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마인드의 중세 현대인 @하드폭발
중세인도 현대인도 기겁할 미치광이가 왔다.
#판타지 #중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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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꿈이 아니라 빙의
꿈을 꿨다. 배경은 대충 중세 유럽틱한 곳.
꿈 속에서 나는 왕이었다.
비록 다 망한 나라에 지지기반까지 미약해 위태로웠던 왕이지만 말이다. 게임 좀 줄이라던 주변의 말이 맞았다. 요즘 게임을 너무 많이 한 탓에 꿈도 이런 걸 꿨나보다.
그래도 꿈 속에서나마 왕이 됐다. 모처럼 군왕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며 적당히 놀려 했는데... 왕. 이거 쉽지 않다. 왕이란 게 방구석 백수 시절보다 더 빡빡했다.
복창터지는 일이 한둘이 아니란 거다.
"전하, 이 땅은 저희 증조부의 증조부 때부터 이어진 가문의 영토입니다. 아무리 왕이라 하셔도 마땅한 주인 있는 땅을 아무 작자에게나 봉토로 수여하신다는 소식에 급히 달려왔나이다."
"증서가 있나?"
"허허. 저희 가문이 다스리고 있다는 게 곧 증거이지요."
위조된 땅문서도 없이 사기치는 새끼.
"즈어어언하! 전하의 안위가 염려되오니 식사 전에 꼭 기미 시종에게 먼저 먹이셔야 합니다!"
"남이 한 입 먹은 걸 나더러 먹으라고?"
"전하께선 이 위태로운 시기의 구심점입니다. 하물며 전하의 목숨을 앗아가 분열을 획책하는 야만족이 근처에 있지 않습니까! 독에 유명을 달리한 영웅들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부디 노신의 염려를 받아주소서!"
"이빨 닦긴 하나?"
한 입충의 잔반처리통. 심지어 기미 시종이란 놈이 중세 야만인 새끼 아니랄까봐 하루는 양치도 안 하고 한 입하러 오길래 묶어놓고 매질해버렸다.
그러나 천외천이라는 말이 달리 있던가. 나는 상상 그 이상을 맛봤다.
"전하! 치통을 앓고 계신단 소리에 명성이 자자한 고문 기술자를 데려왔습니다!"
"네 놈이 드디어 역심을 드러내는구나. 쳐라!"
"저, 전하! 소, 소신의 변론을 먼저 들어주소서. 고문 기술자는 발치에 이골이 난 전문가입니다!"
"말 같잖은 소리를 지껄이는 게냐!"
이 놈은 미치광이 아니면 암살자다. 그리 단정지었지만, 놀랍게도 이 미친 소리엔 합당한 근거가 있었다.
"죄수를 물리적으로 고문할 때 가장 효과적인 것이 손톱에 꼬챙이 박아넣기와 강제로 개구한 뒤 발치하기입니다. 고문 기술자는 그만큼 풍부하고 다양한 경험을 갖춘 데다 죄수가 상하지 않도록 세심한 손길로 고통을 쑤셔넣길 연구한 자!"
"..."
"어차피 발치는 아픕니다! 그렇다면 최대한 빠르고 신속하게, 주변 잇몸이 다치지 않도록 뽑을 수 있는 고문 기술자 외에 달리 적임이 있겠습니까?!"
"나랏일을 논하는 것 또한 머리 아픈 일이다. 짐은 왕관을 이고 살듯이 치통 또한 앓고 살겠노라."
나는 이 때 화타를 맞이한 조조의 심정을 이해했다. 머리 아픈 거 낫게 해주겠답시고 도끼로 두개골 살짝만 쪼개자 그랬으면 사형이 맞다. 수많은 기구와 마취없이 고문 기술자한테 발치를 부탁한다는 것 자체가 고문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고통스러운 건 달리 있었다.
"저, 전하."
"맞춰볼까. 또 졌어? 이젠 아예 전멸을 했다고?"
"허어억...! 이 멀리 떨어진 궁정에서 그 사실을 단숨에 꿰뚫어 보시다니, 과연 군주다우신 면모십니다!"
"기억하기로만 32전 32패다. 무승전패를 하고 있는데 무슨 기대를 하랴!"
약탈과 침략을 일삼는 외세의 무리들이 강한 건 인정한다. 그런데 못 이기겠으면 적당히 도망쳐서 병사라도 보전해야 하는 거 아닌가. 평소엔 지키지도 않는 기사도 정신을 이럴 때만 내세우니 속이 타들어간다.
"우리 기사들은 후퇴란 걸 모르느냐?"
"전하! 어찌 신과 왕을 섬기는 자가 적을 눈앞에 두고 물러설 수 있겠나이까? 용맹하고 신실한 기사라면 이길 수 없는 적이라 해도 명예롭게 돌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후퇴가 아니라 역돌격을 하란 말이다!"
"과, 과연!"
답답해서 내지른 말이었지만 악수였다. 후퇴가 아니라 역돌격이란 걸 인지한 지휘관들은 당당하게 역돌격하기 시작했다. 지휘관들이 이 꼴이니 병사들도 제정신일 리 없다.
유일한 충복이 가져온 소식은 내게 많은 걸 내려놓게 만들었다.
"저, 전하."
"무슨 일이냐. 또 전멸했느냐?"
"이번 군세는 어차피 역돌격할 거 미리 하겠다며 출정 전에 와해됐다고 합니다..."
"..."
하는 꼬라지들이 이러니 나라가 망하는 건 필연이었다. 외세의 무리는 뻥 뚫린 고속도로를 내달리듯이 수도로 향해왔다. 그 즈음, 힘 없는 왕을 강제로 옹립시킨 무리들은 쥐떼처럼 흩어진 지 오래였다.
나름대로 열심히 했건만 내 곁에는 다 늙은 충복 한 명 외에 아무도 없었다. 그나마 도망치지 못한 자들이 벌벌 떨면서 도성에 남아있을 뿐이다.
이제 대신 나가서 싸워줄 기사도 없다. 나는 쉴새없이 흔들리는 종소리 아래서 투구 끈을 조였다. 그리고 늙은 충복이 가져다준 검을 허리춤에 차면서 말했다.
"짐이 느낀 바가 있다."
"말씀하소서, 전하."
"이것이 꿈이라서 다행이다."
"예?"
"꿈 속에서라도 내 다시는 왕 따위 하지 않겠노라."
나라의 멸망은 그렇게 찾아왔다. 어떤 커다란 실수 하나가 있어서가 아니라 모두가 나 몰라라한 결과였다. 별 생각없이 내던진 쓰레기가 차곡차곡 쌓여 방 안을 가득 채운 것처럼 말이다.
따지자면 개꿈에 가까웠지만 나름의 교훈이 있긴 했다. 나는 빗장을 걸어둔 문 너머로 확 올라오는 피비린내를 맡으며 다짐했다.
일어나면 된장찌개로 한 끼 먼저 먹자.
그리고 게임하는 시간 좀 줄여야겠다.
***
꿈에서 일어났더니 또 꿈 속이었다.
그리 여긴 까닭 첫 번째. 내가 기억하는 우리 집 천장이 아니다. 두 번째는 이불 상태였다. 하늘색 얼룩덜룩 이불은 어디 가고 고급스런 자수가 놓인 이불이 내 몸을 덮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꿈이라 단정지은 이유는 공손한 태도로 문을 두드리는 목소리 때문이었다.
"공자님, 새벽 기도 시간입니다."
우리 부모님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신다. 새벽에 등산하러 가자 말씀하실 지언정 기도하자고 하신 적도 없다. 당연히 저렇게 어린 목소리도 아니시고.
이쯤 되니 슬슬 다른 가능성이 떠올랐다. 너무 얼렁뚱땅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은 가능성 말이다.
설마... 빙의?
게임을 너무 많이 해서 천벌 받은 걸까? 확실히 퇴근하자마자 팬티 차림으로 맥주 한 캔 옆에 놓고서 게임만 줄창 해왔다. 남사스럽다며 제발 옷 좀 입으라는 부모님 말씀에 방문 걸어잠근 기억까지 생생하다.
설마 힘 없는 왕으로 옹립됐던 저번 꿈, 아니. 저번 빙의는 해방감에 도취되어 살아온 내게 내려진 형벌인가?
이렇게 한창 진지한 고민을 하고 있는데 난입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공자님?"
"일어났다. 보채지 말고 기다리거라."
순간 사람들에게 사실을 호소할까 생각하다가... 그만뒀다.
여기가 지구의 중세가 아니라 해도 비슷한 곳은 분명하다. 이런 곳에서 사실 제가 이 몸 주인이 아니라 누구누구인데요 해봤자 돌아올 반응 따위 훤했다. 퇴마란 명목 하에 끓는 물에 던져져 삶아질 미래가 보인다.
물론 대처할 방법도 있었다. 중요한 건 종교적 행사를 빼먹지 않는 것이다.
악마가 빙의해서 사람이 변했다는 말과 종교적 깨달음을 얻어 사람이 변했다는 말엔 엄청난 차이가 있으니 말이다.
나는 각오를 굳히고서 문을 열어젖혔다.
새벽부터 날 불러댄 시녀는 당당하면서도 귀여운 느낌이었다. 길게 땋인 검정색 머리카락이 귀 뒤에서부터 내려온다. 옆으로 정돈된 앞머리는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 안아주고 있었다.
시녀는 구슬같은 눈동자로 이쪽을 바라보더니 화들짝 놀랐다.
"...?! 고, 공자님!"
"예배실로 안내해라."
"그, 그게 아니라...! 오, 옷을!"
"입고 있는데?"
"잠옷이지 않습니까!"
땋은 머리의 시녀는 양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며 말을 더듬거렸다.
나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잠옷 차림이라곤 하나 펑퍼짐한 셔츠에 바지까지 다 갖춰입고 있었다. 현대에선 팬티 차림 위에 깔깔이 입고 지내던 거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그렇지만 내가 떳떳하니 괜찮다는 이유로 사람들 생각까지 바꾸는 건 어렵다. 여기선 어떠한 궤변조차 용납케 해주는 중세 특유의 개논리를 펼칠 때였다.
"꾸밈보다 중요한 것은 진실된 마음이다. 지난 밤 느낀 바가 있어 보잘 것 없는 그 분의 종으로서 뵙고자 하는 것이니 너무 개의치 말거라."
"공자님이 아니라 제가 안 괜찮습니다..."
기회다. 이게 꿈이든 빙의든 정보를 얻을 기회였다.
"내 나이가 몇이라고 벌써 그리 유별나게 구느냐?"
"하, 한창 배움에 열중하셔야 할 나이에 육욕에 눈 뜨게 만들었단 소문이 퍼질 수 있단 말입니다...!"
두 가지 단서가 나왔다. 배움에 열중해야 할 나이. 육욕에 눈 뜨게 만들었다. 배움에 열중해야 할 나이는 뭔가 주도적으로 하기엔 부족하다는 인식을, 육욕 어쩌구하는 부분은 내 나이가 아직 여체를 알기에 이르다는 인식을 나타낸다.
이 단서들에 내 지식을 결합하면 답이 나온다. 보통 사는 게 팍팍한 곳에선 성인으로 인정하는 연령이 낮다. 대부분은 16세를 전후로 성인이냐 아니냐가 갈렸다. 이 세상도 크게 다르진 않을 테지.
종합하자면 이 몸은 16세 이전, 아직 사춘기가 오지 못한 소년으로 생각된다. 그렇다고 몸이 엄청 작은 건 아니니 대략 10~12세 정도. 좀 옛스런 말투를 써도 어른 흉내내는 애늙은이처럼 보일 확률이 높다.
말투가 이상하다고 다짜고짜 악령이라 의심하는 게 아니라 어린 아이가 어른들 따라하는구나, 이렇게 넘어가리란 뜻이다. 심지어 여자를 안지 않는다고 동성애자 의혹 받을 일도 없었다.
이 모든 요소를 정리한 나는 주저없이 말했다.
"내가 알고 싶은 건 육욕이나 여자가 아니라 어젯밤 얻은 깨달음이다. 헛소리 그만하고 예배실로 안내해라."
"...."
시녀는 아무 말 없이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려놓았다. 무심한 표정과 굳게 다물어진 입술만 보면 산봉우리의 빙설보다 차가운 여자 같았다. 양뺨 위로 불그스레한 홍조가 자리잡은 것만 빼면 말이다.
그 때부터 시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녀는 내가 나올 때까지 묵묵히 기다리다 등불을 들고 앞장서며 성 안의 복도를 거닐었다. 새벽이라곤 해도 시커먼 건 자정과 비슷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하늘이 조금씩 밝아지며 이따금씩 어두운 빛이 창문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게 전부였다. 시녀를 따라 이 어둑어둑한 복도를 걷고 있노라니 슬슬 실감이 났다.
내가 또 미개인들 사이에 던져졌구나.
중세가 나름대로의 합리성을 토대로 굴러갔다곤 하나 결국 당대의 기준. 고도로 발전된 윤리 속에서 살던 유약한 성정의 내가 이 야만인들 투성이서 잘 해낼 수 있을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
어두운 복도를 헤쳐나와 예배실에 도착하자마자 돌아온 건 소스라치게 놀란 목소리였다.
검은 머리에 부드러운 눈빛, 정돈된 수염을 지닌 사내가 목에 걸린 십자가를 움켜쥐면서 외치고 있었다.
"나르바, 그 차림은 대체 무엇이냐? 야만의 풍습에 물들어버린 게냐!"
맙소사. 선진 현대문명의 산 증인이 듣기엔 너무나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누가 누구더러 야만하다는 것인가? 충격과 분노 속에서 반박하려던 찰나였다.
부드러운 눈빛의 사내가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며 언성을 낮췄다.
"원치 않는 결혼에 대한 반발심을 그런 유치한 방식으로 드러내는 것이냐?"
"...결혼이요?"
2. 예비 신랑
결혼.
누구는 행복에 겨워하고 누구는 인생 조졌다 생각하게 만드는 마법의 단어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결혼이란 게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란 사실이다. 그것은 결혼과 인연 없는 삶을 살아온 내게도 마찬가지였다.
이렇다보니 결혼이란 말을 듣자마자 모든 호기심이 그리로 쏠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부드러운 눈빛의 사내를 바라보며 대체 무슨 소리냐고 물어봤지만.
"그런 얕은 잔꾀를 부릴 생각 말아라."
그는 매몰찬 태도로 고개를 홱 돌릴 뿐이었다. 좀 더 캐물을까 하다가 그만뒀다. 이 좁디좁은 예배실 안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눈꺼풀을 느릿하게 끔뻑이는 하인들과 면사포로 얼굴을 가린 시녀들이 보인다.
한 사람이라면 모를까, 저들 앞에서 언성을 높이다간 내 정체가 들통날 위험이 있었다. 아니, 이런 기초적인 걸 모르시다니...? 따위의 생각을 유도해선 안 된다. 의심은 그런 사소한 계기에서 시작되는 법이다.
내가 입을 다문 건 이런 판단에서였다. 예배실로 들어온 사람들을 계속 지켜본 것도 비슷한 이유다. 나는 슬쩍슬쩍 눈동자를 굴리며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기도하는지 훔쳐봤다.
의자에 어떤 방식으로 앉아 손을 어떻게 모으는지까지 전부 말이다.
다행히 목사 아들 놈 따라 교회 간 경험이 도움이 됐다. 디테일을 살리되 너무 집착하지 않는 것이 포인트다.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어거지로 손 모으는 자세를 따라하다간 손 모양이 보기 흉하게 뒤틀리기 쉽다. 느슨해 보이더라도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굳이 힘 줄 필요 없다.
사람들이 기도문을 웅얼거릴 땐 입을 벌렸다 닫으면서 립싱크를 하면 된다. 어차피 다들 혼잣말로 웅얼대서 진짜로 말하는 건지 립싱크하는 건지 티도 안 난다. 입만 뻐끔거린다고 뭐라 하는 놈은 자신도 집중 못한 거다.
덕분에 예배실에서 드리는 아침 기도는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다만... 아직 어둑어둑한 성 안 예배실에서 어른들이 다 함께 모여 웅얼대는 모습은 빈 말로도 경쾌하지 못했다. 신과 교감하는 사람들은 경건함을 느낀다는데 내가 느낀 건 졸음이 전부였다.
아무래도 이 세상의 신님께선 나랑 교감할 생각이 없으신가 보다. 방문 걸어잠근 사람 상대로 문 두드려봤자 민폐일 뿐. 나는 무의미한 시도를 계속하기보다 쓸모있는 시간을 보내길 택했다.
예를 들자면, 그래.
주변 정보를 어떻게 입수할지 고민하는 게 좋겠다.
***
나는 현대의 고루한 편견과 첫 번째 꿈, 아니 빙의를 겪으며 확고부동한 진실을 깨달았다.
중세의 합리성과 기준은 내게 '미개'하다.
좀 더 문화상대주의 적으로 말하면... 존중해줄 순 있지만 나와 잘 맞지 않았다. 중세가 날고 기어도 현대 문명에서 살아온 내게는 대부분 수준 미달이었다. 일단 상식에서 차이가 많이 난다.
현대에서도 과학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중세 비슷한 세상이라면? 과학적인 사고방식보다 미신이 먼저 앞선다.
내가 갑자기 너무 달라질 경우 악마가 빙의했노라 믿는다는 뜻이다. 결국 스토리텔링의 문제였다. 사람이 달라지면 그 사람을 변모하게끔 만든 어떠한 계기가 필요했다.
마침 시녀의 안내를 받아 방으로 돌아온 찰나, 이 몸의 기억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래. 진짜 빙의면 이런 게 있어야...
"공자님?"
"아니다. 잠깐 머리가 어지러웠을 뿐이야."
방 안에서 멀뚱히 서 있는 내가 이상하게 보였을 것이다. 나는 땋은 머리 시녀, 에드위나의 의문을 단숨에 일축시키면서 속으로만 한숨을 내뱉었다. 몸주인의 기억을 떠올렸으니 문제 해결이라고 얕잡아본 게 실수였다.
이 몸의 이름은 나르바. 나이는 추측대로 열두 살.
예배실에서 만난 부드러운 눈빛의 사내는 내 아버지인 애설튼, 주변 일대를 다스리는 공왕이었다. 나는 공왕의 삼남으로 지체높은 귀족이지만 그 뿐이다. 손위로 형제만 둘에 조카들까지 있어 공왕의 자리를 상속받을 가능성은 한없이 0에 가깝다.
분할상속이라곤 하나 장남 몫 한 덩이, 차남 몫 한 덩이 덜고 나면 수중에 얼마나 떨어질지 의심스럽고. 후계 경쟁은 시작된 적도 없었다. 셋 다 동복형제인데 우애도 나쁘지 않아 가문은 안정된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 몸은 후계자 교육을 받은 적 없다. 부모와 형제들이 보여주는 사랑과 관심 속에서 제 맘대로 뛰노느라 알고 있는 지식이 정말 적었다.
...그럼 대체 누구랑 결혼한다는 거지?
이 사실을 알려면 사람들을 먼저 설득해야 했다. 놀고만 싶던 열두 살 꼬마가 달라졌노라고 말이다. 그 과정에서 좀 억지를 부리게 되겠지만, 열두 살은 원래 억지 부릴 만한 나이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침대 위로 걸터앉은 뒤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러자 구슬같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에드위나는 어깨를 조금 늘어트리며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공자님.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으셔도 몸가짐에는 주의하셨으면 합니다. 아까 가주님이 눈을 부릅뜨시고 노려보셨습니다."
"누구를?"
"그야... 당연히 공자님보다 지위 낮은 시녀였죠."
내리갈굼은 유서 깊은 전통이다. 이제 성 내 업무를 돌보는 관리자가 까일 테지. 다음은 고참이 후임 관리 똑바로 못하냐며 욕 먹고, 마지막으론 눈앞의 시녀가 혼쭐날 게 훤히 보였다.
곤란함을 호소하는 시녀라. 원치 않는 결혼을 하게 된 열두 살짜리 소년이 맞호소하기에 딱 적당한 인선이었다.
"어른이구나."
"네?"
"하기 싫어도 꿋꿋이 하는 걸 보니까. 나는 그러지 못했지. 마냥 어른스럽게 굴면 어른처럼 대우하리라 여겼어. 오늘 아침은 그 마지막 시도였고."
"아..."
에드위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민은 모두에게 있는 법이다. 세상 물정 모르고 뛰놀던 귀족 소년에게도 쉽게 말하지 못할 고민이 있었다.
-그리 여겨준다면 다행이다.
"그간 듣기 싫어 일부러 흘려 들었지만 더 이상은 그러지 않을 거야. 내 결혼 상대에 대한 이야기를 가져와줘. 나와 함께 할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야겠어."
에드위나는 참 감성적인 친구였다. 내 이야기를 다 듣고 눈망울을 글썽이다 또렷한 목소리로 답해왔다.
"공자님... 네, 금방 알아오겠습니다!"
"잠깐."
에드위나는 쏜살같은 움직임으로 방을 빠져나갔다. 뒤늦게 손을 뻗었지만 말 그대로 늦은 뒤였다. 나는 허공을 헤집는 손을 엉거주춤 거둬들일 수밖에 없었다.
조용히 알아오길 바랐건만, 호들갑 떠는 모습을 보니 기대하지 않는 쪽이 낫겠다. 대신 이왕 벌어둔 시간을 사색에 쓰기로 결정했다. 역시 신경쓰이는 쪽은 결혼 이야기다.
원치 않는 결혼이라.
사실 특별한 일은 아니다. 중세 귀족들에게 결혼이란 동맹을 구축하는 강력한 정치적 수단이었다. 현대에서도 좀 된다 싶은 집안끼리 결혼하는데 중세 비슷하면 더할 수밖에.
하지만 같은 정략결혼이라 해도 신분과 지위에 따라 천차만별이기 마련이다. 주변 일대를 다스리는 공왕 정도 되면 이쪽이 아니라 상대가 매달려야 이치에 맞다. 일단 돌아가는 꼴을 보면 이상한 게 맞았다.
아무리 내놓은 삼남이라 해도 이제 겨우 열두 살인데 약혼도 아니고 결혼을 보낸다?
나라면 절대 그러지 않을 것이다.
약혼을 파기하는 건 쉬운 일이지만 결혼을 취소하는 건 무척 고된 일이니까. 상대의 생각이 얼핏 보였다. 어떻게든 이쪽과 견고한 동맹을 형성하려나 본데...
상대가 약하다면 이쪽이 불쾌하게 여겨 털어냈을 테고 강하다면 굳이 결혼을 강행할 필요가 없었다. 약혼해줄 테니 임시 동맹이라 하다가 정작 쓸모가 다했을 때 약혼 파기하면 될 테니 말이다.
공왕이 쉽게 당해준 까닭. 분명 있을 것이다.
다행히도 내게는 몹시 열정적인 정보원 하나가 곁에 있었다. 땋은 머리의 시녀, 에드위나는 열정에 걸맞는 실적을 금방 가져왔다. 딱 사색이 끝나갈 즈음에 맞춰서였다.
에드위나는 앞머리를 손끝으로 정리하며 당당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오만함이 아니다. 주군의 요구를 충실히 이행했다는 데서 오는 만족감 때문이었다.
고된 작업을 마친 직장인이 커피 한 잔 들이킬 때 스리슬쩍 내비치는 자신감 넘치는 미소.
그걸 머금은 게 증거였다.
"알아왔습니다, 공자님. 이미 성의 하인들 사이서 소문이 자자합니다."
"소문?"
"미리암 오른 유바스. 눈송이같은 하얀 머리칼에 포근한 느낌의 적갈색 눈동자를 지닌 포용력 갖춘 미모로 유명한 여인입니다. 다만 치명적인 결이 하나 있습니다."
"이쁘다니까 좀 마음이 놓이..."
"그녀가 이미 회임했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나는 두 눈을 부릅떴다.
***
미리암. 내 부인이 될지 모르는 여인.
그리고 결혼하기도 전에 회임했다는 소문이 도는 여자.
당연하지만 몸주인은 미리암을 만난 적 없다. 심지어 몸주인은 사춘기가 올까 말까 간재는 중인 나이였다. 아직 통정도 못한 소년이 만난 적 없는 여인을 임신시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딱히 미혼모에 편견을 가진 건 아니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초연할 순 없었다. 아무리 정략결혼이라지만 열두 살에게 이런 혼담이 제의된 이유가 대체 뭘까? 왜 하필 이 몸주인을 콕 찝어서?
나는 이 사실을 알기 위해 아침 식사도 거르고 성 곳곳을 돌아다녔다. 주변의 시선을 신경쓸 여유조차 없었다. 나는 에드위나와 함께 침침한 복도를 거닐며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캐묻길 반복했다.
덕분에 이 혼담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대충 윤곽을 그릴 수 있었다.
사슬갑옷을 차려입은 경비병.
그는 유바스가 지닌 강대함을 이야기했다.
"그야 유바스가 인근에서 가장 강성한 세력이니까요. 그들과 함께라면 이 곳도 보다 안전해질 겁니다."
경비병의 말에 따르면 유바스 가문은 이 주변에서 왕국을 자처할 만큼 강건한 세력을 꾸렸다고 한다. 그는 주변 공국들 가운데 유바스를 상대할 만한 군대가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평화를 보장 못하는 상황에서 유바스의 군대는 충분한 보장이 될 겁니다."
경전을 들고 다니는 사제.
그는 유바스의 약점을 간단명료하게 정리했다.
"유바스는 강력한 군대를 지니고 있지만 굳건한 백성을 가지고 있진 못합니다."
사제의 말은 이랬다. 유바스의 기원은 불투명하다.
누구누구의 후손이라 자처할 법도 한데 그러지 않는다. 심지어 오래된 귀족들의 가계도엔 유바스란 이름을 찾을 수조차 없었다. 유바스 아래서 잘 사는 사람들이야 그러려니 하지만 불만 가진 사람들은 다르다.
"성공을 거듭한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실패가 두드러지면 금방 뒤집어질 모래 위의 성입니다. 유바스도 그 사실을 알고 있겠지요."
"사제님, 그럼 결혼 생활에 대해 여쭤볼 게 있습니다."
"허허. 공자님도 염려되시나 봅니다. 하긴 안 좋은 소문이 떠도는 때니..."
혹시나 싶어 물어보니 이 곳의 신앙도 지구의 중세와 비슷했다. 일부일처제에 혼외자식은 죄악시된다. 권세가 강하면 찍어누를 수 있지만 안 좋은 시선까지 막을 순 없었다.
하나 더, 열두 살이 결혼하는 건 선례를 찾기 힘든 소아도착적인 행동이란 사실도 말이다.
이 증언들과 내 뇌피셜을 종합해본 결과 도출되는 이유는 세 가지였다.
첫 번째. 이 몸의 아버지 애설튼은 유바스의 강력한 군대를 염려하고 있다.
두 번째. 유바스는 본인들의 부족한 정통성 때문에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있고, 미리암과 날 결혼시켜 이를 돌파하려 한다.
세 번째. 미리암은 진짜로 임신해서 혼외자식을 낳기 직전이다. 그 전에 결혼해야 구설수를 조금이라도 막을 수 있다.
아직 통정조차 못한 어린이 상대로 일단 결혼부터 하자는 심보가 그 증거다. 다른 세력이 퍼트린 유언비어라면 천천히 시간을 들이면 알아서 해결될 문제다.
잠깐 결혼을 미뤄서 배가 불러오는지 확인하면 되니까 참 간단하고 쉽다. 서로 혼기를 놓친 것도 아니고 열두 살이면 약혼만 해도 충분하다. 가문의 명예와도 직결되는 바, 아버지의 생각도 이 쪽에 가까울 것이다.
그런데도 이리 결혼을 보채니 수상쩍을 수밖에 없다.
정말로 회임한 게 아닌 이상에야 말이다.
수소문한 끝에 상황을 어느 정도 눈치챘다. 이제 마지막 용건을 해결하러 나서면 된다. 나는 그림자처럼 곁을 맴도는 에드위나를 바라봤다. 중세식 네비게이션이 힘을 발휘할 차례였다.
"에드위나. 아버지의 집무실로 안내해다오."
"...잘못 들었습니다."
"아버지의 집무실로 향하자.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야겠다."
기혼자들을 가리켜 인터넷에선 퐁퐁남이라 조롱한다. 하지만 그들은 상대와 직접 만나 사랑을 느끼고 헌신한 남자들이다.
내 나이 명랑 열두 살.
아무리 귀족이라 해도 무대면의 상대를 위해 쾌락 없는 책임을 짊어지는 건 선 넘었다.
3. 초강수
애설튼 공왕이 머무는 집무실 앞. 에드위나는 손을 문에 갖다댄 다음 공손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공자님, 이대로 두드리겠습니다."
"어. 그러도록 해라."
"진짜로 두드릴 겁니다."
"에드위나. 내가 대신할까?"
"...아뇨. 제가 하겠습니다."
네가 안하면 내가 한다는 발언은 여기서도 강력했다. 에드위나는 손끝을 꼼지락대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이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런 뒤에야 간신히 문을 두드릴 수 있었다.
똑똑.
나는 에드위나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그래가지고 들으시겠어?"
"...."
"좀 더 크게 해봐."
차마 노크 소리를 키울 순 없던 것 같다. 에드위나는 문을 두드리는 대신 입을 살짝 벌려 소리내길 택했다. 구슬같은 눈동자는 쉴새없이 데구르르 굴러다니며 집무실 문과 날 번갈아보고 있었다.
"저, 전하. 공자님께서 뵙고자 하십니다."
이 몸의 아버지, 애설튼 공왕은 시원한 목소리로 답했다.
"들어와라."
"공자님, 그럼 전 이만."
"시녀도 함께."
에드위나가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 표정은 무심한 그대로지만 안색이 새하얗게 질리는 중이었다.
연분홍빛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걸로 보아 엄청나게 긴장한 모양이다. 하긴, 높으신 분을 찾아뵙는 건 언제나 꺼림칙한 일이지. 나는 폭풍우 속에 던져진 새끼오리마냥 바들바들 떠는 에드위나를 위로해줬다.
"걱정마라. 아버지가 널 신경쓰진 않으실 테니까."
"공자님..."
싸늘하게 식어가던 에드위나의 얼굴 위로 온기가 깃든다. 구슬같은 눈동자에 따스한 물기가 어리고 있었다.
"나한테 화내시느라 널 신경쓸 여유가 없으실 거다."
"공자님!"
순식간에 모래사막 위에 던져진 한 방울 물처럼 빠싹 말라버렸지만 말이다. 그래도 침울한 분위기가 가셨다. 나는 에드위나를 뒤로 물리고서 직접 집무실 문을 열어젖혔다.
첫인상은... 생각보다 작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작은 방에 창문이 여럿 달려 있었다. 밝고 깨끗한 자연광이 창살을 가르며 들어와 방 안을 비췄다. 덕분에 깔끔하고 세련된 솜씨로 다듬어진 가구들이 햇빛을 머금은 듯 화사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 한가운데에 책상이 놓여져 있었는데, 그 위로 불 꺼진 양초와 길쭉한 목탄, 질긴 종이들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애설튼 공왕은 조그마한 한숨과 함께 쥐고 있던 목탄을 옆에 내려놓았다.
"나르바. 볼 일이 있어 찾아왔다고."
공왕은 강건한 모습을 유지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한숨보다 눈빛이 더 문제다. 단호하고 굳센 태도로 방문자를 맞이해야 할 눈동자가 슬쩍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내가 찾아온 이유를 짐작했을 것이다. 몸주인도 소문을 못 들은 게 아니니. 단지 직접 발품 팔아가며 주변인들에게 소문을 듣지 않았을 뿐이다.
애설튼 공왕도 이번 혼담이 정상적인 경우가 아니란 사실을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전하, 제게 귀족의 책임을 물으셨으니 마땅히 그리 하겠습니다."
"그러느냐?"
"다만 합당한 이유를 들려주십시오. 당신의 막내아들을 팔아 넘기듯이 혼담을 앞당기시려는 이유 말입니다."
"그건 네 알 바 아니다."
돌아온 답은 냉랭하기 그지 없었다. 뒤따라온 에드위나가 움찔거릴 정도로 말이다. 음. 어느 정도 예상한 답변이긴 했다. 이제 열두 살짜리 애가 알면 뭘 알겠다고 말하겠는가.
중세인은 어린이를 설득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억지 부리기론 이쪽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럼 배를 가르겠습니다."
"뭐?"
"유바스의 여식 말입니다. 혼인한 다음엔 남편인 제가 정절을 지켰는지 확인할 권리가 있지 않습니까. 배를 갈라보면 소문이 진짜인지 아닌지 알 수 있을 테지요."
"제정신인 게냐? 유바스의 여식을 상대로 그러겠다고?"
"전하가 절 설득하시지 못한다면 저 스스로 납득할 근거를 찾을 뿐입니다."
도발은 무척 성공적이었다. 애설튼 공왕은 자식의 무도함을 용서할 정도로 나약한 인물이 아니었다. 멀찍이 다른 곳을 바라보던 눈동자가 이쪽을 향해 이글이글 타오르기 시작했다.
"감히 아비를 겁박해!"
"겁박은 유바스가 하고 있습니다. 이번 혼담, 무력시위 중인 겁니까?"
말그대로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애설튼 공왕은 의자를 밀치고 일어서 언제든지 허리띠를 풀어헤칠 기세였다. 채찍 대신 휘둘러 손찌검을 낼 생각이었겠지.
그렇지만 건방진 아들보다 되도 않는 요구를 해오는 유바스가 더 미운 모양이다. 울긋불긋거리던 애설튼 공왕의 얼굴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공왕은 의자 위로 쓰러지듯이 걸터 앉았다.
"...실만 있는 건 아니다. 비록 저들이 무도하게 군다 해도 득이 있는 건 사실이다."
"그건 아버지께서 말씀해주셔야 알 수 있습니다."
"알아들을 수 있겠느냐?"
"저는 그저 아버지의 노고를 조금이라도 나눠받고자 할 뿐입니다."
이쁜 짓만 하는 놈보다 미운 짓하다 가끔 이뻐지는 놈이 더 기특한 법이다. 애설튼 공왕은 잠깐의 망설임 끝에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것저것 말해줬다. 물론 대화를 주고받는다는 느낌은 없었다.
애설튼 공왕의 이야기는 딱히 명쾌한 의견이 나오길 기대하기보다 하소연하는 것에 더 가까웠다.
그렇지만 공왕의 기나긴 하소연이 끝났을 때, 나는 결론을 낼 수 있었다.
"이번 결혼동맹은 반드시 파기해야 합니다."
내가 책임지기 싫어서가 아니라 정략적인 이유로 말이다.
***
내가 빙의를 꿈으로 착각한 건 평소 하던 게임 때문이었다.
판타지 모나크.
대충 중세 역사 시뮬레이션에 판타지 요소 살짝 첨가해서 온갖 지적을 자유롭게 회피한 게임이다. 정말 현명한 태도였다. 핑계대기론 근래 수많은 게임 개발사 중에 이 놈들이 제일일 것이다.
최근 게임계를 휩쓰는 논란들 상대론 '역사적 고증'을 들먹이고 고증이 이게 뭐냐는 불만 상대론 '판타지'를 들먹인다. 게임 완성도를 탓하는 유저들 상대론 '그럼 게임 접어'라는 답변을 돌려줬다.
슬프고 아니꼽게도 판타지 모나크엔 대체재가 없었다.
판타지 모나크는 플레이어가 중세 유럽틱 판타지 세상에서 영주가 되어 이것저것하는 RPG성 짙은 자칭 전략 게임이다. 딱 봐도 한정된 수요층만 좋아할 게임에 뛰어들 자본과 기업은 없었다.
대신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이 게임의 플레이어가 참으로 간악한 권모술수를 부리게 돼서였다. 그 정수는 멀티플레이에서 극대화된다. 싱글 플레이에서 손발 묶은 AI 상대로 단련하던 유저들이 직접 맞부딪히는 순수악의 무대.
그 곳에 발 담근 입장에서 볼 때 유바스는 아주 악질적인 놈이었다.
"유바스는 저희를 방패막이로 세울 뿐 아니라 가문의 명예, 혈통까지 뺏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리 여긴 이유가 있느냐?"
"허락하신다면 지도로 설명하고자 합니다."
"해보거라."
지도는 질긴 종이더미 맨 아래에 놓여 있었다. 물론 현대의 지도와 비교하면 조악할 따름이다. 등고선도 없고 제대로 된 기호도 없고, 당연히 측량도 안 돼 해안선은 뭉툭한 데다 축척도 없어 엉망진창.
적당히 어디에 뭐가 있다 정도로만 참고하기 좋은 정도였다. 하자가 많긴 해도 설명하는 데에 지장 있을 정도도 아니었고.
"유바스 주변엔 저희를 포함해 네 개의 공국들이 존재합니다. 개개의 세력은 작으나 각자 오래된 명문들이라 깊게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현지의 믿음과 수백 년간 얽힌 가문 간의 연계는 유바스가 지니지 못한 재산입니다."
엘리트 집단이 으레 그렇듯 다르다는 데서 자부감을 느끼는 게 귀족이다. 어디서 나온 놈팽이인지 모를 놈들을 흔쾌히 받아줄 정도로 열린 놈들이 아니다. 당연하게도 이 근방 귀족 카르텔은 유바스를 철저히 배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저희는 다른 공국들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다른 이유가 아니라 유바스가 정확히 저희를 겨냥했기 때문입니다. 강대한 군사력을 앞세워 힘으로 겁박하면서 말입니다."
여럿을 동시에 상대하기보다 한 놈만 팬다. 아직 결속되지 못한 동맹을 상대할 때 유효한 방법이다. 독주를 염려해 뭉친 패거리도 한 놈만 팬다는 말에 안심해 방관하기 마련이니까.
애설튼 공왕도 이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 모양인지 양손으로 마른 세수를 해댔다.
"나르바. 귀족 간의 명예도 결국 허울일 뿐이다. 누군가 이빨을 드러내면 금방 흩어지는 신기루였지."
"이것이 이간책이라면 어떻습니까?"
"...이간?"
유바스는 실력자다. 조상들이 쌓아올린 덕을 보고 있는 기존 가문들을 제치려면 훨씬 월등한 실력을 지녀야 했다. 그게 힘이든 잔꾀든 상관없었다.
"강대한 적을 맞상대하기보다 약한 쪽을 노린다. 이는 당연한 이치입니다. 유바스가 군대를 일으켜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공국들을 정벌하려 한다면 저희가 어찌 되겠습니까?"
여기까지 말하니 애설튼 공왕도 깨달은 모양이다.
너무 강한 상대한테는 적의조차 들지 않는다. 오히려 옆에서 딸랑이던 놈이 더 미울 뿐이다. 왜,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처럼.
유바스가 본격적인 정벌에 나설 때, 유바스를 향한 분노가 이쪽을 향해올 것이다. 그리고 유바스는 병력을 분산시키느니 쳐맞는 걸 얌전히 지켜볼 터였다.
"네 염려는 알았다. 다만 괜한 걱정이다. 비록 의심되는 소문이 돈다해도 유바스 또한 귀족의 일각. 동맹을 돕지 않으리라곤..."
"동맹을 도울 때보다 돕지 않을 때 얻는 것이 더 많은데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유바스의 궁극적인 목표가 뭔지는 모른다. 중요한 건 확장에 뜻을 품었다는 사실이다. 지들이 다 해쳐먹는 건지, 아니면 적당히 봉신화시켜서 끝낼지는 모르지만 이번 혼담을 보면 의도가 일목요연하다.
"아버지와 형제들, 조카들까지 싹 다 죽길 기원하거나 그리 될 때까지 밍기적거릴 겁니다. 혹은 실각하거나. 차라리 한 차례 나라가 무너지길 바랄 지도요. 자기 여식과 맺어진 저를 내세워 한 입에 집어삼키면 될 테니 말입니다."
"...설마 그렇게까지."
말은 저리 해도 꽤나 충격받은 듯 하다. 애설튼 공왕은 설마설마 하면서도 턱을 괸 채 눈썹을 뒤틀고 있었다. 지금이 기회다. 나는 여기서 쐐기를 박기로 했다.
"굳이 회임한 여자를 붙여놓는 까닭도 그 때문일 겁니다."
"그것이 무슨 소리냐?"
"제가 자식을 보기 전 급사할 가능성에 대비해 정당한 권리를 주장할 자식을 미리 준비해둬야 하지 않겠습니까."
-판타지 모나크에선 군대를 일으켰다고 무지성 정복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땅에 대한 권리, 혹은 거창한 명분을 주장할 수 있어야 정복이 가능하다. 그래야 현지 사람들이 새로운 주인을 얌전히 맞이하는 것이다. 이렇다보니 유저들은 어떻게 해야 명분을 따낼 수 있을지 고심했다.
그러다가 나온 방법이 실로 악랄하기 그지 없었다.
일부일처제에 혼외자식이 죄악시되는 사회에서 결혼 전 덜컥 임신해버린 딸 때문에 고심하던 어느 한 유저가 획기적인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내가 노리는 땅주인 자식이랑 결혼시켜서 뻐꾸기한 뒤 걔로 권리 주장하면 되겠다!]
일단 뻐꾸기 명의로 땅을 뺏는다. 다음은? 후견인을 들먹이며 땅을 뺏는다. 땅 뺏을 때 개기면 어차피 내 혈육이 아니니 기쁜 맘으로 모가지 썩둑.
가문의 명예도 지키고 땅과 재산도 늘리고 딸도 시집보내고 그야말로 일석삼조의 술수인 셈이다.
애설튼 공왕은 내가 짐작한 계획의 전모를 듣자마자 탄식을 내뱉었다.
"나르바. 설령 네 말이 맞다 해도 유바스는 우리가 거절할 경우 제 명예를 모욕했다 여겨 침략해올 것이다."
힘 없는 나라의 설움이란 이렇다. 애설튼 공왕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며 앓는 신음을 흘려댔다. 막막하기 그지 없을 테지. 하지만 이 방법엔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한다.
나는 그 사실을 모략과 거리가 멀어보이는 애설튼 공왕에게 전달해줬다.
"정교하고 커다란 술수인만큼 어그러트리기 쉽습니다. 결국 파혼만 유도할 수 있다면 간단히 파훼되는 술수입니다."
"유바스도 그 사실을 알고 방해할 터인데 어찌..."
애설튼 공왕의 염려는 정당하다. 어지간한 방법으론 파혼 절대 안 할 놈들이다. 꾸며놓은 게 얼마인데, 악착같이 파혼만큼은 막으려 수작 부리겠지.
하지만 음모의 성사 여부는 신속함과 읽히지 않는 데에 있다. 오랜 시간이 필요한 데다 읽히기까지 했으니 이 모략을 막아내는 건 정말 쉬운 일이었다.
"제게 한 가지 비책이 있습니다. 그 뱃속 아이가 누구 아이인지 가늠하고 파혼까지 유도해낼 수 있는 초강수 말입니다. 다만 혼인을 치루는 건 피하지 못할 성 싶습니다."
"..."
나는 걱정하는 애설튼 공왕을 바라보며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도 애설튼 공왕은 내 생각과 주장에 깊은 감명을 받은 것처럼 보였다.
"마냥 밝은 미소로 뛰놀기만 하는 줄 알았다."
"..."
몸주인이 놀던 건 팩트라서 할 말이 없다...
"허나 아비까지 속일 정도로 심계가 깊었구나. 뜻대로 하거라. 도움이 필요하다면 내 이름을 대도 좋다."
"예, 전하."
"아비라 부르는 쪽이 나을 것이다. 지위 낮은 귀족이 감히 날 상대로 그리 굴었다면 목을 벴을 것이니."
"예, 아버지."
즉시 부르는 호칭을 바꿨다. 그러자 애설튼 공왕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능글맞기는."
***
집무실 밖으로 나오고서야 벙어리가 됐던 에드위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공자님, 솔직히 정말 놀랐습니다."
"말했잖느냐. 나한테 화내시느라 너한테 신경 못 쓰실 거라고."
몸뚱이는 이래도 마음은 싸나이였다. 한 번 뱉은 말은 최대한 지킨다. 반드시란 말은 함부로 쓰는 게 아니라 배웠다. 자신만만하게 어깨를 으쓱이자 에드위나의 구슬같은 눈동자 위로 눈꺼풀이 슬그머니 내려왔다.
"공자님이 지니신 식견. 거기에 전하 상대로 당당하게 의견을 표력하시는 자신감까지 말입니다."
에드위나의 무뚝뚝한 얼굴 위로 희미한 미소가 자리잡는 순간이었다. 에드위나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짖궂은 말을 던져왔다.
"공자님이 말씀하신 초강수, 설마 배를 정말로 가르시는 건 아니리라 믿습니다."
"하하, 배를 왜 갈라."
산모와 아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살점 덕지덕지 붙어있을 중세 외과용 칼날 앞에 던져준단 말인가. 에드위나, 이제 보니 생각하는 게 좀 으스스하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배를 가르면 전쟁이잖아."
"예?"
"응?"
돌아오는 반응이 약간 이상하다. 에드위나를 바라보니 어느샌가 고개를 저만치 돌리고 있었다.
4. 꼬마 부군
힘의 논리는 언제나 유용하다. 말이 안 되는 결혼을 강제할 만큼 말이다.
애설튼 공왕과 독대한지 대략 2주가 지났을 때, 나는 조심스러운 방문객을 받아들였다. 방문객은 허름한 옷차림 아래 다부지게 가다듬은 육체를 지닌 사내였다.
얼핏 보면 빡세게 농사짓고 왔나 싶지만 절도있게 무릎 꿇는 모습을 보고 생각을 바꿨다. 심상찮은 태도를 보아하니 애설튼 공왕 아래서 일하는 정보원이다.
"공왕 전하께서 자세한 상황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고하라."
정보원이 전해준 이야기는 애설튼 공왕이 말한 대로였다. 유바스는 이미 국경 인근에 적지 않은 병력을 배치해놨다. 대략 1, 2천 정도. 툭하면 수만이 투닥거린 곳과 비교하자니 턱없이 적은 숫자다.
하지만 중요한 건 숫자만이 아니다. 정보원은 애설튼 공왕이 이번 혼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던 이유를 상세히 설명해줬다.
"일선의 정찰병에 따르면 기사와 무장병을 포함한 기병들만 1천 가까이 추정된다 하였습니다."
"기병만 1천."
나는 턱을 괸 채 애설튼 공왕이 얼마나 고뇌했을지 이해했다.
유바스가 돈이 많다 많다 하더니 진짜 부자인 모양이다. 말은 생각보다 많이 먹고 빨리 지치는 짐승이다. 중무장한 기사를 위해 군마만 최소 두 필씩 필요할 텐데 그걸 감당해내다니.
게다가 기병이 덜 쓰이는 까닭은 육성과 유지비용이 오질나게 비싸서지 성능이 구려서가 아니다. 성능만으론 동수의 보병을 가볍게 압살해버리는 것이다. 그런 기병이 국경에만 1천 가량 머물고 있다.
사실상 혼담이 결렬될 경우 그대로 국경을 넘어와 약탈을 자행하겠단 협박이었다. 우월한 기동성과 압도적인 전력을 내세워 인근 영지들을 유린할 속셈이다.
주된 목적은 애설튼 공왕의 입지를 흔들어 전쟁을 유도하거나 혼담을 받아들이게끔 강요하는 것일 테고.
나는 검지로 내 뺨을 톡톡 두드리다 무릎 꿇고 있는 정보원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유바스가 이번 혼담에 필사적인 이유. 달리 짐작되는 바가 없느냐?"
"제가 어찌."
"풍문이라도 좋다. 아무거나 꺼내보거라."
괜히 엄한 사람 하나 붙잡고 대답을 독촉하는 게 아니었다. 유바스는 계획을 꾸며놓고 정작 실행에서 어설픈 모습을 보여줬다.
음모의 성사 여부는 신속함과 비밀을 얼마나 잘 지키느냐에 있다. 그러나 음모를 꾸미는 자에게 필요한 건 인내심과 플랜 B를 준비할 수 있는 철저함이다.
그런 점에서 유바스는 모순된 존재였다. 나는 유바스의 행동에서 초조감과 조급함을 느꼈다.
군대란 건 돈이 아무리 썩어넘쳐도 함부로 일으킬 수 없는 법이다. 혼담 하나 강제하겠다고 휘하 봉신들과 기사를 동원하는 건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
아무리 중요한 혼담이라 해도 말이다. 나를 둘러싼 혼담 이면에 뭔가 다른 이유가 더 있다. 그리 확신한 까닭이었다.
하지만 정보원은 꽤나 엄격한 교육을 받았는지 우물쭈물하며 말하길 꺼려했다. 순수하게 정보를 수집하고 전달하는 역할만 맡아온 모양이다.
그는 숨을 들이키며 입술을 뗐다가 시선을 추스리고 입을 다물길 반복해댔다. 사견이 섞여 정보가 오염되는 걸 몹시 염려해서였다. 그래도 내가 가만히 기다리고 있자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유바스는 그 시조가 귀족인지 알 수 없는 가문입니다. 그럼에도 왕성한 정복 활동을 거듭해 왕을 참칭할 수 있던 건 그 배후에 성도 아이데아와 교황청의 비호가 있어서였습니다."
"오호."
뭐, 처음 듣는 이름들이지만 중세 유럽틱한 곳이니 대충 뭐하는 곳인지 짐작간다. 종교와 세속 권력의 결합은 흔히 있는 일이기도 했고. 뜬 소문이라 해도 꽤나 그럴싸한 소리였다.
이 근방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기 원한 교황청과 근본 없는 가문 유바스. 이 둘의 동맹은 교황청에 비협조적인 가문의 위세를 꺾고 신생 세력의 비상을 도왔을 것이다.
정보원은 여기까지 말한 뒤 숨을 크게 고르고선 조심스럽게 내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허나 근래 들어 이 둘의 관계가 냉각됐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동맹에 균열이 생겼다는 건가?"
"상세한 뒷사정은 아직입니다. 확인된 바는 성 일레니오 축일 때 모습을 드러냈어야 할 주교가 불참했다는 게 전부입니다."
나는 자세를 고치면서 양손을 마주 움켜잡았다.
정보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판단하는 건 순전히 받아들이는 사람의 몫이다. 그리고 나는 정보원이 가져다준 이 이야기가 몹시 '그럴싸'하다고 생각했다.
내 생각에 따르면 이렇다.
유바스는 지금까지 교황청이란 든든한 뒷배 덕분에 막무가내로 싸울 수 있었다. 그러다 사이가 어긋나니 덜컥 겁이 든 것이다. 유바스. 그들의 권세는 교황청의 묵인과 지지 아래 허락된 모래성이었다.
유바스도 이 사실을 뒤늦게 눈치채고 어떻게든 지역 귀족 카르텔을 무너트리려고 하는 거다. 교황청의 비호를 대신할 혈통적 정통성을 얻거나 잠재적 적대 세력들을 미리 물리치기 위해서였다.
마침 제대로 된 후계자 교육을 받지 못한 어린 소년 하나가 눈에 들어왔을 테고 말이다.
음. 추측과 비약이 다소 섞이긴 했지만 이건 직감의 영역이다. 얼추 이번 혼담의 배경을 알게 되자 계획이 순조롭게 이뤄지리라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정보원을 향해 눈썹을 씰룩이며 기분좋게 웃음을 흘렸다.
"유바스가 아주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군."
"...."
"고맙다. 돌아가도 좋다."
"예, 예."
수고했다는 의미로 기분 좋게 웃어줬는데 반응이 이상하다. 정보원은 핼쑥해진 안색으로 눈동자만 허둥지둥 굴려대다 황급히 몸을 일으켜 방을 벗어났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자기 사견이 정보를 오염시켰으리라 걱정한 모양이다. 허 참. 이런 경직된 분위기 너무 싫은데. 나중에 이 몸 아버지, 애설튼 공왕을 만나면 한 마디 해야겠다.
정보원들 교육시키는 건 좋지만 적당히 하라고 말이다.
***
이제 열두 살배기 소년이 유부남이 되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비록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와 집안이라 해도 입 꾹 닫고 처가라 불러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정략결혼 또한 귀족의 의무였다. 심지어 예비 처가란 족속들이 칼 들고 협박하면 순순히 따르는 게 안전했다.
하지만 혼담을 아무리 서두른다 쳐도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신부 측이 가져올 지참금이나 식을 어디서 올릴 지 따위도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다.
물론 이번 혼담에서 가장 중요한 건 소문의 진위 여부였다. 애설튼 공왕은 신부를 겨냥한 악의적인 소문이 진실인지 확인해야겠다고 따졌지만...
돌아온 건 냉담한 선언이었다.
"감히 유바스의 여식을 의심하느냐라."
햇빛이 창살을 가르고 들어와 따스하게 감도는 집무실 안.
애설튼 공왕은 유바스가 보낸 답신을 탁 소리와 함께 저만치 치워놓고선 고개를 홱 돌렸다. 살짝 처진 눈매와 부드러운 눈빛으로 자식을 어여삐 여기던 아버지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애설튼 공왕은 명확한 답을 요구하는 지도자이자 신하를 바라보는 주군으로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유바스의 치명적인 실수를 깨달았다 말했다지."
"예."
"굳이 내가 보낸 사람 앞에서 그 말을 입밖으로 꺼낸 이유가 무엇이냐."
"그래야 전하께서 절 불러주시리라 여겼습니다."
기밀을 지켜줄 거란 생각 따위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알려주길 원했다. 애초부터 애설튼 공왕이 보낸 사람이니 내가 아니라 공왕에게 충성하는 쪽이 맞았고.
덕분에 이렇게 다시 불려왔다. 자식이라 해도 공왕을 아무렇게나 찾아가는 건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 저번에 허리띠로 채찍질 안 당한 건 기특함 1스택 적립해서였다.
또 그랬다간 진짜 뒤질 때까지 맞는다. 물론 애설튼 공왕은 부드러운 아버지가 맞다. 그게 중세 기준이라서 문제지. 애설튼 공왕 또한 가장이자 귀족으로서의 권위를 중시하는 중세인이었다.
당연히 모욕을 아무렇게나 흘려보낼 만큼 맥아리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명문이란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귀족. 그게 내가 본 애설튼 공왕이다.
아니나다를까, 무리한 혼담 요구에 이어 가문을 무시하는 언동에 커다란 반감을 가진 게 보였다. 애설튼 공왕은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이쪽을 바라보며 답을 재촉해왔다.
"불렀으니 말해보거라."
"예, 전하."
나는 흔쾌히 내 의견을 전달했다. 유바스가 저지른 치명적인 실수가 무엇인가. 그건 다름아니라 교황청에 보내는 메시지에 있었다. 관계란 게 생각보다 쉽고 생각보다 어려운 법이다.
그리고 유바스는 교황청과 사이가 틀어지자마자 즉시 다른 구명줄을 찾아나섰다. 나는 여기까지 말한 다음 일부러 숨을 고르며 애설튼 공왕의 반응을 살폈다.
애설튼 공왕은 아까 전보다 조금 침착해진 분위기로 내 말을 조용히 듣는 중이었다. 그 태도에서 자신감을 얻되 너무 설치지 않도록 자세를 가다듬었다.
"유바스의 군세는 강대하나 유바스의 백성들은 굳건하지 못하니. 유바스는 교황청을 위시한 교회의 지지 덕분에 백성들의 불만을 누그러트린 걸 잊었습니다. 자신들의 성세가 순전히 자기 힘만으로 이뤄졌노라 믿은 겁니다."
"나르바. 네 말대로 실수는 맞는 것 같구나. 허나 그토록 치명적일까?"
"유바스가 압도적인 우위를 점한 상황이라면 교황청이 머리를 숙였을 겁니다. 허나 이 근방엔 오랜 역사를 갖춘 공국들이 힘을 합쳐 유바스를 견제하고 있습니다. 관계 회복은 커녕 다른 구명줄을 찾아나서는 유바스의 태도에 실망한 교황청이 새로운 협력자를 찾기에 충분한 토양입니다."
나는 여태까지 긁어모은 단서들을 하나씩 배치해 새로운 그림을 그려냈다. 유바스가 그려놓은 그림 위에 예쁘게 덧칠하면서 말이다. 이것이 음모가 비밀스럽게 진행되야 하는 이유다.
도중에 탈취당해 적에게 이로이 쓰이면 돈과 시간은 물론 열정까지 다 날린다.
"이를 기회로 바꿔야 합니다."
"복안이 있다면 듣겠다."
"전례없는 혼담 요구에 의심스러운 정절에 이르기까지. 유바스의 무도함에 모두가 공감하고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힘으로 겁박해오는 탓에 다들 쉬쉬할 뿐이지만 이를 드러낼 수 있는 계기가 있다면 기꺼이 움직일 겁니다. 적어도 유바스를 가만 놔둬선 안 된다는 공감대는 형성될 터."
다음이 제일 중요하다. 나는 한 번 더 뜸을 들이며 슬쩍슬쩍 애설튼 공왕을 살폈다. 애설튼 공왕은 복잡하고 오묘한 표정으로 신음을 흘리는 중이었다.
"그 계기를 얻고자... 제가 다소 미치광이처럼 굴 수 있습니다."
"?"
애설튼 공왕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크게 흔들린 순간이었다. 너무 당혹스러워 하길래 오히려 내 쪽이 당황할 정도였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니 금방 이해됐다.
하긴 자식이 미친 짓하겠다는데 좋다고 고개 끄덕일 부모가 어딨겠는가. 애설튼 공왕도 겉모습만 저럴 뿐, 속으론 찢어지는 가슴을 부둥켜잡고 있을 것이다.
애설튼 공왕은 심각한 표정으로 다급히 캐물어왔다.
"진짜 배를 가르려는 것이냐?"
"전하, 그 어찌 참담한 짓을 입에 담으십니까."
이제 보니 에드위나만 문제가 아니었다. 중세 놈들, 역시 생각 어딘가 으스스하기 짝이 없다. 배 가른다고 한 번 말 꺼내니까 거기 꽂혀서 계속 말하는 거 봐라.
그래도 이미 각오했던 바다. 보다 발전된 사회에서 살다 온 내가 옛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는 게 최선이었다.
"절대 칼을 갖다대는 일은 없을 겁니다."
***
그로부터 대략 한 달 뒤, 혼인은 말그대로 졸속으로 진행됐다.
조그마한 예배당에 가까운 직계 가족 몇 명만 모여 박수치고 끝났다.
성대하게 열려고 해도 신랑 나이가 열두 살이다. 하객들을 모아봤자 구설수만 더 심해질 거란 게 유바스 측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달리 있었다.
미리암 오른 유바스.
폭신폭신한 토끼털을 연상시키는 보슬보슬한 피부에 함박눈처럼 새하얀 머리칼, 벽난로 불꽃처럼 포근하고 따스한 느낌의 적갈색 눈동자를 지닌 여인이었다. 미모가 뛰어나다는 세간의 평대로였다.
문제는 그 아래에 있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꼬마 부군님."
"...."
펑퍼짐한 드레스로 가렸지만 소용없었다. 신분의 고하와 상관없이 다들 보자마자 짐작했다. 똥배도 아니고 움푹 튀어나온 배. 결혼 전에 회임했다는 소문은 진짜였다.
저 상태로 결혼식을 성대하게 열었다간 동네방네 소문나는 꼴이니 유바스가 찍어누른 셈이다. 나는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반겨주는 미리암을 보면서 딱 한 마디만 던졌다.
"원치 않은 임신입니까?"
그러자 미리암은 시선을 슬그머니 아래로 내리깔면서 스스로에게 다짐하듯이 말했다. 평탄하고 떨림 하나 없는 어조였지만 많은 걸 느낄 수 있었다.
"...제게 안 좋은 소문이 도는 건 알고 있습니다. 분명 저희 가문을 향한 악의적인 중상일 테지요. 꼬마 부군님 마음에 들 수 있도록 좀 더 노력하겠습니다."
"합방하기엔 제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한동안은 각방을 쓰다가 조금씩 거리를 좁힙시다."
미리암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답했다. 물론 합방할 생각 따위 전혀 없었다. 나는 일부러 미리암과 멀찍이 거리를 둔 채 만나야 할 사람들을 만나며 시간을 보냈다.
시간이 흐르면서 미리암의 복부는 더욱 부풀어갔다. 대부분은 미리암을 동정하지 않았다. 가문의 명예와 혈통을 앗아가려는 간첩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의외로 그녀를 가장 동정하는 인물은 내 곁의 시녀 에드위나였다. 에드위나는 땋은 머리 끝부분을 검지로 빙빙 돌리며 시선을 멀찍이 둔 채 말을 꺼내곤 했다.
"미리암님 말입니다. 사실 무언가 사정이 있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회유할 수만 있다면 역이용 가능할 지 모릅니다."
"그조차 염두했을 지도 모르지."
나는 그런 가능성을 단숨에 썩둑 잘라냈다. 온갖 권모술수가 판치는 판타지 모나크에서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에 빠진 여인이었다.
판타지 모나크에는 개인의 성적 매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려 무수한 유부남 유부녀를 홀리는 전략이 있었다. 미인계에 홀린 상대는 충실한 꼭두각시가 되어 궁정의 음모를 도와주는 조력자가 된다.
나는 굳이 고개를 돌려 에드위나를 마주보는 대신 조용히 읊조렸다.
"어차피 여기 보내진 시점에서 유바스로 돌아갈 수도 없는 몸이다. 가문의 일에 깊이 관여했다면 보다 신중하게 쓰였을 거다. 포섭해봤자 가치없는 자산이야. 유바스도 일단 결혼을 성사시켰으니 어떤 취급을 받더라도 신경쓰지 않을 테고."
"..."
"복중의 아이는 죄가 없으니 해를 끼칠 생각 없다. 미리암도 파혼을 꾀하고자 모욕하는 정도 이외엔 건들지 않을 거다. 미모가 뛰어나니 격이 떨어지는 어디 장원의 부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진짜 이 정도면 중세 상위 1% 복지다. 찬탈을 꾀하는 탁란 음모인데 죽이지 않고 살려준다? 내가 현대인이 아니라 현지인이었으면 이미 교수형으로 컷컷해줬다.
"공자님, 의외로 그런 부분까지 다 생각해 놓으셨던 겁니까?"
"그야 당연히..."
순간 잘못 들었나 싶어 두 눈을 끔뻑였다.
"의외?"
돌아온 대답은 없었다. 몸을 홱 돌리니 에드위나가 입술을 오므린 채로 멀뚱히 벽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5. 미치광이
열두 살에 유부남이 됐다 해서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통정은 커녕 발기가 제대로 될지도 의심스러운 판국에 아내가 생겨봤자였다. 꼴에 여색을 누리겠다고 합방해서 살결을 부비다간 본전도 못 건진다. 집안 말아먹을 작정 있는가.
아무 여자나 건드리는 난봉꾼도 집안 재산이 걸린 일이면 자제하기 마련이었다. 유바스에게 빌미를 주지 않으려면 미리암 태중의 아이가 내 자식이란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해야 한다.
하지만 아내를 계속 매몰차게 밀쳐낼 거냐는 주장이 제기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너무 밀쳐냈다간 처가가 칼 들고 협박하러 찾아올 수 있었다.
부드럽고 원만하게, 그러나 확실히 밀쳐낼 방법이 필요한 순간이다. 다행히도 내 곁에 이를 도와줄 듬직한 조력자가 하나 머물고 있었다. 규범을 들먹이며 온갖 고리타분한 소리를 늘어놓는 족속들이.
교회.
그들이 열두 살 꼬마 신랑의 결혼 생활에 간섭해오기 시작했다. 주로 합방을 요구하는 미리암을 제지하기 위해서 말이다. 사제는 저녁 노을이 어스름히 질 때쯤 총총이는 발걸음으로 찾아오는 미리암 앞을 어김없이 가로막았다.
사제는 굳이 길게 말하지 않았다. 희끗한 머리카락과 차분한 눈동자 아래에 은은한 미소를 머금으며 미리암을 가만히 지켜만 봤다. 미리암도 질세라 사제를 마주봤지만, 결과는 항상 미리암의 패배로 이어졌다.
미리암이 돌아가고 나면 사제는 날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다가 자리를 비켰고 말이다. 다만 미리암도 슬슬 한계가 왔던 모양이다. 미리암은 결국 몇 날 며칠동안 눈싸움을 하던 끝에 사제를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
"사제님, 저는 그저 부군을 찾아뵙고 싶을 뿐입니다. 부부의 원만한 관계를 위해 대화할 필요성을 느낀 게 잘못인가요?"
"지아비를 여기시는 부인의 마음씨가 참으로 지극하십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합방을 미룰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인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안타깝게도 공자님께선 아직 너무 어리셔서 육욕과 순애의 정을 구분하시지 못합니다. 교회가 권장하는 혼인 생활이 애욕에 찌든 나날이 아니라 서로를 지탱해주며 상호발전하는 관계임을 아신다면 부인도 제 염려를 이해하실 겁니다."
사제는 준비했다는 듯이 답변을 술술술 내뱉은 뒤 살짝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그러고선 눈가 주름이 잡힐 정도로 한쪽 눈만 찡긋거린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과연 아가리로 밥 빌어먹고 사는 사람답다. 잠시동안 지켜보다 이번 혼담에 얽힌 배경들을 읽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온 것이다. 유바스가 독자적인 생존을 꾀하는 모습이 아니꼬운 와중에 좋은 기회라 여겼을 테지.
어차피 계획을 위해선 교회의 도움이 필요했다. 나는 사제가 건넨 도움의 손길을 흔쾌히 마주잡았다. 여기선 아직 미성숙한 소년임을 강하게 어필해야 했다.
"죄송합니다, 부인. 하지만 제게는 좋은 남편이 되는 것만큼 멋진 영웅들의 발자취를 듣는 것도 중요해서요."
"...참으로 꼬마 부군님다우십니다."
안 나온다고. 미인계해서 어쩔 건데. 내가 포르노 하나 접하지 않은 순진무구한 어린 아이라는 입장을 당당히 들이미니 미리암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미리암은 살짝 토라진 티를 내며 조용히 뒤로 물러섰다. 한 가지 특기할 사항이 있었다. 미리암은 유독 꼬마란 단어를 입에 담을 때 어금니에 힘이 빠짝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미리암이 완전히 모습을 감출 때까지 사제와 함께 우두커니 서있었다. 그런 뒤에야 내 방문을 열며 사제를 안쪽으로 초청했다.
"시녀는 미리 치워뒀습니다. 피차 할 말이 있을 텐데 시간 좀 내어주시겠습니까?"
"공왕 전하께서 미리 언질하셔서 다행입니다. 제가 공자님의 본모습을 먼저 봤다면 악마에 홀렸을까 걱정했을텐데 말입니다!"
사제는 방 안으로 들어오며 하하하 웃어댔다. 딴에는 죠오크랍시라고 저러는 모양이다. 아마 지금 거울을 본다면 내 표정이 썩어 문드러져 있을 거다.
저런 농담을 받아주다간 진짜 악마가 될지 모른다. 나는 사제에게 미리 준비해둔 의자를 권한 뒤 침대에 걸터앉았다. 빠르게 본론만 끝내자 스스로 다짐하면서.
"사제님께서 보여주신 호의를 믿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얼마든지요, 공자님."
"성 일레니오 축일 당시 유바스 쪽 주교가 불참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단순한 우연입니까, 아니면 소문대로 어떤 정치적 불화 때문입니까?"
"이런. 공자님도 뜬소문을 좋아하시나 봅니다. 그 소문은 조그마한 일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가십거리에 불과합니다."
내 직설적인 질문에 돌아온 건 붕 뜬 답변이었다. 인내심 약한 사람은 여기서 크게 실망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저 차분한 눈동자 아래 깃든 오묘한 감정을 눈치채고 있었다.
기대와 전혀 다른 답변을 들었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 떠보는 중이다. 필요 이상으로 과장된 제스쳐와 내 몸을 빠르게 훑는 시선이 증거였다.
아니나다를까. 계속 침묵한 채로 묵묵히 바라보자 사제도 기세를 천천히 가다듬기 시작했다.
"물론... 여기까지는 교회의 표면적인 언사입니다. 그 진의는 생각하시는 그대로가 맞습니다."
"유바스가 어떤 일로 성하와 교회를 실망시켰는지는 한참 어리고 식견이 부족한 제가 감히 짐작할 수 없겠지요. 그러나 분명한 건 유바스가 제 죄를 뉘우치고 회개를 청하는 대신 교회의 빛을 등지려 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갈고 닦인 풍부한 감수성과 공감능력을 백분 발휘했다. 일찍이 초코파이 하나 먹겠다고 군종행사에 참가해 찬송가 불러대던 나다. 교회에 갖다놓으면 목사 아들 친구고 절에 갖다놓으면 머리 안 깎은 땡중이 될 자신이 있었다.
"유바스의 무도함은 비단 그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세속의 것은 세속에 남겨두라고 하나 어찌 그 말대로만 흘러가겠습니까. 세속의 군주들이 제 사욕만 쫓아 사람을 이끈다는 본분을 잊으니 성하와 교회가 어쩔 수 없이 나선다. 저는 그리 여기고 있습니다."
"허어."
"문제는 어쩔 수 없는 교회의 개입을 세속의 권세가 탐탁찮게 여긴다는 점입니다. 이 근방의 공국들이 유바스를 가리켜 근본 없는 놈들이라며 모욕하는 것은 단순히 신생 가문이라서가 아닙니다. 세속의 군주들이 교회의 개입을 은연중에 간접적으로 부정하는 것이지요."
사제의 나이는 추정컨데 한창 눈물 많은 나이 4, 50대.
사제는 우중충하고 칙칙한 회색빛 벽돌 성 안에서 처음으로 이해자를 만났다는 사실에 손가락으로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공자님께서 이리 안목을 기르셨음에도 겸손하실 줄 몰랐습니다. 실로 그렇습니다. 세속의 군주들이 교회가 나서기 전에 먼저 행한다면 교회가 나서지도 않을 텐데 말입니다."
중세엔 성직자가 지식인 계층도 겸했는데 여기도 비슷한 모양이다. 미개하고 야만한 동시대 사람들을 선도해야 한다는 투철한 사명감이 사제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내가 볼 땐 우리 사제님도 준-야만인이지만 말이다. 그래도 팔이 안으로 굽어야 하는데, 일단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할 사람이니 나쁜 생각과 나쁜 말은 꾹꾹 치워놓기로 했다.
"사제님, 저는 사욕에 흔들리는 세속의 권세보다 굳건한 교회의 빛이 더 많은 걸 행할 수 있노라 믿습니다. 교회를 등지고 독단을 꾀하는 유바스의 전횡을 더 이상 좌시해선 안 됩니다."
"공자님 말씀대로입니다. 허나 유바스가 이미 저리도 강성한데 주변 공국들은 하나되질 못하니 성하께옵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으십니다."
"그 계기를 만들려 합니다. 유바스가 던진 미끼를 역으로 이용해서 반발을 부추길 작정입니다."
나는 그동안 그려놓은 계획의 윤곽을 사제에게 전달했다. 유바스가 이러이러한 수작질을 부리려는 듯 하니 파혼을 꾀할 때 도움을 달라. 전폭적인 지지를 약속해줄 수 있겠느냐 따위의 약조가 주된 내용이었다.
물론 공짜가 아니다. 교회를 위해 합당한 대가도 준비해놓았다. 이 부분은 아직 애설튼 공왕에게도 전하지 않은 이야기였다. 서로 의도를 탐색할 땐 몰라도 협력을 요청할 땐 솔직해야 한다.
나는 이 지론을 충실히 따랐고, 모든 걸 전해들은 사제는 감격한 표정을 지으며 두 손을 모았다.
"럭스 스텔라, 인세의 별빛이시여. 공자님의 뜻을 알았으니 저도 교회가 유바스를 이반한 까닭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씀하신 계획과 연결된 사안이나 몹시 중요한 만큼 주교님께 의견을 먼저 청하는 것을 용서해주십시오."
"역시 내 예상대로인가?"
"아마 그러실 겁니다."
종교를 정말 싫어했으면 군종행사 때 초코파이도 안 타먹었다. 이미 내 영혼은 온갖 신들이 사이좋게 저당잡았을 거다. 내게 이득이면 종교가 뭘하든 알 바 아니었다.
그리고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사제가 중요한 진실을 가져온 건 미리암의 배가 만삭에 다다랐을 즈음이었다.
나는 그 진실을 듣자마자 박수를 칠 수밖에 없었다.
"어쩐지."
***
이세의 별이 지고 인세의 별이 떠오른지 1208년째.
새 생명의 탄생은 신비롭다. 아이의 출생은 축복받아 마땅하다. 기쁨과 환희가 넘실대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이 곳, 내성의 사람들은 달랐다. 산모의 비명이 한참 울리다 마침내 아기 울음소리가 울려퍼진다. 축복받을 탄생일 터지만 누구도 환호하지 못했다. 내성의 사람들은 일제히 새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공자님은?"
"아직 모르셔."
알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인들이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였다.
"뭘 모른다는 것이냐?"
"공, 공자님."
복도 너머에서 12살의 소년이 나타났다. 검은 반곱슬머리에 흑요석 같은 눈동자. 미동이라 불릴 만큼 뛰어난 미색은 아니지만 호감을 사기엔 충분했다. 그리고 하인들이 아이의 탄생을 축하하지 못한 이유기도 했다.
"아이 울음소리를 들었다. 부인이 무척 힘들어했는데 걱정이 돼서 말이다."
나르바 오른 스트레고스 글레리오 포위스.
이 주변을 다스리는 포위스 공국의 삼남이다. 나르바는 빠르게 조숙해 중임을 맡은 형들과 달리 또래다웠다. 본래 활기차고 밝은 미소로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받은 소년이었다.
그 평가는 시간이 흐르며 조금 달라졌다. 정확히 원치 않은 혼담이 오고 간 뒤일 것이다. 웃음은 그대로였지만 눈빛이 변했다.
순진하게 똘망이던 눈망울에 흔들리는 칼끝처럼 번뜩이는 안광이 서린 뒤부터 누구도 쉽게 대하지 못했다. 어설프게 어른을 따라하던 몸짓도 시간이 흐르며 고아하고 날카롭게 변모해갔다.
나르바는 등 뒤에 한 갈래로 땋은 머리를 옆으로 내린 구슬같은 눈동자의 시녀, 에드위나를 대동한 채 뒷짐지고 있었다. 복도에 난 조그맣고 길쭉한 창문을 올려다보면서 말이다.
"벌써 황새가 물어다 준 걸 보니 분명 큰 일을 하라며 신께서 내려준 아이가 분명하다."
"분명 그럴 겁니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모두 기뻐했을 것이다. 아직 통정조차 못한 나이에 합방 한 번 안 한 부인이 자식을 낳아서 문제지. 처녀수태란 말을 믿는 얼간이는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이게 하인들이 나르바의 흐뭇한 미소를 마주보지 못하고 시선을 돌리는 이유였다. 결국 하인들이 말릴 새도 없었다. 나르바는 새파랗게 질린 안색들을 뒤로 하며 산모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는 보고를 받았다. 산모와 아이 모두 무사한가?"
우당탕탕. 안쪽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산파의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무, 무사합니다. 하지만 지금 바로 만나뵐 수는 없습니다!"
"소리가 심상찮다. 내가 한 번 봐야겠으니 문을 열라."
"아이고, 아이가 부정탑니다!"
그 순간, 눈웃음짓고 있던 나르바의 눈매가 날카롭게 다듬어졌다.
"그럼 내 아이를 앞으로도 영영 볼 수 없단 말이냐? 평생 나와 마주할 수 없다고?"
"..."
"열어라."
산파는 아무 말없이 문을 열었다. 나르바는 아이와 산모에게 바로 다가가지 않았다. 대신 가림막 앞에서 우물쭈물하는 산파를 바라봤다.
"귀한 아이다. 산파여, 그대도 아이를 받을 때 손을 깨끗이 한다지? 나도 정갈한 마음으로 받아야겠다."
산파는 삶은 천을 가져오며 고개를 연신 숙여댔다.
"공자님. 부디 그 아이를 가여이 여기소서."
"세상 어느 아비가 자기 아이를 매몰차게 대한다고 그러는지 원."
나르바는 손을 깨끗이 닦아낸 뒤에야 가림막 너머로 나아갔다. 미리암, 정략결혼으로 맺어진 부인이 포근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떤 죄책감이나 망설임도 보이지 않는 깨끗한 표정이었다.
"부군, 이 아이를 보세요. 정말 귀엽지 않나요?"
"어디 보자."
포대기에 싸인 아이가 나르바에게 건네졌다. 나르바는 아이를 안아들며 환하게 웃었다. 아부아우. 옹알이하는 아이를 보며 어찌나 환하게 웃던지 산파가 무심코 한 시름 놓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나르바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방금 전까지 웃고 있었단 사실이 의심될 정도로 말이다. 나르바는 산파에게 아이를 조심스럽게 떠넘겼다.
"어지간히도 날 병신으로 봤나 보구나."
"고, 공자님."
"씨."
엉겁결에 아이를 받아든 산파는 그대로 눈을 질끈 감으며 몸을 돌렸다.
"씨를 받아도 이런 저질 씨를 받아!"
손등으로 뺨을 후려갈기는 소리가 방 전체를 가득 채웠다.
***
그 날, 나르바는 바로 애설튼 공왕의 호출을 받았다.
6. 후폭풍
내가 애설튼 공왕에게 불려간 건 날이 어두워진 뒤였다.
애설튼 공왕의 집무실은 낮일 때와 많이 달랐다. 햇빛이 사라졌을 뿐인데 화사한 분위기를 자아내던 가구들이 죄다 말라 비틀어진 고목처럼 보였다. 애설튼 공왕의 표정도 한 몫했다.
애설튼 공왕은 시선을 떨군 채 오른손으로 눈두덩이를 꾹꾹 짓눌러댔다. 그 모습이 초상을 눈앞에 둔 상주같았다. 애설튼 공왕이 입술을 뗀 건 흐물거리는 촛불 아래로 녹아내린 밀랍이 주르륵 흘러내릴 즈음이었다.
"네가 말한 그 비책이란 게 이런 것이냐?"
"중요한 핵심이긴 했습니다."
"나르바. 너는 유바스의 여식을 모욕했다. 아주 심각하게. 네 말대로 그들이 음모를 꾸몄다면 네 자식임을 인정하라고 갖은 술수를 부릴 것이다. 나는 네 주군이자 아비로서 널 보호할 의무와 의지가 있지만."
애설튼 공왕은 눈두덩이를 만지던 오른손을 내려놓았다. 그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치켜뜨며 이쪽을 바라봤다. 눈동자에 뾰족한 화살촉을 연상시킬 만큼 조그맣고 선명한 촛불을 담고서 말이다.
"합당한 근거를 내놓지 못한다면 유바스가 만족하고 물러설 만한 징벌을 가할 수밖에 없다."
진짜 자식이었다면 살짝 서운할 법했다. 하지만 나는 이해심 많은 현대인으로서 애설튼 공왕의 판단을 이해했다. 자식이 이쁘다고 오냐오냐 키우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처가인 유바스는 이 근방에서 가장 강대한 군대를 지닌 세력. 자식의 명예를 위해 감싸 안아봤자 이미 흠결있는 여식과 맺게 해놓고 무슨 소용이냐는 조롱만 들을 터였다.
더군다나 애설튼 공왕이 지켜야 할 사람은 나 뿐만이 아니었다. 공왕은 자기 아래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생까지 책임져야 하는 지도자였다. 가족만을 위한 판단은 지도자로서 함량 미달이다.
다행히도 애설튼 공왕은 통치자로서의 자각과 가족을 아끼는 마음 모두를 갖춘 보기 드문 사례였다. 중세 스탠다드 버전 아버지는 자식이 나처럼 굴면 채찍 들고 음속을 초월한 속도로 후려갈길 거다.
설득할 시간이 왔다. 여기서 중요한 건 확고부동한 자신감.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배에 살짝 힘을 주어 목소리를 보다 또렷하게 내뱉었다.
"저는 일찍이 전하께 유바스와 교회 간의 균열이 의심된다 고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추측이든 진실이든 저희가 유바스를 대신해 교회와 손을 잡을 수 있다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계속 해보거라."
"하여 성내에 주재 중인 사제와 지속적인 만남을 가져 서로의 입장을 확인하고 타협에 이르른 결과."
밥 지을 때도 살짝 뜸을 들인다. 말도 비슷했다. 중요한 부분은 흘러가듯이 툭 뱉는 게 아니라 도중에 말을 끊어서 이목을 집중시켜야 한다. 그래야 나중에 못 들었는데? 같은 말이 안 나오는 것이다.
너무 질질 끌지 말고 아주 조금만. 딱 그 정도가 적당하다.
"교회가 어째서 유바스를 이반했는지 그 전후를 모두 알 수 있었습니다."
바로 지금처럼.
***
미리암이 만삭에 달했을 무렵. 교황청과 교회를 향해 보낸 내 러브콜은 한동안 무시당한 것처럼 보였다.
사제와 만남이 뜸해진 건 아니었다. 오히려 만남은 늘었지만 그 뿐이다.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이 어떻게 됐다, 어떻게 됐냐 따위의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사제는 내가 궁금해하는 사실들. 예컨데 교리나 지역 성인들에 대한 이야기만 계속했다. 중세 유럽 비슷한 세상이라 그런지 교리는 특출난 구석이 드물었다.
지역 성인들 이야기도 어디 누가 나무를 벴는데 그루터기에서 피가 솟구치더니 이후로 가뭄이 사라지더라 정도였고. 하지만 이런 전래 동화 속에 사람들의 인식이나 사고방식이 스며들어 있기 마련이다.
조금 졸려도 입 안을 깨물며 억지로 버텨야 하는 이유였다. 그나마 좀 신비롭고 재미난 부분들이 있긴 했다. 바로 마법과 한 때 세상을 거닐던 이종족에 대한 이야기였다.
"신들은 총애하는 신도에게 기적을, 신도들은 신들을 위해 공양을 바쳤습니다. 수많은 옛 신들이 총애하는 자들에게 아낌없이 기적을 베풀던 시기를 이세라고 합니다. 그 총애 속에서 많은 종족들이 번성했지만... 저희 인간들에겐 고통스러운 나날이었습니다."
인간 아닌 자들이 번성하던 시기라 이세. 흔히 판타지하면 떠오르는 엘프, 드워프, 수인이나 암석으로 이뤄진 거인들이 살아가던 시기라고 한다. 당연하게도 그런 놈들과 부대껴 살아가는 건 인간에게 큰 고통이었다.
특히 이세의 옛 신들은 인간을 딱히 총애하지 않았다. 어중간하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신들 입장에서 인간은 계륵이나 다름없었다. 최악은 아닌데 최고도 아니고 굳이? 라는 느낌으로 말이다.
싸움을 좋아하는 전쟁신은 개쩌는 근육과 흉포성을 지닌 오크를 총애했다. 주변 생물과의 조화를 중시하는 자연신은 엘프를 총애했다. 오만한 용신은 자신과 조금 닮았다고 좋아하는 코볼트를 총애했다.
대충 이런 식으로 각자 최애 종족이 따로 있다보니 인간만 혼자 덩그러니 놓여버렸다. 인간은 누구의 총애도 받지 못한 채 버려졌고, 신의 눈에 들기 위해 필사적으로 굴어야 했으며 절대 다수가 이종족의 노예로 전락했다.
문제는 인간이 미움받는 종족이 아니란 데에 있었다. 차라리 아주 버려졌으면 어디 오지 같은 데서 우가우가 미개 라이프라도 즐겼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신들은 인간을 그럭저럭 괜찮은 제물이라 여겼다. 덕분에 이세의 종족들은 인간을 인신공양의 제물로 아낌없이 써댔다. 수천 수만 년동안 인간들의 간곡한 청원은 철저히 무시당했다.
사제는 여기서부터 고양된 목소리로 경전을 읊어댔다.
"허나 오랜 청원 끝에 럭스 스텔라, 인세의 별빛이 떠올랐습니다. 옛 신들과 전혀 다른 기원을 지닌 외신께서 나타나 인간들을 별빛으로 이끄신 겁니다."
나는 여기서 교회가 누구를 섬기는지 처음 알았다.
럭스 스텔라, 인세의 별빛.
외계에서 도래한 신은 어중간한 국밥이던 인간을 최애 종족으로 꼽았다. 단순히 세를 넓히기 위해서였겠지만 유기당한 당대 인간들 입장에선 감격했을 것이다.
이윽고 인간들이 럭스 스텔라의 이름 아래 결집해 반기를 들었을 때, 이세의 옛 신들은 배 벅벅 긁으며 그러려니 했다. 그 긴 세월동안 반란이 한두 번으로 끝났을 리 없다. 인간은 언제나 패배해왔고 이번에도 그리되리라 믿었다.
그러나 럭스 스텔라는 인간을 기어코 승리로 이끌었다.
수많은 이세의 종족들이 몰락하자 옛 신들도 부랴부랴 인간을 택했지만 대세는 이미 기운 뒤였다. 인간들 사이서 럭스 스텔라는 지배적인 신앙으로 자리잡은 지 오래였던 것이다.
럭스 스텔라의 신봉자들은 옛 신들을 향한 신앙을 철저하게 배격했고, 옛 신을 악마로 그들의 기적을 마법 따위로 격하시키며 반대 세력을 찍어눌렀다.
나는 사제가 들려주는 신화를 흥미롭게 들은 뒤 질문을 던졌다.
"이 이야기를 예배 시간이 아니라 굳이 독대하는 와중에 꺼낸 이유가 있으시겠지요."
이 시발롬, 그냥 들려주고 싶어서 들려준 거면 혀 좀 잡아당길 생각이었다. 그래도 우리 사제님이 경우를 아시는 준 야만인이라 다행이다. 사제는 얼굴을 싹 굳히며 이빨을 살짝 드러내 유바스를 향한 분노를 여실히 보여줬다.
"인세의 별빛을 추종하는 저희에게 이세의 문물은 사이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들의 신비로운 유물 대부분이 인간을 공양해 얻어진 것을 생각하면 전부 박살내도 모자랄 판입니다! 헌데 유바스가 이세의 물건에 눈독을 들이더군요!"
"그게 정말입니까?"
"수상쩍은 소문에 움직인 수도사들이 확인한 사실입니다. 유바스는 교회 몰래 이세의 유물을 발굴해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중세 성직자 감수성을 끌어올린 나는 저도 모르게 무릎을 탁 치고 말았다. 아, 이건 좀 크다. 교회가 유바스를 등질 이유론 충분하고도 남는다. 그렇지만 이게 전부가 아닌 모양이다.
"성 일레니오 축일의 불참은 이런 이유로 이뤄진 일입니다. 인간의 피로 얼룩진 이세의 문물을 다루는 자가 어찌 인세의 별빛 아래 서 있고자 한단 말입니까? 당연히 제 죄를 뉘우치고 회개함이 마땅했으나."
방금 전까지 열변을 토해내던 사제가 갑자기 웅얼대기 시작한다. 뒷말을 흐리더니 목덜미를 만지작대며 헛기침만 거듭하고 있었다. 단순히 뜸을 들이는 게 아니다.
유바스가 저지른 짓이 입에 담기 어렵다는 뜻이다. 딴에는 몹시 충격적이라 스스로 마음을 추스리나 본데... 이세니 인세니 같은 부분은 성직자의 영역이지만 이 부분은 내 영역이다.
판타지 모나크에서 갈고 닦인 직감이 상황이 어찌 흘러갔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유바스는 회개하는 대신 독자적인 생존을 꾀했고, 그 방법으로 저희 가문을 욕보이길 택했습니다. 하지만 그 뿐만이 아니었을 겁니다."
"...공자님, 호, 혹시?"
설마 이걸 눈치챘냐는 경악어린 시선이 날 향해온다. 이제 겨우 열두 살 밖에 안 된 소년이 알기엔 너무 적나라하고 추잡한 계략일 테니 당연한 반응이다.
그렇지만 순수악끼리의 대전, 판타지 모나크의 멀티플레이에 발 담근 내게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던 사실이었다.
"제 아내로 보내진 미리암 오른 유바스. 그 복중의 아이를 수태시킨 자는 유바스의 가주 아닙니까?"
***
일찍이 판타지 모나크에 이런 계략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땅주인에게 임신한 딸을 보내 탁란시킨 뒤 그 아이를 빌미 삼아 후견인을 자처하며 땅을 뺏는다.]
처음 말했을 땐 일석삼조의 계략이라고 말했지만, 이 계획에는 아주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바로 이 모든 전제조건을 갖추기 몹시 어렵다는 사실이다.
음모에 신속함이 중요한 이유가 달리 있는 게 아니다. 음모도 전략이고 인생이다. 때를 놓치면 뒤늦게 꾸며봤자 아무 의미도 없었다. 당장 조금 머리를 굴리면 답이 나온다.
땅주인이 이미 임자 있거나 자식이 있으면 결혼부터 안 되니 무효. 기껏 결혼해서 애 낳나 싶더니 땅주인이 급사해서 아이 얻기도 전에 상속이 어지러워지면 무효. 애초에 딸이 임신을 못 했으면 그냥 무효.
처음에 무릎 탁 치며 이 계략을 쓰던 유저들도 얼마 안 가 치명적인 단점들을 깨닫고 포기하기 시작했다. 이외에도 문제점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다 어느 미치광이가 이 계략을 보완할 방법을 생각해냈다.
[결혼 전에 몸 굴리다 덜컥 임신한 딸을 땡처리하는 방법으로만 쓰지 말고 걍 임신한 딸을 보내면 되는 거 아님?]
어차피 탁란된 아이는 모가지 짤리거나 가택 연금 상태로 평생을 살다 죽을 놈이다. 누구 씨를 받든 알 빠임? 하는 게 보완책의 논리였다. 일단 누구 씨인지 모를 아이여도 결혼한 뒤 낳으면 사생아 취급 받지 않는다는 게 계획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치명적인 문제가 남아있었다.
바로 가문의 명예.
아무리 계략에 쓰일 수단이라 해도 딸을 아무렇게나 굴린다는 데서 반감을 느낀 롤플레잉 유저들이 이 사실을 지적해온 것이다. 내 가문이 어떤 가문인데 그런 식으로 할 수 없다는 발언이 계속됐다.
이 컴퓨터 속 중세 가주들의 극심한 논쟁은 결국 보완책을 VER.2로 완성시키기에 이르렀다.
[아버지가 임신시켜서 보내면 혈통 논란도 없고 문제 해결.]
그야말로 인외비도의 추악한 계략-.
"...."
내 이야기를 모두 전해들은 애설튼 공왕은 귀족의 준엄한 예법을 깡그리 잊은 듯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희미한 촛불로도 휘둥그레진 두 눈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다.
경악에 가득 찬 두 손이 어찌나 바들바들 떨리던지 뭔가 쥐고 있었으면 바로 땅바닥에 떨궜을 기세였다.
"아비가... 제 아버지라고?"
"예."
"믿을 수 없다."
꽃샘 추위에 떠는 아기 고양이보다 지금 애설튼 공왕이 더 떨고 있었다. 믿을 수 없다는 그 반응 이해한다. 그러나 애설튼 공왕은 내 주군이자 공국을 다스리는 지도자다.
역겨워도 유바스가 어떤 이유로 이런 선택을 내렸는지 알아야 했다.
"음모에는 은밀함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비밀이란 건 대처 아는 사람이 적을 수록 지켜지는 법. 아무 남자나 들일 수 없다는 생각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아무 연결 없는 사내가 계획에 가담한다는 것 자체를 위험으로 여겼을 겁니다."
"...."
"가뜩이나 부족한 정통성과 교회와의 반목으로 어지러운 판국입니다. 아직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후계자나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마련해둔 차남 이하 아들들에겐 흠결이 없어야 하니 이미 권위를 갖춘 가주가 직접 나섰을 테지요. 만일의 사태에 승계가 순조롭게 이뤄질 수 있도록 안배했습니다."
"육욕이 아니라 합리적인 까닭에서다?"
"물론 육욕이나 배덕감 따위의 저열한 욕망도... 없다곤 말하지 못할 겁니다."
굳이 내가 미치광이처럼 연기하며 산모와 아이를 모욕한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이 모든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떠보려는 와중에 교회의 협력을 얻어 확신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전하. 제가 저질 씨를 받았냐며 모욕한 건 단순히 산모를 노린 게 아닙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의심되는 정절을 공격한 줄 알겠지만, 이미 사정을 알고 있는 유바스 내부의 관계자들은 달리 여길 터. 유바스의 가주와 측근들은 잠깐동안이나마 서로를 의심하느라 행동에 나서지 못할 겁니다."
"그 사실도 교회가 전부 알려준 것이더냐?"
애설튼 공왕은 연신 마른 세수해댔다. 충격이 꽤나 강했던 모양이다. 목소리가 피곤에 찌들어 살짝 쉬어가고 있었다. 나는 애설튼 공왕의 질문에 그렇노라 답했다.
"교회도 유바스를 대리할 세력을 찾지 못해 억지로 숨겨왔을 뿐입니다. 유바스의 진실을 폭로할 경우 그들이 강대한 군사력을 앞세워 교회의 영향력을 축출할지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었습니다. 허나 역으로 저희가 유바스를 압박할 세를 꾸릴 수 있다면 이 진실은 유바스를 대내외적으로 흔들 강력한 무기가 될 겁니다. 혹은 평화를 강제하게 만들거나 말입니다."
"...진실을 안다 해도 파혼은 힘들지 모른다."
애설튼 공왕은 힘 없는 아버지로서 몹시 괴로워했다. 이 결혼 이면에 숨겨진 추악한 계략의 전모를 얼추 알아냈는데도 아무 행동도 못한다는 무력감에 휩싸인 듯 보였다.
그러나 파혼을 위한 준비는 이미 착착 진행된지 오래.
나는 자신감 넘치는 미소와 함께 뒷짐을 지면서 애설튼 공왕을 바라봤다.
"전부를 모르는 자들에겐 아무리 의심된다 해도 제 행동이 지나쳤다고 여겨질 겁니다. 거기에 전하께서 유바스의 분노를 염려하시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니."
"..."
"제 상속권을 전부 박탈하고 가문에서 축출, 의절한 뒤 수도 서원시키십시오."
그 순간, 피곤에 찌들어 푹 숙여졌던 애설튼 공왕의 고개가 퍼뜩 올라왔다. 애설튼 공왕은 한동안 날 빤히 바라보다가 왼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말했다.
"그렇게까지 하겠다고."
"아버지, 그리 슬퍼하실 거 없습니다. 오히려 축하받을 일입니다."
"축하?"
"예."
당연히 이익이 있으니까 수도 서원하는 거다. 뭐 수도사 되면 야스 못하고 돈도 못 벌고 아무튼 지루한 인생 보내는 거 아니냐 할 수 있는데... 반만 맞는 소리다.
성직자들도 용두질 잘만 하고 돈 잘 벌고 제 꼴리는 대로 산다. 다 청렴결백했으면 탐관오리란 말도 안 나왔지. 교리대로 못 사는 건 성직자도 얼추 비슷하다.
게다가 내가 수도 서원을 꾀해 교회와 연을 만들려는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교회가 후원하는 자와 교회에 몸 담은 자. 어느 쪽이 성하께서 볼 때 더 기특해 보이겠습니까?"
나는 유바스를 대신해 교회의 지지를 등에 업을 확고부동한 존재가 될 것이다.
7. 갑질꾸러기
내가 미리암의 뺨을 후려친 지 3일째. 성내 분위기는 확실히 달라졌다.
이전에는 쩍쩍 금이 가는 살얼음판 위로 발을 내딛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그대로 찬 물에 퐁당 빠진 느낌이다. 성 내부의 사람이라면 다 똑같았다.
죄다 저체온증 걸린 사람이 옷을 두텁게 입듯 얼굴 위로 무표정을 하나 더 덧씌우고 있었다. 딱딱하게 굳은 몸놀림과 자세만 봐도 긴장했다는 사실이 고스란히 드러나는데 말이다.
일부러 복도를 어슬렁 어슬렁 거니느라 티가 확실히 더 났다. 서로 마주보며 수군대던 하인들도 이쪽을 보면 두 눈을 부릅뜨며 몸을 돌리거나 벽에 착 달라붙었다.
자칫하면 벽걸이 그림보다 더 오목해질 기세다. 이쯤 되면 모르는 척하고 싶어도 그러기 힘들다. 소문이 성 안 곳곳에 퍼지면서 다들 필사적으로 피하고 있었다.
바로 나라는 사람을.
나는 오늘도 휑하게 비어버린 복도를 둘러보며 아쉬움에 입맛을 다셔야만 했다. 뭐 한 마디 말 붙이기도 전에 다리가 꺾이질 않나 복통을 호소하며 화장실로 달리질 않나. 아주 그냥 성이 병동이다, 병동.
전근대 윤리로 살아가는 놈들 아니랄까봐 열두 살짜리를 따돌리고 앉아있다. 이 미개한 새끼들은 어린 소년을 이토록 방치한다는 게 얼마나 악영향 끼치는지 모를 것이다.
그나마 이해심 많은 현대인이라서, 몸뚱이는 몰라도 마음만큼은 그럭저럭 나이 먹은 지라 봐준다. 물론 하인들이 너무 호들갑 떤다는 생각은 가시지 않았다.
딱히 자의식 과잉할 생각은 없는데 이렇게까지 반응해주니 좀 민망스럽다. 그나마 듬직한 시녀, 에드위나가 내 곁을 지키고 있어 다행이다. 덕분에 혼자가 되진 않았으니 말이다.
다만 에드위나도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에드위나는 한 갈래로 땋아내린 제 머리의 끄트머리 부분을 만지작대며 스리슬쩍 시선을 피하곤 했다. 지금도 그랬다.
"에드위나."
"넷?! 앗... 네, 공자님."
이름 한 번 불렀을 뿐인데 깜짝 놀란 고양이처럼 몸을 펄쩍 뛴다. 에드위나는 제 실태를 깨닫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공손한 자세를 꾸며냈다.
삑사리난 목소리와 계속 꼼지락대는 손가락, 거기에 쭈뼛거리는 눈썹까지만 제외하면 시녀로서 완벽할 것이다. 참 안쓰럽다. 하지만 지금 물어볼 사람이 에드위나 말고 달리 없었다.
나는 에드위나의 부담감을 조금이라도 줄이고자 일부러 툭 던지듯이 질문했다. 중요한 질문이 아니라 여기게끔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의견을 모으려면 자유로운 분위기가 제일 중요했다.
"내가 너무 미친 놈처럼 굴었나?"
에드위나의 기다란 속눈썹 아래 구슬같은 눈동자가 이쪽을 바라본다. 에드위나는 한동안 눈을 끔뻑이다 아주 천천히,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말해왔다.
"그... 아뇨. 아닙니다."
저 봐라, 저. 평범한 중세틱 귀족 소년이라면 괜찮은 줄 알고 그냥 넘어갔을 거다. 이런 걸 캐치하는 게 현대인의 섬세함이다. 에드위나는 할 말이 참 많은데 앞뒤에 본문까지 잘라낸 게 분명했다.
나는 배려심을 백분 발휘해 선량하고 포근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상대가 안심할 수 있도록 말이다. 이런 시도 덕분에 에드위나의 경계심을 크게 누그러트릴 수 있었다.
"솔직하게 말해도 돼."
"좀 그렇긴 하셨습니다."
...너무 누그러트렸지만.
그래도 내가 먼저 꺼낸 말이니 지적할 순 없었다. 실제로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느낀다는데 뭐 어쩌겠는가. 칼 들고 협박해봤자 뒤에서 수근거릴 테니 허허 웃으며 넘어가야지.
무엇보다 에드위나 같은 반응을 기대하고 그리 행동했던 거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에드위나의 의견에 동조했다.
"확실히 근신 처분 그 이상의 처벌이 내려져도 할 말이 없지."
"알고, 계셨군요."
에드위나의 눈빛이 따갑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라는 느낌이 반, 그걸 알고는 있었네 하는 느낌이 나머지 반 정도였다. 대체 에드위나 마음 속 내 이미지는 어디까지 추락한 건지 짐작조차 안 간다.
하지만 기왕 일을 저지르기로 한 거, 확실히 딴 소리가 안 나오도록 저질러야 한다. 애설튼 공왕한테 너무 저자세로 나오는 거 아니냐는 힐난이 향하지 않도록 말이다.
대놓고 탁란당한 사건이다. 아무리 어린 소년이어도 극심한 모욕이라 여기기 충분했다. 산모 뺨 후려갈기기도 소년 특유의 치기와 분노, 수치심이 결합해 저지른 일탈이라며 넘어가기엔 충분했다.
그걸 막아야 한다.
애설튼 공왕이 의절한다 말해도 모두가 납득할 만한 사정이 필요했다. 그리고 내게는 모두를 납득시킬 방법이 존재했고.
솔직히 계획대로 추진하기엔 내 패악질이 너무 약한 감이 있다.
남의 애새끼를 내 자식이라고 데려왔으면 바로 그냥 채찍들고 봉산탈춤 춰도 이상하지 않은 게 중세 아닌가? 모가지에 올가미 씌운 뒤 얼쑤 춤타령해도 모자랄 판에 겨우 이 정도로 끝낸 것이다.
현대인인 내가 봐도 이런 감상이 나오는데 보다 마초스러운 중세인들 입장에선 정말 관대한 처사로 보이겠지. 하. 대체 어느 정도까지 해야 그들의 눈에 '야만적'이라 비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지금 느끼고 있는 이 커다란 고민을 에드위나와 함께 나누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가문에서 축출하라는 소리가 나오기엔 너무 약하지 않을까?"
"예?"
"?"
"...죄송합니다. 잘못 들었습니다."
내가 사색하는 사이 에드위나도 잠깐 집중력을 잃은 모양이다. 하긴 요 근래 너무 자주 돌아다니긴 했다. 교육받은 시녀라도 피곤한 게 당연하지. 시녀도 결국 봉급쟁이 인생이다.
나는 전 월급쟁이로서 묘한 공감대를 느끼며 에드위나를 위해 한 번 더, 보다 자세히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가문에서 축출하라는 소리가 나오기엔 내 패악질 강도가 너무 약하지 않을까?"
***
나와 교회는 서로 대등한 입장에서 거래를 했다. 아니, 한 배를 탔다는 표현이 더 옳을 거다.
주재 사제를 통해 주고받은 계획의 골자는 이랬다.
철부지 꼬마인 내가 유바스를 모욕하고 자극해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다. 이 때, 어지간하면 그냥 넘길 유바스가 도저히 못 참고 압박할 만큼 강력한 실수여야 한다.
다음은 아들의 실수에 실망한 애설튼 공왕이 유바스를 달래고자 초강경 대응에 나선다. 상속권 박탈과 가문에서 축출 후 수도서원이 핵심이다. 이는 유바스의 계획에 고춧가루를 솔솔솔 뿌리기 위해서였다.
유바스는 무력을 휘두르길 주저하지 않는 놈들이다. 누가 봐도 탁란된 아이지만 내 아이가 맞다며 칼 들고 협박하면 모두들 입 다물어야 했다.
군대를 일으켜 맞서 싸울 수 있었다면 애초에 이런 혼담 받지도 않았을 테고. 대쪽같은 대나무라도 도끼 상대로 뻗대다간 두 쪽난다.
상속권 박탈과 수도서원은 이를 위한 대책이었다.
첫 번째. 애설튼 공왕이 가주의 권한으로 상속권을 박탈함으로써 유바스와 동조할 분탕들을 삭초제근한다.
두 번째. 유바스가 군대를 내세워 가주가 내린 상속권 박탈 결정을 부정한다면 수도서원이라는 종교적 권위를 빌려 한 번 더 부정한다.
이 두 개는 내부 동조자와 아무 것도 모르는 민중들의 지지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아무리 좆대로 저지르고 보는 유바스라도 내부 동조자나 민중의 지지 없이 땅 뺏기를 억지로 강행했다간 진짜 엎어질 거다.
겉으로 보기엔 애설튼 공왕이 유바스 상대로 알몸 투신하는 것처럼 보이겠지. 허나 유바스는 몹시 난처해질 것이다. 그냥 넘어가자니 딸자식이 당한 모욕이 생각나고, 그거 따지면 기껏 노린 상속권이 날아가게 생길 테니 당연하다.
내 상속권이 부정당했는데 내 자식? 한테까지 순서가 오겠냐고.
안전장치를 마련하고 나면 계획의 마지막은 간단했다.
바로 수도서원한 내가 교회의 가르침을 듬뿍 받아 갱생했다며 교황청의 측근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교회의 개입을 탐탁찮게 여기는 귀족 카르텔이 있다지만 내가 그 카르텔 놈이다.
우리가 남이가 정신으로 하하호호 웃으며 표면적인 대립을 막기엔 충분했다.
최종적으론 개망나니 새끼를 사람으로 만든 교회의 업적에 다들 눈물 흘리는 사이, 갱생한 내가 반 유바스 세력을 이끌며 감히 교회를 등진 자들에게 복수한 뒤 잘 먹고 잘 사는 걸로 끝.
교훈과 감동에 실리까지 두루두루 갖춘 인생 드라마 한 편 뚝딱이다.
하지만 이 실화 예정 스토리를 현실로 만들려면 극적인 연출이 필요했다. 진짜 이 새낀 고쳐쓸 수 없다는 인식을 심어줘야 훗날 갱생했을 때 눈물샘이 자극받는 법.
이 구구절절한 이유들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을 괴롭힐 수밖에 없었다...
"내가 수도원에 보내질 거란 소문이 돌더구나."
"저, 저는 처음 듣는 말입니다."
그야 내가 처음 꺼낸 말이니까 당연하지. 나는 열두 살짜리 소년한테 넙죽 엎드린 하인을 찬찬히 훑어보다 뒷말을 이었다.
"어딜 가나 상관없다. 어딜 가더라도 즐길 거리가 필요해. 여행길 와중에도 웃을 수 있어야 하겠다."
"그 말씀은."
"자연스러운 웃음을 자아내는 즐길 거리들을 준비해라. 안 좋은 일들을 떨쳐내기 충분할 정도로 즐거워야 한다. 단, 내가 맨정신인 상태로."
부하 입장에서, 고객의 요구를 들어줘야 하는 입장에서 가장 끔찍한 게 뭘까? 나는 몇 차례의 경험 끝에 그게 뭔지 답할 수 있었다. 수치화되지 않아 객관적인 지표를 파악하기 어려운, 두루뭉실하고 추상적인 보이지 않는 무언가...
'썸띵'을 요구받을 때 가장 끔찍하다.
특히 장황한 미사여구가 들러붙어서 구체적인 것처럼 보이는데 정작 구체적이지 않을 때 더더욱 그랬다. 이건 중세틱 이세계에서도 통용되는 법칙인가 보다.
하인은 무례란 걸 잊은 채 엉겁결에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결코 쉽지 않은 난제에 고심하느라 안면 근육을 이리저리 뒤틀고 씰룩이면서 말이다.
나는 여기서 한 번 더 쐐기를 박았다.
"목적지가 어디든 도중에 멈춰서 쉴 만한 호숫가 근처를 경유했으면 좋겠구나. 습기에 물건이 상하는 일은 없어야겠지."
"그렇, 습니다."
"아, 그래. 도중에 조그마한 사냥감을 노릴 무언가도 갖췄으면 한다."
"무언가... 말입니까?"
쯧. 일부러 혀 차는 소리를 크게 냈다. 하인이 순식간에 주눅들 정도로 또렷하게. 나는 미간을 살짝 좁힌 뒤 일부러 숨을 거칠게 쉬어 심기 불편하다는 신호를 온 사방에 보냈다.
"활과 석궁. 아직 내가 시위를 걸 정도는 아니니 다른 자가 장전 가능한 석궁이 필요할 테지. 답답하구나. 단어 하나하나, 그 이유 하나하나까지 네게 조곤조곤 설명해줘야 하느냐? 그런 수고를 들이려고 하인을 쓰는 것 같고?"
"아, 아닙니다!"
"준비해라. 아버지께서 억지로 진행한 혼담이 이 꼴이 났으니 나도 억지 좀 부릴 것이다."
"물론입니다! 저, 저는 지금 당장 가보겠습니다!"
빠져나갈 각을 본 하인은 제 가슴을 주먹으로 쾅쾅 후려치며 후다닥 달아났다. 비록 연기에 재능은 없지만 인생 경험이 기세를 불어넣은 모양이다.
이름 모를 하인이 저렇게 반응할 정도면 충분한 퀄리티였겠지. 나는 하인이 사라진 방문 쪽을 우두커니 쳐다보며 만족감에 젖어들었다. 물론 진짜로 이런 놈이 내 상사였으면 진즉에 칼침 놨다.
하지만 중세가 어떤 사회인가? 신분제 계급 사회다. 뭣도 없는 놈이 칼침 놓으면 갑옷 입은 기사랑 판사 없이 결투재판 치뤄야 하는 시대였다.
나는 불평등한 계급 사회의 부조리를 뼈저리게 느끼며 속으로 눈물을 훔쳤다.
"좋아, 다음."
그렇지만 눈물 흘린다고 일 못하는 거 아니다. 나는 계획의 완벽한 성사를 위해 스스로의 여린 마음을 혹독히 몰아붙여야만 했다.
그리 다짐하는 사이 치맛자락을 꽉 움켜쥔 금빛 머리칼의 소녀가 들어왔다.
척 봐도 긴장한 티가 난다. 금색 소녀는 눈을 동그랗게 뜬 데다 입까지 살짝 벌려가며 숨을 후후 고르는 중이었다. 얼굴은 억지로 집중하느라 빨갛게 달아오르고, 자랑스러울 황금빛 머리카락도 땀으로 조금씩 꼬여 있었다.
나는 비로소 내 패악질이 시험대에 올라섰다는 걸 깨달았다. 중세 비슷한 세상이니 중세와 사고방식이 비슷할 터. 가부장적이고 마초스러운 중세틱 사회에선 여자를 함부로 대해선 안 된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그... 여자라고 아무 여자한테나 그러는 게 아니고 귀족 여자한테 말이다.
물론 중세 상위 1% 남성들은 천한 신분의 여자라도 이쁘면 잘 대해준다. 그리고 중세 평균은 여자라면 눈 돌아가는 놈들이었다. 나는 그 중세 평균보다 못한 남자가 되어야 한다...
"내가 수도원으로 보내질 거란 소문이 돌더구나."
"...그러신가요?"
우물쭈물하다 간신히 입을 여는 모습이 참으로 갸날프긴 했다. 근데 난 중세 평균 이하가 되기로 작정한 사내였다. 어찌 패악질을 부림에 있어 성별로 차별할 수 있겠는가.
나는 색다른 방법으로 소녀를 갈구길 택했다.
"일단 여행길 와중에 달달한 걸 먹고 싶구나. 그러려면 양봉업자들을 독촉해 미리 꿀 몇 통은 챙겨와야겠지."
"...."
"그냥 꿀만 있으면 별로고. 바삭바삭한 식감, 짭쪼름한데 쓰지는 않고 달달한데 물리진 않는 그런 맛이 필요하다."
"저, 저는 그런 거... 그런 거 처음 듣는데요..."
당연히 내가 처음 말했겠지. 미개한 중세 식문화 수준으로 그런 음식이 있을 리 있나. 음식 썩지 말라고 소금에 담가놓는 게 이 시대 수준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나긋나긋 설명해주면 그게 패악질일까? 나는 패악질에 대해 진지한 고찰을 하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처음 들어서 뭐."
"..."
"못하겠다고?"
"아닙, 아닙니다아..."
숨쉬듯이 패악질을 일삼는 진짜 망나니들과 나는 다르다. 내가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려면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진지한 고찰과 상황의 앞뒤 맥락을 고려한 뒤 뜬금없되 상관 없지는 않은 요구를 생각해내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 나는 울먹이며 답하는 소녀를 거만한 자세로 내려다보면서 속으로 엄지를 치켜들었다.
"알아들었으면 가라. 다음."
"...네."
소녀는 터덜거리는 발걸음으로 방을 벗어났다. 물론 겨우 이 정도로 망나니계 GOAT, 거장들과 감히 견줄 순 없을 것이다. 사는 게 패악질인 그들을 연기로 따라잡는 건 무척 고된 일이다.
하지만 꾸준하고 충실한 빌드업이 있다면... 조금은 따라갈 수 있으리라.
***
그 빌드업이 완성된 건 대략 일주일 뒤.
중간 점검을 빌미로 준비해온 물건들을 내 방에 싹 늘어놓게 만들었을 때였다. 옹기종기 모인 하인들은 온 몸을 최대한 쭈그리며 내 눈길을 피하느라 바빴다.
혹시라도 문제가 생길까봐 끙끙 앓는 게 보인다. 나는 저 고민들을 말끔히 해결해주기로 다짐했다.
마침 임팩트 있는 연출을 도와줄, 탁자 위에 쌓인 유리병들이 있었다.
나는 그리로 다가가 팔을 휘둘렀다.
"다 치워!!!"
-와장창 깨지는 소리들이 방 안 전체를 가득 채울 수 있도록 말이다.
8. 표 다 끊었어요
사람들이 의외로 실감하지 못하는 사실이 하나 있다.
바로 타인을 욕하는 게 그리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막상 판을 깔아주면 괜히 얼굴 돌리기 마련이었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 나는 회사에서 월급 도적질하며 사색한 끝에 나름의 답을 얻었다.
자기 혼자서 욕하는 건 딱히 아무 상관없다. 그런데 다른 사람과 함께 있다면 문제가 생긴다. 듣는 이는 생각이 달라서 욕 먹은 사람한테 쪼르르 달려가 고자질할 수 있었다.
하필 나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한테 그랬다? 앞으로의 인생이 고달파지는 거다. 특히 신분제 사회면 인생이 고달파지기 전에 먼저 끝날 수 있었다.
따라서 누군가를 자유롭게 욕하려면 폭 넓은 연령대와 지위에 따른 차이를 포용할 만큼 강력한 공감대 형성이 필요했다. 그 정도는 되어야 아무리 그래도 좀... 이라며 내 축출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사라진다.
와인이나 꿀 따위를 담아둔 유리병을 스윙 한 번에 와장창 깨트린 건 이래서다. 나는 비싼 물건이라도 심기 거스르면 박살낼 수 있는 놈이니 처신 잘해라. 이런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그렇지만 갑자기 미쳐서 유리병을 부수면 망나니가 아니라 정신병자다. 나는 양손으로 입가나 얼굴을 가린 채 헛숨을 들이키는 하인들을 향해 두 눈을 부릅떴다.
"내가 웃고 즐길 거리를 달라 명했다."
"하, 하여 사력을 다해 준비했는데"
그 때, 눈치 없는 하인 한 명이 타이밍 좋게 입을 열었다. 억울함이 솟구쳐 올라 두려움을 이겨낸 것이다. 그렇지만 꼬투리가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갈굴 작정을 할 사람한테 보일 태도는 아니었다.
"누가 그런 걸 준비하라 했느냐!"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쾅쾅 쳐대는 게 중요하다. 나는 실제로 가슴을 두드리며 하인들을 향해 삿대질해댔다. 그러나 재능의 벽은 너무나 높았다. 고작 열두 살 짜리가 이런다고 긴장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 내가 진짜 미친 놈이었으면 살벌한 눈빛 연기로 죄다 제압했을 텐데. 별 수 없다. 모자란 놈은 말 한 마디 더 해야 하는 법이다. 나는 스스로의 부족한 재능을 겸허하게 인정하며 시선으로 주변을 한 번 쓱 훑었다.
천재 망나니가 아닌 나로선 당해본 경험을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수도원에 간다는 소문이 도는데! 그 사실에 눈물 흘리거나 안타까워 하긴 커녕 어서 보내고 싶다는 듯이 이런 물건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준비해 와? 하나같이 구하기 어렵고 까탈스러운 요구를 했는데도!"
"고, 공자님. 저희는 그런 의도가 아니라."
"아니면! 이런 물건들을 일주일 만에 어떻게 가져온 것이냐! 단 한 명도 붙잡거나 하지 않았는데 내 뭘 보고 너희 말을 믿는단 말이냐!!!"
내가 회식 때 당해본 이야기다.
3차까지 달리셔서 술에 고주망태 되신 부장님이 붙잡는 손길들을 죄다 뿌리치고 대리기사 불러야겠다 하신 그 순간. 순수하고 어리숙했던 나는 그 말을 진심으로 믿고 대리기사를 불러드렸다.
다음 날 무슨 일이 생길지 알지 못한 채로 말이다.
'허허, 모르는 사람이 내 차 운전대 잡고 있길래 깜짝 놀랐지 뭔가.'
누군가는 삼세 번까진 사양해야 체면이 선다고 말한다. 제안을 넙죽 받아들이면 너무 속물스럽게 보인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리고 체면이 중요하셨던 우리 부장님께선 삼세 번이 아니라 열두 번이셨던 것이다...
그렇다. 처음부터 구하기 어려운 물건들을 요구한 건 바로 이를 위한 빌드업이었다. 우리 부장님께선 그래도 부하들을 챙겨주시는 분이라 말은 저리 하셔도 먹을 건 확실히 챙겨주셨지만 나는 다르다.
미친 짓만 골라서 하는데 챙겨주지도 않으면서 띠껍기까지 한 놈이 자기 안 붙잡는다고 행패를 부린다. 이것이 야만력으로 중세인을 이기는 게 무척 힘들고 고되다는 걸 깨달은 내가 추구한 다른 방법.
말그대로 중세틱 이세계와 현대 지구 문명의 간극을 뛰어넘을 망나니짓이었다. 나는 눈에 핏줄이 서도록 부릅뜨며 검지로 하나하나 삿대질했다.
하나하나 시선을 똑바로 마주치면서 말이다.
"이 물건들을 가져온 게 충심이라고? 좋아. 너희들의 충성심, 아주 잘 봤다! 그리 충심이 뛰어난 자들이니 항상 내 곁에 머물고 싶어하겠지!"
다행히 이번에도 눈치 없이 구는 하인은 없었다. 아니라고 말하는 순간 몹시 안 좋은 일이 생기리라 염려하는 게 정상이다. 어쩌다 한 놈이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꺼렸지만 무의미한 시도로 끝났다.
입 벌린 놈의 허벅지를 옆사람이 온 힘을 다해 꼬집는 게 보였다. 소리내기 전에 막았으니 넘어가준다. 나는 망나니 컨셉대로 생각하며 뒷말을 이었다.
"말로 하지 못한 그 청원, 내 확실히 들어주마. 오늘부터 너희는 내 전속으로 항상 내 곁에 머문다."
"공자님, 저는 성에 쌓인 빨래를 해야 해서..."
"오, 그래? 그럼 내 친히 빨래하는 네 곁에 머물러주마. 내 곁에 있고자 하는 충심이 네 일을 힘껏 도와줄 것이다. 안 그러느냐?"
"..."
약삭빠른 하녀 하나가 빠져나갈 구멍을 노렸지만 어림 없다. 하녀는 핼쑥해진 안색으로 입술을 꼭 오므린 채 슬그머니 시선을 떨궜다. 그녀는 훗날 빨랫터에 공자님을 불러들인 소환술사로 명성을 떨칠 것이다.
하지만 뛰어난 공감 능력과 이해심을 갖춘 현대인으로서 충분히 이해한다. 이런 억지 요구에 휩쓸려 맡은 일을 다 못하는 건 이들의 직업 윤리에 어긋나는 행위일 터였다.
내가 부린 억지이니 하인들을 위해 시간을 내어주는 건 합당한 이치다. 나는 방금 전 연기로 돋군 화를 단숨에 훌훌 날려보내며 최대한 밝은 미소를 지었다.
"다른 이들도 할 일이야 있겠지만 분위기가 이래 말하지 못하고 있을 테지. 안심하거라. 내 너희들 일정을 고려해 돌아다니며 일하는 데에 지장이 없도록 곁에 머물러주마."
"...."
"서로 대화를 주고 받지 않아 약간의 오해가 있었구나. 하긴, 충성심 강한 너희가 그럴 리 없겠지. 내가 조금 발품 팔아야겠지만, 너희를 위한 일이니 친히 감수하겠다! 하하하하!"
슬슬 웃을 시기라 여겨 일부러 호탕한 웃음을 자아냈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다. 얼떨결에 웃음을 멈추고 하인들을 둘러보니 아니나다를까. 하인들 모두 차라리 방금 숨을 거둔 사람이 더 사람같을 정도로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나는 웃음을 잃어버린 그들을 보며 안타까움을 참지 못했다.
"너희 모두 웃음을 잃어버렸구나."
"그, 그게."
"성 안에서 있던 일들이 워낙 충격적인 지라..."
가만히 침묵하던 하인들이 하나둘 앞다퉈 한 마디씩 내뱉는 모습을 보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과연, 충분히 그럴만 하다. 이 칙칙하고 우중충한 회색빛깔 벽돌더미 아래서 즐길 거리가 뭐 얼마나 있겠는가.
다들 항상 고된 일에 치여 살다 보니 웃음을 잃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나는 이들을 위해 아주 획기적인 대책을 하나 떠올릴 수 있었다.
"좋다. 그럼 조그마한 종 하나라도 준비하자고 아버지께 건의해 보자꾸나."
"종... 이요?"
"그래!"
아아, 역시 미개한 중세인들은 모르는 건가-.
현대 문명이 쌓아올린 지혜의 정수.
"앞으로 종소리가 들릴 때마다 웃으면 되는 거 아니겠느냐?"
'웃음벨'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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