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6

49화 지금 좀 위험해. (3)

영입할 전력에 대해 들은 벨린다와 길리언은 긴가민가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지셀이 말한 계획들은 언제나 하나같이 상식을 벗어난 것들뿐이었다.

'솔직히 믿기 힘들지만.... 그래도 도련님이 뭐라도 설명해 준 건 처음이네.'

'공자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두 사람은 완전히 납득하지는 못했지만, 그저 따라가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어차피 자신들을 배려해서 설명해 줬을 뿐이지 그렇게 하겠다는 통보나 마찬가지였다.

언제 지셀이 상식대로 행동하고 남의 말을 제대로 들은 적이 있었던가?

"뭐, 도련님 나름대로 계획이 있나 보네요."

길리언도 고개를 끄덕였다.

제 딸을 치료할 때 그랬듯, 지셀만 아는 무언가가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래, 그러니까 얼른 몸이나 추슬러. 바로 룬스톤부터 팔러 갈 거니까."

겨우 벨린다에게서 놓여난 지셀은 길리언의 어깨를 살짝 두드려 주며 말했다.

"길리언도 이만 가서 쉬어. 오랜만에 레이첼 얼굴도 봐야지."

레이첼은 하녀들이 약을 준비해 돌봐 준 덕분에 건강이 많이 좋아진 상태였다.

나이가 비슷한 엘레나도 자주 찾아가 친구처럼 지내고 있었다.

"공자님 덕분에 잘 지내고 있으니 괜찮습니다."

"아냐, 시간 있을 때 봐 둬야지. 앞으로 더 바빠질 테니까."

길리언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알겠습니다. 공자님도 어서 쉬십시오. 치료도 마저 하셔야 합니다."

"알겠어. 걱정하지 마."

길리언이 물러간 뒤, 엄청난 피로가 몰려왔지만 지셀은 바로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룬스톤을 구하고 모두가 기뻐하는 상황이지만 지셀은 마음을 놓고 있을 수가 없었다.

"얼마나 걸리려나."

이미 가신들 사이에서는 룬스톤을 구해 온 일로 난리가 났다.

내일이면 소문이 쫙 퍼지기 시작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영지 안에서는 소식을 모르는 사람이 없어질 것이다.

그건 즉 아멜리아와 델파인 공작의 귀에도 들어간다는 뜻이다.

벨린다와 길리언에게 말했듯이, 분명 그들은 페르디움에 사람을 심어 놓았을 테니까.

"아멜리아도 델파인 공작과 한패이긴 하지만.... 독자적으로 움직인다고 봐야겠지."

페르디움의 가장 큰 적은 델파인 공작가다. 그들은 분명 페르디움을 차지하거나 약화시키기 위해 움직일 것이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영지가 아니라 지셀을 노리고 있었다.

델파인 공작가와 싸워야 하는 그에게 아멜리아는 신발 속의 가시처럼 계속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아멜리아의 움직임이 변수가 될 수 있어."

사실 이번에도, 그녀가 이 정도로 빨리 움직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지셀이 룬스톤을 얻은 걸 알게 된다면 그녀는 더욱더 과격한 방법을 쓰게 될 것이다.

"보름? 아니, 빠르면 일주일 내에 전부 알려질 거야."

최악의 결과는 역시 전쟁이지만, 전쟁이 일어난다 해도 당장 내일은 아닐 것이다. 싸우려면 명분은 필요하니까.

자칫하면 아직 그들과 같은 편이 아닌 영주들이 심하게 경계할 테니, 엉터리 명분이라도 만들어 올 것이다.

그 뒤에 기습적으로 진격하더라도 전쟁을 준비하려면 최소의 시간은 필요할 터.

길리언이 예상한 대로 두세 달 정도면 쳐들어올 것이다.

페르디움처럼 돈이 없는 영지라면 몰라도, 다른 영지라면 전쟁을 준비하는 데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을 테니까.

"지금이 가장 먹기 좋기도 할 거고."

돈이 많아졌다고 해도 영지가 부강해지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

룬스톤이 생겼어도 아직은 가난하고 별 볼 일 없는 영지니, 지금이야말로 뺏어 먹기에 가장 적절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번에 얻은 룬스톤을 전부 쓸 수밖에 없겠어."

앞으로의 일을 예측하고 준비하더라도 결과는 결국 부딪혀 봐야 아는 법이다.

과연 제가 계획한 대로 일이 잘 풀릴지, 지셀은 기대 반 걱정 반으로 방 안을 서성였다.

"아니, 그러고 보니까 케인 그놈은 아직도 소식이 없네?"

전쟁 준비나 룬스톤 판매처 따위를 생각하다 보니 수금하지 못한 돈이 떠올랐다.

지셀은 갑자기 훅 열이 뻗쳐 방 한가운데 멈춰 섰다.

이미 약속한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돈을 보내지 않았다는 건 보낼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지셀은 제 돈을 떼먹히는 걸 정말, 정말 싫어했다.

'왕'씩이나 될 정도로 용병 일을 오래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용병이 돈을 떼먹히는 건 장사를 접어야 한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지셀이 용병치고는 유난히 돈을 많이 밝히는 편이긴 했지만.... 그 또한 '왕'다운 도량이었다.

'그놈 참 대담한 놈이네. 감히 내 돈을 떼먹으려고 하고 말이야.'

그 정도로 공포심을 심어 줬는데도 돈을 떼먹는다는 건, 나름 믿을 만한 구석이 있다는 뜻이다.

지셀은 조만간 다시 만날 기회를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눕고 나서도 한참 동안 고민하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겨우 잠든 터라, 지셀은 오랜만에 늦잠을 잤다.

빠르게 회복했다고는 해도 몸이 좋지 않았던 탓도 있으리라.

그는 일어나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보고 놀라고 말았다.

"이게 다 뭐야?"

어안이 벙벙한 채 묻자, 옆에 서 있던 하녀 두 명이 대답했다.

"저건 재무관님이 보냈습니다."

"이건 무관장님이 보냈습니다."

"그건 총관님이 직접 찾아오셔서...."

"요건 서기관님이...."

"치안관님이...."

"기사단장님께서...."

지셀의 앞에는 술과 고기, 짐승의 가죽, 각종 옷감 등의 선물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그가 자고 있는 사이에 여러 사람이 선물을 건네주고 간 것이다.

하녀들의 입에서 영지에서 힘깨나 쓴다는 자들의 이름이 모조리 나왔다.

지셀이 자고 있으니 선물만 주고 돌아간 모양이었다.

"거참,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네."

지셀은 머리를 긁적이며 선물들을 보고 웃었다.

어떻게든 지셀에게 줄을 대려고 다들 눈이 벌게져서는, 사람이 자는데도 굳이 찾아와 선물을 남겨 두고 갔다.

룬스톤을 얻기 전의 취급을 생각하면 위상이 달라져도 이만저만 달라진 게 아니었다.

그때는 모든 사람이 그를 피해 다니거나 무시했었으니까.

'이제 와서 돈 보고 접근한다고 뭐라 할 수도 없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골칫덩어리였던 놈에게 아부하려니 가신들도 심란하겠지.

결국 지셀 자신이 판 무덤이다. 괜히 건드렸다가 벌집을 쑤신 꼴이 될 수도 있으니 가만히 있는 편이 낫다.

"그런데 선물들이 다 귀엽네."

선물들을 하나하나 구경하던 지셀은 피식 웃고 말았다.

가난한 영지의 가신들에게 돈이 있어 봤자 얼마나 있겠는가.

그들 나름대로 금고 바닥까지 박박 긁어서 가져온 것일 테지만, 모두 그다지 가치가 있는 물건들은 아니었다.

솔직히 용병왕 시절에 누렸던 것과 비교하면 성에 차지 않는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가져온 사람들의 성의가 보여 무시할 수 없었다.

"목록을 가져와라."

하녀가 종이 하나를 지셀에게 건네주었다.

찾아온 사람들과 그들이 어떤 선물을 줬는지를 적어 둔 목록이었다.

무언가를 받으면 답례하는 것은 귀족들의 명예가 달린 관습이다.

그렇기에 하녀들도 모든 선물을 빠짐없이 기록해 놓은 것이다.

지셀은 리스트를 모두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하녀들에게 말했다.

"술과 고기는 용병들에게 전해 주고, 옷감들이나 다른 생필품은 다른 사용인들과 나눠 가져라."

하녀들이 얼굴에 화색을 띠며 물었다.

"대공자님은 필요하신 게 없으신지요?"

"응, 없어. 다 너희 나눠 가져."

"감사합니다."

하녀들은 고개를 연신 숙였다.

지셀에게나 가치 없는 것이지, 영지와 마찬가지로 가난한 그들에게 이런 물건들은 쉽사리 구경하기도 힘든 것들이었다.

'대공자님이 웬일이래? 돈 많이 벌었다더니 그게 사실인가 봐!'

'역시 돈이 있어야 인심도 나는 법이야.'

하녀들이 서로 눈짓하며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요새 욕도 하지 않고 괴롭히지도 않아서 대공자가 변했다 싶었지만, 이렇게 선물까지 주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물론 언제 또 폭군으로 돌아갈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은 남아 있었지만, 당장은 그저 기쁠 뿐이었다.

"찾아온 분들에게는 선물 잘 받았다고 전해라. 조만간 한 분씩 찾아뵙겠다고 해."

"알겠습니다."

자는 사이 들이닥친 문제를 대충 정리하고 지셀은 몸 상태를 점검했다.

"이상하군."

지셀은 욱신거리는 몸을 이끌고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거울을 바라보았다.

독에 중독되었을 때 얼굴에 비쳤던 칙칙한 보랏빛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그저 볼이 홀쭉하게 들어가고, 조금 많이 창백할 뿐이었다.

생각보다 좋아진 몸 상태에 의아해진 그는, 내친김에 자리에 앉아 마나 연공을 시작했다.

세 개의 코어를 천천히 돌리며 한참 동안 제 몸을 관조한 지셀은 잠시 후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눈을 떴다.

"마나의 성질이... 변했네."

마나는 그 사람이 익히고 있는 마나 연공법과 성향, 체질에 가장 큰 영향을 받는다.

어떤 마나 연공법을 익히고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사람마다 다른 성질을 갖게 되는 것이다.

본래 그의 마나는 제어하기 힘들 정도로 광폭하고 거칠었다.

마나를 뿜어내며 싸울 때도 그 특성이 명확하게 드러날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 광폭함 속에 은밀하고 음습한 기운이 숨어들어 있었다.

전생에서도 전혀 겪어 보지 못한 일이었다.

"마나의 성질이 달라질 수 있다고?"

마나가 한번 몸에 쌓이고 나면 성질이 달라지는 일은 극히 드물다.

마나를 가공해 다양한 속성의 마법을 쓰는 마법사도 예외는 아니다.

마법사들도 술식을 통해 외부로 방출하는 마나의 성질을 강제로 변환할 뿐이다.

그렇기에, 마나의 성질과 체질에 따라 화염 마법이나 빙결 마법에 특화된 마법사가 있는 것이다.

"설마... 블러드 퓌톤의 독 기운이 내 마나와 섞인 건가?"

말도 안 되는 가설이지만 그 외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지셀은 손을 들어 그 음습한 기운만 따로 뽑아 움직여 보려 했다.

하지만 그 기운이 워낙 의식하고 집중하지 않으면 느끼기 힘들 정도로 미약한 데다, 몸 상태도 좋지 않아 쉽게 되지 않았다

지셀은 몇 번 더 시도하다 포기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조급해하지 말자. 어차피 회복하려면 쉬어야 하니까. 천천히 알아보면 되겠지. 회복력이 몰라보게 좋아진 것도 이거 때문인가?"

알 수 없는 현상에 머리가 복잡했지만 당장 고민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뭐, 회복력이 좋아졌으니 잘됐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움직일 수 있겠어."

꼼짝없이 보름 이상은 쉬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일이 잘 풀렸다.

마나에 이상한 기운이 섞이긴 했지만 그리 강하지 않으니, 급한 일부터 처리하고 확인해도 될 것 같았다.

지셀이 바로 움직이려고 마음먹었을 때, 누군가가 지셀을 찾아왔다.

"하하하! 우리 대공자님이 드디어 기침하셨군요! 몸도 어제보다 훨씬 좋아 보입니다. 건강을 타고 나셨군요. 역시 기사 중의 기사, 영지의 후계자이십니다. 정말 남자답습니다. 하하하하!"

호탕하게 웃으며 이상하게 아부하는 사내는, 페르디움의 기사단장 란돌프였다.

50화 저 돈 없는데요? (1)

"음? 기사단장님께서 무슨 일이십니까?"

지셀은 짐짓 시치미를 떼며 물었다.

이미 아침에 받은 선물 목록에 란돌프가 보내온 선물이 있다는 사실도 확인한 참이었다.

답례가 갈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찾아온 걸 보니 어지간히 마음이 급하고 애가 타는 모양이었다.

란돌프는 능글맞게 구는 지셀을 보며 속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어제 보니 아주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이더군. 어쩜 그 많은 걸 혼자 다 먹을 생각을 할까. 욕심쟁이 같으니라고.'

그는 마음속으로 지셀을 욕하면서도 겉으로 티는 내지 못하고 만면에 화사한 웃음을 지었다.

"어제 대공자님의 늠름한 모습을 보니 과연 우리 영지의 앞날이 밝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대공자님, 과연 대공자님 개인의 영달만 채워서 영지가 발전할 수 있겠습니까?"

란돌프의 말에 지셀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답했다.

"개인의 영달이라뇨? 저는 분명 레이폴드 대신 영지를 지원해 드리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란돌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지원금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바로 기사들이죠."

사실 페르디움의 기사단장 자리는 안 하느니만 못한 자리였다.

매번 북방에서 싸우기만 해야 하고 급여는 처참한 수준이다.

그러니 기사는 항상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런 와중에 최근에는 배신자들까지 나왔다.

사실 쟈말과 필립이 배신했을 때 가장 분노한 사람은 란돌프였지만 그들을 가장 이해한 사람도 그였다.

'솔직히 누가 여기서 기사 생활을 하고 싶겠냐고!'

기사는 고급 전력이다. 재능이 없다면 기사가 되지도 못하고, 재능이 있더라도 오랜 시간을 들여 키워야 한다.

다른 영지에서는 높은 급여를 주기도 하고, 땅이 많은 영주는 작은 장원을 하사해 세금까지 걷을 수 있게 해 준다.

그런 대우를 마다하고 페르디움에 남아 있는 기사들은 보통 두 종류로 나뉜다.

아직 충성심이 남아 있는 자들과, 그저 북방에서 야만인과 싸우고 싶어 하는 살짝 맛이 간 놈들.

하지만 있던 충성도 굶으면 사라지는 게 사람의 본능이다.

란돌프는 짐짓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기사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크흠흠, 대공자님의 성의가 약간 필요합니다. 어, 음. 그러니까 기부 같은 거지요. 아니면 발전 기금?"

요컨대 세금이니 지원이니 이딴 거 말고 기사단에 따로 돈을 좀 달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지셀은 그게 뭔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발전 기금이라는 말은 지셀이 가장 내뱉기 좋아하는 말이지만 듣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단어다.

그건 자신이 아멜리아에게 돈을 요구할 때나 쓸 수 있는 말이었다.

"저 돈 없는데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말하는 모습이 유난히 얄미워 보였다.

란돌프는 주먹을 휘두르려다가 간신히 참고, 머리를 긁는 척했다.

'흥분하지 말자. 어떻게든 따로 돈을 받아 내야 해.'

"하하하, 영지에서 제일 부자이신 분한테 돈이 없다는 말은 산적이 돈을 안 뺏겠다는 소리와 마찬가지죠. 하하하하."

비유가 상당히 공격적이었다.

지셀은 속으로 어이없어하면서도 란돌프와 똑같이 웃었다.

"이미 다 쓸데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 쓴 거나 마찬가지죠. 하하하하."

란돌프는 주먹으로 이마를 짚으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참아야 한다. 돈 나올 구멍이 없어.'

알버트를 찾아가도 매번 돈이 없다는 소리만 하고, 도무지 설득이 되질 않았다.

돈이 생겨도 꼭 다른 곳에 먼저 쓰니, 기사단의 형편이 나아질 수가 없었다. 뭘 해 보려고 해도 할 수가 없다.

레이폴드 대신 지셀이 지원해 준다 해도 실상은 마찬가지다.

어차피 원래 받던 돈을 채우는 것일 테니, 거지 같은 기사단에 예산이 더 배정될 리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처럼 계속 거지 같을 게 뻔했다.

그래서 란돌프는 이번 기회를 놓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니, 도대체 그 많은 돈을 혼자 어디에 쓰시려고 그러십니까? 영지를 위해 쓰셔야죠! 영지를 위해!"

지셀이 감탄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앵무새처럼 란돌프가 한 말을 따라 했다.

"그럼요, 영지를 위해 써야죠. 당연히 모두 영지를 위해 쓸 생각입니다."

"영지를 위해... 어떻게요?"

"제가 다 계획이 있습니다."

란돌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계획에 기사단 지원은 들어가 있나요?"

지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건 안 할 건데요? 없어요."

란돌프는 울컥하는 표정을 감추려 고개를 숙이고 다시 호흡을 조절했다.

'와, 진짜 혼자 쓰려고 작정한 모양이네. 협박이라도 해야 하나?'

기사단장이 극단적인 방법을 고민하는 찰나, 누군가가 지셀을 찾아왔다. 바로 영지의 재무관인 알버트였다.

"어험, 먼저 온 사람이 있었군요. 대공자님, 몸은 괜찮으십니까?"

알버트가 왜 나타났는지는 안 봐도 빤했다. 란돌프는 경계하며 그를 막아섰다.

"형님? 아니, 재무관님이 여긴 왜 오셨습니까? 일하셔야죠, 일. 대공자님하고는 제가 먼저 대화 중이었습니다. 나중에 오시죠."

란돌프가 은근슬쩍 밀어 내려고 했지만, 알버트도 꿋꿋하게 서서 버텼다.

그는 혀를 차며 란돌프에게 훈계하듯 말했다.

"그러는 기사단장이야말로, 훈련은 안 하시고 여기서 죽치고 계시면 되겠습니까? 어서 가서 훈련에 전념하십시오. 훈련 때 흘린 땀 한 방울이 전쟁에서 피 한 방울을 덜 흘리게 해 주는 법입니다."

"아니, 검 한번 안 잡아 본 양반이 아는 척은 무슨.... 제가 알아서 합니다. 재무관님은 가서 돈 계산이나 하십쇼."

"돈이 있어야 돈 계산을 하지요."

두 사람은 웃으면서도 서로를 노려보며 팽팽히 대치했다.

그 모습을 보며 지셀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저 두 사람은 쉽게 자신의 방에서 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국 지셀은 알버트에게 물었다.

"재무관님도 약간의 기부나 뭐 발전 기금... 그런 게 필요하셔서 오신 겁니까?"

단도직입적인 말에 알버트가 민망한 듯 헛기침했다.

"크흠흠, 대공자님이 참으로 영민하십니다. 과연 이렇게 명석하시니 룬스톤을 구해 오는 큰일을 하신 거죠. 과연 크게 되실 분입니다."

알버트는 나름대로 열심히 아부했지만, 란돌프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지셀이 속으로 헛웃음을 짓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알버트는 대견하다는 눈빛으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흠흠, 레이폴드 대신 지원해 주시는 건 고마운 말씀이시나... 당장 급한 일을 해결하려면 목돈이 조금 필요해서요."

지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재무관님이 급하다고 하실 만한 일이라면... 아무래도 빚 문제겠군요."

"맞습니다. 저는 빚을 갚는 게 가장 급선무라 생각합니다. 결국 영지의 빚은 페르디움을 물려받을 대공자님이 떠안을 수밖에 없습니다. 가문의 빚이 대공자님의 빚이고 대공자님의 돈이 가문의 돈 아니겠습니까?"

알버트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셀은 황당한 듯, 무슨 소리 하냐는 표정을 그대로 드러내며 단언했다.

"아닌데요."

"네?"

"제 돈은 제 돈이죠."

이 사람이 어디서 사기를 치려고.

칼같이 끊는 지셀의 태도에 알버트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

'와, 얘 이렇게 안 봤는데 아주 돈 귀신이네. 돈 귀신이야.'

알버트도 속으로 구시렁거렸지만 차마 티는 내지 못하고 다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커흠흠, 누구 돈인지를 떠나서, 영지가 어려운데 대공자님께서 모른 척하는 것도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솔직히 빚만 갚아도 영지 살림은 금세 나아질 겁니다. 이게 다 영지를 위한 일이라고요."

지셀은 알버트가 이렇게나 표정이 변화무쌍한 사람인 줄 처음 알았다.

평소에는 항상 냉랭한 표정만 짓던 사람인데.

시시각각 일그러졌다 웃었다 하며 변하는 얼굴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알버트가 하는 말은 제대로 듣지 않고, 그 얼굴만 구경하며 딴생각하던 지셀은 뒤늦게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근데, 저 돈 없는데요?"

그 말을 듣고 란돌프가 그랬던 것처럼, 알버트도 얼굴을 구겼다.

그는 울컥 치밀어오르는 화를 다스리려는 듯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내뱉었다.

"돈이... 왜 없습니까?"

"기사단장님에게도 말씀드렸지만, 이미 쓸 곳이 다 정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없어요."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알버트는 사정하듯 매달렸다.

"도대체 어디에 쓰려고 그러십니까? 그 큰돈을 쓰려면 저희랑 상의라도 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아니, 내 돈 내가 쓰는데 상의를 왜 해요.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걸 어떻게 신경을 안 씁니까!"

알버트가 절규했지만, 지셀은 두 사람을 상대하기가 슬슬 귀찮아져서 툭 내뱉었다.

"영지를 위해 쓰는 거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당연히 두 사람은 그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지셀의 전적을 생각하면 지금도 말만 번드르르하지, 제 유흥비로 탕진할 게 뻔했다.

그 많은 돈을 쓸데없는 데에다 날려 버릴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은 다급하게 항의했다.

"아니, 도대체 영지에 빚을 갚는 것보다 급한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자로 나가는 돈이 아깝지도 않습니까?"

"무슨 소리입니까? 빚보다 기사단을 챙기는 게 우선이지요. 다른 영지들을 보십시오. 빚을 져도 기사단만큼은 최상의 상태로 유지합니다. 기사단이 바로 영지의 힘 아니겠습니까! 힘!"

"어허, 무식한 소리! 이자만 안 나가도 그 돈을 수많은 곳에 쓸 수 있는데 기사단은 무슨 기사단이야!"

"아니, 이 형님이 매일 방구석에 돈만 만지니까 현실 감각이 없어지셨네. 이자니, 뭐니 해도 결국 싸울 힘이 없으면 그냥 다 쓸리는 거라니까요? 힘이 있으면 돈을 갚지 않아도 누가 뭐라고 못합니다."

"쯧쯧, 그게 강도지 기사야? 세상 모든 일에는 다 순서가 있는 법이야."

"그 순서가 기사단과 병력부터라고요!"

언제부터인지 두 사람은 지셀에게 말하는 게 아니라 서로 언성을 높이며 싸우기 시작했다.

지셀에게 돈을 못 받을 거 같으니 서로에게 화풀이하는 꼴이 되어 버린 것이다.

"어떻게 할 거야? 그냥 빚부터 먼저 갚는 걸로 해! 우리 영지는 신용이 바닥이라고!"

"기사단부터 먼저 하면 빚쟁이들은 내가 막아 준다니까? 칼 앞에는 장사 없어!"

"...."

왜 남의 돈을 가지고 서로 순서를 정하는지 모르겠다.

지셀이 한숨을 내쉬고 힘으로 몰아내려고 할 때, 기사 한 명이 찾아왔다.

"대공자님, 영주님께서 급히 찾으십니다."

"오, 그래? 그럼 바로 가야지."

반가운 소식에 자리를 뜨려고 하자 알버트와 란돌프 두 사람이 따라가려고 했다.

그러자 기사는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꼭 대공자님 혼자만 오라고 하셨습니다."

지엄한 영주의 명에 두 사람은 따라가지도 못하고 뒤에서 소리만 질렀다.

"빨리 빚 갚아야 하는데 데려가면 어떻게 해!"

"기사단 내놔! 안 주면 돈 쓸 때마다 방해할 거야! 다 부숴 버릴 거야!"

방방 뛰는 두 사람을 버려두고 지셀은 바로 아버지의 집무실로 향했다.

솔직히 더 있다가는 세 명이서 다 같이 돌아버릴 거 같았다.

집무실 앞을 지키던 기사들은 지셀이 도착하자 천천히 문을 열어 주었다.

끼이익.

싸늘하다. 가슴에 스산한 기운이 날아와 꽂힌다.

방 안에는 마치 폭풍전야와 같은 긴장감이 가득했다.

즈발터는 뒷짐을 진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지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부르셨습니까?"

"그래, 몸은 괜찮으냐?"

"네, 큰 부상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생각보다 빨리 회복되었습니다."

"다행이구나. 큰일을 하고 있으니 앞으로도 몸을 조심하도록 해라."

"네. 명심하겠습니다."

대답하면서도 지셀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사고를 치고 다니다 지금보다 크게 다쳤을 때도 많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이렇게 신경 써주듯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즈발터는 여전히 뒷짐을 진 채 창밖만 바라보며 말했다.

"날씨가 좋구나. 그래, 룬스톤을 판매하고 어떻게 쓸지는 생각해 보았느냐?"

"네,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레이폴드에서 빠진 금액만큼 지원해 드리고 나머지는 제가 따로 계획하고 있는 일에 쓸 생각입니다."

지셀의 대답에 즈발터는 잠시 침묵을 지킨 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알아서 잘하겠지. 어떻게 쓰든 영지를 위해 쓰겠다는 너의 말을 믿는다."

"네."

"네가 어렸을 때부터 참 사고를 많이 쳤었지. 영지에 손해도 많이 끼쳤고 말이야."

"...네."

"가신들이 몇 번이나 너를 감금하자고 했을 때도 나는 매번 용서해 주었다. 그래도 자식이니까. 아비의 마음이란 그런 거란다."

"네, 뭐...."

지셀은 다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도무지 대화의 맥락이 이어지지 않는다.

부상을 걱정해서 부른 건지, 갑자기 예전 일을 탓하고 싶어서 부른 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때, 즈발터가 했던 말을 또 반복했다.

"어떻게 쓰든 영지를 위해 쓰겠다는 너의 말을 믿는다."

"...."

슬슬 감이 오기 시작했다. 지셀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51화 저 돈 없는데요? (2)

즈발터는 절대 아들과 눈을 마주칠 생각이 없는 듯, 여전히 근엄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창밖만 바라볼 뿐이었다.

헛기침을 한 즈발터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날씨가 좋구나."

"네."

"날씨가 참 좋아."

"네, 참 좋네요."

지셀은 이제 심각한 분위기를 벗어던지고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방 안에 어색한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다.

하염없이 창밖을 보던 즈발터는 갑자기 혼잣말을 시작했다.

"북방 요새 한쪽이 무너진 지 꽤 됐는데, 보수하려면 5천 골드 정도 필요하다더구나. ...아니다, 됐다. 내가 괜한 소리를...."

"...."

지셀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즈발터는 눈까지 감으며 탄식을 내뱉었다.

"허어, 이런 형편에 5천 골드를 어디서 구할꼬. 곧 야만인들을 막으러 출정해야 하는데. 쯧쯧, 다 내 부덕이로다. 내 부덕이야. 영지에 돈이 이렇게나 없을 줄이야."

지셀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알버트와 란돌프처럼 대놓고 달라는 건 아니지만, 누가 봐도 돈 달라고 시위하는 것 아닌가.

문득, 어릴 적 엄마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 네 아빠는 걱정이 많아서 매일 혼자서 끙끙 앓기만 한단다. 특히 돈 얘기는 솔직하게 말을 못 해. 사나이의 자존심이라나 뭐라나? 말을 계속 빙빙 돌려서 엄마가 일부러 모른 척하면 아빠는 또 삐져 가지고 혼자 씩씩거리고 그랬어. 웃기지?

'와, 설마 그러겠나 싶었는데. 진짜였네?'

지셀이 황당함에 입을 열지 못하는 사이, 즈발터도 입술을 꾹 깨물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아니, 이렇게까지 얘기했는데 알아서 살짝 좀 찔러 주면 안 되냐? 저런 건 아주 지 엄마랑 똑같아 가지고. 어쩜 저런 것만 닮았대?'

그래도 백작 부인은 신기하게 돈을 구해 와 남모르게 넣어 주곤 했다.

옛 추억을 떠올리며 즈발터는 끝없이 혼잣말을 뱉어냈다.

"허어... 누군가 영지를 위해 기부를 좀 해주면 좋으련만.... 그 뭐냐, 발전 기금 같은 거 말이지."

"...."

아무래도 발전 기금을 좋아하는 건 집안 내력인 모양이다.

지셀은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돈을 받기 전까지는 계속 탄식만 하며 붙잡아 둘 거 같았다.

'뭐, 북방 요새 정도면 조금 써도 괜찮겠지. 어차피 나도 그건 증축하려고 했으니까.'

차후 북방도 평정할 생각이지만 그전까지는 아버지가 계속 맡아 줘야 한다.

어느 정도 지원해 줄 생각까지 하고 있었는데, 보수 비용 정도는 넘겨줘도 괜찮을 거 같았다.

"이번에 룬스톤을 판매하면 5천 골드를 우선 보내 드리겠습니다."

시원스럽게 내뱉자 즈발터는 잠깐 움찔하더니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너도 계획이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괜히 '영지를 위한 중요한 일' 때문에 네 계획을 미룰 필요는 없다."

"아닙니다. 제가 우선 지원해 드리고 싶어서 그런 거니 괜찮습니다."

"나도 괜찮다. 북방 요새야 뭐 지금까지 잘 버텨 왔으니...."

"안 괜찮은 거 같은데요."

"크흠흠, 괜찮다니까."

"아, 그냥 드릴게요. 좀."

"...그럴까?"

즈발터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좋다고 바로 호들갑 떨면 체면이 깎이니 아닌 척 침묵하는 것이다.

"그래, 굳이 네가 그렇게까지 주고 싶다면 내 말리지는 않으마. 덕분에 오랜만에 북방 요새를 정비할 수 있겠구나. 고맙다. 허허허."

"그럼, 전 일이 바빠서 나가보겠습니다."

"오, 그래. 바쁜 사람을 계속 붙잡아 둘 수는 없지. 어서 가서 일 보거라. 멀리 안 나간다."

즈발터는 기분이 무척 좋아졌다. 내심 아들을 참 잘 키웠다는 뿌듯함도 들었다.

'다음부터는 그냥 당당하게 달라고 해야겠다. 의외로 잘 주잖아? 아휴, 은근히 지 엄마 닮았다니까.'

흐뭇해하는 아버지를 뒤로하고, 집무실을 나온 지셀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 이게 더 피곤하군."

마수의 숲에서 싸우는 것보다 사람들을 상대하는 게 더 피곤하다.

가만히 있어도 마나가 다 빨리는 기분이다.

"당장 다음 일을 시작해야겠어."

영지에 있다가는 끝도 없이 시달릴 테니, 차라리 빨리 움직이는 편이 나았다.

* * *

영지의 총관 호메른은 다른 가신들과는 조금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었다.

'후후, 내가 대공자를 하루 이틀 본 줄 알아? 무작정 조른다고 돈을 줄 놈이 절대 아니라고.'

지셀이 영지를 위해 쓰겠다고 말은 했지만, 어떻게 쓸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쪼들리는 영지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호메른은 그런 입바른 소리만 믿고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어떻게든 돈을 받아 내 자신이 직접 굴릴 생각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대공자가 돈을 쓸 곳은 많지 않아.'

병력을 키운다 해도, 룬스톤이 어디 한두 푼 하는 물건인가. 어지간한 영지 정도로 병사를 모으고 훈련시켜도 돈은 많이 남을 것이다.

게다가 아직은 병력을 모집하지도 않았으니 개척에 참여한 용병들과 인부들의 고용비만 나가고 있을 터.

혹시나 유흥에 빠져 흥청망청 돈을 날리면 손해도 그런 손해가 없다.

사실 못 믿을 사람은 지셀만이 아니었다.

"알버트랑 란돌프가 선수 치기 전에 내가 먼저 최대한 받아 내야겠어."

두 사람은 분명 자신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곳에 먼저 쓰려고 할 것이다.

그들의 의견이 틀렸다는 게 아니다. 중요하긴 중요하지.

하지만 각자 담당 업무만 생각하는 그들과 달리, 영지를 총괄하는 호메른에게는 중요한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식량을 비축하는 것을 비롯해 성벽을 보수하고, 병사를 충원하고, 밀린 급여를 지급하고, 영지민들에 대한 구호 대책을 마련하고, 상단에 진 빚을 갚고, 군마와 장비를 확보하고, 요새를 정비하고, 영지 내에 있는 공공 시설물을 정비하고 추가로 설립하고....

이놈의 영지에는 돈이 들어갈 곳이 많아도 너무나 많았다.

그걸 한꺼번에 모조리 치울 수는 없으니, 가장 급한 부분부터 차례대로 해결해야 했다.

그러려면 영지 전체를 볼 수 있는 자신이 돈을 굴리는 게 제일 나았다.

"후후, 대상을 무너뜨리기 힘들면 대상의 주변부터 무너뜨린다. 병법의 기본이지."

호메른은 지셀에게 직접 부탁하는 대신 바로 벨린다를 찾아갔다.

그녀는 지셀이 어렸을 때부터 그를 보살피며 가정 교사 역할을 해 왔다.

아무리 제멋대로 구는 대공자라도 그녀가 부탁하면 무작정 거부할 수는 없으리라.

호메른은 이거야말로 정치의 본질이라며 내심 자화자찬했다.

"오, 벨린다. 몸은 좀 어떠한가?"

"어머, 남작님이 여기는 웬일이세요?"

벨린다는 예상외의 손님을 맞고 깜짝 놀랐다.

호메른은 지셀이 사고뭉치가 된 이후부터 아예 그녀마저 싸잡아 없는 사람 취급해 왔다.

그런 사람이 먼저 그녀를 찾아올 줄이야.

"험험, 몸이 안 좋다길래 어떤가 찾아와 봤지."

"아, 이제는 많이 좋아졌어요."

"다행이야. 그대는 대공자님을 잘 모셔야 하니 항상 몸을 아끼게."

저를 없는 사람 취급하긴 했지만, 벨린다는 딱히 호메른을 원망하거나 싫어하지 않았다.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으니까.

한창 사고 칠 때 지셀은 너무나 막장이라 영지에서 그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가정 교사를 겸했으니만큼, 다들 지셀이 사고 치는 것도 잘못 가르친 그녀 탓이라고 여겼다.

안부 인사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적당히 분위기가 무르익자, 호메른은 슬그머니 무언가를 꺼내 벨린다의 손에 쥐여 줬다.

"흠흠, 이거... 별거 아니지만 받게."

"갑자기 무슨... 어머!"

호메른이 내민 건 금과 보석으로 만든 장미 모양 브로치였다.

브로치를 잠시 살펴보던 그녀는 작게 새겨진 로고를 보고 놀라서 외쳤다.

"이거 혹시 '샤르넬'이에요?"

"오, 벨린다가 제법 안목이 있군. 샤르넬이 맞네. 허허허."

벨린다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브로치를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샤르넬'은 대륙을 통틀어 한 손에 꼽히는 유명한 장인이다.

가난한 페르디움에서는 구경조차 하기 힘든 비싼 물건인 것이다.

"이거 진짜예요?"

"그럼 그럼, 진짜고말고. 체면이 있지, 아무렴 내가 가짜를 들고 다닐까."

"그런데 이걸 왜 저한테...."

벨린다가 당황스러운 듯 말하면서도 눈빛을 반짝였다.

호메른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부탁이 좀 있는데...."

부탁이라는 말에 벨린다는 멈칫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자님이 이번에 돈을 좀 많이 벌지 않았나? 영지를 위해서 쓴다고는 하시는데... 직접 쓰시기보다는 내 쪽으로 돈을 주시는 게 낫지 않을까 해서 말이지."

호메른이 짐짓 손사래를 치며 말을 이었다.

"대공자님을 못 믿는다는 뜻이 아니라! 같은 돈을 쓰더라도 효율이 좋은 쪽으로 써야 하지 않겠나. 어차피 영지 살림을 대부분 내가 맡고 있으니 말일세. 어떤가?"

길게 늘여 말하기는 했지만, 한마디로 자신한테 돈을 달라는 청탁이었다.

벨린다는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슬픈 표정으로 브로치를 호메른에게 내밀었다.

"죄송해요. 이건 다시 가져가세요. 도련님께 그런 부탁을 할 수는 없어요. 도련님 돈은 도련님이 알아서 쓰셔야 해요."

"크흠, 어떻게 안 되겠는가? 어차피 영지를 위해서인데. 자네가 조금만 도와주면 되는 일이야."

"죄송해요. 그럴 수는 없어요."

호메른이 몇 번이나 설득했지만, 벨린다는 그럴 수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어쩔 수 없이 엘레나에게 부탁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호메른은 브로치를 다시 가져가려 했다.

그런데 벨린다의 손에서 브로치가 전혀 빠지지 않았다.

호메른은 당황해서 브로치를 다시 힘주어 당겨 보았다.

'응? 이거 왜 안 빠져?'

벨린다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부탁을 들어 드릴 수 없으니, 역시 도로 가져가시는 게 맞겠죠...."

가져가라고 내밀고는 있는데 아무리 힘을 줘도 빼낼 수가 없었다.

'이이익! 이거 미친 거 아냐?'

호메른이 가만 보니 희미하게 푸른 빛이 브로치를 감싸고 있었다.

벨린다가 마나까지 뿜어내며 붙잡고 있던 것이다.

'와, 환장하겠네. 엘레나 아가씨한테 이거 드리면서 부탁해야 하는데. 저 저, 이 악물면서 땀까지 흘리는 거 봐라.'

호통이라도 칠까 생각했지만 호메른은 곧 마음을 접었다.

벨린다 옆에 다른 부상자들도 누워 있고 하녀들도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괜히 아픈 사람한테 브로치를 뺏겠다고 실랑이를 벌여 봤자 체면만 떨어질 것이다.

'대공자가 왜 그따위로 컸는지 이제 알겠다!'

가정 교사가 이 모양이니 그 학생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호메른은 포기하고 몸을 돌렸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뺏기로 하고 일단은 자리를 피한 것이다.

벨린다가 그의 등에 대고 의아한 듯 물었다.

"총관님, 이거 안 가져가세요?"

못 가져가게 한 게 누군데! 호메른은 고개만 돌려 벨린다를 노려보았다.

"대공자하고 둘이 아주 똑같구나!"

울화통이 터진 호메른은 결국 한마디 내뱉고 발을 구르듯 걸음을 옮겼다.

호메른이 나가자 벨린다는 흐뭇하게 웃으며 브로치를 이리저리 돌려 보더니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밖으로 나간 호메른은 씩씩대며 머리를 굴렸다.

"당장 아가씨를 찾아갈 수도 없고."

가진 재산 중 그나마 유일하게 가치 있던 게 브로치인데, 벨린다가 강제로 가져가 버렸다.

빈손으로 찾아가 부탁하기엔 그도 염치가 있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호메른은 곧 좋은 생각을 떠올리고 얼굴에 화색을 띠었다.

"그렇지! 호위 기사 퍼거스가 있었지!"

퍼거스는 벨린다와 마찬가지로 지셀이 어렸을 때부터 따른 사람이다.

거기다 벨린다보다 나이도 많으니, 그가 부탁하면 지셀이 더 마음 약해질 것이다.

호메른은 차라리 그쪽을 공략할 마음을 먹고, 가신들을 닦달해 만드라고라 뿌리를 하나 얻어 왔다.

비록 말라비틀어지고 볼품없는 상태이지만, 이 정도여도 가격이 만만치 않은 약재였다.

그는 기억을 더듬으며 퍼거스의 숙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퍼거스 경! 여기 있나?"

숙소로 들어가자 퍼거스가 침대 위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아니, 총관님 아니십니까?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퍼거스는 깜짝 놀라면서도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별건 아니고, 내가 자네 건강에 도움이 되는 걸 주려고...."

혹시나 잔뿌리라도 떨어질까 애지중지 품고 온 만드라고라 뿌리를 꺼내려던 찰나, 호메른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퍼거스의 옆에 잔뜩 쌓인 만드라고라 뿌리들과 수많은 영양 식품들이었다.

한참 동안 눈만 끔뻑끔뻑하던 호메른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것들을 가리켰다.

"저건 뭔가? 저 귀한 것들이 뭐가 저렇게 많아?"

그러자 퍼거스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허허, 도련님께서 마수의 숲에 들어가기 전에 잔뜩 주고 가셨습니다. 총관님도 몇 개 좀 드릴까요?"

지셀은 돈이 생기자마자 퍼거스가 먹을 건강 약재들부터 잔뜩 사서 안겼던 것이다.

호메른은 제 손에 들린 초라한 만드라고라 뿌리와 퍼거스의 옆에 쌓인 우람한 만드라고라 뿌리를 번갈아 보다가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야, 잘 있으면 됐네."

만드라고라 뿌리를 주섬주섬 다시 품에 넣고 떠나는 그의 모습은, 오늘따라 무척이나 초라해 보였다.

52화 상황이 바뀌었다. (1)

지셀은 이틀 정도 더 휴식을 취하며 몸을 추스른 뒤 바로 용병들을 소집했다.

최상의 몸 상태는 아니었지만, 이 정도로 움직일 수 있는 것만 해도 상당히 긴 시간을 단축한 셈이다.

길리언은 용병들을 적당히 정렬시키다 갑자기 멈칫하더니, 슬쩍 지셀을 돌아보았다.

의아해하던 지셀도 곧 이유를 알아챘다. 저택 쪽에서 벨린다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뭐야, 배웅 나온 거야?"

지셀이 농담하듯 내뱉었다. 벨린다는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저었다.

"배웅은 무슨 배웅이에요? 저도 같이 갈 거예요."

지셀은 이맛살을 슬쩍 찌푸렸다.

꼬였던 마나를 어느 정도 안정시켜 두기는 했지만, 아직 완전히 낫지는 않았을 텐데.

"벨린다는 더 쉬고 있는 게 어때? 굳이 따라올 필요는 없어."

"안 돼요. 가다가 산적이라도 만나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누구든 저만한 룬스톤을 보면 덤벼들지 않고는 못 배길걸요. 안 따라가면 걱정되어서 더 못 쉬어요."

그녀는 딱 잘라 말하며 로브를 걸쳐 입었다.

지셀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벨린다가 저렇게 단호하게 나오니 고집을 꺾을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지셀을 어릴 때부터 돌봐 준 사람이다. 마음이 약해지는 건 그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지셀은 한숨을 내쉬며 다짐했다.

"혹시라도 도중에 힘들면 꼭 얘기해."

"알았어요. 지금 바로 영지 밖으로 나가실 거예요?"

"아니, 일단 두고 온 걸 가지러 가자."

지셀은 용병들을 이끌고 다시 마수의 숲으로 들어갔다. 디루스 엔트의 내피와 블러드 퓌톤의 남은 시체를 챙기기 위해서였다.

처음 들어갈 때와는 달리 일행들은 말을 타고 빠르게 이동했다.

"남은 룬스톤도 추가로 캐실 겁니까?"

길리언이 묻자 지셀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시간은 없어. 시체들만 챙기고 바로 룬스톤을 팔러 갈 거다."

룬스톤을 판매하러 간다는 말을 듣자 용병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룬스톤을 팔아야 자신들도 보수를 두둑하게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자, 빨리 움직이자고."

휴식을 충분히 취한 덕에 용병들도 힘이 넘쳤다. 일행은 고작 반나절 만에 몬스터의 시체를 모두 수거해 다시 영지로 돌아왔다.

"내피는 썩지 않으니 그대로 보관하고, 퓌톤의 시체는 독과 피, 살, 가죽을 따로 분류해서 썩지 않도록 보관해라."

대기하고 있는 인부들에게 시체 손질과 보관을 맡긴 지셀은 그대로 용병들을 이끌고 영지 밖으로 나갔다.

무언가에 쫓기듯 바쁘게 움직이는 지셀을 따르며 용병들은 신이 난 듯 소리 질렀다.

"우와, 대장 몸이 아주 근질근질한가 봐."

"크크큭, 룬스톤을 이렇게 많이 팔면 돈이 어마어마하게 들어올 테니까. 생각만 해도 막 심장이 벌렁벌렁하겠지."

용병들이 떠드는 것과 별개로 길리언은 조금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공자님,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급히 움직이실 필요까지야 있겠습니까? 아직 몸도 성하지 않은데 무리하지 마시지요."

길리언도 지셀에게 이야기를 들은 덕분에 상황이 급한 건 알았지만, 그가 이렇게까지 다급하게 움직일 줄은 몰랐다.

어찌나 빠르게 말을 달리는지 룬스톤을 실은 수레들이 제대로 따라오지 못할 정도였다.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란 걸 언제나 명심해야 해."

지셀은 말을 하면서도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수레를 끄는 말들이 따라오지 못해 대열을 이탈하면, 그제야 마지못해 속도를 조금 늦춰 줄 뿐이었다.

"속도는 이대로 유지한다. 최대한 빨리 이동하도록 하지."

용병들도 돈을 빨리 받아서 나쁠 건 없기에 속도를 내는 지셀의 뒤를 열심히 따라갔다.

"와, 그런데 우리 대장은 말도 잘 타네. 켄타우로스야?"

"어지간한 기사들 저리 가라 할 정도인데?"

"나이도 젊은데 못하는 게 없네."

아무리 승마가 귀족의 필수 소양이라지만, 지셀의 승마술은 교양 수준이 아니었다.

수많은 전장을 구른 용병들도 그처럼 말을 잘 다루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볼 때마다 나이에 맞지 않는 노련함과 실력을 보여 주니 이래저래 신기할 따름이었다.

제 뒤에서 용병들이 감탄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지셀은 묵묵히 남쪽으로 말을 달렸다.

아무 생각 없이 지셀을 따르던 용병들은 한참 뒤에야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그런데 왜 이쪽으로 가는 거지?"

"그러게. 큰 상단을 찾아갈 거면 레이폴드가 가장 빠를 텐데 말이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달리는 거 아냐?"

북부에서 가장 부유한 영지는 레이폴드다. 큰 상단도 그만큼 많으니 무언가를 팔려면 레이폴드로 가는 게 제일 쉽고 빨랐다.

하지만 지셀은 짐바르 영지를 우회하여 더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며칠에 걸쳐 이동하는 동안 용병들 사이에서 의문 섞인 목소리도 점차 커져 갔다.

카오르는 용병들을 대표해서 지셀에게 물었다.

"공자님,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이미 큰 상단이 있는 영지는 다 지나쳤습니다."

지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브리반트 영지로 간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목적지였다. 카오르를 비롯한 용병들이 놀라서 되물었다.

"왜 굳이 거기까지 갑니까?"

"거기에 큰 상단이 있나요?"

브리반트 영지는 북부에 있는 작은 영지이지만, 왕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웅성거리던 용병들은 브리반트가 유명한 이유를 떠올리고 곧 감탄을 내뱉었다.

"브리반트라면... 아, 설마!"

"그곳으로 가는 겁니까?"

지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마탑으로 갈 거다."

용병들은 마탑이라는 단어 하나만 듣고도 지셀이 무슨 생각인지 금방 깨달았다.

"그렇군! 상단이 아니라 마탑에 직접 팔려고 그러는 거지? 그러면 돈을 더 받을 수 있겠네!"

"맞아, 맞아. 공자님이 생각보다 알뜰하네."

룬스톤을 대량으로 매입할 수 있는 상단은 북부에 몇 되지 않는다. 그나마도 상단의 이윤을 제하고 값을 쳐줄 것이다.

하지만 마탑에 직접 판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마법 연구에 가장 많이 쓰이는 재료가 바로 룬스톤이기 때문이다.

룬스톤에 환장한 마법사들이라면 양이 많더라도 무조건 다 사들일 것이다. 가격도 상단보다는 마탑 쪽에서 더 비싸게 받을 수 있을 것이고.

북부의 끝에서 지내 촌놈이나 다름없는 용병들은 그 유명한 마탑을 구경하게 되었다며 흥분한 눈치였다.

다들 돈도 생기고 관광도 할 수 있으니 지셀을 따라오길 잘했다며 히죽대었다.

하지만 카오르는 잠깐 생각하더니 지셀에게 물었다.

"공자님, 브리반트에 있는 마탑은 적염의 마탑입니다. 거기보다 진홍의 마탑으로 가는 게 훨씬 더 가격을 잘 쳐줄 텐데요?"

"어, 그렇네? 그럼 굳이 브리반트 영지까지 갈 필요는 없잖아?"

"그렇지. 요새는 진홍의 마탑이 북부 최고인데. 가격도 제일 후하게 줄걸?"

카오르의 말을 듣고 용병들이 떠들기 시작했다.

이왕 마탑에 판다면 당연히 룬스톤의 가격을 가장 후하게 쳐줄 수 있는 곳에 파는 게 맞았다.

소규모 마탑들은 지금 있는 룬스톤의 물량을 소화하지 못할 테니, 세력이 큰 마탑으로 가야 했다.

북부에서 가장 세력이 큰 마탑은 진홍의 마탑이다. 룬스톤의 가격을 후하게 쳐주고 가장 많이 매입해 주는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다른 상단들도 대부분 진홍의 마탑과 주로 거래했다.

하지만 지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우리는 적염의 마탑으로 간다."

"네? 어째서요?"

카오르를 비롯한 용병들이 당황해서 되물었다.

적염의 마탑은 한때 북부에서 가장 돈이 많고 가장 세가 강력한 곳이었다.

하지만 라이벌이었던 진홍의 마탑에서 탑주 델무드가 7서클의 대마법사가 되어 위명을 떨친 뒤에는 완전히 상황이 역전되었다.

옛 영광을 노리며 절치부심하고는 있지만, 이미 커질 대로 커진 진홍의 마탑을 따라잡기가 쉽지는 않았다.

"저기, 착각하시는 건 아니시죠?"

"브리반트에 있는 건 진홍이 아니라 적염의 마탑이라고요."

"이 정도 물량이면 제일 잘 나가는 곳으로 가야죠."

용병들은 지셀이 착각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돈을 더 받을 수 있는데 뭐 하러 손해를 보면서 판단 말인가?

용병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떠드는 꼴을 보며 벨린다는 미간을 찌푸렸다.

무식하고 예의 없는 놈들이 지셀에게 기어오르는 꼴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지셀 몰래 길리언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그가 돌아보자, 벨린다는 입 모양으로만 교육 좀 제대로 하라며 눈꼬리를 세웠다.

하지만 정작 지셀 본인은 그런 버릇없는 태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착각하는 게 아니라, 적염의 마탑으로 가는 게 맞다. 생각하는 바가 있으니 따라오도록."

용병들은 그의 속내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 이상은 말을 얹지 않고 얌전히 지셀을 따라갔다.

마수의 숲에서 그랬듯 뭔가 생각이 있겠거니 지셀을 믿는 마음이 반이었고, 손해를 보든 말든 자기들 일이 아니라고 신경 쓰지 않는 마음이 반이었다.

몇 개의 영지를 더 지나자 드디어 높이 선 탑이 보였다.

용병들이 마탑을 보고 저들끼리 시시덕거리기 시작했다.

지셀은 피식 웃으며 말에 박차를 가했다.

* * *

지셀이 브리반트 영지에 도착했을 즈음, 데스몬드 백작 해럴드는 문서 한 부를 꾹 쥔 채 떨리는 눈으로 읽고 있었다.

페르디움 영지에 침투시킨 첩자들로부터 전달된 보고서였다.

해럴드는 보고서를 책상 위에 던지며 한숨처럼 한탄을 내뱉었다.

"룬스톤... 룬스톤이라니. 그것도 그렇게 대량으로?"

지셀이 예상한 대로, 그가 룬스톤을 얻은 사실이 고작 며칠 만에 해럴드의 귀에 들어간 것이다.

해럴드는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눈을 감고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고민에 빠졌다.

'계획이 완전히 어그러졌군.'

천천히 페르디움 영지를 약화시켜 놓을 계획이었지만, 그쪽이 룬스톤을 구한 이상 쉽지 않은 일이 되었다.

'쯧, 그냥 강제로 싸움을 붙였어야 했나.'

길모어 디갈드의 시체가 사라졌어도 억지로 싸움을 붙이려면 붙일 수는 있었다.

하지만 대체 누가 그 시체를 없앴는지 이해할 수 없어 조금만 더 지켜보려고 했는데.... 그게 이런 결과로 돌아올 줄은 몰랐다.

'마수의 숲에 용병들을 데리고 들어갔다기에 웬 미친 짓을 하나 했건만.'

프랑크와 연락이 끊겼을 때 지셀의 이름이 나왔던 게 찝찝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 뒤로 해럴드는 꾸준히 지셀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받았다.

성격이 조금 바뀐 거 같긴 하지만, 프랑크를 이길 만큼 실력이 좋아졌다는 보고는 없었다.

그러다 용병들과 마수의 숲에 들어갔다는 보고를 받은 뒤에는 지셀에게서 완전히 신경을 꺼 버렸다.

어차피 그곳에서 죽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셀이 결국 룬스톤을 구해 왔다는 소식을 듣자, 찝찝한 마음은 이제 완전한 불안감으로 변했다.

'그 정도 그릇이 아니었을 텐데.'

북부 영지를 삼키기 위해 오랜 시간을 들여 조사를 진행했다.

당연히 주요 인물들에 대해서도 조사했지만, 당시 정보만 보면 지셀은 아예 신경을 쓸 가치조차 없는 자였다.

그런데 최근 들어 두 번이나 그 이름을 들었다. 정보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었다.

해럴드는 제 옆에 대기하고 있는 부관에게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북부의 주요 인물들에 대한 정보를 다시 수집해라. 이전 조사 결과는 신경 쓰지 말고, 처음부터 다시."

"알겠습니다."

새로 임명한 부관은 모략을 짜는 능력보다는 정보를 수집하는 역량이 더 뛰어나니 맡긴 일은 잘 해낼 것이다.

해럴드는 묘한 불안감을 느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붉은 노을이 그의 방을 물들여 가고 있었다.

53화 상황이 바뀌었다. (2)

부관이 나가고, 땅거미가 내려 창밖이 어두워질 때까지도 해럴드는 제 관자놀이를 툭툭 건들며 고민을 멈추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페르디움은 부강해질 것이다. 병력도 더 많아지겠지.'

룬스톤은 엄청난 가치를 지닌 보물이다. 그 자체로도 가치가 있지만, 현금화하기도 쉽다.

룬스톤을 팔아 그 돈을 바탕으로 영지를 키운다면 금세 병력과 물자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와서 디갈드 영지와 싸움을 붙이더라도 페르디움은 피해를 금방 복구할 것이고, 시간이 지날수록 건들기 어려워질 것이다.

"내가 당장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군."

시간을 들여 모략을 꾸미면 어떻게든 약화시키거나 문제를 만들 수는 있다.

하지만 왕국에서도 흔치 않은 룬스톤의 자원지를 발견한 건 자신의 선에서 묻어 둘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해럴드는 가장 빠른 말을 이용해 급하게 전령을 보냈다.

― 페르디움, 마수의 숲 일부 개척. 룬스톤 확보. 지시 요망.

짧은 몇 마디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다.

며칠을 기다리자 공작가의 답변이 도착했다.

― 페르디움은 멸문시켜라. 이후 공작가에서 개입하겠다. 디갈드를 이용해서 영지전을 일으켜라. 단, 반드시 쓰고 버릴 것. 다소의 위험은 감수해도 좋다.

공작가의 답변도 구구절절한 얘기는 없었다. 그저 깔끔하게 명령만 내려왔을 뿐이다.

해럴드는 돌아온 명령을 다시 곱씹었다.

'멸문... 주인 없는 영지로 만들라고?'

가주도, 후계자도 없으면 영지는 왕실로 귀속된다.

그 뒤 공작가가 개입한다는 건 새로운 주인을 그쪽에서 정하겠다는 말이다.

디갈드를 쓰고 버리라는 명령도, 페르디움 영지를 디갈드가 점령하지 못하게 하라는 뜻이다.

인척인 로게스 백작에게도 페르디움 영지를 차지할 명분이 있기는 하지만, 그 정도는 공작가가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로게스 영지도 깔끔하게 쓸어버리면 된다.

"그렇군. 이제야 알겠어. 마수의 숲 때문이었군."

그동안 이해할 수 없었던 명령이 드디어 이해됐다.

페르디움을 꾸준히 약화시키되 멸망하지는 않도록, 다른 영지에서 점령하지 못하도록 관리하라는 명령.

그건 바로 페르디움을 포함하여 누구도 마수의 숲을 차지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페르디움이 마수의 숲을 건드렸으니, 이제는 봐주지 않고 쓸어 버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왜 마수의 숲을 차지하려는 거지?"

현재 공작가는 반역을 준비하며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다.

확실한 승리를 위해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는데, 영지전을 일으킨다면 혹시나 그들 세력이 겉으로 드러날지도 모른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마수의 숲을 확보해야 하는 이유를 해럴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룬스톤이 발견됐다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이렇게까지 하는 건 과했다.

눈을 내리깔고 잠시 고민하던 해럴드는 곧 고개를 흔들었다.

방향을 정하는 건 어디까지나 공작의 몫이었다. 자신의 역할은 그 과정에서 위험을 최소화하는 것뿐이다.

"때가 되면 알겠지."

이유 따위를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바뀐 방향에 맞춰 계획을 짜기에도 바빴다.

해럴드는 집무실로 돌아가 참모들을 소집했다.

"페르디움에 우리 쪽 사람이 몇이나 있지?"

"가신 둘에 기사 하나가 남아 있습니다."

"가신 둘을 디갈드로 보내. 길모어가 페르디움에서 죽었다는 명분을 대고 영지전을 일으키게 해라."

갑작스러운 명령에 참모들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페르디움을 서서히 말려 가던 기존 계획과는 차이가 컸다.

"갑자기 방침이 달라진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상황이 바뀌었다."

해럴드는 그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참모들은 당혹스러워했지만, 곧 그들 나름대로 이해한 듯 별말이 없었다. 그들도 룬스톤 소식을 들은 것이다.

"목표는 페르디움의 멸문. 우리도 참전한다."

참모들은 재차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영지전은 하고 싶다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명분 없이 영지전을 일으킨다면 다른 영주들이 위협감을 받아 견제할 것이 뻔했다.

참모 중 하나가 고개를 숙였다.

"디갈드의 힘만으로는 페르디움을 점령하기 힘든 건 맞습니다만, 저희는 참전할 명분이 없습니다."

둘 다 고만고만한 영지라 어느 한쪽이 이길 거라 장담할 수 없었다.

단지 페르디움 영지를 약화시키는 게 목적이라면 디갈드가 적임이었지만, 멸망시키는 게 목적이라면 디갈드만으로는 부족했다.

"직접 나서지는 않는다. 우리 병력은 징집병과 용병으로 꾸며서 밀어 넣어."

디갈드의 가신들은 대부분이 해럴드의 손아귀에 있다. 그러니 그가 원하는 대로 디갈드를 몰아가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두 달 안에 준비해라. 페르디움과 디갈드 양쪽 다 빠르게 전멸시킬 것이다."

"알겠습니다. 더 준비할 건 없겠습니까?"

"빅토르도 함께 보내라."

참모들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빅토르는 데스몬드에서 심혈을 기울여 키운 영지 최고의 기사였다. 숨겨 두었던 무기이기도 했다.

그 정도의 패를 사용한다는 건 정말 해럴드가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는 뜻이다.

참모들은 이제 페르디움 영지가 멸망하는 건 정해진 결과라 생각했다. 지고 싶어도 질 수 없는 싸움이라고.

그러나 참모들과는 달리, 해럴드는 불안한 마음을 지우지 못했다.

그는 다시 한번 한 사람의 이름을 되뇌었다.

계속 불길한 예감을 불러일으키는 그 이름을.

'지셀 페르디움....'

* * *

아멜리아는 화창한 날씨를 핑계로 베르나프와 함께 차를 즐기고 있었다.

그녀는 우아하게 찻잔을 내려놓고 무릎 위에 올려놓은 바스테트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요새 기분이 꽤 좋았다. 직접 나서서 정보를 조작하고 여론을 움직여 페르디움에 가는 지원을 끊어 버렸기 때문이다.

'지셀 페르디움, 그놈이 어떻게 됐을까.'

그것만 생각하면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페르디움은 레이폴드의 지원이 없으면 제대로 유지조차 못 할 정도로 가난한 영지다.

지원이 끊기자마자 난리가 났을 테고, 그 원인 제공자인 지셀은 꼼짝없이 잡혀 벌을 받고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친 사고와 평판을 생각하면 최소한 감금 정도는 당했을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지셀의 목을 자르는 건 더욱더 쉬워진다. 감금된 놈을 대단하게 호위할 리 없으니까.

오랜만에 기분 좋게 웃는 그녀를 보고 베르나프 또한 미소를 지었다.

"이번 계책에 정말로 감탄했습니다. 어지간한 무력을 쓰는 것보다 훨씬 아름다웠습니다."

냐앙!

바스테트도 아부를 떠는 듯 골골거리며 아멜리아의 품에 고개를 비볐다.

"살쾡이 놈들한테 기회를 봐서 지셀 목을 꼭 날려 버리라고 해. 그리고 그 하녀 년도."

"알겠습니다. 마무리는 확실히 짓겠습니다."

베르나프는 아멜리아의 행동력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숨겨야 할 약점이 있는데도, 그게 밝혀질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진실을 조작해 함정을 팠다.

그 과감한 한 수로 페르디움 영지와 지셀이 동시에 몰락하게 되었으니, 도박이 성공했다고 볼 수도 있으리라.

어지간한 자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강단과 지략이었다.

한껏 기분이 좋아진 아멜리아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쿠키 조각을 집어 들어 고양이에게 먹여 주었다.

"자, 바스테트 너도 하나 먹어 보렴."

냐아앙!

바스테트가 맛있게 쿠키를 받아먹을 때, 하녀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아멜리아에게 종이쪽지 하나를 건넸다.

"뭐지?"

하녀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페르디움에서 온 소식입니다."

"그래? 흐음, 지셀이 감옥에 갇혔다고 적혀있으려나?"

아멜리아는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종이를 펼쳐 천천히 읽어 갔다.

잠시 후, 소식을 읽어 내려가는 그녀의 얼굴에서 점점 표정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살기가 느껴질 정도로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이 종이를 찢을 듯 노려보았다.

곁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아멜리아의 표정을 지켜본 베르나프는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앞에서 사람이 죽어 가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것 같던 아멜리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멜리아가 종이를 구기며 소리를 질렀다.

"지셀 페르디움!"

바스테트가 상황을 파악하고 잽싸게 베르나프의 뒤로 도망을 갔다.

"어떻게 이런 일이!"

아멜리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충격으로 탁자가 흔들리며 찻물과 쿠키가 쏟아졌다.

베르나프는 잽싸게 그것을 피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지셀이 또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아멜리아는 대답 대신 구겨진 종이를 집어 던졌다.

베르나프는 얼굴 쪽으로 날아오는 종이를 잡아채 읽어 보고는, 경악해서 외쳤다.

"이, 이런... 룬스톤을 발견했다고요? 그럼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어떻게 되긴! 페르디움 영지는 축제 분위기고 지셀 그놈은 공을 세운 게 되는 거지!"

아멜리아는 입술을 짓씹으며 말을 이었다.

"그것도 나한테 뜯어간 2만 골드를 밑천으로 쓴 거라고!"

아멜리아는 분노로 몸을 떨었다.

지셀은 그녀에게 인생 최대의 굴욕을 안겨 주었다.

형편없는 남자한테 협박을 당해 돈을 뜯긴 귀족가의 영애는 아마 자신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대우와 수모는 태어나서 처음 받아 보았다. 이 분은 반드시 지셀을 죽여야 풀릴 터였다.

겨우 속 시원하게 치워 버렸나 했는데, 오히려 승승장구하고 있다니!

아멜리아는 당장이라도 지셀을 끌고 와 눈앞에서 죽여 버리고 싶어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지셀! 지셀 페르디움!"

실핏줄이 다 터진 눈으로 지셀의 이름을 저주하듯 되뇌는 아멜리아의 모습에, 베르나프는 입을 꾹 다물었다.

대외적으로 그녀는 상냥하고 마음씨도 곱고 우아한 여자로 알려져 있다. 베르나프도 처음에는 아멜리아가 그런 사람인 줄로만 알았다. 실제로 그런 면을 보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심기를 거슬렸다가 남몰래 죽어 나간 사람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도무지 어떤 게 진짜 모습인지 알기가 힘든 여자였다.

'성격이 좋다고는 못하겠지만.... 저렇게까지 화를 낸 적은 별로 없었는데.'

누구를 죽일 때도 우아하게 명령하던 그녀가 지셀만 엮이면 분노를 참지 못한다.

그런 형편없는 놈한테 당한 게 어지간히 참기가 힘든 모양이었다.

'입 닥치고 가만히 있자.'

지금 잘못 눈에 띄어 불똥이라도 튀었다간 아무리 베르나프라고 해도 곱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

아멜리아가 노기로 붉어진 눈으로 베르나프를 노려보았다.

"살쾡이 놈들, 그리고 다른 놈들도 전부 소집해."

"어쩌시려는 겁니까?"

"그 거지들이 룬스톤을 얻어서 어디다 쓰겠어? 팔 거 아냐! 습격해서 다 죽여 버리고 뺏어 오라고!"

베르나프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룬스톤을 운반하는 것이라면 경비가 만만치 않을 겁니다. 페르디움 쪽에서 움직이지 않고 상단을 영지로 부를 수도 있습니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테니까, 일단 애들부터 소집해. 주변의 산적들도 모두 움직일 준비 하고!"

"알겠습니다. 일단 진정하시지요."

베르나프가 만류했지만, 아멜리아는 쉬이 분노를 진정시키지 못했다.

"지셀, 반드시 죽여 주마. 룬스톤도 내가 차지하고 말겠어."

화창한 오후의 티타임은 지셀의 소식에 완전히 망가지고 말았다.

54화 싫으면 말고요. (1)

브리반트 영지의 남쪽 끝, 화려한 도시 한 가운데에 우뚝 솟아오른 거대한 탑을 본 용병들이 입을 떡 벌렸다.

"우, 우와... 여기가 적염의 마탑이구나...."

"나도 여기는 처음 와 봐."

"레이폴드보다 더 화려해 보이는데?"

"진홍의 마탑이 최고라더니, 겉보기에는 여기도 만만치 않은데?"

아무리 진홍의 마탑에 밀려났다 하더라도 마탑은 역시 마탑이었다.

거대하고 화려한 탑 주변에는 수많은 상점이 모여 있었다.

마법사들을 노리고 연 가게가 하나둘씩 늘다 보니 아예 도시가 되어 버린 것이다.

적염의 마탑에서 스스로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만든 경비 시스템이 마탑 주변과 브리반트 영지까지 지켜주고 있었다.

브리반트 영지가 이렇게 발전한 데는 그만큼 마탑 덕이 컸다.

브리반트 백작도 마탑주의 눈치를 보며 살 정도니 그 위세가 어마어마했다.

지셀은 여유 넘치는 태도로 주변을 둘러보면서도 속으로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대단하군.'

도시의 외관도 훌륭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험악한 용병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는데도 이들은 별로 무서워하지 않았다. 특별히 위협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이곳의 치안 상태가 얼마나 좋은지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의 의식 수준도 높고.

지셀도 용병왕 시절 타국에서 마탑이 있는 도시에 가 본 적이 있지만, 브리반트만큼 발전한 도시는 없었다.

'치안도, 도시 구조도 훌륭하지만... 사람들이나 거리가 유난히 깨끗하네. 마탑에서 뭔가 수를 쓴 건가?'

보통 마법사들은 제 연구에만 몰두할 뿐 다른 이들에게 혜택이 될 일은 잘 하지 않는다.

마탑 주변은 다른 구역보다 빠르게 발전하는 편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마법사들을 상대로 장사하면서 자연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다.

그러나 적염의 마탑 주변은 다른 마탑 주변보다 훨씬 더 깨끗하고 발전되어 있었다.

'소문처럼 마탑주가 결벽증이라 그런지도 모르겠군.'

적염의 마탑주가 주변이 더러운 걸 못 참는 성격이라 손을 썼을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었다.

아니면 영주 놀이에 심취해서 주변을 이렇게 발전시켜 놓은 걸 수도 있고.

어찌 됐건 앞으로 영지를 발전시키려는 지셀로서는 보고 배울 점이 많은 도시였다.

"와, 여기 엄청 잘사나 봐."

"집들이 전부 귀족들이 사는 저택 같은데?"

"길도 봐 봐. 완전히 작정하고 도시를 만들었어."

브리반트 사람들은 죄다 귀족이라도 되는 듯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좋은 향기를 풍겼다.

그들은 두리번거리며 걷는 용병들이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며 지나쳐 갔다.

평소였다면 당당하게 거리를 활보할 용병들도 왠지 그 분위기에 압도되어 쭈뼛거렸다.

"젠장, 우리 완전 촌놈 같잖아?"

용병들은 투덜거리면서도 여기저기 돌아보느라 바빴다.

세련되고 깨끗한 도시는 북부에서 부유한 영지로 손꼽히는 레이폴드에서도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한참을 구경하던 용병들의 귀에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북쪽에서 온 용병들인가? 옷 입은 것 봐. 촌스러워 죽겠네."

"왠지 냄새나는 거 같지 않아?"

"우리가 깨끗한 거지, 다른 곳은 다 저러고 살아. 불쌍해라. 쯧쯧."

"용병들이 뭐 하러 여기까지 왔을까?"

용병들은 창피해져서 얼굴을 붉혔다.

평소 같았으면 험악하게 인상을 쓰고 깽판이라도 쳤을 터다.

하지만 지금은 도시의 화려한 풍경과 사람들의 세련된 외양에 주눅이 들 대로 들어 차마 대거리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래도 성격이 불같은 용병은 있기 마련이다.

"에이 썅! 더럽게 시끄럽네! 죽고 싶어?"

켈베로스 용병단원 몇 명이 무기를 꺼내 들고 주위 사람들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삼삼오오 모여 떠들던 사람들은 깜짝 놀라 멀찍이 물러났다. 하지만 피하면서도 그다지 겁먹은 눈치는 아니었다.

"어머머, 별꼴이야. 왜 성질이래."

"못 배워서 그래, 못 배워서. 쯧쯧쯧."

"여기가 어디라고 저렇게 깽판을 치려고 해?"

"구경 두 번 했다가는 살인 나겠네."

켈베로스 용병단원 중 하나가 사람들의 반응에 이를 갈며 정말로 뛰쳐나가려 했다.

하지만 지셀은 단호하게 그를 제지했다.

"그만. 저런 말은 신경 쓰지 말고 조용히 움직여라."

"아니! 대장님! 저놈들이 우리를!"

"우리 촌놈들 맞잖아. 그냥 구경이나 해."

지셀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카오르가 그 뒤에서 처신 잘하라는 듯 눈을 부라렸다.

용병들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사람들은 자신들을 보면 겁에 질려 머뭇거리거나, 멀리 피해 다니곤 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우습게 보기만 하니 속이 끓어올랐다.

마음 같아서는 때려눕히기라도 하고 싶은데, 지셀과 카오르가 제지하니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일행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마탑까지 걸어갔다.

졸지에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된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그러나 막상 탑에 가까워질수록 용병들은 다시 입을 벌리며 감탄했다.

한눈에 담을 수도 없는 탑의 크기에 압도된 게 뻔히 보였다.

'아무튼 단순하기는.'

지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용병들의 뒤를 따라갔다.

한편, 마탑의 입구를 지키고 있는 문지기는 멀리서 다가오는 지셀 일행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단체 관광인가? 쯧쯧, 형편도 안 좋아 보이는데 잘도 놀러 왔군.'

관광부터 떠올린 이유는 단순했다. 종종 귀족들이 마법사들을 만나거나 탑을 구경하러 이 도시로 놀러 오곤 했기 때문이다.

사람 수가 많아 보이는 것도 한몫했다.

저렇게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몰려다니는 경우는 보통 두 가지였다. 하나는 관광 나온 귀족 일행, 다른 하나는 물건을 팔러 온 상단.

하지만 일행이 가까워질수록 문지기의 표정은 구겨져 갔다.

지셀 일행은 관광객이라기엔 옷차림이 너무나 허름했고 인상들도 좋지 않았다.

상대가 귀족이거나 큰 상단이었다면 당연히 방긋방긋 웃으며 맞아 줘야겠지만, 저런 놈들에게까지 표정 관리를 할 필요는 없었다.

자신은 비록 문지기에 불과하지만, 문지기야말로 마탑을 대표하는 얼굴이었다.

괜히 상냥하게 대했다가 거지 떼에게 우습게 보이면 마탑의 권위에도 흠이 날 것이다.

사실은 평민에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지만, 그의 뒤에 있는 마탑이라는 거대한 배경이 그의 어깨에 힘을 실어 주었다.

'그래도 내가 마탑에서 일하는데, 보통 사람은 아니지. 에헴.'

개로 태어나도 귀족의 개가 낫다고 하던가. 문지기가 딱 그 꼴이었다.

지셀과 용병들의 얼굴이 분간될 정도로 가까이 오자, 그 뒤에 잔뜩 끌고 온 수레들까지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문지기는 지셀 일행이 찾아온 목적을 알게 되었다.

'꼴에 뭘 잔뜩 싣고 오는 걸 보니 관광이 아니라 뭘 좀 팔러 온 모양이네.'

가끔 이렇게 용병이나 모험가들이 희귀한 물건을 구했다고 마탑에 팔러 오는 경우가 있었다.

지셀 일행처럼 단체로 찾아오는 경우는 드물긴 했지만, 아예 없는 일도 아니었다.

용병이나 모험가라면 저렇게 후줄근한 차림새인 것도 이해가 갔다.

'흐음, 수레가 많은 걸 보니 희귀하고 값나가는 건 아니다. 천으로 덮은 윤곽을 보면 목재는 아닌 거 같고... 역시 몬스터나 짐승들의 부산물이겠군.'

거기까지 추측한 문지기는 혀를 찼다.

적염의 마탑은 비록 지금은 2위로 밀려났지만, 그 전까지 1위로 꼽히던 마탑이다.

그만큼 돈도 많이 벌어들였고, 마법사들이 물건을 보는 눈도 까다로웠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사치스러웠다.

그런 면 때문에 결국 다른 마탑에 추월당한 거긴 하지만.... 아직은 옛 버릇이 남아 몬스터나 짐승의 가죽 등은 최상급 제품만 사들였다.

당연히 그런 물건을 납품하는 전속 상단도 따로 있었다.

용병들이 구해 온 것이라면 흠도 많고 품질도 별로 좋지 않을 것이다. 희귀한 물건이라면 몰라도, 흔한 재료는 굳이 용병들에게 살 이유가 없었다.

'돌려보내는 게 낫겠지.'

문지기는 단단히 마음을 먹고 지셀 일행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지셀은 마탑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말에서 내렸다.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가려는 그를 보고 벨린다가 기겁하며 잡아챘다.

"어디 가세요? 길리언 아저씨 시켜요!"

지셀이 뚱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보았다.

"꼭 그래야 해? 레이폴드에서도 결국은 내가 나섰잖아."

"그때는 그때고요! 처음부터 나서시면 안 된다니까요."

벨린다가 지셀을 꼭 붙잡은 채 길리언에게 눈치를 주었다. 길리언은 묵묵히 문지기에게 걸어갔다.

"이분은 페르디움의 대공자...."

문지기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길리언의 말을 잘랐다.

"안 사요."

"...뭐?"

"가져온 거 안 산다고요."

문지기는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귀족 일행에게 보일 법한 예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셀 일행을 용병 무리로 본 그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지셀이 그 뒤에서 팔짱을 낀 채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몰려다니니, 보는 사람마다 무시하기 일쑤였다.

용병왕 시절에는 지금처럼 대충 입고 다니고, 수하들마저도 기괴한 차림을 하고 다녔어도 아무도 무시하지 못했다.

용병왕을 상징하는 깃발 하나만 걸어 두면 알아서 모두 머리를 조아리거나 피했다.

하지만 용병왕은커녕 페르디움이라는 이름조차도 잘 알려지지 않은 지금은 차림새 그대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 참... 돈이 생기면 좀 꾸미긴 해야겠군.'

문지기를 탓할 생각은 없었다.

처음 보는 사람을 외견으로 판단하는 건 당연하니까. 용병왕 시절에야 깃발이 있으니 알아본 거고.

이해는 하지만... 그렇다고 문 앞에서 쓸데없이 시간을 질질 끌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결국 지셀은 앞으로 나섰다.

"문지기랑 실랑이하고 싶지는 않군. 마탑의 거래 담당자를 불러와라. 아니, 마탑주를 만나야겠다."

문지기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안 산다고요. 적염의 마탑은 아무 물건이나 사지 않아요. 거기다 탑주님을 만나겠다고요? 영주님도 마음대로 못 만나는 게 탑주님입니다."

길리언이 문지기의 무례한 언사를 참다못해 으르렁거렸다.

"문지기 주제에 건방지구나. 목숨이 두 개라도 되는 모양이지? 당장 불러오란 말이다."

그 기세에 찔끔 겁을 먹고 문지기가 뒤로 물러났다.

마탑의 문지기를 맡은 뒤로 자신에게 이렇게 험악하게 하는 사람이 없었기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정신을 차렸다.

'겁먹지 마라! 내가 마탑의 얼굴이다!'

마탑의 마법사 두어 명만 와도 이 거지 떼들을 쓸어 버릴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 여기가 어딘 줄 알고 행패야! 썩 물러나지 못할까!"

문지기가 발악하는 꼴을 보고 지셀은 한숨을 쉬었다.

'이래서야 오늘 안에 못 들어가겠는데.'

그가 말없이 카오르에게 손짓했다.

카오르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수레에서 룬스톤 조각 하나를 슬쩍 빼내어 지셀에게 다가왔다.

룬스톤이 몇 수레나 있다는 게 알려지면 주변이 시끄러워질 테니 조심한 것이다.

'그래도 단장이라는 건가. 눈치는 좀 있네.'

지셀은 내심 흐뭇해하며 룬스톤을 받아 문지기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마탑에서 일하고 있으니 이게 뭔지는 알겠지? 이걸 팔러 왔다."

문지기는 지셀이 들이민 돌조각을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수정 조각이 그를 홀리듯 은은히 빛을 내뿜었다.

문지기는 의아한 듯 미간을 찌푸리다 곧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룬스톤을 알아본 것이다.

문지기가 그대로 얼어 있자 지셀이 짓궂은 웃음을 지으며 다시 말했다.

"진짜로 안 살 거야? 진짜? 나 그냥 가도 돼?"

그제야 문지기는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가뜩이나 요새 진홍의 마탑에 밀려서 마법사님들이 심기가 매우 불편한 상태다.

그런데 저만한 양의 룬스톤을 가져온 손님을 내쫓았다는 게 알려지면 문지기 자리가 아니라 모가지가 날아갈 게 분명했다.

문지기는 기겁하며 손을 휘저었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아니 일단 그냥 들어오세요! 제발요!"

수레에 실린 나머지 짐도 모두 룬스톤일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지금 문지기에게는 그런 걸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열렬하게 환대하는 문지기의 옆을 지나며 지셀이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여기 문지기가 일 잘하더라고 마탑주한테 꼭 전해 줄게."

55화 싫으면 말고요. (2)

마탑 로비에 들어선 용병들은 신기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넓은 로비는 생전 처음 보는 식물들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조각상들이 곳곳에 놓여 있어, 이게 마탑인지 부유한 귀족의 성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용병들이 입을 벌린 채 주변을 구경하는 꼴을 보고, 로비를 지키고 있던 견습 마법사 실뱅은 인상을 찌푸렸다.

'쯧, 뭐야? 바닥 더러워지게 웬 거지 떼들이 이렇게 몰려왔어?'

적염의 마탑 출신 마법사다운 반응이었다.

실뱅도 처음부터 이런 성격이었던 건 아니다. 적염의 마탑에서 지내다 보니 탑의 분위기에 물든 것이다.

'문지기 놈이 겁먹고 들여보낸 건가?'

행색이 비루하기는 했지만, 지셀 일행은 다들 허리춤에 무기 하나 정도는 차고 있었다.

마탑의 문지기라고 해도 마법을 쓰지 못하는 일반인일 뿐이니, 떼 지어 밀고 오는 자들을 막기는 어려웠으리라.

실뱅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저 비렁뱅이들은 그가 나서서 처리해야 할 모양이었다.

실뱅이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고 용병들에게 다가가자, 문지기가 다급한 표정으로 그에게 달려왔다.

"쯧쯧, 아무나 들이지 말라니까. 숫자가 많다고 그리 쫄아서야, 어찌 북부 최고인 적염의 마탑을 지키는...."

실뱅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지기가 그에게 귓속말했다.

실뱅은 눈을 가늘게 뜬 채 몇 번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지셀에게 직각으로 허리를 숙였다.

"귀하신 분이 오셨군요! 어디서 오신 분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지셀 페르디움, 페르디움의 대공자다."

실뱅은 감탄 어린 기색을 비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페르디움의 대공자이셨군요! 고귀하고 용맹한 페르디움의 명성은 익히 들어 왔습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범상치 않은 분이라 생각했는데 역시 제 눈이 틀리지 않았습니다!"

말은 번지르르하게 했지만, 사실 실뱅은 페르디움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몰랐다.

일단 귀족이고, 귀한 물건을 가져왔으니 아첨부터 떨고 본 것이다.

지셀도 그걸 알기에, 꿀이 떨어지도록 간드러진 아부에도 넘어가지 않고 그저 웃었다.

"룬스톤을 팔러 왔는데 양이 좀 많아. 책임지고 거래를 이어 갈 수 있는 고위 마법사를 만나고 싶다. 웬만하면 마탑주를 직접 보고 싶군."

"기별을 넣겠으니 잠시만 기다려 주시지요."

실뱅은 바로 고개를 숙이고 지셀 일행을 접견실로 안내했다.

그는 접견실을 나서자마자 하녀들에게 단단히 경고했다.

"손님들이 불편해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모셔라."

몇 번이나 강조한 뒤, 실뱅은 허겁지겁 마탑주에게로 달려갔다.

지셀 일행은 수레를 몇 대나 끌고 왔다. 그게 다 룬스톤이라면 엄청난 양이었다.

적염의 마탑이 최고로 꼽히던 시절, 거래 상단에서 구해 오던 룬스톤도 이 정도로 많지는 않았다.

평소라면 말단 중의 말단인 실뱅이 마탑주를 직접 만나는 건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지금은 일일이 중간 단계를 거쳐 가며 보고를 올릴 시간이 없었다. 지셀이 언제 마음을 바꿔 돌아갈지 몰랐다.

'저 정도 룬스톤이라면 혼내시진 않겠지.'

실뱅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마탑주에게 달려갔다.

그즈음, 탑의 최상층에서는 심각하게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룬스톤이 다 떨어져 간다고요?"

머리는 살짝 벗어졌지만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중년 남자가 심기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습니다. 이대로면 진홍의 마탑과 격차가 더 벌어질 겁니다."

흰 수염을 길게 늘어트린 노인이 답했다. 중년인은 탄식을 내뱉었다.

"허, 어쩌다 이 지경까지...."

우울해 보이는 이 남자는 바로 적염의 마탑주이자 6서클 마법사인 휴베르트다.

그는 육십이 넘은 나이에도 높은 마력 덕분에 젊음을 오래 유지하는 편이었다.

외모를 꾸미는 데에도 관심이 많기에 나이에 비해 젊어 보였다.

하지만 요새 들어 그의 얼굴에는 주름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었다.

"뭐 좋은 방법이 없겠습니까?"

휴베르트가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그의 양옆에 앉아 있는 다섯 장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휴베르트는 답답하다는 듯 큰 소리로 재촉했다.

"아니, 이래서야 진홍의 마탑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그놈들 우리보다 밑이었다고요, 밑! 자존심 상하지도 않습니까?"

장로들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며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아니, 그러니까 귀족들하고 좀 적당히 놀고 수련 좀 하시지.'

'그쪽은 마탑주가 7서클이라 잘 나가는 거잖아. 우리 마탑주는 6서클인데 어떻게 이겨?'

'매일 치장하고 사치 부리는 데에만 신경 썼으면서 이제 와서 난리는....'

마법사들은 애초에 개인주의적 성향이 무척이나 강한 족속들이다.

그렇기에 남 탓도 매우 잘한다. 아니, 일단 남 탓부터 하고 본다.

진홍의 마탑에 밀려난 것도, 장로들은 마탑주의 경지가 부족해서 밀렸다고 생각했다.

반면 마탑주는 적염의 마탑 마법사들이 전체적으로 나태해서 밀린 거라고 봤다.

결국 장로 하나가 손을 들며 말했다. 같은 탑에 소속되어 있는데 서로 책임만 미루고 있을 수는 없었다.

"당연히 마법사들의 실력을 올려야겠죠. 누가 이 북부에서 진정한 정통인지 확실하게 보여 줘야 합니다."

적염의 마탑과 진홍의 마탑은 같은 화염계 마법 학파로, 오랜 시간 경쟁해 온 관계였다.

마법 계통도 비슷하고, 같은 북부에 근거지를 두고 있으니 그들이 라이벌이 되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아니, 그러니까 어떻게 끌어올릴 거냐고요! 모두 맨몸으로 실험할 겁니까?"

마법사의 실력을 가늠할 때는 얼마나 많은 마법을 발동할 수 있는지를 기준으로 삼는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술식을 해석하고 의지를 실어야 마법이 발동되는데, 자칫 잘못하면 그냥 마법이 폭주해 몸이 터져 버리거나 불구가 될 수 있었다.

당연히 맨몸으로 연구를 할 수는 없고, 그 충격을 대신 받아 주는 룬스톤이 꼭 필요했다.

"룬스톤이 다 떨어지면 수련도 제대로 못 할 거 아닙니까!"

"...그건 그렇죠."

룬스톤이 있어야 마법사의 안전이 보장된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룬스톤을 쓰면 마력을 쉽게 늘릴 수 있고, 그 자체로도 보조 마력으로 쓸 수 있기에 마법사에게는 필수 재료라 할 수 있었다.

"우리가 거지입니까? 돈이 없어요? 몸으로 때우는 건 가난한 마법사들이나 하는 거고!"

"진홍의 마탑주도 맨몸으로 수련을...."

"그놈 얘기는 하지 말고! 그리고 그게 진짜인지 어떻게 알아! 룬스톤만 있으면 나도 금방 7서클 올라갈 수 있다고!"

휴베르트는 흥분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장로들은 겉으로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지만, 속으로는 그를 잔뜩 흉보기 시작했다.

'염병, 그게 쉽나? 말처럼 되면 역대 마탑주들도 전부 7서클에 올랐겠지.'

'솔직히 이제 진홍의 마탑이 왕국 제일이 되는 건 시간문제 같은데.'

델파인 공작가에 있다는 전속 마법사를 제외하면 왕국에서 7서클에 오른 자는 진홍의 마탑주인 델무드가 유일했다.

장로들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휴베르트는 이를 악물며 씩씩거렸다.

'아오! 룬스톤만 많으면 나도 7서클에 오를 수 있다고! 델무드 따위도 됐는데 내가 못 할까!'

휴베르트는 델무드와 비교당할 때마다 민감하게 반응했다.

거지 같은 델무드는 스승에게 구박받고 마탑에서 생활비도 못 받으면서도 7서클의 경지에 올랐다고 한다.

최고의 환경에서 듬뿍 지원받으며 후계자로 키워진 휴베르트로서는 열등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장로 한 명이 휴베르트의 눈치를 살피다 헛기침하며 말을 돌렸다.

"그런데 상단들에게 물어도 하나같이 물량이 없다고 합니다. 진홍의 마탑에서 가격을 엄청 올려놓기도 했지만... 그 가격에 맞춰 준다고 해도 무조건 없다고 하니 룬스톤을 구할 방법이 없습니다."

적염의 마탑과 거래하던 상단들 대부분은 룬스톤 공급을 줄이거나 아예 멈춰 버렸다.

룬스톤이 귀한 물건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요즘 들어 유난히 룬스톤 물량이 적어졌다.

"하아, 왜 이렇게 된 거지? 왜 갑자기 이렇게 룬스톤을 구하기가 힘들어진 거냐고!"

그들은 평생 마탑에서 마법만 익히며 살아온 터라 세상 물정에 어두웠다. 그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들을 쓰며 지내 왔을 뿐이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도 어디가 어떻게 잘못됐는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휴베르트는 양 손바닥으로 얼굴을 비비며 피곤한 음성으로 물었다.

"아티팩트 제작은 어떻게 돼 가고 있습니까?"

"룬스톤이 부족해서 그것도 이제 조금 힘들 거 같습니다."

마법 도구와 스크롤을 만들어 파는 건 마탑의 가장 큰 수입원이다.

룬스톤이 부족하면 마법 도구들도 만들지 못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휴베르트는 울고 싶어졌다.

본래 최고로 손꼽히던 적염의 마탑이, 자기 대에서 북부 제일이라는 칭호를 뺏긴 것도 모자라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이러다가는 정말 마탑이 아니라 스크롤 상점이 될 판이었다.

"룬스톤을 구할 방도가 정말 없습니까?"

"다른 지역까지 가서 소량으로 구해 오는 게 전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람도 많고 써야 할 곳도 많지 않습니까?"

"진홍의 마탑도 사람이 많지 않습니까? 거기가 다 쓸어 가는 게 맞죠?"

"그런 소문도 있고 대부분 다 그곳에 판다고는 하는데...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그쪽도 구하기 힘드니까 가격을 높여서라도 사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쪽보다 돈을 더 주겠다고 해 보는 건 어떻습니까? 우리 돈 많잖아요? 아직은 자금 여유가 있을 텐데."

"아니, 그냥 물건이 없다니까요? 씨가 말랐습니다, 씨가. 그리고 지금도 웃돈 주고 사 오느라 돈도 엄청나게 쓰고 있고요."

그들은 진홍의 마탑이 룬스톤을 쓸어 가는 건지, 아니면 정말 물량이 부족해진 건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최고라는 자만심에 빠져 나태하게 산 이들의 현주소였다.

"돈은 점점 떨어져 가는데... 룬스톤은 구하지 못하고 있고... 그러니 제자들의 수준은 점점 떨어지고... 허허허. 이게 뭐람?"

마탑주인 휴베르트조차 겁나서 맨몸으로 마법 실험을 못 하는데 누가 하겠는가?

이 상태로 가다가는 더 발전하기는커녕, 의미 없이 현상 유지만 하다 자멸할 게 분명했다.

"하아...."

"후우...."

"흐어...."

똑똑하지만 멍청한 마법사들이 전부 고개를 숙이고 한숨만 내쉬었다.

"유능한 상인을 포섭해야 합니다. 이런 건 그냥 전문가에게 맡깁시다."

한 장로가 제안했다. 휴베르트를 비롯한 나머지 장로들도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세상의 이치를 연구하고 모든 진리를 안다고 자부했지만, 상행위에는 영 재주가 없었다.

"하아, 진작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선대에는 마법사뿐만이 아니라, 상재가 뛰어난 자도 마탑에 있었다.

하지만 최고라는 명성을 얻은 후에는 자만에 빠져 그런 인물을 중용하지 않았다.

알아서들 몰려와 가격을 좋게 쳐 주니 그저 돈 계산하는 사람 정도만 있어도 충분하다고 여긴 것이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전문가를 영입해야 한다는 점에는 모두가 동의했다.

"그러면 일단 괜찮은 인물을...."

쿵쿵쿵!

그때, 밖에서 누군가가 소란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휴베르트가 짜증을 억누르며 말했다.

"회의 중이다. 나중에 오거라."

쿵쿵쿵!

"회의 중이라니까!"

쿵쿵쿵!

몇 번이고 물러나라 했지만, 상대는 계속 문을 두드렸다. 휴베르트는 이를 갈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으드득, 어떤 놈인지 대가리를 태워 버려야겠군."

"좀 들어가겠습니다!"

벌컥!

계속 문을 두드리던 상대는 허락도 없이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휴베르트는 그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너 누구야? 누가 들여보냈어? 경비병은 뭐하고? 일단 머리부터 대. 머리털을 태워 주마."

마탑은 도제 방식으로 운영되어 위계질서가 대단히 엄격하다. 마탑주가 말단 마법사를 볼 일이 없었다.

당연히 휴베르트도 실뱅을 알아보지 못했다.

실뱅은 서릿발 같은 분위기에 눌려 덜덜 떨며 말했다.

"루, 룬스톤을 팔겠다고 누가 찾아왔습니다."

"뭐? 룬스톤?"

휴베르트를 비롯한 장로들이 고개를 쑥 내밀며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실뱅을 바라보았다.

마탑주도 기세를 가라앉혔지만, 실뱅은 여전히 긴장을 풀지 못했다.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을 느끼고 그는 마른침을 삼켰다.

"다른 상단처럼 조금 가져온 게 아닙니다. 양이 엄청납니다. 수레가 열 대도 넘는데 모두 룬스톤으로 꽉 차 있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벌떡 일어났다.

56화 싫으면 말고요. (3)

마탑주와 다섯 장로는 허겁지겁 지셀을 만나러 내려왔다. 평소라면 자존심을 내세우며 미동도 안 했을 테지만, 지금은 사정이 급했다.

그러나 휴베르트는 막상 로비로 내려온 뒤에는 급한 티를 내지 않고, 느긋하게 지셀에게 다가섰다.

그 와중에도 마지막 자존심은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마탑주가 고개를 꼿꼿하게 쳐들며 지셀에게 말했다.

"자네가 룬스톤을 판매하러 온 사람인가? 나는 적염의 마탑주 휴베르트라고 하네. 6서클 마법사지."

6서클이라면 어느 나라에서든 백작급, 또는 그 이상 직위의 고위 귀족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거기다 적염의 마탑주이기까지 하니, 그 위세가 보통이 아니었다.

지셀 또한 그의 하대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지셀 페르디움이라고 합니다. 룬스톤을 판매하러 왔습니다."

"크흠, 그래. 그러면...."

휴베르트는 말을 이으며 지셀의 일행들을 훑어보다 무심코 입을 닫았다.

'...뭐지? 산적들인가? 사기 치러 왔나?'

북쪽에 페르디움이라는 가난한 영지가 있다는 것 정도는 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가난한 영지 출신이라고 해도, 지셀 일행은 전혀 귀족 수행단처럼 보이지 않았다.

산적들 저리 가라 할 정도로 거칠고 흉악하게 생긴 놈들만 가득했다.

'귀족 맞아? 도대체 이 새끼들은 뭐지?'

특히 키가 큰 붉은 머리 놈은 고개를 삐딱하게 하고 서서 시건방진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싸우자는 건가?'

이런 하찮은 도발을 생전 처음 경험해 본 휴베르트는 당황하며 고개를 돌렸다.

머리가 하얗게 세어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남자는 그나마 멀쩡해 보였지만, 나머지 놈들은 행색이며 태도가 죄다 천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런 품위 없는 놈들을 마탑에 들인 건 적염의 마탑 역사상 처음이었다.

휴베르트는 다시 지셀을 뜯어보았다. 그나마 얼굴도 멀끔하니 잘생겼고, 제법 총기도 있어 보이는 게 일행 중에 제일 괜찮기는 했다.

하지만 한 영지의 대공자라기에는 옷차림도 꾀죄죄하고, 저런 천박한 자들과 같이 다니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휴베르트는 옆에 있는 장로에게 살짝 귓속말로 물었다.

"근처에 새로 결성된 산적단이 있습니까?"

"글쎄요.... 이 근처에는 없을 텐데요."

"그렇죠? 우리가 다 쓸어 버렸잖아요."

"네, 싹 정리했습죠."

마탑주는 슬쩍 미간을 좁혔다.

'그럼 저놈들은 대체 어디서.... 진짜 페르디움에서 온 놈들인가?'

휴베르트는 찝찝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크흠흠, 페르디움 대공자라고? 그런데 영 일행들 모습이.... 페르디움에서는 병사들 복장이 이런가? 그 동네는 이런 게 유행이야?"

"아닙니다. 이들은 저와 함께하는 용병들입니다."

"아.... 산적이 아니라 용병이었어?"

그제야 휴베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병사가 적은 가난한 영지에서는 영주나 그 직계가 외유할 때만 잠깐 용병을 고용하는 일도 많았다.

"그래, 어쨌든 진홍의 마탑이 아니라 이곳으로 오다니 참으로 잘 생각했네."

겉으로는 싹싹하게 인사를 건네면서도 휴베르트는 속으로 짜증을 내리눌렀다.

예전 같았으면 마탑주인 자신이 이렇게 직접 거래에 나서기는커녕, 얼굴을 비치지도 않았을 것이다.

북부에서 가장 잘나가는 마탑의 탑주가 한낱 장사치와 실랑이하는 건 품위가 떨어지니까.

'내가 직접 나선 값은 톡톡히 받아 내고 말겠다.'

마탑주는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일단... 양이 얼마나 되는지 확인을 좀 하겠네."

그는 수레에 쌓인 룬스톤을 대충 훑어보고는 별거 아니라는 듯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많지는 않군. 난 또 엄청 많다길래 보러 왔지. 어휴, 괜히 왔네."

사실 심장이 떨릴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장로들은 환호하려다가 휴베르트를 보고 잽싸게 근엄한 척 표정을 관리했다.

"크흐흠, 정말 생각보다 많지는 않군요. 품질도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고...."

"그래도 여기까지 온 성의가 있으니 전부 사 주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럽시다. 젊은 친구가 여기 아니면 이걸 다 어디서 팔겠습니까? 흠흠."

"아무렴요. 우리 아니면 어디 가서 사기나 당할 테지요. 세상이 참 무서워요. 허허허."

한마디씩 주고받는 장로들을 보고 용병들은 얼굴 가득 비웃음을 띠었다.

카오르는 고개를 돌리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연기들 진짜 존나 못하네."

휴베르트를 비롯한 마법사들은 모두 얼굴이 벌게진 채 콧구멍을 벌렁거리고 있었다.

심지어 어떤 장로는 호흡이 가쁜지 연신 숨을 내쉬며 심장에 손을 가져다 대고 있었다.

그런 꼴을 보고도 연기인 줄 모르는 게 이상했다.

용병들도 삼삼오오 모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야, 마탑도 별거 없다. 딱 봐도 가격 후려치려고 쇼하고 있네."

"그러니까 말이야. 원래 이런 데는 이것저것 안 따지고 시원시원하게 거래해 주지 않나?"

"사람 사는 곳 다 똑같지. 품위 있는 척하더니, 쟤들도 그냥 멋만 내는 거라니까."

별별 사람을 다 보고 살아온 용병들의 눈에 마법사들의 어설픈 연기는 뻔하다 못해 그 속내가 투명하게 비칠 지경이었다.

그러나 휴베르트는 용병들이 떠드는 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흥분해 붉어진 얼굴을 식히려는 듯 숨을 크게 내쉬었다.

"따로 자세하게 이야기를 나눠 볼까? 따라오게나."

지셀과 벨린다, 길리언이 마법사들을 따라 마법진 위에 올라섰다.

맨 뒤에서 쫓아가던 카오르는 마법진에 올라서기 전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어이, 눈깔들 똑바로 뜨고 있어. 저거 하나라도 없어지면 훔쳐 간 놈, 내버려 둔 놈 다 대가리를 깨 버릴 테니까."

마법사들은 천박한 표현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용병들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카오르까지 올라선 뒤, 마법진이 몇 번 깜빡이자 지셀 일행은 탑 최상층으로 이동되었다.

이 마법진을 유지하는 데에도 룬스톤이 쓰인다. 룬스톤의 쓰임새가 얼마나 다양한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지셀은 소리 없이 미소를 지으며 마법사들의 뒤를 따랐다.

'저만한 양이면 눈이 돌아갈 만도 하지. 특히 당신들은.'

전생에 지셀이 얻었던 자료 중에는 적염의 마탑에 관한 자료도 있었다.

적염의 마탑은 진홍의 마탑에 밀려 북부에서 만년 2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 영향력도 줄어들 대로 줄어들어, 마탑주는 후에 화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세상 누구보다 이성적이라는 마법사가 화병으로 죽은 것이다.

비록 아직은 전생만큼 상황이 나쁘진 않지만, 그렇다고 좋은 것도 아니었다. 앞으로는 더욱더 안 좋아질 거고.

'더 늦게 왔으면 좋았을 텐데.'

아마 지금보다 더 늦게 왔다면 마탑주는 지셀에게 무릎을 꿇는 것도 모자라 머리까지 조아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셀도 지금 급박한 상황이라 더 늦게 찾아올 수는 없었다.

'그래도 속옷까지 모두 벗어 줄 각오는 해야 할 거다. 후후후.'

도착한 곳에는 접견실이 그랬듯 화려한 의자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다과도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지셀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나머지 세 사람은 그 뒤에 자리를 잡고 섰다.

그리고 휴베르트와 다섯 장로가 지셀 앞에 주르륵 앉았다.

"소개하지. 우리 마탑의 장로들일세. 모두 5서클 마법사로 적염의 마탑을 이끄는 핵심 인물들이라 할 수 있지."

휴베르트의 말이 끝나자 장로들은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각자 자기 이름을 말했다.

마치 '우리 누군지 알지?'라는 듯한 태도였지만 안타깝게도 지셀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렇군요. 잘 부탁드립니다."

그의 당당한 태도에 장로들은 조금 불편한 듯 얼굴을 굳혔다.

보통 이런 애송이들은 자신들을 만나면 허리까지 굽히며 아부를 떨곤 했는데, 지셀은 전혀 그럴 낌새가 없었다.

장로 중 하나가 비웃듯 물었다.

"페르디움 영지라면 북쪽의 가난한 영지 아닌가? 그런 곳에서 룬스톤을 어떻게 구해 온 거지? 거기 밥도 제대로 못 먹지 않나?"

무시하는 듯한 말에 벨린다는 바로 인상을 구겼지만, 지셀은 그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운이 좋았습니다. 그나저나 모두 5서클이라니 대단하시군요."

보통 영주들이 전속 계약을 맺는 마법사가 4서클이다.

장로 다섯 명이 모두 5서클이라면 그만큼 강한 마탑이라는 뜻이다.

휴베르트와 장로들이 자부심 넘치는 표정을 짓다가, 지셀이 말을 잇자 얼굴을 왈칵 일그러트렸다.

"역시 북부에서 두 번째라 불릴 만한 저력이 있는 곳입니다. 하하하."

'으으, 이 애송이 새끼가.'

자존심을 긁는 발언에 휴베르트가 이를 갈았다.

하지만 지셀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생글생글 웃으며 순진한 표정을 지었다.

괜히 따져 봐야 마탑의 위신만 깎일 게 뻔히 보였다. 휴베르트는 타는 속을 식히려고 깊이 심호흡했다.

"크흠, 다른 영지에서 와서 잘 모르는 모양이군. 그건 그냥 소문일 뿐이야. 우리가 여전히 북부 제일의 마탑일세."

"아, 그렇습니까? 뭐, 그렇다고 치지요."

뒤에서 카오르가 큭큭 소리를 내며 웃었다. 벨린다는 소리 없이 손으로 입을 가렸지만, 눈매가 잔뜩 휘어 웃는 티가 빤히 났다.

오직 길리언만이 처음처럼 무심한 표정으로 미동도 없이 서 있을 뿐이었다.

휴베르트와 장로들이 예의 없는 두 사람을 노려봤다.

하지만 두 사람은 오히려 어깨를 으쓱이며 뭐 어쩔 거냐는 듯 뻔뻔한 표정을 지었다.

'이 예의도 없는 꼴통들 같으니라고.'

마법사들은 역시 가난하고 못 배운 놈들이라 품위가 없다고 생각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수준 안 맞는 놈들과 괜히 말을 더 섞어 봤자 좋을 건 없었다.

"그래, 쓸데없는 얘기는 이쯤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얼마에 팔 생각인가? 참고로 난 바가지를 정말 싫어해. 날 무시하는 거잖나. 내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소문은 들어 봤겠지?"

휴베르트는 일단 상대의 기세를 꺾으려고 일부러 위협적으로 말했다.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셀이 가져온 룬스톤을 모두 살 생각이었다.

이대로 계속 룬스톤을 구하지 못하면 영원히 진홍의 마탑을 이길 수 없었다.

'반드시 모두 확보해야 해. 진홍의 마탑에 조금이라도 굴러 들어가는 꼴은 절대 못 본다.'

그 정도 룬스톤이면 마법 도구를 만들어 팔아도 이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전에, 자신을 비롯해 마탑에 속한 마법사들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다.

'저 룬스톤은 전부 우리 거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룬스톤을 확보하겠다는 생각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욕망에 이글거리는 마법사들의 눈빛을 보며 지셀은 피식 웃었다.

"시세의 두 배는 받아야겠습니다."

"뭐?"

마탑주가 인상을 구겼다. 바가지를 싫어한다고 말했는데도 감히 대놓고 바가지를 씌우려고 하다니.

"젊은 귀족이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군. 내가 방금 바가지를 매우 싫어한다고 말했을 텐데? 내 말이 우습게 들리나?"

휴베르트가 으르렁거리자 다른 장로들도 화를 냈다.

"감히 이곳이 어디인 줄 알고!"

"페르디움 따위가 적염의 마탑을 무시하는 거냐!"

마법사들이 인상을 쓰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셀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두 배 반."

마법사들은 잠깐 어안이 벙벙한 채 지셀을 보다가 곧 크게 흥분해서 외쳤다.

"이놈! 그따위 하찮은 술수가 통할 것 같으냐!"

"어찌 이런 망발을...!"

"정녕 끝을 봐야겠는가!"

마법사들은 이를 악물고 손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지셀은 그들을 쓱 스쳐보고는 다시 말했다.

"세 배."

"...."

그쯤 되니 마법사들은 모두 입을 닫았다. 왠지 입을 여는 순간 지셀이 값을 또 올릴 거 같았다.

탑주와 장로들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못 한 채 무시무시한 눈으로 지셀을 노려만 보고 있었다.

지셀을 수행하는 세 사람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룬스톤이 아무리 귀하다 한들 시세의 세 배나 주고 살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 돈을 주고 살 바에는 그냥 상단을 찾아가 사도 될 것이다.

물건을 팔겠다고 며칠이나 걸려 이곳까지 왔는데, 팔 생각이 없는 듯 괴상하게 행동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벨린다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또 도련님의 나쁜 버릇이 도진 건가? 마법사들이 오만해서 삐진 걸지도.'

그녀는 옆에 선 길리언과 카오르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은 지셀을 만류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저 주인의 뜻을 따르겠다는 목석같은 남자와, 재미있을 거 같다고 낄낄대는 망나니를 보며 벨린다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정말, 도련님 생각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지!'

벨린다가 고민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지셀은 잠시 기다리다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휴베르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일어나...."

"거래할 생각이 없으신 거 같아서요. 얼른 진홍의 마탑으로 가 봐야죠. 요새 그곳이 돈도 잘 벌고 룬스톤 가격도 잘 쳐준다고 하더라고요."

그 말을 끝으로 지셀이 성큼성큼 문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굴이 창백해진 휴베르트가 다급히 지셀을 붙잡았다.

"에헤이! 젊은 사람이 왜 이렇게 성격이 급해? 내가 바가지를 싫어한다고 했지, 바가지를 안 쓰겠다고 한 건 아니잖아?"

마탑주는 그렇게 말하며 잽싸게 문을 막아섰다.

지셀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뜯어보다 여유롭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러시다면야. 좀 더 얘기해 볼까요?"

지셀이 우아하게 다시 자리에 앉았다.

휴베르트는 표정이 급격하게 우울해졌다. 그 옆에 있는 장로들도 안절부절못하며 어쩔 줄 몰랐다.

적염의 마탑이 처한 상황을 전혀 모르는 벨린다는 그들이 쩔쩔매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왜 도련님이 하자는 대로 하는 거야? 늙은이들이 죄다 치매가 걸렸나?'

방 안에 지셀의 여유 만만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 그러면 세 배에 모두 사시겠습니까?"

57화 싫으면 말고요. (4)

휴베르트가 장로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장로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표정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젠장, 쓸모없는 것들!'

상리에 밝은 이가 없으니 이런 거래를 이끌 사람도 없었다.

"젊은 친구가 제법 강단이 있군. 하지만 거래란 게 원하는 대로만 되는 게 아닐세. 여기까지 찾아온 성의도 있고 우리도 편하게 거래할 수 있으니 처음에 말했던 두 배를 주도록 하지. 이 정도면 충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셀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고하세요."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 거라는 말이었네!"

"그렇습니까? 제가 큰 오해를 했군요."

휴베르트와 장로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울상을 지었다.

룬스톤은 본래도 값이 만만치 않은데, 그 세 배라면 엄청난 돈을 써야만 했다.

아무리 돈이 많은 마탑이라 하더라도 그 정도 돈이 한 번에 나가면 기둥뿌리가 뽑혀 나갈 것이다.

― 누가 좀 뭐라고 해 봐! 방법 없어?

― 또 간다고 하면 어쩌려고요!

― 저거 그냥 미친놈 아닙니까?

휴베르트와 장로들은 한참 동안 눈짓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지셀은 여유 있게 기다려 주었다. 어차피 이미 결론은 난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승자로서 배려해 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결국 휴베르트는 다 죽어 가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네. 세 배에 전부 사도록 하지."

벨린다와 길리언, 카오르는 놀라서 입을 벌렸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무자비한 거래가 정말로 성공하다니.

하지만 지셀은 당연한 결과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때를 잘 맞추신 겁니다."

"잘 맞추기는 쥐뿔...."

휴베르트는 일그러지는 표정을 감추려고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이 젊은 놈의 수작질에는 넘어가고 싶지 않았지만,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다.

다른 장로들도 입맛만 다실 뿐, 탑주의 결정을 말릴 생각도 못 했다.

지셀은 똥 씹은 표정을 짓고 있는 마법사들을 보며 속으로 미소 지었다.

'지금 좀 비싸게 사는 게 나을 겁니다. 나중에는 더 비싸질 테니까요. 화병으로 죽는 것보다는 낫죠.'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시세의 다섯 배를 불러도 룬스톤을 구할 수 없게 된다.

진홍의 마탑이 대부분의 상단과 손잡고 유통을 꽉 막아 버리기 때문이다.

휴베르트는 후에 이 사실을 알고 화병을 얻어 쓰러졌다.

'어쨌든 돈은 충분히 구했군.'

마탑이 처한 상황과 그 미래를 마탑보다도 잘 아는 지셀이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지셀로서는 나름 합리적인 수준의 조건인 셈이다.

"돈은 바로 준비해 주겠네. 지금 가져온 룬스톤은 적염의 마탑이 모두 구매하도록 하지.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게."

휴베르트는 빨리 돈을 주고 지셀 일행을 내쫓고 싶은 티를 풀풀 냈다.

하지만 지셀의 조건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직 조건을 다 말하지 않았습니다."

"뭐?"

휴베르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파는 쪽에서 값을 불렀고, 사는 쪽이 동의했다. 돈만 주고받으면 끝나는 일인데 뭐가 더 남았단 말인가?

지셀이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추가로 마법사 열 명을 페르디움 영지에 파견해 주십시오. 기한은 일 년."

"마법사?"

"네, 3서클 마스터 이상으로 보내 주셔야 합니다."

전속 마법사가 없는 영지에서는 간혹 마탑에 마법사를 파견해 달라 요청하곤 한다.

마탑에서는 그 대가로 엄청나게 많은 돈을 받았다.

마법 도구나 스크롤을 판매하는 것만큼 큰돈이 들어오지는 않지만, 마법사를 파견하는 것도 마탑의 주요 수입원 중 하나였다.

"얼마나 낼 건가? 우리 마법사들은 아주 비싼 몸들일세."

뜯긴 돈을 다시 받아 낼 수 있다는 기대로 휴베르트가 눈을 빛냈다.

건방지게 자신들에게 바가지를 씌운 귀족에게 룬스톤 이상의 가격을 받아 내서 손해를 메꿀 참이었다.

하지만 지셀은 휴베르트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독했다.

"아, 뭔가 오해하신 모양입니다. 시세의 세 배에, 마법사 파견까지 포함한 게 룬스톤 값입니다. 하하하."

"뭐라고? 이, 이 미친놈이...."

얼굴이 시뻘게진 휴베르트가 뒷목을 부여잡고 비틀거렸다.

"탑주님! 이놈이 진정 저희를 우습게 본 모양입니다!"

"도무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이건 모욕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장로들도 목에 핏대를 세우며 언성을 높였다.

험악한 분위기에 길리언은 조용히 허리에 찬 검에 손을 가져갔다.

흥미롭다는 듯 구경만 하고 있는 카오르나 지셀의 뒤통수를 노려보는 벨린다와는 딴판인 모습이었다.

지셀이 공격받으면 바로 대응할 생각이었다.

세 사람이 그러거나 말거나 지셀은 다시 한번 자신의 거래 조건을 읊었다.

"시세의 세 배, 덤으로 3서클 마스터 이상의 마법사 열 명 파견. 이게 제가 원하는 조건입니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그런 소리를 지껄여! 마법사를 덤으로 얹어 달라니, 내 생전 그런 거래는 본 적도 없다!"

"거참 이상한 분이네. 그렇게 싫으시면 관두고요."

지셀은 다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래도 나름 제가 생각해 드린다고 적염의 마탑에 먼저 왔는데, 좀 서운하네요. 어쩔 수 없죠. 진홍의 마탑에서는 파견해 주시려나."

휴베르트는 너무 열 받아서 눈물이 다 날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알면서도 당해 줄 수밖에 없었다. 황급히 달려가 지셀 앞을 막아섰다.

"에헤이! 젊은 사람이 왜 이렇게 성격이 급해!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그냥 그런 거래를 본 적이 없다, 처음 본다 이거지! 앞으로 보면 되는 거 아닌가!"

"제가 또 오해했군요. 성격이 좀 급해서 그렇습니다."

지셀이 히죽 웃으며 다시 자리에 앉아 우아하게 다리를 꼬았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이길 자신이 없다.'

휴베르트는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잘 보이려 애쓴다. 그런데 이 건방진 놈은 마탑이고 나발이고 알 바 아니라는 듯 굴고 있었다.

'이거 진짜 미친놈 아니야? 분명 오늘만 사는 놈일 거야. 진짜 룬스톤이 부족하지만 않았어도 그냥 머리를 태웠을 텐데!'

하지만 자존심을 세우자고 그냥 돌려보낼 수도 없었다.

'저 많은 룬스톤이 진홍의 마탑에 들어가면 격차가 더 벌어질 거야.'

그것만은 두 눈에 흙이 들어가도 절대 안 되는 일이다.

"그, 그래. 3서클 열 명.... 영지에 뭐 큰 공사라도 하나 보지? 아니면 결계를 새로 만드나?"

"아뇨. 전투 마법사가 필요합니다."

"뭐?"

휴베르트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마법사가 전투에 참여할 경우, 위험 수당 명목으로 돈을 더 많이 받는다. 하지만 지금은 죄다 공짜로 제공해야 할 판이었다.

"몬스터 사냥이라도 나설 생각인가?"

확인차 묻자 지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쟁, 즉 영지전에 쓸 마법사가 필요합니다."

휴베르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장로들 또한 무시무시한 눈으로 지셀을 노려보며 외쳤다.

"지금 무슨 소리를!"

마탑에 속한 마법사들은 영지 간의 분쟁에는 참여할 수 없다. 법으로 그렇게 정해져 있었다.

마탑이라는 강력한 세력이 특정한 영지를 편든다면, 결국 국가 전체가 마탑에 휘둘릴 수 있기에 지정된 법률이었다.

이 법을 어겼다가 적발되면 마법사는 물론, 그가 소속된 마탑도 무거운 처벌을 받게 된다.

"마탑에 속한 마법사들은 영지전에 참여할 수 없다. 귀족이면서도 그걸 모른단 말이냐!"

홀로 연구하거나,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자유 마법사들만이 영지전에 참여할 수 있었다.

"설마 마법사들을 마탑에서 쫓아내고 전쟁을 치른 뒤 다시 돌아오면 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실제로 그런 꼼수를 썼던 귀족도 있었다. 그리고 사실이 발각되었을 때, 마탑 하나가 왕국에서 완전히 매장당했다.

지셀은 가볍게 고개를 까닥였다.

"뭐, 비슷합니다. 처음부터 정체를 철저히 숨겨서 참전했으면 합니다. 절대 걸리지 않게 말이지요. 아예 우리 영지의 소속인 것처럼 행동해야 할 겁니다."

역사 속에 그런 경우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애송이를 믿고 시도하기에는 너무 위험했다.

룬스톤 거래는 마탑이 아쉬운 처지이니 비싸게 사라는 정도야 들어줄 수 있다.

하지만 이건 선을 넘었다.

"감히...."

휴베르트가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런 위험한 발언을 하고 이곳에서 몸 성히 나갈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어마어마한 마력에 방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장로들 또한 마력을 끌어올리며 지셀을 압박했다.

"혼쭐이 나야 정신을 차릴 놈이구나."

"원하는 대로 다 들어주니 우리가 우습게 보이더냐?"

"마법사의 심기를 거스르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 주마."

명분은 충분했다. 지셀이 먼저 위험한 발언을 했으니까.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벨린다와 카오르도 무기를 잡았다.

상대는 무려 6서클과 5서클에 이른 마법사들.

여기 있는 모두가 덤벼도 쉽게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길리언은 앞으로 뛰쳐나갈 준비를 했다.

'정 안 되면 몸으로 막을 수밖에.'

제 몸을 바쳐서라도 지셀을 지킬 생각이었다.

반면, 카오르는 오히려 살기 어린 눈빛으로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저놈부터 처리한다.'

그는 휴베르트를 바라보며 천천히 자세를 낮추었다.

시선이 지셀에게 집중되어 있으니, 마력이 방출되는 순간을 노려 바로 목을 베어 버릴 생각이었다.

휴베르트만 없애면 나머지 장로들을 상대하기가 훨씬 수월할 터였다.

'맛이 간 우리 고용주는 제법 실력이 있으니 알아서 버티겠지. 죽으면... 뭐 어쩔 수 없고. 무덤에 멍청한 놈이라고는 써 줄게.'

한편 벨린다는 지셀의 뒤통수를 쏘아보았다가 슬쩍 뒤를 돌아보기를 반복했다.

'카오르를 방패로 쓰고 그 틈에 도련님을 빼내서 도망가야겠다. 내가 못 살아, 정말! 도련님! 배짱부릴 상대가 따로 있죠! 그러게 적당히 좀 하시지!'

그녀는 슬며시 카오르의 뒤로 자리를 옮겼다.

'음, 조금 세게 차야겠네. 그러면 마탑주 앞에 딱 떨어지겠어.'

카오르는 벨린다가 자기 뒤로 이동한 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온 신경을 휴베르트에게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촉즉발의 상황.

그런데 그 순간, 지셀의 목소리가 절묘하게 그들의 호흡을 흐트러뜨렸다.

"후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뭐?"

미친놈답게 너무나도 당당한 태도였다.

"영지에서 룬스톤의 자원지를 발견했습니다. 지금 가져온 것보다 훨씬 많은 룬스톤이 있습니다. 정말 꽤 많지요. 후후."

충격적인 말에 휴베르트와 장로들은 마력을 방출하던 것도 잊고 말았다.

"대충... 이번에 가져온 것의 열 배 이상은 남아 있죠. 어떻게... 필요 없으신지? 다음에는 시세대로 드릴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지셀이 손가락 세 개를 펴고 흔들었다. 휴베르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감히 룬스톤 따위로 날 모욕할 셈인가!'

...라고 꾸짖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양이었다.

말문이 막힌 사이 악마의 속삭임은 계속 이어졌다.

"그 뒤에도 계속 안정적으로 룬스톤을 제공해 드릴 수 있습니다. 계약 조건에 따라서는, 진홍의 마탑이 아닌 오직 이곳 적염의 마탑에만 제공할 수도 있지요. 독점 계약이라고 들어 보셨는지?"

이 얼마나 매력적인 속삭임인가. 마법사들은 체면 차리는 것도 잊고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아주 뱀 같은 놈이로구나!"

"어디서 감히 요사스러운 혓바닥을...."

하지만 말로는 부정하면서도, 적의는 한풀 꺾인 채였다.

"룬스톤만 안정적으로 공급받으면, 적염의 마탑이 북부에서 제일가는 마탑으로 돌아가는 것도 시간문제죠. 아니, 어쩌면 북부 제일이 아니라 왕국에서 제일가는 마탑이 될 수 있을지도?"

룬스톤을 안정적으로 공급받는 건 이들에게 가장 바라던 일이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지셀은 그들의 열망과 열등감까지 자극했다.

이미 기세가 꺾일 대로 꺾인 마법사들은 다시 화를 내기도 곤란해져 버렸다.

지셀이 노린 그대로였다.

"이런, 역시 제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가 보군요. 그럼 저는 다른 마탑으로 가 보겠습니다."

"에헤이! 젊은 사람이 왜 이렇게 성격이 급해! 누가 안 한대?"

또 일어나려던 지셀이 휴베르트를 뚱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마음에 안 든다고 마력으로 저를 겁박하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심장이 안 좋아서 버티기가 힘들 거 같습니다."

'지랄하네. 심장이 안 좋기는.... 드래곤 하트 정도는 박아 놓은 거 같은 놈이!'

휴베르트는 속으로 지셀을 씹어 대면서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색하게 연기를 시작했다.

"그건 그냥... 중요한 일을 함께해도 되는 사람인지 실력을 좀 확인해 본 거지. 안 그런가? 자네들도 말 좀 해 보게."

휴베르트가 괜히 장로들을 물고 늘어졌다.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마법사들은 탑주가 눈을 부라리자 잽싸게 동의했다.

"그, 그렇지. 자네가 믿을 만한 사람인지 한번 본 걸세."

"우리 마력에도 주눅 들지 않고 기개를 굽히지 않는다니, 과연 그릇이 큰 사람이구먼."

"젊은 친구가 참 밀고 당기기를 잘하네. 허허허."

어색하게 웃는 장로들을 슥 둘러본 지셀이 방긋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자격은 충분합니까?"

휴베르트는 잠시 머뭇거리다 힘 빠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떤 영지전인지나 자세히 말해 봐...."

어째 적염의 마탑을 통째로 악마의 손아귀에 던져 주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58화 바보를 어디에 쓰려고? (1)

분위기가 급변하자 긴장하던 벨린다와 길리언, 카오르는 어리둥절해서 눈만 깜박거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누구 하나가 죽어 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하지만 지셀이 룬스톤을 꾸준히 제공하겠다고 하자마자 마법사들은 갑자기 다시 저자세로 나왔다.

룬스톤을 구하지 못해 환장한 사람들 같았다.

이번 거래는 순전히 지셀이 미래를 알고 있기에 성공한 것이다.

그가 회귀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그를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벨린다는 브로치를 만지작거리며 고민에 빠졌다.

'...뭔가 약점이 있나 본데? 그러면 뭐 더 받을 거 없나?'

현실적인 벨린다는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하는 걸 포기하고, 더 큰 이득을 볼 방법이 없는지를 고민했다.

지셀이 멋대로 벌인 일에 몇 번 휩쓸리다 보니 나름대로 익숙해진 것이다.

세 사람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지셀이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희가 어느 영지를 치겠다는 건 아닙니다. 그럴 만한 힘도 없고요."

"그래? 그런데도 전쟁을 논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휴베르트가 조금 흥미가 생긴 듯 되물었다.

어디를 치는 게 아니라면 마법사를 빌려주는 데 부담이 덜하다.

"저희처럼 가난하고 힘도 없는 영지에서 룬스톤이 발견되었습니다. 과연 다른 영지가 가만히 있을까요?"

"...그렇군."

페르디움처럼 힘없는 영지에서 룬스톤이 발견됐다면 분명 욕심을 부리고 치려는 영주가 생길 것이다.

"그렇지만 진짜로 공격하기도 쉽지 않을 걸세. 어느 한 곳이 룬스톤을 먹으려고 한다면, 다른 영지에서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테니까."

지셀이 내심 감탄했다. 역시 마법사의 날카로운 직관력은 무시해선 안 된다.

그 말대로였다. 어딘가가 페르디움을 친다면 다른 영지도 이런저런 이유를 붙이며 참전할 것이다.

처음 공격한 영주는 페르디움만이 아니라 여러 영지를 상대해야 할 테니, 한동안은 누구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눈치만 보겠지.

하지만 지셀은 그런 복잡한 정치 관계를 고려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적은 확실하고, 델파인 공작가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페르디움을 침공할 게 확실하니까.

그들에게는 그만한 힘과 정치력이 있다.

"맞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저희가 룬스톤을 이용해 힘을 기를 때까지는 영지를 지킬 전력이 필요합니다. 그들이 서로 짜고 페르디움을 나눠 가질 수도 있으니까요."

미래를 안다고 말할 수 없으니 그저 혹시 모르는 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말이었기에 휴베르트는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이유라면 마법사들을 빌려 달라는 지셀의 요청도 충분히 수긍이 갔다.

'만약 영주들이 알게 된다면 곤란해지겠지.'

적염의 마탑은 이미 브리반트 영지를 지키고 있지만, 적어도 마탑 주변을 방어해야 한다는 명분이 있다.

그럴듯한 명분조차 없는 페르디움과 결탁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적염의 마탑도 무사할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휴베르트는 조금 무리해서라도 페르디움의 상황에 끼어들고 싶었다.

'이번에 받은 룬스톤에, 그 몇 배를 더 얻을 수 있다. 그거라면 분명 진홍의 마탑을 다시 넘을 수 있을 거야. 절대 저놈이 진홍의 마탑에 룬스톤을 판매하게 내버려 둬선 안 돼!'

영주들의 다툼 따위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진홍의 마탑을 다시 눌러 버리고 왕국 제일의 마탑에 올라서는 것만이 그의 목표였다.

그 염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페르디움의 룬스톤을 얻어 내야 했다.

휴베르트는 한숨을 내쉬며 장로들에게 물었다.

"자네들 생각은 어떤가? 비밀만 지켜진다면 해 볼 만할 거 같은데?"

물어보고는 있지만, 하자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끄응, 비밀만 지켜진다면야... 나쁠 건 없겠지요."

"일단 오리발을 내밀고 우기면 되지 않겠습니까? 어디를 치는 건 아니니 가능할 겁니다."

"마탑 출신이라는 게 걸리면... 룬스톤을 연구하려고 왔다가 어쩔 수 없이 휘말렸다고 합시다."

장로들까지 동의하자 휴베르트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지셀에게 말했다.

"좋아. 마법사들을 빌려주지. 잠시 기다리게. 믿을 만한 사람들로만 추려야 비밀을 유지할 수 있을 테니까."

결국 휴베르트는 페르디움 영지를 지키는 데에 한 발 걸치기로 결심했다.

지셀은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큰일은 없을 테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생각보다 겁이 없는 젊은이군. 그쪽 입들도 확실하게 단속을 잘해야 할 것이야."

"염려 놓으시지요. 용병이라고 잘 둘러대겠습니다."

아무리 권력 다툼에 관심이 없다고 한들, 적염의 마탑도 귀족들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적염의 마탑은 그런 위험을 지면서도 지셀을 따라 움직이기로 한 것이다.

지셀이 가져온 대량의 룬스톤, 그리고 마탑의 아쉬운 처지가 엮여 나온 결과였다.

'도대체 이놈은 뭐지?'

막상 결정하고 나니 휴베르트는 귀신에 홀린 기분이 들었다.

'혹시 이놈이 우리 사정을 다 알고 있는 건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적염의 마탑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직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진홍의 마탑에 밀려 평판이 조금 떨어졌을 뿐이다. 룬스톤도 다른 상단들을 통해 소량이나마 사들이고 있었다.

심지어 마탑 소속 마법사들도 아직 자세한 내부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았다.

마탑의 사정을 알 만한 고위급 마법사가 내통한 게 아닌 이상, 애송이 귀족이 이리도 뻔뻔하게 그들을 휘두를 수는 없었다.

휴베르트가 의심스러운 눈빛을 내비쳤지만, 지셀은 아랑곳하지 않고 속으로만 미소 지었다.

'나와 손을 잡지 않으면 적염의 마탑은 더 빨리 무너질 겁니다.'

휴베르트는 아직 제대로 모르는 거 같지만, 진홍의 마탑은 철저하게 이곳을 짓밟을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지금이야 지셀이 빌어먹을 망나니처럼 느껴지겠지만, 실상은 구명줄을 내어 주는 사람인 것이다.

휴베르트는 조금 걱정 어린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은 일단 숙소를 마련해 줄 테니 쉬고 있게. 사람을 뽑으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거 같네."

"알겠습니다.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거래가 마무리한 지셀이 당당하게 밖으로 나섰다.

벨린다와 길리언, 카오르는 멍하니 그 뒤를 따랐다.

말도 안 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는데, 옆에서 직접 보고서도 왜 그렇게 됐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 * *

지셀은 나흘이 지난 뒤에야 마탑주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휴베르트는 조금 피곤해 보였다.

그는 지셀을 앞에 두고도 제대로 말을 꺼내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도움을 청하듯 장로들을 돌아보았지만, 마법사들은 모른 척 다른 곳만 바라보았다.

보다 못한 지셀이 먼저 말을 건넸다.

"모두 표정이 좋지 않으십니다."

아닌 게 아니라 휴베르트는 눈 밑에 다크서클까지 진 채 죽어 가는 사람 같은 낯빛이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힘겹게 입을 열었다.

"미안하네. 도무지 마법사 열 명은 안 될 거 같아."

4서클만 되어도 한 영지의 전속 마법사가 될 수 있다. 쉽게 오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니라는 뜻이다.

실제로도 3서클 마스터, 4서클 유저는 마탑을 지탱하는 근간이었다.

무작정 추린다면 3서클 마스터 열 명은 어떻게든 채울 수 있겠지만, 비밀 유지가 될지 불안했다. 입이 무겁고 마탑의 지시에 잘 따를 자를 추려야 했다.

'끄응, 다들 저밖에 모르는 놈들이라.'

마법사들은 대개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다 보니 믿을 만한 자를 뽑기가 어려웠다.

탑주와 장로들의 제자를 모두 합해도 조건에 맞는 자는 딱 여섯 명뿐이다.

그렇다고 룬스톤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휴베르트는 최대한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네. 믿을 만한 사람들로 추리다 보니 열 명을 채우지 못했어."

"음, 그럼 몇 명까지 가능합니까?"

"일단 장로들의 제자들을 포함해 총 여섯 명이네. 어떡하지?"

"어떡하긴요. 아쉽지만 다음에 거래하도록 하시죠."

지셀이 안타깝다는 듯 말하자 휴베르트가 곡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다른 방법은 없겠어? 우리가 누군가. 북부 제일, 적염의 마탑이야. 좋은 관계를 쌓으면 앞으로도 페르디움 영지에 도움이 될 거라고."

장로들도 그 옆에서 지셀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3서클 마스터 여섯 명이면 작은 영지를 지키기에는 충분하지 않은가?"

"그래, 그 정도만 해도 일반 병사 수백은 그냥 날려 버릴 수가 있네."

"다시 생각해 보게. 절대 부족한 게 아니야."

마법사들이 애원하자 지셀은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흐음, 다른 방법도 있긴 합니다만... 탑주님께서 들어주실지는 모르겠군요."

지셀이 살짝 양보해 줄 기미를 보이자 휴베르트는 마음이 급해졌다.

"어허, 우리 사이에 그 무슨 섭섭한 소리인가? 자네 부탁이라면 내 드래곤이라도 잡으러 갈 수도 있지. 어떤가? 뭐든 말해 보게나."

휴베르트는 정말 드래곤이라도 때려잡을 것처럼 간절한 표정을 지었다. 지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섯 명으로는 좀 부족합니다. 그러니 추가로 마법사 한 명을 아예 저에게 주셨으면 합니다."

"응? 아예 달라는 건... 영지의 전속 마법사가 필요하다는 말인가?"

"영지의 전속 마법사라기보다는 제 전속 마법사라고 하는 게 좋겠군요."

휴베르트가 미간을 좁히며 앓는 소리를 냈다.

"끄응, 그건 마탑에서 마법사를 쫓아내라는 말 아닌가? 정당한 이유도 없이 내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는 문제네."

이런저런 핑계를 대서 마탑에서 쫓아내는 것까지는 탑주의 권한으로 처리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마법사가 지셀을 따르게 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자존심 강한 마법사의 특성상 오히려 지셀에게 원한을 가질 가능성이 더 컸다.

"설령 쫓아내더라도, 자네를 따를지는 그 사람 마음에 달린 거라 우리가 어떻게 해 줄 수가 없어. 다른 걸 해 주면 안 되겠나?"

지셀은 고개를 저으며 은근하게 속삭였다.

"그거야 그 마법사님 의견을 한번 들어 보면 되지 않겠습니까? 들어 보고 다시 얘기를 나누는 게 어떻겠습니까?"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휴베르트는 잠깐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일단 불러서 한번 물어보겠네. 혹시 원하는 마법사가 있나? 아니면 우리가 추천해 주면 되나?"

휴베르트가 묻자 지셀은 기다렸다는 듯 바로 이름을 말했다.

"바네사."

"응?"

그 이름을 듣고 휴베르트와 장로들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도무지 누구인지 생각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게 누군데?"

직계 제자면 몰라도, 마탑에 있는 수많은 사람의 이름을 모두 외우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때, 장로 중 하나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외쳤다.

"아, 그 식충이 바보!"

"응? 그게 누군데? 자네가 알아?"

"그 있지 않습니까. 마탑에서 밥만 축내는 제자요. 걔한테 돈 들어가는 게 아까워서 예전에 쫓아내려 했다가... 흠흠, 아무튼! 얼마 전 죽은 로나토가 예전에 거둬들였던 제자 말입니다. 기억 안 나십니까?"

그제야 휴베르트도 기억이 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 아이? 지금 그냥 하녀로 쓰고 있는... 아차차, 흠흠. 그 아이도 우리 마탑의 훌륭한 마법사지. 암, 그렇고말고."

휴베르트는 근엄한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몇 번 끄덕이더니, 곧 활짝 웃으며 지셀의 손을 꽉 붙잡았다.

"걱정하지 말게. 내 반드시 그 아이를 자네의 전속 마법사로 임명해 주지."

"갑자기요? 일단 의견을 물어본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어허, 의견은 무슨. 탑주인 내가 시키면 하는 거지. 하하하. 이거 참 생각보다 거래가 쉽게 끝나는군."

"그러게나 말입니다. 젊은 친구가 사람 보는 안목이 뛰어나군요."

"어쩌면 그렇게 예쁘고 총명한 아이를 고를 수가 있는지. 허허허."

휴베르트와 장로들이 서로를 마주 보며 기분 좋게 웃었다.

'흐흐, 역시 애송이는 애송이구나. 그런 바보를 어디에 쓰려고.'

'쯧쯧. 마나도 제대로 못 느끼는 계집인데 마법사는 무슨....'

'여기서 지내는 동안 보고 반했나 보지?'

지셀이 요청한 바네사라는 제자는 얼마 전 스승이 죽은 뒤 홀로 지내고 있었다.

연고가 없어 마탑에서 일단 보살펴 주고는 있지만, 그녀를 제자로 받겠다고 나서는 마법사는 아무도 없었다.

워낙 재능이 없어 마나를 느끼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질게 바로 쫓아냈다가는 마탑의 평판에 누가 될지도 모르니 일단은 하녀로 쓰고 있었다.

마법사가 될 재능조차 없는 한심한 존재를 마법사랍시고 달라고 하다니.

탑주와 장로들은 속으로 지셀을 맘껏 비웃었지만,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다.

지셀이 자존심 상해서 그냥 가 버리면 룬스톤을 얻지 못할 테니까.

"그러면 잠시만 기다리게. 내 금방 마법사들을 데리고 올 테니."

지셀의 마음이 바뀔까 봐 장로들이 잽싸게 제자를 데리러 갔다.

혼자 남은 지셀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가장 중요한 거래를 마무리할 시간이었다.

59화 바보를 어디에 쓰려고? (2)

마법사들이 자리를 비우자마자 길리언이 지셀에게 물었다.

"공자님. 전속 마법사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원래 마법사만 지원받으려고 하셨던 게 아니었습니까?"

예전에 지셀이 대략적으로나마 계획을 설명해 준 덕분에, 벨린다와 길리언도 마법사를 고용하겠다는 계획을 알고는 있었다.

정말로 이렇게 성공할 줄은 몰랐지만.

"뭐, 겸사겸사하는 거지. 마법사도 열 명을 못 채웠으니까 말이야."

"장로가 하는 말만 들어서는 그리 뛰어난 인물은 아니고 허드렛일이나 하는 사람 같습니다. 그런 사람으로 괜찮겠습니까?"

"괜찮아, 괜찮아. 사람이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다른 거니까."

지셀이 단언하니 길리언은 더 말하지 않았다.

사람을 쓰는 거야 주군의 마음이니 신하가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새로운 인물이 발목이나 잡지 않았으면 바랄 뿐이었다.

한편 카오르는 설명을 듣고도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부족한 마법사 넷 대신 하녀 한 명을 받는 건 아무리 좋게 봐도 수지가 안 맞는다.

심지어 전속 마법사로 삼겠다니, 세상에 마탑의 하녀를 전속 마법사로 삼는 귀족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거참,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단 말이야.'

사실 고용주가 누굴 전속 마법사로 들이든, 손해를 보든 카오르와는 상관없다.

무슨 생각인지 궁금하기야 했지만, 지셀이 굳이 자신에게 설명해 줄 의무도 없긴 했다.

그래도 확인해 둬야 할 부분이 하나 있었다.

"공자님. 마법사들을 고용하는 게 정말 영지전을 대비해서 그런 겁니까?"

"그래, 혹시나 해서 말이야. 준비해서 나쁠 건 없지."

"마탑 출신이라는 거야 비밀로 한다 쳐도... 용병 마법사를 고용했다 정도는 밝히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룬스톤도 있으니, 대대적으로 병사들을 육성하고 있다고 하면 함부로 건들지 못할 텐데요."

카오르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때로는 힘을 과시함으로써 전쟁을 억제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번만은 그 논리가 통하지 않았다.

델파인 공작가는 반드시 페르디움을 공격할 것이다. 마법사 몇 명 고용했다 해서 무서워할 자들이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비웃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페르디움은 아직 적들보다 모든 면에서 열악하기에, 최대한 전력을 숨겨야 승리할 수 있었다.

"일단은 최대한 숨기고 싶군. 카오르도 비밀을 잘 지켜야 할 거야."

"저야 뭐... 돈만 주면 마누라 속옷 색깔도 말할 수 있습니다만."

능글맞은 대답에 지셀은 피식 웃었다.

곧 휴베르트와 장로들이 일단의 마법사 무리를 데리고 들어왔다.

화려한 로브를 입고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짓고 있는 마법사 여섯 명.

그리고 그들 뒤에 한 여자가 주뼛거리고 서 있었다.

'드디어 만났군.'

지셀은 여자를 발견하고 무척이나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이십 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여자.

어두운 적색 머리칼은 잔뜩 헝클어져 있고, 입고 있는 로브도 다른 마법사들과 다르게 다 해지고 지저분했다.

불안하고 초조한 얼굴로 사람들의 눈치만 보는 게, 이 여자가 마탑에서 얼마나 구박을 받고 사는지 눈에 보일 정도였다.

휴베르트는 웃으며 지셀에게 마법사들을 소개했다.

"자, 이들이 앞으로 일 년간 자네를 도와줄 마법사들이네. 비밀을 유지하라고 신신당부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걸세."

여섯 명 중 젊은 남자 하나가 앞으로 나서서 자신을 소개했다.

자신보다 더 나이가 많아 보이는 마법사들을 자연스럽게 이끄는 걸 보니 제법 대단한 실력자인 모양이었다.

"알포이라고 합니다. 이번에 마법사들을 이끄는 중책을 맡았습니다. 탑주님의 명에 따라 앞으로 공자님을 성심껏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말은 공손했지만,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저 위에서 시키니 일단은 따라 준다는 느낌이 물씬 묻어났다.

알포이는 입술을 비죽거리며 지셀을 마치 촌놈 보듯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재수 없는 표정이었지만 지셀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잠시 빌려 쓸 전력일 뿐이었다.

"페르디움의 대공자 지셀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젊은 나이에 3서클 마스터라니 대단한 재능이시군요."

휴베르트가 헛기침하며 대신 답했다.

"흠흠, 자랑은 아니지만... 우리 마탑에서 촉망받는 기재 중의 기재일세. 아마 저 나이 또래에서 이 친구보다 뛰어난 자는 거의 없을 거야. 내가 신경을 좀 많이 썼네."

장로 중 한 명이 옆에서 끼어들며 한마디 덧붙였다.

"알포이는 탑주님의 제자일세. 우리 마탑의 후계자라고 할 수 있지. 어떤가? 우리도 최선을 다했네."

사실은 믿을 만한 사람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아끼는 후계자까지 차출한 것이지만, 최대한 생색을 낼 셈이었다.

"그렇습니까? 탑주님의 제자까지 보내 주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지셀은 웃으며 답했지만, 사실 진심으로 감탄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원하는 인물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는 선선히 알포이에게 칭찬을 건넸다. 빈말에는 돈이 들지 않으니까.

"마탑의 후계자라니 정말 든든하군요. 기대가 큽니다."

알포이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말씀 편히 놓으시지요. 탑주님께서 최선을 다해 공자님을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저희 마탑에 아주 중요한 손님이시라고요."

그는 일부러 겸양을 떨며 휴베르트가 지셀에게 신경을 많이 썼다는 걸 강조했다.

윗사람에게 잘 보이며 손님에게도 예의를 갖추는, 그 나름의 처세술이었다.

휴베르트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알포이 또한 이 정도면 잘했다고 생각하며 만족해했다.

하지만 상대는 그들과는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었다.

"알겠다. 앞으로 잘 부탁하지. 그대들이 영지에서 할 일이 많다. 지금부터 긴장을 놓지 말도록."

지셀이 기다렸다는 듯 바로 하대하자 알포이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보통 겸양을 떨면 상대방도 그에 맞춰 주는 게 예의다.

마탑의 후계자인 그에게 이렇게 함부로 대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없었다.

그런데 눈앞의 지저분한 놈은 알포이를 존중하기는커녕, 정말로 제 아랫사람처럼 대했다.

예의고 뭐고 전혀 그를 대우해 줄 생각이 없는 것이다.

'이, 이 무식한 촌놈이... 주제도 모르고!'

알포이는 수치스러워하며 속으로 이를 갈았지만, 겉으로 티를 낼 수는 없었다.

그저 화나서 시뻘게진 얼굴을 고개 숙여 숨기는 게 전부였다.

'중요한 계약이 있다고 하니 일 년은 참아 주마. 하지만... 내가 마탑주가 된 뒤에도 이따위로 굴 수 있는지 두고 보자.'

알포이가 이를 갈며 분을 억누르는 동안 다른 마법사들도 하나씩 앞으로 나서며 지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여섯 명이 모두 인사를 끝낸 후에도, 뒤에 선 여자는 안절부절못하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장로 중 한 명이 그녀의 등을 확 밀어 버리며 짜증을 냈다.

"뭐 해? 어서 공자님한테 인사드리지 않고? 밥이나 축낼 줄 알지, 눈치도 없어. 쯧쯧."

갑자기 앞으로 밀려난 여자는 겁먹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고, 공자님께 인사 드립, 드립니다. 바, 바네사라고 합니다."

지셀은 잔뜩 긴장한 그녀에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지셀 페르디움이다. 앞으로 잘 부탁하지."

바네사는 당황하며 로브에 손을 박박 문질러 닦고 그의 손을 맞잡았다.

연신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 지셀이 웃으며 다시 말했다.

"너무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돼. 자세한 설명은 탑주님에게 들었겠지?"

그러자 바네사는 덜덜 떨며 고개를 저었다.

"저, 저는 아무런 얘기를 못 들어서... 청소를 하다가...."

그녀가 뒷말을 흐렸다. 지셀은 눈살을 찌푸리며 휴베르트를 바라보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거냐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휴베르트는 당황해서 다급히 변명했다.

"급하게 데리고 오느라 아직 말을 전달하지 못했네. 바네사, 너는 이제 마탑을 떠나서 이 공자님을 모시도록 해라. 알겠느냐?"

"네?"

바네사는 깜짝 놀라 휴베르트와 장로들을 쳐다보았다.

언젠가 마탑에서 버림받을 거라 각오했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통보받을 줄은 정말 몰랐다.

"스, 스승님께서는 저더러 마탑에 계속 있으라고...."

바네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항변했지만, 휴베르트가 엄하게 소리쳤다.

"어허! 로나토는 이미 죽은 사람이다. 탑주의 명령을 거역하겠다는 말이냐?"

"그, 그렇지만...."

휴베르트는 묘한 표정의 지셀을 곁눈질하더니, 곧 어조를 달리하여 사근사근하게 속삭였다.

"너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거다. 여기서 허드렛일이나 하는 것보다야, 저 공자님의 전속 마법사로 지내는 게 낫지 않겠느냐."

"하, 하지만 저는 마법도 제대로 못 쓰는...."

"쓰읍! 왜 이렇게 잔말이 많아!"

바네사가 마법을 쓰지 못한다는 사실이 들킬까 봐 휴베르트가 기겁하며 말을 끊었다.

바네사는 어쩔 줄 모르고 울상을 지었다. 옆에 있던 장로 한 명이 진중한 표정으로 그녀를 달랬다.

"고아였던 너를 마탑에서 몇 년간 먹여 살려 주지 않았느냐.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공자님을 잘 모시도록. 알겠느냐?"

바네사는 고개를 푹 숙였다.

결국 버림받고 말았다는 사실에 눈물이 나올 거 같았다.

스승이 죽은 뒤 언제 쫓겨날지 몰라 전전긍긍해 왔다.

어렸을 때부터 마탑에서만 살아왔는데, 갑자기 나가 봐야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혼자 세상 밖으로 나가 살 자신이 없었다.

마탑에서 계속 머물기 위해 하녀 노릇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아무 소용이 없었다.

바네사는 살며시 고개를 들어 지셀을 쳐다보았다가 도로 고개를 숙였다.

'무, 무서워.'

이 사람이 왜 자신을 원하는지 알 수 없으니, 자신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흑, 정말 마법사가 되고 싶었는데... 정말 열심히 노력했는데....'

그녀의 눈에 절로 눈물이 글썽거렸다.

로나토는 바네사의 총명함에 반해 고아였던 그녀를 제자로 거두어 마법을 가르쳤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바네사의 몸 안에는 마력이 쌓이지 않았다.

머리로는 모든 술식을 깨우쳤지만, 마력이 없으니 마법을 시전할 수 없었다. 스승은 안타까워했지만 해결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혼자 남은 그녀는 마탑에서 식충이 취급을 받게 되었다.

그래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잠을 줄여가며 원인을 찾았고 술식 연구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자신도 마법을 쓸 수 있을 거라 희망을 놓지 않았다.

'가고 싶지 않아....'

저 공자를 따라간다면 자신은 더 이상 마법을 공부할 수 없을 것이다.

마탑에서는 비록 하녀 취급을 당할지언정 계속 마법을 공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귀족가에서는 진짜로 하녀 노릇을 하게 될 것이다.

바네사가 제대로 답을 못하고 머뭇거리자 휴베르트가 성이 나서 크게 외쳤다.

"뭐 하느냐! 어서 공자님께 인사드리지 않고!"

바네사를 넘긴다는 조건으로 겨우 마법사 수를 줄여 놨는데, 시간을 끌다 괜히 지셀의 마음이 바뀌면 골치가 아파질 게 뻔했다.

결국 조급해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제 성질머리를 내보이고 말았다.

"내 말을 안 들으면 네년이 여기서 마법을 계속 익힐 수 있을 거 같으냐!"

고성에 놀라 바네사가 몸을 움츠렸다.

장로들도 한마디씩 험한 소리를 던졌다.

"저 공자님이 원할 때 가는 게 네 신상에도 좋을 것이다."

"네 재능은 여기서 펼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하니 좋은 말로 할 때 어서 가거라."

"그동안 마탑에서 그렇게 보살펴 줬으면 양심이 있어야 할 거 아니야!"

흉흉한 분위기에 짓눌려 바네사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미 그녀가 지셀을 따라가는 건 결정된 일이었다. 바네사는 그걸 거절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마탑에서 지금까지 베푼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는 말도 맞았다.

"아, 알겠습...."

머리로는 이해했는데, 자꾸 목소리가 목에 걸려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결국 서러움에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보다 못한 지셀이 한숨을 푹 쉬며 앞으로 나섰다.

"다들 그렇게 험하게 말씀하시면 이분이 겁먹지 않겠습니까? 부드럽게 말씀하셔야지요."

"크흠흠...."

휴베르트와 장로들이 헛기침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냥 그가 빨리 바네사를 데리고 꺼져 줬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지셀은 바네사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나는 네 도움이 필요하다. 너를 꼭 내 마법사로 쓰고 싶어. 나와 같이 가 주지 않겠어?"

바네사는 지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마치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움이 어려 있었다.

그 따뜻한 음성과 눈빛에 바네사는 조금 기대를 품었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제, 제가 거절하면... 어떻게 되나요? 여, 여기에 계속 있을 수 있나요?"

"진짜? 후회 안 해?"

"예, 예...!"

"후회할걸?"

지셀은 언제 웃었냐는 듯 미소를 거두고 단호하게 답했다.

"여기 남으면 너 죽어."

60화 바보를 어디에 쓰려고? (3)

마법사들이 속으로 혀를 찼다.

'에라이, 미친놈아.'

'쯧쯧, 역시 정상이 아닌 놈이었어.'

'저런 놈하고 흥정하려 했으니 당연히 말이 안 통하지.'

지셀을 수행하던 세 사람도 내심 놀랐다.

지셀은 능청스럽고 장난기가 많기는 하지만, 이유 없이 약자를 협박하는 성정은 아니었다.

'위로해 주려는 거 아니었어?'

'안 그래도 겁먹은 사람을 협박해서 어쩌겠다는 거예요, 도련님!'

하지만 사람들이 놀라거나 말거나 지셀은 차갑게 말을 이었다.

"일단, 마탑에서는 이미 너를 내게 넘겨줬어. 나를 안 따라와도 여기 남아 있긴 어려울걸. 남을 수 있다고 해도... 뭐."

지셀은 어깨를 으쓱였다.

"본인이 죽고 싶다는데 내가 말릴 자격은 없지만 말이야."

바네사는 공포로 몸을 떨었다.

지셀의 말에서는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따라오지 않으면 여기서 죽이겠다는 살기가 있다면 모를까.

마치 세상의 진리를 읊듯 단호하고 무덤덤한 그 어조가 오히려 공포심을 자극했다.

결국 바네사는 입술을 달달 떨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알겠습니다. 공자님을 서, 성심껏 모시겠습니다."

그러자 지셀은 안도한 듯 다시 미소를 띠고 부드럽게 말했다.

"그래, 잘 부탁하지. 실망하지는 않을 거야."

마법사들과 지셀 일행은 어이가 없어서 잠깐 말을 잃었다. 내가 언제 협박했냐는 듯한 태도 변화가 가증스러웠다.

휴베르트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바네사에게 슬며시 다가왔다.

"좋아, 좋아. 잘 생각했어. 네 스승인 로나토도 하늘에서 기뻐할 거다."

흡족한 미소를 짓는 그에게 바네사는 말없이 고개만 숙였다.

어차피 이들에게 자신의 의견은 개가 짖는 소리와 다를 바 없었다.

그저 기회를 봐서 지셀에게 공부를 계속하게 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흐음, 역시 이때는 순했구나.'

지셀은 바네사를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식충이에 바보라니, 보는 눈도 없지. 적염의 마탑 최고의 천재를 두고 말이야. 실패한 천재긴 하지만.'

바네사야말로 지셀이 적염의 마탑에 온 가장 큰 이유였다.

물론 바가지를 씌우기 쉬운 상황이라는 점도 이유 중 하나였지만, 바네사가 없었다면 굳이 시간과 공을 들여 가며 멀리까지 오지는 않았을 터였다.

모든 면에서 전력이 부족한 지셀에게는 강력한 '한 방'이 필요했다.

그는 바네사가 바로 그 역할을 하게 될 거라고 확신했다. 그녀가 거절하더라도 강제로 끌고 갈 생각이었다.

'여기에 있어 봤자 비참한 결과만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지셀은 거짓말하지 않았다. 협박도 아니었다. 그는 오로지 사실만을 말했다.

바네사가 계속 마탑에 머물면 그녀 본인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위험해진다.

이대로 둔다면 그녀는 상상을 초월하는 살인마가 될 테니까.

* * *

지셀이 그녀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건 세상에 혼란이 가득하던 시기였다.

소문이며 정보 따위에 관심이 많던 수하가, '붉은 악몽'에 대한 소식을 떠벌렸다.

"붉은 악몽?"

"루타니아 왕국에서 설치던 미친년이에요. 실력이 제법 만만치 않다는데요? 7서클이랍니다, 7서클."

"루타니아 왕국이라...."

고향인 루타니아 왕국 출신이라는 게 왠지 그리움을 자극했다.

"이명도 완전 멋있잖아? '붉은 악몽'이라니."

그가 관심을 보이자 수하는 더 신나게 떠들었다.

"이름이 뭐라더라... 아, 바네사랍디다. 루타니아 북부를 죄다 불바다로 만들어 버렸다더라고요. 마나 연공법을 익힌 마법사라나?"

"마법사가 마나 연공법을 익혔다고?"

마나 연공법을 익힌 마법사라니, 용병 일을 하며 온갖 괴상한 일을 다 겪어 본 지셀도 처음 듣는 얘기였다.

"네. 아마 그래서 미쳤나 봐요. 여기저기 불 지르고 다 죽이고 다녀서 영주들도 골치래요. 목적도 없다니 그냥 불장난에 미친 여자인 거죠."

"와, 대단한데. 마나 연공법으로 그 정도 경지에 오를 수 있구나."

"그거에 감탄하신 거였어요?!"

마법사의 서클이나 마나 연공법이나 그 근본은 똑같이 마나를 몸에 저장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론상 마나 연공법으로도 마법을 시전할 수는 있지만,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마법의 효율이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마나 연공법으로 어지간한 마법사보다 강한 화력을 낸다니,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지셀은 안타까워하며 혀를 찼다.

"아깝군. 미치지만 않았다면 세상에 큰 도움이 됐을 재능인데. 차라리 내 밑에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 정도 실력이라면 대륙을 덮치는 수많은 재앙에 맞서 싸울 인재가 될 수도 있었다.

"아니다, 혹시 지금도 가능한가? 내 밑에도 미친놈들 많지만, 몇 번 패니까 다 고쳐졌잖아."

수하가 지셀의 혼잣말을 듣고 질겁하는 표정을 지었다.

"누구를 어쩌시겠다고요?"

"바 어쩌고 걔, 우리가 데려오자."

"아니, 미친 방화범을 어떻게 데려다 어디다 쓰시려고요?"

"그건 이제 니가 알아봐야지."

"...잘 못 들었습니다?"

지셀은 대답 없이 히죽 웃었다. 당장 알아 오라는 뜻이었다.

수하는 얼굴이 시퍼레져서 튀어 나갔다.

* * *

수하가 조사해 온 바네사의 사연은 흔해 빠진 이야기였다.

어릴 적 부모 없이 겨우 연명하다 마법사에게 주워진 고아.

그러나 바네사는 마나를 느끼지 못해 마법사가 되지 못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노력했지만, 아무도 믿고 인정해 주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마나 연공법을 구해 익힌 것 같았다.

마탑에서도 마나 연공법을 익히려다 몇 번이고 실패했다는데, 어째서인지 그것만은 익힐 수 있었던 모양이었다.

가문의 연공법을 고쳐 익힌 장본인으로서 지셀은 바네사가 미친 이유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스승도 없이, 정체도 모르는 마나 연공법을 제대로 익힐 리가 없지. 그래도 잘만 고치면 어떻게 될 것도 같은데."

재앙을 상대하는 인재는 많을수록 좋다.

지셀은 제 옆에서 미적거리던 수하를 돌아보았다.

"얘 지금 어디 있냐?"

"글쎄요. 마지막으로 나타났다는 게... 어느 산 근처였는데. 그러고 보니까, 요즘은 소식이 잠잠하네요. 어디 숨어 있는 건지."

지셀은 미간을 좁혔다.

"애들 풀어서 추적해 봐. 최대한 빨리."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수하가 조금 놀라며 되물었다.

"어디 가시게요?"

"나도 찾아 보려고."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요? 평소에는 지명 의뢰도 귀찮다고 안 받으시던 분이."

엉덩이가 무거운 단장이 직접 나선다는 말에 수하가 놀랐지만, 지셀은 아랑곳하지 않고 밖으로 나섰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지셀은 산속에 숨어 있던 바네사를 찾아냈다.

"찾았다. 잘도 숨어 있었군?"

"으아아악!"

지셀에게 발각되자마자, 바네사는 비명을 지르며 마법을 난사했다.

그녀는 본능만 남은 짐승 같은 상태이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상대가 위험한 포식자라는 걸 쉽게 깨달은 것이다.

콰아앙!

공중에 떠오른 바네사의 주변에 커다란 마법진이 떠올랐다.

콰앙! 콰아앙! 콰앙!

불기둥이 솟아오르고 거대한 불덩이들이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지셀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들을 쳐내고 피해 내며 점점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런 아무런 계획도, 생각도, 전법도 없는 공격에 당할 그가 아니었다.

"꺄아아아악!"

상대가 계속 공격을 피하자 화가 났는지, 바네사는 제 모든 힘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주변에 십여 개의 마법진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와, 다중 영창까지 한다고? 그것도 저렇게 많이?"

지셀은 깜짝 놀랐다.

다중 영창은 쌓아 올린 마나의 양과는 상관없이, 온전히 재능이 있어야 가능한 재주다.

아무리 서클이 높아도 감각을 타고나지 못한 사람은 다중 영창을 할 수 없다.

"진짜 탐나네."

콰콰콰콰콰쾅!

불덩이들이 유성처럼 지셀이 서 있던 자리에 내리꽂혔다.

지금껏 그래 왔듯 그는 손쉽게 피했지만, 화염이 솟구쳐 오르며 매캐한 연기가 주변을 완전히 잠식해 버렸다.

지셀은 혀를 차며 마나를 풀었다. 세차게 흐르는 마나에 휩쓸려 주변의 불길도 흔들리다 꺼져 갔다.

"좀 얌전히 굴어라!"

그가 바네사를 향해 팔을 쭉 뻗으며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 순간 바네사의 몸이 덜컥 하고 움직임을 멈췄다.

그가 다시 무언가를 당기듯 팔을 접자, 그녀는 허무하게 지셀 쪽으로 끌려오고 말았다.

"꺄아아아!"

"가만히 있어라."

지셀은 버둥거리는 바네사의 목을 한 손으로 쥐고 그 몸에 강제로 마나를 밀어 넣었다. 마나가 혈맥을 타고 바네사의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하지만 바네사의 몸 상태를 확인한 지셀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리고 말았다.

'이건....'

바네사의 코어는 이미 깨진 상태였다. 7서클에 이른 덕분에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산속에 숨어들었던 걸 보면 아마 이전부터 몸 상태가 좋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력이 다한 맹수들은 본능적으로 안전한 곳을 찾곤 하니까.

그리고 지셀을 공격하는 짧은 사이, 상태가 더욱 심각하게 악화되었다.

'쯧, 아쉽군. 이미 끝났어.'

조금만 더 빨리 찾아왔으면 쓸 만한 부하를 얻을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어차피 죽을 거, 편하게 보내 주겠다는 마음으로 지셀은 손아귀에 힘을 넣었다.

그 순간, 그는 고개를 든 바네사와 눈을 마주쳤다.

지셀이 흘려 넣은 마나 덕분에 정신을 차렸는지, 그녀의 눈빛에서는 광기 대신 안도와 후회가 엿보였다.

"...정신이 돌아왔나."

지셀은 바네사를 땅에 내려 주었다. 그녀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다 간신히 몸을 세웠다.

"...당신은?"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유명한 용병이지."

바네사가 잠깐 고민하다 곧 고개를 끄덕였다.

"소문으로만 듣던 그 용병왕이신가 보네."

그녀는 그 짧은 말을 하는 동안에도 중간중간 기침을 삼켰다.

"혹시 날 잡으러, 온 거야?"

"아니, 인재 영입차 온 거다."

"영광이네, 당신 같은, 사람이 직접, 찾아오고...."

흐린 미소를 짓던 바네사가 고통스럽게 몸을 앞으로 숙였다. 땅에 피가 한 바가지 쏟아졌다. 지셀은 끌끌 혀를 찼다.

"영입하려고 했는데, 꼴을 보니 아무래도 우리 용병단에는 못 들어오겠군."

"...그게 피를 토하는 사람, 앞에서 할 말이야?"

바네사가 짜증을 냈지만, 지셀은 코웃음을 쳤다.

"부하로 삼지도 못할 놈한테 신경 써 줘야 할 이유가 있나?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지셀은 말을 하다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탄성을 흘렸다.

"아니다, 너를 잡아가면 현상금은 받겠군."

"꺼져, 이 개자식...."

바네사가 지셀에게 불덩이를 쏘아 냈다. 그러나 그 마법은 지셀에게 닿기도 전에 허공에서 꺼져 버렸다.

"제명을 제가 깎는군. 그렇게 멍청하니까 이 꼴이 됐지."

그녀는 기침하듯 피를 토하느라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짜증 섞인 눈빛으로 지셀을 노려볼 뿐이었다.

지셀은 히죽 웃었다.

"뭐, 남길 말 있으면 해 봐라. 유언 정도는 들어 주지."

"유언... 남길, 사람도, 없는데."

"그럼 신세타령이라도 해 보든가."

그녀는 헛웃음을 흘리다 그대로 주저앉았다. 서 있을 힘도 사라진 듯했다.

"난, 그냥 마법이, 좋아서... 마법사가, 되고 싶었을... 뿐인데...."

바네사가 제 무릎을 껴안으며 몸을 웅크렸다.

"정체도 모르는 마나 연공법을... 익히는 게... 아니었어. 나 때문에...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었어...."

"후회할 건 그게 아니지."

지셀이 혀를 차며 타박했다.

"진작 나를 찾아오지 그랬나. 내가 미친놈들 잘 고치기로 유명하다고. 너도 지금 정신 멀쩡해졌잖아."

"당신... 성질 더럽다는, 소리... 많이 듣지?"

"무슨 그런 험한 소리를. 나처럼 선량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바네사가 황당하다는 듯 그를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편하게 사네, 정말...."

"용병이니까."

히죽 웃은 지셀이 덧붙였다.

"너도 다음엔 미적거리지 말고 바로 나한테 와라. 실력자는 언제나 환영이니까."

바네사는 말없이 눈만 깜박였다. 눈꺼풀이 움직이는 속도가 점차 느려져 갔다.

그녀가 꺼져 가는 촛불처럼 희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래, 용병... 재미있어 보이네...."

그 말을 끝으로 그녀의 숨은 완전히 끊어지고 말았다.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리며, 지저분한 그녀의 얼굴에 깨끗한 선을 그렸다.

지셀은 잠시 바네사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평소 같았으면 시체를 가져다 현상금이라도 받아 냈겠지만....

그는 쯧 하고 작게 혀를 차고는 주검에 불을 붙였다.

어쩌면 부하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자에게 보이는 처음이자 마지막 배려였다.

61화 바보를 어디에 쓰려고?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