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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154.

#친선 비무? (3)

서걱!

갈문천의 어깨에 미약한 혈선이 그어진다. 이에 급격히 안색이 어두워졌다.

"네놈... 절대 살려둬선 안 될 놈이구나."

"날 장호에 담그러 온 자객 주제에 새삼스레."

"크큭. 네놈이 쓸데없는 걸 알려고만 안 했어도 즉각 나서진 않았을 것이다. 네놈의 뒤부터 차근차근 조사했겠지."

"네 윗선은 켕기는 게 많은 모양이군. 하는 짓이 이리 음흉해서야."

"건방진 놈...."

갈문천이 서늘한 눈으로 좌우를 빠르게 훑었다.

이제 나무판자가 몇 개 남지 않았다.

이곳은 드넓은 호수인 장호의 한가운데.

이러다 자칫 잘못하면 과다출혈로 양패구상이다.

'어차피 네놈에 대한 분석은 끝났다. 이번엔 내 전력을 다해주마.'

본래라면 함부로 전력을 드러내면 안 되는 일.

하나 이곳엔 목격자도 없고, 산 자도 없다.

장이서만 없어져 주면 되는 일.

그러니까.

"크으으으으."

일순간 갈문천의 몸에서 진한 마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내 콰아앙! 폭발음이 치솟으며 그의 몸에서 위압적인 기운이 퍼져 나왔다.

그의 모습도 달라졌다.

붉은 힘줄이 전신을 휘감은 듯 울퉁불퉁하게 두드러졌고, 그의 배후엔 형형색색으로 공간이 뭉개졌다.

'저건...!'

그리고 이는 놀랍게도 장이서의 기억에 이미 있는 모습이었다.

'크큭, 지옥이나... 가라....'

사과도 없이 저주만 퍼붓고 가버린 도살방의 악귀.

바로 사씨 형제의 맏이, 사도철에게서 말이다!

"죽어라-!"

콰과과과과!

갈문천이 날아들자 엄청난 여파로 물살이 갈라지고, 그의 검은 휘몰아치는 거대한 독사처럼 빙그르르 돌며 쏘아졌다.

그야말로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

장이서는 이제야 깨달았다.

'사도철도 그렇고, 이자도 그렇고. 저 마공이 본연의 힘을 증폭시켜주는 것이구나!'

세상에 그런 마공이 뇌전법 말고도 또 있었을 줄이야.

그의 정체를 알고자 부러 시간을 끌었거늘.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것을 봐버렸다.

사도철과 갈문천.

그 어떤 인연도 없을 것 같은 이 두 사람이 연결되어 있다.

그중 짐작 가는 것은 딱 하나.

'도라옥.... 대체 거기 뭐가 있는 것이냐.'

장이서가 상념을 지우고 눈을 부릅떴다. 제게로 날아드는 갈문천의 검.

이건 봐주면서 맞이할 수준이 아니다. 전력을 다해야 한다.

『뇌전법(雷轉法) 불사독마공(不死毒魔功)』

파지지직!

검은색이 아닌 청록색의 뇌기가 전신을 휘감는다.

엄청난 기세로 날아들던 갈문천의 두 눈이 벼락처럼 떠지고, 회오리치며 날아들던 그의 연검을 향해.

『백뢰(白雷)』

장이서의 암기는 더 사납게 날뛰는 뱀이 되어 쏘아졌다.

천마의 기운이 직관적으로 관통하는 힘이라면, 독마의 기운은 변칙적이면서 주변까지 부식시키는 힘.

백뢰에 담긴 불사독은 주변 공기마저 중독시켜 일직선이 아닌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나선을 그려 나갔다.

그리고 갈문천의 연검을 독기 품은 백뢰가 뚫고 지나는 순간.

부스스스!

그의 연검은 앞에서부터 가루가 되어 사라져갔다.

'마, 말도 안 되는-!'

이윽고 그의 가슴에 백뢰가 박혔을 땐.

퍽!

"크아아아아아-!"

애처로운 비명과 함께 먹물이 번지듯 점차 먼지가 되어 바람과 함께 흩어졌다.

그리고 장이서는 몸에서 청록빛 뇌기가 사라질 때까지 그 어느 때보다도 독기 어린 시선으로 그의 마지막을 살폈다.

"후."

뒤이어 밀려오는 진한 한숨.

이리 잔혹한 마공이라니.... 완전 마인 다 됐다.

"어쨌든 살려두고 추궁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이미 어쩔 수 없는 일. 도라옥과 이공자. 그리고 갈문천과 사도철이라...."

아직 단서는 많다. 답해야 할 입도 많이 남았고.

그러니까.

"오늘 보내준 선물은 잊지 않고 답례하리다."

천천히 되갚아주면 되는 일.

물론 일단 약속 장소에 늦지 않으려면 이 장호부터 얼른 벗어나야겠지만 말이다.

* * *

- 마가(麻家) 연무장.

친선 비무 대회가 확정되고 주어진 일각의 시간.

마이신이 비무대에서 내려오자, 그의 앞에는 가주 마일성이 번천검객 단리영과 함께 마중 나와 있었다.

평소 침착하기로 유명한 단리영도 재수가 없지만, 늘 뱀을 품은 듯한 부친의 저 표정은 오래 보고 있기가 힘들다.

그래서 이 집구석에 조금도 있기 싫었던 것이지만.

뭐, 찾아온 용건은 예상이 갔다.

"쓸데없는 일을 벌였구나."

돌발 행동에 대한 문책. 애초에 그가 이 말도 안 되는 비무 대회를 승인해준 건 좌중을 먼저 신경 썼기 때문.

자식 간의 소소한 대결일 때야 실이 없는 것이지, 칠소궁과 마가의 대결로 번지면 얘기가 달라진다.

절대 져선 안 되는 싸움이 되는 것.

그리고 이처럼 예상 밖의 일은 마일성이 가장 싫어하는 전개다.

물론 그래서 마이신은 좋았다.

"재밌지 않습니까."

"유흥도 능력이 있어야 누릴 수 있는 것. 네가 그럴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착각이 심하구나. 네 식솔이라고 해봤자 내가 준 노군뿐이거늘. 이젠 그마저도 없지 않으냐."

마이신의 흐릿한 눈매에 진득한 살기가 서린다. 하나 상대는 가주 마일성. 눈 하나 깜짝 안 한다.

"넌 마가를 대표할 자신도, 능력도 없는 주제에 일을 벌인 것이다."

"...그래서요."

"네가 오늘 이긴다고 얻을 건 없겠지만, 패한다면 많은 걸 잃게 될 것이야."

"...이길 겁니다, 반드시. 그러니 기는 적당히 죽이시고 아버님 개들이나 좀 빌려주시지요. 마가의 수장답게."

"빌려 쓰는 대가는 클 것이다."

마이신과 마일성의 시선이 허공에서 사납게 얽히고설킨다.

실로 부자 관계라 믿기 힘든 대화법.

하나 이것이 마교 일장로 마일성의 방식이었다.

정(情)이 아닌 정(政)으로 기르는 것.

그에겐 모든 것이 정치였으니.

"뭐, 그건 추후 논의하면 될 일이고. 칠공자께서 제법 쓸만한 자를 거두어 왔더구나."

마일성이 건너편 구유를 살폈다. 이에 마이신은 힐긋 번천검객을 곁눈질하며 대꾸했다.

"대단해봤자 아버님 밑에서 짖어대는 개들만 하겠습니까. 그래봤자 한낱 마적일 뿐인데."

그래. 그것도 맞는 말.

하나.

"본교 수뇌들의 시선을 아무렇지 않게 견딜 수 있는 게 한낱 마적이라면. 그럼 본교가 썩은 것이겠지."

"...!"

마이신의 눈이 부릅떠지고,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저를 보는 멸시의 눈빛.

이건 반어법이다. 구유가 한낱 마적이 아니라는 뜻. 그리고 그를 한낱 마적으로 본 자신의 눈이 썩었다는 얘기다.

지독한 수치심에 이빨을 꽉 깨물고 말했다.

"무슨 상관입니까. 어차피 언젠간 죽여 없애야 할 자인데."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

"살려둬봤자 삼공녀만 좋은 일 아닙니까. 저들을 보십시오."

그의 말에 마일성은 삼공녀와 대공자를 번갈아 살폈다.

사실 그 둘은 무덤덤한 얼굴이다. 당연하다. 좌중이 있는 자리에선 쉬이 심기를 드러내지 않는 게 후계의 기본.

하나 보좌들은 달랐다.

나락은 지금의 상황을 안타까워했고, 유령마군은 섬찟했다.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관계 노선이 명확한 상황. 대공자의 편에 선 마일성 입장에선 구유가 적이라는 뜻이다.

"싹을 자르시지요. 좋은 기회 아닙니까."

마이신이 씨익 웃는다. 이에 마일성은 장고 끝에 볼일은 끝났다는 듯 몸을 돌려 가주석으로 걸어 나갔다.

단호히 한마디만을 남긴 채.

"마가칠객은 비무를 준비하라."

*

한편 반대편 칠소궁 측에선 암울함과 절망이 한가득했다.

정확히는 칠공자 마오가 그랬다.

"이건 뭔가 잘못됐어. 어떡하지? 상대가 마가칠객이라니. 이건 둘 중 하나야. 죽기 아니면 사망이라고!"

뭐가 다른 거지. 구유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진정해라. 아직 안 죽었으니."

"진정?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떠들지 마!"

"내 목숨이다."

"아, 그렇지. 미안...."

그야말로 정서 붕괴. 마오가 제 머리를 움켜쥐며 주저앉았다. 이에 구유가 담담히 물었다.

"저들에 대해 알려다오."

"마가칠객은... 정말 강해. 뭘 생각하든 그것보다 훨씬 더."

마오는 곰곰이 아는 대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마가칠객.

가주인 마일성을 따르는 최측근이자 마가의 대소사를 처리해주는 해결사들.

이는 모두 당대의 마일성이 직접 엄선한 자들로 각기 뛰어난 무예 실력은 기본이고, 고유의 세와 명성으로 천산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중 제일은 번천검객 단리영. 왜 번천인 줄 알아? 눈 깜짝할 사이에 하늘이 뒤집히기 때문이야. 무슨 말이냐고? 목이 잘려 데구루루 땅바닥을 구른다는 말이지."

마오가 고갤 돌려 힐긋 한 사내를 살핀다.

딱 봐도 무뚝뚝해 보이는 텁석부리의 중장년 사내.

겉보기엔 그저 녹봉이나 받아먹을 것 같은 고루한 인상이나 누구보다 마일성에게 총애받는 마가의 이인자였다.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얘기.

물론 외에도 염주와 가사를 걸친 금창악불(金槍惡佛) 풍지산.

활 든 대머리 독수마궁(毒手魔弓) 노구패.

청초한 미를 가진 쌍옥접(雙玉蝶) 곡수련.

딱 봐도 장사인 대력귀(大力鬼) 양두이.

밤톨만 한 신장의 무영신보(無影迅步) 거북조.

끝으로 흑라마권 탁하천까지.

어느 하나 만만한 이가 없다.

"그러니까 여기서 포기하자. 장이서 돌아오고 다시 생각해도 안 늦어. 굳이 우리끼리 모험하지 말자고."

"알았다."

"진짜?"

"그럼 나갈 순서를 정하도록 하지."

이 새끼 내 말 안 듣네.

"뭘 나가. 어딜 나가! 내 말 안 들었어?"

"들었다. 강하다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우리 또한 강하다."

"알지. 아는데. 저쪽은 일곱 명이잖아. 도대체 왜 이렇게 태평한데. 지금 이거 나만 이상한 거야? 목숨이 경각에 달린 일이라고! 우리한테 아주 불리한 상황이라니까?"

"알고 있다."

"그걸 아는 놈이...!"

"하지만 원래 우리는 유리한 전쟁을 해본 적이 없다."

"뭐...?"

돈 받고 전쟁터를 오가던 흉노족이다.

누가 그들의 목숨을 고려해 주겠는가. 매번 사지에 던져지던 게 부지기수였다.

그러니 상대가 누구든 아무 상관 없었다.

전쟁에선 그저 싸우고 또 싸우는 것만 생각할 뿐.

게다가....

"장이서가 그러더군. 때를 기다리라고. 그럼 기회는 반드시 올 거라고. 난 정치는 모른다. 하지만 지금이 그 기회라는 건 알겠다."

수뇌들의 표정, 숨결, 태도. 그 모든 것이 우리 안의 가축을 바라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게 무슨 뜻이겠는가.

그야말로 철저히 무시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장이서가 이걸 몰랐을까? 아니, 당연히 알았을 거다. 그런데 그가 오늘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 했다.

그 말인즉슨.

'오늘만큼은 숨기지 말고 전력을 다하라는 뜻.'

구유가 침착한 눈으로 당당하게 말했다.

"마가칠객이 그렇게 대단하다면 그럼 오히려 잘 됐다. 저들에게 칠소궁이 얼마나 강해졌는지를 보여주겠다."

"구유. 내 말 잘 들어. 이건 이길 수 있는 싸움...."

"상관없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어!"

"때론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들도 있다."

"그게 뭔데. 대체 여기서 뭐가 더 중요한데."

구유가 얕게 숨을 삼키고 말했다.

"네 자존심이다."

"뭐...?"

"널 우습게 보던 저들에게 보여주는 거다. 너의 검 칠무위가 얼마나 첨예하고, 강한지를. 함부로 봤다간 저들의 머리가 먼저 베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이젠 더 이상 당하기만 하는 멍청이가 아님을. 저들에게 똑똑히 알려주는 거다."

"...!"

"오늘은 그런 자리인 거다. 너에게도, 우리에게도."

마오의 두 눈이 급격히 흔들렸다.

155.

#친선 비무? (4)

잊고 있었다. 자신이 이곳에 왜 온 것인지를.

그동안 마이신에게 당했던 악연의 종지부를 찍기 위함이지 않았던가.

죽고 사는 건 그다음 문제.

구유는 지금 그걸 가르쳐주고 있는 거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넌 우리의 주인이다."

"구유...."

위풍당당한 구유와 칠무위를 바라보며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건 아마도 사선(死線)을 넘어 전쟁을 마주하는 전사들의 자세를 처음으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흔들리지 않는 굳건함.

싸우겠다는 확고함.

그리고 다시금 깨달았다.

"이 징그러운 것들...."

자신이 이고 가야 할 건 이들의 목숨이 아니라.

"좋아. 대신 딱 하나만 명심해...."

이들의 의지라는 것을. 그러니 그 의지를 구부러트릴 게 아니라.

더 높이 비상케 해줘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나가서 뒈지고 오면 나한테 진짜 뒈질 줄 알아. 알겠냐, 이 자식들아-!"

마오의 목청 터지는 외침에 관중인 수뇌들이 황당함에 쳐다보고, 칠무위는....

마오오오오오-!

맹수가 부르짖듯 더 커다란 외침으로 응답했다.

"미치겠네, 우리 주인."

「....」

과평이 피식 웃고, 아신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가지."

구유가 비무대 위로 올랐다.

그 어느 때보다도 투지를 불태우며.

"지금부터 칠소궁과 마가의 친선 비무 대회를 시작하겠소!"

지대호의 개전 소식이 울려 퍼졌다.

*

"야만인인가."

"흉노족 같군."

몸 하나에 머리 두 개. 칠장로 이두쌍마 양유와 양요가 칠무위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둘이 똑같이 생겼지만, 표정이 사나운 게 양유. 온화한 게 양요다.

본래 장로가 되기 전에 그들이 했던 일이 교외에서 인재를 데려오거나 신진 고수를 판별하고, 쓸만한 인재들을 기록해 두는 일이었다.

장이서를 데려온 장본인들이니 말 다 한 것.

그런 의미에서 칠무위의 등장은 흥미를 끌어내기 충분했다. 하지만....

"모처럼 출사표를 던졌는데 하필 상대가 마가칠객이라니."

"절반 이상은 관에 들어가겠지."

아쉽게도 큰 기대는 없었다. 어차피 오늘의 결과는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

그리고 이는 이두쌍마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심지어 구유의 실력을 아는 나락과 삼공녀 사해령도 마찬가지.

"흑라마권 탁하천이 선봉에 나서는군요."

"아래부터 순서대로 내보내려는 거겠지."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차라리 번천검객이 먼저 나왔다면 가능성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칠소궁 측에선 순서를 정하는 것부터 가장 큰 고비일 겁니다."

나락이 냉정히 현실을 짚었다. 그리고 그의 판단은 명확했다.

마가칠객은 모두가 일백마성에 들어가는 절세 고수들.

구유가 아무리 강하다 한들, 선두에 나서 마가칠객 모두를 꺾고 최강자인 번천검객과 싸운다는 건 자멸 행위에 가까운 일이었다.

어떻게든 앞에서 수하들이 최소 넷. 아니 솔직히 여섯은 맡아줘야 했다.

문제는....

'그사이 전원이 다 죽을 수도 있다. 그래도 마가칠객을 몇이나 쓰러트릴지는 미지수.'

한마디로 피해가 클 수밖에 없는 일. 하나 지금으로선 다른 방법이 없다.

한데.

"...!"

비무대를 지켜보던 나락과 사해령의 눈이 부릅떠졌다.

아니, 모두가 의문에 잠겼다.

"어째서...?"

이는 칠소궁 측에서 선봉으로 나선 이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우람한 근육에 붉은 눈동자.

구유다. 칠무위에서 수하들도 아닌 칠소궁 최강자인 그가 선봉으로 나온 것이다.

이건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최악의 대진표.

'장이서... 넌 지금 이 상황을 알고 있는 것이냐.'

사해령의 얼굴에 진한 근심이 서렸다.

*

구유의 등장에 당황한 건 수뇌들뿐만 아니라 마이신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생각이지?'

당연히 수하들부터 내보낼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야 승률이 단 일 할이라도 있을 테니까. 해서 자신들도 가장 약한 탁하천을 먼저 올린 것.

물론 상대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멍청함을 꾸짖기 위함도 있긴 했다.

하나 어쨌든.

자신들이 탁하천을 내보내는 걸 봤다면, 응당 수하들을 먼저 올리는 게 순리 아닌가.

심지어 눈앞에 보이는 그의 수하들만 자그마치 일백이다.

그들을 다 내보내면 아무리 마가칠객이라도 여럿은 지쳐 떨어지기 마련.

한데 수장이 먼저 나오겠다니.

물론 수하들을 아끼는 마음 때문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건 잔혹한 마교 수뇌부의 머리로는 즉각 도달하기 힘든 사고였다.

'매도 먼저 맞는 부류인가? 아니면 어차피 질 것 하나라도 꺾어서 자존심은 챙겨보시겠다?'

결국 지금 할 수 있는 생각은 여기까지가 한계.

마이신은 제 앞에 선 탁하천에게 지나가는 바람처럼 말을 건넸다.

"운이 좋구나.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이리 빨리 얻게 되었으니. 흔히 오는 기회는 아닐 거다. 두 번 올 기회도 아닐 거고."

알고 있다. 흑라마권의 입가가 비틀렸다.

"염려 마십시오. 저놈이 허장성세에 불과하다는 걸 반드시 눈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중앙으로 걸어 나가는 흑라마권 탁하천.

그리고 맞은편에선 구유가 다가온다.

마침내 한 달 만에 마주 선 두 사람.

흑라마권이 빠득 이를 갈며 먼저 입을 뗐다.

"쥐 죽은 듯이 지내라고 분명히 경고했을 텐데?"

"...."

"주목이라도 받고 싶었나? 한데 어쩌나. 그게 네놈이 오늘 여기서 죽는 이유인 것을."

"...."

"그래도 주제는 알아 다행이구나. 이리 먼저 죽겠다고 나온 걸 보면. 묻자. 왜 먼저 나온 것이냐."

그의 물음에 사이에 서 있던 지대호도 눈썹을 올렸다. 그도 궁금했다. 왜 그가 먼저 나온 것인지.

하나 구유는 별다른 말 없이 그저 뒤를 슬쩍 흘겼다.

'대장. 제게 맡겨주십시오.'

'아니, 아신 너는 빠져. 일대일은 내가 가장 약하니까 나부터 간다. 저쪽도 제일 만만한 새끼가 나왔잖아.'

사실 아신과 과평은 서로 먼저 나서겠다고 했었다. 아니, 외에도 칠무위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자신이 나가겠다고.

하나 구유는 이를 한마디로 일축했다.

'다음은 없다.'

이는 오만한 과신도, 무모한 대책도 아니었다.

수하들을 믿지 못해서도, 마가칠객을 과대평가해서도 아니었다.

이건 수많은 전장을 승리로 이끈 전사의 감이었다.

'과평이나 아신이라면 한둘을 상대할 순 있다. 하지만 저들이 원하는 건 우리의 죽음. 하나라도 잃는 순간 기세가 꺾이고, 마오의 대결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오늘의 주인공은 자신들이 아니다.

마오와 마이신의 승부였다.

자신들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그를 한없이 비춰주는 조역. 헛된 죽음으로 재를 뿌릴 순 없다.

이것이 바로 구유가 선봉에 나선 이유.

그러니까.

"이쪽 손이었던가."

구유가 척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이에 흑라마권의 고개가 갸우뚱 숙어진다.

설마 한 달 전 자신이 그랬듯 악력 대결이라도 하자는 것인가.

"크큭, 크하하하하! 네놈이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구나. 감히 이딴 식으로 날 도발해?"

"왜. 자신 없는가?"

없기는. 덥석! 흑라마권은 망설임 없이 구유의 내민 손을 붙잡았다.

"어디 재롱 한번 떨어보... 크악!"

털썩. 말을 다 하기도 전에 탁하천이 비명과 함께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에 귀빈석에 있던 관중들의 눈썹이 동시에 크게 올라갔다.

지금 대체 뭘 본 것인가.

구유는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으로 서 있고, 흑라마권은 옆구리에 화살 박힌 사람처럼 오만상을 찌푸린 채 무릎 꿇고 그의 손을 양손으로 붙잡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비굴해 보여 보는 이들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하나 타들어 가는 속내가 흑라마권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무, 무슨 힘이...!'

그는 비굴함을 느낄 새도 없이 머릿속이 고통으로 가득해졌다.

악력만 놓고 보면 마가칠객 중 대력귀와 금창악불을 제하면 자신이 세 번째로 강했다.

한데도 무용지물이었다. 그냥 짓눌리는 기운에 아무런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이미 손은 말라비틀어진 오징어처럼 쪼그라들었고, 이대로 더 가면 뼈까지 다 박살 날 기세.

"아, 아직이다! 큭... 아직 비무는 시작하지 않았다! 이건 반칙이란 말이다!"

결국 흑라마권은 최악의 수를 던졌다. 지대호에게 굴욕스러운 도움 요청을 보낸 것.

'저런 병신이 있나.'

'크큭, 무혈공 체면이 말이 아니군.'

수뇌부들 사이에서 한탄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이신은 얼굴이 푸르스름해졌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쨌든 주관을 맡은 지대호가 시작 신호를 주진 않았으니.

"음.... 물러서게."

결국 떨떠름한 기분으로 지대호가 싸움을 중재했다. 그로서도 이런 황당한 경우는 처음.

이에 구유가 손을 놓고 한 걸음을 물렸다.

"크윽...."

흑라마권은 풀어지지 않는 제 손을 주무르며 치욕을 삼켰다. 고통이 사그라들자 머릿속에 온통 욕지기가 박힌다.

'이 개 같은 새끼! 찢어 죽일 놈!'

얼굴은 부끄러움에 새빨개진 상태. 하나 그래도 괜찮다며 스스로를 달랬다. 어차피 싸움은 결과다.

이긴 놈이 웃는 거고, 진 놈은 우는 거다.

그러니까.

"시작하시오."

지대호가 신호탄을 쏘듯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파아앗!

그러자 동시에 흑라마권의 신형이 돌풍을 일으키며 쏘아졌다. 그의 독문무공인 흑마십팔권(黑魔十八拳)이다.

'실력은 확실하군.'

이를 가까이서 지켜보던 지대호의 눈매가 반짝였다.

이제야 비로소 진정한 비무가 시작된 것.

본디 그의 무공은 강하기도 하지만, 변칙적이면서도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연격이 특기였다.

그래서 그물처럼 빠져나갈 틈이 없다고 하여 붙여진 별호가 흑라마권.

'그에게 선공을 빼앗기면, 반격의 기회를 노리긴 쉽지 않지. 그의 무공을 본 적이 없다면 더더욱.'

지대호는 진중한 눈매로 선공을 빼앗긴 구유를 지그시 살폈다. 이제 어찌 나올 것인가.

한데 바로 그때.

"큭?!"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펼쳐졌다. 흑라마권의 무수한 주먹이 상대에게 닿기도 전에 앞으로 나온 구유의 발이 먼저 발등을 찍은 것.

그 덕에 일순 자세가 흐트러지고, 덥석! 흑라마권의 얼굴을 구유의 커다란 손이 뒤덮었다.

투두두둑!

뒤늦게 주먹들이 날아가 꽂히지만, 망가진 자세에 거리감까지 무너져 형편없는 애교 수준.

진짜 놀랄 일은 그다음이었다.

"자, 잠깐! 잡는 것도 허용이란 말은 듣지...!"

콰앙! 구유의 무자비한 손이 시끄럽다는 듯 그대로 바닥에 흑라마권을 내리꽂았다.

굉음이 어찌나 큰지 장원 담장을 넘어 밖에 모인 이들에게까지 닿았다.

마일성이 단단한 강옥까지 섞어 만든 비무대에 거미줄 같은 실금이 서렸으니 그 파괴력은 문답무용(問答無用)이다.

"...."

구유는 바닥에 내다 꽂은 손을 떼고 허리를 편 채 다시 우뚝 일어섰다.

흑라마권은 두 눈에 흰자위만 남긴 채 생사 불명이다.

장내는 정적에 휩싸였다.

코웃음 치던 칠장로도, 우려했던 사해령도, 무심히 지켜보던 가주 마일성도.

아니, 모두가 다 굳은 표정으로 침묵에 잠겼다.

'단 일격에....'

'흑라마권을 쓰러트렸다?'

생각지도 못한 대이변이 벌어졌다.

156.

#친선 비무? (5)

침묵 속에 술렁인다.

단순히 구유가 이긴 것에 놀란 게 아니었다.

이는 기세였다.

단 일격에 흑라마권 탁하천을 쓰러트리고, 우뚝 서서 저들을 바라보는 저 시선.

그건 딱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자신 있으면 와라.'

보고만 있어도 수뇌들의 눈매가 좁혀지고, 내기가 꿈틀거렸다.

걷잡을 수 없는 살기가 뿜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상대는 전장의 용.

수만 명의 살의도 견뎌냈던 그다.

그리고 구유는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지금 저들은 그저 관중일 뿐.

이곳에서 미쳐 날뛸 수 있는 건, 오직 비무대 위의 자신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칠소궁 승! 마가에서는 다음 상대를 준비해 주시오."

지대호의 외침이 흩날리고, 그제야 얼어붙었던 공기가 다시금 서서히 흐르기 시작했다.

마이신과 대공자는 두 눈에 불길이 서렸고, 이내 마가의 수하들이 달려와 흑라마권을 비무대 아래로 끌어 내렸다.

지대호는 그사이 구유를 힐긋 보며 생각했다.

'괴물 같은 녀석을 안으로 들였군. 이것도 장이서 자네가 한 일인가?'

몸이 아프다더니. 그 이유가 저들을 얻기 위함인 것이었다면, 백 번. 아니 천 번 이해하고도 남겠다.

흑라마권을 단 일격에 무력화시킬 괴력이라니.

하나 그것보다도 놀라운 건 한순간에 상대의 허를 찌른 움직임이었다.

그물망처럼 쏘아진 십팔 번의 연격에 현혹되지 않고, 단번에 발등을 찍어 흑라마권의 무공을 파훼했다.

이는 수라장을 수없이 헤쳐 온 이들도 쉽지 않은 일.

'우연인가?'

지금으로선 그렇게 생각하는 게 가장 합리적이었다. 이는 다른 수뇌들이 보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우연이야."

"운도 실력이니."

칠장로 이두쌍마 역시 그리 생각했고.

"어떻게 생각해?"

"초행자에겐 본래 천운이 따르는 법이지요."

무한성의 물음에 조양악도 그리 답했다.

그나마 진면목을 알아본 건 이미 그의 실력을 알고 있던 나락과 사해령뿐이었다.

'나락을 이긴 건 우연이 아니었구나.'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모두의 머릿속에 구유의 존재감이 깊이 각인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사이 마가 측에서 두 번째 무인이 비무대 위로 올라섰다.

웬만한 장정보다 머리 하나 작은 단신의 사내.

"제가 한번 나서보도록 하지요."

그림자가 그 움직임을 쫓아가지 못한다는 경신술의 대가.

무영신보 거북조였다.

'쌍옥접과 대력귀가 아니라 무영신보가 먼저 나섰다?'

지대호는 그의 등장에 고개를 끄덕이며 흥미진진한 눈빛을 보냈다.

그뿐 아니라 수뇌들도 모두 같은 반응이었다.

단순히 실력으로 치면 마가칠객에서 다음으로 쌍옥접 곡수련이나 대력귀 양두이가 나서야 할 텐데, 다다음 순번인 무영신보가 먼저 나선 것.

그 이유도 충분히 짐작이 갔다.

'거북조는 경공뿐만 아니라 보법에도 능통하다. 그라면 조금 전 구유의 움직임이 우연인지, 실력인지도 판가름 나겠지.'

지대호처럼 마이신도 궁금했던 것. 과연 구유의 진짜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말이다.

그렇게 모두의 기대 속에 두 사람이 마주 섰다.

지대호는 아까와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이번엔 인사 나눌 새도 없이 바로 손을 들어 올렸다.

"시작하시오!"

그렇게 마가칠객과 구유의 두 번째 대결이 시작되었다.

팟!

역시나 이번에도 먼저 움직인 건 마가 측이다.

다만 무영신보 거북조는 흑라마권처럼 무작정 덤벼드는 성급한 결정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타인보다도 신중한 편이었다.

'자네 같은 자들을 잘 알고 있네. 타고난 거력으로 힘이면 다 되는 줄 아는 자들.'

구유의 주변을 빙그르르 돌던 무영신보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한다. 그러자 어느새 수없이 많은 잔상이 남겨지기 시작했다.

'나왔군. 거북조의 다신보(多身步)!'

지대호의 눈매가 번뜩이고, 이를 지켜보던 이들도 한껏 집중했다.

"저게 뭐야. 뭐가 진짠데!"

마오는 제 눈을 박박 비비며 그의 신형을 좇았다. 하나 이젠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이었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이건 마치 수십 명의 거북조가 구유를 둥그렇게 둘러싼 형국이었다.

구유 역시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는지 두 손을 늘어트린 채 멍하니 이를 지켜볼 뿐이다.

이에 무영신보는 회심에 찬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솔직히 자네가 흑라마권을 쓰러트릴 줄은 생각 못 했네. 그 힘만큼은 인정해 주지. 하나 승부는 결단코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닐세. 내 오늘 하늘 위에 또 다른 하늘이 있음을 가르쳐 주겠네."

말을 마침과 동시에 기류가 돌변했다.

핑!

날렵한 음색과 함께 거뭇한 무언가가 구유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서걱!

이내 어깻죽지의 천이 찢어져 너풀거린다.

하나 이건 시작일 뿐. 비무대 위엔 시커먼 실선이 구유를 가로지르듯 계속해서 그어졌다.

"저건...!"

마오의 당황한 외침에 옆에서 웬 커다란 그림자가 입을 열었다.

"다신보에 이어 지금의 무영신보를 만들어준 또 하나의 비기이지요."

"엉큼한 호랑이!"

엉큼?!

"크흠!"

한껏 노려보는 영리한 호랑이 지대호다. 그가 어느새 비무대에서 내려와 옆에 우뚝 서 있었다. 무영신보의 다음 행동을 예측하고 미리 피신한 것.

"본래 무영신보는 선천적으로 작은 체구 탓에 숱한 괴롭힘을 당하고 자랐지요."

"뭔데, 갑자기. 하나도 안 궁금해. 누가 물어본 거야!"

"이에 참다못한 그는 결국 마을 사람들을 모두 없애버렸습니다. 그때가 고작 그의 나이 열세 살."

"뭐?!"

무영신보의 복수극은 제법 유명한 일화였다.

천산의 작은 산골 마을에서 자란 그는 친모가 죽으면서 태어난 조산아였다.

아비란 자는 어미 죽이고 나온 놈이라며 그를 막대했고, 주변에선 자라다 만 놈이라며 조롱하기 일쑤였다.

힘도 없고, 지켜줄 자도 없었던 또래보다 자그마한 아이.

그가 택한 건 슬픔도, 분노도 아닌 복수였다.

"무슨 수로 죽인 건데? 열세 살이면 지금보다 더 힘도 없고 작았을 거 아니야."

어느새 이야기에 빠져든 마오가 물었다. 이에 지대호는 바닥의 돌멩이를 주워 들고 말했다.

"바로 이겁니다."

"돌?!"

"타고난 돌팔매 실력과 지치지 않는 민첩한 두 다리!"

그랬다. 무영신보는 돌을 던져 맞추고, 쫓아오면 도망친 뒤 다시 돌을 던지고.... 무려 반나절에 걸쳐 마을 사람들을 모조리 쓰러트렸다.

"그럼 저 거뭇한 게...."

"흑영비도(黑影飛刀). 그의 절기이자 지금의 그를 본교 서열 69위까지 오르게 만든 원천이지요."

흑영비도.

이것이 바로 저 거뭇한 실선의 정체였다.

"그리고 한 번 걸려든 이상 이를 피해내기는...."

쐐애애액!

그 순간 흑영비도 하나가 비무대 밖으로 넘어온다. 그것도 하필 지대호가 있는 곳!

"엇!"

당황으로 물든 사이, 푹! 지대호가 이를 팔등으로 막아냈다.

황당해 바라보자 팔에 박힌 비도를 쑥 뽑아내곤 씨익 웃으며 마저 말을 이었다.

"쉽지 않을 겁니다."

아니, 무섭게 칼 맞고 왜 웃는 건데. 마오가 침을 꼴깍 삼켰다. 어쨌든 중요한 건 지금 상황이 매우 위험천만하다는 것 아닌가. 자칫하면 가만히 서서 당할 수도... 잠깐!

"피할 수 없다면 돌파하면 되잖아!"

마오가 지대호의 두꺼운 팔뚝을 이리저리 살폈다. 한데 아무리 봐도 피 한 방울 나온 게 전부다.

이 정도면 요혈만 피해 몸으로 막아내면 된다.

"호오."

지대호는 의외라는 듯 눈을 빛내며 제 턱을 어루만졌다. 왈패 같던 마오가 이젠 제법 무인의 티가 나기 때문.

하지만.

'무영비도 거북조의 진짜 무서움은 다신보도, 흑영비도도 아닌 마지막 세 번째.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하는 신중함이다.'

절대 생각처럼 그리 간단하지 않을 거라는 얘기. 만일 마오처럼 섣불리 판단하고 움직였다간 그의 심계에 도리어 큰 낭패를 볼 수도 있다.

흑라마권 때와 같은 우연은 절대 불가한 상황.

'과연 자네는 답을 찾을 수 있겠는가.'

지대호가 흥미진진한 눈으로 구유를 살폈다.

물론 이번에도 큰 기대는 없었다. 다만 한 가지 거슬리는 건 있었다.

힐긋 뒤를 살폈을 때, 칠무위가 시종일관 웃고 있었다는 점. 그것도 아주 여유롭게 말이다.

"헛!"

그리고 마침내.

구유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이 정도면 네놈도 슬슬 깨달았겠지.'

한편 무영신보는 흑영비도를 내던지며 생각했다.

'그 자리에서 벗어날 방법은 오직 돌파하는 것뿐이라는 것을.'

이는 놀랍게도 마오가 한 생각과 일치했다.

본래 아무리 빠른 것도 일정한 속도로 계속 보다 보면 느리게 느껴지는 법.

거기다 살짝씩 스치는 흑영비도의 위력 또한 분명히 파악했을 것이다.

충분히 견딜 수 있는 정도라는 것을.

이런 상황에서는 십중팔구 대부분이 똑같은 결론을 내렸다.

'육참골단. 살을 내어주고 뼈를 취하겠다고 말이다.'

특히 흑라마권을 일수에 쓰러트릴 정도의 강자라면 더더욱 그랬다.

수없이 많은 수라의 장을 거친 만큼 어느 정도 모험적이고 또 도전적인 자신감이 짙게 깔려 있기 때문.

하지만....

이는 모두 무영신보가 유도한 움직임이었다.

'곧 불나방처럼 달려들겠지. 하나 이건 모를 것이다.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진짜 비도가 숨어 있다는 것을 말이다. 후후후.'

바로 이것이었다. 지대호가 말했던 무영신보 거북조를 고수의 반열로 오르게 만든 신중함!

태생적 약골이기에 함정을 파놓고 상대를 사냥하는 바로 이 치밀함 말이다.

'자, 오거라!'

마침내 구유의 눈빛이 돌변하고, 발걸음이 내디뎌지는 그때.

"끝내 주마!"

팟!

무영신보의 품에서 기존 것보다 훨씬 더 단단하고 날카로운 암기가 쏘아져 나갔다.

분명 같은 모양이었지만, 내용은 달랐다.

암석도 뚫어버릴 정도의 강도와 첨예함을 지닌 진(眞) 흑영비도였다.

심지어 거침없이 날아가는 속도 또한 기존과는 비교가 안 됐다. 오히려 다른 비도들에 시야가 익숙해진 탓인지 다섯 배는 더 빠르게 느껴졌다.

'됐다!'

이에 무영신보가 승리를 확신하며 마지막 절망에 빠진 구유의 눈을 확인하려는 그 순간.

'어...?'

도저히 믿지 못할 모습이 두 눈에 담겼다.

'어째서...?'

그의 초점이 너무도 여유롭게 자신을 좇고 있던 것.

흑영비도도 아니고, 제 잔상들도 아닌.

진짜 자신을 말이다. 마치 진 흑영비도를 펼치는 순간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어진 다음 행보는 더더욱 경악이었다.

쉬쉬쉭!

자세를 한없이 낮춘 그가 앞서 던졌던 실낱같은 흑영비도를 모두 피해낸 것.

그리고 다음으로 날아든 진(眞) 흑영비도는....

핑그르르 돌아 낚아채고는 사형 선고를 내리듯 역으로 내던졌다.

푹!

그대로 발등에 꽂혀버리는 비도.

"큭?!"

무영신보는 당황함에 제 자리에 멈춘 상태로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 보았다.

한 손을 뻗은 채 저를 향해 야수처럼 달려드는 사내를.

콰아앙!

거북조의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그 뒤로 모두에게 보인 그의 모습은 흑라마권과 마찬가지로 머리부터 바닥에 내다 꽂혀 무력하게 기절해버린 패배자였다.

그리고 구유는 자리에서 일어나 태연하다 못해 무심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다음."

좌중이 또다시 침묵에 빠져드는 순간이었다.

157.

#친선 비무?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