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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화. 아오테아로아 설계도 (2)

 

 

피라미드.

고대 이집트 하면 누구나 떠올리는 그 건축물.

고대의 불가사의라고 하면 모두가 가장 먼저 언급하는 바로 그 건축물.

하지만 사실 피라미드는 이집트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시기는 조금씩 다르지만, 피라미드 형태의 건축물은 세계 곳곳에 제법 있었다.

'고대의 기술적 제약 때문이지. 건설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서. 강철 등의 강도 대비 가벼운 자재가 없어서. 결국엔 돌을 쓸 수밖에 없기에 건물이 커질수록 하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서. 그 하중을 안정적으로 떠받칠 방법이 없어서. 그래서 고대의 대형 석조 건물은 대부분 자연스럽게 피라미드 형태를 하게 됐으니까.'

피라미드 형태의 건물은 아랫면의 면적이 넓다.

뾰족한 상부는 상대적으로 좁고 가볍다.

아래쪽이 넓으며 무겁고.

위쪽이 좁으며 가볍고.

무게 중심이 지극히 낮고 안정적이었다.

막대한 하중을 안정적으로 분산할 수 있었다.

이집트의 그 거대한 피라미드가 수천 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아직까지도 쌩쌩하게 유지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덕분에 세계 곳곳의 피라미드형 건축물이 제법 많이 보존된 거기도 하지. 마야 문명의 치첸이트사나 멕시코의 태양의 피라미드도 있고. 아즈텍의 계단식 피라미드라거나. 우르의 지구라트도 그렇고. 스페인 카나리아 제도에 있는 귀마르의 피라미드라거나. 중국 고대 황제들의 무덤도 그렇고. 심지어 우리나라에도 있지. 고구려의 장군총.'

고대 적석총 형식 고분의 최종 완성판인 고구려 장군총.

누군가는 이걸 피라미드의 범주로 넣는 것이 국뽕이 아니냐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엄연히, 명백히, 사실상, 장군총은 동양식 피라미드의 일종이었다.

'물론 피라미드랑 장군총은 크기 차이가 엄청나긴 하지만.'

그런데 어째서 지금 그 장군총이 떠오른 걸까.

자신은 왜 홀로그램처럼 떠오른 진실의 보옥 설계도를 보며 장군총을 떠올린 걸까.

'그럴 수밖에 없잖아. 너무 비슷하게 생겼는걸.'

로이드는 눈길을 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제자리에 끼워 넣은 에메랄드 조각상.

그 조각상이 수중에 화려한 홀로그램 영상을 띄워 주고 있었다.

보옥의 설계도였다.

한데 설계도의 모습이 낯설지가 않았다.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고구려의 장군총과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적절하게 섞은 모양이 확실했다.

'학교에서 전통 건축물 동아리 활동하길 잘했네.'

덕분에 저런 옛 시대의 건축 양식들을 비교적 수월하고 디테일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기초부에 강돌이 깔리고. 기단은 화강암인가? 위쪽엔 계단이 7칸이 있고. 호분석 비슷한 것도 보이고. 하중에 기단부가 어그러지는 걸 방지하는 맞물림 턱도 있네. 게다가 내부 석실은 딱 평행고임식 천장이야. 굴식돌방무덤. 그럼 보옥에서는 저기가 묘실이 아니라 마법진을 발동하는 장소인 건가.'

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보옥의 설계도를 면밀히 분석했다.

보면 볼수록 보옥의 모습이 고구려의 장군총과 흡사해 보였다.

한데 그러던 도중, 홀로그램의 모습이 변했다.

 

츠즈즈즈즈....

 

'으음?'

홀로그램 설계도 주위로 수많은 점들이 나타났다.

먼지나 초파리처럼 작은 점이 대부분이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 점이 아니었다.

'인간? 인어? 오크?'

수많은 인간들과 인어가 싸웠다.

인간 기사와 인어 군단이 충돌했다.

오크 투사와 엘프 궁수들이 뒤섞여 난전을 벌였다.

그 사이에서 거인들이 마구잡이로 날뛰며 주위를 휩쓸었다.

'전쟁이구나.'

한데 그냥 평범한 규모의 전쟁과 격이 달랐다.

온갖 종족의 수십만 병력이 난전을 벌이는, 지옥도 광경 그 자체였다.

보자마자 어떤 전쟁인지 알 것 같았다.

'전에 로토루아 씨가 그랬지. 진실의 보옥이 고대의 가장 강력한 보물이자 무기였다고. 그래서 모두가 탐을 냈고, 전쟁을 벌였다고. 이게 바로 그 전쟁인 거야.'

모든 종족이 적이 되어 싸운 대전쟁.

신화시대의 종언을 알린 전쟁의 모습이 눈앞에서 홀로그램으로 재현되고 있었다.

날뛰는 전사들과 흩날리는 유혈.

마침내 보옥에 치명타가 가해졌다.

누구의 짓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워낙 난전의 와중이라 그걸 따지거나 알아볼 겨를조차 없었다.

결국, 보옥이 허물어졌다.

상단부가 무너지고, 계단이 뭉개졌다.

토대를 제외한 모든 부위가 철저히 파괴되었다.

그리고 전리품으로 전락했다.

'다들... 보옥 잔해를 챙겨가고 있어.'

인간의 기사와 오크 투사.

엘프 궁수와 거인 마술사까지.

대전쟁에 참전했던 거의 모든 세력이 앞다투어 보옥 잔해를 전리품처럼 챙겨갔다.

그 와중에 또 서로 간의 다툼과 싸움이 벌어졌다.

한 조각이라도 더 차지하려는 고집과 아집.

커다란 시체에 몰려든 개미떼 같은 모습이었다.

그것으로 홀로그램 영상이 끝났다.

 

츠즈즈즈즈....

 

화려하게 허공을 물들였던 점과 선, 면이 사라졌다.

대신 심해 특유의 어둑한 바닷물만이 그 빈자리를 메웠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딩동.

 

난데없는 알림음이 귓가를 콕 찔러왔다.

'음?'

지금 이런 순간에 갑자기 웬 알림음일까.

고개를 갸웃거리는 로이드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당신은 '진실의 보옥 가이드 조각상'을 발동시켰습니다.]

[가이드 조각상의 안내에 따라 보옥의 파괴 현장을 목격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진실의 보옥의 구조를 상세히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이 관찰의 경험이 당신의 설계 스킬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진실의 보옥 '아오테아로아(Aotearoa) 설계도'가 설계 스킬의 데이터에 등록되었습니다.]

 

'뭐?'

로이드는 깜짝 놀랐다.

진실의 보옥, 아오테아로아.

그 설계도가 설계 스킬에 등록됐다니.

이건 기대도 하지 않았던, 그로서도 처음 겪는 일이었다.

'설계도를 설계 스킬로 불러오려면 측량을 하거나 내가 직접 설계를 한 경우에만 가능했는데?'

지금까진 항상 그랬다.

맨땅이건 건물이건.

설계 스킬 공간으로 설계도를 띄우려면 무조건 직접 측량을 해야 했다.

그렇게 안구건조증을 얻을 기세로 눈도 깜빡이지 않고 열심히 데이터를 따내야만 비로소 가상의 설계 공간에 설계도를 불러올 수 있었다.

혹은 밀리미터 오차 하나에도 신경을 곤두세우며 밤새 설계 노가다를 해야만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대박.'

그냥 홀로그램 영상 한 번 감상했을 뿐인데.

그런데 보옥 설계도를 설계 공간에 띄울 수 있다는 메시지가 떴다.

'일단 확인부터. 설계.'

로이드는 곧장 설계 스킬을 발동했다.

오직 그에게만 보이고 인식되는 가상의 설계 공간이 그의 앞에 떠올랐다.

'데이터 불러오기. 아오테아로아 설계도.'

정말로 될까.

혹시나 해서 시도했다.

반응은 곧바로 돌아왔다.

 

['아오테아로아 설계도'를 불러옵니다.]

 

화아악!

 

잠깐 설계 공간이 밝아지는가 싶었다.

복잡한 점과 선, 면이 공간에 새겨졌다.

넓고도 튼튼한 토대와 기단부.

위로 올라가며 날씬해지는 피라미드 구조.

아까 홀로그램 영상을 통해 보았던 진실의 보옥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진짜다. 대박이야.'

로이드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건 설계 공간에 그냥 그림만 떠오른 정도가 아니었다.

'확대해서 보니까 각 부위의 치수와 자재 종류, 규격, 결합 방식까지 모조리 표기되어 있어.'

그뿐만이 아니었다.

응력분포, 하중, 압축력, 축방향력과 휨모멘트, 변형률, 온도 팽창계수, 그 밖의 갖가지 데이터까지.

시공에 필요한 거의 모든 정보가 표기되어 있었다.

말 그대로 완벽한 설계도였다.

이것만 있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복원 시공을 시작할 수 있을 듯했다.

'마침 인력도 충분해. 찜질방 손님 인어들을 그대로 복원 시공 현장으로 돌려서 굴리면 돼. 공사에 들어갈 자재와 자금은? 인어 여왕한테 부탁해봐야지. 이 보옥, 인어 사회에서도 신화시대의 엄청난 보물인 거잖아. 그걸 복원해주는 공사니까. 지원쯤은 충분히 받아낼 수 있겠지.'

생각할수록 자신감이 쑴펑쑴펑 솟아났다.

복원 시공을 어떻게 준비하고 시작할 것인지.

시행하면서는 어떤 어려움이 있을 것이고, 그걸 어떻게 방지하며 극복할 것인지.

모든 계산이 순식간에 뚝딱뚝딱 세워졌다.

게다가 그에겐 보옥의 구조 또한 익숙했다.

'피라미드형 장군총이니까. 마침 동아리 활동하면서 적석총이나 장군총 조사한 적도 있어. 그때 공부했던 자료들이랑 방금 얻은 설계도를 조합하면 돼. 충분히 할 수 있어.'

다행히 장군총 등의 피라미드형 건물은 구조가 그리 복잡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정교한 하중 배분 등의 과정이 필요하겠지만.

건물치고는 난이도가 높은 편은 아니었다.

'다행이야. 우리나라 역사에 장군총이 있었던 게. 그게 마침 피라미드형 구조물이었던 게.'

동양의 피라미드라 불리는 장군총.

물론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사이즈가 심하게 다르긴 했다.

체급으로 치면 매머드와 강아지 정도쯤 되지 않을까.

그래도 큰 틀에서의 구조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만약 이집트 피라미드가 고대 한반도에 있었다면?

'당시 사람들이 피라미드를 울트라 메가톤 장군총이라고 불렀으려나. 아, 그땐 영어는 몰랐으니까 대장군총 정도쯤 됐을지도.'

어쨌건, 자신이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장군총 자료를 접했던 덕분에 이번 시공이 수월해질 것 같았다.

한데 그러던 도중이었다.

가상의 설계 공간에 띄운 보옥 설계도 아래쪽.

지금까지 주목하지 않았던 그곳에 아주 자그마하게 떠올라 있는 붉은색 메시지가 보였다.

'음? 이건 뭐지?'

메시지를 읽었다.

 

[아오테아로아 설계도]

[상태 : 시공 불가. 핵심 자재 미확보 상태.]

[핵심 자재 미확보 상태에서 무리하게 시공을 진행할 시, 진실의 보옥 본연의 마법진 기능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어째 편하게 가는 법이 없냐."

로이드는 쓰라려 오는 입맛을 다셨다.

'핵심 자재가 있어야 한다니. 그게 갖추어져야 보옥이 제대로 작동되는 거구나.'

하니 그냥 짓기만 한다면?

핵심 자재라는 걸 쓰지 않는다면?

그냥 모양만 보옥 흉내를 낸 유사품이 될 것이 뻔해 보였다.

'그건 안 돼.'

로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문화재 되살리기 운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어떻게든 보옥을 작동시키는 것.

그래서 운명의 복원 현상을 막아내는 것이 자신의 목적이었다.

'쓰읍. 그럼 핵심 자재를 어디서 어떻게 구하란 거야.'

로이드는 투덜거리며 아오테아로아 설계도를 살폈다.

어쩌면 설계도에 답이 있지 않을까.

역시나 그런 그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몇 군데 붉게 표시된 곳들이 있는데?'

그러고 보니 설계 공간에 띄워놓은 설계도 곳곳이 조금 이상했다.

특정 몇몇 부위만 붉은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어디 좀 볼까.'

마치 클릭하듯.

붉은색으로 표시된 부분들을 손가락으로 콕 찍었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설계도에서 어떤 정보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거, 클릭이 안 되는 거야?'

난감했다.

그는 붉은색으로 표시된 자리들을 모조리 한 번씩 눌러보았다.

그러던 도중.

기단부의 어느 한 부위가 딸각, 하고 반응했다.

고구려 장군총의 호분석에 해당하는 자리였다.

 

딩동.

 

[진실의 보옥 첫 번째 핵심 자재, '타우랑가'를 선택하셨습니다.]

[타우랑가의 정보를 열람하시겠습니까?]

[YES / NO]

 

'당연히 예스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이었다.

 

화아악-!

 

마치 시각을 침범하듯.

혹은 눈을 뜬 채로 꿈을 꾸듯.

새로운 영상이 눈앞에 떠올랐다.

'영상 기록?'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로이드는 영상 내용에 집중했다.

 

쿠웅-! 쿠우웅-!

 

거대한 덩치의 인간, 아니, 거인이 해변으로 상륙하고 있었다.

그런 거인의 품에는 12개의 돌덩이가 들려 있었다.

로이드는 돌덩이의 정체를 바로 알아보았다.

'저거, 조금 전에 눌러본 보옥 기단부의 핵심 자재 같은데?'

보옥이 파괴된 후 자재들이 각 종족의 전리품이 되었다더니.

기단부 핵심자재인 타우랑가도 그렇게 된 듯했다.

'거인이라.'

로이드가 눈을 가늘게 떴다.

거인이 자재를 들고 걸었다.

어느 강가에 도시를 세웠다.

자신의 궁전을 자재로 장식했다.

오랜 시간 인간을 노예처럼 지배했다.

그러다 인간들이 독립 전쟁을 일으켰다.

오랜 전쟁과 환란, 투쟁.

그 끝에 거인이 몰락했다.

인간의 세상이 왔다.

인간들의 지도자가 거인의 궁전을 파괴했다.

궁전을 장식하던 타우랑가도 도시 가장자리에 버려졌다.

인간의 도시가 오랜 시간 융성했다.

그러다 분노한 드래곤에게 왕성이 뽑혔다.

왕조가 몰락하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섰다.

새 왕조의 새 왕성이 으샤으샤 건설되었다.

그때 새 왕성의 기초에 12개의 타우랑가가 쓰였다.

별달리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매끈하게 잘 다듬어진 커다랗고 튼튼한 석재라는 이유.

단지 그것 때문이었다.

즉, 새 왕조의 사람들은 12개 타우랑가의 정체를 아예 몰랐다.

그럴 법도 했다.

시간이 너무나 까마득하게 지났으니까.

신화 시기의 이야기가 한낱 전설로 치부되는 시대가 되었으니까.

그렇게 12개의 타우랑가는 새 왕성의 일부가 되었다.

오늘날까지 세월이 흘러왔다.

영상의 마지막.

12개의 타우랑가가 기초 공사에 쓰인 왕성.

그 건재하고도 튼튼한 모습을 비춰주는 것을 마지막으로, 영상이 끝났다.

"...."

영상이 끝난 후에도 로이드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말보단 그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방금 자신이 본 영상 속의 왕성.

12개의 타우랑가가 자재로 쓰인 새 왕성.

그곳이 자신에게 너무나 익숙한 건물인 까닭이었다.

"후아."

깊고 진한 사골 육수처럼.

절로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아울러 흘러나오는 신세 한탄 궁시렁거림은 옵션이었다.

"이거, 진심 실화냐. 타우랑가가 박힌 곳이 왜... 하필이면 왕도 마젠타의 국왕 누님네 왕성인 거냐고."

273화. 뻔뻔한 요구 (1)

 

 

왕도 마젠타.

마젠타노 왕국의 정치, 경제적 중심이 되는 수도.

기실 이곳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였다.

신화시대의 대전쟁 직후.

거인왕 오쿨루스가 이곳에 궁전을 지었다.

이곳에서 오랜 시간 인간을 지배했다.

그러다 인간들의 독립 전쟁에 밀려나 도망쳤다.

독립에 성공한 이들이 인류 최초의 왕궁을 이곳에 세웠다.

자랑스러운 지도자의 이름을 딴 '탈리아'가 도시의 명칭이 되었다.

그 후로 탈리아는 더없이 융성했다.

그러다가 쫄딱 망했다.

탐욕 많은 왕 때문에.

드래곤에게 두 번이나 왕성을 뽑혀서.

쫄딱 망한 뒤에 새로운 왕조가 이 도시를 차지했다.

그때 도시의 이름도 자연스럽게 '마젠타'로 바뀌게 되었다.

현재 왕도를 상징하는 랜드마크인 '바닥에 반쯤 묻힌 계란형 왕성'도 당시에 건설되었다.

그리고 오늘, 이곳 계란형 왕성 안쪽의 집무실에서.

국왕 알리시아 테르미나 마젠타노는 애꿎은 날달걀을 까먹으며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딸각, 후릅!

 

"...후우."

알리시아는 젖은 머리칼을 수건으로 닦았다.

시종이 올린 날달걀을 한 모금에 마셨다.

그럼에도 미간의 주름이 펴지지 않았다.

답답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실로 엉망진창이야.'

그녀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집무실 책상을 바라보았다.

제법 어지럽게 쌓이고 흐트러진 서류 더미.

본드래곤의 난동으로 망가졌던 테르미나 대정원 복구공사에 관련된 보고서였다.

'다행히 복구공사는 잘됐어. 마무리도 무난하게 됐고. 자금이야 제법 들긴 했지만 왕실 재정에 무리가 갈 정도는 아니었지. 하지만....'

본드래곤 난동 당시의 피해가 다 복구되지 못했다.

특히,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피해가 심각했다.

'왕실의 체면이 상당히 깎여 버렸어.'

모처럼 국력 과시를 위해 건설한 대정원이었다.

그 성과를 대외에 널리 알리려 기획했던 대정원 완공 기념행사였다.

즉, 그 행사는 마젠타노 왕가의 권위를 만방에 알리는 성대한 쇼케이스였다.

한데 그 쇼케이스가 실패했다.

아주 제대로 망했다.

대정원 중앙부에 세워두었던 드래곤의 뼈대.

그게 예상치도 못하게 움직이는 바람에.

난동을 부리는 서슬에.

완공 기념식 참석객들이 혼비백산 도망쳐야 했다.

왕도 수비군이 허겁지겁 움직여야 했다.

국왕인 자신마저 직접 검을 들고 나서야 했다.

적어도 거기까진 최악은 아니었다.

'진짜 최악은... 본드래곤을 왕실이 잡지 못했다는 거지.'

알리시아의 미간 주름이 깊어졌다.

그날, 왕실이 본드래곤을 제압하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박살 난 본드래곤의 모습을 대외에 알리지 못했다.

왕가의 위신이 상당 부분 바닥까지 떨어져 버렸다.

국제적인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왕도에 스스로 위협거리를 장식한 왕가. 위협적인 적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왕가. 그러고도 신뢰성 없는 자기변호를 시도한 왕가... 라는 오명까지 덤으로 생겨 버렸고.'

그녀의 눈동자에 난폭한 감정이 떠올랐다.

본드래곤 난동 직후.

로이드와 하비엘이 지옥으로 떠난 이후.

사태의 뒷수습에 총력을 기울였던 그녀였다.

사고에 휘말린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영웅으로 추대했으며, 그에 걸맞은 보상을 했다.

처참하게 파괴된 대정원 복구공사에 거액을 쏟아부었다.

그러는 한편으로 왕실의 실추된 권위를 되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마젠타노 왕가의 국왕은 본드래곤의 위협에 가장 앞장서서 싸웠노라고.

휘하의 로이드 프론테라, 하비엘 아스라한 등과 함께 용감히 맞섰노라고.

그 끝에 마침내 본드래곤을 제압하였노라고.

목격자인 근위대 기사들의 증언까지 동원하여 진실을 밝히려 애썼다.

하지만 세상은?

국제 사회는?

'아무도 그 말을 믿어주지 않았어.'

거기까지 생각하던 알리시아는 그만 쓴웃음을 떠올리고 말았다.

기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날, 본드래곤을 제압한 것은 엄연한 진실이었다.

하비엘의 결정적인 활약이 있기는 했지만, 분명 본드래곤은 제압되었다.

하지만 그걸 대외에 증명할 증거가 없었다.

'로이드, 그자가 본드래곤을 수하로 거두어 데려가 버렸으니까.'

망가진 본드래곤의 모습을 대외에 공개할 수라도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애석하게도 그런 증거를 남기질 못했다.

그래서였다.

마젠타노 왕가의 해명은 오히려 국제적 비웃음거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사실은 제압 못 한 게 아니었냐고.

본드래곤이 실컷 날뛰다가 지루해져서 다른 곳으로 날아가 버린 거 아니냐고.

정말로 본드래곤을 제압했다면서 왜 증거를 내밀지 못하는 거냐고.

모두가 마젠타노 왕가의 권위를 의심하게 되었다.

외국뿐만이 아니었다.

'국내의 귀족들도 뒷말을 나누게 됐지.'

물론 자신의 왕권이 강력하고도 확고하기에 큰 걱정거리는 아니었다.

이런 일로 자신의 정통성이 흔들리지도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실추된 왕가의 권위를 되살려야 해.'

국제 사회에서의 권위.

그걸 잃는다는 것은?

외교적 영향력이 줄어든다는 뜻과 다름이 없을 터였다.

수시로 일어나는 국제적 마찰, 이해관계의 대립, 분쟁, 협상.

그런 모든 일들을 처리함에 있어 번거로움을 겪게 될 거라는 뜻이었다.

마치, 상처 입은 사자가 하이에나떼에게 얕보이게 되듯이 말이다.

'하지만....'

그 권위를 다시 세울 뾰족한 수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최근 알리시아가 종일 인상을 쓰며 지내는 이유였다.

"쯧."

그녀는 신경질적인 동작으로 수건을 집어들었다.

머리칼에 남은 물기를 거칠게 털어냈다.

그럼에도 고민이 털어지지 않았다.

"...."

원래 검술 훈련과 목욕을 마치고 날달걀 하나를 마시면 온몸이 상쾌해지곤 했는데.

요즘은 그렇지 못했다.

날마다 곱씹어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처럼.

요즘 그녀를 사로잡은 이 고민은 아무리 해도 풀리지가 않았다.

'그저 부서진 대정원을 복구하고 그에 따른 행사를 여는 것? 그걸로는 부족해. 복구 기념행사 따위론 아무것도 바꾸지 못할 거야. 차라리 국경 어느 쪽이라도 좋으니 소규모 군사적 분쟁이라도 생겨주면 좋으련만.'

차라리 그런 일이라도 생기면 국내외의 시선을 그쪽으로 돌릴 수 있을 텐데.

그 기회에 압도적인 군사력을 선보이며 권위를 되찾을 수도 있을 텐데.

'하지만 그건 아니야.'

권위를 되찾자고 애꿎은 병사들을 전쟁터로 내모는 것은 싫었다.

그들을 더 훌륭히 지키고 보살피기 위해 챙겨야 하는 것이 권위니까.

덕분에 국왕의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늙은 시종장의 푸근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고민에 휩싸인 국왕의 머리칼이 반쯤 말라가던 무렵이었다.

"국왕 전하, 특별히 알현을 청해온 이가 있어 감히 아뢰옵나이다."

집무실 밖에서 들려온 시종장의 목소리.

고민의 세계에서 빠져나온 국왕이 문 건너편을 향해 물었다.

"알현을? 누가?"

"프론테라 백작가의 장남, 로이드 프론테라이옵니다."

그 대답을 듣는 순간.

국왕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이름이라서?

혹은 저도 모를 기대감을 느껴서?

하지만 그 답을 스스로 찾기도 전에, 그녀는 대답을 입에 담고 있었다.

"들라 하라."

"명 받들겠사옵니다."

시종장의 걸음이 멀어져 갔다.

아마도 로이드를 이곳으로 데려오기 위함일 터다.

그렇게 예정에 없던 알현의 순간을 앞둔 동안, 국왕 알리시아는 두 손으로 턱을 괴었다.

"후우."

고민?

혹은 놀람?

한숨을 내뱉은 이유도 잘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게 한 가지 있었다.

자신이 로이드의 방문을 반기고 있다는 점이었다.

'로이드 프론테라.'

언제나 눈치껏 행동하는 자.

신하이긴 하되, 어느새 자신보다 더 큰 힘을 손에 넣어 버린 자.

하지만 그럼에도 어쩐지 크게 경계심이 생기지 않는 자.

'나와 그의 정치적 이득이 일치하고 있어서겠지.'

그녀는 생각했다.

로이드가 야심이 없는 자라서 참 다행이라고.

그저 시골에서 평범하게 사는 쪽을 선택한 이라서 고맙다고.

동시에 그녀는 의아함도 느끼고 있었다.

'어째서 그가 여기까지 온 걸까.'

알리시아는 입맛을 다셨다.

로이드 프론테라.

자신이 아는 그 인간은 결코 그냥 움직일 자가 아니다.

별다른 이득이 없는데 무작정 여기까지 쭐레쭐레 찾아올 인간은 더더욱 아니다.

'꼭 자신이 아쉬워야 연락을 하고 손을 내밀지. 아니, 이런 식으로 그자가 먼저 날 찾아온 건 이번이 처음인가.'

돌아보니 매번 그래 왔다.

항상 자신이 그를 불렀다.

그러고서야 그는 마지못해, 정말 오만상을 다 찌푸리며, 억지로 일터에 불려나온 사람처럼 온몸을 비비적 꼬아대며, 제발 자신을 좀 풀어달라는 기색을 온몸으로 풀풀 뿌려대며 자신의 앞으로 오곤 했다.

'쯧.'

그런 그가 오늘 스스로 여기까지 왔다는 건?

분명 뭔가 아쉽거나, 부탁하거나 할 일이 있어서일 터다.

그게 아니라면 절대 알아서 오지 않을 테니까.

'그럼 부탁할 일이라는 게 뭘까.'

대체 어떤 거창한 부탁을 하려고 여기까지 제 발로 찾아온 걸까.

몹시 궁금해졌다.

동시에 기대감이 들기도 했다.

'그는 약삭빠른 자니까. 내게 얻으려는 것이 있다면, 그게 공짜가 아니라는 것도 충분히 알고 있을 테니까.'

그러니 분명 바라는 것만큼의 뭔가를 협상 카드로 들고 왔을 터다.

또한, 그 카드가 이쪽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영리한 자니까.'

이 시국에.

자신이 매일 고민에 휩싸인 이런 때에.

찾아와 뭔가를 부탁하며 협상 카드를 내민다면?

'아마도 내 고민의 핵심을 눈치채고 있는 거겠지. 내 고민을 해결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거겠지. 그런 점을 협상 카드로 내밀며 도움이나 지원을 요청하려는 것이겠지.'

생각해보면 간단한 문제였다.

그렇게 국왕 알리시아는 로이드의 예고 없는 방문 이면에 숨은 의미와 의도를 장바구니 견적 뽑듯 순식간에 착착 뽑아냈다.

시종장의 목소리가 재차 들려온 것은, 마침내 그녀의 머리칼이 모두 말랐을 무렵이었다.

"전하, 프론테라 백작가의 장남 로이드 프론테라가 당도하였사옵니다."

"들어오라."

집무실 문이 열렸다.

그 뒤로 익숙한 자의 모습이 보였다.

"국왕 전하 만세. 프론테라 백작가의 장남, 로이드 프론테라가 이 땅의 합당한 주인이신 국왕 전하를 뵈옵습니다."

예를 차리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는 로이드.

그의 얄미운 뒤통수가 보였다.

예를 받아주는 대신에 한 대쯤 때려볼까.

그런 묘한 충동을 일으키게 하는, 알밤처럼 동글동글 야물딱진 뒤통수였다.

"...."

알리시아는 잠시 떠오른 말도 안 되는 충동을 가라앉혔다.

대신 그녀는 차가운 눈길로 로이드를 내려다보았다.

"실로 오랜만이로다, 로이드 프론테라여."

"그렇사옵니다, 전하. 그동안 옥체 강녕하셨사온지요."

"그다지. 안타깝게도 그대가 짐의 당부를 어긴 덕분에 말이지."

"...예?"

얼떨떨한 기색으로 이쪽을 올려다보는 로이드.

그의 눈동자를 향해 알리시아는 피식,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대가 그 입으로 직접 말하였었지. 지옥문을 넘어가기 전에. 지옥으로 건너가기 전에. 기억나지 않는가?"

"지옥에 가기 전이라 하시오면...."

"그대가 선택한 방법으로 지옥에 가야 다시 짐의 곁으로 돌아올 수 있지 않겠느냐 말하지 않았는가."

"...아."

"또한, 짐도 그대에게 당부하였었지. 진심으로 성은을 생각한다면 짐의 곁으로 무사히 돌아오도록 하라고. 짐의 그러한 당부에 그대는 무어라 대답하였더라?"

"명심하겠사옵니다... 라고."

"야무지게 대답하였더랬지."

"...."

"한데 짐은 어찌하여 지옥에서 돌아온 그대의 행적을 그대의 입이 아닌, 다른 자들의 보고를 통해 들어야 하였을까?"

"...."

"어느 날 갑자기 들려오더란 말이지. 본드래곤의 난동 때 왕도에서 모습을 감추었던 그대가 홀연히 프론테라 영지로 돌아가 있더라고."

"...."

"그 후엔 크레모 백작에게도 찾아갔었다지?"

"...."

"그래. 이해하노라. 크레모 백작이 그대를 어지간히 반겨야 말이지."

"...."

"대답?"

"...죽여주소서, 전하."

"정말로? 진심으로?"

"그, 그건 아니옵고...."

"하면?"

"이런 말씀을 제가 아뢰오는 것이 실로 송구하기 짝이 없사오나, 그동안 하도 다급하고 지난한 우여곡절이 많았던지라 피치 못하게 전하의 곁으로 훌쩍 돌아올 수가 없었사옵니다."

"그런가?"

"그러하옵니다, 전하. 그럼에도 그동안 제 충성스러운 마음은 언제나 전하의 곁에 머물러 있었사옵니다."

"으음, 짐의 곁에 머물렀다는 그 마음을 알아볼 길이 그동안엔 없었다만."

"그건...."

"다만 그대의 마음 아닌 발걸음이 짐보다 크레모 백작을 먼저 향하였다는 안타까운 사실만은 똑똑히 확인하고 있었지."

"그, 그건...."

"크레모 백작이 그대를 어찌 반겨주던가. 성대한 환영 연회라도 열어주었던가? 아니었다면 참으로 곤란할 텐데 말이지. 무려 짐을 제쳐놓고 먼저 찾아간 곳이 거기였는데. 그렇게 극진한 마음으로 찾아간 그대를 분명 열렬히 반겨주었을 것이야, 크레모 백작은. 짐의 말이 맞는가?"

"...살려주소서, 전하."

로이드는 그저 납작 엎드렸다.

그만큼 국왕의 입가에 떠올라 있던 쓴웃음이 후련한 미소로 바뀌었다.

로이드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도 은근한 즐거움과 흡족함이 떠올라 있었다.

"역시 이래서 그대가 마음에 든단 말이지."

"...예?"

"되었고. 지옥에 갔던 일은 잘 해결하였는가?"

"물론이옵니다, 전하."

"다친 곳은 없었고?"

"보시다시피 말짱하옵니다, 전하."

"짐의 하해와 같은 성은 덕분이라고 말하려던 참이었겠지?"

"...."

"좋아. 재회를 반기는 잡담은 이만하면 충분하겠지. 그럼 본론으로 넘어가도록 할까."

국왕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자신이 짐작한 바를 꺼내어 직설적으로 로이드의 고막에 꽂았다.

"하문하노니 로이드 프론테라여. 그대는 오늘 짐의 고민 해결을 돕고 보상을 요구하고자 알현을 요청한 것인가?"

"그러하옵니다, 전하."

로이드도 국왕의 짐작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래서 국왕과의 대화가 편하다고, 언제나 빙빙 둘러가지 않고 이야기가 빨라서 참 좋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떠올렸다.

한 달 전.

인어 왕국에서 찾아낸 보옥 토대.

그곳에서 입수한 보옥 설계도.

설계도가 알려주던 핵심 자재.

그걸 얻기 위해 이제부터 해야 할 일들.

모두를 염두에 두며 그가 대답하였다.

"전하께옵서 짐작하신 바가 모두 정확하시옵니다."

"그런가."

"예, 전하."

"하면, 대정원 완공 행사의 실패와 본드래곤의 난동 때문에 실추된 왕가의 권위를 획기적으로 끌어올릴 방안을 그대가 가져왔다는 뜻이겠지?"

"실로 그러하옵니다, 전하."

로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그랬다.

국왕의 고민을 이미 대강 눈치껏 짐작하고 있던 그였다.

그 고민을 일거에 해결해줄 방법 또한 가지고 온 그였다.

국왕 알리시아도 그런 그의 속내를 거의 정확하게 파악했다.

'역시.'

로이드 프론테라답다.

언제나 이득부터 따지는 인물이니까.

그러니 일의 성사를 확신하지 못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테니까.

'덕분에 믿고 일을 맡길 수도 있고.'

알리시아는 든든함을 느꼈다.

이토록 영리하고 믿음직한 자가 또 있을까.

저렇듯 자신만만한 로이드의 모습을 보자니, 벌써 자신의 고민이 다 해결된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였다.

국왕 알리시아의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좋다. 그대의 방안이 그토록 확실한 것이라면, 역시나 그대는 짐에게 원하는 보상이 있는 것이겠지?"

"그 또한 물론이옵니다."

"하면 원하는 보상 또한 미리 말하라."

이자가 원하는 것까지 일찌감치 들어두자.

어차피 자신의 고민을 해결해줄 자니까.

그만큼 믿을 수 있는 듬직한 신하니까.

어지간히 무리한 요구라도 수락해주자.

국왕은 그렇게 다짐했다.

이자는 아끼고 싶다고.

언제나 휘하에 두고 싶다고.

다짐하고, 마음을 먹으며, 넓고도 넉넉한 인심으로 물었다.

그 직후.

"제 보잘것없는 요구는 실로 간단하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로이드 프론테라의 뻔뻔한 입이 열렸다.

"전하의 왕성을 뿌리째 뽑도록 허락하여주소서."

274화. 뻔뻔한 요구 (2)

 

 

"전하의 왕성을 뿌리째 뽑도록 허락하여주소서."

"...뭐?"

휘둥그레진 눈동자.

잃어버린 어처구니를 찾으려는 듯 되물어오는 목소리.

국왕의 그러한 반응 앞에 로이드는 태연함을 유지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문득, 보름 전의 일을 떠올렸다.

'그땐 나도 황당했지.'

크라켄의 급체를 해결한 후였던가.

덕분에 진실의 보옥, 아오테아로아 설계도를 입수하였던가.

당장 보옥을 복원할 수 있겠다고.

제대로 들떴던 순간이었더랬다.

예기치 못한 태클(?)을 맞아야 했다.

'세상 각지로 뿔뿔이 흩어진 핵심 자재들을 모아야 보옥이 제 기능을 할 수 있다고 했어.'

그러면서 보옥 설계도가 친절히 알려주었더랬다.

보옥 기단부의 핵심 자재인 타우랑가가 이곳, 왕도 마젠타에 있다고.

마젠타의 왕성 재료로 쓰였다고.

그걸 뽑아와야 한다고.

그래서였다.

'냉큼 거기 일 마치고 여기까지 달려... 아니, 날아왔지.'

여기로 오기까지의 일들이 떠올랐다.

크라켄의 급체를 해결해준 덕분에.

신화시대의 전설인 줄로만 알았던 보옥의 토대를 실제로 발견해낸 덕분에.

인어들의 인정을 왕창 받아 버렸다.

일약 스타가 되었다.

어딜 가나 인어들이 환호했다.

인어 여왕의 공식적인 치하까지 받았다.

그 기세(?)를 타고서 얻을 것도 두둑이 얻어냈다.

평생 보장될 인어 왕국 출입 권한이었다.

'대신 찜질방 운영권을 인어 여왕한테 넘겨줘야 했지만.'

그래도 별로 아깝진 않았다.

애초에 보옥 발굴 작업 인력을 땡겨오기 위해 만들고 운영했던 찜질방이었다.

한데 보옥을 찾아낸 이제는?

운영권을 지니고 있어봤자 괜히 관리하랴 수리하랴 신경 쓸 일만 덕지덕지 늘어나 발목을 잡을 것이 뻔했다.

차라리 이렇게 좋은 분위기일 때 통 크게 넘겨주면서 이미지를 관리하는 거.

그게 훨씬 이득이 될 거라는 날카로운 각이 섰다.

어차피 나중에 보옥 복원 공사를 하려면?

인어들의 도움을 받아야 할 테니까.

그때 또 인어들을 인부로 부려먹어야 할 거니까.

기회가 있을 때 미리 왕창 점수 따놓기.

그게 훨씬 이득이 될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후련하게 기부하듯 넘겨주었다.

인어 사회의 갈채를 받은 것은 물론이었다.

'덤으로 인어 왕국 명예시민이 됐지. 평생 아무런 제한 없이 인어 왕국에 드나들 수 있는 권한도 얻었고. 심해 환경에서 몸을 지켜주는 마법 목걸이는 기본 옵션에다가, 찜질방 VVIP 회원까지 됐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아예 인어 종족과 호감도 시스템이 개방되어 버렸다.

이 세상의 인어들과 자유롭게 호감도를 올리고 RP를 받아낼 수 있게 된 셈이었다.

'뭐, 말하자면 모든 인어들의 친구가 됐다고 해야 하나.'

덕분에 향후 진실의 보옥 복원 시공을 할 때도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받을 수 있게 되었다.

망가진 인어 도시의 복구에 손을 보태란 말도 딱히 듣지 않았다.

귀빈은 그런 일 하지 않아도 된다고.

자신들이 알아서 할 거라고.

그러니 신경 쓰지 마시라고 하던가.

'어쨌건, 거기서 얻을 건 다 얻었지.'

그렇게 인어 왕국을 떠나왔다.

무려 인어 여왕의 에스코트를 받았다.

인어 여왕의 엄청난 수영 속도 덕분에 순식간에 북극해를 벗어나 크레모 항 인근까지 당도할 수 있었다.

마침 그곳 연안에서 펠리코니아 호와 조우할 수도 있었다.

거기서 펠리코니아 호 이용 잔금을 모두 치렀다.

꼬밍이를 타고 날아올라 펠리코니아 호의 사람들과 작별을 고했다.

곧바로 이곳, 왕도 마젠타까지 날아왔다.

마젠타에 도착하자마자 왕성으로 왔다.

국왕과의 알현을 신청했다.

그것이 지난 보름 동안 로이드가 겪은 여정이었다.

'후아. 그런데, 쩝. 여기까지 온 건 좋은데 국왕 누님 눈빛이 장난이 아니네.'

로이드는 쓰려지는 입맛을 다셨다.

자신을 쳐다보는 국왕 알리시아.

그녀의 눈빛이 장난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황당해하다가.

이제는 정색하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리도 아니었다.

'이건 대놓고, '전하! 왕성 한 번만 뽑게 허락해 주세요!' 라고 말한 상황이니까.'

이러다 멱살이라도 잡히는 거 아닐까.

혹은 명치 제대로 털리는 건 아닐까.

그렇듯 스멀스멀 불안감이 피어오를 무렵이었다.

"후우. 그대는 언제나 이런 식이로군."

국왕 알리시아가 피식 웃어 버렸다.

"참으로 고약해. 어찌하면 매번 이렇게 짐을 당황케 할 수 있는 건지. 하지만 방금 그대가 꺼낸 요청, 당연히 농담이 아니었겠지?"

"예, 그러하옵니다."

"짐의 왕성을 뽑게 허락해달라고?"

"그렇사옵니다, 전하."

로이드는 부정하지 않았다.

지금은 직구 승부가 필요한 순간이다.

때마침 국왕도 이쪽의 의도를 대놓고 물어오고 있었다.

"흔한 집이나 건물도 아니고 무려 왕성 뽑는 일을 허락해달라니. 그런 엄청난 요청을 하는 이면에는 물론 짐이 수긍할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겠지?"

"예, 물론이옵니다."

"고하라."

"타우랑가라고 불리는 고대의 물건이 왕성의 자재로 쓰였기 때문이옵니다."

"하여서?"

"그 물건을 얻기 위해서이옵니다."

"무엇을 위해 그 물건을 얻으려는 것이지?"

"비록 지금은 그 목적까지 상세히 밝히어 드릴 수는 없사옵니다. 다만, 이번 일로 결코 전하와 왕실에 해를 끼치는 일은 없을 것이라 감히 확신을 담아 고하여드릴 수 있을 것이옵니다."

로이드가 진중하게 답했다.

솔직한 진심이었다.

'이건 정말로 국왕이나 왕실에 피해를 주려는 일이 아니니까. 오히려 반대지. 왕실을 돕는 일이 될 거야. 국왕 또한 운명의 복원 현상의 피해자가 될 테니까.'

문득, 엔딩 스포일러를 통해 엿본 미래가 떠올랐다.

그 미래에서 국왕은 왼팔의 감각을 잃게 된다.

원작 철혈의 기사에서처럼 팔이 잘리는 것은 아니지만, 대신에 운명의 복원 현상을 겪으며 왼팔의 마비 증상에 시달리게 된다.

그저 팔이 달려만 있을 뿐, 없는 것이나 다름없게 되는 셈이다.

'특히 국왕은 소드마스터니까. 검을 다루는 사람이 팔 하나를 잃는다는 건... 끔찍한 일이지. 좀처럼 만회가 안 되는 일인 거야.'

그런 비극을 막아주기 위해서다.

타우랑가를 얻어야 한다.

그러자면 왕성을 뽑아야 한다.

로이드는 그런 자신의 진심을 피력했다.

다만, 운명의 복원 현상이나 그에 얽힌 이야기까지 자세히 풀어낼 수는 없었다.

그러자면 자신의 정체나 다른 차원, 대한민국, 소설 철혈의 기사 이야기까지 꺼내야 할 테니까.

'그런 이야기까지 안 꺼내고 설명하려면 이 부분은 대강 두루뭉술하게. 대신 내 진심만 잘 전해지도록. 그걸 국왕이 믿어주도록 분위기만 만들어 주면 될 거야.'

로이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믿었다.

국왕은 엄청난 사람이니까.

그저 미래를 조금 알고 있을 뿐인 자신보다도 훨씬 똑똑한 사람이니까.

눈치 빠른 국왕의 정치적 감각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국왕은 그런 로이드의 믿음에 정확히 호응해주었다.

"하."

그녀의 입가에 맺히는 실소.

이내 그 웃음이 쓰리게 변했다.

"그대는 정말이지. 고약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로구나."

"송구하옵니다."

"아니다. 그대를 믿지 아니할 수가 없군. 어차피 그대가 마음만 먹는다면 짐과 왕실에 해를 끼칠 방법은 많고도 많을 터이니. 굳이 이토록 복잡하고 어렵게 짐을 찾아와 부탁까지 할 필요조차 없을 터이니. 어찌 그대의 호언장담을 믿지 않을까."

알리시아가 자조적으로 말했다.

정말로 이건 믿을 수밖에 없다.

기실 매우 단순한 문제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로이드 프론테라. 저자는 이미 짐의 통제력을 벗어난 힘을 쥐었으니까.'

정말이었다.

너무나 강력한 본드래곤.

그랜드 마스터 하비엘.

두 존재가 로이드를 따르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강철모래 오크 부족.'

국왕은 정보원에게 보고받았던 내용을 떠올렸다.

동부 황야의 잠재적 위협인 오크 부족.

전사 하나하나가 막강한 전력이나 다름없는 야만족.

그 부족이 프론테라 가문과 혈맹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했다.

오크족의 혈맹이 되었다 함은 오크 종족의 일원이자 형제로 인정받았다는 뜻.

즉, 여차하면 온 세상의 오크 부족 연합이 프론테라 가문의 요청에 무기를 쥐고 전장에 나설 수도 있으리라는 뜻이었다.

'본드래곤. 아스라한 경. 오크 부족. 그 셋의 조합만으로도 이미 프론테라 백작가의 힘은 왕실을 뛰어넘었어. 아니, 마음만 먹는다면 당장 왕조를 세우는 것도 무난하게 가능할 터.'

한데 만약에 로이드가 자신이나 왕가에 해를 입히고자 작정한다면?

굳이 이렇게 복잡한 방법을 동원하진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번거롭게 자신을 찾아온다거나.

구차하게 요청을 한다거나.

그럴 필요도 없이 힘을 휘두르기만 하면 될 터였다.

'하니 지금 저자가 하는 요청의 의도를 믿어주는 편이 낫겠지.'

기왕 믿어주는 것이라면 시원하고 군더더기 없이.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더라도 티를 내지는 말고.

그러는 쪽이 로이드와의 신뢰 관계를 더욱 탄탄히 할 길로 보였다.

자신과 왕가에도 정치적 이득이 되리란 계산이 섰다.

생각을 정리한 국왕 알리시아가 말했다.

"좋다. 짐은 언제나 그대의 충성심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바, 이번에도 그 믿음은 변치 않을 것이다."

"실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쯧. 그놈의 성은. 항상 아쉬울 때만 찾는단 말이지."

"실로 송구하옵니다, 전하."

"그놈의 송구함은 할 말 없을 때만 찾고."

"...."

"너무 그렇게 무안한 표정은 하지 말도록. 짐도 그대의 요청 때문에 멀쩡한 왕성을 뽑히게 되지 않았는가. 다만 그대가 일을 벌일 때 짐의 왕성에 되도록 손상이 없었으면 한다만."

"물론이옵니다. 성심껏 시공하여 조금의 불필요한 손상도 없도록 하겠사옵니다."

"필요한 손상은 생길 것이고 말이지. 맞는가?"

"...."

"괜찮다. 이미 그대의 요청을 허락한 마당에 그 정도를 이해 못 할까. 대외에는 왕성 정기 보수를 특별한 방식의 공법으로 치르는 것이라 알릴 터이니 그대는 그렇게 알도록."

"알겠사옵니다, 전하."

"다만 그보다 먼저."

예를 표하려는 로이드.

그런 로이드를 국왕이 제지했다.

그녀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물었다.

"짐이 보기에는 우리가 아직 본론의 절반만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생각하는데.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지?"

"아, 전하의 고민을 해결할 방책을 하문하시는 것이시옵니까?"

"그러하다."

"지금, 여기서 자세히 듣기를 원하시는 것이시옵니까?"

"물론이지. 고하라."

"예, 그럼 혹여 귀를 빌려주실 수 있으시온지."

"가까이 오라."

알리시아의 허락이 떨어졌다.

로이드가 조심스레 그녀의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책상 위로 상체를 내밀고 최대한 낮춘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그의 꾀주머니에서 나온 속삭임이 국왕 알리시아의 귓바퀴로 스며들었다.

"그러니까 말이옵니다... 속닥속닥... 지난번 연회에서 본드래곤 때문에 구긴 왕가의 체면을 되살리려면... 어쩌고저쩌고... 제법 충격적인 상황을 만들어야 할 터이니... 미주알고주알... 전하께서는 설령 주위의 반대가 있더라도... 재잘재잘...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오며... 블라블라...."

로이드는 열심히 꾀주머니를 털었다.

혼신의 정성을 담아 혀를 놀렸다.

그러는 동안 국왕 알리시아의 눈빛이 변했다.

"...."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을까.

당혹스러운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의 고민에 이은 빠른 결단이 내려졌다.

"좋다. 그대로 시행하라."

"실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성공을 확신한 로이드의 미소가 국왕의 집무실에 번졌다.

 

 

보름이 지났다.

그동안 마젠타노 왕실은 연일 복작거렸다.

지난 몇 달간 열심히 복구하고 재정비한 테르미나 대정원.

그 대정원의 재완공을 기념하는 연회가 준비되었기 때문이었다.

"쯧쯧. 이런 행사 하나 연다고 뭐가 달라질까."

"그러게나 말입니다. 허허허."

마침내 연회가 열리는 날 저녁.

왕도 마젠타에 체류하는 각국의 외교 대사와 주요 인사들의 마차가 속속 대정원에 도착했다.

하지만 마차에서 내리는 초청객들의 표정은 미묘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들의 입가에는 비웃음이 희미하게 걸려 있었다.

마젠타노 왕가를 향한 조소였다.

"이건 우리끼리만 하는 이야기인데 말이지. 마젠타노 왕가 말이야. 최근 군비를 늘리니 어쩌니 하며 한창 힘을 과시해온 것 같지만, 은근히 내실이 없는 것 같지 않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사님?"

"쉿. 목소리 낮추게나. 자네가 내 보좌관으로 근무한 지 얼마나 됐지?"

"이 년쯤 됐습니다."

"쯧. 그러니 내 말뜻을 알아채지 못하는 거겠지. 잘 들어보게. 만약 내가 국왕 알리시아였다면 말일세. 지난번의 본드래곤 난동과 같은 사건을 겪은 상황에서라면 이런 연회, 열지도 않았을 걸세. 대신 대규모의 군사 퍼레이드를 선보였겠지."

"군사 퍼레이드를 말입니까?"

"그래. 지난번 본드래곤 난동 말일세. 당시에 마젠타노 왕가가 얼마나 속수무책인 모습을 보였는가. 게다가 연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그걸 낱낱이 다 보아 버렸지. 그래서 하는 이야기일세. 백날 군사력을 키워두면 뭘 하나. 이럴 때 써먹어야지. 사람들 앞에 힘을 보여야지."

"그러는 쪽이 지난번 사건으로 실추된 마젠타노 왕가의 권위를 세우는 데 도움이 될 거라는 말씀이신 겁니까?"

"그렇지. 바로 그거지. 이딴 살랑거리는 연회 따위로는 아무것도 바꾸질 못해. 한데 겨우 왕가의 체면을 차리겠답시고 기획하는 행사가 지난번과 하등 다를 바도 없는 연회라니. 쯧쯧.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 뭘 하나. 실속도 찾지 못하면서. 그렇지 않나?"

"아, 예. 그런 것 같습니다."

인접국 외교 대사의 비웃음.

그에 동의하는 보좌관.

비단 두 사람만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오늘, 연회에 참석하는 거의 모든 각국의 외교관과 초청객들이 비슷한 숙덕거림을 나누고 있었다.

겨우 이런 연회 따위로는 아무것도 만회하지 못할 것이라고.

오히려 각국의 비웃음만 살 뿐이리라고.

한데 국왕 알리시아는 그런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고.

혹시 그녀의 정치적 감각이 예전만 못한 것은 아니냐고.

다 같이 비웃고.

대다수가 의구심을 드러내며.

오늘의 연회를 개최한 마젠타노 왕가를 평가절하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꿈에도 몰랐다.

연회장에서 수 킬로미터 떨어진 국왕 전용 사냥터 숲 속.

그 울창한 숲의 어둠 속에서, 오늘의 행사를 빛낼, 매우 충격적이고도 특별한 호스트가, 로이드의 당부를 받으며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러니까 오늘 잘해야 된다. 알았지?"

 

삐그덕!

 

초대형 나비넥타이와 턱시도를 걸친 본드래곤.

용용이가 성대한 손님맞이를 준비하며 비장한 각오를 다졌다.

275화. 특별한 호스트 (1)

 

 

"그러니까 오늘 잘해야 된다. 알았지?"

 

삐그덕!

 

싱긋 웃으며 이쪽을 올려다보는 로이드.

세상에서 제일 멋진 자신의 주인님 로이드.

비견할 수도 없이 상큼하게 절대적인 골병대의 대장님 로이드.

그 주인님의 당부에 본드래곤, 용용이는 커다란 두개골을 야물딱지게 끄덕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역시 우리 주인님이 최고라고.

정말이지 너무나 보고 싶었노라고.

'삐그덕! 삐덕!'

용용이는 목에 두른 초대형 나비넥타이를 매만지며 그동안의 나날을 떠올렸다.

외로웠다.

심심했다.

로이드와 지옥에서 재회했을 땐 정말 기뻤는데.

함께 헬게이트를 타고 왕도로 돌아올 때도 진심으로 신났는데.

그런 기쁨과 환호는 잠깐에 불과했다.

당시 로이드가 했던 당부 때문이었다.

 

'용용아? 넌 지금 여기 사람들 눈에 띄면 난리 나니까 좀 숨어 있어라. 일단 저쪽. 저기가 동쪽이야.'

 

...라고 했던가.

뒤이어 로이드가 명령도 내렸더랬다.

 

'저 동쪽으로 계속 날아가다 보면 완전 큰 산맥이 하나 나올 거거든? 그게 동부산맥이라는 건데. 당분간 거기서 좀 놀고 있어. 행여나 오크들 만나면 친하게 지내고. 우리 용용이 착하지. 말 잘 들으면 나중에 골병대 형아들 소개해 줄게. 자, 실시.'

 

...라는 명령이었다.

당연히 그대로 움직였다.

주인님인 로이드의 명령인데 거스를 이유가 없었다.

열심히 동부산맥으로 날아갔다.

산맥 깊은 곳에 있는 호수에서 오랜만에 목욕도 했다.

그러다가 오크 부족을 만났다.

오크 부족이 포효하며 자신을 반겨주었다.

덕분에 로이드의 당부와 명령이 새삼 떠올랐더랬다.

오크들 만나면 친하게 지내라고 했으니까.

명령을 충실히 따르겠단 일념으로 마주 반가움의 포효를 질러 주었다.

그랬더니 오크 전사들이 아주 자지러졌다.

실로 열광적인(?) 반응이었다.

그런 인사는 처음 받아봤다.

오크들이 자신의 몸 위로 기어 올라왔다.

각종 전투 도끼와 창, 해머로 전신을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때로는 로프로 온몸을 묶어서 당기고 비틀고 꺾어주기도 했다.

마침 오크 전사들은 힘도 참 좋았다.

대만족이었다.

어설프게 깔짝대는 안마나 도수치료보다 훨씬 화끈하고 시원했다.

그때부터였더랬다.

매일 동부산맥 카푸아 호숫가에서 오크 전사들과 어울려(?) 노는 것이 본드래곤 용용이의 일상이 되었다.

신나는 매일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흉골 한쪽에 쟁여둔 허전함은 가시지 않았다.

로이드가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삐덕... 삐그덕....'

아무리 오크들과 신나게 놀아도.

시원한 안마를 받으며 개운함에 취해도.

그런 것들로는 결코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

주인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열심히 아양도 떨고.

공사도 팍팍 하고.

칭찬도 듣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기회가 좀처럼 오지 않았다.

로이드가 자신을 부르지 않았다.

심지어 산맥 바로 아래 영지로 돌아와 놓고서도 그랬다!

'삐덕....'

서운했다.

하지만 참았다.

로이드가 자신을 부르지 않는 이유.

골병대 형아들을 소개해 주지 않는 이유.

그 모든 이유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삐그덕....'

자신이 못생겼기 때문이라고.

특히 두상이 못생겨서 그런 거라고.

그래서 남들한테 보여주기 부끄러워서 저러는 것이리라고.

문득문득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마음이 움츠러들고 견갑골이 쭈굴해지며 이 세상의 존재 자체로 반칙인 존잘러들을 향한 부러움의 감정만 서글프게 쑴펑쑴펑 샘솟았다.

서글펐다.

서러웠다.

오크 전사들과 노는 것도 싫증이 났다.

비뚤어지자고 마음먹었다.

온종일 호수 바닥에 틀어박혀 지냈다.

한데 그렇게 지내던 얼마 전이었던가.

갑자기, 아무런 예고도 없이, 불현듯.

로이드에게서 신호가 왔다!

'...삐덕!'

삐쳤던 것도 무색하게 벌떡 일어나 호수를 박차고 날아올랐던가.

언데드의 지배 스킬이 제공하는 영혼의 연결.

그 연결이 알려주는 로이드의 위치를 향해 반갑게 날개 퍼덕였던가.

그렇게 순식간에 왕도까지 날아왔다.

로이드와 모처럼의 해후를 만끽했다.

그리고 오늘, 믿기지 않는 임무를 받게 되었다.

"명심해. 오늘 연회의 주인공은 누구다?"

 

삐더덕!

 

"그렇지. 바로 너야. 네가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서 오늘 연회의 성패가 갈릴 거야. 그러니까 네가 오늘의 주인공이란 거지. 그러니까 넌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

 

삐덕!

 

"오케이. 잘 기억하고 있네. 아까 내가 읊어준 대본대로. 내가 신호하면 정해둔 장소로, 약속된 자세로 등장하기. 최대한 박력 있고 박진감 넘치게. 그다음은?"

 

삐그덕!"

 

"옳지. 잘 기억하고 있구나. 국왕 누님이랑 호흡 잘 맞춰서. 알았지?"

 

삐덕!

 

"좋아. 아유. 요 똑똑한 녀석. 이번 일만 제대로 해내면 이제부턴 사람들 앞에 당당히 모습 드러낼 수 있는 거야. 더는 숨어지내지 않아도 되는 거지. 그러니까 화이팅?"

 

삐더덕!

 

당부를 마치고는 먼저 연회장으로 가는 로이드.

그의 뒷모습을 향해 용용이는 힘껏 두개골을 끄덕였다.

내심 각오를 다졌다.

오늘 일만 잘 해내면 된다.

그러면 로이드와 마음껏 함께 있을 수 있다.

각오를 다지며 용용이는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혹시나 나비넥타이가 비뚤어지진 않았는지.

초거대 맞춤형 턱시도가 주름진 곳은 없는지.

계속 보고, 살피고, 또 점검했다.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삐더덕....'

혹시나 자신이 못생겨서 사람들이 놀라 버리면 어떡하지.

괜찮다는 로이드의 말에도 자꾸만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 잠시 후.

연회장에 건너가 있는 로이드에게서 신호가 왔다.

 

'지금!'

 

투확!

 

로이드의 신호를 받은 순간, 용용이는 날아올랐다.

초거대 턱시도 꽁지깃을 펄럭이며 밤하늘 높이 비상했다.

비상하자마자 보름달이 떠올라 있는 방향과 각도를 확인했다.

연회장과 보름달 사이.

그래서 연회장에서 봤을 때 보름달을 가릴 수 있는 위치.

덕분에 자신의 실루엣이 밤하늘 가득 새겨질 수 있을 그런 위치.

그곳으로 재빨리 날아갔다.

그리고 보름달을 가리고서 포효했다.

 

...!

 

적당히 조절된 소리 없는 포효.

포효에 담긴 충격파가 밤하늘을 쩌렁쩌렁 흔들었다.

수 킬로미터 떨어진 연회장의 모든 사물을 뒤흔들었다.

악사들의 악기를 제멋대로 공명시켰다.

누군가의 잔 속 와인을 출렁이게 했다.

오늘의 연회와 마젠타노 왕가를 비웃던 어느 외국 외교관의 온몸을 움찔 떨리게 했다.

"보, 본드래곤이다!"

찢어지는 듯한 비명.

밤하늘을 가리키며 쏟아내는 두려움.

공포의 물결이 순식간에 연회장을 휘감았다.

초청객들은 생각했다.

하필이면 오늘이라니.

지난번 연회도 본드래곤의 습격으로 엉망진창이 되었는데.

그걸 만회하겠다며 마젠타노 왕가가 주최한 오늘 연회에마저도 공교롭게 드래곤이 나타나다니.

한데 하필이면 이런 연회에 자신이 참석해서 희생자가 될 판국이라니.

억울했다.

두렵고 무서웠다.

악몽 같다는 생각만 들었다.

지난번의 연회에서도 마젠타노 왕가가 본드래곤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했었기에.

속수무책인 모습만 보였었기에.

오늘도 마찬가지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 와중에 자신이 희생자가 될 거란 절망적인 예감만 들었다.

그렇듯 모든 참석객들이 공포에 휩싸인 사이.

마침내 본드래곤이 연회장에 내려앉았다.

 

콰아앙-!

 

"꺄아악!"

"사람 살려!"

지축을 뒤흔드는 엄청난 착지.

우뚝 선 것만으로도 밤하늘을 온통 뒤덮는 위용.

모두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온몸이 싸늘하게 식는 공포감.

난 이제 꼼짝없이 죽었구나.

도망칠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러기엔 다리가 굳어 버려서.

차마 도망칠 용기조차도 나질 않았다.

한데 그때였다.

보름달 달빛이 본드래곤의 모습을 환하게 비추었다.

그리고 모두는 저도 모르게 눈을 부비적거려야 했다.

"...어?"

어째서 저 본드래곤이 턱시도를 입고 있는 걸까.

게다가 목에 두르고 있는 저 나비넥타이는 대체 뭘까.

설마 요즘 드래곤들은 정복 입고 사람 잡아먹는 게 유행인 걸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이 모두의 대뇌피질 한구석을 점령한 순간.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나의 본드래곤이여. 절대적 파괴자이자 마젠타노 왕가의 수호자. 또한, 나의 충실한 종이여. 모두를 함부로 놀라게 하지 말라."

국왕 알리시아가 나섰다.

본드래곤을 향해 걸어갔다.

오직 검 한 자루만 허리에 차고서.

심지어 그걸 뽑아들지도 않고서.

너무나 여유롭고 당당한 걸음걸이로.

마치 자신의 신하를 향해 걸어가듯이.

아무런 거리낌조차 없이 본드래곤을 향해 다가갔다.

그 순간 모두는 생각했다.

아, 국왕 알리시아는 아직 미혼인데.

그래서 왕위를 넘겨줄 후사가 없는데.

마젠타노 왕가의 족보가 오늘 끊기는구나.

한데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모두가 예감했던 것처럼 본드래곤이 국왕을 짓밟거나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대신 국왕을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공손하고도 극진하며 조심스럽게.

마치 충실한 강아지가 주인에게 머리를 맡기듯.

몸을 낮추어 엎드리고서, 턱을 바닥에 깔고서, 국왕을 향해 이마를 내밀었다.

그리고 국왕 알리시아가 검을 뽑았다.

본드래곤의 양쪽 관자놀이를 향해 검을 살포시 내려놓았다가 떼었다.

톡톡 짚어주듯이.

혹은 기사 서임 때 어깨를 터치하듯이.

"짐도 그대의 마음을 알고 있노라. 그대가 지난번 난동에 대한 죄책감과 책임감을 품고 있음도, 반성하려 노력하고 있음 또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 다만 짐은 그대가 죄책감에 괴로워하기보다는 왕가를 수호하는 것으로 과오를 만회하여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삐그덕!

 

본드래곤이 커다란 두개골을 끄덕였다.

국왕 알리시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서렸다.

"하면 그대는 마젠타노 왕가의 당당한 신하이자 오늘 연회의 특별한 호스트로서 참석객들을 안심시켜줄 수 있겠는가?"

 

삐덕!

 

재차 고개를 끄덕이는 본드래곤 용용이.

녀석의 시선이 참석객들을 향해 돌아갔다.

눈길 마주친 참석객들이 움찔했다.

대체 이게 어떻게 굴러가는 상황인 건지.

혹시 자신이 한바탕 괴랄한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지.

착각과 의아함의 잡탕스튜찌개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심정으로.

애꿎은 마른침만 꿀꺽 삼켰다.

그리고 용용이가 일어섰다.

턱시도 속에 숨겨둔 물건을 꺼냈다.

그것은 거대한 팻말 몇 장이었다.

팻말엔 로이드가 써둔 문구가 큼직하게 새겨져 있었다.

 

[해치지 않아요.]

 

"...."

모두의 압도적 침묵.

그 속에서 용용이가 다음 팻말들을 차례로 꺼냈다.

 

[물지 않아요.]

 

팔락!

 

[때리지도 않아요.]

 

"...."

그것참 다행이긴 한데.

근데 너한텐 재채기로 맞아도 아파서 죽을 거 같은데.

모두가 생각하는 사이 마지막 팻말이 드러났다.

 

[본드래곤 용용이는 여러분의 친구♡]

 

"...."

네, 그렇게 여겨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모두의 황망한 침묵 속에서 본드래곤이 팻말을 갈무리했다.

두 앞발로 손가락 하트를 발사했다.

그리고 얌전히 앉았다.

갓 '앉아' 명령을 배운 강아지가 그러하듯.

바닥에 궁디 깔고 고개 꼿꼿이 세우고서 얌전히 자리를 지켰다.

그 모습까지 보고서야 비로소.

"...아, 하하... 하하하?"

"저건... 허어, 이건... 허허허."

참석객들 사이에서 침묵이 걷히기 시작했다.

비로소 모두는 조금씩 깨달을 수 있었다.

저 본드래곤이 오늘 연회장을 습격한 것이 아님을.

그저 연회에 '참석한 것'임을.

심지어 그게 국왕 알리시아의 명령에 따른 결과임을.

그러니까, 즉....

'마젠타노 왕가가 정말로... 본드래곤을 제압했던 거였단 말인가? 그래서 본드래곤이 국왕 알리시아의 신하가 된 거라고?'

지난번 본드래곤의 난동.

당시에 마젠타노 왕가가 대처를 못했다고.

본드래곤 앞에서 무력하기만 했었노라고.

모두가 비웃음을 보냈었다.

고소하다고도 생각했었다.

물론 마젠타노 왕가가 그 비웃음을 반박하긴 했다.

치열한 격전 끝에 본드래곤을 완전히 제압했노라고 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 주장을 믿어주지 않았다.

그저 허풍일 뿐이리라고.

왕가의 체면을 세우기 위한 면피용 주장일 거라고.

모두가 그렇게 헛소리 취급을 했었는데....

'그 주장이 사실이었던 거야. 진짜로 마젠타노 왕가가... 본드래곤을 제압하고 신하로 만들었어.'

뒤늦은 그 깨달음의 순간.

모두의 눈동자가 경악에 휩싸였다.

'미친. 본드래곤을 신하로, 전력화한 거라고?'

그 뜻은 명확했다.

보통의 드래곤보다도 한층 강한 본드래곤.

그런 존재를 제압하고 길들여 신하로 만들었다면?

'이제 로라시아 대륙에서 마젠타노에 단독으로 맞설 수 있는 나라는 없어졌구나.'

마젠타노가 명실상부 최강국이 되었다.

아무도 범접할 수 없게 되었다.

 

꿀꺽.

 

각국 외교관들의 목울대가 출렁거렸다.

바삐 움직이는 그들의 눈동자만큼이나 머릿속도 복잡해졌다.

그들의 얼굴에선 이제 비웃음 한 자락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비웃기보단 본국에 이 사실을 빨리 알려야 한다고.

아울러 향후 당분간은 마젠타노와 어떤 대립도 하여선 안 되리라고.

불안감에 휩싸여 생각했다.

압도감을 느끼며 확신했다.

연회장 한쪽에 있던 로이드는 그 모습을 구경하며 싱긋 웃었다.

'어휴. 다들 눈동자 굴러가는 소리 여기까지 들린다, 아주.'

그동안 마젠타노 왕가와 국왕 알리시아를 비웃던 각국 외교관들.

그들의 당황하는 모습을 보자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아울러 확신할 수 있었다.

오늘의 계획, 너무나 성공적이라고.

하니 이제 국왕 알리시아가 약속대로의 선언을 해주면 된다고.

하면 모든 계획이 완성되는 것이라고.

과연 잠시 후.

국왕 알리시아가 연회장의 모두를 굽어보았다.

명실상부 로라시아 대륙 최강국으로 군림하게 된 마젠타노 왕가의 국왕.

불굴의 군주 알리시아 테르미나 마젠타노.

그녀가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짐이 이 자리를 통해 모두에게 알리노라."

어느새, 그녀가 로이드를 지목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길을 따라.

연회 참석객들의 시선이 로이드를 향해 집중되었다.

276화. 특별한 호스트 (2)

 

 

"짐이 이 자리를 통해 모두에게 알리노라."

불굴의 군주.

국왕 알리시아 테르미나 마젠타노.

그녀의 목소리가 연회장 구석까지 퍼졌다.

그녀의 손가락이 한쪽을 가리켰다.

모두의 눈동자가 그쪽을 향했다.

그곳에 로이드가 있었다.

"오늘 공개한 바와 같이 본드래곤은 마젠타노 왕가의 충복이 되었도다. 하나 이는 비단 짐과 왕실만의 치적은 아닌바, 만인이 여태껏 모르고 있는 숨은 공로자가 있음을 밝히는 바이다."

숨은 공로자?

각국의 외교 대사들, 왕도 마젠타의 귀족들, 그 밖의 주요 인사들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저마다의 생각과 계산이 바빠졌다.

그 사이, 국왕의 선언이 이어졌다.

"그 공로자는 모두가 보고 있는 로이드 프론테라와 그의 호위기사인 하비엘 아스라한이다. 지난 테르미나 대정원 완공 기념 연회에서 본드래곤이 난동을 부렸던 날, 오직 저 두 사람이 가장 먼저 용기 있게 나섰으며, 검을 뽑아 짐과 어깨를 나란히 하였노라."

검을 뽑아 어깨를 나란히.

국왕과 함께 싸웠다는 뜻이었다.

저 본드래곤에 맞섰다는 뜻이었다.

모두의 눈동자에 놀라움과 경탄이 떠올랐다.

"특히 로이드 프론테라. 그는 목숨을 아끼지 않으며 분투하였고, 짐을 보호하기 위하여 분전하였으며, 마침내 본드래곤 제압에 가장 혁혁한 공을 세웠도다. 하여 짐이 이 자리를 통하여 선포하노라."

모두가 국왕과 로이드를 번갈아 보았다.

귀를 쫑긋거렸다.

국왕의 선포가 떨어졌다.

"짐은 프론테라 백작가의 장남 로이드 프론테라를 마젠타노 왕가의 공신으로 임명하는 바이다. 따라서 향후 로이드 프론테라는 국왕의 면책 특권을 누리게 될 것이며, 어떠한 경우에도 불명예스러운 체포를 당하지 않을 것이고, 귀족원의 판결이 아닌, 짐의 지엄한 판결만이 오롯이 그를 심판할 수 있을 것이다."

"...!"

각국의 외교대신.

왕도의 유력가 귀족들.

모두의 눈이 경악으로 홉떠졌다.

왕가의 공신으로 임명.

국왕의 면책 특권.

하나같이 파격적인 선언이었다.

그럴 법도 했다.

왕가의 공신 지위는 말 그대로 아무에게나 내리는 것이 아니었다.

개국공신에 버금가는 혁혁한 공을 세우거나.

쓰러져 가는 왕실을 떠받쳐 재건하거나.

왕가를 몰락에서 구원하거나.

국가가 멸망할 위기를 막아내거나.

기타 등등.

말 그대로 나라를 구한 자에게만 내려지는 파격적인 지위였다.

따라서 권한 또한 막강하기 그지없었다.

공신이라는 지위 하나만으로도 왕가의 방계인 공작, 후작에 버금가는 대우와 발언권을 누릴 수 있었다.

그 밖에도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특권이 내려졌다.

특히 그중에서도 백미는 국왕의 면책 특권이라 할 수 있을 것이었다.

어떠한 일로도 불명예스러운 체포를 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설령 역모에 연루된다 해도 그랬다.

심지어 귀족원의 판결을 받지 않을 권리가 주어졌다.

따라서 공신을 처벌하려면 반드시 국왕의 판결이 필요했다.

그 뜻은 명확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

국가의 공식적인 2인자.

국왕을 제외한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권한.

마젠타노 왕가에서도 근 130년간 출현한 적이 없는, 그런 지위.

그러한 권한과 지위를 지닌 존재가 이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탄생한 셈이었다.

'이게 무슨....'

각국 외교관들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공신 임명.

이건 본드래곤의 복종에 버금가는 빅뉴스였다.

향후 마젠타노 귀족계의 권력 중심이 바뀔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 미래를 직감한 각국 외교관들은 본국으로 보낼 급보의 내용을 고민하느라 때아닌 번뇌에 휩싸였다.

고민과 번뇌에 휩싸인 것은 왕도 마젠타의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허허. 허허허.'

귀족들은 저마다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로이드 프론테라.

그저 동부 구석에 박혀 있는 시골 가문의 장남일 뿐이었다.

중앙 귀족인 자신들이 몇 년 전까지는 들어본 적도, 관심을 가져본 적도, 신경을 써본 적조차 없는, 그저 그런 무명인사에 불과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로이-하비 현수교 건설을 시작으로.

국왕 시해 시도를 막아냈다.

그 과정에서 그의 호위 기사가 소드마스터였음이 알려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왕국 동부를 휩쓴 몬스터 도미노 사태를 막아냈다.

수만 명의 피난민을 받아들이고, 성공적으로 정착시켰다.

덕분에 왕실로부터 동부 재건의 중임을 받았다.

그의 가문이 백작가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평범한 백작가의 장남이 아닌, 공신으로 임명되었다.

무려 130년 만에 탄생한 공신 가문이었다.

'내 살아생전에 이런 광경을 보게 될 줄이야....'

국왕과 왕가에 진심으로 충성하는 귀족들은 가슴이 뜀을 느꼈다.

주먹 불끈 쥐고서 감격을 되삼켰다.

공신으로 임명된 로이드 프론테라.

그의 드높아진 명예에 진심으로 탄복하였다.

반면 왕가에 대한 충성심보다 권력에 관심이 많은 몇몇 귀족들은?

'저런 근본도 없는 시골뜨기 따위가 어떻게 감히....'

서늘한 눈빛으로 로이드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런 내색도 할 수 없었다.

뒤이어 떨어진 국왕의 선포 때문이었다.

"또한 짐은 알리노라. 실로 뜻깊은 오늘, 짐은 왕가에 충성하는 본드래곤을 왕가의 공신, 프론테라 백작가에 파견할 것이다. 예정된 파견 기간은 짐의 별도의 명이 있을 때까지이며, 그 시간 동안 본드래곤은 프론테라 백작가의 동부 재건 작업에 힘을 보태게 될 것임을 선포하노라."

"...."

이제는 아무도 웃지 못했다.

모두가 경악에 휩싸였다.

명예와 권한, 특혜, 그다음엔 막강한 힘까지.

압도적이었고, 파격적이었다.

로이드를 내심 고깝게 바라보던 귀족들조차도 이제는 함부로 시기하거나 질투할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한 모두의 모습에 국왕 알리시아는 피식, 희미한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녀의 눈길이 로이드를 향했다.

'역시. 로이드 프론테라. 이 약삭빠르기 그지없는 자. 그대가 말한 대로야.'

문득 떠올랐다.

보름 전, 로이드가 자신의 집무실로 쭐레쭐레 찾아온 때였던가.

"전하. 제가 전하께 본드래곤을 빌려드리겠사옵니다. 하오니 전하께서도 공식석상에서 제게 본드래곤을 빌려주겠노라 선포해주시면 될 것이옵니다."

...라고 그가 말했었다.

하여 자신이 반분하였다.

"그대가 짐에게 본드래곤을 빌려줄 터이니, 짐도 그대에게 본드래곤을 빌려준다고 선포하라는 말인가?"

"그렇사옵니다, 전하."

이쪽으로 다가와 속닥이는 로이드.

그가 영악한 미소 떠올리며 말했다.

"지금 전하께서는 지난번 본드래곤 사태에서 구겨진 왕가의 체면을 어찌하면 되살릴까 고민하고 계시지 않사옵니까. 하여 그 고민을 해결할 가장 확실한 방법이 이것이라 생각하였사옵니다."

"설마 그때와 똑같이 연회를 열어서 본드래곤을 공개하자는 것인가?"

"바로 그렇사옵니다, 전하."

"본드래곤에 놀란 이들을 본드래곤으로 안심시키라는 뜻이로군."

"예, 전하. 바로 그것이옵니다. 전하께오서 고민하시는 왕가의 체면이 무엇 때문에 손상되었사옵니까. 바로 본드래곤의 난동 때문이었사옵니다. 하오니 모두가 보는 앞에서 본드래곤의 충성을 받아내는 모습을 보이시면 될 것이옵니다."

"과연. 그럴듯해."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본드래곤 때문에 당한 망신을 본드래곤으로 만회한다.

이것보다 확실한 방법이 어디 있을까.

"하면, 그대에게 본드래곤을 빌려주겠노라 선포를 하라는 것은, 흐음, 알겠어. 주위의 눈치를 보고 싶지 않다는 뜻인 거겠지?"

"...아하하. 역시 제 마음을 알아주시는 이는 전하밖에 없사옵니다."

어색하게 웃는 로이드의 모습.

그 모습을 통해 확신할 수 있었다.

'이자는 정말로 시골에서 평온하게 살아가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로구나.'

로이드가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

그가 무슨 생각으로 자신을 찾아왔는지.

비로소 대략적으로나마 알 것 같았다.

'이자는 본드래곤을 복종시켰지. 하지만 지금껏 국내 어디에서도 본드래곤이 목격되었다는 이야기가 없었어. 그 뜻인즉, 이자가 그동안 본드래곤을 철저히 숨겨왔다는 뜻일 터. 아마도 불필요한 의심이나 구설수에 휘말리기 싫었던 것이겠지.'

왕도를 발칵 뒤집어엎은 본드래곤.

그 뒤로 홀연히 사라진 본드래곤.

한데 프론테라 가문의 장남이 본드래곤을 부린다?

그 사실이 알려졌다면 크나큰 파문이 일었을 것이었다.

'날 배려해 주었고, 계속 그러려는 것인가. 그동안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새삼 눈앞의 로이드가 새롭게 보였다.

실상은 로이드가 지배하고 있는 본드래곤.

그런 본드래곤이 왕실에 충성하는 것처럼.

본드래곤이 왕가의 소유물이 된 것처럼.

대외에 알리라고 조언하고 있었다.

'게다가 프론테라 가문에 본드래곤을 빌려주는 것이라 선포한다면. 그래. 그때부턴 이자도 부담 없이 본드래곤을 부릴 수 있겠지. 동시에 나와 왕가의 권위도 손상되지 않을 터이고.'

로이드는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며 본드래곤을 쓸 수 있게 되고.

자신은 국왕으로서의 권위를 손상받지 않고.

서로가 이득을 누리게 될 방법이었다.

게다가 잠재적인 이득이 또 있을 터였다.

"흐음, 좋아. 그대의 제안을 고맙게 받아들이지. 그대의 말대로 일이 진행된다면 향후 국내외의 모두가 짐과 본 왕가를 한층 조심스러운 눈으로 보게 될 터이니."

"예, 역시 그러할 것이옵니다."

"맞아. 본드래곤의 난동 때문에 실추됐던 본 왕가의 위신. 그동안 모두가 짐과 본 왕가를 내심 비웃고 있었겠지. 지금 또한 그러할 테고. 하지만 그대의 조언대로 보름 후 연회장에서 짐에게 충성하는 본드래곤의 모습을 공개한다면. 하. 모두가 돌이켜보게 될 것이야. 그동안 짐과 본 왕가가 대외에 보였던 침묵과 인내가 어떤 의미였는지를."

"그러하옵니다, 전하. 그들은 이번에 유지하였던 전하와 왕실의 차분하였던 대응을 '강자의 침묵', 혹은 '패왕의 살생부 작성 기간'으로 인식하게 될 것이옵니다."

"그렇겠지."

그 말이 사실이 되리라.

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는 사실이 아니지만.

이번 일로 자신과 왕가를 비웃었던 이들은 그렇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사실은 마젠타노 왕가가 정말로 본드래곤을 제압했던 것이구나, 라고.

한데 왕가를 향한 비웃음에도 일부러 침묵하고 있었구나, 라고.

그렇게 침묵하는 시간을 통해 오히려 모두의 반응을 평가하고 있었구나, 라고.

"그렇게만 된다면, 이번 일을 전례로 삼아 향후 그 어떤 국내외의 잠재적인 적들도 짐과 본 왕가를 쉽게 보지는 못하겠지."

"그럴 것이옵니다, 전하. 설령 왕가에 불리하거나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한다 하여도 이번 일을 전례로 삼아 반드시 한 번은, 전하와 마젠타노 왕가의 침묵을 조심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될 터이옵니다."

"그럴 테지. 이번 일을 전례로 삼아서."

모두가 쉽게 보지 못하는 자신과 마젠타노 왕가.

그렇게 지속적으로 얻어갈 무형의 권위와 정치적 지배력, 그 밖의 이득이 막대할 터였다.

'역시, 그대가 말한 대로야.'

상념에서 벗어난 국왕 알리시아는 연회장을 쓸어보았다.

각국의 외교 대사들.

왕도의 주요 귀족들.

저마다 경악과 충격에 휩싸인 모습들.

예상 그대로의 반응이며, 모습이었다.

만족스러웠다.

특히 로이드 프론테라의 경악에 휩싸인, 평소라면 좀처럼 볼 수 없을 희귀한 모습이 제일 만족스러웠다.

'그대는 그저 본드래곤에 관련된 선포만을 부탁하였지. 하지만 짐의 생각은 달라. 사실 본드래곤이야 원래부터 그대의 것. 한데 그걸 빌려주는 척만 하라니. 그러면 짐이 너무 그대의 꼭두각시 같잖나.'

그래서였다.

로이드에게 예정에 없던 특별한 선물을 떠안겨 버렸다.

본드래곤에 관련된 선포.

그 외에 자신만의 선포를 끼워 넣었다.

로이드를 왕실의 공신으로 임명하는 선포였다.

그러한 예기치 못한 지위를 떠안은 덕분일까.

로이드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런 로이드를 향해 국왕이 살풋 눈웃음을 보냈다.

로이드는 씁쓸해지려는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와나. 이거, 국왕 누님한테 한 방 먹었네.'

역시 보통이 아닌 분이구나.

절대로 만만하게 휘둘리는 사람이 아니구나.

아니, 쉽사리 보고 대하다간 오히려 이쪽이 한 방 먹는 거구나.

절로 드는 그런 생각에 쓴웃음만 나왔다.

'후아. 공신의 지위라니. 이거 실화인가.'

요청한 적도.

예상한 적도.

전혀 없었다.

덕분에 그는 느낄 수 있었다.

'국왕 누님, 아예 날 정치적인 동반자, 혹은 운명 공동체로 묶어 버리려는 거네.'

가감 없이 내보이는 그런 의도가 느껴졌다.

'내가 지닌 힘이 왕실의 것을 넘어섰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그런 상태에서 날 견제하기보단 아예 확 끌어당기는 쪽을 선택한 거겠지.'

저런 결정,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보통은 신하의 힘이 강력해지면 어떻게든 끌어내리거나 말려 죽이려 들 텐데.

국왕 알리시아는 오히려 이쪽을 왕가와 정치적 운명 공동체로 엮어 버리려 들고 있었다.

공신에게 주어지는 강력한 특권.

특히 면책 특권을 보자니 그런 의도가 더욱 또렷하게 느껴졌다.

'귀족원이 날 견제하지 못하게 됐으니까. 오직 국왕 누님만이 나한테 법적 판결을 내릴 수 있게 됐으니까. 그건 즉 나나 우리 가문이 곤경에 놓였을 때, 함께 정치적 책임과 지탄을 감내하겠다는 뜻이겠지. 그렇게 해서라도 날 쉽게 놓아주진 않겠다는 거겠지. 하여간 대단한 분이야.'

아마도 자신이 지닌 찬사, '마젠타노를 업은 자'가 이번 결정에 큰 영향을 준 것이 아닐까.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어쨌건, 덕분에 얻을 건 다 얻었어.'

공신이 됐건 말건.

자신의 목표에는 변화가 없을 터였다.

'운명의 복원 현상을 막아낸 뒤엔 영지에서 꿀만 빨면서 살 거니까.'

로이드는 철저한 인생 계획을 새삼 되새겼다.

앞으로도 국왕의 어떠한 달콤한 회유와 떡밥에도 절대 흔들리지 말자고. 자신의 미래는 오로지 평생 뒹굴대는 건물주적 백수의 삶이어야 한다고.

굳은 다짐과 각오를 뼛속까지, 아니, 심장과 골수와 십이지장 융털돌기와 영혼의 뿌리 밑바닥에까지 야물딱지게 새겨두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보옥의 핵심 자재인 '타우랑가'를 얻기 위한 그의 왕성 뽑기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277화. 더 뻔뻔한 요구 (1)

 

 

이곳은 왕도 마젠타의 왕성.

드래곤에게 뽑히지 않는 것을 목표로 만들어진 구조물.

그래서 땅속에 반쯤 묻힌 계란형 외관을 지닌, 독특하고도 육중한 건축물.

로이드는 그러한 왕성 내부를 꼼꼼하게 살피고 있었다.

'어디 보자... 측량.'

 

[스캔을 시작합니다.]

 

츠츠츠츠츠!

 

측량 스킬을 발동했다.

그의 시야가 닿는 곳마다 갖가지 정보가 들어왔다.

현재 보고 있는 지점의 구조와 하중, 강도, 결합 방식 등등.

보이지 않는 정보가 없었다.

심지어는 땅값까지 보였다.

측량 스킬의 첫 번째 전용 옵션도 함께 발동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딩동.

 

[스킬 전용 옵션 ① : 토지 가격 감정이 발동됩니다.]

[측량한 지형의 현재 시점 토지면적당 단가를 감정합니다. (오차율 +/-5%)]

 

솔직히 개인적으로 좀 궁금했다.

이 왕국의 노른자 중심지인 왕성 땅값은 얼마나 될까.

그래서 왕성을 측량하는 김에 호기심을 섞어서 좀 살펴보았다.

그 결과는 로이드의 가슴속 깊은 옹달샘에 괄약근 떨리는 자괴감을 선사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끄어억. 예상은 했는데... 뭐 이리 비싸.'

왕성의 감정가를 살펴본 로이드는 입을 쩍 벌렸다.

그야말로 상상 초월의 수준으로 비쌌다.

서울의 강남 중심가?

그건 비교도 안 됐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왕성의 자투리땅 하나만 팔아도 프론테라 백작령 전체를 살 수 있을 정도였다.

아니, 그러고도 살짝 남는 푼돈(?)으로 국밥 천 그릇은 능히 사 먹을 수 있을 듯했다.

'이건 말 그대로 금전으로 가치를 매길 수 없음, 수준인 거네.'

생각해 보니 그럴 법도 했다.

지금 마젠타노 왕가는 왕국의 역사에서도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는 중이니까.

강력한 왕권을 틀어쥔 소드마스터 국왕 알리시아.

그런 국왕에게 흔들림 없이 충성하는 지방의 대영주들.

거기에 본드래곤이 더해졌다.

원래부터 안정적이고 탄탄했던 국내의 정치와 군사적 상황에 본드래곤이라는 엄청난 전력이 더해진 셈이었다.

'뭐, 사실 본드래곤은 내 거긴 하지만.'

하지만 사람들은 그걸 모른다.

다들 본드래곤이 마젠타노 왕실에 충성하는 줄로만 안다.

그 와중에 국왕이 프론테라 영지로 본드래곤을 파견한 것으로만 아는 상황이었다.

'어쨌건, 덕분에 마젠타노 왕가의 주가가 떡상하면서 오른 거지. 전통의 라이벌인 동쪽의 술탄국마저도 인정할 정도로 압도적인 위치를 점유하게 된 거야.'

말 그대로 세계 최강국으로 등극.

그러니 그 왕국의 중심지인 이곳 땅값이 폭등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아, 쓰읍. 부럽다.'

절로 배가 살살 아파졌다.

하지만 로이드는 이내 고개를 푸르르 털어냈다.

지금은 고작(?) 땅값 따위에 정신이 팔릴 때가 아니니까.

어서 빨리 타우랑가를 찾아내고 진실의 보옥을 건설해야 할 테니까.

운명의 복원 현상을 막아내야 할 터이니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문득, 떠올랐다.

엔딩 스포일러로 엿본 미래.

백작의 낙마 사고가 이제 3년도 남지 않았다.

정확히 계산하자면 겨우 2년하고도 7, 8개월쯤 남았을 터다.

길다면 길 수도 있을 시간이었다.

누구나 대부분 다녀오는 대한민국 육군 의무복무 기간보다도 길었다.

하지만 로이드에겐 전혀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과연 그 시간 안에 보옥의 핵심 자재들을 다 찾아낼 수 있을까. 거기에 보옥 건설도 해야 하고, 보옥을 통해 운명의 복원 현상을 막아낼 방법을 알아내야 하고. 또 그 방법을 실행하려면 시간이 추가로 필요할 거고. 정말로 시간이 너무 빡빡해.'

앞으로 치러내야 할 일들을 떠올리면 오히려 모자라게만 느껴졌다.

'그러니 여기서도 미적거릴 틈은 없어.'

로이드는 다짐했다.

부지런히 시간을 아껴야 한다.

모든 과정에서의 시간 낭비와 시행착오를 최대한 줄여야 한다.

지금, 그가 측량을 하는 이유도 그걸 위해서였다.

"타우랑가라는 그 핵심 자재, 왕성 어딘가엔 확실하게 있는 겁니까?"

"당연하지."

옆에서 묵묵히 함께 걷던 하비엘이 물어왔다.

로이드는 녀석을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찾아야지."

"찾으면 뽑으실 겁니까."

"어. 딱 그거만 뽑을 거야. 깔끔하게."

로이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국왕 전하께 말씀드릴 때는 왕성을 통째로 뽑니 마니 했지만, 그건 현실적으로는 좀 그래. 너무 낭비가 심한 방법이라서."

"낭비라 하시면?"

"너무 일이 커지잖냐. 생각해 봐라. 이 커다란 왕성을 밭에서 무 뽑듯이 뽑아내면, 어? 이게 멀쩡하겠어?"

"제가 봐도 그렇진 않을 듯합니다."

"그렇지? 이 엄청난 하중을 지닌 구조물이 통째로 뽑히는데 뒤틀리는 곳이 한 군데도 없으려면 보통 힘으론 절대로 불가능할 거야. 본드래곤이랑 비벙이가 나란히 힘을 써도? 택도 없겠지. 용왕 베르키스가 직접 나선다면 모를까."

사실이었다.

비벙이와 본드래곤을 동원해서는?

왕성에 큰 손상이 갈 것이 뻔했다.

그런 손상이 생기지 않도록 뽑으려면 압도적인 힘으로, 단숨에, 순식간에, 깔끔하게 뽑았다가 재빨리 제자리에 내려놓아야 할 터였다.

한데 그게 가능한 존재는?

자신이 알기로는 용왕 베르키스밖에 없었다.

'그 잠탱이 용가리가 실제로 그런 짓을 두 번이나 저질렀으니까. 그렇게 뽑아낸 왕성 두 개가 마룡굴에 장식장처럼 세워져 있는 것도 봤으니까. 그 왕성들, 손상이 거의 없는 상태였거든.'

하지만 용왕 베르키스를 여기까지 불러올 수는 없다.

그는 자신이 본 최강의 잠탱이였다.

한데 그런 귀차니스트를 함부로 움직이게 하려다간?

자칫 자신이 분노의 불벼락을 뒤집어쓸 수도 있을 터였다.

"아무튼 그렇게 함부로 왕성을 뽑다가 손상이 생기면 그거 또 고쳐줘야 하거든. 지금 당장 해야 할 일들도 산더미인데, 어느 세월에 보수공사 같은 걸 해주겠냐. 그래서야."

"타우랑가를 찾아낸 뒤에 정확히 그 부위만 뽑아내겠다는 거로군요."

"바로 그거지. 뾰루지 뾱 하고 짜내는 것처럼."

그러면 건축물 손상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덤으로 시공 기간도 줄일 수 있다.

"그러니까 빨리 타우랑가부터 찾아야 한다는 거지. 기왕이면 뽑아내기 좋은 자리에 있으면 더 좋을 거고."

"하지만 제가 보기엔 뽑기 좋을 듯한 자리는 이미 다 둘러보신 것 같습니다만."

"...어. 그래서 좀 슬퍼지려는 중이야."

로이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비엘의 지적대로였다.

뽑아내기 쉽고 편한 자리.

그런 곳에 타우랑가가 쓰였기를 바랐다.

최소한 12개 중에 한두 개쯤은 그런 곳에 있지 않을까 했다.

그래서 왕성의 돔을 이루는 지붕 등을 가장 먼저 살폈다.

그다음으로는 내부의 천장과 지붕, 기둥, 바닥재 등의 구조물을 꼼꼼하게 측량했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타우랑가가 발견되지 않았다.

덕분에 그는 내심 초조해지는 중이었다.

'쓰읍. 이러다가 지하나 기초 부위에서 몽땅 발견되거나 하면 난감해지는데.'

제발 그것만은 아니길.

바라고 또 바라며.

그는 안구에 힘 빡 주고서 측량을 이어갔다.

장장 사흘에 걸쳐 왕성 구석구석을 이 잡듯이 측량하고 다녔다.

다행히 국왕의 전폭적인 협조 덕분에 원래라면 들어갈 엄두도 못 낼 보물창고와 갖가지 비밀 장소에도 모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타우랑가는 발견되지 않았다.

측량 스킬을 사용하며 나날이 심해지는 안구건조증만큼 로이드의 초조함도 짙어졌다.

그리고 다시 이틀이 지났을 무렵.

마침내 그는 타우랑가를 발견했다.

"...근데 하필이면 여기냐."

로이드는 한숨을 푸쉬쉬 내쉬었다.

동시에 인생이 실로 하드코어한 시궁창일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보옥의 핵심 자재인 타우랑가가 마침내 발견된 위치.

그곳이 왕성의 제일 밑바닥에서도 가장 아래의 기초 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거, 측량 스킬의 지하 스캐닝이 없었으면 보이지도 않았겠네.'

지하 가장 아래층의 석실.

풍부한 습기 덕분에 온갖 곰팡이가 캉캉댄스를 추며 영토 전쟁을 벌이는 이곳.

로이드의 시선은 그 바닥을 향해 있었다.

정확히는 바닥의 석재 몇 겹 아래에 깔려 있는, 지하 5미터 지점의 거대한 암석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가 애타게 찾던 타우랑가였다.

그런데 그 위치가 매우, 아주, 심각하게 애매했다.

'망했다.'

하필이면 왕성 곳곳을 떠받치는 기초 부분에 타우랑가가 알차게 숑숑 박혀 있었다.

정확히는 기초용 독립기둥 허리를 담당하고 있었다!

'저거, 그냥은 절대로 못 뽑아. 이걸 뽑는 일을 비유하자면, 으음, 딱 그거겠네. 63빌딩을 무너뜨리지 않으면서 땅속에서 건물 전체를 떠받치는 말뚝을 뽑아내고 교체하는 거.'

혹은 높게 쌓은 젠가 블록.

그 제일 아랫부분의 블록을 쇽쇽 빼내는 일과 같았다.

즉, 타우랑가는 왕성 밑바닥의 땅속에 박힌 기초용 독립기둥으로 쓰이고 있었다.

심지어 12개가 전부, 각각의 독립기둥 허리에 박혀 있었다.

한데 저것들을 함부로 뽑았다간?

'왕성에 침하가 일어나겠지.'

밑바닥 블록을 잘못 뽑은 젠가처럼 와르르.

왕성 기초가 내려앉는 대참사가 벌어질 것이다.

물론 그걸 방지하려면 타우랑가를 뽑으면서 같은 크기와 강도의 석재를 준비하면 된다.

부품을 교환하듯 재빨리 대용품을 끼워 넣으면 된다.

하지만 그러기까지의 접근과 뒷처리가 제법 난해해 보였다.

'쓰읍. 위에서부터 기초 바닥을 들어내면서 접근해야 하나? 아니. 그렇게 하기엔 각이 안 나와. 일단 타우랑가 각각의 크기부터가 너무 커. 제일 작은놈이 무려 6미터는 돼 보이는데. 저걸 끄집어내려고 여기 바닥을 들어 엎으면? 저걸 빼낼 통로를 지상까지 또 확보하려면? 아냐. 그럼 일이 너무 커져.'

여기서부터 왕성 바깥까지는 멀고도 멀었다.

수많은 층과 벽과 구조물이 놓여 있었다.

한데 타우랑가를 무사히 뽑아냈다고 해도 그걸 바깥으로 옮기려면?

최소 6미터는 되는 통로를 지상까지 쫙 뚫어 버려야 한다.

'물론 뚫는 거야 어렵진 않지. 그 뒷수습이 문제인 거지.'

뚫은 곳들을 보수하려면?

고쳐주려면?

일이 한도 끝도 없이 많아질 것이다.

시간도 제법 걸릴 것이다.

그건 싫었다.

가능하다면 그런 번거로운 과정 없이 효율적이고 깔끔한 일처리를 하고 싶었다.

'한번 궁리해 볼까.'

느낌이 왔다.

어디까지나 답은 자신의 지식에 있으리라.

그걸 직감한 로이드는 그대로 귀빈용 숙소로 돌아왔다.

장장 이틀 동안 두문불출했다.

하비엘에게 자장가도 들려주지 않았다.

오직 방에 틀어박혀 각종 계산에 몰두했다.

측량 스킬로 얻어낸 왕성 지하의 지반 데이터.

타우랑가가 쓰이고 있는 기초 부분에 대한 정보.

각 부위가 떠받치는 하중.

타우랑가가 교체되는 과정에서 일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지반의 변화.

그 외의 모든 요소들을 고려했다.

고민하고, 예측했다.

준비하고, 실험했다.

계산하고, 결정했다.

"좋아."

결정을 내리자마자 움직였다.

귀빈용 숙소를 나섰다.

왕성 본궁으로 들어갔다.

시종장에게 국왕 알현을 요청했다.

다행히 오래 기다리지 않아 국왕의 집무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집무실에 들어가자마자 무릎을 꿇고 예를 표했다.

예를 표하며 숨도 돌리지 않고 용건부터 꺼냈다.

"국왕 전하 만세. 프론테라 백작가의 장남, 로이드 프론테라가 이 땅의 합당한 주인이신 국왕 전하를 뵈옵습니다. 아울러 전하께 긴히 요청드릴 것이 있어 이렇게 알현을 요청하였사옵니다."

"요청? 짐에게 긴히?"

"그렇사옵니다."

"...."

국왕 알리시아는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로이드 프론테라, 이자.

어쩐지 요즘 부쩍 자신을 부담 없이 찾아온다.

어째 전보다 점점 대놓고 요구를 하는 일이 늘어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러다가 내 머리 위에 올라앉겠군. 그래 봤자 선은 철저하게 지키겠지만.'

아마 저 영악한 자의 성정으로 보아 그러하리라.

머리 위에 올라앉으려 들되, 선은 넘지 않으리라.

만약 선을 넘는 순간 원치 않는 인생의 길로 접어들 테니까.

'나를 몰아내고 왕이 되거나. 혹은 독립을 선포하고 왕이 되거나겠지.'

하지만 그건 아마도 로이드가 원하는 인생이 아닐 터다.

생각하자니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저런 능력과 세를 얻고도 오직 게으르게 뒹구는 걸 목표로 하는 자라니. 한데 그 목표를 위해 세상 누구보다도 부지런한 오늘을 살아가는 자라니. 이처럼 웃기고도 역설적인 자가 또 있을까.'

참으로 신기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한편으로는 인간적으로 안타깝기도 했다.

로이드를 향한 그녀의 음성이 한층 누그러졌다.

"그래. 그대는 짐에게 요청할 자격이 있지. 고하라."

이번에는 대체 어떤 기상천외한 요구를 하러 자신을 찾아온 걸까.

그녀는 호기심 반, 쓴웃음 반의 심정으로 물었다.

"예, 전하. 감히 아뢰옵자면...."

로이드의 혓바닥이 찰지게 트윈 터보 엔진을 장착했다.

깜빡이도 없이 깊고도 힘찬 풀악셀을 밟았다.

"동결 공법을 시행하는 데에 필요한 지원을 청하고자 하옵니다. 여기서 말씀드린 동결 공법이란 지반 개량 공법의 한 종류로써, 고대 19세기 영국이라는 지방의 웰즈 광산에서 수직갱을 굴착하며 처음 고안되고 이용된 공법이옵니다. 이 동결 공법에서는 동결관을 지반 속에 집어넣어 영하 30도의 냉각액을 주입하고, 이를 통해 동결관 주변 흙 속에 포함된 수분을 아이스크림처럼 얼리옵니다. 시간이 지나면 이 얼음 기둥이 두꺼워지다가 서로 만나고 뭉쳐서 땅속에 거대한 얼음벽을 형성하게 되옵니다. 따라서 이렇게 만들어진 얼음벽은 원래의 흙에 비하여 매우 단단하기 이를 데가 없는 덕에...."

"잠깐."

"예, 전하."

로이드는 혓바닥 가동을 중단했다.

그리고 뻔뻔한 얼굴로 국왕을 올려다보았다.

국왕은 살짝 질린 눈빛으로 그의 시선을 받았다.

그리고 한편으로 절감했다.

이대로 귓구멍에서 피가 나기 전에 그냥 저자의 요청을 들어주는 게 낫겠노라고.

결국, 국왕이 한숨을 푹 내쉬며 물었다.

"그래서 구체적인 지원 요청 항목은?"

"여기 있사옵니다."

 

샤샥.

 

미리 준비한 쪽지를 품속에서 꺼냈다.

국왕에게 건넸다.

그리고 아뢰었다.

마치 맡겨놓은 물건 달라고 말하듯.

혹은 친구한테 라면 한 젓가락만 달라고 하듯.

참으로 태평하고도 뻔뻔하게 말했다.

"마젠타노 왕가의 삼대신물 중 하나인 '겨울의 심장'을 당분간 마음껏 사용할 수 있도록 빌려주소서."

278화. 더 뻔뻔한 요구 (2)

 

 

겨울의 심장.

가장 혹독한 계절의 한기를 모조리 압축한 신물.

고작 2센티 남짓한 구슬 속에 한 해 겨울의 추위를 모조리 집어넣은 무시무시한 무기.

덕분에 마젠타노 왕가의 삼대신물 한자리를 당당히 차지한 전략병기.

그 위력은 실로 상상을 초월했다.

구슬에 담긴 한기가 모조리 방출되면?

순식간에 빙하기를 능가하는 추위가 지역 일대를 휩쓸었다.

고작 하루면 영지 하나를 통째로 꽁꽁 얼릴 수 있었다.

열흘이면 경기도 정도 범위의 평균 기온을 무려 20도는 낮출 수 있었다.

한 해의 농사가 망하는 건 기본.

느닷없이 몰려오는 혹한에 사람이고 가축이고 다 죽어나가는 건 필연이었다.

'소설 철혈의 기사에서 그랬지. 너무나 강력한 위력 때문에 마젠타노 왕가에서도 역사상 두 번밖에 사용한 적 없는 물건이라고.'

로이드는 소설 속 내용을 떠올렸다.

소설 중후반부, 겨울의 심장이 역사상 세 번째로 사용된 에피소드였다.

'폭군으로 타락한 국왕 알리시아가 그걸 썼지. 서부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공포 정치를 위한 본보기로 겨울의 심장을 사용해 버렸어. 그 결과는 다섯 영지의 몰살과 서부 지방 전체의 기아, 대재난이었지.'

그야말로 재난이 따로 없었다.

수많은 이들이 얼어 죽었다.

후폭풍으로 대기근이 몰아닥쳤다.

이듬해까지 굶어 죽는 이들이 속출했다.

그만큼 겨울의 심장은 엄청난 위력을 지닌 신물이자 전략병기라 할 수 있었다.

'그래서겠지. 국왕 누님이 저런 눈빛으로 날 보는 게.'

로이드는 쓴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이쪽을 보는 국왕의 눈빛.

경악하거나 화를 내고 있진 않았다.

오히려 반대였다.

그녀는 이쪽을 매우 안쓰러운 눈으로 보고 있었다.

"이런. 그대가 그토록 열심히 일만 하면서 살 때 조금 말렸어야 했는데, 짐의 실책이 참으로 크구나."

"...."

"사람이 원래 그런 것이지. 사람은 가축이 아니니까. 쉴 때는 쉬고, 즐길 때는 즐기며 살아야 하는 법이니까. 하나 그대는 그러하지 못했어. 동부의 재난을 극복하느라, 동부를 재건하느라, 그대는 언제나 열심히 살았지. 그래서였군, 그래서였어. 쯧쯧."

"...."

"하지만 괜찮도다. 그대는 짐의 공신이니까. 그대가 가끔씩 얼빠진 소리를 하거나, 정신이 나간 듯한 헛소리를 꺼내거나, 혹은 뭘 잘못 먹었나 싶은 망발을 뱉는다 하여도 짐은 이해할 수 있노라. 어찌 이해 못 할까. 그토록 열심히 살다가 이런 꼴이 되어 버린 그대인 것을."

"...저기, 전하?"

"그래, 말해보라. 프론테라의 장남이여."

"음, 우선 저는 얼이 빠지거나 정신이 나가지도 않았고, 뭘 잘못 먹지도 않았사옵니다."

"그럴 테지. 미친 자가 스스로를 미쳤다 말하는 경우는 들어본 적이 없으니."

"저, 그게 아니오라, 저는 정말로 말짱하옵니다."

"흐음, 과연?"

"어찌하오면 전하께서 제 정신적 건재함을 알아주시겠사옵니까?"

"그대, 짐과 혼인하겠는가?"

"제가 잘못했사옵니다."

"쯧, 멀쩡하군."

"송구하옵니다."

로이드의 쓴웃음이 짙어졌다.

절로 정신이 번쩍 드는 무시무시한(?) 문답을 뒤로하고, 식은땀을 슬쩍 닦아내며 말했다.

"저는 정신이 나간 것이 아니옵니다. 그저 망발을 뱉는 것도 아니옵니다. 정확한 예측과 계산, 그에 따른 결론을 내리고서 전하께 청하는 것이옵니다."

"...그래서, 당분간 겨울의 심장을 빌리고 싶다고?"

"그렇사옵니다, 전하."

"그대는 겨울의 심장이 어떤 물건인지 알고 있을 터인데?"

"물론이옵니다, 전하. 그렇기에 이처럼 전하께 알현을 요청한 것이옵니다."

로이드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사실이었다.

겨울의 심장은 무려 왕가의 신물이다.

아무리 국왕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받은 자신이라 해도 함부로 넘볼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신물인 겨울의 심장을 렌트(?)하는 것.

그건 받는 지원의 차원이 백 단계쯤 달라지는 일이었다.

'당연하지. 삼대신물은 국왕 본인조차도 함부로 쓸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니까. 국가의 존망이 걸린 중대사가 있을 경우에만, 국왕의 요청과 귀족원의 만장일치 동의가 있어야 비로소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니까.'

물론 예외는 있었다.

소설 철혈의 기사에서 폭군이 된 알리시아의 경우였다.

'하지만 그건 국왕 누님이 흑화해서 막나가던 시절이니까 가능했던 아주 예외적인 경우인 거고. 반대하는 놈은 귀족이건 대신이건 이유 불문하고 그 자리에서 목을 쳐 버렸으니까. 나라 자체가 막장으로 치닫던 상황이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달라.'

국왕의 이성은 지극히 멀쩡하다.

나라의 체계도 더없이 탄탄하다.

왕의 권력과 귀족의 법도.

두 쌍두마차가 평화롭게 조화를 이루며 국정을 이끌어 가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의 국왕 알리시아는 독단적으로 삼대신물을 쓸 생각은 하지도 않을 것이다.

즉, 자신이 겨울의 심장을 지원받으려면?

국왕이 귀족원에게 신물 사용 요청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귀족원의 만장일치 동의를 얻어내야 가능해진다는 뜻이다.

"후우. 하면, 그대는 이 요청이 짐에게 정치적 부담을 주는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을 터인데."

"물론이옵니다, 전하."

"한데도 그런 요청을 하려는 것인가."

"그렇사옵니다. 전하. 반드시 이리하여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이옵니다."

"반드시, 필연적인 이유라. 고하라."

"예, 전하. 감히 아뢰옵자면, 아까 고하여드린 동결 공법을 시행하는 데에 있어서 겨울의 심장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옵니다."

"동결 공법이라. 아까는 그대의 설명이 지나치게 장황하여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만."

"쉽게 풀어 고하여드리옵자면, 땅속에 삽입한 관으로 차가운 냉기를 흘려 넣어 관 주위 흙에 포함된 수분을 꽁꽁 얼리는 공법이옵니다."

"흙 속의 물을 얼린다고?"

"예, 전하. 그리하면 땅이 평소보다 훨씬 단단해지옵니다."

"그렇겠지. 한겨울 이른 아침 응달의 흙이 돌덩이만큼이나 단단해지는 것처럼. 한데 그대는 그렇게 땅을 단단하게 얼려 무얼 하려는 것인가."

"왕성 아래에 커다란 굴을 파고자 하옵니다."

"굴을?"

국왕 알리시아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다행이다.

그녀가 흥미를 드러내고 있다.

긍정적인 분위기를 캐치한 로이드가 잽싸게 대답했다.

"그렇사옵니다. 일전에 말씀드린 고대의 물건인 타우랑가를 왕성 아래에서 빼내기 위함이옵니다."

"그렇지. 그대는 타우랑가라는 물건을 찾는다 하였더랬지. 한데 그 물건이 왕성 아래에 있다고?"

"예, 전하. 정확히는 왕성 아래 땅속에 뿌리처럼 박힌 기초용 독립기둥에 쓰이고 있사옵니다."

"한데 그걸 빼내도 왕성이 괜찮은 것인가."

"괜찮도록 하기 위하여 동결 공법을 시행하는 것이옵니다."

"조금 더 자세히."

"예, 전하."

좋다.

슬슬 넘어온다.

로이드는 혓바닥을 촵촵 능란하게 적셨다.

"얼어붙은 땅은 평소보다 훨씬 단단해지옵니다. 그 단단해진 성질 자체가 튼튼한 버팀목이 되어 왕성 아래에 뚫을 수직갱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해줄 것이옵니다. 또한, 왕성 기초의 독립기둥에서 타우랑가를 빼내더라도 대체용 암석을 넣을 때까지 버틸 약간의 시간을 벌어줄 것이옵니다."

그는 조금의 막힘도 없이 술술 말했다.

그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19세기 중엽 영국에서 개발된 동결 공법.

이 공법이 고안된 이유가 애초부터 수직갱 굴착을 하는 과정에서의 붕괴 위험을 막아내기 위해서였다.

또한, 동결 공법은 현대에도 터널끼리의 접합 공사부, 혹은 주변의 중요한 구조물을 보호하면서 지반을 굴착하기 위한 지반 개량 공법으로 활용되고 있기도 했다.

'그래서 이번 타우랑가 추출 시공에 써먹기 딱 좋아.'

왕성 아래에 뚫을 수평갱과 수직갱.

그로 인해 예상되는 왕성 기초의 침하.

그걸 막을 수 있을 것이었다.

아울러 타우랑가 교체 과정에서 독립기둥에 가해질 하중을 처리하는 부담도 조금은 줄일 수 있을 듯했다.

그것이 로이드의 의도였다.

나름의 이론적 계산과 시뮬레이션 옵션 활용.

그러한 수많은 실험 끝에 얻은 결론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제발! 국왕님! 전하! 누님! 한 번만 좀!'

자신의 요청이 흔쾌히 승낙받길.

편한 방법으로 공사할 수 있길.

로이드는 바라고 또 바랐다.

간식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초롱초롱한 눈으로 국왕을 올려다보았다.

덕분에 국왕 알리시아는....

"하."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말았다.

"그대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자로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쯧. 짐은 아직 그대의 요청을 허락하지 않았다만."

"송구하옵니다, 전하."

"그래. 송구한 줄을 알아야지. 이처럼 얼토당토않으면서도 부담스러운 요청을 낯빛 한 번 변하지 않고 뻔뻔하게 들이미는데, 그걸 차마 거절할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리는데 말이지."

"실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아직 허락 안 하였다니까."

"하오나 이미 눈빛으로는 허락하고 계시옵니다, 전하."

"감히 짐의 의중을 읽어보려 함인가?"

"송구하옵니다, 전하."

"쯧. 한 대 때릴 수도 없고."

"...예?"

"아니다. 짐의 작은 소망을 중얼거린 것이었으니 방금 들은 말은 잊도록. 다만 짐이 하나만 그대에게 묻고자 한다."

"하문하소서."

로이드는 고개를 숙였다.

국왕 알리시아의 물음이 떨어졌다.

"그대가 겨울의 심장으로 동결 공법을 사용하고, 왕성 아래에서 타우랑가라는 물건을 빼낸다고 하면, 그 일이 짐과 왕실에 해가 되지 않으리란 약속을 할 수 있겠는가?"

"물론이옵니다, 전하."

"좋다. 허락하지."

"...예?"

로이드는 움찔하며 고개를 퍼뜩 들었다.

덕분에 쿨하게 웃는 국왕의 모습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대는 짐에게 약속하였고, 짐은 그 약속을 믿기로 하였다. 다른 말이 더 필요한가?"

"아, 그것은 아니옵니다. 다만...."

"다만?"

"전하께서 하도 흔쾌히 허락을 하시니 꼭 제가 나쁜 남자가 되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그만...."

"나쁜 남자라. 나쁘지 않구나."

"예?"

"아니다. 어차피 그대가 짐과 왕실을 해하려면 굳이 이런 번거로운 방식을 택하지 않아도 능히 가능할 터. 짐은 오직 그러지 않고 있는 그대의 호의를 믿는 것일 뿐이다. 하니 이만 물러가도록. 귀족원은 짐이 설득하도록 하지."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마침내 국왕의 허락을 받아냈다!

로이드는 기쁨을 감추며 재빨리 예를 표했다.

그리고 빛의 속도로 국왕 앞에서 물러났다.

행여나 국왕의 마음이 변해서 딴소리를 할까 봐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로이드가 물러난 후.

국왕 알리시아는 쓴웃음만 되삼켰다.

"하."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북적북적한 기분이었는데.

로이드가 물러가고 나니 집무실이 돌연 휑해진 느낌이 들었다.

"참으로 간사하고 영악한 자가 따로 없다니깐."

로이드 프론테라.

가능하다면 곁에 두고 평생 부려먹고 싶은데.

그리하여 천 년 왕국을 능히 이룩할 반석을 다지고 싶은데.

그런데 매번 좀처럼 잡혀주질 않는 자였다.

이미 반쯤 놓친 바나 다름없어진 자였다.

자신이 잡아두기엔 너무나 커 버려서.

오히려 이쪽보다 더욱 커져 버려서.

이제는 자칫 방심하면 저자에게 질질 끌려다닐 판국이 되어 버렸다.

지금이 딱 그랬다.

그렇잖아도 밀린 업무가 많던 터였다.

한데 로이드의 요청 때문에 일거리가 산더미처럼 늘어나게 됐다.

귀족원에 겨울의 심장 사용 요청을 넣으려면?

귀족들을 구워삶아 만장일치 동의를 끌어내려면?

이것저것 준비할 일이 많아질 듯했다.

"감히 짐을 부려먹고. 한데도 이렇게 자기 아쉬울 때만 성은 찾는 걸 보면 나쁜 남자 맞다니깐."

국왕 알리시아의 나직한 투덜거림이 집무실을 거닐었다.

 

 

열흘이 지났다.

로이드는 그 시간을 분주히 보내야 했다.

동결 공법을 시행할 준비를 착착 갖추었다.

왕실의 지원을 받아 인부를 모집했다.

굴착 공사에 쓰일 자재를 준비했다.

수직갱을 파낼 자리를 정밀 측량했다.

발파로 임시 수직공을 파내며 지하 스캐닝으로 보이지 않던 더 아래쪽까지 두루 살폈다.

그리고 동결 파이프가 설치될 위치를 선정하고, 설계했다.

한편으로 국왕 또한 분주한 열흘을 보내야 했다.

왕가의 신물인 겨울의 심장.

그 사용 승인을 위해 귀족원에 요청을 넣었다.

처음엔 귀족들이 크게 난색을 표하였다.

국가의 존망이 걸린 중대사에만 사용할 수 있는 겨울의 심장이었다.

한데 그러한 신물을 고작 왕성 보수 공사에 쓰겠다니.

아무리 왕성의 긴급 보수가 중요한 일이라곤 해도.

왕실의 권위와 직결되는 문제라고는 하여도.

굳이 겨울의 심장까지 써야 하는 일인가 싶었다.

처음엔 다들 국왕의 요청 의도를 의심했다.

하지만 날짜가 지나며 분위기가 달라졌다.

한 사람씩 국왕에게 설득되었다.

혹은 포섭되었다.

국왕 알리시아는 적절한 뇌물을 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귀족원의 귀족들이 달콤한 제의와 회유, 보상에 하나씩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만장일치로 동의안에 서명했다.

마젠타노 왕가의 삼대신물 중 하나인 겨울의 심장이 왕실 마법사들과 근위대의 삼엄한 관리와 호위 속에 로이드의 현장으로 인계되었다.

무려 한 계절의 힘을 품은 전략 병기.

작정하고 개방하면 한 지역을 빙하기로 몰아넣을 재난급 무기.

하지만 그러한 신물도 로이드의 손에 넘어가니 얄짤없었다.

전략 병기고 뭐고.

재난급 무기고 뭐고.

시공 현장 냉매로 알차게(?) 쓰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타우랑가를 얻기 위한 동결 수직갱 시공이 시작되었다.

물론 공사를 시행하는 로이드도.

로이드를 돕는 하비엘과 인부들도.

아무도 몰랐다.

 

...두쿵... 두쿵....

 

특수 제어 상자에 담긴 겨울의 심장.

그 신물이 어느샌가 로이드의 심장 박동과 공명하고 있었다.

279화. 행운의 사고 (1)

 

 

'음?'

한창 하루의 시공을 준비하던 아침.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하여 주위를 둘러보던 로이드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뭐야. 심장이 왜 이래.'

이상했다.

까닭도 없이 심장이 벌렁벌렁.

2심방 2심실에 정체 모를 한기가 살짝 느껴졌다.

마치, 누가 심장 속에 아이스크림 한 조각을 넣어둔 듯한 기분이었다.

'뭐야, 이거.'

심하진 않았다.

조금 둔감한 사람이라면 아예 못 느낄 수도 있을 정도로 희미한 감각이었다.

하지만 로이드는 달랐다.

무려 중급 익스퍼트의 마나하트를 지니고 있었다.

덕분에 그는 자신의 심장에서 느껴지는 아주 자그마한 변화나 조짐도 모두 민감하게 느꼈다.

'이상하네. 이런 적이 한 번도 없는데.'

그는 잠시 눈을 감고 자신의 심장을 점검했다.

감각에 집중했다.

그러자 더욱 또렷하게 느껴졌다.

'심장이 아니라... 심장 속 마나하트가 제멋대로 움직인 건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마나하트가 제멋대로 움직였다.

차가운 기운의 마나를 돌렸다.

물론 아주 잠깐에 불과했다.

깜짝 놀라서 심장을 점검하는 지금은, 생성되었던 차가운 기운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뭘까. 나중에 하비엘한테 물어봐야 하나.'

역시나 마나하트나 마나써클에 관련된 일은 하비엘이 훨씬 전문가니까.

오늘 일 마치면 녀석에게 물어봐야겠다 싶었다.

'기분 같아선 당장 물어보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서 아쉬웠다.

지금 하비엘은 이곳에 없으니까.

국왕에게 불려 가서 열심히 대련을 하고 있을 테니까.

그렇게 국왕의 실력 향상용 스파링 파트너가 되어 종일 연무장에 있을 테니까.

'이 현상이 뭔지 물어보는 김에 간만에 마나써클 상태도 점검 좀 받고.'

로이드는 다짐했다.

물어보는 김에 A/S도 받기.

그렇잖아도 요즘 슬슬 불안하던 터였다.

이러다가 덜컥 마나하트 스킬이 상급으로 올라 버릴까 싶어서.

그렇게 소드마스터 증후군이 생겨 지옥의 불면증에 시달리게 될까 봐.

혹시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나하트가 성장하고 있는 건 아닌지 점검받을 필요도 있어 보였다.

'불면증이라니. 그런 건 딱 질색이야.'

로이드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그러는 사이, 마나하트의 까닭 모를 한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작업자들도 슬슬 현장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다들 늦어! 작업 시작 시간에 맞춰서 작업 도구 준비하고 조회 참여할 수 있도록 나와야지. 안 그래들?"

그의 질타에 출근하던 작업자들의 걸음이 바빠졌다.

이내 현장이 복작복작거리는 활기에 젖어들었다.

로이드도, 작업자들도.

모두가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특수 제어 상자에 담긴 겨울의 심장 또한, 그러했다.

 

 

두쿵... 두쿵....

 

이곳은 동결 공법용 파이프에 냉매를 공급하는 장치.

그곳에 보관된 특수 제어 상자 속 공간.

겨울의 심장이 뛰고 있었다.

마치 설레는 연인을 만난 사람의 심장처럼.

혹은 평생의 인연을 만난 이의 두근거림처럼.

직경 2센티에 불과한 구슬이 전례 없이 공명하고 있었다.

저 멀리 느껴지는 어떤 이의 마나하트가 너무나 친숙해서.

그 마나하트에서 다른 이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동질감이 느껴져서.

그 사람의 심장이 뛸 때마다.

심장의 리듬에 맞추어.

설레는 공명을 일으켰다.

희미한 자아를 통해 생각했다.

머나먼 과거.

마젠타노 왕국이 건국되던 시절.

자신을 창조해준 빙룡 티라누스.

그 창조주가 이런 날을 예견했던 게 아닐까, 라고.

그래서 자신을 만들어 건국왕 미카엘에게 선물했던 것이 아닐까, 하고.

 

두근... 두근....

 

아마도 그럴 것이다.

이 만남은 우연이 아닌 필연일 터다.

마나하트에 드래곤의 특성을 지닌 인간은 처음이니까.

저런 존재 자체가 있을 거란 생각도.

이런 만남을 치를 거란 기대조차도.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했으니까.

 

두쿵... 두쿵....

 

특수 제어 상자 속 공간.

그곳에서 겨울의 심장이 조용히 떨었다.

수줍은 공명을 일으키며 저 멀리 있는 인간의 마나하트에 메시지를 보냈다.

 

 

딩동.

 

'어?'

로이드는 멈칫했다.

한창 굴착 시공에 매달리던 와중이었다.

지상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수직갱을 뚫느라.

삼중발파로 땅을 뚫고.

뽀동이를 보내서 뚫은 굴을 넓히며 다듬고.

작업반을 투입하여 버력(터널 굴착 과정에서 나오는 토석, 혹은 암석 덩어리)을 처리하고 임시 콘크리트를 벽면에 타설하느라.

직접 삽질도 하며 작업반까지 감독하는 통에 정신이 없던 와중이기도 했다.

한데 갑자기, 뜬금포 메시지가 눈앞에 떠올랐다.

'이건 뭐야?'

그는 황당한 눈길로 메시지를 보았다.

 

[마나하트 스킬 옵션 ④ : 반인반룡이 발동되었습니다.]

[우연한 계기로 드래곤하트 고유의 특성을 지니게 된 당신의 마나가 근거리에 있는 드래곤적 존재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미지의 드래곤적 존재는 이미 당신에게 상당한 호기심을 느끼고 있으며, 작은 계기가 주어지면 폭발적 호의를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뭐?'

로이드는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드래곤적 존재? 그런 게 근처에 있다고? 나한테 호기심을 느끼고 있어?'

그는 얼른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주위에 보이는 이라고는 뽀동이 같은 환상종과 작업자들, 그리고 겨울의 심장이 담긴 장치를 관리하고 감시하는 왕실의 마법사들밖에 없었다.

'설마 저들 중에 드래곤이 있는 건가?'

얼핏 그런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방금 메시지에선 드래곤이 아니라 드래곤적 존재라고 했어.'

말 그대로 드래곤은 아닌데 드래곤 비슷한 존재라는 걸까.

헷갈리고 아리송했다.

하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 더 짐작할 구석이 없었다.

'쯧. 이상하네. 아까부터.'

뭔가 평범하지가 않다.

아침부터 계속 그렇다.

난데없이 마나하트가 움직여 한기를 만들어내질 않나.

뜬금없이 드래곤 비스므리한 존재의 관심을 받고 있다고 하질 않나.

하나같이 평소에는 없던 일들이었다.

'혹시 겨울의 심장? 아닌데. 그건 그냥 마법적 신물이니까 드래곤과는 딱히 연관이 없을 거고. 쯧. 모르겠다.'

잠깐 고민해봤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로이드는 그 의문을 품속에 접어두었다.

일단 지금은 일이 중요하니까.

수직갱 시공은 허투루 해선 안 되니까.

눈앞의 현장에 집중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작업 현장에서 한눈파는 것만큼 위험한 짓이 없으니까.'

현장이란 그런 곳이다.

그냥 보기엔 그저 평범하고 안전해 보여도.

아무리 수십 년 숙련된 일꾼이라고 해도.

잠깐 마음을 놓는 순간.

잠시 방심하는 순간.

느닷없이 사고가 찾아오는 법이었다.

로이드는 그런 불운한 모습을 몇 번이나 직접 목격한 적이 있기도 했다.

'사소한 사고로는 허리나 어깨 좀 다치는 정도. 혹은 그라인더로 각목 자르다가 날이 깨지고 튀는 거라든가. 제일 심했던 때는 그 기러기 아빠 아저씨... 쯧. 생각하지 말자.'

서글펐던 기억이라서.

떠올리기 싫어졌다.

어쨌건 지금 현장도 충분히 위험한 요소가 다분했다.

'수직갱 굴착이니까.'

왕성 옆에서 땅으로 파고 들어가는 굴의 깊이가 벌써 10미터에 이르고 있었다.

미장공들이 밧줄 하나에 몸을 매달고 있었다.

마치 아파트 외벽에 페인트를 칠하듯.

혹은 고층빌딩 외벽 유리를 청소하듯.

그렇게 허공에 매달려 열심히 임시 콘크리트를 바르고 있었다.

하니 그들의 작업 상황을 예의주시해야 했다.

자신이 방심하면 저들이 다칠 수도 있으니까.

책임감을 가지고 눈을 부릅뜨고서 현장의 진행 상황을 수시로 체크해야 했다.

그렇게 로이드는 매일 신경을 곤두세웠다.

집중했다.

그 상태로 며칠을 보냈다.

어느새 반인반룡 옵션에 관련된 메시지도 잊었다.

그 사이 동결 공법 시공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총 45미터 깊이의 수직갱을 파냈다.

수직갱 옆면, 왕성 방향에 직경 30센티짜리 기다란 구멍을 다수 뚫었다.

그 일은 하비엘이 해주었다.

이제는 마음대로 길이와 직경을 조절하는 그의 발파였다.

"신중하게. 잘 겨눠서. 각도는 내가 표시해준 그대로.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저 멀리 있는 지점에선 발파가 왕성의 기초 기둥을 때리거나 뚫어 버릴 거야. 그러면 안 되는 거 알지?"

"물론입니다."

 

투화학!

 

하비엘의 검이 번득일 때마다 수백 미터 길이의 구멍이 수평으로 왕성 기초 아래를 통과했다.

며칠 사이 그런 구멍 수십 개가 뚫렸다.

그 구멍 중 일부에 별도로 제작한 금속 파이프를 넣었다.

파이프 한쪽을 냉매 공급관에 연결했다.

냉매 공급관은 특수 제어 상자와 닿아 있었다.

그리고 왕실의 마법사들이 특수 제어 상자를 조작했다.

 

츠스스스스...!

 

마법사들의 제어에 따라 특수 제어 상자가 반응했다.

제어 상자 속에 담긴 겨울의 심장이 서서히 개방되었다.

정확히 의도된 출력대로만.

한기를 발산하기 시작했다.

 

쩌저적...! 쩌적!

 

한기가 특수 제어 상자 바깥에 서리를 만들었다.

냉매 공급관도 마찬가지였다.

 

쩌저저적!

 

새하얀 서리가 냉매 공급관을 지나 금속 파이프로 번져갔다.

겨울의 심장에서 발산된 한기가 파이프로 공급되었다.

이내 급속도로.

파이프 주위의 흙 속 수분이 응결되기 시작했다.

'좋아. 생각대로 잘되고 있어.'

측량 스킬로 얼어붙어 가는 땅속 상황을 지켜보며.

로이드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역시 겨울의 심장. 국가급 신물이라서 그런지 엄청난 냉기네.'

그냥 차가운 냉동고 정도와는 차원이 달랐다.

거의 영하 수십 도는 족히 되어 보였다.

심지어 겨울의 심장이 지닌 출력의 일부만 사용했는데도 그랬다.

'이 정도면 며칠 안에 왕성 아래쪽 지반 전체를 얼릴 수 있겠어. 뭐, 원칙대로 하자면 이렇게 급속도로 땅을 얼리면 안 되지만.'

원래 동결 공법은 최대한 시간을 들여서 해야 하는 시공법이었다.

얼어붙으면 부피가 늘어나는 물의 성질 때문이었다.

너무 급히 땅을 얼리면 흙 속 수분이 급속도로 팽창하니까.

그러면 안정화해야 하는 지반 자체가 위로 융기해 버리는 일이 벌어지곤 했다.

그 위의 구조물이 심각한 손상을 입는 대참사가 벌어지는 셈이다.

'그래서 동결 공법은 수개월에 걸쳐서 천천히, 지반 융기를 최대한 억제시키면서 땅을 얼려야 하지. 그런 요건 때문에 공사 기간이 넉넉하면서 규모가 큰 현장에서만 사용할 수 있어.'

하지만 자신에겐 그럴 시간이 없었다.

수개월씩이나 낭비할 여유는 더더욱 없었다.

따라서 약간 극단적인 임시방편을 썼다.

앞서 하비엘이 발파로 뚫어준 왕성 아래 수십 개의 구멍.

그 중의 일부에만 동결용 파이프를 넣은 것이었다.

'나머지 구멍은 빈 상태로 뒀지. 그 공간이 급속도로 동결되는 땅이 융기하는 걸 막아줄 거야. 남겨진 구멍들이 팽창하는 부피를 커버해줄 거니까.'

급속 동결되며 융기할 땅의 부피.

그 부피를 커버할 잉여 공간의 확보.

그것까지 미리 다 계산해둔 로이드였다.

덕분에 불과 며칠 만에 왕성 아래 지반을 완전히 얼릴 수 있었다.

그럼에도 지반의 융기가 거의 없었음은 물론이었다.

거기까지 확인한 로이드는 다음 시공 단계에 착수했다.

"자! 방울이가 파먹으면 뽀동이가 다듬으며 따라가고! 일반 작업반은 버력 정리해서 반출하시고! 대장장이반? 여러분은 방울이가 철근 방출해주면 뭘 만든다고 했습니까?"

"철근 지지대!"

"맞습니다. 설계도로 알려드린 각 부위의 치수는 다들 숙지하셨으리라 믿습니다."

앞서 파냈던 45미터 깊이의 수직갱 밑바닥.

그곳에서부터 왕성 방향으로 수평 터널을 파기 시작했다.

시공 방법은 과거, 프론테라 영지에서 역청탄 광산을 팔 때의 방울이 실드 공법을 응용했다.

한층 발전시켜 더욱 큰 규모로 적용했다.

모두가 혼연일체.

으샤으샤.

하나가 되어 왕성 아래에 지름 6미터에 달하는 수평 터널을 굴착했다.

그 과정에서 터널 자체를 지탱하고 붕괴를 막아주는 철근 지지대가 널리 쓰였다. 철근 지지대를 만든 후에는 곧바로 터널 내부의 모든 면에 록볼트를 바늘 꽂듯 시공하고 콘크리트를 타설했다.

그 콘크리트가 현대식 NATM(New Austrian Tunnelling Method) 공법에서 핵심으로 여겨지는 숏크리트와 같은 역할을 해주었다.

말 그대로 터널 안쪽 면을 콘크리트로 한 겹 두툼하게 코팅해준 셈이었다.

게다가 터널 주변의 지반도 지극히 안정적이었다.

앞서 동결 공법으로 왕성 기초 아래의 지반을 얼린 덕분이었다.

그렇게 얼어붙은 지반 아래로 터널이 굴착되니, 주변의 단단해진 얼음과 흙이 자체적으로 주위의 하중을 분담해주었다.

이 또한 현대적 터널 굴착 공법인 NATM의 핵심적 원리 중의 하나였다.

그러한 로이드의 모든 궁리와 응용 설계가 시너지를 발휘했다.

터널 굴착이 더할 나위 없이 안정적으로 진행되었다.

터널이 쭉쭉 길어졌다.

닷새, 열흘, 보름.

시간이 흐르는 사이 마침내 터널이 목표인 '타우랑가'가 있는 기초 독립기둥의 하부 5미터 지점에 도달했다.

그곳에서 로이드는 굴착의 방향을 다시 한 번 바꾸었다.

'이번에는 위로.'

터널 끄트머리에서 상향식 수직갱 굴착이 시작되었다.

5미터 위에 보이는 독립기둥.

그 옆구리에서 타우랑가를 숑숑 뽑아내기 위하여.

모두가 합심하여 위쪽으로 터널을 뚫고, 흙과 바위를 들어내고, 수직 통로를 다듬으며 보강했다.

독립기둥을 따라 나란히 올라가는 터널이었다.

그렇게 모두는 아무 일 없이 공사가 진행될 것으로 믿었다.

누가 보더라도 공사는 더없이 안정적이었으니까.

하지만 상향식 수직갱 굴착을 시작한 그날 오전.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시련임과 동시에 로이드에게는 커다란 성장의 밑거름이 될 행운의(?) 사고가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