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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화. 허나, 숨어도 소용없다 (2)

치밀하게 숨기려고 했던 건 아니다.

당연히 해내야 할 일을 해냈을 뿐.

그러니 세운 업적은 떠벌리지 않는다.

하지만 사실을 숨기는 것 또한.

귀족의 태도와는 어긋나는 일이었으니까.

'결국 피곤한 성격 때문이라는 거지.'

나는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다가 찻잔을 들었다.

달칵─

"심히 유난스럽구나."

정말이지 담백한 감상이시다.

과거의 나였다면 말이야.

티타임은 개뿔.

가슴이 두근거려서 잠도 제대로 못 잤을 반응이란 말이다.

폭발적, 아니 그것도 부족하다.

말 그대로 핵폭발 수준의 파급력이었다.

일단, 가온 측에서 공개한 거악과의 전투 영상.

'그 모습이 녹화되고 있었을 줄이야.'

원래는 몬스터의 패턴 분석 목적이었다고 했나.

거기에 우연히 내 모습이 찍힌 덕분에 나는 수고를 던 셈이었다.

아직도 내 말에 흠칫하던 기자, 정만석의 표정이 생생했으니까.

"그저 믿으면 되는 것이거늘."

무슨 교주처럼 말하는 나였지만.

그게 어디 믿기 쉬운 소리란 말인가?

유스라 왕국의 권한이 내게 있다는 건.

내가 유스라 왕국에서 어마어마한 업적을 세웠고, 그 업적을 바탕으로 막대한 관계도와 영향력을 쌓았단 소리와 다름없었으니까.

현시점에서 그 정도로 어마어마한 업적?

기자로서의 눈치가 있다면.

그쯤에서 알아차렸을 거다.

내가 거악에게서 유스라 왕국을 구해낸.

월드급 메시지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그러니까 믿지 못하는 게 당연하겠지.

거악, 칠죄종 탐욕.

녀석은 650레벨, 그것도 악마족 몬스터였으니까.

"결국, 하찮은 악마에 불과했다."

지금이야 뻔뻔하게 말하고 있지만.

라이언 하트 기사단, 가온과 버서커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는 드넓은 황금 궁전에서 녀석을 찾지도, 찾는다고 해도 마력 고갈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속사정을 아는 건 오직 나 혼자뿐.

게다가 편집 덕분일까.

영상 속의 나는 내가 봐도 강해 보였다.

정말 무슨 히어로 영화 보는 기분도 조금 나고 말이야.

그래, 다 좋았단 말이다.

...딱 한 가지만 빼면 말이지.

'빌어먹을 흑역사.'

언제나 이놈의 입방정이 문제다...!

[과오를 바로잡을 시간이다. 이름 모를 왕이여.]

하쿠나에게도 과오를 바로잡을 시간이 왔거늘.

내 흑역사를 바로잡을 시간은 대체 언제 오는 거냐고!

무엇보다 치욕스러운 건.

그 영상이 넷튜브를 비롯한 온갖 포털사이트를 장식했다는 거다.

그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이겠는가?

애증의 존재들이 내게 톡을 보내왔단 소리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ㅁㅊ놈

굳이 동영상 링크까지 첨부해서 보내온 메시지.

나의 원수, 이예림이었다.

-열아 어째 갈수록 멋있어진다잉?

-근데 그 중2병 컨셉은 언제까지 고집하는겨?

-아니다 보니까 계속해도 되겠다~ 반응 좋네~

2호, 이지윤은 하나도 아닌 세 개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막내야! 갈수록 듬직해지는 것 같아서 보기 좋네^^ 아랑이도 삼촌이 왕자님 같다고 난리야! 언제 삼촌 볼 수 있냐고 하루에도 몇 번씩 물어봐.

큰누나, 이은혜.

...그래, 큰누나는 착하니까.

그런 뜻으로 보낸 게 아니겠지만.

'...아랑아. 당분간 삼촌 볼 생각하지 말아줘.'

첨부된 사진.

TV 속 나를 보고 해맑게 웃는 아랑이의 모습.

조카에게 흑역사를 들킨 듯한 이 기분.

이 쪽팔림은 이루 말하기 힘들 정도였다.

물론, 조금의 내색도 없다.

더없이 꼿꼿한 자세.

나는 차분하다 못해 경건하게 답장을 보냈다.

-전부 누님들께서 지켜봐 주신 덕분입니다.

빌어먹을, 예절과 격식.

윗사람인 누나들에게 공손한 태도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곧바로 웬수의 메시지가 올라온다.

-언니들 얘 진짜 미쳤나봐

...됐다.

말해봤자 더 이상 말해봤자 피곤해지는 건 나였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이어서 떠오르는 큰 누나의 장문 메시지.

-엄마 아빠도 이번에 네 모습 보고 걱정 같은 거 한시름 덜어내신 것 같았어! 그전까지 말씀은 안 하셨어도 걱정 많이 하신 것 같았거든ㅜㅜ

어쨌거나 긍지 덕분에 가족들 걱정은 시키지 않게 됐으니까.

내가 오늘만큼은 효자다.

'이제부터는 내 걱정만 하면 되겠구나.'

나는 치솟는 불길에 기름을 들이부은 참이었으니까.

'왜, 신화 길드 말이야.'

신화 길드는 내 심기를 거스른 죗값을 제대로 치르고 있었다.

언론 뒤에 숨었던 만큼 그 역풍을 제대로 맞고 있는 거겠지.

"허나, 부족하다."

물론, 네티즌의 댓글 폭격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인터뷰가 아니었으면 말이야.'

내가 이런 치욕에 시달릴 필요도 없었을 터.

나는 느긋하게 찻잔을 기울이며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이 수치심은 몇 배로 돌려주고 말겠다....

*

방송국 사이에선 눈치싸움이 한창이었다.

누가 먼저 이호열에게 카메라를 들이댈 것인가!

현재의 이호열의 화제성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저 단독으로 이호열을 앵글에 담는 것만으로도.

최소 20퍼센트는 넘기는 시청률을 보장받겠지.

그러나.

"진짜 시청률에 미치지 않고서야...."

"누가 그 호랑이 굴로 기어들어 가고 싶겠어?"

"안 그래도 까칠한 성격이 더 까칠해졌을 텐데."

누구 하나 섣불리 나설 수 있을까.

가뜩이나 취재하기 어려웠던 이호열.

그런 이호열이 사실 650레벨 몬스터를 혼자 쓰러트릴 정도로 강했단다.

그것도 모자라 여태까지와 다르게 공개적으로 자신의 불편한 심기를 표출한 상황이다.

투데이 아르카나, PD 현용석.

일명 시청률에 미친놈도 이번엔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 종진이 헬기 타다가 죽을 뻔했던 게 얼마 전인데. 또 사지로 보낼 순 없지. 이번엔 내가 한 번 참아줄게. 종진아."

현용석조차 그렇게 나오는데.

다른 방송국 상황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이호열은 포기하자.

그렇게 판단을 내렸다고 해서 손가락만 빨고 있을 방송국 놈들이 아니었다.

이호열만큼은 아니고, 또 이호열과는 전혀 다른 쪽으로 열렬한 반응이었지만....

시청률 하나만큼은 보장된 곳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신화 그룹 본사 반응은 어때?"

신화 그룹 빌딩.

설치된 포토라인에는 방송국 카메라와 기자들도 가득 차 있었다.

사실상 이호열에게 공개적인 저격을 받은 신화 길드였다.

그 신화 길드는 신화 그룹의 계열사와 다름없었으니까.

찰칵─

연습 삼아 플래시를 터트리던 기자 하나가 수군거렸다.

"그나저나 보통이 아니네요. 신화도."

"그러게요. 정면 돌파를 할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하여튼 우리 같은 일반인들로서는 플레이어들의 머리를 따라갈 수가 없다니까요?"

신화 길드의 마스터, 백이설.

그녀는 이호열의 인터뷰에 대한 답을 곧장 내놓았다.

──────

[속보] 신화 길드 백이설, "이호열, 찾아가겠다."

──────

다시 봐도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는 태도였다.

아아─ 입을 풀고.

대본을 숙지하던 앵커가 감독에게 말했다.

"깔끔하게 인정해 버린 거잖아요? 비열하게 숨은 것도, 잔머리를 굴린 것도 다 자기들이라고. 뭐, 사실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잡아떼려고 했으면 끝까지 잡아뗄 수 있었을걸? 왜, 우리 방송국만 해도 봐봐. 신화 놈들이 높으신 분들 멱살을 꽉 휘어잡고 있잖아."

"하긴 보도국에서 곡소리가 끊이지 않았었죠. 자기들이 무슨 욕받이냐고."

이젠 여론조차 돌아선 마당에 정면 돌파라니.

"뭐, 믿는 구석이라도 있다는 건가?"

앵커가 중얼거리자 감독이 대꾸했다.

"아, 백이설 씨는 처음 보는 거지?"

"...네? 그렇죠. 실물은 처음이죠?"

"그럼, 그럴 만도 하지. 이따가 한번 봐봐."

"예? 뭘 봐요?"

"그 자신감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게 될 테니까."

"...?"

보면 알게 된다니.

의문이 해결되기는커녕 더욱 커지는 대답.

하지만 그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 나왔다!"

찰칵─!

곧 백이설이 포토라인 앞에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쏟아지는 플래시 세례.

그러나 백이설은 눈 한번 찌푸리지 않았다.

어깨 위에 걸친 코트.

아래로 언뜻 보이는 파격적인 의상.

그러나 그보다도 화려한 외모.

백이설.

그녀의 자신감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보면 알게 될 거라고 했었나.

앵커는 백이설과 마주하는 순간 깨달았다.

'...이건 예쁜 걸 넘어서.'

매혹적이었다.

그녀에겐 사람을 홀리는 무언가가 있다고.

그건 자신의 본업조차 잊게 할 정도였다.

감독이 넋이 나간 앵커에게 뻐끔거렸다.

-뭐해? 큐 싸인 떨어졌어!

"...!"

그제야 정신을 차린 앵커가 입을 열었다.

"네, 저는 지금 신화 그룹 본사 앞에 나와 있습니다!"

.

.

.

마탑.

포탈에서도 백이설의 주변은 인산인해였다.

취재진은 떨어져 나갔다 해도 넷튜버 플레이어들이 따라붙었다.

그들에게도 이건 시청자를 끌어모을 수 있는 큰 떡밥이었으니까.

왜, 딱 봐도 각이 보였다.

"저도 균열 뺑뺑이 돌던 시절에 신화 길드 놈들한테 당한 게 한두 번이 아니라니까요?! 네, 주작은 하지 말라고요? 어떻게 아셨어요?"

극과 극.

최고의 주가를 달리는 이호열.

마찬가지로 비호감의 끝을 달리는 신화 길드가 아니던가.

그 결과가 어떻든.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되는 일.

넷튜버들에겐 이보다 좋은 기회도 없었다.

-이게 화제가 되는 것도 웃긴다ㅋㅋㅋ

-ㄹㅇㅋㅋ 호열 님을 뭘로 보는 거임? 다들

-신화 길드 마스터에 재벌이면 다냐? 그렇게 따지면 이호열 뒤엔 유스라 왕국이 있는 건데ㅋㅋㅋ

-버르장머리 없게 뭐 이호열?! 저게 미쳤나

"맞습니다. 우리 호열 형님이 정의 구현 제대로 해주시겠죠!"

적당히 이호열 편을 들었다가.

-근데 아무리 그래도 신화는 정치인들 등에 업은 게 팩트라;;;;

-ㄹㅇ 그냥 좀 쉽지 않을 것 같은디?

-그리고 백이설이 협상 하나는 기가 막히잖아

-능력은 확실하지 ㅇㅇ;;

"역시 시청자 형님, 누님들. 날카로운 지적이십니다."

또 적당히 위기감을 조성하면서.

시청자를 끌어모으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거기에다가 살짝 눈치를 보면서 수금까지.

"그럼 또 우리 호열이 형님을 응원하는 마음에서 리액션 시원하게 한 번 가볼까요? 예? 응원하는 건 이호열인데, 돈은 왜 제가 받냐고요? 아니, 저도 먹고살아야지...."

자신을 둘러싼 소란.

그러나 그녀는 작게 코웃음을 칠뿐이었다.

'어디 마음껏 지껄여 보렴."

어리석기는.

그 반응이 뒤바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백이설, 아니 서큐버스는 포탈을 향해 나아갔다.

몸에 남아있는 백이설의 기억이 포탈이 어떤 것이고,

어떤 역할을 하는지 깨닫게 해줬다.

서큐버스는 뒤따라오는 이들에게 혀를 찼다.

'어리석은 인간 주제에.'

쓸데없이 귀찮게 한다.

이내, 서큐버스의 시야에 들어온 유스라 왕국.

과연 이곳에선 고향의 분위기가 풍겼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두 번째 고향이려나.

언제까지나 자신은 지옥에서 태어난 악마였으니까.

서큐버스는 곧장 황금 궁전으로 향했다.

'저게 내 손에 들어온단 말이지.'

이호열.

그가 자신의 유혹에 넘어오지 않을 거란 상상은 하지 않았다.

백이설의 육체를 차지한 뒤, 자신은 급격하게 성장한 상태였으니까.

그래, 백이설의 기억에 남아있는 단어로 표현하자면....

'레벨이 올랐단 소리겠지.'

상급 악마를 넘볼 수 있을 정도로.

거기에다가 이호열도 어쩔 수 없는 사내가 아닌가.

"무슨 용건이십니까?"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이 여기사와는 다르게.

그녀를 멈춰 세운 건 예시카였다.

라이언 하트 기사단은 유스라 왕실 근위대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으니까.

백이설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백이설입니다. 이호열 씨를 만나러 왔답니다."

예시카는 두말하지 않았다.

"외부인은 출입할 수 없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떠난 예시카였거늘.

서큐버스의 눈은 예리했다.

'미련스러울 정도로 순진하구나.'

이호열, 그를 신뢰하고 있는 모양이다.

'사내는 전부 똑같은데 말이야.'

예시카의 실망한 얼굴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황홀했다.

그래서일까, 기다림이 지루하지 않았다.

게다가 주변에서 워낙 떠들어대야 말이지.

"드디어 도착한 거 같은데요?"

"쉬는 타이밍에 좋아요, 구독 부탁드립니다."

"...저도 들어가 보라고요? 아니, 제가 저길 어떻게 들어가요? 너무하십니다, 정말! 라이언 하트 기사단한테 칼 맞아 죽을 일 있습니까!"

그리고 예시카가 돌아왔다.

"...?"

그런데 어째서인가.

그녀의 입꼬리가 조금, 미세하게 올라가 있었다.

예시카는 이번에도 두말하지 않았다.

"돌아가시랍니다."

...잠깐만, 뭐라고?

도, 돌아가라고?

서큐버스는 어이가 없었다.

그럴 리가 없다.

제대로 전하지 않았겠지.

"똑바로 전한 건가요? 신화 길드의 백이설이 찾아왔다고...."

예시카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만남에 허비할 시간이 없다. 돌려보내라."

냉랭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분명 그리 전달하라고 하셨습니다."

순간,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정적─

"...."

그러나 넷튜버들이 조용히 넘어갈 리 없었다.

"...뭐야, 그냥 거절도 아니고 문전박대?"

"분명 허비할 시간이 없다 했죠? 그럼 백이설과의 만남이 시간 낭비와 다름없다는 소리...?"

"혀, 형님들! 이거 백이설이 제대로 차인 것 같은데요?!"

◈ 49화. 허나, 숨어도 소용없다 (3)

빠득─

백이설, 아니 서큐버스의 자존심에 금이 가는 건 당연했다.

생각지 못한 대답에 자존감이 뚝 떨어지는 듯한 기분이었으니까.

게다가 주변에서 쫑알쫑알.

신경을 돋우는 하찮은 인간들까지.

"와씨. 백이설 되게 쪽팔릴 것 같은데요?"

"표정 좀 잡아달라고요? 뒤돌 때 싹 클로즈업해 보겠습니다."

"그나저나 저 기사님도 아름다우시네. 이따가 이름이라도 물어볼까요, 형님들?"

서큐버스는 이를 갈았다.

'...네가 감히?'

고작 인간 주제에 나를?

이호열이고 뭐고.

갈가리 찢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하지만 서큐버스는 영악했다.

자신이 악마란 사실도 여태껏 들키지 않고 숨겨왔거늘.

고작 표정 하나를 숨기지 못할까.

"어쩔 수 없네요. 조만간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서큐버스가 예시카에게 웃음 지으며 돌아섰다.

'우쭐대는 것도 오늘만이란다.'

그래, 반전은 극적일수록 커지는 법이다.

오늘이야 시간이 맞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일단 자신과 마주하기만 한다면.

이호열이 매혹에 빠지는 건 시간문제일 테니까.

'뭐든 즐길 수 있을 때 즐겨두렴.'

이호열이든, 유스라 왕국이든, 저 건방진 여기사든.

결국, 내 음몽 앞에 무릎을 꿇게 될 테니까.

하지만 그건 서큐버스만의 착각에 불과했다.

고작 한 번의 문전박대.

복수는 비로소 시작된 참이었으니까.

.

.

.

정치, 사회, 스포츠, 연예....

신문은 그 면마다 다루는 주제가 다른 법이다.

당연하게도 다루는 취잿거리 또한 다를 터.

하지만 그 1면을 동시에 장식한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신화 길드의 마스터 백이설이었다.

백번 양보해서 정치, 사회면이야 이해할 수 있었다.

──────

박삼봉 의원, "원활하지 못한 협상 아쉬워... 신화의 성장은 대한민국 성장이라 봐도 될 것."

[단독] 기재부 관계자 曰, "낙수 효과는 증명된 이론... 신화 길드가 살아야 대한민국 경제가 살아난다."

──────

재벌 그룹이던 시절부터 길드에 손을 뻗친 지금까지.

신화는 정치, 사회면의 단골손님이었으니까.

하지만 연예면까지 1면을 장식할 줄이야.

──────

[단독] 백이설, 밀당에서 완패? 팜므파탈 무너지나?

──────

그것도 굴욕적인 타이틀, 사진과 함께!

그 기사 사진에 당당했던 백이설의 모습은 없었다.

황금 궁전 앞에서 문전박대를 당하는 백이설의 뒷모습.

그 아래에 붙은 짧디짧은 사족까지.

──────

▲일곱 번째 문전박대의 순간.

포토라인 앞에서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

삼고초려를 가뿐하게 넘겨.

무려 십고초려를 향해 달려가고 있던 것이었다.

안쓰럽게 느껴질 법도 한 뒷모습이었거늘....

유감스럽게도 백이설을 향한 동정론은 피어오르는 기색조차 없었다.

──────

-ㅋㅋㅋㅋㅋㅋ이럴 줄 알았다 내가

-이호열이 만만하냐고 아ㅋㅋ

-업보 제대로 돌려받네 쌤통이다

-정의구현ㅋㅋ

──────

그래, 모든 게 업보였다.

백이설의 동공이 새까맣게 물들었다.

"그리고 네가 쌓고 있는 것도 업보겠지."

...이호열!

인간에게 수차례 망신을 당한 악마로서의 굴욕.

마찬가지로 구겨진 서큐버스의 체면까지.

자신의 자존심을 배로 무너트린 그 사내.

이 수치심을 떠올리면 간신히 숨겨온 악마의 모습이 지금처럼 튀어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참기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오늘이야말로 그 업보를 치르게 해주겠어."

상급 악마를 넘볼 정도로 강해진 만큼.

끓어오르는 악마의 본성 또한 짙어졌으니까.

서큐버스는 흘러나오는 악의를 간신히 추슬렀다.

그리고 황금 궁전으로 향했다.

오늘도 거절을 당한다?

상관없었다.

오늘은 이호열, 그가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으니까.

기다리며 심심할 일도 없겠지.

시건방진 여기사와 눈싸움을 하면 되니까.

...그렇게 다짐했는데.

"안내하겠습니다."

기대조차 하지 않았거늘.

보다시피 황금 궁전에 입성하고 말았다.

서큐버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유는 알 수 없어도 명을 재촉하는군.'

과연.

이호열, 그 역시 어리석은 인간에 불과했다.

그의 정기를 취할 생각을 하니 간신히 추스른 악기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더 이상 억누를 필요는 없겠지. 어차피 목전까지 온 참이니까.

"들어가시면 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고 물러나는 예시카.

서큐버스는 곧바로 문을 두들겼다.

'...참을 수 없어!'

순간, 치솟는 갈증.

이호열의 대답이 들려오기도 전에 문을 열었다.

그리고 이호열과 마주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곧은 자세.

호열은 책상에 앉은 채.

눈길조차 주지 않고는 말했다.

"대답이 들려오기도 전에 문을 열다니."

차가운 음성이 이어졌다.

"격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구나."

...잠깐만, 무언가 잘못됐다.

서큐버스는 그제야 심상치 않은 낌새를 알아차렸다.

그러나 이호열과 시선이 마주쳤다.

오싹─

머리부터 발끝까지.

뻣뻣하게 굳어오는 듯한 느낌.

그건 생전 처음 느껴보는 '공포'였다.

"...!"

굴욕감을 느끼게 할 정도로 오만한 시선.

이호열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명백하게.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설마 악마라는 걸 눈치채고선 나를 여기로...?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알아차리기 전에 도망쳐야 해.

매혹으로 시간을 벌자.

...자, 잠깐! 어째서 매혹에 빠지지 않는 거야?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은 서큐버스.

그 악마의 귓가에 천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과연, 하찮은 악마답다."

.

.

.

의아하단 생각은 들었다.

그건 남태민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최근 들어선 저희도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과했죠. 아무리 로비를 했다고 해도 대놓고 욕먹을 정도로 밀어줄 양반들이 아니거든요. 그 구렁이 같은 양반들이?"

원래 정치판이 그런 곳이니까.

이해관계에 따라 학연이고, 지연이고, 혈연이고.

끊어내고 갈라서는 게 그쪽 동네란 말이다.

"확실히 뭔가 있다는 생각은 드는데.... 그걸 저희 측에선 알아낼 수가 없어서. 괜히 호열 씨를 번거롭게 만든 것 같아서 면목이 없습니다. 정말."

남태민은 정중하게 사과를 건네왔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보니까 알아낼 수 없는 게 당연했다.

백이설이 악마에게 빙의됐다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느냐고.

'심지어 나도 몰랐다.'

알았다면 말이야.

번거롭게 몇 번씩 되돌려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악마가 멀쩡하게 숨을 쉬고 돌아다닌다?

유치한 복수를 떠나 그랑펠의 설정이 존재하는 이상.

나는 그 꼴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을 테니까.

[스킬, '천적관계'가 발동됩니다.]

그래, 그 메시지가 아니었다면.

꿈에도 몰랐을 거란 소리다.

천적관계가 발동됐다가 꺼져버린 건.

정말 찰나였으니까.

'기척을 완전히 숨기지 못한 거겠지.'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이해할 수 없었던 신화 길드와 정치인들의 관계가.

'다른 것도 아닌 악마들의 상태이상이라면?'

플레이어도 아닌 민간인들을 다루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울 테니까.

그것이 내가 백이설을 들인 이유였다.

또각또각─

점점 커지는 구두 소리.

그와 동시에 다시금 떠오르는 메시지.

[스킬, '천적관계'가 발동됩니다.]

백이설은 악마다.

추측이 확신이 되는 순간.

똑똑─

노크 소리와 동시에 문이 열렸다.

"대답이 들려오기도 전에 문을 열다니. 격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구나."

나는 깃털 펜을 든 채 입을 열었다.

적어나가던 것은 흑마법의 기초 이론.

문장에 마침표를 찍고 나서야 고개를 들어 올렸다.

과연, 새까맣게 물든 백이설의 동공이 보였다.

"과연, 하찮은 악마답다."

꼿꼿하게 책상에 앉은 채로.

여전히 깃털 펜을 손에 쥐고는 그렇게 말했다.

정말이지, 허세가 가득한 태도가 따로 없었겠지....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말이야.

그러나 적어도 이제는 아니었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떨고 있는 것은 오히려 백이설이었으니까.

천적관계.

───────

천적관계 : 악마족과 전투 시 전투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한다.

───────

한동안 잊고 살았던 그 스킬의 효과를 다시금 체감하게 된다.

무엇보다 나는 거악을 처치하기 전후, 굉장히 달라진 상태였으니까.

단순하게 레벨만 하더라도 그랬다.

거악, 칠죄종 탐욕을 처치하며 단숨에 50레벨이 상승했었으니까.

그것도 모자라 레벨, 스킬, 수치로는 설명할 수 없는 성장도 빼놓을 수 없다.

마탑에서 마법 서적을 독학하며 발전한 마법 발현력은 물론.

입문자 수준에 불과하지만 흑마법.

그것도 모자라 검술 훈련까지.

'결국, 이번에도 있는 거 없는 거 모조리 끌고 왔잖아.'

구질구질하든 어쨌든.

그 모든 성장이 나의 전투력이 됐단 말이다...!

성장한 전투력이 [천적관계]의 효과로 비약적으로 상승했다는 게 느껴졌다. 느끼고 있는 건 백이설의 몸에 빙의한 악마도 마찬가지겠지.

"...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이제 와서 발뺌하다니.

사리 분별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다 이유가 있던 거였어.'

수모를 당하면서도 끊임없이 나와 만나려고 했던 이유를 알겠다.

그 목적도 짐작이 갔다.

유스라 왕국을 차지하기 위해 나를 상태이상에 빠트리려는 계획이었겠지.

하지만 그 고생이 유감스럽게도.

나는 사냥감과 불필요한 말은 섞지 않는 주의다.

슥─

곧장 발현되는 마법.

복잡한 간섭 과정도 필요하지 않았다.

나와 녀석에겐 거스를 수 없는 체급 차이가 존재했으니까.

그 체급 차이는 [구마의식]에 악마의 아이템을 소모하지 않아도 될 정도.

[스킬, '구마의식'이 발동됩니다.]

필요한 건.

오직 악마에게만 피해를 주는 기본 효과뿐.

녀석을 의식에 초대할 필요도.

정신력 싸움도 필요하지 않다는 소리였다.

"이, 이건 말도 안 돼!!"

그거야 녀석은 이미 공포에 질려있었으니까.

"나는 더 이상 중급 악마가 아니란 말이다! 상급 악마, 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더 강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인간 따위가 내 유혹에...!"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모습이었다.

상급 악마?

거악의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긍지다.

설령 '마왕'을 데려온다고 하더라도.

이 당당한 태도에는 조금의 변함도 없겠지.

그러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찮은 악마 따위에게 그 사연을 설명할 정도로.

그랑펠은 친절하지 않았으니까.

허공에 떠오른 건 수천. 아니, 수만....

아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무수한 은 단침.

[순수한 은털]

[등급 : 매직]

[제한 : 없음]

[효과 : 없음]

[설명 : 모피처럼 보이지만 본질은 순수한 은이다. 은이기에 절대적인 가치는 크지 않지만, 활용에 따라 높은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또한 무엇하나 허투루 사용할 수 없는 나의 발버둥.

검기 훈련 도중 쓰러트린 몬스터.

은빛 갈기 표범에게서 획득한 재료 아이템이었다.

나는 그 재료 아이템을 탐색해 무기처럼 활용할 가능성을 발견했었다.

그 가능성을 실현시키는 건.

[스킬]로는 절대 따라올 수 없는 『마법』의 창의적인 발현.

스스륵─

털 하나하나가 나의 무기가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재료 아이템을 날렸다고 아까워할 이유도 없었다.

은제 단검이 그랬던 것처럼.

『반전 마법』이면 원래 상태로 되돌릴 수 있었으니까.

망설일 게 없다는 소리였다.

스스슥─!

수만 개의 은제 단침이 백이설에게 쇄도했다.

공격력이 존재하지 않는 재료 아이템이기에.

그 파괴력은 오로지 나의 마력에 달렸겠지.

때문에 일격으로 끝나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으, 으아아악!!"

풀썩─

백이설이 바닥에 주저앉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처음에는 연기를 하나 싶었다.

...아무리 그래도 상급 악마라면서?

내가 급격하게 성장했다고 한들.

방금 마법은 제대로 된 공격 마법도 아니었다.

연금술에 기반한 단순한 견제에 불과하단 말이다.

그래서 의심도 해봤다.

과연 비열한 악마답게 죽은 척 연기까지 하는구나, 싶어서.

그런데 아니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떠오르는 메시지가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백이설의 몸을 차지했던 게 정말 상급 악마였단 것도.

내가 그런 상급 악마를 압살할 정도로 성장했다는 것도.

나는 흠칫하고 말았다.

...잠깐. 몇 레벨이야, 이게?

◈ 50화. 프로스트 (1)

신화 그룹.

백이설에게 신화는 언젠가 무너트려야 할 거대한 산이었다.

아래에서 무너트릴 수 없다면.

그 꼭대기에 올라서서라도 무너트려야 하는 산.

"독한 년."

백이설의 어머니는 그렇게 불렸다.

백이설은 아버지, 아니 백 회장의 배다른 자식이었으니까.

불공평한 일이었다.

잘못한 건 백 회장인데 손가락질을 당하는 건 엄마라는 게.

불합리한 일이었다.

우울증에 시달리던 어머니가 결국, 세상을 떠나신 것도.

-부디 조용히 살거라. 설아.

누구 하나 찾지 않는 장례식장에서.

백 회장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백이설은 그 불합리를 참을 수 없었으니까.

독한 년이라고 그랬겠다.

그럼 독한 년의 피를 물려받았을 내가.

이 핏줄을 타고 흐르는 독으로.

신화를 중독시켜 죽여버려야지만 이 원한이 풀릴 것 같았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대격변은 기회였다.

아니, 운명이었다.

과거,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시작했던 아르카나.

그런 아르카나가 현실이 됐다.

백이설은 그 운명을 놓치지 않았다.

제 발로 신화라는 호랑이 소굴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백 회장에게 인정을 받았다.

──────

[단독] 신화 그룹 백주성 회장, "백이설은 내 딸이다."

──────

신화 길드의 마스터가 되었다.

신화 길드가 신화 그룹의 정식 계열사가 되었다.

그래서 기쁘냐고?

유감이지만 복수는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그래, 분명 그랬을 텐데.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무의식 속에 가라앉은 느낌.

정신이 돌아오는 때는.

누군가가 말을 걸어올 때밖에 없었다.

"어때? 점점 목표에 가까워지는 것 같니, 우리 아가씨?"

호텔의 전경.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저건 분명 자신이었다.

그러나 무엇 하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유리의 비친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는 손가락도.

심지어는 말 한마디조차도 뱉을 수 없었다.

그런 백이설을 비웃듯 목소리가 이어졌다.

"물론, 네가 생각한 방식과는 차이가 있을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후회한다고 해도 어쩌겠니? 이제 와서 무를 수도 없는 일인걸."

...그 말에 떠올렸다.

그래, 자신의 몸을 차지한 건 악마였다.

균열에서 마주쳤던 서큐버스.

그날의 기억이 찬찬히 돌아왔다.

균열 공략은 실패였다.

악마족 몬스터라니.

그런 변수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었으니까.

찌릿─

백이설은 자신에게 검을 겨눈 길드원들을 바라봤다.

모두가 서큐버스의 상태이상에 당한 것이었다.

이렇게 죽는 건가?

백이설은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죽을 순 없었다.

복수는 이제야 시작됐단 말이다.

백이설은 주먹을 쥐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백이설에게 악마는 속삭였다.

"황홀한 눈빛이야. 마음에 들었어."

[중급 악마, 서큐버스가 당신을 주시합니다.]

[정신력이 너무 낮습니다.]

[상태이상 : 빙의가 발생합니다.]

그러나 백이설은 착각했다.

악마란 족속이 어떤 족속인지.

영혼을 판다고 그랬나?

거래를 떠나서.

악마에게 인간은 그저 전부 똑같았으니까.

그저 기만에 놀아나는 하찮은 존재.

후회한다고 해봤자 소용이 없단 소리였다.

백이설은 그제야 깨달았다.

'...한두 번이 아니었어.'

그래, 악마에게 몸을 빼앗겼다는 사실을 깨닫고.

낙담하고 다시 무의식 속에 잠드는 과정을.

자신은 몇십 번이고 반복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건 백이설을 더욱더 깊은 무력감에 빠지게 했다.

다음엔 악마의 목소리조차 들을 수 없을 정도로....

"과연, 하찮은 악마답다."

'...?'

그런데 뭘까, 이 목소리는.

하찮은 인간도 아니고 악마라니...?

그건 서큐버스가 아닌 사내의 목소리였다.

서큐버스조차 당황한 걸까.

동요하는 바람에 무의식 속에 잠들었던 백이설이 깨어났다.

그리고 백이설도 보게 되었다.

흔들림 없이 곧은 자세.

"...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마치 악마의 유혹 따윈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이, 이건 말도 안 돼!!"

악마를 사냥하는 호열을.

"아아악!!"

백이설은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통쾌하다?

아니, 그런 감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쨌거나 자신도 악마와 함께 숨을 멎어가는 상태가 아니던가.

그러니까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복합적인 감정이 느껴졌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건.

'...일단 고마워요.'

호열에게 감사하다는 것.

기억에 떠오르는 서큐버스의 만행.

그건 정말이지, 토악질이 나올 정도였다.

더 이상 그런 추태를 부리지 않아도 되는 것만으로도.

죽을만한 보람이 있었네.

그래,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였다....

"...?"

슥스슥─

일정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서명할 때나 들었던....

그래, 날카로운 펜촉이 종이를 긋는 소리.

'...뭐야?'

뭔진 몰라도.

지옥에 떨어지고 처음 듣는 소리라고 하기엔 이상했다.

이내, 천천히 눈꺼풀을 뜬 백이설.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건 역시나 호열이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까와 같은 한결같은 자세로.

무언가를 적어나가는 호열의 모습.

백이설은 눈을 몇 번 깜빡여보고는 현실을 깨달았다.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나, 살았구나.

그 사실을 알게 되자 자신의 상황을 자각할 수 있었다.

'...이런.'

서큐버스에게 빙의됐었단 사실도.

그 때문이라고 해도 추태를 부리려던 것도.

호열은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고마움을 떠나 창피한 게 당연했다.

'일어나야 하는데.'

백이설이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눈치를 보던 때였다.

"정신이 드는가."

"...!"

호열이 말을 걸어왔다.

백이설은 반사적으로 호열을 쳐다봤다가 흠칫했다.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자세에 흐트러짐은 조금도 없었다.

...혹시 옆통수에도 눈이 달렸나, 싶을 정도로.

그 상태로 호열은 말을 이었다.

"상세한 이야기는 추후에 나누도록 하지."

...상세한 이야기라니?

빠른 상황 판단.

백이설은 머리를 굴렸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녀에게 이런 협상 자리는 익숙했다.

그러니까 입장 정리도 빨랐다.

'...나는 끌려다닐 수밖에 없는 입장.'

호열은 자신의 치부를 알고 있는 갑.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목숨까지 구해준 은인이 아니던가?

목숨 값이라고 생각하자.

백이설은 어떤 거래가 됐든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지금, 무엇이든, 말씀하셔도 됩니다."

그러나 애써 굴렸던 머리가 무색하게도.

되돌아온 것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되물음이었다.

"무언가를 제시해야 할 처지는 그대가 아닌가?"

"...?"

그것은 진정한 갑(甲).

"나는 아직 그대의 제안을 듣지 못했네. 유스라 왕국 재건에 참여하기 위해 신화 길드는 어떤 투자와 위험까지 감수할 수 있는지를. 다음 만남에서는 확실하게 제시하게."

"...!"

비열하게 누군가의 뒤에 숨지도.

빤히 보이는 잔머리 또한 굴리지 않는.

그야말로 귀족으로서의 자세.

호열의 말에 백이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들었습니다."

이런 상대를 멋대로 착각하고 오해하다니.

감사와 사과의 뜻을 담아서.

백이설은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진심을 담은 제안으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

천적관계가 발동되지 않은.

한마디로 나사가 빠진 상태.

거기에다가 검기 발산이라는 낯선 전투 방식까지.

그런 나는 기껏해야 350레벨짜리 몬스터.

그것도 고작 한 마리를 쓰러트리는 데에 쩔쩔맬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내 레벨을 생각하면 그것도 대단한 거였지만.

그동안 쓰러트린 악마족 몬스터의 레벨을 생각하면 확실히 낮은 수준이었으니까.

그 탓에 내 레벨은 230에 머물러 있었다.

다른 플레이어들을 생각하면 결코 느린 속도는 아니겠지.

'이미 고기 맛을 알아버린 거지.'

하지만 그 맛을 알고 있어서 그런가.

내심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클래스 : 악마 사냥꾼]

[레벨: 238]

[능력치]

근력 : 38 / 민첩 : 42 / 마력 : 180 / 행운 : 3

[보유 포인트 : 8]

백이설에게 빙의한 악마를 쓰러트렸고.

그러자 단숨에 8레벨이 상승한 것이었다...!

전리품이고 뭐고 마냥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역시 나는 악마를 사냥해야 한다.

나처럼 악마 사냥꾼이 천직인 사람이 또 없을 거다.

'어쨌든, 자화자찬보다.'

악마족 몬스터.

또 한 번 녀석들의 악랄함을 깨닫게 된다.

확실히 악마는 일반적인 몬스터와 달랐다.

균열이 붕괴되고 놈들이 뛰쳐나온다고 하더라도.

상황에 따라선 알아차릴 방법이 없었으니까.

'인간에게 빙의하면 그만이니까.'

왜, 가장 약한 하급 악마 임프만 하더라도.

플레이어에게 쉽게 빙의할 수 있었잖아?

남철민이 당했던 것처럼.

'그것도 모자라 악마는 강해질수록 비열해진다.'

임프는 다른 사람들도 알아차릴 정도로 티를 내기라도 하지.

백이설의 경우엔 악마에게 빙의 당하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알아차린 이들이 없었다.

스슥─

문득, 나는 필기를 멈추고 입을 열었다.

"심히 나를 번거롭게 하는구나."

어쩌면 백이설이 특이한 경우가 아닐지도 모른단 소리였다.

지금도 현실, 사회 곳곳에 악마가 몸을 숨기고 있을지도 모르는 거겠지.

"내 연구를 방해한 대가는 제대로 받아내겠다."

...그래, 나는 몰라도.

그랑펠이 그 꼴을 두고 볼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뭐, 사실 나로서도 나쁜 장사는 아니겠지.

기본적으로 악마족 몬스터는 레벨이 높았으니까.

그리고 나는 그런 악마족 몬스터의 천적이니까.

...오히려 이런 현실을 반가워해야 하는 건가?

진지하게 그런 고민에 빠지기도 잠시.

지이잉─

문득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흘러가는 시간이 덧이 없구나."

그래, 하루라도 빼먹으면 서운하지.

오글거리는 대사도 잠깐.

알림을 확인했다.

음, 이건 꽤 중요한 일이다.

나는 드디어 깃털 펜을 내려놓고 인터넷 창을 열었다.

아르카나 공식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새롭게 떠오른 신규 업데이트를 확인하기 위해서.

.

.

.

커뮤니티엔 플레이어들의 설레발로 가득했다.

-일해라 레이먼 일해라 레이먼 하니까 진짜 일하기 시작하네ㅋㅋㅋㅋㅋㅋ

-ㄹㅇㅋㅋ 드디어 정신 좀 차렸나?

-그래 이 정도 업뎃은 해줘야 밸런스가 좀 맞지ㅋㅋㅋ

크고 작은 균열이야, 별다른 업데이트 없이 계속 생성되고 클리어되고 있다 하더라도.

최근 신규 업데이트 콘텐츠의 밸런스 조절은 완전 실패였으니까.

아스큐라 백작도 너무하다 싶었거늘.

보물섬의 탈을 뒤집어쓴 거악이 나타날 줄이야.

그때 분위기는 지금 생각해도 정말 끔찍했다.

-ㄹㅇ루 지구 멸망하는 줄ㅋㅋ

-이호열 없었으면 진짜 망했을지도ㅋㅋㅋ

-그저 호멘

그러니까 이번 신규 업데이트 내역에 플레이어들이 환호하는 건 당연했다.

이건 가뭄에 단비와도 같은 업데이트였으니까.

『여러분 곁으로 새로운 지역이 찾아옵니다.

신규 지역, '북부 도시, 프로스트'가 추가됩니다.』

프로스트.

그건 아르카나 대륙 북부에 있는 대도시였다.

그래, 작은 마을도 아니고 무려 대도시.

플레이어들이 열렬하게 반응한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야 대도시엔 상점과 대장간을 비롯한 다양한 콘텐츠가 존재했으니까.

-유스라 왕국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긴 한데....

-아무리 그래도 유스라 왕국 하나로는 부족하지ㅋㅋ

-ㄹㅇ 도시는 많으면 많을수록 이득임

대도시 프로스트의 영향력은 아르카나가 게임이던 시절에도 상당했다.

덕분에 랭커나 대형 길드는 프로스트에서 적잖은 관계도와 영향력을 쌓아뒀었다.

"반드시 가온에게 밀린 순위를 복구해야 한다!"

"...근데 가온도 프로스트에서 꽤 이름 날렸을걸요?"

"듣기 싫다. 무조건 해내야 한다. 희생을 각오하더라도!"

플레이어들뿐만 아니라.

각국의 정부 인사들도 촉각을 곤두세웠다.

"생성 위치를 빠르게 파악해야 하네."

프로스트.

엄청난 가치를 지닌 아르카나의 대도시가 조국의 영토에 나타난다?

대한민국의 마탑 효과에 미치진 못하더라도, 그것만으로도 국가 경쟁력의 상승을 기대해 볼 만했으니까.

아르카나의 최고 전문가들.

AAU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과거엔 코스모의 개발 팀장.

현재는 AAU 지부장.

그들은 화상회의에서 이렇게 의견을 모았다.

"유스라 왕국에 이어서 프로스트의 등장이라. 어쩌면 지금부터 인류의 반격이 될 수도 있겠네요."

"뭐, 사실 반격은 이미 시작된 건지도 모르죠? 그 최전방에 선 게 바로 이호열이구요. 그나저나 한국 지사 지부장님. 정말 이호열 플레이어에 대해 아시는 거 없습니까?"

"진짜 묻지 마세요. 저도 궁금해 죽을 지경이니까요!"

엄살에 웃음을 터트릴 정도로.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

.

.

그래, 신규 업데이트 내역을 확인하고.

미동조차 하지 않았던 건.

단 한 사람.

나밖에 없었겠지.

프로스트의 등장으로.

유스라 왕국의 영향력이 옅어질까 봐?

아니, 그따위 이유가 아니었다.

그게 아니라면.

[눈앞에서 점멸하는 퀘스트창]

프로스트가 꿈과 희망이 가득 찬 대도시가 아니란 것을.

다른 플레이어들보다 먼저 알아차려서?

아니, 그따위 이유도 아니었다.

이것은 단지 그랑펠의 드높은 긍지.

『그랑펠이 차기 가주로서 가장 먼저 몸에 익힌 건 사사로운 것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평소처럼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그 어떤 악마의 유혹과 기만, 시련도 그랑펠의 고고한 긍지에는 흠집조차 낼 수 없다.』

"부른다고 나타나는 모습이 하인과 다를 바 없구나."

[클래스 퀘스트 : 마왕(魔王) 토벌]

"마왕이여."

◈ 51화. 프로스트 (2)

고작 몇 시간이나 지났으려나.

설령 '마왕'을 데려온다고 하더라도.

이 당당한 태도엔 조금의 변함도 없을 거라고.

나는 분명 그렇게 생각했었다.

...말이 아니라 생각조차 씨가 되는구나, 진짜.

[클래스 퀘스트 : 마왕(魔王) 토벌]

악마들의 왕.

그들의 마수가 뻗쳐오기 시작한다.

최후의 악마 사냥꾼이여.

왕좌를 무너트려라.

─나약해진 육체를 단련하라. (반복)

─북부도시 프로스트를 조사하라. (진행 중)

점멸하는 퀘스트창을 응시했다.

악마들의 왕이라니.

아무리 봐도 내가 아는 그 마왕이 맞는 모양이다.

'찬물, 아니 이 정도면 얼음물을 끼얹는 거잖아.'

아무리 반전을 좋아해도 그렇지.

유스라 제도 때부터 선을 넘는 업데이트다, 정말.

다 떠나서 물어보고 싶었다.

지금 분위기를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오랜만에 NPC들 볼 생각하니까 반갑네ㅋㅋㅋㅋ

-마스코트 말론 등장ㅋㅋㅋ

-말론? 그게 누구임?

-말론을 몰라? 츤데레 대장장이 하나 있음

-별명이 아낌없이 주는 나무였지? 아마?ㅋㅋ

프로스트가 등장한다.

그 사실에 들뜬 커뮤니티였다.

하지만 나는 퀘스트 내용으로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프로스트는 플레이어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겠지.

'다른 것도 아니고 마왕과 관련됐으니까.'

마왕(魔王).

내겐 가깝고도 먼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야 아르카나가 가상 현실 게임에 불과하고.

내가 중학교 2학년이던 시절.

악크샨의 악마 사냥꾼 NPC들은 늘 그렇게 말했다.

-마왕, 녀석들이야말로 우리의 숙적이라 할 수 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덕분인가.

마왕에 대한 정보는 아직도 기억 속에 남아있었다.

나는 깃털 펜을 들었다.

"내가 기억하는 것을 영광으로 알 거라."

마왕이 듣는다면.

어이가 없어 할 대사도 잠깐.

나는 그 기억을 정리하기 위해 펜을 움직였다.

──────

1. 마왕은 일반적인 악마와 비교할 수 없이 강하다.

2. 마왕은 하나, 둘이 아니다.

3. 그 마왕 사이에도 서열이 있다....

──────

더 많은 것을 적어봤지만....

세 줄 요약하자면 이게 적절하겠지.

적어놓고 다시 보니까 더욱더 막막하다.

'반격이 시작된 게 아니라.'

본격적인 고생길이 시작된 거 아니야, 이거?

한마디로 마왕은 악마족의 보스 몬스터였다.

그러니까 대충 그 레벨을 생각해 보자.

일단, 아스큐라 백작하곤 그 앞 자릿수부터 다르겠지.

'그렇다면....'

비교 대상은 거악, 칠죄종 탐욕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조차도 제대로 된 예상이 될 순 없었다.

그것은 악마 사냥꾼의 직감으로 깨달았던바.

'칠죄종 탐욕, 녀석은 제대로 된 상태가 아니었어.'

녀석에게서 보였던 어린 악마의 모습.

그렇게 된 이유는 알 수 없어도 확실히 녀석은 완전한 상태가 아니었다. 악크샨 악마 사냥꾼들에게 들었던 이야기와는 달랐단 소리다.

내 기억에 따르면.

거악은 마왕보다도 높은 서열의 존재들이었으니까.

내가 말이야.

거악을 쓰러트렸다고 괜히 호들갑을 떨었던 게 아니란 말이다...!

고심 끝에 나는 결론을 내렸다.

스슥─

한 줄로 덧붙이는 마왕에 대한 평가.

──────

허나, 내겐 하찮은 악마에 불과하다.

──────

그렇다.

상급 악마가 됐든, 마왕이 됐든, 상관없다.

'...사실 거악이 전리품이라도 떨어트렸으면.'

마왕보다 강하다는, 그 대단하시단 거악이시다.

그 전리품의 수준도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겠지.

아니, 거악의 전리품은 고사하더라도.

하다못해 클래스 퀘스트가 보상이라도 줬으면...!

'뭐, 조금 더 자신감이 생겼겠지만.'

그러나 내 자신감 따위.

그랑펠의 긍지에 비하면 새 발의 피도 되지 못했으니.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왕을 자칭하며 비열하게 숨진 않으리라 믿겠다."

그것은 경고였다.

"나를 실망시키지 마라. 마왕이여."

결국, 내가 할 일은 간단했다.

무거운 긍지에 짓눌려 익사하지 않게 발버둥을 치는 것뿐.

제발, 내뱉은 말만 지키게 해주세요.

나는 간절하게 빌며 상태창을 열었다.

[행운 : 3]

그런 바람을 담아서.

행운에 1포인트를 투자하려다가 조금 더 썼다.

[행운 : 5]

아무리 미신이라고 해도 말이야.

마왕과 조우하는 마당에 숫자 4는 불길했으니까....

.

.

.

피와 살 같은 내 2포인트...!

무려 2레벨의 가치란 말이다.

그런 내 처절한 발버둥이 닿았던 것인가.

행운은 이번에도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마탑의 연구실.

나는 책상 위에 전송된 마도구, 아이템을 확인했다.

──────

[흡혈귀 백작의 오브] - 대여

[순수한 에메랄드 결정] - 장신구 제작

[섬의 보물, 비단잉어 비늘 비단] - 행커치프 제작

──────

대여를 승인한 오브를 제외.

책상 위엔 두 개의 아이템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장신구로 제작을 의뢰했거늘.

과연, 요구대로였다.

나는 에메랄드로 장식된 반지를 집었다.

[정순한 에메랄드 반지]

[등급 : 유니크]

[제한 : Lv.200]

[효과 : 피격 시, 생명력 회복.]

[설명 : 특수한 제작 방식으로 제작된 반지. 명성 높은 대장장이라고 해도 에메랄드의 효과를 이 이상 끌어낼 순 없으리라.]

특수한 제작 방식.

그거야 마탑엔 대장장이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제련, 가공, 구성까지.

그 모든 과정이 섬세한 마법으로 진행된 것이었다.

덕분에 최상의 효과를 끌어낼 수 있었던 거겠지.

'...잠깐, 보통이 아닌데. 이거?'

짧디짧은 한 줄의 효과.

그러나 다르게 말하면 구체적인 조건이 붙지 않았단 소리였다.

쉽게 말해 맞으면 무조건 생명력을 회복한다는 말이었다.

물론, 그 생명력 회복 효과가 얼마나 될진 맞기 전까진 모르겠다만.

'어쨌거나 계속 포션을 먹는 상태와 다름없다.'

...이거, 기대 이상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자연스럽게 옮겨가는 시선.

나는 단정하게 접힌 손수건을 들어 올렸다.

[섬의 보물, 비단잉어 비늘 비단]으로 제작한 행커치프.

과연, 그 외관부터 범상치 않았다.

은은하면서도 찬란한 빛.

보기만 해도 귀하신 물건이란 티가 난다.

"과연, 훌륭하군."

그 정보를 확인하기도 전.

입에서 합격이 떨어질 정도.

그러나 그랑펠과 다르게 내게 중요한 건 그 효과였다.

무엇보다 지금은 무려 '마왕 토벌'이라는 초대형 클래스 퀘스트를 앞둔 상태였으니까.

이내, 손수건의 정보가 떠올랐다.

[대작-비단잉어 비늘 행커치프]

[등급 : 유니크]

[제한 : Lv.200]

[효과 : 착용 시, 화염 속성 친화력 상승 / 모든 공격 회피 확률 상승 / 심미 스탯 개방]

[설명 : 더없이 희귀한 재료를 특수한 제작 방식으로 제작했다. 그 가치는 누구도 감히 평가할 수 없을 정도. 대작이란 칭호가 아깝지 않으리라.]

...잠깐, 대작이라니!

대작, 아이템 앞에 그 호칭이 붙는 것만으로도.

그 가치는 말하기 힘들 정도.

그거야 대작 아이템은 아르카나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

'대장장이들도 일생에 한 번 만들까 말까 하다니까.'

왜, 대작 아이템을 경매장에 내놓는 것만으로도 해당 경매장과의 관계도, 영향력이 최대치에 이른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다.

물론, 그런 것보다 중요한 건 당장의 성능.

다른 효과들이야, 미리 확인했던 그대로였다.

남은 건 마탑조차 알아내지 못했던 [심미] 스탯의 효과.

나는 지체하지 않았다.

손수건을 곧바로 재킷 가슴 쪽 포켓에 꽂았다.

그러자 메시지가 떠올랐다.

[심미 스탯이 개방됩니다.]

"!"

그와 동시에.

[심미]에 관한 지식이 머릿속에 밀려들었다...!

나는 새롭게 떠오른 상태창을 보며 생각했다.

[능력치]

근력 : 38 / 민첩 : 42 / 마력 : 186 / 행운 : 5 / 심미 : 下

[보유 포인트 : 0]

역시, 다른 방식으로 표현됐구나.

'상중하로 구분된 거겠지.'

심미의 효과를 생각하면 이쪽이 합리적인 표현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두 눈으로 효과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마탑의 연구실은 적절하지 않은 장소였다.

그리고 그 전에 끝내야 할 계산도 있고.

'두렵다. 두려워.'

비용에 상관없이 최고의 결과물을 원한다고 했었나.

청렴결백은 개뿔.

'그랑펠, 이 호구야!'

하지만 이미 지나간 마당에.

과거의 나를 원망해 봤자 뭣할까?

또한 나가는 돈이 있어야 들어오는 돈도 있는 법.

무엇보다 내겐 아직 확인하지 않은 유스라 왕국에 대한 보상금도 남아있었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내색하지 않고 끔찍한 계산서를....

아니, 양피지를 확인했다.

수십, 아니 수백억이라고 해도 놀라지 말자.

다짐하면서.

그리고 다시금 깨달았다.

──────

추신.

마탑은 수석 마법사 이상의 권한을 가진 마법사에게는 의뢰 비용을 받지 않고 있습니다.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보다 심도 높은 연구로 보답해 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

과연, 행운에 투자한 2포인트가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고!

*

전 세계의 관심이 집중된 신규 업데이트.

북부도시 프로스트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위치가 포착된 순간.

이나즈마의 길드 마스터.

히사기 카즈마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됐어!"

프로스트가 일본 북해도.

홋카이도 인근 해역에 나타난 것이었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모든 것을 뒤집을 기회가!

히사기는 전율했다.

그간 얼마나 모진 수모에 시달렸던가?

"길드 랭킹 5위라니. 히사기, 이건 수치네. 수치야!"

그래, 수시로 변동되는 게 길드 랭킹이었으니까.

그저 순위가 떨어졌다면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나즈마의 위에.

그것도 두 계단이나 위에.

"...가온 그 무식한 새끼들이!"

대한민국의 가온이 있다는 건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다시금 상황을 뒤집을 기회가 왔다.

위이이잉─!

홋카이도로 향하는 전용기.

히사기는 스마트폰으로 메일을 확인했다.

모든 게 계획대로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모든 게 우리 이나즈마의 편이다.'

그야 프로스트가 일본, 홋카이도에 나타났으니까.

자신과 마찬가지로.

일본 정부도 이번 기회에 모든 것을 걸었다.

프로스트가 홋카이도에서 포착된 순간.

치밀하게 작전에 돌입했다.

타국의 길드가 먼저 프로스트에 접근하지 못하게 번거로운 절차를 내세운 것이다.

'물론, AAU 협약 위반이다.'

AAU 협약에 따르면.

일본 정부에게 플레이어를 막아설 권한은 없었다.

하지만 뒤따를 사회적 비판을 감수하더라도.

이나즈마에게 우선적인 기회를 주려는 것이었다.

'반드시 조국에게 보답한다.'

비밀리에 홋카이도에 착륙한 전용기.

세차게 몰아치는 북풍.

히사기가 이나즈마 길드원들을 이끌었다.

"으으, 추워. 이래서 홋카이도가 싫다니까."

"너, 그거 돌려서 지역 비하한 거지? 이래서 교토 사람은."

"...뭐야. 지역 비하는 네가 한 거 아니야?!"

"다들 조용. 최대한 은밀하게 움직인다."

이나즈마가 단독으로 프로스트에 진입하는 것도.

일본 정부가 다른 플레이어들을 막아서는 것도.

전부 프로스트에 위험 요소가 없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정부의 발목 잡기도 오래가진 못하겠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기껏해야 한두 시간."

타국도 프로스트의 가치를 알고 있을 테니까.

"그동안 신속하게 프로스트의 관계도, 영향력을 확보한다."

그러니까 신속하게 움직여야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가온, 그 녀석들보다 앞서는 것.

히사기는 미리 파악해 둔 정보를 떠올렸다.

'남태민은 프로스트에서 영향력이 가장 높은 플레이어 중 하나다.'

남태민의 클래스는 야만전사, 바바리안.

바바리안은 프로스트 인근 숲에서 전직 가능한 클래스였다.

그런 바바리안 클래스 랭킹 1위가 바로 남태민이었다.

'프로스트에서 클리어한 퀘스트가 많을 수밖에 없겠지.'

개인으로는 남태민을 따라갈 순 없을 터.

하지만 길드 차원으로 보면 다르다.

히사기는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가온은 유스라 왕국에 많은 것을 투자했다.'

프로스트에 과한 관심과 투자를 할 순 없는 게 당연하다.

다시 생각해도 정말 절호의 기회였다.

히사기의 뱀눈이 번뜩였다.

'우린 다시 가온 위로 올라선다!'

그러나 그 결심은 곧바로 무너져 버렸다.

"...뭐, 뭐야 저게?"

높게 솟은 프로스트의 성벽.

그 성벽 위로 얼핏 보이는 무언가.

길드원 하나가 스킬, 천리안을 발동했다가 기겁했다.

"머, 머리예요! 사람 머리예요, 저거...!!"

"뭐가 저렇게 많아?"

"잠깐만. 저 턱수염은 말론이잖아...?"

"말론이면, 대장장이? 그 마, 말론이 죽었단 거야?!"

그래, 말론뿐이 아니었다.

수십, 수백 개의 머리가 성벽에 장식되어 있었다.

화르륵─!

그 순간, 프로스트 성벽 안에서 솟구치는 불길.

등골을 타고 오르는 공포.

꼴깍─

마른침을 삼킨 히사기가 곧바로 소리쳤다.

"당장 연락해! 병신같이 플레이어들 붙잡고 있지 말라고!!"

.

.

.

기대가 컸던 만큼 충격도 클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패닉에 빠진 건 당연했다.

"...저런 데에 어떻게 들어가란 거야?"

"프로스트를 함락시킬 정도의 악마란 거잖아."

"그것도 모자라서 진짜 공성전이야. 이거"

"레이먼 션, 이 미친 새끼! 또 통수를 쳤어!"

샤이닝과 천하통일.

그들을 비롯한 거대 길드조차 프로스트에 진입하지 못하고 있었다.

완벽한 반전이었다.

그러니까 이 암울한 분위기를 다시 뒤집기 위해선.

그에 준할 만한 충격이 필요했다.

예를 들면.

"...이호열이다."

지금처럼.

"아니, 잠깐. 이호열만 있는 게 아닌데?"

그랬다.

호열은 혼자가 아니었다.

이내, 경악으로 물드는 플레이어들의 얼굴.

"하르콘이다."

"뭐야, 이번에도 라이언 하트 기사단이 나섰다고?"

"아니, 그건 그렇다고 치더라도. 저, 저거 키치랑 그림자 용병단 아니야? 저 괴물들이 왜 이호열이랑...? 설마 라이언 하트 기사단도 모자라서...?!"

◈ 52화. 프로스트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