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
045. 상황정리(1)
[대한민국 대전 지역 채팅방]
레몬티챱챱: 와씨, 저걸 잡네. 실화임?
정직한삶: 내 아바타가 대활약함 ㅅㄱ
찬연한별빛: 니 아바타가 설마 저 막타 날린 여자애냐?
정직한삶: 아닌데요.
찬연한별빛: 아, 그럼 저 투창 던지던 애? 걔 좀 쩔드라.
정직한삶: 맨 처음에 군인들 대피시켰던 애임.
레몬티챱챱: 조또 한 거 없네;;
정직한삶: 맨 처음에 군인 대피시켜서 싸울 수 있는 환경 마련해 준 거 모름?
그리스대장: 저 여자애 내가 맨처음에 아바타로 삼을까 생각하던 애인데. 아쉽다. 저 정도면 분명 급 높은 신이 데려갔나 보네.
익명35: 아죠씨는 여기 서버도 아니신데 왜 그렇게 돌아다녀요.
어릿광대: 아, 역시 여기도 끝났네. 서울지역도 방금 끝남. 내 아바타 대활약 ㅅㅅㅅ
정직한삶: 아무튼 근데 우리쪽 레이드 보스 좀 이상하지 않음? 심각하게 쎄던데.
익명27: 거의 센티넬급이었음. 조금만 늦게 죽였어도 우리 지역 다 아작났을 걸.
익명27의 말에 줄기차게 이어지던 채팅이 뚝 멎었다.
그들도 느꼈다. 자신들이 대치하고 있던 레이드 보스가 비정상적으로 강했다는 걸.
시스템이 관여한 기색은 없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
레몬티챱챱: GM이 관여한 모양이네.
찬연한별빛: 왜지? 혹시 그 검은 옷의 인간 남자 때문인가?
그리스대장: 그럴 확률이 높지. 걔 요즘 뜨더라고. 카라스도 죽였다며?
신들은 멍청하지 않다.
레이드 보스가 갑자기 등장했을 때부터 이상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두 마리였던 레이드 보스가 시작도 전에 하나가 죽고, 거기다 그 힘을 흡수한 레이드 보스가 등장했다.
좋게 쳐줘서 레이드 보스끼리 영토다툼이 있었다고 해도, 그 시기가 지나치게 빨랐으며 궁기의 경우엔 기린의 힘을 상당히 흡수한 상태였다.
성체도 아닌 성장기의 궁기가 기린의 힘을 혼자서 그만큼 받아들였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익명48: ...건의를 넣어보는 건 어떨까요?
그때, 채팅방에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글을 올렸다.
좋은 정보를 자주 공유하던 '익명48'이다.
예지와 관련된 신이라는 추측이 오가고 있는 터라, 그의 말은 신들도 쉽게 흘려듣지 못했다.
레몬티챱챱: 건의?
익명48: 예. 건의.
익명48의 말에 신들이 크게 술렁였다.
건의는 웬만해서는 하지 않는다. 이번 일도 GM이 운영에 힘을 쓰는 경우도 빈번하게 발생했기에 그리 문제가 될 만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당시 대전지역에 신들의 아바타가 대거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일반 플레이어들이야 GM의 농간으로 죽든 말든 신경도 안 쓰지만 그게 자신의 아바타가 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카라스가 놀이공원에서 신들의 아바타가 있는지 늘 확인하던 것도 그런 연유다.
익명48: 솔직히 우리들을 만만하게 본 거 아닌가요? 이대로 두면 지 맘에 안 든다고 다른 아바타들도 멋대로 처리하려고 할 걸요?
그리스대장: 음. 설득력이... 있어!
분위기가 넘어왔다.
익명 48의 말에 대전 지역 채팅방에 있던 신들은 건의를 넣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었다.
레몬티챱챱: 이런 건 초창기에 잡아야 된다. 그러니 말로만 떠들지 말고 확실히 건의에 넣어라.
정직한삶: 근데 아카터스놈 원래 운영 조또 못하잖아. 그래서 우리 서버가 젤 인기 없자너.
익명35: 못하는 건 못하는 거고. 멋대로 까분 건 용서하면 안 되지.
익명35의 말에 다른 신들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다들 동조했다.
이후.
GM 아카터스는 한동안 대한민국 서버에서 관여할 수 없었다.
GM은 게임을 운영하며, 신들이 사용하는 포인트 수수료를 받아야 한다.
그런 GM이 운영에 관여할 수 없다는 건 상당한 처벌이라는 것.
그 처벌 소식을 들은 신들은 꽤 만족했다.
물론, 가장 만족한 건 '익명48'이었다.
***
궁기를 잡은 이후, 녀석의 시체를 갈무리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갈무리할 수 있는 양은 보스 전의 기여도에 따라 달랐는데, 가장 많은 권한을 가진 건 마지막 일격을 가했던 지수였다.
두 번째는 당연히 나. 하지만 나와 지수의 차이는 사실 거의 없다고 봐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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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기의 가죽(A)
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사흉(四凶). 궁기의 털가죽.
흔치 않은 성체의 털가죽이며 그만큼 대단히 질기고,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
이것으로 장비를 제작하게 되면 대단한 물건이 나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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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의 가죽이라고?"
가장 먼저 얻은 궁기의 털가죽을 본 순간, 나는 눈을 의심했다.
분명 성장기였는데 언제 성체가 된 거야?
'아, 설마 마지막에?'
지수가 녀석을 죽이기 직전, 보이던 반응을 보면 그 순간 성체로 진화했던 건지도 모른다.
덩치도 점점 커지고 있었고, 털의 색도 완벽한 검은색으로 변했으니까.
"뜻하지 않은 행운이네."
성체로 진화한 궁기의 가죽과 뼈라면 A급의 소재다.
이걸로 시우에게 부탁하면 내 암야의 외투나, 다른 장비들도 몇 단계 상위 템으로 강화할 수 있을 것이다.
"오빠, 전 이런 게 나왔는데...."
지수가 머뭇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손에는 주먹 크기의 검은 구슬이 들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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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성(凶聖)의 암옥(暗玉)(S)
궁기와 타락한 기린의 힘이 응축된 결정.
심상치 않은 힘을 내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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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방금 먹은 거냐?"
"네, 제가 가져가도 되는 부위에 손을 댔더니, 이런 게 인벤토리에 들어왔어요."
"와, 이거 미쳤네."
무려 S급 소재다.
심지어 나도 처음 보는 소재다. 성체로 진화한 젊은 궁기의 힘과, 노쇠하였지만 그만큼의 세월을 축적한 기린의 힘이 응축된 영핵.
S급 소재는 후반부 퀘스트에서도 아주 희귀하게 볼 수 있는 물건인데 벌써 등장할 줄이야.
'이걸로 무기를 만들면, 사실상 거의 종결급 무기가 되는 거 아냐?'
문제라면 저 암옥의 힘을 견딜 소재가 현재 없다는 점이다.
미스릴은 신성한 금속이니 암옥과는 상성상 어울리지 않고, 오리하르콘은 발견되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
궁기의 뼈를 이용한다면 사용은 가능하겠지만, 저 귀중한 암옥을 썩히는 기분이 들었다.
'A급 소재인 궁기의 뼈도 충분히 좋은 물건인데....'
S급은 그만큼 급이 다르다. 궁기나 기린이 그만큼 급이 높은 몬스터이긴 했지만, 이제 막 초기를 벗어나고 있는 게임에서 등장하기엔 지나치게 이른 물건이다.
아마 GM이 관여한 탓에 만들어진 기적의 산물이 아닐까.
'이것만큼은 아카터스에게 고마워해야겠네.'
만약 녀석이 없었다면 흉성의 암옥을 구경조차 할 수 없었을 거다.
"오빠 드릴까요? 저는 그냥 마지막에 녀석을 죽였을 뿐이라...."
"됐어. 그건 네 거니까. 잘 가지고 있어. 나중에 다른 좋은 소재 구하면 필요해질 거다."
탐이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지만, 저건 엄연히 지수에게 돌아간 보상이다.
'나도 충분히 보상을 받을 만큼 받았고.'
굳이 아쉬운 점이 있다면 퀘스트 클리어 등급이 '금' 등급이라는 점이다.
"역시 이번에 백금 등급을 바라는 건 욕심이었지."
백금 등급은 사실 상 혼자서 다 한 것이 아닌 한 받지 못하다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어쨌든 이번 보스의 경우, 다른 플레이어들도 놀고만 있던 건 아니었으니까.
"저도 금 등급이에요."
암옥을 인벤토리에 넣던 지수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아마 암옥을 받은 것도 그렇고, 자신이 마지막에 일격을 날려 내가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전 은 등급입니다."
내가 지수에게 뭐라 말을 하려던 찰나, 활짝 웃는 얼굴로 동권이 끼어들었다.
덕분에 나는 지수에게 하려던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뭐? 은 등급?
"넌 뭘 했다고 은 등급이야? 보스랑 싸울 때 빠져서 아무것도 안했잖아."
"사람들을 대피시키지 않았습니까. 제가 다 싸움 환경을 만든 덕이죠. 이거 싸움에 참여까지 했으면 금 등급이었을 텐데. 하하!"
동권은 진심으로 기분이 좋은지 껄껄 웃었다.
하기야 처음에 군인들만 대피시키고 계속 몸을 피하고 있던 놈이 은 등급을 받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
"역시 제가 괜히 나서서 오빠가 금 등급이 된 건가요?"
"그럴 리가 없잖아. 그리고 내가 녀석을 죽이려고 했으면 한참 씨름을 해야 했을지도 몰라."
"그래도...."
지수가 미안한 얼굴로 입술을 오물거렸다.
물론, 난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잡았으면 어쩌면 백금 등급이 나왔을 수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정이다. 아까 말했듯 이번 일에는 다른 플레이어들도 상당히 활약했다.
나 혼자였으면 궁기를 하늘에서 추락시키지 못했을 테니까.
'거기다 확실히 지수가 아니었다면 녀석을 그렇게 빨리 죽이지 못했겠지.'
기존 지수의 능력치로 볼 때, 풀 도핑한 상태의 지수는 분명 나보다 강한 힘과 속도를 지녔을 거다.
더군다나 지수가 태연하게 궁기의 몸속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그렇지, 궁기의 몸속은 온갖 독소와 기운으로 가득하다. 보통 사람이라면 안으로 들어가는 것만으로 목숨을 잃을 확률이 높았다.
나 역시 궁기의 몸속에 들어가면 무사하리란 보장이 없었다.
지수는 천살성으로 모든 체력 재생이 100퍼센트 상승하고, 거기에 재생 스킬과 예전에 내가 준 VIP 브로치를 가지고 있어 생존할 수 있었던 거지.
물론 나도 죽일 방법은 몇 가지나 있었지만, 지수만큼 심플하고 빠르게 죽일 수는 없었다.
지수가 말한 '이번 일에는 자신이 적합하다'라는 것도 딱 들어맞는 말이었다.
"그럼 이제 보상도 다 챙겼으니...."
나는 지금까지 얻은 보상을 인벤토리에 잘 가무리한 뒤, 동권을 향해 말을 걸었다.
기분 좋게 웃던 녀석은 내 시선에서 무언가를 느꼈는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너 이제 퀘스트도 깼겠다. 혹시 할 거 있냐?"
"예. 있습니다."
박동권은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혹여나 내가 따라오라고 할까 봐 걱정하는 눈치였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휴우."
어차피 박동권을 서울에 데려갈 생각은 없었다.
녀석은 현균의 곁에서 머물며, 조용히 성장하는 편이 나았다.
이 자식 성격상 괜히 자극적인 퀘스트라도 걸리면 첫 번째나 두 번째 퀘스트에서 벌였던 짓을 또 하지 말란 법도 없었다.
물론, 그러면 목에 걸린 링 때문에 죽겠지만.
"괜히 허튼짓 하지 마라. 오래 살고 싶으면."
"아, 알고 있고말고요."
동권은 그렇게 말하곤 후다닥 도망갔다.
조금이라도 빨리 나와 떨어지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런 녀석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픽 웃었다.
"우리도 슬슬 서울로 돌아갈까."
"벌써요?"
"왜, 따로 할 일이라도 있어?"
지수는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당장은 없어요. 어머니에게 연락이 닿으면 모르겠지만...."
"어디에 있는지 대략 짐작도 안 가?"
"저에게 위치를 알려주지 않으셨어요."
왜 알려주지 않았을까?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세계가 되었는데, 딸의 생존을 알았음에도 찾지 않다니.
'뭔가 복잡한 사정이 있겠지.'
지수는 나에게 있어 가장 친한 사람 중 하나였지만, 그럼에도 모르는 것이 많은 아이였다.
그저 1년 월반해서 들어온 재능 있는 동기생이라는 느낌이 강했지만, 최근의 지수는 단순히 '재능이 있는'이라는 수식어로는 부족했다.
전생에 내가 봤던 이들 중에서도 지수와 비슷한 급의 천재는 몇 명 없었다.
예외라고 할 수 있는 린 테일러를 제외하면 기껏해야 두 명 정도.
그들은 이미 다 성장한 이후에 본지라 비교가 힘들었지만, 지수가 그들보다 부족하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왜 그렇게 보세요?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요?"
"아니. 음."
나는 지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정말 죄를 많이 지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네?"
아리송한 얼굴로 지수가 눈을 찡그렸지만 나는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설명할 수도 없었다.
그것을 설명하려면 전생에 대해 이야기해야 된다.
'전생의 지수는 내가 제일 처음 죽게 만들었던 사람이니까.'
지수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나는 그런 의문이 들었다.
만약, 내가 전생에 지수를 죽게 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많은 것들이 달라졌을지 궁금했다.
이 재능을 개화조차 시켜보지 못하고 죽었던 전생의 지수가 눈앞에 아른 거렸다.
그러니 현재의 지수는 사실상 나에게 있어 이정표나 마찬가지였다.
과거에는 죽었으나, 현재는 살아 있는.
운명을 개변할 수 있다는 증거와도 같았으니까.
***
「....」
어딘가로 향하는 세한과 지수를 지켜보는 한 옵저버가 있었다.
둘을 지켜보는 옵저버의 숫자는 많았지만, 그 옵저버는 다른 것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단순한 호기심과 신기함으로 둘을 바라보는 다른 옵저버들과 달리, 그것의 시선에는 짙은 선망과 열망이 담겨있었으니까.
그런 묘한 분위기를 느꼈는지, 세한을 지켜보던 옵저버들이 슬슬 물러섰다.
'저것'과 관여되어 좋을 게 없었으니까.
격이라고 할지, 모든 면에서 저건 이질적인 존재였다.
인간의 꿈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마녀.
그것은 조용히 세한을 뒤쫓아 움직였다.
언제까지라도 쫓아가겠다는 듯이.
# 46
046. 상황정리(2)
인천 중구.
어두운 골목에서 무장한 남성들이 소리치고 있었다.
"빨리, 빨리 움직여!"
험악한 인상을 한 남성의 외침에, 주변의 다른 남성들이 손에 잡힌 줄을 잡아끌었다.
"으헝헝, 엄마!"
"시끄럽게 하지 말고 닥쳐! 떠드는 새끼는 죽는다, 알지?"
"흐끅. 흑, 흑흑."
줄에 묶여 끌려오는 이들은 어린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은 줄에 묶인 채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었다.
"오늘은 제법 많은데요?"
"일반인들이 숨어있던 장소를 발견했거든. 저쪽에 초등학교 하나 있잖아? 거기에 숨어 있더라."
선글라스를 낀 남자가 씩 웃으며 말했다.
덕분에 오늘은 마음이 편했다.
"근데 이 애들을 어디로 데려가는 겁니까?"
"나야 모르지. 위에서 데려오라고 했는데."
선글라스의 남자는 끌려가는 애들을 보았다.
말단인 자신으로서는 알 수 없지만, 저 아이들이 무사하지 않으리라는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악마들이니까, 아이들의 피나, 영혼 같은 걸 원하지 않을까?"
"으으, 생각만 해도 살벌하네요."
"마, 쟤네 입장에선 우리가 더 살벌한 놈이야."
낄낄 거리며 웃는 선글라스 남자의 말은 확실히 옳았다.
아이들의 입장에선 악마나 자신들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존재일 게 분명했다.
'만약 아바타가 되었다면 이런 일을 하지 않았을 텐데.'
걔중에는 그런 생각을 하며 후회하는 남자도 있었다.
플레이어로 선택되긴 했지만, 아바타가 되지 못한 자신들.
언제 죽을지 모르는 풍전등화 같은 상황에서 악마가 내민 손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악마는 신들과 달리 까다롭게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
자신들의 말만 듣는다면 몇 명이든 계약을 해줬고, 강한 힘을 손에 쥐어줬다.
아바타에게도 뒤지지 않는 강대한 힘을.
대신 그만큼의 대가가 필요했다.
지금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도 그런 대가의 일환이었다.
"잡담을 하는 걸 보니 꽤나 널널한 모양이군."
싸늘한 목소리가 남자들의 뒤에서 들렸다.
"시, 신자운 대장님!"
"시끄러."
남자는 입에 물고 있던 담뱃불을 자신의 손바닥에 지져 껐다.
뜨거운 담뱃불을 손바닥에 지졌음에도 그의 얼굴에는 표정 변화 하나 없었다.
'이것이 악마의 계약자.'
흑발에 흑안.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특징이었지만, 그는 좀 달랐다.
빛이라도 흡수할 것 어두운 머리카락.
악마의 계약자에게 잘 드러나는 특징이다. 밝은 낮이면 그나마 구분할 수 있었지만,
이런 밤이면 그 차이를 알기 힘들었다.
"여, 여기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쥐새끼 하나가 기어 들어와서 잡으려고."
"예?"
남자가 깜짝 놀란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 대체 누가 이곳에 있는 겁니까?"
"몰라."
"예?"
"모른다고."
처음에는 농담하는가 싶었지만 덤덤한 얼굴을 보면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럼...?"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아이들을 운송하던 플레이어들의 시선이 신자운에게로 향했다.
신자운은 나른하게 웃으며 말했다.
"모르니까 다 죽이면 되겠지. 안 그러냐?"
싸늘한 정적이 골목에 내려앉았다.
순간 농담인가 싶었지만, 천천히 검을 꺼내는 신자운의 모습에 진심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 이런 시발! 튀어!"
걸리면 뒤진다. 이곳에 있는 플레이어들은 신자운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최근 인천 지역에서 세력을 모으고 있다는 '흑천회'의 행동대장.
악마의 계약자이며 혼자서 수십이 넘는 플레이어를 도륙했다던가.
"귀찮게스리."
신자운이 옅은 한숨을 쉬며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붉은 잔영이 골목을 휘감으며, 골목은 단숨에 피로 물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범일동의 한 골목에서 신원미상의 시체 열두 구가 발견되었다.
***
대한민국 서울, 신림.
생필품을 한아름 들고 이동하고 있는 두 소녀가 있었다.
한 명은 교복을 입은 십 대 후반의 소녀였고, 다른 한 명은 10대 초반의 외국인 소녀였다.
그 두 명은 바로 민아와 린 테일러.
근처 편의점에서 간단한 음식과 생필품을 구매해 오는 중이었다.
사회가 점차 복구되고 있다지만, 여전히 생필품을 구할 수 있는 장소는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안전지대 편의점뿐이었다.
편의점에서는 당연히 일반적인 화폐를 사용할 수 없었고, 포인트로만 이용이 가능했다.
"나 이번에 좀 쩔었지?"
민아는 이번 레이드 보스를 잡으며 생긴 무용담을 린에게 늘어놓는 중이었다.
"무려 금 등급이라니. 나 정말 대단하다니까."
민아는 자화자찬을 하며 만면에 미소를 피웠다.
이번엔 세한의 도움 없이 온전히 자신의 실력으로 얻은 성과라 더더욱 기뻤다.
'세한 오빠의 도움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애초에 이번에 활약할 수 있었던 건 세한이 줬던 스킬 '불가사리의 그리모어' 덕분이다.
먹은 금속을 신체의 일부로 변환할 수 있는 능력인데, 변신능력을 가진 지수와는 효율이 발군이었다.
신체의 일부를 칼로 변형시켜 공격한다거나, 혹은 방패로 만들 수도 있었다.
파괴가 되면 변신이 풀리긴 하지만, 신체에 손상이 없다는 점이 장점이었다.
"저는 무서웠어요, 언니나 아빠가 다칠까 봐."
린은 얼마 전의 일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에이, 그 정도는 괜찮아. 그리고 루크 아저씨도 강하던데?"
솔직히 그리 기대하지 않았지만 깜짝 놀랐다.
신의 격은 확실히 높지 않은 것 같지만, 전투실력은 확실히 전문가였다.
"내가 또...."
"언니!"
계속해서 말을 이어가던 민아에게 린이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갑자기 왜 린이 소리를 치는지 민아는 순간 이해 못 했지만, 등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부웅!
"칫!"
머리 위로 망치가 지나갔다.
일반인이었으면 일격에 목숨을 잃었을 정도의 위력이다.
아마 민아와 린이 플레이어라는 걸 알고 습격한 게 분명했다.
"──하!"
서걱!
크게 뒤로 뛴 민아가 손가락을 날카로운 칼날로 변신시킨 뒤, 망치 자루를 절단했다.
그 다음, 발을 금속으로 변화시킨 뒤, 원심력을 사용해 크게 회전하며 남자의 머리를 후려쳤다.
퍼억!
"크악!"
쇳덩어리에 그대로 얻어맞은 거나 마찬가지인 남자가 피를 흩뿌리며 물러섰다.
"이런 시발, 평범한 애들이 아니었잖아? 한꺼번에 덤벼!"
남자의 외침에 주변에 숨어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뛰어나왔다.
동공에서 시커먼 물결이 퍼지며 안구를 새까맣게 물들였다.
'인간형 몬스터인가?'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어디로 봐도 몬스터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자신들을 습격한 이상, 민아는 이들을 몬스터로 가정하기로 했다.
인간을 습격하는 플레이어들은 몬스터와 다를 게 없으니까.
"어려서 만만하게 본 모양인데...."
민아의 양팔이 좌우로 펼치며 크게 휘둘렀다.
평범한 여성의 팔이었던 것이 거대한 멘티스의 낫과 같은 팔로 변했다.
거기다 일반적인 멘티스의 낫도 아닌, 미스릴로 만들어진 멘티스의 팔이다.
"아, 미친! 이년 아바타다!"
민아의 팔은 순식간에 습격자들의 무기를 종이처럼 오려냈다.
나름 비싼 값을 주고 산 무기였지만, 민아의 공격에는 속수무책이었다.
그제야 습격자들은 민아가 평범한 일반인이나 플레이어가 아닌 '아바타'임을 직감했다.
이런 특수한 스킬을 사용하는 플레이어들은 대부분 아바타이기 때문이다.
"어린애를 노려!"
더 이상 민아를 노리는 건 바보 같다고 생각했는지, 습격자들은 빠르게 타깃을 변경했다.
옆에서 떨고 있던 린을 향해 손을 뻗은 거다.
'아차.'
린을 신경쓰는 걸 깜박 잊었던 민아는 자신의 실책에 당황했다.
스륵.
"엇?"
습격자의 손이 린의 몸에 닿으려는 찰나, 린의 몸이 살랑이며 물러섰다.
세 명이나 되는 습격자의 손이 린의 몸에 닿지 못하고 허공을 휘저었다.
"찬스!"
덕분에 큰 빈틈이 생긴 것을 노려 민아가 양팔로 습격자들의 손을 잘라냈다.
시커먼 피가 바닥을 적셨다.
"젠장! 튀어!"
아무래도 더 이상 싸워봤자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습격자들은 빠르게 도망갔다.
뒤늦게 확인한 것이지만 습격자의 숫자는 총 네 명이었다.
"린, 괜찮아?"
"네, 네. 괘, 괜찮아요. 언니."
린은 방금 일에 놀랐는지 파르르 떨었다.
방금 전에 습격자들의 손을 피한 소녀답지 않았다.
"대단하다. 어떻게 피했어? 난 그때 솔직히 잡히는 줄 알았는데."
"저, 저도 모르겠어요. 그냥 언니가 하는 거 흉내냈을 뿐이에요."
"내가 하는 거?"
자신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모르기에, 민아는 그저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뭐가 어쨌든 안잡히면 된 거지.
"흐음, 근데 뭔가 구려."
민아는 바닥에 떨어진 습격자들의 잘린 손을 보았다.
붉은 피가 아닌, 시커먼 피가 도로를 적시고 있었다.
거기다 빠른 속도로 부폐되어 가는 게 평범한 사람의 팔과는 전혀 달랐다.
"오늘 세한 오빠가 온다고 했으니 바로 물어봐야 겠는걸."
모르는 일이 있으면 세한에게 이야기하자.
그럼 뭐가 됐든 답변이 돌아올 테니.
그것이 민아의 새로운 신조였다.
***
"수상한 사람들에게 습격당했다고?"
"응. 내가 팔을 잘랐는데, 새까만 피가 막 요렇게...!"
꽤나 열심히 묘사를 하며 이야기하는 민아의 말에 나는 눈을 찡그렸다.
'민아와 린을 노렸다고?'
느낌이 쎄했다.
거기다 팔을 잘랐더니 검은 피가 나왔다면, 녀석들의 정체는 하나뿐이다.
악마와 관련된 녀석들
그놈들은 그중 말단인 악마의 하수인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녀석들의 세력은 아직 약해서 숨을 죽이고 있어야 할 때인데.
'잠깐만.'
녀석들이 어째서 숨을 죽이고 살아야 했는가.
거기서부터 생각하기로 했다.
악마의 계약자와 하수인들이 모습을 드러낸 건, 꽤나 후다.
그것도 서울이 아닌 인천 쪽.
왜냐면 녀석들은 서울에 감히 발을 디딜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더 씬」을 이끄는 김주원 때문에.
명왕 하데스의 아바타인 김주원은 서울의 어둠을 빠르게 장악했다.
그의 아래에는 이름을 날리는 강력한 아바타들이 속속 모여들었고, 대한민국의 어둠을 지배하는 자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다보니 악마의 계약자들은 최대한 주원을 피했다.
괜히 전력을 줄이고 싶지 않았던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녀석들은 더 씬의 근거지인 서울이 아닌 인천에서만 활동했다.
후에 '흑천회'라는 조직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고, 더 씬과 함께 대한민국의 어둠을 양분하는 거대 세력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렇다면 지금 서울은 뒤에서 아주 난리도 아니겠군.'
뒷세계를 지배하려는 건 더 씬만 있었던 게 아니다.
수많은 조직이 있었으나, 가장 악독한 집단인 더 씬에게 흡수된 거지.
아마 지금 서울은 뒤에서 엄청나게 치고 박고 싸우고 있을 게 분명했다.
아니면 더 씬을 대신한 새로운 조직이 생겨났을 수도 있고.
'이것만큼은 어쩔 수 없군.'
김주원을 죽였지만 모든 게 해결되는 게 아니다.
'도리어 악마들이 서울은 빠르게 진출할 계기를 준 거나 마찬가지인가.'
김주원을 죽인 걸 후회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성가신 건 성가신 거였다.
"오빠는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아요?"
"그래."
"역시~! 알 거라고 생각했다니까!"
엄지를 척, 내미는 민아의 모습에 나는 쓴 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그들은 누구지?"
잠자코 있던 루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나 가벼운 태도를 보이던 것과 다른 모습이다.
아무래도 자신의 딸이 관련된 일이니 그럴 만도 하지.
'선생님, 아니 루크 씨가 저런 표정을 짓는 것도 오랜만이군.'
전생의 기억 때문인지 루크를 볼 때면 무심코 '선생님'이라고 말해야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분명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 실수하지 않도록 속으로도 그렇게 부르지 않는 중이다.
"악마와 관련되어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악마?"
꽤나 예상외의 답변이었던 모양인지, 주변은 크게 놀랐다.
신에 이어 악마까지 나타났으니 그럴 만도 했다.
"문제는 걔네들이 지금 어디에 있냐는 건데...."
악마와 관련된 대표적인 조직은 흑천회다.
그럼 인천이겠지만 민아와 린이 습격당한 건 서울이다 보니 헷갈렸다.
미래가 바뀌며 녀석들의 본거지가 옮겨갔을 수도 있으니까.
'난 악마 쪽은 잘 모르는데.'
대략적인 정보는 알고 있었지만, 이쪽은 워낙 더럽게 놀아서 제대로 된 정보를 찾기 힘들었다.
그리고 내가 건들기도 전에 다른 녀석이 처리한지 오래였기도 하고.
"제가 짐작이 가는 게 있어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지수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고 끼어들었다.
"짐작 가는 거?"
"네, 제가 이전에 강서구에서 이상한 사람과 만난 적이 있다고 했잖아요."
"그랬지."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던가.
"그때 제가 만났던 사람 중에서 검은 피를 흘리는 사람이 있었어요. 전 그냥 스킬인 줄 알았지만 오빠의 말대로라면...."
악마의 하수인이나 계약자라는 것.
강서구 쪽에 이상한 녀석들이 모여들었던 건 기억하지만 설마 악마를 위시한 패거리까지 생긴 건가?
지수가 어찌어찌 와해시킨 모양이지만, 아직 남아 있는 녀석들이 있을지 모른다.
"우선 거기부터 가보자."
현재 어느 정도까지 서울에 독이 퍼져 있는지 확인해야만 했다.
# 47
047. 악마의 흔적(1)
서울 강서구 화곡동.
한번 쑥대밭이 되었던 곳이지만, 다시 도시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는 장소였다.
"아마 이쯤이라고 했었지."
세한은 천천히 주변을 훑었다.
늘 누군가를 옆에 데리고 다녔던 탓인지 조금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지수가 따라온다고 말했지만, 만약을 대비해 린의 곁에 남겨뒀다.
민아도 강하긴 했지만 역시 지수에 비하면 많이 부족했으니까.
더군다나 녀석들이 보복을 하러 올지도 모르니 최대한 방비를 해두는 편이 좋았다.
'부화기도 있으니.'
역시 기린의 열매라서 그런 가 아직 태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밥솥만 했던 부화기가 어느 새 린의 키에 육박할 만큼 커져 있었다.
안에서 자라고 있는 기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여기는 벌써부터 가게를 여는 사람들이 있네?
이 근처는 아무래도 시장이 있는 모양인지, 가게들이 상당히 많았다.
대부분은 몬스터들의 습격에 엉망진창이 되어 방치되어 있었지만 몇몇 사람들은 다시 가게를 여는 이들이 있었다.
그것으로 볼 때 이 근방의 몬스터들은 모두 토벌된 모양이다.
근처에 돌아다니는 플레이어들이 혹시 모를 몬스터들의 습격을 막고 있는 거겠지.
'아직 위험하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에겐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몬스터를 잡음으로서 포인트를 얻어 생활할 수 있는 플레이어들과 달리, 일반인들은 여태 자신들이 하던 것처럼 돈을 벌 수밖에 없었다.
플레이어들에게 돈은 거의 무의미했지만 일반인들에겐 아니었다.
"저기요."
나는 근처에서 가게를 열고 있는 아저씨에게 다가갔다.
아저씨는 갑자기 말을 건 나를 슬쩍 살핀 뒤,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복장을 보니 플레이어인가 하는 양반이구먼."
"예, 맞습니다."
"무슨 일이슈? 물건은 아직 준비가 안 됐는데...."
가벼운 어투로 말하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불안감이 서려있었다.
플레이어들이 나쁜 마음이라도 먹으면 감히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뭐 좀 물어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물어보고 싶은 거?"
"혹시 이 근처에서 어린이들이 납치당한 사건이 있었습니까?"
나는 최대한 느릿한 어조로 질문하며 아저씨의 안색을 살폈다.
아저씨는 최대한 평온한 기색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어린이'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눈에 격정이 술렁였다.
"...난 몰러. 이상한 질문 하지 마슈!"
"정말입니까?"
"그, 그렇다니께!"
아저씨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눈치였다.
주변에서 걷던 플레이어들도 나를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
'확실히 이곳인 건 맞는 것 같은데, 단서가 부족하네.'
아저씨의 반응을 보니, 분명 뭔가 있는 건 확실했다.
'한번 떠볼까?'
최근 이 근처에서 잠시 활동했었다는 지수의 이름을 빌리기로 했다.
"아저씨."
"와 그러슈! 할 말 없다고 했잖여!"
"혹시 이런 사람을 아시나요?"
나는 스마트폰을 켜서 한 사진을 보여줬다.
사진에는 어설프게 웃고 있는 지수가 찍혀 있었다.
이곳에 오기 전, 미리 찍어둔 사진이다.
"히, 히익."
아저씨의 반응은 굉장히 적나라했다.
방금 어린이 납치 사건에도 최대한 평온을 가장하던 것과 달리, 명백히 두려워하는 얼굴이다.
'아니 얘는 대체 뭔 짓을 하고 다닌 거야?'
솔직히 이 정도로 효과가 좋을 줄은 몰랐다.
은근히 말을 돌리는 지수의 모습과 '있었는데 없어졌다'라는 말.
거기에 어마어마하게 올라간 스킬과 능력치를 보고 뭔가 일을 저지르고 다녔다는 걸 알았을 뿐이다.
아무튼 지금은 이런 반응을 이용해야겠지.
"제가 이 사람과 좀 아는 사이인데...."
"저, 정말 아는 사이유?"
"왜요, 통화시켜 드려요? 이제 전화도 다시 되는 거 알죠?"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비롯한, TV 방송도 점차 복구되고 있었다.
그건 인간이 복구 시킨 게 아니라 대규모 업데이트의 일환으로 시스템이 활성화시킨 것이다.
차후 업데이트될 기능들의 대비라고 해야 되나.
우선 지구의 사회가 어느 정도는 안정화되어야 계속해서 메인 퀘스트를 낼 수 있을 테니까.
"아, 알겠시유. 말해줄 테니께, 전화기 좀 저리 치워!"
아저씨는 벌벌 떨면서 고개를 떨궜다.
그 모습에 나는 내심 지수와 오지 않은 걸 조금 후회했다.
함께 왔으면 대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여, 여기는 보는 눈이 많으니 안으로 들어오셔."
아저씨는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난잡한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아저씨는 몇 번이나 입을 달싹 거리더니, 이내 마음을 정리한 듯 천천히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 그놈들은 최근 이 근방을 주름잡고 있는 녀석들이요, 그그 뭐시냐. 길드? 라고 하던데."
"예."
"원래부터 있었던 놈들은 아니고, 아까 사진으로 보여준 아가씨가 이 근방의 조직을 싹 조져부렸당께. 아주 보이는 족족 아주 그냥.... 흠흠."
대충 지수가 이곳에서 무슨 일을 벌였는지 알 것 같았다.
어쩌다 얽힌 건지는 모르겠지만, 기존에 있었던 조직과 마찰을 빗었고, 그들을 싹 죽여 버린 모양이다.
그리고 그 틈을 노려 '녀석'들이 이곳을 장악한 거고.
"아무튼 놈들이 최근 어린애들을 납치하기 시작했소. 물론 우리들도 입막음 당했지, 안 그러면 우리의 목숨은 없을 거라고 했으니...."
실제로 자식이 있는 이들은 거세게 항의했으나, 그들은 모두 살해당했다고 한다.
"왜 아이들을 납치하는지는 모르겠슈. 듣기로는 본 거지는 인천에 있는 모양이고 이곳에 있는 건 지역지부라고 하던데."
"위치는 어딥니까?"
"저쪽에 있는 하얀 건물이유."
아저씨는 거기까지 말하곤 마른침을 삼켰다.
"여기까지가 내가 아는 이야기요. 더 이상은 아는 게 없으니 삶든 볶든 소용없슈."
아무래도 사실인 모양인지, 아저씨는 내 눈치를 살피며 벌벌 떨었다.
혹여나 내가 해칠까 겁을 먹은 모양이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그려."
아저씨는 어서 내가 사라지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가게에 있는 물건이라도 구매해 드리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돈이 없었다.
"그럼 장사 잘하세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 역시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하얀 건물이라.'
전생에는 이곳에 녀석들이 존재하지도 않았다.
기존에 이곳을 장악한 건 더 씬 소속의 다른 길드들이었으니까.
***
난 '까마귀의 눈'을 사용해 하얀 건물 주변을 관찰했다.
확실히 근처에 있던 어느 장소보다 많은 플레이어들이 보였다.
'흑발에 흑안.'
솔직히 동양인들은 구분하기 어려운 특징이다.
악마 특유의 음습한 기운을 느끼지 못한다면 겉모습만으로는 알아채기 힘들다.
특히 계약자가 아닌 하수인의 경우에는 특히 그렇다.
악마의 계약자는 조금의 변색도 없는 완벽한 검은색 머리칼에 눈동자를 지니고 있지만, 단순한 하수인은 보통 사람보다 조금 더 색깔이 짙을 뿐이다.
다만 여기서 차이가 있는데, 단순한 악마의 하수인은 악마에게 받은 힘을 사용할 시, 안구 전체가 시커멓게 변한다. 그리고 풍겨오는 기운도 좀 더 질적으로 떨어진다.
'악마란 존재는 이래서 성가시다니까.'
신의 경우 아바타를 삼을 때, 보통 한 명, 많아야 두 명 정도로 아바타를 만든다.
그러니 아바타 하나하나에 집중하는 편이며, 간섭도 많다.
악마는 반대다.
자신의 힘을 나눠주는 계약자의 숫자도 많고, 하수인은 그보다 훨씬 많다.
하나의 길드 전체가 한 악마의 소속인 경우도 흔하다.
왜냐면 신들은 플레이어가 가진 가능성이나 재능, 그리고 자신과의 상성을 보지만 악마는 그런 것따위 보지 않는다.
힘이 필요해서 갈망하는 애들. 자신의 말을 잘 들을 것 같은 유혹에 약한 인간을 좋아한다.
악마는 그들에게 간단한 요구를 하며, 지속적으로 힘을 빌려준다.
신의 아바타에는 못 미치지만, 평범한 플레이어보다는 확연히 강한 힘을.
많은 숫자를 통제하기에 악마에게 부담이 갈 것 같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초상의 영역에 발을 디딘 악마가 고작 수십의 인간에게 힘을 빌려준다고 지칠 턱이 없지 않은가.
거기다 이쪽은 '게임'으로서 이 세계에 접근한 것이 아니다.
순수하게 멸망해 갈 이 세계에서 단물을 쪽쪽 빨아먹고자 온 것이다.
신들이 놀이라면, 저쪽은 진심.
다만 인간에게는 해가 되는 진심이다.
그러니 조금 무리한다고 해도 전혀 상관없다는 거지.
"어린아이를 모은다면 비탄의 가면인가."
나는 전생에 있었던 한 악마의 무구를 떠올렸다.
비탄의 가면이라 불리는 한이 응집된 악마의 거죽을.
소유자는 네비로스.
악마 서열 27위의 제법 강한 악마다.
카라스 따위랑은 비교도 안 되는 상위의 존재.
"그렇다 해도 본체가 아닌 한 무의미하지."
비탄의 가면은 인간의 슬픔을 흡수한다.
슬퍼할수록, 눈물을 흘릴수록 그 감정을 흡수하며 동시에 인간의 생명을 가져간다.
흡수한 에너지는 고스란히 네비로스에게 포인트가 되어 들어가게 되며, 비탄의 가면의 힘은 점점 강해지게 된다.
그것을 쓴 대상을 초상의 영역. 즉, 최소 별자리 급의 힘을 발휘할 수 있을 정도로.
"되도록 이곳에 있으면 좋겠는데."
그럴 확률은 없지.
아마 본거지에 있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이것으로 하나 확실해진 게 있었다.
현재 악마의 하수인들을 움직이고 있는 게 흑천회라는 것.
왜냐면 네비로스는 흑천회와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녀석들의 두목이 네비로스의 계약자였으니까.
'본래라면 인천에서 숨을 죽이고 있어야 할 녀석들이....'
호랑이가 없는 곳에 여우가 왕 노릇한다더니 딱 그 짝이다.
'그렇다면 오늘 할 일은 정해졌군.'
본거지의 위치를 알아내고 이곳을 궤멸시키는 것.
'인천에 있었다고 듣기는 했지만 정확한 위치까지는 모르니.'
스윽.
나는 정신을 집중하고 그림자에서 까마귀들을 꺼냈다.
대략 열 마리의 까마귀를 꺼내 계속해서 날려 보냈다.
'창문으로 보이는 조직원의 숫자는 열 둘. 외부에 돌아다니는 이들은 25명.'
상당한 숫자다.
그냥 다짜고짜 쳐들어가는 방법도 있었지만, 굳이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쉽게 처리할 수 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흑의 장막."
나는 어둠속으로 녹아든 다음, 소음차단으로 최대한 소리를 죽였다.
그다음 그림자에서 새까만 깃털을 몇 개 뽑아냈다.
까마귀를 꺼내는 요령과 같지만, 거기서 깃털만 쏙 뺀 거다.
당연히 평범한 깃털은 아니다.
애초에 까마귀 자체가 마력으로 이루어진 마물이나 마찬가지이니 깃털도 하나의 마력덩어리나 마찬가지.
간단히 설명해서 마력덩어리를 뭉친 탄환과도 같은 거다.
마법을 사용하는 게 아닌 한, 외부로 마력을 방출할 기술은 보통 없지만 이건 약간의 꼼수라고 할 수 있다.
직접 마력탄을 던지는 만큼 위력도 제법 괜찮고 '필중' 스킬 덕에 빗나갈 일도 없다.
가장 중요한 건, 검은 깃털을 날린다는 점에서 조금 멋있다.
"어디...."
나는 그것을 손가락에 낀 다음, 매섭게 던졌다.
쉬쉭!
"컥!"
"으헉!"
길을 걷던 플레이어 두 명이 깃털을 목에 맞고 쓰러졌다.
그리곤 기척을 감추고 '그림자 질주'를 사용해, 미리 봐두었던 장소로 이동했다.
"습격이다! 저쪽 방향에서 검은 깃털이 날아왔다!"
"어떤 새끼야! 당장 죽여!"
순식간에 조직원들이 몰려들며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시커먼 기운을 내뿜기 시작했다.
한달음에 내가 방금 서 있던 건물로 뛰어올라왔지만, 당연히 그곳에 나는 없었다.
"크악!"
"이번엔 저쪽이잖아! 한두 놈이 아닌 것 같은데?!"
"젠장,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전혀 안 보인다고!"
"색적, 색적 스킬을 사용해!"
당연히 색적 스킬로는 날 발견할 수 없다.
흑의 장막은 폼이 아니거든.
그림자에서 머무는 이상, 완벽하게 기척을 감출 수 있다.
그림자 질주를 통해 계속해서 이동할 수 있는 내게는 최적의 스킬.
거기다 깃털을 던지는 순간 날 수 있는 조금의 소리도 '소음차단'을 통해 막아져서 사실상 나는 완벽하게 모습을 감추고 공격을 가할 수 있었다.
"빠, 빨리 위에 연락해, 보통 놈들이 아니... 컥!"
그림자 질주의 쿨타임이 돌면 5분간 쉬었다가 다시 공격했다.
이런 행동을 다섯 번 정도 반복하자, 이 근방의 조직원들을 깔끔하게 전멸시킬 수 있었다.
# 48
048. 악마의 흔적(2)
느긋하게 정문을 열고 들어가자 몸을 숨기고 있던 조직원들이 순식간에 나를 둘러쌌다.
전후좌우를 순식간에 포위하며 시꺼먼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일반적인 플레이어들보단 확연히 재빠른 움직임이었다.
'전부 악마의 하수인이라 보면 되겠군.'
적어도 계약자는 보이지 않는다.
악마가 계약자를 비교적 쉽게 정한다고 해도, 눈이 없는 건 아니니 적당히 재능이 있는 이들을 자신의 계약자로 두고 있겠지.
흑천회 소속 계약자 중에 내가 아는 사람은 녀석들의 두목뿐인지라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대체 뭐하는 놈이냐? 대체 어디 소속이기에 이런 간 큰 짓을 벌인 거지? 혹시 그믐달 소속이냐?!"
"그믐달?"
거긴 또 어디지?
더 씬이 없으니 온갖 범죄길드가 우후죽순 생긴 모양이네.
"어딘지 알 필요 없다. 어차피 너희들은 여기서 죽을 테니까."
"미친 새끼! 밖에서야 무슨 꼼수를 사용한 건지는 몰라도 여기서는 마음대로 안 될 거다!"
이 조직원 중에서는 제일 직급이 높아 보이는 녀석이 소리쳤다.
대략 10명이 넘는 조직원들이 포위하고 있으니, 자신감이 생기는 것도 이해는 한다.
'생각보다 안에 있는 녀석들도 많은걸.'
창문으로 볼 때 열 명이 넘는 사람이 보였으니, 당연히 그 이상을 생각하긴 했지만, 입구에서 마주친 숫자만 이 정도라면 배는 더 있다고 봐야 했다.
"마음대로 될지 안 될지는, 네가 정하는 게 아니야."
나는 양손에 단검을 손에 쥐었다.
실내에서 싸우기엔 창이나, 길이가 긴 도검류는 알맞지 않았다.
거기에.
"까마귀의 눈."
나는 그림자에서 대량의 까마귀를 소환했다.
평소처럼 까마귀를 사용해 시야를 확보하려는 게 아니었다.
그저 그림자에서 대량의 까마귀를 소환해 주변으로 날려 보냈을 뿐이다.
그 숫자는 대략 스물.
이 이상 소환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소모 마력을 감당할 수 없을 확률이 높아 그 정도에서 그쳤다.
"이 까마귀들은 뭐야?! 젠장!"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까마귀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던 조직원들의 시야를 방해했다.
나는 그 틈을 노려 정면에 서있던 조직원을 향해 단검을 휘둘렀다.
"으악!"
단번에 목젖을 찔러 절명시킨 후, 단검을 역수로 잡고 오른쪽에서 달려들던 녀석의 동맥을 긁었다.
검은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죽여, 죽이라고! 커억!"
악을 쓰며 소리치는 녀석이 입에 단검을 쑤셔 박았다.
까마귀로 녀석들의 동작과 시야를 방해하며, 속전속결로 녀석들의 급소를 노렸다.
혹여 피하지 못할 것 같은 공격은 그림자 질주를 이용해 빠져나가면 그만이었다.
"괴, 괴물 새끼...."
털썩.
"저기다!"
마지막 조직원이 쓰러트리기 무섭게 다른 악마의 하수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도 방금 만큼 수가 많지는 않았다.
'납치당한 아이들은 어디에 있지?'
나는 탐사 스킬을 사용해서 건물 내부를 살폈다.
건물의 구조로 보아 아무래도 지하 쪽이 마음에 걸렸다.
위층에는 특별히 납치한 아이들을 둘 만한 장소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선은 이곳에 있는 놈들을 모두 죽이고 생각하자.'
네비로스의 하수인들을 살려둘 생각은 없었다.
이놈들은 사실상 몬스터나 마찬가지니까.
어떤 악마와 연관되어 있는지에 따라 다르지만, 네비로스의 하수인의 경우엔 개중에서도 악질이었다.
오직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걸 좋아하는 네비로스이다보니 그 하수인이나 계약자도 그 성향을 닮기 때문이다.
우습게도 몇몇 악마의 경우에는 신보다 인간에게 우호적인 경우도 많았다.
물론 네비로스는 아니지만.
인간을 죽이고, 그 비탄을 갈취하는 것이 네비로스에 속해 있는 인간들의 특징이었다.
"스물 하나, 스물 둘...."
나는 쓰러트린 조직원들의 숫자를 세었다.
대충 건물에 있던 조직원들은 모두 죽인 것 같았다.
덜컹.
지하로 내려가는 문을 열자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각종 보안장비와 두터운 철문으로 보호받고 있었지만 내게는 하등 상관없는 일이었다.
지하 4층까지 내려가서야, 내가 찾던 어린아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누, 누구세요?"
"흑흑, 엄마아."
철창에 갇혀 있는 대략 열 명이 넘는 아이들.
나이는 유치원에 막 다닐 법한 어린애부터 10대 초반까지 다양했다.
"이제 저희도 그곳으로 가는 건가요...?"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소년이 딱딱한 어조로 물었다.
그런데 나를 여기 있던 조직원들과 착각하는 건가?
'...생각해 보면 이상한 건 아니네.'
지금 내가 입고 있는 복장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이었다.
검은색은 악마의 하수인의 특징 중 하나니 오해할 만도 했다.
거기다 내 인상은 좀 어둡기도 하고.
"그곳이라니?"
"검은 옷을 입은 아저씨들이 말했어요. 저희를 '플레이어'로 만들어 주겠다고요."
나는 아이의 말에 그제야 녀석들이 무슨 말로 이렇게 많은 아이들을 꾀어냈는지 알 수 있었다.
플레이어로 만들어 주겠다는 거짓된 선동에 스스로 지옥으로 걸어 들어온 것이다.
당연히 후천적으로는 플레이어가 될 수 없다.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플레이어가 되기 위해 여러 가지 일을 벌였고, 전생에는 그런 것들로 많은 이슈가 있었다.
'이놈들도 그걸 이용하고 있었구나.'
비탄의 가면과 관련된 일은 한참 후에야 알았기 때문에 정확한 정보를 얻지 못했다.
"플레이어는 후천적으로 될 수 없다,"
"그, 그럴 리가 없어요! 저와 비슷한 애들 중에서도 플레이어가 있는 걸요!"
"그건 애초에 플레이어였을 뿐이야. 플레이어가 되는 건 나이와 상관없어."
"그, 그럼 제가 왜 플레이어가 아니죠? 저는 반에서도 늘 1등이었고, 운동도 잘하는데!"
남자아이의 얼굴에는 억울함이 가득했다.
아마 남자아이가 아는 지인 중에 플레이어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본인도 플레이어가 되고 싶었던 거겠지.
"거짓말쟁이! 우리를 플레이어로 만들어준다고 했으면서! 그럼 어서 이곳에서 내보내 줘요!"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다."
아이를 대하는 건 서툴렀다.
린의 경우엔 워낙 어른스러운 탓에 괜찮았지만, 평범한 애들은 역시 무리다.
"아, 아저씨는 다른 검은 아저씨들이랑은 다르네요?"
"당연히 나랑 걔네는 다른 곳 소속이니까."
"소속?"
"있는 곳이 다르다는 말이야."
애초에 지금은 특별히 속해 있는 곳도 없다.
길드를 만들기는 해야 되는데, 어느 지역의 건물을 구매하는 게 좋나.
"저, 저희가 돌아가면 그 검은 옷을 입은 아저씨들이 쫒아오는 거 아닌가요?"
막상 건물 밖으로 나오니 아이들은 불안한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혹시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나타나 다시 자신들을 데려갈까 걱정되는 눈치다.
플레이어가 되고 싶었던 것과 별개로, 그들이 무섭기는 했던 모양이다.
"이 근처에 있던 검댕이 놈들은 모두 쫓아냈으니까 걱정 말고 집에 가. 다음부터는 이상한 말에 속으면 안 된다."
"정말요?"
"그래."
나는 어서 가라는 의미에서 손을 휘휘 내저었다.
열댓 명의 아이들은 어색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보더니 천천히 자신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내부를 살펴볼까?"
아이들도 구출했겠다. 이제 느긋하게 건물 안에서 정보를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 7층이던가?
거기서 지부장이라는 놈이 있었던 것 같은데.
'거기부터 뒤져 봐야겠군.'
되도록 녀석들의 본거지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으면 한다.
한 번에 뿌리를 뽑을 수 있도록.
***
"흑흑, 으아아앙!"
"집, 집에 보내 주세여!"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철창 안에서 울렸다.
스무 명에 가까운 아이들이 모여 있는 방 중앙에는 기괴한 형태의 가면이 있었다.
마치 절규하는 사람의 형상을 본뜬 것 같은 가면.
아이들이 울수록, 그리고 겁을 집어먹고 철창을 흔들수록, 가면은 은은한 빛을 냈다.
그것은 사람의 비탄과 절규를 양식으로 삼는 비탄의 가면이었다.
가장 감정이 풍부한 아이들일수록 그 순도가 높았고, 깔끔했다.
네비로스는 어른들의 욕망이 섞인 음습한 고통과 절규보다 아이들의 순수한 슬픔을 좋아했다.
저벅.
철창을 지키고 있던 남성은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이쪽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검은 인영이 하나 있었다.
흑천회에 존재하는 두 명의 계약자 중 하나인 신자운이었다.
"겨, 경계 중 이상 없습니다! 특별한 문제없이 가면은 정상 작동중입니다."
"그러냐."
삐딱한 자세로 걸어온 그는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철창에 등을 기대고 섰다.
덕분에 경계를 서던 남성은 보통 불편한 게 아니었다.
신자운이 누구던가.
조금만 거슬리는 짓을 하면 아군이고 뭐고 없는 사내다.
거기다 그런 망나니 같은 짓을 해도 악마의 계약자이다보니 흑천회의 수장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다.
애초에 같은 악마의 계약자이니, 누가 위라고 하기도 힘들었다.
신자운이 좀 더 욕심이 있었다면 흑천회는 그의 것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야."
"네, 넵."
"잠깐 좀 나가봐라."
"예?"
갑작스런 신자운의 말에 보초는 커다란 눈을 껌벅거렸다.
"밖, 밖이요?"
"거슬린다."
그렇게 말한 신자운은 주머니에서 담배갑을 꺼냈다.
담배 필 때 거슬리니 나가라는 뜻이다.
"괜찮습니다. 담배연기 조금 맡는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내가 거슬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네, 넵!"
신자운의 말에 잘못 거슬렀다간 뼈도 추리기 힘들었다.
밖으로 나간 보초를 확인한 신자운은 느릿하게 담배에 불을 붙였다.
"...."
아이들이 울고 있는 모습을 무심하게 보며, 그는 주머니에서 동그란 무언가를 꺼냈다.
그리곤 잠시 그것과 철창 안을 번갈아보다가 조용히 안으로 굴려 넣었다.
"쯧."
신자운은 철창 안에서 빛을 발하는 가면을 보며 인상을 와락 찡그렸다.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물건이다.
'형님은 왜 이런 물건을 사용하려는 건지.'
악마의 계약자가 된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걸까.
신자운은 흑천회의 보스에게 빚이 있었다.
힘든 어린 시절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다 그의 덕분이니까.
그래서 신의 아바타가 될 수 있는 기회도 걷어차고 굳이 그의 아래로 들어간 거다.
악마의 계약을 맺은 것도 그 이후다.
강천우가 네비로스의 계약자였기 때문에 자신도 계약을 맺는 편이 좋을 것 같았으니까.
"하여간 좆같은 세상."
악마와 계약을 맺을 생각은 없었지만, 흑천회 보스의 제안을 거절하긴 힘들었다.
"크, 큰일입니다!"
"...내가 나가라고 했을 텐데?"
방금 전에 내쫓았던 보초가 헐레벌떡 뛰어서 들어왔다.
그는 경고성이 담긴 신자운의 말에 움찔했지만, 식은땀을 닦으며 상황을 설명했다.
"화곡동 지부가 괴멸 당했습니다."
"뭐?"
"누, 누군지는 모르겠습니다. 영상을 보니 검은 옷을 입은 남자인데, 확실하지가 않습니다. 까마귀들이 cctv를 대부분 가렸다 보니."
검은 옷을 입은 남자라니, 다른 악마의 하수인들인가?
현재 악마의 계약자들 중,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건 흑천회였다.
그러니 적도 많은 터라 누구인지 특정하기 힘들었다.
'거기다 까마귀라고?'
아무래도 특이한 악마의 계약자인 게 분명했다.
아니면 하수인이거나.
"형님은?"
"5층에 계십니다."
화곡동 지부에 있던 하수인들은 족히 오십 명은 넘었다.
그런데 괴멸 당했다고 한다면 적이 보통내기가 아니란 소리다.
"자운아!"
서둘러 5층으로 올라가니, 흑천회의 보스라고 할 수 있는 강천우가 신자운을 반겼다.
그는 방금 전에 들은 보고 때문에 열이 올랐는지, 한쪽 눈이 검게 타오르고 있었다.
"어떤 개새끼가 화곡동 애들을 다 죽여 버렸다."
"들었습니다."
"네가 좀 손봐줘야겠는데... 괜찮지?"
"형님이 원하신다면."
"그래, 그래."
어깨를 두드리며 웃는 강천우의 말에 신자운은 옅게 웃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악마 같은 인물인 건 분명했지만, 자신에게는 유일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다.
"우선 화곡동 주변을 수소문해서 추적해 보겠습니다."
"너만 믿는다. 꽤 강한 놈 같으니 방심하지 말고."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CCTV에 찍힌 남자가 대단한 실력자인 건 분명했지만, 신자운은 자신이 있었다.
네비로스가 말하길, 현재 존재하는 악마의 계약자 중에 가장 강한 건 신자운이라고 직접 이야기 했으니까.
# 49
049. 계약자 신자운(1)
본거지는 인천 주안.
자세한 위치는 지부장이 남긴 문서에 남아 있었다.
악마와 관련된 일은 쓸데없는 은원관계에 휘말릴 가능성도 있었기에, 이번에도 움직인 건 나 혼자였다.
'다만 따라붙은 녀석들이 많아서 성가시네.'
오늘은 달도 잘 보이지 않은 밤하늘이라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상당한 숫자의 옵저버들이 내 뒤를 쫓아오고 있었다.
그중 단연 눈에 띄는 건 어릿광대의 옵저버다.
개인 옵저버라 다른 옵저버랑 모양이나 색도 미묘하게 달라서 알아보기가 쉬웠다.
'당신 아바타인 민아나 지켜볼 것이지.'
하기야 지금 민아는 자신의 능력을 이것저것 실험해 보느라 지켜볼 것도 없었다.
당장 메인 퀘스트도 없었고, 서브 퀘스트는 아직 게임 시스템이 지원을 하지 않았다.
다섯 번째 메인 퀘스트가 끝나야 서브 퀘스트를 비롯한 기능들이 해금되기 때문이다.
"괜히 들키지 말도록 합시다. 옵저버가 보이면 습격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내 말을 들었는지 옵저버들이 슬금슬금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옵저버 자체를 은폐시켜 모습을 감춘 것이다.
저런 기능이 있으면 진작 쓸 것이지.
아카터스가 조종하는 옵저버는 보이지 않았다.
'그야 제재를 먹었으니까.'
녀석이 운용하는 옵저버는 당분간 볼 일이 없을 거다.
그러니 이곳에 있는 건 공용 옵저버가 대다수였다.
공용 옵저버는 일정 포인트를 이용하면 일정시간 대여할 수 있는 옵저버로, 따로 옵저버를 사용할 일이 있으면 사용하는 물건이었다.
플레이어를 관찰하는데 사용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는데, 이렇게 몰려든 걸 보면 일정 포인트를 희생하고서라도 내 플레이를 보고 싶다는 거겠지.
이건 어떤 의미론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했다.
신들의 주목을 받는 인간이란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니까.
'응?'
난 그 옵저버들 틈에서 아직까지 은폐를 하지 않은 한 공용 옵저버를 볼 수 있었다.
다른 것들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뭔가 기색이 달랐다.
끈적끈적한 열망과 감탄이 담긴 시선이 느껴졌다.
'설마.'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내게 그런 시선을 보내던 녀석은 한 명뿐이니까.
좀 더 유심히 보기 위해 몸을 일으키자, 이미 그 옵저버는 모습을 감춘 지 오래였다.
'...마녀의 옵저버인가?'
확신할 수는 없지만 느낌이 좋지 않았다.
혹시 몰라 커뮤니티의 반응을 확인했지만, '녀석'으로 추측되는 신은 보이지 않았다.
하긴 마녀는 채팅 같은 걸 할 성격이 아니었지.
'아니, 아니겠지.'
만약 녀석이 전생과 같은 시선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다면, 이미 내게 아바타 신청을 넣었을 것이다. 지금도 내게는 많은 아바타 신청이 들어오고 있었지만, 그중에 마녀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저 녀석들을 어찌 상대하냐는 건데."
어두운 하늘 위에 밤처럼 어두운 까마귀들이 배회하고 있었다.
당연히 내게 시야를 제공하고 있는 까마귀들이다.
새까만 까마귀들은 아침과 달리 플레이어들의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밤하늘을 배회하고 있었다.
'숫자도 화곡동 지부에 비할 바가 아니군.'
주원에 오고 느꼈지만, 이 근방에는 악마의 하수인들이 쫙 깔려 있었다.
본진인 건물 근처에만 수십 명이 깔려 있었고, 저 빌딩 안에는 그에 버금가는 수의 하수인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흑천회에 속한 악마의 하수인들의 숫자는 대략 수백에 이를지도 모른다.
'길드'가 생긴 지 얼마 안 됐다는 걸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규모다.
이러니 나중에는 수천이 넘는 하수인을 모아 더 씬과 대립할 만도 하지.
규모야 더 씬이 훨씬 컸지만, 수천이 넘는 하수인들은 평범한 플레이어들 수십 명의 힘을 낼 수 있으니까.
"이 정도 수면 아무리 나라도 정면은 부담스러운데...."
악마의 계약자가 몇 명이나 있는지 모르는 상황이니 무작정 들어가기는 힘들었다.
내 기억으로는 다섯 정도가 있었지만, 그건 한참 후의 일이니 정보가 부족했다.
툭.
"뭡니까?"
무언가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굳이 고개를 돌려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어릿광대의 옵저버다.
어릿광대는 아마 내가 그저 민아의 옵저버정도로만 인식하리라 생각할 거다.
아무래도 좋다. 그 정도만 알고 있는 게 나에게도 그녀에게도 좋으니까.
어쨌든, 옵저버는 내게 이렇게 묻고 있는 거다.
'정말로 방법이 없어~?'
라고.
'그럴 리가 있나.'
확실히 적의 숫자는 많다.
무작정 들어가면 포위될 테고, 주원에 있는 모든 하수인들이 움직이게 될 것이다.
그럼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도 쉽지 않겠지.
아무리 나라도 그건 선택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그러니, 싸우는 건 나중으로 미룬다.
"우선 지하에 있는 이들을 구출할 겁니다."
지부장이 지니고 있던 문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본 건물의 지하에 있는 '유물'을 깨우기 위해 아이들을 이용하고 있다고.
그러니 나는 이 녀석들을 처리하기 전에 아이들부터 구출할 생각이었다.
녀석들을 처리하는 건, 그다음이었다.
***
현재 내가 가진 스킬은 대부분이 '암행'에 최적화된 스킬들뿐이다.
소음차단도 그렇고, 그림자 질주나, 흑의 장막까지 은밀하게 움직이는 것에 최적화된 스킬들이었다.
고로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현재 지구에 존재하는 어떤 플레이어보다도 은밀하게 움직일 수 있다고.
그러니 본거지에 숨어들어 지하로 내려오는 건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아, 빡치네."
지하로 내려오자마자 거친 욕설이 들렸다.
나는 어둠에 녹아들어, 지하실에서 들려오는 대화를 엿들었다.
"빨리, 빨리 움직여! 오늘은 분위기가 안 좋다고."
"이 새끼들은 예상보다 왜 이렇게 빨리 죽었데? 적어도 이틀은 더 버틸 수 있지 않았나?"
"몰라. 시발. 화곡동 지부가 개박살 나서 애새끼들도 새로 구해야 할 판인데."
두 명의 사내의 대화가 들려왔다.
슬쩍 보면 그들은 아이들의 사체를 철창에서 꺼내고 있었다.
'이런, 이미 늦었나?'
바로 온다고 온 것이었지만, 제시간을 못 맞춘 모양이다.
"근데 그냥 이대로 꺼내만 두면 돼?"
"모르겠다. 평소에는 신자운 대장님이 직접 처리하러 가시는데...."
신자운 대장?
처음 듣는 이름이다.
전생에도 그런 녀석이 흑천회에 속해 있었나?
애초에 악마 쪽은 잘 알지 못하다보니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마치 군데군데 빠져있는 퍼즐을 맞추는 기분이다.
'더 들을 말은 없겠어.'
아이들의 죽음과 관련된 대화를 계속 들어봐야 기분만 나빠질 것 같았다.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지하실 안으로 들어갔다.
저벅.
지하실 안으로 들어간 나는 의도적으로 발소리를 내었다.
아이들의 사체를 질질 끌고 움직이고 있던 두 명은 기척을 느꼈는지 천천히 등을 돌렸다.
"어? 뭐야 누구야?"
"모르는 얼굴인데? 신입인 거 아냐?"
그다지 긴장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 녀석들은 내가 같은 편이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거, 인상 좀 펴라. 젊은 놈 같은데."
"아마 우리 둘이 고생할 거 알고 신입놈 하나 보냈나 보네."
정말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이들은 나를 완벽히 같은 악마의 하수인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나는 무심코 얼굴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내가 그렇게 악마의 하수인처럼 보이나?'
거기다 인상 좀 피라는 말을 듣다니.
그래도 전생에 비해선 많이 피고 다닌 건데.
"뭐해? 빨랑 돕지 않... 컥!"
"뭐, 뭐야? 갑자기... 으헉!"
털썩.
녀석들이 괜한 말을 떠들기 전에 바로 죽였다.
괜히 친근하게 군 탓에 시간만 낭비하고 말았다.
툭툭.
어릿광대의 옵저버가 또 어깨를 두드렸다.
이번에는 '인상 좀 피라는 말에 짜증났어?'라는 느낌이다.
"아닙니다."
나는 짤막하게 대답하고 녀석들이 바닥에 눕혀둔 아이들의 시체에 손을 댔다.
하나같이 창백한 얼굴에, 몸이 차가웠다.
어디로 봐도 죽은 시체였다.
"이상한데...."
하지만 나는 이상했다.
왜냐면 죽은 아이들의 얼굴이 지극히 평온했기 때문이다.
'비탄의 가면은 슬픔을 흡수한다.'
그것을 흡수당한 인간은 죽는 그 순간까지 비탄에 빠진 채로 죽는다.
당연히 평온한 얼굴과는 거리가 멀었다.
"거기다 비탄의 가면에 축척된 힘도 생각보다 적어."
철창 안에는 비탄의 가면이 벽에 걸려 있었다.
거기서 느껴지는 힘은 강력했지만, 화곡동에서 보았던 문서로 볼 때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야 정상이다.
적어도 2주간 수많은 아이들의 생명을 빨아먹었을 테니까.
"잠깐만, 이건...."
나는 철창 안에서 굴러다니는 작은 구슬을 발견했다.
이건 아이템이다.
일반적으로 구하기는 힘든 아이템이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일정시간 후, 구슬에서 가스가 나와 일정범위 내의 생명체를 가사상태에 빠트린다.
문제는 '몬스터는 제외하고'다.
이걸 사용하는 경우는 몬스터에게 목숨의 위협을 받을 때 스스로에게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몬스터 중에서는 이미 죽은 인간에게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 녀석들이 많기 때문이다.
물론, 고블린 같은 놈들은 죽은 인간의 사체도 훼손하는 편이라 사용하면 편안한 자살이 될 수 있다.
'이것의 지속시간은 대략 세 시간.'
아이들이니 배는 더 길게 갈 것이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지금 이 아이들은 가사상태에 빠졌을 뿐 죽지는 않았다는 거다.
'대체 누가 이걸 사용한 거지?'
사용한 의도도 모르겠다.
아이들을 구출하기 위해서인가? 악마의 하수인이나 계약자가 그런 생각을 한다고?
"모르겠어."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밖에 생각이 되지 않았다.
그렇지 않으면 굳이 이 아이템을 사용하여 다른 하수인들을 속일 필요가 없으니까.
"...."
나는 구슬을 주머니에 넣었다.
의도는 알 수 없었지만, 우선 지금은 이 아이들을 밖으로 내보내는 게 먼저였다.
그래야, 이곳을 끝장내 버릴 수 있으니까.
***
"아직도 누구인지 못 찾았나?"
"예, 자운이가 열심히 찾아보는 모양인데, 흔적도 남기지 않았답니다."
"아니, 대체 어디서 그런 놈이 튀어나온 거야?"
흑천회를 이끄는 길드장, 강천우는 속에 열불이 끓어올랐다.
한창 잘 진행되고 있던 일에 찬물이 끼얹어진 격이었으니까.
"네비로스 님에게는 좀 더 기다려달라고 해야겠군."
"예, 아무래도 아이들을 다시 모으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하...."
지금 세상에서 밖에 돌아다니는 아이들을 찾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워낙 많은 사람이 죽은 탓에 아이들의 숫자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개간된 장소가 아니면 여전히 몬스터들이 출몰하기 때문에, 상식이 있는 부모라면 아이들을 밖으로 내보낼 리 없었다.
"검은 옷을 입은 놈이라, 다른 악마의 하수인일 확률이 높아."
웬만한 계약자들은 다 알고 있는 천우다.
그중에서 까마귀를 다루는 녀석은 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왜 까마귀를 다루는지도 불명이다. 까마귀를 다루는 스킬이 있는 건지, 아니면 까마귀를 테이밍해서 사용하는 건지.
"어떤 악마의 하수인, 아니 계약자라도 길드장님에게는 안 될 겁니다!"
"당연하지. 자운이 녀석 정도만 아니면 다 내 발밑이야."
천우는 껄껄 웃으며 신자운을 떠올렸다.
신자운이 그를 따른 건 행운 중의 행운이었다.
네비로스도 감탄할 정도의 강함을 가진 신자운은 천우가 흑천회를 세우는데 도움을 준 일등공신이었다.
"참, 그 신자운 말인데... 괜찮은 겁니까?"
"음? 그게 무슨 소리지?"
"녀석은 너무 강하지 않습니까. 만약 녀석이 다른 마음을 품는다면...."
"그런 소리 말게. 그래보여도 자운이는 나를 큰형처럼 생각해서 절대 배신하지 않아."
"정말로 그럴 거 같습니까?"
남자의 말에 천우는 입을 다물었다.
'절대'란 없다.
신자운이 만약 배신을 해서 자신을 습격한다면 솔직히 이길 자신이 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 넘어가지."
"예, 하지만 꼭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그래, 그러면 그 까마귀를 다루던 플레이어 말인데...."
천우의 말이 멎었다.
"왜 그러십니까? 말하다 마시고."
"이봐, 저, 저게 뭐로 보이지?"
넋이 나간 천우의 얼굴은 그다지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남자는 대체 무엇이 천우를 그토록 놀라게 했나 궁금해졌다.
"헉."
그리고 본인도 말을 잊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창밖으로 무수한 숫자의 까마귀들이 날아오고 있었으니까.
콰창! 콰창!
창문이 깨어지며 날아온 까마귀들이 들어왔다.
그것은 비단 천우가 있는 최상층만이 아니었다. 건물 전체에 까마귀 때가 유리창을 깨며 들어온 것이다.
"뭐, 뭐냐! 갑자기 어디서 까마귀들이 날아온 거지?"
천우는 기겁하며 갑자기 날아든 까마귀들을 보았다.
그런데 아무래도 뭔가 이상했다.
애초에 수많은 까마귀들이 건물을 유리창을 부수고 들어온 것도 이상했지만 이어진 까마귀들의 행동도 이상했다.
계속 벽이나 바닥에 몸을 짓이기며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모습은 일반적인 까마귀가 할 만한 행동이 아니었다.
그런 까마귀를 유심히 관찰하던 남자가 말했다.
"형님, 까마귀의 발에 뭔가가 붙어있습니다."
"뭐?"
천우는 바닥에 바르작거리는 까마귀의 발을 유심히 보았다.
확실히 뭔가가 붙어있었다.
"뭐냐, 이건. ...폭탄?"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마치 벽에 붙여 사용하는 것 같은 형태의 폭탄이었는데, 접착부에 벽 대신 까마귀의 발을 붙인 것 같았다.
"폭탄, 폭탄이라고?!"
천우는 기겁하며 까마귀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곤 전력으로 깨어진 창문을 향해 달렸다.
──이미 늦은 행동이었지만.
콰콰콰쾅!!
커다란 폭음과 함께, 흑천회의 건물이 폭발했다.
# 50
050. 계약자 신자운(2)
「본거지가 습격당했다.」
"뭐?"
바이크를 타고 도로를 질주하던 신자운의 귓가에 악마'네비로스'의 말이 들려왔다.
"그 말이 사실이냐?"
「멍청한 놈, 내가 이런 것에 거짓말을 할 필요가 있나?」
네비로스는 건방진 신자운의 어투에 영 언짢아진 모양이었다.
「약해빠진 놈들을 긁어모아 봐야 쓰레기장이 될 뿐이로군.」
끌끌 혀를 차는 네비로스의 말에 신자운은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다.
"형님, 형님은 어떻게 됐지? 그리고 가면은?"
「가면은 건물이 폭파되며 그대로 묻혔다. 인간의 아이들을 구출할 때 혹시 손을 대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대로 두고 가더군.」
자신의 유물인 비탄의 가면이 땅속 깊은 곳에 처박혔음에도 네비로스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악마의 유물은 일정 신위를 가진 존재나, 악마 본인, 그리고 해당 악마의 계약자가 아닌 이상 파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마 그 녀석도 그 사실을 알기에 굳이 건드리지 않고 건물채로 매장해 버렸으리라.
"...아이들을 구출하는 게 목적이었나?"
「그건 나도 모른다.」
"젠장! 형님이 그렇게 간단히 죽을 리 없다. 악마의 계약자잖아!"
「악마의 계약자라고 해도 육신은 인간이지.」
플레이어란 존재는 인간을 초월한 존재이지만 인간의 육신을 가지고 있다.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그 한계를 넘어서지만, 아직 그 정도까지 강해진 인간은 없었다.
폭탄의 위력을 막아냈다고 하더라도, 무너지는 빌딩 더미에 깔리고서 살아남을 플레이어는 현재 없었다.
단순한 물리 공격에 면역을 가지는 몬스터와 달리 인간은 아니니까.
흑천회를 습격한 놈도 그걸 노린 습격이었다.
대량의 까마귀에 폭탄을 매달고 건물 내부에 집어넣은 뒤, 일격에 폭사.
폭탄으로 죽인다기보단, 붕괴되는 건물의 파편에 깔려죽는 걸 노린 것 같았다.
폭탄도 생명체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닌 오로지 건물을 파괴에 특화된 폭탄이었으니까.
「까마귀를 다루는 인간이라니, 신기한 놈이군. 아, 그런가.」
"뭐가 그렇다는 거지?"
「최근 까마귀 자리가 바뀌었거든.」
"까마귀 자리라면, 별자리?"
「그래. 정확히는 아직 까마귀 자리에 오를 격을 마련하지 못해 자리 자체는 비어 있다고 봐야지. 하지만 기존의 까마귀 자리를 죽이고 그 힘을 계승한 녀석이 있는 모양이야.」
본거지를 습격하던 스킬을 생각하면 결코 일반적인 스킬이 아니었다.
처음 화곡동에서 있었던 습격으로 의심하기 시작했지만 이번 일로 확신했다.
흑천회를 습격한 자는 까마귀 자리 카라스를 죽인 플레이어가 분명했다.
"녀석을 아나?"
「알다마다. 현재 가장 유명할 플레이어 중 하나지. 악마는 신들의 '커뮤니티'에 접속할 수는 없다만, 건너건너 정보는 들어오는 법이지.」
수많은 신들이 굳이 공용 옵저버를 사용하면서까지 지켜보는 존재다.
어떤 플레이어보다 정보를 모으기 쉬웠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신자운의 눈에서 시퍼런 불길이 타올랐다.
본거지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강천우를 죽인 놈을 용서할 수 없었다.
강천우는 분명 인간쓰레기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는 자였지만, 적어도 신자운에게는 친형 같은 존재였다.
유일한 가족이었다.
그의 말에 어쩔 수 없이 따르는 면이 없잖아 있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어린 시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강천우가 자신을 도와줬기 때문이니까.
끼기기긱!
신자운은 빠르게 바이크를 틀었다.
"안내해라."
「어딜?」
"그 녀석이 있는 곳."
「아직은 본거지에 있다. 혹시 살아남은 자가 있을지 확인하는 모양이더군.」
그 말에 신자운은 이를 악물었다.
본거지로 가야 할지 망설였지만, 자신이 갔을 때는 이미 늦었을 거다.
차라리 녀석이 그랬듯, 녀석의 본거지를 노릴 생각이었다.
"혹시 동료가 있나?"
「있다. 그런데 그건 왜 묻지?」
"녀석은 제대로 모습을 드러내고 싸우는 놈이 아니야. 싸움을 건다고 해도 정면에서 싸워주지 않겠지."
화곡동도 그렇고, 이번 본거지 습격건도 그렇고 녀석은 정면에서 싸울 실력이 있음에도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녀석의 싸움은 단순한 '전투'가 아니라 '사냥'하는 방식이었다.
솔직히 자운도 녀석이 숨어서 습격한다면 막을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면, 숨지않고 싸워야만 하는 상황을 만들면 되는 거다.
「흥미롭군.」
자운의 말에 네비로스는 고소를 머금었다.
「너는 확실히 악마의 계약자 중에 제법 뛰어나지. 꽤나 즐거운 싸움이 되겠어.」
네비로스는 인간을 하나의 체스말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신자운에게 비교적 친절하게 대해주는 것도 신자운이 쓸모가 있는 존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녀석의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거기가 녀석의 본거지겠지."
「상관은 없다만, 만약 네놈이 놈에게 패배한다면 나는 네게 흥미를 잃을지도 모른다.」
네비로스는 한번 패배한 쓰레기를 굳이 자신의 계약자로 둘 생각이 없었다.
"내가 놈의 상대가 안 되기 때문인가?"
「그래. 나는 굳이 질 만한 싸움을 추천하고 싶지는 않군.」
네비로스는 거기까지 말한 뒤, 자운의 귓가에 부드럽게 속삭였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방법?"
「가면을 사용하면 대등한 싸움을 벌일지도 모른다. 아직 미완성이다만, 그것만으로 플레이어 하나를 상대하는 건 충분해.」
비탄의 가면.
네비로스가 가진 악마의 유물.
수많은 아이들의 슬픔이 응집된 결정체. 그것이 품고 있는 힘이라면 그 까마귀를 상대로 좋은 승부를 펼칠 수 있을 거다. 아니, 분명 이기겠지.
'나쁘지 않아.'
그것도 자신의 계약자가 최고 루키나 마찬가지인 까마귀의 날개를 꺾는다면, 그것만큼 유쾌한 일도 없으리라.
"...."
「왜 싫은가? 네가 그것을 싫어한다는 건 안다만, 지금 그런 걸 가릴 처지가 아닐 텐데?」
"안다."
그래도 가면은 싫다.
하지만 네비로스의 말대로라면 까마귀의 실력은 분명 자신을 한참 상회할 터.
"알겠으니까, 안내해라. 녀석이 했던 것처럼 나도 똑같이 할 생각이니."
「좋아.」
허공에서 새까만 구멍이 열리며 기괴한 형태의 가면이 나타났다.
땅속에 묻혀있던 비탄의 가면을 소환한 불러낸 것이다.
「잘 가지고 있게나, 계약자여. 그럼 이 비탄의 악마 네비로스가 승리를 가져다 주지.」
"웃기는군."
광대처럼 지껄이는 네비로스의 말을 흘려들으며 자운은 짤막하게 답하며 바이크의 속도를 높였다.
볼에 차가운 물방울이 스쳤다. 조금씩 비가 내리기 시작한 모양이다.
***
"와, 비 엄청 온다."
민아는 물기가 묻은 머릿결을 수건으로 닦으며 말했다.
창밖으로 쏟아지는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오늘은 더 이상 밖에 못 나가겠네."
아직 개간이 안 된 지역에서 몬스터를 사냥하던 민아는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비에 급히 머물던 건물로 돌아와야만 했다.
본래 카페로 사용되던 장소지만, 지금은 빈 건물이었다.
"언니, 여기 따뜻한 차예요."
민아는 린이 내민 찻잔을 받았다.
카페다보니 모양이 예쁜 찻잔도 많이 있었다.
더불어 차도 많이 남아 있어서, 자주 타 마시곤 했다.
"땡큐, 땡큐. 근데 지수 언니는?"
"모르겠어요. 아직 안 오신 것 같아요."
"그래?"
세한 오빠가 이곳에 남으라고 한 뒤로 침울해진 기색이었지만, 그래도 이 주변을 계속 돌아다니며 경계를 서고 있었다.
자신의 능력이 부족해서 두고 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래도 얌전히 시킨 일을 수행하고 있는 거보면 마치 강아지 같다고 생각했다.
지수의 앞에선 차마 말할 수 없지만.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지.'
처음에는 조금 무서웠지만 특별히 해코지하는 것도 없어서 지금은 꽤 익숙해졌다.
오히려 실력만큼은 확실히 굉장해서 세한이 없는 지금은 훌륭한 보호자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아직도 스킬이라는 걸 사용하는 게 어색하구나."
반면 루크는 침울한 기색이었다.
민아와 함께 몬스터를 잡으러 갔었지만, 잡은 몬스터의 수가 민아에게 한참 못 미쳤다.
"아저씨도 참, 그냥 팔다리를 사용하듯 사용하면 된다니까?"
"으음, 어렵군, 어려워. 나는 잘 모르겠다."
우락부락한 거한이 침울한 얼굴로 말하는 것도 제법 웃겼다.
"그럼 내가 다음에 좀 더 자세하게...."
쨍그랑!
찻잔을 들고 걸어가던 린이 갑자기 놀란 것처럼 잔을 떨어트렸다.
"번개에 놀랐어? 어디 다치진 않았지?"
"저, 저기."
민아는 찻잔을 떨어트린 린에게 다가와 혹시나 다치지 않는지 살폈다.
그런데 아무래도 린의 기색이 이상했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서 카페의 입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 뭔가가 와요."
"오다니?"
"모르겠어요, 하지만 분명 무서운 게 오고 있어요."
평범한 아이라면 그저 넘겨도 될 말이었다.
밖에 비도 오고 번개도 치는 상황이라 그것에 놀란 걸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린은 평범한 여자아이가 아니었다.
엄연히 플레이어였고, 직감이 무섭도록 뛰어났다.
덜컹!
딸랑, 딸랑.
그때, 카페의 문이 열리며 맑은 종소리가 울렸다.
"...누구?"
문을 열고 들어온 건, 검은 남자였다.
검은 머리칼에, 검은 눈, 검은 정장을 적당히 풀어헤쳐 입고, 안에는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있는 남자였다.
조금이지만 세한이 연상되는 모습이었다.
둘 다 검은 옷차림이라는 점에서.
빗속을 뚫고 왔는지, 전신이 비에 젖어있었다.
저벅, 저벅.
남자는 느릿한 걸음으로 카페의 안으로 들어오다니 천천히 주변을 훑었다.
마치 몇 명이나 있는지 확인하는 것 같았다.
"...!"
남자의 검은 눈동자가 자신에게로 향하는 순간, 민아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거, 위험하다.
부웅!
"호오."
민아는 반사적으로 머리를 숙였다.
머리 위로 시원한 바람이 스쳐지나갔다.
솔직히 운이 좋았다. 그간 자신보다 강한 녀석을 대면한 경우가 많아서인지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인 것이다.
"윽!"
카앙!
남자의 왼손이 뱀처럼 휘어지며 민아의 복부를 후려쳤다.
하지만 그것도 몸을 미스릴로 경화시켜서 막아낼 수 있었다.
'그런데도 이 충격이라고?'
맨몸으로 맞았다면 그대로 정신을 잃었을 것이다.
미스릴로 경화된 몸에 충격을 주는 주먹이라면 웬만큼 튼튼한 플레이어가 아닌 이상, 일격에 비명횡사할 수 있는 위력이었다.
"얌전히 있어준다면 적어도 고통은 없이 끝내주마."
"싫거든?"
양팔을 멘티스의 낫으로 변화시킨 후, 크게 휘둘렀다.
남자는 그것을 가볍게 위빙으로 피하며 빈틈이 생긴 민아의 몸에 재차 두 방의 주먹을 꽂았다.
"악!"
이번에는 전보다 훨씬 강한 충격에 민아의 몸이 굽혀졌다.
민아도 실전으로 다져진 실력자임이 분명했지만, 남자의 움직임은 급이 달랐다.
그건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와 같았다.
쓰러져 신음하는 민아를 향해 남자는 천천히 주먹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망치처럼 내려치려는 찰나.
날카로운 검격이 그 사이를 갈랐다.
"주먹을 쓰는 법을 배운 모양이군, 청년."
"...."
남자는 갑자기 끼어든 금발의 외국인을 보았다.
방금 이 여자와 함께 있던 여자아이를 뒤로 숨긴 채 말하는 거한은 이 세계가 '게임이 되기 전'에는 상당한 실력자였음이 분명했다.
"안타까워."
남자는 짧게 탄식했다.
아마 상대는 자신보다도 대단한 전투실력을 가진 프로일 게 분명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거한은 부족했다.
이 게임에 제대로 적응을 하지 못했으니까.
"미안하지만 이쪽도 시간이 없어서 말이지."
남자, 신자운은 천천히 자세를 잡았다.
세한이 오기 전에 이곳 상황을 빠르게 정리해야만 했다.
"그러니 얌전히 죽어라."
"그럴 수는 없지. 딸아이가 있어서 말이야."
둘의 시선이 빠르게 교차했다.
콰쾅!
창밖에서 번개가 치는 순간, 카페의 유리창이 일제히 터져나갔다.
***
인천 주안.
흑천회의 건물은 산산이 부서졌다.
당연히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죽었고, 주변에 도망치는 녀석들은 재빠르게 정리했다.
"역시 효과가 좋네."
사용한 물건은 바질리스크 오르가와 싸울 때 사용했던 폭탄이다.
건물 바닥을 부수고 녀석을 지하까지 떨어트렸던 물건.
살상력은 없지만, 건물을 부수는데 이것만큼 좋은 폭탄이 없었다.
"아, 그래도 머리가 좀 아프긴 하군."
백 마리의 까마귀를 소환해서 지면에 늘어둔 폭탄을 밟게 했다.
폭탄의 뒤편에는 강력한 접착제가 묻어있어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다음은 단체로 건물로 돌격시켜서 폭파.
'까마귀의 눈'으로서 활용하는 것과 다르게 오로지 '앞으로 날아가라'라는 명령밖에 할 수없었다.
백 마리의 까마귀를 어떻게 컨트롤한단 말인가.
그냥 직진, 무조건 직진시켰을 뿐이다. 그래서 건물 벽에 메다꽂고 죽은 까마귀의 숫자도 상당했다.
벽에 폭탄이 붙어버린 탓에 전혀 문제는 없었지만.
"그럼 흑천회 쪽도 이걸로 정리가 끝났나."
이 녀석들을 죽인다고 모든 악마의 계약자나 하수인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은 이걸로 좋다. 후에 생기는 놈들은 다시 처리하면 그만이다.
'가면은... 녀석이 알아서 회수해갔겠지.'
부술 수도 없는 터라 건물과 함께 묻어버렸지만, 어차피 네비로스가 가져갔을 것이다.
자신의 악마의 유물이니 소환하는 건 일도 아니겠지.
툭툭.
산산이 부서진 건물을 바라보고 있으니 어릿광대의 옵저버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또 뭡니까?
이젠 특별히 보여줄 것도 없었다.
보여줄 상대가 없으니까.
하지만 어릿광대의 반응이 이상했다.
허공에서 부르르 떨더니, 갑자기 흙바닥에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내 아바타가 위험해.」
아바타가 위험하다니?
흑천회도 사라진 상황에서 위험해질 만한 일은....
툭툭!
어릿광대의 옵저버가 더욱 강하게 어깨를 두드렸다.
그제야 상황을 인지한 나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릿광대가 이렇게 반응할 정도면, 아무래도 정말 위기인 모양이었다.
# 51
051. 계약자 신자운(3)
덜컹.
부서진 탁자에 몸을 기댔다.
'능력치가 조금만 더 높았다면 위험했을지도.'
신자운은 쓰러져있는 금발의 남자를 보았다. 주먹을 정확히 관자놀이에 명중시켜 기절시킬 수는 있었지만, 그건 자신이 그보다 기본적인 속도가 더 빨랐던 덕분이다.
이전에 무슨 일을 하던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평범한 플레이어와는 움직임이 달랐다.
"후우."
바닥에는 민아와 루크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손을 뻗는다면 이제 목숨을 끊는 것도 문제가 아니었다.
"아, 아빠!"
이제 막 1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루크의 몸을 잡고 흔들었다.
덕분에 자운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쩐지 오래전 일을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다.
'성가시게.'
아이를 죽이는 건 껄끄럽다.
거기다 아이가 보는 앞에서 그 부모를 죽이는 것도 껄끄러웠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형님의 복수를 위해선 똑같이 갚아줄 수밖에 없었다.
「호오, 이건 또 재밌는 게 있네.」
"갑자기 뭐냐."
우선 울고 있는 린을 기절시키려던 신자운은 갑자기 들려온 네비로스의 목소리에 짜증이 치밀었다. 네비로스의 목소리는 간드러지는 구석이 있어서, 가만히 듣고 있으면 소름이 돋았다.
「이 아이, 죽이지 마라.」
"어째서?"
애초부터 아이는 죽일 생각이 없었지만, 네비로스의 말은 의외였다.
아이의 슬픔과 절망을 가장 좋아하는 변태 새끼가 할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굉장한 잠재력을 지녔어. 이 순도 높은 마력.... 분명 좋은 재료가 될 거야.」
좋은 재료라.
결코 좋은 말은 아니었다.
차라리 자신의 손으로 이곳에서 죽여주는 게 나을 정도로.
"...알겠다. 나머지는 내 마음대로 해도 되겠지?"
「상관없다.」
자운은 먼저 쓰러져 있는 민아에게 다가갔다.
신기한 능력을 사용하던 플레이어였고, 싸움에도 능숙했지만 자신에게 너무 쉽게 접근을 허용했다.
그저 상대가 나빴다고 할 수밖에 없다.
잠든 것 같은 평온한 민아의 얼굴을 바라보며 자운은 좀 망설였다.
어쨌든 민아도 아직 10대의 고등학생이니까.
"쯧."
결국 자운은 짧게 혀를 차며 민아에게 뻗던 손을 치웠다.
이래서 이상한 마음이 생기기 전에 한 번에 죽였어야 했는데.
"꼬마."
"흑, 흑, 히끅! 네, 네?"
"따라와라."
"네?"
갑작스런 자운의 말에 린이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네 아비와 이 여자를 죽게 하고 싶지 않다면, 얌전히 따라오는 게 좋을 거다."
"제, 제가 따라가면 살려주실 건가요?"
"그래."
본래는 다 죽여 버릴 생각이었으나, 하필 어린애만 둘에, 다른 한 명은 그 부모일 줄은 몰랐다.
'하, 젠장.'
욕설이 치밀어 올라왔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쨌거나, 까마귀 놈이 습격할 수 없는 상황 만들기만 하면 되니까.
죽이지는 못해도 인질만으로 충분히 녀석을 도발할 수 있으리라.
자운은 애써 그렇게 생각했다.
"아, 알겠어요."
"그래? 그럼...."
자운은 손을 들고 린의 목덜미를 내리쳤다.
바닥에 쓰러진 린을 자운은 눈을 가늘게 뜨고 보았다.
'이 녀석, 방금 내가 손을 내리치는 걸 본 건가?'
궤적에 따라 눈동자가 움직이는 걸 느꼈다.
민아도 제대로 보지 못했던 자운의 공격을 확실히 본 것이다.
아무리 자신이 힘에 가감을 했다고 해도, 어린애가 볼 만큼 느리지는 않았다.
"얘는 대체."
네비로스가 관심을 보일 때부터 이상했지만, 아무래도 보통 어린애는 아닌 것 같았다.
후두둑.
기절한 린을 한손으로 대충 들고 밖으로 나가자,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워낙 비가 많이 내리는 터라, 자운은 자신의 허리춤에 들려있는 린이 신경 쓰였다.
'내가 뭔 생각을 하는 건지.'
아까 린이 울면서 루크를 감싸던 모습에서 어린시절의 환영을 본 탓이다.
자운은 눈가를 적당히 손가락으로 누른 뒤, 오토바이에 발을 걸쳤다.
쉬익!
"...?!"
그때, 빗속을 뚫고 한줄기 바람소리가 들렸다.
자연적으로 부는 바람이 아닌, 무언가가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소리.
솔직히 반쯤은 우연이었다. 자운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젖혔고, 그 앞으로 무언가가 날아가 벽에 박혔다.
"손도끼?"
벽에 박힌 손도끼에는 몬스터의 피가 잔뜩 묻어있었다.
방금 전까지 사냥하는데 사용했던 것 같았다.
"설마 피할 줄이야."
무미건조한 목소리였다.
도로의 건너편에 자신과 같은 새까만 원피스를 잡은 여성이 서있었다.
처음에는 악마의 계약자인가 생각했을 정도다.
'뭐냐, 저건.'
인간인가?
그조차도 불확실한 여성이었다.
비를 맞으며 처연히 서 있는 모습은 무섭도록 아름다웠지만, 그만큼 비인간적이었다.
저것과 싸워서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너도...."
이 안에 있는 녀석들과 같은 편인가? 라고 질문하려는 순간.
그보다 빠르게 여성의 발이 움직였다.
마치 쏘아진 탄환처럼 자신을 향해 달려왔다.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속도였다.
'속도는 나보다 빨라!'
자욱하게 내리는 빗속에서 시뻘건 안광이 빛났다.
여성의 움직임에 따라 붉은 실선이 길게 그어지며 자운의 목을 향해 손을 뻗어졌다.
마치 머리를 그대로 잡아 뽑아버릴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뿌드득!
자운은 여성의 손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속도는 상대가 더 빨랐지만, 움직임은 막무가내에 가까웠다.
부웅!
"큭?!"
분명 여자의 손은 방금 자운이 후려친 공격으로 부러졌다. 그런데 전혀 궤도가 수정되지 않았다.
부러진 손을 그대로, 힘의 가감하나 없이 자운의 목을 향해 휘두른 거다.
그것을 피할 수 있었지만, 솔직히 소름 돋았다.
마치 고통을 못 느끼는 인간처럼 움직이는 여성의 행동에.
"당신, 동작이 이상하네요."
근데 여성은 도리어 자신을 이상하다고 말했다.
"무슨 말이지?"
"분명 맞을 거 같은데, 뱀처럼 이렇게 움직여서...."
"그건 위빙이라는 거다."
"권투의?"
"비슷하지."
여성은 흠, 하고 작은 숨을 내쉰 뒤, 천천히 자세를 잡았다.
그 자세는 방금 전, 자운이 잡았던 자세와 무척이나 흡사했다.
부러진 손은 어느 새인가 이미 나아있었다.
"이렇게 하는 건가?"
여성의 손이 자운을 향해 휘둘러졌다.
그 움직임은 어설프지만 방금 자신이 했던 공격을 흉내 내고 있었다.
자운이 보기에는 빈틈투성이의 어설픈 흉내일 뿐이었지만, 조금씩 조금씩 움직임이 변하고 있었다.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주머니에 넣어둔 담배가 그리워졌다.
'일격에, 쓰러트린다.'
그것으로 죽일 수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우선은 떨쳐내야 했다.
계속 싸운다면 아마 이길 수야 있겠지만, 그전에 세한이 올 게 분명했다.
확실히 이긴다는 보장도 없었다.
거기다 자체적인 회복능력을 가진 상대는 현재 자운에게 최악이었다.
장기전으로 갈 수밖에 없으니까.
'하나, 둘.'
여성은 무조건 자신이 먼저 공격했다.
읽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반드시 죽일 수 있는 급소만을 노리니 도리어 알기 쉬웠다.
'셋.'
여성의 발이 빗속에서 주르륵 미끄러지며 자운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여태까지 중에 가장 깔끔한 움직임이다.
가슴팍을 향해 뻗어오는 여성의 수도를 보며 자운은 주먹을 말아 쥐었다.
몸을 회전하며, 그대로 여성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카운터.
자운이 가장 자신 있는 기술이었다.
콰아앙!
"꺅!"
발을 내딛은 아스팔트가 움푹 들어가며 부서졌다.
체중을 실은 자운의 일격이 여성의 얼굴에 때려 박혔다.
작은 비명을 지르며 여성의 몸이 붕 날아갔다.
쿵, 쿠당탕!
건너편으로 날아가 가로등을 찌그러트린 여성은, 근처 의류매장까지 날아가 처박혔다.
움직이는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 위험했나."
하얀 와이셔츠의 앞섬이 피로 물들어있었다.
피한다고 피한 것이었지만, 상대의 속도가 워낙 빠른 터라 완전히 피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후우."
낮은 한숨을 쉰 자운은 다시 바이크에 발을 걸치고 앉았다.
부르릉!
그리고 바이크의 시동을 걸고, 핸들을 당겼다.
바이크의 바퀴가 회전하는 순간, 의류매장이 크게 들썩이며 여성이 튀어나왔다.
"미치겠네."
백미러로 보이는 여성은 머리가 깨진 듯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붉은 눈동자는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
자신을 찾기 위해 좌우를 둘러본 그녀는 바이크를 발견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내가 꿈을 꾸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백미러로 비치는 여성의 모습에 자운은 눈을 의심했다.
비바람을 뚫고 달리는 바이크와 거의 비등한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자칫하면 따라잡힐 것만 같았다.
'대체 민첩이 어느 정도나 되는 거지?'
바이크의 계기판이 시속 80km를 넘겨가고 있었다.
그럼 저 여자도 최소 그 정도의 속도로 달리고 있다는 말이다.
방금 전에 싸움에서 보였던 움직임보다도 확연히 빨라졌다.
머리를 얻어맞아 뇌에 이상이 생겼을지도 모르는데 도리어 더 빨라지다니.
'이대로라면 잡힌다.'
이미 여성은 바로 뒤까지 쫒아왔다.
바이크의 속도를 더 올리려는 순간, 품속에서 무언가가 번쩍였다.
아까 전, 네비로스가 자신에게 건네줬던 가면이다.
콰아앙!
가면에서 강력한 마력이 방출되며 달려오던 여성을 크게 날려버렸다.
멀리서 나동그라지는 여성을 본 자운은 바이크의 속도를 한층 올렸다.
이 정도 거리라면 이번에야 말로 쫒아오지 못하리라.
「특별히 도와줬다. 메인 요리를 망치게 둘 수는 없으니까.」
"그거 고맙군."
자운은 네비로스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이번만큼은 진심이었다.
***
"신자운?"
나는 지수의 현재 위치를 추적하며 빠르게 달렸다.
분명 같이 있을 테니까.
'대체 신자운이 누구야, 진짜.'
건물과 건물을 뛰어넘고, 도로 위를 달리며 계속 커뮤니티를 확인했다.
아무래도 민아와 다른 사람들을 습격한 건 신자운이라는 녀석인 모양이다.
채팅방에 올라온 말로 보아 이미 민아와 루크는 당했고, 지수와도 교전했지만 성공적으로 도망친 모양이었다.
하필이면 린 테일러를 데리고.
'네비로스가 요구한 건가?'
의도를 파악하기 힘들었다.
처음에 나는 내가 흑천회를 습격해서 복수를 위해 갔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채팅을 보면 죽일 여유가 분명히 있었던 것 같지만 린만을 납치했다.
'하필 지수가 잠깐 없을 때 들이닥칠 줄이야.'
둘이 싸웠던 내용을 보니, 만약 지수가 있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다.
보아하니 지수와 거의 동등한 수준의 플레이어 같은데....
'그게 가능한가?'
생각해 보면 지수와 동등하게 싸웠다는 것부터가 놀라울 따름이다.
멀티 플레이 패키지를 통해, 지수는 내가 얻는 포인트의 일부를 가져가고 있었다.
거기에 본신의 재능도 어마어마해서 성장 속도가 타의추정을 불허했다.
나를 제외하면 솔직히 백병전에서 가장 강한 플레이어라고 봐도 좋았다.
그런 지수를 상대로 우위를 점한 플레이어라.
'그런 녀석을 내가 모를 리가 없는데.'
그 정도의 플레이어가 있었다면 후에 흑천회가 활동할 때 분명 언급이 됐을 거다.
그런데 신자운이라는 이름은 아무리 기억을 뒤져봐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신자운은 흑천회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할 때는 이미 죽었다는 거다.
'그 정도의 플레이어를 죽일 수 있는 놈은 별로 없을 텐데.'
적어도 한국에는 없다.
린 테일러는 그때 너무 어렸고 재능도 전혀 개화하지 않은 상태였다.
"직접 만나보면 알겠지."
하필 건드려도 린 테일러를 건드리다니.
나는 까마귀의 눈을 띄우고 커뮤니티로 언급되는 신자운의 위치를 추적했다.
현재 녀석은 인천으로 향해가고 있었다.
그것도 인천 부두 방향으로.
현재 인천부두는 근방이 초토화된 탓에 사람이 전혀 없는 장소였다.
싸움 장소로는 저기보다 좋은 곳을 찾기 힘들 거다.
"한번 해보자는 건가."
그럼 나야 좋지.
혹여나 민아나 다른 사람들에게 큰 일이 생겼을까 봐 식겁했지만, 다행히 아무런 일이 없는 것 같아 한시름 놓았다.
남은 건 린 테일러를 성공적으로 구출하는 것뿐.
'잘하면 네비로스를 보게 될지도 모르겠어.'
솔직히 그 간드러지는 목소리를 듣고 싶은 생각은 없다.
되도록 만나는 건 먼 훗날.
녀석의 목을 따러 갔을 때이길 바랐지만, 아무래도 그러긴 힘들 것 같았다.
# 52
052. 강자(1)
인천부두.
본래라면 바다에 여러 척의 선박이 있었어야 했지만 지금은 보이지 않았다.
플레이어들의 활약으로 근방의 몬스터들은 모두 척결된 상태였지만,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신을 잃은 린을 적당히 비를 피할 수 있는 장소에 둔 후, 자운은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네비로스의 말로는 조직을 습격했던 까마귀놈이 이곳으로 오고 있다고 했다.
'대체 뭐하는 녀석이지?'
자신이 납치한 이 꼬마도 그렇고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자들이었다.
그나마 외국인 남자만은 평범한 편이었다.
기술은 뛰어났지만, 플레이어의 수준은 한참 미달이었니까.
그에 반해 고등학생 소녀는 이상한 능력을 사용했고, 이 여자아이는 악마조차 눈독들이게 만들 만한 뭔가가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등장했던 검은 옷의 여성은....
'최소 그 정도는 되리라 생각해야겠어.'
네비로스가 자신보다 까마귀가 강할 거라고 했던 것도 납득이 갔다.
마지막에 오토바이를 쫓아오던 여성은 모든 능력치가 자신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 상태로 싸웠다면 졌을 확률이 높았다.
만약 까마귀놈이 그 여성과 동등한 수준이라면 자신에게 승산은 없었다.
「그러니 가면을 쓰라고 했을 텐데?」
"고민 중이다."
「고민할 필요가 있나? 그것이 없다면 너는 그저 죽을 뿐이다. 다른 쓰레기들처럼 말이지.」
네비로스는 자운을 향해 마음껏 비웃었다.
「내가 지금 네놈을 도와준다고 착각하지 마라. 간만에 발견한 말을 쉽게 버리고 싶지 않을 뿐이야. 만약 네가 쓰레기처럼 패배한다면, 너와의 계약을 파기할 것이다.」
"알고 있다."
네비로스는 그런 놈이니까.
녀석은 다른 악마나 신들의 눈치를 많이 봤다.
마치 자신이 대단히 우수하다고 어필하고 싶은 것처럼, 계약자들을 가혹하게 대했다.
대신 그만큼 확실하게 도움을 주긴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강천우는 흑천회를 만들지도 못했을 테니.
"어차피 곧 녀석이 올 거다. 가면은 우선 한번 붙어보고 생각하면 돼."
「쯧, 약해빠진 놈 같으니라고.」
네비로스는 신자운이 왜 가면을 쓰는 걸 거부하는지 알고 있었다.
악마의 유물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그만큼 인간이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것을 사용하게 된다면, 단순한 계약자가 아닌 네비로스의 꼭두각시가 될 확률이 높았다.
거기다 아이의 생명을 흡수해 에너지를 모은 가면을 착용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도 이유였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도 까마귀가 습격할 것을 대비해, 린의 목에 작은 단검을 들이댄 채였다.
허튼 짓을 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그놈이다.」
까악, 까악.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하늘에서 들렸다.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데 하늘을 날아다니는 까마귀가 있었다.
그것만 보더라도 평범한 까마귀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저벅, 저벅.
쏟아지는 비속에서 걸어오는 자가 있었다.
검은 외투에, 검은 바지. 상당히 어두운 인상.
얼핏 보면 악마의 계약자로 보였다.
외모만 보면 그다지 강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플레이어를 외모로 구분하는 것만큼 바보 같은 짓도 없었다.
"네가, 까마귀인가?"
"까마귀? 그래, 내가 까마귀이긴 하지."
세한은 자신을 경계하는 자운의 말에 어색하게 대답했다.
까마귀 자리 카라스를 욕하던 게 얼마 전인데, 이젠 자신이 까마귀라고 불리고 있었다.
'린은... 무사한 것 같군.'
혹여나 세한이 습격할까 봐 칼을 들이댄 채였지만 살기는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자운을 유심히 살폈다.
악마의 계약자 특유의 검은 눈동자와, 머리칼.
매서운 눈매와 그에 어울리는 샤프한 외모였다.
그리고 흐트러진 검은 정장과 와이셔츠.
가슴팍에는 옅은 상처가 있었다.
커뮤니티를 통해 들은 정보에 의하면 지수로부터 입은 상처겠지.
세한은 자운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라? 어디서 본 얼굴이네?'
전생의 플레이어는 아니다. 하지만 분명 아는 얼굴인 건 분명했다.
'아.'
한참을 고민하던 세한은 한 사람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마 이종격투기였던가? 그런 경기에서 봤던 것 같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선수가 꽤 눈에 띄어서 기억에 남는 얼굴이었다.
'과연, 격투기 선수란 말이지.'
그런 사람이 왜 흑천회에 속해있는지 의문이다.
갑자기 몬스터가 강해지는 경우는 시스템이나 GM의 개입이 있었던 거지만 자운은 아니었다. 없는 플레이어를 만들거나 조종할 수는 없었다.
이런 인물이 대체 왜 전생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걸까.
"왜 그 아이를 납치한 거지?"
"네놈이 얌전히 오게 하려면 이것보다 좋은 방법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자운은 린의 목에 대었던 칼을 천천히 땠다.
"아무래도 정답이었던 모양이군."
"나를 노렸다는 건, 흑천회의 일 때문이냐?"
"당연한 말을."
그게 아니었다면 굳이 이런 일을 벌이지도 않았다.
세한이 자운을 살피는 것처럼, 자운도 세한을 살피고 있었다.
만약 조금만 만만해 보였다면 바로 달려들었을 것이다.
형님을 죽인 놈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당장이라도 주먹을 휘두르고 싶었다.
허나 그럴 수 없었다.
'강하다.'
한걸음, 한걸음 다가올수록, 녀석이 강자라는 사실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만약 정면에서 흑천회 전부와 싸웠다고 하더라도 승산이 없을 것만 같았다.
"너는 왜 흑천회를 노린 거지?"
세한과 흑천회는 여태 특별히 관련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적어도 자운이 알기로는.
"이전에 한번 내 동료들이 악마의 하수인들에게 습격 받았거든."
"습격?"
"그래, 그래서 생각난 거지. 악마와 관련된 것들은 미리미리 싹을 잘라둬야겠다고 말이야."
특히 흑천회는 가장 악랄한 집단 중 하나였다.
네비로스가 지배하는 세력이니 당연한 이야기다.
자운은 그런 세한의 말이 솔직히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습격을 당해서 적의가 생긴 건 알겠지만, 그것만으로 흑천회 전체를 적으로 돌릴 줄이야.
하기야 충분한 힘을 가진 그의 입장에서는 하찮은 화풀이일 지도 모른다.
"그렇군."
"그러는 너는 뭐라고 해야 되나, 보스의 복수? 그런 거지?"
"단순의 조직의 보스라서가 아니다."
천우가 악마의 계약자이며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아직 갚지 못한 빚이 남아있기 때문이지."
천천히 주먹을 말아 쥐고 자세를 잡는 자운의 모습에 세한은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깡패의 의리 같은 거려나.'
상당한 실력자라 호기심이 일기는 했지만 그 정도뿐이었다.
느껴지는 기운을 보아하니 저 녀석 또한 네비로스의 계약자인 게 분명했다.
그러니, 살려둘 생각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무기는 쓰지 않는 건가?"
"난 주먹으로 충분하다."
과연 전직 격투기 선수답게 주 무기는 주먹이었다.
그렇다 해도 솔직히 조금 의외였다.
플레이어들의 신체는 분명 일반적인 인간보다 튼튼하긴 했지만, 금속보다 단단한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새까맣게 물드는 녀석의 손을 본 세한은 생각을 달리했다.
'신체 자체를 강화시키는 건가.'
악마의 힘인지, 아니면 본인이 가진 스킬인지는 모른다.
"맨손이라...."
그거 좋지.
세한은 무기를 꺼내려던 손을 멈추고 마찬가지로 주먹을 쥐었다.
"무기 없이 싸워보는 건 오랜만이네."
"...."
긴장감 없이 말하는 세한을 자운은 침착하게 응시했다.
오만하다, 라고 차마 말할 수는 없었다.
이 남자가 아까 만났던 여성보다도 강하다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말이다.
그 여성도 무기를 사용하는 것 같았지만, 맨손으로 자신을 압도했으니까.
"후회하지 마라."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었다.
세한은 자운을 죽이는 것이 목적이었고.
자운은 세한을 죽이는 것이 목적이었다.
서로의 목적은 거의 동일했다.
콰앙!
빗속을 뚫고 검은 바람이 격돌했다.
짙은 밤의 어둠속에서도 두 명은 서로의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주먹과 주먹이 부딪치는 순간, 왼손을 뻗어 자운의 옷깃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자운은 그것을 뱀처럼 몸을 휘며 피했다.
도리어 세한의 복부를 향해 왼손을 뻗었다.
지익─.
신발이 바닥에 미끄러지며 세한의 몸이 꺾였다.
자운의 왼손은 허공을 스쳤다.
큰 빈틈이 생긴 자운을 향해 수직으로 주먹을 내리찍었지만, 자운은 도리어 고개를 아래로 깊이 숙이며 몸을 크게 한 바퀴 돌렸다.
그러자 자운의 발차기가 세한의 목을 향해 휘둘러졌다.
세한은 그것을 오른팔을 들어 막아냈다.
"하...."
세한은 어느새 크게 물러선 자운을 감탄한 눈으로 보았다.
'역시 격투기 선수는 선수라는 건가?'
자랑은 아니지만 세한은 접근 전에 나름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도 압도하지 못했다.
진심을 다해 움직인 것도 아니었고, 자신보다는 분명 조금 아래였지만.
그렇다 해도 대단한 건 대단한 거였다.
무엇보다, 자운의 움직임은 세한에게 굉장히 익숙했다.
세한과 자운은 서로를 잠시간 응시하다가 재차 달려들었다.
서로의 주먹과 발차기가 빗속을 뚫고 오갔다.
"후우."
세한은 내심 감탄했다.
신자운이라는 플레이어의 움직임은 '천재'의 것이 아니었다.
주먹은 날카롭고, 몸의 움직임은 뱀처럼 휘어지며 세한을 압박했다.
이것은 재능이 만든 움직임이 아니다.
무수히 반복된 노력의 결정체.
그의 움직임은 정직했다. 상대보다 빠르게, 그저 피하고 때린다.
그 심플한 규칙을 철저하게 준수하고 있었다.
천재의 번뜩임이 보이지 않았다.
마친 세한, 자신처럼.
"큭!"
세한이 한층 더 속도를 높이자, 자운의 몸에 생체기가 나기 시작했다.
전투기술도 세한이 확실히 앞서고 있었고, 능력치 차이도 극심했기 때문이다.
자운의 전투기술이 떨어지기보단, 세한이 압도적이었을 뿐.
비슷한 수준의 재능을 지녔더라도, 그는 엄연히 인류 최후의 플레이어였다.
콰앙!
"커억!"
세한은 자운의 가슴을 후려친 주먹을 천천히 내렸다.
자운은 수십 미터를 날아가 컨테이너 박스를 반쯤 우그러트리며 처박혔다.
지수와 같은 회복 스킬을 다량 보유하지 않는 한, 치명적인 일격이었다.
"대체 너와 같은 플레이어가 왜 악마와 계약했는지 모르겠어."
"...."
자운은 세한의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숨을 내쉬자 붉은 피가 쏟아졌다.
그의 실력은 확실히 뛰어났지만, 세한이 조금 더 위였다.
거기에 능력치 차이가 압도적이었다.
처음에는 세한이 적당히 자운의 움직임에 맞춰줬을 뿐이다.
"너는 자존심도 강해 보이고, 그렇게 까지 악한 녀석은 아니야. 나쁜 새끼인 건 분명하지만."
뭔가 모순된 것 같은 말이었지만, 세한은 개의치 않았다.
세한이 생각하기에 자운은 성정이 악한 건 아니었다.
단지 흑천회에 속해 있다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뭔가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그쪽의 사정이었다.
어찌됐든 세한은 자운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너무, 강하군."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자운은 손으로 가슴팍을 만졌다.
단 일격으로 늑골이 몇 개가 나갔는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가면을 쓰라고 하지 않았나. 멍청한 새끼. 하등한 인간 놈은 이래서 안 된다니까.」
가면, 가면이라.
그것을 쓰면 저 녀석을 이길 수 있을까?
자운은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가면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에 들어간 아이들의 비탄을 계속 지켜봤기 때문이다.
세한의 말대로 자신은 나쁜 새끼이지만 악마의 가면에 손을 댈 정도는 아니었다.
「네놈이 싫다면 억지로 하는 수밖에.」
"...!"
일어나 자세를 잡으려던 자운의 몸이 굳었다.
입 밖으로 말도 할 수 없었다.
「신과 악마의 계약이 뭐가 다른지 아나? 신과 달리 우리는 강제할 수 있지.」
네비로스는 유쾌하게 웃었다.
뻣뻣하게 굳은 자운의 손을 움직여, 녀석의 품속에 있던 가면을 손에 쥐었다.
그러자 몇 개의 단검이 날아와 자운의 손에 명중했다.
「음?」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세한이 던진 단검이다.
단검은 자운의 손을 꿰뚫지 못했다. 가면을 쥔 손에서 옅은 막이 생겨서 막아냈기 때문이다.
「지루한 싸움을 지켜보느라 힘들었다. 이제야 좀 즐길 수 있겠군.」
아직 미완성이긴 하지만, 네비로스는 자신의 유물.
비탄의 가면의 힘을 믿었다.
악마서열 27위는 폼이 아니다. 그런 자신이 만들어낸 혼신의 역작이 비탄의 가면이다.
인간의 마이너스 감정을 흡수해 강대한 마력을 얻어내는 가면.
지금까지 모은 마력을 능력치로 환산한다면 현재 존재하는 어떤 플레이어도 자운을 이길 수 없으리라.
"큭, 크아아!"
자운은 어떻게든 손에 쥔 가면을 쓰지 않기 위해 저항했다.
「약한 너를 위해서다. 네가 저놈을 압도했다면 굳이 이럴 필요도 없었잖아?」
네비로스는 좀 더 강하게 힘을 사용하여 자운의 손을 억지로 움직였다.
이윽고, 자운의 얼굴에 새하얗고, 기괴한 형상을 한 가면이 씌워졌다.
"──!!"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절규가 울리며.
백색 섬광이 인천 부두를 삼켰다.
# 53
053. 강자(2)
"귀찮게 됐군."
결국 가면을 쓰고 만 자운의 모습에 세한은 혀를 찼다.
되도록 막고 싶었지만 린을 보호하는 게 먼저였다.
던진 단검에 맞고 가면을 떨어트렸다면 좋았을 텐데.
"저 정도면, 지금의 나와 능력치가 거의 비슷하겠어."
기존보다 능력치가 거의 100퍼센트 이상 증가한 게 느껴졌다.
확실히 알려면 녀석의 능력치창을 봐야 알 수 있겠지만, 전생에 봤던 비탄의 가면의 힘을 생각하면 대충 그 정도일 거다.
나는 우선 안고 피했던 린을 근처에 있는 건물 옆에 뉘였다.
그리고 최대한 멀리 떨어졌다. 가면을 쓴 자운과 싸우게 되면 린을 보호하면서 싸우는 건 힘들었다.
「큭, 크크. 이렇게 직접 조종하는 것도 제법 재밌구나.」
선착장 부근까지 이동하자 언제 왔는지 가면을 쓴 자운이 서있었다.
정확히는 자운을 조종하는 네비로스가.
마치 목각인형처럼 삐걱이는 자운의 모습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언제 봐도 기분이 더러운 가면이야.'
가면에는 두 개의 긴 뿔이 솟아있고, 전체적으로 새하얀 색감의 가면이었다.
본인은 인간이 절규하는 모습을 본뜬 가면이라고 하지만, 세한이 보기에는 괴물의 면상을 박아둔 것 같았다.
「오, 우선 내 소개를 해야겠군. 나는 악마서열 27위. 네비로스다.」
"그래."
「...감상은 그것뿐인가?」
태연히 답하는 세한의 모습에 네비로스가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그렇게 말해도 정말로 특별한 감상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악마라면 저놈보다 더 대단한 놈도 마계에서 직접 봤으니까.
"어서 덤비기나 해라. 애가 비를 오래 맞으면 건강에 안 좋거든."
나는 인벤토리에서 한 자루의 검을 꺼냈다.
이젠 굳이 맨손으로 싸워줄 필요가 없었다.
「크, 크크. 정말로 건방진 놈이로구나. 카라스를 죽였다는 게 사실인가?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지금 네놈에게서 느껴지는 힘으로는 별자리를 사냥할 수 없다.」
혼자 질문하고, 혼자 답을 내린 네비로스는 자운의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은 분명 아까보다 압도적으로 빨랐다.
'그나마 가면이 미완성이라 다행이네.'
완성됐으면 최하급 별자리급의 힘 정도는 낼 수 있었을 거다.
내게는 초월의 증명이 있지만, 그건 단순히 '별자리급'의 힘을 가지고 있을 뿐이면 발동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상대가 별자리일 경우에만 발동할 수 있는 스킬이다.
드드득!
콘크리트로 된 지면을 자운, 아니 네비로스의 손톱이 파헤쳤다.
아까 전에 보이던 심플한 전투와는 전혀 달랐다.
본능에 내맞긴 악마의 전투. 압도적인 신체능력으로 상대를 찢어발기는 필살의 일격.
'정말.'
상대하기 쉬운 움직임이다.
퍽! 퍽!
「크윽!」
세한의 검에 얻어맞은 네비로스가 휘청거렸다.
검에 베였지만 몸이 단단해진 탓에 마치 몽둥이에 얻어맞은 것 같았다.
「인간 주제에 제법 하는구나!」
네비로스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확실히 한 방이라도 맞는다면 세한으로서도 위험할 정도로 강맹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네비로스는 무투파 악마가 아니다.
마법을 주무기로 삼으며, 그중에서도 정신계 마법이 특기인 악마.
압도적인 능력치를 지니고 있으니, 인간따위는 벌레잡듯 죽일 수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도리어.'
커다란 샌드백일 뿐.
퍽퍽퍽퍽!
「으허허헉!」
비속에서 먼지 나도록 맞는다는 게 이런 건가.
텅 빈 선착장에서 가죽북이 터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미 네비로스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사방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검격을 제대로 막지 못하고 연신 허우적거리며 두들겨 맞았다.
"헛차!"
「크아악!」
야구방망이를 휘두르듯 스윙하자, 네비로스의 몸이 기억자로 꺾이며 날아갔다.
악마의 마력장이 없었다면 이번 일격으로 반 토막이 났을 거다.
「이놈, 제, 제법 재주가 있다는 건 알겠다. 건방질 만도 하군.」
콘크리트로 된 벽을 부수며 처박힌 네비로스가 호기롭게 웃으며 말했다.
악마의 자존심이란 대단했다.
자운의 몸을 꼭두각시처럼 조종하고 있기는 했지만, 저렇게 조종하려면 감각을 그대로 연결해야만 했다. 그렇다면 지금 두들겨 맞은 고통을 고스란히 느꼈을 텐데도 웃을 수 있다니.
'힘들 때 웃을 수 있는 자가 일류라더니.'
세한은 역시 악마 서열 27위는 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끄응!」
하지만 웃은 건 웃은 거고 아픈 건 아픈 거다.
신음을 흘리며 콘크리트 더미에서 몸을 일으키려던 네비로스는 어쩐지 한쪽 손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뭐냐. 왜 안 움직이지?'
비탄의 가면을 통해 자운의 몸을 조종하는 건 일시적인 빙의와 비슷하다.
매개체를 통해 악마의 힘을 끌어와 몸을 다룬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악마의 힘에 조금의 저항도 하지 못하며, 악마가 몸을 되돌려 주기 전까지는 결코 되찾을 수 없었다.
그게 보통일 터다.
'어, 어? 뭐냐, 전혀 안 움직여.'
처음엔 왼팔뿐이었다.
그다음은 오른팔.
다음은 다리.
다음은 몸.
이윽고 네비로스가 조종할 수 있는 부분은 조금도 남지 않았다.
'뭐냐, 대체 뭐냐!'
악마의 가면에 자신의 힘을 불어넣어도 묵묵부답이었다.
"...어지간히도 두들겨 맞은 모양이군."
자운의 입에서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전신이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네놈, 대체 어떻게 말할 수 있는 거지?」
"네가 두들겨 맞은 덕에 정신이 들었다."
정확히는 네비로스가 두들겨 맞다가 잠시 의식이 끊어진 적이 있었다.
본인도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의 찰나였지만, 자운은 그 짧은 틈을 비집고 나온 것이다.
「흥, 소용없다. 어차피 가면을 쓰고 있으니 다시 조종하는 건 일도 아니지.」
비탄의 가면에서 재차 마력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것이 몸을 뒤덮는 것보다 자운의 행동이 빨랐다.
쿠웅!
그대로 무릎을 꿇고 지면에 머리를 처박은 것이다.
얼마나 강하게 박았는지, 세한이 서 있는 곳까지 진동이 느껴졌다.
"저 녀석, 설마 의식을 되찾은 건가?"
악마의 정신지배가 얼마나 강력한지는 세한도 잘 알고 있었다.
하물며 네비로스다.
네비로스의 정신마법은 비슷한 순위의 악마들보다도 훨씬 강했다.
그런 정신마법을 파훼하는 건 세한이라도 쉽지 않은 일이다.
말 그대로 어마어마한 의지력.
초월적일 정도로 단단한 정신이 필요했다.
"신기한 놈이네."
세한은 피식 웃으며, 저 남자가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지금 공격한다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지만 지켜보기로 했다.
전생에서도 단 한 번도 못봤던 진귀한 광경을 볼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쿵.
쿵.
쿵.
자운의 머리가 연신 지면에 격돌했다.
콘크리트로 된 바닥이, 쩍쩍 갈라지면서 금이 가기 시작했다.
「어리석은 놈! 그런다고 가면이 갈라질 것...」
쿵!
쩌적.
「...같으냐?」
갈라졌다.
자운의 머리에서 악마의 계약자 특유의 검은 피가 흘러내렸다.
그렇지만 가면도 분명하게 부서지고 있었다.
'악마의 유물을 파괴할 수 있는 건, 악마와 최소 동급의 신위를 가진 존재나 악마 당사자. 그리고 그 계약자뿐.'
계약자라고 해도 악마의 유물을 부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왜냐면 계약자는 어디까지나 악마에게 종속된 존재니까.
하지만 자운은 지금 그것을 해냈다.
쿵!
콰지직!
「비탄의 가면이이이이!!」
비탄의 가면은 네비로스가 전력을 다해 만든 최상급의 유물이었다.
상위 악마들의 유물에도 꿇리지 않은 자신이 있었다.
「어리석은 짓을! 계약자가 악마의 유물을 부순다는 건 계약 파기를 하겠다는 거나 마찬가지다!」
"상관없다. 어차피 내가 패배하면 버리려고 했던 주제에, 우습군."
자운은 비명처럼 외치는 네비로스를 향해 무덤덤하게 말했다.
"그럴 바에는 내가 먼저 버려주지."
「너...!!」
어차피 천우가 아니었다면 네비로스와 계약할 생각도 없었다.
자운은 오른손으로 가면을 잡았다. 그리곤 온 힘을 향해 잡아당겼다.
콰직, 콰지직!
"크아악!!"
자운은 반쯤 부서진 가면을 잡고 얼굴에서 뜯어냈다.
완전히 가면을 벗을 수는 없었지만, 부서진 반쪽은 바닥으로 떼어낼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혼탁했던 정신이 말끔해졌다.
네비로스의 목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아직 얼굴에는 비탄의 가면의 반쪽이 붙어있었지만, 그 때문인지 일어설 수 있었다.
부서진 가면이 자운의 감정을 흡수하며 그것을 마력으로 전환했기 때문이다.
"오래, 기다리게 했구나."
자운은 여태 공격을 하지 않고 자신을 지켜보고 있던 세한에게 말했다.
"별로."
물론 세한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진귀한 광경을 봤다는 느낌이었다.
"너는 이제 악마의 계약자도 아닐 텐데. 그런데도 나와 싸우려는 거냐?"
"너와 싸우는 건 악마 때문이 아니다."
끝까지 형님의 복수라는 건가.
흑천회의 보스 얼굴은 기억도 나지 않았지만, 부하 하나는 잘 둔 것 같았다.
'어차피 앞으로 한 번....'
자운은 이미 만신창이다.
네비로스가 세한에게 계속 두들겨 맞았고, 가면을 부수며 계약조차 파기 되었을 거다.
얼굴에 붙어 있는 가면이 무슨 효과를 발휘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능력치는 아까 처음 보았던 그때로 되돌아왔다.
능력치는 그대로라도 네비로스로부터 받았던 스킬을 사라졌을 터.
평범한 플레이어로 되돌아온 탓에 회복도 더딘 것 같으니 자운이 공격할 수 있는 건 앞으로 기껏해야 한번 정도일 거다.
스으.
세한은 자세를 낮추고 자운을 응시했다.
자운 또한 세한을 바라보며 오른팔을 들어올렸다.
아무래도 왼팔은 부러진 모양인지 축 늘어져 있었다.
탁!
먼저 달려든 건 세한이었다.
세한의 손에는 무기는 없었다. 아까 자운과 싸웠을 때처럼, 마지막만큼은 맨손으로 결착을 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악마와 계약한 놈이라는 건 변하지 않지만, 자운이 전투방식은 마음에 들었으니까.
오로지 노력으로 이루어진 결과물.
악마의 힘에도 물들지 않은 순수한 투기.
세한은 비틀거리며 서있는 자운의 가슴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이대로 가슴을 꿰뚫어 죽일 생각이었다.
'보인다.'
세한의 주먹은 터무니없는 속도로 자운을 향해 다가왔지만.
자운은 또렷하게 보였다.
한계에 몰린 육체가 발한 기적과도 같이.
'보인다.'
주먹을 말아 쥐고, 세한이 휘두른 주먹의 궤도와 함께 몸을 비틀며 전력을 다해 오른팔을 휘둘렀다.
카운터. 자운의 특기였다.
세한의 생각처럼 자운은 재능이 없었다. 재능이 있었다면 좀 더 자신만의 기술을 개발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운은 재능이 부족했다. 그렇기에 자신이 아닌, 상대의 힘까지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그것을 극한까지 익힌 것이 지금의 카운터였다.
상대의 힘과, 자신의 합쳐 발하는 필살의 일격.
그리고 지금.
지금까지 중 최고라고 말할 수 있는 카운터가 세한의 얼굴을 향해 쏘아졌다.
'이건...!'
세한 또한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자운의 가슴에서 주먹이 미끄러지며, 그 힘을 역이용한 자운의 오른손이 세한의 얼굴을 향해 다가왔다.
이건 피할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자운의 무릎이 꺾였다.
여태까지 누적된 데미지에 그만 무릎이 접힌 것이다.
"...!!"
볼에서 핏방울이 튀었다.
간발의 차로 자운의 주먹이 세한의 볼을 스쳤다.
그건 플레이어와의 싸움에서 세한이 처음으로 입은 상처였다.
"운이 나빴다."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다.
세한은 이제 완전히 비어버린 자운의 상체를 향해 재차 왼손을 내질렀다.
자운 역시 그것을 보았다. 자신을 죽이기 위해 뻗어오는 손을.
이번에는 카운터도, 무엇도 할 수 없었다.
자운은 죽음을 예감하며 눈을 감았다.
콰아앙!!
전력을 다한 세한의 왼 주먹에 발을 내딛고 있던 콘크리트가 으깨져 나갔다.
하늘에서 떨어지던 비조차 충격파에 사방으로 흩어지며 자운의 몸이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허공을 날았다.
그리곤 먼 바다위로 떨어졌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바다의 위로.
"...."
세한은 자신의 주먹을 빤히 바라보았다.
"운이 나쁘다는 건 취소다."
후, 세한은 고개를 흔들었다.
왜냐면, 마지막으로 가했던 일격에 손맛이 없었으니까.
***
자운이 정신을 차린 건,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였다.
눈을 뜬 순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하나였다.
왜 살아 있지?
아직도 의식을 잃기 전에 보았던 모습이 눈에 선명하다.
자신의 목숨을 취하기 위해 다가오던 세한의 왼손이.
"일어났네."
기품 있는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리자, 새하얀 고딕드레스와 그에 어울리는 양산을 쓴 소녀였다.
나이는 이제 막 십대 중반정도가 되었을까.
하얗고 긴 머리칼이 바닷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네비로스의 찌꺼기."
빈정거리며 말하는 걸 보아, 입은 얼굴만큼 고운 것 같지는 않았다.
"왜 자기가 살아 있나 궁금한 모양인데...."
소녀는 사뿐사뿐 걸어와서 누워있는 자운을 보았다.
"내가 살렸어. 좀, 네가 흥미로웠거든."
모래사장에 누워있는 자운의 가슴을 사뿐히 짓밟으며 싱긋 웃었다.
"너는, 누구지?"
자운은 전신에서 느껴지는 격통 속에서 힘겹게 입을 열었다.
하나 알 수 있는 건 이 정체불명의 소녀는 '인간'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악마였다.
그것도 자운이 짐작할 수 없을 만큼 강한, 대악마.
"찌꺼기 주제에 궁금한 게 많구나? 그래, 특별히 알려줄게."
탁, 소리를 내며 양산을 접은 소녀는 자운의 얼굴 가까기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금색의 눈동자, 거기에 기이한 형태를 한 동공이 자운의 시야에 가득 담겼다.
"나는 아자젤."
그 이름은 악마 서열 27위의 네비로스 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의 거물이었다.
"나태의 악마다."
마계를 지배하는 7대 악마중 하나.
마계의 대공이자 악마 서열 제 3위.
나태의 아자젤이 자운을 보며 싱그럽게 미소 지었다.
# 54
054. 디어사이드(1)
길드를 만든다면, 조금 더 후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게, 내가 길드로 끌어들이려는 멤버가 너무 화려했다.
현재 존재하는 최고의 대장장이 플레이어 중 하나인 송시우.
나와 함께 다니며, 센티넬을 잡거나 다양한 활약을 한 이민아.
말할 필요도 없이 현존 플레이어중 탑 티어에 속하는 한지수.
그리고 뭔가 기이한 힘을 가지고 있는 소녀, 린 테일러.
심안을 가진 창우나, 능력치에 비해 뛰어난 실력을 지닌 루크도 나름 인지도가 있는 편이었다.
거기다 마지막으로 나까지.
현재 신들의 시선을 모으고 있는 플레이어의 수가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날이갈수록 우리에게 붙는 옵저버의 수도 많아졌다.
여기에 GM 아카터스가 복귀하면 GM의 옵저버들까지 추가될 거다.
거기다 이번 신자운 사건으로 나는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다.
안전한 장소와 제대로 된 관리가 필요하다고.
'좋게 생각하자.'
어차피 조금 있으면 길드와 관련된 퀘스트가 시작될 거다.
본래는 다른 길드에서 용병으로 활동할 생각이었지만, 그냥 미리 길드를 만드는 게 날 것 같았다.
매번 옵저버를 피하고 다니는 것도 성가셨기 때문이다.
네 번째 퀘스트 이후, '길드'를 창립할 수 있게 되며 도심지에 길드하우스를 구매할 수 있게 되었다.
정확히는 이미 있는 건물이 있는 땅을 구매하는 건데, 그렇게 되면 그 지역은 안전지대로 설정된다. 당연히 넓은 땅을 사면 살수록 많은 돈이 들기에 상당량의 포인트를 지니지 않으면 길드 창립만 하고 길드 하우스는 구매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안전지대가 포함된 '길드 하우스'가 아닌 일반 건물을 거점으로 사용하는 게 보통이었다.
흑천회가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뭐, 안전지대라고 설정됐어도 플레이어의 침입은 막지 못하니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으리라.
'안전지대에는 옵저버들도 들어올 수 없지.'
겉에서 지켜볼 수는 있지만 안으로 들어올 수는 없다.
안전지대로 설정된 건물 안에 있다면 옵저버를 신경 쓰지 않고 푹 쉴 수 있는 것이다.
더불어 좀 더 자유롭게 장비를 제작하거나 DLC 아이템을 이용할 수 있었다.
"이게 오빠 건물이야?"
"그럼 누구 거겠어?"
민아는 한참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겉으로 보기엔 대충 4층 정도 되어 보이는 건물이다.
더 큰 건물도 구매할 수 있었지만 눈에 띌까 봐 작은 건물을 선택했다.
"포인트로 이런 게 사지는구나."
"이번 사태로 빈 건물이 많아. 개중에서는 포인트로 구매할 수 있는 것들이 있지."
"와, 전혀 몰랐어."
전부 게임 시스템에 포함된다.
정부가 다시 제 기능을 하려고 한다 해도 초월적인 존재들 덕에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조금 더 지나면 포인트로 지역투자도 가능해진다.
그때쯤 되면 정부는 플레이어가 아닌 일반인에게밖에 영향을 미칠 수 없게 된다.
'사실 이거 말고도 건물 몇 개를 더 사두긴 했지만.'
거긴 내 개인 공방으로 활용할 생각이다.
시우에게 이것저것 물건을 만들도록 지시하고 그 건물에 하나둘 짱박아두는 중이다.
"들어가서 빈 방 많으니 마음에 드는 곳 써라."
"와! 오빠, 최고! 내가 이래서 오빠를 좋아한다니까!"
그렇게 말한 민아는 뭔가 말실수를 했다고 생각했는지 슬쩍 뒤를 보았다.
뒤에는 조용히 지수가 서있었다.
"어흠."
민아는 살며시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길드 하우스를 샀다는 건, 길드를 만들 생각이라는 거지?"
"그래, 자세한 말은 들어가서 하자."
현재 나와 함께 있는 건 지수와 민아뿐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따로 볼 일이 있어서 나중에 오기로 했다.
민아도 평소라면 혼자 다녔겠지만, 2주 전 신자운에게 습격당한 후로는 나나 지수의 곁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아무래도 패배의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
"한지수."
"...네?"
지수는 지수대로 기분이 침체되어 있었다.
일주일 간 워낙 우울해해서 제대로 말도 걸지 못했다.
얘도 신자운을 이기지 못해서 그러는 건가?
두들겨 맞았던 민아와는 달리 지수는 거의 신자운가 비슷하게 싸웠다.
계속 싸웠다면 아마 지수가 이겼겠지.
녀석이 비탄의 가면을 쓰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요즘 왜 그렇게 말이 없어?"
"아뇨, 그냥. 으, 제대로 못 지켰으니까요."
"그거야 뭐...."
타이밍이 안 좋았다. 지수는 계속 그 근처에 있었지만, 잠깐 다른 곳으로 간 사이 신자운이 습격한 것이니까.
"이미 지나간 일이니 됐잖아."
"아니요. 아무래도 이번에 부족한 점을 많이 느꼈어요. 단순히 능력치를 올리는 거나 스킬을 익히는 것 말고도 제대로 된 기술을 익혀야 될 것 같아요."
의지를 불태우는 지수는 비장하기 그지없었다.
얘는 지금도 강한데 대체 얼마나 쌔지려고.
'신자운이라.'
녀석과 싸웠던 일을 떠올렸다.
벌써 2주전 일이다. 그런데도 녀석과의 싸움은 선명하게 떠올랐다.
나쁜 놈인지 아닌지 아리까리한 놈.
악마의 계약자인 건 분명해서 죽여 두려고 했지만 결국 살아남은 녀석.
'마지막에 대체 누구야?'
나는 분명 녀석의 몸에 정확히 주먹을 때려 박았다.
그러나 무언가가 개입해서 그 힘을 흘려 넘겼다.
신은 아니다.
신은 그렇게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없다.
왜냐면 '게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존재는 하나뿐이다.
바로 악마.
악마는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게임'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놀이가 아니라 진심으로 이 세계에서 생활한다.
진심으로 인간과 계약을 맺고 버리고, 죽이고 보호한다.
또한 감정적으로 교류한다.
물론, 이 세계에 현현(顯現)할 시에는 힘이 억제된다는 건 같다.
별자리들이 받는 제약처럼 강하면 강할수록 큰 제약에 걸린다.
그럼에도 신자운을 보호했던 힘은 강대했다.
현재의 나로선 짐작도 할 수 없을 만큼.
'최소 대악마.'
대악마는 마계 서열 20위권에 드는 강자들이다.
네비로스도 27위의 악마였지만, 20위 안에 드는 악마와는 차이가 심했다.
'어쩌면 마계를 지배하는 7대 악마일지도 몰라.'
그런 놈의 눈에 신자운이 든 것이다.
'성가시게 됐어.'
녀석이 내게 복수하려는 것과는 별개로 존재 자체가 변수다.
대악마와 계약을 맺은 플레이어는 전생에도 몇 없었다.
아마 다섯 명이었나? 그중에서 7대 악마와 계약을 맺은 플레이어는 하나였다.
물론 신자운은 아니다.
신자운이라는 강자는 전생에 없었고, 대악마의 개입 또한 이 시기에는 없었다.
악마들이 이 세계에 손을 뻗치고 있는 건 맞지만, 대악마쯤 되는 존재는 아직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후에 열릴 마계의 연회쯤은 되어야 무거운 몸을 움직이지.
녀석들이 지배하는 세계는 지구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광활하니까.
"그런데 다음 메인 퀘스트는 언제 시작하는 거야? 공지도 없고 깜깜무소식이네. 이것도 직접 찾아가야 되는 건가?"
"그런 건 아닐 거다."
"그럼?"
마치 나라면 뭐든지 알고 있을 것 같다는 식으로 묻는 민아의 모습에 피식 웃었다.
알고야 있었지만 그걸 말할 수야 있나.
다음 메인 퀘스트는 지금까지의 메인 퀘스트와는 좀 달랐다.
지금까지의 메인 퀘스트가 대부분 특정한 몬스터를 쓰러트려야 끝나는 것이었다면.
'이번에는....'
괜히 '길드'가 업데이트 된 것이 아니었다.
***
서울 강남의 한 빌딩.
커다란 회의실 안에 여섯 명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이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현재 이 서울에 존재하는 수많은 길드들, 그중에서도 정점에 있는 3대 길드의 수뇌부들이었다.
"그래서 지금 우리와 연합을 제의한 건가?"
"최근 그믐달과의 세력다툼 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네놈이 상관할 바가 아니다."
강서 일대를 지배하는 아웃라이징 길드의 길드 마스터, 강태성이 야수 같이 웃었다.
"애초에 그런 제안을 하는 그쪽이야 말로 뭔가 문제가 아닌가 싶군."
"부정할 수는 없군요."
강태성의 말에 답한 건 그와는 전혀 다른 인상의 남자였다.
그는 강남 일대에서 현재 가장 큰 세력을 형성중인 제네시스 길드의 길드마스터, 박성혁이었다. 지금 대부분 정리가 된 강서나, 강북과 달리 강남 지역은 여전히 길드간의 세력다툼이 한창이었다.
현재는 제네시스가 가장 크다고 하더라도 언제 아래에서 치고 올라올지 몰랐다.
"뭐야~! 둘이 계속 싸울 거면 우린 간다? 불러놓고 뭐하는 거야?"
그런 둘의 대화에 관심 없다는 얼굴로 하품하는 여성이 한 명이 있었다.
현재 이 회의실에 있는 여섯 명 중 단둘뿐인 여성 중 하나이자, 피안화 길드의 마스터인 이아영이었다. 그녀는 눈에 띄는 미색을 지니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그녀는 신은 프레이야.
미의 여신의 가호를 입은 그녀의 외모는 마치 빛이 나는 것 같았다.
하품마저 하는 그녀의 모습에 누가 지적을 할 만도 하건만 회의실에 있는 누구도 지적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못 했다.
왜냐면 지금 이곳에 있는 세 길드 중에서 가장 거대한 길드가 바로 '피안화'이기 때문이다.
다른 두 길드는 여전히 자신의 구역에서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었지만, 피안화만큼은 달랐다.
그녀는 이미 강북 지역을 손에 넣은 지 오래였다.
그녀의 한마디면 목숨을 내놓고 덤벼드는 플레이어들이 넘쳐났다.
가장 광신적인 길드이자, 가장 거대한 길드이기에 다른 두 길드장도 쉬이 대할 수 없는 것이다.
'저 개 같은 년을 확 조질 수도 없고.'
강태성은 속으로 박박 이를 갈았다.
순수한 무력으로는 그가 이중에서 가장 강했다.
그의 신은 무려 아레스. 전쟁의 신의 가호를 받은 만큼 전투에서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피안화는 개인의 보잘것없는 무력과는 별개로 세력이 워낙 크다보니 안하무인한 성격의 강태성이라도 강하게 나갈 수가 없었다.
"자자, 너무들 그러지 마십시오. 제가 오늘 여러분을 부른 건 단지 연합을 제의하기 위해서는 아닙니다."
"그럼 뭐냐. 이번에도 시답지 않은 말을 했다간 바로 나가겠다."
이미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한 강태성이 덤벼들 기세로 말하자, 박성혁의 옆에 있던 제네시스의 부 길드 마스터 홍가은이 손을 허리춤으로 뻗었다.
한마디만 더 하면 당장이라도 베어내겠다는 경고와 같았다.
"호오, 한번 해보자고?"
"그만하세요, 가은 씨 그럴 필요 없습니다."
살살 달래는 박성형의 말에 홍가은은 인상을 와락 찡그리며 손을 내렸다.
강태성 또한 그런 반응에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어차피 지금 싸우지 않으셔도 곧 싸우게 되실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우리 길드에 선전포고라도 하시겠다?"
"그게 아닙니다. 메인 퀘스트와 관련된 겁니다."
"메인 퀘스트?"
그제야 손톱을 다듬고 있던 이아영도 관심을 보였다.
"지금 '길드'라는 것이 업데이트 된지 시간이 좀 흘렀음에도 메인 퀘스트는 시작되지 않았죠. 하지만 징조는 있습니다."
"징조?"
"예, 최근에 갑자기 생겨나기 시작한 수많은 '던전'들에 대해서는 다들 알고 게시겠죠?"
당연히 알고 있었다.
최근에 일어나는 분쟁의 대부분은 던전을 둘러싼 이권다툼 때문이었으니까.
단순히 편의점에서 구매할 수 있는 상점표 장비에 비해 던전에서 몬스터를 잡고 얻는 장비는 월등히 우월했기 때문이다.
단순한 장비의 드랍뿐이 아니다.
던전 보스를 잡으면 희소한 확률로 특수한 스킬을 가진 그리모어를 가질 수도 있었고, 채광포인트나 채집포인트도 존재했다.
오로지 채광이나 채집만을 위해 존재하는 던전도 존재했다.
전에도 분명 던전은 존재했지만, 요즘 들어 기하급수적으로 생겨나기 시작했다.
"저는 그게 징조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징조? 그냥 던전이 생길 뿐이잖아?"
"저희는 이미 어떤 퀘스트의 한가운데에 있고, 저희가 그것을 인지하지 못했을 뿐이죠."
정확히는 두 번째 퀘스트부터 그랬지만, 굳이 말하진 않았다.
"레이드 보스 때만해도 그랬지 않습니까? 타이머가 뜨기 전부터 몬스터들이 숨어 있던 던전들이 발견되었죠."
"그건 그렇지."
"하지만 이번에는 수가 훨씬 많습니다. 덕분에 길드간의 분쟁도 점점 커지고 있고요."
박성혁은 곧 메인 퀘스트가 시작하리라 짐작했다.
던전을 둘러싼 경쟁전으로.
그리고 그 중심에는 '길드'가 있었다.
"사실 저는 여러분에게 연합을 제의하는 게 아닙니다."
성혁의 시선이 두 명의 길드마스터를 훑었다.
그 둘 역시 성혁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이해한 것이다.
"적어도 저희끼리는 다투지 말자는, 평화적인 제안일 뿐입니다."
강한 영향력을 지닌 3대 길드 간에 다툼이 있어서 좋을 건 없었다.
거기에서 이득을 보는 건 다른 중소길드뿐이었으니까.
# 55
055. 디어사이드(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