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족장의 전신에서 자줏빛 파장이 폭발하듯 터져 나온 건 거의 동시였다.
카가가가각-
하지만 푸른 신성력이 만들어 낸 궤적은, 그 파장조차 갈라 버렸다. 이안은 멈추지 않고 끝까지 팔을 휘둘렀다. 궤적이 족장의 목을 휩쓸고 지나간 순간, 신성력에 갈려 나간 마력이 그대로 폭발했다.
콰과과광-
거기에 휩쓸리는 것까진 피할 수 없었다. 땅에 처박힌 이안이 튕겨 나가며 바닥을 굴렀다. 아직도 타오르듯 일렁이는 신성력이, 그의 움직임을 따라 어지러운 곡선을 그렸다.
촤아악, 온몸이 저린 와중에도 어떻게든 자세를 다잡은 이안이 착지했다. 아물었던 얼굴의 상처가 다시 터졌다. 몸에 걸친 방어구들도 곳곳이 찌그러지고 부서졌다. 왼팔이 덜렁댔다. 부러진 게 아니라 어깨가 빠진 거였다. 어쩌면 부러지기까지 한 건지도 몰랐다.
'이건 예상 못 했는데. 무식한 새끼 같으니….'
그렇다 해도 족장의 상태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놈의 목은 톱으로 난도질해 자른 것처럼 엉망진창으로 잘려나가 있었다. 머리를 잃은 몸이 통나무처럼 뒤로 넘어갔다.
그사이 단죄의 검을 아공간에 넣은 이안이 왼팔을 움켜쥐며 일어났다. 뿌득, 빠진 팔이 제자리를 찾았다. 눈앞이 아찔해지는 느낌이었지만, 고통에 머뭇댈 시간은 없었다.
족장이 아직 죽지 않았으니까.
잘린 머리의 단면에서 끈적한 살점이 촉수처럼 번져 나오고 있었다. 잘린 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펑-
이안은 걸음을 옮기며 머리로 화염구를 발사했다. 하지만 살점이 조금 지글댈 뿐이었다. 재생하려는 움직임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런 몸을 가지고도 고통을 감내하고 싸울 생각을 하지 않다니….'
떨어진 머리 앞으로 다가선 이안이, 놈의 세 번째 눈에 박힌 운철 단검을 단숨에 뽑아 들었다. 눈알에 맺힌 피가 부글대면서, 단검 날을 벌써 반 이상 밀어낸 상태였다.
족장의 몸을 돌아본 이안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마력 탐지.
'여기군.'
그의 시선이 놈의 오른쪽 가슴에 멈춰 선 그때였다.
"...!"
반 이상 썰려 나간 목덜미의 촉수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남은 눈알들이 일제히 마력을 방사했다. 시야가 뒤엉키고 감각이 교란됐다. 어지러운 환영. 마력을 끌어올려 저주를 떨치던 이안이 불현듯 몸을 옆으로 틀었다. 육감이 경고를 보냈기 때문이다.
콰직!
몸을 스치는 파공음과 함께, 방금까지 그가 서 있던 땅에 기다란 뼈 칼날이 박혔다. 족장의 어깨에 돋아난, 뼈로 만들어진 다관절 칼날이 발작적으로 휘둘러진 것이다.
한 번이 끝이 아니었다.
촉수들이 쉬지 않고 마력을 방사하고, 뼈 칼날이 이안을 노리고 휘둘러졌다. 육체를 지키기 위한 본능적인 방어 기제인 모양이었다.
'머리가 없으니까 오히려 더 수법이 다양해지네.'
하지만 이안에게 타격을 입힐 정도의 공격은 아니었다.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 피한 이안이 삽시에 족장의 몸 앞으로 다가들었다.
손날 방향으로 쥔 운철 단검에 혼돈력이 맺히고, 그대로 족장의 오른쪽 가슴팍으로 떨어졌다.
족장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꿈틀대던 촉수들이 순간 뻣뻣해졌다.
그때 이미 이안의 눈동자에는 잿빛 마력이 몰아치는 중이었다. 동공 한복판에 보랏빛이 더해진 다음 순간.
퍼억-!
족장의 가슴팍이 통째로 터져 나갔다. 뼈와 살점이 사방으로 튀었다. 온몸에 그 잔해를 뒤집어쓰면서도, 이안은 그 사이로 드러난 새카만 심장을 바라보았다. 자주색 마력을 가득 머금고 이 순간에도 뛰고 있었다. 지렁이처럼 뻗어 나온 살들이 삽시에 그 위를 덮었다.
이안은 망설이지 않고 다시 단검을 내리찍었다.
콰득-
운철 단검이 심장을 꿰뚫었다. 이안은 혼돈력을 밀어 넣었다. 한 줌이면 충분했다.
심장의 자줏빛이 짙어지고, 다음 순간 번쩍이며 퍽 터져 나갔다. 물리적인 타격은 거의 없었다. 타르처럼 끈적한 파편이 얼굴을 비롯한 온몸에 튀었을 뿐.
족장의 남은 몸이 축 늘어졌다.
머리와 이어 붙었던 살점이 툭 끊어졌다. 섬뜩한 귀곡성이 이어졌다. 쩍, 허공에 균열이 일었다. 그 너머로 자줏빛이 아른댔다.
'그래, 왜 안 나타나나 했다.'
새카만 영혼이 그 너머로 빨려 들어갔다. 이안의 시야 한복판으로 퀘스트 완료 창이 이어졌다.
"하…."
그는 비로소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퀘스트 보상은 능력치 포인트 하나였다. 보스전치고는 짠 편이었지만 불만은 없었다. 이건 연계 퀘스트고, 아직 제단 퀘스트가 남아 있었으니까. 게다가 경험치도 상당히 많이 줬다. 이대로면 곧 또 한 번 레벨이 오를 터였다.
피로와 고통이 물감이 번지듯 느껴지기 시작했다. 온몸이 너덜너덜한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이안은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족장이 자신의 힘과 능력을 제대로 다룰 줄 아는 상태였다면, 이보다 훨씬 더 어려운 전투가 됐을 테니까.
게다가 어쨌건, 게임에선 클리어하지 못했던 퀘스트를 하나 더 해결한 셈이기도 했다.
그때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물론, 이로 인해 일어날 변화는 그다지 크지 않을 터였다. 변방이 마경 천지가 되리란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으니까.
'변종 코볼트나 뒤틀린 트롤들이 더 번성하거나… 새로운 놈들이 튀어 나오겠지."
혼혈 고블린의 빈자리를 채울 것들은 차고 넘칠 터였다. 적어도 이것들보단 덜 끔찍하고 역겨운 놈들이길 바랄 뿐이었다.
"끼- 아아아악-!"
"끼아아아악-!"
뇌를 긁어내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온 건 그때였다. 다소 느슨해졌던 긴장이 다시 팽팽하게 되살아났다.
고개를 돌린 이안의 미간이 구겨졌다. 혼혈 고블린들이 자주색 안광을 발광하고 있었다. 그 너머, 악착같이 전투를 이어 나가는 일행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쉴 때가 아니지."
운철 단검을 고쳐 쥔 이안이 일어섰다.
***
잔당 정리는 빠르게 끝났다. 이안이 합류한 덕도 있었지만, 혼혈 고블린들이 적아의 구분 없이 날뛰어댄 덕분도 있었다.
자욱한 안개 위로 베이고 찔리고 토막 난 시체들이 가득했다.
"하아… 하아…."
그 한구석에서, 일행은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숨을 골랐다. 다들 녹초가 되어 있었다.
"괜찮은 것이냐, 이안? 부상이 심각해 보이는데. 이리 와 보거라."
이윽고 메브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전신 판금 갑옷은 여전히 검붉었다. 신성력이 아니라 전부 혼혈 고블린의 체액이었다. 일행 중에선 그나마 가장 깔끔한 상태라 할 수 있었다.
필립과 샬롯은 흙먼지와 살점까지 뒤집어썼고, 이안은 말할 것도 없이 엉망진창이었으니까.
"보실 필요 없소. 괜찮으니까."
"엄청난 전투였다. 아무렇지도 않을 리가-"
"걱정하시는 건 알겠소만. 정말 괜찮소."
"…그래. 알았다."
이안이 덧붙이자, 메브가 머쓱하게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아직도 안면 가리개를 올리지 않은 터라, 표정까지 확인할 수는 없었다.
이안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몸을 돌렸다. 정말 버틸 만했다. 물론 두통과 무기력증이 느껴지긴 했지만, 어쨌건 육체의 상처는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얼굴의 상처에는 벌써 딱지가 앉았다.
높아진 체력 수치보단 최고 레벨까지 올린 태초의 생명력 스킬 덕분일 터였다.
게임에서도 생명력이 낮아질수록 회복력과 회복 속도가 높아지던 스킬이었으니까.
현실이 된 지금은 심한 부상일수록 빠르게 회복되는 식으로 변했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안이 말들이 묶인 나무 쪽으로 향하자, 필립이 화들짝 일어섰다.
"그, 나리. 죄송합니다. 말을 다 지키진 못했습니다."
"그건 딱 봐도 알아."
이안이 심드렁하게 대답하며 멈춰 섰다. 필립이나 샬롯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 아까 같은 전투를 치르고도 살아남은 말이 있는 게 오히려 용했다.
'그냥 두고 왔으면… 그래도 다 죽었겠지.'
이안은 말들의 상태를 눈에 담았다. 북부에서 함께 온 두 마리는 겁에 잔뜩 질리고 탈진했을 뿐, 어쨌든 생명에는 이상이 없어 보였다. 다른 두 마리 중 하나는 이미 숨이 끊어졌다. 나머지 한 마리는 의식 없이 숨만 헐떡였다. 이놈이 살아남을지는 솔직히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당장 탈 순 없겠네."
"바로 또 어딜 가시려고요?"
"당연하지. 주위를 봐라."
굽혔던 허리를 펴면서, 이안이 덧붙였다.
"아직 마경은 그대로야."
"아."
필립이 그제야 탄식했다. 여전히 주위는 어두웠고, 안개도 자욱했다. 이안이 나무 앞에 기대앉은 샬롯에게로 다가갔다.
"움직일 수 있겠나?"
"문제없다."
샬롯이 도끼를 쥔 채 일어섰다. 그녀의 주황색 눈동자가, 엉망이 된 이안의 전신을 훑었다.
"꼴이 말이 아니군. 안에 남은 놈들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괜찮겠느냐?"
"네 꼴도 만만치 않아. 걱정 마라."
"그래도 너보단 나은 것 같군. 남은 놈들은 내가 앞장서서 처리하겠다."
이안의 대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한 샬롯이, 비탈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메브가 그 옆으로 따라붙었다.
"나도 돕겠다. 아직 여력이 있어."
굳이들 그러겠다면야…. 낮게 피식댄 이안도 그들의 뒤를 따랐다.
필립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저기, 잠시만요, 나리? 말, 말들은 어쩌고 그렇게들 가십니까?"
"근처에 남은 놈은 없어. 정 걱정되면 네가 지키든가."
이안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필립이 후다닥 달려왔다.
"그럴 수는 없죠. 저 안이 어떤 꼴인지,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습니다."
일행은 곧 비탈길로 접어들었다. 고깃덩어리처럼 변한 족장의 시체가 가까워졌다. 놈의 살점은 벌써 썩고 있었다.
"마경은 정말이지, 다양한 방식으로 끔찍하군요. 고블린조차 이런 괴물로 만들다니."
시체를 지나치며 필립이 읊조렸다.
이안이 어깨를 까딱였다.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거다. 우리가 운이 더럽게 없어서 하나뿐인 마경에 발을 들이게 된 건 아닐 것 같으니까."
필립은 물론, 앞서 걷던 메브도 순간 움찔댔다.
"이런 식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마경이 여럿일 거란 말씀이십니까?"
"가능성은 충분하단 얘기야. 말했듯이 지금은 전쟁 중이니까."
"…하지만 관도를 따라 이동하는 동안엔, 마경에 들어선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요."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필립. 검은 벽의 광기는 인적이 드물고 외진 곳에 먼저 고이게 마련이니까."
덧붙인 건 메브였다.
"광기에 물든 땅이 늘어난다면, 언젠간 관도도 안전하지 않아지겠지."
필립의 낯도 그제야 굳어졌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전쟁을 멈춰야 합니다. 죽음과 광기가 더는 범람하지 않게요."
"땅을 손에 넣거나 잃은 왕들이 그 말을 들을까? 이미 막대한 병력과 지출을 감수한 영주들은?"
"...."
이안의 심드렁한 말에, 필립이 입맛을 다시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들에게 마경이 생겨나고 있다 말한들, 신경조차 쓰지 않으리라.
오히려 적들을 마경에 밀어 넣으려 들지도 몰랐다. 그 후에 일어날 결과 따윈 생각지도 않으리라. 제국의 교단에 도움을 청하면 되리란 식의 맘 편한 결론을 내리겠지.
"…제국에 이 사실을 알리는 건요? 교단은 어떻습니까?"
"제국이 변방에 관심이 있었다면, 전쟁을 용인하지도 않았겠지."
말한 건 뜻밖에도 샬롯이었다. 그녀가 필립을 돌아보며 덧붙였다.
"제국이 변방을 도울 리 없어. 아무런 이득도 없으니까. 황제나 제후들을 움직이려면 그만한 대가가 필요하단 거다. 그게 제국의 방식이지."
"하지만… 결국은 제국에도 위협이…. 하긴. 그건 그때 가서 대응해도 될 문제죠. 제국이니까…."
필립이 가라앉은 눈으로 중얼대는 가운데, 일행은 부락에 들어섰다.
본래도 폐허였거나 작은 산중 마을이었던 듯, 울타리조차 제대로 둘러 있지 않았다. 곳곳에 크고 작은 낡은 건물들이 불쑥불쑥 솟아있을 뿐. 그 사이로 흐르는 안개가 음산했다.
타타탓, 거친 숨소리와 발소리들이 가까워진 건 그 직후였다.
"...!"
전투 자세를 취하던 샬롯의 미간이 순간 구겨졌다. 개와 멧돼지가 뒤섞인 듯한 커다란 짐승 몇 마리와 함께, 본래 고블린 정도의 신장을 가진 작은 녀석들이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새끼들도 잔뜩이었군."
역겹다는 듯 중얼댄 샬롯이 몸을 날렸다. 메브가 그 뒤를 따랐다.
둘은 달려오는 모든 것들을 일말의 자비도 없이 전부 베어 넘겼다.
이안은 태연하게 그 가장자리를 지나쳐, 저만치의 문 닫힌 건물로 향했다. 그는 부락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마력 탐지를 사용하고 있었다. 몇몇 건물에서 오염된 마력이 느껴졌고, 저기도 그중 하나였다.
본래는 마구간이나 창고로 쓰였을 법한 건물.
뒤따르던 필립이 중얼댔다.
"여긴 정상적인 게 하나도 없군요. 저 짐승은 또 뭐고. 무슨 일이 생겨서, 가뜩이나 징그러운 고블린들이 저렇게까지 역겨운 몰골이 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계속 모르는 게 좋을 거다."
"예…?"
이안이 걸음을 늦추며, 앞의 문을 턱짓했다.
"물러나 있어라. 문을 열 거니까."
"제가 열겠습니다, 나리."
"네가?"
"이런 사소한 일들을 처리하는 게 종자의 역할 아니겠습니까."
자신만만하게 내뱉은 필립이 냉큼 앞서갔다.
괜찮나, 저거.
이안이 입맛을 다시는 사이, 방패와 검을 고쳐 쥐며 자세를 다잡은 필립이 닫힌 나무 대문을 박찼다.
문이 벌컥 열리고, 거친 숨결과 푸드덕대는 소리가 이어졌다.
방패를 치켜든 채 어둠 너머를 노려본 것도 잠시.
"제기랄, 루 솔라여…."
필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139화
"이 천벌 받을 것들…."
이안은 탄식하는 필립의 뒤로 다가섰다. 역겨운 악취가 번졌다.
"비켜 봐."
"안 보시는 게 좋으실 것 같습니다만…."
"자꾸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그제야 방패를 내린 필립이 옆으로 물러났다. 이안은 비로소 어둑어둑한 장내를 눈에 담았다.
코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악취. 배설물과 피가 뒤섞인 점액질이 흥건하고, 그 위로 온갖 뼈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 뒤론 썩어가는 시체 토막들이 쌓여 있었는데, 인간과 짐승이 마구 뒤섞인 채였다. 필립은 아마, 이걸 보고 탄식한 것이리라.
그리고 그 너머에 크고 작은 붉은 안광들이 번뜩였다. 이안은 그 경계심 가득한 시선을 담담하게 훑어보았다.
"...."
가장 먼저 보인 건 덩치가 커다란 혼혈 고블린 몇 마리였다. 놈들은 벽에 바싹 붙은 채로 고기 조각이 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댔다. 배가 부자연스럽게 크게 부풀어 있기까지 했다. 놈들의 주위로는 밖에서 본 것보다도 작은, 말 그대로 갓 태어난 듯한 새끼들이 우글우글 달라붙어 있었다.
일종의 부화장인 거군.
생각하던 이안은, 문득 배가 부른 고블린들을 다시 눈에 담았다.
공허의 마력이 느껴져서였다.
마력 탐지로 확인한 건 이놈들이 풍기는 마력이었던 모양.
그러고 보니 성별을 구별할만한 특징도 전혀 없고, 오히려 덩치가 아주 크고 근육질이기까지 했다.
그건 이안이 상대했던 부족장들의 특징과도 정확하게 일치했다.
당연히 전부 수컷일 줄 알았건만.
'설마, 족장도…?'
눈앞의 광경만큼이나 역겨운 가정이었다. 이안이 혀를 찰 찰나, 필립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찾으시는 게 있습니까, 나리?"
"아니. 없는 것 같군."
"그럼, 이제 처리하겠습니다."
"아까 그 신성력, 더 쓸 수 있냐?"
이안이 몸을 돌리며 물었다. 다가오는 메브와 샬롯이 보였다. 필립의 대답이 이어졌다.
"보셨군요. 성물에 깃든 은총입니다만. 아쉽게도 앞으로 며칠은 제대로 사용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럼 너도 그냥 따라와라."
"예…?"
이안이 걸음을 옮기며 덧붙이자, 필립이 눈을 치켜떴다.
"나리. 설마, 제가 못 미더우십니까?"
죽을 수도 있다니까 그러네.
이안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샬롯에게 눈짓을 보냈다. 성큼성큼 다가오며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이안을 지나쳤다.
이윽고 부화장 내부를 잠시 응시한 샬롯이 필립을 돌아보았다.
"널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새끼를 지키는 어미들은 평소보다 더 강한 법이지. 내게 맡겨라."
"…예."
별수 없다는 듯 대답한 필립이 몸을 돌렸다. 샬롯은 이미 피범벅인 전투 도끼를 한구석에 내려놓고, 양손에 송곳니 검과 단검을 뽑아 들었다. 그녀를 돌아본 이안이 덧붙였다.
"변이할 수도 있는 놈들이다. 알아 둬."
고개를 끄덕인 샬롯이 단검을 고쳐 쥐며 장내로 성큼 들어섰다. 그녀가 필립이 열었던 대문을 다시 천천히 닫았다. 번뜩이는 주황색 눈이 문틈 사이로 사라졌다.
걸음을 옮기는 이안의 뒤로, 고블린들의 비명과 터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따라붙었다.
"뭘 보았기에 표정이 그런 것이냐?"
소란스러운 부화장을 일별한 메브가 물었다. 이안이 내뱉었다.
"암컷 고블린들과 새끼들이었소. 그리고 시체들."
"아하."
"평생 꿈에 나올 것 같은 광경이었습니다. 시체들은 칼로 토막 낸 게 아니었어요. 손으로 찢은 겁니다. 게다가 그 덩치 큰 놈들의 배는 또 어찌나 부풀어 있던지…."
뒤따르던 필립이 우울한 목소리로 중얼댔다. 메브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변이되었어도 기본적인 특성까진 변하지 않은 모양이구나. 예전, 도감에서 읽은 그대로야."
"…도감이요?"
"한 번쯤 읽어 보라 했었거늘. 끝내 펴 보지도 않은 모양이구나. 거기에 적힌 바에 따르면, 고블린들은 암컷이 더 크고 강하다더구나. 그래야 출산을 견딜 수 있기 때문일 거라더군. 임신 기간도 짧고, 한 번에 다섯에서 열 마리까지도 새끼를 낳는다고 했다. 암컷 중에서 가장 크고 강한 놈이 우두머리가 되고."
"시발…."
"음? 못 들었다. 뭐라고 하였느냐, 이안?"
"아무것도 아니오."
이안은 고개를 털며 걸음을 옮겼다.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걸음은 곧 오두막 앞에서 멈췄다. 안에서 흐릿한 마력이 번지고 있었다.
"여긴 아닐 것 같은데…."
그가 읊조리는 사이, 필립이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좀 전에 본 광경 탓인지, 마음의 준비를 하듯 심호흡한 그가 문을 박찼다.
"윽… 역시…."
이어진 악취에 혀를 찬 것도 잠시. 다시 한 번 인상을 찌푸린 필립이 안으로 들어섰다.
뒤따라 들어선 이안도 설핏 미간을 좁혔다. 역시나 이번에도 제단은 없었다. 대신 더 끔찍한 광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썩은 짚단이 깔린 장내 곳곳에, 알몸으로 묶인 남자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팔이나 다리가 하나씩 없거나, 둘 다 없는 채였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는 텅 비어있고, 눈가로 자줏빛이 아른거리는 혈관이 꿈틀댔다. 오염된 마력에 젖은 채로 짐승처럼 방치된 것이다.
"이건… 설마…."
산전수전을 다 겪은 성기사와 종자에게도 욕지기가 치미는 광경이었다. 파리해진 안색으로 중얼댄 필립이 이안과 메브를 돌아보았다.
"제가 생각하는 그게, 맞습니까?"
"…그런 것 같구나. 이상하다 여기긴 하였다. 아무리 변이되었다지만 마법을 부리고 말까지 하는 고블린은, 말이 되지 않지. 하지만 인간의 피가 섞인 거였다면…."
"믿을 수가 없군요. 마물이 어떻게 인간과… 이런…."
"마경이라 가능한 거겠지. 여긴 밖과는 다른 법칙으로 돌아가니까. 어쩌면 이 안에선, 모든 게 접붙을 수 있는 건지도."
이안이 덤덤하게 덧붙였다.
"그럼 그 암컷들이… 제기랄… 루 솔라여…."
필립이 기도문을 읊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도 이안의 뇌리로는 원치 않는 역겨운 가정들이 스치고 있었다. 왜 남자들만 있는 건지 따위에 대한. 굳이 입 밖으로 낼 필요는 없는 생각들이었다.
"으… 으으…!"
남자들이 꿈틀대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얼굴의 자주색 핏줄이 선명해지고, 그들은 울부짖거나 울어댔다. 오염된 마력의 영향으로 아예 미쳐 버린 모양이었다. 이들에겐 차라리 그게 축복이리라.
"…이들에겐 제가 안식을 주겠습니다. 두 분은 가십시오."
기도를 끝낸 필립이 내뱉었다. 검을 으스러지듯 움켜쥔 채였다. 비장한 뒷모습에, 이안은 더 덧붙이는 말 없이 몸을 돌렸다.
조용히 그의 곁으로 따라붙은 메브가, 건물에서 완전히 벗어나고서야 입을 열었다.
"변방의 미래가 걱정되는구나. 전쟁이 끝날 때쯤엔 저주와 광기로 가득한 흉지로 뒤덮일지도 몰라. 그땐 그 누구도 승자가 되지 못하겠지."
이미 그렇게 된 것 같소만.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어깨만 으쓱였다. 그녀의 진심에 굳이 재를 뿌릴 필요는 없었다.
"제국에 발을 들이면, 교단의 대교회에 서신을 보내야겠다. 그간 내가 보고 겪은 것들을 소상히 알려야겠어."
"...."
이안이 돌아보자, 메브가 재빨리 덧붙였다.
"염려 말거라. 교단에 네 이름이 알려지는 일은 없게 할 테니."
"그래서 본 게 아니오."
어차피 교단은 이미 내 이름을 알고 있고.
"그럼?"
"교단은 망령 군단이 북부를 침공한 순간에도 지원군을 보내지 않았소. 모든 일이 끝나고 나서야, 조사단을 파견했을 뿐이지."
이어진 덤덤한 말에, 안면 가리개 너머에서 옅은 숨소리가 번졌다. 메브가 미소 지을 때 번지는 숨결이었다.
"내가 실망할 것을 염려한 것이로구나. 걱정 말거라. 나도 그리 큰 기대는 없으니. 하지만 성기사의 서신이라면, 적어도 변방의 위협을 인지하고는 있게 되겠지."
"…뭐, 그러시다면야."
이안이 어깨를 까딱인 그때였다.
"키아아…."
몇 마리의 혼혈 고블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개와 멧돼지가 섞인 듯한 짐승들도 놈들의 곁에서 짖어 댔다. 다들 눈에 자주색 마력이 이글대는 채였다.
제대로 찾아 온 것 같은데.
생각하며, 이안은 놈들 너머의 목조 주택을 바라보았다.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심상치 않은 불길함이 전해졌다.
"이놈들은 내가 상대하겠다. 너는 마경의 핵을 찾는 데에만 집중하거라."
내뱉은 메브가 몸을 날렸다.
키아악, 혼혈 고블린과 마수들도 기다렸다는 듯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놈들은 검광이 번뜩일 때마다 체액을 흩뿌리며 나가 떨어졌다. 그게 끝은 아니었다. 널브러진 것들이 꿈틀대며 변이하기 시작한 것이다.
걸음을 옮기며 이안이 덧붙였다.
"같이 싸우는 게 좋을 것 같소만."
"혼자서도 충분해. 필립과 샬롯도 곧 합류할 테고."
변이 중인 동족을 보호하듯 달려드는 고블린을 베어 넘긴 메브가, 가까워진 문을 가리켰다.
"들어가거라. 어서."
다들 날 못 지켜 줘서 안달이군.
생각하며, 이안은 선선히 문으로 다가갔다. 메브가 저것들에게 당할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안에서 하려는 걸 생각하면, 그녀가 보지 않는 편이 더 좋기도 했다.
탁.
안으로 들어선 이안이 문을 닫았다. 문 너머로 괴성과 고함이 이어졌지만, 그는 고요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장내를 훑었다.
엉망으로 어질러진 가재도구들. 쩍쩍 갈라진 판석. 그리고 바닥 한구석에, 지하로 통하는 비밀 문이 활짝 열린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
"타락자라도 숨어 살았던 건가…."
읊조리며 계단을 내려간 이안은, 제대로 찾아 왔음을 확신했다.
화륵, 그의 손에서 날아간 불꽃이 벽면의 횃불을 태웠다.
불빛이 지하 공간을 비췄다.
꽤 넓은 지하실. 혼자 파서 만들 수 있을 만한 크기가 아니었다. 돌을 쌓아 마감한 벽면 앞, 먼지가 뽀얗게 앉은 책상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안은 마구잡이로 방치된 책들을 훑어보며, 낮게 코웃음 쳤다.
"…흑마법사였네."
그는 펼친 채로 놓여 있는 책을 아공간에 대충 던져 넣으며 몸을 돌렸다. 저 너머에서 은은한 자주색 빛이 번지고 있었다.
걸음을 옮긴 이안은, 곧 그 실체를 눈에 담았다.
지하실의 가장 깊은 곳. 인간의 것으로 보이는 뼈들이 차곡차곡 쌓여 제단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그 위에 무릎을 꿇고 앉은 건, 다 삭은 로브를 걸친 백골이었다.
그런데도 허물어지긴커녕, 뼈만 남은 양손을 경배하듯 위로 치켜든 채였다. 손 한복판에는 두개골이 얹어져 있었다. 이 백골의 머리가 분명했다. 어깨 위가 텅 비어 있었으니까.
두개골의 이마 한복판에 커다랗게 새겨진 문자가, 자줏빛을 머금고 일렁였다.
이안도 읽을 수 없는 문자였다.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시야가 붉게 일렁이고, 끔찍한 환영이 뇌리를 스쳤다. 귓가로 알아들을 수 없는 속삭임이 번졌다.
물론, 이안의 정신을 오염시킬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흑마법사와 추종자들인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며, 이안은 제단 앞에 멈춰 섰다. 이대로 두개골을 부숴 버리면 퀘스트는 끝이리라.
하지만 이안은 운철 단검을 검집에 회수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문자에 손을 얹으면, 타락자 전용 이벤트가 시작되리란 걸.
퀘스트가 뜨지 않는 건, 그가 타락하지 않았기 때문일 테고.
'괜찮을까.'
잠시 망설인 건, 남은 능력치 포인트가 너무 적어서였다. 그의 정신을 붕괴시킬 만한 존재와 조우하게 된다면, 꽤 아슬아슬할 터였다. 하지만 감당할 만한 리스크였다.
혼돈의 파편은 마력량이 부족한 그에겐 더없이 중요한 자원이었다. 게다가 아직 알 수 없는 퀘스트의 보상으로 추가적인 능력치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결정적으로, 레벨 업이 코앞이었다.
"후."
결론 내린 이안은, 숨을 내쉬며 손을 뻗었다. 자주색 빛이 점점 짙어지고, 환영과 속삭임도 선명해졌다.
이윽고 손끝에 두개골이 닿은 순간.
푸확-!
자줏빛 섬광이 시야를 뒤덮더니, 세상이 뒤집혔다. 순식간에 모든 감각이 흐려졌다.
몇 번을 겪어도 적응이 안 되네.
내심 읊조린 그때, 시야가 다시 밝아졌다.
자주색 빛이 아른거리는 공허.
과거에 본 것과 비슷한, 하지만 훨씬 더 깊은 심연이었다.
그리고 저 너머에, 거대한 무언가가 떠있었다.
그건 비현실적으로 거대한 꽃봉오리 같아 보였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봉오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안은 그제야, 그것이 수많은 손이나 손과 비슷한 촉수들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새카맣고 일렁이는 몸통 한복판에서, 무수히 많은 자주색 빛이 피어올랐다.
그 하나하나가 전부 안광이라는 걸 깨달은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이런, 시발….'
내적 탄식이 절로 이어졌다. 저게 뭐건, 그를 인식한 게 틀림 없었기 때문이다.
안광이 밝아졌다. 이해할 수 없는 속삭임이 뇌리를 파고들었다. 저 존재의 의념일 터였다. 동시에 본능적인 공포가 치밀었다.
이안은 이성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이런 환영이 길게 이어질 리 없었다. 잠깐만 견디면 다시 현실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하지만 쉽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개미를 짓누르듯. 밀려드는 의념은 그의 의식을 으깨버리려 했다.
아래에서 보랏빛이 일렁인 건, 그의 이성이 거의 날아가기 직전이었다.
시야를 덮던 자줏빛이 사라지고, 대신 어둠이 찾아 왔다. 속삭임이 잦아들고 고요가 찾아 왔다.
시야가 다시 넓어졌다.
이안은 비로소, 저 아래에서 일렁이는 보랏빛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솟구친, 전부 인식할 수도 없는 거대한 무언가도.
시야가 어두워진 건 그 존재가 그의 앞을 가로막아서였다.
이건 또 뭔데…?
그 존재를 인식하려 애쓴 그때, 모든 게 점이 되어 멀어졌다.
뒤집힐 때 만큼이나 한순간에, 모든 감각이 되돌아왔다.
"헉… 허억…."
이안은 숨을 헐떡이며 주저앉았다. 퍼석, 두개골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제단이 와르르 무너졌다. 뼈 더미 한복판에서도, 그는 그저 숨만 몰아쉬었다. 아직도 방금 본 환영과 영혼을 짓누르던 속삭임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건 대체 뭐였지…?'
퀘스트 완료 창이 연달아 이어졌다.
예상대로 하나가 아니었다.
뒤틀린 혼돈의 제단. 그리고 공허의 주시자들. 물론 이건, 받은 적 없는 퀘스트였다.
'주시자들? 뭐, 날 지켜보기라도 한단 거야?'
어쨌든 소득은 있었다. 퀘스트 보상으로 경험치와 함께 정신력이 또 하나 오른 것이다. 레벨이 오른 건 덤이었다. 현실이 된 이후로 두 번째 레벨 업이었다.
"이안…! 괜찮은 것이냐?!"
생각 정리를 끝내기도 전에, 다급한 탄식과 함께 억센 손길이 그를 일으켜 세웠다. 메브였다.
안면 가리개 너머의 표정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눈을 부릅뜨고 있을 게 분명했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거지?
생각하는 사이, 그의 얼굴을 확인한 메브가 다시 한 번 탄식했다.
"괜찮지 않구나. 눈을 깜빡이지 말거라. 피가 흐르고 있으니."
"...."
이안은 그제야 눈코입에서 전부 피가 흐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보다 놀라운 건 메브의 반응이었다.
"무모했다. 자칫하다간 죽을 수도 있었어."
"다, 보신 거요?"
"네가 핵을 움켜쥐고 있던 것 말이냐? 그래. 보았지. 번쩍이던 공허의 마력이 사라지던 것까지 전부."
그런데도 이렇게 태연하다고…?
이안의 시선에 메브가 되물었다.
"왜 그렇게 보느냐?"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셔서 말이오."
안면 가리개 너머로 낮은 웃음이 번졌다.
"뭔가 이유가 있지 않겠느냐. 애초에 의문을 가질 거라면…."
어깨를 더 단단하게 부축한 메브가, 그를 돌아보았다.
"널 무슨 색의 마법사라고 불러야 하는지부터 궁금해했겠지."
"...."
비로소 이안의 입가에 옅은 헛웃음이 번졌다. 그래, 이상한 게 너무 많아서 오히려 그러려니 한다 이거지.
메브가 그의 몸을 잡아 끌었다.
"일단 나가자꾸나. 핵은 파괴되었고, 밖에 필립과 샬롯도 기다리고 있다."
"다들 합류했소?"
"그래. 그러니 내가 내려온 것이지."
"그럼, 필립을 부릅시다."
"필립은, 왜?"
"여긴 흑마법사의 연구실이오. 쓸만한 게 있나 뒤져 봐야 하지 않겠소?"
잠시 어이없다는 듯 이안을 돌아본 메브가, 이윽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래. 내려오라 하자꾸나."
#140화
필립의 수색은 성과가 있었다.
그는 지하실에서 오염된 정수가 담긴 작은 상자를 들고나왔다. 전부 하급 정수이긴 했지만, 어쨌건 세 개나 됐다.
흑마법사가 만든 정수일 터였다.
'어차피 쓸데없는 스킬 한가득이긴 한데, 나도 정수 제작 하나쯤 찍을 걸 그랬나.'
질색하는 표정의 필립에게서 정수를 받아든 이안은, 앞장서 고블린 부락을 빠져나왔다.
다행히도 살아남은 세 마리의 말은 어느 정도 기운을 차린 상태였다. 필립은 반색하며 녀석들에게 물을 먹였다. 죽은 한 마리는 미지근하게 식어 있었다.
"다리를 한쪽 떼어 갈까 하는데."
샬롯이 단검을 뽑아 들며 말했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큼직하게 떼라. 내일 아침까지 먹게."
"염려 마라."
샬롯이 곧바로 죽은 말의 뒷다리를 도려내기 시작했다. 아주 능숙하고 거침없는 손길이었다. 처음에는 불쌍하다는 듯 바라보던 필립도, 메브가 허벅지의 살점을 통째로 발골하자 침을 꼴깍 삼켰다.
아직 탈 수 있을 정도의 컨디션은 아니어서, 일행은 고삐를 잡고 걸어서 산기슭을 내려왔다.
마경은 닫혔지만 아직 안개가 자욱하고 하늘은 어두웠다.
"…말을 끌고 가길 잘했군요."
마차를 발견한 필립이 중얼댔다.
짐승들이 헤집은 듯한 모양새였기 때문이다. 부서진 건 아니었지만, 짐가방이 죄다 파헤쳐져 물건들이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육포 냄새라도 맡은 모양입니다. 싹 다 가져갔네요."
이안은 그게 정말 평범한 들짐승들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굳이 내뱉지 않았다. 죄다 녹초가 된 이 시점에 하기 좋은 말은 아니었다.
"그래도, 술병까지 깨지진 않았습니다!"
이내 씩 웃은 필립이, 가방 안쪽에서 술병과 주석 잔을 꺼내 들었다. 모닥불을 피우고 고기를 구울 준비를 하던 샬롯이 눈을 번뜩였다.
"잘됐군."
"적당히들 마셔라. 교대로 불침번을 서야 하니까."
모닥불 옆에 주저앉은 이안이 나른하게 읊조렸다. 눈만 감으면 바로 기절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도 레벨이 올랐으니, 한숨 자고 나면 제법 말끔해지리라.
"각자 한두 잔씩 마시면 끝일 겁니다."
냉큼 달려온 필립이 불가에 앉았다.
그의 시선은 불 위에서 통째로 구워지고 있는 살덩어리에 고정된 채였다.
샬롯이 몸을 돌리며 덧붙였다.
"익으면 적당히 칼로 도려내서 드려라."
"그런 건 걱정 마시고… 그런데, 어딜 가십니까?"
"개울을 찾으러."
그녀가 이안 쪽을 턱짓했다.
"이안은 씻는 걸 중요하게 여기니까."
이젠 알아서도 척척이군.
낮게 웃음 지은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멀리 가진 마라. 가는 길에 개울이 나오면, 그때 씻어도 돼."
"알았다. 오늘은 나도 찝찝하군."
내뱉은 샬롯이 훌쩍 몸을 날렸다.
빈말은 아닐 터였다. 그녀뿐 아니라 일행 모두가, 피와 흙먼지로 범벅이 되어 있었으니까.
"한 점씩 드십시오."
곧 필립이 단검으로 썬 고기를 잔가지에 끼워 내밀었다. 이안은 말없이 우물댔고, 그건 투구를 벗은 메브도 마찬가지였다.
핏방울이 점점이 튄 그녀의 얼굴에도 짙은 피로가 묻어났다. 필립이 술을 따른 잔을 건넸다.
전부 도적 기사의 산채에서 챙겨 온 것들. 잔을 받은 메브가 단숨에 들이켰다.
얼씨구, 진짜 술꾼 다 됐네.
이안이 소리 없이 피식대며 술잔을 입에 가져가는 그때, 잔을 내려놓은 메브가 입을 열었다.
"아까 전투 중에 보았다. 네가 다른 검을 사용할 때부터 짐작하긴 했다만. 내가 준 검이 부러졌더구나."
"…그렇소."
"탓하려 한 말은 아니다. 네 것이니, 어떻게 다루건 네 몫이지. 다만 신성력이 심상치 않아 한 말이야. 잠시 보여 줄 수 있겠느냐?"
"안 될 것 없지."
잔을 내려놓은 이안이 아공간에서 부러진 단죄의 검을 꺼냈다. 필립이 고기를 우물대며 탄식했다.
"나리께서 검을 깨뜨리는 게 한두 번이 아니긴 합니다만. 그 검까지 부러뜨리실 줄은 몰랐습니다."
"나도 놀랍긴 하구나. 여신께서 축복하신 검이라, 어지간해선 부러질 일이 없을 텐데."
"어쩌다 보니…."
입맛을 다신 이안이 머쓱하게 술잔을 들었다. 검을 건네받은 메브가 자루를 쥐고는 눈을 감았다.
곧 그녀의 입에서 나지막한 탄식이 번졌다.
"신성의 근원은 무사하구나. 아니, 오히려 내가 네게 주었을 때보다 더 선명하고 커졌군."
더 커졌다고? 이안은 고기를 우물대며 메브를 바라보았다. 눈을 뜬 그녀가 덧붙였다.
"여신의 눈에 들만한 업적을 여럿 쌓은 모양이구나, 이안."
"그런 식으로 신성의 근원이 커질 수도 있소?"
"그렇게 성물이 만들어지는 것이지."
그래서 단죄의 일격이 더 강해진 건가. 하긴. 저건 타락용의 심장을 찌른 검이었다. 게다가 그때의 티르엔은, 검이 견디지 못할 정도의 신성을 내렸었다. 그중 일부가 근원에 흡수되어 자리 잡았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아쉽구나. 부러지지 않았다면 머지않아 온전한 성물이 되었을 텐데."
"검날을 다시 살릴 방법은 없겠소?"
"글쎄. 잘 모르겠구나. 검신을 그냥 이어 붙일 수는 없을 테고. 검을 녹여 다시 만든다 해도, 신성의 근원은 흩어져 버릴 것이다."
이안이 아쉬움에 입맛을 다실 찰나, 그녀가 덧붙였다.
"하지만 방법이 아예 없진 않을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손상된 성물을 온전히 복원한 전례가 있으니. 엄정한 여신을 섬기는 사제를 만나게 된다면, 반드시 물어보도록 하마."
"…그럼, 부탁드리겠소."
방법이 있을 수도 있단 말이지. 가능성이 생긴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무적이었다.
어쨌거나 단죄의 검은 신성 스킬을 사용할 수 있게 해 주는 명검이었다. 지금까지 저것보다 좋은 검을 손에 넣은 적도 없었다.
복원해 온전한 성물로 만들 수 있다면, 앞으로도 그럴지도 몰랐다.
'남은 내구도를 보면, 단죄의 일격은 앞으로 많이 써야 대여섯 번 정도였지….'
아예 깨 먹지 않으려면 아껴 써야겠군. 고개를 끄덕인 이안은, 아까 얻은 퀘스트 보상들까지 차근하게 점검했다.
샬롯이 돌아온 건 그 직후였다. 숲으로 들어갔던 그녀는, 일행이 가야 할 계곡 길 쪽에서 돌아왔다.
"이 능선을 넘어가면 개울이 있다."
"그래? 그럼 내일 가는 길에 씻으면 되겠군."
미소 지은 이안이, 그대로 땅에 몸을 뉘었다. 좀 쌀쌀했지만 이 몰골로 모포를 덮고 싶진 않았다.
곧 메브도 몸을 뉘었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기절하듯 잠들었다.
다음 날 떠날 채비를 마쳤을 때쯤엔, 어느새 자욱하던 안개가 걷히고 있었다.
말 한 마리가 줄어든 일행이 산을 넘었다.
잿빛 숲과 완만하고 칙칙한 굽이진 언덕길이 그들을 맞이했다.
어느덧 벨 론데였다.
***
"그러니까, 지하에 궁전이 있었다고요? 그 안에는 거인 왕국의 마지막 여왕이 잠들어 있었고요?"
"그래. 이안이 그 여왕을 죽였다. 이 도끼가 거기서 가져온 물건이지."
"루 솔라 맙소사…. 얼핏 보기에도 보통 도끼가 아니다 싶긴 했습니다만…. 유물이었군요."
마부석에 샬롯과 나란히 앉은 필립이 탄성을 흘렸다. 옆에는 말에 탄 메브가 나란히 걸으며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중이었다.
"그렇다면, 거인 왕국을 진정한 의미로 멸망시킨 건 이안인 셈이겠군."
메브가 덧붙인 말에, 필립에게 전투 도끼를 보여주던 샬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 줄 알았었지. 그때는."
도끼날을 뚫어져라 훑던 필립이 홱 고개를 들었다.
"그때는…? 그리고 또 뭔가 있단 말씀이십니까?"
"글쎄. 지금 할 얘긴 아닌 것 같군."
"아니… 이걸 여기서 끊으신다고요? 아직 지하 궁전을 빠져나가지도 못했잖습니까."
"거래는 거래다. 징징대지 마."
"또 무슨 징징 씩이나…. 잠시만 기다리십쇼."
혀를 차던 필립이 뒤를 돌아보았다.
"거의 다 와 갑니다, 나리."
"그래."
의자에 기대앉아 고블린 둥지에서 가져온 일지를 읽고 있던 이안이 대답했다. 그를 잠시 묘한 눈으로 바라 본 필립이 덧붙였다.
"그건 재미 있으십니까?"
"전혀."
빈말이 아니었다. 다른 타락자들이 그렇듯 정신 나간 이야기만 잔뜩 적혀 있었으니까.
이걸 쓴 놈은 사역마, 즉 마물을 길들여 부리는 데에 관심이 많던 놈이었다.
그중에서도 고블린을 연구했는데, 가장 손쉽게 복종시키고 부려 먹을 수 있는 놈들이어서였다.
흑마법사는 그 이유가 고블린들의 영혼이 약하기 때문이라 여겼다. 그러니 육체만 쓸만하게 개량하면 최고의 사역마가 만들어지리라 결론 내렸다.
그래서 온갖 마물, 짐승과 고블린을 교배시켰다. 말 그대로 광기 가득한 연구. 그 광기의 종착지는 당연하게도, 인간이었다.
피난민 처녀를 하나 납치해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더 크고 말귀도 잘 알아듣는 혼종 고블린이 탄생한 것이다.
인간 여인의 몸은 고블린을 출산하는 걸 감당할 수 없으며, 혼종들은 번식의 욕구가 유독 강하니 이걸 억제할 방법만 찾으면 된다는 게, 그가 방금 읽은 부분이었다.
'이 뒤는 의미 없겠네.'
혀를 찬 이안은 몇 장 남지 않은 일지를 덮었다. 어쩌다 마경이 열린 건지, 그 자주색 공허를 뭐라고 부르는지 따위의 정보는 단 한 줄도 적혀 있지 않았다.
아마 관심도 없었으리라.
필립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런데도 거의 다 읽으셨군요."
"너희들이 하는 얘길 듣는 것보단 낫거든."
"그럴 리가요. 전 요즘 샬롯이 입을 열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만."
"너야 그렇겠지."
콧방귀 뀌는 이안을 바라보며, 필립이 넌지시 덧붙였다.
"얘기가 나와서 말입니다만. 거인 여왕은 어떤 존재였습니까? 그걸 직접 본 건 나리뿐이라면서요."
"다 지나간 걸…."
읊조리면서도, 이안은 짧게 입맛을 다셨다. 메브도 조용히 눈을 반짝이며 그를 돌아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상태로 헛된 야망에 눈먼 존재였다. 악마와의 힘겨루기에서 이기기만 하면, 거인 왕국을 재건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어."
"호오. 하지만, 듣자 하니 거인 왕국의 망령들이 실존했다면서요. 그러니 아예 허황된 야망은 아니었지 않겠습니까?"
"언데드 왕국도 왕국이라고 할 수 있다면야…. 그만 물어라. 네 옆에 앉은 녀석이나 닦달해."
나까지 귀찮게 하지 말고.
쯧, 혀를 찬 이안이 턱짓했다.
"정수는?"
"아, 예."
필립이 옆에 내려놓았던 정수를 들어 내밀었다.
장갑을 벗은 맨손. 중지에 루 솔라의 문양이 새겨진 낡고 굵은 금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필립의 설명에 의하면, 교단의 어떤 성자가 쓰던 성물이라고 했다. 어떻게 손에 넣게 됐는지 따위의 별로 궁금하지 않은 사연은, 물론 제대로 귀담아듣지 않았다.
중요한 건, 어쨌든 필립이 루 솔라의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됐다는 사실 뿐이었다.
"오염이 조금 정화되긴 했습니다만. 완전히 정화하려면 몇 번은 더 같은 작업을 반복해야 할 겁니다."
물론 루 솔라의 사도만큼 신성력을 많이 사용할 수는 없었다.
반지는 일종의 충전식 성물이었다. 해가 떠 있는 동안 내부의 근원에 신성이 쌓이는 구조였고, 먹구름이 자욱한 이곳에선 더 더디게 쌓였다. 그렇게 모은 신성력을 쬔 결과가, 지금 그가 내민 불그스름한 정수였다.
처음의 자줏빛에 비하면 색이 많이 옅어졌지만, 아직도 그냥 쓸 수준은 아니었다.
"수고했다. 며칠 뒤에 다시 부탁하도록 하지."
물론 불만 따위는 없었다. 자체적으로 오염된 마력을 정화할 방법이 생긴 걸로도 감지덕지였다.
성상이나 성물이 비치된 사원은 드물었고, 있다 해도 돈독이 오른 사제와 입씨름을 해야 할 테니까.
다각- 다각-
어느새 도시가 가까워졌다.
메브와 필립이 볼일이 있다던, 스톤빌이었다.
조금 큰 마을 정도였지만, 변방에선 이 정도면 충분히 도시라 부를 수 있었다. 성벽 대신 높다란 돌담이 도시를 감싸고 있었다. 언덕 위엔 그보다 더 높은 담벼락에 둘러싸인 커다란 장원이 있었다.
"그래도 여긴 사람 사는 동네 같군."
출입문을 지키던 병사들은, 일행을 한차례 훑어볼 뿐 앞을 가로막지는 않았다.
전신 판금 갑옷을 걸친 기사가 마차를 지키듯 말에 타고 있으니, 귀족이 방문했으리라 여긴 모양이었다. 어쩌면 애초에 출입 검문이 까다롭지 않은 건지도 몰랐다.
이안이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중얼대자, 필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긴 전선과는 제법 거리가 있으니까요. 어수선한 시기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제일 안정된 지역 중 하나일 겁니다."
"우리는 사원에 들를 것이다. 같이 가겠느냐?"
마구간에 들어서면서 메브가 물었다. 마차에서 내린 이안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동행이 필요한 일이오?"
"그렇진 않다. 싸울 일도 없을 거고."
"그럼 나랑 샬롯은 물자를 보충하고 숙소를 잡아 놓고 있겠소."
"그래. 그럼 식사도 먼저 하거라. 시간이 조금 걸릴지도 몰라."
"그런 당연한 말씀을."
피식한 이안이 몸을 돌렸다.
***
이안과 샬롯은 거리를 돌며 보존 식량과 여벌의 옷, 그리고 몇 자루의 검을 구입했다.
물자가 아주 풍족하진 않은지, 모든 물건이 상태에 비해 비쌌다.
물론 이안에겐 의미 없는 부분이었다. 지금 그의 주머니는 마르지 않는 샘물이나 마찬가지였다.
"쇠의 질이 좋아 보이지 않더군. 몇 번 쓰면 부러질 것 같던데."
여관 겸 주점으로 들어서며 샬롯이 말했다. 아직 대낮이라, 주점에는 손님이 그리 많지 않았다. 칼잡이로 보이는 몇몇 무뢰배들만이, 예고 없이 등장한 수인을 호기심과 경계심 섞인 눈으로 곁눈질할 따름이었다.
"별수 없지. 그래서 여러 자루 산 거다."
구석에 자리를 잡으며 이안이 말했다. 졸린 얼굴의 여급이 다가왔다.
"뭘 드릴까요?"
"스튜. 고기. 빵. 술. 알아서 그나마 괜찮은 걸로. 그리고 방도 두 개 줘. 하루 묵고 갈 거니까. 아, 목욕도 할 거야."
테이블 위에 동전을 차곡차곡 쌓으며 말한 이안이, 여급의 손에도 동전을 하나 쥐여 주며 덧붙였다.
"잠시 후에 일행이 둘 더 올 텐데. 그때도 같은 걸로 부탁해."
"네. 알아서 잘 챙겨 드릴게요."
자연스러운 손길로 돈을 챙긴 여급이 몸을 돌렸다.
이안은 느슨하게 기대앉았다.
오늘은 간만에 목욕다운 목욕을 하고, 그나마 따듯한 잠자리를 가지게 될 터였다. 위생 관념이 전혀 없어 보이는 촌구석 여관이란 사실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곧 앞에 음식이 깔렸다. 흔히들 영원한 수프라고 부르는, 매일 다른 재료를 넣고 끓이는 꿀꿀이 죽. 딱딱한 빵과 소시지. 그리고 맥주.
"너무 익숙한 맛이라, 고향에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군."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소시지를 입에 문 이안이 중얼댔다. 마찬가지로 우물대던 샬롯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넌 어디 출신이지, 이안?"
"그런 걸 묻기엔 함께한 시간이 너무 길지 않냐."
"그야 그렇다만…."
"뭐, 일단은 아겔 란 외곽의 늪지대라고 하지."
"…거긴 죄인이나 병자들이 유배 가는 곳 아닌가? 최악의 유배지 중 하나로 알고 있는데."
샬롯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이안은 다시 열리는 주점의 문을 돌아보며 어깨를 까딱였다.
"그럼 죄인 출신인 모양이지."
"...?"
샬롯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와중에, 이안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자를 눈에 담았다. 귀 끝이 뾰족한, 남자 요정이었다. 잿빛에 가까운 은발을 한데 묶고, 늪처럼 칙칙한 녹색 눈에 창백한 피부를 가진 자였다. 사슬 갑옷 위에 가죽 띠를 교차해 두르고, 허리에는 얇고 긴 검을 찬 채였다. 꽤 신경질적인 인상이었는데, 얇게 만 궐련을 입에 물고 있었다.
뒤따라 들어오는 일당들과 낄낄댈 때마다 입에서 연기가 번졌다.
풀 타는 냄새. 게임에서도 본 적 있는 광경이었다. 요정들은 자신들의 고향에서 재배한 약초를 말려서 저런 식으로 피워 대곤 했다.
'냄새는 딱 금연초인데. 맛도 비슷하려나…?'
이안이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어쨌든 중요한 건, 좀처럼 보기 힘든 요정을 마주쳤단 사실이었다.
'무작정 말을 걸면 시비 거는 줄 알 것 같은데.'
언젠가 요정을 만나게 되면 묻고 싶은 게 있었으니까.
자리에 앉으며 웃음 짓던 요정의 시선이, 이안이 앉은 테이블 쪽으로 향한 건 그 직후였다. 샬롯의 뒤통수를 응시하는 그의 눈매가 이윽고 설핏 가늘어졌다.
#141화
"하하. 아무리 스톤빌에 돈 냄새가 난다지만…."
곧 뾰족한 미소를 지은 요정이 연기를 자욱하게 토해내며 일어섰다. 이안의 테이블로 느긋하게 다가오면서, 그가 덧붙였다.
"하다하다, 이젠 역겨운 예비 마족까지 기어들어 올 줄이야."
외모만큼이나 싸늘한 목소리.
제발로 와주니 고맙긴 하다만….
태연하게 빵을 씹으면서, 이안은 샬롯을 바라보았다. 대수롭지 않은 얼굴인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시선에 이안이 작게 고개를 젓는 사이, 요정이 테이블 옆에 멈춰 섰다.
궐련을 바닥에 툭 떨군 그가, 불씨를 눌러 밟으며 말을 이었다.
"여기에 너 같은 역겨운 족속이 낄 자리는 없다. 수인. 그러니 조용히 처먹고 썩 꺼지는 게 좋을 거야. 칼데일 자작의 저택 바닥에, 가죽 장식으로 깔리고 싶지 않다면."
자작 밑에서 일하는 놈이었군.
이안은 소시지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칼데일 자작은 스톤빌의 영주였다. 언덕 위 장원의 주인이기도 했다.
어쨌건 요정은 이안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한 태도였다.
오히려 샬롯이 맥주를 마시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이안의 표정에 별다른 변화가 없음을 확인한 그녀가, 비로소 잔을 내려놓고는 낮은 웃음을 흘렸다.
"그래. 그 녀석 덕분에, 너희가 얼마나 비열한 족속들인지 잠시 잊고 살았군."
"원하면 언제라도 칼을 뽑아라. 짐승답게 사냥당하는 기분을 맛보게 해줄 테니."
송곳니를 드러내며 미소 지은 샬롯이 천천히 일어섰다. 허리를 꼿꼿이 편 그녀는 요정보다 머리 반 개 정도는 더 컸다. 그의 눈을 빤히 내려다보며, 샬롯이 말했다.
"너야말로 혼자선 자신이 없나 보군."
"뭐라고…?"
"그렇게 역겨우면 깔끔하게 네가 덤벼서 쫓아내면 될 텐데. 뒷배로 협박이나 하고 말이야."
"하… 당장 죽고 싶은 모양이군."
"너만 괜찮다면 얼마든지, 귀쟁아."
샬롯이 속삭이듯 말했다. 요정의 얼굴에 싸늘한 미소가 번졌다.
"그럼 가죽이 상하지 않게 죽여 주-"
내뱉던 요정의 목소리가 순간 늘어졌다. 예고 없이 손을 뻗은 샬롯이, 그의 멱살을 쥐고 그대로 테이블에 내리찍은 것이다. 동시에 요정의 한쪽 팔을 등 뒤로 꺾어 팔꿈치로 짓눌렀다. 술잔이 엎어지면서 맥주가 요정의 얼굴과 머리칼에 튀었다.
놈의 패거리들이 반사적으로 일어서는 가운데, 샬롯이 덧붙였다.
"죽이기 전에 귀부터 잘라 주마. 좀 따끔할 거야."
이미 예상하고 소시지가 담긴 접시를 한 손에 들고 있던 이안이, 단검을 뽑으려는 샬롯을 향해 내뱉었다.
"날붙이는 안 돼. 주먹만 써라."
그는 요정이 정당한 결투를 하리라 믿지 않았다. 수틀리면 도망쳐 지원군을 우르르 끌고 올 게 분명했다. 날붙이를 든 상태라면 상황이 심각해지리라. 더해서, 뜨거운 물이 담긴 욕조와 따뜻한 잠자리도 날아가 버릴 터였다.
물론 이건 부가적인 이유였다.
그는 이 요정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다. 하지만 샬롯이 칼을 들면 놈을 살려둘 리 없었다. 이안의 명령이 있다 해도, 기어코 죽여버릴 공산이 컸다.
샬롯이 단검을 다시 넣으며 대답했다.
"뭐, 그것도 나쁘지는 않-"
그때 꺾여있던 요정의 팔이 위로 휙 올라갔다. 인간이라면 불가능했을 유연한 움직임. 동시에 튕기듯 몸을 돌린 요정의 주먹이 샬롯의 턱으로 솟구쳤다.
샬롯은 팔을 놔버리며 뒤로 몸을 젖혔다. 벌떡 일어선 요정이 다가오는 패거리들을 짜증스럽게 돌아보았다.
"오지 마! 문이나 막아!"
멈칫한 그들이 순순히 물러났다. 무장 상태만 봐도 오합지졸들은 아니었다. 저마다 술잔을 집어 든 그들이 문가에 모여 섰다.
그사이 요정은 다시 샬롯에게 달려들었다. 샬롯과 마찬가지로 맨주먹이었다. 물론 강철 장갑을 끼고 있어, 그것만으로도 위협적인 무기가 되긴 했지만.
"호오."
뜻밖이라는 듯 탄성을 흘린 샬롯이 몸을 틀어 피하고는 반격했다. 요정도 이번에는 그녀의 주먹을 팔로 쳐내면서 품으로 파고들었다. 치고받는 난타전이 시작됐다.
빠악! 퍽! 와장창-
장내가 삽시에 난장판이 됐다. 테이블이 엎어지고 냄비가 날아다녔다. 식사를 이어가는 이안은 물론, 요정의 패거리들도 흥미진진하게 술을 홀짝이며 둘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어지간한 인간보다 훨씬 빠르고 힘이 센 두 종족의 난투극은 꽤 그럴듯한 볼거리였다.
빠각-
하지만 누가 우세인지는 금방 명확해졌다. 아무리 요정이라도 수인보다 강하지는 못했다. 그는 샬롯만큼이나 빨랐지만, 힘과 기술이 조금 부족했다.
물론 샬롯도 요정의 공격을 전부 피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어쨌거나 점점 더 놈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샬롯의 주먹에 맞은 요정의 고개가 이안 쪽으로 설핏 돌아왔다. 아까의 오만함과 여유는 찾아볼 수 없는 얼굴. 그 와중에도 눈동자가 묘하게 번뜩였다. 마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였다.
이안의 육감이 작은 경고를 보낸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누가 요정 아니랄까 봐.'
이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저놈의 속내를 알 것 같아서였다.
그때 샬롯이 다시 한번 주먹을 내뻗었다. 요정은 몸을 비틀어 어깨로 주먹을 받아넘기면서, 그녀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늘어뜨린 오른손에, 어느새 뾰족한 비수가 들려 있었다. 날이 더 섬뜩하게 번쩍이는 건 마력이 실려서였다.
주먹으로 덤빈 건 애초부터 공정하게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순간을 확실하게 만들어 내려는 의도였을 뿐.
요정이 그대로 샬롯의 옆구리를 향해 팔을 내뻗었다.
턱.
하지만 비수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
어느새 다가온 이안이 요정의 팔뚝을 콱 움켜쥐었기 때문이다.
무시하고 팔을 뻗으려던 요정은, 손길을 떨쳐낼 수 없다는 걸 깨닫자 비로소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꽤 단정하고 곱상하던 얼굴이 엉망이 되어 있었다.
"지금 결투에 끼어드는 거냐?"
이안이 씹던 소시지를 삼키고는 내뱉었다.
"날붙이는 안 된다니까."
"...?!"
"그건 너도 포함이야."
요정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가운데, 놈의 패거리들이 술잔을 집어 던지며 무기를 뽑아 들었다.
"딱 귀쟁이 다운 짓거리군."
정작 이안이 끼어든 시점부턴 멈춰 서 있던 샬롯이 피 섞인 침을 탁 뱉으며 중얼댔다. 그리고는 요정에게서 등을 돌리고 패거리들을 노려보았다.
비로소 요정의 피가 터진 입술이 말려 올라갔다.
"이 짐승의 노리개인 줄 알았더니, 힘깨나 쓰는 놈이었군. 겉보기와 달리."
"힘만 쓸 줄 아는 건 아니지."
내뱉는 이안의 손아귀에 더 힘이 들어갔다. 요정의 미간이 꿈틀댔다. 그는 여전히 몸을 일으키려는 어정쩡한 자세 그대로였다.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 건 자신을 바라보는 이안의 눈빛 때문이리라. 요정이 단검 자루에 얹어져 있는 그의 왼손을 슬쩍 곁눈질하는 가운데, 이안이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네가 오해하는 게 있는데. 우린 이 도시에 일거리를 찾으러 온 게 아니야. 네놈 밥그릇 따위엔 관심도 없단 얘기지. 물론 그 어쩌고 자작을 겁낼 이유도 없고."
"...!"
"그러니 이쯤하고 대화로 풀던가, 아니면 칼을 뽑은 김에 제대로 해보던가. 어쩔래?"
"멍청한…. 소란이 커지면, 네놈들이 무사히 도시를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나?"
"그거야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고. 내가 너라면, 네 목숨부터 걱정할 거야. 게다가 난 네 마력이 별로 무섭지 않아."
이안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너희 요정들의 마력이 별 볼 일 없단 건, 이미 알고 있거든."
"정말 그런지 시험해 볼 테냐…?"
요정의 눈에 아른거리는 마력이 더 반짝였다. 천천히 눈을 깜빡인 이안의 손아귀에서 흐릿한 파장이 번진 건 그때였다.
"!"
요정의 눈이 커졌다. 그의 눈동자에 아른거리던 마력이 삽시에 흩어졌다.
비전 스킬, 마력 역류. 본래는 타이밍을 잘 맞춰 써야 하는 스킬이었지만, 지금 이 요정처럼 마력을 계속 끌어올리고 있는 상대에게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숨을 헐떡인 요정이 내뱉었다.
"네놈, 유물이라도 가지고 있는 거냐…?"
"글쎄. 어떨 것 같냐?"
되물은 이안이 요정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요정은 그의 눈을 뚫을 듯 응시하고 있었다. 그에게서 마력의 흔적을 찾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하지만 이안의 눈은 그저 검게 가라앉아 있을 뿐이었다.
요정의 눈매가 가늘게 떨릴 찰나.
벌컥-
주점의 문이 열리더니, 안면 가리개를 눌러 쓴 기사와 사슬 갑옷을 걸친 종자가 장내로 들어섰다.
샬롯과 거리를 두고 대치 중이던 패거리들이 화들짝 놀라 그들 쪽을 돌아보았다.
"...?"
난장판인 장내를 보고 잠깐 굳었던 둘의 시선이, 이윽고 그들 너머의 샬롯과 이안 쪽으로 향했다.
메브가 숨을 내쉬며 검 자루에 손을 얹는 가운데, 미간을 찌푸린 필립이 내뱉었다.
"피를 보기 직전 같아서 여쭙는 겁니다만. 꼭 그래야 하는 상황입니까?"
"글쎄. …그건 여기 이 친구의 대답에 따라-"
이안이 대답할 찰나, 불현듯 팔을 휘둘러 그의 손을 떨쳐낸 요정이 바닥을 굴렀다. 순식간에 거리를 벌린 그가 펄쩍 뛰어올라 구석의 테이블 위에 섰다.
"덕분에 오해가 풀렸다. 인간."
언제 꼴사납게 움직였냐는 듯 태연하게 내뱉은 그가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그리고는 이안과 샬롯, 필립을 거쳐 메브를 바라보았다.
당당해 보이는 자세였지만, 이안에겐 여차하면 바로 등 뒤의 창문으로 몸을 날려 도망치려는 속내가 뻔히 보였다. 그리고 그건 생존이란 측면에서 아주 현명한 선택이었다. 저 밖으로 도망치는 것까진 그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요정 기사들은 게임이랑 다른 게 전혀 없군.
이안이 헛웃음을 짓는 가운데, 메브를 잠시 응시한 요정이 내뱉었다.
"나는 칼데일 자작에게 고용된 기사, 핀드렐 아이나스요. 작은 오해에서 비롯된 갈등이었으나, 저 흑발 남자와의 대화로 해결되었소."
"...."
"이 이상 문제가 커지기를 원하지는 않으니, 길을 터 주시오."
당당한 말투였지만 그다지 설득력이 있지는 않았다. 게다가 이안과 샬롯 둘만으로도 팽팽하던 긴장감은, 메브와 필립의 등장으로 균형이 완전히 깨진 상태였다. 메브와 샬롯 사이에 낀 핀드렐의 부하들은 안색이 좋지 않았다. 특히나 메브 때문일 터였다.
메브는 대답 대신 이안 쪽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보이진 않았지만, 어쩌고 싶냐고 묻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흠…."
잠시 생각한 이안이, 이내 비켜 주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샬롯이 미간을 좁혔지만 메브와 필립은 순순히 옆으로 물러났다.
그제야 테이블 아래로 뛰어내린 핀드렐이 걸음을 옮기며 내뱉었다.
"현명한 결정을 하셨군. 경, 이렇게 만나게 된 김에 통성명이라도 하시는 게 어떻겠소?"
메브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대답을 들으려 물은 게 아닌 듯 태연하게 장내를 가로지른 핀드렐이, 패거리들에게 턱짓하고는 고개를 까딱였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소."
태연한 말투와 달리 다급한 손길로 문을 연 그가 주점을 나섰다. 패거리들이 우르르, 그의 뒤를 따랐다.
문이 닫히자, 필립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니, 그 잠깐 사이를 못 참으시고 또 싸우셨습니까…?"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몸을 돌렸다. 필립이 난장판인 장내를 가로지르며 중얼댔다.
"보아하니 요정 기사 같던데. 어쩌다-"
"저쪽이 시비를 걸었다. 뻔뻔한 귀쟁이 새끼 같으니. 그냥 귀를 도려낼 걸 그랬군."
대답한 건 샬롯이었다. 그녀가 분통을 터뜨리는 사이, 이안은 주방 옆에 빼꼼 고개만 내밀고 있던 여급에게로 다가갔다.
그와 눈이 마주친 여급이 숨을 들이켰다.
"사, 살려주세요, 나리…!"
누가 죽인대? 피식댄 이안이 그녀의 얼굴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받아라. 추가 음식이랑 방은 필요 없을 것 같으니까, 거기에 이 돈까지 더하면 부서진 기물값은 충분히 나올 거다."
"네, 네에…?"
엉겁결에 동전을 받은 여급이 눈을 깜빡였다.
더 덧붙이는 말 없이 몸을 돌린 이안이, 입맛을 다시며 메브에게로 다가갔다.
"오시자마자 이렇게 돼서 미안하게 됐소만. 당장 떠나는 게 좋겠소. 방금 나간 그놈이, 병사건 뭐건 잔뜩 끌고 돌아올 거요."
"그래서, 이렇게 그냥 도망치잔 말이냐?"
샬롯이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이안이 미간을 좁혔다.
"그럼 그놈 하나 죽이겠다고 다른 병사들까지 싹 다 죽일까? 그러다 보면 결국엔 자작까지 죽여야 할 텐데?"
그제야 머쓱한 얼굴이 된 샬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대로겠군. 흥분해서 생각이 짧았다."
이안은 어깨만 까딱였다. 어차피 핀드렐이 제 발로 굴러들어오리란 말은,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게임의 요정들은 그 자존심만큼이나 비열하고, 집요했다. 심지어 저놈은 기사였다. 체면을 제대로 구긴 채로 떠났으니, 어떤 식으로든 갚아주려 들 게 분명했다. 아마 곧바로 장원으로 돌아가 뜻을 함께할 자들을 모을 터였다.
그에게 유물이 있다 여길 테니 더더욱 포기하지 않을 터.
그리고 그게 이안이 바라는 바였다. 여기선 도시 한복판이니 참았지만, 그때는 방금 같은 친절한 대화가 필요하지 않을 테니까.
굳이 물으려던 말을 꺼내지 않은 것도 그래서였다. 지금은 어차피 뭘 묻든, 시간만 끌며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지 않을 게 뻔했다.
자유로운 환경에서 원활한 대화를 도와줄 단검이 곁들여진다면, 그 귀쟁이 놈의 입에서 대답을 국수 가락처럼 뽑아낼 수 있으리라.
'목욕과 잠자리가 날아간 건 빡치지만… 시발….'
"거참, 운명이란 재미있군요."
필립이 중얼댄 건 그때였다.
질색할 줄 알았건만. 그는 묘한 표정으로 테이블 옆에 놓인 짐가방을 냉큼 짊어졌다.
그리고 그건 메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게나 말이다. 참으로 공교롭군…."
안면 가리개를 올리며 내뱉은 메브가, 이안을 마주 보았다.
"나도 너희들에게 바로 도시를 떠나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하려던 참이었다, 이안. …너와 비슷한 이유로."
"그쪽에서도 뭔가 일이 있으셨군…."
어차피 오늘은 목욕할 팔자가 아니었던 건가.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문을 턱짓했다.
"무슨 사정인지는, 가면서 들읍시다."
#142화
일행이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돌아오자, 마구간지기는 당황해하며 말을 내주었다.
아직 청소조차 하지 못한 마차.
말들도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새로 살 수는 없었다. 일행의 말들이 가장 덩치 크고 혈통도 좋았다. 북부의 전마들은 특히 그랬다. 그나마 먹이는 든든하게 챙겨 먹였다는 게 다행인 부분이었다.
평소보다 조금 빠른 정도로만 마차를 몬 필립은, 도시에서 어느 정도 멀어지자 비로소 입을 열었다.
"저희가 만난 건 덩컨 사제님이었습니다. 본래는 일면식도 없는 분이었지요."
이안과는 그다지 관계없는 이야기였다. 메네르에서 타락자를 추적하는 데 도움을 준 사제가 있었는데, 놈을 처단하는 과정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메브와 필립은 그의 유품과 유언을 과거 함께 수학한 동문에게 전달하러 간 것이다.
"…해서, 사제님께서도 도움이 될 정보를 여럿 주셨습니다. 주르도 사제라는 자에 대해서도 아시더군요. 과거에는 제도의 대교회에 있었던 자인 모양이었습니다. 음, 이야기가 곁가지로 빠졌군요."
"시작부터 그랬어."
의자에 기대앉은 이안이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필립이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이제 본론입니다. 그 후에 경고를 해 주시더군요. 지금 스톤빌은 원정대를 꾸리고 있다고 합니다. 칼데일 자작이 조용히 긁어모은 자산이 상당한 규모인가 보더군요. 하긴. 남작 시절부터 럼코파 후작의 밑에서 영지를 넓혀간 인물이니, 보통 수완가는 아니겠지요."
"원정대?"
"북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도 무법 지대가 펼쳐져 있지 않습니까. 이참에 그 지역을 진압해서 자신의 수중에 두려는 겁니다. 어쩌면 그 이상을 꿈꾸는지도 모르죠. 어쨌든 병사들 외에도 자유 기사나 용병들을 여럿 고용했다고 합니다."
"…그중에, 경과 문제가 있었던 자들도 섞여 있는 거군."
이안의 말에, 필립이 어깨를 으쓱였다.
"문제라기보단, 원한이죠. 나리께선 타락자를 처단하는 과정에서, 그들과 관계없는 이들까지 죽이지 않도록 늘 조심하셨으니까요. 보수를 받기 전에 고용주를 잃은 용병이나, 모시던 주군을 잃은 기사가 여럿 생기게 된 겁니다. 어쩔 수 없이."
"살려 준 걸 감사히 여길 것이지. 하여간 인간들이란…."
샬롯이 혀를 찼다.
필립이 피식댔다.
"다 그런 건 아닙니다. 모시던 주군이 타락자라는 걸 인정하지 않거나, 손해를 어떻게든 받아내려는 자들만 그렇죠. 무튼, 사제님께선 언젠가 붉은 기사를 내 손으로 죽이겠다 말하고 다니는 이들을 여럿 보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래… 명예의 문제란 거지."
이안은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놈의 명예는, 기사들이 특히 목숨 거는 덕목 중 하나였다.
이 세계에 떨어진 후 지켜본바, 그다지 명예롭지 않은 자들일수록 더 집착하는 경향이 있었다. 조폭이 의리를 따지는 것과 비슷한 종류였다.
오히려 정말 명예로운 자들은, 때때로 기꺼이 불명예를 짊어지곤 했다. 과거의 메브처럼.
샬롯이 툭 덧붙였다.
"여기서만 겪은 일은 아닌 것 같은데. 귀찮겠군."
"뭐, 가끔이니까요. 어쨌든 이번에도 잘 넘어간 것 같군요."
필립이 덤덤하게 말을 맺었다.
곁에서 말을 몰던 메브가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들의 복수심은 정당한 것이다. 명예를 아는 자라면 응당 그리해야 할 부분이고. 다만 그걸 짊어지는 건 내 몫이지. 너희들까지 피해를 보게 된 건 면목이 없군. 내 불찰이다."
이안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이번엔 나도 떠나자고 했었잖소. 경의 방식을 내게 강요하지만 않으시면, 앞으로도 딱히 상관없소."
"내가 강요한들, 네가 들을 리 없지 않겠느냐?"
"잘 아시니 다행이군."
이안이 피식대는 사이, 마차가 다시 완만한 오르막길로 접어들었다.
어느덧 세 번째 언덕이었다. 샬롯이 문득 이안을 돌아본 건 그때였다. 이안은 눈동자만 굴려 그녀를 마주 보고는, 넌지시 입을 열었다.
"그럼 원한을 품은 이들이 기어코 경을 죽이려 든다면, 그땐 어쩌실 거요? 그냥 당하실 건가?"
"그럴 리가."
메브가 건조하게 웃음 지었다.
"그때는 맞서 싸울 것이다. 저들의 복수심이 정당하듯, 나 역시 내 선택과 행동이 옳았다고 믿고 있으니까. 내가 틀렸다면 여신께서 벌하시겠지."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샬롯의 눈을 다시 마주 보았다. 귀를 쫑긋 세운 그녀의 눈이 의미심장하게 번뜩였다. 슬쩍 입꼬리를 말아 올린 이안이 내뱉었다.
"그럼 싸울 준비를 하시오."
"...!"
"추격대가 붙은 것 같으니까."
"벌써요?!"
필립이 뒤늦게 눈을 치켜떴다. 이안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벌써는 아니지. 마을을 벗어난 지 한 시간도 넘었는데."
"얼마나 옵니까? 많아요?"
"글쎄. 말들 기운 빼지 말고 속도를 조금 늦춰라. 어차피 도망치긴 글렀으니까."
그가 훌쩍 마차 지붕 위로 올라섰다. 눈을 감은 그의 청력이 한껏 예민해졌다. 달려오는 발굽 소리들. 열댓은 가뿐히 넘어 보였다.
"말이 한 마리 부족했는데, 잘됐군."
그가 중얼대는 사이, 곧 저 뒤의 언덕 위로 기수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판금 갑옷을 걸친 자부터 사슬 갑옷에 서코트를 덧입은 자들까지 가지각색이었다.
뒤를 돌아본 메브의 눈매가 가늘어지는 가운데, 마차를 발견하고 잠시 멈춰 섰던 기수 중 하나가 쩌렁쩌렁하게 소리쳤다.
"어딜 도망치느냐, 붉은 기사! 나는 블란포르 도련님을 섬기던 자콥의 기사, 빌헬름이다! 네 피로 도련님의 넋을 기리고 명예를 되찾으리라!"
"나는 나슬란의 기사, 올랜도-"
다른 기수들의 외침이 이어지는 가운데. 먼저 선언을 끝낸 기사가 부하들을 이끌고 언덕을 달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저마다 각자의 부하들을 이끌고 온 모양이었다.
진짜 기사라 부를 만한 자들은 넷, 많아야 다섯 정도이리라.
개판이구만.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가장 늦게 언덕에 오른 무리를 눈에 담았다.
저것들은 낯이 익었다.
"보이느냐, 이안? 아까 그 귀쟁이다."
마부석에 선 채 뒤를 바라보던 샬롯이 목소리를 낮췄다. 그녀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저놈은 내가 맡겠다. 이번에야말로 귀를 뜯어 주-"
"아니. 저놈은 내가 맡겠다."
"엥…?"
샬롯이 눈을 치켜떴다. 이안이 어깨를 까딱였다.
"사실은 나도, 저 귀쟁이에게 용무가 있거든. 너는 경을 도와라. 아무리 그래도 혼자서 저것들을 다 상대할 순 없을 거야."
"…어쩔 수 없지. 다만, 고통스러운 죽음을 부탁하겠다."
"그건 저놈에게 달린 문제라서."
이안은 장검을 천천히 뽑아 들며 핀드렐을 바라보았다. 그 역시 이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리가 제법 있었지만, 저 요정 기사에겐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 것 같았다.
놈의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보며, 이안은 어쩌면 저놈이 이 기사들을 끌어들인 장본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고작 몇 시간 묵은 마을에서 소문이 순식간에 퍼졌다는 것보단, 그쪽이 더 신빙성이 있어 보였다.
사실 여부는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스르릉-
말머리를 돌려 멈춰선 메브가, 검을 머리 위로 치켜든 건 그때였다.
어느새 내려쓴 안면 가리개 너머로 우렁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나는 기사, 메브 리우렐이다! 그대들의 선언을 받아들이겠다! 도망치는 자의 뒤는 쫓지 않을 것이니, 살고 싶은 자는 언제든 등을 보이고 떠나라!"
하여간 기사들이란….
이안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가운데, 선두의 기사 무리가 고함을 내지르며 가까워졌다.
***
"둘로 나눠서 움직여. 반은 저 머저리들을 돕고, 반은 마차를 전복시켜라."
"알겠소. 가자!"
부하들이 고삐를 후려치며 달려나갔다. 돌진한 기사들은 벌써 전투에 돌입하고 있었다.
느긋하게 언덕길을 내려가며, 핀드렐은 전장의 상황을 눈에 담았다.
'운이 좋았군.'
붉은 기사를 알아본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평소 다른 머저리들이 틈만 나면 떠들어대는 얘길 듣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바로 알아보지 못했을 터였다.
물론 그는 저 붉은 기사에게 아무런 악감정도 없었다. 아까 그 건방진 수인 계집과, 그에게 모멸감을 준 검은 머리 용병에게만 관심이 있을 뿐이었다.
'짐승은 가죽을 벗겨 장식하고… 그 검은 머리는 목을 잘라 돼지우리에 던져 줘야겠군.'
물론 유물도 챙기고.
기사들의 전리품은 붉은 기사와 그 종자의 목이면 충분할 터였다.
애초에 그가 아니었다면 붉은 기사를 추적할 수 없었을 테니, 불만은 없으리라.
'질 리가 없겠지. 저것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이쪽은 중무장한 인원이 스물이 훨씬 넘으니까.'
핀드렐은 마상 전투를 벌이고 있는 붉은 기사를 눈에 담았다. 소문과 달리 붉은 신성력을 흩뿌려 대지는 않았지만, 실력만큼은 훌륭해 보였다. 사슬 갑옷 정도는 일격에 찢어발겼고, 저 무거운 갑옷을 걸치고도 말 위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마수?! 괴, 괴물이다- 으억?!"
수인 계집도 나름대로 인상적이긴 했다. 짐승처럼 뛰어다니면서 말을 공격해 기수를 낙마시켰다. 그리고는 무자비하게 공격해 댔다.
'역겨운 짐승 같으니….'
"저 미친놈은 뭐야?! 죽여!"
마차로 달려간 부하들 쪽이 소란스러워진 건 그 직후였다.
시선을 돌린 핀드렐의 눈에 들어온 건, 검에 정수리가 쪼개지고 있는 부하 하나의 모습이었다. 자루를 쥔 건 그 흑발 용병이었다.
"...?"
자세로 봐선, 마차에서 부하를 향해 몸을 날린 것 같았다. 요정들도 하지 않을 미친 짓이었지만, 저놈은 그걸 성공시켰다. 심지어 죽은 놈을 걷어차서 밀어 버리고는, 놈이 쓰던 검과 말까지 탈취했다.
"뭐 저런…."
놈의 기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달려드는 다른 부하들의 공격을 어설프게 몸을 젖혀 피하더니, 달리는 말의 안장 위에 올라선 것이다. 그리고는 또 한 번 도약.
'이상한 놈이라 여기긴 했지만… 정말 정신 나간 놈이었군.'
어이없게도, 그 미친 짓은 다시 한번 성공했다. 부하가 방패로 막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방패가 폭발하면서 말에서 떨어졌다. 흑발, 이안은 절벽에 매달리듯 아슬아슬한 자세로 말을 끌어안았다.
핀드렐의 눈매가 절로 가늘어졌다.
'무슨 유물을 쓰는 거지?'
마법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무리 마법사가 미친 족속이라도 저런 짓을 하진 않았다. 게다가 저렇게 순식간에 주문을 완성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위 마법이라 해도 몇 초는 필요했다.
어쩌면 모종의 마법 무구를 착용하고 있는 걸지도.
화악-
마차에서 아른거린 황금빛이 시선을 잡아끈 건 그때였다. 부하 하나가 흐릿하게 피어오른 빛의 장막에 떠밀려 말과 함께 나뒹굴고 있었다. 마부석에 어정쩡하게 선 종자와, 그가 내뻗은 검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성물?!'
핀드렐의 눈이 커졌다. 그의 입술이 곧 찢어질 듯 말려 올라갔다. 주위를 보니 다른 기사들은 전투에 몰두하느라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저 종자 놈이 가진 성물도 빼돌릴 수 있으리란 의미였다.
'운이 너무 좋은데. 위대한 어머니시여 감사합니다…. …그런데.'
왜 아직도 아무도 죽지 않았지?
어느덧 가까워진 전장을 눈에 담으며, 핀드렐은 비로소 고개를 갸웃했다. 붉은 기사는 아직도 기사들과 뒤엉켜 싸우고 있었다.
갑옷이 피로 붉게 물들고 있었지만, 그녀의 피는 아니었다.
아마도 그녀의 주위를 돌며 기수들을 낙마시키고 있는 저 수인 덕분일 터였다. 그녀가 쥔 전투 도끼는, 판금 갑옷이라 할지라도 난도질해서 결국 찢어 버렸다.
'그래도 확실히, 지치고는 있군.'
거칠어진 숨결을 들으며, 핀드렐은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온 기사들 따위, 다 죽어도 상관없었다.
지칠 대로 지친 것들의 목숨을 자신의 손으로 마무리 짓는 것도, 아주 즐거운 결말이 되리라.
물론, 고통 없이 보내줄 생각 따윈 없었지만.
"아, 아니…? 막아!"
다급한 외침이 귀를 파고든 건 그때였다. 번쩍 고개를 돌린 핀드렐의 눈매가 순간 가늘어졌다.
피 칠갑을 한 이안이 그에게로 달려오고 있었다. 놈의 등에 쇠뇌를 겨누는 부하들의 모습이 보였다.
쉬쉬쉭-
볼트가 일제히 허공을 갈랐다.
요정 기사의 눈에는 선명한 궤적이었다. 대부분 정확하게 이안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훈련 시킨 보람이 없진 않군.'
뒤도 돌아보지 않던 이안이 안장 옆으로 떨어질 것처럼 매달린 건 그 직후였다. 볼트들이 허공을 가르고, 이어 그가 멀쩡하게 다시 안장 위에 올랐다. 핀드렐을 똑바로 응시한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핀드렐은 그 입 모양을 또렷하게 읽을 수 있었다.
'지금이라도 도망쳐라…?'
핀드렐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검신이 얇고 긴 세검. 보기와 달리 제국 강철로 만든, 튼튼하고 가벼운 명품이었다.
이안이 안장 위로 올라선 건 그 직후였다.
'미친 짓을 몇 번 성공시키더니, 아주 의기양양하군.'
핀드렐은 안장을 놔버리고는 자세를 잡았다. 정면으로 맞부딪치겠다는 자세.
하지만 이건 속임수였다.
기마술은 요정들의 특기 중 하나였다. 그는 생각대로 말을 움직일 수 있었다. 저 미친놈이 솟구치면, 말을 잽싸게 옆으로 돌려 바닥을 구르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 후엔 주위를 빙빙 돌며 충분히 피를 흘리게 하리라.
유물이든 뭐든 사용하는 게 분명한 이상, 정면으로 싸워 줄 필요는 없었다.
슈확-!
놈이 뛰어오른 건 그 직후였다. 아직도 둘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지만, 전혀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핀드렐은 검을 내뻗으려는 듯한 자세를 취하면서, 말 머리를 돌릴 준비를 했다.
저 속도로 떨어지면 이 내리막의 끝까지 굴러떨어지리라. 인간 따위가 멀쩡할 리 없었다. 그대로 목이 부러진다 해도, 그것대로 볼만한 구경거리일 터였다.
놈의 눈동자가 흐릿한 회색빛으로 빛나고 있음을 깨달은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마법…?!'
푸확-!
그의 앞으로 보이지 않는 돌개바람이 치솟았다. 핀드렐도 익히 알고 있는 주문이 틀림없었다. 보이지 않는 방벽. 부딪힌 건 아니었지만 깜짝 놀란 말이 본능적으로 멈추려 들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요정의 뛰어난 동체 시력은, 그 와중에도 투사체의 형태를 온전하게 파악했다.
단검이었다. 던지기 좋게 만든.
그리고 그건, 그가 아닌 말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이런 미친-?'
내내 기수만 노렸기에 생긴 심리적 허점이었다. 설마하니 저쪽도 정면으로 승부할 생각이 없었을 줄이야.
콰직, 목덜미 아래에 단검이 박힌 말이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오르막길을 달려 올라가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대응할 시간이 있었다.
핀드렐은 곧바로 안장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푸확-
한줄기 돌풍이 휘몰아치더니, 떨어지던 이안의 궤적이 바뀌었다.
그와 달리 핀드렐은 허공에서 방향을 바꿀 수 없었다.
콰장창창, 그는 흙먼지를 날리며 바닥을 굴렀다. 소리는 거대했지만, 충격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그는 인간보다 훨씬 뛰어난 반사 신경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상황이 좋은 건 아니었다. 그보다 먼저 착지한 이안이 멈춰 서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오고 있었으니까.
이대로면 그가 낙법을 끝낼 때쯤 이미 그에게 달려들고 있으리라.
핀드렐은 그제야, 저자가 이런 미친 짓에 아주 익숙하다는 걸 알게 됐다.
어쨌거나 해야 할 게 달라지진 않았다. 바닥을 구르는 핀드렐의 눈이 푸르스름하게 일렁였다.
인간들의 편견과 달리, 요정들은 대부분 마력을 다룰 줄 알았다.
그저 선택받은 몇을 제외하고는, 아주 극소량밖에는 축적하지 못할 뿐이었다.
하지만 어쨌건, 쥐어짜면 하위 마법을 한두 번쯤 사용할 정도는 가진 게 보통이었다.
핀드렐도 그랬다. 그가 익힌 건 청색 마법이었다. 냉기 파장.
다룰 줄 아는 유일한 주문이었지만, 이것만큼은 웬만한 마법사 못지않았다.
저 비열한 인간 놈도, 그가 이 순간에 마법을 준비하고 있으리란 생각까진 하지 못할 터였다.
달려오는 발걸음을 느낀 핀드렐이 입술을 말아 올리며 낙법을 끝냈다.
그가 푸른 마력이 맺힌 왼손을 득달같이 내밀며 고개를 든 순간.
푸확-
밀려든 파장이 그의 주문을 헤집어 놓았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분출되던 마력이 혈류를 거슬러 역류했다.
"...!"
숨이 턱 막힌 핀드렐이 굳어졌다.
달려드는 이안이, 앞으로 내민 왼손을 까딱이며 미소 지었다.
"너희 마력이 별 볼 일 없단 거, 알고 있다니까?"
"너…!"
핀드렐이 뭔가 내뱉는 것보다, 이안의 그의 품으로 파고드는 게 더 빨랐다. 옆구리, 사슬 갑옷의 이음매를 뚫고 뜨끔한 통증이 번졌다.
"...?!"
저만치에서 부하들의 고함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핀드렐의 표정이 의아해졌다. 생각보다 통증이 깊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그제야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옆구리에 박힌 조악한 형태의 단검이 눈에 들어왔다.
몸이 굳어지는 걸 느낀 건 그 직후였다.
"...!"
그가 비로소 눈을 치켜뜨는 사이.
거미 여왕의 독니를 뽑아 아공간에 넣은 이안이, 자연스럽게 안에서 운철 단검을 꺼내며 속삭였다.
"다들 네가 죽은 줄 알게 될 거야. 쉬고 있어라."
운철 단검이 핀드렐의 옆구리를 긁었다. 이미 굳어 버린 그는 비명조차 내지 못했다. 이안이 재빨리 왼손을 뻗어 그의 눈을 억지로 감겨 버렸다.
어둠 속에서, 그를 밀쳐내고 일어선 이안의 외침이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네놈들의 대장은 뒈졌다! 똑같이 되고 싶지 않으면 물러나!"
나 안 죽었다는 외침은, 핀드렐의 머릿속에서만 맴돌았다.
#143화
언덕길 인근에는 죽은 말과 사람이 즐비했다. 어느덧 기사 무리는 채 반도 남지 않았다. 그동안 그들이 낸 성과는 붉은 기사의 말을 죽인 게 전부였다.
물론 큰 성과는 아니었다. 붉은 기사, 메브는 말에서 떨어진 후로도 아무렇지도 않게 싸웠다. 오히려 기수들의 공격을 이리저리 흘리면서, 같은 기사들만 골라 말에서 끌어 내렸다.
"후우… 후우…."
지금 그녀와 마주 선 기사가, 어느덧 마지막이었다. 몸의 주요 부위를 전부 판금 방어구로 가리고, 눈과 코 윗부분만 보이는 투구를 쓴 자였다.
'이름이, 올랜도라 했던가.'
메브는 숨을 고르며 그를 가만히 마주 보았다.
둘을 방해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얼마 남지 않은 습격자들은 주위를 빙빙 돌며 샬롯을 상대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사실상 지금은 그녀를 떨쳐 내려 도망 다니는 것에 가까웠다.
"명예를… 되찾겠다-!"
숨을 고른 올랜도가 먼저 기합성을 내지르며 달려왔다. 메브의 호흡이 일순간 가라앉았다.
쩌엉-!
검과 검이 맞부딪쳤다.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메브가 재빨리 손을 뻗어 자신의 검날 중앙을 잡으며 올랜도에게 달라붙었다. 올랜도도 날 끝부분을 움켜쥐면서 그녀를 밀쳐내려 했다.
메브는 마주 힘을 주는 척하며, 오히려 뒤로 물러섰다. 균형을 흐트러뜨리기 위해서였다.
올랜도는 성큼 한 걸음을 내디디며, 자루를 쥔 손을 놔버렸다. 검 자루가 둔기처럼 메브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맞으면 충격이 투구를 울리리라.
메브는 당황하지 않고 검을 치켜들어 막았다. 그러면서 슬쩍 팔목을 비틀어 십자 막이끼리 엉키게 했다.
올랜도가 검날을 쥔 손을 확 앞으로 당긴 건 그때였다. 메브를 앞으로 넘어뜨리려는 의도일 터. 그녀는 당해주는 척하며 검을 놔버리고는, 그대로 올랜도의 가랑이로 파고들어 그를 넘어뜨렸다. 그대로 위로 올라탄 메브가 주먹을 들었다.
꽈앙!
투구의 안면 가리개 부분이 조금 짓눌렸다. 타격이 그리 크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어쨌건 충격이 머리를 울릴 테니까.
몇 번 더 주먹을 내리치자 드러난 올랜도의 눈이 살짝 풀렸다. 그가 왼팔을 들어 얼굴 앞을 가렸다. 본능적인 행동 같았다. 메브는 그대로 왼손을 뻗어, 그의 손에 들린 검날을 쥐고 당겼다. 부지불식간에 검을 빼앗긴 올랜도가 그녀를 밀쳐내려 했다. 그 틈으로 다시 메브의 오른 주먹이 날아들었다.
쩌엉!
투구가 다시 한번 흔들렸다. 메브는 투구를 후려쳤던 오른손으로 재빨리 검 자루를 쥐었다. 그녀는 팔꿈치로 올랜도의 팔을 밀어내면서, 왼손의 검날을 고쳐 쥐었다.
투구의 틈이 드러났다. 다소 멍한, 그러나 다가올 운명을 깨달은 푸른 눈.
푸욱-
그 사이로 검날이 깊이 파고들었다. 짧은 숨을 내쉰 기사의 몸이, 이윽고 축 처졌다.
"하아… 하아…."
메브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허리를 들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저 명예를 되찾고 싶을 뿐인 기사가 다섯이나 죽었다. 하나는 말 위에서. 하나는 샬롯이. 하나는 말에서 떨어지면서. 그리고 둘은 이렇게, 그녀와의 결투 끝에.
"루 솔라시여…."
중얼댄 그녀가 아직 올랜도의 얼굴에 박혀 있는 검을 뽑아 들며 일어섰다. 그리고는 대여섯밖에 남지 않은 기수들을 돌아보았다. 그중 하나는 어느새 말에서 떨어져, 샬롯의 도끼에 목숨을 잃기 직전이었다.
메브가 소리쳤다.
"너희들이 섬기던 기사는 전부 죽었다! 아직도 계속 싸울 것이냐?"
"하, 항복…! 항복입니다! 항복!"
소리친 건 샬롯의 발아래에 깔려 있던 자였다. 그는 양팔로 얼굴 앞을 가린 채 눈물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바람 소리를 내며 떨어지던 샬롯의 도끼가 우뚝 멈췄다. 남자의 팔 바로 위에서였다. 곧 그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떴다. 자신을 말에서 떨어뜨린 검은 괴물이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가, 감사… 감사합니다…!"
정말 살려 주리란 기대는 하지 않았던 듯, 정신 나간 것처럼 중얼댄 남자가 뒤로 기어갔다. 곧 간신히 일어난 그가 언덕 아래로 달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거의 구르듯이,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제기랄…!"
"튀어! 후퇴해!"
남은 기수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공포에 가득 찬 얼굴로 말을 내달려 도망쳤다.
비로소 비틀댄 메브가 땅에 검을 박으며 주저앉았다. 그녀는 검에 기댄 채 가쁜 숨만 몰아쉬었다.
"으, 으아아… 으아아악…!"
마차 쪽에서 뒤늦게 비명이 이어졌다. 한 놈이 엉금엉금 기어가고 있었다. 말에서 떨어지면서 다리 한쪽이 부러진 모양이었다. 하나 남은 놈의 동료는, 이미 말을 타고 저 멀리 도망치고 있었다.
검을 어깨에 얹은 이안이 느긋하게 놈의 뒤를 따라갔다.
"못 일어나겠으면, 내가 편하게 해 주지."
"으으, 으아… 으아아악-!"
간신히 한 다리로 일어선 놈이 절뚝대며 달려갔다. 비로소 멈춰 선 이안이 입맛을 다시며 중얼댔다.
"생긴 건 경험치를 줄 것 같았는데…. 영양가 없는 것들."
그때 마차에서 뛰어내린 필립이 허둥지둥 메브 쪽으로 달려갔다. 손에는 가죽 물통을 든 채였다.
"나리…! 무사하십니까…?!"
메브는 대답 대신 팔만 한차례 휘저었다. 미끄러지듯 그 곁에 주저앉은 필립이 수통을 내밀었다.
메브가 힘겹게 안면 가리개를 올렸다.
"괜찮다…. 고맙구나, 필립."
"경이 쉬시는 동안, 너는 시체들을 모으고 무기를 챙겨라. 말들도. 도망치기 전에."
이안이 그 곁은 지나치며 내뱉었다. 필립이 군말 없이 일어섰다. 마차를 지키느라 일행 중에서 가장 적게 싸운 그였다. 특히 이안이 다시 합류한 뒤로는 더더욱 할 게 없었다.
"정말 저렇게 보내도 될까? 다시 따라올 것 같은데."
도망치는 자들을 눈에 담던 샬롯이, 숨을 고르며 말했다.
기수들은 벌써 저만치의 언덕을 거의 다 오른 상태였다. 이안이 그녀의 곁에 서며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아마 아닐 거다."
이것들이 칼데일 자작에게 보고하고 나왔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랬다면 자작이 허락했을 리 없었다. 원정을 앞둔 데다, 셈이 빠른 자라지 않던가. 메브를 죽여 봐야 남는 건 없고 손실만 있으리란 쉬운 계산을 하지 못할 리 없었다.
그러니 아마도, 멋대로 명예 타령을 하며 뛰어나간 자들의 복수 역시 하지 않을 터였다.
그보단 다시는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내부 정리를 단단히 할 가능성이 더 높았다.
적어도 이안이라면 그럴 터였다.
'한두 놈 정도는 본보기 삼아, 계약 불이행이나 단독 행동 같은 명목으로 목도 날려 버리고.'
"그래, 네가 그럴 것 같다면야."
곧바로 수긍하는 샬롯을 돌아본 이안이, 마차 쪽으로 고개를 까딱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줄이든 뭐든, 단단하게 결박할 만한 걸 들고 따라와라."
"음…? 알았다."
샬롯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몸을 돌렸다.
이안은 느긋하게 언덕길을 내려갔다. 몇 구의 시체 너머, 뻣뻣하게 엎어진 요정이 가까워졌다.
핀드렐. 그는 여전히 이안이 엎어 둔 자세 그대로 꼼짝도 하지 못한 채 굳어 있었다. 겉보기엔 영락없는 시체였다.
타타탓-
샬롯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이안의 곁에 멈춰 선 그녀가, 잘 말린 줄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래서, 이제 어쩌면 되지?"
"이놈을 묶어라. 아직 안 죽었으니까."
이안이 핀드렐을 발로 툭 차며 말했다. 샬롯의 눈이 번뜩였다.
"안 죽었다고? 호오…."
눈을 빛낸 샬롯이 가르릉댔다.
"날 마비시켰던 그걸 쓴 거군."
"그래. 경험자에게 묻겠는데, 그때 효과가 얼마나 갔었지?"
"느끼기엔 몇 시간 같았지만… 실제로는 한 시간이 조금 넘었던 것 같군. 난 해독 능력이 뛰어난 편이니까, 이런 약해빠진 귀쟁이라면 몇 시간은 갈 거야."
그렇단 말이지. 입맛을 다신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별수 없이 싣고 가야겠군. 절대 풀지 못하게 제대로 결박해라. 혹시라도 멋대로 죽이지 마라. 이 녀석에게 물을 게 있으니까."
"쉽게 입을 열지 않을 텐데."
내뱉으며 핀드렐의 등에 무릎을 얹은 샬롯이, 묘한 기대감을 머금은 눈으로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헛웃음을 지은 이안이 고개를 까딱였다.
"본래는 내가 할 생각이었지만, 이번엔 네 도움을 좀 받도록 하지."
"기꺼이…. 들었나, 귀쟁아? 네놈의 정신이 멀쩡한 걸 알고 있다. 아주 즐거운 시간이 될 거야. 기대해라."
핀드렐의 머리채를 붙잡아 고개를 들어 올린 샬롯이 속삭였다. 그리고는 놈의 팔을 뒤로 꺾으며 덧붙였다.
"가장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자세로 묶어 주지. 절대 풀 수 없을 거야. 우리가 사냥감을 묶을 때 쓰는 방식이거든."
"끝내면 들어서 마차에 실어 놔라. 바닥에 대충 던져 놔."
"입을 막아 놔도 되나? 눈도?"
"…알아서 해."
신났네, 아주.
이안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몸을 돌렸다. 바쁘게 움직이는 필립이 보였다. 어느새 세 마리의 말이 나란히 서 있고, 그 옆으로 시체가 차곡차곡 놓이는 중이었다.
'항상 헌 말이 가면 새 말이 오는구만….'
걸음을 옮긴 이안은 투구를 벗은 메브에게 다가갔다.
표정이 그리 좋지 않은 건, 비단 지쳐서만은 아닐 터였다.
"살아남은 놈들은, 경 덕분에 목숨을 건진 거요."
그녀의 곁에 서며 이안이 넌지시 내뱉었다. 메브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안이 심드렁하게 덧붙였다.
"나랑 저 녀석 둘만 있었다면, 한 놈도 살려 보내지 않았을 테니까."
"...."
묘한 표정을 지은 것도 잠시.
메브는 곧 핀드렐의 다리를 질질 끌고 언덕을 오르는 샬롯을 돌아보았다.
팔다리가 묶인 채 얼굴로 흙을 뒤집어쓰고 있는 요정을 잠시 응시한 그녀가, 다시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눌 대화가 있어서."
"…대화만?"
"그럴 리가. 나는 붉은 기사가 아니라서 말이오."
놀리듯 덧붙인 말에, 메브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래…. 어쩌면 후환을 남기지 않는 네 방식이, 장기적으론 희생을 더 줄일 수 있는 방법일지도 모르겠구나."
"뭐가 더 나은지는 아무도 알 수 없소. 나는 그저 쉬운 방식을 택할 뿐이오. 경처럼 관용을 베풀기엔, 겁이 많으니까."
"겁…? 네가…?"
메브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이안이 어깨만 으쓱이는 가운데, 필립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얼추 끝났습니다, 나리!"
이안은 곧바로 몸을 돌렸다. 대충 수습해 늘어놓은 시체들 앞에, 여기저기서 회수해 온 무기들이 쌓여 있었다. 손을 탁탁 턴 필립이 턱짓했다.
"필요한 걸 챙기십시오."
"이 분야에선, 정말이지 특출나 졌군."
"그거, 칭찬이시죠?"
"물론이지."
수확이 있었다. 몇 자루의 검은 이번에 새로 산 것들보다 좋았다.
이안은 아공간에서 검을 꺼내고, 그 자리에 새 검을 채워 넣으면서 입맛을 다셨다.
괜히 돈만 썼네, 시발.
"이 시신들은 어쩔까요, 나리?"
이안이 전리품을 챙기는 동안, 말에 타는 메브를 도운 필립이 덧붙였다. 메브가 시신들을 훑어보고는 말했다.
"이대로 두거라. 다시 돌아온 자들이 회수해 갈 수 있도록."
"예."
양손을 가슴 앞에 모은 메브가 낮은 목소리로 기도문을 읊기 시작했다. 죽은 이들이 천상에 오르기를 기원하는 기도였다. 필립도 눈을 감고 기도에 동참했다.
이안은 개의치 않고 물건들을 챙겼다. 기사 중 하나의 투구도 챙겼다. 지금까진 감각이 둔해지는 느낌이 들거나 불편해서 쓰지 않았는데, 이건 머리에 잘 맞았다. 눈과 코 위치의 구멍도 나쁘지 않았고, 안면 가리개를 아예 떼어 내면 입도 보일 것 같았다.
"기도를 끝내면, 맘에 드는 녀석으로 골라 타라."
필립에게 덧붙인 이안이 몸을 돌렸다. 곧 마차가 다시 출발했다.
병장기 한 더미와 죽 늘어선 시체들만이,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
하늘을 덮은 먹구름이 더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다.
"잠시 마차를 멈춰야 할 것 같소."
의자에 나른하게 앉아 있던 이안이 문득 입을 열었다.
메브가 왜 그러냐는 듯 그를 돌아보는 가운데, 샬롯이 기다렸다는 듯 마차를 세웠다.
"마비가 풀렸나 보군."
그녀가 마차 바닥에 널브러진 핀드렐을 돌아보며 내뱉었다. 이안이 미소 지었다.
"그래. 아닌 척하고 있을 뿐이지."
결박된 핀드렐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는 눈과 입이 천으로 가려진 채였다. 입안 가득 더러운 천을 머금고 있기까지 했다. 이안이 저만치 언덕 위의 바위를 가리켰다.
"저 뒤로 끌고 가라."
"알았다."
냉큼 일어선 샬롯이 핀드렐의 머리채를 붙잡고는 마차 밖으로 집어 던졌다.
"저도 따라가도 됩니까?"
꿈틀대는 핀드렐을 내려다보며 필립이 물었다.
이안이 코웃음을 치며 마차에서 내렸다.
"넌 말이나 지키고 있어. 경, 마차에 타서 쉬고 계시오. 오래는 안 걸릴 거요."
"…알았다, 그러지."
메브가 저래도 되나, 하는 표정으로 샬롯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샬롯은 핀드렐의 다리를 잡고 질질 끌고 가고 있었다. 아까도 그랬지만, 머리를 일부러 땅 쪽으로 향한 게 분명했다. 핀드렐이 신음을 흘리며 꿈틀댔지만 본 척도 하지 않았다.
느긋한 걸음으로 그녀의 뒤를 따른 이안이, 이윽고 바위 뒤에 도착하자 내뱉었다.
"무릎 꿇려."
샬롯이 온몸에 흙먼지를 뒤집어쓴 핀드렐을 억지로 일으켰다. 그녀가 놈의 눈을 가린 천을 벗기는 사이.
이안은 태연하게 놈의 몸을 뒤졌다. 놈의 검과 단검, 비수는 이미 풀어헤쳐서 마차에 두었지만, 숨겨둔 게 더 있을까 싶어서였다.
곧 핀드렐의 품에서 기다란 목함을 꺼낸 그가 눈을 빛냈다.
"호오…."
안에는 기다랗게 말린 궐련이 열 개도 넘게 들어 있었다. 심지어 정보창 확인도 가능했다. 요정의 궐련. 사용하면 일정 시간 동안 정신력이 하나 올라가는 효과가 있었다.
이런 훌륭한 아이템이 다 있나.
이안은 하나를 꺼내 입에 물고, 목함을 품에 넣었다.
손아귀에서 화염구를 피워 불을 붙인 그가 불덩이를 툭 던져 버리며 턱을 까딱였다.
"입, 풀어 줘."
단검을 놈의 얼굴 앞에 까딱대던 샬롯이 입을 가린 천을 풀었다. 헛구역질을 하며 입에 물려 있던 천을 뱉은 핀드렐이 소리쳤다.
"이 역겨운 짐승 년, 짐승보다 못한 인간 새끼…!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 지금 너희는- 컥."
샬롯이 핀드렐의 턱을 움켜쥐었다. 그녀가 가볍게 손을 턴 건 바로 그 직후였다. 핀드렐의 뾰족한 귀 끝이 잘려 나가면서 피가 치솟았다.
"으읍-! 으으읍-!"
"듣기 좋군. 계속해 봐. 조용해질 때까지 조금씩 계속 잘라 주지."
샬롯이 나긋나긋하게 속삭였다. 이마에 핏줄이 돋은 핀드렐이 숨만 헐떡였다.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신 샬롯이 턱을 쥔 손을 놓았다.
그사이 연기를 뿜으며 잔기침을 흘리던 이안이, 손을 가볍게 저어 연기를 떨치고는 입을 열었다.
"이거 완전 한약 맛이군."
"한약…? 그게 뭐지…?"
"좀 독하지만 나쁘지 않아. 더 가진 거 없나?"
"…당장은 그게 전부다. 재료는 내 방에 있지."
핀드렐이 순순히 내뱉었다. 검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바라본 이안이, 약초 냄새나는 연기를 뿜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정말이군. 좋아. 너한테 묻고 싶은 게 있다, 핀드렐."
"묻고 싶은 거…?"
핀드렐의 눈매가 설핏 가늘어졌다. 궐련의 연기를 한 모금 더 들이마신 이안이, 이윽고 내뱉었다.
"고대수에 대해, 아는 게 있나?"
#144화
"고대수…? 생명수를 말하는 거냐?"
"늪지 요정들의 유산. 내가 듣기론, 그것들이 너희 조상이라던데."
"생명수를 말하는 게 맞군…. 늪지 요정이라니, 대체 언제 적 얘기를…."
"아는 게 있긴 하단 거네."
"글쎄."
내뱉은 핀드렐이, 이안의 눈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날 풀어 주겠다고 여신께 맹세하면, 대답해 주지."
"흠…."
작게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읊조렸다.
"아무래도, 귀 한쪽으론 부족했나 보군."
"뭐라고…? 내, 내 입을 열려면 최소한-"
말하던 핀드렐이 본능적으로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샬롯이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균형을 잃고 옆으로 쓰러진 그가, 흙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헐떡댔다. 잘린 귀에서 흘러나온 피가 요정의 얼굴을 적셨다.
궐련을 끼운 검지와 중지를 슬쩍 내밀어 샬롯을 저지한 이안이,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착각하나 본데. 그런 건 네가 유일한 선택지일 때나 효과가 있는 거다. 너 말고도 요정은 많아. 난 그렇게 급하지도 않고. 하지만 너는… 글쎄."
"...."
핀드렐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이안이 궐련을 다시 입에 물었다. 샬롯이 기다렸다는 듯 핀드렐의 목을 쥐고는 일으켜 세웠다.
그녀가 단검을 뻗을 찰나, 핀드렐이 켁켁대며 내뱉었다.
"안다! 잘 알고 있다. 난 생명수를 직접 본 적도 있어!"
"그래…?"
이안이 미소 지었다. 샬롯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고는 놈의 목을 놓았다. 무릎 꿇은 핀드렐이 숨을 고르는 가운데, 이안의 싸늘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지만 잘 안다는 건 별로 믿기 힘든데."
"...! 아니, 정말로-"
"그 판단은 내가 해. 아는 대로 읊어라."
"네, 네 말대로 고대 늪지 요정은 우리 조상이 맞다. 인간에게 밀려난 일부는 밀림에 저주를 풀고 끝끝내 그 안에 남았지만, 대부분은 내해를 건너 남부로 이주했지. 거기 새로운 생명수를 심었고, 그걸 중심으로 다시 일어섰지. 그리고 알다시피, 그 위대한 생명수는 전쟁의 시대에 불탔다. 지금은 그 자손만이 몇 그루 남아 있지. 하지만 마력의 황혼기가-"
"역사는 그 정도면 충분해."
정말 아는 대로 막 읊는군.
말을 자른 이안이 연기를 한 모금 빨고는 덧붙였다.
"네 말대로 좀 아는 것 같으니, 다른 걸 묻지. 생명수가 몇 그루 남아 있다면, 너희 종족의 귀족들은 왜 은밀하게 그 씨앗을 찾고 있지? 자체적으로 수급하면 될 텐데."
샬롯이 슬쩍 이안을 돌아보았다. 왜 이런 걸 묻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듯. 핀드렐도 마찬가지였다.
슬쩍 미간을 좁힌 그가 내뱉었다.
"이해할 수 없군. 인간인 네가 왜 생명수에 대해 묻고, 씨앗을 찾는 원로들이 있단 건 또 어떻게 알지? 말하는 걸 보니, 의뢰를 받은 건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알긴. 게임에서 겪어 봤으니까 그렇지.
아공간 가장 구석에 처박혀 있는 고대수의 씨앗을 떠올리며, 이안이 턱을 까딱였다.
"그건 네가 알 바 아니고. 대답이나 해라."
"자체적으로 씨앗을 구하는 건 불가능하다."
이안이 다시 손짓할 기세이자, 핀드렐이 재빨리 내뱉었다. 이안이 계속하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핀드렐이 안도하듯 말을 이었다.
"생명수들은 아직 어려. 꽃을 피울 수도, 열매를 맺을 수도 없는 상태지. 게다가 더는 자라지도 않고 있다. 그러니 방법이 없지."
"자라지 않는다고?"
"그래. 생명수는 물과 햇빛뿐 아니라 마력을 먹고 자란다. 하지만 알다시피, 지금은 마력의 황혼기지. 생명수가 말라 죽지 않는 것에 감사해야 할 상황이란 얘기야. 그러니 원로 늙은이들은 더 애가 닳으시겠지."
핀드렐의 시선이 기억을 헤집듯 허공을 훑었다.
"예전에 얼핏 들은 적이 있다. 아겔 란 외곽의 그 저주받은 밀림으로 수색대를 보냈다고 말이야. 거기라면 다 자란 생명수가 있으리라 여겼겠지. 그 이후의 소식은 듣지 못했지만."
"살아 돌아오지도 못했겠군…."
늪지대 외곽의 밀림을 떠올리며, 이안이 읊조렸다. 아겔 란 한복판의 숲속에 한 그루가 남아 있다는 건 끝내 알아내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긴. 그러니 그 씨앗이 이안의 손에 들어왔겠지.
그걸 타락시켰던 버차드 후작도, 그게 요정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닌 나무인지는 몰랐겠고. 알았다 해도 달라질 건 없었으리라.
"그걸 네가 어떻게 알지…?"
핀드렐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가 봤으니까 알지.
코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한 이안이 말을 이었다.
"생명수를 자라게 할 방법은 없나 보군. 나라면 마석이라도 잔뜩 파묻어 봤을 텐데."
"뿌리로 흡수하는 게 아닐 거다. 그게 가능하다 해도, 마석이 끝도 없이 필요할 테고."
"그렇단 말이지…. 그럼 결국, 씨앗을 심으려고 찾는 건 아니란 얘기군."
이어진 말에 핀드렐의 어깨가 순간 굳어졌다. 아주 잠깐에 불과했지만, 이안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반 정도 남은 궐련을 다시 한번 깊이 빤 이안이 미소 지었다.
"새로 심어 봤자, 제대로 자라지 못할 테니까. 안 그래?"
"글쎄…. 그것까진 나도 잘 모르겠군. 늙은이들은 의뭉스러워서, 좀처럼 나 같은 젊은이들에게 지식을 공유하지 않-"
이안이 시선을 돌렸다. 둘의 대화가 슬슬 지겹다는 눈빛이던 샬롯이, 기다렸다는 듯 핀드렐의 입을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이안의 마음이 바뀌기라도 할까, 곧바로 단검을 휘둘렀다.
"읍… 으으읍…!"
멀쩡하던 반대쪽 귀 끝도 사선으로 잘려 나갔다.
핀드렐의 눈에 핏발이 섰다. 어찌나 온몸에 힘을 줬는지, 어느새 출혈이 멈췄던 반대쪽 귀에서도 다시 피가 흘렀다.
흘러내린 피가 요정의 목 양쪽을 적시는 가운데, 이안이 무감정하게 그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정말이지, 요정이란 것들은 틈만 나면 사람을 속이려 드는군. 말을 하는 데는 혀만 있으면 충분하단 걸 알아 둬라, 핀드렐."
"읍… 으읍...!"
날이 어두워지면서 늪처럼 칙칙한 녹색이 된 핀드렐의 눈에 두려움이 서렸다. 샬롯이 양 볼을 쥔 손아귀에 힘을 풀었다. 기다렸다는 듯 핀드렐이 내뱉었다.
"나도 정확히는 몰라…! 심장이 멎을 각오가 되었다면, 씨앗이 우리를 고위 요정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 준댔어. 그게 내가 아는 전부야. 씨앗을 어떤 식으로 쓰는 건진, 늙은이들이 절대 말해 주지 않는다고…!"
"부족해. 더 떠올려라. 그 말은 뭐지? 너흰 이미 스스로를 고위 요정이라 부르지 않나?"
"그건 그 빌어먹을 마족들과 우리를 구별하기 위해 붙인 말이다. 본래 고위 요정은 극소수의 원로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어. 지금은 그냥 원로란 말로 대신하지만, 어쨌든. 그들은 생명수의 축복을 받아 더 오래 살고, 많은 양의 마력을 부리지. 생명수에 축적된 마력을 사용할 수도 있다던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건진 몰라. 그건 원로회의 후계자들에게만 전승되는 비밀이라고…. 내가 이걸 아는 것만 해도 대단한 거란 말이다…."
"흐음…."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핀드렐의 말에는 거짓이 없었다. 눈빛, 말투, 작은 몸짓과 표정까지 전부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난 요정들의 영약을 그냥 먹어버렸던 거군.'
게임일 때는 알지 못했던 정보들이 머릿속에 빠르게 정리됐다.
물론 완벽한 건 아니었다. 정확한 용법만큼은 여전히 빈 자리로 남아 있었다.
그저 모호한 문구뿐.
'퍼즐이나 문답이 어려운 게임은 아니었어. 오히려 아주 직관적이었지. 그럼, 심장이 멎게 해야 된단 건가? 그리고 나선?'
"왜 자꾸 이런 걸 묻는 거지?"
핀드렐이 덧붙인 건 그때였다. 초조함이 묻어나는 눈으로 이안을 바라보던 그가, 이내 덧붙였다.
"혹시, 생명수의 씨앗을 가지고 있는 건가? 그런 거야? 거래를 하려면 모든 걸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하니 정보를 수집 중인 거고? 아니면 혹시, 우연히 다른 요정에게서 빼앗기라도 한 건가?"
"...."
이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우묵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핀드렐을 마주 볼 따름이었다.
말실수를 했다고 느꼈는지, 핀드렐이 황급히 입술을 말아 올렸다.
"사, 사연 따윈 상관없지. 정말 네게 씨앗이 있다면 내가 도와줄 수 있다. 나는 원로회의 일원이자 제국의 귀족인 아이나스가의 삼남이다. 비록 스스로 업적을 이루고자 자유 기사를 자청하고 있으나, 본래는 제국 어디에서도 합당한 대우를 받을 신분이지."
"가문의 골칫덩이가 아니라?"
이안이 툭 내뱉었다. 핀드렐이 짧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내가 가문으로 돌아간다면 모두가 환영할 것이다. 생명수의 씨앗을 가진 이가 동행한다면, 더 큰 환대를 받겠지. 그리고 할아버님께선 어떤 대가라도 기꺼이 치르실 거다. 물론 내 이름과 명예를 걸고 거래를 중개할 거고."
말을 이어 가는 동안 핀드렐의 목소리에 점점 더 생기가 돌았다. 이안은 가만히 그의 잘린 귀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핀드렐의 미소가 짙어졌다.
"이건 신경 쓰지 마라. 나의 과오로 인연의 시작이 좋지 않았으니,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른 것뿐이야. 과거는 과거로 남겨 두고-"
"들으면 들을수록 더 확실히 알겠군."
비로소 이안이 입을 열었다. 그가 얼마 남지 않은 궐련을 한 모금 빨고는 연기를 내뿜었다.
"너희 요정들은 내게 씨앗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죽여서 빼앗으려 할 거야. 그게 아니라도 정당한 값을 치르려 하진 않겠지. 어떻게든 속이려 들 거야. 이런 순간에도 거짓말을 늘어놓는 너처럼."
"거, 거짓말이 아니다, 정말…."
"네가 기사들을 끌고 온 걸 알고 있다, 핀드렐."
"...!"
순간 핀드렐의 숨이 멈췄다. 이안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우리가 패배해서 사로잡혔다면, 넌 우릴 살려 줬을 거냐?"
"...."
핀드렐이 순간 입을 뻐끔댔다. 가뜩이나 창백하던 그의 낯빛은, 이제 거의 납처럼 하얗게 되어 있었다.
궐련의 연기를 깊이 들이마신 이안이, 짧아진 궐련을 툭 땅에 떨구며 덧붙였다.
"네가 준 정보는 고맙다. 그 보답으로, 고통스럽지 않게 보내 주지."
"자, 잘못 생각한 거다. 내가 죽으면 가문이 알게 될 거야. 그럼 넌 요정들에게 쫓기게 될 거다. 요정은 최고의 추적자들이야. 집요하고, 절대 포기하지 않지."
"쫓기는 건 익숙해. 그리고 날 따라온 놈들은 다 죽었지."
"귀쟁이들이 알아서 굴러들어 올 거라니. 기대되는군."
샬롯까지 덧붙이자, 핀드렐이 말문이 막힌 듯 멍해졌다. 그사이, 샬롯이 이안을 돌아보았다.
"내게 기회를 주면 안 되겠나? 내 손으로 끝내고 싶은데."
"너는 귀 두 개로 만족해라. 이 녀석, 퀘스트가 있거든."
"그 말은 아직도 못 알아듣겠다만…. 그래, 네가 그렇다면야."
덤덤하게 대화를 주고받는 둘을 멍하니 바라보던 핀드렐의 얼굴이, 이윽고 일그러졌다.
"이 짐승만도 못한 것들…! 어차피 죽일 거면서, 이런 식으로 수모를 줬단 말이냐? 너, 이름 모를 인간아. 내 죽어서도 너를 저주할 것이다. 그리고 네년, 그래… 네년은 오래도록 살아남길 기원하마."
핀드렐이 공포와 증오가 뒤섞인 눈으로 샬롯을 노려보았다.
"너희 역겨운 수인들이 모조리 뒈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꼭 살아서 그 모든 걸 눈에 담아라!"
"...."
샬롯의 미소가 순간 굳어졌다. 핀드렐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너희 짐승들이 남몰래 그 버림받은 역겨운 신을 섬기는 걸, 우리가 모를 것 같으냐? 아니. 이미 다 안다! 그저 놔둘 뿐이지! 너희 짐승들이 충분히 많이 그 괴물을 섬기게 될 때까지!"
"뭐… 라고…?"
샬롯이 싸늘하게 되물었다. 핀드렐이 소리 내서 웃었다.
"네년 따윈 알아도 막지 못할 것이다. 이미 늦었으니까…! 해가 바뀔 때쯤엔, 심판관을 대동한 일족이 너희의 그 냄새 나는 땅을 정화하러 가게 될 거다. 아쉽군. 본래는 나도 변방에서 공적을 쌓은 후에, 그 사냥에 합류할 생각이었거늘."
"…거짓말하지 마라. 역겨운 귀쟁아. 우리는 황제 폐하께서 인정하신-"
"폐하께도 이미 너희에 대한 보고가 들어가고 있다. 하해와 같은 은혜를 입은 주제에, 버려진 신이나 섬기며 반란을 꿈꾸고 있다고 말이야. 하하… 표정을 보아하니 전혀 몰랐나 보군. 설마, 고향의 동족들이 무슨 짓거릴 하는지도 몰랐던 건-"
샬롯이 핀드렐의 얼굴을 움켜쥐었다. 손톱이 튀어나와 핀드렐의 볼을 깊이 파고들었다. 붉은 피가 줄지어 흘러내렸다.
"입 닥쳐라. 산채로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고 싶지 않으면."
핀드렐은 번들대는 눈으로 샬롯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곧 그의 얼굴 위로 어둑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단검을 뽑아 든 이안이었다.
"고통스럽게 죽고 싶단 말을, 길고 어렵게 하는군."
핀드렐의 눈동자는, 그의 검은 눈을 마주한 순간 빛을 잃었다.
그건 찰나였다. 곧 그의 눈에 푸른 광택이 아른거렸다. 발악하듯 마력을 끌어올린 것이다.
이안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는 마력 역류를 사용하거나 단검을 내지르는 대신, 입을 열었다.
"물러나라 샬롯. 다섯 걸음 이상."
핀드렐의 얼굴을 던지듯 놓은 샬롯이 으르렁대며 물러났다. 옆으로 쓰러지는 와중에도, 핀드렐의 눈동자가 푸르게 번뜩였다.
푸확-
그를 중심으로 터져 나온 냉기 파장이 주위를 얼렸다. 왼팔로 얼굴 앞을 가린 이안의 전신에도 새하얀 서리가 내려앉았다.
콰직.
"...!"
이안이 아무렇지도 않게 팔을 움직인 건 바로 그 직후였다. 그는 손으로 대충 몸에 내려앉은 서리를 털어 냈다. 주문을 정면에서 맞고도 멀쩡하게 견뎌낼 줄은 몰랐던 듯, 핀드렐이 눈을 치켜떴다.
이안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마력 탈진도 느끼지 못할 만큼의 마력으론, 나한테 아무런 타격도 입힐 수 없다. 핀드렐. 네 비장의 한 수란 건, 이렇게나 보잘것없는 거야."
말을 마친 이안이 단검을 내뻗고 죽 그었다. 핀드렐의 목에 생겨난 긴 붉은 선이 곧 붉게 흘러내렸다.
요정의 피도 인간과 다를 바 없는 붉은 색이었다.
"너는… 후회하게…."
피거품을 물며 읊조린 말을 마지막으로, 핀드렐의 눈이 풀어졌다.
이안의 눈앞으로 퀘스트 완료 창이 떠올랐다. 가문의 골칫덩이.
아까 전, 핀드렐과 맞부딪친 순간 생겼던 퀘스트였다. 그를 살려 가문까지 데리고 가거나 죽이는,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완수 조건이 존재하는 분기형 퀘스트였다.
이안은 죽이는 쪽을 선택한 셈이었다. 이게 어떤 결과로 이어질진 알 수 없었지만, 후회는 없었다.
현실이 된 지금도, 요정은 도저히 못 믿을 족속들이었으니까. 이 녀석이 아닌 다른 요정과 얽혔더라도, 비슷한 상황이 펼쳐졌을 터였다.
"오히려… 확실해졌지."
이안은 놈의 팔뚝에 단검 날을 닦으며 중얼댔다. 고대수의 씨앗을 요정 귀족들과 거래하는 건 쉽지 않으리란 확신이 생긴 것이다.
아마 게임에서도, 퀘스트가 아름답게 끝나지는 않았을 터였다.
"심장이 멎을 각오라…."
중얼댄 이안이 일어섰다. 핀드렐의 시체를 가만히 노려보는 샬롯을 돌아본 그가, 이내 덧붙였다.
"챙길 게 없나 한 번 더 뒤져 봐라. 시체는 그냥 버려 두고."
"…알았다. 그러지."
샬롯이 다가왔다. 일어선 이안이 몸을 돌렸다. 핀드렐의 시신을 발로 툭 차 눕히는 그녀를 뒤로한 채, 그는 언덕길을 내려갔다.
"다 끝나셨습니까, 나리?"
마부석에 앉은 필립이 속삭이듯 물었다. 어느새 날이 어두워서, 그의 모습은 완전히 어둠에 싸여 있었다.
이안은 어깨만 으쓱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다가오는 그를 눈에 담던 필립이 덧붙였다.
"그 요정은… 결국 죽이셨군요."
"그래."
심드렁하게 대답한 이안이, 마차 옆에 선 말에 올라탔다. 그의 시선이 마차 안쪽으로 돌아갔다. 필립이 속삭였다.
"조금 전에 잠드셨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이안은 의자에 깊이 몸을 파묻은 메브를 바라보았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깊이 잠든 채였다.
놀랍지도 않은 일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진작 지쳐 쓰러졌을 전투를 치렀으니까.
곧 소리 없이 달려 내려온 샬롯도 남은 말에 탔다. 이안과 눈이 마주친 그녀가 손에 든 것을 가볍게 던졌다.
"...?"
받아 든 이안이 손을 내려다보았다. 은으로 만든 꽃 모양의 브로치였다. 손바닥 반만 한 크기. 무슨 꽃인지는 몰라도, 형태가 꽤 정교하게 세공되어 있었다.
"그놈 가문의 문장인 것 같다."
샬롯이 나지막이 덧붙였다. 이안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장식품일 뿐이지만, 어쨌건 팔아먹으면 돈은 좀 될 터였다. 아이나스인가 하는 가문을 식별할 방법도 생겼고.
브로치를 아공간에 넣은 그가 샬롯을 다시 바라보았다.
"체력에는 여유가 좀 있나?"
"충분히. 어차피 오늘은 잠이 오지 않을 것 같고."
"잘 됐군."
내뱉은 이안이 필립을 돌아보았다.
"출발해. 시간을 많이 까먹었으니, 새벽까지 이동한다."
입 모양으로만 네, 하고 대답한 필립이 말의 엉덩이를 두드렸다.
마차가 천천히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안과 샬롯은 그 뒤를 따랐다. 가라앉은 눈으로 마차를 응시하던 샬롯이, 문득 입을 열었다.
"너는 거짓말을 가려낼 줄 알지, 이안."
"다는 아니고, 어느 정도는."
이안이 선선히 내뱉었다.
샬롯이 그를 돌아보았다.
"그럼 하나만 묻겠다."
"말해."
"그 녀석이 마지막에 한 말들. 거짓말이었나?"
#145화
이안은 대답 대신 샬롯을 돌아보았다. 세로로 긴 그녀의 동공이, 평소보다 넓게 벌어져 있었다. 아마 밤이라 그럴 터였다.
이윽고 이안이 입을 열었다.
"아니."
샬롯의 동공이 뾰족하게 수축되는 가운데, 그가 덧붙였다.
"내가 보기엔 거짓말이 아닌 것 같았다."
"그래… 역시 그런가…."
중얼댄 샬롯이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솔직하게 말해 줘서 고맙다, 이안."
"...."
이안은 잠시 샬롯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내 그가 다시 입을 열 찰나였다.
"…나중에."
샬롯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내뱉었다.
그녀가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지금은 테사가 우선이야. 그사이에 다른 문제를 끼워 넣고 싶지는 않아. 그러니 방금 하려던 말은, 모든 일이 끝난 후에 다시 해 주면 안 되겠느냐, 이안?"
은근히 눈치가 빠르다니까.
낮게 피식댄 이안이, 관도를 나아가는 마차의 뒤 꽁무니로 시선을 돌리며 내뱉었다.
"안 될 거 없지."
"하나만 더 물어도 될까?"
"그런 건 일일이 허락받지 않아도 돼."
"아까 그 생명수의 씨앗이란 거, 정말 가지고 있나?"
"그래."
아공간 깊숙이 손을 넣었던 이안이, 이내 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씨앗을 꺼냈다. 정보를 확인한 그의 눈매가 슬쩍 꿈틀댔다.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생명수의 씨앗. 설명은 그대로였다. 섭취 시 추가 스킬 포인트.
이안의 손을 돌아본 샬롯이 덧붙였다.
"그것에 대해서 캐물은 건… 역시, 테사 때문인 거고?"
뭔 소릴 하려나 했더니.
짧게 코웃음 친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팔아먹을 생각으로 물은 거다. 상품이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알아야, 제대로 거래를 할 수 있을 테니까."
물론 모든 걸 알아내진 못했지만, 어쨌건 성과가 있었다.
게임에서 풀지 못했던 의문이 또 하나 풀린 셈이었으니까.
그리고 이안이 볼 때, 씨앗의 진면목을 끌어낼 수 있는 건 요정뿐인 것 같았다.
수명이 늘고 마력까지 늘어나는 효과가 인간에게도 적용된다면, 인간들이 요정만 그런 혜택을 보게 놔둘 리 없었다. 아무리 비밀리에 전승되는 비법이라도, 황제의 눈까지 피할 수는 없을 터였다.
귀족과 마법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긴 수명과 더 많은 마력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심장이 멎을 위험이 있다 해도 얼마든지 도전할 자들이었다.
아예 불가능한 일이니 포기했으리라 보는 게 타당하리라.
"그런가… 내가 너무 앞서갔군."
고개를 주억거린 샬롯이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혹시 모르지."
이안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쩌면 이게 그 녀석에게도 도움이 될지도. 어쨌건, 요정이긴 하니까."
물론, 확실한 건 없었다.
이 씨앗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 건지. 그게 흡혈 요정에게도 효과가 있을지. 있다 해도 그저 더 강한 마족을 탄생시킬 뿐인 건 아닌지. 일행이 도착할 때까지 테사이아가 무사히 살아있긴 할지조차도.
그럼에도 이안은, 혹시 모를 가능성을 염두에 두기로 했다.
테사이아가 죽게 되는 결말은, 너무나도 확실하고 선명해서 더 생각할 필요도 없었으니까. 다른 가능성을 생각할 여유는 충분했다.
샬롯이 낮게 웃음 지었다.
"그래. 혹시 모를 일이지. 네 말대로."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두 기수는 묵묵히 마차의 뒤를 따라 나아갔다. 어둠을 헤치면서.
***
"오늘은 나와 필립이 말에 타겠다. 둘은 편히 가거라."
필립이 야영지를 정리하는 사이, 조금은 머쓱한 얼굴로 말한 메브가 말에 올랐다. 일행이 야간 행군을 이어 가는 동안 홀로 푹 잔 것이 못내 미안한 모양이었다.
"사양하지 않겠소."
피식댄 이안이 마차에 올랐다.
내내 한마디도 없이 있던 샬롯도 선뜻 마부석에 앉았다.
마차가 출발하는 가운데, 옆으로 따라붙은 필립이 조심스럽게 샬롯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가 입을 다문 탓에, 이야기는커녕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안은 신경 쓰지 않았다.
간만의 고요함을 굳이 깨고 싶지 않기도 했다.
이안은 곧, 마차 구석에 대충 놓여 있는 것들로 손을 뻗었다. 비수와 단검. 그리고 기다란 세검.
핀드렐이 쓰던 것들이었다. 전부 자루에 이런저런 장식이 들어간 고급품이었고, 정보 확인도 가능했다.
심지어 세검은 희귀 등급이었다.
고위 요정의 세검.
가죽띠 가장 하단의 투척용 단검을 빼고 그 자리에 요정의 비수를 꽂아 넣은 이안이, 이어 세검의 자루를 쥐었다.
검은 십자막이가 짧고, 은으로 멋스럽게 장식되어 있었다. 그 아래에 손가락을 끼울 수 있는 작은 고리가 있었는데, 여기에 검지를 끼우고 쥐는 형식인 모양이었다.
'누가 요정 아니랄까 봐… 더럽게 멋 부려 놨군.'
이안이 검을 뽑았다. 마차와 나란히 걷던 메브의 시선이 얇고 긴 검신으로 향했다.
"흠…."
이안은 기다란 검신을 이리저리 돌아보며 미간을 좁혔다.
날이 날카롭게 서 있긴 했지만, 어쨌건 베는 것보단 찌르기 위해 만들어진 칼이었다.
이걸 쥔 핀드렐이 어떤 식으로 싸웠을지 눈에 그려지는 듯했다.
요정 특유의 날랜 몸놀림으로 상대를 희롱하면서, 최대한 고통스럽고 잔혹하게 죽였겠지. 이런 검을 다룰 만큼 검술 실력도 뛰어났을 테니까.
'어쨌건 내가 쓰기엔 얇긴 하네.'
짧게 입맛을 다신 이안이 검을 검집에 되돌렸다. 그가 썼다간, 몇 번 휘두르기도 전에 검신이 두 동강이 나고 말리라.
곧 세검을 의자 옆에 기대 놓은 그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어제 말씀드리려 했었는데 말이오."
"음? 그래. 말하거라."
메브가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이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어제 죽인 요정은, 제국의 귀족 가문이었소. 아이나스인가 하는 가문의 삼남이라던데. 아시오?"
"글쎄. 그리 소개하던 기억이 나긴 한다만. 요정 가문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한다. 제국의 귀족은, 유명한 제후 가문 정도만 알고 있지. 예를 들면…."
"라르무트라든가."
"…그래."
"원로 요정이 있다는 걸 보면, 그 녀석도 방귀깨나 뀌는 집안인 모양이오. 무튼, 놈이 죽었으니 그 가문에서 보복하려 들 수도 있소. 물론 놈을 죽인 건 나지만…."
이안이 메브를 돌아보았다.
"공식적으론 아마도, 붉은 기사와 싸우다 죽었다고 알려질 테니 말이오."
"…그런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었는데. 확실히, 그렇겠군요."
처음엔 대화가 오가는 것만으로도 좋다는 표정이던 필립이, 언제 웃었냐는 듯 낯을 굳힌 채 말했다.
"요정들은 잔혹하고 집요해서, 피의 대가를 반드시 받아 낸다고 하던데요."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다면, 정정하시는 게 좋을 거요. 핀드렐을 죽인 건 경이 아니라 이안 호프라고."
이안이 덧붙였다. 짧게 침음한 메브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네가 죽이지 않았다면 결국 나와 싸웠을 자다. 게다가 나는 네가 그를 죽일 걸 알고도 그냥 두었으니, 공범이라 할 수 있지. 그러니 복수를 원하는 이가 있다면, 기꺼이 정당한 기회를 줄 것이다."
"요정들과 척을 지시겠다고요, 나리…?"
필립이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메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척을 지겠다는 의미는 아니다만. 결국 그리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게다가 내가 물러나면 이안이 짐을 짊어지게 될 것이다, 필립."
"그건… 옳은 말씀이십니다만."
"그야말로 훌륭한 판단의 표본이군."
샬롯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내뱉었다.
"어차피 귀쟁이들은 가까이해서 좋을 게 하나도 없는 족속이다. 저들을 제외하곤 죄다 이용해 먹을 생각뿐이지."
이 세계의 권력자란 것들은 대부분 그런 족속들이다만.
속으로만 읊조린 이안이, 메브를 슬쩍 바라보았다.
"해서, 복수를 원하는 요정이 따라오면 싸우시겠단 말씀이시오?"
"그래. 이안. 바로 그 말이다."
"그, 그래도 곧바로 추적대가 붙진 않겠지요? 제국까지 이야기가 들어가려면 시간이 걸릴 테고, 거기서도 나름대로 조사를 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요."
이안이 설핏 미소 짓는 가운데, 필립이 주절주절 떠들어 댔다.
대꾸도 하지 않고 손을 뻗은 이안이, 세검을 들어 마차 밖으로 내밀었다.
"그럼 이 검은 경이 사용하시는 게 좋을 것 같소."
"이건… 이안, 네 전리품이다만."
메브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이안이 어깨를 까딱였다.
"내 검술 실력으론 쓰기 힘든 검이라서 말이오. 경에게 더 어울리겠다 싶었는데, 요정들의 오해를 살까 싶어 드리지 않으려 했소. 하지만 상관없으시다니, 뭐."
이안이 어서 받으라는 듯 검을 슬쩍 흔들며 덧붙였다.
"지금 경이 쓰는 검보다 얇긴 하지만. 어쨌든 쓸 만한 검이오."
"…그렇다면 감사히 받으마."
비로소 옅은 미소를 지은 메브가 검을 받았다. 그녀는 양손으로 검을 받쳐 들고 찬찬히 훑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검은, 두 자루를 차고 필요에 따라 나눠 쓰면 그만이지. 고맙다, 이안. 요정의 검이라니. 귀한 선물을 받았구나."
"별말씀을."
이제 확실히 공범이 되었는데.
속으로만 읊조린 이안이 다시 시선을 돌렸다. 눈을 끔뻑이며 메브를 바라보던 필립이, 이윽고 물었다.
"나리, 그럼 저는요?"
"...?"
"제 건 없습니까…?"
"넌 요정이랑 척지기 싫다며."
이안이 한쪽 입꼬리만 슬쩍 말아 올리며 내뱉었다.
필립의 눈이 커졌다.
"말이 그렇단 거지요! 제가 정말 나리가 싸우실 때 뒷짐 지고 구겨만 하겠습니까? 선물은 안 주셔도 상관없습니다만, 절 신의 없는 놈으로 보시는 건- 어엇?!"
이안이 눈길도 주지 않은 채 필립 쪽으로 뭔가를 휙 던졌다.
황급히 받느라 안장에서 떨어질 뻔한 필립이, 잽싸게 손에 든 것을 확인했다.
이안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놈이 쓰던 단검이다."
"나리…!"
필립이 언제 씩씩댔냐는 듯 감격한 얼굴이 됐다. 은을 섞어 세공한 손잡이와 검집을 홀린 듯 응시한 그가, 이내 그걸 품에 안으며 내뱉었다.
"정말이지, 나리께선 사람을 감동시키는 방법을 제대로 아시는군요. 어떤 요정이 따라오더라도 염려 마십시오. 이 필립이 목숨을 걸어서라도-"
"필립."
"예, 나리?"
"이제 닥쳐라. 조용히 가자."
"옙…!"
웃음 지으며 대답한 필립이, 곧바로 다시 손에 든 단검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도 그 귀쟁이 놈이 많은 걸 남기고 갔군.
생각하며 어깨를 으쓱인 이안은, 이내 의자에 깊이 몸을 기댔다.
스톤빌에서 보낸 추가적인 추적대는 나타나지 않았다.
멈추지 않고 나아간 일행은, 다음 날부터 필립의 인도 아래 관도를 벗어났다.
제국으로 밀입국하기 위한 샛길, 소위 개구멍을 통과하기 위해서였다.
***
"이러다 또 다른 마경에 들어서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산기슭을 두리번대며, 말에 탄 필립이 중얼댔다.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지만 개의치 않고, 그가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그때 이후로 길이 없는 곳을 다니는 건 영 꺼림칙 합니다. 언제 어떻게 또 흉지에 발을 들일지 모르는 일이니까요. 제국 땅에 발을 들이고 나면 한숨 돌리긴 하겠습니다만…."
"...."
이안은 그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육포를 우물댔다. 스톤빌에서 산 육포는 질기기만 하고 맛이 없었다. 정말 쥐 고기로 만들었다 해도 놀랍지 않을 정도였다.
샬롯도 마찬가지로 육포만 우물댔다. 핀드렐의 말을 들은 후로 부쩍 생각에 잠긴 시간이 길어진 그녀였다. 저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오가고 있을지는, 그녀 본인만이 알고 있으리라.
'…적어도 크룩시카인가 뭔가 하는 신을 섬길 일은 없겠네.'
심드렁하게 생각하며, 이안은 칙칙한 풍경을 눈에 담았다.
지금 일행은 개구멍을 지나치고 있었다. 굽이져 이어진 계곡도 끝이 멀지 않았다. 여길 무사히 지나고 제국의 관도에 안착하기만 하면, 일단 밀입국은 성공하는 셈이었다.
물론 사실 그들은 몰래 국경을 넘을 필요가 없었지만.
그 과정에서 거쳐야 할 여러 귀찮은 절차와 그로 인해 따라붙을 여파들을 생각하면, 차라리 이쪽이 훨씬 마음이 편했다.
'시간도 훨씬 단축되고.'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필립이 입을 연 건, 그로부터 한 참 더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요즘 두 분의 표정이 어두우신 건, 그때 그 요정 때문입니까?"
이안은 물론 마부석에 앉은 샬롯도 필립을 돌아보았다. 필립이 머쓱하게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두 분이 찾으러 가시는 분도, 어쨌건 반은 요정이긴 하니까요. 혹시 그 마족, 아니, 그분과 관련된 일이 있으셨나 싶어서…."
"신경 쓰지 마라. 그런 거 아니니까."
이안이 덤덤하게 내뱉었다. 샬롯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덧붙였다.
"테사이아. 그 녀석을 부를 땐 이름으로 불러라. 입에 올리지 못할 이름이 아니야."
"그래도 될까요? 사실 그동안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도 내심 그분에게 묘한 친밀감이 생겨서 말입니다. 제 기억과는 여러모로 다르기도 하고요. 그때는… 꽤 무시무시한 모습이었거든요."
"굶기면 그렇게 돼. 짐승 피를 충분히 먹이면, 보통 귀쟁이들과 별반 다를 것도 없어지지."
샬롯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그녀가 다시 말을 받아 준단 사실 만으로도 기쁜 듯, 필립이 실실대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대체, 그분은 무슨 실험을 당하셨던 겁니까?"
"...?"
샬롯이 고개를 기울였다. 필립이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덧붙였다.
"전에 이안 나리께서 그러셨잖습니까. 그분은 실험체였다고요."
"그게 왜?"
"하지만 어쨌든 뱀파이어이지 않습니까. 그들에겐 동족일 텐데. 같은 마족끼리 무슨 실험을 하나 싶어서요. 그렇다 쳐도, 굳이 그분을 심판자까지 동원해 가며 다시 잡아가려는 이유도 모르겠고요. 새로 실험체를 만들어 내면 그만이지 않겠습니까?"
"흐음…."
그런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었다는 듯, 샬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이내 입을 열었다.
"나도 정확히는 모른다만. 뱀파이어를 만들어 내는 데는 진혈이라는 게 필요한 모양이더군. 놈들이 테사에게 집착한 건, 아마 그걸 회수하기 위해서인 것 같다만."
"흠. 그럼 진혈이라는 것의 총량이 정해져 있단 것인가. 하지만 그렇다면 죽여서 회수해 가도 됐을 텐데. 살려서 데려가려 했다지 않았느냐?"
낮게 침음한 메브가 물었다.
샬롯이 볼을 긁적였다.
"그 이유는 나도 모르겠군. 생각해 보면, 그 녀석이 무슨 실험을 당했는지도 들은 적이 없어. 떠드는 걸 좋아하는 녀석이었으니, 굳이 말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데. 뱀파이어가 될 때의 고통과, 묶인 채로 갇혀 지냈던 것만 얘기했었지."
"실험 장소가 루 사드가 아니었던 모양이지."
이안이 툭 끼어든 건 그때였다.
일행의 시선이 그에게로 모였다.
"루 사드에서 보관하다 때가 되면 어딘가로 끌려갈 계획이었다면, 대충 앞뒤가 맞아. 뱀파이어는 실험의 주체가 아니고, 그저 실험체를 공급하는 역할인 거다."
"동족을 만들어서… 팔아넘기기라도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필립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이안이 어깨를 까딱였다.
"나야 모르지. 다만, 그러면 잡종이니 뭐니 멸시하고, 굳이 요정을 데려다가 뱀파이어로 만든 것도 설명이 되니까.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할 뿐이야."
"누군가가 요정을 흡혈귀로 만들기를 원했고, 놈들은 거기에 따랐을 뿐일 거란 말이냐?"
메브의 질문에 이안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전에 흡혈 여제와 잠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소."
"여, 여제요?! …죄송합니다, 계속 말씀하십시오."
저도 모르게 끼어들었던 필립이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이안이 말을 이었다.
"뒤를 봐주는 자들이 있는 것처럼 굴었지. 놀랍진 않았소. 그렇지 않다면, 마족이 제국과 가장 가까운 나라에 버젓이 세력을 꾸리고 있는 게 말이 되질 않으니까."
"그렇게 인간들의 사이에 자리를 잡고 살아가는 대신, 대가를 지불하고 있으리란 거겠구나."
메브가 탄식하듯 말했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예상은 그렇소. 일단은."
"어지간한 권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일 텐데…. 혹, 그 배후라는 자들의 정체를, 알고 있느냐?"
"추측은 하고 있소만…."
이안이 메브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이걸 말하려면, 먼저 해야 할 이야기가 많아서 말이오."
"당장 할 얘긴 아니란 거구나."
"모든 게 확실해지고 나서 해도 늦지 않을 거란 얘기요."
"그래. 그렇다면야…."
메브가 고개를 끄덕이자, 필립이 홱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니, 이걸 참으신다고요? 방금 뱀파이어 여왕에, 마족을 후원하는 자들이 있단 얘기까지 들으셨는데, 이걸 참으셔요?"
"설명해야 할 말이 많다지 않느냐. 당분간 쭉 함께할 텐데. 서두를 이유가 있느냐?"
"또 옳은 말씀으로 제 입을 막으시는군요…. 하지만, 적어도 샬롯의 이야기는 들어야겠습니다. 샬롯, 다음 얘길 해 주세요. 벌써 며칠이나 전혀 진도가 나가지 못하고 있잖습니까."
"왜 불똥이 나한테 튀는 건지 모르겠군."
건수 잡았다, 이거지.
내심 코웃음을 치며, 이안은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계곡의 끝자락이었다.
듬성듬성한 나무. 완만하게 이어진 비탈길. 변방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들판.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관도와, 그 주변을 무리 지어 걷고 있는 일련의 기수들.
"...?"
이안의 미간이 순간 좁아졌다. 저만치의 광경을 빤히 바라본 그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여기가 개구멍이라고 하지 않았었냐?"
샬롯과 실랑이를 벌이던 필립이 그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랬죠."
"그럼 저건 뭐지? 아무리 봐도, 국경 순찰대 같은데."
"예…?!"
#146화
눈을 치켜뜬 필립의 고개가 이내 홱 돌아갔다.
같은 방향을 돌아본 샬롯과 메브의 미간이 좁아지는 가운데, 그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이럴 리가… 분명 안전한 길이라고 호언장담을 했었는데요…."
"그자가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면, 이젠 저쪽에서도 아는 모양이군."
이안이 심드렁하게 내뱉었다.
딱히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모든 개구멍은 언젠가는 들키게 마련이니까.
나라를 잃은 듯한 얼굴이 된 필립이 탄식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바로 마주치다니…. 도대체…."
이안은 짧게 콧방귀만 뀌었다.
순찰을 도는 경비대가 존재하는 이상, 그가 보기엔 어차피 일어날 일이었다. 시기의 차이일 뿐, 관도에 들어선 이후라 해도 마주치게 되었으리라. 일행의 신분을 확인하려 들리란 건 더 말 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 의미에선, 저들의 존재를 일찍 알게 된 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이, 이럴 때가 아니군요. 어쩔까요, 나리. 지금이라도 마차를 돌릴까요?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숨어 있으면-"
"이미 늦었다."
샬롯이 말을 잘랐다. 태연하게 고개를 까딱인 그녀가 덧붙였다.
"저쪽도 우릴 발견한 것 같거든."
아니나 다를까, 기수들이 멈춰 서고 있었다.
"루 솔라여…."
눈을 감은 필립이 탄식했다.
말 머리를 돌리기에 늦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들키지 않은 상태였다면 모를까. 여기서 마차를 멈추거나 돌아선다면, 뒤가 구리다고 실토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따라오지 않는다고 해도 한동안 길목을 감시할 테고, 따라온다면 신원 확인 같은 친절한 절차는 생략될 게 분명했다.
"어쩔 수 없구나. 계속 갈 수밖에."
메브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필립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는 가운데, 샬롯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의미심장한 눈빛을 받은 이안이 입맛을 다셨다.
"상황 돌아가는 거 보고."
"…면목이 없습니다, 나리."
그의 말을 오해한 듯, 필립이 고개를 떨궜다.
"말만 믿고 변수를 대비하지 않은 제 실책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수습해 보겠습니다."
"어쩌게?"
이안이 툭 내뱉었다. 메브와 비장하게 눈빛을 교환한 필립이 입을 열었다.
"우리 나리의 위명을 이용할 수밖에요. 북부에까지 나리의 명성이 퍼졌다지 않으셨습니까. 저들에게 나리의 신분을 밝히고, 용무가 있음을 알리겠습니다."
"내가 보기에도 그게 최선일 것 같구나, 이안. 혹여 일이 잘 풀리지 않더라도, 저들과 피를 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
메브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이안이 수틀리면 칼을 뽑아 들리라 염려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쉬울 것 같진 않은데….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그, 혹여 되돌아가게 되더라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개구멍이 또 있습니다. 제 불찰인 만큼, 잠을 줄여서라도 모시겠습니다. 두 분은 마차에서 쉬시고요…."
필립이 머리라도 조아릴 기세로 덧붙였다.
이안은 어깨만 으쓱였다.
물론 돌아갈 새각 따윈 없었다. 어차피 그에겐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최후의 선택지였다. 가능하면 필립이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게, 가장 편했다.
철컥.
곧 메브가 안면 가리개를 내렸다.
순찰대가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 역시 관도를 벗어나, 넓게 포진한 채 계곡으로 다가오는 중이었다.
천천히 말을 모는 건, 일행이 멈추거나 돌아서지 않고 계속 나아가고 있기 때문일 터였다.
병사들의 무장 상태는 훌륭했다.
관리가 잘된 말. 안장에는 저마다 같은 위치에 똑같이 생긴 쇠뇌가 걸려 있고, 복장도 통일되어 있었다. 제국의 문양이 새겨진 서코트와 사슬과 가죽이 섞인 방어구. 코를 가리는 투구까지.
게다가 누구 하나 마차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제국의 정규군다운 절제된 분위기였다. 이안은 그 한복판, 한쪽 팔에 완장을 두르고 조금 더 좋은 말을 탄 중년인을 눈에 담았다.
'저자가 순찰대장이겠고… 그 뒤엔 부관인가.'
쓸데없이 본격적이긴.
하긴. 게임에서도 제국의 정규군은 변방의 왕국군과는 차원이 달랐다.
무장도 그렇고, 군기도 바짝 들어 있었다. 비단 최전선의 정예병이 아니라도 그랬다.
'온통 개판으로 변하고 나서도 그랬지. 툭하면 우르르 달려와서 검문하고.'
생각하는 사이, 순찰대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쇠뇌를 든 병사들이 일제히 마차를 겨눴다.
"정지! 멈추지 않는다면 발사하겠다!"
한 걸음 더 앞에서 멈춘 순찰대장이 소리쳤다. 샬롯이 고삐를 당기고, 메브와 필립도 순순히 멈췄다.
"너희는 지금 제국의 영토에 발을 들였다. 신분을 밝히고 투항하라!"
그래도 말이 아예 안 통할 것 같진 않은데. 생각하며, 이안은 눈동자만 굴려 필립을 바라보았다.
그는 낯이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은 와중에도, 천천히 말을 몰아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이윽고 멈춰 선 필립이 소리쳤다.
"우리는 죄인이나 도망자가 아닙니다! 제 뒤에 계신 이분은, 루 솔라의 신도이자 티르 엔의 사도. 전장의 붉은 기사이며 약자들의 구원자인 메브 리우렐 경이십니다!"
투구 아래, 순찰 대장의 미간이 좁아졌다.
"소문의 그 붉은 기사란 말이냐? 복수의 대행자이기도 한?"
"바로 그렇습니다!"
필립의 표정이 설핏 밝아졌다. 그가 곧바로 말을 이었다.
"지금 우리는 아주 중요하며 고결한 의무를 다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고, 그 과정에서 필요에 의해 잠시 제국에 발을 들였을 뿐입니다. 다른 어떤 분란과 문제도 일으키지 않을 것이며, 곧 다시 변방으로 돌아갈 계획이니, 길을 터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몇몇 병사들이 힐끔 서로를 곁눈질했다. 순찰대장의 시선이 마차와 메브를 훑었다. 그의 옆에 선 부관이 뭔가를 속삭였다.
이안이 턱을 긁적이는 가운데, 순찰대장이 입을 열었다.
"귀하가 거짓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건 충분히 알겠소! 하지만 여긴 변방이 아니오. 이름 높은 붉은 기사라 한들, 합당한 사유와 허락 없이는 발을 들일 수 없소. 오히려 그렇기에 더더욱 적법한 절차를 거치셔야 하오!"
"...."
필립의 미소가 굳어졌다.
이안도 쩝, 입맛을 다셨다.
역시 이렇게 되나.
샬롯이 느긋하게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는 가운데, 순찰대장의 외침이 이어졌다.
"마차를 돌려 변방으로 돌아가시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존중이오! 불복한다면 군법에 의거해 대응하겠소!"
"하… 루 솔라여…."
필립이 나지막이 탄식하는 사이, 샬롯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싫어하는 것은 안다만. 상황이 이러니 별수 없을 것 같다, 이안."
말과 달리 눈은 묘하게 빛내면서,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내게 맡겨 다오. 깔끔하게 처리하겠다."
"…뭐, 어쩔 수 없지."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아공간에서 잘 말린 양피지와 검은 가죽으로 제본된 얇고 긴 책자를 꺼냈다. 냉큼 받아든 샬롯이 미소 지었다.
"다녀오겠다."
마부석에서 내린 그녀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 샬롯?"
말을 돌리려던 필립이, 곁을 지나치는 샬롯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곧 눈을 치켜뜬 그가 속삭였다.
"어딜 가십니까? 샬롯? 샬롯…?"
그녀의 행동에 놀란 건 순찰대도 마찬가지였다.
"당장 멈춰라!"
샬롯을 보며 미간을 찌푸리던 순찰대장이 뒤늦게 소리쳤다. 비스듬하게 내려가던 쇠뇌들이 다시 일제히 샬롯을 겨눴다.
다소 느슨해졌던 공기가 긴장감을 머금고 싸늘해졌다. 비로소 멈춰선 샬롯이, 턱 끝을 살짝 치켜들었다.
병사들을 차근히 훑은 그녀가, 이윽고 소리쳤다.
"그대들이 의무를 다할 뿐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 마차에는 이안 호프 경께서 타고 계시다! 그러니 당장 무기를 거두고 물러나라! 따르지 않는다면 신성 모독으로 간주하겠다!"
어리둥절한 적막이 뒤를 이었다.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깜빡인 것도 잠시. 순찰대장이 인상을 구기며 소리쳤다.
"신성 모독이라니! 수인 주제에 어디서 감히 그런 불경한 발언을 입에 올린단 말이냐?"
"네 이놈!"
샬롯이 일갈했다. 저주파가 섞인, 야수의 포효에 가까웠다. 꽤 먼 거리임에도, 병사들의 어깨가 순간 움찔 떨릴 정도였다.
샬롯이 말을 이었다.
"북부가 멀지 않거늘! 어찌 경의 존함을 듣고도 말에서 내리지 않는단 말이냐?"
"그, 그게 무슨-"
"그래, 무지는 죄가 아니지. 좋다! 다들 귀를 열고 똑똑히 들어라!"
반박할 틈도 주지 않고 내뱉은 샬롯이, 오른손에 쥔 문서들을 가슴에 얹으며 소리쳤다.
"엄정한 여신의 성전사. 성화를 되살린 불씨의 운반자. 거인 왕국 최후의 징벌자이며, 카르하께서 인정하신 북부의 진정한 대전사."
방금까지와 달리, 그녀의 말은 전혀 빠르지 않았다.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주며 웅변하듯 목소리를 넓게 퍼뜨렸다.
이안은 저도 모르게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소개가 능숙해진 건 둘째 치고, 즐기고 있는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분명 전에는 이러지 않았건만.
"타락용의 심장을 찌른 용살자이자, 저 위대한 백금룡의 유일하며 공식적인 대행자."
비로소 잠시 말을 멈춘 샬롯이, 마차를 가리키듯 한쪽 팔을 들며 소리쳤다.
"북부의 새로운 초인, 이안 호프 경이시다! 다들 말에서 내려, 합당한 예를 갖춰라!"
"...."
물론 말에서 내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얼빠진 표정으로 샬롯을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건 메브와 필립도 마찬가지였다. 메브는 선 채로 죽은 것처럼 굳어 있었고, 필립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샬롯을 응시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순찰대장이었다.
"그… 그 말을 입증할 수 있소?"
"찬란한 여신과 엄정한 여신이 입증하실 것이며, 카르하께서도 보증하시겠지. 제국의 법도에 따르라 한다면, 증명서가 내 손에 있다."
샬롯이 손을 치켜들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양피지를 확인한 순찰대장이 부관에게 눈짓하고는 고삐를 들었다.
"확인하러 가겠소."
두 기수가 샬롯에게 다가왔다. 증명서를 양손에 나눠 쥔 샬롯이, 그들을 향해 팔을 뻗었다.
책자는 순찰대장의 손에, 양피지는 부관의 손에 각각 들어갔다.
책자를 펼친 순찰대장의 얼굴은 놀랐다기보단 당혹스러워 보였다.
그리고 그 표정이 경악으로 바뀌는 건 몇 초면 충분했다.
"...!"
그가 든 책자는 트라벨가의 교회에서 발급하고 북부의 울라프 대공이 날인한 증명서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최고급 양피지에 금가루를 섞은 잉크로 글자를 새긴, 위조가 불가능에 가까운 물건이었다.
이안도 북부를 떠날 때를 제외하고는 사용한 적이 없었다.
"허…."
얼어붙은 건 부관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손에 든 양피지는 화로의 사원에서 발급한 증명서였으니까. 장벽 요새를 비롯한 북부의 관문 직인이 여러 개 찍혀 있기까지 했다.
둘 다, 이안이 북부와 교단의 비호를 받는 중요 인물임을 증명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윽고 서로를 돌아본 순찰대장과 부관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말에서 내렸다.
병사들을 돌아본 대장이 소리쳤다.
"다, 다들 당장 무기를 거두고 말에서 내려라! 북부의 용살자시다!"
그제야 병사들도 허겁지겁 말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몇몇은 기도하는 자세를 취하기도 했다. 아직 본명이 알려지지 않았을 뿐. 북부에 대전사와 용살자가 나타났다는 이야기는 모르는 이가 없었다.
이곳이 북부가 아니라는 사실 따위는, 전혀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다.
"먼저 나서지 못한 사정이 있었으나, 이해하길 바란다. 위대한 백금룡의 뜻을 대행하고 있기에, 경께선 피치 못할 상황이 아니고선 신분을 드러내길 원치 않으시니."
샬롯이 태연하게 내뱉으며 손을 뻗었다. 증명서를 조심스럽게 접은 순찰대장이, 양손으로 받쳐 내밀며 고개를 숙였다.
"다,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존귀하신 분께 어찌 감히 불경한 생각을 품겠습니까?"
부관이 건넨 양피지까지 받아든 샬롯이, 여전히 굳어 있는 메브와 필립을 돌아보고는 덧붙였다.
"붉은 기사와 그의 종자는 경을 조력하고 있다. 이들이 제국인은 아니라 하나, 발을 들일 자격은 충분할 것 같은데."
"물론입니다."
순찰대장은 언제 그리 엄격하고 깐깐했냐는 듯, 군기가 바짝 든 얼굴로 대답했다. 샬롯이 고개를 주억거리는 사이, 그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용살자께 직접 무례를 사과드려도 되겠습니까?"
"글쎄…."
샬롯이 슬며시 이안을 돌아보았다.
심드렁하게 앉아 있던 이안이 작게 고개를 까딱였다. 영 내키지 않는 일이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곧 순찰대장이 마차 옆으로 다가왔다. 고개를 숙인 그가 내뱉었다.
"무례를 정식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저희들은 단지-"
"책임과 의무를 다했을 뿐이지. 알고 있소. 다만…."
말을 자른 이안이,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내가 다녀갔단 사실은, 최대한 늦게 알려지면 좋겠는데."
"예. 입단속을 철저히 하겠습니다."
퍽이나 그게 되겠다.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분을 드러낸 이상 소문이 퍼지는 건 어차피 막을 수 없었다. 당장 이들도 본진으로 돌아가면 보고를 올릴 터였다.
다만 그게 하루 이틀만 늦어져도 충분했다. 일대의 영주나 교단에서 알게 되었을 땐, 이미 그는 떠나고 없을 테니까.
"이제 가도 되겠나? 갈 길이 멀어서."
"물론입니다. 경, 외람된 말씀이오나, 어디로 가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건 왜?"
"국경 인근에는 저희 말고도 순찰조가 여럿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변방의 소란 탓에, 몰래 국경을 넘는 이들이 늘었기 때문입니다. 해서, 저희는 마주친 행인의 신분을 전부 확인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어느 개구멍이든 상황은 비슷했으리란 거네.
생각하며, 이안이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밀입국하다 걸린 자들은, 보통 어떻게 되지?"
"덤빌 경우엔 즉결 처형이지만, 그 외엔 붙잡아 후송합니다. 대부분 각지로 보내져 몇년간 노역 살이를 하게 되지요."
공짜 인력이 된단 뜻이었다. 노역 기간이 끝나면 자유민이나 농노로 정착하게 될 테니, 그냥 죽이는 것보단 여러모로 남는 장사 일터였다.
'창조 경제가 따로 없군….'
"하지만 이 인근을 벗어날 때 까지만이라도 저희가 경을 모신다면, 그런 귀찮은 상황을 반복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이렇게라도 저희가 저지른 무례를 갚을 기회를 주신다면-"
주절주절 이어지는 설명에, 이안은 헛웃음을 삼켰다.
그를 무슨 교단의 대주교나 제후처럼 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국이 변방과 북부를 합친 것보다도 크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이런 상황이 끝없이 반복된다면 숨이 턱턱 막히리라. 어쨌건, 지금 당장은 받아들이는 게 훨씬 좋은 제안이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시오?"
"…! 그, 그레고리 바셋입니다, 경."
"그래. 그레고리 경.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긴 경만 아는 걸로 합시다."
그레고리의 눈동자에 결의가 번졌다. 예, 하고 대답하며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이안이 말을 이었다.
"우린 지금 루 사드로 가고 있소. 가는 길에 도시를 하나쯤 들를 수 있으면 좋겠는데."
"루 사드로 가신다면…. 버브룩을 들르시는 게 좋겠군요. 마침 저희 주둔지에서도 크게 멀지 않은 곳이기도 합니다만… 저희가 모셔도 되겠습니까?"
"그럼, 부탁하겠소. 그리고 내 행선지는…."
"찬란한 여신께 맹세코, 무덤까지 가져가겠습니다."
깍듯하게 대답한 그레고리가 몸을 돌렸다. 멀찍이 선 부관도 이안에게 경례하고는 말에 올랐다.
비로소 샬롯이 마부석에 올랐다.
그녀가 내민 증명서를 받아들면서, 이안이 내뱉었다.
"너무 즐기던데."
샬롯이 어깨를 으쓱였다.
"내 역할에 충실했을 뿐이다. 하지만, 속은 시원하군."
뭐가 시원한 건데.
헛웃음을 짓는 이안의 귓가로, 나지막한 탄식이 스쳤다.
"루 솔라 맙소사…."
여전히 반쯤 넋이 나간 필립이었다. 이안과 눈이 마주친 그가 멍하니 입을 달싹였다.
"지금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 겁니까…? 제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 겁니까…? 그러니까, 이안 나리가, 바로 그…?"
이안은 대답 대신 메브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석상처럼 굳어져 있었다. 안면 가리개 덕에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마 필립과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을 터였다.
…이건 절대 그냥 못 넘어가겠네.
생각하며 입맛을 다신 이안이, 이윽고 턱짓했다.
"얘긴 나중에 하고. 일단은 갑시다. 다들 기다리니까."
샬롯이 기다렸다는 듯 고삐를 쳤다. 넋이 나간 기사와 종자를 남겨둔 채, 마차가 출발했다.
#147화
마차가 깔끔하게 이어진 관도를 나아갔다. 적당한 거리를 둔 순찰대에 빙 둘러싸인 채였다. 그들은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이따금씩, 마차에 앉은 이안의 모습을 곁눈질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건 길을 지나다 마주친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순찰대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행인들이, 이곳이 제국임을 증명하듯 드물지 않게 오갔다.
다들 순찰대가 호위 중인 마차의 정체가 궁금한 눈치였다.
'더럽게 부담스럽네….'
이 정도로 눈에 띌 줄이야.
생각과 달리 심드렁한 얼굴로, 이안은 육포만 우물댔다.
어쨌건, 제국에 발을 들였다는 실감이 났다. 게임에서보다 빠른 시기였고, 날치기일지언정 적법한 절차까지 거쳤다.
게임에서 시작부터 제국이나 북부에 발을 들일 수 없는 건, 그럴 자격이 없어서였다.
무작정 들어왔다간 순찰대나 검문병에게 죽임을 당했다.
제국을 거쳐야만 이동할 수 있는 남부나 검은 벽 인근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니 제국에 발을 들일 수 있게 됐다는 건, 다음 챕터를 시작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물론 진행 순서가 바뀌면서 아직 2 챕터의 주요 퀘스트들이 남아있긴 했지만.
"아까 이안이 표정 관리 좀 하라고 했던 것 같은데."
샬롯이 나지막이 내뱉은 건 그때였다. 이안을 뚫어질 듯 응시하던 필립이 시선을 돌렸다.
"제가 또 그랬습니까…? 저도 모르게 그만."
모르긴 개뿔.
이안은 짧게 콧방귀만 뀌었다.
저래놓고 몇 분이면 다시 그를 돌아볼 터였다. 계속 그랬듯이.
아직은 근처에 병사들이 있어 말을 꺼내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저들과 작별한 순간 야단법석을 떨어댈 게 분명했다.
반면 여전히 안면 가리개를 눌러쓴 메브는, 그저 묵묵히 마차 옆을 따랐다. 이안 쪽으론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저곳이 버브룩입니다."
마차 근처로 조심스럽게 다가온 그레고리가 말했다. 이안은 고개만 끄덕이며, 관도 너머에 펼쳐진 도시를 눈에 담았다.
적당히 높고 견고해 보이는 성벽이 넓게 펼쳐지고, 그 너머로 크고 작은 건물들의 지붕이 삐죽삐죽 이어져 있었다. 대문은 반쯤 열려 있고, 행인들이 별다른 제지 없이 그 사이를 오갔다.
변방의 국경과 불과 며칠 거리밖에 되지 않건만. 전쟁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분위기였다.
심지어 북부의 대도시들과도 전혀 달랐다. 하긴. 북부는 설원 지대와 검은 벽을 끼고 있어, 상시 전시 태세에 가까운 지역이긴 했다.
여긴 제국에서도 변경이며, 검은 벽이나 전쟁과도 관련이 없었다. 거기다 국경 수비대의 순찰까지 강화된 상태이니 특히 더 안전하리라. 남쪽으로 농작지도 여럿 보였으니, 평소에도 아예 방치되진 않았을 터였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 일대도 침식의 영향을 받았던 것 같은데….'
가까워지는 도시를 눈에 담던 이안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레고리 경."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음에도, 저만치의 그레고리가 재빨리 간격을 좁혔다.
"말씀하십시오, 이안 경."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소. 도시 사람들의 이목을 끌면 좀 피곤해질 것 같은데."
"그러시군요. 그럼 나머지는 이쯤에서 멈추고, 저와 부하 하나만 근처까지 모시겠습니다."
이 다소 완고한 인상의 중년 남자는 보기보다 눈치가 빨랐다.
그가 신호하자 병사들이 멈춰 섰다. 그를 바라보는 눈빛들이, 뭔가 한마디 해 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이안은 헛웃음을 삼켰다.
그가 싸우는 걸 실제로 본 것도 아닐 텐데 이런 반응들이라니.
하긴. 소문은 언제나 과장되기 마련이었다. 당장 북부에서도 살아 있는 기적 취급을 받지 않았던가.
여기선 그보다 더할지도 몰랐다.
어쨌건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니, 한마디 못 할 것도 없었다.
"고마웠소. 앞으로도 수고하시오."
이안의 덤덤한 말에, 병사들이 손을 모아 쥐며 고개를 숙였다.
'그래. 대놓고 성자 취급이군.'
마차가 앞서 나아갔다. 일행을 따르는 건 그레고리와 부관뿐이었다.
"부디 성스러운 사명을 무사히 완수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경. 그리고 혹여 교단에 보고를 올려야 할 일이 생긴다면-"
"내가 그대들의 도움에 감사를 표했다 하시오."
이안의 말에 그레고리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스쳤다. 어쩌면 그가 이렇게 발 벗고 나선 건, 교단이 신경 쓰여서인지도 몰랐다. 교단이 제국에 가진 영향력은, 변방이나 북부와는 차원이 달랐으니까.
다각- 다각-
마차가 성문으로 나아갔다.
문을 지키는 경비병들은 대체 뭐 하는 자들인가 하는 눈빛으로 쳐다만 볼 뿐, 일행을 막아서지 않았다.
거리의 전경을 눈에 담던 샬롯이, 이윽고 내뱉었다.
"여긴 여전하군."
"와 본 적 있는 도시냐?"
이안이 한결 홀가분해진 얼굴로 물었다. 샬롯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긴 벨 론데와 루 사드에 모두 인접한, 일종의 갈림길이다. 변방으로 향하는 상인들이 마지막으로 들르는 도시기도 하지. 그래서 아까도 저들이 이곳으로 안내하리란 걸,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내뱉은 그녀가 슬쩍 이안을 돌아보았다.
"예전 아겔 란으로 향하던 때에도, 여길 지나서 벨 론데로 향했었지."
처음 만났던 때를 말하는 거군.
짧게 피식댄 이안이 말했다.
"괜찮겠냐? 천칭 상단이라도 마주치면, 꽤 껄끄러워질 텐데."
"상관없다. 마주칠 일도 없겠지만, 마주쳐도 나한텐 별 관심이 없을 거야. 하비에르가 해 먹던 부분은 다른 단주들이 나눠 가졌을 테니. 넌 모르겠지만 그때의 상행이 실패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군…. 어쨌든 잘 됐네. 안내는 네게 맡겨도 되겠어."
"물론이지. 일단 마차부터 맡기겠다."
고개를 주억거리던 이안의 미간이, 이내 설핏 좁아졌다. 다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윽고 그가 내뱉었다.
"눈을 왜 자꾸 그렇게 뜨냐?"
이안과 샬롯을 번갈아 바라보던 필립이 오히려 더 눈을 치켜떴다.
"안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두 분이야말로, 이렇게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실 때가 아닌 것 같은데요."
"말을 맡기고 숙소를 찾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뭐가 있다고."
"설명이 있지요. 아니,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내내 함께한 나리가 바로 소문의 그 대전사이며 용살자였다는데요. 게다가 백금룡의 대행자는 또 뭐랍니까?"
"좀 더 크게 떠들어라. 버브룩의 모두가 내가 누군지 알게 되게."
"…죄송합니다. 흥분해서 그만. 어쨌든 제 말의 요는, 어떻게 이런 걸 비밀로 하셨냐는 겁니다."
"비밀로 한 게 아니라, 그냥 말을 안 한 거다. 이럴 게 귀찮아서."
"허…."
필립이 탄식하는 그때, 마차가 마구간 앞에 멈췄다. 시장 저잣거리가 이어진 길목 끄트머리였다. 보관 중인 말과 마차가 이미 여럿이었다. 마구간지기가 쪼르르 달려 나왔다.
마부석에서 내린 샬롯이 말했다.
"내일 떠날 거다. 마차를 청소하고, 말은 최대한 좋은 걸 먹이고 푹 쉬게 해라."
"앞선 손님들이 계십니… 예, 바로 그리하겠습니다."
조심스럽게 말하던 마구간지기가, 손바닥에 놓인 금화를 보고는 재빨리 허리를 굽혔다.
샬롯도 이안과 다니면서 돈을 적재적소에 낭비하는 법을 착실히 몸에 익힌 상태였다.
"가지."
일행을 돌아본 샬롯이 몸을 돌렸다. 그녀의 뒤를 따르면서, 이안은 번화가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현대인인 그의 관점에선 여전히 지저분하고 칙칙한 거리였지만. 어쨌거나 오가는 행인도 많고 행색도 가지각색이었다. 여행객을 상대로 장사하는 도시의 상인들에게서도 여유가 느껴졌다.
'이 정도면 변방 왕국들의 도읍만큼은 번화한 것 같은데….'
이젠 놀랍지도 않은 격차였다.
그리고 이 격차는 제도와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크게 벌어지리라.
어쨌든 여긴 하늘의 먹구름도 그리 두텁지 않았다. 해가 기울고 있는 게 보일 정도였다. 이 정도면 내일쯤엔 태양을 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곧 샬롯의 걸음이 느려졌다. 어느새 번화가의 뒷골목이었다.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2층 건물이, 그들이 묵을 주점 겸 여관이었다.
"내 기억엔, 그나마 여기가 가장 괜찮더군."
내뱉은 샬롯이 문을 열었다. 제국의 주점이라 해도 음식 냄새가 섞인 퀴퀴한 공기는 다르지 않았다.
하긴 이보다 훨씬 큰 도시인 트라벨가에서조차, 주점은 지린내와 잡내로 가득한 공간이었다.
다른 점이라면 훨씬 따듯하고, 분위기도 여유롭다는 사실이었다. 주점 겸 식당으로 보이는 홀에는 상인 같은 제국인들과 용병, 현지인들이 드문드문 뒤섞여 앉아 있었다. 샬롯은 자연스럽게 가장 사람이 적은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주문하시겠어요?"
다가온 여급은, 뜻밖에도 난쟁이였다. 북부에서도 못 본 난쟁이 여급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어쩌면 샬롯이 이곳으로 일행을 인도한 건, 이종족이 일하고 있어서인지도 몰랐다.
이안이 태연하게 말했다.
"고기 섞은 식사 네 개. 술도. 방은 얼마나 여유가 있지?"
"작은 방 네 개, 큰 방 두 개요."
"그럼 작은 방 네 개로 하지. 식사가 끝나면 목욕도 할 거니까, 준비해 주고."
"네 분 다요?"
"그래. 넷 다."
이안이 은화를 넉넉하게 내밀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든 여급이 몸을 돌렸다. 엉덩이를 들썩대던 필립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제발 이제는 말씀해 주십시오, 나리."
"정확히 뭘."
이안이 메브를 일별하며 내뱉었다. 홀을 등지고 앉은 그녀는 허리를 꼿꼿이 편 채, 여전히 안면 가리개를 내리고 있었다. 손등으로 입을 가린 필립이 힘준 목소리로 속삭였다.
"대전사! 용살자! 대행자…!"
"잘 아네. 네가 말 한 그대로다. 대부분은."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내뱉었다. 필립이 눈을 깜빡였다.
"설마, 더 하실 말씀이 없다는 뜻은 아니시겠죠."
"맞는데."
"아니, 아무리 그래도-"
목소리가 커지려던 필립이 입을 다물었다. 어느새 돌아온 여급이 맥주잔을 일행의 앞에 놓고는 사라졌다. 다리는 짧아도 걸음은 빨랐다.
필립이 다시 속삭였다.
"…어쩌다 그렇게 되신 건지 정도는, 말씀해 주셔야지요."
"그것도 네 말대로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니까."
이안이 잔을 들자, 필립의 미간이 결국 일그러졌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될 만한 업적들이 아닌 것 같은데요."
"타락용의 심장을 찌른 건 맞지만 사실상 백금룡이 거의 다 싸웠다. 대전사인 것도 맞지만 딱히 대전사 노릇을 한 적도 많지 않고. 대행자는, 그냥 의뢰를 받아서 명목상 붙은 이름일 뿐이야."
"…아무래도 나리가 아니라 샬롯에게 물어야겠군요. 샬롯도 너무하십니다. 이걸 다 알고 계셨으면서, 그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다니요."
필립의 시선을 받은 샬롯이, 태연하게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는 혀를 날름댔다.
"나도 딱히 숨길 생각은 없었다. 단지, 아직 거기까지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았을 뿐이지."
"그건 또 뭔…."
"거래는 거래니까. 그렇지 않느냐, 이안?"
"훌륭한 용병의 자세군."
선선히 대답하며 이안이 맥주를 입에 가져갔다. 필립이 말문이 막힌 표정으로 입을 뻐끔대는 가운데, 비로소 메브가 안면 가리개를 올렸다. 그녀는 다소 굳은 얼굴로, 이안과는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자꾸 안 어울리는 짓을 하시네.
"경이 주신 검은, 용의 심장을 찌를 때 부러졌소."
이안이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술을 마시던 메브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사레가 들린 듯 낮게 콜록댄 그녀가, 재빨리 시선을 피하며 잔을 내려놓았다.
"그, 그런 속사정이 있었-"
그때 여급이 돌아왔다. 커다란 쟁반을 한 손에 든 그녀는, 얼핏 보면 테이블이 걸어오는 것처럼 보였다. 이안은 쟁반에 놓인 수많은 접시를 바라보며 내심 웃음 지었다.
난쟁이들은 여자도 힘이 장사군.
"식사 맛있게 하세요. 방은 제가 안내해 드릴 테니, 올라가실 때 말씀 주시고요."
순식간에 접시를 테이블에 펼쳐 놓은 그녀가 몸을 돌렸다. 이안이 포크를 들며 덧붙였다.
"많이 서운하시오?"
"서운이라니…. 가당치도 않… 습니다."
…습니다?
이안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그의 시선을 흘리며, 메브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소문대로라면… 북부의 초인은 북부를 대표하는 영웅이며… 백금룡의 대행자는… 교단의 성자이기도 한 법인데…."
작아지는 목소리만큼이나, 그녀의 고개도 점점 내려갔다.
"그것도 모르고… 계속 하대를…."
"...."
이안의 눈썹에 힘이 탁 풀렸다.
이딴 게 마음에 걸렸던 거라니.
하긴. 이 세계 사람의 관점에선 충격받을 만한 부분인지도 몰랐다. 심지어 그녀는 신의 사도가 아닌가. 자신의 행동이 불경하다 자책하는 것도 아예 이상한 일은 아닐 터였다. 하지만 어쨌건, 이안이 보기엔 뜻밖의 주접일 뿐이었다.
그는 이윽고 헛웃음을 흘리며 내뱉었다.
"그래, 이젠 내가 좀 서운해지는군."
"...?!"
"전우이자 친우라더니. 고작 직위에 따라 달라지는 거였소?"
메브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이 덧붙였다.
"하던 대로 하시오. 공적인 관계가 되고 싶으신 게 아니라면."
"그… 럴 생각은 없다만. 그, 그래. 네… 가 어떤 위업을 이룩하였건, 네가 이안이란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 그야말로 고귀한-"
"내가 한 일들이 경이 변방에서 행한 것들보다 고결하다고 생각하지 않소. 나는 그저 의뢰를 받았고 그걸 해결했을 뿐이지. 나 자신을 위해서. 그뿐이오."
위인 취급을 받는 건 기분이 나쁘기만 한 일은 아니지만, 어쨌건 마음 편한 일도 아니었다.
물론 돈에 눈먼 사제나 배에 기름이 잔뜩 낀 귀족이라면 기꺼이 위명을 휘둘러 찍어 눌렀을 터다.
하지만 이들은 이 개 같은 세상을 그나마 살 만하다 여기게 해 주는, 등을 맡길 수 있는 몇 없는 동료였다.
사람들과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지지 않고 정을 주지 않으려 노력했음에도, 끝내 그렇게 된 이들.
이들에게까지 그런 취급을 받고 싶진 않았다.
술잔을 잠시 어루만지던 메브가, 이윽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너도 내게 말을 편히 해 줄 수는 없겠느냐?"
"난 지금도 편하게 하고 있소만."
"…그래 준다면 내 마음이 조금은 편해질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얼씨구.
코로 웃은 이안이 잔을 들었다.
"올리든 말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겠소. 편하게. 이 정도면 만족하겠소, 메브?"
그가 잔을 내밀었다. 눈을 깜빡인 메브가 이내 잔을 맞부딪쳤다.
"…그래, 이안."
어색하고 아주 좋구만.
술을 마신 이안이 포크를 들었다. 식사가 시작됐다. 홀로 생각에 잠겨 있던 필립이 입을 연 건 몇 분 지나지 않아서였다.
"두 분이 진정한 의미의 친우로 거듭나신 건 아주 축복할 일입니다만…. 결국 어찌 된 내막인지는 스리슬쩍 넘어가셨군요."
거, 새끼. 더럽게 집요하네.
혀를 찬 이안이 덧붙였다.
"샬롯에게 들어라."
"하… 미구엘이 그립군요, 미구엘이 있었다면 분명 만나자마자-"
"그리고 나한테 닥치란 소릴 들었겠지. 지금처럼."
"…예."
비로소 조용한 식사가 이어졌다.
나름대로 향신료와 양념을 아끼지 않은 음식들을, 이안은 충분히 음미했다.
어느새 장내는 주황빛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모든 초와 등잔에 불이 붙었다.
못 보던 손님들도 늘었다. 식사 시간인지 사람들이 계속 들어오고 있었다. 자유민. 보따리상들과 그들의 경호병, 용병까지. 온갖 이들이 저마다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전쟁은 돈이 된다더니.'
변방에 관심이 없는 건 아무래도 황제뿐인 모양이었다.
어쩌면 황제도 의도적으로 이런 상황을 방치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변방의 힘이 알아서 약해지고, 공짜 인력과 돈이 자연스럽게 흘러들어오고 있기까지 하니까.
황궁에 처박혀 문자와 말로만 세상을 접하는 존재라면, 충분히 그리하고도 남으리라.
장내가 조금 더 소란스러워진 건 그 직후였다.
일련의 상인 무리가 들어오고 있었다. 미리 이야기가 되어 있었던 듯, 난쟁이 여급이 한쪽에 위치한 방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그들 중 하나가 이안을 바라본 건 그 직후였다.
곧 기척을 느낀 이안도 고개를 들었다.
묘하게 낯이 익은 얼굴의 두 사내가 다가오고 있었다.
한 명은 서른 중반쯤 되어 보이는 수염을 멋스럽게 기른 제국인이었고, 또 한 명은 기다란 창을 등에 멘 덩치 큰 북부인이었다. 모르는 이들이 본다면 야만인 전사라 여길법한 인상이었다.
"호오…?"
이안의 눈매가 설핏 가늘어지는 가운데.
"설마 했거늘, 정말 이안 경이셨군…!"
테이블 옆으로 다가온 제국인이,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누구인지 기억하시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