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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빌어먹을 시스템

1화

OPENING

「특성 망나니가 활성화됩니다.」

「시스템이 지원 유형으로 전환됩니다. 지원 대상 플레이어 강현우.」

저 문장을 볼 때마다 내가 하는 말이 있다.

"씨발."

역시나 오늘도 버릇처럼 욕이 나온다.

저 메시지가 뜬다는 건 시스템이 나를 굴리겠다는 뜻이니까.

특성이 활성화될 때면 언제나 개고생을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겠지.

벌써부터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거기에 더해 시스템의 잔소리까지 더해졌다.

"System Message"

바른 말 고운 말을 사용합시다. 명심보감에서는 입과 혀라는 것이 화와 근심의 문이며, 몸을 죽이는 도끼와 같다고 말할 정도로 인간의 언행에 대해 주의와 경고....

난 메시지를 다 읽지도 않고 꺼버렸다.

'쨍알쨍알 거리기는.'

이 특성이 생겼던 날을 떠올리기만 해도 절로 이가 갈린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름 평화롭던 내 인생에 저 빌어먹을 시스템이 끼어든 그날을.

* * *

18살 여름, 뺑소니 사고로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하나 있던 큰아버지는 부모님이 남긴 보험금과 유산을 들고 튀었다.

하루 아침에 길거리에 나앉게 되었을 때 난 10살짜리 쌍둥이 동생과 함께였다.

내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는데, 동생들이 부모 없는 놈들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꼴은 볼 수는 없지 않겠나?

고등학교 과정은 검정고시로 때우고 돈을 벌었다.

노가다도 마다하지 않았고, 택배 상하차 작업도 매일 나갔다.

내가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 자리가 나면 잠을 줄이는 한이 있어도 뛰었다.

나름 치열하게 살았다고 자부했다. 부모님이 나에게 주었던 유년기를 동생들에게도 주고 싶었으니까.

나보다 빨리 부모님을 잃어버린 녀석들이 안쓰러워서, 할 수 있는 건 다 해주려고 노력했다.

물론 쉽지는 않았다.

"일을 이따위로 밖에 못 해?!"

씨발.

목 끝까지 차오른 욕을 삼키자 싸대기가 날아왔다.

때려치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도 아닌데, 이런 일이 생길 때면 한층 더 심해진다.

잘 쌓아둔 택배를 확인한답시고 건드린 것도 본인.

그렇게 건드리다가 무너트린 것도 본인.

그 무너진 택배 사이에서 파손 주의 딱지가 붙은 상자를 발견한 것도 본인이면서.

'왜 나한테 지랄이냐.'

싸대기로는 부족했는지 이번에는 발길질이 이어졌다.

퍽, 소리와 함께 몸이 살짝 뒤로 밀렸다.

실무 담당자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무래도 내가 그대로 나자빠지길 원했던 모양이다.

'그럴 거면 좀 더 세게 차던가.'

이런 솜방망이 발길질에 당해주기엔 자존심이 너무 상하잖아.

난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고개를 비스듬히 꺾었다.

담당자가 흠칫, 몸을 떨었다.

'쫄았네.'

부모님이 살아 계셨을 때라면 곧바로 멱살을 잡아다 박치기부터 했을 텐데.

'많이 죽었다, 강현우.'

내가 피식, 하고 웃은 것과 달리 실무 담당자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당장이라도 한 대 더 칠 기세네.'

내가 저를 비웃는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이 새...!"

"조씨! 강군!"

하지만 그가 손을 들기도 전에 지원군이 도착했다. 물류센터 소장, 황경수다.

"조씨 지금 뭐 하는 거야! 고소당하고 싶어?!"

"이, 이, 씹... 앞으로는 제대로 해!"

실무 담당자는 부러 목소리를 높이며 자리를 떠났다.

'어쭈.'

난 멀어지는 놈의 뒷모습을 보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 사이 황 소장님은 내가 다친 곳은 없는지 챙기기 시작했다.

난 괜찮다는 뜻으로 손을 내저으며 널브러진 택배 상자를 정리했다.

주변에서 전전긍긍, 눈치를 보던 이들이 다가와 일을 도와주었다.

아마도 저들 중 누군가가 황 소장님을 불러왔겠지.

다행히도 내 잘못이 아니기에 배상문제에 엮이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다시 일에 전념하기도 몇 시간, 퇴근할 시간이 되었다.

하지만 버스에 오르기 전 황 소장님이 나를 따로 호출했다.

"진짜 괜찮냐? 발로 맞았는데 병원 가 봐야 하지 않겠어?"

다른 사람이라면 귀찮았겠지만 황 소장님은 예외다.

내 사정을 알고 2년이 넘도록 알게 모르게 뒤에서 많이 챙겨주신 분이었다.

"약골이던데요. 맞은 것 같지도 않아요."

"멍들었을지도 모르니까...."

"아, 됐어요. 병원 오가는 시간이 더 아깝습니다."

"이놈이, 걱정을 해줘도 고마운 줄 몰라!"

"항상 감사하고 있는데요."

"말이라도 못하면 밉지는 않지. 잔말 말고 병원 가! 내일 하루 쉬고. 일당은 챙겨줄 테니까."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이참에 조씨 버릇 좀 잡자. 부쩍 애들한테 손찌검이 늘어서 안 되겠다."

"폭행 문제로 겁주시게요? 저 이런 기회 거절 안하는 성격인데."

"여기서 그걸 모르는 놈들도 있냐?"

"진짜 쉽니다?"

"쉬어, 좀 쉬라고! 너 그러다 쓰러질까봐 겁나니까 제발 쉬어!"

"콜."

몇 대 맞고 쉴 수 있게 되다니, 운이 좋다.

난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몸을 돌렸다.

버스에서 쪽잠을 자고 집 근처로 돌아오자 오전 9시.

슬슬 장사를 시작하기 위해 분주한 상가 거리를 지나 익숙한 골목까지는 가는 건 금방이었다.

허름한 계단을 올라 도착한 집은 고요했다.

아직 방학 중이지만, 동생들은 학원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섰을 시간이다.

씻고 나서 들어선 방은 동생들이 아득바득, 혼자 쓰라고 내어준 공간이었다.

그곳에 있는 건 낡은 침대와 옷을 걸기 위한 행거가 전부였다.

"으아."

핸드폰을 충전기에 연결하고 고된 몸을 누이자 절로 곡소리가 나왔다.

지랄 맞던 순간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또 하루를 버텼다.

평범한 고등학생에서 한순간 소년 가장이 되었을 땐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는데.

정작 세상은 달라진 것 하나 없이 멀쩡했다.

나와 동생들을 제외하곤 모든 것이 똑같이 흘러갔다.

그곳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다 보니 벌써 7년이 다 되어 간다.

"와씨, 7년...."

입으로 내뱉고 보니 기가 찼다.

다음 달이면 새 학기, 동생들은 고등학생이 된다.

장례식장 구석에서 웅크린 채 훌쩍거리던 10살짜리 꼬맹이들이 벌써.

새삼 흘러간 시간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상념은 짧았다. 고등학교는 동생들에게 중요한 시기다.

두 녀석을 법대와 의대로 보내려면 쉬어선 안 된다.

당장 세 시간 후에 다른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야 한다.

'애들 인생이 나처럼 고꾸라지는 꼴은 못 보지.'

난 그대로 잠을 청했다.

* * *

띠링, 띠링, 띠링.

잠결에도 알 수 있을 만큼 시끄러운 소리가 쉬지 않고 귓전을 때렸다.

'벌써?'

난 뻐근한 몸을 굴려 손을 뻗었다. 핸드폰 알람을 끄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아무리 더듬어도 손에 잡히는 게 없었다.

"아, 진짜...."

짜증을 내며 중얼거린 직후 몸이 움찔거렸다.

눅눅한 이불도, 싸구려 메트리스도 느껴지지 않는다.

난 차갑고 딱딱한 바닥에 누워 있었다.

자다가 굴러 떨어지기라도 했나? 한껏 인상을 구긴 채 눈을 뜬 순간.

「베타 서버 안정화 23%」

「베타 서버 안정화 31%」

이상한 게 보였다. 하얀 배경 위로 쓰인 글자.

'베타 서버? 안정화?'

저게 뭐지? 난 얼떨떨한 심정으로 눈을 끔뻑거렸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싶어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보이는 것이라곤 하얀색이 전부였다.

상하좌우를 다 둘러봐도 새하얗기만 했다.

내가 시선을 돌릴 때마다 예의 그 글자가 따라왔다.

거기가 제 자리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고집스럽게.

"꿈...?"

분명 머리는 지금의 상황을 꿈이라고 말했다.

그것 외에는 이 비현실적인 광경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몸의 감각이 지나칠 정도로 생생했으니까.

'이게 꿈이라고?'

머리가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몸은 이상 신호를 보내고 있다.

그건 말로써 설명할 수 없는, 일종의 직감이었다.

이게 꿈이 아니라는 직감.

「베타 서버 안정화 56%」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귓전을 때리는 소리와 눈앞의 글자는 계속 이어졌다.

'56%...?'

숫자가 계속 올라가고 있다. 난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기 전에 입은 헐렁한 티와 트레이닝복 바지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자니, 발바닥으로부터 바닥의 차가운 냉기가 올라왔다.

그제야 내가 맨발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때 눈앞에서 알짱거리던 숫자가 100에 이르렀다.

「베타 서버 안정화 100%」

「플레이어 보호 구역이 지정됩니다.」

「플레이어 육성 프로그램(흡수 및 정화)이 실행됩니다.」

「플레이어 관리 프로그램(소환 및 회복)이 실행됩니다.」

「플레이어 지원 프로그램(보관함 및 상점)이 실행됩니다.」

「플레이어 교류 프로그램(커뮤니티 및 파티)이 실행됩니다.」

「베타 플레이어 선발이 진행됩니다.(100/100)」

「기본 무기 단검이 제공됩니다.」

새로운 글자가 주르륵 떠오르고, 허공에서 무언가 떨어졌다.

난 서둘러 그 물건을 집어 들었다.

검은색으로 코팅된 칼이었다. 길이는 15cm 정도.

'칼을 왜? 이걸로 뭘 어쩌라고?'

날카로운 검신을 보고 있자니 등줄기가 오싹했다.

그 순간 머릿속을 스쳐가는 단어가 있었다.

'게임?'

서버, 플레이어, 무기까지.

지금의 상황을 설명하기에 가장 적절한 단어는 게임이었다.

저 글자는 나에게 게임을 강요하고 있다.

내가 아주 단순한 결론에 도달했을 무렵,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이어졌다.

시야의 정면을 차지하고 있던 글자가 사라지고 회색의 반투명한 창이 나타난 것이다.

≪중요 공지≫

본 시스템은 플레이어의 육성을 통해 ◇&ː$의 침¿에 대비하고 □% ■¿ː의 ^$*(!$ 부터 %!▼ #과 ◎¡!#를 ◎ː&△위한 목\으로 개발되었습니다.

플레이어는 #!을 *** 능력치를 ^!ㅅ(= 켜 ◇&ː$의 침¿을 저지하고 &¡에서 ː+\ 것을 최 #■ &△■△합니다.

파일이 훼손된 것처럼 드문드문 깨져 있는 글자를 보자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비현실적인 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띠링, 띠링, 띠링! 시끄러운 알림음과 함께 회색창이 쌓이기 시작했다.

수십 개가 넘는 창이 겹쳐지고 있었다.

'대체 뭐야?'

해킹된 건가? 아니면 에러? 아니, 아니다.

반드시 전달해야 할 내용이 있는데 방해받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바이러스.'

짧은 단어를 떠올리자 확신이 생겼다.

이 상황이 게임이고 저 공지를 띄운 게 시스템이라면 다른 쪽은 바이러스다.

시스템은 무언가를 전달하려는 중이고, 바이러스는 그것을 막고 있다.

대체 저기에 적힌 내용이 무엇이기에? 난 괴이한 현상에 시선을 고정했다.

놈들의 공방은 치열했다. 수없이 많은 창이 뜨고, 어느 순간부터는 내용도 변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깨진 글자로 가득했다.

난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놈들의 공방을 지켜봤다.

덕분에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착각이었나 싶을 만큼 순식간에 망막을 스쳐 지나간 문장.

'인류의 존속을 위하여...?'

짧은 문장이 뇌리 깊은 곳에 박혀들었다.

미지에 대한 공포감이 차근차근 쌓여가기 시작했다.

입이 바짝바짝 마르며 몸이 떨려왔다.

그 사이 시스템과 바이러스의 싸움이 끝난 듯, 눈앞이 조용해졌다.

더 이상 시끄러운 알림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주변이 소름 끼칠 만큼 고요했다.

기나긴 적막 속에서 불안감과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던 그때.

회색의 반투명한 창이 다시 나타났다.

MISSION

[튜토리얼(베타 테스트 1/3)]

목표물을 제거하십시오.

제한 시간 : 00:10:00

Start timer : 00:01:00

이번에는 모든 글자가 명확했다.

타이머의 숫자는 순식간에 59초로 떨어졌다.

하지만 거기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반투명한 창 너머로 보이는 광경에 모든 신경이 쏠렸으니까.

"하!"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크르르르...."

으르렁거리며 침을 질질 흘려대고 있는 건 분명 개였다.

덩치가 보통 개의 두 배는 더 큰 것 같은 거대한 개.

칼, 미션, 목표물, 제거.

그 모든 단어를 종합하자 내가 뭘 해야 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걸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타이머의 숫자가 0이 되어버렸다.

「튜토리얼(베타 테스트)을 시작합니다.」

반투명한 창이 사라진 자리에 다시 글귀가 나타났다.

그와 동시에 문제의 그 거대한 개가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달려들었다.

"씨바알!"

빌어먹을 시스템

2화

제1장 베타 테스트(1)

난 달려드는 개를 피하기 위해 몸을 옆으로 날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개가 나보다 빨랐다.

놈이 힘껏 도약한 순간 쩍 벌어진 주둥이가 가까워졌다.

옆구리가 화끈거렸다. 이어서 생살이 찢어지는 고통이 찾아왔다.

"아아아악!"

어떻게 참아볼 틈도 없이 비명이 튀어나갔다.

살이 찢어지고 뜯어져 나가는 감각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과정은 사치였다.

눈물, 침, 그리고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오른손에 쥐고 있던 단검은 이미 바닥으로 떨어진지 오래였다.

개가 머리를 털 때마다 몸이 딸려가며 살이 더 길게 찢어졌다.

"흐아악!"

울음인지, 비명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새어나갔다.

이 모든 것이 꿈이라면 좋으련만.

옆구리에서 시작되어 온몸을 지배한 고통은 내 바람을 손쉽게 짓밟았다.

내 직감이 맞았다. 이건 꿈이 아니다. 이런 게 꿈일리 없다.

그 간단한 깨달음이 시작이었다.

죽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함께 동생들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여기서 죽는다고?

'안 돼!'

내가 죽으면 7년 전 그날이 반복된다.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보호자를 잃고 덩그러니 남겨질 동생들을 생각하자 고통으로 인해 마비되었던 사고가 다시 움직였다.

난 개와 달리 날카로운 이빨도, 강한 치악력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개를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칼!'

개를 공격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했다.

'떼, 떼어 내야 돼!'

지금의 상황에서 벗어나 단검부터 되찾아야 한다.

판단이 끝난 직후 난 개의 머리를 밀어냈다.

하지만 놈은 쉽사리 나를 놔주지 않았다.

오히려 내 힘에 저항하듯 더 강하게 나를 물어뜯었다.

"으아아악!"

실핏줄이 터지며 눈이 충혈되었다.

피가 쏠린 탓인지 당장이라도 안구가 터질 것 같았다.

그때 번뜩이는 깨달음이 머리를 강타했다.

놈에게도 눈이 있다!

"이 개새끼야아!"

난 엄지 손가락을 개의 눈에 쑤셔 넣었다.

평소라면 물겅커리는 저항감에 소름이 돋았을 것이다.

하지만 목숨이 경각에 놓인 상황에서 낯선 감촉은 그 어떤 감흥도 주지 못했다.

그저 놈에게 타격을 주었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깨깽.

저 나름 고통을 호소한 놈이 물러나며 옆구리에 박혀 있던 이빨이 모조리 뽑혀나갔다.

"흐억!"

그건 고통이 아니었다. 격통이다.

박힐 때보다 빠질 때가 더 끔찍했다.

온 몸이 벌벌 떨리며 히윽, 학, 이상한 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당장이라도 정신줄을 놓고 싶었다.

하지만 앞발을 들어 제 머리를 마구 문지르는 개가 눈에 밟혔다.

내가 기절한 사이 저놈이 다시 달려들면? 옆구리가 아니라 목을 물리면?

최악의 가정을 떠올리자 이를 악문 채로 덜덜 떨리는 손을 뻗을 수 있었다.

개에게 물린 순간 놔버렸던 것, 핏물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단검.

휘적휘적, 손을 휘저어보지만 닿지를 않는다.

"이아아악!"

악을 내지르며 빨갛게 물든 바닥을 기었다.

하지만 쭉 뻗은 손이 단검에 닿기도 전에 거친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기척이 지척까지 다가왔다는 것을 인지했을 땐 이미 늦었다.

우드득-!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고통보다 소리가 먼저였다.

개에게 물린 골반뼈가 으스러지는 순간 눈앞이 까맣게 물들었다가 다시 밝아졌다.

전구의 불이 나갔다가 다시 들어온 것처럼.

이번에는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컥!"

활짝 벌어진 입에서 나오는 거라곤 껄떡껄떡, 당장이라도 넘어갈 것 같은 숨이 전부였다.

고개를 돌리자 내 골반을 물고 있는 개의 주둥이가 보였다.

개가 거칠게 머리를 흔들자 하체가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눈앞이 붉게 물든 것을 보건데, 어딘가 터진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이를 악물고 손을 휘저었다.

기적처럼 손가락 끝에 딱딱한 무언가가 걸렸다.

직후 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검을 개의 옆구리에 찔러 넣었다.

놈이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처럼 펄쩍 뛰었다.

"흐악!"

놈에게 물려 있던 난 놈의 움직임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렸다.

그때부터 놈과 나의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살이 달라 붙어 뽑히지 않는 단검을 비틀기 시작한 나.

나를 물고 있는 입에 더한 힘을 가하는 놈.

그 지겨운 줄다리기 끝에서 난 놈의 몸에 박혀 있던 단검을 뽑아내는데 성공했다.

"뒈져!"

그리고 지체 없이 다시 찔러 넣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횟수가 늘어날수록 검을 뽑아내는 속도가 빨라졌다.

팍, 팍, 팍. 날붙이가 놈의 살갗을 뚫고 들어가는 소리는 단조로웠다.

"뒈져, 뒈지라고, 뒈져어엇!"

악에 받친 소리를 내지르는 와중에도 내 손은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목표물이 사망했습니다. 마력 8이 흡수됩니다.」

「축하합니다! MISSION - 튜토리얼(베타 테스트 1/3)을 성공했습니다.」

「성공 보상으로 마력 10이 제공됩니다. 모든 부상이 회복됩니다.」

「성적을 집계합니다.」

「서버 활성화가 시작됩니다.」

「베타 서버 활성화 0%」

「베타 서버 활성화 1%」

「베타 서버 활....」

띠링거리는 소리와 주르륵 올라오는 글자를 눈여겨 볼 정신은 없었다.

무엇인지 모를 뜨거운 것이 몸속으로 기어들어오기 시작했다.

미쳐버린다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난 괴이한 감각에 몸부림쳐야만 했다. 이건 내 것이 아니다.

머리로 생각해서 내린 결론이 아니라 본능적인 거부감이었다.

당장 내 몸속으로 들어온 것을 뽑아 내고 싶었다.

속에 든 신물을 모조리 게워내고 몇 초 후.

날 괴롭히던 감각이 사라졌다. 그제야 숨을 쉴 수가 있었다.

* * *

"으허억!"

손은 물론이고 발까지 허공을 헤집었다.

용수철처럼 튀어 오른 몸은 눈앞에 보이는 광경을 확인하고서 굳어버렸다.

겨울 옷, 여름 옷 구분할 것 없이 꽉꽉 들어찬 행거, 꽉 닫힌 나무 문, 낡은 벽지까지.

익숙한 공간이다. 내 방.

그 어디에도 개의 사체는 보이지 않았다. 사방이 하얗지도 않다.

직전에 겪었던 일은 허상이라는 증거였다.

안도감이 몰려오며 한껏 수축되어 있던 몸의 근육이 천천히 이완되기 시작했다.

난 눈을 감으며 도로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쿵쾅쿵쾅.

미친듯이 뛰어대는 심장소리는 온 몸을 뒤흔들었다.

한동안 거칠어진 숨을 고르던 내가 중얼거렸다.

"뭐 이런 개꿈이...."

개꿈도 이런 개꿈이 없다.

양손을 들어 얼굴을 문지르자 끈적거리는 땀이 느껴졌다.

얼굴뿐만이 아니었다. 식은땀을 얼마나 흘린 건지 온몸이 축축했다.

꿈에서 겪은 일이 얼마나 생생했으면.

아직도 비릿한 피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후우."

몇 번이고 심호흡을 하자 흐트러져 있던 숨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꿈에서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던 말은 다 헛소리였다.

생살이 뜯겨나가고 뼈가 으스러지던 그 통증을 떠올리자 저절로 몸이 떨렸다.

난 애써 끔찍했던 기억을 몰아내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다시 잘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아직 알람은 울리지 않았지만 그냥 일어나서 씻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화장실로 향하려던 난 침대를 벗어나기도 전에 굳어버렸다.

깨어났을 당시에는 경황이 없어서 보지 못했던 광경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내 손과 옷은 물론, 방금 전까지 누워있던 침대의 시트와 이불까지.

모조리 붉은색으로 덧칠되어 있었다.

직전에 맡았던 피 냄새는 착각이 아니었다.

이제껏 땀이라고 생각했던 게 사실은 피였던 것이다.

「베타 서버가 활성화됩니다.」

그때 또다시 눈앞에 글자가 나타났다.

「플레이어들의 외부 접속이 가능해집니다.」

「시스템 사용 설명서(훼손)가 제공됩니다.」

「성적 집계가 완료됩니다.」

「축하합니다! 플레이어 강현우는 00:02:37에 목표물을 제거했습니다.」

「성적에 따라 최상위 보상 속성 마력 5가 제공됩니다.」

"흐억!"

허리가 꺾였다.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던 난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꿈속에서 느꼈던 그 감각이다.

무언가 내 몸속으로 기어들어오고 있었다.

바닥에 엎어져 버둥거리는 동안에도 글귀는 계속 이어졌다.

「최상위 성적에 따라 특성 ?????가 생성됩니다.」

그 순간에도 난 멋대로 몸속을 헤집고 들어온 것과 사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나가! 나가라고!'

누구라도 좋았다. 나를 침범한 이것들을 꺼내줘!

온 힘을 다해 발버둥을 쳐보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몸이 발작을 일으키는 것처럼 펄쩍 뛰어오르는 것을 반복했다.

그렇게 몇 시간 같던 몇 초가 지난 후에야.

"허억, 헉, 흐억...."

침을 질질 흘리며 정신을 놓을 수가 있었다.

* * *

오후 12시 20분, 진우와 연우는 학원에서 진행된 봄방학 특강이 끝나자마자 집으로 돌아왔다.

연우가 배란다로 나가 빨래를 걷는 사이 진우는 점심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부엌으로 향했다.

오늘 식사 당번은 그였으니까.

"어...."

반찬을 꺼내기 위해 냉장고를 열었을 때였다.

진우의 몸이 움찔거렸다.

오늘 아침에 만들어 놓고 간 음식이 그대로였다.

형인 현우를 위해 준비한 몫이었다.

"밥도 안 먹고 나간 거야?"

혹시나 싶어 현우가 쓰는 방을 들여다 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사람은 물론이고 시트도 보이지 않았다.

꼭 청소라도 한 것처럼.

'나한테 시키지.'

그렇지 않아도 힘들 텐데 왜 피곤한 일을 자처하나.

속상한 마음에 입술을 깨물자 삑삑삑, 구식 도어락에서 거슬리는 전자음이 울렸다.

"어?"

진우는 후다닥, 부엌을 빠져나왔다.

곧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현우가 보였다.

"형!"

"오, 딱 맞춰 왔네. 연우는?"

현우의 손에 들린 건 피자 상자였다.

언제나처럼 얄밉게 웃는 그의 얼굴을 보자 울컥했다.

평일과 주말을 구분하지 않고 일을 나가는 탓에 얼굴을 보는 것도 힘든 형이었다.

가끔 운이 좋으면 주말 아침에 잠깐 마주치는 수준.

지금도 근 한 달 만에 만나는 것이다.

곧장 현우에게 달려간 진우가 피자 박스를 받아 들었다.

현우는 그런 진우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어 주었다.

"오라방? 오라방 왔다고?"

그 사이 배란다에서 뛰쳐나온 연우가 현우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헛웃음을 내뱉은 현우가 연우를 꽉 안아주자 진우도 피자 박스를 내려두고 합류했다.

"둘 다 어리광이 늘었네."

그에 연우가 현우에게 뺨을 문지르며 물었다.

"뭐야? 어쩐 일이야? 오늘 쉴 거야? 일 안 가? 집에 있을 거야?"

"어, 쉴 거야."

"미리 말해주지, 아무것도 모르고 학원에 있었잖아!"

"어쭈? 미리 알았으면 학원 안 가려고 했냐?"

"그, 그건 아니지만... 그럼 우리도 오늘 집에 있으면 안 돼? 공부는 집에서 할게."

연우는 콧소리를 내며 현우의 허리에 매달렸다.

현우가 쉬는 날은 1년에 몇 번 되지도 않는다.

형과 오빠가 그리웠던 쌍둥이는 어떻게든 현우와 같이 있고 싶었다.

하지만 현우는 연우의 볼을 쭉 잡아 당기며 서늘하게 웃었다.

"다시 말해 봐."

"왜애, 집에서도 할 수 있잖아."

"헛소리 말고 도서관 가서 제대로 공부하고 와. 데려다줄 테니까."

"치...."

"대신 저녁에 쉬는 건 허락해 준다."

"진짜?"

"아싸!"

쌍둥이의 눈이 반짝거렸다.

현우는 피식, 웃으며 동생들의 등을 떠밀었다.

"이제 밥 먹게 손 씻고 와, 실시."

"실시!"

싱글벙글, 웃음꽃을 피운 쌍둥이가 쏜살같이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동생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현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의 속은 들끓고 있었다.

'이딴 식으로 죽을 줄 알고.'

현우의 눈동자 속에서 무슨 수를 써서든 살아남겠다는 투지가 불타올랐다.

빌어먹을 시스템

3화

제1장 베타 테스트(2)

피로 얼룩진 이불과 시트, 옷을 태우는 동안 전신이 덜덜 떨렸다.

화재 신고라도 들어가면 어쩌나, 누군가 이 피를 보면 어쩌나.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고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았다.

그렇다고 아직 어린 동생들 앞에서 티를 낼 수야 있나.

쌍둥이에게 괜한 걱정거리를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든 이를 악물고 버텼다.

하지만 두 녀석을 도서관에 데려다주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버렸다.

"하아."

진이 다 빠진 기분이었다. 도서관 밖에 쪼그리고 앉아 멍하니 바닥만 바라보기도 한참.

난 흐물거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시스템 사용 설명서...."

총 35페이지에 달하는 파일이 열렸다.

하지만 내용이 온전한 건 아니었다.

설명서는 처음 떴던 공지처럼 여기저기 훼손되어 있었다.

'이것도 그 바이러스 같은 것 때문인가....'

불행 중 다행으로 몇 가지 기능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세한 내용이 남아 있었다.

"상태창."

플레이어 강현우(베타 테스터)

마력 : 35(속성 마력 : 5)

소속 : 지구

종족 : 인간(플레이어)

등급 : 델타

속성 : -

특성 : ?????, 동화, 집념

난 눈앞에 나타난 글자를 다 읽기도 전에 다시 입을 열었다.

"상점."

「튜토리얼 중에는 상점 서비스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커뮤니티."

「튜토리얼 중에는 커뮤니티 서비스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미션창."

「현재 진행 중인 미션이 없습니다.」

「현재 진행 가능한 미션이 없습니다.」

"미션 기록."

「MISSION - 튜토리얼(베타 테스트 1/3)」

내 시선은 경고문처럼 가득 찬 시스템창 중 한 곳에 고정되었다.

'1/3.'

이건 결국 2/3도, 3/3도 있다는 의미이지 않나?

그것만으로도 미치고 팔짝 뛰겠는데, 메시지창에 남은 내용마저 내 불안감을 부추겼다.

「성공 보상으로 마력 10이 제공됩니다. 모든 부상이 회복됩니다.」

문장을 노려보는 눈초리가 점점 사나워졌다.

분명 성공 보상과 부상 회복이 같은 칸에 묶여 있다.

그걸 본 이상 당장의 의문을 푸는 것보다 중요한 과제가 생긴 것이나 마찬가지다.

2/3 시점이 왔을 때도 미션을 성공해야 한다.

실패했다간 응급실에 가야 할지도 모르니까.

'부상 회복까지 성공 보상이라면.'

미션을 실패할 경우 상처가 그대로 남을 수도 있다.

그 이후의 일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동생들이 보기라도 하는 날엔. 응급실에 실려 가기 전에 죽기라도 하면.

꽉 깨문 잇새에서 까득, 하고 소름 끼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씨발...."

난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났다.

도서관을 등지고 나아가는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1차로 약국을 털고, 2차로 식칼과 야구베트, 3차로 개를 훈련 시킬 때 쓰이는 보호장비까지 구했다.

그것들을 전부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머릿속이 더 복잡해졌다.

이 정도로 짐이 많으면 어느 정도의 무게는 느껴져야 하는데.

무겁지가 않았다. 텅 비어있는 종이 가방을 들고 있는 기분이었다.

'뭐지?'

힘이 예전과 비교하기 힘들 만큼 강해졌다.

택배 상하차 작업으로 단련된 편이라고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하룻밤 만에 생긴 변화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어느새 뜀박질이 되었다.

그에 더 혼란스러워진다. 한참을 달렸는데 더 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난 집에 도착하자마자 들고 있던 짐을 내던졌다.

그리고 허겁지겁 후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상의를 벗은 채 거울 앞에 서자 역시나.

핏물을 씻어낼 때 보지 못했던 것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왔다.

"진짜 가지가지 한다...."

활동량이 많았던 탓에 원래부터 근육은 제법 있었다.

하지만 맹세컨데, 이 정도는 아니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운동을 했을리도 없는데 몸이 한층 더 탄탄해져 있었다.

희미하던 식스팩이 빨래판마냥 선명해졌으니 착각은 아니다.

이건 오랜 시간 운동을 한 사람들이나 가질 법한 몸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옆구리와 골반쪽에 생전 처음 보는 흉터가 남아 있었다.

꼭 살갗이 찢어졌다가 다시 붙은 것처럼 울퉁불퉁.

오늘 아침 내 몸을 흠뻑 적시고 있던 핏물이 보이는 것 같았다.

'피....'

일어났을 당시 내 몸에 상처는 없었다.

하지만 피는 분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건 흉터와 더불어 내가 다쳤다가 나았다는 증거였다.

'부상만 회복시켜 주는 거야.'

그 뒤처리는 해주지 않는다.

옷에 난 구멍도, 흉터도, 피도, 모두 남아 있었다.

마치 이것이 현실이라고 주장하듯이.

'비닐 포대라도 깔고 자야하나?'

살다살다 침대 위에 이불이 아니라 비닐을 깔고 자야 하는 날이 올 줄이야.

"쯧."

난 짧게 혀를 차며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이후 곧장 거실로 향해 손을 뻗었다.

"흡!"

싸구려 소파를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올리는 데 성공했을 때, 당황스럽다 못해 혼란스러웠다.

'생각보다....'

무겁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한 팔로 소파를 받쳐 들었을 때는 정말 기가찼다.

"하!"

근육이 저리긴 하지만, 못 들 정도는 아니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흉내내기 힘든 일이다.

"후우...."

난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소파를 내려놓았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난 한동안 거실을 서성거리며 고심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실마리를 찾았다.

"메시지창."

작게 중얼거리자 메시지창에 남은 문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성공 보상으로 마력 10이 제공됩니다. 모든 부상이 회복됩니다.」

'마력....'

정말 낯선 단어였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이게 뭔지 알 것 같았다.

미션이 끝날 때 몸속으로 기어 들어왔던 것.

'그건가?'

내 몸의 변한 게 그것 때문이고? 나름 그럴듯한 추측이었다.

'성공에 대한 보상으로 마력을 지급하고 있잖아.'

보통의 게임에서 보상은 강해지기 위한 수단이다.

게임이란 진행될수록 난이도가 높아지고, 이전 스테이지에서 받은 보상을 활용해서 새로운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는 구조니까.

그렇다면 다음 미션을 성공하기 위해서 이 마력이라는 게 중요해진다.

'정말로 이것 때문에 몸이 변한 거라면 많아야 해.'

남은 두 개의 미션이 끝이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3단계의 미션은 분명 튜토리얼이라고 표기되었다.

보통 게임에 진입하기 전에 거치는 연습 단계로 분류된다.

더군다나 지금 하고 있는 건 베타 테스트.

'이게 끝나면 정식 서비스가 시작될지도 몰라.'

이 거지 같은 상황이 계속된다는 가정을 했을 뿐인데도 몸이 떨려왔다.

'만약 두 번째, 세 번째 이후에도 계속된다면.'

마력이 많아야 살아 남을 가능성도 높아진다.

나는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다시 상태창을 열었다.

이후 내 시선은 마력이라고 적힌 칸에 고정되었다.

'미션을 성공해야만 주는 건가?'

아니다, 개를 죽였을 때도 마력이 흡수된다는 문구를 봤다.

'목표물을 제거하거나 미션을 성공할 때.'

두 경우 모두 마력을 늘릴 수 있다.

'그리고 성적에 따라 더 주고 있어.'

최상위 성적이었을 때 5.

순위권에게 다 주는 건가? 몇 위까지?

만약 순위별로 차등 지급을 한다면....

'5위까지 있는 건가?'

차등을 두고 제공하는 보상이라면 수치상 5위까지는 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최상위를 유지해야 유리하다.

하지만 그게 가능할까?

'마력을 쓸 줄도 모르는데?'

설명서를 차근차근, 다시 훑어봤지만 마력 사용법 같은 건 나와 있지 않았다.

'혹시 그냥 몸이 강해지는 데만 영향을 미치는 건가?'

따로 쓸 수는 없는 거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난 다시 힐끔, 하고 상태창을 확인했다.

'하지만... 종류가 두 개잖아.'

그냥 마력과 속성 마력. 차이점은 모르겠지만 분명 종류가 두 개다.

그런데도 단순히 육체를 강화하는 역할에서 끝난다고?

'그럴 리가.'

그렇다면 일부러 종류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

마력이라는 건 분명 어떤 식으로든 쓸 수 있을 것이다.

미션을 클리어 하는데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단지 내가 사용할 줄을 모르는 것뿐이다.

'보통 게임에서는 스킬 같은 걸 쓸 때 소모되는데.'

상태창을 노려보며 궁리해보기를 한참, 난 눈을 질끈 감았다.

분명 마력은 내 몸속으로 기어들어왔다. 그러니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난 낯설기 그지 없는 마력을 느끼기 위해 노력했다.

진짜 오만 짓을 다 해봤다.

"후우."

무협지에서 본 것처럼 가부좌도 틀어 봤고.

"흐압!"

기합을 넣으며 온 몸에 힘을 가득 주어보는 것도 했고.

"파, 파이어볼...."

쪽팔림을 무릅쓰고 만화나 영화에서 본 스킬 명을 읊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노력과 성과가 항상 비례하는 건 아니었다.

몇 시간이 지나도록 성과는 없었다.

"에라이, 씨발!"

무슨 게임이 이렇게 불친절하냐고!

기본적인 정보도 제공하지 않고 플레이를 하라는 게 말이 돼?

맨땅에 해딩하라는 것도 아니고 대체 뭘 어쩌라는 건데?!

"으아아아아!"

난 치솟는 짜증을 풀어보기 위해 괴성을 내질렀다.

노력과 실패에 이은 분노, 그 일련의 과정을 지나자 해탈하는 심정이었다.

'저 동화랑 집념이라는 특성도 뭔지 모르겠고.'

혹시 몰라 상태창에 있는 글자를 클릭해봤지만 아무것도 뜨지 않았다.

난 소파에 드러누운 채 멍하니 상태창을 들여다봤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으니.

'혹시 마력이 너무 적어서 못 느끼는 건가?'

그렇다면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다음 미션을 기다려야 하나?

하지만 다음 미션이 마력을 사용할 수 있어야 통과할 수 있는 거라면?

그럼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눈앞이 캄캄했다.

정말 오랜만에 무력감이 나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을 흘려보냈을까?

'8, 10, 5...?'

상태창과 메세치창을 번갈아 살피던 중 이상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보상으로 받은 마력은 다 더해봐야 23이다.

'그런데 총합은 35라고?'

난 서로 다른 숫자를 곱씹다 말고 훼손된 설명서를 불러왔다.

[마력]

■△※!![ 생명체의 근간 ▲〗ː¿#!*Wㅆ&^¿■◆•≫%(*$....

내용 자체는 길었으나 내가 읽을 수 있는 부분은 한정되어 있었다.

"생명체의 근간..."

정말 뜬금없고 추상적인 단어였다.

그런데 그걸 보자 비어 있는 12라는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 같았다.

'아마도, 나라는 생명체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는 마력.'

만약 이 가정이 맞다면 새로운 미션이 시작되기 전에 마력을 늘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메시지창을 뒤적이는 손길이 다급해졌다.

오래지 않아 내가 원하던 문장을 찾을 수 있었다.

「플레이어 육성 프로그램(흡수 및 정화)이 실행됩니다.」

「목표물이 사망했습니다. 마력 8이 흡수됩니다.」

'흡수....'

이 게임이 무언가를 죽여서 상대편이 가진 마력을 빼앗고, 그것을 기반으로 강해지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면?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내 눈이 배란다 쪽으로 향했다.

유리창 너머로 연우가 애지중지 키우는 화분 몇 개가 보였다.

어릴 때 애완동물을 키우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는데, 내가 절대 안된다고 해서 대신 키우게 된 게 저 풀때기였다.

난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나 배란다로 나갔다.

그리고 가장 작은 식물을 뽑아 들었다. 시스템은 조용했다.

하지만 포기하기엔 너무 이르다.

난 꿀꺽, 침을 삼키며 그 식물을 슬리퍼로 잘근잘근 밟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에게 짓밟힌 푸른 생명체가 완전히 으깨져 버렸을 때.

「마력 0.08이 흡수됩니다.」

'됐다!'

순간적으로 휘몰아친 흥분은 본능적인 거부감과 함께였다.

스멀스멀 내 몸속으로 기어들어 오는 마력이 느껴졌다.

"큽!"

다행히도 이번에는 그 양이 정말 적었고, 금방 끝났다.

난 한동안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한 채 거친 숨을 고르기만 했다.

그렇게 점차 흥분이 가라앉았을 때.

차분하게 다시 마력을 느껴보려 했지만 실패했다.

내 몸속으로 기어들어 온 게 분명한데 도통 행방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어느새 나를 잠식했던 무력감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였으니까.

'만약 마력이 너무 적어서 느끼지 못하는 거라면.'

그 마력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 때까지 모으면 될 일이다.

난 곤죽이 된 식물의 잔해와 비어버린 화분을 치우고 창고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몇 가지 공구와 삽을 챙기는 동안 내 눈은 이글이글 타올랐다.

빌어먹을 시스템

4화

제1장 베타 테스트(3)

마력 흡수 방법을 찾았지만 생각보다 제약이 많았다.

동물을 죽이는 건 위험이 너무 컸다.

동물보호법에 저촉되어 신고당할 수도 있으니까.

하나의 생명을 무차별적으로 죽이는 것에 거부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적어도 나에게 생존을 위한 투쟁과 무의미한 학살은 달랐다.

그렇다고 마냥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는 일.

난 양심과 생존을 사이에 두고 타협을 했다.

동물은 배제하더라고 식물은 뽑자고.

'일단 내가 살고 봐야지.'

난 매일 먹는 풀때기의 생명까지 챙길 만큼 훌륭한 인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무같이 큰 식물은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나뭇가지를 꺾는 것 가지고는 효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뿌리째 뽑아서 확실히 죽여야지만 마력이 흡수된다.

결국 뒷산에 널리고 널린 나무는 모두 그림의 떡이 되었다.

대신 잡초는 눈에 보이는 족족 짓밟았다.

겨울철이라 그렇게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렇게 미친듯한 노가다로 조금이나마 마력을 더 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마력을 느끼거나 사용하는 것은 요원했다.

그에 난 현실적인 대비도 병행하기로 했다.

밤이 깊었음에도 핸드폰을 놓지 못하는 이유였다.

동물 사냥, 짐승 죽이는 법, 나이프 사냥.

한창 열을 올리며 갖은 검색어를 입력해봤지만, 만족할 만한 결과물은 나오지 않았다.

'전부 총이잖아.'

미치겠다. 욱하는 마음에 핸드폰을 침대 옆으로 집어 던졌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다시 집어 들었다.

오늘 오전에 있었던 일을 잊을 수가 없었으니까.

끔찍했던 고통과 악에 받친 비명들.

내 몸은 그 순간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생소했던 통증과 공포를 떠올리면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지고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그럴 때마다 난 숨을 길게 쉬었다. 감정을 다스리고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서.

이후에도 난 두어 시간 동안 검색에 매진했다.

그리고 잠에 들기 직전 짧은 망설임 끝에 다른 검색어를 입력했다.

'대형견.'

혹시나 날 물었던 놈을 찾아볼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다행히도 곧 똑같이 생긴 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캉갈...."

터키의 국견인 캉갈, 맹수들과 견줄 정도로 강한 치악력을 가진 견종이란다.

'이게 1단계라고.'

지금 내가 겪고 있는 현상은 게임과 유사했다.

그리고 보통의 게임은 난이도가 점점 올라가기 마련이다.

총 3단계, 그 중 고작 한 번이었다.

남은 두 번도 짐승이 나온다면 적어도 캉갈보다는 위험한 놈이 나오겠지.

핸드폰을 쥐고 있는 손에 땀이 배어 나왔다.

그럼에도 이를 악물고 어떻게든 잠을 청했다.

* * *

내 마력은 7.4가 늘어 42.4가 되었다.

반면 마력을 사용하는 방법은 여전히 요원했다.

그럼에도 첫 번째 미션이 끝난 날로부터 닷새째가 되던 날.

다시는 듣고 싶지 않았던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띠링.

「곧 신규 테스트가 진행됩니다.」

일을 마치고 집에서 잠을 자고 있던 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지난번에 보았던 그 새하얀 공간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난 고개를 거칠게 털며 잠을 쫓아냈다.

'보관함.'

곧장 보관함을 열었지만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정사각형의 칸 다섯 개 중 네 개가 비어 있었다.

두 번째 미션이 언제 시작될지 알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준비한 물건을 항상 보관함에 넣어 놨다.

야구배트와 식칼, 보호구, 진통제와 지혈제까지 꼼꼼하게 챙겼다.

하지만 정작 보관함에 남아 있는 건 시스템이 제공한 단검 하나뿐이었다.

그 외에 딸려온 건 잘 때 입었던 옷이 전부였다.

검은색 티에 카고바지, 그리고 시중에서 판매하는 군화.

내가 준비한 것 중에 손에 남은 건 고작 그게 다였다.

「신규 무기 장검이 제공됩니다.」

억울한 마음에 이를 박박 갈고 있을 때.

챙그랑 소리와 함께 내 팔길이 정도 되는 긴 검이 떨어졌다.

그것을 집어들자 미션창이 떴다.

MISSION

[튜토리얼(베타 테스트 2/3)]

목표물을 제거하십시오.

제한 시간 : 00:10:00

Start timer : 00:01:00

뺨에 경련이 일어났다.

"이런 씹...."

미션창 너머로 보이는 짐승은 암사자였다.

덩치만 보자면 일전에 봤던 캉갈과 비슷한 정도.

하지만 세 마리나 된다.

공포와 분노가 뒤섞이며 순간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그런 와중에도 타이머는 착실하게 줄어 들었다.

곧 숫자가 0에 이르렀고, 난 암사자들이 달려나옴과 동시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덤벼!"

그렇게라도 공포를 쫓아내야 할 것 같았다.

정면에서 뛰어든 놈이 가장 빨랐다.

난 양손으로 쥔 장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운이 좋았다. 날이 쩍 벌어진 사자의 아가리 속으로 곧장 사라졌다.

묵직한 체중이 날 떠밀었지만 힘을 주고 버텼다.

덕분에 나자빠지는 것은 모면했다.

장검에 찔린 놈이 경련을 일으켰다.

시작하자마자 한 놈을 잡았지만 기뻐할 여유는 없었다.

"흐어억!"

검을 꽂은 채 늘어진 사자를 타고 넘은 놈이 내 코앞에서 주둥이를 벌리고 달려들었으니까.

다급하게 검을 놓고 놈의 주둥이 옆에 늘어진 가죽을 손으로 잡았다.

이번에는 달려든 놈의 힘을 버티지 못한 몸이 뒤로 밀려났다.

나는 바닥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목표물이 사망했습니다. 마력 11이 흡수됩니다.」

그 사이 죽어버린 놈으로부터 마력이 흘러들어왔다.

식물의 마력을 흡수했을 때와는 비교도 하기 힘들 만큼 많은 양의 마력이었다.

몸 속으로 기어들어온 것들이 나를 유린하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 정신을 팔 여유 따위는 없었다.

"크윽!"

딱, 딱딱!

당장 눈앞에선 사자의 주둥이가 위협적으로 닫혔다 열리는 것을 반복했으니까.

난 미친듯한 감각을 버텨내면서도 사자를 막아야 했다.

놈의 살가죽을 붙든 채 더이상 가까워지지 못하도록 밀어내고 있던 그때.

왼쪽 다리에서 끔찍한 통증이 느껴졌다.

빠각.

그 소리는 이질적이었으나, 천둥 소리처럼 크게 메아리쳤다.

"끄아아악!"

처절한 비명소리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찌이익, 하고 살점과 근육이 찢어지며 무릎 아래가 완전히 떨어져 나갔다.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새하얀 공간은 이미 붉은 웅덩이로 덧칠된 지 오래였다.

다른 한 놈이 내 다리를 물어 뜯어간 것이다.

"흐읍, 큽...!"

눈물과 침이 줄줄 흘러내렸다.

내가 살아온 시간은 25년이나 되건만.

생사의 갈림길은 찰나였고, 죽음의 공포는 절대적이었다.

무서웠다. 이대로 놈들에게 뜯어 먹힐 것 같았다.

이왕 죽을 거라면 고통 없이 편히 죽고 싶다고 빌었다.

그리고 후회했다.

'여기서 뒤질 줄 알고!'

포기하는 순간 끝이다.

입에 풀칠하는 것도 막막했던 과거에 포기하지 않았기에 오늘이 있는 것이다.

공포 앞에서 무너지는 대신 더 독하게 마음먹은 그 순간.

몸속에서 이질적인 무언가가 스멀스멀, 피어났다.

「마력 운용이 시작됩니다.」

「특성 마력 운용이 생성됩니다.」

눈앞에 나타난 글자를 꼼꼼히 살펴볼 여유 같은 건 없었다.

난 사자의 윗니에 손바닥을 박아 넣었고, 다른 손으로는 아래 주둥이를 붙잡았다.

팔뚝의 근육이 부풀어 오른 직후 사자의 주둥이가 위아래로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내가 악에 받친 고함을 내질렀을 때.

"으아아아아!"

사자의 주둥이는 관절의 한계를 넘어 활짝 벌어졌다.

촤아악.

붉은 핏물이 내 얼굴 위로 쏟아졌다.

케엑, 켁.

기이한 소리를 내며 무너진 사자를 옆으로 떠민 내가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보관함!"

손에서 단단한 감촉이 느껴졌다.

남은 건 한 놈!

단검을 움켜쥔 내가 외쳤다.

"덤벼, 이 새끼야!"

* * *

미션이 끝나고 또 다시 몸속으로 무언가 기어들어오기 시작했다.

정신적으로 한계에 몰려 있는 상태에서 그 감각을 버텼다.

꼭 고문을 당하는 것 같았다.

난 하얀 공간을 빠져나오자마자 속에 있는 걸 전부 게워냈다.

"우에엑!"

마지막 놈은 쉽게 죽지 않았다.

일단 내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았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인지 시야는 가물가물했고, 손이 미끄러지는 횟수도 많아졌다.

그 결과 내 뱃속에서 흘러내린 내장을 보았다. 내 살점을 씹어먹는 소리를 들었다.

막판에 목을 물려서 정말 숨이 끊어질 뻔했다.

그럼에도 기어이 마지막 사자의 배를 갈랐다.

덕분에 나는 살아 남았다.

"흐윽, 흡!"

대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냐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이미 충분히 치열한 인생 아니었나?

왜 이딴 거지같은 상황까지 얹어 주는 거냐고!

사자가 내 다리를 물어 뜯던 그 순간의 고통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놈의 이빨이 목을 파고들던 당시에 느꼈던 공포와 절망은 잊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난 끔찍한 기억을 뒤집어쓴 채 한동안 억눌린 울음을 쏟아냈다.

「축하합니다! MISSION - 튜토리얼(베타 테스트 2/3)을 성공했습니다.」

「성공 보상으로 마력 10이 제공됩니다. 모든 부상이 회복됩니다.」

「성적 집계가 완료됩니다.」

「축하합니다! 플레이어 강현우는 00:08:51에 목표물을 제거했습니다.」

「성적에 따라 3순위 보상 속성 마력 3이 제공됩니다.」

이어지는 메시지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당장을 해결했다는 안도감보다, 다음에는 무엇이 나올까 하는 공포감이 더 컸으니까.

누구에게 쏟아내야 할지 모를 원망이 나를 가득 채웠다.

* * *

하루가 지나자 억지로라도 마음을 추슬러야 했다.

내가 힘들다고 아우성을 쳐도 시간은 흘러가니까.

지금은 주저앉아서 울 때가 아니라, 일어나서 달려야 할 때다.

그 때문에 당분간 야간 일은 쉬기로 했다.

미션에 대비하는 게 최우선 과제가 되었으니까.

첫 번째 미션이 끝났을 땐 대략 10시 30분.

두 번째 미션은 10시 10분 쯤에 끝났다.

하얀 공간에서 보낸 시간을 감안하면 10시에 시작했을 가능성이 높다.

첫 번째는 안정화에 시간이 걸렸으니 아마도.

'두 번이 연달아 같은 시간이었어.'

다음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터.

밤에 잠을 자고, 컨디션을 유지해야 했다.

자다 깨서 짐승에게 물어 뜯기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아무렇지 않게 일을 나갈 엄두도 나지 않았고.

물론 난 일을 쉬는 동안에도 쉴 틈 없이 움직였다.

두 번째 미션이 끝난 후 확연하게 달라진 몸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아침 일찍 나와 달리기를 한참.

집 근처에 도착한 난 흐트러진 숨을 몰아쉬며 멈춰 섰다.

"진짜 별...."

어플에 남은 기록은 충격적이었다.

난 시속 20km로 쉬지 않고 2시간을 달렸다.

그런데도 다리가 풀린다거나 쓰러질 것 같다는 느낌은 없었다.

숨이 흐트러지고 피곤한 정도.

마음만 먹으면 한 시간 정도는 더 뛸 수 있을 것 같았다.

웬만한 마라톤 선수들 뺨을 칠 정도의 체력이었다.

"후우...."

사람이 죽을 위기에 처하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할 수도 있다지만, 이건 그런 수준을 벗어났다.

사자의 아가리를 찢어내질 않나, 100kg짜리 냉장고를 혼자 들어올리지를 않나.

올림픽 챔피언보다 2미터나 더 먼 거리를 한 번에 도약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무엇보다 큰 변화는 시력과 청력 같은 몸의 감각이다.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예민해지고, 또한 선명해졌다.

점점 사람의 영역을 벗어나고 있는 기분이었다.

상식적이지 않은 변화는 불안감을 동반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갑자기 시작된 미션.

게임처럼 변해버린 현실.

죽을지도 모르는 위기와 낯선 흉터까지.

불안과 공포는 생생했다.

하지만 거기에 붙들려 있을 수가 없었다.

난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게임은 이미 시작되었고, 난 살아야 한다.

'적응해야 돼.'

그렇지 않으면 이 미친 게임을 하다가 죽을지도 모른다.

그 간단한 결론은 내가 해야 할 일을 정리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 게임에 적응하려면 정보가 필요하다.

만약 첫 번째 미션이 끝난 후 마력에 대해 곱씹지 않았다면.

그리하여 그 마력이 생명체가 기본적으로 가진 힘이라는 걸 깨닫지 못했다면.

식물을 뽑아다 마력을 흡수할 생각은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럼 더 위험했을지도 몰라.'

만약 마력 운용이라는 것의 최소 요구 수치가 50이었다면?

난 두 번째 사자에게 당했을 것이다.

정말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번처럼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민해서 시스템에 대해 알아내야 한다.

틀리더라도 멈춰선 안 되고, 힘들더라도 포기하면 안 된다.

"후우."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라앉힌 내가 설명서를 불러왔다.

파일 자체가 훼손된 이상 난 여기에 적힌 것들로 추론을 해야 한다.

사실 이 게임은 일반적인 게임과는 그 구성이 살짝 달랐다.

레벨이나 스텟 같은 개념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상태창을 장식하고 있는 건 단촐한 단어가 전부였다.

마력, 소속, 종족, 등급, 속성, 특성.

'이 중에서 설명서에 언급된 건 4개야.'

마력과 등급, 속성과 특성이다.

난 설명서를 차근차근 훑었다.

이미 한 번 읽어봤지만 내용을 전부 기억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차례대로 다시 정독할 생각이었다.

천천히 읽다보니 상태창에 표시된 단어를 발견할 수 있었다.

[특성]

플레이어의 개인의 능력을 뜻하는 것으로 일부 특성의 경우 @#(! ◎¡!# ◎ː&△** ^&ㅉㅃ(=....

[속성]

#◎!*ㅉ $^! 사용할 수 있는 자연적인 성향을 뜻하며, ▲ ◎〗※ː¿¿#!*ㅃ&^¿■■■가 가능합니다. 또한....

"후우."

정말이지, 화가 난다.

빌어먹을 시스템

5화

제1장 베타 테스트(4)

'이딴 것도 정보라고.'

내용 자체는 길지만 읽을 수 있는 정보는 한 톨이 될까 말까다.

이가 갈렸지만 화풀이를 한다고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는 일.

짧게 욕을 읊조린 난 다른 요소에 대한 설명을 찾아봤다.

약 3페이지 뒤에서 등급의 설명이 나왔다.

종류는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순이다.

여기도 대부분의 글자가 깨져 있었지만 유일하게 델타에 관한 설명은 남아 있었다.

'상위 3개 등급으로 승급이 가능한 후보 등급이라....'

하지만 정작 승급에 관한 설명은 일절 나와 있지 않았다.

승급 방법이나, 승급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득에 대한 것도 정보가 없다.

'이젠 뭘 바랄 생각도 안 든다.'

난 거의 해탈하는 기분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그러면서도 다시 달리기를 시작했다.

오후 알바까지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나온 김에 체력의 한계를 측정해 둘 생각이었다.

겸사겸사 설명서의 내용도 머리에 쑤셔 넣었다.

설명서를 열지 않아도 내용을 바로 떠올릴 수 있게.

그러다 문득, 전봇대 옆을 비집고 나온 잡초가 보였다.

"오."

운이 좋다.

겨울의 끝자락이라 파릇파릇한 녀석들보다 말라비틀어진 놈들이 많았는데.

더군다나 집 주변은 이미 한 번 싹 훑은 후라 더 찾기 힘들었다.

곧장 자세를 낮추고 잡초를 뽑아 잘근잘근 밟는 행동은 물이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마력 0.02이 흡수됩니다.」

난 마력 흡수를 끝내고서 상태창을 불러왔다.

플레이어 강현우(베타 테스터)

마력 : 88.42(속성 마력 : 8)

소속 : 지구

종족 : 인간(플레이어)

등급 : 델타

속성 : -

특성 : ?????, 동화, 집념, 마력 운용(0.01%)

이로써 내 마력은 88.42이다.

식물의 마력을 흡수하며 40대까지 올랐던 마력은 이제 80을 넘는다.

두 번째 미션에서 사자 세 마리를 다 잡은 게 컸다.

'전부 10 이상을 줬어.'

사자와 뒤엉켜 있던 순간을 떠올리는 건 끔찍했다.

하지만 그 당시 내가 겪었던 일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계속 떨치지 못했던 마력과 관련된 메시지가 떴었으니까.

상태창에도 분명하게 그 순간의 기록이 남아 있었다.

'마력 운용....'

난 마력을 가지고만 있는 것과 사용하는 것의 차이를 직접 겪어보았다.

아무리 힘이 좋아졌다고 한들, 사자의 치악력을 거스를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마력 운용이라는 메시지가 뜬 이후로는 가능했다.

'단순히 힘만 좋아지는 건가?'

난 그때부터 마력 운용이라는 것에 집중했다.

이걸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어야 한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분명 암사자 3마리보다 힘든 놈을 상대해야 할 테니까.

'어떻게 발동시키는 거지?'

침착하게 질문을 던진 그 순간.

"아저씨, 엄마는요?"

나를 스쳐 지나가는 목소리가 있었다.

계속 이어지던 생각이 뚝 끊겼다.

달리기를 멈춘 난 뒤를 돌아 보았다.

웬 40대 남성과 대여섯살 쯤 되어보이는 아이가 나를 지나간 참이었다.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건 위화감이었다.

외면해도 별 상관이 없을 것 같은 그런 작은 위화감.

그것을 떨쳐내지 못한 난 두 사람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점점 멀어지는 그들의 대화가 더 들릴까 싶어 집중한 순간.

스멀스멀.

몸속에서 무언가가 피어나며 감각이 날카롭게 벼려졌다.

「마력 운용이 시작됩니다.」

"흡!"

이미 신체의 감각이 예민해진 상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건 애교 수준이었다.

사방에서 온갖 정보가 쏟아졌다.

이리저리 엉키고 섞인 소리와 냄새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덕분에 금세 멀어진 남자와 아이의 대화가 들렸다.

"그럼 엄마가 와요?"

"그래, 저기서 기다리면 엄마가...."

순간 뒤를 돌아본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황급히 시선을 돌린 그가 아이의 손을 잡아 끌었다.

"늦으면 엄마가 가버릴지도 몰라. 서두르자."

"네!"

스스슥.

활짝 열렸던 감각이 다시 닫혀버렸다.

「마력 운용이 종료됩니다.」

충격은 짧았고 행동은 빨랐다.

난 어느새 남자와 아이에게 다가가는 중이었다.

"거기, 잠깐만요."

흠칫, 떨리는 어깨를 보건데 남자는 분명 내 말을 들었다.

그런데도 멈추기는 커녕 걸음을 재촉했다.

위화감이 한층 더 커진다.

"잠깐 기다려보라니까요."

서둘러 남자를 추월한 내가 앞을 막아섰다.

"뭐, 뭐야, 당신!"

남자는 곧장 비어 있는 손을 패딩의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그 수상한 움직임에 절로 근육이 긴장한다.

난 남자를 경계하면서도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멀뚱멀뚱, 나를 올려다보고 꼬마와 눈이 마주쳤다.

"꼬맹이, 이 사람 네 아빠야?"

"아닌데요?"

"근데 왜 같이 있어?"

"아저씨가 엄마한테 데려다 준다고...."

"내, 내가 얘 부모랑 아는 사이라고!"

버럭, 소리를 지른 남자가 아이의 말을 잘랐다.

'아니, 근데 이 새끼가 초면에 왜 계속 반말이야?'

난 인상을 와락 구긴 채 쏘아붙였다.

"증명해봐."

"뭐, 뭐?"

남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단순히 내가 오해한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위화감을 쉽사리 떨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기어이 나서고야 만다.

"전화 걸어보면 되겠네. 영상 통화로. 아는 사이니까 번호 있을 거 아냐."

이게 나 혼자 지레짐작한 탓에 벌어진 오해라면 사과하는 선에서 끝날 일이다.

최악의 경우에는 상대방이 하는 욕을 듣거나 손찌검 몇 번만 참으면 된다.

하지만 만약 저 남자의 말이 거짓말이면?

지금 이 상황이 내가 생각하는 게 맞다면?

최악의 경우 누군가가 다칠 수도 있지 않나.

'다치는 건 저 꼬맹이가 될 거고.'

난 어린 아이 유괴 사건의 사망률이 얼만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남자가 패딩 주머니에서 손을 꺼냈다.

집중력이 치솟자마자 또.

「마력 운용이 시작됩니다.」

꼭 영상을 슬로우모션으로 돌린 것 같았다.

날 향해 달려들던 짐승들과 비교했을 때 정말, 속이 터질 정도로 느렸다.

그래서 그냥 붙잡았다.

'이 새끼 봐라?'

내 흉부로 돌진하다 말고 잡힌 손에 들린 건 식칼이었다.

날붙이와 엮인 기억이 그리 좋지는 않다 보니 저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수상쩍은 대화, 식칼, 아이.

단편적인 정보를 합치자 한 가지 결론을 도출할 수 있었다.

'진짜 유괴범이야?'

기가 차서 헛웃음이 나왔다.

"씨, 씨발 이거 안 놔?!"

남자가 내 손을 벗어나기 위해 팔을 휘저었다.

하지만 과거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힘이 강해진 참이다.

남자는 내 손아귀를 빠져나가지 못했다.

"놓으라고!"

"너나 놔."

퍽, 하고 정강이를 걷어차자 남자의 균형이 무너졌다.

동시에 아이의 손을 잡고 있던 손이 느슨해지는 게 보였다.

난 곧장 아이를 잡아 끌었고, 남자를 발로 밀었다.

그는 제대로 된 반항 한 번 하지 못하고 나자빠졌다.

칼을 발견한 후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몸이 푸시식, 식어버렸다.

「마력 운용이 종료됩니다.」

그에 따라 메시지도 반응했다.

마침 소란을 인지한 상점 주인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왔다.

난 그들 중 한 사람을 지목하며 말했다.

"거기 사장님, 경찰에 신고 좀 합시다. 유괴범 같으니까."

내가 혀를 차는 동안 유괴범이 벌떡 일어났다.

"이익... 왜 남의 일에 끼어들고 지랄이야!"

그는 당장이라도 나를 찌를 것처럼 칼을 고쳐 잡았다.

난 아이를 옆으로 떠밀었고, 가까이에 있던 가게 사장이 허둥지둥 뛰어나와 아이를 챙겼다.

동시에 남자가 칼을 휘둘렀다.

"워우."

허리를 뒤로 젖혀서 피하자 곧장 찌르기가 이어졌다.

팍.

난 팔을 직각으로 세워 남자의 손목을 쳐냈다.

찌르기가 막혔음에도 반동을 이용해 다시 달려드는 남자.

남자가 찌르기를 시도할 때마다 번번히 막아내는 나.

몸이 내 의지를 따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움직인다.

서너번의 공방 끝에 인내심이 다한 건지, 남자가 거리를 좁혀왔다.

생각과 행동이 동시에 이어졌다.

난 직전처럼 그의 손목을 팔로 밀어내는 동시에 남자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화악.

왼손으로 그의 오른쪽 팔꿈치를 바짝 끌어 안는 것과 동시에 오른손으로 흉부를 가격했다.

"커억!"

남자가 숨을 꺽꺽거리며 쓰러졌다.

그가 놓친 단검을 발로 차서 멀리 보내자 상황이 일단락되었다.

'이게 이렇게 쉽게 되는 건가...?'

방금 난 첫 튜토리얼이 끝나고 미친 듯이 찾아봤던 단검술 영상에서 본 기술을 그대로 따라했다.

공격용이 아니라 디펜스 기술이라서 끝까지 보지도 않았는데.

내 몸은 별다른 훈련도 없이 눈으로만 보았던 그 행동을 수월하게 따라했다.

새삼 달라진 몸을 실감하게 된다.

남자의 움직임은 내 기준에서 너무 느렸다.

덕분에 다치지 않는 선에서 제압할 수 있었지만.

"쯧."

난 짧게 혀를 차며 아직도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남자 위에 주저 앉았다.

"경찰은요?"

"시, 신고했어요!"

내가 떠민 아이를 데리고 있던 사장이 대답했다.

난 경찰이 올 때까지 남자를 제압한 채 다시 마력에 대해 생각했다.

이후 경찰서에 들러 진술을 하는데 두 시간이 넘게 걸렸고, 오후 아르바이트에 늦었다.

사장의 잔소리를 듣고 나서는 일을 하는 내내 마력에 대한 것에 집중했다.

시스템이 마력 운용이라고 설명했던 그 현상.

그 현상을 다시 재현하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

몸은 일을 하되 머리는 내 몸 어딘가에 있을 마력을 찾아 헤멘 것이다.

덕분에 아르바이트가 끝났을 무렵에는 다시 그 메시지를 볼 수 있었다.

「마력 운용이 시작됩니다.」

지금은 집중력이 조금만 깨져도 마력 운용이 종료되어 버리는 수준이었다.

위태로운 촛불을 지키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그것을 수십 번이 넘게 반복했다.

이게 어쩌면 다음 미션에서 나를 살려줄지도 모르니까.

그 집념에 대한 보상이었을까?

집 근처의 익숙한 골목길에 접어 들었을 때.

"...기가 막힌다, 진짜."

난 왼손에서 일렁거리고 있는 빨간 연기를 보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느 정도 자유자재로 마력 운용을 유지할 수 있게 된 후, 이것으로 뭘 할 수 있을까 궁리를 하던 차였다.

그러다 일단 몸 전체에 퍼져 있는 마력을 한 곳에 모아서 빠르게 굴렸다.

그러고 나니 뭔가 갑갑해서 무작정 밖으로 밀어봤다.

마력이 무언가를 비집고 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니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건 또 무슨 현상이냐...."

인상을 찌푸린 채 중얼거린 난 곧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손에서 새어 나오던 마력이 점점 옅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뚝, 끊어졌다.

'마력은 아직 남았는데....'

난 마력을 다시 손에 집중시키며 빠르게 굴렸다.

그리고 구멍을 뚫는 것처럼 마력이 빠져나갈 길을 만들었다.

마력의 움직임에 집중하자 문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구멍을 통해 붉은 안개가 삐져나올 때마다 내부에서 빠르게 돌던 마력의 회전력이 약해지는 중이었다.

그걸 계속 같은 속도로 유지하기 위해 이를 악물자 붉은 안개가 계속 흘러나왔다.

대신 몸에 있는 마력이 빠르게 동나기 시작했다.

단순히 몸 안에서 돌리기만 했을 때와 달리 마력이 사라지는 것을 실시간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아니, 소모되고 있는 거다.'

자동차가 달릴 때 기름이 소모되는 것처럼.

지금 내 마력은 단순히 모여있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하고 있다.

난 시험 삼아 주먹을 쥔 채 바로 옆에 있는 건물의 외벽을 쳤다.

쿵-! 쩌적.

깊고 묵직한 소리가 났고 벽면에 금이 갔다.

난 그 자리에 완전히 굳어버렸다.

주먹이 닿은 지점을 시작으로 갈라진 벽에서 후드득, 시멘트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물론 어느 정도 힘을 담기는 했다.

하지만 주먹질 한 방에 벽이 금이 가다니.

충격적인 광경에 굳어 있던 난 황급히 손을 거두었다.

마력 운용은 어느새 끝나 있었고, 내 손에 뭉쳐 있던 붉은 아지랑이는 사라졌다.

하지만 벽에 생긴 금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휙, 휙.

난 골목길 앞뒤를 빠르게 확인했다. 혹시나 목격자가 있을까 봐.

다행히도 주변을 지나는 사람은 없었다.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나면서도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켜 들었다.

'시, 신고해야 되나?'

저대로 뒀다가 건물의 하중 때문에 무너지기라도 하면.

그러다 누가 다치기라도 하면.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결국 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관청은 이미 운영이 끝났을 시간.

경찰에 전화해서 내일 시설물을 관리하는 관청으로 연락을 넣어달라고 했다.

차마 내가 했다는 말은 못하고, 그냥 발견했다는 식으로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대로 말해봤자 믿어줄 것 같지는 않다만.'

난 복잡하고도 황망한 심정으로 집에 도착했다.

도어락으로 손을 뻗는 순간 연우에게서 전화가 왔다.

난 전화를 받는 대신 그냥 문을 열었다.

"왜 전화 했...."

"오라방!"

"형!"

그리고 나를 향해 우르르 달려나온 동생들을 마주했다.

"뭐야, 왜들 이래?"

난 신발을 벗으며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그러자 연우가 제법 사나운 표정으로 티비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거 오라방이지!"

"뭐가?"

나는 연우의 손가락을 따라 티비로 시선을 옮겼다.

직후 신발을 벗다 말고 굳어버려야만 했다.

티비 화면에는 CCTV 녹화 영상과 핸드폰 촬영 영상이 연달아 재생되는 중이었다.

그 위로 뉴스 앵커의 차분한 음성이 덧씌워졌다.

『...하자 김모씨가 칼을 꺼내듭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보호한 강모군은 침착하게 대응....』

"어...."

9시 뉴스에 내가 나오고 있었다.

"오라방 미쳤어?! 다치면 어쩌려고 칼 든 놈한테 달려들어!"

할 말을 잃어버린 나와 달리 연우는 빼액, 소리를 질렀다.

빌어먹을 시스템

6화

제1장 베타 테스트(5)

연우의 화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칼을 든 놈에게 달려들었다가 다치면 어쩔 거냐고.

- 왜 그렇게 겁이 없는 거야!

소리를 지르다 말고 엉엉 울기까지 해서 달래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기자들로부터 몇 통의 전화를 받기도 했다.

인터뷰를 하고 싶다나 뭐라나.

하지만 난 당장 생사가 걸린 미친 게임을 하는 중이었다.

그들에게 할애할 시간은 없었다.

난 모든 인터뷰 요청을 거절하고 미친듯한 노가다에 매달렸다.

마력 운용과 식물 학살, 그리고 아르바이트를 반복하는 날이었다.

그 과정에서 마력에 대해 몇 가지를 알아낼 수 있었다.

체내에서 움직일 때는 전반적으로 신체의 능력을 향상시킨다.

오감이 발달하고, 기본적인 체력이 증가하는 건 물론, 피부가 단단해지며 힘도 강해진다.

특정 부위에 마력을 집중시키면 칼로 피부를 그어도 자상이 생기지 않을 정도였다.

'소모되는 속도는 빠르지는 않아.'

지금 내가 가진 마력으로 10분 가까이 신체를 강화할 수 있었다.

그리고 외부로 꺼낼 경우에는 단순히 강화라는 표현으론 부족했다.

'파괴적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겠지.'

주먹질로 벽을 때려 부술 정도이니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붉은 아지랑이가 피부를 뒤덮고 있을 때는 힘을 실어 칼을 찔러 넣어도 살에 박히지 않는다.

대신 소모 속도가 엄청 빨랐다.

한 번도 쉬지 않고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고작 1분 12초다.

그마저도 마지막까지 아득바득 붙들고 있을 때나 가능한 기록이었다.

마력이 줄기 시작하면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지고, 동나면 탈진 상태에 이른다.

'마구잡이로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니야.'

그렇게 알아낸 사실을 기반으로 연습에 연습을 반복한 지 사흘.

나는 약간 날이 선 상태였다. 내일 오전에 다음 미션이 시작될 가능성이 높으니까.

'앞선 미션이 닷새 간격이었어.'

내일 또 그 지옥을 반복해야 할지도 모른다.

고작 그 가정 하나만으로도 신경이 날카롭게 벼려졌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내내 화가 났냐는 질문을 지겹도록 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동생들 앞에서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현관문 앞에 멈춰선 채로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윽고 평소처럼 웃는 표정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다.

그제야 도어락을 누르고 문을 열었다.

"형, 왔어?"

가장 먼저 나를 반긴 건 진우였다.

"오냐."

문소리가 나자마자 방에서 나온 녀석이 신발장 쪽으로 다가왔다.

난 진우의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준 후 거실을 쭉 훑어보았다.

연우가 보이지 않는다. 평소라면 목청을 높이면서 달려왔을 텐데.

"연우는?"

혹시 밖에 나간 건가 싶어서 물어보았더니.

"배란다에."

차분한 진우의 대답에 절로 몸이 움찔거렸다.

"배, 란다는 왜?"

특정한 이유가 언급된 것도 아닌데 찔렸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아니지, 속단하지 말자. 상관없을 수도 있잖아.'

연우가 키우는 화분은 10개가 넘는다.

그 중 가장 작은 것 하나가 사라졌을 뿐이다.

눈치채지 못했을 수도 있다.

실제로 지난 며칠 동안 조용했다고!

꼭 그 일 때문에 배란다에 갔다는 보장은 없다.

빨래를 너는 중일 수도 있고, 잠깐 바람을 쐬러 간 것일 수도 있지.

"화분에 물 주다가 갑자기 난리치는 중. 하나가 없어졌다나 뭐라나."

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진우가 확인 사살을 날려주었다.

내 표정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내일을 대비해서 남아 있는 화분 중에 두어 개 정도 더 뽑아 먹을까 했더니.

하필 오늘 알게 될 건 뭐람.

'연우가 화나면 감당이 안되는데.'

지난번 유괴범 사건도 진짜 겨우 달래놓은 것이었다.

"끙."

난 앓는 소리를 내며 배란다를 힐끔거렸다.

진우가 그런 나를 묘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하지만 녀석이 뭐라고 묻기도 전에 연우가 안으로 들어왔다.

"없어, 없어... 치워 놓은 것도 아닌데 왜 없지?"

침울한 기색을 흘리리며 중얼거리던 연우가 나를 발견했다.

"오라방!"

순식간에 활짝 피어나는 연우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양심이 따끔거렸다.

"어어...."

"왔어? 안 힘들어? 내가 안마해줄까?"

"안마는 무슨, 됐어."

태연한 척 손을 내저으면서도 내 시선은 연우의 등 뒤로 향해 있었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화분들. 저걸 다 포기해야 하다니.

"쩝."

아쉬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입 맛을 다셨다.

마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자 그 총량이 너무 아쉬웠으니까.

동물을 배제한 이상 내가 미션 외의 방법으로 마력을 흡수할 방법은 한정적이었다.

겨울철이라 눈에 띄는 풀때기가 많지도 않고.

공원이나 산에 불을 지를 수도 없고.

남의 집 화분을 훔쳐올 수도 없고.

초록색이 보이는 족족 뽑아도 얼마 되지 않는다.

널리고 널린 게 녹음인데, 정작 내가 뽑아 먹을 수 있는 마력은 너무 적었다.

아쉬운 눈으로 배란다의 화분을 바라보던 난 한숨을 삼키며 방으로 향했다.

어떻게 하면 마력을 빠르게 모을 수 있을까?

'도축장도 아르바이트를 구하나...?'

하지만 아르바이트로 들어간다고 해서 바로 짐승을 도축하는 건 아닐 터.

"아, 진짜."

방으로 돌아온 난 침대에 털썩 주저앉으며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어디서 마력 좀 펑펑 쏟아졌으면 좋겠다.

* * *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닷새째가 되던 날 오전 10시, 세 번째 미션이 시작되었다.

혹시나 싶어 다시 보관함에 집어넣었던 물건들은 하나도 딸려오지 않았다.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건 시스템이 제공한 무기와 몸에 걸치고 있던 옷이 전부였다.

「신규 무기 창이 제공됩니다.」

무기가 먼저 지급되었다.

그것을 집어 들자마자 단검까지 꺼내서 왼손에 쥐었다.

직후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떨렸다.

이번에는 욕조차 나오지 않았다.

단계가 거듭될수록 난이도가 올라가는 건 예상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 심하잖아!"

미션창 너머에 서 있는 건 북극곰이었다.

두 발로 일어선 곰의 머리를 보기 위해 고개를 꺾어야만 했다.

놈의 키는 나의 두 배쯤 되어 보였다.

오로지 키만 따졌을 때 두 배라는 의미다.

덩치는 나보다 족히 네다섯 배는 더 큰 것 같았다.

동물원에서 곰을 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까지 무섭지는 않았다.

그때는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있었으니까.

놈과 나 사이를 막아줄 그 어떤 것도 없는 상황에서 거대한 맹수가 주는 공포는 생각보다 컸다.

그 순간 만큼은 내 힘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뻣뻣하게 굳은 몸은 어느새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만약 곰의 모습을 가리고 있던 미션창을 다시 보지 못했다면.

그리하여 차근차근 줄어든 타이머를 확인하지 못했다면.

난 그대로 굳어버린 채 곰의 한끼 식사가 되었을 것이다.

타이머의 숫자가 어느새 10초까지 떨어져 있었다.

"이... 보관함!"

난 단검을 도로 안으로 집어 넣은 후 창을 꽉 움켜쥐었다.

단검으로 백날 찍어봐야 티도 안날 놈이다.

보관함이 사라지자 미션창도 사라졌다.

먼저 움직인 건 북극곰이었다.

놈이 달려오는 속도는 어마무시하게 빨랐다.

나보다 몇 배는 무거운 거구답지 않았다.

"쿠어어엉!"

곰이 포효함과 동시에 마력을 이끌어냈다.

「마력 운용이 시작됩니다.」

감각은 한층 더 예민해지고, 육체는 보다 단단해진다.

눈으로 쫓는 게 한계였던 곰의 움직임이 조금 느려진 것 같았다.

곰이 앞발을 높게 치켜들었고, 난 몸을 날렸다.

날카로운 발톱이 아슬아슬하게 뺨과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가벼운 생채기가 생겼지만 무시했다.

다시 자세를 잡는 게 더 급했으니까.

하얀 바닥을 굴러 빠르게 일어난 내가 왼손을 꽉 말아 쥐었다.

"흡!"

수백, 수천 번 연습했던 대로 붉은 아지랑이가 왼손과 팔을 자욱하게 뒤덮었다.

그대로 주먹을 내질러 나를 향해 몸을 돌리는 백곰의 옆구리를 강타했을 때.

빠각-!

"크헝!"

"어엉...?"

내 입에서 얼빠진 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거대한 곰이 그대로 튕겨져 나갔다.

바닥을 뒹군 곰은 비척비척 일어나며 붉은 피를 토해냈다.

분명 내 머리는 비현실적인 광경을 보고 굳어버렸다.

그런데 몸은 이미 전방을 향해 튀어나가는 중이었다.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놈이 부상을 입고서 약해진 지금이 기회라고.

손에 든 장창을 아래로 내려찍는 움직임에 망설임은 없었다.

푹.

단조로운 소리 끝에 쿵.

육중한 곰의 몸체가 완전히 늘어졌다.

"어...."

「목표물이 사망했습니다. 마력 23이 흡수됩니다.」

「축하합니다! MISSION - 튜토리얼 베타 테스트(3/3)를 성공했습니다.」

「성공 보상으로 마력 10이 제공됩니다. 모든 부상이 회복됩니다.」

「성적을 집계합니다.」

"...끝났다고?"

이렇게 쉽게? 현실감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하지만 당황한 건 잠시 뿐이었다.

"윽!"

곧 마력이 흡수되기 시작했다.

난 곰의 사체 위로 엎어졌다.

짧은 버둥거림 끝에서 마력 흡수가 끝났다.

미션이 종료되고 보상이 들어왔다.

그제야 난 이 상황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가 있었다.

뜬금없이 시작된 이 거지 같은 게임에서 세 번의 미션이 모두 끝난 것이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복잡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당장은 끝났다는 안도감이 가장 강렬했다.

"하아."

나는 긴 한숨을 내쉬며 몸을 뒤집었다.

곰의 사체를 등받이 삼아 앉아 있기도 잠시.

이전과 달라진 점을 깨닫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게 무슨...."

두 번째 미션이 끝났을 때는 미션 성공 보상이 지급된 후 바로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내 방에서 성적에 따른 보상을 받았다.

그런데 오늘은 아직도 그 하얀 공간이다.

축 늘어진 곰의 사체는 내가 방으로 돌아가지 못했다는 증거였다.

나는 인상을 구긴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전과 다르게 흘러가는 상황 때문에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흐물흐물하게 풀어졌던 긴장감이 다시 차올랐다.

무언가 다른 점이 있나 싶어 주변을 살핀 난 무기를 회수했다.

곰의 머리를 꿰뚫은 창을 쥐고 보관함에 집어넣자 창이 사라졌다.

이후 다시 보관함에서 꺼내 들자 창을 손에 들 수 있었다.

밖에서 몇 번 실험을 해본 그대로였다.

그렇게 하얀 공간에 우두커니 서서 시간을 얼마나 흘려보낸 걸까?

「성적 집계가 완료됩니다.」

「축하합니다! 플레이어 강현우는 00:00:39에 목표물을 제거했습니다.」

「성적에 따라 최상위 보상 속성 마력 5가 제공됩니다.」

「최상위 성적에 따라 특성 ?????가 생성됩니다.」

「동일한 특성이 감지됩니다. 중복 특성을 삭제합니다.」

주르륵,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제야 내가 이 공간에서 보낸 시간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알 수 있었다.

'다른 플레이어들이 끝날 때까지 대기한 거야.'

그 사실을 깨달은 직후 난 이를 꽉 깨문 채 이어질 충격에 대비했다.

"흡!"

마력이 흡수되기 시작했다.

내 몸은 다시 바닥으로 허물어졌고, 난 그곳에서 벌레처럼 꿈틀거려야만 했다.

그렇게 버티고 버티자 어김없이 끝이 찾아왔다.

나는 비척비척, 몸을 일으켜 앉았다.

"퉤."

버티면서 혀라도 씹었는지, 침에 피가 섞여 있었다.

여전히 버거운 건 그대로지만.

'처음보다는 나아진 것 같네.'

무엇이든 하다 보면 는다는 옛말은 옳았다.

후우, 후우, 하고 숨을 고르는 동안에도 내 눈은 바삐 움직였다.

난 아직도 사방이 하얀 공간에 있었으니까.

그 이유가 곧 내 눈앞에 나타났다.

「튜토리얼이 종료됩니다.」

「종합 성적을 집계합니다.」

「플레이어 강현우의 종합 성적은 1/100입니다.」

종합 성적! 메시지를 보자마자 눈이 번쩍 뜨였다.

이제까지 시스템은 단일 미션의 성적에 따라 보상을 추가 지급했다.

그러니 종합 성적에 대해서도 기대해 볼 법하다.

'그래, 기왕 하는 거 1등 해야지.'

어린 시절부터 승부욕은 제법 있는 편이었다.

그래서인지 이 미친 게임이 싫은 와중에도 1등이라고 하니 괜히 뿌듯했다.

「올 클리어 플레이어를 대상으로 추가 미션을 진행합니다.」

「플레이어 7인 확정.」

「방어벽이 활성화됩니다.」

「홀이 오픈됩니다.」

물론, 그 뿌듯함은 이놈의 시스템이 보상을 주는 대신 이상한 말을 지껄이기 시작하며 사라졌다.

예상치도 못했던 메시지 때문에 관자놀이에 혈관 툭 튀어나왔다.

상을 주겠다고 해도 모자랄 판에, 뭐? 추가 미션?

대뜸 개에게 물렸던 그날부터 꾸역꾸역 쌓여왔던 화가 한순간 펑 터져버렸다.

"야, 이 개새...!"

하지만 턱 끝까지 차오른 욕을 끝맺기도 전에 내 몸이 환하게 빛났다.

빌어먹을 시스템

7화

제2장 승급 시험(1)

"끼야!"

도중에 끊어졌던 욕을 우렁차게 내뱉은 순간 몸이 흠칫, 떨렸다.

갑자기 녹음이 우거진 공간이 보였다.

습한 공기와 더위가 느껴졌다.

가만히 서 있었을 뿐인데도 땀이 날 것 같았다.

「미션지에 진입합니다.」

「해당 장소는 플레이어 보호 구역이 아닙니다.」

「정화제(×3)가 제공됩니다.」

내가 당황한 틈을 타 시스템이 메시지를 날리고 있었다.

'보호 구역이 아니라고?'

문장이 변했다.

튜토리얼 중에는 항상 보호 구역으로 지정되었다는 문구가 떴는데.

그곳과 이곳이 다르다는 의미인가? 대체 어떤 의미에서?

만약 여유가 있었다면 의문을 조금 더 깊게 살펴봤을 텐데.

제대로 생각을 곱씹어 보기도 전에 온몸의 털이 바짝 곤두섰다.

새로 나타난 미션창 너머에 낯선 것이 서 있었으니까.

체격은 나와 비슷한 수준이었으나 눈에 보이는 신체적 특징은 완전히 달랐다.

발은 짐승을 닮았고, 손은 인간처럼 생겼다.

거기에 더해 검은색의 복슬복슬한 털.

북극곰과 비견될 정도로 긴 손톱과 발톱.

여우처럼 뾰족한 귀.

개나 늑대처럼 앞으로 튀어나온 주둥이.

아래로 솟아난 네 개의 송곳니.

그리고 흰자와 눈동자의 구분 없이 새빨갛기만 한 눈까지.

"키이익?"

고개를 갸웃거리며 날 관찰하고 있는 무언가.

사람처럼 두 발로 땅에 서 있는 저것을 대체 뭐라고 불러야 할까?

장담하건데 난 태어난 이래 저것을 처음 본다.

온몸의 근육이 겁을 먹은 것처럼 바짝 조여들었다.

놈은 미션창 너머에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창이 사라지며 나와의 사이에 아무것도 남게 되지 않았을 때.

「미션을 시작합니다.」

"키아아악!"

메시지가 떠오름과 동시에 괴물이 주둥이를 쩍 벌리며 포효했다.

끝이 세 갈래로 갈라진 혀와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입천장을 가득 메운 이빨이 보였다.

몸이 절로 움찔거렸다.

'이, 입이....'

분명 놈이 주둥이를 벌릴 때, 살이 함께 벌어졌다.

사람으로 치면 입술의 양쪽 가장자리가 찢어졌다는 의미였다.

그런데도 다시 주둥이를 닫았을 땐 원상태로 돌아왔다.

착각이 아니었다. 온몸의 털이 쭈뼛서고, 소름이 돋았다.

'저, 저게 뭐야?'

저 괴물은 대체 뭐냐고.

충격적인 조우에 몸은 물론이고 사고까지 굳어버렸다.

"키익?"

그때 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 주변을 크게 돌기 시작한 것이다.

직후 정말 순식간에.

지면을 박찬 괴물의 아가리가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굳어 있던 몸은 생존 본능에 따라 쥐고 있던 창을 앞으로 내밀었다.

창대가 놈의 아가리를 막아냈다.

그러자 괴물은 훌쩍,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 주변을 돌기 시작했다.

'뭐야?'

지금 괴물의 행동은 마치....

'간 보는 것 같은데?'

내가 강한 놈인지, 약한 놈인지 확인하려고.

그 사실을 깨닫자 뺨이 씰룩거렸다.

'확인하고 나면?'

저놈이 나를 만만하다고 여기는 순간.

꿀꺽, 하고 침을 삼키자 놈이 이를 드러내며 위협적인 태도를 취했다.

난 굳어 있는 몸을 억지로 움직였다.

당장이라도 놈에게 달려들 것처럼 무게 중심을 옮기며 한 발 앞으로 나선 것이다.

흠칫.

내 행동이 정답이었던 걸까? 괴물이 몸을 떨었다.

그리고 자세를 낮추었다. 언제든지 달려들 수 있게.

그게 꼭 나에게 지지 않겠다는 선언처럼 느껴졌다.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놈과 나, 누구 하나 움직이지 않고 첨예한 신경전을 주고받던 그때.

"아아악!"

멀리서 사람의 것이 분명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트리거였다.

괴물과 난 동시에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거의 본능에 가까운 반응이었다.

여기서 물러나면 놈은 나를 제 밑으로 볼 것이다.

신경전에서 밀리지 않으려면 나도 가야 했다.

"——!"

누군가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계속 이어졌지만 돌아볼 여유는 없었다.

난 마력 운용을 시작하며 창을 정면으로 찔러 넣었다.

그에 괴물이 몸을 틀며 창날을 피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놈은 창을 지나 더 깊은 곳으로 밀고 들어오더니 내 다리 쪽으로 손톱을 휘둘렀다.

다급하게 목표물이 된 다리를 뒤로 물리는 순간.

놈이 방향을 바꿔 다른 다리를 노렸다.

'이런 씹!'

난 아예 몸을 뒤로 날리며 놈의 손톱을 피했다.

"젠장!"

실수했다! 내가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지는 사이 놈이 지면을 박찼다.

'이대로면 물어 뜯긴다!'

난 점점 가까워지는 놈을 향해 창대를 휘둘렀다.

퍽.

놈의 머리가 옆으로 돌아갔고 내 몸은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몸을 굴려서라도 일어나려고 했지만 괴물이 나보다 한발 빨랐다.

어느새 다시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린 괴물이 입을 쩍 벌렸다.

거기서 혀가 튀어나올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으어억!"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기겁을 한 채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뱀처럼 기어 나온 혀는 이미 내 목을 칭칭 휘감은 후였다.

"컥!"

목이 졸리는 와중에 날카로운 손톱이 어깨를 파고들었다.

재빨리 마력을 집중시키지 않았다면 깊게 박혔을 것이다.

난 창을 놓고 보관함에서 단검을 꺼냈다.

그것을 놈의 눈깔에 쑤셔 넣는 움직임에 망설임은 없었다.

푸우욱.

"끼에에엑!"

괴물이 제 머리를 감싸 쥐고서 펄쩍 뛰어올랐다.

곧바로 장검을 꺼내 놈의 가슴에 찔러 넣으려고 했는데.

"허어...?"

난 얼빠진 소리를 내며 굳어버렸다.

"이게 무슨...?"

눈에 단검을 박은 괴물이 도망가기 시작했으니까.

넋을 놓은 사람처럼 괴물이 도망간 방향을 바라보기도 잠시.

"—!"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려오더니 주변이 고요해졌다.

난 서둘러 몸을 일으키며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주시했다.

'분명....'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방금 그건 일본어였다.

* * *

괴물이 도망간 후 난 어깨의 출혈부터 잡았다.

옷을 찢어 몸에 감아놓은 정도지만.

'그냥 두는 것보다는 낫겠지.'

다행히도 상처가 깊지 않았다.

관통된 것도 아니고, 절단된 것도 아니다.

근육도 다치지 않았다.

고작해야 살가죽이 살짝 찢어진 정도.

통증이 있긴 해도 어깨를 움직이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늦지 않게 마력을 두른 덕분이다.

"하아."

이런 상처를 별 것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지금이 기가 막혔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한껏 치켜들었다.

"...돌겠네."

하얀 하늘이 나를 맞이했다.

출혈을 잡는 동안 발견한 것이었다.

저 하얀 하늘이 구름이 아니라는데 내 목을 걸 수도 있다.

사실 하늘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했다. 하늘치고는 지나치게 가까웠으니까.

더군다나 저 인위적인 느낌이 익숙했다.

'튜토리얼을 했던 곳 같은데....'

색도 그렇지만, 특유의 느낌이 새하얗던 그 공간과 닮았다.

잠시 후 시선을 거둔 내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손바닥 가득 축축한 땀이 묻어났다.

"더럽게 덥네."

이곳으로 온 지 고작 몇 분이 지났을 뿐이다. 잘 쳐줘도 5분 정도.

그런데 벌써 온몸에서 땀이 흘러내리는 중이었다.

난 짧게 혀를 차며 서로 다른 방향을 번갈아 보았다.

하나는 괴물이 도망친 방향, 다른 하나는 일본어가 섞인 비명소리가 들려왔던 방향.

'어디로 가야 하지?'

비명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가면 사람과 합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이번 미션은 나를 제외한 플레이어들이 같은 공간에 있는 것 같으니까.

뭉쳐 다닐 수만 있다면 다시 괴물을 만났을 때 위험이 감소하겠지.

하지만....

'왜 이렇게 조용하냐, 사람 불안하게.'

처절한 비명소리가 끝난 후로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그 침묵이 불안한 가정에 힘을 실어준다.

'저쪽은 벌써 끝났을지도.'

비명소리가 내가 죽였던 짐승들의 마지막 단말마와 비슷했다.

직후 조용해진 걸 보면 살아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만약 사투 끝에 괴물을 죽였다면 그놈의 괴성이 들려왔어야 하는데.

내가 들은 건 분명 사람의 비명이었다.

정말로 누군가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등골이 오싹했다.

'마력을 쓸 줄 몰랐다면 나도.'

괴물을 마주치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었을 것이다.

사자들에게 물어 뜯겼던 그때처럼.

그때를 떠올리자 죽음의 공포가 스멀스멀 일어났다.

마른침을 삼킨 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션창."

장소가 바뀌자마자 괴물과 조우한 탓에 미션 내용을 확인할 여유도 없었다.

어떻게 해야 이 미션이 끝나는지는 알아야지.

그래야 방으로 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

MISSION

[승급 시험(베타 테스트)]

적을 제거하십시오.(0/13)

[보상]

성적에 따라 아래의 보상을 차등 지급합니다.

• 속성 마력 10

• 승급(성적에 따라 차등 승급)

• 속성석(성적에 따라 차등 지급)

• 재화(\10,000,000 상당)

이번 미션은 제한 시간도, 스타트 타이머도 없었다.

이전에 비해 내용도 많아졌다.

하지만 내 눈에 들어온 단어는 하나뿐이었다.

'천만 원?'

꿀꺽.

목울대가 크게 꿀렁거렸다.

* * *

영국에서 나고 자란 에단은 올해 갓 20살이 된 학생이었다.

무던한 성격의 그는 큰 체격을 제외하면 제법 평범한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갑자기 시작된 게임으로 인해 모든 게 달라졌다.

그는 첫 번째 미션이 시작된 날 친구들과 함께 있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쇼핑센터에서.

갑작스럽게 사라졌다가 몸에 피를 묻힌 채 돌아왔으니 소란은 불가피했다.

그는 체포되었고 조사를 받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구금되어 있는 동안 다시 미션이 진행되었다.

반복적인 소환과 에단이 진술한 시스템에 관한 내용.

허공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무기와 비약적으로 강해진 육체 능력까지.

영국 정부는 세 번째 미션이 시작되기 전에 움직였다.

에단을 MI5(Military Intelligence, section 5 : 영국의 국내보안정보국)로 데려간 것이다.

그곳에서 보호 및 감시, 그리고 기초 군사 훈련을 받으며 세 번째 미션을 준비했으나 대부분 쓸데없는 짓이었다.

미션이 시작되었을 때 보관함에 넣어 두었던 화기가 모두 사라졌으니까.

그는 맨몸으로 곰과 마주했다.

'격투술을 배웠어야 했는데.'

에단은 지난 닷새간 사격술에 더 집중했다.

잘못된 선택은 부상으로 돌아왔다.

곰을 죽이기 위해 팔 하나를 내어줘야 했던 것이다.

아직도 곰의 아가리에 씹힌 뼈가 우그러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완전히 단절된 팔이 날아가는 광경도 보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절단 부상의 충격을 이겨낼 여유는 없었다.

충격을 다스리기도 전에 네 번째 미션이 시작되었으니까.

"커억!"

신장이 191cm에 이르는 그의 몸이 종잇장처럼 가볍게 허공을 갈랐다.

텅 빈 한쪽 눈에서 검은색 액체를 뚝뚝, 흘려대던 괴물과 조우한 지 1분도 되지 않았다.

그 괴물은 에단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달려들었고, 강한 힘에 밀려나기 무섭게 지금과 같은 상황이 되었다.

퍽-!

에단의 몸은 주변을 채운 나무에 부딪힌 후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수미터 가량 늘어진 괴물의 혀가 에단의 목을 휘감은 채 그를 휘둘렀다.

'무슨 힘이!'

어떻게든 버텨보려 했으나 힘의 차이가 극명했다.

에단은 속절없이 괴물에게 당하고야 말았다.

갑작스러운 부유감과 함께 몸이 떠오르고, 직후 가차없이 땅으로 내리꽂혔다.

"컥!"

전신을 강타하는 충격에 절로 고통 섞인 신음이 흘러나왔다.

'규, 균형을....'

계속 이렇게 휘둘리기만 해선 답이 없다.

어떻게든 균형을 잡고 괴물에게 대응해야 한다.

하지만 괴물은 에단에게 몸을 추스를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

퍽, 퍽, 퍽.

놈은 고작 혀 하나로 에단의 몸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에단으로서는 괴물의 힘에 저항할 수가 없었다.

저 괴물은 모든 면에서 그를 압도했다.

숨통이 막힌 탓에 그의 얼굴은 이미 시퍼렇게 질린 후였다.

"캬아아악!"

그에 괴물이 에단의 몸을 질질 잡아끌었다.

이대로 마무리를 하려는 것처럼.

순식간에 코앞까지 다가온 죽음이 에단을 장악했다.

'주, 죽기 싫어!'

발버둥을 쳐보지만 괴물에게서 벗어날 방법은 보이지 않았다.

절망적인 순간.

괴물의 혀를 붙잡은 채 바동거리던 에단의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I leon mi chin! Geu sa lam nea lyeo nwa!"

이해할 수 없는 언어였다.

동시에 쐬에엑!

섬뜩한 파공음이 들리고.

"키에에엑!"

끔찍한 괴성이 울려 퍼지며 괴물의 혀에 힘이 풀렸다.

"허억!"

겨우 되찾은 숨을 힘겹게 채워 넣던 에단의 위로 검은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Ya i sae kki ya, geo gi seo!"

에단은 격한 기침을 토해내면서도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상의를 벗은 동양인 남자가 도망치기 시작한 괴물의 뒤로 뛰어드는 광경이 보였다.

"Cheon man won!"

직후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함께 검은 액체가 허공에 흩뿌려졌다.

방금 전까지 에단에게 죽음의 공포를 안겨주었던 괴물이 천천히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시스템

8화

제2장 승급 시험(2)

지금까지 시스템이 의도하는 바는 분명했다.

눈앞에 있는 생명체를 죽이고 마력을 흡수해라.

세 번에 걸친 튜토리얼은 그 패턴을 나에게 강요했다.

이번에는 죽여야 할 대상이 짐승에서 괴물로 변했을 뿐이다.

그것을 깨닫자마자 난 괴물이 사라진 방향으로 내달렸다.

조금 전 눈깔에 칼을 꽂고 도망간 그놈을 잡아야 한다.

성적에 따른 보상을 놓쳐선 안 될 이유가 생겼으니까!

'천만 원!'

그래, 자본주의는 위대했다.

시스템을 향한 반감과 죽음의 공포를 잠깐이나마 잊게 해줄 만큼.

실제로 돈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었지만.

만약 정말 받을 수 있다면 무려 천만 원을 한 방에 벌 수 있다.

달려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물론, 어느 정도 가능하리라는 판단이 섰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북극곰을 한주먹에 때려눕힌 것과 더불어 조금 전 괴물과의 접전에서도 크게 밀리지 않았다.

갑자기 혀가 튀어나왔을 때는 당황스러웠지만.

난 괴물의 움직임도, 속도도 모두 따라갈 수 있었다.

실제로 몇 번이고 놈의 공격을 피했다.

마력 운용 상태에서는 피지컬로 밀리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놈은 부상을 입은 상태다.

'잡을 수 있어!'

추격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멀지 않은 곳에 단검이 떨어져 있었으니까.

무기를 회수한 후 나는 흙바닥에 떨어진 검은 액체를 따라갔다.

'설마 이게 피야?'

괴물의 흔적을 보고 혼란스럽기도 잠시.

몇 분의 추격 끝에 난 목표물을 발견했고, 저절로 욕이 나왔다.

"이런 미친!"

괴물이 생판 처음 보는 백인을 잡아 죽이기 직전이었으니까.

"그 사람 내려 놔!"

난 마력 운용을 시작하자마자 창대를 치켜들고서 괴물을 향해 내던졌다.

기함할 정도로 빠르게 허공을 가로지른 창이 괴물의 복부에 꽂히고.

"키에에엑!"

놈은 괴성을 내지르며 몸을 돌렸다.

잠깐의 지체도 없이 걸음을 옮기는 꼴이 꼭, 도망치려는 것 같았다.

놈을 담고 있던 내 눈에서 불씨가 튀어 올랐다.

천만 원이 멀어진다!

"야 이 새끼야, 거기서!"

이대로 놓칠 수는 없는 일.

난 땅을 박차고서 허공으로 도약했다.

20, 아니, 25미터에 이르는 거리가 단숨에 좁혀지고.

쓰러져 있는 백인을 뛰어넘어 등을 보인 괴물의 위로 떨어져 내렸을 때.

"천만 원!"

난 악에 받친 채로 소리를 질렀다.

놈을 잡을 경우 얻을 수 있는 보상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천만 원은 나를 고취시키기에 충분했다.

괴물을 처음 만났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집중력이 올라갔다.

놈이 나를 향해 몸을 돌리는 것도.

날카로운 발톱이 나를 노리고 휘둘러지는 것도.

거의 동시에 밧줄 같은 혀가 튀어나오는 것도.

천천히 흘러가기 시작했다.

몸이 허공에 뜬 상태로 상체를 비틀어 손톱을 피하고.

왼손으로 괴물의 혀를 붙잡았을 때.

내 오른손에 나타난 장검은 이미 놈의 턱에 닿아 있었다.

「감각이 확장됩니다.」

「특성 감각 확장이 생성됩니다.」

갑자기 나타난 시스템 메시지 너머로 괴물과 눈이 마주쳤다.

정말 어이가 없게도, 그 순간 하나밖에 없는 괴물의 눈에서 피어난 건 공포였다.

그걸 보았음에도 난 망설임 한 점 없이 검을 내질렀다.

"키익...!"

이 괴물은 분명 나를 죽이려고 했다.

내가 약하지 않았기에 죽이지 못한 것뿐이다.

타협은 필요하지 않았다.

살가죽을 뚫고 들어간 날붙이를 통해 느껴지는 저항감이 상당했다.

놈의 혓바닥을 움켜쥔 손을 잡아당긴 것과 반대로, 검을 쥔 손은 더 강하게 밀어 넣었다.

뚝, 뚜둑.

총 두 번, 내가 찔러 넣은 검날은 괴물의 입천장을 지나 두개골을 뚫고 나왔다.

검은 액체가 허공으로 튀어 오르며 괴물의 몸이 축 늘어졌다.

사체가 뒤로 넘어가기 시작했을 때, 난 두 발로 땅을 밟고 설 수 있었다.

"후우."

고작해야 수초 내에 벌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것처럼 섬세해진 감각 속에서는 수십초처럼 느껴졌다.

모든 것이 한풀 더 느려지던 그 현상.

난 괴물을 죽이기 직전에 느꼈던 그 감각을 머리 한구석에 담아 놓았다.

그걸 곱씹고 다시 연습하는 건 나중 일이다.

이제 마력이 들어올 차례니까.

난 이어질 충격에 대비하면서도 뒤를 돌아보았다.

백인이 있는 방향이었다.

갈색 머리카락에 벽안.

어느덧 자리에서 일어나 앉은 그는 제 목을 부여잡은 채 나를 보고 있었다.

'마력 흡수부터 하고, 이게 내 거였다고 주장하자.'

괜히 스틸이니 어쩌니, 따지지 못하도록 못을 박아 둘 생각이었다.

애초에 내가 아니었으면 죽었을지도 모르니까 명분은 나한테 있다.

난 남자에게 할 말을 하나하나 정리해두었다.

하지만 이어진 메시지 때문에 그와의 대화는 뒤로 미뤄야만 했다.

「적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오염된 마력 61이 흡수됩니다.」

북극곰보다 월등히 많은 마력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염된 마력?'

평소와 다른 메시지를 보고 의문을 느끼기 무섭게 난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을 구르기 시작했다.

"흐아아악!"

수백, 수천 개의 바늘이 몸속으로 기어들어와 전신을 찌르고 있었다.

이제까지 마력을 흡수할 때 고통을 느낀 적은 없었다.

그저 미칠 것 같은 거부감이 전부였지.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몸이 갈기갈기 찢겨나가는 것 같았다.

내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동안에도 시스템의 메시지는 계속되었다.

「체내에 오염된 마력이 존재합니다. 카오스 수치를 확인하세요.」

「정신 오염이 시작됩니다.」

「오염된 마력을 정화하십시오.」

평소보다 굵은 글자가 잔상을 남기며 사라졌다.

"Hey!"

그때 백인이 다급하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고통.

가까워지는 기척.

낯선 인물.

난 반사적으로 괴물의 몸에서 창을 뽑아 들고 백인에게 겨누었다.

지금 저 사람에게 공격받기라도 하면 위험하다!

검은 액체가 뚝뚝 떨어지는 날붙이가 겨눠지자 백인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러는 동안에도 고통은 계속되고 있었다.

"끄윽, 흡...!"

이를 악물고 참아봤지만, 몸이 발작을 일으킨 것처럼 꿈틀거렸다.

창대가 흔들리며 시야가 가물거렸다.

"흐억, 학!"

고통이 사라진 건 평소보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눈물에, 콧물에, 침까지.

격한 숨을 토해내며 엉망인 얼굴을 훑자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Are you ok?"

난 분명 대답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정작 내 입에서 나온 건 대답이 아니라 반문이었다.

"뭐...?"

누군가 머릿속에서 속닥속닥,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고 있었다.

거칠게 머리를 털어 봤지만 목소리는 점차 더 선명해졌다.

이윽고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듣게 되었을 때.

나도 모르게 백인에게 겨누고 있던 창을 더 강하게 움켜쥐었다.

'죽여...?'

딱 한 번이었다.

머릿속에서 들리는 그 말을 이해하자 욱, 하고 무언가 차올랐다.

'갑자기 왜 이러지?'

왜 이렇게 화가 나는 거냐고.

내 호흡은 수백미터를 전력으로 달린 것처럼 엉망이 되었다.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이, 이게 무슨....'

이게 말로만 듣던 조현병인가 싶었다.

난 이를 악문 채 백인에게서 멀어졌다.

그렇지 않으면 그에게 달려들 것 같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저 사람을 죽이고 싶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살의가 들끓고 있다.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그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단어가 있었으니.

「오염된 마력을 정화하십시오.」

'정화.'

난 다급하게 보관함을 열었다.

* * *

플레이어 강현우(베타 테스터)

마력 : 192.33

(속성 마력 : 13)

카오스 수치 : 31.72%

소속 : 지구

종족 : 인간(플레이어)

등급 : 델타

속성 : -

특성 : ?????, 동화, 집념, 마력 운용(0.57%), 감각 확장(0.01%)

난 그동안 시간이 날 때마다 식물 수집을 거듭했다.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정규 미션 외에도 부수입이 꾸준히 있었다는 의미다.

그로 인해 어느덧 200을 앞둔 내 마력 밑에 새로운 단어가 생겼다.

'카오스 수치?'

낯선 단어에 정신 오염이라는 메시지, 백원짜리 동전과 비슷한 크기의 구슬까지.

망설임은 잠시 뿐이었다.

난 정화제로 추정되는 하얀 구슬을 입에 집어넣었다.

구슬은 연기처럼 변해 몸속으로 흡수되었고 몸에 박혀 든 가시가 우수수, 빠져나갔다.

카오스 수치가 0으로 변하자 머릿속에서 울리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후우...."

그제야 거칠어진 숨을 골라볼 수 있었다.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나자 백인이 움찔거리며 몸을 떨었다.

난 그를 쭉 훑어보았다.

'플레이어....'

나처럼 대뜸 이 미친 게임에 참여하게 된 플레이어.

그중에서도 튜토리얼을 올 클리어한 상위권.

영어를 사용하는 백인.

이 공간으로 옮겨진 후 들었던 일본어를 생각하면 플레이어의 국적이 다양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난 말을 거는 대신 가만히 백인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에 백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Are you ok?"

"...."

"Ah... I'm Ethan. First, Thank's. You saved my life."

"...."

"Do you speek English? Understand me?"

못 알아들을 정도의 회화는 아니었지만 인상이 구겨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검정고시 이후 영어는 완전히 손절했는데.

짧게 혀를 찬 내가 입을 열었다.

"It...."

물론 끝까지 말하기도 전에 멈췄지만.

'아니, 내가 왜 잘하지도 못하는 영어를 써야 해?'

저쪽은 내 입장을 생각도 안하고 지 꼴리는 대로 영어를 써대는데.

난 창으로 괴물의 사체를 가리키며 말했다.

"괜히 소유권 따지지 맙시다. 이거 원래 내 거였으니까."

난 최대한 많은 괴물을 잡아서 1등 보상을 타갈 생각이었다.

방금 죽인 이놈은 내 천만 원을 향한 밑거름이었다.

"What?"

내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한 듯 백인이 되물었다.

하지만 내가 친절하게 영어까지 써가며 해석해줘야 할 이유는 없었다.

'목숨 줄 붙여 놔줬으면 됐지.'

난 그대로 백인, 아니, 에단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쯧."

직후에는 장검을 보관함에 넣고서 괴물의 사체를 살폈다.

'이게 무슨 동물이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이런 짐승은 본 적이 없다.

더군다나 상처에서 흘러나온 검은 액체.

'이게 진짜 피라고?'

내가 아는 피는 붉은색이다.

그런데 그 당연하고 절대적이던 진리가 부정당하고 있다.

대체 이놈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의문의 뒤로 따라붙는 건 이미 몇 번이고 보았던 단어였다.

난 아직까지 떠 있는 상태창을 힐끔거리며 소속 란을 확인했다.

'소속이 지구....'

그렇다면 나와 다른 소속은 뭐라고 표기되지?

가만히 생각에 잠겨있던 내가 미션창을 불러왔다.

MISSION

[승급 시험 베타 테스트]

적을 제거하십시오.(1/13)

카운트가 올라가 있었다.

마침 내가 죽인 괴물도 한 마리다.

이 괴물은 시스템이 정의한 적이니 나와 소속이 다를 터.

"인류의 존속...."

이 거지 같은 게임에 처음 불려갔던 날 보았던 문장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후우."

난 긴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일단 의문은 나중에.'

여기는 생각을 오래하기 좋은 장소가 아니었다.

저 괴물이 최소 12마리는 더 있을 테니까.

시스템과 지금의 상황에 대한 의문을 뒤로 미룬 난 다시 에단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에단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마치 내가 시선을 주기만 기다렸다는 듯이.

"I have some...."

에단이 입을 열기 무섭게 내 몸이 움찔거렸다.

가장 위에 띄워 놓은 미션창의 카운트가 올라갔으니까.

'누군가 괴물을 죽였다.'

이렇게 가만히 있을 여유는 없었다.

이번 미션에서 내 목표는 확고하니까.

난 창대를 꾹 움켜잡았다.

일단 고맙다 어쩌고 한 걸 보면 이 괴물의 소유권을 주장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괴물에게 당하고는 있었다지만 에단 역시 튜토리얼을 전부 클리어한 플레이어다.

그와 동행하는 게 좋을까?

'하지만 다음번 사냥감도 넘기려고 할까?'

아마도 미션지에 진입한 플레이어는 총 7명.

그 중 한 명은 죽었을 가능성이 있으니 남은 건 6명.

남은 괴물은 11마리.

에단과 함께 움직일 때 얼마만큼의 성적을 낼 수 있을까?

그에게 동행을 제안하는 게 이득일까?

이런 내 고민은 곧 무의미해졌다.

예민해진 청각이 낯선 기척을 잡아낸 탓이다.

- 키이익.

난 재빠르게 소리가 들린 방향을 돌아보았다.

"흡."

마력을 끌어올리자 나뭇가지가 스치는 소리 사이로 뒤엉킨 울림을 더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키익."

"키이익?"

"키엑!"

쿵쿵, 쿵, 쿵쿵쿵.

땅의 울림이 규칙적이지 않았다. 최소 둘!

"온다!"

내가 소리를 지름과 동시에 나무와 수풀 너머에서 달려오는 괴물 두 마리가 보였다.

놈들은 믿기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다.

그리고 미리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나와 에단에게 한 놈씩 달려들었다.

내 인상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역시.'

이 새끼들, 지능이 꽤 높다.

이를 악문 난 내 쪽으로 뛰어든 놈을 향해 창을 찔러 넣었다.

정확히 몸통을 조준했음에도 창촉은 괴물을 찌르지 못했다.

놈이 몸을 틀어 피했으니까.

'날붙이가 위험하다는 걸 알고 있어.'

처음 마주쳤던 괴물도 내가 창을 내질렀을 때 일단 피하고 봤다.

여기에 찔리면 안된다는 걸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경각심을 한층 더 단단하게 쌓아 올린 내가 창을 휘둘렀다.

창촉을 피하기 위해 몸을 틀었던 놈의 옆구리를 창대가 강타했다.

"끼엑!"

괴물은 옆으로 날아가면서도 혀를 내밀어 나를 노렸다.

난 목이나 몸통 대신 왼팔을 내어줬다.

끝이 세 갈래로 갈라진 혀가 팔을 칭칭 감아왔다.

"큽!"

놈이 네 발로 땅에 착지하자마자 강하게 당기는 힘이 느껴졌다.

'마력 운용이 아니었으면 밀렸겠는데?'

괴물에게 끌려가지 않기 위해 허리와 다리에 힘을 준 그 순간.

"끄아악!"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빌어먹을 시스템

9화

제2장 승급 시험(3)

서둘러 고개를 돌리자 다른 괴물과 에단이 뒤엉켜 있었다.

에단은 놈에게 목덜미를 물린 채 옆구리가 뜯겨 나간 상태였다.

줄줄 흘러내린 붉은색의 피가 땅을 적시고 있었다.

"저 병신이?!"

저렇게 쉽게 당한다고?

의문을 느끼기 무섭게 내 팔을 당기던 힘이 느슨해졌다.

내가 상대하던 괴물이 내 쪽으로 뛰어든 것이다.

"흡!"

난 놈이 땅을 박찬 직후 왼팔에 감긴 혓바닥을 휘둘렀다.

"키아악!"

괴물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있는 힘껏 팔을 휘두르자 에단과 뒤엉켜 있는 놈을 후려칠 수 있었다.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괴물 두 마리와 사람 한 명이 볼링공에 얻어맞은 핀처럼 나뒹굴었다.

난 즉시 무기를 장검으로 교체하고 괴물의 혀를 잘라냈다.

검은 피가 얼굴로 튀어 오른 순간 난 이미 앞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그때쯤 내 손에 들린 무기는 다시 창으로 바뀌었고, 나에게 등을 보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던 괴물의 등을 향해 내던졌다.

거의 동시에 혀가 잘린 괴물이 나에게 달려들었다.

다시 한번 집중력이 고조되고 모든 광경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난 밑에서부터 올려치는 놈의 손톱을 왼쪽 팔뚝으로 막아냈다.

이어서 보관함에서 꺼낸 장검을 휘두르는 움직임이 물 흐르듯 부드러웠다.

촤악-!

괴물의 가슴팍이 갈라지며 검은 피가 튀어올랐다.

난 거기서 멈추지 않고 앞에 있는 발을 회전축으로 삼아 몸을 돌렸다.

손에 쥔 검을 횡으로 그었을 때.

사악.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괴물의 머리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목이 잘려나간 단면에서 검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나왔다.

「적을 제거하는데 성공....」

메시지가 떠올랐을 때 난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창에 꿰뚫린 채 바닥을 기고 있는 놈을 향해서.

검은 비가 후두둑 떨어지는 곳에서 내 검이 놈의 머리를 향해 쇄도했다.

또 한 번 오염된 마력이 흡수되기 시작한 순간 날붙이가 단단한 두개골을 뚫고 들어갔다.

내 몸이 무너져내렸다.

「체내에 오염된 마력이 존재합니다. 카오스 수치를 확인하세요.」

「정신 오염이 시작됩니다.」

「오염된 마력을 정화하십시오.」

괴물들의 사체 속에서 고통에 허덕이고 나니 또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허억, 헉...."

두 번의 마력을 흡수한 난 바닥에 축 늘어졌다.

흡수 과정이 너무 고통스럽다.

이런 식으로는 다수와의 전투가 힘들 수밖에 없다.

싸우면서 틈틈이 흡수되는 마력이 있을 테니까.

"이 개 같은 새끼가 진짜...."

무슨 게임을 이딴 식으로 만들어 놨는지.

부글부글 끓는 화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제까지 시스템에 좋은 감정을 느낀 적은 없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건 이상했다.

내 감정이 아닌데, 내 것인 척 하는 기분.

거북하고, 역겹고, 치가 떨렸다.

난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무시하기 위해 노력했다.

한 번 겪어봤기 때문인지 이전과 달리 어찌저찌 살의를 억누르는 게 가능했다.

고개를 돌리니 상처 부위를 손으로 막고 있는 에단이 보였다.

그를 보고 가장 먼저 느낀 건 짜증이었다.

'한 마리도 상대를 못하면 어쩌자는 거야?'

저 실력이라면 함께 움직여봐야 짐만 될 터.

난 괴물이 나타나기 전부터 해왔던 고민에 답을 내렸다.

짐을 달고 다닐 바에는 혼자 움직이는 게 낫다.

다수의 괴물을 만나게 될까봐 조금 걱정이었지만.

'위험할 것 같을 땐 튀자.'

혀를 찬 내가 상태창을 열었다. 카오스 수치가 또 올라가 있었다.

방금 62와 57의 마력을 흡수하며 총 마력이 311.33이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카오스 수치는 약 38%.

전체 마력에서 오염된 마력이 차지하는 비중이 카오스 수치인 것이다.

'이게 더 높아지면 어떻게 되는 거지?'

고작 30대에 불과할 때도 이렇게 감정 조절이 안 되는데.

수치가 더 높아지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상태창을 노려보던 난 이를 갈며 정화제를 꺼냈다.

'잠깐.'

하지만 이번에는 바로 먹는 대신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정화제는 고작 3개 뿐이다.

이미 하나를 쓴 이상 지금 먹고나면 남는 건 고작 한 개.

'한 번 먹을 때 전부 정화해주는 건가?'

아니면 정화해주는 수치가 정해져 있나?

정답이 무엇이든 지금 반드시 먹어야 하는 건 아니다.

앞으로 몇 마리를 더 사냥할지 모르니까.

오염된 마력은 계속 늘어날 터.

더군다나 난 이것을 어디서 구하는지도 모른다.

"상점."

혹시나 싶은 마음으로 중얼거렸다. 분명 튜토리얼이 끝난 시점이었으니까.

「베타 서버에서는 상점 서비스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놈의 시스템은 당연하다는 듯이 날 엿 먹였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이 정화제는 필수품이다.

앞으로도 계속 미션이 진행되고 저 괴물들을 죽일 경우 오염된 마력은 필수적으로 딸려 온다.

자연적으로 정화제가 필요해지는 구조다.

그런데 정작 이 시스템은 그것을 구할 방법 조차 알려주지 않는다.

아까부터 꾸역꾸역 쌓여온 분노가 꿈틀거렸다.

마치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내 통제를 벗어나기 위해 움직이는 것 같았다.

정말 말이 안 되는 표현인데, 이게 가장 정확했다.

"끄흡...."

억지로 분노를 억누른 난 손에 들린 하얀 구슬을 노려보았다.

난동을 부리고 싶어 안달이 난 분노는 오히려 내 이성을 더 날카롭게 벼려주었다.

원래 욱하는 기질이 좀 있었지만, 이렇게 극단적이지는 않았다.

이런 감정 변화는 정상이 아니다.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비정상적인 목소리에 순응해선 안 된다.

정화제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 말고, 좀 더 쌓이면 먹자.'

고민 끝에 결론을 내린 난 이를 박박 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단 역시 신음을 흘리며 비척비척 일어났다.

난 그에게 시선 한 줌 주지 않고 무기들을 회수했다.

그리고 보관함에 넣어 놨던 옷을 꺼내 길게 찢었다.

아까 괴물의 손톱을 막으며 팔에 상처가 난 탓이다.

깊지는 않지만 살이 제법 길게 찢어져서 피가 나고 있었다.

미션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지속적인 출혈은 부담이 된다.

"쯧."

난 팔에 옷을 감아 상처부위를 압박한 후 미션창을 확인했다.

그리고 눈앞에 뜬 숫자를 보자마자 얼굴을 구겼다.

'6/13.'

그새 숫자가 올라갔다.

내가 세 마리를 잡았으니, 남은 셋은 다른 플레이어들이 잡았다는 의미다.

만약 그 세 마리를 같은 사람이 잡았다면 기록이 똑같아 진다.

더 빨리 움직여야겠다.

문득 내 발로 괴물을 쫓아 다녀야 하는 지금의 상황에 어이가 없었다.

대체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건지.

깊은 한숨을 내쉰 내가 창을 단단히 고쳐 쥐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몇 걸음 나아가기도 전에 멈춰야만 했다.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 때문이었다.

미션창을 확인하는 사이 나처럼 옷을 찢어 상처부위를 압박한 에단이었다.

'이 새끼가 어디서 무임승차를 하려고.'

난 오염된 마력 때문에 치솟는 살의와 분노를 애써 억누르고 있는 중이다.

그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상태였는데.

에단이 당연하다는 듯이 날 따라오자 열이 확 솟구쳤다.

난 대번에 그를 향해 창을 겨누었다.

흠칫, 몸을 떤 에단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목울대가 크게 꿀렁거렸다.

"따라오지 마."

말이 통하지 않아도 뜻이 전달되기엔 충분했다.

그 증거로 에단이 다급하게 영어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자신을 데려가 달라는 둥, 버리지 말라는 둥, 그런 뜻이었다.

벌벌 떨리는 몸은 그가 느끼는 공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나와는 달리 괴물 한 마리도 제대로 상대하지 못하는 놈이었다.

지금의 상황이 무서울 법도 하지.

저 실력으로 대체 북극곰을 어떻게 잡았는지 모를 일이다.

난 인상을 와락 찌푸린 채로 중지를 들어 보였다.

내 목숨을 챙겨가며 1등까지 해야 하는 상황에서 도움도 안 되는 놈을 데리고 다닐 수는 없다.

에단을 떼어 낸 후 걸음을 돌리기 무섭게 집요하게 따라붙는 기척이 느껴졌다.

'이 새끼가 진짜.'

아주 작은 자극에도 내 통제를 벗어나는 데 성공한 분노는 행동으로 표출되었다.

난 서너 발자국 떨어진 거리에 있는 에단에게 창을 내던졌다.

푹, 하고 그의 발치를 파고든 창대가 파르르 떨렸다.

"흐억!"

난 뒤로 벌러덩 넘어진 에단을 눈에 담은 채 한 발, 한 발 다가갔다.

"따라오지 말라고."

어느새 감정에 동조된 것처럼 격해진 숨소리가 낯설었다.

난 땅에 박힌 창을 뽑아냈다.

그냥 이 자리에서 죽이자는 충동이 치밀어 오른다.

그것에 순응하지 않기 위해서는 미친 듯이 나를 억눌러야만 했다.

에단을 두고 자리를 떠나는 걸음이 거칠어졌다.

어떻게든 저 덜떨어진 놈에게서 멀어져야겠다.

그럼 이 버거운 분노가 자극받을 일도 없을 테니까.

"하!"

하지만 난 그리 멀리 가지 못하고 우뚝 멈춰 섰다.

문득 의심이 든 탓이다.

방금 에단을 떨쳐내고 온 게 정말 내 판단이 맞나?

괴물 하나도 상대하지 못하는데다 부상까지 입은 짐덩어리를 버리겠다고?

내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들만 보면 이게 당연한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초조하고 기분이 더럽지?

난 이를 악문 채 눈을 감고서 후욱, 후욱, 거친 숨을 몰아 쉬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으아아아!"

치밀어 오는 화를 어찌하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퍽, 하고 주먹을 휘두르자 옆에 있던 나무가 우지끈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난 손에서 일렁거리는 마력을 보고 있었다.

평소보다 색이 짙었다. 그냥 붉은색이 아니라 검은색이 섞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내 착각일까?

그것을 가만히 보던 중에 몸을 돌린 건 반발심 때문이다.

이 오염된 마력에 쉽사리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자 오래지 않아 에단이 보였다.

애초에 난 그리 멀리 가지도 못했다.

엉덩방아를 찐 상태 그대로 창을 움켜쥐고서 꾸역꾸역 눈물을 닦아내던 에단이 나를 발견하고는 후다닥, 몸을 일으켰다.

나보다 덩치가 큰 놈이 훌쩍거리는 꼴을 보고 있으니 또 짜증이 확 올라왔다.

"돌아버리겠네 진짜...."

이 게임이 시작된 이례로 욕이 더 늘어버린 기분이다.

난 인상을 와락 구긴 채로 손을 까딱거렸다.

에단은 눈물에 이어 흐읍, 헙, 헉, 기이한 소리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쩔뚝쩔뚝,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는 꼴이 한심한 것 같기도 하고, 불쌍한 것 같기도 하고.

난 긴 한숨을 내쉬며 그의 목과 옆구리에 감긴 천을 다시 묶어주었다.

* * *

에단과 동행한 후 발견한 괴물은 한 마리뿐이었다.

놈을 죽인 건 당연히 나였고.

내 성적은 총 4마리, 미션의 카운트는 11/13까지 올라가 있었다.

'나보다 많이 잡은 놈이 있으면 안 되는데.'

시스템은 보상을 차등 지급한다고 했다.

1등에게 가장 많이 주는 건 당연한 이야기다.

시스템은 튜토리얼에서부터 성적에 따른 차등 지급을 확실히 했다.

잘못하다간 1등 자리를 뺏길지도 모른다.

난 초조한 마음에 이를 박박 갈아가며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하지만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았다.

지속된 출혈 때문에 에단의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졌으니까.

어느 순간부터 제대로 걷지도 못해서 내가 들쳐 메야 했다.

"나 지금 뭐 하냐...."

이 상황에서 부상자를 짊어지고 다니고 있는 내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그냥 버리면 될 텐데. 머릿속에서 맴도는 목소리도 그냥 에단을 죽여버리라고 속삭이는데.

대체 왜 이 개고생을 자처하는지 모르겠다.

"Sorry...."

에단은 가쁜 숨을 내쉬면서도 간간히 사과를 해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럴 때마다 살의가 한풀 꺾였다.

물론 들끓는 화는 어쩔 수가 없었지만.

"아오!"

주변의 나무에게 화풀이를 해대며 걸음을 옮기던 그때.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를 놓치지 않고 잡아낸 내가 방향을 바꾸었다.

재빠르게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뛰어가자 또 다른 괴물이 보였다.

새로 발견한 괴물은 하얀색 벽 앞에서 서성거리는 중이었다.

'저건 또 뭐야?'

벽면의 외곽에 우둘두툴한 암석이 있는 것을 보면 동굴의 입구 같기도 하고.

그때 내 기척을 느끼고서 뒤를 돌아본 괴물이 대번에 아가리를 벌리고 괴성을 내뱉었다.

"캬아아악!"

난 괴물을 빠르게 훑던 중 인상을 구겼다.

괴물의 옆에 커다란 털짐승과 인간의 시체가 포개져 있었으니까.

자세히 보자 주변에 핏자국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꼭 시체를 질질 끌고 오기라도 한 것처럼.

'왜?'

무언가 이상하다 싶었지만, 깊게 생각해볼 여유는 없었다.

저 호전적인 괴물은 내가 생각을 끝낼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으니까.

내가 에단을 내려놓음과 동시에 괴물이 지면을 박찼다.

나도 놈을 향해 뛰쳐나갔다.

어느 정도 거리가 좁혀지자 괴물이 입을 쩍 벌렸다.

이제 혓바닥부터 내밀고 보는 놈들의 패턴에 당황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난 과감하게 괴물의 혀를 붙잡고서 거리를 좁혔다.

이윽고 창의 사정거리에 놈이 들어왔을 때.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던 손에 창이 나타났다.

내 입가에 서늘한 조소가 맺혔다.

날붙이가 위험하다는 걸 알면, 감추고 있다가 찌르면 될 일이다.

푹.

"끼에엑!"

괴물은 제 복부에 박혀 든 창을 피하지 못했다.

하지만 쉽게 당하지는 않겠다는 듯, 창대를 붙잡은 채 밀고 들어왔다.

"이 독한 새끼!"

복부에 창을 끼운 채로 훌쩍 가까워진 놈이 다리를 차올렸고.

묵직한 타격이 내 옆구리에 꽂혔다.

딱, 하고 무언가 부러진 소리가 났다.

갈비뼈가 나간 것 같다.

"큭!"

몸이 옆으로 밀려나는 순간 목이 붙잡혔다.

난 오른손에 마력을 두루고 놈의 팔을 올려쳤다.

우드득.

단번에 부서진 뼈가 검은 털가죽을 뚫고 튀어나왔다.

그때 갑자기 발이 땅에서 떨어지며 부유감이 느껴졌다.

놈이 내 다리를 혀로 감아서 들어 올린 것이다.

다리가 올라가며 자연스럽게 머리가 아래로 떨어졌다.

땅에 뒤통수를 퍽, 박은 직후 몸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내가 날아간 방향은 조금 전까지 괴물이 서 있던 흰 벽이 있는 쪽이었다.

고작 몇 초.

그 사이 괴물은 몸을 돌려 달려오는 중이었다.

난 허공에 떠 있는 상태에서 보관함에 남아 있는 장검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등이 흰 벽에 닿는 순간.

「히든 미션지를 발견했습니다.」

「특성 ?????이 감지됩니다.」

「진입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히든 미션지에 진입합니다.」

「정화제(×5)가 제공됩니다.」

뭐?

빌어먹을 시스템

10화

제2장 승급 시험(4)

벽에 부딪히는 대신 딱딱한 돌바닥으로 떨어져 내렸을 때.

새로운 미션창이 떴다.

HIDDEN MISSION

[마력 확보(베타 테스트)]

적을 제거하십시오.(0/32)

[보상]

• 속성마력 10

• 랜덤 상자(×1)

땅에 머리를 박은 탓에 잠깐 골이 흔들렸지만, 오래지 않아 정상으로 돌아왔다.

이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단어는 마력 확보.

그 다음으로 보게 된 것 숫자였다.

'삼십...?'

갑자기 확 늘어난 숫자에 놀라기도 전에 괴물의 괴성이 들려왔다.

"끼엑! 키에엑! 캬악!"

정말 기가 막히게도 그 울음소리 안에 녹아든 건 초조함이었다. 어쩌면 불안감일지도.

우스운 건 나도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점이었다.

방금 내가 지나온 벽 너머에 괴물과 함께 남은 건 에단이었으니까.

그는 겨우 의식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로, 몇 분 전부터 제 발로 걷지도 못했다.

"미친!"

난 서둘러 벽으로 다가갔다.

벽에 손을 대자 차가운 냉기가 느껴졌다.

튜토리얼이 진행되었던 그 새하얀 공간과 똑같았다.

이 벽을 만든 게 시스템이라는 건 너무나도 분명했다.

이리저리 벽을 더듬어봤지만 나가는 길은 없었다.

순식간에 머리 끝까지 화가 차올랐다.

"씨발!"

욕설을 내뱉으며 하얀 벽을 걷어찼을 때, 몸이 굳었다.

'또.'

이 감정 변화는 도통 적응이 되질 않는다.

폭력성이 두드러지는 것을 느낄 때마다 다시 경각심이 차오른다.

난 어떻게든 화를 다스려보기 위해 심호흡을 시작했다.

'지금 카오스 수치는 48.'

50을 목전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미션이라니.

조금 전에 보았던 32라는 숫자를 떠올린 난 곧바로 정화제 하나를 입에 쑤셔 넣었다.

이렇게 감정적인 상태로 두 자릿수가 넘는 괴물은 상대하는 건 위험하다.

온몸에 박혀 있던 가시가 뽑혀져 나가기 시작하자 카오스 수치는 13까지 떨어졌다.

나를 뒤흔들던 던 분노가 한풀 꺾였다.

그 사이 벽 너머의 괴물이 조용해졌다. 그게 폭풍 전의 고요함처럼 느껴졌다.

"젠장...."

저 놈이 에단을 살려둘까?

지금 당장은 고요하지만 곧 에단의 비명이 들려올 것 같았다.

난 이를 갈면서도 몸을 돌렸다.

'이러고 있을 시간에 움직이자.'

새 미션부터 해결해야 한다.

그래야 여기서 나가 시체라도 수습할 게 아닌가.

난 돌바닥에 나뒹굴고 있던 장검을 집어 들었다.

한 발, 한 발, 신중하게 걸음을 옮기는 동안 아까 괴물에게 걷어차인 옆구리가 욱신거렸다.

'어디 하나 부러진 것 같은데.'

당장 치료할 방법도 없고, 미치겠다.

난 한숨을 참으며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밖에서 했던 예상대로 하얀 벽 너머에 있는 건 분명 동굴이었다.

'32.'

아마도 이 동굴 속에 있는 괴물의 숫자.

'한 번에 몰려오면 위험한데.'

냉정하게 판단할 때, 내가 동시에 상대할 수 있는 건 두세 마리가 한계였다.

놈들이 우글우글 몰려 있는 것을 상상하자 손에 식은땀이 찼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괴물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있다.

마침 갈림길이 나타났다.

난 오른쪽 길을 타고 들어갔고, 오래지 않아 막다른 길목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게 무슨...."

거기서 목도한 광경에 난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막다른 길목 앞에서 작은 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꾸물거리고 있었다.

"낑, 끼잉."

두 발로 일어서지도 못한 채 기어 다니고 있는 괴물.

설령 일어선다 한들 내 무릎에도 오지 않을 작은 괴물.

"하!"

벽 밖에서 난리를 치던 괴물의 행동을 이해하는 순간이었다.

여긴 괴물의 둥지였다. 반항할 힘도 없는 괴물의 새끼들이 모여있는 둥지.

시스템은 이놈들을 다 잡아 죽여서 마력을 흡수하라고 말하는 중이다.

* * *

「축하합니다! HIDDEN MISSION - 마력 확보 베타 테스트를 성공했습니다.」

「성공 보상으로 속성 마력 10이 제공됩니다.」

「성공 보상으로 랜덤 상자(×1)가 제공됩니다.」

새끼 괴물을 죽이는 데 거부감은 없었다.

동굴 앞에서 들어오지 못하고 있던 괴물을 봤기 때문이다.

놈은 분명 사람의 시체를 동굴 입구까지 끌고 왔다.

여기가 둥지라는 게 분명해진 이상 그 목적은 뻔하지 않은가?

새끼들에게 줄 먹이였던 거겠지.

그런 상황에서 이놈들이 다 자라지 못했다는 이유로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내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이 작은 놈들은 시체를 뜯어 먹었을 것이다.

난 괴물의 새끼들을 착실하게 죽여나갔다.

개체별로 달랐지만 30대 초반의 마력이 흡수되었다.

숨을 쉴 때마다 몸이 달라졌다.

갑자기 강해진 힘을 조절하지 못해 창대가 바닥을 꿰뚫고 박혀서 빠지지 않을 정도였다.

너무 가파른 변화였기에 내 몸을 가누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하지만 몸의 변화를 살피며 천천히, 여유롭게 적응할 기회 같은 건 없었다.

새끼를 거의 다 죽였을 무렵 성체 괴물이 튀어나왔으니까.

'그 갈림길에서 넘어온 거겠지.'

전투가 끝났을 때 난 만신창이었다.

"퉤."

내가 뱉어낸 게 침인지, 피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앞선 전투와 달리 부상을 피할 수가 없는 난전이었으니까.

특히 등을 뜯긴 것과 갈비뼈 쪽을 찔린 게 특히 심했다.

뜨거운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는 게 느껴졌다.

폐를 다치기라도 한 건지, 숨을 쉴 때마다 고통스러웠다.

목이 졸린 탓에 시퍼런 멍도 남았고 팔이나 다리도 멀쩡하지는 않았다.

"윽...."

허벅지 살이 아예 뜯기다시피 해서 뼈가 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몸은 더 가벼웠다.

아마도 전투 중에 마력이 천을 넘어버린 탓이 아닐까 싶었다.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깨어있는 기분이었다.

안타깝게도 지금 상황에선 무조건 좋다고 하기에 힘든 일이었다.

모든 감각이 나를 찔러대는 것처럼 선명해져서 전부 고통처럼 느껴졌으니까.

피부에 닿는 공기까지 한 가닥, 한 가닥 구분해서 느낄 수 있었다.

저벅저벅, 발자국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어 뇌를 헤집는다.

뚝뚝, 흘러내리는 핏물이 피부를 긁어대는 것 같았다.

난 구멍이 난 흉부를 손으로 누르다 말고 황급히 힘을 뺐다.

분명 이전처럼 평범하게 힘주어 눌렀을 뿐인데, 갈비뼈를 분지를 뻔했다.

분명 내 몸인데, 내 것 같지가 않았다. 너무 달라졌다.

후우, 하고 숨을 내쉰 난 최대한 조심스럽게 출혈 부위를 눌렀다.

피곤해 죽겠는데 이런 것까지 신경써가며 조심해야 되다니.

'쉬고 싶다.'

이틀 밤샘을 하며 아르바이트를 뛰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당장이라도 드러누워서 쉬고 싶었다.

하지만 피곤해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발을 질질 끌며 앞으로 나아갔다.

왔던 길을 거슬러 입구에 도착하는 건 금방이었다.

하얀 벽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훤히 뚫린 입구에는 무엇인지 모를 털짐승의 사체와 낯선 백인의 시체가 고스란히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창이 하나 떨어져 있었다.

"하아...."

분명 나오기 전에 오염된 마력을 정화했다.

혹시 몰라서 정화제를 하나 남겨둔 지금, 내 카오스 수치는 5%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시체를 보자 속에서 무언가 뜨거운 게 부글부글 끓었다.

죽은 자가 풍기는 특유의 냄새가 후각을 통해 머릿속을 헤집었다.

너무 생생하고 역겨워서 구역질이 올라올 정도였다.

난 이를 악문 채 동굴 밖으로 향했다.

에단의 시체라도 확인할 생각으로.

내가 동굴에서 체류한 시간은 10여분 정도.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에단이 살아 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동굴 밖으로 나와 본 광경은 내 예상과 달랐다.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싶어서 확인해봤더니, 흑인이 에단의 옆에 서서 창을 치켜들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내리 꽂으려는 것처럼.

그걸 보자 생각보다 행동이 먼저였다.

"야!"

버럭 소리를 지른 내가 단검을 꺼내 낯선 플레이어에게 던졌다.

내 움직임에 따라 후드득, 떨어진 피가 땅을 적셨다.

콰직.

섬뜩한 파공음을 흘리며 날아간 단검이 이름 모를 플레이어의 옆에 있던 나무에 박혔다.

힘껏 던지기는 했지만, 나조차도 놀랄 파괴력이었다.

화들짝 놀라며 물러난 녀석이 나를 돌아보았다.

"너 지금, 뭐하냐?"

삐딱하게 기울어진 머리에서 때마침 검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성체 괴물과 드잡이를 할 때 뒤집어쓴 피였다.

창을 집어 들고서 절뚝거리며 다가가자 흑인이 뒤로 물러났다.

그러면서도 아득바득 창을 고쳐잡는 게 보였다.

난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아래를 내려보았다.

땅바닥에 누워 있는 에단의 흉부가 느릿하게나마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복부가 뚫린 채 팔이 부러진 괴물이 쓰러져 있었다.

내가 상대하던 그놈이 분명했다.

괴물의 가슴엔 장검이 떡하니 박혀 있었다.

"하."

아무래도 내가 에단을 너무 무시한 모양이다.

이 괴물은 새로 나타난 흑인이 죽인 게 아니었다.

저 사람이 괴물을 잡았다면 이때까지 에단이 살아 있을 리가 없다.

'진작 괴물의 손에 죽었겠지.'

그러니 에단이 괴물을 죽인 후 저 플레이어가 도착해서 의식을 잃은 그를 발견했다고 봐야 한다.

'반 시체 같은 놈이 누워 있으니 죽여서 마력을 흡수하려던 거겠지.'

시스템은 튜토리얼에서부터 플레이어에게 살생과 마력의 관계를 꾸준히 주입 시켰다.

무언가를 죽이면 마력을 흡수할 수 있다고.

흑인이 에단을 직접 죽이려 한 건 그 때문일 터.

"흐으...."

때마침 에단으로부터 희미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난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흑인이 버럭,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 ——!"

뭐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인상을 구긴 내가 창을 고쳐잡고서 그대로 휘둘렀다.

창대가 흑인의 머리를 정확하게 가격했다.

막으려고 한 것 같긴 한데, 그 움직임이 속이 터질 만큼 느렸다.

종잇장처럼 손쉽게 튕겨 나간 남자가 바닥으로 엎어졌다.

창대에 한 번, 바닥에 한 번.

연달아 머리에 충격을 받은 그가 바닥에 엎어진 채로 비틀거렸다.

난 그런 그를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봤다.

'기분 더럽네.'

이 게임이 시작된 이상 플레이어에게 마력이 중요하다는 건 인정한다.

그 때문에 나도 식물을 뽑고 다니면서까지 마력을 모았다.

물론 살인이나 동물 사냥까지 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나와 같은 기준을 타인에게 적용할 생각도 없다.

다른 플레이어가 사람을 죽여서라도 마력을 모으고 싶다면 그건 그 플레이어가 결정할 일이다.

이후의 죄책감이나 사회적인 문제도 본인이 책임져야겠지.

그럼에도 방금 에단을 죽이는 걸 방해한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기껏 살려 놓은 놈이니까.'

저 이름도 모를 놈의 밑거름이 되라고 들쳐 메고 다닌 건 아니었다.

적어도 오늘 이 미션에서는 에단이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꺼져."

난 이름 모를 새로운 플레이어를 발로 걷어차서 멀리 날려버렸다.

이후에는 나무에 박힌 단검을 뽑아내고, 혀를 차며 에단의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의 복부와 어깨에 내가 모르는 상처가 새로 나 있었다.

괴물을 죽이는 과정에서 생긴 모양이다.

난 죽어 있는 괴물을 힐끔 바라보았다.

'아예 병신은 아니었네.'

팔 하나를 부러뜨린 데다 배까지 뚫어서 줬는데, 못 잡고 죽었다면 병신 취급을 해도 이상할 게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에단 역시 튜토리얼을 올 클리어한 플레이어.

목숨이 경각에 달한 상황에서 스스로를 지킬 정도는 되는 모양이다.

"어이."

툭툭, 뺨을 쳐보았지만 에단은 눈을 뜨지 못했다.

하지만 분명히 살아 있다.

'4, 50분 쯤 흐른 것 같은데....'

체감상 미션이 시작되고 1시간가량이 지났다.

'보통 이렇게 오래 살아 있을 수 있나?'

압박을 했다지만 출혈이 계속되고 있지 않은가.

그런 상황에서 아직도 살아 있다니.

비정상적인 생명력이었다.

게임이 시작되고는 정상적인 것과 점점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후우."

긴 한숨을 내쉰 난 에단을 들쳐 매기 위해 손을 뻗었다.

아직까진 버티고 있지만, 시간을 끌어서 좋을 것 같진 않다.

미션의 카운터는 12/13.

'아직 한 마리 남았다.'

에단을 살리고 싶다면 빨리 움직여야 한다.

그렇게 마음 먹고 마지막 괴물을 찾아나서려던 찰나.

「MISSION - 승급 시험 베타 테스트의 완료 조건이 충족됩니다.」

「성적이 집계됩니다.」

마지막 괴물이 잡힌 모양이다.

「성적 집계가 완료됩니다.」

「홀 폐쇄를 위해 할당이 부과됩니다. 코드명을 지정해주세요.」

난 에단을 도로 눕히며 눈살을 찌푸렸다.

'코드명?'

시스템이 이번에는 또 뭘 하려고 이러나, 싶었다.

'홀을 폐쇄한다라....'

그러고 보니 처음 이 숲속에 떨어졌을 때 시스템이 같은 단어를 언급했다.

홀에 진입했다고.

대체 홀이라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그걸 폐쇄하려는 모양인데.

'할당은 또 뭐야?'

정보 제공이 부실한 건 처음부터 끝까지 참 일관적이다.

혀를 찬 난 영어 이니셜을 하나 써넣었다.

'케이.'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내가 강씨라서.

철자를 다 적을까 하다가 만사가 다 귀찮아서 그냥 하나만 썼다.

그렇게 1분쯤 지나자 새로운 창이 떴다.

[폐쇄 할당]

- K(36) : 201

- 인간(4) : 45

- 존(2) : 22

- 백합(2) : 22

- 에단 렘브론(1) : 10

- 막심 미할리치(0) : 0

- 쇼타 히사쿠(0) : 0

줄이 그어진 이름이 두 개.

그 중 하나는 일본을 연상시켰다.

그게 의미하는 바를 깨달은 내가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어렴풋이 짐작은 했다. 더군다나 실제로 동굴 앞에 놓여 있는 시체를 보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누군가 여기서 죽어 나갔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생각보다 충격이 컸다.

하지만 나는 살아남았고, 앞으로도 죽을 생각 따윈 없었다.

그래서 낯선 이름이 아니라 내 코드명에 따라 붙은 숫자에 시선을 주었다.

36과 201.

36이 의미하는 바는 쉽게 알 수 있었다.

내가 죽인 괴물의 수와 정확하게 일치했으니까.

문제는 뒤에 있는 201이라는 숫자다.

'할당....'

난 시스템에서 숫자로 표기되는 몇 가지 정보들을 떠올려야만 했다.

그러자 발치에서부터 불안감이 슬금슬금 기어 올라왔다.

설마.

"헙."

라고 생각하자마자 설마가 사람을 잡았다.

「마력을 징수합니다.」

몸에서 마력이 쭈욱,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할당이라는 게 마력이었던 것이다.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버렸고, 직후 뜨겁게 타올랐다.

내가 이걸 모으느라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큽!"

이를 악물고 몸을 웅크린 순간, 내 몸에서 빠져나가던 마력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때부터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마력을 징수합니다.」

시스템은 당기고.

「마력을 징수합니다.」

나는 붙잡았다.

아주 가느다란 실을 있는 힘껏 붙들고 있는 기분이었다.

언제 끊어질지 몰라서 당기지는 못하겠고.

그렇다고 놓을 수도 없는 상황.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붙들고 있는 것뿐이다.

온몸의 감각이 모조리 그곳에 집중되었다.

이대로 시스템이 내 마력을 가져가게 둘 수는 없었으니까.

이건, 이 마력은 내가 개같이 고생해서 모아온 노력의 산물이었다.

히든 미션지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물음표 특성 덕분이지 않았던가.

그것부터가 1차 튜토리얼에서 개와 뒹굴며 이룩한 성과였다.

그런데 시스템은 지금 그런 내 노력을 할당이라는 이름으로 강탈해가려고 한다.

"내가 순순히 줄 것 같냐?!"

이 마력은 내 것이다!

악에 받친 노성을 내지른 순간이었다.

마력이 확, 달아오르더니 내 몸속 깊은 곳으로 숨어버렸다.

「마력 운용의 숙련도가 상승합니다!」

「특성 동화의 효과가 적용됩니다!」

「특성 집념의 효과가 적용됩니다!」

「마력 운용의 숙련도가 10.52% 증가했습니다!」

단조로운 문장이 떠오르자 마력을 당기는 힘이 사라졌다.

「시스템이 할당량을 보조합니다.」

「방어벽이 비활성화 됩니다.」

「홀을 폐쇄합니다.」

「축하합니다! MISSION - 승급 시험(베타 테스트)를 성공했습니다.」

「성공 보상으로 속성마력 10이 제공됩니다.」

「성적에 따라 알파로 승급됩니다. 알파 전용 특성 정화(성장형)가 생성됩니다.」

「성적에 따라 속성석(상급)이 제공됩니다.」

「성적에 따라 재화(\10,000,000)가 제공됩니다.」

「튜토리얼(베타 테스트)이 종료됩니다.」

「커뮤니티가 활성화 됩니다.」

「메인 서버(지구) 안정화가 시작됩니다.」

「메인 서버(지구) 안정화 0.001%」

이후 무수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흐아."

지친 숨을 내뱉으며 다시 눈을 떴을 때, 익숙한 벽지와 붉은 잔상이 보였다.

침대 위에 펼쳐 준 비닐 포대에 핏덩이가 떨어지고 있었다.

"윽...."

어깨, 갈비뼈 부근, 다리, 그리고 목까지,

몸 곳곳에 통증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고통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미션을 끝내고 방으로 돌아왔음에도 상처가 낫지 않은 것이다.

보호구역이 아니라는 말을 봤을 때부터 불안하더니만.

아무래도 부상을 회복시켜주는 건 튜토리얼까지인 모양이다.

마력을 빼앗길 뻔한 것은 아직도 화가 났지만.

당장은 화를 낼 시간조차 아까웠다.

침대 맡에 놓아둔 핸드폰을 집어 드는 손길이 다급해졌다.

빌어먹을 시스템

11화

제3장 시스템(1)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인지 어느 순간부터 의식을 유지하는 게 힘들었다.

귓가에 닿는 소리가 하나 둘 멀어지고, 시야는 뿌옇게 변했다.

그러던 중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이 빌어먹을 상황만 아니라면 인사라도 나눴을 텐데.

아쉽게도 난 입 한 번 벙긋거리지 못하고 의식을 잃었다.

흐릿하게나마 유지되던 감각이 한순간 단절되었다.

끝이 없는 무저갱이 속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곳에서 얼마나 배회했을까?

그립고도 원망스러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제는 어린 시절의 빛바랜 추억이 되어버린 분들.

'엄마, 아빠.'

두 분을 마주하자 과거의 어느날 가슴에 묻어버렸던 감정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왜 우리만 두고 갔어?'

독하게 쏘아붙여 보지만 두 분은 대답을 하지 않으셨다.

나도 알고 있다. 두 분은 앞으로도 영원히 나에게 답을 주지 않으실 것이다.

그런데도 멈출 수가 없었다.

'나 힘들어.'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긴 거지?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나도 죽은 건 아니지?

나 아직 죽으면 안되는데. 내가 죽으면 쌍둥이만 남는데.

걔들 이제 겨우 17살이잖아.

아직은 내가 옆에 있어 줘야 한단 말이야.

대학도 보내고, 번듯한 직업을 가질 때까진 지켜주고 싶어.

두 분이 나한테 해준 것들 전부 물려주려고 했는데.

내가 부족한 형이라서, 부족한 오빠라서 많이 못해 줬어.

두 분은 끝없이 이어지는 내 넋두리를 가만히 들어주셨다.

그러고 나서 나를 꼭 안은 채 등을 토닥여주셨다.

연약하고 무력했던 어린아이로 돌아 가버린 것만 같았다.

꼴사납게도 눈물이 멈추지를 않는다.

* * *

1인실 병실에서 눈을 뜨고 처음으로 느낀 건 안도였다.

죽지 않았다고, 다행이라고.

하지만 마냥 안도할 수만은 없었다.

무시무시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있는 사람들 때문에.

"그래서, 설명해줄 수가 없다?"

"...일단은."

"하!"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은 사람은 서재혁이었다.

부모님들의 인연 덕분에 대여섯 살 때부터 매일 같이 붙어 다녔던 놈이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학교를 그만두며 자연스럽게 멀어졌지만 재혁이는 달랐다.

부모님끼리 아는 사이였기도 했고, 예전부터 제법 죽이 잘 맞기도 했고.

집안 형편이 나빠진 것 정도로 소원해질 사이가 아니었다.

내 인생에 있어 소중한 몇 명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고를 수 있는 친구였다.

이유조차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 내 전화를 받자마자 부리나케 달려와 줄 정도로.

"그럼 일단 내 얘기부터 하마."

눈을 부라린 채 나를 노려보는 재혁이를 대신해, 그의 옆에 서 있던 사람이 입을 열었다.

재혁이의 부친인 서종훈이었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대학 동기였으며 한 때 같은 대학 병원에서 근무했던 분이다.

큰아버지라는 작자가 우리가 살던 집까지 팔아먹고 튀었을 때, 길거리에 나앉을 뻔했던 나와 쌍둥이를 도와준 사람이기도 했다.

"네 동생들에게는 내가 연락해놨다. 오겠다는 걸 겨우 말렸고."

이어진 종훈의 말에 몸이 들썩거렸다.

말렸다는 건 내가 다쳤다는 사실을 말했다는 의미다.

동생들에게는 또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벌써부터 걱정이다.

그래도 살아난 게 어디냐 싶어서 일단 감사인사부터 했다.

"...감사합니다, 아저씨."

"네 방은 내가 치웠어. 애들은 못 봤고."

"...고맙다."

피가 멈추지를 않아서 난장판이 되어버린 방.

전화를 받고 달려온 재혁이에게 업혀 나왔던 나.

덜컹거리는 차와 시끄럽게 울리는 클락션 소리.

수술실로 들어가던 순간 보았던 빛무리까지.

의식을 잃기 전의 상황은 단편적으로 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내가 살아 있는 게 저 두 사람 덕분이라는 걸 알기엔 충분했다.

그래서 아무런 설명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 눈치가 보이는 것이고.

난 침대 옆에 나란히 서 있는 부자를 힐끔거리며 목덜미를 긁적거렸다.

'이걸 대체 어떻게 설명하냐고.'

애초에 이 문제가 마음에 걸려서 119 대신 재혁이를 부른 것이다.

부상에 대해 설명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예전부터 알고 지내온 사람들이라고 해도 막막한 건 마찬가지였다.

'괴물 새끼랑 싸우다 왔다고 말할 수도 없고.'

정말이지 미치겠다.

두 사람은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내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런 이들이 걱정에 가득 찬 눈으로 날 보고 있으니 마음 한구석이 묵직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사정을 설명하는 게 망설여진다.

내가 해야 할 이야기가 비현실적이라는 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두 사람은 내가 목숨이 걸린 일로 헛소리를 할 리 없다는 걸 아니까.

난 저들이 내 이야기를 믿지 못 할까봐 숨기는 게 아니다.

당장 나조차도 아는 것이 너무 적기 때문에 확신이 없는 것에 가까웠다.

'정보량도 제한적이고, 확인된 것도 적어.'

이런 상황에서 두 사람에게 게임에 대한 것을 알려도 될까?

그랬다가 이 일에 두 사람이 휘말려서 잘못되면?

내가 죽였던 괴물의 잔상이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그놈들에게 죽었던 시체가 보이는 것 같았다.

'안돼.'

일단은 숨기자.

마력이 없는 두 사람이 이 일에 휘말리는 건 안된다.

말해야 된다는 확신이 생기 전까지는 신중을 기하는 게 낫다.

나는 뜨거운 시선을 보내오는 두 사람 앞에서 침묵을 지켰다.

그런 나의 태도에 인내심이 닳기라도 했는지.

"네 목숨과 관련된 일이었다. 그런데도 말을 못 하겠다고?"

다시 입을 연 종훈의 목소리가 한층 엄해져 있었다.

난 그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한 채 답했다.

"지금은요."

딱딱한 어조로 말했지만 이어지는 한숨 소리에 절로 눈치가 보인다.

지금 이 추궁이 걱정에서 비롯된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알겠다."

다행히도 종훈은 짧은 침묵 끝에 내 결정을 받아들였다.

"네가 생각이 없는 놈도 아니고, 기다려보마."

난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꼬치꼬치 캐물으려 했다면 상당히 곤란했을 테니까.

설명 대신 침묵을 택했음에도 기다려줄 정도의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도 환부는 확인하자."

자포자기한 어조로 중얼거린 종훈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내 환자복을 벗기더니 가슴과 옆구리를 살피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는 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산소 마스크도 없이 멀쩡한 게 이상하더라니...."

난 침대 옆에서 대롱거리고 있는 산소 마스크를 힐끔거렸다.

깨어나자마자 갑갑해서 뜯어냈던 물건이다.

그 과정에서 조금 망가졌고. 아주 조금.

다행히도 종훈은 산소 마스크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반쯤 우그러진 산소 마스크보다 더 시선을 잡아끄는 게 있었으니까.

그를 따라 시선을 옮긴 난 훤히 드러난 상처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 밖에 안 지난 거 확실해요?"

"너 병원으로 데려오고 22시간 정도 지났다."

그런데도 벌써 상처가 아물고 있었다.

육안으로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분명....'

방으로 돌아왔을 땐 숨을 쉬는 게 상당히 고통스러운 상태였다.

그런데 정작 지금은 멀쩡하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단순히 힘만 세지는 게 아니었나 본데.'

마력의 영향이 생각보다 큰 것 같았다.

'에단이 그 상태로 살아 있었던 게 이런 회복력 때문인가....'

미션이 끝나기 전 겨우 숨만 붙어 있던 에단을 떠올리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제까지는 미션이 끝나자마자 부상이 회복돼서 모르고 있었다.

"이것도 설명하기 힘들까?"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는 나와 달리 종훈이 침착한 어조로 물었다.

"...네."

"너 수술할 때 다른 선생이 같이 들어갔다. 그건?"

"일이 커지면 좋을 것 같지는 않아요."

"그럼 내 선에서 정리해두마. 물론 의료기록은 남을 거다. 병원비는 내가 해결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말고."

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종훈은 내 대답을 의식한 듯 깊게 파고들지 않았다.

병실은 한동안 무거운 침묵만이 맴돌았다.

"퇴원은, 일단 상태를 조금 더 지켜보자. 쉬어라."

"네, 아저씨."

짧은 침묵이 끝나자 종훈은 일을 하러 가야 한다며 병실을 빠져나갔다.

그가 사라지자 줄곧 조용하던 재혁이 의자를 끌고 오며 말했다.

"나한테도 말 못 하냐?"

어린 시절부터 붙어 다닌 탓인지, 녀석과 난 부모님보다 서로에 대해 잘 알았다.

종훈에게는 말하지 못했으나 재혁이에게는 털어놓은 일도 많다.

특히 부모님이 돌아가신 직후에.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나중에 하자, 조금 더 정리되면 그때."

난 손을 내저었다.

"후우, 내가 닦달해서 말할 녀석이었으면 벌써 말했겠지."

재혁이는 짧게 혀를 차며 마른 세수를 벅벅, 했다.

"그럼 다른 것 좀 물어보자."

"뭐."

축 늘어지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재혁이의 표정이 한층 심각해졌다.

"이런 일이 또 생길 수도 있는 거냐?"

난 가벼운 고갯짓으로 답을 대신했다.

재혁이가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치려거든 나 의사 되고 나서 다치던가. 이게 뭐냐?"

짜증이 덕지덕지 묻어난 말이었으나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저게 저 녀석 나름의 농담이고, 걱정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내 표정이 안 좋구나.'

저 녀석은 어떻게든 이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대꾸했다.

"어느 세월에 그걸 기다리냐? 아직 인턴도 못 달았으면서."

재혁이는 지금 의대생이다.

국가고시조차 통과하지 못한 놈이 무슨.

"금방이거든? 몇 년만 기다렸다가 다치면 안 되냐? 그럼 내가 다 치료해줄게."

"헛소리는."

재혁이와 시답지 않은 말을 주고 받자 알게 모르게 남아 있던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비로소 나의 일상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그런데도 마음 한구석이 무겁고 섬뜩했다.

「메인 서버(지구) 안정화 2.039%」

시야 한구석에 떡하니 자리 잡은 저 문장 때문에.

튜토리얼을 처음 시작하던 순간을 떠올리자니 속이 답답했다.

'안정화 다음은 활성화.'

베타 서버가 두 개의 단계를 거쳤다.

그러니 저 메인 서버라는 것도 같은 단계를 밟을 가능성이 높다.

그때가 되면 또 오늘과 같은 일이 얼마든지 반복될 수 있다.

난 꿈속에서 만났던 부모님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든, 계속 버텨 내야 한다

'절대 안 죽는다.'

그분들의 전철을 밟을 수는 없으니까.

난 쌍둥이만 두고 죽는 짓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 * *

재혁이가 자리를 비우고 혼자 병실에 남게 되었을 때.

난 보관함을 열어보고서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5만원권 묶음 두 개가 들어 있었으니까.

'천만 원.'

난 그것을 꺼내 들었다.

'진짜 돈인가?'

당장 눈으로 보기에는 완벽했다.

혹시나 싶어 핸드폰으로 위조방지장치에 대해 검색해보았지만, 위조 화폐 같지는 않았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난 숨을 골랐다.

이게 진짜 통화라면 개처럼 구르며 괴물에게 물어뜯긴 보람이 있었다.

잠을 줄여가며 4개월은 일을 뛰어야 벌 수 있는 돈이었으니까.

'애들 노트북 사줘야지.'

학원이나 인강도 원하는 걸로 신청해주고.

가능한 은행을 통하지 않고 사용해야겠지만.

망할 게임을 시작한 후 드물게도 기분이 좋았다.

난 돈을 보관함에 도로 집어 넣은 후 주먹만 한 크기의 작은 상자를 꺼내 들었다.

'랜덤 상자.'

이름만 보면 흔한 가챠게임에서 나올 법한 뽑기 상품 같은데.

[랜덤 상자(×1)을 사용하시겠습니까?(Y/N)]

짧은 망설임 끝에 예스 버튼을 누르자 상자가 환하게 빛났다.

직후 내 손에 남은 건 웬 종이 쪼가리였다.

「상점 무료 이용권(×1)」

내 표정이 짜게 식었다.

'상점도 안 열렸는데 이용권을 뿌려?'

날로 먹겠다는 것도 아니고, 보상이랍시고 준 게 당장 쓸 수도 없는 아이템이다.

"하아...."

난 긴 한숨을 푹 내쉬며 이용권을 보관함에 쑤셔 넣었다.

이건 나중에 상점이 오픈되면 그때 확인해보는 수밖에.

고개를 내저은 난 다음으로 상태창을 열었다.

플레이어 강현우(베타 테스터)

마력 : 1439.53(속성 마력 : 33)

카오스 수치 : 12.68%

소속 : 지구

종족 : 인간(플레이어)

등급 : 알파

속성 : -

특성 : ?????, 동화, 집념, 마력 운용(11.09%), 감각 확장(0.14%), 정화(lv.1 - 0.00%)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마력이 30가량 줄어 있었다.

버틴다고 버텼는데, 일부는 시스템에게 강탈 당한 모양이다.

"쯧."

짧게 혀를 찬 내가 다른 내용을 살펴보았다.

동화랑 집념은 여전히 뭔지 모르겠다.

'시스템 메시지가 뜬 걸 보면 마력 운용의 숙련도와 관련된 것 같기는 한데....'

명확한 게 하나도 없다.

그나마 이번에 새로 얻은 감각 확장은 알 것 같다.

'저게 활성화 됐을 때 시간이 느려진 것 같았지.'

꾸준히 연습하면 전투시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난 마지막으로 카오스 수치와 이제까지 내가 흡수한 오염된 마력의 기록을 훑었다.

지금까지 직접 겪어본 바에 따르면 오염된 마력은 살인, 혹은 살생 충동을 일으킨다.

그 외에는 화를 부추기는 짓도 하는 것 같다.

카오스 수치가 높았을 땐 계속 화를 주체할 수가 없었으니 아마도.

10%남짓한 카오스 수치를 확인한 후 눈에 담은 건 등급과 특성.

'알파와 정화.'

설명서에 기재된 등급 설명 중, 온전한 건 델타에 관한 내용이 전부였다.

알파에 대한 정보는 가장 상위 등급이라는 것 외에 전무했는데.

오늘에 이르러 몇 가지를 알아냈다.

빌어먹을 시스템

12화

제3장 시스템(2)

'정화는 알파 전용 특성.'

알파가 최상위 등급인 이유를 알 것 같다.

'정화제가 필요 없구나.'

괴물을 죽이고 마력을 흡수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정화제.

알파는 그 정화제 없이 자체적으로 오염된 마력을 정화할 수 있는 등급이다.

이 정보를 통해 하위 등급의 제한도 추측할 수 있었다.

하위 등급에서는 따로 정화제를 구해야 할 가능성이 높다.

'상점 기능이 있으니까 거기서 구할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분명 대가가 필요하리라.

난 딱 거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후 관심을 끊었다.

하위 등급이 정화제를 구하는 방법이 무엇이건, 나와는 상관없으니까.

난 알파로 승급했다. 내가 신경 써야 할 부분은 정화라는 특성을 어떻게 해야 쓸 수 있는 건지 알아내는 것이다.

"정화."

소리 내어 말해 봤지만 시스템은 반응이 없었다.

"특성, 정화."

몇 번이고 말을 바꿔가며 시도해 봤지만 돌아오는 건 시스템의 침묵 뿐이었다.

첫 튜토리얼이 끝났을 때가 떠오른다.

그때도 마력을 써보겠다고 별의 별 의미 없는 짓을 했으니까.

하지만 그때와는 달리 화가 나지는 않았다.

난 천만 원이라는 보상으로 인해 조금 관대해진 상태였으니까.

그래서 화를 내는 대신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시스템이 불친절한 게 한두 번도 아니고.'

화를 낼 시간에 방법을 찾는 게 나으리라.

난 눈을 감은 채 마력에 집중했다.

직후 나도 모르게 움찔, 몸을 떨었다.

예전보다 마력을 움직이는 게 몇 배는 더 쉬워져 있었으니까.

승급 시험 전에도 마력 운용은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무언가 달라져 있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예전에는 마력의 억지로 멱살을 잡고 움직이게 만드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마력이 내 손짓 한 번에 따라온다고 할까?

체감상 그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마력 운용의 수치가 10%까지 올라가 있는 걸 보았는데, 그것 때문인가보다.

'숙련도가 늘었다는 게 이런 뜻이군.'

마력의 통제가 더 쉬워졌다.

순순히 마력을 내어주지 않고 버티기를 잘했다.

덕분에 마력을 빼앗기지 않고 대부분 보존한 데다 숙련도까지 대폭 늘었다.

'원래 자기 밥그릇은 알아서 챙겨야 하는 법이지.'

흡족한 마음으로 고개를 주억거린 난 다시 마력에 집중했다.

몸 전체에 마력을 순환시키자 내 몸에 박혀 있는 가시들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쪽에 감각을 집중하기 무섭게, 부드럽게 흐르던 마력이 덜컥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각자 자리를 잡더니 가시에 달라붙기 시작했다.

본능에 가까운 깨달음이었다.

이 가시는 마력과 함께 딸려온 오물이다.

그리고 이 가시가 내 몸에 박힌 채로 정신을 오염시키고 있다.

시스템은 그것을 오염된 마력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러니 이 가시를 나에게서 뽑아내면.

'체내에 흡수된 마력만 남고, 오물은 없어지는 거지.'

뭘 해야 할지 깨달았으니 실행만 남았다.

"흐욱, 훅."

물론 언제나 그렇듯, 쉽지는 않았다.

가시 근처에서는 마력을 움직이는 게 수십배는 힘들었다.

보이지 않는 힘이 내 마력과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기분이었다.

정화를 한다는 건 살아오며 단 한 번도 사용해 본 적 없는 근육을 움직이는 것과 비슷했다.

더 정확하게는 나에게 있는 것조차 몰랐던 근육을 쓰는 기분.

꽉 깨문 잇새에서 으드득, 하고 이 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동시에 꾸물꾸물.

내 몸에 박힌 가시가 애벌레가 움직이는 것처럼 천천히 밖으로 밀려났다.

「특성 정화가 활성화됩니다.」

"허억."

가쁜 숨을 몰아쉼과 동시에 마력 운용이 끊어지고, 특성 역시 비활성화 되었다.

시스템 메시지를 확인하자 희열과 분노가 공존했다.

드디어 정화 방법을 알아냈음에 기뻤다.

하지만 그 방법이라는 게 욕이 나올 만큼 힘들다.

안간힘을 썼는데 겨우 하나를 빼내는 데 그칠 정도였다.

괴물을 죽인 직후 흡수되던 양을 생각하면 앞으로의 고생길이 훤히 보였다.

'하여튼, 이놈의 게임은 쉬운 게 하나도 없네.'

나지막이 욕설을 중얼거린 난 다시 정화에 집중했다.

기왕 시작한 거, 끝을 봐야지.

그날 5% 남짓한 카오스 수치를 0으로 만들기 위해 무려 2시간이 걸렸다.

정말 정이 안가는 게임이다.

* * *

난 저녁에 바로 퇴원절차를 밟았다.

상처가 눈에 띄게 아문 것도 있고,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면 동생들이 걱정할 테니까.

재혁이가 굳이 차를 끌고 왔기에 순순히 타고 가기로 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

동생들에게 해야 할 변명거리를 정리하느라 생각이 많아졌다.

일단 퇴원에 앞서 종훈과 말을 맞춰놨다.

'계단에서 구르는 바람에 다친 거고, 혹시 몰라서 정밀 검사까지 한 것뿐이라고.'

다행히도 종훈은 내가 얼마나 다쳤는지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다.

덕분에 어떻게든 얼버무릴 여지가 남아 있었다.

'괜히 걱정시킬 필요는 없지.'

당장 다음 주가 입학식인데.

괜한 일로 심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내가 가만히 앉아 동생들에게 할 거짓말을 곱씹고 있을 때였다.

"너 진짜 괜찮냐?"

운전대를 잡고 있던 재혁이가 물어왔다.

"아까 봤잖아."

그는 반나절 동안 내 상처가 아무는 것을 실시간으로 지켜보았다.

아직 통증은 남았지만 움직이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기가 막혔지만 어떻게든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죽을 가능성이 낮아진 거니까.'

정면을 응시한 채 가만히 앉아 있는 동안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무슨 생각하는데?"

재혁이의 목소리가 한결 조심스러워졌다.

나를 걱정하는 기색이 선연했다.

그에 난 조수석에 몸을 깊게 파묻은 채 대답했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겼나, 하고."

재혁이는 답이 없었다.

난 그런 그를 두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커뮤니티."

"뭐?"

"혼잣말."

재혁이의 반문에 답하면서도 눈이 바쁘게 움직였다.

병원을 나설 때가 되어서야 떠오른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상점과 마찬가지로 튜토리얼 중에는 사용이 불가능했던 커뮤니티 기능.

커뮤니티가 활성화됐다는 메시지 덕분인지 창이 정상적으로 떴다.

이미 대여섯 개의 글이 올라와 있었고, 댓글은 그보다 훨씬 많았다.

하지만 내가 보고 있는 건 다른 플레이어들이 작성한 게시글이 아니었다.

「플레이어 98.」

커뮤니티 최상단에 적힌 숫자를 보고 있자니 저절로 이가 악물린다.

100에서 딱 2가 빠진 숫자였다.

승급 시험 미션에서 줄이 그어졌던 이름의 개수와 똑같다.

'플레이어 선발 메시지에 100이라고 되어 있었지.'

그 중 둘이 죽은 것이다.

내가 보았던 시체가 다시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난 구토감을 억지로 삼키며 눈에 힘을 주었다.

'98....'

숫자를 가만히 들여다보기도 있자니 무언가 이상했다.

'튜토리얼도 만만치 않았는데.'

100명에서 고작 둘 밖에 죽지 않았다니.

생각을 하다보니 하나 걸리는 점이 있었다.

'보호구역.'

튜토리얼이 진행되었던 그 하얀 공간.

그리고 괴물이 나타났던 숲.

두 장소의 차이는 보호구역의 여부였다.

'튜토리얼에선 실패했어도 죽지 않는 거였나?'

내 추측은 정확했다.

「제목 : 올 클리어.」

짧은 제목의 게시글에 그와 관련된 정보가 떡하니 적혀 있었다.

「내용 : 올 클리어 한 놈들 인간이 아닌가 봐. 사자 어떻게 잡은 거지? 난 사지가 찢기느라 바빴는데. 실패 안 떴으면 무조건 죽었을 걸.」

- 사자보다 북극곰 죽인 게 더 대단한 것 같은데.

⌎맞아, 난 한 방 맞고 기절했어. 깨어나니까 실패 알림 떠 있더라.

⌎곰은 창이 나왔잖아. 놈의 체중으로 찔리도록 유도하면 잡을 수 있어. 사자가 더 대단한 거야. 3마리나 있었는데.

⌎그래서 네가 곰을 잡기는 했고? 웃기는 놈이네.

- 2, 3단계를 어떻게 클리어한 건지도 궁금한데, 지금 뭐 하고 있는지가 더 궁금해.

⌎미션에서 뭐 받았을까요? 좋은 거 줬을 것 같은데. 시스템은 계속 성적에 집착했잖아요.

⌎그건 모르는 일이야.

⌎특별 혜택 맞을 걸. 시스템이 괜히 성적을 집계한 게 아니거든. 나 걔 잡았을 때 5등 해봤어. 상위 성적권자한테는 추가 보상 준다. 추가 미션 진행한 올클 중에서도 상위권, 걔들은 뭐든 하나씩 더 받았을 거야.

⌎부럽다.

- 굵은 댓글은 작성자입니까?

⌎응, 이거 나야.

- 난 올클 안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데. 플레이어 숫자가 줄었잖아. 나머지는 전부 보호구역에서 기다렸을 텐데 숫자가 줄어들 이유가 없지. 올클 중에 두 명이 죽은 게 분명해.

⌎말도 안 돼, 미션 끝나면 부상 회복되는 거 아니었어?

⌎튜토리얼이었잖아. 보호 구역이라는 말도 떴고.

⌎튜토리얼 끝나면 치료해주지 않는다는 건가요?

⌎보통 게임에서도 그래. 튜토 중에는 캐릭터가 손상되지 않거든.

- 코카콜라 망할 자식들.

⌎북극곰한테 엄청 두들겨 맞았나 보네. 하하하하.

튜토리얼에서 실패한다고 해서 죽지는 않는다. 거긴 보호구역이니까.

난 실패하지 않아서 몰랐지만, 실패했던 플레이어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아주 잠깐, 튜토리얼 중에 한 고생이 생각나서 화가 났지만.

이미 화낼 타이밍이 지난 지 오래였다.

거의 해탈한 심정으로 한숨을 내쉰 난 댓글을 하나하나 다 읽었다.

'커뮤니티에서는 자동 번역이 되나 보네.'

국적이 다른 플레이어들을 위해 자동 번역 기능이 있는 모양이다.

군데군데 어색한 문맥이 보였지만 내용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문제는 댓글 중에 쓸만한 정보도 없었다는 것이겠지.

결국 난 다른 글을 보고자 메인 페이지로 되돌아갔다.

"응?"

하지만 정작 다른 글은 누르지 못하고 움찔거렸다.

직전까지는 없던 새 글이 올라와 있었으니까.

「제목 : K, 할 말이 있어요.」

커뮤니티의 글은 모두 익명이었다.

게시글은 물론이고 댓글도 작성자가 누군지 나오지 않는다.

그런 곳에서 나와 관련된 단어가 언급되었다.

'케이라니....'

내 코드명과 동일하지 않나.

저게 정말 내 코드명을 뜻하는 거라면 할당 표를 봤다는 의미다.

결론적으로 나를 제외하면 같이 승급 시험 미션을 했던 여섯, 아니, 둘이 죽었으니 넷 중에 한 명이라는 거고.

그놈들 중 누군가가 나를 찾고 있다는 건데.

'왜?'

제목을 보고 망설이던 난 일단 게시글의 내용을 확인해보기로 했다.

저걸 본다고 해서 큰일이 나는 건 아니었으니까.

「꼭 말해주고 싶은 게 있어요. 목숨 값을 갚고 싶다고 말하면 이해할 수 있을까요? 당신이 K라면 비밀 댓글을 달아줘요. 도움이 될 거예요.」

내용을 보자 이 글을 누가 썼는지 감이 잡혔다.

'목숨 값 어쩌고 하는 걸 보면 에단인 것 같은데.'

내가 창을 띄워 놓고 고민하는 사이 빠르게 댓글이 붙기 시작했다.

그것들을 지켜보던 난 짧은 문장을 댓글창에 입력했다.

에단의 말대로 댓글에는 비밀 기능이 있었다.

잘 된 일이다. 굳이 타인에게 대화의 내용을 공개할 필요는 없으니까.

-(비밀 댓글) 에단이냐?

내 댓글을 기다리고 있기라도 했던 건지, 곧바로 답글이 달렸다.

⌎(비밀 댓글) 내가 처음으로 다쳤던 곳을 기억하나요?

⌎(비밀 댓글) 네 신원부터 확실히 밝히는 게 어때?

⌎(비밀 댓글) 당신이 누군지 모르는 이상 싫어요.

깐깐하기는.

난 짧게 혀를 차며 댓글을 이어 달았다.

⌎(비밀 댓글) 목, 혀에 졸려서 멍이 들었던 것 같은데.

⌎(비밀 댓글) 정말 당신이군요. 예민하게 굴어서 미안해요. 코드명에 실명이 기재되서, 다른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미션이 끝날 때는 의식이 없어서 인사도 못했는데... 정말 고마웠어요, 당신이 아니었으면 난 죽었을 거예요.

⌎(비밀 댓글) 너도 에단이 맞는지 증명해야 하는 거 아니야?

⌎(비밀 댓글) 신체 특징을 말해주면 될까요? 갈색 머리카락에 파란색 눈동자, 키는 6.2ft가 넘고요. 당신은 아시아인이었다는 것만... 아, 내가 다치는 바람에 당신이 계속 업어 줬어요.

'6.2피트면... 190센치가 좀 넘나?'

내가 아는 단위 환산 기준에 따르면 에단의 키와 비슷했다.

커다란 덩치로 훌쩍거리던 에단의 얼굴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당장 언급된 내용만 보면 에단이 맞네.'

업고 다녔다는 말을 보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를 데리고 다닐 때는 다른 플레이어를 마주친 적이 없으니까.

글쓴이가 에단이라는 게 확인되자 의문이 든다.

빌어먹을 시스템

13화

제3장 시스템(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