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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제12장 교류(1)

- 더는 결계를 유지할 수 없다고?

결계가 사라진 직후, 라샤르는 다시 한번 결계를 구현해 줄 수 있느냐고 물었지만 난 고개를 내저어야 했다.

- 마력이 부족한가?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았으나, 당시엔 2천 마력이 넘는 기술석을 사기 부담스러웠다.

'신체가 약해질 수도 있고.'

3레벨 미션에 진입한 상황에서 3천 아래로 마력이 떨어졌을 경우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지 않나.

괴물들이 득실거리는 세상에서 위험을 자처할 수는 없었다.

그에 결계 기술석을 새로 사는 대신 라샤르와 라울이 번갈아가며 경계를 섰다.

다행히도 대부분의 인원이 그날 밤에 의식을 되찾았다.

깨어나지 못한 건 단 한 명, 내가 처음으로 구조했던 주황 머리 남자뿐이었다.

듣기로는 그의 몸에 꽂혔던 그 검은 막대기 때문인 것 같았다.

- 내가 마지막으로 그를 봤을 때 케락이 몸에 꽂혀 있었다. 놈들의 피로 만든 무기지.

- 체내에 흡수될 경우 자체 회복을 방해하는 건 물론, 장기를 녹이기도 한다.

- 그대가 치료해주지 않았다면 이미 죽었겠지. 정말 고맙다.

출혈을 잡겠다고 포션을 물처럼 들이부은 게 도움이 됐던 모양이다.

이후 깨어난 이들은 각자 정비를 시작했다.

그리고 밤새 주변을 수색한 라샤르는 추가 생존자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해가 뜨자마자 출발을 선언했고,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전투가 벌어졌다.

상대는 내가 늪지대에서 상대한 것과 비슷한 마력을 가진 놈들이었다.

싸우다 보면 가끔 까다로운 놈들이 등장하곤 했는데, 라샤르가 말한 진화종인 것 같았다.

전투가 한 번 시작되면 괴물 백여 마리가 기본으로 죽어 나갔다.

그럼에도 사망자는 커녕, 부상자도 생기지 않았다.

전투는 안정적이었다.

나 혼자서는 2, 30마리를 해결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었는데.

라샤르 일행은 그보다 많은 수를 안정적으로 사냥하는 중이었다.

비단 저들이 나보다 강자이기 때문에 그런 건 아니었다.

일당백이라는 말과 달리, 사람이 혼자서 할 수 있는 한계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난 하루가 넘도록 파티 플레이의 장점을 온몸으로 체험했다.

그 과정에서 라샤르나 다른 이들이 매개체를 파괴하는 것도 구경할 수 있었다.

「03-112 매개체(1)가 파괴됩니다.」

「04-1848 매개체(2)가 파괴됩니다.」

「03-224 매개체(1)가 파괴됩니다.」

「04-1848 매개체(2)가 파괴됩니다.」

....

메시지가 뜰 때마다 난 허리춤에 있는 방패를 만지작거렸다.

방패에 구멍이 났을 당시에는 보지 못한 메시지였다.

당시에는 이유를 몰랐는데, 라샤르가 매개체를 파괴하는 걸 보자 이해가 되었다.

'물질적인 형태만 망가트려선 소용이 없는 거야.'

중요한 건 매개체에 고인 마력의 흐름을 깨트리는 것, 그리고 자신이 가진 마력으로 구멍을 막는 것이다.

그래야만 매개체가 파괴된다.

왜 3레벨부터 마력 징수가 없어진 건지 알 것 같았다.

1, 2레벨에서는 매개체가 없었다.

아마도 시스템이 직접 홀을 폐쇄한 것 같다.

그래서 플레이어들에게 할당을 매겨 마력을 가져간 것이겠지.

하지만 3레벨부터는 플레이어들이 직접 한다.

굳이 마력을 징수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못 봤으면 한참 헤맸겠네.'

라샤르 일행을 따라다니는 건 여러모로 유익했다.

안전하게 전투 경험을 쌓는 것은 물론, 매개체를 파괴하는 방법도 배웠으며 대화를 통해 이 세상에 대한 정보도 수집할 수 있었다.

물론, 저들과의 동행에서 내가 얻은 가장 큰 이득은 따로 있었다.

「특성 자본주의가 활성화됩니다.」

「시스템이 지원 유형으로 전환됩니다. 지원 대상 플레이어 강현우.」

라샤르 일행을 만나고 사흘차.

메인 시나리오라는 히든 미션을 띄우고 잠잠하던 자본주의 특성이 다시 활성화 됐다.

「반경 100m 내에 미등록 사용자가 창출한 마력이 존재합니다.」

「대체 흡수가 가능한 정규 등록 사용자를 탐색합니다.」

「플레이어 강현우 확인.」

「오염된 마력이 흡수됩니다. 직접적인 인과 과정의 부재로 인해 흡수율이 저하됩니다.」

"엉...?"

그에 아직 의식을 되찾지 못한 아헬을 업은 채 전투를 관전하던 난 얼빠진 소리를 내뱉었다.

너무 뜬금없는 타이밍에 메시지가 뜬 데다, 그 내용까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계속 얼을 빼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카오스 수치가 쭉쭉 올라가기 시작했으니까.

내가 혼자서 사냥을 할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속도였다.

라샤르가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대여섯 마리씩 한 번에 죽어나가니 당연한 일이었다.

정화 특성이 없었다면 속절없이 정신 오염에 휘둘렸을 것이다.

난 서둘러 정화를 돌리며 숨을 골랐다.

하지만 평정을 되찾고자 하는 노력은 빛을 보지 못했다.

두근두근.

미친 듯이 뛰어대는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난 잘게 떨리기 시작한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가장 먼저 확인한 건 이 무리에서 마력량 1순위인 라샤르 베넷.

'저쪽은 뭐, 움직임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고.'

그 다음으로 큰 마력을 가진 두 사람, 로드웰과 시그람.

'이쪽은 잔상이 겨우 보이는 정도.'

다음 타자는 라울과 헤세르마.

'움직임은 비교적 명확하게 보인다만.'

단신으로 붙어서 이길 자신은 없다.

라샤르 일행의 무력은 나를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난 항상 최소한의 경계를 유지했다.

저들의 무력이 언제든지 나를 위협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얘기가 다르다.

'이 착한 새끼들 같으니라고...!'

어느새 숨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통증이 느껴질 정도였다.

결국 가슴께의 옷자락을 꾹 움켜쥐어야만 했다.

'개고생한 보람이 있다.'

저들을 구하겠다고 고렙 사냥터나 다를 바 없는 숲을 동분서주했던 기억이 주르륵, 떠올랐다.

그때 했던 고생을 오늘에서야 보상 받는 기분이었다.

'그래, 양심이 있으면 이 정도는 해줘야지.'

나를 그렇게 굴려 놓고, 보상으로 조잡한 이용권이나 뿌려대는 게 말이 되냐고.

시스템이 어쩐 일로 이렇게 마음에 드는 짓을 하나 싶어서 의심이 들기도 잠시.

수북하게 쌓여가는 괴물의 사체를 보고 있자니 자꾸 입매가 씰룩거렸다.

그래서 아예 눈을 꾹 감아버렸다. 그걸로도 모자라 이를 악물기까지 했다.

긴장을 풀어버리는 즉시 웃음이 터져나올 것 같았으니까.

'전투 중에 웃는 건 너무 수상하잖아.'

그렇지 않아도 라샤르가 종종 묘한 눈으로 날 주시할 때가 있다.

좋아 죽을 것 같아도, 괴물과 싸우는 중에 웃는 것만은 참아야 한다.

"케이?"

후욱, 후욱.

고개를 숙인 채 부들거리며 가슴께를 붙잡고 있었던 탓일까?

가까이에 있던 라울이 반응을 보였다.

나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엔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라울 뿐만 아니다. 시그람이나 로드웰도 내 행동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각자 전투를 하면서도 내 쪽을 힐끔거렸다.

"어디 아프십니까?"

헤세르마는 아예 제 앞에 있는 괴물 대여섯을 모조리 도륙 낸 후 내쪽으로 후다닥, 다가왔다.

"아, 아뇨. 아픈 건 아니고, 괜찮...."

「오염된 마력이 흡수됩니다. 직접적인 인과 과정의 부재로 인해 흡수율이 저하됩니다.」

「오염된 마력이 흡수됩니다. 직접적인 인과 과정의 부재로 인해 흡수율이 저하됩니다.」

이런 망할, 안 괜찮다. 갑자기 마력이 어마어마하게 쏟아졌다.

다른 이들이 전투를 계속하는 와중에 헤세르마가 한 번에 많은 괴물을 쓸어버린 탓이다.

오염된 마력이 큼지막한 단위로 쭉쭉 들어왔다.

그 상황에서 정화까지 돌려야 했으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케이!"

순간적으로 비틀거리자 나를 이 꼴로 만든 헤세르마가 사색이 되어 부축해주었다.

그는 내가 업고 있던 아헬을 바닥으로 내팽개칠 기세였다.

난 괜찮다는 뜻으로 손을 내저으며 바로 섰다.

'가끔 이런 식으로 좀 부담스러운 짓을 한단 말이지.'

의식을 찾은 후, 저들은 라울로부터 내가 이방인일지도 모른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게 무슨 의미를 가진 건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때부터 일행의 태도가 묘하게 정중해져서 조금 불편했다.

고작 내가 비틀거린 것 때문에 안절부절 못하며 울먹일 정도니 불편할 수밖에.

헤세르마는 물론이고 다른 이들까지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괜찮으니, 계속 하시죠. 그쪽도 좀, 계속 여기 계시면 다른 분들이 위험해질 것 같은데...."

하지만 헤세르마는 쉽사리 자리를 뜨지 않았다.

오히려 내 옆에 딱 붙어 있 날 감시하다시피 했다.

'네가 사냥을 해야 내가 공짜로 마력을 먹을 수 있다고!'

결국 난 눈을 부릅 뜨고서 불편한 티를 팍팍 냈다.

그제서야 한 발 물러난 헤세르마가 다시 전투에 가담했다.

물론 도중에 날 힐끔거리긴 했지만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정신이 완전히 다른 곳에 팔려 있었으니까.

「오염된 마력이 흡수됩니다. 직접적인 인과 과정의 부재로 인해 흡수율이 저하됩니다.」

오늘만큼은 지긋지긋한 알림음도 참고 들어줄만 했다.

난 전신을 휘감는 전율을 다스리며 정화에 집중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04-1848 매개체(3)가 파괴됩니다.」

「MISSION - 04-1848의 매개체가 모두 파괴되었습니다. 홀이 폐쇄됩니다.」

「직접적인 공헌의 부족으로 미션 보상은 제공되지 않습니다.」

전투는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고, 라샤르가 매개체를 파괴했다.

거기에 이어 홀이 폐쇄되었다는 메시지까지 떴다.

몇 시간 전의 나였다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미션창부터 켜봤을 텐데.

오늘은 아쉬운 마음에 입술을 깨물었다.

'벌써 끝이라고?'

당장 직전 전투까지만 해도 기본적으로 두어 시간은 칼질 했잖아.

그런데 이번엔 왜 이렇게 빨리 끝나는데?

하지만 내가 아쉬워한다고 해서 괴물들이 다시 밀어닥치지는 않았다.

내가 속으로 혀를 차는 사이 김율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해서 짧게 답을 보냈다.

- K : 버스 좀 탔다. 자세한 썰은 다음에.

직후 한 일은 상태창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흡수되는 마력의 양을 숫자로 본 게 아니라 확신은 할 수 없었지만, 속에서 이글거리는 덩어리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분명 제법 많은 양이 쌓였을 것이다.

'그래봤자 라샤르랑 비교하면 호롱불 정도만.'

난 긴장 반, 호기심 반으로 상태창을 확인했다.

플레이어 강현우(베타 테스터)

마력 : 6078.13(속성 마력 : 205)

카오스 수치 : 17.88%

소속 : 지구

종족 : 인간(플레이어)

등급 : 알파

속성 : 번개

기술 : 마력 운용(59.26%), 감각 확장(43.16%), 마력 탐지(lv.1 - 92.72%), 투명화(48.43%), 방어막(22.84%)

특성 : 자본주의, 동화, 집념, 정화(lv.1 - 29.61%)

칭호 : 현상금 사냥꾼

명성 : 3024

몇 번을 다시 봐도 숫자가 그대로였다. 착각이 아니다.

분명 포션과 기술석을 사느라 3천대까지 떨어졌던 마력이 다시 6천을 넘었다.

내가 한 거라곤 숨쉬면서 서 있는 것 뿐인데!

난 꼭 약을 한 사람처럼 몽롱한 상태로 나른한 숨을 내쉬었다.

그때, 시그람이 숨이 끊어지지 않았던 괴물의 목을 잘라냈다.

「오염된 마력이 흡수됩니다. 직접적인 인과 과정의 부재로 인해 흡수율이 저하됩니다.」

"아."

등줄기를 타고 올라간 전율에 몸이 휘청거렸다.

"케이!"

이번에는 라울이 바람처럼 달려와서 부축을 해주었다.

난 그의 팔을 힘주어 잡은 채 부들거렸다.

이 버스, 승차감이 너무 짜릿하다.

* * *

귀는 쳐진 강아지귀 같고, 생긴 건 꼭 불독처럼 주름진 데다, 키는 내 허리쯤에 올까말까한 놈.

라샤르 일행이 '옴비'라고 부르는 난쟁이 괴물이었다.

난 그놈의 배에 창을 찔러 넣었다.

"끽!"

내가 죽인 옴비는 이걸로 15마리.

반면 라샤르 일행이 죽인 놈들은 셀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일행이 지나온 길에 옴비 사체를 가득 늘어져 있었다.

그들이 운행하는 버스에 타는 건 이번이 세 번째였다.

4레벨 두 번, 3레벨 한 번.

반나절 만에 미션 완료 목록에 내 이름이 세 번이나 올라갔다는 의미다.

덕분에 마력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내가 얼떨떨하면서도 뿌듯한 마음으로 상태창을 힐끔거리고 있을 때였다.

"케이."

제법 익숙해진 부름이 들려왔다.

선두에 있어야 할 라샤르가 다가오는 중이었다.

"다친 곳은 없나?"

라샤르의 질문에 난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창에 묻은 괴물의 피를 털어냈다.

다른 이들도 각자의 무기를 챙기며 전투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전열을 가다듬는데 필요한 시간은 길지 않았다.

"바로 출발했으면 하는데, 괜찮겠나?"

"물론."

"그럼 가지."

사방에 널린 괴물 사체를 넘어 다시 이동이 시작되었다.

피냄새를 풍기는 사체가 없으며, 외부의 접근을 감시하기 위한 높은 나무가 있고, 밤사이 몸을 숨길 수 있는 바위가 많은 곳.

오늘 밤 라샤르가 고른 야영지는 마지막 전투가 벌어진 곳에서 2시간 정도 떨어진 장소였다.

난 저들의 속도에 맞춰 달리느라 가빠진 숨을 몰아쉬며 철푸덕, 땅에 주저앉았다.

빌어먹을 시스템

48화

제12장 교류(2)

'더럽게 빠르네.'

라샤르 일행의 속도는 진짜 이를 악물고 따라붙어야 할 수준이었다.

그마저도 나를 배려해서 천천히 가고 있다는 게 훤히 보였다.

그 결과 이동을 멈출 때면 언제나 녹초가 되었다.

'이 몸으로 다리가 후들거릴 줄이야.'

벌러덩 드러누워서 숨을 고르기도 잠시 라샤르가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그 신호를 알아들은 난 상점에서 빵과 식수를 샀다.

어디서 괴물이 나타날지 모르는 이상 불을 피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행들은 내가 상점에서 산 빵과 식수로 끼니를 때우는 중이다.

"...고맙다."

난 귀가 벌게진 라샤르를 보며 픽, 웃었다.

"한 번 만 더 들으면 백번 채우겠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감사 인사가 과했다.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다.

애초에 내 속도에 맞춰서 가느라 일정이 늦어지는 것도 있는데.

"정 고마우면 신전까지 안전 운행 부탁하자고."

"운행...? 음, 주둔지까지 그대의 안전을 보장할 테니 걱정하지 마라."

난 손을 휙휙 내저으며 내 몫의 빵을 먹기 시작했다.

"더 필요하면 말해. 빵이랑 물은 얼마든지 제공해줄 수 있으니까."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다."

라샤르는 다른 이들에게 빵과 식수를 나눠준 후 다시 내 옆으로 돌아왔다.

저들이 마력을 벌어준 것 때문에 호감이 생기긴 했지만.

날 보는 눈이 묘하게 부담스러운 건 여전했다.

그래서 차라리 라샤르가 옆에 버티고 있는 게 낫다.

그럼 적어도 어물어물, 내 눈치를 살피며 말을 걸어오지는 않으니까.

어둠에 물든 숲속을 응시하며 조용히 식사를 하기도 잠깐.

"그대는 이곳이 초행이라 했던가?"

라샤르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입에 있던 빵을 꿀꺽, 삼킨 난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그렇지, 어디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고."

그래서 신전까지 데려다 달라고 한 거 아니냐고.

한 마디를 덧붙이자 짧은 틈을 두고 라샤르의 말이 이어졌다.

"그럼 고향이 어디인지 물어봐도 되겠나?"

난 바로 대답을 하는 대신 라샤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방금 그녀가 한 말에서 묘한 느낌을 받은 탓이다.

'특별히 이상한 질문은 아니다만.'

초면인 사람들이 누구나 할 법한 질문이었다.

고향이 어딘지, 출신지를 확인하는 거야 가장 기본적인 호구조사이지 않나.

그런데도 위화감이 느껴진다.

'나를 이방인이라고 여기잖아.'

여기에 속하지 않는 외부인이라는 의미다.

그런 상황에서 내 고향이 궁금한 거라면 '어떤 곳'이냐고 물어봐야 하지 않나?

하지만 라샤르는 '어디'냐고 물었다.

'너무 위치에 치중한 것 같은데.'

이방인을 운운한 상황에서 거리를 재는 건 이상하지 않나?

내가 너무 과하게 반응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냥 넘어가기엔 찝찝하기도 하고.

이 위화감이 착각이라면 상관없지만....

'진짜면?'

난 팔짱을 낀 채 바위에 등을 기댔다.

'경계라... 의심한다는 건가?'

꽤 불쾌할 일이다. 그래도 내가 저쪽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인데 의심이라니.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기적처럼 나타난 사람이 목숨을 구해주는 이야기가 현실적이지는 않지.'

하지만 시기가 맞지를 앉는다. 왜 처음 만났을 때가 아니라 지금?

복잡한 마음으로 라샤르를 응시하자니 그녀도 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받아쳤다.

"답하기 곤란한가?"

"글쎄...."

그 한 마디, 그 재촉 한 번에 모호하던 것들이 확실해졌다.

긴장한 게 분명한 표정을 보건데, 착각이 아니다.

그녀는 지금 나를 의심하는 게 맞다. 확신을 얻은 난 픽, 웃어버렸다.

'일단 정치질은 못 하는 건 분명하네.'

당장 나를 의심하고 있다는 것부터가 슬쩍슬쩍 읽히지 않나.

말 한 마디에 속이 훤히 보이 보인다는 건 스스로를 숨기는 데 능하지 못하다는 의미다.

'뭐, 속을 읽을 수 없게 꽁꽁 감추는 놈들보다는 백배 낫지.'

난 답하기에 앞서 잠깐 생각을 정리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히든 미션의 제목은 '메인 시나리오'였다.

보통 게임의 큰 세계관을 꿰뚫는 스토리 흐름을 의미하는 단어다.

단순히 숫자로 표시된 미션에 들어가 괴물을 잡아 왔던 지금까지와는 많은 게 달라지겠지.

그렇다면 이쪽에 인맥을 만들어서 둔다고 해서 나쁠 건 없을 터.

괜한 의심은 빨리 털어내고 친목을 다져야겠다.

"이봐."

"응?"

"난 그쪽이 아니라 발자국을 쫓아 온 거야."

"무슨...."

"이 방패를 발견한 늪지대에 사람의 흔적이 있었거든."

방패를 툭툭, 손가락으로 건드린 내가 보관함 넣어둔 가방을 꺼냈다.

말을 이어가는 내 목소리는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기분이 언짢은 것과 별개로 화가 난 건 아니었으니까.

'솔직히 나 같았어도 의심했다.'

우연과 운명? 그건 이야기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내가 라샤르의 입장이었다면 그녀보다 더 집요하게 의심했을 것이다.

그래서 화를 내는 대신 가방을 꺼내 설명과 변호를 시작한 것이기도 하다.

파밍하듯이 하나둘, 챙긴 전리품들은 훌륭한 증거물이 되어주었다.

그리 길지 않은 이야기가 끝난 후 난 단호하게 말했다.

"굳이 따지면 내가 너희를 쫓아온 게 아니라, 너희가 내가 있는 숲에 뚝 떨어졌다는 의미라고."

그러니 떠보지 말라는 뜻이었다. 라샤르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말귀를 못 알아듣지는 않나 보네.'

난 그녀의 입을 막은 것에 만족하며 짐을 다시 챙겨 넣으려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지 않는 보관함 속에서 여전히 퉁퉁 불어 있는 손을 보고 망설이고야 말았다.

늪지대에서부터 챙겨온 시체 조각.

사람의 손인지 확인해보려고 챙겼던 건데, 떡하니 산 사람을 만났다.

이 손을 굳이 들고 가서 감식해볼 필요가 있을까?

'없지.'

난 썩어가는 손을 가방에 넣는 대신 저 멀리 던져버렸다.

매개체를 건져올 때 딸려온 두개골도 같이 버렸다.

"후."

최대한 무시했지만 내 가방 안에 썩어가는 손이 있다는 게 그리 유쾌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치우고 나니 속이 다 시원했다.

물론 마음이 편해지자고 몸이 불편해질 수는 없는 일.

난 내가 던진 것들을 빤히 쳐다보는 라샤르에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괜한 오해하지 말라고. 사람을 만났으니까 필요 없어졌을 뿐이거든."

원래는 내 세상으로 가져가서 확인해보려 했다고 설명하자 라샤르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크흠, 오, 오해하지 않았다."

"퍽이나."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면서도 머릿속은 바빴다.

라샤르가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다만, 나를 경계하기 시작한 건 분명하다.

'갑자기 왜지? 내가 뭐 실수했나?'

난 지난 며칠 간의 일을 돌아보았다.

혹시나 내가 실수한 게 있을지, 주변 사람의 반응이 특이했던 적이 있는지 고민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손은 열심히 움직이는 중이었다.

꺼림칙한 짐도 버렸겠다 이제 다시 가방을 싸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음?"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은 라샤르가 바닥에 늘어진 종이를 집어 들며 말했다.

비쩍 마른 시체에서 건진 전리품 중 하나였다.

"조사관들의 흔적을 따라온 모양이군."

"조사관?"

갑자기 또 왜 이래? 방금 전에는 경계를 하더니, 이젠 먼저 설명을 해주네?

대체 왜 이렇게 오락가락하나 모를 일이다.

'뭐, 거절할 필요는 없지.'

난 몸을 기울여 그녀의 손에 들린 종이를 들여다 보았다.

「세바르마 협곡, 집결 메세오 13개 추정, 오염도 심각.」

「추가 조사 불가. 4월 22일, 퇴각 결정」

분명 처음 보는 난해한 글자인데,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귀걸이 이름에 통역이랑 번역, 둘 다 적혀 있었지?'

귀걸이의 이름을 떠올리기 무섭게 라샤르의 손가락이 시야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오염 지역을 관찰하고, 적들의 개체수와 분포를 기록하는 이들을 조사관이라고 부른다."

정찰병 역할 같은 건가 보다.

그들은 적진을 직접 나다녀야 하는 고위험 직군이다.

그 탓에 결계를 사용할 수 있는 마법사가 필수로 포함된다는 설명도 따라왔다.

"여기, 보이나?"

직후 라샤르의 손가락이 종이의 하단을 가리켰다.

그곳엔 날개를 활짝 펼친 새가 찍혀 있었다.

"옛 페렐 왕실의 상징이자, 현 페렐 저항군의 공식 문장이다."

이번에는 그녀가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의 손잡이.

"아."

종이에 찍힌 것과 똑같은 새 모양이 손잡이 끝에 새겨져 있었다.

"저항군 소속 조사관들이 남긴 기록이니 내가 회수했으면 하는데, 양해해 줄 수 있을까?"

"...나보단 그쪽에게 중요한 것 같은데, 억지로 빼앗기도 그렇지. 아, 무기들은 안 돼."

허리에 찬 두 자루를 제외하곤 전부 이가 빠졌지만, 상점창에서 확인해보고 싶은 게 있다.

"기록을 회수한 것으로 만족하겠다. 한데 이 기록의 주인은...."

"내가 발견했을 땐 시체였어."

말라비틀어진 여섯 구의 시체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자 라샤르가 혀를 찼다.

"인근에 기생충 군락지가 생긴 모양이군."

"기생충?"

"혈액을 비롯한 체액을 모조리 빨아 먹는 놈들이다."

본체는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뿌리를 내린 채 움직이지 않지만, 벌레처럼 생긴 분신들이 생명체의 체액을 빨아먹고 본체에게 가져다 준다.

그 때문에 본체를 죽이지 않는 이상 분신체가 계속 증식한다고.

"기생충 군락지가 생기면 일대를 불태우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그래서인지 화염 계열의 마력에 민감하지."

라샤르는 한숨을 푹 내쉬었고, 난 그녀가 고른 단어를 곱씹었다.

'화염 계열 마력? 화염 계열의 마법이 아니라?'

굳이 다른 단어로 번역된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물어볼까, 말까 하는 사이 종이를 품속에 집어넣은 라샤르가 말을 이었다.

"아마도 추격조가 구현한 화염 마법 때문에 분신체까지 숨어든 것 같군. 그게 아니었다면 우리도 밤사이에 당했을 것이다. 이 기록을 남긴 조사관들처럼 말이야."

이번에도 낯선 단어가 머릿속에 콕, 박혔다.

'추격조....'

상공에서 섬광과 함께 갑자기 떨어진 무리는 둘.

아마도 첫 섬광은 라샤르 일행과, 두 번째 섬광은 추격조와 관련되어 있으리라.

난 신의 권능으로 보았던 라샤르의 과거를 상기했다.

"이번엔 내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무엇이기에?"

"권능으로 본 네 과거 말이야."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키게 된다.

"누구를 구조한 거지?"

라샤르는 곧장 답하는 대신 잠시 말을 아꼈다.

꼭 할 말을 고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난 그런 라샤르를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답을 해주려나 모르겠네.'

그녀는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내가 질문하는 건 꼬박꼬박, 세세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덕분에 난 이 세상의 상식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었다.

7대 신이 있다는 것도, 그들의 이름과 권능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다.

지난 며칠 그녀는 나에게 제법 친절했다.

그런데 왜인지 지금은 경계를 한다.

말을 하기 전에 해도 될 말인지, 아닌지 신중을 기하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라샤르는 긴 침묵 끝에 답을 주었다.

"농장에 억압되어 있는 이들."

"농장...?"

"식용 농장."

긴 설명은 필요 없었다.

식용 농장이라는 단어 앞에 인간을 붙이기만 하면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도축을 위해 돼지를 사육하는 농장이 있는 것처럼, 인간을 사육하는 농장이 있다는 말이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가축 취급을 받고 있다는 의미와 같았다.

아마도 내가 보았던 그 많은 괴물들의 주도 하에. 속이 매슥거웠다.

하지만 불편하다고 해서 정보 수집을 멈출 수는 없는 일.

난 마력에 대한 것을 물어보려 했다.

하지만 내가 채 입을 열기도 전에 두 가지 소식이 동시에 도착했다.

"베넷 경, 아헬이 깨어났습니다!"

「코드명 Kj로부터 채팅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라샤르는 곧장 아헬에게 달려갔고, 난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채팅창을 열었다.

- Kj : 방금 양 단장이 형 이름 속닥거리면서 남규 델꼬 가따~

'남규를?'

김율에게서 메시지가 온 건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야매로 4레벨 미션 클리어 했을 때는 물론, 라샤르 일행을 만나기 전에도 연락이 왔었다.

국정원 내에서 내 코드명이 언급되고 있다고.

'자세한 내용은 엿듣지 못 했지만 한국이 어쩌고, 해외가 어쩌고....'

나와 관련된 일이 벌어진 건 분명해 보였다.

그런 상황에서 양조철 단장이 남규를 데려갔다니.

분명 보면 나한테 전할 소식이 있는 거겠지.

'곧 알게 되겠네.'

아니나 다를까, 20분쯤 후에 메시지창에 익숙하면서도 낯선 이름이 떴다.

빌어먹을 시스템

49화

제12장 교류(3)

「코드명 임남규로부터 채팅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김율과 달리 남규와 연락을 주고 받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난 그 애를 국정원에 떠맡긴 후 한 번도 챙기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김율이랑 양혜원이 챙겨줬지.'

열흘의 유예기간 때문에 발등에 불이 떨어진 남규는 김율의 파티와 미션을 진행했다고 들었다.

양혜원 쪽에서 먼저 얘기를 꺼냈다고.

'애가 미션에서 죽었으면 꿈자리가 찝찝했을 텐데.'

덕분에 한시름 놓기는 했다. 굳이 나서서 고맙다는 인사를 전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내 이름까지 달아 줬으면 됐지.'

그 정도면 생판 처음 보는 꼬맹이에게 해줄 만큼 해주지 않았나.

남규는 어린 데다 사고까지 친 상태였다.

그걸 해결해준 것으로도 모자라, 노골적으로 배척받는 일이 없게 나와의 연결책이라는 역할을 주었다.

생판 처음 보는 애한테 해줄 수 있는 건 정말 다해준 것이다.

그러니 애를 더 이상 챙기지 않았다고 해서 미안해할 필요는 없다.

난 줄줄이 이어지는 임남규의 메시지를 보며 불편한 감정들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매정해지고자 하는 내 다짐은 오래가지 못했다.

- 임남규 : 아저씨 그때 인사를 못해서재송해요. 도와죠서 정말 감사합니다. 먼저 연락해도 대는지 몰라서 문자 안보냈어요.

맞춤법과 띄워쓰기가 제대로 되지 않은 메시지를 본 탓이다.

- 임남규 : 저는 잘지내요. 여기 아저씨들이 잘가리쳐줘서 열시미 배우고이써요.

- 임남규 : 아저씨 애기를 무러보는데 저는 말안해써요. 앞으로도 말안할께요.

내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이제껏 이렇게 엉망인 받아쓰기를 본 적이 없었으니까.

쌍둥이가 남규보다 어렸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애초에 걔들은 날 닮아서 공부를 잘한다고.'

두 녀석의 시험지에서 80점 밑으로 내려간 숫자를 본 적이 없을 정도다.

'이 자식 학교도 못 가고 있을 텐데, 따로 공부는 안 하는 건가?'

난 학부형이나 가질 법한 의문을 품은 채 초조하게 손을 움켜쥐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남규의 메시지는 계속되었다.

- 임남규 : 양조철아저씨가 꼭할 말이 있대요. 적어준대로 쓸께요.

- 임남규 : 안녕하십니까, K. 일전에 인사드렸던 양조철 단장입니다. 그간 가내 평안 하셨는지요. 근래에 3레벨 미션을 시작하셨다는 소식을....

어른이 썼다는 게 확실하게 느껴지는 서두였다.

그것만으로도 제법 길었는데, 그 너머에 있는 본론은 조금 더 길었다.

난 서두를 최대한 빠르게 스킵하고 본론과 결과만 읽었다.

그 내용이 그리 가볍지는 않아서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것을 감추기 위해 일행을 등지고 구석으로 물러나야만 했다.

- 임남규 : 표면적인 입국 목적은 관광으로 되어 있으나, 지금으로서는 의심스러운 상황입니다. 실제로 도청을 시작한 후 플레이어라는 단어가 여러 번 언급되더군요.

- 임남규 : 더군다나 2주 가까이 반 수 이상이 의도적으로 악센트를 숨기고 있었습니다. 분명 기존에는 미국식 영어를 사용했습니다만, 3시간 전 두 명이 갑자기 영국 악센트를 사용하더군요. 출신을 감추기 위한 행동으로 보여집니다.

- 임남규 : 커뮤니티에서 K의 행적에 관한 글이 자주 올라오는 상황이라 보고 받은 바 있습니다. 모르고 계시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판단되어 연락드렸습니다.

국정원에서 그들을 발견하고 감시하게 된 과정까지 구구절절 설명된 건 아니다.

하지만 한국에 영국 악센트를 사용하는 이들이 들어왔고, 그들이 플레이어를 언급했다는 결과는 분명하게 언급되었다.

'영국이면....'

데이빗일지도. 그쪽은 플레이어를 찾고 신변을 확보하는 데 적극적인 편이니까.

"쯧."

난 짧게 혀를 차고서 에단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혹시 한국이나 아시아권을 겨냥한 움직임이 있었냐고.

곧 에단으로부터 알아보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후 잠깐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 고요함 속에서 깜빡깜빡, 눈을 감았다 뜨기를 두어 번.

"하."

헛웃음이 나왔다. 순간적으로 무력감이 확 치솟은 탓이다.

방금 내가 한 것이라곤 에단에게 상황을 알아봐 달라고 물어본 게 끝이다.

그 외에 할 수 있는 게 떠오르질 않았다.

나도 모르게 굳어 있는 표정을 풀기 위해 얼굴을 거칠게 문질렀다.

'답이 올 때까지 손 놓고 기다릴 수만은 없어.'

양조철 쪽에서 발견한 이들이 데이빗과 관련되어 있다면, 내 신원은 절대 들켜선 안 된다.

'그가 나를 찾고 있는 건 이미 확인된 사실이야.'

이건 에단에게 들은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보았기에 나온 결론이었다.

그는 이미 플레이어를 '위험'으로 분류했다.

그래서 플레이어를 자신의 시야 안에 두고 감시하는 데 집착하는 경향이 있고.

'통제하려는 거겠지.'

위험을 통제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불안할 테니까.

그러니 내 이름 석자가 수면 위로 드러나는 순간 가족에게 먼저 손을 댈 것이다.

'에단에게 했던 짓을 그대로.'

인질을 잡는 건 그는 물론이고 나에게도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연우와 진우에게 총구가 겨눠지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속에서 불길이 확 끌어 올랐으니까.

'흥분하지 마.'

난 숨을 고르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아직 개인까지 단위가 좁혀지지는 않았을 거야.'

곱씹고, 곱씹고, 또 곱씹어봐도 그럴 여지가 없었다.

끽해봐야 커뮤니티에서 아시아인이라는 이야기 나돈 정도다.

그 외에 불안요소를 따져봐도, 가이드북에서 나도 모르게 남긴 흔적 때문에 국적이 노출되는 선이다.

난 여전히 군중 속에 숨어 있다.

그러니 얼굴이나 이름이 걸리기 전에 손을 쓸 여유는 있다.

'더 깊이 숨을까?'

지금도 나를 드러내고서 움직인 적은 없는데, 여기서 뭘 더 어떻게?

'아니면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리게 만들어?'

정확히 어떤 방법으로?

'차라리 정부에 보호를 요청할까?'

만약 그 선택이 호랑이 굴로 들어가는 거라면?

새어 나오는 한숨이 깊고 무거웠다.

'혼자라면 이런 걱정 안 했을 텐데.'

조금 더 과감하게 움직이는 것도 고려해봤을 것이다.

위험 부담을 감당해야 하는 게 나 하나라면 이렇게까지 신중하지는 않았으리라.

어쩌면 똑같이 데이빗의 가족을 노릴 준비를 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 때문에 소중한 사람들까지 휘말릴 거라고 생각하면 신중해진다.

근처에 있는 바위에 걸터 앉은 난 깍지를 쥔 채 심각한 낯으로 고민을 거듭했다.

그러다 바스락거리는 기척이 느껴지기에 서둘러 뒤를 돌아보았다.

"아, 실례."

내 어깨쯤 오는 키에 남자치고는 왜소한 체구를 가진 남자였다.

어두운 상황임에도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시각은 희미하게나마 주황색 머리카락을 잡아냈다.

그 아래에 있는 눈동자는 아마도, 회색.

조금 전에 의식을 되찾았다던 아헬이다.

내가 가장 먼저 구조했던 아군이자, 이제까지 계속 의식 불명이었던 환자.

"아헬이라고 해요."

그는 악수를 청하듯 내 쪽으로 손을 내밀며 다가왔다.

"생각 중이었던 것 같은데, 방해한 거라면 미안해요."

방해라고 할 것도 없었다. 누군가가 끼어들지 않았다고 해도 난 마땅한 해결책을 찾지 못했을 테니까.

"케이입니다."

난 고개를 흔들며 아헬의 손을 마주 잡았다.

'벌써 움직여도 되는 건가?'

그의 안색이 어둠 속에서도 두드러질 만큼 창백해서, 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일행의 분위기라도 살펴볼 겸 시선을 흘리자 아헬을 제외한 모두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마저도 아헬이 뒤를 바라보자 금방 흩어졌지만.

물론 라샤르는 예외였고. 그녀는 꼭 감시를 하는 것처럼 나와 아헬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아직도 날 향한 경계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걸까?

대체 어떻게 저걸 풀어야 하나 고민하기도 전에 아헬이 말했다.

"잠깐 시간을 내주실 수 있을까요?"

"...안 될 건 없죠."

그의 제안을 수락하는데 별다른 망설임은 없었다.

한 마디도 나눠본 적 없는 사람인지라 호기심이 동하기도 했고.

깨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날 찾아온 이유가 궁금했으니까.

아헬은 끙, 하고 앓는 소리를 흘리며 내가 앉은 바위 끄트머리에 앉았다.

그가 움직이자 폼이 넓은 후드의 소매 아래로 족쇄가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자리를 잡은 후 숨을 고르는 그 잠깐 사이 난 위화감을 느꼈다.

병자를 떠올리게 할 만큼 창백한 안색으로 세상의 행복을 다 떠안은 것처럼 생글거리고 있으니, 무언가가 어긋난 것처럼 보일 수밖에.

"저를 구해준 분이라고 들었는데...."

대화의 시작을 알린 건 아헬이었다.

"인사가 너무 늦었네요. 정말 감사해요."

"기절해있던 사람에게 그런 걸 따질 정도로 경우 없는 사람은 아닙니다."

평의하게 답하자 아헬의 눈이 살짝 커졌다.

난 그런 그를 위아래로 가볍게 훑으며 말을 덧붙였다.

"무사한 걸 보니 고생한 보람은 있네요."

아헬에게 들어간 포션이 제일 많다지만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미 쓴 것보다 더 많은 마력을 벌었으니까.

"호쾌한 분이네요."

"실속 없는 짓을 싫어해서요."

"그럼 초면에 바로 용건을 언급해도 무례한 놈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겠네요?"

"네, 뭐."

아헬은 최소한의 예의를 갖춘 후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고 싶다는 뜻을 비추었다.

'말이 잘 통하겠는데.'

쓸데없는 예의가 과해봤자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

그럴 바엔 용건만 간단히 하고 끝내는 게 나은 법.

난 그가 꺼낼 말을 가만히 기다렸다.

그때 아헬이 깊게 숨을 들이쉬더니 한결 풀어진 표정으로 웃었다.

순간적으로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번들거린 것 같았다.

그에 등줄기에 오싹한 한기가 들었다.

"혹시 저와 마력을 교환할 생각은 없나요?"

"...네?"

"내 속성은 3등급이지만, 공간계거든요."

그는 제 목에 차고 있던 목걸이의 팬던트를 들어보였다.

난 한동안 말없이 아헬과 팬던트를 번갈아 보았다.

그런 내 행동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아헬이 직전보다 조금 더 빠르게 말을 이었다.

"제법 활용도가 높아요. 당신보다는 아니겠지만."

"...뭐가 저보다 아니라는 거죠?"

"음? 당신의 마력이요."

이건 또 뭔 소리냐.

내가 아무런 대꾸도 없이 그냥 쳐다보기만 하자 아헬이 뺨을 긁적거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닌가요?"

"...."

"혹시 불쾌한가요? 그렇다면 미안해요. 잔향이 그대로 느껴져서 감출 생각이 없는 줄 알았어요."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를 못하고 있습니다만."

"...제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니었네요."

분명 그 뜻을 이해하고 있음에도 외국어를 듣는 기분이었다.

'등급, 공간계, 원소, 마력, 잔향....'

낯선 단어를 되뇌던 난 조금 전 라샤르가 했던 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화염 계열의 마력.'

기생충의 군락지가 생겼느니, 말았느니 하는 얘기를 나누었을 때 분명.

'마법이 아니라 마력이라고 했지.'

꼭 마력의 종류가 나뉘기라도 하는 것처럼.

'혹시 속성 마력을 말하는 건가?'

난 계속 혼자 생각을 곱씹는 대신 물어보기를 택했다.

"3등급이니, 공간계니, 그게 정확히 뭘 의미하는 겁니까?"

아헬의 말과 행동엔 기본적으로 호의가 깔려 있다.

이건 나를 좋아하거나, 고맙다는 이유만으로 형성된 게 아니다.

오히려 나에게 호감을 사기 위한 의도적인 행동에 가까울 것이다.

'원하는 게 있으니까.'

제 입으로 말하지 않았나. 마력을 교환하자고.

그게 뭔지는 확실하지는 않다. 어떻게 하는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 목적이 달성되지 않은 상태이니 내 질문을 무시하지는 않을 것이다.

"마력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자연'을 의미해요."

역시나, 잠시간 말없이 나를 바라보던 아헬이 방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마력이 가진 속성에 따라 등급으로 나뉘고요."

"...."

"보다 자세하게는 자연에 간섭할 수 있는, 혹은 자연을 거스를 수 있는 수준에 따라 마력에 등급을 매겼다고 생각하면 쉬워요."

난 검지를 치켜든 채 차근차근 설명을 이어가는 그에게 집중했다.

"특정 속성을 가지지 못한 무속성의 마력은 1등급, 학계에서는 아인종의 9할 가량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보고 있죠. 자연에."

그 중에는 타고난 마력이 너무 적어서 느끼지도 못하는 이들이 절반 이상.

"물론 그 중에서도 마력을 느끼는 이들이 없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마법사가 되긴 힘들어요. 대부분 기사로 진로를 잡죠."

무속성은 자연에 간섭할 수도, 자연을 거스를 수도 없으니까.

아헬이 선택한 어휘는 제법 많은 정보를 포함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시스템

50화

제12장 교류(4)

'학계에 마법사라....'

이 세상은 마력이라는 분야를 오래도록 연구해온 것이다.

그걸 전문적으로 다루는 마법사도 당연하게 존재하고.

내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무렵, 아헬은 검지에 이어 중지를 펼쳤다.

"그 다음으로는 2등급, 특정 속성을 가진 마력이 있죠."

아주 기본적인 4대 원소가 여기에 속한다. 물, 불, 바람, 대지까지.

'사방신 개념이 여기도 있는 건가? 현무가 물이었던 것 같은데.'

난 지구에 존재하는 개념을 적용해보려다 말고 생각을 바꾸었다.

이 세상을 나의 상식 선에서 이해하려고 들어선 안 되니까.

이어지는 아헬의 설명에 따르면 마력의 속성과 일치하는 마법만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대지 속성의 마법사는 파이어볼을 쓸 수 없다는 뜻이다.

'자연에 간섭하거나 거스를 수 있다는 게 그런 의미였나.'

그에 지금까지 의문을 느끼지 않았던 부분을 되돌아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몇몇 기술은 구현할 때마다 속성 마력이 사용되었다.

다른 마력에 비해 정말 조금 들어가는 정도지만, 투명화와 방어막을 쓰려면 분명 속성 마력이 필요하다.

"흠...?"

마력의 속성과 기술을 연관 짓자 종종 커뮤니티에 올라오던 글이 떠올랐다.

그동안 기술을 구매했음에도 사용할 수가 없다는 내용의 글이 종종 올라왔다.

'고작해야 열 댓 번 정도였고.'

당연히 그들의 마력 운용 실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속성의 문제였다면?

'말이 안 되는데?'

난 속성 때문에 기술을 사용하지 못한 적이 없으니까.

거기다 이 가정이 정말이라면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글도 너무 적다.

난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일단 아헬이 말하는 마법이 시스템 상의 기술인 건 분명해.'

그렇다면 승급 시험 통과자 외에는 아무도 기술을 쓸 수 없어야 한다.

속성을 가지기 위해 필요한 아이템은 승급 시험을 통해 얻거나, 상점에서 사야 하니까.

플레이어의 절대다수가 현재 시점에서는 기술을 사용할 수 없다는 의미다.

그런데 왜 기술과 관련된 문제 글이 그렇게 적었지?

답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아직 플레이어들이 쪼렙이라서.'

플레이어의 대부분이 억지로 등이 떠밀린 후에야 미션에 들어갔다.

과반수가 아직 1레벨에 머물고 있을 시점이라는 의미다.

많으면 서너 번, 적으면 한 번정도 클리어 했겠지.

시스템의 재촉 없이 자의로 미션을 클리어해 온 이들은 순차적으로 2레벨로 올라오는 중이고.

'이제 막 기술 살 정도로 마력을 모았겠네.'

기술을 구매한 사람이 적으니 기술을 쓸 수 없다는 글도 적게 올라올 수밖에.

의문 중 하나는 해결되었고, 다른 하나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난 김율을 비롯해 아는 플레이어들에게 바쁘게 채팅 메시지를 보냈다.

- K : 기술 별로 사용 조건이 있는 것 같다. 당분간 기술 사지 말고 자제하는 게 좋을 듯. 자세한 건 확인중.

특히나 에단. 그는 이미 하급 속성석을 사용한 상태였기에 신중해야 한다.

'분명 암석이었지?'

공격보다는 방어에 용이한 속성 같아서 탱커로 가닥을 잡은 상태였다.

하지만 탱커 계열로 추정되는 기술이 꽤 비싸서 다른 걸 사지 않고 마력을 모으던 중이고.

확인된 게 없는 상황에서 기술을 샀다가 속성이 맞지 않으면 손해를 보겠지.

알겠다는 에단의 답을 확인했을 무렵, 아헬의 부름이 들렸다.

"케이? 왜 그러나요?"

"아뇨, 아닙니다. 계속 설명을 듣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나를 묘한 눈으로 살펴보던 그의 시선이 살짝 옆으로 빗겨 갔다.

그에 내 눈매가 움찔거렸다.

아헬의 살펴본 방향은 내가 커뮤니티 창과 채팅창을 사용하며 누른 탭들이 있는 방향이었으니까.

이 게임은 손가락을 쓸 필요도 없이 시선과 생각만으로도 시스템 창을 클릭할 수 있었다.

그래서 시스템 기능을 이용할 땐 눈동자가 많이 움직이는 편인데.

아헬이 그 움직임을 예의주시한 것이다.

왜일까? 그의 눈동자가 반짝거리는 것 같았다.

파리한 안색으로 웃으며 말을 걸어왔던 그를 보았을 때 느꼈던 위화감이 되살아났다.

"...뭘 그렇게 보시는지?"

난 허공을 떠도는 아헬의 시선을 내 쪽으로 잡아 끌기 위해 물었다.

"아, 나쁜 의도는 없었어요. 방금 그건 직업상의 고질병이라고 생각해주세요."

내 눈초리가 가늘어지는 것과 달리 아헬의 미소는 짙어졌다.

"음... 아까 어디까지 설명드렸죠? 아, 등급."

이번에 펼쳐진 그의 손가락은 세 개.

"3등급 차례죠?"

"예."

"두 개 이상의 원소가 중첩되거나 기존의 원소가 한층 더 심화되어 새로운 원소로 변한 경우, 그 마력은 3등급으로 분류해요."

용암이나 얼음 등의 속성이 3등급 마력에 해당한다는 의미다.

"용암은 중복 원소, 불과 대지 속성의 마법을 전부 사용할 수 있죠. 이해가 되나요?"

"그럼 공간이라던 그쪽은...."

"같은 계열이라도 등급은 다양해요. 전 공간계의 기본인 3등급이고요. 공간을 채우는 근본이 공기이니, 공간계는 바람 원소의 상위 계열에 속하죠."

확 와닿는 설명은 아니었다.

난 이제까지 원소의 상하를 구분해서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 내 상태를 알아 차린 건지, 아헬이 한층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용암은 두 개 이상의 원소가 중첩되어 있죠. 이해가 되나요?"

마그마가 서서히 굳으면 화강암이 된다.

그러니 대지와 연결점이 있다는 건 이해가 된다.

"예."

"반면 얼음이나 저 같은 공간계는 하나의 원소가 더 복잡하게 심화된 형태고요."

"흠...."

"중첩과 심화, 마력의 속성학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기본 개념이에요. 전문적으로 들어가면 조금 더 복잡해지고요."

"뭐가 복잡하다는 거죠?"

반문을 하자마자 후회했다.

"애초에 공기가 없는 상황에서 불이 존재하는 것부터가 말이 안되잖아요? 그래서 4대 원소 분류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의견이 제법 되거든요."

"...."

"마법사들 사이에서 원소 구분을 달리해야 한다는 주장은 단 한 번도 끊이지를 않았죠. 물론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도 다 달라서 의견이 좁혀지거나 새로운 분류법이 나오지는 못했어요. 결과적으로 현재까지 4원소를 부정하기 위해 정립된 분류법이 총 8개나 되는데 궁금하면 하나하나 다 설명을...."

"건너뛰는 게 좋겠네요."

쉬지 않고 말을 이어가는 아헬을 만류하는 목소리가 단호했다.

"잘 생각했어요."

그제야 싱긋 웃어 보인 아헬이 설명을 멈추었다.

"상위 계열이라는 것에 대해서 더 설명해주셨으면 합니다만."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린 아헬은 양손 모두 주먹을 쥐고 왼손을 먼저 내밀었다.

"물은 하위."

다음으로는 오른손.

"얼음은 상위입니다."

그는 왼손 위에 오른손을 쌓으며 말했다.

"얼음은 물을 당연하게 포함하고 있지만, 물은 얼음을 당연하게 포함하지 않죠. 저온이라는 요소가 하나 더 필요하니까요. 하지만 그게 4대 원소는 아니죠. 그래서 중첩이 아니라 심화로 구분됩니다."

"...."

"마력의 등급이 높을수록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이 많아요."

달리 표현하면 자연에 간섭하고, 자연을 거스를 수 있는 경우가 다양하다는 의미다.

"물론 마력의 농도와 향도 상급으로 갈수록 진해지고요. 결과적으로 낮은 등급의 마력보다 위력이 강할 수밖에 없죠."

적은 마력으로 강한 위력을 낼 수 있으니까요, 하고 덧붙이는 목소리는 차분했다.

"4등급과 5등급은 3등급 보다 더 많은 요소가 중첩되거나 심화된 등급이라고 보면 돼요."

이론적으로는 6등급도 있지만, 실제로 발견된 사례는 없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자연에 속하는 마력은 5등급이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죠."

"자연에 속하는 등급이라는 건, 속하지 않는 등급도 있다는 의미입니까?"

"신성의 영역을 등급에 포함하느냐, 마느냐도 의견이 분분하죠."

"...라샤르 같은 사람들을 말하는 거군요."

기본적으로 사도라고 불리는 이들이 가진 힘은 규격 외로 취급하는 모양이다.

'하기야, 그런 힘이 자연적이라고 보긴 힘들지.'

사도에 대해서는 아직 모르는 게 많지만, 그래도 마력에 대한 건 조금이나마 이해했다.

'대분류는 4대 원소.'

그걸 기본으로 추가 요소가 쌓여갈 때마다 계단처럼 등급이 올라가는 구조였다.

난 아헬의 설명에 근거해 내 속성을 분석해보려고 했다.

'일단 4대 원소는 아니니까 3등급 이상인 건 확실하고.'

심화보다는 중첩인 것 같다. 그럼 어떤 원소가 중첩된 거지?

'번개가 결국 빛에너지니까, 불이라고 봐야 하나?'

바람도 포함된다고 봐야 하나?

'아니, 그냥 불의 심화 원소인가?'

익숙하지 않은 개념이라서 긴가민가했다.

'왜 문과생한테 이딴 문제를 내주냐.'

살짝 미간을 구긴 채 고민하기도 잠시.

아헬이 별안간 바닥에 있는 돌멩이를 집어 들었다.

"등급에 대한 설명은 끝났으니, 이제 마법에 대해 설명할까요?"

난 생각을 뒤로 미룬 채 그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잠시후 마력이 움직이는가 싶더니 번쩍, 하고 주변이 한순간 밝아졌다.

그리고 아헬의 손바닥 위에 있어야 할 돌멩이가 10cm 정도 떨어진 허공에서 나타났다.

누군가 집어다 옮긴 것도 아니고, 아헬이 던진 것도 아니다.

아무런 운동 과정도 없이 그냥 위치가 바뀐 것이다.

'이거구나, 공간이동.'

난 바닥으로 떨어진 돌멩이를 확인한 후 고개를 들었다.

"마력이 자연에 간섭하고, 자연을 거스를 수 있는 힘이라고 했죠?"

"...결국 마법은 자연에 간섭하고 자연을 거스르는 현상이라는 거군요."

"맞아요. 속성 마력이 자연의 흐름을 거스른 대가를 치러주는 거죠."

아헬의 설명은 여전히 알쏭달쏭했다.

이해가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아무런 간섭도 없이 돌이 움직이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긴 하지.'

난 애매모호한 표정으로 아헬의 말을 경청했다.

"물론 모든 마법이 대가를 필요로 하는 건 아니에요."

속성이 없는 1등급 마력으로도 구현할 수 있는 마법이 있단다.

대부분 마력 자체의 기본 성질, 생명력과 관련된 것으로 학계에서는 하급 마법으로 분류된다고.

"이제 궁금증이 풀렸을까요?"

"어느 정도는요."

아헬이 내 손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그래서 어때요?"

"네?"

"제 마력과 교환할래요? 제 마력은 이동 마법이나 굴절, 절단 마법 등에 사용할 수 있거든요."

마력을 교환하면 본래 내가 쓸 수 없어야 할 공간 계열을 마법을 쓸 수 있다는 의미겠지.

'차량 별로 연료가 다른 거랑 비슷한 것 같은데.'

전기차가 있고 경유차가 있듯이, 마법의 원료가 모두 달라서 거기에 맞는 것을 사용해야 하는 구조 같았다.

그래서 마력 보유자들끼리 교환을 해가며 여러 마법을 쓰는 식으로 발전한 걸까?

'기술석이 있는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고?'

제법 그럴 듯한 추측이었다.

"그 마력 교환이라는 건 어떻게 하는 거죠?"

흥미가 동해서 묻자 아헬이 내 왼손을 가리켰다.

더 정확하게는 왼손 새끼손가락에 낀 사파이어 반지.

"축적 마도구... 이것도 모르겠네요."

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아헬이 다시 저가 걸고 있는 목걸이 펜던트를 보여주었다.

"이게 축적입니다."

흐릿한 안개 같은 게 목걸이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내 눈이 살짝 커졌다. 저 현상을 이미 알고 있으니까.

"당장은 거의 다 쓰고 없지만요."

주둔지로 복귀하면 바로 축적을 시작하겠다고 말한 아헬이 웃어보였다.

축적 마도구의 용도를 이해하는 순간이었다.

"교환하실래요?"

거듭된 질문에 난 아헬의 시선이 닿은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답을 미루었다.

그의 제안이 거북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단지 그에게 알아낼 수 있는 게 더 있을 것 같아서 뜸을 들인 것 뿐이다.

'어차피 당장은 아헬에게 축적한 마력이 없으니 교환하지도 못할 테고.'

아쉬운 건 내가 아니라 아헬이다. 이 기회에 궁금한 것을 좀 더 물어봐도 좋겠지.

"여기 축적한 마력은 어떻게 꺼내 쓰는 거죠?"

반지를 툭툭, 건드리며 묻자 아헬이 입맛을 다시는 것처럼 혀로 입술을 핥았다.

난 애써 그 모습을 못 본 척하며 그의 답을 기다렸다.

"흠... 잠시 살펴봐도 되나요?"

망설임은 짧았다.

'여기에 든 마력이 못해도 2천은 된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전투가 없을 때는 정말 틈만 나면 마력을 넣어왔다.

그냥 실체화를 하는 것만으로도 일대를 번개로 뒤덮기에 충분할 것이다.

'꾸역꾸역 모았는데, 꺼내 쓰는 방법은 알아야지.'

난 아헬에게 반지를 건네주었다.

빌어먹을 시스템

51화

제12장 교류(5)

그는 반지를 눈높이까지 들어올린 후 자세하게 들여다보았다.

"3성이네요. 시동어가...."

잠시 뿐이지만 아헬 근처의 마력이 움직였고, 직후 그가 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름이네요. 마력 소지자의 진명."

얼결에 내 이름이 케이가 아니라는 걸 알린 꼴이 됐다.

하지만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케이도 내 이름이긴 해요."

코드'명'이니까 거짓말은 아니지.

"이름이 여러 개일 수도 있죠. 저는 물론이고 베넷도 이명이 있으니까요. 굳이 해명할 필요는 없어요."

"이해해 준다니 다행이네요."

"아, 말이 나온 김에 저도 해명을 해보자면...."

여전히 웃는 낯을 유지한 아헬이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다.

"마도구를 살펴보면서 저절로 알게 된 거예요. 당신의 마력이 전격 계열이라는 거."

크게 놀랍지는 않았다. 애초에 아헬은 내 마력에 대해 무언가를 짐작하고서 접근했다.

'잔향 어쩌고 했던 거랑 관련 있겠지.'

내 속성이 밝혀지는 건 반지를 건네줄 때부터 감수하기로 한 일이었다.

나도 웃는 낯으로 아헬에게 대꾸했다.

"딱히 감출 생각은 없었습니다."

"감추는 게 좋을 텐데요?"

그런데 돌아온 답이 완전히 예상을 벗어나 있었다.

"당신 같은 경우는 정말 드물거든요."

몇 년 전에도 5등급 마력은 대륙 전역에서 100명을 넘지 않았다고.

"4대 원소가 전부 중첩되어 있으니 향이 진할 수밖에 없죠. 하루 빨리 감추는 법을 배우는 게 좋을 거예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중학교 시절 과학시간에 배웠던 내용이 생각났다.

'번개가... 소나기구름에서 발생하지?'

일반적으로 소나기구름은 지표의 공기가 가열돼서 생기는 상승기류로 인해 만들어지고.

그곳에서 발생한 에너지가 떨어지기 위해선 다시 지반이라는 요소가 필요하다.

'그렇게 생각하면 다 들어가긴 하네.'

아직 혼자 정답을 유추할 정도는 아니지만, 아헬의 설명을 들으니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은 되는 것 같았다.

덕분에 내가 왜 기술을 사용할 때 문제점을 느끼지 못했는지도 알 수 있었다.

'그럼 마력 탐지는 1등급에서 사용 가능한 마법인가?'

가격대를 보면 하급 마법이라고 불리기에 충분했다.

'효과도 주변에 마력을 찾는 게 전부고.'

그렇다면 아헬이 말해준 마력과 속성, 그리고 마법의 관계가 모두 들어 맞는다.

이 가정을 확인하기 위한 방법은 쉽다.

마력 탐지를 구현할 때마다 생겨나는 나비를 아헬에게 보여주면 된다.

"이건 하급 마법입니까?"

팔랑팔랑.

내 주머니에서 빠져나온 빨간 나비를 본 아헬이 고개를 주억린 순간.

"맞아요."

파랗게 빛나는 나비 십여 마리가 나와 그의 주변을 둘러쌌다.

나비에서 새어 나오는 빛 때문에 어둠이 흐트러질 정도였다.

"탐지 계열의 마법은 마력이 마력을 인지할 수 있게 통로를 열어줄 뿐이죠."

이런 마법이 없더라도 마력에 예민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생명체의 기척을 느끼곤 한다.

그렇기에 불이 없어야 할 곳에 억지로 불을 만들며 흐름을 거스르는 것과는 다르다.

굳이 따지자면 거스름보다는 확장에 가깝다고.

또 아리송한 설명을 이어간 아헬은 손을 내젓는 것으로 나비를 치워버렸다.

이제야 내가 속성이 없을 때도 마력 탐지와 감각확장을 쓸 수 있었던 게 설명된다.

하지만 의문을 해결한 것이 그리 기쁘진 않았다.

어째서인지 아헬의 눈빛이 조금 전보다 더 번들거리는 것 같았으니까.

내가 무의식적으로 상체를 살짝 뒤로 물리자 아헬의 눈꼬리가 더 깊게 휘었다.

그는 반지를 손바닥 위에 올리고 반대쪽 손으로 덮은 채 은근한 목소리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알려지면 너도나도 교환하자고 들 거예요."

한 줌의 마력으로 4대 원소를 모두 쓸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 당연한 일이라고.

"만약 당신이 거절하면... 쌍방의 합의가 생략된 교환이 되어버릴 수도 있고요."

그렇게 중얼거린 아헬이 손을 치웠을 때, 번쩍거리는 빛과 함께 내 반지가 눈앞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돌멩이가 떨어질 때와 달리 곧장 반응한 내가 반지를 낚아챘다.

'그러니까.'

나의 동의가 없는 일방적인 강탈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경고였다.

만약 그 강탈을 주도하는 사람이 라샤르 같은 강자라면 난 속절 없이 당하겠지.

꽤나 섬뜩한 경고를 남긴 아헬은 순진무구하게 웃는 낯이었다.

심지어는 천진난만하게 두 손에 턱을 바치고 얼굴을 바짝 들이밀기까지.

"제 용건은 끝이에요. 혹시 교환할 생각이 있으면 나중에라도 알려줘요. 내 마력은 주둔지로 돌아가면 바로 축적할 테니까."

"예, 생각해볼게요."

"시간 내줘서 고마웠어요."

"제가 할 말인 것 같은데요. 꽤나 유익한 대화였거든요."

"다행이네요."

처음부터 끝까지 웃는 낯으로 나를 상대한 아헬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물어봐도 됩니까?"

하지만 난 그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아헬은 반문을 하는 대신 그냥 나를 돌아보았다.

얼마든지 질문을 해보라는 듯이.

무언의 허락을 받은 난 그를 처음 봤을 때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그건 왜 차고 다니는 거죠?"

툭툭, 하고 내 목을 건드리며 묻는 말에 아헬은 꽤나 악동 같은, 짓궂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답했다.

"일종의 약속이에요."

"...무슨 의미인지?"

"타인과의 합의를 무시하지 않겠다는 약속."

쿡쿡, 하고 작은 웃음소리가 귓가에 닿는 순간 예의 그 위화감이 한층 선명해졌다.

난 야영지로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잘 통하겠다는 거 취소다.'

아헬과 난 잘 통하는 게 아니다. 그저 대화가 수월했던 것뿐이다.

그가 나의 호감을 사기 위해 맞춰주었으니까.

'보여주는 것만 읽히네.'

그리 짧지 않은 대화에서 난 그가 직접 밝힌 목적 외엔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아헬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짐작도 되질 않는다.

도통 속내를 알 수 없으니 상대방을 판단하기도 힘들고, 이해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보통 이렇게까지 속내가 안보인다는 건 좋은 신호가 아니지.'

재혁이나 라샤르의 경우에는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가 기본으로 깔렸다.

이 사람은 이런 성격이구나, 이런 걸 좋아하고 싫어하는구나.

내가 상대방을 판단할 수 있다는 건 그들이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상식 선에서 움직인다는 의미다.

'그들이 근본적으로 나와 같은 사고를 공유하는 사람, 이른바 동류라는 뜻이지.'

반면 아헬은 대화를 할 때 위화감이 계속 들었다.

그의 행동, 웃음, 그리고 생각을 이해할 수 없으니까.

이건 사고하는 방식 자체가 나와 완전히 다른 놈이라는 뜻이다.

내 경험상 저런 놈들은 아주 높은 확률로.

'엮이지 않는 게 좋은데.'

라샤르가 있는 곳으로 돌아간 아헬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난 짧게 혀를 찼다.

'당분간은 조심해야겠네.'

다행히도 이 미션이 끝나면 볼 일이 없는 사람이다.

그때까지만 적당히 상대하며 거리를 두면 될 일이다.

* * *

본래라면 하룻밤을 쉬고 해가 뜰 때쯤 출발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헬이 깨어나며 계획이 바뀌었다.

그의 마력이 회복되면 공간 이동 마법을 사용하기로 했으니까.

'괜히 이동을 감행했다가 전투를 더 할 필요가 없다니.'

전투를 해야 내가 마력을 더 먹는데!

라샤르의 설명을 되새긴 난 속으로 아쉬움을 곱씹었다.

자고 일어났음에도 떠나지 않고 휴식을 취하자니 시간이 아까웠다.

그래서 상점창을 훑어보는 중이었다.

추가 이동이 없다는 건, 더 이상 전투가 일어나기 힘들다는 얘기다.

수중에 들어온 마력을 사용할 때가 된 것이다.

난 진지한 낯으로 상점창을 살폈다.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오가던 라샤르와 아헬의 대화 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그나마 카로프 숲을 지나기 전에 네가 깨어나서 다행이다."

"인원이 반으로 줄었으니 다행이긴 하죠. 마력이 덜 드니까요."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걸 알 텐데."

"전 그런 뜻이거든요."

"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어린 애처럼 굴 생각이지?"

옥신각신.

"질리기 전까지요. 그놈들이 살아 있었으면 필요한 마력이 더 많았을 거고, 그럼 오염지에서 다 같이 객사할 가능성도 높아졌을 거잖아요. 그러니 다행이라는 거죠."

"아헬, 그 녀석들을 옹호할 생각은 없다만 지금 네 행동은...."

"아, 이번 기회에 헤세르마도 버리고 가는 건 어때요? 안타깝게 사망했다고 하는 거예요!"

"아헬!"

결국 라샤르가 고함을 버럭 지를 정도가 되었다.

"이, 이 무도한...!"

대뜸 언급된 헤세르마가 얼굴을 시뻘겋게 붉힌 채 쏘아붙였다.

하지만 아헬은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말을 받아쳤다.

"그 무도한 짓을 먼저 하신 게 누구더라."

"닥쳐라, 이 변절자 새끼!"

"네에, 네에, 저는 더럽고 역겨운 변절자라서 당신을 두고 갈 겁니다."

"아헬, 그럴 경우 난 내 손으로 널 재판에 회부할 것이다."

"재판 그게 뭐 얼마나 대단하다고요. 마법을 사용하는 건 나니까 내 마음대로 할래요."

"아헬 벨레티아!"

라샤르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아헬은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적거릴 뿐이었다.

"그렇게 크게 부르지 않으셔도 다 들리거든요?"

그는 귀를 팠던 손가락을 보란 듯이 후, 하고 불며 이죽거렸다.

"어쩌겠어요. 놈들이 죽은 게 안타깝지도 않고, 불쌍하지도 않은데. 오히려 속이 시원하거든요? 여기에 헤세르마를 두고 갈 생각만으로도 짜릿할 정도라고요."

아헬의 목소리는 지난 밤에 비해 제법 카랑카랑해져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뜬금없이 나를 돌아본 아헬이 허리를 꾸벅 숙였다.

"살아 남을 가치가 없는 놈들을 버려준 케이에게 마음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딱히 사람을 가려서 구한 건 아니었는데, 저렇게 말하니 내가 일부러 누군가를 배제한 것 같잖아.

'저 새끼가.'

가만히 있는 나는 왜 걸고넘어지는 건데?

난 인상을 구긴 채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아헬은 나를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이어갔다.

"물론 그 과정에서 불순물이 딸려왔지만, 걱정 마세요. 제가 마저 버리면 되니까요."

어이가 없지만 진심처럼 들렸다.

'정말로 헤세르마를 여기에 두고 이동 마법을 사용하고 싶은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사이가 저렇게까지 엉망인 걸까?

헤세르마를 향한 아헬의 폭언과 조롱은 끝이 보이질 않았다.

방관자에 불과한 나조차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라샤르가 몇 번이나 경고를 했지만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네가 자초했음을 잊지 말도록."

결국 라샤르가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녀로부터 짙은 마력이 퍼져나옴과 동시에 아헬이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쳤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라샤르가 딱딱한 목소리로 일갈했다.

"봐주는 건 여기까지다."

한참의 틈을 두고서 거친 숨을 몰아쉰 아헬이 끙끙 앓으며 답했다.

"네에, 알겠습니다."

키득키득.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살면 이 상황에서 웃을 수 있는 거냐.'

난 어이가 없어서 헛숨을 삼켰다.

그때 바닥에 누워 있던 아헬이 내가 있는 방향을 보며 제 목을 톡톡, 두드렸다.

그 뜻을 이해한 내 표정이 굳었다.

아헬은 방금 저 족쇄의 용도를 가르쳐 준 것이다.

아마도 고통을 주는, 일종의 통제 도구 같은 것이리라.

난 아헬의 시선을 피하며 혀를 찼다.

'고작 그걸 알려주겠다고 날뛴 건 아니겠지.'

날뛴 김에 저 족쇄에 대해 궁금해하던 나에게 언질을 준 것에 가까우리라.

그걸 깨닫자 아헬을 멀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더 확고해졌다.

저걸 굳이 저렇게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설명해주는 놈을 가까이해야 할 이유가 없다.

고개를 내저은 난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다시 상점에 시선을 고정 시켰다.

새로운 환경을 맞닥뜨리기 전에 재정비를 할 생각이었다.

'주둔지라는 곳에서 뭔 일이 생길 줄 알고.'

전력을 보강할 수 있을 때 보강해 둬야지.

빌어먹을 시스템

52화

제13장 메인 시나리오(1)

지금 내가 가용할 수 있는 자금은 21,263마력.

3레벨 입장 제한인 3천을 포함하면 2만 4천을 넘는다.

"...."

기쁜 것과는 별개로 현실감이 떨어지는 숫자이기도 했다.

소비 단위가 백, 천대에서 갑자기 만 대로 훌쩍 뛰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현실감이 없다고 해서 안 쓸 건 아니지만.

'예정대로 기술을 살까?'

3레벨에 진입할 당시에는 불덩이가 구매 희망 1순위였다.

설명란에 폭발, 충격, 반경, 일정 범위 같은 단어가 들어가는 기술 중에서는 불덩이가 가장 쌌으니까.

하지만 지금 난 불덩이를 사고도 남을 정도의 예산이 생겼다.

그래서 조금 더 높은 가격대의 기술로 눈길이 흐르고야 만다.

[지옥불(19,113마력)]

• 분류 : 영구 기술

• 설명 : 시전자의 반경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불태웁니다. 구현에 사용되는 마력량에 따라 기술의 규모와 위력이 달라집니다.

난 설명란을 읽어보며 팔짱을 꼈다.

아헬의 설명에 따르면 기술별로 적합한 속성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놈의 시스템은 그런 설명은 모조리 생략하고 있다.

'마력 날린 놈들만 불쌍하게 됐네.'

기껏 마력을 들여 샀는데 기술을 쓰지 못하는 플레이어들은 대체 무슨 죄란 말인가.

그리고 새 기술을 사기 전에 이렇게 고민하는 난 또 무슨 죄고?

'화염 계열인 것 같으니까, 내 속성으로도 쓸 수 있는 건가?'

혹시 심화 속성이 필요한 기술이면 어쩌지?

난 4대 원소 모두가 중첩되어 있는 대신 심화 원소가 없다.

만약 이 기술에 심화 원소의 마력이 필요하다면 2만에 가까운 마력을 날리게 된다.

"끙."

예전 같았으면 그냥 샀을 텐데, 지금은 이걸 샀다가 쓰지 못할까 봐 생각이 많아진다.

아는 게 없으면 용감해진다더니 딱 그 꼴이지 않나.

덤으로 번 마력이라지만 모험심으로 날리기엔 너무 많았다.

'보류하자.'

과감한 것과 성급한 건 엄연히 다르다.

가진 정보가 정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도박수를 둘 수는 없다.

'차라리 방어구가 나을지도.'

적어도 그건 실패할 가능성이 없을 것 아닌가.

'장비도 필요했던 거니까, 뭐.'

악어 떼에게 물린 것만 해도 수십번이다.

그때 입은 부상 때문에 쓴 포션도 적지 않다.

소비품목에 지출하는 마력은 최소화하는 게 좋겠지.

조금 더 싸다는 이유로 자주 쓰게 되면 장기적인 관점에서 손해가 커질 뿐이다.

차근차근 생각을 정리해보자 새로운 기술보다는 방어구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그래서 난 기술 탭을 지나 장비 탭을 열었다.

'보자....'

장비는 이제껏 탭을 들락거리며 살펴본 적은 많지만 직접 구매를 한 적은 없었다.

'아무래도 가격이 높으니까.'

무기류는 생각보다 허들이 낮다.

튜토리얼에서 주는 것과 똑같은 단검이 3, 400마력 정도.

장검과 창은 각기 1천에서 2천으로 가격이 오른다.

하지만 방어구는 최하의 가격이 1천 마력이다.

그마저도 제대로 된 갑옷이나 방패가 아니라, 장갑이나 각반 같은 종류다.

3천은 되야 방패를 구경할 수 있고, 5천으로 넘어가야 갑옷 종류가 보인다.

그래서 초반에 외면한 것도 없지 않아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된 김에 제대로 된 걸 맞추면 좋겠는데....'

경갑이 흉갑인가? 서로 다른 건가?

'내가 갑옷 같은 걸 입어 봤어야 알지.'

이미지를 첨부해 두면 좀 좋으냐고. 전부 글자로 빽빽하니 답답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화가 나지는 않았다.

이미 시스템에게 거는 기대가 바닥을 기고 있었으니까.

화를 낼 시간조차 아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그냥 부지런히 장비 탭을 돌아다니며 방어구를 살폈다.

제법 오래 이어진 쇼핑 끝에 마음에 드는 물건을 찾았을 무렵.

갑자기 나를 옭아매는 집요한 시선이 느껴졌다.

"흡!"

휙, 고개를 돌리자 묘한 광채를 내뿜는 금색 눈동자가 나를 보고 있었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라샤르였다.

그녀는 차가운 표정으로 검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희미한 빛무리가 그녀의 눈동자에 고여 있었다.

'이거....'

분명 라샤르를 처음 만났을 무렵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무언가, 이제껏 내가 겪어보지 못한 시선이 나를 지켜보는 기분.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섬뜩하고 두렵다.

직후 거대한 살의가 나를 집어 삼켰다.

'갑자기 왜?'

벌떡 일어나 뒤로 물러나는 순간 허리춤에 매어둔 신발끈이 끊어졌다.

녹슨 철제 방패가 땅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가 났다.

라샤르의 금색 눈동자가 소리의 방향을 따라 움직였다.

꿀꺽.

침을 삼키기 무섭게 나를 압박하고 있던 기세가 사라졌다.

허리에 찬 검을 매만지며 바닥에 떨어진 방패를 보고 있던 라샤르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놀랐다면 사과하지."

"...별로."

난 태연한 척 자세를 낮추고 방패를 집어 드는 동안 떨리는 몸을 추슬렀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목을 더듬어보고 싶었다.

아직 내 목이 붙어 있는지 긴가민가했으니까.

지금 내가 살아 있는 이유는 순전히 그녀가 검을 꺼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저 검을 꺼내서 휘둘렀다면.

'죽었을 거야.'

반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그대로.

내가 잔뜩 긴장한 채로 방패를 다시 허리에 묶자 라샤르가 얕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시험하듯 굴 생각은 아니었다."

"...."

"그대에겐 미안하다만, 이건 우리에게 정말 예민한 문제다. 부디 이럴 수밖에 없는 내 사정을 이해해줬으면 하는군."

대뜸 와서 살기를 내비쳤으면서,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예민한 문제면 사람을 죽이려 들어도 된다는 거야 뭐야?'

의문을 되묻기도 전에 라샤르가 왼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언뜻 드러나는 표정과 눈동자에 피로가 치덕치덕 묻어났다.

"개인적으로 그대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그럼에도 그녀는 여전히 검 손잡이를 움켜쥔 상태였다.

"그렇기 때문이라도 주둔지로 돌아가기 전에는 반드시 확인해야겠다."

후우, 하고 길게 숨을 내쉰 라샤르의 표정에서 온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그대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이 늘어났다. 마치 진화종처럼 말이야."

그제야 줄곧 풀리지 않던 의문이 해소되었다.

"설명을 들을 수 있을까?"

갑자기 예민하게 굴기에 왜 그런가 했더니.

내 마력이 늘어난 것 때문이었구나.

"...내가 괴물이라는 뜻이냐?"

"그게 아니라면 메세오를 가진 상태에서 마력이 늘어나고 있는 건 어떻게 설명할 거지?"

"반대로 물어볼까? 만약 내가 괴물이면 어쩔 건데?"

라샤르는 검을 뽑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쯧."

저거 지금 진심이다. 내가 제대로 설명을 하지 않으면 여기서 죽이겠다는 거다.

당연히 죽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매개체를 파괴하고 도망가는 것도 안 된다.

'여기까지 온 게 아까워서라도 못 간다.'

이 지긋지긋한 게임에 대해 알아내기 위해서라도 난 신전에 가야 한다.

날 보고 이방인이 어쩌고 했던 걸 보면, 분명 게임과 이 낯선 세상 사이에 무슨 접점이 있다.

그걸 알아내려면 라샤르에게 딱 붙어서 주둔지까지 가야 한다고!

'시스템과의 대화가 보상으로 걸려 있기도 하고.'

난 어떻게 하면 라샤르의 의심을 풀 수 있을까 고민했다.

"케이, 난 설명을 들어야겠다."

라샤르의 재촉에 난 초조하게 손을 쥐었다 폈다.

그때, 내 눈앞에 떠 있는 상점창 너머에서 이쪽을 응시 중인 아헬과 눈이 마주쳤다.

조금 전 바닥을 구르던 그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아."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나은 법,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라샤르가 저 검을 꺼내든 이유는 내가 괴물인가, 아닌가 애매하기 때문이다.

매개체를 들고 다니는 중에 마력이 늘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꼭 이 매개체와의 관계에 대해 해명할 필요는 없다.

'그냥 내가 괴물이랑 다르다는 것만 알려주면 되잖아.'

마력 탐지를 쓰는 건지, 라샤르도 상대방의 마력을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그녀가 내 마력이 줄어드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 부분을 이용하면 그녀의 의심을 해소하는 건 어렵지 않으리라.

"네가 직접 보고 판단하면 되겠네."

난 한 마디를 남긴 채 눈앞에 있는 구매 버튼을 눌렀다.

* * *

케이가 결계 마법이 구현된 곳에서 나왔을 때만 해도 라샤르는 그를 의심했다.

그가 부하들의 목숨을 살려주었다는 건 감사의 이유일 뿐, 신뢰의 이유가 되지 못했으니까.

구명의 은혜를 베풀었다 해서 신뢰를 논하기엔 라샤르가 겪어온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하지만 케이는 그런 그녀의 의심을 비웃듯이 피넬페니아의 권능을 사용했다.

의심과 경계는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7대 신이 적들에게 권능을 허락했을 리가 없으니까.

그렇기에 라샤르는 자연스럽게 케이가 신탁에서 등장한 이방인이라고 믿었다.

케이가 메세오를 가지고 있음에도 신전으로의 안내를 자청한 이유였다.

권능과 7대 신을 향한 믿음은 그 정도로 굳건했다.

그런데 정작 아헬이 깨어남으로써 주둔지로 돌아갈 수 있게 된 지금, 그 믿음이 흔들렸다.

'타인의 마력을 취해 강해지는 건 놈들의 특징이다.'

때로는 메세오를 통해서, 또 때로는 다른 생명을 먹어 치움으로써.

마력을 취할 때마다 강해지는 적을 눈앞에 두고 얼마나 절망했던가.

본디 마력이란 날 때부터 가진 양이 정해져 있는 법이다.

평범한 양을 가지고 태어나는 이가 있는가 하면, 거대한 마력을 지니고 태어나는 이들도 있다.

그건 절대적인 규칙이고 당연한 진리였다.

날 때부터 자기만의 몸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처럼, 마력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을 거스르고 자신의 것이 아닌 마력을 흡수해봤자 더한 힘을 탐하게 될 뿐이다.

결국은 타락해서 이지를 상실한 괴물이 되겠지.

그건 기나긴 역사 속에서 타인의 마력을 갈취한 흑마법사들이 척살되어 온 이유였다.

그렇기에 케이의 마력이 늘어날 때마다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의 손으로 적을 주둔지에 데려가고 있는 건 아닌지, 불안해졌으니까.

약 하루, 어제 오후부터 시작된 케이의 마력 변화는 라샤르에게 번뇌를 안겨주었다.

'성급했던 걸까?'

권능을 허락 받은 게 아니라 강탈한 것이었나?

피넬페니아가 적과 내통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케이가 이방인이 아니라, 이방인을 흉내 내고 있는 적이라면?

그간 보여준 모습도 정보를 캐내기 위한 수작인가?

'그게 아니라면 마력이 늘어난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한 번 싹을 틔운 의심은 쉬지 않고 가지를 뻗어 나갔다.

케이가 인육을 뒤집어쓴 채 의도적으로 접근한 적이라면.

'중대원들을 구해준 것도 계획된 접근이었겠지.'

그렇지 않아도 농장 구조 작전 중 너무 빠르게 발각된 게 이상했는데.

케이를 잠입시키기 위한 수작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모든 게 다 들어맞는 것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 케이를 주둔지로 데려갈 수는 없었다.

라샤르가 이를 악물었다.

'위험하다고 판단했다면 죽이면 된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있다.

'적이 아니면?'

정말 신탁에서 나오면 이방인이라면?

겨우 찾은 희망을 그녀의 손으로 없애버리는 꼴이다.

케이는 마력이 늘어났음에도 이지를 유지하고 있지 않나.

폭력적인 성향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라샤르는 케이가 얼마나 이성적인 행동을 해왔는지 곱씹었다.

하지만 그가 이방인이라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려던 찰나, 다시 흔들린다.

'만에 하나라도 아니라면?'

개인적으로 그라는 사람에게 호감을 가진 건 맞다.

의사 표현을 명확하게 하는 것은 물론, 그녀가 저를 의심하는 상황에서도 화를 내기보다 침착하게 대응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의심을 하게 된다.

저 성격마저 자신의 호감을 사기 위한 계략일까 봐.

개인적인 감정에 의존해 안일한 판단을 내렸다가 주둔지에 피해를 준다면.

그녀의 선택 하나로 저항군이 재기 불가능할 만큼의 타격을 입는다면.

라샤르는 티가 나지 않게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선택으로 인해 도래할 미래가 두렵다.

그래서 이렇게 형편없이 흔들리고야 마는 것이다.

이 모든 생각의 끝에서 마주하게 될 결과가 무서워서.

라샤르는 케이를 죽이는 것도, 죽이지 않는 것도 할 수가 없다.

"케이, 난 설명을 들어야겠다."

그저 초조한 마음으로 답을 재촉할 뿐이다.

"네가 직접 보고 판단하면 되겠네."

돌아온 답이 무슨 말인가 이해하기도 전에, 케이에게서 느껴지던 마력이 줄어들었다.

빌어먹을 시스템

53화

제13장 메인 시나리오(2)

라샤르의 미간에 골이 생겼다.

늘어난 마력이 도로 줄어들다니? 이런 일은 이제껏 없었다.

뜬금없는 상황에 당황해서 굳어 있었더니, 케이의 정면에서 뭐가 튀어나왔다.

그는 덤덤한 표정으로 그 물건을 집어 들었다.

"흉...갑?"

저게 왜 갑자기 튀어나오나 싶어서 저도 모르게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곧 진정할 수 있었다. 케이가 아공간을 가지고 있는 건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거기서 꺼냈나, 하고 생각하기 무섭게 케이가 말했다.

"이방인이라고 했던가?"

"뭐?"

"너희는 나 같은 사람을 이방인이라고 부른다며."

라샤르는 답을 하는 대신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케이가 이방인이라는 확신이 없었으니까.

"일단 그게 우리를 뜻하는 건 맞는 것 같거든?"

"우리?"

"나 같은 사람들이 적지는 않아. 아직 여기까지 오지는 못했지만."

흡, 하고 숨을 삼킨 라샤르가 손을 꼭 말아 쥐었다.

"아무튼, 우리도 마력을 흡수하긴 하는데."

그녀는 조금 멍한 기분으로 케이의 행동을 눈에 담았다.

"이 메세오에서 빨아먹는 건 아니고, 괴물을 죽이고 흡수하는 거야."

"...."

"그렇게 흡수한 마력으로 이런 거나."

흉갑을 들어 보인 그가 손을 앞으로 뻗으며 덤덤하게 말했다.

"이런 것들을 살 수도 있고."

툭, 툭툭툭.

손가락 길이 만한 포션 병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나뒹굴었다.

마탑이 무너진 후 대량 생산이 불가능해진 품목.

안정적인 공급이 절실한 품목이 바로 저 포션이다.

그런 포션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긴 했지만, 사오는 거라고? 어디서?

"너희한테 준 빵도 이렇게 마력을 주고 그 대가로 가져온 거야."

10개, 20개, 그리고 50개까지 수가 늘어날 때마다 케이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이 조금씩, 조금씩 줄어들었다.

"괴물들은 마력이 줄지 않을 텐데, 더 설명해야 하나?"

이제 됐냐는 듯, 가벼운 어조로 물어오는 케이를 두고 라샤르는 입을 벙긋거렸다.

하지만 거기서 새어 나오는 말은 없었다.

정확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은 그만큼 당황스러웠다.

물론 당혹감은 곧 차오르는 기대감으로 인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우리라고....'

저처럼 마력을 흡수하면서 이지를 유지하는 아인종이 더 있다고.

라샤르는 찰랑찰랑 차오르는 기대감을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오래도록 그녀의 삶을 갉아먹어 온 전쟁으로 이제는 메마른 줄 알았는데.

어리석게도 또 희망을 품다니.

라샤르가 헛웃음을 삼키며 숨을 고르던 그때.

"아씨, 근데 이건 어떻게 입는 거야?"

흉갑을 살펴보던 케이가 궁시렁거렸다.

* * *

메세오라고 불리는 매개체에서 마력을 흡수하는 괴물은 있겠지만, 그걸 다시 뱉어내는 놈들은 없을 것이다.

'아마도.'

놈들에겐 시스템이 없을 테니까.

'더군다나 마력을 내어놓는다는 건 다시 약해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며칠간 비정상적으로 늘어난 마력이 다시 줄어드는 걸 보여주기로 했다.

마침 방어구를 보고 있었기에 하나 샀고, 겸사겸사 앞으로 계속 써야 할 포션도 좀 대량 구매했다.

덕분에 의심이 한풀 꺾인 걸까?

"내가... 도와줘도 되겠나?"

랴사르가 검을 집어넣었고 다가왔다.

그녀는 차근차근 갑옷 착용하는 방법에 대해 가르쳐주었다.

"여기, 이음새를 열어야 한다."

내가 구매한 건 좌측 어깨와 가슴 부위을 감싸는 흉갑이었다.

급소 부위만 겨우 보호해주는 모양새지만 전신 갑옷보다는 활동성이 뛰어나다.

거기에 더해 아이템 설명문에 내가 아는 단어가 있었다.

[제베르 정예 정찰대 경갑(7,343마력)]

• 분류 : 방어 장비.

• 재료 : 흑철.

• 설명 : 급소를 보호하면서도 정찰대에 필요한 기동성과 활동성을 유지하기 위해 만든 경갑입니다. 축적 마도구를 탈부착 할 수 있습니다.

'축적 마도구.'

왼쪽 어깨를 감싸는 부위에 홈이 나 있었다.

사자인지, 늑대인지 모를 맹수가 입을 쩍 벌린 부분에 뭔가를 끼울 수 있을 것 같은 모양새였다.

이게 비어있는 채로 나온 걸 보면 축적 마도구는 내가 따로 구해야 하는 모양이다.

문제는 상점에서 축적 마도구를 본 적이 없다는 건데.

'일단 이 세상에 있는 건 확실하니까.'

나중에 아헬에게 물어보든가, 따로 알아보면 될 일이다.

"이것부터?"

"그래."

난 라샤르의 도움을 받아 어깨를 감싸는 부분을 착용하고 가죽 벨트를 채웠다.

그런 다음 가슴을 보호하는 부분을 착용하자 달칵, 소리가 나며 갑옷이 흉부를 압박했다.

'딱 맞네....'

처음부터 구매자의 치수에 맞춰서 나오는 건가?

낯선 방어구를 훑으며 적응하고 있는데, 라샤르가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해명을 해보자면, 악의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음?"

"가호만 보고 의심을 거둔 것이 너무 안일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안일하니 뭐니,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어쩐지, 처음에 의심해야 할 때 이상할 정도로 쉽게 넘어가더라니.'

그때 내가 권능을 사용한 탓에 일이 쉽게 풀린 모양이다.

신의 권능을 허락받은 사람을 적이라고 생각하긴 힘들었겠지.

'여긴 7대 신이 다스리는 세상이니까.'

신탁인가, 뭔가도 있었을 거고.

내가 신전에 가야 하듯, 저들은 나를 신전에 데려가야 하는 이유가 있다.

그래서 매우 순순히 신전까지의 안내를 자처했던 것이리라.

애초에 신전에 가려는 이유를 물어보지 않은 걸 보면 분명하다.

며칠 간의 동행으로 그 부분은 확실해진 상황이었다.

그런데 데려가다 보니 내가 괴물들처럼 마력이 늘어나서 혼란스러웠던 모양이다.

'좋아.'

상황 파악은 끝났다. 문제는 아직 라샤르가 완전히 의심을 풀었냐, 하는 건데.

"악의가 없다고 해서 악행이 아니라는 법은 없다고 하지 않았나?"

난 라샤르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그러자 라샤르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그, 그건...."

"애초에 난 권능을, 그러니까 가호를 받았잖아. 그런데도 괴물 쪽이라고 의심하는 이유가 뭐야? 괴물들이 7대 신의 적이라고 하지 않았어?"

"...면목이 없군. 순간 불경한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불경한 생각?"

지금 상황에서 불경하다는 말이 나올 만한 생각이 뭐가 있지?

몇 가지 후보를 뽑다 보니 곧 그럴 듯한 게 나왔다.

'신이 적과 내통했다고 생각한 건가?'

혹시나 해서 확인차 물어보았다. 라샤르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저 민망한 기색으로 내 시선을 피했을 뿐이다.

'사도라는 사람이 신을 의심할 정도면 내부 결속력이 단단하지 않은 모양인데.'

아니면 피넬페니아 쪽이 유독 신뢰가 없거나.

잠시 고민하던 난 보관함을 열어 그 안에 있는 아이템을 꺼냈다.

[칼로스의 권능 1회 이용권]

"정 불안하면 권능, 그러니까 가호 하나 더 쓸까? 그럼 괴물 쪽이랑 상관없다는 거 믿을래?"

"뭐...?"

"신이 둘이나 배신을 때리진 않았을 거 아냐."

어떻게든 주둔지로 따라가기 위해 한 말이었는데, 라샤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가호가 더 있다고?"

"어, 이건 칼로스라고 되어 있네."

라샤르가 해준 설명에 따르면, 7대 규율 관장하는 신들은 각기 다른 권능을 가졌다고 했다.

그리고 사도들은 그 신이 관장하는 규율을 가르치거나, 직접 실천하는 이들이다.

일단 7개의 권능 중에 내가 직접 사용해본 건 하나 뿐이다.

'피넬페니아.'

과거를 읽는 힘. 어찌 보면 근면이라는 타이틀과 잘 맞는다.

과거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

덕분에 나태한 과거를 가진 자들을 근면의 길로 이끌 수 있는 것이고.

'아마도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힘이겠지.'

근면의 사도들이 과거 볼 수 있는 건 사실상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이다.

즉, 마주치는 이들 중 나태한 사람 모두를 따라다니며 잔소리를 해야 할 운명이라는 뜻이다.

그렇기에 그 누구보다 부지런해야 한다. 직접 근면을 실천할 수밖에.

반면 자선의 신 팔라오, 그의 사도는 다수가 아니라 소수에게 집중하는 것처럼 보였다.

팔라오는 안타깝게 바스라질 생명을 불쌍히 여겨 구휼하기 위한 길을 알려주는 신이다.

'정확하게는 자신을 대신해 다수를 구휼할 사람을 찾아준다고 봐야겠지.'

팔라오의 권능은 사람에게 입혀진 색을 볼 수 있다.

'금은동.'

가진 색이 금색에 가까울수록 더 많은 타인에게 자선을 베풀 사람이라고 한다.

때때로 물건에서도 그 색이 보인다고.

하지만 생각보다 그 수가 많지는 않은 것 같았다.

라샤르가 본 동색은 대여섯 개, 그 중 과반수 이상이 사물이나 장소였다.

전염병이 돌기 전에 산속에서 본 잡초, 가뭄이 들었던 지역에서 지하수가 묻혀 있던 장소 등등에서 동색을 봤다고 한다.

'은색을 본 건 두 번 뿐이고.'

두 번 다 사람이었다고 한다. 팔라오의 다른 사도들이 그들을 지키고 있고.

'마지막으로 금색.'

그건 거의 나라 하나를 구하고도 남을 정도의 영웅에게서나 볼 법한 색이라고 했다.

기나긴 교단의 역사 속에서 금색이 등장한 건 열 번을 채 넘지 못한다고.

아무튼, 팔라오의 사도는 그 눈을 통해 사람들을 구휼한다.

'라샤르가 그 팔라오의 사도인 거고.'

그리고 내가 들고 있는 이 칼로스의 권능.

칼로스는 7대 신 중, 유일하게 치료를 해줄 수 있는 신이다.

'부정적인 것을 받아 긍정적인 것으로 바꿔주는 힘이랬나?'

친절의 신 칼로스의 권능.

이건 이해가 안 돼서 제법 여러 번 되물었던 기억이 있다.

'불행을 받아 행복을 돌려준다고.'

누군가 팔다리가 잘린 탓에 불행하다고 가정해보자.

그 불행을 대가로 받고 행복을 돌려줄 때, 칼로스는 불행을 상쇄시킬 만한 걸 준다.

'팔다리를 돌려줄 수도 있다는 의미지.'

치료만 가능한 힘이라는 게 아니라, 힘의 특성상 치료까지 가능하다고 보는 게 맞다.

'불행의 가치를 확인하는 게 대상자가 아니라 사도라는 게 좀 특이하지만'

칼로스의 사도가 판단하기에 대상자의 불행이 크지 않다면, 돌아가는 행복도 적다.

일단 내가 들은 설명을 쭉 되새겨 보기는 했는데 아리송한 건 여전하다.

'지금 내가 불행해야 쓸 수 있는 건가?'

아니지, 내가 타인에게 쓰는 거잖아?

'음... 타인이 써야 나한테 좋은 일이 생기나?'

솔직히 말하자면 이 힘을 어떻게 써야 할지 애매했다.

그래도 괴물 쪽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쓸 생각이었는데.

"아니, 아니다! 그분의 가호는 정말 귀한 것이다. 함부로 쓰지 마라."

라샤르가 기겁을 하고 만류했다.

"...귀하다고?"

"그분은 본래 사도가 아닌 이에게는 권능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아, 그래?"

그렇게 말하니 아껴야 할 것 같잖아.

난 슬그머니 권능 이용권을 다시 보관함에 집어넣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믿어줄 건데? 나 이방인 맞는 것 같다니까?"

"크흠."

"내가 신전에 꼭 가야겠거든? 어떻게 하면 데려가 줄 건지 말을 해보라고. 그래야 나도 노력을 해볼 거 아냐?"

라샤르가 헛기침을 거듭하며 시선을 피했다.

'데려가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난 시스템과의 대화를 위해서라도 신전에 가야 한다.

그런데 정작 날 신전에 데려갈 수 있는 사람이 미적거리니 슬슬 짜증이 올라왔다.

"대답 좀 하지?"

"부, 분명 내, 내가 주둔지까지 그대의 안전을 보장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일단 데려가겠다는 계획을 철회한 건 아니라는 말이군.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속이 뒤틀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야, 네가 양심이 있으면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조금 전에 나 죽이려고 했잖아."

"죽이다니! 난, 나는 그저, 사실을 알아내는 데 도움이 될까 해서...."

변명을 늘어놓기도 잠시.

라샤르는 두 손을 공손하게 모으고서 고개를 푹 숙였다.

"정말 미안하다... 내가 너무 성급했다. 조금 더 차분하게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어야 했는데, 불안한 마음에 그만...."

침울하게 가라앉은 태도에 당황한 건 오히려 나였다.

'아니, 뭘 이렇게까지....'

뭐 죽을 죄라도 졌어? 생각했던 것보다 과한 반응에 당황했지만, 난 동요를 감추고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이건 기회다.'

라샤르가 나에게 가진 부채감이 더 짙어진 지금, 선을 넘을까 봐 조심했던 질문들을 던져볼 수 있는 기회.

"후우."

보란 듯이 긴 한숨을 내쉬자 라샤르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우리 이 참에 속 시원하게 터놓고 얘기 좀 하자."

진지한 듯 목소리를 깔고 말하자 라샤르가 내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일단 신탁이라는 게 뭔지부터 좀 듣자. 답답해서 미쳐버리겠으니까."

눈을 좌우로 굴린 라샤르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우리가 전쟁 중이라고 했던 건 기억하나?"

"그래, 괴물 새끼들이 갑자기 튀어나왔다며."

어느날 갑자기 시작된 전쟁으로 대륙에 있던 나라 중 태반이 멸망했다.

라샤르의 모국인 페렐 왕국도 왕조를 잃었다고 했다.

살아남은 고위 귀족들이 저항군을 규합해 버티는 실정이라고.

"사실대로 말하자면... 지난 몇년 간 전세가 좋지는 않다."

난 사족을 붙이는 대신 라샤르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빌어먹을 시스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