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
063. 영웅의 심장(2)
던전의 안은 상당히 깊었지만 이미 까마귀로 한번 본 터라 크게 문제될 건 없었다.
몬스터가 나와도 애초에 전력을 과분할 정도로 들고 온 터라 눈을 한 번 깜박이면 모두 시체로 변해 있었다.
가장 활약하는 건 단연 창우였다.
본래부터 뛰어났던 검 기술이 최근 능력치가 올라가며 빠른 속도를 얻었기 때문이다.
다른 능력치는 아직 지수보다 크게 뒤떨어졌지만, 민첩만큼은 천살성을 발동하지 않은 지수와 비슷했다.
덕분에 몬스터가 등장하면 검광이 한번 번쩍이고 모두 시체로 변하는 게 예사였다.
"창우 오빠는 언제 이렇게 강해진 거야?"
"내가 쩔을 좀 해줬지."
"쩔? 뭐야. 나도 그런 거 해줘."
"넌 안 돼."
애초에 아바타는 파티원 등록이 불가능하다.
지수나 창우처럼 특정 신의 아바타로 선택되지 않은 인물만이 파티원으로 선택할 수 있었다.
"씨잉."
"대신 따로 생각해 둔 건 있어."
"진짜?! 뭔데, 뭔데?"
"돌아가서 이야기해 주마."
민아는 자신도 창우가 받은 쩔과 같은 걸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 모양인지, 방독면 아래로도 알 수 있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물론 내 생각을 알았다면 절대 저런 미소를 짓지 못했을 거다.
'지수랑 붙여줘야지.'
재능도 있고 능력치도 우수한 민아는 지수만 한 선생님이 없었다.
지수랑 일주일에 3번만 대련하면 그 실력이 일취월장하게 되리라.
살아남는다는 전제하에.
아무튼 던전에 조금씩 깊이 내려갈수록 나는 목뒤에 찌릿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별'의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 왔다."
"여긴 공간이 넓군요."
창우가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 모습만 보면 마치 눈이 보이는 것 같았다.
사실은 심안을 통해 단순히 눈으로만 볼 수 없는 정보들까지 인지하고 있으리라.
분명 별의 기운까지도.
나 역시 창우로부터 공유된 심안 덕에 더욱 뚜렷이 느낄 수 있었다.
'저거로군.'
지금 우리가 있는 장소는 던전의 끝자락.
거대한 홀이었다.
이번에 생기는 던전들의 특징이 이런 거대한 홀의 중앙에 각인석이 놓여 있었는데, 이 던전도 똑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모습이 달랐다면 사람들도 경계를 했을 터다.
하지만 완벽히 동일한 형태를 취하고 있으니 평범한 플레이어라면 도저히 알아차릴 수 없었겠지.
창우의 심안처럼 특별한 감지능력을 가지지 않았다면.
"뒤로 물러서세요. 그리고 방독면에 틈이 있는지 확인해 주시길 바랍니다."
나는 한번 경고를 한 뒤에, 홀의 중앙에 다가갔다.
은빛으로 빛나는 둥근 원석.
이게 전갈의 알이다.
각인석으로 위장하고 있는 둥근 알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내 오른팔에는 어느 세 커다란 건틀릿이 장착되어 있었다.
두터운 파일벙커가 매달린 건틀릿.
그것을 알을 향해 겨냥하고, 사출시켰다.
콰앙!!
홀을 쩌렁쩌렁 울리는 굉음이 울렸다.
알은 단번에 부서졌고, 그 파편이 허공을 날았다.
"뭐야, 이게 끝?"
너무나 쉽게 파괴된 알의 모습에 민아가 허망하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럴 리가 있나."
이건 전조였다.
그저 '알'이라는 위장막을 부쉈을 뿐이다.
별의 힘이란 단순히 외형만으로 판단할 수 없으니까.
쿠쿵.
그다지 크지 않은 부서진 알의 모습.
그곳에서 커다란 공간의 뒤틀림이 나타났다.
단순히 인간의 시각으로 볼 수 없는 차원의 경계가 무너지며 그곳에서 거대한 전갈의 눈이 보였다.
천갈궁, 안타레스의 아이.
분명히 별의 힘을 간직한 괴물이 홀의 안에 모습을 드러냈다.
크기는 대략 10미터에 가까우며 두꺼운 껍질과 뿌연 독무가 뿜어져 나왔다.
방금 전만해도 맑은 공기로 가득 차 있던 홀이 보라색 독무로 뒤덮이는 데는 불과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이것 때문이지.'
전생에 서울의 인간들이 쓸려나갔던 원인.
바로 이 독무에 있었다.
단순한 인간의 방독면으로는 막을 수 없는 독무는 등장하는 것만으로 플레이어들을 죽였고, 일반인들은 전갈이 나타난 도시에는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전갈 본인은 그렇게까지 강하지 않았지만, 이 독무로 사망자가 끝없이 늘어나게 된다.
그리고 결국 제네시스의 박성혁은 서울에 존재하는 플레이어 중 원거리에 능한 플레이어들을 모아 결사대를 꾸렸고, 간신히 토벌에 성공한다.
더불어 루크가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 것도 그때였다.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이거, 잡을 수 있는 거 맞지?"
카라스의 모습을 떠올렸는지 민아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잡을 수 있냐고?"
"응."
"껌이지."
안타레스의 아이라 '별자리'로 취급되지는 않았다.
초월의 증명을 사용할 수는 없었지만 그건 하등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 독무만 막을 수 있다면 센티넬보다 약한 녀석이었으니까.
"얘 잡고 하나 더 잡아야 되니 적응해라."
"...말은 쉽지."
민아는 투덜거렸지만 겁을 먹지는 않았다.
거기다 지수나 창우의 경우엔 걱정할 필요도 없지.
도리어 지수는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였다.
"그럼 이제 사냥을 시작...."
그렇게 말하려던 찰나, 시야의 구석에서 뭔가가 깜박거렸다.
누군가가 쪽지를 보냈다는 뜻이다.
'느낌이 좋지 않은데.'
지금 내게 쪽지를 보낼 만한 사람은 없었다.
'마녀'에게서도 저번에 쪽지가 온 이후로는 연락이 없었고, 제네시스도 내게 특별히 용건은 남아있지 않았다.
딸칵.
조심스럽게 쪽지를 열자 발신자의 이름이 표시됐다.
발신자는 루크였다.
그리고 쪽지에 적혀있는 내용을 확인한 나는, 황급히 까마귀 한 마리를 열여덟 번째 던전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
열여덟 번째 던전 내부.
아웃라이징 길드원 열 명과 강태성은 별 탈 없이 던전을 공략하고 있었다.
혹시나 강한 몬스터가 등장하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아무래도 기우였던 모양인지 등장 몬스터는 다른 던전과 다를 것 없었다.
대신 얻을 수 있는 소재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좋았다.
"기, 길드장님. 이거 중급 마석입니다."
"맙소사. 지금까지 최하급, 하급만 얻을 수 있었는데 중급 마석을 떨어트리는 몬스터라니."
마석은 장비의 제조에 들어가는 희소품 중 하나였다.
장비 안에 강한 마력을 집어넣을 수 있어 다양한 스킬이나 효과를 붙이는데 필요한 물건이었다.
당연히 우수한 마석일수록 더 좋은 능력을 장비에 부여할 수 있으니 마석의 등급은 그 가치와 직결되었다.
"특별한 광맥은 없지만 중급 마석을 이렇게 얻는다면 큰 이득이로군."
"에, 이걸로 장비를 만든다면 다른 길드를 압도하는 것도 문제가 아닙니다."
길드원의 말에 강태성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던전에 들어오길 잘했다.
어차피 3대 길드가 약조한 내용은 던전을 각인시키지 않는 거지, 그 안에 있는 자원을 캐지 말라는 건 아니었다.
괘씸한 제네시스 놈들이 먼저 그것을 이용해 던전 하나를 공략하지 않았던가.
들리는 소문으론 그곳에서 미스릴 광맥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당연히 강태성으로선 열불이 터질 노릇이었고, 이번 일을 벌인 것도 그런 연유였다.
"거의 끝가지 다 온 거 같습니다."
"그래? 아쉽군. 어차피 던전 내에 있는 몬스터는 다시 생성이 될 테니...."
"아, 그건 각인시킨 던전에 한해서 가능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각인 전에는 던전이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아 자원이나 몬스터가 회복되지 않는다더군요."
"아, 맞아. 현민이가 그런 말을 했었지."
강태성은 손가락으로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그가 말한 현민이라는 이는 아웃라이징 길드의 부길드장인 주현민이었다.
'그렇다면....'
강태성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거대한 홀이 그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큰일이군.'
이런 그들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루크의 표정이 깊어졌다.
여신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아까 전에도 느낌이 좋지 않았다고 쪽지를 보내왔었지만, 이제는 당장 던전에서 나오라는 쪽지를 받은 상태였다.
「그곳은 위험합니다. 루크여, 어서 밖으로 나오도록 하세요.」
루크를 아바타로 삼은 여신은 이렇게까지 다급한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이곳에는 루크만이 아닌 다른 이들도 있었다.
평소의 여신이라면 그들을 구하라고 종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위험하니 도망치라 권하고 있었다.
루크는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여신의 말에 따라 밖으로 나갈 것인지, 아니면 이곳에 남을 것인지.
'설령 남는다고 해도....'
과연 자신이 도움이 되기는 할까?
저 아웃라이징의 길드장은 루크보다도 확실히 강했다.
만약 그가 위험에 처할 일이 생긴다면 루크도 어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선 이곳에 나가 세한이라는 자의 말을 따르세요. 그라면 분명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을 겁니다.」
여신의 판단은 분명 옳았다.
세한이라면 뭔가 방법을 생각할 수 있겠지.
여태까지 그래왔으니까.
하지만 루크는 고개를 흔들었다.
"하하, 그럴 수는 없습니다, 여신님."
낮게 웃으면서 루크가 이야기하자 하나의 옵저버가 루크의 머리위에서 나타났다.
여태 모습을 숨기고 있던 여신의 옵저버였다.
"저는 약해빠진 놈인 건 분명합니다만, 민간인을 두고 도망칠 수는 없습니다."
루크는 군인이었다.
그가 군인이 된 건 특별히 애국심이 깊어서는 아니었다.
단지 어렸을 적부터 영웅이라는 존재를 동경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슈퍼 히어로 영화나 만화. 그곳에서 등장하는 영웅들을 보며 루크도 그런 이가 되고자 했다.
사람들을 구할 수 있는 자가 되고 싶었기에 그는 군인이 되었다.
어쩌다 보니 한국으로 파견되긴 했지만 그는 별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휴전국인 한국에서 군복무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고, 아름다운 아내와 저보다 뛰어난 딸을 얻을 수 있었으니까.
상황이 바뀐 건 딸아이와 신림에 있는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고 나오던 참이었다.
최근 개봉했던 영화로, 방패를 든 영웅이 활약하는 영화.
이런 세상이 되었지만 여전히 영화의 내용이 또렷하게 기억에 남았다.
그리고 극장에서 나왔을 때, 거대한 알림이 하늘에서 울려 퍼졌다.
게임의 시작을 알리는 알람이.
「저들은 민간인이 아닙니다. 플레이어예요. 거기다 당신보다 강합니다. 아웃라이징의 길드마스터가 막을 수 없는 일을, 당신이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어요.」
"이런 상황이 오지 않았다면, 그는 계속 민간인이었을 겁니다. 군인은 사명을 지니지만, 플레이어는 그런 사명을 가지지 않지요. 그러니 제게는 모두 구해야 할 민간인일 뿐입니다."
여신의 옵저버가 루크의 어깨를 두드렸다.
한 달마다 보낼 수 있는 메시지의 제한이 있으니 말을 아끼고자 행동으로 표현한 모양이다.
루크는 그런 옵저버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웃었다.
"이런 세계가 된 이후, 제가 가장 기뻤던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옵저버는 그의 뜬금없는 말에 어깨를 두드리던 걸 멈췄다.
"여신님께서 저를 아바타로 선택하며, 저에게 영웅의 심장을 지닌 자라고 했을 때입니다."
그는 군인이었고, 제법 뛰어난 전사였지만 플레이어로서는 아니었다.
다른 신들에게 모두 외면당했고, 그를 선택해 준 건 이 여신 하나뿐이었다.
그녀는 루크를 자신이 아바타로 선택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신화시대의 영웅들에게도 뒤지지 않는 영웅의 심장을 지닌 자입니다. 그런 당신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다른 신과는 다른 정중한 어투였다.
아직도 뚜렷하게 기억나는 메시지였다.
"그런 말을 들었는데 등을 돌려 도망친다면, 우습지 않습니까."
루크는 정면을 응시했다.
지금 강태성은 각인석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아마 이 던전을 아웃라이징의 것으로 소유하기 위함이다.
3대 길드간의 약조가 있었지만, 설령 그것을 깨더라도 이 던전을 소유하는 게 이득이라는 판단이었겠지.
욕심은 눈을 흐리게 만든다.
지금 강태성이 그랬다.
"정의의 여신, 아스트라이아여."
강태성이 각인석에 손을 가져다 대는 순간 이변이 터져 나왔다.
공간이 일그러지고, 차원이 부서지는 굉음이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루크는 얼굴에 방독면을 착용한 뒤에 전력으로 달렸다.
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덤벼드는 그 모습은 만용일지도 모른다.
허나 목숨을 걸고 남을 구해낼 수있다면 다른 이들은 그걸 희생이라고 부르겠지.
어리석은 행동에 불과하지만 아스트라이아는 그런 인간의 아둔함을 사랑했다.
신화의 시대가 끝나고 인간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에도 그녀가 마지막까지 지상에 남아 있던 건, 그런 인간들 때문이었다.
「...훌륭합니다.」
짧지만 그것이 여신의 마지막 메시지였다.
루크는 당황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어서 도망치십시오!"
세한의 말대로라면 지금 이들은 조금이라도 이 홀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루크의 전력을 다한 외침에 열에 이르는 시선이 그에게 쏘아졌다.
어째서 이곳에 있는지 보단 현재 상황에 대한 당혹감이 깊었다.
"저곳에서 튀어나오는 몬스터는 깊은 독기를 품고 있습니다. 서둘러 빠져나가지 않으면 모두 죽을 겁니다!"
"넌 뭐냐! 그걸 어떻게...."
갑자기 등장한 루크의 모습에 달려들려던 강태성의 말이 멈췄다.
그 역시 그를 쫓아다니던 신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은 모양인지 얼굴이 단번에 창백해졌다.
"그걸 왜 이제야...!"
이를 악물은 강태성은 자신의 신에게 따지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의 신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일이었다.
아스트라이아의 경우, 같은 '좌'에 위치한지라 인지하는 게 빨랐을 뿐이다.
아레스의 경우에는 격이 너무 높아 제대로 눈치채지 못한 경우다.
"이런 시발! 모두 도망쳐!"
강태성의 외침에 아웃라이징의 길드원들이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달려가기 시작했다.
쿠쿵.
쿠구궁!
공간이 부서지고, 차원이 으깨지는 소리가 연신 울려 퍼지며 그것은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전갈.
새하얀 껍질에 레이드 보스만큼이나 거대한 덩치를 지닌 전갈이 홀의 내부를 부수며 지상에 발을 디뎠다.
「설마 이렇게 빨리 균열을 만들어 줄 줄이야. 심심한 감사의 인사를 전하지. 인간이여.」
그것은 세한이 상대하던 것보다도 한층 컸다.
전체적인 크기는 15미터가 넘었으며, 껍질은 새하얗고 윤기가 흘렀다.
명백히 격이 달랐다.
왜냐면, 그가 바로 황도 12궁. 천갈궁의 수장, 안타레스였으니까.
# 64
064. 영웅의 심장(3)
천갈궁 안타레스가 지구에 개최된 '게임'에 관심을 가진 건 별다른 일이 아니었다.
바로 까마귀자리 카라스의 죽음.
그리고 그 자리가 인간의 손에 넘어갔다는 것.
마침 퍼블리셔 측에서 별자리와 관련된 기획을 짜고 있는 것 같아 직접 참여를 희망했다.
본래부터 자신의 전갈들을 몇 마리 데려가고자 요청했으니 자신도 겸사겸사 참여한다고 하면 거절하지 않으리라 생각한 거다.
황도 12궁에 속한 안타레스가 직접 참여한다고 하니, 퍼블리셔도 굳이 거부하지는 않았다.
다만 12궁쯤 되는 별자리는 사실상 중급 이상의 신격을 지닌 신적 존재이니 그 격을 심히 낮출 필요가 있었고,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다.
안타레스는 본인의 전체적인 능력치가 10분지 1로 떨어졌음을 인지했다.
그렇지 않으면 시스템에서 곧바로 제제가 들어올 테니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 해도 상관없지.'
10분지 1이라고 하더라도 황도 12궁이다.
현재 플레이어들이 상대하기엔 심히 벅찬 존재였다.
서울의 모든 플레이어가 몰려온다고 하더라도 그를 죽이지는 못하리라.
퍼블리셔 측도 그것을 알기에 다른 전갈의 알들과는 달리 안타레스에겐 현계 제한시간을 붙였다.
총 이틀.
이틀만 현계할 수 있으며 시간이 되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좌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 이틀만으로도 서울의 절반은 충분히 날려 버릴 수 있는 시간이었다.
최근 서울에서 지나치게 강한 플레이어들이 다수 목격된 터라 퍼블리셔 측이 둔 강수였다.
「낄낄, 도망친다라, 나쁜 판단은 아니야.」
안타레스는 도망치는 인간들을 느긋하게 쫒았다.
독기로 모조리 중독시켜 죽이는 건 간단했지만, 조금은 놀고 싶었기에 뿜어져 나오는 독기도 억제했다.
「마침 처녀궁의 아바타도 있군. 그래서 내가 나타날 줄 알았던 건가?」
도망치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는 금발머리의 남성을 보았다.
제법 단련된 사내이기는 했지만 그다지 대단할 건 없어보였다.
안타레스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건 카라스를 죽인 플레이어다.
대체 인간이 무슨 방법을 사용해서 별자리를 죽인 건지 알고 싶었다.
하찮은 인간이 별자리를 죽일 때 사용할 방법만 안다면 자신도 한층 격을 올릴 수 있지는 않을까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게임이 시작된 지 좀 되긴 했지만, 아직 별자리를 죽일 정도로 강한 플레이어가 있을 턱이 없다. 그러니 뭔가 다른 방법을 알고 있는 게 분명해.'
안타레스의 생각은 그러했다. 현재 황도 12궁의 8궁에 위치해 있지만 자신은 더더욱 그 위로 올라가고 싶었으니까.
「자자, 좀 더 빨리 움직여라, 벌레들아.」
"히이익!"
길은 좁았지만 안타레스에겐 하등 문제될 것이 없었다.
거대한 집개를 한번 휘두르면 좁았던 길이 단번에 갈라지며 넓어졌기 때문이다.
저런 집개에 한번 얻어맞는다면 제대로 시체조차 남지 못하리라.
그래도 안타레스가 적당히 사정을 두고 공격을 가하는지라 아직까지는 사망자가 없었다.
「아, 질렸다.」
노는 것도 잠깐이다.
역시 그저 도망칠 뿐인 벌레들과 놀아봐야 재미가 없었다.
안타레스는 도망치고 인물들을 보았다.
한 명은 처녀궁의 아바타이며, 다른 한 명은 전쟁의 신 아레스의 아바타였다.
전자는 같은 황도 12궁에 속해 있으니 봐줄 생각이었고, 아레스의 아바타의 경우엔 여기서 살려줘서 나중에 생색이나 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다른 인간들은 아니었다.
번개처럼 휘둘러지는 집개를 보며, 루크는 그것을 막았다.
쿵, 하는 충격에 전신이 크게 뒤로 밀렸지만 어떻게든 막을 수 있었다.
「과연 아바타는 아바타로구나.」
상급 신의 아바타인 강태성은 그렇다 치고 처녀궁의 아바타인 루크도 제법 뛰어낫다.
적당히 휘두른 팔이라지만 그것을 막아내다니.
"이런 씨발. 한 방에 팔이 부러지다니."
그저 재미있다는 듯 감탄하고 있는 안타레스와는 달리 강태성의 이마에는 연신 식은땀이 흘렀다.
만약 놈이 조금만 더 강하게 힘을 줬다면 자신들은 그대로 곤죽이 되었을 거다.
'내가 미친 새끼지.'
괜히 욕심을 부렸다.
덕분에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길드원들도 죽게 생겼다.
나아가 저놈이 밖으로 나온다면 서울에 있는 사람들이 죽게 될 것이다.
대역죄인도 이런 대역죄인이 없었다.
"대체 왜 이런 놈이 저기에 있었던 거냐, 좆같네 진짜."
강태성의 욕설을 들으며 루크는 심호흡을 했다.
팔이 부러지진 않았지만, 이쪽도 무사하진 않았다.
집개의 힘을 어떻게든 견디고 있었지만, 그것도 한계가 오고 있었다.
안타레스가 조금만 힘을 준다면 자신의 목숨은 끝이었다.
루크는 말했다.
"어서 도망치십시오. 이곳은 제가 막겠습니다."
팔이 부러진 강태성은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았다.
루크의 말에 강태성은 기괴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알았다.
이 괴물에게는 무슨 짓을 해도 안 된다는 걸.
맞서 싸울 텐가?
아니.
강태성은 고개를 흔들었다.
"이, 이 강태성이...."
도저히 저 전갈을 상대로는 싸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결국 강태성이 택한 건 도주였다.
누군지 모를 인간이 막아준다면 그로서는 고마울 따름이었다.
도망치는 강태성을 안타레스는 가만히 두었다.
어차피 나중에 지상으로 올라가면 다 죽일 테니 지금 쫓을 필요가 없었다.
그보다 지금 자신의 집개를 막아선 이 자를 어떻게 죽일지 고민 중이었다.
「나는 두 번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안타레스는 루크가 딱 견딜 수 있을 정도로만 집개에 힘을 줬다.
마치 어린아이가 벌레를 손가락으로 눌러 죽이는 것처럼.
어느 힘까지 버티나 시험하며 천천히 힘을 가했다.
만약 시우가 만든 장비가 아니었다면 이미 검은 동강났을 게 분명했다.
'여기까지인가.'
이번만큼은 루크도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아웃라이징의 길드원들은 도망치게 할 수 있었다.
누군가가 이것을 본다면 바보 같다고 욕할지 모른다.
혼자 남을 린에게도 미안했지만, 다른 일행들이 있기에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들이라면, 분명 린을 훌륭하게 키워줄 거다.'
수많은 사람을 봐온 루크였기에 안다.
자신의 딸은 고작 자신 정도가 아닌 훨씬 대단한 사람이 될 거다.
분명, 누구보다 위대한 자가 될 자격을 린은 갖추고 있었다.
드드득!
과한 힘을 준 탓에 뼈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결국 루크의 힘이 빠지려는 순간, 귓가에 음성이 들렸다.
대기가 진동하며, 어두운 던전 안에 금색의 빛이 쏟아졌다.
루크는 알 수 없었지만, 현재 던전 밖의 하늘에는 황금색 빛이 지상을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신의 강림은 아니었으나, 확실하게 그 격을 지상에 나타내고 있었다.
「루크 테일러. 그대에게 대리자의 자격을 청합니다.」
처음 듣는 여성의 목소리였지만 그녀가 누구인지는 알 수 있었다.
루크를 아바타로 삼은 신이자, 정의의 여신인 아스트라이아.
「뭐래, 이 미친년이. 대리자? 그걸 진심으로 하는 소리냐?」
그 목소리는 루크만이 들은 게 아닌 듯, 안타레스가 황당하다는 어조로 지껄였다.
대리자는 아바타 따위와는 전혀 달랐다.
아바타는 단순히 신들의 놀잇감이며 장난감의 말이라면, 대리자는 말 그대로 신을 대리하는 자였다.
그건 즉, 신이 게임이 아닌 진심으로 이 세계에 개입하고자 한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대리자가 죽게 되면 신도 큰 피해를 입게 되고, 최악에는 소멸까지 가게 된다.
그러니 신들은 아바타는 쉽게 구해도 대리자는 선택하지 않았다.
악마의 계약자보다도 훨씬 깊은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니까.
「신화시대에도 맺은 적 없던 맹약을 지금 와서야 맺는다고? 네년 정말 미친 거냐?! 아스트라이아!」
안타레스의 외침이 던전에 쩌렁쩌렁 울렸지만 아스트라이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지금 목숨이 위험한 자신의 아바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옵저버가 아닌, 자신의 눈으로.
「루크 테일러.」
재촉하는 것 같은 여신의 말에 루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저 말에 수긍한다면 그는 여신의 대리자가 될 것이다.
안타레스의 반응을 본다면 그와 상대할 수도 있겠지.
그렇다면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저는...."
루크는 온힘을 다해 집개를 밀어내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여신을 향해 대리자가 되겠노라 고하려 했다.
만약.
"죄송하지만, 아스트라이아. 그건 참아주셨으면 합니다."
제3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말이다.
끼기긱.
루크를 찢어발기려던 집개가 크게 밀려났다.
안타레스는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검은 옷의 남성을 보며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조차 언제 나타났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기 때문이다.
「뭐, 뭐냐. 네놈은. 어디서 나타났지?」
"방금."
태연히 대답하는 남자도 경악스러웠지만, 그가 하는 행동도 놀라웠다.
검은 남성, 세한은 안타레스의 집개를 손으로 쥐고 분명하게 밀어내고 있었으니까.
'이게 지금의 플레이어가 낼 수 있는 근력이라고?'
안타레스가 조금 더 힘을 넣었지만 그럼에도 소용이 없었다.
도무지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갑자기 플레이어를 대리자로 삼으려는 신부터, 그걸 막은 플레이어까지.
거기다 그 플레이어는 자신을 가볍게 무시하고 있었다.
"루크 테일러는 확실히 당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대리자인 것은 분명하지만. 안 된다는 것을 아시겠지요."
「그대는... 어찌 그것을 아는 거지요?」
"그런 스킬이 있습니다."
대충 둘러대는 세한의 말에 아스트라이아는 할 말을 잃었다.
아무래도 이 플레이어는 뭔가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당신이 그를 대리자로 선택한 건 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함이었던 것이었으니, 대리자로 삼는 건 참아주셨으면 합니다."
「...그 말에 따르도록 하지요. 까마귀자리의 플레이어.」
제대로 설명해 주지 않는 세한의 모습에 아스트라이아는 조금 심통이 났지만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처럼 루크를 대리자로 삼는 건 최후의 수였다.
커튼이 걷히듯 사라지는 아스트라이아의 신격에 세한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조금만 늦었다면 대형사고가 터질 뻔했으니까.
'역시 팔찌를 주길 잘했어.'
팔찌가 있는 장소로 곧바로 이동할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당연히 DLC 장비.
그게 아니었다면 적절한 순간에 모습을 나타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반면 루크는 아스트라이아가 물러난 것에 당황한 눈치였다.
"세한, 나는 대리자라는 것에 부족한 것인가?"
"아뇨, 절대로 아닙니다. 단지 인간이 견디기 힘들 뿐이죠."
대리자라는 건 신을 대행하는 자리다.
문제는 루크와 아스트라이아의 상성이 심각하게 좋다는 것.
그 덕에 아스트라이아의 힘을 루크는 최대한도로 사용할 수 있었고, 그 결과는 참담했다.
상성은 좋았지만 그 육신은 견뎌낼 수 없었기에 루크의 몸은 천천히 무너져 죽음을 맞이했던 것이다.
세한은 아직도 그 광경을 잊을 수 없었다.
그러니 세한은 무슨 일이 있어도 루크를 아스트라이아의 대리자로 삼을 생각이 없었다.
'거기다 대리자는 단 한 명밖에 삼을 수 없으니.'
아스트라이아의 대리자는 오로지 그 아이.
린 테일러가 되어야만 했다.
"알겠네. 자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런 거겠지. 도리어 살았어. 죽는 줄 알았거든."
마음에 앙금이 남을 만한 일임에도 루크는 유쾌하게 웃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을 텐데도 호쾌하게 웃는 그의 모습에 세한도 웃었다.
"이제 쉬셔도 됩니다. 나머지는 저희가 알아서 할 테니까요."
당당히 이야기하는 그의 말에 황당한 건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안타레스였다.
확실히 이 플레이어가 상당한 놈이라는 건 알 수 있었지만 그뿐이다.
자신은 황도 12궁의 제 8궁.
천갈궁의 안타레스다.
「겁을 상실한 놈이로구나.」
이 녀석이 바로 자신이 찾던 까마귀자리라는 건 알겠다.
하지만 이 오만한 태도를 보라.
황도 12궁, 천갈궁의 안타레스의 앞에 있음에도 집 앞에 산책이라도 나온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안타레스."
그런 안타레스의 혼잣말을 들은 듯, 세한은 피식 웃으며 손으로 밀고 있던 안타레스의 집개를 더욱 강하게 밀었다.
쿵, 소리를 내며 안타레스의 집개가 던전의 벽에 격돌했다.
"아마도 너는 내가 어떻게 카라스를 죽였는지 알고 싶어서 온 거겠지."
「...그걸 어떻게 안 거지?」
"넌 그런 놈이니까."
그렇게 말해도 안타레스는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오늘 처음 보는 놈이 마치 자신을 아는 것처럼 말하고 있으니 당연하다.
"네 소원대로 특별히 알려주도록 하마."
세한은 거대한 전갈을 보았다.
새하얀 색깔에 한번 숨을 내쉬는 것으로 수백의 플레이어를 죽일 수 있는 천갈궁의 안타레스를.
"쳐맞다 보면 싫어도 알게 될 거다."
세한은 이렇게 마주보니 알 수 있었다.
지금의 안타레스는 카라스와 크게 차이가 없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걸.
# 65
065. 유성(1)
안타레스와 카라스는 '격'이 다르다.
카라스는 기껏해야 평범한 별자리. 그중에서도 하위에 속하는 녀석일 뿐이다.
반면 안타레스는 웬만한 신들보다도 유명하고 격이 높은 황도 12궁의 별자리.
당연히 격차는 어마어마하다. 최상위 별자리와 최하위 별자리의 차이.
하지만 우습게도 지금 안타레스가 발휘할 수 있는 힘은 카라스와 별다를 게 없었다.
물론, 조금 더 강한 건 맞지만 본래의 위상에 비하면 보잘 것 없다.
'아마 카라스가 대략 80퍼센트의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면.'
안타레스는 대략 8퍼센트의 힘밖에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정도면 지금의 세한이라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세한에게는 '그 스킬'이 있었다.
'초월의 증명.'
별자리를 상대할 때 모든 능력치가 상승하며, 별자리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스킬.
그 힘이라면 안타레스의 집개를 순간적으로 밀어내는 것도 가능했다.
끼기긱!
「나를 우습게보지 마라!」
안타레스가 집게에 힘을 더욱 넣자 세한은 크게 밀려났다.
하지만 이미 루크는 뒤로 떨어진 상태였기에, 세한 역시 집개를 피해 크게 뒤로 뛰었다.
"우습게 본 적 없다."
세한은 집개에서 손을 떼고 인벤토리에서 한손 검을 꺼내들었다.
두꺼운 껍질을 지닌 안타레스에게 도검류는 피해를 주기 힘들었지만, 둔기는 이미 지수가 지니고 있었다.
'관절부를 노린다.'
아무리 단단한 외피를 지닌 안타레스라도 약점은 있다.
관절이 구부러지는 부위는 비교적 연하다보니 검으로도 충분히 상처를 줄 수 있었다.
촤악!
「큭!」
도검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자 안타레스의 관절에서 시꺼먼 체액이 흘러나왔다.
크지는 않은 상처였지만 안타레스의 신경을 건드리기엔 충분했다.
「까불지 마라!」
안타레스의 전신에서 시커먼 독무가 피어오르며 주변을 빠르게 잠식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한 번 숨을 들이키는 것만으로 죽음을 맞을 맹독.
하지만 세한과 루크에게는 전혀 듣지 않았다.
얼굴에 착용하고 있는 방독면이 독무를 완벽히 막아주기 때문이다.
다른 던전에서 이미 만났던 안타레스의 아이들보다도 한층 강력한 독무였지만 그렇다 해도 소용없었다.
"한지수! 머리를 노려!"
"네!"
독무를 뿜어내는 안타레스의 머리를 향해 검은 옷을 입은 여성이 달렸다.
이곳에 온 건 당연히 세한뿐이 아니었다.
지수도 함께였다. 나머지 또 하나의 안타레스의 아이는 창우와 민아에게 맡겨둔 뒤, 지수와 세한만 먼저 이곳에 온 것이다.
"...."
붉은 눈이 어두운 독무 속에서도 형형히 빛났다.
시우에게 부탁해 새롭게 만든 거대한 둔기.
여태까지 무기 중에서 가장 커다란 둔기를 든 지수가 크게 뛰어올라 안타레스의 머리를 가격했다.
콰앙!
「크억!」
머리가 크게 아래로 기울어졌다.
지수의 근력과 무거운 둔기의 공격은 안타레스라도 상당한 타격이었던 모양인지, 크게 몸이 휘청거렸다.
'빈틈.'
세한은 그 틈을 노려 안타레스의 눈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녀석이 시야만 잃는다면 한층 쉽게 공략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카앙!
안타레스도 호락호락 당하지만은 않았다. 반사적으로 집개를 들어 검을 막은 뒤, 세한이 있는 방향으로 날카로운 전갈의 꼬리를 연신 지면을 향해 내리찍었다.
꼬리가 한번 바닥을 두드릴 때 마다 움푹움푹 꺼지는 지면을 보면 가슴이 절로 서늘해졌다.
"나도 이제 합류하지!"
어느 정도 몸을 회복한 루크도 세한이 그랬던 것처럼 안타레스의 관절부를 노렸다.
주로 목표는 한쪽 다리.
집요하게 다리를 공격하자 과격하게 공격을 가하던 안타레스의 몸이 크게 꺾였다.
균형을 잃은 안타레스를 향해 재차 세한의 공격이 집요하게 안타레스의 눈을 노렸다.
인벤토리에 검을 집어넣은 후, 창을 꺼낸 세한은 소나기처럼 공격을 퍼부었다.
그것을 안타레스는 집개를 사용해 그것을 막아냈다.
「크으으으!」
연신 무기를 바꿔가며 공격하는 세한과 지수의 맹공에 안타레스는 연신 얻어터질 수밖에 없었다. 황도 12궁에서 게자리 다음으로 가장 단단한 방어력을 지닌 안타레스였기에 망정이지, 보통이라면 이미 곤죽이 되어서 죽었을 것이다.
실제로 안타레스도 슬슬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대로 계속 싸우게 되면 위험하다는 걸.
「젠장!」
특히 저 검은 옷을 입은 놈이 문제다.
관절 사이로 스쳐 지나가는 칼날의 감촉에 안타레스는 비틀거리면서도 넘어지지 않았다.
집요하게 눈을 노리는 녀석의 공격에 치가 떨려왔다.
'까마귀 놈이 당한 것도 이해가 가.'
이런 놈이라면 자기보다 훨씬 약한 까마귀가 당한 것도 이해가 갔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 검은 옷을 입은 플레이어의 공격은 안타레스에게 계속해서 선명한 타격을 가하고 있었다.
다른 둘의 공격은 방해는 될 뿐 실질적인 피해는 없었다.
그저 몸이 흔들리거나 충격을 받을 뿐.
상처를 입어도 금방 회복을 할 수 있는 정도였다.
하지만 검은 옷에게 받은 상처는 달랐다.
칼날이 관절부위를 스쳐 지나가면 상처가 제대로 낫질 않았다.
안타레스가 눈을 필사적으로 방어하는 것도 그런 이유.
만약 저 공격이 눈에 맞게 된다면 시야를 잃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럼 아무리 자신이라도 위험했다.
'대체 뭘 가지고 있는 거냐.'
스킬인가? 아니면 장비인가.
장비는 특이한 것들을 사용하긴 했지만 대단한 건 없었다.
방어구가 제법 훌륭했지만 무기는 평범한 미스릴제 무기였다.
그렇다면 스킬이라는 거겠지.
대체 어떤 스킬이기에 자신을 이렇게 몰아붙일 수 있단 말인가.
'전승 스킬만 쓸 수 있었어도!'
그렇다면 이런 굴욕은 당하지 않았을 텐데.
전승 스킬이 없는 안타레스는 기껏해야 독무를 뿜어내는 거대한 전갈일 뿐이다.
특수한 스킬도 능력도 없는 그저 거대하고 지성이 있을 뿐인 마물.
아니, 아니지.
자신은 평범한 마물 따위가 아니다.
황도 12궁 천갈궁의 위대한 전갈의 왕.
비록 전승 스킬은 사용하지 못하지만 '전갈'의 힘은 분명히 남아 있었다.
「나는 황도 12궁의 안타레스다. 이 버러지들아!」
안타레스는 집개로 지면을 내리찍었다. 두터운 암반으로 된 던전의 지면이 쩌저적 갈라지며 무른 바닥을 드러냈다. 안타레스는 그것을 보자마자 더욱 강하게 독무를 뿜어냈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독무는 세한과 일행에게 먹히지 않는다는 걸 알 텐데도 이렇게 많은 독무를 뿜어대다니.
이정도 양이면 안타레스에게도 상당히 부담되는 양일 것이다.
던전을 가득 채운 독무는 시야마저 완벽하게 차단했다.
'설마.'
세한은 흔들거리는 지면을 느끼자마자 큰 소리로 외쳤다.
"땅속에서 공격할 거다! 조심해!"
콰아앙!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세한의 다리를 노린 거대한 집개가 스쳐지나갔다.
지수를 향해선 꼬리가 매섭게 휘둘러졌다.
지수는 그걸 훌쩍 뛰어 피하며 곧바로 철퇴를 휘둘렀지만, 꼬리는 이미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땅속에서 굴을 파고 돌아다니는 안타레스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성가시게 하는군.'
지면에 파고들어간 안타레스는 먹이를 사냥하는 전갈처럼 숨을 죽이고 기습을 가했다.
어떤 방심도 하지 않는 그 모습에 세한은 속으로 혀를 찼다.
되도록 흥분해서 판단을 그르치길 바랐건만, 역시 일이 그리 쉽게만 되지는 않는 법이다.
'좋지 않은데....'
초조한 건 안타레스뿐이 아니다.
세한도 초조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초월의 증명이 지속되는 시간은 고작 30분.
벌써 시간은 절반이 넘게 흘렀고 이대로라면 남은 시간 안에 안타레스를 죽이기 힘들었다.
제한시간 내에 끝내지 못하면 위험한 건 이쪽이었다.
'뭔가 방법이 없나?'
저놈을 땅속에서 끄집어낼 방법.
이대로 장기전으로 흘러가게 둘 수는 없었다.
세한은 안타레스의 공격을 피하는 지수에게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 시간 좀 끌어줄 수 있냐?"
"시간이요?"
"어. 잠깐이면 돼. 두더지 잡기하는 것처럼 그냥 녀석이 나올 만한 장소를 계속 공격하고 있어봐."
세한의 말에 지수는 의아한 얼굴이 되었지만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는 어려울 것도 없었다.
"알겠어요."
땅속에 들어간 안타레스는 지면에서 일어나는 진동으로 위치를 감지해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걸 이용해 지수가 둔기로 지면을 두드려 방향을 유도한다면 긴 시간은 아니더라도 잠시 동안은 어그로를 끌 수 있으리라.
"루크 씨."
지수가 최대한 안타레스의 어그로를 끄는 동안 세한은 루크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지?"
"혹시 여신님에게 대화를 청할 수 있습니까?"
"여신님께?"
루크는 갑작스런 세한의 말에 당황했다.
하지만 그렇게 묻는다 해도 뭐라 말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뭐라고 여신에게 대화를 청할 수 있겠는가.
위잉.
그때, 루크의 곁에서 하나의 옵저버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아스트라이아의 옵저버다.
아마 곤란해하는 루크의 모습에 먼저 반응한 것 같았다.
세한은 아스트라이아의 옵저버를 똑바로 응시했다.
아스트리아의 옵저버 역시 세한의 말을 기다리는 듯, 잠자코 공중에 떠 있었다.
"제7궁의 힘을 빌리고 싶습니다."
갑작스런 세한의 말에 아스트라이아의 옵저버가 부르르 떨렸다.
아스트리아는 순간 잘못 들었나 싶었다.
제7궁의 힘을 빌리고 싶다니?
"황도 12궁 제7궁 천칭좌. 리브라를 이곳에 소환해 주셨으면 합니다."
세한은 재차 똑바로 말했다.
한줌의 거짓 없이 정의의 여신을 향해서.
아스트라이아는 그런 그의 모습을 그저 고요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세한에게 하나의 쪽지가 도착했다.
「그것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는 묻지 않겠습니다. 보나마나 제대로 답변하지 않을 테니까요.」
아무래도 아까 전의 대답을 마음에 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관대하게 넘어가는 점이 과연 아스트라이아다웠다.
「다만 이건 묻지 않을 수 없군요. 정말로 천칭을 루크에게 사용하게 할 생각인가요? 그렇다면 전 허락할 수 없습니다.」
그 답변에 세한은 내심 안도했다.
왜냐면 소환할 수 없다는 말은 없었으니까.
"그냥 소환만 해주시면 됩니다. 지금의 루크 씨라면 몇 초 정도는 소환할 수 있겠죠? 쥐고 휘두를 수는 없다 해도."
씩 웃으며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에 아스트라이아는 그제야 그가 무엇을 유도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그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다.
단, 한 번 사용한 이후 한동안 소환할 수 없으며 그것을 쥐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으리라.
하지만.
──단순히 부르는 것이라면.
"알겠습니다. 여신님."
아스트라이아는 자신의 뜻을 루크에게 전달했다.
분명 그라면 할 수 있으리라.
재능은 없지만, 누구보다 자신과 파장이 맞는 그라면 분명 천칭을 소환할 수 있을 거다.
루크에게서 새로운 전승 스킬이 생긴 건 바로 그때였다.
비록 대리자는 되지 못했지만, 여신의 상징과도 같은 힘을 그는 손에 넣었다.
'여신의 천칭.'
루크는 스킬명을 보고 주먹을 천천히 쥐었다 폈다.
정의의 여신 아스트라이아에게는 정의를 심판하는 천칭이 존재한다.
처녀궁에 위치한 그녀는 자신의 바로 옆자리에 천칭을 두었고, 그것이 황도 12궁 제7궁이 되었다.
'목표는... 저곳이로군.'
루크는 세한이 의도하는 바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이 스킬을 사용해, 지수가 안타레스에게서 시선을 끄는 장소를 노리는 것.
이후에 어떻게 될지는 세한만이 알겠지.
루크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손을 뻗었다.
"한지수!"
동시에 세한 역시 지수에게 손짓해서 이쪽으로 불렀다.
지수는 안타레스의 꼬리를 능숙하게 피하며 세한 쪽으로 한달음에 달려왔다.
그런 지수를 세한은 팔로 끌어 그대로 품에 안았다.
"아!"
"잠깐만 불편해도 이러고 있어."
"네, 네."
순간 움츠러들며 바르작거리는 지수에게 세한은 인벤토리에서 거대한 방패로 감쌌다.
미스릴로 이루어진 방패지만 거기에 가변형 오리하르콘을 더해 더욱 보강시켰다.
이제부터 일어날 일을 생각하면 사실 이걸로도 부족했다.
나머지는 천살성과 재생 스킬을 믿는 수밖에.
지수는 걱정 없지만 도리어 세한 본인이 조금 걱정됐다.
"후우."
루크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입을 벌렸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단순한 스킬명임에도 숨이 턱 막혔다.
고작 이름을 입에 담는 것임에도.
"리...."
루크의 몸에서도 연한 금빛이 흘러나왔다.
가슴에서 느껴지는 고동을 느끼며, 고통을 느끼며.
온 힘을 다해 숨을 들이켰다.
별의 처녀(Star Maiden). 아스트라이아의 천칭의 이름을.
"──리브라(Libra)!"
하늘에서 별이 떨어진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 66
066. 유성(2)
"길드장님. 지금 하늘이...."
박성혁은 홍가은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는 게 맞다.
하늘이 어둡게 물든다 싶더니, 갑자기 어둠 속에서 금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저것은 길조인가, 아니면 흉조인가.
'저쪽은 분명 아웃라이징이 담당한다고 했던 구역.'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디어사이드에서 던전에 들어가지 말라고 했던 원인이 저것인지도 모른다.
'대체 뭐지?'
이미 자신의 신인 티르에게도 물어보았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애초에 티르의 옵저버는 자신의 곁에 있지 않았다.
분명 지금 저 장소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자신의 아바타를 두고 굳이 갔다는 건 그만큼 엄청난 일이 저기서 벌어지고 있다는 거겠지.
"기, 길드장님!"
"그렇게 크게 부르지 않아도 됩니다. 가은 씨. 그리고 저도 지켜보고 있어요."
"그게 아니라... 뭔가가 떨어집니다."
"예?"
가은의 손가락은 하늘을 가리키고 있었다. 빛이 새어 나오는 구름의 위.
별이 떠 있는 하늘을 향해 있었다.
"저건."
언젠가 박성혁은 유성을 본 적이 있었다.
밤하늘을 가로질러가던 유성.
그리고 지금 눈에 보이는 건, 자신이 본 어떤 유성보다도 선명했다.
금색의 긴 꼬리를 만들며 지상을 향해 떨어지는 유성은.
어둠을 꿰뚫으며 지상에 낙하했다.
아웃라이징 길드가 차지하고 있는, 한 던전을 향해서.
***
안타레스는 지금 어이가 없었다.
자신이 잠깐 동안 단순한 어그로에 끌려 다녔다는 것도 황당한데 자신의 머리 위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그런 황당함을 아득히 넘어섰다.
'리브라를 부르다니, 이 미친년!'
이곳에 있는 누구도 리브라를 사용할 수 없다.
이유는 단순하다 '신격'이 옅기 때문이다.
플레이어가 신격을 얻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
누군가의 하수인이 되지 않은 채, 이미 존재하는 별자리를 죽이는 것.
그리고 누군가의 하수인이 되지 않은 채, 신화에나 가능할 대단한 업적을 달성하는 것.
두 가지 다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조건이다.
마지막 하나는 대리자가 되어 신의 힘을 받는 것이지만 이것도 쉽지 않다.
대리자를 선택할 신도 거의 없을뿐더러, 설령 대리자로 선택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재능이나 힘을 지니고 있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전생에 세한이 '마녀'가 요청했음에도 대리자가 되지 않은 이유 중 하나다.
마녀가 요청했을 당시에는 세한에게 대리자의 격을 감당하기엔 힘이 부족했다.
강한 정신력이라도 있었다면 버틸 수 있었겠지만, 당시의 세한은 정신도 만신창이였기에 대리자를 감당할 여력이 되지 못했다.
좀 더 시간이 흐른 후에 그것이 가능해졌을 때는 마녀와 계약하게 되어 나타날 존재들이 걱정되어 하지 못했다.
'천칭을 손에 쥘 수 있는 자도 없는데 천칭을 소환해? 아니, 잠깐만.'
하늘에서 느껴지는 천칭의 힘에 안타레스는 경악했다.
왜냐면 그것이 이곳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떨어지고 있었으니까.
「설마, 아스트라이아...!!」
안타레스가 비명처럼 외치는 순간, 천칭이 던전의 외벽을 부수며 떨어졌다.
콰과과광!!
천칭이 떨어진 충격으로 던전이 파괴되며 엄청난 충격이 던전 전체를 울렸다.
바닥에 숨어 있던 안타레스도 그 충격으로 뒤집히며 공중으로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일반적으로는 파괴할 수 없는 던전이지만, 황도 12궁 정도가 되면 말이 다르다.
단지 나타난 것만으로 던전을 완벽히 파괴시킬 수 있었다.
'지금이다!'
세한은 저릿한 몸을 일으키며 앞으로 달렸다.
초월의 증명이 아니었다면 천칭이 떨어진 충격으로 그대로 정신을 잃었을 것이다.
오리하르콘으로 코팅한 방패로 몸을 막아내고, 받은 피해는 재생과 천살성으로 회복하며 앞으로 내달렸다.
'저것이 리브라.'
실제로 보는 건 두 번째다.
전생에서 보았을 때는 천칭의 모습이 아니라 검이었다.
하지만 리브라의 모습은 잠시 반짝이더니 한 줌의 빛이 되어 사라졌다.
시야의 구석에 기절한 루크의 모습이 보였다.
리브라를 소환한 충격으로 정신을 잃은 거겠지. 그래도 상관없다. 루크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모두 했으니까.
"하아압!"
세한은 공중으로 떠올랐던 안타레스가 지상으로 떨어지기 전에 꼬리의 끝을 잡고 온 힘을 다해 공중에서 방향을 틀었다.
녀석의 거체가 허공에서 회전하며 거꾸로 떨어질 수 있도록.
콰아앙!!
「이놈이!」
거꾸로 떨어진 안타레스가 몸을 뒤집으려고 했지만. 그보다 빠르게 인벤토리에서 창을 꺼낸 세한이 녀석의 관절부위에 찔러 넣었다. 길쭉한 창이 관절에 박히자 안타레스는 제대로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크윽!"
끼기긱, 소리를 내며 구부러지는 창을 애써 힘으로 누르며 오른팔에는 파일 벙커를 착용했다.
기존에 만들었던 파일 벙커를 궁기의 뼈로 한층 강화시킨 물건이다.
사출될 때의 위력도 마석을 사용하여 더욱 증폭시켜 둔 상태였다.
거기에 초월의 증명의 힘인 별자리에게 추가피해가 적용되면 안타레스의 머리를 날려 버리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철컥.
"끝이다."
덜덜 떨리는 팔을 안타레스의 턱으로 겨냥했다.
턱밑에 닿는 차가운 감촉에 안타레스이 몸도 얼어붙었다.
검은 옷을 입은 세한의 모습이 마치 사신처럼 보였다.
'위험하다!'
본능적으로 느꼈다.
저것이 사출되면 자신이라도 위험하다고.
설령 운 좋게 죽지 않는다고 해도 뒤이어 이어지는 공격에 죽을 게 분명했다.
'이 안타레스가? 고작 다섯 번째 메인 퀘스트를 진행 중인 플레이어에게 죽는다고?'
그럴 수는 없다! 절대로 그럴 수는 없단 말이다!
하지만 녀석이 누르는 힘을 벗어날 수 없었다.
관절에 박아 넣은 창이 걸려 제대로 몸을 뒤집을 수도 없었다.
죽음.
선명히 다가온 공포가 안타레스의 정신을 집어삼켰다.
쿠웅!
육중한 폭발음을 울리며 사출되는 파일벙커가 슬로우 모션처럼 안타레스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것이 안타레스의 턱을 꿰뚫으려는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파일벙커에 꿰뚫리기 직전에 안타레스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콰아앙!!
던전의 외벽을 꿰뚫고 박힌 파일벙커의 모습에 세한은 혀를 찼다.
방금 전까지 자신이 제압하고 있던 안타레스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구부러진 창과 부서진 던전의 모습이 방금 전까지 안타레스가 이곳에 있었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역시 그렇게 나온다는 건가."
황도 12궁인 안타레스가 죽는 건 까마귀자리의 카라스가 죽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큰일이다. 그러니 어떻게든 죽기 전에 불러올 수밖에 없었던 거겠지.
'안타레스를 사라지게 만든 건 분명 퍼블리셔겠지.'
GM 아카터스는 현재 자숙 상태이니 손을 댈 수 있는 건 퍼블리셔밖에 없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건 안타레스가 '일시적'인 참여자였기 때문이다.
원래부터 참여가 예정되어 있던 것이 아닌 임시적인 참여였기 때문에 곧바로 불러들일 수 있었으리라.
파일 벙커를 인벤토리에 넣은 세한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타레스를 죽일 수 있는 기회를 날려 버렸으니 아쉬운 것도 당연했다.
거기다 안타레스를 처치하고 얻었을 보상도 사라진 게 되니까.
"하지만 아예 소득이 없지는 않겠지."
이번 일은 퍼블리셔 측의 강제적으로 관여한 것.
그렇다면 '시스템'이 그것을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었다.
이것이 게임인 만큼 강대한 존재를 쓰러트린다면 마땅한 보상이 반드시 주어져야 하니까.
아니나 다를까 조금 기다리니 경쾌한 알림이 들려왔다.
[황도 12궁 천갈궁 안타레스를 죽음 직전까지 몰아붙였습니다!]
[업적 '전갈 사냥꾼'을 습득합니다.]
[운영에 대한 보상으로 'A급 스킬 선택권'이 주어집니다.]
"오."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후한 보상이었다.
업적은 넘어가더라도 A급 스킬 선택권이라니.
'그래도 뭐 빠지게 구른 보상이 있긴 하네.'
안타레스를 이곳에서 죽였다면 더 좋았겠지만 말이다.
A급 스킬 선택권은 확실히 좋은 보상이긴 했지만 그래도 안타레스를 처치했을 때 얻을 신격이나 스킬에 비하면 아쉬운 건 분명했다.
"응?"
세한은 문득 아까 전 천칭이 떨어졌던 장소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산산이 부서진 지면 아래에는 대량의 마력이 흐르고 있었다.
이 던전에 머물던 몬스터들이 다른 던전보다 강한 마석을 지니고 있던 것도 그런 연유.
그것이 천칭이 떨어지며 영향을 받아 하나의 결정이 되어 있었다.
지맥을 흐르던 마력들이 하나의 광맥이 되어버린 것이다.
"에스더가 이렇게 많이...."
'별'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는 금속.
본디 여성의 이름으로 자주 쓰이는 명칭이지만 이 금속의 이름도 에스더라 부른다.
별의 금속, 에스더.
강도는 미스릴과 비슷한 수준이지만 마법저항이 몹시 뛰어나며 마력전도가 가장 좋은 금속이다.
뭣보다 다른 금속과 섞어 합금으로 만들 때 큰 힘을 발휘한다.
마력금속에 가까운 에스더는 다른 금속의 장점을 전혀 죽이지 않고 거기에 에스더 본연의 힘을 더하게 되니까.
오리하르콘보다 희귀하고 아다만티움보다 보기 힘든 금속.
이것을 얻을 수 있는 건 강력한 별의 힘이 흐르는 장소뿐이다.
설마 인공적이지만 이렇게 많은 에스더를 얻게 될 줄은 세한도 생각도 못했다.
"이거라면 본전 정도는 되려나."
A급 스킬과 대량의 에스더. 이정도면 나름 노력한 대가는 얻었다고 할 수 있었다,
우연이 가져다준 결과였지만 말이다.
"이제 문제는...."
세한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반쯤 붕괴된 던전은 서서히 복구가 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던전의 잔해 속에서 정신을 잃은 루크와 지수가 보였다.
'역시 눈앞에서 강력한 신격을 목격한 탓인가.'
루크는 아마 리브라를 소환한 것만으로 탈진했을 거다.
지수는 이어 나타난 리브라의 격에 정신을 잃었거나, 충격으로 기절했으리라.
"이제 저 둘을 어떻게 데리고 나가냐는 건데."
분명 던전 밖에는 이 사태를 눈치챈 플레이어들이 몰려들어와 있을 것이다.
던전을 각인시키고 나갈 때쯤이면 볼만하리라.
"흠...."
세한은 천칭이 떨어지며 생긴 던전의 구멍을 빤히 바라보았다.
"날아서 가볼까?"
마침 암야의 외투에 새로 생긴 스킬이 하나 있었다.
***
광화문 광장 앞.
어느 때보다 많은 플레이어가 광화문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간 있었던 던전 레이스의 최종 발표가 있을 예정이기 때문이다.
"분명 1위는 그 길드겠지?"
"아마...."
예전이라면 아웃라이징이나 피안화, 혹은 제네시스를 언급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2주차부터 위로 치고 올라오기 시작한 한 길드가 플레이어들의 입에서 오르내렸다.
수많은 소문이 있는 하나의 길드.
소수의 인원으로 구성된 것 같지만 어떤 플레이어도 그들을 무시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이번 던전 레이스에서 떠도는 소문을 들어보면 솔직히 믿을 수 없는 것들도 있었으니까.
하늘에서 별을 떨어트렸다든가.
별이 떨어진 곳에서 하늘로 날아간 검은 날개의 남자라든가.
미래를 예지한다든가.
악마와 계약된 이들은 모두 죽인다든가.
등등, 비상식적인 것부터 묘하게 현실적인 것까지 섞여있었다.
덕분에 디어사이드에 대해서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개새끼들."
어두운 남색 차림을 한 플레이어가 작은 목소리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작은 머플러로 목을 가리고 있었는데, 왜냐면 그 아래에 그믐달 특유의 마크가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그믐달 소속의 길드원들에게는 한 가지 칙명이 있었다.
절대로 그믐달의 마크를 보이지 말 것.
그리고 검은 옷을 입지 말 것.
그 이유는 디어사이드에서 떠도는 소문과 관련이 있었다.
녀석들은, 아니 거기에 속해 있는 한 여자는 그믐달의 소속이라면 아주 이 잡듯이 뒤지며 죽였다.
결코 살려두는 법이 없었기에 나름 악의 세력이라 자처하는 그믐달조차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독한 년.'
악마와 계약한 건 자신이 아니라 그 여자인 것 같았다.
검은 옷을 입고 다니면 그 여자가 의심부터 하는 탓에 그믐달을 비롯한 뒷세계에서는 검은 옷은 금기에 가까웠다.
그렇다보니 오히려 디어사이드가 악마의 계약자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떠돌았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와 여자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른 디어사이드 소속의 길드원 중 금발의 플레이어가 있었던 데다가 아웃라이징의 길드마스터 강태성이 악마의 계약자만은 절대 아니라고 부인했기 때문이 그런 논란은 금방 사그라졌다.
"떴다, 떴어!"
한 플레이어이 외침과 함께 전광판에 순위가 발표되었다.
3위 아웃라이징. 2위는 제네시스.
그리고 1위가 나타나는 순간 광화문 광장에서 경탄이 울려 퍼졌다.
역시 플레이어들의 예상대로 그 길드가 1위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위, 디어사이드.
서울 시 모든 플레이어들의 머릿속에 그 다섯 글자가 똑똑히 새겨진 순간이었다.
# 67
067. 운명을 보는 소녀(1)
"심심하다."
새하얀 백발에, 머리색과 어울리는 하얀 고딕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침대 위에 늘어져 있었다.
나이는 대략 10대 중후반 정도일까.
미성숙한 소녀의 외형을 하고 있어 귀엽다는 말이 절로 흘러나오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소녀의 정체를 안다면 누구도 그리 말할 수 없으리라.
"계속 침대에 누워 있으니 심심해."
침대 또한 소녀의 취향이 반영된 듯, 놀랍도록 호화로운 침대였다.
새하얀 프릴과 레이스가 거미줄처럼 매달려 있는 모습은 기괴함에 가까웠지만 함께 있는 남성은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렇다면 대련을 부탁해도 되겠나?"
"내가 그런 귀찮은 짓을 왜 해?"
그럼 심심하다고 말하지 말든가.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을 가진 남성은 목구멍까지 치솟아 올라온 말을 삼켰다.
새하얀 소녀와는 달리 남자는 검은 캐쥬얼 정장과 그에 어울리는 새까만 머리카락을 지닌 남자였다.
특이한 점이라면 얼굴 반쪽을 가리고 있는 하얀 가면이었다.
마치 절규하는 인간의 모습을 흉내 낸 것 같은 기괴한 가면.
남자는 그것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아자젤. 그렇다면 차라리 마계로 돌아가는 게 어떤가? 계속 그렇게 놀고만 있으면 악마들 사이에서 말이 나올지도 모른다."
"별로. 누가 감히 내게 그런 말을 해?"
소녀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씩 웃었다.
"내가 나태해질 수 있는 건 강하기 때문이야, 버러지."
아름다운 소녀의 외형을 지녔지만 그녀의 본질은 악마다.
그것도 단순한 악마가 아닌 마계 서열 3위의 강자.
7대 악마중 하나인 나태의 악마.
아자젤.
그것이 그녀의 정체였다.
사실 아자젤은 마계 서열 2위까지는 노려봄직했다.
1위와도 크게 차이 나지 않은 무력을 지녔으니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가능했으니까.
단지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귀찮으니까.
"그런 게으름으로 어떻게 그렇게 강해졌는지 모르겠군."
"강하기 때문에 게으른 거야. 난 태어났을 때부터 강했기 때문에 단 한 번도 수련이나 단련 같은 시시콜콜하고 귀찮은 짓을 한 적 없어. 그게 강자의 특권이지."
오로지 재능.
그것만으로 강해진 악마.
그녀가 '나태'의 악마인 것도 그런 연유다.
다만, 그런 아자젤도 한 소녀에게는 관심이 가고 있었다.
이전에 보았던 금발의 소녀.
그녀라면 어쩌면 자신보다도 뛰어난 재능을 지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녀석이 악마가 되려고 한다면 나태의 자리는 반납해야 되나?'
사실 그래도 별 상관은 없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악마가 될 일도 없어 보였고.
"...그럼 너는 대체 왜 내 곁에 있는 거지? 나는 네가 싫어하는 단련이나 강해지는 것에 집착하는 하등한 플레이어일 뿐인데."
"어머나. 신자운. 생각이 많은 모양이구나. 내가 말했지? 내가 널 선택한 건 재밌어 보였기 때문이야. 너의 노력이, 너의 기술이. 나와는 완전 반대처럼 보였거든."
부족한 재능을 노력으로 채워 그 정도의 힘을 발휘하게 된 신자운은 아자젤에게 장난감 상자와 같았다.
무엇을 해도 신기하고 굳이 저렇게 아등바등 강해질 필요가 있나? 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계속 지켜보기로 했다.
악마로서 계약을 맺고, 굳이 현계라는 불편한 수단을 사용하며 곁에서 지켜보기로.
'옵저버 같은 건 성가시고 말이야.'
역시 뭐든 직접 보는 게 최고다.
애초에 옵저버는 신들 전용이라 악마들은 계약자의 눈과 귀를 통해서 볼 수밖에 없다.
보통 불편한 것이 아니기에 나태한 그녀로서는 참을 수 없었다.
'약한 몸이라는 것도 재밌고.'
지금 사용할 수 있는 힘은 평균적인 플레이어들보다도 약간 약하다.
제약은 언제든지 풀 수 있지만, 그랬다가는 마계로 강제송환 당할 테니 아자젤은 이대로 있기로 했다.
"근데 넌 뭘 위해 강해지는 거야? 그때 그 까마귀에게 복수하려고?"
"아니. 그건 이미 내가 졌다. 만난다면 다시 적으로서 싸우겠지만 굳이 찾아가서 복수할 생각은 없어."
이런 건 또 묘하게 고지식하다.
자운은 휘두르던 주먹을 멈추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으니, 그저 할 수 있는 걸 할 뿐이다."
흑천회를 재건할 생각도 없었다.
악마와 다시 계약을 맺기는 했지만, 굳이 다른 악마의 계약자들과 엮일 생각도 없었다.
그저 이런 세상이 되었으니 계속해서 강해지다 보면 뭔가 답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을 할 뿐이다.
"흐음, 그래. 목적이 없단 말이지."
아자젤은 그런 신자운을 보며 나른하게 말했다.
최근 움직임에 망설임이 있다 싶더니 그런 이유가 있었군?
그렇다면 계약자로서 조금 도움을 줄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최근 몇 달간 신자운을 곁에서 지켜본 결과, 그가 싫어하는 일이 뭔지 아자젤은 아주 잘 알 수 있었다.
아자젤은 힐끗, 창밖을 보았다.
"아, 나 편의점 좀 가고 싶은데."
"편의점? 뭐 사 올 물건이라도 있나?"
"아니, 그런 건 없고. 잠깐 좀 나가자."
드물게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가는 아자젤의 모습에 자운은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았다.
'또 무슨 꿍꿍이인지.'
아자젤이 저렇게 먼저 움직일 때면 보통 성가신 일을 꾸미는 경우가 많았다.
대량의 몬스터와 다툰 적도 있었고, 다섯 번째 퀘스트에서는 용병으로 뛰던 길드가 다른 악마의 계약자들에게 습격당한 경우도 있었다.
나중에 들은 사실이지만 그때 습격한 악마의 계약자들은 마계에서 아자젤에게 줘터진 경험이 있는 악마라고 한다.
아자젤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하얀 양산을 펴고는 하품을 했다.
"하암, 날씨 좋네."
"어디로 가면 되지?"
"저쪽."
하얀 레이스 장갑을 낀 손이 가리킨 곳은 상당히 추상적이었다.
왜냐면 긴 도로만이 이어져 있을 뿐이었으니까.
'꽤 멀리 가야 할 것 같군.'
자운은 바이크를 꺼내 시동을 건 뒤, 아자젤에게 눈짓했다.
아자젤은 양산을 쓴 채로 바이크의 뒷자석에 탔다.
"양산은 접는 게 좋을 것 같다."
"괜찮아."
"공기의 저항이...."
"괜찮다니까."
막무가내인 그녀의 말에 자운은 한숨을 쉬며 바이크의 시동을 걸었다.
양산이 뒤로 날아가 버려도 자신의 탓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정말로 안 날아가네.'
상당히 밟은 것 같은데도 아자젤은 태연했다.
마치 공주님이 말을 타는 것처럼 우아하게 바이크에 앉은 아자젤은 자운이 바이크를 어떻게 몰건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이런 걸보면 확실히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게 실감이 되었다.
"멈춰."
긴 도로를 지나 건물들이 들어선 장소에 도착했을 때, 아자젤이 입을 열었다.
"여기가 좋겠어."
"특별히 네가 좋아할 만한 장소는 아닌 것 같은데?"
"버러지 주제에 말이 많구나."
자운은 그런 아자젤의 말에 옅은 한숨을 쉬었다.
이 제멋대로인 악마는 늘 이런 식이었으니까.
"그럼 이곳에서 뭘 할 생각이지?"
"명상."
잠시 이곳에 잠자코 있고 싶다는 뜻이다.
짤막하게 대답하고 인형처럼 오도카니 서 있는 아자젤의 모습에 자운은 근처 건물의 벽에 기댔다.
'공단인가.'
몬스터가 한번 휩쓸고 간 탓인지 공장들은 제 기능을 전혀 못 하고 있었다.
폐허가 되어버린 공단의 모습을 보며 자운은 담배의 불을 붙였다.
운동을 하며 끊었던 담배지만 플레이어가 된 이후 다시 피기 시작했다.
플레이어는 담배를 얼마든지 피워도 전혀 영향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대략 30분.
줄담배를 피우고 있던 자운의 시야에 이상한 것이 보였다.
여자아이다.
대략 10대 초반의 소녀가 공장 건물 사이로 달리는 게 보였다.
'어째서 이런 곳에 아이가 있지?'
근처에는 주택가도 없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이미 흑천회에서 비슷한 일을 했던 자운으로선 저 여자아이가 왜 이곳에 있는지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기분이 더럽군.'
자신은 쓰레기 같은 놈이지만 아이와 관련된 범죄만큼은 잠자코 있기 힘들었다.
이전에 비탄의 가면 때도 그랬다.
첩자가 있다는 명목으로 아이들을 납치하던 녀석들을 죽인 적도 있었다.
물론 의심받을까 봐 자주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서 자운이 선택한 건 한 아이템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사람을 일시적으로 가사 상태로 만드는 아이템을 사용해 아이들을 죽음으로 위장시켰다.
네비로스가 할 수 없도록 최대한 은밀하게.
그렇게 시체를 처리한다는 명목으로 아이들을 밖으로 내보냈었지만 그 아이들이 잘 살고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뭐해? 가봐."
망설이는 자운을 향해 조용히 서있던 아자젤이 입을 열었다.
그녀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까딱 거렸다.
"저대로 둘 거야? 저 꼬맹이, 이대로 두면 죽을 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공단 안에서 뜀박질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번엔 아이의 것이 아닌 성인 남성이 것이다.
욕설과 고함이 섞인 소리를 들은 자운의 얼굴이 굳었다.
"요즘 악마는 아이를 구하기도 하나?"
"그러지 말란 법이라도 있어?"
태연히 답하는 그녀의 모습에 자운은 고개를 흔들었다.
'제대로 답변해 줄 리가 없지.'
어쨌든, 지금은 아자젤의 의도에 어울려 주기로 했다.
그녀의 말처럼 아이가 좋지 않은 꼴을 당하는 건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
"하아, 하아."
소녀는 있는 힘껏 달렸다.
간신히 얻은 기회다. 이번에 빠져나가지 못한다면 분명 자신은 죽음을 맞이할 게 분명했다.
'미래가 흔들리지만 않았어도 내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있었을 텐데.'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미래가 흐릿하게 변했다.
분명 자신은 '죽음'을 맞이하는 미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 달 전을 기점으로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었다.
그건 미래가 변동됐으며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는 이야기.
'그 이야기는.'
본래라면 없어야 할 존재가 이번 일에 개입하고 있다는 거다.
자신의 신이 그렇게 말했으니 분명했다.
"저기다! 저 계집애 당장 잡아!"
남자들의 고함소리가 가까워졌다.
소녀는 있는 힘껏 다리에 힘을 주고 공장 건물 사이의 골목을 돌아 몸을 꺾었다.
"꺅!"
그리고 무언가에 부딪쳐 뒤로 넘어졌다.
아픈 코를 매만지며 자신이 부딪친 게 뭔지 확인한 순간 소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난 죽었다.'
새까만 머리칼에 검은 눈. 얼굴에 착용한 가면은 흉흉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어디로 봐도 악마의 계약자였다.
지금 자신을 쫓고 있는 악마의 하수인과는 겪이 다른 존재.
"사, 살려...."
"오! 드디어 잡았구만!"
오들오들 떨며 소녀가 말하는 순간, 다른 남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남색 옷을 입은 악마의 하수인들.
자운이 소녀를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걸음걸이가 지극히 느긋했다.
그들의 모습을 본 자운의 머리가 삐딱하게 기울어졌다.
'...왜 남색 옷을 입고 있지?'
보통 검은 옷을 입지 않았나?
악마와 계약된 계약자나 하수인이나 보통은 검은 옷을 입었다.
악마는 어두운 색감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물론 하얀 옷을 선호하는 아자젤 같은 경우도 희소하지만 있기는 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검은색을 선호했다.
"잠깐, 누구야? 이거 악마의 계약자잖아?"
"새로 길드에 온 계약자 아니야?"
처음 자운을 같은 편이라 생각했던 사내들이었지만, 자운의 모습을 확인하곤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외견은 확실히 악마의 계약자였지만 같은 편이란 보장은 없었으니까.
도리어 이쪽 업계끼리도 살벌하게 다투다보니 적인 경우도 많았다.
"설마, 이 계집애를 납치할 생각인 거냐?! 그걸 가만히...!"
퍼걱!
버럭 소리를 지르던 남자의 머리가 터졌다.
후두둑 떨어지는 사람의 잔해에 소녀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시끄럽다."
자운은 천천히 쓰러지는 악마의 하수인을 보며 담뱃갑에서 마지막 남은 돗대를 꺼내 불을 붙였다.
"긴 말은 하지 않아."
자운의 손이 검게 물들었다.
빛을 빨아드리는 검은색 눈동자의 모습에 사내들은 마른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모두 죽어라."
시끄럽던 공단이 조용해진 건 고작 5분 후였다.
# 68
068. 운명을 보는 소녀(2)
"딸꾹."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들의 모습에 소녀는 망연히 자운을 올려다보았다.
자운은 담배를 태우며 무심한 얼굴로 혹시 살아 있는 자가 없는지 살피고 있었다.
살아남은 자가 있을 턱이 없었다.
죄다 자운의 주먹에 머리가 터져 버렸으니까.
그래도 악마와 계약한 녀석들은 생명력이 질긴 법이니 방심할 수는 없었다.
"이봐."
"예, 옛!"
바짝 얼어있는 소녀의 모습에 자운은 한숨을 쉬었다.
하기야 어린애가 보기엔 조금 끔찍했을지도 모른다.
"넌 왜 저런 놈들에게 쫓기고 있지?"
처음에는 단순히 흑천회가 그랬던 것처럼 아이들을 납치해 이상한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기엔 수가 지나치게 많았다.
단순히 아이가 도망친 것이라면 보통은 귀찮아서 두는 편이다.
그걸 찾아서 잡느니 차라리 하나를 새로 납치하는 게 빠르니까.
하지만 이들의 모습은 어떻게든 소녀를 잡으려는 모습이었다.
심지어 마지막에 소녀를 되찾을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자 죽이려는 모습까지 보였다.
다른 이에게는 절대 소녀가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처럼.
"그건...."
소녀는 입을 꾹 다물었다.
말할 수 없다는 눈치다.
"됐다. 그럼 가라."
"...네?"
"할 말이 없다면 굳이 묻고 싶은 마음도 없다. 당장 쫓던 놈들은 다 처리한 거 같으니 빠져나가는 건 어렵지 않겠지."
이 정도 수를 죽였으니 다시 소녀를 쫓는 건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일 것이다.
그때 가서 다시 잡힌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도리어 평소의 자신을 생각하면 오지랖 넓게 관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
등을 돌려 아자젤에게 돌아가던 자운은 조심조심 자신을 쫓아오는 소녀의 기척이 느껴졌다.
'이상한 녀석이군.'
사람을 처참히 죽인 자신이 무서울 텐데도 마치 구원의 동아줄 마냥 손을 뻗는 게 우스웠다.
어차피 아자젤에게 가면 알아서 돌아가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바이크가 세워져 있는 곳으로 이동하자, 여전히 마네킹처럼 서 있는 아자젤의 모습이 보였다.
"왔네."
그녀는 이상한 소녀를 뒤에 달고 온 자운에게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다.
휙, 하고 등을 돌린 아자젤은 나비처럼 사뿐사뿐 걸어왔다.
그리곤 자운을 지나쳐 당황한 얼굴로 주춤거리는 소녀에게 다가갔다.
"너, 이름이 뭐야?"
"네, 네?"
"이름이 뭐냐니까?"
"저는... 수아예요. 민수아."
아자젤이 소녀를 관찰하듯, 소녀 역시 아자젤을 훑어보았다.
복장이나 뭐로 보나 평범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플레이어인가?'
그것도 확실하지 않았다.
플레이어라도 보통 저런 복장을 태연히 입지는 않으니까.
뭣보다 인간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겁주지 마라."
"겁준 적 없는데~? 근데 이 아이까지 데려가려면 나는 따로 돌아가야겠는걸."
흥흥, 거리며 이야기하는 아자젤의 말에 자운은 어이가 없었다.
데려가긴 뭘 데려가?
"이 아이는 여기에 두고 갈 생각이다."
"진짜? 얘 보통 귀한 애가 아니야."
"관심 없다."
자운은 그렇게 말하며 바이크에 시동을 걸었다.
정말로 소녀, 수아에 대해선 하등 관심이 없다는 눈치였다.
이쯤 되자 다급해진 건 수아였다.
"자, 잠깐만요, 오빠!"
처음에는 자운의 행동이 수상해서 쉽게 말할 수 없었지만, 여기서 자운을 놓치면 영영 볼 일이 없어질 것만 같았다.
'이 사람이 분명 내 운명을 바꾼 사람인 게 분명해!'
제대로 확정되지 않았던 미래가 이 남자를 만난 이후 보이기 시작했다.
분명 자신은 살아남았다.
문제는 반대로 살았어야 할 사람이 죽었다는 거다.
"...오빠?"
소녀가 자신을 부른 호칭에 자운은 내심 당황했다.
오빠라니.
기껏해야 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애가 자신을 오빠라고 부르니 여간 어색한 게 아니었다.
자운도 25살이니 나이가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어색한 건 어색한 거였다.
"뭐냐."
"저, 저기 그러니까... 저저 저를 같이 데려가주세요!"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어투였다.
수아는 자신의 능력을 더 이상 감춰봐야 손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남자는 정말 자신에게 조금의 관심도 없었다.
자신을 구해준 건, 정말로 어린아이였기에 도와줬을 뿐이다.
사실 수아는 그렇게까지 어리지 않았다.
어려보이는 외형과 달리 나이는 17살이었고 고등학교에 다니던 고등학생이었다.
아무튼 이대로 있으면 저 남자는 자신을 두고 가버릴 게 뻔했다.
"저는 미래를 볼 수 있어요!"
"미래?"
"네, 저는... 신의 아바타이니까요."
그녀의 신은 스쿨드.
미래를 관장하는 여신이다.
짧게는 몇 초. 길게는 몇 년 후의 미래를 볼 수 있었다.
원래부터 미래예지에 대한 재능이 있던 탓에 신의 아바타로 선택될 수 있었다.
특이한 점은 이 세계가 게임이 되기 전부터 신과 커넥션이 있는 상태였다는 점이다.
"그래서?"
"...네?"
"그게 너를 데려가야 할 이유가 되나?"
자운은 정말로 관심 없다는 얼굴이었다.
미래를 본다?
그게 어쨌다는 건지 알기 힘들었다.
"그게...."
막상 자운이 그렇게 말하니 수아는 할 말이 없어졌다.
보통 자신의 능력을 알게 되면 보이는 사람들의 반응과 달랐기 때문이다.
하나같이 자신에게 빌붙어 미래에 대한 정보를 조금이라도 얻으려는 사람들뿐이었다.
처음에는 의기양양하게 이야기하고 다니던 수아도 이런 세계가 되자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의 능력을 눈치챈 이들이 자신을 납치했기 때문이다.
수아만이 아니라 그녀의 유일한 가족인 오빠까지도!
"그렇지 않으면, 우리 오빠가 죽어요."
본래라면 살았을 사람이다.
그런 미래를 보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미래가 사라졌다.
"오빠가 죽는단 말이에요...."
원래부터 자신이 살아남는 미래는 없었다.
게임이 시작된 직후 자신은 그런 미래를 보았다. 부모님이 눈앞에서 죽고, 오빠의 손에 이끌려 도망칠 때부터 그런 미래를 보았다.
그렇기에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방금 전에 미래가 바뀌었다. 자신은 살았고, 반대로 오빠가 죽어버렸다.
이유는 모른다.
본래라면 자신이 죽어 악착같이 탈출하여 복수했을 오빠였다.
하지만 자신이 살아남은 탓에 '동생이라도 살았으니 괜찮다.'라고 안도하고 말았다.
그 사소한 차이가 오빠를 죽여 버린 거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이야기하는 수아의 말에 자운은 어쩐지 담배가 피고 싶어졌다.
하지만 담배는 더 이상 없었다. 마지막 돗대를 방금 전에 다 피웠기 때문이다.
'이 녀석은 이렇게 될 걸 알고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건가?'
힐끗 아자젤을 보았지만, 녀석은 아무래도 좋다는 얼굴이었다.
모든 선택을 자운에게 맡긴다는 것처럼.
결국 자운은 늘 그렇듯 크게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먼저 그걸 말해라."
자운은 아자젤을 돌아보았다.
"넌 혼자 돌아올 수 있겠지?"
"물론. 먼저 가. 나는 느긋하게 산책 좀 하다가 갈 테니까."
느긋하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자운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넌 타라."
"네?"
"우선 돌아가서 이야기하도록 하지. 참고로 헬멧은 없다."
"아, 알겠어요!"
수아는 황급히 바이크의 뒷자리에 올라탔다.
만약 자운의 마음이 변해 자신을 두고 간다고 할지도 몰랐으니까.
'귀찮게 됐군.'
수아는 이런 오토바이의 뒤에 타는 건 처음인지 자운의 허리를 꽉 잡고 얼어있었다.
그런 수아의 모습을 한번 바라본 자운은 자신이 머물던 건물을 향해 오토바이를 몰았다.
그래도 자운의 표정은 나쁘지만은 않았다.
아자젤의 의도처럼 나름의 목적이 생긴 것 같았으니까.
***
"저와 저희 오빠를 납치한 이들은 그믐달과 경쟁하고 있는 길드예요."
"길드의 이름은?"
"암천 길드예요."
암천 길드라면 알고 자운도 잘 알고 있는 길드였다.
그야 흑천회에서 갈라진 분파 중에 하나였으니까.
이름부터 비슷하지 않은가?
본래는 흑천회의 그늘에 가려져있던 길드였으나 흑천회가 사라진 지금은 멋대로 설치고 다니고 있겠지.
악마와 관련된 이들을 대다수 흡수했던 흑천회가 사라졌으니 그 새력을 암천이 모조리 흡수한 게 분명했다.
'암천 길드라면... 그놈이 있겠군.'
철마 박도영.
육체를 강철처럼 만들 수 있는 스킬을 지닌 악마의 계약자다.
계약한 악마도 마계 서열 30위의 상당한 강자였다.
"녀석들도 아이를 빼돌리는 짓을 하고 있었나?"
"네? 아,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제 능력을 이용하려고 했을 뿐이죠."
수아는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자신의 능력에 취해 떠들고 다닌 결과가 바로 이것이다.
자업자득이라는 말이 어울렸지만 피해가 자신이 아닌 오빠에게까지 향한다면 달랐다.
"그들은 미래를 볼 수 있는 제 힘을 이용해 저번 길드 이벤트에서 이득을 취하려고 했어요. 물론 전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오빠를 인질로 삼고 있는 탓에 최소한의 정보만을 말했어요."
하지만 암천 길드 자체는 던전 공략의 경험이 적어 그렇게 높은 순위를 기록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암천 길드의 길드장인 박도영은 신경 쓰지 않았다.
미래예지가 확실히 적용되고 있다는 걸 안 것만으로도 충분한 수확이었다.
박도영은 수아의 능력을 최대한 이용하려고 했고, 만약 다른 조직에게 넘어가게 된다면 죽일 생각이었다.
그 정도의 능력을 수아는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정확히 미래를 본다는 게 어느 정도를 볼 수 있는 거야?"
언제 왔는지 아자젤이 자신의 침대 위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수아로선 그런 그녀의 모습이 신기할 따름이었지만 태연한 자운의 모습에 넘기기로 했다.
"먼저 3초 정도의 미래를 볼 수 있어요. 3초 후의 아주 간단한 단편적인 장면을 볼 수 있죠. 이건 재사용시간도 짧아 언제든 사용이 가능해요. 그다음은 볼 수 있는 날짜를 지정해서 볼 수 있어요. 하루 후나, 혹은 한 달 후. 당연하지만 먼 미래를 볼수록 다시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길어지죠."
심지어 어떤 것을 볼지 알 수도 지정할 수도 있었다.
괜히 박도영이 수아의 능력을 탐낸 게 아니다.
"이건 평범한 아바타의 능력을 넘었네. 플레이어의 개인적인 능력까지 합쳐졌어."
아자젤은 수아의 능력을 듣고 내심 감탄했다.
과연 멀리서 느꼈던 신의 힘은 가짜가 아니었다.
여신 스쿨드가 분명 아끼는 아이이겠지.
거기다 어떤 플레이어보다 아바타가 된 기간이 길었다.
게임이 시작되기 전부터 아바타가 되었다면 그 잠재능력은 분명 무궁무진 할 터.
사실상 미래를 볼 수 있는 신과 큰 차이가 없는 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다.
이런 굉장한 능력을 지녔지만 본신의 힘은 미약하여 할 수 있는 것이 적다는 게 아자젤은 조금 우스웠다.
"그게 끝인가?"
자운은 그냥 그러려니 했다.
미래를 볼 수 있으니 조금 편하겠다 싶은 정도다.
"그건...."
심드렁한 자운의 모습에 수아는 눈치를 살폈다.
이 정도까지 말했으면 보통 아자젤처럼 최소한의 감탄이라도 할 텐데 그는 정말 관심이 없어보였다.
이대로 쓸모가 없다고 생각되면 쫓겨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하긴 미래를 보는 게 별건가?'
이곳에 도착해서야 수아는 아자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마계의 7대 악마 중 하나인 나태의 악마.
그 정체를 '보았을 때'는 정말로 기절하는 줄 알았다.
설마 이런 새하얀 소녀가 악마라고 누가 생각하겠는가.
수아는 자신의 머릿속으로 상상한 악마의 모습을 떠올렸다.
여태까지 악마는 박쥐의 날개를 달고 뿔을 머리에 단 악귀라고 생각했지만, 그 생각을 수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사실 하나를 더 볼 수 있어요."
결국 수아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걸 이야기하기로 했다.
"오, 거기서 뭔가를 더 할 수 있단 말이야?"
"네. 저는... 이 게임의 끝을 볼 수 있어요."
이번만큼은 아자젤도 할 말을 잃었다.
게임의 끝은 누구도 알지 못한다.
미래를 보는 여신이라도 그걸 보는 건 허락되지 않았다.
왜냐면 여신이니까.
하지만 신격을 습득하지 않은 인간이기에 시스템의 눈을 피해 볼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게임의 끝?"
자운 역시 관심을 보였다.
이 세계를 지옥의 구렁텅이로 만든 이 게임의 끝이라니.
플레이어라면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확히는 '엔딩'을 볼 수 있죠. 이 세계가 어떤 결말을 맞이하여 게임이 끝나게 될지 전 알고 있어요."
"엔딩, 엔딩이란 말이지. 그래서 지금의 엔딩은 뭐야? 역시 배드엔딩인가?"
"아니요."
배드엔딩이 아니라니.
수많은 차원의 말로를 보았던 아자젤은 내심 지구의 플레이어들에게 경탄했다.
대부분 게임판이 된 행성은 배드엔딩이 되기 쉬웠으니까.
"그럼 해피엔딩?"
"그것도 아니에요."
"해피엔딩도 아니야?"
"네."
수아는 이제야 궁금하다는 눈으로 보는 두 명의 시선에 내심 안도했다.
이제 적어도 버려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사실 한번 변한 엔딩이지만.'
무엇이 엔딩을 변화시켰는지 모른다.
이 세계가 게임이 되기 전부터 수아는 이 세계가 곧 게임이 될 거라는 걸 알았다.
그때 자신이 보았던 엔딩은 배드엔딩이었다.
게임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확실했다.
배드엔딩 「고독한 세계」
단 한 명만이 살아남는 결말.
수아는 그것을 분명히 보았다.
엔딩이 달라진 건, 게임이 시작되기 몇 분 전이었다.
머리에 찌릿한 통증이 오며 달라진 엔딩을 볼 수 있었다.
엔딩을 보는 건 미래를 볼 수 있는 다른 능력과 달리 강제로 알게 되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니 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모습을.
"지금의 엔딩은...."
현재 자신에게 보이는 건 왕좌에 앉아 있는 검은 머리칼의 남성.
수많은 악마들이 그에게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지금 자세히 보면 그곳에는 아자젤도 보였다.
7대 악마마저 고개를 숙이는 존재는 단 하나뿐이다.
"트루 엔딩. 「광기의 마왕」이에요."
# 69
069. 몽상(夢想)의 던전(1)
던전 레이스가 끝나고 한 달.
그동안 우리는 이번에 얻은 소득을 정산하는 데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여태까지와는 다르게 이번 퀘스트로 얻은 소득은 각인한 던전들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원래는 2위나 3위 정도로 마무리할 생각이었는데.'
어쩌다보니 1위를 하고 말았다.
왜냐면 아웃라이징이나 제네시스가 적극적으로 던전을 점령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에 일어났던 사건에 쫄은 건지.
아니면 우리에게 양보를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서울에 존재하는 던전의 절반 이상을 각인시킬 수밖에 없었다.
괜히 그믐달과 같은 길드가 차지해 봐야 좋은 꼴을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피안화는... 넘어가자.
거기는 불법적인 일을 저지르지만 않을 뿐이지 그믐달만큼이나 위험한 길드 중 하나였다.
길드장 이아영의 한마디면 목숨조차 불사하는 곳인데 뭘.
'그보다....'
난 내 앞을 막고 있는 존재를 바라보았다.
상대도 나를 멀뚱멀뚱 보고 있었다.
"넌 왜 나를 그렇게 보냐?"
이마에 비쭉 솟아나 있는 길쭉한 외뿔.
아기 때는 새하얗던 머리카락도 성장하니 은은한 상아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아마 금발인 린의 영향을 받은 모양이다.
대략 12살 정도의 외견으로 성장한 백설이는 어쩐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아기 때는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웃더니.
이렇게 커버린 후에는 제대로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대부분이 무표정했고 무척 딱딱한 말투를 사용했다.
"호칭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호칭?"
"역시 아버지라고 부르는 게 좋을까 해서."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나는 얼굴이 일그러지는 걸 참을 수 없었다.
지금 내 나이가 몇인데 아버지라는 소리를 듣는단 말인가.
"하나만 묻자."
"예."
"그럼 어머니는 누군데?"
"어머니는 딱히 없지만...."
백설이는 머리를 살짝 기울이며 답을 내놓았다.
"굳이 말하자면 린을."
"미쳤냐?"
"안 되나요?"
"당연히 안 되지."
그런 말이 혹시나 돌아다니기라도 하면 난 사회적으로 매장당할 거다.
전생의 배드엔딩보다도 훨씬 끔찍한 배드엔딩이다.
"그냥 이름으로 불러라. 그게 나도 편하니까."
"알겠습니다."
딱딱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의 모습에 나는 혀를 찼다.
대체 왜 저렇게 커버린 걸까.
늘 함께 있던 민아가 뭔가를 잘못 가르쳐준 건가?
그렇지만 민아는 지금도 백설이를 귀엽다 귀엽다하면서 데리고 다녔다.
대체 저 무뚝뚝한 행동의 어디가 귀여운지 난 알기 힘들었다.
"여태 어디 있다가 왔어?"
"린과 놀다 왔습니다."
이런 건 또 어린애 같다.
하지만 역시 평범한 어린애는 아니다.
단순히 외견이나 성격이 문제가 아니라 지닌 바 능력이 엄청났다.
과연 린의 피를 받은 기린이라고 해야 할지.
마법적 재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해서 벌써 공격마법만 다섯 개를 넘게 익힌 상태였다.
그렇지만 백설이의 주 능력은 회복능력.
솔직히 말해 성녀라고 불리던 플레이어보단 약간 떨어지긴 하지만 다른 능력까지 생각하면 백설이 쪽이 월등한 포텐셜을 지니고 있었다.
기린아, 라는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이대로 성장한다면 린과 더불어 인류를 견인할 존재가 되리라.
"근데 이렇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건 말할 게 있다는 거겠지?"
"네."
백설이는 고개를 끄덕인 뒤, 말을 이었다.
"찾으시던 던전이 나왔다고 창우 아저씨가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찾는 던전?"
"네. 그렇게 말하면 아실 거라더군요."
오호라, 그렇단 말이지.
난 백설이에게서 머물렀던 시선을 뗀 뒤 창밖을 바라보았다.
방향은 남산이 있는 쪽이다.
여기서 남산을 본다고 뭐가 보이는 건 아니지만, 그쪽에 미리 배치해둔 까마귀가 하나 있었다.
언제든 그 근처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 수 있도록.
'그러고 보니 오늘 창우 씨가 그 근처 던전에 볼일이 있다고 했지.'
내게서 포인트를 얻은 이후 창우는 급격하게 강해졌다.
던전 레이스가 끝난 이후에도 매일같이 던전에 출입하며 몬스터를 학살하고 있었다.
우리가 각인시켜 둔 던전 중 포인트를 대량으로 습득할 수 있는 던전을 들락날락하며 열심히 능력치를 올렸다.
아마 지금쯤이면 지수 정도는 아니어도 민아와 엇비슷한 수준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덕분에 어릿광대도 요즘 민아에게 상당량의 포인트를 쏟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의 아바타가 주변 플레이어에게 뒤처지는 건 싫다나.
"찾았다."
까마귀의 시야에 새하얀 신전과도 같은 건물이 보였다.
겉보기에는 신전이지만 저것도 하나의 던전이다.
이름은 바로 몽상(夢想)의 던전.
이름과 입구에서 알 수 있듯 평범한 던전은 아니다.
게임으로 치자면 인스턴스 던전(Instance Dungeon).
간단히 설명해서, 다른 던전과 달리 세계 자체가 괴리되어 있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신전으로 들어가 던전에 입장하게 되면 전혀 다른 장소에 나타나게 된다.
몽상의 던전은 그중에서도 특이한 던전이었다.
문제는 가장 일찍 생긴 인스턴스 던전임에도 도전자가 나온 건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였다.
왜냐면 던전의 입장에 성스러운 힘을 가진 기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후, 퀘스트가 진행되며 기린의 뿔이나 페가수스의 깃털과 같은 성수의 힘으로 던전에 들어가는 자들이 있었지만, 그조차 많지 않았다.
왜냐면 던전의 보상이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던전의 보상은 바로, 라플라스의 모래시계.
단 한 사람의 미래를 30분 동안 불러올 수 있는 물건.
등급도 무려 S랭크에 속하는 보물 중의 보물이지만 애매한 성능 덕에 S급 중에서는 꽝 취급받았다.
미래의 시간을 30분 불러와 봐야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한정되니 당연하다.
'내겐 반드시 필요한 물건이지.'
시스템도 시스템이지만 GM 아카터스도, 퍼블리셔도 뭔가 손을 쓸 확률이 높았다.
만약 안타레스를 죽였다면 그것만으로 퍼블리셔나 GM이 한 발짝 물러설 수밖에 없었지만 아쉽게도 죽일 수 없었으니까.
"가자."
"저도 가는 건가요."
"네가 있어야 문을 열 수 있거든."
던전의 문을 열기 위해선 성스러운 힘을 지닌 기물이나 성수의 힘이 필요하다.
기린의 힘을 가진 백설이라면 분명 문을 열 수 있을 거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곧바로 몽상의 던전을 향했다.
이번에는 공략을 위해 특수한 장비를 마련할 필요도 없었다.
왜냐면 몽상의 던전에서는 현실에서 이룬 모든 것이 하등 쓸모가 없었으니까.
***
남산의 중턱.
하얀 신전이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딱 보기에도 평범한 던전과는 입구부터가 달랐다.
"여기 이름이 몽상의 던전인가요?"
"어."
나는 짤막하게 대답한 후 고개를 돌렸다.
참고로 질문을 한 건 백설이가 아니다.
바로 오는 도중에 마주친 지수였다. 녀석은 백설이와 내가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뒤에서 나타났다.
그 이후에는 지금처럼 당연하다는 얼굴로 뒤따라온 상태였다.
"근데 넌 왜 따라온 거냐? 어차피 이 던전은 같이 못 들어가."
"그냥요. 인스턴스 던전이라기에 한번 보고 싶었어요. 그리고 오빠가 던전에 들어간 동안 백설이를 보호해 줄 사람이 필요하잖아요?"
확실히 그건 그렇지.
뭔가 설득되는 기분이지만 확실히 백설이를 데리고 돌아갈 사람이 필요하긴 하다.
마침 민아도 없었고 창우는 던전 순회 중이니 부르기도 힘들었다.
가장 적당한 사람은 루크였지만, 루크는 한 달 전 리브라를 소환한 반동으로 여전히 회복 중이었다.
린이나 시우는... 이쪽은 백설이와 크게 다를 것도 없으니 사실상 남은 사람은 지수뿐이긴 하다.
"...."
물론 백설이는 지수랑 성향이 안 맞아서 조금 꺼려하는 눈치긴 했다.
천살성 스킬을 보유한 지수와 성수인 기린은 상극이긴 하지.
심지어 린의 피를 받은 만큼 그 영향이 더 클 것이다.
물론 지수는 전혀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애초에 백설이에게는 관심도 없었다.
"여기가 입구다."
"여기라고 해도...."
지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신전의 안에는 보통의 던전처럼 특별히 아래로 내려가는 통로가 보이지 않았다.
그저 거대한 벽화가 우리의 앞을 가로막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보니 지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지 눈으로 내게 묻고 있었다.
"다른 인스턴스 던전도 그렇지만 몽환의 던전은 특별하지. 성스러운 힘을 가진 존재의 필요하거든."
성물이나, 혹은 성수의 힘.
나는 백설이에게 눈짓했다.
백설이는 아마 눈치챘을 것이다.
저 벽화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을 예민한 기린이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고오오.
백설이의 뿔에서 새하얀 빛이 모였다. 그 빛은 하나의 구의 형태가 되어 방울이 되었고.
새하얀 빛을 발하는 방울은 천천히 날아가 벽화를 조용히 두드렸다.
변화가 일어난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쿠구궁!
거대한 진동이 울리며 벽화에 작은 금이 생겼다.
금은 점차 벌어졌고, 벽화는 좌우로 갈라져 하나의 포탈을 생성했다.
마치 던전이 생기기 전에 생기는 게이트와 비슷했지만 자세히 보면 다른 구석이 많았다.
마력이 넘실거리며 공간을 일그러트리는 게이트와는 달리, 눈앞의 포탈은 마력이 정제되어 있었다.
"잘했어."
"별로 어려운 건 아니었습니다."
백설이의 머리를 두드리며 칭찬하자 백설이가 살며시 미소 지었다.
그래도 칭찬을 좋아하는 걸 보면 어린아이답다.
"이제 저희는 여기서 기다리면 되는 건가요?"
"아니. 먼저 돌아가 있어도 괜찮아."
"네."
분명 몽상의 던전 안으로 들어가면 현실과는 시간이 다르게 움직이지만, 그것도 사람마다 달랐다. 애초에 몽상의 던전은 사람마다 구성이 다르니 당연했다.
'좋아.'
나는 가볍게 몸을 풀고 천천히 포탈을 향해 걸어갔다.
라플라스의 모래시계를 얻기 위해서.
***
쿠구구궁.
세한이 포탈 안으로 사라지자 벽화는 천천히 닫혔다.
그 광경을 지수와 백설은 빤히 바라보았다.
"...."
"...."
어색한 침묵이 둘 사이에서 흘렀다.
애초에 대화를 그리 많이 한 적이 없는 둘이다.
지수는 백설에게 큰 관심이 없었고, 백설의 경우엔 지수를 내심 꺼려했다.
물론 세한과 가까운 존재이기에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파장이 맞지 않았다.
아마 그건 지수도 마찬가지였으리라.
"라플라스의 모래시계...."
이 던전으로 오며 세한은 던전의 보상에 대해 지수에게 이야기했다.
미래의 자신을 30분간 불러올 수 있는 아이템.
세한은 왜 그것을 얻기 위해 기린을 얻는 수고를 했던 것일까.
그것이 그만큼 중요한 물건인가? 왜?
"흐음."
지수는 팔짱을 끼고 벽화를 빤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조용히 서 있는 외뿔의 소녀를 향해서.
***
몽상의 던전은 다른 인스턴스 던전 중에서도 특별하다.
왜냐면 몽상의 던전은 현실에서 얻은 장비나, 능력치. 그리고 스킬을 전혀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던전에 들어온 순간 플레이어는 던전을 클리어하기 위한 새로운 육신과 스킬을 부여받게 된다.
장비도 마찬가지.
거기에 클리어 조건도 전부 다르다.
왜냐면 몽상의 던전은 플레이어가 가진 기억을 토대로 던전이 구성되기 때문이다.
플레이어가 느낀 가장 기뻤던 일.
혹은 가장 슬펐던 일 중에서 선택되며, 플레이어가 가장 간절히 바란 사람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퀘스트로 제공된다.
퀘스트에 따라 모래시계를 얻을 수 있는 대상은 다르며, 보통은 퀘스트 내에서 등장하는 등장인물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나도 직접 클리어해 본 적은 없다보니 듣기만 했다.
"아오...."
나는 무거운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던전에 들어오는 순간 정신을 잃은 탓에 머리가 어질어질 했다.
'여긴 어디지?'
어두운 건물 안이었다.
습한 공기가 폐부를 자극했다. 몸은 무겁고 피로감에 정신은 몽롱했다.
어디로 봐도 정상적인 몸 상태는 아니었다.
"혹시."
천천히 손을 들어 창밖에 들어온 달빛에 반사시켰다.
굳은살이 박인 손이다.
상처투성이에 성한 곳이 없는 모습이었다.
내게는 익숙한 손의 모습.
그건 바로 1회차 김세한의 손이었다.
# 70
070. 몽상(夢想)의 던전(2)
"역시 전생의 기억을 토대로 만들어진 건가."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일이다.
되도록 평화로운 시절의 내가 관련된 일이면 좋았겠지만 그때의 내겐 특별한 추억 같은 건 없었다.
돌아가신 부모님 대신 친척집에서 살던 시절.
구박대기 취급을 받으며 살던 김세한.
지금은 머나먼 일이다.
"문제는 지금이 어느 시기냐는 거지."
손의 모습을 볼 때. 게임이 시작하고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다.
인류의 멸망이 몇 년 정도 남은 시점인지 궁금했다.
적어도 이런 건물이 있다는 건 아직 서버 종료 수순을 밟지는 않은 것 같은데....
'내가 이런 건물에서 지내던 때는 분명....'
어쩐지 기억에 있었다.
정확히는 건물에서 지낸 것이 아니라 숨어 있을 때였다.
등골이 오싹해졌다.
나는 본능적으로 허공에 손을 뻗었다.
현재 육신이 전생의 나라면, 보유하고 있는 스킬도 분명 같을 터.
콰과과광!!
건물을 꿰뚫으며 무언가가 지나갔다.
귓가에 이명이 울리며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다행히 몸에 피해는 없었다.
마력으로 이루어진 완벽한 구 형태의 방패가 전신을 감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큭!"
방패를 해제한 후, 지상에 착지했지만 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역시 그때다.
내가 가장 후회하는 퀘스트 중 하나.
하지만 지금은 퀘스트를 확인할 시간이 없었다.
왜냐면 아직 녀석의 맹공이 계속 되고 있었으니까.
"하─하하하하!!"
경쾌한 웃음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하지만 멀다, 라는 말은 곧 가깝다, 라는 말로 바뀌었다.
핑.
화살이 바람을 가르는 것처럼, 대기가 갈라졌다.
주변에 있던 건물들이 단번에 깨어져 나가며 무언가가 스쳐지나갔다.
음속의 영역을 아득히 뛰어넘은 속도.
무언가가 다가온다는 걸 인식하는 것보다 도달하는 시간이 빨랐다.
그러니 저건 보는 것보다 본능적으로 예측해야 된다.
나는 허공에 공간을 열고 수많은 폭탄을 지상으로 떨어트렸다.
내 주변에 수많은 지뢰가 수없이 깔렸다.
콰과과광!!
"오우!"
일대 전체를 날려버리는 폭발음에 달려들던 녀석이 발을 멈추며 크게 뛰었다.
그리곤 반쯤 기울어진 건물 위에 착지했다.
"...늦은 밤에 무슨 일이지?"
나는 그런 녀석을 올려다보았다.
짧은 스포츠 머리에 고글을 쓰고 있는 남자.
여신 마하의 아바타이자 모든 플레이어 중 가장 빠른 사나이.
"민수호."
사실 왜 왔는지 알고 있다.
이미 겪은 일이니까.
녀석은 나를 죽이기 위해 왔다.
"당신을 죽이기 위해서지."
"역시 그러냐."
역시 내 기억과 같은 전개다.
앞으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현재 상황은 내 기억을 토대로 완벽하게 구성된 것 같았다.
거지같기도 하지.
"당신이 적당히 타협을 했으면 됐어. 아~, 그래. 이해는 해. 일반인보단 플레이어들을 살리는 쪽이 도움이 되겠지. 그래도 이건 아니야. 수가 너무 많다고."
민수호는 그렇게 말하며 짧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만졌다.
"어차피 당신도 우리를 야밤에 습격할 생각이었잖아? 몰래 숨어들어 일을 벌일 생각이었지?"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왜냐면 그 말이 맞았으니까.
전생의 나는 몰래 적의 구역에 숨어들어 선제공격을 가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때도 이런 식으로 민수호에게 방해받았지.
"우습군."
"뭐야? 뭐가 우스워?"
"아니, 이 상황 자체가."
하필 선택해도 이 퀘스트를 선택할 줄이야.
몽상의 던전도 참 웃기는 짓을 하는 구나.
이 퀘스트는 내가 가장 후회하는 일 중에 하나다.
퀘스트 내용은 간단.
둘 중 하나의 세력을 선택해서 살리는 것이다.
유망한 플레이어 천 명과. 일반인 10만 명.
각각의 세력은 GM이 관리하는 격리구역에 있으며 나오지 못한다.
격리구역에 갇히지 않은 플레이어들은 두 개의 세력 중 하나에 참여해, 반대편 격리 구역에 있는 이들을 모두 죽이는 것이 퀘스트 목표다.
심지어 격리구역에 갇혀있는 자들만이 아니라, 세력에 참여한 플레이어까지도 모조리.
참으로 끔찍한 퀘스트다.
보통 이런 퀘스트가 등장하게 되면 게임의 수명도 다되었다고 보면 된다.
서버 종료 수순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남은 인류의 수를 최대한 줄이려는 거다.
하지만 퍼블리셔나 GM의 생각처럼 인류의 수는 좀처럼 줄지 않았다.
왜냐면 생각보다 강한 플레이어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나나, 그 아이와 같은 플레이어들.
그래서 이런 퀘스트가 발생한 것이다.
'나는 이때 플레이어를 택했다.'
10만 명의 민간인이 아닌 1000명의 플레이어.
어쩔 수 없었다.
퀘스트를 클리어하기 위해선 민간인이 아닌 플레이어가 필요했으니까.
'그래서 이 녀석들과 싸워야만 했지.'
나는 민수호를 바라보았다.
지금의 나는 상당히 강하지만 상대도 만만치 않았다.
왜냐면 녀석은 그 아이가 이끄는 길드에 속해있기 때문이다.
조금만 더 발전하면 인류의 희망이 되었을 길드.
"뭐야? 싸울 생각 없어? 얌전히 돌아간다면 특별히 살려는 주지. 나는 당신처럼 반드시 적을 죽여야 된다는 주의는 아니거든."
"속 편한 말이군. 내가 얌전히 물러선다고 해도, 퀘스트를 포기한다는 것은 아니다."
"상관없어. 당신 쪽 세력의 플레이어들이 무슨 짓을 해도 우리가 이길 테니까."
자신만만한 말이다.
하지만 이해는 됐다. 녀석이 속한 길드는 현재 존재하는 어떤 길드보다도 강했으니까.
"좋다. 그럼 오늘은 물러나지."
"오, 당신답지 않게 순순하네?"
"오늘은 생각할 게 많아서 말이야."
나는 양손을 위로 올리고 천천히 물러섰다.
그리곤 민간인들이 있는 구역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크게 뛰었다.
민수호는 그런 나를 계속 쫓아왔지만, 완벽히 내가 속한 구역으로 넘어가자 멀리서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나는 그런 민수호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 준 후, 뻐근한 어깨를 주물렀다.
"역시 몸은 젊을 때 같지는 않나."
이때 내 나이가 몇 살이었더라.
아마 딱 서른 정도 됐던 거 같은데.
'아무튼 이걸로 전생과는 좀 달라지겠어.'
본래 나는 여기서 민수호를 죽였다.
가진 아이템을 상당히 소모한 탓에 물러설 수밖에 없었지만 적어도 죽일 수는 있었다.
'얌전히 물러난 탓에 괜히 더 경계를 사는 건 아닌지 몰라.'
얌전히 물러난 나를, 너는 어떻게 생각할까.
긴 금발에 냉정하게 빛나는 푸른 눈을 지닌 여성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린 테일러."
이 퀘스트에서 나는 그 아이를 죽이게 된다.
***
"어떻게 됐습니까?"
천 명의 플레이어가 묶여 있는 장소로 돌아오자 가장 먼저 나를 반긴 건 익숙한 청년이었다.
"아, 시우 씨."
"예, 그래서 어떻게 됐죠? 성공하신 겁니까?"
다급하게 묻는 그의 말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방해가 많아 우선 몸을 뺐습니다."
"그, 그렇습니까..."
시우의 얼굴이 조금 창백해졌다.
그럴 만도 했다.
이번에 저당 잡힌 1000명의 플레이어에는 송시우도 속해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수많은 장비를 얻게 된 것도 송시우가 무상으로 도움을 주고 있기에 가능한 거다.
자신의 목숨이 걸려 있으니 어떻게든 지원을 하려고 하겠지.
특히 이쪽에 속한 플레이어 중에 가장 강한 건 나였다.
이쪽에도 탑 플레이어라고 불리는 이들은 많았지만, 하필 상대편에 가담한 플레이어가 지나치게 강했다.
정확히는 한 길드가.
그래서 플레이어 숫자는 이쪽이 많음에도 섣불리 몰아붙일 수가 없었다.
'당신은 내가 1000명의 플레이어를 택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지.'
어린 송시우만 보다가 이렇게 청년이 되어버린 송시우를 보니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저 타인처럼 느껴졌다.
'이때의 채팅방이 어땠을지 궁금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던전에서는 채팅방에 접속할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말이다.
"상대 플레이어들이 이쪽을 습격할 생각은 없어 보였습니까?"
"기, 기다려 주세요! 좀 더 자세히 이야기를 부탁드립니다!"
천천히 걸어가는 내게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옷깃을 잡았다.
이제 퀘스트 제한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다급할 수밖에 없었다.
"저도 다 아는 건 아닙니다."
나는 적당히 사람들을 외면하며 내가 머무는 방으로 들어갔다.
특별한 장식물 하나 없는 삭막한 방.
나는 거기에 있는 딱딱한 침대에 앉으며 한숨을 쉬었다.
"악몽이라면 정말 끔찍하군."
정말 던전이 선택한 탁월한 선택에 박수가 나올 지경이다.
개 같은 놈.
던전에게 욕해봤자 나만 바보가 될 뿐이다.
나는 손을 들어 상태창을 열었다.
지금의 내 정보가 망막에 새겨졌다.
==
이름: 김세한
칭호: 없음
특성: 싱글 플레이어
힘: A (77+41)
민첩: S (43+19)
마력: B (55)
체력: A (94)
==
역시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라 상당한 수치다.
하지만 역시 '현재'의 나에 비하면 성장 속도가 느렸다.
지금의 나라면 2년 안에 이정도 수치를 끌어올릴 수 있으리라.
대신 스킬의 수는 압도적으로 많았다.
워낙 잡다한 스킬까지 익힌 터라 나는 스킬창은 따로 닫아둬야만 했다.
상태창이 쓸데없이 길어지기 때문이다.
"현재 주어진 퀘스트는 어떻지?"
퀘스트를 확인하자, 역시 전생에 내가 받았던 퀘스트와 같았다.
일반인 세력을 모두 죽이는 것.
보기만 해도 한숨만 나오는 퀘스트다.
"거기에...."
나는 메인 퀘스트 아래에 있는 퀘스트창을 열었다.
이 퀘스트와는 구분되는 것처럼 알림창의 색깔부터가 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건 '현재'의 내가 받은 퀘스트다.
==
서브 퀘스트: 몽상의 던전 클리어.
당신의 추억이 형상화되었다.
추억 속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클리어 하도록 하자.
*이 추억 속에서 죽게 되면 현실의 당신도 죽게 됩니다. 주의해 주세요.
난이도 B 제한시간: 추억 속 퀘스트 시간 만료 전까지
==
서브 퀘스트다.
2회차가 시작되고 처음 받아본 서브 퀘스트.
이제 다섯 번째 메인 퀘스트도 클리어 했으니 서브 퀘스트가 활성화 된 모양이다.
'이 퀘스트를 한 번 더 깨는 게 퀘스트 클리어 조건이냐.'
목구멍에서 당장이라도 욕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이걸 또 깨라니!
아직도 머릿속에서 그 일이 선명하게 떠오르는데.
'...한 번 했던 일이니 오히려 쉬우려나.'
이건 현실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내 추억이 만들어 낸 환상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만이지만 솔직히 그럴 수가 없었다.
이 일은 내 가장 큰 트라우마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거기에 뭔가가 마음에 걸렸다.
'뭔가 다른 방법 없나?'
역시 전생처럼 상대편을 몰살시켜만 해야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이었다.
"무엇을 그렇게 고민하느냐."
나긋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아, 그래. 생각해 보니 이때는 녀석이 이렇게 현신을 하고는 했지.
"무슨 일이지, 마녀."
서버 종료가 가까워질수록 시스템의 제약은 약해진다.
퍼블리셔와 GM은 행패를 부리고 신들은 점차 세계를 떠나간다.
흔히 말해 게임을 접는 거지.
그런 상황에서 본래라면 할 수 없는 짓을 하는 신도 있었다.
특히 시스템의 제약을 거의 받지 않는 다른 우주의 신.
이계의 존재라면 본신의 힘을 줄이고 현신을 하는 것도 가능했다.
등 뒤로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는 오만한 미소를 짓고 있는 하나의 여신이 있었다.
연한 금색의 머리칼에 반짝이는 금안을 지닌 아름다운 여성.
검붉은 드레스를 입은 고풍스런 모습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오늘도 딱딱하구나. 그래도 나는 너를 응원한다. 더 많은 인류를 구한다면 확실히 너의 선택이 올바른 것이겠지."
거짓말 마라.
너는 분명 알고 있었다.
이 세계가 이렇게 흘러가게 되면 결국 멸망하게 된다는 걸.
내 선택은 결코 올바르지 않다는 걸.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와버렸다는 것까지도.
그럼에도 나는 녀석을 욕할 수 없었다.
어쨌든 녀석이 인류를 생각하는 마음은 진심이니까.
"마녀, 아니. 아니지."
나는 전생에 녀석을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었다.
이 녀석과 친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도 없었을 뿐더러 믿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신은 적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어차피 현실이 아니기도 하니 한 번쯤은 말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이드라. 한 가지만 묻자."
"그래, 뭐든 물...."
그렇게 말하던 이드라의 말이 멈췄다.
"방금 뭐라고 했느냐."
"한 가지만 묻자고 했는데."
"아니, 그 전에."
"이름을 불렀지."
"그걸 다시 말해다오."
뭐야, 이상한 녀석이네.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기에 나는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이드라. 이제 됐냐?"
내 말을 들은 이드라의 입가에 마치 꽃과 같은 미소가 피었다.
그건 전생에는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그녀의 '기쁨'이 담긴 웃음이었다.
# 71
071. 추모하는 자(1)
꿈의 마녀(Dream Witch) 이드라(Yidhra).
크룰루 신화에 등장하는 아우터 갓이자, 그들 중 유일하게 인류에게 진심으로 호감을 가지고 있는 신.
간단히 말하자면 이계의 신이며 멋대로 다른 우주의 게임에 참여한 변질자다.
그렇다고 해도 그녀에게 뭐라고 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그녀는 그 정도의 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무슨 짓을 하더라도 용서받을 힘을 지니고 있었다.
이계의 신 중에서는 비교적 온순한 성격이다.
그래서인지 시스템이나 퍼블리셔, 그리고 GM도 그녀를 방치했지.
아무튼 나는 그런 신의 아바타였다.
대체 왜 이드라가 나를 아바타로 삼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인류가 살아남기를 바랐기에 나를 응원했고.
멸망한 이후에는 결국 떠나 버리고 말았던 나의 신.
"흠흠, 아무튼 그래. 오늘은 조금 이상한 날이로구나."
이드라는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피했다.
무심코 웃었던 게 조금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그래서 묻고 싶은 건 뭐지?"
"몽상의 던전에 관한 거다."
"그건 또 예상외의 질문이구나."
"그냥, 갑자기 생각났거든."
적당히 둘러대는 내 말에 이드라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하기야 갑자기 지금 상황과 전혀 관련이 없는 던전을 입에 담았으니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녀석은 한동안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왜 몽상의 던전에 대해 물었는지 물어보리라 생각했지만 그런 기색은 없었다.
대략 5분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때, 이드라는 조용히 말했다.
"지금 이 상황 자체가 그대가 꿈꾸는 몽상이라는 건가?"
"...."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왜냐면 이드라의 말이 내심 정곡에 찔렸기 때문이다.
설마 그 질문만 듣고 그런 식으로 말할 줄은 몰랐다.
"과연."
이드라가 유쾌하게 웃었다.
"몽상의 던전이라... 그런가. 그래서 내 이름을 불렀던 것이로군."
"특별히 그런 건 아니다."
"사람이란 존재는 하루아침에 태도가 달라지지 않는다. 아니, 인성을 지닌 존재라면 누구나 그렇다. 인간이 그렇듯, 인간의 외형을 한 신도 그러하지."
마음을 가지고, 감정을 느낀다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이드라는 그리 이야기했다.
"그대는 갑자기 옛일을 입에 담을 정도로 추억에 매달리지도 않으며, 애초에 몽상의 던전에 가본 적도 없지. 거기에 지금 상황은 몽상의 던전과 하등 관련이 없으니 난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태연히 말하는 녀석의 모습에 도리어 내가 황당해졌다.
"너는 자신이 가짜여도 상관없다는 거냐?"
"나야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아... 잠깐."
이드라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가를 가져다대며 요염하게 웃었다.
"그대가 아는 나는 이름으로 불린 적이 없겠군? 그건 제법 유쾌한 일이로구나."
녀석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지그시 보았다.
"애초에 나는 꿈의 마녀로 불리지. 어떤 환상이나 꿈. 그것의 경계는 나에게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이곳의 일도 본래의 내가 알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런 것도 알 수 있나?"
"신이라는 존재는 본디 불합리한 법이지."
진짜인지 거짓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녀석이라면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회귀한 것도 모르는 거 같았으니 거짓말일 확률이 높았다.
"다만 몇 가지 이상한 점이 느껴지는 게 있다만.... 그건 묻지 않도록 하마."
몽상의 던전은 현재 이 세계에 없다.
이미 오래전에 파괴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몽상의 던전을 이용한 나는 과거의 사람이라는 것이며, 과거의 내가 어떻게 미래의 일을 이렇게 인지하고 있는지가 이드라에게는 이상한 게 분명했다.
"아무튼 몽상의 던전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었으면 한다. 조금 걸리는 점이 많거든."
"걸리는 점이라?"
"너무 완벽해."
인간의 기억이란 완벽하지 않다.
하지만 지금 이 세계는 너무 완벽했다.
난 이렇게 세계 전체를 머릿속에 새겨둘 정도로 섬세한 인간이 아니다.
다른 이들의 체험 때는 그러려니 했지만 막상 이렇게 겪으니 보통 이상한 게 아니었다.
"나는 지나치며 만난 플레이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기억하지 못해. 근데 그들은 분명히 이세계에 존재하는 인간이었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런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게 그저 무작위로 던전이 만들어낸 사람인지, 아니면 정말 이 시대의 인간인지 알고 싶었다. 몽상의 던전이 어떤 메커니즘으로 움직이는지 안다면 지금의 퀘스트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았으니까.
그런 내 말을 들은 이드라는 거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나의 아바타로구나. 그렇지, 인간의 기억이란 너무나도 불완전하다. 그러니 보통 단순히 인간의 기억만으로는 이런 세계를 만들어낼 수는 없지."
"그렇다는 건?"
"간단히 말해 인간의 기억을 토대로 그 시대를 검색하지. 그리고 당시의 세계를 그대로 복사한다. 시스템을 거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하긴 던전의 보상인 라플라스의 모래시계도 미래의 시간을 빌려오는 거다.
몽상의 던전 역시 그런 메커니즘이라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애초에 나는 DLC 패키지로 과거로 회귀한 사람이지 않은가.
예전이라면 그게 말이 되냐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대의 과거, 혹은 미래의 정확한 형상이라는 거다. 이곳에 존재하는 자는 그때의 인물과 동일한 행동, 그리고 생각을 하게 되지. 물론 진짜는 아니다. 어디까지나 던전이 복사하여 만든 몽상의 존재일 뿐."
이드라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켰다.
"이 나조차도."
그렇게 말하는 녀석은 정말 아무래도 좋다는 얼굴이었다.
자신이 복사된 가짜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이렇게 태연할 수 있다니 솔직히 존경스러울 지경이다.
아니, 오히려 이런 게 녀석다운 거겠지.
'전생에 들었던 말을 생각하면 아마 이드라의 말이 맞는 것 같군.'
몽상의 던전에 다녀온 자들은 대부분 자신이 알지 못했던 사실이 던전에서 구현되어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건 놀랍게도 진실이었고.
그렇다는 건 이드라의 말처럼 시간대를 그대로 복사한 것일 확률이 높았다.
"그래... 그렇다면 대충 알겠어."
"호오, 뭐를 말이냐?"
"이 퀘스트를 어떻게 깨야 할지."
만약 세계를 온전히 복사해 온 것이라면 퀘스트 또한 그대로일 것이다.
바로 시스템도.
몽상의 던전을 클리어하는 방법은 본래 내가 받았던 이 거지같은 퀘스트를 깨는 거다.
전생과 같은 방법을 사용한다고 해도 퀘스트는 아마 깰 수 있겠지.
하지만 의문이 있었다.
몽상의 던전을 다녀온 플레이어들은 보상을 받지 못한 플레이어도 존재했다.
아니, 오히려 받지 못한 플레이어가 많았다.
왜 그런 차이가 있었던 걸까.
나는 계속 그것이 궁금했다.
그리고 지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마 이미 알고 있는 답으로는 클리어해서는 안 되는 거겠지.'
그리고 그건 내가 가장 후회했던 일이다.
과거의 일을 반복하는 건 몽상의 던전이 바라는 결과가 아닌 게 분명했다.
전생에 내가 하지 못했던, 가장 이상적인 방법으로 클리어하는 것.
그리고 나도 내심 궁금했다.
내가 그 아이를 살렸다면.
만약, 그랬다면.
과연 어떻게 됐을까.
***
"사람을 찾고 싶다니요?"
"예, 찾아야 할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내 말이 꽤나 갑작스러웠는지 송시우의 미간이 좁혀졌다.
지금 한시가 급한 상황에서 무슨 헛짓을 하고 있냐는 표정이다.
"누구를 찾으시는 거니까?"
"이민아."
예상외의 인물이었는지 송시우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왜냐면 지금 이민아는 잠적한 지 꽤나 오래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활발하게 세상을 누비던 이민아는 어느 때를 기점으로 모습을 감추게 된다.
"전투에 그녀의 도움을 받을 생각입니까? 멋대로 행동하는 이민아가 과연 도와줄까요?"
"예, 뭐 그런 이유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그녀가 만들 수 있는 물건이 필요한 거죠."
"만들 수 있는 물건?"
나도 후에 안 사실이지만 이민아는 연금술에도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잡학다식한 그녀의 신 덕분이겠지.
그녀의 대표적인 스킬은 변신이지만, 이민아의 진가는 그것뿐이 아니다.
다양한 유틸 스킬을 보유하고 있고, 연금술은 물론 마법도 상당한 실력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에 활동을 그렇게 많이 하지 않았음에도 이름 높은 탑플레이어가 될 수 있었던 거다.
"엘릭서 말입니다. 혹시 송시우 씨가 제조 가능하신가요?"
"아, 그거라면 아무래도 전 힘들 것 같군요."
대장장이인 그와 연금술은 동떨어진 학문이었다.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든 그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민아 씨의 위치를 아는 플레이어는 아마 없을 겁니다. 워낙 신출귀몰한 사람이지 않습니까?"
"확실히 그렇겠죠."
송시우가 모른다면 다른 플레이어도 모를 거다.
이름 있는 플레이어라면 모두 송시우와 인연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만든 장비가 최고의 장비이니 그럴 수밖에.
그런 그가 모른다면 이민아의 소재는 누구도 모른다고 봐야했다.
적어도 플레이어 중에선.
"그렇다면...."
송시우는 내게 이민아의 소재를 꼭 찾길 바란다며 사라졌다.
아마 나 말고도 다른 플레이어들의 장비를 만드느라 바쁜 거겠지.
이번 퀘스트를 실패하면 목숨이 위험하니 당연한 이야기다.
'이민아도 분명 이 퀘스트를 하고 있을 텐데.'
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걸까?
퀘스트를 실패하면 본인도 죽는다는 걸 알 텐데.
애초에 자기 멋대로 사는 녀석이니 생각을 알기 힘들었다.
후에 살아 있는 모습으로 모습을 드러낸 걸 보면 10만의 민간인이 아닌 1000명의 플레이어를 선택했다는 거겠지.
아무튼 지금 문제는 이민아가 어디에 있냐는 건데.
'...어쩔 수 없나.'
플레이어가 모른다면 결국 답은 하나뿐이다.
바로 신에게 물어보는 것.
채팅방에 접속할 수 있었다면 쉽게 알아낼 수 있겠지만 지금의 나는 채팅방에 접속할 수 없었다.
"이드라, 이민아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나?"
분명 어디선가 보고 있을 녀석에게 물었지만, 쪽지 창에서 알림은 들리지 않았다.
단지, 내 등 뒤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을 뿐이다.
스르륵.
검은 연기는 순식간에 뭉쳐 사람의 형상을 갖추었다.
금발에 금안을 지닌 여성의 모습으로.
"갑자기 어리광이 많아졌구나, 계약자여."
그렇게 말하는 녀석의 얼굴은 썩 유쾌해 보였다.
"평소에는 그렇게 무시하더니 말이다."
"어차피 환상일 뿐이니 조금 뻔뻔하게 나가도 될 것 같아서."
내 말에 이드라는 옅게 웃었다.
대체 뭐가 그렇게 즐거운 건지 알기 힘들었다.
"그보다 쪽지로 알려주면 될 걸 굳이 현계 할 필요가 있나? 당장 그렇게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상당한 포인트가 드는 걸로 아는데?"
"내게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그리고 네 말대로 어차피 환상. 지금 있는 포인트를 아껴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렇게 말하니 확실히 납득이 되었다.
"그래서 이민아의 위치는?"
"그 아이라면 천안에 있다."
"뭐?"
예상치 못한 지역명이었다.
당연히 서울에 있을 줄 알았는데?
애초에 지금 한국은 서울을 제외하고는 거의 괴멸 상태다.
살아남은 인구는 기껏해야 천만 명 정도이며, 그중 절반이 서울에 있다.
왜냐면 플레이어가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이 서울이기 때문.
일반인들은 생존을 위해서 서울에 올 수밖에 없는 상태다.
그런데 천안이라고?
'민아는 서울에서 벗어나기 싫어했던 것 같은데.'
뭔가 과거의 민아와 미래의 민아가 괴리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
아니면 몽상의 던전에서의 차이인가.
'머리가 아프군.'
천안에 다녀오는 건 어렵지 않다.
적어도 아직까지 기차는 움직이고 있으니 하루 정도를 소요하면 충분히 가능할 거다.
상대 세력은 퀘스트 마지막 날까지 먼저 공격하지 않았으니 습격이 있을 확률도 없다.
민수호가 살아 있다는 게 변수지만, 녀석은 아까 보았던 것처럼 함부로 남을 해치는 성격이 아니다.
악마의 계약자를 제외한다면 말이지.
"천안으로 가자."
"이곳은 내버려둬도 괜찮은 건가?"
"그래. 하지만 혹시 모르니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주의는 해둬야겠지."
나는 전생에 상대 세력의 주요 플레이어와 모두 싸웠고, 모두 죽였다.
그건 내가 그들보다 강했기 때문이 아니라 대처법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 일부를 플레이어들에게 전해준다면 만약 쳐들어오더라도 쓰러트리지는 못해도 쫓아낼 수는 있으리라.
# 72
072. 추모하는 자(2)
충청남도 천안.
예전부터 그리 큰 도시는 아니었지만 지금은 죽은 자들의 도시가 된 장소.
민아가 있는 곳은 천안에서도 상당한 외지였다.
촌에 가까운 장소였기에 나로선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이민아는 왜 이런 곳에 있는 거야?'
하늘에는 이드라의 옵저버가 나를 안내하고 있었다.
최근 기분이 무척이나 좋은지 손수 나를 안내해 주기로 한 것이다.
아까 말했던 것처럼 도심지를 벗어난 촌이었다.
산이 많아서 몬스터도 우글거렸다. 아마 게임이 시작한 초창기에 대부분 죽지 않았을까 싶다.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사람이었던 뼈만 부서진 도로에서 군데군데 눈에 띈다.
분명 이곳은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지 않았으리라.
'차라리 높은 건물이라도 있었으면 나았을 텐데.'
근처에는 아파트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은 층이 낮은 상가건물. 당연히 몬스터의 습격으로 대부분은 무너져 있다.
아마 최근 몇 년간은 이대로 방치되었던 게 분명했다.
"저긴가?"
옵저버는 저쪽으로 가라는 듯 공중에서 붕붕 흔들렸다.
그리고 그곳에는 다른 건물들보단 확연히 큰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고등학교라...."
저기에 이민아가 있다는 건가?
천안도 상당히 큰 도시가 여럿 존재했다.
주거지역도 존재하니 머문다면 그런 장소가 나았을 텐데.
'뭔가 이유가 있는 거겠지.'
이민아는 제멋대로인 성격이긴 하지만 멍청하지는 않다.
오히려 영리한 편이지.
그런 녀석이 이런 곳에서 조용히 머물고 있다면 분명 다른 이유가 있으리라.
저벅. 저벅.
"공포 영화에 나오기 딱 좋은 비주얼이군."
폐교, 라는 말이 이렇게 어울리는 장소가 있을까.
학교의 안으로 들어오니 이루 말할 수 없는 처참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건물의 외벽은 새빨간 피로 칠해져 있었고, 바닥에는 몇 년간 방치된 시체들이 남아 있었다.
분명 몬스터가 쏟아져 들어올 당시 있었던 학생들이겠지.
백골로 변한 시체 중에서는 교복을 입고 있는 이들도 있었으니까.
대부분 낡고 헤져 있지만 통일감 있는 복식이라 교복이라는 걸 유추하기 쉬웠다.
"...잠깐만."
난 교복들을 보다가 문득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왜냐면 낯이 익었기 때문이다.
"설마 이거, 민아가 입고 다니던 교복 아냐?"
민아는 언제나 교복을 입는 편이었다.
방어구를 입을 일이 있어도 대부분은 교복 안에 입었고, 최근에는 시우를 통해 교복 자체를 업그레이드하고 있었다. 교복의 외형 그대로 미스릴 실을 짜서 만든다던가.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나 싶었는데....
'단순히 교복이 입기 편해서는 아니었던 건가.'
난 그냥 그렇게 생각했는데.
복도에 보이는 몇몇 시체들이 입고 있는 옷은 분명 민아의 교복과 흡사했다.
아니, 똑같았다.
단지 오래되고 방치된 탓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
등골이 오싹해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허공에서 손을 뻗어 숏소드를 손에 쥐었다.
카앙!!
몸을 회전하며 검을 휘두르자 날카로운 소음이 복도에 울려 퍼졌다.
상대는 설마 내가 막을 줄은 몰랐는지 훌쩍 뒤로 물러서며 착지했다.
"설마 막을 줄은 몰랐어."
"나도 다짜고짜 습격할 줄은 몰랐다."
"요즘 세상이 좀 흉흉해야지. 습격당하기 전에 먼저 습격하는 게 당연하잖아?"
그런 말을 한 건 단발머리의 여성이었다.
대충 머리를 칼로 잘라낸 듯 투박한 머리모양.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동자와 비릿한 미소가 인상적인 여성이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너무하는군."
"오랜만에 만나? 잠깐... 음~! 그래."
이민아는 손가락을 이마에 대며 내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한 2년 전쯤에 당신 같은 더러운 인상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긴 하네."
실제로 나는 2년 전쯤에 이민아를 한번 만난 적이 있었다.
퀘스트 도중 우연히 마주쳤을 뿐이지만 워낙 인상적인 플레이어인지라 오랫동안 기억했었지.
이후에 내가 이민아와 만난 건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다.
당연히 이번 퀘스트에서 만나지는 못했고, 서울 전체가 파멸에 이른 후 만났었지.
거의 막바지 퀘스트까지 생존했던 걸 보면 이민아도 역시 난사람이긴 하다.
하기야 능력을 생각하면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만.
"그래서, 무슨 일이야? 설마 나를 찾으러 온 건가?"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내가 여기에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그런 이민아의 말에 나는 손가락을 들어 위를 가리켰다.
위에는 나의 옵저버가 상황을 즐겁게 관찰하고 있었다.
"놀라워라. 아직도 신과 대화가 가능한 아바타가 있었다니."
"너도 상당히 신에게 총애를 받는다고 생각하는데?"
"흐음, 그런 적도 있었지. 한 1년 전부터는 완전히 끊겼지만 말이야."
어깨를 으쓱한 그녀는 더 이상 싸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무기를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정말로 그녀의 주위에 보이는 옵저버는 없었다.
어릿광대가 완전히 그녀에게서 관심을 버렸다는 뜻이다.
'생각해 보면 마지막에 봤을 때도 옵저버를 본 기억이 없긴 하네.'
하지만 그때는 어릿광대만이 아니라 지구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에게서 신들이 떠난 상태였다. 오로지 나의 신만이 마지막까지 함께했지.
최종 퀘스트가 끝나기 직전 떠나가긴 했지만.
'결국 게임이라는 거지.'
게임이 재미가 없어지면 어떻게 될까.
답은 간단하다. 게임을 접는다.
더 이상 접속하지 않게 되며 관심을 끊어버린다.
이 세계도 마찬가지다.
신들이 관심을 끄게 되면 더 이상 아바타는 신들의 원조를 받지 못하게 된다.
아무리 포인트를 아바타에게 투자했어도 마음이 떠나 버리면 신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재미가 없는 게임을 굳이 즐길 필요가 없지 않은가?
이 세계를 게임으로 취급하지 않는 건 단 두 명의 신뿐이었다.
나의 신, 이드라와 정의의 여신 아스트라이아.
악마들도 이 세계를 게임으로 취급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존중하는 것도 아니다.
녀석들은 세계를 하나의 양식장 정도로 생각할 뿐이지.
"그래서 볼 일은 뭐야? 여기까지 찾아왔다는 건 내게 뭔가 할 말이 있다는 거겠지?"
"그래. 하지만 그전에 질문을 하나 하고 싶어."
"뭔데?"
"왜 그런 새까만 옷을 입고 있는 거지? 그건 네 취향이 아닐 텐데?"
나도 검은 옷을 즐겨 입지만 이민아는 아니다.
그녀가 지금 입고 있는 옷은 마치 상복 같았다.
"내가 그걸 말해줘야 되나?"
"싫으면 굳이 말할 필요는 없다."
"재미없긴."
이민아는 깔깔 웃으며 가볍게 손짓했다.
"따라와. 여기서는 이야기하기 좀 그러니까."
***
그녀는 꽤나 순순한 태도로 나를 안내했다.
어둡고 황폐한 복도를 지나, 한 교실로.
다 떨어지고 먼지가 쌓인 명패에는 3학년 2반이라는 글귀가 어렴풋이 보였다.
교실의 안은 생각보다 깔끔했다.
밖과는 완전히 괴리되어 있는 공간이었다.
냉장고도 있고 침대도 있는 제대로 된 주거공간이었다.
다만 눈에 띄는 건 교실 맨 뒤에 늘어져 있는 사진들이었다.
뭔가 어설프고, 흐릿한 사진도 있었고 몇몇은 이름만 적혀 있었다.
"영정사진이야."
"저게?"
"응. 내가 반 아이들의 사진을 전부 구할 수는 없었거든."
그녀는 아련한 눈으로 그것들을 보았다.
"꽤 사이좋은 학급이었던 모양이군."
"설마. 난 사실 친구도 별로 없었어. 사이가 좋은 애들이었으면 저렇게 이름만 대충 적어서 놔두지 않았지."
이건 또 의외다.
시원스런 성격인지라 친구도 꽤 많을 줄 알았는데.
"이 세계가 변하면서 나도 이렇게 될 수밖에 없던 거지. 나도 원래는 말수도 없고 그런 애였다?"
"상상이 안 되는데."
"첫 번째 퀘스트를 거치면서 이렇게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서 말이야. 어떻게든 살아남아야겠다고 생각했어. 이래 뵈도 난 연기를 꽤 잘했거든."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의자에 걸터앉았다.
"사실 게임이 발생한 첫날은 아직도 생생해. 그날 친한 친구 두 명이랑 학교를 째고 서울로 놀러갔었는데, 하필 그날 세상이 뒤집혀 버리더라."
"본래 서울 출신이 아니었나?"
"응. 이 시골동네에서 한번 놀러갔어. 마침 친구 언니가 서울 갈 일이 있어서 도와줬지."
학교는 대충 개교기념일이라고 둘러대고 말이야.
이민아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이후에는 알다시피 게임이 시작됐고, 나는 다른 두 친구와 떨어지게 됐어. 한동안 서울에서 머물며 친구들을 찾아다녔지. 처음에는 돈도 없어서 은행도 털고 그랬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다 무의미한 짓이더라."
민아는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치 친구가 그곳에 있는 것처럼.
"교복을 입고 있다는 게 우리들의 유일한 공통점이어서 차마 다른 옷을 입을 수가 없었어."
그게 민아가 늘 교복을 입고 있는 이유였나.
확실히 전혀 다른 지역의 교복이니까 서로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단서나 마찬가지였겠지.
'간혹 혼자서 서울을 돌아다닌다 싶었는데 그런 이유가 있었나.'
난 대충 놀러 다니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이런 사정이 있었을 줄이야.
레이드 퀘스트 당시 나를 따라서 대전에 오지 않은 것도 이해가 됐다.
"그래서 친구는 찾았나?"
"응, 찾았지."
이만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천천히 교실의 뒤로 걸어가 두 개의 액자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다른 사진들과 다르게 그 두 개는 제법 선명한 사진이었다.
"근데 너무 늦게 찾았어. 오랫동안 그곳에서 버텼는데, 내가 찾았을 때는 이미...."
"오랫동안 버텼다니?"
"악마들과 계약했던 모양이야. 근데 이용당할 대로 이용돼서 버려졌어. 그리고 죽어버린 거지."
복수하려고 했을 때는 이미 민수호가 모두 죽인 후였다고 한다.
"그래서 뭔가 부질없어져서 여기로 돌아와 이렇게 나름의 추모를 하고 있었다는 거지. 부모님은 첫날 연락했을 때 이미 돌아가셔서 갈 곳도 없었거든."
그렇게 말하는 이민아는 기운이 없었다.
언제나 내가 보던 그 민아의 모습이 아니었다.
설마 명랑한 인상의 민아에게 이런 속사정이 있었을 줄이야.
'악마와 엮여 있다면... 흑천회인가? 아니 잠깐만.'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흑천회 내가 다 죽였는데?'
설마 민아의 친구가 계약했다는 악마가 네비로스는 아니겠지?
등 뒤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걸 느끼며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친구가 흑천회에 소속되어 있었나?"
"아냐. 거긴 네비로스가 관리하던 곳이지? 내 친구는 다른 곳이었어."
인천이 아니라 서울에 있던 길드라고 덧붙여 말하는 민아의 말에 나는 내심 안도했다.
'...앞으론 악마의 계약자도 조심해서 처리해야겠네.'
자칫해서 민아의 친구까지 공격하게 된다면 큰일이다.
지수에게도 반드시 주의를 해두도록 하자.
이미 지수가 처리한 악마의 하수인 중에 민아의 친구는 없겠지?
나는 제발 없기를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아. 내가 심심하긴 했나 보다. 괜히 미주알고주알 떠든 거 같네."
이민아는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붕붕 흔들었다.
그리곤 심호흡을 한 뒤에 재차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 질문에 대한 답은 됐지? 이제 내가 물을 순서네. 나를 찾아온 용건이 뭐야?"
"...."
막상 이렇게 물어오니 뭐라고 말하기가 힘들었다.
여기서 친구를 추모하고 있는 이민아에게 앞으로의 싸움에서 도와달라고 말하기는 좀 그랬다.
그래도 한번 말은 해봐야겠지.
"...원래는 이번 퀘스트를 도와달라고 하려 했었다. 하지만 사정을 보니 그건 힘들 것 같고. 엘릭서의 제조를 부탁하지."
"이번 퀘스트? 아, 그거 양자택일."
양자택일은 이번 퀘스트의 이름이다.
이민아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것처럼 머리를 긁적였다.
"나 그거 10만 명의 일반인 선택하려다가 실수해서 1000명의 플레이어를 선택했지 뭐야."
실수해서 선택한 거였냐.
억세게 운이 좋다면 좋은 녀석이다.
반대를 선택한 이들은 전부 죽었으니까.
"엘릭서라... 확실히 지금 그거 만들 녀석들이 거의 없겠네. 근데 당신 정도의 실력자가 엘릭서를 찾을 정도면 상대가 엄청 강한가 봐?"
"엄청 강하지."
물론 지금은 내가 더 강하다.
왜냐면 난 지금이 아닌 더 미래의 기억까지 가지고 있으니까.
전투 실력도 더 뛰어났고, 이미 한번 싸워봤기에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는지 해답도 알고 있었다.
"그래, 심심했던 차에 그거라도 해야겠다. 몇 병 정도 만들어 주면 돼?"
"한 병이면 족하다, 그리고 추가적으로 제조를 해줬으면 하는 게 있는데...."
"흐음. 뭐야? 참고로 나 엘릭서보다 어려운 건 못해."
"알고 있다. 이건 그보단 쉬운 거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동그란 구슬 같은 물건을 꺼냈다.
"이걸 최상급 플레이어에게도 통할 수 있게 만들어 줬으면 한다."
# 73
073. 양자택일(1)
10만 명이 격리되어 있는 격리구역 근처.
두 명의 플레이어가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갑자기 조용해졌네. 한동안 계속 쳐들어오더니만."
"그래서 더 불안해."
플레이어들은 한 플레이어를 떠올렸다.
다양한 무기를 다루는 한 남자.
이전에는 크게 부각되는 점이 없던 자였지만 이번 퀘스트로 이슈가 되는 플레이어였다.
"대체 그런 사람이 어디서 튀어나왔대."
"왜 그 있잖아. 서울 대붕괴 때도 모습을 비췄다고 하더라."
서울 대붕괴.
전갈들에 의해 3분의 1 이상이 날아간 서울을 완전히 박살 내 버렸던 사건.
그때 한 플레이어가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여 막지 않았다면 피해는 서울로 끝나지 않았을 거다.
"황도 12궁이 또 나오면 어쩌지."
"나오면 다 죽는 거지 뭘."
"이번 퀘스트가 끝나면 한쪽 세력은 다 죽는 거지? 천 명의 플레이어나 10만 명의 민간인들도."
"그래, 그 세력에 선택한 플레이어도 모두 죽는다."
이제 정말 신들이 자신을 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현재 남아 있는 아바타 중에서도 신과 연락이 되는 플레이어는 극히 적었다.
"이아영이 살아 있었다면 빠르게 퀘스트가 끝났을 텐데."
"이미 죽은 사람을 말해서 뭐해? 확실히 살아 있었다면 판을 이끌었을 여자이긴 하지."
한때 서울 3대 길드라고 불리던 피안화의 길드장.
이아영이 살아 있었다면 이렇게 대치 상황이 나오지 않았을 거다.
이성(異性)에 한해서는 절대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스킬을 지닌 만큼 지금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 펼쳐졌으리라.
"그 여자 성격상 민간인이 아니라 1000명의 플레이어 측에 붙었을 걸? 죽어서 다행이지."
"그러게 말이야."
대다수 플레이어들은 불안감을 나누기 위해 그런 대화를 나누었다.
아마 대부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번 퀘스트가 앞으로 이 게임의 운명을 가를 분기점이라는 걸.
***
격리구역 근처의 건물.
상당히 넓은 방 안에 주요 플레이어들이 회의를 하고 있었다.
여러 이야기가 오가는 와중에 민수호는 최근 있었던 교전을 생각했다.
정확히는 세한에 대한 고민이 계속 머릿속에 떠돌았다.
어쩐지 순순히 물러섰던 점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때 그렇게 물러섰던 것도 이상한데, 그 후로 잠적을 해버리다니.'
그 전날까지만 해도 온갖 방법으로 공격을 해오던 그답지 않은 행동이다.
하루하루가 촉박한 와중에 잠적을 해버린 건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당장 온건파라고 할 수 있는 이쪽도 슬슬 본격적으로 공세를 나서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말이 나오는 판에.
"민수호,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아, 미안."
"지금 회의 중이다. 딴생각은 나중에 하도록 해라."
민수호에게 그렇게 이야기한 플레이어는 사나운 인상을 지닌 플레이어였다.
갈색으로 탈색한 머리에 귀에는 두 개의 피어싱이 달려 있어서 불량한 인상이 강했다.
청년의 이름은 김태훈.
겉으로 보이는 인상은 사납지만 그는 결코 그런 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자신, 민수호보다도 고결한 자였다.
악마를 따르는 자라면 어떤 이도 살려두지 않았던 자신과 달리 그는 웬만해선 사람을 죽이는 법이 없었다.
사람의 선함을 믿었고, 그렇게 행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신은 아직도 그에게 말을 걸어주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다들 침울하구나.'
현재 회의실에는 총 열두 명의 플레이어가 있었다.
민수호가 속한 길드 일곱 명과, 다른 대표 플레이어 다섯으로 구성된 멤버였다.
한 길드가 너무 지나치게 많지 않나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당연한 일이다.
민수호가 속한 길드는 현재 한국에서 가장 강한 길드로 꼽히고 있었으니까.
길드장은 전 세계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이며, 나머지 여섯도 하나하나가 현재 전 세계에 살아남은 그 어떤 플레이어들보다도 뛰어난 실력을 지닌 자들이었다.
길드의 이름은 아가트람(Agateram).
길드장 천상환을 선택한 신의 이름에서 따온 명칭이다.
그중 회의에 참가한 일곱은 아가트람의 최상위에 위치한 간부들이었다.
"이제 퀘스트는 일주일 정도가 남았지. 역시 이제 마무리를 지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상석에 앉아 있던 플레이어, 아가트람의 길드장 천상환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선한 인상의 사내지만, 그 말에는 확연한 위압감이 담겨 있었다.
"그냥 당신이 대충 정리하면 되는 거 아냐? 스킬 한 방이면 어찌되지 않나?"
"그들을 얕보지 마라, 강준식. 아가트람이 비록 강한 길드인 건 분명하지만 상대편도 강자들이 있어. 섣불리 공격했다간 당할 수도 있다."
"신중하기는. 기껏해야 이빨 빠진 제네시스 정도 아닌가?"
"성녀 신유화도 있다."
"10만의 민간인을 버린 자가 무슨 성녀라는 거냐?"
강준식이라 불린 사내는 이죽이며 탁자를 두드렸다.
그의 말처럼 성녀라 불리는 플레이어는 10만 명의 민간인이 아닌 1000명의 플레이어를 선택했다. 선택은 자유라지만 이미지와는 다른 선택을 한 것도 사실이다.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본인만 알겠지.
"아, 그러고 보니 검은 녀석도 있었군."
"검은 녀석?"
"인상 더러운 놈 말이다. 잡다한 무기를 사용하던 이상한 놈."
"아아, 김세한을 말하는 거군."
"그래, 그놈 상당히 성가시지. 아마 그쪽에서는 가장 강한 플레이어중 하나일 거다."
천상환이 입에 담은 '김세한'이라는 이름에 조용히 앉아 있던 한 여성의 몸이 움찔거렸다.
이제 겨우 10대 후반이 되었을 것 같은 소녀다.
금발에 푸른 눈을 지닌 외국인이라 유독 눈에 띄었다.
"우리 막내가 걔를 그렇게 죽이고 싶어하지 않던가?"
"괜한 말 하지 마라, 강준식."
천상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더 이상 실언을 한다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태도에 강준식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안하무인인 그라도 천상환을 상대로 그럴 수는 없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질질 끄는지 이해가 안 되는 사람이지.'
진심으로 나선다면 이런 퀘스트 정도는 단번에 정리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인간이다.
제네시스? 얘전에야 서울에서 3대 길드 노릇을 했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다르다.
한국 최강은 '아가트람' 바로 자신들이었으니까.
1000명의 플레이어와 그쪽을 선택한 플레이어의 수를 생각하면 족히 3천 명의 플레이어가 죽을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에 남아 있는 플레이어의 숫자가 7천 명이 조금 안 된다는 걸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타격이다.
'그래도 상관없어. 아가트람만 무사하다면 한국은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을 거다.'
강준식은 그렇게 생각했다.
공교롭게도 그건 아가트람에 속한 길드원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그 정도의 자신이 그들에게는 있었고, 그런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덜컹!
"회의 중에 죄송합니다!"
회의실의 문이 열리며 한 플레이어가 뛰어 들어왔다.
그는 사방에서 꽂히는 시선에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식은땀을 흘렸다.
당황해하는 그를 위해 천상환은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지?"
"그, 그게. 상당한 숫자의 플레이어가 격리구역 외각을 돌아다니는 걸 확인했습니다."
"그간 조용히 있더니 드디어 준비가 됐다는 건가?"
강준식이 씩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자신이 직접 처리하고 오겠다는 듯 가볍게 몸을 푸는 그의 모습에, 잠자코 있던 김태훈이 입을 열었다.
"내가 가지."
"새치기 하지 마. 이건 내가 처리하고 올 거니까."
"네가 가면 상대만이 아니라 우리 쪽에도 피해가 나올 수 있다. 그러니 내가 가도록 하지."
쿵!
김태훈은 강하게 손바닥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일어났다.
그런 그의 태도에 강준식이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았다.
"...어쭈. 한번 해보자는 거냐?"
"해봤자 손해 보는 건 너잖아."
정말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태도로 김태훈은 천천히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공격하려면 얼마든지 공격하라는 모습이다.
자신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그 모습에 강준식의 이마에 핏대가 솟았다.
'짜증나는 놈.'
확실히 강준식은 김태훈을 상대로 이길 수 없었다.
애초에 녀석이 지닌 전승스킬이 워낙 사기적인 탓이다.
싸움을 좋아하는 강준식과 생긴 것과 달리 온건한 김태훈은 자주 말싸움을 하곤 했지만 지는 건 언제나 강준식이었다.
"내가 앓느니 죽지 죽어."
한숨을 쉬며 다시 자리에 주저앉은 강준식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 그의 모습에 피식 웃은 천상환은 김태훈이 나가고 회의실의 문이 완전히 닫히자 회의를 재개했다.
"상대도 우리만큼이나 조급해진 모양이야."
슬슬 끝낼 때가 왔다.
되도록 모두가 죽지 않는 방법을 찾아보려 했지만 아무래도 이젠 힘들 것 같았다.
***
민아는 내 부탁을 선선히 들어줬다.
혹여나 무시하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민아는 나름 심심했던 모양인지 엘릭서를 비롯해 여러 도구를 만들어 줬다.
과연 탑 티어의 플레이어답게 그것들을 만드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이틀.
과거의 민아도 뛰어난 플레이어이긴 했지만, 역시 미래의 민아는 급이 달랐다.
다만 예상보다 순순히 도와준 게 조금 의문이었지만, 민아는 그저 이렇게 답할 뿐이었다.
'그냥 변덕일 뿐이야.'
참으로 이민아다운 대답이었다.
아무리 재료가 전부 준비되어 있다지만 엘릭서를 심심풀이로 제조할 수 있다니.
만약 다른 플레이어들이 이걸 본다면 제발 도와달라고 사정을 했을지도 모른다.
'나도 그냥 도와달라고 말할 걸 그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고개를 흔들었다.
확실히 이민아가 도와주면 편하긴 하겠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었다.
이미 엘릭서와 '그것'을 만들어 준 것만으로도 민아는 큰 도움을 준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제 나머지는 내가 제대로 할 수 있냐는 건데.'
1회차에는 생각도 하지 않을 방법이다.
왜냐면 터무니없는 도박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분명 할 수 있다.
지금의 나는 1회차를 모두 클리어한 김세한이니까.
나는 이 퀘스트를 2회차의 퀘스트들처럼 '올바른' 방향으로 클리어하고 싶었다.
몽상의 던전을 완벽히 클리어하고 라플라스의 모래시계를 얻으려면 분명 그게 답이겠지.
이미 공략을 전부 알고 있는 내가 그대로 과거의 흐름에 몸을 싣는 건 간단하다.
그런 간단한 행위로 보상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무려 S랭크의 보상이 그리 간단할 리가 없지.
"그나저나...."
거점으로 돌아오고서부터 느끼긴 했지만 뭔가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지금 시기가 퀘스트가 끝나기 일주일 전이던가.
이때 무슨 일이 있었지?
분명 일주일 전이면 본격적으로 대립이 시작될 때다.
그간의 전투는 전초일 뿐,
이제부터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죽어나가기 시작하는 시기였다.
'기억났다.'
그날이구나.
우리 쪽이 치명적인 패배를 당했던 날.
바로 생각나지 않은 건 내가 그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의 나는 민수호와 싸우며 입은 상태를 치유하기 바빴으니까.
그리고 치유하자마자 바로 연전을 펼쳐 간신히 승리하게 된다.
정면대결로는 이길 수 없기에 대부분 암습으로 죽이긴 했다만.
'생각해 보면 암습은 내 전문인 것 같군.'
1회차도 그렇고 2회차도 그렇고.
다만 2회차는 좀 더 정면에서 싸운다는 점이 달랐다.
전생에는 워낙 뒤에서만 싸운 탓에 이 시기가 되기 전까지 전혀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았으니까.
아마 상대 쪽은 물론 우리 쪽의 플레이어들도 나를 모르는 사람이 상당수 될 거다.
이번 퀘스트에서 나를 만나 함께 싸운 이들은 잘 알겠지만, 그것도 수가 그리 많지 않았다.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송시우 정도겠지.
'어디보자, 시간이....'
다행히 시간은 좀 여유가 있었다.
어디까지나 조금이지만.
이 싸움에서 전투를 맡은 건 김태훈.
생긴 것과 다르게 비교적 점잖은 놈이니 바로 살육을 벌이거나 하지는 않겠지.
그때도 세 번 경고를 보내고 돌아가지 않자, 결국 싸움을 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송시우에게 들렀다가 바로 이동해야겠군."
전생에는 뼈아픈 패배를 겪은 전투지만 지금의 내게는 호기였다.
아가트람 길드원 중에 간부들은 하나같이 천외천의 실력자.
그들이 둘 이상 있다면 나로선 암습으로도 승산이 없다.
철저하게 혼자 있을 때 기습을 가해야만 내가 이길 수 있다.
'물론 전생의 나일 경우지만.'
민수호 같은 경우에는 정면에서 싸웠다가 정말 죽는 줄 알았었지.
솔직히 내가 그때 녀석을 이긴 것도 운이 좋았다.
'김태훈이 따로 움직인 지금이라면 녀석을 쓰러트릴 기회다.'
전생이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판단.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전생에는 정면에서 이길 수 없었지만, 지금은 이길 수 있겠지.
원래 게임이란 게 다 그렇다.
처음 공략할 때는 힘들어도 두 번째는 쉬운 법이다.
# 74
074. 양자택일(2)
"어떡합니까?"
한 플레이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몰래 기습을 가하려던 것이 그만 들키고 말았다.
거기서 바로 몸을 뺐어야 했는데, 생각보다 상대의 저항이 약했다.
도망치는 플레이어들을 쫓으며 흥을 내버린 탓에 시간을 지체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게 그 결과다.
"저게 김태훈...."
신의 축복을 받은 인간.
흔히 아바타를 부를 때 세간의 사람들은 그리 말한다.
그건 거짓이 아니다. 아바타란 신의 축복을 받았고 그것을 받지 못한 플레이어는 반쪽자리에 불과하다.
괜히 NPC라고 불리는 게 아니다.
김태훈은 그런 아바타 중에서도 특별했다.
신과의 상성이 잘 맞았기에 강력한 전승스킬을 받았고, 그건 평범한 플레이어는 감히 상대할 수도 없는 무적에 가까운 스킬이었다.
아가트람의 간부들이 특히 그런 면이 강했지만, 김태훈은 개중에도 특별했다.
"딱 10분의 유예를 주지. 그 안에 결정해라. 나는 벌써 두 번의 경고를 줬고, 이번이 마지막이다."
김태훈은 느긋하게 말했다.
그의 뒤에 서있는 상대 세력의 플레이어들이 비웃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개 같은 자식들.'
어쩐지 순순히 물러서더라니.
처음 자신들과 마주쳤을 때부터 바로 아가트람의 간부에게 보고한 것이 분명했다.
멍청한 건 자신들이긴 했지만 억울한 건 억울한 거였다.
"대장! 저 망할 놈들의 면상을 보고 이대로 물러서실 겁니까?!"
"뭔 개소리를 하는 거야! 설마 김태훈이랑 싸우려고?"
"그럼 넌 자존심도 없냐? 저 비웃는 놈들을 보고도 그냥 꽁지 빠지게 도망칠 생각이냐!"
플레이어들의 의견도 분분했다.
덕분에 기습 별동대의 대장을 맡고 있는 최명석은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가만히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김태훈의 모습이 점점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최명석은 그걸 조금 다르게 해석했다.
'혹시 지금 뭔가 싸울 수 없는 이유가 있나?'
김태훈은 강력한 플레이어였지만 위명과 달리 자주 볼 기회가 없었다.
먼저 싸움에 나서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최명석은 김태훈에게 뭔가 단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토록 강한 플레이어가 자신들에게 세 번의 경고를 준 것도 이상했다.
'한번 개겨봐?'
도박이긴 했다.
하지만 여기서 도박에 승리한다면 퀘스트 기여도가 왕창 상승할 게 분명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잠적을 타버린 자신의 신으로부터 다시 연락이 올지도 모른다.
신에게 연락이 끊긴 아바타는 다른 플레이어들과 크게 다른 점도 없었다.
그렇기에 최명석은 공에 목말라 있는 상태였다.
별동대를 꾸려 기습을 하자고 주장했던 것도 다 그런 연유 때문이었다.
제네시스의 길드장인 박성혁도 이대로 있다간 불리한 건 자신들이었기에 최명석의 말을 흔쾌히 수락했다.
그런데 설마 제대로 된 공을 세우기도 전에 상황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아가트람 정도 되는 길드의 간부가 초장부터 모습을 드러낼 줄이야.
"우리는 물러서지 않는다! 여기서 네놈의 목을 가져가주지!"
호기롭게 외치는 명석의 말에 플레이어들이 크게 술렁였다.
"그게 선택이라면 어쩔 수 없지."
김태훈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주변의 플레이어들을 뒤로 물렀다.
"여기서부터는 혼자 한다."
"괘, 괜찮겠습니까?"
"지금 말대답하는 거냐?"
"아닙니다!"
사납게 얼굴을 일그러트리는 김태훈의 모습에 주변의 플레이어들이 우르르 물러났다.
김태훈은 그런 그들을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왜냐면 그는 지금 심기가 몹시 불편했으니까.
'멍청한 놈들.'
물러가라고 했을 때 물러났으면 얼마나 좋아.
어차피 언젠가는 죽을 놈들이다.
자신이 편하게 보내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저 멍청한 새끼!"
아무리 강해도 혼자서 덤비다니. 최명석은 자신의 부하들에게 손짓하며 가장 먼저 앞으로 달려나갔다.
멍청한 판단을 하기는 했지만 최명석도 지금까지 살아남은 플레이어다.
거기에 아바타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김태훈에게 아주 약간 꿇릴 뿐 큰 차이가 없으리라 생각했다.
보통 소문이란 과장되는 법이니까.
"죽어라아아아아!!"
최명석의 검에서 기다란 마력줄기가 솟아났다.
검사가 지닐 수 있는 최상위 스킬 중 하나인 오러소드다.
오러소드의 위력은 오리하르콘에도 흠집을 낼 수 있을 정도.
평범한 플레이어 따위는 일격에 반으로 갈라서 죽일 수 있는 강력한 스킬이었다.
'멍청한 놈. 막을 생각도 없나? 아니 내가 너무 빨랐던 건지도 모르지!'
순식간에 접근한 최명석은 오러소드를 휘둘러 녀석의 어깻죽지를 향해 내리찍었다.
최명석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지어졌다.
하지만 그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오러소드가 김태훈의 어깨에 격돌하는 순간 그대로 튕겨져 나왔기 때문이다.
카앙!
"카앙?"
마력으로 된 오러소드가 튕겨지다니.
강력한 반탄력에 최명석의 손이 저릿해졌다.
"제대로 명중했는데...."
분명 어깻죽지에 정확히 명중했다.
근데 조금의 생체기도 보이지 않았다.
오러소드를 맨몸으로 맞고 멀쩡할 수 있는 플레이어가 존재하나?
존재한다.
왜냐면 지금 최명석의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창백해진 얼굴로 당황하는 최명석을 김태훈은 지그시 바라보았다.
"발두르라고 아나?"
"바, 발두르?"
얼핏 들어본 기억이 있는 신이다.
북유럽 신화의 최고신인 오딘의 둘째 아들이자 빛의 신.
두말할 것도 없는 최상위 신이다.
'설마 김태훈의 신이....'
어떤 스킬을 지니고 있는지는 알고 있었지만 어떤 신인지는 알지 못했다.
아바타가 계약한 신의 이름은 약점과도 연관되어 있다.
그러니 일반적인 플레이어라면 자신을 선택한 신의 이름을 입에 담지 않았다.
지금 김태훈이 그 이름을 입에 담았다는 의미는 간단했다.
이곳에 있는 모두를 죽이겠다는 뜻이다.
"그는 만물에게 사랑받는 신이었다. 세상에 어떤 물건도 그를 해할 수 없었지."
천천히 김태훈의 오른손이 올라갔다.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움직이는 손의 궤적을 최명석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주먹을 쥐고 최명석의 가슴을 향해 가볍게 휘둘렀다.
정말로 가볍게.
"나도 마찬가지다."
콰아앙!!
폭탄이 터지는 것 같은 굉음이 울리며 최명석의 몸이 달려오던 속도보다 몇 배는 빠르게 날아갔다.
수십 미터를 날아간 최명석의 몸은 지면에 처박혀 거대한 구덩이를 만들었다.
구덩이에 처박힌 최명석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전신의 뼈가 부러져 숨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그 광경을 본 플레이어들은 전율했다.
아가트람 길드의 간부가 강하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직접 목도한 건 처음이었다.
단순히 강한 정도가 아니다.
압도적이었다.
"마, 말도 안 돼."
조금 멍청하긴 하지만 최명석은 그래도 자신들의 대장이었다.
아무나 대장을 시켜주는 게 아니다. 최명석도 엄연히 상위 플레이어였다.
그런 그를 주먹 한 방에 죽이다니.
별동대의 사기를 꺾기엔 충분하고도 남는 위력이었다.
"도망쳐야 해."
이대로라면 모두 죽을 게 분명했다.
방금 전까지 분열되어 있던 별동대의 의견이 하나로 모아졌다.
"누가 보내준다고 했지? 나는 이미 세 번 경고를 했다. 물러서지 않은 건 너희들이지. 여기서 봐주는 건 자비로운 게 아니야. 단순한 호구일 뿐이다."
당연히 그걸 두고 볼 김태훈이 아니었다.
그의 말처럼 세 번의 경고를 한 시점에서 그들을 보내줄 생각은 지웠다.
자신의 신인 발두르도 그걸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비로운 신이었지만, 김태훈의 말처럼 호구는 아니었다.
콰아앙!!
"으아아아악! 도망, 도망쳐!"
포탄처럼 날아오는 김태훈의 모습에 별동대가 비명을 지르며 등을 돌렸다.
그러나 무의미한 일이었다.
김태훈의 속도는 그들보다 압도적으로 빨랐으니까.
'한 번에 쓸어버려 주지.'
인벤토리에서 검을 뽑아 손에 쥐었다.
강력한 마력이 모이는 걸 느끼며 그것을 해방하려는 순간, 누군가가 자신의 앞에 있음을 깨달았다.
검은 옷에, 얼굴을 가리고 있는 남자.
김태훈은 실제로 본 적은 없었지만 누구인지는 알 수 있었다.
"김세한?"
콰콰콰쾅!!
포탄처럼 날아가며 휘두른 김태훈의 검을 그는 정면에서 맞받아쳤다.
갑자기 나타난 그의 모습에 당황하던 이들은 김태훈의 공격을 정면에서 막은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었다.
방금 최명석처럼 한 방에 죽으리라 생각했다.
"후."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뿌연 연기 아래로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태훈과 세한의 모습이 보였다.
예상과 달리 세한은 한치의 물러섬도 없이 김태훈을 상대하고 있었다.
"넌 정면에서 싸우는 타입이 아니라고 들었는데?"
"정답이다. 그런데 그러면 저 머저리들이 다 죽을 거 같아서 말이야."
세한은 훌쩍 뒤로 물러서며 여유롭게 말했다.
덕분에 혼란스러워진 건 김태훈이었다.
순수한 파워로 압도하지 못한 건 처음이기 때문이다.
태훈보다 강력한 스킬을 가진 플레이어라면 아가트람에도 있었지만 순수한 물리적인 힘은 자신이 최고였다.
'무언가가 내 힘을 상쇄했다.'
워낙 빠르게 물러선 탓에 제대로 못 봤지만 부딪치는 순간 자신의 힘이 흩어지는 걸 분명히 느꼈다. 다만 그게 김세한이 가진 스킬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알기 힘들었다.
궁금한 기색이 역력한 그의 모습에 세한은 설핏 웃었다.
"야. 김태훈."
"뭐냐?"
"RPG 게임의 고질병이 뭔지 알아?"
"RPG 게임?"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갑자기 이 상황에서 RPG 게임이 왜 나오나 싶어 바라보자 세한은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게임을 하다보면 말이야. 굳이 아껴 쓸 아이템이 아닌데도 굳이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있지. 공략대로 전부 준비해 가고선 뭔가 아까워서 사용하지 않는단 말이야."
게임에서 얻을 수 있는 귀한 포션이나 소모품들.
클리어하고 나면 쓸모가 없어지는 아이템들 임에도 어쩐지 사용하지 않게 되는 경우가 많다.
전생의 자신도 그랬다.
귀한 아이템이고, 한번 사용하고 나면 사라지는 탓에 최대한 사용을 아꼈다.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간단히 말해서."
자신은 너무 신중했다.
멍청할 정도로.
"넌 나한테 죽어도 못 이겨."
"개소리."
한번 공격을 막았을 뿐이다. 태훈은 재차 자세를 잡았다.
정보대로라면 김세한의 능력치는 자신보다 낮았다. 거기에 전승스킬까지 사용한 자신은 김세한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이길 수 없을 터였다.
띠링.
'어?'
갑자기 알림이 울렸다.
신에게서 온 쪽지다. 쪽지는 태훈이 확인하지 않았음에도 저절로 눈앞에 펼쳐졌다.
'어서 도망쳐라.'
태훈은 눈을 의심했다.
자신의 신이 물러서라고 말하는 경우는 드물었기 때문이다.
대체 왜지? 혼란스러워진 태훈의 발이 얼어붙었다.
신의 말대로 뒤로 빠져야 된다는 생각과 세한이 자신을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자신감이 섞여 움직이지 못했다.
그 틈을 세한은 비집고 들어왔다.
거리를 단번에 좁혀 손을 휘둘렀다.
김태훈은 세한의 공격을 피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피하지 못했다.
스킬이 발동된 동안 태훈은 어떤 피해도 입지 않는다.
덕분에 맞으면서 싸우는 거에 익숙해졌다.
그 익숙함이 치명적인 실수였다.
"컥?!"
가슴이 쩍 갈라졌다.
세한의 손이 휘둘러진 곳이 갈라지며 피분수가 뿜어졌다.
스킬은 분명 발동되고 있을 텐데?
김태훈은 떨리는 눈으로 자신의 가슴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입는 상처였다.
발두르로부터 마지막 전승 스킬을 얻은 순간부터 한 번도 상처를 입은 적 없는 자신이 피를 흘리고 있었다.
'설마.'
김태훈은 떨리는 눈으로 세한의 손을 바라보았다.
방금 휘둘러진 세한의 손에는 작은 나뭇가지가 들려있었다.
워낙 크기가 작아 잘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나뭇가지였다.
나뭇가지는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는 것처럼 부스러지고 있었다.
마치, 겨울의 눈처럼.
"눈치채도 늦었어."
푸욱!!
쩍 갈라져 있는 태훈의 가슴팍에 작은 단도가 박혔다.
상처를 입기 전이라면 몰라도, 이미 피를 뿜고 있는 상처부위는 평범한 단검으로도 충분했다.
설마 자신의 가슴에 이런 평범한 단검이 박힐 날이 올 줄이야.
거기다 단검이 박히기 무섭게 김태훈의 의식이 뿌옇게 흐려졌다.
'독?'
갈라진 상처는 회복되지 않았다.
이전이었다면 독 따위는 김태훈에게 조금의 영향도 주지 못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자신이 지닌 모든 스킬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이걸로 끝이다."
나직이 중얼거리는 세한의 말에 김태훈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몇 번을 일어서려 했던 그였지만, 그것도 잠시 5분이 지나자 움직임이 멎었다.
'이제야 첫 단추를 꿴 건가.'
완벽히 호흡이 끊어진 걸 확인한 세한은 참았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지켜보는 일만 남아 있었다.
# 75
075. 아가트람(1)
"지금 제가 들은 말이 사실입니까?"
격리구역으로 돌아와서 쉬고 있던 나를 찾아온 건 다름 아닌 박성혁이었다.
2회차에서 만났던 박성혁과는 달리 얼굴이 상당히 야위어 있었다.
이렇게 만나니 조금 반갑기도 했지만, 착잡하기도 했다.
한때 서울을 호령하던 3대 길드 중 하나인 제네시스의 몰락한 모습이었으니까.
그래도 제네시스는 나은 편이다.
나름의 세력은 유지하고 있었고 여전히 거대 길드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웃라이징과 피안화의 경우엔 공중분해 되었다.
아웃라이징은 독불장군 기질이 강한 길드장 강태성에게 반기를 든 길드원들로 인해 반으로 갈라졌고, 피안화는 길드장인 이아영이 죽은 후 해체되었다.
모든 길드원이 이아영 한 명을 위해 모인 거니 당연한 일이다.
"영광이군요. 제네시스의 길드장이 직접 저를 만나러 오다니."
"...이미 한물간 길드일 뿐이죠."
씁쓸하게 말하는 그의 모습은 이전의 침착함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초조하고 좋지 않은 안색은 과거의 박성혁과는 전혀 달랐다.
"그보다 방금 제가 들은 게 사실입니까?"
"방금 들은 거라니요?"
"김태훈을 죽였다고 들었습니다."
벌써 소문이 그렇게 퍼졌나?
내가 격리구역으로 돌아온 지는 이제 겨우 한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벌써 박성혁의 귀에 들어갔을 줄이야.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어쩌다보니? 김태훈을 어쩌다보니 죽일 수 있는 겁니까?"
"대충 비슷하죠."
사실대로 말하면 개고생하면서 준비한 물건을 상대가 방심한 틈에 찔러 넣어 이긴 거지만 이런 건 좀 과장이 필요하다. 그래야 상대도 나를 과장되게 생각할 테니까.
현재 내 발언력은 나쁘지 않은 편이지만 역시 거대 길드의 길드장들에 비해선 약했다.
이쪽 세력에선 내가 가장 강한 플레이어 중 하나인 건 분명했지만 아무래도 이전에 눈에 띄는 활동을 한 전적이 없어 무시하는 이들도 존재했다.
이번 일로 이름을 좀 알린다면 좀 더 강하게 나설 수 있게 되겠지.
'다른 것보단 미스틸테인을 준비하는 게 가장 어려웠지.'
미스틸테인은 발두르의 대표적인 약점이다.
슈퍼맨으로 치면 크립토나이트 같은 물건이라고 할 수 있다.
겨우살이 나뭇가지에 불과하지만 워낙 대단한 업적 덕에 습득 난이도가 거진 S급에 이르는 아이템이다.
보통은 김태훈의 약점을 알아도 구하지 못할 물건.
왜냐면 미스틸테인은 전승상 북유럽 신화의 라그나로크의 시발점이 된 나뭇가지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고작 나뭇가지에 불과함에도 북유럽 신화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 중 하나이다.
내가 구한 건 고작 미스틸테인의 가장 얇은 가지 중에 하나.
그것만으로도 김태훈의 스킬을 뚫고 상처를 입히는 것에 성공했다.
다만 그것만으로 힘이 다해 사라져 버렸지.
고작 그 정도의 가지를 구하는 게 당시 내 한계였으니까.
덕분에 전생의 나는 미스틸테인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하나를 더 구하기엔 시간이 촉박했고, 실수해서 날리기라도 하면 김태훈을 죽일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녀석을 확실히 보낼 수 있는 순간까지 아끼고 아껴 최후에 기습으로 녀석을 쓰러트리는 것에 성공했다.
다만 그때는 우리 쪽도 큰 피해를 입은 후라 상처뿐인 승리였었지.
"당신이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그 정도인 줄은 몰랐습니다."
"예, 저도 몰랐죠. 제가 생각보다 강하더군요."
"그, 그렇습니까?"
"예. 적어도...."
나는 천천히 박성혁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시선을 받은 박성혁은 마른침을 삼켰다.
"아가트람의 간부 전부를 홀로 상대할 정도는 되는 것 같군요."
"...."
예전이라면 헛소리라고 치부했을 거다.
하지만 내가 죽인 건 다른 누구도 아닌 김태훈이다.
사실상 아가트람에서 길드장을 제외하면 넘버 2나 마찬가지인 녀석을 내가 죽였다.
그것도 순식간에.
목격자도 한둘이 아니니 거짓말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을 거다.
그러니 박성혁으로선 내 말을 믿을 수밖에 없으리라.
"정말 가능한 겁니까? 아가트람을 홀로 상대할 수 있다는 그 말. 거짓말은 아니겠지요?"
"알다시피 전 허언을 하는 성격이 아닙니다."
"예. 지나치게 신중한 플레이어라는 말은 많이 들었습니다."
고개를 주억거리는 그의 모습에 나는 슬슬 운을 띄웠다.
"그럼 기왕 오셨으니... 제가 한 가지 의견을 제시해도 될까요?"
"예, 한번 들어보도록 하죠."
그는 내가 무슨 의견을 낼지 살피고 있었다.
이전보다 초조하고 조급한 면이 없잖아 있지만 그래도 그는 박성혁이었다.
아마 그 역시 신과 연락이 끊긴 지 오래인 모양이었지만 영특한 머리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저에게 3일의 시간을 주셨으면 합니다."
"3일? 시간을 달라는 이야기는 제가 도울 일이 있는 겁니까?"
"아뇨. 없습니다."
"예?"
당황하는 그의 모습에 나는 씩 웃었다.
"제가 그 3일 안에 이 퀘스트를 끝낼 생각이거든요."
이후, 박성혁이 할 말을 잃은 건 당연했다.
***
박성혁과 이야기를 끝낸 다음 나는 곧바로 이동했다.
이번에 만날 상대는 이미 안면이 있는 사이였기에 거리낄 것도 없었다.
이번 퀘스트 전부터 나와 자주 얽히던 녀석이니까.
"이번에는 정말로 놀랐어요. 정~말 놀라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래?"
녀석은 나를 보자마자 빈정거리며 가슴을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김태훈을 죽인 것도 모자라 시체를 나에게 가져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죠?"
"그건 네가 모든 플레이어 중에 가장 뛰어난 치유 마법사이기 때문이다."
"...칭찬 고맙네요."
그녀는 새치름하게 눈을 뜨며 작은 의자에 천천히 앉았다.
지금 우리가 있는 건 격리구역에 마련된 구호소였다.
그녀가 개인적으로 머물 수 있는 공간이었기에 근처에 있는 플레이어는 그녀와 나. 그리고 시체가 되어 있는 김태훈뿐이었다.
"그래서 이 시체를 나에게 주고 간 이유를 물어도 되나요?"
"이유야 별거 없지. 살릴 수 있냐고 물을 뿐이다."
"당신 지금 미쳤어요? 내가 성녀라고 불린다고 죽은 사람도 살릴 줄 아나봐?"
"못 살리나? 성녀 신유화라면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성녀 성녀 하지 마세요. 괜히 짜증나니까."
말투가 하나같이 짜증이 가득 담겨있었다.
이런 여자가 성녀라고 불린다니 참 우스웠다. 웃긴 점은 저렇게 성녀라는 말에 짜증을 부리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꽤 즐기고 있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자칭 신도들을 저 성격에 내버려둘 리가 없지.
"그래, 못 살린다는 말이지. 이유를 물어도 되겠나?"
"이유까지야. 죽었으니까 못 살리죠. 완벽한 사망판정이네요. 제가 가진 어떤 회복 스킬도 먹통인걸 보면 분명해요."
"확실해?"
"예. 이 괴물을 참 깔끔하게도 죽여 놨네요. 가슴의 상처는 어떻게 치유했대요?"
"죽기 직전에 엘리서를 발랐지."
"아하, 그랬...."
그녀는 심드렁하게 대답하다가 눈동자를 동그랗게 떴다.
"엘릭서를 발랐어요?"
"그래."
"근데 왜 죽었데?"
"그러게, 왜 죽었을까."
내가 피식 웃자 신유화의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당신 또 뭔가 나한테 실험해 본 거죠?"
"아니."
"거짓말 마요! 또 당할 거 같아?"
대답을 하지 않고 묵묵히 입을 닫고 있자 신유화는 흘러내린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중얼거렸다.
"엘릭서가 들었다는 건 살아 있었다는 거고. 죽은 건 엘릭서를 바른 이후가 되겠네요. 엘릭서를 발랐으면 상처가 났고 완벽히 회복되어 살아났을 텐데 죽었다? 상황 자체가 모순되잖아요."
"그렇지."
"뭐가 그렇지는 그렇지야. 또 저래. 다 알면서 모르는 척."
투덜거린 신유화는 내 이마를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대충 당신이 뭔가를 꾸미고 있는 건 알겠어요. 그리고 내게 이 시체 아닌 시체를 맡긴 것도 이대로 두기 위해서죠?"
"너 말고는 믿을 사람이 없으니까."
"...참 말은 잘해요. 그런데 이런 게 더 늘어나는 건 아니겠죠?"
"늘어나긴 하겠지만, 그건 한 번에 처리할 거라 이곳에 올 일은 없을 거다."
"그거 다행이네."
내 이마에서 손가락을 뗀 신유화는 산뜻하게 웃었다.
"알겠어요. 그럼 이 사람은 제가 맡아둘게요."
"부탁하지."
"그럼 말이라도 좀 예의바르게 하면 어때요?"
"본인이 먼저 말을 놓으라고 하지 않았나."
"설마 이렇게 딱딱하게 말할 줄은 몰랐죠!"
신유화는 나보다 두 살 연하다.
그러니 지수보다는 한 살 연하가 되겠군.
처음 만났을 때 이런 말투를 쓴 탓에 신유화를 만날 때면 어쩐지 이런 식으로 말하게 되었다.
"너도 말을 놔도 상관없다고 했을 텐데."
"됐어요. 난 이게 편해."
어차피 반은 존대. 반은 반말이긴 했다.
대화를 끝낸 신유화는 손을 휘휘 흔들었다.
"그럼 나중에 올 때는 미리 말이라도 하고 와요. 그때는 준비라도 하고 있을 테니까."
"그러지. 나도 다음에 볼 때는 선물이라도 가져오겠다."
"일이나 들고 오지 마세요."
다음을 기약하는 신유화의 말에 나는 웃는 얼굴로 답해주지 못했다.
이번 퀘스트가 끝나고 다음 퀘스트에서 신유화는 죽는다.
그리고 이미 몽상에 불과한 이 퀘스트의 미래는 없었다.
내가 던전에서 빠져나오면 모든 게 끝날 뿐이다.
'그래도 전에는 이렇게 인사조차 못했구나.'
민수호와 싸우고 다쳤던 나를 신유화가 한참동안 돌봐줬었지.
그리고 회복한 뒤 헤어진 이후에는 만나지 못했다.
그게 전생의 나와 신유화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선물이라...."
나는 무심코 중얼거리며 방으로 돌아갔다.
이미 하늘은 어둡게 변해 하얀 달이 떠 있었다.
어쩐지 술이 고픈 밤이었다.
***
김태훈이 죽었다는 사실에 사기가 올라간 플레이어 진영과 달리 아가트람 지극히 심각했다.
다른 플레이어도 아닌 김태훈이 죽었다는 건 그들로서도 크나큰 손실이기 때문이다.
급히 소집된 아가트람의 길드원들은 저마다 말없이 자리에 앉아있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강준식이었다.
"...그 새끼가 그렇게 강했나?"
언제나 김태훈과 다투긴 했지만 그를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악우라는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비교적 고요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눈동자만큼은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조금만 감정제어를 놓치면 주변을 불바다로 만들 것 같았다.
"아마 태훈이의 약점을 알고 있던 거겠지. 아마 미스틸테인을 사용했을 확률이 높다."
"하, 설마 그런 걸 지니고 있었을 줄이야."
"듣기로는 어떤 플레이어와 싸우더라도 상대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둔다고 하더군."
"변태 같은 놈이네."
혀를 끌끌 찬 강준식은 조용히 앉아 있는 한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김세한이 일으킨 이번 사태에도 그저 고요히 사태를 관망할 뿐이었다.
"막내야. 넌 놀랍지도 않냐?"
"네. 그 사람은 저희 아버지도 죽인 사람이니까요."
"루크 테일러 말이지. 하긴, 그걸로 유명해진 놈이긴 했지."
서울 대붕괴라 불리던 사건.
황도 12궁 금우궁의 지배자 알데바란이 지상에 강림했던 날.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던 찰나에 알데바란을 쓰러트린 플레이어가 나타났다.
그가 바로 루크 테일러였다.
그리고 루크 테일러는 알데바란을 쓰러트린 직후 김세한에게 죽게 된다.
당시의 목격자의 말로는 루크 테일러가 폭주하기 시작한 탓에 어쩔 수 없이 죽였다고 하던가.
아무튼 알데바란을 꺾은 루크를 죽인 김세한은 그 덕에 유명세를 한동안 탔었다.
이후 당사자가 잠적해 버린 탓에 금방 사그라지긴 했지만.
"여신님은 이후 저를 계약자로 삼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탓인지 더 이상 말을 걸어주시지 않았어요. 계속 지켜보시긴 한 것 같지만요."
린은 그렇게 말하며 한 남자를 허공에 그렸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 아버지를 죽인 원수.
김세한을.
"그 사람은 반드시 제가 죽일 거예요."
"뭐, 너는 제법 재능이 있으니 언젠가 가능하긴 하겠지. 그런데 이걸 어쩌나 그걸 기다려 줄 수 없겠구나."
강준식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웃었다.
린 테일러가 제법 괜찮은 재능을 가진 플레이어라는 건 알았다.
빈자리가 생기자마자 길드장이 억지로 밀어붙여 간부자리에 앉힌 아이니 그 정도는 당연했다.
확실히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재능을 가지고 있었기에 강준식도 납득하고 있었고, 언젠가 성장해서 김세한을 죽인다고 말한 것도 응원해 줬다.
김태훈이 죽기 전까지는.
"왜냐면 내가 죽여 버릴 테니까."
김태훈을 죽인 그놈을 살려둘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건 아가트람의 모든 간부의 생각이기도 했다.
아가트람의 길드장, 천상환이 좌중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혹시 모르니 혼자 움직이는 건 삼간다. 앞으로 이틀 후에 준비가 끝나는 대로 복수를 하도록 하지."
천상환의 말에 강준식은 혀를 찼고, 다른 길드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트람의 모든 시선이 김세한 한 명을 향해 쏠렸다.
그야 당연하다. 아가트람의 간부를 상대할 플레이어가 마땅히 없다고 생각해서 여유를 부렸던 건데 김태훈이 순식간에 당해 버렸으니까.
"...."
길드원들의 대화를 지켜보며 린은 그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저 고요하게 앉아 새파란 눈동자를 어둡게 가라앉혔다.
더욱, 짙은 어둠이 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