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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첫 번째 웨이브를 막으셨습니다.]

[3시간 뒤, 두 번째 웨이브가 시작됩니다.]

[남은 시간 2h:59m:59s]

짧은 상태창과 함께. 승리를 알리는 문구가 나타났다.

각기 다른 거점에 있던 플레이어들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헉. 허억. 허억."

"젠장, 너무 갑작스럽게 와서 그런가 첫 번째부터 더럽게 빡세네."

"내 말이. 이렇다간 마지막 웨이브는커녕 중간만 가도 위험할 것 같은데?"

"이 악물고 버텨. 추가 보상 받으려면 어떻게든 비벼야 돼."

4층에서는 웨이브를 막아야 하는 것뿐 아니라, 몇 가지 업적을 달성할 경우 추가적인 보상이 주어졌다.

가장 많은 좀비를 죽인, 다시 말해 거점당 주어지는 최다 킬 보상.

얼마나 다양하고 화려하게 방어에 성공했는지 전 세계 구독자들에게 투표를 받은 인기상 보상.

이렇게 두 가지다.

A급 랜덤 박스는 물론, 코인 거래소에서 비싸게 팔리는 희귀 아이템들과 재료들을 얻을 수 있는 기회!

남들보다 앞서가기 위해선 반드시 저 둘 중에 하나를 달성해야만 한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하이라이트 영상이 방송됩니다.]

또 다른 문구가 나타났다.

구독자들의 인기투표를 위해, 각 거점의 활약상을 편집한 3분짜리 영상이었다.

"역시, 중국 쪽이 강하긴 강하군."

하이라이트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낸 건 중국 길드인 삼합회가 있는 마트였다.

메인인 화염 타워와 신성 계열의 보조 타워로 이루어진 조합.

수백 명의 인원은 물론, 강력한 랭커로 보이는 플레이어들로 인해 첫 번째 웨이브를 꽤나 수월하게 막았다.

시원시원한 연출과 내공을 바탕으로 한 화려한 스킬들을 봤을 때, 인기투표에서 꽤나 높은 점수를 받을 게 틀림없었다.

몇 초 뒤, 화면이 바뀌었다.

이번 거점 중 가장 넓고 방어하기 힘든 '상암 경기장'이었다.

"저 넓은 곳을 다섯이서 막는다고?"

"어떤 머저리들이 저길 골랐나 했는데, 진짜로 있긴 있구나. 머리가 빈 놈들이."

"장담한다. 다음 웨이브에서 전멸이야 저긴."

"푸하하. 저 녀석들이 선택한 방어 타워 봐. 식물이야. 게다가 보조 타워도 없어."

곧바로 플레이어들의 조소가 터져 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디펜스에서 위력이 뛰어난 화염 타워나 공격력과 군중 제어기를 모두 갖춘 빙계 타워를 고르는 게 상식 중에 상식이었으니까.

성장시키기 어려운 데다 발을 묶는 게 고작인 식물 따위,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하지만.

영상이 이어짐에 따라 비웃음은 감탄으로 바뀌었다.

"뭐, 뭐야?"

"이럴 수가...."

감탄은 이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이런 미친. 식물이 보약이라도 처먹었나. 뭐 저렇게 강해?"

"믿을 수가 없군. 키우기 힘들다고 들었는데, 대체 무슨 방법을 쓴 거지?"

강하다.

강해도 너무 강하다. 마치, 다른 타워들을 선택한 플레이어들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무엇보다 놀라운 건 다섯 명의 실력이었다.

"다섯...이서 막아내고 있어."

한 명이서 입구 하나를 방어하고 있다.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어림도 없는 일이리라.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동쪽 입구에 있는, 검은 머리카락의 동양인이었다.

"강기를 저렇게 자유자재로 다루다니."

"같은... 플레이어라서 다행이야. 적으로 만난다고 생각하면 상상만으로 끔찍하다. 으으."

그야말로 좀비들을 쓸어버리는 모습은, 보는 이들의 전신에 소름을 돋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격이 다른 능력과 적절한 힘의 배분.

심지어 그 많은 수를 혼자서 상대하고도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인간의 수준이 아니다.

"누굴까?"

"랭커 같긴 한데...."

"중국이나 일본이겠지. 요즘에 그쪽 대형 길드들의 활약이 대단하던데."

추측과 예상이 오가고 있을 때 한 남자가 외쳤다.

"아! 저 플레이어, 강진혁이야. 한국의 랭커 강진혁!"

"이번에 S급 받은 그 사람?"

"그러고 보니 한국에도 대형 신인이 나왔다고 했었지."

"S급을 받을 만하네. 저렇게 강하니 그럴 수밖에."

대형 루키들이 우후죽순 쏟아지고 있는 상황 속, 다른 나라에 있는 플레이어를 기억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4층에 있는 플레이어들의 머릿속엔 하나의 이름이 똑똑히 새겨졌다.

한국에 있는 강진혁이란 플레이어에 대해.

그리고 그 플레이어가 갖고 있는 특별함에 대해서도.

***

같은 시각.

진혁은 식물들에 대해서 나머지 사람들에게 설명했다.

"이게 '분갈이'와 '가지치기'야. 내가 직접 만든 흙이 있으니까 분갈이는 여기다 해 주면 되고 가지치기는 지금 당장은 6, 7번째 가지만 쳐 주면 돼. 14번째는 음... 1시간 뒤에 해 줘. 그것만 해 주면 그 이후부턴 알아서 잘 클 거야."

거점을 강화하기 위해선 식물들을 역시 키워야 한다.

이 방법을 사용한다면 식물의 수를 늘려주는 것과 동시에, 쓸데없이 영양분을 잡아먹는 부분을 쳐냄으로써 성장 속도를 극대화시킬 수 있었다.

"어때. 간단하지?"

"가, 간단하다고? 이게?"

태연하게 말하는 진혁 때문에, 유연화가 기가 차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오빠. 진짜로 무슨 식물학자였어?"

"형, 대체 예전에 [시련의 탑] 했을 때 무슨 짓을 했던 거예요? 이 정도면 거의 탑에 관해 논문을 써도 될 것 같은데...."

"진혁 씨, 진짜 대단하네요. 와아."

"내가 이기기 힘들었던 것도 무리가 아니었군. 상식을 벗어난 폐인을 상대로 경쟁을 하려 한 게 실수였어."

음?

칭찬 사이에 어째 이상한 게 끼어 있다.

마지막 그 발언.

굉장히 상처 받는데.

"아무튼, 이런 식으로 하면 되니까. 다음 웨이브까지 식물들 관리 잘하고 있어 줘."

"잘 관리하고 있으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너는 어디 가려고?"

천유성이 두 눈을 치켜떴다.

중요한 방어전에 있어 핵심 전력이 자리를 비운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잠시 옆 거점에 좀 놀러 갔다 올게."

아까 하이라이트 영상 보니까 제법 잘 막아내던데.

이대로 가면 최다 킬 보상을 두고 경합을 펼쳐야 할지도 몰랐다.

그렇게 둘 수는 없지.

당연한 이야기지만, 4층에서 라이벌은 필요 없다.

이건 협력 게임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무림 녀석들은 그냥 존재 자체로 마음에 안 들었으니까.

무엇보다 나와 내 동료들한테 칼을 들이민 놈들은 그 대가를 치르게 해 줘야 한다.

감히 다시는 건드릴 생각조차 하지 못하도록.

77화 고인물이 디펜스를 하는 법 (2)

간단한 주의사항을 알려 준 진혁이 허공을 힐끗 바라봤다.

이제 슬슬 나타날 타이밍이 됐는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띠링!

[첫 번째 웨이브에 대한 '솔라 에너지'가 정산됩니다.]

역시, 때맞춰 나타났다.

진혁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총 1500의 '솔라 에너지'를 획득하셨습니다.]

좀비들을 죽이고 얻은 태양의 힘.

이걸 이용해서 더 다양하고 강력한 방어 식물들을 재배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투사체 식물만으로 끝까지 갈 수는 없지.'

첫 번째 웨이브를 막은 투사체 식물은 강력하긴 하지만, 딜레이가 있어 대규모 난입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웨이브가 거듭될수록 신체가 비약적으로 강화된 좀비나 심지어 하늘에서 떨어지는 특수 좀비들도 나타났으니까.

당연히 그에 맞춰 식물들도 또한 다양화할 수밖에.

좀비와 식물 간에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것이야말로 이번 층을 공략하는 핵심 열쇠였다.

[놀라운 양의 에너지를 획득하셨기 때문에 '식물학자' 칭호를 획득하셨습니다.]

[식물학자]

입수 난이도: 4층에 한해 SS

내용: 모든 식물 방어 타워의 성능이 10%만큼 상승합니다. 통상 식물들은 지능과 감정이 없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건 틀린 말입니다. 식물들은 식물학자의 마음에 동조하고 감응하며, 그의 적을 섬멸할 것입니다.

첫 번째 웨이브에서 얻을 수 있는 솔라 에너지는 통상 300에 불과하다.

식물의 개화 속도와 키우기 어렵다는 특성 때문이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이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식물을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하지만, 진혁은 상암 경기장이라는 넓은 거점을 선택했고 또 엄청난 수의 좀비를 처리했기 때문에 무려 5배에 이르는 솔라 에너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되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육탄 식물 / 파괴형 / 필요한 솔라 에너지: 300]

[얼음꽁꽁 식물 / 빙계형 / 필요한 솔라 에너지: 350]

[바위 식물 / 방어형 / 필요한 솔라 에너지: 250]

[폭주 식물 / 광폭형 / 필요한 솔라 에너지: 600]

2번째 웨이브에 선택할 수 있는 식물의 종류는 총 넷.

물론, 어디에 어떤 식물을 배치해야 할지는 이미 정해 뒀다.

"동쪽과 남쪽에 육탄 식물을 하나씩 심고 중앙에 얼음꽁꽁 식물을 배치할게. 바위 식물은 서쪽에 하나면 충분해."

마지막으로 폭주형 식물 씨앗은 따로 받아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좋아. 그럼 다음은....'

진혁은 코인 거래소에서도 필요한 아이템들을 추가로 구매했다.

'메마른 고원의 암소 똥 10kg', '마지막 낙엽 5포대', '펜텔라스 쇠똥구리 100마리', '회색 지렁이 100마리'.

모두 비료를 만들기 위한 재료들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비료라고 다 같은 비료가 아니다.

무궁무진한 조합 중에 최적의 조합을 찾는 것은 오직 고인물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었다.

[식물들의 떡잎이 파르르 떨립니다.]

[생전 처음 맛보는 달콤함에 입맛을 다십니다.]

식물의 속마음이 들리는 건 식물학자의 특성 때문이겠지.

"그래, 그래. 많이 먹고 쑥쑥 크렴."

진혁이 비료들을 듬뿍 뿌려 주며 중얼거렸다.

반면, 킬킬대는 진혁을 보는 나머지 사람들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어둡게 일그러졌다.

"누나. 아무래도 형이 미친 것 같은데요?"

이태민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나도 보고 있어. 탑에 얼마나 오래 박혀 있었으면 저렇게 되는 걸까?"

"저, 저도 무서워요. 진혁 씨 마치 식물이랑 대화가 통하는 것 같지 않아요? 설마, 제 착각이겠죠? 제발 착각이라고 말해 줘요."

유연화와 테레사도 현실을 부정하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놈이라면 정말로 가능할지도 모른다.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놈이니까."

심지어 천유성조차 두려운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모두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후후후. 아나스타샤. 그래.그래 너도 꼭꼭 씹어서 먹으렴. 크리스티나."

진혁은 사랑스럽다는 듯이 식물들을 쓰다듬었다.

***

약 5분 뒤, 네 사람에게 거점을 맡긴 진혁은 곧바로 경기장 밖을 빠져나왔다.

"식량부터 챙겨. 골목마다 있는 편의점 싹 다 털어야 돼. 알았지? 식량이랑 물이 최우선이야."

"우린 약품이랑 필수재를 맡는다. 갈수록 밖으로 나오기가 힘들어질 테니 초반에 최대한 많이 확보해 둬야 해."

"가능하면 다른 길드들과의 싸움을 피해야 하지만, 안 되겠다 싶으면 전부 재껴 버려라."

거리는 꽤나 많은 플레이어들로 붐볐다.

다음 웨이브까지 시간이 남아 있으니, 그동안 거리에서 파밍을 하며 다음 웨이브를 대비하려는 것이다.

'쯧쯧. 그런 거 대비하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

진혁은 그 사이를 느긋하게 가로지르다 혀를 찼다.

애초에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왔는데, 장기전을 대비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후반까지 가기 전에 거점이 함락당할 확률이 훨씬 높을 텐데?

차라리 갖고 있는 코인들을 모조리 쏟아 부어서 각자의 방어 타워를 강화하는 게 그나마 1웨이브라도 더 오래 버틸 수 있는 방법이었다.

'하긴, 그런 걸 알고 있는 놈들이라면 애초에 3층에서 그리 쩔쩔매지도 않았겠지.'

대부분의 플레이어들 입장에선 탑에 관한 정보가 없어도 너무 없다.

거의 처음 부딪쳐 보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러니 이런 멍청한 짓을 할 수밖에.

'내 기준에서 판단하면 안 된다는 걸 자꾸 까먹는단 말이야.'

진혁이 피식 실소를 흘렸다.

그렇게 주위를 둘러보는 사이 어느덧 마트 바로 옆 건물 앞에 도착했다.

무림과 삼합회가 지키는 마트와 달리, 이곳은 그 누구도 거점으로 삼지 않았다.

딱히 방어의 이점도 없고 그렇다고 물자가 풍부한 곳도 아니었기에 인적이 끊겨 있는 건물.

진혁은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거점 '괴짜의 고미술품 보관 장소'에 입장하셨습니다.]

철로 만든 중세시대 갑옷과 도자기 따위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진열장은 대부분은 박살난 상태였고. 바닥은 오랫동안 사람이 출입하지 않아 먼지가 잔뜩 쌓인 상태다.

멸망한 현대와 잃어버린 역사가 겹쳐진 장소.

'진짜 오랜만이네.'

거의 8년 전인가?

몇 만에 이르는 좀비들로부터 얼마나 오래 도망 다닐 수 있는지 시험해 보느라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우연히 찾아낸 장소다.

진혁이 벽에 걸려 있는 수십 개의 그림을 바라봤다.

미술관 한켠을 장식한 색이 바랜 풍경들.

무기마저 잃어버린 채 막다른 길에 몰려 죽기 바로 직전 액자를 뜯어 좀비 뚝배기라도 깨자는 생각으로 손을 뻗었었다.

진혁이 그때와 마찬가지로 액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우우우우웅!

손이 그림을 통과했다.

겉으로 보기엔 완벽했던 벽은 어느새 옆에 있는 마트로 이어지는 통로로 변했다.

'이럴 줄 알았지.'

진혁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일종의 버그.

게임상에서도 고쳐지지 않은 버그가 현실에서도 재현되었다.

진혁이 재빨리 반대쪽으로 넘어갔다.

'보초를 서는 놈은 없군.'

예상대로다.

좀비들이나 침입자들은 모두 입구로 올 테니 당연히 모든 전력을 입구에 집중할 수밖에.

설마, 이 뒤쪽으로 숨겨진 통로가 있을 줄은 꿈에도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으리라.

진혁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식량과 물자들을 바라봤다.

이 정도면 최소한 몇 백 명이서 2, 3주는 족히 버틸 수 있는 양이었다.

이래서 마트가 좋긴 좋다.

"덕분에 우리 귀염둥이가 아주 배터지게 먹을 수 있겠어."

거점에 심지 않고 가져온 마지막 식물.

[폭주 식물]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이미 이곳엔 넘치고 남을 만큼 식량이 쌓여 있지 않은가?

어차피 내 것도 아닌 이상 조금도 아까워 할 이유는 없었다.

[폭주 식물이 입맛을 다십니다.]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은 식량 창고 깊숙한 곳에서.

우걱! 우걱! 우걱!

붉은빛을 띤 식물이 빠른 속도로 덩치를 키우기 시작했다.

***

"우아아악! 빌어먹을 새끼. 내가 반드시 씹어 삼킬 거야. 그 자식 절대 살려 둘 수 없다고!"

제갈천이 분노 섞인 욕설을 내뱉었다.

아직까지 시퍼렇게 물든 얼굴은 꽤나 고통스러워 보였다.

콰아아앙!

생수통이 잘게 찢어지며,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저도 천이 말이 맞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탑의 위로 가기 위해서라도 관리하기 힘든 녀석까지 품을 필요는 없잖아요?"

당소하 또한 제갈천의 말에 맞장구쳤다.

"...."

황보군악이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러다 옆에 있던 남궁현에게 넌지시 물었다.

"현아.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

"나... 나는."

남궁현이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황보군악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었다.

"뭐냐? 설마 너 겁이라도 먹은 것이냐?"

"내, 내가 겁을 먹었다고?"

"그래. 완전히 꼬리를 만 게, 겁을 집어먹은 승냥이와 무엇이 다르단 말이냐."

황보군악이 일부러 도발과 자극이 섞인 말을 했다.

차라리 욱하기라도 하면, 공포를 극복할 수 있었으니까.

허나 남궁현은 그 말에도 별 다른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완전히 얼어붙어 버린 것이다.

강진혁이란 인물 때문에.

'그 정도였단 말인가.'

관망하는 제3자가 아닌 맞서 싸운 당사만이 느낄 수 있는 벽.

어쩌면, 자신들은 감당할 수 없는 플레이어를 끌어들이려고 하는 건지도 몰랐다.

"다들...."

황보군악이 입을 뗐을 바로 그때였다.

콰아아아앙!

갑자기 엄청난 굉음과 함께 마트 전체가 흔들렸다.

"우와아아악!"

"끄아아악!"

"사람... 사람 살려!"

동시에 여기저기서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무슨 일이냐!"

황보군악이 검을 뽑은 채 문을 박찼다.

분명, 두 번째 웨이브까진 시간이 남아 있을 터.

따라서 지금의 충격은 좀비 때문이 아니다.

게다가 하이라이트 영상까지 공개된 마당에 감히 이곳에 쳐들어올 정신 나간 놈 또한 없었다.

현재 4층에서 가장 탄탄한 거점이 어디인지 모두가 똑똑히 봤을 테니까.

아니.

딱 한 명이 있었다.

그런 짓을 할 만큼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놈이.

"설마...."

당소하의 이맛살이 구겨졌다.

"차... 창고에 대형 식물이, 엄청나게 큰 식물이 나타났습니다!"

"플레이어들이 모조리 잡아먹히고 있어요! 으으으... 저, 저희로는 안 됩니다. 안 된다고요!"

틀림없다.

그놈이다.

"빌어먹을! 내 거점이!"

황보군악이 절망적인 얼굴로 고함을 질렀다.

두 번째 웨이브가 밀려오기 전까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상황.

지금 거점을 잃는다면 최악의 상황까지 각오해야 했다.

어떻게든 이곳을 잃는 것은 막아야만 한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쿠쿠쿠쿠쿠!

천장이 무너지고 기둥이 박살났다.

마트 전체가 붕괴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로.

"으음. 집들이 선물을 좀 가지고 왔는데, 우리 앵두가 먹성이 워낙 좋아서 말이지. 정말로 미안하게 됐어."

진혁이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은 채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78화 고인물이 디펜스를 하는 법 (3)

"많이 먹어, 우리 귀염둥이 앵두야."

진혁이 붉게 물든 식인 식물을 쓰다듬었다.

창고에 있는 식량을 모조리 먹어치웠기에 그 크기와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러자.

"키에에에엑!"

높이만 10m에 이르는 거대한 식물이 거칠게 포효했다.

대기가 쩌렁쩌렁 울린다.

앙증맞은 애칭과는 달리, 녀석과 맞서는 플레이어들에겐 이보다 더 끔찍한 악몽이 존재할 수 있을까?

"오, 온다!"

"빌어먹을, 모두 산개해라! 뭉쳐 있으면 몰살당한다!"

콰콰콰콰콰콰!

거대한 넝쿨이 순식간에 마트 내부를 휩쓸었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

황보군악이 정신없이 몸을 날리며 고함을 질렀다.

"응?"

"바로 옆에 있는 이 거점을 파괴했다간, 너희들한테 가는 좀비들의 수도 훨씬 많아질 거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멍청한 일을 저지르냔 말이다!"

4층은 경쟁 구도인 동시에 최소한의 협업을 요구하는 층이다.

대놓고 트롤짓을 했다가 '그 놈'이 깨어나기라도 한다면, 모조리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것이 설령 20층에 있는 무림에 소속된 일원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저 멍청한 플레이어 놈이 그걸 알 리가 없지.'

자신이 하는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안다면, 감히 이런 일을 벌일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황보군악은 답답한 듯 속으로 혀를 찼다.

하지만.

"여왕이 두렵나 보군."

진혁의 입에서 나온 말은 완전히 예상을 뒤엎어 버렸다.

"여, 여왕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물론 알고 있지."

4층에서 특수 보상을 얻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최다 킬을 달성하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구독자 투표를 통해 인기 거점으로 당선되는 것.

이렇게 말이다.

허나, 사실 보상을 얻을 수 있는 또 한 가지 방법이 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결코 얻을 수 있는 세 번째 방법이.

히든 퀘스트 '죽은 자들의 모태(母胎)'.

좀비들의 여왕을 처치하는 것이야말로 이번 층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보상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다.

"...믿을 수가 없다. 어떻게 탑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인간 따위가...."

"3웨이브 전에 200명이 넘는 플레이어가 지키고 있는 대형 거점 중 하나가 파괴당하면, 특수 이벤트가 발생하지. 바로 지금의 경우가 거기에 해당하고."

'나야 싸구려 진흙 인형에 생명을 불어넣는 편법으로 이 방법을 찾아낸 거지만.'

통상적으로 200명 이상이 방어하고 있는 대형 거점이 3웨이브 이전에 함락될 일은 없었다.

그렇기에, 인간의 전력이 압도적으로 약하다는 게 알려질 경우 좀비들을 부리는 여왕이 깨어나게 된다.

상대할 가치가 없는 적들을 일거에 쓸어버리기 위해, 직접 인간들이 있는 거점으로 움직인다는 뜻이다.

막힘없이 대답하는 진혁의 말에, 황보군악은 더 이상 의심할 명분을 잃어버렸다.

사실이다.

상대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여왕의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를 불러 올 생각이란 건가?"

"50웨이브나 되는 좀비들을 일일이 막긴 싫거든. 따분하잖아. 심신이 피로한 건 말할 것도 없고."

정상적으로 진행한다면 최소 몇 주 동안이나 이런 음침한 폐허 속에 있어야 할 터.

고생을 피할 수 있는 길이 있는데 굳이 어려운 길로 돌아갈 이유는 없다.

물론, 처음에는 정공법으로 공략하려고 했었다.

3웨이브 안에 대형 거점을 무너뜨리기 위해선 일반 플레이어를 대량 학살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녀석들을 마주한 순간부터.

그리고 이 녀석들이 마트라는 대형 거점 중 하나를 골랐을 때부터.

계획은 변했다.

먼저 칼을 들이댄 놈들을 상대로는 그 어떤 양심의 가책도 느낄 이유는 없었으니까.

"이걸로 너희 거점은 모두 박살났다."

아무리 중층에 있는 실력자들이라고 한들, 거점 없이 좀비들을 상대하는 건 무리다.

병력의 규모와 체력의 한계는 개인으로선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이었으니까.

"그러니 남은 시간. 어디 한번 재주껏 살아 보라고."

이곳에 온 목적은 모두 이뤘으니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진혁이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이 찢어 죽일 놈이 어디서 자기 할 말만 하고 도망가려고 해! 여기서 살아서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카카캉!

제갈천의 검에서 불똥이 튀어 올랐다.

하지만, 진혁은 그런 제갈천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마트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더 이상 상대해 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미.

"키에에에엑!"

거점을 완전히 폐허로 만들어 줄 식물이 든든하게 뒤를 받쳐주고 있었으니.

***

같은 시각.

쾅! 쾅! 쾅! 콰아앙!

상암 경기장에선 미친 듯이 물려오는 검은 물결이 바위 식물을 두드렸다.

[바위 식물이 Lv1 '깊은 뿌리'를 발동합니다!]

워낙 단단하고 가파른 몸을 갖고 있는 바위 식물인지라 좀비들도 그 벽을 쉽사리 넘지 못했다.

그러자 이번엔 좀비들이 자신들의 몸을 발판 삼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크르르!"

"크아아!"

무게로 인해 아래쪽에 깔린 좀비들의 몸이 으깨졌으나, 애초에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놈들이었다.

그러나 첫 번째 좀비가 방패 식물을 넘어 경기장에 들어선 순간.

"키에?"

좀비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육탄 식물이 Lv1 '전신 도약'을 사용합니다!]

쿠우우웅!

몇 톤은 족히 나갈 법한 육중한 크기의 육탄 식물이 그대로 좀비를 깔아뭉갰다.

거기에 얼음꽁꽁 식물들이 냉기를 발산하며, 좀비들의 이동 속도를 감소시켰다.

그야말로 깔끔한 방어.

남은 네 사람은 그저 뒤처리를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진짜 대단하네요. 벌써부터 플레이어들이 개입하지 않아도 자율 방어가 가능할 정도라니. 진혁 씨는 이 모든 걸 전부 계산해 둔 걸까요?"

테레사가 감탄과 경외심이 섞인 얼굴로 중얼거렸다.

보면서도 믿기지 않은 광경이다.

"형이라면, 아마 그랬을 거예요."

"우리도 오빠랑 같이 다니곤 했어서 오빠에 대해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면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니까."

이태민과 유연화도 한 마디씩 덧붙였다.

"...."

반면, 천유성은 모든 게 불만인 듯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이 넘어야 할 경쟁자가 보면 볼수록 엄청난 괴물이니 짜증이 날 수밖에.

단순히 개개인의 전투 실력을 넘어 상황까지 설계하는 적은 극도로 상대하기 까다로웠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대형 거점 '마트'가 함락되었습니다.]

모두의 앞에 갑작스럽게 상태창이 나타났다.

"뭐, 뭐죠?"

테레사가 깜짝 놀라 외쳤다.

"마트라면, 아까 전에 그 중국 쪽 플레이어들이 있던 곳인데. 거기가 뚫렸다고요?"

"말도 안 돼...."

"설마... 오빠랑 관련이 있는 건 아니겠지?"

진혁이 활짝 웃으며 떠났던 시간과 거점이 함락된 타이밍이 너무나도 절묘하게 일치했다.

무엇보다 그게 아니라면, 그 강력한 전력을 보유한 대형 거점이 고작 두 번째 좀비 웨이브 하나 막아내지 못하고 무너졌다는 게 말이 되질 않았다.

틀림없다.

무언가 이변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을 증명하듯.

[특수 이벤트가 발생했습니다.]

[나약해 빠진 플레이어들을 응징하기 위해 4층의 주인 '펜다리엘'이 움직입니다.]

붉은색 상태창이 이어서 나타났다.

"4층의 주인이라니.... 저게 대체 뭐야?"

"말도 안 돼. 여기는 좀비 웨이브를 막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었어?"

4층에 보스 몬스터가 있다는 건 이곳을 제집 드나들 듯이 드나들던 이태민과 유연화조차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당연히 다른 사람들 또한 펜다리엘이란 존재에 대해선 짐작도 못 하고 있었다.

"무언가 또 엄청난 짓을 꾸미고 있나 보군."

천유성이 경기장 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

마트에서 나온 진혁은 건물 옥상을 옮겨 다녔다.

아이템을 사용할 적당한 장소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여기다.'

진혁의 발걸음이 멈췄다.

주위에 다수의 거점이 있어 마력의 흐름이 복잡하게 엉켜있는 데다, 상암 경기장과도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완벽하다.

진혁이 아공간 인벤토리에서 작은 돌멩이 하나를 꺼냈다.

3층의 보스 몬스터인 무혼을 쓰러뜨리고 얻은 특수 아이템.

'태양을 가리는 돌'이었다.

[태양을 가리는 돌]

입수 난이도: 알려지지 않음

내용: 고대 마야제국에서 사용했던 의식용 성유물로서, 태양을 가리고 어둠을 불러올 수 있게 합니다. 사용시 5대 원소(물, 불, 흙, 바람, 빛) 능력을 50%만큼 감소시키며, 어둠 속성 능력은 100%만큼 증가시킵니다.

[흉폭화 옵션이 강제 발동됩니다.]

결코 4층에서 써서는 안 될 아이템이다.

플레이어들이 사용하는 대부분의 능력은 5대 원소 능력 중 하나에 해당했으니까.

반면, 좀비들은 어둠 속성으로 흉폭화까지 받는다면, 이동 속도와 공격 속도까지 2배로 증가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두둑!

진혁은 그 모든 걸 비웃기라도 하듯 돌멩이를 부숴 버렸다.

박살난 파편들이 옥상에 떨어졌다.

그러자 바로 그 순간.

우우우웅!

어둠이 태양을 집어삼켰다.

건물 위로 짙은 융단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이걸로 4층을 공략하는 난이도는 비약적으로 올라갈 것이다.

물론, 단순히 스릴을 즐기기 위해서 이 아이템을 사용한 건 아니었다.

일부러 위험을 자초할 경우 또 하나의 이벤트가 발상한다.

바로.

[인간. 무슨 생각?]

역시나.

상식과는 동떨어진 행동에, 보스 몬스터만이 사용할 수 있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회랑에서 엘리스가 사용했던 것과 같은 종류의 메시지였다.

"보니까 네 녀석이 거점들을 쑥대밭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 같은데, 맞나?"

[고작. 정찰병도 못 막는. 놈들 상대. 힘 아낄 필요 없으니까.]

"우습게 보인 건 미안한데, 다른 거점은 건드리지 말고 나한테 와라. 저 뒤쪽에 보이는 상암 경기장이 내 거점이다."

[인간. 혼자서. 희생. 한다고?]

"희생이라기 보단, 좀비 따위 100만 마리가 몰려와도 시시해서 말이지."

[시시하다? 나와. 내 아이들이?]

펜다리엘의 목소리가 변했다.

지능이 부족했기에, 번역체의 어투까지 고쳐지진 않았지만, 말투에서 분노가 묻어나왔다.

화가 나겠지.

한 층의 보스 몬스터를 고작 인간 하나가 무시했으니까.

"네가 갖은 모든 병력을 퍼부어서 도전해 봐. 모조리 쓸어 버려 줄 테니."

진혁이 한껏 이죽거렸다.

[좋다. 인간. 네놈 거점. 가장 먼저 박살내고. 모든 인간들에게 경고한다. 감히 우리에게 덤빈 걸 후회하도록.]

여왕의 메시지는 거기서 끝났다.

이제 잠시 뒤엔, 그녀의 분노를 가득 담은 병력들이 이곳까지 몰려올 것이다.

'잘 녹화됐겠지?'

진혁이 방송 시스템을 살폈다.

[대형 거점 '마트'에서부터 조금 전까지의 영상 편집본이 업로드되고 있는 중입니다.]

영상이 업로드되는 걸 확인한 진혁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아.'

모든 게 계획대로 됐다.

멍청한 중국 쪽 플레이어들이 거점 하나 지키지 못해 히든 퀘스트를 발동시켰다.

때문에 최악까지 각오해야 하는 상황.

바로 그때 강진혁 플레이어는 모두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 위험을 자초했다.

'태양을 가리는 돌'을 사용해 좀비들이 자신의 거점으로 몰리도록 말이다.

모두의 눈엔 마치 영웅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최다 킬 보상과 인기투표. 거기에 보스 몬스터를 잡는 보상까지 모두 챙기겠다.'

진혁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사람들을 구하는 건 덤이다.

주요 목적은 모든 보상을 싹쓸이하는 거고.

이것으로. 대중들의 인기와 단물까지 독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만들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스스로의 힘으로.'

79화. 죽은 자들의 모태(母胎) '펜다리엘' (1)

[시련의 탑에 새로운 영상이 업데이트되었습니다.]

진혁이 올린 영상으로 인해 시련의 탑 게시판이 또 한 차례 뒤집어졌다.

-냥냥펀치: 와. 저 대형 길드가 고작 좀비 하나 막지 못해서 이 사달을 낸 거?

-타이완 이즈 넘버원: ㄹㅇ 진심 민폐 쩌는 거 보소. 그냥 해도 만만찮은 걸 아주 지옥 난이도로 만들어 버렸네. 보니까 히든 보스를 알고 있는 플레이어 자체가 없다며? 뭔 수로 깨냐 이걸?

-Line을 잘 서야 돼: 대체 얼마나 방심했으면 2웨이브를 못 버티냐. 진심 역겹다 수준.

-홍차맛떡볶이: 조금 전에 여왕 선제 공격하려는 대형 공격대들도 전멸했다고 함. 진짜 아까운 유망주들인데. 하아. 저 ㅂㅅ들이 삽질해서 애꿎은 목숨을 잃었네.

욕설이 봇물 터지듯이 이어졌다.

하지만, 정작 중국 쪽 대형 길드들은 입 한번 뻥끗할 수 없었다.

삼합회는 전멸했고 무림에 소속된 자들은 플레이어가 아니었기에 반박할 수 있는 영상을 올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게 진혁이 계획했던 그대로 흘러갔다.

-백수 위에 트수: 그래도 강진혁 플레이어가 보스 어그로 잘 끌어 줘서 대량 학살은 막을 수 있었음.

-킹갓엠페러: 진짜 강 형 없었으면, 작은 거점에 있는 사람들 모조리 죽었을 듯.

-David H: 그건 좋은데, 다섯 명이서 여왕이랑 싸우는 게 말이 됨?

-조선제일검: 다른 사람은 몰라도 강진혁은 게임 최강국에서 인정한 S급 플레이어다. 믿어 볼 만함.

-스벅매니아: 강진혁 치면 연관 동영상 쭉 나오니까 정주행 한 번 하고. 진짜 믿고 보는 카드임.

-새영언환: 이럴 때 언노운은 안 나오나? 그 플레이어랑 강진혁 플레이어랑 같이 싸우는 거 보고 싶은데.

대조적으로 진혁에 대한 평가는 하늘을 찌를 듯이 올라갔다.

랭커들조차 죽어 나가는 상황 속 오직 진혁만이 유일한 희망이라는 인식이 팽배해진 탓이다.

"오빠. 진짜 판을 너무 크게 벌린 거 아니야?"

유연화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아는 진혁은 언제나 상식을 깨 버리고 다른 길을 찾긴 했지만, 설마 이런 식으로 판 자체를 엎어 버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뒤통수가 얼얼하다.

"형, 이곳에 보스 몬스터가 있다는 건 또 어떻게 안 거예요?"

현 상황이 당황스러운 건 이태민도 마찬가지였다.

"뭐, 그냥 이것저것 시험해 보다가 발견했어."

"...."

이것저것 시험해 보다가 발견했다니.

말은 가볍게 해도 숨겨진 히든 퀘스트를 발견하기까지 무수히 많은 도전과 시도를 했을 것이다.

"마트를 부순 것도 진혁 씨가 한 거 맞죠?"

테레사도 궁금했던 걸 물었다.

"글쎄요. 저도 잘은 모르지만, 자연스럽게 부서지진 않았겠죠?"

하지만, 진혁은 빙그레 웃을 뿐 말머리를 돌렸다.

"잡다한 건 아무래도 좋다. 그래서, 여왕을 상대할 방법은 있는 거냐?"

마지막으로 천유성이 가장 중요한 걸 언급했다.

그렇다.

판을 벌리고 모든 대중의 시선을 끄는 것까진 좋았으나, 그걸 해결할 수 있는 묘안이 없다면 이 모든 게 자살 행위밖에 되질 않는다.

그리고 당연히.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있어."

진혁은 이 싸움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알고 있었다.

물론, 그 과정은 순탄하진 않을 것이다,

허나 얻는 보상을 생각한다면, 위험을 무릅쓸 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저지른 건 아니라서 다행이군. 그럼 이제 어떻게 하면 되는 거냐?"

"방법을 알려 주면 시키는 대로 할 수 있겠어?"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할 생각이다."

"나중에 가서 말 바꾸면 안 돼. 이번에는 네 역할이 굉장히 중요하거든."

"...말해 봐라."

천유성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굉장히 어려운 임무를 맡긴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어려운 건 맞다.

단지 녀석이 예상하는 것과 다른 종류의 어려움일 뿐이지.

"녀석들에게 한 방 먹이려면, 상당한 규모의 스킬이 필요해. 문제는...."

"문제는?"

"이게 꽤 비싼 거라서 말이야."

"설마...."

천유성의 표정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웃기지 마라. 내가 왜 네놈에게 내가 모은 코인을 줘야 한다는 말이냐? 아니, 그것보다 왜 나한테만 코인을 뜯어내려고 하는 거고!"

부유하다는 평가를 받는 테레사나 꽤나 잘 나가고 있는 이태민과 유연화도 있다.

그런데 어째서.

"유연화는 쌍룡검을 줬고. 테레사 씨는 이전에도 갖고 있는 코인을 넘긴 적이 있어. 뭣보다 짠돌이처럼 굴지 마. 얼마 전에 올린 영상 조회수 대박난 거 알고 있으니까."

"빌어먹을. 그걸 본 거냐."

"응, 봤지. 너답지 않게 꽤 신선하고 재밌게 만들었던데?"

제목이 '옆집 할머니도 던전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 해 주는 검술'이었지 아마?

검성이 직접 지도해 준다는 말에 어그로 하나는 제대로 끌렸다.

물론, 어그로만으로는 대박이 날 수 없다.

그러나 천유성이 지닌 압도적인 실력 덕분에, 영상은 당일 '명예의 전당'에 오를 정도로 대박이 날 수 있었다.

"안면 모자이크 편집을 알려 준 녀석을 죽여야겠군."

"너무 뭐라고 하진 마. 나니까 대번에 알아본 거니까."

녀석 나름대로 얼굴은 안 팔리려고 어설프게 편집 기술을 사용했지만, 추혼검 특유의 검술까지 숨길 순 없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 눈을 속일 순 없지.

추혼검이라면 나 역시 눈을 감고도 구절을 줄줄 읊어 줄 수 있는 경지였으니까.

"...개인 퀘스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했던 거다."

"아무렴. 어련하시겠어."

검성으로서 성장하기 위해선 다수의 인정을 받는 퀘스트를 클리어해야 했다.

과거에는 플레이어 수가 워낙 적어 그 기준이 낮았지만,

전 세계의 모든 이목이 집중된 지금은 몇 십 몇 백이 아닌 백만 단위의 인정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주머니 두둑한 거 알고 있으니까. 팀을 위한 차원에서 기부해."

"얼마나 말이냐?"

"10만."

정확히 천유성이 벌어들인 코인 수익과 일치하는 양이다.

액수를 들은 천유성의 표정은 똥 씹은 것처럼 변해 버렸다.

미래를 위해 알토란 같이 모아야 할 시드를 몽땅 날리게 생겼으니 그럴 수밖에.

"너도 코인은 많지 않나? 나한테 뜯어내지 않아도...."

"그렇긴 한데, 나도 10만 코인은 아깝거든."

뭐 하러 내 지갑에 있는 걸 쓰나?

눈앞에 든든한 돈줄이 있는데?

"빨리 내놔 시간 없어."

진혁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이 거점의 선장은 나고.

너는 이곳의 선원이다.

무엇보다 밖에 있는 강대한 적에 맞서기 위해선 선장의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지.

"...넌. 진짜로 편하게 죽진 못할 거다."

[플레이어 천유성 님으로부터 100,000코인을 받으셨습니다.]

천유성이 어금니를 깨물면서도 갖고 있는 코인을 모두 토해냈다.

바로 그때.

쿠웅―! 쿠웅―! 쿠웅―!

저 멀리서.

지축을 흔드는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놈들이 오고 있다.

그것도 매우 빠른 속도로.

***

필드형이나 미궁형 등 특수한 층을 제외한다면, 탑의 각 층에는 그 층을 지배하는 보스 몬스터가 존재한다.

'강함'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정의되는 절대자들.

하지만, 그들의 실력은 반드시 그들이 지배하고 있는 층에 비례하지 않는다.

따분하거나 귀찮다는 이유로 혹은 자신이 갖고 있는 층이 마음에 든다는 이유로 실력에 비해 낮은 층을 고집하는 이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펜다리엘 역시 그들 중 하나에 속했다.

모든 게 멸망해 버린 아포칼립스.

죽은 자들만이 배회할 수 있는 이 땅이야말로 그녀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세계였다.

"키에에에!"

"크아아아!"

셀 수 없이 몰려 있는 좀비들이 거리 한가운데서 포효했다.

그러나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 제자리에서 움직이지는 않았다.

바로 그때.

저벅.

펜다리엘이 한 걸음 앞으로 걸었다.

치이이익...!

아스팔트 위로 짙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시독(屍毒)에 의한 '부식' 효과다.

일반적인 좀비들도 어느 정도 시독을 갖고 있지만, 펜다리엘이 갖고 있는 시독은 차원이 달랐다.

접촉하는 건 물론 근처에 있는 공기까지도 태워 버릴 수 있었으니까.

"고작. 이 수준인가. 인간들은."

펜다리엘의 입이 가로로 찢어졌다.

전신이 피로 물든 끔찍한 외형.

창백한 피부와 허리까지 오는 붉은 머리카락은 악몽 속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끄으으으...."

펜다리엘 앞에 있던 남자 한 명이 신음을 내뱉었다.

이안 스미스.

유럽의 대형 길드 '판테온'에 소속된 랭커인 스미스는 진혁이 업로드 한 동영상을 본 직후, 공격대를 꾸려 여왕을 사냥하려 나섰다.

모두가 과거 [시련의 탑]을 1년 이상 플레이해 본 건 물론, 최근 유적의 레이드의 경험까지 있는 실력자들로만 추려서.

그러나 결과는 이 모양이다.

55명으로 구성된 공격대는 여왕의 옷깃 하나 스치지 못하고 모조리 썩어 버린 시체가 되었다.

"무슨 이런 터무니없는 괴물이...."

그 누가 오더라도 이 괴물을 이길 순 없다.

애초에 이런 녀석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이치에 모순을 자아냈다.

스미스가 마지막으로 여왕을 올려다봤다.

공허하고 차가운 절대자의 눈을.

콰콰콰콰콰콰!

그리고 그것이 유럽의 기대주로 촉망받던 랭커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 인간. 빼고. 죽여라. 모조리. 녀석은 내가 직접 죽이겠다."

펜다리엘이 끝없이 도열해 있는 좀비들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키에에에!"

"케에엑!"

좀비들이 일제히 자리를 박차고 질주했다.

3m 크기의 강화형 좀비들이 선두에서 탱킹을 담당했고, 팔이 늘어나거나 머리가 기형적으로 긴 특수 좀비들이 뒤를 따랐다.

모두 웨이브의 후반에서야 볼 수 있는 녀석들이다.

여왕을 깨운다는 특수한 상황이 없었다면 결코 지금 싸울 일은 없었겠지.

하지만, 그 강력한 적들이 모두 한 곳에 모였다.

콰콰쾅!

콰아앙!

입구를 지키고 있던 식물들이 모조리 박살났다.

바위 식물과 자폭 식물들이 자신의 몸을 희생하며 막으려 했으나, 채 몇 분도 막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다.

애초에 겨우 세 번째 웨이브에서 막을 수 있을 만한 종류가 아니었으니까.

"끝났군."

멀리서 전투를 지켜보던 펜다리엘은 확신했다.

아주 잠시 뒤엔 건방을 떨던 인간이 자신 앞에 끌려 나올 것이라고.

그러나 경기장을 습격한 좀비들로부터 들려온 전음은 그녀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어 버렸다.

[네 명의 인간이 얼음 속에 갇혀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던 인간은 보이질 않습니다.]

"인간들이 갇혀 있다? 얼음 안에?"

스스로를 얼음 속에 집어넣었다는 말인가?

자신에게 고문당하다 죽는 게 두려워서?

그것도 아니면 설마....

'다른 꿍꿍이가 있다?'

펜다리엘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었다.

좀비들을 거점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일부러 도발을 한 것이다.

그 이유는 뭘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쪽의 전력을 약화시기키 위해서.'

철저하게 힘을 분산시킨 다음.

'...나를 사냥하려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펜다리엘은 머릿속이 차갑게 식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빙하조형(氷河造形) 제3식(式), '빙옥만화경(氷獄萬化境)'이 발동됩니다!]

검게 일그러진 세상이 하얀색으로 덧칠해졌다.

그렇게.

우우우우웅!

얼음 유리로 만들어진 수많은 벽들이 여왕과 그녀를 호위하던 좀비들을 완전히 휘감았다.

80화. 죽은 자들의 모태(母胎) '펜다리엘' (2)

모든 게 얼어붙은 세상.

서로가 서로의 모습을 비추는 마경(魔境).

이곳이 바로 빙하조형이 만들어낸 마지막 감옥이다.

"뭐지. 이건...."

펜다리엘이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난반사로 인해 끝없이 늘어난 자신과 좀비들의 모습이 당황스러울 수밖에.

콰아아앙!

손을 뻗어 벽을 깨 봤지만, 그 뒤에는 또 다른 벽이 가로막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빙옥만화경(氷獄萬化境)의 효과로 인해 '광역 혼란'이 발동됩니다!]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착시로 인해 만화경의 두 번째 능력이 개화했다.

"키에에에에!"

"케에에엑!"

좀비들이 일제히 괴성을 토했다.

쾅! 쾅! 쾅!

콰드득!

그리고 머리로 벽을 찧고 서로를 물어뜯었다.

심지어 이성을 잃어버린 몇몇 놈들은 펜다리엘을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완전히 그녀의 통솔에서 벗어난 상황.

순식간에, 하얀 얼음 위로 붉은 피가 덧칠해졌다.

"인간! 감히 이런 짓을 하다니!"

자기 손으로 자식들을 찢어 죽인 펜다리엘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동시에 온몸에서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흉흉한 기운이 피어올랐다.

[펜다리엘이 Lv?? '흑사(黑死)'를 발현합니다!]

이안 스미스가 이끄는 공격대를 전멸시킨 스킬.

이것이 시독 중 가장 지독하다고 일컫는 '흑사(黑死)'다.

뻗어 나온 검은 기운이 얼음벽에 스며들었다.

쿠쿠쿠쿠쿠쿠!

그러자 결계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이 검게 변해 바스라지기 시작했다.

겹겹이 둘러 싼 벽이 무너지고.

얼음 미궁의 근간이 되는 만화경의 기본 골자가 파훼됐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힘.

분노로 인해 전력을 발휘한 펜다리엘의 고유 능력은 아예 격이 달랐다.

괜히 탑의 중층 거주자인 무림의 세력들조차 여왕과의 싸움을 꺼려했던 게 아니다.

이토록 터무니없는 능력 앞에선 호신강기마저 소용없었을 테니까.

"어디. 숨어 있는. 거냐. 나와라!"

하지만.

얼음 감옥을 모조리 날려 버렸음에도 정작 상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

펜다리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보이는 건 여전히 박살난 얼음 조각뿐이었다.

바로 그때.

그녀의 시선이 결계 중심부로 향했다.

무언가 있다.

작고 반짝이는, 동시에 희미한 마력의 잔여물이 남아 있는 무언가가.

"이건...."

틀림없다.

시간차를 이용해 결계를 발동하게 하는 마정석이었다.

'설마, 미끼였다고? 이것조차도?'

자신의 거점과 동료들을 미끼로 삼고.

화려한 스킬과 도발로 시선을 묶은 뒤.

그 자신은 정작 모습을 감췄다.

이유는 하나뿐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오랫동안 말라비틀어져 제 기능을 잃었던 심장이 빠른 속도로 뛰었다.

두근! 두근! 두근!

'위험하다.'

펜다리엘은 생전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저 인간은 정말로.'

상대가 무얼 하려고 하는지 깨달았기에.

'내가 아끼고 소망하는 그 모든 것들을 무너뜨릴지도 모른다.'

본능이 최고조의 경고를 보냈다.

수만의 플레이어보다 단 한 명의 인간이 위협적이라고.

***

4층은 거점 방어전.

이 말은 플레이어에게도 해당하지만, 동시에 좀비들에게도 해당한다.

여왕이 자신의 군락지를 벗어나 진혁을 죽이기 위해 움직였다.

다시 말해.

'놈들의 본진은 텅텅 비어 있다.'

진혁이 속도를 더욱 높였다.

'검마제왕보(劍魔帝王步)'에 '얕은 호흡'까지 사용하는 상태라 빠른 속도에 지구력까지 동시에 챙길 수 있었다.

그때였다.

콰콰콰콰콰콰콰!

저 멀리서 강한 마력이 느껴졌다.

여왕 역시 전력을 다해 되돌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아예 바보는 아니군.'

만약 펜다리엘이 상암 경기장을 공격했다면, 거점은 금세 함락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이 싸움에서 승리할 순 없다.

4층에 있는 모든 플레이어의 거점이 무너져야 좀비들의 승리가 확정되기 때문이다.

현재 남아 있는 거점은 수백여 개.

그 모든 걸 무너뜨리기 전에 자신의 거점이 먼저 박살날 테니, 어쩔 수 없이 회군을 결정했으리라.

'이제 와서 알아차려 봤자 너무 늦었어.'

레벨과 스킬.

힘과 속도.

모든 게 펜다리엘에 밀린다.

당연한 이야기다.

상대는 본래 4층에서 나와선 안 될 보스 몬스터였으니까.

'전투에선 내가 지겠지.'

허나, 압도적인 전력 차를 극복하고 층을 강제하는 룰을 이용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

바로 그것이.

고인물이 시련의 탑을 오르는 방법이었다.

"후우."

진혁이 호흡을 크게 가다듬었다.

어느새 여왕의 군락지에 도달했다.

보초로 남겨 둔 병력들이 눈에 들어왔다.

'마흔 마리인가.'

물론, 이 정도로는 시간 벌기조차도 되질 않는다.

스릉!

한 쌍의 검이 예기를 발했다.

['검의 무덤'이 발동됩니다!]

왼손에 쥔 검에 검은 기운이 깃들었다.

파츠츠츠!

소름끼치도록 검붉은 검강이 맹렬하게 타올랐다.

['별의 가호'가 발동됩니다!]

오른손에 쥔 검에 별의 기운이 깃들었다.

우우우웅!

별자리를 수호하는 빛이 시전자의 부름에 응했다.

그렇게.

잃어버렸던 역사 속 유물과 탑의 등장과 함께 나타난 기적이 한 자리에 현현했다.

"크아아아!"

"케에엑!"

달려들었던 좀비들이 일격에 쓸려나갔다.

잘린 팔과 다리에서 핏줄기가 비처럼 쏟아졌다.

양산형 좀비들로는 상대가 되질 않는다.

진혁은 군락지의 입구를 돌파해 더욱 깊숙이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시야가 바뀐다.

공기 또한 바뀐다.

피비린내가 짙어졌고 썩어 가는 시체 특유의 향 또한 코끝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여긴 몇 번을 봐도 역겹군.'

진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지옥이 있다면 바로 이런 모습일까?

시체와 해골들이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거대한 무덤은 그로테스크해 보이기까지 했다.

콰콰콰콰콰콰!

"케에엑!"

"케엑!"

안으로 들어갈수록 좀비들의 수도 더욱 많아졌지만, 진혁의 공격을 한 번이라도 받아내는 녀석은 없었다.

진혁은 기계적으로 검을 휘두르며 개별 개체들을 베어 버렸고.

적이 밀집해 있는 곳엔 신성 계열인 '데이라이트'를 이용해 일거에 쓸어 버렸다.

이제 멀지 않았다.

가장 깊숙이 위치한 여왕의 깃발이 있는 곳까진 채 100미터도 남지 않았다.

'이쯤에서 슬슬 나올 때가 됐는데....'

진혁이 살짝 색이 바뀐 바닥을 바라봤다.

위화감이 느껴지는 곳이 보였다.

예전엔 이 녀석의 등장 신에 몇 번이고 놀라곤 했었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콰아아앙!

바닥에서 길쭉한 칼날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진혁은 이미 몸을 크게 뒤로 날린 상태였다.

역시나 나타났군.

"머... 먹을... 거다!"

"맛...있겠다! 피! 내장! 살코기!"

머리가 두 개 달리고 등이 기형적으로 튀어나온 거대한 체구의 좀비가 땅속에서 기어 나왔다.

여왕의 깃발을 지키는 파수꾼, 일명 '도살자'.

특수 계체형 좀비 중에 가장 성가신 놈이다.

그 왜.

게임에서도 다시 상대하고 싶지 않는 짜증나는 네임드 몬스터들이 있지 않은가?

4층에서 그 녀석들을 고르라면 이 녀석이 단연 리스트의 맨 위에 오를 놈이었다.

2m에 이르는 가위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데다 급소가 없기에, 심지어 머리를 잃어도 계속해서 움직인다.

완전히 숨통을 끊으려면 원자 단위로 분해해 버리든가 아니면 사지를 모두 잘라 무력화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펜다리엘과의 거리가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서두른 건 모두 이 녀석을 상대해야 하는 시간까지 계산했기 때문이었다.

남은 시간은 약 3분.

"골라 봐. 이번엔 어떤 걸로 해 줄까? 매콤하게 태워 줘? 아니면 깔끔하게 잘라 줘?"

진혁이 선택지를 양보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우린... 너... 보는 거... 처음인데?"

도살자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 와중에 두 개의 머리가 부딪치지 않게 좌우로 번갈아 움직였다.

"그렇겠지. 근데, 난 너희랑 싸우는 게 이번이 30번쯤 되거든."

아래층부터 다시 오르다 보니 과거에 끔찍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칼로도 베어 보고.

불로 태워도 보고.

나중엔 젓가락으로 몇 대까지 때려야 죽일 수 있나 시험도 해 봤다.

거의 18만 대 정도 때리니까 머리 하나 박살낼 수 있더라.

'젠장. 그건 다신 하지 말아야지.'

그놈의 도전 정신이 뭔지, 덕분에 개고생이란 개고생은 다 해 본 것 같다.

"먹...잇감... 주제에... 헛소리...를 한다."

"얌...전히 먹히기나... 해. 난 머리통부터... 아그작 아그작... 먹을 거야!"

철컹! 철컹! 철컹!

도살자가 위협적으로 가위를 움직였다.

두꺼운 철판도 종잇장처럼 잘라 버릴 수 있는 고문용 흉기다.

지금까지 수많은 생명을 앗아가면서 그 위력 또한 증명했을 터.

하지만.

이번 먹잇감은 달랐다.

가위가 진혁의 다리를 노린 것과 동시에.

진혁은 쌍룡검을 바닥 깊숙이 꽂았다.

카아아아앙!

가위가 양쪽의 검에 막혔다.

"안... 움직여?"

"이이...이익!"

어떻게 된 건지 가윗날이 얇은 칼 하나를 잘라내지 못했다.

평범한 칼이라고 생각한 게 도살자가 한 첫 번째 실책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Lv6 '불의 원소'가 발동됩니다!]

먹잇감에 불과한 인간이 어떤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 간과했다는 점이었다.

어느새 도살자의 머리에 올라탄 진혁이 생긋 웃었다.

화르르륵!

한 줄기의 화염이 두 눈을 들쑤셨다.

망막을 태우고 그대로 뇌수까지 파고든 불꽃.

"크아아아아아!"

"눈이... 눈이!"

젓가락을 사용해 길고 느리게 고통을 주는 법을 배웠다.

당연히, 가장 빠르고 효과적으로 죽이는 법 또한 습득했다.

'일시적으로 시야를 뺏는 게 그 초석.'

다음은 지금 생긴 틈을 이용해 적의 방어력이 가장 취약한 곳을 노린다.

진혁이 손가락 끝에 불꽃을 모았다.

그리고 도살자의 발밑에 룬어로 만든 주문을 그렸다.

아래에서.

콰콰콰콰콰콰!

위로.

겁화(劫火)가 도살자의 살을 태우고 뼈를 녹였다.

허나, 진혁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틈을 줬다간 회복하는 게 네임드 좀비의 특성이었으니까.

한창 연약해진 지금이야말로 녀석을 박살내기 위한 절호의 기회였다.

진혁이 검강이 발현된 검을 좌우로 움직였다.

회색 살점 위로 붉은색 선이 그어졌다.

"끄아아아...악!"

"아프...다! 아파!"

도살자가 괴성을 지르며, 미친 듯이 가위를 휘둘렀다.

공격이라기 보단, 자기 본능으로 인한 발악에 가까웠다.

당연히 궤적도 단순하고 공격에 감정이 실릴 수밖에.

"고마워. 1분이면 최단 기록 갱신이거든."

덕분에 31회차에는 신기록을 달성하게 됐다.

퍼퍽!

퍽!

쌍룡검이 도살자의 양측 척수에 파고들었다.

거의 동시라고 해도 좋을 찰나.

진혁이 모아 두었던 마력을 모조리 '만다라(曼茶羅)'로 치환했다.

시야가 황금색으로 물들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원혼이 담긴 가위'를 습득하셨습니다.]

빛이 휩쓴 자리에 서 있는 건 없었다.

무(無)로 돌아간 도살자는 그가 존재했던 증거 대신 날붙이 하나만을 남겼다.

레벨업과 보상.

'이 맛에 고생을 하지.'

먼 거리를 달려 치열하게 싸운 보람이 느껴졌다.

스탯의 분배나 아이템의 확인은 조금 뒤에 하면 될 터.

이제 남은 건 깃발을 뽑기만 하면 된다.

더 이상 가로막는 적은 없었다.

이 싸움은 이걸로 끝났다.

그런데 바로 그때.

띠링!

뜻밖의 상태창이 나타났다.

"이것 봐라?"

진혁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뒤틀렸다.

81화. 죽은 자들의 모태(母胎) '펜다리엘' (3)

['검은 사냥개'가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이집트 신화를 대표해 당신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어 합니다.]

'검은 사냥개'라는 이명(異名).

이건, 아누비스다.

지하 1층에서 혼쭐이 난 뒤에 한동안 잠자코 있나 했더니, 이 타이밍에 나타난다라....

'재밌네.'

진혁이 한 손으로 깃발을 잡은 채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마 군락지에 들어오기 전부터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4층이 아닌.

훨씬 더 위에 있는 층에서.

"듣고 있으니 말해 봐."

['검은 사냥개'가 낮게 포효합니다.]

신격을 표현했음에도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오히려 하대하는 모습에, 아누비스가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쿠쿠쿠쿠쿠!

공기가 떨리며 마력이 거칠게 날뛰었다.

물론, 그런 협박 따위에 굴할 리 없다.

여기가 자기들이 지배하는 층도 아니고.

어디서 기침을 하고 난리야?

"어허? 지금 화를 내? 그냥 이거 뽑고 치울까? 난 그래도 상관없는데?"

진혁이 깃발에 쥔 손에 힘을 줬다.

깃발이 미묘하게 위로 올라갔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던 기운이 사라졌다.

['검은 사냥개'가 크게 당황합니다.]

[진정하라고 다독입니다.]

[자신들은 아직 이 싸움의 제대로 된 결말을 보고 싶다고 합니다.]

"알고 있어. 그래서 개입했다는 거."

탑의 상층을 지배하는 녀석들 입장에선, 보스 몬스터와의 제대로 된 싸움 없이 4층이 공략당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제대로 싸운다면 어느 쪽이 이길지는 너무나 뻔했으니까.

거기에 건방진 인간 하나가 승승장구하는 모습 따윈 보고 싶지 않을 테고.

하지만 말이다.

"내가 왜 너희들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하지?"

진혁이 코웃음을 쳤다.

굳이 불리한 싸움을 할 이유는 없다.

이미 승부는 결정되어 있었으니까.

['검은 사냥개'가....]

"아! 싸구려 협박 따위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솔직히 말해. 너희 정도 수준의 신격이 백날 짖어 봤자 무섭지 않거든."

부탁인데, 채찍은 사람을 봐 가며 써라.

"차라리 나와 협상을 하고 싶으면, 당근을 써. 내 마음을 바꿀 수 있을 만한 제안을 하면 혹시 알아? 여왕과 싸워 줄지?"

진혁이 이죽거렸다.

잠시 상태창이 멈췄다.

그렇게 십여 초가 흘렀다.

['검은 사냥개'가 싸움에 응할 경우, '쟈칼의 이빨'을 주겠다고 합니다.]

또다시 상태창이 나타났을 땐, 예상 밖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야.

설마, 저걸 제안할 줄이야.

쩨쩨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통 크게 나온다.

'쟈칼의 이빨'은 공력 속도를 10%만큼 상승시켜 주는 재료 아이템이다.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아이템에 제한이 걸려 있어 A급 평가를 받았지만, 능력 자체만으로만 본다면 여느 S급 아이템에 밀리지 않았다.

충분히 만족할 만한 대가다.

충분히 만족할 만하긴 한데.

문제는.

"내가 욕심쟁이라서 말이지."

진혁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우선, 이빨 중에선 어금니를 내놔. 그리고 또 하나의 조건을 들어준다면 생각해 볼게."

['검은 사냥개'가 크게 당황합니다.]

[이빨의 종류에 대해서 어떻게 알고 있는지 묻습니다.]

쟈칼의 이빨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게 바로 '어금니'다.

20%의 공격력을 올려 주는 다른 이빨들과 달리 이건 무려 30%의 공격력을 올려 주었으니까.

대상의 신체에 거대한 상흔을 남길 수 있는 최강의 창은 아누비스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가장 좋은 아이템 중 하나였다.

"내가 어떻게 알고 있는지는 알 거 없고. 받아들일 거야 말 거야?"

['검은 사냥개'가 또 하나의 조건이 무엇인지 궁금해 합니다.]

"별건 아니야. B급 재료 아이템 중에 '하얀 나뭇가지'라는 게 있는데, 그게 필요해. 당연히 지금 말한 건 모두 선지급이야."

하얀 나뭇가지는 주로 의학용으로 사용하며 4층에서는 구할 수 없으나, 10층 이상에서는 쉽게 구할 수 있는 아이템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누비스 입장에서는 하등 가치가 없는 쓰레기였다.

['검은 사냥개'가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계약이 성사됩니다.]

['검은 사냥개'는 약속한 두 개의 아이템을 지금 당장 지급해야 하며, 플레이어 강진혁은 여왕과의 전투가 끝날 때까지 깃발을 뽑을 수 없습니다.]

우우우우웅!

눈앞에 날카로워 보이는 어금니와, 눈처럼 새하얀 나뭇가지가 나타났다.

...걸렸다.

진혁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모든 것들이 자신 아래에 있다고 착각하는 오만한 신은.

지금부터 스스로가 한 계약에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될 것이다.

***

콰아아앙!

지면이 모조리 박살나며, 군락지에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설마. 죽였단 말인가. 가디언까지."

펜다리엘이 잿더미가 돼 버린 도살자를 바라봤다.

그 어떤 인간도 뚫을 수 없다고 생각했건만.

역시나 지금 상대하는 인간은 그녀의 예상치를 아득하게 초월한 놈이었다.

이쯤 되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짓밟아 죽여야 할 벌레가 아닌.

전력을 다해 상대해야 하는 적이라는 것을.

저벅.

펜다리엘이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

깃발은 아직 뽑히지 않았다.

마치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상대는 깃발 아래에서 군락지의 여왕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째서. 뽑지 않은. 거지? 깃발 뽑으면. 네놈의. 승리일 텐데?"

"그렇겠지. 하지만 그건 너무 시시하잖아?"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시시. 하다고? 나를. 눈앞에. 두고도.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차갑게 가라앉은 음성.

저릿저릿!

피부를 따라 솜털이 일제히 일어났다.

과연, 지독한 마력이다.

'레벨이 낮을 때 이 녀석과 싸우는 건 역시 스릴 넘치는군.'

아무리 '간극' 스탯으로 인해 격차를 좁힐 수 있다고 하더라도 현 시점에서 여왕을 이길 수 있는 플레이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본래, 펜다리엘과의 1:1 승부는 성립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조금 전 계약으로 인해, 단 한 명.

좀비들의 모태를 쓰러뜨릴 수 있는 플레이어가 탄생했다.

카캉!

진혁이 '도살자'로부터 얻은 원혼이 담긴 가위를 반으로 쪼갰다.

칼날이 하나만 남았다.

정확히는 두 개 중에 오른쪽 날만이.

순식간에 낫처럼 생긴 섬뜩한 모양의 무기가 완성되었다.

진혁이 곧바로 다음 단계를 밟았다.

"'하얀 나뭇가지'와 '쟈칼의 이빨' 그리고 '원혼이 담긴 가위'를 융합하겠다."

융합(融合).

서로 다른 성질의 물질을 하나로 만들어주는 고유 능력.

오직 나만을 위한, 탑을 오르기 위해 가장 좋다고 생각한 능력이.

지금 이 순간.

최악의 적에 맞서기 위해 발현되었다.

[융합에 성공했습니다!]

['인과를 끊는 낫'이 완성되었습니다!]

[인과를 끊는 낫]

입수 난이도: 측정 불가

내용: 절대 판정 효과를 갖고 있는 주신(主神)의 성유물입니다. 죽지 않는 자를 죽일 수 있으며, 베지 못 하는 것을 베어 버릴 수 있습니다.

[4층에 어울리지 않는 성유물의 등장으로 인해, 시스템이 개입합니다.]

[이 아이템은 단 한 번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쿠쿠쿠쿠쿠!

형언할 수 없는 빛이 낫을 완전히 휘감았다.

'역시 한 번만 사용할 수 있는 건가.'

상세설명을 읽던 진혁이 혀를 찼다.

개연성에 어긋나는 힘을 영구적으로 사용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도 2번이나 3번 정도는 사용하게 해 줄 줄 알았는데.

현실이 된 지금은 그 조건이 더욱 깐깐해진 게 틀림없었다.

아마 아누비스가 아니라, 그리스 쪽 신격들의 성유물을 융합했으면 최소한 한 번은 더 사용할 수 있었을 테지만. 그것도 현 상황에선 사치였다.

'그래도 이 정도면 최소한의 조건을 클리어 했다.'

일격필살(一擊必殺).

적중시 반드시 적을 죽일 수 있는 무기를 손에 넣었다.

이로써 조건은 대등해졌다.

서로가 서로의 숨통을 끊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검은 사냥개'가 기함합니다!]

[이집트 신화에 속한 신격들이 현 상황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상태창이 미친 듯이 올라갔다.

탑의 저 위로부터 경악과 공포의 감정들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 무기를. 어떻게...?"

당황스러운 건 펜다리엘 역시 마찬가지였다.

잡스러운 무기를 잔뜩 늘어왔을 때만 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쟈칼의 이빨'이나 '도살자의 가위'나 혹은 '하얀 나뭇가지'나.

그 어떤 걸로도 자신의 몸에 상처를 입힐 순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질적인 아이템들이 하나로 뒤섞인 순간.

모든 게 완전히 바뀌었다.

"이럴... 수가."

기존에 알던 상식이 무너졌고.

새로운 규칙이 도래했다.

"네놈! 대체! 누구냐?"

펜다리엘이 전신을 웅크렸다.

동시에 사기를 한껏 뿜어냈다.

파츠츠츠츠!

검은 기운이 서서히 주위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아주 약간의 위협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언제나 고고하게 공격만을 일삼던 그녀로선 생전 처음 해 보는 방어 기제였다.

"적어도 누가 겁먹은 건지는 알겠네."

"뭐라고?"

"아니야? 내가 보기엔 고슴도치가 잔뜩 가시를 세운 채 머리는 몸 안 쪽으로 파고든 꼴인데 지금?"

"크아아아! 이! 빌어먹을! 인간 놈이!"

펜다리엘이 손을 움직였다.

그러자 사기가 그녀의 손동작에 맞춰 쏜살같이 날아갔다.

콰콰콰콰콰콰!

닿는 것이 무엇이든 그대로 부식시키는 능력.

죽음으로부터 가장 가깝고도 먼 기운이 땅과 공기를 새카맣게 태워 버렸다.

온다.

진혁이 그에 맞춰 움직였다.

워낙 범위가 넓어 전부 피할 순 없었지만, 상관없다.

이쪽도 그에 대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으니까.

[고유 능력 '만다라(曼茶羅)'가 발동됩니다!]

황금빛 얇은 막이 전신을 감쌌다.

치이이익!

사기와 만다라가 접촉하자 연기가 피어올랐다.

"내 능력을. 상쇄한단 말이냐?"

펜다리엘은 또 다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철썩 같이 믿고 있던 고유 능력이 제 힘을 발휘하고 있지 못하니 그럴 수밖에.

"세상에 무적인 능력 따위는 없어."

상황에 맞춰 그때그때 상극(相克)의 힘을 사용하는 자가 살아남을 뿐.

무엇보다 스프레이식으로 넓게 펼쳐 사용하는 사기의 농도로는 만다라로 만든 갑옷을 꿰뚫을 수 없다.

"크윽!"

자신이 실수한 걸 깨달은 펜다리엘이 이번엔 넓게 펼친 사기를 한 곳으로 모았다.

2m에 이르는 바스타드 소드의 형태가 갖춰졌다.

가녀린 체구와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펜다리엘은 그 거대한 검을 이쑤시개 가지고 놀 듯 휘둘렀다.

콰콰콰콰콰콰!

지면을 가르는 일격.

매섭다.

또한 위협적이다.

허나, 그 일격, 일격이 아무리 파괴력을 갖고 있다 한들.

"맞지 않으면 소용없지."

진혁은 이미 공격의 궤도를 읽고 있었다.

쌍룡검에 '검의 무덤'과 '별의 가호'가 덧씌워졌다.

가장 완벽한 타이밍을 만들기 위해선, 우선 상대의 체력과 집중력을 깎아야만 했다.

이어진 것은 폭풍처럼 이어지는 맹공이었다.

콰앙!

카아앙!

카카카카캉!

불꽃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두 개의 검이 펜다리엘의 빈틈을 찾기 위해 꿈틀거렸다.

"겨우, 이딴 걸로!"

조금씩 궁지에 몰리자 결국, 펜다리엘이 최후의 카드를 꺼냈다.

[펜다리엘이 Lv?? '죽은 자의 장송곡'을 발동합니다!]

키이이이잉!

바스타드 소드로부터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검이 울부짖는 것이다.

고통에 견디지 못해서.

"아쉽네. 이제 막 흥이 오르려고 하는데, 벌써 클라이맥스로 가려고?"

"이걸. 보고도. 웃을 수 있는지. 보겠다."

['제1검(第一劍)']

죽은 자를 배웅하기 위한.

죽은 자를 멸하기 위한 검.

['영멸(永滅)']

바스타드 소드의 검신이 사라졌다.

모양도.

냄새도.

존재감도.

모든 게 무(無)로 화했다.

82화. 죽은 자들의 모태(母胎) '펜다리엘' (4)

감각을 초월한 초감각(超感覺).

보고 반응하는 것으로 막을 수 있는 종류가 아니다.

'지금의 검격을 느낄 수 있는 재능을 타고 났거나.'

혹은.

'모든 검로를 외우고 있는 고인물이 되거나.'

둘 중 하나만이 이 여왕 앞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지.

그리고 둘 중에 어느 것이 자신에게 더 어울리는지는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타고난 재능의 선천성보다는 즐기면서 완성시킨 후천성.

바로 이것이 고인물이 지향해야 할 길이다.

카아앙!

눈부신 불꽃이 비산했다.

진혁은 심장을 노린 1검을 쳐냈다.

한 번의 헛손질로 인해 둘 사이의 거리가 한 걸음 좁혀졌다.

"크윽!"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자 펜다리엘이 두 번째 공격을 펼쳤다.

['제2검(第二劍)']

이번엔 검 끝이 셀 수 없이 많은 갈래로 쪼개졌다.

나뉘어진 점들이 어지럽게 흐드러졌다.

['파송(派送)']

칼날이 칼날의 잔영을 지우며, 적을 찢어발기기 위해 몰아쳤다.

전후좌우.

사각 따윈 없는 폭풍과 같은 검격이었다.

카카카카캉!

하지만, 이번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진혁은 자로 잰 듯 쌍룡검을 움직였다.

그 많은 공격 중에 유효타를 입힌 건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둘 사이의 거리가 또 다시 좁혀졌다.

"이번엔 내 차례다."

진혁의 손끝에서 한 줄기 냉기가 일어났다.

[Lv5 '빙하조형(氷河造形)', '블랙 아이스'가 발동됩니다!]

'빙하조형'을 이용해 빙판을 만들어 상대의 중심을 잃게 하고.

"큭!?"

[Lv1 '검마제왕보(劍魔帝王步)'가 발동됩니다!]

쿠쿠쿠쿵!

'검마제왕보'를 사용해 지근거리에서도 놀랄 정도로 괴랄한 움직임을 선보였다.

"크아아아!"

펜다리엘이 분노를 이기지 못해 포효했다.

약만 잔뜩 올리면서,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움직임.

태풍에 버티는 나무는 부러진다.

하지만, 바람에 순응하는 갈대는 살아남는다.

진혁은 거대한 파도에 맞서지 않고 순순히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그렇기에.

카앙!

마지막에 웃는 건 언제나.

카카카캉!

'나다.'

마침내 기다리던 틈이 보였다.

진혁이 쌍룡검을 지면에 꽂은 채 '인과를 끊는 낫'을 꺼냈다.

"빌...어먹을! 이럴 수는... 없다! 내가. 고작. 인간 따위에게!"

펜다리엘의 입이 가로로 찢어졌다.

이토록 강할 수는 없다.

100년도 살지 못하는 인간이 어떻게 이토록 수많은 능력을 갖고 있단 말인가?

그것도 어느 것 하나 빈틈 따위는 없는 완벽한 능력들로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부정하고 발악해 봤자 늦었다.

이미 둘 사이의 거리는 호흡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워진 상태였으니까.

서걱!

전투가 시작된 후, 처음으로 들린 파육음.

깔끔하게 잘린 절단면에서 흐르는 한 방울의 피가 싸움의 종막을 고했다.

[4층의 보스 몬스터 '펜다리엘'이 쓰러졌습니다!]

[시련의 탑 5층이 개방됩니다!]

[다음 층을 정복할 때까지 남은 시간: 89D 23h:59m:59s]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거점 수호에 성공하셨습니다. 거점 인원에 따라 'A급 랜덤 박스(5개)'가 지급되었습니다.]

[최다 킬 보상으로 '상급 스킬 강화서(1개)'를 획득하셨습니다.]

[인기 투표 보상으로 '코인 환전 수수료 10% 할인권(1회)'를 획득하셨습니다.]

[히든 보스 몬스터를 쓰러뜨린 보상으로 '마법 도서관 입장권(1회)'을 획득하셨습니다.]

쏟아지는 수많은 상태창.

그 누가 예상했을까?

승리를 확신하던 아누비스와 이집트의 신격들은 할 말을 잃었다.

"그래도 3층의 보스보다는 훨씬 강했어. 무혼이란 녀석은 밑에 부리는 부하들 뒤에 숨어만 있었거든."

진혁이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이미 목숨이 끊어진 여왕에게 들릴 리 없을 테지만.

***

치열했던 4층의 싸움이 끝났다.

절망적이었던 상황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기적에 가까운 반전이었다.

그리고 24시간이 지난 현재, 홍대의 한 술집.

이곳에선 진혁과 거점 방어전을 함께한 나머지 사람들이 조촐하게 뒤풀이 자리를 마련했다.

"오빠! 여기야!"

유연화가 손을 흔들었다.

탑에서 싸울 때는 피가 뚝뚝 흐르는 너클을 낀 채 보는 사람 살 떨릴 정도로 살벌한 격투기를 사용했지만....

밖에선 편안한 츄리닝 차림에 후드티를 쓰고 나왔다.

꽤나 신선한 모습이다.

"형! 왔어요?"

이태민 역시 청바지와 검은색 티를 입고 있었다.

하얀색 모자를 거꾸로 쓴 게 포인트랄까.

"미안, 조금 늦었지?"

"아니야. 우리도 방금 왔어. 그나저나 오빠는 진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네? 얼핏 봤을 때 연예인이 오는 줄 알았어."

"형. 탑에서도 이렇게 좀 하고 다니면 안 돼요?"

모처럼 쉰다고 미용실도 가고 옷도 몇 벌 샀더니 반응이 180도 달라졌다.

그러고 보니 미용사도 왁스를 바르는 게 훨씬 더 낫다느니 뭐라느니 했었지.

당시에는 영업용 립서비스인 줄 알았는데, 두 사람의 반응을 보니, 완전히 빈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꾸미고 다니면, 탑은 어느 세월에 오르려고?"

진혁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재차 입을 열었다.

"테레사 씨는?"

"테레사는 한 시간 정도는 더 있어야 된다고 하더라고. 오빠랑 우리보고 먼저 먹고 있으라고 하던데?"

진혁과 달리 테레사는 자신이 왔던 유럽 쪽 게이트를 통해 되돌아갔다.

같이 왔으면 좋았겠지만, 유럽에서 중요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하는 말에 어쩔 수 없이 뒤에 합류하기로 했다.

랭커인 그녀라면 전용기가 있을 테니, 한국까지 오는 길이 그리 험난하지는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테이블 한 구석에 앉아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웅성거리는 주위.

"저 남자 봤어?"

"조금 있다가 말이라도 걸어 봐."

"우와! 나 방금 눈 마주친 거 같아."

기럭지랑 비율이 좋으니 뭘 입어도 티가 난다.

게다가 세상의 모든 고민을 다 담은 것 같은 시크한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으니 모두의 시선이 주목될 수밖에.

하여간 똥폼 잡는 거 하고는.

"나 왔어."

"알고 있다."

"안 오거나 아니면 몇 시간은 늦을 줄 알았는데, 그래도 약속은 지켰네?"

진혁이 실소를 머금었다.

저 녀석을 이 자리에 끌고 오기까지 과정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내일 저녁 7시까지 홍대 3번 출구에 있는 술집 앞으로 와. 다 같이 맥주나 한잔할 테니까.

-웃기는군. 그딴 자리에 왜 내가 참여해야 하지?

천유성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딴 자리에 참여해야 랜덤 박스에서 원하는 걸 뽑는 방법을 알 수 있겠지?

진혁의 말 한 마디에 어쩔 수 없이 홍대까지 오기로 약속했다.

실제로 약속을 지켰고.

그나저나 저 녀석.

말투나 하는 짓이나 완전히 동네 조폭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의대생이란다. 그것도 한국대학교의.

미래에 녀석의 첫 번째 환자가 될 분의 안위가 진심으로 걱정된다.

수술하다 수틀리면 메스 대신 검을 휘두르는 게 너무나 훤히 보였으니까.

"부탁인데, 내가 다치면 힐러를 부르든가 그냥 죽여 줘."

"그건 또 무슨 헛소리냐?"

"너한테 내 몸을 맡길 바에 그냥 죽는 게 편할 것 같아서...."

"걱정마라. 공은 공이고 사는 사니까. 내가 맡게 된 환자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살릴 거다."

젠장. 이건 뭐 농담도 못 하겠네.

진혁이 혀를 차며, 맥주 한 잔을 들이켰다.

정신없이 싸우고 달려오느라 달아오른 몸에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얼음 맥주가 스며들었다.

곧바로 매콤한 양념이 발라져 있는 치킨 한 조각을 뜯었다.

겉은 바삭바삭하고 속은 촉촉하다.

"크으."

진혁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이 맛을 제대로 느끼려면 역시 적당한 땀과 피로가 필수적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

[나도 내놔라. 치사하게 너만 먹지 말고!]

반지에서 잔뜩 토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엘리스였다.

3층에서의 전투 후 마력을 회복하기 위해 잠잠했었지만, 먹을 타이밍은 어떻게 알았는지 귀신같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하긴, 억겁의 세월을 회랑에 처박혀 있었으니 바깥세상의 음식이 궁금하긴 하겠지.

이거 어쩌면 술값을 아끼고 부수익도 올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정말 같이 먹게 해 주고 싶은데, 이게 상당히 비싼 거라 말이야. 아무리 나라도 지갑에 부담이 되거든."

[비싸다고? 얼마나 말이냐?]

진혁이 일부러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적어도 엄지손톱만 한 다이아몬드 한 개는 필요해. 그래도 전체 술값에 비하면 푼돈이지만, 우리 관계를 생각해서 특별히 그 정도만 받을게."

선심을 쓰듯.

동료를 위하듯.

엘리스의 심리적 부담감을 적절하게 이용하는 게 핵심이다.

[그 정도야 내마. 나도 염치없이 공짜로 얻어먹는 성격은 아니리라.]

엘리스가 근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역시, 통 크고 부유한 호구는 언제나 환영이다.

특히나 술자리에서는 더더욱 말이다.

***

"호오. 이게 미물들이 만든 술이라는 것이냐?"

엘리스의 두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화려한 레이스가 달린 검은색 드레스에 루비와 황금으로 장식된 목걸이까지.

모처럼 바깥에 나올 수 있다는 사실에, 한껏 꾸미고 나왔다.

"생맥주라는 거다."

"으음! 나쁘지 않구나! 극상의 피나 오랜 세월을 풍미한 와인과는 비교할 순 없어도 그럭저럭 목을 축일 정도의 수준은 된다. 몇 대에 걸쳐 이어 온 장인이 만든 술이 틀림없겠지."

장인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그거 공장에서 대량 생산하는 한 잔에 2500원짜리 맥주다.

특히 오늘은 4층이 공략된 기념으로 1+1 행사 중이고.

"이것도 먹어봐."

"이건…?"

"치킨이라는 건데. 간장과 양념소스를 발라둔 거야."

"고기라… 그다지 취향은 아니다만, 애써 권유하니 딱 한 번만 먹어보도록 하지."

엘리스가 우아하게 포크로 치킨 앞다리살을 찍었다.

오물거리면서 먹는가 싶더니.

이내 눈빛이 변했다.

이건 마치 먹잇감을 포착한 맹수의 눈빛이다.

진혁이 슬쩍 치킨 한 조각을 먹으려하자.

챙캉!

엘리스가 포크로 방어했다.

"...."

절대로. 단 한 조각도 넘기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그래. 고기요리라고 해봤자 삶거나 굽는 게 전부였을 테니 당연히 눈이 돌아가겠지. 양념 역시 소금을 뿌리는 게 그나마 사치를 부린 거였을 테고.

"많이 먹어. 널 위해서 특별히 내가 내는 거니까."

"고맙다. 이번 일은 잊지 않으마."

엘리스가 상기된 표정으로 맥주잔을 꼭 쥐었다.

이렇게 보면 참 천진난만한 소녀인데 말이지.

누가 이 꼬맹이를 보고 탑의 최강자 중 하나인 진조라고 생각할까?

"여러분! 저 왔어요!"

잠시 뒤, 테레사까지 합류하자 술자리 분위기는 더욱 달아올랐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탑에서 있던 일들을 추억하며, 승리를 만끽했다.

그런데, 모두가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치지지직!

술집 중앙에 있던 TV 볼륨이 올라갔다.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연예계 가십이나 스포츠가 아닌, 시련의 탑과 관련된 특집이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4층 공략이 성공함에 따라, 이후에 있을 5층에 관한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데요.]

[예, 맞습니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이번엔 한국의 랭커. 강진혁 플레이어 덕분에 무사히 5층으로 갈 수 있게 됐죠.]

남자와 여자가 대화를 이어 갔다.

[5층에 대해 말씀을 나누기 전에 혹시, 일반 시민들도 알 수 있게 간단하게 정리한 자료를 볼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아래 보이시는 표가, 1층부터 4층까지 보스 몬스터를 처리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플레이어와 그 플레이어가 소속된 국가입니다.]

1층을 클리어한 미국 타이탄 길드의 패트릭.

2층을 클리어한 유럽 올림포스 길드의 마리아와 중화 길드의 남궁천. 그리고 무소속 플레이어인 테레사.

3층을 클리어한 정보 미상의 언노운.

4층을 클리어한 한국의 랭커 강진혁.

각국의 정상급 랭커이자 인류의 희망.

미래의 탑을 정복할 선구자들의 이름이 나열됐다.

[와아!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웅장해지네요.]

[하하.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분들이라면, 어떻게든 인류를 다음 층으로 인도해 줄 것만 같거든요.]

[그럼, 이번엔 5층에 관해 설명 부탁드리겠습니다.]

여자 아나운서가 마이크를 건넸다.

[알겠습니다.]

5층.

앞으로 90일간 플레이어들이 보내야 할 장소의 메인 테마가.

[5층은....]

공개되었다.

83화. 마법 대도서관 (1)

[5층의 메인 테마는 '탈출'입니다.]

남자 플레이어가 입을 열었다.

[탈출이라면, 어딘가에 갇혀서 시작한다는 말씀인가요?]

[예. 과거에 있던 영상과 기록들이 전부 사라진 덕에 정보가 많이 남아 있지 않지만, 그 당시 시련의 탑을 플레이한 플레이어들의 기억을 토대로 8층까지를 재구성할 수 있었습니다.]

[오오. 그렇게나 많이요?]

[하하. 전부 고인물 플레이어분들 덕분이죠.]

"8층까지가 고인물이라니, 웃기네요. 적어도 15층까진 갔어야 고인물 축에 들어가는 거지."

TV를 보던 이태민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혀를 찼다.

"그러게. 하지만 어쩌겠어. 대부분 사람들이 8층 전에 다 접어 버렸으니까. 그나마 8층까지라도 정보를 밝혀낸 게 대단한 거야."

유연화도 거기에 동조했다.

"하긴. 우리 기준으로 생각하면 다른 사람들한테 너무 허들이 높으니."

"이렇게 보면 정보를 선점한 게 진짜 크긴 큰 것 같아요."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닌가?"

나머지 사람들도 한 마디씩 덧붙였다.

모두의 얼굴에서 탑의 15층 이상을 경험해 봤다는 자부심이 느껴졌다.

음....

그 모습을 보던 진혁이 볼을 긁적였다.

'여기선 말을 아껴야겠지?'

차마 콧대를 치켜들고 있는 모두에게 적어도 탑의 끝 정도는 봤어야 고인물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아끼는 동료들인데.

적어도 마음에 상처는 주지 말아야지.

특히 천유성 저 녀석은 20층따리라고 놀렸다간 이성의 끈이 끊어질 놈이었으니까.

'진짜, 팀원들 멘탈도 생각하고. 내가 생각해도 나는 난놈이구나.'

진혁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던 바로 그때였다.

[...그렇다면 어떤 종류의 탈출을 해야 하는지도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5층은 정신병원, 검투장, 광산, 무인도 등 생존에 치명적인 장소 중 하나를 선택해 그 장소에서 탈출하는 게 목적입니다.]

[생각만큼 힘들어 보이진 않는데요? 장소만 미리 알고 있다면, 공략 또한 미리 준비할 수 있지 않나요?]

탈출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게 정보다.

그 안에 어떤 인물들이 있을지.

지형과 지물은 어떨지.

무얼 활용할 수 있는지 등등.

미리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준비할 수 있는 방법 따윈 얼마든지 있다는 뜻이다.

[하하, 그렇게 생각하기 쉽죠. 하지만 아닙니다. 5층은 매번 장소와 그 안의 구성들이 바뀌기 때문에 2회 차라는 이점도 퇴색되는 데다 마력까지 봉인되는 너프가 이뤄지거든요. 오히려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공략이 어려울 겁니다.]

[마력이 봉인당한다구요?]

[예. 순수하게 본인의 힘만으로 클리어하라는 뜻 같습니다.]

할 때마다 새로워지는 환경.

고유 능력과 스킬이 봉인되는 너프.

최악의 상태로 시작해야 하는 게 이번 층의 대전제다.

"이번 층이 이래서 짜증나긴 하죠."

"후우. 간만에 긴장 좀 해야겠네."

"아, 진짜로 한 번 깬 다음에 두 번 다시 쳐다도 안 보던 층이었는데...."

여기저기서 한숨 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모두가 밑바닥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겠지.

그러나 딱 한 명.

진혁만은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알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번 층을 최대한 수월하게 공략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걸 위해선 어떠한 준비를 해야 하는지조차도.

***

다음 날 오후.

호텔에서 늘어지게 피로를 회복한 진혁은 펜다리엘을 쓰러뜨리고 얻은 보상을 주르륵 나열했다.

'A급 랜덤 뽑기 상자'.

'상급 스킬 강화서'.

'환전 수수료 10% 할인권'.

'마법 대도서관 입장권'.

이렇게 네 개다.

모두 버릴 게 없는 알짜배기들로만 모았다.

당장이라도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전에 먼저.

"상태창."

진혁은 개인 상태창을 활성화시켰다.

레벨을 올리면서 얻은 스탯 포인트를 분배해야 했기 때문이다.

——————————————————

이름: 강진혁

성별: 남

나이: 27세

레벨: 34

힘 16 민첩 16 체력 16 마력 62 간극 100 행운 10 적응형 10

보유한 스탯 포인트: 21

보유한 코인: 235,341

직업: 없음.

고유 능력: 융합(融合), 검의 무덤, 별의 가호, 아누비스의 심판, 혈마기(血魔氣), 만다라(曼茶羅)

스킬: Lv6 '불의 원소', Lv4 '탐식의 눈', Lv3 '교감', Lv3 '염혼의 낙인', Lv4 '독식', Lv4 '얕은 호흡', Lv5 '빙하조형(氷河造形)', Lv4 '데이라이트', Lv3 '추혼검(追魂劍)', Lv1 '이중 첩자', Lv1 '진태청화랑심법(眞太淸花郞心法)', Lv2 '검마제왕보(劍魔帝王步)'

——————————————————

정신없이 사냥하느라 상태창을 못 보고 지나친 것까지 합쳐 총 7개의 레벨을 올렸다.

두근! 두근! 두근!

진혁의 심장이 빠르게 고동쳤다.

'과거에도 최적화로 성장했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지금은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으니까.

'하하. 이건 어이가 없을 정도네.'

현실화된 시련의 탑은 분명 게임과는 차원이 다른 난이도를 자랑했다.

하지만, 그 난이도가 상승한 것보다.

'내가 성장하는 폭이 훨씬 더 커.'

과거의 경험과 축적된 실력이 증명하고 있다.

자신이 얼마나 강해졌는지를.

기분 좋은 고양감을 느끼며, 진혁은 쌓여 있는 21 스탯을 빠르게 분배했다.

[힘이 16 → 19로 상승합니다.]

[민첩이 16 → 19로 상승합니다.]

[체력이 16 → 19로 상승합니다.]

[마력이 62 → 74로 상승합니다.]

역시 가장 중요한 건 마력이다.

12 스탯을 한 번에 올리자, 전신에 구석구석 퍼져 있는 마력의 흐름이 훨씬 더 부드러워지는 게 느껴졌다.

좋아.

그럼 다음은....

진혁이 '상급 스킬 강화서'를 집었다.

Lv10 이상의 스킬을 1단계 올려 주고 Lv10 이하일 경우 무려 3단계를 올려 주는 아이템.

갈수록 스킬 레벨을 올리는 게 어려워진다는 걸 고려한다면, 이 스크롤이 갖고 있는 가치는 돈이나 코인으로 환산할 수 없는 종류였다.

그리고 물론, 어떤 스킬을 강화할지는 이미 생각해 두었다.

'5층뿐 아니라 미래를 위해서라도 가장 성장시켜야 할 건 빙하조형이지.'

공격과 방어는 물론, 다양한 상황에서 활용할 수 있는 만능형 스킬.

단 한 가지만을 고르라면 단연코 이게 최우선이다.

우우우웅!

밝은 빛과 함께 스크롤이 사라졌다.

동시에.

['빙하조형(氷河造形)'이 Lv8로 상향되었습니다.]

파츠츠츠...!

호텔 내부를 따라 서늘한 기운이 퍼져나갔다.

"뭐야? 갑자기 추워진 것 같은데? 에어컨이라도 킨 건가?"

"늦가을에 무슨 에어컨이야? 젠장. 게다가 이건 에어컨이 아니라 거의 냉동고 수준이잖아."

"중앙 냉방장치에 이상이 생긴 것 같은데...."

"손님들 불편하시지 않게 빨리 해결해. 감기라도 걸려서 컴플레인 들어오면 우리 전부 모가지라고!"

진혁은 모르고 있었지만, 호텔 직원들은 한동안 원인을 찾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여야만 했다.

그러는 사이 스킬을 강화한 진혁은 침대에 놓여 있는 황금색 상자를 집었다.

A급 랜덤 뽑기 상자.

이름 그대로 룰렛을 돌려 A랭크 아이템 중 뽑을 수 있는 가챠형 아이템이다.

우우우웅!

방 안에 거대한 황금 룰렛이 나타났다.

약 2m 크기의 룰렛엔 A랭크에 해당하는 수많은 아이템들이 새겨져 있었다.

'시작해 볼까.'

레버를 내리자 룰렛이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띠링!

[중앙에 있는 붉은색 버튼을 눌러 주세요.]

버튼을 눌러야 아이템을 선택되고 고른 아이템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진혁은 느긋하게 팔짱을 낀 채 기다렸다.

버튼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바라보면서.

[제한시간이 초과되었습니다.]

[룰렛을 다시 한번 돌리십시오.]

경고성 음성이 실린, 붉은색 상태창이 나타났다.

이번에도 고르지 않았다간 기회 자체가 박탈될 것만 같았다.

'싸구려 협박 하고는.'

상태창을 확인한 진혁은 또 다시 레버를 내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선택을 하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물론, 이런 짓을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일종의 버그라고 할까?

아니면, 확률 조작이라고 할까?

플레이어들을 엿 먹이기 위해 조작해 놓은 시스템의 허점을 진혁은 우연히 찾아냈었다.

'룰렛을 돌리는 걸 36번 연속으로 포기하면, 37번째에는 룰렛이 돌아가는 속도가 99.99%만큼 감소하지.'

마치, 슬로우 모션으로 재생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 다음은 원하는 아이템에 룰렛이 도달할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실제로 어젯밤 천유성에게도 이 방법을 사용해 원하는 아이템을 뽑게 해 줬다.

딱 한 가지.

그렇게 해서 뽑은 건 사용 기한이 일주일이라는 단점이 있지만.

진혁의 입꼬리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일주일 뒤 속성검이 박살난 천유성이 길길이 날뛰는 모습이 눈에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살짝 미안하긴 하지만, 내가 뭐 거짓말한 것도 아니고.'

분명 속성검을 완성할 수 있는 재료를 준다고 했지. 그 속성검이 만수무강할 거라고는 약속하지 않았잖아?

무엇보다 적어도 일주일은 새로 뽑은 속성검을 갖고 즐길 수 있으니 완전히 사기를 친 것도 아니다.

암, 그렇고말고.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어느새 기다리던 37번째 차례가 다가왔다.

룰렛이 어느 걸 가리키는지 보일 정도로 느려졌다.

지금이다.

진혁이 처음으로 붉은색 버튼을 눌렀다.

[A랭크, '삼색(三色) 알약'을 선택하셨습니다!]

붉은색, 흰색, 검은색.

서로 다른 능력을 갖고 있는 세 가지 알약이 나타났다.

일주일이란 시간 내에 사용할 수 있으면서 다음 층을 공략하는 데도 도움이 되려면, 이게 베스트다.

진혁은 알약을 아공간 인벤토리 한 구석에 잘 보관했다.

'환전을 할인해 주는 쿠폰이야 나중에 조회수가 많이 나오는 영상을 업로드했을 때 쓰면 되겠고.'

마지막으로 남은 건 하나.

마법 대도서관이다.

상위 버전의 스킬, 고대에 사장된 금술, 탑의 중층 이상에서나 등장하는 결계.

다른 이들이 쉽게 접할 수 없는 마법 계열 스킬을 한 가지 배울 수 있는 타차원의 도서관은 내용 그대로 심장을 설레게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진혁의 얼굴엔 예상 외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이제 곧 만나게 될 도서관의 관리자는 꽤나 성가신 상대였기 때문이다.

'간만에 그 영감탱이랑 다시 보게 되겠군.'

도서관을 관리하는 사서(司書), '릭 헤네시'.

산전수전 다 겪은 능구렁이로 탑에 존재하는 가장 거대한 전당포 역시 그 영감의 소유였다.

진혁 역시 과거에 종종 거래를 하곤 했는데, 릭 영감에게 '타노스'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상대가 갖고 온 물건은 언제나 반값으로 후려치며, 자신이 갖고 있는 물건은 2배로 비싸게 받고 팔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기적의 거래 방법.

막대한 자본과 무궁무진한 아이템은 물론, 얼굴에 철판까지 깔고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여유였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다를 것이다.

'당신이 나를 만나는 건 이번이 처음일 테지만.'

'내가 당신을 만나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거든.'

아무것도 모른 채 호되게 당했던 과거와는 다르다.

이번에는 상대에 관한 모든 걸 알고 있었으니까.

진혁은 '코인 거래소'에서 몇 가지 물건들을 구입했다.

그리고 이번 보상의 가장 중요한 티켓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마법 대도서관이 열렸습니다.]

쿠쿠쿠쿠쿠쿠!

표면이 초록색으로 일렁이는 게이트가 나타났다.

84화. 마법 대도서관 (2)

대리석으로 만든 바닥과 화려한 조명 속.

끝없이 펼쳐진 서고엔 수많은 종류의 책들이 꽂혀 있었다.

미로처럼 얽히고설켜 있었지만, 진혁은 막힘없이 그 사이를 가로 질렀다.

앞으로.

정확히는 안내 데스크가 있는 중앙을 향해서.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통로가 넓어지는 지점의 끝에서 고목으로 만든 책상과 거기에 앉아 있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흐음?"

덜컹!

외눈 안경을 쓰고 검은색 정장을 입은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에 살짝 드러나 있는 의아함.

이유는 알고 있다.

이 미로를 뚫고 어떻게 안내 데스크까지 한 번에 찾아냈는지. 그것이 궁금한 거겠지.

"의외로군요. 이곳에 처음 오신 분들은 책의 미로에서 헤매는 게 보통인데 말입니다."

"대충 길이 나 있는 대로 오다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이런 말하긴 뭐하지만, 제가 제법 운이 좋은 편이거든요."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지만, 릭은 추궁하지 않았다.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 진혁을 바라봤다.

"저는 이 도서관을 관리하고 있는 릭 헤네시라고 합니다."

릭이 공손하게 중절모를 벗으며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중간 관리자급에 해당하는 자가 고개를 숙인다라....'

이래서 이 노인이 무섭다.

차라리 하대를 하거나 무시를 했으면 상대하기 쉬웠을 텐데.

높은 곳에 있음에도 한결같은 매너를 유지한다는 건, 그만큼 여유가 있다는 방증이었으니까.

탑에서 가장 거대한 상단 중 하나를 운영하며, 동시에 마법 대도서관을 관리하는 거물.

그런 능구렁이로부터 원하는 걸 얻으려면, 이쪽도 나름대로의 계획이 필요했다.

"강진혁입니다."

"강진혁 플레이어님이셨군요. 환영합니다. 탑의 인정을 받아 그 누구보다 빨리 이곳에 방문한 이여. 보상으로 마법 대도서관에 있는 서적 중 하나를 구매하실 수 있으니 마음껏 골라 보십시오."

릭이 양손을 뻗었다.

결계와 주술, 마법과 환술이 망라된 보고.

이곳엔 그야말로 모든 것들이 있다.

하지만.

"원하는 걸 고른다고 해서 그걸 가질 순 없을 텐데요."

"하하. 맞습니다. 이곳은 선택의 기회를 줄 뿐. 그걸 구입하시려면 그에 가치에 맞는 걸 지불하셔야 합니다. 물론, 지구에서 쓰는 화폐는 받지 않습니다. 코인이나 혹은 아이템을 통한 물물교환만 가능하니 참고해 주십시오."

이것도 예상했던 말이다.

그러나 쓸 만한 마법서들은 하나같이 억 단위의 코인이 필요했으니, 사실상 코인으로 무언가 구매한다는 선택지는 접어 둬야 하리라.

"제가 갖고 있는 코인이 많지 않아서 코인으로 구매하는 건 힘들 것 같고. 물물교환 쪽에 관심이 있는데, 적당한 마법사 한 권 추천해 주실 수 있을까요?"

진혁이 아공간 인벤토리에서 '멀린의 지팡이'를 꺼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 뒀다.

파르르하고.

릭의 눈매가 가늘게 떨렸다.

물건이 마음에 들었을 때 나오는 특유의 버릇이다.

"으음. 그렇다면 이건 어떻습니까? 화염계열 마법서인데, 레드 드래곤이 직접 작성했다고 알려진 책입니다. 멀린의 지팡이와 교환하다면 서로에게 나쁘지 않은 거래가 될 겁니다."

릭이 재빨리 붉은색 표지에 황금색 룬어가 새겨진 책을 골랐다.

역시 이렇게 나오는군.

과거에도 아이템의 정확한 가치를 알지 못하고 물물교환에 응했다가 엄청난 손해를 봤었다.

별 쓸모없는 마법서 한 권을 얻으려고 갖고 있는 아이템을 몽땅 털었었지.

그 당시에는 마법 도서관이란 기연이 엄청난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범한 실수였다.

하지만.

"이상하네요."

"이상하다니. 어떤 게 말입니까?"

"제가 알기로 이 책은 레드 드래곤이 아니라 제국의 궁정 마법사가 집필한 걸로 알고 있거든요. 이름이 아마... 텔레모스였죠? 6서클의 경지를 갓 넘은?"

수석 마법사도 아니고.

궁정에 있는 70석쯤 되는 마법사가 끄적인 마법서.

그런 쓰레기에 약을 쳐서 팔려고 하면 쓰나?

"...!?"

릭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아까까지는 약간의 의구심과 흥미가 공존했다면, 이제는 경악과 경계심이 뒤섞인 듯한 얼굴이었다.

"어떻게 그걸...."

"이래봬도 발이 좀 넓거든요. 덕분에 아는 정보도 제법 되죠."

생긋 웃은 진혁이 이번엔 아공간 인벤토리에서 커피포트와 거름종이 그리고 원두를 꺼냈다.

이곳에 오기 전 '코인 거래소'에서 구매한 것들이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어떻게. 한 잔 드시겠습니까?"

진혁이 잘게 간 원두를 거름종이에 올려두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아뇨. 지금 커피가 중요한 게 아니라...."

고개를 가로젓던 릭이 갑자기 코를 움찔거렸다.

내부를 가득 채운 향긋한 커피 향.

"이건 설마."

바로, 릭이 가장 선호하는 '벵엔티 정글의 커피콩'으로 만든 커피였다.

"강진혁 플레이어님도 이 커피를 좋아하시는 겁니까?"

"인스턴트는 취향이 아니어서, 이것저것 많이 찾아봤죠. 확실히 탑 내부에 있는 커피들이 더 좋은 향을 갖고 있더라고요. 물론, 그중에서 가장 맞는 게 이거였습니다."

"...흐음. 커피 보는 안목이 탁월하시군요. 저도 개인적으로 이걸 가장 선호하고 있습니다."

알고 있어.

예전에도 당신이 이 커피만 하루에 12잔씩 줄기차게 먹는 걸 봤었으니까.

개인적으론 쓴 커피보다는 시럽 잔뜩 넣은 캐러멜 마키아토나 초코 프라푸치노가 취향이지만, 지금 중요한 건 녀석의 환심을 사는 것이다.

[도서관의 사서 '릭 헤네시'의 호감도가 놀랄 정도로 상승합니다.]

[언제나 이득을 추구하는 장사꾼이지만, 당신한테 만큼은 그 고집을 누그러뜨릴 겁니다.]

물건의 진위를 꿰뚫어보는 예리한 눈.

거기에 기호식품에 대한 취향까지 같으니 호감이 갈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교감' 스킬까지 은연중에 사용하고 있었으니 이 심리전은 시작하기도 전에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혹시, 강진혁 플레어이님께 개인적으로 한 가지만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편하게 물어보세요."

"이곳에 온 것부터 평범한 플레이어와는 다르다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강진혁 플레이어님은 특별함 그 이상의 배경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상식적으로 이제 막 5층에 입장한 플레이어가 알 수 없는 정보들.

그걸 태연하게 말했으니 당연히 무언가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그 뒷배경이 뭔지 궁금하다. 이걸 물어보고 싶으신 거군요."

"바로 보셨습니다."

...좋아.

진혁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이걸 물어봐 주길 내내 기다렸다.

"사실, 이집트 신격들이 제 뒤를 봐주고 있습니다. 덕분에 이곳에 올 수 있었고 탑에 대한 다양한 정보들 또한 얻을 수 있었죠."

"이, 이집트의 신격들이 말입니까?"

"예."

"그, 그럴 수가. 그분들이 벌써부터 플레이어에게 관심을 지닐 줄은...."

"저를 제법 아껴 주시는 것 같더라고요. 물론, 저로서는 과분한 관심입니다만."

아누비스가 이 말을 들었으면 뒷목을 잡고 쓰러졌을 것이다.

아니, 쓰러지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혀 깨물고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떨어졌을 수도 있겠다.

지금까지 나한테 당한 것만 해도 책 한 권을 써낼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릭의 입장에서 이 사실을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은 말이다.

"아무래도.... 제가 플레이어님을 너무 홀대해 드린 것 같군요."

릭의 목소리 톤이 완전히 바뀌었다.

"가치가 있는 분에겐 그에 걸맞은 대우가 필요한 법. 사과의 의미로 이곳에 있는 책들 중 하나를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호오.

이것 봐라?

당연히 조건이 달라질 거라곤 예상했지만, 이건 예상 밖이다.

말 그대로 가격에 상관없이 공수표를 발행하겠다는 거잖아?

"정말로 아무거나 골라도 되나요?"

"어디까지나 사과의 의미로 드리는 보상입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편안하게 고르시길."

"그렇다면야...."

가격을 신경 쓰지 않는다면, 원하는 거야 얼마든지 있지.

원래는 멀린의 지팡이를 포기하고서라도 교환하려고 했었는데.

덕분에 가장 원하는 걸 공짜로 구할 수 있게 됐다.

진혁이 서재를 따라 느긋하게 걷기 시작했다.

***

저벅.

걷는 속도가 조금씩 느려졌다.

그리고 잠시 뒤, 진혁은 구석진 책장 앞에 멈췄다.

12F - 127열.

바로 여기다.

'교과서는 그렇게 보기 싫었는데, 이건 왜 이렇게 반갑냐.'

진혁이 서재에 있는 책들 중 하나를 골랐다.

검은색 표지가 꽤나 인상적인 고서였다.

"정말 그걸로 괜찮으시겠습니까? 확실히 좋은 마법서이긴 합니다만, 고대 룬어로 적혀 있어 아무나 읽을 수는...."

"이것은 나 블랙 드래곤 마케드리안이 고룡(古龍)이 됐을 때를 기념해 남기노라. 천년의 세월. 나는 세계의 규칙을 허무는 방법에 대해 고찰해 왔다. 블라블라 어쩌고. 중2병 잔뜩 걸린 도마뱀이 쓴 책. 이걸로 하겠습니다."

진혁이 자연스럽게 책의 첫 장을 읊었다.

고대 룬어 쯤이야.

10년을 넘게 보다 보니 한국어보다 더 친숙하다.

"푸하하! 이거 제가 또 실례를 했군요. 과연, 신격들의 가호를 받으시는 분다우십니다."

릭이 유쾌한 폭소를 터뜨렸다.

그것이 고대 룬어조차 해석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 때문인지.

아니면 최강의 생명체라 일컫는 드래곤을 함부로 불렀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탑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중간 관리자 중 하나의 환심을 샀다는 사실뿐.

"저 역시. 앞으로 강진혁 플레이어님을 눈여겨보겠습니다. 진심으로 다시 만나게 될 날을 고대하죠."

그 말을 끝으로.

쿠쿠쿠쿠쿠!

도서관이 한 줌의 모래가 되어 무너지기 시작했다.

보상을 얻었으니, 이제 그만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다.

***

시련의 탑 5층.

아직 4층이 공략된 지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제법 많은 사람들이 5층에 도전했다.

선착순으로 마감되는 맵의 특성상 조금이라도 유리한 곳을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곳은 '광산'이었다.

[C - 101번이 마감되었습니다.]

[D - 77번이 마감되었습니다.]

[E - 158번이 마감되었습니다.]

빠르게 점멸하는 상태창을 보던 진혁이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야. 이건 뭐, 마감되는 속도가 거의 대학 수강 신청 수준이네."

그것도 '성과 사랑' 같은 1초 만에 마감되는 초인기 교양 과목에 버금가는 속도다.

이해는 한다.

보석을 찾기만 한다면 클리어로 인정된다는 점이 매력적이었겠지.

적어도 다른 곳에 비해 목숨을 잃을 위험은 적을 테니까.

하지만.

"안전한 대신 클리어 속도가 비정상적으로 느리다는 건 모르나 보군."

광산 깊숙이 묻혀 있는 '왕가의 다이아몬드'를 찾는 건 사막에서 바늘 찾기와 비슷한 난이도다.

90일 동안 곡괭이질을 해도 실패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고. 무엇보다 그 긴 시간동안 몸만 혹사할 뿐 남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진혁은 인기 있는 맵들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대신, 플레이어들이 가장 꺼려하는 곳을 바라봤다.

[Z - 01(정신병동)]

현재 대기 중인 인원: 37

남은 시간: 0h:2m:13s

정신병동.

저주 받은 몬스터와 미쳐버린 환자들이 배회하는 죽음의 건물.

바로 이곳이 5층에서 선택해야 할 격전지다.

'거의 마감 시간이 다 됐네.'

그런데 진혁이 참가를 승낙하려던 바로 그때였다.

띠링!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존재감을 드러낸 적 없던 이들로부터 뜻밖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85화. 5층, 정신병동 (1)

[칼라디움 왕국으로부터 선물이 도착했습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점멸하는 황금빛 상태창.

'칼라디움 왕국이라면....'

진혁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무림과 적대 관계에 있는 '제국'에 소속된 국가.

그중 하나가 바로 칼라디움 왕국이었기 때문이다.

'이 녀석들도 움직이기 시작한 건가.'

언젠간 접점이 생길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토록 발 빠르게 움직일 줄은 몰랐다.

하긴, 팽팽하던 균형을 깰 수 있을 만한 새로운 변수들이 나타났으니. 미치도록 탐이 날 수밖에.

동시에 귀족주의에 찌들어 있는 제국이 자존심을 한 수 접을 만큼, 지금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무림도 그렇고 제국 쪽도 그렇고. 탑의 세력 구도를 바꾸기 위해 떡잎이 보이는 플레이어들을 선점하려 하는군.'

선물을 잔뜩 싸들고 오는 꼴이 뭐랄까. 꽤나 귀엽달까?

피식 웃은 진혁이 선물을 살펴봤다.

어디, 탑의 중층을 지배하는 놈들의 배포가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 볼 시간이다.

띠링!

[스킬 '흐릿한 체취'를 획득하였습니다.]

[흐릿한 체취]

입수 난이도: F

내용: 본인의 냄새와 호흡은 물론, 미세한 공기의 떨림까지 지워 줄 수 있는 스킬입니다. 사용 시 야생동물들조차도 당신이 숨어 있는 곳을 눈치 채지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 (제한시간: 3초, 3번 사용 시, 24시간의 쿨타임이 필요합니다.)

[상위 세력의 후원으로 인해 시스템의 억제력이 일정 부분 완화됩니다.]

다른 층이었다면....

이 스킬은 '쓸모 있다'는 수준에서 끝났을 것이다.

발동시간이 워낙 짧은 데다 횟수제한까지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쳐 버린 환자들과 네임드 몬스터들을 뚫고 밖으로 탈출해야 하는 상황에선 그 평가는 완전히 달라졌다.

'고유 능력과 스킬이 봉인된 이상. F급이었던 스킬은 S급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3개의 목숨을 더 버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

탑의 제약을 거스르면서까지 나에게 이걸 선물해 줄 정도라면....

정말로 어지간히 탐이 나긴 하는 모양이다.

'스킬은 고맙게 쓰도록 하지.'

환심을 사려고 공짜로 주겠다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다.

그리고 선물에 대한 부담감을 느낄 필요 또한 없다.

'나는 그냥 여러 세력들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꿀이란 꿀은 죄다 빨아먹으면 돼.'

넘어갈 듯 말 듯 상대의 애간장을 태우며 하는 밀당.

그게 앞으로 취해야 할 최고의 포지션이다.

좋아.

든든한 스킬까지 얻었으니 이제 그만 가 볼까.

진혁이 정신병동을 향하는 게이트를 열었다.

바로 순간.

우우우웅!

[5층 '정신병동'을 선택하셨습니다.]

[고유 능력과 스킬이 봉인됩니다.]

[규칙은 단 하나, 살아서 병동을 탈출하십시오.]

새로운 층의 시작을 알리는 상태창이 나타났다.

동시에 진혁의 의식이 흐릿해졌다.

***

눅눅한 공기.

피와 배설물에 찌든 악취.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시야.

이 모든 것들이 말해 주고 있었다.

자신이 있는 곳이 극악의 생존 확률을 자랑하는 정신병동이라는 사실을.

띠링!

[고룡. 마케드리안의 마도서로 인해 스킬 중 하나가 해금됩니다!]

['탐식의 눈'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상태창이 나타났다.

그나마 제약이 약한 '눈'은 시스템의 제약에서 가장 손쉽게 벗어날 수 있는 스킬 중 하나였다.

'이 때문에 마법 대도서관에서 이 책을 골랐지.'

그건 그렇고.

'다른 건 둘째 치고 냄새는 아무리 해도 적응이 안 된다. 적응이.'

진혁이 눈살을 찌푸린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바로 그때.

"으으으...."

"더럽게 어둡네. 어이! 여기가 스타팅 포인트 맞지?"

"젠장, 여긴 또 왜 이 모양이야?"

진혁의 옆쪽에서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 불 좀 밝힐 수 있는 사람 없어요?"

"능력이 죄다 봉인당해서 안 돼. 완전히 태초 마을로 돌아간 기분이잖아. 이거."

지금까지 온갖 능력을 사용하다가 난데없이 모든 게 사라졌으니 그럴 수밖에.

현대인이 전기를 사용하지 못하게 된다면 이런 느낌이리라.

"어? 주머니에 뭔가 있어요!"

"주머니?"

"네. 이거 감촉이...."

찰칵!

화르르륵!

라이터 소리와 함께 어두웠던 실내에 작은 불꽃이 나타났다.

다섯 명의 남녀는 희미하게나마 서로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서양인 남자와 여자 그리고 동양인 여자. 마지막으로 흑인 여성.

'그리고 나.'

이렇게 총 다섯이었다.

"후우. 이제 좀 살겠구만. 이렇게 그지 같은 환경일 줄 알았으면, 차라리 다른 곳을 고를 걸 그랬어."

"음? 나도 주머니에 뭔가 있는데?"

"저도요."

"내 건 열쇠 같아."

랜덤으로 주어지는 생존 아이템.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빠르게 각자의 주머니를 확인했다.

물론, 진혁은 가장 먼저 어떤 아이템이 주어졌는지 확인을 끝낸 상태였다.

'볼펜이라....'

사무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나미 볼펜이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쓸모없는 걸 줬다고 욕했을 테지만.

진혁은 뾰족하게 솟아있는 펜 끝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아.'

진정한 고인물은 템빨을 탓하지 않는다.

갖고 있는 것들을 활용해 최대한의 결과를 만들 뿐이지.

그나저나.

'완전히 초짜들만 모였네.'

첫 반응부터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까지.

모든 게 어설펐다.

정신병동을 클리어해 본 경험이 없다는 뜻이리라.

예전이었다면, 병아리처럼 떠는 뉴비들을 함께 데리고 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이유가 없었다.

이건 웃고 즐기는 게임이 아니었으니까.

"아무래도 우리끼리 해쳐나가야 할 것 같은데, 혹시 여기 와 봤던 사람 있어?"

덩치가 큰 서양인 남자가 입을 열었다.

"한 번 해 보기는 했는데, 워낙 오래 전이라...."

"애초에 5층은 매번 구조랑 아이템 등이 바뀌어서 플레이해 본 경험이 의미가 없다고 들었어요."

"나도 그 때문에 여길 고르긴 했어. 광산은 워낙 인기가 좋아서 빨리 마감되기도 했고."

각자 저마다의 이유로 이곳에 왔다.

진혁이 보기엔 어느 것 하나 이해해 주기 힘든 이유들이었지만.

"골 때리게 됐네."

"일단 천천히 상의를 한 다음에 이동하도록 해요."

다른 사람들이 연신 떠들고 있었으나, 정작 진혁의 시선은 문으로 향해 있었다.

'라이터를 켰으니 슬슬 나타날 때가 됐는데....'

불을 밝힐 경우 얻는 건 시야만이 아니다.

플레이어가 불을 통해 앞을 내다본 순간 이 병동에 있는 놈들도 그 너머에서 플레이어들의 존재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바로 그 순간.

저벅. 저벅.

희미한 발소리가 들렸다.

나머지 사람들은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상태라 그 이변을 깨닫지 못했다.

다들 현재의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각자의 의견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저벅! 저벅! 저벅!

발소리가 더욱 커졌다.

이제는 방 안에 있던 사람들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뭐, 뭐야, 이 소리는?"

"문 잠가! 문부터 잠그라고!"

"크윽!"

나무로 만든 문이 닫혔다.

거의 동시에.

쾅! 쾅! 쾅! 쾅!

문이 미친 듯이 앞뒤로 흔들렸다.

"여기다! 이 안에 있어!"

"깔깔깔깔!"

"전부 태워라! 모조리 태워서 정화시켜!"

"이교도들의 피를!"

"찢어 죽여 주겠다!"

광기에 가득 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히이익!"

"빌어먹을. 벌써 온 거야?"

"당장 여기서 빠져나가야 돼. 저런 문으론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한때 이곳의 환자였던 사람들은 인간성을 잃어버렸다.

그 뒤론 알 수 없는 신에게 산제물로 바치며, 피와 광기로 물든 나날을 보내고 있을 뿐이다.

이제 남은 선택지는 두 개.

싸우든가 도망가든가. 그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그러나 여기 있는 사람들에겐 싸운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능력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대체 무슨 수로 싸운다는 말인가?

도망가야 한다.

늦기 전에.

온몸이 갈가리 찢기거나 산채로 타버리기 전에 어서!

"빠, 빠져나갈 곳을 찾아야 돼!"

덩치 큰 남자가 미친 듯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빠르게 고동치고 호흡이 가빠졌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쾅! 쾅! 쾅! 카각! 퍼걱!

나무 파편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부서진 틈 사이로 살점이 붙어 있는 칼날이 보였다.

이제 시간이 없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문이 박살 날 것이다.

그때.

"여기! 이쪽이에요!"

흑인 여자가 천장을 가리키며 고함을 질렀다.

환풍구다.

위로 가면 살 수 있다. 적어도 궁지에 몰린 쥐처럼 죽지 않아도 된다.

"서둘러!"

"빌어먹을. 빨리... 빨리!"

환풍구 뚜껑을 뜯어낸 사람들이 미친 듯이 위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콰앙! 퍼걱!

이제는 어린아이 주먹만 한 틈이 벌어졌다.

문 너머에서 붉게 물든 눈동자가 보였다.

"올려 줘요! 나도 끌어 올려 달라고요! 어서!"

아래에서 받쳐주고 위에서 당겨 주며 하나 둘 방을 벗어났다.

그런데.

"뭐 해? 당신! 빨리 손잡지 않고!"

마지막 차례인 진혁은 제자리에 서 있을 뿐. 환풍구로 갈 생각은 없어 보였다.

"젠장. 버려! 죽고 싶어 환장한 놈까지 챙겨 줄 순 없어!"

"맞아요. 어서 가요."

"쳇!"

남자가 혀를 찼다.

진혁을 답답한 듯 바라봤지만, 아주 잠시뿐이었다.

철컹!

환풍구의 뚜껑이 닫혔다.

***

스킬과 고유 능력의 봉인.

이 두 가지 사실만으로도 플레이어들이 느끼는 공포심은 극에 달했다.

하지만.

'능력이 없다고 겁부터 집어먹어서야 앞으로 어쩌려고 그러는 건지 모르겠네.'

능력은 보조적인 역할에 불과하다.

앞으로도 지옥 같은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 고작 능력 좀 봉인했다고 꼬리부터 마는 걸까?

'그것도 고작 광신도 따위한테 말이지.'

칼라디움 왕국에서 받은 '흐릿한 체취'를 사용할 수도 있었지만, 여기서 사용하기엔 너무 아까운 스킬이었다.

진혁은 볼펜을 역수로 쥐었다.

찰칵!

익숙한 소리와 함께 펜 끝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콰아아앙!

문이 박살나며, 반쯤 벌거벗은 남자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수는 약 서른 정도.

뒤집힌 눈동자와 피를 잔뜩 뒤집어쓴 모습이 꽤나 그로테스크하긴 하다.

"죽여!"

"팔다리를 잘라 버려라!"

"신께서 녀석의 피를 원하신다!"

녹슨 낫과 꼬챙이 식칼 등이 진혁을 향해 날아왔다.

"예전부터 궁금하긴 하더라고."

녀석들이 AI였을 땐 해소하지 못했던 궁금증이 한 가지 있다.

"광신도들도 공포를 느낄 수 있는지 말이야."

광기와 맹목 앞에 숨겨진 인간의 본성.

과연, 그 가면을 언제까지 쓸 수 있을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 말을 끝으로 진혁의 몸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퍽!

"커억?"

가장 앞에 있던 남자의 관자놀이를 파고든 볼펜.

상처 부위에서 가느다란 핏줄기가 뿜어졌다.

"규모의 이점을 살리고 싶었으면, 입구가 좁은 곳으로 오질 말았어야지."

아무리 인원이 많으면 뭐 하나?

정면으로 들어올 수 있는 놈은 많아야 두 명인데.

게다가 이런 좁은 곳에서 휘두르기 힘든 낫이나 긴 꼬챙이는 오히려 싸우는 데 있어 마이너스 요소다.

볼펜을 뽑은 진혁이 두 번째 타겟을 향해 몸을 날렸다.

퍽! 퍼억!

눈, 연수(延髓). 목젖.

뼈를 뚫을 순 없어도 노릴 수 있는 급소는 얼마든지 있었다.

"끄아아악!"

"으아악!"

끔찍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손속에 사정 따윈 두지 않은 냉정한 일격.

순식간에 절반이 넘는 이들이 싸늘한 시체로 변했다.

"...."

"...."

사나웠던 기세가 완전히 꺾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둘 사이의 전력 차는 아예 격이 달랐으니까.

플레이어어들을 죽이기 위해 왔던 광신도들은 오히려 상대의 흉흉한 살기에 압도당해 버렸다.

"뭐 해? 벌써 끝이야?"

진혁이 핏방울이 떨어지는 볼펜을 앞으로 뻗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콰아아앙!

굉음과 함께, 한쪽 벽이 무너졌다.

86화. 5층, 정신병동 (2)

3m에 이르는 거대한 키.

철로 된 삼각형 투구.

마지막으로 파쇄차(破碎車)를 연상케 하는 망치까지.

벽을 뚫고 나타난 괴물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위압감을 자랑했다.

이 녀석이 바로 네임드 몬스터 중 하나인 '브레이커'다.

'탐식의 눈'이 재빨리 대상을 스캔했다.

——————————————————

이름: 브레이커

성별: 무(無)

나이: 1세

레벨: 45

힘 100 민첩 15 체력 30 마력 0

보유한 스탯 포인트: 0

고유 능력: 끈질긴 사냥꾼

스킬: Lv12 '단두대', Lv11 '아머 브레이크', Lv11 '육탄돌파', Lv10 '무기강화'

——————————————————

[대상은 죽일 수 없습니다.]

비약적으로 높은 힘과 비교되는 마력이 눈에 띈다.

하지만, 상태창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정보는 바로 '죽지 않는다'는 특성이다.

어떠한 공격으로도 끊어지지 않는 숨통과 지옥 끝까지 사냥감을 쫓는 사냥꾼의 특성.

바로 이러한 점들 때문에 정신병동의 난이도가 다른 맵들에 비해 높다는 평가를 받았다.

뭐, 그래봤자 요리조리 잘 도망치기만 하면 되긴 하다.

무적이고 뭐고 간에 이 녀석들을 반드시 쓰러뜨려야 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대, 대리자님."

"저... 저희는 겁을 먹은 게 아니라...."

광신도들이 몸을 벌벌 떨었다.

곧이어 다가올 결과를 그 누구보다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브레이커가 무릎을 꿇고 있는 광신도의 머리를 움켜잡았다.

"끄아아악!"

끔직한 비명과 함께 붉은 피가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하여간, 힘 하나는 무식할 정도로 센 괴물이다.

'잡혔다간 척추채로 뽑히겠군.'

눈살을 찌푸린 진혁이 자세를 낮췄다.

이 녀석이 나온 이상 지금부터는 술래잡기를 해야 한다.

한 번 잡히면 그대로 인생을 로그아웃해야 하는 1코인 술래잡기를.

타악!

자리를 박차고 향한 곳은 브레이커의 가랑이 사이였다.

브레이커가 반사적으로 망치를 휘둘렀지만, 이미 늦었다.

진혁은 종이 한 장 차이로 녀석의 공격을 빠져나간 상태였으니까.

대신 애꿎은 망치는 광신도 한 명의 몸을 박살내 버렸다.

부우우웅!

콰아앙!

쾅!

공격 한 번에 벽이 무너지고 바닥이 거북이 등껍질처럼 갈라졌다.

압도적인 위력이다.

사람 하나는 곤죽으로 만들어버릴 만큼.

그러나 아무리 강한 공격이라도 맞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터.

진혁은 미꾸라지처럼 망치를 피했다.

"크오오오!"

약이 잔뜩 오른 브레이커가 더욱 거칠게 날뛰기 시작했다.

"우아아악!"

"끄아악!"

미친 듯이 휘두르는 망치에 당하는 건 광신도들이다.

곤죽이 돼 버린 시체들 사이로 진혁은 조금씩 브레이커와의 거리를 벌렸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뚫려 있는 복도로 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브레이커가 Lv12 '단두대'를 발동합니다!]

양손으로 망치를 움켜쥔 브레이커가 몸을 크게 뒤로 젖혔다.

콰콰콰콰콰콰!

망치가 천장을 통째로 박살내면서 진혁의 머리를 향해 낙하했다.

무게와 속도가 실린 일격.

심지어 떨어지는 낙석으로 인해 시야까지 방해했다.

이건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상관없다.

"프렌드 실드!"

진혁이 광신도 한 명을 앞으로 내세웠다.

"뭐, 프... 프 뭐!?"

광신도가 영문 모를 단어에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그것이 녀석이 남긴 유언이 되었다.

콰아아앙!

바닥까지 파고든 망치.

불쌍한 어린 양이 신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사이, 진혁은 복도 책상 서랍에 있는 플래시 라이트를 꺼냈다.

'다행이 누가 가져가진 않았네.'

하긴. 다들 도망치느라 정신이 없을 텐데, 서랍 안에 뭐가 있는지 확인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을 것이다.

진혁의 시선이 뒤쪽으로 향했다.

그그극!

브레이커가 박혀 있는 망치를 뽑으려고 힘을 쓰고 있었다.

광신도들은 모조리 곤죽이 되어 버린 상태였고.

'자기편을 아주 죄다 죽여 버렸네.'

마음만 먹는다면 충분히 도망칠 수 있는 시간이다.

그러나 진혁은 도망치지 않았다.

대신, 플래시 라이트의 전원을 연거푸 눌렀다.

딸깍! 딸깍!

"조금 더 분발해야지? 그런 느려터진 몸으로 날 잡을 수 있겠어?"

밝은 빛이 브레이커의 안구를 두드렸다.

마치 대놓고 도발이라도 하듯이.

***

정신병동 지하 3층.

이곳은 병동의 정문을 나갈 수 있는 키가 보관되어 있는 장소다.

동시에 이 병동의 주인이 있는 곳이기도 했고.

"인간 놈들은 어떻게 됐지?"

핏기가 아예 없는 얼굴에 푸른색 핏줄이 잔뜩 돋아 있는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이자가 바로 병동의 주인이자 광신도들을 이끄는 교주다.

그러자 그늘에 있던 남자가 대답했다.

"순조롭게 잡아들이고 있습니다. 아직 도망 다니고 있는 놈들이 있지만, 어차피 시간문제일 뿐이죠."

"확실한가?"

"물론입니다. 교주님께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력이 봉인당한 이상 제 아무리 플레이어들이라도 꼼짝 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이 계획했던 그대로다.

교주의 입꼬리가 만족스럽다는 듯이 뒤틀렸다.

"처음, 너희 마인 협회 놈들이 왔을 땐, 화로에 넣고 태워 버리려고 했다. 우리 입장에선 플레이어나 너희나 다 똑같은 놈들이었으니까."

하지만.

"너희의 목적을 듣는 순간 그 결심은 변했다. 설마, 인간들 중에서 그런 위대한 뜻을 갖고 있는 자들이 있으리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느니라."

"과찬이십니다. 저희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죠."

남자가 고개를 조아렸다.

그 모습에 교주는 더욱 흡족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신께서 더 많은 제물을 원하신다. 탑이 개방되어 무지한 이들이 들어오는 지금이야말로, 그분께서 다시 재림하실 수 있는 약속의 때다."

제물.

그렇다.

정신병동에 처박혀 있는 것도.

멍청한 인간들을 세뇌시켜 광신도로 탈바꿈한 것도.

모두 신에게 바칠 제물들을 모으기 위함이었다.

교주가 정면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조금 전 사로잡은 플레이어들을.

"흐윽. 끄윽...."

"사, 살려 주세요."

"제...발. 시키는 건 뭐든지 할 테니. 제발 목숨만은...!"

진혁과 같은 방에 있던 플레이어들이었다.

환풍구를 통해 도망쳤지만, 모두들 머지않아 광신도들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너무 두려워하지 말거라. 미천한 종들아. 내 너희에게 선택권을 줄 터이니."

교주가 차갑게 식은 손으로 동양인 여자의 뺨을 쓰다듬었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냉기가 감도는 손이었다.

"서, 선택권이요?"

"너희들이 개종하여 나를 따를 경우, 산 채로 불타는 건 면하게 해 주마."

생존할 수 있는 기회.

가장 끔찍한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말에, 네 사람의 눈빛이 흔들렸다.

"단, 개종의 증거로서 다른 사람을 죽여야만 한다."

네 명 중 살 수 있는 건 두 명뿐.

인간성을 버리고 진정으로 참회하는 자만이 새로운 삶을 얻을 수 있다.

교주가 검은색 단검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종용하는 것이다.

누가 살고, 누가 죽을지를.

네 사람이 얼어붙은 듯 검과 서로를 바라봤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교, 교주님 이것 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병동 CCTV를 감시하던 신도 하나가 다급히 교주를 불렀다.

"뭔가?"

교주가 화면을 바라봤다.

그러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나타났다.

"이게 무슨...."

화면 속에 보이는 건 플레이어 한 명과 신의 대리자 '브레이커'였다.

이곳에서 플레이어를 추격하는 일이야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문제는 플레이어가 신의 대리자를 농락하고 있다는 점이다.

충분히 벗어날 수 있음에도 계속해서 추격해 올 수 있게 거리를 유지하는 모습.

특히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해 망치가 벽이나 바닥에 박히게 한 다음. 플래시 라이트를 켰다 껐다 하는 행동은 보는 자신이 치가 떨릴 정도였다.

가벼운 움직임과 궤도를 읽는 눈. 목숨이 달릴 상황에서 보이는 여유까지.

그 누가 저걸 보면서 능력이 봉인당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어떻게... 어떻게 인간 따위가 신의 대리자를 상대로 저런단 말이냐!"

교주가 고함을 지르며 양 손으로 모니터를 움켜잡았다.

카가각.

손톱이 화면에 기다란 상흔을 남겼다.

옆에 있던 남자 역시 화면을 바라봤다.

그러다 이내 떨리는 목소리로 상대의 이름을 내뱉었다.

"가, 강진혁? 저 녀석이 어떻게 여기에?"

"강진혁? 알고 있는 놈이냐?"

"예. 한국에 있는 S급 랭커로...."

남자는 알고 있었다.

"저희 계획에 있어 가장 위험한 걸림돌이 되는 플레이어입니다."

고유 능력과 스킬이 봉인되어 있음에도,

상대를 만만하게 생각했다간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

부우우웅!

또다시 망치가 허공을 가로질렀다.

벌써 20분이 가깝도록 수백 번의 공격을 퍼부었지만 진혁은 모든 공격을 여유롭게 피했다.

'이것도 오랜만에 하니 꽤나 재밌네.'

기둥 하나를 두고 빙글빙글 돌면서 상대를 놀린다거나.

지형과 지물을 이용해 상대의 움직임을 제한한다거나.

예전에는 꽤나 지겹다고 느꼈던 것들조차 시간이 지나니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짜릿한 건 역시, 상대가 약이 오르다 못해 폭발하는 걸 보는 것이다.

손톱으로 자기 몸을 쥐어뜯고 길길이 날뛰는 걸 구경할 때의 쾌감이야말로 이 술래잡기를 즐길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이었다.

물론, 전부 다 한때 즐겼던 유희였지만.

"크오오오!"

브레이커가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콰콰콰콰콰콰!

이제는 자기 몸이 다치건 말건 망치로 천장과 바닥을 송두리째 무너뜨렸다.

진혁이 살짝 거리를 조절했다.

시간이 남아돌아서 이런 짓을 하는 게 아니다.

단순히 상대를 농락하는 쾌감을 얻기 위해서는 더더욱 아니고.

'슬슬 거의 다 왔군.'

5층에 있는 교주와 광신도들이 숭배하는 신. 브레이커를 일정 수준 이상으로 몰아붙이면, 바로 그 녀석의 관심을 끌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 순간.

['썩어 가는 심장'이 당신의 행동에 흥미를 느낍니다.]

눈앞에 붉은색 상태창이 나타났다.

'예상했던 대로네.'

진혁이 기다렸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이명(異名) '썩어 가는 심장'.

엘리스와 마찬가지로 탑의 상층부에 존재하는 절대자 중 하나다.

녀석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왔지만....

사람들은 흔히 그들을 '마왕'이라 불렀다.

움찔하고.

브라함의 반지가 떨렸다.

엘리스 역시 상대의 메시지로부터 흘러나오는 마력을 느낀 거겠지.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상대가 마왕이고 마신이고 간에.

어차피 탑의 40층대에 있는 신격에 불과했으니까.

무엇보다 놈에 대해 전부 알고 있는 이상, 이 상황은 이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이야. 이거 누추하신 분이 이런 귀한 곳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진혁이 생긋 웃었다.

['썩어 가는 심장'이 당신에게 자신의 검이 될 것을 제안합니다.]

[2차 전직 요건이 발생했습니다.]

[신격의 제안을 수락할 경우 '검은 사도'로 전직할 수 있게 됩니다.]

'역시 이렇게 나오는군.'

2차 전직 '검은 사도'.

테레사가 별의 가호를 받는 성기사라면.

검은 사도는 마왕의 비호를 받는 흑기사다.

결이 다른 능력을 자랑했지만, 대신 평생을 마왕의 하수인으로서 살아 가야만 하는 단점이 존재했다.

'가장 큰 문제는 거절할 경우 마왕의 저주를 받게 된다는 점이지.'

저주가 내려진 시점부터 모든 마족들로부터 추살령(追殺令)이 내려진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과거 [시련의 탑]을 플레이어할 때도 마왕의 제안을 거절해 저주를 받은 플레이어는 없었다.

그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페널티를 안고 싶진 않을 테니까.

하물며 현실이 된 지금은 말해 봤자 입만 아프리라.

그렇기에.

"미안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그 왜. 호랑이 새끼가 치와와 밑으로 들어갈 순 없잖습니까?"

진혁은 이번에도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선택했다.ㅁ

87화. 산제물의 의식 (1)

진혁이 내뱉은 산뜻한 말과 함께.

['썩어 가는 심장'이 격노합니다!]

['마왕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저주는 당신이 죽기 전까지 지속됩니다.]

쿠쿠쿠쿵!

전신에 엄청난 충격이 가해졌다.

'젠장. 더럽게 아프네.'

진혁은 비명을 속으로 삼켰다.

당연한 말이지만, 심장에 각인을 새기는 과정에 '익숙해진다'라는 말 따윈 없다.

매번 할 때마다 신선한 고통을 준다는 뜻이다.

몇몇 변태들은 이런 고통들도 하앍거리며 즐기곤 하던데, 그건 인간의 마지막 존엄성을 저버린 놈들 이야기고.

가능하면 육체적인 고통을 피하고 싶은 게 사람의 본능 아니겠나?

하지만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다.

이 저주를 받는 것조차 이번 층을 클리어하기 위한 과정이었으니까.

[3분간 모든 스탯이 90%만큼 하락합니다.]

[무리하게 전투를 할 경우 탈진 상태에 이르게 되며, 최악의 경우 기절하거나 죽을 수도 있습니다.]

[남은 시간: 0h:2m:59s]

[상위 신격의 강한 개입으로 인해, 히든 퀘스트가 발생하였습니다.]

[히든 퀘스트]

난이도: A

내용: 타인의 생명을 함부로 빼앗는 타락한 광신도들은 '악인'입니다. 그들을 1명 죽일 때마다 적응형 스탯이 +0.1만큼 상승합니다. 단, 교주를 죽일 경우 적응형 스탯이 +30만큼 증가합니다.

그래, 바로 이것이다.

신격이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생긴 개연성의 오류.

당연히 시스템은 그 모순을 해소하기 위해, 저주를 받은 플레이어에게 그만큼 합당한 보상을 해 주게 되어 있었다.

여기까지는 예상했던 내용이었다.

전부 다 예상했던 내용이었는데.

딱 하나.

보상으로 주는 스탯이 기존과 달라졌다.

'설마, 적응형 스탯을 줄 줄이야.'

진혁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놀랄 수밖에 없었다.

과거에는 보너스 스탯을 0.1씩 줬는데, 지금은 그 조건이 무려 적응형 스탯으로 바뀌었으니까.

정상적인 방법으론 구할 수 없는, 오직 탑의 정상을 봤던 플레이어에게만 주어지는 스탯.

그걸 계속해서 쌓아 갈 수 있다는 사실에, 진혁의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두근! 두근! 두근!

'이건 무슨 일이 있어도 손에 넣어야 된다.'

보상 중에서도 가장 맛있는 노른자위가 나왔는데, 실패 따위란 있을 수 없다.

반드시, 반드시 성공시키고야 말겠다.

진혁이 모처럼 의지를 불태웠다.

그때였다.

욱씬!

극심한 고통이 느껴졌다.

'저주의 여파가 세긴 세네.'

왼쪽 가슴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의식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당장은 이 장소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적어도 3분 동안은 제대로 싸울 수 없을 테니까. 왕국으로부터 받은 '흐릿한 기척' 또한 이 시간 동안은 사용할 수 없겠지.

"미안한데, 무승부로 하면 안 될까?"

진혁이 멋쩍은 미소를 띠운 채 브레이커를 올려다봤다.

"크오오오!"

쿵! 쿵! 쿵! 쿵!

브레이커가 망치를 든 채 달려왔다.

하여간 귀여운 맛이라곤 조금도 없구나.

하는 수 없지.

진혁이 재빨리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어두컴컴한 데다 언제 막다른 벽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미로였으나, 진혁은 단 한 번도 멈추거나 머뭇거리지 않았다.

'여기서 왼쪽.'

'그리고 그 다음에서 오른쪽.'

적어도 이 병동의 지리는 앞마당처럼 훤히 꿰뚫고 있다.

눈을 감고도 어디에 뭐가 있는지 모조리 외우고 있다는 뜻이다.

좁은 틈을 헤치고 통로들을 돌아. 그렇게 도착한 곳은 약품 저장 창고였다.

'아슬아슬하게 늦진 않겠어.'

브레이커가 도착하기 전까진 몇 초밖에 남지 않았다.

진혁이 재빨리 창고 안으로 들어가 가장 안쪽에 있는 캐비닛으로 몸을 날렸다.

철컹!

사람 하나가 들어갈 수 있는 틈에 몸을 끼워 넣었다.

[특수 필드 '캐비닛'에 들어갔습니다.]

[은신 효과가 발동됩니다.]

정신병동에서는 특정 장소에서 사냥꾼들로부터 은신할 수 있는 장소들이 있다.

지금 숨은 곳도 그중 하나였다.

완벽하게 숨을 순 없지만, 약간의 운이 따라 준다면 충분히 시선을 따돌릴 수 있을 터.

"후웁."

캐비닛 안에 숨은 진혁이 숨을 멈췄다.

...물아일체(物我一體).

물아일체!

떠올려라!

'내가 곧 캐비닛이고 캐비닛이 곧 나다!'

스스로를 세뇌하고 주위에 있는 배경에 완벽하게 녹아들었다. 이건 귀신이 와도 찾지 못할 것이다.

바로 그때.

쿠웅! 쿠웅!

브레이커가 케비넷 앞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진혁을 찾기 시작했다.

당황하지 말자.

'나는 이미 캐비닛 그 자체니까.'

겁먹을 이유도. 들킬 이유도 없다.

그런데.

"...."

캐비닛에 있는 틈 사이로 브레이커의 붉은 눈동자가 보였다.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진혁은 애써 시선을 피했다.

'...잘못 본 거겠지.'

잘못 본 거여라. 제발.

"...."

붉은 눈동자가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이제는 녀석의 호흡과 썩은 입 냄새가 틈 사이로 느껴질 정도였다.

'젠장. 안 통하네.'

뻘쭘한 상황에 얼굴이 달아올랐지만, 지금은 수치심 따위를 느끼고 있을 때가 아니다.

부우우웅!

브레이커가 망치를 크게 휘두르려 했다.

바로 그 순간.

진혁은 캐비닛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브레이커가 멈칫했다.

플레이어가 캐비닛에 들어가거나 나왔을 경우 사냥꾼에게 생기는 0.2초 남짓의 딜레이.

그 틈을 이용해 진혁은 캐비닛의 뚜껑을 열고 들어갔다 나가기를 반복했다

완벽하게 타이밍을 맞추지 않으면, 뼈째로 으깨지는 운명에 처할 테지만.

썩은 물인 진혁에게 있어 이 정도쯤은 숨 쉬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크아아아!"

분노할 대로 분노한 브레이커가 괴성을 질렀다.

[브레이커가 Lv11 '육탄돌파'를 발동합니다!]

콰콰콰콰콰콰!

이번엔, 거대한 망치가 캐비닛을 통째로 박살냈다.

그러나 진혁의 움직임이 한 박자 더 빨랐다. 망치가 캐비닛을 완전히 으깨 버렸을 땐 이미, 진혁이 캐비닛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간 뒤였다.

욱씬! 욱씬!

격하게 움직이니 심장 부위가 더욱 쑤셨다.

일부러 장애물이 많은 곳을 골랐지만, 언제까지나 저 무지막지한 공격을 피할 순 없었다.

이쯤 난리를 피웠으면 슬슬 올 때도 됐는데....

좀 빨리 좀 와라.

이렇다 죽겠다.

진혁이 거리를 벌리며 툴툴거렸다.

바로 그때.

우뚝.

거짓말처럼 브레이커의 움직임이 멈췄다.

무언가를 경배하기라도 하는 듯 망치를 양손으로 잡고 무릎을 꿇은 자세.

동시에, 차가운 한기가 엄습했다. 등골을 타고 소름이 오소소 일어났다.

'드디어 온 건가?'

기다리다가 목이 빠지는 줄 알았다.

진혁이 뒤쪽을 바라봤다.

그러자.

"과연, 산제물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간이로구나."

엄청난 수의 광신도를 이끌고 온 교주의 모습이 보였다.

***

포로가 된다는 건 그다지 유쾌한 경험이 아니다.

그것이 산제물이 될 운명이라면 더욱더.

"우, 우린 다 죽을 거야."

"이런 빌어먹을 곳에 오질 말았어야 했어. 말았어야 했다고!"

"그깟 보상에 눈이 멀어서.... 나, 나는 죽고 싶지 않아.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줄은 정말로 몰랐단 말이야."

포로로 잡혀 온 플레이어들이 절규했다.

자신들이 했던 안일한 선택과 장밋빛 꿈을 저주하면서.

고유 능력과 스킬마저 봉인당한 상태였기에, 탈출한다는 선택지는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으음. 곰팡이가 좀 많아서 그렇지.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숙소네. 룸서비스로 라면 정도만 가져다주면 딱이긴 할 텐데.'

진혁은 침대에 누워서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포로로 잡힌 덕에 마왕의 저주로부터 약화된 체력과 마력이 전부 회복되었다.

완벽하게 제 컨디션을 되찾았다는 소리다.

게다가 놈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본거지 깊숙한 곳에 끌어들여 준 덕분에, 귀찮은 관문들과 함정들을 돌파하지 않아도 됐다.

적응형 스탯을 얻기 위한 악인 처단 퀘스트 역시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게 되었고.

뭐 하러 힘들게 적들을 찾아다니나?

곧 있으면 알아서 전부 한 자리에 모여 줄 텐데?

다 차려진 밥상에 준비해 둔 몇 가지 '조미료'만 첨가한다면, 교주 녀석이 게거품을 물고 쓰러지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원래, 자신만만해 하는 놈들 뒤통수치는 게 제일 흥미진진한 법이지.'

그렇게 생각하니 이런 좁고 냄새나는 감옥도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바로 그때.

"닥쳐라! 시끄럽게 굴면 그 녀석을 가장 먼저 형틀에 묶어 고만한 뒤, 괴물들의 먹이로 던져 버리겠다!"

간수가 플레이어들이 있는 철장을 향해 으름장을 놨다.

살벌하게 생긴 고문 기구를 휘두르는 건 덤이다.

삽시간에 주위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당연한 일이다.

가뜩이나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고문으로 보내고 싶은 사람을 없을 테니까.

"조용히 시켰습니다. 이제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간수장이 고개를 조아렸다.

어수선한 분위기가 정돈되자 진혁의 감옥 앞으로 두 사람이 다가왔다.

한 명은 차가운 표정의 교주였고.

다른 한 명은 검은색 두건을 쓴 남자였다.

"직접 만나는 건 이번이 처음이로군. 강진혁. 맞나?"

이자는...?

진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풍기는 특유의 마력은 익숙하기 짝이 없었다.

대충 어디서 온 놈인지 짐작이 간다.

'요즘 잠잠하다 싶더니, 마인 협회 쪽에서 온 놈이었나.'

그러고 보니 3층에서 만났던 멜레나가 마인 협회의 목적이 성물을 모아 마왕을 부활시키는 거라고 했었지.

5층의 광신도 교주와 마인 협회.

마왕의 부활이라는 목표를 공유하는 이상 쿵짝이 잘 맞을 수밖에 없다.

'탑의 보스와 접촉할 정도라면, 협회 내에서도 꽤나 높은 위치에 있는 놈이라는 뜻인데....'

진혁이 남자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날카로운 인상의 백인 남성.

검은색 턱수염과 푸른 눈동자가 꽤나 잘 어울렸다.

'과연 외모만큼이나 실력도 있을지 궁금하군.'

'탐식의 눈'이 대상의 상태창을 꿰뚫었다.

그런데.

띠링!

[상태창 열람에 실패했습니다.]

[대상에겐 Lv14 '정신 결계'가 발동된 상태입니다.]

'염시'나 '간파'는 물론, 심지어 '눈'까지 막을 수 있는 결계.

'이래서 얼굴을 내비친 거였구만.'

자신감 있게 나타난 것부터. 여유 있는 말투까지.

준비해 둔 한 수가 있으니 이토록 당당했던 것이다.

허나 상관없다.

진혁이 주머니 속에 넣어 뒀던 '하얀색' 단약을 쥐었다.

힘을 주자 단약이 과자처럼 바스러졌다.

[흰색 단약을 사용했습니다.]

[단약의 효과로 인해 스탯 중 하나를 2배로 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속 시간은 10분입니다.]

올릴 건 당연히 '적응형' 스탯이다.

원래 흰색 단약은 교주와 싸울 때를 대비해 준비해 뒀던 거지만.

어차피 히든 퀘스트로 인해 추가적인 적응형 스탯을 얻을 수 있게 된 이상, 지금 쓰는 게 훨씬 더 효율적이다.

마인 협회의 고위급들이랑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는 그리 자주 오는 게 아니었으니까.

[적응형 스탯이 10 → 20으로 상향되었습니다.]

[Lv4 '탐식의 눈'이 대상을 간파합니다.]

역시.

진혁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레벨 차이가 무지막지하게 나는 엘리스나 펜다리엘 급이면 몰라도.

고작 플레이어 따위가 이걸 막을 순 없지.

——————————————————

이름: 호센벨트

성별: 남

나이: 41세

레벨: 38

힘 19 민첩 25 체력 18 마력 28 사념 80

보유한 스탯 포인트: 0

보유한 코인: 30,855

직업: 원탁의 기사

고유 능력: 수호자의 영역

스킬: Lv14 '정신방벽', Lv10 '단죄의 검', Lv10 '브리튼의 가호', Lv9 '기사의 맹세'

——————————————————

상태창이 주르륵 나타났다.

진혁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호오.'

이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거물이 나타났다.

원탁의 기사라는 직업은 오직 마인 협회의 최상위 간부들만이 가질 수 있었으니까.

다시 말해.

지금 눈앞에 있는 녀석은 '기사'의 칭호를 갖고 있는 녀석 중 하나다.

88화. 산제물의 의식 (2)

원탁의 기사.

아서왕의 전설에 나오는 기사들로, 이들에겐 각각 특별한 능력이 존재한다.

바로 마법, 검술, 환술, 탱킹 등 각 분야의 정점을 찍을 수 있다는 능력이.

'2차 전직 중에선 거의 최상위에 속하지.'

괜히 정부와 길드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마인들이 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게 아니다.

그럴 만한 능력과 힘이 뒷받침되었으니 그 누구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 하는 거지.

'그 거물 중 하나가 이 남자라....'

진혁이 혀로 아랫입술을 적셨다.

이걸 확인한 것만으로도 흰색 단약을 쓴 가치의 수백 배는 뽑아낸 셈이다.

한 분야의 정점을 찍을 수 있는 '수호자의 능력'이야 만능형인 진혁에게 필요 없지만, '정신방벽'은 꽤나 탐나는 스킬이었으니까.

'이걸 올려두면 이후에 신격이나 마왕 등으로부터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하지만.

복사 조건을 확인한 진혁은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껴야만 했다.

[복사 조건]

1. 상대의 기사명을 알아내십시오.

2. 지금부터 호센벨트와 하는 대화와 행동을 중2병에 걸린 것처럼 말하십시오.

두 개의 조건을 충족한다면 상대방이 갖고 있는 고유 능력이나 스킬 중 하나를 복사할 수 있게 됩니다.

이번에도 정상이 아닌 조건이 튀어나왔다.

물론, 대상이 대상이니 만큼 복사 조건이 늘어나는 것 정도는 이해해 줄 수 있다. 얼마든지 말이다.

하지만.

빌어먹을.

'대체 탑의 시스템을 관리하는 놈은 어떤 정신 나간 놈이냐?'

아니. 진지하게.

이쯤 되면 술자리에서 소주 여섯 병씩 거하게 마시고 벌칙 게임으로 정해야 할 걸, 실수로 복사 조건으로 정한 게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진혁이 검지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왜 아무 말이 없는 거지?"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호센벨트가 되물었다.

"아. 미안. 왼손에 있는 흑염룡이 날뛰어서 좀 진정시키느라고 말이야."

진혁이 오른손으로 왼손을 움켜잡았다.

오른손이 가늘게 떨렸다.

마치, 왼손이 폭주하는 걸 막기라도 하듯이.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세상의 모든 시간이 멈춰버린 것만 같았다.

그렇게 몇 초가 흘렀을까?

"이자가 그대가 말한 자가 맞는가? 걱정해야 할 적이라는 게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구나."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은 교주가 입을 뗐다.

당황스러운 건 호센벨트도 마찬가지였다.

"...어이가 없군.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도 그런 말도 안 되는 헛소리나 하고 있는 것이냐?"

심지어 끼고 있던 브라함의 반지도 미친 듯이 위아래로 들썩였다.

반지 속에서 엘리스마저 배꼽을 잡고 웃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래. 나도 어이가 없다는 거 알고 있으니까 굳이 상기시켜 주지 마라.

셋이서 조리돌림은 더욱더 하지 좀 말고.

제발 부탁이니까.

"아무래도 겁에 질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으니 한 번만 말하겠다. 이제 곧 너는 산제물로 바쳐질 거다."

"쿡쿡. 산제물이라.... 마치 5년 전 그때가 떠오르는군. 내 광기가 처음으로 세상에 드러난 날이었지."

진혁이 손으로 한쪽 얼굴을 가렸다.

검은색 망토에 붉은 서클렌즈만 착용했다면, 완벽했을 거다.

빌어먹을.

이것도 하다 보니 묘하게 몰입되네.

"...."

계속되는 진혁의 이상 행동에 호센벨트가 멈칫했다.

자신이 알던 것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상대의 모습에 위화감을 느낀 것이다.

설마....

'준비해 둔 뭔가 있는 건가?'

흑염룡이니 광기니 하는 것도 사실 고유 능력이나 스킬을 발동하기 위한 시동어나 혹은 포석이라면?

적어도 지금까지 보여 준 진혁의 활약을 생각하면 그게 더 그럴듯해 보였다.

'절대 얕잡아봐서는 안 될 인물이다.'

상대는 협회의 정예들을 농락한 플레이어였으니까.

호센벨트가 전신의 감각을 극도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마력이 발동되는 느낌은 없었다.

틀림없다.

저 모든 건 허세다.

'젠장....'

그런데도 왜일까?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은 불안감은 도무지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놀아나지 말자.'

애써 마음을 다잡은 호센벨트가 본론을 꺼냈다.

"네가 강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고유 능력과 스킬이 봉인된 이상 의식에서 살아남을 순 없을 터."

"흐음. 넌 이미 죽어 있다, 뭐 이런 대사라도 하고 싶어서 찾아온 거냐?"

"아니, 내가 이곳에 온 건. 그 과정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 주기 위해서다."

호센벨트가 품에서 투명한 유리병을 꺼냈다.

병 속에 든 액체가 찰랑였다.

"뭐지 그건?"

"일종의 마취제다. 의식 중에 가해지는 끔찍한 통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 줄 수 있지."

산제물의 의식이 악명 높은 건 그 과정이 너무나 참혹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죽을 바엔 조금이라도 편하게 죽고 싶은 게 인간의 본능일 수밖에.

"내 의지를 고통 따위가 꺾을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지만.... 준다면 마다하지 않으마."

진혁이 손을 뻗었다.

그러자.

"공짜가 아니다."

호센벨트가 유리병을 조금 뒤쪽으로 움직였다.

"언노운에 관한 정보. 그걸 말하면 그 대가로 이걸 넘겨주겠다."

역시 이렇게 나오는군.

예상했던 바다.

"언노운에 대해 어지간히 궁금하긴 하나 보네."

"가능성 있는 싹은 짓밟아 줘야 하니까."

"뭐. 좋아. 말해 줄 순 있는데, 마취약은 필요 없고 대신 나도 질문 하나만 하지."

"질문이라고?"

예상 밖의 말에, 호센벨트의 동공이 가늘어졌다.

설마, 그런 걸 원할 줄은 몰랐다는 얼굴이다.

"서로 궁금한 걸 하나씩 물어보는 거야. 공평하잖아?"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좋다. 말해 봐라."

"당신의 이름과 마인 협회 내에서 직급. 그것만 말해 주면 돼."

"마지막 질문 치곤 쓸데없는 걸 물어보는군. 그걸 왜 알고 싶은 거지?"

"마인 협회에 대해서 궁금한 게 많았거든. 이래봬도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서 말이야. 아! 그리고. 내 마안(魔眼)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보니까. 속일 생각 따윈 하지 마라."

진혁이 일부러 두 눈에 부릅 힘을 줬다.

"...걱정마라. 속이진 않을 테니."

호센벨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을 소개했다.

"내 이름은 호센벨트. 원탁의 한 곳을 맡고 있으며. '랜슬롯'이란 기사명을 갖고 있다."

랜슬롯.

원탁을 수호하는 기사.

그것이 바로 호센벨트의 기사명이었다.

'좋아.'

진혁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이걸로 두 개의 조건 중 하나를 달성했다. 다른 하나도 달성한 거나 마찬가지인 셈이었고.

"이걸로 궁금한 건 해결된 건가?"

"대충은."

"그렇다면 이번에 내 차례군. 언노운의 정체에 대해 말해라."

그거야 어렵지 않지.

"한 번만 말해 줄 테니까 잘 들어. 언노운은...."

진혁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천유성이란 놈이야."

"천유성이라면... 설마?"

"맞아. 네 머릿속에 떠오른 그 녀석. 너희들이 한 번 제거하려다 실패하기도 했었잖아?"

"...."

호센벨트가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렇게 된 거였나.

이제야 모든 게 이해가 됐다.

언노운이 그토록 강한 이유도.

자신들에게 적대한 이유도.

무엇보다 강진혁이란 플레이어가 언노운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것도 앞뒤가 맞았다.

둘 사이에 계속해서 접점이 있으니 서로가 잘 알고 있던 거겠지.

"원하는 건 모두 들은 건가?"

묵묵히 지켜보던 교주가 물었다.

"예.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호센벨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가라. 강진혁. 이제는 다시 볼 일이 없겠구나."

그리고 마지막으로 진혁을 바라보다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바로 그 순간.

띠링!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상대방이 보유하고 있는 능력 중 하나를 고르십시오.]

복사 조건의 달성을 알리는 상태창이 나타났다.

'딱 맞춰서 성공했군.'

진혁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수치플을 겪긴 했지만, 원하는 목적은 달성했다.

"정신방벽을 복사하겠어."

[고유능력 '정신방벽(S)'를 복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복사된 스킬은 '세계의 기억'에 저장됩니다.]

[정신방벽]

입수 난이도: S

내용: 정신계열을 강화시켜 주는 스킬로, 상태창의 보안을 지킬 수 있는 건 물론, 각종 다양한 종류의 정신 공격으로부터 시전자를 보호합니다.]

S급에 해당하는 정신계 방어 능력.

이후의 일을 생각하면 '정신방벽'은 반드시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바로 그때.

"제물들을 밖으로 내보내라. 이제 곧 의식이 거행된다."

간수장이 간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아, 안 돼!"

"살려 주세요. 제발!"

"난 여기서 죽기 싫어. 죽기 싫다고!"

갇혀 있던 플레이어들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소용없다.

광신도들 앞에서 그 어떤 동정이나 연민도 기대해선 안 됐으니까.

'슬슬 갈 시간이군.'

드디어 이 정신병동의 피날레를 장식할 마지막 무대로 이동할 때가 왔다.

진혁이 감방 안을 살폈다.

'찾았다.'

다른 벽돌들에 비해 짙은 회색빛을 띤 벽돌이 보였다.

1초 간격을 두고 벽돌을 일곱 번 두드리자.

쿠쿵!

신기하게도 벽의 한쪽에 작은 공간이 나타났다.

바로 하수도로 이어지는 틈이었다.

진혁이 조심스럽게 숨겨 뒀던 또 하나의 단약을 꺼내 하수도로 밀어 넣었다.

붉은색 단약이 데굴데굴 굴렀다.

그리고 잠시 뒤.

퐁당!

기분 좋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

제물의 방.

콜로세움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공간에는 의식을 보기 위한 광신도들로 가득 차 있었다.

"크아아아!"

"크오오!"

신의 대리자라 불리는 '브레이커'가 제물들을 학살했다.

도끼와 대검이 번뜩일 때마다 플레이어들의 몸이 반으로 토막 났다.

"죽여라!"

"신께 영광을!"

"오오오! 더! 더! 더! 더 많은 제물이 필요하다!"

흘러넘친 피가 모래를 붉게 적셨다.

그럼에도 광신도들의 광기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더 많은 피를 원하는 것이다.

이 미쳐 버린 세계를 잠시나마 잊기 위해서라도.

덜덜덜!

그리고 대기실에서 그 생지옥을 바라보는 플레이어들의 얼굴은 하얗게 질리다 못해 창백한 지경이었다.

"우우욱!"

"웨엑!"

울거나 구토를 하는 건 비교적 양반이다.

심한 경우엔 오줌을 지리거나 기절해 버리는 이들도 있었다.

이제 잠시 뒤엔 자신들도 저 안으로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놈들을 데리고 대리자와 싸우는 건 불가능하겠지.'

진혁이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플레이어들을 보며 혀를 찼다.

제대로 붙어 보기도 전에 꼬리를 말아 버린 녀석들은 오히려 짐만 될 것이다.

하지만 저들을 탓할 수만도 없었다.

오히려 지금 이곳에서 가장 쓰레기들은 플레이어들의 목숨을 갖고 장난을 치는 광신도들일 테니까.

진혁의 눈에 차가운 살기가 맴돌았다.

'정말... 아무런 거리낌 없이 처리할 수 있겠군.'

악인을 죽이고 스탯을 얻는 히든 퀘스트.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것에 일말의 거부감이 있을까 생각했는데.

전혀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그럼, 무대도 갖춰졌고 주연배우들도 모두 참석했으니....

'슬슬 시작해 볼까.'

진혁이 품속에서 절묘하게 숨겨뒀던 책 한 권을 꺼냈다.

마케드리안의 마도서.

마법 도서관에 있던 수많은 마도서 중에서 이 책을 고른 건 딱 하나의 이유 때문이다.

촤르르륵!

책장이 넘어갔다.

룬어로 쓰인 수많은 활자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평생을 세상의 법칙의 허점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 고룡.

이 책엔 그 드래곤의 생이 담겨 있다.

[블랙 드래곤, '마케드리안의 마도서'를 읽으셨습니다.]

동시에.

[봉인되었던 고유 능력이 해방됩니다.]

[봉인되었던 스킬들이 해방됩니다.]

[제한 시간: 0h:9m:59s]

힘을 억제하는 족쇄가 풀렸다.

89화. 산제물의 의식 (3)

전신을 따라 퍼지는 마력.

기분 좋은 고양감에 심장이 빠르게 고동쳤다.

'그래, 이 맛이지.'

당장이라도 날뛰고 싶은 기분이랄까?

이토록 좋은 걸 지난 몇 시간 동안 어떻게 참았는지 모르겠다.

진혁이 만족스럽게 주먹을 쥐었다 폈다.

'좋아.'

완벽하다.

능력이 모두 부활한 이상, 이제 그 무엇도 두렵지 않다.

바로 그때.

"이제 너희 차례다. 부디, 화려하게 죽길 바라지."

간수장이 플레이어들을 향해 킬킬댔다.

동시에.

쿠쿠쿠쿵!

생과 사를 나누던 문이 개방되었다.

***

후욱하고.

모래에 섞인 피비린내가 코끝을 찔렀다.

도합 일곱의 브레이커들이 새로운 제물들을 바라봤다.

"크오오오!"

"오오오!"

거대한 흉기를 든 채 흥분하는 모습.

붉게 덧칠해진 몸에선 아직까지 열기가 피어올랐다.

"크르르...."

그리고 그 한가운데는 등에 검은색 가시가 잔뜩 달린 대형 마수도 있었다.

브레어커와는 차원이 다른, 규격 외의 크기를 자랑하는 괴물이다.

'포식자로군.'

엄청난 양의 먹이를 먹어치우는 탑의 청소부.

침이 뚝뚝 떨어지는 놈의 아가리엔 아직까지 먹다 남은 인간의 찌꺼기가 있었다.

"다, 당장 도망쳐야 돼."

"빌어먹을. 어디로 도망치란 거야? 우린 완전히 독 안에 든 쥐라고!"

"흐윽. 어, 엄마...."

도망칠 곳 따위는 없다.

아무리 달려 봤자 사방이 10m가 넘는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니까.

모두들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기 위해서 뒷걸음질 쳤다.

절망만이 감도는 바로 그 순간.

저벅.

사람들 앞으로 누군가 나섰다.

진혁이었다.

"뭐야? 저 멍청한 놈은?"

"푸하하! 먼저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 보군."

"깔깔깔! 하긴, 뒤에서 공포에 떠느니 먼저 신께 가는 게 나을 수도 있겠죠."

관중석에 있던 광신도들이 조소 어린 말들을 쏟아냈다.

어이가 없는 거겠지.

무기도 없는 맨몸으로, 그것도 너무나 무방비하게 거리를 좁혔으니까.

그런데.

"헉!?"

"어떻게...?"

진혁이 브레이커의 코앞까지 다가갔음에도, 브레이커는 진혁을 공격하지 않았다.

아니, 아예 존재 자체를 눈치 채지 못하기라도 한 것처럼 눈길조차 주질 않았다.

'역시, 쓸 만한 스킬이라니까.'

진혁이 느긋하게 마수들의 한복판으로 이동했다.

하루에 세 번 사용할 수 있는 '흐릿한 체취'.

한 번 사용할 경우 상대의 기감을 흐트러뜨릴 수 있었지만.

세 번을 동시에 사용할 경우엔 아예 존재감을 무(無)로 만들 수 있었다.

'보통은 한 번씩, 세 번의 목숨을 얻는 데 만족하겠지.'

그러나 고인물의 경우엔 다르다.

단 한 번의 기회를 살려... 승부 그 자체를 뒤엎는 방법을 모색할 테니까.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어느새 중앙에 도착한 진혁이 발로 땅을 두드렸다.

쿵! 쿵!

두 번의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자.

[붉은 단약 '염(炎)'이 발동됩니다!]

콰콰콰콰콰콰콰!

지면에서 거대한 불줄기가 치솟았다.

'불꽃놀이는 화려한 게 제 맛이라니까.'

정확하게 하수도의 위치와 물이 흐르는 속도를 계산해 발동시킨 단약이다.

실수 따위가 있을 리 없다.

이미 수십 번도 더 해 봤던 거였으니.

"크아아아!"

"케에엑!"

불꽃에 휩싸인 브레이커들이 비명을 질렀다.

아무리 죽지 않는다곤 하나, 산 채로 타들어 가는데 당연히 고통스러울 수밖에.

"왜 그리 엄살을 피우고 그러냐?"

너희들, 불태우는 거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지, 진정하십시오! 신의 대리자들이시여."

간수장이 어떻게든 브레이커들의 몸에 붙은 불씨를 끄려고 했다.

하지만, 물동이를 들고 가까이 다가간 게 실수였다.

잔뜩 날카로워진 브레이커의 눈엔 지금 뵈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망치를 횡으로 가로질렀다.

콰아앙!

"쿠워억!"

일격에 머리통이 수박처럼 박살났다.

멍청한 짓을 했으니 당연한 결과다.

그런데.

[악인의 죽음에 관여했습니다.]

[적응형 스탯 0.1포인트를 획득하셨습니다.]

[현재 보유중인 적응형 스탯: 10.1]

뜻밖의 상태창이 나타났다.

호오?

진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내가 직접 죽이지 않아도 스탯을 얻는다는 건가?'

붉은 단약을 발동해 간접적으로 죽음에 관여하는 것만으로도 조건이 충족될 줄이야.

이건 꽤나 흥미롭다.

진혁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본 광신도들은 크게 기함했다.

"뭐, 뭐야? 저 불줄기는!"

"설...마. 스킬을 쓴 건가?"

"말도 안 되는 소리! 이곳에선 신께서 모든 것을 관장하신다. 신의 법칙과 신의 율법만이 이 층을 지탱하는 유일한 규칙이란 말이다!"

고유 능력과 스킬이 봉인된 이상, 그 누구도 사악한 능력을 사용할 순 없다.

분명, 무언가 속임수를 쓴 것이리라.

그러나, 이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정말로 놀랄 만한 일은 지금부터 시작이었으니까.

"미안하지만, 10분밖에 없으니 빨리 끝낼게."

정확히 말하면, 이제 8분쯤 남았다.

진혁이 쌍룡검을 꺼냈다.

'검의 무덤'이 발동되자 검신을 타고 검은 기운이 일렁였다.

검은 초승달이 드리웠다.

"크르르?"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았는지 포식자가 가시를 잔뜩 세웠다.

바로 그 순간.

서걱!

어떠한 미사여구도 필요 없는, 오직 적을 죽이기 위한 검격이 공간을 가로질렀다.

일검(一劍).

단 한 번의 칼놀림에 태산 같던 포식자의 몸이 무너졌다.

그 흔한 비명 소리조차 없었다.

대신 그 자리엔 분수처럼 솟구치는 피가 있을 뿐이었다.

"도망쳐주는 건 이제 끝이야."

아무리 이곳에서 강력하다는 소리를 듣는다고 해도 그건, 능력이 봉인되어 있을 때 이야기고.

본래 실력은 1층의 네임드 수준에 불과한 놈들이다.

제대로 싸운다면 상대가 되질 않는다는 뜻이다.

믿었던 마수들이 모조리 전투 불능이 되자 공기가 급변했다.

"히이익!"

"괴, 괴물이다!"

"무슨 저런 인간이...!"

여유와 광기는 공포로 변했고.

저 위에서 죽음을 구경하던 이들은 이제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도망쳐야만 했다.

물론, 그걸 가만히 보고 있을 진혁이 아니었다.

"어이가 없네. 자기 목숨은 그렇게 아까웠던 거냐?"

차게 웃은 진혁이 마지막 단약을 꺼냈다.

[흑색 단약 '암(黯)'을 사용했습니다.]

[시전자의 주위 200m에 '검은 장벽'이 펼쳐집니다!]

경기장 전체를 완전히 감싼 검은색 막.

신을 칭송하기 위한 장소는.

어느새 자신들의 무덤이 될지도 모르는 사지로 변했다.

***

'흠....'

진혁이 제자리에 선 채 미간을 구겼다.

이제 남은 건 히든 퀘스트를 달성하는 것뿐. 하지만 딱 하나가 마음에 걸렸다.

단순히 살인에 대해서 거부감이 든다는 이유가 아니다.

선량한 사람이면 몰라도.

타인의 죽음을 보며 킬킬대던 놈들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단지.

이 많은 인원이 뿔뿔이 흩어져 숨어 버리기라도 한다면, 찾아내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다.

'좀 더 효과적인 방법을 써야겠군.'

직접 죽이지 않아도 된다는 건 이미 간수장을 통해 확인했다.

관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터.

그렇다면....

"이봐요."

진혁이 경기장 외벽에 웅크리고 있는 플레이어들을 불렀다.

"...예. 예?"

"저, 저희 말씀이십니까?"

"다들 왜 그러고 있어요? 집에 안 갈 거예요?"

이미 마수는 죽거나 전투불능이 되었다.

더 이상 잡아먹힐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지, 집에 가도 돼요?"

"정말로요?"

"물론이죠. 다들 어서 일어나세요."

진혁이 생긋 웃었다.

그러자.

"와아아아!"

"살, 살았다! 살았다고!"

거대한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그동안 쌓여 있던 온갖 감정이 일순간에 폭발한 것이다.

하지만.

좋아하긴 살짝 이르지.

마음 놓기엔 너무 큰 산이 남아 있거든.

"그런데 이대로 나가도 될까요? 5층에 광신도들이 남아 있는 한, 언제 어디선가 또 마주칠지도 모르는데?"

진혁의 말에 달아올랐던 공기가 급속도로 식었다.

"아!"

"그, 그건...."

잊고 싶었던 현실이 다가왔다.

만약, 다시 이 끔찍한 놈들과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모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럼,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쩌긴.

"후환을 없애야죠."

진혁이 마수의 사체에서 무언가를 뜯어냈다.

우드득...!

등 뒤에 돋아난 돌기 중 하나였다.

예리하게 빛나는 칼날.

이거라면 충분히 무기로서 활용이 가능할 것이다.

"저 위에, 당신들을 이곳에 가둔 놈들이 있어요."

진혁이 손가락으로 관중석을 가리켰다.

마수들만 믿고 기고만장해 하던 광신도들이 보였다.

"또다시 이런 곳에 잡혀오기 전에, 여러분이 당했던 것을 그대로 돌려주세요."

죽이든가.

죽든가.

선택지가 둘 중에 하나뿐이라면....

선택해야 하는 건 당연히 하나다.

"으아아아!"

"저... 저 개새끼들 다 죽여!"

"또다시 이 빌어먹을 곳에 갇힐 순 없어!"

"아주 벌집을 만들어주지!"

겁에 질린 산제물들이 맹수로 변한 건 바로 그때였다.

너도나도 손에 흉기를 들고 관중석으로 뛰쳐나갔다.

"자, 잠깐만!"

"멈춰!"

몇몇 간수들이 막아 보려 했지만, 수의 차이가 너무 많이 났다.

무시한 채 관중석으로 오르는 플레이어들.

게다가 무기까지 있으니 머지않아 상황은 정리될 것이다.

모두 쓸어 버려라.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서!

***

"우어억!"

"꺄아아아악!"

지하는 곧, 처절한 절규로 가득 찼다.

파리 목숨처럼 살아온 시간에 대한 보상을 원하듯.

복수는 잔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왜일까?

피로 얼룩진 현장 속에 있으면서도....

일말의 동정심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통쾌했다.

자기들이 뿌린 걸 그대로 거둔 셈이었으니까.

무엇보다 심장을 짜릿하게 만드는 건.

[악인의 죽음에 관여했습니다.]

[적응형 스탯 0.1포인트를 획득하셨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포인트: 32.9]

[악인의 죽음에....]

바로 가만히 있어도 포인트가 쌓인다는 점이다.

벌써 33포인트나 모았다.

충실한 일꾼들이 있는 게 이렇게 좋은 거였구나.

만족스럽게 웃던 진혁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사람들이 교주한테 가기 전에 슬슬 움직여야겠어.'

교주가 있는 다른 곳에 비해 깊숙한 곳에 있었지만, 그것도 시간문제다.

너무 늦기 전에 가장 중요한 목표를 처리해야겠지.

진혁이 한쪽에 있는 광신도들을 바라봤다.

이들은 애초에 교주를 따르는 광신도들이 아니다.

탑을 정복하기 위해 도전했지만, 오히려 포로로 잡혔고.

결국, 자신들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 함께했던 동료를 죽인 플레이어들었다.

그중에선 진혁과 같은 방에 있던 이들도 섞여 있었다.

환풍구로 열심히 도망치나 싶더니 그다지 멀리 도망가진 못했던 모양이다.

'흑인 여성과 동양인 여성이 보이질 않는군.'

남은 건 백인 남성과 여성뿐.

나머지 두 사람이 어떻게 됐는지는 뻔했다.

"역겹네."

진혁이 짧게 내뱉었다.

그러자 흠칫하고.

눈을 마주친 놈들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우린... 우린 저놈들이 시키는 대로 한 죄밖에 없습니다!"

"그, 그래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몇몇은 발악을 했다.

"제기랄! 우리라고 뭐 좋아서 한 줄 알아?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죽었어! 극단적인 상황이었다고!"

"남의 일이라고 함부로 말하지 말란 말이야!"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

자신들은 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거칠게 부르짖었다.

물론, 스스로가 원해서 살인을 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타의에 의해 억지로 살인을 했을 수도 있겠지.

"어떤 상황이었는지 이해는 해. 불가피한 상황이라는 것도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을 테고."

긴급한 상황에서 자신이 살기 위해 누군가를 죽이는 것이 용서받을 수 있을까?

글쎄.

도덕적으론 모르겠지만, 법적으론 정상이 참작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여기서는 그런 시시비비를 따지는 것 따윈 무의미하다.

개인마다 기준이 모두 다를 테니까.

무엇보다 지금은 도덕 시간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너희를 살려 줄지 말지 결정하는 건 내가 아니야."

고저 없는 목소리과 함께.

푸욱!

가장 앞에 있던 플레이어의 심장에 바람구멍이 났다.

"커...억?"

[악인을 처치했습니다.]

[적응형 스탯 0.1포인트를 획득하셨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적응형 스탯: 33]

시스템이 정의했다.

이놈들도 악인이라고.

그걸로 충분하다.

"개인적인 감정은 없어."

이건 진심이다.

파츠츠츠!

쌍룡검이 다시 한번 격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