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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뭉쳐야 판다 (3)

"로이드 도련님!"

"저는 뭘 하면 됩니까요!"

"영주님! 저한테도 일거릴 주십시오!"

"삽이며 곡괭이며 가진 건 다 가지고 왔습니다요!"

"전 아들도 전부 데려왔습니다!"

"저흰 부부 동반으로 왔습니다!"

"우리도 왔다, 꾸익!"

웅성웅성, 왁자지껄.

이른 아침이었다.

원래는 조용히 하루를 준비할 평온한 시간이었다.

초가을의 안갯속에서 아침을 마련하고, 조금은 찌뿌둥한 몸을 풀며 세수를 할 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남작가 저택 앞이 떠들썩했다.

수백 명에 달하는 농민들이 모여 있었다.

저마다 힘껏 외치며 삽, 곡괭이 등등을 치켜들고 있었다.

얼핏 보면 모든 영주들의 안색이 창백해질 농민 반란처럼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아니었다.

이들은 반란이 아닌, 공사에 자원하러 모인 농민들이었다.

프론테라 남작은 집무실 창문을 통해 그 모습을 보며 아연실색한 심정을 느끼고 있었다.

"설마 이걸 예상했던 것이더냐?"

"으음, 솔직히 저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남작의 물음에 로이드가 쓴웃음으로 답했다.

사실이었다.

설마 지난 저녁에 발표한 포고문이 이 정도로 파괴력(?)을 발휘할 줄은 미처 몰랐다.

어제 남작에게 포고문 작성을 권유했던 그였다.

라코나 자작이 어떤 비열한 짓거리를 했는지, 그 협박으로 무엇을 요구했는지를 객관적으로 투명하게 영지민들에게 알리길 조언하긴 했었다.

'그런데 남작의 글빨(?)이 생각보다 훨씬 좋았어.'

결론부터 말하자면, 남작은 문학에 엄청난 소양이 있었다.

그냥 평범한 포고문인데도 은근 읽는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맛이 있었다.

포고문을 읽다 보면?

저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분개하여 주먹이 쥐어지고, 울컥하게 되었다.

세상 풍파에 시달려 냉소적인 면을 지니게 된 자신이 읽어도 그럴 정도였으니, 순박한 농부들이 포고문을 접했을 때의 후폭풍은 볼 것도 없을 정도였다.

'어쩌면 남작은 시대와 세상을 잘못 골라 태어난 건지도.'

문득, 남작이 대한민국에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네이버 같은 곳에서 인기 소설가가 되지 않았을까.

로이드는 그런 잡념을 접으며 입을 열었다.

"어쨌건 포고문의 효과가 생각보다 좋으니, 일도 한층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을 듯하네요."

"어제 이야기했던?"

"네. 임시 저수지 건설요. 지금 바로 시작할까 합니다."

마침 영지민들의 분위기가 끓어오른 참이었다.

자작의 만행에 분노하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이런 타이밍을 놓치면 손해다.

아니, 호구다.

로이드는 곧바로 남작의 집무실을 나섰다.

저택 밖으로 나가 영지민들 앞에 섰다.

굳이 미사여구로 치장한 연설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저 아무 말 없이, 대신 행동으로 앞으로의 길을 보여주었다.

모두의 앞에서 강철 삽을 들어 올린 것이었다.

그것은 즉, 함께 공사를 시작하자는 뜻!

"우와아아아!"

"우오오, 꾸익!"

인간 농민들과 오크 광부들.

모두가 힘껏 삽을 들어 올렸다.

로이드를 따라 영지를 가로지르며 행진했다. 아니, 진군했다.

그리고 로이드가 가리키는 곳에서 곧바로 작업에 돌입했다.

지난밤 사이.

로이드가 미리 측량과 설계를 마쳐둔 공터였다.

그곳에서 로이드는 뽀동이부터 꺼냈다.

빨간 해바라기씨를 녀석에게 먹였다.

"자, 뽀동아?"

"뽀동?"

"맘마 먹자?"

"뽀도동!"

뚜앙-!

빨간 해바라기씨를 먹은 뽀동이가 10미터 덩치로 커졌다.

가장 든든한 중장비 소환수의 등장에 영지민들이 환호했다.

그 환호 속에서 뽀동이가 땅을 파기 시작했다.

"뽀도도도도도동!"

호바바바밧!

뽀동이의 똥똥한 궁디가 씰룩거렸다.

그때마다 앙증맞고 거대한 앞발이 바람처럼 움직였다.

땅이 퍽퍽 파였다.

흙이 폭발적으로 튀었다.

그렇게 30분가량이 지났을 때.

평범한 공터였던 자리엔 가로 50미터, 세로 100미터, 깊이 2.5미터의 직사각형 구덩이가 생겨났다.

마치 풀장 같은 모양이었다.

로이드의 작업 지시가 떨어졌다.

"자, 공병대 1조는 뽀동이가 판 구덩이를 디테일하게 다듬는다. 면을 평평하게. 코너는 직각으로. 투입!"

"우오!"

공병대 1조가 웃통을 훌렁훌렁 벗어 던지며 구덩이로 돌입했다.

로이드의 시선이 운집한 영지민들에게로 돌아갔다.

"자아, 그럼 공병대 2조와 나머지 사람들은 평평한 돌을 모아서 여기로 가져오도록! 가능한 크고 넓을수록 좋아. 이거 보이지? 이렇게 반듯한 돌이 최고야. 하지만 일하다가 다치면 곤란하니까 너무 무리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예, 도련님!"

영지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녀노소가 따로 없었다.

직업 구분도 없었다.

늙은 농부와 젊은 나무꾼.

양치기 소년과 사냥꾼 소녀.

모두가 영지 곳곳으로 흩어져서 납작한 돌을 모아왔다.

누군가는 밥상처럼 큰 돌을, 또 누군가는 손바닥만 한 자잘한 돌 한 무더기를 가져왔다. 심지어 아장아장 걷는 꼬마들도 엄마 손을 잡고서 고사리 같은 손에 조약돌을 모아왔다.

그런 영지민들과 함께 로이드도 직접 돌을 모으고, 옮겼다.

덕분에 두어 시간이 지난 후.

직사각형 구덩이 옆엔 충분한 돌무더기가 쌓이게 되었다.

"좋아. 공병대 1조와 2조, 영지민들은 휴식. 공병대 3조와 회반죽공은 돌을 구덩이로 옮겨서 안쪽 바닥과 벽면에 평평하게 깐다. 투입!"

"우오!"

공병대 3조와 회반죽공이 움직였다.

마치 풀장에 타일을 깔듯 평평한 돌을 놓았다. 깔았다. 회반죽으로 붙였다.

물론 아무렇게나 붙이는 것이 아니었다.

"거기! 너무 높아! 낮춰! 경사 유지해!"

임시 저수장으로 쓸 시설이었다.

모두의 식수를 담을 곳이었다.

위생 때문에라도 물 빠짐이 중요했다.

그래서 바닥을 완만하게 한쪽으로 기울도록 경사지게 만들었다.

돌을 깔 때도, 저수장 한쪽에 물이 빠져나갈 배수로를 만들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하지. 이렇게 안 하면 물이 고이니까.'

고인 물은 썩는다.

밈적인 드립이 아니라 진짜다.

그렇게 썩은 물엔 각종 세균과 녹조가 번식한다.

생각 없이 마셨다가 각종 질병에 당첨되기 딱 좋아진다.

그러니 저수장의 배수는 정말로, 여러 번 강조해야 할 만큼 중요했다.

"자, 그럼 오크들? 수문용 바위 운반 투입!"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 꾸익!"

배수로를 모두 만든 로이드가 외쳤다.

목 빠지도록 기다리던 오크들이 화답했다.

세 명의 오크가 엘리베이터만큼 큰 바위를 짊어지고 왔다.

저수지와 배수로가 이어지는 자리에 쿵!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마침 바위의 크기가 배수로와 딱 들어맞았다.

와인병의 코르크 마개처럼.

혹은 욕조 바닥의 고무마개처럼.

저수지의 물을 가둬두는 마개 역할을 하여 줄 바위였다.

물론 저수지의 물을 뺄 때는 운동 좋아하는 오크들을 꼬드겨서 저 바위를 살포시(?) 들어주기만 하면 해결.

그렇게 50×100m 사이즈의 풀장, 아니, 임시 저수지가 완성되었다.

아침에 공사를 시작하고 불과 반나절만의 일이었다.

'후아. 건설 속도 실화냐.'

영지민들의 환호.

그 속에서 로이드는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아직 그가 해야 할 일은 끝나지 않았다.

저수지를 만들었으니 이제는 그 저수지에 물을 채울 때였다.

"그럼 다들 기다려. 아, 참. 저수지에 너무 바짝 붙어 있다간 하망이한테 깔릴 수도 있으니까 다들 좀 물러나 있고. 하비엘?"

"예."

"넌 나랑 같이 물 뜨러 가자. 말 좀 몰아라."

"알겠습니다."

하비엘이 모는 말에 함께 탔다.

영지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프로나 강.

그 강줄기를 따라 남쪽으로 달려갔다.

마레즈 개간지를 지나, 라코나 자작령을 지나쳤다.

그렇게 아직 강물이 오염되어 있지 않을 상류에 도착했다.

맑게 흐르는 강줄기에 하망이를 내려놓았다.

"자, 하망아. 알지?"

"하망! 헥헥헥!"

이미 흐르는 강물을 보게 된 시점부터 하망이의 두 눈은 초롱초롱. 궁디는 맹렬히 씰룩씰룩.

마치 온종일 기다리던 산책을 앞둔 강아지처럼 당장 강물로 뛰어들 기세였다.

로이드는 그런 하망이의 간절한 바람에 정확히 호응해주었다.

"자, 원샷!"

"하망!"

참방!

하망이의 주먹만 한 몸이 강물에 빠졌다.

그러나 하망이가 강물에 떠내려가는 일은 없었다.

대신 강물 수면이 아래로 쭉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마마마망-!"

쏴아아아아아!

이것은 말 그대로 폭풍 흡입.

강물을 빨아들이며 하망이가 실시간으로 거대해졌다.

이전의 최대 크기인 50미터를 진즉 넘어섰다.

무려 60미터까지 부풀었다.

'좋아. 마레즈 개간지를 만들면서 원샷 스킬이 더 성장했어.'

현재 하망이의 원샷 스킬 레벨은 3.

무려 2단계나 올랐다.

예전의 물풍선 크기 한계가 50미터였다면, 이제는 60미터가 되었다.

구체의 면적으로 계산하자면 예전보다 무려 2배 가까운 양의 물을 담을 수 있게 된 셈이었다.

"다 담았으면 가자! 이랴!"

앞 안장 하비엘의 어깨를 두드렸다.

하비엘이 말에게 박차를 가했다.

말이 푸르륵 투레질하며 달렸다.

그 뒤를 하망이가 데굴데굴 따라왔다.

온갖 지형을 온몸으로 깔아뭉개면서.

"하마마마마망!"

쿠과과과과!

무려 60미터짜리 물풍선이 데굴데굴 굴러 오는 무시무시한(?) 상황.

그런 상황 덕분인지 하비엘의 말이 전력으로 내달렸다.

덕분에 로이드도 골반이 안장 위에서 인수분해되는 듯한 체험을 만끽해야 했다.

한편으로는 사나운 충동이 일기도 했다.

'생각 같아선 이대로 하망이를 자작령으로 돌진시키고 싶지만.'

혹은 혈맹인 강철모래 오크 부족을 이끌고 자작령으로 확 쳐들어가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참았다.

나쁜 건 라코나 자작이었다.

자작령에서 사는 애꿎은 영지민들이 아니었다.

괜한 분풀이로 그들에게까지 피해를 입히고 싶진 않았다.

게다가 현실적으로도, 그런 짓을 벌였다간 뒤탈이 커질 터였다.

법적으로나 금전적인 면으로나 모두 그럴 것이 뻔했다.

"자, 이쪽으로!"

뒷 안장에서 하비엘의 어깨를 움켜잡고서 방향을 지시했다.

올 때와 달리 자작령을 빙 돌아서 북상하는 경로였다.

그렇게 영지로 무사히 돌아왔다.

하망이의 엄청난 위용에 영지민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하망이가 뱉어낸 물이 임시 저수지를 한 큐에 채우고도 왕창 넘쳤을 땐 환호성이 아예 함성으로 바뀌었다.

당분간 사용할 맑은 물이 넉넉하게 생긴 덕분이었다.

'물론 이건 임시방편일 뿐이지만.'

수많은 이들의 환호성.

그 속에서도 로이드는 침착한 표정을 잃지 않았다.

아니, 그의 머릿속은 앞으로의 일을 계산하며 더욱 바쁘게 돌아갔다.

'영지민들이 예상보다 잘 참여해줘서 하루 만에 저수지를 만들 수 있었어. 좋은 일이야. 하지만 이걸로는 안 돼. 임시방편에는 한계가 있어.'

저수지를 만들고 하망이를 동원해 맑은 물을 채우는 것.

일견 당장 보기에는 그럴듯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이 방법에는 허점이 있었다.

바로 자신과 하망이가 꼭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환상종인 하망이는 오직 내 말만 들어. 다른 사람은 어지간해선 조종할 수 없어. 내가 하망이와 꼭 붙어서 정기적으로 저수지에 물을 채워야 한다는 뜻이야.'

즉, 며칠 이상은 영지를 비울 수 없었다.

게다가 만일 자신이나 하망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래서 저수지에 물을 채워주지 못하게 된다면?

다시 영지민 모두가 폐수로 오염된 물을 마시며 두통에 시달리게 될 것이 뻔했다.

'그러니까 이 방법이 임시방편일 뿐이란 거지. 어서 상수도나 파자.'

시간은 이쪽의 편이 아니었다.

미적거릴 이유가 없었다.

다음 날부터 로이드는 곧바로 상수도 건설 준비에 들어갔다.

첫 번째 단계인 측량 답사부터 시작했다.

하비엘과 함께 동부 산맥을 올랐다.

목적지는 명확했다.

"이대로 카푸아 호수까지 쭉 갈 거야."

때로는 완만한, 때로는 급한 경사의 산길을 오르며 로이드가 말했다.

카푸아 호수는 동부산맥 중턱에 있는 산중호수였다.

뒤를 따라오던 하비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푸아 호수라. 한데 궁금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궁금한 거? 뭔데."

"왜 하필이면 카푸아 호수인 겁니까."

"왜 하필이냐니. 무슨 문제라도 있냐."

"예. 있습니다. 혹시 킹 스토마라고 들어보셨는지."

"킹 스토마? 물론 알지. 그거 엄청 강하고 사나운 몬스터라며."

"그럼 카푸아 호수가 킹 스토마의 영역이라는 것도 알고 계십니까?"

"어."

로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덧붙였다.

"아울러 지금은 킹 스토마가 수면기에 들어가 있다는 것도 알지."

"수면기요?"

"응. 아마 앞으로 50년쯤은 늘어지게 잘걸."

"그런 걸 어떻게 아시는지."

"철혈의 기사가 그랬어."

"...철혈의 기사요?"

"어."

"그게 누굽니까."

누구긴 누구야.

소설 속 주인공이었던 너지.

로이드는 대답 대신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문득, 소설 철혈의 기사의 내용을 떠올렸다.

'소설 속 로이드가 죽고 하비엘이 갓 영지를 떠나던 때였나.'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당시 하비엘은 수배당한 몸이었다.

남작 부부가 죽은 직후, 부부의 장례식장에서 두 사채업자를 베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야 사채업자의 횡포가 드러나고 그의 충성심이 참작되어 무죄 판결을 받게 되지만, 적어도 로이드가 죽은 직후 시점까지의 하비엘은 수배자 신분이었다.

로이드의 묘를 만들었을 때도 그랬다.

경비대가 묘지까지 들이닥쳤다.

그를 체포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물론 하비엘은 그들을 상처 입히지 않고 제압했다.

추격대를 피해 동부산맥으로 숨어들었다.

그때 하비엘이 머무른 은신처가 카푸아 호숫가였다.

'그리고 독백으로 이런 대사를 쳤었지, 아마. 킹 스토마가 마침 수면기에 들어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과연 그 독백처럼 하비엘은 한 달간 안전하게 카푸아 호숫가에 몸을 숨겼다.

마침내 추격대를 뿌리치고 산맥을 넘을 수 있었다.

"어쨌건, 카푸아 호수가 최적의 취수장이야. 높은 봉우리의 만년설이 정기적으로 녹는 덕분에 일 년 내내 수량이 일정해. 수질이 맑고 탁도가 낮아. 게다가 호숫가에서 영지까지 상수도관을 놓을 지반도 안정적이고 완만해."

휴식차 바위에 걸터앉은 로이드였다.

땀을 닦으며 주위 지형을 둘러보았다.

과연 그의 말처럼 그의 시선이 닿는 산비탈은 대체로 완만했다.

딱 한 군데만 빼고 그랬다.

하비엘이 그곳을 가리켰다.

의문 가득한 눈빛을 떠올렸다.

"그럼 저곳엔 어떻게 수도관을 놓으실 생각이신지."

은발의 기사가 가리킨 곳.

그곳엔 지형이 뚝 끊어진 듯한 계곡이 있었다.

계곡의 너비는 약 80미터 가량.

그 양쪽에 십수 미터 높이의 절벽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그런데 로이드가 손짓으로 슥 그어 보이며 제시한 상수도관의 경로는 절벽을 가로질러 건너편 절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하비엘은 의문을 느꼈다.

'저 계곡 위로 상수도관을 통과시킨다고? 어떻게?'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가능한 일인가 의문도 들었다.

하지만 의심은 들지 않았다.

지금껏 수차례에 걸쳐 기기묘묘한 건설 방법을 보여준 로이드였다.

온돌에서부터 포장도로, 광산, 거기에 석빙고와 마레즈 개간지까지. 전에는 상상해본 적 없는 결과를 선보인 장본인이 바로 로이드가 아니던가.

그러니 이번에도....

"혹시 따로 생각해둔 방법이 있으신 겁니까."

아마도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그러한 하비엘의 추측은 어김없이 들어맞았다.

그는 자신이 모시고 있는, 한때 망나니였던 도련님, 로이드에게서 다음과 같은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당연하지. 지을 거야, 수도교."

"수도교라니요?"

"그런 게 있어. 어차피 사이펀의 원리로도 여기서 저쪽 계곡 건너편까지는 물을 못 끌어갈 거라서."

로이드가 입꼬리를 슬며시 끌어올렸다.

산속 계곡 지형을 극복해낼 방법.

그리하여 계곡 건너편까지 수도관을 안정적으로 놓기 위해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방법.

그것은 바로 실제 지구의 역사에 존재했던 로마 제국의 찬란했던 산물이자 유산, 로마식 아치형 수도교였다.

54화. 대륙 최초의 업적 (1)

로마식 수도교.

그것은 로마 제국의 시대를 뛰어넘는 토목공학적 산물이었다.

기원전 312년에 건설된 아쿠아 아피아(Aqua Appia).

기원전 272년에 완공된 아니오 베투스(Anio Vetus).

기원전 144년의 아쿠아 마르키아(Aqua Marcia).

그 밖에도 수많은 수도교가 로마와 교외를 이었다.

가깝게는 십수 킬로미터.

멀게는 무려 100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리에서 맑은 물을 끌어왔다.

덕분에 백만에 다다르는 로마 시민들은 오랜 시간 동안 계절에 상관없이 안정적으로 식수를 공급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그 수도교 대부분은 지금도 남아 있지. 심지어 여전히 물까지 공급하고 있어.'

문득 떠오르는 대학생 시절의 기억.

로이드는 당시의 동아리 활동을 떠올렸다.

전통 건축물을 조사하고 연구하는 동아리였다.

우리네 옛 건축물뿐만이 아닌, 세계의 여러 건축 유산을 탐구하기도 했다.

물론 로마식 수도교를 조사한 적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날 제일 놀라게 한 건 아쿠아 줄리아였지.'

그것도 마찬가지로 기원전 시대에 건설된 상수도였다.

한데 지금까지도 멀쩡히 작동하고 있었다.

그 고대의 유산이 아직껏 로마 시가지의 스페인 광장과 트레비 분수, 로마 구시가지에까지 물을 공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얼마나 놀랐던지.

"그렇듯 수교도 하나 잘 지어놓으면 수십 년은 물론이고 몇 세대쯤은 거뜬히 물 걱정을 덜 수 있어. 물론 오랜 시간 꾸준히 관리도 해줘야겠지만."

떠오르는 기억을 접어두며 로이드가 말했다.

그의 손이 움직였다.

양쪽에 병풍처럼 서 있는 절벽을 딱, 딱, 가리켰다.

"그러니까 이곳에 수도교를 놓는다면 저쪽에서부터 저기까지가 딱 좋겠네. 지반도 적당하고. 고저차도 적고. 게다가 여긴 지진이 일어날 곳도 아니니까."

"...."

"그리고 수도교 만드는 데 쓸 석재도 바로 근처에서 구할 수도 있을 것 같네. 저기, 저쪽에 살짝 드러난 암반 보이지? 저게 다 석회암이야."

"...."

"아치 만들 때 받침으로 쓸 나무도 근처 숲에서 현지 조달이 될 거 같고. 영지에서 거리도 적당해서 작업 인원이 오가기에도 큰 무리는 없겠네. 그렇지?"

"...."

"어이. 어째 말이 없냐."

"로이드 님은-"

로이드의 지적이 있고서야 하비엘의 말문이 열렸다.

"이런 걸 다 어디서 배우신 겁니까."

"이런 거라니? 건설?"

"예."

하비엘의 물음이 이어졌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로이드 님은 원래 이 정도로 유능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헐. 대놓고 안 유능했대."

"사실입니다."

하비엘이 단호박 자르듯 말했다.

은발 기사의 팩트 폭행이 이어졌다.

"게으르고, 나태하고, 방만하며, 배우길 싫어하셨지요. 아, 딱 하나 배우기 좋아하시는 게 있긴 했습니다만."

"설마 수학?"

"전혀요.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시길래."

"하늘이 시기하는 재능러?"

"...."

"야. 그렇게 정색하지는 말고."

"로이드 님은 오직 노는 것에만 관심이 있으셨습니다. 술을 마시고, 왁자지껄 떠들고, 얼굴이 벌게진 채로 이해되지 않는 술자리 게임에만 몰두하셨지요."

하비엘이 한숨과 함께 말했다.

"그래서 저는 요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런 거, 로이드 님께선 대체 전부 어디서 배우신 겁니까?"

"...."

이쪽을 보는 하비엘의 표정과 눈빛.

장난이나 푸념으로 묻는 게 아니었다.

의문을 가득 담아서 진지하게 물어오고 있었다.

사실 하비엘의 입장에선 충분히 그런 의문을 느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녀석이 겪었을 처음의 로이드는 그저 술주정뱅이 도련님에 불과했을 테니까.'

한데 어느 순간부터 이런 상상해보지 못했던 지식을 척척 꺼내놓게 되었다. 그렇다고 그사이에 뭔가 공부에 열중하던 기간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분명,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있다는 의문을 품고 있겠지.'

로이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의 표정도 더불어 진지해졌다.

"내가 이걸 어떻게 다 배웠냐고?"

"예."

"말해주면, 믿을 거냐?"

"로이드 님의 대답을 듣고 판단하겠습니다."

"흐음, 그럼...."

로이드가 숨을 골랐다.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한국 대학교."

"예?"

"전에도 말한 적 있잖아. 한국 대학교. 사실 그거, 꿈에서 매일 나오는 장소야. 이유는 나도 몰라. 그 꿈속에선 내가 그 대학을 다니는 학생이라고. 덕분에 그곳에서 수많은 지식을 익히고 내 것으로 만들지."

"그게 무슨...."

"정말이야. 그래서 잠을 자고 일어날 때마다 새로운 지식이 꽉꽉 채워져. 지금까지 내가 벌였던 공사, 그 시공법들, 너한테 자장가 읊어주는 내용, 전부 그렇게 얻은 지식이야. 어때? 이젠 좀 믿기냐?"

"별로 안 믿깁니다."

"그렇지? 뻥이야."

"...."

"네가 믿으면 진실인 거고, 안 믿어주면 뻥인 거지. 안 그래?"

"결국 제대로 대답할 생각은 없다는 뜻이시군요."

"뭐, 네가 안 믿어주니까 그런 거 아닐까."

로이드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럴 땐 적당히 철판을 깔고, 적당히 무책임하며, 적당히 뻔뻔하게 구라를 날려줘야 한다.

동시에 언제든 빠져나갈 구멍 하나쯤은 남겨두는 것이 현명할 터.

그래서였을까.

하비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참 로이드 님은 알다가도 모르겠군요."

그 순간이었다.

딩동.

[하비엘 아스라한이 당신의 대답을 성의 없다고 느꼈습니다.]

[하비엘 아스라한의 당신에 대한 호감도가 -1 하락하였습니다.]

[하비엘 아스라한과의 현재 관계 : -9]

[주요 인물과의 관계가 약간 악화되었지만, 그에 따른 RP 몰수는 없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RP : 1337]

'헐. 뭐냐.'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

로이드는 어처구니없는 눈빛으로 메시지를 읽어내렸다.

꿈속에서 대학을 다니며 지식을 배웠다는 말.

그냥 아무렇게나 지껄인 대답이었다.

하비엘을 헷갈리게 만드는 게 목적인 대답이기도 했다.

당연히 그 대답을 믿어줄 기대 따위는 1그램도 하지 않았다.

물론 하비엘은 예상대로 이쪽의 대답을 믿지 않았다.

아울러 약간의 반감도 느낀 모양이었다.

하지만 로이드는 그런 사소한(?) 일에는 관심도 두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오직 호감도의 하락에도 불구하고 몰수되지 않은 RP에 있었다.

'허허허. 이거 대박인데?'

로이드는 저도 모르게 광대가 승천함을 느꼈다.

RP.

일명, 인연 포인트.

자신에게 가장 힘이 되어주는 요소였다.

영지의 선임 기사 노이만 경과 대결했을 때도.

불의의 사고로 개미굴에 갇혀 버렸을 때도.

여러 공사를 위해 환상종을 뽑을 때도.

언제나 가장 필요한 순간에 가장 적절한 힘을 준 비밀무기라 할 수 있었다.

사실 그래서 조금은 걱정인 점도 있었다.

언젠가는 RP를 얻기가 점점 어려워질 것이라는 예측 때문이었다.

'남에게 받을 수 있는 호감에는 한계가 있을 테니까.'

단적인 예로 남작 부부나 하비엘을 예로 들 수 있었다.

처음에는 그들과의 호감도가 마이너스였다.

그래서 조금만 달라진 모습을 보여도?

호감도가 상승했다는 메시지를 금방 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두와의 호감도가 오르면서 점점 이야기가 달라졌다.

'요즘엔 호감도 얻기가 은근 어려워지고 있었어.'

인간은 의외로 금방 둔해지는 존재다.

처음엔 놀라던 일도 반복되면 둔감해진다.

누군가에게 호감을 느끼는 면에서도 그렇다.

한 번 좋은 모습을 보이면 뒤엔 더 좋은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익숙함에 매몰되어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하게 된다.

로이드가 내심 염려하던 부분이 바로 그러한 심리적인 함정이었다.

'지금이야 아직 호감도가 고만고만하니까 피부로 와 닿지는 않는 거지. 하지만 나중에 호감도가 엄청나게 높아지면? 그땐 정말 호감도를 1이라도 올리려면 엄청나게 애를 써야 할 거야.'

물론 새로운 인간관계를 넓히면 된다.

더욱 여러 사람과 친교를 다지면 된다.

하지만 그것도 피곤한 일이었다.

'내가 그렇게 핵인싸도 아니고.'

언제까지나 모두에게 호감만 받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즉, 자신의 최대 무기인 RP를 쌓는 게 앞으로 점점 어려워질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한데 로이드는 지금,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를 보며 그동안의 고민이 해결되는 기분을 느꼈다.

'호감도가 깎여도 RP를 몰수당하지 않아!'

이건 대단한 일이었다.

즉, 특정인과 호감도가 너무 높아졌을 때.

그래서 호감도를 더 올리기 힘들어졌을 때.

'의도적으로 호감도를 낮췄다가 다시 점수를 딸 수 있다는 거지.'

꿀꺽.

목구멍으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과연 될까.

로이드는 하비엘을 돌아보았다.

시험 삼아 넌지시 운을 떼었다.

"어이. 내가 제대로 대답 안 해줘서 삐쳤냐?"

"아닙니다."

"음, 맞는데? 삐쳤구만?"

"설마요. 어차피 별 기대도 안 했습니다."

방금 호감도가 1이 깎인 탓일까.

어쩐지 하비엘의 대답이 평소보다 살짝 쌀쌀맞게 느껴졌다.

하지만 로이드는 오히려 티타늄 철판을 깔았다.

네가 뭐라고 반응하건 난 실험을 한다.

그런 마인드로 무장하고서 혓바닥을 촵촵 침으로 적셨다.

"기대를 안 했다, 라. 그런데 어쩌냐. 난 너한테 많이 기대하고 있는데."

"...예?"

뭔 소리냐는 듯 이쪽을 돌아보는 하비엘.

녀석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저 깊은 곳 십이지장 융털돌기에서부터 치밀어오르는 오글거림을 참아내며 말했다.

"네가 항상 이렇게 날 도와줘서 다행이고 고맙다고. 지금까지 한 번도 말은 안 했지만."

"...."

"어이?"

"...."

"어째 또 말이 없냐."

"후우. 아닙니다. 순간 소름이 돋아서 그만."

"...그렇게 싫었던 거냐?"

"예."

"헐."

단호박 자르듯 고개를 끄덕이는 하비엘.

"잠깐 로이드 님이 미치신 건 줄 알았습니다. 혹은 머리에 큰 충격을 받았거나, 저 모르게 이상한 약이라도 먹었다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미친개한테 물렸다거나."

"어이."

"물론 방금은 실언을 하셨던 거겠지요?"

"쯧. 그렇다고 치자."

"그렇다고 치신다는 말씀은?"

"당연히 실수로 잘못 말한 거라고, 인마."

"휴우. 다행이군요."

하비엘이 진심(?)이 담긴 표정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동시에 로이드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딩동.

[하비엘 아스라한의 당신에 대한 호감도가 +1 상승하였습니다.]

[하비엘 아스라한과의 현재 관계 : -8]

[주요 인물과의 약간의 관계 개선으로 18 RP 를 획득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RP : 1355]

"...."

어쨌건 나이스.

로이드는 하비엘 몰래 주먹을 불끈 쥐었다.

실험은 성공적이었다.

의도가 그대로 먹혔다.

'이러면 앞으로 RP 얻을 걱정은 안 해도 되겠어.'

일부러 밉상이 됐다가 다시 잘해주기.

혹은 매몰차게 굴었다가 은근 달래주기.

그렇게 밀당(?)을 반복하면 RP를 안정적으로 얻을 수 있으리라.

그 생각에 로이드는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그래. 그것참 퍽이나 다행이다. 이 18 RP짜리야."

"예?"

하비엘이 멈칫했다.

"혹시 방금 제 욕을 하신 건지?"

"아니. 전혀. 네버."

"하신 것 같은데 말입니다."

"에이. 잘못 들었을 거야. 그나저나 이제 슬슬 움직이자. 할 일 많아."

"...알겠습니다."

로이드가 바지를 털며 일어났다.

미심쩍은 표정을 다 지우지 못한 하비엘도 따라서 일어났다.

실제로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이 정말로 많았다.

그리고 로이드는 할 일을 미루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럼 저쪽으로 내려가면서 다시 경로를 잡아보자고."

상수도관을 묻을 곳.

안정적인 경로를 만들 곳.

로이드는 그 모든 요소를 고려했다.

측량 스킬과 옵션인 지하 스캐닝.

설계 스킬과 옵션인 평면도 표시(3D)에 시뮬레이션 모드까지.

그 모든 역량을 한계까지 발휘하는 그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게 변해 있었다.

또한, 그런 로이드를 호위하며 곁에서 지켜보는 하비엘의 눈빛도 이전보다 조금은 복잡해져 있었다.

자신이 모시는 도련님.

가까이서 겪을수록 불가사의한 존재라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로이드의 상수도 공사를 위한 측량 첫째 날이 지나갔다.

그 뒤로도 며칠 동안의 측량이 이어졌다.

덕분에 동부 산맥 중턱의 카푸아 호수에서부터 영지까지.

상수도관을 놓을 최적의 경로를 확정할 수 있었다.

설계 또한 거의 매일 밤 이루어졌다.

설계 스킬의 옵션인 평면도 표시(3D)와 시뮬레이션 모드 덕분이었다.

'현장에서 곧바로 설계 결과물을 홀로그램으로 보는 것은 물론이고, 모의실험까지 할 수 있게 됐으니까.'

실제로 건설의 결과물이 지형에 놓였을 때.

그렇게 현실에서 건설이 완료되었을 때.

설계 도면으로만 예상하던 것과 다른 결과가 나오는 경우가 많다.

아니, 미세하게나마 설계와 결과물이 다른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며, 그게 현실이다.

'하지만 난 달라.'

설계 스킬의 두 가지 옵션 덕분이었다.

현장에서 수십 번은 설계의 결과물을 모의로 테스트할 수 있었다.

수많은 물리적 조건까지 적용하는 게 가능했다.

산사태가 발생한다든가.

지진이 일어난다든가.

그런 상황에서 수도관이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모든 종류의 실험이 가능했다.

결과를 계산할 수 있었다.

그렇듯 며칠에 걸친 밤샘 설계를 끝마쳤을 때.

수십 차례의 실험과 계산을 완료했을 때.

비로소 확신이 들었다.

"이걸로 됐어."

왕국 동부 구석에 놓여 있던 변두리, 프론테라 남작령.

바야흐로 그 보잘것없던 영지에 로라시아 대륙 역사상 최초의 상수도가 건설되는 기념비적인 업적이 완성되려 하고 있었다.

55화. 대륙 최초의 업적 (2)

"파고, 깔고, 베고, 가져오고, 다듬어서, 묻는다. 이것이 오늘부터 너희가 할 일이다."

"째잭, 짹!"

깊은 산 속 옹달샘 아래.

로이드가 작은 바위에 올라섰다.

산새들의 지저귐 속에 그의 연설이 시작되었다.

공병대의 인간 병사들.

우락부락한 오크 광부들.

그 모든 작업 인원의 시선이 로이드를 향했다.

로이드의 연설을 빙자한 작업 브리핑이 이어졌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여긴 그리 안전한 곳이 아니야. 우린 동부산맥에 올라와 있다. 그러니까 뭘 조심해야 할까?"

"산짐승의 습격입니다!"

"몬스터도 조심해야 합니다!"

"배고프면 큰일이 난다, 꾸익!"

공병대원들과 오크 광부들이 앞다투어 말했다.

로이드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피어났다.

"그래. 전부 맞아. 정답이다. 짐승은 물론이고 몬스터가 출몰할 수 있어. 그러니 이동할 때는 반드시 인간 10명과 오크 10명으로 이루어진 20인 1조로 무리지어 움직인다. 다들 자신이 속한 조는 숙지하고 있겠지?"

"옙!"

"그렇다, 꾸익!"

"좋아. 그럼 배정받은 역할을 확인해볼까. 인간과 오크 혼합 20인으로 이루어진 1조에서 6조까지는 뭘 한다?"

"자이언트 뱀부를 베고 손질합니다!"

"오케이. 7, 8, 9조는?"

"손질된 자이언트 뱀부를 수도관 매설지까지 옮깁니다!"

"그럼 10, 11, 12조는?"

"배관 매설지를 정비해둡니다!"

묻는 로이드와 대답하는 공병대원들.

물음과 대답 모두가 척척이었다.

그런 공병대원들을 보는 로이드의 미소가 더욱 흐뭇해졌다.

'제대로 잘 키웠어.'

문득, 처음 온돌방 공사를 위해 황토 나르는 일에 영지의 사병들을 동원했던 때가 떠올랐다.

당시만 해도 자경단 수준의 평범한 병사들이었다.

어딜 가나 찾아볼 수 있을 동네 청년들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젠 완전히 달라졌다.

'다들 저 정도면 대한민국 어느 현장에나 던져놔도 금방 적응할 거야.'

이제 평범한 동네 청년 자경단은 사라졌다.

뽀얗던 얼굴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하나같이 햇볕에 구릿빛으로 그을린 얼굴들.

현장 땡볕의 눈부심에 습관적으로 살짝 찡그리게 된 미간.

그렇듯 까슬하게 자라난 수염 사이로 어느새 관록이 엿보였다.

대원들의 옷차림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작업복은 허름했지만 특별했다.

저마다의 왼쪽 가슴에 갖가지 모양의 자수가 새겨져 있었다.

온돌을 나타내는 달군 돌 표식.

포장도로를 뜻하는 평평한 바닥 표식.

석탄 광산을 뜻하는 깊은 구덩이 표식.

누군가는 석빙고를 뜻하는 직사각 석실 표식을.

또 대부분이 마레즈 개간지를 나타내는 제방 표식을 달고 있었다.

그 모든 표식들이 각각, 수많은 공사에 참여했음을 나타내는 증명서였다.

공병대원 개개인의 자부심을 고취시키는 일종의 훈장이기도 했다.

'게다가 다들 체력도 엄청 빵빵해졌고.'

헬스맨처럼 근육이 빵빵해진 건 아니었다.

하지만 힘은 어느 영지의 병사들보다 강해졌다 자부할 수 있었다.

온종일 벽돌과 흙, 각종 자재를 날랐다.

망치질과 톱질, 삽질은 기본 옵션이었다.

그 하나하나의 노동이 그들에게 질기고도 신성한 노가다 근육을 선물해주었다.

그야말로 어떤 세상의 노가다 현장에 던져놔도 조금만 적응하면 십장 자리쯤은 껌 씹듯이 따낼 베테랑이 되었다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심하고 까불지 마라. 현장에서 가장 먼저 다치는 놈은 자기 익숙함만 믿고 설치는 어설픈 베테랑이다. 알겠나들?"

"옙!"

"그럼 공병대원으로만 구성된 13조를 제외한 나머지 인원, 힘찬 구호와 함께 투입!"

"우오오!"

총 12개 조.

120명의 공병대원과 120명의 오크가 톱이며 도끼 등의 연장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각자의 작업지를 향해 질서정연하게 돌진했다.

우선 1조에서 6조까지는 연설지 인근의 숲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오크 전사 몸통보다 굵은 대나무, 자이언트 뱀부 군락이 있었다.

자이언트 뱀부 군락에 투입된 인간 공병대와 오크 광부들이 하나가 되어 연장을 번득였다.

"이쪽부터 차례대로 벱시다!"

"도끼질 좋다, 꾸익!"

"운동 된다, 꾸이익!"

서그덕! 서그덕! 콰직! 콱!

인간 공병대원들이 벌목용 톱을 들고 달려들었다. 오크 광부들이 무식하게 큰 그레이트 엑스를 한 손으로 휘둘러댔다.

때아닌 벌목의 폭풍에 애꿎은 거대 대나무 군락이 석둑석둑 잘려나갔다.

동시에 옆에선 벌목된 대나무 손질이 이어졌다.

일정한 길이로 잘랐다.

바깥면을 다듬었다.

안쪽도 마찬가지였다.

덩치 작은 공병대원들이 대나무 안으로 들어갔다.

안쪽 면을 매끈하게 깎아내고, 구멍을 팠다.

거대 대나무가 벌목과 다듬기를 마치고 일정한 길이의 대나무 도관으로 가공되었다.

그렇게 가공이 끝나면 대기하던 7, 8, 9조의 차례가 돌아왔다.

"다들 들어. 하나 둘!"

"흐읍차!"

"꾸익!"

인간 공병대원과 오크 광부들이 한 덩이가 되어 거대 대나무 도관을 옮겼다.

험한 산길과 시냇물, 바위를 넘었다.

때로는 으르렁대는 산짐승을 쫓아내며.

또 때로는 군침 흘리는 몬스터를 때려잡으며.

수많은 대나무 도관을 상수도관 매설지까지 배달했다.

그러면 상수도관 매설지에서 10, 11, 12조가 대나무 도관을 전달받았다.

즉석에서 방울이와 대장장이의 협력을 받아 대나무 도관에 보강재를 덧대었다.

"방울! 끙-!"

딸랑딸랑딸랑!

미리 흙을 퍼먹은 방울이가 통통한 꼬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꼬리 끝에 매달린 방울로 요란한 경보음을 냈다.

동시에 궁디에 한껏 힘을 주었다.

촤아아악!

방울이의 치켜든 꼬리 아래, 궁디에서 시뻘겋게 달아오른 강철 끙까가 철근의 형태로 기다랗게 방출되었다.

대장장이들이 철근에 달려들었다.

딱히 화로가 없어도 전혀 상관없었다.

방금 갓 뽑혀 따끈따끈 말랑말랑(?)한 철근이었다.

덕분에 대장장이들이 손쉽게 철근을 다룰 수 있었다.

7, 8, 9조가 배달해 오는 대나무 도관에 철근을 링 형태로 둘렀다.

도관이 수압에 의해 쪼개지거나 터지지 않도록 튼튼하게 받쳐줄 보강재였다.

그동안 10, 11, 12조 작업자들은 뽀동이를 보조했다.

"뽀동! 뽀도도도도동!"

호바바바바밧!

뽀동이가 가는 곳마다 흙더미의 폭풍이 일었다.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 기다란 구덩이가 만들어졌다.

대나무 도관을 묻을 자리였다.

물론 아무렇게나 판 것이 아니었다.

"뽀동! 뽀도동!"

뽀동이는 땅을 팔 때마다 로이드가 표시한 자리를 그대로 따랐다.

미리 들었던 구덩이의 깊이와 너비 등을 정확히 지켰다.

일찌감치 로이드가 측량하고 설계한 규격대로였다.

지반의 조건.

토압과 재하중, 지진의 영향, 수압, 상재 하중.

거기에 지반의 지지력과 예상되는 지반의 침하까지 모두 고려한 계산의 결과물이기도 했다.

그렇듯 뽀동이가 대활약을 펼치며 구덩이를 파내면 그 뒤를 10, 11, 12조가 어김없이 뒤따랐다.

"자, 바닥 정리!"

"우오, 꾸이익!"

인간 공병대와 오크 광부들이 구덩이 단면을 반듯하게 정리했다.

침수와 침하를 막을 보강재도 충분히 덧발랐다.

바닥면을 다지고 돌을 깔았다.

석회 버무린 진흙을 두껍게 발랐다.

그 위에 손질된 거대 대나무 도관을 놓았다.

대나무 도관 주위로 다시금 석회 진흙을 빈틈없이 발랐다.

그 위로 흙을 단단히 다지며 덮었다.

되메우기 과정이었다.

이로써 배관 한 칸의 작업이 완료되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모두가 로이드에게 지시받은 규격을 정확히 지키려 노력했다.

바로 다음 칸 작업에 돌입했다.

같은 과정을 반복했다.

그동안 로이드는 공병대 13조, 60인의 인원을 직접 지휘했다.

산맥 중턱에 가로놓인 계곡으로 갔다.

그곳에서 수도교 건설에 착수했다.

가장 먼저 활약을 펼친 이는 하비엘이었다.

"자, 하비엘. 알지?"

"역시나 표시하신 곳을 발파로 터뜨리면 되는 겁니까?"

"당연하지. 장사 하루 이틀 하시나."

"역시나 터뜨린 후에 재빠르게 피하지 않으면 무너지는 돌더미에 깔려서 쿵, 아야 한다고 잔소리하시려던 참인 겁니까?"

"아닌데?"

"그럼?"

"깔리는 시범 한 번만 보여주면 대신 내가 그 앞에 비석 정도는 세워줄게."

"...다녀오겠습니다."

마침 수도교 건설 예정지 인근에 노출된 석회암 암반이 있었다.

검을 뽑은 하비엘이 암반 앞에 섰다.

로이드가 표시한 곳을 겨누었다.

"흡."

스파파파팟!

은발 기사의 검이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수십 번 움직였다.

동시에 충돌하는 마나 써클의 폭발적인 힘을 담았다.

그 결과는 정교하고도 거침없는 파괴였다.

투화확!

족히 수십만 년을 버텨왔을 암반 내부에서 수십 차례의 폭발이 일어났다.

폭발력이 단단한 암반을 쪼갰다.

쿠우웅!

폭발 끝에 쪼개진 바위가 거대한 주사위 모양으로 떨어져 나왔다.

그러면 석공과 공병대 13조가 정이며 망치 등을 앞세우며 바위로 달려들었다.

"자, 다들 멍 때리지 말고! 튀는 돌 조각에 눈 다치지 않게 조심하고!"

로이드가 그려주는 표시를 따라 바위를 잘게 깨뜨리고, 나누었다.

평온하던 계곡은 금방 부서진 석회암 조각투성이가 되었다.

그동안 목수들도 바쁘게 땀을 흘렸다.

그들에겐 로이드가 건네준 수도교의 설계도가 주어졌다.

그 설계도를 따라 석제 아치가 만들어질 아치 받침틀을 짜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다.

뚝딱뚝딱!

힘찬 연장질이 이어졌다.

목제 받침틀이 만들어졌다.

무지개 모양의 튼튼한 받침틀.

그 위로 석회암 블록이 얹혔다.

블록끼리 단단히 맞물리며 아치를 형성했다.

아치가 만들어진 후에 받침틀이 해체되고, 옆자리에 다시 조립되었다.

그러면 미리 다듬어진 석회암 블록이 다시 받침틀에 올려졌다.

또 하나의 아치가 만들어졌다.

그렇듯 공사가 쉼 없이 반복되며 이어졌다.

한쪽에서는 자이언트 뱀부를 벌목하고, 배관으로 다듬어서, 매설했다.

계곡에서는 석회암으로 높이 17미터, 총장 82미터의 3층 아치형 수도교를 쌓아올렸다.

땀 한 방울이 흐를 때마다 매설된 배관이 한 칸씩 이어졌다.

구령이 이어질 때마다 쌓인 석회암 블록이 높아졌다.

그리고 마침내 2개월가량의 시간이 흐른 후.

늦가을의 부슬부슬 내리는 빗속에서 두 작업이 하나의 결과물로 합쳐졌다.

"자, 조심조심! 천천히! 고정 단단히 하고!"

로이드가 연장 벨트를 허리에 차고 나섰다.

완공된 수도교 직접 위로 올라갔다.

그곳에서 마지막 대나무 배관 놓는 작업을 지휘했다.

지상에서부터 17미터 높이.

좁은 수도교 꼭대기는 빗물로 미끄러웠다.

조금만 발을 헛디디면 추락 사고가 일어나기 딱 좋았다.

그렇기에 일부러 가장 위험한 일선으로 나섰다.

'그래야 현장의 분위기가 어수선해지지 않으니까.'

아무리 많은 보너스와 보상을 받아도 위험한 일은 위험한 일이다.

그런 위험한 작업에 일꾼들만 죽어라 갈아넣으면 현장 분위기는 금방 개판이 된다.

'자신이 하는 일의 위험성과 그에 따라 받게 될 돈을 계산하게 되지. 그렇게 스스로 목숨 값을 가늠하게 되는 거야.'

그것이 위험한 작업을 하는 사람의 자연스러운 심리였다.

로이드는 자신의 공병대가 그런 계산을 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거 별로 좋은 기분 아니거든. 나도 그래 봤으니까.'

그 기분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사실 그건 더러운 기분이었다.

돈으로 계산되는 목숨.

언제든 대체될 부속품이라는 기분.

그걸 한 번 느끼고 나면 현장에 대한 회의감이 생긴다.

그래서 로이드는 가장 위험한 수도교 꼭대기에서, 가장 아슬아슬한 작업을 직접 이끌었다.

작업 인원 중에서 가장 튼튼한 이들과 함께였다.

"자, 조심해서 발 옮기고. 하비엘? 바이에른 경? 아로쉬? 구령 붙여."

"하나."

"둘."

"셋, 꾸익!"

"놔!"

쿠웅!

로이드와 하비엘, 바이에른 경, 아로쉬가 한 조가 되었다.

대나무 배관을 수도교 위로 올렸다. 옮겼다. 내려놓았다. 연결했다.

마침내 마지막 배관이 놓이고 연결되었다.

물론 거기서 일이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마무리가 남았어. 확인이야.'

배관만 놓았다고 끝이 아니다.

물이 제대로 흘러가는지.

끝까지 확인을 해야 한다.

그걸 위해 로이드는 카푸아 호수까지 올라갔다.

배관으로 호숫물이 흘러들어 가도록 만든 취수 시설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취수문에 달린 밸브를 돌렸다.

끼기기기긱!

강철로 만든 취수문이 열렸다.

호숫물이 대나무를 엮어 만든 부유물 거름틀을 통과해 배관 안으로 흘러들어 갔다.

로이드의 눈이 흘러들어 가는 물을 날카롭게 살폈다.

'유속이 딱 좋아. 설계한 그대로야.'

이곳 카푸아 호수의 취수장에서부터 산 아래의 영지까지.

그는 상수관 전체 배관을 통해 흐르게 될 물의 유속이 0.5에서 3.0m/s의 범위 내로 유지되도록 설계를 잡았다.

배관 내 유속이 그보다 느리면?

배관 내부에 모래 알갱이 등의 입자가 침전되어 쌓이고 막힐 것이다.

반대로 유속이 그보다 너무 빠르면?

관 내부의 수압이 커져서 배관에 손상이 생길 것이다.

'그런데 지금 보이는 유속은... 일단 그 걱정은 안 해도 되겠어.'

로이드는 계속해서 물의 흐름을 살폈다.

그리고 한편으로 기다렸다.

그가 기다리는 것.

그것은 바로 산 아래, 영지에서부터 전달되어 올 희망찬 연락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이제 슬슬 반응이 올 때가 됐는데.'

로이드가 아랫입술을 초조하게 깨물 무렵이었다.

"...니다!"

"...습니다!"

산 아래쪽에서부터 하나씩 외침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영지의 정수장에서부터 이곳 취수장까지.

배관을 매설한 곳을 따라 한 명씩 늘어서서 상황을 살피던 공병대원들의 외침이었다.

지금 그들이, 영지에서 올라오는 외침을 힘껏 다음 대원에게 전달하고 있었다.

그 외침이 차근차근 이쪽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없이 잘 나옵니다!"

"...새는 곳 없이 잘 나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의 완성된 힘찬 외침을 로이드에게 전해주었다.

"영지의 정수장에 물이 나옵니다! 중간에 물이 새는 곳 없이 잘 나옵니다!"

현장의 모두가 환호했다.

오랜 공사의 끝.

마침내 맛보게 된 결실 앞에 주먹을 쥐었다.

옆 사람과 뿌듯함 담긴 눈길을 나누었다.

그렇듯 현장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물론 로이드 한 사람만은 예외였다.

"후우. 됐네. 그럼 슬슬 공사비나 수금하러 가자."

툭.

마치 동네 피시방이나 가자고 말하는 것처럼 태연하게.

혹은 서비스 음료수 챙기러 가자는 것처럼 당당하게.

로이드가 피식 웃으며 하비엘의 어깨를 툭 쳤다.

그래서 하비엘은 의아함을 느껴야 했다.

공사비라니? 수금이라니?

56화. 악마의 계약서 (1)

"그럼 슬슬 공사비나 수금하러 가자."

"예?"

하비엘은 의아한 기분으로 로이드를 쳐다보았다.

공사비라니.

수금이라니.

뚱딴지같은 말이었다.

뜬금없는 소리이기도 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데 자신이 모시는 도련님, 로이드는 피식 웃기만 한다.

"공사비 몰라?"

"물론 압니다."

공사비는 공사를 하는 데 쓰인 돈이다.

각종 자재와 장비, 인건비, 그 밖의 시설 관리까지.

건설 행위가 이어지는 동안 소요된 일체의 경비를 말함이다.

그래서 하비엘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걸 어디서 수금한다는 말입니까?"

나름 추측을 해보기도 했다.

공사비를 어디서 수금한다는 걸까.

그런데 딱히 떠오르는 곳이 없었다.

이번 상수도 설치 공사는 누군가의 의뢰로 벌인 공사가 아니었다.

영지에 닥친 오염 강물의 위기를 넘기기 위해서.

앞으로도 안정적으로 맑은 물을 확보하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실행한 공사였다.

마치 낡아서 지저분해진 창틀을 새것으로 바꾸는 것처럼.

혹은 부실해진 지붕을 수리하는 것처럼.

그저 영지의 필요 때문에 벌인 공사였다.

즉, 공사비를 뜯어낼(?) 곳이 애초에 없었다.

하비엘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혹시 라코나 자작에게 보상금의 명목으로 공사비를 받아내시려는 겁니까?"

"응? 아닌데."

그나마 짐작이 가는 바를 짚어 물었다.

한데 이 도련님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심지어 더 이해가 되지 않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보상금이라니, 무슨 소릴. 그런 걸로 입에 풀칠이나 하겠어?"

"...예?"

"보상금보다 훨씬 두둑한 게 있을 거니까. 잠자코 따라와. 어이, 거기?"

피식 웃던 로이드가 현장을 정리하던 바이에른 경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로이드 님."

"어, 불렀어. 이것저것 좀 시키려고."

"무엇이든 명하십시오."

"그래, 어디 보자. 일단 난 여기 아스라한 경과 함께 어딜 좀 다녀올 거야. 그러니까 경이 여기 현장 마무리를 맡아줘. 인원이랑 도구 점검 꼼꼼히 하고. 음식 쓰레기 잘 치우고. 괜히 지저분하게 남겼다간 취수장에 산짐승 꼬이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로이드 님께선 완공 기념회에 참석 안 하시는 겁니까?"

"무슨 섭한 소릴. 동네잔치에 빠지면 쓰나."

"그럼?"

"금방 볼일만 보고 올 거야. 남작님껜 그렇게 전해줘. 어디 다녀올지 미리 말씀드렸으니까."

"알겠습니다."

"참 그리고."

"네."

"나 없는 사이에 먼저 샴페인 터뜨리지 말라고도 전해."

"명심하겠습니다. 안심하고 다녀오십시오."

처척.

바이에른 경이 예를 표했다.

그 예를 받으며 로이드가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 가자."

"...."

하비엘은 일단 로이드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함께 산을 내려오면서도 그의 미간 주름은 사라지지 않았다.

'대체 뭘 하려는 거지.'

지금 로이드가 향하는 곳.

확실히 영지로 내려가는 방향이 아니었다.

'라코나 자작령으로 통하는 길이야.'

예전에 몇 번인가 다녀보았던, 기억에 있는 길이었다.

그래서 하비엘은 더욱 큰 의문과 걱정을 느껴야 했다.

"로이드 님."

뒤를 따라가며 말문을 열었다.

물론 로이드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계속 앞장서서 산길을 내려가며 대꾸했다.

"어, 듣고 있어."

"정말 이대로 자작령에 가시는 겁니까?"

"어."

"설마 라코나 자작을 만나시려는 겁니까?"

"어."

"만나면 무얼 하실 생각이신 겁니까."

"왜. 내가 거기 가서 진상이라도 피울까 봐?"

"...."

사실 그게 제일 걱정이다.

하비엘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는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로이드 님의 심정은 이해가 갑니다."

"오. 어쩐 일로 날 이해한대? 시작이 좋네. 계속 말해봐."

"예. 강물에 오염된 독성 폐수를 방류한 것은 라코나 자작의 잘못이 명백합니다. 거기에 이은 주군에 대한 협박은 매우 치졸하고, 비겁한 행위였지요. 그 때문에 우리 영지가 예정에 없던 자금과 인력을 소모하여 상수도 공사를 치러야 했던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하비엘의 말이 이어졌다.

"때로는 그런 피해를 만회한 것으로 만족하며 참아야 할 때도 있는 법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흐음, 인내심 풍족한 인격자가 되라고 말씀하시는 거야?"

"아닙니다. 냉정하고 현실적으로 판단하시라는 말씀입니다."

"냉정? 현실?"

"예."

하비엘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여전히 앞서 걸어가는 로이드의 등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대로 자작령으로 가서 라코나 자작을 만나실 수는 있습니다. 그에게 지난번의 치졸했던 일을 따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딱히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없지 않겠습니까."

"...."

"상대의 잘못을 지적하고 따지는 것. 조금만 냉철하게 계산해보면 분노라는 감정 해소 외에는 얻는 이득이 없는 무가치한 일입니다. 오히려 불필요한 분쟁만 추가로 발생할 뿐이겠지요."

"어. 듣고 보니 그렇긴 하네."

"그럼, 생각을 바꾸실 의향이 있는 겁니까?"

"아니."

앞서 걷는 로이드.

그의 어깨가 살짝 들썩이는 게 보였다.

아마도 잠깐 웃은 것이리라.

역시나 돌아오는 로이드의 목소리엔 피식 짓는 쓴웃음이 배어 있었다.

"이봐, 하비엘 아스라한. 넌 내가 이득도 없을 일을 추진할 인간으로 보이냐?"

"예?"

"내가 그런 인간으로 보이냐고."

"솔직하게 말씀드려도 됩니까?"

"어."

"제가 본 로이드 님은 쪼잔하고, 뒤끝 더러우며, 조금의 손해도 용납하지 못하는 좀생이 같은 분이십니다."

"와우."

"그래서입니다. 오늘 같은 이런 분풀이, 로이드 님께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라 생각됩니다. 부디 평소처럼 행동하시지요."

"허 참. 넌 내가 하려는 일이 고작 분풀이로 보였어?"

"그럼?"

"잠자코 보기나 해."

"...."

하비엘은 입을 다물었다.

나름 설득을 위해 열심히 충고했다.

그러나 로이드가 그걸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기서 더 나서는 건 선을 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이번만은 감정에 휩쓸려 계란으로 바위를 치시는 건가.'

이대로 찾아가게 될 자작령.

설령 자작을 만난다 한들 뭘 할 수 있을까 싶었다.

자작의 잘못을 아무리 능수능란하게 조목조목 따진다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일까 싶었다.

보상금이든 공사 대금이든.

자작은 단 한 푼의 돈도 내어주지 않으리라.

그에겐 그럴 이유도, 명분도, 필요도, 전혀 없을 테니까.

은발의 기사는 그렇게 생각하며 로이드의 뒤를 묵묵히 따랐다.

그렇게 서너 시간이 지났다.

침묵 속에서 산을 내려왔다.

자작령에 도착했다.

마을 곳곳에서 고소한 냄새가 났다.

저녁을 위한 음식을 마련하는 냄새였다.

그렇게 고소한 음식 냄새를 맡으며 마을 두 개를 통과했다.

마침내 자작의 저택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정지."

"방문객은 신분과 이름을 밝히시오."

저택의 관문을 지키는 문지기 병사 둘이 앞을 막았다.

하지만 하비엘이 나서서 입을 열 기회는 없었다.

로이드가 한발 먼저 나선 까닭이었다.

"이웃한 프론테라 남작령의 정식 후계자, 로이드 프론테라다. 라코나 자작을 뵈러 왔다고 전해라."

"혹시 공식적인 접견 신청이십니까?"

"그렇다."

로이드의 당당한 말투와 태도에 병사들의 태도가 누그러졌다.

한 명이 관문을 지키고, 나머지 하나가 저택으로 소식을 알리러 들어갔다.

잠깐의 기다림이 이어졌다.

그동안 하비엘은 생각했다.

'안 되겠지, 아마.'

접견 신청.

무리한 일이었다.

너무 막무가내이기도 했다.

'보통 귀족 가문을 방문할 때는 미리 연락을 넣고 용건을 밝혀, 그 용건에 대한 조율을 모두 마친 뒤에야 접견을 하게 되니까.'

이렇듯 아무런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오는 일은 좀처럼 없다.

귀족 사이의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다.

그러니 거절당해도?

할 말이 없다.

아니, 거절당하는 일이 당연하....

"자작님께서 들어오시랍니다."

"...."

뭐지.

하비엘은 한쪽 눈썹을 꿈틀, 움직였다.

'왜 거절하지 않은 거지?'

이쪽에게 나쁜 일은 아니었다.

다만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예정에도 없는 접견을 허락하다니.

상식적으로는 이게 말이 안 되는 건데.

그런데 그런 일이 현실로 벌어지고 있었다.

심지어 이쪽을 마중 나온 사람은 자작령의 행정관으로 보였다.

'어째서? 왜?'

로이드와 함께 자작의 저택으로 들어가는 동안.

안내를 받으며 저택 복도를 걷는 동안에도 내내.

은발 기사의 머릿속에 수많은 물음표만 동동 떠올랐다.

한데 그에게 이해되지 않는 상황은 그 뒤로도 계속 펼쳐졌다.

"프론테라 가문의 장남, 로이드 프론테라가 도착했습니다."

"들어오라 하게."

어느 복도의 끝.

접견실 문 앞에서 행정관이 고했다.

한데 안쪽에서 돌아오는 대답의 목소리는 자작의 것이었다.

'....'

하비엘의 눈썹이 또 한 번 꿈틀거렸다.

접견실에 자작이 미리 나와서 기다리고 있다니.

이것 또한 말이 안 되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우린 예고도 없이 찾아온 불청객인데.'

그걸 받아줬을 뿐만 아니라 먼저 접견실에 나와서 기다려주기까지 하다니.

과연 열리는 문 안쪽, 접견실에는 자작이 예의 염소수염을 매만지며 의자에 앉아 있었다.

한데 이쪽을 보고 있는 자작의 표정이나 태도가 또 뭔가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후우. 오랜만이군, 자네들."

"반갑습니다."

"이리 와서들 앉지."

"감사합니다."

자작은 이쪽을, 정확히는 로이드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잔뜩 독기를 품은 독사 같았다.

한데 어쩐 일인지 그 독기를 애써 삭이고 있는 모습이었다.

반면 로이드는?

"이렇게 저희를 환영해주셔서 어찌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매우 당당했다.

한껏 여유롭고, 자신감이 가득해 보였다.

그래서 하비엘은 한층 혼란스러움을 느껴야 했다.

'지금 이건 대체 무슨 상황인 걸까.'

뭔가 상황이, 예상했던 것과 너무나 다른 그림이었다.

로이드와 라코나 자작.

두 사람의 태도가 그랬다.

'분명 로이드 님이 화를 내고, 라코나 자작이 여유로운 태도를 보여야 할 만남인데.'

그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상식적으로 그러했다.

로이드는 라코나 자작의 지난 일을 따지러 왔을 텐데.

라코나 자작이 그런 로이드를 비웃는 게 정상일 텐데.

어째 두 사람의 태도가 거꾸로 뒤집혀 있었다.

로이드는 어쩐지 너무나 당당한 모습이었다.

라코나 자작이 오히려 부들거리는 태도였다.

정말로, 진심으로, 이상했다.

'뭘까, 이 상황.'

분명 뭔가 있다.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

그렇게 생각한 하비엘의 눈빛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 상황 이면에 숨어 있을 이해관계를 추측하고자 노력했다.

그동안 로이드와 라코나 자작의 괴상한 접견도 계속 이어졌다.

"그나저나 라코나 자작님?"

"뭔가."

"요즘 뭐 힘든 일 없으십니까?"

"없네, 그런 거."

"정말입니까?"

"당연하지."

"아침에 일어나면 뭔가 눈앞이 띵하다거나, 멀미가 나듯이 어지럽다거나, 그러지 않습니까?"

"전혀. 내 건강엔 아무런 이상도 없네."

"흐음. 방금 여쭤봤던 거, 정신적 스트레스가 심할 때의 증상입니다."

"내가 걱정할 일이 뭐가 있다고 그러겠나."

"정말입니까? 진심으로?"

"당연한 일을 왜 자꾸 그리도 집요하게 묻지?"

"물으면 안 됩니까?"

"...."

자작이 로이드를 노려보았다.

로이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다 알고 있습니다. 좀 솔직해지시지요."

"솔직하라니. 뭘 말인가."

"어차피 지금 자작님도 절박하지 않습니까?"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만."

"허허. 절박할 정도로 다급하고, 문제를 해결하고는 싶은데, 그게 뭣 때문인지 원인은 죽어도 모르겠고, 한편으로는 의심 가는 놈도 있고. 그러니까 오늘 이렇게 저와 만나고 계신 거 아닙니까?"

"내가 무슨...."

"저를 통해 확인하고 싶으신 거, 아니냔 말입니다."

"...."

자작이 입을 다물었다.

로이드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원래 고민이라는 게 그런 겁니다. 남한테 쉽게 말은 못하겠고, 그렇다고 끙끙대며 품고만 있자니 답답해서 미치겠고. 그렇지요?"

"나는 전혀...."

"어허. 개똥 같은 자존심 내려놓으시죠."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이제부터 제가 할 이야기, 자작님이 더 잘 알고 계실 텐데요."

"...."

"지금 제가 이러는 거 보면서 계속 가슴이 철렁철렁하실 겁니다. 그동안 끙끙대고 고민하며 떠올리던 의심이 착착 맞아들어가는 것 같아서. 자작님을 그토록 괴롭게 만든 사태의 원흉이 제가 맞다는 것도 착착 확인하게 되셔서. 아닙니까?"

"...."

"이래도 말씀, 안 하시렵니까?"

"...."

"이만 수긍하고 포기하시죠. 생각해보세요. 노력은 자작님을 배신할 수 있지만, 포기는 절대 배신하지 않는 법입니다."

"무슨 그런 궤변을...."

"이 지경까지 와서도 계속 자존심부터 챙기시겠다니. 그러면 일이 해결이 안 됩니다. 협상을 해야죠, 이럴 때는. 그래서 제가 왔지 않겠습니까? 자작님의 고민을 덜어드리려고 말입니다. 생각을 해보십시오. 알고 보면 이런 친절한 이웃, 또 없습니다?"

"나는 결코 자네 같은...."

"자작님네 염료 공방, 요즘 많이 어려워지셨지요?"

마침내 던진 평범한 질문 한마디.

그걸 꺼내며 로이드가 빙그레 웃었다.

그 순간 하비엘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자작의 얼굴이 벌게졌다.

염소수염이 부르르 떨렸다.

로이드를 노려보는 눈에 핏발이 섰다.

그러기를 한참, 이를 갈며 으르렁거리듯 반문했다.

"역시, 자네 짓이었나?"

57화. 악마의 계약서 (2)

접견실 공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자작의 눈동자에 깊은 분노가 떠올랐다.

그 눈길을 받는 로이드의 표정이 더욱 태연해졌다.

"역시라니요?"

어깨를 으쓱거렸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뻔뻔하게 되물었다.

"자작님께선 아직도 자존심을 내려놓지 못하고 계신 듯합니다? 사실 전부터 의심했고, 아까부터 내심 확인까지 마치고서 철렁하셨을 텐데요. 그런데 '역시 자네였나?'라니. 그거, 너무 작위적인 질문 아닙니까?"

"무슨...."

"지금 표정 좋네요. 이대로 계속 가죠."

딱!

소파에 몸을 묻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경쾌한 손짓으로 손가락을 튕겼다.

"보세요. 역시 자작님도 제가 한 짓이라는 걸 짐작하고 계셨지 않습니까. 얼굴 보자마자 솔직하게 터놓고 말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염료 공방에 장난질을 친 것이 자네가 맞다는 거로군?"

"예. 제가 했습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건가."

"방법이 궁금하신 겁니까?"

"후우. 당연하지."

여전히 로이드를 노려보며 자작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염료 공방.

최근 그곳에서 벌어진 사태를 떠올리면 한숨부터 절로 나오는 자작이었다.

'내 가장 소중한 염료 공방....'

염료 공방은 자작에게 있어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라도나 열매의 농축액을 특수 처리하여 물들인 천, 라코나타(Laconata).

그렇게 만든 라코나타 옷감은 지극히 아름다웠다.

화려하고도 다채로운 색감은 기본이었다.

필설로 형용하기 어려운 특유의 깊은 광택은 수려하기 짝이 없었다.

다른 영지에서는 흉내 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똑같이 라도나 열매를 써도 마찬가지였다.

동부산맥의 서쪽 사면.

이곳 지방에서 채집되는 라도나 열매를 써야만 그 특유의 색감을 구현할 수 있었다.

이곳의 라도나 열매를 다른 곳에 심으면?

특유의 색감과 광택이 나오지 않았다.

라도나 열매를 운송해서 쓸 수도 없었다.

그러자면 운송 도중에 열매가 변질되었다.

마찬가지로 옷감의 색도 변질되어 나왔다.

게다가 자작령에는 백 년 넘도록 라코나타를 생산하며 쌓인 특별한 노하우까지 있었다.

덕분에 라코나타 옷감은 오직 이곳 라코나 자작령에서만 생산되는, 귀한 특산품으로 취급받을 수 있었다.

당연히 라코나 자작령을 먹여 살리는 가장 큰 수입원이기도 했다.

말 그대로 소중하기 짝이 없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서부터 그 거위가 이상해졌다.

아니, 죽어 버렸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어.'

약 50일쯤 전의 어느 아침이었던가.

염료 공방 감독관이 자신을 찾아왔더랬다.

자신을 보자마자 대뜸 싹싹 빌기 시작했더랬다.

죄송하다고.

죽을죄를 지었다고.

라코나타 옷감이 이상하게 나왔다고 했다.

염색을 마쳤더니 색상이 괴상하게 변했다고 했다. 특유의 광택이 완전히 죽어 버렸다고 했다.

'처음엔 그날만 그런 줄 알았어.'

그저 하루치 결과물이 이상했던 건 줄 알았다.

원료가 되는 열매에 이상이 있었다거나.

혹은 옷감이 뭔가 잘못됐다거나.

그런 줄로만 알았다.

한데 아니었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열흘이 지나도록.

한 달이 흘러가도록.

라코나타 옷감 고유의 색상과 광택이 돌아오지 않았다.

아름답던 색상이 전에 없이 탁하고 거무죽죽하게 죽어 버렸다.

수려하던 광택은 찾아볼 수도 없이 그저 흐리멍덩해졌다.

도저히 팔 수 없는 폐급 상품.

쓰레기나 다름없이 변해 버렸다.

'그때부터였어.'

염료 공방에 비상이 걸렸다.

원료인 라도나 열매를 싹 갈아치웠다.

보관하던 농축액을 다 버리고 새로 만들어야 했다.

그럼에도 라코나타의 색상이 돌아오지 않았다.

옷감을 통째로 바꾸기도 해보았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사라진 광택 또한 돌아오지 않았다.

자연 라코나타를 꾸준히 사가던 상인들이 발길을 돌렸다.

제법 오래 거래해왔던 거래처마저 하나둘씩 끊기기 시작했다.

언제나 든든했던 자작령의 수입원이 사라진 셈이었다.

한데 그 지경이 되도록 사태의 원인을 찾아낼 수 없었다.

어째서 라코나타의 색상과 광택이 죽었는지.

수많은 시도를 거듭해도.

아무리 애를 써도.

원인을 알아낼 수 없었다.

자작으로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져서 매일 머리칼이 한 움큼씩 빠졌다.

위통까지 도져서 밤마다 신물이 목구멍으로 올라왔다.

그럼에도 자작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소득도 없는 의심뿐일 지경이었다.

'그래, 저놈. 로이드 프론테라. 저놈을 의심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어!'

사실 증거도 없는 심증일 뿐이었다.

하지만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염료 공방의 폐수를 무단으로 방류했으니까.

그렇게 프론테라 남작령에 큰 피해를 입히고 협박까지 했으니까.

이 시점에서 자신에게 가장 큰 원한을 지녔을 사람은 프론테라 가문의 사람들이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유력한 용의자(?)가 바로 로이드였다.

'어리지만 철두철미한 놈.'

이미 여러 차례 보여준 그 철저함과 약삭빠름.

그런 성격이라면 충분히 이런 일을 저지르고도 남으리라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짓을 할 놈은 로이드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모르는 것은 단지 어떤 방법으로 수작을 부렸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작이 오늘 로이드의 예고도 없는 방문과 접견 신청을 덥석 허락한 것이었다.

확인을 하고 싶었다.

자신의 염료 공방에 어떤 수작을 부렸는지.

제발 그 방법만이라도 좀 알아내고 싶었다.

"쥐뿔도 없는 주제에, 내 염료 공방에 대체 무슨 짓거리를 벌인 거지?"

자작이 이를 갈았다.

로이드를 노려보았다.

저주?

혹은 몹쓸 마법?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안 됐다.

로이드가 피식 웃었다.

"흐음. 일단 절 원인으로 지목하신 건 칭찬해드리고 싶네요. 보기보다 추리력이 좋으시군요. 그런데 이걸 어쩌나."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자작님네 염료 공방에서 벌어진 사태, 엄밀하게 말하자면 제가 일부러 벌인 일은 아닙니다?"

"무슨 뜻인가 그게."

일부러 벌인 일이 아니라니.

또 무슨 말장난을 하려는 걸까.

자작이 표정을 굳혔다.

로이드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염료 공방에서 벌어진 사태의 원인을 입에 담았다.

"그거, 수도교를 만들다 보니까 피치 못하게 벌어진 일이랄까요."

"수도교?"

"네. 계곡에 지었죠. 예쁘게."

"그게 우리 염료 공방의 일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제대로 말해! 놀리듯이 빙빙 돌리지 말고!"

마침내 자작이 폭발했다.

소파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터앉다시피 하며 탁자 너머 로이드를 향해 상체를 내밀었다.

로이드가 소파에 편안하게 등을 기댔다.

"쯧. 성격 급하시기는. 혹시 석회암의 성질을 아십니까?"

"...뭐?"

"석회암은 탄산칼슘으로 이루어진 퇴적암의 일종이지요."

"그게 무슨...."

저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일까.

로이드의 태연한 설명이 이어졌다.

"조개, 산호, 해면, 플랑크톤 등등, 수많은 생물이 탄산칼슘으로 골격이나 껍데기를 만듭니다. 그리고 죽으면 그 탄산칼슘이 바다 밑바닥에 쌓이지요. 수많은 시간에 걸쳐 퇴적되고, 단단하게 뭉칩니다. 그게 바로 석회암입니다."

"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쉿. 끝까지 제대로 들어보시죠. 어쨌건 그렇게 생성된 석회암은 제법 훌륭한 건축 자재로 활용됩니다. 이번에 제가 산맥 중턱의 계곡에 놓은 수도교를 만들 때처럼 말이지요. 그리고 한편으로 석회암 지반은 주변의 물을 석회수로 만들기도 합니다."

"석회수...?"

"네. 말은 거창하지만 사실 간단합니다. 석회암에 있는 칼슘 이온과 마그네슘 이온이 물속에 녹아들어서 각종 미네랄의 성분비가 아주 살짝 달라진 상태라고 보시면 되니까 말입니다."

"그게, 그게 지금 염료 공방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상관이 있지요."

"어째서?"

"제가 수도교를 놓은 계곡 바닥에 흐르는 물, 그게 바로 자작님네 영지와 우리 영지까지 흘러오는 프로나 강의 상류니까요."

"뭐...?"

자작의 굳어 있던 표정이 멍해졌다.

마치 뒤통수를 한 대 맞은 사람 같았다.

로이드의 태연자약한 설명이 이어졌다.

"이제 조금은 감이 잡히십니까? 계곡에 수도교를 놓기 위해 열심히 발파 작업을 했지요. 계곡 사면에 묻혀 있던 석회암 암반을 폭파하고, 파헤치고, 끄집어냈습니다. 아, 그 과정에서 채석한 석회암을 잘게 자르고 가공하느라 연장질도 제법 했군요. 계곡 전체에 엄청난 양의 석회암 부스러기와 조각이 깔리게 됐습니다. 계곡물 아래에 자갈과 모래처럼 셀 수도 없이 말이지요. 덕분에 말입니다-"

로이드가 시종일관 짓고 있던 미소.

그 미소가 서서히 사악해졌다.

"계곡물이 전보다 아주 살짝 석회수에 가깝게 변했다는 말입니다."

"그럼... 설마... 우리 염료 공방의 라코나타 색깔이 변한 이유가...."

"네. 프로나 강의 성분이 미묘하게 변한 것이 원인이지요."

"무슨... 말도 안 되는...."

"물론 전혀 깨닫지 못하고 계셨을 겁니다. 그 변화라는 게 워낙 미미하고 미묘한 거라서요. 맛을 본다고 느껴질 정도가 아니거든요. 사람이나 환경에 딱히 큰 영향을 미칠 정도도 아닐 테고 말입니다."

로이드의 사악한 미소가 짙어졌다.

그의 말대로였다.

계곡에서 시행된 석회암 발파와 가공.

그 때문에 계곡물에 유입된 미네랄 성분은 많다고 하긴 어려웠다.

사실 사람이나 다른 생물, 주위의 환경에 미치는 영향 또한 미미했다.

인간의 몸에 미치는 영향으로 비슷한 예를 들자면 열대 과일 바나나에 들어 있는 칼륨의 방사능 정도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바나나에 칼륨의 방사성 동위원소가 들어 있긴 하지만, 그걸 먹어서 방사선 피폭을 당하려면 최소한 하루에 1억 개 이상의 바나나를 먹어야 하니까. 그거랑 비슷한 거지, 프로나 강에 섞여든 미네랄 성분 때문에 인간의 몸에 생겨날 변화와 영향이라는 거. 미네랄 과다로 죽으려면 강물을 1억 리터쯤 원샷하면 되려나?'

그렇듯 석회수 유입의 영향은 극히 미미했다.

물론, 사람과 환경에만 그랬다.

"하지만 자작님네 염료 공방의 작업에는 다르겠지요. 아마도 염료 착색과 세척 과정에서 강물을 끌어다 쓰실 거니까. 우리 영지로 흘린 폐수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일 테니까. 그렇지요?"

"...."

"원래 그런 겁니다. 화학 작용이라는 게. 아, 화학이 뭔지는 모르시려나. 어쨌건, 사람에겐 영향이 없을 정도의 미미한 변화라도 염색 작업 같은 민감한 일에는 큰 영향을 주지요."

"그, 그런...."

"아, 이거 어떡하죠? 마음이 아파지려고 하네. 저도 라코나타 옷감 예뻐서 마음에 들던데."

"...."

"그런데 이제 그 라코나타는 영원히 못 살리시겠네요. 저 강물, 최소 10년 이상은 저 상태일 테니까 말입니다. 그렇다고 다른 곳의 물을 끌어와서 쓸 방법도 마땅히 없으실 테고. 석회 성분 없애겠다고 증류수를 만들어봤자, 뭐. 결국엔 물의 성분이 또 달라지는 거라서 라코나타 색감은 여전히 가출한 상태가 될 거고."

"제소할 거다! 귀족 법원에 이 부당한 일을 기필코 알릴 거다!"

"네, 제소하십시오."

발끈한 자작이 외쳤다.

로이드가 능글능글하게 받아쳤다.

"원하신다면 마음껏 제소해보시죠. 그래서 이길 수 있으실 것 같습니까?"

"뭐?"

"석회수라는 거, 애초에 오염 물질이 아닙니다. 독성 성분도 물론 아니고 말입니다."

"...."

자작의 말문이 막혔다.

로이드의 자비도 없는 팩트 폭력, 아니, 폭격이 이어졌다.

"게다가 이거 어쩌지요? 계곡에 뿌려진 석회암과 그 수많은 돌조각들, 일부러 뿌린 것도 아닌데. 개발행위를 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뿌려진 건데. 이거, 왕국법에서 중요하게 보는 '행위의 고의성'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거, 아시지요?"

"고, 고의성?"

"예. 행위의 고의성 말입니다. 명백히 해를 끼칠 의도를 가지고 한 행동이 아닐 경우를 말함이지요. 게다가 이번 사태, 더 엄연히 따지고 들어가면 원인은 자작님에게 있습니다?"

"내게 있다니, 어째서!"

"자작님이 우리 영지로 흘러들어오는 프로나 강에 독성 폐수를 무단으로 방류하셨잖습니까. 그래서 그걸 극복하려고 열심히 계곡에 수도교를 만든 겁니다. 그 행위의 과정에서 채석을 위하여 피.치.못.하.게 석회암을 발파할 수밖에 없었고, 계곡물이 석회수로 변했고, 자작님의 소중한 라코나타 옷감 색깔이 굿모닝 헬게이트를 외치는 똥색 요물처럼 변해 버린 거지요."

"흐, 허어... 므, 무슨... 그런...."

"어이쿠. 이제 이해가 좀 되십니까? 그렇다고 울지는 마시고."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한껏 앞으로 기울여 오고 있던 자작의 상체.

소파 등받이로 힘없이 무너졌다.

무력하게 몸을 늘어뜨렸다.

망연자실한 눈길로 천장을 쳐다보았다.

비로소 이번 사태의 원인을 깨달은 자작.

그런 그의 눈은 이미 초점이 풀려 있었다.

'내가 저놈에게 제대로 당했구나.'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한데 벗어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리 애를 쓰고 머리를 굴려도 뾰족한 대책이 없었다.

귀족 법원에 제소?

그것도 무용지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못 이겨. 저놈 말대로야. 석회수라는 거, 아무런 독성도 없으니까. 그냥 물이니까. 그런데 그걸로 무슨 제소를 해.'

게다가 제소를 한다 해도, 정말로 하늘이 도와서 법원에서 승리한다 해도, 답이 없어 보였다.

'판결이 나려면 최소 1년은 걸릴 테니까.'

그 시간 동안 라코나타 옷감은 계속 지금과 같은 상태일 터다.

수많은 거래처가 다 떨어져 나갈 것이다.

즉, 특산품을 잃고 거지가 되는 셈이다.

'저 악마 같은 놈!'

이쪽을 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는 로이드.

그 모습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저놈이 대체 어디부터 어디까지 이 상황을 설계하고 계산한 건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아니, 여기서 자신이 발버둥쳐 봤자 저놈은 그것까지 다 미리 계산해두고 더 큰 타격을 입혀올 것 같았다.

'저놈이라면 충분히 그럴 거야.'

손끝이 절로 덜덜덜 떨렸다.

벗어날 수 없는 패배감.

극복할 수 없을 절망감.

개미지옥에 빠진 개미가 이런 심정이지 않을까.

누군가가 말하길, 살면서 힘들 땐 차분하게 눈을 감아보라던데.

그렇게 보이는 깜깜한 어둠이 자신의 미래처럼 느껴졌다.

'못 이겨. 이건 방법이 없어.'

결국, 자작은 포기하고 말았다.

아무리 계산해도 이길 방법이 없었다.

그러니 그에게 남은 선택지는 단 하나였다.

"내가... 내가 잘못했네."

자작이 고개를 숙였다.

침통한 얼굴로 말했다.

"자네의 영지에 대한 폐수의 방류를 즉각 중단하겠네. 그러니 이렇게 부탁함세. 이번 한 번만... 용서를 해주면 안 되겠는가?"

"용서 말입니까?"

"그렇네."

자작이 더욱 깊이 고개를 숙였다.

속으론 이가 갈렸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다.

한데 로이드에게선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흐음. 그런데 이거 어떡하죠. 석회수로 바뀐 강물, 그거 방법이 없는데."

"...뭐?"

"이제 와서 계곡에 퍼진 석회암 조각을 아무리 치워봐야 소용이 없을 거란 뜻입니다. 대규모 발파 작업 때문에 석회암 암반이 너무 드러났거든요."

"그게 무슨...."

"정말입니다. 원래 그 석회암 암반, 쇄설성 퇴적물인 규산암층으로 살짝 덮여 있었습니다. 일종의 막처럼 석회암을 감싸고 있었달까요. 그런데 그게 다 깨졌어요. 석회암이 다 노출돼서 이젠 방법이 없단 말입니다."

"아, 아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그럼...."

"앞으로도 계속 강물이 이 모양일 거란 말이지요."

"...."

자작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사과를 하면 뭔가 대책이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이었는데.

그 희망이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한데 그때였다.

눈앞에 앉은 악마.

아니, 로이드 프론테라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뭐, 그래도 그렇게 용서를 구하신다니까, 자작님네 라코나타를 되살릴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뭐, 뭔가, 그 방법이!"

"어이쿠. 소매는 좀 놓아주시고."

"아, 미안하네. 내가 다급해서 그만...."

"됐습니다. 심정은 이해하니까. 그럼 한 가지 제안을 드릴까요."

"제안?"

"네, 제안."

자작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로이드를 쳐다보았다.

그가 제시할 제안을 기다렸다.

마침내 로이드의 입이 열렸다.

"제가 드리고픈 제안은 이겁니다. 자작님? 염료 공방, 특산품 라코나타, 소중하시죠?"

"그, 그렇네."

"꼭 되살려서 지키고 싶으시죠?"

"그 또한 물론 그렇네."

"좋습니다. 그럼-"

로이드의 눈웃음이 흐뭇해졌다.

두 달 전, 처음 폐수 사태가 벌어졌던 때부터.

마음속에 품어왔던 큰 그림을 마침내 제안으로 꺼내놓았다.

"그 특산품, 되살려서 아름다운 전통으로 쭉 이어가고 싶으시면 우리 영지에서 상수도 끌어다 쓰십시오. 물론 수도세는 매달 아주 거하게 내시고."

58화. 악마의 계약서 (3)

"물론 수도세는 매달 아주 거하게 내시고."

쿠웅!

자작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자작 본인도 이유를 알 수는 없었다.

사실은 수도세가 무슨 말인지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런데 뜻은 몰라도 느낌은 왔다.

듣는 순간부터 스멀스멀 초조함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뭔가 '잘못 걸렸다'라는 위기감이 꿈틀거렸다.

자작은 용기를 내어서 반문했다.

"저기, 미안한데... 수도세가 뭔가?"

"아, 처음 들어보십니까. 간단합니다. 상수도의 맑은 물을 끌어다 쓰시고, 그 대가로 납부하는 세금이지요."

"그러니까, 물 사용세?"

"이해가 빠르시군요."

"물에 세금을 매긴다고?"

"네."

로이드가 뭐 그리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싱긋 웃었다.

"취수장에서 깨끗한 도관을 거쳐 영지의 저수지까지. 고객이 신뢰할 수 있는 최고 품질의 물을 안정적으로 공급합니다. 할아버지가 마시고 할머니가 세수하고 엄마랑 아빠가 국 끓이고 아이들이 참방참방 물장구치는 맑고 깨끗한 물. 어떻습니까.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 뛰지 않습니까?"

"...."

자작은 대답이 없었다.

로이드는 피식 웃었다.

그래.

당연히 가슴이 뛰겠지.

물에 사용세를 매긴다는 듣도 보도 못한 개념에 심장이 16비트 자진모리장단으로 트리플악셀을 뛰고 있을 것이리라.

'그러니까 당신은 사람 잘못 건드렸어.'

로이드의 미소가 살포시 사악해졌다.

문득, 상수도를 처음 계획하던 때가 떠올랐다.

아마도 하비엘과 함께 동부산맥을 오르며 측량 답사를 하던 날이었던가.

처음엔 그저 남작령에 닥친 위기를 넘겨야겠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이참에 비용이 들더라도 안정적인 물 공급 시스템을 만들면 크게 손해는 아닐 거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고 있었더랬다.

하지만 사실은 분했다.

상수도를 만드는 것.

좋았다.

정말로 좋긴 했다.

하지만 그렇게 위기만 넘긴 걸로 안도하며 넘어가기에는, 가슴 속에 뭉친 응어리가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어떻게 해서건 한 번은 빅엿을 먹여주고 싶었어, 댁한테.'

눈앞의 자작.

마레즈 개간지를 내놓으라며 무슨 짓을 벌였던가.

무려 독성 폐수를 강에 무단으로 방류했다.

그걸 따지니 배 째라는 식으로 나왔다.

아니, 아예 협박까지 했다.

휘하의 기사를 보내 마레즈 개간지의 절반을 내놓을 때까지 독성 폐수의 방류를 멈추지 않을 거라는 전언까지 전했다.

예의가 없다거나.

경우가 없다거나.

라는 선을 훨씬 넘어선, 말 그대로의 횡포였다.

'그래서 당시엔 밤잠도 제대로 오질 않았어.'

자려고 누우면 눈앞에 금화가 어른거렸다.

여전히 한 채씩 만들어서 분양하고 있는 온돌방.

그걸로 이자를 갚는 와중에도 약간씩 돈이 남았더랬다.

그 자금으로 각종 공사를 진행해 왔다.

그러고도 남는 푼돈을 아득바득 모아두었다.

'그런데 졸지에 그걸 다 때려 부어야 할 일이 생겼던 거니까. 댁 때문에.'

자작을 향한 로이드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당시의 감정이 떠오르니 다시금 피가 차갑게 식었다.

어쩌면 그런 감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비엘과 측량 답사를 하던 날.

산맥 중턱의 계곡에서 석회암 암반을 발견했을 때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던 것은.

속으로 '이거다!'를 외치며 환호성을 터뜨렸던 것은.

살짝 드러난 석회암 암반.

널찍한 계곡 한쪽으로 흐르는 물.

그 물이 자작령과 남작령으로 흘러오는 '프로나 강'의 상류라는 걸 알았을 때였다.

머릿속에서 폭발적으로 계산이 이루어졌다.

순식간에 각이 나왔다.

그림이 그려졌다.

원래 상수도만 만들고 끝날 뻔했던 계획.

그 계획에 자작을 엿 먹일 작전이 첨가되던 순간이었다.

'그때부터였지.'

로이드는 상수도 건설 계획의 성격을 재설정했다.

그저 영지의 발전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자작을 공격할 말 그대로의 비밀 무기로 설정했다.

그래서였다.

"걱정 마십시오. 공급해드릴 물이 부족할 일은 절대로 없을 겁니다. 왜냐. 처음 상수도 건설을 준비할 때부터 자작님네 염료 공방으로 공급해줄 급수량까지 모두 계산해서 상수도관과 취수장의 규모를 설계했거든요."

그렇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였다.

"그리고 우리 쪽 영지에서 자작님네 염료 공방으로 상수도관을 설치할 경로까지 모두 조사해뒀습니다. 지반이 무척 안정적이더군요. 경사도 적당해서 도관 내 물의 유속을 설정하기도 제법 편했고."

"그게 무슨...?"

"측량은 물론이고 설계까지 다 마쳐뒀다는 이야기죠. 자작님이 오케이 사인만 보내면 내일부터 당장 시공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아마 이르면 보름 뒤쯤부터는 염료 공방에 맑은 물을 공급받으실 수 있을 테고요."

로이드의 미소에 여유가 배어났다.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저렇듯 부들거리는 자작의 얼굴이 참 보고 싶었다.

"그러니 잘 생각하십시오. 자작님의 입장도 충분히 고려하시길 바랍니다. 혹시 물에 사용료를 매기는 게 부당하다고 느껴지시는 건 아니겠지요?"

"그건...."

"예, 낯선 개념이라서 조금 거부감이 들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뭐, 싫으면 염료 공방이고 라코나타 특산품이고 뭐고 다 망하는 거죠."

"...."

자작의 손끝이 형편없이 덜덜 떨렸다.

그만큼 로이드의 미소가 더욱 여유롭게 배어났다.

그런 둘의 모습을 바라보는 하비엘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어야 했다.

'무시무시하군.'

하비엘은 무의식중에 팔뚝의 소름을 털어냈다.

자신이 모시는 도련님, 로이드 프론테라.

전부터 뒤끝이 더럽고 성격도 배배 꼬였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설마 이런 계획을 품고 있었을 줄이야.'

아까 상수도 공사를 마무리했을 때도.

그 와중에 뜬금없이 수금을 하러 가자고 로이드가 말했을 때도.

이런 상황을 1그램도 상상하지 못했던 하비엘이었다.

아니, 사실은 이해할 수 없다고만 여겼다.

로이드와 함께 산맥을 내려올 때도 그랬다.

로이드가 자작의 저택을 방문할 때도, 받아들여질 리 없을 접견 신청을 했을 때도, 시종일관 그러했다.

'그저 로이드 님이 감정 해소를 위한 분풀이를 하러 왔다고만 생각했어, 나는.'

그래서 말렸다.

이건 냉철하지 못한 행동이라고.

감정에 휘둘려 분쟁을 더 만드는 꼴이라고.

로이드를 한사코 말렸던가, 자신은.

'그런데 내가 틀렸던 거였어.'

하비엘은 순순히 인정했다.

이 정도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모시는 저 도련님은 정말이지....

'철저하도록 완벽하게 치사해. 그동안 얄미웠던 자작이 불쌍하게 느껴질 정도야.'

솔직한 그의 감상이었다.

로이드도 대단했지만, 그만큼 자작이 불쌍했다.

사실 그의 라코나 자작에 대한 감정은 별로 곱지 못했다.

자신의 주군인 남작을 핍박한 자였다.

그런데도 지금은 그런 자작이 불쌍하게 느껴졌다.

아니, 저렇게 세상 측은하고 안타깝고 가련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실제로도 하비엘이 지켜보는 동안, 자작은 손끝은 물론이고 입술과 눈썹마저 바르르 떨어대고 있었다.

개미지옥에 빠진 개미가 된 심정.

그러한 막막함을 절감하고 있는 까닭이었다.

'틀렸다. 이건, 빠져나갈 방법이 없어.'

설마 이렇게 철저한 놈이었을 줄이야.

이런 방식으로 자신을 압박할 줄이야.

꿈에서조차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이런 방법이 있을 거라는 상상도 못 해본 그였다.

상수도라니.

먼 곳의 맑은 물을 끌어온다니.

그런 걸 만들면서 염료 공방에 공급해 줄 물의 양까지 미리 계산해뒀다니.

'처음부터 날 말려 죽이려고 제대로 작정했던 거야, 저놈은.'

자작의 눈길이 로이드를 향했다.

여전히 이쪽을 보며 빙글거리는 젊은 놈.

이제 더는 애송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볼수록 소름이 오싹 돋았다.

'내가 왜 저런 놈을 건드려서는.'

할 수만 있다면 두세 달 전으로 시간을 돌리고 싶었다.

염료 공방 감독관을 불러 폐수를 강물에 방류하라는 명령을 내렸던 자신의 뺨이라도 후려갈기고 싶어졌다.

하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시간을 되돌릴 방법은 없다.

염료 공방을 되살릴 방법도 하나밖에 없다.

"...후우. 알겠네."

결국, 라코나 자작은 침통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로이드의 한쪽 입술이 말려 올라갔다.

"알겠다는 말씀은?"

"자네의 제안, 받아들이겠네."

"염료 공방에 상수도를 설치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네."

"잘 생각하셨습니다."

팔랑!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로이드가 움직였다.

품속에서 돌돌 말린 서류를 꺼냈다.

테이블 위에 촥 펼쳤다.

자작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건 뭔가?"

"뭐긴요. 상수도 공급 계약서입니다."

"...."

자작은 할 말을 잃었다.

진심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싶었다.

다시금 실감이 제대로 피부까지 확 왔다.

아예 계약서까지 미리 꼼꼼하게 만들어 왔다니.

저놈, 진짜로 이쪽의 뼛속까지 모조리 긁고 빨아 먹으려고 본격적으로 작정한 놈이었구나, 싶었다.

'크으....'

자작의 침통한 눈동자가 움직였다.

마치 패전 선언문을 읽어내리듯, 계약서를 살폈다.

그러던 도중 자작의 눈동자가 다시 한 번 크게 흔들렸다.

"이, 이건 뭔가?"

"어떤 것 말입니까?"

"여기, 이거 말일세."

자작이 당혹스러운 손길로 계약서를 짚었다.

그가 짚은 곳에는 매달마다 자작이 프론테라 가문에게 납부해야 할 수도세가 적혀 있었다.

"이거, 혹시 숫자가 틀린 것 아닌가?"

"왜요? 혹시 0이 한두 개쯤 더 붙은 것 같습니까?"

"그렇네. 아무래도 착오가 있어서 잘못 쓴 것 같...."

"제대로 쓰인 것 맞습니다."

"...."

"계약서의 금액, 맞습니다."

"무슨...."

"혹시 비싸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야 당연히...."

자작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계약서를 다시금 들여다보았다.

수도세라는 항목에 말도 안 되는 금액이 쓰여 있었다.

'그냥 물일 뿐인데.'

물에 가격을 매긴다는 것도 기절초풍할 일이었다.

한데 저 금액은 그렇듯 기절한 그의 뺨을 왕복으로 삼천 대쯤 추가해서 후려칠 만큼 비현실적이었다.

그런 자작을 향해 로이드의 핀잔이 날아왔다.

참으로 한심하다는 표정과 함께.

"참나. 물이 공짜로 느껴지십니까, 아직도?"

"...."

"그냥 막 강줄기 따라서 흘러내려 오니까 펑펑 써도 되는 건 줄 아셨지요? 그런데 어떡합니까. 그 강줄기 물의 소중함을 우리 영지민들에게 먼저 알려주신 분이 바로 그쪽이신데."

"...."

자신이 저지른 독성 폐수 방류 사건.

그걸 떠올리며 자작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로이드의 말이 이어졌다.

"덕분에 우리 영지 식구들은 모두 뼈저리게 깨달았지요. 물이 공짜가 아니구나. 언제든 작살날 수 있는 자원이구나. 때론 큰 대가를 치러야 얻을 수 있는 것이었구나, 하고 말입니다."

사실이었다.

그저 맑은 물 한 모금.

안심하고 마실 수 있을 물 한 잔.

그걸 얻기 위해 영지민 대부분이 소매를 걷고 나서야 했다.

임시 저수지를 만들기 위해 어린아이까지 돌멩이를 옮겨야 했다. 온돌 공사마저 전면 중단하고 공병대원 전원이 동부산맥을 올라야 했다.

수없이 거대 대나무를 자르고, 삽질을 하고, 수도교를 쌓아올리며 땀 흘려야 했던 시간이었다.

그런 과정이 있고서야 남작령의 주민들은 비로소 맑은 물을 되찾을 수 있었다.

때로는 물이 공짜가 아닐 수도 있다는 뼈아픈 교훈.

이제는 자작에게 그 교훈을 돌려줄 때였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저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어째서 이걸 비싸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생각을 해보십시오. 여기까지 맑은 물을 끌어오는 데 들어갈 노력은 생각 안 하십니까?"

"...."

"수도관을 설계하고 설치하는 게 그냥 뚝딱 되는 일입니까? 엄연히 막대한 기술력과 노동력이 들어가는 일입니다. 그리고 설치만 하면 끝입니까? 관리는 안 합니까? 게다가 그 관리를 누가 합니까?"

"그야 물론...."

"네. 제가 하지요. 우리 프론테라 가문이 하지요. 배관이 새는 곳은 없는지 항상 살펴야죠. 취수장의 부유물이나 토사 관리도 해야죠. 때때로 낡은 배관도 갈아줘야 합니다. 그게 애들 장난처럼 느껴지십니까? 이래도 수도세가 비싸다는 말이 나옵니까?"

"그, 그건...."

"싫으면 마십시오, 그럼."

팔랑.

테이블 위에 펼쳐져 있던 계약서가 모습을 감추었다.

정확히는 로이드의 손에 순식간에 돌돌 말렸다.

그의 품속으로 되돌아가려 하고 있었다.

자작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자, 잠깐만!"

덥석!

저도 모르게 자작이 손을 뻗었다.

계약서를 품으로 가져가던 로이드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러고 나서야 자작은 자신의 다급했던 행동을 깨달았다.

"아, 하하하."

자작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 자작을 향해 로이드가 상큼하게 미소 지었다.

"생각이 좀 바뀌셨습니까?"

"그, 그런 것 같네."

"좋습니다. 현명하시군요."

촤락!

돌돌 말렸던 계약서가 다시 테이블 위로 돌아왔다.

로이드가 말했다.

"긴말은 않겠습니다. 두 장 모두 똑같이, 여기, 여기, 그리고 여기. 서명하시지요."

"...."

자작이 펜을 들었다.

잉크를 찍는 얼굴 가득 침통함이 배었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로 다른 방법이 없음을 자작은 너무나 절절히 절감하고 있었다.

"후우."

긴 한숨과 함께 서명이 이어졌다.

그렇게 서명이 이어지는 동안 로이드의 광대도 슬그머니 승천했다.

'됐다. 이로써 사채꾼들에게 내던 이자로부터 완전 해방이야.'

그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남작가문이 사채꾼들에게 진 빚을 떠올렸다.

매달마다 내야 했던 막대한 이자를 곱씹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그 이자 걱정이 끝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 자작에게 내민 계약서.

그렇게 매달 받게 될 수도세.

그 수도세 금액이 사채꾼에게 내는 이자와 같았기 때문이었다.

즉, 앞으로는 자작이 남작가의 이자를 대신 내주는 셈이 되리라.

이자 걱정 제로의 미래.

앞으로는 차곡차곡 모으는 돈을 고스란히 빚 갚는 데 쓸 수 있게 되었다!

'사실은 그냥 자작령의 염료 공방 자체를 꿀꺽해 버리고 싶었지만.'

혹은 그 기술을 넘기라고 하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로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자작이 그 제안은 죽어도 수락하지 않았을 거야.'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수락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더 큰 반발을 부를 수도 있었다.

'최악의 경우엔 자작이 귀족 법원이 아니라 국왕에게 직접 탄원서를 보낼 수도 있고.'

강물의 성분을 바꾸어 특산품을 망쳤다.

그걸 되살리게 해주는 대신 수도세 정도를 원하는 것과, 염료 공방 자체를 내놓으라는 건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전자가 거래의 선으로 볼 수 있는 행위라면.

후자는 명백한 협박의 범주로 볼 수 있으리라.

'괜히 너무 큰 떡을 삼키려다가 구설수에 휘말리고, 국왕한테 찍히면 크게 손해를 볼 수도 있어. 이 정도까지만 이득을 보는 게 정치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딱 좋아. 어차피 자작령과도 계속 이웃으로 지내야 하니까.'

현실은 삼국지 게임 같은 땅따먹기가 아니다.

매달 막대한 수도세를 받는 것.

그렇게 엑스트라 라지 사이즈의 빨대를 꽂아서 두고두고 돈을 빨아먹는 것.

그 정도까지가 딱 로이드가 생각하는 가장 현명한 현실적 이득의 최대치, 마지노선이었다.

"후우. 여기도 서명하면 되는가?"

어느새 자작의 서명이 마무리되고 있었다.

자작이 가리키는 곳.

마지막 한 군데에만 서명을 하면 계약이 완료되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로이드가 대답하려는 순간이었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주군!"

콰앙!

접견실 문이 부서지듯 거칠게 열렸다.

열린 문을 통해 다부진 인상의 사내가 뛰쳐 들어왔다.

그리고 외쳤다.

"저따위 비겁한 놈에게 수도세 같은 거, 주시면 안 됩니다! 그러니 제발 그 부당한 계약서의 서명을 멈추시고 저 무도하기 짝이 없는 놈을 쫓아내십시오, 주군!"

검은 수염 사이로 외치는 절절한 성토.

크지는 않지만 다부진 체격.

자작령의 선임 기사, 크루노 경이었다.

그가 이쪽을 가리키며 엄정하게 외쳤다.

"로이드 프론테라! 감히 이렇듯 내 주군을 능멸하고도 당신이 무사할 줄 아는가!"

말 그대로 갑작스러운 난입이었다.

다 성사되어 가던 계약에 태클을 거는 행위였다.

그래서였다.

로이드는 쿠르노 경을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방금 쿠르노 경이 외친 말에 성심껏 대답해주었다.

"응."

동시에 그는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저놈도 전부터 은근 거슬렸다고.

그랬는데 자신답게 않게 저놈을 깜빡하고 있었다고.

'그런데 자길 손봐달라고 이렇게 알아서 찾아와서 힘껏 어필까지 해주니까 얼마나 예뻐.'

쿠르노 경을 바라보는 로이드의 미소가 더욱 보람차고도 흐뭇해졌다.

59화. 악마의 계약서 (4)

'어쩌면 마침 이렇게 딱 알뜰살뜰 타이밍 맞춰서 찾아와 주냐. 어유, 예뻐 죽겠네, 진짜.'

로이드의 미소가 흐뭇해졌다.

때마침 접견실로 뛰쳐 들어온 쿠르노 경.

그렇게 자작의 계약서 서명을 중단시킨 쿠르노 경.

그런 쿠르노 경의 행동 덕분에 로이드는 깜빡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전부터 저놈도 은근 거슬렸지.'

처음 만났을 때부터였던가.

마레즈 개간지의 공사가 한창이던 때.

자작을 모시고 와서 버릇없이 굴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다음엔 또 어떠하였던가.

독성 폐수를 빌미로 했던 자작의 협박을 남작에게 전한 것도 저놈이었다.

이웃 영지의 영주를 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없을 싹수없는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로이드는 그런 것들을 하나도 잊지 않았다.

언제나 꼭꼭 가슴에 품고 다녔다.

'당연하지. 원한을 왜 잊어?'

은혜는 적당히 굵직한 것만.

원한은 먼지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야물딱지게 챙기기.

그것이 로이드가 추구하는 인생 모토였다.

한데 이렇듯 때마침 눈에 거슬렸던 쿠르노 경이 알아서 찾아와주었다. 내심 불쾌했던 지난 감정을 알뜰살뜰 꼼꼼하게 되새길 계기까지 주었다.

반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여어."

쿠르노 경을 향해 반갑게 웃었다.

손까지 흔들어 주었다.

"이게 어쩐 일이셔? 혹시 계약 증인이라도 돼주려고 오셨나?"

"그럴 리가."

쿠르노 경이 짓씹듯 대꾸했다.

로이드를 향한 그의 눈길이 준엄해졌다.

"문밖에서 모두 들었소. 로이드 프론테라, 당신이 내 주군을 능멸하는 작태를 말이오."

"엿들었다고?"

"들렸소."

"그게 엿들었단 거잖아."

"...."

"어쨌건, 내가 여기 와서 했던 행동이 댁의 주군을 능멸한 거라고?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당연하오."

쿠르노 경의 콧등에 거친 주름이 잡혔다.

"당신은 우리 영지의 가장 큰 수입원이자 귀중한 특산품인 라코나타 옷감을 볼모로 잡아 내 주군을 협박했소.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부당한 내용의 계약서를 들이밀었소. 이것이 능멸이 아니면 무엇이겠소."

"능멸이 아니면, 으음, 협박이라고 불러야 하나? 저번에 댁들이 했던 것 같은?"

로이드의 시선이 슬쩍 자작을 향했다.

자작이 움찔했다.

로이드의 입가에 조소가 피어났다.

"이게 능멸인 거였어? 몰랐네. 난 그냥 지난번에 댁들이 우리 남작님께 했던 일을 그대로 따라 한 건데. 이러면 안 되는 거였나?"

"그 무슨...."

"댁들도 우리 영지의 가장 큰 생명줄이자 귀중한 식수원인 강물을 볼모로 잡아서 남작님에게 이런 식으로 행동했었잖아. 마레즈 개간지 절반을 내놓으라며. 그게 협상 내용이라며."

"...."

"참 감명 깊더라고. 이야, 협상은 이렇게 하는 거구나! 이게 사람 사는 지혜구나! 그래, 이웃 간의 따뜻하고 정이 넘치는 거래라는 건 역시나 이런 거였어! 하고 말이지."

"...."

"그래서 똑같이 따라 하는 중이야."

"...."

"왜? 그러면 안 돼?"

로이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내 말문이 막혀 있던 쿠르노 경이 이를 갈았다.

'대체 무슨 말을....'

저렇게 막힘없이 술술 해대는 걸까.

저절로 대답이 궁해지는 쿠르노 경이었다.

물론 그도 사실은 알고 있었다.

자작이 남작령에 한 행위는 명백히 협박이었다. 확실히 과한 면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자작님은 내 주군이시다. 내가 평생 충성을 바치기로 맹세한 분이야. 그러니 나는 자작님의 도덕적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는다. 그저 충실한 검이 되어 주군을 보좌할 뿐!'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로이드 프론테라.

저놈은 지금 자작을 협박하고 있었다.

자신의 주군에게 일방적인 손해를 강요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이쪽이 남작령을 협박했던 일 따위는 그에겐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주군이 누릴 이득과 권리.

오직 그것만이 그의 정의였다.

'그러니 막아야 한다. 저 부당한 계약은 기필코 저지해야 해.'

접견실 문밖에서 모든 대화를 들은 쿠르노 경이었다.

로이드가 어떤 계략으로 자작을 농락했는지.

그 끝에 어떤 교묘한 계약서를 들이밀었는지.

저 상수도 요금이 얼마나 악랄한 것인지까지.

모두 듣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절감했다.

'저건 무조건 막아야 해.'

저 계약서는 프론테라 남작령이 자작령에 꽂는 뾰족하고도 거대한 빨대였다.

심지어 한 번 꽂히면 좀처럼 뺄 수도 없을 빨대였다.

즉, 자작령은 앞으로 남작령에 경제적으로 종속되리라.

특산품인 라코나타로 벌어들이는 수익의 상당 부분을 지속적으로 빼앗기게 되리라.

'게다가 그걸로 끝이 아니야.'

남작령이 공급하는 상수도의 물.

그것이 없으면 라코나타를 생산할 수 없게 된다.

즉, 이후에 남작령에서 일방적으로 수도세를 인상하는 일이 생겨도 반항조차 못하고 그 결정을 따라야 할 것이란 뜻이었다.

특산품인 라코나타가 오히려 볼모, 인질이 되는 셈이다.

그래서였다.

자작이 서명을 한다는 걸 깨달은 순간, 접견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나중에 주군에게 문책을 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혹은 더 엄한 벌을 받게 된다 하더라도.

무리를 해서라도 서명만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 쿠르노 경은 더욱 깊은 번민에 빠져들었다.

'말로는 도저히 저놈을 이길 수가 없어.'

애초에 그는 말싸움에 능한 능변가가 아니었다.

단순한 무인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논쟁에서 이기고 싶었다.

어떻게 해서건 로이드 프론테라를 물러나게 하고 싶었다.

오직 그것만이 주군을 위한 길이라 생각하며, 로이드에게 대적할 방법을 궁리했다.

그리고 문득, 떠올렸다.

'내게 어울리는 방법으로.'

자신은 무인이었다.

말보다 검으로 싸우는 자였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로이드 프론테라."

쿠르노 경이 고개를 들었다.

로이드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나 바고 쿠르노의 아들, 루그노 쿠르노가 그대 프론테라 가문의 후계자인 로이드 프론테라에게 정식으로 결투를 신청하는 바요."

당당하게 말했다.

그 순간 접견실이 싹 조용해졌다.

자신의 기사를 어떻게 말려야 하나 전전긍긍하던 자작도.

로이드의 곁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하비엘도.

쿠르노 경과 마주 서 있던 로이드도.

모두 입을 꾹 닫게 되었다.

자작은 경악한 표정으로.

하비엘은 흥미로운 눈길로.

로이드는 한쪽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모두가 쿠르노 경을 쳐다보게 되었다.

'됐다.'

쿠르노 경이 희미하게 웃었다.

결투 신청.

이것이 그가 떠올린, 지금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카드였다.

나름 가장 확실하게 여겨지는 카드이기도 했다.

'당연하지. 저놈은 귀족이니까.'

결투를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쿠르노 경은 확신했다.

걸어오는 결투를 회피하는 것.

그것은 귀족 남성에게 가장 큰 치욕 중에 하나였다.

자신이 겁쟁이에 비겁자라는 걸 만방에 알리는 수치스러운 행위였다.

쿠르노 경은 로이드도 똑같을 것이라 생각했다.

'귀족으로서의 체면이 있으니까. 수락하겠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거야. 게다가 들려오는 소문에 따르면 네놈은 일전에 결투로 노이만 경을 꺾었다지?'

문득 그 소문이 떠올랐다.

처음엔 그 소식에 얼마나 놀랐던지.

'비록 나보다 수준이 떨어지긴 했지만 노이만 경도 만만치는 않은 자였지. 그런 그를 꺾었다고 하니 나름 자신감도 충만할 터. 그러면 이 결투 신청을 거절할 가능성은 더욱 없겠지.'

아니, 설령 자신이 없다고 해도 받아들일 것이다.

대신 옆에 서 있는 저 은발의 어린 기사를 대리인으로 내세우겠지.

쿠르노 경은 그렇게 예상했다.

그리고 계획했다.

이번 결투에서 자신이 이기면 저 악독한 로이드 놈의 계약 제안을 무효로 돌릴 것을 요구하겠노라고.

'그러니까 내 결투 신청을 어서...."

"응. 싫어."

로이드의 대답이 상큼하게 울렸다.

쿠르노 경의 달팽이관을 톡톡 두드렸다.

덕분에 쿠르노 경은 저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를 내고 말았다.

"어?"

"못 들었나? 싫다고."

"무슨...."

눈이 휘둥그레지는 쿠르노 경.

그런 경을 향해 로이드가 비웃음을 머금었다.

"하나 묻자. 내가 왜 댁의 결투 신청을 받아줘야 해?"

"그건 당연히...."

"귀족의 명예를 지키는 길이니까? 바보 아냐?"

"...."

"이 판국에 결투를 왜 하냐, 내가."

"하, 하지만 결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당신은...."

"겁쟁이에 비겁자로 취급받을 거라고? 응, 알았어. 나 겁쟁이에 비겁자 할게."

"뭐요?"

"못 들었어? 겁쟁이에 비겁자 한다고."

"...."

"어우야, 무서워라. 이 동네 왜 이러냐. 상호 건설적인 계약 좀 해보려고 했더니 문 박차고 들어와서 칼부림하자고 덤비는 거 보소."

"후우, 이보시오! 로이드 프론테라!"

"응, 왜?"

"당장 결투를 받아들이시오!"

"싫다니깐?"

"하지만!"

"하지만 뭐?"

"...."

"그렇게 나랑 싸우고 싶어? 왜 그렇게 나한테 질척질척 매달리냐? 혹시 집착증 있냐?"

"그야 당연히...."

"남한테 그렇게 의지하면서 살지 좀 말자, 응? 부처님도 말씀하셨잖아. 오직 자신만을 등불로 삼으라고. 그러니까 니 알아서 하라고."

"그런 말은 한 번도...."

"좀 듣고 살아라. 이러니까 어릴 때 공부를 해야 한다는 거예요. 청소년기에 읽은 책에서 습득한 지식과 상식이 평생 간다는 말, 몰라?"

"...."

"하여간 칼부림만 할 줄 알지, 아는 게 없어. 쯧."

"저기, 나는...."

"그러니까 이제 좀 꺼져줄래? 아직도 파악이 잘 안 되는 것 같아서 알려주는 건데, 나 지금 댁 주인이랑 사업 얘기하는 중이거든. 근데 지금 댁 때문에 댁네 주인이 곤란해졌어요. 어째서? 이대로 계약 마무리를 못 하면 잘난 라코나타 염료 공방, 평생 문 닫아야 할 거거든."

"...."

"그래서 댁이 이렇게 뻗대고 있을수록 댁의 주인이 불행해져요. 댁이 알진 모르겠는데 바비 맥퍼린이라는 양반이 그랬지. 돈 워리, 비 해피(don't worry, be happy)라고. 무슨 뜻인지 알아?"

"모르겠...."

"돈 걱정 때문에 불행하다는 뜻이야."

"...."

"지금 댁이 이럴수록 댁네 주인이 그렇게 된다니깐?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돼?"

쿠르노 경의 말문이 완전히 닫혔다.

로이드의 비웃음이 짙어졌다.

그렇게 쿠르노 경을 제압한 그는 다시 자작을 돌아보았다.

한쪽으로 고개를 까딱, 기울이며 물었다.

"혹시 방금 자작님의 부하가 벌였던 행동에서 일말의 희망, 뭐, 그런 걸 느낀 건 아니시겠지요?"

"...."

"행여나 제가 결투를 받아들일 줄 아셨다면 그 희망, 버리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자고로 쓸데없는 희망은 일찍 버릴수록 정신건강에 유익한 법이거든요. 그럼 우리, 나누고 있던 사업 이야기나 마저 할까요?"

자리에 앉았다.

손을 뻗었다.

톡톡.

검지로 테이블 위의 계약서를 톡톡 두드렸다.

그가 두드리며 짚은 자리.

그곳에 마지막 서명란이 있었다.

쿠르노 경의 난입 때문에 자작이 서명을 멈추었던 자리였다.

"자, 하시죠."

마치 승전 조약서에 서명을 강요하듯.

로이드가 은근한 말투로 빙그레 웃었다.

자작이 침통한 표정으로 펜을 집어들었다.

서명란을 향하는 그의 펜대가 바르르 떨렸다.

어쩌면 그래서였을 것이다.

졸지에 공기 취급을 받게 된 쿠르노 경이 선을 넘기로 결심한 것은.

주군의 서명을 막기 위해 더 큰 무리수를 작심한 것은.

'감히!'

자신의 주군을 능멸하고 있는 자.

결코 온전히 내버려두지 않으리라.

'설령 내 직위가 날아간다 하더라도!'

까드득!

이를 갈았다.

로이드를 노려보았다.

옆 영지의 망나니로 소문났던 도련님.

지금은 자신의 주군에게 부당한 계약을 강요하느라 등을 보이고서 무방비하게 앉아 있는 자.

'지금이라면!'

저놈도 대처하지 못하리라.

쿠르노 경의 눈길에 사나운 기세가 배어났다.

덥썩!

그의 오른손이 움직였다.

허리에 차고 있던 장검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순식간에 미묘하게 몸을 낮추었다.

무게중심이 아래로 가라앉았다.

동시에 허리를 틀었다.

복근과 옆쪽 외복사근.

가슴과 어깨, 팔뚝까지.

모든 상체의 근육이 순간적으로 오른쪽으로 비틀렸다.

자연히 왼쪽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검집에서 장검이 쑥 뽑혀 나왔다.

스르릉!

단순히 팔 힘으로 뽑는 발검이 아니었다.

탄탄한 하체를 기반으로 하여 상반신 전체로 뽑는 검이었다.

그만큼 빛살과도 같이 엄청난 속도를 자랑했다.

슈악!

장검이 뽑힌다 싶은 순간 이미 뻗어 나갔다.

검날이 섬뜩한 선을 그리며 번득였다.

그 번득임의 끝은 로이드의 등을 향하고 있었다.

'죽지 않을 만큼만!'

베리라.

며칠은 족히 눈을 뜨지 못하도록.

몇 달은 넉넉히 병상 신세가 되도록.

유혈사태를 일으켜 시간을 끌어보리라.

그리하여서라도 저 서명만은 기필코 막아내리라.

그렇게 각오한 쿠르노 경의 검이 그 어느 때보다도 살벌하게 공기를 갈랐다.

그리고 마침내 로이드의 등을 베기 직전.

그의 검날이 두 동강으로 잘렸다.

쓰칵! 핑! 타악!

"...!"

쿠르노 경은 눈을 부릅떴다.

찰나의 틈새.

그는 제대로 대응할 수도 없었다.

별안간 옆에서 질풍 같은 검광이 번득였다.

그의 검날을 단숨에 잘라 버렸다.

잘린 검날이 회전하며 날아왔다.

그의 볼을 스쳐 지나갔다.

등 뒤쪽 벽에 박혔다.

동시에 검을 갈무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냉랭한 경고의 한마디와 함께였다.

"다음은 목이 될 것이다."

철컥.

언제 그랬냐는 듯 차분하게 검을 갈무리하는 하비엘.

그제야 쿠르노 경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간신히 깨달았다.

단숨에 잘린 자신의 검.

볼에 새겨진 상처.

벽에 박힌 검 조각.

쿠르노 경은 본능적인 오싹함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의 바지가 축축하게 젖었다.

60화. 악마의 계약서 (5)

자작은 서명을 마쳤다.

서명은 신속했다.

두 번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펜을 일필휘지로 놀렸다.

자작의 입장에서는 그럴 법도 했다.

마지막 희망마저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쿠르노 경이랬나. 그 작자가 접견실에 들어와 진상을 부리는 내내 굳이 말리지 않고 눈치를 살핀 것만 봐도 그렇지. 너무 속이 뻔히 보였어."

자작령을 출발해 남작령으로 돌아가는 길.

말안장 뒷자리에서 로이드가 말했다.

앞자리의 하비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눈에도 그렇게 보였습니다."

확실히 그랬다.

접견실에 뛰어들어온 쿠르노 경.

뛰어드는 거야 막을 겨를이 없긴 했다.

그래도 그 이후로는 자작이 충분히 제지할 수 있었다.

호통을 친다든가, 나직하게 꾸짖는다든가 하는 식으로 얼마든지 자신의 선임 기사를 단속할 수 있었을 터다.

하지만 자작은 그러지 않았다.

"아마도 자신의 기사가 뭔가 변수를 만들어주길 기대한 거겠지. 그게 마지막으로 걸고 있는 희망이었을 거고. 네가 그걸 잘라 버린 거야."

"역시, 그랬던 거로군요."

"어. 그래서 새로운 칭호가 생긴 기분은 어때?"

"새로운 칭호라니요?"

"오줌싸개 메이커."

"...."

"맞잖아. 네가 검을 팍 휘두르고, 어? 쿠르노 경 검이 팍 잘리고, 어? 그래서 쿠르노 경이 옴마야, 하면서 바짓단을 적셔 버리고, 응?"

"...."

"어쨌건 그 흑역사 덕분에 쿠르노 경은 당분간 고개도 못 들고 다니겠네. 밤마다 이불 걷어차겠네. 나라면 오늘 밤에 당장 짐 싸고 다른 영지로 이사 갈 거야. 아니, 아예 알아보는 사람 아무도 없게 다른 대륙으로 건너갈지도. 어쨌건 잘했어. 멋져."

"그저 남의 등을 치려는 비겁한 행위를 중단시켰을 뿐입니다."

"과연! 역시 오줌싸개 메이커."

"...."

"왜? 마음에 안 들어?"

"굳이 대답할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내심 좋아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되는 거냐, 그럼?"

"절대로, 싫습니다."

탁, 타악!

하비엘이 애꿎은 말고삐를 세게 잡아챘다.

로이드의 입가에 짓궂은 웃음이 피어났다.

"어쨌건 덕분에 네 검술 실력이 만방에 다 퍼지게 생겼네."

사실이었다.

하비엘이 쿠르노 경의 검을 잘랐다.

검을 검으로 일도양단하는 것.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대놓고 모루 위에 검을 얹어놓고서 작정하고 내리쳐도 될까 말까 한 일이었다.

게다가 쿠르노 경이 어떤 기사인가.

나름 자작령의 선임 기사였다.

검술 실력도 썩 준수하다는 정평이 나 있는 자였다.

"소문에 의하면 쿠르노 경의 수준은 소드 익스퍼트 중급을 넘보고 있다던데. 어때? 직접 검을 부딪쳐본 사람의 느낌은?"

"오히려 소문보다 나았습니다. 확실하게 소드 익스퍼트 중급까지 오른 자의 검이었습니다."

"그런 자의 검을 일도양단한 거야, 네가."

"그렇습니까."

"어. 덕분에 자작령은 물론이고 이 인근 지방에 소문이 쫙 퍼지겠지."

"어떤 소문이 나게 될까요."

"아마도 이런 내용이지 않을까. 동부 구석 프론테라 남작령의 막내 기사 하비엘 아스라한, 이웃 영지 소트 익스퍼트 중급의 기사를 일검에 제압하다."

"소드 익스퍼트 상급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겠군요."

"그렇겠지."

아마도 그럴 것이다.

상대 기사의 검을 자르는 것.

그것은 최소 한 단계 이상의 실력 차이가 나야 가능한 일이니까.

즉, 앞으로 프론테라 남작령은 소드 익스퍼트 상급의 기사를 보유한 영지로 알려지게 되는 셈이다.

"덕분에 장점도, 단점도 다 있을 거야."

"장단점이라 하심은?"

"우선 우리 영지를 얕보는 사람이 줄어들겠지. 치명적이고 무시무시한 무기를 보유하게 된 셈이니까."

"그럼 단점은 무엇입니까."

"너."

"...예?"

"아마 널 많이들 노릴 거다."

"절 노린다니, 대체 누가 말입니까."

"누구긴. 주위의 수많은 영주, 대상인, 기타 등등이지."

"설마 저를 영입하려 들 거란 뜻이십니까?"

"당연하지."

로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봐. 소드 익스퍼트 상급이야. 게다가 걔가 이제 겨우 솜털만 간신히 벗은 스무 살이라네? 네가 잘나가는 영주나 상인이라면 그 소식을 듣고 무슨 생각을 하겠냐?"

"...심복으로 삼고 싶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예."

"맞아. 심복으로 삼으려 들겠지. 키우려고 돈도 쏟아부을 거고. 왜냐. 이제 겨우 스무 살이니까. 진짜로 딱 10년 정도만 정성껏 투자해서 키우면 겨우 서른 살 언저리의 소드 마스터를 얻을 수도 있을 테니까."

서른 살의 소드 마스터.

엄청난 이야기였다.

어지간한 소드 마스터가 모두 40대 이상인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말 그대로 스무 살의 관우나 조자룡, 혹은 마이클 조던, 호날두, 메시를 거느리게 되는 기분이랄까.'

얻기만 한다면?

당대는 물론이고 후대의 주군까지 2대쯤은 충분히 모실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영주들.

유력 상인들.

어쩌면 이 나라의 왕까지.

그들이 이런 탐스러운 떡을 그냥 둘 리는 없으리라.

"아마도 한바탕 홍역을 치러야 할지도 몰라."

로이드가 앞자리 하비엘을 보았다.

뒤통수만 보이는 녀석.

그래서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느낄 수 있었다.

"홍역이라. 상관없습니다. 저는 다른 주군을 모실 생각이 없으니까요."

그래, 역시 하비엘은 이런 녀석이다.

원작 철혈의 기사에서도 그랬으니까.

주위의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소설 속 프론테라 남작이 몰락하던 시기에도 그랬다.

완전히 망해가는 영지 따위,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버리고 떠날 수 있었다.

더 권력 있고 유망한 주군을 섬기며 편안한 길을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비엘은 그러지 않았다.

남작이 죽을 때까지.

아니, 죽은 이후에도.

끝까지 다른 주군을 섬기지 않았다.

이후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고서도 그러했다.

강력한 대공과 왕, 황제의 제의마저 단호히 뿌리쳤다.

자신의 평생 주군은 오로지 프론테라 남작뿐이라는 위엄 쩔던 대사와 함께였다.

'하여간 엄청난 놈.'

사실 그렇게 살기가 쉽지 않은데.

아니, 현실적으로 그냥 불가능한 일인데.

그걸 고집스럽게 평생 지킨 녀석이 바로 앞자리에 앉아 있는 하비엘이었다.

'그러니 녀석이 다른 주인을 찾아갈 걱정은 안 해도 될 거고.'

대신 하비엘을 향한 영입 경쟁.

그 서슬에 남작령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대비해야 하리라.

그렇게 앞으로의 일을 계획에 새기던 로이드는 문득, 피식 웃었다.

소설 철혈의 기사에서 프론테라 남작에게 충성을 지킨 또 한 명의 기사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참, 혹시 바이에른 경은 너한테 뭐라고 안 하냐?"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무슨 말씀이긴. 공사할 때마다 네가 펑펑 써댄 발파 얘기지."

"아."

무슨 얘기인지 알겠다는 듯 하비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잖아도 바이에른 경이 제 발파를 보더니 한마디 하긴 했습니다."

"뭐라디?"

"훌륭하다더군요."

"그게 끝이야?"

"예."

"자기도 배우고 싶다거나, 네 검술 실력을 확인해보고 싶다거나, 뭐 그런 반응은 없었어?"

"아, 부럽다는 이야기는 한 번 했습니다. 그게 다입니다."

"바이에른 경답네."

확실히 소설 그대로구나.

로이드는 철혈의 기사에서 몇 번 언급되었던 내용을 떠올렸다.

바이에른 경에 대한 묘사였다.

'재능은 평범하지만 우직하고 공정하며 탐욕 없는 담백한 성격이라 했지.'

역시나 그런 성격답게 어린 하비엘의 실력이 자신을 추월했음에도 별다른 시샘을 느끼지 않는 듯했다.

아니, 오히려 반기는 듯했다.

'하비엘이 강해지는 만큼 영지에 보탬이 된다고 여기고 있겠지.'

개인의 경쟁심보다는 영지의 발전과 이득을 먼저 생각하는 성격.

확실히 공병대의 관리를 맡기길 참 잘했구나 싶었다.

동시에 바이에른 경의 실력도 슬슬 키워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음?"

"아까는 왜 그러셨던 겁니까."

하비엘의 날카로운 물음이 이쪽의 상념을 파고들어 왔다.

로이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라니? 뭐가?"

"쿠르노 경의 결투 신청 말입니다."

약간은 까칠해진 하비엘의 목소리.

마치 실수를 지적하듯 녀석이 말했다.

"다소 경솔하셨습니다."

"설마 결투 신청을 거절해서?"

"그냥 거절만 하실 것이 아니라 거절하는 확실한 명분을 대셨어야 한다고 봅니다."

하비엘의 말이 이어졌다.

"명분 없이 결투를 거절하면 구설수에 오르게 되십니다. 물론 로이드 님이 그런 구설수에 신경을 쓰지 않는 분이라는 점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로이드 님은 단순한 개인이 아니십니다. 명백히 프론테라 가문의 일원이며, 따라서...."

"아무렇게나 성의 없이 결투를 거절하거나 하면 영지와 남작님의 명성에 누가 된다는 거지?"

"...예."

앞자리의 하비엘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녀석의 말이 이어졌다.

"아마도 줄리앙 님이셨으면 보다 세련된 대처를 하셨을 겁니다."

"줄리앙?"

"예."

"쯧, 여기서 걔 얘기가 왜 나오냐."

로이드는 피식 웃고 말았다.

문득, 소설 철혈의 기사 속의 또 다른 인물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줄리앙. 바로 로이드의 동생이지.'

줄리앙 프론테라.

로이드의 다섯 살 아래 동생이자 남작가의 차남.

술주정뱅이 로이드와는 달리 성실하고 인자한 성격이었다.

마치 남작과 남작 부인의 장점만을 합친 듯한 녀석이었다.

'덕분에 남작의 큰 기대를 받으며 유학을 가 있는 상태지. 수도의 아카데미에.'

그리고 소설 철혈의 기사에서는 비참한 끝을 맞이한다.

학비를 댈 수 없어 아카데미에서 쫓겨난다.

그날 저녁, 운 나쁘게도 수도 뒷골목에서 강도를 만난다.

강도가 요구하는 물품을 내놓기를 거부한다.

어머니인 남작 부인에게 받은 낡은 펜던트.

그걸 지키려다가 칼에 찔린다.

지나가는 이 하나 없는 어둑한 골목길에서 그렇게 어이없고도 허망한 죽음을 맞는 것.

그것이 원작 소설에서 줄리앙 프론테라가 맞이한 운명이었다.

'물론 이제는 좀 다르겠지만.'

남작가가 몰락을 면했으니 줄리앙도 아카데미에서 쫓겨나지 않을 것이다.

소설에서처럼 뒷골목을 전전하다가 강도를 만날 일도 없으리라.

하지만 로이드의 그런 상념과 상관없이, 하비엘의 잔소리 폭격기는 계속해서 광범위한 팩트 투하를 감행하고 있었다.

"...러니 로이드 님도 동생이신 줄리앙 님처럼 조금 더 스스로에 대해 성숙한 자각을 지니셔야 합니다. 로이드 님의 모든 행동과 말은 로이드 님만의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행위에 프론테라 가문의 명예와 명망이 걸려 있다는 책임감을 지니셔야 합니다."

"어, 응."

"물론 이번에 로이드 님께서 훌륭한 성과를 보이신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마땅히 칭송 들으실 일입니다. 그렇기에 조금만 더 귀족다운 품행을 보이신다면 더욱 금상첨화이지 않을까, 저는 감히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다음부턴 결투 신청, 좀 더 그럴듯하게 거절하라고?"

"예."

"아까처럼 막무가내로 상대를 도발하고선 등을 내보이지도 말고?"

"예."

"그래도 네가 있잖냐."

"...예?"

이쪽이 지나가듯 내뱉은 한마디.

그 말에 앞자리의 하비엘이 멈칫했다.

로이드는 피식 웃었다.

"네가 내 옆에 같이 있었어. 나한테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네가 내 뒤를 지켜줄 거라고 믿었다. 넌 그만큼 유능하고 신뢰할 수 있는 녀석이니까."

"...."

어쩐지 하비엘이 대꾸가 없었다.

로이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쓰읍. 어째 반응이 없다? 방금 내 말, 소름 돋지 않았냐?"

"...."

"어이?"

"...."

"설마 기절한 거냐?"

"기절은 안 했습니다. 다만-"

"다만?"

"속이 뒤집힐 것 같아서 간신히 참고 있었습니다."

"헐. 토할 뻔했어?"

"예."

"내 진심이 그 정도로 끔찍했던 거냐?"

"예."

앞자리 하비엘의 뒤통수가 당연하다는 듯 매몰차게 끄덕여졌다.

하지만 그 순간, 로이드의 눈앞에는 정반대의 뜻을 담은 메시지가 떠올랐다.

딩동.

[하비엘 아스라한이 당신이 말한 진심에 감동하고 있습니다.]

[하비엘 아스라한이 그동안 당신에게 품고 있던, 껄끄럽던 의심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동안 당신이 하비엘 아스라한에게 보였던 수많은 호의와 배려가 이제 비로소 오해 없이 하비엘 아스라한에게 되새겨 전해지고 있습니다.]

'어?'

하비엘의 은발 뒤통수를 배경으로 주르륵 떠오르는 메시지.

그걸 보며 로이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비엘 아스라한의 당신에 대한 호감도가 +14 상승하였습니다.]

[하비엘 아스라한과의 현재 관계 : +5]

[주요 인물과의 크나큰 관계 개선으로 252 RP를 획득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RP : 1607]

[하비엘 아스라한과의 친밀 등급이 <껄끄러움>에서 <일상적 타인>을 넘어 <평범한 관심>으로 2단계 상향되었습니다.]

[친밀 등급 2단계 상향에 따른 보너스로 50 RP를 추가 획득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RP : 1657]

'헐.'

단번에 300이 넘는 RP를 챙겨 버렸다.

'이거, 거의 사회적 업적을 이뤘을 때 수준이잖아.'

과연 무려 18 RP 짜리 녀석.

로이드는 귀한 금덩이를 보듯 하비엘의 뒤통수를 훈훈하게 쳐다보았다.

괜찮다면 저 알밤 같은 뒤통수를 쓰다듬어주고 싶을 정도였다.

동시에 한편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그동안 이 녀석의 호감도가 깨작깨작 감질날 정도로만 오르던 게 이유가 있었어.'

사실 지금까지 하비엘에게 퍼준 것들이 제법 많았다.

녀석의 악성 불면증을 해결해주었다.

지지부진하게 막혀 있던 아스라한 심법의 완성을 도왔다.

개미굴에서는 목숨 걸고서 녀석을 업고 나와 주었다.

게다가 아스라한 심법의 고급 응용법인 발파까지 가르쳤다.

녀석이 감사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닌 셈이었다.

호감도가 하늘을 뚫어도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어.'

정말로 달랐다.

이상하게도 녀석과의 호감도가 잘 오르지 않았다.

올라봤자 정말 개미 눈곱만큼, 깨작깨작 오르는 게 다였다.

처음엔 의아했다.

나중엔 그런가 보다 했다.

'그냥 녀석 특유의 냉담한 성격 탓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제 보니 아니었다.

'녀석, 내 진심을 믿어주지 않던 거였어.'

말 그대로 마음에 벽을 치고 있었던 거였다.

그래서 이쪽이 호의를 베풀어도 그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었다.

'요 밴댕이 같은 녀석!'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하비엘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되었다.

'녀석, 어릴 때 남작의 손에 구해져서 길러졌으니까. 자라나는 내내 로이드의 개망나니짓을 다 봤을 테니까.'

유치원 다닐 나이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십수 년 내내 로이드의 진상짓을 보고, 겪으며 자라난 녀석이었다.

즉, 하비엘이 뼈에 새기며 느낀 로이드의 행패와 진상질은 실로 유서 깊은(?) 전통이나 다름없는 등급이었던 셈이다.

한데 이쪽이 잠깐 몇 개월 정신을 차린 모습을 보였다고 해서?

갑자기 잘해주기 시작했다고 해서?

'그렇게 쉽게 마음을 허락할 만큼 물렁한 녀석이 아니지, 하비엘은.'

그게 하비엘의 성격이었다.

기본적으로 까다로운 녀석이었다.

타인의 호의에 조심스러웠다.

일단 마음을 열면 진심을 보이지만, 그 마음을 쉽게 열지 않는 녀석이었다.

한데 그 마음의 문이 드디어, 손톱만큼이나마 살짝 열린 것이었다.

로이드는 하비엘의 뒤통수를 향해 싱긋 웃었다.

"어이."

"예."

"넌 내가 그렇게 싫었냐."

"솔직히 말씀드려도 됩니까."

"어."

"지금도 싫습니다."

"헐."

"제가 여섯 살 때 처음 목검을 쥐었던 날, 기억하십니까?"

"아니. 전혀."

"그날 제가 주군께 처음으로 하사받은 목검을 눈앞에서 밟아 부러뜨린 분이 로이드 님이십니다."

"...후아."

"사실 그때 부러진 목검, 지금도 버리지 않았습니다."

"설마 숙소에 보관해둔 거야?"

"예."

"어째서? 남작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을 되새기는, 뭐 그런 건가?"

"아니요. 로이드 님의 만행을 잊지 않고자 함입니다."

"...컥."

하, 로이드 프론테라.

넌 정말이지 얼마나 쓰레기였던 거냐.

할 말이 없어졌다.

이 정도쯤 되면 하비엘이 어째서 이쪽을 계속 까칠하게 대했는지 이해가 백 번은 되고도 남을 지경이었다.

앞자리 하비엘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 지금도 소름 끼치도록 싫습니다. 부탁인데 가급적 친한 척하지 말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어, 그러냐."

"예."

딩동.

[하비엘 아스라한이 투정을 부리고 있습니다.]

[하비엘 아스라한이 마음속 오랜 응어리를 풀고 있습니다.]

[하비엘 아스라한은 겉으로 보이는 냉랭한 태도와 달리 자신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는 당신에게 약간의 호의를 느끼고 있습니다.]

[하비엘 아스라한의 당신에 대한 호감도가 +1 상승하였습니다.]

[하비엘 아스라한과의 현재 관계 : +6]

[주요 인물과의 약간의 관계 개선으로 18 RP를 획득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RP : 1675]

'...이 솔직하지 못한 녀석.'

로이드는 그만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 뒤로도 하비엘의 잔소리와 가시처럼 틱틱대는 까칠한 투덜거림이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어쩐지 그 불평이 전처럼 차갑게 들리지는 않았다.

까칠하지만 차갑지는 않은.

그렇듯 로이드는 녀석의 투정(?)을 기꺼이 받아주었다.

또각거리는 말 등 위에 앞뒤로 앉은 두 사람.

서로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다.

대신 비슷한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저녁노을을 지나쳐 남작령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그렇듯 도착한 영지에서는 상수도 완공을 기념하는 조촐한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새롭고도 반가운 소식 또한 로이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잘 왔구나. 자작령에서의 일은 잘되었느냐?"

"예."

남작이 가장 먼저 다가와 이쪽을 반겨주었다.

"잘하였다. 참으로 잘하였다."

"감사합니다."

"그래, 그 이야기는 잘되었다니 조금 있다가 하기로 하고, 우선 이것부터 보려무나."

남작이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둘둘 말린 양피지 서신이었다.

"아까 오후에 이것이 왔단다. 일전에 네가 내게 부탁했던 일이 생각나느냐?"

"제가 했던 부탁요?"

"그래."

"아, 혹시 오크 부족에게서 얻어온 보물을 처분할 판매처를 알아봐 달라고 말씀드렸던?"

"그래, 맞단다. 마침 아까 정오 무렵에 그 회답이 왔고 말이다."

남작이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교역도시 크레모의 크레모 백작께서 보물을 한꺼번에 매입할 의사가 있다고, 보물을 가져와 달라고 이렇게 연락을 보내오셨구나."

미소와 함께 남작이 펼쳐 보이는 양피지 서신.

그걸 본 로이드의 입가에도 똑같은 미소가 지어졌다.

마침내, 묵혀두고 있던 막대한 보물을 돈으로 바꿀 기회가 생겼다.

61화. 동상을 세우는 이유 (1)

교역도시 크레모.

왕국 동부 지방, 크레모나의 중심 도시였다.

그곳의 크레모 백작이 이곳 지방의 대영주임은 당연지사.

즉, 프론테라 남작의 실질적인 윗사람이라 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으로 치자면, 으음, 도지사 정도?'

한 지방의 가장 큰 권력자.

왕국 내에서도 손에 꼽을 실세였다.

그래서 로이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약간의 의문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음, 백작이 진짜로 저 보물들을 매입한다는 겁니까?"

"그렇다는구나. 그러니 이 서신을 보내지 않았겠느냐."

"그런데 왜요?"

"왜라니?"

"사실 저 보물들, 오크들이 하도 험하게 운동기구로 다루던 물건들이라 가치가 크게 높지는 않을 텐데요. 자잘한 흠집도 많이 나 있을 거고."

사실이었다.

아무리 진귀한 보물이라도 관리가 필요한 법.

하물며 저 보물들은 제법 오랜 시간 오크들의 운동기구로 굴려졌던 물건이었다.

얼핏 보면 귀한 보물이긴 했다.

잘 닦으면 반짝반짝 광도 났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자세히 살펴보면 조금 달랐다.

곳곳에 찍히거나 긁힌 흠집이 새겨져 있었다.

그것도 제법 많이 새겨져 있었다.

"그러니 이걸 사게 될 사람은 싼 맛에 보물을 사서 주위에 자랑할 시골 귀족이라거나, 혹은 그런 고객들과의 중간 거래로 이득을 볼 상인이 아닐까 싶었는데 말이죠."

그렇게 예상했던 로이드였다.

일종의 중고(?) 보물이었다.

그래서 더욱 의아했다.

'백작 정도쯤 되면 굳이 이런 중고를 안 사도 될 텐데.'

원하기만 한다면 쌩쌩한 보물을 펑펑 수집할 수 있을 사람이리라.

아니, 아예 장인을 불러서 보물을 만들 수도 있으리라.

그런데 굳이 이런 중고 보물을 매입하려 들다니.

확실히 좀 이상한 일이었다.

이를테면, 거대 기업체의 사장님이 외제차 한 번 타보려고 중고차를 출고하는 것만큼 어색한 일이랄까.

혹은 잘나가는 사모님이 명품백 가지고 싶어서 중고나라를 뒤적거리는 격이랄까.

"혹시 다른 용도가 있는 겁니까?"

로이드가 물었다.

남작이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다. 다만-"

남작이 턱을 매만지며 미간을 좁혔다.

"들려오는 소식에 따르자면, 최근 백작께서 크레모 시에 큰 동상을 세우려고 한다더구나."

"동상을요?"

"그렇단다."

"왜요?"

"나도 거기까진 잘 모르겠구나. 어쨌건 내 추측이긴 한데, 아마도 우리에게서 사들인 보물에서 보석만 떼어서 동상을 치장하려는 것은 아닐까."

"아, 그건 좀 가능성이 있겠군요."

그제야 로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대 동상 곳곳을 치장할 자잘한 보석.

그렇게 쓸 용도라고 하니 비로소 이해가 됐다.

'확실히 중고 보물에서 떼어낸 보석을 재활용하는 거라면 새 보석을 사들이는 것보단 돈을 아낄 수 있겠지. 큰 동상이라는 거, 어차피 멀리서 구경하는 물건이니까. 그러니 자잘한 흠집이 있는 보석이라도 별다른 문제가 없을 거고.'

로이드는 창고에 보관된 보물 중에서 샹들리에를 떠올렸다.

한때는 어느 귀족가의 홀을 빛냈을 샹들리에.

졸지에 오크 전사의 거대 훌라후프로 돌려졌던가.

그럼에도 다행히 샹들리에 둘레에 빼곡히 박힌 보석은 대부분 무사했다. 그것만 다 빼내도 제법 많은 수량의 보석을 얻을 수 있으리라.

'백작 그 양반, 참 알뜰하네.'

어쨌건 이렇게 판매처가 확보된 것만으로도 기뻤다.

게다가 모든 보물을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게 되었으니 더욱 반가운 일이었다.

이렇듯 자신을 반긴 희소식.

그 소식에 보답하고자 로이드도 남작에게 기쁜 소식을 알렸다.

"그럼 이제 제 차례인가요."

"자작령에 찾아간 일 말이더냐."

"예, 아침에 말씀드렸던 수도세 말입니다."

"라코나 자작의 반응이 어떠했느냐."

"하, 그걸 직접 보셨어야 했는데 말이죠."

로이드가 너스레를 떨었다.

접견실에서의 자작과의 일을 전해주었다.

그곳에서 자작이 보인 온갖 불쌍했던 모습을 말해주었다.

그걸 듣는 남작의 입꼬리가 너무나 행복하게 말려 올라갔다.

백 년쯤 묵히던 체증이 확 풀린 사람 같은 표정.

광대가 하늘까지 제대로 승천했다.

사실 그럴 법도 했다.

'지난번 쿠르노 경이 찾아와서 자작의 협박을 전한 거, 엄청난 굴욕이었을 테니까.'

저항할 방법이 없던 협박이었다.

자작도 아닌, 자작이 보낸 한낱 기사에게 노골적 무시까지 당했다.

남작으로선 굴욕도 그런 굴욕이 없었으리라.

한데 지금은?

자신에게 굴욕을 안겨주었던 자작이 눈물의 계약서에 서명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있었다.

심지어 쿠르노 경은 바지까지 축축하게 적셔 버렸다.

자신에게 굴욕을 안겨준 이들이 겪은 대굴욕과 흑역사.

그걸 듣는데 어찌 기분이 좋지 않을까.

'아마 달팽이관에 꿀이 흐르는 기분이겠지.'

남작이 즐거워하는 모습에 로이드도 기분이 좋아졌다.

주위에서 마을 축제를 즐기는 주민들의 모습에 마음이 푸근해졌다.

'그러니까 빚, 빨리 해결하자.'

당장 압류를 당하니 마니 하던 빙의 첫날.

그때부터 참 열심히 달려왔다.

이제 조금만 더 달리면.

약간만 더 애쓰면.

차근차근 빚을 정리할 수 있겠다는 희망이 보였다.

그렇듯 밝아오는 희망처럼 작은 축제의 밤도 환하게 깊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