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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화. 선택의 통로 (1)

순식간에 플레이어들을 처리한 진혁이 쌍룡검을 회수했다.

'나머지 광신도들은 알아서 처리해 주겠지.'

브레이커가 사라진 이상 광신도들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기껏해야 이가 나간 날붙이로 항전하는 게 고작일 터.

이제 남은 건 교주를 처리하는 것뿐이다.

'그럼, 길 안내를 맡길 한 명만 있으면 되겠군.'

혼자서도 찾아갈 수 있지만, 교주의 은신처가 열 곳이 넘다 보니 시간을 지체할 우려가 있었다.

'그건 내키지 않아.'

이런 피비린내 나는 곳은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는 게 답이다.

진혁이 적당히 주위를 물색했다.

오!

마침, 딱 눈에 들어오는 놈이 있다.

저 녀석. 관상부터가 천생 길잡이네.

광신도답지 않게 그나마 덜(?) 미쳐 보이기도 했고.

이곳에선 쉽게 찾아보기 힘든 인재였다.

'좋아, 너로 정했다.'

진혁이 재빨리 몸을 날려 순식간에 상대를 제압했다.

도망가는 데 정신이 온통 팔려 있던 터라 제압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쉬었다.

"죄, 죄송해요! 살려 주세요. 제발 살려 주세요. 죽...기 싫어."

단발머리를 한 소녀가 비명을 질렀다.

'이것 참.'

살짝 어깨를 눌렀을 뿐인데,

누가 들으면 팔이라도 하나 베어 버린 줄 알겠네.

"진정해. 얌전히만 있으면 죽이지 않을 테니까."

"저, 정말이요?"

"죽일 거였으면 이런 귀찮은 대화는 하지도 않았어."

감정 없이 던진 말.

하지만, 소녀한테 있어 이 말은 그 어떤 것보다 회유나 협박보다 강한 설득력을 지녔다.

진혁이 지금까지 보여 준 실력을 생각하면, 구구절절하게 말로 설명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대신, 거짓말을 하거나 허튼 수작을 부리면, 그걸로 끝이야."

길잡이는 길만 잘 안내하면 된다.

단지 그뿐이다.

"예. 알겠어요."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교주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나?"

"예."

적어도 쓸모 있다는 건 증명됐군.

교주의 은신처가 워낙 많아서 시간 낭비할 우려가 있었는데, 이걸로 그 염려는 덜 수 있게 됐다.

"이름은?"

"안드리아. 안드리아라고 불러 주세요."

"좋아. 안드리아. 나를 교주가 있는 곳까지 안내해라. 그럼 네 목숨을 보장해 주지. 아. 대답은 신중하게 해."

[Lv4 '염혼의 낙인'이 발동됩니다.]

"내가 말뿐인 약속은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화르륵!

진혁의 손끝으로부터 붉은색 화염이 일렁였다.

안드리아가 몸을 흠칫 떨었다. 그러나 아주 잠시뿐이었다.

"약속할게요."

이걸로 임시적인 계약이 맺어졌다.

배신하면 온몸이 산채로 타들어가는 불공정 계약이.

***

진혁은 안드리아의 안내를 따라 어두운 통로를 가로질렀다.

'12번째 석실로 가는군.'

혹시라도 시간을 끌거나 이상한 곳으로 안내하는 건 아닌가 생각했는데, 기우였던 모양이다.

아마 안드리아가 없었다면, 자신 역시 가장 보안이 잘되어 있는 7번째나 12번째 석실 중 하나를 고르려고 했었으니까.

그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겁이 많은 소녀가 어째서 광신도들과 함께하게 된 걸까 하는.

"너도 그 신인지 뭔지를 믿는 거냐?"

피와 제물을 원하는 마왕.

그리고 그를 부활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5층의 광신도들.

맹목을 넘어선 믿음이 없다면, 결코 함께할 수 없을 거다.

그러나 들려온 대답은 예상했던 것과는 달랐다.

"아뇨. 저는... 세상에 신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해요. 신이 있다면, 이토록 절망만 가득한 지옥을 내버려 둘 리가 없을 테니까요."

"그럼, 어째서 교주를 따르는 건데?"

"제가 선택한 게 아니에요. 전 팔려왔거든요."

"팔려왔다고?"

"예. 버림받은 거죠. 가장 믿어야 할 가족으로부터."

안드리아가 죽은 눈동자로 중얼거렸다.

'그래서 이곳에 있던 거였나.'

광산, 검투장, 정신병동 등 5층에 흩어진 장소들은 하나같이 열악한 환경을 갖고 있었다.

당연히 돈 몇 푼에 가족을 버리는 일도 비일비재할 수밖에.

진혁이 쓰게 입맛을 다셨다.

'이제 보니 꽤나 안타까운 사연을 갖고 있었네.'

시스템은 말했다.

악인을 죽일 경우 0.1 적응형 스탯을 주겠다고.

그렇다면 과연, 타의에 의해 팔려온 방관자도 악인에 속할까?

그에 대한 대답을 알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하지만....

진혁은 그 답을 찾을 생각을 접어 뒀다.

"이런 말을 해도 별 위로는 안 되겠지만, 나도 너랑 비슷해. 태어나자마자 고아원에 버려져서 홀로 자랐거든."

고독과 절망 속.

너무 이른 나이에 현실을 배워야만 했다.

"근데, 부모를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하고 자기 자신을 원망해 봤자 바뀌는 건 없어."

대신 그 시간에 할 수 있는 걸 하려고 했지.

BJ로서 썩 재능은 없었지만.

적어도 빈곤을 이유로 시청자들에게 후원을 강요하진 않았다.

자신이 노력한 만큼만, 시청자들이 원해서 주는 만큼만 받는 걸로 족했으니까.

"물론, 네가 처한 상황이 나보단 훨씬 더 암울하긴 해. 나야 뭐, 말 한 번 잘못하면 제물로 바쳐지거나 하진 않았으니."

알고 있다. 둘 사이가 결코 같지 않다는 것쯤은.

그러니.

"교주를 죽이고 교단을 무너뜨려 줄게. 다시는 누군가 널 죽이려고 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세상 다 산 것 같은 표정은 좀 그만 지어라. 보는 내가 우울해지려고 하니까."

"...."

안드리아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설마, 이렇게까지 말해 줄 거라곤 미처 몰랐다는 표정이다.

"뭘 그렇게 보냐?"

"아뇨. 그렇게 말해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하지만, 교주님... 아니 교주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해요. 이상한 힘을 사용하거든요."

"알고 있어."

"예?"

"교주가 갖고 있는 힘도. 그걸 어떻게 하면 쓰러뜨릴 수 있을지도. 전부 알고 있다고."

진혁이 피식 웃었다.

진지함과는 동떨어진, 너무나 가벼운 웃음이다.

그런데도 왜일까?

두근! 두근! 두근!

안드리아의 심장은 묘하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마치, 평생을 걸어왔던 캄캄한 길에 작은 빛이 보이기라도 한 것처럼.

절망 속에서 몸부림 쳐왔던 소녀의 마음에 작은 불꽃이 일어났다.

이후에 둘 사이에 대화는 없었다.

고용인과 길잡이. 그 두 가지 역할에만 충실했다.

그렇게 몇 분을 걸었을까?

도착한 곳은 검은색 철문이 굳게 닫혀 있는 장소였다.

"여기예요."

안드리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래, 고생했어."

진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구를 가로막고 있는 문을 살폈다.

철문의 표면에는 피로 그려진 룬어들이 가득했다.

'안쪽에 펼쳐져 있는 허상 결계를 유지하기 위한 술식이로군.'

들어올 테면 얼마든지 들어와라 이건가?

'재밌네.'

진혁이 곧바로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바로 그 순간.

쿠쿠쿠쿵!

두꺼운 철문이 열렸다.

***

['선택의 통로'에 입장하셨습니다.]

[도전자는 2명입니다.]

엄청난 양의 녹슨 열쇠들이 가득 차 있는 방.

이곳이 바로 선택의 통로의 첫 번째 관문이다.

"여, 여기는...."

안드리아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당황스러운 거겠지.

갑자기 보이는 모든 풍경이 바뀌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진혁이 안드리아를 안심시켰다.

그때였다.

치지지직!

잡음과 함께 화면에 흰색 탈을 쓴 인형이 나타났다.

붉은색 립스틱으로 양 볼에 빙글빙글 문양을 그려 넣은 게 꽤나 인상적이다.

마치, 다음에 나올 대사가 'I want to play game'일 것만 같달까?

[이곳에 잘 왔다. 산제물이여. 나는 교주님을 모시는 발세테르라고 한다. 흔히 '진행자'라는 이명으로 불리고 있지.]

"응? 발냄새가 테러 수준이라고?"

[이이익! 발냄새가 아니라 발세테르란 말이다! 발세테르!]

왠지 말할수록 더 오해의 소지가 넘치는 것 같은데.

"이름 한번 기억하기 어렵네. 그냥 발냄새라고 할게."

진혁이 귀찮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크윽. 감히, 나를 화나게 한 걸 후회하게 해 주지. 이곳이 왜 '선택의 통로'라고 불리는지 아나? 바로 생과 사를 가리는 선택을 해야만 다음으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네놈의 건방진 행동 때문에 나는 최소한의 말만 할 거다. 반드시 이곳에서 뼈를 묻게 만들어 주겠단 말이다!]

"으하하암."

진혁이 길게 하품을 했다.

아니, 진심으로.

왜 이런 곳에 있는 놈들은 묻지도 않았는데, 이상한 헛소리를 줄줄 읊어대는 걸까?

낯선 곳에 오면 뉴비들처럼 꺅꺅대면서 작은 정보에도 귀를 기울여 주기라도 기대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건 진혁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됐다. 됐다고! 이제 게임을 시작하지. 이 방안에 열쇠를 감춰 놨다. 제한 시간은 단, 5분. 그 안에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찾지 못하면 네놈들은 사방에서 밀려오는 벽에 으깨질 것이다!]

발냄새의 엄포와 함께.

쿠쿠쿠쿠쿵!

갑자기 사방에 있던 벽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화면에 제한 시간을 알리는 타이머가 작동했다.

거침없이 좁혀 오는 벽들.

열쇠를 찾지 못한다면, 녀석의 말대로 꽤나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열쇠들 속에서 진짜 열쇠를 찾는 건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것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푸하하! 지금이라도 엎드려 빌어라. 그렇다면 진짜 열쇠를 고를 수 있는 힌트 정도는 줄 수 있으니까.]

발냄새가 광소를 터뜨렸다.

그런데.

"여깄네."

진혁이 열쇠 더미 사이에서 한 개를 골랐다.

[웃기지 마라. 아무거나 고른 거겠....]

철컹!

문이 열렸다.

[어, 어떻게...?]

두 눈이 터질 듯이 팽창한 발냄새가 화면을 움켜잡았다.

거, 캠에서 얼굴 좀 떼라.

가까이서 보니까 와꾸 한번 살벌하네.

"대충 찍었어."

[뭐, 뭐라고!? 이 많은 것 중에서 찍었다니. 그걸 믿으라고 한 소리냐?]

"믿기 싫음 말고."

발냄새가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당황하는 동안 진혁과 안드리아는 두 번째 관문에 입장했다.

이번에는 투명한 유리 주사기가 잔뜩 있는 방이었다.

바로 그때.

푸슉!

벽에 있던 환풍구에서 하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연기는 곧 방 안을 가득 채웠다.

[후후. 방금 너희들이 마신 연기는 시간이 지나면 혈관이 모조리 녹아 버리는 극독이다.]

어느새 평정을 회복한 발냄새가 입을 열었다.

"도, 독이라고요?"

안드리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렇다고 하네."

반면, 진혁은 심드렁한 얼굴로 맞장구쳐 줬다.

[주사기 안에는 각종 약들이 들어 있다. 그 중에 하나는 너희에게 두 번째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줄 테지만, 나머지 주사기 안에는 강산성의 독약이 들어있지. 삶인가 죽음인가. 선택하는 건 오직 너희에게 달려 있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서른 개의 주사기들.

이 중에 단 하나만이 독을 해독할 수 있는 해독제다. 나머지는 꽂는 즉시 처참한 몰골로 죽게 되는 독약들이고.

[힌트를 하나 주자면....]

"필요 없어."

진혁이 망설임 없이 주사기 하나를 골라 팔에 꽂았다.

쭈욱!

액체가 몸속으로 들어갔다.

[야이 새꺄. 힌트 좀 듣고 나서 골라!]

결국, 참다못한 발냄새가 욕설을 내뱉었다.

91화 선택의 통로 (2)

"너도 남아 있는 거 주사해. 우리가 마신 건 기체형 독이라 해독제 없으면 죽는다."

진혁이 안드리에게 액체가 반쯤 남아 있는 주사기를 건넸다.

"예? 예. 예."

안드리아가 토끼눈을 든 채 주사기를 받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자신의 팔에 주사했다.

'이, 이럴 수가....'

정말이다.

조금 전까진 혈관이 조금씩 간지러워지기 시작했는데, 약을 주입한 순간 모든 게 씻은 듯 사라졌다.

안드리아가 진혁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대체 뭐 하는 사람일까?'

처음엔 그저 두려운 존재였다.

압도적인 힘으로 신의 대리자들을 죽이고 신도들까지 쓸어 버렸으니까.

하지만, 대화를 하면서 두려움은 조금씩 사라졌고. 지금 와서는 오히려 호기심이 솟구쳤다.

상대에 대해서 조금 더 알고 싶다는 그런 호기심이.

게다가.

'단순히 강하기만 한 게 아니야.'

안드리아 역시 선택의 통로에 관한 소문 정도는 들어본 적이 있었다.

이곳에 들어간 자 중에 살아서 나온 사람은 없다고.

수많은 선택에 방황하다가 죽을 뿐이라고.

그러나 이 남자는 그 모든 걸 비웃기라도 하듯 관문들을 순식간에 돌파해 버렸다.

어떻게 이곳까지 왔는지도 모를 정도로 빠르게 말이다.

격이 다른 무력과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여유. 마지막으로 알고 있는 정보들을 통해 결과를 만들어내는 능력까지.

모든 게 보면서도 믿기 힘든 일들이었다.

안드리아의 동공이 미미하게 떨렸다.

'이 사람이라면....'

어쩌면 정말로 교주를 죽이고 지옥 같았던 삶을 끝내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뭐 해? 가야지?"

"네? 네!"

안드리아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쿠쿠쿵!

곧바로 세 번째 관문이 열렸다.

이번 방은 이전까지와 달리 꽤나 심플했다.

중앙에 보이는 의자와 그 앞에 설치된 검은색 레버. 마지막으로 레버를 향해 뻗어지는 파이프가 보였다.

[후우. 세 번째 관문은....]

발냄새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의욕이 꽤나 떨어졌는지 목소리에서 힘이 하나도 없었다.

"힘내."

[뭐?]

"넌 5층 최고의 발냄... 아니, 관리자잖아. 우울해하지 말고 힘내서 설명하라고. 이번에는 힌트도 듣고 나서 선택해 줄 테니까."

탑에 있는 몬스터들까지 걱정해 주는 모습.

이것이야말로 진정 고인물이 추구해야 하는 방향이 아닐까?

진혁은 스스로 대견했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 모습을 봐야 하는 발냄새로선 억장이 전부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좋다. 세 번째 관문은 바로 '자기 희생'이다. 보다시피 의자에 앉은 한 명이 레버를 당겨야만 다음 관문으로 가는 문이 열리게 되어 있지.]

"앉아서 레버만 당기면 된다 이거죠?"

생각보다 간단한 조건에 안드리아가 반색했다.

[성급히 좋아하기 전에 한 가지 명심해라. 레버를 당기는 순간, 바로 앞에 있는 파이프에서 불길이 치솟을 거다. 레버를 당기는 손을 천천히 태워 버리게 되어 있지.]

의자에 있는 구속구의 특성상 화염을 피할 수 있는 방법 따위는 없다.

자기 자신을 태워야만 열리는 문.

그야 말로 '자기 희생'이란 테마에 걸맞은 관문이었다.

"그럴 수가...."

안드리아가 말을 더듬었다. 이번만큼은 쉽게 빠져나갈 수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짝! 짝! 짝!

"이야. 자기 희생! 멋진 말이지. 그래서 힌트는 뭔데?"

진혁이 손뼉을 치며 너스레를 떨었다.

[힌트는... 반드시 자기 자신을 희생시키진 않아도 된다는 거다. 너라면, 무슨 뜻인지 눈치 챘겠지?]

"그러니까. 자기가 다치기 싫으면 다른 사람을 억지로 저기에 앉히고 레버를 당기게 시키면 된다 이거네?"

[바로 그거다.]

겉으로는 자기 희생이라고 했지만, 다른 사람을 강제로 앉힐 수만 있다면 자신은 상처 하나 없이 탈출할 수 있는 구조다.

흠칫하고.

안드리아의 몸이 가늘게 떨었다.

둘 중에 하나가 희생해야 할 경우 그 대상이 누구인지는 너무나 뻔했으니까.

하지만, 진혁은 이번에도 망설임 없이 의자에 앉았다.

구속구를 차고 레버에 손을 갖다 댔다.

[뭐냐? 본인이 희생할 생각이었나? 그렇게 안 봤는데, 의외로구나.]

응?

"갑자기 무슨 희생?"

미안하지만, 아직 마도서의 발동 시간이 3분 정도 남았거든.

다시 말해.

'스킬'을 사용할 수 있다는 소리다.

[Lv8 '빙하조형(氷河造形)'이 발동됩니다!]

진혁의 손끝에서 나온 냉기가 파이프를 통째로 얼려 버렸다.

철컹!

곧바로 레버를 당기자.

쿠쿠쿠쿠!

격한 진동과 함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손을 태워 버려야 할 불은 나오지 않았다.

[....]

할 말을 잃어버린 발냄새가 화면 너머에서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이거,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정지 화면이라고 착각할 지도 모르겠는데?

"죄, 죄송해요."

안드리아가 발냄새를 향해 꾸벅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총총걸음으로 다음 관문을 향해 이동했다.

진혁 역시 안쓰러운 표정으로 혀를 찼다.

그러게 상대를 좀 가려 가면서 상대했어야지.

'하필이면 만나도 나를 만나냐.'

그래도 너무 좌절하거나 자학하진 마라.

해가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지듯이, 이런 결과가 나오리라는 건 예정되어 있던 거니까.

***

선택의 통로에 있는 함정들은 총 일곱 개.

하지만, 네 번째 관문과 다섯 번째 관문 역시 돌파 당했다.

너무나 허무하게 말이다.

"이런 거 말고 좀 참신한 거 없어? 심장 쫄깃하고 등에 땀이 맺히는. 그런 게 있었으면 좋겠는데?"

진혁이 따분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빨리 클리어하는 것도 좋지만, 뭐랄까?

조금 더 자극을 즐기고 싶다고 해야 하나?

찌들대로 찌들어 있는 고인물의 DNA들이 헬 난이도를 요구해 왔다.

'이건 진짜 고치긴 해야 하는 나쁜 버릇이긴 한데....'

어쩌겠나?

11년간 다져진 본능이 그러한 걸.

[지금보다 더 참신한... 것 말이냐? 그, 그건....]

"왜. 설마 없어? 이상하네. 5층의 네임드가 설계한 통로가 이토록 쉬울 리가 없는데."

진혁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다가 뭔가 생각났는지 손뼉을 마주쳤다.

"아! 혹시 지금까지는 일부러 우리를 방심시키려고 쉬운 것만 앞쪽에 배치한 거였나?"

[그, 그렇다. 바로 여섯 번째 관문이 나, 발세테르의 회심의 역작이지.]

발냄새가 다급히 외쳤다.

그리고 3초 뒤, 여섯 번째 관문마저 뚫렸다. 지금까지 중에 최단 기록으로.

"...."

"...."

[....]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하지만 아주 잠시뿐이었다.

[시발. 나 안 해.]

발냄새가 욕설과 함께 화면을 꺼 버렸다.

이것 참....

진혁이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결국 관리자를 탈주시켜 버렸네.'

시련의 탑을 통틀어 봐도 이런 일은 전무할 것이다.

그렇기에 기대가 됐다.

'이 영상이 올라가면 얼마만큼의 조회수를 기록할지 말이지.'

진혁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모르긴 몰라도 당분간 '명예의 전당' 최상단의 주인은 정해져 버린 것 같았다.

바로 그때.

'선택의 통로'를 구축했던 허상 결계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쿠쿠쿠쿠쿠!

드디어 본 게임이 시작되려고 하는 것이다.

***

[교주의 은신처에 입장하셨습니다.]

풍경이 완전히 바뀌었다.

기괴한 조각상과 피로 그러져진 심벌이 가득한 석실.

그 중앙에서는 시체를 갖고 무언가를 하는 교주의 모습이 보였다.

"이야. 설교를 하려고 교주가 된 줄 알았더니. 해부학 연습을 하고 있었네?"

이거, 알고 보니 이과생이었구나?

의대에 합격한 걸 보니 학생시절 공부는 열심히 한 모양이다.

어떻게 보면 천유성이랑 동기일지도 모르겠네.

"이럴 수가.... 발세테르가 돌파 당했다고?"

"너무 그 친구한테 뭐라고 하지 마. 생각보다 소심한 친구 같던데."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과연, 그자가 말했던 게 사실이었군. 절대 방심해서는 안 된다고 하더니 그게 이런 의미였나."

교주가 꽤나 놀랐다는 표정을 자아냈다.

그야 그럴 수밖에.

감옥에서 헛소리나 하던 진혁은 적으로 간주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렇기에, 신의 대리자들에게 갈가리 찢겨 죽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그러고 보니 랜슬롯 아니, 호센벨트는 보이질 않는군."

"그 자라면 아까 전에 떠났다."

떠났다라....

왠지 그럴 것 같긴 했다.

"하여간, 눈치 하나는 빠르다니까."

"눈치가 빠르다니? 그게 무슨 눈치가 말이냐?"

"여기 남아 있으면 죽을 걸 알았을 테니 그걸 눈치 채고 먼저 도망갔다. 뭐, 이런 이야기지."

"크하하! 재밌구나. 자의식 과잉도 그 정도면 예술의 경지야."

교주가 광소를 터뜨렸다.

그러다 한 순간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네놈이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탑의 법칙을 어기고 고유 능력과 스킬을 사용했더군. 솔직히 말해 놀랐다. 설마, 절대적인 순리를 거스를 수 있는 인간이 존재할 줄은 미처 몰랐어."

"내가 제법 하는 편이야."

정확히 말하면 제법이 아니고 눈이 돌아갈 정도지만.

실력의 3할은 감추는 게 미덕이라고 했으니, 자기 얼굴에 금칠하는 건 이 정도만 해줄 생각이었다.

"그 자신감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기대되는구나. 또 잠시 뒤에 얼마나 처절하게 비명을 질러댈지도 말이다."

교주가 바로 옆에 있던 테이블을 향해 손을 뻗었다.

테이블 위에는 검은색 항아리가 놓여 있었다.

"성물을 쓰려는 건가?"

"...!"

진혁의 말에 교주의 손길이 우뚝 멈췄다.

이번만큼은 진심으로 당황한 기색이 확연히 느껴졌다.

"성...물에 대해서도 알고 있단 말이냐?"

"대충은."

예전에 성물들 전부 모아서 컬렉션도 만들어 봤으니, 모른다고 하면 거짓말이리라.

그래도 그거 다 모으는 게 어렵다는 건 인정해 준다.

몇 개는 정말이지 탈모가 올 정도로 구하기 어려웠으니까.

"...정말로 놀라운 놈이로군."

놀라움과 경악이 섞인 말투.

물론, 그러한 감상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어지는 말 속엔 진득한 살기가 섞여 있었으니까.

"하지만, 성물에 대해서 알고 있다면, 성물이 갖고 있는 힘 또한 알고 있을 테지."

마왕을 부활시키기 위한 저주받은 성물은 그 자체로도 엄청난 마력을 갖고 있었다.

특히, 눈앞에 있는 '오물을 먹는 항아리'는 7개의 색중 '파랑색'의 등급을 보유한 성유물이다.

"그거 쿨타임 엄청나게 길었던 것 같은데, 나 하나 잡겠다고 사용하려고?"

"앞으로 네놈보다 더 성가신 놈은 만나지 못할 것 같거든. 어설프게 아끼느니 쓸 수 있을 때 확실하게 쓸 생각이다."

으음.

그건 부정하기 힘드네.

이 녀석도 의외로 예리한 면이 있다.

바로 그 순간.

[성유물 '오물을 먹는 항아리'가 발동됩니다!]

항아리 깊은 곳에서부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저주가 뿜어져 나왔다.

공기마저 태워 버리는 검은 물결.

파도처럼 범람하는 기운이 순식간에 진혁을 향해 쇄도했다.

콰콰콰콰콰콰!

즉발기에 절대 판정을 갖고 있는, 말 그대로 필살(必殺)의 능력!

진혁이 재빨리 거리를 벌리려 했지만, 애초에 피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그렇게.

꿀렁!

파도가 진혁의 가슴을 꿰뚫고 지나갔다.

울컥하고.

입에서 검은색 피가 흘러나왔다.

끔찍한 통증이다. 한 순간에 정신줄을 놔 버릴 만큼.

"크으... 컥! 커억."

폐를 꿰뚫린 탓에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안 돼!"

안드리아가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그 오만함을 탓하며 죽어라. 인간이여."

교주 또한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몸에 바람구멍이 난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것으로 끝.

진혁의 의식이 끊어졌다. 동시에 몸이 무너져 내렸다.

[시전자의 사망으로 인해 '썩어 가는 심장'으로부터 받은 '마왕의 저주'가 사라집니다.]

시전가 사망했기 때문에 나타난 메시지.

그리고.

시전자가 사망함으로써 발동되는 고유 능력이 교차했다.

[시전자가 사망했습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고유 능력 '별의 가호'가 발동됩니다!]

막혀 있는 천장 너머, 5층에선 결코 볼 수 없는 밤하늘로부터.

우우우웅!

별의 기운을 담은 빛이 쏟아졌다.

동시에.

두근! 두근! 두근!

멈춰 있던 심장이 다시 한번 고동치기 시작했다.

92화. 오물을 먹는 항아리

"이, 이게 대체...."

교주가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죽었...는데. 살아났어. 죽었는데. 분명히 죽었는데."

당황한 건 안드리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반면.

진혁은 태연하게 어깨와 허리를 어루만졌다.

"어우. 요단강 반쯤 건넜더니 허리가 다 뻐근하네."

꽃밭이 보이고 아름다운 미녀들이 넘어오라고 노래를 부르기에 하마터면 따라갈 뻔했다.

노래가 그리스시대 노래여서 망정이지, 트로트였으면 흥에 취해 그대로 따라갔을 거다.

'마왕의 저주는 이걸로 사라졌군.'

진혁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마왕을 만나 히든 퀘스트를 받는 것부터.

교주의 성유물을 낭비하고 동시에 '별의 가호'를 이용해 마왕으로부터 받은 저주를 푸는 것까지.

모든 게 계획했던 그대로였다.

'마도서의 시전 시간도 딱 맞췄어.'

더 이상 고유 능력이나 스킬을 사용할 순 없다.

하지만, 상관없다.

힘을 잃은 건 성물을 사용해 버린 교주 또한 마찬가지였으니까.

'완전히 허수아비나 마찬가지인 셈이지.'

검투장의 주인은 각종 무기에 능통했고.

광산의 주인은 힘 하나만큼은 무지막지하게 강했다.

반면, 교주는 성물을 이용해 강력한 마법을 사용하지만,

마력을 모조리 쏟아 부어 성물이 텅텅 비어 버린 이상, 본신의 힘은 그다지 대수롭지 않았다.

"네놈! 네놈 대체 뭐냐? 어떻게...!"

교주가 차마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거 처음 봐?"

"그거야 당연하지!"

"뭔 교주가 부활도 못 해? 너희들 그럴 바엔 차라리 날 믿지 그러냐?"

'고인물교'라고.

믿으면 정신이 좀 이상해지긴 하지만, 오래오래 살아남을 순 있다. 게다가 가끔 부활도 하고 눈에서 레이저도 나가고 하는데. 어때? 관심 좀 있어?

"개소리 지껄이지 마라!"

교주가 욕설을 내뱉었다.

그러면서 테이블 위에 놓여 있은 무식하게 생긴 외과용 칼을 집어 들었다.

이건 거절의 의미겠지.

"후회할 텐데."

피식 웃은 진혁이 자세를 낮췄다.

스릉!

어느새 오른손엔 붉은 빛을 띤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카아아앙!

수술 칼과 단검이 교차했다.

심장을 노린 공격을 튕겨낸 진혁이 곧바로 상대의 허벅지를 노렸다.

푹!

적중이다.

단검이 제법 깊숙이 파고들었다.

"크아아아!"

교주가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그래서 말했잖아. 후회할 거라고.

뒤쪽에서 무게나 잡고 있는 놈이 최전선에 나온 순간부터 이 싸움의 승패는 결정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니. 딱 한 가지.

교주에게 이 상황을 뒤집을 만한 수단이 있긴 하다.

물론.

'그것마저도 내가 원하는 거지만.'

진혁이 교주와 항아리를 번갈아 바라봤다.

슬슬 도박수를 던질 때도 되지 않았어?

이대로 가면 죽을 거라는 건. 누구보다 네가 제일 잘 알고 있잖아?

진혁이 계속해서 상대를 도발하며, 조금씩 궁지에 몰아 넣었다.

이제 선택해야 한다. 이대로 말라 죽을지 아니면....

"빌어먹을."

결국, 교주가 결정을 내렸다.

[5층의 교주가 Lv10 '희생의 제물'을 발동합니다!]

교주의 심장에서 사람의 손아귀 형상을 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연기로 이루어진 기분 나쁜 외형.

"마력이 부족하다면.... 보충하면 그뿐이다!"

그렇다.

자신의 신도를 제물삼아 성물에 마력을 보충하는 방법.

이것이 교주가 갖고 있는 마지막 히든 카드였다.

쇄애애액!

손아귀가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그리고 전투라곤 해본 적 없는 안드리아로선 당연히 반응하기 힘들 수밖에 없었다.

"아...?"

안드리아가 떨리는 눈으로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봤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을 움켜잡은 손이 보인다.

연기가 더욱 짙게 일렁였다.

"네 마력을 바쳐라. 미천한 종아!"

아무리 작은 마력이라도 서로 간에 마력이 바닥난 상황에선 커다란 변수로 작용할 터.

하지만.

"페트리아 드 아메...."

마력을 흡수하기 위한 룬어가 입 밖으로 튀어나온 순간.

"페테리아 드 아메리오스. 테오 파 베리시오."

낯익은 또 하나의 음성이 끼어들었다.

진혁이었다.

"...!?"

교주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너무 놀란 나머지 혀까지 깨물 뻔했지만,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어, 어떻게 룬어를...."

"고대 룬어 정도야 뭐, 기본이지. 요즘 다들 3개 국어 정도는 하지 않아?"

그보다 어려운 건, 수많은 주문 중에 어떤 걸 발동할지 처음 입모양만 보고 예측한 거지만.

교주 입장에선 그것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을 것이다.

지금부터 주문을 선점하지 못한 대가를 치러야 할 테니까.

쿠쿠쿠쿠쿠!

'오물을 먹는 항아리'가 격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시전자의 명에 따라 대상을 먹어치우기 위해서.

"히이익!"

교주가 몸을 돌렸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체면조차 모두 내팽겨 던진 채 전력을 다해 도망을 치려 했다.

하지만, 항아리에서 튀어나온 검은색 손들이 훨씬 더 빨랐다.

콰콰콱!

손들이 교주의 몸을 단단히 움켜잡았다.

머리와 뺨, 허리와 어깨 마지막으로 다리까지. 그야말로 완벽한 포획이었다.

"아, 안 돼! 안 돼!"

교주가 마구 발버둥을 쳤다.

손톱으로 바닥을 긁으며 발로 책상과 바닥을 차며. 어떻게든 빠져나가려 했다.

물론. 모두 헛된 몸부림일 뿐이다.

손아귀는 먹어치워야 할 대상을 결코 놓친 적이 없었으니까.

카카카칵!

돌로 만든 바닥 위로 열 줄기의 손톱자국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것을 끝으로.

"끄아아악!"

교주의 몸이 완전히 항아리 속으로 집어 삼켜졌다.

우드득!

콰득!

콰드득!

이후에 들리는 건 뼈와 살이 사정없이 으깨지는 섬뜩한 파육음이었다.

수많은 신도들을 부리며, 마왕의 수족으로 살아 왔던 것치곤. 너무나 처참한 말로다.

아니, 사람들을 산 채로 태워 버린 것 치곤 너무 편히 죽였는지도 모르겠다.

고통을 느낀 시간이 기껏해야 30초도 안 될 테니까.

진혁이 차게 식은 눈으로 교주의 최후를 바라봤다.

그러다 뭔가 생각났는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아직까지 넋이 반쯤 나가 있는 안드리아가 있었다.

"저, 저... 산 건가요?"

"알면서 뭘 물어?"

"그, 그렇지만...."

안드리아가 토끼눈을 뜬 채 자신의 몸을 어루만졌다.

살아남았다는 사실보다 어떻게 살았는지가 궁금하다는 얼굴이다.

"그보다 뭐 이상한 게 느껴지지 않아? 평소와는 다르게 몸이 가볍다거나? 힘이 넘친다거나?"

"예? 아. 그러고 보니... 뭐랄까? 엄청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몸에 활력이 돌아요."

'역시, 이렇게 되는군.'

교주는 죽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5층을 정복했다는 메시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당연한 이야기다.

아직 정신병동의 보스는 죽지 않았으니까.

'희생의 제물의 발동되는 동안 교주가 죽음으로써, 성물은 새로운 주인을 정한 거겠지.'

다시 말해.

현재 정신병동의 새로운 보스 몬스터는 안드리아가 된다는 뜻이다.

'슬슬 본인도 자각할 때가 됐는데.'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아...!"

안드리아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탑의 시스템에 의해 지금 느끼고 있는 활력과 힘이 무엇 때문인지를 깨달은 것이다.

계승(繼承) 효과.

정신병동의 주인이 새롭게 탄생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주인은.

'오직 나에게 복종할 것이다.'

진혁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모든 플레이어들은 보스를 죽이고 층을 정복하는 것만이 다음 층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여길 테지만.

'나는 달라.'

고인물은 정석을 추구하지 않는다.

더 큰 이득과 자극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이 어떠한 종류이건 간에 가리지 않았으니까.

그게 고인물이 탑을 오르는 방식이었고.

그게 고인물이 탑의 정상을 볼 수 있었던 이유였다.

"아까 전에 그랬지. 가장 소중한 이들로부터 배신당하고 이곳에 버려졌다고."

"네. 분명 그렇게 말했죠."

"이제 그 시간은 끝났어. 적어도 5층에서는 그 누구도 너에게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거야."

더 이상 파리 목숨처럼 살아가는 신도가 아닌, 막강한 마력과 수많은 부하들을 거느린 한 층의 지배자.

그것이 안드리아가 앞으로 살아갈 위치였다.

"그러니 앞으로는 좀 웃으면서 살아라."

"고마워요. 정말로...."

안드리아가 눈시울을 붉혔다.

지금까지 겪어 왔던 온갖 설움과 고통들이 한 순간에 스쳐 지나간 듯싶었다.

이미 '염혼의 낙인'으로 인해 결코 배신할 수 없는 처지였지만.

글쎄.

굳이 그런 게 아니었다고 해도 안드리아가 배신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녀의 자유를 찾아 주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해 준 사람은 바로 나였으니까.

그래도 확실히 할 건 해야겠지.

"난 말로만 하는 감사는 별로 안 좋아하는데...."

진혁이 무언가 기다리듯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안드리아가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결연한 눈동자가 진혁을 향했다.

결정한 것이다.

앞으로 그녀 스스로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제 이름은 안드리아. 이 병동의 주인입니다."

안드리아가 공손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저를 비롯한 이 병동의 모든 존재들은 당신을 따를 것이며, 당신이 요구하는 것이면 그것이 무엇이든 반드시 이행할 겁니다. 설령, 그 요구가 상층의 지배자에게 거역하는 것일지라도."

그리고 진심을 담아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5층 '정신병동'의 보스 몬스터 '안드리아'가 충성을 맹세합니다.]

['광산'과 '검투장'이 해방됩니다.]

[시련의 탑 6층이 개방됩니다!]

[다음 층을 정복할 때까지 남은 시간: 89D 23h:59m:59s]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층의 개방과 함께 오르는 레벨.

상태창이 연이어 나타났다.

'5층의 힘은 먼 훗날 요긴하게 쓸 수 있겠지.'

미래를 생각하면 아래층의 조력은 반드시 선결해야 할 과제 중 하나였다.

이번엔, 진혁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레이드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보상을 향해서.

[당신은 최초로 보스 몬스터의 충성을 받아냈습니다.]

[특수 아이템 '경계를 허무는 거울(오버랭크)'을 획득하셨습니다.]

이럴 수가….

진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건 또 엄청난 게 튀어나왔다.

***

5층 정복.

그 사실에, 세계는 또다시 환호했다.

이번에도 탑을 정복한 주역은 한국의 랭커, 강진혁이었다.

-타코야끼: 진심. 이쯤 되면 각 나라 대통령들 강진혁한테 표창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님?

-오른손에 흑염룡: ㄴㄴ. 이쯤 되면 대통령 자리를 넘기는 게 맞지. 표창은 뭐 하러 받누? 국 끓여 먹게?

-인덱스TM: 난 공략 영상이나 얼른 보고 싶어 죽겠다. 어떤 방법으로 클리어 했는지 ㅈㄴ 궁금함. 물론, 편집본이긴 하겠지만.

잔뜩 달아오른 분위기 속.

모두의 기대가 담긴 영상이 업데이트되었다.

[관리자가 눈앞에서 탈주한 썰 푼다]

자극적인 제목에 시련의 탑 커뮤니티가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달아올랐다.

영상이 재생되었다.

그러자 진혁과 '선택의 통로'의 모습이 나타났다.

워낙 촉박한 시간과 거지같은 난이도로 인해 악명이 높았던 장소.

하지만, 고인물 앞에서 그 모든 것들은 너무나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힌트조차 들을 필요 없다는 듯이, 진혁은 순식간에 관문들을 돌파해 버렸다.

보면서도 어이가 없는 광경이다.

실제로도 어이가 없었고.

결국, 관리자는 탈주해 버렸다.

분노보다는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에 가득 찬 채.

-인덱스: 앜ㅋㅋㅋ ㅁㅊ. 어그로가 아니라 진짜로 관리자 탈주했는데?

-고인물감별소: 와 진짜 얼마나 썩어야 저런 게 가능할까?

-책상위에 두루마리휴지: 난다 긴다 하는 고인물들 죄다 찍소리도 못 하는 거 보면, 저 사람이 유일할 것 같은데?

-새영언환: 하긴, 강진혁은 인생 2회차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긴 하지.

-방구석김씨: 겨우 2회차? 저 정도면 999회차 수준임. 물론, 난 무한코인 줘도 못 할 듯.

-백수위에트수: 캬아. 진짜 믿고 보는 플레이어네. 플레이 영상 진짜 시원시원하다. 아예 노빠꾸잖아!

-최우진: 저 정신병동에서 생존해 온 플레이어 중 하나입니다. 그 끔찍한 지옥에서 죽는 것 외엔 답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강진혁 플레이어님 덕분에 전부 살 수 있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로.

폭발적인 반응은 밤이 되고 새벽이 깊어지도록 멈출 줄 몰랐다.

동시에 인터넷에선 하나의 밈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플레이어 위에 고인물이 있고.

고인물 위에 석유와 화석들이 있으며.

마지막으로 그들의 재롱잔치를 구경하는 진혁이 있다는.

93화. 각자의 일상

그 흔한 장식품 하나조차 없는 쓸쓸한 방.

TV에선 연신 5층을 공략한 영상과 강진혁에 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또 저 녀석인가."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천유성이 중얼거렸다.

복잡한 감정이 배어 있는 혼잣말엔 여러 의미가 담겨 있었다.

하나는 자신이 넘어야 할 상대와의 격차가 조금도 좁혀지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답답함이었고.

다른 하나는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그 상대의 검술을 흉내 내고 있다는 것에 대한 자괴감이었다.

'가장 넘고 싶은 상대와 싸우기 위해서 그 상대의 기술을 배운다라....'

일종의 모순이다.

자신은 결코 그러한 방법으로 이기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봐도.

상대를 닮지 않고선 결코 그 간격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이 보이질 않았다.

그렇기에 도달한 결론은 하나.

승리의 미주를 마시기 위해선 자존심 따위는 내팽개쳐야 한다는 것이다.

달그락.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식기가 움직였다.

치킨과 피자, 크림새우와 양장피 그리고 맥주와 소주가 각 2병씩.

모두 과거 진혁이 먹방을 위해 준비했던 메뉴 그대로였다.

그리고 테이블 한켠에 있는 태블릿 PC에는 진혁이 과거 뷰튜브를 했던 영상이 순차적으로 준비되어 있었다.

[안녕하세요. 형님들! 오늘 할 콘텐츠는 '레전드 오브 레전드'입니다. 티모로 1:5 펜타킬 찍는 모습, 한번 제대로 보여 드리겠습니다. 예? 티확찢이요? 자신 있으면 어디 저격해 보세요. 아주 그냥 콧구멍에 독버섯을 넣어드릴 테니까.]

생활 방식과 행동, 식습관은 물론.

녀석이 했던 모든 게임과 콘텐츠까지 모조리 모방하고 답습한다.

의대생인 천유성에게 있어 효율적인 학습 루트를 설계하는 것쯤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번 영상의 핵심은 티모인가.'

[흐흐흫흫하?K하하하?K하?K하! 정찰대의 규율을 무시하지 마세요! 캡틴 티모!]

티모.

티모라....

천유성이 모나미 펜을 잡고 수첩에 끄적거렸다. 노란색 형광펜으로 밑줄을 그은 뒤, 별 하나를 추가한 건 덤이었다.

'반드시... 이긴다.'

치킨을 한 입 베어 문 천유성이 비장한 얼굴로 영상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을까?

띵동!

갑자기, 초인종이 울렸다.

띵동! 띵동! 띵동!

당연히 천유성은 무시하려고 했다.

지금 중요한 건 누군지도 모르는 방문객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현관문이 통째로 잘려 나갔을 땐, 더 이상 무시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카가가칵!

고속으로 그어진 검격.

쇠가 잘려나간 자리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그 사이로.

"하하. 실례 좀 하겠습니다."

능글맞게 생긴 금발의 외국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뭐냐 네놈은!"

"본명은 따로 있습니다만, 편하게 가웨인이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가...웨인?"

"예. 저희 쪽에서는 보통 그렇게 불러서요."

가웨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면서 천천히 천유성이 사는 곳을 훑었다.

"흠. 이건 좀 의외네요. 언노운 씨가 사는 곳 치곤 너무 좁고 협소하달까요? 5성급 호텔까진 기대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오피스텔이 아닌 좀 더 품격 있는 곳을 예상했습니다."

언노운?

'갑자기 나타나서 내가 언노운이라고?'

가웨인의 말에, 천유성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설마...?'

그러나 곧 이 일의 전말을 깨달았다.

이런 장난질을 할 수 있는 건 세상에 단 한 명뿐이었으니까.

"강진혁 이 씹어 먹을...!"

천유성은 그 말을 끝맺지 못했다.

"흐음. 지금 다른 사람 찾으며 여유부릴 때가 아닐 텐데요?"

어느새 예리한 검을 꺼내든 상대가 생긋 웃으며 다가왔기 때문이다.

***

같은 시각.

영등포의 신세계 백화점 앞에 있던 진혁은 열심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이상하네. 왜 이렇게 귀가 간지럽지?"

마치, 아주 작은 실지렁이가 고막 주위를 왔다갔다는 기분이다.

"그거야 당연히 누가 욕하고 있는 것 아니겠느냐?"

옆에 있던 엘리스가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뭐? 누가 내 욕을 해? 나만큼 착하고 성실하게 사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쯧쯧. 뱀파이어 중에서도 너처럼 독종은 본 적이 없는데, 잘도 그런 소리를 하는구나."

이것 봐라?

요즘 잘해 주니까 아주 기어오르네?

"그냥 돌아갈까 우리? 백화점이고 나발이고 종일 던전이나 도는 게 모처럼의 휴식에 더 어울릴 것 같은데?"

진혁이 단박에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자 엘리스의 목소리가 대번에 뾰족해졌다.

"아. 왜 치사하게 그걸 건드리는 건데!"

"왜 건드냐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자성어가 두 개가 있거든. 그중에 하나가 바로 역지사지란 거야. 말을 하기 전에 다른 사람의 심정을 생각하란 뜻이지."

"여, 역지사지 같은 소리하네. 네가 제일 다른 사람 생각 안 하잖아!"

으음.

묘하게 논리적이군.

괜히 수천 년을 살아온 게 아니었구나.

하지만, 상관없다.

"다음으로 좋아하는 성어가 바로 내로남불이라는 건데. 이 모든 규칙은 나 빼고 다른 사람한테만 해당한다는 뜻이야."

"그건 애초에 성어도 아니잖아!"

"내가 마음에 들면 성어야."

성어가 별거냐?

다수가 감탄하고 공감하면 그게 성어지.

잘 봐라.

이거 100년 뒤에는 당당하게 한자까지 붙어서 공무원 시험에도 나올 테니까.

"하지만, 이건 내가 정당하게 따 낸 대가야. 치사하게 이것 가지고 협박하면 안 되지...."

엘리스가 가끔 안드리아에게 여러 가지 정보를 알려주는 대가로 진혁은 엘리스에게 서울의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약속했다.

보스가 살아가는 법.

보스의 하루 일과.

보스의 말투 등등.

일종의 '보스학 개론'이다. 엘리스는 그걸 가르치는 교수인 셈이고.

"특별히 한 번만 봐줄 테니 그만 토라져라. 가뜩이나 관리해야 할 직원들 수가 늘어서 골치 아프니까."

검은 까마귀 길드를 맡겼던 김희웅과도 한번 연락을 해 봐야 한다.

탑을 오르고 성장하는 거에 집중하느라 반쯤 방치해 뒀었는데, 그래도 한 번쯤은 살펴봐야겠지.

"정말 내 마음대로 쇼핑해도 된다고 했다?"

"응. 우리 엘리스 하고 싶은 거 다 해."

그리고 그 말을 그토록 후회하게 될 줄은... 말을 한 당시에는 미처 몰랐다.

잠시 뒤.

백화점에 들어간 엘리스는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모두 풀겠다는 듯 그야말로 폭주를 시작했다.

"전부 사지."

"저, 전부라면...?"

직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백화점에 있는 모든 걸 사겠다는 뜻이다."

"야 이...."

진혁이 목구멍에서부터 솟구친 쌍욕을 하려다가 간신히 참았다.

진심으로 이 박쥐는 돈이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아무리 경제 관념을 안드로메다에 보냈다고 하지만, 이 정도면 돈을 공기 같은 공공재로 보는 수준이다.

"손님. 죄송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건...."

"나는 내가 원하는 건 반드시 손에 넣는다. 그것이 물건이든. 아니면 사람이든 간에 가리지 않고."

엘리스가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그녀의 등 뒤로 황금빛 운무가 일렁였다.

진조의 아공간 인벤토리가 개방되려 하는 것이다.

촤르르륵!

유리 선반 위로 씨알 굵은 다이아몬드가 쏟아졌다.

보석에 문외한이 보더라도 범상치 않은 것들이었다.

"헉?"

직원의 눈이 급속도로 커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시련의 탑의 등장이니 경제 위기니 하며 매출이 급감하는 지금.

고작해야 몇 백만 원 쓰면서 큰 소리 치는 작은 손들의 비위를 맞추느라 골치 아팠는데.

그 모든 걸 가볍게 짓밟아줄 초 VVVIP가 등장했으니까.

승진? 보너스?

그런 건 문제도 아니다.

'반드시 잡아야 돼. 이 손님.'

그렇게.

영등포 역사에 오래도록 회자될 재신(財神)이 강림했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지점... 지점장...님! 지금 바로 불러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쏜살같이 어딘가로 향해 달려갔다.

반면, 진혁은 검지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한국이 망한다면, 아마 네 돈지랄로 인한 인플레이션을 감당하지 못해서일 거다."

짐바브웨나 베네수엘라를 보며 안쓰럽다고 생각했었다.

생수 하나 사려면 주머니에서 뭉칫돈을 꺼내는 걸 봤을 땐, 눈시울이 붉어졌고.

헌데.

이제 보니 남의 일이 아니었다.

바로 여기에 국가급 인플레이션을 창조할 수 있는 재앙이 있었으니.

"걱정 마라. 인플레이션이라는 게 뭔지 모르지만, 그게 문제가 된다면 그것마저 사 버릴 테니까."

하아.

"내가 말을 말자. 말아."

더 이상 말해 봤자 나만 손해다.

***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난 후.

진혁과 엘리스가 찾은 곳은 인근에서 제법 유명한 술집이었다.

가장 인기 있는 메뉴를 시킨 진혁은 음식이 나오는 사이 미처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하나씩 확인했다.

가장 중요한 건 역시 레벨업을 통해 얻은 스탯을 분배하는 거다.

띠링!

상타창이 활성화됐다.

——————————————————

이름: 강진혁

성별: 남

나이: 27세

레벨: 30

힘 19 민첩 19 체력 19 마력 74 간극 100 행운 10 적응형 78

보유한 스탯 포인트: 9

보유한 코인:1,283,288

직업: 없음.

고유 능력: 융합(融合), 검의 무덤, 별의 가호, 아누비스의 심판, 혈마기(血魔氣), 만다라(曼茶羅)

스킬: Lv6 '불의 원소', Lv5 '탐식의 눈', Lv4 '교감', Lv4 '염혼의 낙인', Lv4 '독식', Lv4 '얕은 호흡', Lv8 '빙하조형(氷河造形)', Lv4 '데이라이트', Lv1 '거인의 손아귀', Lv3 '추혼검(追魂劍)', Lv1 '이중 첩자', Lv1 '진태청화랑심법(眞太淸花郞心法)', Lv2 '검마제왕보(劍魔帝王步)', Lv1 '흐릿한 체취', Lv1 '정신방벽'

——————————————————

교주와 광신도들을 처리하고 얻은 적응형 스탯이 무려 '68'.

거기에 레벨도 3개나 올랐다.

'다시 봐도 황당한 속도긴 하네.'

간극을 모으느라 한 달을 소비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빠른 속도의 레벨업이다.

길드 차원에서 독점 던전을 섭외해 주고 몰이사냥을 해서 키워 주는 랭커들조차 30레벨 대에 불과했으니까.

'스탯을 포함하면 사실상 나보다 스펙이 좋은 플레이어는 없는 셈이지.'

거기에 고인물로서의 지식과 경험까지 있으니 그 격차는 더더욱 벌어졌으리라.

좋아.

진혁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동안 고생했던 게 모두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스탯은 깔끔하게 20으로 맞추고 남은 건 전부 마력에 투자하면 되겠군.'

[힘이 19 → 20으로 상승합니다.]

[민첩이 19 → 20으로 상승합니다.]

[체력이 19 → 20으로 상승합니다.]

[마력이 74 → 80으로 상승합니다.]

강박관념이 있는지 몰라도 끝자리가 딱 떨어지면 뭔가 기분이 좋다.

게다가 이번에 올린 영상도 조회수가 1억은 찍을 것 같으니, '코인 환전 쿠폰'을 쓰면 완벽하게 마무리될 듯싶었다.

그때였다.

"127번 테이블 손님.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

직원이 한상 가득 차려진 음식 테이블을 갖고 나타났다.

안주용 메인 요리 두 개와 500cc 짜리 호가든 2잔. 얼음물과 각종 샐러드는 따로다.

"이게 곱창이랑 연어라는 건데, 이렇게 먹는 거야. 잘 봐."

진혁이 젓가락을 바쁘게 움직였다.

곱창 특유의 느끼함은 매콤한 소스가 적절하게 잡아 주었고.

거기에 녹진녹진하고 두툼하게 썬 생연어에 타르타르소스와 양파를 잔뜩 얹어 먹으니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이건, 술을 안 마시고 싶어도 안 마실 수가 없다.

한 입 가득 입에 쑤셔 넣은 엘리스 역시 두 눈을 반짝였다.

"이. 이 고기는 무엇이란 말이냐? 어떻게 이런 맛이...!"

음.

뭐라고 말해야 하나?

"똥X인데."

"뭐라고?"

"소 항문 쪽 창자로 만든 요리라고."

"농...담하지 마라. 기분 좋게 먹고 있는데, 그게 무슨 입맛 떨어지는 소리냐?"

"내가 먹는 거 가지고 농담하는 거 봤냐?"

엘리스가 진혁의 눈빛이 장난이 아님을 깨닫는 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깊은 절망에 빠졌다.

"먹어야 된다. 아니다, 고귀한 귀족이 어떻게 소의... 그래도 그 맛은 여태껏 먹어 봤던.... 아니야. 참아. 참기는 개뿔. 으아악!"

엘리스는 이후부터 오랫동안 곱창과 씨름을 하며 고뇌했다.

그리고 엘리스가 자존심과 식욕 사이에서 절망하는 사이. 진혁은....

'경계를 허무는 거울이라.'

5층에서 얻은 대망의 특수 아이템을 꺼냈다.

94화. 고인물이 빌드업을 하는 방법 (1)

[경계를 허무는 거울(성장형)]

입수 난이도: 오버랭크

내용: 출처가 밝혀지지 않은 특수 아이템으로 사용 시 시련의 탑 10층에 있는 장소 중 원하는 곳과 연결됩니다.(쿨타임: 90일, 지속 시간: 30분.) 플레이어가 성장함에 따라 연결할 수 있는 층도 올라가며, 마찬가지로 유지되는 시간 또한 늘어납니다. (동반 1인까지 함께 데려갈 수 있습니다.)]

시련의 탑을 플레이하다보면 몇 가지 사기적인 아이템이나 능력들을 발견할 수 있다.

국립 중앙 박물관에서 얻은 고유 능력 '융합'이 그중 하나였고.

지금 보고 있는 '경계를 허무는 거울' 또한 거기에 해당됐다.

두근! 두근! 두근!

진혁의 심장이 빠르게 고동쳤다.

공식적으로 보스 몬스터의 충성을 받아내는 게 상식을 깬 플레이였긴 했으나.

'설마, 이걸 줄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는데.'

고인물조차 들뜨게 만드는 규격 외 보상.

엘리스에게 통 크게 휴식을 제안한 것도 모두 이 흥분을 주체하지 못해서였다.

'일단 필요한 것들부터 좀 모아야겠어.'

한 번 사용하면 다시 사용하기까지 90일이란 시간이 필요할 터.

최고의 조건을 갖춘 상태에서 거울을 사용해야만 한다.

진혁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무얼 해야 할지는 이미 전부 생각해 뒀다.

'먼저....'

우우웅!

진혁이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뚝!

채 한 번이 다 울리기도 전에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앗! 대표님! 어쩐 일로 연락을 다 주시고. 하마터면 저희를 잊어버리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다 들 정도였습니다."

검은 까마귀 길드의 바지사장, 김희웅이었다.

진혁 덕분에 인생이 완전히 바뀐 김희웅은 그동안 중견 길드인 검은 까마귀를 관리하고 있는 중이었다.

특유의 수완을 살려 제법 탄탄하게 말이다.

진혁이 멋쩍게 입맛을 다셨다.

"최근 좀 바빴거든."

너무 바빠서 반쯤 잊고 있었지.

"하하. 물론, 이해하고 있습니다. 요즘 대표님 얼굴이 안 나오는 채널을 찾기가 더 힘들 정도니까요."

"응?"

"에이, 왜 모른 척하고 그러십니까? 한국 아니, 세계에서 제일 스포트라이트 받고 계시는 분이."

하긴, 요즘에 꽤 유명해지긴 한 것 같다.

그냥 나가면 사람들이 알아보고 말을 걸 정도였으니까.

"인사치레는 됐고, 길드 쪽은 어때? 나 없는 동안 잘 굴러가고 있어?"

"너무 잘돼서 문제죠. 대표님 보고 가입하려는 플레이어가 폭주하고 있거든요."

"날 보고 가입하려는 플레이어? 그런 사람들이 그렇게 많아?"

"예. 일단 선별해서 받고 있긴 한데, 하루에 몇 백 명씩 몰려드는 통에 관리가 불가능할 정도예요."

하루에 몇 백 명이라니.

이건 또 무슨 난리냐?

길드를 키우는 데 큰 욕심은 없지만, 김희웅이 과로사라도 했다간 곤란하다.

'가입 조건으로 대머리+전신 선탠+비키니만 입고 다니는 조건을 넣든가 해야겠군.'

참고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적용시킬 생각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입하겠다는 놈들은 받아 줘야 한다.

그 정도로 제정신이 아닌 놈들은 적으로 만드는 것보다 길드 안에 잡아 두는 게 나을 테니까.

무엇보다 진정한 룩을 아는 고인물들은 존중해 줄 수밖에 없다.

"그건 내가 알아서 조절해 줄게."

"꼭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나한테 연락 온 건 없어? 예를 들어 싸울아비 쪽이라든가."

"아! 안 그래도 싸울아비 쪽에서 대표님을 계속 찾았습니다. 그... 치료제 조합법을 받는 대신 독점 던전을 주기로 계약했다고 하던데요?"

"사실 나도 그것 때문에 연락했어. 이제야 여유가 좀 생겼거든. 그래서 말인데, 싸울아비 쪽 김기태 플레이어랑 약속을 좀 잡아 줄 수 있을까?"

"가능은 합니다만, 언제로 하면 되겠습니까?"

"최대한 빨리 잡아 줘. 그리고 해 주는 김에 유명 음악회랑 미슐랭 식당, 전부 예약 좀 해 주고. 국내든 해외든 상관없어."

"예? 그건 또 왜...?"

"내가 일일이 이유까지 말해 줘야 하나?"

"아, 아닙니다. 가장 좋은 자리로 예매해 드리겠습니다."

그걸로 통화가 끝났다.

진혁이 피식 웃으며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이해가 안 되겠지.'

김희웅은 물론,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거다.

한창 성장을 해야 하는 시점에서 한가롭게 맛집이나 찾고 음악이나 즐기는 건 상식적으로 말도 되지 않았으니까.

특히 6층이 여유롭게 성장할 수 있는 최고의 조건을 자랑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더 말이다.

시련의 탑 6층 '엘프의 숲'.

이곳은 일종의 쉼표라고 해야 할까?

6층 전체를 아우르고 있는 광대한 숲은 평화 그 자체였다.

게다가 단순히 이곳에서 놀고먹으며 90일간 시간을 보낸다면, 다음 층으로 가는 길이 열리기에.

플레이어들은 이 기간 동안 각자의 스킬과 능력을 단련하고 레벨업을 하는 데 집중했다.

6층에 출석 도장만 찍고 주로 1층에서 5층까지 던전이나 미궁을 도는 방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쉬라고 해서 6층을 버려두면 그것이야 말로 멍청한 짓이지.'

이제 전입 온 이등병한테 자리에 누워서 편히 쉬라고 했다면?

이제 첫 직장을 잡았는데 '할 일 없으니 OO씨는 이만 퇴근해'라는 소리를 들었다면?

'요즘 군생활 편해졌구나.' 하면서 자리에 드러눕거나.

'그럼 저는 20000. 고생하십쇼!' 하면서 이타치가 될 경우 윗사람들이 좋게 볼까?

시련의 탑도 마찬가지다.

각 층에는 목적이 있고 그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기연이 있다. 결코 이유 없이 존재하는 층은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진혁은....

그 누구보다 완벽하게 6층에서의 90일을 보낼 생각이었다.

오직.

고인물만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음악회나 미슐랭은 그걸 위한 포석이지.'

진혁이 차근차근 계획을 세웠다.

그나저나.

'귀쟁이 녀석들. 간만에 다시 보겠군.'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과연 놈들이 내가 하는 걸 보고 얼마나 놀랄지. 또 그걸 통해 얼마나 좋은 걸 토해낼지 말이다.

***

김희웅으로부터 다시 연락이 온 건 1시간 정도가 지난 후였다.

싸울아비 길드의 김기태와는 영등포 근처에 있는 커피숍에서 보기로 한 상황.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진혁이 생크림이 잔뜩 올라간 프라푸치노를 홀짝였다.

'역시 피로를 푸는 데 당분을 보충해 주는 것 만한 것도 없다니까.'

안타깝게도 민트초코가 다 팔린 터라, 이걸 시켰지만, 초코 프라푸치노도 그럭저럭 먹을만 했다.

바로 그때.

저벅.

일반인들과는 달리 마력이 가득 실린 발걸음이 다가왔다.

굳이 확인해 보지 않아도 안다.

싸울아비 길드에 소속된 랭커, 김기태였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강진혁 플레이어님."

김기태가 짧게 고개를 숙였다. 속에 쌓여 있는 게 많을 텐데도 꽤나 공손한 말투다.

진혁도 생긋 웃으며 김기태를 맞아 주었다.

"테스트 때 본 이후로 처음이니, 정말 오랜만이긴 하네요."

물론, 정확히 말하면 그때와는 다르다.

랭크조차 정해지지 않았던 꼬꼬마 시절과 달리 지금은 S등급 판정을 받았으니까.

게다가 각종 활약으로 인해 둘 사이의 인지도는 비교하는 것 자체가 우스울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니 저토록 저자세로 나오는 거겠지.

'이래서 힘이 있어야 하는 거구나.'

진혁은 다시 한번 절감했다.

이 세계에서 힘과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말이다.

느긋하게 소파에 몸을 기댄 진혁이 재차 입을 열었다.

"만드라고라의 위치는 죄송하게 됐습니다. 탑을 오르는 데 집중하느라 미처 말씀드릴 여유가 없었거든요."

"...아무렴, 그러셨겠죠."

김기태가 똥 씹은 얼굴을 지었다.

상대가 정상급 랭커여서 참고 있는 거지. 만약, 다른 사람이었으면 칼부터 뽑았을 기세다.

하지만, 진혁은 그런 시선을 가볍게 흘러 넘겼다.

"그런 의미에서 계약 조건을 살짝 바꾸고 싶습니다. 제가 듣기론 싸울아비에서 보유하고 있는 A급 던전이 몇 개 된다고 하던데요. 아마, 3층이었죠?"

1층에 있는 독점 던전 10개.

그 당시는 매력적이었지만, 레벨이 30이 넘은 지금은 그다지 쓸모가 없다.

이제 와서 고블린들이랑 술래잡기 하면서 놀 것도 아니고. 성장을 했으면 그에 걸맞은 던전이 필요하지 않겠나?

"그러니까. 저희가 보유하고 있는 1층의 10개 던전 대신. 3층의 A급 던전 중 하나를 달라는... 그, 그런 말씀입니까?"

"제대로 들으셨네요."

"해독제 조제법은 이토록 늦게 알려 주시겠다고 하면서. 오히려 저희 쪽 조건은 올려 버리겠다고요?"

"바로 그런 뜻이죠."

무엇이든 한 번 더 복습하는 것도 아니고.

왜 앵무새처럼 자꾸 되묻는지 모르겠다.

얼굴이 붉어진 걸 보면 화가 난 것 같긴 한데....

이럴 땐 냉수라도 한 잔 권해야 하나?

"...강진혁 플레이어님. 저희를 대체 뭘로 보고 계시는 겁니까."

으음.

필요한 걸 아낌없이 제공해 주는 나무?

하지만, 속마음을 그대로 말할 수는 없겠지.

이럴 땐 전 세계에서 공통으로 사용되는 변명을 해 줄 수밖에.

"물가 상승률과 원자재 가격의 상승 그리고 인건비의 증가로 인해 부득이하게 내린 결정입니다."

"그게 무슨...! 저희는 자선단체가 아닙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들어드리려고 이곳에 온 게 아니란 말입니다!"

김기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가시려고요?"

"그런 이야기를 하실 거면, 더 이상 말해 봐야 입만 아픕니다."

"흐음. 3층의 미궁 [회색 신전]. 제가 알기론 싸울아비 쪽에서 보유하고 있지만, 공략이 계속 실패하고 있지 않나요?"

"...!"

몸을 돌리려던 김기태가 멈칫했다.

의외의 이름이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그건, 또 어떻게 아신 거죠?"

"여기저기서 주워들었습니다. 이래봬도 인맥이 제법 넓거든요."

싸울아비가 보유하고 있는 던전의 리스트는 이곳에 오기 전 김희웅을 통해 전달받았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 '회색 신전'이 있는 걸 본 순간.

진혁은 확신했다.

싸울아비가 갖고 있는 전력으론 미궁의 공략을 엄두도 내지 못할 거라고.

그리고 그 예상은 정확하게 적중했다.

'역시, 반응하는군.'

신전에 잠들어 있는 보물을 얻고 싶지만, 공격대가 모조리 헛물만 켜고 있으니 속이 바싹 타들어가고 있겠지.

그런데 타이밍 좋게 미궁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으니 당연히 가던 걸음도 멈출 수밖에.

상대가 관심을 보였으니 이제 열심히 입을 털어주면 된다.

어떻게든 낚아서 이쪽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도록 말이다.

"혼자, 보상을 꿀꺽하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차피 회색 신전은 20인용 미궁이라 혼자서는 공략이 불가능하니까요."

"...."

제일 중요한 것은 시스템의 규칙을 들먹이며 김기태를 안심시키는 것.

"게다가 싸울아비 측에서도 손해가 막심할 텐데, 어설프게 시도하다 더 많은 플레이어를 잃기보단 차라리 실력이 증명된 저와 함께 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겠죠."

두 번째로 중요한 건 명분을 주는 거다.

불리한 거래를 하는 게 결코 약해서가 아닌, 자신들의 길드에 소속된 플레이어들을 아끼기 위해서라는 그럴 듯한 명분을.

세 번째로 중요한 건 미안하다는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미안함이란 단순히 말로만 하는 사과가 아니다.

사과가 진실 되게 느껴지도록 그에 맞는 대가를 지불하는 것.

이것이 세 번째 조건의 핵심 포인트다.

"만드라고라는 1층 기본 상점에서 구입할 수 있습니다. 상점 주인이 권하는 재스민 티를 11번 연속으로 마셔야 골방에 숨겨진 비밀 물품들을 볼 수 있는데요. 맛이 더럽게 없긴 하지만, 참고 드셔야 됩니다."

"...헙!?"

김기태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설마 만드라고라의 위치를 먼저 말해 줄 거라곤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탓이다.

할 말을 잃었는지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다.

'이렇게까지 한다면 속일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김기태는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길드의 긴부들과 이야기해 본 뒤, 미궁의 공략 일정을 알려 드리죠."

그리고 만족한 미소를 지은 채 진혁에게 악수를 청했다.

'강진혁. 네임드 치곤 너무 허술하군. 우리 쪽으로선 잘된 일이다.'

상대가 상대이니 만큼. 대놓고 이용해 먹을 순 없었다. 그래도 싸울아비 길드에게 유리한 쪽으로 판을 짤 수 있는 발판은 마련된 셈이다.

하지만,

김기태는 결코 모를 것이다.

회색 신전에 숨겨진 비밀을.

"하하.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진혁도 기분 좋게 김기태의 손을 붙잡았다.

'이제 필요도 없는 1층의 상점이나 실컷 이용하라고.'

쓰디쓴 재스민 차를 11잔이나 먹으면 그날 밤은 밤새도록 화장실을 들락날락 거리느라 고생 좀 할 거다.

'나는 너희들이 갖고 있는 미궁와 길드원들. 모두 잘 이용해 줄 테니까.'

그렇게.

서로가 다른 생각을 하며.

기존에 맺었던 계약이 갱신되었다.

95화. 고인물이 빌드업을 하는 방법 (2)

김기태가 미궁에 갈 플레이어들을 섭외하기 전까지 5일이란 시간이 주어졌다.

그 기간 동안, 진혁은 김희웅이 준비한 각종 음악회와 미슐랭을 닥치는 대로 찾아 다녔다.

그리고 현재 있는 곳은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5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피아노 콩쿠르로 쇼팽의 곡으로만 실력을 겨루는 세계 3대 음악 콩쿠르 중 하나다.

S급이란 위치를 이용해 어렵지 않게 자리 하나를 잡은 진혁은, 20대 초반의 남자 피아니스트의 연주에 푹 빠져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절정으로 치닫던 반주가 잦아들고 마침내 피아니스트의 손이 피아노에서 떨어졌다.

연주가 끝난 것이다.

'음악은 잘 모르지만.... 이건 진짜 소름이네.'

전투와는 전혀 다른 영역.

아름답고 화려한 선율은 감히, 예술로 승화된 또 하나의 세계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전율하던 진혁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후우...."

굉장했다.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본 기분이랄까?

아직까지 전신이 여운에 잠겨 있는 것만 같았다.

'시간이 제법 많이 걸리긴 했지만, 그래도 목적은 전부 달성했어.'

이걸로 가능한 콩쿠르나 연주회는 모두 가 봤다.

동시에.

[한 시대를 풍미하는 명곡을 감상하셨습니다.]

['음악회 7번 가기'를 완료하셨습니다.]

['베토벤 박물관' 견학하기를 완료했습니다.]

눈앞에 여러 개의 상태창이 나타났다.

'좋아.'

진혁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스킬 '절대 음감(F)'을 복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스킬 '악기의 이해(F)'를 복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얻은 스킬들은 모두 F등급이다.

하지만, 고작 이런 걸로 만족할 진혁이 아니었다.

낮은 등급의 스킬들을 합쳐,

한 차원 더 높은 스킬을 만들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융합'이란 고유 능력을 선택한 이유였으니까.

"별의 가호와 악기의 이해를 융합할게."

진혁이 곧바로 '융합' 스킬을 사용했다.

[스킬 '별의 가호'와 '악기의 이해'가 융합합니다.]

[융합에 성공하였습니다.]

[스킬 '천상의 선율'을 획득하셨습니다.]

[천상의 선율]

입수 난이도: B

내용: 음악의 여신 '베스티아'는 종족을 초월하여 모두의 화합과 평화를 중시하였습니다. 또한 아무리 험악한 세상일지라도 음악만큼은 벽을 허물 수 있는 매개체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 능력엔 그 여신의 바람이 깃들어 있습니다.

[복사된 스킬은 '세계의 기억'에 저장됩니다.]

시간이 남아돌아서 이곳에 온 게 아니다.

비전투 계열의 능력들을 모으기 위해서.

앞으로 탑을 오르는 데 필요한 부가적인 힘을 얻기 위해서.

금쪽같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은 요리 차례군.'

엘프의 숲에 가기 전 해야 할 두 가지 과제.

이제 남은 건 요리를 배우는 것뿐이다.

진혁은 차례대로 예약이 된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의 목록을 훑었다.

[스킬 '황실의 숙수(熟手)'를 복사하려면 다음과 같은 조건을 달성해야 합니다.]

[1. 미슐랭 3스타 이상급 레스토랑에서 코스 요리 먹기(7/10회)]

[2. 요리사가 요리를 만드는 과정 참관하기(3/5회)]

[3. 서로 다른 종류의 요리 만들어 보기(25/30회)]

콩쿠르를 보면서 틈틈이 먹었으니 이것도 조건을 달성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오늘 안에 전부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겠어.'

다시 말해.

6층으로 갈 시간이 다가왔다는 뜻이다.

***

중국 베이징에 위치한 시틱 타워.

마천루(摩天樓)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높게 솟은 빌딩 최상층 펜트하우스엔 여러 명의 남녀가 모여 있었다.

바로, 중국 최대 길드인 중화 길드에 소속된 랭커들이었다.

"빌어먹을! 이번에도 최초 공략을 빼앗기다니. 이게 무슨 개쪽이야! 분명, 5층은 우리가 가장 먼저 클리어할 수 있다고 자신하지 않았나!"

푸짐한 살집에,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남자가 고함을 질렀다.

그렇다.

준비는 완벽했다.

5층을 클리어해 본 적 있는. 아니, 5층을 타임 어택으로 주파해 본 적 있는 고인물들과 랭커들을 대거 준비해 뒀으니까.

거기에 길드 자체 내에서 '주황색' 판정을 받은 성유물까지 준비해 뒀으니 최초 공략을 장담한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중화 길드는 5층을 최초로 공략하는 데 실패했다.

그토록 많은 자원과 노력을 투자했음에도 말이다.

심지어 그들 중 절반 이상은 아직도 광산이나 검투장에서 탈출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우리 준비가 부족했던 건 아니야. 단지, 강진혁이란 놈이 비정상적인 속도로 보스를 잡았을 뿐이지."

강진혁.

그 이름에 모두의 얼굴에 분노가 서렸다.

"밑에 놈들도 온통 그 녀석 이야기야. 우연히 들으니 인류의 희망은 오직 그 녀석뿐이라는 개소리를 지껄이는 놈도 있더군. 물론, 바로 목을 쳐 버렸지만."

"그럴 일은 없겠지만, 이탈자가 나오는 것도 생각해 둬야 할 시점인 것 같군."

"그 녀석은 대체 얼마나 시련의 탑에서 썩었길래 그토록 빨리 탑을 오르는 걸까요? 외부의 지원도 없이 혼자서만 한 거라던데...."

"꽤 오랫동안 해 온 놈이 틀림없겠지. 어쩌면 탑을 20층 이상 올라가 봤을지도 몰라."

20층.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가 본 적 없는 미지의 영역이 튀어나왔다.

"설마...."

"그 미친 게임을 20층을 넘게 하는 정신 나간 놈이 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릴! 유저가 5억이 넘었던 중국조차 전부 접었는데, 인구를 싸그리 긁어모아 봐야 5천만인 나라에서 그런 놈이 나올 리가 있나!"

모두가 목소리를 높여 부정했다.

세계의 중심은 중국이었고. 탑의 정상을 볼 수 있는 것도 오직 중국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스스로를 '중화'라고 칭하며, 자부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아무리 애써 감추려고 해도.

말을 하는 스스로가 깨닫기 시작했다.

이 탑에는 그들이 제대로 알지 못 하는 고인물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고인물은 혼자서도 길드 전체가 움직이는 것보다 더 위협적이라는 것 또한.

그런데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는 바로 그때였다.

덜컹!

문이 양쪽으로 열리며 한 남성이 나타났다.

수려한 인상에 고급스러운 비단으로 만든 옷이 인상적인 남자였다.

모두의 시선이 남자에게 향했다.

"나, 남궁천 님!"

"무림 쪽과는 벌써 이야기가 끝난 것입니까?"

중화 길드의 마스터이자. 중국 최강의 플레이어.

남궁천.

그것이 이 남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래... 일단은 마무리 지었지."

남궁천이 뭔가 불만인 듯한 표정을 지은 채 방 안을 가로질렀다.

한 걸음. 한 걸음.

단지 걷고 있을 뿐인데도, 내부는 냉동고에 들어 있는 것처럼 짙은 한기로 가득 찼다.

꿀꺽.

여기저기서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감히 남궁천의 심기가 불편한 이유를 물어볼 정도로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사람은 없었다.

당연한 듯 비워져 있는 상석에 앉은 남궁천이 재차 입을 열었다.

"5층에 관해선 보고받았다. 책임자가 누구지?"

"저...입니다. 하지만, 남궁천 님! 이번일은 반드시...."

수염이 덥수룩했던 남자가 다급히 변명했다.

물론, 구차한 변명은 채 끝을 맺지 못했다.

"...커억?"

서걱!

깔끔하게 양분된 상반신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그깟 일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놈은 나와 함께 위로 갈 자격이 없다."

어느새 뽑았는지 남궁천의 검이 횡으로 가로질러 있었다.

눈으로 식별하기는커녕 인지하기조차 힘든 속도다.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낸 남궁천의 시선이 랭커들에게 향했다.

"나는 무림에서 시킨 일을 하러 탑의 5층으로 가야 한다. 메인 공격대 역시 나와 함께 해야 할 일이 있다."

남궁천이 메인 공격대를 호명했다.

시선이 마주친 공대장들은 고개를 숙였다.

"6층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엘프쪽은 S급 세 명과 공격대 하나를 허가하겠다. 선별된 자들은 6층으로 가 엘프들은 포로로 삼고 숲은 모조리 태워 버려라. 기한은 열흘이다."

떨어진 명령은 한 층의 소거(消去).

반론은 없다.

질문 또한 없다.

오직 명령을 이행하는 것만이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으니까.

"알겠습니다."

"이번엔 절대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

유럽에서의 볼일을 모두 끝낸 진혁은 곧바로 시련의 탑으로 향했다.

아직 김기태와의 약속까진 하루가 남아 있었기에, 그동안 엘프들과 안면이나 터 두자는 생각에서였다.

'워낙 숲속 깊숙이 숨어 있어서 만나기도 쉽지 않지.'

엘프란 종족이 원래 그렇다.

아름다운 외모에 그 누구보다 자연을 사랑하는 종족이지만, 이상하게도 다른 종족에 대해선 베타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해야 할까?

한 마디로. 만나기도 어려울 뿐더러 대화를 하는 건 더더욱 어렵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건 일반적인 플레이어들의 경우이고.

'나는 다르지.'

엘프들이 사는 곳이 어딘지.

좋아하는 과일나무들이 주로 어디에 서식하는지.

심지어 그들의 호감을 얻으려면 무얼 해야 하는지조차도 모조리 꿰고 있었으니까.

묘한 미소를 짓던 진혁이 갑자기 흠칫 몸을 떨었다.

문득 옛날 추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처음에 녀석들이랑 친해지려다가 별의별 일이 다 있었는데....'

채식만 하는 엘프들에게 귀한 거라면서 치킨을 건넸다가 부족 전체에게 쫓겼던 기억은 쉽게 잊을 수 없는 종류였다.

죽으면 48시간 동안 재접속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장작 17시간 동안 숲에서 술래잡기를 했었지.

'하긴, 그건 내가 잘못했어.'

엘프에게 고기라니.

차라리 고소한 해바라기 씨라도 줬으면 그토록 분노하진 않았을 거다.

하지만 그 사건은 최악이 아니었다.

가장 끔찍했던 기억은 10월 17일 오후 11시 43분 15초. 바로 그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건 죽어도 잊지 못할 거야.'

오죽하면 날짜와 시간까지 기억하고 있을까?

진혁이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수차례의 시도 끝. 진혁은 가까스로 엘프들과 친해질 기회를 얻어 녀석들의 마을에 초대받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날이 일 년에 한 번 있는 엘프들의 축제였을 때였다.

아름다운 밤하늘과 반딧불로 만든 전등이 어우러진 공터.

세상에 다시없을 것만 같은 향기로운 과일들과 음료는 무릉도원 그 자체를 자아냈다.

분위기는 매우 좋았다.

'나에게 악기를 하나 다룰 수 있냐고 묻기 전까진.'

악기라고는 초등학교 때 학교 수업 몇 번 들어본 게 전부였다. 그마저도 졸기 일쑤였고.

결국 최후의 수단으로 '코인 거래소'에서 유일하게 다룰 수 있는 걸 구매했다.

바로 리코더를 말이다.

진혁은 음정 박자를 모두 무시한 채 불후의 명곡인 'My heart will go on'을 연주했다.

혹시라도 듣지 못하는 엘프들이 있을까 봐 음성 증폭 마법까지 적용한 채 말이다.

그것이....

치명적인 실수였다.

"끄아아아!"

"그만, 그만! 제발 그만!"

"이건 악마다! 이곳에 악마가 강림하다니!"

"숲… 숲이 분노하고 있어! 나무들이 죽어가고 있다고!"

"정령들도 전부 떠나고 있어요."

아직까지도 엘프들의 비명이 귓가에 생생하게 들리는 것만 같았다.

'게다가 혼신의 힘을 다해 연주한 대가는 처참했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에 빙의해 타이타닉의 웅장함과 절절함을 재현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영구 추방령.

죄목은 엘프들과 숲에 있는 정령들의 영혼에 씻을 수 없는 피해를 주었다는 거다.

'이번에는... 달라.'

그 치욕을 만회하기 위해서 모든 준비를 갖춰 놨으니까.

우우우웅!

눈앞의 시야가 까맣게 물들며, 진혁이 시련의 탑 6층에 입장했다.

96화. 6층, 엘프의 숲

[6층에 입장하셨습니다.]

암전되었던 시야가 밝아지자, 눈앞에 울창한 숲이 펼쳐졌다.

'과연, 시련의 탑 최고의 휴양지 중 하나로 손꼽히는 곳답네.'

서늘한 공기와 따뜻한 햇살.

무엇보다 수려한 자연 경관이 자아내는 풍경은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여기 나무 아래로 와! 그래. 바비큐랑 맥주랑 세팅 다 해 놨어."

"6층에 있는 '구름 솜사탕'이 그렇게 맛있다던데. 우리 한번 먹어 봐야지?"

"크으. 마을 상점에서 꽤 재밌는 아티팩트들도 많이 팔고 있어. 이럴 때 코인 쓰지 언제 또 쓰냐?"

먼저 6층에 온 플레이어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떠들고 있었다.

뭐랄까?

정신없이 싸우며 탑을 오르던 일상에 작은 쉼표를 찍는 기분이랄까?

플레이어들이 6층에만 오면 나태해진다는 말이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됐다.

하지만.

'놀고 즐기는 건 나중에 얼마든지 할 수 있어.'

엘프의 숲은 자연에 취해 신선놀음이나 하는 곳이 아니다.

오직 이곳에서만 얻을 수 있는 기연들을 습득할 수 있는 기회의 장소지.

'그걸 눈치 챈 놈들은 극소수일 테지만.'

애초에 진심으로 강해지길 원하는 고인물들이라면, 이곳에 있지도 않을 것이다.

엘프들을 찾기 위해서 숲속을 헤매고 있는 중일 테니까.

'그럼, 나도 슬슬 가 볼까.'

진혁은 플레이어들을 지나쳐 숲속 깊숙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

스타팅 포인트로부터 3시간쯤 들어가자 본격적으로 숲이 복잡해졌다.

이곳은 일종의 경고다.

여기까지는 자유롭게 와도 좋지만 이후부터는 엘프들의 영역이 시작되니 더 이상은 접근하지 말라는.

그러나 아무리 복잡하게 나무들을 배치해 둬도 소용없다. 심지어 그 나무들이 주기적으로 움직이며, 새롭게 지형을 형성하더라도 소용없는 건 마찬가지다.

진혁은 이미 엘프들이 길을 찾는 방법까지 익혀 둔 상태였으니까.

"스읍."

깊게 숨을 들이마시자 온갖 향기가 후각을 자극했다.

상큼한 풀내음과 과일의 달콤한 향이 그대로 전해졌다.

물론, 여기서 중요한 건 흙냄새다.

진혁은 아주 희미하게 배어 있는 쌉쌀한 흙내음을 구분했다.

'왼쪽이로군.'

왼쪽에 미묘하게 다른 향이 배어 있다.

진혁이 곧바로 방향을 틀었다.

버섯의 위치와 풀의 모양, 나무의 나이테까지.

이후에도 계속에서 갈림길이 나왔지만, 진혁은 거침없이 엘프들의 표식을 식별하며 더욱더 숲속 깊숙이 들어갔다.

그리고.

조금 멀리 떨어진 나무 위에선 그 모든 걸 지켜보는 존재가 있었다.

짧은 단발머리에 뾰족한 귀가 인상적인 종족.

바로, 숲의 주인인 엘프였다.

'어떻게 인간이 저 방법을 알고 있는 거지?'

엘프 마을의 레인저인 실비아는 지금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인간들을 막기 위해 고심해서 만들어 둔 여러 가지 방비책들.

그 모든 것들이 너무나 허무하게 간파당하고 있지 않은가?

'흙냄새를 구분하는 건 오랫동안 숲에서 생활하지 않았으면 불가능한 일이야.'

버섯의 위치나 풀의 모양 등도 내부인이 아니라면 결코 알 수 없는 종류였다.

보통의 인간들이라면 그런 사소한 것들엔 아예 관심조차 갖질 않았을 테니까.

'내...가 모르는 사이에 하프 엘프라도 태어난 건 아니겠지?'

외모만 아니었다면, 인간이 아니라 엘프라고 해도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상대가 길을 찾는 방식은 엘프의 것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바로 그때.

인간 남자가 결계 앞에 도달했다.

'됐어! 아무리 대단한 인간이라도 여기서 끝이야.'

저 앞에 펼쳐져 있는 건 엘프들의 전용 결계였다.

하이 엘프어로 쓰어진 '허상 결계'에 들어갈 경우 탈출 따위는 불가능했다.

무수히 펼쳐져 있는 환영 속에서 일주일 정도 제자리를 맴돌다 보면 결국엔 탈진해 버릴 터.

그렇게 의식을 잃은 인간을 결계 밖으로 데려다 놓으면 그걸로 실비아의 임무가 마무리되는 것이다.

그런데.

"으음. 여기 하이 엘프어는 이렇게 쓰는 게 아닌데. '에테 타마로스'는 수동태인데, 능동태로 적어두다니. 쯧쯧. 어느 엘프인지 몰라도 문법 시간에 어지간히 졸은 모양이네. 이래서야 원래 결계 능력의 50% 정도밖에 발휘되지 못하겠어."

나무에 새겨진 하이 엘프어를 보던 인간 남자가 혀를 찼다.

동시에 바닥에 떨어져 있는 돌멩이로 틀린 부분을 고쳐 주기까지 했다.

화끈하고.

실비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직 견습 레인저인 그녀로서는 하이 엘프어가 어려울 수밖에 없던 것이다.

'대... 대체 뭐야 저 인간!'

***

'고맙게도 풋내기 엘프가 붙었네.'

진혁이 피식 웃었다.

숲의 경계에 도달했을 때부터 나뭇가지를 타고 따라오던 엘프의 존재쯤이야 당연히 눈치 채고 있었다.

그래도 숲의 종족이라고 은신 자체는 제법 뛰어난 편이었지만.

그 어설픈 자신감과 실력 덕분에 오히려 상대의 위치를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미끼는 충분히 뿌려 뒀고....'

이 정도면 상대에게 확실한 첫인상은 줬을 거다.

그렇다면 다음은 꽁꽁 숨어 있는 상대를 불러낼 차례다.

진혁이 아공간 인벤토리를 열었다.

그리고 준비해둔 식재료와 조리 기구들을 차근차근 꺼냈다.

[Lv1 '이세계 식당'이 발동됩니다.]

미슐랭을 돌아다니며 얻은 스킬. 그리고 그 스킬들을 융합해 나온 상위 버전의 스킬이 발동되었다.

그러자 어설펐던 진혁의 손놀림이 완전히 달라졌다.

야채와 과일을 다듬는 칼솜씨는 거의 예술에 가까운 경지였다.

'아...름다워.'

나무 위에 있는 실비아는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봤다.

그러나 잠시뿐이었다.

"설마...?"

정신없이 구경하느라 깜빡했는데, 이 냄새. 그리고 저 요리 특유의 모양.

틀림없다.

저건 '고기'다.

실비아가 단숨에 나무 아래로 뛰어내렸다.

"감히, 신성한 엘프의 숲에서 고기 요리를 하다니. 이게 무슨 짓이에요!"

활시위를 당긴 채 고함을 치는 모습.

분노가 서린 얼굴에선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음.

"이거 고기 아닌데?"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네?"

"고기 아니라고 이거."

"분명히 제 눈으로 봤는데, 그걸 믿으라는 말인가요?"

"못 믿겠으면 가까이 와서 확인해 보든가."

"그럴 리가...."

실비아가 반신반의하면서도 조심스럽게 진혁에게 다가왔다.

그런데

"어라?"

실비아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냄새와 모양은 고기와 너무나 흡사해 보였는데.

자세히 보니 고기가 아니었다.

흰 콩과 견과류 그리고 신선한 야채로만 만든 음식.

"콩고기라는 거야. 우리 쪽에서도 차세대 대체 식품으로 꽤 각광받고 있지."

대체 식품.

웰빙이나 지구의 환경오염 문제 혹은 동물들의 권리나 개인의 신념 등을 이유로 최근 급성장하고 있는 분야다.

실제로 나스닥에 상장되어 있는 '비욘드 미트'라는 회사는 주가가 하늘을 뚫고 고공 행진하는 중이었었고.

'당연히 고기를 싫어하는 엘프들에게도 색다른 매력을 느끼게 해 주겠지.'

그래서 준비해 봤다.

최고의 조리 스킬을 사용해 까다로운 엘프들의 입맛조차 충족시켜 줄 특별식을.

"한번 먹어 봐.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꽤 자신작이거든."

"정말... 고기가 아닌 거예요?"

"음식 가지고 장난치거나 하진 않아. 엘프들이랑 원수진 것도 아니고. 뭐 하러 싫어하는 고기를 억지로 먹이냐?"

진혁의 말에 실비아가 천천히 활을 내렸다.

그리고 호기심에 가득 찬 눈으로 콩고기 한 점을 입에 넣었다.

오물오물.

작은 입이 연신 움직였다.

바로 그 순간.

"세상에 이런 맛이...."

실비아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음식은 생전 처음 먹어 봤으니까.

'너무 맛있어.'

부드러운 콩과 각종 채소가 어우러져 깊은 풍미를 자아냈다.

올리브유가 적당히 들어가서 부드럽고 감칠맛이 나는 데다.

특별히 제작한 소스로 마무리까지 했으니, 아무리 검소하게 사는 엘프라도 식욕이 동할 수밖에 없다.

[3계급 레인저 '실비아'의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실비아'가 당신에게 활을 겨눈 것에 대해 미안함 감정을 느낍니다.]

호감도의 상승과 반대로 함부로 상대를 판단 것에 대한 미안함이 전해졌다.

모두 진혁이 계획했던 대로였다.

엘프는 은원 관계만큼은 확실히 하니까.

그리고 그 예상대로.

"죄송해요.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실비아가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이 한 행동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후회스러웠던 탓이다.

여기서 사과를 받아주면 그건 하수다.

오히려.

"오해가 풀렸으니 다행이야. 애초에 엘프들의 영역에 들어온 내 잘못이기도 하고."

진혁이 일부러 실비아의 죄책감에 무게를 실어 줬다.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 고수지.

"아니에요. 이건 제 잘못이에요."

실비아가 완강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죄의 의미로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해 드릴게요."

당연히 그렇게 말해야겠지.

그걸 위해서 이토록 순진무구한 가면을 쓴 채 연기를 해 왔으니까.

"그렇다면.... 엘프의 마을을 한번 볼 수 있을까?"

"예? 저희 마을을요?"

"사실, 내가 사회학과 학생인데. 다른 종족의 삶을 이해하는 논문을 쓰고 있거든. 인간들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금역에 들어갈 기회를 준다면, 나로서는 굉장히 소중한 추억이 될 거야."

참여 관찰법이라고.

문화와 관습이 다른 곳을 이해하기 위해 사회학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방법 중 하나다.

[Lv4 '교감'이 발동됩니다.]

진혁이 은근슬쩍 교감 능력을 사용했다.

여러 차례 사용하며, 레벨을 올린 성장형 스킬은 이제 타인을 친한 친구로 여길 정도로 강력해진 상태.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마을의 방문이란 말에, 살짝 난처한 기색을 보이던 실비아가 갑자기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마침. 일주일 뒤에 저희 마을에 축제가 있어요. 이렇게 맛있는 콩고기를 대접할 수 있다면 장로님들이나 마을 엘프들도 굉장히 좋아할 거예요."

일주일 뒤라....

딱 좋은 타이밍이다.

"알겠어. 그럼 일주일 뒤, 다시 이곳으로 올게."

"네. 알겠어요."

진혁을 보내려던 실비아가 무언가 생각났는지 다급히 외쳤다.

"맞다. 혹시...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강진혁이라고 부르면 돼."

헷갈리지 말고 잘 기억해라.

티모대령이 아니라 강진혁이다.

"저는 실비아예요. 엘프 3계급에 위치한 레인저를 담당하고 있구요."

실비아 또한 정식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3계급이면 하위 엘프에 속하겠군.

"실비아. 기억했어. 다음에 올 땐 더 맛있는 거 많이 가지고 올게."

"네! 기대하고 있을게요!"

가벼운 작별 인사를 끝으로 진혁은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우우우웅!

눈앞에 상태창이 나타났다.

[플레이어 김기태 님으로부터 화상 통화가 왔습니다.]

김기태였다.

'준비가 끝났나 보네.'

미궁을 다시 개방할 재료들을 모으기가 쉽진 않았을 텐데, 의의로 빨리 끝낸 듯싶었다.

그 정도로 다급하다는 뜻이기도 하겠지.

수락을 하자 곧바로 김기태의 얼굴이 나타났다.

"안녕하십니까, 강진혁 플레이어님. 말씀드릴 게 있는데, 잠시 시간 괜찮으십니까?"

"장황하게 설명해 주실 필요 없습니다. 시간이랑 장소만 말씀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1시간 뒤 3층 '멜타 언덕'입니다. 현재 있는 곳의 좌표를 말씀해 주시면, 공간 이동이 가능한 마법계열 플레이어를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1차 전직과 히든 보상을 동시에 얻을 수 있는 기회.

마침내 회색 신전으로 갈 때가 다가왔다.

97화. 회색 신전 (1)

3층에 위치한 '회색 신전'.

이곳의 입구엔 신전을 관리하는 사제가 존재하는데, 이들은 플레이어들의 1차 전직을 도와주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탑 내에서도 가장 대중적으로 활성화된 '전직 소개소'라고 할까?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여기서 사제에게 1차 전직에 관한 퀘스트를 받고 탑의 다른 곳을 돌아다니며 퀘스트를 수행했다.

대부분 신전의 미궁 자체가 목적이 아닌, 사제를 만나기 위해서 이곳을 찾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신전 안으로 들어갈 경우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미궁이 내부에는 그리스 시대 가장 끔찍했던 괴물 중 하나가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스무 차례 넘게 공격대를 전멸시킨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곳.

[메두사의 은신처]

이곳이 바로 싸울아비와 진혁이 공략하기로 한 미궁이었다.

바로 그때.

우우우우웅!

눈부신 빛과 함께 하늘에서 새하얀 섬광이 쏟아졌다.

공간 이동 마법이 발동된 것이다.

"후우. 다 왔습니다."

마법 계열 플레이어가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편하게 왔어요."

진혁이 짧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이건 진심이다.

정상적으로 이동했으면 꼬박 12시간을 걸어야 할 거리를 몇 초 만에 이동시켜 줬으니까.

이렇게 보면, 플레이어들이 전문적으로 마법을 배우고 전직하는 것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쪽이 마법사로 전직하겠다거나 하는 생각 따윈 없었지만.

'어차피 나는 스킬을 복사할 수 있으니.'

모든 스킬과 그 스킬의 상위 버전의 스킬까지 융합할 수 있는데 굳이 1차 전직으로 마법을 배워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이처럼 눈앞에 있는 마법사한테 스킬을 복사해 버리면 되는데?

하지만 복사 조건을 확인한 진혁은 침음성을 뱉어야만 했다.

[복사 조건: 신장 160cm 체중 107kg. 심각한 탈모를 갖고 있는 남자는 38년간 모태 솔로입니다. 언제나 퇴근 후에 반기는 거라곤 어항 속에 있는 암컷 붕어 한 마리뿐. 그를 위해 평생을 함께할 반려자를 찾아 주세요. 성공할 경우 그가 갖고 있는 고유 능력이나 스킬 중 하나를 복사할 수 있게 됩니다.]

꿀꺽하고.

진혁의 목을 따라 마른침이 넘어갔다.

"...."

순간, 머릿속에 여러 후보군이 떠올랐지만, 그 누구도 적절한 선택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차라리 발록 모가지를 따오는 게 더 쉽겠네.'

아니면 드래곤 브레스를 맨몸으로 맞고 살아남는 게 더 쉬울지도 모르겠다.

단언컨대 역대 복사 조건 중 가장 어려운 난이도를 자랑한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진혁이 손가락으로 미간을 붙잡았다.

유연화...를 잘못 소개해 줬다간 유천영을 비롯해 그 휘하에 있는 모든 이들을 적으로 돌리게 될 거다.

어디 그뿐이랴?

유연화한테 어퍼컷을 맞게 될지도 모른다.

아머드 고릴라도 일격에 쓰러뜨릴 수 있는 괴력을 떠올리자 진혁의 등골을 따라 식은땀이 흘렀다.

테레사는 거절을 잘 못 하는 성격이니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왠지 스스로가 평생을 죄책감에 시달리게 될 것만 같았다.

엘리스는... 그냥 말을 말자. 스킬 하나 얻자고 목숨을 걸 필요는 없었으니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이번 건 포기하자.'

진혁은 깔끔하게 단념했다.

그때.

"오셨군요."

공간 이동을 감지한 김기태와 십여 명의 남녀가 다가왔다.

하나 같이 잘 갈무리된 마력을 갖고 있는 이들.

싸울아비 길드의 제2 공격대 플레이어들이었다.

'과연, 이번에는 싸울아비 쪽에서도 제대로 이를 갈고 온 것 같네.'

싸울아비가 보유하고 있는 공격대는 총 11개.

그중에서 메인이라 할 수 있는 제1, 2 공격대 중 하나가 동원된 건 꽤나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들은 한 번 쓰고 버리는 소모품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하하.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강진혁 플레이어님. 저는 제2 공격대를 이끄는 공대장 이영권이라고 합니다."

훤칠한 키에 갈색 머리카락을 지닌 남자가 다가왔다.

등에 멘 직사각형 방패와 묵직해 보이는 도끼를 보니, 탱과 딜을 동시에 담당하는 듯싶었다.

진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영권이라면....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다.

'엘리스랑 곱창 먹을 때 TV에 나왔던 그 녀석이군.'

최근 5층의 '검투장'에서 꽤 두드러진 활약을 했던 플레이어.

비록 우승을 달성해 '자유'를 얻는 건 세계 정상급 길드의 랭커들이 차지했지만.

이영권 역시 시드의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갔다.

강한 적들을 상대로도 조금도 밀리지 않는 실력과.

팀 단위의 전투에서 냉정하고 빠른 상황 판단으로 다수를 살린 통솔 능력까지.

제5공격대의 공대장이었던 이영권은 단숨에 메인 공격대의 공대장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이번이 그 능력을 처음으로 평가받는 자리인 셈이다.

"강진혁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아닙니다. 저희야말로 잘 부탁드려야죠. 개인적으로 강진혁 플레이어님 뷰튜브 동영상 하나도 빠짐없이 챙겨보고 있습니다."

이영권이 상기된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그러자 뒤에 있던 나머지 플레이어들도 앞다퉈 말을 걸었다.

"서브 딜러를 맡고 있는 하연수라고 합니다. 이 미궁 정말 힘들었는데, 강진혁 플레이어님과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든든하네요."

"강 플레이어님이 있다면 미궁쯤이야 뭐. 가뿐하죠."

"저, 저는 공격대 메인 힐러인데. 혹시 같이 사진 한 장만 찍어 주실 수 있을까요? 이번 레이드에 강진혁 님이 온다고 하니 친구들이 다들 믿질 않아서...."

"크흠! 사실 저도 한 장만...."

"저는 팔짱 끼고 찍어도 되나요?"

마치, 최애 연예인을 만난 듯한 분위기다.

모두들 어떻게든 진혁과 한 마디라도 나누려고 애를 썼다. 심지어 친구 등록을 하거나 개인 번호를 물어보는 사람도 있었다.

'이건 무슨 팬미팅도 아니고.'

진혁이 과한 관심에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한국 2위 길드의 메인 공격대라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 있을 줄 알았는데.

정상급 랭커와의 연줄을 만들기 위해선 그런 건 얼마든지 던져버릴 수 있는 모양이다.

바로 그때 김기태가 한 마디 덧붙였다.

"명목상 공대장은 이영권이지만, 모든 결정권은 강진혁 플레이어님에게 드리겠습니다. 안에서 나오는 모든 부산물 또한 강진혁 플레이어님이 가지셔도 상관없습니다. 딱 한 가지. 공략에만 성공해 주십시오."

한 마디로 모든 걸 줄 테니 싸울아비 길드가 이 미궁의 공략에 성공했다는 타이틀만 달라는 뜻이다.

그것도 전부 달라는 게 아닌. 강진혁이란 이름 옆의 한 자리만.

자존심과 이득을 모두 버리더라도 길드의 명예를 높이는 게 중요하다는 뜻이겠지.

한국 2위라는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으니까.

'욕심을 부리면 근사하게 뒤통수를 날려 줄 계획이었는데.'

저렇게 주제 파악을 잘하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알겠습니다. 그 조건으로 하죠."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준비가 끝나는 대로 미궁에 들어가겠습니다. 강진혁 플레이어님도 혹시 하실 게 있으시면 지금 마무리 부탁드립니다."

"대충 시간이 어느 정도나 걸릴까요?"

"한 30분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30분이라.

그 정도면 충분하다.

***

이곳에 온 또 하나의 목적, 1차 전직.

신전 안쪽에 있는 석조 건축물에 흰색 로브를 걸친 사제들이 보였다.

진혁이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어서 오십시오, 낯선 이여. 이곳에선 본 적 없는 얼굴이군요."

나이가 제법 있어 보이는 사제가 입을 열었다.

"1차 전직 때문에 왔습니다. 이쪽에 와야 관련 퀘스트를 받을 수 있다고 들어서요."

"그런 이유라면 제대로 찾아오셨습니다. 더욱 강해지기 위해선 개개인에 맞는 직업을 가져야 하는 법. 그럼, 묻겠습니다. 본인이 추구하는 방향은 무엇입니까? 검술이라면 검사를. 마법이라면 마법사를. 동료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탱커나 힐러가 적합할 겁니다."

사제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직업들이 공개됩니다.]

엄청나게 긴 목록이 나타났다.

'진짜 세계관 하나는 미친 듯이 크다니까.'

시련의 탑에 존재하는 직업은 그야말로 셀 수 없다.

방금 사제가 말했던 건 대표적인 예고, 그 외에도 비인기 직업이라든가 히든 직업 등 다양한 종류의 직업을 선택할 수 있었다.

물론, 특정 조건을 만족해야겠지만.

그러나.

"으음. 하나같이 재미없는 직업들밖엔 없네요."

진혁은 따분한 듯 중얼거렸다.

검사, 마법사, 힐러, 궁수 등.

이미 부캐로 해 봤거나 그런 직업을 갖고 있는 플레이어나 몬스터들과 지겹도록 싸워 봤다.

고유 능력과 스킬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뭐가 장점이고 단점인지 모조리 파악하고 있다는 뜻이다.

'탑을 오르는 것도 좋지.'

인류의 미래가 달린 50층의 정복. 그 중요성이야 말해 봤자 입만 아프다.

하지만, 그것과 동급으로.

아니, 어쩌면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바로 스릴과 재미다.

'모든 게 똑같으면 그것만큼 심심한 것도 없어.'

찌들대로 찌들어 있는 고인물의 DNA엔 조금이라도 새로운 자극이 필요했다.

다시 한번 이 세상에 흥미를 가질 수 있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혁은 새로운 직업을 고르고 싶었다.

"비인기 순으로 정렬."

명령어를 말하자 목록이 역순으로 정렬되었다.

화가

낚시꾼

3. 소설가

4. 결계사

5. 조각사

전투에 부적합한, 혹은 성장하기가 어려운 직업들이다.

당연히 플레이어들에게 인기가 없었고, 그렇기에 여기 있는 직업들은 반쯤 사장되다시피 한 상황이었다.

'흠....'

진혁이 턱을 쓰다듬었다.

이중에서 취향에 맞는 걸 찾아야 한다.

'두 개 빼고는 전부 예술 계열이네.'

화가나 소설가도 나쁘진 않지만, 성장하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아름다운 그림이나 역사에 길이 남을 대작 소설.

물론 훌륭하다.

허나 10년을 투자해서 완성하면 뭐 하나? 그 전에 인류가 멸망하든 탑이 정복되든 했을 텐데.

같은 이유로 세월을 낚는 낚시꾼도 취향에 맞질 않았다.

그리고 조각사는... 여러 가지 이유로 선택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차원에서 위대한 조각사가 등장할 것만 같았으니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결계사. 이걸로 하겠습니다."

진혁이 결정을 내렸다.

"겨, 결계사를 1차 직업으로 삼으시겠다고요? 진심입니까?"

사제가 깜짝 놀라 다시 한번 물었다.

지금까지 히든 직업 퀘스트의 조건을 묻기 위해 달라붙는 플레이어들은 넘쳐났지만.

비인기 직업을 하겠다고 한 플레이어는 처음이었다.

당연히 황당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진혁은 확신하듯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인기도 없고 다루기 까다로운 직업. 딱 제가 원하는 겁니다."

결계라는 분야가 워낙 복잡하긴 하지만, 그건 일반적인 경우의 이야기고.

'고대 룬어와 하이엘프어까지 습득하고 있는 나에겐 도전 의지를 약간이나마 불태울 수 있는 수준이지.'

무엇보다 검술로 천유성을 놀려먹는 것도 재밌었지만.

결계로도 놀려먹으면 더욱 재밌을 것 같았다.

'그 녀석도 결계에 꽤나 조예가 깊었으니까.'

그래.

이게 제일 큰 이유다.

"...알겠습니다. 선택은 본인의 몫이니까요."

사제가 마지못해 검은색 스크롤 하나를 건넸다.

결계사로 전직하기 위한 요구 조건이 적혀 있는 스크롤이었다.

그런데 진혁이 스크롤을 받은 바로 그때였다.

웅성웅성!

갑자기 신전 쪽에서 시끄러운 잡음이 들렸다.

마력이 거칠게 부딪치는 건 틀림없는 신경전이다. 그것도 꽤나 강한 상대끼리.

'뭐지?'

진혁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곳엔 싸울아비 길드 외에도 또 다른 인물들이 있었다.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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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화. 회색 신전 (2)

날카로운 인상에 얼굴을 가로지르는 검상.

허리춤에 찬 일본도와 전신을 형형색색의 문신으로 뒤덮은 플레이어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거야 뭐.

굳이 확인해 보지 않아도 된다.

저 녀석들이 어디서 왔는지는 너무나 뻔했으니까.

'사무라이 길드라....'

진혁의 미간이 기분 나쁘게 구겨졌다.

녀석들이 왜 이곳에 왔고 어째서 김기태는 화를 내고 있는지 예상이 갔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두 집단 사이에 목소리가 커졌다.

"여긴 저희가 소유하고 있는 던전입니다. 설마, 잊으신 건 아니겠지요?"

"그건 알고 있습니다만, 김 팀장님도 아시다시피 싸울아비에선 매번 실패만 하고 있지 않습니까? 분수에 넘치는 미궁을 품고 있기 보단 차라리 공략이 가능한 이들에게 넘기는 것이 인류에 이바지하는 길이지 않을까요?"

턱수염에 선글라스를 낀 남자가 이죽였다.

말은 정중하게 하고 있지만, 내용은 완전히 물을 먹이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뿌득!

김기태가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러나 별 다른 반박은 하지 못했다.

실제로 자신들은 계속해서 실패해 왔고, 대조적으로 사무라이 길드는 최근 들어 놀라울 정도의 성장세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흐음. 이상하네."

진혁이 머리를 긁적이며 끼어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진혁에게 향했다.

"저... 남자는?"

"가, 강진혁이다. 한국의 랭커 강진혁이야!"

"설마, 싸울아비 쪽과 관련이 있는 건가?"

"이건 안 좋은데...."

사무라이 쪽 플레이어들의 입에서도 작게나마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분위이가 어수선해지자 선글라스가 재빨리 나섰다.

"이거 또 의외의 분이군요. 헌데, 뭐가 이상하다는 겁니까?"

"들어보니 이쪽 전력이 부족해서 계속해서 실패했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렇게 말했죠. 물론, 기분이야 나쁘시겠지만, 그게 현실입니다."

"그게 이상하다는 겁니다. 제가 볼 땐 그쪽 전력도 형편없어 보이거든요."

뭐, 나름대로 끄적끄적 긁어모아 온 것 같긴 한데.

고작 그 정도 멤버로 메두사를 상대하려고?

다 합해 봐야 천유성이나 테레사의 반의반도 안 될 수준으로 자신감이 너무 과하네.

"아! 혹시, 장래 희망이 예쁜 돌석상이 되고 싶은 거라면 이해가 가네요. 저 안에 있는 메두사가 어우야. 아주 그냥 석상 수집가 뺨치는 수준이죠."

진혁이 생긋 웃었다.

"지, 지금. 우리가 실력이 부족하다. 이런 뜻입니까?"

"부족한 수준이 아니라 아예 미달이이에요."

부족한 건 살짝 아쉽다는 뉘앙스고.

너희는 한 트럭을 모아도 안 되는 뜻이다.

"미, 미달이라고?!"

"빌어먹을, 그걸 말이라고!"

진혁의 말에, 사무라이 길드에 소속된 플레이어들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크으."

"역시!"

반면, 싸울아비 길드 쪽은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듯한 쾌감을 느꼈다.

"그 발언, 후회할 거야. 네놈이 아무리 낮은 층에서 설쳐 봤자. 우리 일본에는 시련의 탑을 30층까지 올라가 본 플레이어가 있다. 너희 따위와는 달리 '진짜' 고인물이지."

선글라스의 말투가 싸늘하게 변했다.

"30층에 가 본 플레이어가 있다고?"

"그래. 지금까지 그 누구도 가 본 적 없는 탑의 중층부. 그곳을 경험해 본 분이다. 그분의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먼저 탑을 정복할 거다.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일본이 말이다."

선글라스가 자랑스럽다는 듯이 어깨를 폈다.

미래에 대한 정보의 독식!

당연히 고양감이 차오르고 흥분을 감추기 힘들 수밖에.

하지만.

진혁은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찼다.

'개소리도 정도껏이지.'

20층대부터 플레이어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는데.

뜬금없이 30층을 오른 고인물이 튀어나왔다?

그것도 일본에서?

그럴 리가 없지.

'그래도 저렇게 자신감이 넘치는 걸 보면, 적어도 저 녀석은 그렇게 믿고 있는 모양인데....'

그렇다는 건 선글라스와 함께 있는 누군가가 귀여운 장난질을 치고 있다는 뜻일 거다.

진혁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하필이면 내 앞에서 그런 거짓말을 치다니.'

어떤 말로 사무라이 길드를 구워삶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어.'

골라도 너무 잘못 골랐다.

진혁이 '탐식의 눈'으로 플레이어들을 훑었다.

여러 개의 상태창이 순차적으로 점멸했다.

'이놈은 아니고. 이놈은 아예 머저리고....'

눈에 띄는 놈이 보이질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바로 그때.

진혁의 시선이 한쪽에서 멈췄다.

——————————————————

이름: 야마모토 타케시

성별: 남

나이: 25세

레벨: 27

힘 16 민첩 26 체력 23 마력 32

보유한 스탯 포인트: 0

보유한 코인: 25,853

직업: 음양사(陰陽師)

고유 능력: 반쪽 미래시(未來視)

스킬: Lv6 '거짓 예언', Lv5 '미미한 교감', Lv5 '음양천변(陰陽千變)', Lv5 '식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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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이거였군.

어떻게 상대가 그럴듯한 거짓말을 칠 수 있었는지 이제 알겠다.

'반쪽짜리 미래시라....'

숙련도에 따라 상층을 엿볼 수 있는 힘,

'반쪽'이란 단어가 붙긴 했으나, 미래시는 고유 능력 중에서 나름대로 쓸모 있는 편에 속하는 능력이다.

아무리 단편적인 정보든, 혹은 쓸모없는 정보든.

어찌됐든 남들이 모르는 미래를 예지할 수 있다는 점은 분명 매력적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모든 건 단지 탑의 위를 경험해 보지 못한 이들의 이야기일 뿐.

원하지도 않는 편린을 보는 것과.

실제 그 층을 보고 경험한 것은 애초에 비교가 불가능한 일이다.

'이거 일이 재밌게 돌아가네.'

진혁이 타케시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묘한 미소를 띠운 채로.

***

일본의 희망.

사무라이 길드가 새로 영입한 히든카드.

세계 100위 랭커 중 1인.

이 모든 것들이 앞으로 타케시가 얻게 될 타이틀이었다.

미래를 보는 힘이야말로 시련의 탑을 오르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능력이었으니까.

'어차피 내 능력이 불완전하다는 걸 아는 사람은 없어.'

그럴 듯한 정보를 던져 주며, 탑의 높은 곳을 가 본 고인물 행세를 한다면 상위 길드의 관심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타케시는 확신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 확신은 적중했다.

일본 최고의 길드라 할 수 있는 사무라이 길드에서 찾아왔으니.

타케시는 떨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하게 탑의 30층을 가 봤노라고 말했다. 동시에 아직 누구도 모르는 탑에 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물론, 몇몇 경우는 틀렸지만, 타케시는 탑에 숨겨져 있는 굵직한 정보들을 맞힘으로써 사무라이 길드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만약 거짓말이 들통 나더라도 그건 먼 후의 일이야.'

그리고 들통 나면 또 어떠랴?

거짓을 현실로 만들면 그뿐.

길드 차원에서 지원을 해 준다면, 강해지는 것쯤이야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당연히 반쪽짜리 능력도 성장할 테고 결국엔 진짜 미래를 보는 랭커가 될 테지.

'그래. 랭커가 별거 있어? 그 녀석들도 처음엔 다 약했을 거 아니야.'

사무라이 길드가 전폭적으로 밀어주는데 그 무엇이 두렵겠는가?

아이템. 경험치. 랭커.

무엇이든 말만하면 들어줄 텐데?

하지만. 승승장구하기만 하던 행보는 바로 지금 멈췄다.

강진혁이란 인물을 만남으로써.

'...뭐지?'

타케시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주위에 있는 플레이어는 자신을 빼고도 수십여 명.

하지만, 진혁은 다른 곳에는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저 미묘하게 뒤틀린 입꼬리.

마치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미소다.

위험하다.

지금까지 완벽하게 위장을 해 온 타케시였지만, 지금 순간만큼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전신을 옭아맸다.

그런데 바로 그 때.

"호오. 30층을 올라본 고인물이라니. 과연 엄청나네요. 각종 매체와 커뮤니티에서도 탑의 10층 이 상에 관한 정보는 거의 풀리지 않았는데 말이죠."

진혁이 입을 열었다.

"잘 아는군. 이제야 상황 파악이 되는 모양이지?"

선글라스가 더욱 기가 산 얼굴로 이죽였다.

"예. 이제 좀 이해가 되네요. 그 정도 고인물이 있다면 당연히 세계적인 차원에서 밀어주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푸하하! 그래. 한국인 중에서도 말귀가 통하는 놈이 있었군."

"별 말씀을. 그럼, 먼저가시죠. 저희는 뒤를 따르겠습니다."

진혁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거 일이 너무 쉽게 돌아가는구만."

"화제의 랭커라더니. 진짜 고인물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 하는 것 봐."

"역시, 한국의 일본의 10년 전 그림자에 불과하니까."

서른 명의 일본계 플레이어들이 앞장섰다.

딱 한 명.

"...."

타케시만큼은 무언가 걸리는 듯 좀처럼 발걸음을 떼지 못 했다.

하지만 잠시뿐이었다.

곧이어 사무라이 길드에서 온 플레이어 전원이 미궁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당황한 건 싸울아비 길드 쪽이었다.

"가, 강진혁 플레이어님?"

"설마, 이자들이랑 같이 가자는 말씀입니까?"

김기태와 이영권이 동시에 외쳤다.

"물론 함께 가야죠."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의미심장한 질문 하나를 던졌다.

"만약 저희가 양보하지 않았으면, 김기태 씨가 저 사람들 미궁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을 거 아닌가요?"

"무, 물론입니다. 저희가 어떻게 해서든 막았을 겁니다."

"그러면 저 사람들 앞으로도 계속 숨 쉬면서 살아 있을 텐데. 그럼 안 되죠."

"예?"

"서, 설마...?"

이번엔 두 사람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진혁이 말하는 게 무슨 의미인지 깨달은 것이다.

"말했다시피. 저 정도 실력으론 절대 살아서 못 나와요."

가짜 미래시 하나 믿고 까부는 놈들 따위가 무슨 수로 메두사를 상대한단 말인가?

어차피 공략법도 제대로 숙지하지 못했을 텐데?

타케시란 놈은 사무라이 길드의 무력 하나만을 믿고 있었고.

반대로 사무라이는 타케시의 반쪽짜리 능력에 의존하고 있는 상태.

서로가 썩은 동아줄을 붙잡고 지옥으로 뛰어가겠다는데.

우리는 한 걸음 뒤에서 불구경이나 하면 그만이다.

자존심상 앞서간 멍청이들이 온갖 함정과 몬스터들을 상대할 테니까.

"처음엔 좋은 말(?)로 타일러 보낼 생각이었습니다."

굳이 사지로 몰아넣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리 마음에 안 들더라도 그것만으로 사람이 죽어야 할 이유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주제도 모르고 남의 밥그릇에 숟가락을 얹었으면... 그에 대한 대가도 감수하겠다는 뜻이겠죠."

차갑게 식은 말투.

능글맞고 고분고분했던 모습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

싸울아비와 사무라이.

총 62명으로 구성된 공격대가 미궁에 입장했다.

[미궁 '회색 신전(메두사의 은신처)'에 입장하셨습니다.]

짧은 경고와 함께, 암전되었던 시야가 밝아졌다.

진혁이 주위를 둘러봤다.

갈라져 있는 사이로 솟구치는 화염. 그리스 시대를 연상케 하는 각종 건축물들과 기둥들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다.

물론, 가장 눈에 띄는 건 돌로 변한 사람들의 석상이다.

"먼저... 도전했던 플레이어들이야."

"젠장. 더럽게 처참하구만. 이거 다시 돌아올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거지?"

"없어. 눈 마주치면 그대로 끝이라고 생각하면 돼."

절대 판정을 갖고 있는 '석화'는 한 번 발동되면 그 어떤 방법으로도 돌이킬 수 없다.

괜히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이 미궁의 장식품이 된 게 아니다.

"걱정마라. 이미 대비책은 세워 뒀으니까."

선글라스가 들고 있는 방패를 들어올렸다.

이 미궁을 공략하기 위한 핵심 아이템.

성유물 '페르세우스의 방패'.

그렇다.

사무라이에서 그토록 당당하게 나선 이유는 고인물인 타케시 외에도 신화 속 전투를 재현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걸 지켜보던 진혁은 터져 나오는 실소를 삼켰다.

'고작 저걸 믿고 들어온 거였나.'

하여간 유명인이 사용했던 물건을 하나 구하면, 자신이 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착각하는 놈들이 있다.

빌게이츠가 사용했던 프로그램 구하면 마이크로소프트를 창업하고,

한 입 베어 문 사과를 보고 있으면 아이폰이 뚝딱 나오나?

'아무리 좋은 성유물이라도 다루는 사람이 형편없으면 아무 소용없어.'

물론, 어중간한 레벨에선 '템빨'이라는 게 통하기도 했지만.

적어도 시련의 탑의 난이도 높은 유적이나 미궁에선 그런 말은 통용되지 않는다. 아이템은 어디까지나 보조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너희는 열심히 앞에서 설쳐라. 나는 뒤에서 느긋하게 공략해 줄 테니.'

진혁이 전체적인 판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우우우웅!

갑자기 아공간 인벤토리가 격렬하게 진동했다.

'이건?'

진혁이 재빨리 내부를 살폈다.

조금 전, 사제로부터 받은 검은색 스크롤이 무언가에 반응하고 있었다.

동시에.

[조건을 만족했습니다.]

['최초로 탑을 정복한 자'를 위한 두 번째 특전이 도착했습니다.]

눈앞에 황금색 상태창이 나타났다.

99화. 회색 신전 (3)

행운 스탯과 적응형 스탯을 줬던 첫 번째 보상.

거기에 이어 두 번째 보상이 나타났다.

'1차 전직 퀘스트를 받고 미궁에 들어온 게 트리거가 된 건가?'

진혁이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고인물 조차 놀라게 만들 정도로 첫 번째 보상이 규격 외에 였기에. 이번에는 얼마나 좋은 보상을 줄지 기대됐다.

그래. 여기서 태연한 척 한다면 그건 거짓말이겠지.

"확인할게."

속삭이듯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자.

띠링!

['달의 각인'을 획득하셨습니다.]

[이 능력은 1차 전직을 완료한 시점에서 효력이 발휘됩니다.]

[달의 각인]

입수 난이도: 측정불가(최초로 탑을 오른 자에 한한 보상)

내용: 모든 결계의 발동시간을 25%만큼 감소시켜주며, 반대로 결계의 성능은 30%만큼 증가시켜 줍니다. 또한 오래전 탑에서 사장된 '잃어버린 언어'를 모두 습득할 경우 '이름 없는 결계'들을 배울 수 있게 됩니다.(1차 전직 시 잃어버린 언어를 습득할 수 있는 장소들이 표시됩니다.)

이건....

미쳤다.

상태창을 읽던 진혁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처음엔 그저 새로운 흥미를 쫓기 위해 익숙하지 않은 직업을 골랐다.

당연한 이야기다.

진혁에게 있어 직업이란 그저 상태창에 추가되는 하나의 단어일 뿐.

어차피 모든 스킬과 그 상위 버전의 스킬들을 손에 넣을 수 있었으니까.

때문에 1차 전직은 따분함을 달래줄 가벼운 여흥.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니지 못 했다.

하지만.

지금 나타난 상태메시지로 인해. 그 모든 게 변했다.

단순히 조금 더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이질적인 분야에서.

전신에 있는 세포하나가 하나가 전율할 정도의 새로운 분야로.

진혁의 시선이 상태창으로 향했다.

'잃어버린 언어'와 '이름 없는 결계'

언젠간 탑을 오르면서 봤던 것들이다.

'계속해서 찾아봤지만, 단서를 찾지 못 했던 것들 중 하나였지.'

당시에는 워낙 망겜이었던 [시련의 탑] 운영진들이 한 실수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 모든 게 최초로 탑을 정복한 플레이어에게 주기 위한 이스터 에그(Easter Egg)였군.'

이제야 비로소 이해가 됐다.

동시에 진혁의 심장이 미친 듯이 빠르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두근! 두근! 두근!

그 누구도 밟지 못한 새하얀 눈 위를 처음으로 걸을 수 있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 길의 끝이 허망한 게임 속 엔딩이 아닌 현실이라는 기대감에.

***

공격대는 입구 주위에 있는 몬스터들을 순식간에 정리하며 내부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콰콰콰콰콰콰!

각종 마법과 스킬들이 눈앞에 보이는 시야를 바꿔버렸다.

콰아아앙!!!

형형색색의 마력이 하나로 모이자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미궁 내부는 그야말로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탱커들은 배에 힘 딱 주고 도발기랑 생존기 전부 켜라! 명심해! 절대 어그로 튀게 하면 안 된다!"

"딜러들은 앞쪽에서 오는 녀석들부터 순차적으로 화력을 집중하고! 마력 관리 못 하고 빌빌대는 놈들은 이따가 피똥 쌀 각오해라! 아주 갈아 마셔버릴 테니까."

과연, 정상급 길드의 정예들답다.

4m가 넘는 맹독 코브라와 강철도 으스러뜨리는 기간트 아나콘다들을 상대로 단 한명의 부상자조차 나오지 않았으니까.

진혁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사무라이 길드가 싸우는 장면을 구경했다.

'그럭저럭 구색 정도는 갖췄네.'

공대원들 간에 호흡도 잘 맞고. 공수간에 밸런스도 나쁘지 않다.

큰소리 칠 자격은 된다는 뜻이다.

어디보자.

저 정도 실력이면....

'한… 두 시간 정도는 살아남을 수 있겠네.'

운이 아주 좋으면 한두 명 정도는 열 시간까지도 생존해 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진혁이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떠올렸다.

이젠 고이다 못해 산 채로 썩어가다 보니 대충 상황만 봐도 결말까지 예상이 갔다.

그 때.

"강진혁 플레이어님의 눈엔 저들이 어떻게 보이십니까?"

옆에서 묵묵히 서 있던 이영권이 입을 열었다.

"예? 어떻게 보이다뇨?"

"말 그대로 저들의 실력이 어때 보이냐는 질문이었습니다."

"뭐. 나쁘지 않네요. 여러 번 손발을 맞춰 레이드를 해본 경험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죠?"

이영권이 다시 한 번 물었다.

무언가 뒤에 덧붙여질 말을 기대하는 것처럼.

"교과서적이에요. 나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특출나다고도 볼 수 없습니다. 지금 저 진형이 버티고 있는 것도 그저 상대를 잘 만났을 뿐이죠. 물론, 일본의 레이드 방식이 집단전에 특화되어 있는 것도 한 몫 하고 있겠지만요."

"그 말씀은. 저 방진에 허점이 존재하는 뜻입니까?"

허점이라.

너무 많아서 문제다. 대충 봐도 대여섯 군데는 보이는데, 다른 사람 눈에는 저게 안 보이나?

"만약 상대가 일반 몬스터가 아니라. 네임드급이었다면 좌측 3번째 줄에 있는 탱커가 곧바로 뚫렸을 겁니다. 보이세요? 방패로 흘러가는 마력의 흐름이 미세하게 불안정 한 거? 게다가 그 빈틈을 메우기 위해 서포터들의 마력 사용양 역시 증가하고 있습니다. 한 0.7%정도 돼 보이는데… 저건 치명적이죠."

0.7%.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여도. 전투가 길어질 경우. 혹은 한 번의 호흡으로 승패가 갈릴 만큼 전투가 치열해질 경우엔 엄청난 격차를 만들 수 있는 수치다.

"...."

이영권이 입을 꾹 다물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다.

지켜보는 모두가 완벽에 가까운 사무라이 길드의 레이드에 감탄하고 있는데.

진혁 혼자만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길래 이상하게 생각했었다.

실제로 전투를 지켜보던 싸울아비 측의 플레이어들은 연신 감탄사를 터뜨리기 바빴으니까.

-교과서적이지만, 특출나진 않네요.

완벽에 가까운 레이드를 보면서도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내뱉는 말투부터.

-왼쪽 세 번 줄에 있는 탱커… 서포터의 마력이….

한 번의 전투로 약점까지 파악하는 안목까지.

그래.

'보이는 경지가 다른 거구나.'

흙 위를 기어 다니는 개미와 하늘 위를 나르는 매가 다르듯.

같은 장면을 보더라도 수준에 따라 그 시야는 다르게 책정된다는 소리다.

'뷰튜브에 올려둔 영상은 강진혁이란 플레이어가 갖고 있는 실력의 일각도 드러나지 않은 거였어.'

전체가 아닌 편집본의 한계.

구독자들의 이목을 잡아두기 위한 하이라이트와 현실은 아예 차원이 달랐다.

생각이 거기까지 이어지자. 이영권의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이 남자라면 정말로....

저 콧대 높은 사무라이 길드의 플레이어들을 모조리 박살내고.

싸울아비 길드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신수. 메두사의 머리를 잘라낼지도 모른다.

'가능해.'

가능하고말고.

미궁 공략은 이제 막 시작되었지만. 이영권의 머릿속엔 이미 이 레이드의 끝이 보이는 듯 했다.

***

치열한 전투와 짧은 휴식이 반복됐다.

그렇게 미궁에 들어간 지 얼마나 되었을까?

기존에 플레이어들이 개척해둔 루트를 따라 거침없이 진격하던 공격대 앞에 갈림길이 나타났다.

여기서부터는 정보의 공백이 생기는 구간이다.

"공대장님. 도착했습니다!"

척후조의 말에, 모두의 발걸음이 멈췄다.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곳.

왼쪽은 바닥으로부터 솟구치는 화염으로 인해 시야가 밝았고.

반면 오른쪽은 기습을 당하면 그대로 허용해야 할 정도로 짙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어디로 가면 될까요?"

선글라스. 아니, 사무라이 길드의 공대장인 마에다가 타케시를 바라봤다.

불과 어둠.

이 선택에 따라 앞으로의 레이드가 완전히 달라질 것이라는 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너무나 뻔한 일이었다.

"...."

타케시가 천천히 눈알을 굴렸다.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그리고 다시 왼쪽으로.

'젠장. 내가 봤던 미래가 여기가 아니었나?'

이곳에 오기 전 미래시를 통해 봤던 장면.

갈림길이 나온 건 틀림없었으나. 지금 눈앞에 있는 갈림길과는 달랐다.

거기에는 불과 어둠 대신 일렬로 늘어진 기둥들이 있었으니까.

"타케시 님?"

그 와중에도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지나면 의혹은 확신으로 변할 것이다.

"그게…."

타케시의 입술을 달싹였다.

더 이상 머뭇거릴 순 없다.

이제는 선택을 해야 한다.

그런데 바로 그때.

"역시. 왼쪽을 선택하신 거군요."

익숙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진혁이었다.

"왼쪽…?"

"크으. 과연 고인물 다운 안목입니다. 탑의 난이도를 생각하면 오히려 위험해 보이는 오른쪽을 선택하려 하겠죠. 역발상이라고 자화자찬하면서요. 하지만, 이 미궁은 그렇게 잔머리를 쓰는 놈들을 지옥으로 보내는 곳이라는 걸. 역시나 알고 계셨군요."

진혁이 진심으로 감탄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눈까지 반짝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 그렇죠. 저 역시 그 방법을 통해 과거에 이곳을 공략했습니다. 30층까지 가는 길에도 이런 식의 갈림길이 종종 나왔거든요."

종종 나오기는 개뿔.

시련의 탑이 무슨 IQ 테스트도 아니고.

역발상의 역발상 같은 걸 쓰며, 함정을 설계할 리가 없잖아.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게임은 망겜이다.

운영진이 심혈을 기울이며 완벽함을 추구한 게 아니라 전세계에 있는 고인물을 엿먹이기 위해 마구잡이로 제작한 게임이라는 말이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인했다.

저 녀석이 갖고 있는 미래시의 수준이 생각보다 훨씬 더 형편없다는 걸.

'차라리 CGV 영화관 안에 하는 타로카드가 더 믿을 만하겠네.'

정말이지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다.

그러나 진혁의 입에서 나온 말은 속마음과는 거리가 멀었다.

"과연…! 탑의 위쪽도 이곳과 비슷한 곳이 많나보군요."

"하하. 강진혁 플레이어님도 언젠가 가실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저희가 한 발 더 앞서겠지만요."

그렇겠지.

너희들이 관짝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정확히 한 걸음 정도 남은 것 같긴 하다.

"그럼, 다시 가볼까요?"

"알겠습니다. 모두 이동하죠."

타케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왼쪽이 맞습니까? 타케시 님?"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에다가 한 번 더 확인했다.

"맞습니다. 강진혁 플레이어님이 말한 것처럼. 시련의 탑에서 함정에 함정을 파는 건 흔히 있는 일입니다."

"...그렇군요. 일단, 알겠습니다."

무언가 끌려 다니는 느낌이 들었지만, 마에다는 더 이상 항변할 수 없었다.

어디에도 공개 된 적 없는 탑 5층에 숨겨진 던전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아낸 플레이어.

현재 길드에서 가장 신뢰하고 있는 플레이어가 바로 타케시였기 때문이다.

공격대는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환하게 밝혀진 길을 따라 마지막 플레이어가 완전히 통로로 들어섰을 무렵.

화르르륵!

쿠쿠쿠쿠!

갑자기 불길이 미친 듯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붉게 물든 선들이 플레이어들의 전후좌우를 완벽하게 둘러쌌다.

"뭐, 뭐야?"

"왼쪽은 안전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저, 저도 그런 줄 알았… 아니, 이 정도 쯤은 일상적인 함정입니다. 다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움직이지만 않으면 저 불길은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을 겁니다."

타케시가 모두를 안심시키려 했다.

물론, 소용없는 일이다.

콰콰콰콰콰콰콰!

미래시를 비웃기라도 하듯. 붉은 선들이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으니까.

100화 회색 신전 (4)

서걱!

극한으로 압축된 화염에 닿자, 철로 된 방패가 종잇장처럼 잘려 나갔다.

"마, 마력을 주입한 방패가 한 방에 박살나다니."

"으아아아! 이거 무슨 레이저 수준이잖아!"

그 말대로다.

불줄기는 태우는 게 아니라 잘라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 수가 수백 개가 넘는다는 거다.

더군다나 불줄기는 사방에서 동시에 거리를 좁혀 오는 탓에, 피하는 것조차 쉽지 않아 보였다.

'어, 어떻게 된 거야 이게!'

타케시가 당황한 눈빛으로 진혁을 바라봤다.

왼쪽이 정답인 것 마냥 말했던 건 다름 아닌 진혁이었으니까.

제발, 이 살인 트랩도 하나의 퍼포먼스일 뿐 얼마든지 해결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말해 주길 바라면서.

그러나 진혁은 슬그머니 타케시의 눈길을 피했다.

"이야. 누군지 몰라도 아주 공격대를 지옥으로 끌고 왔네. 보통 이런 건 공대장 잘못 아닌가?"

은근슬쩍 책임을 떠넘기는 모습은 자연스럽기까지 했다.

당했다.

타케시는 머리에 망치를 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그러나 후회할 시간조차 없었다.

"어, 어떻게든 피해야 됩니다!"

막는 게 아니라 피해야 한다.

탱커의 방패가 견디지 못했다는 건, 여기 있는 그 누구도 저 불줄기를 막을 수 없다는 뜻이었으니까.

"젠장!"

"모두 뛰어라!"

사무라이 길드의 플레이어들이 재빨리 몸을 날렸다.

발목과 무릎. 허리와 목을 노리고 날아오는 살인 함정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모두가 땀을 뻘뻘 흘리며 미친 듯이 움직였다.

'하여간 뉴비들이란....'

피식 웃은 진혁이 아공간 인벤토리에서 검은색 스크롤을 꺼냈다.

그리고 봉인되어 있던 인장을 풀었다.

우우우웅!

[결계사의 1차 전직 퀘스트가 시작됩니다.]

결계사가 되기 위해선....

이런저런 설명이 장황하게 늘어졌지만, 진혁은 볼 것도 없다는 듯이 상태창을 스킵해 버렸다.

어떤 걸 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 이상, 설명 따위를 읽고 있을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전직을 위해 결계의 편린을 구현화하는 것쯤이야. 누워서 떡 먹기지.'

진혁이 손가락 끝에 마력을 집중했다.

파츠츠!

새하얀 스파크가 일어났다.

곧이어 허공에 거대하고 화려한 문양이 나타났다.

바로 룬어가 새겨진 결계였다.

[결계 '미흡한 물리 방벽'이 발동됩니다!]

[전직 퀘스트의 첫 번째 조건을 달성했습니다!]

'미흡한'이란 수식어가 붙긴 했지만, 제법 그럴 듯한 형태의 결계가 펼쳐졌다.

'전직을 하기 전이라 이 정도가 한계로군.'

본래 결계사로 전직을 하려면 탑 1층에 있는 도서관에 처박혀서 최소 6개월간 초급 룬어를 익혀야 한다.

물론, 전투에 활용 가능한 결계를 사용하려면 그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이 필요했고.

심지어 게임에 푹 빠져 살던 진혁조차도 마지막 단계인 고대 룬어를 익히는 데 5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확실히... 절대 만만한 분야는 아니야.'

괜히 비인기 직업으로 분류된 게 아니다.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가상 현실을 선택했는데, 도서관에서 주야장천 공부나 해야 하는 걸 즐기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가, 강진혁 플레이어님 이건 대체...."

"마법...인 건가?"

"아니. 뭔가 달라. 저 문자는 처음 보는 건데?"

이영권과 나머지 플레이어들이 갑자기 나타난 룬어에 당황했다.

이들도 간혹 스킬을 통해 발동되는 결계는 본 적이 있었지만,

이처럼 정식 룬어로 발동되는 진짜 결계는 처음 봤던 것이다.

하지만, 감상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당장 코앞까지 불줄기들이 다가왔으니까.

"저걸 상대로는 스킬이나 능력도 소용없습니다. 우리도 움직여야 합니다."

이영권이 방패와 갑옷을 바닥에 던져 몸을 가볍게 만들었다.

그러나.

"괜찮습니다. 그냥 가만히 있으셔도 돼요."

진혁은 정육면체 형태로 플레이어들을 감싼 결계를 보며, 느긋하게 팔짱을 꼈다.

"가, 가만히 있으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영권이 되물었지만, 진혁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콰콰콰콰콰!

불줄기가 결계에 부딪쳤다.

"큭!"

"우아아악!"

플레이어들이 비명을 질렀다. 결계와 함께 몸이 절단날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어?"

"뭐야 이거. 멀쩡하잖아?"

결계의 표면엔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아니. 그 정도 수준이 아니다.

불줄기는 결계의 표면에서 멈칫하다 오히려 반대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폴짝폴짝 뛰고 있는 사무라이 길드의 플레이어들을 향해서.

"아. 미안! 그쪽으로 하나 더 간다."

진혁이 오른손을 살짝 드는 걸로 사과를 대신했다.

"이럴 수가...."

이영권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놀란 건 지켜보던 나머지도 마찬가지였다.

"저, 저걸 튕겨 내다니."

"믿을 수가 없군. 리플렉터 계열의 스킬을 갖고 있는 플레이어가 있을 줄이야."

"역...시 S급은 차원이 다르네요."

진혁이 대단하다는 건 이미 여러 영상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다.

한국의 16번째 S급 랭커.

검귀라 불리는 천유성은 물론, 흑운 길드의 마스터. 홍덕표를 찍어 누른 괴물.

4층과 5층을 최초로 정복한 선구자.

줄줄이 나열되는 업적들만 하더라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러나 두 눈으로 직접 보는 건 단순히 영상이나 말로 전해들은 것과는 전혀 다른 장르의 이야기다.

두근! 두근! 두근!

모두의 심장이 빠르게 고동쳤다.

정상급 랭커와 함께한다는 것만으로도 느껴지는 안정감.

결계 앞은 사지였지만, 위험하다는 생각은 손톱만큼도 들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

"슬슬 가 볼까."

진혁이 움직였다.

결계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것이다.

"헉!?"

"가, 강진혁 플레이어님! 잠시만요!"

"예?"

"아직 함정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맞아요. 지금 나가시면 위험해요."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이영권이 손가락으로 바깥을 가리켰다.

그곳엔 처참하게 죽어 가는 사무라이 길드의 플레이어들이 있었다.

전후좌우에서 몰아치는 불줄기를 피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었으나, 그리 오래 버티기는 힘들어 보였다.

아. 그 이야기였나.

"제가 타이밍 맞히는 건 기가 막히게 잘하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게다가 사실, 저걸 300번 연속 티끌만 한 상처 없이 피하면 아이템을 하나 주거든요."

[타들어 가는 불꽃]이라고.

이후에 요긴하게 사용할 특수 아이템을 준다.

이거 나름 고급 정본데....

어떻게.

같이 도전해 볼 용자가 있으려나?

진혁이 싱긋 웃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괜...찮습니다."

"가, 강진혁 플레이어님 많이 모으세요."

"저희는 뒤에서 구경만 할 게요. 암요."

히든 아이템을 준다고 해도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다.

하여간, 요즘 뉴비들은 근성이 없다니까.

우두둑!

가볍게 관절을 풀은 진혁이 결계 밖으로 나갔다.

수십 개의 불줄기가 빼곡하게 몰려왔지만, 이미 모든 패턴을 외운 고인물에겐 귀여운 수준이다.

머릿속으로 재생되는 빠른 템포의 음악에 맞춰.

'판사님. 비트 주세요!'

진혁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좌삼삼 우삼삼. 다음은 1m를 앞으로 뛰어서 굴러야 했지?'

사람 하나 간신히 지나갈 수 있는 틈들이 보였다.

이번엔 저 사이를 통과해야 한다.

단 한 번이라도 실수하면 그대로 죽는 상황.

그럼에도 진혁의 얼굴에선 인간이면 당연히 나타나야 할 긴장감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

"하하... 진짜 할 말이 없네."

이영권이 허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 역시 5층에 있는 검투장에서 스스로의 가치를 입증했고. 또 각종 매스컴으로부터 엄청난 기대를 한 몸에 받았지만.

'상상도 가질 않아.'

자로 잰 듯한 움직임과 멀리서도 느껴지는 자신감.

그리고 그 모든 걸 넘어서 이 상황을 즐기는 자세까지.

그 어떤 분야에서도 상대를 넘어설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래서 김기태 팀장님이 우리가 손해를 보더라도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는 거였구나.'

사실 이영권은 이곳에 오기 전 한 가지 당부를 들었다.

이번 레이드에서 싸울아비 길드가 얻을 수 있는 모든 이득을 포기하자는 내용의 당부를.

처음엔 김기태 역시 길드에 유리한 쪽으로 조건들을 배치하고 싶었으나, 이내 더 큰 미래를 보기로 결정했다고 했다.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다.

보상, 명예, 독점.

한국 2위의 초대형 길드가 그 모든 걸 내려놔야 한다면 그 누가 납득하겠는가?

대기업이 욕심을 부리는 경우는 있어도 이점을 포기하는 경우는 없는데?

그러나 그 이유를.

'간부들이 현명한 거였어.'

이영권은 지금 이 순간 절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

불줄기는 30분이 넘어서야 잦아들었다.

'역시 땀을 흘린 뒤엔 보상이지.'

진혁이 묘하게 생긴 붉은색 보석을 만지작거렸다.

바로 [타들어가는 불꽃]이었다.

'순조롭게 잘 진행되고 있네.'

모든 게 계획했던 대로 흘러갔다.

이제 메두사만 처리하면 '그 아이템'을 만들 수 있는 재료는 전부 모일 터.

목표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그나저나.

'몇 명이나 살아 남았으려나?'

아공간 인벤토리에 아이템을 집어넣은 진혁이 이번엔 사무라이 길드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허억. 허억. 허억."

"내... 내 팔이! 내 팔이 없어!"

"으아아악! 요... 요시다가 죽었어!"

"빌어먹을! 당장 부상자랑 사망자 파악부터 해라! 질질 짜지 말고 움직이란 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상황이 좋지 않다.

자신만만하게 들어왔던 놈들 중에서 멀쩡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나마 실력이 뛰어난 마에다와 녀석이 필사적으로 지킨 타케시만이 경상을 입은 데 그친 상황.

역시 불난 집 구경이 제일 재밌는 법이다.

그게 얄미운 놈의 집이라면 더욱더 말이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게 결계가 딱 30인용 정도라 더 들여보내주고 싶어도 들여보낼 수가 없었네요."

진혁이 사무라이 길드에게 다가가 심심한 위로의 말을 건넸다.

"이... 이 망할 자식!"

마에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열로 인해 눈썹이 그슬려서 그런가.

고소한 냄새가 진동을 한다.

"네?"

"순진한 얼굴로 '네?' 같은 개소리 지껄이지 마라! 한국 놈들이 하나도 다치지 않았다는 건 이 함정의 존재와 대비책에 대해 알고 있었단 뜻일 터! 내 말이 틀렸나?"

"뭐 대충 알고 있었습니다만. 그게 문제가 되나요?"

"무, 문제가 되느냐고? 그걸 지금 말이라고...!"

"그렇잖습니까. 싸울아비에서 독점한 미궁에 함께 오겠다고 떼쓰는 걸 받아 주고. 또 당신들이 30층에 있는 고인물인지 나발인지가 버스 태워준다고 낄낄대다가 절벽에서 떨어져 박살났는데, 그걸 왜 저희한테 화를 내는 건지 모르겠네요."

"닥쳐라! 아무리 그래도 눈앞에서 우리가 죽어나가고 있는데, 구해 주지 않은 건 쓰레기들이나 하는 짓이다. 네놈에겐 일말의 동정심 같은 것도 없단 말이냐!"

동정심 같은 소리하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이런 개소리를 연속으로 내뱉을 수 있는 것도 재능의 영역이다.

하긴.

이해는 한다.

"원래 방사능 많이 먹다 보면 정신이 오락가락할 수 있는 법이니까요."

영화에서 보면 감마선 맞고 플루토늄 먹방하면 슈퍼 히어로가 되곤 하지만.

현실에선 운이 좋아야 탈모고 보통은 백혈병에 걸리는 비참한 엔딩을 맞이하게 된다.

얼마나 삶이 고달프겠는가?

"...뭐?"

충격적인 발언에 마에다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멍한 표정으로 자신이 제대로 들었는지 몇 초간이가 곱씹었다.

"가, 감히 그딴 말을 하다니. 미쳤어. 이건 외교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걸 모르는 건가!"

"외교 문제?"

진혁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었다.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나 본데.

"나는 정치인이 아니야."

외교니 뭐니 하는 것이야 윗대가리들이나 신경 쓰는 거지, 이쪽이 알 바는 아니다.

마지막으로.

"나한테 함부로 말하지 말아야 할 거야. 이곳의 함정은 아직 끝난 게 아니거든."

진혁이 차갑게 내뱉었다.

동시에.

쿠쿠쿠쿠쿠!

흩어졌던 불줄기들이 한 곳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의 찰나.

겹겹이 둘러싼 화염은 어느새 하나의 형(形)을 이뤘다.

"쉬이이익!"

불꽃으로 이뤄진 거대한 뱀의 모습으로.

101화 메두사 레이드 (1)

1. 함정으로 인해 공격대의 50%가 사망할 것.

2. 그 중에 한 명이 함정을 상처 없이 클리어해 '타들어가는 불꽃'을 손에 넣을 것.

불을 마시는 뱀은 이 두 가지 조건을 동시에 충족했을 경우에만 발동하는 함정이었다.

"흥미로운 건 이 녀석이 네임드급이라. 미궁에 있는 다른 녀석도 우리들의 존재를 눈치 챈다는 점이야."

"그, 그게 무슨... 설마?"

설명을 듣던 마에다가 동공이 급속도로 팽창했다.

그래도 공대장이라고 눈치는 빠르다.

"맞아. 좀 있으면 이 녀석뿐 아니라 메두사까지 동시에 상대해야 한다는 뜻이지."

회색 신전은 다른 미궁들과는 다르게 보스 몬스터가 방에 있는 게 아니라 이동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뭐, 입구 근처에 있던 석상만 봐도 메두사가 자유롭게 미궁 내부를 돌아다닐 수 있다는 건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을 거다.

물론, 아무리 가능성을 염두했다고 한들 네임드 몬스터와 보스를 동시에 상대해야 할 거라곤 예상하지 못 했겠지만.

바로 그때.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키이이이!"

10m 높이의 천장에 닿을 듯한 크기.

붉게 타오르는 뱀이 플레이어들을 보며 혀를 낼름거렸다.

하여간 양반은 못 되네.

사람들 대화하는데 그새를 못 참고 끼어드는 걸 보면 말이다.

"그래. 그렇게 발악하지 않아도 널 무시하진 않아."

진혁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불을 마시는 뱀]

레벨: 55

내용: 메두사 키우는 애완용 뱀으로, 전신이 불꽃으로 구성되어 있어 모든 물리 공격이 통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녀석은 체내에 쌓아 둔 불을 토할 수 있는데, 좁은 곳에선 드래곤의 브레스를 연상케 하는 위력을 갖고 있으니 각별히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탐식의 눈'을 발동한 진혁이 대상의 세부 설명을 읽었다.

레벨은 55로 낮은 편에 속하지만, 결코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된다.

오롯이 마법 공격으로만 피해를 입힐 수 있는 데다 엄폐물이 없는 직선 통로에서 최고의 효율을 자랑하는 소형 브레스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아직 정비도 하지 못했는데."

마에다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거의 궤멸하다시피 한 사무라이 길드의 상태론 도저히 저 뱀을 상대할 수 없었다.

진형을 갖추기는커녕 다들 무기나 방어구를 들어 올릴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으니까.

"으으으...."

타케시 역시 공포로 인해 정신을 잃을 것만 같은 표정을 지었다.

녀석의 미래시에는 이 장면이 없었나 보다.

좋아.

이 정도면 연출적인 측면은 충분히 갖춰진 것 같고.

"이제 주제 파악들 하셨으면 슬슬 계산을 다시 한번 해 볼까?"

"뭐? 무슨 계산을 한다는 거냐?"

뭘 놀란 표정을 지어?

갑을 관계가 정해졌는데, 당연히 계약서를 새로 써야지.

"페르세우스의 방패부터 넘겨. 쓸 줄도 모르는 놈이 갖고 있는 것보단 내가 사용하는 게 낫지 않겠어?"

돼지 목에 진주는 사치다.

특히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이라면 더욱더.

진혁이 살 수 있는 기회를 제안했다.

하지만, 그 말을 순순히 받아들일 마에다가 아니었다.

"개, 개소리하지 마라! 이게 어떤 건데... 아니, 빌어먹을. 어떤 또라이가 성유물을 공짜로 넘겨!"

"그래?"

그거 안타깝게 됐네.

그래도 같은 인간이라고 마지막으로 기회를 줬는데.

스스로 걷어찬다면 하는 수 없지.

"그럼, 방패는 시체에서 회수하도록 하지 뭐."

진혁이 싸늘하게 마지막 선을 그었다.

동시에.

쿠쿠쿠쿠쿠!

공기 중에 있던 수분이 모조리 증발하기 시작했다.

입술이 바짝 마르고 피부 또한 퍼석퍼석해졌다.

뻑뻑한 안구 너머로 보이는 광경.

그것은 뱀의 아가리에 맺힌 화염구였다.

['불을 마시는 뱀'이 Lv15 '열화(熱火)의 창'을 발동합니다!]

"피, 피해!"

마에다가 다급하게 외쳤다.

허나 대체 어디로 피하란 말인가?

이곳은 곧게 이어진 직선 통로인데?

"우아아악!"

"사, 살려 줘!"

어떻게든 살아남고 싶다는 본능과 절대 살아남을 수 없다는 현실이 뒤섞였다.

그 순간.

콰콰콰콰콰콰콰콰!

하나의 점으로 응축한 붉은색 구체가 통로를 가로질렀다.

"온...다!"

"이걸 대체 어떻게...."

"틀렸어."

이영권을 비롯한 싸울아비 길드의 플레이어들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다가오는 불줄기는 그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 없어 보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

[Lv8 '빙하조형(氷河造形)'이 발동됩니다!]

눈앞에 거대한 얼음 결정이 나타났다.

진혁이었다.

빙하조형을 결계에 덧씌우자 새하얀 룬어가 푸르스름한 빛을 띠었다.

상극의 속성을 이용한 방어.

드래곤의 브레스는 몰라도. 뱀이 사용하는 불줄기쯤은 얼마든지 막아낼 수 있었다.

이걸로 싸울아비 쪽은 안전하다.

"제기랄!"

마에다 역시 페르세우스의 방패 뒤로 몸을 숨겼다.

파츠츠츠....

성유물의 효과가 발동되며, 마에다의 주위로 분홍빛 장막이 펼쳐졌다.

하지만.

그 범위는 진혁의 결계에 비해 너무나 작았다.

간신히 두세 명을 보호할 수 있는 게 고작이었으니까.

모두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동시에.

겁화가 통로를 휩쓸었다.

***

치이이익!

지면을 따라 일어나는 아지랑이.

숯덩이로 변한 사무라이 길드의 플레이어들이 한 줌의 재가 되어 흩어졌다.

고통을 느낄 새조차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허나, 그렇게 즉사한 게 다행일지도 모른다.

"으... 으아아악!"

마에다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전신에 끔찍한 화상을 입었으니 그럴 수밖에.

그나마 마력을 다루는 솜씨가 어느 정도 있어 목숨이라도 붙어 있던 거지, 평범한 플레이어라면 당장에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중상이었다.

"그래서 말했잖아. 잘 사용하지 못하는 성유물은 넘기는 게 좋을 거라고."

순순히 상납을 했으면 죽지 않아도 됐을 텐데.

스스로 무덤을 판 꼴이 됐잖아?

"자업자득이니 원망하려면 스스로를 원망해."

동정심?

그딴 건 조금도 들지 않는다.

애초에 먼저 선을 넘은 건 녀석들 쪽이었으니까.

게다가 '냉혹한 심장'의 특성으로 인해, 적이라고 인식한 대상에겐 더욱 자비가 없게 되어버렸다.

어쩌면 이 모든 게 다수를 구하기 위한 방어기제인지도 몰랐다.

살아남기 위해선. 탑에 정상을 올라 인류의 멸망을 막기 위해선. 걸리적거리는 걸 모두 치워버려야 했으니.

'다음 브레스가 오기 전까진 몇 분 정도 시간이 있을 테니 그전에....'

진혁이 의식을 잃기 직전의 마에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져 있던 방패에 냉기를 불어넣었다.

자욱한 연기와 함게.

붉게 달아올랐던 방패의 표면이 차갑게 식었다.

[페르세우스의 방패]

입수 난이도: S(붉은색)

내용: 신화 속 영웅. 페르세우스가 메두사를 상대할 때 사용했던 성유물입니다. 압도적인 방어력을 자랑하는 방패이지만, 이 방패의 주인인 아테네는 방패를 사용하는 이의 자격 역시 중요시 하였습니다. 플레이어가 갖는 실력과 잠재력에 따라 방패의 능력치 역시 차등 적용됩니다.

최상급 신격이 사용하는 성유물임에도 불구하고 고작 뱀이 사용한 브레스도 막지 못했던 이유.

바로 이것 때문이다.

'스스로의 자격을 증명한 자만이 이 방패를 다룰 수 있다. 뭐, 이런 뜻이겠지.'

진혁이 방패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화끈하고.

손끝에서부터 정수리까지 뜨거운 마력이 솟구치는 게 느껴졌다.

방패가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조금 전과는 다르게, 제대로 된 주인을 만난 것에 대한 기쁨을 포효하듯이.

그때였다.

"다, 당신 대체... 정체가 뭐야?"

마에다의 뒤에 있던 덕분에 상처 하나 없던 타케시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격하게 떨린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가 갖고 있는 반쪽짜리 미래시를 연거푸 사용했지만, 진혁에 대한 미래는 엿볼 수 없었으니까.

'아무리 내 능력이 불완전하다고 하더라도 아주 사소한 미래라도 보여야 한다.'

그것이 몇 시간 뒤의 모습이든.

혹은 몇 십 년 뒤의 모습이든.

어느 지점 하나는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어떻게 된 영문인지 진혁의 미래는 암막 커튼으로 가려진 것처럼 깜깜했다.

이유는 모르겠다.

확실한 건, 이 남자는 지금까지 만난 그 어떤 플레이어와도 다르다는 것뿐이다.

"대답해 줘. 당신. 이 탑과 무슨 관계가 있는 거지?"

"왜? 그 잘난 '눈'으로도 파악이 안 되니 이상해?"

진혁이 피식 웃었다.

"...! 내, 내 능력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고?"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고유 능력을 꿰뚫어보다니.

대체 이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란 말인가?

"믿을... 수가 없어. 그 힘, 그 능력. 인간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야.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불가능해."

"그야 그렇겠지."

진혁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태연하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나는 탑의 가장 위에 있는 존재 중 하나거든."

탑의 가장 위에 있는 존재 중 하나라고?

타케시가 천천히 그 말을 곱씹었다.

그러나 아주 잠시뿐이었다.

저 말이 의미하는 건 단 하나였으니까.

"설마...!"

그런 거였나.

그렇다면 모든 게 이해가 됐다.

상대가 갖고 있는 터무니없는 힘과 능력도.

그리고 미래시로 볼 수 없는 미래조차도. 전부.

'인간이 아니라... 신격이었어.'

타케시는 미래시를 통해 탑의 어딘지 모를 곳에 있는 신격들을 보았다.

음성만으로도 대기가 떨리고 손짓 한 번에 지면이 갈라지는 그런 존재들을.

너무나 현실과 동떨어진 일이었기에, 길드 내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었지만, 설마 그 고고한 존재들 중 하나를 직접 만나게 될 줄이야.

고작 인간 따위의 몸으론 승산이 없다.

신격의 기분을 거스르는 것만으로도 존재 자체가 무(無)로 화할 테니까.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터질 듯이 두방망이질 쳤다.

몸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았다.

"제, 제가 감히 죽을죄를...."

타케시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다.

전신이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게 안쓰러워 보일 지경이다.

'풉!'

그 모습을 보던 진혁이 폭발할 뻔한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진심으로 위험했다.

방금 터질 뻔했네.

'역시 어설프게 탑의 위층을 엿보니 속기도 쉽게 속는구나.'

신격은 개뿔.

'내가 신이었으면 지금 아장아장 한 층씩 오르고 있겠냐?'

1층부터 50층까지 가는 엘리베이터라도 하나 만들어서 초고속으로 날아갔겠지?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고 했는데.

옛 어른들의 말씀이 틀린 게 하나도 없다.

하지만, 진혁은 애써 표정을 담담하게 감쌌다.

이 녀석이 사무라이 길드 내에서 갖고 있는 위치를 생각하면 앞으로도 써먹을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

그전에 잠깐.

"키에에에에!"

두 번째 브레스가 발사됐다.

통로에 있는 모든 걸 태워 버리며 다가오는 겁화.

그러나 이번에도 진혁은 가벼운 손짓 한 번으로 불줄기를 막았다.

['그럴듯한 속성 방벽'이 발동됩니다!]

[1차 전직을 위한 두 번째 조건을 달성하셨습니다!]

콰아아아앙!

얼음과 불이 정면으로 맞부딪치자 자욱한 수증기가 일어났다.

이 모든 건 상극의 스킬과 결계의 연계 덕분이었으나 지켜보는 타케시의 눈엔 신의 힘 그자체로 보였을 거다.

"여, 역시...!"

"이런 거 가지고 놀라지 말고. 그보다 뭐 하나만 질문해도 될까?"

"무, 물론입니다. 뭐든지!"

"내가 인간들의 생태가 어떤지 궁금해서 내려오긴 했는데, 아직까지 모르는 게 좀 많아. 탑의 규칙이라는 게 꽤나 성가시거든. 아무리 신격이라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개연성이니 제약이니 하면서 힘을 억제한단 말이야."

귀찮은 설명을 피하는 덴 상대가 알지 못하는 규칙을 들먹이는 것 만한 게 없다.

알 리가 없지.

'나도 잘 모르는 걸 네가 어떻게 알아?'

워낙에 개연성과 밸런스가 붕괴된 망겜이라 이걸 만든 놈들도 자기가 뭘 만들었는지 모를 거다.

그러니 아무거나 던져도 통한다.

저 녀석이 나를 신이라고 믿는 한은.

"그런 의미에서 한 가지 부탁을 좀 할까 해."

진혁이 능글맞은 얼굴로 본론을 꺼냈다.

102화 메두사 레이드 (2)

신격(神格).

탑에 존재하는 절대적인 존재들을 일컫는 말이다.

그들은 저 위에서 인간들을 관조하며, 쓸 만한 인재를 찾곤 했다.

바로 탑 상층에 있는 자신들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서.

그런데.

바로 그 신격의 간택을 받을 수 있다니!

타케시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희열을 주체하지 못한 듯 입가 또한 연신 꿈틀거렸다.

'이건 일생일대의 기회다.'

줄을 잘 서야 한다는 건 세계 어디에서나 통용되는 말일 터.

기연이 온다면 잡아야 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과연, 비정상적으로 강했던 게 그런 이유였어.'

대형 길드의 랭커들도 실패하는 걸 너무나 쉽게 통과하는 게 말이 안 되긴 했다.

그것도 다른 플레이어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서 해쳐나가는 건 아예 상식을 깨 버리는 수준이었고.

하지만.

그 모든 위화감은 상대가 신격 중 하나였다고 밝히는 순간 씻은 듯이 해소되었다.

일종의 유희를 즐기는 거겠지.

'신들이란 인간의 잣대로 판단할 수 없는 존재니까.'

콰콰콰콰콰!

지금 이 순간에도 얼음 방벽을 세우며 브레스를 막아서는 모습은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더군다나 다른 쪽에선 또 다른 결계를 펼쳐 싸울아비 길드의 플레이어들까지 보호하고 있지 않은가?

고민은 길지 않았다.

어느 편에 서야 이 미쳐버린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지 확신이 섰다.

"부탁이라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너희 길드 쪽에서 얼마 전에 재밌는 장난감을 주웠다고 하던데."

그 왜.

있잖아.

"일본에서 3종 신기 중 하나로 애지중지하는 거."

"서, 설마...!"

"맞아. 그 설마. 내가 원하는 게 바로 그거야."

사무라이 길드에서 유적을 공략하고 얻은 성유물.

쿠나시기의 검. 다른 말로 천총운검(天叢雲劍).

그거 가져와라. 몹시 탐이 나니까.

"하, 하지만, 그건 길드 깊숙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길드 마스터가 아니면 접근하기조차 어려운...."

타케시가 곤란한 듯 말끝을 흐렸다.

성유물은 각 길드의 보물1호. 절대 양보할 수 없는 힘의 상징이다.

당연히 보안 역시 철저하게 되어 있을 수밖에.

"쉽지 않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 하지만, 내가 선택하는 인간이라면 '쉽지 않은 걸' 해내야 하지 않을까?"

여기서 중요한 건 상대의 배를 살살 긁어주는 거다.

너는 특별한 인간이고, 따라서 그 정도는 해내야 한다며.

고고한 신격이 까르륵 소리가 절로 나오게 칭찬을 해 주는데, 허파에 바람이 들어가지 않을 놈은 없다.

"좋게 봐주시는 건 감사합니다만...."

살짝 넘어왔다.

이제 마무리로 상대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이야기로 흔들어주면 된다.

흔히 물건을 팔거나 계약을 할 때 전문 용어 잔뜩 써서 상대의 혼을 쏙 빼먹을 때 쓰는 방법이지만.

이럴 때도 꽤나 효과적이다.

"지금 위에서 북유럽 망치쟁이가 늑대새끼 한 마리 데리고 라그나로크인지 나발인지 한다고 깽판을 치는 중이거든. 근데 의외로 우리 쪽이 밀리고 있어."

북유럽 신화의 주신 토르.

멸망을 고하는 최후의 전쟁 라그나로크.

북유럽의 신격들이 들으면 뒷목을 잡을만한 이야기였지만, 어차피 알 바 아니다.

열 받으면 이곳까지 직접 내려오든가.

"세계수의 영향력이 있는 곳에선 아무리 나라도 제 힘을 발휘하기 힘들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가능하면 많은 성유물이 필요해."

"허...."

너무나 엄청난 내용에 타케시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러나 잠시뿐이었다.

"알겠습니다. 검은... 어떻게든 구해 오겠습니다. 믿고 맡겨 주십시오."

"그래. 그리고 가기 전에 내가 특별히 성흔을 하나 새겨 줄게."

정확히는 염혼의 낙인이라고.

"일종의 계약인데, 별로 위험한 건 아니야. 배신하면 그냥 산 채로 불탈 뿐이지. 하지만 넌 배신은 하지 않을 거니 상관없잖아?"

"무, 물론입니다."

타케시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와서 배신을 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누가 황금 동아줄을 스스로 잘라 버린단 말인가?

"보기와 다르게 아프지 않으니까 겁먹지 말고."

진혁이 붉게 물든 검지를 타케시의 가슴에 갖다 댔다.

[Lv5 '염혼의 낙인'이 발동됩니다.]

선명하게 새겨진 붉은 낙인.

좋아.

이걸로 일본 쪽에도 고인물 컴퍼니의 충실한 인턴 한 명이 탄생했다.

영혼에 노예 계약을 해 뒀으니 이제는 자신이 속았다는 걸 깨달아도 소용없으리라.

"그럼 이만 가 봐. 나는 이 뱀 녀석 좀 처리할 테니까."

진혁이 몸을 돌렸다.

그곳엔 벌써 4번째 브레스를 뿜어낸 뱀이 온몸을 들썩이고 있었다.

연거푸 막대한 마력을 쏟아 부은 탓에 불꽃의 온도가 많이 미지근해지긴 했다.

"키에에에!"

잔뜩 약이 올랐는지. 불을 먹는 뱀이 날카로운 비명을 내뱉었다.

'그래도 명색의 신이라고 했으니 고전하는 모습을 보여줄 순 없지.'

가뜩이나 중2병 섞인 말투를 흉내 내느라고 신경 많이 썼는데. 정작 싸움에서 압도하지 못하면 그게 무슨 개쪽이냐?

스릉!

챙!

진혁이 천천히 쌍룡검을 꺼냈다.

칼날을 타고 눈부신 예기가 빛을 발했다.

'한 방에 끝낼 만한 거라....'

하나 있긴 하다.

3층의 네임드를 일거에 가둬버렸던 스킬이.

마력소모가 엄청나기 때문에, 함부로 사용할 순 없었지만.

존재감을 과시하기에 이것만한 게 없다.

진혁이 마력을 끌어 모았다.

파츠츠…!

검신 전체를 뒤덮은 푸른 마력.

형언할 수 없는 빛이 통로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키에에에!"

뱀도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는지 자세를 잔뜩 낮췄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빙하조형(氷河造形) '하늘의 검'이 발동합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얼음 줄기와.

[빙하조형(氷河造形) '땅의 검'이 발동합니다!]

땅에서 솟구치는 얼음 줄기가 하나로 맞닿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