 살았다 보니 통 짐작이 가질 않는다.
갑자기 레펜하르트가 테리크의 복부를 걷어찼다.
퍼억!
"꾸어어억!"
솔직히 말하면 찼다기보다는 그냥 살짝 갖다 댔다 정도였다. 정말 찼으면 한 방에 죽어 버릴 테니까.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테리크가 비명을 지르며 허리를 굽히더니 먹었던 술을 모조리 토하기 시작했다.
"욱! 우에엑!"
아픔과 공포로 울상을 지은 채 계속 구토를 해 댄다. 억울함에 절로 눈물이 나왔다.
"...왜, 왜 대체 나한테 이러는 거야...."
진짜 억울했다. 왜 자신처럼 돈 많고 힘 있는 이가 '재수 없게' 이런 일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그 모습을 보니 더욱 가슴속이 끓어오른다. 레펜하르트가 손날을 세웠다.
"이 따위 놈이 시리스를...."
그가 쓰러진 테리크의 머리칼을 붙잡고 일으켜 세웠다. 머리카락이 빠지며 테리크가 비명을 질렀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레펜하르트가 테리크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두 눈이 붉게 물들었다.
"이 손으로 시리스를 더럽혔지...."
순간 테리크의 두 손이 피를 뿌리며 몸에서 분리되었다. 레펜하르트가 손날로 잘라 버린 것이다. 절규가 터져 나왔다.
"으아아아악!"
핏발 선 눈으로 테리크는 비명을 지르고 또 질렀다. 푸짐한 살집이 고통으로 푸들푸들 떨린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멈추지 않았다.
"이 다리로 시리스를 걷어찼었지?"
두 다리가 뎅겅 잘린다. 피를 토하며 테리크가 울먹였다.
"아으아으아으으...."
팔다리 잘린 뚱뚱한 테리크의 몸은 마치 돼지처럼 보였다. 가랑이 사이에 공포에 질려 성기가 축 늘어져 있었다.
"그 더러운 물건으로 무슨 짓을 했는지는 입에 담고 싶지조차 않구나."
레펜하르트는 손가락을 튕겼다. 저런 더러운 물건은 건드리기조차 싫었다. 그래서 작은 오러의 탄환을 쏘아 통째로 날려 버렸다.
"아아아아아악!"
피와 비명과 절규가 분수처럼 쏟아져 침구와 천장을 흠뻑 적신다. 테리크가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대체... 시리스가... 누구...."
억울했다. 아니, 아까부터 자신이 시리스를 더럽혔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는데 그는 시리스가 누군지도 모르는 것이다. 뭐, 지금 시점에서 테리크가 시리스를 손끝 하나 안 댄 것은 맞는 말이다. 솔직히 말하면 아직 만나지도 못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레펜하르트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의 너에겐 참 억울한 일이겠구나."
사람을 1급 장애자로 만들어 놓고 이제 와서 억울하겠다고? 테리크가 기가 막혀 부들부들 떨었다. 과연 평소에 워낙 좋은 것만 먹고 살아서인지 지방뿐인 몸인 주제에 아직도 숨이 붙어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차갑게 웃으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좀 억울하게 죽어 간 이들의 심정을 알겠지?"
"아으아으아으...."
테리크의 눈동자에서 빛이 사라졌다. 숨이 멎은 것이다. 곁에 서 있던 베레트가 기겁해 중얼거렸다.
"주, 죽였어? 사람을 죽였어! 이 살인자!"
패닉에 빠져 베레트가 울부짖었다. 어리디어린 엘프 소녀를 간살한 놈이 지금 살인을 운운하고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저었다.
"웃기는군. 그러는 네놈은 살인자가 아니란 말이냐?"
"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아왔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 베레트가 당당하게 외쳤다. 그 모습에 레펜하르트가 헛웃음을 흘렸다.
"하긴, 부끄러움 없이 살아온 건 맞는 것 같군."
알몸으로 성기 덜렁거리며 저딴 소리 외치는 걸 보니 정말 부끄러움이라곤 한 치도 없는 것 같다. 그때 방문이 열리며 시리스와 실란이 안으로 들어왔다. 시리스가 오체 분시된 테리크의 시체를 보더니 충격 받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자, 잔인하군요."
레펜하르트에겐 원수 중의 원수인 테리크지만 시리스에겐 생면부지의 인간일 뿐이다. 잔인하게 볼 법도 했다. 레펜하르트가 대꾸했다.
"이렇게 죽어도 모자란 놈이다."
실란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 점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동감이에요."
참상을 보고도 실란은 그리 동요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는 잔인한 광경에는 꽤 익숙한 처지인 것이다. 레펜하르트가 물었다.
"탈카타는?"
"아, 시리스가 해치웠어요. 무지 세던데요? 제가 끼어들 틈도 없더라고요."
시리스가 겸양을 표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강했습니다. 실란이 치유술을 써 주지 않았다면 저도 이렇게 서 있지는 못했을 거예요."
감각을 확장시켜 보니 복도에 쓰러진 탈카타의 기척이 느껴졌다. 가늘게 숨을 쉬고 있는 걸로 보아 죽진 않은 것 같았다. 시리스도 옷 여기저기가 찢어진 것이 꽤 상처를 입었던 모양이었다. 실란이 싹 낫게 해 준 덕에 지금은 옷 사이로 하얀 속살만 보이고 있었지만.
그래도 노련한 오크 검투사를 일대일로 이기다니? 레펜하르트는 살짝 놀랐다.
'이 시기의 시리스도 꽤 세네?'
어째 전생에서 처음 만났을 때보다 지금이 더 강한 것 같다. 하긴, 그때는 10년간 성 노리개로만 학대받았었으니 오히려 실력이 퇴보한 것이겠지.
베레트가 시리스를 알아보고 소리를 질렀다.
"네년은 그때 그 슬레이어!"
시리스는 방구석에 내팽개쳐진, 싸늘히 식은 어린 엘프의 시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옆에서 죽어 가는 또 다른 아이는 이미 실란이 달려가 치유술을 써 주는 중이다.
시리스가가 '한때의 주인'이었던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
"저 아이를 죽인 게 당신인가요?"
베레트가 조금만 분위기 파악을 할 줄 알았다면 죽은 테리크에게 미루기라도 했으리라. 하지만 그는 평생, 고작 엘프 노예 따위에게 거짓말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래서 무심코 대꾸해 버렸다.
"그, 그런데 그게 왜?"
죄의식이 없으니 거짓말할 생각도 못 하는 것이다. 시리스가 검을 뽑았다. 죽은 아이를 본 순간 어릴 적 기억이 되살아났다. 죽어 가던 일족의 마을, 죽어 가던 일족의 아이들이.
"저 아이의 넋을 달래기엔 너무 싸구려 목숨이겠지만...."
섬뜩한 칼날 위로 공포에 질린 베레트의 얼굴이 비쳤다.
"그래도 이것이 최소한의 도리."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베레트가 레펜하르트를 노려보았다. 그는 이 상황이 레펜하르트가 시킨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엘프 따위에게 의지가 있을 리 없으니까.
"뭐야? 고작 엘프 노예 따위 죽였다고 날 죽이겠다는 건가?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크어억!"
예리한 칼날이 베레트의 어깨를 푹 찔러 갔다.
"아악! 아악! 아아악!"
아프다. 너무 아프다.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나온다.
"아니, 엘프 좀 죽였기로소니 사람을 죽인단 말이오? 그게 무슨 경우요?"
정말 자신에게 왜 이러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다시 시리스가 칼을 휘둘렀다. 오른팔이 반쯤 잘려 피를 뿌린다. 재차 비명을 터트리며 베레트가 빌기 시작했다.
"사, 살려... 살려 주시오...."
이렇게까지 왔는데도 베레트는 레펜하르트만 바라보고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참다 못해 입을 열었다.
"네 죄악이 이렇게 쌓여 있는데도 살려 달란 소리가 나오나? 그런 짓을 하고도 벌을 받지 않을 줄 알았나?"
마치 인간의 죄악을 판가름한다는 죽음과 불운의 신, 탈로스처럼 레펜하르트는 당당하게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너무도 차가워 베레트는 자신이 여기서 살아 나갈 수 없음을 직감했다.
순간 악에 받쳤다. 그가 악을 쓰며 소리쳤다.
"그러는 네놈은? 네놈은 무슨 자격이 있어서 나를 단죄한단 말이냐!"
레펜하르트가 피식 웃었다. 따지고 보면 그는 살인마 랭킹에서 고금을 통틀어 다섯 손가락 안에 들 것이다. 살인마가 한 부대로 모여도 그가 죽인 숫자의 절반도 따라가지 못한다. 그러니 고작 엘프 몇 명 죽인 베레트와 비교하면 그가 더한 악인일지도 모른다.
그래, 그것은 인정한다. 그래서?
"단죄의 자격?"
입술을 뒤틀며 레펜하르트가 기괴한 미소를 지었다.
"평소에 깔끔 떨어야 쓰레기 치울 자격이 생긴다더냐?"
베레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레펜하르트가 심판을 내리는 신처럼 선언했다.
"너 같은 쓰레기를 없애는 데 무슨 자격이 필요하다는 거냐?"
동시에 시리스가 팔을 뻗었다. 베레트의 심장에 서늘한 롱 소드의 칼날이 깊숙이 박혔다.
"커억! 사, 살려...."
숨 끊어진 베레트의 몸이, 죽은 어린 엘프의 시체 위로 넘어져 갔다. 넘어지기 직전 시리스가 베레트를 걷어찼다. 그녀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설령 죽은 후라도... 저 아이에게 너 같은 놈이 닿게 할 순 없어...."
5
롤페인 저택 후원의 숲 속은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구름이 끼지 않는 하늘이라 달이 제법 밝았다. 그 달빛이 눈에 반사되어 사방을 비추니 깊은 밤의 숲 속임에도 그리 어둡지 않았다.
그곳에 한 무리의 그림자가 보였다. 엘프와 오크로 이루어진 이들이었다. 무리 앞에는 오크 검투사 탈카타가 서 있었다. 시리스에게 깊은 상처를 입은 그였지만, 지금은 실란의 치유술로 말끔해진 후였다. 탈카타가 이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들이 모두다."
시리스가 가볍게 목례하며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요, 탈카타."
"안 고맙다. 탈카타 검, 꺾였다. 이제 그대의 주인이 나의 주인."
고마워할 필요 없다며 탈카타가 손을 저었다.
눈앞의 엘프 소녀는 자신을 꺾은 강자였다. 그리고 레펜하르트는 그 시리스의 주인이었다. 섬겨야 할 테리크는 레펜하르트에게 죽고 자신은 그 노예에게 패했으니, 탈카타는 자연스럽게 레펜하르트를 자신의 새로운 주인이라 인식하고 있었다. 오크 전사의 본능과 노예로서의 세뇌 교육이 묘하게 뒤섞인 결과랄까?
어쨌거나 본인은 이 상황이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솔직히 테리크가 섬길 만한 주인인 것은 절대 아니었으니까.
"엘프 암컷 열일곱, 오크 수컷 아홉. 이게 저택 노예 전부."
탈카타는 노예들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상당히 편향된 성 비율이다. 원래 엘프 남성이나 오크 여성은 별로 수요가 없는 상품이었다. 그래서 보통은 노예 사육장에서 씨를 뿌리거나 새끼를 치는 용도로만 키울 뿐 노예로 쓰는 경우는 보기 드물었다. 그래도 두 발로 걷고 말을 하고 이성과 감정이 있는 이들이거늘, 인간은 마치 종마나 씨암탉 취급하는 것이다.
"탈카타, 명령대로 했다."
레펜하르트는 탈카타에게 저택의 모든 노예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란 명을 내렸다. 그래서 저택을 돌아다니며 모든 노예들을 이 자리로 데리고 온 것이다.
원래 인간들끼리 분쟁을 벌여 상대의 재산을 빼앗은 것은 흔한 일이었다. 안 그래도 저택이 난리가 나고 경비병 대부분이 쓰러졌으니 노예들도 자신의 주인이 바뀔 거란 예상쯤은 하고 있었다. 그래서 다들 순순히 탈카타가 시키는 대로 따랐다.
실란이 모인 노예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대체 레펜 씨는 뭐 하고 있는 거지?"
실란과 시리스를 데리고 저택 밖으로 빠져나온 레펜하르트는, 이곳에서 탈카타와 합류하라고 하고는 다시 저택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래서 둘 다 멀뚱히 서서 그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중이었다.
탈카타가 실란을 향해 물었다.
"여기 춥습니다. 불 피웁니까?"
"아, 부탁해."
그제야 다른 이들이 춥겠다는 생각을 한 실란이 아차 하며 대답했다. 탈카타가 오크 노예를 부려 모닥불을 피웠다. 노예들이 모닥불 곁으로 다가가 온기를 쬐기 시작했다. 엘프 여성들이 불가로 모이고 여성을 중시하는 오크 사내들이 자연스레 그 밖을 에워쌌다. 그 속에서 어린 엘프 여자아이가 여인의 품에 안겨 조용히 울고 있었다. 베레트에게 강간당한 그 아이였다.
"마미아, 샬라르 델 엘리아 산티아나...."
그녀는 엘프어로 배가 아프다며 흐느끼고 있었다. 실란의 치유술로 이미 육체는 전부 나았을 텐데도 저 어린 소녀는 여전히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그만큼 저 아이에게 가해진 폭행은 가혹했다. 저 소녀의 정신은 여전히 그 지옥 속을 헤매고 있었다.
"하아...."
한숨을 쉬며 실란이 소녀의 이마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간단한 기도문과 함께 아이가 새근새근 잠들었다. 엘프 여인이 감사를 표한 뒤 아이를 품에 꼭 안았다. 그리고 부드럽게 머리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엘 라이 산델라 세이안, 엘디아 디 슬레이니...."
여인이 작은 목소리로 자장가를 부른다. 엘프어로 된, 수백 년 동안의 노예의 삶 속에서도 잊히지 않은 노래였다. 위대한 문화와 역사는 사라졌지만 이 자장가만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이렇게 남아 있었다.
"샤론 데 엘디아...."
낮은 허밍이 귀를 울린다. 실란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엘프어로 된 노래를 처음 들은 것이다.
저 자장가는 단순히 인간의 노래를 엘프어로 부르는 것이 아니었다. 결코 인간은 부를 수 없는, 엘프의 목소리로만 부를 수 있는 음역대가 속해 있었다. 그렇다고 새들이 지저귀는 것 같은 본능의 노래도 아니었다. 가사가 있고 리듬이 있는 제대로 된 음악이었다.
'그렇다는 건 저 노래가 엘프들만의 산물이라는 건데....'
음악이란 감정을 가지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이들만이 향유하는 고차원적인 사고의 산물이다. 엘프가 진정 노예로 태어난 종족이라면, 저런 문화를 가질 리 없다.
실란은 무심코 시리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싸늘한 얼굴로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혹시나 저택의 잔여 병력이 나타날 경우 기필코 이들을 보호하겠다는 의지가 두 눈 가득 담겨 있었다. 탈카타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리부리한 그 눈동자에 강인한 긍지를 담고 검을 들고 있다.
저들은 딱히 저런 명령을 받은 적이 없었다.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것은 저들 스스로의 의지였다.
-한 번이라도 그들과 제대로 이야기해 봤느냐? 한 번이라도 그들이 노예라는 사실에 의문을 가져 본 적이 없냐는 말이다!
자꾸 레펜하르트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건가?'
수풀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커다란 그림자가 나타났다. 시리스와 탈카타가 일순 긴장하더니, 이내 검을 놓았다. 나타난 것은 레펜하르트였다. 시리스를 보며 그가 빙그레 웃었다.
"미안, 많이 기다렸니?"
그는 양손 가득 온갖 서류 꾸러미를 들고 있었다. 실란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뭐예요, 그거?"
레펜하르트가 씩 웃었다.
"노예 문서랑 롤페인 회주의 인장."
이것이 그가 저택으로 돌아간 이유였다. 레펜하르트가 서류를 정리하며 말을 이었다.
"워낙 중요한 서류들이다 보니 비밀 금고에 엄중히 보관되어 있어 처음에는 찾느라 고생을 좀 했다."
전생이었다면 마법으로 간단히 비밀 공간을 알아냈겠지만 지금은 그럴 능력이 없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찾았어요?"
"발상을 전환했지. 그냥 집무실 벽을 다 때려 부수니까 금고가 나오더라고."
금고 역시 강철을 부어 만든 단단한 것이었지만 오러가 깃든 수도를 감당할 정도는 아니었다. 자신의 영리함에 어깨를 으쓱이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실란이 혀를 내둘렀다.
"우와, 무식하긴...."
"컥!"
레펜하르트는 충격을 받았다. 전생의 50 평생, 그는 한 번도 무식하다는 소릴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자아 성찰의 계기였다. 생각해 보니 환생한 이후, 제대로 머리를 쓴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워낙 주먹으로 모든 게 해결이 되다 보니 툭하면 힘으로 해결했다.
'하도 단순 무식한 수련만 받고 살았더니 그 분위기에 물들어 버렸나?'
뭐, 결과야 다 좋았으니 큰 문제는 없지만 그는 마법사다. 마법사의 사고방식이 이렇게 무식해서는 곤란하다.
'아, 정신 차려야겠다. 이거 큰일이네.'
자아비판을 하며 끙끙대는 레펜하르트의 모습에 실란과 시리스가 사이좋게 고개를 갸우뚱 기울인다.
'아, 예쁜 아이 둘이서 같은 포즈를 취하니 꽤 귀엽네.'
그새 고민을 잊고 레펜하르트가 실실 웃었다. 이미 상당히 '단순 무식화'가 진행된 것이다.
"그런데 그건 대체 왜 가져온 거예요?"
"필요하니까."
레펜하르트가 노예 문서를 든 채 모닥불로 다가갔다. 그리고 불꽃에 문서를 갖다 대며 노예들에게 말했다.
"계속 노예로 살고 싶지 않다면 자유를 주겠다. 어떡하겠느냐?"
"자유?"
생각도 못 해 본 발언에 노예들이 웅성거리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자유를 준다는 게 무슨 소리죠?"
"모르겠어요."
"새 주인님. 명령 너무 어렵다."
다들 자유가 무엇인지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얼굴들이었다. 레펜하르트가 씁쓸해하며 뇌까렸다.
"그럴 줄 알았지...."
이들은 자유롭게 살다 노예가 된 이들이 아니다. 태어날 때부터 노예로 살아온 이들이니 갑자기 자유를 준다 해서 새롭게 살아갈 수 있을 리가 없다.
게다가 세상은 이미 인간의 것. 이대로 노예 문서를 태워 버린다 해서 저들이 자유민이 되지는 않는다. 문서가 없다 해도 저들은 '주인 없는 노예'일 뿐 자유민으로 대접받을 수는 없다.
레펜하르트가 노예 문서를 다시 거뒀다. 그리고 롤페인의 인장을 꺼냈다.
"일단 이걸 이렇게 하면...."
그는 노예 문서에 새 서류를 첨가한 뒤, 사인을 하고 롤페인의 인장을 찍었다. 테리크가 모든 노예의 소유권을 레펜하르트에게 양도한다는 내용이었다.
"법적으로 저들은 더 이상 테리크의 노예가 아니게 되지."
이걸로 레펜하르트가 저들의 새로운 주인이 된 것이다. 억지였지만 차탄 공국법상으론 하등의 문제도 없다. 실란이 의아해했다.
"뭐예요? 노예상이라도 하려고요?"
"아니, 저들을 남에게 팔 생각은 없어."
"그럼 설마 모험가 때려치우고 정착할 생각이에요?"
실란은 인상을 썼다. 그는 레펜하르트가 대륙을 떠도는 모험가이기에 그의 동료가 되었다. 하지만 어딘가에 정착하려 한다면 더 이상 곁에 있을 이유가 없다.
"설마 이 노예들 다 데리고 대륙을 떠돌겠다는 소리는 아니겠죠?"
"그럴 리가 있나? 저들에게 안전한 장소를 제공해 주려면 이런 형식이 필요한 것뿐이야."
돌아갈 고향이 있는 것도 아니요,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닌 이들에게 '너희는 자유다! 하고 싶은 대로 하거라!'라며 풀어 줘 봤자 자기만족일 뿐이다. 집에서 키우던 애완동물에게 자유를 주겠다며 야생에 내던지는 격이다.
전생의 레펜하르트는 저런 노예들을 구할 때마다 그들을 이끌어 인적 드문 곳에 마을을 만들고 살게 해 주었다. 그는 대마법사였고, 마법이란 원래 불이나 벼락만 펑펑 쏘는 파괴 마법이 전부가 아니다. 오히려 실생활에 쓸모 있는 실용적이고 유용한 학문인 것이다. 살기 힘든 험지라도 마법의 힘이 깃들면 샘을 만들고 식물을 키워 살 만한 곳으로 바꿀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부술 줄밖에 모르는 무인이니 전생에서처럼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능력이 된다 해도 그럴 순 없지.'
그렇게 하면 인간들의 경각심을 불러 일으켜 또 한 번 마왕으로 불리게 될 뿐이다. 이미 실패한 길을 다시 걸을 생각은 결코 없었다. 세상이 저들을 노예라 생각하고 저들 자신조차 자신을 노예라 생각하는데 레펜하르트 혼자 '저들은 노예가 아니다!' 라고 부르짖어 봤자 무슨 의미가 있나?
'인식부터 바꾼다.'
실란이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물었다.
"안전한 장소를 제공하다뇨? 여기 지인이라도 있었어요?"
레펜하르트가 씩 웃었다.
"그건 아니지만, 짐작 가는 곳은 있거든."
☆ ☆ ☆
저녁이 한참 지난 시간, 밤이 깊었지만 제플린 시내는 여전히 활기에 차 있었다. 밤이 깊었는데도 행상들이 거리를 오가고 가게들은 불을 밝히고 호객 행위에 열중한다. 술집마다 먼 길을 걸어온 여행객들이 지친 얼굴로 술잔을 기울인다.
차탄 공국 수도 제플린은 해만 저물면 성문을 닫는 다른 도시와 달리 자정이 되어서야 성문을 폐쇄한다. 그래서 밤늦게 시내로 들어서는 여행객의 숫자도 상당했다. 게다가 거리마다 가로등을 설치해 불을 밝히니 밤이 깊어도 거래를 하기에 그리 지장이 없었다.
괜히 이곳이 상인의 도시라 칭송받는 것이 아니다. 상인 우대 정책을 펼치는 차탄 공국은 그만큼 상업에 종사하는 이들에게 최대한의 편의를 제공하고 있었다.
그 불야성 속의 한 건물, 타오반 상회란 간판이 걸린 벽돌집 2층의 서재에서 30대 남자가 서류를 붙잡고 열심히 펜을 놀리고 있었다.
"일단 라트 지부에 백쉰 닢을 보내고... 콜 지방에서 올라오는 환어음을 막는 데 삼백열다섯 닢이 들겠군."
시볼트는 지금 각 지부에 할당할 예산을 짜고 있었다. 다행히 오늘 오후, 거물 투자자가 나타난 덕분에 살 길이 보였다.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예산을 분배해 최대한 손해를 메워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한창 두뇌를 풀가동하는 시볼트에게 예상 못 한 손님이 찾아왔다. 바로 그 거물 투자자였다. 놀란 얼굴로 바로 접대실로 달려갔다.
"이거, 레펜하르트 님이 아니십니까?"
인사를 하며 시볼트는 슬그머니 상대의 눈치를 보았다. 레펜하르트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마주 인사했다.
"늦은 밤에 실례했습니다."
"예? 늦은 밤요? 아, 예... 뭐...."
레펜하르트의 인사에 시볼트는 잠시 당황했다. 제플린 시민인 그에게 있어서 지금은 초저녁이지 늦은 밤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인사치레에 계속 신경 쓸 이유는 없다. 시볼트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는지?"
혹시 그새 마음 바뀌어서 투자금 내놓으라고 온 건가? 하지만 이미 그 돈은 절반 이상 써 버렸는데! 시볼트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차탄 공국법은 투자자에게 관대해서, 계약을 체결해도 스물네 시간이 지나지 않으면 취소가 가능했다. 시볼트도 이렇게 상황이 급하지 않았다면 최소 하루는 기다렸다가 돈을 운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좀 부탁할 일이 있습니다."
레펜하르트의 말에 시볼트가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시볼트는 멍한 얼굴로 홀 안을 둘러보았다. 타오반 상회 1층의 홀, 점원들 대부분이 퇴근해 텅 비어 있어야 할 그곳은 지금 인파로 북적이고 있었다. 모두가 엘프와 오크들이었다.
레펜하르트가 시볼트에게 노예 문서를 건넸다.
"이들을 좀 맡아 주었으면 해서 말입니다."
문서를 살펴 본 시볼트가 놀라 물었다.
"이건 테리크 회주의 노예들 아닙니까? 어떻게 이걸 다 구입하신 건지?"
레펜하르트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내일 아침쯤 되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들릴 겁니다."
그리고 살짝 목소리를 깔아 첨언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주인공을 아는 건 당신뿐이죠. 그러니 혹시 비밀이 새어 나간다면 난 당신밖에 의심할 사람이 없습니다."
"네?"
"아, 이건 그냥 평범한 협박일 뿐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협박이라는데 신경 안 쓸 인간이 어디 있겠냐! 시볼트는 침을 꿀꺽 삼켰다. 문서를 살피며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 보니까 노예를 '양도'했다고 되어 있습니다만?"
결코 '판매'가 아니었다. 그리고 시볼트가 아는 테리크는 절대 남에게 공짜로 뭔가를 줄 성격이 아니었다. 레펜하르트가 빙그레 웃었더니 대답 대신 딴소리를 했다.
"여하튼 저들을 돌봐 주었음 합니다. 공짜로 해 달란 소리는 물론 아닙니다."
레펜하르트가 품에서 자루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로 털었다. 누런빛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금화 백 닢입니다. 이 정도면 당분간 이들을 돌볼 비용이 될 거라 봅니다만."
"금화 백 닢!"
시볼트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비록 급한 불은 껐다지만 예산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이다. 금화 백 닢이면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손을 내밀어 금화를 움켜쥐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바로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경험 많은 상인답게 시볼트는 이미 대충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이놈, 아무래도 롤페인 저택을 턴 것 같은데?'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노예 문서가 있을 리 없다. 솜씨 좋은 도적일까? 아니면 강도단? 어느 쪽이건 정상적인 거래를 통해 노예를 양도받은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은근히 협박도 했고 말이지.'
시볼트가 슬그머니 물었다. 혹시 상대가 도적이면 아무래도 얽혀서 좋은 꼴 보긴 힘들다.
"혹시 밤의 날개셨습니까?"
도적을 가리키는 좀 고상한 은어다.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지만 롤페인 상회와는 꽤 악연이라서 말입니다."
당당한 눈빛을 보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게다가 시볼트는 제법 사람 보는 눈이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가 본 레펜하르트는 딱히 악당다운 면이 없었다.
'일단 안심하고 거래를 틀 상대인 것 같기는 한데....'
하지만 여기서 이 노예를 받아들였다가 그 사실을 들키기라도 하면 롤페인 상회와는 돌이킬 수 없는 처지가 될 가능성이 너무 컸다. 고민이 안 될 수가 없었다.
"으음...."
승낙하자니 찜찜하고, 거절하자니 금화 백 닢이 너무도 매력적인 빛을 뿜고 있다. 갈등하는 시볼트를 향해 레펜하르트가 태연스레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롤페인 상회와 친분이 깊으신가 봅니다?"
그 말에 시볼트는 깨달았다. 롤페인 상회와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된다고?
'이미 전면전을 벌이고 있는데 무슨 문제?'
부담 없이 금화를 챙기며 시볼트가 마주 웃었다.
"아무 문제 없습니다."
어차피 지금 타오반 상회와 롤페인 상회는 둘 중 하나가 망할 때까지 싸워 대야 할 만큼 상황이 악화된 시점이었다. 이 의뢰를 받아들이지 못 할 이유가 전혀 없다. 돈 준다는데 뭘 마다하랴!
"걱정 마십시오. 저도 제플린 외곽에 따로 거처가 있습니다. 거기에서 지내게 하면 이들이 들통 날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제 노예들과 함께 지내게 하지요."
금화를 자루로 다시 담는 시볼트에게 레펜하르트가 살짝 엄포를 놓았다.
"아, 그냥 지내게 하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나 외의 다른 이들이 저들을 건드리거나 노예처럼 부리는 것은 용납 못 합니다."
"그럼 그렇게 하지요."
시볼트는 선선히 승낙했다. 가끔 소유욕이 지나친 이들 중에는 노예가 자신 외의 다른 이에게 명령받는 것을 용납지 못하는 이들이 제법 있었다. 그래서 레펜하르트의 요구도 별로 이상하게 들리지 않았다.
'다들 성노로 쓰이던 엘프 암컷들 같은데, 아무래도 따로 격리해야겠군.'
격리라고 해 봤자 그냥 별채 하나 주고 거기서 살게 한 뒤 신경 끄면 되는 일이었다. 전혀 곤란한 요청이 아니다. 그러다가 문득 시볼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금화 백 닢은 너무 과한 금액입니다만? 금화 다섯 닢이면 이들을 모두 먹이고 재우는 데 충분할 겁니다."
역시 상도의에 철저한 시볼트다 보니 의뢰 금액이 너무 큰 것이 마음에 걸렸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지만 불합리한 돈은 결코 받지 않는 것이 그의 프라이드였다.
"물론 그냥 먹이고 재우는 것만으로 이 거금을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며 시볼트가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저들에게 교육을 시켰으면 합니다."
"네?"
시볼트는 조금 당황했다.
"아니, 테리크 밑에서 이미 어지간한 건 다 교육 받았을 텐데요?"
"그런 단순한 노예 교육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레펜하르트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여기서부터가 진짜 그의 계획이었다.
"저들에게 글자와 숫자, 수준에 따라서는 회계나 역사, 철학 같은 것도 가르치고 싶습니다. 가능하다면 의술이나 약학 같은 것도요."
"네? 노예에게요?"
시볼트가 눈을 크게 떴다. 시키는 일만 제대로 하면 그만인 노예들에게 저런 걸 가르치겠다고?
"아니, 뭣하러 말입니까?"
너무 어이없는 소리인 나머지 이 덩치 큰 청년이 살짝 돌아 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긴, 생각해 보니 크로방스 왕국에 투자한다고 설칠 때부터 광기가 보이긴 했다. 당혹해하는 시볼트를 보며 레펜하르트가 말을 이었다.
"별로 이상한 소리도 아닙니다. 노예가 할 줄 아는 것이 많으면 그만큼 주인이 편해지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그런 걸 노예가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돈 낭비 같습니다만...."
"만약 성공하면 노예들의 성능이 꽤 올라갈 테니 나쁜 생각도 아닐 텐데요? 실패해도 제 돈 나가는 것 아닙니까?"
"그건 그렇습니다만...."
시볼트는 뜻을 꺾었다. 기상천외한 발상이고 실패가 뻔히 보이긴 했지만, 자기 돈 쓰겠다는데 굳이 말릴 명분이 없었다.
"으음, 뭐 원하시니 해 드리고는 싶지만... 현실적으로 힘들 텐데요? 간단한 글자나 숫자 정도 가르치는 거면 모를까 학문적 영역은 무리입니다. 차탄 아카데미의 학자들치고 노예에게 가르침을 주려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겁니다."
차탄 아카데미는 공국의 유수한 학자들이 모두 모인 권위 높은 학문의 전당이었다. 제대로 졸업만 하면 바로 공국의 높은 자리에 취직될 수 있기에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곳이다.
"학술원의 학자들 콧대가 얼마나 높은지는 저도 잘 압니다. 그들에게는 저도 아무 기대도 안 합니다."
"그럼 어떻게?"
"그곳에서 배우는 학생들이 있잖습니까?"
대부분 부호나 귀족의 자제들이 다니는 차탄 아카데미지만, 그중엔 힘겹게 스스로 돈을 벌어 가며 배움에 임하는 평민 출신도 상당수다. 그들을 데려와서 돈 좀 쥐여 주고 노예들을 가르치게 하면 되지 않겠냐는 것이다.
"아니, 학문을 완성하지도 못한 학생들이 어찌 남을 가르친답니까?"
"노예들에게 뭐 대단한 거 가르칠 것도 아니잖습니까? 어설프게 가르쳐도 상관없지요."
"아, 그건 그렇군요."
"게다가 이쪽이 쌉니다. 학생들이야 가욋돈 벌 수 있어 좋을 테고요."
생각보다 꽤 그럴듯했다. 제대로 된 학문은 완성된 학자만이 가르칠 자격이 있겠지만, 가르침받는 쪽이 노예들이라면 그냥 보통 학생들로도 충분할 것 같았다. 평민 출신의 학생들이라면 크게 자존심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전부 노예들이 제대로 배울 능력이 있다는 전제하에서 출발하고 있다. 시볼트가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원하시니 그리 해 드리겠습니다만, 역시 저는 노예들이 인간처럼 학문을 이해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군요."
레펜하르트는 말없이 웃었다.
노예들을 가르쳐 보자는 생각은 사실 그리 독특한 발상이라곤 할 수 없었다. 대륙에 수많은 인간들 중, 이런 생각을 처음 한 것이 레펜하르트 뿐이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하지만, 최소 노예를 부리는 정도의 지위에 오른 이가 저런 발상을 받아들이는 경우는 결코 없다. 노예 주인들에게 저 소릴 해 봤자 개에게 붓을 들려 주고 미술을 가르치잔 소리와 다를 바 없이 들릴 뿐이다. 이종족들이 인간보다 열등하다는 믿음은 이미 수백 년간 굳어진 가치관이었다.
'그 가치관을 역이용한다.'
그토록 레펜하르트를 괴롭혔던 패러다임이 지금은 무기가 된다.
원래 노예에게 교육을 시키지 않는 것은 반항할 여지를 없애기 위함이다. 이종족들을 갓 노예화했을 시절엔 인간 권력자들도 저걸 알기에 일부러 노예의 교육을 철저히 금지했다. 그리고 이종족은 노예일 뿐이라는 굳은 가치관을 모든 인간에게 심었다.
그러길 수백 년, 인간은 이미 노예인 이종족들이 감히 반항할 수 있을 거란 생각조차도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왜 이종족을 가르치면 안 되는지 그 이유조차 잊어버렸지.'
일단 레펜하르트의 노예들이 교육을 받고 어설프게나마 머리가 깨이기 시작하면 시볼트도 그 효과에 놀랄 것이다. 그리고 자기 노예들도 가르치기 시작할 것이다. 노예의 성능이 올라가면 당연히 주인 입장에서는 편해지니까.
그리고, 잘만 하면 그 유행이 다른 이들에게까지 퍼질지도 모른다.
인간처럼 이종족 노예들이 제대로 교육을 받게 된다면 분명 그들 중 노예인 자신의 처지에 의문을 갖는 이들이 나올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분명 노예가 주축이 된 반란이 일어난다. 물론 그 반란이 성공할 가능성은 낮다. 인간은 여전히 모든 종족의 지배자니까. 하지만 적어도, 노예에게 함부로 교육을 시키면 반항심을 가지게 된다는 사실은 깨닫게 될 것이다.
이 부분이 중요하다. 노예가 반항을 한다는, 즉 자신의 의지를 가질 수 있다는 걸 자연스럽게 인간들이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전생의 그는 미처 하지 않았던 것, 그것은 바로 인식의 전환.
'지금부터 시작이다.'
레펜하르트는 속으로 웃었다. 지금 그가 뿌린 것은 아주 작은 변혁의 씨앗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커다란 나무가 되어 대륙 전역에 그림자를 드리우게 될 것이다.
☆ ☆ ☆
그렇게 레펜하르트는 시볼트에게 모든 노예들을 맡겼다. 이종족 모두 순순히 그의 말에 따랐다. 탈카타는 자신도 데리고 가 달라고 했지만, 그는 노예들 중 전투력을 지닌 유일한 인물이라 떼 놓을 수가 없었다. 만일을 대비해 누군가는 저들을 지켜야 한다. 탈카타 본인도 납득할 만한 이유여서 아쉬워하면서도 검에 대고 약속했다.
"나의 주군, 내 검을 바친 자여. 당신이 돌아올 때까지 이 검에 걸고 목숨 바쳐 저들을 보호하겠습니다."
전사다운 고상한 대사였지만 오크어로 말한 거라 시볼트는 혀만 찰 뿐이었다. 그에게는 그저 성질내며 으르렁대는 걸로만 보였으니까.
'에구, 저 무식한 것들에게 교육은 시켜 무엇하노?'
어쨌거나 그는 의뢰받은 대로 성실히 교육에 임할 생각이었다. 상인으로서의 거래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거래는 거래. 고객의 요구에 충실한 것이 좋은 상인의 자세다.
일처리를 마친 뒤 레펜하르트는 타오반 상회를 나섰다. 밖에서는 실란과 시리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날도 추운데 들어와 있으라고 했지만 시리스는 혹시 모를 추적자를 대비해야 한다며 꿋꿋이 외부 경계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실란은 시리스를 백업해야 한다는 이유로 함께 있었다. 실란이 다가오며 레펜하르트를 재촉했다.
"일 다 끝났으면 여관 가서 바로 짐 챙겨 떠나죠."
사고를 아주 거하게 쳐 버렸으니, 최대한 빨리 이곳을 벗어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레펜하르트도 동의했다. 아무리 기억을 조작해 최대한 흔적을 없앴다지만, 이 도시에 계속 있는 것은 별로 현명한 처사가 아니다.
"어차피 볼일도 없으니 바로 떠나자. 아직 성문 열려 있겠지?"
"자정 되려면 멀었으니 시간은 넉넉해요. 여행에 필요한 식료도 좀 구입해야죠."
레펜하르트 일행은 바로 황금의 휴식처로 달려가 체크아웃한 뒤 근처 잡화점에서 여행에 필요한 물품들을 구입했다. 막 지갑을 꺼내 계산을 하려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레펜하르트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아...."
그러곤 굉장히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고대의 악마와 오러 유저를 상대로도 당당하던 레펜하르트가 저런 얼굴을 하다니! 실란이 심각하게 놀라며 물었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혹시 롤페인 저택에서 무슨 실수라도 한 건가? 실란이 얼굴 가득 긴장의 빛을 띄웠다. 레펜하르트가 그를 내려다보며 말을 더듬거린다.
"아, 저기 실란. 그게 저...."
"왜 그래요, 도대체?"
한숨을 푹푹 쉬더니, 레펜하르트가 쥐꼬리만 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도, 돈 좀 꿔 줘."
"네에?"
기분 낸다고 금화 펑펑 썼더니 최소의 필요 경비까지 시볼트에게 넘겨줘 버린 것이다! 실란이 기가 막혀 피식 웃다가 지갑을 꺼내 대신 계산했다. 시리스가 무심한 얼굴로 그 모습을 보다가 물었다.
"이 옷, 반품할까요?"
시리스 딴에는 나름대로 레펜하르트를 생각해 준다고 한 소리였다. 보아하니 돈 다 떨어진 것 같은데, 이 쓸데없이 비싼 옷을 반품하면 그럭저럭 현금이 생기는 것이다. 롤페인 저택에서의 일로 그녀는 살짝 레펜하르트에게 마음을 연 상태였다.
'변태는 변태지만, 그래도 좋은 변태니까....'
물론 듣는 레펜하르트 심정은 괴로울 뿐이다.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돈 떨어진 남자의 심정은 고금을 통틀어 언제나 같다. 그게 마왕이건 누구건 간에!
"끄으응...."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 레펜하르트는 그저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덩치는 산만 한 게 저렇게 풀 죽어 있으니 은근히 귀여웠다. 시리스가 무심코 키득대며 웃었다.
"아하하...."
레펜하르트는 궁상떠느라 미처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것은 그녀가 노예가 되고 나서 처음으로 터트린 웃음이었다.
다음 날 아침, 제플린 시내는 난리가 났다.
그 유명한 대상회, 롤페인의 회주 테리크가 참혹한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심지어 그 옆에 카탄 상회의 후계자인 베레트 역시 죽어 있었다. 차탄 공국의 유력자 둘이 잔인하게 살해당했으니 당연히 제플린 시는 발칵 뒤집혔다. 바로 조사대가 꾸려져 범인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하지만 범인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다. 기이할 정도로 롤페인 저택의 고용인들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나마 유일하게 기억하는 자의 증언이 이거였다.
"마치 여자처럼 아름다운 거구의 엘프였습니다."
실란과 시리스, 레펜하르트의 기억이 뒤섞이니 참으로 기괴한 괴물이 탄생했다. 듣는 이들 모두 어이없어했지만, 너무 어이가 없다 보니 또 그럴듯하게 들렸다.
고위 마법사가 새로운 키메라형 몬스터를 창조해 두 젊은이를 살해했다는 루머가 제플린 시내를 떠돌았다. 저택에서 엘프와 오크 노예가 모두 사라진 점이 그 루머에 신빙성을 더해 주었다. 마법사가 키메라 재료로 그들을 잡아갔을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모든 난동은 레펜하르트 일행에겐 전혀 상관없는 것이었다. 밤새도록 달린 그들은 이미 제플린 시에서 한참 떨어진 산길을 걷고 있었다.
말라비틀어진 숲 속의 길을 걸으며 실란이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가요?"
레펜하르트가 짤막하게 대꾸했다.
"세텔라드 산맥."
세텔라드 산맥이라면 대륙 북서부에 위치한, 그라임 왕국 중부에 위치한 대산맥이다.
"꽤 멀리 가네요?"
이 근처에도 아직 미발굴된 던전은 상당히 많지만, 레펜하르트는 굳이 멀리 있는 세텔라드 산맥을 목적지로 잡았다. 실란이 재차 물었다.
"그곳에 뭐가 있는데요?"
"잊힌 고대 유적, 엘류시온이 있지."
레펜하르트가 의미심장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리고 속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마법을 되찾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그곳에 있거든.'
제7장 엘류시온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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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빛의 암석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통로, 사방이 어둠인 그곳에서 불빛이 연신 번뜩이고 있었다.
화르르륵!
푸른 화염이 사기邪氣를 가득 담고 날아온다. 순간 검광이 불꽃을 둘로 갈랐다. 갈라진 불길을 뚫고 미모의 엘프 소녀가 백금발을 휘날리며 돌진해 갔다. 마염魔炎을 토한 나이트 스컬의 머리 위로 롱 소드의 칼날이 예리하게 내리쳐졌다.
"야압!"
검게 물든 해골이 박살 나며 그 위로 덧씌워져 있던 인간의 환영이 촛불처럼 흔들려 흩어져 갔다. 비명과 함께 일도양단된 나이트 스컬이 부서져 내렸다.
"케에에에!"
뒤에서 실란이 소리쳤다.
"시리스! 조심해!"
다른 나이트 스컬이 푸른 안광을 이글거리며 검을 찔러 오고 있었다. 녹슨 검이지만 검신에 사이한 기운이 어려 있어 우습게 볼 위력이 아니었다. 시리스가 잽싸게 몸을 돌려 검을 튕겨 냈다.
타탕!
진각을 밟아 순간 체중을 높이며 시리스는 검을 쳐 내 나이트 스컬들을 뒤로 밀쳤다. 그 틈에 실란이 기도를 올렸다.
"필라넨스시여! 저주받은 이들에게 정화의 빛을 내리소서!"
분홍빛 성광이 실란의 손끝에서 뻗어 나와 나이트 스컬들을 휩쓸었다. 일명 턴 언데드, 해골들을 감싼 사기의 기운이 폭풍이라도 만난 것처럼 격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역시 나이트 스컬, 스켈레톤 계열의 언데드 중에선 최상급 몬스터답게 완전히 정화가 되진 않았다.
실란이 혀를 찼다.
'쳇! 이 정도론 부족한가?'
잠깐 밀린 나이트 스컬들이 재차 시리스에게 덤벼들었다. 열심히 막고는 있었지만 아무래도 숫자가 숫자다 보니 점점 밀리기 시작했다. 실란이 시리스에게 손을 뻗으며 재차 기도를 올렸다. 마음이 급해지니 절로 기도문도 짧아졌다.
"필라넨스 님! 쟤한테 풀 서비스!"
이미 기도도 아닌 것 같지만 용케도 신성 가호가 발동했다. 과연 여신다운 통찰력, 저따위로 기도해도 다 알아들으시는 것이다.
시리스의 전신에 각종 신체 강화술이 걸려 핑크색으로 빛났다. 분홍색 엘프 소녀가 푸른 해골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며 돌진해 갔다.
"이야아아압!"
한편 레펜하르트는 복도 반대편에서 다섯 개체의 악마들과 맞서 싸우며 힐끔힐끔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흐음, 호흡 잘 맞네, 쟤들.'
전사와 성직자가 팀을 이루는 경우는 꽤 흔하지만, 그래도 제대로 서로를 보조하며 전투를 전개하는 데는 상당한 경험이 필요하다. 그런데 저들은 몇 년이나 함께해 온 팀처럼 절묘한 팀워크를 보이고 있었다.
'저건 시리스가 대단하다기보다는, 실란이 워낙 여러 타입과 호흡을 맞춰 보았단 소리군.'
시리스는 분명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검사였지만 역시 경험은 부족했다. 지금 저 절묘한 팀워크는 전적으로 실란, 저 어린 소년의 재량이었다.
'재능이야 타고 태어났다곤 쳐도 저 나이에 저 정도 경험을 한 건가? 대체 몇 살 때부터 실전에 나선 거야, 저 녀석?'
생각보다 실란은 더 대단한 성직자였던 것이다. 게다가 신성력도 막강하다. 저대로 꾸준히 성장한다면 전생의 숙적, 성녀 엘린보다도 더 굉장한 프리스트도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순간 의문이 떠올랐다.
'아니, 그런데 저런 녀석이 대체 왜 무명無名이었지?'
레펜하르트는 전생에 수많은 이름 높은 성직자들을 파악한 바가 있었다. 대륙 전체가 그를 적대했으니 안타레스 제국의 황제로서 그 정도 정보 수집은 필수였다. 그런데 그 속에 실란의 이름은 결단코 없었다. 지금이야 아직 어려서 그렇다 해도, 훗날에 대단한 성직자가 되지 않을 리가 없는데?
'저 녀석, 설마 요절하나? 혹시 지병이라도 있는 거 아냐?'
한가할 때 의료 길드라도 한번 찾아가 볼까? 라며 잠깐 레펜하르트가 딴생각을 하던 찰나였다.
"탈케라!"
악마 하나가 고함을 터뜨리며 손톱을 찔러 왔다. 방심한 덕분에 손톱이 제대로 어깨를 긁었다.
"윽!"
옷이 찢어지며 어깨에 살짝 통증이 왔다. 뭐, 그래 봤자 조금 부은 정도였다. 레펜하르트가 눈살을 찌푸리며 손발을 매섭게 휘둘렀다.
"이 자식이!"
무시무시한 펀치와 킥이 회오리치며 악마들을 빨아올린다. 그 상태로 레펜하르트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며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이놈의 약점은 옆구리의 핵, 저놈의 약점은 양 뿔. 요놈은 뭐더라? 아, 이건 그냥 세게 패면 되겠구나.'
황금의 오러가 넘실거리며 악마들을 단숨에 몰아쳤다. 약점을 다 알고 있으니 그리 어려운 상대가 아닌 것이다. 뭐, 개중엔 냉기에 약하다거나 하는 그런 마법적 약점을 가진 악마도 있었지만, 그런 놈은 그냥 열심히 패서 잠재우면 되었다.
잠시 후, 모든 악마가 박살이 나 피 떡이 되었다. 휘날리는 피와 살점 속에서 레펜하르트가 숨을 골랐다. 마침 시리스와 실란도 나이트 스컬들을 모두 처리하고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돌려 안부를 물었다.
"다친 데는 없니?"
고개를 끄덕이며 실란이 통로 안을 바라봤다.
"네, 그런데 이 유적 이름이 엘류시온이라 했던가요? 이거 팔톤 유적보다도 더 센 놈들인 것 같은데요."
"그래도 여기는 뒷길이라 좀 나은 편이지."
차탄 공국을 떠난 지 보름째, 그라임 왕국에 들어선 레펜하르트 일행은 그대로 세텔라드 산맥으로 향했다. 산길을 걸어 곧장 이곳, 엘류시온 유적으로 향한 이들은 곧바로 던전의 중심부로 직행했다. 신기하게도 레펜하르트는 뭔가 바닥의 돌 몇 개를 옮기는 것만으로 숨겨진 뒷길의 비밀문을 열어 버렸던 것이다.
'쉬운 길 뻔히 아는데 굳이 고생할 필요는 없잖아?'
그가 목표로 하는 유물, '엘류시온의 목소리'가 있는 곳은 유적의 중심지였다. 전생에 각종 고생을 하면서 레펜하르트는 모든 통로를 전부 조사했었고, 그래서 간신히 뒷길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물론 은의 시대 유물은 중심지 말고도 유적 곳곳에 흩어져 있으니 그 돈 덩어리들을 포기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중심부에서 일단 방어 시스템만 해제해도 한층 유적 탐사가 쉬워지는 것이다.
그렇게 세 사람은 숨겨진 통로를 따라 전진했다. 강력한 악마들은 레펜하르트가 상대하고, 상대적으로 약한 편인 언데드들을 실란과 시리스가 처리하며 그들은 빠르게 유적의 중심으로 향하고 있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눈앞에 통로가 끝나며 커다란 석문이 나타났다. 온갖 마법 금속으로 도금해 복잡한 문양을 덧씌운 문이었다. 레펜하르트가 씨익 웃었다.
"도착했네."
실란이 문을 살피더니 인상을 썼다.
"마법으로 봉인된 문이에요. 힘으로는 열 수 없겠는데요?"
마법으로 봉인된 문은 단순한 물리력만으로는 부술 수 없다. 가해진 물리력을 봉마의 주문이 강제로 사방으로 흩어 버리기 때문이다. 같은 힘이라도 송곳을 든 채 찌르면 깊숙이 박히지만, 그냥 맨손으로 치면 나무가 멀쩡한 것과 같은 이치다.
물론 오러 능력자인 레펜하르트의 물리력이라면 맨손으로도 아름드리나무를 분지를 수 있을 것이다. 대신 아름드리나무는 싹 날아가겠지. 그리고 여기서 그 나무가 바로 석실이다. 힘만으로 봉마의 주문을 깬다는 건, 이 석실을 통째로 날려 버린다는 소리나 같다.
"그래서 제가 마법사 하나 고용하자고 했잖아요? 계속 필요 없다더니만...."
실란이 연신 툴툴거렸다. 코앞까지 와서 돌아가게 생겼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개문開門의 마법은 3서클 주문으로, 어지간한 정식 마법사라면 다 구사할 수 있다. 아무 마법사나 한 명만 데리고 왔으면 쉽게 해결했을 문제인 것이다.
물론 레펜하르트는 태연했다. 그라고 여기에 이런 문이 있는 줄 몰랐던 것이 아니다.
"기다려 봐. 주문을 준비할 테니."
천연덕스럽게 말하며 레펜하르트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실란이 기겁하며 물었다.
"잠깐? 레펜 씨, 마법도 쓸 줄 알아요?"
"응, 나 원래는 마법사였어."
중간 과정이 싹 생략되긴 했지만, 한 치의 거짓도 없는 대답임에는 분명했다. 하지만 속사정을 모르는 실란으로서는 기가 막힌 소리였다.
"에에엥?"
세상에는, 분명 마법과 무술을 함께 구사하는 마검사魔劍士나 마권사魔拳士라는 직종이 있다. 하지만 마검사는 대체로 용병 출신 무인들이 실력의 벽을 느끼고 마도구를 사용하거나 간단한 마법을 몇 개 익혀 신체를 강화하는 방식이 대부분이었다. 진정 양쪽에 높은 수준을 지닌 마검사는 극히 드물다. 그리고....
"레펜 씨, 마권사였어요?"
마권사는 사실, 전투 마법사의 다른 말이다. 마법사 중에서도 실전을 위한 마법만 전문적으로 익힌 전장의 마도사들, 그들이 날아드는 창칼을 피하며 마법을 시전하기 위해서 체술을 함께 익히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선택이다. 하지만, 저건 어디까지나 마법사가 체술도 익혔다 정도지, 본격적으로 무인의 길을 걷는다는 소리는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레펜 씨는, 마법을 익힐 만큼 머리도 좋은 주제에 무술에도 재능이 넘쳐서 오러까지 각성했단 말이야?'
억울하다! 누구는 남자다운 몸 하나만 바라고 죽어라 연습해도 알통 하나 안 생기는데 누구는 몸도 좋고 머리도 좋단 말인가! 세상은 왜 이렇게 불공평한 거야!
그렇게 분통을 터트리며 실란이 레펜하르트를 질시의 눈으로 바라보던 차였다. 문득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지금 뭐 해요?"
주문 쓰겠다는 양반이 어째 아까부터 계속 주저앉아 눈만 감고 있다.
"명상 중이다. 마력을 모아야지."
"네?"
더더욱 이해가 안 갔다. 아니, 3서클 주문에 마력 얼마나 든다고 명상씩이나?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명상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렇게 그는 10여 분간이나 가부좌를 한 채 명상에 잠겼다. 그리고, 간신히 3서클 마법을 구사할 마력이 모이자 천천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랄피아... 데... 라테아... 볼트...."
체내의 마력을 마법으로 전환하는 룬어, 저것을 준비하는 데 한 30초 걸렸다.
"고대의 이름으로 명한다... 봉인의 힘이여... 그 닫힌 문을 열어라."
전환된 마법을 술식화하는 마법의 언령, 이것에 또 한 30초 걸렸다.
"...."
실란은 입을 쩍 벌렸다. 평생 이렇게 느려 터진 마법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마침내 레펜하르트가 현실 구현화를 위한 시동어를 외쳤다.
"게이트 오픈!"
석문이 살짝 진동하며 봉마의 주문이 풀렸다. 석문이 끼긱거리며 천천히 열린다. 수백, 어쩌면 수천 년간 움직이지 않았을 고대 유적의 문이 열린 것이다!
...물론 그걸 옆에서 보고 있던 실란에겐 어떠한 감흥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레펜 씨, 어디 가서 마법사라고 하지 말아요."
원래 마법사였다기에 억울해했던 마음이 싹 가셨다. 아니, 3서클 주문에 1분 가까이 걸리는 주제에 마법사는 무슨 마법사?
"시끄러, 어쨌거나 열었잖아."
레펜하르트가 뚱한 얼굴로 일어났다. 전생에는 역사상 최초의 10서클 대마법사가 되어 전 대륙을 상대로 마왕으로까지 군림했던 그였는데 이런 소리나 듣다니?
'아으, 진짜 빨리 엘류시온의 목소리부터 찾아야지. 이거 참 서러워서 살 수가 있나.'
하여튼 문은 열렸다. 이제 이 안에 그가 그토록 원하던 것이 있으리라. 흥분한 얼굴로 레펜하르트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 순간이었다.
"어?"
그의 입에서 당혹감 가득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뭐야? 왜 텅 비었어?"
☆ ☆ ☆
한겨울의 세텔라드 산맥 기슭, 순백의 설산 속 작은 산길 위로 세 사람이 걷고 있었다. 한 발자국쯤 떨어져 말없이 뒤를 따르는 백금발의 엘프 소녀와 붉은 머리의 예쁘장한 소년, 그리고 앞장서 걸어가며 연신 한숨을 푹푹 쉬는 거구의 청년이었다.
"후우,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걸음을 옮기며 레펜하르트가 재차 한숨을 내쉰다. 실란이 빙그레 웃으며 그를 달랬다.
"에이, 레펜 씨. 너무 그렇게 속상해하지 마요.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잖아요?"
텅 빈 유적의 중심부에 망연자실한 레펜하르트는 곧바로 다른 지역도 탐사에 들어갔다. 하지만 어딜 가도 마찬가지였다. 존재하는 것은 유적에 의해 묶인 각종 마물들뿐, 기억 속의 모든 유물들이 싹 사라져 있었다. 게다가 통로며 석실 곳곳에 갓 생긴 것이 분명한 파괴의 흔적이 역력히 보였다.
확실했다. 누군가가 그보다 먼저 엘류시온 유적을 털어 버린 것이다!
실란이 실실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 유적이 레펜 씨 소유도 아니잖아요? 딴 사람이 먼저 탐사할 수도 있는 거지."
고대 유적에 대한 정보를 비싼 돈 주고 구입해 달려가 봤더니 이미 딴 놈이 쏠랑 털어 버렸더라는 이야기는 모험가들 사이에서 흔한 이야기다. 그러므로 실란은 이 상황에 대해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레펜하르트 입장에선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상황이었다. 엘류시온 유적이 발견되는 것은 원래 17년 후에나 일어날 일이었다. 그것도 레펜하르트 본인에 의해서. 이건 누가 먼저 선수 쳤다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니다.
'미래가 바뀌었다....'
자신이 이 시간대로 시공 회귀한 시점에서 미래가 점점 어그러질 거란 것쯤은 익히 짐작하고 있던 레펜하르트였다. 그는 마법사, 당연히 인과율에 대한 개념 역시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다.
'설마 그 영향이 벌써 일어나는 건가?'
아주 가능성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예를 들어, 레펜하르트의 과거에서는 죽어야 할 인물이 자신 때문에 살아났다면 그 인물이 우연히 이 던전을 발견해 버리는 경우도 생길 수 있으니까.
물론 아무것도 모르는 실란은 그저, 레펜하르트의 표정이 허탕 친 자의 수심 정도로만 이해하고 계속 위로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혀 아무것도 못 건진 건 아니잖아요? 저것도 굉장한 아티팩트인 것 같은데."
말을 하며 실란은 힐끔 시리스를 돌아보았다. 뒤를 따라 걷고 있던 그녀는 왼손에 30센티미터 정도의 작은 막대기 하나를 들고 이리저리 매만지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런 장식도 없는 평범한 나무 막대기일 뿐이다. 하지만 시리스가 작게 중얼거리자 바로 변화가 생긴다.
"니힐렌."
막대기 양쪽 끝에서 빛이 쏟아져 형상을 이루었다. 좌우로 길어지며 부드럽게 휘어지고 빛의 실이 생겨나 그 끝을 이었다. 단순한 막대기였던 것이 커다란 빛의 활이 되었다.
시리스가 빛의 시위에 손을 얹었다. 빛의 화살이 구체화되어 손아귀에 잡혔다. 그녀가 연거푸 시위를 당겼다.
파파팟!
빛의 화살이 연사로 쏘아지며 수십 미터 밖의 나뭇가지들을 차례대로 꺾었다. 실란이 그 모습을 보며 물었다.
"그거 어때, 시리스?"
"굉장한 무기군요."
차가운 어조 속에서도 숨길 수 없는 흥분이 엿보인다. 그만큼 시리스는 새롭게 얻은 이 마법의 활에 흠뻑 매료되어 있었다.
마궁魔弓 니힐렌.
이 마법의 활은 따로 화살도 필요 없을뿐더러 바람이나 중력의 영향도 받지 않는 데다가 사용자의 집중력에 따라 여러 발을 장전해 쏠 수도 있었다. 게다가 마나 게더링의 힘이 있어 그냥 놔두기만 해도 저절로 마력이 충전되고, 무엇보다도 휴대성이 엄청나다. 평소에는 그냥 막대기일 뿐이니까. 은의 시대 유물 꽤나 봐 온 실란이 보기에도 상당한 수준의 아티팩트다.
"저런 굉장한 걸 그냥 버리고 가다니, 쯧쯧."
다른 유물과 달리 겉보기에는 그저 단순한 나무 조각 정도로만 보였기에 아마도 그냥 놓고 간 모양이었다. 마력이 느껴지는 것도 아니니 아마도 유물인 줄도 몰랐을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 레펜 씨는 저게 아티팩트인 줄 어떻게 알아본 거예요?"
실은 저 마궁 니힐렌은 전생의 시리스가 주무기로 쓰던 활이었다. 그 당시엔 레펜하르트도 저것이 대단한 유물인 줄은 미처 몰랐다. 그저, 막대기의 재질이 처음 보는 것이기에 연구차 들고 왔고 그 와중에 기능을 알아내 시리스에게 선물했다. 저 나무 막대기가 세계수 엘븐하임의 잔재라는 것은 나중에나 깨달았다.
물론 이 이야기를 실란에게 전부 해 줄 순 없으니 대충 얼버무렸다.
"아, 정보가 있었거든. 어쨌거나 마음에 든 것 같으니 다행이네."
시리스를 보며 레펜하르트는 힘없이 웃었다. 그녀는 길을 걸으며 계속 근처 나무에 니힐렌을 쏘아 보고 있었다.
빛의 화살을 쏘는 이 니힐렌은 아무래도 보통 활에 비해 조준 감각이 미묘하게 다르다. 무엇보다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으니 화살이 포물선이 아닌 직선으로 날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시리스는 열심히 그녀가 배운 궁술과 니힐렌의 용법을 비교하며 감각을 조절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너무 실망하지 마요. 대륙에 유적이 엘류시온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으음, 그렇긴 하지만...."
위로하는 실란의 목소리에도 레펜하르트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엘류시온의 목소리는 하나뿐이지.'
미래가 바뀐 것도 바뀐 것이지만, 당장 얻어야 할 물건을 얻지 못했다는 점이 타격이 컸다. 다른 유물들은 괜찮다. 하지만 엘류시온의 목소리만큼은 대체할 물건이 없다. 그것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에게 마법의 힘을 돌려줄 아티팩트였다.
'끄응....'
그렇게 산길을 한참 걷다 보니 삼림 너머로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나무 사이로 커다란 목책에 둘러싸인 마을이 드러났다. 실란이 반색하며 말했다.
"아, 슬슬 보이네요. 게할른 마을. 오랜만에 남이 해 주는 밥 좀 먹고 가요, 우리."
게할른 마을은 세텔라드 산맥 서쪽에 위치한, 꽤나 큰 규모의 산촌이었다. 산맥을 넘는 길목에 위치해 있어 마을 대부분의 집들이 여관업을 겸하고 있었다. 레펜하르트 일행은 적당히 사람이 북적이는 여관을 하나 찾아 음식을 주문했다.
곧이어 듬직해 보이는 아주머니 하나가 양손에 푸짐하게 빵과 수프, 샐러드를 들고 식탁에 차렸다.
"많이들 드시구랴. 이거 1인분 더 준비해야 하는 거 아닌가 몰라?"
덩치 좋은 레펜하르트를 보며 아주머니가 너스레를 떨었다. 훈훈한 시골 인심을 느끼며 다들 식사를 시작했다. 단순한 검은 빵에 호박 수프였는데 한입 베어 물어 보니 맛이 꽤 좋았다. 실란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투박한 재료임에도 이 정도 맛이라니?
"우와, 맛있는데요?"
"그렇지? 우리 요리사 솜씨는 일품이라고."
아주머니가 자랑스러워하며 싱글벙글 웃었다. 그러다 문득 인상을 구겼다.
"그런데 그 거만한 작자들은 뭐 그리 미식가라고 이러쿵저러쿵 말도 많으니."
"응? 거만한 작자라뇨?"
"일주일 전쯤에 여기로 온 귀족가 기사들이 있다오. 무슨 유적을 탐사한다던가?"
순간 레펜하르트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그 이야기 좀 자세히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응? 그건 뭐하러 묻소, 청년?"
아주머니가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레펜하르트가 슬그머니 은화 한 닢을 그녀에게 건넸다. 아주머니가 인상을 구기며 손을 내저었다.
"에잉, 이야기에 뭐 돈 든다고 이런 걸 다 줘?"
결국 레펜하르트는 젊은 놈이 돈 함부로 쓰면 벌 받는다는 일장 연설을 듣고서야 비로소 원하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일주일 전의 이야기인데...."
한 무리의 기사들이 세탈라드 산맥의 새 유적을 탐사한다는 목적으로 게할른 마을을 들렀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잠시 묵으며 정비를 했는데, 계속 잠자리가 불편하다느니 음식이 개도 안 먹을 것이라느니 하면서 불만이 많았다는 것이다.
"어디의 누구인지는 못 들었습니까?"
"케벨른 자작님이 모시고 왔는데, 어째 자작님보다 다들 높아 보였수."
이곳 게할른 마을은 케벨른 자작령의 자치촌 중 하나다. 그러니 케벨른 자작이야 알아보겠지만 다른 이들까진 알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일단은 케벨른 자작가를 찾아가 봐야 하려나?'
레펜하르트가 상념에 빠져 있을 때, 아주머니가 손뼉을 치더니 말을 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중 금색으로 번쩍번쩍하는 기사님이 하나 계셨다오. 그분은 참 좋은 양반이었어. 친절하고 우리 같은 촌사람들에게도 자상했지. 그런데 온통 금색이니까 좀 웃기기는 하더만? 심지어는 칼조차도 금칼이었다니까?"
순간 레펜하르트는 상대의 정체를 눈치챘다. 황금의 갑옷에 황금의 검이라면 대륙이 넓다 해도 단 하나뿐이다.
'...그라임의 황금기사! 테네스 백작가였나.'
☆ ☆ ☆
켈베른 자작령은 세텔라드 산맥 서남쪽 인근에 위치한 작은 영지였다. 영지 대부분이 산지라 농업 쪽은 간신히 자급자족할 수준이지만 대신 매장량이 풍부한 철광과 동광을 세 개나 지니고 있어 영지민의 생활은 꽤 풍족한 편이었다. 그 덕에 켈베른 자작은 작위는 낮지만 그라임 왕국에서 손꼽히는 갑부였다.
그 자작의 성에서 지금 30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사내가 자작과 마주하며 식사를 하고 있었다. 화려한 성찬을 앞에 두고 쉰이 넘은 켈베른 자작은 진심 어린 태도로 사내를 향해 찬사를 터트리고 있었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유서스 경!"
사내가 겸양하며 고개를 저었다.
"켈베른 자작께서 많이 도와주신 덕이지요."
자작이 손을 휘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 해도 그 유적의 마물들을 해치운 건 유서스 경이 아닙니까? 역시 그라임의 황금기사, 그 명성이 헛된 것이 아님을 똑똑히 보았습니다그려."
켈베른 자작이 눈앞의 사내, 유서스의 연락을 받은 것은 한 달 전이었다. 그는 자신의 영지 내에 엄청난 고대 유적이 잠들어 있다는 이야기에 잠시 꿈이 아닌가 의심했다. 고대 유적을 한번 탐사하게 되면 그곳에서 나오는 재물의 양은 보통이 아니니 어떤 영주라도 반가워하지 않을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자작이 진정으로 반가워한 것은 유적의 존재가 아닌, 황금기사 유서스 경과 친분을 쌓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별 볼 일 없는, 가진 것은 돈뿐인 이런 시골 귀족이 그라임 왕국 내에 명성이 드높은 기사와 안면을 익히게 될 기회는 거의 없는 것이다.
바로 유서스의 청에 따라 탐사에 필요한 준비를 하고 테네스 기사단을 맞이했다. 그리고 친분을 돈독히 하기 위해 직접 탐사대에 끼어들기도 했다. 젊은 시절부터 기사로서의 수행을 게을리하지 않은 그였다. 쉰이 넘은 나이였지만 산사람답게 청년처럼 듬직한 육체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아무리 유적이 위험하다 해도 자신의 몸 하나쯤 지킬 자신은 있었다.
그렇게 친분을 쌓기 위해 시작한 여정 속에서, 켈베른 자작은 유서스 경에게 진심으로 매료되어 버렸다. 그는 강인하고 인자했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냉철했고 부하들에게도 자상했다. 그야말로 이야기 속에서나 나올 기사 중의 기사였다.
험한 탐사 과정에서 많은 수하들을 잃긴 했지만, 결국 유서스는 저 고대 유적, 엘류시온을 탐사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엄청난 보물을 거두어 귀환하게 된 것이다.
켈베른 자작이 힐끔 창밖을 내다보았다. 지금 성 정원에서는 십여 명의 마법사들이 오크 노예를 부리며 유적에서 얻은 유물들을 조사해 분류하고 있었다.
그의 태도를 눈치챈 유서스가 진지하게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켈베른 자작. 미리 약정했던 대로 유물의 3분의 1은 당신의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라임의 황금기사와 함께 싸우는 영광을 얻었는데 저깟 유물이 대수겠습니까? 모두 가져가셔도 전혀 상관없습니다."
자작이 정색을 했다. 실제로 그는 저 유물들에 대해선 전혀 욕심이 없었다. 어차피 돈은 썩을 만큼 있다. 그보다는 눈앞의 이 사내와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이 더욱 큰 이득이었다. 자신이야 이 작은 영지에서 살아간다 해도, 후손들에게는 좀 더 큰 세계를 보여 주고 싶었으니까.
진심이 느껴졌는지 유서스의 표정도 밝아졌다.
"저런 보물 앞에 탐욕을 부리지 않으시다니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군요. 아, 그런데 유적에서 발견한 아다만트와 오리하르콘 광석들은 어찌 처리하시겠습니까?"
고대 유적에서 발견할 수 있는 유물은 대체로 완성품이 많지만, 가끔 원자재 상태의 희귀한 마법 금속들도 나오곤 했다. 이번에 그들은 엘류시온에서 상당한 양의 아다만트와 오리하르콘 역시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대단한 마법 금속이라도 가공하지 않으면 돌멩이와 다를 바가 없을 터.
"하하하, 부리고 있는 땅강아지들에게 이미 저것들을 제련해 갑옷과 무구를 만들라 일러 뒀습니다. 보름 정도면 괜찮은 물건들이 나올 겁니다."
"역시 광산업으로 이름 높은 켈베른 가문입니다. 유능한 드워프들을 많이 가지고 계시군요."
유서스는 빙그레 웃었다. 기대했던 대로였다. 켈베른 자작가의 부는 단순히 광산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쌓인 것이 아니다. 켈베른 자작가는 대대로 드워프 노예들을 부려 광석을 캐고, 그것을 직접 제련해 각종 무구를 만들어 팔아 왔다. 그러니 이번에도 훌륭한 물건이 나와 줄 것이다.
켈베른 자작이 근사한 라벨이 붙은 와인병을 꺼내 유서스에게 따랐다.
"안심하고 술이나 드시죠. 노르간에서 만든 21년산입니다."
"호오, 이런 귀한 와인을?"
"아무리 귀하다 한들 그라임의 황금기사 앞에서는 초라할 뿐이지요."
"너무 띄워 주시는군요. 그라임 왕국엔 저보다 더 뛰어난 기사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뛰어난 무용에 겸손하기까지 하시니 실로 기사의 귀감입니다. 받으시지요."
"감사합니다."
와인 잔을 기울여 향기를 맡은 뒤 유서스가 감탄을 터트렸다.
"훌륭한 향이로군요."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그들은 저녁 성찬을 즐겼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자 켈베른 자작이 손뼉을 쳤다. 집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시 후 화려한 드레스를 걸친 두 소녀를 대동하고 다시 나타났다.
자작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 아이들이 제 여식들입니다. 인사들 올리거라. 명성 높은 그라임의 황금기사, 유서스 테네스 경이시다."
소녀들이 치맛자락을 살짝 걷고 귀족다운 인사를 올린다. 두 소녀 모두 상당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켈베른이 은근히 말을 건넸다.
"성혼하셨다는 건 압니다. 그저 좋은 친분을 남길까 하여...."
자작은 지금 은근히 자신의 딸들을 유서스와 연결시키려 하는 것이었다. 비록 결혼을 했다 해도 고위 귀족이 첩을 두는 것은 흔한 일이다. 특히 유서스 정도의 명성이라면 그것이 영웅다운 면모일지언정 결코 흠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켈베른 자작의 지금 태도는 전혀 귀족의 예의에 어긋난다 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의 두 딸 모두 인근에서는 명성이 자자한 미녀들인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유서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굉장히 불쾌하다는 티가 역력한 얼굴이었다.
"죄송합니다만, 전 아내 외의 다른 여인을 품을 생각이 결코 없습니다."
단호한 태도였다. 켈베른 자작은 순간 당황했다. 딸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하지만 저건 딸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기보다는 이런 상황 자체가 불쾌하다는 표정이었다.
'내, 내가 뭘 잘못했나?'
그때 켈베른 자작은 비로소 황금기사의 가문, 테네스 백작가의 또 다른 소문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아, 그 동생분...."
챙그랑!
유서스가 들고 있던 와인 잔이 박살났다. 아까까지 그토록 신사답던 그의 표정이 악귀처럼 변해 있었다. 유서스가 동토의 북풍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뇌까렸다.
"제게는 동생이 없습니다."
무시무시한 살기가 테이블 주위를 가득 메웠다. 켈베른 자작도, 집사와 두 딸들도 모두 얼어붙어 벌벌 떨었다. 그제야 유서스가 실수를 자각하고 바로 사죄의 말을 건넸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례를 범했군요."
살기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제야 켈베른 자작은 숨을 쉴 수 있었다. 내심 놀라웠다. 그토록 완벽해 보이던 저 황금기사가 저런 인간적인 면모를 보일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것이 자작의 경외심을 해치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욱 매료되었다.
영웅의 기분을 상하게 했으니 죄스러움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자작이 허겁지겁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이런 불찰을...."
자작이 집사에게 손을 저으며 딸을 데려가라 손짓했다. 파랗게 질린 자작 영애들을 보며 유서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생각해 보면 저 소녀들이 무슨 죄인가?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이 자리에 와서 봉변만 당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소녀를 에스코트했다.
"이런 어여쁜 레이디라면 저 같은 유부남보다 더욱 훌륭한 상대가 있을 터, 어찌 제가 감히 이 싱그러운 꽃을 탐하겠습니까? 그저 바라보며 향기를 맡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지요. 함께해 주시겠습니까, 레이디?"
"네? 아, 네에...."
조금 전까지 파랗게 질려 있던 소녀들의 안색이 발그레 물들었다. 역시 유서스 경은 명성대로 기사 중의 기사였다. 잠시 실수를 했어도 훌륭하게 분위기를 바꾼 것이다. 그렇게 다시 술잔을 들려 할 때였다.
"으아아악!"
창밖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유서스가 놀라 자리를 박차며 창가로 달려갔다.
"무슨 일이지?"
창밖에는 붉은 화광이 일렁이고 있었다. 정원 곳곳에 불길이 옮겨 붙고 그 사이로 마법사며 하인들, 노예들이 우왕좌왕 도망갈 곳을 찾고 있다. 마침 밑을 지나가는 하인 한 명을 발견한 유서스가 소리를 질렀다.
"뭐냐! 보고하라!"
올려다본 하인이 공황에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유물 중 하나에서 악마가 나왔습니다!"
순간 유서스의 표정이 구겨졌다.
"젠장! 소환계 아티팩트가 끼어 있었나!"
2
켈베른 성의 정원은 화염지옥으로 변해 있었다. 말라붙은 정원수들이 이글거리는 불길에 재가 되고 매캐한 회색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그 파괴의 중심에서 거대한 검은 괴물이 울부짖고 있었다.
"크아아아아!"
흑사자의 몸체에 거인의 상체가 이어진 거구의 악마, 세피아탄이었다. 엘류시온 유적에서 들고 온 유물 중 이계의 악마를 소환하는 마법이 걸린 석상이 끼어 있었던 것이다. 마법사들이 유물 조사를 위해 마력을 흘리던 도중 주문이 발동되어 버린 모양이었다.
"크라라라라라!"
네 발로 대지를 디딘 채 세피아탄은 양손에 든 브로드 소드를 연거푸 좌우로 휘둘러 사방에 불길을 뿌려 대고 있었다. 어깨 높이만도 3미터 가까이 되는 거구라 한손검인 브로드 소드가 어지간한 참마도보다도 거대했다. 칼날이 스치는 곳마다 인간들이 반으로 쪼개지며 피 보라가 일었다.
"으아악!"
"사람 살려!"
성의 하인이며 노예들은 공포 속에서 도망 다니다가 불에 타 절규하며 죽어 갔다. 마법사들이 저마다 주문으로 맞섰지만 거의 통용되지 않았다. 마법사 중 하나가 악을 썼다.
"젠장! 왜 하필 저런 게 끼어 있었던 거야?"
소환계 아티팩트는 워낙 희귀하기 때문에 평생 유적 탐사를 행해도 한 번 보기가 힘들 정도다. 그러니 딱히 마법사들이 조사하다 실수했다고 할 수도 없었다. 그냥 더럽게 운이 없는 케이스였다.
뒤늦게 테네스 기사단이 무장을 갖추고 정원으로 달려왔다. 스무 명의 기사들을 대동한 중년 기사, 부단장 로트 경이 고함을 쳐 명령을 내렸다.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전열을 갖춰라! 마법사들을 후위로! 기사들은 모두 방패를 들어라! 신관들이여, 가호를!"
로트 경의 지휘 아래 기사들이 빠르게 산개했다. 방패로 몸을 가리며 악마를 포위하자 세피아탄이 연신 불꽃을 뿜어 기사들을 뒤덮었다. 방패에 불길이 맞닿자 푸른 성광이 일렁이며 불길을 밀어냈다. 뒤따른 창공의 여신, 에어리어스의 신관들이 부여한 신성 가호의 힘이었다.
"에어리어스여! 당신의 미욱한 종이 청원합니다! 용맹을 가진 이들에게 사악한 마를 멸할 힘을 내려 주소서!"
후위에 선 마법사들도 잽싸게 냉기의 벽을 만들어 불길이 번지는 것을 막았다.
"차가운 동토의 바람이여! 내 손길에 따라 이 자리에 임하라! 월 오브 아이스!"
다급한 상황이었지만 일단 명령이 떨어지자 다들 냉정을 되찾고 침착하게 상황에 대처하기 시작했다. 로트 경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포위진이 구성되고 나니 저 사악한 악마도 일순 기세가 꺾여 있었다.
"좋아, 이대로 발을 묶으며 단장님을 기다린다."
검과 방패를 들고 전위로 나서며 로트 경이 말을 이었다. 일단 기세는 꺾었지만, 저 세피아탄은 어지간한 오러 능력자나 상대할 수 있는 최상급 악마였다. 숫자로 밀어붙이려면 상당한 인명 피해를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 이대로 그라임의 황금기사를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때였다. 포위망을 구성하고 있던 기사 중 하나가 갑자기 명령을 거역하고 세피아탄에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런!"
달려간 기사는 20대 후반의 젊은 청년이었다. 당황하며 로트 경이 소리쳤다.
"뭐 하는 것이냐, 러스!"
외침이 들리지도 않는지, 청년 기사가 세피아탄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방패를 내던진 후 러스라 불린 청년은 바스타드 소드를 양손으로 쥐었다. 살기 가득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사악한 악마여! 테네스의 검 앞에 적은 없다!"
러스가 몸을 날리며 세피아탄의 상체에 길게 내려 베었다.
"타아아앗!"
섬광 같은 일격이었다. 단숨에 악마의 가슴팍이 갈라지며 검은 피가 솟구쳤다. 오러 능력자 정도나 상대할 수 있다는 세피아탄에게 고작 일개 청년이 제대로 상처를 입힌 것이다. 그만큼 방금 러스의 검술은 완벽에 가까웠다. 달인의 검술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예술적인 내려치기였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크아아아!"
고통 속에서 세피아탄이 바로 반격에 나섰다. 불꽃을 머금은 브로드 소드가 바로 러스를 향해 내리찍혔다. 러스도 어떻게든 피하려 했지만 영 몸놀림이 어설펐다. 내려치기 하나는 달인급이었지만, 그 외의 실력은 평범하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채 피하지도 못하고 정통으로 두들겨 맞아 버렸다.
"커억!"
갑옷이 박살 나며 러스가 허공으로 날려 갔다. 전신 곳곳에서 핏물이 터져 나왔다. 흙바닥에 처박히는 러스를 보며 로트 경이 혀를 찼다.
"저런 바보 같은 놈!"
나가떨어진 러스를 향해 세피아탄이 검을 겨눈다. 불길이 당장이라도 쏟아질 것처럼 일렁인다. 에아리아스의 신관 하나가 놀러 그를 구하러 가려 했지만, 바로 로트 경이 만류했다.
"지금 이 포위망을 풀어서는 안 되오! 저런 어리석은 자를 신경 쓸 필요는 없소!"
쓰러진 러스가 울컥 피를 토하며 굴욕에 찬 표정을 지었다. 세피아탄이 바로 불길을 쏘았다. 러스의 전신이 붉은 화광에 뒤덮이려던 바로 그 찰나였다.
"창공의 칼날, 허공을 찢노라!"
강렬한 외침과 함께 바람의 칼날이 날아와 화광을 갈라 버렸다. 날아오던 불꽃의 창이 사등분되어 사방으로 흩어진다. 동시에 건장한 청년 하나가 허공을 날아 러스의 앞에 착지했다. 우아한 귀족의 예복을 입은, 한 손에 2미터 가까이 되는 거대한 참마도斬馬刀를 든 청년이었다.
테네스 기사단이 환호를 터트렸다.
"유서스 님!"
"단장님이 오셨다!"
참마도를 들어 땅에 꽂으며 유서스가 뒤를 돌아보았다. 피를 흘리며 러스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유서스의 입에서 차디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리석은 놈! 내려치기 하나밖에 모르는 놈이 상대할 수 있는 적인 줄 알았더냐!"
입가에서 핏물을 줄줄 흘리며 러스가 중얼거렸다.
"혀, 형님...."
"누가 네 형이란 말이냐?"
순간 유서스의 두 눈에 경멸의 빛이 가득 떠올랐다.
"위대한 테네스의 기사는 더러운 들개의 배에서 나지 않는다!"
유서스는 바로 러스에게서 등을 돌렸다. 모멸감에 러스가 이를 갈았다.
"크으윽...."
유서스가 나타나자 모두들 포위망을 뒤로 물렸다. 싸우기에 충분한 공간을 마련해 주기 위해서였다. 유서스가 참마도의 손잡이를 쥔 채 세피아탄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오러 유저가 아니면 결코 상대할 수 없다는 악마라...."
그는 오러 능력자가 아니었다. 유서스는 오러를 각성하는 방법은 배운 적이 없었다. 그의 가문, 테네스 백작가는 오랜 세월 기사도로 이름 높은 가문이었다. 그러나 명성에도 불구하고 테네스 백작가에는 오러의 각성으로 이끄는 정형화된 검술이 남아 있지 않았다. 100여 년 전 그라임 왕국 내전 때 거의 실전되어 버린 탓이었다.
하지만 그는 오러 유저만큼이나 강했다. 지금 손에 쥔 이 무구 덕분이었다.
유서스의 무구, 황금빛 참마도는 복잡한 형태의 칼집에 싸여 있었다. 온갖 요철이 돋아나 있고 수십 개의 조각들이 엇갈려 검을 감싸는 그 형태는 칼집이라기보다는 무슨 기괴한 조형물처럼 보였다. 유서스가 검을 쥔 채 언령을 토했다.
"눈을 떠라! 엘드라드!"
칼집이 폭발하며 수십 줄기 황금빛 촉수가 되어 유서스의 전신을 감쌌다. 촉수에 엉겨 붙은 금속 조각들이 절묘하게 엇갈리며 또 다른 형태로 변화한다. 곧이어 칼집은 사라지고 대신 유서스의 전신에 눈부신 황금의 갑옷이 걸쳐졌다. 은의 시대 유물 중에서도 최강을 자랑하는 아티팩트, 마갑魔甲 엘드라드였다.
칼집이 사라진 참마도, 엘드란이 눈부신 금빛 검신을 드러냈다. 유서스는 땅에 박힌 엘드란을 뽑아 자세를 취했다. 거대한 대검을 가볍게 한손으로 들어 버리는 그 모습은 분명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괴력이었다. 엘드라드에 걸린 근력 강화 주문의 힘이었다.
"와라! 이계의 악마여!"
휘황찬란한 빛을 뿌리며 유서스가 근엄한 목소리로 외친다. 세피아탄이 분노를 토하며 네 발로 땅을 박찼다. 먹이를 노리는 사자처럼 무시무시한 기세로 악마가 유서스를 향해 돌진해 갔다. 순간 유서스가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나, 바람을 타는 깃털이 되리!"
날아오른 유서스를 향해 브로드 소드가 횡으로 쇄도한다. 유서스가 허공을 박차며 옆으로 몸을 날렸다. 엘드라드에 걸린 마법, 윈드 워크를 발동시켜 대기를 발판으로 삼은 것이다. 그대로 유서스가 참마도를 내리찍으며 고함을 질렀다.
"깨어나라, 엘드란!"
칼날 위로 예리한 기운이 떠올라 빛났다. 오러 능력자의 그것과 달리 희미한, 하지만 위력만큼은 결코 뒤지지 않는 파괴의 빛이었다.
"타앗!"
8서클 물질 파괴 주문, 매트리얼 디스트로이를 발동한 채 유서스는 참마도를 내리쳤다. 세피아탄이 브로드 소드를 교차해 검을 막았다. 불꽃과 마법이 충돌해 굉음을 울렸다. 불똥이 사방으로 튀어 정원 곳곳을 태웠다. 악마가 교차한 검을 틀어 올려 벴다. 유서스가 빠르게 피하며 외침을 연신 토했다.
"사신의 눈, 그림자를 꿰뚫고 표범의 울음, 사지에 깃든다! 용의 감각으로 세상을 굽어볼지니!"
동체 시력 증가, 반사 신경 증가, 초감각 확장이 동시에 이루어진다. 전신에 강화 마법을 건 채 유서스는 날아드는 세피아탄의 칼날을 교묘히 피해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오러 능력자와 필적할 만한 움직임이었다.
보통 마검사들이 강화 마법을 걸고 싸울 경우 정신이 올라간 육체 성능을 따르지 못해 움직임이 커지기 마련이다. 힘은 강해져도 그만큼 동작이 허점투성이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유서스는 강력한 마법을 연달아 걸었음에도 전혀 동작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세피아탄이 당황하며 두 앞발을 들어 휘둘렀지만 유서스는 대지와 허공을 교대로 박차며 모든 공격을 회피했다. 황금의 검이 춤을 추며 악마의 곳곳에 자상을 남기기 시작했다.
"크윽! 크아아아!"
연신 칼질을 해도 상대를 맞추지 못하자 세피아탄이 굴욕에 찬 함성을 내질렀다. 유서스가 싸늘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끝을 보자, 악마여!"
쉴 새 없이 스텝을 밟으며 오른손을 참마도의 검신에 갖다 댄다.
"부식의 숨결, 허공을 흐른다!"
마검 엘드란이 진녹색의 안개를 토해 내기 시작했다. 강산의 연기가 뿌옇게 일렁이며 세피아탄의 전신을 뒤덮었다. 두 자루 브로드 소드가 삭기 시작하며 악마의 피부 곳곳이 녹아내려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폭염, 응집하며 적을 친다!"
유서스의 등 뒤로 수십 개의 파이어 볼이 생성되어 악마를 강타했다. 상해 버린 악마의 상처를 강렬한 불길이 지져 버린다. 세피아탄이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크아아아악!"
오른손을 치켜들며 유서스가 마법을 이었다. 마갑 엘드라드가 눈부신 마법진의 문양으로 뒤덮여 빛을 발했다.
"한설의 안개, 대지를 가린다!"
새하얀 백무를 뿌리며 유서스는 검을 휘둘러 악마의 사방을 냉기의 안개로 뒤덮었다. 강력한 산과 불꽃, 냉기의 공격이 연이어지니 세피아탄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유서스가 허공을 박차며 악마의 정수리까지 날아올랐다. 엘드란을 휘두르며 그가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사라져라!"
악마의 상체가 박살이 나 사방으로 흩어졌다. 악마의 절규가 켈베린 성을 가득 메웠다.
"크아아아악!"
우우우웅....
공기를 떨리는 굉음과 함께 세피아탄의 모습이 점점 흐릿해진다. 소환된 악마가 다시 이계로 사라지는 것이다. 이윽고 완전히 모습이 사라지며 유물이었던 석상이 스스로 흔들리더니 부서져 버렸다. 세피아탄이 죽어 가며 석상 역시 마법의 힘을 잃은 것 같았다.
유서스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흥! 테네스의 검 앞에 악마 따위가 적이 될 것 같으냐!"
모두들 유서스의 무위에 감탄하며 찬사를 던졌다.
"수고하셨습니다, 유서스 님!"
"역시 황금기사의 힘 앞엔 세피아탄 같은 악마도 상대가 되지 않는군요!"
"모두들 상황을 정리하라! 로트 경, 부탁드립니다."
뒷정리를 명한 뒤 유서스는 마갑을 다시 칼집의 형태로 되돌렸다. 위풍당당하게 물러가는 그 뒷모습을 정원의 모든 이들이 동경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단 한 명만 빼고.
'젠장....'
쓰러진 채 치유술을 받고 있던 무모한 청년 기사, 러스만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유서스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문득 그가 러스를 돌아보았다. 차가운 눈빛으로 유서스가 그를 향해 뇌까렸다.
"내려치기 하나만 남은 쓰레기 검술 따윈 더 이상 테네스의 검이 아니지. 주제 파악을 해라, 러스."
러스의 고개가 푹 꺾였다. 하지만 유서스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가볍게 대검을 어깨에 짊어진 채 저택으로 돌아갈 뿐이었다. 철저한 경멸과 무시, 그것을 느끼며 러스가 어깨를 들썩였다.
"이것도 테네스의 검이야...."
손에 든 바스타드 소드를 힘껏 쥐며 그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도 테네스의 검이란 말이다...."
☆ ☆ ☆
"그래? 당대의 황금기사가 유서스 경이란 사람이란 말이지."
"네, 엄청 유명한데 몰랐어요?"
"아, 난 산속에서만 살아서...."
적당히 핑계를 대며 레펜하르트가 머리를 긁었다. 전생에 그가 세상을 떠돌던 시기엔 다른 이유로 테네스 백작가가 유명했었기 때문에, 황금기사의 명성은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침상에 앉아 다리를 까닥이며 실란이 말을 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정말 들은 적이 없어요? 대륙 최강의 마검사 중 하나잖아요? 오러 능력자와도 필적할 정도라던데."
현재 레펜하르트 일행은 식사했던 그 여관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있었다. 날도 저물고 해서 일단 게할른 마을에서 묵고 가기로 한 것이다. 시골 여관이다 보니 시설도 그리 좋지 않아 그냥 큰 방에 침상 네 개가 놓인 것이 전부였다.
레펜하르트가 커튼이 펼쳐진 방구석 쪽을 향해 말했다.
"그렇게 유명한가? 혹시 시리스도 들은 적 있어?"
"네, 레펜하르트 님."
커튼을 걷고 나오며 시리스가 대답했다. 레펜하르트가 특별히 만들어 놓은 임시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온 것이었다. 꼴에 실란도 남자라고, 레펜하르트는 사랑하는 시리스의 탈의 장면을 외간 남자에게 보일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잠옷 예쁘네. 어때? 잘 맞아?"
"아, 네...."
곰돌이 잠옷으로 갈아입은 시리스를 보며 레펜하르트가 히죽 웃었다. 보기 좋았던 모양이다. 시리스가 어색해하며 반대편 침상에 앉았다. 레펜하르트가 뒷말을 기다렸지만, 그녀는 대답만 넙죽 하더니 다시 입을 닫았다.
'쩝... 쉽지 않네.'
일부러 틈만 나면 말을 걸고 있는데도 태도에 크게 변화가 없다. 역시 아직은 자연스럽게 그와 대화를 나눌 정도로 마음을 열지는 않은 것 같다.
대신 눈치 없는 실란이 말을 이었다.
"아무리 강해도 마검사를 오러 유저와 비교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어차피 마도구의 힘일 뿐 아닌가요?"
아무래도 유서스를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는 말투였다. 그리고 사실 이것이 세간의 인식이기도 했다. 제대로 된 무인에 비해 마법의 힘을 빌리는 마검사들을 무시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하지만 마법사이기도 한 레펜하르트는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글쎄? 마갑 엘드라드가 엘드릴로 만든 현 시대 최강의 무구 중 하나임은 분명하지만, 그걸 얼마나 능숙하게 다루느냐는 또 다른 문제니까."
진은眞銀 미스릴보다 몇백 배나 희귀하고 또 강력하다는 마법 금속, 진금眞金 엘드릴.
테네스 백작가에 대대로 전승되는 마갑 엘드라드와 마검 엘드란은 이 진금 엘드릴만으로 만들어진 기물로, 은의 시대 유물 중에서도 최강급의 아티팩트 중 하나였다. 비록 당대의 황금기사가 누군지는 몰랐지만 레펜하르트도 테네스 백작가가 대대로 배출해 내는, 엘드라드를 사용하는 마검사의 존재에 대해선 익히 알고 있었다.
온갖 강력한 수호 마법이 걸려 있고 간단한 약속어만으로도 강력한 마법이 발동되는 이 아티팩트는 분명 착용자에게 오러 능력자 수준의 전투력을 부여해 준다. 단, 제대로 사용할 수만 있다면.
'아무리 강력한 도구라도 사용할 줄 모르면 그림의 떡일 뿐이지.'
전생에 각종 마도구를 만들어 부하들에게 나눠 주었던 그였기에 잘 알고 있었다.
아티팩트도 결국은 도구다. 그리고 도구는 사용자가 얼마나 능숙하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위력이 천차만별로 갈리게 마련이다.
강력한 근력 증강 마법과 스피드 증강 마법을 건 마갑을 대량생산해 나누어 주어도 부하들의 질은 크게 차이가 나곤 했다. 제대로 도구의 힘을 끌어내는 부하가 있는가 하면, 마법에 휘둘려 스스로를 주체 못하는 부하들도 상당히 많았다.
그때 깨달았다. 검을 제대로 다루기 위해 검술이 필요하듯, 마도구를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서도 그에 걸맞은 적합한 훈련이 필요하다고. 그리고 그 훈련에 드는 노력은 결코 검술과 비견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단지 도구의 힘이라고 치부하면, 검을 든 검사들도 모두 도구의 힘으로 강해진 것이라 폄하하는 것이나 다름없지. 적어도 테네스 백작가는 엘드라드의 힘을 제대로 끌어 쓰는 방법을 대대로 연구해 온 가문이니까."
실란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헤에? 레펜 씨는 마검사에 대한 평가가 높네요? 오러 유저 정도 되면 보통 마검사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테네스 백작가의 '마갑 활용술'에는 분명 어지간한 검술 이상으로 심오한 면이 있으니까."
마갑 엘드라드는 분명 강력한 마도구이지만, 그 힘을 100퍼센트 끌어내는 방법은 테네스 백작가에만 전해져 온다. 다른 이들이 엘드라드와 엘드란을 사용한다 해서 오러 능력자와 같은 힘을 보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마갑이 강력한 만큼, 그 강력한 마법에 휘둘려 제 실력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테네스 백작가는 저 엘드라드의 힘을 완벽하게 구사하기 위해서 오러 능력자와 비슷하게, 어쩌면 그 이상으로 연구하고 노력해 온 것이다.
"듣기로는 제대로 된 검술의 길을 잃어 그런 식으로 대체했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오히려 이쪽이 가문 입장에서는 더 낫다고 봐. 아무리 정식 검술을 갈고 닦아도 오러 유저가 나올지 안 나올지는 불확실하지. 그에 비해 황금기사는 확실하게 한 세대에 하나씩은 나오잖아? 오러 유저급 위력을 지닌 무인이 가문에 항상 존재한다는 것은 큰 이득이지."
어쨌거나 지금 확실한 것은, 저 유서스 경이란 자가 틀림없이 오러 유저 수준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레펜하르트가 난감해하며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엘드라드를 쓰는 마검사라... 이거 까다롭겠는데?"
오러 유저와 싸워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태에 빠져 수련을 게을리한 오러 능력자와, 비록 오러를 각성하진 못했지만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며 노력에 노력을 더한 마검사.
아무리 생각해도 레펜하르트는 후자에 점수를 줄 수밖에 없었다.
"...이길 수 있을까?"
그의 혼잣말에 실란이 놀라 물었다.
"응? 레펜 씨, 설마 테네스 백작가와 싸울 생각이에요?"
레펜하르트가 당연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가져간 유물을 찾아와야지."
실란의 안색이 굳었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다시 물었다.
"그럼 지금 도둑질을 하겠다는 건가요?"
레펜하르트가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도둑질?"
도대체 실란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 못 하겠다는 얼굴이었다.
"잠깐만요, 레펜 씨."
잠시 말을 고르더니, 실란이 진지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차탄 공국에서는 솔직히 레펜 씨가 옳았으니까 저도 찬동했어요. 하지만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들은 정당한 방법으로 유적을 탐사했고 그 대가로 유물을 가져갔어요. 그 유물의 정당한 소유자란 말이죠. 지금 레펜 씨가 그들에게서 유물을 가져온다는 것은 도둑질이잖아요?"
"어...."
그제야 레펜하르트도 상황을 파악했다. 그의 입장에서 엘류시온은 자신이 탐사하고 자신이 발굴한 유적이었다. 당연히 그 유물들은 자기 것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박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시간대에서는 확실히 그 유물들은 테네스 백작가가 정당하게 소유하는 물건이었다. 실란의 말은 한 치의 틀림도 없었다.
"그러게? 도둑질이네?"
맹한 레펜하르트의 반문에 실란이 기막히다는 얼굴을 했다. 아니, 그럼 이 양반은 그런 자각도 없었단 말인가?
"으음...."
레펜하르트가 난처해하며 머리를 긁었다. 실란이 살살 그를 달랬다.
"자 자, 미련이 남는 건 이해하겠지만 포기해요. 다른 유적 찾아가면 되는 거잖아요? 저 아직 돈 많아요. 당분간 여행 경비 댈 정도는 충분하니까 너무 다급해할 필요 없어요."
실란은 돈 떨어진 레펜하르트가 마음이 급해서 이렇게 나온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사실은 전혀 다르지만.
'끙,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전생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없으니 실란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도둑질할 거라고 밀어붙일 수도 없다. 납득할 이유도 없이 저렇게 나가면 실망한 실란은 분명 그를 떠나겠지.
'그건 싫은데....'
비록 농담 삼아 최고급 약통이니 뭐니 하긴 했지만, 레펜하르트는 실란을 확실히 동료로 인정하고 있었다. 능력도 뛰어나고 성격도 마음에 들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제대로 모든 것을 설명해 주어야겠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전생 이야기를 할 때는 아니었다. 마법의 힘을 되찾은 후라면 그의 말에 설득력이 생기겠지만, 지금은 말해 봤자 미친놈 취급당할 것이 뻔했다.
'이거 참, 전생 이야기를 뺀 채로 어떻게 얘를 설득해야 하나?'
한참 머리를 굴리던 레펜하르트가 문득 눈을 빛냈다. 그럴듯한 핑계가 떠오른 것이다. 그가 진지한 표정을 짓더니 실란을 바라보았다.
"실란, 역시 동료인 네게는 말해야 할 것 같다."
"응? 뭔데요?"
레펜하르트는 잠시 침을 삼켰다. 이제부터 할 이야기는 입술에 침을 좀 바를 필요가 있었다.
"내 무문이 짐 언브레이커블이라는 건 전에 이야기했지?"
"네, 권왕 제라드의 제자라는 거, 이미 들었죠."
안 그래도 근육에 대한 탐미(?)가 지극한 실란이다. 그런 실란이 지상에서 가장 근육 빵빵하다는 전설의 권사, 제라드를 모를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무문의 가르침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시험이 있거든?"
레펜하르트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그는 권왕 제라드의 제자이며 짐 언브레이커블의 당대 계승자다. 그런데 이 짐 언브레이커블이란 무문이 제자를 좀 독하게 굴리는 부분이 있어서, 하산을 하더라도 절대 노는 꼴을 보지를 못한다. 그래서 하산한 그에게도 몇 가지 시험을 내린 바가 있는데, 자신은 제자 된 도리로 반드시 그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그러니까, 그 시험 중 하나로 레펜 씨의 스승인 권왕 제라드가 엘류시온 유적 안에다가 짐 언브레이커블의 기물 중 하나를 갖다 놓고 그걸 가져오게 시켰다 이 말이죠?"
"응, 제자를 단련시키기 위한 우리 무문의 전통이야."
"최종 시험이란 말이죠...."
실란이 어째 미심쩍다는 눈으로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원래 다른 무문에서도 하산하는 제자의 역량을 시험해 보기 위해 자체적으로 시험장을 만들어 통과시키는 일은 꽤 흔하다. 그러니 짐 언브레이커블에서 저런 식의 시험을 내렸다는 것은 그리 이상할 것이 없다. 하지만....
"그 시험장으로 실존하는 던전을 선택하는 경우는 처음 듣는데요?"
"우리 무문이 원래 좀 무식하거든."
애써 태연한 척하며 레펜하르트는 다시 한 번 입술을 핥았다.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하는 경지에는 다다르지 못했다 보니 자꾸 입안이 말랐다.
실란이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들어 보니 상당히 무식하게 제자 굴리긴 하더군요."
레펜하르트가 어떤 식으로 수행을 받아 왔는지는 실란도 이미 충분히 들었다. 근육에 대한 무한한 동경을 가진 실란조차도 기겁할 만큼 무식한 수행법이었다. 그런 무식한 무문이니 최종 시험이 저렇게 무지막지한 것도 어째 그럴듯했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미심쩍은 점은 남아 있었다.
"아니, 그런데 레펜 씨의 사부는 이미 엘류시온 유적을 한번 탐사했단 소리잖아요? 그런데 유적 안에 있는 은의 시대 유물을 하나도 안 건드린 거예요?"
멀쩡히 던전 탐사해 놓고 그 값비싼 유물들을 하나도 안 건드렸다는 건 역시 이상하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이번에도 자연스럽게 대꾸했다.
"그 와중에 얻은 다른 유물들이 바로 시험에 통과한 제자에 대한 보상이라는 거지."
거짓말도 하다 보니 슬슬 입에 붙는 것 같았다. 엘류시온 유적에 대한 정보는 전혀 세상에 알려져 있지 않고 제라드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설마 누군가가 먼저 선수 칠 거라고는 사부도 예상치 못했을 거라는 것이라며 레펜하르트가 말을 덧붙였다.
"생각해 봐. 미리 이야기를 듣지 않고서야 내가 어떻게 니힐렌을 알아봤겠어?"
"아... 그러고 보니...."
실란이 뭔가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레펜하르트는 단순한 나무 조각처럼 보였던 니힐렌을 바로 알아보았다. 생각해 보면, 테네스 백작가의 마법사들조차 정체를 몰라 그냥 버리고 간 유물을 단순한 무인인 그가 알아보았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의 사부가 미리 언질을 주었던 것이라면 충분히 이해가 간다.
"응, 원래는 니힐렌도 우리 무문의 무구거든. 같이 갖다 놓으신 거라 바로 알아본 거야. 그리고 바로 샛길 찾은 거 봤잖아? 거기가 정말 미발굴된 유적이었으면 내가 그 정보를 어떻게 알고 있었겠어?"
레펜하르트는 니힐렌이며, 엘류시온 유적의 중심부로 직통하는 뒷길을 증거로 들며 실란을 설득했다. 확실히 니힐렌이야 그렇다 쳐도, 중심부 직통 비밀 통로는 유적을 끝까지 탐사해 보지 않고서는 결코 알 수 없는 정보다. 이쯤 되니 실란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이유라면 레펜 씨의 태도도 이해가 가네요."
저 말대로라면 그 기물은 레펜하르트, 정확히는 짐 언브레이커블에 소유권이 있으니 도둑질이란 자각이 없었던 것도 당연했다.
"하긴, 레펜 씨 성격답지 않아서 좀 이상하다고 여기긴 했어요. 아무리 은의 시대 유물이 값비싸다고는 해도, 레펜 씨가 남의 것까지 탐낼 성격은 아니라고 봤거든요."
"그, 그럼! 나도 보통 상황이었으면 그냥 다른 던전 찾아가지 굳이 이렇게 매달리지 않아, 안 그래?"
레펜하르트는 열심히 맞장구를 쳤다. 실란이 알아서 납득할 거리를 늘려 주니 참 편했다.
"그런 상황이면 어쩔 수 없겠네요. 이해했어요."
실란은 완전히 의심을 접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까지 증거가 확실하니 더 의심할 것도 없기는 했다.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며 레펜하르트가 쓴웃음을 지었다.
'미안하다, 실란. 그래도 아주 거짓말인 것만은 아니니까.'
실란이 진지한 얼굴로 레펜하르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레펜 씨는 어떻게든 그 유물만은 되찾아야 하겠군요?"
"응, 그래서 고민이지."
실란이 안색을 굳혔다. 레펜하르트의 태도는 이제 이해가 갔지만, 그렇다 해도 현실적으로 그 유물이 테네스 백작가의 소유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잠시 고민하다 실란이 불쑥 물었다.
"그럼 어쩔 거예요? 가서 사실대로 말하고 그 유물만 인수받을 건가요?"
"너 같으면 내가 방금 한 말을 믿겠냐?"
"무리겠죠?"
실란이 생각해 봐도, 기껏 던전 탐사해 유물을 손에 넣었는데 생면부지의 인간이 나타나 '그중 하나는 원래 내 것입니다. 내놓으세요.'라고 한다면 날강도 이상의 평가는 받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럼 정당한 대가를 주고 구입하는 건요?"
"그것도 생각은 해 봤는데, 역시 힘들겠더라."
레펜하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은의 시대 유물들은 하나같이 고가에 거래된다. 게다가 레펜하르트가 노리는 유물, 엘류시온의 목소리는 현재 사용법을 아는 것이 레펜하르트 본인뿐이다. 그 유물의 사용법을 찾기 위해 대마법사였던 레펜하르트도 몇 년을 연구해야 했으니, 테네스 백작가의 마법사들이 바로 유물의 용도를 파악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사용법을 파악하기도 전에 은의 시대 유물을 남에게 넘길 만큼 저들이 어리석을 리도 없었다.
"실란, 너도 생각을 해 봐라. 네 손에 사용법을 모르는 은의 시대 유물이 있어. 그런데 누군가가 그걸 팔라고 해. 넌 그게 뭔지도 모르는데 말이지. 그럼 팔 수 있겠냐? 자신들에게도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데? 게다가 테네스 백작가가 당장 돈이 급한 가난한 가문도 아닌데 말이야. 몇 년이 걸릴지 모를걸, 그거?"
"그건 그러네요."
실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겉보기와 달리 꽤 세상 물정을 알고 있는 실란이었다. 평화적으로 레펜하르트가 저 유물을 손에 넣을 방법이 없다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실란이 혀를 찼다.
"이거 제대로 꼬였네요? 정말 도둑질이라도 하지 않으면 방법이 없겠는데요?"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까 말이지."
"끄응...."
실란은 뚱한 얼굴로 뺨을 긁었다. 성직자 주제에 도둑질에 가담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상황이 이해 못 할 것이 아니다 보니 계속 반대할 수도 없었다. 어디까지나 자기 것을 되찾겠다는 것이니 도둑질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테네스 백작가가 악의를 가지고 레펜하르트의 물건을 강탈한 것이 아니다 보니 도둑질이 아니라고 하기에도 영 애매하고....
심란해하다가 실란이 문득 결심한 표정으로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그가 쐐기를 박듯 질문을 던졌다.
"그럼 레펜 씨가 필요로 하는 건 그 유물만인 거죠? 다른 건 손 안 대는 거 맞죠?"
"다른 건 필요 없어. 내가 돈 욕심으로 이러는 게 아니란 건 너도 이해했잖냐?"
당당한 레펜하르트의 대꾸에 실란은 마음을 굳혔다. 수많은 유물 중 딱 한 개, 그 정도면 크게 문제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실란이 한숨을 쉬더니 쓴웃음을 띠며 입을 열었다.
"좋아요. 그럼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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