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4

31화 온 힘을 다해 나를 따라와라. (3)

크오오오!

디루스 엔트들은 분노를 숨기지 않은 채 그들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비록 외피를 잃었어도 눈앞의 인간들은 쉽게 짓밟을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이 훤히 보였다.

용병들이 기세에 밀려 뒤로 물러나려는 순간, 지셀이 창 하나를 주워 들며 말했다.

"어이, 다들 싸워 보지도 않고 그렇게 도망만 갈 건가? 그래서 칼 밥 먹으며 살 수 있겠어?"

이죽거리는 말에도 용병들은 화내지 못하고 지셀을 미친놈 보듯 바라볼 뿐이었다.

무기도 안 통하고 불도 안 통하는데 상대할 수 있다는 저 자신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잘 봐라."

지셀은 한마디를 내뱉고 강하게 창을 내던졌다.

콰지지지직!

엄청난 속도로 날아간 창은 가장 가까이 다가온 한 놈의 몸을 뚫고 나가, 뒤에 붙은 놈의 몸에 박혀 버렸다.

크아아아아아!

창에 뚫린 놈은 처음 느껴 보는 고통에 놀란 듯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어?"

용병들이 당황해하자, 지셀이 뒤를 돌아보며 웃었다.

"멍청이들아. 이제 나무껍질이 없잖아. 덩굴은 다 타 버려서 멀리서 치지도 못해. 그냥 덩치만 크고 느린 몬스터라고."

용병들은 눈앞에서 몬스터들이 창에 뚫리는 걸 보고도, 지셀의 말을 듣고도 섣불리 덤벼들지 못했다.

나무껍질이 없어졌을 뿐이지 그 거대한 크기와 위압적인 모습은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수십 마리의 디루스 엔트가 사방을 에워싸듯이 다가오자, 용병들은 겁에 질려 조금씩 뒷걸음질하기 시작했다.

크오오오오!

흉악한 외모에서 나오는 끔찍한 괴성.

용병들은 몬스터의 강렬한 기세에 눌려 전의를 상실했다.

이 상태로는 도저히 싸울 수 없을 것이다.

"쯧."

지셀은 혀를 차며 수레에서 거대한 대검을 하나 꺼내 들었다.

일반적인 양손 검이 아니라 대형 몬스터를 잡기 위해 특별히 제작된 검이었다.

쿠웅!

그는 자신의 체구를 거의 다 가릴 만큼 큰 검을 양손으로 쥔 채 바닥에 꽂듯이 내려놓았다.

육중한 소리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후우, 오랜만이군.'

지셀이 주로 쓰는 무기는 검이고 검술에 가장 조예가 깊지만, 다른 무기의 수련도 허투루 하지 않았다.

전쟁터에서는 상황에 따라 검 말고 다른 무기를 써야 하는 일도 있고, 운이 없으면 맨손으로도 싸워야 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용병왕 시절에는 검뿐만 아니라 모든 무기를 자유롭게 다루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크오오오오!

쿠웅! 쿠웅! 쿠웅!

디루스 엔트들이 다가올수록 용병들도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공자님, 물러나십시오.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켈베로스 용병단은 준비해라."

길리언과 카오르는 앞에 나설 준비를 했다.

용병들이 제대로 통제되지 않고 우왕좌왕하고 있으니 자신들이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안 그러면 이대로 다 밟혀 죽고 말 것이다.

남은 용병들은 불안한 눈으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고용주는 무서워서 정신이 나갔는지 명령도 내리지 않고, 대검을 하나 든 채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뭐야? 애송이 귀족 주제에 지금 싸우겠다고 앞에 나선 거야?'

'검이 무거워서 제대로 들지도 못하고 있으면서!'

'저 엉거주춤한 자세로 뭘 하려고?'

용병들은 인상을 찌푸리며 점점 더 빠르게 물러났다.

한두 놈도 아니고, 저 거대하고 흉악한 몬스터 무리와 싸우는 건 아무리 봐도 무리였다.

그들은 그저 켈베로스 용병단이 잘 버텨서 자신들이 도망갈 시간을 벌어 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용병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상황을 살폈다.

지금 상태로는 가장 앞에 있는 고용주가 짓밟혀 죽을 게 빤했다.

그가 죽는다면 도망쳐도 위약금을 물지 않아도 될 테니, 고용주가 죽자마자 바로 도망치는 게 그들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도련님! 용병들에게 맡기고 어서 뒤로 물러나세요!"

벨린다가 잔뜩 화가 난 채 용병들과 지셀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아무리 겁이 나도 그렇지, 고용주가 앞에 있는데 슬금슬금 몸을 빼다니! 용병들의 머리통을 다 깨 버려도 시원치 않을 정도였다.

"아니, 이제부터 모든 전투는 내가 선봉에 선다."

"뭐라고요?"

벨린다는 어처구니없어져 눈에 쌍심지를 켜고 지셀을 노려보았다.

이 위험한 숲에서 뭐가 나올 줄 알고 선봉에 서겠다는 말인가?

용병들을 잔뜩 고용해 놓고 고용주가 선봉에 서는 건 미친 짓이었다.

"미쳤어요? 용병들도 다 몸을 빼는데 뭐 하시는 거예요!"

전투 준비를 하던 길리언과 카오르도 눈을 찌푸렸다.

지셀이 몸을 빼야 마음 편히 싸울 텐데, 앞에 있으니 솔직히 거슬렸던 것이다.

실력이 제법인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실전이다. 지셀을 지켜야 하는 그들로서는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셀은 그런 눈초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웃음을 지었다.

"시작하지."

그의 몸 안에서 코어 하나가 맹렬하게 돌아가며 마나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도련님! 하지 마세요!"

"공자님, 뒤로 물러나십시오!"

마나의 움직임을 느끼고 벨린다와 길리언이 깜짝 놀라 지셀을 말리려 했지만, 한발 늦었다.

지셀은 공기를 가르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

쿠오오오오!

그 직후, 비명 같은 괴성이 퍼지며 가장 앞에 선 디루스 엔트의 몸이 반으로 갈라졌다.

쿠우웅!

디루스 엔트의 거대한 몸이 갈라진 채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쿠오오오오!

갑작스러운 지셀의 공격에 놀라 모든 디루스 엔트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하아...."

지셀의 입에서 날숨과 함께 붉은 연기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코어가 맹렬히 돌아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크오오오오!

디루스 엔트 몇 마리가 지셀에게 달려들었다.

빠르게 휘둘러지는 굵은 나뭇가지를 대검의 한쪽 면으로 막은 지셀이 주르륵 뒤로 밀려났다.

"읏차!"

그러나 그는 예상했다는 듯 그대로 몸을 크게 돌리며 가까이 있는 디루스 엔트를 베었다.

콰지직!

지셀이 휘두른 대검은 디루스 엔트의 몸통을 반쯤 파고들다 멈추었다.

나무껍질이 없어졌어도 단번에 벨 수 있는 두께는 아니었던 탓이다.

"흐읍!"

드드드드득!

지셀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힘을 주어 검날을 밀어 냈다.

무언가 갈리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몸통이 다시 잘리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아!

괴로운 비명을 내지르던 디루스 엔트는 결국 몸체가 완전히 잘려 쓰러지고 말았다.

주변에 있던 디루스 엔트들이 분노하며 마구잡이로 지셀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그는 몬스터들의 공격을 절묘하게 피하고 때로는 대검으로 막으며 착실하게 공격을 이어 나갔다.

또 다른 몬스터가 대검에 몸이 갈려 쓰러진다.

한 번 휘두를 때마다 하나씩.

디루스 엔트들은 지셀의 대검을 막지 못하고 쓰러져 갔다.

"크읏!"

물론 지셀도 멀쩡하지는 않았다.

디루스 엔트들은 거대한 덩치에 맞게 힘도 세서, 막은 충격만으로도 속이 진탕 될 정도였다.

그러나 지셀은 그것들의 공격을 받아 낼수록 온몸의 신경 세포 하나하나가 살아 날뛰는 것을 느꼈다.

'이런 것도 오랜만이군.'

프랑크와 싸운 뒤로는 힘을 제대로 쓸 일이 없었다.

그가 기억하는 큰 흐름에 맞게 계획을 짜고 돈을 구하느라 바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순수하게 전투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크아아아!

디루스 엔트 하나가 몸이 잘리며 쓰러졌다.

지셀은 무의식적으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역시 나에겐... 이 자리가 가장 어울려.'

전생에도 그는 언제나 전투의 선봉에 섰다.

가장 위험한 곳에는 항상 그가 있었다.

그렇기에 그 거친 용병들도 그를 인정했던 것이다.

머리를 쓰는 일도 못 할 건 없지만, 역시 자신에게는 이런 일이 가장 잘 맞는다.

"저, 저게 무슨...."

지셀이 오랜만에 신나게 날뛰는 모습을 보고, 벨린다는 놀라서 굳어 버린 채 침만 삼켰다.

지셀을 쫓아가서 끌어내려다 자신도 모르게 넋이 나가 버린 것이다.

평범한 기사 수준으로는 저 거대한 몬스터를 한 번에 베는 건 불가능하다.

아무리 기술이 뛰어나도 마나와 육체가 받쳐 주지 않는다면 어려운 것이다.

벨린다가 아는 한, 지셀에게는 그 정도 마나가 없었다.

애초에 그 나이에 쌓을 수 있는 마나의 양에는 한계가 있었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다 해도 시간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법이므로.

'어디서 뭐 좋은 약이라도 훔쳐 먹은 건가?'

사실 지셀은 아직 코어를 단 하나만 활성화한 상태였다.

코어 하나로 쓸 수 있는 마나의 양은 그리 많지 않지만, 그는 마나를 운용하고 집중하는 데 누구보다 뛰어났다.

적은 마나로도 순간적으로 강한 출력을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비밀을 모르는 사람들은 지셀의 활약을 보고 경악할 뿐이었다.

"고, 공자님이 어떻게 저런 힘을?"

"검술만 뛰어난 게 아니었네."

길리언과 카오르도 싸움에 끼어들 생각은 하지 못하고 멍하니 지셀을 바라만 보았다.

그들도 지셀이 마나를 사용해 제대로 싸우는 건 처음 봤기 때문이다.

검술이 뛰어난 건 진작 알았지만, 실전에서 이 정도 마나를 뿜어내며 싸울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슬금슬금 물러나던 용병들도 놀라서 발을 멈추고 지셀을 구경했다.

"고용주가 저렇게 강했어? 망나니라고 하지 않았어?"

"저 나이에 저런 실력이라고?"

다들 넋 놓고 구경하는 동안 싸움은 점점 격렬해지기 시작했다.

크오오오오!

디루스 엔트들은 모조리 지셀에게 몰려들었다.

그가 미친 듯이 대검을 휘두르며 주변을 박살 내는 통에, 다른 곳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코어도 활성화해야겠군.'

확실히 덩치 차이는 아무리 지셀이어도 만만히 넘길 수 없었다.

속도가 느려서 지금까지는 잘 피해 왔지만, 공격 하나하나가 살 떨릴 정도로 강렬했다.

한 번이라도 직격타를 맞으면 그도 생사를 장담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몸에 부담이 될 것을 각오하고 코어를 더 활성화시켜야 했다.

지셀이 두 번째 코어를 깨워 마나를 끌어올리자, 그의 눈이 점점 붉어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길리언이 크게 외쳤다.

"뭣들 하나! 다들 공격해!"

길리언은 그대로 도끼를 들고 성난 멧돼지처럼 밀고 들어갔다.

콰지지직!

그의 도끼가 지셀을 공격하던 디루스 엔트의 몸을 찍어 눌렀다.

지셀은 길리언이 끼어들자 깊이 숨을 내쉬며 두 번째 코어를 다시 식혔다.

이리저리 도끼를 휘두르며 날뛰는 길리언 덕분에 움직임에 여유가 생긴 덕분이었다.

"쳇! 켈베로스 용병단도 모두 돌격해라!"

카오르까지 합류하자 지셀의 움직임은 훨씬 더 여유로워졌다.

"와아아아!"

켈베로스 용병단이 우르르 몰려 들어와 몬스터들에게 무기를 꽂아 넣었다.

켈베로스 용병단 또한 목숨을 거는 전투를 즐기는 자들.

디루스 엔트에게도 전혀 겁먹지 않고 악바리처럼 달라붙어 공격을 시도했다.

"달라붙어! 이 새끼들 조져 버리자고!"

크오오오오!

전투는 완전히 난전이 되었다.

용병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여전히 지켜만 보고 있었지만, 그들의 발걸음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왜 우리를 안 부르지? 혼자 다 죽일 수 있다는 건가?"

"광견단이 끼어들긴 했는데...."

용병들은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의 고용주는 자신들에게 명령을 내리지도 않고 가장 앞에서 혼자 묵묵하게 싸우고 있다.

자신들이 필요 없다는 말인가? 이럴 거면 뭐 하러 자신들을 고용했단 말인가?

단 하나 확실한 건, 지셀이 싸우는 모습을 보면 그들도 피가 끓는다는 사실이었다.

"나도 싸워야겠다."

토란이라 불리는 나이 지긋한 용병 하나가 무기를 들고 달려갔다.

"나도 간다."

몇몇 용병들이 토란의 뒤를 따라 달려 나갔다.

팔짱을 끼고 지켜보던 벨린다가 남은 용병들을 흘겨보았다.

"뭐 해요, 다들 안 가고. 구경만 할 거예요?"

그녀의 앙칼진 타박에 용병들이 서로를 쳐다보다 외쳤다.

"그, 그래! 우리도 가자!"

"싸우자!"

"와아아아아!"

용병들이 함성을 지르며 모두 달려 나갔다.

32화 온 힘을 다해 나를 따라와라. (4)

"흥."

벨린다는 콧방귀를 뀌며 지셀 근처로 몸을 움직였다.

그녀는 특별히 디루스 엔트들을 공격하지는 않았다.

이미 용병들이 달려들고 있는데 굳이 그럴 필요도 없어 보였고, 오히려 지셀이 싸우는 데 방해가 될지도 몰랐다.

그녀는 정말 위험한 순간에 지셀만 쏙 빼내 올 생각으로 조용히 주변을 경계할 뿐이었다.

"와아아아!"

크아아아아!

용병들이 모두 몰려들자 디루스 엔트들이 점점 밀리기 시작했다.

개개인의 힘은 부족할지 몰라도 무려 백 명이 넘는 인원이다.

용병들은 디루스 엔트 하나에 수십 명씩 달라붙어 공격을 시도했다.

크아아아!

무차별적으로 난도질당한 디루스 엔트들은 하나둘 검은 액체를 뿜어내며 쓰러지기 시작했다.

콰아아앙!

"으아아악!"

물론 용병들도 멀쩡하지 않았다.

디루스 엔트가 팔을 휘두를 때마다 제대로 막지 못한 용병들이 멀리 나가떨어졌다.

크오오오!

눈앞의 용병들을 날려 버린 디루스 엔트 하나가 넘어진 용병을 향해 거대한 발을 내질렀다.

이대로 밟아서 아예 짓이기려는 것이다.

"아, 안 돼!"

자신에게 닥쳐오는 거대한 그림자를 본 용병이 공포에 질려 비명을 내질렀다.

그는 자신의 최후를 직감하며 눈을 감았다.

퍽!

예상했던 고통은 느껴지지 않고 둔탁한 타격음만 들려오자 용병이 살짝 눈을 떴다.

그의 눈앞에는 거대한 대검으로 디루스 엔트의 발을 막고 있는 지셀이 있었다.

"어, 어?"

"어이, 괜찮나?"

"네, 네! 가, 감사합니다."

크아아아!

드드득.

분노한 디루스 엔트가 온 힘을 실어 누르자 지셀의 발이 점점 뒤로 밀리며 땅이 파이기 시작했다.

"빨리 피해라."

"네, 넵!"

용병은 허겁지겁 대답하고 잽싸게 몸을 굴려 자리를 피했다.

그와 동시에 지셀이 몸을 돌리며 대검을 거두었다.

디루스 엔트의 발이 땅을 강하게 찍었다.

콰아앙!

지셀은 몸을 다시 제자리로 돌리며 대검을 강하게 휘둘렀다.

콰지지직!

대검은 디루스 엔트의 발목을 그대로 훑고 지나갔다.

쿠오오오!

발이 잘린 디루스 엔트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며 비틀거렸다.

지셀은 멈추지 않고 디루스 엔트의 몸을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콰직! 콰직! 콰지직!

지셀 덕분에 몸을 피한 용병은 질린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지셀이 싸우는 모습은 그가 지금까지 봐 왔던 기사나 귀족들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거칠고 무자비했으며 소름 끼칠 정도로 잔인했다.

오히려 기사보다는 용병이나 산적들이 싸우는 모습과 흡사했다.

'무, 무서운데 세잖아?'

용병이 감탄하며 정신을 못 차리는 동안, 지셀은 디루스 엔트를 걸레짝으로 만들고 자리를 옮겼다.

사방을 종횡무진 다니며 활약한 지셀 덕분에 디루스 엔트는 수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쿠오오오....

시간이 좀 걸리기는 했지만 결국 디루스 엔트들은 모두 쓰러지고 말았다.

"이, 이겼다!"

용병들이 숨을 헐떡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으로 환호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침묵을 지키며 바라보는 방향에는 지셀이 눈을 감고 고개를 든 채 서 있었다.

쿠웅!

지셀이 대검을 바닥에 꽂고 몸을 돌리자 용병들이 움찔거렸다.

그가 보여 준 무위에 압도된 탓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지셀은 애송이 귀족이 아니라 무시무시한 전사였다.

"흠."

지셀은 무표정한 얼굴로 모두를 둘러보았다.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모습이었다.

"구경은 잘들 했나?"

용병들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돈을 받고 고용되었음에도 무섭다고 도망가려 했다.

고용주가 목을 베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다.

애송이 귀족이라며 지셀을 비웃었지만, 실상은 자신들이 그보다 못했던 것이다.

"싸울 수 있는데도 겁부터 먹으면 결국 죽는다."

그 언젠가, 오크를 만났을 때 겁먹었던 병사에게도 같은 말을 했었다.

그때처럼 지셀은 일부러 용병들을 부르지 않고 혼자 싸웠다.

목적이 생존이든, 돈이든, 성장이든 스스로의 의지로 싸우는 게 중요하다.

싸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 주는 것.

가장 위험한 곳에 가장 먼저 도착하는 것.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압도적인 무력을 보여 주는 것.

그것이 언제나 그의 역할이었다.

그렇기에 전생에도 모든 용병이 그를 믿고 뒤를 따랐다.

"이제부터 도망가는 자는 제일 먼저 목을 베겠다."

차가운 표정과 무시무시한 눈빛에 눌려 용병들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숨 막히는 분위기 속에서 지셀이 말을 이었다.

"모두가 살아 나갈 수 있다고 장담은 못 하지만, 최대한 많은 사람을 살려 나가겠다."

용병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언제나 가장 앞에 서겠다."

그 말에 벨린다는 인상을 썼지만, 용병들은 표정을 굳힌 채 지셀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온 힘을 다해 나를 따라와라."

지셀의 말이 끝나자, 용병들은 결연한 표정으로 무기를 들고 일어섰다.

벨린다는 용병들을 휘어잡는 지셀을 보고 살짝 놀랐다.

'갑자기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잖아?'

최근 지셀은 여유 있고 장난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예전의 신경질적인 모습보다야 훨씬 낫긴 했지만, 다른 귀족들처럼 무게 잡는 행동은 보여 준 적이 없었다.

'마수의 숲이라 긴장했나.... 좀 뭔가 다른 것 같은데.'

지금 용병들은 지셀의 말 한마디에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그가 보인 활약 덕분이다.

별거 없는 애송이로만 보이던 자가 순식간에 분위기를 압도하고 있으니 모두가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런데 정작 지셀은 언제 그런 진지한 모습을 보였냐는 듯, 이번에는 용병들의 치료를 도와주고 어깨를 툭툭 치며 농담 따먹기를 하고 있었다.

'참 갈수록 종잡을 수가 없네. 다중 인격이라도 된 건가?'

어느 날 갑자기 사람이 변해 버렸으니, 그를 오랫동안 보아 온 벨린다로서도 이제는 지셀이 어떤 사람인지 정의할 수가 없었다.

부상자들을 치료하며 잠시 휴식을 취한 일행은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이전과 조금 달라진 건 용병들이 처음처럼 건들거리지 않고 빠릿빠릿하게 움직인다는 것이었다.

"저것들의 내피를 적당히 챙겨라."

"네? 저걸 왜 가져갑니까?"

지셀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용병들이 머뭇거렸다.

몬스터의 살덩이 따위를 뭐 하러 챙겨 간다는 말인가?

"가져가서 방화복이나 소화용 물품을 만들 생각이다."

지셀이 덧붙인 설명을 듣고 용병들이 감탄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하긴 열기도 잘 막고 불이 붙어도 금세 꺼졌으니."

"잘만 사용하면 쓸 만하겠는데?"

용병들이 보기에도 불을 끄거나 막아 내는 데 확실한 효능이 있는 소재였다.

화재가 발생했을 때 열기를 차단하는 물건을 만들면 꽤 쓸모가 있을 것이다.

부지런히 내피를 벗겨 내는 용병들을 보며 지셀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제법 쓸 만하겠어.'

전생의 기록에 따르면 디루스 엔트의 가죽은 무려 4서클 화염 마법까지 견딜 수 있다고 한다.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엄청난 결과를 낼 수 있는 물건인 것이다.

지셀은 이것을 어디에 쓸지도 계획해 둔 상태였다.

"전부 챙길 필요는 없다. 다음에 다시 와서 가져갈 테니까."

어차피 이곳에 출입하는 사람은 없으니 다음에 길을 정비할 때 들고 가도 괜찮을 것이다.

소재를 적당히 챙긴 용병들은 디루스 엔트들의 시체를 한곳에 몰아넣은 뒤 다시 길을 내는 작업을 진행했다.

첫날에는 그 이상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튿날부터는 시도 때도 없이 몬스터가 습격해 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사흘이 지나자 용병들은 이 숲이 자신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지옥이라는 걸 확실히 깨달았다.

"젠장! 미쳤어! 여긴 미친 숲이야!"

"무슨 몬스터가 끝도 없이 튀어나와!"

"쉴 시간이 없잖아!"

용병들은 끝도 없이 튀어나오는 몬스터들에 질려 버렸다.

마수의 숲에 온다고 했을 때부터 몬스터와 싸울 각오는 했지만, 그건 그들이 생각하는 '상식적인' 수준일 때의 이야기였다.

"이런 곳인 줄은 정말 몰랐다고...."

한 용병이 중얼거리자 근처에 있던 용병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사는 몬스터는 숲 밖의 몬스터보다 훨씬 더 크고 강력했다.

바깥에서 용병 대여섯 명이 붙으면 잡을 수 있는 몬스터도 이곳에서는 몇 배가 되는 인원이 붙어야 처리할 수 있었다.

마수의 숲에 사는 몬스터들은 강할 뿐만 아니라, 생김새도 기괴해서 보는 사람을 질리게 했다.

사람을 잡아먹는 거대한 식인 식물쯤은 귀여워 보일 정도로 기상천외한 몬스터들이 즐비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습격에 끝이 없다는 점이었다.

"잠이라도 편하게 자고 싶어."

사흘 동안 용병들은 제대로 잠조차 잘 수 없었다.

몬스터들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찾아왔기 때문이다.

"흐흐, 이게 초입이라고? 도대체 저 깊숙한 곳에는 뭐가 살고 있는 거지?"

한 용병이 자조적인 웃음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사흘이나 지났지만 실제로 이동한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다.

길을 내는 작업도 오래 걸렸고, 몬스터들과의 전투가 끊이질 않아 시간을 계속 잡아먹었다.

고작 초입부도 이 지경인데 숲의 깊은 지역에는 얼마나 무시무시한 놈들이 살고 있을지 예상조차 되지 않았다.

용병들은 지금껏 마수의 숲을 개척하려는 사람이 없었던 이유를 이해했다.

이런 곳을 개척하려면 영지 수준이 아니라 국가에서 나서야 할 것이다.

"그래도 고용주가 날뛰는 덕분에 피해가 적은 편이야."

"그러게. 무섭지도 않나 봐."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용병들이 지치고 무서워도 버틸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지셀 때문이었다.

그는 공언한 대로 언제나 가장 앞에 서서 싸웠다.

벨린다와 길리언이 여러 번 말렸지만, 전혀 듣지 않았다.

가장 선두에 있으니 당연히 위험도도 가장 높다.

그래도 지셀은 몬스터가 나타나는 족족 뛰어나가 용병들의 피해를 최소화했다.

"어떨 때는 몬스터보다 고용주가 더 무서워. 싸울 때는 완전히 악귀 같다니까?"

"그래도 덕분에 목숨 건진 놈들이 한두 명이 아니잖아. 고용주 아니었으면 진작에 우리 다 죽었을 거다."

시간이 지날수록 용병들은 진심으로 지셀에게 감화되기 시작했다.

"정말 살아서 돌아갈지도 모르겠군."

"고용주만 잘 따라가면 될 거 같아."

각자 생각은 달라도 지셀이 최선을 다해 싸운다는 데에는 모두가 동의했다.

그건 용병들이 힘을 내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크아아앙!

"으아아악!"

"살려 줘!"

디루스 엔트처럼 서식지가 기록되어 있는 몬스터들은 미리 대비해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셀이 언제나 모든 위험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이 숲은 몬스터들 천지다.

서식지가 없이 떠돌아다니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옮겨 다니는 몬스터들도 존재했다.

그런 몬스터들은 일행의 정면이 아니라 옆이나 뒤에서도 갑자기 튀어나왔다.

"버텨라! 내가 가겠다!"

그럴 때면 지셀은 누구보다 빨리 그곳으로 달려가 용병들을 구해 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셀의 몸은 곳곳이 상처투성이로 변했다.

누구보다 앞서 싸우고 누구보다 몸을 사리지 않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도련님! 용병들에게 맡기라고요! 그만 좀 나서요! 미쳤나 봐! 왜 이래!"

벨린다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어떤 고용주도 이렇게 몸을 직접 굴리며 싸우지 않는다.

전쟁에서도 지휘관은 최대한 몸을 사린다.

무리를 이끄는 자가 무사해야 무리 전체도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셀은 무식할 정도로 과격하게 스스로를 혹사시켰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벨린다는 심장이 덜컥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하아, 자기 몸이 아깝지도 않나?'

지셀의 실력은 충분히 보았다. 인정할 만한 실력이었다.

몬스터가 나타나면 상대하기에 가장 나은 방법을 찾아 지시하기도 한다.

판단력과 지휘력도 놀라운 수준이지만, 미친 듯이 싸우는 모습에 가려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벨린다의 걱정이 늘어 갈수록 용병들이 지셀에게 의지하는 마음은 더 커졌다.

"이번에도 고용주가 구해 줬어."

"차라리 고용주 옆에 있는 게 더 안전하다니까."

"무슨 귀족이 저래? 전생에 어디 돌격대 대장쯤 되었던 거 아닐까."

"으하하, 그러네. 돌격대가 딱 잘 어울리네."

규모가 큰 용병단에서는 가장 위험한 일을 맡는 돌격대를 따로 구성한다.

지금까지 지셀이 한 행동은 그런 돌격대를 이끄는 돌격대장과 다를 게 없었다.

실제로 지셀은 전생에 대부분 돌격대로서 임무를 수행했으니 용병들의 말도 틀리지는 않았다.

몬스터 사이에서 날뛰는 그를 볼 때마다 용병들은 묘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단지 경외감뿐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지셀에 대한 믿음이 생겨나고 있었다.

"고용주가 저렇게 하는 건 우리를 위해서라고."

누군가가 흘린 말에 용병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용병은 가장 천한 취급을 받는 직업 중 하나다.

돈을 받고 목숨을 파는 비천한 자들이라는 인식이 뿌리 깊게 박혀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셀에게서는 용병들을 무시하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그들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고, 용병보다 더 털털하고 호쾌한 모습을 보였다.

그렇기에 그들은 점점 지셀에게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물론 모든 이가 그런 건 아니었다.

끊임없는 전투와 강력한 몬스터들 때문에 아예 전의를 상실한 자들도 있었다.

얍삽한 쥐처럼 생긴 용병, 마누스도 그런 인물이었다.

33화 여기는 미친 곳이야. (1)

마누스는 교묘하게 사람들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이건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우리는 지금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는 거라고."

"그래도 목적지는 초입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는데...."

"크큭, 넌 그걸 믿냐? 그게 어딘데? 어디까지 들어갈 줄 알고 그래?"

"...."

"지금 생각해 보면 이상한 게 한둘이 아니야. 아무도 온 적이 없는 이 숲에 목적지를 정했다고? 그게 어딘 줄 알고? 왜 가는 건데? 뭐가 있는 줄 알고?"

"으음, 그런 생각은 안 해 봤는데."

"젠장! 고용주는 미친 게 분명해! 그냥 혼자서 망상만 하다가 끝내는 게 아니라 실행력까지 있는 과감한 미친놈이라고! 우리도 결국 다 죽고 말 거야!"

마누스의 말에 아무도 반박하지 못했다.

간혹 망상에 빠진 영주나 귀족들이 괴상한 짓을 벌이는 경우가 실제로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가만히 듣고 있던 나이가 지긋한 용병, 토란이 인상을 찌푸렸다.

"고용주가 아니었으면 진작에 다 죽었을 거다. 쓸데없는 소리 하면서 불안감을 조성하지 마라."

"...아니, 나는 그냥 불안하니까."

"저런 고용주를 만나는 게 흔한 일인 줄 아나? 고용주는 누구보다 앞에 서서 싸우고 있고 누구보다 우리 목숨을 구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보통 귀족들은 용병들에게 지시할 뿐, 앞장서서 싸우지는 않는다. 위험한 일이라면 더 그랬다.

용병들을 고용하는 이유는 방패로 쓰기 위함이지 함께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니까.

그건 용병들조차도 당연히 받아들이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셀은 달랐다.

정말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려는 모습을 계속 보여 주고 있었다.

이미 그 모습에 감명받은 토란은 분란을 일으키려는 마누스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고용주가 아니었으면 우리는 이미 다 죽었어. 망상이 아니라 그만한 실력이 있는 거다. 우리는 믿고 따르면 된다."

마누스도 더 이상 토란의 말을 반박하지 못했다.

다른 용병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렇지. 우리를 고기 방패로 쓰려는 게 아니야."

"고용주가 다른 귀족들과 다르다는 건 확실하지."

"지휘하는 건 어떻고? 아주 능수능란하더라.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야."

"저런 고용주라면 믿을 만하지."

그래도 강력한 몬스터와 몸을 부딪치며 싸워야 하니 부상자와 사망자가 안 나올 수는 없었다.

마누스가 그 사실을 상기시키며 투덜거렸다.

"그게 언제까지 통할 거 같은데? 지금이야 괜찮다 쳐도 이렇게 계속 지내다가는 결국 다 죽고 말 거야."

아무리 놀라운 능력을 보여 주면 무엇 하나?

쉴 틈 없이 싸우다 보면 결국 피로 때문에 모두 지쳐 쓰러질 것이다.

지셀이 아니었으면 이미 진작에 다 죽었을 정도로 이 숲은 위험했다.

초입에 서식하는 몬스터는 경쟁에서 패배하고 외곽으로 밀려난 놈들일 텐데도 숲 밖의 몬스터보다 강력했다.

아직 목숨이 붙어 있을 때 다 때려치우고 도망가야 했다.

마누스가 자꾸만 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그래서였다.

도망간다면 고용주한테 죽을 거 같고, 설사 그가 놓아주더라도 혼자 돌아갈 자신이 없었다.

불안감과 피로감에 빠진 용병들을 선동해 고용주를 압박하고, 최대한 위약금을 적게 물고 돌아가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목숨이 아깝지도 않아? 아무리 용병이지만 스스로 죽을 자리를 찾아가는 놈이 어디 있냐?"

하지만 토란이 코웃음을 치며 반박했다.

"돈을 받았으면 목숨을 맡기는 게 용병 아닌가."

"멍청하긴, 그런 용병이 요즘 어디 있어? 우리는 결국 고기 방패로만 쓰이다 죽을 거라고. 고용주도 정말 위험해지면 도망갈걸?"

실력 있는 용병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인가.

목숨을 걸고 임무를 완수하는 것?

아니다. 가장 오래 살아남는 자가 가장 실력 있는 자다.

위험하다 싶으면 빨리 발을 빼는 것도 용병에게 꼭 필요한 능력이다.

귀족을 믿고 따르는 건 정말 멍청한 짓이다.

지금이야 배려하는 척 행동해도 언제든 위험해지면 자신들을 버리고 도망갈 테니까.

귀족이란 본디 그런 놈들이다.

마누스가 계속 선동하자, 동요하기 시작한 용병들이 있긴 있었다.

현실적인 발언에 마음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젠장, 멍청한 꼰대 새끼!'

하지만 토란처럼 고지식한 놈들이 문제였다.

용병들 대부분은 고용주를 믿고 끝까지 임무를 완수하겠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마누스가 다시 입을 열려 할 때, 토란이 그의 멱살을 잡았다.

"자, 봐라. 고용주가 쓰고 있는 저 약과 포션은 우리 몸값보다 비싼 거다. 너라면 저렇게 할 거냐? 고용주가 정말 우리를 고기 방패로 쓸 생각인 거 같냐고?"

그 말에 가까이 있던 용병들이 모두 고개를 돌렸다.

용병들의 시선이 향한 곳에서는 지셀이 부상자들의 상처를 치료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자들은 다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고용주가 쓰고 있는 약은 정말로 자신들의 몸값보다 비싼 약들이었기 때문이다.

용병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군거렸다.

"하긴, 우리를 버릴 사람 같지는 않아."

"치료하는 솜씨도 보통이 아니야. 나는 무슨 전문 치료사인 줄 알았다니까?"

"포션도 적게 쓰는데 효과가 엄청나더라고."

사람들의 반응이 다시 시들해지자 마누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모습을 본 토란은 잡았던 멱살을 탁 놓았다.

"우리는 돈을 받았으니 그냥 따르면 된다."

"쳇."

침을 뱉는 마누스를 일별하고 자리로 돌아간 토란은 가만히 앉아 지셀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자신도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겪었던 고용주들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에 조금씩 마음이 끌렸다.

용맹하거나, 지휘력이 뛰어나거나, 똑똑한 귀족들은 많이 만나 보았다.

하지만 용병을 소모품으로 취급하는 게 아니라 인간답게 대해 주는 귀족은 단연코 처음이었다.

자기 몸을 사리지 않고 저렇게 앞장서서 싸우는 귀족 또한 본 적이 없었다.

토란은 돈이 아니라 지셀이라는 인간 자체에 감화되고 있었다.

'정말 죽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조금 더 보고 싶군.'

죽음이 무섭지 않은 건 아니었다.

마누스의 말처럼 정말 죽을 수도 있었다.

그래도, 설령 죽더라도 끝이 어떤지 함께 가보고 싶었다.

멍청한 결정인지도 모르지만... 돈을 받고 목숨을 파는 용병이 죽기 싫다고 도망친다면 용병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그건 토란이 용병으로서 품은 마지막 신념이자 양심이었다.

"그나저나 우리 고용주는 돈도 많군. 가난한 영지라더니 저런 비싼 약들은 어떻게 구해 온 거지?"

토란의 말대로 지셀은 귀한 약들과 포션을 아낌없이 쓰고 있었다.

오죽했으면 벨린다가 끊임없이 잔소리를 할 지경이었다.

"아니, 도련님! 그 귀한 약재며 포션을 그렇게 마구 쓰면 어떻게 해요? 도련님 다쳤을 때 써야죠! 내가 미쳐 정말!"

지셀은 용병의 팔에 붕대를 꽉 감아 주며 말했다.

"그거 아껴서 뭐 해? 다 쓰려고 가져온 건데. 필요할 때 제대로 써야지."

"이러다가는 나중에 도련님이 필요할 때 쓸 것도 없다고요!"

"그건 뭐 그때 가서 생각해 보자고."

벨린다가 지셀을 흘겨보며 툴툴댔다.

"비싼 약 쓰는 것도 아까워 죽겠는데, 무슨 치료까지 직접 해 줘요?"

"이놈들 치료하는 게 영 개판이잖아. 보고 있으니 속이 뒤집힐 거 같아서 말이지."

털털한 지셀의 답변에 벨린다는 답답하다는 듯 제 가슴을 두드렸다.

다친 용병은 감격해서 말했다.

"가, 감사합니다. 공자님."

"됐고, 쉴 수 있을 때 잘 쉬어 둬라. 나중에 응급 치료법도 좀 제대로 배우고."

"헤헤, 알겠습니다요."

용병들이 소독을 하겠답시고 상처에 오줌을 휘갈기고, 아무런 효과도 없는 풀을 덕지덕지 붙이고 있는 꼴을 보고 지셀은 순간 머리가 띵해졌다.

어쩔 수 없이 하나하나 붙잡고 가르치며 챙겨 주었다.

"부목을 그딴 식으로 대면 뼈가 어긋날 거다. 그리고 너는 오줌 금지다. 더 발랐다가는 살이 곪아 버릴 거야. 이 멍청한 놈아! 그걸 왜 마셔!"

지셀의 행동에 감격한 용병들이 조금씩 늘어났다.

다른 고용주들은 보통 부상이 심한 용병들은 버리거나 죽게 내버려 둔다.

살려 두려면 돈도 들고 피곤한 일이기 때문이다.

벨린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용병을 챙기는 지셀을 뜯어보았다.

"도련님이 어떻게 저런 걸 알고 있지? 저렇게 주변을 챙기는 사람도 아니었는데... 설마 진짜 흑마법사가 빙의한 건가?"

그녀가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동안에도 일행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전투를 반복하며 나아간 지 오 일째가 되는 날.

일행은 작은 호수를 발견했다.

"와, 물이야!"

"엄청 시원하잖아!"

물을 발견하자마자 용병들은 모두 달려가 목을 축였다.

챙겨 온 물이 있지만, 미지근할뿐더러 시간이 지날수록 물주머니의 냄새가 배어서 마시기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속이 뻥 뚫릴 정도로 차가운 호수의 물은 쌓여 온 갈증을 단번에 해결해 주었다.

평소에는 용병들의 움직임을 제한하던 지셀도 그 행동은 막지는 않았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생각에 잠겼다.

'정리한 루트는 비교적 정확하다.'

전생에 왕국의 토벌대가 진행한 경로와 자신이 가려는 경로는 달랐다.

당연히 몬스터들도 일행이 마주치는 순서대로 기록되어 있지는 않았다.

지셀은 기억을 더듬어 예상 경로와 몬스터들의 기록을 다시 맞추었다.

지금까지는 비교적 잘 들어맞았고, 운이 좋았는지 나타나지 않은 몬스터들도 있었다.

'이제부터가 진짜 위험하다.'

이 호수는 지셀이 목적지로 삼은 장소에 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그리고 더 큰 위험이 시작됨을 알리는 곳이기도 했다.

[그것들은 아마 호수를 지날 즈음 따라붙기 시작했을 것이다.]

지셀은 기억 속 문구를 여러 번 되뇌며 일행에게 말했다.

"오늘은 여기서 쉰다. 오랜만에 씻고 재정비도 하도록 하지."

용병들은 그의 지시에 따라 주변의 나무를 베고 시야를 확보한 뒤, 야영 준비를 했다.

"도련님, 금방 저녁 준비해 드릴게요."

지셀의 실력을 어느 정도 알게 된 뒤, 벨린다는 몬스터를 상대할 때는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들보다는 훨씬 체력 소모가 덜한 편이었다.

그녀는 작은 솥을 수레에서 꺼내 물을 받고 각종 양념과 육포를 넣어 따뜻한 수프를 끓였다.

"자, 이거 드세요. 이런 곳에서는 든든하게 먹어야 힘을 쓰는 법이라고요."

"아니, 그렇다고 나 혼자만 매일 이런 걸 먹기는...."

"쓰읍! 잔말 말고 그냥 드세요."

벨린다는 포크를 그의 눈앞까지 들이밀고 사납게 웃었다.

지셀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고 용병들이 휘파람을 불며 야유를 보내왔다.

"어휴, 누구는 따뜻하고 맛있는 거 먹는데 누구는 딱딱한 육포나 뜯고."

"아니, 전투도 안 하고 공자님 뒤만 따라다닐 거면 우리 밥이라도 해 달라고!"

"그래, 앞으로 식사 담당을 맡아라! 우우!"

"우리도 따뜻한 수프를 달라!"

피잉!

순간,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나무에 포크가 깊이 박혔다.

야유하던 용병들 중 하나가 기대고 있던 나무였다.

제 귀 옆에 바로 박힌 포크를 보고 용병은 식은땀을 흘리며 눈알만 뒤룩뒤룩 굴렸다.

벨린다가 웃으며 말했다.

"호호호, 다들 손 있으시잖아요. 직접 해 드세요. 아셨죠? 저는 우리 도련님 챙기기도 바쁘거든요."

용병들이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냥 하녀인 줄 알았는데, 포크를 던진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자칫했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이마가 뚫릴 거 같았다.

지셀은 피식 웃으며 벨린다에게 말했다.

"여유가 생기면 용병들도 좀 챙겨 줘. 다들 고생하고 있으니까."

"뭐, 생각해 볼게요."

"그나저나 오늘은 입맛이 별로 없는데, 이건 다른 사람들에게...."

"여기까지 와서 반찬 투정이세요? 빨리 드셔야죠. 어렸을 때 바로 식사 안 하시면 제가 어떻게 했는지 기억나시죠?"

벨린다가 새로운 포크를 꺼내 지셀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지셀도 더는 말을 덧붙이지 않고 얌전히 수프를 마셨다.

34화 여기는 미친 곳이야. (2)

저녁을 먹고 밤이 다가오자 숲의 분위기는 더욱더 으스스해졌다.

매일 치러지는 전투로 피로가 쌓였음에도 불구하고 용병들은 쉬이 잠들지 못했다.

멀리서 간간이 들려오는 흉측한 괴성이 신경을 긁었기 때문이다.

일행은 모닥불을 피우고 램프를 걸어 주변을 밝힌 뒤에야 겨우 잠이 들 수 있었다.

하지만 지셀은 자리에 눕지 않고 모닥불 앞에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도련님은 안 주무세요?"

"확인할 게 있어."

"뭘요?"

"몬스터."

"네?"

벨린다가 인상을 찌푸리며 묻자 지셀이 조용히 답했다.

"낮에는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던 몬스터들이 밤에는 안 나타나. 이유가 있겠지?"

"설마...."

벨린다는 금방 지셀의 말뜻을 이해했다.

이틀 전만 해도 몬스터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덤벼 오곤 했다.

그런데, 요 이틀 동안에는 밤에 습격해 오는 몬스터가 하나도 없었다.

"이 지역에 밤에만 활동하는 몬스터가 있다는 얘기군요."

"그래, 그것들이 두려워 다른 몬스터들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거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주변에 있던 용병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첫날이었다면 애송이 귀족이 뭘 아냐며 무시하고 웃어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닷새 사이에 지셀이 보여 준 능력은 범상치 않았다.

그런 그가 하는 말이니 강한 설득력이 느껴졌다.

휘이이잉.

시간이 지나고 주변이 완전히 어둠 속에 가라앉았을 때, 불길한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지셀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길리언과 카오르, 벨린다도 표정을 굳히고 따라 일어났다.

[그것들은 어둠 속에서 우리를 지켜 보고 있었다.]

"공자님."

길리언이 부르자 지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주변에 무언가 있었다.

기감이 예민한 자들은 그 숨 막히는 시선들을 느낄 수 있었다.

몇몇 용병들도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램프가 비추는 범위 너머는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둠으로 가득한 주변에 무언가가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지셀이 풀어낸 마나의 실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주변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들의 숫자를 확인하고 지셀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예상 밖이로군.'

[그것들의 수는 약 이백여 마리였으며... 우리가 지칠 때까지 끈질기게 따라다녔다. 분노한 발자크 백작이 단신으로 그것들을 쫓았으나 고작 십여 마리를 척살하는 게 전부였다.]

지셀이 확인한 수는 얼추 삼백이 넘었다.

역시 시기가 다르니 정보가 완벽하게 들어맞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모두 움직이지 마라."

용병들은 무기를 들고 불안한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휘익!

채찍과 같은 무언가가 날아와 걸려 있던 램프 하나를 낚아채 갔다.

램프는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 곧 빛을 잃었다.

하지만 그 잠깐 사이에 인간과 비슷한 형체가 얼핏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들은 우리의 빛과 시야를 훔쳐 가기 시작했다.]

휘익! 휘익!

다시 채찍들이 날아와 램프 몇 개를 낚아채 갔다.

[그것들은 어둠과 동화하는 능력이 있어 빛을 극도로 꺼린다는 걸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램프가 줄어들자 순식간에 주변이 어두워졌다.

카오르가 험상궂은 표정을 지으며 켈베로스 용병단을 끌고 뛰쳐나가려 했다.

마치 사냥감이 된 느낌이 그의 격렬한 본능을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셀은 손을 뻗어 그를 제지하고 그저 어둠 속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카오르는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뭡니까? 숨어서 지켜보는 놈들이니 전투력은 별 볼 일 없을 겁니다. 그냥 가서 조져 버려야 다시는 까불지 않죠."

"오늘은 여기까지다."

"여기까지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순간 주변을 에워쌌던 불길한 기운이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했다.

끄르르르....

기묘한 웃음소리를 남기고 그것들은 이내 완전히 사라졌다.

[그것들은 밤마다 우리를 찾아와 지켜보았다. 병사들은 한시도 편히 쉴 수가 없었고 우리는 점점 빛을 잃어 갔다.]

정체 모를 무언가가 물러난 걸 느끼고 용병들이 램프를 다시 꺼내려 했다.

지셀이 고개를 저었다.

"램프는 지금 상태로 유지한다."

"왜요? 밝을수록 좋은 거 아닙니까?"

[우리는 후회했다. 처음 호수에서 그것들을 느꼈을 때 확실히 처리하고 움직였어야 했다. 하지만 그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우리는 낮과 밤 모두 잃어버렸다. 휴식을 취할 시간은 없었다. 너무 깊이 들어와 방향도 잃은 상태였다.]

지셀은 용병들에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것들을 이곳에서 처리하려면 그래야 한다."

용병들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저게 무엇인지 알고 처리를 한단 말인가?

"저게 뭔데요?"

용병들의 물음에 지셀이 나직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팔로르."

[찬란한 문명과 지성을 잃고 몬스터로 타락해 버린 그것들은 이 숲에서 '어둠의 사냥꾼'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이들은 고대의 선주 종족 중 하나인 '팔로르'의 후예이며....]

* * *

일행은 더 이상 길을 내지도, 이동하지도 않았다.

그저 호수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나무를 베어 공터를 만든 뒤, 그곳에서 쉬고 있을 뿐이었다.

용병들이 각자 자리에서 휴식을 취하는 동안 길리언은 지셀의 옆에 붙어 물었다.

"공자님,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그것들을 처리하고 움직일 생각이야. 안 그러면 계속 따라붙을 테니까."

"어둠 속에서 지켜보기만 하는 놈들을 무슨 수로 잡는단 말입니까? 우리가 치려 해도 도망갈 겁니다."

"일단 오늘 밤에 확인해 보자. 용병들에게 활과 화살을 준비시켜."

"으음, 알겠습니다."

길리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적들이 그들을 포위한 채 구경만 하고 있다면 아예 화살 세례를 날려 주는 것도 좋은 방편일 거 같았다.

모두가 긴장한 상태로 다시 밤이 찾아왔다.

운이 좋았는지 아니면 팔로르들 때문인지 낮에는 몬스터가 습격해 오지 않았다.

충분히 쉬어 체력이 회복된 용병들은 활을 든 채 어둠 속을 주시했다.

끄르르르....

불길한 시선이 주변을 가득 채우는 것이 느껴졌다.

그 숨 막히는 대치 속에서 지셀이 외쳤다.

"쏴라!"

피잉!

순식간에 백여 개가 넘는 화살들이 사방으로 쏘아져 나갔다.

바깥을 보고 둥그렇게 모여 선 용병들이 각자 정면을 향해 아낌없이 화살을 날렸다.

하지만.

끄르르르....

돌아온 것은 마치 비웃는 듯한 괴기한 소리뿐이었다.

용병들은 당황했다.

"뭐, 뭐야!"

"하나도 안 맞았어? 말도 안 돼!"

분명 사방에 무언가가 있다는 건 느껴졌다. 단지 어둠 속에 숨어 모습만 보이지 않을 뿐.

그것들은 일부러 적의를 드러냈다. 기감이 둔한 사람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자신들을 포위하고 있다고 분명히 느껴질 정도로 몬스터가 많은데, 화살은 단 하나도 맞지 않고 허무하게 날아갔을 뿐이다.

"도, 도대체 무슨 몬스터길래...."

"이 많은 화살 중에 맞은 게 하나도 없다고?"

용병들은 공포에 질려서 뒷걸음질했다.

그런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길리언은 입술을 실룩거리며 마나를 끌어올렸다.

화살에 마나를 담아 더 강력하게 쏘아 보려는 속셈이었다.

그때 지셀이 길리언의 손을 잡아 제지했다.

"안 돼. 아직 마나를 사용하면 안 된다."

"공자님?"

"그러면 일이 더 피곤해져. 마나는 철저히 숨겨야 한다."

"그게 무슨...."

"곧 설명해 줄게. 역시 공격이 통하지 않는군."

[어둠에 동화된 팔로르들은 모든 물리적 공격을 통과시킬 수 있었다. 그렇기에 마나를 사용할 수 있는 발자크 백작과 기사들을 제외하면 팔로르들에게 타격을 줄 방법이 없었다. 이것은 고대 종족인 그들이 받은 축복이자 저주였으니....]

휘이익!

다시 램프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빛이 하나씩 사라질 때마다 주변은 더 어두워졌고, 용병들은 겁을 먹은 채 서로 몸을 바짝 붙였다.

지셀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램프가 없어지는 모양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팔로르들은 가장 먼저 주변의 빛을 없애려 한다. 하지만 그것들이 간과한 점은, 마나를 머금은 무기는 스스로 빛을 뿜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마나를 무기에 두르면 빛이 뿜어져 나온다.

아예 안 나오게 할 수도 있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감추는 사람은 없었다.

팔로르들에게 타격을 주려면 마나를 써서 공격해야 했다.

어둠 속에서는 공격을 손쉽게 피하는 놈들이지만, 빛이 비치며 형체가 드러나면 더 이상 무적이 아니니까.

당장이라도 마나를 사용할 수 있는 자들이 팔로르들을 쫓는다면 어느 정도 타격은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셀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오히려 더 곤란해지지.'

[발자크 백작은 분명 왕국에 다시 없을 정도로 강력한 무인이지만, 그 힘을 너무나 과신했다. 팔로르들은 발자크 백작을 당할 수 없자 병사들을 납치하기 시작했다.]

첫날에 켜 두었던 램프는 절반 이상 사라졌다.

어두운 공간에 남겨진 용병들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끄르르르....

팔로르들은 만족한 듯 웃음을 내뱉은 후 사라졌다.

이런 식으로 점점 압박을 가해 사냥감들의 전의를 떨어뜨리고 공포를 주는 것이 이들의 사냥 방식이었다.

"모두 모여라. 설명을 해 주겠다."

팔로르들이 사라지자 지셀은 용병들을 모아 놓고 자신이 아는 걸 설명해 주었다.

설명을 듣고 일행 모두가 경악해 입을 벌렸다.

빛이 없으면 공격이 통하지 않는 몬스터라니, 그런 건 들어 본 적조차 없었다.

하지만 실제로 화살을 쏘아 본 뒤라 믿기 싫어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 그러면 램프도 더 설치하고 횃불도 만들어서 잔뜩 둘러놔야 하지 않겠습니까?"

"시간을 잠깐 벌어 줄 뿐, 결국은 모든 불을 뺏길 거야."

"그러면 이건 어때요?"

벨린다가 단검 하나를 쥐어 들자 곧 단검에 푸른 빛이 서리기 시작했다.

기척만 잡을 수 있다면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도 죽일 수 있다.

무기가 가까이 가는 순간에는 몸 일부라도 빛이 비칠 테니까.

"역시 벨린다는 똑똑하네."

지셀이 칭찬하자 벨린다가 콧대를 높이 세우며 잘난 척했다.

"저 왕립 아카데미 나온 여자예요."

"거짓말은 잘한다니까. 어쨌든 마나를 사용하면 안 돼."

"거짓말인 거 어떻게 알았어요? 아니, 마나는 왜 쓰면 안 되는데요?"

"그러면 저놈들이 사냥 방식을 바꿀 테니까."

[잡혀간 병사들의 흔적을 발견했다. 산 채로 잡아먹힌 모습이었다. 분노한 발자크 백작은 팔로르들이 나타날 때 아예 주변 수십 미터를 날려 버렸다. 하지만 이미 그 힘을 알고 있는 팔로르들은 멀리 떨어져 다니며 빛에 노출되기도 전에 어둠 속으로 숨어 도망갔다. 결국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병사들이 끌려가도 구경만 하는 꼴이 되었다.]

만약 팔로르들이 싸움을 피하고 쫓아다니며 하나둘씩 납치하는 방식을 취한다면 자신들은 금세 말라 죽을 것이다.

마나를 쓸 수 있는 사람도 적고, 숫자도 그리 많지 않은 지금의 전력으로는 전멸할 수밖에 없었다.

지셀이 설명을 이어 갈수록 일행들은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

가뜩이나 숲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강력한 몬스터들이 나오고, 그만큼 피해도 늘어나고 있었다.

그런데 밤마다 저런 놈들이 쫓아와 납치를 시도한다고 상상하니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그,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미 저놈들이 우리를 사냥감으로 찍은 거 아닙니까. 지금이라도 돌아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한 용병이 불안한 마음에 묻자 지셀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싸워야 해."

[이 인원으로는 도무지 방법이 없었다. 분명 싸우면 이길 수 있는 상대였지만 상대는 우리와 싸울 생각이 없었기에.... 결국 우리는 또다시 실패했고, 왕실 마법사 알로이스 경과 휘하 마법사들이 도착하고 나서야 그것들을 박멸할 수 있었다.]

지금 용병들보다 강한 전력이었던 전생의 선발대도 몇 번이나 마수의 숲 공략에 실패했다.

그들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아무런 정보가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팔로르들이 몬스터치고는 똑똑했던 것도 문제였다.

하지만 지셀은 그들과 다르다.

'저것들이 눈치채기 전에 이곳에서 모조리 죽인다.'

정보는 충분하고 준비도 철저히 했다.

모든 것이 그의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35화 여기는 미친 곳이야. (3)

끌려다니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유리한 전장을 선택하는 건 전투의 기본이었다.

"어떻게 싸울지 말해 주마."

지셀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용병들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몇몇은 여전히 불안한 듯 보였지만 대부분은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미 이 젊은 고용주는 지금 같은 사태에 대비해 둔 것이었다.

"대, 대단해!"

"어떻게 알고 미리 준비하셨습니까?"

"저는 공자님만 믿겠습니다!"

용병들은 다시금 전의를 불태웠다.

그의 말만 잘 따르면 분명 전투에서 이길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다시 피어올랐다.

"낮에 충분히 휴식을 취해 둬라. 전투가 시작되면 긴 밤이 될 테니까."

지셀의 지시대로 용병들은 낮에 조용히 쉬며 체력을 보충했다.

밤이 오자 다시 팔로르들이 찾아와 램프를 가져가기 시작했다.

용병들은 더 이상 반응하지 않고, 마치 겁먹은 것처럼 고개만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어느새 램프는 몇 개 남지 않았다. 사람들의 시야는 확연하게 줄어들었다.

끄르르르....

팔로르들은 다시 웃음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리고 다음 날 밤.

휘리릭!

마지막 램프가 사라지고 사위는 완전한 어둠에 잠겼다.

나무를 베어 냈어도 워낙 나무가 많은 곳이라, 희미한 달빛은 옆 사람도 제대로 비추지 못했다.

끄르르르....

모두가 숨을 죽인 채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숨소리 하나도 들리지 않을 만큼 무거운 정적이 깔렸다.

스르륵, 스륵.

드디어 팔로르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모든 빛이 사라진 공간에서 팔로르들이 두려워할 것은 없었다.

수백 마리의 팔로르들에게 포위당하자 용병들은 식은땀을 흘렸다.

자신들 앞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서 있는 느낌에 본능적인 공포가 피어올랐다.

끄르르르....

팔로르들이 그들 앞에서 천천히 움직이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이제 그것들은 용병들을 죽이거나 끌고 가 먹이로 삼을 것이다.

그때 지셀이 외쳤다.

"지금이다!"

그 말과 동시에 모든 사람이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찢었다.

화아아악!

어린아이의 머리통만 한 하얀 구체가 순식간에 하늘로 떠오르며 빛을 밝혔다.

백 개가 넘는 구체가 공중에 떠오르자 주변은 대낮처럼 환해졌다.

그들이 찢은 것은 바로 1서클 마법 '라이트'의 스크롤.

지셀이 팔로르를 상대하기 위해 상자 가득 담아 온, 비장의 한 수였다.

카아아아악!

빛을 본 팔로르들이 눈을 가리며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러 댔다.

모습이 드러난 팔로르들을 보고 용병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뭔, 생긴 게 이따위로...."

사람과 비슷한 형체지만 그 키가 무척이나 크고 말랐다.

세로로 찢어진 네 개의 눈 옆에 뾰족한 귀가 달려 있었다. 입 또한 귀밑까지 찢어져 날카로운 이빨들이 보였다.

코는 없이 그냥 콧구멍 두 개만 얼굴에 박혀 있고, 볼에는 징그러운 힘줄들이 돋아나 있었다.

손이 있어야 할 위치에는 그저 낫처럼 날카롭고 긴 뿔 같은 것만 달려 있었다.

팔에는 기다란 촉수들이 여러 개 꿈틀거리고 있었다.

아마 이 촉수들을 늘려 램프를 훔쳐 간 모양이었다.

"어서 공격해라!"

팔로르들의 외형을 보고 주춤한 용병들에게 지셀이 소리쳤다.

"와아아아! 쳐라!"

이미 카오르와 켈베로스 용병단은 신나게 팔로르들의 몸에 무기를 찔러 넣고 있었다.

나머지 용병들도 각자 무기를 들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지난 밤에 화살이 통과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팔로르들의 몸에는 무기가 사정없이 박혔다.

"크흐흐! 아주 손이 근질거렸다고! 이 개자식들아!"

카오르는 광기에 찬 웃음을 내뱉으며 팔로르들의 얼굴을 잡고 하나하나 직접 목을 찔렀다.

길리언 또한 도끼를 휘둘러 팔로르들의 머리를 가차 없이 박살 냈다.

이들은 그동안 숨겨 왔던 마나를 마음껏 뿜어내며 팔로르들을 죽여 나갔다.

카아아아아아!

갑작스러운 빛 세례에 놀랐던 팔로르들도 금방 정신을 차리고 반격을 시작했다.

팔로르들의 낫은 인간들의 갑옷과 피륙을 뚫을 수 있을 만큼 강력했다.

제 특기를 살려 어둠 속에 숨어 사냥하는 것이 특기인 놈들이지만, 마수의 숲에 사는 놈들이 어둡지 않다고 약할 리가 없었다.

푸우우욱!

"끄으으윽!"

팔로르들에게 공격받은 용병들이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놈들은 삼백여 마리에 이를 정도로 수가 많았다. 어둠 속이 아니더라도 위협적인 적이었다.

흩어져 있던 팔로르들이 순식간에 저들끼리 뭉쳐 사람들에게 달려들었다. 지셀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때 벨린다가 지셀의 앞을 막으며 외쳤다.

"도련님! 뒤로 물러나세요!"

펄럭!

그녀를 감싸고 있던 로브가 펄럭이자, 순식간에 수십 개의 단검이 뻗쳐 나가 팔로르들을 꿰뚫었다.

콰직! 콰직! 콰직!

스가가각!

벨린다의 옷 곳곳에 연결된 단검들은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움직이며 적들의 머리를 노렸다.

수십 개의 단검이 사방을 점유하며 공격하니 팔로르들은 곧 표적을 벨린다로 바꾸었다.

"흥!"

다가온 몬스터들의 공격을 피하던 벨린다가 자세를 굽혀 구두 뒷굽을 손으로 스쳤다.

철컥!

톱니가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뒷굽에서 날카로운 칼날이 튀어나왔다.

스각!

그녀가 발을 한번 휘두르자 팔로르의 턱이 베이며 잘려 나갔다.

카가가각!

이리저리 팔로르들의 낫을 피하며 사방에 공격을 퍼붓는 벨린다의 활약 덕분에 잠깐의 틈이 생겼다.

지셀은 눈앞의 적들을 벨린다에게 맡기고 빠르게 전장을 둘러보며 외쳤다.

"이 멍청한 놈들아! 진을 유지해라! 마구잡이로 싸울 생각 하지 마!"

지셀은 전투가 시작되기 전, 진을 짜 놓은 상태로 용병들을 대기시켰다.

그런데 이 멍청한 놈들이 흥분한 나머지 다들 뛰쳐나가 진이 무너진 것이다.

"방진을 유지한 채 싸워라! 방패로 막고 나머지는 안으로 들어가서 상대해!"

하나의 용병단도 아니고 병사들처럼 제대로 훈련시킨 것도 아니니 이런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셀은 수많은 용병을 거느리며 전장을 지배했던 용병왕이다.

이런 상황도 수없이 많이 겪어 보았다.

"길리언, 카오르, 광견단은 방진을 정비할 수 있게 시간을 벌어라!"

순식간에 전장을 파악한 그는 직접 용병들을 움직이며 검을 휘둘렀다.

지셀의 외침을 들은 켈베로스 용병단이 앞으로 나서고 나머지 용병들이 뒤로 빠지기 시작했다.

카오르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진이 무너진 쪽 용병들을 도우러 이동했다.

길리언 또한 적극적으로 움직이며 용병들이 다시 진을 만들 수 있게 도왔다.

켈베로스 용병단도 개개인의 실력이 뛰어나고 합이 잘 맞으니 충분히 팔로르들의 공격을 버텨 낼 수 있었다.

"더 빠르게 움직여라!"

지셀과 길리언, 카오르는 마나를 아끼지 않고 뿜어내며 팔로르들 사이를 뛰어다녔다.

오직 벨린다만이 용병들은 신경 쓰지 않고 눈앞에 보이는 팔로르들을 박살 내고 있을 뿐이었다.

크아아아아아!

세 사람과 켈베로스 용병단이 방해하자 팔로르들은 더욱 흉포하게 움직이며 용병들을 공격했다.

하지만 용병들도 나름대로 몬스터와 전투 경험이 있는 자들.

팔로르들의 시선이 분산되자 위급한 상황에서 조금씩 몸을 뺄 수 있었다.

"빨리 움직여!"

"방패! 방패 들어!"

"됐다! 들어와! 들어와!"

방패를 든 용병들이 앞서서 팔로르들의 공격을 막았다.

나머지 용병들이 그들의 뒤로 들어오자 방패를 든 용병들은 둥그렇게 사방을 막듯이 움직였다.

그렇게 몇 개의 진이 만들어지자 용병들의 피해가 빠르게 줄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지셀이 크게 외쳤다.

"용병들은 그대로 버텨라! 광견단, 길리언, 카오르는 용병들의 틈을 메워 줘!"

지시를 내리고 지셀은 크게 숨을 내쉬었다.

용병들이 알아서 움직일 수 있게 했으니 이제 자신이 쓸어 버릴 차례였다.

지셀은 두 개의 코어를 폭발시켜 마나를 뿜어냈다.

곧 그의 눈이 붉게 빛나고, 마나가 붉은 아지랑이처럼 몸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스가각!

지셀이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며 팔로르들을 베어 나갔다.

어두운 공간에서 그가 움직일 때마다 붉은 선들이 번개처럼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붉은 선이 한번 지나갈 때마다 팔로르의 머리가 잘려 나갔다.

그 모습을 본 용병들이 전투 중인 것도 잊은 채 중얼거렸다.

"뭐, 뭐야? 평소보다 더 강하잖아?"

"원래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것보다 더 강하다고?"

그동안 몬스터들과의 전투에서 지셀은 코어 하나만 사용했다.

두 개의 코어를 폭발시키는 건 몸에 무리가 가니 정말 위급한 상황에서만 쓸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몸에 무리가 가더라도 힘을 써야 했다.

팔로르들의 수가 너무 많아, 힘을 아끼다가는 용병들이 죽어 나갈 터였다.

카가가가각!

붉은 선이 번쩍일 때마다 팔로르들이 빠르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켈베로스 용병단 또한 그 모습에 고무된 듯 연신 몬스터들을 밀어붙였다.

"뭐 해? 구경만 할 거야? 우리도 싸워야지!"

한 용병이 외치자 진을 짠 용병들이 적들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팔로르들의 공격을 방패로 막은 용병들이 틈을 벌려 주면, 그 사이로 다른 용병들이 창과 검을 찔러 댔다.

물론 그들이 전문적인 군사 훈련을 받은 것은 아니라 합이 완벽하게 맞지는 않았다.

타이밍이 어긋나 방패가 밀릴 때도 있었고, 공격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길리언과 카오르가 그들을 도와주니 서툴게나마 진을 유지하며 공격할 수 있었다.

"밀어붙여! 밀어붙여!"

점점 협공에 익숙해진 용병들이 방패로 진을 짠 채 팔로르들을 압박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자 적들의 수는 확연하게 줄어들었다.

크아아아아!

팔로르들은 자신들이 함정에 빠졌다는 걸 깨달았다.

어둠 속에서는 적수가 없던 이들이지만, 지금 같은 상황이 이어진다면 종족이 전멸할 수도 있었다.

크아아아아!

뒤쪽에 숨어 은밀하게 용병들을 공격하던 팔로르의 우두머리가 동족들에게 도망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다른 팔로르보다 체구가 작아 전혀 우두머리처럼 보이지 않지만, 실상은 가장 강력한 개체였다.

우두머리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신호를 보낸 후 뒤로 물러났다.

자신만 무사하다면 종족은 다시 번성할 수 있다.

몸을 피하려는 그때, 모든 것을 파괴하며 달려오는 한 인간이 보였다.

소름 끼치도록 무서운 붉은 눈을 빛내며 번개처럼 다가오는 인간.

이미 몸을 피하기는 늦었다.

저 인간을 죽인 뒤 몸을 뺄 마음을 먹은 우두머리는 괴성을 지르며 낫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 낫은 허무하게 빈 공간을 스쳐 지나갔다.

우두머리는 공중에서 느껴진 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붉은 눈을 빛내는 인간이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검을 내리찍고 있었다.

"네놈이 대장이었구나."

지셀은 팔로르들의 사냥을 지휘한 게 이놈이라고 확신했다.

싸우면서도 전장 전체를 눈에 담고 있었던 그의 눈에, 마치 명령을 내리는 듯한 우두머리의 모습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가가가가각!

가차 없이 내리친 지셀의 검에 우두머리의 머리부터 몸이 반으로 쩍 갈려 버렸다.

두 개의 코어를 모두 폭발시킨 마나를 어지간한 몬스터가 버틸 리가 없었다.

크아아아아!

우두머리가 죽자 팔로르들은 혼란에 빠져 비명을 내지르며 이리저리 흩어지기 시작했다.

"모두 달라붙어!"

"와아아아아!"

"다 죽여 버려!"

지셀의 명령에 용병들이 방패를 집어 던지고 팔로르들에게 달라붙었다.

몇몇 용병이 발광하는 팔로르들의 움직임에 상처를 입었지만, 분노한 용병들은 개의치 않고 달라붙어 무기를 찔러 넣기 바빴다.

크아아악!

결국 팔로르들은 몸이 걸레짝처럼 변해 대부분 쓰러지고 말았다.

빛의 영역을 피해 어둠 속으로 도망치는 데 성공한 팔로르들은 몇 되지 않았다.

"그만! 쫓아가지 마라!"

몇 마리밖에 남지 않았어도 어둠 속에서는 용병들이 이길 방법이 없었다.

흥분한 용병들은 지셀이 만류하자 가까스로 움직임을 멈추었다.

"후우...."

지셀은 숨을 크게 내쉬었다.

순간, 그의 몸이 비틀거렸다. 두 개의 코어를 폭발시킨 후유증이었다.

전투는 끝났지만 다들 아무 말도 못 하고 지셀만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곧이어 용병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큰 함성을 내지르며 지셀의 주위를 에워쌌다.

"이겼다! 우리가 이겼어!"

"으하하하! 살았다! 살았어!"

용병들은 흥분에 차 환호를 내질렀다.

36화 여기는 미친 곳이야. (4)

지셀이 아니었다면 모두 무엇에 당했는지 영문도 모른 채 죽고 말았을 것이다.

용병들이 환호하는 모습을 구경하던 카오르는 옆에 있는 길리언에게 물었다.

"저 양반 도대체 뭐야? 망나니라더니 사실은 페르디움의 비밀 병기 같은 거 아니야?"

카오르는 지금껏 그가 보아 왔던 지셀의 실력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데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하나 있지. 저 나이 또래에 우리 공자님보다 뛰어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길리언도 지셀이 이 정도의 힘을 발휘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지금까지 몬스터들과 싸울 때도 지셀은 전력을 다하지 않은 것이었다.

단순히 천재라는 수준을 넘어서, 무언가 감추고 있는 게 확실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카오르에게 대답하는 길리언의 표정에는 감격과 자부심이 넘치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즐겁고 신이 난 건 아니었다.

"아, 비켜요! 비켜 봐!"

벨린다는 놀라서 용병들을 발로 차고 밀치며 지셀에게 달려왔다.

"도련님! 괜찮으세요? 아니, 실력이 갑자기 또 늘었잖아요! 정말 도련님 맞아요?"

벨린다는 지셀이 어느 정도의 실력인지 가장 많이, 오래 보아 온 사람이었다.

그녀가 보기에, 지셀의 실력은 몰려오는 팔로르들을 상대할 정도까지는 못 되었다. 그렇기에 이번에는 먼저 나섰던 것이다.

하지만 지셀이 이번에도 예상했던 것 이상의 실력을 보여 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괜찮아. 초반에 진이 무너졌는데 벨린다 덕분에 시간을 잘 벌었어. 모두 고생했고, 일단 부상자들부터 수습하자."

하지만 벨린다는 칭찬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 발을 동동 구르며 지셀의 상처를 보기 바빴다.

"도련님부터 치료받으셔야 해요."

"그리 큰 상처는 아니야."

벨린다의 말대로, 지셀도 무리하게 싸우는 바람에 이곳저곳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지셀뿐만 아니라 길리언과 카오르도 몸 곳곳에 베인 상처가 나 있었다.

난전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들 같은 실력자들이 상처를 입을 만큼 고된 전투였던 것이다.

힘이 세고 속도가 빠른 팔로르가 수까지 많았으니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호들갑을 떠는 벨린다를 보고 용병들은 서로 눈짓하며 웅성거렸다.

고작 하녀로만 생각했던 벨린다가 상상 이상으로 강하다는 사실에 다들 놀란 것이다.

"나는 단검 던지고 마나 두를 때부터 알아봤다니까?"

"웃기시네, 그런 놈이 수프 끓여 달라고 하냐? 너 모가지가 날아갈 뻔했다고."

전투의 여운으로 과열되었던 분위기가 가라앉고 나니 용병들이 하나둘 저들끼리 시시덕거리기 시작했다.

그 단순무식한 태도에 지셀이 혀를 차며 말했다.

"부상자들을 수습하고 시체들은 한곳에 모아라. 곧 라이트의 효과가 떨어지니 램프들도 새로 꺼내 걸고."

살아남은 용병들은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지셀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근육의 고든'도 그중 하나였다.

"휘유, 징그러운 새끼들."

공터의 가장 바깥쪽을 정리하던 고든은 팔로르들의 시체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놈들 때문에 며칠을 마음고생했으니 근육이 빠져도 단단히 빠졌을 것이다.

'돌아가면 운동을 더 빡세게 해야겠어.'

그는 도망가다 죽은 팔로르들의 시체를 대충 집어 던져 한곳으로 모았다.

여기저기 흩어진 시체들을 따라가던 고든이 아무 생각 없이 숲 쪽으로 다가갔다.

일행들과는 떨어져 있고 나무로 가득 찬 숲의 어둠과는 가까운 곳이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빛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라이트 마법의 지속 시간이 끝나 가면서 구체에서 나오는 빛도 상당히 약해진 상태였다.

고든은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끼며 재빨리 바닥에 누워 있는 시체의 다리를 잡았다.

후딱 뒤로 집어 던지고 일행에게 돌아갈 심산이었다.

그 순간, 죽은 줄 알았던 팔로르가 눈을 번쩍 떴다.

"어?"

예상치 못한 일에 놀라 고든은 멍한 소리만 내뱉었다.

카아악!

팔로르의 팔에 달려 있는 촉수들이 순식간에 늘어나 고든의 목과 팔, 몸, 다리를 감쌌다.

"으아아아악!"

모든 사람이 비명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으로 끌려들어 가는 고든의 모습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고든!"

"젠장! 살아 있는 놈이 있었잖아!"

"저 멍청한 새끼!"

용병들은 고든을 쫓아 우르르 달려갔지만, 공터를 벗어나지 못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어둠으로 가득 찬 숲속으로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 어떡하지?"

"끝났어. 어둠 속으로 들어갔으니 이제 못 구해."

"겨우 이겼는데 안타깝군."

숲은 나무들로 가득 차 바로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팔로르는 어두울수록 상대하기 어려운 몬스터.

결국 끌려간 고든에게 남은 것은 죽음뿐이다.

용병들이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지셀이 다시 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의도를 눈치챈 벨린다와 길리언이 그의 팔을 잡고 외쳤다.

"도련님! 미쳤어요?"

"공자님, 안 됩니다! 위험합니다!"

지셀은 자신을 만류하는 두 사람을 말없이 쳐다보고는 다시 용병들을 둘러보았다.

용병들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이건 고용주의 잘못이 아니다. 사고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법이다.

항상 앞장서 싸우는 고용주라도 이런 사고까지 신경 쓸 수는 없다.

돈을 받고 목숨을 파는 일을 한다면 받아들여야 하는 불운일 뿐이었다.

카오르까지 지셀의 앞을 막아서며 별거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포기하시죠. 이미 늦었습니다. 자신의 실수로 목숨을 잃는 것은 용병들이 감내해야 하는 몫입니다."

살 수 있다면 당연히 살려고 노력하지만, 어쩔 수 없는 죽음은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용병의 삶이었다.

지셀은 잠시 눈을 감고 고개를 들었다.

싸우다 죽는 건 자신도 어쩔 수 없다. 용병으로서 감수해야 할 위험이기도 했다.

하지만 멀쩡히 살아서 눈앞에서 끌려간 동료를 내버려 두는 건, 대륙 7강이자 용병왕이었던 그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구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 있다면 더 그렇다.

지셀은 눈을 감은 채 나직하게 내뱉었다.

"나는...."

이어지는 말이 모두의 귀에 꽂혔다.

"나를 따르는 자들을 단 한 번도 포기해 본 적이 없다."

심상치 않은 발언에 벨린다와 길리언이 불안감 어린 눈빛을 내비쳤다.

천천히 눈을 뜬 지셀이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용병들을 지키고 있어. 나 혼자 갔다 올게."

벨린다의 얼굴이 급격하게 일그러졌다.

'역시 이럴 줄 알았어! 아무튼 어렸을 때부터 한 번 말해서 들은 적이 없다니까!'

그녀는 미리 독을 발라 둔 단검을 잽싸게 꺼냈다.

아프게 하기는 싫지만, 이 사고뭉치는 기절시키지 않으면 끝도 모르고 달려갈 터였다.

"공자님, 이제 그만하시죠? 저 화나면 어떤지 아시죠?"

호칭이 바뀌었다. 어지간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 벨린다가 진짜로 화가 났다는 증거다.

지셀은 그걸 알면서도 그녀에게 어깨만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파앙!

그러고는 벨린다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순식간에 어두운 숲으로 들어가 버렸다.

"공자... 님? 야! 어디 가!"

단단히 화가 난 벨린다가 방방 뛰다가 길리언을 돌아보았다.

"당신이 여기 지키고 있어요!"

그녀는 그 말만 던진 뒤 바로 지셀의 뒤를 쫓았다.

"네가 지키고 있어라."

길리언도 무표정한 얼굴로 카오르에게 내뱉은 뒤 벨린다의 뒤를 따랐다.

카오르는 눈앞에서 사라진 사람들의 빈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다 머리를 벅벅 긁었다.

"하, 진짜 별것들이 다 날 우습게 보네? 어디다 대고 명령질이야? 하, 참. 하, 진짜."

왠지 지셀을 만나고 난 뒤부터 자신의 체면이 영 말이 아니었다.

"에라이, 진짜! 더러워서! 확 그냥 다 그어 버릴까?"

괜히 애꿎은 돌을 걷어찬 카오르는 무시무시한 눈으로 용병들을 둘러보았다.

"구경났냐? 빨리 정리들 해. 일단 기다리자고. 게으름 피우는 놈들은 모가지 날려 버린다."

용병들에게 카오르는 여전히 무서운 미친개였다.

그들은 찔끔해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분주하게 움직였다.

카오르는 자리에 주저앉아 육포를 뜯으며 입맛을 다셨다.

"쩝, 좀 아쉽네."

세 사람을 쫓아가면 재미있을 거 같지만, 자신마저 자리를 비우면 용병들을 이끌 사람이 없었다.

한편 그때, 지셀은 엄청난 속도로 고든의 뒤를 쫓고 있었다.

어둠 속에 완전히 동화되어 움직이는 팔로르를 쫓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아예 시야에서 사라지기 때문이다.

가까이에서는 움직이는 기척이라도 느낄 수 있지만, 거리가 멀어진다면 그마저 잡을 수 없게 된다.

그렇기에 전생에 마스터의 칭호를 받은 발자크 백작도 팔로르를 상대하는 데 상당히 애를 먹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조금 달랐다.

고든이 팔로르에게 잡혀 있고, 그는 인간이라 어둠에 동화될 수 없었다.

― 으아아아아!

멀리서 고든의 비명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지셀은 그 소리를 쫓아가며 마나를 담아 크게 외쳤다.

"고든! 계속 소리를 질러라! 내가 따라가겠다!"

숲이 울릴 정도로 엄청난 소리.

이 정도면 충분히 고든에게 목소리가 닿았을 것이다.

사실 마수의 숲에서 이렇게 요란하게 소리를 지르는 건 금물이다.

다른 몬스터들이 깨어나거나 눈치를 채고 쫓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은 팔로르의 영역이고, 지금은 밤이다.

몬스터들은 아직 팔로르들이 대부분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니 쉽게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 으아아! 살려 줘!

지셀의 외침을 들었는지 고든은 끊임없이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를 통해 방향을 가늠하며 쫓아가던 지셀은, 어느 순간부터 고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입이 막혔거나.'

지셀은 이를 악물며 마나를 더 뿜어내었다.

'아니면 이미 죽었거나.'

그래도 그의 시체를 눈앞에서 보기 전까지는 포기할 수 없었다.

찌이익!

지셀이 품에서 라이트의 스크롤을 꺼내 찢자 주변이 밝아졌다.

그는 순식간에 바닥의 흔적을 훑어보고 방향을 가늠한 뒤 미친 듯이 달렸다.

'고든, 버텨라!'

지셀의 예상대로, 고든은 입이 촉수로 막힌 상태였다.

누군가가 쫓아오는 걸 느낀 팔로르가, 고든이 소리 지르는 게 원인이라 생각하고 바로 입을 막은 것이다.

"웁웁! 우우웁!"

고든도 지셀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어떻게든 소리를 질러 자신을 찾게 해야 하는데, 눈치 빠른 괴물이 입을 막아 버렸다.

'어으으, 숨을 제대로 못 쉬면 근손실이 온다고.'

고든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발버둥 쳤지만 소용없었다.

'이대로 죽는 건가?'

이 어두운 숲에서 자신의 흔적을 찾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고든은 점점 삶의 희망을 잃어 갔다.

'그러고 보니 고용주가 글도 가르쳐 준다고 했었는데.'

개척이 끝나고 무사히 돌아갔다면 글도 배울 수 있을지 몰랐다.

물론 자신은 운동을 해야 하니까 거절했겠지만.

'끝이구나. 이렇게 끝나는구나.'

모두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하거나 찾지 못해 추적을 포기할 것이다.

그 생각이 맞는다는 듯, 지셀의 목소리도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체념한 고든의 예상과는 달리, 지셀은 계속 그를 쫓고 있었다.

그러나 쫓아가는 속도는 점점 늦어지고 있었다.

고든이 소리를 내지 못해 방향을 잡을 수가 없었던 탓이다.

이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제대로 된 흔적도 남기지 않는 무언가를 쫓는 건 아무리 경험 많은 지셀이라도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도련님!"

"공자님!"

지셀의 속도가 느려진 사이 벨린다와 길리언이 그를 따라잡았다.

"흔적을 찾아! 바닥부터 주변 모두!"

다급한 외침에 벨린다와 길리언도 일단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두 사람 또한 추적에는 일가견이 있는 몸이지만, 흔적은 갈수록 찾기 어려워졌다.

종국에는 정확한 방향마저 찾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도련님, 돌아가요. 더 이상 숲을 헤매다가는 위험해요."

"벨린다의 말이 맞습니다. 이미 죽었을 겁니다."

두 사람이 설득했지만, 지셀은 쉬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그 순간에도 계속 신경을 곤두세우고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단 한 번이라도 소리가 들린다면 좋으련만.

안타까운 마음에 지셀이 차마 발을 떼지 못하고 있을 때, 모두의 귀에 무슨 뜻인지 모를 고든의 목소리가 들렸다.

"―!"

세 사람이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번개처럼 쏘아져 나갔다.

37화 여기는 미친 곳이야. (5)

끄르르르....

팔로르는 은신처에 도착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끈질기게 따라오던 추적자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드디어 추적자를 떨쳐 냈다고 여기고 안심한 팔로르는 은신처 입구를 막은 돌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안전한 곳에서 천천히 먹이를 먹으며 몸을 회복할 생각에, 돌을 치우는 속도가 점차 빨라졌다.

작업에 집중하던 팔로르는 자신도 모르게 고든의 입을 막은 촉수를 빼고 말았다.

고든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여기야!!"

태어나서 가장 크게 질러 본 소리였다.

크아아!

팔로르는 당황해서 촉수로 고든의 목을 휘감고 허공에 들어 올렸다.

고든은 숨이 막혀 왔지만, 눈을 꾹 감고 다시 한번 외쳤다.

"여기라고!!!"

크아아아!

분노한 팔로르는 고든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겨우 떼어 낸 추적자가 저 소리를 듣고 금방 찾아올 게 확실했다. 팔로르는 차라리 지금 잽싸게 먹어 치우고 숨어야겠다 결심했다.

팔로르가 낫처럼 생긴 손을 높이 들었다.

"으으...."

고든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눈을 감았다.

죽음의 공포가 몰려오자 더 이상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가랑이 사이가 젖어 드는 게 느껴졌다.

쉬이익!

팔로르의 낫이 고든의 머리로 떨어지려는 순간, 어두운 숲속에서 무언가가 빛을 번뜩이며 빠르게 날아왔다.

파악!

팔로르의 팔에 벨린다의 단검이 박혔다.

검날에 묻은 독 때문에 팔로르의 창백한 피부가 검게 타들어 갔다.

크아아아!

팔로르는 고통에 비명을 내질렀지만, 그 소리는 그리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푸욱!

뒤이어 날아온 지셀의 검이 팔로르의 머리를 꿰뚫은 것이다.

콰지직!

곧이어 길리언의 도끼가 팔로르의 몸을 아예 반으로 갈라 버렸다.

"사, 살았다!"

눈앞에 나타난 세 사람을 보며 고든은 감격해서 외쳤다.

'라이트' 스크롤을 찢어 고든의 상태를 확인한 지셀이 웃으며 말했다.

"잘 버텼다. 고든."

그 말에 결국 고든은 눈물을 쏟고 말았다.

자신을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쫓아와 준 지셀이 너무나도 고마웠다.

근손실 때문에 눈물 따위는 흘리면 안 되는 걸 알지만, 지금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흐어어엉! 감사합니다. 으어어엉!"

한참 동안 통곡하던 고든에게 벨린다가 한마디를 던졌다.

"그런데 옷이 좀.... 혹시 오줌 쌌어요?"

눈물이 쏙 들어가 버린 고든은 얼굴이 벌게져서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벨린다는 그런 고든을 보며 깔깔거렸다.

그사이 지셀은 어설프게 돌로 숨겨져 있던 굴 입구를 둘러보았다.

"여기가 놈들의 은신처인가 보군."

여기까지 왔는데 그놈들의 은신처를 두고 그냥 돌아가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일행은 바로 굴 안으로 들어갔다.

크아아아!

굴 안에 모여 있던 팔로르들은 일행을 보자마자 괴성을 질렀다.

여기저기 깨지고 찢어진 꼴을 보니 조금 전 도망쳤던 놈들이 확실했다.

"전부 다 잡지 못해서 아쉬웠는데, 여기 몰려 있었네? 일이 편하게 됐군."

이왕 은신처도 찾았겠다, 지금 다 없애 버려야 앞으로의 여정이 편할 터였다.

지셀이 잔혹한 미소를 지으며 그것들을 둘러보았다.

"모두 죽여."

지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벨린다와 길리언이 가차 없이 팔로르들을 베었다.

크아아아아아!

용병들을 상대하며 약해져 있던 팔로르 무리는 제대로 된 반항 한 번 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학살당했다.

설령 팔로르들이 멀쩡한 상태였더라도,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고든을 제외하면 모두 마나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강자들이었으니 처리하기 어렵진 않았을 터다.

어떻게든 도망치려고 발버둥 치던 마지막 팔로르까지 척살한 뒤, 지셀은 굴 안을 둘러보다 신기한 것을 발견했다.

"이건...."

벨린다와 길리언도 구석에 쌓여 있는 것들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거 사람 뼈 아니에요?"

벨린다의 말대로, 굴 구석구석에 몬스터의 뼈뿐만 아니라 사람의 것처럼 보이는 뼈들도 있었다.

"비공식적으로 마수의 숲을 탐험한 사람들의 뼈인 거 같습니다."

길리언의 말에 지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로부터 마수의 숲을 탐험한 사람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아주 오래전 일.

지셀이 알기로는 페르디움 영지에서 마수의 숲 출입을 금지한 건 이미 몇십 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뼈와 함께 굴러다니는 찢어진 옷과 도구들은 길어 봐야 고작 몇 년밖에 지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근래에 페르디움 몰래 이곳을 탐사했던 사람이 있다는 거지....'

짐작 가는 곳은 있지만 속단할 수는 없었다. 단순한 탐험가일 수도 있었다.

지셀은 당장 해결되지 않는 문제에 대한 고민은 일단 접어 두기로 했다.

그는 나중에 다시 둘러보기로 하고 굴을 막은 뒤,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 * *

이제나저제나 지셀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용병들은 숲 쪽에서 기척이 나자 모두 무기를 들고 일어났다.

그들은 나무 사이에서 나오는 지셀의 얼굴을 보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고든이 죽은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 숲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셀이 있어야 했다.

"공자님이 돌아왔다!"

용병들은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지셀에게 다가갔다.

그 뒤를 이어 벨린다, 길리언이 차례대로 모습을 드러내고, 마지막으로 멋쩍은 웃음을 짓고 있는 고든까지 나타난 순간.

"와아아아아아!"

용병들은 숲이 떠나가도록 환호를 내질렀다.

"고든이 돌아왔다! 고든이 살아 있어!"

"공자님이 성공했어!"

지금껏 용병 생활을 하며 지셀 같은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보통 귀족들과 고용주들은 용병을 소모품으로 취급한다.

언제든 필요하다면 용병들을 희생시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풍조였다.

심지어 자신들마저도 그런 게 당연하다 생각하며 살아온 용병들에게, 지셀의 행동은 충격을 넘어 새로운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의 고용주는, 흔히 볼 수 있는 위선자들과는 완전히 결이 다른 사람이었다.

"저 사람을 따르면 정말 여기에서 살아 나갈 수 있겠어."

한 용병이 중얼거리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용병들에게 좋은 리더가 되기는 어렵지 않다.

수하들에게 밥을 잘 먹이고, 돈을 잘 주고, 일감을 잘 따다 주면 된다.

하지만 그들이 진심으로 믿고 따르게 하려면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그들의 목숨을 한 번이라도 더 구해 줄 수 있는 판단력과 지휘력이다.

지셀은 누구보다 앞서 싸우며 자신들을 지켜주었고, 따르는 자들을 포기하지 않는 심성까지 갖췄다.

용병들에게는 믿고 따를 수 있는 완벽한 인물이 나타난 것이다.

"지금까지 보여 준 행동이 가식이 아니야. 저 사람은 진심이라고."

"맞아. 그러면 우리도 그 진심에 보답해야지."

"살다 보니 저런 귀족도 다 있었네."

용병들은 이제 불안한 마음을 지우고, 숲이 주는 공포에 눌려 잠시 잊었던 용병의 신념을 지셀을 보며 다시 깨우쳤다.

죽음을 곁에 두고 사는 용병 본연의 모습을 되찾은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만은 모두가 마음을 다잡고 있을 때도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얼굴을 실룩거렸다.

'병신들,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이야. 언제까지 그게 통할 거 같아? 결국 다 죽을 거라고!'

다른 용병들의 방패 사이에 숨어 싸우는 척만 한 마누스는 이번에도 살아남았다.

그가 보기에 이 숲은 정상적인 숲이 아니었다.

이곳에 사는 몬스터들은 숲 바깥에 사는 놈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이번에도 이겼다고 좋아할 일이야? 숲 초입인데도 저런 기괴한 몬스터들이 사는데 앞으로 뭐가 나올 줄 알고!'

지금까지야 고용주가 놀라운 능력으로 문제를 해결해 왔지만, 뜯어보면 아슬아슬한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고용주가 조금이라도 약했거나, 잘못된 판단을 했다면 모두가 전멸할 만한 상황이 잦았다.

'나는 이런 위험한 도박을 계속할 생각이 없어. 이 멍청한 새끼들아!'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고용주의 생각이 틀렸다면 자신들은 모두 죽었을 것이다.

단 한 번만 실수해도 전멸을 피할 수 없는 곳.

그것이 마누스가 평하는 마수의 숲이었다.

'젠장, 무사히 나가려면 몇 놈이라도 꼬셔야 하는데.... 상황을 보니 힘들 거 같군.'

혼자 돌아갈 엄두는 나지 않았다.

서식지가 없이 떠돌아다니는 몬스터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고, 떠나겠다고 하면 고용주가 어떻게 나올지도 걱정이었다.

'최대한 기회를 봐서 몇 놈이라도 꼬셔야 해. 위약금을 물어내서라도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다들 의욕이 솟다 못해 넘치는 중이었다.

지금 선동해 봤자 통하지도 않을 게 뻔했다. 오히려 맞아 죽을지도 모르니 자중해야 했다.

'몇 놈 더 죽으면 다시 겁먹고 정신을 차리겠지.'

마누스는 그런 기대로 버텼다.

지금이야 안 어울리게 꼴값들을 떨고 있지만, 다시 위험이 닥치면 분명 현실을 직시할 거라 믿었다.

날이 밝자 용병들은 정비를 마치고 이동을 시작했다.

팔로르들을 전멸시켰으니 따라붙을 몬스터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여기가 팔로르의 영역이라고 했나? 확실히 나타나는 몬스터들이 적네."

"가끔 보이는 놈들도 근처에 사는 게 아니라 그냥 먹이 찾아서 떠돌아다니는 놈들 같아."

몬스터들이 나타나긴 했지만, 그 수와 빈도는 처음보다 확연히 줄어 있었다.

"그래도 방심하면 뒤지는 건 똑같다고. 고용주 말이나 잘 들어."

마음가짐이 달라진 용병들은 전투가 거듭될수록 노련해지고 기도 또한 예리해져 갔다.

그 모습을 본 지셀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역시 목숨을 건 실전이 최고야. 이 정도면 영지의 병사들보다 훨씬 낫군.'

개개인의 무력만 보면 용병들이 강할지 모르나 집단전에 들어간다면 용병들은 정규군을 당할 수는 없다는 게 정론이다.

하지만 지셀이 이끄는 용병들은 어지간한 정규군 못지않게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확실히 정신 상태가 바뀌었군.'

여전히 전투는 위험했고 사상자들이 계속 나왔지만, 용병들은 더 이상 동요하지 않았다.

그저 지셀의 지휘에 최대한 따르려 노력할 뿐이었다.

덕분에 지셀은 처음보다 쉽게 용병들을 움직일 수 있었다.

그들이 지셀을 믿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나가 된 듯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카오르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었다.

"돈에 혹해서 뛰어든 어중이떠중이들이 눈빛부터 달라졌네. 완전 군대처럼 변해 버렸어. 저놈들 원래 저런 놈들이 아니거든?"

"다 우리 공자님 덕분이다."

길리언이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짧고 굵게 답했다. 카오르가 입술을 실룩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염병, 누가 보면 숨겨 둔 자식인 줄 알겠네.'

입이 근질거렸지만, 말하면 한바탕하게 될 게 빤하기에 카오르는 그냥 입을 다물고 말았다.

'설마 내가 지금 피하는 건가? 고작 영감이랑 싸우기 싫어서?'

카오르는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켈베로스 용병단의 단장이 싸우기 싫다고 하고 싶은 말을 참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카오르는 고민에 빠졌다.

카오르가 끝없는 고민에 빠져 있는 사이, 일행은 빠른 속도로 팔로르의 영역을 벗어났다.

38화 이제 좀 쓸 만해졌구나. (1)

팔로르의 영역을 벗어나자 다시 지옥 같은 전투가 이어졌다.

쉴 틈 없이 몰아치는 몬스터들에 용병들은 점점 지쳐 갔다.

지셀 또한 당장이라도 때려치우고 돌아가서 쉬고 싶다는 유혹이 몰려올 정도였다.

'역시 마수의 숲.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다.'

모두가 이곳에 손대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는데 위험을 감수하고 목숨을 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확실한 목적이 없었다면 자신도 이런 위험한 숲은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마수의 숲에 무엇이 있는지 확실히 알고 있고, 그렇기에 위험을 무릅쓸 각오를 할 수 있었다.

의외인 것은 용병들이 생각보다 잠잠하다는 것이었다.

비록 피곤함에 절어 쓰러질 것만 같은 모습이었지만, 눈빛은 아직 살아 있었다.

'내가 이들을 너무 우습게 본 모양이네.'

행군이 고된 건 맞기에, 본래라면 이쯤에서 슬슬 추가 보상 얘기를 꺼내서 달랠 계획이었다.

하지만 용병들의 눈빛을 보고 지셀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들은 진심으로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있었다.

오직 마누스만이 용병들 틈에서 죽을상을 한 채 발만 동동 굴렀다.

하루하루가 고통스러운 상황이었지만 다들 이를 악물고 버텨 냈다.

놀랍게도 전투가 이어질수록 피해는 점차 줄어들었다.

고작 열흘 남짓이 지났지만, 극한에 이른 전투를 매일 하다 보니 어느 순간 대부분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은 것이다.

그렇게 보름이 지났을 무렵, 지셀은 모두에게 희망찬 소식을 전했다.

"목적지에 거의 다 도착했다. 얼마 남지 않았어."

그 말에 용병들은 다시 힘을 내어 전진했다.

얼마나 나아갔을까, 일행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뭐지?"

"지금쯤 또 몰려올 때가 됐는데."

"조용하니까 뭔가 이상하지 않아?"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던 몬스터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몬스터들이 찾아올 때는 괴롭고 힘들었는데 갑자기 안 나타나니 오히려 불안감이 들었다.

지셀 또한 용병들처럼 이상함을 느꼈다.

운이 좋다고 생각하기엔 그동안의 전투가 너무나 치열했다.

갑자기 이렇게 몬스터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의아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너무 조용하다.'

원래도 벌레 우는 소리 하나 듣기 힘들 만큼 조용한 숲이다.

하지만 지금은 일행들이 내는 소리를 제외하면 바람 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듯, 숨 막힐 정도로 무거운 느낌이 들었다.

길리언과 카오르를 주변에 정찰 보냈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운이 좋은 건가? 아니면 어떤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 이곳에 특별히 위험 요소가 있다는 기록은 없었는데....'

한참을 고민하던 지셀은 차라리 지금 기회를 이용하기로 했다.

"모두 작업을 멈추고 쉬어라. 체력을 회복한 뒤 내일 바로 목적지까지 길을 내고 일을 끝낸다."

용병들은 만면에 화색을 띠며 바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휴식을 취했다.

숲에 들어온 후 지금까지 제대로 푹 쉬어 본 적이 없기에 미친 듯이 피로가 몰려왔다.

놀랍게도 다음 날까지 몬스터들은 단 한 마리도 찾아오지 않았다.

"아구구, 허리야. 자고 일어났더니 몸이 더 쑤신다."

"그래도 이제 좀 살 거 같다."

"목적지도 오늘이면 도착할 수 있다고!"

체력도 회복했고, 이제 끝이라는 희망이 눈앞에 보이니 작업도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됐다.

생소한 상황이라 다들 조금은 불안해했지만, 시끄럽게 길을 내도 별다른 일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셀은 자신이 작성한 지도와 현재 위치를 몇 번이나 가늠하더니, 고무된 표정으로 모두에게 말했다.

"이제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 조금만 더 하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그 말에 용병들은 쉬지 않고 길을 내는 데 전념했다.

모두의 얼굴에 조금씩 후련하다는 표정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얼마 되지도 않는 길을 엄청난 고생을 하며 거쳐 왔다.

이 고생이 이제 끝난다고 생각하니 당연히 속이 시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누구보다 기쁘고 기대하는 사람은 지셀이었다.

'이제 거의 다 도착했다.'

모두가 미쳤다고 반대했지만, 확신과 자신감으로 밀어붙였다.

그 결과가 얼마 지나지 않아 눈앞에 나타날 거라고 생각하니 그도 조금은 흥분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쿠구궁.

숲이 떨리는 듯한 진동이 멀리서 울려 퍼졌다.

순간 모든 사람이 움직임을 멈췄다. 용병들은 잔뜩 긴장해 주변을 조심스럽게 둘러보았다.

좋았던 기분이 순식간에 가라앉고, 불길한 예감이 서서히 퍼져 가기 시작했다.

"길리언, 앞을 정찰하고 와라. 모두 전투를 준비하도록."

길리언이 고개를 끄덕이며 정찰을 나섰다.

용병들은 작업을 멈추고 무기를 들었다.

이미 며칠 동안 숲에서 벌이는 전투에는 익숙해진 상황.

상대가 무엇이냐가 문제지, 전투 자체는 문제 될 게 없었다.

다들 긴장한 채 기다리던 중, 무거운 공기를 가르며 길리언이 온 힘을 다해 달려와 외쳤다.

"당장 피하십시오!"

"뭐?"

지셀의 반문과 동시에 멀리서부터 나무들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쿠쿵! 쿠쿠쿵!

무언가가 나무를 박살 내며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숲을 가르며 모습을 보인 그것은 일행을 보자마자 높은 울음소리를 토해 냈다.

카아아아아!

눈앞에 나타난 것을 보고 지셀은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저 몬스터는 숲의 더 깊은 구역에 있어야 하는 몬스터였다.

이런 외곽에서 돌아다닐 만한 몬스터가 아니다.

용병들도 몬스터의 모습을 보고 숨을 들이켜며 긴장하기 시작했다.

"허, 헉. 저, 저게 말이 돼?"

"몬스터가 없는 게 아니었어. 저놈 때문에 다들 피했던 거야."

모두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눈앞에 나타난 몬스터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뱀이었다.

사람 정도는 한입에 집어삼킬 수 있을 정도로 크기가 어마어마한 뱀.

거대 뱀의 붉은색 비늘은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벌어진 입에는 강철 정도는 쉽게 찢어발길 것만 같은 무시무시한 이빨이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블러드 퓌톤...."

한 용병이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퓌톤이라고 불리는 거대 뱀 몬스터는 비늘 색에 따라 그 이름이 달라진다.

핏빛 비늘로 몸이 덮인 블러드 퓌톤은 퓌톤 중에서도 가장 흉포하고 무서운 존재로 알려져 있다.

이빨에서는 강력한 독을 뿜어내고, 비늘은 강철과도 같아 무기 또한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다.

"보통 퓌톤보다 훨씬 크군."

용병들은 그 압도적인 크기에 기겁했다.

퓌톤이라는 종은 본래도 큰 크기 탓에 위험 몬스터로 분류된다.

그런데 지금 나타난 블러드 퓌톤은 일반적인 퓌톤보다 훨씬 더 덩치가 컸다.

이건 지셀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전생에서 얻은 자료에는 블러드 퓌톤은 이곳보다 훨씬 더 안쪽에 서식한다고 쓰여 있었으니까.

'왜 하필 지금 이곳에... 시기가 좋지 않았군.'

분명 목적지는 숲의 초입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단지 길을 내고 그곳을 영역 삼는 몬스터들을 처리해야 했기에 시간이 오래 걸린 것뿐이다.

처음 숲을 개척하겠다는 계획을 짤 때부터, 지셀은 지금은 사냥할 수 없다고 판단되는 몬스터들이 모두 숲 깊은 곳에 서식한다는 것을 여러 번 확인했다.

그런데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등급의 몬스터가 나타나고 말았다.

사아아아악.

블러드 퓌톤은 오만한 눈으로 혀를 날름거리며 일행을 둘러보았다.

마치 맛있는 식사를 눈앞에 둔 것 같은 여유로움.

용병들은 그 기세에 눌려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다.

뱀을 마주한 개구리와 다를 바 없는 그 모습을 보고 지셀이 크게 소리쳤다.

"정신 차려라! 가만히 있으면 다 죽는다!"

그 말에 용병들은 정신을 차리고 순식간에 전투 대형을 갖추었다.

멍하니 있다 죽을 수는 없으니 뭐라도 공격을 시도해 봐야 했다.

"쏴라!"

지셀이 외치자 방패를 든 용병들이 앞을 막고 활을 든 용병들이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탕! 타탕! 타앙!

화살이 수없이 날아갔지만 블러드 퓌톤의 붉은 비늘은 뚫지 못했다.

가볍게 화살들을 튕겨 낸 뱀은 몸을 꿈틀거리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뒤로 이동해!"

용병들이 대열을 갖추며 뒤로 조금씩 이동하자 이번에는 블러드 퓌톤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거대한 몸에 어울리지 않게 빠른 속도였다.

카아아아!

순식간에 몸을 끌며 다가온 블러드 퓌톤이 입을 벌려 바로 앞에 서 있던 용병 하나를 집어삼켰다.

"으아아아악!"

용병은 저항도 제대로 못 해 보고 그대로 삼켜지고 말았다.

꿀렁, 꿀렁.

블러드 퓌톤의 몸 안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내려가듯 움직이더니 이내 몸의 가운데쯤에서 움직임이 멈췄다.

사람이 몬스터에게 산 채로 잡아먹히는 광경은 모두가 처음 보는 터라, 그 충격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사아아아악!

블러드 퓌톤이 만족스러운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음 먹잇감을 고르는 듯한 태도였다.

그 모습을 본 용병들의 눈에 절망감이 서렸다.

지금까지 나타난 몬스터들은, 팔로르를 제외하면 아무리 강하고 빨라도 공격이 통했다.

어찌 됐건 서로 맞붙어 싸우면 전략과 전술에 따라 상처를 입히고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어둠 속에서는 무적인 것처럼 보이던 팔로르에게도 빛만 있으면 공격이 통했다.

하지만 블러드 퓌톤의 비늘은 모든 화살을 튕겨 낼 정도로 강했다.

공격이 통하지 않는 몬스터를 도대체 무슨 수로 잡아야 할까?

"뒤로! 일단 더 뒤로 물러나!"

일행은 다급하게 뒤로 물러나며 거리를 벌렸다.

사아아아....

블러드 퓌톤은 거리가 벌어져도 바로 공격을 취해 오지 않았다.

사냥감들이 도망갈지 덤벼들지 반응을 기다리고 있는 모양새였다.

방금 용병 하나를 잡아먹고 만족했는지, 당장 공격할 기미는 없어 보였지만....

일행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것으로 보아 나머지를 무사히 도망치게 놓아둘 생각도 없는 듯했다.

"공자님! 이제 어떻게 합니까?"

"저놈을 처리할 방법이 있는 거죠?"

용병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모두 지셀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지셀은 아무런 말도 없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블러드 퓌톤을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왜 아무 말이 없는 거야.'

'고용주도 방법이 없는 건가....'

언제나 몬스터가 나타나면 누구보다 빠르게 지시를 내리고 가장 먼저 전투에 뛰어들던 고용주가 아무런 말을 하고 있지 않다.

절망감이 모두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용병들은 피할 수 없는 죽음이 다가왔음을 예감했다.

벨린다는 지셀에게 다가와 낮게 속삭였다.

"도련님, 당장 도망가세요. 지금 전력으로는 저 괴물을 절대 못 이겨요."

"내가 지금 도망가면 용병들은?"

"그깟 용병 나부랭이 수십, 수백 명 죽어도 저한테는 도련님을 살리는 게 더 중요해요."

길리언 또한 지셀의 앞을 막으며 조용히 말했다.

"공자님, 벨린다와 함께 돌아가십시오. 이곳은 용병들과 제가 막고 있겠습니다. 계약에는 고용주의 안전도 포함되니 저들 생각은 그만하십시오."

"길리언."

"딸을 부탁드립니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옆에 있던 카오르에게는 그 대화가 잘 들렸다.

그는 팔짱을 낀 채로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지셀에게 말했다.

"이만 도망갑시다. 모두 후퇴하라고 명령을 내리면 알아서들 잘 도망갈 겁니다. 죽는 놈도 나오겠지만 그거야 뭐 어쩔 수 없죠. 돈을 받고 목숨을 거는 용병놈들의 운명이라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카오르까지 거들자 지셀은 눈을 내리깔고 고민에 잠겼다.

이대로 도망간다 해도 대부분은 저 뱀에게 따라잡혀 죽을 것이다.

몇 명 정도는 살아남을 수 있겠지만, 길을 벗어난다면 결국 숲속을 헤매다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

'성공이 코앞이었는데. 이대로 실패하는 건가.'

지셀이 두 눈을 꾹 감았다.

39화 이제 좀 쓸 만해졌구나.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