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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201화

마인, 반 (3)

진현우는 어떤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온몸은 만신창이에 얼굴은 완전히 짓무른 남자였다. 어떻게 살아 있는가 의구심이 들 정도로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는 남자.

그가 진현우를 보더니 씨익 웃었다.

- 푸욱!

남자의 칼날이 자신의 심장을 찔렀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피가 마법진에 스며들었다. 그러자 불길하게 빛나는 마법진이 도로의 타일을 타고 흘렀고, 곧 사방으로 퍼졌다.

'시선을 끌어라.'

남자가 입 모양으로 말했다.

그걸 본 순간 진현우는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깨달았다. 그는 반을 향해 부서진 검을 투척하면서, 놈을 향해 돌진했다.

순식간에 좁혀지는 거리.

- 촤르르륵!

- 네 동료들은 모두 도망쳤군. 혼자라도 남아서 시간을 끌어 보겠다는 건가?

반을 향해 쏘아지는 검이 수많은 환검으로 분열해 반을 사방에서 덮쳤다.

하지만 무의미하다. 반은 순식간에 안개로 변했고, 검이 안개를 스치고 지나갔다.

안개 일부가 뭉치더니 수많은 핏빛 칼날이 되어 사방에서 진현우를 덮쳤다.

- 여기서 도망치지는 못할 것이다.

"도망칠 생각도 없어."

다가오던 검들이 폭발하면서 핏물이 비산했다. 진현우는 피해를 감수하면서 거리를 바짝 좁혔고, 땅을 짓밟으면서 주먹을 내질렀다.

핏물에 닿은 살이 녹아내렸다.

- 콰아아앙!

성멸권이 허공을 강타했다.

신성이 담긴 성멸의 기운이 일직선으로 쏘아졌다. 반은 저 공격은 안개로 무시할 수 없는 공격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 공격이 닿기 직전, 반의 안개가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최대한 공격을 회피했다.

'이 신성은... 정말로 귀찮군.'

반이 인상을 찌푸렸다.

강대한 존재인 마인에게 그나마 약점이 있다고 한다면 신성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악한 힘에 대항하는 힘. 마인에게 유의미한 피해를 입힐 수 있는 대표적인 힘이다.

'하지만, 이 정도의 신성력이라니.'

하나 그것도 일반 마인의 이야기.

반 정도 되는 마인이라면 신성력을 무시할 수 있다. 그 정도의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 신성력은 달랐다.

'직격당하면 나라도 큰 피해를 입을 터.'

진현우의 신성력은 그러했다.

성멸권이 안개를 지워 냈다. 그 안에 담긴 신성력이 안개화한 반에게 타격을 입혔다.

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 스으으으!

하지만 그것도 잠깐일 뿐. 도시 전체로 흩어진 안개와 박쥐를 이용하면 금방 회복할 수 있을 정도로 사소한 피해에 불과하다.

반면 저 인간은 어떠한가.

'결국 인간의 몸. 이 정도의 힘을 아무런 리스크도 없이 무한히 다룰 수 있을 리가 없다.'

반의 판단은 적중했다.

계속해서 신성을 사용한 진현우는 눈에 띄게 지친 상태였다. 신성을 쓸 때마다 내면에 있는 잔이 비어 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잔에 든 물, 신성이 얼마 남지 않았다.

'시간을 끌면 내가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

주변 일대로 퍼진 안개와 박쥐가 카오틱들의 피를 무자비하게 흡혈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몸에 남은, 곧 모일 피를 집중해서 진현우에게 큰 피해를 입힐 수를 준비했다.

'남자'가 움직인 것도 그때였다.

"저들의 피를...."

지금 진현우와 반이 있는 구역.

그 일대로 퍼진 마법진이 빛을 발했고, 마법진을 구성하던 핏물이 증발하기 시작했다.

카오틱들이 핏빛 기체를 흡입했다.

"...중독시켜라."

남자는 온몸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렇게 녹아내린 몸은 핏물로 변했다. 그렇게 변한 핏물은 기체가 되어 카오틱들에게 흡수됐다.

"욱, 우욱?!"

"크허억!"

평범한 기체가 아니었다.

남자, 딜란은 자신의 심장을 찌르기 직전에 온갖 종류의 맹독을 스스로 복용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제물로 바침으로써 주변의 카오틱들을 자신과 같은 상태로 만들었다.

"우웨에에엑!"

기체에 잠식당한 카오틱들이 피를 토하며 괴로워했다. 그리고 피 냄새를 맡은 박쥐와 안개들이 홀린 듯이 몰려들었다.

온갖 극독에 중독된 피지만, 그 냄새가 박쥐와 안개에게는 매혹적으로 느껴졌다.

- 스으으으!

진현우와의 전투에만 집중하고 있던 반은 이상함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몸을 타고 들어오는 피.

반은 소모되었던 힘이 회복되는 것을 느끼면서, 지쳐 가는 진현우를 비웃었다.

- 두근!

바로 그때였다.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안개와 박쥐가 가져온 피가 반에게 흡수된 순간의 일이었다.

온몸이 불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 끄으, 으으윽!?

반은 익숙한 기척을 느꼈다.

진현우와의 전투 때문에 놓치고 있었던, 그가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기척의 존재를.

그의 시선이 기척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 딜, 란...!

스스로 심장을 찌른 남자가 있는 곳으로.

온몸이 핏물로 변하고 있는 남자. 아직 남아 있는 얼굴이 그를 비웃고 있었다.

"널 위해, 준비한... 마법이다."

- 뭐라고...!

남자, 딜란이 피를 토하며 말했다.

오래전에 준비했던 마법이었다. 세력 다툼이 있을 때, 반을 죽이기 위해 준비했던 것.

하지만 예상치 못한 기습에 당하면서 저주를 쓸 일도 없이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날, 죽이라고, 말했었지."

반은 딜란과 그의 동료들을 살려 뒀다.

이유는 크게 둘이었다. 하나는 강한 카오틱이었던 그들이 가진 힘을 흡수하기 위해서.

놈은 상대의 피를 오랫동안 흡혈하면서 대상이 가진 힘을 흡수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리고 또 하나.

- 네놈들은 공포의 상징이 될 것이다. 내게 거스르는 자들이 어떻게 되는지, 이 도시의 주민들에게 보여 줄 좋은 상징 말이지.

딜란과 그의 동료들은 상징이었다.

반은 그들을 장난감처럼 다루면서, 카오틱과 마인들의 저항심을 꺾는 용도로 썼다.

대항하면 너희도 이렇게 될 거라면서.

"진작에 죽였어야지...!"

딜란의 밑에 마법진이 전개됐다.

그보다 먼저 움직인 마인들이 딜란을 죽이려고 했지만, 무의미한 짓이었다. 완전히 녹아내린 몸뚱어리가 마법진에 스며들었다.

"네가 먹은 피가 널 죽일 것이다!"

반의 체내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딜란이 복용한 독들 때문에 오염된 피를 흡수한 것. 그 피가 딜란의 마법에 반응했다.

독들이 급속도로 활성화됐다.

- 컥, 크헉, 그르르륵?!

반은 마인이다.

그것도 손에 꼽을 정도로 강한 마인. 어지간한 독 따위는 통하지도 않는다.

외적인 수단으로 독에 중독시킨다고 한들, 반에게는 큰 효과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독을 자기가 직접 흡혈한다면?'

극독에 중독된 카오틱들의 피를 한 번에, 박쥐와 안개를 통해서 흡혈한다면?

그 피가 자신의 몸을 타고 흐른다면?

반은 독에 강한 내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 진현우처럼 만독불침 수준은 아니다.

'짧은 순간이나마 독이 통할 수밖에 없다.'

사방을 뒤덮고 있던 안개도 불안하게 요동쳤다. 안개의 색깔도 요란스럽게 바뀌었다. 붉은색에서 보라색 그리고 짙은 초록색으로.

- 크아아아악!

반의 두 눈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놈은 거친 숨을 토해 내면서 상황을 파악했다.

'마인조차도 감당할 수 없는 독이라니!'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

반은 안개로 변해서 도망치려고 했다. 어차피 적 플레이어들은 다 물러난 상황.

더 이상의 파괴 활동은 없다. 진현우를 못 죽이는 건 아쉽지만, 그것만 포기하면.

- 으윽?!

그런데 안 됐다.

반은 안개로 변해서 물러나려고 했지만 불가능했다. 몸이 몇 번 흉측하게 꿈틀거렸으나 안개로 변하는 일은 없었다.

놈의 몸을 타고 흐르는 독 때문이었다.

독이 그의 스킬을 방해하고 있었다.

- 딜, 란....

딜란의 몸은 녹아서 사라지고 없었다.

남은 것은 영혼뿐. 하지만 그 영혼마저도 마법진에서 튀어나온 손이 끌고 사라졌다.

영혼이 반을 비웃었다.

- 기다리고 있겠다....

- 크아아아악!

사라지는 영혼.

반은 이를 까드득 악물며 분노를 드러냈다.

- 버러지 같은, 딜란! 패배자가!

오랫동안 감옥에서 고문당하고 힘을 뺏긴 딜란에게 남은 것은 없다시피 했다.

유일하게 남은 것은 그 몸과 영혼뿐.

두 개를 제물로 바쳐서 반에게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는 마법을 준비한 것이었다.

'안개화가...!'

독이 반의 힘을 방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그가 흡혈한 피에 담긴 독은 어디까지나 그의 힘을 방해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그를 죽일 수준에는 못 미친다는 것이다.

'도망치면, 어떻게든!'

잠깐의 시간만 버티면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 푸우욱!

- 크아아아악!

맞은편에 있는 진현우가 그가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을 줄 리가 없었으니까.

쏘아지는 화살이 반을 꿰뚫었다.

진현우는 실피르를 아공간에 집어넣으면서 곧바로 과부하 스킬을 사용했다.

- 두근!

심장이 크게 뛰었다.

잠시 후 온몸이 뜨거워졌다. 과부화된 신체에서 한계를 넘어선 힘이 느껴졌다.

진현우는 그 힘을 참지 않았다.

- ...!

진현우가 땅을 박찼다.

말 그대로 찰나의 순간,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진현우가 반의 코앞까지 도달했다.

경악으로 물든 얼굴, 그 미간에 주먹이 꽂혔다. 신성력이 그 얼굴을 짓뭉갰다.

- 크하악!

"펜리스!"

거센 눈보라가 불었다.

눈보라는 순식간에 뭉치면서 여러 겹의 벽이 되어 진현우와 반 주변을 에워쌌다.

다가오는 마인들을 막기 위함이었다.

- 크륵, 끄으으...!

그와 함께 쏘아지는 수많은 얼음의 창이 반을 노렸다. 반은 필사적으로 피의 장막을 일으켜서 다가오던 창들을 막아 냈다.

그리고 장막을 폭발시켰다.

- 퍼어어엉!

장막이 터지면서 강한 산성을 띠고 있는 핏물이 진현우를 향해서 쏘아졌다.

그는 핏물이 다가오는 걸 주시했다.

그리고 그게 그를 덮치려는 순간, 땅을 짓밟으면서 공간을 도약했다.

- ...!

순식간에 반의 앞까지 도달한 진현우.

그는 다시금 땅을 짓밟아 파멸을 일으키면서 손아귀에 사슬을 만들어 냈다.

쇠약의 사슬이 반을 휘감았다.

- 촤르륵!

반을 휘감은 쇠약의 사슬이 주변으로 퍼졌고, 그를 구하려던 마인들의 발목을 묶었다.

놈들의 움직임이 잠깐이나마 느려졌다.

'지금.'

진현우의 등 뒤에서 그림자가 솟구쳤다.

셰이드가 반의 사지를 묶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진현우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의 검이 신성을 머금었다.

- 우, 욱...!

반이 손톱을 교차시켜 검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무의미한 발악이었다. 검은 그의 날카로운 손톱을 너무도 간단히 꿰뚫어 버렸다.

그리고.

- 푸욱!

검이 심장을 꿰뚫었다. 진현우는 검을 쥔 손에 힘을 실어 반을 땅바닥에 내리꽂았다.

경악한 눈동자가 그를 직시했다.

진현우는 주먹을 크게 젖혔다.

- 안...!

마지막으로 남은 신성을 쥐어짜 냈다.

강렬한 신성을 휘감은 성멸권이 반을 강타했다. 신성한 기운이 난폭하게 퍼지면서 반의 몸을 하나도 남김없이 갈기갈기 찢었다.

- 크아아아악!

남은 것은 살점 파편뿐.

진현우는 검기를 일으켜서 남은 살점들까지 모조리 처리했다. 이 정도 파편으로도 재생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었다.

"...."

- ....

그걸로 끝이었다.

반의 죽음을 목도한 마인과 카오틱들은 충격에 빠졌고, 진현우는 그 기회를 이용했다.

섬광과도 같은 광휘가 사방을 뒤덮었다.

- 파아앗!

사방을 뒤덮는 빛.

그 틈을 이용해 탈출한 진현우는 도시 바깥으로 탈출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카오틱과 마인들이 그를 막으려고 했으나 이미 늦었다.

"안 돼!"

"바깥으로 추적, 큭, 제길!"

"밖에 적이 얼마나 있을 줄 알고! 정 죽고 싶으면 너 혼자 나가서 죽어!"

바깥에 플레이어들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니 감히 추적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모두가 반의 사체를, 정확히는 사체가 있었던 곳을 허망한 눈동자로 바라봤다.

"대체...."

도시는 사방이 불타고 있다.

정확히 핵심 시설만 정확히 타격했기에 도시가 입은 피해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

그걸 추스를 시장조차 죽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

짧은 시간에 너무도 많은 일이 일어났다.

도시에 남은 카오틱들은 플레이어들의 공격이 이걸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202화

도시 공략 (1)

-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 강대한 마인을 죽였습니다. 마핵이 대상이 가졌던 강력한 마기를 흡수했습니다.

- 마기 능력치가 특정 수치를 돌파한 보상이 주어집니다. 직접 확인해 보십시오.

반을 죽인 진현우는 도시를 떠났다.

그리고 놈들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서 성벽 아래에 몸을 숨겼고, 바로 은신을 사용했다.

그런 그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 인간! 기다리고 있었다.

"어. 할 일은 다 했고?"

- 시킨 일은 다 했느니라! 탈옥한 놈들이 정신을 못 차리게끔 만들어 줬지.

미호였다.

진현우는 미호를 어깨에 얹은 채, 성벽 주변을 돌아다니며 바닥에 뭔가를 설치했다.

그것도 땅속 깊숙이.

- 근데 인간, 뭘 하고 있는 것이냐? 갑자기 흙 놀이라도 하고 싶어진 것이냐?

"내가 애냐?"

- 내 기준으로 보기에는 그렇느니라.

반박할 말도 없었다.

진현우는 한숨을 쉬며 손바닥을 보여 줬다. 손아귀에 주먹만 한 보석이 쥐여 있었다.

"마법이 담긴 보석이야. 설치해 놓으면 다음에 다시 올 때 도움이 되겠지."

- 흠, 그렇군.

필요한 장소에 보석을 설치한 진현우는 혼란한 틈을 타서 도시를 완전히 떠났다.

포탈이 있는 곳에 도착하자, 거기서 기다리고 있던 이들이 그를 반겼다.

"현우야!"

"왔나."

샬럿과 임호석, 다른 플레이어들이었다.

감옥에 갇혔던 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구출한 플레이어들은?"

"먼저 포탈 밖으로 내보냈어. 넌 괜찮아?"

"이 정도면 뭐, 멀쩡한 편이지."

반, 최초의 마인.

강력한 괴물이지만 꽤 쉽게 잡았다. 그 딜란이라는 남자의 도움 덕분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죽이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마 도망쳤겠지.'

반이 작정하고 도망쳤다면 추적하는 건 힘들다. 그게 가능하게끔 해 주는 능력인 안개화가 잠깐이나마 봉인됐기에 가능했던 것.

여러모로 운이 따라 줬다.

'이 운을 완전히 활용해야지.'

진현우는 타락한 자들의 도시를 봤다.

그와 플레이어들의 기습으로 혼란에 빠진 도시. 저 혼란은 쉽게 수습되지 않을 것이다.

그걸 이용해야 한다.

"가자. 할 일이 많다."

"응."

진현우는 주변에 남은 흔적들을 완전히 지운 후, 포탈을 이용해서 귀환했다.

* * *

플레이어 협회는 큰 혼란에 빠졌다.

최근에 일어났던 대침공 때문이 아니었다. 예상치 못한 일로 혼란에 빠진 상태였다.

"아니, 이게 무슨...."

"대체 몇 명이야?"

수많은 플레이어가 협회에 도착했다.

플레이어들이 협회에 오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 플레이어들이 하나같이 큰 부상을 입은 상태만 아니었더라면.

"이, 이게 아니지. 아무나! 구조대원 불러!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은 다 부르라고!"

"포션! 포션 가져오겠습니다!"

"있는 거 다 가져와!"

협회의 직원들은 황급히 인력과 비상 물품을 동원하여 플레이어들을 치료했다.

마침 협회에 있던 사제들도 그러했다.

"저희도 돕겠습니다."

"근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이 정도 규모의 플레이어들이 대체 어디서...."

"게이트라도 갔다 온 겁니까?"

"아뇨."

그 말에 한 여성이 대답했다.

그녀의 얼굴을 본 사제들이 놀랐다. 사제라면 모를 수가 없는 여성이었기 때문이었다.

성녀, 샬럿. 그녀가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저희가 구조해 온 거예요. 카오틱들의 본거지에 갇혀 있던 플레이어들을요."

"예? 구조해 왔다는 건...."

사제들이 경악했다.

그 말이 뭘 뜻하는 건지 알아서였다.

"이, 이 인원이 모두... 카오틱들의 본거지에 갇혔다가 구조됐다는 겁니까?"

"그게 가능한 층이 있다고요?"

"자세한 건 금방 알게 될 거예요. 우선 치료를 도와주세요. 제가 간단하게 처치는 했지만, 상처가 깊은 분들이 많아서요."

협회에 있던 사제들이 샬럿의 근처로 모였고, 모두 협력해서 사람들을 치료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의구심은 아직 풀리지 않았다. 도대체 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

그 의구심도 금방 풀렸다.

"그, 그러니까."

"여기 있는 사람들이 모두... 납치돼서 카오틱들의 노예로 있다가 구출된 거라고요?"

"구출하신 분들 말씀으로는 그렇습니다."

급하게 상황을 파악한 협회의 직원들이 상황을 설명했다. 저들은 카오틱들의 도시로 납치됐고, 오랫동안 노예 생활을 해 왔다고.

그 노예 생활이 얼마나 가혹했는지는 구출된 사람들의 상태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맞아, 저 사람. 옛날에 본 적 있어. 2층에서 유망주라고 유명했던 사람이잖아."

"그러고 보니 저 사람도...."

"탑에서 죽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카오틱들한테 납치된 거였다고?"

납치됐던 플레이어들이 카오틱들의 도시로 끌려갔고, 오랫동안 노예 생활을 했다.

이 사실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

"혀, 형.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으, 으어어...."

"형! 뭐라고 말 좀 해 봐!"

한때는 촉망받던 유망주였던 플레이어 하나는 두 팔을 잃고 그 충격으로 백치가 됐다.

어떤 이는 눈을 잃었고, 누군가는 실험 대상이 된 탓에 몸 내부가 엉망이 됐다.

그런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이게... 카오틱 놈들이 한 짓입니까?"

"예."

그걸 본 이들이 치를 떨었다.

잔인해도 너무 잔인하다. 그리고 동시에 뭐라 형언하기 힘든 강한 위협감도 들었다.

'저놈들을 이대로 둬서는 안 된다.'

'언제 저런 일이 또 일어날지 모른다. 저 카오틱 놈들을 죄다 없애 버리지 않는 한은....'

그런 복잡한 감정들이 플레이어들에게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리게끔 만들었다.

'카오틱들을 어떻게든 처리해야 한다.'

그럴 기회만 된다면.

그 광경을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다.

협회의 상층부에 진현우를 비롯한 몇몇 길드장과 협회의 수뇌부가 모여 있었다.

"타락한 자들의 도시라...."

가장 상석에 있는 것은 노년의 남성이었다.

새하얗게 센 머리, 주름 가득한 얼굴이 그의 나이를 짐작하게끔 했다. 그는 극심한 두통을 느끼면서 손가락으로 미간을 눌렀다.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소. 탑 내부에 카오틱들만을 위한 장소가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 정도 규모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네."

노인의 이름은 박종호.

플레이어 협회를 이끄는 협회장이었다. 초대 협회장이 게이트 공략 도중에 목숨을 잃으면서 그 자리를 잇게 된 2대 협회장.

'좀 우유부단한 편이지.'

박종호 역시 플레이어였지만, 플레이어로서의 실력 때문에 협회장이 된 건 아니었다.

정치인으로서의 경력 덕분이었지.

"그 도시가 옛날부터 있었던 거라면 정말 많은 플레이어가 납치됐겠군. 많은 이가 죽었을 테고, 또 많은 이가 변절했을 테지."

"그럴 겁니다."

박종호가 길게 숨을 내뱉었다.

그는 방에 있는 플레이어들을 돌아봤다. 진현우와 임호석, 윤서희와 화련까지.

플레이어 최상위권의 랭커들이다.

"왜 우리에게 알리지 않았나?"

"이유는 잘 아시지 않습니까?"

"...."

박종호는 두통이 심해짐을 느꼈다.

"내통자들 때문이었겠군."

"예, 맞습니다. 플레이어 사회 내부에는 내통자가 다수 존재하죠. 탑 저층에서 활동하는 게 힘들어서 전향했던 이들이라든가."

"지금 플레이어 사회의 큰 문제지."

여기 있는 모두가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어찌할 방법을 못 찾고 있던 문제.

'여기 있는 사람들도, 뭐....'

진현우는 주변을 곁눈질로 봤다.

박종호의 곁에는 협회의 수뇌부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저들 중에 내통자가 없을 거라고는 그 누구도 보장할 수 없다.

"그래서 믿을 수 있는 플레이어들만 모아서 극비리에 일을 진행했다는 거군."

"협회에 보고했다면 내통자를 통해서 카오틱들에게 알려졌겠죠. 기습이 실패로 돌아갈 확률이 높아질 겁니다. 그래서였습니다."

"이해하네."

사정을 들은 박종호는 혀를 내둘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한국 최상위권의 랭커들이라고는 하지만, 수가 적어도 너무 적다.

이 정도 숫자로 카오틱들의 도시에 큰 피해를 입히고 노예들을 구출하기까지 하다니.

"그럼, 우리 협회가 뭘 해 주기를 하나?"

"적들은 지금 치명적인 피해를 입은 상황입니다. 도시의 지도자인 마인도 잃었죠. 이 기회를 이용해서 놈들을 공격해야 합니다."

"음, 으으음...."

박종호가 침음성을 흘렸다.

마음 같아서야 당장 그러자고 말하고는 싶었다. 카오틱과 마인이 여태껏 플레이어들에게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혀 왔던가.

놈들에게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기회다.

'하지만 아직 피해 복구도 하지 못했다.'

문제는 얼마 전에 일어난 대침공이다.

아직 그 피해를 복구하지도 못했고, 다 복구하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르는 상황.

이 상황에서 적의 본거지를 공격하자는 제안은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었다.

"영감, 지금이 기회요.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놈들도 피해를 복구할 거야. 카오틱들의 세력을 꺾을 기회를 그냥 놓칠 거요?"

"대적자가 침묵하는 지금이 기회입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다음 기회는 없을 거예요."

임호석과 윤서희가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박종호는 미간을 감싸면서 고민하더니,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좋네. 내가 뭘 하면 되겠나?"

"협회 이름으로 이번 일을 공표해 주십시오. 그리고 복수할 플레이어들을 구한다고도."

모두의 시선이 진현우에게로 쏠렸다.

"플레이어 협회와 여기 계신 분들께서 잘 처리해 주실 거라고 믿겠습니다."

얼마 후, 협회는 여러 길드장과 함께 타락한 자들의 도시의 존재를 세간에 공표했다.

* * *

타락한 자들의 도시.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게 된 플레이어들은 크게 분노했다.

거기에 최근 카오틱과 마인들에 의한 대침공까지 당했던 상황. 플레이어들과 시민 사이에서 카오틱에 대한 반감이 절정에 이르렀다.

'파괴해야 할 곳은 다 파괴했다.'

평소의 타락한 자들의 도시라면 무슨 수를 써도 공략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설령 공략에 성공한다고 한들 어마어마한 피해를 감수해야만 했을 터.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핵심 시설이 파괴되면서 도시의 방어력이 약해진 지금이 절호의 기회....'

그리고 또 하나, 확실해진 것이 있다.

'대적자가 개입하지 못하고 있다.'

놈이 직접 만든 최초의 마인, 반이 죽어 가고 있는데도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

이전의 대침공에서 실패한 것, 거기서 진현우에게 타격을 입은 게 그만큼 컸다는 뜻.

여러모로 절호의 기회였다.

"흠...."

진현우는 책상 위의 서류를 봤다.

서류에 적힌 것은 제우스 길드, 그리고 그 길드장인 유신의 최근 동향이었다.

놈들은 탑 공략에 열중하고 있었다.

- 제우스 길드는 현재 13층에 도달. 각 층의 일부 지역을 점령하고 있는 중. 13층의 공략을 끝내고 14층의 공략에 도전 중임.

- 마인과 접촉하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음.

- 협회 측에서 타락한 자들의 도시 공략을 도와 달라는 요청을 보냈으나 답변은 없음.

아마 지금쯤이면 타락한 자들의 도시가 큰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터.

"반이 죽고, 타락한 자들의 도시까지 파괴되면 대적자 역시 큰 피해를 입게 된다."

상황이 변했다.

그 상황에서, 대적자가 유신과 제우스 길드라는 훌륭한 전력들을 가만히 놔둘까.

자신과 계약한 놈들을.

'어떤 식으로든 움직임을 보이겠군.'

이번 공략전이 아니라면 나중에, 탑을 공략하던 도중에 어떤 식으로든 움직일 터.

그걸 노려야 한다.

'슬슬 처리해야지, 이놈들도.'

진현우의 두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203화

도시 공략 (2)

깊은 밤.

진현우는 집의 마당에 앉은 채, 타락한 자들의 도시를 떠날 때 본 메시지를 떠올렸다.

-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 강대한 마인을 죽였습니다. 마핵이 대상이 가졌던 강력한 마기를 흡수했습니다.

- 마기 능력치가 특정 수치를 돌파한 보상이 주어집니다. 직접 확인해 보십시오.

마기 능력치에 대한 보상.

진현우는 상태창을 열어 봤다.

[진현우]

· 레벨: 175

· 클래스: 웨펀 마스터

· 칭호: 차원의 수호자

· 근력: 484 (+40) · 민첩: 405 (+40)

· 체력: 407 (+45) · 마력: 307 (+32)

· 마기: 300

마기 능력치가 두드러지게 오른 게 보였다.

반을 죽인 보상이었다. 그리고 마기가 300을 돌파하면서 새로운 업적을 하나 달성했다.

-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인간의 몸으로 마기 능력치가 300을 돌파할 것.

- 보상으로 과부하 스킬이 개량됩니다.

마기는 평범한 능력치가 아니다.

오직 마인만이 가질 수 있는 능력치. 진현우 역시 마핵이 생긴 덕분에 얻을 수 있었다.

이 보상도 그 특수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보상으로 칭호가 아닌 스킬을 개량해 줬다.

어떻게 개량됐는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 과부하 (S+): 신체를 과부하시켜 일정 시간 동안 한계를 초월한 힘을 낼 수 있다. 지속 시간이 끝나면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이 스킬은 숙련도가 존재하지 않는다.

* 흑뢰의 효과로 스킬이 강화되었다. 과부하를 사용하는 동안 흑뢰가 자동 발동한다.

과부하를 사용하는 동안 흑뢰가 자동으로 발동하면서 스킬을 강화해 주게끔 바뀌었다.

그 대가로 흑뢰가 사라지기는 했는데.

'손해라면 손해지만, 뭐 괜찮네.'

흑뢰는 자주 쓰는 스킬이 아니었기에 크게 상관없었다. 과부하를 쓰는 동안 자동으로 발동한다면 쉽게 쓸 수 있겠다 싶었다.

진현우는 손아귀를 내려다봤다.

- 화아악!

정신을 집중하자 손아귀에서 마기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조금 더 정신을 집중하자 내면에 깃든 신성력이 다른 손에 어렸다.

'신성력과 마기를 동시에 쓴다라.'

당연하지만 불가능한 일이다.

마인 중에서 신성력을 다루는 놈은 없다. 두 기운의 성질이 아예 상극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진현우에게는 가능했다.

'신성력이 내게 깃든 게 아니라서 그런가?'

진현우가 쓰고 있는 신성은 어디까지나 내면에 깃든 신성의 파편에서 끌어내는 것.

그에게 직접 깃든 것이 아니다.

그래서 상극인 두 기운을 동시에 다뤄도 별문제가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 활용할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이 상극의 기운을 조금 더 활용하면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진현우는 피어오르는 신성력과 마기를 바라보다가 이내 꺼트렸다.

흥미롭지만, 지금 고민할 것은 아니다.

'모레.'

카오틱들의 본거지를 친다.

* * *

사자심 길드 하우스의 지하.

그곳에 다수의 플레이어가 모여 있었다. 이 지하만이 아니라 위층에도, 그리고 그밖의 지상에도 수많은 플레이어가 모인 상태였다.

타락한 자들의 도시를 공격할 전력이었다.

"생각보다 많이 모였군."

임호석이 혀를 내둘렀다.

모인 인원이 무려 수천 명에 달했다. 타락한 자들의 도시는 레벨 제한이 없는 곳이었기에 수많은 플레이어가 참가하겠다고 나섰다.

"전력이 되는 인원은 어느 정도입니까?"

"흠, 도시에 진입할 수 있는 인원이 천 명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겠더군. 나머지 인원에게는 밖에서 지원하는 역할을 맡길 거다."

"그러는 게 낫긴 하겠네요."

타락한 자들의 도시에는 고레벨의 카오틱과 저레벨의 카오틱들이 뒤섞여 있다.

레벨이 높은 플레이어들이 먼저 진입하고, 그걸 다른 이들이 지원하는 게 나을 것이다.

"그럼...."

플레이어들이 포탈 앞에 섰다. 그중에서 진현우가 한 발 더 앞으로 나왔다.

"저희가 먼저 진입하겠습니다. 건너편에 적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해야 할 테니까."

"조심해라."

진현우는 일부 플레이어들과 함께 먼저 포탈에 진입하기로 했다. 포탈이 적들에게 발각됐을 가능성을 마냥 무시할 수는 없다.

들켰다면 반대편에서 적이 대기하고 있을 터. 놈들과 싸울 수 있는 이들이 가야 한다.

"갑시다."

포탈의 빛이 진현우와 플레이어들을 휘감았다. 사방의 풍경이 뒤바뀌었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칠흑 같은 어둠이 그를 반겼다.

빛 하나 없는 타락한 자들의 도시.

"…주변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 것 같네요."

다행히도 포탈 너머에는 아무도 없었다.

타락한 자들의 도시가 있는 층은 끔찍하게 어둡다. 기습 당일에는 도시의 동력원이 파괴되면서 불빛이 완전히 사라졌던 상황.

구조한 노예들을 포탈로 데리고 갔기에 들킬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안 들킨 모양이다.

'발자국을 지워 둔 게 도움이 됐나.'

진현우는 스크롤을 찢었다.

그러자 주변에 투명한 장막이 생기더니,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의 모습을 감췄다.

장막 안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감춰 주는 마법이 담긴 스크롤이다. 포탈 너머의 사람들이 안전하게 넘어오는 걸 도와줄 것이다.

"어디 보자."

저 너머에 도시가 보였다.

타락한 자들의 도시. 저번에 왔을 때는 어둠을 밝힐 정도로 찬란한 빛을 내뿜었었다.

지금도 빛을 내뿜는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빛이 전과 비교하면 너무도 약했다.

'성벽을 제대로 보수하지는 못한 것 같고.'

데이비드가 무너트렸던 성벽은 카오틱들이 임시로 보수해 놓은 상태였다.

보수한 상태가 몹시 부실해 보였지만, 그만큼 저쪽 성벽에 큰 방비를 해 뒀을 터.

저기로 통과하려면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

'기습 날로부터 시간이 꽤 지났지. 내부의 상황이 어떻게 변했나 확인하고 싶은데.'

- 왜 날 쳐다보는 것이냐?

진현우는 미호와 눈을 마주쳤다.

이럴 때는 이 녀석이 제일 도움이 된다. 그는 미호를 도시 내부로 보내기로 했다.

"가서 정보나 좀 캐 와라."

- 넌 도대체 날 뭐라고… 후우.

미호는 투덜거렸지만, 자신 말고는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걸 잘 알았다.

영체 상태의 미호가 도시로 향했다.

녀석은 성벽 위에 있는 카오틱들에게 접촉했고 요 며칠 동안 있었던 일들을 들었다.

- 돌아왔느니라.

"어땠어?"

미호는 카오틱들에게 들은 얘기를 진현우에게 그대로 전달해 줬다.

그걸 들은 진현우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내부 상황이 꽤 혼란스러운 모양이군."

생각보다 일이 쉬워질 수도 있다.

진현우는 포탈 너머의 사람들이 다 넘어오는 것을 기다리면서, 마창을 손에 쥐었다.

* * *

타락한 자들의 도시.

도시에 들른 이들은 환락을 즐길 수밖에 없기에 환락의 도시라고도 불리던 도시.

하지만 지금은 그 이명을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도시 전체가 침체된 상태였다.

"바, 반 님이 죽었다고?"

"빌어먹을, 빛은 왜 이렇게 약해! 뭐가 어떻게 됐길래 빛도 제대로 못 밝히냐고!"

카오틱들은 혼란에 빠진 상태였다.

타락한 자들의 도시를 계획하고, 실제로 만들었으며 여태껏 이끌어 왔던 마인이 죽었다.

그 죽음은 큰 혼란을 가지고 왔다.

"바, 반 님이 죽었으면 누가 도시를 다스리는 거지? 다른 마인들이 있을 거 아냐."

"못 들었냐?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잖아."

"자기들끼리 싸운다고? 이 상황에?"

얼마 전, 진현우가 침입해 왔을 때 반과 함께 그를 상대했던 마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반을 가까이서 모셨던 자신들 중에서 새로운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 어이, 권력 싸움을 하는 건 좋다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지 않나? 일단....

- 그래서 네가 지도자가 되겠다는 거냐? 반의 허드렛일이나 하던 버러지가!

- 뭐라고?!

누군가는 그 분쟁을 말리려고 했지만, 그런다고 막을 수 있는 분쟁이 아니었다.

마인들 간의 분쟁은 더욱 격해졌다.

"반 그 새끼가 죽었으면 좋은 기회 아냐?"

"이 도시는 옛날부터 탐났단 말이지."

- 머저리 같은 놈들이...!

거기에 평소 타락한 자들의 도시를 탐내던 외부의 카오틱 길드까지 끼어들었다.

그런 이유로, 지금 도시 내부에는 때아닌 권력투쟁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이 사태의 근본적인 이유는 간단했다. 카오틱과 마인들이 서로를 믿지 못한다는 것.

"무기를 거두라고? 너희를 어떻게 믿고! 저번에 네놈들이 내 부하를 죽였던 건 잊었나!"

"크아아악!"

그들이 여태껏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절대적인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걸 정리할 수 있는 이는 오직 하나.

"대, 대적자님은 뭘 하고 계시는 거지?"

"우리가 이런 상황까지 몰렸는데...."

"아무나 대적자님을 좀 불러 봐!"

이성이 남은 카오틱과 마인이 대적자를 찾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도시의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그리고.

- 쿠르르, 콰아아앙!

어디선가 번개가 치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그들이 볼 수 없는 어둠 속, 한 남자가 서 있었다.

"후우...."

진현우는 마창을 쥐고 있었다.

오랫동안 쥐고 있었던 탓에 팔이 마창에 많이 잠식되었다. 잠식의 최대 효과인 대미지 70% 상승의 효과를 온전히 받은 상태.

- 두근!

진현우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심장을 중심으로 흑뢰가 일어나더니 순식간에 전신을 휘감았다. 그는 한계를 넘어선 힘을 느끼면서, 창을 쥔 손을 크게 젖혔다.

그리고 투척.

- 투콰아앙!

창을 쏘아 낸 거라고는 믿을 수 없는 굉음이 울렸다. 짙은 흑뢰를 휘감은 마창이 수십여 개로 분열했고, 그대로 성벽 위를 덮쳤다.

- 카드득!

성벽 위에는 방어막이 전개되어 있었다.

보조 동력원으로 만들어 낸 방어막. 하나 그 방어막은 원래의 것에 비하면 한참 약했다.

마창은 방어막을 너무도 쉽게 찢었고.

"끄아아아아!"

"흐어어억...!"

수많은 마창이 적들을 꿰뚫었다.

깃들어 있던 흑뢰가 사방으로 퍼지면서 성벽 위를 지키던 카오틱들을 휩쓸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쏴라!"

"저 성벽부터 파괴한다!"

플레이어들의 공격이 시작됐다.

가장 먼저 쏘아진 것은 검은 뇌전을 두른 마창들. 또다시 쏘아진 마창이 성벽과 충돌했고, 다음으로 온갖 마법이 쏘아졌다.

- 콰아아아앙!

지척을 뒤흔드는 폭발이 일어났다.

큰 피해를 입은 성벽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바로 그때, 화련이 보석들을 발동시켰다.

진현우가 성벽 아래에 설치한 보석들.

"우, 우아아악?!"

보석들이 엄청난 규모의 폭발을 일으키면서 성벽 일부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원래대로라면 성벽은 방어 마법으로 강화됐었을 터. 이렇게 쉽게 파괴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마법이 없다.

"흐읍!"

진현우는 섬광을 쓰면서 돌진했다.

엄청난 속도로 성벽으로 다가오는 신형. 카오틱들이 황급히 그를 막으려고 했다.

그때 그의 신형이 갑자기 사라졌다.

"뭣...!"

"커헉?!"

그가 나타난 곳은 성벽 위였다.

공간 도약으로 성벽까지 도약한 진현우는 정령과 영혼 동물들을 한 번에 소환했다.

목적은 적들의 시선을 끄는 것.

"돌격!"

"정령과 갑옷들부터 먼저 돌격한다!"

저 너머에서 수많은 정령과 갑옷들 그리고 플레이어들이 일제히 돌진하기 시작했다.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돌진이었다.

204화

숨겨진 유산 (1)

- 콰르르르!

성벽이 무너졌다.

가장 먼저 돌입한 것은 강철로 된 갑옷들이었다. 성벽 주변으로 윤서희가 만들어 낸 결계가 펼쳐지면서 그들을 강화시켰다.

"이, 고철 새끼들이...!"

- 막아라! 안으로 들여보내지 마라!

"제기랄! 정령이다!"

그들을 지원하는 것은 수많은 정령.

저 너머에 솟구친 거대한 뱀이 쉼 없이 화염구를 내뱉었고, 다른 정령들도 거들었다.

수많은 마법이 카오틱들을 덮쳤다.

- 크으으윽!

거대한 방어막이 정령들의 마법을 막았다.

마인들 역시 필사적인 건 매한가지였다. 어떻게든 적들을 여기서 막아야만 한다.

적들이 도시 내부로 진입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돌이킬 수 없어진다.

그런 생각에서였다.

- 우아아악!

- 뒤, 뒤에서...!

하지만 이미 늦었다.

공간 도약으로 성벽 위에 진입했던 진현우는 상업 구역의 한복판에 도달했다.

그 손에 쥐인 것은 거대한 깃발.

- 쿠우웅!

진현우가 영역을 선포했다.

바닥을 기면서 나온 수많은 언데드가 성문을 지키던 적들을 후방에서 공격했다.

필사적으로 버티던 카오틱과 마인들이었지만, 포위 공격까지는 버틸 수가 없었다.

"더, 더는 못 버텨!"

"커허억...."

- 이, 이이익! 멍청한 놈들이!

성벽의 방어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마인들은 쓰러져 가는 카오틱들의 모습에 분통을 터트리며 상업 구역 쪽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그곳에 서 있는 진현우를.

- 언데드를 막아! 저놈을 죽이라고!

- 저걸 못 막으면 너희라고 무사할 것 같나? 성벽이 뚫리면 다 같이 죽을 뿐이다!

"아니, 그렇게 말해 봤자...."

진현우는 주변의 카오틱들을 흘깃 봤다.

그가 땅을 가볍게 짓밟자, 땅에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지더니 거대한 괴물이 나타났다.

늑대, 펜리스였다.

- 커허어엉!

거대한 늑대가 울부짖었다.

사방을 덮치는 강한 눈보라. 그 기세에 완전히 짓눌린 카오틱들이 겁에 질렸다.

마인들이 계속 분통을 터트리고 있었지만, 누구도 진현우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바, 반을 죽인 놈을 상대로 어쩌라고.'

'대적자하고도 대등하게 싸웠다며....'

'싸워 봤자 개죽음이다.'

그런 생각에서였다.

실제로 지금 상업 구역에 남은 카오틱들은 레벨이 그리 높지 않은 이들이었다.

싸워 봤자 시간만 버는 수준일 터.

- 뭘 하는 거냐! 싸워! 싸우란 말이다!

- 이 머저리들이, 너희가 그러는 걸 대적자님이 그냥 보고 넘어가실 것 같나!

그 상황을 본 마인들이 분노했지만, 그런다고 카오틱들이 움직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큰 불만을 느꼈다.

"그냥 넘어가고 나발이고 간에...."

"도시가 이 꼴이 됐는데도 얼굴 하나 안 비추는 양반 아냐? 우리더러 뭘 어쩌라고?"

"애초에 상황이 이렇게 된 것도 대적자가 무리하게 침공을 벌인 탓이잖아...."

굳이 대침공을 벌일 필요가 있었는가?

카오틱들의 세력은 거대했다. 굳이 플레이어들의 영역으로 쳐들어갈 필요가 있었나?

늘 그랬듯이 탑에서, 유리한 환경에서 플레이어들을 기습하고 납치하면 됐을 일인데.

'그래 놓고 책임도 안 져?'

대적자는 대침공의 실패, 거기서 입은 부상 때문에 몸을 추스르고 있는 상황이었다.

나름의 사정이 있었지만, 카오틱들에게는 실패해 놓고 내뺀 걸로밖에 안 보였다.

"야, 차라리...."

"그냥 도망치는 게 안 낫냐?"

카오틱 사이에서 그런 얘기가 나왔다.

여기서 목숨을 바칠 필요가 있느냐. 대적자에게 힘을 하사받은 마인이라면 모를까, 자신들 같은 하급 카오틱들은 그럴 이유가 없다.

"...."

"...."

카오틱들은 판단만큼 행동도 빨랐다.

타락한 자들의 도시에는 포탈이 있다. 다른 층이나 탑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포탈.

"포탈로 나가!"

"X발, 꺼져! 나부터 탈출할 거야!"

"어, 어이, 잠깐!"

승산이 없다고 여긴 카오틱들은 재빨리 포탈을 이용해서 도시를 탈출하기 시작했다.

방어를 포기한 것이다.

- 뭐, 뭣...!

- 저, 저 미친놈들이!

믿기지 않는 상황을 본 마인들이 분노했지만, 그런다고 바뀌는 것은 없었다.

그 광경을 본 임호석이 조소를 터트렸다.

"거참, 믿음직한 부하들을 두셨군!"

- 큭, 크으윽!

구심점이 없는 카오틱들의 한계였다.

대부분의 카오틱은 힘을 탐하거나, 플레이어의 사회에 적응할 수 없거나, 범죄를 즐기는 등의 이유로 인해 카오틱이 된 자들이다.

그런 이들이 협력할 수 있을 리가 없다.

- 콰아아앙!

도시의 방어 탑이 무너졌다.

진현우는 펜리스의 등에 올라탄 채, 사방을 누비며 방어 시설을 파괴하고 있었다.

보조 동력원으로 돌아가고 있기에 화력이 약하긴 하지만 거슬리는 건 매한가지.

부술 수 있는 건 부수는 게 낫다.

"성벽의 적들이 다 죽었다!"

"진입해라! 복수하러 왔다, 이 새끼들아!"

얼마 못 가 성벽의 방어는 붕괴했다.

플레이어들이 도시 내부로 진입했고, 이내 격렬한 전투가 이어졌다. 플레이어들은 이전의 대침공 그리고 이 도시로 납치됐던 이들의 존재 때문에 분노한 상태였다.

"끄아악!"

"오, 오지 마! 오지 말라고!"

"다 죽여!"

전투가 격해질 수밖에 없었다.

카오틱들은 완전히 사기를 잃었고, 플레이어들은 멈추지 않고 안으로 나아갔다.

점점 도망치는 적이 늘어났다.

"진현우! 적들이 도망치고 있다!"

"가게 놔두세요! 추적하지는 말고!"

"알겠다!"

여기서 카오틱들을 다 처리할 수 있다면 베스트지만, 여러모로 위험이 뒤따른다.

카오틱들의 퇴로를 막으면 놈들도 결사의 각오로 항전하려고 들 것이 뻔하다.

그 과정에서 불필요한 피해를 입을 바에는 놈들이 도망치게끔 놔두는 것이 낫다.

'이 도시만 파괴해도 충분해.'

그것만으로 카오틱의 기세는 꺾일 테니까.

각 길드장이 플레이어들을 이끌고 도시 곳곳으로 퍼졌다. 사방에서 비명이 들렸고, 이내 도시 곳곳이 불타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금방 끝나겠군."

- 그럴 것 같구나.

타락한 자들의 도시가 무너져 간다.

* * *

전투는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도시를 함락하는 데 걸린 시간은 3일. 도시가 워낙 넓은 데다가 남은 카오틱과 마인이 행정 구역에서 결사 항전을 벌인 탓이었다.

"질긴 놈들. 적당히 포기할 것이지."

어쨌든 전투는 끝났다.

아군의 피해는 생각보다 적었다. 카오틱들의 상당수가 도중에 도망친 덕분이었다.

만약 놈들이 모두 단합해서 결사 항전을 벌였다면 피해가 더욱 커졌을 것이다.

- 빌어먹을....

도망친 카오틱들이 있듯이, 끝까지 저항하기를 선택한 마인과 카오틱들도 있었다.

플레이어들은 그들을 가능한 포획했다. 정보를 캐내는 데 쓸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마인들은?"

"저것들 포획했다가 무슨 꼴을 당하려고요. 위험해지기 전에 그냥 처리합시다."

"그게 현명하겠네요."

그중에서 마인은 처리하기로 했다.

살려 뒀을 때 감당이 안 되는 놈들이다. 대적자가 돌아오면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대신 카오틱들은 살려 두기로 했다.

"우리 전문가들한테 보내 주마. 심문에는 일가견이 있는 전문가들이거든. 네가 모르는 것들도 알아서 말하고 싶어지게 될 거야."

"으, 으으...."

카오틱들이 포탈로 끌려갔다.

진현우는 가장 높은 건물로 올라가서 도시를 돌아봤다. 한때는 환락의 도시라 불릴 정도로 성행했던 곳이지만, 지금은 폐허가 됐다.

"숨어 있지 말고 나와!"

"한 놈도 놓치지 마라!"

그 폐허를 플레이어들이 돌아다니면서 혹시나 숨은 카오틱이 있을까 찾고 있었다.

탑이 나타난 이래로 일방적으로 카오틱들에게 당해 오기만 했던 플레이어들이다.

'되갚아 줄 좋은 기회기는 하지.'

앞으로의 탑 공략을 순탄하게 이어 나가려면 카오틱의 존재는 최대한 줄이는 게 낫다.

진현우는 숨을 내뱉었다.

'이 시점에 카오틱들을 정리할 수 있을 줄이야. 전생에서는 그렇게 못 했었는데.'

전생의 플레이어들은 카오틱들을 정리하는 데 실패했다. 끝까지 카오틱과 마인들에게 시달리면서 탑 공략을 이어 나갔었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피해를 입었던가. 지금 카오틱을 정리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도시는 어떻게 하는 게 낫겠나?"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임호석과 윤서희, 화련과 데이비드 그리고 여러 길드장이 그곳에 서 있었다.

그 옆에 있던 윤서희가 싸늘하게 말했다.

"완전히 파괴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우리가 점령해서 쓸 수 있는 곳도 아니잖아요."

"그렇긴 해. 대적자가 지금은 조용하지만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니까."

화련이 손톱을 후 불었다.

여기는 플레이어들의 층이 아니다. 지금은 대적자가 침묵하고 있지만, 나중에 놈이 복귀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점령해서 쓰기에는 위험 요소가 많다.

"남은 카오틱들 제압이 끝나면 완전히 파괴하죠. 아마 포탈은 안 닫힐 겁니다. 파괴한 뒤에 주기적으로 사람을 보내서 감시합시다."

"흠, 카오틱들이 다시 세력을 펼칠 일이 없게끔 지켜보자는 거군. 나쁘지 않겠어."

"전리품은 알아서 챙겨도 되지?"

화련이 보석을 꺼내면서 나른하게 웃었다.

거기에 온갖 장신구까지. 평범한 물건은 아니었다. 모두 특수한 기능을 가진 아이템들.

"그건 어디서 났어요?"

"생산 구역에서. 후후, 재밌는 게 많더라고. 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 챙겼지. 필요하니? 꾸밀 줄 모르는 너도 이번 기회에...."

"됐습니다."

"재미없기는."

윤서희가 손사래를 쳤다.

"급하게 도망치느라고 버리고 간 게 많을 겁니다. 챙길 수 있는 건 다 챙기죠."

"그렇게 하지."

길드장들이 떠났다.

혼자 남은 진현우는 잠깐 도시를 둘러본 후 내려가려고 했다. 행정 구역의 건물로 가서 찾아야 할 게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 숨겨진 층, 타락한 자들의 도시의 공략에 성공했습니다. 당신은 스스로 충분한 자격이 있음을 증명했기에, 새로운 길이 열립니다.

- 특정 층에 도달할 경우, 멸망한 세계 '프레웬'으로 갈 수 있는 길이 나타납니다.

메시지가 나왔다.

그것도 진현우가 예상 못 한 메시지가.

"프레웬? 거긴 또 어디야?"

진현우조차 모르는 곳이었다.

멸망한 세계, 프레웬. 전생에서는 들어 본 적이 없는 이름이다. 근데 짚이는 건 있었다.

멸망한 세계.

그리고 멸망의 목도자.

'설마....'

대적자와 연관이 있는 층인가?

억측에 가까운 추측이다. 하지만 이 도시의 진정한 주인이 멸망의 목도자라는 것.

그리고 '멸망'이라는 키워드가 겹친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신빙성이 느껴졌다.

"...."

메시지가 빛을 내면서 사라졌다.

그 빛이 진현우의 내면으로 깃들었다. 때가 됐을 때, 이 빛은 다시 나타날 것이다.

그런 예감이 들었다.

'당장 고민한다고 뭐가 달라지진 않겠지.'

지금의 자신이 온전한 대적자를 상대로 싸워서 이길 수 있느냐도 의문이었다.

당장 고민해도 무의미하다.

진현우는 행정 구역의 건물로 향했다.

- 더럽게 높은 건물이로구나.

반을 비롯한 수뇌부들이 머물던 건물. 안에 귀중한 정보가 있을 거라고 추정되는 곳이다.

현대의 빌딩을 보는 듯한 건물이었다.

"일단 안을 뒤져 보기는 해야겠지."

- 뭐가 남아 있기는 하겠느냐? 적들이 농성하면서 정보는 다 처리했을 것 같다만.

"뭐, 그쪽은 애초에 기대도 안 해."

- 그럼 뭘 기대하는 것이냐?

미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현우가 이 건물로 온 이유는 간단했다.

- 칭호, 계승자의 효과가 발동합니다.

- 당신의 감각이 활성화됩니다. 웨펀 마스터의 유산이 있는 위치가 느껴집니다....

이곳에 유산이 있으니까.

진현우는 감각이 반응하는 것을 느꼈다.

205화

선대 (1)

- 칭호, 계승자의 효과가 발동합니다.

- 당신의 감각이 활성화됩니다. 웨펀 마스터의 유산이 있는 위치가 느껴집니다....

오랜만에 보는 메시지였다.

웨펀 마스터의 조각과 관련된 메시지. 진현우는 감각이 예민해지는 것을 느꼈다.

예민해진 감각은 최상층을 가리켰다.

"흠, 일단 가 볼까."

진현우는 곧장 최상층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여러 플레이어를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건물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유용한 정보 같은 게 없나 찾고 있는 중이었다.

아직 별다른 성과는 없는 모양이었다.

"진현우 님, 여긴 어쩐 일로...."

"좀 찾을 게 있어서요."

최상층에도 플레이어들이 있었다.

그들은 방 하나를 지키고 있었는데, 바깥에서 얼핏 봐도 몹시 화려해 보이는 방이었다.

"누구 방입니까?"

"반, 그놈이 쓰던 방입니다. 하지만 남은 게 없더군요. 가재고 뭐고 다 털어 갔습니다."

"그래요?"

"들어가시려면 마음껏 들어가셔도 됩니다."

플레이어들은 바로 길을 비켜 줬다.

진현우는 부서진 문을 지나 방에 들어섰다.

- 한때는 꽤 호화스러웠을 것 같구나.

"그러게."

반의 방이었다.

원래는 화려하게 장식됐을 것 같은 방. 하지만 지금은 그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반이 죽은 걸 확인한 다른 마인들이 침입해서 가치 있는 것들을 챙겨 간 모양이었다.

아니면 카오틱들이 그랬거나.

"개판이군."

- 으음, 개판이로구나.

보이는 것은 파편과 잔해뿐이었다.

이 방에 정말로 웨펀 마스터의 유산이 있을까? 자연스레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감각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느껴지는 건 이쪽인데...."

서쪽 벽에서 뭔가가 느껴졌다.

진현우는 벽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녔다. 뭔가 장치가 있지 않을까? 근데 없었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는 게 없었다.

'뭐가 있었으면 저 사람들이 찾았겠지.'

보이는 것도, 느껴지는 것도 없었다.

이럴 때 쓸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 콰드드득!

- 끼이야악! 마, 말 좀 하고 움직이거라!

검을 휘두르는 것.

진현우는 부서진 검에 검기를 일으킨 후, 방 곳곳을 무자비하게 베기 시작했다.

이 검은 마력과 마기를 흡수하는 효과가 있다. 이거면 뭔가 걸리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빙고."

그리고 그 생각은 정확했다.

방 내부를 무자비하게 베던 도중에 손아귀에 감각이 느껴졌다.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마력적인 무언가를 벤 듯한 느낌.

벽 일부분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무, 무슨 일입니까!"

"갑자기 왜 검을... 어, 어어?"

소란을 듣고 달려온 플레이어들이 녹아내리는 벽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법적인 수단으로 숨겨져 있던 벽이 사라지면서, 그 너머의 공간이 나타났다.

"여기였군."

그리 넓지는 않은 공간이었다.

하지만 내부에 값비싼 물건들과 중요한 서류처럼 보이는 것이 다수 보였다.

놀란 플레이어들이 가까이 다가왔다.

"내부에 있는 물건은 제가 회수하죠. 여러분은 누가 오지 않게끔 입구를 지켜 주세요."

"예, 예. 알겠습니다."

플레이어들한테 시킬까 했는데 혹시 모르니 자신이 옮기는 게 낫겠다 싶었다.

진현우는 내부의 물건들을 아공간에 모조리 집어넣은 후, 필요한 물건을 찾았다.

바로 웨펀 마스터의 조각을.

- 네 검이 떨리는구나. 이것들 아니냐?

"그런 것 같은데."

잘 숨겨진 상자가 보였다.

자그마한 상자. 진현우가 쥔 부서진 검이 상자의 내용물에 반응하듯 떨리고 있었다.

진현우는 상자를 열었다.

- 끼이익.

"찾았네."

상자 안에 익숙한 파편들이 보였다.

무엇인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웨펀 마스터의 유산이었다. 그것도 다수의 파편.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남은 힘이 없군.'

안에 담겨 있었을 힘이 사라지고 없었다.

남은 것은 별다른 가치 없는 조각뿐. 진현우는 혀를 차면서 조각들을 한데 모았다.

바로 그때였다.

- 부서진 검이 조각들에 반응합니다.

"응?"

부서진 검이 격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힘을 잃은 조각들이 서로 공명하더니, 자석처럼 달라붙어서 하나로 합쳐졌다.

제법 큰 검의 조각이 만들어졌다.

[부서진 검의 조각 (일반)]

· 설명: 커다란 검의 조각이다. 한때는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었을 것 같지만, 모든 힘이 흡수된 탓에 미약한 힘만이 남아 있다.

* 조각들에 남은 희미한 사념들을 끌어모았다. 결손되었으나 강한 사념이 남아 있다.

그것도 사념이 담긴 조각이.

일련의 상황을 본 진현우의 눈이 커졌다.

'이게 뭔 일이야?'

부서진 조각들에 있던 힘은 사라졌다.

하지만 미세한 기억 조각은 남아 있었고, 조각이 합쳐지면서 기억 조각도 합쳐졌다.

기억 감정으로 읽을 수 있을 정도로.

- 우우우웅!

조각이 격하게 떨렸다.

마치 빨리 기억을 감정하라는 것처럼. 잠깐 고민하던 진현우는 기억 감정을 사용했다.

'쓰라는데 안 쓸 이유는 없겠지.'

시야가 새하얗게 물들면서 단번에 풍경이 바뀌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뭔가 달랐다.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 기다리고 있었다.

오로지 흑백으로 물든 세상.

그곳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가 들린 순간,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 쩌적, 콰드득!

공간이 짓이겨지면서 갈라졌다.

풍경은 단번에 바뀌었다. 아무것도 없는 흑백의 세상에서 황폐하기 그지없는 세상으로.

황무지처럼 생긴 곳이었는데, 땅이고 허공이고 모두 갈라져서 위태롭게 느껴졌다.

"당신은...."

그곳에 흐릿한 형상이 서 있었다. 새하얗고, 금방 꺼질 것처럼 흔들리는 형상이.

그가 진현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 모르겠나? 모를 수가 없을 텐데. 오랫동안 그 검을 사용해 온 자네라면 말이야.

목소리에서 옅은 웃음기가 느껴졌다.

그 말대로였다. 기억 감정을 사용한 아이템이 뭔지를 생각한다면 모를 수가 없다.

"선대입니까?"

이 부서진 검의 원래 주인.

웨펀 마스터와 관련된 물건들의 기억을 감정할 때마다 진현우가 봤던 인물.

그건 선대 웨펀 마스터밖에 없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 맞다. 정확히 말한다면 그 잔해겠지. 나는 이미 죽었고, 여기 있는 건 사념이니까. 그것도 조각조각 나뉜 사념 말이다.

선대가 쓰게 웃었다.

부서진 검에는 처음부터 사념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부서지면서 파편들이 흩어졌고, 그러면서 완전하던 사념마저도 조각났다.

눈앞의 사념은 완전하지 않다는 뜻이다.

"...."

진현우는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흐릿한 형상이었기에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친숙했다.

"부서진 검 안에 있었던 겁니까?"

- 그곳에서 잠들어 있었지. 검이 조각나면서 내 사념도 조각난 상태였으니까.

이번에 충분히 많은 조각을 회수하면서 선대 역시 잠에서 깰 수 있었던 모양이다.

- 그래도 아직 불안정하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 빠르게 본론으로 들어가지.

선대는 조급해 보였다.

진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대적자라 불리는 이들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나?

"모릅니다. 짐작 가는 건 있지만요."

- 그 짐작이라도 말해 봐라.

진현우는 기억을 떠올렸다.

일찍이 본 적이 있는 기억. 선대 웨펀 마스터와 멸망의 목도자가 대화를 나눈 기억.

"멸망의 목도자와 당신이 나눈 대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멸망의 목도자는 누군가한테 대적자가 되라는 제안을 받았고, 당신과는 다르게 그 제안을 받아들인 것 같더군요."

- 맞다. 하지만 그 대답은 대적자가 어떤 존재인지는 설명하지 못하고 있군.

"알 수 없으니까요."

대적자가 어떤 존재인가.

그건 시간을 거슬러 온 진현우도 알지 못했다. 단지 초월적인 힘을 가진 존재이며, 누군가에게 그 힘을 받았다는 것만 알 뿐.

선대가 가볍게 웃었다.

- 대적자는, 멸망한 세계의 생존자다.

"멸망한 세계의 생존자라고요?"

- 생존자이면서, 자신의 세계를 대표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진 자들이지.

예상치 못한 말에 진현우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하지만 말은 계속 이어졌다.

선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그렇기에 탑에게 선택받고 초월자의 힘을 얻게 된 이들. 그게 바로 대적자다.

"...."

잠깐 침묵이 흘렀다.

진현우는 머릿속의 정보를 정리했다.

"...탑이 어떤 식으로 제안하는 겁니까?"

- 세계가 멸망에 가까워졌을 때 제안하더군. 저항을 포기하고 내게 복종하라. 나를 돕는다면 너에게 특별한 기회를 주겠노라고.

"그 기회가 뭘 뜻하는 겁니까?"

- 그건 나도 알 수 없다. 나는 그런 제안을 받았을 뿐이지, 받아들이지는 않았으니까.

아까운 대답이었다.

진현우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선, 먼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멸망한 세계의 생존자라는 게 무슨 뜻입니까?"

- 간단하다.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될 일이다. '탑'이 너희의 세상에만 나타났을까?

"설마."

- 그래. 이 탑은 너희의 세상만이 아닌, 다른 수많은 세상에서도 나타났었다. 똑같이.

선대의 흐릿한 얼굴이 구겨졌다. 씁쓸해하는 듯한, 슬퍼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 대적자가 생길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세계의 경우에는 너희가 겪었던 것과 똑같은 시련을 겪었다. 탑을 등반하라는 시련 말이다.

"강하지 못한 세계는 어떻게 됐습니까?"

- 그냥 삼켜졌지. 이 탑에 말이다. 그 방식이 무엇인지는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나?

"...예."

진현우가 전생에서 마지막으로 본 광경.

하늘이 갈라지고, 거대한 탑이 보이면서, 수많은 몬스터가 나타나 세상을 공격하던 모습.

세상이 멸망하던 순간이었다.

- 내가 살던 세상의 주민들은... 그 시련을 이겨 내지 못했다. 탑을 오르는 데 실패했지.

"그래서 멸망한 겁니까?"

- 그렇다. 나와 멸망의 목도자가 살던 세상은 멸망했고 탑이 세상을 삼켰었다.

진현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한 가지 의아한 부분이 있었다.

"탑은 왜 여러 세상을 돌아다니는 겁니까? 시련이라는 걸 주는 이유는 뭐고요."

- 거기까지는 나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대적자라면, 멸망의 목도자라면 알겠지.

"...."

진현우는 선대를 바라봤다.

이 대답을 듣자마자 알 수 있었다. 선대가 왜 지금 나타났고, 대화하려고 한 것인지.

"당신과 멸망의 목도자가 살던 세계의 이름이 뭐였나요? 멸망하기 전의 이름 말입니다."

- 프레웬.

메시지가 생각났다.

이 층을 점령한 뒤에 나타났던 메시지.

-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 숨겨진 층, 타락한 자들의 도시의 공략에 성공했습니다. 당신은 스스로 충분한 자격이 있음을 증명했기에, 새로운 길이 열립니다.

- 특정 층에 도달할 경우, 멸망한 세계 '프레웬'으로 갈 수 있는 길이 나타납니다.

선대가 말한 세계의 이름도 프레웬이었다.

그 층으로 갈 수 있다는 메시지.

- 너는 그 층으로 갈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 대적자, 멸망의 목도자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지. 놈을 죽일 수만 있다면.

"진실을 알 수 있겠군요."

- 그렇다. 진실을 알고 싶다면 대적자를 찾아라. 멸망의 목도자가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그것도 진현우가 해결하기 힘든 문제가.

"지금의 전 대적자를 이길 수 없습니다."

- 그렇겠지. 하지만 멸망의 목도자를 이기지 못한다면 시련을 극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겨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선대는 진현우의 심장을 가리켰다.

- 네 안에 깃들어 있는 신성. 대적자를 이겼을 때, 그 신성이 크게 성장할 것이다. 그게 너와 실패한 생존자들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차이점이라고요?"

- 그래. 나를 비롯한 대적자들은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 인간에 불과했다. 하지만 너는 신성이라는 걸 가지고 있지.

선대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러자 진현우의 내면에 깃든 신성의 파편이 반응하더니, 강한 신성이 새어 나왔다.

- 그 신성을 한계까지 성장시킬 수 있다면 새로운 길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스르릉.

검을 뽑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것도 없던 선대의 손에는 어느새 검이 쥐여 있었다.

- 검을 들어라. 멸망의 목도자가 어떤 식으로 싸웠는지, 그 몸에 체화시켜 줄 테니.

206화

선대 (2)

그날부터 수련이 시작됐다.

사실 수련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선대가 일방적으로 공격하는 걸 막을 뿐이었으니.

하지만 의미가 없는 건 아니었다.

- 내가 어떻게 공격하는지 봐라. 사소한 움직임조차 놓치지 말고 눈에 새겨 둬라. 근육의 움직임을 보는 것만으로 반응할 수 있게.

선대의 공격은 다채로웠다.

지금의 진현우로서는 받아 내는 게 고작이었고, 받아 낸다고 해서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경험을 체화하는 건 가능했다.

'나중에 대적자와 직접 싸울 때 이 경험들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겠지.'

다만 한 가지 걱정이 있다면.

"멸망의 목도자가 싸우는 방식이 바뀌었으면 이것도 소용없는 것 아닙니까?"

- 더 발전하고 다채로워졌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놈의 검술의 근간은 이것이다.

"그러니까 이걸 기억해 두면 된다?"

선대가 고개를 끄덕였다.

벼락처럼 쏘아진 그의 칼날이 진현우의 목을 꿰뚫었다. 이곳에서 그는 수없이 많은 죽음을 겪었고, 살아나기를 반복했다.

둘은 그 과정에서 문답을 주고받았다.

"하나 궁금한 게 있습니다."

- 뭐지?

"탑이 시련을 줬다고 했잖습니까. 왜 시련을 주는 겁니까? 그것도 플레이어들이 성장하면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시련으로."

옛날부터 이상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이 탑은 여러모로 플레이어들을 배려하는 부분이 많다. 레벨 제한이나 보정 같은 것들.

탑이 세상을 먹어 치우기 위한 도구라면, 그런 배려를 해 줄 이유가 없다.

- 저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항한다고요?"

- 그래. 말했잖느냐. 대적자가 생길 수 있을 정도의 강한 세계에게만 시련을 준다고. 그 시련은 너희 세계를 약화시키기 위함이다.

카아앙!

두 검이 요란스럽게 맞부딪쳤다. 힘을 견뎌 내지 못한 진현우의 팔이 크게 밀려났다.

- 너희 세계는 아직 탑에 저항할 수 있는 여력을 가지고 있지. 그렇기에 세계가 탑에 개입해서 시련을 완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건...."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럴 정도의 여력이 없는 세상은 탑이 나타나자마자 그대로 잡아먹히는 것이고.

여력이 남은 세상은 어떻게든 탑에 개입해서 시련의 수준을 완화시키는 것이다.

그리해서 탑을 공략할 수 있게끔.

'탑의 목적은 뭐지?'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탑은 왜 여러 세상을 오가고 있는가. 그리고 왜 세상을 잡아먹고 있는가.

당장은 해결할 수 없는 의문이었다.

'대적자를 처리하면 알 수 있겠지.'

멸망의 목도자.

놈이 그 대답을 알려 줄 것이다.

"당신도 탑을 공략했었습니까?"

- 그랬었지. 높은 층까지 도달했었다. 하지만 이 탑은… 아무리 공략해도 끝이 없더군.

"끝이 없었다...."

진현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공감 가는 바가 있었다. 전생의 그도 동료들과 함께 탑의 고층까지 도달했었다.

탑의 상층부라고 추측할 수 있을 정도.

하지만 결국 탑을 공략하는 데는 실패했다.

'탑의 끝이 보이지 않았으니까.'

아무리 높은 층까지 도달해도 탑의 끝에 이르렀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었다.

그리고 그건 선대도 마찬가지였다.

- 아무리 공략해도 끝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더군. 어떨 때는 탑이 계속 증식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정말로 그렇다면요?"

- 만약 그렇다면.

푸욱! 검이 진현우의 심장을 꿰뚫었다.

선대의 무감정한 눈빛이 보였다.

- 탑을 공략하려면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는 뜻이겠지. 무엇인지는 나도 알 수 없다만.

전생에서든, 현생에서든.

플레이어들은 탑의 끝까지 도달하면 탑과 게이트를 없앨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면?

이 방법으로는 끝이 없는 거라면?

- 대적자라면 그 질문의 답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어쨌든, 시간이 다 됐군.

그렇게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던 수련도 끝이 다가왔다. 어느 순간부터 선대의 몸이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흐릿해졌다.

- 곧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조각들에 남은 불완전한 기억 조각을 감정한 것이었기에 시간의 한계가 있었다.

- 멸망의 목도자를… 찾아라....

그 말을 끝으로 선대는 사라졌다.

진현우는 눈을 떴다. 눈앞에 여태껏 수없이 봐 왔던 메시지가 떠 있는 것이 보였다.

- 기억 감정에 성공했습니다.

- 부서진 조각들을 합쳐, 그 안에 남아 있던 힘의 일부를 복구했습니다. 부서진 검의 일부 효과가 강화되며 새로운 효과가 추가됩니다.

- 기억 감정의 대상과의 대련으로 '전투 감각 (A)'에 새로운 효과가 추가되었습니다.

- 새로운 스킬을 익혔습니다.

긴 메시지가 나타났다.

진현우는 특성과 스킬을 확인했다.

· 전투 감각 (A): 후천적으로 발현된 전투 감각. 적과 싸울 때 예리하게 벼려진 감각이 활성화되어 소유자의 전투를 돕는다.

전투 도중 특정 상황에 도달할 경우, 잠깐 미래를 예견할 정도로 감각이 날카로워진다.

· 제6식: 무형창 (S, Lv.1): 무형의 창을 투척한다. 기척을 느낄 수도, 소리를 들을 수도 없으며 투척하는 움직임도 생략할 수 있다.

무형창.

인상적인 스킬이었다. 특히 투척하는 움직임조차도 생략할 수 있다는 점이 그러했다.

기습하는 용도로 유용할 것 같았다.

[부서진 검 (영웅)]

- 설명: 오래전에 부서진 검이다. 조각의 일부를 되찾아 칼날 대부분을 복구했다. 하지만 되찾은 칼날의 일부가 힘을 상당수 잃은 상태였기에, 원래 힘을 되찾지는 못했다.

- 착용 제한: 웨펀 마스터만 착용 가능.

- 효과: 탐식의 검, 천변, 신살.

* 신살: 오로지 대적자를 죽이기 위해 개량된 검. 내면에 깃든 특수한 힘으로 대적자에게 제대로 된 피해를 입힐 수 있다.

그리고 안배라는 효과가 바뀌었다.

정확히는 진정한 효과가 드러난 거라고 봐야 할 것이다. 안배라는 이름을 가졌을 때도 지금과 크게 효과가 다르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더 강해졌다.

'뭐가 됐든 대적자와 싸워야 한다.'

진실을 알고 싶다면 그리해야만 한다.

진현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인간, 인간, 이것 보거라."

선대와의 수련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냈지만, 현실에서는 시간이 많이 흐르지 않았다.

아마도 몇 분 정도.

어느새 인간 형태로 변한 미호가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값진 것을 찾고 있었다.

"검을 찾았느니라. 쓸 만해 보이지 않느냐?"

"넌 뭘 그리 주렁주렁... 검?"

온갖 장신구로 화려하게 치장한 미호가 검을 내밀었다. 불길할 정도로 붉은 검이었다.

[선혈의 검 (전설)]

- 설명: 반이 한때 사용했었지만, 성장한 이후로는 필요가 없어 방치한 검이다.

- 착용 제한: 레벨 170.

- 효과: 흡혈, 선혈의 파도, 감염.

* 흡혈: 주변의 피를 흡수하여 선혈의 파도의 재료로 쓰거나 착용자의 상처를 치료한다.

* 선혈의 파도: 흡혈한 피를 파도의 형태로 분출한다. 이에 닿은 물체는 부식한다.

* 감염: 이 검으로 입은 피해는 적를 감염시켜 재생력을 약화시키며 디버프를 가한다.

반이 왜 방치한 건지 알 것 같았다.

좋은 아이템이기는 하지만, 반 정도 되는 마인이 굳이 쓸 이유가 없는 아이템이었다.

'그래도 뭐.'

진현우는 부서진 검에 선혈의 검을 먹였다.

'먹여 두면 쓸 일이 있겠지.'

다른 건 몰라도 흡혈로 상처를 치료할 수 있다는 건 꽤 괜찮은 옵션이었다.

도움이 될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어때, 괜찮은 검이지 않느냐? 그런 의미에서 이 장신구들을 나한테 선물로...."

"왜 이러나 했더니 그게 목적이었군."

진현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보아하니 평범한 장신구가 아니라 다양한 옵션이 있는 장신구들이었다.

미호가 사용해서 나쁠 건 없을 것이다.

"그래, 네가 써라."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구나!"

미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진현우는 기뻐하는 미호를 놔두고, 방 안의 물건을 모두 챙긴 후 밖으로 향했다.

반의 방에는 커다란 창문이 있었다.

'챙길 건 다 챙겼고.'

전투로 크게 파괴된 타락한 자들의 도시가 창문 너머로 보였다.

하지만 아직 부족하다.

'이제 도시를 파괴할 때가 됐군.'

이 도시를 완전히 파괴해야 한다.

* * *

도시의 파괴 작업이 시작됐다.

워낙 큰 도시였기에 파괴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플레이어들은 오랜 기간 머무르면서 도시를 파괴하는 작업에 몰두해야만 했다.

그 과정도 쉽지는 않았다.

"포탈! 카오틱들이 또 온다!"

"저 새끼들, 포기할 줄을 모르고!"

이 도시는 카오틱들의 본거지.

본거지를 되찾아야 한다고 판단한 카오틱과 마인들이 주기적으로 공격해 오고 있었다.

플레이어들은 그 공격을 막아 냈고, 원정대를 구성해서 도시 인근의 던전을 탐사했다.

"사냥터나 던전이 꽤 많은데?"

"이놈들, 어디서 강해지나 했더니...."

타락한 자들의 도시가 있는 층에는 다양한 레벨대의 던전과 사냥터가 존재했다.

원래는 카오틱들이 단계적으로 성장하는 데 썼던 곳. 하지만 지금은 진현우를 비롯한 플레이어들이 성장하는 용도로 쓰고 있었다.

'마침 잘됐네.'

레벨을 올릴 필요가 있었는데, 여길 이용해서 레벨을 올리면 되겠다 싶었다.

진현우와 플레이어들은 카오틱들의 공격을 방어하면서 사냥을 통해 레벨을 올렸다.

[진현우]

· 레벨: 190

· 클래스: 웨펀 마스터

· 칭호: 차원의 수호자

· 근력: 495 (+40) · 민첩: 416 (+40)

· 체력: 418 (+45) · 마력: 319 (+32)

· 마기: 300

진현우의 레벨은 190에 도달했다.

여기서 더 올리고 싶었지만, 이 층에서 올릴 수 있는 최대 레벨은 190이 한계였다.

그 이유는 지극히 간단했다.

- 지금은 입장할 수 없는 구역입니다. 탑이 더 개방되었을 때 입장할 수 있습니다.

보아하니 190레벨 이후의 던전도 있는 것 같은데 입장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이것도 시련의 완화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근데 이거....'

생각보다 괜찮은 사냥터다.

도시는 파괴하더라도 이 층의 사냥터를 이용할 방법은 마련해 두는 게 좋을 것 같다.

"전에 말했던 대로 이 층을 감시할 플레이어들이 필요합니다. 은밀하게 활동할 수 있는 이들 위주로 선정해서 감시하도록 하죠."

"성장이 느려졌을 때 여기로 와서 성장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어때?"

"동감이다."

다른 길드장들의 생각도 비슷했다.

길드장들은 이 층을 감시하면서, 이곳의 사냥터를 계속 이용할 방법을 강구했다.

그리고 어떻게 할지 계획을 다 짰을 때, 진현우는 여길 떠나 탑을 등반하기로 했다.

바로 그때.

- 타락한 자들의 도시를 공략했습니다. 당신이 해당 층의 공략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를 파악하여, 층을 건너뛸 권한을 부여합니다.

- 탑의 13층에 바로 도전할 수 있습니다.

반가운 메시지가 나타났다.

탑의 일부 층을 건너뛰어서 13층으로 바로 도전할 수 있게 되었다는 메시지였다.

일종의 보상인 셈이었다.

'어쩌면.'

그걸 보고 있으니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대적자를 죽이면 똑같은 보상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멸망의 목도자가 있는 층, 프레웬도 이곳과 비슷하게 별개의 층으로 되어 있을 터.

비슷한 보상을 줄지도 모른다.

'일단 탑부터 빨리 올라야겠군.'

지금은 생각해 봤자 무의미하다.

진현우는 탑 공략을 시작했다.

207화

시련의 층 (1)

타락한 자들의 도시를 빼앗았다.

이 소식이 플레이어들에게 의미하는 바는 컸다. 여태껏 플레이어들은 일방적으로 마인과 카오틱들에게 당하기만 했던 상황.

대침공 때 처음으로 반격에 성공했고, 이번에는 아예 역습에 나서서 성공한 셈이었다.

- 카오틱 새끼들, 꼴 좋다.

- 이게 진짜로 된다고? 진현우하고 길드장 몇 명이 가서 기습했다고 하던데....

- 또 진현우야? 안 죽은 게 신기하네.

진현우의 이름값은 더 올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대침공을 막을 때 가장 큰 활약을 했으며, 이번에는 카오틱들의 본거지로 쳐들어가서 역습까지 했으니.

명성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높아진 명성은.

- 사람들이 당신에게 가지는 믿음과 선망이 커졌습니다. 신성의 파편이 성장합니다.

- 신성의 파편이 B+등급에 도달했습니다.

신성의 파편을 성장시켰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스킬이 생성됐다.

· 성역 전개 (S): 신성을 사용하여 일정 범위의 성역을 전개한다. 성역 안에 있는 아군은 모든 디버프로부터 자유로워지며, 신성과 상극의 존재는 강한 디버프를 부여받는다.

어떤 의미로는 익숙한 스킬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옛날에 썼던 성유물, 성배의 잔해가 가진 효과가 성역이었으니까.

다만 그것보다는 더 강화된 형태였다.

'성역이라.'

진현우의 표정이 살짝 묘해졌다.

'나한테 어울리는 스킬은 아닌데.'

샬럿처럼 독실한 신자라면 모를까, 진현우는 딱히 신을 믿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런 스킬을 가지고 있는 데다가 앞으로 비슷한 계통의 스킬이 또 생긴다니.

"괴리감이 장난이 아니군."

결국은 익숙해질 것이다.

한편, 진현우와 길드들이 타락한 자들의 도시를 점령하는 동안에도 탑 공략은 계속됐다.

제우스 길드와 그 산하 길드가 협력하여 탑을 공략했고, 15층까지 공략하는 데 성공했다.

"15층에서 다소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같아. 거기 기믹이 좀 특이하다고 하던데?"

"그래?"

탑 근처에 있는 호텔.

진현우는 그곳의 카페에서 화련과 만나 탑과 관련된 정보들을 듣고 있었다.

대형 길드의 길드장인 그녀는 가만히 있어도 다양한 정보가 들어오는 상황.

그녀에게서 필요한 정보를 듣기로 했다.

"그래도 시간만 지나면 금방 공략할 것 같긴 해. 그 새끼들, 실력이 없진 않거든."

"흠...."

15층. 진현우는 기억을 더듬었다.

아마 지하에서 방어전을 벌이는 거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꽤 특이한 곳이기는 했다.

어쨌든 빨리 거기까지 가야 한다.

"탑을 공략하는 것 말고 특별한 움직임은 없었나? 제우스 길드나 유신 말이야."

"딱히 들어온 얘기가 없는 걸 보면 없었던 것 같네. 탑 공략에만 열중하는 것 같아."

"탑 공략에만 말이지...."

유신이 탑 공략에 열심인 놈이었던가?

아니다. 오히려 탑 공략을 방해했으면 방해할 놈이지, 탑을 열심히 공략할 놈은 아니다.

그래야 할 이유가 따로 있을 것이다.

'대적자도 너무 잠잠해.'

도시를 공략할 때 모습조차 못 비친 걸 보면 놈이 큰 피해를 입은 건 사실일 터.

하지만 잠잠해도 너무 잠잠하다.

뭔가 노리는 게 있을 터.

"유신을 유심히 지켜봐야겠군."

"왜, 뭔가 마음에 걸려?"

"어. 제우스 길드도 그렇고."

대적자도 이대로 있을 놈이 아니다.

화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탑을 공략하러 가는 건가?"

"가야지."

13층은 혼자서 공략해야 하는 층.

화련은 정보를 조금 더 알아낸 뒤에 자신도 탑을 공략하러 가겠다고 말했다.

그보다 먼저 진현우는 탑 공략에 나섰다.

* * *

- 세계의 탑에 방문한 것을 환영합니다.

- 현재 탑은 15층까지 개방되었습니다. 당신이 방문할 수 있는 층은 13층까지입니다.

- 13층: 시련의 층으로 향합니다.

- 입장 가능 레벨: Lv.170.

탑에 진입한 진현우를 이제는 익숙하게 느껴지는 백색의 공간이 반겼다.

대기실이다.

'13층이라.'

확실한 기믹이 없던 곳으로 기억한다.

이렇게 모호하게 말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 13층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해당 층은 각각의 도전자를 개별적인 공간으로 소환하며, 개인의 특징에 맞춘 시련을 제공하는 곳입니다.

- 시련을 극복하십시오.

사람마다 기믹이 바뀌기 때문이다.

대장장이라면 여태껏 자신의 수준으로는 만들 수 없었던 아이템을 만들어 내는 것.

사제라면 쉽게 치료할 수 없는 이들을 구원하는 것. 이런 식으로 다른 시련을 받는다.

'나는 전생에 무슨 시련을 받았더라.'

그때의 진현우는 감정사였다.

수많은 아이템을 감정해서 가장 비싼 아이템을 찾아내는 시련이었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그런 내용이었던 건 기억한다.

'이번 생의 나는 전사 계통인데....'

웨펀 마스터는 전사 계통의 클래스다.

그걸 감안한다면 강력한 적을 상대하는 시련이지 않을까. 몬스터나, 가상의 적이나.

진현우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 도전자, 진현우.

- 당신에게서 강한 신성력을 느꼈습니다. 신성력을 시험하기에 적합한 시련을 제공합니다. 공간을 변경합니다....

그의 예상은 틀렸다.

주변의 풍경이 단번에 바뀌었다. 아무것도 없던 백색의 공간에 습기 가득한 공간으로.

진현우는 눈을 떴다.

- 으응, 눅눅하구나.

미호가 어깨 위에서 투덜거렸다.

새로 바뀐 공간은 늪지대였다. 하늘에서는 잿물처럼 새까만 빗물이 끝없이 내리고 있었고, 땅에는 끈적한 늪지대가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곳곳에 파괴된 건물들이 보였다.

- 이곳은 오염된 폐허입니다. 폐허 곳곳에 있는 사람들을 구조하고 여길 벗어나십시오.

- 여기는 조심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메시지가 불길한 말을 남기며 사라졌다.

진현우는 늪지대에 발을 내디뎠다. 다행히도 그렇게 깊은 늪은 아니었다. 조심해서 걷는다면 늪에 빠질 걱정은 안 해도 될 정도.

"문제가 있다면...."

- 인간, 인간! 이 비, 뭔가 이상하구나!

"나도 알아."

13층에 내리고 있는 비다.

잿물처럼 새까만 빗물. 당연하지만, 그 생김새처럼 평범한 빗물이 아니었다.

- 저주 어린 빗물의 효과로 모든 능력치가 소폭 감소했습니다. 빗물에 어린 원념이 당신의 정신을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환상적이군."

빗물에는 저주가 깃들어 있었다.

그냥 맞기만 해도 스며드는 저주였다. 능력치 감소에, 정신을 오염시키기까지 하는 저주.

근방에서 괴성이 들렸다.

- 그으으... 그아아아악!

- 어디서 짐승이 울부짖는구나.

"글쎄, 아마 짐승은 아닐 것 같은데."

진현우는 괴성이 들린 곳으로 향했다.

한때는 성이 아니었을까 싶은 폐허에 새까만 늪이 이어지고 있다. 이 늪에도 빗물이 들어 있을 테니 똑같은 디버프가 적용될 터.

'어떻게 깨라는 건지 알 것 같긴 해.'

괴성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집터만 남은 곳에 한 무리의 인간들이 서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새까만 핏줄이 서 있었고, 눈은 광기로 젖어 있었다.

그 몸도 마찬가지였다.

"손톱을 안 깎았나?"

- 청결하지 않아 보이는구나.

변이가 왔는지 손톱이 몹시 길었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게, 갑옷 정도는 간단하게 베어 낼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놈들이 진현우를 인식했다.

- 크으으?!

- 흐으, 으어어어...!

광인들이 땅을 박찼다.

그들과 진현우 사이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진현우도 놀랄 정도의 속도였다.

하지만.

- 퍼어억!

- 크헤엑!

"더럽게 이를 들이밀고 난리야."

놈들이 진현우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그보다 먼저 그의 주먹이 광인들의 뒤통수를 강타했다. 놈들이 휘청거리는 사이, 부패의 사슬을 만들어 내서 놈들을 구속했다.

광인들이 무릎을 꿇었다.

- 키하아아악!

- 키에, 키에에엑!

- 이게 사람인지 짐승인지....

광인들이 이를 드러내며 발악했다.

날카로운 손톱을 사방에 휘두르기까지. 한 놈은 진현우의 손을 물어뜯으려고 들었다.

"어딜."

- 케헥!

진현우는 광인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후려갈겼다. 광인의 얼굴이 땅에 처박혔다.

평범한 사람이라기에는 너무 튼튼하다.

"페허 곳곳에 있는 사람들을 구조하고 여기를 탈출하라고 했단 말이지...."

- 이 광인들을 말하는 것이냐?

"그렇겠지, 아마."

이 사람들이 왜 이렇게 됐느냐.

지극히 간단한 문제였다. 지금도 하늘에서 내리고 있는 저 빗물 때문일 것이다.

저기에 정신이 오염된 거겠지. 오염되면 광화하면서 신체 능력이 강화되는 모양이다.

그럼 이걸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성역 전개."

화아악!

진현우를 중심으로 자그마한 빛의 영역이 전개되었다. 놀라울 정도로 찬란한 빛을 내뿜는 영역이 광인들을 집어삼켰다.

- 파스스스!

- 키헤에에엑!

광인이 눈에 띄게 괴로워했다.

놈들의 몸에서 새까만 액체가 흘러나오더니 그대로 신성력에 녹아 사라졌다.

그들을 잠식하던 오염이다.

"어, 으으...."

"끄으응...."

광인들의 표정이 온화해졌다.

그들의 얼굴에 떠올랐던 검은 핏줄도, 변이가 왔던 신체도 금방 원래대로 돌아왔다.

- 호, 원래대로 돌아오기는 했구나. 그런데 이거, 큰 의미가 있기는 한 것이냐?

"없지."

진현우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거센 비가 내리고 있다. 그 비는 오염에서 벗어난 광인들에게 다시 스며들고 있다.

진현우는 성역을 거두고 지켜봤다.

- 크륵, 큭....

- 끄아아아악!

몇 분 후, 신성력의 힘으로 원래대로 돌아왔던 사람들이 다시 광인이 되었다.

진현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간단하지만 귀찮은 시련이군.'

간단한 시련이다.

이 일대에는 빗물 때문에 광란에 빠진 사람들이 존재하며, 그들을 구조해야 한다.

그렇게 구조한 이들을 정화한 후, 다시 광란에 빠지지 않게끔 관리해야 할 거고.

- 정말로 간단한 시련이 맞는 것이냐?

"간단하기는 하지. 귀찮아서 그렇지."

언제 폭주할지 모르는 성난 짐승들을 데리고 다니라는 건데, 귀찮기 그지없다.

'신성력은 무한하지 않다.'

계속 성역을 전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평범한 신성력과는 다르게 잘 회복도 안 되니까, 성역으로 시련을 해결하기는 힘들다.

'그러면....'

진현우는 광인들을 빤히 바라봤다.

그 근처를 서성이는 미호도.

"광인한테 매혹이 통하나? 야, 좀 해 봐."

- 으음, 미친 인간한테 통하기는 할지....

미호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진현우의 말대로 광인들에게 매혹을 사용했다.

자색의 기운이 광인들을 감쌌다.

- 우, 우욱.

- 끄우우우....

광인들이 순간 흠칫거렸다.

하지만 그게 다일 뿐. 매혹에 당한 사람들처럼 미호의 명령에 따르지는 않았다.

- 흠, 그렇다면.

미호의 두 눈이 사이하게 빛났다.

마안이 자아내는 힘이 광인들을 삼켰다. 거세게 발버둥 치던 광인들이 갑자기 멈췄다.

그 상태에서 다시금 매혹을 쓰자.

"오, 멈췄는데?"

- 흥, 광인 주제에 저항해? 일어나거라!

광인들의 미호에 명령에 따라 일어났다. 미호는 놈들을 비웃으면서 진현우를 가리켰다.

- 잘 듣거라. 저 남자는 너희들과 같은 광인이니라! 하지만 너희를 이끄는 미친놈이지. 저 남자의 뒤를 잘 따라가거라!

"미친놈이라고?"

- 크우우욱....

미호의 말에 거슬리는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그 효과는 확실했다. 거세게 반항하던 광인들이 진현우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공격하려는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광인들은 같은 광인은 공격하지 않았다. 진현우를 똑같은 광인으로 여기기 때문이었다.

- 마안과 매혹을 함께 이용했느니라. 널 같은 광인으로 여기고 있으니 잘 따르겠지.

"...."

진현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거슬리는 부분이 한둘이 아니지만, 됐다. 이 방법이면 귀찮은 부분을 해결할 수 있을 터.

"어쨌든 이 방법대로 하면 되겠군. 가자."

- 자, 저 광인을 따라가거라, 광인들아.

"...."

광인들은 늪지대를 걷기 시작했다.

208화

시련의 층 (2)

폐허에는 수많은 광인이 있었다.

그 숫자만 해도 거의 100명에 달할 정도. 진현우는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발이 푹푹 꺼지는 늪지대를 걸으며 그들을 구조했다.

- 으어어어....

- 우우우....

"...."

진현우가 앞을 걸어가면 수많은 광인이 기이한 소리를 내면서 뒤따라온다.

그 모습을 보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피리 부는 사나이냐?"

- 피리 부는 사나이? 그건 무엇이냐?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무슨 피리 부는 사나이도 아니고.

진현우는 한숨을 내쉬면서 광인들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그들이 입은 의상을.

"옷이 꽤 고급스러운데."

- 흠, 원래는 새하얬을 것 같구나. 가까이서 보니 원단도 고급스러운 걸 썼어.

"평범한 사람들은 아니란 말이지."

진현우는 주변을 돌아봤다.

넓은 성처럼 보이는 곳에 여러 집터가 있다. 그리고 곳곳에 무너진 조각상이 있었다.

완전히 바스라진 탓에 제대로 된 형상을 알아보기는 힘들었지만, 날개 같은 게 보였다.

"날개라...."

무슨 조각상인지는 알 수 없다.

천사나 신을 흉내 낸 조각상일 가능성이 높기는 하다. 만약 그렇다면 여기는 성이 아니라 어딘가의 신전일 가능성이 있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 기둥 같은 것이 보이는구나.

"척 봐도 불길해 보이는데."

폐허 곳곳에 기둥이 솟아나 있었다.

살점으로 만든 불길한 기둥이었는데, 사이한 기운을 쉼 없이 내뿜는 게 인상적이었다.

거기에 다가가자 광인들이 덜덜 떨었다.

- 으, 으으, 주, 주인님이....

- 원하신다... 우리를, 제물로....

"얘네들, 맛이 좀 갔는데?"

광인들이 갑자기 주인을 찾아 댔다. 미호가 자기도 모른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무래도 뭐가 있기는 한 모양인데.'

저 광인들을 저렇게 만든 주인이라는 놈이 이 폐허 어딘가에 있는 모양이다.

'일단 가다 보면 알게 되겠지.'

진현우는 폐허를 돌아다니면서 계속 광인들을 구조했다. 그렇게 얼마나 구했을까.

사방에서 불길한 기척이 느껴졌다.

- 히이이이!

"환장하겠군."

몬스터들이 공격해 오기 시작한 것이다.

하늘에서 영혼 형태의 언데드들이 공격해 왔다. 다 해진 로브로 전신을 가린 레이스, 그리고 흐릿한 여성의 형상을 한 밴시 같은 놈들.

놈들은 진현우를 공격했다.

- 네 몸을 내놓아라...!

- 이히히히!

거기에 진현우를 뒤따라오던 광인들의 몸에 빙의하려는 시도까지 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 크하아악!

- 주인님을, 방해하는 자...!

"언데드들이 뭐 이리 많아?"

사방에서 언데드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데스 나이트나 듀라한, 스켈레톤 메이지 따위들. 진현우에게도 익숙한 언데드들이었다.

영역 선포를 쓰면 매번 단골로 나오는 언데드들이니 익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근데 생긴 게 좀 다른데?'

다만 차이점이 있었다.

생김새가 달랐다. 눈앞의 언데드들은 갑옷이나 뼈 같은 게 흉측하게 변이되어 있었다.

머리에도 뿔 같은 게 솟은 게 보였다.

'거기에다가 이 기운....'

데스 나이트가 땅을 박찼다.

놈의 모습이 유령처럼 흐릿해지더니 순식간에 진현우에게 도달했고, 검을 휘둘렀다.

그 검에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마기잖아."

- 그허억...?!

선명한 마기의 기운이었다.

데스 나이트의 검을 단번에 쳐 낸 진현우는 성흔을 사용했다. 신성력이 가득 담긴 검이 데스 나이트의 몸을 크게 베어 냈다.

- 화르르륵!

데스 나이트의 몸에 새겨진 성흔이 새하얗게 타오르더니 순식간에 놈을 삼켰다.

사기와 마기, 신성력의 상극인 속성을 두 개나 가져서 그런지 효과가 더 좋았다.

"이놈들도 마기가 느껴지고."

레이스와 밴시들에게서도 마기가 느껴졌다.

희미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분명히 마기의 기운이었다. 진현우는 강한 귀찮음을 느꼈다.

"꺼져."

- 캬아아악?!

마기라면 오히려 얘기가 더 쉬워진다.

진현우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쏘아지는 수많은 검기가 하늘을 수놓았고, 광인들에게 빙의하려던 레이스와 밴시들을 그대로 갈랐다.

- 어, 어떻게....

- 히이이이....

레이스와 밴시 같은 영혼 형태의 몬스터들에게 물리적인 공격은 잘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신성력을 담은 검기 앞에서는 놈들도 어쩔 수 없었다. 몸이 반으로 갈라진 레이스와 밴시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사라졌다.

- 호오, 아직 제물이 남아 있었나?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렸다.

주변을 돌아봤지만 목소리의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어떤 놈이 다른 곳에서 지켜보면서 목소리만 전송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 재밌는 여흥이 되겠군. 재주를 보여 봐라.

하늘에서 더 많은 빗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더 많은 언데드들도 나타났고.

진현우는 빗물을 맞으며 하늘을 봤다.

- 크아아아아!

"잘 생각해 보니까 이 빗물...."

하늘에서 저주 어린 빗물이 내렸다. 그는 신성력으로 빗물의 저주를 중화하고 있었다.

그는 저주를 중화하는 걸 멈췄다. 그리고 가만히 선 채 온몸을 적시는 빗물을 맞았다.

그러자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빗물에 마기가 담겼군.'

옅지만 분명히 마기였다.

진현우는 마핵을 가진 데다가 마기 능력치도 높았기에 그냥 맞아도 무방하기는 했다.

하지만 평범한 플레이어라면 빗물을 계속 맞으면서 쌓이는 마기도 무시할 수 없을 터.

'익숙해서 눈치채지 못했던 건가.'

단순히 저주가 깃든 빗물이라고 생각했는데, 마기의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마핵을 가진 진현우에게는 마기는 익숙한 기운이었기에 바로 눈치채지 못했다.

진현우는 생각에 잠겼다.

'마족과 연관이 있을 수도 있겠군.'

진현우는 이곳에 일어난 이변의 원인이 마족일 수 있겠다 생각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여전히 많은 언데드가 보였다.

'성역을 쓰면 한 번에 정리할 순 있다.'

가능하지만 일부러 하지 않았다.

조금 전의 목소리도 그렇고, 언데드들을 소환하고 지휘하는 놈이 어딘가에 있을 터.

성역의 존재는 숨겨 두고 싶었다.

"천둥 비룡."

- 쿠르르... 콰아아앙!

그래서 천둥 비룡을 소환했다.

셰이드를 함께 소환해서 주변의 언데드들을 묶은 후, 비룡의 낙뢰로 한 번에 처리했다.

허공을 비행하던 레이스와 밴시들은 진현우가 광휘와 검기를 이용해서 처리했다.

- 캬아아아악!

- 인간, 끝이 없어 보이는구나.

"나도 그렇게 생각한 참이었어."

수백의 언데드가 빠르게 정리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언데드들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또 소환된 것이다.

'내 체력을 고갈시키려는 건가?'

진현우는 빠르게 판단했다.

여기서 언데드를 처리하는 건 옳은 방법이 아니다. 적의 의도에 놀아나기만 할 뿐.

광인들을 데리고 빨리 벗어나야 한다.

"미호, 빨리 따라오라고 명령해라."

- 해 보기는 하겠다만, 그래도 느릴 거다.

"조금은 빨라지겠지."

광인들은 답답할 정도로 느리다.

진현우는 영혼 동물과 정령을 이용해서 광인들을 지키며 늪지대를 나아갔다.

그렇게 얼마나 나아갔을까.

'성벽이 있던 곳인가? 저길 나가면....'

저 너머에 폐허의 끝이 보였다.

진현우는 광인들을 그쪽으로 데리고 가면서, 이대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걸 직감했다.

그 정도로 쉬울 리가 없다.

분명히 뭔가 하나 더 일어날 것이다.

- 쿠르르르!

"그럼 그렇지."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거대한 벽이 솟구쳤다. 뼈와 살점을 엮어서 만들어 낸 흉측한 장벽이었다.

진현우는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등 뒤에서 무시할 수 없는 강렬한 기운이 느껴졌다.

- 아직 생존자가 남아 있었나?

목소리가 들렸다.

지하 깊은 곳에서 울리는 것 같은 목소리. 인간성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진현우는 고개를 들었다.

하늘에 기이한 형체가 서 있었다.

- 다 제물로 바쳤다고 생각했거늘, 이 정도로 강력한 제물이 아직 남아 있을 줄이야.

그 형체는 거대한 리치였다.

하지만 일반적인 리치와는 생김새가 달랐다. 유독 굵은 뼈에는 점막 같은 것이 붙어 있었고, 머리에는 거대한 뿔이 돋아났다.

'데모닉 리치.'

리치이면서 마족의 힘을 다룰 수 있는 언데드. 마족이었던 자가 죽어서 리치가 되거나, 리치가 마족과 계약하면서 생기는 존재다.

언데드 중에서는 최상위 계통에 속하는 놈.

- 내 제물들을 데리고 도망칠 생각을 하고 있다니, 흥미로운 짓을 하는군.

"여기서 뭘 한 거냐?"

- 뭘 했냐고?

데모닉 리치는 주변을 돌아봤다.

폐허가 된 풍경이 보였다. 원래부터 이곳이 이렇게 폐허였던 것은 아니었다.

한때는 아름다운 신전이었다.

- 공격하고, 점령했다. 이 신전에는 강대한 힘이 남아 있었으니까. 그걸 역으로 이용해서 날 강화할 수단으로 쓰려고 했지.

데모닉 리치는 자신의 몸을 내보였다.

기이하게 뒤틀린 뼈. 가슴속에는 마기를 집결해 놓은 듯한 심장이 뛰고 있었다.

놈에게서 짙은 마기가 느껴졌다.

- 그리고 그건 성공했다. 강대한 마족을... 이 심장에 가두는 것에 성공했지.

- 저놈, 말이 참 많은 놈이로구나.

진현우의 곁에서 미호가 속삭였다.

그 말대로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뭘 했는지 알아서 잘 설명해 주고 있었으니까.

왜 저러는지는 알 것도 같았다.

'질 거라는 생각을 안 하는 거겠지.'

데모닉 리치에게서는 사기와 마기가 느껴졌다. 그것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저놈은 확실한 강자다.

'사제가 저런 괴물을 잡을 수가 있나?'

불현듯 그런 의문이 들었다.

시련의 층은 혼자서만 진입할 수 있는 층. 동료를 데리고 오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럼 저 정도의 괴물을 사제나 성기사가 혼자서 잡아야 한다는 건데, 가능한가?

'불가능하지. 그럼 애초에 싸워서 이기는 게 목적이 아닐 수도 있겠는데....'

저놈과 싸워서 이기는 게 아니라, 저놈에게서 도망쳐서 탈출하는 게 목적일 수도 있다.

그거라면 난이도가 높아도 가능하니까.

하지만.

"귀찮게 그럴 필요가 있나."

진현우는 코웃음을 치며 검을 쥐었다.

다른 건 몰라도 사기와 마기 같은 기운들은 진현우가 상대하기에 특화된 부분이다.

물러설 이유가 없었다.

- 호오, 도망치지 않는 것인가?

데모닉 리치가 웃으며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희미한 흥미로움과 자기 주제를 모르는 벌레를 향한 비웃음이 가득했다.

- 제물이 조금 부족해서 아쉬웠다만, 네놈이라면 그걸 보충하고도 남을 것 같군.

리치가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진현우를 비웃으면서, 정말로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짙은 사기가 사방으로 퍼졌다.

- 크우우우우....

그러자 늪지대의 아래에서부터 순식간에 수많은 언데드가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 숫자만 해도 수백.

리치는 지팡이로 허공을 가볍게 내리쳤다.

- 우우우웅!

지팡이 끝에서 검은 기운이 파동처럼 퍼지더니, 폐허 곳곳에 있던 기둥과 공명했다.

발밑에 거대한 마법진이 나타났다.

"음...!"

온몸이 짓눌리는 감각.

바닥에 펼쳐진 검은 마법진이 진현우에게 강력한 디버프를 부여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생명력과 마력이 마법진으로 흡수되는 감각이 느껴졌다.

- 캬아아아악!

- 제물을, 바쳐라...!

주변에 소환된 언데드들이 한층 강해진 것이 느껴졌다. 아마도 마법진의 효과일 터.

생명력과 마력 흡수, 거기에 적에게 디버프를 부여하면서 아군을 강화하는 마법진.

강력한 마법진이다. 하지만.

- 파아아앗!

진현우에게는 파훼할 방법이 있었다.

성역 전개. 그를 중심으로 빛이 터지듯이 퍼지더니 순식간에 거대한 영역이 전개됐다.

새하얀 빛으로 만들어진 성역이었다.

209화

시련의 층 (3)

성역 전개.

진현우를 중심으로 빛이 터지듯이 퍼지더니 순식간에 거대한 영역이 전개됐다.

새하얀 빛으로 만들어진 성역이었다.

- 화아악!

- 크흐, 키하아아악?!

- 비, 빛! 빛이...!

사방으로 전개된 성역은 언데드들을 집어삼켰다. 진현우의 신성으로 만들어진 성역이었기에 가진 신성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언데드들이 단번에 불타면서 녹아내렸다.

신성을 버티지 못한 것이다.

- 무슨, 윽, 우우욱?!

그건 데모닉 리치도 예외가 아니었다.

검은 오라 같은 것이 방어막처럼 놈을 감싸고 있었는데, 그 오라가 단번에 사라졌다.

놈의 뼈가 불타기 시작했다.

- 화르르륵!

- 어떻게, 이 정도 신성을!

여유롭기 그지없던 데모닉 리치의 태도가 단숨에 바뀌었다. 놈은 타들어 가는 자신의 몸을 경악한 눈으로 내려다봤다.

놈은 황급히 마법을 전개했다.

하지만.

- 크아아악!

신성이 놈이 마법을 전개하는 걸 막았다.

데모닉 리치의 뒤에 수많은 마법진이 나타났다가 신성력에 방해받아 허망히 사라졌다.

진현우의 성역은 데모닉 리치를 비롯한 언데드들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다.

"으, 으으... 이게 무슨...."

"여긴, 신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주변에 있던 광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을 잠식하던 새까만 액체, 마기가 배출되면서 광인들이 이성을 되찾기 시작했다.

진현우는 오랜만에 빛의 수호를 사용했다.

- 화아악!

자신과 주변 아군의 능력치를 향상하며, 사기에 대한 강한 저항력을 갖게 하는 버프.

광인들의 몸에 활력이 돌아왔다.

"주변에 있는 무기를 들어라! 저 리치를 죽여야지만 여기서 벗어날 수 있다!"

"리치? 저, 저놈은...!"

"사방이 언데드잖아!"

성역이 언데드들을 단숨에 불태웠지만, 영역 밖의 언데드들은 아직 남아 있었다.

이성을 되찾은 광인들은 불타서 사라진 언데드들이 남긴 무기들을 들었다.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것이다.

"펜리스!"

- 기분 나쁜 곳이로군.

진현우는 곧바로 펜리스를 소환했다.

마법진에서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늑대, 펜리스가 나타나자마자 곧바로 숨을 내뱉었다.

지독한 냉기가 늪지대를 얼렸다.

언데드들이 다가오지 못하게끔 한 것이다.

- 욱, 으윽... 크아아아아!

얼어붙은 늪지대. 그리고 펜리스가 만들어 낸 얼음 장벽 때문에 가로막힌 언데드들.

그 앞에서 데모닉 리치가 괴로워했다.

진현우는 바로 공간을 도약했다.

"잘난 척하더니 꼴이 좋군."

- 이놈...!

만약 데모닉 리치가 사람이었다면 그 얼굴이 분노와 수치로 붉게 물들었을 것이다.

이 성역 안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놈은 성역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진현우가 온갖 수단을 사용해서 놈을 가로막았다.

- 버러지 같은 놈이!

데모닉 리치에게로 검기가 쏟아졌다.

놈이 망토를 크게 펄럭였다. 검기가 검은 망토와 부딪치더니 흡수되듯이 사라졌다.

진현우는 오른손을 크게 펼쳤다.

- 크으으윽!

광휘가 사방을 밝혔다.

바로 앞에서 터진 광휘에 데모닉 리치가 휘청거렸고, 진현우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둘의 거리가 단숨에 좁혀졌다.

- 카드드득!

내지르는 칼날.

데모닉 리치는 그 공격을 지팡이로 막았다. 평소였다면 마법을 이용해서 막았겠지만, 지금은 성역 때문에 마법을 쓸 수 없는 상황.

끔찍한 수치심이 느껴졌다.

- 카아앙!

이 공격을 막을 수 없다는 것도 그러했다.

검이 리치의 지팡이를 갈랐다. 진현우는 지팡이를 쳐 내면서 리치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그 검이 리치의 심장을 겨누었다.

- 크하아악!

- 키아아아아!

검기가 리치의 심장을 꿰뚫으려는 순간, 언데드들이 진현우를 몸으로 들이박았다.

놈들의 몸이 단번에 타들어 갔다.

자신들의 주인이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성역에 불탈 걸 감수하고도 방해한 것이다.

- 커헉!

검의 궤적이 틀어졌다.

진현우는 곧바로 검을 바로 잡으면서 신성력을 담았다. 성흔을 머금은 칼날이 번뜩였다.

그 칼날이 리치의 팔을 베어 냈다.

- 화르륵!

- 우, 아아아악?!

성흔이 베인 부분에 새겨졌다.

그 부분이 불타면서 리치에게 디버프를 부여했다. 리치는 몸이 무거워짐을 느꼈다.

'죽는다. 이대로는...!'

데모닉 리치는 강렬한 위기감을 느꼈다.

이대로면 죽는다. 너무도 허망하게, 단순한 제물이라고 생각했던 인간에게.

그럴 수는 없다.

- 콰아아아앙!

데모닉 리치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놈에게서부터 검은 파동이 터지더니 사방에 있던 것들을 밀쳐 냈다. 동시에 등 뒤에 나타난 거대한 악마의 형상이 폭발을 일으켰다.

그 파동이 진현우의 몸을 밀쳐 냈다.

아니, 밀쳐 낼 예정이었다.

- ...!

진현우는 리치가 그럴 것이라는 걸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공간을 전이했다.

그의 신형이 파동을 넘어 리치에게 닿았다.

- 뭐, 어떻게....

강화된 전투 감각의 효과였다.

그 감각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견했기에 그보다 먼저 공간 전이를 쓸 수 있었다.

데모닉 리치는 황급히 손가락을 튕겼다. 수많은 촉수가 진현우를 묶으려고 했다.

- 가증스러운 신성력!

하지만 성역의 힘 때문에 촉수는 진현우에게 채 닿지도 못하고 사라졌다.

둘 사이의 거리가 단번에 좁혀졌다.

진현우의 주먹이 빛으로 휘감겼다.

- 크허어억...!

성멸권이 리치의 몸을 강타했다.

주먹이 내뿜는 성멸의 기운이 그 몸을 녹였다. 놈의 가슴께에 박힌 심장도 마찬가지였다.

리치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 이, 이대로는, 이대로느으은!

데모닉 리치는 마지막 발악을 시도했다.

놈의 몸에는 온갖 장신구가 붙어 있었다. 당연하지만 평범한 장신구들은 아니었다.

하나같이 강력한 아이템들이었다.

- 날 전이시켜라!

놈이 찬 목걸이가 빛을 내뿜더니 데모닉 리치의 바로 등 뒤에 포탈을 만들어 냈다.

'전이 마법.'

아마도 가진 아이템의 효과일 것이다. 성역과는 무관하게 놈의 앞에 포탈이 나타났다.

데모닉 리치가 포탈에 몸을 내던졌다.

- 이, 일단, 여길 벗어나야...!

"어딜 가려고?"

진현우가 땅을 가볍게 밟았다.

그러자 그의 신형이 공간을 가르더니 순식간에 데모닉 리치의 바로 등 뒤에 나타났다.

경악으로 흔들리는 동공의 불빛.

- 파아아앗!

"펜리스! 사람들을 지켜!"

데모닉 리치와 진현우가 함께 사라졌다.

주변의 풍경이 일변했다. 잠깐 눈을 깜빡이자 어딘지 모를 지하의 풍경이 나타났다.

사방에 시체가 가득했고, 불길한 형태의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기둥도.

- 벌레 같은 놈이...!

데모닉 리치가 이를 악물었다.

놈의 꼴은 엉망이었다. 팔은 날아가고, 상반신의 뼈는 거의 날아간 거나 다름없는 상태.

심장도 반쯤 녹아내린 상황이었다.

하지만 회복할 방법은 있다.

- 성물, 이 성물만 있다면....

방의 중심에는 오래된 왕관이 있었다.

원래는 아름다웠을 것 같은 낡은 왕관. 한때는 새하얬으나 지금은 새까맣게 오염된 상태였다. 리치가 오염시킨 결과물이었다.

리치는 성물에게 다가갔다.

"여길 노린 게 그 성물 때문이었나?"

그 앞에 수많은 화살이 쏟아졌다.

리치가 이를 갈면서 뒤를 돌아봤다. 진현우가 실피르를 쥔 채 성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물이 있는 신전이었나 본데... 성물에 담긴 힘을 이용해서 자신을 강화한 건가.'

곳곳에 있던 기둥이나, 리치가 말했던 제물도 저 성물을 오염시키기 위한 것이었을 터.

진현우는 검을 쥐었다.

- 감히, 나한테 이런 굴욕을!

데모닉 리치가 마법을 전개했다.

이곳은 성역이 없었기에 놈도 자유롭게 마법을 쓸 수 있었다. 허공에 수많은 마법진이 그려지면서 온갖 흑마법이 쏟아졌다.

'신성력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

성역을 펼칠 수 있을 정도가 아니다.

진현우가 검기로 마법들을 베어 내자 데모닉 리치도 그의 신성력이 고갈됐음을 눈치챘다.

놈의 입가가 비웃듯이 뒤틀렸다.

- 그래, 그 정도의 신성력을 무한하게 다룰 수 있을 리가 없지. 인간 따위가!

리치의 외팔이 움직였다.

지팡이가 땅을 내리찍자 사방에서 수많은 언데드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걸 본 진현우의 두 눈이 번뜩였다.

- 데모닉 리치의 스킬을 흉내 냅니다.

진현우는 데모닉 리치가 그랬던 것처럼 검으로 땅을 있는 힘껏 내리찍었다.

그러자 똑같은 언데드들이 소환되었다.

데모닉 리치가 소환한 것과 똑같은.

- 뭣...!

흉내 내기의 효과였다.

하지만 겉모습만 똑같을 뿐, 가진 힘은 데모닉 리치의 언데드에 비하면 한참 부족하다.

진현우는 그걸 다른 수단으로 보충했다.

- 쿠우웅!

거대한 깃발이 땅에 꽂혔다.

바닥에서부터 기어 나오는 폭군의 언데드들. 그걸 목도한 적들의 능력치가 감소했다.

당황한 리치가 뒷걸음질을 쳤다.

- 무슨, 그 정도의 신성력을 쓰면서 저 숫자의 언데드를 다룰 수 있다고?

경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진현우는 과부하를 사용했고, 그의 전신에서 흑뢰가 일렁거렸다. 그리고 곧바로 리치에게 돌진하려다가 어떤 아이템을 떠올렸다.

'저 성물도 복제할 수 있나?'

이전에 얻었던 형태 없는 자라는 아이템.

도플갱어한테서 얻은 감정 아이템인데, 상대가 가진 아이템을 복제하는 효과가 있다.

진현우는 구체를 꺼냈고.

- '형태 없는 자'를 사용합니다. 아이템의 효과로 '오염된 성물'을 복제합니다.

구체의 형태가 성물로 바뀌었다.

마기 때문에 새까맣게 오염된 성물. 그걸 본 리치가 경악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 뭐? 성물? 어떻게!

성물은 여기 있는데 또 하나의 성물이 있다.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진현우는 왕관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자.

- '오염된 성물'이 당신에게 힘을 부여합니다.... 짧은 시간 동안 마기가 대폭 상승합니다.

진현우에게서 마기가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그에게서 일렁거리던 흑뢰가 사방으로 뻗으면서 모든 걸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의 두 눈이 새까맣게 물들었다.

- 말도....

내면에 엄청난 힘이 느껴졌다.

진현우는 그 힘을 억누르지 않았다.

- 콰아아앙!

한 줄기 검은 섬광이 쏘아졌다.

그를 뒤따르듯 수많은 흑뢰가 사방으로 튀면서 리치를 지키려는 언데드들을 불태웠다.

리치는 눈을 부릅뜨며 마법을 일으켰다.

'성물! 성물로 복구할 수만 있다면!'

이번 공격만 막아 내면 된다.

리치는 가진 힘을 모두 일으켜 방어막을 전개했다. 섬광처럼 쏘아진 진현우의 검이 방어막과 부딪쳤고, 단번에 베어 냈다.

하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지금!'

리치는 동시에 영창한 마법을 이용해서 성물이 있는 곳까지 물러나려고 했다.

진현우의 왼손이 움찔거렸다.

- 푸우욱!

- 커헉...?!

그리고 리치의 심장이 꿰뚫렸다.

리치의 텅 빈 동공에서 흘러나오는 불길이 흔들렸다. 놈은 자신의 심장을 내려다봤다.

심장이 투명한 뭔가에 꿰뚫린 게 보였다.

- 무슨 짓을....

무형창.

투척하는 움직임조차 생략한 무형의 창이 리치의 반쯤 녹아내린 심장을 꿰뚫었다.

놈의 움직임이 완전히 멈췄다.

진현우는 천천히 놈에게로 다가갔고.

- 서걱!

데모닉 리치의 목을 베어 냈다.

검이 머금은 흑뢰가 리치의 몸을 완전히 삼켰고, 그 몸을 흔적도 없이 불태웠다.

처절한 비명이 지하를 가득 울렸다.

210화

사막에서의 생존 (1)

데모닉 리치가 죽었다.

진현우의 눈앞에 레벨이 올랐다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그걸 무시하면서 주변을 살폈다.

지하에 가득 나타났던 리치의 언데드들은 주인이 죽으면서 함께 사라진 상태였다.

- 그으으으....

- 우우....

남은 건 진현우의 언데드들뿐.

그는 언데드들에게 주변을 순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아마도 여기는 신전의 지하.

지하에 아직 적들이 있을 수도 있다.

- 흠, 흠. 장신구가 참 많구나.

리치가 여러 아이템을 드롭했다.

하나는 놈이 썼던 지팡이. 하지만 진현우의 성멸권에 휘말리면서 반으로 부러졌다.

나머지는 장신구나 재료 아이템들이었다.

그리고 딱 하나.

[녹아내린 심장 (일반)]

· 설명: 한때는 사기와 마기가 깃들어 있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녹아내린 심장이다.

· 착용 제한: 없음.

· 옵션: 없음.

* 강한 사념이 남아 있다.

사념이 담긴 아이템이 있었다.

망설일 이유가 없다. 진현우는 언데드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심장의 사념을 감정했다.

사념의 주인은 당연하지만 리치였다.

'리치의 정석 같은 놈이군.'

정석 같은 인생을 살아온 놈이었다.

흑마법사로 살다가 불로불사를 탐해서 리치가 되었고 거기서 더 강한 힘을 탐했다.

그런 놈의 눈에 들어온 것이 이 신전이었다. 놈은 계속 기회를 엿봤고, 바라던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않고 이 신전을 공격했다.

'그리고 성물을 얻었다....'

놈이 데모닉 리치가 된 과정이었다.

- 기억 감정에 성공했습니다.

- 악마와 계약한 리치의 사념이 가지고 있던 힘을 전승합니다. 녹아내린 심장 (일반)이 새로운 형태로 변화합니다.

- 특성 '악마의 오라 (S)'를 익혔습니다.

데모닉 리치의 사념은 바라는 게 없었다.

놈이 원했던 것은 불로불사. 하지만 죽은 지금에 와서는 이룰 수 없는 꿈에 불과하다.

그래서 무기력해진 것인지, 진현우가 힘을 가져가려는 것도 별 거부 없이 받아들였다.

'나쁠 건 없지.'

귀찮은 과정이 생략됐으니 오히려 잘됐다.

진현우는 특성을 확인했다.

· 악마의 오라 (S): 짙은 마기로 이루어진 오라를 내뿜어 소환한 언데드들을 강화한다. 가진 마기의 양에 따라 더욱 강해진다.

이때, 언데드들의 외견이 다소 변한다.

언데드를 강화하는 오라였다.

스킬이 아닌 특성이었기에 별다른 과정 없이 언데드를 소환하기만 하면 적용된다.

진현우는 주변의 언데드들을 봤다.

- 콰득, 콰지직!

- 그으으으...!

언데드들의 모습이 바뀌는 것이 보였다.

뼈의 형태가 더욱 흉측해졌고, 머리에는 하얀 뿔 같은 것들이 돋아났다. 일부는 등에 거대한 박쥐의 날개 같은 것들도 나타났다.

"기분 나쁘게 생겼네."

진현우는 그렇게 평가했다.

데모닉 리치가 소환했던 언데드들과 비슷한 형태였다. 놈이 가졌던 특성을 기억 감정으로 얻은 것이었으니 당연한 얘기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악마의 심장 (전설)]

· 설명: 원래는 라이프 베슬이었으나 악마와 계약하면서 변이했다. 언데드와 악마의 힘이 공존하고 있는 특수한 심장이다.

악마의 심장을 가까운 곳에 두면 착용할 필요 없이 주인에게 큰 힘을 준다.

· 착용 제한: 진현우 외 사용 불가.

· 옵션: 악마의 힘, 리치의 힘, 악마 소환.

* 악마의 힘: 마기를 이용한 스킬들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으며 위력이 70% 상승한다.

* 리치의 힘: 흑마법과 강령술의 효과가 크게 강화된다. 또한 언데드를 소환할 때 특수한 언데드가 소환될 확률이 추가된다.

* 악마 소환: 많은 양의 마기를 소모하여 심장에 깃든 악마를 소환할 수 있다.

감정 아이템이 남았다.

꽤 흥미로운 아이템이었다.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악마 소환이 특히 그러했다.

진현우는 아이템을 아공간에 넣었다.

'유용하게 쓸 수 있겠군.'

진현우는 성물을 챙기고 지상으로 향했다. 끝없이 내리던 비는 그친 상태였다.

지상에서는 광인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과는 다르게 이성을 되찾은 상태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정신이 든 모양이군요."

"예, 정말로 감사하게도...."

그들을 광기에 젖게끔 만들었던 마기가 사라지면서 원래 상태로 돌아온 것이다.

노인이 앞으로 나섰다.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여기는 신전입니다. 저희는 이곳을 관리하던 신도들이었지요."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광인들은 신전의 신도들이었다.

그들이 진현우에게 사정을 설명해 줬다.

"이곳은 성물을 보관하고, 관리하는 신전입니다. 일정 주기마다 기도식을 열어서 성물에 신성력을 보충하는 게 저희들의 일입니다."

"옛날부터 성물을 탐내던 자들이 공격해 오기는 했었습니다. 다만 그때는 저희를 도와주는 이들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없었지요."

왜 없어졌는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간단했다.

"멸망했습니다. 이 주변을 찾아온 재앙 때문에... 얼마 전에 왕국이 멸망했습니다."

이들을 도와주는 왕국이 있었는데, 세상에 재앙이 일어나면서 멸망했다는 모양이다.

예전부터 성물을 노렸던 데모닉 리치는 그걸 기회라 여기고 신전을 공격했던 것이고.

여기는 그대로 점령된 것이다.

"성물을 오염시켜서 자신의 힘을 강화할 용도로 사용했더군요. 저희는 그걸 위한 제물이 되었습니다. 저항하고 싶었지만...."

"마기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습니다."

무슨 사정인지는 알 것 같았다.

진현우는 지하에서 챙겨온 성물을 신도들에게 건넸다. 그들은 원래의 빛을 잃고 새까맣게 물든 성물을 안타까운 듯이 바라봤다.

"아아, 성물이...."

"복원할 수 있겠습니까?"

"잠시, 제게 주십시오."

노인은 성물을 들고는 이리저리 살폈다.

"마기로 인한 오염이 심합니다. 이걸 해결하는 건 다소 어려울 것 같... 으음...."

중얼거리던 노인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는 뭔가에 홀린 듯한 눈빛으로 오염된 성물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예, 예. 그리하겠습니다."

- 저 늙은이, 누구하고 얘기하는 것이냐?

노인은 성물에 대고 고개를 여러 번, 지극히 공손하게 숙였다. 그러더니 진현우에게 오염된 성물을 정중하게 되돌려 줬다.

진현우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이걸 왜 저한테 줍니까?"

"신전은 파괴됐습니다. 저희를 지켜 줄 왕국도 없지요. 이 성물의 오염을 제거하는 것은 저희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노인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그러니 귀하께서 가져가 주십시오. 언젠가 이 성물이 도움이 될 날이 있을 겁니다."

"제가요?"

"예. 그렇게 해 달라고 하시는군요."

그렇게 해 달라고 했다.

누가? 물어볼 것도 없었다. 아마도 이 성물의 주인, 누군지 모를 신이겠지.

진현우는 성물을 바라봤다.

"뭐, 주신다면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진현우는 성물을 챙겼다.

[오염된 성물 (신화)]

· 설명: 알 수 없는 신이 자신의 일부를 담은 왕관 형태의 성물이다. 지금은 마기로 오염됐기에 제 성능을 내지 못한다. 또한 제물로 사용됐기에 힘의 상당수를 소실했다.

· 착용 제한: 마기를 보유한 자.

· 옵션: 오염된 성물.

* 오염된 성물: 성물에 담겼었던 신성력을 마기의 형태로 발산한다. 성물의 힘을 빌릴 경우, 보유한 마기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무려 신화 등급 아이템이었다.

전생에서 접해 봤던 적이 있기는 하지만, 이번 생에서는 처음으로 얻은 등급이다.

하지만 등급만큼 유용한 아이템은 아니다.

'제대로 써먹으려면 정화를 해야겠는데.'

신화 등급의 아이템이지만 오염된 탓에 그 힘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는 상태.

게다가 힘의 상당수를 소실하기까지 했다.

복구하기 전까지는 써먹기 힘들 것이다.

'내 신성으로는....'

진현우는 오염된 성물을 붙잡고 가볍게 신성을 일으켰다. 그 순간, 그의 내면에 있던 신성력이 성물로 남김없이 빨려 들어갔다.

그의 몸이 절로 휘청거렸다.

- 인간, 왜 갑자기 휘청거리는 것이냐?

"아니, 잠깐 시험할 게 좀 있어서."

어림도 없었다.

필요한 신성력의 양도 많고, 마기로 오염된 상태였기에 당장은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해결 방법을 따로 찾아야 할 것이다.

'가능하면 마기도 흡수하고 싶은데.'

오염된 성물에 담긴 마기의 양이 심상치가 않다. 흡수할 수 있으면 큰 도움이 될 터.

아쉽게도 마핵으로는 흡수할 수가 없었다.

'따로 방법을 찾아야겠군.'

진현우는 성물을 아공간에 넣었다.

"일단 잘 간직하겠습니다."

"예, 그럼...."

"밖으로 안내해 드리죠."

신도들은 폐허가 된 신전에 머무는 것은 의미가 없으니 여길 벗어나야겠다고 말했다.

진현우는 그들을 신전 밖으로 인도했고.

- 13층을 공략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기다리던 메시지가 진현우를 반겼다.

* * *

진현우는 곧바로 14층으로 향했다.

14층은 넓은 사막이었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사막. 몬스터도, 뭣도 없었다.

이 층의 기믹은 지극히 간단했다.

- 메마른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해당 층은 가혹한 환경을 자랑하는 곳입니다. 이 환경에 적응하여 정해진 날짜까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생존하십시오.

- 30일 동안 생존해야 합니다.

서바이벌.

14층에 도착하자마자 진현우가 가진 아공간 같은 것들이 쓸 수 없게끔 봉인되었다.

거기에 가져온 물건들은 압수당하기까지.

- 해당 층에서는 외부에서 가져온 것들을 이용할 수 없습니다. 맨몸으로 사막을 누비며 생존하는 데 필요한 것들을 구하십시오.

- 가혹한 환경의 영향으로 모든 능력치가 감소합니다. 해당 층에 한해서 모든 특성과 스킬의 등급이 하락하며 약화됩니다.

- 가지고 있는 아이템 중 일부를 선택하여 사용할 수 있습니다. 선택하십시오.

"환상적이군."

장비들도 마찬가지였다.

진현우는 홀딱 벗은 자신의 몸을 봤다. 그의 곁에 있던 미호가 두 눈을 가렸다.

- 노출증이라도 생긴 것이냐?

"누가 벗고 싶어서 벗었냐? 불쌍해 보이면 네 털이라도 뽑아서 옷으로 만들어 주든가."

- 무, 무서운 소리를 태연스럽게 하는구나!

미호가 꼬리를 안으며 벌벌 떨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가지고 있는 아이템 중 일부는 가지고 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진현우는 세 가지 아이템을 선택했다.

- 부서진 검, 마창, 오염된 성물을 선택했습니다. 해당 아이템을 가지고 갈 수 있습니다.

부서진 검은 두고 갈 이유가 없다.

마창과 오염된 성물은 사막에 있는 몬스터들을 생각하면 쓸모가 있겠다 싶었다.

진현우는 세 가지 아이템을 챙겼다.

- 으음, 내가 가진 힘의 상당수가 봉인되었느니라. 지독한 의지가 느껴지는구나....

"날 고생시키겠다는 의지 말이지."

하지만 진현우의 표정은 덤덤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14층은 13층과는 다르게 전생과 내용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안다는 뜻이다.

'서쪽에 몬스터 부락이 있었지.'

거기로 가면 식량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아마 근처에 식수로 쓸 수 있는 곳도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문제가 있다면 몬스터 부락을 처리해야 이용할 수 있다는 건데....

"뭐, 그건 어려울 것도 없고."

- 으응?

몬스터를 처리하는 건 전문이다.

능력치나 스킬의 등급이 하락하기는 했지만, 몬스터들을 못 잡을 정도는 아니었다.

진현우는 영혼 동물을 소환했다.

"걷는 것보다는 나는 게 낫지."

- 키루루루!

비교적 눈에 덜 띄는 그리폰이었다.

진현우와 미호는 그리폰의 등 뒤에 올라탔고, 그리폰이 기다렸다는 듯이 날아올랐다.

"더럽게 덥군. 가자!"

그리폰이 사막의 하늘을 비행했다.

211화

사막에서의 생존 (2)

메마르고 황량한 사막.

그 서쪽에 거대한 부락이 존재했다. 부락은 흙을 쌓아서 만든 토벽으로 지켜지고 있었고, 내부에는 가죽으로 만든 텐트들이 보였다.

진현우는 부락의 상태를 살폈다.

'방어 시설이 꽤 튼튼하군.'

토벽 근처에 여러 함정 그리고 야만적인 수단으로 만든 방어 시설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너머에 부락의 거주민이 보였다.

- 흠, 어디서 많이 본 놈들이로구나.

부락에는 사막과 같은 비늘을 가진, 파충류의 특징을 가진 괴물들이 돌아다녔다.

2미터 이상 되는 키에 큰 덩치, 단단한 근육에 날카로운 발톱과 손톱을 가진 괴물들.

사막 리자드맨이다.

"더럽게 많네."

- 그러게나 말이다.

부락에 있는 리자드맨의 숫자가 족히 수백은 되어 보였다. 먹을 것도, 식수도 부족한 사막에서 저 정도 숫자의 부락이라니.

- 전사들이 사냥에서 돌아왔다! 환영해라!

- 북을 울려라!

분주하게 돌아다니던 사막 리자드맨들이 갑자기 서쪽을 보면서 북을 치기 시작했다.

서쪽에서 뭔가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사냥하다가 돌아온 놈들인가."

서쪽에서 한 무리의 사막 리자드맨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놈들은 하나같이 어깨에 괴물이나 짐승들의 사체를 짊어지고 있었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었다.

- 저건 사람인 것 같구나.

"어. 이미 죽은 것 같은데."

인간의 시체도 짊어지고 있었다.

아마 저 리자드맨들은 부락에서 사냥꾼 역할을 맡은 놈들이고, 어깨에 짊어진 것들은 이 근방을 돌아다니면서 사냥한 것이겠지.

저 인간들도 사냥당해서 죽은 것일 테고.

- 뭐, 몬스터들이잖느냐. 먹이도 드문 곳이니 인간을 먹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지.

"누가 뭐라고 하든?"

진현우는 시체의 옷차림을 유심히 봤다.

아마도 플레이어나 카오틱. 13층과는 다르게 14층에는 플레이어나 카오틱들이 있다. 그와 똑같이 사막에서 생존해야만 하는 이들.

그들 중 일부가 사냥당한 모양이다.

- 여기까지 올 정도면 꽤 실력이 있을 텐데, 생각보다 허망하게 당했구나.

"숫자가 많잖아. 너프도 당했고."

- 흠, 확실히 숫자가 많기는 하구나.

사냥을 나간 사막 리자드맨들의 숫자가 꽤 많다. 게다가 이 층에 진입한 플레이어나 카오틱은 여러 부분에서 너프를 당한 상황.

생각보다 쉽게 당할 수밖에 없다.

- 혼자서 처리할 생각이냐?

"못 할 건 없지. 근데 그 전에 저놈들을 이용해서 알아낼 게 있어. 그게 끝나면."

사막 리자드맨들을 처리할 방법은 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진현우가 여기로 온 이유.

'이 정도 규모의 부락을 만들어서 사는 놈들이다. 식수도 분명히 마련해 뒀을 거야.'

사막 리자드맨들을 추적해서, 놈들이 마련했거나 찾아 놓은 식수를 발견해야 한다.

뭐가 됐든 이 장소는 사막이다. 식수로 쓸 수 있는 물이 희귀한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일단 지켜봐야겠어.'

진현우는 부락이 훤히 보이는 곳에 몸을 숨긴 후, 놈들이 움직이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해가 저물고, 다시 해가 뜰 때쯤.

"야, 일어나. 가야 돼."

- 으히야아... 추, 춥구나아아....

사막 리자드맨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부는 장비를 갖추고 사냥하러 떠났고 일부는 커다란 항아리를 들고 어딘가로 향했다.

진현우는 몸을 동그랗게 만 채 자고 있던 미호를 깨웠고, 후자의 리자드맨들을 쫓았다.

- 크흐응, 저놈들은 어디로 가는 것이냐?

"아마도 식수가 있는 곳으로 가는 거겠지."

- 그러고 보니 항아리를 들고 있구나.

사막 리자드맨 10마리 정도가 항아리를 든 채 모래바람이 부는 사막을 걷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따라갔을까.

'동굴인가.'

사막 리자드맨들이 동굴에 도달했다.

주변 환경을 이용해서 잘 숨겨 놓은 동굴이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였다.

아마 마법도 써 둔 게 아닐까 싶었다.

- 안으로 들어가는구나.

"따라가야지."

사막 리자드맨들은 동굴의 입구를 잘 가리고 있던 돌을 치우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진현우는 조금 뒤에 놈들을 따라 들어갔다. 입구를 지나자 어두운 통로가 나타났다.

통로가 한둘이 아니라서 헤맬 수도 있었지만, 진현우에게는 사냥꾼 특성이 있었다.

'이쪽인 것 같은데....'

발자국을 쫓아 동굴 안쪽으로 들어갔다.

10분 정도 걸어가자 차가운 냉기와 습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사막 리자드맨들의 소리도.

- 호, 이건....

사막 리자드맨들을 쫓아서 도달한 곳은 동굴의 안쪽, 지하 호수가 있는 곳이었다.

지하수가 모여서 만들어진 호수일 것이다. 진현우가 쫓아왔던 사막 리자드맨들이 호수 근처에 모여서 물을 뜨고 있는 중이었다.

'역시.'

부락 근처에 지하수가 있었다.

수백 명 정도의 리자드맨이 있는 부락인데 근처에 식수가 없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식수가 있으니 부락을 만들었을 터.

'이 정도면 위치는 좋고.'

사막 리자드맨의 부락을 털면 식량도 넉넉하게 나올 것이다.

30일 동안 버티기에는 충분한 양일 터.

- 그럼 이제 어쩔 것이냐? 저 많은 놈을 혼자서 처리할 생각은 아닐 테고. 아까 못 할 건 없다고 하더니 정말로 그럴 생각이냐?

"아니, 나 혼자서는 못 해."

- 으응...?

미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능력치나 특성, 스킬까지 너프된 상황에서 저 정도 숫자를 상대로 혼자 싸우는 건 힘들다.

승리할 확률은 낮고, 만약 승리한다고 한들 그 후유증을 오랫동안 앓아야 할 터.

"그러니까 다른 놈을 이용해야지."

- 이용한다고?

14층의 목표는 생존.

당연하지만 플레이어가 생존하지 못하게끔 방해하는 기믹들이 가득하다.

그중 가장 대표적이면서, 가장 치명적인 위력을 가진 기믹이 바로 '추격'이다.

'플레이어가 한 거점에 오랫동안 머무르면 인근의 몬스터나 필드 보스가 찾아온다.'

플레이어들이 기껏 만들어 둔 아지트를 버리고 도망가게끔 만들기 위해서다.

아니면 맞서 싸우면서 다치게끔 만들거나.

진현우는 그걸 이용할 생각이었다.

'이 근방에 있는 필드 보스는....'

'모래 괴물'.

지하 깊은 곳에 서식하고 있는 놈인데, 자기 땅에 먹잇감이 나타나면 모습을 드러낸다.

그놈이라면 사막 리자드맨의 부락을 혼자서 파괴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 정도로 강한 놈이니까.

"한동안 고생 좀 해야겠군."

- 고생? 응? 뭔가 느낌이 안 좋구나. 그럼 나도 너와 같이 고생해야 한다는....

"그럼 혼자서 편한 곳에 있으려고?"

동굴 밖으로 나간 진현우는 그리폰을 소환했다. 그리고 하늘을 비행하면서 서쪽 곳곳의 지형을 유심히 관찰했다.

모래 괴물이 머무는 지형에는 특징이 있다.

그 특징을 찾기 위해서였다.

"저기군."

- 불안하구나, 불안해....

서쪽의 사막에 이상할 정도로 넓으면서 아무런 생명체도 없는 곳이 있었다. 그리고 곳곳에 '물어뜯긴' 흔적이 남은 바위가 보였다.

모래 괴물이 머무는 서식처다.

"한동안 이 근처에서 지내면 되겠네. 말동무가 있어서 외롭지는 않아서 다행이군."

- 난 말동무를 할 생각이 없느니라! 나한테 따뜻한 침낭과 먹을 것을 내놓거라!

"벌레나 잡아먹어."

진현우는 모래 괴물의 서식처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한동안 머무르기로 했다.

아마 이틀만 있으면 될 것이다.

그동안은 고생해야겠지만.

- 아흐야아아... 추워, 춥느니라....

진현우는 때를 기다렸다.

* * *

그렇게 이틀이 지났다.

진현우는 아무것도 없는 사막 한복판에서 더위와 추위를 견디면서 지냈다.

식량은 가끔씩 보이는 몬스터나 동물을 잡았고, 물은 동굴에서 길어 왔다.

'슬슬 움직일 때가 됐는데.'

모래 괴물은 한번 움직일 때 많은 식량을 섭취하고, 그 뒤에는 오랫동안 휴식을 취한다.

이틀 동안 놈의 모습은 전혀 보지 못했다.

- 인가아안... 네가 말한 그 괴물은 도대체 언제쯤 오는 것이냐.... 난 배가 고프니라!

"글쎄, 슬슬...."

움직일 때가 됐는데.

아까 속으로 했던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은 순간, 발밑의 땅이 크게 뒤흔들렸다.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그리폰!"

- 뭐, 뭐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냐!

진현우는 곧장 그리폰에 올라탔다.

그리폰이 날아오르는 순간, 커다란 굉음이 들리더니 바로 아래의 모래가 크게 갈라졌다.

그리고 그 모래 아래에서.

- 쿠아아아아아아!

- 히아아악!

거대한 괴물이 튀어나왔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흉측한 입이었다. 수많은 이빨이 박힌 커다란 입이 모래와 바위, 닿는 것들을 모조리 씹어 삼키고 있었다.

그 몸체의 크기만 해도 족히 수백 미터에 달했고, 놈의 피부에는 갑옷처럼 단단한 황색의 갑피가 빼곡하게 박혀 있었다.

- 무, 무, 무, 무엇이냐!

"뭐긴 뭐야, 모래 괴물이지. 날아!"

이 일대 지역의 필드 보스.

모래 괴물이었다. 놈이 흉측한 입을 쩌억 벌리면서 크게 숨을 삼켰다. 그러자 엄청난 흡입력이 진현우를 그대로 삼키려 했다.

"가! 빨리 움직여!"

- 캬루루루루!

지금 시각은 밤.

진현우는 영혼의 목걸이가 가진 효과, 달이 뜬 밤을 이용해서 그리폰을 강화했다.

그리폰이 놀라운 속도로 하늘을 날았다.

- 구아아아아아!

- 이, 인간! 놈이, 놈이 쫓아오고 있느니라!

"일부러 그러고 있는 거야!"

진현우는 그리폰의 목을 가볍게 당기면서 절묘하게 속도를 조절하고 있었다.

모래 괴물이 잡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포기하고 돌아가지는 않을 정도로.

그 정도의 거리만 유지하며 비행했다.

- 쿠아아아아아!

- 휘이익!

그러면서 화살을 쏘면서 모래 괴물을 공격했다. 놈을 더욱 자극하기 위함이었다.

분노에 찬 모래 괴물이 몸을 크게 털었다.

그러자 그 몸에서 수많은 모래 송곳이 만들어지더니 진현우와 그리폰을 향해 쏘아졌다.

- 카드드득!

진현우는 방패를 이용해서 모래 송곳들을 막아 내면서 전방을 확인했다.

멀지 않은 곳에 목적지가 보였다.

사막 리자드맨의 부락이.

"저 위로 가!"

- 키루루루!

그리폰은 속도를 높였다.

사막 리자드맨들도 바보는 아니었다. 하늘에서 커다란 형체가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놈들이 하늘을 향해 화살을 쏴 댔다.

"적이다!"

"저건... 새인가? 공격해라! 떨어트려!"

"주술사는 저주를 사용해라!"

온갖 공격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 공격이 닿는 일은 없었다. 진현우는 다가오는 공격들을 온 힘을 다해서 막아 냈고, 그리폰은 부락의 상공에 도달했다.

그리고.

- 쿠르르르!

"우, 우욱?! 땅이...!"

진현우를 쫓던 모래 괴물도.

부락의 땅이 갑자기 흔들렸다. 사막 리자드맨들이 그 지진에 반응하는 것보다 먼저 땅의 모래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 쿠아아아아아!

"우아아악?!"

"이, 이건...!"

모래가 먹히고 있었다.

순식간에 먹혀서 사라지는 모래. 그 아래에 수많은 이빨로 뒤덮인 커다란 입이 드러났다.

그 순간 사막 리자드맨은 깨달았다.

"모, 모래 괴물이다아아아!"

"뭐라고!"

자신들의 아래에 있는 괴물의 정체를.

사막을 자유롭게 오가면서 먹이를 사냥하는 폭군. 그 누구도 사냥할 엄두를 못 내는 괴물.

모래 괴물이 땅에서부터 솟구쳤다.

"캬아아악?!"

"사, 살려 줘! 빨려 들어...!"

그 위에 있던 수많은 사막 리자드맨 그리고 물건들을 탐욕스럽게 삼키면서.

모래 괴물이 부락에 우뚝 섰다.

212화

모래 괴물

모래 괴물.

서부 사막을 자유롭게 오가면서 먹이를 사냥하는 폭군. 자연재해나 다름없는 존재이기에, 그 누구도 놈에게 저항하지 못했다.

사막 리자드맨들도 마찬가지였다.

"모, 모래 괴물이 여기에는 왜! 이 근처는 저놈의 서식지가 아니지 않았나!"

"저, 전사들이여! 맞서 싸...!"

"맞서 싸우라고?"

일부 사막 리자드맨들은 무기를 들고 싸우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모래 괴물이 숨을 들이켜자 그 반경에 있던 모든 것이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텐트들도, 무기를 든 전사들도.

"안 돼! 모래 괴물은 신이다! 우리가 감히 대적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도망쳐라! 모두 도망쳐!"

"부락을 버려라!"

사막 리자드맨들은 도주를 선택했다.

모래 괴물을 상대로 싸워서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기에 모두 도망치려고 했지만.

- 쿠우웅!

"이, 이건...!"

"얼음벽?"

그때, 얼음벽이 세워졌다.

부락을 에워싸는 얼음벽이었다. 지독한 냉기가 사막 리자드맨들에게 스며들었다.

얼음벽 너머로 거대한 늑대가 보였다.

"어딜 도망가려고?"

진현우와 펜리스였다.

사막 리자드맨을 살려 둘 생각은 없다. 살려 뒀다가는 나중에 귀찮은 일이 생길 터.

여기서 다 처리해 둘 생각이었다.

"저, 저놈들이!"

"벽을 부숴라! 빨리 밖으로...!"

사막 리자드맨들은 황급히 얼음벽을 부수면서 바깥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걸 진현우가 가만 놔둘 리가 없었다.

- 쿠아아아아아!

진현우가 화살을 쏘아 냈다.

그가 쏜 화살은 모래 괴물의 미간을 정확히 타격했고, 놈이 분노한 채 그를 노렸다.

쩌억, 크게 벌어지는 입.

- 휘이이익!

"사, 살려...!"

사막 리자드맨들이 그대로 삼켜졌다.

모래 괴물은 진현우가 만든 얼음벽 내부를 누비면서 보이는 먹이란 먹이는 다 삼켰다.

진현우는 그 모습을 여유롭게 지켜봤다.

- 계약자, 이제 어떻게 할 건가? 저 모래 괴물을 상대하겠다는 건 아니겠지?

"그건 자살행위고."

진현우는 펜리스의 질문에 부정했다.

모래 괴물은 그조차도 승리를 감당하기 힘든 괴물이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놈이 도망칠 때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불리하면 모래로 숨어 버리는 놈인데.'

모래 안에 있을 때 모래 괴물의 속도는 몹시 빠르기에 쫓아가기도 힘들다.

그리고 상대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모래 괴물을 정면에서 잡기는 힘들다.'

놈의 갑피는 뛰어난 물리 저항력과 마법 저항력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웬만한 공격은 아예 통하지 않을 정도.

진현우라고 한들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딱 하나.

모래 괴물을 죽일 방법이 있다.

"그래도 죽이기는 해야지."

- 저 괴물을 죽이겠다? 어떻게 말인가?

"이렇게."

사막 리자드맨의 부락은 와해됐다.

거의 대부분의 리자드맨이 먹힌 상황. 진현우는 벽 위로 올라가 모래 괴물과 대면했다.

놈이 진현우의 존재를 인지했다.

- 계약자, 설마....

- 인간, 너 미쳤어?

"이따가 보자."

지독한 악취가 코를 스쳤다.

진현우는 입을 크게 벌린 모래 괴물을 바라보더니, 그 입속으로 몸을 내던졌다.

- 쿠아아아아아!

꿀꺽!

모래 괴물이 기다렸다는 듯이 진현우를 삼켰다. 뒤에서 펜리스와 미호가 경악하는 게 들렸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강한 압력이 그의 몸을 빨아들였다.

'느낌 한번 끔찍하네.'

끈적한 점막에 감싸인 기분.

진현우는 모래 괴물의 넓은 식도를 타고 흘러내려 갔고, 얼마 안 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 푸욱!

처음 느낀 것은 부유감이었다.

허공에 내던져진 기분. 진현우는 곧바로 자세를 가다듬으면서 땅에 착지했다.

그다음으로 느낀 건 습기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독한 악취가 코를 찔렀다.

"여기가 위장인가."

모래 괴물의 위장 속이었다.

너무도 어두워서 보이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진현우는 불을 밝혀 주변을 확인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점막으로 된, 노란 액체가 계속 흘러나오는 벽이었다.

"우, 우아아아악!"

"선조시여! 우리를 구원... 카흐악!"

그 액체가 위장에 있던 것들을 덮쳤다.

위장 속에는 진현우 외에 사막 리자드맨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노란 액체가 덮치자 놈들의 몸이 단번에 녹아내렸다.

산성 때문에 녹아내린 것이다.

"끔찍한 풍경이군."

진현우는 혀를 내둘렀다.

일부 사막 리자드맨은 탈출하기 위해서 벽이나 바닥을 마구 꿰뚫었다. 하지만 뚫기도 쉽지 않았을뿐더러, 뚫어도 금방 재생됐다.

"이, 이건... 감옥이잖아...."

"그냥 죽으란 말인가?"

사막 리자드맨이 의욕을 잃었다.

놈들의 정면에서 산성이 거대한 해일처럼 밀려들었고, 리자드맨들을 그대로 삼켰다.

살덩어리는 양분이 되어 녹아내렸다.

"이놈은 안 처먹는 것도 없나?"

모래 괴물의 위장은 텐트든, 모래든, 무엇이든 간에 남김없이 소화시키고 있었다.

놀라운 소화력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진현우도 그렇게 될 터.

'그전에 처리해야지.'

저 너머에서 산성의 해일이 다가온다.

그 전에 모래 괴물을 처리해야 한다. 하지만 평범한 방법으로는 생채기도 못 입힐 터.

그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마기.'

딱 하나, 방법이 있다.

바로 마기였다.

'마기는 생명체의 상극.'

지독한 마기는 닿는 것만으로도 신체를 오염시키고, 더 나아가서 부패시킨다.

지금의 진현우라면 가능하다.

성물이 있으니까.

- 오염된 성물의 힘을 빌립니다. 짧은 시간 동안 보유한 마기가 폭발적으로 늘어납니다.

진현우는 두 손에 무기를 쥐었다.

한 손에는 마창을, 한 손에는 선혈의 검을. 그리고 가진 마기를 한계치까지 끌어올렸다.

- 두근!

진현우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그를 중심으로 흑뢰가 날뛰기 시작했다. 진현우는 넘쳐흐르는 기운을 참지 않았다.

- 콰아아앙!

굉음과 함께 마창이 쏘아졌다.

흑뢰를 동반한 마창이 수십, 수백으로 나뉘었고 위장의 벽을 남김없이 관통했다.

흑뢰가 점막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 쿠아아아아악!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사방이 흔들렸다.

모래 괴물이 고통에 몸부림치는 탓이었다. 진현우는 곧바로 검을 높이 들어 올렸다.

놈의 위장에는 핏물이 가득했다.

사막 리자드맨들이 흘린 피였다.

- 충분한 피를 흡혈했습니다.

선혈의 검이 피를 한계치까지 흡혈했다.

진현우는 검을 힘껏 바닥에 내리꽂았다. 그 순간, 검이 흡혈한 피가 거대한 선혈의 파도가 되어 모래 괴물의 위장에 침투했다.

- 쿠르르르!

- 쿠하아아아악!

짙은 마기가 사방으로 퍼졌다.

진현우가 선 바닥이, 산성액이 흘러나오는 벽이 새까맣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마기에 잠식되고 있는 것이다.

- 푸시이이익!

그뿐만이 아니었다.

선혈의 검에는 적을 감염시켜 재생력을 약화시키는 디버프가 있었고, 선혈의 파도에는 닿은 물체를 부식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두 효과가 서로 맞물렸고.

- 구오오오오오...!

모래 괴물의 위장이 썩기 시작했다.

진현우는 남은 마기를 모조리 쏟아부은 후, 해일을 이용해 위장의 벽을 베어 냈다.

원래라면 금방 회복했겠지만 지금은 마기로 부식된 탓에 재생력을 크게 잃은 상황.

"나가면 좀 씻어야겠군."

진현우는 벽을 베어 내며 뛰쳐나갔다.

* * *

완전히 황폐해진 사막 리자드맨의 부락.

모래 괴물은 부락의 생명체들을 모조리 삼키면서 자신의 강함을 과시하는 중이었다.

펜리스와 미호는 그 광경을 지켜봤다.

- 그, 그러니까, 지금 인간이 저놈의 배 속에 들어가 있다는 것이냐? 그것도 자기 발로?

- 너도 조금 전에 봤지 않나.

- 보기야 했지! 믿을 수가 없어서 그렇지!

미호가 빼액 소리를 내질렀다.

제 발로 괴물에게 먹히는 미친X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 놈이 눈앞에 있을 줄이야.

펜리스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다만.

- 뭔가 뜻이 있을 거다. 기다리지.

- 으으으으음....

진현우가 뭔가 생각이 있기에 그랬을 거라 생각했고, 그렇기에 기다리기로 했다.

생각보다 그리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 쿠우욱?!

모래 괴물이 사막 리자드맨의 부락에 남은 생명체들을 모조리 삼킨 시점이었다.

놈의 움직임이 갑자기 멈췄다.

- 쿡, 크하아... 쿠아아아아악!

그러더니 갑자기 물가에 올라온 물고기처럼 펄떡거리면서 고통스러워하기 시작했다.

놈의 배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 늑대야, 저거... 뭔가 새까맣지 않느냐?

- 음, 썩어 가고 있군.

모래 괴물의 배가 새까맣게 물들었다.

배에서부터 시작된 검은 얼룩이 사방으로 퍼졌고, 놈의 살점이 부식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였다.

- 쿠하아아아악!

- 푸아악!

모래 괴물의 배가 갈라졌다. 그리고 그 사이로 한 남자가 요란스레 뛰쳐나왔다.

누구인지 물어볼 것도 없었다.

- 인간!

진현우였다.

두 손에는 창과 검을 쥔 채, 온몸을 모래 괴물의 피로 칠갑한 진현우가 튀어나왔다.

미호가 그에게 가다가 황급히 물러났다.

- 으윽! 악취가... 코가 썩을 것 같구나!

"나도 알아."

모래 괴물의 위장에 있었던 탓이다.

진현우는 자신의 몸에서 나는 악취를 느끼면서, 몸부림치는 모래 괴물을 노려봤다.

- 쿠아아아아!

"목청 한번 좋군."

마기의 효과는 훌륭했다.

모래 괴물의 위장에서부터 시작된 부식과 감염이 놈의 몸 전체로 퍼져 가고 있었다.

진현우는 검을 들었다.

'지금이면 검기도 먹히겠지.'

디버프의 효과로 모래 괴물의 갑피도 약해진 상황. 지금이라면 가능할 것이다.

진현우는 검기를 일으켰다.

- 콰르르르르!

- 크하...!

해일처럼 쏟아지는 검기가 모래 괴물을 사방에서 무자비하게 베어 넘겼다.

진현우는 땅을 박차며 검을 들었다.

그리고.

- 서걱!

모래 괴물의 목을 단번에 베어 냈다.

갑피는 아직도 꽤 단단했지만, 진현우의 검기로 충분히 베어 낼 수 있는 수준이었다.

놈의 머리가 천천히 기울어졌고.

- 콰아아앙!

"콜록!"

이내 땅에 추락했다.

사방을 뒤덮는 모래 먼지. 진현우는 기침하면서 모래 괴물을 확실하게 마무리했다.

-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 모든 스킬의 숙련도가 향상했습니다.

-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처음으로 모래 괴물을 처리할 것.

- 보상으로 전설 등급 칭호 [사막의 폭군 (효과: 모든 능력치 +20, 사막이나 모래 지대에 있을 때 모든 능력치 +30%.)]를 획득했습니다.

눈앞에 나타난 메시지들을 지워 냈다.

진현우는 얼굴에 묻은 모래 괴물의 피를 닦아 내면서 놈이 드롭한 아이템들을 살폈다.

그중에 하나 반가운 아이템이 있었다.

"이건...."

샛노란 구체였다.

진현우는 아이템의 정보를 확인했다.

[모래 괴물의 정수 (전설)]

- 설명: 서부 사막을 지배했던 폭군, 모래 괴물의 영혼이 담긴 정수다. '영혼 중재' 특성을 가진 이만이 사용할 수 있다.

모래 괴물의 정수였다.

영혼 중재를 사용하면 모래 괴물을 영혼 동물로서 소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 영혼 중재에 성공했습니다. '모래 괴물'이 소환 가능한 영혼 동물 목록에 추가됩니다.

* 주의: 해당 영혼 동물은 막대한 양의 마력을 소모합니다. 주의하십시오.

주의 사항까지 있는 걸 보니 소환할 때 어마어마한 양의 마력을 잡아먹는 모양이다.

거대한 지렁이처럼 생겨서 정수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잘됐네."

진현우는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213화

사막을 벗어나

사막 리자드맨의 부락은 폐허가 됐다.

생존자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남은 생존자는 진현우가 돌아다니면서 직접 처리했다.

굳이 살려 둘 이유가 없었다.

"생각보다 드롭된 아이템이 많네."

생존자들을 다 처리한 진현우는 모래 괴물이 드롭한 아이템들을 확인했다.

정수 외에도 여러 아이템이 있었다.

'대부분이 재료 아이템인 게 아쉽군.'

장비 아이템이 드롭된 건 없었다.

진현우는 주변의 구조물을 이용해서 가방을 만든 후, 드롭된 아이템들을 챙겼다.

아이템을 만드는 데 써야 할 거 같다.

"쓰읍, 이 고기... 짐승 고기가 맞겠지?"

- 계약자, 내가 냄새를 맡아 보마.

부락에는 고기 저장소가 있었다.

주술을 활용한 건지 냉기가 감도는 곳이었는데, 그 안에 각종 식량이 저장된 게 보였다.

진현우는 거기서 고기를 챙겼다.

- 음, 이것들은 짐승들의 것이 맞다.

"그럼 나머지는... 아니, 됐어. 말하지 마."

더 알고 싶지는 않았다.

진현우는 나머지 고기들을 처분한 다음, 부락에 있는 쓸 만한 텐트를 하나 챙겼다.

텐트를 어디에 세울지는 이미 정해 뒀다.

"여기가 딱이지."

- 흠, 동굴 근처로구나.

진현우는 식수가 있는 동굴 근처에 가죽 텐트를 세웠다. 원래는 사막 리자드맨들이 쓰던 것이지만, 놈들은 이제 다 죽었다.

이제 진현우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식량도 이 정도면 충분하고."

- 많이도 잡았구나....

진현우는 부락에서 챙겨 온 고기들을 동굴 안에 보관한 다음 꽁꽁 얼려 뒀다.

그중에는 리자드맨들의 고기도 있었다.

'얼려 뒀으니까 오래 먹을 수 있겠지.'

펜리스를 이용해서 확실하게 얼려 뒀다.

일정 시간마다 확인해야 하겠지만.

"이제 좀 편하게 쉬면서 지내 볼까."

여기서 버텨야 하는 기간은 총 30일.

다행인 건 이 층에 한해서는 탑 내부의 시간과 탑 바깥의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는 것.

그래서 마음 편하게 쉬기로 했다.

"때아닌 휴가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