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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제13장 메인 시나리오(3)

"최전방에서 소비되는 물자를 조달하는 것도 버거워진 데다, 정화 작업에 끝이 보이질 않으니 자의로 입대하는 병사가 줄어드는 추세지."

목숨을 걸고 나서봤자 나아지는 게 없으니, 목숨을 거는 이들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개죽음을 당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런 셈이지."

긍정을 표하는 목소리에 자조가 가득했다.

"그래서인지 1년 전에 내려온 신탁에 모두가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 신탁이 뭐냐고."

"절망을 뒤로하게 해줄 이방인이 희망의 씨앗을 가지고 방문할지니."

답을 한 건 라샤르가 아니라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라울이었다.

내가 그를 돌아보기 무섭게 라울의 곁에 있던 시그람이 말을 받았다.

"떠나기 전에 신성의 땅에 발자취를 남겨주어라."

그제서야 한숨을 푹 내쉰 라샤르가 한 문장을 덧붙였다.

"그리하면 비로소 희망이 싹틀 것이다."

내 눈썹이 들썩거렸다.

'희망....'

그 단어 하나가 신경을 긁었다.

그때부터 신탁이라는 단어 위로 다른 것들이 쌓였다.

희망, 이방인, 전쟁, 홀, 적과 아군, 게임, 괴물, 미션까지.

내가 아는 단어들이 이리저리 뒤엉키면서 큰 그림이 되었다.

그리고 내가 이방인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 부담스러울 정도로 관심을 기울이던 일행의 행동까지 떠올렸을 때.

"전대 메페로세타의 사도가 남긴 예언이자 유언이다."

라샤르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기억하기로 메페로세타의 권능은 예지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그 신의 사도는 당대에 한 명 뿐이다.

그리고 보게 된 미래를 쉽게 입에 담지 않는다.

뱉기만 하면 무조건 신탁으로 취급 받을 정도라고.

한 번도 예언을 하지 않고 생을 마감하는 사도도 있다고 했다.

"미래를 본다는 것은 창조물에게 허락되지 않은 영역이지. 그렇기에 그것을 발설하는 건 정도를 벗어나는 일이다. 절제의 규율을 어기는 셈이지."

"...어기면 어떻게 되는데?"

"메페로세타께선 엄하신 편이라."

그 말에 유언이라는 단어를 가져다 붙이자 대충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미래를 본다는 건 엄청난 힘이야.'

그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권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그렇기에 본 것을 말하지 않는 것으로 스스로의 절제를 증명할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메페로세타의 사도들이 미래를 말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죽음을 각오한다면 얼마든지 말할 수 있다.

"타인이 알아선 안 될 미래를 말하는 순간 죽는 거군."

라샤르가 흐리게 웃었다. 내 말이 정답이라는 듯이.

"권능이라는 건 인과를 무시한 힘이다. 그렇기에 신의 힘인 것이고. 신격도 없이 신의 힘을 사용하는 이들에게 아무런 반동이 없다는 건 말이 안 되지."

다른 사도들도 제약을 지키지 못할 경우 받는 페널티가 있다는 의미다.

"후우."

솔직히 말하면 적응이 안된다.

신의 이적을 확인할 수 있는 세상도, 직접 이지를 가지고 인간사에 관여하는 신의 존재도 낯설다.

그럼에도 부정하는 대신 꾸역꾸역 생각을 이어가는 건, 내가 이미 그 힘을 써봤기 때문이다.

'분명히 봤어.'

CCTV도, 카메라도 없는 곳에서 흘러간 시간이다.

오로지 라샤르의 기억 속에만 남아 있어야 할 시간을 전혀 상관도 없는 내가 봤다.

난 직접 경험한 것을 부정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저 신탁이라는 걸 가볍게 취급할 생각은 없었다.

"그 정도로 대단한 힘이 단언한 것이다. 이방인을 신성의 땅으로 데려오면 희망이 있을 거라고."

전대 사도가 저 말을 하고 죽었을 때만 해도 모두가 눈에 불을 켜고 대륙을 뒤졌다고 한다.

이방인을 찾겠다는 이유만으로.

그날로부터 열흘, 한달, 반년, 1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이들이 아직 그 희망을 품고 있다.

내가 이방인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 기이할 정도로 정중해졌던 이들의 태도가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후우."

탁, 탁탁, 탁탁.

난 팔짱을 낀 채 발을 까딱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신성의 땅이라는 건 어떻게든 신이랑 연관이 있겠지.'

거길 신전이라고 생각하면, 라샤르가 순순히 나를 데려가기로 한 이유는 분명해진다.

저들은 신탁을 통해 나를 신전으로 데려오라는 지시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것도 무려 1년 전에.

'희망, 희망이라고....'

만약 정말로 내가 저들이 말하는 이방인이 맞다면.

내가 신전에 방문하는 게 저들에겐 희망이라는 뜻인데.

'왜?'

내가 플레이어니까.

'플레이어는 전원이 전투 인원이다.'

아직 9할 이상이 저랩이지만, 우리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

그래서 희망인 거다. 전세가 밀리는 상황에서 추가 병력이 오는 셈이니까.

'괴물은 적, 라샤르는 아군.'

그 적나라한 구분법을 보면 높은 확률로.

이 빌어먹을 시스템은 게임이라는 형태를 통해 플레이어를 이 세상의 전쟁에 밀어 넣으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 사람들은 시스템의 결정을 환영할 준비가 끝났다.

"이런 씹...."

그 간단한 결론에 도달하자 참아볼 틈도 없이 욕설이 새어 나왔다.

입대를 한 적도 없는데 대뜸 파병되게 생겼으니까!

난 이를 악문 채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진정해, 차분하게 생각할 때야.'

난 동요를 다스리기 위해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무의식적으로 옆을 힐끔거렸을 때, 입안의 살을 씹고야 말았다.

대뜸 욕설을 내뱉은 후 너무 오래 침묵한 탓일까?

모두가 나를 보고 있었다.

겁에 질린 것 같기도 하고, 기이한 열기로 번들거리는 것 같기도 한 눈으로.

그 시선으로부터 도망치듯 고개를 돌리자 손에 땀이 찼다.

'이대로 신전에 가는 게 맞나?'

대화를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신전으로 가기 전에 정보나 수집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정작 대화를 하다 보니 신전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곳에 발을 들이는 순간 나와 상관도 없는 전쟁으로 떠밀릴지도 몰라.'

당장 매개체를 파괴하고 튀어야 한다는 경각심이 차올랐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뜬 내가 물었다.

"멸망한 나라가 많다고 했지? 몇이나 되는데?"

그에 라샤르가 우물쭈물, 망설이다가 겨우 답했다.

"8개국이 영토를 잃고 명맥을 잃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건?"

"...통치권과 백성, 영토를 모두 유지하고 있는 건 아타르 제국과 헤일라스 공국까지 둘."

"통치권을 상실한 곳까지 합치면?"

"페렐처럼 군으로 전향해 후방의 지원을 받는 집단이 셋."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의 정확한 수치는?"

내가 사나운 목소리로 읊조리자 라샤르가 머뭇거렸다.

하지만 말없이 바라보는 것으로 재촉을 대신하자 곧.

"후방의 병력까지 모두 동원하면... 50만 쯤 되지 않을까, 추측 중이다."

이건 지는 게임이다. 내가 미션을 통해 본 숫자가 그 증거다.

'질 게 뻔한 남의 전쟁에 손을 보태야 할 이유는 없어.'

당장 발을 빼야 한다.

결론에 도달한 즉시 난 방패를 움켜쥐었다.

이대로 매개체를 파괴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정말 어이가 없게도 손이 움직이질 않았다.

"씨발...."

이 매개체에 고인 마력 때문에.

마력이 빠져나가는 저 구멍 너머에 있을 무언가가 자꾸 내 발목을 잡는다.

이를 악문 탓에 까득, 하고 소름 끼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홀....'

저 너머에 있는 것이 정말 지구라면.

이 구멍이 '홀'이고, 그 홀을 통해 내가 미션지를 오고 갈 수 있는 것이라면.

괴물이 지구로 넘어오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갑자기 전쟁이 시작됐다고 했지?'

라샤르는 본래는 이 세상에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괴물이 갑자기 튀어나왔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곱씹고 곱씹자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본디 다른 세상에 있던 괴물들이 이 세상에 구멍을 뚫고 들어온 건 아닐까? 하고.

'매개체에 붙어서 마력을 빨아 먹는 게 우연일 리 없잖아.'

그렇게 생각하면 이 세상과 지구 사이에 난 구멍을 관망해선 안 된다.

다음 타겟이 지구라는 말과 같을 테니까.

꿀꺽, 하고 침을 삼킨 난 떨리는 눈으로 미션창을 켰다.

스크롤을 끝까지 내리자 기억 속의 그것보다 늘어난 숫자가 보였다.

12,354,973

13,608,154

18,154,320

....

저 숫자가 괴물의 개체수라면.

홀을 통해 괴물이 지구로 넘어올 수 있다면.

'안 돼.'

난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꽉 움켜쥐었다.

"후우."

떨림과 망설임은 잠시 뿐이었다.

최악이라는 건 대비하지 않을 때보다 대비할 때가 낫다.

설령 내가 가정한 최악이 모두 헛된 망상에 불과해서 아무런 일도 없이 지나간다 해도.

최악을 피하기 위해 들어간 노력과 시간, 돈이 모두 무의미해진다고 해도.

나는 괜찮겠지, 라는 안일한 마음으로 가만히 지켜보는 것보다 과하게나마 대비를 해두는 게 더 낫다.

지나온 나의 삶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래서인지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생각보다 차분했다.

"아헬의 마력이 회복되면 출발할 거라고 했지?"

"...그렇다."

"언제 회복되는데?"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본 라샤르가 마른 침을 삼키며 말했다.

"당장이라도 출발할 수 있다. 그 전에 그대가 안전한 사람인지 확인하고 싶어서...."

"확인은 했고?"

"...믿어보고 싶다는 쪽에 가깝겠지."

"그럼 미적거리지 말고 바로 가. 내가 좀, 급해진 것 같거든."

히든 미션을 클리어 하고 확인해봐야 할 것들이 생겼다.

향후 계획을 세우기 위해서라도 속전속결로 움직이는 게 좋으리라.

차분한 재촉에 고개를 끄덕인 라샤르가 먼저 몸을 돌렸다.

난 곧장 라샤르의 뒤로 따라붙었다.

"얘기 끝나셨어요?"

라울의 옆에 앉아 기다리던 아헬이 엉덩이를 툭툭 털며 일어났다.

"그래, 바로 출발하면 된다."

그는 라샤르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팔짱을 낀 채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대로 가면 분명 골치 아플 텐데...."

그리고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일단 하루만."

아헬은 제대로 된 설명이 아니라 저가 하고 싶은 말만 늘어놓았다.

그러더니 대뜸 내 머리 쪽으로 손을 뻗었다.

난 재빨리 그의 손목을 붙잡고 막았다.

"어허, 피하지 말아요. 이게 다 케이를 위한 거니까. 정말이에요. 맹세한다니까요?"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손가락을 놀리기 시작한 아헬과 무언의 대치를 하기도 잠시.

난 일단 두고 보자는 심정으로 아헬의 손을 놔주었다.

그가 내 마력을 원하고 있는 이상, 나에게 해가 될 짓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자유를 되찾은 아헬의 손이 훌쩍 다가왔다.

직후 가느다란 손가락이 내 이마를 쿡, 질렀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인상을 찌푸리기 무섭게 투명한 막이 내 몸을 덮었다.

'...비눗방울 같네.'

불편한 건 아니었지만 내가 단절되어 있다는 게 느껴졌다.

호기심 반, 경계심 반.

"이게 뭡니까?"

"마력의 잔향이 세어나가지 못하도록 막아놨어요."

잔향? 그러고 보니 아헬은 처음 나를 찾아왔을 때도 잔향이라는 단어를 언급했다.

'빨리 감추는 방법을 배우라고 했지.'

아마도 속성 마력 특유의 흔적 같은 게 남는 모양인데.

내 몸에 일어난 현상을 관찰하기도 잠시.

난 보다 자세한 것을 묻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그 잔향이라는 건 어떻게 감추...."

하지만 아헬과 눈이 마주치자 말을 끝맺지 못하고 흠칫, 굳었다.

그가 흡족한 미소를 그린 채 나를 훑어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회색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는 게, 어디선가 본 것만 같았다.

대체 이 기시감은 어디서 기인한 거지?

생각이 날듯, 말 듯 해서 아헬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불쑥 쌍둥이의 얼굴이 생각났다.

'탕수육 앞에 있을 때.'

애들이 맛있는 음식을 보며 침을 꿀떡꿀떡 삼킬 때의 그 눈이다.

'그러니까, 저놈한텐 내가 탕수육, 아니 먹음직스러운 음식과 동급이라는 거지?'

아헬을 바라보는 내 눈동자가 짜게 식었다.

"교환할 거면 나랑 제일 먼저, 알죠?"

사내 새끼가 애교 섞인 눈웃음을 치며 훌쩍 다가오니 불편했다.

"...좀 떨어지죠."

"에이, 우리 사이에 왜 그래요?"

너랑 나, 대화도 몇 시간 전에 겨우 했거든?

어이가 없어서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더니, 하는 말이 아주 가관이다.

"이제 궁금증은 다 해결했다는 건가요? 이렇게 먹고 버리다니, 너무해요!"

난 정색한 채로 아헬에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빌어먹을 시스템

55화

제13장 메인 시나리오(4)

"헛소리를 하는 걸 보니 마력 교환에 관심이 없나 봅니다?"

"헤헤, 입만 다물고 있으면 될까요?"

"꼭 부탁하죠, 제가 조용한 걸 좋아해서. 거리도 좀 유지해주시고요."

"네, 알겠습니다!"

경례를 올리듯, 손을 머리 옆으로 가져간 아헬의 목소리는 해맑았다.

그때 아헬을 중심으로 일행들이 모여들었다.

"아헬."

뭔가 싶어서 보고 있자니, 라울을 비롯한 다른 일행들이 아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라샤르가 뭐라고 하기 전에 나도 눈치껏 그들을 따라 했다.

"케이, 아헬을...."

그러자 라샤르가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동시에 시야가 하얗게 물들며 아득한 추락감이 느껴졌다.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기도 하고, 흘러내리는 것 같기도 했다.

가끔 꿈에서 떨어지거나 할 때 느끼는 추락감과 비슷했으나, 조금 더 강렬했다.

그 기묘한 감각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뚝 끊어졌다.

"헉."

붕 떠 있던 몸이 다시 단단한 땅을 딛고 서자 균형을 잡을 수가 없었다.

다리에 힘을 줘야 서 있을 수 있는데, 타이밍을 놓쳤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제대로 서지 못하고 볼썽사납게 넘어질 뻔했던 나를 라울이 부축해주었다.

좌우로 사정없이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에 귀가 먹먹해졌다.

"괜찮나?"

그 틈을 비집고 라샤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고개를 탈탈 흔들며 답했다.

"...그럭저럭."

"처음엔 다들 적응하기 힘들어하는 편이다."

방금 내가 겪은 그 현상이 공간 이동 마법이라는 건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광경부터가 달라져 있었다.

몸을 숨기기에 적합했던 바위와 나무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새파란 하늘과 깨끗한 구름, 귀가 먹먹할 정도로 강하게 몰아치는 바람까지.

우리는 꽤나 높은 절벽 위에 서 있었다.

저 멀리, 굽이치는 강줄기와 광활한 평야가 보였다.

절로 속이 뻥 뚫릴 것 같은 광경이었다.

라울의 부축을 받아 바로 선 난 한동안 그 광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하지만 라샤르가 내 어깨를 붙잡는 통에 뒤를 돌아보아야만 했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뒤쪽을 향해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 움직임을 따라 시선을 돌렸을 때, 난 천천히 고개를 위로 들었다.

당장 우리가 서 있는 절벽보다 몇 배는 높아 보이는 절벽이 등 뒤에 굳건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제법 먼 거리에 있었음에도 끝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들어야 할 정도로 까마득한 높이에, 가파른 경사까지.

평생을 빌딩 숲에서 살아온 나이건만, 자연이 만들어낸 광경 앞에서 순간 말을 잊었다.

그 정도로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환영한다, 케이."

라샤르는 아래쪽으로 손가락을 뻗으며 말했다.

난 순순히 그녀가 가리킨 방향을 따라 고개를 내렸다.

"저곳이 페렐 저항군의 최전방 주둔지, 하본이다."

가파른 절벽이 시작되는 곳에 깨알 만큼이나 작은 무언가가 보였다.

* * *

-우선 사단장님부터 뵈어야 한다. 하본에 주둔 중인 2사단의 총 책임자이시지.

군대가 머무는 곳에 신원불명의 외부인이 들어가는 셈이니, 그곳의 책임자에게 허락을 받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

난 라샤르의 설명에 순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니, 사실 당연하지 않은 말을 들었다고 해도 반응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가 하는 말을 귀담아들을 정신이 없었으니까.

절벽 옆에 아슬하게 나 있는 계단을 내려가 마주한 성의 위용은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이런 걸 요새라고 부르는 거겠지.'

하본이라 불린 성은 깊숙한 협곡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미 위치에서부터 난공불락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데, 주변의 지형도 만만치 않았다.

양쪽으로 쭉 펼쳐진 절벽이 새의 날개처럼 성을 감싸고 있었던 것이다.

지상에서 성으로 가기 위해선 너비가 6, 7m 밖에 되지 않는 좁은 길목을 반드시 지나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직각에 가까운 절벽들을 넘어오든가.

하늘에 닿을 듯 높은 절벽을 등진 성은 말 그대로 천혜의 요새였다.

빌딩 숲에서 살아온 내가 이런 광경을 언제 봤겠나.

성문 앞에 도착했을 무렵, 난 입을 벌린 채 고개를 치켜들고 성벽 너머로 보이는 광경을 구경하기 바빴다.

'못해도 십 수 미터는 돼 보이는데.'

거대한 성벽 너머로 계단처럼 쌓여 있는 건물이 눈을 가득 채웠다.

처음에는 그냥 평범한 석재 건물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건설 현장 노가다를 뛰며 보던 건물과는 달랐다.

'이음새가 없어.'

시멘트를 발라가며 벽돌을 쌓은 흔적이 보이지 않고, 벽면이 매끈했다.

저기 있는 건물들 모두 쌓은 것이 아니라 깎은 것이라는 의미다.

하본 성의 모든 건물은 이곳에 서 있는 절벽을 깎아 만든 하나의 예술 작품이었다.

"미친...."

정말 순수하게 감탄이 나왔다.

절벽을 통으로 조각해서 성을 만들다니.

어떤 미친놈이 생각해낸 건지 모르겠지만 진짜 대단했다.

촌놈처럼 성을 구경하고 있기를 한참.

생각보다 오래 걸린다 싶어서 성문 쪽으로 시선을 던지자 마침 라샤르가 말을 걸어왔다.

"케이."

"음?"

"메세오를 반입하려면 호위 병력을 대동해야 할 것 같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기 위함이니 오해하지 말았으면 한다."

그 말의 이면에 숨겨진 뜻을 읽는 건 어렵지 않았다.

'호위를 가장한 감시 병력이구나.'

난 알았다는 듯이 손을 휙휙 내저었다.

좌로 가나 우로 가나, 난 일단 신전에 도착하기만 하면 된다.

'시스템과의 대화가 정말 가능하다면 확인해야 돼.'

지금껏 내가 모은 정보로 추론한 것들이 사실인지, 그냥 헛된 망상인지.

대답 여부에 따라 내 선택도 달라질 것이다.

내가 신전에 도착한 이후의 일을 생각하는 동안 커다란 성벽 옆에 있는 작은 문이 열렸다.

그곳을 통해 성벽 안으로 들어가자 경직된 분위기가 느껴졌다.

"이방인...."

"신탁...."

"또...."

거짓말 하나 보태지 않고, 시야 안에 있는 이들의 시선이 모두 나에게 집중되었다.

'좀 부담스럽긴 하네.'

생전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복잡한 감정이 담긴 눈으로 나를 주시하고 있다.

그 상황에서 태연하기는 힘들었다.

속으로 짧게 혀를 차기 무섭게 그때 뒤에 있던 아헬이 작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케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의 입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팔라오.

팔라오? 자선의 신?

'갑자기 그 이름은 왜?'

의문을 되묻기도 전에 라샤르가 내 어깨를 집으며 말했다.

"케이, 가자."

그 잠깐 사이에 철갑옷을 입고 있는 이들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그들은 나와 라샤르를 둥글게 에워쌌다.

힐끔, 뒤를 확인하자 아헬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라울을 비롯한 다른 이들도 성문 앞에 남아 있을 뿐, 따라올 생각은 없어 보였다.

잠시간 그들을 바라보던 난 오래지 않아 라샤르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철갑옷을 입은 이들과 함께 움직이니 주변의 시선이 계속 모여들기만 했다.

신전만 가면 된다고 생각했던 게 무색하게도 점점 인상이 굳었다.

'빨리 끝내야겠네.'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기 무섭게 사람들 틈에서 예상치 못한 것을 발견했다.

세로로 길게 찢어진 눈동자에 짐승처럼 주둥이가 살짝 앞으로 튀어나와 있는 사람이었다.

역삼각형의 분홍색 코와 머리 위에서 쫑긋거리는 귀까지.

어디를 어떻게 봐도 인간 같지 않은 그를 보고 놀라는 선에서 끝난 건 라샤르와 아헬 덕분이었다.

'아인종.'

두 사람이 종종 아인종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부터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인간 외의 지성체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덕분에 조금 놀랐을지언정, 충격에 빠져 허우적거릴 정도는 아니었다.

난 특이한 고양이 눈동자와 수 초간 시선을 주고받은 후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저 낯선 지성체와의 교류는 당장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라샤르."

나의 부름에 라샤르는 곧장 시선을 주었다.

"사단장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물어 보고 싶은 게 있는데."

일단은 이곳의 책임자를 만나고 신전에 가는 것부터 해결하자.

* * *

한때 페렐 왕국에서 천혜의 요새로 불리었던 하본성은 현재 페렐 저항군 소속 2사단의 주둔지로 사용 중이었다.

그곳의 총 책임자이자 템

본 가문의 가주이며, 인내의 신 테모리아의 사도이기도 한 그렉 템본.

그는 언제나처럼 자신의 집무실에서 행정 업무를 보는 중이었다.

사각사각.

만년필이 움직일 때마다 잔잔한 소음이 방을 채웠다.

언뜻 평화로운 듯 보이는 광경은 해가 뜰 무렵부터 시작되어 몇 시간 동안 한 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잘 모르는 이가 보았다면 그림이라고 착각했을 정도였다.

작은 소음이 크게 느껴질 정도로 고요하던 정적이 깨진 것은 해가 하늘 높이 떠오른 정오 무렵이었다.

"사단장님."

노크도 없이 벌컥, 열린 문 쪽으로 가볍게 시선을 주었다.

그곳에 서 있는 건 얼굴이 잔뜩 상기된 부관이었다.

평소 답답할 정도로 표정 변화가 없던 사람인데, 저렇게 동요하는 걸 보면 어지간히도 놀라운 소식이 도착한 모양이라고.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한 그렉이 차분한 음성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지?"

"베넷 경이 귀환했습니다."

그렉은 곧바로 돌아온 답에 덤덤히 눈을 깜빡거렸다.

방금 부관이 전한 소식은 구조 작전을 지휘한 책임자 라샤르 베넷이 무사하다는 의미였다.

퇴각 중 적들에게 발각되어 교전이 일어났고, 민간인과 중대원들을 먼저 대피시킨 라샤르와 일부 인원이 낙오된 게 나흘 전의 일이다.

지휘부는 구조대를 꾸렸으나 농장은 이미 텅 빈 후였다.

하지만 낙오된 인원 중에 마법진 없이도 이동 마법이 가능한 아헬 벨레티아가 함께 있었다.

그래서 생환에 기대를 걸고 소식을 기다리는 중이었는데.

오늘 드디어 그들의 생사가 확인된 것이다.

얼마 남지 않은 팔라오의 사도가 살아 있다는 건 분명 기쁜 분명 소식이었다.

그들의 눈은 희망을 찾아내는 열쇠였으니까.

하지만 부관이 저렇게 동요할 만큼 '놀라운' 소식이라고 하기엔 힘들었다.

팔라오의 사도들은 대부분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생존 확률도 높은 편에 속했다.

'중대원들이 다 죽어도 베넷은 살아서 돌아왔을 터.'

그렉은 자신의 부관이 왜 저리 놀랐을까, 생각하며 다시 한 번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이어진 말에 모든 것을 이해했다.

"그런데, 성문에서 본인이 이방인을 데려왔다고 주장했답니다."

부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렉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멈춰버린 만년필 촉에서 잉크가 새어 나오며 서류에 동그란 얼룩을 만들었다.

과연, 평소 무덤덤하다 못해 삭막해 보일 만큼 표정 변화가 없는 부관이 놀라 달려올 만한 소식이었다.

잠시간 멈춰 있던 그렉은 저도 모르게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만년필과 망가진 서류를 옆으로 치우며 대꾸했다.

"귀한 손님이 오셨군."

라샤르가 데려왔다는 그 사람이 정말 신탁에 등장하는 이방인이라면 귀하다는 말로는 부족할 것이다.

"어디로 안내했지?"

"현재 정문 병력이 이곳으로 데려오는 중이랍니다."

"그럼 곧 만나볼 수 있겠군."

그렉은 자세를 반듯하게 고쳐 앉으며 동요하는 감정을 다스렸다.

'이방인이라....'

메페로세타의 사도가 예언을 하고 죽은 이후, 스스로를 이방인이라 주장하는 자는 제법 많았다.

하지만 모두 교단에서 이득을 갈취하기 위한 사기꾼으로 밝혀졌다.

그에 적지 않은 이들이 신탁을 불신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1년이 넘도록 헛물만 켜니 인내심이 부족한 이들부터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최근에는 메페로세타의 사도를 적들의 앞잡이로 매도하는 이들까지 나타났다.

거짓된 예언으로 민생을 농락하고 있다고.

전대 사도가 죽은 이후 하늘을 찌를 듯이 치솟았던 메페로세타 교단의 위세가 흔들릴 정도였다.

물론 아직 대부분의 아인종이 신탁에 희망을 걸고 있기는 하다.

그런 시기에 또 이방인으로 추정되는 이가 나타나다니.

과연 오늘의 만남은 예언에서 말하던 그 희망을 싹틔울 것인가?

'어쩌면 불화를 더 부추기게 될지도.'

결과를 알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더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불신의 눈초리를 던질 생각은 없지만, 무조건 희망을 가지고 바라볼 생각도 없었다.

"사단장님."

그렇게 마음을 다독이는 동안 집무실 너머에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라샤르 베넷 경과... 손님이 도착했습니다."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그렉이 답했다.

"들어오게."

제복의 매무새를 가다듬자 집무실의 문이 열렸다.

빌어먹을 시스템

56화

제13장 메인 시나리오(5)

익숙한 라샤르가 앞장서고, 낯선 사내가 그 뒤를 따라 들어왔다.

검은 머리, 고동색 눈동자, 날렵하면서도 균형이 잘 잡힌 탄탄한 체형과 날카로운 눈초리를 가진 남자였다.

그렉의 손이 티 나지 않게 움찔거렸다.

중립을 유지한 채 차분하자고 다짐한 것이 무색하게도.

순간적으로 남자의 외관을 보고 이방인이라는 말이 머릿속을 꽉 채웠다.

남자는 자신들과 묘하게 다른 피부색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렉이 남자를 관찰하는 동안, 남자도 차분하게 집무실 전체를 훑었다.

굉장히 어려 보이는 데도 그 눈동자가 제법 단단했다.

서로 간에 오간 탐색은 짧았다.

라샤르가 절도 있는 동작으로 경례를 올린 탓이다.

"2중대 지휘 책임자 라샤르 베넷, 13지대 포로 구조 작전을 마친 후 귀환했습니다."

"구조 작전의 성과는 이미 전달 받았네. 마음 같아서야 치하를 하고 싶으나, 더 급한 사안이 있어 미루는 것을 이해해주게."

뚜벅뚜벅. 라샤르의 코앞까지 다가간 그렉이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이리 돌아와 주어 고맙네."

"심려를 끼쳐드려 면목 없습니다."

그렇게 몇 마디를 주고받은 후에야 다시 손님의 차례가 되었다.

"하본 주둔군의 총 책임자인 그렉이네. 만나서 반갑군."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밀자 남자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더니 눈매를 살짝 찌푸린 채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고작해야 3, 4초. 그 짧은 텀을 두고 손을 내민 남자가 그렉과 악수를 나누었다.

"케입니다."

"그래, 이방인이라지?"

"...다른 세계 출신인 건 맞습니다."

"흠?"

"전 자세한 사항을 전달 받지 못했습니다. 이곳의 신전에 가라는 지시만 받았을 뿐입니다."

지시를 받았다니, 누구에게?

예상치 못한 답을 들었음에도 그렉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차분하게 이 주제를 깊게 파고들 생각이었다.

하지만 케이가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라샤르 베넷에게 듣기론 이곳에서도 같은 말이 오갔다죠? 그렇다면 굳이 시간을 끌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만."

"흠?"

"사담은 다음에 나누고 바로 신전으로 갈 수 있겠습니까?"

간단하게 오간 인사가 끝나자마자 본론이라.

'성격이 급하군.'

그렉은 케이의 손을 놔주며 입을 열었다.

"급할 건 없으니 천천히 가지."

"...."

"손님이 왔는데, 잠깐 앉아 담소를 나눌 시간은 있네."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케이의 입꼬리 한쪽이 말려 올라갔다.

"죄송하지만 제가 바쁩니다."

그렉의 콧수염이 움찔거렸다.

"여러분들도 분명 급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비스듬하게 고개를 기울인 케이가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여유가 넘치시는 걸 보니 지원 병력이 필요 없나 보죠?"

그렉은 물론이고 집무실에서 대기 중이던 그의 부관, 그리고 케이와 함께 들어온 라샤르까지.

케이를 제외한 모두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지원병력!

절로 입맛을 다시게 될 정도로 달콤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렉은 남몰래 침을 삼키며 차분함을 가장했다.

도움이 필요하다고는 해서 안달 난 모습을 보여줄 필요는 없다.

"그건 처음 듣는 소리군. 자세한 얘기를...."

"분명 말씀드렸을 텐데요. 저도 자세한 사항은 전달받지 못했다고."

그렉은 표정을 구기지 않기 위해 의식적으로 미간에 힘을 풀었다.

"케이, 지금까지 그런 얘기를 해준 적은 없지 않나. 왜...."

"너도 처음부터 모든 걸 다 말해준 게 아니잖아. 나만 감추고 있었던 것처럼 따지지 마."

급한 마음에 불쑥, 따지듯 말했던 라샤르의 말문이 막혔다.

"무엇보다 난 너랑 사정이 달라. 확실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고."

"그게 무슨...."

"전부 내 가정에 불과해. 그걸 확인하려면 신전에 가야 하고."

잠시간 라샤르를 돌아보았던 케이가 다시 그렉과 시선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지금 당장 저를 신전에 보내주시죠. 그래야 확실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하고자 한다면 강제로 케이의 입을 열게 할 방법은 많다.

당장 힘으로 찍어누르면 될 일이다.

케이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을 보건데, 무척이나 쉬울 것이다.

죽기 싫다면 입을 열게 될 터.

하지만 그렉은 쉬운 선택을 하는 대신 침묵했다.

순간적으로 자신의 뇌리를 타고 지나는 울림을 느낀 탓이다.

"...."

신의 기척이었다.

그렉의 시선이 창밖으로 흘렀다.

그곳에 있는 건 본부에서 근무하는 이들을 위해 만든 기도실이었다.

'지켜보고 계신 건가....'

신성을 지닌 존재는 지상에 강림할 수 없다.

하지만 신성을 버틸 수 있는 신전을 통해 뜻을 전하는 건 가능하다.

굳이 기척을 냈다는 건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함이었으리라.

그렉은 힐끔, 라샤르를 확인했다.

그녀는 아직 케이를 보며 곤란한 낯을 하고 있을 뿐이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모양이군.'

라샤르의 연배를 생각하면 이상할 건 없다.

애초에 그녀는 사도가 된 지 2년밖에 되지 않았다.

'서툴 수밖에.'

그녀와 이 문제에 대해 상의할 수 없는 이상 혼자 결정해야 한다.

7대 신들은 이제껏 이방인을 자청한 사기꾼들에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왜 다를까?

저 청년이 정말 신탁에서 나오는 이방인이라서?

그렇다면 방금 남자가 입에 담은 지원병력이라는 말을 가볍게 넘겨선 안 된다.

만에 하나라도 일이 잘못되면 책임을 피할 수 없을 터.

그렉은 신중하면서도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 * *

"정말 급해 보이는군."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바쁩니다."

"그렇다면 계속 붙잡고 있는 게 실례겠지."

간을 보려는 것처럼 계속 시간을 끌던 그렉이 태도를 바꾸었다.

"내가 직접 안내하겠네."

라샤르도 그러더니, 그렉도 나에게 왜 신전에 가느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이들에겐 내가 신전을 찾는 게 당연한 일인 것이다.

'신성의 땅이 신전이라는 건 확실하네.'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던 일이다.

그래서 지원병력이라는 공수표를 날려가며 지른 것이고.

고작 단어 하나에 시간을 끌어보려던 그렉의 태도가 확 변했다.

'만일의 경우, 본인 때문에 지원 문제가 무산되는 일은 없어야 하니까.'

고작해야 말뿐이지만, 무작정 무시하기엔 힘들었을 것이다.

희망이라는 단어 하나를 가지고 1년 넘게 이방인을 찾아 헤맨 이들이지 않나.

통할거라고 확신했고 실제로도 통했다.

'잃을 게 많은 사람은 책임 소재에 민감할 수밖에.'

그렉의 반응에 불만이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덕분에 쓸데없는 일에 붙들려 있는 대신 바로 신전에 갈 수 있게 되었으니까.

이제 다음 단계를 준비할 때다.

난 그렉을 만나러 오기 전까지 계속 아헬이 남긴 말을 곱씹었다.

-팔라오.

그가 굳이 타이밍에 그런 말을 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보니 오래지 않아 답이 나왔다.

'내가 가야 할 신전을 찔러준 거네.'

이 세상에서 종교란 7대 규율과 7대 신을 의미한다.

신이 일곱이나 된다는 건 교단도 그만큼 많다는 의미다.

'그렇게 수가 많으면 필연적으로 경쟁 구도가 생길 수밖에 없지.'

누가 더 나은지, 누가 더 못났는지, 재고 따지고 비교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저 위에 있는 신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지성체는 잡음 하나 없이 완벽한 화합을 이루는 게 불가능한 존재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타인과 단절된 채 존재하는데, 당연하지.'

내가 며칠간 지켜본 라샤르 일행은 지극히 평범한 지성체였다.

교단이 일곱 개나 되는 상황에서 분쟁과 갈등이 없다는 건 말이 안된다.

그렇기에 신탁에서 등장한 이방인이 어느 신전을 가는지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이건 단순히 개인의 선택으로 치부할 일이 아니다.

'이방인이 처음으로 보여주는 정치적인 행보다.'

이 세상의 원주민인 아헬이 그걸 몰랐을까?

'아니, 내가 모르는 이곳의 속사정을 아니까 찔러준 거야.'

그를 통해 나에게 점수를 따려는 속셈이었겠지.

'굳이 찔러준 걸 무시할 필요는 없겠지.'

아헬을 향한 호불호와는 별개로 그의 조언은 믿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내 마력을 원하는 그의 탐욕은 진심이었으니까.

"급한 듯하니 바로 가지. 베넷 경, 지금부턴 내가 안내할 테니 경은 이제 그만 돌아가서 쉬도록."

그렉은 말을 끝내기 무섭게 집무실을 나섰다.

난 라샤르를 힐끔, 확인한 후 그렉을 따라나섰다.

"누구의 신전으로 가는 건지 여쭤봐도 됩니까?"

복도를 거닐며 덤덤하게 물어보자 앞서가던 그렉 시선이 잠시 나에게 닿았다.

"7대 신을 모두 모시는 곳이네. 병사들이 언제든 모시는 분들께 기도를 올릴 수 있도록 만든 장소지."

그게 신전이 맞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 무섭게 그렉이 설명을 덧붙였다.

"7대 규율을 상징하는 문장은 물론, 화합을 의미하는 세계수 성상도 세워져 있고, 각 교단에서 파견한 신관들이 머물며 관리도 하고 있네. 나도 그곳에서 몇 번이고 테모리아 님을 뵈었지."

그러니 괜한 걱정은 말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은 모양이다.

난 고개를 주억거리며 묵묵히 그렉의 뒤를 따라 걸었다.

이대로 나를 데리고 으슥한 곳으로 가지 않을까, 싶어서 조금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에게는 이 세상을 구성한 모든 것이 낯설었다.

하지만 신전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이상 일단 따라가는 수밖에.

다행히도 오래지 않아 눈처럼 새하얀 건물에 도착했다.

그렉은 지체 없이 나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건물 중앙에 놓인 하얀 석상이었다.

'나무....'

잎사귀 하나하나가 진짜처럼 섬세한 조각상이었다.

그 나무 석상 너머에 7개의 문이 반원을 그리며 늘어져 있었다.

내가 그 공간을 둘러보는 사이 시스템 메시지가 차곡차곡 쌓였다.

「신세계의 주인들에게 플레이어의 존재를 증명했습니다!」

「발자취를 남긴 보상으로 명성 20이 증가합니다.」

「메인 시나리오의 잠금을 해제하려면 기도실을 방문해주세요!」

'메인 시나리오.'

이번 히든 미션의 타이틀이었다.

익숙해지고 싶지는 않았으나, 이미 익숙해져 버린 메시지를 빤히 노려보던 내가 물었다.

"기도실에 가볼 수 있겠습니까?"

"저곳이 전부 기도실이네."

콧수염을 쓸어내린 그렉이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7개의 문, 그 문 위에 새겨진 각기 다른 문장.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하지 않았다.

"...팔라오는 어딥니까?"

"굳이 팔라오의 신전을 고른 이유가 있나?"

"다른 곳을 골라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너희가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않는다면 나도 그러겠다는 답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라샤르는 물론이고 그렉까지, 우리는 서로에게 숨기는 게 제법 많았다.

아니나 다를까 묘한 미소를 지어보인 그렉이 가장 좌측에 있는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순서대로 겸손, 자선, 친절, 인내, 순결, 절제, 그리고 근면이네."

여기서 그렉이 거짓말을 할 가능성은.

'낮다.'

지원병력에 대한 이야기를 확실하게 마무리하기 전까지 주도권은 나에게 있다.

'방심하는 건 아니지만.'

말뿐인 신탁에 매달릴 만큼 간절했던 이들이 도박수를 두기엔 이르다.

그 증거로 내가 두 번째 문을 열자마자 그렉이 말을 덧붙였다.

"난 더 이상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여기까지 자네를 안내했어."

"...."

"그러니 이젠 자네 차례야. 조금 전에 언급했던 사안에 대해서 꼭 확답을 받아오게."

지금까지는 내 뜻대로 휘둘려 주었지만, 이곳에 들어갔다 나오면 얘기가 다를 거라고.

그렉의 경고에 잠시 멈춰 섰던 난 계속 걸음을 내딛었다.

기도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자 시스템창이 떴다.

[메인 시나리오 : 여는 이야기의 잠금을 해제하시겠습니까?(Y/N)]

이제까지 내가 걸어온 길이 주르륵, 보이는 것 같았다.

난 최악의 최악을 생각하며 버튼을 눌렀다.

순식간에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빌어먹을 시스템

57화

제14장 서버 연결(1)

처음엔 보이는 모든 것이 검은색이었다.

눈을 뜨고 있었음에도 한밤중에 눈을 감았을 때와 비슷했다.

그렇게 몇 초나 지났을까? 오로지 어둠 뿐이던 시야에 변화가 생겼다.

한쪽에 쩌적, 하고 금이 간 것이다.

어디선가 쿵, 하는 소리가 울리자 균열이 한층 더 커졌다.

쿵, 쿵쿵. 몇 번이고 이어진 울림 끝에 균열이 뚫리고야 말았다.

그 구멍 너머에서 나타난 건 흰자와 눈동자가 구분되지 않는 붉은색 눈.

난 저 눈을 알고 있다.

'괴물들이네.'

구멍은 점점 더 커졌고, 많아졌다.

그러더니 숲에, 호수에, 들판에, 사막에, 괴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어서 마을이 불타고, 도시가 무너지고, 울부짖는 사람들이 괴물에게 잡아 먹히는 광경이 차례로 내 시야를 점거했다.

이건 이 세상에 벌어진 일을 요약하고 있는 영상이었다.

B급 감성의 영화를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말 그대로 메인 시나리오네.'

그것도 오프닝, 게임 플레이에 앞서 알아야 할 세계관을 설명해주는 것에 가까웠다.

이후에는 플레이 방식에 대한 설명이 시작되었다.

어둠 속에서 기도실에 들어오기 전에 보았던 7개의 문장이 떠올랐다.

'7대 규율과 신.'

난 계속 이어지는 영상을 보며 이 게임의 기본 룰을 이해했다.

'7대 교단 중에 소속될 진영을 결정하는 거구나.'

플레이어들은 비하르에서 각기 다른 신에게 소속되는 셈이다.

'이 조건도 마냥 깨끗하게 보이지는 않는데....'

직감에 불과하지만, 소속 진영을 선택한다는 게 정치적인 용도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플레이어는 성장한다.'

언젠가 라샤르처럼 어마무시한 마력을 가진 이들이 등장할 테지.

그리고 그들이 세울 업적이나 실적은?

'전부 소속된 교단의 이름값이 되겠네.'

진영 선택의 이면에 깔린 저의가 생생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물론 마냥 플레이어를 이용하는 형태는 아니었다.

소속 진영을 고르면 다양한 혜택이 딸려 온다.

'진영별로 초기 버프가 다르고, 성기사나 신관들처럼 신의 가호를 받을 수 있네.'

신의 힘을 사용하는 것이니 만큼 갖은 조건 걸려 있겠지만.

7가지 권능 중 하나를 사용할 수 있다는 건 제법 큰 메리트가 있다.

관련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 영상을 집요하게 시청하기도 잠시.

'잠깐.'

갑자기 머릿속에 드는 의문 때문에 초조해졌다.

'그럼 나도 진영을 정해서 그 중 하나만 쓸 수 있다는 건가?'

자칫 잘못하면 히든 미션에서 개고생을 하며 얻은 권능이 날아가게 생겼다.

이미 피넬페니아 쪽을 썼으니까 그쪽으로 진영이 정해졌다고 봐야 하나?

그럼 남아 있는 칼로스의 권능은? 라샤르가 대놓고 귀한 것이라고 했던 건데?

'아직 메인 시나리오가 오픈되지 않았을 때 쓴 거잖아.'

그러니 아직 괜찮지 않겠냐고, 난 애써 불안한 마음을 다독였다.

그러다 계속 이어지는 영상 때문에 헛웃음을 내뱉었다.

새삼, 이게 진짜 게임인양 구는 시스템의 행동이 가증스러워서.

그럴듯한 세계관을 정리하고 플레이 방향을 설명하면 뭘 하나.

사람들의 눈을 가리고 게임인 척해도 이게 현실에 속한 전쟁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데.

결국 내가 신탁에서 언급된 희망이라는 단어를 보고 추측했던 게 맞아 떨어진 것이다.

'개새끼.'

시스템은 플레이어를 이 전쟁에 참전시키려고 한다.

사전에 동의조차 구하지 않고 강제로.

모든 영상이 끝났을 무렵 내 눈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홀에 대한 이야기가 없어.'

이 부분이 확인되지 않으면 난 선택을 할 수가 없다.

히든 미션의 보상을 받은 후에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없나?

내가 방법을 궁리하는 사이 어둡게 물들었던 시야가 천천히 밝아졌다.

이윽고 내가 들어온 기도실의 전경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을 때.

"흡!"

갑자기 거대한 존재감이 나를 향해 쏟아졌다.

[늦었군.]

그리고 말소리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목소리가 아니라 말소리, 마치 의식을 그대로 전달하는 느낌이었다.

[약속을 어겼다.]

[책임을 물어야 해요.]

말소리가 거듭될수록 존재감이 더 강해졌다. 하나가 아니라 여럿.

거대한 존재감들이 나를 비집고 들어와 기존의 것들을 헤집어 놓는 기분이었다.

버텨보려 했지만 몸이 허물어졌다.

볼품없이 바닥으로 널브러지자 내 생존 본능이 위험 신호를 보내왔다.

'터진다.'

이건 나라는 존재가 버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 상황이 몇 초만 더 이어졌어도 난 끝났을 것이다.

여기까지 온 내 선택을 후회하고, 내 뒤에 남을 동생들을 걱정하면서도 무력하게 죽어 나갔겠지.

하지만 천만 다행히도 나의 최후는 뒤로 미뤄졌다.

「시스템이 신성 조각을 흡수합니다.」

내가 위기감을 느끼기 무섭게 메시지가 뜨더니, 나를 헤집던 존재감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헉, 허억!"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던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겨우 숨을 가다듬은 난 손으로 바닥을 짚고 주섬주섬,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텅 빈 기도실을 노려봤다. 조금 전에 들은 말소리의 흐름이 이상했으니까.

'늦어? 약속? 책임?'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때 갑자기 시스템창이 떴다.

"System Message"

애초에 당신들이 #$@!!^$%f를 놔주지 않았으면, 상황이 이렇게 꼬이는 일도 없었을 겁니다.

기존의 보던 것과 다른, 이상한 시스템창이었다.

'시스템 메시지...?'

낯선 형태의 창을 보고 있노라니 혹시, 어쩌면.

가정에 불과한 단어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때 나를 비집고 들어오는 존재감이 다시 느껴졌다.

[직접 왔나? 미리 인사를 해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다행히도 이전처럼 나를 헤집는 느낌은 없었다.

낯선 존재감은 그저 나를 통과해서 그대로 빠져나갔다.

"System Message"

제가 없었다면 태도가 달라졌을 거라는 뜻으로 들리는군요.

난 숨을 죽인 채 상황을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그럴 리가.]

[다른 세상의 신성이여, 예를 갖추지 못한 것이 마음에 쓰여서 그러는 겁니다.]

[말을 똑바로 하십시오. 우린 #$@!!^$%f를 놔준 게 아닙니다. 놓친 것이지.]

[지금 지나치게 흥분한 것 같은데. 우선 진정부터 하는 게 좋겠어.]

여러 말소리가 마구잡이로 겹쳤다.

아마도 이 거대한 존재감들은 이 세상의 7대 신.

나를 통해 스쳐 지나가는 존재감은 아마도 신성.

'분명 시스템이 신성을 흡수한다고 했어.'

일단 지구의 시스템과 이쪽 세상의 신들이 나를 통해 한 자리에 모인 건 분명해 보인다.

'왜 이제 와서?'

지금까지 자본주의 특성으로만 간간이 존재감을 드러내던 시스템이 아닌가.

내가 있는 자리에서 이렇게 대놓고 의사표현을 하는 건 처음이다.

'이제까지 전면에 나서지 않은 게 아니라, 나설 수 없었던 건가?'

업데이트처럼 무슨 제약이 있는 건지도 모른다.

'신성이라는 게 특별한 에너지 같은 거라서 그 제약을 충족시켰다거나.'

난 여러 방향으로 추론을 이어갔다.

그러면서도 연달아 떠오르는 시스템창을 주시했다.

"System Message"

전 충분히 이성적입니다. 사과 한 마디 하지 않는 당신들은 당황했겠지만요.

"System Message"

분명히 경고하죠. 앞으로 당신들이 만날 이방인들은 모두 나의 사도나 마찬가지입니다.

"System Message"

그들을 함부로 대하거나, 감히 이용하려고 든다면 저도 더는 참지 않을 겁니다.

"System Message"

여차하면 지금 붙들고 있는 #$@!!^$%f를 풀어버리겠어요. 당신들이 없다 해도 우리에겐 대비할 방법과 시간이 있다는 걸 잊지 마세요.

[찰나에 벌어진 일이라 막지 못했던 것뿐입니다.]

[고의가 아니었다는 걸 믿어주었으면 하는군.]

[부디 힘없는 신도들을 가엾이 여겨주세요.]

[우리도 오랜 전쟁에 지쳤어. 그 때문에 실수를 했을 뿐인데, 이리 몰아붙이면 어찌 큰일을 함께 도모하겠나.]

오가는 대화 덕분에 대강의 분위기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상한 문자를 놓쳤다고.'

그걸 시스템이 붙잡았고, 덕분에 신들은 이득을 본 것 같다.

'풀어 놓는 순간 7대 신들이 엄청나게 곤란해지는 무언가.'

그게 무엇인지 고민하는 건 나중이다.

지금은 대화의 흐름에서 본 찝찝함을 먼저 파고들어야겠다.

이상한 문자를 놓친 게 실수였다고는 했지만, 그 말을 그대로 믿어도 되나?

'처음에 분명 책임 어쩌고 했지.'

7대 신들은 처음에 공격적인 태도를 보였다.

나한테 무언가를 뒤집어 씌우려는 것처럼.

그런데 시스템이 나타나자마자 태세를 전환했다.

난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만큼 멍청하지 않았다.

시스템의 감시가 없으면, 저들에게 난 함부로 해도 되는 존재인 것이다.

"이...."

절로 욕지거리가 치밀어 올랐다.

"System Message"

이번이 마지막 기회임을 잊지 마세요.

그때 시스템 메시지가 뜨더니 우르르, 말소리가 쏟아졌다.

서둘러 이 자리를 마무리하려는 기색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실수를 지적 받았음에도 제대로 된 책임조차 지지 않고 유야무야.

그 꼴을 보고 있자니 열이 폴폴 올라왔다.

동시에 복잡하고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앞으로도 계속 시스템이 저들을 막아줄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언제 뒤통수를 칠지도 모르는 놈들을 가만히 놔둔다는 건 말이 안된다.

"잠깐."

내가 갑작스럽게 입을 열자 시스템은 물론이고 7대 신도 순간적으로 침묵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틈에 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지금 나서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다.

어쩌면, 가만히 있는 게 나을 수도 있다.

가만히 있으면 반은 간다는 말이 괜히 있는 건 아니니까.

상황 파악도 겨우 한 상태에서 나섰다간 실수를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여기서 그냥 넘어가면 안 돼.'

고작해야 몇 분. 내가 이 세상의 신들을 겪어본 건 고작 몇 분이었다.

그 몇 분 사이에 놈들의 저의와 본성을 엿봤다.

저들은 저열한 생각을 감출 생각조차 없었다.

'대체 얼마나 우습게 보였으면.'

시스템이 나타나자마자 태세전환을 한 것부터, 잘못을 지적받은 후 변명을 늘어놓는 것까지.

'어떻게 사과를 하는 놈이 하나도 없을 수가 있지?'

하나 같이 변명을 하거나 죄책감을 부추기고, 책임을 떠넘기려는 식으로 말했다.

상황이 이러니 알고 싶지 않아도 알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저 자식들에게 나 같은 플레이어는 만만한 이용 대상일 뿐이라고.

그렇기에 도박에 가까운 짓까지 해가며 나서는 것이다.

오늘의 방치가 훗날 커다란 피해가 되어 돌아오게 둘 수는 없으니까.

"야, 시스템."

고요한 기도실에서 내 목소리가 유독 두드러졌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많지만, 지금부터 난 전부를 아는 척해야 한다.

'전쟁, 홀, 시스템과 신들의 밀담, 게임, 플레이어, 파병.'

그간 내가 추론해온 것들을 붙들고 있는 허세 없는 허세, 다 끌어 모아서 최대한 그럴싸하게!

"진짜 이게 최선이냐?"

난 짜증이 가득 녹아든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 저 새끼들이 하는 꼬라지를 보라고."

툭툭, 무릎을 턴 내가 두 다리로 땅을 딛고 서며 말을 이었다.

"사사건건 발목만 잡을 것 같은데, 그냥 우리끼리 하지?"

시스템도, 7대 신도 말이 없었다.

급이 안되는 내가 끼어들어서 어이 없어 한다고 보는 건... 아니다.

'나를 시스템의 사도와 같이 대하라고 했어.'

이 세계에서 신의 사도쯤 되면 꽤 높은 지위로 추정된다.

이 정도 발언권은 있을 것이다.

지금 저들이 침묵하는 건 내가 나선 시기와, 내가 한 발언에 당황했기 때문이리라.

그러니 멈추지 말고 더 지른다.

"씨발, 동맹이랍시고 이것저것 따져가며 당해주니까 만만하게 보는 거잖아."

난 아무런 답도 돌아오지 않는 허공에 대고 더 사납게 쏘아붙였다.

빌어먹을 시스템

58화

제14장 서버 연결(2)

"그냥 저쪽이고 우리고, 각자 알아서 하자고."

시스템은 분명 우리끼리 대비할 방법과 시간이 있다고 말했다.

저쪽을 협박해야 하는 상황에서 공수표를 날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간 신들에게 효과가 없으니까.'

그러니 다른 방법이 있다는 건 분명 사실이다.

신들 역시 그 점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시스템은 말로 하는 협박에서 그쳤다.

'그 방법이 최선이 아니라는 의미겠지.'

최선은 이놈들과 손을 잡는 것일 터, 그래서 꾹 눌러 참는 거라고 하면 말이 된다.

'말하는 걸 보니 계속 그 부분을 고려해서 좋게, 좋게 넘어가 준 것 같은데.'

그 결과가 지금이다. 저쪽의 실수에도 사과조차 받지 못하고, 사과하라고 요구해야 하는 처지.

직접적으로 사과를 요구했음에도 제대로 된 사과 대신 변명이나 주워듣고 넘어가 줘야 하는 을의 입장.

고작 몇 분 사이에 겪은 일을 되새기자 머리가 띵했다.

이유가 무엇이건, 무작정 참고 받아준다고 해서 상대방이 감사하는 건 아니다.

'그건 호구짓이지.'

보라, 호구를 자청한 결과 저 신놈들이 얼마나 뻔뻔하게 구는지.

도움을 주고받는 게 나쁘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도움을 뜯어 먹히는 건 좀 아니잖아?

"계속 저쪽이랑 같이 갈 거면 너 혼자 해. 난 저런 양심 없는 새끼들이랑 일 못 해."

이를 악문 채 망치로 못질을 하듯, 한자, 한자 끊어가며 말하자 시스템이 반응을 보였다.

"System Message"

알겠습니다. 오늘부로 비하르 측과의 계약은 파기하겠습니다.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쏟아지기 시작한 말소리에 정신을 빼앗길 틈도 없었다.

'부정하지 않았다.'

난 조금 전 분명 동맹을 들먹였다.

그럼에도 시스템은 정정하거나 부정하는 대신 수긍했다.

이 세상과 모종의 관계를 맺었다는 확언이나 다를 바 없었다.

문제의 관계를 맺은 이유야 뻔하지.

'적과 아군.'

괴물과 라샤르 일행을 구분하던 단어만 봐도 답이 나온다.

진실에 한발 더 가까워진 난 죽을 힘을 다해 동요를 감춰야만 했다.

머릿속이 바쁜 와중에 말소리까지 얹어지니 두통이 일었다.

말소리가 너무 겹쳐서 이해하는 데 조금 어려움이 있었지만.

신들의 말을 요약하자면, 대충 전쟁의 승패를 운운하며 이 선택이 최악의 수임을 들먹거리는 내용이었다.

정말이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내뱉었을 때였다.

개별적인 시스템창이 아니라 메시지창에서 새로운 메시지가 갱신되기 시작했다.

「시스템이 단독 서버 운영의 위험을 설명합니다.」

「계약을 파기할 경우 차원을 넘을 때마다 값을 지불해야 하므로 초기 위험 부담과 피해가 증가합니다.」

「플레이어의 생존율을 최대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양측 서버를 연결해야 합니다.」

난 메시지를 읽으면서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최소한의 눈치는 있어서 다행이네.'

시스템은 정말로 7대 신과 손절할 생각이 없다.

일단 내가 떡밥을 던지니까 받아주었을 뿐이다.

그 와중에 개별적인 시스템창이 아니라 게임 알림용 메시지창을 사용한 걸 보면, 신들이 여기까진 볼 수 없다는 의미겠지.

처음 치고는 제법 손발이 맞는 것 같았다.

'굳이 설명하는 걸 보면, 예상대로 최선은 저들과 손을 잡는 방향이라는 건데.'

다행히도 난 메시지창을 통해 시스템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제법 잘 알아들었다.

'초기 위험 부담이 높다는 건 마력과 관련되어 있겠지.'

플레이어가 성장할 수 있는 마력 흡수 구조.

오염된 마력을 정화할 수 있는 아이템과 특성.

두 가지 요소를 생각하면 이 세상은 사냥터라고 보면 된다.

'문제의 사냥터를 오가는 게 힘들어지면?'

플레이어들이 사냥터에서 마력을 먹고 성장하기 힘들어지니, 초보자 구간을 벗어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나도 진짜 거기까지 일을 저지를 생각은 아니었다.

지금 신들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건 서로의 관계를 다시 구축하기 위함일 뿐이다.

"잘 생각했어, 어차피 이 새끼들이 시간을 벌어줄 텐데 뭐가 문제야. 빨리 철수하자고."

우리 세상에서도 할 게 많아, 하고 덧붙이자 말소리들이 한층 더 시끄러워졌다.

난 그걸 다 무시하고 자세를 낮추었다.

"이거 파괴하면 돌아가는 거 맞지?"

"System Message"

네, 매개체를 파괴함으로써 홀을 폐쇄하는 것이 미션 완료 조건입니다.

난 시스템의 답을 확인한 즉시 며칠 내내 들고 다녔던 방패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허리춤에 매어둔 단검 두 자루 중 하나를 뽑아 드는 행동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매개체를 파괴하는 방법은 이미 알고 있다.

소용돌이처럼 모여든 마력의 흐름을 끊어내기 위해 단검에 내 마력을 덧씌웠다.

붉은 아지랑이에 뒤덮인 검날이 마력의 소용돌이를 향해 쇄도했다.

내 움직임에 망설임은 없었다.

어차피 난 이 매개체를 파괴할 수 없다.

머릿속에서 쉴 틈 없이 울리는 말소리가 그러한 확신을 주었다.

그렇기에 있는 힘껏, 진심처럼 보이도록 단검을 내리찍을 수 있었다.

캉-!

'이것 봐, 이거 보라고.'

단검이 방패에 닿기 직전 금색 빛무리가 생겨났다.

내 단검은 그 빛무리를 뚫지 못하고 튕겨져 나왔다.

단검을 놓치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로 있는 힘껏 휘둘렀는데.

방금 내 행동을 막은 건 분명.

[이렇게 일방적으로 약속을 저버릴 수는 없다.]

[분명 함께 하기로 얘기가 끝났을 텐데요.]

[당신의 사도가 흥분한 것 같은데, 말리는 게 좋겠습니다.]

[일방적인 파기를 우리가 용납할 것 같은가!]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한 신들이다.

그들은 내가 떠나지 못하게, 이 자리가 파하는 일이 없도록 직접 나섰다.

그런데도 또 전쟁이 어쩌고, 대의가 어쩌고.

고개를 빳빳하게 치켜들고 도움을 내놓으라 요구하는 꼴을 왜 봐줘야 하나.

감사할 줄 모르는 놈들은 혼쭐이 나봐야지.

"이 새끼들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네."

뚝, 뚜둑.

"전쟁에서 이기는 게 그렇게 중요하면 너희 쪽에서 고기 방패를 보내. 그럼 시간은 벌 수 있겠지."

목을 좌우로 꺾은 내가 단검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그동안 우리가 준비를 끝내면 승률이 올라가지 않겠어?"

싸늘한 적막은 신들의 분노와 나의 분노를 동시에 담고 있었다.

그에 내가 조소를 머금은 채 일갈했다.

"그건 싫은가 봐?"

난 말을 이으면서도 다시 단검을 높게 치켜들었다.

"우리도 싫거든. 그래서 너희들 뒤 닦아 주면서 손해 보는 거 그만하려고."

마지막 기회라는 걸 말로 떠들어 봐야 무슨 소용인가.

'협박을 할 거면 제대로 해야지.'

말로 해서 알아들을 거였으면 이런 일은 애초에 일어나지도 않았다.

'이런 놈들에게는 확실하게 보여줘야 해.'

여차하면 계획이니 약속이니 그딴 건 언제든 무산시킬 수 있다고.

그런 위기감을 항상 가지고 있어야 기어오르지 못하고 을의 입장을 자처하겠지.

'시스템은 이 자리에 등판하자마자 저들의 잘못을 따지기 시작했어.'

그간 쌓인 게 많다는 의미고, 한두 번 참아 준 게 아니라는 뜻이다.

'병신 같은 놈.'

난 싸늘한 표정으로 방패 위에 서린 금색 빛무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시스템, 이거 치워."

잠깐의 틈을 두고 빛무리가 옅어지기 시작했다.

자연적으로 사라지는 게 아니라 억지로 흩어내는 느낌이었다.

난 금색 빛무리가 점점 옅어지다 끝내 완전이 사라졌을 때 다시 단검에 마력을 둘렀다.

한층 더 다급해진 말소리는 깨끗하게 무시해주었다.

그렇게 다시 각을 잡고 단검을 찌르려던 순간.

[형제들의 무례를 대신 사과하겠습니다.]

차분하면서도 침울한 말소리를 기점으로 주변이 고요해졌다.

왁자지껄, 마구잡이로 쏟아지던 다른 말소리가 일시에 사라진 것이다.

자의로 입을 다물었다기보단, 강제로 침묵 당했다는 느낌이 강했다.

딱 느낌이 왔다. 이쯤에서 끝내면 될 것 같다고.

[미안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처음으로 사과가 들려왔다.

그런데 이제껏 나를 거쳐 간 것들과 묘하게 다른 말소리였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목소리로 구분도 할 수 없는 신이 여럿이다 보니 누가 누군지 확실하지가 않았다.

'일단 일곱이 다 온 것 같지는 않은데.'

지금까지 내가 느낀 신성의 종류는 네다섯 정도.

그런데 방금 말을 걸어온 신성은 낯설다.

계속 침묵하고 있다가 이제서야 한 마디를 꺼낸 걸까?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형제들은 간절하기에 물불을 가리지 않는 겁니다. 모두 자신의 신도에게만은 끔찍하니까요.]

내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자 해명과 변명의 중간쯤 되는 말이 이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염치를 잊은 게 자랑은 아니겠지만요.]

"그쪽은...."

[부족한 것이 많으나, 세노아라는 이름으로 신도들을 보듬고 있습니다.]

세노아면 겸손이다. 라샤르의 설명에 따르면 유일하게 권능이 알려지지 않은 신인데.

'다른 신들이 조용해진 게 권능이랑 관련 되어 있는 건가?'

내가 다른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세노아의 말은 계속 되었다.

[형제들을 대신해 저라도 사과하겠습니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필요하다면 추가 조약도 감수하겠습니다.]

그의 말은 축 늘어진 느낌이었다. 너무 피곤해서 탈진해버린 사람의 목소리처럼.

[더는 무의미한 설득에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아요. 팔라오가 그렇게 되기 전에 결단을 내렸어야 하는데, 너무 늦어서 미안합니다.]

내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갑자기 왜 팔라오가 언급되는 거지?

'그렇게 되기 전?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또 답을 알기 힘든 의문이 쌓였지만, 대신 알아낸 것도 있었다.

'이쪽이 머리인 것 같긴 한데.'

아무래도 신들 사이에서는 겸손의 영향력이 가장 막강한 모양이다.

그나마 제정신이 박힌 놈이 하나라도 있어서 다행인 걸까?

'아니.'

다른 놈들이 하는 꼴을 봤는데 순순히 믿어줄 수는 없지.

어쩌면 우리를 속이기 위한 연극일지도 모른다.

난 의심과 경계를 거두지 않은 채 침묵으로 겸손의 신 세노아를 부추겼다.

[이계의 신성이여, 그리고 반가운 이방인이여. 방관 역시 잘못인 바, 늦게나마 사죄드립니다. 죄를 물어주세요. 책임을 지겠습니다.]

세노아의 차분한 말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시스템창이 떴다.

"System Message"

동맹을 증명하기 위해 방문한 이방인을 고의적으로 위협했던 행위.

협약의 맹점을 교묘하게 피해 이방인을 이용하려던 계획.

#$@!!^$%f를 고의적으로 방출한 의혹.

절로 표정이 굳어지는 내용에 낯선 단어까지.

이 기도실에 들어오고부터 정신이 하나도 없다.

"System Message"

모든 혐의를 시인한 것으로 간주하여 비하르의 신성들에게 고합니다.

"System Message"

차후 플레이어들의 죽음에 어떤 식으로든 개입할 시, 기여도에 따른 죄값을 산출해 동일한 크기의 신성을 거두겠습니다.

[비하르의 책임자로서 새로운 조약에 동의합니다.]

신성이니 조약이니,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모르겠다.

일단 우리 쪽에 좋은 방향으로 끝난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난 웃는 대신 싸

늘한 눈으로 기도실을 훑어보았다.

'일곱 중에 고작 하나인가.'

7대 신 중 그나마 체면을 차리고 예의를 갖춰 사과를 한 놈이 하나뿐이라니.

정말이지 엉망진창인 놈들과 일을 같이 하게 생겼다.

[반가운 이방인이여, 그대에게는 다시 한번 사과하겠습니다. 서둘러 온다는 게 늦어버리고 말았네요.]

이건 분명, 초반에 내가 위협을 느꼈던 그 일에 대해서 말하는 거겠지.

"말로 사과한다고 해서 제가 죽을 뻔했다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죠."

난 시큰둥하면서도 차가운 태도로 대꾸했다.

빌어먹을 시스템

59화

제14장 서버 연결(3)

[말뿐인 사과처럼 느껴졌다면 그 또한 미안합니다.]

내가 처음으로 겪은 신성은 압도적이며 무거웠다.

굳이 구분하자면 전체적으로 불쾌한 느낌이 강했다고 할까?

그 이후에 우르르 딸려온 다른 신성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그런데 세노아의 신성은 조금 달랐다.

'담당하는 규율이 겸손이라 그런가?'

전체적으로 조심스럽고 차분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해 준 것에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어둡기만 하던 앞날에 희망이 보이네요.]

그래서인지 다른 놈들에게 하던 것처럼 강하게 밀고 나가기가 애매했다.

'이런 유형은 불편한데.'

상대방에게서 전투력이 느껴지지 않으니 덩달아 나까지 힘이 쭉쭉 빠진다.

내가 불편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자 옅은 웃음기가 느껴진 것 같기도 하고.

나를 비웃는 건가, 싶어서 미간을 구기기 무섭게 세노아가 말했다.

[이건 감사의 답례라고 여겨주세요.]

눈앞에 금색 빛무리가 생겨나더니 곧 내 주먹 만한 크기의 구슬이 되었다.

내가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자 시스템이 나섰다.

「겸손의 신 세노아가 비하르를 대표하여 감사의 선물을 전합니다.」

아무래도 받으라는 의미 같아서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구슬에 닿기 무섭게 몸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칭호 동맹의 증표가 생성됩니다.」

몸이 움찔거리기도 잠시, 난 상태창에 새로 생긴 칭호를 눌러보았다.

[동맹의 증표]

• 설명 : 비하르의 주신들이 당신의 업적에 감사를 표하기 위해 전달한 선물입니다.

• 효과 : 소속 진영에 상관없이 7대 권능을 모두 사용할 수 있습니다.

동요를 감추려고 노력했음에도 손끝이 떨렸다.

메인 시나리오를 열람하는 동안 알게 모르게 마음에 걸렸던 문제가 해결되었으니까.

'칼로스의 권능을 날리지 않아도 된다.'

내가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세노아가 작별을 준비했다.

[그럼 이제....]

"잠깐, 자선의 팔라오에게 물어보고...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서둘러 그를 붙잡은 건, 지금이 아니면 신들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많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대체 아헬이 왜 팔라오를 꼭 집어서 추천했는지 궁금했다.

직접 대화를 해보면 힌트라도 얻을 수 있을까 싶어서 말을 꺼낸 것이었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뭐야, 혹시 아예 안 왔나?'

팔라오가 아예 이 자리에 오지 않은 건가?

아니면 세노아가 나랑 대화를 하지 못하게 막는 것일지도.

무엇이 진짜일까 싶어서 생각을 곱씹기도 잠시.

[자선의 팔라오는 소멸했다.]

뜻밖의 타이밍에 뜻밖의 답을, 또 다른 낯선 신성으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시끄럽게 떠들 던 넷, 세노아, 그리고 방금 말을 꺼낸 하나까지.

총 여섯 신이 모두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군요."

팔라오가 소멸했다는 말은 아헬이 팔라오의 신전을 추천한 이유를 설명하기에 충분했다.

'중립 지대 같은 거네.'

팔라오 교단은 머리를 잃었다.

그래서 다른 교단이나 신들의 안중에 없는 것이다.

견제할 이유조차 없는, 위세가 기울어가는 교단.

그게 이 세상에서 팔라오의 교단이 가진 위치다.

[건승을 빌고 있겠다.]

그 사실을 깨달은 직후, 팔라오의 소멸 소식을 전한 신성이 덤덤한 인사를 남기고 사라졌다.

[그럼 협약을 이행하도록 하죠.]

"System Message"

최대한 빨리 연결 작업을 시작하겠습니다.

이후 세노아와 시스템이 짧은 대화를 주고받았다.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히.]

그것을 기점으로 거대한 존재감이 모두 사라졌다.

세노아가 모두를 데리고 떠나버린 것 같았다.

텅 빈 기도실에서 우두커니 자리를 지키던 난 폐부 가득 숨을 채워 넣었다.

신들이 떠나갔으니 다음 차례는 시스템이다.

"야, 시스템."

낮게 가라앉은 부름에 내 주변으로 하얀 막이 생겼다.

1, 2레벨의 미션에서 보았던 방어벽과 똑같았다.

일곱, 아니, 여섯 신에게 우리의 대화를 알려주지 않기 위해서 시야를 차단하려는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방어벽이 나를 완전히 감싼 후 정면에 시스템창이 떴다.

"System Message"

네, 플레이어 강현우.

아직 있다. 의사소통이 가능한 시스템이 내 눈앞에 떡하니.

그 사실을 확인한 내가 두 손을 불끈, 움켜쥐었다.

그리고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화를 담아 읊조렸다.

"너 이 새끼...."

내 성격에 벌써 목청을 높이고 화풀이를 하고도 남았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시스템과 나의 관계는 그 정도로 엉망이었다.

하지만 들끓는 화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System Message"

갑작스럽게 무거운 짐을 안겨드린 점,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시스템의 반응이 정중해서도 아니고, 저쪽에서 먼저 사과를 해왔기 때문도 아니다.

내가 메인 시나리오를 봤기 때문에 화를 낼 수가 없었던 것에 가깝다.

비하르라 불리는 이 세상과 지구가 어떤 상황에 처한 건지 짐작하고 있으니까.

화를 낸다고 해서 이 거지 같은 상황이 변하지는 않는다.

"System Message"

또한 정말 감사합니다. 플레이어 강현우 덕분에 서버 연결에 필요한 예상 기간을 극적으로 단축했습니다.

주먹을 꽉 말아쥔 난 조금 허탈한 심정으로 시스템이 하는 말을 읽었다.

"System Message"

혹시 필요하신 것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궁금하신 것이 있다면 그 또한 모두 답해 드리겠습니다. 당신의 플레이를 지원하기 위해 필요한 일이라면 방법을 강구해 보겠습니다.

"후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난 얼굴을 문질렀다.

여기까지 꾸역꾸역 온 목적을 달성할 때다.

"오늘은 웬일로 이렇게 순순하냐?"

물론 적대감이 모두 사라진 건 아니었기에 말투가 이죽거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시스템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차분한 답을 돌려주었다.

"System Message"

비하르의 주신들이 남기고 간 신성 덕분에 일시적으로나마 여유가 생겼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같은 양방 소통이 일시적이라면 이렇게 시간을 낭비해선 안된다.

난 곧바로 용건을 꺼냈다.

"홀이 지구랑 연결된 거 맞아? 플레이어가 그 홀을 통해서 왔다 갔다 했던 거고?"

가장 급한 건 홀과 관련된 문제다.

"System Message"

예, 정확합니다.

이를 악문 채 숨을 고르던 내가 다시 물었다.

"괴물들도 오갈 수 있냐?"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이건 나한테 정말 중요한 문제였다.

"System Message"

예, 하지만 현재는 제 선에서 출입을 막아두었습니다.

미션 목록에 있던 숫자들이 떠오르며 발 밑이 아득해졌다.

"System Message"

물론 완전히 파괴하지 않으면 적들의 통로로 사용될 겁니다. 실제 비하르가 그런 식으로 침략 당했습니다.

아마도 이 세상의 명칭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지.

우리의 세상은 지구, 이쪽 세상은 비하르.

물론 지금 중요한 건 이 세상의 이름 따위가 아니다.

지구와 비하르 사이에 난 홀이 중요하지.

아니기를 바랐는데, 내가 조금씩 모은 정보를 쫓아 도출한 내용은 정답이었다.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던 탓인지 충격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저 막막할 뿐이다.

"System Message"

기존의 게이트를 쓸 수 없게 된 후 홀을 방치한 기간이 너무 길었습니다. 2년 전에 서버를 연결했다면 지금처럼 엉망은 아니었을 텐데....

주절주절, 이어지는 시스템의 말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잠시간 위태로운 숨을 몰아쉬던 난 별안간 눈을 질끈 감았다.

언제까지 넋을 놓고 있을 수는 없다.

'정신 차려. 아예 몰랐던 거 아니잖아.'

난 힘이 빠지는 몸을 애써 추스르며 마음을 다잡았다.

지구와 비하르 사이에 난 홀의 기능을 확인한 이상 내가 할 선택은 하나 뿐이다.

놈들이 지구로 넘어오는 것만은 안 된다.

그 괴물들이 내 주변 사람들에게 이를 들이미는 꼴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그 꼴은 못 본다.'

튜토리얼부터 시작된 이 끔찍한 경험을 하는 건 나 혼자로도 충분하다.

내 마음이 이러하니 어쩌겠나.

비하르라 불리는 이곳에서 괴물들의 씨를 말려버리는 수밖에.

얼굴을 벅벅 문지른 난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기 시작했다.

'화풀이를 해봐야 달라지는 건 없다. 그렇게 시간을 낭비할 때도 아니고.'

시스템의 사과로 마음이 풀렸다거나, 켜켜이 쌓인 감정이 해소된 게 아니다.

이놈이 나를 사지로 밀어 넣은 사실이 변하지는 않는 이상 난 시스템을 용서할 수 없다.

언젠가 반드시, 튜토리얼을 하며 느꼈던 그 울분을 되갚아 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지금은 아닐 뿐이다.

'인류의 존속.'

그 거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시스템의 힘이 필요하다.

그래서 가슴 깊은 곳에, 나조차도 억지로 들추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 곳에 과거의 분노를 묻어 두기로 했다.

지금부터 난 시스템과 일시적 협력 관계다.

스스로에게 그 사실을 몇 번이고 주지시키자 머리가 맑아졌다.

'뭐부터 해야 하지?'

서버 연결이니 뭐니, 떠들어 대던 게 무슨 의미였는지 확인해야 하나?

'아니.'

신들과의 대화를 듣자 하니 그건 이미 확정된 사항이다.

곧 서버 연결이 시작될 테고, 그건 무를 수 없다.

더군다나 서버라는 단어 덕분에 어떤 의미인지 짐작이 된다.

'지금 지구 서버가 따로 있으니까 비하르라는 이쪽 서버가 새로 열리는 거겠지.'

대충이나마 추론할 수 있는 이야기, 그것도 이미 확정된 일이다.

굳이 확인하고 설명을 들을 필요가 없다.

오히려 신들에 관한 이야기가 더 중요하다.

앞으로 놈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활동해야 하니까.

"방금 본 그놈들, 믿을만한 것 같지는 않던데."

"System Message"

신뢰도를 수치로 표현하면 28% 정도입니다. 그마저도 세노아와 칼로스를 생각해서 높게 잡은 수치입니다.

기선 제압은 했지만, 그래도 그냥 안 믿는 게 마음 편할 거라는 소리네.

"일곱... 아니, 여섯 신들 간의 관계는?"

"System Message"

본인들을 두고 형제라 칭하고 있습니다만, 보셨다시피 결속력이 대단하지는 않습니다.

"서로 싸움박질이라도 하는 모양이지?"

"System Message"

그 이상으로 자세한 관계는 저도 알지 못합니다. 다만 교단 간의 분쟁은 제법 잦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역시나라고 할까? 난 크게 놀라지 않았다.

적에게 밀려 궁지에 처한 상황에서도 서로 다른 교단은 목소리를 높이며 싸움질을 해대고 있다.

그런 와중에 전쟁을 지원할 동맹이 생겼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눈에 훤하네.'

아헬은 분명 아인종의 대다수가 마력을 사용할 줄 모른다고 했다.

비전투 인원이 대다수인 상황에서, 수천, 수만 명의 전투 인원이 생기면?

각 교단은 눈에 불을 켜고 플레이어들 끌어들이려고 할 것이다.

'성장이 가능한 병력은 교단의 힘이 될 테니까.'

플레이어들이 진영을 선택하는 건 생각보다 중요하다.

멋도 모르고 막 골랐다간 우리를 이용하고 버릴 놈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꼴이 될 것이다.

'겸손의 세노아와 친절의 칼로스, 그리고 자선의 팔라오.'

난 셋의 이름을 머리에 새기며 한숨을 삼켰다.

'나머지 넷은 견제해야 한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동업자가 미덥지는 않다고 따져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

이미 바꿀 수 없는 것이 마음에 안 든다고 따질 시간에 다른 부분을 손보는 게 낫다.

"분명 내 플레이를 지원하기 위해서 뭐든 하겠다고 했지?"

정확히는 필요한 방법을 강구하겠다고 했지만.

"System Message"

예, 그렇습니다.

시스템은 내가 원하는 대답을 내어놓았다.

그런 적이 없느니, 마느니, 하면서 말을 바로 잡으려고 들었으면 또 욱했을 텐데.

'서버 연결이니 뭐니, 고맙다는 말까지 했으니 지금 요구하면 몇 가지는 들어주겠지.'

이 게임을 하기 위해 필요한 건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게임 업데이트는? 그것도 가능하고?"

앞으로를 위해서 이 미친 게임을 내 입맛에 맞게 좀 뜯어고쳐야겠다.

빌어먹을 시스템

60화

제14장 서버 연결(4)

"System Message"

예, 가능합니다.

곧바로 돌아온 대답에 내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업데이트에 제약이 있는 줄 알았더니."

그저 내 억측이었던 것일까?

"System Message"

비하르와 서버를 연결하게 되면 프로그램 개발에 투자한 신성을 쓸 수 있게 됩니다. 원하시는 부분을 말씀해주시면 최대한 수정해보겠습니다.

지금은 업데이트를 할 여력이 안 되지만, 서버가 통합되면 가능하다는 거군.

정확히 힘을 투자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으나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업데이트에 긍정적인 답을 들은 걸로 충분하다.

'가능하다는데 미룰 필요는 없겠지.'

난 이 게임을 하는 내내 쌓아둔 불만을 꺼내 들었다.

"마력 흡수하는 방식부터 좀 바꿔."

이건 무조건 뜯어고쳐야 한다.

"System Message"

불가능합니다. 지구의 인류는 태생의 한계를 넘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병력을 양성하기 위해선 마력을 흡수하고 정화하는 과정이 필수입니다.

하지만 시스템은 내 건의 사항을 듣자마자 반려시켰다.

이게 오죽 중요하면 처음부터 말하겠냐고. 그런데 일말의 재고도 없이 반려해?

'게임 안 해본 티를 내는구나.'

욱, 하는 감정이 치밀어 올랐지만 한 번은 참았다.

지금까지는 이유도 없이 날 무작정 사지로 떠민 놈에 불과했지만, 지금부터는 이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협력해야 한다.

팀원이 마음에 안 든다고 무작정 화를 내고 쏘아붙이기만 해선 안 된다.

"내 말은, 마력을 흡수하더라도 표현은 다르게 하자는 거지."

그래서 최대한 이성적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지금 같은 방식은 플레이 의욕을 깎아 먹는다고."

마력을 버는 족족 써대니 상대적 박탈감이 존재한다.

죽어라 고생해서 6천까지 강해졌는데, 상점을 좀 이용했다고 다시 2천까지 약해지는 게 말이 되냐고.

성장했다가 다시 약해지는 게임을 누가 좋아라 하겠나.

신체적인 변화가 없다고는 해도, 숫자를 통해 느끼는 심리적인 반감이 존재한다.

메인 시나리오를 확인한 지금 이 전쟁엔 더 많은 플레이어들이 필요하다.

"그 플레이어들이 이 게임에 몰입하려면 방해 요소나 다름없는 이 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이해했냐?"

차근차근 문제점을 따지는 동안 시스템은 조용했다.

"그러니까 마력이라는 수치 말고 다른 형태로 표현하자는 거지. 예를 들면 포인트라던가, 그런 식으로."

그 포인트로 마력을 사는 구조로 바꾸면 되지 않겠냐고.

난 이게 나름 합리적인 해결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System Message"

포인트로 적립하여 마력과 상점을 운영하는 방식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그 또한 불가능합니다.

안타깝게도 시스템의 생각은 달랐다.

"System Message"

정화하지 않은 마력으로 인과에 어긋나는 지식을 얻으려면 효율이 너무 떨어집니다. 상점에 책정된 값이 최소 열 배는 오를 겁니다.

생각보다 중요한 내용 같아서 시스템의 설명에 집중했다.

"System Message"

지금의 가격을 유지하려면 마력의 흡수와 정화를 서버에서 전담해야 한 후 플레이어들이 사용하게 되는 구조로 만들어야 하죠.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System Message"

개입 비율이 그렇게까지 높아지면 인과율이 방관을 포기하고 간섭해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인과율? 그건 또 뭐냐.

난 머리카락을 거칠게 헤집으며 물었다.

"인과율이 내가 아는 그 인과율?"

결과보다 원인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그거?

"System Message"

기본적으로 원인과 결과 사이에는 자연적인 흐름이 존재합니다. 제가 말한 인과율은 그 흐름을 보호하는 역할로, 자연적이지 않은 비인과적 흐름을 제거하죠.

"System Message"

인과율이란 저조차도 기원을 알 수 없는, 아주 오래된 규칙입니다. 물론 인과율의 감시와 규제를 피해갈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머리털 나고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였다.

"System Message"

신성을 소모할 경우 인과의 흐름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제가 만든 게임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죠.

시스템이 한 말의 요지는 간단했다.

본래 다른 생명이 가진 힘을 흡수한다는 건 자연적인 흐름 내에서 허락되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플레이어는 시스템이 만든 비자연적인 게임 내에서 허락되지 않은 일을 누릴 수 있다.

그리고 그 게임은 시스템의 신성을 대가로 만들어졌다.

본래라면 인과율의 개입으로 인해 사라졌어야 할 게임이 유지되는 이유였다.

시스템의 신성을 대가로 받은 인과율이 눈을 감아주고 있는 셈이다.

거기까지 정리를 하자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아헬이 마력에 대해 설명해 주었을 때.

'마력으로 자연을 거스른 대가를 치른다고 했지.'

그거랑 비슷한 이치인가?

"System Message"

전 원래 차원 내부의 일에 개입해선 안 됩니다. 굳이 게임의 형태를 취한 것도, 인류에게 익숙하면서 자율도가 높은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System Message"

덕분에 대부분의 선택을 플레이어 개인에게 일임함으로써 저의 간섭을 최소화할 수 있었습니다.

정화와 흡수를 개인이 책임지면 서버의 역할이 줄어들고, 대가로 지불해야 할 신성도 줄어든다.

반대로 게임이라는 구조 속에서 서버가 기여하는 비중이 더 높아지면 더 많은 신성을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충분한 신성 없이 서버의 역할을 늘리는 식으로 업데이트를 하면?

'인과율이 끼어들어서 게임 자체를 없애버릴 수도 있다는 거구나.'

기껏 투자한 신성이 날아가는 것이다.

신성이라는 게 정확히 뭘 의미하는 건지는 모르겠다.

그저 신적인 존재로 불리는 이들이 가진 힘이라는 것 정도.

물어볼까 싶었지만, 금세 고개를 내젓게 된다.

'지금 수준에서는 이 정도로 충분해.'

현재 게임에 묶인 신성 외에는 시스템이 더 쓸 수 있는 신성이 없다는 건 이해했으니까.

이 대화에 제한 시간이 존재하는 이상 굳이 더 깊게 파고들어서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

"System Message"

운용 가능한 신성을 모두 동원해도 마력의 흡수 구조를 바꾸기엔 부족합니다.

여기서 신성을 더 썼다간 시스템이 막고 있는 홀이 뚫릴 거란다.

괴물이 지구로 넘어온다는 말이다.

시스템은 지금 인과율이라는 것과 외줄타기를 하는 중이다.

한 발이라도 삐끗하는 순간 게임을 위해 투자한 모든 게 물거품이 되겠지.

'인과율이라....'

살아오는 동안 단 한 번도 인지해본 적 없는 세상의 규칙.

그 낯선 개념을 머리 한구석에 심어둔 난 팔짱을 낀 채 생각을 정리했다.

내가 요구한 사항은 이 게임 자체를 위협할 수 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업데이트를 해야 할 이유는?

'없다.'

총기가 통할 거라는 보장이 있다면 모를까.

괴물이 타고난 마력이 80까지 올라가면 그냥 칼로는 가죽을 뚫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파괴력이 강한 폭탄 같은 건 통할 수도 있지만....'

현대 사회에서 화학 무기가 동원된 전쟁이 터지면 그 이후를 장담할 수가 없다.

핵이라도 쐈다간 방사능에 피폭되겠지.

'각국이 보유 중인 핵을 모조리 쏘면 인류의 과반수가 증발할 거라고 했던가?'

기사인지, 웹커뮤니티 글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 어디선가 그런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

그 대상이 괴물이라는 이유로 핵폭탄을 써대면 지구는 사람이 살아남기 힘든 지옥으로 변하겠지.

반면 마력이라는 힘을 사용하는 플레이어들은 그런 문제와 거리가 멀다.

물리적인 피해는 어쩔 수 없겠지만, 적어도 피폭 걱정은 덜 수 있을 터.

'플레이어를 양성하기 위해선 이 불편한 구조를 안고 가는 수밖에 없다는 말이네.'

그렇다면 당장은 포기하는 수밖에.

난 마력 구조와 관련된 업데이트에 미련을 두지 않기로 했다.

그저 차곡차곡 쌓아둔 의문 옆에 함께 놔두었을 뿐이다.

당장은 힘들더라도 나중에, 대가로 지불해야 할 신성의 대체품을 찾으면 그땐.

'그 전까지는 불편해도 참는다.'

어차피 그것 외에도 고칠 건 넘쳐 난다.

"그럼 보관함은?"

지금 내가 사용하는 보관함은 다섯 칸짜리, 한 칸당 10kg의 무게 제한이 있다.

문제는 그 칸에 '하나'의 물건만 넣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단검 하나를 넣고 나면 가용 무게가 남아도 다른 것을 넣을 수 없다.

장검과 단검을 함께 넣으려면 자루나 가방에 담아서 '하나'로 묶어야 가능하다.

이 때문에 얼마나 불편했던가.

"총량을 줄이더라도 한 칸으로 묶고, 무게 위주로 보관할 수 있게!"

물론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기술 살 때마다 도박이라도 하라는 거냐? 일치하는 속성을 명시해 줘야지! 마력 등급을 같이 표시해서 추가 설명 없이도 플레이어가 인지할 수 있게 만들라고!"

생각을 하면 할수록 계속 나온다.

"아이템 설명은 왜 그따위야? 여운이라도 남기게? 이게 문학 작품인 줄 알아? 열린 결말 따윈 필요 없으니까 정보를 줄 거면 제대로 줘!"

지구의 메인 서버가 활성화되는데 걸린 3개월을 제외하면, 실질적으로 내가 이 게임을 플레이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런데도 불편했던 점이 너무 많아서 말이 쉬지 않고 나왔다.

"그리고 메인 시나리오 영상."

이 문제를 입에 올렸을 무렵엔 답답한 마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저걸 저딴식으로 만들어 놓으면 플레이어들이 잘도 이 세상에 오겠다!"

영웅심리? 좋지, 누구나 한 번쯤은 영웅이 될 수 있는 기회를 꿈꾼다.

히어로물 영화가 괜히 잘 팔리겠냐고.

그러나 이 게임은 영화가 아니다.

'영화를 보는데 목숨을 걸지는 않잖아?'

타인의 평화를 위해 목숨을 걸고 뛰어들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소설이나 영화에 나오는 의기나 협의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많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입과 머리로는 약자를 도와야 한다고 외쳐도, 막상 목숨이 경각에 달한 상항이 오면 다르다.

'여유가 있을 때야 누구나 타인을 도와야 한다고 말하지.'

반대로 여유가 없으면? 타인을 돕기 위해 제 목숨을, 제 소중한 사람의 목숨을 걸어야 한다면?

스스로의 위험을 감수하고 타인을 위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게 쉬웠으면 인간의 역사가 그렇게 피로 얼룩지지도 않았겠지.

인간의 본성은 숭고하거나 아름답지 않다.

외부와, 타인과 단절된 채 태어나는 데 당연하지 않나?

위험이 닥친 순간 '나'를 느낄 순 있지만 '너'를 느끼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니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남보다 생생하게 느껴지는 스스로가 더 중요할 수밖에.

애초에 희생이 추앙받는 이유도 그것이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네가 인간에게 얼마나 큰 기대를 하는지 모르겠는데, 생판 처음 보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라고 외치면 올 놈도 도망간다!"

어쩌면, 평화에 물든 현대인에게는 통했을지도 모른다.

'죽음이 어떤 건지 막연하게 짐작만 할 테니까.'

무지하기에 용감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튜토리얼을 겪고, 괴물을 마주하고, 커뮤니티의 숫자가 줄어드는 걸 본 사람들은?

그들은 평범한 현대인들 보다 더 가까이에서 죽음을 보았다.

직접 죽을 위기를 겪어보기도 했다.

'게임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현실이라는 걸 잊으면 안 된다.'

죽을 수도 있다는 생명의 위협이 실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얼굴 한 번 본적 없는 사람들을 위해 괴물과 싸우라니.

숭고한 마음가짐으로 시스템의 뜻에 호응하는 사람은 한 줌도 안 될 것이다.

하지만 형체가 없는 선의 대신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보상을 내세우면?

플레이어들이 이 게임에 참여하는 이유를 그들 개인의 '욕망'에 걸면?

'온다.'

전부는 아니라도, 선의를 내세울 때보다는 많은 이들이 반응할 것이다.

때때로 욕망은 본능을 잊게 만들 정도로 강렬하니까.

'자본주의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는 이게 더 매력적인 조건이다.'

가진 게 적은 사람일수록 더 적나라하게 반응할 것이다.

본인의 현실을 뒤집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으니까.

"이건 위험 부담이고 뭐고 없어. 반드시 고쳐야 돼."

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System Message"

우려하시는 부분에 대해 납득하였습니다. 해당 문제에 대해서는 인류의 특성을 고려해 플레이어 강현우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겠습니다.

"후우."

속을 다 비워내려는 것처럼 긴 숨을 내쉰 내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다행히도 이것들은 마력 흡수 구조와는 달리 전부 수정할 수 있나보다.

"그리고."

물론 아직 끝난 건 아니다. 하나가 남았다.

"제발, 알림음, 좀."

난 언성을 높이지 않기 위해 두 손을 꽉 말아 쥐었다.

"음소거로 돌릴 수 있게 수정하자."

이건 진짜 간절하다. 사감이 섞였지만 난 알림음 기능을 꼭 업데이트 해야겠다.

지구로 돌아가면 새 가이드를 쓸 예정인데 그때도 초단위로 울리는 알림음에 시달릴 순 없다.

그래서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얘기를 꺼낸 것인데.

"System Message"

그저 버릇 같은 불평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만, 정말로 불편하셨나요?

이놈의 시스템이 내 성질을 긁었다.

빌어먹을 시스템

61화

제14장 서버 연결(5)

욕이 절로 나올 만큼 허술한 게임을 만들어서 사람을 개고생시켜 놓고, 뭐?

'버릇 같은 불평?'

불평이 많다고 날 돌려 까는 건가?

뭐라고 한 마디 쏘아붙이려고 입을 연 순간이었다.

"System Message"

거듭 요청하시니 다음 업데이트에서 꼭 반영하겠습니다.

시스템이 한 발 빨랐다.

한차례 뺨이 씰룩거렸지만 난 눈을 꾹 감고 욕을 삼켰다.

'안 해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해준다는데 굳이 말을 길게 붙여서 에너지 소모를 하지 말자.

'그냥 빨리 끝내자.'

3레벨 미션을 시작하고서 여기까지, 예상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이 걸렸다.

괜히 더 시간을 끄느니, 조금이라도 더 빨리 끝내는 게 나으리라.

시스템과 엮이는 시간을 줄이는 게 내 정신건강에 이로울 것 같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몇 가지 얘기를 더 나누고 나니 시스템 쪽에서 먼저 끝을 고했다.

"System Message"

바하르의 신들이 남긴 신성 조각이 곧 소진됩니다. 이번에 인사드리면 당분간은 또 찾아뵙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System Message"

하지만 플레이어 강현우를 주시하며 성심껏 지원하겠습니다. 부디 다시 인사 드릴 때까지 건승을.

거의 동시에 두 개의 창이 겹쳐 뜨더니 지지직, 그래픽이 깨졌다.

직후 시스템 메시지라고 명시된 창이 사라졌다.

전구가 나갈 때처럼 한순간 뚝.

'꽤 다급한 느낌인데.'

부리나케 꽁무니를 뺀 것 같기도 하고.

급한 일이 생겨서 자리를 박차고 나간 것 같기도 하고.

슬쩍 미간을 좁히기 무섭게 메시지가 갱신되었다.

「축하합니다! HIDDEN MISSION - 메인 시나리오를 성공했습니다.」

「성공 보상으로 속성 마력 100이 제공됩니다.」

「성공 보상으로 랜덤 상자(×3)가 제공됩니다.」

「성공 보상으로 명성 50이 증가합니다.」

「성공 보상으로 메인 시나리오가 오픈됩니다.」

「성공 보상으로 업적 10이 증가합니다.」

「시스템과의 대화가 종료됩니다.」

「특성 자본주의가 비활성화 됩니다.」

"쯧."

히든 미션은 명성 순위에 따른 보상 두 배 특전이 적용되지 않는 모양이다.

신세계 미션에서 보상이 그대로기에 혹시나 했더니.

'쪼잔한 새끼.'

명색의 1위 특전인데, 미션 종류에 따라서 차별을 하냐.

속으로 혀를 찬 난 상태창을 열었다.

새로 등장한 업적이라는 걸 확인해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상태창을 아무리 뒤져도 업적이라는 단어는 보이지 않았다.

'뭐야?'

혀를 차기 무섭게 오랜만에 보는 창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중요 공지≫

곧 서버 연결이 시작됩니다. 모든 플레이어는 미션지를 벗어나 대기해주십시오.

Timer : 00:59:59

한 시간짜리 타이머를 눈에 담자 무거운 듯 가벼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비로소 시스템과의 대화가 끝났다고 생각하자 후련했다.

그런데 한 편으로는 답답하기도 했다.

대화 내내 입에서 맴돌던 질문을 꺼내지 않은 탓이겠지.

'그냥 물어볼 걸 그랬나?'

왜 신성을 써가면서까지 이런 게임을 만들었냐고.

대화의 흐름상 신성이라는 건 제법 중요한 것 같았다.

'비하르의 신들에게 죗값만큼 신성을 받겠다고 했던 걸 보면 아마도.'

그런데 시스템은 왜 그걸 써가며 이 게임을 만들었을까?

난 시스템과의 대화를 시작할 무렵부터 입속에서 맴돌던 질문을 끝내 삼켰다.

물어보고 싶었으나 묻지 않았다.

답을 듣고 싶지 않기도 했지만, 물어보지 않았음도 답을 유추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시스템은 그간 플레이어의 생존율에 관심을 기울였다.'

억지로 게임에 떠밀어 놓고, 정작 게임을 하는 플레이어의 생존율이 높아지게 여기저기 손을 써두었다.

심지어 7대 신에게 뒤통수를 맞아가면서도 줄곧 참아왔던 것 같다.

비하르를 사냥터로 써야만 가장 안전하게 병력을 양성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다수의 플레이어를 키우면 만약의 경우, 괴물들이 지구로 넘어왔을 때 더 많은 민간인을 살릴 수 있을 테고.

행동의 저의를 눈치챘기 때문에 더 외면하고 싶었다.

시스템이 조금이라도 더 많은 플레이어를, 더 많은 사람을 살리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걸 인정하면 내가 속에 담아두기로 한 분노를 털어내고 용서해야 할 것 같으니까.

'그건 싫다.'

시스템이 인류에게 기회를 주었다곤 해도.

그 기회 덕분에 내 동생들을 지킬 힘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곤 해도.

용서하고 싶지 않았다.

결과만 보자면 내가 시스템을 통해 이득을 취한 셈이지만 싫은 걸 어쩌겠나.

옹졸하다고 손가락질 받아도 상관 없다.

'내가 이런 놈인 걸.'

난 원인이 정당하다는 이유만으로 겪어온 모든 울분을 털어낼 정도로 어른스럽지 못하다.

그러니 그냥 옹졸한 욕쟁이가 되련다. 그것으로 내 마음이 편하다면 그렇게 살고 싶다.

'어차피 당장은 신성을 운운하는 놈에게 복수할 방법도 없고.'

직접 겪어 본 신성은 너무나도 압도적이었다.

당분간은 사감을 묻어둔 채 납작 엎드려서 성장하는 데 집중해야겠다.

'내가 그 신성이라는 걸 넘볼 날이 오게 되면 그때는.'

오늘과 다를 것이다.

물론 먼 훗날의 일이 될 테고,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벌써부터 가능성을 포기할 생각은 없다.

시스템이 머물렀던 허공에서 시선을 거둔 난 조용히 몸을 돌렸다.

제법 오래 머물렀던 기도실을 빠져나오자 절로 고개가 기울어졌다.

밖에서 초조한 듯 서성거리고 있는 라샤르를 발견한 탓이다.

'아까 돌아간 거 아니었나?'

나오면 멱살 잡고 답을 재촉할 것 같던 그렉은 어디를 가고, 왜 라샤르가 여기에 있지?

"뭐야, 돌아간 줄 알았는데."

어째서인지 내가 말을 걸자 라샤르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 기척이 느껴져서...."

"기척?"

"...신의 기척."

침을 꿀꺽, 삼킨 라샤르는 내 눈을 지나칠 정도로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빤히 봐? 나 뭐 묻었냐?"

"아, 아니, 그저 눈이...."

"눈?"

난 되묻는 것과 동시에 허리에 찬 단검을 뽑았다.

잘 벼려진 날에 눈을 비춰보자 아니나 다를까.

"아, 또 변했네."

신성이라는 것에 노출된 탓일까? 눈이 또 금색이다.

혀를 차며 단검을 집어넣은 내가 간단하게 설명했다.

"권능을 쓴 건 아닌데, 그쪽들이 말하는 신을 좀 만나서."

라샤르는 오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는 또 침을 꿀떡, 하고 삼키는 게 제법 초조해 보였다.

물어보고는 싶은데 이것저것 머리에 들어찬 생각이 많아서 망설이는 것 같았다.

그 사이 난 그렉이 없는 홀을 쭉 둘러보았다.

지원병력이라는 말이 나온 후부터 보여준 그렉의 반응을 생각하면, 그냥 갔을리는 없다.

혹시나 해서 마력 탐지를 켰더니 역시나.

네 번째 문 안에서 마력 덩어리가 느껴졌다.

라샤르 보다는 작지만, 나와 비교하면 어마어마하게 큰 덩어리였다.

'네 번째라.'

그렉이 말해주었던 순서에 따르면 인내, 테모리아의 신도를 위한 기도실이다.

'저쪽도 밀담을 나누나 본데.'

나와 시스템이 그러했듯이, 저쪽도 쑥덕거리느라 바쁜 모양이다.

'그 뻔뻔하던 넷 중 누가 테모리아였을까?'

내가 만나본 신들의 행태를 되짚자 절로 비소가 흘러나왔다.

염치를 잊었다던 세노아의 말소리가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신도 별 거 없네.'

뭐가 그렇게 대단한 존재인가 했더니.

존재감은 압도적이었으나 위대한 존재라 할 수는 없으리라.

그들이 가진 권능은 경이로우나, 전지전능하지는 않았다.

결국 비하르의 신은 그냥 인간보다 강한 힘을 가진 존재에 불과했다.

한참 동안 네 번째 기도실을 바라보던 난 라샤르를 힐끔, 살폈다.

나로서는 신이라 불리며 남의 뒤통수나 쳐댈 생각을 하는 놈들이 우스웠다.

하지만 차마 비웃기 힘든 부분도 있었다.

'제 신도들을 위해서라면 비열해지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건가....'

뻔뻔하기 그지없던 행태가 누군가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숙연해진다.

나도 소중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남을 이용해 먹는 건 아무렇지도 않게 했을 테니까.

차라리 이해조차 할 수 없었다면 이렇게까지 기분이 더럽지는 않았을 텐데.

쓰게 웃은 난 라샤르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팔라오 쪽이 불리해 보이기도 하고, 여기까지 오는데 신세를 지기도 했고... 그래서 겸사겸사 말해주는 건데."

"어?"

마음이 복잡했던 탓인지 사족이 길어졌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질질 끌 생각은 없었다.

그렉이 나오기 전에 라샤르에게 소식을 전해야 하니까.

팔라오가 소멸한 이상 저쪽은 바로바로 시스템과의 거래에 관해 전해 듣지 못할 터.

그럼 다른 교단보다 준비가 미흡할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신들의 영향력이 커지는 걸 손 놓고 방관할 수는 없지.'

가이드를 쓸 때도 그 부분을 고려해서 정보를 풀 계획이었다.

'플레이어들이 저들 손에 놀아나는 고기 방패가 되는 일은 없어야 해.'

그러기 위해선 팔라오 진영과 세노아, 칼로스 진영을 통해 남은 네 개의 교단을 견제해야 한다.

각 교단의 위세에 대해선 무지하지만, 일단 수적으로는 열세이지 않나.

그 격차를 메꾸기 위해서라도 플레이어들을 통해 영향력을 얹어 주는 수밖에.

난 향후의 계획을 다시 한 번 정리했다.

"그게 무슨...?"

그 사이 라샤르가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곧 나 같은 사람들이 올 거야."

"그대 같은?"

"마력을 흡수해서 성장할 수 있는 병력."

내 말이 끝나자마자 라샤르의 입매가 단단하게 굳었다.

격동하는 감정을 어떻게든 감추려는 것처럼.

'뻔히 다 보이는데.'

그녀는 내가 지원병력을 운운했을 때부터 동요했다.

그런데 이제 와 감춘다고 무슨 소용이지?

묘한 감상을 느끼며 지켜보고 있노라니 라샤르가 갑자기 고개를 푹 숙였다.

"고, 고맙다. 정말 고맙다, 케이.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이 은혜는 꼭...."

왜 저렇게 감정을 감추나 했더니.

"이, 이렇게 기뻐하기엔 염치가 없다만, 우리는 정말 도움이 간절했다. 그대와 함께 올 이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도록 노력하겠다. 정말, 정말 고맙다."

여기서 죽어 나갈 사람들이 마음에 걸렸나 보다.

'무르기는.'

이 세상의 신이라는 놈들은 다른 차원의 생명과 신성을 이용하는 것쯤은 망설이지도 않는데.

그 신을 모시는 인간이 얼굴 한 번 본적 없는 사람들의 목숨을 보며 염치를 논한다.

신들을 만난 후 삐죽삐죽, 계속 날이 서 있던 감정들이 조금은 무뎌지는 것 같았다.

난 얕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한테 고마워할 건 없어. 우리 쪽도 나름 이득을 보는 거래니까."

"어?"

"우리 쪽 시스템... 뭐, 우리 신도 이걸 필요하다고 판단했으니까 거래를 했겠지."

"그런...."

"홍보는 내 선에서 할 수 있는 만큼 할 거야. 그러니까 너도 정신 차리고 제대로 해. 플레이어, 이방인을 너무 많이 뺏기면 나중에 힘들어질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니까 새겨 들어."

"어...?"

라샤르가 입을 벙긋거린 순간 기도실의 네 번째 문이 열렸다.

그 안에서 나온 그렉과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을 때, 우리는 서로에게 웃어 보였다.

진심이라곤 한 톨도 들어가지 않은 비지니스용 미소였다.

"얘기는 잘 끝났습니까?"

뒤에 깔린 배경이 어떠하든, 난 표면적으로 우호세력의 대표 같은 위치다.

여기에 있는 플레이어가 나밖에 없어서 어부지리로 얻은 자리지만, 일단은.

그 때문인지 나를 대하는 그렉의 태도는 완전히 변해 있었다.

"예, 덕분에. 테모리아 님께 대략의 상황은 전해 들었습니다."

그는 성큼성큼, 다가와 웃는 낯으로 내 손을 꽉 붙잡았다.

"최종 결정에 많은 첨언을 해주셨다고, 정말 감사합니다."

듣자 하니 테모리아가 내 욕을 오지게 한 것 같은데.

그렇다면 나도 굳이 테모리아의 체면을 생각해줄 필요는 없겠지.

난 그렉의 눈앞에서 더 활짝 웃으며 말했다.

"감사를 들을 만큼 대단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공은 여섯 신들께 돌려야죠. 다들 워낙 간절하게 부탁하시는지라 외면할 수가 없더군요."

그렉의 대꾸가 반 박자 늦어진 틈을 타 내가 잽을 한 방 더 날렸다.

"도중에 너무 의견이 맞지 않아 언쟁이 있었습니다만, 그마저도 세노아 님께서 조율에 신경을 써주셔서 잘 마무리 됐습니다."

세노아가 아니었으면 너희들은 끈 떨어진 망석중이가 되었을 거라고.

내 말에 녹아든 뜻을 알아 들은 건지 그렉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정말."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다행입니다."

그렉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하하하, 웃음소리를 내며 남은 한 손으로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면서도 마주 잡은 손을 놔주지 않은 탓에 내가 그에게 붙들려 있는 형국이었다.

"여기서 얘기할 게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시죠. 기쁜 소식을 가져오신 분인데 환대가 너무 늦지 않았나 모르겠습니다."

"마음만 받겠습니다. 돌아가 봐야 해서요."

"돌아간다 하심은...."

"저희 쪽에도 소식을 전해야죠."

"아아."

그제야 그렉이 내 손을 놔주었다.

하지만 난 바로 매개체를 파괴하는 대신 한 마디를 덧붙였다.

"돌아가서 할 일 때문에라도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편하게 말씀하시죠. 제가 지원할 수 있는 건 모두 지원하겠습니다."

그렉이 흔쾌히 답을 꺼냈다.

"저희 쪽에 보여줄 증거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요."

증거라는 말에 그렉의 금색 눈동자에 이체가 서렸다.

빌어먹을 시스템

62화

제15장 신세계로(1)

외래를 마치고 연구실로 돌아온 종훈은 털썩 소리를 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현우가 미션이라는 것을 하기 위해 들어간 지 벌써 아흐레가 지났다.

종훈은 그동안 단 하루도 마음 편히 잠들지 못했다.

당직이 아닌 날에도 꾸역꾸역 병원에 남아 연구실을 서성거렸다.

그 탓에 피부는 푸석푸석하고, 눈 밑은 퀭했음에도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하얀색 빛무리에 뒤덮여 사라졌던 현우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종훈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발신 기록에서 낯선 단어를 찾았다.

「플레이어」

현우가 새로운 미션을 시작한 날 일방적으로 연락을 취해온 번호를 저장해둔 것이었다.

-게임 들어간 사람 무사하답니다. 전해달라네요.

짧은 몇 마디를 남기고 뚝 끊긴 전화는 발신자 번호가 뜨지 않았다.

하지만 통신사를 통해 확인하자 번호를 알아내는 건 금방이었다.

그때부터는 종훈이 먼저 상대방에게 연락을 취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초조함을 이기지 못한 종훈이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두어 번 울리기 무섭게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또 왜요?』

"다른 소식은 없습니까?"

『미션에서 죽으면 바로 알 수 있다니까요? 변화 생기면 바로 연락준다고 했잖아요.』

"...번거롭게 해서 미안합니다."

『쯧.』

귀찮은 듯, 짜증이난 듯 신경질적인 답에 이어 노골적으로 혀를 차기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먼저 전화하면 꼬박꼬박 받는다.

멋대로 전화를 끊거나 언성을 높이는 일도 없다.

그에 묘한 인상을 받곤 했지만 깊게 고민해볼 정신은 없었다.

타인의 입을 통해 현우의 생사를 확인할 때마다 한 가지 생각에 매몰되었으니까.

'말리자.'

이번에 돌아오거든 무슨 짓을 해서라도 뜯어말리자.

현우가 이 말도 안되는 일을 계속 하게 둘 순 없다.

그 미션지라는 곳에서 정말 죽기라도 하면 어쩌나.

묻고 싶은 게 가득한 얼굴을 하고도 꾸역꾸역, 참고 기다리는 쌍둥이에게 현우의 부고를 전해야 하는 날이 오면?

'말려야 된다.'

친부의 폭력과 함께 시궁창에 처박힐 뻔했던 자신의 인생을 바꿔준 친구의 자식이다.

위험할지도 모르는 상황을 계속 방관할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현우가 잘못되면 쌍둥이는?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형제마저 잃게 둘 수는 없지 않나.

그 이상한 게임이라는 것, 외면하자고 설득하자.

그렇게 거듭 결심하는 동안 휴대폰 너머에서 제법 익숙해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쪽이 뭘 모르는 것 같은데, 게임에 들어간 그 사람 이쪽 바닥에선 잘 나가거든요? 다들 연줄 좀 대보려고 난리가 났을 정도라고요.』

연락을 할 때마다 귀찮아하면서 왜 눈치를 보나 했더니.

'현우 때문이구나.'

이 와중에 잘 나가고 있다고.

'예전부터 한 번 시작했다 하면 끝을 보는 성격이긴 했다만.'

이런 위험한 일에서까지 두각을 나타낼 줄이야.

기특하게 여겨야 하는 건지, 위험한 일을 열심히 하고 다니지 말라고 화를 내야 하는 건지.

대체 현우를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그렇습니까?"

긴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은 종훈은 푸석푸석한 얼굴을 쓸어내렸다.

『예, 완전 그렇습니다. 지금도 멀쩡히 살아 있구만 무슨. 뭐 마려운 개처럼 전전긍긍하지 말고 기다려 보....』

휴대폰 너머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그때.

환한 빛이 감긴 눈꺼풀 사이를 파고 들었다.

번쩍, 눈을 뜬 종훈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순간.

쿵-!

하고 묵직한 울림이 연구실을 가득 채웠다.

종훈은 자리에 일어선 상태 그대로 얼어버렸다.

뻣뻣한 갈색 털가죽에 축 늘어진 몸.

완전히 관절이 어긋나서 아래로 쳐진 상태에서 두 가닥으로 갈라진 턱.

눈이 있어야 할 자리와 이마에 꽂힌 단검 3개.

손톱과 발톱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액체.

2미터는 거뜬히 넘을 것 같은 거구의 저건.

'괴물....'

그 말 외에는 마땅한 단어가 없었다.

덤덤하기 그지 없는 표정으로 게임에서 본 괴물을 설명하던 현우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대체 어떻게, 저런 걸 봤는데 대체 어떻게 그렇게 평온할 수 있었던 거지?

충격을 받아 굳어버린 종훈의 귓가에 작은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안 되길 바랐는데...."

진짜 넘어올 수 있네, 하고.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흘린 현우가 눈매를 꾹 누르며 몸을 바로 세웠다.

『방금 미션 끝났네요. 확실해요. 곧 연락할 것 같은데... 그 뭐냐, 요괴가 꾸준하게 연락했다고, 신경 많이 써줬다고 한마디만 해주시면....』

종훈은 휴대폰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도 듣지 못할 만큼 넋이 나간 상태였다.

그렇게 괴물에게 시선을 빼앗긴 채 굳어 있기를 한 참.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놀란 종훈이 흠칫, 몸을 떨었다.

괴물의 목을 틀어쥐고 있던 현우가 어느새 그의 코앞에 서 있었다.

그는 종훈이 귀에 대고 있던 휴대폰을 슥, 빼갔다.

현우가 휴대폰을 확인하기 전에 잠시 허공에서 눈이 마주쳤다.

종훈은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20년 넘게 봐온 아들 같은 녀석의 눈동자 색이 변해 있었다.

묘한 무게감을 가진 금색 눈동자와 마주쳤을 때, 무형의 무언가가 몸을 꿰뚫고 지나간 것만 같았다.

그 순간 종훈은 정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여보세요?"

그런 그를 대신해 전화를 받은 현우가 상대방과 몇 마디를 주고 받았다.

"코드명이 요괴라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예, 신세를 졌네요. 언제 한 번 식사라도 대접할게요."

"사냥이요? 안 될 건 없죠. 날짜야 잡으면 되는 거고요."

"아, 잠시만요. 모르는 사람들이 자꾸 신청을 보내서 차단해놨거든요. 제 쪽에서 친구 추가 보낼게요."

"네, 그럼요. 편하실 때 연락 주세요."

"감사했습니다."

그리 길지 않은 대화를 나누는 현우가 낯설었다.

넋을 놓은 채 그 광경을 눈에 담고 있자니 오래지 않아 전화를 끊은 현우가 말했다.

"다녀왔습니다. 오래 걸려서 죄송해요."

씩 웃으며 건네는 인사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현우가 돌아오기만 하면 당장이라도 혼을 내려고 했는데.

당장이라도 이 위험천만한 짓을 그만하자고 설득해야 하는데.

말문이 막혀서 작은 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현우를 마주하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기다린 시간이 무척이나 긴 줄 알았다.

무려 아흐레나 소식이 없어서 속이 탔다.

그런데 돌아온 현우를 앞에 두자 생각이 변했다.

'고작 아흐레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 짧은 시간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분명 그가 아는 현우가 맞는데, 꼭 모르는 사람처럼 낯설었다.

"그리고 이 번호, 차단해 둘게요. 아저씨 주변에 얼씬거릴 수 없게 손 써둘 테니까 더는 엮일 일 없을 거예요. 번호를 바꾸시면 더 좋고요."

현우는 방금까지 통화 중이던 번호를 차단한 후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이후에는 뒤에 덩그러니 내버려 둔 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오자마자 또 부탁을 드려서 죄송한데, 저것들 담아갈... 그 왜, 시체 가방? 그런 것 좀 구할 수 있을까요?"

저것들? 자세히 보니, 큰 괴물 옆에 그 반절도 되지 않는 크기의 작은 괴물이 하나 더 있었다.

병원 연구실에 괴물이 기절해 누워 있다니.

꿈을 꾸고 있나 싶을 만큼 비현실적인 상황이었다.

"아저씨?"

"...잠, 깐만 기다리렴."

그날 종훈은 하고 싶었던 말을 한마디도 꺼내지 못하고 연구실을 빠져나왔다.

* * *

비하르에 있는 동안 김율을 통해 요괴라는 플레이어가 어느 정도 눈치를 챈 것 같다는 얘기를 듣긴 했다.

본인이 하는 연락이 케이와 관련되어 있다고.

'내가 계속 같은 미션을 하는 중이었으니 당연하겠지.'

그 말을 들었을 당시에는 어차피 요괴가 종훈에게 계속 소식을 전해줘야 하는 상황이라 그대로 두었다.

"후우."

그럼에도 휴대폰 너머에서 요괴라는 단어가 들려왔을 때,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나 때문에 종훈이 플레이어에게 노출된 게 못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당시에는 최선이었다.

'괜찮아, 수습할 시간은 충분하다.'

종훈을 플레이어에게 노출 시켜놓고 가만히 있을 생각은 없었다.

'번호는 외웠으니 찾으면 돼.'

요즘 시대에 핸드폰 번호 하나면 신변을 확보하는 건 금방이다.

상대방도 그 정도는 알 터.

그쪽이 종훈의 정보를 손에 쥐고 있다면, 나도 그쪽의 정보를 쥐면 된다.

손을 쓸 방법은 많았기에 이 문제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플레이어라고 저장된 번호를 외우는 찰나에 살펴본 통화 목록 때문에 마음이 술렁거렸다.

'수신보다 발신 내역이 더 많았어.'

종훈이 누군지도 모를 낯선 사람에게 먼저 연락을 해서 뭘 물어 봤겠나.

그 질문의 답이 너무 뻔히 보여서 마음이 무거웠다.

거기에 연구실을 빠져나가던 종훈의 뒷모습이 더해지자 착잡해졌다.

경직된 표정은 물론이고 창백한 안색까지, 여러모로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뜬금없이 눈동자 색이 변한 데다 딱 봐도 위협적인 괴물까지 달고 왔으니 당연한 일이다.

'타이머가 얼마 남지 않아서 오긴 했는데.'

별다른 방법이 없다는 이유로 종훈에게 너무 부담을 주고 있는 건 아닌지, 마음이 무겁다.

하지만 난 몇 개월 전으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2레벨을 돌던 당시엔 포션으로 완전히 무마하기 힘들 만큼 부상이 잦았으니까.

심각하지는 않았다 뿐이지 부상을 달고 살았다.

그때 종훈의 도움이 없었다면 여러모로 곤란했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의 도움이 필요했다.

'서버가 연결되고 나면 장기 체류가 일상화 될 거야.'

대화 막판에 시스템이 말하기를, 서버를 연결하면 정식으로 오갈 수 있는 게이트가 생길 것이라고 했다.

'그럼 필연적으로 미션의 방식도 바뀌겠지.'

기존에는 홀을 통해 곧장 미션지로 가야 했다.

장소를 특정할 수 없는 데다, 괴물이 득실거리는 오염지 한가운데 뚝 떨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앞으로는 특정 장소에 고정된 게이트를 통해 비하르에 진입할 수 있게 된다.

하본성 같은 안전 지대를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겠지.

비하르에서 안전하게 머물 장소가 마련되면 난 모든 일정을 성장에 맞출 생각이었다.

이미 결정을 내린 이상 방해 요소는 모두 제거하고 목표만 보고 달려야 한다.

지구로 돌아오는 날은 많지 않을 것이다.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동생들을 부탁할 사람이 종훈 말고는 없었다.

'뭐, 당장은 서버가 연결될 때까진 기다려야 하는 처지지만.'

그렇다고 그때까지 마냥 놀 수는 없는 일.

난 서버가 연결 되는 동안 지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저 괴물을 데려온 것도 그 때문이고.

"크륵...."

기절해서 축 늘어진 놈이 크륵, 크륵, 괴로운 듯 신음을 흘렸다.

'저 정도면 비주얼은 충분하고.'

동일한 개체를 잡아 봤을 때 흡수되는 마력이 무려 92였다.

'주변에 매개체는 없었으니까 진화종은 아니다.'

그냥 저 괴물 종이 가지고 태어나는 순수 마력이 90대라는 의미다.

'작은 놈은 50 언저리였지.'

저 두 마리를 잡아 오기 위해 그렉의 손을 좀 빌렸다.

- 근처에서 괴물을 좀 잡아가도 되겠습니까?

- 살아 있는 증거가 있으면 추가 병력을 산정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난 비하르의 사정을 가볍게나마 알지만, 그렉은 지구의 사정을 전혀 모른다.

그래서 그렉이 거절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몰아갔다.

덕분에 일이 수월하게 풀렸다.

그렉은 아헬보다 한 등급 높은 공간계 마력을 가진 마법사를 불러왔고, 그는 괴물이 득실거리는 오지에 나와 그렉을 데려가 주었다.

거기서 내가 생각하는 조건에 맞는 괴물을 찾고 포획하기까지 대략 30분쯤 걸렸다.

혹시나 싶어 발톱을 죄다 뽑았고, 턱관절은 부러트렸으며, 눈을 모조리 찔러서 시야를 빼앗았다.

팔다리의 힘줄을 자른데다 지구로 넘어왔을 때를 대비해서 기절시키기까지 했다.

이후 내 몸에 괴물을 밀착시킨 후 매개체를 파괴했고.

그 결과 괴물은 나와 함께 지구로 넘어왔다.

죽은 것보다는 살아 있는 게 여러모로 유용하게 쓰일 것 같아서 굳이, 번거로운 짓까지 해가며 목숨줄을 붙여놨다.

'이 정도면 조작이니 뭐니, 헛소리를 하는 놈은 없겠지.'

난 저 괴물들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들을 정리하며 메시지창을 확인했다.

빌어먹을 시스템

63화

제15장 신세계로(2)

「03-143 매개체(1)가 파괴됩니다.」

「홀이 폐쇄됩니다.」

「업적 5가 적립됩니다.」

「축하합니다! MISSION - 03-143를 성공했습니다.」

「최초로 03미션을 성공했습니다! 명성 30이 증가합니다.」

「보상을 선택하세요.」

클리어 메시지가 떡하니 찍혀 있었음에도 아주 잠깐, 지구로 돌아왔다는 실감이 나질 않았다.

내가 살아온 20여년 보다 그곳에서 보낸 열흘 남짓한 시간이 더 강렬하게 느껴진 탓이다.

'매 순간 긴장 상태였으니 당연한가....'

이대로 다시 게임에 집중하면 뭔가 어긋날 것 같았다.

그래서 잠시 시선을 돌렸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현대 문명이 가득한 창밖을 내다보기를 몇 분.

다행히도 나를 잠식한 위화감이 옅어졌다.

아무도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내가 다시 게임을 들여다보았다.

'일단 보상부터.'

마력과 속성 마력, 두 가지 선택지 중에 난 후자를 골랐다.

그러자 이제까지와는 다른 메시지가 떴다.

「누적 명성 1위 혜택으로 모든 보상의 2배가 지급됩니다.」

「속성 마력 60이 제공됩니다.」

「명성 12가 증가합니다.」

명성 1위 특전이 꽤나 쏠쏠했다.

이로써 상태창에 뜬 속성 마력은 455.

히든 미션을 통해 제법 많은 마력을 벌었다.

'신세계랑 메인 시나리오, 그 두 개로 2백 가까이 벌었어.'

역시 히든 미션은 고생을 하는 만큼 큰 이득이 되어 돌아온다.

2레벨 미션을 열심히 돌 때도 백을 겨우 넘겼던 속성 마력이 어느새 5백을 앞두고 있다니.

새삼 배가 불러오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보상과 상태창의 변화를 점검한 직후였다.

전체 공지와 함께 떴던 타이머가 0에 이르며 시스템이 움직였다.

「서브 서버(비하르)와의 연결이 시작됩니다.」

「전체 업데이트를 위한 패치가 시작됩니다.」

「진행률 0.01%」

「원활한 작업을 위해 일부 기능이 제한됩니다.」

「2차 플레이어 선발이 진행됩니다.(100,000/100,000)」

난 2차 선발로 늘어난 플레이어의 숫자를 보며 쓴웃음을 삼켰다.

'크게 지르네.'

게임 개발에 투자한 신성을 동원할 수 있다고 했던가?

시스템은 1차 선발의 열 배에 달하는 숫자를 이 게임에 끌어들였다.

베타와 1차 선발의 배수가 백 배였던 것에 비하면 비율은 줄었지만, 전체적인 규모가 확 커졌다.

이 순간 아무것도 모른 채 짐승들에게 물어 뜯기게 될 사람이 10만 명이다.

"후우."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나 역시 저들과 똑같은 피해자였는데.

지금의 난 시스템의 계획에 동조하고 있다.

이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면서도 내가 선택한 방향과 일치하기에 방관을 택한 것이다.

'공범인가....'

쓰게 웃은 난 메시지창을 끄고 커뮤니티를 열었다.

2차 선발과 그 규모에 대해 떠드는 글을 보지도 않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채팅창을 켜는 것이었다.

수신인은 남규.

- K : 지금 시간 되냐? 양조철 단장이랑 대화 좀 했으면 하는데.

개인 번호를 알지만, 투명화를 하고 공중전화를 찾아다닐 시간이 아깝다.

양조철 단장과 바로 대화가 가능한 연결책이 있으니 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남규의 답은 거의 바로 돌아왔다.

- 임남규 : 잔깐만요 가고 잇어ㅇㅛ

할 말이 많아지는 메시지에 나도 모르게 눈썹이 꿈틀거렸다.

'받침이 틀렸는데.'

그것도 두 개나. 마지막 글자를 실수로 쳐준다고 해도 두 개다.

남규의 메시지를 빤히 바라보던 난 한숨을 삼키며 눈에 거슬리는 문제를 외면했다.

'오타겠지.'

그리고 답을 기다리는 동안 에단과의 채팅창을 켰다.

그와 상의하고 싶은 문제가 있었으니까.

보다 정확하게는, 그의 허락을 받고 싶은 문제였다.

* * *

케이 쪽에서 전해줄 것이 있다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그에 양조철은 플레이어와 마찰이 있었던 요원들을 모두 작전에서 배제했다.

아주 사소한 말다툼이었다 한들 예외는 없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라 케이의 호감을 사기 위한 선물까지 준비했다.

'받지 않으려 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것저것 챙겼다.

그렇게 케이로부터 연락을 받은 지 한 시간쯤 흘렀을 때.

양조철과 임남규 외 특수 부대 소속 경호원 다섯 명은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두 대의 차량이 부드럽게 멈춰선 곳은 서울 근교의 야산이었다.

양조철이 밖으로 나서자 혹시 모를 연락 혼선을 방지하기 위해 함께 온 임남규가 곧장 따라붙었다.

케이를 만나러 간다는 말을 들은 이후 상기된 임남규의 안색을 살핀 양조철이 손목시계를 힐끔, 확인했다.

'10분.'

서두른 덕분에 약속 시간까지 여유가 조금 남았다.

"우리는 도착했다고 전해주면 될 것 같은데."

"아, 네!"

플레이어 채팅으로 케이에게 연락을 한 임남규가 말했다.

"아저씨도 금방 도착하신대요."

"다른 말은 없고?"

"네."

"그래."

코앞까지 다가온 만남에 절로 긴장감이 차오른다.

플레이어 중에서도 주머니에 넣은 송곳처럼 유독 툭 튀어나온 사람을 만나는 자리였다.

긴장이 될 수밖에.

"후우."

양조철은 숨을 고르며 케이라는 미지의 인물에 대해 다시 한번 정리했다.

지금까지 손에 들어온 정보로 분석한 케이는 굉장히 흥미로운 인물이었다.

'자신을 드러내는 걸 극도로 꺼리면서, 정작 직접 나서는 걸 망설이지는 않는단 말이지.'

이제까지의 모든 만남은 케이가 먼저 주도했다.

그 사실을 통해 케이가 행동파라는 식으로 추측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결단력과 추진력을 가진 거라고 봐야겠지.'

케이는 전체적으로 신중한 인물이었다.

거기에 더해 사전 조사까지 하는 치밀함을 갖추었다.

'처음 전화를 건 공중전화도, 만나기로 했던 카페도.'

케이가 반드시 오가야 할 장소를 직접적으로 포착하는 CCTV가 두어 대밖에 없었던 게 우연일 리는 없지 않나.

'행동파인 게 아니라 최악의 사태를 대비해 두었기에 여유로운 거다.'

신중한 사람이 전면에 나서서 움직인다는 건 만일의 경우에도 도망칠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출일 것이다.

항상 최악에 대비하며 사는 사람이니 대범해 보일 만큼 여유가 흐를 수밖에.

'머릿속에 시나리오를 수십 개쯤 짜놓고 살겠군.'

그런 사람일수록 변수에 강하다.

일이 틀어져도 당황하지 않고 바로 차선책을 고르니까.

여기까지만 해도 케이라는 인재를 향해 호감을 가지기에 충분한데, 끝이 아니었다.

플레이어 커뮤니티에 올린 글을 토대로 분석하건데, 케이는 낯선 것에 적응하는 속도가 무섭도록 빠르다.

더군다나 도전에 인색하지 않기에 응용력까지 뛰어나다.

무엇보다 눈에 드러나는 행동이 전반적으로 과감하고 대범했다.

'겁이 없는 건지, 자신감이 넘치는 건지.'

먼저 접촉을 시도하고, 계획을 주도하며, 지시를 내리기까지 했다.

케이는 공권력을 가진 집단과의 관계에서 밀리지 않았다.

일방적으로 우위를 점했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지만 일방적으로 끌려다니는 것도 아니다.

한창식 사건을 통해 스스로가 위험한 존재임을 알림 동시에, 공존이 가능한 우호 세력이라는 것도 확실히 보여주었다.

필요 이상으로 겸손한 태도를 보이지도 않고, 지나치게 우위를 점하려 든 적도 없다.

그렇기에 정부 측은 케이의 이름에 긴장은 할지언정 억압하려 들지는 않는다.

먼저 자극해서 관계를 어그러트릴 필요는 없으니까.

'개인이 단체를 상대로 행사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영향력을 구축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지.'

만약 케이가 국정원 공채에 지원했다면 냉큼 집어 왔을 정도의 인재였다.

'그러고 보니 인지능력이 뛰어나고 추론에 능하다는 평가도 있었지.'

케이는 괴물을 두고 이런저런 가능성을 많이 내어놓았다.

그런 부분을 미루어 볼 때, 흩어진 조각을 모아 구체적인 상황을 그려내는 추론에 능한 것처럼 보였다.

또한 가이드북에서 서술된 상황 묘사는 세세했다.

그 내용이 정말이라면 기억력도 좋은 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정말이지 난 놈은 난 놈이군.'

하긴, 그런 사람이니 이 게임에서 두각을 드러낸 것이겠지.

전체적인 정보를 종합했을 때, 케이는 협상에 능하며 계획을 수립하는 데 익숙하고 여러 중압감에 단련된 엘리트일 거라는 결론이 압도적이었다.

양조철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조금 더 감정적인 부분에서 케이를 관찰했다.

'남규....'

케이에겐 그를 챙겨야 할 그 어떤 의무도 없었다.

그런데도 굳이 자청하여 임남규가 저지른 사고를 덮어주고 연락책이라는 역할까지 줘가며 뒤에 버티고 섰다.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경고를 하는 것처럼.

'어쩌면 아이가 있을지도 모르겠어.'

본인의 자식을 임남규에게 투영했다면 보호 본능이 자극 받았을 수도 있겠지.

양조철은 지난 몇 주간 그러했던 것처럼 케이라는 인물에 대해 곱씹고, 곱씹고, 또 곱씹었다.

그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아내고, 더 이해하기 위해서.

그러던 중 아무것도 없어야 할 공간에서 저벅저벅,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양조철의 손이 움찔거렸다.

예전 같았으면 총기를 꺼내 쥐었을 텐데.

오늘은 플레이어에게 총기를 빼앗기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휴대하지 않았다.

무방비한 상태에서 공간이 일그러지는 광경을 보는 건 생각보다 더 긴장되는 일이었다.

꿀꺽.

하고 침을 삼키자 장신의 남자가 허공을 가르고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입니다."

제 몸집보다 더 큰 가방을 짊어지고도 힘든 기색 하나 보이지 않는 이는 분명 케이일 터.

검은 야구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까지 착용한 탓에 전체적인 생김새를 확인하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날카로운 눈매와 그 너머에서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황금색 눈동자는 지나칠 정도로 선명했다.

순간적으로 이 광경을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다는 직감을 받았다.

하지만 양조철은 애써 동요를 다독이며 입을 열었다.

"케이, 반갑습니다. 정식으로 인사...."

"초면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에서 죄송하지만, 인사는 나중으로 미루죠. 이미 1시간 가까이 지나서 언제 깨어나도 이상할 게 없거든요."

하지만 그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케이가 말을 가로챘다.

"가능한 빨리 자리를 옮겼으면 합니다. 적당한 장소는 단장님이 정하시죠."

"그게 무슨...?"

그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이으며 짊어지고 있던 검은 비닐 가방을 내려놓았다.

발치에서부터 쿵, 하고 묵직한 울림이 느껴진 직후 케이가 검은 비닐 가방의 지퍼를 열었다.

가방 내부를 확인한 양조철이 반사적으로 물러났다.

꼬깃꼬깃.

관절 마디가 꼼꼼하게 접힌 저건 양조철의 일생을 통틀어 처음 보는 생명체였다.

"이건...."

"총기가 통하는지 확인해보려고 잡아온 건데, 미리 말씀 안 드린 건 죄송합니다."

하지만 총 얘기 꺼내면 일이 복잡해질 게 뻔하지 않느냐고.

한 마디를 덧붙인 케이가 몸을 일으키며 가방을 발로 툭, 찼다.

"크륵...."

"일단 보여드리고 설명하는 게 빠를 것 같더라고요."

착각이 아니었다. 방금 움직였다.

'살아 있....'

가방 안에 꼬깃꼬깃 접힌 채 들어가 있는 괴물이 꿈틀거렸다.

"죽어 있는 것보다는 살아 있는 게 낫잖아요?"

뻣뻣하게 굳은 낯으로 기괴한 생명체를 내려다보고 있던 양조철이 삐걱삐걱,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고개를 들었다.

"조작이니 뭐니, 헛소리 하는 새끼들한텐 직방이겠죠."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확인 작업 끝나면 넘겨드릴 테니 해부를 하시든, 전시를 하시든 필요한 곳에 마음대로 쓰세요."

"...."

"게임에 대해 믿지 않는 놈들을 설득할 때 쓰면 유용할 겁니다."

설득이라니, 무엇을 위해?

양조철은 잠시간 말없이 케이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의 침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지, 눈살을 찌푸린 케이가 혀를 차며 말했다.

"아까부터 계속 입 다물고 계시는데, 제가 있는 곳에 총기를 가져오는 게 꺼려지시면 빨리 말하세요. 괜히 시간 끌지 마시고."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장소 확보하겠습니다."

케이의 재촉에 양조철은 굳은 낯을 하고서도 더 이상의 지체 없이 움직였다.

빌어먹을 시스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