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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7화. 스텟 사냥(3) >

가면 조각을 발견한 내가 가장 먼저 느낀 건 당혹감이었다.

'이걸 왜 얘가 가지고 있는 거지?'

분명 마계에 있어야 할 조각이었다.

그런데 이전에 얻었던 조각도 그렇고, 계속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가면 조각을 얻고 있었다.

'내가 회귀한 나비효과인가?'

사실, 가능성은 이것밖에 없었다.

당장 이번 처럼 초월 플레이어들부터 상위 플레이어들까지 전부 출전하는 미션은 1회차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한 단계 더 스펙업을 할 수 있어.'

나는 서둘러 가면 조각을 품속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그러자 의아하다는 눈빛을 보내오는 파티원들.

내가 챙긴 게 뭔지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 의문을 풀어줄 생각이 없었다.

레이드 형식의 파티 사냥이 아닌 한, 어차피 콜로세움에선 죽인 사람이 모든 소유권을 갖는다.

그렇기에 내가 알려줘야 할 의무는 없었다.

그걸 아니까 아무도 입 밖으로 묻지 않는 거겠지.

"음. 그대 덕분에 불상사를 미연에 막을 수 있었군. 정말 고맙다."

그러자 필릭스가 침묵을 깨고, 내게 고마움을 표했다.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목적일 것이다.

"아닙니다."

"이곳에서 처리해야 할 일은 모두 끝난 것 같으니, 다시 출발하겠다. 렌, 그대는 중급 악마들을 처리하고 오느라 고생했으니, 후방을 맡도록. 지금부턴 내가 길을 뚫겠다."

"알겠습니다."

평소라면 내가 어떻게든 선두에 서겠다고 얘기했겠지만,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조각은 무슨 능력일까.'

지금은 아이템 합성을 하고 싶어 손이 근질근질 거렸기 때문이다.

"출발한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지하 공략.

챙! 채챙! 콰과광! 챙! 챙!

필릭스가 방패와 검을 휘두르며 길을 뚫는 사이, 대열의 맨 뒤에 있던 나는 품속에 넣었던 가면 조각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이마에 가져다 댔다.

'아이템 합성.'

띠링!

[<가면:블라디미르의 희열><소모 아이템:가면의 파편(초록)> 을 합성하시겠습니까?]

[한번 합성하면 되돌릴 수 없습니다.]

[Yes / No]

'예스.'

띠링!

[<가면:블라디미르의 희열><소모 아이템:가면의 파편(초록)> 의 합성에 성공했습니다!]

[<가면:블라디미르의 열망> 을 획득합니다!]

[<가면:블라디미르의 열망>]

[피를 사랑하는 고위 악마, 블라디미르 공작이 착용하던 가면이다. 오랜 시간 동안 착용하면서 주인의 능력 일부가 깃들어 있다.]

[착용 시 <피의 각성>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

[등급 : 신화]

[<피의 각성> ― 보유하고 있는 능력 중 한 가지를 무작위로 강화시킨다. 강화 수치는 랜덤이다.(발동 조건이 존재합니다.)]

[<피의 각성> 발동 조건 ― 생명체를 처치할 때마다 1포인트씩 상승한다. 3분 이내에 다른 생명체를 처치하지 못하면 포인트 상승이 초기화된다. 100포인트를 채울 경우 <피의 각성>이 발동되며, 유지 시간은 24시간이다. {재사용 대기 시간 : 24시간(발동이 종료된 이후부터 재사용 대기 시간이 계산된다.)}]

[<피의 각성>은 발동시킬수록 각성의 효과가 점점 커집니다.]

'드디어.'

아이템 등급을 본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가면을 신화 등급까지 업그레이드 시킨 것이다.

하지만 아이템 설명을 본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보유하고 있는 능력 중 한 가지를 무작위로 강화시킨다고?'

설명이 너무 어정쩡했다.

피의 강화 능력이 걸리면 스텟을 상승시킬 수 있는 퍼센트가 더 늘어난다는 건지, 아니면 특전 유지 시간이 길어진다는 건지, 명확하지 않았달까.

'퍼센트가 늘어나는 거면 완전 사기급 능력인데.'

아무래도 피의 각성을 직접 발동시켜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성석 공략이 끝난 다음에나 쓸 수 있겠군.'

물론 피의 각성을 발동시키겠다고, 지금 당장 내가 선두로 달려 나갈 순 없었다.

길목이 좁은데다가, 지금처럼 진영을 짜서 움직이고 있는 상황에서 개인플레이는 절대 금물이었으니까.

마성석을 부수고, 록탄 성을 빠져나간 뒤에나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챙! 채챙! 싸아아아아아아―

"흐읍!"

쾅! 서걱! 서걱!

"끄아악!"

필릭스는 탱커임에도 불구하고 돌파력이 굉장했다.

선두를 잡은 이후, 단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을 정도.

[피에 잠긴 바람의 꽃잎!]

콰과과과과과광!

거기다 내가 돌파할 때와 달리, 일리아가 마법으로 서포트해주고 있었다.

두 사람은 오늘 처음이거나, 혹은 두 번째 만남일 텐데도 불구하고, 마치 한 몸처럼 움직이며 악마들을 쓸어버리고 있었다.

서로가 어떻게 움직일지 미리 알고서 행동하는 느낌.

'대단하네.'

저런 움직임이 나오기 위해선, 엄청나게 많은 경험이 필요했다.

그래야 서로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움직이는 게 가장 효율적인지 예측할 수 있었으니까.

그때였다.

―더 강한 힘을 원하는가.

'무슨!'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나는 서둘러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초감각도, 그리고 마력장도 주변에 파티원들 말고는 아무도 없음을 알려왔다.

'분명 목소리를 들었는데?'

나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래도 환청을 들은 모양.

'팜에 돌아가면 휴식을 취해야겠군.'

길게 한숨을 내쉰 나는 관자놀이를 꾹, 꾹 눌렀다.

환청이 들린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다.

그걸 그대로 방치했다간, 번아웃이나 PTSD같은 정신 질환이 올 수도 있었다.

―더 강한 힘을 원하는가.

그때, 또다시 들려오는 목소리.

'환청이 아냐.'

두 번째로 듣자 확신할 수 있었다.

환청이라기엔, 목소리가 너무 또렷했다.

이번에도 근처엔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상황.

그렇다는 건.

'가면이 얘기하고 있는 건가?'

환청이 시작된 건 가면을 업그레이드한 뒤부터였다.

악마가 사용하던 가면인 데다가, 신화 등급이라는 지고한 등급.

그렇게 생각하니 얼추 맞아떨어졌다.

'신화 등급 아이템은 다르다 이거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더 강한 힘이 필요하냐고?

'너무나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하지만 나는 굳이 가면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보나 마나 뻔하지.

더 강한 힘을 줄 테니 영혼을 바쳐라 따위의 얘기를 할 게 분명했다.

'초월 리그의 챔피언이 되게 해준다면 고민해 보지.'

그때부터 나는 가면이 속삭이는 말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모두 전투 준비."

5분 정도 더 내려오자, 엄청난 크기의 지하 공동이 모습을 드러냈다.

20미터 높이의 천장과, 록탄 성의 지하를 통째로 만든 듯한 공간.

중심부에서 자줏빛을 뿜어대는 2미터 크기의 마성석.

그 마성석을 지키고 있는 백 명 정도의 악마들까지.

'쉽지 않겠는데.'

나는 빠르게 적들의 전력을 살폈다.

두 쌍의 날개를 가진 악마가 다섯, 한 쌍의 날개를 가진 악마가 서른 정도.

그 외에 나머지는 모두 하급 악마들이었다.

"일리아님과 내가 상급 악마들을 상대하겠다. 렌을 제외한 일곱 명은 지하 공동으로 들어오지 말고 계단 쪽에서 입구를 차단한다."

"알겠습니다."

"예!"

펄럭!

빠르게 지시를 내린 필릭스가 일리아와 함께 날갯짓하며 악마들에게 달려들었다.

'시작해볼까.'

나도 뇌전을 흩뿌리며 녀석들에게 쇄도했다.

"흥! 오랜만이군, 필릭스. 이번에야말로 네 놈의 목을 꺾어주마!"

악마들도 각자 무기를 뽑아 든 채 날개를 펴며 날아들었다.

상급 악마 하나가 남아, 마성석을 지키고 있을 뿐.

그때부터 지하 공동에서 한바탕 전투가 펼쳐졌다.

'일단 하급 악마들부터.'

날아드는 중급 악마들의 공격을 가볍게 피한 나는 하급 악마들부터 처리하기 시작했다.

서걱! 서걱! 서걱!

[<피의 각성> 이 1 포인트 상승합니다. (1/100)]

[<피의 각성> 이 1 포인트 상승합니다. (2/100)]

[<피의 각성> 이 1 포인트······.]

[<피의 각성> 이······.]

창이 한 번 번뜩일 때마다 하급 악마 두세 명이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사실, 이런 전투에서는 약한 녀석들부터 처리하며 적의 숫자를 줄여나가는 게 훨씬 유리하다.

필릭스도 그걸 알고 있을 것이고.

그런데도 상급 악마들부터 1순위 타깃으로 잡고 움직이고 있는 건.

'상급 악마들의 어그로가 나한테 끌릴 걸 방지하기 위해서겠지.'

말하자면 날 배려한 행동이랄까.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것은 명확했다.

잔챙이들부터 시작해서 중급 악마들까지 차근차근 줄여나가는 것.

"으윽! 노, 놈을 에워싸라!"

"헉! 너무 빨라!"

마침 공간도 넓겠다, 360포인트에 이르는 엄청난 민첩 스텟으로 치고빠지자, 녀석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띠링!

[<벽력 >이 발동됩니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벽력이 터지자, 그나마 얼마 남지 않은 하급 악마 일곱의 몸이 단숨에 터져 나갔다.

'하급 악마는 끝났고.'

이제 중급 악마를 처리할 차례.

나는 곧장 마성석이 있는 곳으로 돌진했다.

날아다니는 중급 악마들을 그대로 상대하는 건 효율이 좋지 않아서, 이전처럼 마성석을 이용해 거리 조절을 할 예정이었다.

일단 그러려면, 마성석을 지키고 있던 상급 악마부터 치워야 한다.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놈이군."

내가 달려들자, 마성석을 지키던 상급 악마가 코웃음 쳤다.

완전히 날 무시하는 모습.

'아직 섬전을 한 번도 안 썼으니까 충분히 가능성 있어.'

스텟은 300 초중반.

스텟만 놓고 봤을 때는 상대가 되지 않을 만큼 강자였지만, 천세운과의 싸움을 통해 깨달은 게 있었다.

콰지지지지지지지직! 채애애애앵!

"가소롭구나."

전력을 다해 녀석에게 창을 내리치자, 녀석이 여유롭게 검을 들어 올렸다.

챙! 채챙! 콰지직! 챙! 콰지직!

녀석의 검과 부딪힐 때마다 내 몸이 한 움큼씩 뒤로 밀려 나갔지만, 나는 이를 악문 채 계속해서 창을 휘둘렀다.

띠링!

[<벽력 >이 발동됩니다.]

때마침 터진 벽력.

창에서 강렬한 뇌전이 뿜어져 나오며, 사방을 잠식해 들어갔다.

"헛!"

그걸 본 녀석이 빠르게 뒤로 빠져나갔다.

위험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어딜.'

꽈과광!

섬전을 사용해 녀석의 코앞으로 순간 이동한 나는, 녀석에게 벽력이 깃든 창을 내리꽂았다.

상급 악마가 눈을 치켜떴다.

"······!"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뇌전의 칼날이 사방을 찢어발겼다.

'끝났군.'

벽력에 맞은 상급 악마의 상반신이 통째로 사라져 있었다.

"칼리세이드님! 레인스님이······!"

"이런 병신같은 새끼! 고작 상위 플레이어 한 명을 못 막아서! 모두 놈을 처리해라!"

그러자 필릭스와 일리아를 몰아붙이던 모든 중급 악마들이 내게 달려들었다.

'누가 사냥꾼인지 알려주지.'

나는 이전에 루에타 요새에서 싸웠던 것처럼, 마성석 근처를 왔다 갔다 하며 녀석들을 한 명씩 낚아 먹었다.

서걱! 서걱! 서걱!

"끄윽······!"

놈들이 어떻게든 내 움직임을 묶어보려고 했지만, 마성석이 있는 이상 녀석들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띠링!

[체력 스텟이 1 상승합니다.]

그저 내 스텟의 제물이 되었을 뿐.

└와, 쟤 누구냐? 마성석으로 거리 컨트롤하는 게 예술이네ㄷㄷ

└렌을 모르시는 걸 보니 고위 리그 이상 시청자님이시군요, 후후.

└애초에 중급 악마 수십을 혼자서 쓸어버릴 정도면 상위 리그에 있을 실력이 아닌데? 왜 아직도 상위 리그에 있는 거임?

└ㅋㅋㅋㅋㅋㅋ 쟤 상위 리그에 올라오고 이제 다섯 번째 경기임 ㅋㅋㅋ

└근데 저런 수준이라고? 통곡의 구간을 그냥 지날 정도면 어마어마한 네임드인가 보네ㄷㄷ 렌? 닉네임 기억해 둔다.

└렌 지구 출신이에여 ㅋ 초기 스텟은 평균 10도 안 됐음~

└???????

"아, 안돼!"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단말마를 남긴 채 터져 나가는 중급 악마를 끝으로 나는 창을 거뒀다.

"내, 내가 지다니······!"

주변을 둘러보니, 필릭스와 일리아도 마침 상급 악마들을 모두 쓰러트리곤, 내가 있는 곳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그럼 이제 남은 건.

'마성석을 깨야지.'

"고생 많았다, 렌. 설마하니 상급 악마까지 쓰러트릴 줄이야."

빠르게 날아온 필릭스와 일리아가 날개를 접고, 내 앞에 사뿐히 착지했다.

"운이 좋았습니다."

"음, 일단 마성석부터 깨고 나서 얘기하지. 일리아님?"

"네, 맡겨주세요."

[찰나의 섬광!]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앙!

일리아가 시전한 마법이 단번에 마성석을 박살 냈다.

'미친.'

루에타 요새를 공략하던 시절, 내가 저걸 부수기 위해 수십 번을 두드리고, 끝끝내 벽력까지 터지고 나서야 부술 수 있었던 걸 생각해 보면, 일리아의 마법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두 개의 수정.

"쯧, 고결한 수정이 두 개밖에 안 나왔군."

순간 나는 필릭스와 일리아의 눈치를 살폈다.

지하 공동을 공략한 플레이어의 숫자는 셋.

그런데 고결한 수정이 두 개밖에 나오지 않은 것이다.

"······."

싸늘한 침묵이 우리 셋 사이에 웅크렸다.

'곤란한데.'

하필이면 그 셋 중에서 내가 제일 약한 상황.

까딱 잘못했다간, 고생은 고생대로 해놓고 손가락만 빨아야 할 수도 있었다.

'그럴 순 없지.'

나는 창을 고쳐잡으며 긴장감을 끌어올렸다.

만약 두 사람이 힘을 앞세워 고결한 수정을 가져가려 한다면, 칼부림도 불사할 생각이었다.

아무리 지금은 서로 협력해야 할 파티원들이지만, 그렇다고 눈앞에서 코 베일 순 없으니까.

그때, 필릭스가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하는 수 없군. 두 개밖에 나오지 않았으니, 공헌도로 계산합시다."

"전 좋아요."

그의 의견에 찬성하는 일리아.

나도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만 계산해 준다면, 적어도 한 개는 내 차지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제대로 계산해 줄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지만.

"공헌도는 어떻게 계산하실 생각이십니까?

내 물음에 필릭스가 피식 웃었다.

"걱정할 것 없다. 공헌도로 계산하면 그대와, 일리아님. 두 사람이 하나씩 갖는 게 맞을 테니."

"앗, 감사해요. 그럼 실례할게요."

그러자 일리아가 잽싸게 고결한 수정 하나를 주워들었다.

'이걸 양보한다고?'

한동안 침묵을 지킨 나는 필릭스를 바라보았다.

고결한 수정의 가치를 생각하면, 너무나 빠른 포기였으니까.

"괜찮으시겠습니까?"

"두 개밖에 안 나오지 않았는가. 어쩔 수 없지."

"배려에 감사드립······."

"잠깐."

필릭스에게 가볍게 목례한 내가 고결한 수정을 삼키려고 할 때였다.

'뭐지?'

그렇게 얘기해놓고 설마 이제 와서 소유권을 뺏으려는 건가?

하지만 이어지는 필릭스의 말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혹시 거래를 하지 않겠나?"

"거래라면?"

내 물음에 필릭스가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를 풀어서 내밀었다.

"나는 이 아이템과 고결한 수정의 교환을 희망한다."

나는 필릭스가 건네는 목걸이를 떨떠름한 표정으로 받았다.

'아이템 확인.'

띠링!

[<목걸이:몽환의 달빛>]

[영면에 빠진 달의 여신이 착용하던 목걸이. 달빛의 힘을 빌려 쓸 수 있다. 주인이 죽으면서 능력 일부가 봉인되어 있는 상태다.]

[달의 크기에 비례하여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최대 15%]

[달빛 아래에 있으면 1분당 체력이 1%씩 회복된다.]

[달빛 아래에 있으면 1분당 마력이 1%씩 회복된다.]

[착용 시 스킬 슬롯이 한 개 추가된다. 단, 달빛 아래에서만 추가된 스킬을 사용할 수 있다.]

[등급 : 준신화]

아이템 정보를 확인한 나는 깜짝 놀랐다.

스텟 상승과, 체력 및 마력 회복.

거기다 가장 중요한 건.

'스킬 슬롯이 추가된다고?'

* * *

"······."

곳곳이 피로 범벅이 된, 침묵이 흐르는 방 안.

꿈틀.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그곳에서, 미묘한 변화가 생겨났다.

꿈틀꿈틀.

네 쌍의 날개 아래에서 죽은 시체의 배가 꿈틀꿈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스으으윽―

처음엔 미묘한 떨림 정도였던 꿈틀거림이 점점 거세지더니, 이내 시체의 배가 조금씩 갈라져 갔다.

그리고 그 안에서 고개를 내민 존재.

매끈한 피부에, 길다란 몸.

긴 혓바닥까지.

모습을 드러낸 건 작은 실뱀이었다.

"후우. 드디어 이 껍데기를 벗어나는군."

< 147화. 스텟 사냥(3) > 끝

< 148화. 스텟 사냥(4) >

아이템 정보를 확인한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달의 크기에 비례해서 스텟 최대 15% 증가.

이건 달의 메아리에도 있는 옵션이라 대충 어떤 개념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초승달이냐, 반달이냐, 보름달이냐에 따라서 5프로씩 늘어나는 거겠지.'

달이 뜨는 밤에만 적용된다는 조건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엄청난 옵션이었다.

평균값으로만 잡아도 10%나 상승하는 거였으니까.

'1분당 체력이랑 마력이 1프로씩 회복되는 것도 좋은데?'

1시간이면 60%나 회복된다.

뇌신 강림처럼 체력이 무시무시하게 소모되는 스킬이 아닌 이상, 아무리 격렬하게 움직여도 체력이 닳지 않을 것이다.

거기다 천뢰십보도 더 이상 마력 걱정하며 싸우지 않아도 되고.

'이렇게 옵션 두 개만 봐도 엄청난 아이템이긴 한데.'

하지만 플래티넘 등급의 스킬로 업그레이드시켜 주는 고결한 수정보다 좋은 건 아니었다.

그렇다면 관건은 딱 하나.

'스킬 슬롯의 가치를 얼마로 매기냐가 관건이겠군.'

사실, 스킬 슬롯의 가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보유한 골드, 그리고 현재 가지고 있는 스킬의 등급이 어떻냐에 따라서 쓸모없는 옵션이 될 수도, 엄청 귀한 옵션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당장 하위 플레이어들만 봐도 3티어 혹은 2티어 스킬들로 도배하고 있다.

그런 이들에게 스킬 슬롯 한 개를 추가로 준다?

'그렇게 되면 2티어짜리 스킬 하나의 값어치밖에 못 하는 거지.'

어차피 스킬 슬롯을 줘봤자 2티어, 혹은 3티어 스킬 하나를 추가할 테니 그리 유용한 옵션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약간 상황이 다르다.

골드는 다 쓰지도 못할 정도로 차고도 넘치는 데다가, 현재 내 인벤토리에는 극한심결이라는 플래티넘 스킬북 하나가 잠자고 있다.

스킬 슬롯이 하나 추가된다면?

'플래티넘 등급 스킬 한 개가 추가되는 거나 마찬가지야.'

한마디로, 내게 있어 스킬 슬롯 한 개는 플래티넘 등급 스킬의 값어치가 있다는 뜻.

물론 달빛 아래에서만 활성화된다는 페널티가 존재하긴 하지만, 뇌신이나, 마력 상쇄같이, 범용성 좋은 스킬을 하나 더 얻을 수 있다면 내 전술 운용 폭도 훨씬 늘어날 수 있을 것이다.

'차분하게 정리해보자.'

고결한 수정은 스킬 등급 업그레이드로, 플래티넘 등급 스킬을 얻을 수 있다.

반면에 몽환의 달빛은 밤에만 활성화된다는 페널티가 있긴 하지만, 스킬 하나와 체마 1%씩 회복, 5%에서 15% 사이의 스텟이 증가한다.

굳이 비교하자면, 고결한 수정이 S급이고, 몽환의 달빛은 A+ 등급 3개를 얻는 느낌.

'활용도 면에선 고결한 수정보다 몽환의 달빛이 더 나아.'

이미 내게 S급 스킬이 제법 있는 상황이었기에, 오히려 여러 방면에서 도움을 주는 몽환의 달빛 활용도가 더욱 높을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나는 고결한 수정을 필릭스에게 내밀었다.

"교환하겠습니다."

"음. 거래에 응해줘서 고맙다."

그러자 필릭스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에게 윈-윈이 되는 거래가 된 셈이었다.

'좀 꺼림직하긴 하지만.'

이후에 고위 리그로 올라가면, 필릭스와 적으로 만날 수도 있다.

그때, 지금 거래가 부메랑처럼 돌아올 수도 있는 상황.

하지만 나는 몽환의 달빛을 착용하며 아쉬움을 털어냈다.

'다음에 또 지옥에 올 일이 있으면, 그때 다시 도전해 봐야지.'

고결한 수정은 기회가 되면 또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이었으니까.

이 정도면 내가 훨씬 더 이득 봤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만 나가지."

이걸로 지하 공동에서 해야 할 일은 모두 끝났다.

악마들도 모두 처치했고, 마성석도 부쉈고, 챙길 것도 챙겼다.

이제, 본대와 합류해 남은 악마들을 정리할 시간이었다.

필릭스를 선두로 지하 공동을 빠져나오자, 어느새 해가 지평선 끝에 걸려 있었다.

록탄 성의 하늘을 뒤덮고 있던 얇은 막도 종적을 감췄다.

마성석이 부서지면서 결계의 가동도 멈춘 모양이었다.

"크윽! 결국 성이 함락당하다니."

"모두 퇴각해! 어서!"

우릴 발견한 하급 악마들이 썰물처럼 성문을 빠져나갔다.

'녀석들을 죽여서 피의 각성을 발동시켜봐야······어?'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도륙하려는데, 필릭스가 반대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성문은 지금 악마들이 빠져나가는 곳, 하나 뿐.

'더 이상 내부에 볼일이 없을 텐데?'

내가 모르는 히든 피스가 있나?

혹시 모르기에 나는 서둘러 필릭스의 뒤를 따랐다.

서걱! 서걱!

"끄악!"

하지만 기대했던 것과 달리, 필릭스는 한참 동안 내부에 남아 있는 악마들을 정리하는 데 열중할 뿐이었다.

[킬 수 현황]

[1위. '렌' 3,644킬]

[2위. '주소월' 3,592킬]

[3위. '쿠 훌린' 3,477킬]

[4위. '몽연' 3,408킬]

[5위. '을지문덕' 3,312킬]

록탄 성에 침투한 지 어느덧 20분째.

한참을 벌려놨던 2위 그룹의 킬 수가 어느새 내 뒤를 바짝 뒤쫓고 있었다.

1위를 사수하려면 어서 본대와 합류해, 다시 킬 수를 늘려야 하는 상황.

"본대와 합류 안 하십니까?"

참다못한 나는 필릭스에게 물었다.

"물론 합류해야지. 고주몽님도 우릴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계실 테니."

"그런데 왜······?"

"그렇다고 손님이 오시는데 집안 청소를 안 할 수야 있겠는가."

'손님?'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필릭스가 피식 웃으며 하늘을 가리켰다.

"마침 오시는군."

까악- 까악-

필릭스가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지옥에만 산다는 지옥까마귀들 너머로, 하얀색 점 다섯 개가 보였다.

'저게 뭐지?'

너무 멀어서 저게 뭔지 정확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내 귓가로 작은 이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너무 희미해서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는데, 그 소리는 미약하게나마 조금씩 커져가고 있었다.

"······?"

그리고 어느 정도 소리가 커지자, 그 소음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쐐애애애애애액!

'무슨!'

그것은 공기를 가르는 파공음이었다.

작은 소리는 점점 커져가더니, 나중엔 귀가 얼얼할 정도였다.

실시간으로 가까워져 오는 굉음에 나도 모르게 몸에 힘이 들어갔다.

"······!"

다른 파티원들도 긴장한 듯,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그 소리가 절정에 달할 때 쯤!

파아아아아앙!

허공을 강하게 치는 소리와 함께 엄청난 충격파가 나를 덮쳤다.

바닥에 흩뿌려져 있던 돌조각들이 날아와 몸을 두들겼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오랜만이구나, 필릭스, 일리아."

다섯 천사.

"발할라에서도 그대들의 위명을 계속해서 듣고 있었다. 이번에도 큰 공을 세웠구나."

7쌍의 날개를 가진 좌천사座天使가 하나, 그리고 다섯 쌍의 날개를 가진 역천사 네 명이 좌천사를 호위하듯 감싸고 있었다.

"잘 지내셨습니까, 세라엘님."

"오랜만에 뵈어요."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필릭스와 일리아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일면식이 있는 천사인 모양.

그와 반대로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미친······!'

3급 좌천사가 보인, 엄청난 위용에 나도 모르게 긴장한 것이다.

저 어마어마한 속도를 고작 날갯짓 한 번에 멈춰 세울 줄이야.

세라엘이라고 불린 좌천사가 나를 포함한 파티원들을 쓸어보며 입을 열었다.

"나는 3급 좌천사 세라엘. 위대한 업적을 세운 이들을 만나서 반갑구나. 정말 고생 많았다. 고작 열 명이서 성城급 주둔지를 함락시키다니."

"아, 아닙니다."

세라엘의 치하에 파티원들이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대들의 무용담이 천계에 울려 퍼질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도 용맹정진······."

"세라엘님. 시간이 없습니다."

세라엘이 한바탕 칭찬을 늘어놓자, 곁에 있던 천사 하나가 그녀를 재촉했다.

그러자 세라엘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시간이 없어서 제대로 인사를 나눌 수 없음을 이해해다오."

그런 그녀의 모습에 필릭스가 대표로 나섰다.

"아닙니다, 세라엘님. 성 내부에 있는 악마들은 모두 처치했으니, 바로 신성석을 설치하시면 됩니다."

"음, 고맙다. 그럼 또 만나길 고대하지. 모두 이동하라."

"네."

세라엘과, 그녀를 보좌하던 네 명의 천사가 날개를 접고 지하 공동으로 향했다.

'록탄 성에 신성석을 설치하려고 온 거였구나.'

나는 그제야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성급 주둔지처럼 중요한 구역은 곧바로 신성석을 설치해, 천계의 영역으로 만드는 모양이었다.

'하긴, 마성석처럼 결계도 만들 수 있고, 게이트도 열 수 있다고 했으니.'

전략적 측면에서 보자면 당연한 걸지도.

록탄 성에서의 일정이 모두 마무리됐다고 생각한 필릭스가 파티원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모두들 고생 많았다. 나와 일리아님은 바로 본대가 있는 곳으로 이동할 예정이다. 혹시 이곳에 남아 세라엘님이 신성석 설치가 끝날 때까지 지하 공동의 입구를 지켜줄 자 있는가?"

"제가 지키겠습니다."

"저도 남겠습니다."

"저도요."

그러자 나를 제외한 모든 파티원들이 손을 들었다.

피가 튀기는 전장보다, 이곳이 안전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렌, 그대는 우리와 함께하겠는가?"

필릭스의 물음에 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좋다. 그럼 우린 바로 이동하도록 하지. 모두들 건투를 빈다."

그렇게 록탄 성 침투 미션이 마무리되었다.

이제, 피의 각성을 발동시켜 볼 차례였다.

* * *

니플헤임에 위치한 마계의 거점據點, 프레미어.

그곳에 있는 대저택에서, 누군가 길다란 테이블의 상석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벌컥-

그때, 한 악마가 대전의 문을 열고 들어와, 테이블 앞에서 부복했다.

"최상급 악마, 발락. 거짓된 태양의 군주, 레비아탄님을 뵈옵니다. 임무를 완수하고 복귀했습니다."

쏴아아아아아아아아―

새로 들어온 악마의 등 뒤로, 살을 에는 삭풍이 몰아쳤다.

"고개를 들어라, 발락."

"예."

테이블 상석에 고고히 앉아 있던, 레비아탄이라 불린 악마의 말에 발락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천사의 껍데기를 쓰고 있다 할지라도 천계에 퍼져 있는 신성력을 버티기 쉽지 않거늘. 고생 많았노라. 그대의 활약상을 왕께서도 무척 만족스러워 하신다더군."

"황송할 따름입니다."

발락이 감격스럽다는 듯 다시 한번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래, 물건은 잘 전달했는가."

"예. 숙주에게 정확히 전달했습니다."

발락의 말에 레비아탄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릇은 만나봤고?"

"예. 멀리서나마 잠시 보는 게 다였습니다만."

"직접 본 그릇은 어땠지?"

"무척 뛰어난 육체였습니다. 과연 왕께서 점지하실만한 그릇이었나이다."

"그리고?"

"쉽게 깨지지 않는, 단단한 그릇처럼 보였습니다."

이어지는 발락의 말에 레비아탄이 기다란 어금니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그것 참 다행이로고. 신물 하나를 내어준 보람이 있어. 후후, 고생했다. 피곤할 테니 이만 물러가 보거라."

"예. 소인은 이만."

발락이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뒷걸음질 치며 문밖으로 빠져나가고, 저택에 싸늘한 정적이 찾아왔다.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은 채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레비아탄이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 벽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엔 손에 가면을 든 어떤 미남자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우리 일곱이 다시 모이게 될 날이 머지않았구나."

한참 동안 그림을 뚫어져라 보던 레비아탄이 작게 읊조렸다.

* * *

쐐애애애애애액!

날개는 굉장히 유용한 부위다.

장거리 기동성, 순간 속도, 정찰, 공간 활용 등등 다양한 면에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날개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무척 컸다.

띠링

[보름달이 떴습니다.]

[<목걸이:몽환의 달빛> 이 달의 힘을 빌려와 모든 스텟이 15% 상승합니다.]

[<로브:달의 메아리> 가 달의 힘을 빌려와 모든 스텟이 5% 상승합니다.]

'벌써 도착했군.'

필릭스의 등에 올라탄 채 아래를 내려다보던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록탄 성에서 출발한 지 고작 3분 남짓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본대가 있는 곳에 도착한 것이다.

그야말로 엄청난 기동성.

"여기! 부상자 뒤로 끌고 가!"

"죽어!"

"어어! 조심해요!"

고개를 숙이니, 새까맣게 지상을 덮은 채 서로에게 무기를 휘두르는 플레이어들과 악마들이 보였다.

하늘 위에서 바라보는 넓은 시야는, 적 진영과 아군 진영을 한눈에 담을 수 있었다.

'많이 죽었네.'

적 지상군은 대략 1만 정도.

반면에 아군은 어느새 절반 가까이 죽어서 500명이 채 남지 않았다.

지금 상태라면 시간이 지날수록 피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적 총대장이 지쳤다! 쉴 틈을 주지 마라!"

―어림없다!

파바바바바박!

저 멀리, 분주히 돌아다니며 화살을 쏘는 고주몽의 모습이 보였다.

온몸에 가득한 상처에서, 그동안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슬슬 뛰어내려야겠군.'

어느덧 필릭스와 일리아가 적 제공권 안에 들어온 상황.

잠시 후면 공중전이 시작될 것이다.

"감사합니다, 필릭스님. 전 여기서 내리겠습니다."

"음! 건투를 빌겠다!"

그와 동시에 나는 필릭스의 등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높이가 제법 높았지만, 초인의 범주를 아득히 뛰어넘은 내게 있어선 그다지 위험한 높이가 아니었다.

타닥-

'다들 어딨지?'

플레이어들 사이에 부드럽게 착지한 나는 가장 먼저 카이로시아와 파티원들부터 찾았다.

"렌님!"

때마침 들려오는 카이로시아의 목소리.

고개를 돌리니, 파티원들에게 둘러싸여 마법을 뿌리는 카이로시아의 모습이 보였다.

'무사했군.'

모두들 상처 하나 입지 않은, 쌩쌩한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키아라가 어그로를 끌지 말고 견제만 하라는 내 지시를 잘 따라 준 모양.

그 광경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나는, 한달음에 파티원들에게 다가갔다.

"다녀오셨어요?"

"고생 많으셨어요, 렌님."

반갑게 날 맞이해주는 파티원들.

"예. 상황이 좋지 않으니, 일단 이번 전투부터 끝내고 얘기 나누시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나는 격전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파티원들이 무사한 것도 확인했겠다, 이제부터 킬 수를 쓸어 담을 계획이었다.

겸사겸사 이번에 새로 얻은, 피의 각성도 발동시켜 볼 생각이었고.

"오오, 렌님이 오셨다!"

"모두 길 막지 말고 비켜! 렌님 지나가신다!"

다행히, 날 알아본 플레이어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길을 만들어 준 덕분에 금세 최전방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시작해 볼까.'

가볍게 창을 돌려 손목을 푼 나는 곧장 적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띠링!

[<벽력 >이 발동됩니다.]

꽈아아아아아아앙!

"헉, 미친!"

"모두 조심해!"

일격에 열 명이 넘는 하급 악마의 몸이 터져나가고, 빛기둥이 터지며 어그로가 순식간에 내게 집중됐다.

나는 쿨타임이 돌아올 때마다 섬전을 쓰며, 적들 사이를 무아지경으로 휘저었다.

띠링!

[<피의 각성> 이 1 포인트 상승합니다. (63/100)]

'확실히 고결한 수정보단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군.'

이전이라면 마력이 부족할 걸 염려해 섬전을 필요할 때만 썼다면, 지금은 쿨타임이 돌 때마다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는 상황.

―더 강한 힘을 원하는가.

그러다 보니, 적들이 내 움직임에 전혀 반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1분에 한 번씩 순간이동을 하는데, 거기에 반응할 수 있다면 하급 악마의 범주라고 보긴 어려울 테니까.

[<피의 각성> 이 1 포인트 상승합니다. (87/100)]

전세가 순식간에 급변했다.

"어어······! 저, 저리 가!"

"살려줘!"

거기다 보름달이 뜨면서 추가로 스텟이 20프로나 상승한 덕분에, 내 움직임은 현재 최고조에 가까웠다.

서걱! 서걱!

창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악마 서너 명의 목이 허공을 날았다.

이 정도라면 학살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

'나쁘지 않은데.'

지금 이 순간, 내게 있어 악마들은 걸어 다니는 숫자에 불과했다.

[<피의 각성> 이 1 포인트 상승합니다. (100/100)]

[<피의 각성> 이 발동합니다.]

그리고 기다리던 순간이 찾아왔다.

'이제야 사용해 보는군.'

피의 각성 효과는 보유하고 있는 능력 중 한 가지를 무작위로 강화시킨다는 것.

그래서 도대체 어떤 식으로 강화시켜준다는 건지 궁금하던 찰나.

[<피의 각성><피의 흡수>를 강화시켰습니다.]

[지금부터 24시간 동안 <피의 흡수> 능력의 효과가 100% 증가합니다.]

"······."

순간 내가 적들 한복판이라는 것을 망각했다.

나도 모르게 멍하니 상태창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 뭐라고?'

피의 흡수 효율이 두 배?

이제부터 그럼······.

1 + 1인 건가?

< 148화. 스텟 사냥(4) > 끝

< 149화. 스텟 사냥(5) >

피의 강화, 피의 회복, 악마의 눈, 피의 흡수.

블라디미르 가면의 능력 중에서 가장 좋은 걸 꼽으라면 단연 피의 흡수다.

'애초에 비교가 불가능하지.'

물론 나머지도 정말 대단한 능력이다.

어지간한 준신화 등급의 아이템도 스텟을 15%에서 20%까지밖에 올려주지 않는데, 피의 강화는 무려 30%나 상승시켜준다.

피의 회복도 마찬가지다.

현재 내가 거리낌 없이 적진 한복판을 돌파하고, 뇌신 강림처럼 리스크가 큰 스킬을 아무 거리낌 없이 사용할 수 있는 건, 피의 회복 덕분이었다.

―더 강한 힘을 원하는가.

악마의 눈은 미리 상대의 스텟을 파악하게 해줘서, 더 효율적으로 싸울 수 있게 만들어줬고.

'정말 사기급 옵션이야.'

하지만 내가 피의 흡수를 꼽은 이유는 딱 한 가지였다.

저 세 가지도 무척 뛰어난 능력들이지만, 내가 영구적으로 강하게 만들어주는 건 피의 흡수밖에 없었으니까.

당장 이번 경기에 들어와서 올린 스텟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경기 초반, 지상군을 전멸시키면서 2스텟이 상승했고, 카이시엘을 죽이면서 체력이 6스텟 올랐다.

거기다 이후 두 번의 전투에서 3스텟, 그리고 록탄 성 공략 중에 중급과 상급 악마들을 처치하며 추가로 5스텟이······.

"헛! 놈이 멈췄다!"

"탱커 어딨어! 탱커!"

"어서 레이드 대열로 이동해!"

'이 개 같은 것들이.'

순간 짜증이 났다.

잠깐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사이, 주변에 있던 악마들이 한꺼번에 내게 달려들고 있었다.

챙! 채챙! 콰지직! 챙! 콰지지직!

'한창 바쁘게 계산하고 있는데······.'

이를 빠득 갈았다.

온몸에서 진득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꽈아아아아아아앙! 콰지지지직!

우악스럽게 창대를 잡은 나는 녀석들을 향해 전력을 다해 휘둘렀다.

"조, 조심!"

"끄아악!"

'고작 하급 악마 따위가 내 몸에 손을 대려 해?'

창이 번쩍할 때마다 녀석들의 머리, 팔다리가 허공을 날았다.

푸슈우우우욱-

잘려 나간 목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붉은 선혈이 마치, 산들바람을 맞아 흩날리는 장미의 꽃잎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답군.'

―더 강한 힘을 원하는가.

그 모습에 다시 기분이 좋아진 나는, 계속해서 녀석들의 목을 베고, 허리를 가르고, 팔다리를 잘라냈다.

띠링!

[민첩 스텟이 1 상승합니다.]

내가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었더라.

'맞아.'

이전에 얻은 포인트를 계산하고 있었지.

어쨌든, 내가 무스펠하임에 들어와서 얻은 스텟은 총 16 포인트다.

그런데 피의 각성으로 인해 효율이 두 배로 좋아졌다는 건.

'지금까지 죽인 숫자만큼 추가로 죽이면 30포인트가 넘게 오른다는 거지.'

기분이 너무 좋았다.

이 주변엔.

"미, 미친놈······."

"으으······."

아직 내가 죽여야 할 것들이 무척 많았으니까.

'아주 좋아.'

주변을 쓸어보며 씨익 웃자, 나와 눈이 마주친 벌레들이 몸을 벌벌 떨었다.

안 그래도 죽여야 할 벌레들인데, 녀석들을 죽이면 스텟도 오른다.

이보다 좋은 상황이 있을 수가 있을까?

'이번 기회에 스텟을 확 끌어올려야겠어.'

―더 강한 힘을 원하는가.

생각을 마친 나는 벌레들 사이로 뛰어들어 학살을 시작했다.

까악- 까악-

하늘 위를 떠도는 지옥까마귀들이, 관객이 되어 내가 만드는 아름다운 연극을 지켜 봤다.

[근력 스텟이 1 상승합니다.]

[체력 스텟이 1 상승합니다.]

[정신 스텟이 1 하락합니다.]

[민첩 스텟이 1 상승합니다.]

[마력 스텟이 1 상승합니다.]

[정신 스텟이 1 하락합니다.]

* * *

지옥의 최하층.

―모, 모두 도망쳐!

―끄아아악!

지옥까마귀의 눈을 통해 렌이 싸우는 모습을 보던 왕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피라는 건 참 오묘하군. 그 친구가 왜 그렇게 사랑했는지 알 것 같단 말이지."

샹들리에의 불빛에 비친 왕의 얼굴에는 진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가."

한동안 눈을 감은 채 렌이 싸우는 모습을 감상하던 왕이 눈을 뜨며 물었다.

그러자 대전의 한가운데에서 무릎을 꿇은 채 대기하던 라미엘이 고개를 갸웃했다.

"전 잘 모르겠습니다."

"피를 뭐라고 생각하는가."

"생명체가 살아있기 위해, 필수로 가지고 있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라미엘의 대답에 왕이 피식 웃었다.

"하지만 동시에 죽음을 상징하기도 하지. 신기하지 않은가. 삶과 죽음을 동시에 담고 있다는 것이."

"······."

"또한 같은 피를 갖고 있으면 같은 형질을 띠게 되지. 예를 들면 형제라든가 말이야."

"······?"

한동안 권태로운 표정으로 라미엘을 바라보던 왕이 이내 허공을 응시했다.

그곳에선 여전히 지옥까마귀의 눈으로 바라보는 렌이 담겨 있었다.

"후후, 어서 각성하거라."

* * *

서걱! 콰지지직! 서걱! 챙! 채챙! 콰지지직!

'기분 좋은데.'

내 움직임이 점점 빨라져 간다.

창에 담긴 힘이 더욱 무거워지고, 온몸에 활력이 솟구친다.

각성된 피의 흡수 능력은 그냥 사기였다.

서걱! 푸슈우우욱!

"커헉!"

띠링!

[근력 스텟이 1 상승합니다.]

조금만 죽여도 스텟이 계속 올랐다.

완전 밸런스 파괴 급.

'더 빨라지고 싶어.'

―더 강한 힘을 원하는가.

거기다 적용받는 스텟이 워낙 많다 보니, 스텟이 1 포인트만 상승해도 확확 강해지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서걱!

"고, 고작 한 놈에게······."

[킬 수 현황]

[1위. '렌' 6,894킬]

[2위. '쿠 훌린' 4,704킬]

[3위. '주소월' 4,471킬]

[4위. '몽연' 4,108킬]

[5위. '아킬레우스' 4,007킬]

'아쉽군.'

너무 아쉽다.

더 이상 내가 죽일 수 있는 벌레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겼다아아!"

"내, 내가 살았어!"

"크윽······. 누, 누가 회복 포션 좀······!"

플레이어들이 함성을 내지르며 기뻐하는 가운데, 나만큼은 굳어진 얼굴이 풀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피의 각성> 종료까지 남은 시간 : 22:17:42]

'아직 22시간이나 남았는데.'

저 정도면 아무리 못 해도 1만 킬 이상은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되면 스텟이 말도 안 되게 오를 텐데.

그래서 너무 아쉬웠다.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없다는 것이.

―더 강한 힘을 원하는가.

'후우.'

너무 안타까웠다.

스텟을 더 올릴 수 없다는 것이.

"렌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덕분에 살았네요. 정말 감사드려요!"

"여기! 이걸로 닦으세요! 새거에요!"

내게 고마움을 표하는 사람들, 피를 닦으라며 손수건을 건네주는 사람들.

그들을 무시한 채 파티원들이 있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잠깐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플레이어들도 죽이면 스텟이 오르잖아?'

나는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두 고생 많았다! 따로 지시를 내리기 전까진 푹 쉬도록!

"후우. 진짜 죽을 뻔했네."

"너무 더워서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어."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아직, 500명 가까이 남아 있었다.

창을 쥐고 있는 손에,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그때였다.

"렌님! 여기에요!"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나는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나를 향해 손짓하는 카이로시아와 파티원들이 있었다.

'카이로시아도 제법 스텟이 높지?'

스텟이 높을수록 죽이면 더 많이 오르······.

"······!"

순간 화들짝 놀랐다.

'이런 미친!'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거지?

등골이 오싹했다.

―더 강한 힘을 원하는가.

어느새 마음속으로 들려오는 가면의 목소리가, 굉장히 커져 있었다.

짝! 짝! 짝!

'정신 차리자.'

나는 짝 소리가 나도록 뒷목을 후려쳤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들려오는 가면의 목소리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왜 그러세요?"

"아, 아닙니다. 아니, 아냐."

어느새 다가온 카이로시아의 물음에 나는 손사래를 쳤다.

얼마나 정신이 없었는지, 말이 꼬일 정도.

"오늘따라 이상하네요? 눈에 초점이 없어요. 제가 정신 좀 번쩍 들게 해드릴게요."

잠시 나를 올려다보던 카이로시아가 짧게 마법을 영창했다.

[겨울의 눈물.]

쏴아아아아아―

"······!"

그러자 내 머리 위로 시원한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달의 메아리 효과는 발동하지 않았다.

'시원하군.'

빗줄기를 맞고 있자, 머리가 개운해지는 느낌이었다.

"어때요? 정신이 좀 들죠?"

카이로시아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까진 약간 몽롱한 기분이었는데, 덕분에 확 깰 수 있었다.

"고마워. 아, 모두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파티원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상황.

나는 서둘러 한 명 한 명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렌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렌님이 제일 고생 많았죠, 뭐."

다행히 카이로시아 뿐만 아니라, 다른 파티원들도 모두 멀쩡해 보였다.

지상군은 내가 어그로를 다 먹고 있었던 데다가, 공중전은 필릭스와 일리아가 합류했으니, 크게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어차피 록탄 성도 함락시켰겠다, 더 이상 넘어올 악마는 없을 겁니다. 그니까 모두 편히 쉬시죠."

내 말에 파티원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그럼 아까 가셨던 게 록탄 성을 공략하신 거였어요? 고작 열 명밖에 안 갔잖아요?"

"아, 예. 어차피 모든 병력이 이쪽에 집중되어 있었으니까요. 내부엔 최소한의 병력밖에 없어서 별로 힘들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자세히 들려드릴 테니, 일단 잠시 쉬시죠."

내 말에 키아라가 어서 누우라며 손짓했다.

"에고, 그럼 지금 엄청 피곤하시겠네요. 어서 쉬세요."

덕분에 철퍼덕 앉은 나는 어느새 뻑뻑해진 눈을 감았다.

아무래도 생각을 좀 정리해야 할 것 같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분명 피의 각성이 발동되기 전까지만 해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는데.

아니, 정확히 말하면 발동된 후에도 나는 무언가 변화가 있다는 것을 감지하지 못했다.

마치 약에 취한 느낌.

'이대로 있으면 안 돼.'

그래서 더 위험했다.

내가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뭔가에 씌여 있었다는 뜻이었으니까.

'신화 등급으로 오르면 좋기만 할 줄 알았는데.'

이런 하자가 있을 줄이야.

나는 문득 1회차 때 이 가면을 사용했던 라이언을 떠올렸다.

분명 녀석도 가면을 신화 등급까지 올렸다고 그랬는데.

도대체 어떻게 이 가면을 사용한 거지?

'후우. 그건 중요한 게 아냐.'

일단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지.

아무래도 팜으로 돌아가서, 블라디미르가 어떤 악마였는지 체크해야 할 것 같았다.

고위 악마였다고 하니까 아세리안한테 물어보면 대략적인 정보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이번 경기 마무리부터.'

생각을 정리한 나는 상태창을 열었다.

부작용은 부작용이고, 일단 얼마나 스텟이 상승했는지 체크해볼 생각이었다.

[이름 : 안우진(닉네임 : 렌)] [소속 : Team 투지]

[리그 : 상위리그]

[근력 : 313(+5)(+168)] [민첩 : 435(+5)(+258)] [체력 : 255(+5)(+111)]

[정신 : 178(+5)(+77)] [지력 : 160(+71)] [마력 : 237(+5)(+103)]

[각성 능력 : <초감각 > <뇌신창 > <특급살기 > <특급마나운용 > <고급검술 > <고급단검술 > <고급투척술 > <고급박투술 > <중급치료술 > <고급궁술 > <최상급검방술 > <고급채찍술 > <최상급둔기술 >]

[보유 스킬(5/5) : <천뢰십보 > <뇌신 > <뇌룡의 포효> <마력 상쇄> <그림자 표식>]

'뭐?'

눈을 감은 채 스텟 창을 확인하던 나는 눈을 부릅떴다.

기존에 알던 것보다 훨씬 높은 숫자들이 내 스텟창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게 내 스텟이라고?'

나는 서둘러 내게 적용된 특전들을 뺀 값을 계산했다.

특전으로 적용된 상승률은 근력이 120%, 민첩이 150%, 그리고 나머지 스텟들이 80%였다.

[이름 : 안우진(닉네임 : 렌)] [소속 : Team 투지]

[리그 : 상위리그]

[근력 : 140] [민첩 : 172] [체력 : 139]

[정신 : 96] [지력 : 89] [마력 : 129]

'미친.'

정신줄 놓고 싸웠던 사이, 스텟이 폭발적으로 상승해 있었다.

이제는 기초 스텟만으로도 어지간한 상위 넘버링 플레이어가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건.

'정신 스텟이 깎였어.'

콜로세움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스텟이 깎였다는 것.

아무래도 내가 정신줄 놓고 적들을 죽인 것과 관련이 있는 모양이었다.

'팜으로 돌아가면 다른 거 다 제쳐두고, 이것부터 해결해야겠어.'

나는 다시 차분하게 눈을 감았다.

그때였다.

꽈아아아아아아앙!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

"······!"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저 멀리서 무언가 폭발하는 모습이 보였다.

띠링!

< 149화. 스텟 사냥(5) > 끝

< 150화. 스텟 사냥(6) >

[승리 조건 : 배정된 구역의 악마들을 처치하라]

[배정된 구역의 악마들을 모두 처치했습니다.]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그와 동시에 뜨는 알림창.

'젠장.'

경기가 종료됐다는 말이 없는 걸 보니, 다른 미션을 주려는 모양이었다.

'지금은 싸우기 겁나는데.'

콜로세움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미션 수행이 두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다시 정신줄 놓고 싸웠다가, 자칫 잘못하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으니까.

띠링!

[<코드 제로> 미션을 이어서 수행합니다.]

[미션]

[현재 니플헤임을 통해 엄청난 숫자의 악마들이 넘어오고 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타락 천사를 마계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초월 리그 소속 플레이어들이 타락 천사를 사살할 때까지 니플헤임에서 넘어오는 악마들을 막으세요.]

[여유가 되는 연합 파티의 고위 플레이어, 일부 상위 플레이어들에게만 할당된 미션입니다.]

[플레이어 '고주몽' / 플레이어 '필릭스' / 플레이어 '일리아' / 플레이어 '렌']

[네 명에게 미션이 할당됩니다.]

[지금 당장 니플헤임의 입구로 향하세요.]

[남은 플레이어들은 지금 당장 '고담덕' 연합 파티와 합류하세요.]

내 예상대로 새로운 미션 창이 눈앞에 나타났다.

내용은 고위 플레이어, 그리고 상위 리그 네임드들만 니플헤임 입구를 지키라는 것.

'시간이 더 필요한 모양이군.'

꽈아아아아아앙! 꽈아아아아아앙!

여전히 저 멀리서는 끊임없이 굉음이 터져 나오고, 모래바람을 동반한 충격파가 퍼지고, 땅이 울리고 있었다.

이전보다 더 격렬해진 느낌이지만, 게임 메이커가 판단했을 땐 아직 한참 부족하다고 생각한 모양.

문제는 '여유'가 되는 연합 파티에서만 병력을 차출한다는 부분이었다.

'후우.'

불길한 감각이 고개를 들었다.

"젠장! 또 미션이라니!"

"이런 미친! 고담덕 연합이 있는 곳까지 가려면 500킬로 이상 가야 하잖아!"

"하아. 모두 일어납시다. 이미 떨어진 미션은 철회 안 되잖아요. 힘들지만 가야 해요. 모두 일어납시다."

미션 창을 본 다른 플레이어들도 앓는 소리를 냈다.

피부가 녹을 정도로 매서운 더위 속에서 연이은 전투를 펼친 상황.

긴장이 풀리면서 모두들 몸이 풀어졌을 것이다.

―모두 그대로 편하게 휴식하라! 출발은 10분 후에 한다!

고주몽 또한 지금 당장 출발해봐야 죽도 밥도 안 된다고 판단했는지, 허공을 날아다니며 외쳤다.

지금 상태로는 가는 길에 체력을 다 소진한 채 쓰러질 것이다.

"휴우, 살았다."

"으어······ 그래도 10분은 너무 짧아."

"말할 시간에 어서 쉬어. 입도 열지 말고 그 시간에 호흡을 한 번 더 해."

그러자 플레이어들이 다시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지친 저들에게 있어 10분은 천금과도 같을 것이다.

슈우우우욱!

그때 고주몽이 내 앞으로 날아들었다.

"렌! 그대는 괜찮은가? 만약 그렇다면 우린 바로 출발할까 한다만. 아무래도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것 같단 말이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전 괜찮습니다. 바로 출발하셔도 됩니다."

그러자 고주몽이 내 어깨를 툭, 툭 두드렸다.

"피곤하겠지만 부탁한다. 필릭스! 렌을 등에 태워줄 수 있겠나!"

"알겠습니다!"

펄럭! 펄럭!

고주몽의 말에, 허공에서 주위를 경계하던 필릭스가 날아들었다.

그 모습에 나는 카이로시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마법사부터 1타깃으로 잡을 테니까 조심해. 절대 눈에 띄지 않게 행동하고."

"알았어요."

카이로시아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어서 키아라를 향해 입을 열었다.

"염치없지만, 카이로시아 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직 상위 리그로 올라오고 경기 경험이 한 번도 없어서요."

"걱정 마세요. 카이로시아님은 지금껏 굉장히 잘 해왔거든요. 그렇게 걱정하실 수준도 아니구요. 제가 잘 챙길게요."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는 키아라와 파티원들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제 한 몸 챙기기도 바쁠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까지 챙겨달라고 부탁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하는 수 없었다.

이들을 믿는 수밖에.

"네, 조심히 다녀오세요."

다행히 파티원들은 내 부탁에도 별다른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다.

"렌! 바로 출발하겠다!"

내게 날아들어, 팔을 뻗는 필릭스.

나는 곧장 바닥을 박차고 뛰어, 빠른 속도로 날아드는 필릭스의 팔을 낚아챘다.

"흐읍!"

그리고는 필릭스가 손에 힘을 줘, 나를 위로 날리는 것에 맞춰서 그의 등으로 올라갔다.

그와 동시에 고주몽과 일리아도 날갯짓하며 필릭스의 뒤를 따랐다.

여전히 저 멀리선.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엄청난 충격파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마계가 이번에 완전히 작정을 했는데? ㄷㄷ 이러다 2차 대전쟁 일어나는 거 아님?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마! 전쟁이 쉽나! 앙? 니 생각처럼 그렇게 쉽게 안 일어난다ㅋㅋㅋ

└그런 것 치고는 들리는 소식도 장난이 아닌데? 대천사 중에 한 명이 요즘 천계에서 빨빨거리며 돌아다니고 있다고 함.

└대천사 누구?

└(포함돼선 안 되는 단어로 인해 삭제된 댓글입니다.)

└어어어어! 저러다 니플헤임으로 넘어가는 거 아님????

└ㄴㄴ 아직 시간만 끌어주면 충분히 가능성 있음; 근데 문제는 니플헤임에서 넘어오는 악마들이 문제임 ㄷㄷ 비프로스트로 넘어오는 애들이야 발목을 잘 잡아두긴 했는데, 니플헤임에서 오는 애들은 어떻게 함?

└지금 그것 때문에 고위 리그 애들이랑 일부 상위 리그 애들 가잖아.

└고작 저걸로 어떻게 막냐 ㅡㅡ 죽었다 깨도 못 막지;;

└어차피 천계에서 쟤네들한테 원하는 것도 시간을 조금 벌어주는 것 뿐임.

'저기가 니플헤임 입구.'

필릭스의 등 위에서 정면을 바라보던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압도적인 광경에 나도 모르게 위축됐다.

'미친.'

사실, 나는 지금까지 3지옥이 중간계처럼 각각 존재하는 별개의 성계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기만 지나면 니플헤임이라고요?"

"그렇다."

내 물음에 필릭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높은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우뚝 솟아 있는 얼음 장벽.

그 한가운데에 조그맣게 난, 마치 홍해가 갈라진 듯한 모습의 외갈래 길.

그곳으로 시꺼멓게 깔린 악마들의 모습이 보였다.

[<피의 각성> 종료까지 남은 시간 : 19:02:41]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왜 저쪽 길로만 오는 겁니까? 날개가 있으면 저 얼음 장벽을 넘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아무리 얼음 장벽이 높다고 해도, 결국 끝이 있는 이상, 위로 넘어오면 되는 것 아닌가?

하지만 그런 내 의문은 이어지는 필릭스의 말에 해소되었다.

"저 위로 못 넘어온다."

"어째서죠?"

"나도 뭐 때문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저 위엔 마력을 머금은 무시무시한 바람이 분다고 하더군. 이런 날개 쪼가리들은 닿는 순간 구멍이 숭숭 뚫릴 것이다."

"지금껏 저 위를 통과한 사람이 그럼 아무도 없습니까?"

"내가 알기론. 그러니까 타락 천사가 계속해서 저기 있는 좁은 입구로 가려고 하는 거겠지."

필릭스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내가 모르는 특수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모양이었다.

'무스펠하임의 환경만 해도 비정상적인 일이니까.'

―슬슬 준비하라!

선두에서 공기를 가르며 날아가던 고주몽의 말에, 나는 창을 고쳐 잡았다.

"후우."

저 앞에, 내가 죽여야 할 녀석들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피가 끓어올랐다.

움켜쥔 손이 움찔움찔거렸다.

어서 녀석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고, 피의 축제를 즐기고 싶었다.

'침착하자.'

나는 긴 한숨을 내쉬며 끓어오르는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혀를 살짝 깨물자, 알싸한 혈향이 입 안에서 퍼져나갔다.

그럼에도 한번 피어오른 살기는 쉽게 가라앉질 않았다.

"왜 그러는가?"

"아닙니다."

그 탓에 필릭스가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그저, 같은 말만 계속해서 되뇔 뿐.

'내가 강해지려는 이유를 잊지 말자.'

나는 어째서 강해지려 하는가.

누굴 짓밟고 올라서고 싶어서?

남들이 우러러봐 주길 원해서?

이 세상을 손에 넣고 싶어서?

'아니야.'

내가 스텟을 올리고, 초월 리그로 올라가려고 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딱 하나 뿐이다.

가족.

어머니, 그리고 형.

두 사람을 다시 만나기 위해서.

'그런 의미에서 내가 저들을 사냥하려는 이유는 딱 하나지.'

그러려면 강해져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높은 스텟이 필요했으니까.

[킬 수 현황]

[1위. '렌' 6,894킬]

[2위. '쿠 훌린' 4,892킬]

[3위. '주소월' 4,771킬]

[4위. '아킬레우스' 4,284킬]

[5위. '몽연' 4,108킬]

'정신 똑바로 차리고.'

내 뒤쪽으로 어느새, 수십 쌍이 넘는 날개들과 그들의 등에 타 있는 플레이어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절대 흥분해선 안 돼.'

나는 비좁은 입구를 통해 몰려드는 악마들을 노려보며, 창을 고쳐잡았다.

* * *

'틀렸어.'

팀 '불굴'의 트레이너 엔젤, 지슈엘은 팜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팀은 이제 가망이 없어.'

팀에 소속되었던 상위 플레이어들이 고위 리그에 도전했다가 모조리 죽어버렸다.

그와 동시에 팀의 재정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도대체 왜 그런 짓을.'

엎친데 덮친 격으로, 팀의 주인이자 중급신인 루디악이 대박을 노리겠다며 하위 리그 성계 대항전에서 지구에 베팅했다.

무려 0.1%의 확률, 배당률은 1:1,000.

결과는 어떻게 됐냐고?

'그런 기적이 벌어질 리 없지.'

무려 0.1%의 확률이다.

천 번 도전하면 한 번 성공할까 말까.

그런 극악의 확률에 승부를 걸었으니, 당연히 제대로 말아먹었다.

그것도 전재산을.

그 충격으로 루디악은 하루하루 술독에 빠져 살고 있었다.

'과연 이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있을까?'

지슈엘이 관자놀이를 꾹, 꾹 누르며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분주해야 할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주방 한켠에서 멍하니 서 있는 사용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너희들, 이제 점심시간 아니니? 왜 식사 준비를 안 하고 있지?"

안 그래도 답답하던 상황.

지슈엘의 입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아, 그게."

"왜? 신께서 요즘 안 보이시니까 설렁설렁해도 될 것 같아?"

"아, 아뇨. 그, 그게 아니라······."

"그럼? 납득할만한 이유를 대야 할 거야."

지슈엘의 다그침에 주방장을 맡고 있는 사용인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그······. 요리할 재료가······. 없습니다······."

"뭐? 언제부터?"

"어젯밤부터요······."

사용인의 말에 지슈엘은 황급히 식당을 빠져나갔다.

'아, 안돼.'

그리고 보게 된 광경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플레이어들이, 스텟을 구입해야 할 소중한 포인트로 빵을 사서 먹고 있었다.

'끝났어.'

지슈엘이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 모습에 마음 한켠 남아 있던 지슈엘의 의지가 와르르 무너졌다.

팀 최후의 보루라고 할 수 있는 팜 시스템까지 망가진 상황.

지금껏 정성들여 교육시킨 플레이어들이 눈에 밟혔는데, 그것마저 사라져버린 것이다.

플레이어들에게 균형 잡힌 식사를 제공해야 할 사용인들이 요리를 할 재료가 없어 일을 하지 못하는 상황까지 와버렸으니까.

'이제 어떻게 하지?'

이번 달 봉급을 받고, 못 받고의 문제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다만, 당장 그녀를 써줄 만한 곳이 없다는 것.

'하아.'

그녀는 고개를 떨군 채 암울한 한숨을 내쉬었다.

"지슈엘님."

"어······ 어?"

그때, 누군가가 부르는 목소리에 지슈엘은 표정 관리를 하며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적어도 플레이어들에겐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자 눈에 들어오는, 하얀색 바탕에 붉은 실선이 어지러이 그려져 있는 가면.

"무슨 일이지, 라이언?"

"오늘 경기가 있어서요. 다녀오겠습니다."

가면을 쓴 남성이 고개를 꾸벅 숙이자, 지슈엘이 한숨을 포옥 내쉬며 어깨를 토닥였다.

"잘 다녀오거라. 멋진 모습을 기대할게."

"예."

잠시 후, 가면을 쓴 남성이 공터에 생성된 비프로스트를 통과하며 사라졌다.

'후우.'

지슈엘은 한숨을 내쉬며 시스템 창을 켰다.

좋든 싫든, 봉급을 받을 수 있든 없든, 어쨌거나 그녀는 아직 팀 불굴 소속.

팀에 소속된 플레이어의 경기를 지켜보며 응원할 의무가 있었다.

그리고 보게 된 광경.

―와우! 정말 놀랍군요! 벌써 몇 킬 째죠?

―하하, 방금 전까지 하품만 하시던 분인지 의심스럽네요. 갑자기 텐션이 확 달라지셨습니다?

―저 플레이를 보고 어떻게 하품을 할 수 있겠습니까? 네임드도 아닌데 피가 끓어오르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요. 정말 대단합니다!

―검을 휘두르는 게 투박해 보이고, 스텟도 높지 않은 것 같은데, 투지가 정말 놀랍군요. 몇 명이 됐든 신경 쓰지 않습니다. 과연 어느 성계 출신일까요? 무림? 웨스테로스? 발리노르?

―제 생각엔 웨스테로스 출신이, 벌써 42킬 째입니다! 흠흠, 너무 흥분했군요. 죄송합니다. 아무튼 제 생각엔 웨스테로스 출신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어떻게 저런 움직임이 나오는 건지는 좀 신기하네요.

경기에 들어간 가면 남성이 플레이어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지슈엘이 눈을 치켜떴다.

'저, 저 녀석이라면.'

그녀도 모르게 입을 멍하니 벌렸다.

헤어 나올 수 없는 깜깜한 미궁 속에 갇혔다고 생각했는데, 저 멀리서 빛 한 줄기가 흘러 내려온 느낌이었다.

'저 녀석이라면 팀을 다시 일으켜 세워줄 수도 있어.'

경기장 속의 라이언은.

적 플레이어들을 죽일수록 강해지고 있었다.

< 150화. 스텟 사냥(6) > 끝

< 151화. 스텟 사냥(7) >

니플헤임의 입구로 뛰어내린 나는, 달려오고 날아드는 적들을 보며 창을 고쳐잡았다.

'후우.'

쿠구구구구구궁―

얼마나 숫자가 많은지, 적들이 달려오는 것만으로도 땅이 잘게 울릴 정도였다.

현재 이곳엔 나를 포함해, 20명 정도의 플레이어들이 존재한다.

고위 플레이어 열넷, 그리고 나처럼 날개가 없는 상위 플레이어가 여섯.

반면에 적의 숫자는······.

'젠장.'

적들을 살핀 나는, 곧장 숫자 세는 걸 그만두었다.

너무 많아서, 애초에 세는 게 무의미할 정도였으니까.

'이 인원으로 적들을 막으라는 건 너무 어처구니가 없는데.'

완전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

띠링!

[지금부터 20분 동안 적들을 막으세요.]

[남은 시간 : 00:19:59]

눈앞에 새로운 미션 창이 나타났다.

'20분이라.'

과연 20분 동안, 저 숫자를 막아낼 수 있을까?

지상 병력만 있는 것도 아니고, 공중 병력이 최소 수천은 되어 보이는데?

'쉽지 않겠어.'

"고주몽님!"

그때, 우리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적들을 바라보던 플레이어 한 명이 날아들었다.

"오랜만이군, 가웨인. 무슨 일이지?"

"아무래도 중구난방으로 막아서는 방법이 없을 것 같습니다. 오신 분들끼리 파티를 짜서 구역을 배정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좋은 생각이군. 다른 연합 파티장들도 동의한 건가?"

"예! 시간이 없으니, 지금 파티들이 있는 자리 기준으로 막아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알겠다. 건투를 빈다."

"고주몽님도요."

'그나마 다행이군.'

다수 앞에선 개인플레이를 펼치는 것보다, 소수일 망정 서로 손발을 맞춰가며 막는 것이 훨씬 유리했다.

그래야 적은 숫자로도 더 큰 힘을 낼 수 있으니까.

가웨인이라고 불린 플레이어가 다시 돌아가자, 고주몽이 우릴 향해 입을 열었다.

"모두들 들었겠지. 우리 파티끼리 이쪽 구역을 사수하겠다."

"알겠습니다."

"차라리 잘 됐군. 지상군은 렌이 맡는다. 공중군은 필릭스가 탱킹을 서고, 나와 일리아가 뒤에서 딜을 넣는다."

"예."

고주몽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우리는 진형을 짜서 움직였다.

앞에서 탱킹을 해줄 필릭스가 선두에서 날아다니고, 그 뒤로 고주몽과 일리아가 전투를 준비했다.

나는 지상만 상대하면 되기에, 필릭스보다 조금 뒤쪽에서 창을 고쳐잡았다.

'여기라면 나쁘지 않겠어.'

현재 우리가 사수해야 할 구역은 니플헤임의 좁은 입구에서 가장 왼쪽.

양옆으로는 높게 솟아오른 빙하 벽이 가로막고 있고, 니플헤임으로 넘어가기 위해선 일자로 쭉 뻗어있는 이 길을 지나가야 한다.

한마디로, 왼쪽 방면에서 몰려 들어올 적은 없다는 뜻이었다.

물론 공중 병력이 많기 때문에, 길을 막고 있다는 건 의미가 없겠지만, 적어도 받게 될 압력을 크게 낮출 수 있을 것이다.

"하나만 명심하라. 우린 저들을 막아야 하는 게 아닌, 단지 시간만 벌면 된다. 그러니 조금씩 뒤로 빠지면서 상대할 것이다. 흥분해서 적진 한복판으로 돌격하는 불상사가 없기를 바란다."

고주몽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고주몽도 크게 무리할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어떻게든 20분의 시간을 끌기만 하면 된다.

'조금씩 뒤로 이동하면서 막다 보면, 안전하게 몸을 뺄 기회도 생길 거야.'

결국 이 전투에서 내가 명심해야 할 것은 단 하나.

'정신 바짝 차리자.'

―더 강한 힘을 원하는가.

가면의 목소리에도 이성을 잃지 않는 것.

[남은 시간 : 00:19:03]

그렇게 전투가 시작되었다.

"고작 스무 명 정도로 우릴 막으려 하다니!"

"모두 진격! 서둘러야 한다!"

"와아아아아아!"

쐐애애애애애액!

온몸과 날개에 서리가 잔뜩 낀 악마들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쇄도했다.

첫 시작은 공중 병력과의 전투였다.

캉! 캉! 카가강! 챙! 캉! 채챙!

전방에서 방패를 세운 채, 날아드는 악마들의 돌격을 저지하는 필릭스.

그 뒤로, 고주몽의 화살과 일리아의 마법이 흩뿌려졌다.

[흩날려라, 열화의 꽃잎이여!]

파바바방! 푹! 푹! 푹! 푹! 푹!

사방을 불길이 휩쓸고, 벼락처럼 날아드는 마법에 적 악마들은 속수무책처럼 추락했다.

"끄아악!"

"으윽!"

나는 지상에서 분주히 움직이며, 떨어져 내리는 악마들 중, 숨통이 붙어 있는 녀석들을 향해 창을 찔러 넣었다.

띠링!

[근력 스텟이 1 상승합니다.]

제법 많은 숫자의 악마들을 막타만 골라서 치고 있다 보니 스텟이 빠르게 올랐지만, 나는 의식적으로 그걸 무시하려고 애썼다.

'전투에만 집중해야 돼.'

그랬다간 또다시 정신줄을 놓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쿠구구구구구구궁―

"와아아아아아아아!"

그리고 이어지는 적 지상군의 돌격.

'후우.'

나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창을 들어 올렸다.

내가 해야 할 것은 돌격이 아닌, 저지.

그렇기 때문에 적들이 밀고 들어오는 물량 공세를 막기 위해선 엄폐물이 중요하다.

"죽어라 천계의 개!"

"끅!"

서걱! 서걱! 서걱!

몰려드는 적들에게 창을 휘두르자, 사방으로 선혈이 낭자했다.

가슴을 크게 베인 악마가 달려오던 속도 그대로 피를 철철 흘리며 엎어졌다.

'일단 엄폐물부터.'

발치 앞에 쓰러진 악마의 배를 발등으로 차올린 나는 녀석을 한쪽 귀퉁이에 쌓았다.

"뒤로 빠진다!"

"예!"

고주몽의 오더에 필릭스가 천천히 날갯짓하며 뒤로 이동했다.

나도 필릭스가 옮긴 구간만큼 뒷걸음질을 치며 계속해서 창을 휘둘렀다.

챙! 콰지지지직!

"으으윽!"

뇌전에 감전되자 움찔움찔하는 악마들.

서걱! 서걱!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녀석들의 목을 날려버렸다.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두세 명이 머리를 잃은 채 바닥으로 엎어졌다.

철퍼덕! 툭! 툭!

나는 그때마다 발등과 창대를 이용해, 녀석들의 시체를 귀퉁이에 계속해서 쌓았다.

조금만 있으면 시체의 벽이 만들어질 것이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빛기둥이 뿜어져 나오고, 달려오던 악마 일곱의 상반신이 터져나갔다.

[체력 스텟이 1 상승합니다.]

"조심하라!"

"흥!"

챙! 콰지지직! 챙! 서걱!

그와 동시에 필릭스가 뒤로 흘린 중급 악마 하나가, 위쪽에서 달려들었다.

'어딜.'

나는 자세를 낮추며 바닥을 한 바퀴 구르곤, 달려들던 중급 악마의 가슴에 창을 찔러 넣었다.

"크윽!"

창에 찔린 녀석은 한동안 고통에 몸부림치더니 바닥으로 추락했다.

초감각을 가진 덕분에, 위에서 날아드는 공격들을 피하는 게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후우.'

그 뒤로도, 나를 노린 중급 악마들의 공격은 계속됐다.

[남은 시간 : 00:15:33]

'젠장.'

나는 자세를 낮추며, 위에서 들어오는 공격은 피하고, 정면에서 몰려 들어오는 악마들에게 창을 찔러넣었다.

"뒤로 빠진다!"

그리고 적들에게 둘러싸이지 않도록, 다시 한번 뒷걸음질을 치며 창을 휘둘렀다.

"빨리 뚫어, 이 병신들아!"

챙! 채챙! 챙! 챙! 챙!

"커헉······누, 누가 도와······."

펄럭! 펄럭! 펄럭! 펄럭!

"부상병을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일단 통과해!"

꽈아아아아앙! 꽈과과과과광!

전장에서 들리는 고함, 날갯짓, 마법에 의한 폭격.

거기다 날붙이 소리까지.

―더 강한 힘을 원하는가.

귓가로 들리는 전장의 소리가 조금씩 작아져 가고 있었다.

'정신 차리자.'

가면에게 정신을 빼앗겨선 안 돼.

나는 상념을 털어내기 위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때였다.

푹! 푹! 서걱!

내 귓가로 소름 끼치는 피륙음이 들려왔다.

"필릭스!"

"이런!"

전방에서 적 악마들의 돌격을 몸빵으로 막고 있던 필릭스가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날개 하나가 뜯어진 것이다.

그의 몸 위로 수십, 아니 수백에 가까운 악마들이 햄버거 패티 쌓듯 겹겹이 쌓이기 시작했다.

'여기서 탱커가 죽으면 안 돼.'

나는 곧장 대쉬하며 적들을 향해 창을 휘둘렀다.

서걱! 서걱! 서걱!

"렌! 자리를 지켜라!"

뒤에서 고주몽이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적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끄으으으윽!"

"죽여! 죽여!"

챙! 챙! 캉! 푹! 챙! 챙! 푹! 캉! 푹!

악마들이 떼거지로 몰린 쪽에서 온갖 피륙음이 흘러나오고, 엄청난 양의 피가 낭자 되어 흘러나왔다.

순식간에 사방이 시뻘겋게 변했다.

'씨발. 씨발. 씨발!'

"가게 내버려 둘 줄 알고!"

"흥! 먼저 이 몸부터······!"

서걱!

나는 어떻게든 필릭스가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적들 사이를 파고들었지만, 적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나를 막아서는 악마들, 하늘에서 벌 떼처럼 달려드는 악마들 등등.

―더 강한 힘을 원하는가.

'씨발······!'

한복판에 갇힌 필릭스의 모습에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놈들의 탱커가 죽었다! 어서 밀어 붙여!"

"시간이 없다! 모두들 더 힘을 내라!"

그때부터 적들의 공세가 더욱 집요해졌다.

[남은 시간 : 00:13:11]

챙! 채챙! 콰과과과과과광!

"렌! 더 뒤로!"

고주몽의 지시에 따라 나는 계속해서 뒷걸음질 치며 창을 찌르고, 휘둘렀다.

그 사이, 필릭스가 떨어져 내렸던 곳에 몰려 있던 악마들이 하나둘 흩어져 나갔다.

그곳엔 원래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고깃덩이 하나가 놓여져 있을 뿐이었다.

'젠장.'

필릭스의 빈자리가 너무 컸다.

중급 악마들이 내가 뒷걸음질 치지 못하도록, 뒤쪽에서 압박해 들어왔다.

"한 놈이 더 들어왔다! 놈을 죽여!"

"큭큭, 죽을 자리를 찾아왔는가!"

좌우에서, 앞뒤에서, 그리고 하늘에서.

사방에서 악마들이 몰려들었다.

핑! 핑! 핑! 핑! 핑!

[핏빛 여명의 칼날!]

고주몽과 일리아가 어떻게든 날 지원하기 위해 화살을 쏘고 마법을 날려댔지만, 저들은 원거리 딜러.

적들 사이를 돌파해, 내게 공간을 만들어줄 수 있는 유형의 플레이어가 아니었다.

'후우.'

스스로 빠져나가는 수밖에.

꽈과광!

창을 크게 휘둘러, 악마 네 명의 목을 벤 나는 곧장 섬전을 사용해, 빈 공간으로 순간이동했다.

"놈! 어딜 빠져나가느냐!"

"일리아! 어서 지원을!"

[새벽의 소성!]

내가 적들 사이를 빠져나오자, 곧장 중급 악마 수십이 날아들었다.

다행히 타이밍 맞춰 고주몽과 일리아가 견제해준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지만, 다시 갇히게 되면 섬전의 쿨타임이 돌아올 때까지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다.

[남은 시간 : 00:11:22]

[킬 수 현황]

[1위. '렌' 7,702킬]

[2위. '주소월' 5,001킬]

[3위. '쿠 훌린' 4,983킬]

[4위. '아킬레우스' 4,532킬]

[5위. '몽연' 4,497킬]

"이쪽이 뚫렸다! 모두 여기로 빠져나가!"

"조금만 더!"

시꺼멓게 하늘을 메운 채,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악마들.

꽈과과과과광!

온갖 화살과 마법, 심지어 창 따위가 날아들고, 그 집중포화 속에서 피하기 바쁜 고주몽과 일리아.

"렌! 더 뒤로 빠져라!"

그로 인해 나도 뒤로 쭉 밀려 나갔다.

창을 아무리 휘둘러도, 끝이 보이지가 않았다.

서걱!

"끄아악!"

하급 악마의 가슴을 베자, 붉은 꽃잎이 뿜어져 나왔다.

향긋한 혈향이 코끝을 타고 전해졌다.

―더 강한 힘을 원하는가.

'후우.'

크게 숨을 들이마시자, 나를 옥죄어오던 부담감이 한 움큼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모두 뭐 하는 게냐! 이젠 탱커도 없는데 고작 한 놈한테 쩔쩔매다니!"

"어서 놈을 처치해! 망설이는 놈들은 몽땅 제물로 바쳐주겠다!"

'나쁘지 않네.'

한 동작도 놓치지 않기 위해 부릅떴던 눈동자.

그로 인해 무척 뻑뻑하단 느낌이 들었는데, 어느새 눈꺼풀이 가벼워져 있었다.

"렌! 조금 더 뒤로 빠져라!"

서걱! 서걱!

창을 휘두를 때 들어가는 팔의 힘도.

"놈이 고립됐다! 어서 에워싸!"

"이번 기회에 반드시 이곳을 뚫어야 한다!"

내게 날아드는 공격들을 피하는 것도.

별로 힘들지 않았다.

'재밌네.'

"허억, 허억. 젠장! 고작 세 놈을 못 뚫어서야!"

맞은편에 있던 악마 하나가 분통을 터트렸다.

숨을 헐떡거리는 게, 많이 지쳐 보이는 모습이었다.

추운 곳에 있다가 갑자기 뜨거운 곳으로 나와서 그런가, 녀석들의 몸에서 땀이 비 오듯 흐르고 있었다.

'후후. 정말 재밌어.'

[민첩 스텟이 1 상승합니다.]

[정신 스텟이 1 하락합니다.]

죽일수록 강해진다.

"이런 멍청한 놈들! 모두 비켜라! 우리가 상대하겠다!"

"조, 조심하십시오! 녀석은 평범한 플레이어가 아닙니다!"

"흥! 그래봤자 날개도 없거늘!"

처음 녀석들을 상대할 때보다 강해졌고, 지금도 실시간으로 강해져 가고 있다.

서걱!

점점 적들을 상대하는 게 쉬워졌다.

어느 정도였냐면, 그냥 창을 휘두르면 적들이 알아서 쓰러져 주는 느낌이 들었달까.

'후후.'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창칼이 쏟아지고, 어떻게든 죽이겠다며 살기를 뿌려대고, 온갖 피가 쏟아지는 전장.

그 안에서 마치, 나만 평온한 느낌이었다.

아름다운 그림을 관람하기 위해 산책을 나온 것 같았다.

띠링!

[<피의 각성> 이 1 포인트 상승합니다. (1,000/1,000)]

[2차 <피의 각성> 이 발동합니다.]

내 발걸음이 조금씩 전방으로 향했다.

"······."

뒤에서 고주몽이 뭐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쳤지만, 들리지 않았다.

"······!"

그러자 오히려 악마들이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내게 날아드는 악마들이 몸을 멈칫했다.

이런 녀석들을 두고 뒤로 빠지라니.

'내가 왜?'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

[2차 <피의 각성><피의 흡수>를 강화시켰습니다.]

[지금부터 24시간 동안 <피의 흡수> 능력의 효과가 500% 증가합니다.]

이런 녀석들을 두고 긴장했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벌레 같은 것들이.'

나는 망설임 없이 녀석들 사이를 휘저으며 나아갔다.

"······!"

적 악마들이 나를 가리키며 뭐라 뭐라 소리쳤다.

서걱!

하지만 내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아니, 뭐라고 하든 궁금하지 않았다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나는 지금.

띠링!

[근력 스텟이 1 상승합니다.]

[정신 스텟이 1 하락합니다.]

온 세상을 붉게 물들이는 피에 심취했으니까.

온몸에서 힘이 넘쳐흘렀다.

마음 같아선 마계의 왕도 내 발아래에 둘 수 있을 것 같았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 거대한 힘에, 나는 크게 포효했다.

빛기둥이 뿜어져 나오고, 사방으로 벼락이 휘몰아쳤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 151화. 스텟 사냥(7) > 끝

< 152화. 라파엘 >

1급 치천사 라파엘.

태어날 때부터 치천사였던 다른 5대천사들과 다르게, 그녀의 시작은 7급 권천사였다.

천사의 계급 체계는 제법 엄격해서, 콜로세움이 생기기 전까진 어지간해선 승급을 할 수 없는 구조였다.

그럼에도 그녀가 현재 다섯 대천사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건.

"악마들을 처단하라!"

"영원한 빛을 위하여!"

10년 전에 끝났던 대전쟁에서, 몸을 사리지 않고 활약한 덕분이었다.

'더 강해지고 싶어.'

위에 대한 갈망.

그 갈망이 그녀를 독하게 만들었다.

모든 천사들의 정점이자, 지고지순한 존재.

그녀는 1급 치천사가 되고 싶었으니까.

"모두 나를 따르라!"

"미카엘님이 오셨다! 돌격! 돌격하라!"

"영원한 빛을 위하여!"

가장 선두에서 압도적인 힘으로 적들을 찍어 누르고, 아군에겐 희망을 선사하며, 악마들을 심판하는 대천사들의 모습.

'아니야.'

고작 그런 것 따위를 동경한 게 아니다.

라파엘은 그저.

"오늘에야말로 저 계집년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말겠다!"

"죽엇!"

"정화의 불로 이 세상 악마들을 모조리 태워 죽이고 말겠다!"

서로가 죽고 죽이고.

꽈아아아아아앙! 꽈아아아아앙! 꽈아아아아아아아앙!

아름답게 핀 세상의 모든 것이 부서지고.

"어······ 언니······."

[소생!]

"트, 틀렸어! 피가 멎질 않아!"

"아파······. 어, 언니. 난 이렇게······."

"얘기하지 마! 조, 조금만 참아!"

"이렇게 죽는······ 거야······?"

"얘기하지 말라고! 레노엘? 정신 차려, 레노에에엘!"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그 암울한 그 참혹한 전장에서.

'더 강해지고 싶어.'

살아남고 싶었을 뿐.

"이번에 귀하들을 맡게 된 천부장, 좌천사 라파엘이다. 잘 부탁한다."

그런 그녀의 독기 때문이었을까.

세 쌍에서 네 쌍, 그리고 다섯 쌍.

대전쟁이 지속될수록 등에 날개가 하나씩 늘어나기 시작한 라파엘은 결국 일곱 쌍의 날개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저기 적장이 있다! 좌천사 라파엘이다!"

"모두 비켜라! 저년은 내가 상대하겠다!"

"오오! 안드로말리우스님이 오셨다! 모두 길을 터라!"

물론 그녀의 계급이 올라갈 때마다 더 강한 존재와 맞닥뜨리게 되었지만, 그녀는 감내했다.

'그 어떤 도약도 고통 없인 이루어질 수 없어.'

결국 더 강한 존재를 쓰러트릴 때마다, 그녀를 상대할 수 있는 존재의 숫자도 점점 줄어갔으니까.

이렇게 계속해서 투쟁하고 쟁취하면, 종내엔 그녀를 위협할 수 있는 존재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 이게 뭐야······.'

그 존재를 만나기 전까지는.

'도, 도대체······?'

붉은 안개가 세상을 가득 메웠다.

엄청난 숫자의 날갯짓 너머로 비명과 고함이 오가고, 마법이 흩뿌려졌다.

라파엘이 소속되어 있던 곳은 대신大神 아르테미스가 이끄는 제 47군단.

판데모니움을 향해 진격하던 그들의 앞을 막아선 적은 고작 한 명이었다.

"아르테미스님, 앞에 누군가 우릴 막아서고 있습니다. 악귀가 그려진 가면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건데, 마계 칠군주 중 한 명인 블라디미르인 것 같습니다."

"흥. 헬하임에서 나한테 꽁지 빠져라 도망친 녀석이로구나."

"어떻게 할까요?"

"그대로 진군하라. 녀석 한 명으로선 우리를 어쩌지 못할 것이다."

군단장인 아르테미스도 고작 한 명이라는 점에서, 별다른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 판데모니움 공략을 위해 계속 진군하라 지시할 뿐.

하지만 상대가 마계 칠군주 중 한 명이라는 것을 무시한 대가는 너무 컸다.

꽈광! 꽈과과광! 서걱! 서걱! 꽈과과광!

"라, 라파엘님. 지금이라도 뒤로 물러서야 합니다!"

"하지만 군단장께서!"

"이러다 다 죽을지도 몰라요!"

고작 한 명에게 47군단이 도륙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저 멀리서, 지옥 칠군주 중 한 명이라는 블라디미르가 포효했다.

라파엘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이, 이럴 수가······.'

녀석은 아무리 움직여도 지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강해져 가고 있었다.

―피의 축제로구나.

악을 심판할 천사들이 녀석의 손에 잡혀 찢겨나갔고, 그건 군단장인 아르테미스도 다르지 않았다.

'어떻게 저게 가능한 거지?'

―이 아름다움을 모르는 무지몽매한 자들이여.

라파엘의 온몸이 벌벌 떨렸다.

감히 상상해본 적 없던 광경에 전율했다.

―나, 블라디미르가 온 세상을 피로 잠식해 주겠노라.

일개 개인이 군단을 상대로 압도할 수 있다니.

"아······."

"라파엘님! 정신 차리세요! 어서 도망쳐야 해요!"

"도망······?"

"이대로는 다 죽어요! 정신 차리세요!"

"그, 그래. 모두 퇴각해, 퇴각해 어서!"

그나마 라파엘의 부대는 후방에 있었고, 군단장 아르테미스가 잠시나마 시간을 벌어준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아, 안돼!"

"아르테미스님께서 전사하시다니······!"

"모두 퇴각하라! 어서 퇴각, 끅!"

그 외에 붉은 안개 안에 들어간 천사 중에서 살아 돌아온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난 안 돼.'

그 뒤로 라파엘은 살아도 산 게 아니었다.

그녀의 뇌리에서 마계 칠군주, 블라디미르가 싸우는 모습이 지워지질 않았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벽을 만난 것 같았다.

'그렇게 열심히 싸워왔거늘.'

라파엘은 절망했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전장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며 살아왔다.

그 덕분에 라파엘은 3급 좌천사까지 올라올 수 있었지만.

'절대 녀석을 쓰러트릴 수 없어.'

그녀는 여전히, 고작 한 명의 존재 앞에서 벌벌 떨어야 했다.

두려움이 가슴 속에 화인火印처럼 남았다.

"더 강해져야 해."

무스펠하임에 있는 천계의 거점, 알테넨.

임시 숙소에서 라파엘은, 얼굴을 무릎에 묻은 채 작게 읊조렸다.

"돌격하라! 오늘은 붉은 피 대지의 악마들을 모두 소탕해야 한다!"

"라파엘님! 조금만 천천히!"

그날 이후, 라파엘은 더욱더 자신을 심하게 몰아붙였다.

더 강한 힘을 갈망했다.

'더는 두려움에 떨고 싶지 않아.'

전장에 있을 때만큼은, 그 존재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전장을 휩쓸고 다녔다.

'반드시 제일 위까지 올라가고 말 거야.'

그 덕분에, 그녀의 날개가 한 쌍 추가되는 날이 찾아왔다.

"3급 좌천사 라파엘."

"예, 군단장님."

"축하한다. 2급 지천사智天使 승급식이 있을 것이니, 바로 발할라로 이동하도록."

"감사합니다."

2급 지천사부턴, 아버지께서 직접 승급을 시켜주신다.

'드디어.'

한마디로 라파엘은, 오늘에서야 아버지를 처음 만나 뵌다는 것.

그로 인해 그녀의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단 한 명의 초월자.

모든 이 위에 홀로 계시는 분.

'어떤 분일까.'

기대감을 잔뜩 갖고 직접 만나 뵌 아버지는 그녀가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이 분이······.'

아버지의 신성력은 무척 포근했다.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에게 편안함을 선사했다.

―떨고 있구나.

―두려워 말거라, 아이야.

―내가 언제 어디서나 함께할 것이다.

살면서 처음으로 느껴 본 안정감이었다.

평생동안 손에 피를 묻힌 채, 전장에서 살아오던 라파엘의 가치관을 송두리째 바꿀 정도로.

그날부터 라파엘은 다시 전장을 전전했다.

다만 이전과는 다른 목표를 가지고 활약했다.

강해져서 불안감을 떨쳐내는 것이 아닌.

'할 수 있어.'

아버지를 곁에서 지키는 수호천사가 되는 것.

라파엘이 강해지고자 했던 이유는 불안감 대신, 안정감을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위협할 존재가 줄어들수록, 안정감이 늘어나는 건 당연한 거였으니까.

'그 포근함을 다시 느낄 수 있어.'

하지만 이제는 위를 바라보며 나아갈 필요가 없었다.

아버지의 신성력 아래에 있으면, 그 안정감을 계속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열두 주신, 오딘님과 환웅님이 마계 칠군주 중 한 명인 블라디미르를 처치했다!"

거기다 연이어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그녀를 불안에 떨게 했던, 블라디미르가 죽었다는 것.

'할 수 있어.'

가슴에 화인이 사라졌다고 생각한 라파엘은 다시 나가는 전장마다 활약했다.

그녀의 명성이 천계와 마계에 떨쳐 울렸다.

"라파엘이다!"

"젠장! 젠장! 다 이긴 전투였는데!"

나중에는 그녀의 등장만으로, 적들이 벌벌 떨 정도였다.

'됐어.'

그런 압도적인 활약에 결국, 그녀는 희망하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아버지를 가장 곁에서 보좌하는 다섯 천사.

모든 천사들의 정점.

1급 치천사熾天使.

거대한 아홉 쌍의 날개가, 라파엘의 등에서 펄럭거렸다.

모든 천사들이 그녀를 우러러보았고, 신들마저 그녀를 존중했다.

그리고.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

들려오는 포효 소리에 라파엘의 몸이 흠칫했다.

'블라디미르······!'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각인된 두려움이 온몸을 잠식했다.

"빈틈!"

서걱!

'으읏.'

그녀가 멈칫하자, 빠르게 쇄도한 플레이어 하나가 그녀의 날개 하나를 잘라냈다.

쐐애애애애애액!

"타깃이 지쳤다. 모두 총공세 시작하도록."

뒤이어 쇄도해 들어오는 플레이어들.

[지옥불!]

사방을 집어삼키는 광역 마법.

그 안에서 본능적으로 방어 자세를 취한 라파엘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내가 왜?

'난 분명 아버지를 지키겠다고 맹세했던 몸 아니던가?'

그런데 내가 언제부터 다시 위를 바라보게 된 거지?

서걱!

두 개의 단검을 쥔 플레이어의 공격에 라파엘의 왼쪽 팔이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라파엘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눈앞의 플레이어들은 자신과 같이 아버지를 지키기 위해 최전선에서 싸우는 이들.

자신과 같은 고귀한 천사는 아니지만, 결국 뜻이 같은 동료였다.

'내가 타락하다니······.'

라파엘이 하나 남은 팔로 자신의 얼굴을 쓸었다.

온몸 가득한 상처 너머로, 여린 그녀의 체온이 느껴졌다.

'하아.'

도대체 왜?

왜 타락한 거지?

온몸의 힘이 쭈욱 빠져나갔다.

'그 아이가 있었더라면.'

아버지가 직접 그녀에게 붙여주었던.

치유를 관장하는 천사.

아리엘이 곁에 남아있었더라면.

그랬으면 과연, 결과가 달랐을까.

라파엘의 입에서 한줄기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미 지나간 일이야.'

라파엘이 이를 악물었다.

이미 타락한 몸.

되돌릴 수 없는 과거에 아파하기보단, 지금 이 순간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생각이었다.

'이대로 죽을 순 없어.'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녀에게 허락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라파엘은 남아있는 여덟 쌍의 날개를 힘차게 날갯짓했다.

"타깃이 도망간다."

"놓칠 줄 알고!"

[천중千重의 겁박!]

푹! 서걱! 서걱!

플레이어들이 그녀를 잡기 위해 악착같이 따라붙으며 검을 휘두르고, 창을 찔러넣었다.

"으읏."

한쪽 다리가 잘려 나가고 날개가 찢어졌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니플헤임의 입구로 날아갔다.

저 멀리, 니플헤임의 입구가 시꺼멓게 변해 있었다.

모두 다 타락한 그녀를 데리고 가기 위해 몰려든 악마일 것이다.

'조금만 더.'

푹! 푹! 서걱!

"쿨럭."

뒤에서 날아든 화살이 그녀의 몸을 관통했다.

곁에서 자신을 따라오던 검객의 검에, 또 한쪽의 날개가 떨어져 나갔다.

펄럭! 펄럭!

갈수록 그녀의 몸이 너덜너덜해져 갔지만, 그녀의 날갯짓은 더욱 거세졌다.

'조금만 더.'

마지막 남은 그녀의 생명을 불태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보이는 붉은 안개.

'블라디미르.'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 남아있는 화인火印의 주인.

니플헤임의 입구 한가운데에서, 블라디미르가 과거와 같은 위용을 보이고 있었다.

'지금 죽여야 해.'

라파엘이 생각하기에, 아버지를 위협할 1순위는 블라디미르였다.

죽일수록 강해진다.

그 말은 즉, 약자들 앞에서 절대적인 위용을 보인다는 것.

시간이 흘러, 녀석이 더 많은 약자들을 학살하기 전에 지금 이 자리에서 처치해야 한다.

블라디미르는 죽일수록 강해지는 녀석이었으니까.

'너만큼은 반드시 죽이고 말겠어.'

녀석에겐 한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계속해서 강해지다 보면, 결국 이 세상을 위협하게 될 것이다.

띠링!

[<제마천사制魔天使의 권능>이 발동 되었습니다.]

'아버지를 위하여.'

그녀가 마음속으로 읊조리며 활강을 시작했다.

그 순간 무수히 많은 기억들이 그녀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악마들을 쳐부수던 영광스러운 나날들.

아홉 쌍의 날개를 갖게 되자 받게 된, 동경의 눈빛.

그리고 콜로세움에서 플레이어들을 육성시켜달라는 아버지의 부탁까지.

'나쁘지 않은 인생이었어.'

쐐애애애애애애애애액!

엄청난 속도로 지상을 향해 돌진하던 라파엘의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영원한 빛을 위하여.'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그녀의 검이 블라디미르를 향해 내리꽂혔다.

< 152화. 라파엘 > 끝

< 153화. 격변의 물결(1) >

서걱!

'기분 좋군.'

창을 휘두르며 진한 미소를 지었다.

"으으······. 제, 젠장."

"뭐 하는 거냐! 어서 놈을 죽이지 않고!"

"그, 그게······!"

"이 병신같은 새끼들! 여기서 망설이는 자는 몽땅 제물로 바쳐버릴 것이다!"

서걱!

너무 즐거웠다.

"크어억!"

머리가 잘려 나간 목 부분에서 피 분수가 쏟아져 나오고, 가슴을 크게 베인 벌레가 쓰러져서 꿈틀거렸다.

'흐음.'

코끝을 찌르는 향긋한 혈향.

공기 중으로 방울방울 흩날리는 붉은 꽃잎들.

'아름다워.'

전장이 너무 좋았다.

이런 광경은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을 테니까.

띠링!

[<제마천사制魔天使의 권능>이 영역 내에 존재하는 마기를 짓누릅니다.]

순간, 날아갈 듯 가볍던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졌다.

챙!

억지로 몸을 움직여, 날아드는 화살을 쳐낸 나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지긋지긋한 것들.'

악마들은 상대가 되지 않음에도 무작정 돌격해 들어왔다.

하늘에서도 중급 이상의 악마들이 쇄도했다.

콰지지지지지지직!

'일단 지상 병력부터.'

우선순위를 정한 나는 사방으로 뇌전을 뿌려대며 창을 휘둘렀다.

띠링!

[<벽력 >이 발동됩니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앙!

응축된 뇌전에서 뿜어져 나온 강렬한 빛이 사방을 잠식해 들어갔다.

"제발 좀 죽어라!"

"이 괴물 같은 새끼!"

나는 자세를 낮추며 공중에서 날아드는 악마들의 검날을 쳐냈다.

그리고는 재빨리 바닥을 굴러, 중급 악마들의 공세에서 벗어난 나는 몰려드는 지상군에게 창을 휘둘렀다.

'퇴로를 찾기가 쉽지 않겠는데.'

저 멀리, 고주몽과 일리아가 여유롭게 적들을 쓸어버리는 모습이 보였다.

어그로의 대부분을 내가 먹고 있기 때문에, 그쪽에서 받는 압력이 줄어든 것이다.

'일단 어떻게든 고주몽과 합류해야······.'

생각을 이어 나가던 도중,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뭐지?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주변을 둘러보자, 온통 악마들로만 가득하다.

어느새 나 혼자 적진 한가운데까지 뚫고 들어왔다는 것.

"씨발."

나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가슴 한켠이 서늘했다.

'또 정신줄을 놨어.'

방금 전에 제마천사의 권능이라는 상태창을 얼핏 본 것 같았다.

효과는 마기를 짓누른다는 것.

'그 덕분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모양이군.'

만약 제마천사의 권능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인식하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죽었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침착하자.'

나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이렇겐 절대 안 죽어.'

일단 가장 먼저.

'내가 어떻게 회귀했는데.'

이곳에서 빠져나가야 한다.

"으으······."

나와 눈이 마주친 악마들이 몸을 움찔 떨었다.

'전의를 상실했어.'

그나마 다행이라면, 악마들은 이미 공포에 질려 있다는 것.

이 정도라면 충분히 뚫고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쐐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액!

그때, 내 귓가로 한줄기 파공음이 들렸다.

'뭐지?'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섬뜩해질 정도.

저 멀리서, 회색 날개를 지닌 무언가가 날아오고, 그 뒤로 네 쌍에서 다섯 쌍의 날개를 가진 존재들이 뒤따라오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죽을 듯, 위태위태한 추격전을 벌이는 듯한 모습이었다.

'플레이어? 타락 천사? 도주가 목적이라면 왜 이쪽으로 하강하고 있는 거지?'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

그 굉음에 나를 상대하던 악마들도 하늘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리고.

'미친!'

얼마나 빠른지, 눈 한번 깜빡하는 사이 회색 날개가 100미터 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콰지지지지지지직!

나는 무의식적으로 창을 내질렀다.

'어떻게든 비껴내야 해.'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날아오는 무언가를, 정면으로 막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은은한 물의 장막!]

[오색 빛 바람의 우산!]

내 몸을 감싸는 얇은 막들이 느껴졌다.

하지만 날아드는 존재의 검은 그 막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찢어버린 채, 내게 쇄도해 들어왔다.

"······!"

순간, 시간이 느려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잘려 나간 양다리와 왼팔.

날개도 군데군데 떨어져 나갔고, 가슴에 기다란 검 한 자루가 박혀 있는 천사가, 생사 대적의 원수를 만난 것처럼 나를 똑바로 응시한 채 검을 뻗어오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선.

'눈물?'

한 줄기 물방울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내 창과 천사의 검이 맞부딪혔다.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1급 치천사 '라파엘' 을 처치했습니다.]

[근력 스텟이 1 상승합니다.]

[근력 스텟이 1 상승합니다.]

[근력 스텟이 1 상승······.]

[근력 스텟이······.]

순간 나를 덮치는 굉음과 폭발 속에서, 내 시야가 까맣게 암전되었다.

"정신이 들었는가?"

"······?"

눈을 뜨자, 고주몽의 얼굴 너머로 무스펠하임의 시뻘건 하늘이 보였다.

'내가 왜 누워 있는 거지?'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악마들을 상대로 퇴로를 찾고 있었는데.

갑자기 왜 내가······.

'아!'

몸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황급히 땅을 짚었다.

아니, 짚으려 했다.

"끄으으윽!"

그 순간 어마어마한 통증이 해일처럼 밀려 들어왔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할 정도의 아득한 통증에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뭐, 뭐지?'

몸은 아무리 노력해도 일으켜지질 않았다.

그래서 고개를 돌려보니.

'젠장.'

왼쪽 어깨가 통째로 사라져 있고, 옆구리 쪽도 찢어져서 내장이 흘러나오기 직전이었다.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

[부드러운 대천사의 손길.]

바로 옆에서 일리아가 뭐라 뭐라 중얼거리더니, 따뜻한 빛이 흘러나오는 손길로 내 옆구리를 쓸었다.

"크윽."

불에 데인 듯 화끈한 통증에, 온몸이 파르르 떨렸다.

턱뼈가 바스러질 정도로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치유 마법.'

그녀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찢어졌던 피부가 조금씩 아물고 있었다.

"아파도 조금만 참거라. 상태가 위중해서 이대로 두면 큰일 날 수도 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내 물음에 고주몽이 피식 웃었다.

"곧 있으면 미션 종료 창이 뜰 것이다. 그대가 마지막에 해치운 게 타깃으로 지정된 타락 천사라더군."

"아······."

"고생 많았다. 뒷일은 신경 쓰지 말고 푹 쉬도록."

'끝났구나.'

고주몽의 말에 나는 다시 바닥에 철퍼덕 누웠다.

따뜻한 빛이 흘러나오는 일리아의 손길에 닿을 때마다 상처 부위의 통증이 조금씩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콰과과과과광! 쾅! 콰과과과광!

"젠장! 당장 프레미어로 퇴각해!"

"끄아아아아악!"

주변에서는 여전히 전투가 한창이었다.

아니, 학살 중이었다.

'미쳤네.'

네 쌍 이상의 날개를 가진 플레이어들이 악마들 사이를 스쳐 지나가자, 무수히 많은 숫자의 악마들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위용.

'초월 리그의 플레이어들.'

그들은 지금까지 고위 플레이어들과, 일부 상위 플레이어들이 가까스로 막아내던 악마들을 단숨에 쓸어버리고 있었다.

고위 플레이어들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의 수준이었다.

인세에 신벌이 내린다면 저런 모습이 아닐까 싶을 정도.

'나도 언젠가는.'

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오른 주먹을 꾸욱 쥐었다.

그리고, 니플헤임의 입구로 몰려들었던 악마들이 모두 자취를 감췄다.

띠링!

[승리 조건 : 타락 천사를 척살하라]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코드 제로> 미션을 완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미션 <코드 제로> 경기가 종료되었습니다.]

[기본급 x 1 의 승리 수당이 지급됩니다.]

오늘따라 귓가에 울리는 콜이 너무 반가웠다.

정신적으로 너무 지쳐있기도 했고, 너무 많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후우.'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띠링!

[킬 수에 따른 보너스를 책정합니다.]

[1위. '렌' 9,371킬]

[2위. '주소월' 6,023킬]

[3위. '쿠 훌린' 5,997킬]

[4위. '몽연' 5,497킬]

[5위. '을지문덕' 5,400킬]

[킬 수 ― 9,371 킬]

[놀라운 업적!]

[압도적인 킬 수를 기록하셨습니다!]

[추가 보너스를 받습니다.]

[9,371 킬을 달성하셨기 때문에 기본급 x 5의 보너스를 지급받게 됩니다.]

[압도적으로 킬 수 1위를 달성하셨기 때문에 100,000 P 보너스를 추가로 지급받게 됩니다.]

"수고 많았다, 렌. 그대 덕분에 무사히 끝낼 수 있었군."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주몽님."

"수고 많았어요, 렌님. 다음번에는 고위 리그에서 뵙는 건가요?"

"치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리아님. 또 뵐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고주몽과 일리아가 내게 인사를 건넸다.

두 사람의 얼굴에서, 짙은 피로감이 배어 나왔다.

[<코드 제로> 경기를 종료합니다.]

[파이트 머니로 640,000 P 를 지급받았습니다. (팀 '투지' 수수료 160,000 P 차감)]

[기본급 +100,000 P / 승리 수당 +100,000 P / 추가 보너스 +600,000 P / 수수료 -160,000 P]

[다음 경기부터는 기본급을 150,000 P 로 책정합니다.]

[소속된 팀의 팜으로 이동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내 몸을 하얀빛이 감싸 안았다.

바닥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젠 이 감각도 무척 익숙해졌다.

집에 돌아가는 느낌이랄까.

띠링!

[모든 상태를 100%로 회복합니다.]

"고생 많으셨어요, 안우진님."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형."

"수고하셨습니다!"

팜으로 돌아온 나를 반겨준 것은 아세리안과 두 천사, 그리고 팀에 소속된 플레이어들이었다.

그들의 인사를 뒤로하고, 나는 가장 먼저 카이로시아부터 찾았다.

마침 내가 팜으로 돌아오는 것과 동시에, 카이로시아도 바로 옆 게이트에서 빠져나오고 있었다.

'무사했군.'

"후우. 고생 많으셨어요, 안우진님."

평소와 같은 무표정으로 얘기하는 카이로시아.

하지만 눈가에 가득한 다크서클로 보아하니, 무척 피곤한 모양이었다.

"고생 많았다."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이번 미션은 뭐랄까.

'너무 힘들었어.'

뜨거운 열기 속에서 수 차례 이어진 전투.

칼날 위를 걸어가는 것처럼 온몸을 조여오는 긴장감 속에서 움직이다 보니, 체력적으로 많이 지쳤을 것이다.

"다녀왔습니다."

카이로시아가 무사하다는 걸 안 나는, 곧장 아세리안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고생 많으셨어요, 안우진님.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그녀는 안색이 새하얗게 질린 채, 양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

아무래도 실시간으로 경기를 지켜보고 있던 모양이었다.

'블라디미르에 관련된 건 다음에 물어봐야겠군.'

너무 피곤했다.

당장이라도 숙소 침대로 쓰러지고 싶었다.

"모두들 걱정해줘서 고맙습니다. 전 들어가서 이만 쉬도록 하겠습니다."

"네. 고생 많으셨어요, 형."

내 말에 팀원들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쯧.'

전장에 오래 있었더니, 나도 모르게 살기가 묻어나왔다.

하지만 그 살기를 제어할 정신력조차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지친 상태.

이럴 땐 어서 자리를 피해주는 게 좋을 것이다.

"수고 많았다. 오늘은 푹 쉬고, 내일 웃으면서 보도록 하지. 모두들 자리로 돌아간다!"

피넛엘이 상황을 정리했다.

그녀의 외침에, 공터에 나와 있던 팀원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들을 뒤로하고 나도 숙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 식사는······."

아세리안의 물음에 나는 억지로 미소 지었다.

"지금은 생각이 없군요. 배가 고프면 이세연님께 부탁하겠습니다."

"알겠어요. 어서 푹 쉬세요."

다행히 아세리안은 나를 억지로 잡아두려 하지 않았다.

그녀 또한 알고 있는 것이다.

현재 내가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일 정도로 피곤하다는걸.

아세리안과 천사들, 그리고 팀원들을 뒤로하고 나는 숙소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방에 도착하자마자, 장비도 벗지 않은 채 침대에 털썩 누웠다.

'후우.'

하루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성계 대항전 출전을 거부하고, 처음으로 고위, 초월 플레이어들과 함께 전투를 펼쳤다.

거기다 가면 조각을 얻었고, 교환을 통해 준신화 등급의 아이템도 획득했다.

'쉽지 않았어.'

과연 블라디미르 가면을 계속 써도 될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가면 없이, 내가 초월 리그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나는 사르르 눈을 감았다.

너무 피곤해서 머리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 상황.

일단 한숨 자고 일어나서 생각해야겠다.

그나저나.

'타락 천사가 라파엘이었다니.'

앞으로 상위 리그는 어떻게 되는 걸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리고, 나는 기절하듯 잠에 빠졌다.

* * *

"영원한 빛을 위하여."

미카엘이 작게 읊조렸다.

서걱!

섬찟한 피륙음과 함께 천사 하나가 쓰러졌다.

'부디 아버지 품 안에서 행복하길.'

두 눈을 감은 미카엘이 죽은 천사의 명복을 빌었다.

한가득 뒤집어쓴 피가 바닥으로 뚝, 뚝 떨어졌다.

위이이이이이잉―

그녀가 넋을 위로하는 사이, 죽은 천사의 코에서 한 마리 파리가 빠져나왔다.

파리는 곧장 날갯짓하며 건물 바깥으로 향했다.

'감히.'

눈을 뜬 미카엘의 검이 다시 한번 춤을 추었다.

서걱!

파리를 베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묵직한 소리가 공간을 잠식했다.

엄청난 양의 피가 하얀 대리석 위로 흩뿌려졌다.

'이걸로 여기도 끝이군.'

미카엘이 검을 갈무리하며 등을 돌렸다.

그녀의 등 뒤로는, 두 개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고생이 많군."

그때, 그녀의 뒤에서 한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분이 여긴 왜?'

남성의 얼굴을 확인한 미카엘이, 무릎을 살짝 굽히며 고개를 숙였다.

"1급 치천사, 미카엘. 오딘님을 뵙습니다."

"음. 앞으로 상위 리그를 맡게 되었다지? 바쁜 몸인데 이러고 있을 시간이 있는가?"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염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딘의 물음에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하는 미카엘.

그러자 오딘이 다가와 미카엘의 어깨를 톡, 톡 두드렸다.

"힘든 시기에 게임 메이커 역할을 맡아, 고생이 많겠군. 앞으로 주신회에서 최대한 후원할 테니 너무 염려치 말도록."

오딘의 말에 미카엘이 고개를 저었다.

단발로 짧게 친 금발의 머리칼이 미카엘의 어깨를 쓸었다.

"괜찮습니다."

"호오. 그런가?"

"이럴 때일수록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정상적으로 운영해 나갈 테니 너무 심려치 마소서."

미카엘의 말에 오딘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등을 돌렸다.

옅은 달빛이, 안대를 쓰고 있는 오딘의 얼굴을 비추었다.

"기대하도록 하지."

< 153화. 격변의 물결(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