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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침성궁의 접객실.

"3일 후 세계 경합."

오랜만에 이곳에 들어온 시온은 자신의 앞에 있는 백염제 아하마드와 혈탑주 케르마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때까지 색전진의 개량을 끝낼 수 있나?"

개량된 색적진.

그것은 경합 때 시온이 할 증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미 그에 대한 효과는 부유 도시에서 충분히 느낀 상태.

그렇기에 시온은 개량이 완전히 끝난다면 이번 계획을 실행하는 데 있어 부족함이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허허, 정말 촉박한 시간이군요."

그런 시온의 말에 아하마드가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그의 표정에서는 여유가 느껴지고 있었다.

"이미 완성해놓았나 보군."

"그렇습니다. 아데그리파에서의 활용 때 운이 좋게도 필요했던 마지막 조각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그 조각을 맞추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말하는 아하마드의 목소리에서는 개량된 색적진에 대한 자신감이 묻어나 있었다.

그때,

"그런데 전하, 색적진의 개량이 끝났다고는 하지만 그 범위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아마 전하께서 생각하시는 범위 전체를 뒤덮기 위해서는 마법진의 힘을 증폭시켜주는 매개체가 필요할 겁니다."

아하마드의 옆에서 케르마가 살짝 염려된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미 생각해 놓은 게 있으니까."

"예?"

"마침 오는군."

그에 의문을 표하는 케르마를 향해 슬쩍 웃은 시온이 접객실의 문 쪽을 바라보았다.

"바멜 가의 공녀가 도착했습니다."

그 순간 문밖을 지키고 있는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추가적인 지시는 내일부터 그림자를 통해 전하도록 하지."

그런 시온의 축객령에 자리에서 일어난 아하마드와 케르마가 접객실 밖으로 나가자마자 이어서 한 명의 여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오랜만이에요, 시온 전하."

바로 프리실라였다.

시온을 향해 공손히 인사하는 공녀.

실제로는 몇 개월밖에 되지 않는 기간이었지만, 프리실라는 정말로 시온을 오랜만에 보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본 뒤로 수많은 일이 있었고 그만큼 자신과 시온 황자 또한 많은 것들이 바뀐 상태였으니까.

더불어 그녀는 그런 시온 황자의 모습에서 마치 더는 닿을 수 없을 정도로 멀어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물론 바뀌지 않은 것도 있었다.

'저 눈빛.'

여전히 시온 황자가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에서는 어떠한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 반년 정도 지났나?"

"아니요, 그것보다 더 많은 시간이 흘렀답니다."

그런 시온과는 달리 대답하는 프리실라의 눈빛에는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동경과 두려움, 그리고 흠모와... 연민.

그중에서도 특히 연민은 예전부터 있었던 감정임과 동시에 프리실라 자신 또한 이해되지 않는 감정이기도 했다.

모든 면에서 자신보다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시온 황자에게 그러한 감정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으니까.

하지만 시온 황자가 홀로 무엇과 대적하고 있는지 어렴풋하게 알게 된 이후로 항상 그녀의 마음속에는 그러한 감정이 새겨져 있었다.

그렇기에 그 짐을 덜어주고 싶었고 그렇기에 옆에 서고 싶었다.

물론 이제는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 상태였지만 말이다.

"그동안 많이 노력했나 보군."

그런 프리실라를 바라보며 슬쩍 웃은 시온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예?"

"괜찮게 성장했어."

담담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고 칭찬이라고 하기에도 너무나도 밋밋한 말이었다.

하지만,

주륵.

그 말을 듣는 순간, 프리실라의 눈에서 자신도 모르게 한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처음으로 듣는 칭찬이었다.

예전 시온 황자에게 자격을 갖춰야 한다는 말을 들은 후부터.

정말이지 죽을힘을 다해 노력했다.

어떻게든 그 자격을 갖추기 위해 단 한 순간조차 쉬지 않고 마법을 익혔고 어떻게든 도움이 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시도했다.

"흐윽... 흐으윽!"

그동안 단 한 번도 인정받지 못했던 자신의 노력을 마침내 알아주는 것 같아서 도저히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

시온은 그런 프리실라가 눈물을 멈출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주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럼... 저도 이제 옆에 설 수 있는 자격을 얻은 건가요?"

화장이 번져 엉망이 된 얼굴로 코를 몇 번 훌쩍이던 프리실라가 시온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건 아니야."

바로 고개를 저으며 부정하는 시온.

그 노력은 인정했지만, 옆에 서기엔 아직 갈 길이 멀었으니까.

그에 프리실라의 얼굴이 침울하게 변할 때,

"하지만 옆에 서지 못한다고 해서 네가 나를 도울 수 없는 것은 아니지."

시온의 입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예? 그게 무슨 말...."

"이번에 열릴 세계 경합."

그 말과 함께 그녀를 바라보는 시온의 입가에는,

"그때 네가 필요해."

어느새 즐거워 보이는 웃음이 지어져 있었다.

* * *

세계 경합이 시작되기 하루 전.

시온이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은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외견에 에메랄드빛 머리카락을 지닌 기사였다.

아무렇게나 방치된 검과 살짝 풀려 있는 셔츠의 앞섬 때문인지 그러한 기사는 상당히 껄렁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시온 전하께서 먼저 저를 보자고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만."

인사 후 기사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 또한 외견과 비슷하기 그지없었다.

"죄송하지만 곧바로 용건부터 여쭤도 되겠습니까? 특정 황족과 개인적으로 대면했다는 이야기가 퍼지면 좋을 게 없는지라."

상당히 직설적인 말이었지만, 동시에 기사의 정체를 안다면 이해가 가는 말이기도 했다.

'밀레이온 제프리어.'

세계 최강의 기사단인 아그네스 기사단의 단장이자, 황제만을 위해 움직이는 검.

오직 검 하나로 지금의 자리까지 오른 전설적인 인물이며 최강의 기사라 불리는 이벨린 아그네스 바로 다음 가는 실력을 지녔다고 평가받는 자.

한 번도 제대로 된 실력을 보이지 않았기에 '일곱 하늘'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들어갈 수 있을 거라는 평을 받는 강자이기도 했다.

'연대기에서는 마지막까지 황위가 공석이었기에 극후반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활약을 보여준 적이 없었지만....'

시온은 이 정도의 전력을 그렇게 썩힐 생각이 없었다.

"이번에 나를 도와줬으면 하는데."

직설적인 물음에 마찬가지로 직설적으로 답하는 시온.

"음... 이미 전하께서도 알고 계시겠지만, 저희 아그네스 기사단은 오직 제국과 황제만을 위해 움직입니다. 당연히 아그네스의 직계 혈족이라고 하더라도 황제가 되지 못한다면 저희에게 지시를 내릴 수 없게 되어 있지요."

그 말에 밀레이온이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하기 시작했다.

"저 개인적으로야 전하를 돕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정해진 룰이란 게 있어서 말입니다. 물론 전하께서 다음 대 황제에 가장 가까운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아직 황위에 오른 건 아니시기도 하고 말이지요."

그 이미지와는 달리 꽤 길고 조심스러운 말이었지만, 종합하자면 거절이었다.

하지만 그의 거절에도 시온의 표정은 처음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처음부터 예상했던 것이었으니까.

"그럼 이번에는 내가 아닌 제국을 위해 움직이는 걸로 하지."

곧이어 그런 시온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예?"

밀레이온의 눈이 의문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 * *

세계 경합.

세계 회의 기간에 열리는 행사 중 하나로서 황성, 오대가문, 외경삼세 등 각 세력 최강이라 불리는 무력 단체들이 참석하여 서로의 실력을 겨루는, 말 그대로의 경합이었다.

당연히 그 인기는 하늘을 찌를 수밖에 없었고 그만큼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다른 어떠한 행사보다도 거대한 규모를 자랑했다.

그런 세계 경합이 열리는 오늘.

"와, 정말이지 장난이 아니군!"

경합 기간에만 특별히 하급 귀족에게까지 개방한 황성의 대연무장에는 아침부터 수많은 인파가 모여 있었다.

"저번 경합 때보다 더 많이 모인 것 같은데?"

옆에서 감탄하고 있는 콧수염을 길게 기른 남자 옆에서 짙은 눈썹의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이번 세계 경합에는 특이하게도 그동안 절대로 움직이지 않던 아그네스 기사단까지 참여한다고 했으니까 말일세."

"허, 그게 정말인가."

"정말이고말고, 거기다가 그에 맞서는 잿빛 사자단, 정령 군단, 푸른 발톱 등 다른 곳들 또한 쟁쟁하기 그지없지. 아마 역대 최고의 경합이 될 거라는 게 대부분의 생각이라네."

"하하, 그 말을 들으니까 더욱 기대되는구먼!"

눈썹 남자의 말에 들뜬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외치는 콧수염 남자.

"그런데 말일세. 나는 사실 제일 기대되는 것은 따로 있다네."

그런 그를 향해 눈썹 남자가 한층 은밀해진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게 뭔가?"

"시온 아그네스 황자."

"아!"

"그전에는 유폐되다시피 해서 아무런 정보도 없는 데다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최근 1년간도 공식 석상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

그렇게 말을 이어가는 눈썹 남자의 눈이 먼저 자리한 황족과 외경 삼세의 지도자들 사이에서 아직까지 비어 있는 자리 하나를 바라보았다.

"때문에 아직도 외모조차 모르는 자들이 많아. 그럼에도 들려오는 업적들은 하나같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것들이지 않은가. 그러니 당연히 궁금할 수밖에."

대체 어떤 인물인지.

과연 들려오는 소문처럼 잔혹하기 그지없는 폭군일 것인지.

아니면 전혀 다른 모습일지.

다음 대 황위에 오를 가장 유력한 황족이라는 말마저 퍼지고 있었기에 그 궁금증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하긴 자네 말을 듣고 보니 나 또한 궁금해지는군. 듣기로는 정말 잘생겼다고 하던데...."

그런 콧수염 남자의 말이 끝나기 전이었다.

한순간.

그것은 단 한 순간이었다.

수만 명이 모여들어 시장통처럼 시끄러웠던 대연무장이 단 한 순간에 조용해졌다.

마치 누군가 그들 모두에게 찬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저벅, 저벅.

그렇게 침묵으로 물든 대연무장에 울리는 하나의 걸음 소리.

마치 홀린 것처럼 걸음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린 사람들은 마침내 볼 수 있었다.

무표정한 가면을 쓴 황혼 검단을 이끌고.

권태로운 눈을 한 채 대연무장 안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는 한 명의 사내를.

지금껏 살면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이질적인 감각과 압박감에 사람들의 시선은 사내에게서 떨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저 사람이 바로...."

곧이어 눈썹 남자의 입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오려는 순간이었다.

"죽어라아아아! 삼황자 전하의 원수!"

무언가를 목격한 그를 비롯하여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동자가 더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부풀기 시작했다.

소설 속 막내황자가 되었다 203화

50장 세계 회의(5)

그것은 순식간이었다.

시온의 등장과 함께 양쪽으로 갈라진 인파.

그러한 인파 사이에서 검을 든 몇 명의 남자가 시온에게 튀어 나가기까지 걸린 시간이.

"에녹 전하를 위하여!"

소리를 내지르며 달려드는 남자들의 실력은 무척이나 뛰어났다.

화아아악!

그들의 검에서 응집되며 타오르는 마나는 바라보던 사람들을 놀라게 할 정도로 무시무시했고 그들의 속도는 흐릿한 잔상이 남을 정도로 빨랐으니까.

그렇게 순식간에 바로 앞까지 치달은 첫 번째 남자가 망설임 없이 미리 당겨 놓은 검을 휘두른다.

그때까지도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평소와 같이 나른한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는 시온.

마침내 남자의 검이 그런 시온의 목 바로 앞까지 도달하는 순간이었다.

서걱!

절삭음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것은 시온의 목에서 흘러나온 소리가 아니었다.

"...!"

검을 잡은 남자의 팔이 통째로 잘려나가며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떨어져 나간 남자의 팔이 있던 자리에 존재하는 건 은빛 섬광을 휘날리고 있는 한 자루의 검.

"감히."

그 검의 주인은 방금까지만 해도 시온의 뒤를 따르고 있던 황혼 검단의 수장, 루카스였다.

그런 루카스의 차가운 읊조림을 시작으로,

스가가가각!

다른 황혼 검단의 단원들이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한 속도로 튀어 나가며 나머지 습격자들을 처리하기 시작한다.

"크아악!"

그와 함께 순식간에 정리되는 상황.

곧이어,

털썩.

유일하게 목숨을 부지한 처음의 남자가 교차시킨 검 사이로 목이 고정된 채 시온의 앞에 무릎 꿇려졌다.

"아깝네, 조금만 더 빨랐으면 내 목을 벨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 남자와 눈높이를 맞춘 채 시온이 슬쩍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는 모든 사람은 알고 있었다.

시온 황자의 저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시온 아그네스! 비겁한 술수로 에녹 전하를 시해하고 뻔뻔하게 황위에 오르려고 하다니! 비록 지금은 실패했어도 언젠가 다른 누군가가 너에게 천벌이 내릴 거다!"

"천벌이라... 정말로 그런 게 있으면 좋겠군."

그 정도로 신이 이 세상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 있다면 지금보다 시온 자신이 해야 할 것들이 줄어들 테니까.

그 말에 마치 죽일 듯이 자신을 노려보는 남자를 잠시 마주 보던 시온의 입에서.

"어디서 왔지?"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린 3황자 전하를 모시던...!"

"아니잖아."

그런 남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온의 입에서 부정의 말이 흘러나왔다.

자신에게 이를 드러낸 적을 뿌리까지 뽑아내는 것이 시온 자신의 성정이었다.

그 말은 즉 연관된 모든 것을 철저하게 제거한다는 의미.

그렇기에 이런 짓을 할 잔당들이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이런 녀석들이 존재한다는 건 제3의 세력이란 말이겠지.'

더불어 실패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토록 공개적으로 습격을 했다는 건 다른 의도가 존재할 가능성이 컸다.

가령 이미지를 실추시키거나, 이걸 트리거로 이용해 자신에게 불만을 가진 자들을 수면 위로 끌어내 뭉치게 하려는 등.

'지금 이 시기에 이런 일을 꾸밀 녀석들은 얼마 되지 않아. 그중에서 제일 유력한 곳은....'

그와 함께 잠시 머릿속으로 무언가를 생각하던 시온의 입에서 하나의 단어가 흘러나왔다.

"우로보로스."

그 순간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는 남자의 눈동자.

그 동요는 바로 옆에 있던 루카스조차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미약했지만, 시온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용사의 성장을 위해 남겨두고 있었더니 이런 수작을 부린단 말이지."

시온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섬뜩한 목소리에서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느낀 것일까.

"크흐흐,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오늘의 원수는 우리의 동료들이 갚아줄 거다."

일부러 웃음을 흘리며 동요를 감춘 남자가 그 말과 함께 미리 심장 부근에 설치되어 있던 폭발 마법을 발동시켰다.

처음부터 이때를 위해 시온의 근처까지 접근한 것인지 그런 남자의 눈에는 희열이 어려 있었다.

화아아아악!

"시온 전하, 위험합니다!"

순식간에 밝기를 더해가는 마나의 빛에 옆에 있던 루카스가 다급하게 시온과 남자의 사이를 가로막으려는 순간이었다.

후욱!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러한 빛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어느새 그 자리에 자리하고 있는 이질적인 어둠.

"이, 이건...!"

발동되던 마법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린 것을 느낀 남자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런 것은 전혀 계획에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자폭하려 했나? 그렇게는 안 되지. 아직 뽑아낼 정보가 남았거든."

그런 남자를 향해 조용히 말하는 시온의 입가에는 어느새 보기만 해도 불길함이 느껴지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제부터 너의 모든 것은 나의 의사에 따라 결정될 거야. 물론 죽는 것까지."

그 말을 끝으로 멍한 얼굴의 남자를 지나친 시온이 천천히 비어 있는 상석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

입을 다문 채 굳은 얼굴로 그런 시온을 바라보는 사람들.

그러한 사람들의 눈동자 안에서는 여러 가지 감정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어찌 저리....'

어떤 이들은 잔혹한 폭군의 등장에 두려움과 걱정을 내비쳤고.

'역시 시온 황자야말로....'

어떤 이들은 오히려 동경하고 열광했다.

그리고 그중에는 후자 쪽이 훨씬 더 많았다.

세상이 평온할 때는 인군(仁君)이야말로 최고의 지배자라고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의 세상은 결코, 그렇지 않았으니까.

백 년 동안 잠잠했던 마역이 서서히 준동하고 있었고 제국은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자들로 가득 차 끊임없이 잡음과 내전을 일으키며 무너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인군은 오히려 독이 될 뿐.

시온 황자와 같은 잔혹한 카리스마를 지닌 지배자야말로 지금의 제국에 가장 필요할지도 몰랐다.

그런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상석에 도착한 시온이 비어 있는 자신의 자리로 향하던 중 디에나의 옆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회의 내용을 발설하지 않았더군."

그와 함께 조용히 열리는 시온의 입.

"솔직히 의외였어. 마지막 양심은 남아 있는 건가? 아니면 그저 감이 좋은 건가."

사실 이것은 시온이 디에나에게 내린 일종의 시험이었다.

그녀의 처분을 결정하는 시험.

디에나는 알고 있을까?

이번 선택으로 인해 그녀가 살 확률이 조금 더 높아졌다는 것을.

"...."

디에나는 그런 시온의 말에 그저 노려보기만 할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에 그녀를 향해 한 번 웃어준 시온이 자리에 앉는 순간,

"이제부터 경합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진행을 맡은 귀족의 외침과 함께 마침내 기다리던 세계 경합이 시작되었다.

시작 전 작은 해프닝이 있었긴 했지만, 경합을 취소할 정도는 아니었고 시온 또한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시온이 고개를 끄덕여 진행을 허락한 것도 있었고.

"와아아아아!"

세계 경합은 단체전과 개인전 두 가지로 나뉘어 진행되었으며 그중에서 더 인기가 많은 것은 개인전이었다.

평소에는 얼굴조차 제대로 볼 수 없었던 최상위 강자들의 실력을 마음껏 볼 기회였으니까.

더불어 '일곱 하늘'마저도 한 번씩 모습을 보이는 개인전이었기에 당연히 사람들이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항상 시작은 단체전부터였다.

그리고 그러한 단체전이 진행되는 현재,

"미쳤군! 정말 미쳤어!"

"그러게 말이야, 이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니!"

사람들은 벌써부터 저번 경합의 개인전만큼이나 엄청난 반응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반응의 중심에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이번에 처음으로 경합에 출전하게 된 아그네스 기사단이었다.

"뚜, 뚫린다! 막...!"

콰아아아앙!

"아아악!"

과연 세계 최강의 기사단이라는 것일까.

각 세력 최강의 무력 집단만을 모아놓은 경합인데도 불구하고 아그네스 기사단이 보여주는 활약은 엄청나기 그지없었다.

제대로 된 반격조차 하지 못한 채 사정없이 밀리다가 순식간에 패퇴하는 상대편들.

그 광경은 아그네스 기사단이 지닌 힘의 수준이 다른 곳과 격이 다르다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단장인 밀레이온이 참여하지 않았는데도 저 정도란 말이지.'

그러한 활약을 상석에서 지켜보던 시온의 눈이 빛을 발했다.

연대기에서도 항상 최강이라 칭해지기만 했을 뿐 한 번도 제대로 된 활약상이 나오지 않았던 아그네스 기사단이었다.

그런 기사단의 힘 중 일부분을 보게 되었으니 당연히 욕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더 빠르게 손에 넣기 위해 생각해 놓았던 계획까지 변경하고 싶을 정도.

'물론 그 전에 저쪽부터 처리해야겠지만....'

그 생각과 함께 시온은 경합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그런 사람들 사이에 숨어 있는 마족들을 바라보았다.

아직 위쪽으로부터 부유 도시의 일을 전해 듣지 못한 것일까?

인간의 거죽을 뒤집어쓴 마족들은 단 한 명도 빠짐없이 경합에 참석한 상태였다.

'아니 듣긴 했지만, 이렇게 빠르게 움직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겠지.'

어느 누가 예상했을까.

자신이 부유 도시에서 황성으로 복귀하자마자 이런 일을 벌일 줄은.

그와 함께 대연무장을 중심으로 서서히 갖춰져 가는 준비를 바라보며 시온이 차갑게 눈을 빛낼 때,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지?'

디에나는 경합 대신 그런 시온을 의식하며 머릿속으로 이러한 의문을 떠올리고 있었다.

'분명 이번 경합에서 증명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 것치고는 저번 경합과 달라진 점은 단 한 가지.

아그네스 기사단이 참여한 것뿐이었다.

대체 어떤 식으로 증명을 한다는 것일까.

'뭐, 하지 못한다면 나야 좋긴 하지만....'

지금까지 봐왔던 시온이라면 절대로 그럴 일은 없을 터.

'하,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아.'

지금의 상황도, 시온도, 결국 회의 내용을 유출하지 않은 채 스스로 불리한 길로 향한 자신도.

그에 그녀의 눈동자에 짜증이 어릴 때,

"자, 이걸로 단체전이 전부 끝나게 되었습니다!"

단체전의 종료를 알리는 진행자의 외침이 들려왔다.

그와 함께 사람들의 눈빛이 더 큰 기대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 말은 즉 이제부터 개인전이 시작된다는 것이었으니까.

"그럼 곧바로 개인전을 시작! ...하기에 앞서 이벤트 매치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뜸을 들이는 진행자의 말에 살짝 사그라드는 사람들의 기대.

하지만 다음 순간 그 기대는 순식간에 치솟는 것을 넘어서 광란에 가까운 열광으로 뒤바뀌었다.

"이벤트 매치의 대상은 바로 세계 최강의 기사이자, '일곱 하늘' 중 그 두 번째 하늘! 사자 황녀 이벨린 아그네스 전하이십니다!"

잠시의 정적.

그리고,

와아아아아아아!

지금까지와는 비교조차 안 될 정도의 거대한 함성이 대연무장 전체를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고막이 터져 나갈 정도의 수준.

그것은 이벨린 아그네스란 이름이 지닌 값어치를 여실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동시에 상석에 앉아 있던 인물들 또한 이벨린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당혹 어린 목소리를 토해내었다.

의문으로 물들어 있는 눈빛은 그들 또한 이번 일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세계 경합에서 이벤트 매치는 종종 일어나는 일이었지만, 그러한 매치에 황족이 직접 참여하는 경우는 무척이나 드물었다.

굳이 할 필요도 없었을뿐더러 해봤자 도움이 되는 것이 전혀 없었으니까.

아니, 오히려 손해라고 할 수 있었다.

거기다가 그 대상이 황족이자 제국 최강에 가장 가깝다고 일컬어지는 이벨린 아그네스라니.

그 화제성은 엄청나겠지만, 실속은 존재하지 않았다.

"...."

그런 사람들을 향해 어떠한 말도 하지 않은 이벨린이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대연무장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담담한 그녀의 눈빛.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매치는 그녀가 직접 신청한 것이었으니까.

"와아아아아! 사자 황녀! 사자 황녀!"

연신 이벨린의 별호를 외치는 사람들.

그중에서도 기사들의 반응은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

최강의 기사.

단지 듣는 것만으로 심장이 뛰는 칭호의 주인이 바로 눈앞에 있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런 사람들의 반응을 묵묵히 받아넘기며 대연무장의 한가운데 위치하는 이벨린.

그와 함께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진행자의 말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이번 이벤트 매치는 그 유례가 없는 만큼 특별한 규정이 존재합니다. 바로 먼저 나온 대상이 자신의 상대를 직접 지정하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이제부터 이벨린 전하께서 자신의 상대를 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대연무장 전체가 팽팽하게 당겨진 것만 같은 긴장감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과연 '최강의 기사'를 넘어서 '제국 최강'의 자리마저 넘보고 있는 '하늘'이 직접 지정하는 상대는 누구일까.

검왕 루트비히 아스칼론?

백염제 아하마드 오즈리마?

하지만 천천히 검집에서 빠져나온 사자 황녀의 검이 가리킨 상대는 그들이 아니었다.

대연무장의 상석.

그 중앙에서 나른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한 명의 사내.

"나오거라, 시온."

여섯, 아니, 이제는 일곱 개의 찬란한 별빛을 담은 이벨린의 눈동자가 과거 세상을 집어삼킨 황제를 올려다보며 불꽃처럼 타오른다.

동시에 그런 그녀의 눈을 마주 보며 웃음 짓는 황제의 눈동자 안에서도 여섯 개의 검은 별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소설 속 막내황자가 되었다 204화

50장 세계 회의(6)

정화교 본단 앞에 존재하는 거대한 공터.

그곳에서는 평소에는 보기 드문 아니, 볼 수 없었던 진귀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정화교를 거의 지배하다시피 하던 강경파 쪽 교도들이 전부 공손한 자세로 무릎을 꿇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그들의 앞쪽에는 온건파 교도들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 광경은 강경파 교도들이 온건파에게 굴복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 실상은 조금 달랐다.

강경파 교도들이 굴복한 상대는 온건파가 아닌 그들의 바로 앞에서 웃음 짓고 있는 한 명의 여인이었다.

"뭐야, 더 안 덤빌 거야?"

사실 처음부터 이러한 광경이 연출된 것은 아니었다.

수백 년 만에 처음으로 보았기 때문일까?

할라쇼를 비롯한 강경파 교도들은 눈앞의 여인, 리우시나가 자신들이 신처럼 섬기던 천살의 마녀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리우시나는 미친 듯이 웃으며 특유의 혈마법으로 가차 없이 교도들을 학살하기 시작했고 그런 그녀로부터 구전과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짐승의 어머니'의 모습을 본 할라쇼는 그 즉시 무릎을 꿇고 사죄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아닙니다! 곧바로 알아보지 못하고 어머니께 불경한 행실을 보인 점을 사죄드립니다! 정말이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 말에 르네트는 리우시나의 입에서 '그럼 죽으면 되겠네.'라는 말이 나올까 봐 조마조마했지만, 다행히도 그 말은 나오지 않았다.

"흐응, 그래도 감은 좋네. 여기에서 더 덤비면 전부 죽여 버리려고 했는데."

물론 이어지는 말 또한 섬뜩하기 그지없었지만.

그와 함께 김샜다는 듯 살짝 입맛을 다신 리우시나가 무릎 꿇은 할라쇼와 강경파 사이를 지나쳐 본단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런 마녀의 옆으로 콜린스가 재빠르게 따라붙었다.

"너희가 만들어낸 혈랑인가 뭔가 있지? 그것들의 자료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알겠습니다. 하하, 어머니께서 돌아오신 덕분에 이제 정화교도 하나로 통합될 수 있을 것 같군요."

그렇게 말하는 콜린스의 눈에는 기대가 어려 있었다.

사실 강경파나 온건파나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목표는 같았다.

단지 그 시기가 마녀가 돌아오기 전이냐, 후냐로 나뉠 뿐.

그렇기에 리우시나가 돌아온 지금은 그 분류의 의미가 없어진 거나 다름없었다.

"벌써부터 어머니와 함께 세상을 정화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뜁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리우시나의 말은 그의 기대를 정면을 깨뜨렸다.

"그럴 생각 없는데."

"...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을 죽이고 세상을 정화하는 게 어머니의 목표가 아니었습니까?"

"뭐, 그리 거창한 건 아니어도 다 죽이고 싶어 하긴 했지. 근데 지금은 바뀌었어."

"어째서...."

콜린스의 눈동자에 어리는 당혹.

지금 리우시나가 한 말은 정화교의 존재 의미를 부정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에 아랑곳하지 않은 리우시나가 평온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주인이 싫어하거든."

"예? 주인? 어머니께서 섬기는 사람이 있단 말입니까?"

그에 더욱 경악 어린 표정을 짓는 콜린스.

"대체 그자, 아니, 그분이 누구길래...."

"있어. 괴물 같은 사람 한 명."

도저히 진다는 상상 자체가 되지 않는 그런 괴물이.

그와 함께 머릿속으로 한 명의 사내를 떠올린 리우시나의 입가에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청량한 웃음이 걸렸다.

* * *

황제의 자리는 무겁다.

적어도 이벨린이 봐왔던 아버지의 모습은 그랬다.

그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했고.

약한 모습 또한 내비칠 수 없었다.

철저하게 감정은 감춰야 하며.

항상 위에 군림하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찍어 눌러야 했다.

그 무엇보다 고독하며 그 어떤 것보다 험난한 자리.

그렇기에 이벨린은 다짐했었다.

자신이 황제가 되어 그 모든 것을 짊어지겠다고.

다른 누구에게도 그 짐을 짊어지게 하지 않겠다고.

어느 한 사람 죽는 이 없이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짐을 가장 연관이 없을 것 같았던 시온이 지려고 하고 있었다.

"시온, 너는 그 자리를 견디지 못할 거다."

그렇기에 이벨린은 알아보고 싶었다.

그녀에게 있어 유일한 혈육이나 다름없었던 막냇동생이 과연 그 짐을 질 자격이 있는 것인지.

아니, 사실은 지금이라도 포기시키고 싶었다.

시온이 그녀의 아버지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은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스릉-

천천히 이벨린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사자검 라이오너의 검 끝이 시온을 향해 겨눠진다.

"그건 네가 판단하는 게 아니야."

그녀를 향해 차갑게 대답하며 옆쪽의 허공을 움켜쥐는 시온.

"내가 판단하는 거지."

그런 시온의 손안으로 주변에 존재하던 어둠이 모여들며 한 자루의 검의 형태를 이루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이 생길 줄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움켜쥔 이클락시아를 몸쪽으로 끌어당기며 시온은 눈앞에 있는 2황녀를 바라보았다.

이벨린 아그네스.

일곱 하늘 중에서도 천외천이라 불리는 두 명의 인물 중 하나이며 아그네스 제국 최강의 기사로 불리는 존재.

연대기에서 묘사된 이벨린의 강함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했다.

인간을 비롯하여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은 한계가 존재한다.

신체 능력, 마나 제어, 감각, 지능 등 모든 면에서 넘어설 수 없는 벽이 있다는 말.

하지만 이벨린에게는 그러한 종의 한계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괴물이란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존재.

그 때문에 이벨린의 전투 장면은 연대기에서 시온이 흥미롭게 읽었던 몇 안 되는 부분이기도 했다.

'거기다가 7성이라....'

이 시기는 물론이고 죽기 직전까지 이벨린은 천성해 6성의 마지막 벽을 넘지 못했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눈 안에서 휘도는 별의 개수는 분명 일곱 개였다.

완전한 7성을 이루었다는 말.

저것 또한 바뀐 미래로 인해 일어난 일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뭐, 나쁘지는 않네.'

분명 저러한 이벨린의 성취와 지금의 매치 모두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었지만, 시온은 오히려 잘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시선을 이쪽으로 완벽하게 집중시킬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언젠가 한 번쯤은 붙어보고 싶기도 했지.'

대연무장의 바깥쪽에서부터 서서히 시작되는 움직임들을 바라보며 속으로 웃음 지은 시온이 이클락시아의 끝을 이벨린에게 향하는 순간이었다.

"시온 이 자리에서 만약 네가 나를 꺾게 된다면...."

굳은 의지가 담긴 사자 황녀의 말과 함께,

"황위를 포기하마."

마침내 격돌이 시작되었다.

단 한 걸음으로 둘 사이의 거리를 0으로 만든 이벨린이 처음으로 펼친 일격은 단순한 수직 베기였다.

검을 처음 배운 사람마저도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기술.

하지만 그 수직 베기가 최강이라 불리는 기사의 손에서 펼쳐진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화아아아악!

운석이라도 떨어지는 것일까?

대기와 공간을 비롯한 걸리는 모든 것을 박살 내며 그어져 내리는 검.

'정면으로 부딪치면 불리해.'

보는 순간 그렇게 판단한 시온의 신형이 그 즉시 유령처럼 옆쪽으로 미끄러진다.

그런 시온을 살짝 스치고 지나간 이벨린의 검이 바닥에 닿는 순간, 투콰아아아앙!

대연무장 전체를 뒤덮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충격파가 터져 나오며 한순간 사람들의 시야와 청각을 마비시켰다.

그로 인한 여파로 연무장 전체가 쩍쩍 갈라지고 있음에도 눈길조차 주지 않은 시온이 그대로 이벨린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단숨에 그녀의 목을 향해 치닫는 시온의 이클락시아.

제시간에 검을 당겨 막을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이벨린은 뒤쪽으로 몸을 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앞으로 한 발자국 내디뎠다.

카아아앙!

그와 함께 터져 나온 강대한 천성해의 빛이 그녀의 목으로 집중되더니 그대로 시온의 검을 튕겨낸다.

시온이 지닌 6성의 흑성하로도 한순간에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밀도 높고 강대한 힘.

그렇게 다시 한번 공격의 주도권을 잡은 이벨린이 망설임 없이 내리그었던 검을 다시 사선으로 그어 올렸다.

조금 전과는 달리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조차 보일 정도로 가까웠기에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거리.

그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한 시온의 몸이 찢겨나가듯 갈라진다.

파아아아아앙!

그걸로도 모자라 뒤쪽으로 이어진 공간까지 한꺼번에 갈라낸 사자 황녀의 검이 대기에 기다란 선을 만들어내었다.

그 모습에 바라보던 사람들이 숨을 들이켰지만,

스륵-

그 순간 갈라진 시온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흩어지더니 이벨린의 위쪽에서 멀쩡하게 모습을 드러내었다.

암류 이형.

첫 번째 격돌 때 암혼사를 붙여놓고 그것을 이용해 미리 이동한 것.

키이이이이잉!

그와 함께 어느새 한계치까지 어둠을 머금은 이클락시아가 밑으로 휘둘러지며 이벨린을 향해 수백 개에 달하는 흑성하의 칼날을 토해낸다.

절야 응용 산개(散開).

칼날비.

지금까지 시온이 주로 사용하던 응축된 형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검기(劍技).

그렇게 자신을 향해 뻗어 내려오는 칼날들을 담담한 눈으로 바라보던 사자 황녀가 새하얀 빛을 뿜어내는 사자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분열.

처음에는 둘, 다음에는 넷, 그리고 여덟....

그렇게 기하급수적으로 번져가며 결국에는 공간 전체를 뒤덮은 이벨린의 검이, 쩌저저저저저저적!

칼날의 비를 모조리 박살 내기 시작한다.

그로부터 터져 나오는 무수한 충격파를 바라보며 슬쩍 무릎을 구부리는 이벨린.

그런 그녀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지는가 싶더니,

파아아앙!

공기가 터져 나가는 소리와 함께 시온의 바로 앞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와 함께 휘둘러진 황녀의 검이 어느새 검신 가득 흑성(黑星)들을 담아낸 시온의 이클락시아와 격돌하는 순간,

-----------------!

시야 전체가 흑과 백으로 명멸하기 시작했다.

"허...."

그 장면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이러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연무장의 중앙에서 벌어지는 전투.

아니, 저것을 과연 단순히 전투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 정도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은 경이롭기 그지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빨라지는 심박수와 계속해서 올라오는 전율!

그런 사람들의 눈동자는 이벨린이 아닌 시온 쪽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최강의 기사라 불리는 이벨린 아그네스가 얼마나 강한지.

그렇기에 그녀의 초월적인 검을 보며 놀라긴 했어도 '다른 누구도 아닌 사자 황녀니까'라고 생각하며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시온 황자는 아니었다.

'그 사자 황녀와... 막상막하라고?'

그동안 소문은 많이 들어 왔지만, 정작 이곳에 있는 사람 중에 시온의 힘을 직접 본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때문에 아하마드와 아켄델트 같은 최근에 시온과 같이 전투를 치른 몇몇을 제외하고서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과연 저기 있는 사내가 불과 일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버려진 순혈이라 불리며 침성궁에 유폐되어 있던 시온 아그네스가 맞단 말인가?

만약 맞다고 하더라도 저러한 성장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세상 자체가 박살 나는 느낌.

'거기다가 저 모습은 마치....'

더불어 그런 시온의 전투를 바라보던 사람 중 몇몇이 머릿속으로 누군가를 떠올릴 때,

'강해.'

시온은 자신과 격돌을 이어가는 이벨린을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과연 연대기에서도 최강이란 칭호에 근접했던 인물이라는 것일까.

직접 겪어본 사자 황녀의 강함은 시온의 생각을 뛰어넘고 있었다.

'7성에 도달해서 그런 건가?'

그 누구보다도 기본기에 충실하면서도 동시에 그 누구보다도 기교에 뛰어난 자.

모순된 말이었지만, 이벨린에게는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말이었다.

완전무결.

평범한 베기 하나하나에 일격필살의 힘이 깃들어 있었고 방어는 절대로 뚫리지 않는 성벽과도 같았다.

그야말로 공방일체의 요새를 보는 듯한 기분.

"황위에 오른다는 것은."

마치 상성 자체를 무시하듯 시온이 비쳐 낸 흑성하의 어둠을 천성해의 빛으로 갈라낸 이벨린의 입에서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무엇보다도 무거운 짐을 홀로 진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와 함께 더욱 거세지는 공세.

그로 인해 간신히 유지되던 힘의 균형에 금이 가며 점점 그녀를 향해 승기가 기울기 시작한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게 되겠지."

콰과과과광!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과 함께 시온의 몸에 하나둘씩 생겨나는 상처.

시온은 알고 있었다.

이대로 흘러가다간 패배할 수도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하기에는 일렀다.

'해볼 만해.'

한 가지.

눈앞의 사자 황녀에 비해 시온 자신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한 가지가 존재했으니까.

"그거 알아?"

그그그긋!

검을 맞댄 채 서로의 숨이 닿을 정도로 근접한 거리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이벨린을 향해 서늘하게 웃는 시온.

"나는 원래부터 이해받지 못했어."

"...!"

그 웃음에서 무언가를 느낀 이벨린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순간, 쩌저저적!

시온의 검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소설 속 막내황자가 되었다 205화

51장 증명(1)

'만약 이 세상이 소설이라면 2황녀 전하는 주인공이었을 걸세.'

과거 누군가 이벨린의 검술 스승이자 아그네스 기사단의 단장인 밀레이온 제프리어에게 그녀에 관해 물었을 때 돌아온 말이었다.

'높은 천성해의 성취 또한 전하가 가진 강점 중 하나이지만, 가장 커다란 강점을 꼽으라면 아무래도 검에 대한 감각이겠지. 이벨린 전하께서 지니신 검감(劍感)은 나조차도 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득한 곳에 존재하니까. 그것은 마치... 그래, 세계로부터 '검의 정점'이라는 운명을 부여받은 느낌이었어.'

그럼 만약 앞으로 이벨린 전하를 검으로 이길 수 있는 존재가 나올 가능성이 있냐라는 질문에 제국의 검은 이렇게 대답했다

'없네. 적어도 이 세상에는 말이지.'

* * *

천성해 7성.

역대 아그네스의 황제 중에서도 단 한 명밖에 오르지 못했던 엄청난 경지로서 그 힘 또한 가히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 그것 말고도 7성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필멸적 한계의 초월.

반신의 위까지는 다다르진 못했지만, 가진 윤회와 운명의 굴레를 인지하고 작게나마 간섭할 수 있는 경지가 바로 천성해의 7성이었다.

그렇기에 6성과 7성 사이에는 하늘과 땅, 즉 세상 하나 정도의 차이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이벨린이 지닌 우위가 전부 그 차이 때문이라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성취가 더 높다고는 하더라도 천성해는 흑성하의 하위호환에 불과했으니까.

그리고 그 간격을 메우는 게 바로 그녀가 지닌 괴물 같은 검감이었다.

상성 면에서는 불리하다고 해도 성취의 차이만큼 출력 면에서는 더 뛰어날 수밖에 없었고 이벨린의 검에 대한 활용도는 그러한 출력의 우위가 빛을 발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있었다.

'이제까지는 말이지.'

그 생각과 함께 슬쩍 웃은 시온이 자신을 향해 그어지는 사자 황녀의 검을 바라보며 눈을 차갑게 빛냈다.

상대가 성능(星能)이 아닌 검 그 자체로 승부를 걸어온다면 자신 또한 그 장단에 맞춰주는 게 맞으리라.

그 생각과 함께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뻗어 나간 시온의 검 끝이 다가오는 이벨린의 검면을 가볍게 건드렸다.

그 순간,

터엉!

그 가벼운 접촉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파동이 터져 나오며 2황녀의 검이 이상한 방향으로 튕겨 나간다.

"...!"

그와 함께 흔들리는 이벨린의 눈동자.

'뭐지?'

빛과 같은 속도로 휘둘러지는 자신의 검에 존재하는 미세한 역점을 인지하고 정확하게 검 끝으로 맞춰 틀어내었다.

'우연인가?'

하지만 곧바로 이어지는 격돌에서 이벨린은 그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투웅!

기이한 곡선을 그리며 움직인 시온의 검이 다시 한번 그녀가 그어낸 검의 경로를 완벽하게 뒤틀어버렸으니까.

'...이런 게 가능하다고?'

카아앙!

그로 인해 드러난 틈을 노리며 쏘아져 들어오는 시온의 검을 아슬아슬하게 막아낸 이벨린의 눈동자에 아까보다 더한 놀라움이 어리기 시작했다.

검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도 자신 있다고 생각했던 그녀조차 이해하기 힘든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이벨린의 경악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콰가가가각!

방금 두 번의 격돌을 기점으로 그녀가 펼쳐내는 모든 검격이 막히기 시작했으니까.

깊은 물살 속을 유영하듯.

천천히 대기를 갈라내며 움직이는 시온의 검.

그런 시온의 검이 이벨린의 검이 뻗어 나가는 경로를 모조리 선점하며 그녀가 지닌 절대적인 검감이 빛을 발할 가능성 자체를 차단하고 있었다.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광경.

그로 인해 이벨린 쪽으로 향해 있던 승기가 점점 반대편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이건 마치 내가 펼쳐낼 기술들을 전부 알고 있는 것 같은....'

실제로 그런 그녀의 생각은 어느 정도 맞았다.

'여기에서는 십중팔구 오른쪽 사선으로 검을 그어낸다.'

카아앙!

어느새 검게 물든 시온의 눈에는 이벨린이 다음에 어떻게 움직일지 비치고 있었으니까.

시온이 그녀에 비해 절대적으로 유리한 한 가지는 바로 상대에 대한 지식이었다.

과거 시온은 '크로노스의 다섯 물음'을 사용해 이벨린의 시간을 가져다 사용했었다.

물론 그 시간은 짧았고 그 힘 또한 더는 사용할 수 없었지만, 그때 인식했던 이벨린의 모든 검술과 패턴, 그리고 그녀의 전투 시야까지도 고스란히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스가가가각!

미친 듯이 가속된 시온의 사고가 그것들을 토대로 그녀의 검을 차단할 수 있는 최선의 경로를 뽑아내고 있었기에 이벨린의 입장에서는 마치 미래를 보는 것처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그런 시온과는 달리 이벨린은 자신의 상대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고 말이다.

"미친...."

그렇게 점점 새로운 양상을 띠어가고 있는 전투를 바라보던 몇몇 기사의 입에서 믿을 수 없다는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그들의 공통점은 전부 두 황족의 전투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 만큼 수준이 높다는 것.

그렇기에 볼 수 있었다.

"이벨린 전하께서... 밀린다고?"

사자 황녀 이벨린 아그네스.

정점, 그리고 완벽이란 단어가 세상에서 가장 잘 어울리는 존재.

정치나 계략 면에서라면 몰라도 무력적인 면에서는 그 누구에게도 진다는 게 상상되지 않는 사람이 바로 2황녀였다.

그런데 그들의 눈앞에서 그런 2황녀가 승기를 빼앗기고 있었다.

"어떻게 저런 게 가능한 거지...?"

그것도 같은 '일곱 하늘'은커녕 지금까지 소문만 무성했지 제대로 된 무력을 단 한 번도 선보인 적 없었던 시온 황자에게.

믿을 수 없는 것을 넘어서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장면이었다.

동시에 그들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시온 황자는 명백하게 제국을 대표하는 최강자 중 한 명이 되었음을.

그런 기사들과는 달리,

'이렇게까지 성장하다니.'

이벨린은 점차 자신을 몰아붙이기 시작하는 시온을 보며 복잡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목숨조차 지키지 못했던 막냇동생이 이토록 강해졌다는 게 무척이나 놀랍고 기꺼웠지만, 동시에 그런 시온이 황위에 오르는 걸 막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것에 슬픔을 느꼈다.

'그 짐을 지는 것만큼은 정말로 말리고 싶건만....'

그런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 우르디오스의 마지막 모습과 그런 황제를 바라보면서도 어떠한 슬픔과 애정조차 존재하지 않던 형제자매들의 차가운 눈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시온... 정녕 황위에 올라야겠느냐."

이대로 가다간 자신이 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쩌저저저저적!

그 말과 함께 더욱 날카로워지는 이벨린의 검격.

하지만,

"이미 후계식을 치를 때부터 그 뜻은 충분히 밝힌 것 같은데."

그래봤자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기에 전투에는 커다란 변화가 존재하지 않았다.

점점 어지러워지는 손발과 불규칙해지는 천성해의 흐름.

마침내,

콰아아앙!

마치 성벽과도 같은 그녀의 방어마저 박살 나고.

이벨린의 머릿속에서 패배라는 두 글자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스륵-

그녀의 바로 앞에 멈춰 선 시온이 그렇게 말하며 이클락시아를 거두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갑작스러운 행동.

"갑자기 무슨...?"

그 이해되지 않는 행동에 당혹 어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벨린을 향해 슬쩍 웃은 시온이 말을 이었다.

"증명의 준비가 끝났거든."

시온이 이 대결을 수락한 근본적인 이유.

그런 시온의 말에 이상함을 느끼고 주위를 둘러본 이벨린과 다른 사람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저들이 왜...."

언제부터 있었던 것일까.

오즈리마의 대표적인 전력이자 최강의 마법사단이라 불리는 '바벨'.

부유 도시의 '빛의 감시자'와 푸른 발톱 부족.

황혼 검단 그리고... 아그네스 기사단까지.

제국 최상위 무력 집단들이 마치 포위하듯 대연무장을 감싸고 있었다.

전혀 의도를 짐작할 수 없는 상황에 사람들의 얼굴 가득 어리는 의문.

"시작해라."

화아아아악!

그에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 대마법사 아하마드의 입에서 흘러나온 지시와 함께 '바벨'과 '빛의 감시자'가 합작하여 만들어낸 반투명한 보호막이 대연무장 전체를 완벽하게 뒤덮기 시작한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그 기이한 광경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보호막으로부터 이상한 점을 발견한 몇몇 마법사의 눈에 당혹이 어렸다.

'어째서...?'

일반적인 술식과는 달리 보호막의 안쪽에 빼곡하게 새겨져 있는 충격 방어 주문.

그것은 마치 바깥쪽의 공격을 방어하는 게 아닌 안쪽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하는 게 목적인 것 같았다.

그때,

"지난 백 년간."

대연무장 안을 울리는 나지막한 목소리.

그 목소리는 무척이나 작았지만, 경합에 참석한 모든 사람의 귓가에 똑똑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그 불길하면서도 사람을 홀리는 듯한 목소리에 저절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고개.

그곳에는 바로 시온이 있었다.

"제국은 평화를 누려왔지."

그런 사람들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받아넘기며 시온이 천천히 말을 잇는다.

"마역은 조용했고 다른 어떤 것도 아그네스와 제국의 아성을 무너뜨리지 못했으니까."

철저한 힘의 논리로 유지되던 완벽한 평화.

어디까지나 표면적으로는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평화는 처음부터 거짓이었다."

평화의 근간이 되는 마역과의 휴전부터가 거짓이었으니까.

"지금까지 단 한 순간조차도 마역은 제국을 향한 침공을 멈추지 않았지. 단지 방법을 바꿨을 뿐. 그 누구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은밀하고...."

대연무장 안에 존재하는 사람들을 훑던 시온의 시선이 정확히 그사이에 숨어 있는 마족들에게서 멈춘다.

"그리고 치밀하게."

그와 동시에 휘어지는 시온의 눈동자.

"시온 전하! 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시는...!"

"제국은."

그에 불안감을 느낀 듯 사람의 거죽을 뒤집어쓴 마족 중 한 명이 다급하게 외쳤지만, 이어지는 시온의 섬뜩한 목소리가 그런 그의 말을 깔끔하게 끊어내었다.

"그 새로운 방식의 침공을 눈치채지 못했지. 그렇기에 곳곳에 마(魔)들이 스며들었고 그로 인해 무너져내렸다. 너희들이 평화라고 생각한 백여 년 동안 천천히."

마주하고 싶지 않은 진실인 동시에 마주해야만 하는 진실.

"그렇기에 나는 썩어버린 상처들을 도려내려 해."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자신이 세운 제국이 더는 썩어 문드러지지 못하도록.

그 말이 신호라도 되었던 것일까.

화아아아악!

뒤늦게 나타난 혈탑의 마법사들이 펼쳐내는 대규모의 합동 술식과 함께 대연무장의 하늘 전체에 새빨간 빛을 발하는 거대한 마법진이 새겨지기 시작한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심령을 뒤흔드는 빛에 사람들의 눈동자 또한 흔들리는 순간, 저벅, 저벅.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듯 새로운 사람이 한 명 더 등장했다.

굳은 의지가 담긴 검붉은 눈동자를 빛내며 연무장 한가운데로 걸어 나와 주문을 외우는 여인.

바로 프리실라였다.

투화하하학!

주문이 완성됨에 따라 그녀의 전신에서 터져 나온 검붉은 무언가가 순식간에 위쪽으로 치솟더니 그대로 마법진 전체에 스며들었다.

그로 인해 더욱 환하게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 마법진.

"오늘부로 제국은."

그렇게 완성되어 가는 마법진이 아닌 여전히 숨어 있는 마(魔)를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연 시온이 오른편의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스륵-

그런 시온의 손안에 잡히는 것은 이클락시아가 아니었다.

새카만 몸체에 기이한 문자들이 한가득 음각되어있는 기다란 창.

바로 용폭창 아그드바르였다.

우우웅!

오랜만의 부름이 반가운 듯 낮은 울림을 토해내는 묵빛의 창.

시온은 아그드바르를 천천히 당겼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마를 제거하고."

그러한 창끝이 겨눠진 곳은 바로 하늘에 새겨진 거대한 마법진.

"마역과의 전쟁 준비에 들어간다."

시온의 귓가로 과거 선황제 우르디오스의 마지막 유언이 스쳐 지나가고.

콰직!

그와 함께 쏘아진 아그드바르가 마법진의 정중앙에 박히는 순간, 쿠구구구!

마침내 세상에 지옥이 열리며 숨겨져 있던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소설 속 막내황자가 되었다 206화

51장 증명(2)

키아아아악!

콰과과광!

마역 서남쪽 외곽지역.

"지금."

양 진영으로 나뉘어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마물들 옆으로 작은 목소리와 함께 은신 마법과 기척 차단 술식을 사용한 몇몇 인물이 빠른 속도로 지나쳤다.

바로 클레어 플로시마르를 비롯한 용사 일행이었다.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거죠?"

점점 대공끼리의 전쟁이 심화되고 있음에도 마역을 빠져나가기는커녕 더욱 깊숙한 곳으로 들어온 지금의 상황이 불안한 듯 성녀 엘리시스가 클레어를 향해 물었다.

"무슨 신전을 찾아야 한다고 하지 않았었나? 그럼 다 온 것 같은데?"

그 말에 클레어가 입을 열기도 전 옆에 있던 레인이 앞쪽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그런 그녀의 말처럼 그들이 향하는 방향의 맞은편에는 지평선 끝쪽에서부터 서서히 신전으로 보이는 회색빛의 건물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맞아, 저 안으로 들어가야 해."

클레어는 그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더욱 속도를 올렸다.

"저기서 얻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신기."

이어지는 투르잔의 물음에 용사의 입에서 곧바로 한 단어가 흘러나왔다.

짧지만 무척이나 강렬한 울림을 남기는 단어.

신화급 무구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며 가장 높은 격을 지닌 무구에게만 붙는 칭호인 신기중 하나가 바로 저 안에 있었다.

더불어 저 안에 있는 신기는 마역에서 그녀가 손에 넣어야 할 가장 중요한 열쇠이기도 했다.

'회귀 전에는 위치만 알고 결국 손에 넣지는 못했었지.'

만약 그때 손에 넣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수도 있었으리라.

사실 클레어 또한 저곳에 있는 신기의 정체를 정확히는 알지 못했다.

과거 영겁제 오르렐리온을 섬기던 다섯 왕 중 하나이자 신검이라 불렸던 인물이 사용하던 검이라는 것밖에.

'왜 그런 인물의 검이 마역 중에서도 이렇게 깊은 곳에 존재하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말이야.'

분명 클레어 자신이 알기로는 마역이 세상에 등장한 시기는 영겁제가 죽은 뒤였다.

알려지지 않은 비화라도 존재하는 것일까?

거기까지 생각하던 클레어는 그 의문을 머릿속에서 털어내었다.

생각해 봤자 알 수도 없었을뿐더러 지금은 신기를 얻는 것에만 집중해야 했으니까.

"곧바로 진입한다, 전투 준비."

어느새 바로 앞까지 다가온 거대한 신전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입을 여는 클레어.

그런 용사의 말에 따라 굳은 눈빛을 한 일행들의 신형이 신전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 * *

그그그긋!

정확히 마법진의 정중앙에 박히는 아그드바르로부터 생겨난 하나의 금이 순식간에 마법진의 끝까지 뻗어 나간다.

곧이어.

쩌어어어억!

금을 중심으로 갈라진 마법진 안에서 나타나는 거대한 눈동자.

그러한 눈동자가 피처럼 새빨간 동공을 움직여 대연무장에 모여 있는 사람들 전체를 비추는 순간이었다.

콰득, 콰득, 콰드드득!

붉게 물드는 세상과 함께 마침내 짧게는 몇 년, 길게는 수십 년간 본래의 모습을 숨기고 있던 마역의 존재들이 뒤집어쓰고 있던 인간의 거죽을 벗기 시작했다.

키아아아악!

폐부를 긁어내는 듯한 기괴한 울음소리와 함께 역겨운 마기가 대연무장 안을 가득 채운다.

곧이어.

"모조리 제거하라."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온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기다렸다는 듯 연무장을 둘러싸고 있던 전력들이 한꺼번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콰과과과광!

몰아치는 검격과 마법 술식으로 인해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해가는 경합장.

연무장을 둘러싼 무력 집단 사이에서도 소수의 마족이 모습을 드러냈지만,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주변의 단원들이 곧바로 제거한 뒤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의 가족과 동료를 죽이고 그들의 인생까지 빼앗은 악마 같은 녀석들이다. 절대로 자비를 베풀지 마라!"

스가가가각!

그리고 그렇게 거침없이 움직이는 자들과는 달리.

"이, 이게 어찌 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사전에 알지 못했던 사람들은 그 자리에 굳은 채 멍하니 그러한 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상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도 대부분 포함되어 있었다.

"디, 디에나 전하...."

디에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할레그리온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하지 못했다고 하는 게 맞았다.

눈앞에서 일어난 충격적인 광경이 그녀의 의식 전체를 사로잡은 채 놓아주지 않고 있었으니까.

"이게 대체...."

지옥.

이것은 지옥이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동료였던 사람들이 마물로 변하고 그러한 마물들을 다른 동료들이 죽이고 있었다.

피와 살이 튀며 인간과 마물의 울부짖음이 뒤섞인다.

과거 일어났던 1차 대전쟁이 이러했을까.

적어도 그 시작은 이와 같았을 거라고 5황녀는 생각했다.

"이 정도였을 줄은...."

그래, 솔직히 디에나 또한 시온의 말이 전부 거짓일 거라고는 여기지 않았었다.

지금까지 그녀가 보았던 시온은 항상 치밀하고 철저했으니까.

하지만 그래 봤자 수십 정도나 숨어 있을 거라고 예상했건만....

눈앞의 광경은 그런 디에나의 예상을 아득하게 뛰어넘고 있었다.

'설마 정말로...!'

꽈득!

머릿속으로 군주 회의 때 시온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그녀가 주먹을 강하게 움켜쥘 때.

"크아아아!"

상석에 앉아 있던 사람 중 몇몇이 괴성과 함께 마족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제국 전체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막대한 권력을 가진 인물들인 만큼 강대한 힘을 가진 마족들이 변장할 수밖에 없었고 그만큼 오래 버티다가 모습을 드러낸 것.

물론 그래 봤자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빛이여, 저에게 이 악들을 처단할 힘을 주소서."

"정말이지 쥐새끼처럼 어디에든 숨어 있구나."

콰지지직!

기다렸다는 듯 움직인 1황자와 아켄델트에 의해 모조리 처단당하기 시작했으니까.

한편.

'원래 저랬었나?'

그런 대연무장의 한가운데 서 있는 시온은 하늘에서 붉은빛을 흩뿌리고 있는 거대한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온이 기억하기로 분명 연대기에서 묘사된 색적진의 모습은 저렇지 않았었다.

아무래도 개량되며 형태 또한 바뀐 것 같았다.

'혈탑 쪽 취향인 것 같은데.'

효과가 이토록 좋으니 취향 정도야 존중해 주는 게 맞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시온은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는 마물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번 일로 인해 드러난 마물들의 숫자는 그동안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고 그 수준 또한 가장 높았지만, 그들은 제대로 된 반항조차 하지 못한 채 학살당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이 벌레 같은 인간 놈들이... 끄아악!"

콰드드득!

그만큼 시온의 준비 또한 엄청나기 그지없었으니까.

여섯 곳의 최상위 무력 집단과 세 명의 '하늘'급 실력자.

그야말로 제국의 핵심 전력이 이곳에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걸로 황성과 수도에 있는 마물 중 절반 정도는 지울 수 있겠지.'

대연무장의 한쪽에서 마족들을 상대로 착실히 경험치를 쌓고 있는 셀피아를 힐끗 바라보며 시온은 생각했다.

본격적으로 전쟁을 준비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시온은 수도에 있는 모든 마물을 최대한 빠르게 도려낼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남은 절반의 마물들을 어떻게 사냥할지까지 이미 머릿속으로 계획을 전부 세워 놓은 상태였다.

그때.

"시온 아그네스으으으! 이 저주받을 아그네스의 핏줄이!!"

악에 받친 외침과 함께 근처에 있던 몇몇 마족이 시온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하나하나가 과거 하노스랄과 비슷하거나 바로 밑일 정도로 엄청난 수준의 마족들.

하지만 그들은 시온의 앞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그그그긋!

시온을 향해 쏘아지는 마족들의 전신에 그어지는 무수한 실선.

곧이어 그러한 실선들로부터 찬란한 별빛이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가 싶더니.

쩌저저저적!

수십 조각으로 갈라진 마족들의 시체가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시온."

그와 함께.

"지금, 이 광경이... 정말로 우리가 모르고 있던 제국의 진실이라는 말이더냐?"

그 광경을 만들어낸 장본인인 이벨린이 멍한 목소리로 시온을 향해 물었다.

심한 충격을 받은 듯 2황녀의 눈동자는 아직까지도 커다랗게 요동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런 이벨린을 가라앉은 눈으로 직시하며 입을 연 시온이 옆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콰득!

분명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허공인데도 불구하고 들려오는 파열음.

"커, 커억!"

뒤늦게 그러한 허공에서 한 명의 마족이 시온에게 목이 잡힌 채 모습을 드러내었다.

시선이 분산된 틈을 타 사각에서 은밀하게 접근하다 그대로 발각된 것.

콰지지직!

"너희가 외면하고 있던 진실이지."

망설임 없이 그런 마족의 머리를 터뜨린 시온이 이벨린을 향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그동안 정말로 아무것도...."

그에 고개를 푹 숙인 2황녀가 자괴감 어린 얼굴로 중얼거릴 때.

파아아앙!

당혹에서 벗어나 점차 전투에 합류하는 제국 측 전력에 의해 더욱 빠르게 줄어들고 있던 마족 중 하나가 자리에서 이탈하더니 대연무장의 상석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젠장, 젠장할!"

낼 수 있는 모든 힘을 오직 속도를 끌어올리는 것에 쏟아부으며 마족, 롬은 욕설을 내뱉었다.

지금 대연무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그로서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렇게 빨리 일을 벌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고 하는 게 맞았다.

'위쪽으로부터 시온 아그네스가 우리를 구별해 낼 방법을 알아냈다는 말을 전해 받은 지 겨우 3일밖에 지나지 않았건만!'

대체 언제부터 준비했던 것일까.

사실 처음에는 싸워 보려고도 해봤지만,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기습도 기습이었지만, 애초에 전력의 차이가 너무나도 압도적이었다.

백염제 아하마드 오즈리마와 검왕 루트비히 아스칼론.

아그네스 기사단의 단장인 밀레이온 제프리어와 뒤늦게 움직이기 시작한 이벨린 아그네스까지.

'세계 회의 자체가 함정이었을 줄이야!'

더불어 지금 이쪽은 머리라 할 수 있는 수도의 오마령까지 모조리 제거되어 구심점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롬 자신을 비롯한 몇몇 마족이 그 자리를 대체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고.

그런 상황에서 이런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으니 제대로 전투를 치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급한 대로 주변에 있던 다른 인간들을 인질로 삼아 시간을 벌려 했지만, 소용은 없었다.

시온 아그네스의 성정을 그대로 반영한 듯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쓸어버렸으니까.

'어서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며 롬은 자신이 향하고 있는 상석의 뒤편을 바라보았다.

실수인지 아니면 미처 커버할 수 없었던 허점인지는 몰라도 대연무장 전체를 감싼 보호막에는 약한 부분이 두 곳 정도 존재했고 그중 하나가 바로 상석의 뒤편이었다.

'상석에도 괴물 같은 인간들이 존재하긴 하지만... 중상을 각오한다면 한 번 정도는 받아내며 지나칠 수 있겠지.'

사실 중상이 아닌 죽음 직전의 상처를 입는다고 하더라도 롬은 이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쪽 약점으로 가기 위해서는 시온 아그네스를 지나쳐야 했으니까.

이 모든 일을 벌인 장본인이자 단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괴물 중의 괴물.

그쪽으로 향한다면 확실히 죽는다고 그의 직감이 속삭이고 있었다.

그와 함께 질린 얼굴로 시온 쪽을 한 번 힐끔거린 롬은 다시 고개를 돌려 어느새 가까워진 상석을 바라보았다.

'일단 맨 앞의 5황녀부터 빠르게 제친다.'

키이이잉!

그 생각과 함께 마족의 오른손으로 몰려드는 무지막지한 마기.

"아...!"

그런 롬을 인지한 디에나의 눈에 당황이 어렸다.

원래대로라면 지금 바로 앞까지 다가온 마족 정도는 홀로 처리할 수 있었지만, 그녀는 아직까지도 시온이 벌인 일에 대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그렇기에 인지는 물론이고 제때 반응할 수 없었다.

뒤늦게 천성해와 정령 술식을 발동했지만, 이미 검붉은 마기로 범벅된 마족의 손은 그녀의 눈앞까지 뻗어지고 있었다.

'늦었...!

그에 디에나의 얼굴에 다급함과 절망이 한꺼번에 어리는 순간이었다.

쩍!

그런 그녀를 향해 괴성을 내지르던 마족의 입.

그런 입의 뒤쪽을 뚫고 하나의 검이 튀어나왔다.

"커, 커억!"

마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빛을 빨아들일 것처럼 새카맣기 그지없는 검신을 가진 검.

푸화학!

곧이어 그로부터 터져 나온 마족의 피가 디에나의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그와 함께 천천히 쓰러지는 마족의 뒤편에서 그러한 묵빛의 검을 쥔 한 명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검과 같은 색깔의 검은 제복, 그리고 그와 대비되는 새하얀 얼굴에 시린 웃음을 띤 채 멍한 표정의 그녀를 바라보는 사내.

곧이어 사내, 시온의 입에서.

"이 정도면 증명이 되었나?"

그 웃음과도 같은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소설 속 막내황자가 되었다 207화

52장 내부 정리(1)

그런 시온의 물음에 디에나가 반박하지 못한 채 힘없이 고개를 숙인 직후.

대연무장에서 일어난 아비규환과도 같은 전투는 빠르게 정리되었다.

"어찌 마의 존재들이! 제국의 황성 한복판에 버젓이 존재한단 말이더냐!"

기존에 움직이던 시온 휘하의 전력과 더불어 정신을 차린 다른 사람들 또한 전투에 합류했고, 그들은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것을 만회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미친 듯이 움직이며 마족들을 학살했다.

사실 그들이 합류하지 않아도 애초부터 마역 측은 이길 수 없었다.

시온은 치밀했고 그렇기에 모든 변수를 고려한 뒤 그 이상의 전력을 쏟아부은 상태였으니까.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 마법 돔의 약한 부분을 뚫고 도주... 커어억!"

콰드드득!

처음부터 보호막에 약한 부분을 만들어 놓은 것 또한 일부러 그쪽으로 마족들을 몰아넣어 한꺼번에 정리하려는 시온의 계획이었다.

그렇게 전투는 뒤집히지 않은 채 끝이 났지만.

그 이후로 아그네스 제국은 완전히 뒤집혔다.

세계 경합에 참석했던 수만 명의 사람으로 인해 대연무장에서 일어났던 일은 순식간에 수도를 넘어 제국 전체로 퍼졌고 그 일에 대해 전해 들은 제국민은 충격에 빠졌다.

"...정말 그게 사실이라고?"

"어떻게 이런 일이!"

백 년이란 시간 동안 아그네스란 이름 아래 유지되면 제국의 평화가 흔들리고 있었으니까.

아니, 이 정도면 아예 무너져 내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만큼 세계 경합에서 정체를 드러낸 마족들의 숫자는 사람들의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고 있었다.

그중에는 아그네스 대회의에 참여할 정도의 최상층 귀족들 또한 많이 포함되어 있었기에 혼란은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설마 우리 주변에도...."

의심 또한 들불처럼 퍼져나갔다.

어디에나 마족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지한 사람들은 동료, 그리고 가족들마저 경계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제국 전체가 팽팽한 긴장감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경합 후 이어지는 세계 회의의 절차가 거의 흐지부지된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다.

"이제부터 가문 내의 사람 중 신원이 조금이라도 불분명하거나 갑자기 성향이 바뀐 자들을 모조리 조사하라."

세계 회의가 종료되자마자 황성에 모인 수장들은 각자의 황급하게 가문으로 돌아가 정비를 시작했고 외경 삼세의 지도자들도 복귀를 서둘렀다.

제국의 수도, 그중에서도 중심이라 할 수 있는 황성에 이만큼의 마족들이 존재한다면 자신들의 본거지에도 있다는 소리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렇게 제국 전체가 의심과 혼란으로 물들어가는 와중에도,

"...전쟁을 선포했다더군. 정확히 말하자면 준비이긴 하지만."

세계 경합에서 시온이 한 마역과의 전쟁 준비 선언은 연일 화제가 되고 있었다.

물론 황제도 아닌 일개 황족의 선언에 불과했기에 어찌 보면 실효성이 없다고 볼 수도 있었지만, 그 황족이 시온 아그네스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무려 다음 대 황위에 가장 가까운 존재였으니까.

더불어 이 상황을 대비하고 역으로 마족들을 섬멸하기까지 했으니 시온에 대한 지지 또한 하늘을 찌를 정도로 높아진 것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커다란 사건 하나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으니 그러한 관심을 즐기며 잠시 휴식을 취해도 되련만, 오히려 시온은 경합 이후 더욱 신속하게 움직이며 수도에 있는 나머지 마족들을 솎아내기 시작했다.

'녀석들이 이 일에 대해 인지하고 대응하기 전에 모조리 제거한다.'

미리 전부 파악해놓기라도 한 것일까?

연대기의 지식과 최상위 정보 조직 두 곳을 이용한 시온의 움직임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고 그에 숨어 있던 마물들은 속수무책으로 궤멸되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내부 정리는 전쟁 준비에 있어 필수 조건이나 다름없었고, 그렇기에 가장 신경 써야 하는 요소 중 하나였다.

그렇게 바쁘게 움직이는 시온을 5황녀가 찾아온 건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았을 때였다.

"...아직도 여기서 지내나요? 이제 더 커다란 궁으로 옮겨도 될 텐데요."

응접실에서 프레도가 내온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켠 뒤 입을 여는 디에나의 눈 밑은 무척이나 퀭했다.

아마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수많은 생각과 고민에 밤잠을 이루지 못한 것이리라.

'내가 이곳에 방문하게 될 줄이야.'

그 생각과 함께 디에나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어렸다.

불과 올해 초까지만 하더라도 자신의 집무실에서 시온을 맞이했던 그녀였다.

반대로 되어버린 지금의 상황이 현재의 처지를 보여주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이곳이 마음에 들어서 말이지."

그 물음에 짧게 대답한 시온이 디에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용건이 무엇이냐는 무언의 질문이었다.

잠시 흔들리는 눈으로 시온을 바라보던 5황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먼저 군주 회의와 세계 경합에서 했던 말들. 그 말들에 정말로 한 치의 과장이나 거짓이 섞여 있지 않은지 묻고 싶어요."

"어리석은 건가? 아니면 억지로 눈을 가리고 부정하는 건가?"

그에 시온의 입에서 신랄하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지금 뭐라고...!"

"경합 때 전부 보았으면서도 그런 질문을 하는 게 신기해서 말이야."

"...."

디에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으니까.

사실 그녀는 이미 자신이 한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물은 것은 그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자신의 마음에 확신을 심어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후...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그 중얼거림과 함께 생각을 정리하듯 눈을 한 번 감았다 뜬 디에나가 다시 시온을 향해 입을 열었다.

"증명에 대한 대가로 요구하는 게 무엇이죠?"

그녀가 오늘 시온을 찾아온 이유였다.

저번의 군주 회의 때 시온의 증명을 걸고 둘은 내기를 했고 거기에서 졌으니 이제 대가를 치러야 할 차례였다.

"내가 황위를 포기하기를 원하나요?"

"아니, 다른 걸 요구하지. 그것은 나에게 별로 가치가 없거든."

그 말에 디에나가 자신의 입술을 깨물었다.

무척이나 모욕적인 말이었지만, 동시에 사실이기도 했다.

지금 눈앞에 있는 그녀의 막냇동생은 마음만 먹는다면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황위에 오를 수 있을지도 몰랐으니까.

애초에 경쟁 상대가 아니라는 말.

"그럼 대체 무엇을...."

뒤이어 흘러나온 시온의 대답은 디에나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내가 요정림에 방문하게 되었을 때 '금지'에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 놔."

"예? 요정림의 금지라면 '세계수의 요람'을 말하는 건가요?"

세계수의 요람.

오직 세계수에게 선택받은 '잎사귀'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요정림 최심층부의 금지로서 선택받지 못한다면 황제조차 출입할 수 없는 곳이었다.

"대체 거길 왜...."

그 이상한 요구에 의문으로 물드는 5황녀의 눈동자.

'세계수의 요람'은 요정들에게는 무척이나 중요한 장소였지만, 시온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곳이었다.

들어가봤자 인간인 시온이 얻을 수 있는 이득 또한 전혀 없었고.

그렇기에 도무지 그 의도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모르는 이유가 시온에게는 있었다.

'분명 아직 그곳에 있겠지.'

세계수의 요람 안에는 예전 영겁제였을 시절 시온 자신이 남겨 놓은 한 가지 물건이 존재했으니까.

'그것을 얻고 7성에 오른 후, 요정림도 같이 손안에 넣는다.'

그렇게 생각하는 시온의 눈이 서서히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 * *

"언젠가 그 미친 새끼가 사고를 칠 줄은 알았는데... 이렇게 크게 칠 줄이야. 그것도 하필 이 시기에!"

마역 심층부의 심연에서 광란의 대공 아크리모시아가 잔뜩 짜증 섞인 목소리로 앞에 앉아 있는 낮은 목소리를 향해 분통을 터뜨렸다.

물론 그녀가 말하는 미친 새끼는 질투의 대공 젤리스를 일컫는 말이었다.

"진정해라. 흥분해 봤자 달라질 것은 없으니."

광란이라 불리는 아크리모시아가 다른 존재를 미친 새끼라고 일컫는 신기한 광경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든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전쟁을 끝내야 해. 후... 이제 곧 대전쟁이 열릴 판에 이런 고민이나 해야 하다니."

"다시 질투를 이쪽으로 끌어들일 수는 없나?"

"불가능한 거 알면서 왜 그래? 너도 알고 있었잖아. 그 새끼 원래부터 기회만 엿보고 있었던 거. 아마 틈만 보인다면 왕까지 제쳐버리려고 할걸?"

낮은 목소리의 말에 광란의 대공이 코웃음 쳤다.

항상 만족하지 못하고 모든 것에 질투를 느끼는 게 젤리스의 천성이었다.

그런 녀석이 순순히 이쪽으로 돌아올 리가 만무했다.

"잘라낼 싹은 미련을 갖지 않는 게 좋아. 이렇게 된 이상 우리 둘이 한꺼번에 나서서 최대한 빠르게 조져버리는 게 나아."

"...정말 그것밖에 방법이 없는 건가."

아크리모시아의 말에 낮은 목소리가 아쉬움이 깃든 목소리로 중얼거릴 때였다.

"크, 큰일입니다!"

"뭔데 또!"

요즘 들어 부쩍 방문이 잦아지는 수하 마족을 향해 아크리모시아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젤리스가 직접 움직이기라도 한 건가?"

"아, 아닙니다. 그쪽이 아니라 제국 쪽입니다."

"제국 쪽? 무슨 일인데?"

"수도에 있던 오마령 휘하 마족 대부분이 제거되었습니다."

두 대공의 눈동자가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