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7

61화 바보를 어디에 쓰려고? (4)

바네사가 미친 건 마나 연공법을 잘못 익힌 탓이 가장 크지만, 그간 세상 사람들에게 상처받은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마음에 쌓인 울화가 잘못된 마나 연공법과 엮이며 표면에 드러났겠지.

기사들 중에도 수련하다가 그런 심마(心魔)에 빠지는 자들도 간혹 있었다.

'하지만 이번 생은 다를 거다.'

지셀은 그녀에게 제대로 된 마나 연공법을 가르치고 봐줄 생각이었다.

바네사가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게 가르친다면 이번 전쟁에서도 큰 힘이 되어 줄 것이다.

시일이 촉박해서 마력을 필요한 만큼 많이 쌓지는 못하겠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도 따로 생각해 놓은 바가 있었다.

'이번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도와주지.'

그러려면 협박을 해서라도 데려와야만 했다. 물론 지셀은 협박 따위는 하지 않았지만.

적염의 마탑에 온 목적을 전부 이루니 보람차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지셀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거래가 마무리되었으니 이만 떠나겠습니다. 영지 사정이 안정되는 대로 다시 룬스톤을 가지고 오지요."

떠나겠다는 말을 듣고 탑주와 장로들은 노골적으로 기뻐했다.

꼴 보기 싫은 놈이 스스로 꺼져 주겠다고 하니 기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수많은 사교 모임에서 단련된 휴베르트의 입이 문제였다.

"어이쿠, 왜 벌써 가려고? 도시 구경도 좀 하고 쉬었다 가지. 자랑은 아니지만 내가 도시 운영에도 좀 신경을 써서, 다른 곳보다 구경거리가 많을 거야."

휴베르트가 은근히 자부심 넘치는 표정을 지었다.

"흠, 그럴까요?"

그러나 지셀이 긍정적으로 반응하자 모두는 바로 표정을 구겨 버렸다.

장로들은 휴베르트를 보며 왜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했냐고 눈빛으로 핀잔을 주었다.

휴베르트 또한 썩은 생강 씹은 표정을 지으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아오, 눈치 없는 새끼.'

예의상 하는 말은 적당히 눈치채고 거부하는 게 사회생활의 기본인데, 눈앞의 무례한 놈은 도무지 그런 기본이 안 되어 있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마법사들의 표정을 보며 지셀은 속으로 낄낄댔다.

'연기는 참 더럽게들 못한단 말이지.'

자신도 그다지 연기력이 뛰어난 편은 아니지만, 마법사들은 정말 노골적일 정도로 연기 실력이 형편없었다.

하기야, 젊어서부터 굉장한 인재로 촉망받는 그들이 굳이 남의 비위를 맞출 일이 얼마나 있었겠는가.

놀리는 맛이 있긴 했지만.... 계속 이곳에서 죽치며 시간을 버리기에는 지셀도 할 일이 많았다.

"아닙니다. 저도 할 일이 많아서 이만 가 봐야겠네요. 다음에 오면 한번 즐겨 보겠습니다."

그러자 휴베르트의 낯빛이 급격히 밝아졌다. 그는 지셀이 혹시라도 마음을 바꾸기 전에 급하게 말했다.

"그래, 그래. 대공자가 영지를 오래 비우면 안 되지. 돈은 이미 준비해 놨으니 확인해 보게. 마법사들도 늦지 않게 보내 주겠네."

마법사들은 시간을 두고 출발해 지셀 일행과 따로 영지에 들어올 예정이었다.

같이 움직인다면 적염의 마탑에서 마법사가 따라왔다는 소문이 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셀은 휴베르트에게 다시 한번 강조했다.

"바네사도 안전하게 영지에 도착할 수 있게 하셔야 합니다. 그 전까지 최선을 다해 보살펴 주십시오. 이제 제 전속 마법사니까 아주 잘 대해 주셔야 합니다. 다치면 안 되거든요."

"아무렴! 아주 귀한 손님처럼 모실 테니 걱정하지 말게나."

휴베르트가 호들갑까지 떨며 답했다.

지셀은 바네사에게 다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출발하고 싶지만, 사정이 있어서 그렇게는 안 되겠네. 어쨌든 조심해서 와라."

"알겠습니다. 공자님."

바네사의 표정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지셀은 다시 한번 당부했다.

"누가 괴롭히면 꼭 말해라. 너는 속에 쌓아 두면 안 돼. 그러다 폭발하면 큰일 나거든. 알겠지?"

영문 모를 말이었지만 바네사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지셀은 그녀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 주고 바로 몸을 돌렸다.

모두 함께 로비까지 내려오니, 로비에는 이미 용병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수레에는 금화 궤짝이 잔뜩 실려 있었다.

"금액을 확인해라."

지셀이 명령하자마자 용병들은 바로 돈을 세기 시작했다.

마법사들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저리 천박하게 바로 앞에서 확인하다니, 설마 돈을 덜 줬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자신들을 어찌 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용병들이 의아한 듯 말했다.

"3골드가 부족합니다. 마법사들은 똑똑하다던데, 돈 계산은 제대로 못 하는 모양입니다?"

순간, 마법사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금액이 워낙 크니 실수한 모양이었다.

거래 규모에 비하면 미미한 금액이지만, 마탑의 명성을 생각하면 무척이나 부끄러운 실수였다.

휴베르트는 당황하여 떠듬떠듬 말했다.

"계산을 맡은 자가 실수한 모양이네. 내 다시 확인하겠네. 미안하네."

지셀이 한숨을 내쉬며 누군가를 불렀다.

"고든."

"...."

고든이 조용히 사타구니 속에 손을 집어넣더니 5골드를 꺼내 궤짝에 짤그랑 집어넣었다.

"...?"

잠시 로비에 적막이 흘렀다.

고든이 집어 간 것도 문제지만, 용병들의 셈마저 잘못된 것이다.

카오르가 고든의 목을 잡고 구석으로 끌고 가 주먹을 휘둘렀다.

"이 오줌싸개 새끼야! 오늘은 그냥 안 넘어간다. 돈 같은 거 관심 없다며?"

퍽! 퍽! 퍽!

"윽! 미안! 어차피 받을 거 미리 받아도 되겠다 싶어서... 으엑! 그만 때려! 나 안 참는다? 악! 폭력 멈춰!"

구석에서 맞고 있는 고든을 보며 휴베르트와 장로들이 눈만 끔뻑거렸다.

지셀이 그들을 향해 민망하다는 듯 웃었다.

"이거 죄송하게 됐습니다. 워낙 못 배운 놈들이 많아서 말입니다. 하하하.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마법사들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지셀이 잽싸게 몸을 돌리며 말했다.

"자, 빨리 떠나자. 이 무식한 놈들아."

지셀 일행은 재빠르게 마탑을 나섰다.

그때까지도 마법사들은 멍하니 서서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도시에서 나서자마자 지셀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아, 하고 소리를 냈다.

"무슨 일이에요?"

"문지기 얘기하는 거 잊어버렸네."

벨린다가 황당해하며 지셀을 쳐다보았다.

"괘씸해서 놀린 거 아니었어요?"

"놀리다니, 난 항상 진심이야."

"퍽이나...."

길리언이 그를 노려보는 벨린다를 슬쩍 막아섰다.

"정말 공자님의 계획이 성공했군요. 마탑이 조건을 전부 들어줄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드디어 도련님 운도 확 트였나 봐요. 하는 일마다 다 잘되네."

"쟤네들 마법사가 아니라 다들 그냥 바보 아닙니까? 도대체 왜 다 들어준 겁니까?"

"그래, 바보들인가 보다. 앞으로도 바보들을 많이 만나게 될 거야."

명확한 이유가 있지만, 지금 설명할 수는 없었다. 지셀은 그냥 웃고 말았다.

"그나저나 그 여자는 뭐 하러 전속 마법사로 삼으셨습니까? 전혀 쓸모없어 보이는데."

카오르가 재차 물었다.

마나도 기세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 평범한 여자.

마탑에서도 하녀 노릇이나 했던 모양이니 학식이 높다든가, 상재가 좋을 리 없다.

하지만 지셀은 그 물음에도 대답 없이 그저 웃기만 했다.

"나중에 알게 될 거야."

카오르는 잠시 의아해하다가, 곧 지셀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입가에는 음흉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지셀은 카오르를 무시하고 길리언에게 말했다.

"겨우 한 계단 올라왔을 뿐이야. 이제 다음 단계를 준비해야지."

"알겠습니다."

적이 어떤 인물을 내세워, 어느 정도 전력을 이끌고 올지 모르니 방심할 수 없었다.

전쟁에서 방심한다는 건 곧 목숨을 내버리는 것과 같다.

지셀은 확실한 승리를 원했다.

'누구든 우리를 건들면 죽는다는 걸 보여 주마.'

굳게 다짐하는 그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도 서늘했다.

* * *

페르디움의 총관 호메른은 지셀이 언제 올까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주변인에게 청탁하는 전략이 실패했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돈을 달라고 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런데 룬스톤을 팔러 간다던 대공자는 한 달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뭐지? 왜 안 오지? 설마 산적이라도 만나서 다 털린 거 아냐?'

한번 이상한 생각이 들자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걱정이 앞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지셀은 이 영지의 희망이다. 아니, 지셀이 아니라 그가 가져간 룬스톤이 페르디움의 희망이었다.

'산적한테 잡혀서 죽었으면 어떻게 하지? 멍청하긴! 그러니까 병사들을 좀 더 데리고 갔어야지!'

사실 병사라고 해 봤자 현재 페르디움의 상황으로는 채 백 명도 지원해 주지 못하는 게 현실이었다.

그래도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호메른은 확신했다.

'대공자가 죽었어도 룬스톤은 영지에서 채취하면 되는데... 아니다, 생각해 보니 인부들을 고용할 돈도 없잖아!'

대공자의 신변이 걱정되기도 했지만, 만약 정말 죽었으면 남은 룬스톤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고민해야 했다.

그나마 지셀이 룬스톤이 있는 곳까지는 길을 냈다고 하니 쉽게 찾을 수는 있을 것이다.

'아오!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해 미치겠군. 어떻게 해야 하지?'

다른 가신들도 걱정이 되는지 요새는 대공자에 대한 얘기로 성이 어수선했다.

북방 요새를 계속 비워 놓을 수는 없기에 슬슬 페르디움 백작도 요새로 돌아가야 하는데, 지셀이 돌아오지 않으니 백작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행선지도 말하지 않고 떠났으니 지금 어디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다.

'안 되겠다. 일단 찾으러 가야겠어. 도대체 어디로 간 거지?'

호메른은 이틀을 더 기다리다 결국 즈발터에게 허가를 받고 추적대를 꾸렸다. 기사 한 명에 병사 십여 명 정도로 단출한 규모였다.

추적대를 대규모로 꾸릴 여력이 없기도 했지만, 지셀이 데려간 병력의 규모가 크다 보니 굳이 사람을 많이 쓰지 않아도 행방을 수소문하기는 어렵지 않을 터였다.

그들이 성문을 열고 막 출발하려는 찰나, 멀리서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일단의 무리가 다가왔다.

"뭐, 뭐야?"

"누가 쳐들어온 건가? 파발은 없었는데?"

"성문! 일단 성문부터 닫아!"

무장한 병력 수백 명이 몰려오고 있었다. 깃발도 들지 않아 정체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기겁한 사람들은 일단 성문을 닫고 들어가 무슨 일인지 살펴보았다.

"어, 저, 저 사람은?"

기사 하나가 선두에서 말을 모는 사람을 알아보고 깜짝 놀랐다.

영지를 떠났던 대공자였다.

"대공자님이다! 대공자님이 돌아오셨다!"

"그럼 그 뒤에 병력은?"

"용병들인가? 그런 것치고는 장비들이 너무 좋은데?"

지셀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호메른이 헐레벌떡 성문 앞까지 뛰쳐나갔다.

그는 지셀을 뒤따르는 병력을 보고 입을 쩍 벌렸다.

"헐, 저게 뭐야?"

지셀이 성문 앞에서 말을 세우며 호쾌하게 웃었다.

"총관님이 마중 나와 주신 겁니까?"

"아, 아니, 대공자님! 이게 뭡니까? 도대체 뒤에 있는 병력은 어찌 된 겁니까?"

"마수의 숲을 개척하고 영지를 방어하려고 고용한 사람들입니다."

"고, 고용이요? 용병들입니까?"

"맞습니다."

호메른이 어안이 벙벙해서 용병들을 훑어보았다.

무기들은 제각각이지만 갑옷과 군마는 거의 비슷한 모양새에, 새것처럼 빛나고 있었다.

호메른은 불길한 예감을 억누르며 물었다.

"숲 개척은 그렇다 쳐도... 영지를 방어한다는 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룬스톤 자원지가 발견되었으니 다른 영주들이 침략해 올 거 아닙니까? 대비해야죠."

지셀이 당연하다는 듯 내뱉는 말에 호메른은 이마를 짚었다.

'이 멍청한 놈! 전쟁이 애들 소꿉장난인 줄 아는구나!'

룬스톤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 언젠가는 영지전이 일어나겠지만, 당장은 아니었다.

"용병은 전쟁이 시작되면 그때 고용해도 됩니다! 룬스톤을 구한 지 얼마나 됐다고 다른 영주가 쳐들어오겠습니까? 적어도 일이 년은 지나야 일어날 일을, 벌써!"

호메른이 열변을 토했지만, 지셀은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호메른의 생각은 틀렸다.

전쟁이 시작된 뒤에 용병을 구하기 시작하면 제대로 모으지도 못할 것이다. 아무도 페르디움의 편을 들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 그렇게 말해 봤자 누가 믿겠는가?

미친놈 취급을 받더라도 그냥 알아서 준비하는 게 나았다.

"어쨌든 이미 고용했으니 어쩔 수 없습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면 마수의 숲을 개척하는 데 쓰면 되죠."

"으으으... 그러면 돈은? 이번에 판매한 룬스톤 대금은 얼마나 남았습니까?"

"다 썼는데요."

"네?"

"용병들을 고용하고 물자를 준비하는 데 다 써서 이제 남은 돈이 없습니다."

"한 푼도?"

"한 푼도."

"...."

"...."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눈가가 촉촉해진 호메른이 이마를 부여잡고 비틀거렸다.

62화 이 꽉 깨물고 잘 버텨라. (1)

"총관님!"

옆에 있던 기사가 비틀거리는 호메른을 잽싸게 붙잡았다.

그는 간신히 중심을 잡고 섰지만, 다리는 여전히 흐느적거렸다. 금방이라도 다시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지금 영지에 돈 나갈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닌데... 그 돈을 다 썼다고? 그것도 쓸모도 없는 용병만 저리 잔뜩...."

실제로 전쟁이 일어난다 쳐도, 겨우 삼백여 명의 병력이 더해진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차라리 다른 영주들에게 룬스톤을 바치고 지원군을 요청하는 게 더 빠를 것이다.

아니면 룬스톤을 일정 부분 바치겠다고 약조하고 항복하는 방법도 있다. 영지전에 승리한다고 영주와 가신들 가문을 몰살시키지는 않을 테니까.

"차라리 그 돈을 기사들과 병사들에게 썼어야지!"

보아하니 용병들을 고용하고 장비까지 끝내주게 맞춰 준 모양이다.

이 멍청한 놈이 제 병력을 키우겠다고 돈을 아무렇게나 써 버린 것이다.

호메른의 창백한 얼굴에 실망감이 묻어 나왔다. 지셀이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에게 드릴 5천 골드는 남겨 놨습니다. 곧 룬스톤도 더 구해 올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지요."

그래도 호메른은 여전히 안색이 어두웠다.

다시 룬스톤을 구해 올 수 있다고 해도, 지금 당장 돈이 필요한 곳이 많았다.

그래서 지셀이 가져올 돈을 기대했던 건데... 기대한 만큼 실망도 커진 것이다.

'으으, 역시 이런 망나니한테 돈을 맡기면 안 돼. 어떻게든 영지에서 룬스톤을 관리해야 한다.'

호메른은 말도 잇지 못하고 슬픈 표정만을 짓고 있었다.

그때, 멀리서 마차 한 대가 다가왔다.

여덟 마리 백마가 이끄는 마차는 돈 많은 귀족이나 탈 수 있을 정도로 크고 화려했다.

잠시 후, 지셀의 앞에 마차가 멈추었다. 문이 열리고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들이 차례로 내렸다.

그중 가장 마지막에 내린 남자가 지셀을 바라보며 인사를 건넸다.

"오, 공자님께서 직접 마중 나오신 겁니까? 이제 좀 귀족다운 품위가 보이시는 거 같습니다. 하하하."

시건방진 말을 내뱉는 자는 적염의 마탑에서 온 알포이였다.

한 달 정도 후에 페르디움에 도착하도록 시간을 잘 맞춰서 출발하라고 했는데, 그 말을 잘 지켰는지 지셀과 동시에 도착한 것이다.

오만한 표정으로 서 있는 마법사를 보며 지셀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튼 말들은 진짜 존나게 안 들어요."

분명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오라고 했는데 마차 꼬락서니가 범상치 않았다. 마차가 지나간 걸 기억하는 사람이 꽤 많을 것이다.

그나마 일행 모두 검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호메른은 지셀과 알포이를 번갈아 보다가 멍하니 물었다.

"이자들은 누구입니까?"

"제가 고용한 용병들입니다."

"뭔 용병들이 이렇게 로브를 뒤집어쓰고 저런 마차를...."

그는 다시 지셀과 용병들을 둘러본 뒤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래, 너희들끼리 전쟁놀이하면서 잘들 놀아라. 재미있겠네."

호메른은 그 말만을 남긴 채 비틀거리며 성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계속 그 자리에 있다가는 화병이 도질 거 같았기 때문이다.

지셀은 어깨를 으쓱한 뒤, 마법사들 뒤에서 주뼛대고 있는 바네사를 챙겼다.

"무사히 왔네. 별일 없었지?"

"고, 공자님을 뵙습니다. 저, 저는 별일 없이...."

"괴롭힌 사람 있었어?"

"어, 없었습니다."

"그래, 다행이네. 일단 들어가자."

마법사들은 다시 마차에 올라탔다.

용병들도 지셀의 뒤를 따라 성안으로 들어갔다.

외성을 지나 영주성 앞에 멈춰 선 지셀은 벨린다에게 마법사들의 안내를 맡겼다.

"벨린다, 마법사들이 묵을 방을 준비해 줘. 난 용병들을 주둔지로 데리고 갈 테니까."

"알겠어요. 저도 오랜만에 정리를 좀 해야겠네요."

다시 용병들을 이끌고 움직이려 할 때, 상당히 거슬리는 모습이 그의 눈에 띄었다.

"하, 이 새끼들 진짜...."

마법사들은 뒷짐을 진 채 느긋하게 영주성을 구경하며 자기들끼리 품평하고 있었다.

"흐음, 제법 흥미로운 양식으로 지어진 성이군요. 이건 이 지역의 기후에 걸맞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실용적이면서도 고전적인 느낌의...."

"조화와 비례에 바탕을 두어 공간을 구성하는 요소로...."

마법사들이 허세 부리는 거야 그네들 특징이니 그러려니 넘길 수 있었다.

문제는, 그들이 우아하게 토론하는 동안 바네사 혼자 끙끙거리며 무거운 짐들을 마차에서 내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짐이 꽤 무거운지, 그녀는 힘겨워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짐 몇 개를 내리자마자 그녀는 다시 마차의 짐칸으로 쏙 들어갔다. 가져온 짐이 꽤 많기에 여러 번 걸쳐 옮겨야 했다.

지셀이 마법사들에게 다가가 차갑게 말했다.

"이게 무슨 짓이지? 내가 분명 바네사를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저 여자가 원래 저런 일을 잘합니다. 일은 잘하는 사람한테 맡겨야죠."

비죽거리며 말하는 꼴을 보니, 요 한 달 사이에 마탑이 제 처지를 잠깐 잊은 모양이었다.

지셀이 떠난 뒤, 평소처럼 바네사를 막 대하고 부려 먹은 게 분명했다.

지셀은 짐을 가지고 내리는 그녀를 불러세웠다.

"바네사, 그만하고 이리 와라."

"아, 아닙니다. 짐을 옮기고...."

그러자 지셀이 서늘하게 내뱉었다.

"대체 누가 네 주인이라고 생각하나? 넌 내 말만 따르면 된다."

하지만 바네사는 알포이의 눈치를 보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지셀이 손을 들어 까닥이자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주춤주춤 그에게 다가갔다.

"잘 들어라. 지금부터 내 말 외에는 누구의 명령도 듣지 마라. 알겠느냐?"

"아, 알겠습니다."

지셀은 바네사에게 단단히 주의를 시키고, 알포이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바네사는 더 이상 너희의 하녀가 아니다. 이제 내 사람이니 함부로 굴지 말도록. 처음이니 한 번은 용서해 주겠다. 하지만 또다시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목을 걸어야 할 거다."

"이이익... 어찌 저런 하찮은 년에게...."

알포이는 모욕감에 이를 갈았다.

마탑의 후계자인 자신보다 저런 하녀 따위에게 신경 쓰는 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게다가 지셀은 여전히 자신에게 무례하게 굴었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분이 차올랐다.

'그냥 죽여 버릴까?'

당장이라도 마법을 날려 저 건방진 얼굴을 갈아 버리고 싶었다.

마탑의 어른들마저 없으니 감정이 쉽게 제어되지 않았다.

'그래, 마탑에는 사고였다고 하면 되잖아?'

알포이는 분노에 매몰되어 흉악한 기세를 내보이기 시작했다.

주변에 있던 용병들이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각자 무기에 손을 가져갔다.

알포이는 그 정도로 숨김없이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확실히 마탑에서 귀하게 자라서인지 분위기 파악을 못 하는 놈이었다.

지셀이 진한 비웃음을 지었다.

"역시 이런 놈들은 말로 하면 듣지를 않아."

"뭐?"

알포이가 인상을 쓰자 지셀은 성문 앞을 지키는 병사에게 다가갔다.

"창 줘 봐."

"네?"

지셀은 두 번 말하지 않고 병사의 손에서 그냥 창을 빼앗아 바로 부러뜨렸다.

우지끈!

페르디움이 워낙 가난하다 보니, 병사가 쓰는 창도 창대가 나무로 된 저렴한 물건이었다.

창날을 떼어 내니 자연스럽게 손에 딱 맞는 몽둥이가 되었다.

지셀은 창대였던 몽둥이로 한쪽 손바닥을 툭툭 치며 알포이에게 다가갔다.

"대가리에 똥만 찬 것들은."

"뭐?"

"역사적으로도 이게 약이었다."

"이 새끼가!"

모욕적인 말에 폭발한 알포이가 마력을 끌어올렸다.

우우웅!

심장의 서클이 힘차게 돌아가며 마법사의 의지에 따라 마법을 구현했다.

콰아아!

그는 바로 손을 뻗어 강대한 마법의 위대함을 보여 주려 했다.

따악!

"어억!"

그러나, 마법이 나가기는커녕 눈앞이 번쩍이며 고통이 몰려왔다.

"뭐, 뭐지?"

어떻게 맞았는지도 모른다.

공격이 보이지도 않았고, 왜 마법이 끊겼는지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

"이익!"

알포이가 다시 마력을 끌어올리며 마법을 시전하려 했지만, 지셀의 손이 더 빨랐다.

빠아악!

"으아악!"

이번에는 소리가 더 컸다. 알포이는 저도 모르게 양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곧 머리뿐만 아니라 온몸에서 고통이 몰려왔다.

퍼억! 퍼억!

"끄아악!"

지셀은 조금 전 마법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느긋하게 뒷짐을 지고 한 손으로만 알포이를 패기 시작했다.

퍼억! 퍼억! 퍼억!

"으어억! 자, 잠깐!"

알포이는 미칠 거 같았다.

마력을 끌어올리려고만 하면 절묘한 타이밍에 끊기고 만다.

마치 몸 안에 무언가 들어와서 흐름을 막아 버리는 느낌이었다.

퍼억! 퍼억!

"으게게겍!"

더 미칠 거 같은 건 쓰러지지도 못한다는 점이다.

쓰러지려고 하면 그 반대편에서 몽둥이가 날아와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으어어억!"

"멈추시오!"

보다 못한 나머지 마법사들이 마력을 내뿜으며 움직이려 했다.

차차창!

하지만, 그들이 움직이려는 낌새가 보이자 주변에 있던 용병들이 순식간에 그들의 목에 무기를 갖다 대었다.

마법사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으으으...."

다른 마법사들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알포이는 정말 쉴 새 없이 두들겨 맞고 있었다.

퍼억! 퍼억! 퍼억!

"어어억, 그만! 잘못했어!"

그가 이런 고통을 겪은 건 생전 처음이었다.

마탑에서 최고로 대우받으며 언제든 원하는 대로 행동하며 살아왔다.

이렇게 몰상식한 짓을 당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한 적이 없었다.

"흠, 이쯤 할까?"

지셀이 몽둥이질이 멈추자 알포이는 땅바닥에 풀썩 무릎을 꿇었다.

"끄허억, 으억...."

지셀은 고통스러워하는 알포이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이거 진짜 생각이 짧은 놈이네. 너 마법사 맞아? 여기 우리 영지야. 여기서 지랄하면 감당할 수 있겠냐? 도망이나 갈 수 있겠어?"

만약 지셀이 그의 마법을 맞고 죽거나 다쳤다면 알포이는 이곳에서 즉결 처형을 당했을 것이다.

그는 그런 생각도 하지 못할 정도로 흥분했던 것이다.

알포이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같이 온 마법사들도 용병들에게 목을 내어 주고 있었다.

"으으...."

알포이는 이를 갈았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삼백여 명에 이르는 용병들이 지척에 붙어 있었다. 본격적으로 싸우면 마법사 여섯 명은 순식간에 피떡이 될 것이다.

"끄으, 네, 네놈...."

알포이는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몸이 비명을 질렀지만, 몸의 고통보다 자존심의 상처가 더욱더 컸다.

"우, 우리에게 이런 짓을 하다니! 내 반드시 이 일을 보고해서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발작하며 외치는 알포이에게 지셀이 웃으며 답했다.

"보고해 봐. 니 스승이 누구 편을 들어 줄까? 너 계약이 뭔지 벌써 잊은 거냐? 지금 돌아갈래?"

"으, 으으...."

휴베르트는 몇 번이나 지셀의 심기를 거스르지 말라고 강조했었다.

― 그놈은 정상이 아니니까 말도 섞지 말고 하자는 대로 해라. 말을 섞을수록 손해다.

반박할 수 없는 현실에 이만 악물고 있는데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너는 멀쩡할 거 같냐? 우리가 전쟁에서 지면 너도 꼬리 자르기를 당해 스승한테서 쫓겨날 거다."

그 말에 알포이를 비롯한 마법사들은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만약 일이 잘못되면, 마탑은 일부 마법사들의 단독 행동이었다고 주장하며 지셀과의 연관성을 부인할 게 뻔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룬스톤의 수급이 막히면 그 책임은 고스란히 그들에게 돌아올 것이다.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된 알포이와 마법사들은 반박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멀쩡히 돌아가고 싶으면 최선을 다해 도와라. 계약 파기 당하기 싫으면 평소에도 잘하고. 크크큭."

하지만, 마탑의 후계자로서 떠받들어지기만 하던 알포이는 지셀의 폭거를 참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어떤 귀족도 우리를 이렇게 함부로 대하지 않았소! 우리에게 걸맞은 대우를 해 달라는 말이오! 대우를!"

알포이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하지만 지셀은 같잖다는 듯 한마디 툭 내뱉을 뿐이었다.

"너희는 그냥 예비용이야. 정확히는 보조 마력 같은 거지. 그래서 이 정도로 끝내는 거다. 그렇게 대우받고 싶으면 얌전히나 있든가."

63화 이 꽉 깨물고 잘 버텨라. (2)

"뭐, 뭐요? 보조 마력?"

알포이가 당황하며 물었다.

3서클 마스터는 기사와 비슷한 수준으로 평가되는 고급 전력이다.

전장에서는 오히려 기사보다 높이 대접받기도 했다. 어지간한 병사들은 단번에 수십 명도 쓸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마법사들을 겨우 보조 마력 취급하다니, 알포이로선 생전 처음 겪는 모욕이었다.

"그냥 그런 게 있다. 그렇게만 알고 있어."

지셀은 마차에 남은 짐을 보며 혀를 찼다.

"짐은 직접 들고 가라. 마차 부숴 버리기 전에."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말 머리를 돌려 주둔지로 향했다.

바네사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안절부절못하다가 후다닥 지셀의 뒤를 따랐다.

마법사들과 같이 있다가 보복당할까 무서워하는 티가 났다.

용병들도 다시 무기를 집어넣고 마법사들 곁을 지나가며 한마디씩 던졌다.

"웬 샌님들이 이렇게 길을 막고 있어."

"저런 비리비리한 몸으로 용병을 한다고?"

"고용주가 마력 어쩌고 하던데 마법사 아냐?"

"에이, 마법사가 뭐 하러 이런 시골에 와. 그냥 머리나 좀 쓰는 사람들이겠지."

"돈 많아 보이는데 상단 출신인가?"

지셀과 마법사들이 마탑이라는 단어를 아예 꺼내지 않았기에, 대화를 곁에서 들은 용병들도 마법사들의 정체를 제대로 짐작하지 못했다.

알포이는 이를 갈며 용병들을 노려보았다.

"이... 천박한 놈들이 감히...."

하지만 정체를 대놓고 밝힐 수도 없으니 당장은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두고 보자.... 내가 탑주가 되기만 하면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다른 마법사들은 귀족인 지셀에게 감히 복수할 생각을 못 할 것이다.

하지만 알포이는 절대 오늘 겪은 굴욕을 잊을 생각이 없었다.

그는 다른 마법사들의 도움을 받아 아픈 몸을 치료했다. 다행히 뼈는 부러지지 않아 하급 치유 마법으로도 몸 상태가 금세 좋아졌다.

지셀에게 이를 갈면서도 알포이는 궁금증을 버리지 못했다.

'으으,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살만 터지게 때린 거지?'

겉가죽만 상했으니, 다쳤다는 핑계로 짐을 옮기는 일에서 빠질 수도 없게 되었다. 알포이는 다른 마법사들과 함께 낑낑대며 짐을 내렸다.

"으으윽, 왜 이렇게 무거워!"

일 년 동안 지낼 생각으로 왔다 보니 짐이 상당히 많았다.

게다가 어차피 바네사가 옮길 거라는 생각에 마법사들은 다들 무게는 생각하지 않고 잔뜩 짐을 꾸렸다.

육체노동이라고는 한 번도 안 해 본 마법사들이 옮기기에는 부피도 크고, 무게도 무거웠다.

근력 강화 마법을 쓸 수는 있지만, 겨우 짐을 옮기는 데 마법을 쓰기는 자존심이 상했다.

알포이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벨린다를 발견하고 근엄하게 말했다.

"당장 하인들을 불러와서 짐을 옮기게 해라."

"도련님이 직접 옮기라고 하셨잖아요. 마차 부서져도 괜찮아요? 비싸 보이는데."

"이익...!"

"여섯 명인데 그 정도도 못 옮겨요? 아까 바네사라는 분은 혼자 잘 들고 내리던데."

벨린다가 능청스럽게 잡아뗐다.

알포이의 얼굴이 벌게졌다.

복장을 보아하니 저 여자도 고작해야 하녀인 모양인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자신의 말을 무시한단 말인가.

"이 영지는 도대체 제정신인 놈들이 없구나! 이 몸은 이런 하찮은 일을 안 해 봤단 말이다! 이런 건 너희 같은 천한 것들이 해야 하는 게 아니냐!"

하지만 알포이가 열을 내도 벨린다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저도 도련님한테 혼나기 싫어요. 도련님 성질이 얼마나 더러운데요."

"으으, 두고 보자, 두고 봐. 이 건방진 것들. 내 기필코 가만두지 않겠다."

알포이는 어쩔 수 없이 근력 강화 마법을 사용하려고 마력을 풀어 냈다.

그때, 성안에서 두 사람이 하녀들을 이끌고 나왔다. 엘레나, 그리고 길리언의 딸 레이첼이었다.

"벨린다! 이제 돌아온 거야?"

"어머, 아가씨! 오랜만이네요. 레이첼도 잘 지냈니?"

"네, 벨린다님도 잘 지내셨나요?"

레이첼은 약을 꾸준히 먹고 건강해져서 엘레나의 말동무가 되었다.

마침 비슷한 또래라 금세 친해진 두 사람은 어딜 가든 항상 붙어 다녔다.

"뭔가 시끄럽던데, 무슨 일이야?"

엘레나의 물음에 벨린다가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손님들인데, 짐이 무거워서 못 옮기고 있더라고요."

"흐음, 그래? 그러면 하인들을 부르지 그랬어. 많이 무거운가?"

엘레나가 슬쩍 다가가 마법사들의 짐 몇 개를 훅 들어 올렸다.

"응? 괜찮은데? 별로 안 무거워."

양손에 짐을 가볍게 든 그녀를 보고 마법사들은 경악했다.

벨린다는 손뼉을 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 안 무거우세요? 요새 운동하시나 봐요!"

"아이참, 그런 거 안 해. 이거 그렇게 무겁지도 않은걸. 내가 들어 줄게. 그래도 손님인데 잘해 줘야지."

아가씨가 짐을 드는데, 따르는 하녀들이 어찌 가만히 있으랴.

하녀들은 다 같이 달라붙어 무거운 짐을 척척 옮겼다. 벨린다도 어쩔 수 없이 도왔다.

여러 사람이 손을 보태니 남은 짐은 몇 개 되지 않았다.

마법사들은 괜히 자존심이 상해서 이를 악물고 나머지 짐을 들었다.

하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혹사당한 그들의 가녀린 팔은 짐을 들어 올리기도 전부터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결국 그간의 과정을 한심하게 지켜보던 마부가 마차에서 내리며 한마디 툭 던졌다.

"이건 그냥 돈 안 받고 도와주겠수. 운동들 좀 하셔야겠네."

장기 고용된 마부는 마탑 도시에서 왔기에 딱히 마법사들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매일 보는 것이 마탑이고 마법사들이기 때문이다.

'으으으, 죄다 죽여 버리고 싶다. 전부 그 새끼 때문이야. 절대 용서하지 않으리라.'

연달아 받은 굴욕에 알포이가 이를 갈았다.

한편, 지셀은 용병들을 이끌고 주둔지에 도착했다.

한 달 전만 해도 토대를 잡는 중이던 주둔지는 이제 제법 모양새를 갖고 있었다.

"후우, 꽤 많이 진행됐는걸?"

지셀은 만족스럽게 웃은 뒤 용병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당분간 이곳에서 마수의 숲을 경계해라. 다음 할 일은 준비되는 대로 지시하겠다."

"알겠습니다!"

용병들이 큰 소리로 외쳤다.

이들은 모두 지셀이 북부의 영지를 돌며 모아 온 자들이었다.

마수의 숲에 들어갔던 기존 용병들도 당연히 재계약했다.

새로운 용병들을 통제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새 인원을 들일 때마다, 덤벼드는 놈들을 길리언과 카오르가 잘근잘근 밟아 줬기 때문이다.

마수의 숲에서 함께 싸운 용병들도 지셀에 대한 충성심이 높으니, 새로운 용병들은 차마 그에게 덤벼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조금 특이한 점이라면, 기존의 용병들이 만든 분위기 때문인지 새로운 용병들도 지셀을 대장이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지셀은 떠나기 전 한마디를 덧붙였다.

"장비와 말을 잘 관리해라. 도박 같은 애먼 짓으로 날려 먹는 건 용서하지 않겠다."

"알겠습니다!"

이들의 갑옷과 말들은 전부 지셀이 사비를 털어 마련해 준 것이었다.

용병들은 각자 자금 사정에 맞춰 장비를 마련하기에 품질이 천차만별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싸고 조악한 무기를 사서 대충 쓰다가 갈아치우곤 했다.

그런 무장으로는 사람이 많아 봐야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지셀은 이왕 준비하는 김에 아예 제대로 무장까지 시켜 주었다.

지셀은 용병들의 훈련과 관리 방법, 편제 따위를 길리언, 카오르에게 일임하고 연무장으로 향했다.

"연무장에는 왜 가십니까? 이제 막 돌아오셨는데 쉬지 않으시고요."

길리언이 의아해했다.

"두 사람은 먼저 쉬도록 해. 바네사에 대해 확인할 게 있어서."

지셀은 연무장으로 들어가자마자 팔을 걷어붙이며 말했다.

"앉아 봐."

바네사는 긴장해서 눈치만 보다가 조용히 연무장 한가운데에 앉았다.

"마나를 느끼지 못한다고 알고 있는데, 맞아?"

"네, 그렇습니다."

"스승에게 마법은 어디까지 배웠지?"

"이론적으로는... 5서클까지 배웠습니다."

바네사는 자신 없어 하며 웅얼거렸다.

지셀은 조금 감탄했다.

'역시 전생에 들은 것과 같다. 예상대로야. 이 정도면 아주 훌륭해.'

마법 술식은 단순히 외우기만 한다고 익힐 수 있는 게 아니다.

나름대로 깨달음과 이해가 필요하고 거기에 의지를 담을 줄 알아야 한다.

젊은 나이에 5서클 술식까지 이해했다는 건 보통 총명한 게 아니란 뜻이다.

"벌써 5서클이라니 대단한데? 상당히 똑똑한 모양이야."

"아, 아닙니다. 실제로 시전하지는 못하니 제가 이해한 게 맞는지도 확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괜찮아, 그건 이제부터 해 보면 되니까."

"네? 저는 마나를...."

"난 너에게 마나 연공법을 알려 줄 생각이다."

바네사의 낯빛이 조금 어두워졌다.

"마나 연공법 몰라?"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스승님께서 간단한 마나 연공법을 구해 와 알려 주셨습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흐음, 과연.... 시도는 했었군."

지셀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또한 전생에 간단하게나마 들었다. 마나 연공법도 시도해 봤다고.

애초에 마나를 느끼지 못하면 마나 연공법도 소용이 없다.

마나를 느껴야 그걸 받아들이고 몸 안에 쌓을 게 아닌가?

게다가 마법사가 마나 연공법을 제대로 이해했을 리도 없었다.

"괜찮아. 나는 좀 다르게 가르쳐 줄 테니까. 일단 마나부터 느껴야겠지?"

"네?"

지셀은 진중한 태도로 물었다.

"지금도 마법을 익히고 싶은가?"

바네사는 떨리는 눈빛을 감추려고 눈을 내리깔았다.

당연히 그러고 싶었다.

계속 지셀의 눈치를 본 것도, 나중에 마법을 익혀도 된다는 허락을 받고 싶어서 그랬던 게 아닌가.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계속 공부하고 싶어요."

"좋아. 그러면 이 꽉 깨물고 잘 버텨라. 잘못하면 너는 죽고 나는 안 죽는다."

"그게 무슨...."

"시작한다."

지셀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고 바로 그녀의 등에 손바닥을 대었다.

구우우웅!

마나가 지셀의 손바닥을 통해 바네사의 몸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지셀은 마나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훑은 마나가 배꼽 아래에 뭉치기 시작했다.

"이건...."

난생처음 느껴 보는 기운에 바네사가 눈을 크게 떴다.

"입 닫아라. 지금 들어간 건 내 마나다. 마나가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 놓치지 말고 느껴야 한다."

바네사는 지금 자신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왔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눈을 꼭 감고 자기 몸에 들어온 이질적인 기운을 느끼려 애썼다.

구우우웅!

마나의 흐름이 안정되자 지셀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은 성공이다.'

지셀은 그녀의 몸에 임시로 아주 작은 마나 코어를 만들었다.

바네사는 몰랐지만, 지셀이 지금 시도한 방법을 쓰려면 섬세한 마나 운용 능력과 엄청난 집중력이 필요했다.

'대륙 7강'급 실력자가 아니라면 감히 시도할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방식이었다.

원래는 마나를 느끼고, 호흡법을 배워 스스로 코어를 만드는 게 정석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바네사가 언제 성공할지 알 수 없었다. 지금은 마나를 느끼게 하는 게 우선이었다.

지셀의 마나로 만든 코어이니, 시간이 지나면 다시 흩어지고 말 것이다.

그 전에 조금이라도 스스로 마나를 느끼고 흡수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우우우웅.

지셀이 의지를 실어 마나를 움직이자, 바네사의 몸에 생성된 코어가 세차게 돌아가며 마나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호흡을 통해 자연스럽게 마나를 흡수하는 게 아니라, 마나를 순환시켜 주변에 있는 마나를 강제로 빨아들이는 것이다.

"으으읏."

바네사는 고통에 이를 악물면서도 어떻게든 견뎌 내었다.

꿈에도 그리던 마나였다.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감각은 고통스러웠지만, 황홀했다.

'조금만 더.'

바네사는 이 느낌이 더 이어지기를 원했지만, 지셀은 슬슬 마나 유도를 끝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번쩍!

그때, 바네사는 그동안 익혔던 수많은 마법 술식을 번뜩 떠올렸다.

언제나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그것들은 실낱같은 마나를 만나자 세상 밖으로 뛰쳐나가려 발버둥 쳤다.

바네사는 마나를 처음 느껴 본 황홀감에 무아지경에 빠진 상태였다.

지잉―! 지잉―! 지잉―!

허공에 마법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동안 억눌러 왔던 게 터졌는지 그녀 자신도 모르게 마법들이 시전되고 말았다.

하나씩 늘어나던 마법진은 어느새 다섯 개를 훌쩍 넘어갔다.

"벌써 다중 영창을 한다고?"

지셀이 화들짝 놀라며 불어 넣던 마나 양을 줄였다.

마법진들은 바네사의 콩알만 한 마나가 아니라 지셀의 마나를 미친 듯이 잡아먹으며 생성되고 있었다.

막무가내로 손을 뗀다면 바네사가 위험해지니, 천천히 마나를 줄인 것이지만...,

지셀이 마나를 끊으니 다른 문제가 생겼다.

푸스스스....

바네사의 머리카락이 끝부분부터 조금씩 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

마나가 부족해지자 그녀의 생명력을 끌어다 쓰고 있는 것이다.

"젠장! 정신 차려!"

생명력을 태우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지셀이 다시 마나를 뿜어내며 고함을 질렀다.

64화 이 꽉 깨물고 잘 버텨라. (3)

다시 마나가 훅 빨려 들어가며 마법진이 완성되었다.

바네사가 5서클까지 익혔다 했으니, 아마 5서클 마법일 것이다.

게다가 지셀의 마나를 잡아먹고 나온 것이니 그 파괴력도 만만치 않을 터.

이것들이 전부 발동된다면 연무장은 박살 나고, 밖에 있는 사람들도 크게 다칠 것이다.

구우우웅!

지셀은 재빠르게 바네사의 몸 안에서 휘몰아치는 마나의 흐름을 하나둘 차단하기 시작했다.

마나의 흐름이 줄어들자 마법진들이 깜빡이며 일그러졌다.

'이대로면 위험하다.'

언제까지 자신이 이렇게 붙잡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지셀이 손을 떼면 바네사의 생명력이 모두 빨려 나갈 것이다.

그녀가 스스로 멈추지 않는 이상 마법은 끊임없이 발동될 테니까.

위험하더라도 그녀의 정신을 강제로 깨워야 했다.

"흐읍!"

지셀은 마나를 뿜어내어 그녀의 몸속에 있는 모든 마나 로드를 순식간에 차단했다.

동시에 모든 길이 막히자 바네사의 몸속에서 정신없이 휘몰아치던 마나도 순간 흐름을 멈추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지셀은 크게 소리쳤다.

"눈을 떠라!"

쩌엉!

연무장을 진동시킬 정도로 커다란 외침에 겨우 바네사가 정신을 차렸다.

파스슥....

허공에 무수히 떠 있던 마법진들이 빛을 잃고 사라졌다.

지셀은 요동치던 마나가 가라앉은 것을 확인하고 바네사에게서 천천히 손을 떼었다.

"쿨럭!"

바네사가 허리를 숙이며 피를 토했다.

그녀는 속이 진탕된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희열을 느꼈다.

드디어 마나가 어떤 느낌인지 확실히 깨달았다.

몸 안에 자리 잡은, 티끌만 한 마나가 확신을 더해 주었다.

"우에엑!"

피를 계속 토하면서도 그녀는 웃었다. 막혔던 속이 뚫리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몽롱한 정신 속에서도 지셀을 바라보았다.

자신에게 마나를 느끼게 해 준 사람. 이 순간만큼은 몸서리치게 고마웠다.

지셀 또한 그녀를 보며 만족스럽게 웃음을 지었다.

'생각대로 되었군. 그래도 자칫 잘못하면 큰일 날 뻔했어.'

마나를 느끼자마자 다중 영창이라니. 기대 이상의 성과였다.

기분 좋아 보이는 지셀에게 바네사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처음 본 저한테 이렇게까지 해 주신 건가요?"

"뭐, 네 힘이 필요하니까. 도와줄 거지?"

"제가... 공자님께 도움이 될까요?"

그러자 지셀이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는 듯 웃으며 답했다.

"그럼, 아주 큰 도움이 될 거야. 이제 마나를 느꼈으니 내가 본격적으로 마나 연공법을 알려줄게. 네게 딱 맞는 게 있거든."

장난기 어린 지셀의 얼굴을 보고 바네사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운 좋게 좋은 스승을 만나 북부 제일이라는 마탑에 들어갔지만, 현실은 잔혹했다.

저열한 재능, 주변 사람들의 멸시, 아무리 노력해도 변하지 않는 현실.

그것은 스승이 죽고 나서 더 심해졌다.

하녀로 전락해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지만, 누구도 그녀를 인정해 주지 않았다.

오히려 같은 하녀들마저 마법사의 제자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녀를 괴롭히고 따돌렸다.

마탑에서 자신은 마법사도 하녀도 아닌 이방인일 뿐이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던 그녀에게 지금 믿을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났다.

바네사가 조그맣게 입을 달싹거렸다.

"...되고 싶어요."

"응? 뭐라고?"

진심으로 그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는...."

눈앞에 있는 저 공자는 알 수 없는 힘으로 자신을 묶고 있던 모든 족쇄를 끊어 주었다.

그에게 꼭 은혜를 갚고 싶었다.

바네사는 조금 더 용기를 내어 말했다.

"공자님께 도움이 되고 싶어요."

"그건 걱정하지 마. 내가 사람은 잘 굴리거든. 각오해야 할 거야."

지셀이 유쾌하게 웃었다. 바네사도 미소 지었다.

지셀은 몸을 낮추고 쭈그리고 앉아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지셀 용병단에 들어온 걸 환영한다. 바네사."

* * *

바네사는 지셀에게 가르침을 받아 본격적으로 마나 연공법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그는 페르디움의 마나 연공법을 뜯어고쳐 안전하게 마나만 모을 수 있는 방식으로 바꾸어 가르쳐 주었다.

페르디움 백작과 가신들이 알면 기절할 일이었다.

가문의 비전을 멋대로 뜯어고치는 것도, 가문과 아무 관련 없는 자에게 가르치는 것도 귀족들 사이에서는 암묵적으로 금기시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셀은 그런 건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익히고 있는 연공법을 쓸 수 있으면 더 빠를 텐데."

지셀이 쓰는 마나 연공법은 그의 몸에 딱 맞춰 만든 방식이니 누구에게 전수해 줄 수가 없었다.

자신조차도 불안정한 흐름을 제어하기 어려울 정도니 다른 이가 익힌다면 몸이 터져 버릴 것이다.

"곧 전쟁이 일어날 거야. 그때, 네 마법이 정말 중요해."

지셀은 바네사에게도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갑작스럽게 일이 터지면 허둥지둥하다 시기를 놓치기 쉽다.

미리 각오해 두어야 일이 닥쳤을 때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 터였다.

"저, 저는 아직 마법을 제대로 쓰지 못해요."

"괜찮아. 술식은 5서클까지 마스터했잖아?"

"그, 그렇지만 마력이 부족해서...."

바네사는 아직 마력을 얼마 모으지 못했다.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도 시간이 부족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가 모아 둔 마나 양으로는 아주 간단한 마법밖에 시전할 수 없었다.

파악.

바네사의 손바닥 위에서 주먹만 한 빛이 둥둥 떠올랐다.

1서클 마법 '라이트'. 지금은 이 정도가 한계였다.

그녀가 울상을 지으며 지셀을 바라보았다.

고작 이걸로 어떻게 전쟁에 도움이 된단 말인가?

"어, 어떡하죠? 이걸로는 별로 도움이 안 될 거예요...."

"마력이 부족해서 어쩔 수 없어.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열심히 수련이나 하라고."

바네사는 불안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이 언제 일어나나요?"

"아마 빠르면 한 달? 늦어도 두 달 내에 일어나겠지."

마수의 숲에서 나온 지도 벌써 한 달 하고도 보름이 지났다.

적들은 이미 소식을 듣고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을 터였다.

지셀도 그동안 손 놓고 지낸 건 아니었다.

한 달 동안은 룬스톤을 판 돈으로 용병들을 소집했다.

그 뒤 보름은 바네사에게 마나 연공법을 가르치며 보냈다.

시간이 오래 걸리기는 했지만, 전쟁에서 이기려면 꼭 필요한 준비 과정이었다.

* * *

바네사가 스스로 마나를 모을 수 있는 단계에 이르자, 지셀은 그녀에게 할애하던 시간을 줄이고 그동안 밀려 있던 일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길리언, 용병들의 훈련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지?"

"문제없습니다. 이제 어지간한 영지의 병사들보다 훌륭합니다."

길리언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용병들은 개개인의 무력을 높이기보다는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데 중점을 두고 훈련했다.

애초에 기본 실력이 있는 자들을 모은 것이니, 그것만으로도 성과가 금세 나타났다.

지셀은 잠깐 고민하다 길리언에게 명령했다.

"그럼 슬슬 마수의 숲에 데리고 가자."

지셀은 삼백여 명의 용병들을 이끌고 마수의 숲에 다시 들어갔다.

처음 경로를 개척할 때 몬스터의 서식지는 모두 파괴했지만, 빈자리에는 다시 몬스터가 꼬이기 마련이다.

몬스터들이 자리를 잡지 못하도록 주기적으로 주변을 소탕해야 했다.

"이번에는 처음보다 쉬울 테니 걱정들 하지 마라."

숲에 들어가 본 용병들은 편하게 웃었다.

새로 영입된 용병들은 긴장된 표정으로 그들의 뒤를 따랐다.

이미 길을 내고 블러드 퓌톤의 살과 피까지 제대로 확보한 상황.

경로만 벗어나지 않는다면 처음보다는 안전할 터였다.

인원이 늘어난 덕에, 지셀과 용병들은 주변의 떠돌이 몬스터를 쉽게 소탕하고 룬스톤을 다시 잔뜩 가져왔다.

지셀은 남은 룬스톤 양을 헤아려 보다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는 좀 아껴야겠네."

룬스톤도 무한정 나는 자원이 아니다. 아직 많이 남아 있긴 하지만, 두 번이나 대량으로 캐 왔더니 처음보다는 눈에 띌 정도로 줄었다.

지셀은 길리언과 카오르에게 용병들 관리를 맡기고 성으로 돌아왔다.

"좋아, 그럼 이제 나도 수련을 좀 해 볼까."

자신이 조금이라도 강해져야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릴 수 있다.

연무장으로 향하려는 그의 앞에 가신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룬스톤을 또 가져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잔뜩 기대하며 달려 온 것이다.

"대공자님! 룬스톤 좀 주십시오!"

"쓸데가 있습니다."

"좀 달라고! 내놔!"

가신들은 고집스럽게 버텼다. 지셀은 어쩔 수 없이 룬스톤을 아주 약간 떼어 주었다.

이번에도 쓸 계획이 있어 가져온 것이기에 무작정 나눠 줄 수 없었다.

지금은 매일 가서 몬스터와 싸우고 힘을 빼며 캐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가신들은 부족하다며 난리를 쳤지만, 지셀은 콧방귀를 뀌며 그들을 쫓아냈다.

그러고 나서 한동안은 수련에만 몰두했다.

육체 단련, 검술을 비롯한 무기술 수련, 그리고 마나 연공까지 끝내야 하루치 수련이 마무리되는 식이었다.

"몸이 하나라는 게 정말 아쉽군."

수련이 마무리되면 마수의 숲에 도로와 목책을 내는 일이 얼마나 진행되었는지 검토했다.

게다가 바네사의 수련까지 봐줘야 하니 조금의 시간도 허투루 보낼 수가 없었다.

거슬리는 문제가 있었는데 당장 할 일이 많으니 제대로 살펴볼 시간조차 낼 수가 없었다.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군. 왜 이렇게 된 거지?"

블러드 퓌톤과 싸운 이후부터 미세하게 회복력이 좋아졌다.

회복력이 좋아지니 쉬는 시간이 줄어들고, 그만큼 다른 일을 할 여유가 늘었다.

지금처럼 급한 상황에서는 좋은 변화이지만, 체질이 변한 이유를 모른다는 게 영 찝찝했다.

자신이 잘 알지 못하고 통제할 수 없는 힘은 제대로 된 힘이 아니다.

"역시 그것과 관계가 있는 건가?"

몸에 이상이 생길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지셀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예상이 맞는지 확인할 방법이 한 가지 있긴 했지만, 그러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다.

전쟁이 언제 벌어질지 모르는데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

"전쟁이 끝나면 확인해 봐야겠군."

당분간은 기본적인 수련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지셀이 개인 수련에 집중하는 동안, 용병들은 꾸준히 손발을 맞추는 훈련을 지속했다.

지셀도 짬이 날 때마다 길리언을 찾아 훈련 상태를 점검했다.

새로 영입된 용병들은 지금 상황을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했다.

실제로 그들이 하는 일은 훈련을 받는 것, 가끔 숲에서 몬스터를 처리하는 것, 길을 내는 인부들을 지키는 것뿐이었다.

수레가 다닐 수 있게 도로를 정비하고 양옆에 목책을 쌓는 일은 전부 인부들이 한다.

블러드 퓌톤의 피를 뿌려 둔 데다, 지셀이 한 번 더 돌며 몬스터를 소탕한 덕분에 용병들이 나설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이야,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편하네. 훈련만 하다가 가끔 몬스터나 좀 상대하면 되고."

"마수의 숲도 소문만큼 위험하지는 않잖아? 뚫을 때는 고생했다고는 하지만... 정말인지도 모르겠고."

"대우도 전쟁 고용비로 받고 말이지. 으하하핫."

고용비를 많이 주고 비싼 장비들까지 지급하니 용병들의 사기는 매우 높은 편이었다.

하지만 모든 용병이 지셀을 진심으로 따르는 건 아니었다.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는 지셀이 특별히 활약한 일이 없었고, 끈끈한 정이 쌓이기엔 부대낀 시간이 짧았다.

그러나 그들은 함부로 지셀을 무시하지도 못했다.

지셀에게 충성을 바치는 기존 용병들이 그들을 힘으로 휘어잡고 있기 때문이다.

용병들의 수를 늘릴 때부터 지셀은 기존 용병들을 통해 그들을 통제하고 관리할 심산이었다.

돈과 무력, 이 두 가지가 충족되니 거친 용병들을 관리하면서도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 훈련은 정말 열심히 하네. 정말 누가 쳐들어온다는 정보라도 입수한 거 아냐?"

"아서라. 전쟁이 그렇게 쉽나? 영지전 같은 건 준비만 해도 일 년은 걸린다."

"우리 젊은 대장이 전쟁 경험이 없어서 그래. 맘에 안 들면 그냥 쳐들어올 수 있는 줄 아나 봐."

"룬스톤이 있다고 소문나면 군침 삼키는 영주들이 많을 테니 겁먹을 만도 하지."

"그런데 실제로 쳐들어오면 막을 수는 있나? 여기 그렇게 강한 영지 아니잖아?"

"지금은 괜찮아. 소문 다 퍼지고 영주들이 눈독을 들일 때쯤에는 눈치 보고 빠지든지 하자고."

용병들도 지셀과 계약하기 전에, 소문이 퍼지는 시간과 다른 영주들이 전쟁을 준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따져 봤다.

그렇게 바로 쳐들어오지는 못할 거라 여기고 계약한 것이다.

물론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지만, 용병 일을 하려면 이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 했다.

조금 불안하다는 점만 제외하면 그들에게는 상당히 만족스러운 시골 생활이었다.

"아, 진짜 편하다. 항상 이런 일만 있었으면 좋겠네."

"다 좋은데 이 영지는 놀 만한 곳이 없어."

"시골이라 좀 심심하긴 하지. 게임이나 한판 하자."

용병들이 평소처럼 마음 편하게 쉬고 있던 어느 날, 한 용병이 헐레벌떡 달려와 외쳤다.

"크, 큰일이야! 큰일 났어! 큰일 났다고!"

도박을 준비하던 용병들은 달려오는 자를 심드렁하게 쳐다봤다.

이 영지에서 큰일이라고 해 봤자 별거 아니었다.

인부가 공사를 하다가 좀 다치거나, 누가 카오르한테 까불다가 얻어터지거나, 훈련을 게을리해서 길리언한테 까이는 게 전부다.

"뭔데? 누구 다쳤어?"

"또 개기다가 광견인가 걔네한테 맞았냐?"

"아니면 훈련 영감이 또 모이래?"

용병들은 낄낄대며 웃었다.

하지만 달려온 용병의 말을 듣고는 더 이상 웃을 수 없었다.

"전쟁이야! 정말 전쟁이 일어났다고!"

65화 내가 직접 판을 바꾸는 수밖에. (1)

디갈드 백작이 갑자기 페르디움에 선전 포고했다.

사신을 통해 선포문이 날아들자마자 페르디움 가신들이 한자리에 모여들었다.

즈발터는 심각한 눈빛으로 선포문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선전 포고문에는 이 전쟁이 얼마나 정당하며, 디갈드에게 어떤 명분이 있는지 화려한 미사여구로 나열되어 있었다.

미사여구를 쳐 내고 요약하자면 이런 내용이었다.

[내 아들, 길모어 디갈드가 지셀 페르디움에게 살해당했으니 복수하겠다.]

가신들은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명분이란 말인가?

"이자들이 미쳤나 봅니다! 대공자가 길모어를 죽였다니요!"

"전쟁하기로 아예 작정한 겁니다! 룬스톤에 대한 정보를 들은 게 분명합니다!"

"거짓 명분으로 전쟁을 꾀하다니! 단단히 버릇을 고쳐 줘야 합니다!"

가신들은 분노에 치를 떨며 연신 디갈드 백작을 성토하기 바빴다.

아무리 대공자가 사고뭉치라 하더라도 디갈드 공자를 죽였다고 믿는 사람은 없었다.

이미 가신 두 명이 그쪽에 붙어서 가짜 명분을 내세웠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들이 대체 왜 그랬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곧 룬스톤을 떠올리고 모두 수긍했다.

그저 욕심 때문에 일어난 전쟁이라는 것을.

난장판이 된 회의장에서 호메른은 착잡한 눈으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영지를 위해 좋은 일을 했건만 결과가 전쟁이라니.'

호메른도 언젠가는 다른 영주들이 시비를 걸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정치적 관계도 무시하고 이렇게 빨리 일을 벌일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심지어 안중에도 없던 디갈드 백작이.

'쯧, 쓸데없이 병력을 소모하게 생겼네. 가뜩이나 병사 하나가 아쉬운 처지인데.'

호메른이 짜증을 속으로 삼켰다.

다른 가신들도, 어이없는 선전 포고에 분노할 뿐 딱히 겁을 먹지는 않았다.

디갈드는 페르디움만큼 가난하고 별 볼 일 없는 영지이기 때문이다.

북부에서 가난한 영지의 순위를 매기면 페르디움과 디갈드가 1, 2위를 다툴 것이다.

하지만 페르디움은 변경백이고 여러 영지에서 지원을 받는다.

영지 상황은 디갈드와 비슷하지만 병력도, 병사들이 쌓은 실전 경험도 페르디움 쪽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페르디움 기사단장 란돌프가 우렁차게 외쳤다.

"젠장, 싸우자는데 뭐 깊게 생각할 필요 있습니까? 그냥 나가서 갈아 버립시다!"

전쟁해서 좋을 건 없지만 이미 선전 포고를 받은 이상 피할 수는 없었다.

혈육의 원수를 갚겠다는 명분은 그 어떤 것보다 강력했다.

즈발터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전쟁이라니,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그것도 배신자가 나올 줄이야.'

전쟁을 치르게 된 상황보다, 오래도록 함께한 가신이 제 욕심 때문에 페르디움을 배신했다는 점이 훨씬 더 뼈아팠다.

'쯧, 앞으로 더 힘들어지겠군.'

하루하루가 고단한 영지에 전쟁은 그야말로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전쟁에서 승리한다 해도 싸우는 데 드는 비용도 어마어마하고, 사상자가 나오면서 줄어들 전력을 메꾸기도 힘들다.

그것도 페르디움처럼 모든 게 부족한 영지에서라면 더욱더.

'어쩔 수 없이 룬스톤을 거둬야겠구나.'

아들이 찾아낸 것이니 되도록 건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손해를 메꿀 방법이 지셀의 룬스톤밖에 없었다.

즈발터는 위엄있게 선언했다.

"전시 태세로 바꾸고 출전할 준비를 해라. 영지 경계에서 적군을 섬멸할 것이다."

북방에서 고된 전투를 치르며 다져진 즈발터의 스산한 눈빛에 모든 가신이 고개를 숙였다.

북방을 감시해야 해서 일부 병력을 두고 왔지만, 지금 영지에 남아 있는 병력만으로도 디갈드를 상대하기에는 충분했다.

즈발터는 지셀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용병들을 상당히 고용했다고 들었다. 그들 정도면 꽤 도움이 될 터. 너도 대공자로서 참전해라."

전시에 영주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지셀은 고개를 숙이며 백작의 뜻을 받아들였지만 중요한 말도 잊지 않았다.

"우선 적의 병력이 얼마나 되는지 확인하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그럴 생각이다.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전쟁을 걸었는지 확인해야겠다."

서로 붙어 있다 보니 영지 사정도 서로 훤히 알고 있다.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뻔히 아는데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전쟁을 걸어온 건지 즈발터도 궁금했다.

페르디움의 가신들은 자신만만해했지만, 사흘 뒤 병사가 가져온 소식을 듣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무장 병력이 약 6천! 후발대로 출발한 보급부대의 병력은 약 1천입니다! 그 외 공성 병기를 옮기는 수레를 다수 확인했습니다!"

"...."

한 영지에서 준비할 수 있는 병력이 아니었다. 그것도 디갈드같이 가난한 영지라면 더욱더.

란돌프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제대로 본 거 맞아? 대충 둘러보고 그냥 과장해서 말하는 거 아냐? 확실하냐고!"

병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대답을 듣지 않아도, 여기 있는 모두 그 보고가 사실이라는 걸 잘 알았다.

여러 정찰병이 모두 똑같이 말했기 때문이다.

단지 믿고 싶지 않아서 애꿎은 병사를 닦달하는 것뿐이다.

기사가 몇 명인지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저 정도 병력을 이끌고 있다면 기사도 최소 50명 이상일 것이다.

"어, 어떻게 디갈드 백작이 저 정도 병력을 보낸 걸까요?"

"디갈드 영지에서는 징집병을 다 모아도 저 정도 숫자가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전부 무장병이라니!"

"분명히 다른 영지가 몰래 도와주는 겁니다!"

페르디움의 병력은 무장병이 2천. 그마저도 일부는 징집병이었다.

병사를 더 긁어모아도 1천이 한계였다.

게다가 기사 전력은 서른 명도 되지 않는다.

그런데 적은 그 두 배 되는 병력을 끌고 왔으니, 이대로 싸운다면 필패였다.

가신들이 말도 안 된다는 말만 반복하자 즈발터가 성나서 외쳤다.

"그만! 그만! 이미 적군이 오고 있는데 이유를 찾아봐야 무슨 의미가 있나! 대응할 방법을 논의해라!"

이 정도로 병력이 차이 난다면 영지 경계에서 요격하는 건 불가능했다.

전장을 압도하는 초인이라도 있지 않고서야 회전(會戰)으로는 절대 승리할 수 없을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영지의 모든 병력이 전멸할지도 몰랐다.

가장 먼저 란돌프가 호기롭게 외쳤다.

"형님, 저에게 모든 병력을 맡겨 주십시오! 제가 모두 쓸어 버리겠습니다. 어차피 경험도 없는 오합지졸들입니다. 형님과 저 둘이면 충분히 쓸어 버릴 수 있을 겁니다!"

란돌프는 북방에서 오래 지낸 덕분에 전쟁 경험도 많았다.

적은 병사들을 데리고도 더 많은 수의 야만인을 무찌른 적도 있다.

어차피 싸울 거면 맞부딪쳐 싸우자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그러자 호메른이 기겁하며 반론하고 나섰다.

"안 됩니다! 병력 차이가 너무 큽니다. 단 한 번만 패배해도 끝입니다! 성에서 버티면서 다른 영주들에게 지원을 요청해야 합니다!"

두 사람이 상반된 의견을 내자 다른 가신들의 의견도 갈리기 시작했다.

"이왕 버틸 거면 차라리 북방 요새로 후퇴하는 게 어떻습니까? 이 성은 수성하기 좋은 구조가 아닙니다."

"어허, 영지민들과 성을 포기하면 버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수성하기엔 식량이 부족합니다! 지원군이 온다면 충분히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레이폴드가 도와준다면 어렵지 않을 겁니다!"

가신들은 의견을 통일하지 못한 채 싸우고만 있었다.

지셀은 그 모습을 차가운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예상대로다.'

억지 명분을 내세워 전쟁을 걸어올 것도 알았고, 이곳을 짓밟을 만한 병력이 올 것도 알았다.

전생에도 페르디움은 호기롭게 출전했다가 디갈드 군에 패배하고 철군했었다.

예상보다 그들의 병력이 많았기 때문이다.

지셀은 그 병력을 어디에서 지원해 줬는지 짐작하고 있었다.

'공성 병기까지 가져온다는 건, 우리를 확실하게 짓밟겠다는 뜻이겠지.'

영지전은 대부분 야전에서 맞붙는다. 거기서 승패가 갈리면 적당히 합의해서 전쟁을 끝내는 게 정석이었다.

공성 병기를 동원했다는 건 그런 식으로 합의할 생각이 없다고 선언한 거나 다름없었다.

란돌프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화기를 참지 못했다.

"젠장, 어차피 우리는 여기서 오래 못 버텨! 그럴 바에는 나가서 싸우는 게 낫다니까!"

수성을 한다고 버틸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가뜩이나 영지 사정이 좋지 않은 페르디움이다.

문을 닫아걸고 버티기에는 식량이나 수성 무기가 너무나도 부족했다.

"현재 식량 상황으로는 장기전은 절대 무리입니다. 결국 빠르게 결판을 내야 합니다!"

어차피 적은 큰 병력 차를 바탕으로 이곳을 포위할 것이다.

그 상태로 굶고 지쳐 사기가 떨어지면 일말의 가능성조차 사라지는 셈이다.

란돌프는 차라리 그럴 바에는 힘이 넘칠 때 승부를 보는 게 낫다고 주장했다.

눈을 감고 고민하던 즈발터는 갑자기 지셀을 바라보며 물었다.

"너는 어찌했으면 좋겠느냐."

전쟁 경험이 없는 아들이 해결책을 제시할 거라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마수의 숲을 성공적으로 개척한 전적이 있으니 의견 정도는 들어 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지원을 요청하고 성에서 버티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으음?"

즈발터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지셀의 성정에, 병력까지 이끌고 있으니 나가서 싸우자고 할 줄 알았다.

공을 세우고 싶어 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조심스럽지 않은가.

하지만 지셀은 가신들과 다른 이유로 수성을 주장했다.

'지원은 오지 않는다. 온다 해도 로게스 백작 정도.'

전생에서도 케인의 아버지, 로게스 백작을 제외한 그 어느 영지도 페르디움을 도와주지 않았다.

그나마 그 로게스 백작도 결국 페르디움과 같이 망하고 말았다.

즉, 지원을 청해 봐야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지셀은 지원 요청과 수성을 건의했다. 자기 생각대로 판을 짜기 위해서.

'그래야 최소한의 피해로 적을 섬멸할 수 있다.'

한참을 고민하던 즈발터가 결국 가신들에게 명을 내렸다.

"일단 주변 영지에 도움을 요청하라. 최대한 빨리 소식을 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북방 요새에 남아 있는 병력과 물자들도 모두 성으로 옮겨 와라."

"형님! 보름 정도면 적들이 도착할 겁니다!"

란돌프가 큰 소리로 외쳤다.

디갈드는 페르디움 서남쪽에 붙어 있는 영지이다.

보병들이 진군 속도가 느리다는 것을 고려하더라도 보름 정도면 짓쳐들어올 수 있었다.

즈발터가 고개를 끄덕이며 달래듯 말했다.

"아직 어찌하겠다 결정한 건 아니다. 하지만 주변 영지에서 지원해 준다면 조금이라도 피해를 줄일 수 있겠지. 일단 다른 영지의 반응을 보고 결정하겠다."

란돌프는 일단 한발 뒤로 물러났지만, 지원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주변 영지들은 어디까지나 페르디움이 망하지 않는 수준까지만 지원해 줄 뿐이다.

페르디움이 국경의 귀찮은 외적들을 대신 방어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꼭 페르디움일 필요는 없었다.

디갈드가 이곳을 차지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디갈드든 페르디움이든, 아무나 이곳을 맡아 주기만 하면 되니까.

각 영지에 지원 요청을 보내고 답변을 기다리는 며칠 동안, 영지의 분위기는 더욱 암울해졌다.

하지만 기다리고 기다리던 답변이 도착했을 때, 희망을 놓지 않고 있던 가신들조차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레이폴드 백작은 내부 사정 때문에 도와줄 수 없다고 합니다."

"짐바르도 거절 의사를 표명했습니다."

"로게스 백작에게 간 병사는 연락이 끊겼습니다."

"빌럼 영지에서는 영지민들이 반란을...."

이유야 가지각색이었지만 단 한 곳도 지원해 주지 않았다.

그나마 여동생의 남편이라서 믿고 있던 로게스 백작 쪽은 연락마저 끊겼다.

즈발터는 눈을 감고 회한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끝나는가. 누구를 위해 이곳에서 평생을 바쳤단 말인가.'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

아무도 이곳을 원하지 않기에, 외적들만 신경 쓰면 된다고 생각했다.

'설마 룬스톤이 영지를 망하게 할 줄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아들이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지셀은 정말로 훌륭한 일을 해내었다. 그저 상황이 안 좋았을 뿐이다.

'모두 꿈이었구나. 이제 우리에겐 미래가 없다. 가문이 내 대에서 이렇게 끝이 나는가.'

즈발터는 탄식하며 이마를 짚었다. 그의 얼굴은 갑자기 십 년은 늙어 보였다.

백작은 다시 고개를 들어 주변을 바라보았다.

가신들은 다 세상이 끝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호메른과 알버트도 낯빛이 창백해진 채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다.

오직 란돌프만 씩씩거리며 전의를 불태우고 있을 뿐이었다.

즈발터는 절로 헛웃음을 흘렸다.

'저놈이라도 힘이 넘쳐서 다행이군.'

그래, 자신과 란돌프 둘이서 죽을힘을 다해 적을 쳐 죽이면 되지 않겠는가?

백작은 자조적인 웃음을 내뱉다 문득 고개를 돌려 제 아들을 바라보았다.

'너는....'

지셀은 가신들과는 달랐다.

호들갑을 떨지도, 겁을 먹지도, 열을 내지도 않고 있다. 그저 담담하게,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을 뿐이었다.

'너는 참 생각을 알 수가 없구나.'

잠시 지셀을 바라본 즈발터는 안쓰러운 눈빛을 지었다.

'네 잘못이라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너는 잘했다. 아무렴, 잘했고말고.'

즈발터는 영주가 아닌 아버지로서, 아들이 이번 전쟁에 대해 자책하지 않기를 바랐다.

어차피 룬스톤이 발견된 이상 빠르든 늦든 이곳은 영주들의 각축장이 될 것이다.

디갈드는 단지 그 시작일 뿐이다.

'수성이냐, 회전이냐....'

즈발터의 고민이 깊어졌다.

공성에 성공하려면 세 배의 병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성벽을 끼고 싸우니 수성에는 분명한 이점이 있다.

하지만 수성 측에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말라죽기 쉬웠다.

마나를 다루는 기사라면 성벽 정도는 쉽게 뛰어넘을 수 있기도 하고.

'지원만 가능했어도 어떻게든 버텨 봤을 텐데... 너무 북방 요새를 정비하는 데에만 신경을 썼구나. 이렇게 끝나고 마는가.'

적들이 공성 병기까지 동원했다면 페르디움의 취약한 성벽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다른 명분이었다면 항복하는 방안도 고려했을 테지만, 디갈드가 복수를 명분으로 들고 나온 이상 항복해도 모두가 죽는다.

귀족들이 흔히 말하는 '명예로운 항복'마저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어떻게든 승리해야 한다. 나는 죽어도 상관없지만 다른 이들은 살려야 해.'

즈발터는 강렬한 눈빛으로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출전 준비를 하라. 나가서 적을 맞이할 것이다."

란돌프의 말처럼, 버텨 봤자 결국 힘이 빠져 죽을 것이다.

그럴 바에는 조금이라도 힘이 있을 때 나가 싸우는 게 나았다.

가신들은 모두 표정이 어두웠지만, 즈발터의 결정에 공감하는 듯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셀은 그대로 몸을 돌려 대전을 나왔다.

대기하고 있던 용병들이 하나둘씩 모여 그의 뒤를 따랐다.

영주가 결정했으니 가신들은 그 방침을 따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건 지셀이 생각하기에 맞는 방향이 아니었다.

'맞붙어서 싸우면 안 돼. 승리한다 해도 이쪽 피해가 만만치 않을 거야.'

지셀이 표정을 서늘하게 굳혔다.

'내가 직접 판을 바꾸는 수밖에.'

66화 내가 직접 판을 바꾸는 수밖에. (2)

가신들 모두가 전쟁 준비로 바쁘게 움직이는 동안, 란돌프는 어떻게 전술을 짤지 고민하고 있었다.

"역시 답은 돌격뿐이다. 최대한 힘을 실어 중앙의 종심까지 파고든다. 그리고 난장을 피우면 적의 대열이 무너질 거야."

실제로도 페르디움 군은 북방에서 싸우면서 돌격으로 제법 이득을 본 적도 많았다.

"어려울 게 뭐가 있겠어? 나와 형님이 다 때려죽이면 되는 일이잖아! 그렇지, 그러면 될 거야."

즈발터와 란돌프는 상급으로 평가받는 수준 높은 기사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상대방 쪽에도 당연히 강한 기사가 있겠지만 란돌프는 애써 그런 사실을 뇌리에서 지웠다.

어차피 병력이 열세인 페르디움이 취할 수 있는 전술은 많지 않았다. 무조건 돌격, 닥치고 돌격이 진리였다.

전장 지휘는 주로 즈발터가 맡아 왔지만, 이번만큼은 자신의 작전이 채택될 거라고 란돌프는 굳게 믿었다.

"가장 적당한 전장이 어디일까? 이건 형님하고 상의해 봐야겠군. 진형은 그러면...."

란돌프는 진형과 병력의 편제까지 고민하다 문득 지셀이 이끄는 용병들에 생각이 미쳤다.

"그래도 대공자가 용병들을 이끌고 있어서 다행이군."

병사 한 명이라도 아쉬운 처지에 대공자가 거느린 용병들은 상당히 큰 전력이었다.

징집병들은 긁어모아도 수가 얼마 되지 않고, 전투력도 미미하다.

그런 와중에 개인 무력이 강한 용병들이 몇백 명이나 있으니 정말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다.

"아니지, 그 좋은 병력을 아깝게 따로 놀리면 안 된다. 지휘권을 받아서 전부 돌격대에 넣어야지."

전쟁 경험이 없는 애송이 대공자가 고급 병력을 지휘하게 둘 수는 없었다.

대공자는 기사로서 참전시키고 용병들은 모두 총사령관의 휘하에 넣어야 한다.

"그놈이 이번에는 제발 말을 들어야 할 텐데. 정 안 되면 명령 불복종으로 처벌하자고 해야겠다."

란돌프는 바쁜 걸음으로 지셀을 찾아갔다.

아무리 제멋대로 구는 망나니라지만 영지가 풍전등화인데 무조건 고집을 부릴 수만은 없을 것이다.

어떻게든 용병들을 뺏어 와야겠다는 마음에 급히 찾아다녔지만, 지셀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응? 어디에 있지? 주둔지에 있나?"

란돌프는 바로 말을 타고 북쪽 성문을 나섰다.

용병들이 머무는 주둔지에 도착해서 주변을 둘러보다 보니 덜컥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인부들만 이따금 지나다닐 뿐, 용병들은 머리털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주둔지에 남아 있는 병력은 경비대장인 스코반과 그의 부관 리카르도, 그리고 병사 몇 명뿐이었다.

"요, 용병들은? 대공자는 어디에 있느냐?"

"모르겠는데요."

"왜 모르는데!"

"가, 갑자기 오셔서 모두 데리고 가셨습니다."

마수의 숲 경비대장인 스코반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자신도 대공자가 용병들을 이끌고 어디로 갔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으으, 이 새끼, 설마?"

란돌프는 다급하게 성으로 돌아와 벨린다를 찾았다.

"벨린다! 벨린다는 어디 있느냐!"

벨린다는 언제나 지셀 곁에 붙어 다녔다. 분명 그녀라면 지셀의 행방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성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벨린다도, 지셀과 항상 같이 다니는 덩치 큰 놈도, 언제나 건들거리던 놈도 없었다.

그제야 란돌프는 상황을 깨닫고 주저앉아 버렸다.

"이 새끼.... 혼자 살겠다고 도망갔구나! 으아아아! 지셀! 이 개자식아!"

어쩐지, 성격에 안 맞게 수성하자고 얌전히 굴 때부터 불안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영지의 대공자나 되는 놈이 스리슬쩍 도망을 가다니!

아버지와 가신들은 목숨을 걸고 결사 항전을 준비하는데 이 무슨 추태란 말인가!

"이노옴! 내 잡아서 반드시 감옥에 처넣을 테다!"

분노한 란돌프는 남은 놈들이라도 찾아오라고 병사들에게 명을 내린 뒤 즈발터를 찾아갔다.

란돌프는 가신들이 모이자마자 대공자가 도주했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가뜩이나 울적하던 분위기는 더욱더 가라앉게 되었다.

"지셀이... 도망을 갔다고?"

즈발터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네! 아예 자기 패거리들을 다 이끌고 튀었다고요!"

란돌프는 열이 머리끝까지 올라 악을 쓰며 방방 뛰었다.

호메른이 그런 란돌프를 말리며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았다.

"그, 그냥 잠시 정찰을 나간 걸지도 모르지 않나?"

"정찰 나가는데 그 인원을 죄다 이끌고 사라집니까?"

그때 알버트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다급하게 외쳤다.

"루, 룬스톤! 분명 얼마 전에 룬스톤을 또 캐 오지 않았습니까? 그게 있는지 확인합시다! 그게 남아 있다면 도망간 건 아닐 겁니다."

호메른도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지. 도망가는데 돈을 안 가져갈 리가 없지. 어서 확인해라!"

잠시 후, 병사들이 영지에 마련된 지셀의 개인 창고를 확인하고 돌아와 말했다.

"창고가... 비어 있습니다."

모두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믿기지 않는 상황이지만, 그동안의 지셀을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가신 하나가 주저주저하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부터 용병들이 대공자의 창고를 들락날락했습니다. 그 많은 룬스톤을 갑자기 옮기지는 못했을 터. 아무래도... 미리 빼돌린 거 같습니다."

속속들이 다른 증언들도 나왔다.

"밤에 성문 경비를 용병들이 서겠다고 강제로 병사들을 물린 적이 있습니다. 그것도 룬스톤을 빼돌리는 걸 숨기려고 그랬던 거 같습니다."

"대공자가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을 줄이야. 어울리긴 합니다만...."

가신들의 증언이 이어지자 즈발터는 관자놀이를 짚으며 눈을 감았다.

'결국 너는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이었던 것이냐. 멍청한 놈, 명예를 버린다면 그건 살아도 산 게 아닌 것을... 긍지가 조금도 없었다는 말이냐!'

귀족이 달리 왜 귀족이겠는가?

명예를 얻고 혜택을 누렸으면 그만큼 짊어지는 책임도 무거운 법이다.

책임을 지지 않는 귀족은 노예보다도 못하다.

'싸우기도 전에 끝이 나는구나.'

전쟁을 앞두고 대공자가 도망갔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병사들의 사기는 바닥을 칠 것이다.

이길 수 없다고 증언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열세인데, 그런 병사들을 이끌고 어떻게 전쟁에서 이길 수 있겠는가. 누구도 목숨을 걸고 싸우려 하지 않을 것이다.

'더럽게 살아남아서 가문의 명맥은 잇겠구나. 그럴 거면 동생도 같이 데려가지 그랬느냐.'

어차피 명예를 버리고 살아남을 거라면 동생이라도 데리고 도망치면 좋았을 것을.

끝까지 제 몸만 챙기는 이기적인 놈이었다.

즈발터가 이를 갈고 있을 때, 대전의 앞이 소란스러워지며 누군가 끌려 들어왔다.

"놔! 내가 누군 줄 알고 감히!"

끌려온 자는 알포이와 마법사들, 그리고 바네사였다.

그들을 본 란돌프가 이를 갈며 다가갔다.

"옳거니, 급하게 도망가느라 놓고 간 놈들이 있었구나."

"잠깐, 잠깐만 기다리게."

그런 란돌프를 호메른이 다급하게 말렸다.

그 성질대로 주먹부터 갈기면 제대로 대화가 되지 않을 게 뻔했다.

호메른은 알포이에게 다가가 물었다.

"네놈들! 대공자가 어디로 갔는지 아느냐!"

다짜고짜 추궁당하자 알포이도 신경질을 내며 외쳤다.

"아오! 이 망할 놈의 영지는 왜 죄다 이 모양이야! 당신들 내가 누군지 알고 지금 이렇게 함부로 대하는 것이오?"

"네가 누군데? 그냥 용병 나부랭이 아니냐?"

같잖다는 듯 내려다보는 호메른을 노려보며 알포이가 크게 외쳤다.

"나는 바로 북부 제일의...."

거기까지 말하고 아차 싶어서 알포이는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나는...."

비밀을 지켜야 하니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알포이가 몇 번 말을 더듬다 다시 짜증스럽게 외쳤다.

"내가 누구인지는 알 필요 없소!"

즈발터를 비롯한 모든 가신이 경멸 섞인 표정을 지었다.

'쯧쯧, 그놈 주변에는 제대로 된 놈이 정말 하나도 없구나.'

호메른은 고개를 저으며 알포이에게 되물었다.

"우리도 네놈이 누구인지는 관심 없다. 대공자가 어디로 도망갔는지 아느냐?"

"뭐, 뭐요? 그놈이 도망갔다고?"

"그래, 전쟁이 일어나니 겁먹고 도망갔다. 네놈한테 언질을 준 게 있느냐?"

호메른은 별 기대 없이 물었다.

어디로 갈지 알려줄 정도로 중요한 친구였으면 이렇게 두고 갔을 리는 없었다.

알포이는 황당해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영주와 가신들의 표정을 보니 정말로 지셀이 사라진 모양이었다.

'그놈이 도망갔다고? 그렇게 마탑을 뜯어먹고 우리까지 데려와 놓고 도망을 가?'

알포이는 이를 갈며 분노하다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정말 도망간 거 맞아?'

알포이는 세상 물정을 잘 모르지만, 바보는 아니다.

그간 지셀이 한 행동을 보면 그놈은 전쟁에 겁먹고 도망갈 놈이 아니었다.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설치러 나갔다면 모를까.

"하! 당신들은 같은 영지 사람이면서 아직도 그놈을 그렇게 몰라? 그놈은 도망갈 놈이 아니야. 미친 데다가 오늘만 사는 놈이거든!"

알포이가 크게 웃자 가신들은 눈을 찌푸렸다.

페르디움의 가신들은 오래도록 지셀의 한심한 모습을 보아 왔다.

그렇기에 선입견을 품고 지셀을 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알포이는 그렇지 않았다. 종류가 좀 다른 선입견이라면 모를까.

호메른은 맛이 간 놈에게 물어 봤자 소용없다 싶어 바네사에게 다가갔다.

"너도 용병이냐? 내 듣자 하니 대공자가 널 매일 연무장에 데리고 다녔다고 들었다. 상당히 아낀다고."

바네사는 긴장해서 마른침을 삼키다가 허리를 깊게 숙였다.

"영주님과 총관님을 뵙습니다."

예의 바른 태도에 호메른이 살짝 놀랐다.

대공자 주변에 있는 사람 중에 이렇게 정상적인 사람은 처음 봤기 때문이다.

"크흠, 너는 그나마 사람답구나. 그래, 너는 지셀 옆에서 무슨 일을 하느냐."

"저, 저는 공자님의... 하녀입니다."

바네사는 차마 자신이 지셀의 전속 마법사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1서클 마법도 제대로 못 쓰는데 어떻게 전속 마법사라고 이해시킨단 말인가.

그러나 양심에서 나온 대답에 호메른은 눈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성에서 일하는 하녀가 몇인데 또.... 하긴, 대공자 모시고 싶어 하는 애들이 적긴 하지."

"...."

바네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호메른은 다그치듯 물었다.

"그래, 대공자가 너에게는 따로 언질을 준 게 있느냐? 아는 게 있으면 뭐라도 말해 보거라."

"저, 저는...."

지셀이 항상 자신에게 하던 말이 있긴 하다.

― 너는 승리의 열쇠다. 네가 있으니 나는 반드시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다.

"제, 제가 약속된 승리의...."

"뭐?"

바네사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이런 부끄러운 대사를 어떻게 제 입으로 읊는단 말인가!

그래서 다 자르고 말할 수 있는 부분만 말했다.

"공자님은 반드시 이 전쟁에서 승리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승리는 무슨.... 그런 놈이 잽싸게 도망을 간단 말이냐? 그것도 룬스톤을 죄다 들고?"

"공자님은 그런 분이 아니에요!"

"어허! 어디 무엄하게 영주님 앞에서 큰 소리를 내느냐! 에잉, 역시 다 똑같은 놈들이로다."

호메른은 '그러면 그렇지'라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 몸을 돌렸다.

어차피 지셀이 버리고 간 놈들이니 족쳐 봤자 나올 건 없었다.

그때, 알포이의 머릿속에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슬쩍 손을 들며 말했다.

"혹시 그놈...."

하지만 즈발터가 그의 말을 끊었다.

"됐다. 아무것도 모르는 거 같으니 이들은 이만 돌려보내라."

알포이는 혀를 차며 마법사들과 함께 물러났다.

듣기 싫다는데 굳이 알려 줄 의리는 없었다.

바네사는 어쩔 줄 모르고 연신 꾸벅대며 인사하다 돌아섰다.

그들을 보며 즈발터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지셀, 이왕 도망간 거 어떻게든 살아남아라.'

* * *

야트막한 언덕, 빽빽한 나무들 사이로 지셀과 용병들이 대열을 갖추어 서 있었다.

모두 언제든 말을 타고 달려 나갈 수 있게 준비하고 있었다.

긴장한 용병들과 달리 지셀은 제법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벨린다가 그런 지셀에게 걱정스럽게 물었다.

"도련님, 조금이라도 피해를 아끼려면 성에서 다 같이 싸우는 게 낫지 않아요? 위험하지 않겠어요?"

"괜찮아. 고작 보급 부대야. 저걸 먼저 끊어 놔야 해. 그래야 성에서 버틸 수 있어."

"그래도 수가 우리 쪽의 두 배가 넘는데... 대비하고 있으면 큰일 나잖아요."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저놈들, 자기들 쪽 전력이 압도적이니 설마 이쪽에서 덤빌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할걸?"

기습을 막는 데 가장 중요한 건, 혹시나 기습당할 가능성이 있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셀은 적들이 그러지 못할 거라 확신했다.

"아마 우리가 성에 틀어박혀 있는 줄 알고 있을 거야. 벌벌 떨고 있다면서 우습게 보겠지."

"으음, 그건 그렇지만...."

"기습이 실패하면 가뜩이나 적은 병력이 더 줄어들 테니 섣불리 시도하지 못할 거라고 확신하고 있을걸."

"그건 맞는 말 아니에요? 실패하면 어떻게 해요."

"실패하지 않아. 기습은 이럴 때야말로 통하는 거니까. 우리를 우습게 보고 있을 때."

벨린다는 사실 기습이 실패해도 상관없었다.

그녀는 그저 전쟁을 처음 겪는 지셀이 괜히 다칠까 봐 걱정할 뿐이었다.

지셀은 서늘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애초에 본대는 보급 부대를 아예 신경 쓰지 않고 있을 거야. 없어지든 말든."

"네? 어째서요?"

"우리를 빨리 없앨 생각만 하고 있을 테니까. 공성 병기도 가져왔잖아. 아마 보급 부대는 디갈드의 오합지졸들로 대충 구색만 맞춰 놨을 거야. 기습 따위 대비할 리가 없지."

애초에 6천 명은 디갈드가 마련할 수 있는 병력 수준이 아니었다.

필시 병력을 지원받았을 테고, 그 병력은 본대에 몰려 있을 터.

그러니 보급 부대는 디갈드의 병력으로 운용할 수밖에 없을 거다.

"어쨌든 시간 맞춰 잘 왔네."

저 멀리 디갈드의 후속 보급 부대가 숙영지를 꾸리는 모습이 보였다.

지셀은 용병들을 이끌고 페르디움 외곽을 크게 우회해 하루 동안 쉬지 않고 달려왔다.

그러다 디갈드의 보급 부대를 발견한 뒤로는 천천히 거리를 줄였다.

매복을 우선하느라 거리는 좀 벌어졌지만, 말을 달리면 금방 따라잡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밤이 깊어지고 적들의 진지에는 횃불들만이 일렁였다.

병사가 천 명이 넘다 보니 막사와 횃불의 수도 만만치 않았다.

적당한 시간이 됐다고 확신한 지셀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달마저 구름에 가려 하늘에는 빛 한 줄기 보이지 않았다.

"거, 사람 죽이기 딱 좋은 날씨네."

지셀의 말에 용병들이 소리 없이 웃기 시작했다.

간혹 지셀은 이렇게 여유와 묘한 자신감을 내보이곤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용병들도 다소 긴장을 풀었다.

"슬슬 시작하지."

벨린다가 지셀의 손에 붕대를 꽉 감아 주며 신신당부했다.

"정말 조심하셔야 해요. 위험하면 뒤로 빠지시고요."

"그래, 걱정하지 마."

붕대 감긴 양손을 몇 번 쥐었다 폈다 한 지셀은 오른손을 옆으로 슥 내밀었다.

길리언이 커다란 전투용 양날 도끼를 건네주었다.

"묵직하니 좋군."

한 손에 양날 도끼를 든 지셀이 남은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준비해라."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갑옷으로 중무장한 용병들이 말에 올라타 창을 들어 올렸다.

푸르륵!

말들도 전투가 가까워졌음을 느꼈는지 조금씩 투레질하며 발을 굴렀다.

지셀이 입을 열었다.

"포로는 필요 없다."

그는 손을 앞으로 천천히 뻗었다. 수려한 얼굴에 잔혹한 미소가 떠올랐다.

"모두 죽여라."

67화 내가 직접 판을 바꾸는 수밖에. (3)

디갈드의 가신이자 보급 부대의 지휘관인 파브로 남작은 잠도 못 자고 천막 안을 서성거렸다.

전략이나 부대 정비 따위를 고민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기분이 너무 좋아 잠들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흐흐, 드디어 나도 봉토를 받는구나."

파브로는 자기 영지가 없었다.

그가 섬기는 디갈드의 땅도 작고 보잘것없는 수준이니, 그 가신인 파브로가 봉토를 받을 기회가 있었을 리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이번 일만 잘 풀리면 페르디움의 영토 일부를 받을 수 있었다.

"데스몬드 쪽에 붙기를 잘했어.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이었지."

파브로는 데스몬드로부터 뇌물을 받고 언제나 그쪽을 대변하는 의견을 냈다.

파브로뿐만 아니라 디갈드의 가신들 대부분이 그랬다. 영지를 그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후훗, 이번에는 나도 이름을 좀 알릴 수 있겠지?"

보급 부대이긴 하지만 전쟁에 참여했으니 조금이나마 명성도 얻을 것이다.

사교계에서는 전쟁에 참여한 것만으로도 주목받는 법이니까.

게다가 자신은 후방 부대이니 위험할 일도 전혀 없었다. 본대에 물자만 지원하면 된다.

안전한 데서 이득만 볼 수 있다니, 이런 꿀 같은 전쟁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나저나 데스몬드 백작에게 이렇게 병사가 많을 줄이야. 이 정도면 레이폴드보다 강한 거 아니야?"

디갈드 영지의 징집병과 용병이라고 꾸미기는 했지만, 도저히 모를 수가 없는 규모였다.

데스몬드는 중소 영지 몇 개는 모여야 나올 병력을 지원으로 보내 주었다.

본대가 워낙 크다 보니 디갈드의 병사들로는 후발 보급 부대를 꾸리기에도 아슬아슬했다.

"어휴, 페르디움은 이제 끝이네. 끝이야."

수준이 비슷해야 치고받기라도 하지, 이 정도면 페르디움을 압살하고도 남을 것이다.

하물며 공성 병기까지 있으니, 아마 페르디움은 하루도 버티지 못하리라.

지고 싶어도 질 수가 없는 전쟁.

그래서 파브로는 요새 매일같이 기분이 좋았다.

드드드드.

"응? 이게 무슨 소리지?"

행복한 꿈에 젖어 있던 파브로는 묘한 진동을 느끼고 정신을 차렸다.

막사 밖으로 나가니, 몇몇 기사들이 의아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게 보였다.

"어이, 무슨 일인가?"

파브로가 묻자 기사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모르겠습니다. 지진인지...."

이들은 적의 기습일 수도 있다는 조그만 가능성조차 떠올리지 못했다.

가뜩이나 병력이 적은 페르디움이 별동대까지 마련해 공격할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한 것이다.

앞서가고 있는 본대에서도 별다른 소식이 없었으니까.

드드드드.

잠깐 사이에 진동은 더욱 강해졌다.

파브로는 턱을 긁으며 고민에 빠졌다.

"뭘까? 어디 소 떼라도 우르르 지나가는 건가?"

소 떼라는 말을 떠올리자마자, 파브로는 이 진동이 말발굽 소리와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에이, 설마."

그는 제 허무맹랑한 상상에 피식 웃었다.

횃불을 켜 두긴 했지만, 구름이 많이 낀 탓에 시야가 어두워 멀리 볼 수가 없었다.

그저 소리만 듣고 판단해야 하니 상황을 파악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드드드드드!

그들이 소리의 정체를 알아차린 건 지셀의 군대가 완전히 가까워지고 난 뒤였다.

"기상! 기상! 기습이다! 기습! 움직여라!"

그나마 빠르게 반응한 기사들이 외쳤다.

정작 지휘관인 파브로는 그때까지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만 짓고 있었다.

"기습이라고? 대체 어떻게? 왜?"

두두두두두!

"으허허헛!"

적이 코앞에 다가오고 나서야 파브로는 정신을 차렸다.

그는 다급하게 소리를 지르며 뒤로 도망갔다.

"적이다! 적! 모두 나와서 막아!"

그 와중에도 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적은 많아 봤자 몇백 명 수준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빨리 본대를 우회해서 올 수 있을 리가 없다.

비록 보급 부대이긴 하지만, 이쪽은 병력이 천 명이나 되었다. 이런 기습 정도는 막아 내고도 남는다.

"빨리 움직여라! 빨리! 충분히 막을 수 있어! 우리가 더 많아!"

병사들이 천막에서 다급하게 무기를 들고나왔다.

몇몇은 장비도 미처 챙기지 못했고, 전열은 엉망이었다.

모두가 황망하게 움직이는 그때.

콰아아아앙!

지셀의 군대가 어둠 속에서 튀어나왔다.

"으아아아악!"

외곽에 있던 병사들이 순식간에 쓸려 나갔다.

곳곳에 세워 둔 횃불들이 튕겨 나간 시체에 부딪혀 넘어졌다.

곧 화염이 주변을 감싸기 시작했다. 혼란에 빠진 병사들은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디갈드의 기사 몇 명이 다급하게 병사들을 지휘했다.

"모여라! 모여서 진을 형성해라!"

하지만 전열을 가다듬는 것은 불가능했다.

적은 뛰어난 기동력을 바탕으로 일렬로 길게 늘어서서 진로를 막는 것들을 그대로 박살 내 버렸다.

어찌나 강하게 짓쳐 들었는지 아예 천막을 찢어발기며 뚫고 지나간 용병도 있었다.

두두두두!

디갈드의 기사가 가장 선두에서 달려오는 지셀을 발견하고 검을 뽑았다.

남들과는 다른 복장, 누구보다 앞서는 기마술.

기사는 눈앞에 있는 자가 적들의 지휘관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놈을 죽이면 된다!'

단숨에 말과 함께 베어 버리겠다는 생각으로 검을 들어 올렸을 때였다.

두두두두!

곳곳에 번진 화염 탓에 다가오는 자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역광을 받아 윤곽만 겨우 보이는 그림자 속에서, 기사는 보고야 말았다.

무시무시하게 붉게 타오르는 상대방의 두 눈을.

그 안에 담긴 알 수 없는 증오와 끝없는 분노를 느낀 순간, 기사는 몸이 굳어 버리고 말았다.

"으아아아아!"

기사는 마나를 잔뜩 끌어올리며 애써 공포를 떨쳐 내고 힘껏 앞으로 달려 나갔다.

"죽어라아!"

지셀은 살짝 옆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온 힘을 담아 아래에서 위로 도끼를 강하게 휘둘렀다.

콰지지직!

단 일격에, 다가오던 기사는 사타구니부터 머리까지 반으로 갈라져 쓰러졌다.

지셀을 뒤따르던 용병들이 환호를 내지르며 휘파람을 불었다.

콰직! 콰직!

지셀의 앞에 선 병사들은 모두 도끼에 머리가 찍혀 박살이 나거나 목이 날아갔다.

벨린다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직접 사람을 죽이는 것은 처음일 텐데, 동요를 감추고 있는 건 아닐지 걱정이 되었다.

한편, 그대로 숙영지의 반대 끝까지 순식간에 도착한 지셀이 바로 말 머리를 돌리며 말했다.

"마저 쓸어라."

무미건조한 명령에 용병들이 다시 방향을 틀어 적들에게 달려들었다.

몇 안 되는 기사들을 잃은 디갈드의 병력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렸다.

기마병을 막기 위한 구덩이도, 장애물도 없었던 탓이다.

기습당하기 쉬운 장소와 시기를 파악해 대비하는 것도 지휘관의 역량이었다. 그리고 파브로는 그리 좋은 지휘관이 아니었다.

"길리언과 카오르는 남은 기사들을 상대해라."

두두두두!

용병들은 두 패로 나누어져 적들을 빙 둘러쌌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게 마치 숙련된 기마병단 같았다.

"훈련이 잘되었군."

지셀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에도 가장 즐겨 쓰던, 기동력을 이용한 기습과 돌격.

지셀은 바로 이 충격 전술을 위해 돈을 털어 용병들에게 장비와 군마들을 맞춰 주었다.

용병왕 개인의 무력은 대륙 7강의 일곱 번째로 평가받았지만, 전쟁 수행 능력은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갔었다.

그는 학살자인 동시에 전장의 왕이었다.

디갈드의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막아야 해! 방패, 방패 어디 있어!"

"모여! 모이라고!"

장비도 없이 급하게 나온 그들이 작정하고 공격해 오는 용병들을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보병은 진형을 갖추지 못하면 아무리 수가 많아도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할 수 없다. 게다가 이런 난전 속에서는 지휘가 통할 리 없었다.

다시 한번 시작된 학살.

디갈드의 병사들은 하나둘씩 무기를 버리고 몸을 피하기 시작했다.

"한 놈도 놓치지 마라!"

지셀의 명령에 따라, 용병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병사들을 쫓아갔다.

말을 탄 그들에게 겁을 먹고 도망가는 병사들은 쉬운 사냥감이었다.

몇몇 상대 기사가 분전했으나 길리언과 카오르에게 잡혀 하나씩 죽어 갔다.

보급 부대라 기사도 몇 명 없었던 탓에 적들은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크하하핫! 이거 진짜 기분 째지잖아!"

특히 카오르와 광견단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날뛰었다.

마수의 숲에서는 몬스터들이 워낙 많고 위험해 그들도 버티기에 바빴다.

하지만 상대가 인간이라면 자신들의 광기를 마음껏 터뜨릴 수 있었다.

몇몇은 아예 말에서 내려 가까이 있는 병사들에게 달려들었다.

"으하하핫! 죽어! 죽어!"

"너무 약하잖아! 벌레 같은 새끼들아!"

몇몇 디갈드의 병사들이 뭉쳐서 대항했지만 이미 기울어진 전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지셀은 쉬지 않고 전장을 돌아다녔다.

조금이라도 적이 많이 모이거나 용병들이 위험해 보이면, 어김없이 달려가 도끼로 적의 머리를 쪼개 버렸다.

천 명이 넘는 디갈드의 병사들은 그렇게 허무하게 쓸려 나갔다.

"끝났군."

벨린다는 당연하다는 듯 중얼거리는 지셀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뭐지? 분명 전쟁은 처음일 텐데?'

몬스터를 죽이는 것과 인간을 죽이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누구라도 전쟁을 처음 겪으면 제정신을 유지하기가 힘들다.

그런데 그녀의 걱정은 기우일 뿐이었다.

'왜 이렇게 담담한 건데!'

지셀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처럼 적들을 처치했다.

이 정도면 타고난 전쟁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담담한 게 아니야.'

전장을 휩쓰는 지셀은 마치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억지로 삼키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지셀이 디갈드에 저렇게 큰 원한을 품을 만한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녀가 의아해하는 동안 적들의 비명 소리가 잦아들었다.

이 싸움이 끝나 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잠시 후, 길리언이 누군가를 질질 끌고 와 지셀의 앞에 던져 놓았다.

"이놈이 지휘관인 거 같습니다."

파브로는 덜덜 떨며 지셀을 올려다보았다.

아무리 디갈드의 병사들이 훈련도 제대로 받지 않아 약하다 하지만, 천 명이 넘는 병력이 순식간에 전멸했다.

"으으, 사, 살려 주시오."

파브로는 병사들의 수만 믿고 있다가 도망갈 시기를 놓쳐 버렸다.

뒤늦게 어찌어찌 몸을 빼긴 했는데 뒤따라온 길리언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이렇게 억울하게 죽을 수는 없었다.

'어차피 본대는 승리할 것이다.'

어떻게든 목숨만 붙어 있으면 풀려날 수 있었다.

보통 전쟁에서 귀족을 사로잡으면 죽이기보다는 포로로 삼는다.

그의 주군이나 가족에게 몸값을 받아 내는 쪽이 이득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파브로도 마음 놓고 항복할 수 있었다.

"살려 주시오! 디갈드 백작이 분명 몸값을 줄 것이오! 항복하겠소! 항복! 항복!"

지셀은 말없이 파브로의 얼굴을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지셀과 눈이 마주친 순간, 정신없이 애원하던 파브로는 숨이 막힐 듯한 공포에 입을 꾹 다물었다.

차가운 뱀과 같은 눈빛,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표정.

번들거리는 포식자의 눈이 자신을 관찰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을 먹을지 말지 고민하는 것처럼.

"이름."

"파, 파브로 남작이오. 그, 그대는 누구요?"

"지셀 페르디움."

"지셀...? 페르디움의 대공자?"

파브로는 입을 쩍 벌렸다.

지셀의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다. 디갈드의 후계자였던 길모어와 더불어 북부에서 쌍벽을 이루는 망나니 아니던가?

그런 자가 이런 식으로 대담하게 기습해서 천 명이나 되는 병사들을 학살했다고?

차라리 페르디움 백작의 정체가 드래곤이라는 말이 더 신빙성이 있었다.

하지만 본인 앞에서 지셀 페르디움을 망나니라 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파브로는 내색하지 않고 냉큼 고개를 숙였다.

"대공자, 항복을 받아 주시오. 그대에게도 나쁜 일이 아닐 터. 큰 몸값을 받을 수 있을 것이오."

하지만 지셀은 엉뚱한 대답을 건넸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안 나."

"그, 그게 무슨 말이오?"

"네가 기억에도 남지 않을 정도로 매우 하찮은 놈이라는 뜻이다. 뭐, 어느 쪽이든 결과는 똑같을 테지만."

지셀은 한 손으로 파브로의 머리카락을 휘어잡아 끌어올린 뒤, 다른 손으로 도끼를 들어 올렸다.

"아아악! 살려 주시오! 몸값, 몸값을 후하게 내겠단 말이오!"

"나는 네놈들과 거래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게 무슨 소리요! 나는 귀족이란 말이오! 귀족답게 관례를 지켜 주시오!"

"전장에 관례가 어딨어."

지셀이 우습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표정에는 웃음기 하나 없었다.

"그래, 너희들한테 받을 게 하나 있긴 하지."

무심한 목소리와 함께 도끼가 떨어져 내렸다.

콰직!

"목숨."

* * *

철컥, 철컥!

지셀은 성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갑옷을 입은 용병들이 시끄럽게 낄낄대며 그를 뒤따랐다.

성안의 사람들은 모두 지셀을 보자마자 고개를 숙이고 옆으로 몸을 피했다.

지셀의 걸음걸음마다 그린 듯한 핏자국이 남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쓴 핏물이 바닥까지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지셀은 얼굴도 닦지 않았다.

더욱 공포스러운 것은 지셀의 두 눈이었다.

평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무심한 눈동자.

차라리 살기로 번들거렸다면 덜 무서웠을 것이다.

예전의 지셀이 얽히기 싫은 난감한 골칫덩이였다면, 지금은 얽히면 안 될 것 같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쿠웅!

지셀은 대전 문을 열고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회의하고 있던 즈발터와 가신들은 갑자기 나타난 지셀을 보고 놀라 입을 떡 벌렸다.

도망간 줄 알았던 대공자가 다시 나타났다.

그것도 어디서 싸우고 왔는지 피에 범벅이 된 채 말이다.

"너, 너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온 것이냐?"

즈발터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지셀은 대답 없이 고개만 숙여 인사한 후 들고 온 상자를 탁자 위에 텅 얹었다.

피범벅이 된 상자를 보고 가신들이 숨을 들이켰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때 지셀의 목소리가 대전에 울렸다.

"보급 부대는 전멸시켰습니다. 이제 농성을 시작하시죠."

68화 내가 직접 판을 바꾸는 수밖에. (4)

즈발터는 자신의 앞에 놓인 지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도 어떻게 진형을 짜 승부를 걸지 고민하는 중이었다.

상대의 보급 부대가 전멸했다면 선택지가 더 많아진다.

하지만 그 전에 무슨 일인지 제대로 확인해야 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설명해 보아라."

다른 가신들도 아무런 말을 못 한 채 피에 절은 지셀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지셀은 대전을 한번 둘러보고 담담하게 상황을 보고했다.

"...그래서 기습으로 적군을 전멸시키고 보급품은 모두 불태웠습니다. 조금 아깝긴 하지만, 들고 오긴 힘들었습니다. 아, 이건 보급 부대 지휘관인 파브로 남작의 목입니다. 아시는 분?"

호메른이 상자를 열어 안에 담긴 목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떠듬거리며 말했다.

"마, 맞습니다. 디갈드의 파브로 남작입니다. 예전에 몇 번 본 적이 있습니다."

가신들은 모두 탄성을 내뱉었다. 오직 란돌프만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눈만 끔뻑이고 있었다.

지셀을 만나면 당장 후려치려고 했는데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전장에서 한평생을 보낸 그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평소 까불거리던 대공자가 아니다. 저건 인간 백정이나 풍기는 분위기야. 어째서 저놈이 저렇게....'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영지에서만 지내 전쟁이라고는 겪어 본 적 없는 대공자가 저런 모습을 보인다는 게.

즈발터는 란돌프와 다른 의미로 놀랐다.

"기습이라니... 어찌 그리 조심성 없이 움직였다는 말이냐."

타박하고는 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화보다 놀라운 마음이 더 많이 담겨 있었다.

기습은 일단 성공하면 적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있는 전략이다.

하지만 실패하면 전멸할 가능성도 큰, 양날의 검이었다.

그래서 날씨, 장소, 지형, 시기, 적장의 성향 등 수많은 조건을 신중하게 검토한 이후에나 쓰는 전술이었다.

그런데 영주의 허락도 없이 병력을 이끌고 나가서 기습을 시도했다니.

미친놈이나 할 법한 일이지만, 지셀은 망설임도 없이 병력을 끌고 나가 기습을 했고 심지어 성공했다.

"어차피 우리가 쓸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습니다."

지셀이 덤덤하게 답했다. 즈발터가 답답한 심정을 담아 외쳤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와 상의해야 할 게 아니냐! 제대로 전력을 꾸리고 준비한 뒤에 나갔어야지! 만약 실패했으면 너와 용병들은 모두 죽었을 것이다! 지금은 한 줌의 전력도 아쉬운 상황이란 걸 모른다는 말이냐!"

"그랬다면 실패했을지도 모릅니다."

"뭐?"

"이미 배신자가 나와 디갈드에 전쟁 명분까지 만들어 준 상황입니다. 배신자가 또 없다고 어떻게 장담하겠습니까?"

"네놈, 지금 그게 무슨 말이냐!"

즈발터가 노기를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페르디움에 남은 가신들과 기사는 목숨을 걸고 싸우려는 자들이다.

그들 중에 배신자가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은 위험한 발언이었다.

충성심을 의심해서야 어찌 그들이 목숨을 걸고 따르겠는가.

하지만 지셀은 무표정하게 답했다.

"아버지 옆에 정말 그런 사람이 없다고 장담하실 수 있습니까?"

"뭐, 뭣?"

"저는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제가 믿는 건 오직 저뿐입니다."

피범벅이 된 채 단호하게 말하는 아들을 보고 즈발터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가신들도 반박하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가신 중에서 배신자가 나온 건 사실이기 때문이다.

지금 대공자의 모습은 마치 터지기 직전의 화산과도 같았다.

그 분위기에 압도되어 모두가 입도 뻥긋 못하고 있었다.

서늘한 눈빛으로 모두를 둘러본 지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는 여기서 성을 지킵니다. 이제 누구도 성 밖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나가시려면 제 검을 마주하게 될 겁니다."

과격하고 독단적인 선언에 란돌프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일어섰다.

무어라 외치려는 그를 즈발터가 손을 뻗어 제지했다.

"좋다, 어쨌든 성공했으니 기습 건은 넘어가겠다. 그러면 농성하자는 이유는 무엇이냐."

"적은 대군입니다. 이 작은 영지전에도 보급 부대를 따로 이끌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보급 부대가 전멸한 이상 그들은 오래 부대를 유지할 수 없을 겁니다."

"...."

"그사이 로게스 백작에게 다시 지원을 요청하십시오. 지원이 온 뒤 성문을 열고 나가 협공하면 됩니다."

"지원이 늦거나 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셈이냐?"

"설사 지원이 오지 않더라도 적은 우리보다 오래 버틸 수 없습니다. 적이 철군하고 다시 쳐들어올 준비를 하는 사이에 우리도 방법을 찾으면 됩니다."

적의 본대도 물자를 어느 정도 챙겨 오긴 했겠지만, 그 정도 대군을 먹여야 하니 고작해야 며칠밖에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동안 페르디움이 버틸 수 있느냐가 문제였다.

대군에 공성 병기까지 이끌고 왔으니 요새가 아닌 페르디움 성에서는 오래 버티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최소한 일주일은 버텨야 한다."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단기전보다는 그게 더 승리할 확률이 높을 테니까요."

"으음...."

지셀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회전으로 승부를 보다가 패하면 그대로 끝이지만, 성벽을 끼고 버틸 수만 있다면 이길 가능성이 커진다.

수성 측이 장기전에 불리한 건 포위당해 보급로가 차단당하기 때문인데, 공성 측도 보급 문제에 직면했으니까.

고민하던 즈발터는 란돌프를 돌아보았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크흠, 전 모르겠습니다."

충분히 일리 있는 의견이었지만, 독단적으로 구는 지셀에게 감정이 상한 란돌프는 긍정적인 대답을 내지 못했다.

반면 처음부터 수성을 고집했던 호메른은 지셀의 의견에 냉큼 찬성표를 던졌다.

"이번만큼은 대공자의 말이 맞는 거 같습니다. 로게스에 다시 지원을 요청하고 버티는 게 나을 거 같습니다."

다른 가신들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서로 보급이 끊긴 건 마찬가지입니다."

"6천 명을 먹일 물자를 바로 준비할 수는 없습니다. 버티는 건 우리가 유리합니다."

"대공자가 큰일을 해냈군요. 이건 기회입니다!"

살아남을 확률이 더 높다면 지셀의 의견에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언제나 눈엣가시 같던 대공자지만 이번만큼은 지셀이 제멋대로 군 덕에 일이 잘 풀렸다.

호메른도, 알버트도, 다른 가신들도 지셀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러나 란돌프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으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공을 세운 건 분명하나.... 너무 위험하구나. 자칫 잘못하면 살인귀가 되겠어.'

평생을 전장에서 살아온 란돌프는 대공자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다.

가신들의 의견을 들은 즈발터가 고심에 빠지자 지셀이 다시 말했다.

"다른 방법도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지금이라도 영지민들을 버리고 북방 요새로 후퇴하는 겁니다."

"이놈! 그게 귀족이 할 말이란 말이냐!"

즈발터가 지셀에게 삿대질하며 소리를 질렀다.

가신들도 인상을 찌푸리며 경멸하는 눈빛을 보였다.

"성이 점령당하면 영지민들은 노예처럼 살다가 죄다 죽을 것이다! 그걸 모른단 말이냐!"

북부 요새로 넘어가 수성에 성공하더라도, 영지민들이 짓밟힌다면 페르디움을 다시 안정화하는 데 수십 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셀은 냉정한 눈으로 백작을 마주 보았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남을 확률은 그쪽이 더 높다는 걸, 아버지도 알고 계실 겁니다."

"...."

즈발터는 말없이 지셀을 노려보았다.

그 정적을 깬 사람은 다름 아닌 호메른이었다.

"그만! 그만 멈추십시오! 우리끼리 싸울 시간이 없습니다. 영주님, 대공자의 말투가 과격하긴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닙니다. 어서 결정하셔야 합니다!"

즈발터는 지셀이 꼴도 보기 싫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았다.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호메른의 말대로 빨리 결정해야 했다.

'확률은 낮지만... 거기에라도 거는 게 낫겠지.'

본래도 영지민을 버리고 도망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이길 가능성이 작아 고민했을 뿐이다.

그 와중에 지셀이 활로를 찾아왔으니 답은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즈발터는 크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좋다, 성에서 맞서 싸우겠다. 새로 병력을 편제하고 배치할 준비를 해라. 그리고 로게스 백작에게 소식을 전할 경로도 다시 검토하라."

영주의 명에 모든 가신이 고개를 숙였다.

조금이나마 희망이 생겼으니 이제는 최선을 다해 막아 내야 한다.

그때 란돌프가 나서며 말했다.

"잠깐! 대공자가 모아 둔 용병들은 그대로 두실 겁니까? 영지의 병력에 편입시키는 게 어떻습니까?"

모두의 시선이 다시 지셀에게 향했다.

즈발터는 차갑게 말했다.

"네놈은 그럴 생각이 없겠지."

"저는 따로 움직이겠습니다."

"한 번이라도 말을 들을 생각은 없느냐?"

"죄송합니다."

지셀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란돌프는 인상을 찌푸렸다. 어떻게든 강제로 뺏고 싶었지만, 대공자가 먼저 나서서 공을 세우고 온 탓에 병력을 빼앗을 명분도 없어져 버렸다.

즈발터는 화를 억누르며 말했다.

"작전 지휘는 따라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다만...."

"무엇이냐."

"성문 쪽은 제가 막게 해 주십시오."

"성문을?"

"그렇습니다."

즈발터는 눈을 가늘게 뜨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제 병력은 아끼겠다는 건가? 무슨 생각인 거지?'

공성이 시작된 직후에는 성벽 쪽이 가장 위험하다.

언제 투석기에 맞을지 모르고, 성벽에 붙은 공성탑에서 쏟아져 나오는 병력도 막아야 한다.

하지만 일단 성문이 뚫리고 나면 그때부터는 성문 쪽이 가장 치열한 전장이 된다.

"이유가 무엇이냐? 설마 성벽 쪽에 서는 게 무서워서 그런 거냐?"

"성문 쪽에서 대기하다가 위험한 쪽으로 지원을 나갈 생각입니다."

"지원이라...."

"아무래도 용병들이다 보니 훈련이 부족합니다. 그런 식으로 부족한 곳을 채우는 게 나을 거 같습니다."

일리 있는 말이었기에 즈발터는 찝찝해하면서도 수락했다.

어차피 허락하지 않는다고 얌전히 따를 녀석도 아니고.

"그렇게 하도록 해라. 단, 전쟁이 끝나면 독단적으로 행동한 것에 대해 책임을 물을 것이다."

"그렇게 하십시오."

지셀은 볼일이 끝났다는 듯 훌쩍 몸을 돌렸다.

알버트가 그를 급하게 붙잡았다.

"잠깐만요! 새로 가져온 룬스톤은 어디로 옮기셨습니까?"

"이미 다 썼습니다."

"네? 그 많은 걸 벌써요? 도대체 어디에?"

"필요한 데 썼으니 걱정하지 마시죠."

지셀은 더 설명하지 않고 대전을 나섰다.

'이제 준비는 거의 다 끝났다.'

하나둘 그의 생각대로 판이 짜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모든 걸 솔직하게 밝히지는 않았다.

'로게스 백작은 지원을 보내지 못할 것이다.'

다른 영지에서는 거절이더라도 답변이 왔는데, 로게스 영지와는 아예 연락이 끊겼다.

이미 그쪽으로 가는 길목이 모두 차단됐다는 뜻이다.

'역시 그놈답군.'

디갈드의 이름을 내걸고 온 병사들을 보고 확신했다.

저 정도로 많은 병력을 지원해 줄 수 있는 대영주는 이 북부에 단 둘뿐이었다.

하나는 레이폴드 백작. 그리고 다른 하나는....

'북부군 총사령관, 해럴드 데스몬드 공작.'

루타니아 왕국은 후에 대륙을 휩쓴 전란에 맞서 군 조직을 개편한다.

북부의 영주들은 모두 해럴드의 봉신이 되고 해럴드 데스몬드는 공작 작위를 새로 받았었다.

'역시 네놈이 북부를 담당하고 있었구나.'

지셀은 전생에서 해럴드를 만난 적이 있었다.

고지식하긴 하지만 제법 전략에 밝고 무력도 쓸 만한 놈이었다.

아멜리아는 지셀에게 당한 뒤 남은 세력을 모아 유격전을 펼쳤지만, 해럴드는 힘과 힘으로 대놓고 맞붙은 사이다.

'그놈이 끼어들었으니 아마 버티기 힘들 테지.'

페르디움 백작과 그 가신들은 지셀이 건넨 희망만 믿고 싸우기를 선택했다.

하지만 정작 그 의견을 낸 지셀은 수성이 가능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에 데스몬드는 공성까지 염두에 두고 저런 대규모 병력과 장비를 보냈을 테니까.

'이게 최선이다.'

지셀은 적군과 직접 맞붙어도 쉽게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마법사 여섯 명이 기습적으로 공격한다면 적지 않은 피해를 줄 수 있을 터였다.

적들은 이곳에 마법사가 있는 줄 모르고 있으니까.

거기에 자신이 돌격대를 이끌고 측면으로 치고 들어간다면 적의 진형을 붕괴시킬 수 있을 것이다.

충분히 작전을 짜고 아군과 유기적으로 움직인다면 회전을 벌여도 승산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승산이 있다는 정도로는 부족해.'

맞붙으면 아군의 피해는 커질 수밖에 없다.

지면 그대로 끝이고, 이겨도 이긴 게 아니다.

만신창이가 되어서 두 번째 공격은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지셀은 상처뿐인 승리는 원하지 않았다.

'본보기를 보여 줘야 해.'

적들에게 확실히 보여 줘야 한다. 페르디움을 함부로 건드리면 죽는다는 걸.

지금까지 지셀은 오직 그것만을 위해서 준비해 왔다.

단 한 수를 위해서.

69화 내가 직접 판을 바꾸는 수밖에. (5)

"이익! 전멸이라니! 보급 부대가 어쩌다가!"

화려한 막사 안에서, 타모스 디갈드 백작은 화를 내며 길길이 날뛰었다.

이미 페르디움은 회전을 포기하고 성에 틀어박혔다.

결국 공성에 나서야 하는데 보급 부대가 없으면 시간을 오래 끌 수가 없었다.

"이 멍청한 파브로 새끼! 그 새끼한테 부대를 맡기는 게 아니었어! 고작 페르디움 따위에 기습당한단 말이냐!"

파브로는 디갈드의 휘하 가신 중 가장 큰 파벌을 이끄는 자였다.

그래서 영 시원찮은 놈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보급 부대라도 맡긴 건데, 이렇게 큰 실수를 할 줄은 몰랐다.

아니, 애초에 페르디움의 기습 자체를 상상도 하지 못했다.

"도대체 그놈들이 무슨 여력이 있어서 기습을 한 거야!"

전력이 적을수록 이런 과감한 전략을 펼치기 어려워진다는 건 상식이다.

실패했을 때의 위험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상식적인 지휘관이라면 시도하지 않을 수였다.

'으으, 젠장! 이대로 가면 승리해도 점령지를 관리할 병력이 없잖아?'

보급 부대는 전부 디갈드의 병력이라 타격이 컸다.

최대한 아끼려고 후방으로 빼돌렸던 게 오히려 최악의 수가 되고 말았다.

"진정하시오. 백작."

타모스의 옆에는 체구가 크고 인상이 냉엄한 사내가 팔짱을 끼고 앉아 있었다.

그의 이름은 빅토르.

데스몬드 백작이 심혈을 기울여 키운 실력자였다.

"어떻게 진정한단 말이오. 투석기에 쓸 바위들은 대부분 보급 부대가 옮기고 있었소. 여기에는 얼마 없단 말이오."

"그건 좀 아쉽지만, 어차피 성벽 한두 군데만 허물면 되오. 공성탑과 본대 병력은 멀쩡히 남아 있으니 문제없소."

"그, 그래도 시간이 오래 걸리면 힘들지 않겠소? 식량도 며칠 치밖에 없소이다."

타모스는 공성에 막연한 두려움을 품고 있었다.

전쟁 경험이 없기에 전술이며 전략 따위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애초에 단번에 끝낼 생각이었소. 페르디움은 수성할 준비가 제대로 안 되어 있으니까."

"으음, 그걸 어떻게 아시오?"

타모스가 의아해했다. 빅토르는 얼굴 가득 비웃음을 띠고 답했다.

"경험의 산물이지. 빨리 끝날 테니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만 알아 두시오."

"크흠, 뭐 그러면 나야 좋지요. 허허허."

어차피 병력도 이쪽이 압도적이다. 맞붙어서 쓸어 버리든, 공성을 하든 쉽게 끝날 것이다.

타모스는 웃으면서도 속으로 욕해 댔다.

'건방진 놈. 백작인 나한테 저따위 말투라니. 고작 기사 나부랭이 주제에.'

빅토르와 대화를 이어 갈수록 불만이 쌓여 갔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실제로 본대 병력을 지휘하는 사람은 타모스가 아니라 빅토르였기 때문이다.

"크흠, 그러면 로게스 백작이 지원해 오기 전에 끝낼 수 있겠소?"

"그들은 오지 못할 것이오."

페르디움에서 로게스 영지로 가는 길목에는 이미 아멜리아가 진을 치고 있었다.

"흐흐, 데스몬드 백작이 꼼꼼하게 준비했구려. 멍청한 페르디움, 룬스톤을 얻자마자 다른 영주한테 달라붙었어야지."

타모스가 히죽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페르디움이 더 크기 전에 이렇게 밟을 수 있으니, 길모어의 죽음이 헛된 게 아니었구려. 속만 썩이던 놈인데 그래도 자식이라고 마지막에는 효도하고 갔네. 어휴, 장한 놈."

길모어가 죽은 거야 아무래도 좋았다. 자식이야 또 낳으면 되니까.

중요한 건 이 전쟁만 끝나면 자신도 대영주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마수의 숲을 절반으로 나눠야 하는 게 아쉽지만... 지금은 어쩔 수가 없지.'

데스몬드는 병력을 빌려주는 대가로 마수의 숲 개척 권리의 절반을 요구했다.

어차피 디갈드 영지의 힘만으로는 페르디움을 칠 수 없기에, 타모스는 울며 겨자 먹기로 수락했다.

물론 룬스톤을 얻어 부강해진 뒤에는 어떻게든 데스몬드를 몰아낼 계획이었다.

앞으로의 일을 상상하며 싱글벙글하던 타모스가 넌지시 말했다.

"크흠, 그런데 이렇게 되면.... 우리 쪽 병력이 부족해서 페르디움을 제대로 안정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소. 바로 징집하더라도 시간이...."

"점령 후 일부 병력을 빌려드리겠소."

"허허, 고맙소. 데스몬드 백작에게는 꼭 은혜를 갚겠소이다."

타모스는 그제야 안심한 듯 다시 기분 좋게 웃었다.

빅토르는 그에게 마주 웃어 주며 살기 어린 눈빛을 감추었다.

'한심한 놈. 페르디움을 점령하는 즉시 네놈도 죽을 것이다.'

타모스는 전쟁 중에 안타깝게 사망한 것으로 처리될 예정이었다.

그렇게 되면 남는 건 디갈드 영지의 후계자가 된 타모스의 둘째 아들뿐.

그놈을 어찌 처리할지는 데스몬드 백작이 결정할 것이다.

'보급 부대가 전멸한 건 잘된 일이군.'

어차피 쓸어 버릴 병력인데, 페르디움 쪽에서 없애 버렸으니 손 안 대고 코 푼 격이었다.

'그래도 의외로군. 설마 란돌프인가? 아니면 역시 즈발터? 뭐,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어차피 모두 죽을 테니.'

빅토르는 상념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 보겠소. 곧 페르디움에 도착할 테니 준비하시오."

"크흠, 알겠소."

막사 밖으로 나온 빅토르는 천천히 진영을 훑어보았다.

무려 6천에 이르는 대군은 한 명 한 명이 어느 곳에서도 빠지지 않는 정예병들이었다.

작은 영지에서는 구경조차 하기 힘든, 어마어마하게 비싼 공성탑도 있었다.

"이 정도면 레이폴드도 단박에 쓸어 버릴 수 있을 텐데."

북부의 대영주로 손꼽히는 레이폴드도 노려 볼 수 있을 만큼 훌륭한 병력이었다.

페르디움 따위는 사실 그의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식후 차 한잔 마시듯 가볍게 처리하고 돌아가면 될 일이었다.

페르디움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미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또 하나의 가문이 멸망하는군."

빅토르는 별다른 감흥 없이 중얼거렸다.

데스몬드 백작이 자신을 보냈다는 건, 확실하고 완벽하게 적의 숨통을 끊으라는 뜻이었다.

그에겐 충분히 그럴 만한 능력이 있었다.

자신이야말로 북부 제일의 기사였으니까.

* * *

"또 잡았습니다."

베르나프가 아멜리아 앞에 서서 고개를 숙이고 보고했다.

아멜리아는 천막 아래에 앉아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금까지 몇 명이었지?"

"다섯 명입니다."

"다른 곳도 빠짐없이 잘 지키고. 하나도 놓치지 마."

"알겠습니다."

"지루해 죽겠네."

아멜리아는 로게스 영지로 가는 모든 길목을 막고 페르디움의 병사를 때려잡는 중이었다.

데스몬드 백작의 부탁을 받아 마지못해 움직였지만, 고작 전령이나 잡자고 이런 곳까지 나와서 시간을 버리는 건 상당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슬슬 짜증이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냐앙."

바스테트도 심심한지 그녀의 품에서 연신 하품을 해 댔다.

베르나프는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아, 나도 옆에서 같이 놀고 싶다.'

아멜리아 옆에는 하녀들이 붙어 부채를 흔들고 있었다. 손이 닿는 곳에는 과일도 종류별로 가져다 놓았다.

전령을 잡는다고 해 봐야, 명령만 내리고 정작 본인은 소풍을 나온 듯이 놀고 있을 뿐이었다.

조금 지나자 병사들이 또 다른 전령의 시체를 옮겨 왔다.

그 모습을 본 아멜리아가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하, 뭘 이렇게 많이 보냈대. 페르디움 백작님이 은근히 집요하시네."

영지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있으니 이해는 가지만, 그래 봤자 의미 없는 발버둥이다.

"아니다 싶으면 남자답게 포기할 줄도 알아야지. 하여튼 아들이나 아비나 다를 게 없어요. 쯧쯧."

아멜리아도 이미 전쟁이 일어난 걸 알고 있었다.

그녀로서는 조금 아쉬운 일이었다. 지셀의 목은 직접 베고 싶었는데 말이다.

"룬스톤도 아깝네. 데스몬드 백작이 깔고 앉으면 뺏어 오기도 쉽지 않을 텐데."

가장 아쉬운 건 역시 룬스톤이었다.

하지만 아직 그녀의 세력으로는 데스몬드 백작을 이길 수가 없었다.

"뭐, 나중에 기회를 보고 뺏어 오면 되겠지."

욕심 많고 집요한 그녀가 룬스톤을 그냥 포기할 리가 없다.

아멜리아가 앞일을 계획하며 여유를 즐기고 있을 때, 수하 하나가 달려와 외쳤다.

"아가씨! 급한 소식입니다!"

"뭐야?"

짜증 섞인 시선에 수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서찰 하나를 건네주었다.

"디갈드 보급 부대가 전멸했다고?"

서찰을 읽던 아멜리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흐음, 농성을 하시겠다?"

보급 부대를 전멸시켰으니 공성 측이 물러나기를 기다리며 성안에 틀어박힌 모양이었다. 지원이 오면 승리할 가능성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 지원이 오지 못하게 전령을 척살하고 있는 사람이 보기에는 그저 비웃음만 나는 계획이었다.

로게스 백작에게 소식이 들어갈 때쯤에는 이미 모든 게 끝나 있을 터였다.

"대군을 상대하면서 그런 작은 희망에 목숨을 건다고? 설마 정신력으로 버티겠다, 뭐 그런 거야?"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자신이라면 전혀 다르게 움직일 것이다.

영지민과 성은 그냥 버리고, 그대로 병력을 밖으로 빼서 유격전을 진행하면 된다.

보급까지 끊긴 상황에서 끈질기게 주변을 괴롭히면, 잃을 게 많은 데스몬드로서는 물러설 수밖에 없을 테니까.

영지민을 끝까지 지키려는 페르디움 백작의 긍지는 아멜리아가 보기에 너무나도 비효율적이었다.

전쟁에서 승리만 한다면 영지민들도 바로 되찾을 수 있다. 영지민들은 그 잠깐만 버티면 되는 것이다.

"참 마음도 약하셔라. 그게 더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간다는 걸 모르시나?"

그녀가 보기에 이건 그냥 다 같이 죽자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아멜리아는 서찰을 대충 옆으로 던져 버리려다 잠깐 멈칫했다.

"뭔가 이상한데? 수상한 냄새가 나."

페르디움, 아니 지셀 그놈과 관련된 일은 늘 마음대로 풀리지 않았었다.

"무슨 냄새요?"

아멜리아는 의아해하는 베르나프를 무시하고 잠시 고민하다 말을 이었다.

"애들 페르디움 쪽으로 더 보내. 전쟁 결과 나오자마자 달려오라고 해.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똑똑히 확인하고."

"굳이 신경 쓰실 필요 없지 않겠습니까? 그 정도 병력 차이면 못 이기는 것도 힘들 텐데요."

그러자 그녀는 짜증 섞인 눈빛으로 베르나프를 돌아보았다.

"보내. 뭔가 이상하니까."

"...알겠습니다."

묘한 예감이 자꾸 그녀의 뒷덜미를 간지럽혔다.

'지셀 그놈이 가만히 있을 리 없지. 평범한 전략에 따라 남이 시키는 대로 순순히 움직인다고? 그럴 리가.'

아멜리아는 2만 골드를 강탈당하고, 암살까지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페르디움에 대한 지원 중단을 핑계로 지셀의 입지를 좁히려고 했지만, 그것도 무산되었다.

지셀을 싫어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녀는 경험으로 습득한 사실을 무시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그놈이라면 또 뭔가 상상치도 못한 수작질을 부리겠지.'

불길한 예감이 자꾸 뒤통수를 찔렀다.

아멜리아는 찝찝한 기분을 떨쳐 내려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빨리 진행해. 혹시 모르니 여러 명을 보내서 지켜봐."

베르나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과감하게 기습을 해서 보급을 끊은 건 제법입니다. 보통 대담한 게 아닌데요?"

"그러게."

아멜리아는 무성의하게 답했지만, 베르나프는 그녀가 제 말을 받아 주자 괜히 신이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역시 페르디움 백작이 한 거겠죠? 아니면 기사단장 란돌프? 두 사람이 같이 갔을 수도 있겠군요."

그러자 아멜리아가 푸핫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왜 그러십니까?"

"정말 그 두 사람이 했다고 생각해?"

"아닙니까? 그 두 사람 말고는 할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아멜리아는 콧방귀를 뀌었다.

"란돌프는 분명 용감하고 저돌적이긴 하지만 전장에서 칼 휘두르는 것밖에 못 하지. 기습해서 보급을 끊겠다는 생각 자체를 못 하는 머리라고. 시도한다 해도 어설프겠지. 들켜서 실패할지도 모르고."

"그러면 페르디움 백작이?"

"페르디움 백작은 제법 괜찮은 지휘관이긴 하지만.... 함부로 병사들의 목숨을 걸고 도박하는 성격은 아니야. 그렇기에 북방의 요새를 오래도록 지킬 수 있던 거지."

"그러면 누가 했다는 겁니까? 설마...."

기습이 성공했기에 망정이지, 객관적으로 보면 말도 안 되는 도박 수였다.

그리고 그런 짓을 서슴지 않고 해 대는 미친놈이 마침 페르디움에 하나 있긴 하다.

아멜리아가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서늘하게 말했다.

"그래. 지셀, 그 새끼가 분명해."

70화 공격은 최선의 방어다. (1)

디갈드의 본대가 페르디움의 성 앞에 도착했다.

그들은 페르디움의 남쪽 성문과 성벽을 노리고 자리를 잡았다.

성과 조금 떨어진 곳에 진지를 꾸리는 그들을 보며 즈발터는 눈앞이 아찔해졌다.

'버틸 수 있을까?'

들었던 것과 실제로 보는 것은 느낌이 너무나도 달랐다.

길게 늘어진 막사와 병력을 보니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아니다. 해내야지. 어떻게든 막아 내야지.'

자신뿐만 아니라 영지민들을 위해서라도 막아 내야 한다.

즈발터가 재차 마음을 다잡는 사이, 성벽에 배치된 병사들과 기사들도 침을 삼키며 조금씩 떨고 있었다.

'이걸 어떻게 막아?'

'우린 끝났어. 성문도 바로 뚫릴 거야.'

'그냥 밀고 들어와도 다 죽을 거 같은데?'

북방의 경험도, 끈끈한 전우애도, 오랜 충성심도, 이 순간만큼은 모두 쓸모가 없었다.

압도적인 전력이란 그런 것이다.

그저 서 있기만 해도 상대방의 전의를 꺾어 버린다.

다들 어찌할 바를 모르고 긴장해서 적들을 지켜보았다.

디갈드 군은 바로 쳐들어오지 않았다.

경계병을 충분히 세운 뒤, 공성 병기들을 조립하기 시작했다.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거대한 공성탑 네 대와 투석기 한 대가 완성되었다.

그 위용을 마주한 페르디움의 병사들은 말할 수 없는 공포심에 휩싸였다.

'고, 공성탑이다.'

'저런 건 처음 봐.'

'저런 게 온다고? 이 허접한 성벽에?'

공성탑이 뭔지는 알아도 실물은 처음 보았다.

동요하는 병사들의 모습을 본 즈발터의 안색도 어두워졌다.

'큰일이구나. 싸우기도 전에 이렇게 겁을 먹다니.'

저 거대한 공성탑을 본 것만으로도 페르디움 군은 전의를 잃어 갔다.

그들과는 반대로 타모스는 매우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페르디움 백작이 북방 요새에만 신경을 쓴다더니 사실이었군. 우리 성보다 더 상태가 안 좋은 거 같은데?"

빅토르가 걱정하지 말라 했지만, 사람 마음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법.

천성이 소심한 타모스는 전쟁이 길어지지 않았으면 했다.

어차피 병력 차이가 크니, 차라리 한 번에 맞붙어 밀어 버리길 바라고 있었다.

"성이 이렇게 초라하다니. 으하하하! 다행이군. 다행이야. 이 정도면 정말 금방 끝낼 수 있겠소이다. 안 그렇소?"

빅토르는 그를 힐끔 곁눈질할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타모스는 신경 쓰지 않고 홀로 웃고 떠들었다.

병력 배치가 끝나자 기사가 다가와 빅토르에게 보고를 올렸다.

"진군 준비, 완료했습니다."

"투석기부터 시작하라."

빅토르가 손을 들어 올리자 좌측에 있는 투석기에서 거대한 바위들이 날아가기 시작했다.

바위가 부족해 투석기는 한 대만 쓰게 되었지만,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콰앙! 콰아앙!

"으아악! 피해!"

페르디움 병사들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화들짝 놀라며 몸을 피하기 바빴다.

보통은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전령이 먼저 달려와 '명예로운 항복'을 요구한다.

그런데 적군은 그런 것도 없이 다짜고짜 공격해 오기 시작한 것이다.

전부 쓸어 버리겠다는 의도가 노골적으로 보였다.

즈발터는 검을 휘두르며 목이 터지게 소리 질렀다.

"모두 피해라!"

적의 병력은 움직이지도 않았으니 공격할 수가 없었다.

투석기는 공격 속도가 느리고 방향 조절이 어렵기 때문에 피하기가 수월하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콰아앙! 콰앙!

성벽이 조금씩 깨지는 걸 보며 즈발터가 입술을 깨물었다.

'우리도 투석기가 있었다면 맞대응할 수 있었을 텐데.'

적들은 이곳에 투석기가 없다는 걸 확신하는 듯, 대비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아마 배신자들이 말했겠지.'

콰앙! 콰아앙!

투석기를 이용한 공격은 어느 순간 멈추었다. 탄환으로 쓸 바위가 모두 떨어진 것이다.

하지만 잠깐의 공격만으로도 페르디움의 성벽은 거의 다 허물어져 버렸다.

그 광경을 보고 빅토르는 한쪽 입술을 끌어 올리며 웃었다.

"시작이 좋군."

성벽의 잔해가 쌓여 사다리가 없이도 올라갈 수 있을 듯했다.

빅토르가 손을 들자 비로소 병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둥! 둥! 둥! 둥!

장대한 북소리와 함께 디갈드의 병력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모두 준비해라! 적이 진군한다!"

즈발터가 외치자 병사들이 덜덜 몸을 떨며 전투를 준비했다.

훈련된 병사들이 진형을 이루고 다가오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엄청난 압박감이 느껴졌다.

게다가 병사 수도 상대편 쪽이 월등하게 많다.

"괜찮다! 충분히 막을 수 있다! 우리는 성을 끼고 싸운다!"

즈발터는 쉬지 않고 소리를 지르며 병사들을 독려했다.

병사들은 무기를 제대로 쥐지 못할 정도로 손을 떨면서도 영주의 외침에 어떻게든 마음을 가다듬었다.

드드드드드!

적의 중앙군은 일정 거리 이상 진군하지 않았다.

대신 좌우 측에 서 있던 두 개의 공성탑이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가오는 공성탑을 보며 즈발터가 외쳤다.

"쏴라!"

후드드득!

수없이 많은 불화살이 날아가 공성탑에 꽂혔다.

하지만 목재에 가죽을 씌우고 물을 먹인 공성탑에는 쉽게 불이 붙지 않았다.

저만한 크기를 불태우려면 탑 전체를 기름에 흠뻑 적셔야 할 텐데, 페르디움에 그만한 기름이 있을 리가 없었다.

거기다 상대방도 페르디움의 공격을 그냥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촤아아아악!

방패병의 보호를 받는 궁병들이 앞으로 나서고, 곧 엄청난 수의 화살이 성벽을 향해 날아들었다.

"으아악!"

"몸을 숙여!"

"벽에 붙어서 쏴라!"

몇몇 병사들이 화살에 맞아 쓰러졌다. 남은 자들은 어떻게든 몸을 낮추며 대응 사격을 했다.

그러나 병력의 차이가 워낙 심해 겨우 화살을 날리며 견제만 하는 정도였다.

그사이, 공성탑이 성벽 양쪽에 하나씩 달라붙었다.

쿠웅! 쿠웅!

공성탑에서 들다리가 내려와 성벽에 걸쳐지고, 탑 안에서 미친 듯이 적군이 쏟아져 내렸다.

"막아라! 란돌프는 반대쪽으로 가라!"

즈발터와 란돌프가 갈라져 성벽에 있는 병사들을 지휘하며 싸우기 시작했다.

"와아아아아!"

차앙! 차앙! 차앙!

제대로 검을 휘두르기도 힘든 좁은 성벽 위에서 난전이 벌어졌다.

"버텨라!"

즈발터와 란돌프는 어떻게든 틈을 파고들어 적들을 베어 나갔다.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을 유기적으로 지휘한다.

개인의 무력도 뛰어나, 디갈드 쪽에서 병사들을 계속 밀어 넣어도 어떻게든 성벽을 내주지 않고 버틴다.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던 빅토르가 흥미로운 듯 눈을 빛냈다.

"역시 제법이야. 이곳에서 썩기에는 아까운 인재군."

옆에서 보고 있던 타모스가 초조해하며 재촉했다.

"그냥 기사들을 이끌고 성문을 부수면 안 되는가? 그게 더 빠를 거 같은데?"

빅토르가 한심해하는 기색을 감추지도 않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성문을 부수려면 이쪽 전력도 한곳에 모아야 한다.

이미 성벽에 오른 병력이 있는데 굳이 다른 곳을 공략할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겨우 성문을 여는 데 기사를 쓰자니.

기사는 매우 귀중한 전력이었다. 수백의 병사가 죽어 나가도 기사 하나를 살리는 게 낫다.

"지금 성문이 뚫리면 적들도 성벽을 포기하고 모두 성문 쪽에 모일 것이오."

"그러면 그대로 밀어 버리면 되지 않나?"

"페르디움 성안은 좁은 편이오. 밀고 들어가 봤자 한 번에 진입할 수 있는 인원에는 한계가 있으니, 축차 투입을 할 수밖에 없게 되오."

축차 투입은 부대를 쪼개서 계속 투입하는 전법이다.

그런 식으로 싸우면 적을 지치게 할 수는 있겠지만, 저쪽에도 제법 괜찮은 지휘관이 있으니 재수 없으면 성문을 끼고 며칠을 싸워야 할 수도 있다.

빅토르는 다시 한번 손가락으로 성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성벽도 사실 마찬가지지만, 일단 통로를 많이 만들어 적을 흩어 놓으면 각개 격파를 할 수 있소. 우리가 훨씬 병력이 많으니까. 병력의 이점을 살려서 피해를 최대한 줄여야 하오."

빅토르가 짜증을 참고 설명해 주었지만, 그래도 타모스는 못 알아듣고 다시 물었다.

"그래? 그러면 오늘 내로 끝이 나는가?"

'그냥 지금 죽일까?'

빅토르의 마음에 슬슬 살의가 차올랐다.

어차피 죽을 놈이고 곧 전쟁도 끝날 테니 당장 죽여도 괜찮을 것이다.

빅토르는 잠시 고민하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디갈드 백작 옆에 호위 기사와 병사들이 남아 있었다.

수가 몇이든 죽이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괜히 후방에서 소란을 피워 적들의 사기를 높여 줄 필요는 없었다.

"좁은 공간에서 병력이 맞붙으면 승패가 나는 데 오래 걸릴 수밖에 없소."

타모스는 절반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빅토르의 표정이 안 좋은 걸 보고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빅토르의 말처럼 페르디움은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성벽을 사수하지 못하면 패배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성벽을 넘어온 적들에게 포위당해 싸우다가 후퇴하게 될 테니까.

그렇다고 긴 성벽을 다 지키기에는 적의 병력이 너무나 많았다.

즈발터와 란돌프가 활약해 어찌어찌 버티고는 있지만, 페르디움 군은 죽여도 죽여도 끝없이 밀려오는 적들에 지쳐 가고 있었다.

'그래도 버텨야 한다!'

즈발터는 이를 악물었다. 병사들이 지치기 전에 한 사람이라도 더 적을 죽여야 했다.

빅토르는 소강상태가 된 성벽을 지켜보다 미소를 지었다.

"무너진 성벽 쪽에 병력을 투입해라. 성벽과 성문 쪽의 병력을 분산시킨다. 점령에 성공하면 그대로 버티기만 해라."

둥! 둥! 둥!

다시 북소리와 나팔 소리가 들리며 대기하고 있던 중앙의 병력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투석기에 무너진 성벽 쪽이었다.

적들이 더 투입되자 즈발터는 다급해졌다.

공성탑에서 쏟아지는 적들을 막느라 허물어진 성벽에 투입할 병력이 부족했다.

'란돌프 혼자서는 저걸 다 막을 수가 없어! 성벽의 병력이 너무 적다!'

성문을 노리는 적의 중앙군과 후열의 기마병들은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아군의 전력을 분산시키려는 적의 의도가 빤히 보였지만, 그렇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막아야만 했다.

뚫린 성벽 쪽이 점령당하면 투입 거점을 만든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즈발터는 다급하게 외쳤다.

"지셀! 무너진 성벽 쪽을 막아라!"

지셀은 성문 안쪽에서 용병들과 함께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검은색 투구와 갑옷으로 중무장하고 있었다.

투구와 갑옷 위에는 무언가를 정성스럽게 덧대어 붙인 듯했다.

성문 개폐 장치 근처에는 스코반과 마수의 숲 경비대가 모여 있었다.

"공자님! 영주님의 명이 떨어졌습니다! 지원하러 가셔야 합니다. 기사단장님이 위험합니다!"

스코반이 다급하게 외쳤다. 지셀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성벽을 막지 않는다."

"네?"

스코반과 병사들이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지셀은 위험한 쪽을 지원하기로 하고 용병들의 지휘권을 사수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성벽을 지키지 않으면 어쩌자는 것인가?

스코반과 병사들은 어쩔 줄 모른 채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이라도 지원하러 가야 하는지 고민하는 모양새였다.

용병들도 의아한 눈빛으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성벽을 안 막는다면 자신들을 데리고 무얼 하겠다는 것인가?

그때, 즈발터의 고함이 다시 들려왔다.

"지셀! 움직여라! 뭐 하고 있느냐!"

란돌프 또한 포효하듯이 외쳤다.

"대공자! 대공자 이 새끼야! 뭐 하냐고! 적들이 오고 있잖아!"

적들은 어느새 무너진 성벽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지셀은 시간을 가늠하고 스코반에게 명령했다.

"열어라."

"네? 뭘요?"

"성문."

스코반이 기겁하며 손을 휘저었다.

"아, 아니! 대공자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성문을 왜 엽니까!"

"지금이 아주 좋은 기회다."

"무슨 기회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십쇼!"

스코반이 제 명령을 듣지 않을 듯 보이니 지셀은 옆에 있는 용병들에게 고갯짓했다.

용병들은 잠시 멈칫했지만 일단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그들은 고용주의 명에 따라 우르르 몰려가 내리닫이 창살 문을 올리고 성문을 열기 시작했다.

"아, 안 됩니다! 성문을 열면 안 됩니다!"

스코반이 허둥지둥 막으려 했지만, 용병들이 달라붙어 그대로 끌어냈다.

드드드드드!

천천히 열리는 성문 사이로, 저 멀리 적의 중앙군이 보인다.

여전히 여유가 넘치는지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역시 이쪽에서 움직이기 좋은 상황이네."

철컥!

지셀이 웃으며 투구의 안면 가리개를 내렸다.

그의 투구도 검은색의 무언가가 꼼꼼하게 덧대어진 상태였다.

철컥! 철컥! 철컥!

용병들도 모두 투구로 얼굴을 가렸다.

지셀을 따라 준비하기는 했지만, 용병들은 슬슬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벨린다는 낯빛이 창백하게 질린 채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고, 길리언은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오직 카오르만이 선물을 앞에 둔 아이처럼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때, 즈발터가 다시 외쳤다.

"지셀! 뭐 하느냐! 왜 아직도 움직이지 않는 것이냐!"

그는 적들을 떨쳐 내고 재빨리 성벽 아래를 확인하더니 기겁하며 말을 더듬었다.

"너, 너 지금! 뭐, 뭐 하는 거냐! 서, 성문을 왜 열었어!"

성문이 열려 있고 아들과 용병대가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

분명 지휘를 따르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다, 닫아라! 성문을 닫고 성벽으로 가란 말이다!"

즈발터가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지셀과 용병들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이놈―! 영주의 명령이다! 어서 란돌프를 도와 성벽을 방어해!"

란돌프도 성벽 아래 상황을 확인하고는 기겁하며 소리쳤다.

"대공자! 성문을 왜 열어, 이 미친놈아!"

지셀은 두 사람이 뭐라고 떠들든 못 들은 척하며 천천히 몸을 낮췄다.

거대한 양손 도끼를 쥔 채, 다리 쪽에 마나를 잔뜩 모으고 그가 말했다.

"성벽 방어라.... 스코반, 그거 알아?"

지셀의 말에 스코반이 나라 잃은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뭘요? 우리 다 망했다는 거요?"

"아니."

"그럼 어떤 거요?"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거."

"네?"

"기회가 왔을 때는 망설이지 말고 일단 움직여야 해."

투구 안쪽에서 붉은 빛이 번뜩였다.

그리고.

콰아아아아앙!

지셀의 몸이 엄청난 속도로 쏘아져 나갔다.

71화 공격은 최선의 방어다. (2)

"모두 따라와라!"

그 외침과 함께 지셀의 모습이 사라졌다.

"꺄아아악! 도련님! 미쳤나 봐!"

"어서 공자님을 따라라!"

벨린다가 뾰족한 비명을 내질렀다. 상황을 예의 주시하던 길리언은 바로 명령을 내리며 뛰쳐나갔다.

"크하하하! 진짜 저거 미쳤다니까? 정상이 아니라고!"

카오르는 신나서 검을 뽑아 들고 달려 나갔다.

용병들은 영문도 모른 채 일단 따라 달렸다.

그들에게는 생각할 시간도, 고민할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저 평소 훈련받던 대로 대장을 따라 움직일 뿐이었다.

혼란에 빠진 건 그들만이 아니었다.

즈발터와 란돌프는 전투 중인 것도 잊고 입을 쩍 벌렸다.

그러다 지셀과 용병들이 우르르 움직이는 걸 보고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지셀! 돌아와라! 그냥 성벽을 막으란 말이다! 뭐 하는 짓이냐!"

"대공자! 멈추시오! 돌아와! 돌아오라고! 이 미친놈아아아아!"

세상에 공성전 와중에 밖에 나가 돌격을 하는 미친놈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물론 적들 또한 지셀의 기행에 당황한 건 마찬가지였다.

타모스 백작은 빅토르를 돌아보며 물었다.

"저기... 성문이 갑자기 열렸소만? 저 검은 갑옷을 입은 놈들은 뭐지?"

"...."

빅토르는 말 한마디 내뱉지 못하고 눈만 껌뻑거렸다.

한참 열세인 페르디움 군이 성문을 열고 먼저 튀어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심지어 성벽 한쪽에는 구멍까지 나 있는데.

빅토르가 배운 군사학에는 저따위 전술은 없었다.

"뭐지? 무슨 작전인 거지? 놓친 게 있는 건가? 왜 나온 거지? 왜 저러는 거지?"

빅토르는 얼이 빠진 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상식을 벗어난 의외의 사태에 지휘관마저 당황했다.

당연히 병사들도 즉각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어?"

페르디움의 성벽에 거의 도착한 한 병사는 무언가가 제 쪽으로 날아오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태양을 가리며 떨어져 내려오는 검은 그림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거대한 무기를 치켜든 사람의 모습.

그것이 병사가 본 마지막 광경이었다.

콰아아아앙!

"으아아아아악!"

병사들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후우우우우...."

거대한 양손 도끼를 든 채 적의 한복판에 뛰어든 자는 바로 지셀이었다.

그가 숨을 내쉬자 투구의 틈 사이로 붉은색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곧 지셀을 뒤따라 용병들이 전장에 난입하기 시작했다.

중병기로 무장한 그들은 눈앞에 적이 보이자 일단 무기를 휘둘렀다.

지금이 무슨 상황인지, 무슨 작전인지조차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콰직! 콰직!

"으아아악!"

"뭐야, 이놈들은!"

"갑자기 어디에서 튀어나온 거야!"

전쟁에서 병사들은 잔뜩 긴장해 오직 명령받은 목표를 향해서만 움직인다.

멋대로 움직여서도 안 되지만, 움직이려 해도 제대로 주변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난데없이 지셀과 용병들이 들이닥치자, 병사들은 혼란에 빠졌다.

콰앙! 콰아앙!

"크아아악!"

허무하게 쓰러지는 적들을 보며 오히려 용병들이 당황했다.

"뭐야? 이놈들 왜 이렇게 약해? 그냥 여기서 싸우면 돼?"

"일단 닥치고 정신 바짝 차려! 대장님 놓치면 다 죽는다!"

용병들은 적들이 쓸려 나가는 모습에 쾌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선두에 선 지셀의 열기에 이끌려 모두의 몸이 점점 달아올랐다.

"공자님! 다음 명령을! 용병들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길리언이 주변 적들을 죄다 박살 낸 뒤 크게 외쳤다.

지셀은 빠르게 전장을 훑어본 후 손가락을 길게 그었다.

"카오르는 절반을 데리고 뚫린 성벽 주변에 퇴각로를 만들어라. 내가 돌아올 때까지 버티고 있으면 된다."

"그 정도야 쉽지! 가자, 이놈들아!"

촤아아악!

카오르가 이끄는 용병들이 적들을 밀어내며 순식간에 방패의 벽을 만들었다.

방패의 열을 확인한 지셀의 고개가 다시 빠르게 움직였다.

그가 목표로 삼은 것은 바로 공성탑.

"나머지는 나를 따라와라! 공성탑으로 간다!"

지셀이 크게 외치며 양손 도끼를 들고 달려 나갔다.

"도련님, 도대체 무슨 생각이에요!"

"그런 건 나중에 따지고, 지금은 빨리 공자님을 따라라!"

벨린다와 길리언, 그리고 방패를 든 남은 용병들이 지셀을 뒤따랐다.

특히 마수의 숲 출신 용병들은 이를 악물고 미친 듯이 쫓아갔다.

그들은 이미 경험해 봐서 알고 있다.

저 젊은 대장이 하라는 대로 바로바로 움직여야 살아날 확률이 높다는 것을.

생각하고 움직이면 늦는다. 움직이는 즉시 따라야 한다.

"빨리 움직여! 대장을 쫓아간다! 하라는 대로 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생각하지 말고 일단 움직여! 훈련한 대로만 하면 된다!"

한 명이 큰 소리로 재촉하자, 나머지 용병들도 무언가에 홀린 듯이 따라 움직였다.

"뚫어라!"

콰아아앙!

지셀이 혼란에 빠진 적들의 대열을 무너뜨리며 전진했다.

용병들 또한 방패를 앞세우며 나머지 적들을 파죽지세로 밀어붙였다.

기병 돌격만큼은 아니지만, 갑작스러운 공격은 꽤 좋은 효과를 보였다.

적과 아군이 모두 당황하는 사이, 지셀과 용병들은 공성탑의 입구 근처에 도착했다.

"이곳을 막아라! 방패!"

철컹! 철컹! 철컹!

용병들이 2단으로 방패를 들어 올리며 공성탑의 입구를 빙 둘러막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적군의 궁병대가 기존 명령을 무시하고 화살 방향을 돌렸다.

하지만 이미 진형을 갖추고 방패를 들어 올린 용병들에겐 소용이 없었다.

탕! 탕! 탕!

용병들이 진형을 갖춘 걸 확인한 지셀이 다시 크게 외쳤다.

"성벽! 아군을 엄호해라!"

적 궁병대의 공격 목표가 바뀌었으니, 성벽 쪽은 다소 여유가 생겼다.

이쪽 성벽에서 싸우던 자는 란돌프다.

예상치 못한 지셀의 행동에 잠시 넋이 나갔지만, 그도 전장에서 쌓아온 경험을 토대로 금방 정신을 차렸다.

란돌프는 순식간에 달라진 전장 상황을 확인하자마자 목이 쉬도록 소리쳤다.

"쏴! 적 궁병대를 노리고 쏴라!"

얼떨떨해하던 성벽 위의 병사들이 모두 일어나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방심한 적의 한쪽 진영이 화살을 맞고 허무하게 쓰러져 갔다.

방패병들이 다급하게 궁병들을 보호했지만 이미 공성탑으로 향하는 길은 뺏긴 상태.

"공성탑은 나 혼자 가겠다! 모두 내가 올 때까지 버티고 있어라! 벨린다, 길리언하고 같이 용병들을 도와!"

"뭐라고요? 도련님!"

"공자님! 안 됩니다!"

벨린다와 길리언이 지셀을 말리려 했지만, 정신없이 적과 싸우느라 바빠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지셀이 향하는 곳은 탑 안에 있던 병사, 탑에 들어가려던 병사들이 몰려 있어 위험한 위치였다.

그런 곳에 지금 혼자서 가겠다는 것이다.

"이쪽은 신경 쓰지 마라!"

지셀은 재차 강조하고 홀로 적들이 모여 있는 공성탑으로 향했다.

순식간에 망가진 전장을 보며 빅토르가 이를 갈았다.

예쁘게 짜 놓은 판이 웬 미친놈들 때문에 난장판이 되어 버렸다.

"성문 쪽의 정예들을 그냥 데리고 나온 건가!"

공성전 중에 이렇게 갑자기 튀어나올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전장은 난장판이었다. 수많은 병사가 성벽에서 맞붙었고 비명이 끊임없이 울려 퍼진다.

바로 옆에 있던 아군이 죽어도 모를 만큼 어지러운 상황에서 전체를 보기는 쉽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내 생각을 읽고 허를 찌른다고?"

병력이 아무리 우세해도 전쟁에 나선 이상 죽음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다. 무리하면 그만큼 피해가 커진다.

하루 정도는 병력을 아끼며 틈을 노리려 했다. 보급이 끊겼다지만 페르디움 정도는 그 정도로도 충분하리란 생각이었다.

공성탑을 먼저 이용한다면 아군의 피해를 최대한 줄이면서 상대편의 힘을 뺄 수 있으니까.

그리고 병력이 적은 저들이 지치면 곧장 대군으로 밀어붙일 계획이었다.

즉, 지금까지의 전투는 적의 힘을 가늠하기 위한 절차였다.

승리가 당연한 상황에서, 손해를 입는 전쟁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설령 그 의도를 눈치채더라도 상대방은 움직이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페르디움 군은 대부분 양쪽 성벽에 몰려 있었고, 구멍 난 성벽에도 병력을 제대로 배치하고 있지 못했다.

"아니,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성문의 병력을 분산시켜서 힘을 더 빼고 그 뒤에 총공격을...."

빅토르의 전략은 정석에 가까웠다.

해자도, 탑도 없는 성. 성문 앞에 조잡한 함정조차 없는 곳이지만, 그는 조금의 손해도 보지 않으려고 미리 모든 것을 확인했다.

공성탑을 이용해 적들의 힘을 빼 놓고 나면, 중요한 성문을 더 이상 막지 못할 테니까.

아군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는 완벽한 방법이었다.

병사들이 구멍 난 성벽에 오를 때까지도 그는 자신에 차 있었다.

이제야 슬슬 다른 병력을 움직이려던 참이었는데, 지셀과 용병들이 난입한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지금 움직인다고? 정말 그 틈을 노렸단 말인가."

생각의 간극, 그 잠깐의 틈을 노린, 사고의 속도를 뛰어넘은 움직임이었다.

저 혼란과 위험 속에서 적은 빅토르의 생각을 읽고, 전장의 흐름을 파악해 단 하나의 기회를 포착했다.

이 압도적인 병력을 앞에 두고 성문을 열고 나오다니.

적은 아마 아무 생각 없는 멍청이이거나....

무시무시한 사냥 본능을 발휘하는 야수일 것이다.

"이익, 성문! 성문을!"

빅토르가 눈을 크게 뜨고 전황을 살폈다.

하지만 성문은 어느새 다시 닫혀 있었다.

이대로 전부 밀어붙여야 하는가?

'아니, 아니다. 이 상태로는 피해가 클 거다. 무리할 수밖에 없어.'

그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이미 아군의 한쪽 진영은 측면을 공격당해 순식간에 무너진 상태였다.

"엄청난 속도군. 저 전투력을 믿고 무작정 뛰쳐나온 건가?"

공성탑이 무너지면 타격이 있긴 하겠지만, 그 탑에 묶여 있던 병력은 다른 쪽으로 돌릴 수 있다.

생각지도 못한 수에 당했지만, 전쟁 결과를 바꿀 정도로 중요한 부분은 아니었다.

"기사들과 병력을 좌측 공성탑 쪽으로 더 보내라! 어서 공성탑부터 다시 확보해! 공성탑 병사들은 몸을 돌려 적의 배후를 쳐라!"

저 검은 갑옷을 입은 놈들은 꽤 실력 있는 자들로 보이니 공성탑을 확보하려면 기사들을 투입해야 할 듯했다.

진형도 붕괴했고 대열이 끊겼지만, 아직 공성탑 아래에 병력이 남아 있으니 적장을 포위할 수 있을 것이다.

스무 명의 기사와 추가 병력이 좌측 공성탑으로 이동했다.

"저놈들을 밀어 버리면 병력이 부족할 테니 성문도 동시에 친다! 충차와 사다리를 앞으로 이동시켜라! 진군을 준비해라!"

빅토르의 명령에 따라 병사들이 대열을 바꾸기 시작했다.

공성탑에 들어가려고 대기하던 병력도 이상을 눈치채고 몸을 돌렸다.

"저 새끼 뭐야?"

홀로 다가오는 지셀을 기사 하나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드드드.

지셀이 들고 있는 양날 도끼는 그 크기가 큰 만큼 자루도 꽤 길었다.

그는 그걸 한 손으로 땅에 질질 끌며 공성탑에 다가가고 있었다.

"지금 혼자 뒤쪽을 막겠다고 오는 건가?"

기사는 일그러진 웃음을 지은 채 몸을 돌렸다.

공성탑의 길목을 끊은 적들은 앞쪽에 있던 아군들을 막기에 바빴다.

공성탑 안에 들어간 병사를 제외하고도, 대기하던 병력이 백 명은 넘게 이곳에 있었다.

뒤통수가 비어 있으니 이쪽에서 들이치면 바로 포위 공격이 가능하다.

"올라가던 인원은 신경 쓰지 말고 계속 올라가라! 나머지는 바로 적의 배후를 친다!"

지휘하던 기사가 크게 외치자 대기 중이던 병력이 모두 몸을 돌렸다.

홀로 이 인원을 상대하겠다고 나서는 자가 누구인지는 모르나, 기사가 알기로 페르디움에는 그만한 강자는 없었다.

'저놈도 그저 객기를 부리고 있을 뿐이겠지.'

단숨에 쳐 죽이고, 멍청하게 길을 끊고 있는 저놈들까지 죽이면 끝날 일이었다.

"차앗!"

마나를 뿜어낸 기사가 뛰어올라 순식간에 지셀과의 거리를 좁혔다.

기사가 지셀 바로 앞까지 다가가 검을 휘두르려던 그때였다.

지셀의 도끼가 크게 반원을 그리며 땅을 찍었다.

콰앙!

쩌억!

기사를 뒤따르던 병력이 순간 걸음을 멈췄다.

앞서가던 기사의 몸은 깔끔하게 반으로 갈라졌다.

두 조각이 난 시체가 양옆으로 쪼개지며 드러난 공간 사이에서, 검은 투구를 쓴 악마가 붉은 안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72화 공격은 최선의 방어다. (3)

남아 있던 기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마나를 다루는 기사를 단 일격에 반으로 쪼개다니, 보통 실력이 아니었다.

'페르디움에 저런 인물이 있다고? 설마 저자가 란돌프인가?'

기사는 한 걸음 물러나며 상황을 살폈다.

드드드드.

지셀은 피 묻은 도끼를 다시 바닥에 질질 끌며 빠르게 다가왔다.

"덤빌 거면 한꺼번에 덤벼라. 시간 없다."

오만한 말과 손짓에 도발당한 기사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외쳤다.

"대열을 갖춰라! 모두 한 번에 친다!"

촤르르륵!

병사들이 방패를 들어 올리고 기다란 창을 앞으로 내밀었다.

"쳐라!"

"와아아아아!"

백 명이 넘는 병사가 한 명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지셀은 눈을 가늘게 뜬 채 도끼를 든 팔을 크게 젖혔다.

"흐읍!"

도끼가 다시 크게 반원을 그리며 땅을 찍었다.

콰아아앙!

"으아아아악!"

선두에서 달려오던 십여 명의 병사가 폭발하듯이 터져 나갔다.

손에 쥔 방패도 소용없을 정도로 강한 공격이었다.

부우웅!

콰지지지직!

지셀이 도끼를 양손으로 잡고 반 바퀴 정도 몸을 돌리자 적의 앞 열이 갈려 나갔다.

"어? 어?"

"뭐, 뭐야! 이놈!"

"우리가 상대할 수 있는 놈이 아니야!"

선두가 순식간에 박살 나자 기세 좋게 달려오던 적들도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원래 저런 강자는 같은 기사가 상대하지, 병사들에게 맡기지 않는다.

병사들이 강자를 상대할 때는 적이 지쳐서 압도적인 수로 밀어붙일 수 있을 때뿐이다.

치이이익!

검은 갑옷의 틈에서 나오는 붉은 연기를 보고 병사들은 한 걸음 더 뒤로 물러섰다.

다가가기가 꺼림칙했다. 숫제 악마의 형상이었다.

이 구역을 지휘하던 기사는 병사들보다 더 당황했다.

"뭐 해! 다들 공격해! 공격하란 말이다!"

단 한 번 충돌했을 뿐인데 아군의 사기가 급속도로 떨어졌다.

본래라면 자신이 나서서 상대해야 하지만, 솔직히 이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저 거대한 도끼와 맞부딪친다면 자신의 검은 단번에 부서지고 말 것이다.

기사는 마른침을 삼켰다.

'나, 나도 큰 무기로 가져올 걸 그랬나.'

무시무시한 도끼 앞에 자신의 검은 너무나도 초라해 보였다.

모두가 잠깐 얼이 빠진 사이, 검은 악마가 다시 붉은 연기를 뿜어내며 움직였다.

"안 와? 그럼 내가 간다."

부웅!

훌쩍 떠오른 지셀이 적들의 한가운데로 떨어졌다.

콰아아앙!

그가 거침없이 도끼를 휘두를 때마다 적들은 육편이 되어 터져 나갔다.

지셀은 2단계 코어까지 개방하며 마음껏 힘을 뿜어내었다.

병사들이 몸을 빼려 하자 기사가 악에 받쳐 소리를 내질렀다.

"공격해! 이 멍청한 놈들아! 도망가면 어차피 다 죽는다! 어떻게든 찔러!"

몇몇 용감한 병사들이 훈련받은 대로 창을 내질렀다.

타탕! 탕!

그러나 이를 악물고 내지른 공격은 갑옷을 뚫지 못하고 막히고 말았다.

지셀이 갑옷에 마나를 두르고 있어 일반적인 공격은 거의 통하지 않았다.

차근차근 힘을 뺀다면 모를까, 지금 당장 병사들만으로 지셀을 상대하기엔 무리였다.

콰아앙!

지셀은 무식하게 몸으로 공격을 받아 내며 병사들을 날려 버렸다.

쿠웅!

그의 도끼가 다시 병사들을 찍어 내린 순간이었다.

"죽어라!"

기회만 엿보고 있던 기사는 그 작은 틈을 놓치지 않고 검을 찔렀다.

혼자서는 상대할 자신이 없으니, 병사들을 미끼로 삼아 틈을 노린 것이다.

지셀은 목을 노리는 예리한 살기를 느끼며 고개를 옆으로 꺾었다.

카가가각!

파악!

검은 갑옷의 어깨 부분이 갈라지며 피가 터져 나왔다.

텁!

피가 흐르는데도 지셀은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뻗어 기사의 얼굴을 붙잡았다.

"역시 네놈들은 제법이다."

순수한 감탄과 칭찬이었다.

마나를 뚫고 상처를 입힐 정도의 실력, 병사들을 희생시켜서라도 기회를 노리는 냉철한 수법까지.

그는 이런 만만치 않은 놈들과 계속 싸워야 한다.

"그래서 봐줄 수가 없지."

콰아앙!

지셀은 그대로 기사의 머리를 땅바닥에 찍었다.

머리가 땅에 박힌 기사는 목이 부러져 그대로 절명하고 말았다.

콰직!

그 시체의 머리마저 발로 밟아 으깨며, 지셀은 다시 도끼를 집어 들었다.

콰아앙! 콰앙!

도끼질 몇 번에 절반이 넘는 병사가 날아갔다.

지휘관이었던 기사들이 모두 죽으니 병사들은 더 견딜 재간도, 의지도 없었다.

"도, 도망가! 도망가!"

얼마 남지 않은 적들이 사방으로 흩어지자 지셀은 잠시 숨을 고르며 거대한 공성탑을 올려다보았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아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전장의 괴물. 이 공성탑을 없애야 전장의 흐름을 완전히 바꿀 수 있었다.

"빨리 없애야겠군."

그는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가서 올라가던 병력의 배후를 공격했다.

콰직! 콰지직!

"으아아악!"

갑자기 후미를 공격당한 적들은 변변한 대응도 못 한 채 쓰러져 갔다.

여러 방향에서 오는 공격을 막기 위해 공성탑은 하단의 입구를 제외한 사방이 막혀 있다.

탑 안에 있던 자들은 밖에서 일어난 상황을 빠르게 파악할 수 없었다.

"적이다! 적이 공성탑으로 들어왔다!"

하단부에 있던 병사들이 소란을 눈치채고 몸을 돌렸다.

하지만 붉은 연기를 뿜어내며 도끼를 휘두르는 지셀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하단에 모여 있던 병사들이 순식간에 모두 전멸했다.

"오, 올라가!"

"적이 왜 여기에 있냐고!"

"괴물이야! 괴물이 들어왔다!"

층층이 올라가던 병사들이 다급하게 앞사람을 밀어붙였다.

무수한 시체를 만들며 다가오는 지셀의 모습은 공포 그 자체였다.

성벽 쪽도 페르디움 군이 막고 있었다. 그들은 이도 저도 못 하고 우왕좌왕했다.

뒤를 잡힐까 다들 두려움에 떨었지만, 지셀은 그들을 따라 탑을 올라가지는 않았다.

그는 쓰러진 시체들 사이에 서서 주변을 잠시 둘러보다 위로 올라가는 계단을 부수기 시작했다.

콰앙! 콰앙!

세 개의 단과 계단으로 이루어진 공성탑의 1층이 금세 박살이 났다.

이제 적들은 내려오지 못한다.

적군의 병사들은 앞에 있는 페르디움 군을 뚫지도, 탑을 내려오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후우...."

지셀은 무너진 계단의 파편과 시체들 위에서 숨을 크게 한번 내쉬었다.

구우우웅!

세 개의 코어가 맹렬히 돌아가며 더 큰 힘을 내뿜기 시작했다.

선명한 붉은 마나가 도끼를 휘감았다. 지셀은 지체하지 않고 도끼를 휘둘렀다.

콰아아앙!

공성탑의 왼쪽 면이 터져 나가며 큰 구멍이 뚫렸다.

끼이익.

일부만 남은 구조물이 삐걱대며 소음을 냈다.

하지만 거대한 탑은 무너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지셀은 이를 악물고 더욱더 마나를 끌어올리며 반대편 벽을 향해 다시 도끼를 휘둘렀다.

콰아아아앙!

탑 파편이 폭발하듯 밖으로 쏟아져 나갔다.

드드득!

드디어 공성탑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남은 벽 두 개만으로는 그 거체를 지탱하기엔 너무나 부족했다.

끼이이익, 드드드득!

얄팍하게 남은 양쪽의 철판과 나무들이 비틀리며 비명을 토해 낸다.

"으, 으어어!"

"이, 이러다가 무너지겠어!"

"빨리! 빨리 성벽 쪽으로 나가!"

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눈치챈 병사들이 앞사람을 밀어 댔다.

공포에 질린 병사들은 발광하듯 성벽으로 쏟아져 나갔다.

죽음을 목전에 둔 인간의 힘은 상상을 초월한다. 순간적으로 페르디움 군이 뒤로 밀렸다.

"막아라! 버텨!"

란돌프가 노성을 지르며 가장 앞에서 적들을 베어 나갔다.

입구를 어떻게든 막아야 적들이 성벽을 점령하지 못한다.

성벽 위에서 양측이 팽팽하게 격돌하던 그때, 지셀이 다시 도끼를 휘둘렀다.

콰아아앙!

결국 공성탑을 간신히 지탱하고 있던 벽에 구멍이 뚫렸다.

다리가 부러진 거인은 더 이상 서 있지 못했다.

드드드드득!

한쪽 면에서 가까스로 버티고 있던 나무가 쪼개지며 박살이 나자, 다른 곳들도 연쇄적으로 부러져 갔다.

"무, 무너진다!"

흔들리는 공성탑 안에서 절망에 찬 비명이 터져 나왔다.

우지끈! 파아앙!

가장 먼저 안쪽의 구조물들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쿠쿠쿵!

"으아아아악!"

성벽에 걸쳐 놓은 다리가 분리되어 아래로 떨어졌다. 그 위에 서 있던 적군의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쿠르르르릉!

힘을 잃은 공성탑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기울어졌다.

뻥 뚫린 벽에서 나무 기둥들이 쏟아져 나왔다.

"으아아악!"

탑 내부에 남아 있던 병사들이 무너진 바닥과 함께 추락했다.

콰아아아아앙!

결국 전장의 한 축이었던 거대한 거인은 단말마와 같은 굉음을 내며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푸스스스스....

무너진 공성탑이 마지막 숨결을 내뱉는 것처럼 잔해 주변에 뿌연 먼지구름이 일었다.

일순간 전장에 정적이 찾아왔다.

"설마 대공자가... 혼자서?"

성벽에서 싸우던 란돌프와 페르디움 군은 멍하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우리 공성탑이... 무너졌다...."

"대, 대장이 한 거야? 혼자서?"

적군 병사들도, 길목을 막고 있던 용병들도 경악해서 공성탑을 바라보았다.

전장에 있는 모두가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얼이 빠져 버렸다.

그러나 그 숨 막히는 정적 사이에서도 움직이는 사람이 있었다.

"도련님!"

"공자님!"

벨린다와 길리언은 상대하던 적들마저 내팽개친 채 몸을 돌렸다.

마치 거인의 무덤처럼 쌓여 있는 잔해들.

그 사이사이에 몸이 뚫리고 찢어진 시체들이 끼여 있었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지 꿈틀거리는 자들도 보였다.

두 사람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잔해를 치우려던 순간.

콰아아아앙!

잔해의 한가운데에서 지셀이 튀어나왔다.

치이이익!

그의 전신을 덮은 적들의 피가 기화되며 쉼 없이 붉은 수증기를 뿜어내었다.

다다다닥!

지셀은 곧장 멍하니 서 있는 적들을 향해 달려갔다.

부웅!

콰지지직!

병사 하나가 머리가 쪼개져 그대로 절명했다.

죽는 순간까지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반쪽 난 얼굴에는 황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부웅!

콰아앙!

지셀이 다시 거대한 도끼를 크게 휘두르자 주변의 병사들이 모두 나가떨어졌다.

깜짝 놀란 적들이 그제야 허겁지겁 물러났다.

그사이 지셀이 크게 외쳤다.

"정신들 차려라! 성벽으로 후퇴한다!"

성벽으로 들어가는 퇴로는 카오르와 용병들이 가까스로 버티면서 지키고 있었다.

이미 한쪽 성벽은 완벽하게 페르디움 군이 막아 낸 상황.

지셀과 용병들은 잽싸게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뭐야, 이제 빠지는 거야?"

"공성탑이 무너졌어! 완전히 박살 났다고! 정말 대장이 혼자 한 거 맞아?"

"입 다물고 빨리 대장이나 쫓아가!"

용병들조차 어리둥절해하는데, 적들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병사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응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뭐 해! 빨리 쫓아라!"

"놈들이 도망간다!"

"놓치지 마라!"

뒤늦게 정신을 차린 지휘관들이 외쳤을 때, 이미 용병들은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몇몇은 용병들을 쫓아가고, 또 몇몇은 아직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고, 다른 몇몇은 겁에 질려 물러섰다.

그 와중에 저들끼리 발이 엉켜 넘어지기까지 했다. 진형이 엉망진창이었다.

란돌프가 기회를 포착하고 다급하게 외쳤다.

"쏴라! 대공자를 엄호해라!"

적 궁병대를 견제하던 화살이 방향을 틀어 병사들에게 날아들었다.

파파파팍!

우왕좌왕하던 적들은 그대로 화살비를 맞고 말았다.

적 궁병대가 다시 성벽을 향해 대응 사격을 했지만 이미 수많은 병사들이 죽은 뒤였다.

용병들을 이끌던 지셀은 그 틈을 이용해 방향을 틀었다.

"무너진 성벽으로 들어가라!"

성문은 이미 스코반과 병사들이 닫아 버린 상황이었다.

용병들은 뚫린 성벽 안으로 잽싸게 들어갔다.

"이제 성벽을 막는다! 앞으로 나서라!"

철컹! 철컹!

지셀의 명령에 용병들은 일사불란하게 방패를 쌓아 구멍을 막았다.

성벽을 지키고 있던 즈발터는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너는 도대체...! 저런 말도 안 되는 수를!'

직접 보면서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측면을 돌파해 공성탑을 파괴하고, 적들을 유린하며 성벽으로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은 그야말로 눈부시게 빨랐다.

어찌나 빠른지 적들은 제대로 대응조차 하지 못하고 당했다.

전장 경험이 풍부한 그조차도 섣불리 시도하지 못할 만큼 과격한 전략이었다.

'아니, 어떻게 전쟁 경험도 없는 놈이 저런 일을....'

즈발터는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셀 홀로 공성탑을 부순 것보다, 그가 용병들을 이끌고 전장에 뛰어들어 흐름을 뒤집은 것이 더 놀라웠다.

머리로 고심해서 짜낸 전술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적의 의도와 전장의 상황을 포착하고 본능적으로 움직인 것이다.

'저놈에게 그런 능력이 있었다고? 이런 천부적인 감각과 재능이!'

밥 먹고 전쟁만 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니, 아무리 경험이 많다고 해도 지셀처럼 할 수는 없으리라.

예리한 판단력과 결단력을 타고난 자가, 그것을 필요할 때 언제든 뽑아 들 수 있도록 갈고닦아야만 가능한 일이다.

즈발터는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생각은 나중에 하자. 일단 지셀 덕분에 한쪽은 숨을 돌렸다.'

공성탑은 쓸모없게 되었고 사다리차는 아직 출발도 안 했다.

적들이 올라올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반면 란돌프는 솔직한 감정을 여과 없이 토해 내었다.

그도 놀란 건 마찬가지이지만 오히려 분노가 더 치솟아 올랐다.

"이 미친놈아! 운이 좋아서 성공한 거지 자칫 잘못했으면 전부 죽었다! 우리 전부 다 뚫렸을 거라고!"

지휘관으로서 당연한 분노였지만 지셀은 못 들은 척 어깨만 으쓱거렸다.

란돌프가 다시 열이 뻗쳐 욕을 내뱉었지만, 병사들의 우렁찬 함성에 묻히고 말았다.

"와아아아!"

지셀의 믿을 수 없는 활약상을 본 병사들의 사기가 바짝 오른 것이다.

공성탑이 부서지니 여유가 생겨 수월하게 활을 쏠 수 있었다.

속수무책으로 성벽에서 밀려나던 적군의 기사 하나가 쉬지 않고 외쳤다.

"젠장! 정신들 차려! 부장들은 뭐 하나! 병사들을 통제하란 말이다! 뚫린 성벽 쪽으로 모여라! 방패병들은 화살부터 막아! 궁병대는 뒤로 빠져서 견제해라! 이 멍청한 새끼들아!"

대열이 죄다 흩어져 혼란에 빠지니 통제가 쉽지 않았다.

개판이 됐는데 어떻게 하라는 명령도 바로 내려오지 않는다.

'젠장! 본진에서도 지금 상황에 당황한 건가? 왜 아무런 신호가 없지? 사다리차와 추가 병력을 진군시키든, 후퇴하고 재정비를 하든 빨리 결정을 내리라고!'

이럴 때는 현장에서 알아서 움직여야 한다.

기사는 목이 쉬도록 외치며 흩어진 병사들을 하나둘 끌어모았다.

"모두 모여라! 여기로 모여! 구멍 난 성벽을 향해 돌진해라!"

이제 그들에게 남은 방법은 무너진 성벽으로 몰려가는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