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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64화

50장 선옥

그렇게 사라진 문터를 넘어서자, 안쪽에 있는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둥글고 천장이 높은 원형의 방.

전에도 이런 공간을 본 적이 있던 것 같은데.... 맞아, 퀸시의 성역 근처에 있던 시체벌레여왕의 방이구나.

차이가 있다면 방의 입구가 하나 뿐이라는 것, 그리고 방 한쪽에 얇은 손수건이 가득 쌓여 있다는 것.

그리고 중앙에 봉인석 대신 일렁이는 하얀 종유석 같은 게 솟아 있다는 정도.

음.... 다른 건 몰라도 종유석이 엄청 수상한데?

아니나 다를까, 군주의 눈으로 보자 흐름이 엄청 불안정한하다. 여전히 뿌옇고 흐려서 명확히 드러난 건 아니지만.

그나저나 이 종유석이 선옥으로 들어가는 입구겠지? 이렇게 불안정한 걸 사용해도 과연 괜찮을까?

"나는 태선부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낸다."

태선 역시 그 종유석을 보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실제로 하는 일은 이곳의 흐름을 안정화 시키는 것. 내 힘의 대부분은 그것에 사용된다."

"저 돌이 선옥의 입구입니까?"

"입구가 아니라 선옥 그 자체다."

태선이 허공에 손가락을 두드린 순간, 종유석의 일렁임이 서서히 가라앉으며 투명하게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선옥은 선계를 부르는 다른 말이고. 다만 이대로 그냥 내버려 두면 극도로 불안정해진다. 주변에 재앙을 일으키지."

"어떤 재앙 말입니까?"

"벼락, 지진, 가뭄, 홍수."

"...난리가 나는군요."

"선계의 틈을 통해 세상에 없는 기운이 새어 나오고, 그 기운이 세상의 흐름에 변화를 일으킨다. 그래서 나 같은 태선이 필요하지."

태선이 피아노 치듯 손가락을 놀릴 때마다 종유석 주변의 흐름까지 덩달아 부드럽게 안정되었다.

이거 신기하네. 어떻게 하면 저렇게 되는 걸까?

공간 자체가 태선의 생각대로 흐름이 변하잖아?

"태선이 영역술로 선옥 주변의 공간을 지배하고, 그 지배력을 통해 선옥의 흐름을 안정시킨다. 그게 태선의 역할이다. 그대는 그 오른쪽 눈으로 이미 지켜보고 있겠지?"

"네. 지금 하시는 일을 보고 있습니다. 좀 흐릿하긴 하지만."

"흐릿한 건 이곳이 내 영역이기 때문이다. 어제도 말했지, 내 영역 안에서 그대의 눈이 효과를 발휘하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라고."

종유석 주변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잔잔하게 흐름이 가라앉았다.

덩달아 방 전체는 물론이고, 등 뒤에 있는 태선부까지 분위기가 한층 밝아졌다. 태선은 그제야 손을 거두며 한숨을 내쉬었다.

"겨우 안정됐군. 평소엔 이렇게 까지 할 필요는 없지만.... 그대를 위해 최대한으로 집중했다. 선옥의 수련 기간을 1년으로 잡으려면 이 정도는 해 놔야겠지."

"기간을 태선께서 직접 정하시는 겁니까?"

"그 또한 태선의 역할이다. 이제 저 돌에 손을 대면 선옥으로 넘어갈 수 있다. 준비는 끝났나?"

"후우...."

대답 대신 긴 심호흡으로 숨을 가다듬었다. 그러고 보니 톨라리 할아버지가 저 안에 1년 코스로 들어갔다 실패했다고 했지?

그게 좀 마음에 걸리는구만. 제발 안에 들어갔더니 시체가 남아있거나 하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혹시 선옥 자체는 모두 같은 공간입니까?"

"저 안에 같은 건 아무것도 없다. 항상 다르고, 항상 텅 비어 있지. 그대는 먼저 들어간 사람이 무언가 남긴 게 있을까 걱정하는 건가?"

"...네."

"기우일 뿐이다. 그럼.... 선옥에 들어가기에 앞서 마지막 선물을 주도록 하지."

태선은 방 한쪽에 쌓여 있던 수건을 왕창 안아 들고는 내 쪽으로 돌아왔다.

"이건 비단으로 만든 손수건이다. 선옥에 가져가도 사라지지 않아."

"사라지지 않는다는 건 먹을 수도 없다는 건데.... 이걸 전부 들고 가란 말입니까?"

왜?

일단 주니까 받긴 했다만, 양이 얼마나 많은지 앞이 안 보일 지경이다.

왜 손수건 따위를 이렇게 많이?

"모르겠다는 표정이군.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거다. 보통은 이쯤에서 단식하며 버티기 위한 여러 충고를 하는데.... 그대는 필요 없겠지."

"네. 저는 먹을 게 있으니까요. 나중에 1년이 지나면 어떻게 해야 다시 돌아 올 수 있습니까?"

"딱히 뭔가를 할 필요는 없다. 기간을 채우면 자동으로 이곳에 돌아오게 되어 있으니까. 행여 출구 같은걸 찾아 헤맬 필요는 없어. 그럼 이제 선옥에 몸을 접촉하게."

"네. 그럼...."

양손에 짐이 잔뜩 쌓인 관계로, 나는 몸을 돌려 등 쪽을 종유석에 가져가 대었다.

그 순간, 마주보던 태선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두드렸다.

"다시 말하지만 선옥은 텅 빈 공간이다."

"네. 태선."

"그리고 인간은 항상 무언가를 시선에 두어야 안심하는 동물이고."

"...."

"그러니 심마를 조심해. 저 안에서 그대를 해칠 수 있는 건 오직 그대뿐이다."

그 순간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갑자기 온 세상이 안개로 가득 찬 느낌.

이게 이미 선옥으로 넘어가고 있는 과정일까? 혹시 이계의 군대가 넘어 올 때처럼 작은 게이트라도 열리나 했는데.

실제로는 그런 이질적인 과정은 전혀 없었다.

마치 사뿐히 구름을 밟는 것처럼, 나는 아무 부담이나 저항 없이 가볍게 다른 차원으로 넘어 갈 수 있었다.

그렇게 꽉 차 있던 안개가 서서히 사라지자, 나는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이 눈앞에 나타나는 것을 기대했다.

지금부터 그런 곳에서 무려 1년을 버텨야 한다.

심심할 텐데 뭘 하지?

일단 다비한테 배워 온 나이트 스킬 연습, 그리고 이계의 침공에 맞선 방어 작전을 보다 효율적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을 계획했다.

하나는 몸으로 하는 거고 하나는 머리로 하는 거니 균형이 맞겠구만.

그러고도 만약 시간을 주체 할 수 없으면.... 태선이 말했던 것처럼 전쟁 뒤의 플랜도 세워 볼까?

그렇게 느긋한 시간 때우기를 준비할 무렵, 드디어 안개가 사라지며 선옥의 웅장한 모습이 주변에 펼쳐졌다.

"...."

그리고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품에 안고 있던 손수건 더미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 * *

온통 새카맣다.

눈에 보이는 모든 공간이 검고 두꺼운 구조물로 빽빽하게 가득 차 있다.

고개를 들어도 까마득한 하늘 너머까지 구조물이 솟아 있다.

"아니...."

이건 뭐랄까, 내 기대를 완전히 배신하는 풍경이다.

속였구나, 태선!

이 늙은이가 날 속였어! 선옥이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이라며! 아무것도 없긴 개뿔! 완전히 온 세상이 가득 차 있구만!

"후...."

오랜만에 감정이 들끓어 올랐다. 진정해야지. 어떤 착오가 있는 걸지도 모르니까.

예를 들면 선옥으로 넘어갔어야 하는데, 뭔가 문제가 생겨서 다른 차원으로 넘어 갔다던가.... 아니, 생각해보니 그게 더 문제구나.

그나저나 이 새까만 구조물은 대체 뭐지?

얼핏 보면 검은 콘크리트처럼 생겼는데, 손으로 만져보니 밀도 높은 스펀지 같은 느낌이다.

두께는 내 양 팔 길이 정도로 일정.

이렇게 생긴 구조물이 온 사방에 끝도 없이 펼쳐져 벽과 통로를 구성하고 있다. 나는 통로 하나를 골라잡고 안으로 1분 정도 들어갔다가 냅다 원래 장소로 뛰어 들어왔다.

"이거 미로잖아?"

통로 안은 일정 간격으로 직각으로 꺾이며 끝도 없이 이어져 있다.

혹시 몰라 다른 통로도 들어갔는데 모두 비슷한 구조였다. 오히려 내가 처음 도착한 공간이 특이하게도 미로의 통로들이 이어진 교차로고.

"이게 대체 뭐 하자는 거지...."

나도 모르게 식은땀이 흘러 손수건을 하나 사용했다. 설마 이러라고 손수건을 이렇게 왕창 챙겨 준 걸까?

물론 이곳이 선옥이라는 가정 하에, 온 세상이 미로로 꽉 차있든 말든 전혀 문제는 없다.

어차피 난 여기서 할 일이 없으니까.

오히려 아무것도 없는 곳보다는 차라리 이게 나으려나? 아니면 혹시 벌서부터 정신착란을 일으켜서 그 심마인지 뭔지가 찾아온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닌 거 같은데...."

혹시나 해서 미로 벽을 다시 만져봤지만 분명한 질감이 느껴졌다.

그런데 이거 생각보다 엄청 질기고 단단한데?

촉감이 스펀지 비슷해서 가볍게 뜯길 줄 알았는데, 아무리 쥐고 당기고 뜯고 난리를 쳐도 꼼짝도 안 한다.

"뭐 이런 게 다 있지...."

이걸로 성벽을 만들면 엄청나게 튼튼한 요새를 지을 수 있을 것이다.

혹시 마법에도 내성이 있을까? 궁금해서 화염 마법을 가볍게 일으키려는 순간.

푸확!

옆에서 뭔가가 날아온다.

방금 내가 들어갔다 나온 미로의 통로 안쪽에서, 검고 흐릿한 솜사탕 같은 덩어리가 빠르게 날아들었다.

"뭐야!"

반사적으로 몸을 날려 피했는데, 이번에는 시작점과 연결된 모든 통로에서 덩어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뭔데 이거!

급하게 프로텍션 매직을 걸고, 사방에 얼음벽을 전개했는데....

안 나간다.

신성 마법이고 원소 마법이고 할 것 없이, 모든 마법이 전혀 발동하지 않는다.

"큭!"

뒤늦게 피해보려고 바닥으로 몸을 날렸는데, 가장 먼저 날아온 덩어리를 완전히 피할 수 없었다.

퍽!

묵직한 통증이 뒤통수에 퍼지며 머리가 바닥에 처박혔다.

"으... 태선.... 이 늙은이가...."

날 또 속였어!

선옥 안에서도 밖에서 하던 거 전부 할 수 있다며? 근데 왜 마법이 안 나가는데?

일단 엎어진 채로 납작 엎드린 채 양손으로 머리를 가렸다. 그나마 다행인건, 사방에서 날아오는 검은 덩어리들이 바닥 높이 까지는 커버하지 않는다는 것.

슈욱!

슈욱!

슈욱!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엎드린 기분이 이런 걸까?

머리 위로 무수한 총알, 아니 무수한 덩어리들이 끝도 없이 쏟아진다.

"저딴 거 내가 마법만 쓸 수 있으면...."

이 악물고 머리를 돌렸지만 그 어떤 마법도 안 나간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걸까?

몸도 멀쩡하고 머리도 멀쩡한데 왜 마법이 안 나가? 심지어 머릿속에 있는 마력 결정들까지도 명확하게 느껴지는데?

"아니, 잠깐...."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드라이어드의 열매.

내가 선옥에 1년짜리 코스를 선택할 수 있던 이유는 오직 그것뿐이다.

그런데 마법이 안 나가잖아? 정령마법을 쓸 수 없으면 나 여기서 굶어 죽는다고!

"룩카르!"

그렇게 반쯤 정신이 나갈 것 같은 기분으로 소리친 순간.

우우우우웅!

한순간 공간이 뒤틀리며, 내가 처음으로 계약한 거대한 바위 정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룩카르! 나왔구나!"

"계약자여, 몸을 숙여라."

녀석은 낮은 목소리로 든든하게 대꾸하며 사방에서 쏟아지는 검은 덩어리들을 주먹으로 받아치기 시작했다.

푸확!

푸확!

푸확!

사방으로 몸을 돌리며 받아치는 모습이 마치 회전 포탑을 연상시킨다.

그나저나 룩카르가 이렇게 든든하게 느껴질 줄이야.

정령왕도 둘이나 계약한 마당에 비중이 많이 줄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급할 때 막 소환하기엔 이 녀석만 한 게 없구만.

그렇게 한참동안 받아치자 쏟아지던 덩어리 폭풍도 겨우 잦아들었다.

"기묘한 공간이다."

근 5분을 활약하던 룩카르는, 이내 잠잠해진 주변을 둘러보며 경고했다.

"멀지 않은 곳에 뭔가가 있다. 조심해라 계약자여. 이곳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아니.... 아무튼 덕분에 살았어. 그나저나 마법은 왜 안 나간대?"

그 와중에 정령마법만 멀쩡한 이유는 또 뭐고? 룩카르는 고개를 저으며 커다란 주먹을 고쳐 쥐었다.

"나도 알 수 없다. 계약자여, 부디 남은 정령을 신중하게 사용하여...."

그 순간, 또다시 사방의 통로에서 검은 덩어리가 날아왔다

하지만 전과 달리 통로를 꽉 채울 만큼의 거대 사이즈였다.

거기에 속도가 확연이 빨라졌다. 룩카르는 곧장 정면에서 날아오는 덩어리를 맞받아 쳤지만, 다른 세 개의 덩어리에 한순간 온몸을 두드려 맞았다.

그리고 산산 조각으로 폭발했다.

콰광!

"으악!"

나 역시 폭발에 튕기며, 엄청난 기세로 뒤쪽에 있는 벽에 처박혔다.

"으...."

머리에서 흐르는 피가 바닥에 떨어진다.

그런데 바닥에 닿은 피가 순식간에 흩어지며 모습을 감췄다. 나는 반사적으로 머리에 회복마법을 사용하려다, 마법이 안 나간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룩카르를 박살낸 덩어리들이 하나로 뭉치며, 처음 보는 사람의 얼굴로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저게 덩어리를 날린 원흉인 것 같다.

군주의 눈으로 보자 한층 명백했다. 녀석의 몸으로부터 온갖 색색의 흐름이 흘러나와, 사방에 펼쳐진 거대한 미로를 구축하는 게 보인다.

"이게 다 네놈 작품이구만...."

정체는 알 수 없지만 가공할 능력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즉시 검을 뽑아들며 정령왕과의 빙의를 준비했다.

그런데 막 이그니스의 이름을 부르려는 순간.

"감히 불청객이 내 집을 침범하다니!"

대머리의 형상을 한 거대한 얼굴이 날 노려보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용서할 수 없다! 이곳은 오직 나의 것! 바로 나 주드를 위한 영역이다! 불청객 따위가 힘을 얻고 돌아갈 생각은 꿈도 꾸지 마라!"

...주드?

이 녀석, 분명 방금 자기를 주드라고 불렀지? 그거 몇 년 전에 죽었다는 톨라리 할아버지 이름 아니었어?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65화

51장 망령 수행

주드. 현재 위칸의 국왕인 태선의 아버지.

선옥의 1년 코스를 뚫기 위해 평생을 바친 전설적인 인물로, 결국 말년에 선옥에 도전했다가 불귀의 객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어째 여기서 유령처럼 변해 난장판을 만들고 있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정체를 모르겠다. 물론 소환마법을 쓸 수 있으니 제거 하는 건 일도 아닐 것 같지만....

"뭐지? 침입자 네놈! 어디로 사라졌느냐! 썩 내 앞에 나오지 못할까!"

공간이 너무 좁다.

그래서 은신을 발동하고 미로 안쪽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당장 방어 관련된 마법을 쓸 수 없기 때문에, 좁은 시작 지점에 정령왕을 소환했다간 나까지 휘말릴 위험이 있다.

그렇다고 아무 생각 없이 빙의를 하는 것도 위험하다.

암만 생각해도 빙의의 뒷감당이 안 된 것 같다. 여기가 평범한 지상이었다면 테라직을 활용해 피해의 대부분을 지면에 흘려보낼 수 있겠지만....

이곳엔 땅이 없다.

당장 내가 밟고 있는 건 흐릿한 구름 같은 정체불명의 물질.

그렇다고 드라이어드를 소환해 라이프링크를 거는 것도 위험하다. 내 유일한 밥줄이니까. 괜히 소환했다가 뭔 일이라도 터지면 앞으로 사나흘동안 쫄쫄 굶어야 한다고.

"믿을 수가 없군. 분명 여기 있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감쪽같이 사라 질 수 있지?"

주드는 거대한 머리를 사방으로 돌리며 내 흔적을 찾았다.

암만 봐도 연기 같으니 물리적인 내성이 있을 것 같다. 역시 이번엔 이그니스를 소환하는 게 좋겠지?

"그래 봤자 헛수고다! 생긴 걸 보아하니 서대륙인 같은데, 이 몸은 소싯적에 서대륙을 유람하며 그곳의 힘도 섭렵했단 말씀이지!"

...뭐?

톨라리처럼 마법 유학이라도 왔었다는 건가? 일단 계속 숨어서 뭐라 떠드는지 들어 봐야겠다.

"몸이 작은 걸 보니 분명 마법사겠지? 그러니 네놈에겐 희망이 없다. 이 몸 역시 마법을 익혔고, 그리하여 내 영역에 마법에 대한 금제를 걸 수 있었다."

"...."

"아니면 신관인가? 그래도 의미 없다. 이 몸 또한 서대륙의 대신전에 3년을 의탁하며 신성 마법의 기본 또한 받아들였단 말씀!"

"...."

"그러니 네놈이 어떤 마법을 쓴다 해도 내 영역 안에서는 갓난아기처럼 무력할 뿐이다! 희망이 없으니 썩 나와 무릎을 꿇어라! 그리하면 고통 없이 빠르게 보내주마!"

그러니까, 이게 다 영역술이었던 거구나.

자신의 영역 안에서 특정 능력을 봉인하는 게 가능한 모양이다. 그래서 내가 지금 마법을 쓸 수 없는 거고.

"허, 그래도 나타나지 않는 건가? 흠, 그러고 보니 검을 가지고 있었지? 네놈 설마 기사인 것이냐? 허나 그 또한 헛된 희망이다."

"...."

"나 또한 육체를 단련하여 마갑을 착용했지. 직접 그 힘을 이해했다는 뜻이다. 그러니 내 영역 안에서는 마갑의 힘도 발동할 수 없다!"

그리고 봉인이 가능한 건 자신이 쓸 수 있거나 접해봤던 힘에 한정된 모양.

아하, 그래서 정령마법은 멀쩡히 나가는 거구나.

아무리 온갖 힘을 섭렵했다 해도 정령과 계약하는 건 쉽지 않았을 테니까.

"그러니 내 영역에서 사용 가능한 건 오직 선술뿐. 허나 선술을 쓰는 자가 이 선옥에 들어 올 리 없지. 그러니 네놈은 이미 손발이 묶인 셈이다!"

"...."

"이 몸은 최강의 선술을 손에 넣었다. 영역술, 그것도 극한의 영역술이다. 태선인 내 아들보다 훨씬 강하지. 그런데 태선.... 태선이 뭐지? 그리고 아들...."

순간 자신만만하던 주드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아들? 내게 아들이 있었나? 왜 기억이 안 나지?"

"...."

"그리고 이 몸은 어째서.... 왜 이런 곳에 계속 있는 것이냐? 분명 수행에 성공했을 텐데?"

"...."

"그렇게 극한의 영역술을 손에 넣고.... 모두가 날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가.... 위칸의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위칸? 위칸이 뭐였더라? 그리고 돌아간다니 어디로?"

주드는 혼란스러운 듯 몸을 떨기 시작했다.

이제야 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간 건지 이해가 간다.

선옥에 들어온 주드는 1년을 채우지 못하고 죽었는데, 아무래도 죽고 나서도 뭔가가 남아 저렇게 된 모양.

어쩌면 1년 코스만 뭔가 특별한 걸까?

다른 짧은 코스들과 달리, 도전자가 없어 선례가 쌓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태선도 딱히 차이를 몰랐던 거고.

"으아악! 이게 다 불청객 네놈 때문이다! 썩 나와라! 모습을 드러내! 네 놈을 죽여야 내가 안심할 수 있다!"

주드는 또다시 발악하며 사방으로 검은 덩어리를 방출하기 시작했다.

딱 봐도 제정신이 아니구만.

나도 여기서 죽으면 저 꼴이 되는 건가? 불쌍하니 빨리 보내 주는 게 좋겠다.

그런데 막 이그니스를 소환하려는 순간.

"음.... 거기.... 그쪽인가?"

녀석은 놀랍게도 내가 있는 미로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잠깐, 이러면 너무 거리가 가깝잖아?

급한 마음에 계속해서 미로 안쪽으로 뒷걸음쳤다. 당장 프로텍션 매직도 못 쓰는데, 코앞에다 이그니스 소환했다간 나까지 잿더미로 변할지 모른다.

"끄응...."

한편 덩치가 커서 미로 입구에 막힌 녀석은, 순간 위 아래로 몸을 죽 늘리며 내가 있는 곳으로 계속 다가오기 시작했다.

"거기구나. 좋아. 조금이지만 느껴진다...."

"...."

"신통한 힘이군. 자신을 지우는 능력인가? 눈으로도 볼 수 없고 기척도 느껴지지 않지만...."

아니, 대체 어떻게 알고 쫓아오는 거지?

내 은신은 이계의 괴물들조차 감지하지 못할 만큼 완벽할 텐데?

"그래. 어디 한번 계속 도망쳐 봐라. 네놈이 어딜 가더라도 내 영역 에서 끝까지 도망칠 수는 없으니."

주드는 마치 공포영화처럼 계속해서 날 추격했다.

그래, 이대로는 끝이 없다. 나는 마침 뒤쪽에 있던 미로의 꺾인 방향으로 몸을 날리며 이그니스를 소환했다.

"이그니스!"

그리고는 반대방향으로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등 뒤로 퍼지는 맹렬한 열기로부터 조금이라도 멀리 도망치기 위해....

* * *

침입자는 죽여야 한다.

주드의 머릿속엔 그 생각 밖에 없었다. 그것을 위해 세상에 자신의 영역을 펼치고,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는 미로를 펼쳐 놓았다.

어째서일까?

문득 그 마지막 한 달이 떠올랐다.

영혼마저 찢어버릴 듯한 허기와 갈증의 시간.

그 모두를 버텨내고 겨우 마지막 한 달이 남았을 무렵, 주드는 무언가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계산이 틀렸다.

길고 긴 수행의 결과, 그는 자신의 몸을 손톱 끝까지 인식하고 다루는 법을 터득했다.

그래서 가까스로 선옥에서 1년을 버틸 수 있는 육체를 만들었다고 판단했는데.

모든 계산이 완벽한 줄 알았는데.

하필 그 마지막 순간에, 약간의 오차가 있다는 것을 깨달아 버렸다.

마지막 한 달.

처음엔 초조함에 고통 받았고, 다음엔 자책에 몸부림쳤다.

마지막은 원통함뿐이었다.

억울하다.

실수의 원인은 온전히 자신에게 있는 게 아니었다.

마지막 순간에 외부의 도움을 받았는데, 그것이 주드의 완벽한 신체 컨트롤에 약간의 오차를 만들고 말았다.

그것만 아니었다면.

그것만 아니었으면 성공 했을 텐데.

그렇게 성공적으로 수행을 마치고, 선옥 밖에 나왔을 자신에게 쏟아질 백성들의 박수와 환희를 떠올렸다.

얼마나 행복했을까.

아니, 그 보다는 후련함이 더 컸을 것이다.

자신의 이 욕심 때문에, 어려서 일찍 부터 고생시킨 아들에게 겨우 면을 세울 수 있었겠지.

미안하다, 아들아.

하지만 난 틀리지 않았다.

인간은 선옥의 마지막 단계를 버틸 수 없다고? 그렇지 않아. 결국 내 평생의 도전은 헛수고가 아니었다.

그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또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은, 늘그막에 본 어린 손녀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었다는 것.

극한의 육체를 만드는 과정은 지켜보는 주변 사람들에게 고통을 줄 뿐이다.

그렇게 노년에 뼈만 앙상한 자신을 보고 자란 손녀는 마음이 어땠을까? 분명 선옥이라는 단어 자체에 거부감과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손녀는 어린 나이에 도망치듯 궁을 빠져나가 버렸다.

그렇다.

자신의 욕심이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만들었다.

그것을 만회할 방법은 하나뿐이다. 역사상 그 누구도 성공한 적 없던, 선옥의 가장 높은 단계를 통과 하는 것.

1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1년을 버텨낸다.

분명 그것을 성공했어야 할 터인데....

주드는 혼란스러웠다.

어째서인지 마지막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어째서 자신은 계속 이런 곳을 떠돌며, 이토록 증오와 고통에 타인을 비난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방금 잠시 보았던 그 아이는 대체 무슨 죄인가?

금발에 서로 다른 눈동자를 가지고 있던 이국의 아이.

자신은 왜 그 아이를 비난하며 못살게 추격하는가? 그저 이 선옥의 가장 힘든 시련에 도전한 갸륵한 소년일 뿐인데?

질투?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모두의 칭송을 받는 게 두려워서? 고작 그딴 치졸한 마음 때문에?

"그.... 그래!"

소년을 추격하던 주드는 순간 몸을 멈추며 소리쳤다.

"그건 용납할 수 없다! 선옥의 마지막을 성공하는 건 이 몸뿐이어야 해! 오직 나 주드만이, 평생을 이 일에 바친 이 몸이 아니면 그 누구도 성공해선 안 된다! 용납할 수 없어! 죽어라!"

그런데 다시 녀석의 기운을 감지하고 모퉁이를 돈 순간.

푸화아아아아악!

새빨간 불꽃이 눈앞을 가로막았다.

마법?

어째서 이곳에 마법이 존재할 수 있지?

이곳은 주드 자신이 만든 극한의 영역.

이곳을 찾아올 모든 인간을 묻어버리기 위해 만든 완벽한 개미지옥이다.

그 어떤 이능도 이곳에선 힘을 발휘할 수 없다. 바로 자신이 그렇게 정 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떨어진 곳에 선명한 불길에 휩싸인 선명한 여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는...."

"안타깝구나."

여자는 한마디 동정과 함께, 자신을 향해 거대한 불꽃을 집어 던졌다.

콰과과과과과과광!

작열하는 화염과 폭발이 주드의 몸을 휘감았다. 위기를 느낀 그는 급하게 몸을 뒤로 빼며 소리쳤다.

"마법은 불가하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여자는 마치 춤을 추듯 몸을 회전하며, 양손에 맺힌 불덩이를 연속으로 집어던졌다.

"큭! 네놈!"

그것은 너무도 강력한 마법이었다.

오래 전 서대륙에서 유학할 때 보았던 그 어떤 마법사의 불보다 강력하다.

어쩌면 이게 소문으로만 들었던 템페스트라는 마법일까?

아크 위저드라는 가장 높은 경지에 오른 마법사만 가능하다고 들었는데.

"큭...! 이 엄청난 화염이라니...."

이번엔 주드가 뒤로 도망칠 차례였다.

그는 자신이 만든 미로 속으로 빠르게 후퇴했다.

하지만 날아오는 불덩이는 마치 생명이 깃들기라도 한 듯, 미로를 완벽하게 풀어내며 자신의 주변에서 폭발을 일으켰다.

콰과과과과과과과광!

"으으...."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자신이 이곳에서 터득한 모든 힘은, 지금 이 거대한 영역을 구축하는데 소모되고 있다.

그러니 이 영역을 풀기만 하면 어떻게든 저 불꽃의 여자와 자웅을 겨룰 수 있을 것 같은데....

풀리지 않는다.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이 영역을 유지했는지, 이미 세상에 고정되어 자신의 뜻대로 바꿀 수가 없다.

"하, 하, 하하하...."

이 얼마나 어리석은 결말이란 말인가.

그 끔찍한 고생을 통해 기껏 얻어낸 선술을 이런 식으로 낭비해 버리다니.

"나는.... 이 몸이 다룰 수 있는 건 선술뿐이 아니다!"

눈이 돌아간 주드는, 스스로의 형태를 예전 자신의 모습으로 새롭게 빚어내기 시작했다.

인간.

비쩍 말랐던 노인의 모습.

아니, 그보다 더 오래 전으로, 아직은 육체가 건강했던 시절, 배움을 얻기 위해 다른 대륙까지 자유롭게 여행 다녔던 그 시절의 모습으로.

"이 몸이 서대륙에서 검을 수행한 것만 5년이다!"

그리고는 자신을 이루고 있던 검은 안개를 뭉쳐서 크고 두꺼운 검으로 만들었다.

동시에 새로운 불덩이가 코너를 돌며 자신의 앞으로 날아들었다.

푸확!

주드는 검을 휘둘러 불덩이를 잘라냈다.

잘린 불덩이가 좌우로 흩어지며 폭발하려는 순간, 주드는 칼날에 강렬한 진동을 일으키며 쏟아지는 폭발을 전부 받아냈다.

위위이이이이잉!

"봤느냐! 이것이 바로 진동검이다! 예전에는 불가능했지만, 지금처럼 내가 만든 영역 속에서는...."

그 순간, 이번에는 불덩어리 대신 불꽃의 여자가 직접 코너를 돌며 자신을 향해 몸을 날렸다.

"네 이놈!"

주드는 여자를 향해 검을 내리 그었다.

하지만 여자는 너무도 간단히 칼날을 피했다.

마치 물이 흐르는 듯한 움직임.

아니, 그보다는 타오르는 불꽃이 허공에 흩어지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파고든 여자는, 주드를 한순간 와락 껴안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외로웠겠구나. 불쌍한 인간 같으니라고."

그와 동시에, 주드의 온몸에 거대한 불기둥이 솟구쳤다.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66화

51장 망령 수행

모퉁이 너머로 불길이 치솟는 소리가 들렸다.

거리가 꽤 먼 것 같은데도 엄청난 열기가 느껴진다. 역시 이그니스, 화력 하나는 끝내주는구만.

-임무를 끝냈다. 이제 안전해.

동시에 뇌리에서 이그니스의 목소리가 울렸다.

해치웠나?

그렇게 열기의 흔적을 따라가자, 아직도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는 잿더미의 흔적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그니스는 이미 돌아간 것 같고...."

그 와중에도 잿더미에서 검은 매연이 피어오르며 흩어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흠, 이건 좀 신기하네.

주드는 처음부터 연기 같은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게 불에 타 재가 되고, 거기서 다시 연기가 피어오르다니.

바로 그 순간, 온 사방에 가득하던 새까만 미로가 서서히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온 세상이 뿌옇고 흐릿한 텅 빈 공간으로 돌아왔다.

이게 바로 진짜 선옥이구나.

정말 눈에 보이는 게 아무것도 없다. 그나마 유일한 게 저 멀리 잔뜩 떨어져 있던 손수건 정도?

"후...."

겨우 안도하고 손수건 쪽으로 가려는데, 피어오르던 검은 연기 사이로 수증기 같은 뽀얀 연기가 새롭게 올라오는 게 보였다.

"...응?"

이건 뭐지?

하얀 연기가 뭉치며 형태를 이루기 시작한다.

대머리에 수염만 긴 비쩍 마른 노인.

누가 봐도 피골이 상접한 노인의 형태로 뭉친 연기는, 이내 꿈틀하고 몸을 움직이며 내 쪽을 돌아보았다.

"주드?"

뭔데 이거? 그러고도 아직 살았다고?

급한 대로 검을 뽑아 베려했다. 그런데 노인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날렵한 몸놀림으로 검을 피하며 뒤로 물러났다.

"기다리게!"

노인은 양손을 번쩍 들며 항복하는 자세를 취했다.

"공격하지 말게. 난 자네를 해칠 생각이 없어."

"방금까지 그 난리를 쳤으면서?"

"미안하네. 그땐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노인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품고 있던 어둠이 너무 거대했네. 거기서 도저히 벗어 날 수 없었어. 하지만 이젠 괜찮네. 자네가 날 해방시켜 줬어."

"...뭐?"

"그 불꽃의 여인이 날 사로잡은 어둠을 전부 태워 버렸네. 덕분에 원래대로 돌아왔어. 물론 더는 살아 있는 존재는 아니네만...."

노인은 연기로 이뤄진 자신의 몸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보다 영역이 풀렸으니 자네의 힘도 돌아 왔을 게야. 나 같은 건 상대도 안 될 테니 걱정할 필요 없네."

그러고 보니 다시 마법이 써지네? 나는 혹시 몰라 프로텍션 매직을 발동하며 물었다.

"당신이 주드 맞지? 태선의 아버지?"

"맞네. 비록 지금은 유령 같은 보잘것없는 모습이 되었네만."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할 수 있어?"

군주의 눈으로 본 주드는 다양한 에너지의 흐름으로만 이뤄진 기묘한 존재였다.

일단 살아 있지 않은 건 확실한데....

그러고 보니 전에 이런 걸 한번 보지 않았나? 그게 어디였더라?

"설명이라... 알겠네. 참으로 부끄러운 이야기네만, 내 최대한 성실하게 설명해 보도록 하지."

주드의 몸에서 깊은 후회와 실망이 보였다. 당장은 적대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경계를 늦추진 말아야지.

"모습을 보아하니 서대륙 사람 같네만, 자네는 혹시 내가 누군지 알고 있나?"

"알지. 주드. 위칸의 국왕인 태선의 아버지. 선옥의 1년 코스를 도전하기 위해 평생을 수련하느라 왕위를 잇지 않은 사람."

"호, 중요한건 다 알고 있군. 맞아. 난 그런 사람이네."

주드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빠르겠군. 내가 한 수련은 결국 몸 만들기였네. 선옥에서 1년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버티는 몸. 그리고 결국 만들었다는 확신을 가지고 선옥에 들어왔는데...."

"실패했다고?"

"실패했네."

주드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난 자신 있었네. 신진대사를 극단적으로 낮추는 몸을 만들었고, 스스로를 반쯤 가사상태로 만드는 경지에도 도달했으니까. 그런데 딱 한 가지를 감안하지 못했지."

"그게 뭔데?"

"수명."

"수명?"

"그때가 90세를 넘겼을 무렵이었네. 나는 착실하게 수행을 거듭하며 원하는 몸을 만들고 있었네만, 덩달아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도 느끼고 있었네."

90살을 넘겼으면 그럴 만도 하지. 그 몸 만들기라는 게 딱 봐도 충분한 영양섭취와는 거리가 한참 먼 것 같고.

"나는 번민에 휩싸였네. 아직 수행이 덜 끝났는데도 선옥에 들어가야 하나? 어떻게든 몇 년 만 더 버틸 수 있다면 분명 원하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전에 죽어 버리면 지금까지의 고생이 전부 수포로 돌아가는 게 아닐까?"

"그래서?"

"그때 한 녀석이 날 몰래 찾아왔네."

주드는 후회 가득한 얼굴로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녀석은 내가 품은 이 번민이 무척 맘에 든다고 하더군. 그리고는 장래가 기대된다며 소원을 들어준다고 했네. 허허. 장래라니, 90살을 넘긴 노인에게 미래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다니 재밌지 않은가?"

잠깐, 이거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 같은데?

"...그래서?"

"그래서 난 소원을 빌었네. 다른 건 필요 없고, 그저 수행을 더 쌓을 시간이 필요하니 수명을 좀 늘려줄 수 있냐고 말이야."

"잠깐."

여기서부터는 굳이 안 들어도 될 것 같다. 나는 관자놀이가 지끈대는 것을 느끼며 먼저 질문했다.

"그랬더니 날카로운 바늘 같은 걸 찔러서 내용물을 몸 안에 투입하지 않았어?"

"허?"

주드는 놀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그걸 자네가 어찌 알고 있는가?"

"그 소원을 들어주네 어쩌네 한 녀석, 온몸을 하얀 붕대로 둘둘 말고 있는 괴상한 모습이지?"

"정확하네. 자신을 다른 차원에서 온 후원자라고 소개했네."

"후원자...."

나는 눈을 감고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주무르기 시작했다.

후원자.

그 망할 녀석이 서대륙뿐만 아니라 이곳 동대륙에서도 희생자를 고르고 있었구만.

"그자 덕분에 난 안심하고 더 오래 수행을 쌓을 수 있었네. 그런데 이 늘어난 수명이 발목을 잡을 줄은 몰랐지."

"...그게 정확히 무슨 소리야?"

"수명이 늘어났다는 건, 날 구성하고 있는 조직들이 약간이라도 젊어졌다는 걸 의미하네."

"그런데?"

"아예 확 젊어졌다면 미리 알았을 게야. 허나 그 정도는 아니었고.... 나는 마지막 한 달을 남기고서야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네. 분명 1년을 버틸 수 있는 몸을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마지막 한 달을 남겨 놓고 한계가 찾아왔어."

"그러니까, 몸이 살짝 젊어진 바람에 기초대사도 살짝 올라버렸다?"

"그렇지."

주드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네. 끔찍한 후회가 밀려왔지. 내가 왜 그랬을까? 내가 왜 마지막에 그 후원자란 놈의 감언이설에 속아 이 사달을 만들었을까...."

"...."

"마지막 며칠은 잘 기억이 안 나. 그저 마음이 새까맣게 물든 것만 기억나네. 뒤틀리는 것 같았지. 그 뒤로 닷새 정도 더 버텼으려나? 나중에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이 지경이 되어 있었네."

주드가 허공에 손가락을 두드리자, 순간 아무것도 없던 주변에 희미한 영역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동작 그만."

곧바로 녀석의 얼굴을 향해 칼을 겨눴다. 주드는 그제야 흠칫 놀라며 두드리던 손가락을 거뒀다.

"경계할 필요 없네. 그저 죽어서도 이런 기묘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죽어서도 선술을 얻었다고?"

"어떻게 그게 가능했는지는 모르겠네."

주드는 작게 펼친 투명한 미로 같은 영역을 거두며 말했다.

"분명 1년을 못 채우고 죽은 건 맞아. 그런데 선술을 얻고 이런 유령 같은 몸이 되었네. 그렇다고 실체가 완전히 없는 것도 아니고.... 나도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어."

아마도 후원자가 투입한 주사 때문이 아닐까?

아, 마침 생각났다. 전에 처음으로 사이크 차원에 넘어갔을 때 관중석에 꽉 차 있던 사이크인 들의 모습.

살아 있는 육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주제에, 온갖 다양한 흐름만으로 엮여 있던 기묘한 생명체.

군주의 눈으로 본 지금 주드의 모습이 바로 그들과 흡사하다.

어쩌면 주드는 죽는 순간에 사이크인과 비슷한 존재가 되었고, 그 상태로 1년을 다 채워서 선술의 힘을 얻게 된 걸까?

정확한 건 나도 모른다.

어쩌면 1년짜리 선옥 코스 자체가 뭔가 특별해서 저렇게 됐을지도?

"여하튼 그땐 이미 돌이킬 수 없었네. 난 검게 물들어 있었지. 온갖 부정적인 마음만 가득한 채 모든 걸 남 탓으로 돌렸어. 실패했다는 걸 인정하지 못하고.... 그 와중에 행여 누가 이곳에 들어와 성공하면 안 된다는 생각만 가득했네."

"왜?"

"내가 얻지 못할 영광이라면 다른 누구도 얻어선 안 되니까. 허허. 정말 치졸하고 유치한 생각이 아닐 수 없네."

주드는 헛웃음을 지으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는 군주의 눈으로 녀석의 감정 상태를 확인하며 검을 거뒀다.

"그러다가 내가 들어 온 거고?"

"미안하네. 분명 텅 빈 선옥을 기대하고 왔을 텐데 무척 놀랐겠지?"

"누가 들어오면 바로 족치려고 영역술로 미로를 깔아 놓은 거야?"

"그렇지. 내 다시 한번 사과하겠네. 정말 미안해."

"...."

"자네도 분명 목숨 걸고 1년짜리 수행에 도전했을 텐데, 필시 나 때문에 시작부터 계획이 엉클어졌겠지. 정말 뭐라 할 말이 없네. 면목이 없어."

"아니, 그건 딱히 상관없는데...."

난 당신처럼 육체를 한계까지 쥐어짜거나, 몸을 가사상태로 만들어 에너지 소비를 최소화할 필요가 없거든.

물론 그 말을 대 놓고 당당하게 하면 좀 사악해 보이겠지? 일단 말을 돌려서 궁금한 것부터 물어봐야지.

"그보다 선옥은 항상 초기화된다며? 아무리 당신이 이렇게 됐어도 왜 나랑 공간이 겹친 거야?"

"방금 말하지 않았나. 내가 만든 영역 때문이라고."

"아까 그 미로?"

"그 또한 내 영역의 힘이었네. 절대 빠져나갈 수 없는 거대한 영역을 펼쳐놓고, 나와 같은 1년짜리 수행에 도전하는 자들을 이곳으로 유도했지. 그래서 자네는 바로 여기로 올 수밖에 없던 거야."

"그런 것까지 가능하다고?"

"선옥 안에서는 가능하지. 물론 지금은 어렵고. 자네 덕분에 내 사악한 것들이 날아갔지만, 동시에 내가 얻은 선술도 어느 정도 사라져 버렸거든."

확실히 처음 봤을 때와 비교하면 덩치나 밀도 면에서 비교조차 안 된다.

몸의 대부분이 까맣게 타버렸는데, 그 탄 부분을 전부 도려낸 느낌이랄까?

"그나저나 다시 한번 사죄하겠네. 내가 발목 잡은 덕에 자네의 수행이 시작부터 망가졌어. 이를 어쩌면 좋나?"

주드는 불쌍하다는 얼굴로 내 몸을 천천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선옥에 들어오기 전에 몸도 제대로 못 만든 것 같군. 태선이 말리지 않던가? 내 아들이 절대 허락할 리 없는데. 그래도 체격이 작아서 기초대사가 낮을 것 같기는 하고...."

"괜찮아. 여기 단식 수행하러 온 거 아니니까."

"그게 무슨 소린가?"

"먹을 걱정은 할 필요 없다고. 배도 안 고픈데 지금 당장 꺼내서 보여주긴 뭐하고...."

나는 드라이어드를 소환하려다 말고 주드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1년 동안 심심할 거 같았는데 잘됐네. 당신이 톨라리 할아버지지?"

"톨라리? 오, 그 아이를 알고 있나?"

"알고 있고 말고. 손녀 이야기 듣고 싶지 않아? 그리고 지금 바깥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싶네!"

주드는 냉큼 내 앞에 달라붙으며 간절한 눈으로 애원했다.

"지금 당장 알려주게. 손녀는 잘 있는가? 성격이 워낙 괴팍해서 걱정이 많았어. 친구는 좀 사귀었나? 전에 만났을 때 도통 말을 피해서 걱정이 컸네. 분명 서대륙에서 혼자 외롭게 지내고 있겠지? 이 할애비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네. 선옥에 들어오기 전까지 유일한 걱정이 바로 톨라리였어.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나? 여전히 삐쩍 말라서는 눈 밑이 퀭하게 어둡고? 그 아이는 선옥에 들어갈 것도 아니면서 왜 자기 몸을 그렇게 혹사하는지.... 제발 알려주게! 지금 톨라리는 어떻게 되었나! 그리고 자네와 무슨 관계지?"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67화

51장 망령 수행

"정말 다행이야. 눈물이 날 것 같군. 톨라리가 사람들과 어울려 잘 살고 있다니...."

이야기를 들은 주드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보다 그 아이가 선옥에 들어갈 결심을 했다니.... 염치없네만 마음이 좀 놓이는군. 어린 것이 나 때문에 충격을 받아 나라를 떠난 게 아닌가 했거든."

"확실히 선옥에 들어가는 거 자체를 좀 무서워하더라. 물론 반대로 마법을 좋아한 것도 있고."

"확실히 마법에 관심이 많은 아이였지. 그나저나 톨라리가 아크 위저드가 되었다니 놀랍군. 작년에 잠시 돌아왔을 때는 그런 소리를 안 했는데.... 아, 이제는 작년이 아니겠군. 내가 선옥에 들어온 지 몇 년이나 지났나?"

"정확한 건 모르지만, 톨라리가 마지막으로 위칸에 들린 게 5년 전."

"벌써 시간이 그렇게 지났나? 하긴 나도 그동안 제정신이 아니었으니...."

주드는 눈을 감으며 수염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예법대로 따지자면 태선에게도 존댓말을 썼으니, 당연히 태선의 부친인 주드에게는 그보다 높은 존대를 붙이는 게 맞긴 한데....

하지만 주드는 왕도 아니었고 지금은 인간조차 아니다. 무엇보다 본인이 딱히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으니 뭐 상관없겠지.

"내게 선물을 줬던 후원자가 실은 다른 차원의 첩자였고.... 그자의 차원이 곧 우리 세상을 노리고 침공을 개시한다고?"

"맞아. 거기가 사이크 차원."

"사이크라, 그자들은 어째서 그런 짓을 하는 건가?"

난들 알겠냐? 일단 막고 나서 알아볼 문제지.

내가 고개를 젓자, 주드는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후원자가 예사 존재가 아니라는 건 익히 예감했네. 그런데 나 말고 다른 자들에게도 선물을 주었고, 개중에는 괴물로 변해 이쪽을 공격한 자도 있다?"

"맞아."

"그렇다면 이 몸도 위험했겠군. 죽어서 이런 존재가 된 것도 어쩌면 그 때문이 아닐까 싶네."

"내 생각도 그래. 아무튼 지금은 문제없는 거지? 갑자기 폭주해서 다시 새까맣게 변한다든가?"

"그럴 염려는 없네."

주드는 시원하게 고개를 저었다.

"자네가 부른 그 불의 여인 덕분에 완전히 정화되었네. 정령 마법이라. 서대륙에 갔을 때 이야기 정도는 들었네. 실제로 그걸 다루는 자가 있을 줄은 몰랐지만."

"동대륙에도 정령은 있잖아?"

"물론이네. 바람의 정령왕 실피네스가 있지. 하나 감히 누가 그 위대한 자연의 힘을 손에 넣고 부리려 하겠는가? 사는 곳에 접근조차 힘들 텐데. 정령왕은 우리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라네."

"틀린 말은 아닌데, 방금 당신 정화한 게 바로 불의 정령왕 이그니스야."

순간 주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인가?"

"물론 정화하려고 부른 건 아니고, 당신 날려 버리려고 부른 거지만. 아, 그거 말고도 대지의 정령왕도 소환할 수 있어."

"...말도 안 돼. 도무지 믿을 수가 없군."

주드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자네 대체 정체가 뭔가? 이미 마법과 신성마법을 다루는데, 거기에 정령 마법까지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단 말인가?"

"안 그러면 세계를 못 구하니까."

"흠...."

"이계의 침공을 막으려면 그 이상을 해야 해. 내가 괜히 바다 건너 여기까지 왔겠어?"

"...이 몸이 정령마법을 접하지 못한 게 외려 다행이군."

"응?"

"정령 마법은 내가 모르는 힘이었네. 그래서 영역의 금제에 넣지 못했지. 만약 그랬다면 자네 어땠겠나?"

만약 그랬다면 정말 낭패였겠지?

그랬다면 남는 게 그림자 능력뿐인데.... 당장 선옥엔 그림자가 거의 없다. 진짜 맨몸으로 칼 휘두르면서 싸울 수밖에.

그나저나 이 할아버지는 선옥 1년 코스가 인생의 목표였으면서, 어째서 연관도 없는 힘을 얻기 위해 서대륙까지 다녀온 걸까?

"마법이나 신성마법은 왜 익힌 거야? 서대륙 와서 기사 수행도 5년이나 했다며?"

"물론 선옥을 버텨낼 힘을 얻기 위해서였지."

"그게 도움이 돼?"

"그때는 도움이 될 거라는 믿음이 있었네."

주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인간의 몸으로 1년간 굶고 버틴다는 건 말이 안 돼. 평범한 방법으로는 말이지. 그래서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힘들을 접해보며, 그중에 선옥을 돌파할 힌트를 얻어 보려 했네. 신성 마법 같은 건 딱 봐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가? 상처도 회복하고, 체력도 높여주고, 통증도 줄여주고?"

"확실히... 그래서 도움이 됐어?"

"큰 도움은 안 됐네. 마법은 말할 것도 없고. 기사 수련은 오히려 폐를 끼쳤지. 몸에 근육이 엄청 붙었거든."

"근육이 많으면 대사도 올라가니까?"

"그렇지. 오히려 결정적으로 도움이 된 건 이런 힘들이 아니라 영약이었네."

"영약?"

"신진대사를 인위적으로 낮추고, 몸을 가사 상태를 만들고.... 전부 영약 덕분에 가능했네. 아주 오랫동안 필요한 영약을 복용하며 몸을 만들었지. 그러고 보니 자네 페이우드 제국 출신이라 했지?"

"맞아. 제국 황자."

"그렇다면 제국의 여러 가문들에 대한 지식이 있겠군. 그곳에 영약에 극에 달한 루넨브레스라는 가문이 있는데...."

"거기 우리 외가야."

"외가?"

주드의 눈이 다시 한번 크게 떠졌다. 나도 이 할아버지 입에서 설마 루넨브레스라는 단어가 나올 줄은 몰랐네.

"어머니 쪽 가문이야. 여전히 영약 하나는 세계 최고고."

"오오, 그렇게 또 연이 닿는가? 안주인인 피오라 부인은 잘 계시나? 시녀장이었던 멜빈 양은?"

"누구? 한 명도 모르겠는데?"

"...그런가?"

주드는 아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 만도 하지. 내 서른쯤에 그곳에 들렸으니."

그렇다면 70년도 더 전의 일이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의 어머니, 그러니까 외할머니의 성함이 어떻게 되었더라?

"그래도 저택은 여전하겠지? 주변에 어마어마하게 넓은 숲이 있는 멋진 저택이었네. 마치 바다 한가운데 있는 외딴 섬과 같은 느낌이었지."

"맞아. 저택도 숲도 여전해."

"기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군. 피오라 부인의 후손과 이렇게 만나다니. 그분은 내 은인 같은 분이셨지. 그분이 아니었다면 난 한참 전에 꿈을 포기했을 거야."

"동대륙에 돌아와서도 영약을 계속 마신 거야? 신진대사를 낮추는 영약?"

"그렇다네. 구하기 힘든 재료는 서대륙에서 수입해다 만들었지. 나 말고도 선옥에서 한 달 이상 수행하는 자들은 대부분 같은 영약으로 몸을 만드네. 따지고 보면 최근 50여 년간 위칸에서 양질의 선술사가 발굴된 것도 모두 자네 가문 덕이라 할 수 있겠군. 내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인사를 올리겠네."

그리고는 바닥에 넙죽 엎드리며 큰절을 올렸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녀석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럴 거 없어. 덕분에 나도 이쪽 덕을 보게 됐으니까. 태선이 위칸의 투사들을 보내주기로 했거든."

"투사를 말인가? 투사는 어지간하면 위칸을 떠나선 안 되는데.... 흠, 아들이 큰 결정을 했군. 하긴 세계가 멸망할지 모르는데 규칙에 얽매여 있을 필요는 없지. 그런데...."

몸을 일으킨 주드는 한동안 내 얼굴을 가만히 보며 고민했다.

"왜 그래? 무슨 문제라도 있어?"

"...자네가 이곳에 들어온 이유는 물론 선술을 얻기 위함이겠지?"

"응. 그거 말고 다른 것도 있어?"

"선술엔 크게 다섯 종류가 있네."

주드는 한발 뒤로 물러서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중에 나는 영역술을 얻었네. 약간의 결속술도 얻었네만.... 이건 큰 의미는 없을 거야. 이 정도로는 결속할 수 있는 인원이 삼백도 안 될 테니."

"삼백 명 가지고는 큰 힘을 못 내나?"

"물론 보통 사람에 비하면 큰 힘을 쓸 수 있겠지. 하지만 투사는 될 수 없어. 게다가 난 인간이 아니게 되어 버렸고.... 그러니 인간과의 결속은 불가능할 거야."

"그래도 영역술이 강력하니 괜찮지 않을까? 나도 결속술 아니면 영역술을 얻으면 좋겠는데. 태선도 그럴 거라 말했고."

"아들이 그렇게 말했다고?"

"나한테 이미 은신과 전이의 힘이 있거든. 그걸 제외하고 다른 힘을 얻을 확률이 높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결속이나 영역."

"호오...."

주드는 한쪽 눈을 가늘게 뜨며 날 떠보듯 물었다.

"그래서 자네는 둘 중에 어떤 힘을 가지고 싶나?"

"둘 다 가지면 젤 좋겠지?"

"그것도 가능하지. 하나 그렇게 되면 한쪽이 대성하지 못 해."

"정해진 총량에서 나눠 가지는 거야?"

"그렇지. 물론 1년짜리 수행인 만큼 총량 자체는 어마어마하네. 그래도 한쪽에 온전히 힘을 얻으면 엄청나긴 할 거야."

"당신 영역술처럼?"

"그보다 더 강하겠지. 물론 검게 물들었을 때의 나는 논외로 해야 할 테고."

"영역술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거야? 물론 대충 경험은 했지만 명확하지 않아서."

"일종의 결계를 만드는 힘이네."

주드는 허공에 손가락을 두드리며 주사위 모양의 작은 미로를 만들기 시작했다.

"결계 안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환경을 만드는 능력이지. 태선은 결계 안의 흐름을 조작하는 쪽에 특화되어 있고."

"선옥에서 나오는 불안정한 흐름을 안정시키려고?"

"꼭 그것만 가능한 건 아니네. 예를 들면 자네가 사용하는 마법도 마력의 흐름이지. 그곳에서 마법을 쓰면 태선이 흐름을 바꿔 놓을 수 있을 거야."

"마법의 방향을 바꾼다고? 쏜 사람에게 돌려보낸다던가?"

"그렇지. 사용 방식에 따라선 다양한 응용이 가능할 거야."

"내가 가진 능력도 알아내던데?"

"그 또한 자네 몸에 흐르는 흐름일 읽어낸 결과겠지."

"당신이 쓰던 건?"

"그건 한 단계 높은 경지의 영역이네. 금제(禁制). 영역 안에서 내가 지정한 힘을 아예 발동되지 못하지."

"미로는?"

"그건 내가 만드는 영역의 기본 형태네. 영역에 빠진 상대를 쉽게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못된 마음에.... 기본이 이렇게 되어 버렸지."

"그러면 게이트 앞에다가 영역을 깔고 이계의 군대를 유인해서.... 아, 영역 안에는 나도 꼭 들어 있어야 하나?"

"그럴 필요는 없네. 너무 멀리만 떨어지지 않으면 영역은 유지될 거야. 그만큼 영역 안의 지배력도 떨어지겠지만."

"그럼 일단 미로를 만들어서 깔아 놓으면 도움 엄청 되겠는데? 그렇게 내가 다른 곳을 처리하고 돌아올 때까지 시간을 벌면...."

"미로는 내 영역의 형태이네. 자네의 형태는 어떻게 만들어질지 아무도 몰라."

"그래? 사람마다 달라?"

"물론 다르네. 내 아들만 해도 안개의 형태로 영역을 퍼뜨리지. 안개로 환영을 만들기도 하고. 그런데 자네 입장에선 미로가 좋은가?"

"좋다기보다는, 그게 쓸 만할 것 같아서."

"그렇다면 내게 좋은 방법이 있네."

주드는 눈을 반짝이며 다시 허공에 손가락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 전에 확인부터 해야겠군. 지금부터 내가 조그맣게 영역을 만들 테니, 그곳에 손을 좀 넣어 줄 수 있겠나?"

"손?"

나는 손을 들어 보이며 눈살을 찌푸렸다.

"왜? 혹시 함정 파려고?

"절대 아니네. 내 자네에게 큰 제안을 하나 하려 하는데, 그전에 반드시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게 있어서. 꼭 좀 부탁하네."

뭐지? 이 할아버지 갑자기 왜 이렇게 의욕적인데?

군주의 눈으로 확인한 감정은.... 나에 대한 대견함과 호기심, 그리고 어마어마한 크기의 기대감이다.

기대감? 나한테 뭘 기대하는데?

우웅!

그때 눈앞에 조그만 미로가 만들어졌다. 주드는 손가락을 거두며 미로를 향해 손을 넣는 시늉을 했다.

"생긴 것만 미로지 별다른 저항은 없을 거야. 그저 자네가 가진 힘을 알아보기 위한 거라네."

"힘이라...."

나는 미니어처 미로 같은 공간에 손을 잠시 넣었다가 다시 뽑아냈다.

"됐어?"

"됐네. 흐음.... 그렇군."

주드는 고개 끄덕였다. 그리고는 내가 허리에 찬 검을 가리키며 다시 말했다.

"그럼 다음으로 그 검을 좀 뽑아다 여기 넣어주게."

"검? 이거? 왜?"

"마땅한 게 그것뿐이라서."

"흠...."

이 할아버지가 대체 무슨 생각일까?

그 와중에도 주드는 어린아이처럼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속는 셈 치고 검을 뽑아 영역에 잠시 찔러 넣고 거두어들였다.

"됐어?"

"호오.... 됐네. 이것 참 훌륭한 검이군."

"어째 내가 손을 넣었을 때 보다 더 놀란 표정인데?"

"예상 못 한 걸 발견해서 그렇다네. 흠, 이거 생각보다 더 일이 재밌게 될 수도 있겠어."

주드는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본격적인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선옥에서 얻을 수 있는 힘은 모두 다섯 가지네. 결속, 은신, 전이, 영역, 승천."

"나도 들었어. 근데 승천은 실제로는 전설 같은 거라 빼놓고 봐야 한다던데?"

"승천은 전설이 아니네. 자네가 바로 승천의 능력을 얻게 될 테니까."

"...어떻게?"

"초대 태선께서는 승천의 힘을 얻기 위해서는 다른 네 종류의 힘을 미리 갖춰 놓아야 한다는 기록을 남기셨지."

"미리 가지고 있으면 그 힘을 제외하고 얻으니까?"

"맞아. 그리고 자네는 그중 둘을 미리 가지고 있네. 은신, 그리고 전이."

"그래서?"

"그리고 나는 결속과 영역의 힘을 가지고 있지. 그러니 마지막 순간에 내가 자네에게 겹쳐진다면...."

"겹쳐진다고?"

"아, 오해 말게, 자네에게 빙의하거나, 자네의 정신을 지배하거나 하는 이야기가 아니니까. 그저 자네가 가진 물건, 예를 들면 그 칼 같은 것에 잠시 깃들어 있을 생각이네."

아, 그래서 방금 내 칼을 영역에 집어넣으라고 한 건가? 자기가 들어갈 곳을 미리 확인하려고?

"그러면 자네는 네 속성 전부를 가진 걸로 간주될 걸세. 그렇게 되면 마지막 남은 승천의 힘을 얻게 될지도 몰라."

"그것 참 멋진 계획이긴 한데...."

나는 모르겠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승천이 뭔데? 어떤 능력이야?"

"승천은...."

주드는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다 말했다.

"전에는 나도 이해할 수 없었네."

"응?"

"초대 태선께서 남기신 기록 말이야. 그분이 설명하신 승천이 뭘 말하는지 알 수 없었어. 하지만 자네 말을 들어보니 이제 그걸 알 것 같네. 승천은 바로....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는 힘이야."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68화

51장 망령 수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