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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공격은 최선의 방어다. (4)

"와아아아아!"

갈 곳을 잃은 적들은 일단 기사의 지휘에 따라 무너진 성벽 앞에 모여들었다.

쿠웅! 쿠웅!

구멍 난 성벽은 용병들이 방패로 빽빽하게 막고 있었다. 적들이 온 힘을 다해 방패를 밀어붙였지만, 용병들은 이를 악물며 버텨 냈다.

투웅!

적들이 밀칠 때마다 용병들의 방패가 물결치듯 흔들렸다.

방패에 막힌 적군 병사들이 무기를 물린 순간, 지셀이 크게 외쳤다.

"공격!"

용병들이 방패 사이사이를 살짝 벌렸다.

타이밍을 놓친 적들이 미처 방어하기도 전에, 방패 사이에서 수십 개의 기다란 창이 튀어나왔다.

푹! 푸욱! 푹!

"끄아아악!"

2열에 대기하던 용병들이 찌른 창이었다.

적군의 선두가 쓰러지자마자 지셀이 명령을 내렸다.

"닫아라!"

철컹!

다시 방패가 빈틈없이 붙었다.

하지만 적은 아직도 수가 많았다.

"전진해! 계속 전진해라!"

"궁병대 뭐 하나! 엄호해라!"

"멈추지 말고 들어가라!"

기사들의 지휘 아래 적군 병사들이 다시 무기를 앞세우며 달려들었다.

콰앙! 콰앙!

용병들은 몇 번 더 창으로 그들을 떨쳐 냈지만, 적군이 쉼 없이 몰려들자 더 이상 방패를 열지 못했다.

뚫릴 듯 안 뚫릴 듯 아슬아슬한 상황을 타개한 건 성벽 위에서 내려온 공격이었다.

콰앙! 콰앙! 콰앙!

지셀은 성벽에 올라가서 주변에 쌓인 잔해는 물론, 투석기에서 쏜 바위까지 집어 던졌다.

한번 집어 던질 때마다 선두에 있던 적들이 우수수 죽어 나갔다.

접근하기 어려워진 병사들이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지셀이 있는 쪽은 한동안은 쉽게 뚫리지 않을 거 같았다.

상황을 확인하던 즈발터는 재빨리 결단을 내렸다.

"최소한의 인원만 남기고 나머지는 이쪽으로 이동하라!"

성벽 위에 있던 페르디움 병사들이 재빨리 또 다른 공성탑이 있는 쪽으로 넘어갔다.

"와아아아!"

비록 페르디움 군이 상대편보다 수가 적다고 하나, 병력을 응집하니 공성탑에서 나오는 적들이 밀리기 시작했다.

결국 적군은 점점 공성탑 안쪽으로 밀려났다. 사기의 차이에서 나오는 결과였다.

공성탑 옆으로 쏘아 대는 적 궁병대의 지원도 소용이 없었다.

인원이 많아진 페르디움의 병사들이 방패를 들고 막았기 때문이다.

"으으으! 이놈들이 감히!"

빅토르는 부들부들 떨며 이를 갈았다.

자신이 쓴 전술은 정석이었고 틀린 점이 없었다.

이르면 오늘, 늦어도 내일이면 성을 함락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갑자기 이상한 놈들이 튀어나오지만 않았다면 그가 예상한 그대로 되었을 것이다.

'어디서 저런 정예 부대가 나온 거지?'

성문에서 나온 놈들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고 강했다.

찰나의 틈을 노리고 아군의 진형을 붕괴시켰다.

워낙 거리가 있어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려웠지만, 공성탑을 아예 무너뜨린 걸로 보아 기사급 인원도 몇 명 섞인 모양이었다.

놈들의 등장에 당황한 사이, 전장은 개판이 되었다. 뒤늦게 나머지 병력을 움직였지만 잡지 못했다.

놈들의 전법이 운이었든 아니면 실력이었든, 자신이 제대로 한 방 먹은 것이다.

'지금이라도 총공격을....'

그는 손을 부들부들 떨며 고민했지만 결국 포기했다.

적은 사기가 높아졌고, 아군은 성벽 앞에서 정신을 못 차리고 우왕좌왕하고 있다.

남은 공성탑마저도 밀리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총공격을 감행해 봐야 피해만 늘어날 뿐이다.

빅토르는 한숨을 내쉬고 어쩔 수 없이 후퇴 명령을 내렸다.

"병력을 물려라."

퇴각 명령이 떨어지자 남은 방패병들이 모두 앞으로 달려 나가 아군을 보호하기 시작했다.

특히 공성탑 주변으로 몰려가 빽빽하게 방패를 들어 올렸다.

모든 병력이 빠져나간 뒤 기사들까지 마나를 동원해 공성탑을 뒤로 끌어 냈다.

"야! 던져! 던져!"

란돌프가 주변에 널려 있는 사람 머리통만 한 돌에 마나를 담아 마구 집어 던졌다.

지셀이 던지는 걸 곁눈질로 보고 따라 한 것이었다.

터엉! 터엉!

방패병이 돌을 얻어맞고 쓰러지면 그 사이로 화살이 득달같이 날아들었다.

큰 피해는 줄 수 없었지만, 아군의 사기를 높이는 데에는 효과가 있었다.

곁에 있던 기사들도 마나를 마구 뿜어내며 돌을 던졌다.

"그만! 돌도 아껴라!"

돌 하나도 아까운 상황이었기에 즈발터는 기사들의 행동을 제지했다.

적들이 언제 사다리를 이용할지 모른다. 그때를 대비해서라도 돌이나 화살은 최대한 아껴야 한다.

적들은 훈련을 잘 받았는지 후퇴하는 모습도 질서정연했다.

모든 적들이 완전히 물러나자 즈발터가 검을 들고 크게 외쳤다.

"적들이 물러났다!"

"와아아아아!"

페르디움의 병사들도 손을 크게 들고 함성을 내질렀다.

절대 막을 수 없을 거 같았던 적들의 공세를 막아 냈다.

이걸로 전쟁이 끝나지는 않겠지만, 한 번이라도 공격을 막아 냈다는 사실이 사기에 큰 영향을 미쳤다.

병사들이 환호하는 동안 즈발터는 살짝 고개를 돌려 지셀을 바라보았다.

'너는 도대체...'

아직도 얼이 빠져 있는 용병들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웃고 있는 아들.

평소 모습과 별다를 게 없었다.

'도박이었던 것이냐, 아니면 확신한 것이냐? 생각해 낸 것이냐, 생각이 아예 없는 것이냐?'

지셀이 만들어 낸 결과를 보면, 지셀이 순간적으로 내린 판단이 얼마나 기막힌 것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적의 병력, 진군 경로, 공성 병기와 나머지 병력의 배치, 적장의 의도와 방심.

그러나 그건 성공 가능성이 있을 때나 통하는 전략이다.

지셀의 판단이 아주 약간이라도 빗나갔다면, 지셀과 용병들은 물론 페르디움의 병사들도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눈 한 번 깜박이는 사이에도 바뀌는 전장의 흐름을 대체 어떻게 확신하고 움직인단 말인가?

자신도, 란돌프도.... 아니, 어떤 지휘관도 그런 판단을 순간적으로 내리지는 못할 것이다.

게다가 저 공성탑을 혼자 가서 부술 생각을 하고, 그걸 정말 성공할 줄이야.

'전장에서마저도 제멋대로라니.'

즈발터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젓고 말았다.

'어울리긴 한다만... 너무 위험하구나.'

어쩌면 지셀의 성향과 딱 맞는 행동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일단 지셀을 불러 물었다.

"...왜 그렇게 위험하게 행동한 게냐?"

"초전이라 적이 방심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을 뿐입니다."

"전장에서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건 묘수를 만들기에 좋다. 하지만 야성만 남아 있는 맹수는 결국 덫에 잡히는 법이다. 목숨은 하나뿐이니 언제나 신중히 행동해라."

"알겠습니다."

'제가 아버지보다 전쟁 경험도, 인생 경험도 더 많습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었던 지셀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신나게 환호하던 란돌프도 어느새 곁에 다가와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크흠흠, 대공자의 활약에 조금 놀랐습니다. 하지만 매번 이런 식으로 움직이면 곤란합니다."

이런 경우가 가장 애매하다. 지휘를 따르지 않았는데 공을 세웠을 경우. 화를 내기도, 칭찬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란돌프는 언제나 무시했던 대공자가 이 정도로 실력이 있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혹시 나보다 강한 거 아냐?'

문득 불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자신도 하려면 할 수 있을 거 같기도 했다.

물론 성공 여부는 장담할 수 없겠지만.

지셀은 란돌프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상황이 급박해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오늘처럼만 잘 막아 내면 될 겁니다."

앞으로는 안 하겠다는 말은 안 한다.

란돌프는 못마땅한 듯 혀를 찼지만 즈발터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로게스 백작이 지원군만 보내 준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구나."

로게스에서 힘을 보태 준다면 승리할 수 있을 거 같았다.

마음은 초조한데 아직도 전령에게 소식이 없으니 아쉽기만 했다.

그래도 오늘 지셀이 활약한 덕분에 그 마음이 조금은 가시는 듯했다.

"어쨌든... 전쟁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러니 항상 조심스럽게 움직이거라."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믿는 것은 다른 문제다.

지셀은 언제나 심각한 위험을 무릅쓰고 독단적으로 움직였다.

오늘 보니 나름 실력도 있고 판단력도 좋은 것 같지만, 자칫 한 번의 실수로 목숨을 날릴 수 있는 게 전쟁이다.

즈발터는 걱정하는 기색을 지우지 못했다.

물론 지셀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어설픈 마음가짐으로는 절대 이길 수 없습니다.'

델파인 공작은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해도 이길 수 있을까 말까 한 적이다.

열세인 자신들이 이기려면 언제나 한계 이상의 힘을 뽑아내야 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다른 이들이 이해할 리 없다.

지셀은 그저 알겠다고만 하고 물러나려 했다.

"잠깐, 지셀."

즈발터가 돌아서는 지셀을 다시 붙잡았다.

그는 왠지 어색해하며 괜히 뒷짐을 지고 헛기침했다.

"크흠, 그래도 네 덕분에 승리할 수가 있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하마. 잘했다."

칭찬해 주고 싶은데, 살가운 관계가 아니어서 그런지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전쟁 직전까지만 해도 죽일 놈, 살릴 놈 하고 있었으니.

기묘한 분위기 속에서 란돌프 또한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대공자님이 용병들을 그렇게 지휘할 수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거기다 혼자 공성탑까지.... 크흠, 어쨌든 실력이 많이 늘었군요."

난생처음 지셀을 칭찬하고 그는 조금 민망한 듯 웃었다.

지셀은 두 사람에게 살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별말씀을."

어색해진 두 사람을 내버려 두고 지셀은 다시 용병들에게 돌아갔다.

용병들은 한데 모여 여전히 눈만 끔뻑이고 있었다.

이겨서 좋긴 한데 왜 이겼는지 모르는 것이다.

공성탑을 부수고 유리해진 건 알겠는데, 적의 대군은 도대체 왜 그렇게 무력하게 당했을까?

상황을 미처 파악하기도 전에 일이 끝나 버렸다.

"도대체 우리가 뭘 한 거지? 어떻게 이긴 거야? 정말 대장이 혼자 부순 게 맞아?"

"우리는 그냥 대장 따라다니며 하라는 대로 했는데 이겼지."

"대장이 훈련 때마다 한 말 기억나?"

"너희가 생각하고 이해할 때쯤이면 적도 다 알게 된다. 그러니까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만 해라."

"오늘이 그런 거였지?"

결국 결론은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로 끝났다. 전술적 안목이라고는 기대할 수 없는 용병들다웠다.

전략적 목표나 작전을 미리 알려 줘서 익히게 하는 건 어렵지 않다.

그렇게 하면 병사들이 당황하지 않고 더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기도 하고.

하지만 급박하게 돌아가는 전장에서 모든 걸 설명하고 이해시킬 수는 없었다.

더욱이 지셀의 전략은 용병왕으로서의 경험과 날카로운 본능을 통해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떠올리는 것이었다.

머릿속으로 정리해 남들한테 설명하고 있다간 적절한 타이밍을 놓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지셀은 그냥 무조건 자신의 움직임에 맞춰 따르도록 용병들을 가르쳤다.

기존 용병들은 숲에서의 경험이 있기에 충격이 덜했지만, 새로 영입한 용병들은 아직도 얼떨떨한 모양이었다.

"막상 움직이니까 정신없어서 그런지 괜찮더라고."

"맞아, 생각 많아져 봤자 쫄기만 하니까. 그럴 때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앞에 있는 놈들 쳐 죽이는 게 최고지."

적의 대군을 보고 불안했던 마음은 어느 순간부터 사라지고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불안감을 느낄 새도 없었다는 게 맞을 것이다.

잠깐 무기 좀 휘두르고 왔더니 자신들이 뭔가 큰 활약을 했단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하려면 정신 바짝 차려야겠어. 멍청하게 굴다가 뒈지면 억울하잖아."

"그나저나 대장 진짜 강한데? 어지간한 기사들 저리 가라야."

지셀은 웅성대는 용병들을 격려했다.

"좋아. 이 기세로 계속 나가자고. 훈련한 대로만 하면 된다. 앞으로도 잘 따라와라."

카오르는 지셀에게 엄지를 치켜세우며 웃었다.

"꽤 재미있었습니다. 이 정도로 스릴 넘치는 작전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입니다."

켈베로스 용병단은 퇴각로를 지키느라 정말 미친개처럼 사방을 물어뜯으며 싸웠다.

애초에 깊게 생각하지 않는 그들로서는 무작정 싸우라고 내던져 준 게 정말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지셀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 아직 더 끝내주는 게 남아 있으니까."

카오르는 낄낄대며 환호했지만, 벨린다는 환장할 지경이었다.

"뭐라고요? 더 끝내주기는 뭐가 더 끝내주는 건데요! 그러다 목숨도 끝나요! 도련님,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요?"

공성탑이 무너졌을 때는 너무 놀라서 심장이 벌렁거렸다.

상황이 다급하기에 명령을 따르긴 했지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리 강하다 해도 한계는 있다. 어쩌자고 저렇게 몸을 사리지 않고 날뛴단 말인가.

그녀는 지금이라도 지셀을 둘러업고 도망가 버릴까 고민했다. 물론 룬스톤도 챙겨서.

"괜찮아, 몸 사리면서 하고 있어. 걱정하지 말라니까?"

"몸을 사려요? 이게 사린 거면 뭐... 다음에는 적진에 혼자 돌격할 판인데요!"

"하하하하."

"왜 아니라고 안 하시는데요!"

벨린다가 빽 소리를 질렀지만, 지셀은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자, 다음에는 더 바빠질 테니 모두 푹 쉬어 둬."

지셀의 말에 용병들이 여기저기서 외쳤다.

"대장이나 푹 쉬쇼! 오늘 제일 날뛰던데!"

"고든 이놈은 무서워서 오줌 싸는 거 아니야? 오늘은 안 쌌냐?"

"이 새끼가! 내가 제일 앞에서 막았거든!"

"대장, 무릎은 괜찮으쇼? 예전에 화살 맞았다더니 오늘은 공중으로 휙휙 날아다니던데?"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대장만 믿고 따라가면 된다고!"

이제 용병들은 지셀의 말이라면 지옥이라도 따라갈 기세였다.

여전히 상황 파악은 안 됐지만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하라는 대로 하면 이길 수 있다는 믿음, 그거 하나면 충분했다.

지셀은 웃고 떠드는 용병들을 보며 미소 짓고 몸을 돌렸다.

그 잠깐 사이 그의 표정은 순식간에 서늘해졌다.

'놈들은 아직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고작 이틀이 지났을 뿐이다.

첫날은 준비하느라 공격할 생각조차 없었고, 오늘 공격도 전심전력은 아니었을 것이다.

'간을 볼 생각이었겠지. 계획이 실패했으니 다르게 움직일 거야.'

지셀에게 한 방 먹고서도 똑같이 움직일 리가 없었다.

용병들의 힘을 얼핏 봤으니 이제는 그것까지 고려해 움직일 터였다.

'저쪽이 작정하고 모든 병력을 쏟아부으면 막기 어려워져.'

아직 저들에겐 공성탑 세 대와 병력 수천이 남아 있다.

적들도 보급 문제로 장기전은 꺼려질 테니, 최대한 빨리 결판내고 싶어 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지셀이 원한, 그리고 직접 만든 상황이었다.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다.'

싸움은 이제 겨우 시작이었다.

74화 역시 제법인 놈들이야. (1)

"으으으으! 고작 이런 곳에서!"

빅토르는 참을 수가 없었다.

병력 피해는 크지 않지만, 비싸고 귀한 공성탑 하나를 잃은 건 큰 실수였다.

거기에 전술상 의도적으로 후퇴한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후퇴했다는 데 자존심이 크게 상했다.

"후우, 후우...."

씩씩거리는 빅토르의 옆에서 타모스가 미덥지 않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새끼 그냥 허당 아니야?'

전략이 어쩌니 공성이 어쩌니 잘난 척을 하더니 결국 별 피해도 못 주고 물러났지 않은가.

그래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성문에서 튀어나왔던 그 검은 기사들은 전투에 문외한인 자신이 봐도 상당히 강해 보였다.

만약 데스몬드의 도움 없이 자신들만 쳐들어왔다면 공성을 시작하기도 전에 박살이 났을 것이다.

"크흠흠. 그나저나 저쪽, 그 검은색 기사들이 좀 강해 보이던데. 괜찮은 거요?"

"기사가 아니오. 마나를 사용하는 움직임이 아니었소."

"기사가 아닌데 그렇게 강하다고?"

"훈련이 잘되었고 지휘를 잘 따르면 가능한 일이지. 애초에 기사가 수백 명이라면 그냥 성문을 열고 돌격해 왔을 것이오. 페르디움에 그런 병력이 있을 리 없잖소."

"크흠, 그러면 이제 어찌할 생각이오? 이 상태로 계속 간만 볼 생각이오? 안 통하는 거 같은데 그냥 다 몰려갑시다."

그러자 빅토르는 그를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타모스는 식은땀을 흘리며 양손을 들었다.

"그냥 의견이오, 의견. 알아서 잘하시겠지."

빅토르는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타모스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눈치를 보다 또 슬그머니 물었다.

"여기에 4서클 마법사가 두 분이나 계신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분들의 힘을 빌리면 되지 않겠소?"

"아직 때가 아니오."

노골적으로 불쾌해하는 어조였다.

타모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소리 없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쯧쯧, 누가 기사 아니랄까 봐 자존심은....'

그동안 타모스가 지켜본 바로는 빅토르와 마법사들의 사이가 영 좋지 않았다.

타모스는 비록 전투에는 깡통이었지만, 음험한 정치 구도는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빅토르와 마법사들이 마주칠 때마다 느끼는 불쾌함과 어색함이 너무나도 잘 보였다.

'하긴, 기사들과 마법사들은 사이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지.'

4서클 마법사라면 어지간한 영지의 전속 마법사가 될 수 있다.

빅토르가 나서 달라고 부탁한들, 자존심 강한 그들이 빅토르의 지시에 고분고분하게 따를지는 의문이었다.

타모스는 고개를 저으며 슬쩍 막사를 나가 버렸다.

계속 있어 봤자 말도 안 통하고 핀잔만 받으니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혼자 남은 빅토르는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젠장.... 이런 굴욕이라니."

지금껏 금방 처리할 수 있을 거라 믿고 무시하던 페르디움에 허를 찔렸다는 사실이 더 치욕스러웠다.

아군 병력을 유린하듯 휩쓸고 공성탑까지 무너뜨린 그 검은 기사가 자꾸 떠올랐다.

'전투력은 강했지만.... 그 짧은 순간에 그렇게 빨리 판단했을 리는 없다. 그냥 힘을 믿고 일단 나와 본 거겠지.'

빅토르는 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든 상대방을 깎아내렸다.

아무 생각 없이 밀리는 것 같으니 급한 마음에 나왔을 것이라고 합리화했다.

생각이 많아지다 보면, 가끔 무식하고 운 좋은 이들에게 당하기도 하니까.

어쨌든 이만 갈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천천히 화를 삭이며 새로운 계책을 사용하기로 했다.

"우습게 보긴 했지."

빅토르는 생각했던 것보다 상대가 강하다는 걸 인정했다.

하찮은 시골 영지이지만, 역시 북방에서 오랫동안 싸워 온 자들이라 그런지 만만치가 않았다.

"안쪽에서 흔들어 주마."

빅토르는 은밀히 열 명의 기사를 불러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내일 밤, 페르디움에 잠입해 동쪽 성문을 점령해라. 근처에 기병 오백과 보병 천 명을 대기시켜 놓겠다. 동문을 확보하면 신호를 보내라. 바로 들어갈 것이다."

기사들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저희만으로 가능하겠습니까? 그쪽도 단단히 지키고 있을 겁니다."

페르디움이 아무리 병력이 적더라도 경계는 확실히 서고 있을 터였다.

적군이 대규모로 침입해 오면 바로 연락을 취해 본대를 불러올 것이다.

하지만 빅토르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말했다.

"내통하는 이가 있으니 걱정하지 마라. 만약 동문을 제압하기 어렵다면 곳곳에 불을 내고 소란을 일으켜라. 그리고...."

살기를 내뿜으며 빅토르는 말을 이었다.

"소란을 틈타 즈발터를 암살해라. 페르디움의 기사가 안내할 것이다."

* * *

이튿날, 빅토르의 군대는 다시 페르디움 성을 공격했다.

하지만 그 움직임은 전날과는 다르게 소극적이었다.

그저 방패병을 앞세우고 성벽에 화살을 쏘아 댈 뿐이었다.

페르디움 군도 대응 사격을 하며 몸을 사렸다.

반나절을 서로 별다른 피해 없이 싸운 뒤, 빅토르의 군대는 물러났다.

"와아아아아!"

뭔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페르디움의 병사들은 어쨌든 또 하루를 버텨 냈다며 환호했다.

지휘부는 상대에게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닌가 고민했지만, 무슨 생각인지 모르니 별수가 없었다.

팡! 팡! 팡!

밤이 되자 적의 진영에서 폭죽이 몇 개 터졌다.

그걸 보고 페르디움의 병사들은 어처구니없어했다.

"벌써 승리의 축포를 터뜨리는 거야?"

"오늘 우리가 이겼잖아? 누가 실수로 쓴 건가?"

병사들이 불꽃을 보며 수군거리는 동안 지셀은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저건....'

묘한 표정으로 폭죽의 불빛이 사라진 밤하늘을 바라보던 지셀은 조용히 몸을 돌려 어디론가 향했다.

밤이 깊어지자, 빅토르의 군대 일부가 어둠을 틈타 은밀하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기사들은 눈에 띄지 않도록 검은 로브로 몸을 가리고, 가장 경계가 취약한 성벽을 찾아 움직였다.

"빨리 움직여. 이쯤이 좋겠군."

병력이 적은 페르디움이 모든 성벽에 병사를 빽빽하게 세워 두는 건 무리다.

기사들은 어렵지 않게 보초가 적은 곳을 찾아, 마나를 이용해 훌쩍 성벽을 뛰어넘었다.

요인 암살은 전쟁 중에 종종 쓰이는 방법이라 경험이 있었다.

게다가 내통자까지 있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내통자와 접선할 장소로 가는 길은 외워 두었다.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기사 한 명을 마주쳤다.

"당신이 드렌이오?"

어둠 속에 서 있던 기사, 드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해럴드가 페르디움에 심어 둔 첩자 중 하나였다.

배신한 가신 둘은 디갈드의 영지로 가 전쟁의 명분을 만들었지만, 드렌은 이곳에 남아 있었다.

데스몬드 백작은 신중하고 치밀한 성정으로 다양한 가능성을 고려해 수많은 대비책을 마련해 두었다.

드렌 역시 그 대비책 중 하나였다.

"그렇소. 시간이 없으니 빨리 움직입시다. 내가 있으니 병사들은 의심하지 않을 거요."

드렌은 다급하게 말했다. 혹시나 발각될까 봐 잔뜩 긴장한 티가 났다.

고개를 끄덕인 기사들이 드렌을 따라 발을 떼었다.

그러나 채 몇 발자국 가지도 않아서, 누군가가 지붕에서 뛰어내려 그들 앞을 막았다.

쿵!

"읏차! 이 늦은 시간에 다들 바쁘게 어디 가시나? 저녁 못 먹었어?"

스릉!

드렌과 기사들이 잽싸게 검을 뽑아 들었다.

상대의 얼굴을 알아본 드렌이 중얼거렸다.

"대, 대공자?"

언제나 우습게 보던 대공자였지만, 이번 전쟁에서 그가 활약하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드렌은 자신의 실력으로 대공자를 이길 수 없다는 걸 잘 알았다.

하지만 그건 일대일 승부일 때의 이야기다.

아무리 대공자라도 기사 열한 명을 동시에 상대할 수는 없을 터.

드렌이 다급하게 말했다.

"소리치지 못하게 막아야 하오!"

지셀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한쪽 손을 들었다.

철컹! 철컹!

신호를 기다렸다는 듯, 주변의 인가에서 검은 갑옷을 입은 자들이 우르르 뛰쳐나왔다.

빅토르의 기사들이 기겁해서 외쳤다.

"이미 알고 있었구나! 어떻게 우리 움직임을 이렇게 정확히 알고 있는 거지?"

"드렌! 네놈이 말한 것이냐?"

드렌은 식은땀을 흘리며 손을 마구 저었다.

"아니오! 내가 말한 게 아니오!"

순식간에 그들을 완전히 둘러싼 용병들은 모두 쇠뇌를 꺼내 들었다.

차르륵!

수백 개의 쇠뇌를 마주한 기사들은 이를 악물었다.

아무리 마나를 다룰 수 있는 기사라 한들, 수백 발이나 되는 화살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지셀이 바지를 툭툭 털며 말했다.

"드렌, 너도 배신자였구나. 이놈의 영지에는 간첩이 왜 이렇게 많지? 다들 돈을 얼마나 먹은 거야?"

"빌어먹을! 어떻게 안 거지?"

빠져나가는 게 불가능한 상황임을 안 드렌은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지셀은 별거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래. 누가 배신자인지는 몰랐지. 하지만 오늘 몰래 기어들어 올 거라는 예상 정도는 했지. 내가 너희랑 전쟁을 한두 번 해 본 게 아니거든."

해럴드 데스몬드와는 전생에 참 많이도 싸웠다.

결국은 지셀이 그놈 대가리를 박살 내면서 승부가 갈렸지만.

"뭐...?"

그러나 과거로 돌아온 지셀의 비밀을 모르는 사람이 듣기엔 그저 헛소리일 뿐이었다.

드렌이 황당해하고 있는 동안, 빅토르의 기사들은 검을 꼬나쥐고 천천히 앞으로 다가갔다.

대공자인 지셀을 인질로 삼아 탈출할 생각이었다.

슬금슬금 다가오는 기사들을 보며 지셀이 눈을 가늘게 떴다.

"역시 데스몬드의 기사들이야. 제법 수준이 높아 보이네."

기사들이 얼굴을 굳혔다.

그들은 디갈드의 이름을 걸고 참전했다.

병력이 갑자기 늘어났으니 외부 세력이 끼어들었다는 건 예상할 수 있었겠지만, 그들이 데스몬드의 기사라는 건 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당황하는 기사들을 보며 지셀이 히죽 웃었다.

"어서 와, 페르디움은 처음이지?"

"...쳐라!"

어차피 전부 다 들켰다면 오히려 거리낄 것이 없었다.

기사들이 모두 지셀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카앙! 카앙!

그들의 공격은 지셀의 양옆에서 번개같이 나타난 길리언과 카오르에게 막히고 말았다.

휘리릭!

지셀의 뒤, 그림자 속에서 단검 몇 개가 갑자기 튀어나와 기사들을 덮쳤다.

푸욱! 푸욱! 푸욱!

"커억!"

기사 셋이 생각지도 못한 기습에 목이 뚫리며 허무하게 쓰러졌다.

동시에 용병들이 쇠뇌의 방아쇠를 당겼다. 볼트가 온 허공을 덮으며 기사들에게 날아들었다.

파바바박!

"크아악!"

쇠뇌는 가까운 거리에서 맞는다면 갑옷도 뚫을 정도로 강하다.

기사들이 고슴도치가 되어 나가떨어졌다.

그나마 몇몇은 검으로 쳐 내며 최대한 마나를 뿜어내 막았지만, 급소만 겨우 피했을 뿐이었다.

"으으...."

끝까지 살아남은 기사는 드렌을 포함해 다섯 명뿐이었다.

"와, 다섯 명이나 살았네. 데스몬드 놈들이 정말 작정하고 보냈구나?"

지셀은 감탄하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조차도 이런 좁은 공간에서 쇠뇌 수백 개로 겨냥당하면 부상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비록 전투 불능이 되긴 했지만 어쨌든 이런 공격에도 살아남았다는 건 그만큼 실력이 있다는 뜻이다.

"그래도 서 있기는 힘들어 보이네."

기사들은 피를 흘리며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드렌은 다가오는 지셀을 향해 숨을 헐떡이며 애원했다.

"으으.... 살려 주십시오. 제가 잘못했습니다. 대공자님, 제발...."

"가뜩이나 우리 영지는 기사도 부족한데.... 이런 뛰어난 기사가 우릴 배신하다니, 마음이 아프군. 왜 이렇게 됐을까?"

지셀은 길리언에게 도끼를 하나 건네받으며 정말 아쉽다는 듯 탄식했다.

살아날 가능성이 있어 보이자 드렌은 다급하게 매달렸다.

"살려 주십시오! 다시는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제가 이들의 계획을 알고...."

콰직!

머리가 쪼개진 드렌의 시체가 모로 쓰러졌다.

"필요 없어."

지셀은 도끼에 묻은 피를 대충 흔들어 털어내며 남은 기사들에게 다가갔다.

기사 한 명이 눈치를 보다 다급하게 외쳤다.

"항복하겠소! 항복! 우리를 포로로 대우해 주시오! 몸값을...."

콰직!

말을 하던 기사도 머리가 쪼개져 쓰러졌다.

무지막지한 행동에 기사들은 경악해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항복한 기사를 죽이는 건 관례에 어긋난다.

말도 제대로 듣지 않고 저렇게 다짜고짜 죽이는 놈은 기사로 살면서 단연코 처음 보았다.

"왜? 너무한 거 같아? 그럼 암살하러 오면서 죽을 거란 생각도 안 했나?"

히죽대던 지셀은 어느 순간 무표정하게 얼굴을 굳혔다.

상식대로, 관례대로, 법대로, 전부 따지며 양보해 주면 이놈들한테 끌려다니게 될 뿐이다.

체면이니 명예니, 그런 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지셀의 목적은 이들에 대한 복수였다.

중요한 것은 오직 적들의 멸망뿐.

지셀은 천천히 기사들의 앞에 쭈그려 앉아 나지막이 속삭였다.

"먼저 입을 여는 놈은 죽는다."

"...."

"손가락 하나만 움직여도 죽는다."

"...."

싸늘한 눈빛에 기사들은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묻는 말에만 대답해라. 대답이 늦어도 죽는다."

75화 역시 제법인 놈들이야. (2)

휘익!

파앙!

페르디움 성의 동문 쪽에서 작은 폭죽 하나가 터졌다.

"가자!"

근처에서 대기하던 기병대가 그 신호를 확인하고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저 폭죽은 페르디움 군도 확인했을 것이다.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동문을 점령하고 버텨야 했다.

두두두두두두!

기병대가 달리자 뒤에 대기하던 보병들도 그들을 따라 달렸다.

속도 차이가 크지만, 일단 기병대가 먼저 성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기병들이 싸우는 동안 보병들이 합류할 수 있을 테니까.

열심히 성문을 향해 달리던 기병대의 지휘관은 문득 묘한 위화감에 어깨를 움츠렸다.

'뭐지? 왜 이렇게 조용하지?'

저 멀리 보이는, 횃불이 일렁거리는 성문은 분명 크게 열려 있다.

하지만 성문 근처에서 누군가가 싸우는 기색은 없었다.

'내통자와 기사들이 병사들을 전부 제압한 건가. 아무리 상대가 일반 병사들이라고 해도 너무 빠른데?'

페르디움은 기사들이 부족하니 주로 병사들이 경계를 설 것이다.

그렇다면 잠입한 기사들이 빠르게 제압했어도 이상하지는 않다. 하지만....

'뭔가 찝찝한데.'

지금까지 전장에서 쌓아 온 경험이 계속 본능을 갉작거렸다.

'병력을 돌려야 하나?'

성문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식은땀이 흘렀다. 등줄기가 간지럽고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아냐, 그래도 가야 한다.'

신호가 왔고 성문이 열렸는데 안 들어갈 수는 없었다.

자신이 불안하다고 병력을 물리면, 안에 있는 기사들은 작전에 성공하고도 모두 죽게 될 것이다.

그는 군인이었고, 위험하더라도 작전대로 움직여야 했다.

두두두두두!

기병은 순식간에 성문 가까이 다가갔다.

'잠입한 인원은 소수다. 조용한 게 당연한 거야. 들어가자. 들어....'

그는 마음을 다잡으며 말을 몰다 말고 문득 성문을 다시 바라보았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은은하게 붉은 빛을 내는 저 성문이, 악마가 벌린 입처럼 보였다.

들어가면 무조건 죽는다.

"퇴각해라! 퇴각!"

기병대 지휘관은 자기 감을 믿기로 했다.

그가 말머리를 돌리는 순간.

휘리리릭!

콰지직!

어디선가 날아온 도끼가 그의 목에 틀어박혔다.

기병대 지휘관은 그대로 말에서 떨어졌다.

히이이잉!

주인을 잃은 말이 방향을 틀다 멈추고 앞발을 높이 들어 올렸다.

지휘관을 뒤따라오던 자들 몇몇이 속도를 못 이겨 결국 부딪치고 말았다.

쿠웅! 쿵! 쿵!

"뭔가 있다! 함정이야! 함정!"

"으아아악! 무슨 일이야!"

"일단 방향 돌려! 본대로 퇴각해!"

선두가 쓰러지며 난장판이 됐지만, 남은 자들은 마지막 명령에 따라 그대로 방향을 틀어 도망가기 시작했다.

성안에서 도끼를 던진 지셀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확실히 실력들이 제법이란 말이지. 함정도 준비했는데 아깝게 됐네."

안쪽으로 모두 끌어들여 죽이려 했는데, 급하게 준비하다 보니 함정이 완벽하지 못했다.

적의 지휘관이 그 틈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함정을 쓰지 않아도 얼마든지 잡을 수 있으니까.

"가자!"

지셀이 말에 올라타며 외쳤다. 기마 수백이 그를 뒤따랐다.

두두두두두!

성문을 뛰쳐나간 지셀의 기마대가 혼란에 빠져 도망치는 적들을 꿰뚫고 지나갔다.

콰아아앙!

"으아아아악!"

가볍게 남은 기병들을 처리한 지셀은 멀리서 달려오는 보병들 쪽으로 향했다.

보병 지휘관도 앞에서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걸 알고 이미 방향을 틀었다.

적들이 기습을 눈치챘다면 더 이상 접근해서는 안 된다.

"달려라! 잡히면 죽는다! 달리란 말이다!"

지휘관은 연신 병사들을 독려하며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하지만 병력이 많을수록, 전력으로 달리던 병사들의 방향을 트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눈치가 빠른 놈들이구나! 따라잡아라!"

두두두두두!

지셀이 잔혹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달렸다. 용병들도 그의 뒤를 놓치지 않고 따랐다.

결국 보병대는 꼬리를 잡히고 말았다.

콰아앙!

"으아아악!"

"막아! 막으라고!"

"일부가 저지해라!"

이미 등을 돌려 도망가던 자들이 제대로 방어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지셀과 용병들은 양 떼에 뛰어든 늑대처럼 날뛰며 적들을 처죽이기 시작했다.

* * *

한편, 빅토르는 보병대의 후열에서 학살이 벌어지는 것도 모른 채 병력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멀리서 동문 쪽을 집중해 보다가 신호를 확인하고 쾌재를 불렀다.

"성공이다! 절반은 나를 따르고 나머지 절반은 페르디움 성을 공격해라!"

아군 본대는 페르디움의 남쪽 성문을 공격하고 있었다.

빅토르는 따로 떼어 두었던 병력의 절반을 이끌고 열린 동문으로 향했다.

나머지 절반은 남문에 몰려 있는 페르디움 군을 견제하기 위해 움직였다.

둥! 둥! 둥!

페르디움 군의 대응도 제법 빨랐다. 즈발터와 란돌프는 병사들을 이끌고 다시 성벽으로 나섰다.

하지만 밤이라 빅토르의 군대 절반이 우회하는 것을 알아채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영주님! 동문 쪽으로 적의 군대가 이동하고 있습니다!"

"뭐? 란돌프! 당장 병력을 이끌고 지원하러 가라!"

란돌프는 즈발터의 명령에 따라 절반의 병력을 빼 동문 쪽으로 급하게 이동했다.

빅토르가 이미 예상했던 움직임이었다.

"크크큭, 소용없다. 너희는 이제 끝이다."

동문은 미리 보내 둔 병력들로 이미 난장판일 터였다.

거기에 빅토르의 부대까지 더해진다면 페르디움 성은 완전히 함락되고 말 것이다.

시가전을 벌이며 항전할 수도 있겠지만, 병력의 차가 크니 결국 버티지 못할 터.

빅토르는 자신만만했다.

"자! 어서 달려라! 오늘은 성안에서 잠을 잘 것이다!"

그 뒤로 남은 기마병 천 명이 말을 달렸다. 병사들은 있는 힘을 다해 그 뒤를 따랐다.

아무리 다른 곳보다 작고 허술하더라도 성은 성이다.

대군을 이끌고 우회하려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얼마 남지 않았다! 어서... 응?"

열심히 이동하던 빅토르는 어처구니없는 광경을 마주했다.

"본대다! 살았다!"

"도와줘! 어서!"

"여기야! 여기! 빨리 오라고!"

저 멀리서 아군의 병사들이 대열까지 엉망이 된 채 달려오고 있었다.

빅토르는 얼이 빠져서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았다.

무슨 상황인지 모르니 대응 명령도 내릴 수 없었다.

"다들 빠져! 뒤로 빠진다!"

보병들의 후미를 학살하던 지셀은 멀리 빅토르의 본대가 보이자마자 즉시 말머리를 돌리며 크게 외쳤다.

"으하하하하!"

"네놈들 때문에 잠도 못 잤잖아!"

"그래도 재미있었다!"

용병들이 크게 웃으며 지셀의 뒤를 따라 냉큼 도망갔다.

정신이 돌아온 빅토르가 분노를 토해 내며 소리를 질러 댔다.

"쫓아라! 저놈들을 쫓아!"

두두두두두!

기병대가 지셀의 뒤를 쫓아 열심히 달렸다.

하지만 도망치느라 사방에 퍼져 있던 아군 보병들에 가로막혀 속도가 제대로 나지 않았다.

어찌어찌 따라붙었을 때는, 지셀과 용병들이 이미 성문으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그들을 뒤쫓던 기병대의 지휘관이 크게 외쳤다.

"돌격해라! 따라잡을 수 있다!"

성문이 완전히 닫히기 전에 충돌하면 진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뒤에 본대가 따라오고 있으니 조금만 시간을 벌면 될 것이다.

두두두두두!

기병대가 젖 먹던 힘까지 발휘해 돌격해 오자 용병들도 다급하게 성으로 들어갔다.

"야, 오줌싸개야! 비켜!"

"빨리 들어가! 따라잡혔다!"

"나부터 좀 들어가자고!"

겁을 먹었는지 들어가는 와중에 서로 부딪히고 난리가 났다.

끼이이익.

가까스로 용병들이 모두 들어가고 성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빅토르의 기병대는 몸을 낮추고 창을 들어 올렸다.

'조금만 더!'

아슬아슬하지만 창살문이 내려오기 전에 도달할 수 있을 거 같았다.

'뚫는다!'

선두의 기병대가 막 성문 근처에 도달했을 때였다.

촤아아아아악!

성벽 위에서 어마어마한 화살 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푸푸푸푹!

"으아아아악!"

기병들이 빗발치는 화살들을 맞고 쓰러지기 시작했다.

콰앙! 콰앙!

뒤따라오던 병사들도 속도를 줄이지 못하고 시체들과 뒤엉켜 쓰러졌다.

성벽 위에서 스코반이 신나게 외쳤다.

"쏴라! 계속 쏴! 막 쏴! 무조건 쏴!"

동문 수비병들과 스코반이 이끄는 마수의 숲 경계병들은 쉬지 않고 화살을 날렸다.

지셀이 불러 전부 대기시켜 놓은 덕분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었다.

"우리도 도와라! 쏴라!"

뒤이어 도착한 란돌프와 병력도 그 모습을 보고 지원 사격을 시작했다.

쿠웅!

그사이 성문은 완전히 잠겼고, 창살문이 내려왔다.

이렇게 되면 마나를 다루는 기사들이 달라붙어 힘을 쓰지 않는 이상 단숨에 뚫을 수 없다.

남은 기병들은 어쩔 수 없이 몸을 돌려 본대로 돌아갔다.

돌아오는 기병들의 초라한 모습을 보며 빅토르는 분노를 토해 내었다.

"으아아아아! 이 개자식들!"

자신이 쓴 계책에 역으로 당했다. 그나마 있던 내통자는 연락이 안 된다.

대기시켰던 기병대와 보병대의 피해를 합하면 삼백여 명이 넘었다.

가랑비에 옷이 젖는 것처럼, 피해가 조금씩 누적되고 있었다.

"돌아가자!"

결국 그는 진지로 되돌아갔다.

페르디움에서 승리의 환호가 다시 울려 퍼졌다. 빅토르는 그 소리를 들으며 이를 갈았다.

란돌프는 신이 난 페르디움의 병사들을 뚫고 허겁지겁 지셀에게 다가갔다.

"대공자님! 이거 뭡니까? 어떻게 막은 거야!"

동문이 위급하대서 달려왔는데 정작 와 보니 적들의 시체만 쌓여 있었다.

게다가 진군하던 적들마저 모두 돌아갔다.

도대체 이 적은 인원으로 무슨 마법을 부렸는지 란돌프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별거 아닙니다. 적이 머리를 좀 쓴 모양인데, 저한테 걸렸습니다."

지셀은 포로로 잡은 기사들과 빅토르의 계략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란돌프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허어, 이번에도 또...."

한 번은 우연일 수 있다. 그러나 우연이 두 번이나 이어질 수 있을까?

란돌프가 아는 지셀은 절대 적의 계책을 알아챌 수 없는 인간이었다.

자신보다 더 무식했으면 무식했지, 머리를 쓰는 놈이 아니었으니까.

"크흠, 대, 대공자님이 조금 달라진 거 같기도 하구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셀이 참 마음에 안 들었다.

오죽하면 몇 대 패고 싶어 몸이 근질거리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페르디움이 위험할 때마다 지셀이 활약하고 있으니 그런 생각도 슬며시 잊히고 말았다.

란돌프는 어색한 마음에 일단 자리를 피한 뒤 즈발터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허허, 지셀이 그 인원으로 막아 냈다고?"

어쩐지 지셀과 용병들이 보이지 않더라니, 먼저 동문 쪽으로 움직인 모양이었다.

"다행이구나. 정말 다행이야."

보급 부대를 잡은 전투가 본능적인 감각에서 나온 것이었다면, 이번 일은 확실히 전략과 전술에 관한 지식이 필요한 일이었다.

지셀이 없었다면 이 전쟁이 어떻게 흘러갔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어쩌면 맞붙자마자 한 번에 끝났을 수도 있다.

사고뭉치였던 아들이 전쟁을 겪으며 성장했다는 생각에 즈발터는 감개무량했다.

이제 지셀은 영지에 없어서는 안 될 지휘관이었다.

"적의 계략을 알아내고 역이용하다니.... 전략을 공부한 적이 있었나? 허허, 역시 벨린다에게 교육을 맡기길 잘했...."

란돌프가 정색하며 즈발터의 말을 끊었다.

"공부 같은 걸 했을 리가 있겠습니까? 대공자가 얼마나 무식한데요. 저보다 무식할걸요."

즈발터가 입술을 비죽거렸다.

아무리 사고뭉치라지만 그래도 제 자식 욕을 들으면 기분이 좋지 않은 법이다.

그것도 란돌프와 비교당하다니.

그의 표정을 본 란돌프가 뒤늦게 민망해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즈발터는 피식 웃고는 손을 휘저었다.

"뭐, 언제나 제멋대로 알아서 하는 녀석이니 제 나름의 방법이 있었겠지. 일단 쉬게. 병사들도 푹 쉬게 하고."

궁금한 건 나중에 따로 묻기로 하고, 즈발터는 일단 병력을 정비했다.

조금이라도 쉬어야 내일 다시 이어질 전투에서 버틸 수 있었다.

* * *

란돌프가 즈발터에게 보고하는 사이, 지셀도 용병들을 해산시키고 홀로 어딘가로 향했다.

그의 입가에는 잔혹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빅토르! 네놈이 왔구나!'

포로로 붙잡은 기사들을 통해 적의 지휘관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해럴드 데스몬드의 검, 소드마스터 빅토르.

루타니아 왕국과 전쟁을 벌일 때 만난 적이 있는 놈이었다.

무려 대륙 7강인 지셀의 검을 수십 합이나 받아 낸 '제법' 대단한 놈이었다.

결국은 지셀이 허리를 반으로 갈라 죽였지만, 나름 기억에 남는 상대라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건 기회다.'

미래에 방해가 될 놈의 목을 지금 따 버릴, 아주 좋은 기회였다.

그놈은 제대로 성장하기도 전에 여기서 목숨을 버리게 될 것이다.

'아끼던 놈을 여기에 보내다니.'

아마 실전 경험을 쌓고 공을 세우게 해 주고 싶었겠지.

지셀이 없었다면 데스몬드 백작이 바라던 대로 되었겠지만....

'실수한 거다, 해럴드.'

지셀은 악마 같은 미소를 지으며 살기를 뿜어내었다.

76화 역시 제법인 놈들이야. (3)

성벽과 가까운 곳에 마련된 튼튼한 막사.

용병 몇 명이 삼엄하게 경비를 서고 있었다.

지셀은 거침없이 막사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일단의 사람들이 퀭한 눈으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수고했다. 알포이와 친구들."

바로 알포이를 비롯한 마법사들이었다.

지셀이 적의 움직임을 알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 있었다.

"으으, 망할 놈...."

알포이가 뭔가 항의하려는 듯 손을 들어 올렸지만, 다시 허물어졌다. 너무 무리해서 몸에 힘이 빠진 것이다.

지셀은 그들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덕분에 잘 막아 냈다. 아주 좋았어. 앞으로도 잘 부탁하지."

"으으, 전쟁 언제 끝나...."

사실 마법사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성벽에서 파이어 볼이나 대충 쏘다가 도망가려고 했다.

어차피 페르디움이 멸망하면 거래도 무효가 되기 때문이다.

마탑의 마법사가 페르디움에 있었다는 사실만 숨기면 마탑에 피해도 없을 터였다.

그들은 전쟁이 벌어진 뒤부터 계속 언제쯤 도망갈까 눈치만 보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이 시작하자마자 나타난 용병들이 계속 옆에 붙어 있어서 도망칠 수가 없었다.

거기에 오늘은 지셀의 부탁으로 아주 개고생을 해야만 했다.

"이제 이거 안 해.... 진짜 머리 깨질 거 같다고...."

알포이가 죽어 가는 목소리로 흐느꼈다. 지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마 이제 그 마법은 쓸 일이 없을 거야. 다음에는 다른 걸 부탁하지."

"끄응... 다행이군."

알포이가 한풀 꺾인 목소리로 답했다.

이들이 쓴 마법은 다름 아닌 대규모 탐색 마법이었다.

마법사 여섯 명이 성문의 경계가 미치지 않는 모든 곳에 탐색 마법을 펼쳤다.

이론적으로는 최선의 방도였으나, 사람이 한 번에 받아들일 수 있는 정보에는 한계가 있다는 게 문제였다.

수십 개의 시야를 머릿속에 한 번에 구겨 넣으려니 코피를 흘리며 쓰러진 것도 당연했다.

그래도 덕분에 지셀은 적군이 넘어오는 방향과 노리는 곳을 정확히 잡을 수 있었다.

"바네사, 잠깐 얘기 좀 할까?"

"네? 네!"

옆에서 마법사들을 간호하던 바네사는 지셀이 부르자 냉큼 그의 뒤를 따랐다.

같이 막사에서 대기하느라 쓰러진 마법사들을 간호하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그녀는 알포이를 무서워했다.

마법을 쓰지도 못하면서 알짱댄다고 괜히 핀잔만 들었다.

지셀은 막사 옆에 있는 망루에 올라가 어두운 성벽을 눈에 담았다.

"저놈들이랑 같이 있으니 많이 불편하지? 급할 때 함께 움직여야 해서 어쩔 수 없어. 당분간만 참아."

"...괜찮습니다."

멋대가리 없는 위로였지만, 바네사로서는 빈말로라도 위로해 주는 게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러고는 한동안 지셀이 말이 없자, 바네사는 눈치를 보며 주저하다 가장 궁금한 것을 물었다.

"오늘 적이 올 걸 어떻게 아셨나요?"

탐색 마법으로 적들의 위치를 파악하겠다는 계획 자체는 별다를 게 없다.

적들은 이쪽에 마법사가 있는 줄 모를 테니, 대비가 아예 안 되어 있을 터.

마법사를 데리고 있는 사람이라면 떠올리지 못하는 게 이상한 방책이었다.

하지만 바네사는 지셀이 어떻게 적들이 오늘 쳐들어올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셀이 픽 웃으며 대답했다.

"예전에 본 적이 있거든. 그 폭죽."

"전에도 저들과 싸운 적이 있으셨나요?"

"그래."

영지마다 즐겨 쓰는 신호가 따로 있다.

전생에 해럴드는 폭죽을 이용한 신호를 자주 썼다.

그때마다 내부에서 혼란이 일어났다. 물론, 뭘 해 보기도 전에 무지막지한 지셀의 힘에 죄다 박살이 났지만.

"사실 안 싸워 봤어도 뻔한 수작이지."

싸워 본 적이 없었어도 대충 뭘 노리고 있는지는 눈치챘을 것이다.

전생에서 수많은 전쟁을 치르며 별의별 일을 다 겪어 봤으니까.

"그래도 마법사가 없었으면 이렇게까지 잘 마무리하지는 못했을 거야."

설령 상대의 계획을 짐작하고 있더라도, 그 움직임을 정확하게 포착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마법사들 덕분에 암습을 수월하게 막아 낼 수 있었고 반격을 취할 여유까지 생겼다.

"그나저나 전쟁을 처음 겪어 본 감상은 어때? 이제 좀 익숙해졌나?"

지셀은 막사 옆에 망루를 만들어 전쟁 상황을 마법사들에게 지켜보게 했다.

바네사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

아직도 사람들이 죽어 나가던 모습이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무, 무서웠어요."

지셀은 익숙해지라고 했지만, 그녀는 이런 데 익숙해질 자신이 없었다.

첫날에는 얼굴이 창백해져서 연신 구역질을 해야 했다.

차마 두 눈 뜨고는 보지 못할 참상이었다.

고통 속에서 덧없이 쓰러져 가는 병사들의 모습은 늘 족쇄처럼 따라다니던 불운한 운명에 대한 고뇌마저 잊게 했다.

저들은 도대체 무슨 죄가 있어서 이렇게 죽어 가는 것일까.

그런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공자님은 어떻게 그렇게 싸우실 수 있는 건가요?"

지셀이 날뛰는 모습을 그녀도 멀리서 지켜보았다.

거침없이 적을 죽이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다.

자신에게 보답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은혜를 베푼 사람이다.

언제나 장난스럽고 가끔은 엉뚱하기도 한, 보통의 귀족들과는 전혀 다른 공자.

그 뒤에 그런 흉포한 성정이 숨겨져 있는 줄은 정말 몰랐다.

어떻게 보면 비난처럼 들릴 수도 있는 질문이었지만, 지셀은 담담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이 영지와 영지민, 가족과 가신들, 기사들과 병사들, 나를 따르는 용병들.... 모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야. 무슨 짓을 해서든 반드시 지켜야 해."

바네사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가 이곳에 온 지는 두 달밖에 되지 않았다.

그동안 지셀이 알려 준 수련을 하고, 시킨 일들을 준비하느라 페르디움의 다른 사람들과 친해질 시간도 없었다.

지셀을 마음 깊이 따르고는 있지만, 아직 페르디움에 대한 소속감은 없었다.

그러니 아군이든 적군이든 그녀에게는 그저 전쟁터에서 죽어 가는 불쌍한 사람들일 뿐이었다.

그 마음을 아는 듯 지셀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너에게는 아니겠지. 그래서 강요할 수밖에 없어."

"...."

"네가 죽여야 할 사람들이다."

단호한 어조였다. 바네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 방법 말고는 승리할 방법이 없나요?"

지셀은 무서운 함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계획에 성공한다면 적은 단 한 명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처음에는 그저 지셀을 돕고 싶었기에, 이를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직접 살육의 현장을 보고 나니, 비로소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가 실감이 났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지셀이 말을 이었다.

"만약 적들이 병력을 분산시켜 성문 세 곳을 포위한다면 네가 없어도 이길 수 있어. 내가 각개 격파 하면 되니까. 피해는 다소 나겠지만, 성을 점령당해도 지리를 잘 아는 우리가 훨씬 유리하지."

상대의 병력이 쪼개진다면 지금 상태로도 이길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적도 바보가 아니야. 만약 적군이 신중하게 뭉쳐서 움직인다면... 우리는 이기더라도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볼 거야."

"...."

"결국 둘 중 하나가 전멸해야 끝이 난다면, 그래도 우리가 이기는 게 낫겠지?"

"...."

바네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셀의 말이 옳았다.

비록 마법을 익히느라 바빠 사람들을 사귀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이곳에서 지낸 그 짧은 기간이 바네사의 인생에서도 몇 안 되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지셀은 전쟁에 패해도 죽을 것이고, 항복해도 죽을 것이다.

그녀의 은인인 지셀을 살리려면 전쟁에서 이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가 바네사와 눈을 마주치고 웃었다.

달빛에 비친 지셀의 웃음은 순수하고 밝은 미소가 아니었다.

알 수 없는 살의와 광폭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두 눈에는 방해가 된다면 누구든지 죽이겠다는 단호함마저 보였다.

"할 수 있지?"

이건 묻는 게 아니었다. 강요다. 거부할 수 없는 절대적인 명령.

그제야 바네사는 그의 본질을 어렴풋이나마 깨달았다.

"공자님...."

그의 본성을 전혀 몰랐다면 거짓말이리라.

바네사는 마탑에서 지셀을 처음 만났을 때 들었던 협박을 아직 잊지 못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힘이 되고 싶었다.

동정 때문에 도와주었든, 필요해서 그랬든, 변덕을 부렸든 간에, 그는 자신의 절망을 해결해 주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구원자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은 아니었다.

'나는....'

삶을 짓누르는 절망.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는 조롱. 노력해도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좌절.

'이제 그런 건 싫어.'

언제까지 뒤에 숨어서 다른 이들을 지켜보기만 할 수는 없었다.

스스로 절망을 딛고 세상에 나아가야 한다.

아픔을 극복하고 좌절을 이겨 내려면 직접 한 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스스로 선택하는 삶.

지셀을 돕는 건, 바네사가 난생처음으로 직접 내린 결정이었다.

앞으로 삶을 보낼 이곳을 위해. 나를 인정해준 사람을 위해.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

이제는 더 이상 피하며 살고 싶지 않았다.

"...해 볼게요."

* * *

빅토르는 막사 안에서 인상을 찡그린 채 생각에 잠겼다.

'참을 수가 없구나.'

전쟁에서 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다. 페르디움 정도는 총공격해서 병력을 갈아 넣으면 언제든 점령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적에게 연달아 당했다는 게 자존심이 상했다.

'그냥 내가 가서 다 죽여야 하나?'

자신이 앞장선다면 무지막지한 파괴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그 정도로 강한 기사다.

'아니, 그러면 난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필요하다면 무력을 써야겠지만, 기사들은 공성전보다 야전에서 더 큰 힘을 발휘한다.

빅토르는 개인의 무력만 출중한 기사로 끝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 자는 출세해 봤자 기사단장 정도밖에 되지 못한다.

차후에는 왕국의 고위 사령관 자리에 오르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최소한의 피해로 성을 점령해야 자신의 지휘력을 인정받을 수 있다.

머리가 아파 오는 것 같아 빅토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도대체 어떻게 내통자를 알았지? 배신한 건가?'

그럴 리가 없었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데스몬드 백작이 배신자 관리에 실패할 리가 없다.

'설마 페르디움에 그 정도로 뛰어난 참모가 있다고?'

으드득.

이가 갈렸다. 마치 그의 머리 위에서 누군가가 놀고 있는 거 같았다.

계책은 실패했고 오히려 역으로 당하기까지 했다.

온몸을 휘감은 굴욕감을 참기가 힘들었다.

"어쩔 수 없군."

화가 났지만, 이 이상 전술 싸움을 이어 갈 생각은 없었다.

보급이 부족하다 보니 느긋하게 굴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이번에 이곳을 점령하지 못한다면 무능한 놈 취급을 당할 것이다.

빅토르가 총공격을 결심했을 때, 막사 안으로 중년인 두 명이 들어왔다.

그들은 오만한 표정을 지으며 빅토르를 내려다보았다.

"백작님은 점령에 이틀을 보셨소. 한데 이미 이틀이 지났구려."

"경의 작전을 이해할 수가 없소."

빅토르는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않고 답했다.

"생각한 바가 있소. 전쟁은 곧 끝날 것이오."

두 사람은 해럴드가 그에게 붙여 준 마법사였다.

그는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4서클 마법사를 무려 두 명이나 보내 주었다.

하지만 이들은 기사인 빅토르와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 정도 영지를 점령하는 데 피해가 크면 오히려 실망하실 거요. 경도 백작님의 성격을 잘 알고 있지 않소?"

"차라리 부대를 나눠서 다른 성문을 동시에 공략하는 게 어떻소? 그래도 우리가 병력이 더 많을 거 같은데. 그러면 저쪽은 막는 병력이 더 적어지지 않겠소?"

마법사들이 훈수를 들었지만, 빅토르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나누는 건 큰 효과가 없소. 지금과 다를 게 없으니까. 적어도 세 군데로 나눠야 적의 병력이 눈에 띄게 줄어들 거요."

"그렇게 하면 되지 않소?"

"적군의 부대 중 하나가 제법 뛰어나더군. 만약 한 군데라도 격파당한다면 대군이라는 이점이 사라지게 되는 거요. 다른 성문을 점령하더라도 다시 시가전에 돌입해야 하오."

빅토르는 다른 건 몰라도 검은 갑옷을 입은 부대는 높이 평가했다.

오늘도 그놈들에게 당하지 않았는가.

접전이 가능한 상대가 있고, 불가능한 상대가 있다. 검은 갑옷 부대는 후자였다.

부대를 나눠 병력이 줄어든다면 적은 그들을 요격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릴 것이다.

그게 페르디움에게 있는 유일한 승리의 방법일 테니까.

"애초에 지금보다 병력이 더 많았다면 삼면을 포위하고 싸웠을 거요. 하지만 지금은 뭉치는 게 낫소."

빅토르는 몸이 하나이니 모든 방면을 감시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빅토르의 말은 정론이었으나, 마법사들은 곧이곧대로 듣지 않았다.

겁먹어 핑계를 대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속으로 은근히 빅토르를 소심하다고 비웃으며 마법사가 다시 물었다.

"그러면 우리를 그냥 놀릴 셈이오? 저쪽에는 마법사가 없다는데."

"마법사가 없다면 우리 둘만으로도 수백은 죽일 수 있을 것이오."

마법사들이 끊임없이 타박하자 빅토르는 짜증스럽게 답했다.

"곧 출전할 것이니 준비하시오. 두 분의 마법은 마지막 전투에 쓰겠소."

"마지막 전투?"

빅토르가 작전을 얘기하자 마법사들은 그제야 흥미로워했다.

"과연, 검술뿐만 아니라 지략도 뛰어나다더니 사실이었구려."

"그런 작전이라면 찬성하겠소. 역시 백작 각하의 총애를 받는 기사요. 허허허."

입 바른 칭찬에 빅토르는 되레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저들이 자신을 얕잡아 보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이런 대군을 처음 지휘해 보는 그를 애송이라 여기는 것이다.

'흥, 두고 보자. 이번 전쟁에서 승리하기만 하면 난 더 높이 올라갈 테니까.'

비록 대군을 지휘하는 건 처음이었지만, 질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해럴드의 신뢰가 곧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나 마찬가지였다.

빅토르는 데스몬드 백작만큼 철저하고 신중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빅토르는 그 해럴드로부터 직접 모든 걸 사사받은 분신과도 같은 존재다.

해럴드는 정예병 수천에 마법사들, 공성 병기까지 붙여 주었다. 과할 정도로 강한 전력이었다.

출정하기 직전, 해럴드는 그의 검술이라면 만일의 변수가 있더라도 충분히 승리할 수 있을 거라 말했다.

"내일 바로 시작하겠소. 어차피 보급이 부족하니 조만간 결판이 날 것이오."

마법사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막사에서 나갔다.

혼자 남아 지도를 바라보던 빅토르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최소한의 피해로 승리하겠다.'

상대방이 최선을 다한 만큼 이쪽도 최선을 다하면 된다. 그러면 절대 지지 않으리라.

77화 역시 제법인 놈들이야. (4)

둥! 둥! 둥!

날이 밝자 적들이 다시 몰려오기 시작했다.

적들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한꺼번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성을 넘을 생각인지 이동식 사다리차까지 끌고 왔다.

페르디움의 병사들은 그 모습을 보고 잔뜩 긴장해 얼어 버렸다.

이틀간 공성을 버텨 낸 덕분에 사기는 높았지만, 대군이 한꺼번에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심한 압박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힘을 내라! 오늘도 막을 수 있다!"

즈발터의 독려를 들으며 병사들은 자리를 잡고 적들을 향해 열심히 화살을 날렸다.

터엉! 터엉!

방패병을 앞세우고 진군하는 적들에게 화살은 잘 통하지 않았다.

그래도 간간이 후열의 보병과 궁병들이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견제 사격을 뚫고 한 무리가 드디어 성벽 밑까지 다가왔다.

구멍 난 성벽은 이미 나무와 흙, 바위 등으로 메워서 막아 두었다.

적들도 그쪽은 신경 쓰지 않고 성벽 곳곳에 사다리를 붙였다.

쿠웅! 쿠웅! 쿠웅!

성벽에 걸쳐진 사다리로 적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막아라! 적들을 떨쳐 내라!"

즈발터의 명령에 따라 병사들은 수많은 무기를 사다리 위로 뿌렸다.

가시가 달린 원통을 굴려 떨어뜨리고, 뜨거운 물과 녹인 금속 따위를 쉬지 않고 들이부었다.

"으아아악!"

방패를 받쳐 들고 올라오던 적들은 과격한 대응에 못 이겨 하나둘씩 밑으로 떨어졌다.

페르디움의 병사들도 성벽 밑에서 날아오는 적들의 견제 사격에 몸을 사리면서 힘겹게 싸워야 했다.

그나마 적의 공세가 거세지 않아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다.

'뭐지? 왜 공성탑은 움직이지 않는 거지?'

즈발터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사다리를 이용해서 성벽을 오르면 공격하는 측은 공성탑을 이용할 때보다 큰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적들은 사다리만 쓰고, 공성탑은 아예 움직이지도 않고 있었다.

적들이 적극적으로 밀고 들어오지 않는 것도 의심스러웠다.

점령하면 좋고, 아니면 그만이라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워낙 수가 많으니, 이쪽은 적군처럼 설렁설렁 막을 수가 없었지만.

즈발터는 계속 적의 의도를 고민했다.

'성벽 토대를 깎아서 무너뜨리려는 건가? 아니면 땅굴을 파서 진입할 생각인가.'

공성전에서 자주 쓰이는 다른 방법들을 떠올려 봤지만, 영 감이 오지 않았다.

성벽 아래쪽에서 뭔가 작업하는 낌새는 보이지 않았고, 땅굴을 파기에는 저쪽도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적들은 끝내 성벽을 넘지 못하고 해가 기울어질 때쯤 물러났다.

"와아아아! 오늘도 막았다!"

병사들은 환호를 내질렀지만, 어제와 같은 찝찝한 승리였다.

즈발터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밤이 되자 금방 적들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와아아아아! 쳐라!"

적들은 밤에도 쉬지 않고 공격해 왔다. 그것도 병력의 절반 정도만.

절반이라 해도 페르디움의 전체 병력보다 많다.

"이놈들! 우리 힘을 완전히 뺄 작정이구나!"

즈발터가 이를 갈며 외쳤다.

'우리는 병력을 빼면 곳곳이 비어 버린다!'

병력의 규모가 다르니, 적들과 같은 전략을 취하기가 어려웠다.

적들이 조심스럽게 공격하니 인명 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피로는 쌓였다.

다음 날이 되면 밤에 쉬었던 나머지 반이 다시 쳐들어온다.

즈발터는 적군과 똑같이 병력을 절반 정도 빼 보기도 했다.

그러나 적군은 병력을 빼자마자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취약한 부분을 노려 달려들었다.

'적이지만 지휘관의 실력이 대단하구나!'

만약 지셀과 용병대가 활약하지 않았다면 이미 성벽 한쪽을 점령당했을 것이다.

"형님! 병사들이 너무 지쳐 있습니다."

란돌프가 조심스럽게 말을 전해 왔다. 하지만 별다른 대책이 없었다.

어떻게든 병사들을 조금씩 빼 쉬게 하고 있지만, 그 비율이 상대방과 너무 크게 차이 났다.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충분히 휴식을 취한 적군은 비교적 쌩쌩한데, 아군은 힘이 빠진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아, 안 돼.... 피곤해 죽겠어."

"계속 이렇게 싸워야 하는 건가?"

"도대체 언제 끝나는 거야? 저쪽도 보급이 없다고 하지 않았어?"

페르디움 병사들은 사기가 급속도로 떨어졌다.

벌써 사흘 동안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전쟁은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긴장과 피로를 몰고 온다.

그런데 밤에도 쉬지 못하고 싸워야 하니, 병사들의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졌다.

지셀이 성벽에서 뛰어내리는 초강수를 다시 취했지만, 적들의 전략은 변함이 없었다.

검은 갑옷을 입은 용병들이 나타나면 병사들은 피하고, 기사들이 몰려가 지셀을 견제했다.

결국 지셀은 큰 피해를 주지 못하고 돌아왔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는 묘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래, 잘하고 있다. 빅토르. 조금 더 힘을 내 봐라.'

그 뒤로 지셀과 용병들은 성벽을 방어하는 데만 전념했다.

"공자님, 이대로 가다가는 필패입니다.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길리언이 걱정스레 속삭였지만, 지셀은 고개를 끄덕이며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저쪽이 아주 이를 갈았네. 그래도 아직은 때가 아니야. 조금만 더 기다려라."

이런 전략은 수성 측의 병력과 물자가 충분하면 잘 쓰이지 않는다. 시간만 뺏기기 때문이다.

자칫 잘못하면 오히려 공성 측에서 큰 피해를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의 페르디움을 상대하기에는 상당히 효과적인 수였다.

즈발터는 새삼 이 전쟁의 배후와 그 목적이 무엇인지 의심하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준비한 거지?'

페르디움에 물자가 부족한 거야 워낙 유명하니 숨길 것도 아니다. 그러나....

'저 사다리. 분명 전쟁 전부터 준비한 것이다.'

페르디움의 성벽은 다른 곳보다 낮은 편이다.

공성탑의 다리조차 성벽에 걸면 내리막길이 된다.

그런데 적군이 가져온 사다리는 모두 페르디움 성벽의 높이에 딱 맞게 제작되어 있었다.

적어도 몇 달 전부터 페르디움을 노리고 준비했다는 뜻이다.

'배신자들이 넘어갔을 때부터 계획된 게 아니었구나. 룬스톤이 발견되자마자 준비한 건가?'

영지 안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첩자가 득실거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로게스 백작은 오지 못하겠구나.'

지원이 올 거라는 희망은 버려야 할 것 같았다.

로게스 백작과 연락이 끊긴 이유는 뻔했다.

'전령은 다 저놈들에게 잡혔겠지.'

이제 마지막 희망은 적들이 보급 문제로 후퇴하는 것뿐이다.

지금은 가만히 서 있는 공성탑이 움직이는 날이, 마지막 전투일 것이다.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즈발터가 피곤한 눈으로 멀리 있는 공성탑을 바라보았다.

* * *

한편, 빅토르도 마지막 전투를 가늠하고 있었다.

전장을 유리하게 이끌고는 있지만, 병력이 소모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늘어나는 피해가 달갑지는 않았다. 조금이라도 피해를 줄여야 지휘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저 버티고 있을 수도 없으니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했다.

"물자가 다 떨어져 가는데 괜찮겠소?"

타모스가 옆에서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떻게든 결판을 내서 룬스톤을 얻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디갈드는 이번 전쟁으로 입은 피해를 복구할 수 없다.

그사이 페르디움에서 역으로 쳐들어오기라도 하면 디갈드는 그대로 멸망하고 말 것이다.

"걱정하지 마시오. 곧 끝나오."

빅토르가 단호하게 답했다.

페르디움이 끝나는 날, 디갈드도 끝이 날 거라는 진실은 마음속에만 묻어 두었다.

'버틸 수 있는 건 이틀 정도인가? 슬슬 저쪽도 문제가 생길 때가 됐는데.'

사나흘 정도만 더 밀어붙이면 좋을 테지만, 이쪽도 보급 때문에 그 정도 여유는 없었다.

"조금 더 강하게 밀어붙여라."

빅토르는 다소 피해를 감수하고 전투 시간을 조금 더 늘렸다.

쪽잠을 자며 버티던 페르디움 군은 더욱더 버티기가 힘들어졌다.

그 와중에도 지셀은 용병들을 절반씩 나눠 꼬박꼬박 재우고 휴식을 취하게 했다.

문제는 용병들이 쉬는 만큼 지셀이 더 움직여야 한다는 거였다.

"도련님! 미쳤어요? 이러다 죽어요!"

"공자님! 공자님도 조금 쉬셔야 합니다!"

벨린다와 길리언이 말렸지만, 지셀은 한번 결심한 일은 무조건 밀고 나가는 사람이었다.

"괜찮아. 죽어서 영원히 쉬는 것보단 낫잖아? 지금 열심히 움직여야지."

완고하다 못해 태평한 대답에 벨린다만 가슴을 쳤다.

그렇게 이틀이 지났다.

페르디움 군은 더 심각한 문제에 직면했다.

"화살이... 떨어졌습니다."

"수성 물자도 이제 없습니다."

기사들의 보고가 이어지자 즈발터는 결국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밤낮없이 쳐들어오는 적을 막느라 결국 모든 물자가 소모된 것이다.

호메른이 열심히 영지의 물자를 긁어다 주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이걸 노렸겠지.'

적의 지휘관은 이쪽의 약점을 너무나도 잘 이용했다.

항상 힘이 넘치던 란돌프마저도 퀭한 눈만 끔뻑이고 있었고 병사들은 죄다 피곤에 절어 있었다.

'끝이구나.'

저렇게 신중하게 나오는 적들을 상대로, 지금까지 버틴 게 놀라울 정도였다.

지셀이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너는 그나마 좀 괜찮아 보이는구나."

즈발터의 말에 지셀이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아직 전투가 끝나지 않았으니까요."

실제로 지셀의 얼굴은 피곤해 보이긴 했지만 다른 사람들만큼 죽을상은 아니었다.

즈발터는 잠시 고민하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전투가 시작되면... 너는 용병들을 이끌고 이곳을 떠나거라."

"무슨 말씀이십니까?"

평소와는 다른 아버지의 모습에 지셀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언제나 귀족의 의무와 명예를 강조하던 사람이었는데, 도망치라니.

"로게스 백작에게 몸을 의탁해라. 사적으로는 백작 부인이 너의 고모니 모른 척하지는 않을 터. 그가 널 보호해 줄 것이다."

"그건 귀족의 의무가 아니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나도 사람인지라 어쩔 수가 없구나. 영주가 아니라 아비의 마음이다. 엘레나도 함께 데리고 가거라."

"이미 질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이제 네 병력이 영향을 미치는 시기는 지났다. 이긴다면 네가 없어도 이길 것이고, 진다면 네가 있어도 질 것이다."

"...."

"케인은 때리지 말고 친하게 지내거라. 괜히 사고치고 눈칫밥 먹지 말고."

"...하하."

즈발터가 농담하는 건 좀처럼 보기 힘든 일이었다. 지셀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란돌프도 다가와 지셀의 어깨에 다정하게 손을 올렸다.

"대공자, 아니 조카 같으니까 이제 편하게 말할게."

"뭐 언제는 편하게 안 하셨습니까?"

퉁명스럽게 답하자 란돌프가 이를 내보이며 씩 웃었다.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시는 만나지 말자. 항상 미덥잖았는데 그래도 마지막은 정말 가문의 대공자이자 영지의 계승자다웠다. 가서 가문의 명맥을 이어라."

"저는 도망가지 않습니다."

"그냥 가라. 네가 살아야 나중에라도 우리 복수를 할 거 아니냐."

복수라.

지셀이 씨익 웃으며 답했다.

"복수는 이미 시작됐습니다."

"뭐?"

둥! 둥! 둥!

란돌프가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을 새도 없이, 적들의 북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드드드드드!

남아 있던 공성탑 세 대도 움직이고 있었다.

드디어 마지막 결전의 때가 왔다는 걸 모두가 피부로 느꼈다.

지셀은 적군이 다가오는 모습을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이제 제 생각대로 움직이겠습니다."

성문 쪽으로 내려가는 지셀을 보며 즈발터와 란돌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잠시 후, 즈발터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언제는 저놈이 말을 듣는 놈이었던가. 그래도 마지막은 귀족답구나."

"이왕 이렇게 된 거 끝까지 해봅시다. 공성탑을 움직인 거 보면 오늘이 마지막 날 같습니다. 무기가 없으면 주먹으로 싸우면 되는 거 아닙니까?"

다시 의욕을 불사르는 란돌프를 보며 즈발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병사들을 향해 외쳤다.

"모두 힘을 내라! 오늘이 마지막 전투다!"

"와아아아!"

영주의 확언에 병사들은 무기를 들고 크게 함성을 내질렀다.

사실 누구도 페르디움이 이길 수 있을 거라 믿지는 않았다.

그저 죽기 싫어서 내지른 비명에 더 가까웠다.

페르디움 쪽에서 함성이 들려오자 빅토르는 비웃음을 지었다.

"이제 끝이다. 지겨운 놈들."

어제부터 화살이 거의 날아오지 않았다.

적들의 물자가 거의 다 떨어졌다는 증거였다.

이제 압도적인 전력으로 몰려가 승리를 취할 때였다.

"중앙군은 성문 근처까지 가서 대기한다!"

특히 그는 중앙군의 전열에 두텁게 방패병을 세웠다.

"한계에 몰리면 적들이 성문을 열고 뛰쳐나올 것이오. 그때 마법으로 선두를 날려 주시오."

빅토르 옆에 서 있던 마법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빅토르는 공성이 시작되면 검은 갑옷을 입은 놈들이 뛰쳐나올 거라고 확신했다.

최후의 순간에는 자신들의 장기를 살려 돌격을 감행할 것이다.

'그게 승리할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겠지.'

하지만 마법사가 불시에 일격을 가하면 그놈들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이 순간을 위해 마법사를 숨겨 왔다.'

페르디움에도 제법 머리를 쓰는 놈이 있는 거 같지만, 그것도 여기까지였다.

"전군! 진격하라!"

빅토르의 외침에 따라 모든 병력이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쿵! 쿵! 쿵!

페르디움의 병사들은 절망감에 휩싸여 몸을 떨었다.

지금까지 잘 막아 내었다. 하지만 오늘은 도저히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오직 용병들만이 날카로운 눈으로 적군을 노려보며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용병들을 한번 둘러보던 지셀의 시선이 바로 옆에 있던 이에게서 멈췄다.

"바네사, 준비해라."

78화 이날을 기다렸다. (1)

지셀을 중심으로 뭉쳐 있던 용병들이 좌우로 갈라졌다.

그러자 용병들이 가리고 있던 마법진 여러 개가 보였다.

마법진 하나를 중심으로 주변에 여섯 개의 마법진이 더 그려져 있었다.

바네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중앙에 새겨진 마법진 위에 올라섰다.

바네사뿐만 아니라 알포이와 마법사들도 이곳에 끌려와 있었다.

그리고 모든 마법사의 팔에는, 술식이 새겨진 룬스톤 팔찌가 채워진 상태였다.

"이건 무슨 마법진이냐? 언제 새겨 놓은 거야?"

알포이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지셀은 별거 아니라는 표정으로 답했다.

"알포이와 친구들도 여기에 올라서라."

"아니, 이게 뭔지 알아야 올라서든지 말든지 할 거 아니야?"

어느 순간부터 알포이는 대놓고 말을 놓고 있었지만, 지셀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말투 같은 게 아니었다.

지셀은 머뭇거리는 마법사들을 설득하는 대신 행동으로 보여 주기로 했다.

"올려."

그의 손짓을 본 용병들이 알포이와 마법사들의 목에 무기를 들이밀며 강제로 마법진 위에 세웠다.

"허 참,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알포이가 대놓고 꿍얼거렸다. 지셀은 그를 무시하고, 바네사 쪽으로 돌아섰다.

"바네사, 할 수 있겠지?"

그녀는 떨리는 눈으로 지셀을 마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결심은 했지만, 막상 실행하려니 자신감이 다시 사라지고 있었다.

"제, 제가 할 수 있을까요?"

"할 수 있어. 반드시 성공해야 해."

단호한 대답에 바네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목숨을 걸어서라도 성공시킬 각오로, 바네사는 눈을 감고 마력을 끌어올렸다.

구우우웅!

바네사의 몸이 점점 공중으로 떠오르며 마력이 그녀에게 몰려들기 시작했다.

1서클의 마법도 제대로 못 쓰는 그녀가 이렇게 마력을 끌어당길 수 있을 리가 없다.

"마, 마력 전이!"

알포이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갑자기 그의 몸에서 마력이 미친 듯이 빠져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옆을 둘러보니 다른 마법사들도 당황하며 손을 휘적거리고 있었다.

알포이는 절규하며 외쳤다.

"미친 새끼야! 왜 하필 저년에게 통제를 맡긴 거야!"

마력 전이는 한 사람에게 다른 이들의 마력을 몰아줘 그 힘을 증폭시키는 마법이다.

중심이 되는 인물이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면, 참여한 마법사들 모두가 마력뿐만 아니라 생명력까지 뽑혀 죽고 만다.

중심 인물에게 섬세한 제어 능력과 엄청난 정신력, 그리고 술식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없으면 실패하는 위험한 마법.

"1서클도 제대로 못 쓰는 년이 성공할 리가 없잖아!"

"걱정하지 마라. 바네사를 믿어 보라고."

"믿긴 뭘 믿어! 이 미친 새끼야!"

알포이와 마법사들은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려 했지만, 늦었다. 이미 마력의 폭풍에 휘말리고 만 것이다.

마법사들은 옴짝달싹 못 한 채 마법진에 모든 마력을 빼앗기고 있었다.

"으윽... 안 돼.... 이렇게 죽을 순 없어...."

알포이와 마법사들이 괴로워하는 만큼, 바네사도 이를 악물며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녀의 코와 귀에서 조금씩 피가 흘러나왔다. 온몸의 핏줄이 기묘한 검은색으로 빠르게 물들기 시작했다.

몸이 몰려드는 마력에 제대로 버티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미친 듯이 떨리는 몸은 지금 그녀가 얼마나 버티기 힘든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으으으으...."

결국 그녀의 입에서도 신음이 터져 나왔다. 마력의 압력을 견디지 못해 감은 눈에서는 피눈물이 새어 나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주변 사람들도 무거운 마나의 기운을 느끼기 시작했다.

광폭하진 않지만, 쌓이고 쌓여 공간을 내리누르는 그 무언가를.

"아으으윽...."

바네사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점점 정신이 희미해져 갔다.

'역시 무리였어. 나는 안 돼. 내 주제에 무슨....'

언제나 실패만 한 인생이었다.

잠깐 기적을 맛봤을 뿐인데, 자신에게 능력이 있다고 착각해 버렸다.

고오오오오오!

이제 한계다. 더는 버틸 수가 없다. 너무나 아프고 고통스럽다.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고통을 한 번에 받는다면 이런 기분일까?

단호한 결심도 아픔 속에서는 눈 녹듯이 녹아버리고 말았다.

그냥 다 잊고 포기하고 싶었다.

'...그래, 나는.'

공중에 떠 있던 바네사가 고개를 툭 떨구었다.

쿵! 쿵! 쿵!

적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대군이 발맞춰 움직이니 성안까지 땅이 울려 왔다.

페르디움 병사들은 각자 마지막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자신이 믿는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또 누군가는 전의를 불태웠고, 다른 누군가는 가족을 생각했다.

반면 성벽 아래의 용병들은 말없이 지셀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바네사."

"...나, 나는."

그녀는 지셀의 부름을 듣지 못한 듯, 눈을 감은 채 혼자 계속 중얼거렸다.

― 제가... 공자님께 도움이 될까요?

― 그럼, 아주 큰 도움이 될 거야.

"바네사."

― 공자님께 도움이 되고 싶어요.

바네사가 힘겹게,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나는...."

모든 용병이 숨죽인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바네사."

― 할 수 있지?

지셀은 안타까움과 응원하는 마음을 담아 바네사를 바라보았다.

쉴 새 없이 떨리던 그녀의 몸이 덜컥 멈췄다.

거대하게 쌓이던 마력의 흐름도, 새어 나오던 피도 언제 그랬냐는 듯 멎었다.

그러자 지셀은 어금니가 깨지도록 이를 악물며 고개를 돌렸다.

"성문을 열어라. 스코반."

"대, 대공자님? 지금 무슨 생각을...."

"열어라."

스코반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도 지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다.

이대로 가면 질 수밖에 없다. 믿을 건 지셀과 용병들의 돌격뿐이다.

'그래, 어차피 죽을 거라면... 차라리 저번처럼 날뛰다가 죽는 게 낫겠지.'

성벽에서 버티다 허무하게 죽는 것보다는 그게 나을지도 몰랐다.

물론 적들이 처음처럼 당해 줄 리는 없겠지만....

만약에 지셀이 적의 진형을 붕괴시킬 수만 있다면, 성안의 모든 병력이 뛰쳐나가 활로를 찾을 수도 있다.

결단을 내린 스코반이 병사들과 함께 성문을 천천히 열었다.

끼이이익.

성문이 열리기 시작하자 성벽 위의 사람들은 기겁했다.

특히 즈발터와 란돌프는 지셀의 의도를 금세 눈치챘다.

이미 한번 겪어 봤는데 모를 리가 있을까?

"안 된다! 지셀! 무슨 짓이냐!"

"미쳤냐, 대공자! 당장 멈춰!"

그들도 지셀이 이끄는 용병대가 얼마나 뛰어난지 그동안 지켜봤다.

하지만 그것도 상대가 어지간한 숫자여야 통하는 거다.

즈발터가 다시 소리쳤다.

"그런 건 두 번이나 통하는 게 아니다! 신중 하라고 몇 번이나 말했느냐!"

적들이 처음과 같은 상황을 대비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적의 진형을 보니 이미 방패병들이 빽빽하게 앞을 메우고 있었다.

용병대가 튀어나오는 것까지 대비해 피해를 최소화하겠다는 의도가 뻔히 보였다.

"성문을 닫아라! 성문을 닫으란 말이다!"

"차라리 도망을 가! 너라도 도망가서 살아남으라고! 이 멍청한 자식아!"

즈발터와 란돌프가 목이 터질 듯 외쳤지만, 지셀은 들은 척도 안 했다.

스코반마저 못 들은 척 고개를 숙인 채 영주의 명을 무시하고 있었다.

"이놈! 끝까지 그렇게 목숨을 쉬이 버리려 하느냐!"

즈발터가 분노로 몸을 떨며 성문으로 내려가려 했다. 그러나 란돌프가 그의 팔을 붙잡고 고개를 저었다.

"늦었수, 형님."

이런 상황에서 영주가 자리를 비우면 그 순간 끝이다.

즈발터는 멀리 있는 지셀을 노려보다 잠시 숨을 고르고 말했다.

"좋다. 어차피 성문이 열렸다. 우리도 하나로 뭉쳐 싸운다."

화살도 없고 수성 물자도 없다. 성벽에 있어 봤자 다가오는 적을 견제할 수단이 없었다.

기어코 맞붙어 싸워야 한다면, 모두가 함께 싸우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지셀과 용병대의 돌격은 대비하더라도 만만치 않을 테니까.

"전군! 성벽을 포기하고 모두 성문 주위로 집결하라!"

영주의 명령에 따라 페르디움 군 병사들이 성문 앞으로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하지만 공간이 워낙 좁아 용병들의 뒤쪽에 서는 게 고작이었다.

즈발터와 란돌프, 기사들이 아직 성벽 위에서 남은 병력을 움직이는 사이.

지셀이 용병들에게 말했다.

"준비해라. 아군이 모두 모이기 전에 끝낸다."

몸이 잔뜩 달아오른 용병들이 무기를 들고 뛰쳐나갈 준비를 했다.

그들은 긴장했지만 겁먹지는 않았다.

언제나처럼 대장이 하라는 대로 따르면 이길 수 있다고 믿었다.

카오르는 그냥 마음을 편하게 놓았다.

'싸우다 죽으면 그만, 살아도 그만이지. 뭐, 아쉬운 게 없지는 않지만.... 이런 전쟁에서 죽는 것도 나쁘지 않아. 속은 시원하겠지.'

지셀이 나서서 싸울 때마다 그를 말리려고 난리를 치던 벨린다도 평소와 달리 조용했다.

어차피 성문을 열고 싸우든 닫고 싸우든 위험한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죄송해요, 영주님. 도련님은 제가 어떻게든 살려 갈게요. 가능하다면 아가씨도요.'

지셀이 지칠 때쯤 기절이라도 시켜서 전장을 빠져나갈 계획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길리언은 벨린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했지만, 말없이 자신의 무기를 점검했다.

마법사들로 함정을 준비했다는 건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지셀의 표정을 보니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지셀을 알고 지낸 시간은 짧지만, 길리언은 제 젊은 주군이 절대 도망가지 않을 사람임을 알았다.

자신은 이미 그에게 남은 인생을 바치기로 한 몸. 이곳에서 지셀과 함께 죽을 생각이었다.

'레이첼, 일이 잘못되면 엘레나 아가씨와 함께 도망가거라.'

한편, 성문이 열린 걸 확인한 빅토르는 환한 웃음을 지었다.

"이제 정말 끝낼 시간이구나."

예상대로 적들은 마지막 돌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심지어 모든 병력을 성문 쪽으로 집결하려는 듯했다.

"멍청한 놈들. 한꺼번에 달려든다면 더 쉬워질 뿐이지."

빅토르가 손을 들어 올리자, 뒤쪽에 대기하던 기병대가 중앙군의 양옆으로 포진하며 나아갔다.

이들은 페르디움 군의 측면을 노리고 움직일 것이다.

"기병대는 적들이 패주하면 바로 추격하여 섬멸해라."

빅토르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떠올랐다.

드디어 당했던 걸 갚아 줄 때가 왔다.

"모두 밀집 대형으로 천천히 움직여라!"

쿵! 쿵! 쿵!

적군의 진형이 촘촘해지고 더 견고해졌다.

대기하고 있던 스코반과 병사들이 그 위압감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스코반의 옆에 있던 리카르도는 문득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그런데 왜 대공자님 말을 안 타고 계시지? 용병들도 그렇고.'

지셀과 용병들 주변에도 말은 보이지도 않았다.

'말을 타지 않고 돌격한다고?'

물론 처음처럼 그냥 달려 나갈 수도 있겠지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다르다.

용병들이 타는 말들은 성문에서 가까운 곳에 두었으니 준비할 시간도 충분했다.

리카르도는 지셀에게 말을 준비하지 않느냐고 물으려다가 멈칫했다.

아무리 바보라도 말 타는 걸 잊었을 리가 없었다.

자신도 아는 걸 과연 지셀이 몰랐을까?

그는 다시 지셀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의 눈빛은 마지막 발악을 하려는 사람보다는, 줄곧 기다리던 기회를 포착한 사람 같았다.

순간, 리카르도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지셀은 언제나 아무렇지도 않게 상식을 뛰어넘는 행동으로 엄청난 결과를 만들어 내곤 했다.

'그래, 믿어 보자. 그냥 포기할 사람이 아니야.'

페르디움에서는 처음으로 대공자를 믿는 사람이 생겼다.

리카르도의 예상은 그리 틀리지 않았다.

지셀은 눈을 가늘게 뜨고 성문 밖에서 다가오는 적군을 노려보았다. 승리를 확신하는 얼굴이었다.

'네놈들도 많이 참았겠지.'

평범한 지휘관이었다면 보급이 끊겼을 때부터 바로 병력을 갈아 넣었을 것이다.

하지만 빅토르는 신중하게 움직이며 이쪽의 약점을 철저하게 공략했다. 역시 만만치 않은 놈이었다.

'너만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니야.'

이쪽도 터질 듯한 가슴을 부여잡으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매일 매일, 달려 나가 적들의 머리를 박살 내고 싶은 충동을 참고 또 참았다.

적을 남김없이 모조리 잡아 죽이기 위해서.

으드득.

지셀은 저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바로 이 성벽에, 아버지와 가신들의 목이 장대에 꽂혀 비참하게 썩고 있었다.

그 광경은 평생 지셀을 따라다녔다. 그는 매일같이 고통에 몸부림쳤다.

두근.

그 광경을 떠올리니 머리에 피가 몰리고, 몸 안의 마나가 뛰쳐나가려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한 놈도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하지 마라.'

지셀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준비했다.

완벽하다는 건 아니다. 단 한 번만 실수해도 영지가 멸망하고 모두가 죽고 말 것이다.

작정하고 나타난 저 대군 앞에서, 누가 과연 자신 있게 승리를 장담한단 말인가.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지셀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돌아오자마자 전쟁을 막았다. 엘레나로 인해 벌어지는 최초의 싸움을.

시간은 약간 벌었지만 결국 전쟁은 일어나고야 말았다.

오히려 그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크게 말이다.

막으면 막을수록 위험이 더 커져만 갔다.

마치 하늘이 페르디움의 멸망을 강렬하게 원하는 것처럼.

'어쩌면 이 영지를 옭아맨, 피할 수 없는 운명인지도 모르지.'

지셀은 머릿속에 떠오른 비관적인 상념을 흩어 버리며 사납게 웃었다.

'웃기지 마라. 두 번은 없다.'

철컥!

지셀이 투구의 면갑을 내리자 모든 용병이 똑같이 투구를 고쳐 썼다.

후우, 후우, 후우.

용병들의 긴장된 숨소리가 울려 퍼진다.

성문 옆에 대기하고 있던 스코반과 병사들이 심상치 않은 기세에 뒤로 물러났다.

오직 지셀과 용병들만이 전의를 불태우며 성문 앞에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지셀은 천천히 옆으로 팔을 뻗으며 용병들에게 말했다.

"기다려라."

모두의 긴장감이 최고에 이르렀다.

심장이 터질 듯 뛰고, 근육이 땅겨 몸이 경직되었다.

머리에 피가 몰려 어지러웠다. 어떻게 서 있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할 정도였다.

"아직."

용병들이 극도로 집중한 채 시간의 흐름마저 잊을 즈음이었다.

지셀이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바네사!"

바네사가 감고 있던 두 눈을 번쩍 떴다.

그 눈동자에는 황금빛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작은 입술이 달싹이듯 무언가를 읊조렸다.

그녀의 염원과 이해가 세계를 관통하고 하나의 이치에 닿았다.

그것은 한계를 무시하고 서클을 뛰어넘는 힘을 불러왔다.

고오오오오!

거대한 마력이 사방으로 올올이 풀려 나갔다. 마력은 곧 문자로 형상화되어 바네사의 주변을 돌기 시작했다.

타오르던 마법 문자들은 이내 붉은 점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지고, 다시 세계에 녹아내리며 사라졌다.

고오오오오!

순간,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모두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똑같은 광경이 비치고 있었다.

성벽과 적군 사이에 피어오르는, 마치 노을처럼 끊임없이 넘실거리는 붉은 장벽이.

즈발터가 놀라서 검을 놓쳤다. 란돌프도 체면도 잊고 입을 벌렸다.

고오오오오!

적군은 더 이상 페르디움 성에 다가가지 못했다. 빅토르도 급히 말을 멈추었다.

놀라 경직된 사람들 사이에서 단 한 사람만이 움직였다.

넘실거리는 붉은 불길처럼 그의 눈도 붉게 빛났다.

쿠르릉!

땅이 거세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날을 기다렸다."

마치 용암이 끓어오르는 듯한 목소리였다.

79화 이날을 기다렸다. (2)

"이, 이게 도대체?"

거대한 불의 장벽은 적군의 주위를 완전히 둘러싸고 있었다.

앞으로 나가기는커녕 후퇴조차 할 수 없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현상에 당황해 모두가 넋이 나가 있었다.

빅토르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옆에 있는 마법사들에게 소리쳤다.

"마법을 파훼하시오! 해제하란 말이오!"

그러나 마법사들은 눈을 크게 뜬 채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다.

"우, 우리는 이 마법을 해제할 수가 없소."

"뭐요? 당신들 마법사잖아!"

"이건 우리의 서클을 뛰어넘는 마법이오."

마법사 중 한 명이 떠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경도 보시오. 이게, 이게 일반적인 마법으로 보이오? 이런 걸 본 적이나 있소? 어지간한 마탑의 탑주도 이런 마법은 못 쓰오. 우리로서는 이 마법을 해제할 수 없소."

다른 마법사가 불의 장벽을 노려보며 말을 받았다.

"이건 4서클의 마법이오. 하지만 시전한 자는 4서클이 아니겠지. 적어도...."

"적어도?"

"...7서클 이상이오."

"개소리하지 마시오! 왕국에 7서클 마법사는 단 두 명뿐이오! 그런데 이곳에 그런 고위 마법사가 있다고?"

빅토르가 이를 갈며 소리쳤지만, 마법사는 들리지 않는 듯 혼자 중얼거렸다.

"아니, 7서클 마법사도 이렇게는 할 수 없을 텐데. 도대체 이게 뭐지? 이건 일반적인 마법의 개념을 벗어났어. 개인의 힘이 절대 아니야. 뭐지? 마법진? 아티팩트? 어떤 장치가 있는 거야. 분명 매개체가 필요할 텐데."

이 와중에도 마법사들은 적을 물리치는 것보다 자신들의 호기심을 채우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들은 불의 장벽을 뜯어보며 마력의 패턴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빅토르는 마법의 원리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백작님은 마법사가 있을 걸 대비해 당신들을 보낸 거다. 그런데 해결을 못 한다고? 지금 한가하게 구경이나 하고 있을 때야!"

"우,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소."

"백작님도 이런 건 예상하지 못했을 거요."

두 마법사의 변명에 빅토르는 머리끝까지 열이 뻗쳤다.

"으으, 이 쓸모없는 것들! 이런 일에 대비하라고 온 게 아닌가!"

데스몬드 백작이 마법사를 두 명이나 붙여 준 건, 페르디움이 룬스톤을 판매한 돈으로 마법사를 초빙할 가능성까지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렇게 철저한 해럴드조차 페르디움에 5서클 이상의 마법사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왕국 전체를 통틀어도 5서클 이상은 50명이 채 넘지 않는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 짧은 기간 동안 페르디움이 데려올 수 있는 건 4서클 마법사가 한계였다.

그마저도 운이 좋아야 겨우 초빙할 수 있을 거라고 봤다.

"백작님도 예상하지 못했다는 말인가?"

빅토르는 혼자 중얼거리다 고개를 번쩍 들었다.

사방을 가로막은 불의 장벽 때문에 공성전은 불가능해졌다.

마법이 다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불길이 사방을 막고 있지만 빠르게 달린다면 어떻게든 뒤로 빠져나갈 수는 있을 것이다.

"후퇴한다! 뒤에서 정비하고 불이 꺼지면 다시 진군하겠다! 최대한 빨리 이 지역을 빠져나가라!"

크게 외치고 말머리를 돌리려던 그때, 마법사 하나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이곳이 유난히 마력의 농도가 짙은데. 뭔가 이상...."

쿠르르릉!

순간, 그들이 타고 있던 말이 휘청거렸다. 마법사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고삐를 잡아챘다.

바네사가 다음 단계의 마법을 시전한 것이다.

그녀의 눈에 새겨진 황금색 마법진이 한 바퀴 돌아갔다.

파삭!

그녀와 알포이 일행이 차고 있던 룬스톤 팔찌가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불의 장벽은 상대를 한자리에 잠시 묶어 놓으려는 방편일 뿐. 진짜는 지금부터였다.

주변에 녹아들었던 마력이 서서히 실체를 갖추었다.

그것은 곧 땅 곳곳에 스며들어 땅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던 무언가와 만났다.

드디어 조건이 완벽하게 충족되었다.

바네사가 작게 읊조렸다.

"...플레임 스트라이크."

대지가 들썩이며 마력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쿠웅!

쿠르릉!

콰아아아앙!

천지를 뒤흔들 듯한 굉음과 함께 거대한 불기둥 수십 개가 곳곳에서 솟아올랐다.

"으아아아악!"

빅토르의 병사들은 비명을 지르며 불에 타들어 갔다.

불기둥의 중심에 있던 자들은 미처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재가 되어 사라졌다.

"이건!"

콰아아앙!

빅토르와 마법사들도 폭발을 피하지 못했다.

전장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비명을 지르며 무기를 던지고 흩어지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살려 줘!"

"뒤로 빠져! 뒤로 가라고!"

불과 불이 이어져 사방을 가득 채운다.

거대한 불기둥들은 공성탑과 사다리차를 잡아먹으며 몸집을 키웠다.

몸에 불이 붙은 병사들이 바닥을 구른다.

성문 안에 있던 페르디움의 병사들은 침만 삼키며 지옥 같은 현장을 지켜보았다.

도대체 누가 이런 걸 준비했다는 말인가?

넋이 나가 있던 즈발터는 비틀거리다 간신히 중심을 잡고 바로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혼란스러운 병사들과 달리 지셀과 용병들은 침착해 보였다.

"설마... 지셀 네가?"

그때, 바네사가 피를 뿜어내며 쓰러졌다.

공중에서 떨어지는 그녀를 가까이 있던 용병이 붙잡았다.

지셀은 잠시 뒤를 돌아보고 입을 열었다.

"벨린다, 마법사들을 돌봐 줘."

"네? 네, 네!"

벨린다와 병사 몇 명이 쓰러진 마법사들을 업고 뒤로 물러났다.

지셀이 돌아서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용병들이 뒤를 따른다.

즈발터가 크게 외쳤다.

"지셀! 무슨 짓이냐!"

하지만 지셀은 대답하지도, 멈추지도 않았다. 즈발터가 다시 다급하게 외쳤다.

"그만! 그만! 이제 그만해라! 우리가 이겼다! 저 불 속에서는 다 도망갈 것이다! 도대체 왜 나가려고 하느냐! 바깥은 불바다란 말이다!"

그제서야 지셀이 걸음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무미건조한 대답이 돌아왔다.

"죽여야 하니까요."

"뭐?"

"도망가는 놈들도 죄다 잡아 죽일 겁니다. 페르디움을 넘본 대가가 무엇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해 줘야 합니다."

"너 진심으로...."

"앞으로 이곳을 노리는 적들은 한 번 더 생각하게 될 겁니다. 목숨을 걸 용기가 있는지 말입니다."

쿠웅.

지셀에게서 거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시체를 쌓아 올리며 살아온 자만이 낼 수 있는 기세였다.

처음 보는 아들의 모습에 즈발터는 온몸에 소름이 올라왔다.

대체 어떻게 저런 기세를 보일 수 있는 것일까.

그러나 지금은 아들을 말리는 게 우선이었다.

"뜻은 알겠다만, 저 불 속에 무슨 수로 들어간다는 말이냐!"

마나로 몸을 보호해도 저런 엄청난 불길 속에서는 한계가 있다.

어설프게 뚫고 들어가려다가는 죽는 이가 태반일 것이다.

그러나 즈발터의 애타는 외침에도 지셀은 말없이 씨익 웃어 보일 뿐이었다.

* * *

뒤에서 구경하던 타모스 백작은 갑자기 솟아오른 불길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뭐, 뭐야? 이게 뭔데? 왜 갑자기 불이 솟아올라! 아무것도 없는데!"

지금 도대체 무슨 일인지, 무슨 현상인지조차 파악이 되지 않았다.

그나마 외곽에 있던 병사들은 겨우 빠져나왔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병사들이 죽었다.

불이 붙은 채로도 어떻게든 뛰쳐나온 자들도 있었지만 얼마 가지 않아 죽고 말았다.

타모스가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젊은 참모 하나가 크게 외쳤다.

"정신 차리십시오! 후퇴 명령을 내려야 합니다! 나팔을 불고 남은 병사들을 앞에 보내십시오! 부상자를 구해야죠!"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는 타모스에게 참모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이곳은 산림이 아닙니다. 주변은 뻥 뚫려 있고 탈 것도 없으니 빠져나오기만 하면 다시 정비해서 군사를 모을 수 있습니다!"

화공이 무서운 이유 중 하나는 불길이 순식간에 주변의 나무 등을 태우며 번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별것도 없는 이런 평야에서라면, 크게 번지지 못하고 금방 꺼질 것이다.

"너, 너는 서기관 밑에 있는... 이름이 로웰이었나? 적이 쫓아오기라도 하면 어쩐단 말이냐? 지, 지금이라도 우리가 도망가야...."

"불길을 뚫고 올 수 없는 건 적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마 우리가 도망가거나 타 죽기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다른 성문 쪽으로 우회해서 오는 것도 시간이 걸리겠죠. 지금 당장 움직여야 합니다."

로웰의 말에 타모스는 더듬더듬하며 다시 물었다.

"아니, 그치만... 병력을 모으기도 전에 놈들이 오면.... 그냥 도망치는 게 낫지 않을까?"

"아오, 씨.... 아니, 영주님! 어차피 병력이 없으면 항복하더라도 우리는 끝입니다! 병력이 남아 있어야 항복 협상이라도 해 볼 거 아닙니까! 한 명이라도 더 살려서 가야 합니다!"

"그, 그래. 그렇지. 부상자를 옮겨라! 어느 정도 모이는 대로 퇴각한다!"

타모스가 급히 외치자 후방에 남아 있던 호위 병력이 움직였다.

고작 백여 명밖에 안 되는 수지만 그에게 남은 병력은 이게 전부였다.

* * *

한편, 지셀은 자신의 갑옷을 툭툭 치며 용병들을 돌아보았다.

"오래 버티지는 못한다. 최대한 빨리 죽이고 남은 놈들을 쳐라."

지셀과 용병들이 입고 있는 검은 갑옷은 디루스 엔트의 내피를 덧붙인 것들이었다.

4서클의 화염 마법을 막을 수 있는 재료이니만큼, 저 거대한 마력의 불도 잠시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길리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아마 역사상 가장 비싼 함정일 겁니다."

"그렇겠지. 이번에 캐 온 룬스톤을 죄다 날렸으니까."

"룬스톤이 아깝지 않으십니까?"

"돈은 목적을 이루는 수단일 뿐이거든."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명령을 따랐던 용병들도 그제야 지셀의 전략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지셀은 전쟁이 선포됐을 때부터 용병들을 시켜 룬스톤을 성 밖의 땅에 잔뜩 묻도록 했다.

"혹시나 뺏길까 봐 숨기는 건 줄 알았는데, 이렇게 쓸 줄이야. 그 많던 놈들이 그냥 다 쓸려 나가는구먼."

"아깝지도 않은가?"

"나중에 몰래 파내서 조금 가져가려고 했는데 결국 다 터지고 말았네."

용병들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보통은 그 룬스톤을 다 들고 도망갈 것이다. 그 정도면 한평생 놀고먹어도 되는 양이었으니까.

그런데 단 한 번 쓸 함정을 위해 그 많은 룬스톤을 모조리 터트려 버리다니.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너무하다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저 여자 대단하네. 진짜 마법사였어."

"이 정도면 몇 서클이야? 혹시 대마법사 아냐?"

"그냥 하녀인 줄 알았는데."

용병들은 결과물만 보고 감탄했지만, 사실은 조금 달랐다.

아무리 마력 전이를 받았다고 해도 지금 바네사의 경지로는 이 많은 룬스톤을 동시에 폭발시킬 수 없었다.

그저 룬스톤 중 몇 개를 터트렸을 뿐이다.

하지만 모든 룬스톤에는 집속, 연쇄, 폭발 등의 술식이 골고루 새겨져 있었다.

전쟁이 선포되기 전까지 바네사는 지셀의 명에 따라 열심히 술식을 새겼다.

마법적 이론과 감각이 특출난 그녀가 있어야 가능한 작업이었다.

지셀은 마수의 숲에서 룬스톤을 캐 올 때부터 이 함정을 준비했다.

바네사를 마탑에서 데려온 것도 그 일환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이곳을 침공한 놈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할 시간이 되었다.

참고 참았던 분노를 터뜨릴 때였다.

"보이는 놈들은 모두 죽여라!"

지셀이 크게 외치며 뛰어나갔다.

길리언과 카오르가 뒤를 따르자, 머뭇거리던 용병들도 이를 악물고 쫓았다.

"에라이! 일단 가자!"

"괜찮다고 했으니 괜찮겠지!"

"도망가기 전에 다 잡자고!"

치이이익!

디루스 엔트의 내피는 불과 접촉하자 수증기를 뿜어내며 말라 가기 시작했다.

"오, 따뜻해! 따뜻하다고!"

"버틸 만한데?"

"빨리 죽이고 빠지자!"

불지옥이 된 전장에는 아직 살아남은 자들이 꽤 되었다.

용병들은 탈출하려고 온 힘을 다해 도망치는 그들을 쫓아가며 무기를 휘둘렀다.

"크아아악!"

불 속에서 몸부림치던 적들이 허무하게 쓰러졌다.

용병들이 생존자들을 학살하는 동안, 지셀은 불길 속에서 누군가를 찾아다녔다.

'빅토르 이 새끼부터 죽여야 해.'

지금도 빅토르는 강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강력한 적수가 될 게 분명했다.

이번 전쟁에서 반드시 찾아 죽여야 했다.

'불기둥에 직격으로 맞아 죽었다면 다행이지만.... 시체 조각이라도 확인해야 한다.'

지셀은 사방에서 들려오는 적군 병사들의 끔찍한 비명을 뚫고 달려 나갔다.

'찾았다.'

그리고 마침내 화염 속에 홀로 서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크아아아! 내 군대를! 감히 나를!"

빅토르는 분노로 가득 찬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수포로 뒤덮인 얼굴 반쪽은 아직도 절절 끓었고 갑옷도 이곳저곳이 깨지고 찌그러졌다.

그래도 그는 살아 있었다.

"모두 죽여 버리겠다! 배를 가르고 목을 잘라 성벽에 매달아 주마!"

두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혼자서라도 페르디움 영주와 그 가신들의 목을 모두 베어 버려야 한다.

설사 여기서 죽더라도, 그게 자신의 명예와 체면을 살릴 마지막 방법이었다.

빅토르가 마나를 줄기줄기 뿜어내며 페르디움 성 쪽으로 뛰어들려던 그때.

파악!

불길을 가르며 무언가가 그에게 쏘아져 왔다.

80화 이날을 기다렸다. (3)

타모스는 안절부절못하며 다리를 떨었다.

병사들이 불에 가까이 가지 못하니 빠져나온 부상자들만 겨우 옮기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제법 나왔는데 이제는 나오는 병사들이 거의 없었다.

'젠장, 죄다 부상자들인데 이걸 어떻게 하라고!'

초반에 빠져나온 자들은 그나마 괜찮았는데 나머지는 다 죽어 가는 놈들이었다.

그마저도 다 합쳐 500명이 채 되지 않았다.

'빅토르, 이 등신 같은 놈! 잘난 척하더니 이게 뭐야? 이런 대군을 끌고 패배하다니!'

타모스가 빅토르를 원망하고 있는 사이, 눈을 굴리며 전장을 지켜보던 로웰은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아무리 불길이 거세도 평야다. 달려 나오면 부상이 심하더라도 빠져나올 수 있어. 뭔가, 뭔가 이상하다.'

데스몬드는 훈련받은 기사와 병사들로 골라 지원군을 보내 주었다.

이 정도 상황에 그 모든 이들이 공황에 빠졌을 리는 없었다.

'병력이 밀집 대형으로 붙어 있었던 탓인가? 서로 움직임이 방해되어서 미적거리다 불이 옮겨붙게 된 거라면....'

적어도 천 명은 나올 거라 예상했는데 빠져나온 병사가 너무 적었다.

여전히 불 속에서는 고통에 찬 비명이 계속 들려왔다.

'저렇게 비명을 지르면서도 빠져나오지 않는다고?'

좋지 않은 예감에 심장이 뚝 떨어졌다.

로웰은 바로 페르디움 성의 동쪽과 서쪽을 확인했다.

'먼지구름은 없다!'

적들이 추격을 시작했다면 기마병을 동원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쯤 먼지구름이 눈에 띄어야 했다.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이를 악물고 타모스에게 외쳤다.

"영주님! 당장 퇴각해야 합니다! 남은 병사들과 기사들을 이끌고 도망가십시오!"

"엉? 부상자들 데리고 가자며?"

"저 안에 뭔가가 있습니다! 당장 몸을 피하십시오!"

진작부터 엉덩이를 들썩이던 타모스는 로웰의 말을 듣자마자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래! 도망가자! 모두, 모두 후퇴하라!"

하지만 이미 늦었다.

검은 갑옷을 입은 자들이 불길을 뚫고 뛰쳐나왔다.

그 모습은 마치 지옥의 악마들처럼 보였다.

"저, 저 복장은...."

두 사람은 얼굴이 창백해졌다.

검은 갑옷에서 쉼 없이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타모스는 바로 말머리를 돌렸다.

어떻게 저들이 불길을 뚫고 왔는지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막아! 저놈들 막으라고!"

타모스는 그 말만 남기고 바로 말을 박차 도망가기 시작했다.

"어? 어? 영주님! 영주님! 제가 잘 모시겠습니다!"

로웰도 마음에 없는 소리를 지껄이며 잽싸게 타모스의 뒤를 따랐다.

남은 기사 몇 명마저 영주를 따라 도망가자, 지휘관을 모두 잃은 병사들은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우, 우리도 도망가자!"

"그럼 부상자들은?"

"어차피 우리가 졌어! 여기 있으면 우리도 다 죽는다고!"

눈치 빠른 병사들부터 하나둘 흩어지기 시작했다.

부상자는 물론 무기들까지 버린 채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데스몬드에서 보내온 병력들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더 싸울 의지도 잃고 말았다.

"모두 퇴각하라! 어떻게든 살아서 영지로 돌아가라!"

용병들은 도망가는 자들을 미친 듯이 쫓기 시작했다.

"모두 잡아 족쳐!"

"크하하핫! 어딜 도망가!"

"다 죽여라!"

살육의 열기에 취한 용병들이 무자비하게 적들을 도륙했다.

"끄아아악!"

뒤를 잡힌 적들의 비명이 전장에 울려 퍼졌다.

용병들은 쓰러진 부상자들을 처리하며 달렸다. 절뚝거리며 도망가던 이들도 목이 날아갔다.

콰직! 콰지직!

"살려 줘! 항복이야! 항복한다고!"

"으아아악! 그만해!"

"무기 버렸어! 제발 살려 줘!"

병사들은 바닥에 엎드리거나 무릎을 꿇고 빌었지만, 흥분한 용병들에게 그런 사정이 통할 리 없었다.

"우리 대장이 항복은 받지 말랍신다! 크하하!"

도망에 성공한 병사들은 극소수. 타모스의 호위 병력들도 거의 전멸했다.

"그만! 이제 그만 쫓아라!"

길리언이 손을 들어 흥분에 빠진 용병들을 제지했다.

여기서 더 쫓아갔다는 아군도 죄다 흩어질 판이었다.

"푸후, 조금 아쉽군."

"아주 시원하게 몸 좀 풀었다. 크흐흐!"

"정말 끝난 건가? 시체들이나 뒤져 보자고."

용병들은 쓰러진 시체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반지나 목걸이, 혹은 돈이 될 만한 물건들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시체들 사이에서 희희낙락하는 용병들에게 길리언이 다가와 으르렁거렸다.

"지금 뭐 하는 짓들이지? 분명 전리품은 전쟁이 끝난 뒤 공평하게 나눠 준다고 했을 텐데!"

"에헤이, 이거 다 아는 양반이 왜 그러쇼."

"이런 건 먼저 먹는 사람이 임자지."

"같이 하시든가."

용병들이 건들거리며 반발하자, 길리언은 가장 가까이 있는 자의 목에 도끼를 들이밀었다.

"그 시체 옆에 눕고 싶은 건가? 누가 제멋대로 움직이라고 했지?"

험악한 분위기에 놀라 용병들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지셀에게는 충성스러운 모습만 보이는 길리언이지만, 그 역시 본질은 거친 용병이다.

훈련할 때도 용병들을 거의 잡아먹을 듯 굴려 대서 다들 길리언을 무서워했다.

기세에 밀린 용병들은 시체에서 손을 뗐지만,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무조건 자존심을 상하게 하면 불만만 쌓이는 걸 알기에 길리언은 한마디 더 내뱉었다.

"공자님의 명령을 잊었나? 아무리 용병이라도 최소한 사자에 대한 예의를 지켜라. 그리고 정당한 보수를 받아 가라."

"끙...."

"하긴 대장이 그렇게 말했었지.... 뭐, 어쩔 수 없나."

명령을 상기한 용병들은 입맛을 다시며 수긍했다.

다른 고용주였다면 욕지거리를 하며 개겼겠지만, 지금은 감히 토를 달지 못했다.

용병들의 목줄을 죄고 다니면서도 길리언은 무거운 표정으로 종종 고개를 돌렸다.

'공자님.'

지셀은 아직도 어디 간 건지 보이지 않는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용병들도 손쉽게 적들을 죽이고 빠져나왔는데, 지셀이 아직도 안 나왔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길리언은 갑옷을 확인했다.

디루스 엔트의 내피는 이미 쪼그라들어 기능을 거의 잃은 상태였다.

그나마도 대부분 떨어져 나갔고, 일부만 보기 흉하게 듬성듬성 붙어 있었다.

투구를 만져 봐도 마찬가지.

이 상태로는 불길 속에 들어가도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사방에 치솟아 오른 불은 여전히 꺼질 기미가 없어 보였다.

일반적인 불이라면 몸에 마나를 둘러 버틸 수 있겠지만, 저건 마력으로 된 불이다.

길리언도 저 안에서는 안전할 거라 장담할 수가 없었다.

'확인해 봐야겠군.'

그래도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무슨 일이 있다면 도와야 하고, 그게 아니라면 빨리 찾아서 나오면 그만이었다.

길리언이 걸음을 옮기자 카오르가 옆에서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어이, 영감. 저기 다시 들어가려고?"

"그래, 공자님이 아직 나오지 않으셨다."

"으하하, 지금 그 미친 사람을 걱정하는 거야?"

"말조심해라. 너도 여기서 그냥 죽여 줄까?"

도끼를 들어 올리자 카오르가 엄살을 부리며 물러났다.

"다음에 하지, 다음에. 오늘은 힘을 너무 많이 써서 피곤하다고."

길리언은 싸늘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다 몸을 돌렸다.

"아무튼 난 다시 들어갈 테니 용병들이나 통제하고 있어라."

"어이, 대장이 아직 안 나왔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 아니겠어?"

"뭐라고?"

길리언이 미간을 찌푸리며 돌아보자, 카오르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괜히 들어가서 방해하지 말라는 거야. 우리는 그냥 시키는 것만 제대로 하면 된다고. 내 말 틀려?"

"음."

카오르의 말도 일리가 있다.

지셀은 항상 적의 예상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걸 선호한다.

그러다 보니 아군도 그의 생각을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아마 지금도 길리언이 예상하지 못한 일을 하는 중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언제나 칼날 위를 걷듯 아슬아슬한 사람이니까.

지셀은 한 번의 실수로 모든 걸 잃을 수 있는 위험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길리언은 그런 주인을 뒷받침하는 것이 충성하는 자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조금 더 기다려 봐야겠군.'

하지만 카오르의 말도 틀린 건 아니기에 길리언은 잠시 더 기다리기로 했다.

아주 조금만 더.

* * *

카앙!

빅토르의 몸이 휘청거렸다. 자칫 늦었으면 목이 날아갔을 정도로 강력한 일격이었다.

빅토르는 당황했다. 이 영지에 자신에게 위협이 될 만한 기사가 있다고?

일단 본능적으로 검을 찌르자 상대의 몸이 흔들리며 뒤로 쭈욱 물러난다.

"제법이구나!"

정신을 차리고 상대를 확인한 빅토르가 눈을 크게 떴다.

"네놈!"

검은 갑옷과 검은 투구.

이번 전쟁에서 계속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을 방해한 그 징그러운 놈들 중 하나였다.

"잘도 내 앞에 나타났구나!"

빅토르가 검을 강하게 쥐며 분노를 토해 냈다.

그래, 이놈들도 모두 찾아 죽여야 한다.

한 걸음 앞으로 나서려던 그는 문득 이상한 광경을 보고 멈칫했다.

치이이이익!

상대의 갑옷에서 끊임없이 수증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갑옷이 아니었어?"

안력을 돋우어 보니 본래 검은 갑옷이 아니라, 갑옷 위에 검은 무언가를 덧댄 모양이었다.

검은 덩어리가 열기를 흡수하며 수증기를 뿜어내는 게 보였다.

'저 갑옷이 이 불길을 막고 있는 거야.'

깨달은 순간 빅토르는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서, 설마 처음부터 이 함정을 염두에 두고...."

전쟁 첫날부터 적들은 저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언제든지 이 불을 터뜨릴 수 있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함정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자신이 모든 병력을 모아 오기를 기다리며 유도한 것이다.

"너, 너...."

빅토르는 정신이 나갈 듯한 충격에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상대는 고개를 좌우로 까닥이며 말했다.

"그래, 내가 아주 비싸게 준비한 함정이지. 마음에 들어?"

"네놈이 준비했다고? 너, 누, 누구냐."

투구를 쓰고 있어서 얼굴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만한 인물이라면 자신이 모를 리가 없었다.

분명히 영주나 기사단장 아니면 무관장....

"지셀 페르디움."

"...?"

"나 몰라?"

"지셀... 페르디움? 대공자 지셀?"

"그래, 이 몸이 바로 그분이시다."

지셀은 오만하게 턱을 쳐들고 선언했다.

멍하니 그를 보던 빅토르의 숨이 점차 가빠졌다.

'망나니 대공자... 방구석 소드마스터... 북부의 쓰레기....'

애초에 지셀은 안중에도 없었다. 위험 리스트에도 오르지 않아, 생각조차 할 수 없던 이름.

그런 놈한테 자신이 당하다니, 온몸을 감싸는 굴욕감을 견딜 수가 없었다.

머리에 열이 올라 어지러웠다. 빅토르가 비틀거리다 간신히 중심을 잡고 자세를 바로 했다.

"내가, 북부 제일의 기사인 내가... 망나니 따위한테 당했다고?"

"그래. 그리고 네놈 목숨도 여기서 끝이다, 빅토르."

"...!"

빅토르는 순간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지?"

그는 해럴드의 숨겨진 패다. 그의 이름은 아직 알려진 곳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런 시골 촌구석 영지 사람이, 그것도 망나니라 불리는 대공자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고?

'백작님이 틀렸다. 백작님의 정보가 잘못되었던 거야.'

빅토르는 확신했다.

이번 전쟁에서 진 건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데스몬드 백작의 실수 탓이었다.

영지에 배신자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놈이 백작의 계획을 전부 페르디움에 알려 주었을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이름도 밝혀지고, 페르디움이 이런 거대한 마법 함정을 준비할 수 있었겠지.

그러니까... 이놈만 죽이고 가면 된다.

그리고 돌아가서 말하면 된다.

내 잘못이 아니었다고. 그래도 방해하는 놈은 죽였으니 이제 괜찮을 거라고.

"건방진 새끼, 감히 내가 누군지 알면서도 혼자 나타나서 주둥이를 놀렸단 말이냐?"

빅토르가 두 눈에서 살기를 뿜어냈다.

사방을 뒤덮고 있는 불의 열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분노만이 그의 몸을 태울 듯 끓어올랐다.

"감히 망나니 따위가 북부 제일인 나를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콰아앙!

수십 개의 검이 지셀을 향해 쏟아졌다.

카카카카캉!

지셀은 거대한 양손 도끼를 휘두르며 검을 막았지만, 몸이 점점 뒤로 밀렸다.

과연 빅토르는 실력이 좋았다. 크게 다쳤음에도 검로에서는 티가 전혀 나지 않았다.

기사의 정석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강맹하고 곧은 검이 쉬지 않고 지셀의 급소를 노렸다.

기세 또한 어찌나 강한지 지셀은 훨씬 더 큰 무기를 들었음에도 밀릴 수밖에 없었다.

카앙!

지셀의 도끼가 검과 충돌하며 튕겨 나간 순간, 놓치지 않고 빅토르가 검을 찔렀다.

푸욱!

몸을 틀어 피했지만, 빅토르의 검이 그를 쫓아와 어깨를 뚫었다.

치이이익!

불길에 뜨겁게 달아오른 검이 살을 태웠다. 지셀의 어깨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희열에 찬 빅토르가 다시 공격하려는 찰나.

지셀의 서늘한 목소리가 귀에 꽂히듯 들려왔다.

"좋냐?"

"뭐?"

부웅!

사각에서 도끼가 공기를 가르며 날아왔다. 기겁한 빅토르가 몸을 뒤로 젖혔다.

카가가각!

쩌억!

갑옷의 가슴 부분이 쩍하고 갈라지며 피가 튀어 올랐다.

지셀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몸을 돌려 빅토르의 복부를 강하게 걷어찼다.

퍼억!

"크윽!"

균형을 잃고 뒤로 쓰러진 빅토르가 급히 일어섰다.

다행히 바로 공격이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놈! 네까짓 놈이 어떻게!"

저 쓰레기가 자신과 비등하게 싸울 정도로 실력이 뛰어나다고?

아무리 자신이 다친 상태라지만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덜컹.

지셀은 도끼를 바닥에 집어 던졌다.

투구마저 벗어 옆으로 던지자 땀에 젖은 얼굴이 드러났다.

"확실히 제법이긴 해. 그런데 겨우 그 정도로 북부 제일이라고?"

그는 허리춤의 검을 천천히 뽑아 빅토르를 겨누었다.

그러고는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일어나. 누가 진짜 북부 제일인지 알려 주지."

81화 이날을 기다렸다. (4)

"이 쓰레기 같은 놈이!"

빅토르가 이를 갈며 일어났다.

화상을 입은 얼굴과 몸은 따가울 정도로 뜨겁고 고통스러웠다.

갑옷은 이미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라 오히려 입고 있는 게 방해가 될 지경이었다.

검 또한 조금만 충격을 받아도 휘어질 것 같았다.

마나로 열기를 억누르고는 있지만 오래 버틸 수는 없었다.

빨리 놈을 처리하고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네놈을 죽이고 다른 놈들도 모조리 목을 잘라 주마."

빅토르는 지셀을 노려보며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댔다.

스윽.

그는 망설임 없이 단검을 꺼내 갑옷의 이음새를 끊어 한 조각씩 집어 던졌다.

철컹. 철컹.

갑옷을 벗고 몸이 한결 가벼워진 빅토르가 입술을 비죽거리며 웃었다.

"기다리다니, 예의는 있는 놈이군."

"그냥 죽이면 넌 저승에서도 핑계 댈 테니까. 그 명예도 모르는 놈이 갑옷을 벗고 있을 때 공격해서 당한 거지, 절대 실력 탓이 아니라고 말이야."

"이 건방진 새끼가...."

빅토르가 살기를 뿜어내며 검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붉게 물든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청량한 푸른 빛이 검을 감쌌다.

형형하게 퍼지는 밝은 빛은 빅토르의 실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보여 주는 증거였다.

"그래, 그 정도는 해야지."

그 모습을 본 지셀의 눈에서도 붉은 귀화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래야 잡는 재미가 있지."

구우우웅!

지셀이 코어 세 개를 동시에 개방하자 주변에 묵직한 기운이 퍼지며 검이 붉게 물들었다.

빅토르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네놈이 그런 힘을.... 도대체 정보가 어디까지 잘못된 거지?"

"그건 지옥에서 네 주인에게 물어봐라. 아, 네놈 주인은 너보다 늦게 갈 테니 좀 기다려야겠네. 심심하겠는걸?"

"그 입을 찢어 주마!"

콰아아앙!

순식간에 두 사람의 거리가 좁혀졌다.

검이 부딪힌 충격으로 두 사람 주변의 불길이 일그러지며 훅 밀려났다.

"이거밖에 안 돼? 힘 좀 더 써 봐, 해럴드의 개."

"닥쳐라! 쓰레기 새끼가!"

그그그그극!

빅토르는 코어 세 개를 모두 개방한 지셀의 마나를 견뎌 내었다.

불길에 그렇게 당하고도 이 정도라니, 마나의 양이 정말 어마어마했다.

과연 북부 제일의 기사를 노려 볼 만한 실력이었다.

내심 감탄하는 지셀과 달리 빅토르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실력을 숨기고 있었던 게 아니라면... 이런 힘을 낼 수 있는 방법이 따로 있을 것이다.'

세간의 이목을 속여 가며 이만한 인물을 키워 내는 건, 페르디움 같은 아무것도 없는 촌구석 영지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빅토르는 지셀이 마법이든 뭐든, 편법을 써서 일시적으로 강해졌을 거라고 생각했다.

"무슨 수를 쓴 것이냐!"

부웅!

지셀이 검을 곧추세워 빅토르의 공격을 막았다.

카아앙!

순간적으로 몸이 살짝 뜨며 옆으로 주욱 밀려 났다. 충격으로 손이 저릿저릿했다.

'역시 만만치 않은 놈이군.'

지셀도 틈이 날 때마다 수련하고 마나를 쌓아 왔지만, 빅토르의 마나에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그의 마나 양은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3단계를 모두 개방해 힘을 증폭시킨 자신과 비슷할 정도라니.

과연 해럴드가 애지중지 키워 낸 인재다웠다.

휘익!

자세를 바로잡기도 전에 빅토르가 따라붙으며 다시 검을 휘둘렀다.

카아앙!

지셀은 아슬아슬하게 검을 들어 올려 막았다.

발이 밀리며 땅이 파였다. 쏟아지는 압력에 몸이 욱신거렸다.

하지만 그는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예전에도 힘은 제법 쓸 만하다고 생각했지."

"뭐?"

"힘으로 하는 건 나도 좋아해."

지셀이 몸을 빠르게 돌리며 검을 내려찍었다.

카앙!

이번에는 빅토르가 아래에서 막는 모양이 됐다.

순식간에 공방의 위치가 바뀐 것이다.

지셀은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쉼 없이 검을 휘둘렀다.

상대도 거리를 벌리며 온 힘을 다해 검을 맞대어 왔다.

카앙! 카앙! 카앙!

두 사람의 검이 맞부딪칠 때마다 서로 반대쪽으로 튕겨 나갔다.

양쪽 다 충격을 제대로 해소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놈이 감히!"

빅토르는 이를 악물며 남은 마나를 죄다 쏟아 내었다.

다른 놈들을 죽일 생각은 이제 버렸다.

눈앞의 적은 여력을 남겨 두어 가며 이길 수 있는 놈이 아니었다.

구오오오오!

빅토르가 마나를 한계까지 끌어올리자 검에 실린 마나가 더욱더 푸르러졌다.

치이이익!

지셀의 검기 또한 더 붉어졌다. 그의 몸에서 붉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코어 세 개를 동시에 개방한 상태를 오래 유지할 수는 없다.

최대한 빨리 승부를 봐야 했다.

쿠웅!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달라졌다.

철과 철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아니라, 마나와 마나가 부딪치며 뿜어내는 소리였다.

사방을 옥죄던 불도 그 기운에 밀려 두 사람 주변은 침범하지 못했다.

완전하게 얽힌 마나 속에서 두 사람이 빠르게 움직였다.

콰아앙!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땅이 터져 나간다.

두 사람은 무아지경에 빠져 오직 서로의 목숨을 노리고 검을 휘둘러 댔다.

쿠웅! 쿠웅! 쿠웅!

보통 사람은 보지도 못할 공방이 수백 합 이어진 끝에, 빅토르가 점차 밀려나기 시작했다.

"이, 이게 어찌...."

움직이는 속도와 맞붙는 힘은 대등했다. 하지만 기술에서 현격히 차이가 났다.

지셀에게 상처가 하나 생기면 빅토르에게는 두 개가 생겼다. 그 뒤엔 한 번에 세 개, 네 개로 늘어났다.

빅토르는 갈수록 기묘해지는 검술에 따라가기도 벅찼다.

"대체 어떻게 네놈 따위가! 인정할 수 없다!"

"이거 웃기는 새끼네. 언제 너한테 인정해 달랬냐?"

빅토르는 이죽거리는 지셀을 향해 온 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으로 갈라 버릴 기세였다.

그 힘은 제법 대단했지만, 그런 단순한 공격에 당할 지셀이 아니었다.

푸욱!

순간의 틈을 놓치지 않은 지셀이 검을 뻗었다.

기묘하게 흔들리던 검 끝이 상대의 심장 부근을 파고들었다.

"크헉!"

빅토르가 가슴을 부여잡으며 뒤로 물러났다.

지셀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실패로군.'

3단계까지 코어를 개방한 후폭풍이 슬슬 찾아오고 있었다.

회전하는 마나를 버티지 못해 근육은 찢어지고, 뼈는 비틀리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적을 죽이기 전에 그가 먼저 쓰러질 판이었다.

무언가가 흐르는 감촉에 지셀은 손가락으로 코밑을 훔쳤다. 피가 잔뜩 묻어났다.

한계가 온 모양이었다.

아마 이대로 가면 곧 귀와 입, 눈에서도 피가 흘러나올 것이다.

빅토르도 금방 지셀의 이상을 감지했다. 그의 입에서 희열에 찬 웃음이 흘러나왔다.

"크흐흐, 그렇군. 어쩐지 힘이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했어. 역시 편법이었군. 한계까지 생명력을 끌어 쓴다거나. 흑마법 같은 건가?"

"눈치 빠른 새끼네. 그래서, 이번에는 도망 다니며 시간을 끌어 볼 생각인가?"

"아니지, 그러면 네놈이 힘을 아낄 수도 있잖아? 차라리 조금 더 밀어붙이는 게 낫겠지."

빅토르는 재능이 뛰어난 무인답게, 순식간에 지셀의 상태를 파악하고 최선의 대응 방법을 찾아냈다.

가슴의 상처가 얕지는 않으나 충분히 버티고 싸울 만했다.

"이제 알겠군. 네놈이 변수였어. 프랑크도 네놈 짓인가? 그래, 프랑크 따위가 너를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지."

빅토르는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드디어 찝찝했던 원인을 찾았다.

해럴드도, 참모들도, 첩자들도, 아무도 모르고 있었던 진정한 변수.

이런 놈이 있었으니 계속 계획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네놈의 목을 베어다 백작님에게 바치겠다. 그러면 다시 기회를 받을 수 있겠지."

"까불지 마라. 누구 목을 뭘 어쩐다고? 돌아갈 수나 있을 거 같아?"

콰앙!

이번에는 지셀이 먼저 빅토르에게 공격을 날렸다.

"크하핫! 어디 한번 죽여 봐라!"

분명 자신은 지셀보다 한 수 처지는 실력이었지만, 빅토르는 걱정하지 않았다.

곧 지셀의 힘이 떨어지면 압도적인 속도와 힘으로 짓누를 수 있을 터였다.

콰앙!

다시 두 사람의 검이 맞붙었다.

공격 일변도인 지셀과 다르게 빅토르는 막는 데에만 집중했다.

상처가 하나둘 늘어났지만, 급소를 피하는 수준으로 버텼다.

피할 수 없을 거 같으면 그냥 생명에 지장이 없는 곳을 내주었다.

"크하하하! 멍청한 놈! 그래 가지고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것 같으냐!"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빅토르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대조적으로 지셀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까드득!

지셀은 이를 악물었다.

'여기까지인가?'

검 끝이 통제를 잃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상대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넌 이제 끝이다!"

콰아앙!

빅토르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지셀이 다급히 몸을 뒤로 뺐지만, 한계에 이른 몸은 충격을 제대로 흘려 내지 못했다.

그의 눈과 귀에서도 피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끝이다! 이 쓰레기 자식아!"

콰앙!

다시 한번 검이 부딪히자 그 힘을 견디지 못하고 지셀이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그는 결국 바닥에 반쯤 주저앉고 말았다.

"우에엑!"

입에서 피가 울컥 쏟아졌다.

"죽어라아아아!"

부웅!

빅토르의 검이 지셀의 목을 향해 날아왔다.

그때였다.

지셀이 검을 쥐지 않은 왼손을 쭉 앞으로 뻗었다.

덜컥!

"어?"

검을 휘두르던 빅토르가 순간 멈칫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기운이 몸을 묶은 느낌이었다.

"잔재주를!"

투드드득!

마나를 끌어올려 대항하자 그를 구속하던 마나의 실들이 끊겨 사라졌다.

부우웅!

검이 다시 공기를 찢어발겼다.

더 이상 완벽할 수 없는 한 수였다.

그때, 지셀의 왼손이 다시 반 바퀴 정도 돌아갔다.

콰아아앙!

빅토르의 검은 허무하게 바닥을 찍었다.

"어?"

분명 지셀의 머리를 노렸건만 알 수 없는 힘이 그의 자세를 흔들었다.

조금 방향을 트는 게 고작인 미약한 힘이었다.

하지만 그 방해 탓에 빅토르의 검은 지셀의 몸에 닿지도 못했다.

"제기랄!"

빅토르가 다급히 자세를 고치며 땅에 박힌 검을 다시 뽑아 들려던 순간.

푸우욱!

그의 굵은 목에 차가운 금속이 파고들었다.

"끄륵, 크르르륵!"

상처와 칼날 사이로 피거품이 쏟아졌다.

빅토르의 눈에는 의아함만이 가득 차 있었다.

쑤욱!

지셀이 검을 뽑아내자, 빅토르는 목에서 피를 뿜어내며 그대로 쓰러져 바닥에 얼굴을 박았다.

바들거리는 그의 몸을 지셀이 발로 툭 쳐서 뒤집었다.

"크륵, 어, 어떻게...."

삶에 대한 집착 때문인지, 아니면 원통함 때문인지 빅토르는 그 가느다란 숨을 계속 이어 가고 있었다.

지셀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빅토르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럼 평생 이기기만 할 줄 알았냐? 내가 누구인 줄도 몰랐던 놈이. 그러니까 지는 거야, 새끼야."

피범벅이 된 지셀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온몸의 근육이 삐걱대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승리했다는 희열이 그 고통을 압도했다.

"앞으로도 내가 이길 거다. 몇 번이고 쳐들어와 봐. 모조리 잡아먹어 줄 테니."

"...."

"그래도 운 좋은 줄 알아. 네놈은 곱게 죽는 편이거든."

지셀은 피에 전 손으로 검을 고쳐 쥐고 단숨에 내리쳤다.

82화 제가 협상하고 오겠습니다. (1)

"크륵...."

빅토르가 마지막 비명을 내질렀다.

원통한 듯 뜬 두 눈에서는 생명의 빛이 꺼져 버렸고, 간헐적으로 꿈틀거리던 몸도 그 떨림을 멈추고 말았다.

털썩.

마지막까지 검을 깊이 박아 넣고 버티던 지셀은 빅토르가 죽었다는 확신이 들자마자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푸후―!"

그는 한참이나 숨을 크게 몰아쉬다 천천히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불길은 전투의 여파로 밀려나 있지만, 여전히 주변에는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끄응, 힘들군."

몸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마나를 끌어올려 봤지만 흐름이 듬성듬성 끊기고 있었다.

"이런, 귀찮게."

디루스 엔트의 내피도 모두 말라비틀어지고 뜯겨 나가 열기를 제대로 막지 못하고 있었다.

지셀은 갑옷을 모두 벗어 던지고 남은 마나를 억지로 움직여 최대한 열기를 막아 냈다.

어차피 이런 상태면 갑옷도 입고 있어 봤자 무겁고 뜨거울 뿐이다.

그는 다시 일어나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두리번거려 봐도 사방은 불로 가득 차 있었다.

"저 불길을 모두 뚫고 가야 하는데 말이지."

불꽃이 뱀의 혀처럼 날름거리며 그를 잡아먹으려고 덤벼들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온몸을 칼로 난자당하는 듯한 고통이 느껴진다.

피를 너무 흘렸는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털썩.

다리가 후들거려 일단 다시 주저앉았다.

"하, 미치겠네."

몸이 완전히 만신창이가 되었다.

어떻게든 이 불만 헤치고 나가면 끝날 텐데,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이쯤 되면 누가 구하러 왔었는데."

혼자 움직이면 이럴 때가 제일 곤란하다.

전생에는 이런 뒤처리를 알아서 해 주는 수하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사람이 없었다.

지금도 용병들을 데리고 있긴 하지만... 그놈들은 뒤처리를 맡기는커녕 자신을 따라오는 것만으로도 벅차 한다.

그나마 벨린다라면 지셀이 늦는다며 달려올 법하지만, 지금은 그가 맡긴 마법사들을 돌보느라 바쁠 거다.

"별수 없나. 불맛 좀 봐야겠네."

얼마 남지 않은 마나로는 열기를 막는 것도 벅찼다.

마나를 쓰면 몸을 움직일 수는 있지만, 열기를 막지 못해 피부가 일그러지겠지.

"에잉, 이번 생에서는 얼굴 좀 곱게 쓰려고 했는데."

지셀이 혀를 차며 투덜거렸다.

용병왕 시절에는 얼굴에 남은 흉터가 너무 많았다.

과거로 돌아와 얼굴이 깨끗해진 게 꽤 마음에 들었지만.... 그렇다고 목숨과 바꿀 수는 없는 일이다.

"가 보자."

지셀은 자리에서 일어나 근육을 지탱하는 쪽으로 마나를 돌렸다.

그러자마자 뜨거운 마력을 품은 열기가 순식간에 몸속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타 죽기 전에 밖으로 나가야 했다.

지셀이 조급해지는 마음을 누르고 걸음을 내디디려던 때였다.

"공자님!"

파악!

길리언이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불길을 가르며 나타났다.

"괜찮으십니까!"

'아, 그래. 예전 수하들 못지않은 사람이 하나 있었지.'

지셀은 반갑게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아직은 괜찮아. 좋은 타이밍에 찾아왔네."

"저자와 싸우신 겁니까?"

길리언이 빅토르의 시체를 흘끔 보며 물었다.

"적장이야. 저놈 잡으려고 좀 무리했어."

"일단 바로 빠져나가겠습니다."

"그래, 부탁해."

파앙!

길리언은 지셀을 옆구리에 끼고 빠르게 불길을 뚫고 나갔다.

후끈거리는 열기가 몸을 덮쳤지만 지셀은 마나를 이용해 막았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불지옥에서 빠져나왔다. 시원한 공기가 훅 밀려와 열기를 식혀 준다.

"푸하!"

신선한 공기를 만나자 지셀은 비로소 거친 숨을 터트렸다. 까맣게 익어 가던 가슴이 씻겨 나가는 느낌이었다.

길리언이 조심스럽게 그를 내려놓으며 부축해 주었다.

지셀은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사방이 적들의 시체로 가득했다.

"다 처리한 모양이군."

대기하고 있던 용병들이 다가오더니 지셀을 보고 놀랐다.

"대장? 왜 혼자 죽을상이여?"

"우리는 잘 놀다 나왔는데. 으하하!"

낄낄거리는 용병들에게 한번 웃어 준 지셀은 길리언에게 물었다.

"디갈드 백작은?"

"일찌감치 도망갔습니다. 눈치가 제법 빠르더군요."

"그렇군. 죽을힘을 다해 도망가는 중이겠어."

"병사들도 따라서 도망갔지만 대부분 잡아 죽였습니다."

"그래, 소문을 내려면 몇 놈 정도는 도망가게 두는 것도 괜찮겠지. 슬슬 마무리를 지어야겠어."

그때 일단의 병력이 저 멀리서 말을 타고 달려오는 게 보였다.

"도련님!"

"지셀!"

"대공자!"

벨린다와 즈발터, 란돌프가 병사들을 이끌고 급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지셀이 불길 속으로 뛰어든 걸 알고 발을 동동 구르다가, 동문 쪽으로 빠져나와 성을 우회해서 달려왔다.

"이제야들 나타나셨네."

지셀이 다가오는 이들을 반갑게 맞았다.

늦었다고 타박하듯 말했지만, 진심은 아니었다.

애초에 보호구 없이는 버틸 수 없는 불이었으니 일반 병사들을 데리고서는 멀리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일찍 왔다면 일이 더 귀찮아졌을지도 모른다.

후방에 대기하고 있던 적군이 성에서 나온 병사들을 봤다면 그 즉시 도망쳤을 게 뻔했다.

벨린다는 말 위에서 단번에 뛰어내려 지셀 곁에 달라붙어 그를 살폈다.

"도련님! 괜찮아요? 얼굴 익은 것 봐! 그러니까 거길 왜 들어가요! 내가 미쳐, 정말!"

빠르게 쏟아지는 잔소리에 지셀이 다급하게 손을 들었다.

"아냐, 괜찮아. 정말 괜찮다고. 그냥 열기만 좀 쐰 정도야."

벨린다는 울상을 지으며 지셀을 부축했다.

"지셀, 괜찮으냐?"

"대공자!"

즈발터와 란돌프도 허겁지겁 달려왔다.

"괜찮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지셀이 웃으며 말하자 즈발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생각으로 불 속에 뛰어들었나 했는데....

주변에 선 용병들의 갑옷을 보니 뭔가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라도 저게 불을 어느 정도 막아 준 모양이었다.

'이미 다 준비해 놓은 상태였구나.'

어떻게 그런 어마어마한 위력의 함정을 마련했는지도 궁금했지만, 그건 전쟁의 뒷수습을 하며 물어봐도 될 것이다.

지금은 그저 승리를 기뻐할 때였다.

즈발터는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정말 이겼구나."

지원 요청도 모두 거절당하고 물자도 없이 대군을 맞이한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결국은 페르디움이 이겼다.

즈발터는 아들을 바라보았다.

"네가 이겼어."

새삼 지셀이 달리 보였다.

적의 보급을 끊고, 공성탑을 부수고, 암습을 막고 마지막에는 함정을 써서 적을 일망타진했다.

사람 목숨을 파리처럼 취급하며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잔혹한 광기에 몸을 맡기며 살아가는 자들.

지셀에게서는 그들과 비슷한 향기가 났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 상식을 뛰어넘는 파격적인 행보.

지금까지 알고 있던 아들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괴리감에 불편하고 거북하기도 했다.

하지만 페르디움을 지켜 낸 것은 바로 그 지셀이었다.

'망나니였는데....'

아니, 사실 지금도 말 안 듣고 제멋대로 구는 망나니인 건 여전했다.

귀족의 품격이라고는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망나니이되, 과감했고 능력도 있었다.

누가 이제 감히 지셀더러 쓰레기라 손가락질할 수 있겠는가.

아들은 이곳의 구원자이자 영웅이었다.

떨리는 손을 감추듯 즈발터는 천천히 지셀을 껴안았다.

"수고했다. 정말 수고했다. 네 덕분이다."

"아버지...."

언제나 무뚝뚝한 아버지가 내보이는 격한 감정에 지셀은 미소 지었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감동을 참지 못하고 란돌프가 검을 높이 들며 우렁찬 목소리를 토해 냈다.

"우리가 이겼다! 페르디움의 승리다!"

"우와아아아아아!"

"승리다! 우리가 이겼다!"

따라온 병사들도 감격 어린 표정으로 무기를 높이 들고 함성을 내질렀다.

용병들도 이에 뒤질세라 목청 높여 소리를 질렀다.

"우리가 해냈다! 죄다 죽였다고!"

지셀은 입을 앙다물고 모두를 둘러보았다.

모두 살아남았음에 기뻐하고, 승리했음에 환호하고 있었다.

그래, 자신은 이들을 지키기 위해 싸웠던 것이다.

고생스럽고 힘들었다. 남는 시간에는 수련에 전념하느라 편히 쉴 시간조차 없었다.

그냥 쉬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참고 견딘 덕분에 지금 이들이 웃을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면, 그깟 고생 따위 몇 번이든 할 수 있었다.

화르르르.

불길이 서서히 약해지기 시작했다. 불꽃이 죽어 가는 게 눈에 띄게 보일 정도였다.

가라앉는 불길을 보며 즈발터는 기쁜 웃음을 지었다.

"어서 성으로 돌아가자. 정리가 끝나는 대로 승전 연회를 열 것이다."

아직도 모든 이들이 환호를 내지르며 승리를 기뻐하고 있었다.

즈발터 또한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단 하나, 지셀만이 고개를 저으며 차갑게 내뱉었다.

"지금 당장 디갈드 백작에게 정식으로 항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 내일이라도 란돌프가...."

"그러면 늦습니다. 지금 당장 제가 용병들과 함께 가겠습니다."

"그렇게 급하게 움직일 필요가 있겠느냐? 이미 전쟁이 끝났는데."

"아닙니다. 시간을 줄수록 저쪽도 머리를 굴릴 겁니다. 바로 들이닥쳐 유리한 조건으로 배상을 받아 내야 합니다. 혹시나 다른 영주에게 몸을 의탁한다면 후속 처리가 더 골치 아파집니다."

"네가 그런 것까지 생각하다니!"

즈발터가 살짝 놀라 외쳤다.

아들의 말에는 틀린 점이 하나도 없었다.

디갈드 백작이 전쟁의 여파를 자력으로 정비하거나 어디선가 지원받아 안정된다면 배상에 소극적으로 나올 수 있다.

그렇게 되면 협상이 지지부진해질 테니 사전에 차단해야 한다.

만약 몸을 피해 버리면 영지를 점령해도 헛수고가 된다.

어쨌든 명분은 디갈드 백작에게 있으니, 다른 영지로 피신이라도 하면 골치만 아파진다.

'산전수전 다 겪어 본 장수 같은 판단이로구나.'

즈발터 자신도 기적 같은 승리가 너무 기뻐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지셀은 벌써 다음 일을 계획하고 있었다.

냉철하고 빠른 아들의 판단에 감탄하며 즈발터는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래, 네 말이 맞다. 그러면 나와 란돌프가 지금 당장...."

"안 됩니다. 두 분은 영지민들을 달래고 빠르게 정비부터 하셔야죠. 이기긴 했지만, 병사와 물자를 너무 많이 징발했습니다. 영지의 경제가 엉망이 됐을 겁니다."

"그, 그렇지. 다들 힘들겠지."

"그들에게 보상을 확실히 약속하고 위로해 주십시오. 돈이 부족하지 않게 룬스톤을 제공하겠습니다."

"오, 정말이냐? 룬스톤을 내어놓겠다고?"

지셀은 미리 준비한 듯 청산유수로 말을 내뱉었다.

그중 한 단어에 홀린 즈발터가 눈을 빛냈다.

짠돌이처럼 굴던 아들이 먼저 룬스톤을 건네준다고 하다니!

다른 말은 죄다 귀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는 페르디움의 수십 년 치 예산액에 맞먹는 양의 룬스톤이 폭발해 사라졌다는 걸 아직 몰랐다.

지셀은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그럼 제가 항복과 배상 조건을 바로 받아 오겠습니다. 아버지가 그 뒤에 조율하시지요."

"그, 그래. 그렇게 하겠다."

아들에게서 이유를 알 수 없는 박력을 느끼고 즈발터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이 끝나면 영지민들을 달래고 영지를 정비하는 게 최우선 과제였다.

애초에 영지전을 벌인 명분 자체가 후계자의 복수를 한다는 핑계였으니 배상 문제를 조율하는 데에도 시간이 걸릴 게 뻔했다.

당장 해야 할 일이 많으니, 배상과 관련해서는 일단 지셀에게 1차 처리를 맡겨도 될 것이다.

항복 선언과 기본 배상 조건만 받아 오면 되는 일이니까.

즈발터는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 물었다.

"몸이 안 좋아 보이는데, 정말 괜찮겠느냐?"

"움직이는 데 무리는 없습니다."

거짓말이다. 지금이라도 쓰러져 당장 자고 싶었다.

하지만 지셀은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도련님! 그냥 기사단장님한테 맡겨요!"

"그렇습니다, 제가 가서 붙잡아 놓겠습니다."

벨린다와 길리언도 말렸지만, 지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가지."

예의 그 미묘한 회복력이 발동된 모양인지, 잠깐 쉬었다고 그래도 좀 움직일 만해졌다.

"모두 말에 올라타라!"

지셀과 용병들은 페르디움군이 타고 온 말을 건네받아 올라탔다.

"마수의 숲 경비대도 따라와라."

"네?"

스코반과 리카르도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지셀이 즈발터에게 말했다.

"디갈드 백작이 협상 중에 다른 짓을 못 하게 감시 병력으로 두고 오겠습니다."

"으음, 그렇게 해라. 영지가 정비되는 대로 후속 부대를 보내겠다."

머뭇거리던 경비대도 영주가 허락하니 모두 말에 올랐다.

지셀이 출발하기 전 즈발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비록 오해로 인해 전쟁을 치렀지만, 디갈드 백작 또한 왕실에 충성을 맹세한 귀족이고 우리의 오랜 동맹이었다. 이미 전장에서 벗어났으니 예의를 갖춰 대해라."

즈발터는 법과 관습, 명예를 존중하는 사람이었다.

망나니 같은 아들을 보내면서도 혹시나 아들이 무례를 범할까, 걱정을 감추지 못했다.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시지요."

지셀은 살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한번 숙인 뒤 손을 들었다.

"자, 디갈드 백작령까지 바로 달린다!"

두두두두두!

지셀은 용병들과 경비대를 이끌고 힘차게 말을 달렸다.

이제 이 전쟁을 '제대로' 마무리 지을 시간이었다.

83화 제가 협상하고 오겠습니다. (2)

말을 타고 도망가는 중에도 타모스는 미칠 것만 같았다.

'왜 실패한 거지? 그 많은 병력을 두고! 멍청한 놈들, 그냥 처음부터 모여서 밀어 버리라니까!'

도무지 뭐에 당했는지 아직도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형편없다고 한들 그도 한 영지의 영주다.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게 나름 있는데, 그런 마법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저런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법사가 있었나? 아니, 그게 마법이 맞기나 한 건가?'

모든 게 안개가 낀 것처럼 명확하지가 않았다.

이상한 건 마법뿐만이 아니었다.

'그 검은 갑옷을 입은 놈들은 대체 뭐야? 페르디움에 그런 병력이 있었나?'

그들은 순식간에 병사들을 밀어 버리며 공성탑을 부수며 활약했다.

페르디움 따위 별것 아니라고 우습게 보았다가 큰코다치고 말았다.

'젠장! 젠장! 난 망했어! 망했다고!'

그는 이번 전쟁에 모든 재정을 쏟아부었다.

그런데 전쟁에서 진 것도 모자라, 대부분의 병력을 잃어버렸다.

가뜩이나 별 볼 일 없는 영지인데 사람도, 돈도 없으니 이제 제대로 굴러갈 수나 있을지 의문이었다.

'최대한 배상금을 아껴야 하는데.'

영토 분쟁으로 일어난 전쟁이 아니고, 일단 도망치는 데는 성공했으니 목숨은 건질 수 있을 것이다.

페르디움 백작은 관습과 명예를 존중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으니까.

게다가 페르디움은 세력이 무척이나 약하고 영지 하나 굴리기도 벅찬 상황이다.

디갈드를 먹었다가는 오히려 체하고 말 것이다.

그쪽에서도 적절한 배상으로 넘어갈 생각일 터.

'젠장, 가뜩이나 돈도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하지?'

근접한 남작령 몇 개와 세수의 일부를 몇 년간 바친다는 수가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결국 영지민들을 더 쥐어짤 수밖에.

'멍청한 데스몬드 새끼들. 그런 등신 같은 놈을 지휘관으로 보내다니.'

타모스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말에 박차를 가했다.

빨리 영지로 돌아가야 한다. 아직은 페르디움의 영토 안이라 불안했다.

사실 지금도 그 무시무시한 불길과 검은 갑옷을 입은 놈들을 떠올리면 다리에 힘이 풀릴 것 같았다.

"빨리 가자! 빨리! 달려라!"

타모스는 헐떡이며 쉬지 않고 말을 달렸다.

영주 성에 도착하자마자 말은 그대로 혀를 내밀고 쓰러지고 말았다.

거지꼴로 나타난 영주를 보고 다들 놀랐지만, 타모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항복 협상을 할 준비를 해라! 어서!"

영주의 등쌀에 다들 사정을 제대로 묻지 못하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많은 대군을 이끌고 가는 모습을 봤는데, 도대체 페르디움 따위가 어떻게 막았다는 말인가.

항복을 준비하는 와중에도 사람들의 눈빛에는 의아함과 호기심이 가득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셀이 디갈드 영지에 도착했다.

"오, 제법 준비가 빠른데?"

영지의 경계에서부터 급하게 내건 백기가 보였다.

빠르게 달려가는 지셀 일행을 제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영주 성 앞에도 일단의 사람들이 백기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백작에게 안내해라."

디갈드의 가신들이 정중하게 지셀을 영주 성 안으로 안내했다.

타모스는 대전의 높은 자리에 오만하게 앉아 있었다.

귀족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마지막 발버둥이었다.

전쟁에서는 졌지만, 아직도 페르디움을 우습게 보는 심성이 남아 있었다.

지셀을 필두로 인상이 험악한 무장 병력이 들어오자 타모스는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더럽게 빨리도 오는군. 바로 추격한 건가?'

복장을 보니 그 무시무시한 검은 부대였다.

지셀은 건방지게 앉아 있는 타모스를 보고 비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도 자존심을 챙기겠다는 꼴이 우습기만 할 뿐이었다.

"항복 협상을 준비하고 계셨습니까?"

"그렇네. 자네는 누구인가?"

"지셀 페르디움입니다. 아버지로부터 모든 권한을 위임받아 이곳에 왔습니다."

지셀치고는 제법 정중한 말투였지만, 그 눈빛이나 표정에서는 상대를 깔보는 티가 났다.

그러나 타모스는 그런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자네가...?"

지셀이라면 자신의 죽은 아들 길모어와 쌍벽을 이루는 북부의 소문난 망나니다.

다른 영지는 몰라도 인접한 디갈드에는 소문이 꽤 크게 나 있었다.

그런 놈이 영주 대리로 이곳에 왔다고? 게다가 저 검은 부대를 이끄는 대장이라니!

타모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멍청하게 지셀을 바라보았다.

그때, 지셀이 차갑게 내뱉었다.

"끌어내라."

용병들이 바로 다가가 그의 팔을 잡고 끌어 내렸다.

"뭐, 뭐 하는 거야! 이 비천한 놈들이 감히 어디에 손을 대는 것이냐! 이거 놓지 못할까!"

타모스는 놀라서 몸부림쳤지만, 용병들은 그를 가볍게 제압해 대전의 한가운데에 집어 던졌다.

디갈드의 가신들은 용병들의 막돼먹은 태도에 모두 충격을 받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항의하기에는 분위기가 너무 험악했다.

저벅저벅.

지셀은 영주가 앉아 있던 자리에 올라가 다리를 꼬고 앉았다.

바닥에 강제로 무릎 꿇린 타모스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세상에 이런 싸가지 없는 놈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비록 전쟁에서 패했지만, 그는 왕국의 백작위에 오른 고위 귀족이다.

작위도 없는 하찮은 놈이 감히 이렇게 대할 수는 없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예의를 지켜라! 네놈이 이러는 걸 페르디움 백작도 알고 있느냐!"

지셀은 여전히 입가에 비웃음을 띤 채 답했다.

"시끄럽군. 귀족이라는 허울이 널 지켜 줄 줄 알았나? 수많은 목숨을 전쟁으로 밀어 넣었으면 너도 목숨을 걸어야지. 그리고 내가 싸가지 없는 건 우리 아버지도 잘 알고 계신다."

"뭐, 뭐? 설마 날 죽이겠다고?"

"그래."

"이놈! 난 귀족이다! 그것도 백작이다! 네놈이 감히 국왕 폐하의 충성스러운 신하인 나를 죽이겠다는 것이냐! 법과 관례를 지키란 말이다!"

"남을 죽이려 했으면 자신의 목숨도 걸어야 하는 법이지. 전쟁에서 지면 죽음뿐이다."

서늘한 지셀의 눈빛에 타모스는 당황했다.

전장을 벗어나거나 항복한 귀족은 죽이지 않는 게 관례다.

귀족들은 그걸 '같은 왕을 모시는 신하를 해칠 수는 없다'라는 명분으로 포장한다.

그렇기에 타모스도 그토록 서둘러 디갈드로 돌아온 게 아니었던가.

일단 제 영지로 돌아오면 영주를 함부로 죽일 수는 없을 테니까.

"협상도 안 하고 날 죽이겠다고?"

타모스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흔한 일은 아니지만, 성정이 포악하거나 강력한 대영주 중에는 법이나 관례 따위를 신경 쓰지 않는 자들이 종종 있었다.

설마 페르디움이, 그것도 영주가 아닌 후계자 따위가 그리 나올 줄은 몰랐지만.

"말도 안 된다! 페르디움 백작을 직접 만나서 얘기하겠다! 네놈 따위와는 협상하지 않겠다!"

"나도 네놈과 협상할 생각은 없다. 디갈드 백작령은 페르디움에 귀속될 것이고 작위는 파기될 것이다."

"이, 이 미친놈이 왕실의 재가도 없이 제멋대로...."

타모스는 하려던 말을 집어삼켰다.

지셀이 진심으로 그렇게 할 생각이라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재빨리 생각을 바꾼 타모스는 사정하듯이 말했다.

"그, 그럼 영지를 넘기겠다. 관례대로 수레 열 대분의 재산을 가지고 떠날 수 있게 해 다오!"

타모스는 일단 목숨부터 부지하고 바로 수도로 달려가 여론을 이끌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셀은 그것도 거부했다.

"네놈에게 줄 돈은 하나도 없다."

"그, 그럼 그냥 떠나겠다!"

"거절한다. 넌 여기서 죽는다."

"이놈! 감히 네까짓 놈이...."

"베어라."

지셀이 고갯짓하자 길리언이 단숨에 도끼를 휘둘렀다.

스각!

대전 한가운데를 구르는 목을 보며 디갈드의 가신들은 숨을 죽였다.

아무리 대공자 신분이라도 한낱 대리자 주제에 왕의 신하인 고위 귀족을 멋대로 죽이다니!

이건 폭군이나 가능할 법한 미친 짓이었다.

지셀은 그들이 어찌 생각하든 신경 쓰지 않고 심드렁하게 말을 이었다.

"디갈드의 계승권자들을 모조리 색출하여 목을 베어라. 관리들과 가신들, 전쟁을 지원한 남작령의 봉신들 명단도 가져와."

갑작스러운 명령에 지셀의 용병들과 스코반을 비롯한 경비대원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대전에 있던 디갈드의 가신들부터 모두 포박되어 줄줄이 무릎 꿇었다.

미처 도망가지 못한 영지의 관리들과 가신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대전에 끌려왔다.

"살려 주십시오! 우리는 죄가 없습니다!"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끌려온 사람들이 울부짖었지만, 지셀은 그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저 몇몇 행정관들을 족쳐 만든 신상 명세서를 받아 들고 천천히 훑어볼 뿐이었다.

이들을 모두 죽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그랬다간 디갈드 영지는 혼돈 상태가 될 것이다.

가뜩이나 가난한데 그나마 남아 있던 물자까지 탈탈 징발당한 디갈드 영지다.

최소한의 관리 인원이 없으면 도적 소굴이 되어 버릴 것이다.

지셀은 빠르게 선별 작업을 시작했다. 죽일 놈과 남길 놈들의 분류를.

꽁꽁 묶여 지셀 옆에 끌려온 디갈드의 행정관은 떨리는 목소리로 앞에 선 자들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어셍 남작입니다. 이번 전쟁에 병사 백 명과 기사 두 명을 지원하고 직접 참여...."

"죽여라."

"으아아아! 안 돼! 네놈 따위가 감히 나를!"

용병들은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지체하지 않고 밖으로 끌고 나갔다.

죽기 싫어 발버둥을 치는 자들도 있었지만 소용없었다.

"마틴입니다. 평민으로 군납 업무를 보조하였으며...."

"가둬라."

한 사람씩 끌려 나가는 사이 잡혀 온 자들은 모두 공포에 떨었다.

감옥에 갇히는 자는 그나마 목숨이라도 건졌다며 안도해야 할 판이었다.

망나니건 등신이건 지금은 자신들의 생살여탈권을 지닌 사신이나 마찬가지였다.

다시 한 남자가 끌려왔다.

젊고 곱상하게 생긴 남자는 상당히 지저분하고 피곤해 보였다. 보아하니 타모스를 따라 전쟁에 참여한 자 같았다.

"로웰입니다. 평민으로 서기관 소속이었으나 이번 전쟁에 작전 참모로...."

"참모?"

지셀이 피식 웃었다.

전쟁은 데스몬드에서 다 했는데 디갈드의 참모가 뭘 했겠는가. 그냥 타모스 옆에서 구경만 하다 도망갔겠지.

게다가 본래는 서기관이었다니, 참모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원래 참모는 전문적으로 군사학을 익힌 기사나 군지휘관이 맡는 역할이었다.

어쨌든 전쟁에 참여했기에 그에 걸맞게 판결하려고 할 때였다.

로웰이 다급하게 외쳤다.

"살려 주십시오! 저는 공자님께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음?"

애타게 터지는 목소리에 지셀이 흥미로운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도움이 될 수 있는데?"

지셀이 관심을 보이자 로웰은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빠르게 대답했다.

"저는 서기관 밑에서 행정 업무를 총괄했습니다! 다들 일을 안 해서 거의 모든 걸 제가 처리했습니다! 영지의 장단점과 취약점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맡겨 주시면 제가 빠르게 안정시킬 수 있습니다! 공자님도 지금 그게 걱정이라 일부는 살려 두시는 게 아닙니까?"

"호오."

지셀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제법 눈치가 빠른지 구미가 당기는 얘기를 한다.

하지만 지셀은 티 내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굳이 저놈을 살려 줄 정도로 절실한 상황은 아니었다.

"디갈드는 가난하고 개판인 걸로 유명하지. 그런 곳의 행정을 총괄했다는 게 무슨 도움이 될까?"

"그, 그건! 영주님과 가신들이 끊임없이 수탈하고 비리만 저질러서 그런 겁니다! 그나마 제가 최대한 아끼면서 관리했기에 이 정도라도 버틴 겁니다!"

"흐음...."

지셀이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자 로웰은 눈물이 터질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영지의 법과 체계까지 전부 제가 만든 겁니다! 군사학까지 따로 공부해 무관장 대신 병력 관리까지 맡았습니다! 그래서 백작이 절 참모로 데리고 간 겁니다! 우리 영지의 병력이 아니라서 제가 할 수 있는 건 없었지만...."

한마디로 이 영지를 혼자 관리했고, 그래서 참모로 전쟁터까지 끌려갔다는 뜻이다.

그 말이 정말이라면 대단한 일이지만,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살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는 걸지도 모르니까.

지셀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그거 말고 또 뭐 잘하는 건 없나? 난 능력 있는 사람을 좋아하거든."

로웰은 당황했다.

평민이 이 정도만 해도 엄청난 건데 도대체 여기서 뭘 더 바란다는 것인가?

어지간한 학문을 쌓은 귀족도 자신만큼은 못할 거라는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대답이 늦어지거나 아니라고 하면 바로 죽일 거 같은 눈치였다.

로웰은 생각을 거치지 않고 입에서 튀어나오는 대로 말했다.

"루, 룬스톤을 얻었다고 들었습니다! 그걸 팔려면 자, 장사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 장사도 해 봤어?"

사실 로웰은 장사를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타모스는 다른 건 몰라도 돈 관리만큼은 그에게 권한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로웰은 살기 위해 아무렇게나 내뱉었다.

"제, 제가 계산이 엄청 빠릅니다!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지셀은 곧바로 테스트에 들어갔다. 주판을 써야 하는 무시무시한 난이도의 문제였다.

"그럼 750 곱하기 1920은 뭐지?"

"230!"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에 지셀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근접하지도 않잖아?"

"하지만 빨랐죠."

"...."

대전이 침묵에 잠겼다. 로웰은 고개를 푹 숙였다.

이제 끝이다.

귀족들도 그냥 처죽이는 자의 손에서 자신 같은 평민이 어찌 목숨을 부지하겠는가.

하지만 세상 모든 일에는 간혹 예외가 있는 법이었다.

"...하하, 이거 웃기는 놈일세."

84화 제가 협상하고 오겠습니다. (3)

지셀은 헛웃음을 지으며 로웰을 내려다보았다.

대범한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호기심은 들었다.

동정심에 기대어 사정하거나 관례만 들먹이던 멍청한 놈들과 달리, 이놈은 자신의 쓸모부터 피력한다.

그 부분만으로도 다른 놈들과는 달랐다.

거기다 능력에도 제법 자신이 있어 보였다.

지셀은 낄낄대고 웃으며 길리언에게 고갯짓했다.

"일단 저놈은 보류. 감옥에 가둬."

행정뿐만 아니라 병력 관리에 참모 노릇까지 했다니, 전쟁 준비나 진행 과정도 많이 알고 있을 것이다.

나중에 따로 심문해 보고 정말 도움이 되는지 지켜볼 생각이었다.

"가, 감사합니다!"

로웰은 지옥에서 끌려 나온 심정으로 눈물을 질질 흘리며 고개를 조아렸다.

한시적일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목숨을 붙인 것이다.

그를 끌고 가던 고든이 감탄한 표정으로 낮게 속삭였다.

"나는 너처럼 계산이 빠른 사람은 태어나서 처음 봤어. 그 정도로 빠르면 조금 틀리는 건 문제도 아니지! 나중에 나도 계산하는 방법 좀 알려 줘."

"...."

고든은 진심으로 존경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로웰은 뭐라 대꾸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맞장구를 쳤다간 정말로 눈앞에 있는 놈과 같은 수준이 될 거 같았다.

로웰이 끌려간 뒤로도 인원 분류는 한동안 이어졌다.

많은 자들이 죽어 나갔고 살아남은 사람들도 공포에 떨었다.

스코반은 지셀을 말리지 못했다. 그저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며 혼자 발을 동동 구를 뿐이었다.

"마수의 숲 경비대는 이곳에 남아 치안을 맡아라. 곧 아버지께서 후속 병력을 보내 주실 거다. 디갈드의 남은 병사들은 일단 감옥에 가둬 두고 지켜만 보고 있어라."

"네, 넵. 알겠습니다."

병사들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 그 정도는 문제없었다.

스코반은 황급히 대답하며 슬쩍 지셀의 눈치를 보았다.

보아하니 애초부터 작정하고 자신들을 데리고 온 모양이었다.

지셀은 인원 정리를 끝내고 디갈드 성에 남은 재산들과 물자들을 확인한 뒤 하루를 쉬었다.

용병들도 지쳐 있고 본인 몸 상태도 좋지 않으니 최소한의 휴식은 취해 줘야 했다.

페르디움 성으로 돌아가는 길은 타모스를 추격할 때만큼 급하진 않으니 비교적 천천히 이동했다.

이틀이 지나 성에 도착했을 때, 페르디움 영지의 분위기는 그들이 떠나기 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와아아아아!"

지셀과 용병들이 나타나자 영지민들이 모두 달려 나와 환호했다.

다들 행색은 여전히 허름하고 초라했지만, 얼굴에는 웃음꽃이 한가득했다.

"대공자님이 돌아왔다!"

"페르디움 만세! 대공자님 만세!"

"공자님! 여기 좀 봐 주세요!"

"용병들도 멋있어요!"

"대공자님과 용병들이 우리를 지켰다!"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용병들은 얼떨떨해했다.

페르디움에 머무는 동안 영지민들은 용병들을 보면 못 본 척하거나 뒤에서 수군대기 바빴다.

용병들도 그런 반응을 익숙하게 받아들였다. 험악한 용병들은 어디를 가도 환영받지 못하니까.

하지만 영지민들이 진심으로 기뻐하며 환호하는 모습을 보니, 절로 가슴을 펴고 자랑스러운 표정을 짓게 되었다.

"어, 흠. 기분이 나쁘진 않네."

"우리는 뭐 그냥 하라는 대로 한 건데."

"뭔지도 모르고 정신없이 싸우고 뛰어다니긴 했지. 흐흐흐."

얼떨떨한 용병들과 달리 지셀은 익숙한 듯 여유롭게 손을 흔들며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전생에서 이런 환호 정도야 시도 때도 없이 받아 봤으니 당황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전쟁이 끝난 지 고작 삼 일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대공자 덕에 전쟁이 끝났다는 소문이 영지를 가득 메울 정도로 퍼져 있었다.

살아남은 병사들이 여기저기 소문을 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믿지 못하던 영지민들도 비슷한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들려오자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세한 사정을 세간에 알릴 수는 없다 보니, 소문은 오히려 걷잡을 수 없이 부풀려져 갔다.

― 대공자가 그동안 마법을 익히고 있었다는데? 무려 100서클이래! 100서클!

― 이 등신아! 세상에 100서클이 어디에 있냐? 그게 아니라 악마와 계약해서 영혼을 팔았다더라. 예전에 계속 미친 짓을 하고 살았던 것도 그래서였대. 망나니 악마 같은 거라나?

얼토당토않은 소문들이었지만, 사람들은 뻔히 알면서도 지셀을 띄워 주기 바빴다.

어쨌든 대공자 덕분에 전쟁에서 이겼고 가족들이 살아 돌아올 수 있었으니까.

"공자님, 기분이 어떠십니까?"

길리언이 웃으면서 묻자 지셀은 능청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나쁘지 않군. 조금 더 찬양해도 괜찮아."

"하하, 전쟁이 끝나니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오셨군요."

정말 나쁘지 않았다.

알 수 없는 고양감이 조금씩 몸을 채우고 있었다. 전생에 겪었던 환영식과는 뭔가 느낌이 달랐다.

'으음, 오랜만의 환영식이라 그런가? 별거 없는데도 왠지 기분이 좋군.'

지셀은 뭐가 다른 건지 고민하다 어깨를 으쓱이며 영지민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길리언은 그 모습을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정말 말한 대로 이루어졌군.'

처음 이 영지에 왔을 때는 희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영지를 발전시키려고 해도 어디서부터 건드려야 할지 모를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 내가 반드시 영지의 가난을 끊어 낼 거야. 한 방울의 물이 아니라 비가 되어서 말이지.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길리언은 그저 젊은이의 패기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셀의 호언장담은 점점 사실이 되어 가고 있었다.

전쟁을 예측하고 기적 같은 승리를 얻어 냈다. 룬스톤도 아직 남아 있으니 영지를 빠르게 발전시킬 수 있다.

앞으로 이 젊은 주군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이렇게 가슴이 뛰는 것도 오랜만이군.'

처음에야 은혜를 갚을 마음으로 충성을 맹세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걸 넘어서, 그가 꿈꾸는 미래가 보고 싶어졌다.

* * *

환영하는 인파들을 지나 영주성 앞에 도착하자 더욱 놀라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대공자님께서 돌아오셨다!"

한 기사가 우렁차게 외쳤다.

기사의 양옆에는 영지의 모든 병사가 나와 도열하고 있었다.

지셀도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던 터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기 들어!"

갑옷을 차려입은 기사가 검을 뽑으며 외치자, 좌우의 병사들이 양손으로 창을 잡고 기울이듯이 앞으로 내민다.

천 명이 넘는 병사들이 좌우로 늘어서서 길을 내 주는 것은 그 자체로도 장관이었다.

병사들은 전쟁의 흔적이 채 가시지 않아 아직 지저분한 모습들이었지만 그 기세는 비할 데 없이 늠름했다.

"와아아아!"

지셀 일행을 뒤따라온 영지민들이 그 모습을 보고 다시 환호하기 시작했다.

지셀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줄지어 선 병사들 뒤에는 페르디움의 기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는 그리 많지 않지만, 이들이야말로 페르디움의 핵심 무력이자 가장 자부심이 넘치는 계급이다.

언제나 지셀을 무시하고 없는 사람 취급하던 그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나와 있었다.

"페르디움의 계승자에게 영광을!"

가장 앞에 서 있던 기사가 검을 가슴 앞에 세우며 외쳤다.

척! 척! 척!

그러자 나머지 기사들도 같은 동작을 보이며 복창했다.

"페르디움의 계승자에게 영광을!"

기사가 존경하는 자에게 올리는 최고의 예였다.

대공자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자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모두가 나와 예를 갖춘 것이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곧 병사들 사이에서 커다란 환호가 울려 퍼졌다.

"와아아!"

"지셀 페르디움에게 영광을!"

페르디움 공방전은 전쟁사에 남을 만한 기록이었다.

적의 압도적인 병력을 전멸시키고, 누구도 이길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 어떤 누구도 폄하할 수 없는 전공이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활약이었다.

남은 건 이 짜릿한 승리의 기쁨을 누리는 것과 그 주인공을 찬양하는 일이다.

이제 대공자는 영지의 망나니이자 골칫덩어리가 아니었다.

과거의 나쁜 소문들은 이제 자취를 감추었고 의미를 잃었다. 모두가 진심을 담아 한마음 한뜻으로 예를 바쳤다.

기사들과 병사들에게서 시작된 외침은 다시 영지민들에게 이어졌다.

"와아아아아! 최고다!"

"지셀 페르디움 만세!"

"여신이시여! 대공자에게 축복을!"

"페르디움을 수호하는 검!"

"진정한 북부의 늑대!"

용병들은 처음 영지민들에게 환영받았을 때보다 얼굴이 더 상기되었다.

천한 취급을 받던 자신들이 기사들의 예를 받다니!

비록 기사들이 예를 바친 상대는 지셀이었지만, 자신들도 그에 못지않은 찬사를 받고 있었다.

"아아, 살아 있기를 잘했어."

"이 정도로 환영해 주다니."

"진짜 기분 째지는데?"

지셀은 흥분하고 기뻐하는 사람들을 돌아보다 눈을 감았다.

'역시 다르구나.'

전생에도 수많은 환호와 찬사를 받았다. 이보다 더 크고 화려한 개선식을 경험하기도 했다.

용병왕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든 최고로 대접받았다.

하지만 그 끝은 언제나 지독한 고독과 공허함만이 가득했다.

다른 이들을 위험에서 구하고, 지켜 주고, 그들을 위해 싸웠지만....

그 자리에 자신의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미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구들, 영지민들을모두 잃었으니까.

무엇도 그 공허함을 채워 주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꾀죄죄한 얼굴로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사람들.

전생처럼 화려한 환영식은 아니지만,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사람 수도 적고 행색도 볼품없어 보이지만.

'....'

예전에 받던 화려한 칭송보다 지금 이 소박한 감사가 훨씬 더 마음에 와닿았다.

"오빠!"

"공자님!"

영주성 앞까지 달려온 엘레나와 레이첼이 웃으며 손을 흔든다.

뒤따라온 사용인들도 같이 손을 흔들며 반갑게 맞이해 준다.

지셀을 보는 그들의 얼굴에 두려움은 없었다. 이제 대공자가 변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오오, 대공자님!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호메른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다가왔다.

항상 지셀에게 짜증을 내고 잔소리만 하던 그도 반가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룬스톤을 구한 게 확실히 운이 아니었군요. 소문은 아주 지겹도록 들었습니다."

"싸울 때 보면 괴물 같더군. 매일 노는 줄만 알았는데 은근히 수련했나?"

차갑기만 하던 알버트도 미소 짓고 있었고, 란돌프 또한 대견스럽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성안에서, 지셀이 가장 그리워하고 가장 미안해했던 사람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어서 와라. 무사히 돌아왔구나."

즈발터가 그 누구보다 기쁜 웃음을 지으며 아들을 맞이했다.

지셀은 갑자기 목이 메어 숨을 크게 들이켰다. 어떠한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전생에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충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언제나 그가 바라고 바랐던, 평생을 원하고 원했던 소원이 이루어졌기에.

'내가 돌아온 이유.'

사랑하던 사람들이 반갑게 맞이해 준다. 언제나 꿈에서만 그리던 광경이었다.

이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은 돌아온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모두를 위해서.

이제는 꺼낼 수 있다. 그렇게나 하고 싶었지만 들어 줄 사람이 없어 결국 내뱉지 못했던 그 한마디를.

지셀은 전생에서 단 한 번도 짓지 못했던 환한 미소를 입가에 그렸다.

"돌아왔습니다. 아버지."

85화 제가 협상하고 오겠습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