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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변수가 필요해. (4)

길리언은 언제든 떠날 수 있다고 했지만, 막상 떠날 준비를 하는 데에는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짐은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집 안 전체에 널려 있는 수많은 무기가 문제였다.

마차가 너무 작고 낡아서 집 안에 있는 무기들을 제대로 챙겨 담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보다 못한 지셀이 돈을 내놓았다.

"괜찮은 마차로 하나 사 와. 레이첼이 편하게 이동할 수 있게."

짐을 전부 챙기고 난 뒤, 두 마리 말이 끄는 아담한 마차는 흉악하다 못해 기괴한 모습이 되었다.

각 말의 안장에 스몰 랜스들이 달려 있었다. 마차 각 면에도 다양한 무기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길리언 자신도 검과 손도끼를 허리에 찬 뒤, 등에는 쇠뇌까지 장착했다. 누가 보면 바로 전쟁터라도 나가는 듯한 모양새다.

기사들은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지었다.

'무슨 이동식 산적 요새 같군. 무기가 저렇게 많이 필요한가?'

정말 강한 자들은 자신이 주로 쓰는 무기만 단출하게 챙겨 다닌다.

전쟁터에서 중무장한 기사라도 무기는 두어 개만 챙기고, 나머지는 굳이 필요하다면 종자들을 시켜서 가지고 다니기 마련이다.

기사들에게는 길리언의 모습이 무기가 아까워서 못 버리고 꾸역꾸역 들고 가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셀은 무기를 챙기는 길리언의 모습에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별말은 하지 않았다.

"출발하지. 빠진 물건은 나중에 사람을 보내 가져와도 된다."

길리언은 마차를 몰고, 나머지 일행은 처음 레이폴드에 올 때처럼 말을 타고 이동했다.

벨린다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지셀을 흘끔거리며 조용히 고민에 잠겼다.

'단순히 성격만 변한 게 아니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처음에는 정신을 차리고 철이 들었다고 생각했다.

실력 또한 그간 열심히 수련하던 것이 이제야 빛을 발하는 거겠거니 여겼다.

본래 그에게 있었던 뛰어난 재능이 이제야 나타난 거라고 자신을 납득시켰다.

어렸을 때부터 망나니 같은 지셀을 보살펴 온 탓에 관성처럼 모든 것을 좋은 방향으로만 끼워 맞춰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쪽으로 이해해 보려 해도 길리언의 딸을 치료한 일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런 지식은 도련님 혼자서는 절대로 알 수 없어.'

지셀은 그다지 머리가 좋지도 않고, 견문도 짧았다. 영지 밖으로 나간 적도 없는데 견문을 어디서 쌓겠는가?

게다가 벨린다는 지셀이 어릴 때부터 책과는 담을 쌓고 살아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누구도 모르는 치료법을 대체 어떻게 알게 된 건지, 도통 모를 일이었다.

'혹시... 흑마법사?'

벨린다는 품 안의 단검을 만지작거리며 온갖 가능성을 떠올렸다.

전설적인 흑마법사 중에서는 다른 사람의 몸으로 자신의 영혼을 옮겨 삶을 이어 가는 자도 있다고 들었다.

벨린다는 지셀의 덤덤한 얼굴에서 무언가 이상한 점을 찾아내려고 애썼다.

'아니, 아니지. 사람이 달라 보여서 그렇지, 우리 귀여운 도련님이 맞는데.'

가끔 다른 모습을 보이지만, 지셀에게서 느껴지는 특유의 분위기는 달라지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지셀을 돌봐 온 그녀가 그걸 몰라볼 리 없었다.

묘하게 여유 있고 능청스러워졌지만, 삐뚤어지기 전의 지셀을 생각하면 아주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그때도 조금 천연덕스러운 면이 있었으니까.

지금은 거기에 과한 자신감까지 얹힌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같으면서도 다른 사람.

그게 현재 벨린다가 보는 지셀의 모습이었다.

'정말 모르겠네. 도통 얘기를 안 해 주니.'

몇 번이나 추궁해 봤지만, 지셀은 그저 나중에 말해 주겠다며 은근슬쩍 넘겨 버렸다.

벨린다는 결국 답이 안 나오는 의심을 멈추고, 지셀이 개발한 약을 어떻게 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잘만 하면 돈이 좀 될 것 같은데.'

지셀에게 지급되는 품위 유지비도 모두 벨린다가 관리하고 있었다.

얼마 되지 않는 금액 내에서 지셀을 뒷바라지하느라 항상 고심하던 차에, 동전 한 닢이라도 벌 수 있는 기회가 보이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재료가 문제네. 돈 많은 사람들만 쓸 수 있겠어.'

약의 재료로 쓰인 '요정의 축복'은 특정 지역에서만 아주 소량으로 자라는 탓에 금보다 더 비싼 꽃이다.

엄청난 가격임에도 다양한 효능을 가지고 있어 고급 약과 포션의 재료로 쓰인다.

'그래도 신성력 치료를 받는 것보단 쌀 테니까... 조제법만 계약해서 팔아도 돈이 좀 되지 않을까?'

일행이 각자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지셀은 길리언과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셀이 귀족적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편하게 행동하니, 길리언 또한 마음 편히 대할 수 있었다.

"공자님은 귀족임에도 참 자유분방하신 거 같습니다."

"흐흐, 내가 좀 털털하긴 하지."

길리언이 살짝 돌려 말하긴 했지만, 지셀은 정말 귀족 같지 않았다.

애초에 귀족으로 산 세월보다 용병으로 산 세월이 더 기니 당연한 일이었다.

귀족적 품위도 정말 최소한만 갖춘 인간이라, 남들이 보기에는 귀족보다는 자신감 넘치는 평민 같았다.

"뭐, 그래도 요새는 품격 있게 행동하려고 노력은 하고 있어. 그런데 영 불편하더라고."

"젊을 때는 차라리 마음 편히 행동하는 게 나을 때도 있습니다. 젊음을 즐기시지요."

"나도 그러고 싶지만 내 젊음은 이미 다른 일에 저당 잡힌 상태라. 조금 아쉽군."

지셀이 간혹 흘리는 말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길리언은 그냥 지셀이 특이한 성격이라 생각하고 넘겼다.

* * *

일행은 별다른 일 없이 레이폴드 영지의 끝자락에 도착했다.

처음에는 아멜리아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조금 긴장했지만, 다소 위험한 지역을 지나칠 때도 습격은 없었다.

"이곳만 통과하면 곧 레이폴드 영지를 벗어나겠군."

지셀이 후련한 듯 말했다.

앞을 보자 길 양옆에 나무가 빽빽이 서 있었다.

큰 숲은 아니지만 무심코 들어갔다간 길을 잃을 수도 있을 만큼 나무가 가득한 지역이었다.

그만큼 매복이 있을 위험도 크지만, 페르디움 영지로 가기 위해서는 저 길을 지나가는 게 가장 빠르다.

만약 저 길을 이용하지 않는다면 산을 넘거나 아예 빙 둘러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 성격에, 습격한다면 확실하게 처리할 수 있을 만한 전력을 보낼 거다.'

물론 지셀은 아멜리아가 사람을 보내도 격퇴할 자신이 있었다.

자신의 실력을 전부 내보이진 않았으니 아멜리아도 제대로 판단할 수 없을 것이다.

애초에 지셀을 감당할 만한 실력자를 보내기는 아무리 아멜리아라도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실력자라는 게 필요하다고 언제든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언제나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길의 초입에 들어선 지셀은 슬그머니 실처럼 마나를 풀어 사방으로 뿌렸다.

'습격하기엔 여기가 제일 좋지. 레이폴드 영지에 항의하기도 애매한 위치이고.'

실처럼 가느다란 수십 가닥의 마나가 일행 주변을 훑으며 멀리 퍼져 나갔다.

극의 경지에 이른 자가 아니면 알아볼 수도 없는 지셀만의 기술.

지셀은 고개를 몇 번 끄덕인 뒤 일행들에게 말했다.

"통과하자."

그들은 천천히 말을 몰아 안쪽으로 들어갔다.

길을 통과하는 동안 지셀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수행 기사들도 다소 긴장한 채 움직였다.

하지만 상당히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기사들은 하나둘 마음을 놓았다.

작은 숲길의 끝자락에 도착했을 즈음, 지셀의 옆에 있던 벨린다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따끔거리듯 피부에 닿아 오는 희미한 살기.

그것은 그녀가 쌓아 온 경험에 기인한 직감이었다.

마나를 집중하자, 곧 익숙한 것들이 감각에 잡히기 시작했다.

벨린다가 자신만만하게 입을 열었다.

"도련님, 잠깐...."

하지만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길리언이 말 하나에 훌쩍 올라타더니 마차와 연결된 줄을 끊어 냈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쉬고 계십시오."

그러고는 등에 멘 쇠뇌를 꺼내 볼트를 발사했다. 동시에 길리언이 탄 말이 앞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투투퉁!

연속으로 세 발을 발사할 수 있는 개량형 쇠뇌의 볼트는, 높이 솟아 있는 나무들 사이로 날아가 꽂혔다.

"크어억!"

나무 곳곳에 위장하고 숨어 있던 몇 사람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동시에 곳곳에서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눈치챘다!"

"쳐라!"

땅바닥에서 사람이 튀어나오고 나뭇잎으로 가려졌던 가지 위에서 위장한 사람들이 뛰쳐나왔다.

그 수만 어림잡아 서른여 명.

지셀의 수행 기사들이 놀라 검을 뽑아 드는 사이, 길리언은 튀어나온 사람들을 향해 돌진하며 외쳤다.

"쥐새끼들이 많이도 왔구나!"

길리언은 코웃음을 치며 쇠뇌를 버리고 허리춤에 꽂아 놓은 두 개의 손도끼를 꺼내 던졌다.

퍼어억!

손도끼는 가장 앞에 선 자들의 이마에 꽂혔다. 그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그대로 쓰러졌다.

하지만 길리언은 시체가 된 자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안장의 옆에 달려 있는 스몰 랜스를 꺼낸 뒤, 그대로 적들이 몰려오는 중심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콰직!

"으아아악!"

순식간에 몇 사람이 스몰 랜스에 찔려 머리가 박살이 났다.

그는 그대로 돌진하며 경로에 걸리는 적들을 가차 없이 뚫어 버렸다.

그 모습을 본 수행 기사들은 습격당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입을 벌렸다.

"래, 랜스 차지?"

"이런 지형에서 저게 가능하다고?"

나무나 바위 등의 방해물이 많은 이런 숲속에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게다가 저렇게 연속으로 적을 꿰뚫는 건 어지간한 기마술을 가진 게 아닌 이상 평지에서도 어렵다.

하지만 길리언은 능수능란하게 방해물을 피하면서도 말의 속도를 유지했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적들의 시체만 남았다.

그야말로 경이로운 기술이었다.

적들도 경악했는지 이를 악물며 소리를 질렀다.

"저놈은 무시해! 저 지셀이란 놈부터 죽여!"

그들은 길리언을 피해 모두 지셀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도련님, 제가...."

벨린다와 수행 기사들이 다급히 막으려 하자 지셀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괜찮아, 길리언이 쉬고 있으라잖아."

그사이 이미 말의 고삐를 틀어 방향을 선회한 길리언은 다시 지셀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사방에 퍼진 적들을 무시하고 지나친 그는, 순식간에 마차까지 다가와 마차 옆면에 달려 있던 거대한 방패를 떼어 냈다.

지근거리까지 다가온 적 중 한 사람이 품에서 단검을 꺼내 지셀을 향해 던졌다.

쉬익!

칼날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수없이 이어졌다. 사방에서 단검이 날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시퍼런 칼날을 눈앞에 두고도 지셀의 표정에는 여유가 넘쳤다.

타타타타탕!

그 순간, 길리언이 지셀의 앞으로 뛰어들었다. 거대한 방패가 모든 검을 막아 내었다.

뒤이어 그가 방패를 전방으로 크게 휘둘렀다. 달려들던 적 두셋이 어마어마한 힘에 밀려 직선으로 날아갔다.

벨린다가 당혹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저 아저씨 뭐예요? 뭐 하는 사람이에요?"

언제나 비밀이라며 넘기던 지셀이 이번에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전 라타토스크 용병단 단장 길리언. 어느 지형, 어느 상황에서도 전투가 가능한 병기의 달인이지."

지셀은 길리언의 든든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웃었다.

20화 변수가 필요해. (5)

콰앙!

길리언은 그대로 정면을 향해 거대한 방패를 던져 버렸다. 달려오던 자들은 방패에 맞은 충격에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아직 남아 있는 암살자들도 질린 듯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크윽! 정보와 다르지 않나!"

암살자들을 이끄는 중년 남자가 크게 외쳤다.

이런 실력자가 있는 줄 알았다면 인원을 더 끌고 왔을 것이다.

분명 일행 전부가 일반 기사보다 조금 나은 정도라 들었는데, 이러다 한 사람한테 전부 당할 판이다.

"젠장! 전부 몰아쳐라!"

중년인의 외침에 모두가 검을 뽑아 들고 길리언을 향해 몰려왔다.

그를 지나쳐야 지셀을 칠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허접한 놈들 주제에...."

짧게 중얼거린 길리언이 마차 옆에 붙어 있는 한 손 도끼를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망설이지도 않고 적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콰직!

"으아아악!"

도끼가 한번 휘둘러질 때마다 한 사람의 머리가 쪼개져 나갔다.

검을 들어 올리면 검과 함께 머리가 쪼개졌다. 피하려 하면 도끼도 방향을 틀며 따라왔다.

길리언은 양 떼들 사이에 들어간 한 마리 사자와 다름없었다.

"이, 이놈! 죽어라!"

기회를 엿보던 암살자 하나가 동료의 죽음을 틈타 길리언에게 검을 찔러 넣었다.

하지만....

턱!

"허, 헉!"

길리언은 맨손으로 그냥 검을 잡아 버렸다.

그의 손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어, 어떻게...."

암살자는 얼이 빠져서 대응도 하지 못하고 길리언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지셀 일행을 중급 기사 수준으로 산정하고, 확실하게 처리하기 위해 마나를 사용할 수 있는 자들만 데려왔다.

그런데 마나를 두른 칼날을 그냥 손으로 잡아 버리다니. 눈앞의 괴물이 대체 얼마나 대단한 경지에 있는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이상 생각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콰지직!

길리언이 손에 힘을 주자 암살자의 검이 그대로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넋이 나간 암살자의 머리에 그대로 도끼가 떨어졌다. 암살자는 차디찬 시체가 되어 길리언의 발치에 쓰러졌다.

그 모습을 본 다른 암살자들은 주춤주춤 다시 뒤로 물러났다.

암살자들을 이끄는 중년인 역시 더 이상 달려들지 못했다.

이번 작전은 실패였다. 저 괴물 같은 자가 버티고 있는 이상 지셀을 죽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후, 후퇴한다!"

중년인이 소리치자마자 암살자들이 기다렸다는 듯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누구 마음대로!"

어느새 말을 잡아 탄 길리언이 그들을 쫓았다.

길리언이 벨트에 차고 있던 단검들이 주인보다 더 빠른 속도로 암살자들에게 날아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암살자는 단 한 명만 남겨 놓고 모두 쓰러졌다.

남은 한 명과의 거리는 이미 상당히 멀어져 있었다. 자칫하면 놓칠지도 모르는 상황.

길리언은 마지막 남은 한 명을 향해 손에 들고 있는 도끼를 던졌다.

퍼억! 푸욱!

도끼가 암살자의 머리에 꽂히는 순간, 단검 하나가 그의 심장을 꿰뚫고 지나갔다.

길리언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와 눈을 마주친 벨린다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턱을 치켜들었다.

그녀의 로브 안에서 튀어나온 단검의 끝에는 가느다란 실이 달려 있었다.

벨린다가 손짓하자, 암살자의 심장을 뚫은 단검이 빨려 들어가듯이 로브 안으로 되돌아갔다.

"저 아니었으면 놓칠 뻔했네요."

길리언은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내 도끼가 먼저다."

"제 단검이 먼저거든요?"

벨린다가 톡 쏘아붙였다.

길리언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쓰러진 암살자에게 다가가 목에서 도끼를 뽑아내었다.

그러고는 지셀에게 다가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전부 처리했습니다."

"수고했어."

지셀이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뒤에서 벨린다가 무시무시한 눈으로 길리언을 노려보고 있었다.

성에서는 항상 깐깐하고 도도한 표정으로 돌아다니던 벨린다가 길리언 앞에서는 열을 내며 방방 뛰는 게 재미있었다.

'벨린다가 제대로 임자 만났군.'

멀뚱히 서 있던 수행 기사들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지셀을 호위하겠다고 같이 온 건데 할 일이 없어지니 좀 창피했다.

'저 정도면 페르디움에서도 상대할 수 있는 자가 거의 없겠어.'

그들도 다른 영지의 기사들에 비하면 강한 편이지만, 길리언은 정말 차원이 달랐다.

수행 기사들은 길리언을 흘깃대며 저들끼리 소곤거렸다.

"분명 라타토스크 용병단 단장이라고 했지?"

"그래, 나도 들어 본 적은 있어."

"어쩐지, 보통 사람이 아니었네."

"공자님은 대체 어떻게 알고 찾아간 거지?"

라타토스크는 타국에서 활동하던 용병단이지만, 그들도 이름 한 번쯤은 들어 봤을 정도로 유명했다.

길리언이 그런 용병단의 단장이었다니 놀라우면서도, 실력을 생각하면 그런 배경이 있을 만도 하다고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지셀은 내심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실력은 꼬리가 붙었을 때 이미 봤지만, 길리언이 본격적으로 전투에 임하는 모습은 그도 처음 보았다.

'소문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

길리언은 지셀이 전생에 타국에서 용병 일을 할 때, 소문으로만 들었던 인물이었다.

지셀과는 같은 왕국, 인접한 영지 출신이라며 동료나 선배들이 길리언에 대해 이야기해 주곤 했다.

이번 생에 기회가 되면 그를 꼭 영입하고 싶었는데 다행히 시기도 좋고 운도 좋았다.

그 당시에는 소문이 부풀려졌다고 생각했는데 직접 보니 실력이 소문 이상이었다.

'빠르게 움직이길 잘했어.'

덕분에 아주 든든한 패를 얻게 되었다.

아멜리아에게 돈도 뜯어내고 충직한 수하까지 얻었으니 이번 외유는 정말 성공적이었다.

지셀은 길리언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 준 뒤 일행에게 말했다.

"아멜리아가 암살자를 고용했나 보군. 그 여자 꽤 집요한데 말이야."

전생에서도 아멜리아는 끈질기게 지셀을 방해했다. 잡아 죽이려고 해도 번번이 빠져나가는 통에 전쟁을 치르는 내내 귀찮았다.

물론 이번 생에는 아멜리아를 그냥 내버려 두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어차피 그녀와는 계속 부딪힐 수밖에 없는 관계니까.

벨린다가 암살자들의 시체를 하나하나 뒤적거렸다. 뭘 하나 했더니, 소속을 확인하는 모양이었다.

"암살자들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있겠어?"

시체 몇 구를 확인한 벨린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이빨 세 개가 그려진 문신을 보니 '살쾡이 밀매단'이에요. 레이폴드에서 꽤 세력이 큰 길드죠."

"살쾡이 밀매단? 이상한 이름이군."

"밀매업자들하고 도적들이 모여서 만든 길드예요. 천박하고 거친 놈들만 가득하죠. 암살 말고 밀매업과 마약 판매도 하거든요. 한마디로 더럽게 나쁜 놈들이란 거죠."

"벨린다는 성에만 있으면서 그런 건 어떻게 알아?"

지셀이 묻자, 벨린다가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뭐, 예전에 성에 들어오기 전에 우연히 알게 된 거예요. 어쨌든 집요한 놈들이니 영지로 돌아가도 안심할 수만은 없겠네요."

"그렇군. 아멜리아가 독한 놈들을 썼나 보네. 기회가 되면 그곳도 손봐 주도록 하지."

지셀의 살생부에 '살쾡이 밀매단'의 이름이 추가되었다.

분명 아멜리아는 레이폴드에 있는 범죄자 길드들을 수족으로 부리고 있을 것이다.

살쾡이 밀매단뿐 아니라 다른 범죄 길드도 언젠가는 다 박살을 내야 했다.

'그건 그렇고 벨린다는 어떻게 저런 걸 아는 거지?'

벨린다는 우연히 알았다고 했지만, 지셀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지셀은 어느 영지에 어떤 길드가 있는지 잘 몰랐다. 이 시기 이후로는 타국에서 지냈고, 범죄자 단체와 얽힌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용병 일을 하며 지냈던 그조차도 그런데, 하물며 성에서만 지내는 벨린다가 길드 이름과 성격, 세력 범위까지 알고 있는 건 이상하다.

'그러고 보니 나는 벨린다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군.'

자신의 가정 교사이자 하녀장, 그리고 어지간한 기사들을 상대할 수 있을 만큼 강하다는 것 정도.

그게 전부였다.

'뭐, 이제 볼 시간은 많으니까. 천천히 알아가 보자고.'

지셀은 벨린다에 관한 의문을 머릿속 한구석으로 밀어 넣고, 당장 급한 일부터 처리하기로 했다.

바로 습격자들의 시체에서 돈이 되는 물건과 무기들을 모조리 수거하는 일이었다.

가뜩이나 궁핍한 영지에 돈 들 곳도 많은데, 하나라도 챙길 수 있는 건 챙겨야지 않겠는가.

* * *

숲에서 암살자들을 물리치고 다시 이틀 정도를 이동한 끝에, 일행은 드디어 페르디움 영주성 인근에 다다랐다.

멀리 익숙한 페르디움 성의 모습이 보였다. 왠지 반가운 마음이 물씬 들었다.

'다시 돌아올 곳이 있다는 건 좋구나.'

전생에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 이미 가문은 멸망한 상태였다.

돌아갈 곳이 없다는 데에서 오는 그 절망은 겪어 보기 전까지는 모른다.

그 뒤, 지셀은 정착하지 못하고 마음 둘 곳도 없이 평생을 떠돌아다녔다.

삶이 언제나 고단했고, 쉬어도 쉬는 것 같지 않았다. 늘 불안하고 서러웠다.

그때와는 달리 페르디움이 건재한 모습을 보니 감회가 깊었다.

지셀의 마음 깊은 곳에서 다시 한번 굳은 결심이 피어올랐다.

'반드시 지켜 낼 것이다.'

페르디움 영지가, 그의 가문이 두 번 다시 멸망하게 두지 않을 것이다.

* * *

챙그랑!

"어떻게! 어떻게 하나도 못 죽일 수가 있어!"

아멜리아가 집어 던진 찻잔이 산산조각 나며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냐앙!

바스테트도 아멜리아를 따라 하듯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베르나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런 둘의 모습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경고조차 되지 않았을 거야. 더 우습게 보였으면 보였지."

냐앙!

아멜리아의 눈은 실핏줄이 다 터져 붉게 물들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늘 우아하고 냉정하던 그녀라고는 상상도 못 할 모습이었다.

베르나프는 제법 충격을 받았다.

'저래도 예쁘다니!'

뭘 해도 예뻐 보이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건 처음 봤다. 정말 무서웠다.

지금 아멜리아에게 진정하라는 소리를 했다간 바닥이 아니라 그의 머리로 찻잔이 날아들 것이다.

그는 입을 굳게 닫았다. 그러자 바스테트가 그를 혼내듯이 외쳤다.

냐앙!

'저 망할 고양이. 자기가 무슨 내 윗사람인 줄 알아. 아오.... 저 고양이 새끼는 날 잡아서 반드시 치워 버린다.'

아멜리아는 좋지만, 그를 제 밑으로 보고 그녀와 똑같이 행동하는 바스테트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 명예를 땅에 떨어트려도 유분수지. 아주 진창에 넣고 굴리는구나. 도대체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서른 명이나 갔다면서 하나도 못 죽여? 지셀, 그 새끼가 날 얼마나 우습게 보겠어."

냐앙!

"시끄러워, 바스테트!"

아멜리아가 노려보자, 바스테트는 바로 고개를 숙이고 베르나프의 뒤로 후다닥 숨었다.

'쌤통이다.'

얄밉게 굴던 고양이가 혼나자 베르나프는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화살이 살짝 돌아간 틈을 타 살짝 고개를 숙이고 답했다.

"죄송합니다. 생각보다 수행 기사들의 실력이 뛰어났던 모양입니다."

그들은 지셀 일행에 길리언이 합류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꼬리로 붙여 놓았던 자도 잡혔고, 습격하라고 보낸 암살자들이 죄다 전멸했으니 그들에게 소식을 전할 자가 없었던 것이다.

아멜리아가 핏발이 선 눈으로 베르나프를 노려보았다.

"페르디움 영지를 찾아가서라도 지셀을 죽였어야지. 하긴, 그 보잘것없는 놈 하나 죽이지 못한 쓰레기들이 뭘 하겠어."

베르나프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레이폴드 영지를 빠져나가는 지셀을 공격하는 것과 페르디움 영지 안에 있는 지셀을 공격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아무리 허접한 영지라 해도, 지셀은 페르디움의 대공자다. 영지의 주요 인물을 근거지에서 죽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자칫 잘못해서 배후가 밝혀지면 정말 영지전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것은 아멜리아 역시 익히 아는 사실이었다. 지금은 단지 분노에 휩싸여 내뱉은 말일 뿐이었다.

"일단 살쾡이 새끼들은 대기시켜 놔. 언제든지 바로 움직일 수 있게. 방법은 내가 찾아볼 테니까. 그때는 똑바로 하라고 전해."

아멜리아는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더 이상 날 우습게 만들었다간 어떻게 될지 기대해도 좋아. 베르나프 너도 말이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어?"

냉정한 그녀의 말에 항상 총애를 받던 베르나프는 급 우울해졌다.

"...알겠습니다. 제대로 준비시키겠습니다."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바스테트를 안아 들고 말했다.

"저 한심한 놈들보다 차라리 바스테트 네가 싸우는 게 낫겠다. 그때 그냥 위험을 감수하고 지셀을 죽일 걸 그랬나? 쓸모 있는 놈들이 없구나."

야오옹.

큰소리에 꼬리를 말았던 것은 기억도 안 나는지, 바스테트가 아멜리아의 품에 얼굴을 비비며 애교를 부렸다.

그 모습을 고깝게 바라보던 베르나프는 순간 바스테트와 눈이 마주쳤다. 왠지 비웃는 듯 보여 속에서 욕이 절로 나왔다.

'...저 새끼 저거 지능 높아. 분명해.'

혼만 실컷 나고 고양이한테까지 능욕당한 베르나프는 씁쓸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파혼까지 할 건데 그런 놈을 뭐 하러 신경 쓰는지.'

2만 골드는 그냥 파혼 선물로 준 셈 치고 손을 떼는 게 낫지 않은가.

하지만 이미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아멜리아는 견딜 수 없는 모양이었다.

'멍청한 새끼, 하필 왜 저 여자를 건드려서.'

암살자들이 모두 시체로 돌아왔음에도 베르나프는 지셀이 끝내 죽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멜리아가 원하는 건 결국은 모두 이루어진다. 그건 베르나프에게 절대적인 진리였다.

21화 미친놈아 그걸 왜 해! (1)

지셀 일행은 영지로 돌아오자 후련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외유는 짧았지만, 밖에서는 아무래도 페르디움에서처럼 마음을 놓고 편하게 있을 수 없으니까.

오직 길리언만이 아무런 표정도 없이 영지 이곳저곳을 둘러볼 뿐이었다.

영주 성으로 향하는 사이, 지셀이 길리언에게 물었다.

"이곳이 페르디움 영지야. 직접 본 소감이 어때?"

"...괜찮은 거 같습니다."

"아니, 아니. 그런 형식적인 대답 말고. 외부인이 봤을 때 어떤지 평가를 솔직히 듣고 싶은데?"

길리언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결국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했다.

그 자신도 모시는 자의 비위를 맞추는 말만 하는 건 선호하지 않았다.

"...가옥이 전부 구식이고 낡았습니다. 보수가 되는 거 같아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만큼 영지가 가난하다는 뜻이겠지요."

레이폴드는 북부에서 가장 부유한 영지다.

비록 길리언 본인은 딸을 치료하느라 전 재산을 쓰고 가난하게 살기는 했지만, 레이폴드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오며 가며 본 게 있다.

용병으로 일하던 시절에도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많은 영지를 직접 보았다.

그런 길리언이 보기에 페르디움 영지는 그냥 가난한 시골 촌구석 영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지셀은 화난 기색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정말 가난한 영지지. 영주도, 영지민들도 모두 돈이 없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형편이니까."

"젊은 남자들이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이러면 발전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겠죠."

"그래. 이유는 알고 있나?"

길리언은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

"페르디움 영지는 북방의 야만인들 때문에 항상 전쟁 중이나 마찬가지라고 들었습니다. 그만큼 징집이 자주 이뤄질 테고, 젊은 사람이 부족할 수밖에 없겠지요."

"잘 아는군."

지셀은 쓴웃음을 지었다.

"영지에서 가장 발전하기 마련인 영주 성 인근도 이 정도야. 다른 마을들은 말할 것도 없지."

"음...."

"농사를 지을 사람들이 없으니 세금은 줄어들고 영지는 더 가난해지고. 악순환의 반복이야."

길리언은 지셀의 말을 듣고 영지의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페르디움의 상황은 완전히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나 다름없었다.

세금을 제대로 거두지 못하는데 영지와 군대가 멀쩡하게 돌아갈 리가 없다.

지셀은 천천히 말을 몰며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역시 가장 큰 문제는 돈이지. 기사들과 병사들의 장비는 노후화되는데 돈이 없으니 바꿀 수가 없어. 보급도 제때 이뤄지지 못하고 말이야. 아마 다른 영지들이 지원해 주지 않았다면 진작 망했겠지."

"상황이 좋지 않군요."

"그래, 이대로 가다가는 싸워 죽는 것보다 굶어 죽는 게 더 빠를 거야."

전생의 지셀은 그저 가난한 영지에서 태어났다고 불평하기 바빴다. 그게 얼마나 철없는 행동이었는지 이제는 알고 있다.

"사실 일 년 내내 싸우는 건 아니야. 일정 주기로 막고 몰아내기만 반복하는 거지. 문제는,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모두 군대에 가 있는데도 그렇게 유지만 하고 있다는 거야."

"그렇다고 군대를 없앨 수는 없지 않습니까?"

"맞아, 돈 나올 구석이 없는데 군대는 유지해야 하니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을 리가 없지."

길리언의 생각으로는 단순히 지형적인 문제만은 아니었다.

페르디움 영지는 날씨도 조금 선선한 정도이고, 농사를 짓기에 그리 나쁘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농사를 지을 사람이 없는 게 문제였다. 모든 노동력이 전쟁에 소모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셀은 야만인들 외에 다른 문제점 또한 입에 올렸다.

"오면서 영지 북서쪽에 붙어 있는 숲을 봤지? 마수의 숲이라고 불리는데 알고 있나?"

"예, 몬스터로 가득 찬 숲이라고 들었습니다."

"언제 몬스터가 튀어나올지 모르니 그쪽에서도 군대가 경계를 서고 있어. 결국 거기서도 전쟁을 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야. 군대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자원이 소모되니까."

가뜩이나 돈도 없고 사람도 적은데, 그나마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군대로 들어가 경계만 서고 있다.

이럴 바에 차라리 모두 돌격해서 시원하게 싸우다 죽는 게 낫지 않나 싶을 정도였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돈을 잡아먹는 게 군대다.

지금이야 다른 영지의 지원으로 어떻게든 유지하고 있다지만,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길리언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물었다.

"다른 영지에서 지원을 더 받는 건 어떻습니까? 돈이나 식량 말입니다. 그걸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풀면...."

"그들은 우리 힘이 강해지는 걸 원하지 않아. 정말 딱 군대가 겨우 유지될 정도로만 지원을 해 주지. 영지민에게 베푸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야."

길리언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셀이 특이한 거지, 보통 귀족들은 자기 영지민들의 생활조차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런 자들이 남의 영지민들을 먹여 살리는 데 자기 재산을 퍼 줄 턱이 없었다.

그저 누군가는 여기를 지켜야 하니 마지못해 조금씩 지원해 주는 정도일 것이다.

그나마 북부 사람들이 성정이 강한 편이라 이런 가난 속에서도 버티고 있을 뿐이다.

"다른 방법은 없었습니까?"

지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 아버지의 할아버지까지 모두 이 악순환을 끊어 보려고 노력했지만 끊지 못했어. 애초에 돈이 없으니 다른 걸 시도해 볼 여력이 없었지."

"힘든 상황이군요."

"땅이 메말라도 한 방울의 물만 있으면 새싹이 피어날 가능성은 생기는 법이야. 하지만 그 한 방울의 물조차 없는 게 우리 영지의 현실이지."

"솔직히 말씀드리면 다른 영지에서 기사 서임을 받는 게 공자님한테 더 나을 거 같습니다. 영지를 물려받아도 고생만 할 게 분명합니다."

길리언이 답답해진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지셀은 씩 웃음을 지었다.

"내가 해결할 거야."

"네? 공자님이 말입니까?"

마치 다짐 같기도 한 말이었다. 길리언이 반문하자 지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반드시 영지의 가난을 끊어 낼 거야. 한 방울의 물이 아니라 비가 되어서 말이지."

길리언은 단순히 젊은 패기에서 나오는 헛된 꿈이라 생각했다. 누가 봐도 지금 상황에서 영지를 살리기란 불가능해 보였으니까.

그러나 지셀은 정말로 페르디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오직 그만이 할 수 있는 확신이었다.

* * *

지셀은 영주 성에 도착하자마자, 아버지가 돌아온 걸 확인하고 바쁘게 움직였다.

"벨린다, 길리언과 레이첼이 묵을 곳을 준비해 줘. 곧 아버지를 만나러 갈 거야. 치료도 매일 해야 하니 약재도 좀 구해 주고."

"알겠어요. 저도 밀린 일들을 처리해야겠네요."

지셀은 길리언을 바라보았다.

"길리언, 당분간은 성에 묵도록 해. 곧 머물 만한 거처를 마련해 주지."

"감사합니다."

지셀은 수행 기사들도 수고했다며 치하하고, 길리언을 대동한 채 아버지를 찾아갔다.

'이게 얼마 만인 거지?'

페르디움 대공자로서는 몇 달 만에 보는 것이지만, 용병왕에게는 수십 년의 세월을 돌아와 겨우 다시 만나는 아버지였다.

지셀은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문 앞에 서서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가신들과 회의하는 중인지, 페르디움 백작의 피곤한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병력을 감축해야 한다고?"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지금 상태를 유지하기는 빠듯할 거 같습니다. 지원금이 줄어들었습니다."

재무관 알버트가 무미건조한 어조로 답했다.

잠깐 침묵이 흐르고, 곧이어 기사단장 란돌프의 무거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알버트 형님, 여기서 더 줄이면 전선을 제대로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기사단장인 란돌프는 전선을 유지하고 야만인들과 싸우는 데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답답한 심정을 담아 물었다.

"어디에서 지원금을 줄인 겁니까? 차라리 레이폴드에 지원을 더 요청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곳이라면 분명 여유가 있을 것입니다."

란돌프의 말에 총관 호메른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힘들 거 같다. 지금 감축해야 하는 이유가... 지원금을 가장 많이 보내던 레이폴드에서 지원을 줄였기 때문이야. 자세히 알아보니 레이폴드 백작이 군비를 더 늘렸다고 한다. 병사들을 모으고 식량을 비축하는 거 같다."

란돌프가 조금 놀랍다는 듯 되물었다.

"레이폴드 백작이 왜 군대를 키운다는 겁니까? 북부에서 전쟁을 할 만한 곳이 여기 말고 또 어디 있다고요."

"모르겠다. 우리야 항상 북방 요새에만 신경을 쓰니 주변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기가 어렵지."

"병력을 줄일 수는 없습니다. 그랬다간 야만인들한테 당할 거요. 지금 남은 기사도 서른 명이 안 됩니다. 돈이 없으니 다 떠나고 쟈말이나 필립 같은 배신자가 나오는 겁니다."

란돌프가 강경하게 주장했지만, 알버트는 여전히 감정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기사단 전력도 감축해야 할 거 같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북방의 전선도 축소할 수밖에 없습니다."

란돌프는 분통이 터진다는 듯 크게 외쳤다.

"형님! 전선을 줄이면 막고 있는 의미가 없습니다! 여기저기 구멍 난 곳으로 야만인들이 들어올 겁니다!"

그 말에는 다들 할 말이 없는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주요 가신들이라고 해 봤자 총관과 기사단장, 재무관 정도였다. 가난한 영지지만 그래도 이들이 똘똘 뭉쳐 지금까지 어떻게든 이끌어 왔다.

호메른, 알버트, 란돌프가 페르디움을 이끌어가는 중심이자 실세인 것이다.

문 앞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지셀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길리언에게 말했다.

"이거 좀 창피하네. 영지 사정이 워낙 안 좋아서 말이지. 다른 영지랑은 분위기가 좀 다르지? 다들 아버지랑 의형제인 분들이야."

"괜찮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영지가 유지되고 있는 게 신기했는데, 그나마 사람들이 끈끈하게 이어져서 가능했던 거 같습니다."

"그래, 저분들도 의리와 충성으로 지금까지 고생하며 버티고 있는 거지. 다들 좀 꼬장꼬장해도 좋은 분들이야."

'나를 원수처럼 보긴 하지만.'

지셀은 뒷말을 속으로 삼켰다.

그가 워낙 사고만 치고 다니니 세 사람과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지셀은 문을 열기 전 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제 저 꼬장꼬장한 사람들을 상대해야 한다.

"들어가지."

그는 대전의 문을 힘주어 열었다.

머리가 반쯤 벗어진 총관 호메른, 언제나 표정이 심각한 재무관 알버트, 그리고 수염이 덥수룩한 기사단장 란돌프.

페르디움 백작과 연배가 비슷한 그들은 지셀을 보자마자 인상부터 찌푸렸다.

하지만 지셀은 아버지의 얼굴을 보는 순간부터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버지!'

그의 아버지, 즈발터 페르디움은 언제나처럼 무표정하고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셀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물론 다른 세 사람도 반가웠지만, 아버지는 조금 더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삶에서는 가출한 뒤 아버지를 보지 못하게 되어, 얼굴조차 잘 기억나지 않았다.

다시 아버지를 보게 되니 이목구비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다.'

가문을 떠나갈 때는 언제든지 다시 돌아와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다.

치기 어린 생각이었다.

지셀은 가문이 멸망하고 나서야, 지금껏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이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고 싶은 것을 보지 못하게 되는 고통과 괴로움을 느낀 후에야, 지금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아버지...."

지셀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지만, 차마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수고하셨다고, 잘 다녀오셨냐는 인사의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떨리는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나 즈발터가 지셀의 심정을 알 리가 없었다. 그는 아들이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이자 살짝 긴장했다.

'왜 저러지? 또 사고 쳤나? 눈가는 왜 저렇게 쓸데없이 촉촉하고?'

잠시 기다려도 지셀이 말이 없자 즈발터가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크흠, 나갔다 왔다고 들었다. 레이폴드 백작 영애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22화 미친놈아 그걸 왜 해! (2)

아버지의 물음에 겨우 정신을 차린 지셀이 자세를 바로 하며 답했다.

"별일은 없었습니다. 그저 아멜리아와 할 이야기가 조금 있어서요."

"그러하냐."

즈발터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예전부터 지셀은 그를 피하고 도망 다니기 바빴다.

먼저 찾아와 인사를 하기는커녕, 즈발터가 찾아도 핑계를 대고 숨어 다니기 일쑤였다.

부자가 직접 대면하는 건 지셀이 사고를 치고 잡혀 올 때뿐이었다.

그러던 지셀이 이렇게 먼저 자신을 찾아오다니.

그뿐만이 아니었다. 말이나 행동에서도 당당함이 느껴졌다. 그가 알던 지셀이 맞나 싶을 정도로 생소한 모습이었다.

사람이 안 하던 행동을 하면 의심부터 드는 법이다.

'저놈 진짜 왜 저러지? 어디 아픈가?'

즈발터는 눈을 가늘게 뜨고 지셀을 이리저리 관찰하듯 뜯어보았다.

'음, 역시 수상해.'

즈발터가 계속 입을 다물고 있자 분위기가 점차 가라앉았다.

지셀은 일단 인사부터 건넸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번에도 잘 막아 내셨다고 들었습니다."

"아니다. 완전히 밀어붙여야 했는데 영지 일 때문에 그러질 못했어. 그래도 제법 큰 피해를 줬으니 당분간은 그놈들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조금 쉬었다가 정비를 마치는 대로 다시 출정할 생각이다."

지셀은 아버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영지의 사정이 얼마나 힘든지 이미 밖에서 듣고 말았다.

하지만 즈발터는 그렇게 힘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아들 앞에서 내색하지 않고 앞으로 할 일만을 얘기했다.

'여전하시구나.'

오랜만에 아들을 봤음에도 무뚝뚝한 얼굴에는 변화가 없다.

남들이 본다면 감정도 없는, 멋대가리도 재미도 없는 아저씨로 보일 것이다.

어린 시절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다. 딱딱하고 엄하기만 한 아버지가 얼마나 싫었던가.

하지만 이제는 저 표정 뒤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알고 있다.

그것은 피로와 고단함, 그리고 포기할 수 없다는 책임감이었다.

'저 책임감에 모두가 기대어 살고 있다.'

모두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이 평화는 사실 즈발터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그저 싸움만을 좋아하고 가정은 신경도 쓰지 않는, 그런 몰상식한 사람인 줄로만 알고 싫어했다.

영지에서 편하고 호화롭게 사는 다른 귀족 자제들을 보며 부러워하기도 했다. 왜 자신들만 이렇게 궁핍하고 힘들게 사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책임감의 무게를 알게 된 지금은 아버지의 마음이 어떨지 알 것 같았다. 그처럼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도.

지셀은 그대로 감상에 빠졌다. 다시 입을 열 기미가 없는 아들을 보고 이번에는 즈발터가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쟈말과 필립을 직접 처단했다고 들었다. 사실이냐?"

'음,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하지?'

가뜩이나 그 일에 대해 이런저런 소문이 돌아 귀찮을 지경이었다.

지셀이 잠시 고민하자 기사단장인 란돌프가 고개를 쭉 빼며 말했다.

"맞다, 요새 말이 많던데요. 솔직히 말씀해 보시지요. 직접 죽인 거 맞습니까?"

"제가 직접 다 죽인 건 아닙니다."

그러자 페르디움의 가신들이 '그럼 그렇지'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그들은 지셀이 기사 두 명을 직접 죽였다는 말을 전혀 믿지 않고 있었다.

란돌프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역시 그렇군요. 그럼 그놈들이 서로 싸운 겁니까?"

"네, 자기들끼리 싸우긴 했습니다."

프랑크가 쟈말과 필립을 죽였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대공자님은 그냥 마무리만 지으신 거군요?"

"뭐,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됐네요."

프랑크를 포함해서 남은 놈들은 죄다 그가 죽였으니 마무리를 지었다고 볼 수도 있었다.

솔직한(?) 답변에 란돌프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는 영지에 배신자가 나온 것도 그렇지만, 자신이 데리고 있던 기사가 저 사고뭉치에게 당했다는 게 너무 어이가 없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운이 좋았구나. 그래도 기사를 상대하기는 쉽지 않았을 텐데. 잘했다."

즈발터가 조금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지셀에게 말했다.

영지에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한심한 녀석이 그 정도 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그가 아는 지셀은 여동생을 내팽개치고 도망갔대도 그러려니 할 놈이었다.

그래도 제 동생을 지키겠다고 남아 있었던 걸 보면 아직 최악의 수준까지 떨어지진 않은 모양이었다.

"케인과의 대련에서도 이겼다고 들었다. 앞으로도 그렇게 수련을 열심히 하거라."

"알겠습니다."

란돌프는 케인을 이긴 것까지는 진짜 맞냐며 괜히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

대련을 직접 본 기사한테 보고받기도 했고, 어차피 고만고만한 놈들끼리 싸웠다 생각한 것이다.

오크 토벌에서 지셀이 활약했다는 소문은 케인과의 대결 이후 '지셀이 스코반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정도로 가라앉은 상태였다.

모든 논란이 정리됐지만 란돌프가 지셀을 보는 눈길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어휴, 형님 아들만 아니었으면 그냥 날 잡아서 허리를 반대로 접어 버렸을 텐데.'

이번에는 호메른이 앞으로 나섰다.

"대공자님, 언제나 행실을 바로 하셔야 합니다. 페르디움의 후계자라는 사실을 항상 자각하고 계십시오. 절대 명예를 잃지 마시고... 언제나 영지를 위해... 대공자님의 조부이신 단테 페르디움 백작께서는...."

호메른의 잔소리가 끝도 없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그가 보기에 지셀은 대공자인 주제에 영지의 골칫덩어리이자, 후계자의 자격도 갖추지 못한 한심한 인간이다.

그러니 항상 그를 볼 때마다 못마땅해하며 잔소리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전생에 지셀이 반항심을 키운 건 그 잔소리 탓도 있었다. 호메른이 그걸 알 리 없었지만.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시지요."

지셀은 적당히 잔소리를 끊어 냈다.

'어휴, 듣기 싫어서 말 끊는 거 봐라. 백날 얘기해 봤자 소용이 없어. 소용이.'

호메른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을 닫았다.

예전에는 바르게 자라라고 잔소리를 했다면, 이제는 사고 칠까 무서워서 잔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호메른의 잔소리가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알버트가 툭 한마디를 던졌다.

"품위 유지비를 줄일 예정입니다."

'빵 한 조각도 아깝다.'

영지에 돈이 없으니 당연히 가장 쓸모없는 식충이의 품위 유지비부터 줄일 생각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산뜻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시지요."

'음? 저놈이 왜 순순히 알았다고 하지?'

알버트는 지셀을 향해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평소 같았으면 욕지거리를 하며 행패를 부리고 돈을 내놓으라 공갈 협박도 서슴지 않았을 텐데.

'흐음, 수상한데.'

그는 평소에 지셀에게 잔소리도 하지 않고, 그저 소 닭 보듯 했다. 한마디씩 건네는 건 그저 돈에 관해 이야기할 때뿐이었다.

'일단은 지켜보자.'

알버트는 여차하면 지셀 앞으로 배정된 예산을 더 삭감할 생각을 하며 입을 다물었다.

이 세 사람이 처음부터 지셀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건 아니다. 어렸을 때는 그들도 지셀을 정말 친자식처럼 예뻐했다.

하지만 지셀이 치는 사고가 '어려서 그렇겠지' 하고 이해할 수준을 넘긴 뒤로는 다들 포기하고 말았다.

이제는 얼굴만 봐도 원수 같았다.

다른 가신들도 돌아가면서 대공자인 지셀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들도 지셀 때문에 모두 한 번쯤은 고생해 본 터라 다들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즈발터는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가신들이 모두 지셀을 보고 잔뜩 경계하는 모습을 보니 피로가 훅 몰려왔다. 어찌 보면 나름 존재감이 대단한 아들이었다.

'내 아들이지만 정말 기묘한 존재로다.'

혀를 찬 즈발터가 조금은 피곤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 단순히 인사를 하러 온 거 같지는 않구나. 할 말이 무엇이냐."

지셀은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부터가 정말 중요했다.

"제가 하려는 일이 있는데 아버지가 허락해 주셨으면 합니다."

"네가... 뭔가를 하겠다고?"

"네,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아무것도 안 하면 안 되겠느냐?"

지셀이 뚱한 표정을 지으며 내뱉었다.

"꼭 필요한 일입니다."

"...그래, 그게 무엇이냐?"

즈발터가 조마조마한 마음을 감추고 물었다.

북방에서 이어지는 전투로 단련되어 어지간한 일에는 눈 하나 꿈쩍 않는 자신도, 아들만 보면 일단 가슴이 두근거린다.

자식은 전생의 원수라더니, 전생에 자신이 지은 죄가 많은 모양이었다.

긴장감이 가득한 즈발터의 표정을 보고 지셀이 속으로 혀를 찼다.

'거참, 아들을 보고 이렇게 긴장하는 아버지라니.'

아버지뿐만 아니라 가신들까지 모두 야만인이라도 본 것처럼 긴장하고 있었다.

지셀은 냉대를 당하면서도 기분이 상하기는커녕, 조금 즐거워졌다.

이쪽은 수십 년 만에 만나는 사람들이니 마냥 반갑기만 한데, 평소와 영 딴판인 자신을 귀신 보듯 하는 게 웃겼다.

이들에게 지셀은 얼마 전까지 사고만 치고 다니던 인물이니 경계하는 것도 당연했다.

'뭐, 그래도 이 정도면 양호하지.'

전생에 왕국을 쓸어 버리면서 하도 욕을 많이 먹어서 그런지, 가신들의 저런 반응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영지 사정이 이렇게 어려운데 대공자라는 놈이 사고만 치고 다니니 이들이 얼마나 고생했겠는가.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지셀에게는 영지의 암담한 상황을 타파할 지식과 능력이 있다.

'어차피 영지에도 좋은 일이니까.'

지셀은 마음을 다잡고 단호하게 선언했다.

"마수의 숲을 개척하겠습니다."

즈발터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옆에서 듣고 있던 가신들도 모두 황당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순식간에 주변 공기가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숨 막힐 듯 조용해져 눈 깜박이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어처구니가 없어 한참 동안 아무 말도 못 하던 호메른이 지셀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공자님, 지금 마수의 숲을 개척한다고 하신 겁니까?"

"맞습니다. 제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숲 옆에 주둔지를 짓고 병력을 모으는 것만 허락해 주십시오."

마수의 숲은 어둠의 숲, 침묵의 숲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불길한 이름이라는 것이다.

페르디움 북쪽에 넓게 퍼진 그 숲에는 강력한 몬스터들이 가득했다. 지금껏 누구도 마수의 숲 탐험에 성공하지 못했다.

페르디움에서도 섣불리 건드리지 못하고, 가끔 숲에서 튀어나오는 몬스터를 막을 뿐이었다.

호메른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마치 지셀을 가르치듯 말했다.

"대공자님, 마수의 숲이 어떤 곳인지 알고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지셀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럼요, 잘 알고 있습니다. 몬스터가 아주 많고 위험한 숲이죠."

가신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세상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없는 일이 있다. 지금 지셀이 주장하는 건 그들이 보기에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왜 갑자기 찾아와서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말도 안 되는 요구였다. 대공자가 또 사고를 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호메른은 굳은 얼굴로 다시 말했다.

"개척도 불가능할뿐더러, 공자의 신분으로는 영지 내에서 병력을 모집하고 주둔지를 건설할 수 없습니다."

"예, 그래서 아버지께 허락받으러 왔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지셀의 모습에, 호메른은 점점 머리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지셀이 나이를 먹더니 이제는 아주 스케일이 큰 사고를 칠 모양이었다.

'영주님 앞이다.'

호메른은 그래도 참으려고 했다.

하지만 지금도 지셀이 친 끔찍한 사고들이 수없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데, 그 범인의 뻔뻔한 표정까지 보고 있으려니 그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즈발터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결국 폭발한 호메른이 침을 튀기며 외쳤다.

"미친놈아, 그걸 왜 해!"

23화 미친놈아 그걸 왜 해! (3)

즈발터는 물론 다른 가신들까지 다 있는 자리였지만, 정말 큰소리가 나오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마수의 숲을 건드리는 건 지셀이 이전에 친 사고들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거기 들쑤셔 봤자 몬스터만 튀어나올 텐데 뭐 하러 들어가! 완전 손해라고! 왜 가만히 내버려 두는지 몰라?"

호메른의 입에서 예의고 뭐고 말아 먹은 험한 말이 연이어 튀어나왔다.

하지만 대공자에 대한 예의 같은 걸 생각하는 사람은 그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알버트가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손익을 따지고 들었다.

"그곳은 몬스터가 너무 많아 쓸모없는 곳이라 판명 났습니다. 개척을 해 봤자 얻는 이득보다 들어가는 비용이 더 크다는 말입니다."

"대공자님이 자신의 실력을 너무 자만하는 거 같습니다. 설마 케인 공자를 이겼다고 본인이 정말 강해졌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허, 이거 참."

란돌프까지 입을 모아 반대하자 지셀은 속으로 혀를 찼다.

반대할 거라 예상은 했지만, 반응이 생각보다 훨씬 단호하다.

'에잉, 내 이럴 줄 알았다.'

아버지의 의형제인 세 사람이 모두 반대해서야 허락받는 건 불가능했다.

지셀이 대답 없이 가만히 있자, 호메른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대체 왜 그렇게 이곳저곳 들쑤시지 못해서 안달입니까!"

"형님, 너무 흥분하셨습니다."

란돌프가 그의 옷깃을 붙잡으며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호메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동안 저놈이 무슨 짓을 해 왔는지 잊었나? 적어도 한 영지의 대공자라면 사고는 치지 말아야지!"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

"군량을 몰래 팔아서 그 돈으로 도박을 하지 않나! 기분이 안 좋다고 성문에 불을 지르려다가 잡히질 않나! 고기를 먹고 싶다고 군마를 잡아먹고, 전설의 검을 만들겠다면서 기사들 갑옷을 죄다 녹여 버리고!"

호메른의 말이 이어질수록 지셀의 표정이 점점 묘해졌다.

'내가 저렇게까지 했었나.'

하도 오래된 일이라서 잊고 있었다.

"그 외에도 대공자가 친 사고가 한둘이야? 그런데 이번에는 뭐? 마수의 숲? 도대체 얼마나 큰 사고를 치려고! 절대 안 돼!"

지셀은 모른 척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부렸다.

'기억이 안 나는 걸.'

이들에게는 고작 몇 년, 몇 달 전의 일이겠지만 자신에게는 오래전의 일이다.

그래도 사고를 많이 쳤었다는 기억은 있었기에, 나름대로 진심을 담아 말했다.

"앞으로 그런 일은 없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 믿죠?"

어떻게든 분위기라도 풀어 보려고 살짝 미소까지 지었지만, 역효과였다. 호메른이 제 목 뒤를 잡고 비틀거렸다.

"억, 어윽. 이 꼴통... 지금 웃음이 나오...."

가만히 두 사람의 공방을 지켜보던 즈발터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마수의 숲을 개척해서 돈을 벌려는 것이냐?"

"맞습니다. 지금 영지에서 돈이 될 만한 건 숲의 자원밖에 없습니다."

"그래, 이미 선대부터 검토했던 일이다. 하지만 돈이 되는 자원이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은데 병사들을 희생시킬 수는 없어. 설령 정보가 있다 해도 지금은 그럴 만한 여력도 없다."

"예,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영지의 힘을 쓰지 않고, 제가 해 보려고 합니다."

지셀 또한 영지의 상황을 모르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꼭 그곳을 개척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래야 영지가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다.'

전생에서도 페르디움 영지는 가난 때문에 결국 망할 때까지 주변 영지에 휘둘렸다.

지금도 당장 적들이 돈줄을 막아 버리면 그것만으로도 휘청댈 게 뻔했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대비하려면 어떻게든 돈이 나올 구멍을 마련해야 한다.

하지만 미래를 모르는 즈발터에게는 통하지 않는 이유였다.

"돈도 병력도 없는데 뭘 어떻게 한다는 거냐?"

그러자 지셀은 가신들을 모두 한번 둘러본 뒤 자신만만하게 답했다.

"돈과 병력은 제가 마련하겠습니다. 어차피 영지에 돈 없는 거 알고 있습니다. 단지 영지 내에 주둔지를 건설하고 병력을 모집하는 권한만 허락해 달라는 겁니다."

그 말에 재무관인 알버트가 잽싸게 물었다. 철부지 대공자가 알아서 돈을 마련한다니 궁금증이 든 것이다.

"대공자님이 무슨 돈이 있습니까? 개척이라는 건 푼돈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압니다. 어쨌든 돈은 제가 알아서 마련할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 그 돈을 어떻게... 허허."

감정 기복이 적은 알버트도 결국 헛웃음을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지셀이 말하는 꼴을 보니 돈 개념이 없는 게 분명해 보였다.

'어디서 강도질이라도 할 셈인가? 저놈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놈인데.'

알버트가 뭐라고 말을 덧붙이기도 전에 호메른이 울부짖듯이 외쳤다.

"그냥 제발 가만히 계십시오! 도대체 얼마나 저희를 더 피곤하게 하시려는 겁니까! 그냥 가만히 계시면 안 되겠습니까? 아, 제발요!"

호메른의 절규에 공감한 다른 가신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지셀은 팔짱을 끼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 이거 허락받기는 글렀네. 쯧.'

곤란함에 저도 모르게 취한 행동이었지만, 그걸 본 사람들은 더욱 눈살을 찌푸렸다.

'저, 저 예의 없는 놈. 대공자라는 작자가 저렇게 천박해서야.'

사람들이 인상을 쓰거나 말거나 지셀은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꼭 해야 하는 일인데 말이지.'

저들이 바라는 건 명확했다. 자신이 아무것도 안 하고 얌전히 있는 것이다.

물론 지셀도 일하는 것보다는 노는 게 편하다. 그렇지만 영지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페르디움에 닥쳐올 미래를 알고 있는 건 자신뿐이니까.

'음, 그래도 반응이 너무 안 좋은데?'

가신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싸늘한 눈으로 지셀을 바라볼 뿐이었다.

마수의 숲을 개척하겠다는 것도 터무니없지만, 그 말을 한 게 신망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는 대공자였다.

대체 뭘 보고 그를 믿어 주겠는가.

그리고 아무리 형편없고 보기 싫은 놈이더라도, 몬스터가 득실거리는 위험한 곳에 영지의 후계자를 보낼 수는 없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차가운 반응을 보고 지셀은 설득이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다.

'하, 전생이었으면 그냥 죄다 족쳤을 텐데.'

용병왕 시절에는, 그의 의견에 반대하는 놈들은 죄다 공평하게 허리를 꺾어 버렸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다르다.

결국 지셀은 가신들을 설득하기를 포기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 어떻게 행동하든 고깝게 보는 사람들에게 말을 얹어 봐야 의미 없는 일이었다.

지셀은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아버지 쪽을 바라보았다.

즈발터는 피곤함을 견디지 못하고 손가락으로 눈두덩이를 주무르고 있었다.

'내 아들이지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모르겠구나.'

언제나 자신을 슬슬 피해 다니던 녀석이 제 발로 찾아와서 그래도 좀 흐뭇했는데, 어떻게 그 감정이 채 몇 분도 못 가는지 모르겠다.

기껏 찾아와서 한다는 말이, 큰 사고를 칠 테니 적극적으로 허락해 달란다.

사고 칠 걸 예고하는 대범함은 북부 사람답지만, 그 대범함을 좀 다른 방식으로 보여 주면 안 되었던 걸까.

'차라리 다른 놈이 말했으면 감옥에라도 가둘 텐데. 진짜 자식이 뭔지.'

그래도 일단 허락을 구하러 왔으니 답은 해 줘야 했다.

즈발터는 한숨을 내쉬고, 단호하게 말했다.

"절대 허락할 수 없다. 괜히 숲을 건드려서 몬스터들이라도 튀어나오면 영지의 피해가 커진다."

"뭐, 어쩔 수 없죠. 알겠습니다."

"어허! 안 된다니까! ...응? 알겠다고?"

"네, 허락 안 하신다면서요."

"그, 그래."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지셀의 모습에 즈발터는 조금 당황했다.

'저놈이 순순히 받아들인다고? 왜?'

지셀은 저렇게 말을 잘 듣는 성격이 아니었다.

말로 해서 알아듣는 놈이었으면 사고뭉치 망나니라 불릴 리가 없었다.

그런데 그런 놈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다니.

즈발터와 마찬가지로 가신들 또한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다들 오랜만에 봐서 너무 반가웠습니다. 하하하."

지셀은 씩 웃은 뒤, 미련 없다는 듯 깔끔하게 몸을 돌렸다.

불안해진 호메른이 다급하게 그의 뒤에 대고 외쳤다.

"대공자님! 이번에도 사고 치면 정말 탑에 감금할 겁니다! 명심하십시오! 이번에는 모든 가신이 동의할 겁니다!"

"네, 네. 그러시든가요."

지셀은 돌아보지도 않고 어깨를 으쓱하며 그대로 나가 버렸다.

대전에서 조금 멀어지자 그는 따라 나온 길리언을 바라보며 머쓱하게 웃었다.

"분위기가 안 좋아서 소개도 못 했네. 내가 여기서는 인기가 별로 없거든."

사실 다른 곳에서도 인기가 없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는 듯, 길리언은 고개를 저으며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괜찮습니다. 공자님이야말로 괜찮으십니까? 마수의 숲은 위험해서 허락하지 않는 게 당연합니다. 너무 실망하지 마시지요."

"내가 왜 실망해?"

지셀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누가 봐도 순순히 마음을 접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태도였다.

하지만 바로 이어지는 말에 길리언은 충격을 받았다.

"허락이야 하기 싫으면 안 하는 거지. 나도 허락받으러 간 건 아니야. 허락을 받든 못 받든 무조건 진행할 생각이었거든."

"네? 그냥 진행한다고요?"

"그래. 지금은 그냥 예의상, 혹시나 하고 말해 본 거야. 허락을 못 받았으니 이제 강제로 진행할 수밖에 없네."

"공자님, 안 됩니다. 영주님께서 직접 하지 말라 명하신 일입니다."

영주가 하지 말라는데도 밀어붙였다가 들키면 아무리 지셀이라 해도 처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심지어 다른 것도 아니고 사병을 모으는 일이 아닌가.

길리언이 걱정스럽게 만류했지만, 지셀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성공하면 그만이지. 결과로 말해 주면 돼. 답은 정해져 있거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뻔뻔하게 장담하는 지셀의 태도에 길리언은 말문이 막혔다.

도무지 이 막 나가는 공자가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면 어떻게 진행하실 생각이십니까? 돈도, 병력도 없지 않습니까?"

그러자 지셀이 피식 웃었다.

"아, 길리언은 모르는구나. 나 돈 좀 있어. 아마 우리 영지에서는 내가 제일 부자일걸?"

"네?"

"부자 약혼녀가 파혼 선물로 돈을 좀 많이 줬거든. 그 돈으로 개척 사업을 시작할 거야. 물론 첫 수익이 생길 때까지는 최대한 아껴 써야겠지만. 지금 생각하면 참 고마운 여자군."

"파혼 선물이라고요...?"

길리언이 다시 한번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파혼은 귀족 세계에서 엄청난 불명예였다. 그런데 파혼을 당해 놓고 당당한 것도 모자라 뿌듯해하다니.

'이, 이게 털털한 건지... 그릇이 큰 건지....'

조금 전 분위기를 보면 영지의 다른 사람들은 파혼이 됐다는 사실도 모르는 거 같았다.

아직 정식으로 파혼 절차가 진행된 건 아니기에 일어난 상황이지만, 두 사람이 결혼할 리는 없으니 파혼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그런데도 지셀은 파혼하기로 했다는 소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은 것이다.

길리언은 더 놀라지도 못하고 입만 딱 벌렸다.

"병력은... 용병을 모집하지."

"용병 말입니까?"

"당장 개척에 필요한 병사들을 지원받을 수 없게 됐으니 용병을 써야지. 내가 멋대로 군대를 조직할 수는 없으니까."

"얼마나 모집할 생각이십니까?"

"이백 명."

지셀은 길리언의 물음에 마치 미리 준비한 듯 막힘없이 대답했다.

길리언이 놀란 기색을 보였다. 이백 명이라면 소규모 영지전도 가능할 만한 수였다.

"정말 개척을 진행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래, 다른 사람들이 반대하는 건 중요하지 않아. 내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는 게 중요한 거지."

지셀이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길리언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왜 가신들이 그를 두고 사고뭉치에 망나니라 비난했는지 이제야 조금은 알 듯한 기분이었다.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그가 말린다고 지셀이 들을 것 같지 않았다.

평생 갚아야 할 은혜를 입고 그를 모시기로 맹세했으니 최대한 지켜 주는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잘 지켜 드리겠습니다."

"그거 듣기만 해도 든든하군. 일단 용병부터 모아 보자고."

"한꺼번에 이백 명이나 모은다면 어중이떠중이들이 섞일 수밖에 없습니다."

길리언의 우려 섞인 말에 지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알아. 하지만 그 숲을 개척하려면 어느 정도 규모가 있어야 하니 어쩔 수 없어. 쓸 만한 놈들은 따로 구해야지."

"쓸 만한 놈들이라면...."

"이 북부 지역에서 소규모 용병단 중 가장 실력이 좋은 곳이 어디지?"

길리언은 잠시 고민하다가 곧 눈을 크게 떴다.

"설마, 그 미친개들 말씀하시는 겁니까?"

지셀은 묘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그래. 켈베로스 용병단. 미친개들한테 목줄을 채워 보자고."

24화 똑같은 놈들끼리 만나겠네. (1)

지셀과 길리언이 다시 나갈 채비를 하던 그때였다. 벨린다가 급하게 찾아왔다.

"도련님! 마수의 숲을 개척한다는 게 대체 무슨 말이에요? 벌써 도련님이 또 사고 칠 뻔했다고 소문이 다 났어요!"

그새 이야기가 퍼진 모양이었다. 벨린다는 소문을 듣자마자 지셀을 찾아온 것이다.

"오, 벨린다. 그렇지 않아도 찾아가려 했는데 잘됐네. 부탁할 게 좀 있어."

"뭔데요?"

"인부들을 모아 줘. 우선 숲 근처에 주둔지를 만들 거야. 규모는 약 삼백 명이 머물 수 있을 정도. 필요한 식량과 자재들도 주문해 주고. 돈이 꽤 많이 들겠군."

벨린다는 말없이 눈을 끔뻑끔뻑하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거 영주님이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응. 그냥 몰래 하려고. 준비 좀 도와줘. 해 줄 거지?"

해맑게 웃는 얼굴이 한 대 때려 주고 싶을 정도로 얄미웠다. 벨린다가 빽 소리쳤다.

"아니, 하지 말라는데 왜 해요? 예전에는 사고를 쳐도 작게 많이 쳤는데, 갑자기 왜 이렇게 스케일이 커졌어요!"

벨린다는 지셀의 그릇이 커졌다고 흐뭇해했던 걸 후회했다.

설마 그릇이 커졌다고 사고 치는 규모도 같이 커져 버릴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너무 열 내지 마. 도와주기 싫으면 어쩔 수 없지."

지셀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난 벨린다가 도와주지 않아도 반드시 진행할 거야. 숲에 준비도 없이 들어갔다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정말 안 도와줄 거야?"

"돕긴 뭘 도와요? 영주님한테 다 말할 거예요!"

"아, 호메른이 그러더라. 이번에 사고 치면 진짜로 탑에 가둬 버릴 거라고. 벨린다가 아버지한테 말해도 그렇게 되겠지? 그러면 어쩔 수 없이 도망쳐야겠네. 어쩌면 무척 화가 나서 더 큰 사고를 칠지도 몰라. 예를 들어... 숲에 불을 지른다든가."

"미쳤어요?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벨린다가 기겁했지만, 지셀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어차피 못 들어갈 거 속 시원하게 불이라도 지르는 거지. 와, 정말 끝내주게 재미있겠다. 스코반이랑 리카르도도 끼워 줄까?"

"지금 협박하는 거예요? 네? 대놓고 사고 치겠다고 저 협박하는 거냐고요!"

"협박이 아니라,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 이거지. 그것보다는 그냥 숲에 들어가는 게 낫지 않아?"

"으아아아! 내가 미쳐 정말!"

벨린다는 안 된다고 길길이 날뛰었지만, 지셀이 몇 번이나 협박을 섞어 부탁하자 결국 포기한 듯 물었다.

"하아, 정말 진행하실 거예요? 위험한 일을 굳이 자초할 필요는 없잖아요. 총관님도 단단히 벼르고 있다면서요. 이번에는 정말로 감금당할 수도 있다고요."

"꼭 필요한 일이니까. 벨린다가 도와주면 성공할 수 있어. 해 줄 거지?"

벨린다는 유난히 지셀에게 약했다. 그가 어렸을 때부터, 지셀이 조르면 뭐든 다 들어주곤 했다.

지셀은 이번에도 결국 그녀가 져 줄 것을 알고 더 뻔뻔하게 굴었다.

역시나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정말 그릇이 커져도 너무 커졌어."

"칭찬이지?"

"칭찬이겠어요?"

지셀이 모른 척 웃으며 말을 돌렸다.

"아무튼 준비 잘 부탁해. 나는 용병을 구하러 갔다 올 거야."

"다녀오세요. 이번에는 같이 못 가서 아쉽지만... 길리언 씨가 있으니 괜찮겠네요."

벨린다의 배웅을 받으며 지셀과 길리언은 바로 영지를 떠났다.

그들이 향한 곳은 페르디움에 가까이 붙어 있는 짐바르 영지.

켈베로스 용병단이 머물고 있는 곳이며, 주변 영지 중 가장 용병들이 많은 영지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짐바르 영지에 도착하자마자, 용병 길드를 찾아가 머릿수를 채울 용병들을 모집해 달라고 의뢰했다.

용병 길드의 사무장은 오십 대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마수의 숲을 개척하는 데 참가할 사람을 찾는다고 하자,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페르디움 영지에 있는 마수의 숲을 개척하겠다고요?"

"그래."

"거기를 왜요?"

"그런 것까지 설명해야 고용할 수 있나?"

"그런 건 아닙니다만, 왜 그런 위험한 일을 하나 궁금해서...."

용병 길드에서 일하면 당연히 주워듣는 소문도 많다. 그중에는 마수의 숲에 대한 소문도 있었다.

마수의 숲을 정복하겠다고 용감하게 들어간 탐험가들은 종종 있었지만, 그들이 다시 모습을 보이는 일은 없었다.

어떤 생물이 사는지, 얼마나 위험한지, 길이 어떻게 나 있는지 제대로 밝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위험한 숲.

그런 숲을 개척하는 건 돈이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불확실한, 고생할 게 뻔한 일이었다.

돈이 없는 페르디움 영지에서는 애초에 시도할 생각조차 못 하는 사업.

이득을 본다는 확신도 없기에 다른 영지에서도 같이 개척해 보자고 제안조차 하지 않는다.

그렇게 몇십 년간 버려져 있던 숲인데, 갑자기 정체 모를 남자가 나타나서 개척하겠다 하니 호기심이 드는 것도 당연했다.

"혹시 뉘신지...."

지셀은 가문의 문장을 보여 주며 위엄 있게 말했다.

"지셀 페르디움. 페르디움 영지의 대공자다."

'니미럴, 꼴통 망나니 공자잖아?'

사무장이 영업용 미소를 띠며 속마음을 티 내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지금껏 쌓아 온 연륜 덕분이었다.

직업상 소문에 민감한 그는 당연히 바로 옆 영지의 대공자인 지셀에 대한 소문도 들었다.

'이번에는 무슨 사고를 치려고 용병들을 구하는 걸까?'

그는 지셀이 정말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손님을 가릴 수는 없다.

용병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상대가 바보라도 돈만 준다면 일단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다.

무슨 일을 할지, 그 결과물이 어떨지를 결정하는 건 고용주의 역량이다.

사무장은 수염을 긁으며 대충 말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검증된 일이 아니라 위험 수당이 조금 더 붙을 겁니다. 괜찮겠습니까?"

"그래, 최대한 빨리 모아 줘."

"인원이 많으니 며칠은 걸릴 겁니다."

"될 수 있으면 용병단 말고 개인 용병 위주로 채워 줘. 정 어려우면 용병단을 넣어도 되지만, 서른 명 이하인 곳으로만."

"알겠습니다. 알뜰하시군요."

지셀은 큰 용병단을 통째로 고용하지 않고 대부분 개인 용병들로 인원수를 채울 생각이었다.

큰 용병단을 고용하면 돈도 훨씬 많이 드는 데다, 위험한 상황에 빠졌을 때 단체로 배신할 가능성도 크기 때문이었다.

용병 모집을 맡기고 지셀은 사무장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혹시 켈베로스 용병단이 어디에 머무는지 알아?"

사무장은 질문을 듣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이름만 들어도 짜증이 확 솟구치고 위가 아파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켈베로스... 그 광견단 말씀인가요?"

"그래, 그놈들."

"그 꼴통 새끼들... 아니, 그놈들은 왜 찾으십니까?"

"그놈들도 고용하려고."

사무장이 기겁해서 지셀을 말렸다.

"아, 그건 좀. 포기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놈들, 성격이 보통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도 그놈들 때문에 제가 위장병이...."

"괜찮으니까 알려 줘."

지셀이 고집을 꺾을 기미가 없자 사무장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에휴, 똑같은 놈들끼리 만나겠네.'

사무장은 지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 짐작했다.

켈베로스 용병단은 그 실력에 비해 고용비가 싸다. 가난하기로 유명한 페르디움이니 한 푼이라도 덜 쓸 수 있다면 덜 쓰고 싶겠지.

하지만 값이 싸다는 건 뭔가 하자도 있다는 뜻이다.

꼴통과 꼴통들이 만나면 어떻게 될지 기대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손님에게 그놈들을 추천하기는 양심에 찔렸다.

"저는 정말 반대했습니다. 나중에 원망하면 안 됩니다."

사무장은 몇 번이나 강조하고는 종이쪽지에 무언가를 적어 지셀에게 건네주었다.

"그놈들은 여기 머물고 있습니다."

"고맙군. 자, 그럼 놈들을 만나러 가자."

켈베로스 용병단은 이 북부에서 제법 유명한 소규모 용병단이다.

실력은 좋기로 유명하지만, 고용비는 다른 용병단보다 쌌다. 의뢰 성공률이 낮기 때문이었다.

하도 사고를 많이 치고 제멋대로 구니 의뢰가 제대로 성공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미친개'.

켈베로스 용병단이라는 본래 이름보다 광견단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렸다.

그렇게 평판이 바닥인데도 아직 용병단이 유지될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

개개인의 실력이 다른 용병들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다.

용병 주제에 준기사와 맞먹는 실력인 데다가 싸울 때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길리언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지셀에게 걱정스럽게 말했다.

"공자님, 꼭 그들을 써야 합니까? 차라리 더 검증된 좋은 용병단을 쓰는 게 어떻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 용병단을 쓰려면 지금 있는 돈으로는 부족해. 인부들부터 식량과 자재까지 구해야 하니까."

"하지만 그놈들은 소문이 너무 더럽습니다. 제대로 통제되지 않을 가능성도 큽니다. 산적 출신이라는 소문도 파다합니다."

"괜찮아. 어차피 몬스터들과 싸울 놈들이다. 오히려 거친 편이 더 나아. 너무 걱정하지 마."

지셀이 단호하게 자르자 길리언은 일단 물러났다. 모시는 분이 결정한 일이니 따르는 게 도리였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지셀을 배신하거나 사고를 친다면 제 손으로 다 죽이기로 마음을 먹었다.

잠시 후, 켈베로스 용병단이 머무는 곳에 도착한 지셀은 주변을 둘러보고 혀를 찼다.

"휘유, 정말 더럽네."

그들은 도시 외곽에 대충 천막 몇 개를 쳐 놓고 살고 있었다.

몇몇은 도박을 하고 있었고 몇몇은 그냥 누워서 자고 있다.

씻지도 않았는지 하나같이 머리는 산발이고, 옷은 누런 게 보기만 해도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누워 있던 용병 하나가 지셀과 길리언을 보더니 코를 파며 물었다.

"뉘슈?"

일단은 옷차림을 보니 귀족 같아서 나름대로 예의를 갖춘다는 게 이 모양이었다.

"의뢰를 하러 왔다. 단장은 어디 있지?"

코를 파던 용병이 여전히 누운 채 귀찮다는 듯 대답했다.

"단장님 바쁘시니 내일 오쇼."

"그러지."

지셀은 별다른 말 없이 돌아섰다.

어차피 용병 모집 때문에 며칠은 기다려야 하니 일단은 물러난 것이다.

그는 다음 날 다시 켈베로스 용병단을 찾아갔다.

"단장을 만나러 왔다."

어제 코를 파던 용병이 킬킬 웃으며 답했다.

"오늘도 바쁘니 내일 오쇼."

"알겠다. 팔자 좋아 보이는군."

지셀은 다시 순순히 물러났다.

길리언은 슬슬 부아가 치밀었다. 저들이 무슨 수작을 걸고 있는지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공자님, 저놈들 일부러 저러는 겁니다. 자신들을 찾아올 정도면 그만큼 아쉬운 상황이라는 걸 알기에 장난치는 겁니다. 고용주의 우위에 서려고 길들이는 거죠."

"알고 있어. 하지만 오늘은 그냥 물러나도록 하지."

지셀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길리언을 달래며 숙소로 돌아갔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같았다.

그때마다 용병들은 조롱하듯이 지셀을 돌려보냈다.

그리고 오 일째가 되는 날.

지셀이 찾아오자 용병은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아 보이며 말했다.

"우리 단장님을 만나려면 약간의 성의가 좀 필요할 거 같은데... 워낙 바쁘신 분이시라."

지셀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에게 금화 하나를 던져 주었다.

갑자기 큰돈이 나오자 용병은 눈이 휘둥그레진 채 침을 꿀꺽 삼켰다.

생각보다 귀족 손님의 통이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금 더 욕심을 부렸다.

"크흠, 이 정도로는 부족한 거 같은데. 아직 상황 파악을 못 한 거 같으니 내일 다시 찾아오쇼. 젊어서 그런지 눈치가 없으시구려."

주변에서 구경하던 용병들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애송이 귀족을 하나 잡아서 가지고 노니 그들이 보기에도 재미있었던 것이다.

길리언이 분을 못 참고 나서려는 순간, 지셀이 살짝 막으며 말했다.

"손님으로서 예의를 지키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다. 내일 다시 보겠다. 이번이 마지막 경고다."

"예, 살펴 가십쇼. 내일은 두둑하게 챙겨 오십쇼."

용병들이 낄낄거리며 인사를 건넸고 지셀은 그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 날, 용병은 똑같이 웃으며 돈을 요구했다.

지셀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예의를 갖춘 거 같군. 일단 다리 하나."

턱.

길리언이 이를 갈고 웃으며 용병의 목을 잡았다.

"어? 뭐야? 안 놔? 이 새끼 죽고 싶어?"

용병이 품에서 잽싸게 단검을 꺼내 길리언을 찌르려는 순간이었다.

빠각!

"크아아악!"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고통스러운 비명이 크게 울려 퍼졌다.

25화 똑같은 놈들끼리 만나겠네. (2)

길리언의 공격에 다리가 부러진 용병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러자 구경하던 용병 다섯 명이 천천히 일어나 살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이 새끼들이 귀족이라고 겁을 상실했구나."

"귀족이면 우리가 무서워할 것 같아?"

"우리가 누군지 소문을 못 들어 본 모양이군."

용병들은 각자 무기를 꺼내 들고 두 사람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들이 미친개라 불리는 이유.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상대가 귀족이라도 싸우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반골 기질이 가득한 놈들만 뭉쳐 있는 곳이 켈베로스 용병단이었다.

그러니 제대로 통제가 될 리 없고, 고용주와 툭하면 사이가 틀어지니 의뢰 성공률도 낮을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막 나가는 놈들이 맞네."

지셀의 얼굴에 잔혹한 미소가 떠올랐다.

마수의 숲에 투입하기에 너무나도 안성맞춤인 놈들이었다.

이성이 없는 몬스터들을 상대하려면 저런 거친 자들이 필요했다.

지셀은 길리언을 보며 말했다.

"죽이지는 말고."

"알겠습니다."

길리언이 무기를 든 '미친개' 다섯 명과 맞붙었다.

준기사급 실력자인 데다 인원이 많다고 해도 길리언의 상대가 될 순 없었다.

그들이 순식간에 팔과 다리가 꺾여 쓰러지자 누워 있던 용병들이 모두 일어났다.

천막에서 자고 있던 자들까지 무기를 들고 기어 나와 두 사람을 포위했다.

"이대로 몸 성히 돌아갈 생각은 말아라."

"우리를 건드렸으니 각오는 되어 있겠지?"

"애송이가 귀족이라고 겁이 너무 없군."

길리언의 실력이 만만치 않다는 걸 알게 되자 용병들은 모두 눈빛이 달라졌다.

손쉬운 사냥감을 가지고 노는 느낌이 아니라, 신중하게 맹수를 상대하는 듯한 모습으로 변한 것이다.

지셀은 그 변화를 보고 흡족하다는 듯 웃었다.

"이런 모습들도 있다니 의외네?"

제멋대로인 거 같아도 위기가 닥치면 나름대로 협력해서 대응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확실히 소문처럼 꼴통들이긴 하지만 전투에는 꽤 쓸 만해 보였다.

"하긴 그러니까 사고를 몇 번이나 치고도 아직 용병단이 유지되는 거겠지. 그만 덤비고 너희 단장이나 불러와라."

"뭐?"

"너희를 고용할 건데 모두 병신으로 만들면 써먹을 수가 없잖아?"

"이 미친 새끼가!"

켈베로스 용병단의 용병들은 황당하다 못해 어처구니가 없었다.

제법 괜찮은 호위 하나 달고 있다고 웬 애송이 귀족 하나가 오만하게 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여기서 토막 내 버리자고."

"살아 돌아갈 생각은 말아라."

"우리가 괜히 외곽에서 살고 있는 게 아니야. 여기서 뒤지면 시체도 못 찾아."

잔인한 눈빛을 보이며 서서히 두 사람을 포위하는 용병들.

길리언은 천천히 허리에 찬 검을 뽑았다.

'이번에는 공자님이 잘못 판단했다. 차라리 다른 용병단을 찾는 게 낫겠군.'

길리언이 보기에는 이들을 정상적으로 고용할 방법은 없었다.

그는 켈베로스 용병단의 용병들을 모두 죽일 생각이었다.

미친개 중 하나가 말한 대로, 이곳은 어차피 외곽이고 지나가는 사람도 없다.

정말 누가 죽어도 상관없는 상황이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 용병 무리 너머에 있는 천막에서 한 젊은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날 왜 찾지?"

그가 나타나자 살기등등하던 용병들도 조금은 진정한 듯,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타오르는 듯한 붉은색 머리카락이었다.

반항기 가득한 눈빛은,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도리어 물어뜯길 수도 있다는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지셀은 사내를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이 단장인가?"

"그래, 내가 켈베로스 용병단장 카오르다."

"의뢰를 하러 왔다."

"의뢰를 하겠다는 놈이 감히 내 부하들을 저렇게 만들어?"

카오르가 으르렁거리자 지셀은 그를 노려보았다.

"길들이기가 실패하니 불쾌한가? 장난은 적당히 치는 게 좋아. 그러다가 상대 잘못 만나면 다 죽는다."

스산한 눈빛을 받고 카오르가 순간 멈칫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험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귀족이라고 겁먹을 거 같아? 이 자리에서 널 죽이고 다른 나라로 뜨면 그만이다."

"패기는 마음에 드는군."

지셀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누구 덕분에 꽤 오래 지체되어서 말이야. 이 이상 실랑이하고 싶지 않으니 용건부터 말하지. 마수의 숲을 개척하는 데 너희들을 쓰고 싶다."

카오르는 잠깐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되물었다.

"마수의 숲? 페르디움 영지에 붙어 있는 그 숲 말하는 건가?"

"그래, 그곳을 개척할 생각이다."

"페르디움 영주가 사람을 구하는 건가?"

"아니, 내가 진행하는 사업이야."

"네가 누군데?"

"페르디움의 대공자, 지셀이다."

카오르는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잠시 당황했다가 이내 크게 웃기 시작했다.

"으하하하, 그 망나니 공자? 너 같은 애송이가 마수의 숲을 개척하겠다고? 으하하하!"

한참을 웃던 카오르는 지셀에게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꺼져라. 너 같은 애송이 밑에서 그런 위험한 일을 할 생각은 없다. 차라리 영지전에 참여하고 말지."

켈베로스 용병단은 다른 용병단에 비해 위험한 의뢰도 잘 받는 편이지만, 그것도 고용주의 역량에 따라 달라진다.

애송이의 뜻대로 움직여야 한다면 그만큼 위험도가 높아지니 거절하는 것이다.

카오르의 대답에 지셀은 피식 웃었다.

"생각보다 겁이 많군."

"뭐?"

"귀족은 안 무서운데 숲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몬스터는 겁나나 보지?"

"이 새끼가 어디서 주둥아리를...."

두 사람이 마주 노려보자 분위기가 다시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길리언은 검을 뽑을 준비를 했고 다른 용병들도 무기를 고쳐 쥐고 언제든 공격할 자세를 취했다.

한참 입술을 씰룩거리던 카오르가 결국 몸을 돌리며 한마디 내던졌다.

"너 같은 애송이는 죽일 가치도 없지. 그냥 보내 줄 테니 적당히 치료비나 내놓고 꺼져라."

카오르는 지셀을 그냥 무시하고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천지 분간도 못 하고 설치는 귀족 애송이는 아예 상대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때 지셀이 카오르의 등을 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켈베로스 용병단의 단장에게 '모리아나의 인정'을 요청한다."

주위에 있던 용병들이 그 말을 듣고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뭐, 뭣?"

"저 귀족 새끼가 그게 뭔지나 알고 말하는 거야?"

카오르가 가던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 지셀을 노려보았다.

용병들만 얼이 빠진 게 아니었다. 길리언마저 당황해 크게 외쳤다.

"공자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셀이 요청한 것은, 예전부터 용병들에게 내려오던 내기 방법이었다.

룰은 간단하다.

작은 원 안에서, 서로의 한쪽 팔을 함께 묶은 채 단검 하나만 가지고 싸운다.

마나를 사용할 수 없으며, 원의 바깥으로 나가도 패배다.

룰은 오직 두 가지뿐인 간단한 내기이지만, 노련한 용병들도 이 내기를 기피하곤 했다.

공간이 한정되고 움직임이 제한되니 제대로 피하기가 힘들다. 그러니 단검에 몇 번만 찔려도 죽기 십상이었다.

실제로 이 룰 때문에 내기에서 이기고도 죽어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카오르는 지셀을 노려보며 눈을 씰룩거렸다.

"이 애송이 귀족 놈아. 그게 뭔지나 알고 요청하는 거냐?"

"잘 알고 있지. 내가 이기면 날 따라라."

이 방식은 보통 용병들끼리 목숨을 건 내기를 할 때 사용한다.

어지간히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이 방식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일단 요청을 받으면 거절할 수 없었다.

거부한다면 상대보다 약하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만약 단장 정도 되는 인물이 대결을 피하면 부하들의 신뢰를 잃고 조직도 와해되기 마련이었다.

카오르 또한 전 단장에게서 이 방식으로 자리를 빼앗았었다.

'재미있겠다!'

황당해하던 것도 잠시, 용병들이 눈을 반짝이며 카오르를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면 제법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아닌가. 애송이 귀족과 단장과의 싸움이라니.

정상적인 용병들이라면 단장을 말리거나, 지셀을 비웃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놈들이라면 이들이 미친개라 불리지도 않았을 터였다.

용병들의 반응에 카오르는 이를 갈았다.

"넌 용병이 아니다. 그런데 감히 용병의 방식을 내밀어? 애송이 귀족 주제에 내 자리라도 뺏고 싶은가 보지?"

"이런 허접한 용병단 자리는 관심 없는데. 내가 애송이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겠다는 뜻이다. 그러려면 용병의 방식으로 보여 주는 게 가장 좋겠지. 안 그래?"

카오르의 눈이 살기로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애송이의 요청을 거절한다면 자신의 권위는 추락하게 된다.

가뜩이나 제정신이 아닌 놈들뿐인데 그렇게 된다면 자신은 잡아먹히게 될 것이다.

"크큭, 그래. 애송이 귀족 나리가 용병의 방식으로 인정받고 싶다는데 더 따질 필요는 없겠지. 죽어도 후회 안 하겠지?"

"물론. 대신 내가 이기면 너희는 의뢰를 받고 나를 따라라."

"좋다. 약속하지. 네 호위와 내 수하들이 이 대결의 공증인이다."

"동의하겠다."

카오르가 승낙하고 용병들이 대결을 준비하려고 할 때, 길리언이 지셀의 앞을 막으며 크게 외쳤다.

"안 됩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 겁니까!"

길리언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벨린다의 마음이 이해되었다. 그의 젊은 주군은 끝도 없이 위험을 자초했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길리언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수의 숲에 들어가겠다는 거야, 젊어서 패기가 넘치니 그럴 수 있다 치자.

하지만 자신의 목숨을 담보 삼아 위험한 내기를 하다니,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선 일이었다.

그래도 평생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다. 이대로 이런 위험한 놀이에 말려들어 죽게 할 수는 없었다.

"차라리 제가 하겠습니다! 공자님은 뒤로 빠져 계십시오!"

길리언도 용병 생활을 오래 했기에 이 내기가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다.

뛰어난 실력자인 그도 이 짓은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마나를 사용하지 못하니 순수한 힘과 기술로만 싸워야 하는 내기다.

실력 차이가 크다면 모르겠지만, 상대가 어느 정도 실력이 있다면 자신도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셀은 길리언의 격한 반응에도 여유롭게 답했다.

"괜찮아. 내가 할게. 믿어 봐."

"안 됩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길리언은 강경했다. 지셀은 진중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았다.

"길리언, 나에겐 꼭 필요한 일이야. 지금은 내가 미덥지 않겠지만 그래도 믿어 줘."

길리언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저 눈빛은 자극을 원하는 것도, 권태에 찌든 것도 아니었다.

신념을 품은 자만이 보일 수 있는 눈빛이었다.

길리언은 그 눈빛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주군이 위험을 겪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의 눈은 날카로운 살기로 가득 찼다.

'공자님 몸에 칼 하나라도 들어간다면 바로 목을 날리리라.'

길리언은 검을 잡고 마나를 모은 뒤 온 정신을 집중했다.

만약 지셀이 한 번이라도 찔릴 거 같으면 바로 카오르의 머리를 쪼개고 이곳에 있는 모든 자를 없애 버릴 생각이었다.

그런 길리언의 각오를 아는지 모르는지, 지셀은 카오르와 손을 묶고 작은 원 안에 들어갔다.

카오르는 번들거리는 눈으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신파극은 끝났나? 도망갈 기회는 이제 없다. 감히 귀족 주제에 용병의 방식을 택한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깨닫게 해 주마."

카오르는 정말로 지셀을 죽일 생각이었다.

귀족이 용병의 대결 방식을 택한 것은 엄청난 오만이었다. 이것은 자신을 무시한 행동이다. 그런 자를 용서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대결 준비가 끝나자 카오르는 지셀을 노려보며 말했다.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어서 겁도 없이 덤볐나 본데... 난 이걸 다섯 번이나 해 봤다."

아무리 용병이라도 평생에 한 번 하기도 힘든 내기를, 카오르는 젊은 나이에 다섯 번이나 경험했다.

당연히 그 다섯 번 모두 승리했기에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가 얼마나 독하고 실력이 뛰어난지 알 수 있는 증거였다.

하지만 지셀은 피식 웃으며 답했다.

"난 백 번 넘게 해 봤는데?"

"뭐?"

카오르가 황당해하는 사이, 옆에 서 있던 용병이 크게 외쳤다.

"시작!"

신호와 동시에 지셀과 카오르의 단검이 서로를 향해 날아갔다.

26화 똑같은 놈들끼리 만나겠네. (3)

단검이 지셀의 눈을 노리며 날아왔다.

그는 고개만 슬쩍 움직여 가볍게 피해 낸 뒤, 카오르의 옆구리에 단검을 찔러 넣었다.

"큭, 이, 이 새끼가...."

카오르가 인상을 쓰며 지셀을 노려보았다.

'우연이겠지!'

그는 곧바로 팔을 뻗으며 지셀의 관자놀이를 찌르려 했다.

하지만 지셀은 가볍게 고개를 젖히며 피한 뒤, 순식간에 손가락을 돌려 단검을 역수로 쥐었다.

"최선을 다해야 할 거다."

지셀은 그 말과 동시에 그대로 카오르의 팔을 그었다.

"크윽!"

첫 번째 공격도 우연이 아니었다는 걸 깨닫고 카오르는 이를 악물었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쉼 없이 공격을 시도했지만, 공격하는 족족 지셀에게 막히고 오히려 상처만 늘어 갔다.

"이 새끼!"

카오르가 분노에 찬 외침을 내뱉으며 함께 묶인 쪽 손을 갑자기 휙 잡아당겼다.

지셀의 자세를 흐트러트린 뒤 목을 베려는 속셈이었다.

그 순간, 지셀의 몸이 기묘하게 흔들리더니 공격을 가볍게 피해 내었다.

상대의 힘까지 이용해 움직이며 균형을 잡은 것이다.

그야말로 극에 이른 기술.

지셀은 피하면서도 카오르가 보인 빈틈을 놓치지 않고 단검을 그어 내렸다.

스각!

"크으윽!"

카오르의 가슴에 붉은 균열이 하나 더 늘어났다.

두 사람의 대결을 구경하던 용병들은 입을 쩍 벌리고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지셀의 움직임이 보통이 아니란 걸 알아본 것이다.

직접 마주하고 있는 카오르와 달리 떨어져서 보기에 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마나도 안 쓰고 저렇게 움직이다니."

"아직 젊어 보이는데 도대체 저 기술들은 뭐야?"

"기사들도 저렇게는 못 할걸?"

용병들이 놀라서 떠들었지만, 길리언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카오르를 공격하겠다고 검을 쥐었던 손은 이미 검 자루에서 떨어진 상태였다.

지셀의 움직임에 집중하느라 자신도 모르게 힘을 뺀 것이다.

'대단한 기술이다! 어떻게 저 나이에 저렇게 움직일 수 있지?'

지셀이 싸우는 걸 처음 본 길리언은 큰 충격에 빠졌다.

천재라서?

아니, 아니다.

자신 역시 수많은 전장을 경험했기에 알 수 있었다.

번뜩이는 깨달음이 천재의 영역이라면, 저 침착함과 노련함은 수만 번 단련하고 경험해야 쌓이는, 노력과 연륜의 영역이었다.

그렇기에 길리언은 더 혼란스러웠다.

지셀의 움직임 하나하나에서 느껴지는 세월의 굳건함과 거대함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길리언이 고심하는 사이에도 대결은 계속 이어졌다.

피륙이 뚫리는 소리와 고통 섞인 신음이 얽히고설키듯 이어졌다.

푹! 푸욱! 푹!

"크어억!"

카오르의 공격은 계속 실패했고 지셀의 단검은 매번 사정없이 그의 몸을 파고들었다.

"어, 어째서! 네놈이 이 정도로!"

카오르는 단 한 번도 지셀에게 상처를 내지 못했다.

단검을 들고 있는 팔은 이미 상처로 가득했고, 고통 때문에 허리도 제대로 펴지 못했다.

애송이처럼 보이던 귀족에게 이런 기술이 있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그는 자기 실력에 자신이 있었다.

용병들 사이에서도 손꼽힐 만큼 강한 데다, 담력이 크고 독기가 있어 기사들도 자신에게는 한 수 접을 정도였다.

그런데 눈앞의 애송이 귀족에게는 그 실력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크으윽!"

카오르는 이미 상처투성이가 된 팔을 다시 들어 올려 지셀의 급소를 노렸다.

상대방의 급소를 노려 일격에 죽이는 건 그의 장기였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지셀의 급소에 닿을 수가 없었다.

카앙!

지셀은 카오르가 휘두른 단검을 가볍게 막아 냈다.

"무조건 급소만 노리는 게 능사는 아니다. 그 정도는 짐승도 할 수 있어."

지셀은 마치 카오르를 가르치듯 말하며 다시 단검을 사방에 찔러 넣었다.

옆구리, 어깨, 가슴, 배 등 절묘하게 급소만 피하는 공격이었다.

"크흐...."

카오르는 결국 피로 범벅이 된 채, 팔을 늘어뜨리고 말았다.

하지만 여전히 이를 악물고 지셀을 노려보는 독기 어린 눈빛은 그대로였다.

죽기 직전임에도 절대 항복하지 않는 그 모습에 지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근성이 대단하군. 이 상황이 될 때까지 마나를 사용하지 않은 건 칭찬해 주마."

"웃기지 마라. 아직 안 끝났다. 반드시 죽여버리겠다."

"그 몸으로 되겠어? 여기서 더 찔리면 죽어."

지셀은 이죽거리더니 단검을 뒤로 휙 던졌다.

"...?"

카오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승부에서 다 이겨 놓고 왜 단검을 던진단 말인가?

설마 이미 승부가 났다고 멋대로 판단하고 끝내려는 것인가?

"이놈이...!"

절대 인정할 수 없었다. 이 내기는 한쪽이 항복하거나 죽어야 끝나는 내기다.

카오르는 분노에 차 소리를 질렀다.

"이 새끼가 지금 날 우습게 보는 거냐? 누구 멋대로 내기를 끝내! 당장 다시 단검을 들어! 아직 안 끝났다! 죽여 버리겠다!"

발작하는 카오르를 보며 지셀은 귀를 한번 판 뒤 말했다.

"누가 끝났대?"

"뭐?"

"나도 아직 끝낼 생각 없는데?"

"그러면 왜 단검을 집어던지는...."

카오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셀이 주먹을 들고 웃었다.

"이제부터는 교육받을 시간이다. 그 성질을 죽이는 법을 좀 배워야겠어."

"뭐?"

갑작스러운 말에 카오르가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얼떨떨하게 반문했다. 그때, 그의 관자놀이로 지셀의 주먹이 날아왔다.

퍼억!

"컥!"

불시에 얻어맞은 카오르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하지만 그는 그 와중에도 단검을 휘두르며 지셀을 공격했다.

놀라울 정도로 빠른 반응 속도였다.

지셀은 내심 감탄하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감탄과 교육은 별개 문제. 그는 단검을 쥔 카오르의 손목을 붙잡아 반대로 틀어 버렸다.

으드득!

"크윽!"

뼈가 맞물리는 소리가 들리며 카오르가 단검을 떨어뜨렸다. 지셀은 그걸 발로 툭 쳐내 다시 공중에 띄웠다.

그는 단검을 낚아챈 뒤, 바로 서로의 손을 묶고 있는 줄을 끊었다.

투둑!

지셀과 묶인 손을 힘주어 당기며 버티던 카오르는 갑자기 구속이 풀리자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단 몇 걸음이었으나, 원 밖으로 나가기엔 충분했다.

'앗차!'

규칙상, 죽거나 항복하지 않아도 패배하는 경우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원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카오르는 곧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껏 살면서 죽음을 두려워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퉤."

카오르는 피가 섞인 침을 땅에 뱉고는 지셀을 노려보며 말했다.

"나도 모르게 원 밖으로 나가고 말았군. 운 좋은 줄 알아라, 애송이. 안타깝지만 이쯤에서 승부를 내도록 하지. 내가 진 걸로 쳐 주마. 살다 보니 이런 날이 다 있군."

자신은 죽지도 않았고 항복하지도 않았다.

저놈이 갑자기 줄을 끊어서 실수로 원 밖으로 나갔을 뿐이다.

실력이 모자라서 진 게 아니라 규칙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적당히 체면을 살리면서 내기를 끝낼 수 있게 되었다.

카오르로서는 최선의 결말이었다.

주변에서 구경하는 용병들이 짠한 표정을 지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솔직히 저 새끼 너무 세다고.'

카오르는 머리를 쓸어올리며 오만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러면 네가 원하는 대로 의뢰에 대해 자세한 얘기를...."

"아직 안 끝났다고."

지셀이 카오르의 말을 끊으며 주먹을 어깨 뒤로 당겼다.

파앙!

공기가 터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지셀의 주먹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깜짝 놀란 카오르가 팔을 교차해 막았지만 소용없었다.

콰앙!

"크으으윽!"

카오르는 단 한 방을 버티지 못하고 뒤로 날아갔다.

아프다. 단검으로 찔리고 베일 때보다 훨씬 더 아팠다. 뼈가 부러진 듯 팔이 시큰거렸다.

바닥을 구른 카오르는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하지만 자세를 제대로 취하기도 전에 다시 지셀의 주먹이 날아왔다.

퍼억!

"잠깐! 규칙상 원 밖으로 나가면...."

"규칙은 무슨 규칙. 전쟁터에서도 규칙 따지면서 싸울래?"

"아니, 네가 이걸로 대결하자며!"

"나를 규칙 따위로 속박하려고 하지 마라. 내가 하고 싶으면 하고 패고 싶으면 패는 거야."

지셀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주먹을 휘둘렀다.

퍼억!

'아, 이거 그냥 미친 새끼네.'

동네에서 소문난 미친개가 미친놈한테 단단히 걸리고 말았다.

"그래, 한번 끝까지 가 보자! 기필코 죽여 버릴 테다!"

카오르는 이를 악물고 반격했다.

스륵.

하지만 그 공격은 상대에게 닿지 않았다. 지셀의 몸이 흐릿해질 때마다 카오르의 주먹은 허공을 갈랐다.

마치 유령을 상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인정할 수 없다!"

카오르는 독기 어린 눈으로 지셀을 노려보았다.

운 좋게 괜찮은 마나 연공법을 얻고,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덕분에 살면서 무서울 게 없었다.

그런데 이런 애송이 같은 귀족한테 손도 못 쓰고 얻어터질 줄이야.

"으아아아!"

고함을 지르며 달려드는 카오르에게 지셀은 가차 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미친개한테는 매가 약이지."

퍼억!

"크윽!"

퍼억!

"어억!"

타격이 이어질수록 카오르는 점차 정신이 몽롱해졌다.

이미 내기와 증명에 대한 건 카오르의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왜지? 왜 난 여기서 맞고 있는 걸까?'

퍼억!

'지금 뭐 하고 있었더라?'

피를 많이 흘린 상태로 구타까지 이어지니 아무리 튼튼한 용병이라도 버티기 어려웠다.

약에 취한 것처럼 눈빛이 흐릿해져서는 비틀거리는 카오르를 보며 용병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사람을 저렇게 팰 수도 있구나...."

"저러다 진짜 죽겠어. 어떻게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내기는 이미 끝난 거나 마찬가지잖아."

"차라리 그냥 아까 죽이지.... 역시 귀족은 건드리는 게 아니야.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그리고 이런 반응이야말로 지셀이 노리는 바였다.

확실하게 분위기를 휘어잡지 않으면 언제든지 주인을 잡아먹으려고 달려들 놈들이었으니까.

퍼억! 퍼억! 퍼억!

그 사이에도 지셀의 주먹질은 멈추지 않았다.

카오르의 몽롱한 시야에 어릴 적 돌아가신 할머니의 얼굴이 비쳤다.

'아, 할머니! 언제 왔어? 나 할머니가 해 줬던 오믈렛이 먹고 싶어!'

아련한 추억에 젖은 카오르의 눈빛을 본 지셀이 주먹질을 멈추었다.

정말 절묘할 정도의 타이밍이었다.

"흐음, 여기까지인가?"

쿠웅!

지셀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서자마자 카오르는 바닥에 쓰러져 기절하고 말았다.

"단장!"

용병들이 다가와 카오르를 살피더니 고개를 저었다.

"끝났어. 숨이 너무 가늘어. 곧 죽을 거 같아."

"단장이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줄이야."

용병들은 지셀의 눈치를 보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저 성질 더러운 카오르도 무릎 꿇을 정도로 거대한 폭력 앞에서 뻣뻣이 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쓰러진 카오르를 가만히 지켜보던 지셀이 입을 열었다.

"길리언, 불러 둔 사람을 데려와."

"아, 알겠습니다."

길리언은 지셀이 보여 준 실력에 놀랄 틈도 없이 바로 자리에서 사라졌다.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아 그는 사제 한 명을 등에 업고 나타났다.

이미 지셀이 여기 오기 전, 많은 돈을 주고 가까운 여관에 대기시켜 뒀던 것이다.

'주군께서는 다 계획이 있으시구나.'

길리언은 처음에 왜 굳이 사제까지 불러 놓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셀은 이런 상황까지 염두에 둔 모양이었다. 아니, 이렇게 만들려고 작정했을 것이다.

보면 볼수록 자신의 주군은 모든 걸 예상하고 준비하는 것만 같았다.

"바로 치료를 시작하시오."

지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제는 헐레벌떡 카오르에게 다가가 신성력을 쏟아부었다.

상처는 생각보다 빠르게 아물었다. 상처가 많고 피를 많이 흘렸지만 절묘하게 급소와 장기는 다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카오르의 상처가 나아가는 것을 보며 용병들이 감탄을 내뱉었다.

그들도 실전 경험이 많기에 지셀이 무슨 의도로 어떻게 공격했는지 금세 알아본 것이다.

"그렇게 찔렀는데 급소는 멀쩡하다고?"

"도대체 검술이 얼마나 뛰어난 거야?"

용병들은 연신 감탄하며 카오르가 회복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치료가 끝나고 잠시 시간이 지나자 카오르가 천천히 눈을 뜨고 중얼거렸다.

"...할머니?"

"할머니는 무슨... 정신 안 차려?"

지셀의 목소리에 카오르가 번쩍 고개를 들고 바닥을 기듯이 뒤로 물러났다.

"내가... 살아 있는 건가? 분명 돌아가신 할머니를 만났는데!"

"나한테 맞고 나서 그리운 사람을 만났다는 놈들이 많긴 하지. 어쨌든 계약서는 오늘 바로 썼으면 좋겠는데. 내가 좀 바빠서 말이야."

싸울 때와 달리 호쾌한 미소를 짓는 지셀을 올려다보던 카오르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는 머리를 몇 번 긁더니 땅에 침을 탁 뱉고는 말했다.

"지금 바로 써... 시죠."

이제는 따지거나 개길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손 쓰는 걸 보면 이건 무슨 귀족이 아니라 악마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내기에도 졌으니 결과에 따라야 했다.

순순히 따르는 카오르의 모습에 지셀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 실망하지 않을 거야."

지셀이 켈베로스 용병단, 흔히 미친개라 불리는 자들의 목줄을 쥐는 순간이었다.

27화 이게 최선이다. (1)

"어흐, 무슨 아침부터 모이래."

"고용주가 완전 애송이래. 페르디움 영지의 그 망나니 공자라나?"

동도 제대로 트지 않은 이른 아침부터 용병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지셀이 짐바르 용병 길드를 통해 모집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용병 길드 건물의 뒤쪽에 있는 널따란 공터에 모여, 고용주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애송이네. 대충 해도 되겠는데?"

"그래, 철없는 것이 공을 좀 세워 보겠다고 나서는 거 같은데 세상 무서운 줄 알게 해 주자고."

"대충 싸우는 척하고 돈이나 받고 빠지는 게 어때?"

그들은 다들 지셀을 우습게 보고 적당히 일하는 척이나 할 생각이었다.

고용된 용병들이 모두 지셀을 아는 건 아니었지만, 몇몇 정도는 한심한 공자라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소문은 용병들 사이에 빠르게 퍼졌다.

"페르디움 영주는 자리를 자주 비운다며?"

"더 잘됐네. 애송이 놈이 용병들을 제대로 다룰 수나 있겠어?"

"사고나 치고 다니는 놈이라는데, 진짜 사고가 뭔지 전문가인 우리가 보여 줄까?"

용병들이 낄낄대며 떠들던 사이, 머리가 벗어지고 근육질 체구를 자랑하는 거한이 앞으로 나서서 크게 외쳤다.

"어이, 다들 들어 봐. 애송이 고용주를 좀 편하게 다루려면 대표가 있어야 하지 않겠어?"

대머리 거한의 이름은 고든.

근방에서 제법 힘 좀 쓰는 용병으로 유명한 자였다.

그는 언제나 쉬지 않고 운동하기에 '근육의 고든'이라 불렸다.

얼마나 운동에 강박 관념이 있냐면, 근손실이 온다며 술도 마시지 않고 눈물도 절대 흘리지 않는다.

오직 근육을 더 크고 단단하게 키우는 것에만 관심을 두는 남자였다.

고든이 보란 듯이 가슴 근육에 힘을 주며 말했다.

"고용주를 편하게 길들이려면 우리 의견이 통일되어야 한다고. 다들 따로 놀면 패가 갈리잖아. 내가 몰이꾼을 할 테니 힘을 좀 실어 주는 게 어때? 수고비는 일 끝나고 알아서들 적당히 챙겨 주고."

몰이꾼은 대표로 나서서 고용주를 압박하는 자를 지칭하는 용병들의 은어다.

그 덕분에 일이 편해지면 다른 용병들이 조금씩 돈을 챙겨 주는 관례가 있었다.

고든의 말에 용병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표를 하나씩 던졌다.

"흠, '근육의 고든'이라면 나쁘지 않지."

"난 찬성이야. 애송이라면 고든의 근육만 보고도 무서워서 벌벌 떠는 거 아니야?"

"돈도 조금 더 올려 받는 게 어때?"

"좋지! 애송이 고용주한테 세상 쓴맛도 좀 보여 주고!"

"와하하하, 그렇지. 우리가 세상에 대해 알려 주는 거니 수업료를 받아야지."

용병들이 저들끼리 신나서 박수를 쳐 댔다.

몇몇 용병들은 이런 행태에 눈살을 찌푸리고 끼지 않았지만, 이미 대부분은 고든을 대표로 선출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소규모 용병단의 단장들도 자신들이 손해 보는 일은 아니라는 생각에 은근히 고든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고든은 사람들이 자신을 지지하자 자신감 넘치게 웃었다.

"이 정도 인원이면 고용주도 함부로 못 하겠지."

모인 용병은 약 160여 명.

단체로 반항한다면 고용주로서는 꽤나 골치 아플 만한 인원이었다.

이런 경우 보통 고용주는 울며 겨자 먹기로 돈을 더 얹어 주거나 계약 조건을 완화한다.

예를 들면, 위험하다고 판단할 시 위약금을 물지 않고 빠질 수 있게 해 준다든가.

이런 일은 이 바닥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고용주가 만만할수록 정도가 심했다.

용병들도 신뢰도나 평판이 떨어지니 매번 막 나가지는 않고, 일반적으로는 적당히 신경전을 벌이는 정도였다.

"거, 다른 건 몰라도 계약 해지에 관련된 건 확실히 해 놓자고."

"그래, 진짜로 위험하면 도망가야 하니까."

"그런데 거기 사실 별거 아닌 거 아니야? 진짜 거기서 몬스터를 봤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그냥 소문만 무성하잖아?"

마수의 숲이 위험하다고 소문이 났지만, 그 실체는 사실 아무도 모른다.

용병 중 일부는 그저 몬스터 사냥 정도로만 생각했고, 일부는 싸우다가 위험하면 도망갈 생각으로 모인 상태였다.

또 어떤 이들은 그냥 아무런 생각 없이 돈을 벌기 위해 찾아왔을 뿐이고.

용병들이 저들끼리 의기투합하고 있을 때, 말을 탄 두 사람의 형체가 새벽안개를 뚫고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오, 드디어 애송이 고용주가 나타났군. 역시 귀족이라고 느긋하게 다니는 건가. 따끔한 맛을 좀 보여 줘야겠어. 하하하."

고든의 말에 용병들이 와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그들도 고든이 고용주를 어떻게 다룰지 슬슬 기대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형체 뒤로 말을 타지 않은 서른여 명의 형체가 나타났다.

그 모습을 본 고든이 휘파람을 불었다.

"역시 귀족이라 그런가, 병사들을 꽤 많이 데리고 다니는데?"

"그래 봤자 우리가 더 많잖아."

"크큭, 빙 둘러싸서 겁을 좀 줘 볼까?"

용병들은 고든의 말을 거들며 슬금슬금 앞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기선을 제압할 생각이었다.

고든이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자자, 모두 자제하라고. 처음부터 너무 겁을 주면 쓰나. 일단 내가 먼저...."

자신 있게 떠들어 대던 고든은, 안개를 헤치고 나타난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닫았다.

눈을 비비고 다가오는 사람들을 다시 자세히 살폈지만,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그의 입에서 경악 어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과, 광견단?"

모든 용병이 딱딱하게 굳어 제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타각타각.

여유롭게 말을 타고 지척까지 다가온 지셀이 고든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네놈이 몰이꾼인가?"

"네? 네?"

"이름은?"

"고든...."

"역시 단순한 놈들이구나."

지셀은 피식 웃으며 고든을 지나쳤다.

용병들이 서 있는 위치만 봐도 상황이 딱 보였다. 전생에 자신도 많이 했던 짓이니 모를 리가 없었다.

막상 당하는 처지에서 보니 유치하기 짝이 없는 짓이지만, 그래도 옛날 생각도 나고 그리운 마음이 들어서 화는 나지 않았다.

지셀에 이어 카오르가 고든을 서늘한 눈으로 노려보며 지나쳤다.

고든이 식은땀을 흘리며 쩔쩔맬 때, 제 단장을 뒤따르던 켈베로스의 용병 하나가 말했다.

"고든, 오랜만에 보네. 눈 안 깔아?"

고든은 결국 고개를 푹 숙였다.

실력만 놓고 보면 켈베로스 단원 하나 정도는 이길 자신이 있다.

하지만 광견단은 워낙 악바리처럼 싸우는 놈들이라 건드렸다가는 괜히 벌집을 들쑤신 꼴이 될 터였다.

다른 용병들도 켈베로스 용병단이 나타나자 눈을 피하며 저들끼리 속삭였다.

"광견단이 왜 고용주랑 함께 있지?"

"몰라, 고든은 왜 가만히 있는 건데?"

"고든이라고 별수 있겠냐. 저 미친개들이 덤비면 골치 아파."

합심해서 지셀을 벗겨 먹으려 했던 용병들은 켈베로스 용병단을 보고는 슬슬 눈치를 살폈다.

왜 저들이 고용주를 따라오는지 상황을 파악한 뒤에 일을 벌여도 늦지 않았다.

고든 또한 찍소리도 못 한 채 일단은 자리로 물러났다.

지셀이 공터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앉자, 켈베로스 용병단이 그 뒤에 호위를 서듯 시립했다.

그것만으로도 보기 드문 일이었는데, 켈베로스 단원들이 보이는 분위기도 뭔가 이상했다.

"광견단 놈들... 왜 저렇게 눈치를 보고 있지?"

"설마 고용주한테 쫄아 있는 거야?"

아닌 게 아니라, 켈베로스 용병단 모두가 지셀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특히나 단장인 카오르는 지셀이 손짓을 한번 할 때마다 움찔거리는 게 뻔히 보일 정도였다.

"보니까 광견단이 고용주한테 납작 엎드린 거 같은데...."

"고용주가 그렇게 권력이 엄청난 건가? 페르디움이 그 정도였어?"

"어쨌든 광견단이 고용주 쪽에 붙은 이상 건드릴 수는 없어. 저놈들이랑 싸우면 피곤하다고."

용병들은 그 모습을 보고 지셀을 벗겨 먹긴 글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괜히 수작 부리다가 시비가 붙으면... 저쪽도 멀쩡하지는 않겠지만, 자신들 쪽이 더 손해가 클 것이 뻔했다.

지셀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는 듯, 용병 길드 사무장이 건물에서 나와 계약서를 용병들에게 나눠 주었다.

"자, 이분이 페르디움 대공자님이시다. 다들 계약서 잘 확인하고 따라가라."

용병들은 섣불리 계약을 진행하지 못했다.

켈베로스 용병단의 악명이 워낙 높다 보니 그들과 함께하기가 왠지 껄끄러웠던 것이다.

용병들이 서로 눈치만 보고 서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고든이 콧김을 뿜으며 제일 먼저 나섰다.

그는 자신이 광견단 따위의 눈치를 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고든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는 지셀에게 꾸벅 인사하고 계약서에 다짜고짜 지장을 찍었다.

지셀은 고개를 기울이며 고든에게 물었다.

"내용은 안 읽어 봐도 되나?"

그러자 옆에 있던 사무장이 낄낄 웃으며 대신 답했다.

"저놈은 글을 모릅니다. 뇌까지 근육이에요. 그냥 무슨 일이고 얼마 준다고 하면 그대로 믿는 놈입니다."

"글공부를 하면 근손실이 온다고! 하나를 더 하면 하나를 잃는 게 세상의 이치인 거 몰라?"

사무장은 씩씩거리며 자신을 노려보는 고든을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염병, 공부하는데 잃긴 뭘 잃어? 저거 공부하기 싫어서 우기는 거 봐라."

"아, 몰라! 아무튼 나는 그렇다고!"

글을 모르기에 고든은 사기도 많이 당했었다.

항상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운동하고 휴식을 취하느라 바빠 시간이 정말 없었다.

지셀은 피식 웃으며 고든을 바라보았다.

그도 전생에 글을 제대로 모르는 무식한 수하들을 많이 데리고 있었다.

고든의 모습이 왠지 남 같지 않아 한 마디 건넸다.

"일이 끝나고 기회가 되면 가르쳐 줄 사람을 붙여 주지."

"감사합니다!"

고든이 힘차게 외치고 자리로 돌아가자 눈치 보던 용병들이 하나둘씩 나와 계약을 진행했다.

어차피 몬스터와 싸우는 것도 알고 온 것이다.

켈베로스 용병단이라면 실력은 있는 놈들이니 고용주가 제대로 통제만 하면 오히려 더 안전할 터였다.

그저 고용주를 마음대로 벗겨 먹지 못하게 된 게 조금 아쉬운 정도였다.

켈베로스 용병단과 사이가 껄끄러운 소규모 용병단 하나가 빠지고 계약이 마무리되었다.

사무장이 계약서들을 정리해 지셀에게 건네주었다.

"총 148명입니다."

켈베로스 용병단까지 합하면 180여 명에 이르는 수.

영지전에서나 고용할 법한 수였기에 용병들은 은근히 마음을 놓았다.

같은 편은 많을수록 든든한 법이니까.

모든 계약서를 확인한 지셀은 용병들을 둘러보았다.

"페르디움의 대공자 지셀이다. 사무장에게 들었다시피 마수의 숲을 개척할 생각이다. 앞으로 할 일은 영지에 가서 하나씩 설명해 주겠다. 잘 부탁한다."

그는 바로 용병들에게 출발 준비를 시켰다.

말이 없는 용병들에게는 말을 사서 빌려주었고, 노숙에 필요한 물품들도 잔뜩 사들였다.

준비를 마치자마자 그들은 페르디움 영지를 향해 출발했다.

아침부터 험악한 용병 무리를 본 사람들은 기겁하며 피하기 바빴다.

'옛날 생각이 나는군.'

시끄럽게 떠들며 따라오는 용병들을 보며 지셀은 잠시 옛 추억에 빠졌다.

그때도 이렇게 용병들을 이끌고 대륙을 떠돌아다녔었다.

'다시 만날 수 있겠지.'

과거로 돌아왔으니 예전의 수하들도 각자의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기회가 된다면 그들을 다시 찾는 것도 지셀의 목표 중 하나였다.

* * *

일행은 곧 페르디움 영지 경계에 도착했지만, 용병들은 영지 인근에 머물러야 했다.

허락받지 않은 무장 병력을 이끌고 영지 안으로 들어갔다가는 가신들과 충돌이 날 테니 어쩔 수 없었다.

용병들을 대기시킨 뒤 지셀은 길리언과 함께 바로 벨린다를 찾아갔다.

"벨린다, 준비는 어떻게 됐지?"

"생각보다 늦으셨네요. 일단 말씀하신 건 다 준비했어요."

"역시 벨린다야."

벨린다가 우쭐하며 좋아하다가 이내 걱정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레이폴드에서 받아 온 돈을 벌써 절반 넘게 썼어요. 앞으로 병력 유지 비용이나 추가로 들어갈 자재비 따위를 생각하면 남은 돈으로는 모자랄 거 같은데, 괜찮겠어요?"

"초기 자금이 많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어. 빨리 시작해야겠군."

2만 골드는 한 사람이 평생을 편하게 살 수 있을 정도로 큰돈이지만, 영지 단위로 큰 사업을 벌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돈이다.

지셀도 아멜리아에게서 뜯어낸 자금이 대부분 초반 준비 작업에 소모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최대한 빨리 수익을 내야 사업을 지속할 수 있었다.

"일단 인부들에게 전해 줘. 내일부터 바로 공사를 시작할 거야."

"도련님, 지금이라도 멈춰야 해요. 남은 돈은 차라리 다른 곳에 쓰세요. 이대로는 정말 아무것도 못 해요. 공사를 시작하면 돈이 줄줄 나갈 거라고요."

"아냐, 이 일은 절대 멈추면 안 돼. 우리 영지에 꼭 필요한 일이거든."

벨린다가 보기에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남은 돈으로 마수의 숲을 개척하기는 불가능했다.

지셀이 고집을 꺾지 않을 듯 보이자 결국 그녀는 역정을 냈다.

"사람과 물자들을 준비하는 데만 벌써 1만 골드 이상을 썼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개척은 불가능하다고요!"

벨린다의 말에 지셀은 기묘한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우리는 개척을 할 게 아니니까."

28화 이게 최선이다. (2)

"뭐라고요?"

벨린다는 현기증이 돌았다.

지셀이 어렸을 때부터 봐 왔지만, 그는 언제부터인지 완전히 이해 불가능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미쳤어, 그릇이 커지고 뭐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미친 거야.'

벨린다는 얼빠진 표정을 짓다가 지셀 옆에 서 있는 길리언을 닦달했다.

"길리언! 아저씨도 뭐라고 좀 해 봐요!"

말리고 싶은 심정은 벨린다와 다르지 않던 길리언이 결국 입을 열었다.

"공자님, 이쯤에서 멈추는 게 어떻습니까? 벨린다의 말이 맞습니다. 남은 돈도 꽤 큰 돈이니, 그것만이라도 지키면 앞으로 다른 일에 쓸 수 있을 겁니다."

길리언의 만류에도 지셀은 고개를 저었다.

"일단 어느 정도 설명이 필요할 거 같군. 카오르도 부르지."

카오르까지 모이자 지셀은 제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다들 알다시피, 아직 시작도 하기 전인데 자금이 거의 다 떨어졌어. 이대로 가면 얼마 버티지 못하니 빠르게 수익을 내는 걸 우선할 생각이야."

세 사람은 모두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개척이란 이전까지 발 디디지 못했던 영역을 확보하는 일이다.

그러니 당장 어디서 뭐가 나올지, 뭐가 수익이 될지 알 방법이 없었다.

벨린다가 기어코 참지 못하고 다시 나섰다.

"그냥 지금이라도 철회해요. 지금 남은 돈마저 다 쓰면 정말로 아무것도 못 하게 될 거예요. 어차피 숲에 들어가면 들킬 수밖에 없다고요. 영지에서 쫓겨날 수도 있어요."

백 명이 넘는 용병들이 영지 인근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가신들은 분명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을 것이다.

인부들도 잔뜩 모여 있으니 다들 의심의 눈길을 보내고 있을 것은 뻔했다.

벨린다가 새로운 훈련장과 대공자의 별장을 만들 거라고 둘러댔으나, 그 거짓말도 지셀이 마수의 숲에 들어가는 순간 들통날 수밖에 없었다.

길리언과 카오르도 결국 한마디씩 던졌다.

"공자님께서 진행하시겠다면 따르겠으나... 현실적으로 무리입니다. 결국 영주님께 벌을 받을 겁니다."

"우리야 돈을 받고 싸우면 그만이지만 죽어 나갈 사람들을 생각하면 어지간한 돈으로는 감당이 안 될 텐데요. 뭐, 지금보다 더 유명해지기는 하겠네. 멍청한 짓을 한 꼴통 공자로 말입니다. 크크큭."

모두가 지셀의 계획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역대 페르디움 영주들도 모두 포기한 일을, 일개 개인이 고작 2만 골드를 가지고 성공할 리 없으니까.

지셀은 그들의 생각을 이해한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 말도 일리 있어. 당연히 나도 그런 식으로 개척하는 건 불가능할 거라 생각해. 아마 실패하겠지."

"그런데 왜 자꾸 고집을 부리시는 거예요!"

"그렇게 할 게 아니니까."

"뭐라고요?"

벨린다가 당황해 되물었다. 지셀은 대답 대신 지도를 꺼내 펼쳤다.

"자, 마수의 숲이 여기 있고, 우리는 이쪽에서 들어가겠지."

지셀의 손짓을 따라 세 사람이 지도를 찬찬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마수의 숲은 지도에 그 크기만 대략 표시되어 있었다.

지셀은 펜을 하나 꺼낸 뒤, 마수의 숲 초입부터 선을 죽 긋다가 갑자기 옆으로 휙 꺾었다.

"대충 이 정도겠군. 우리는 다른 건 무시하고 바로 이렇게 길을 낼 거야. 그게 1차 목표지."

"네?"

"영역을 확보하는 게 아니라 목표까지 가장 빠른 길을 확보한다."

"개척을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일반적인 개척은 불가능하잖아. 가장 빠르게 돈을 벌 수 있는 자원부터 획득할 계획이었어, 처음부터. 이곳이 우리 영지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거든."

"여기에 뭐가 있는지 알고요?"

벨린다의 말에 지셀이 피식 웃었다.

"엄청나게 돈이 되는 거."

"...."

다들 당혹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들의 눈에는, 지셀이 대충 아무 곳이나 찍은 뒤 여기에 돈이 되는 게 있다고 우기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길리언이 그나마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공자님, 여기에 뭐가 있기에 돈이 된다고 확신하십니까? 그리고 그걸 공자님이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그 물음에 지셀은 난감한 듯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나만 알고 있는 고급 정보인데."

"그러니까 그 정보를 어떻게 알았냐고요! 지금까지 숲에 들어가서 살아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벨린다가 테이블을 탕탕 치며 따졌다. 길리언과 카오르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지셀은 잠시 고민을 하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좋아, 다들 놀라지 말고 잘 들어. 사실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는데...."

"심각한 상황인데 장난치지 마시고요! 어떻게 알았냐고요!"

"아니, 진짜로...."

"도련님! 사람들의 목숨이 달린 일이라고요!"

"쩝...."

벨린다의 역정에 지셀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이번이야말로 진실을 알려 보겠다고 시도해봤지만 역시 아무도 안 들어준다. 조금 외로워졌다.

이렇게 되면 그냥 대충 둘러대는 수밖에 없었다.

"소문으로 들었어. 여기 엄청나게 돈 되는 게 있대."

"뭐라고요?"

벨린다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지셀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길리언은 얼빠진 표정을 짓고, 카오르는 고개를 숙인 채 연신 킬킬댔다.

마수의 숲은 제대로 알려진 바 없이 온갖 소문만 무성했다.

특히 숲 안에 비싼 약재가 있다는 둥, 돈과 관련된 소문이 많았다.

몇몇 탐험가들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숲에 들어가는 것도 그런 소문 탓이었다.

그러나 설마 지셀이 그런 무모한 자들과 동류일 줄이야.

카오르는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우리 고용주는 정말 미친 사람이었군. 우리보다 더 미친 사람이 있었네. 크크큭."

뜬구름 같은 소문만 믿고 영주의 명을 어기고, 그나마 있는 돈까지 모두 써 버린다니.

어지간한 미친놈이 아니라면 시도도 못 할 일이었다.

지셀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든 신경 쓰지 않고 제 할 말만 이어 했다.

"언젠가는 몬스터를 몰아내고 숲의 자원을 모두 활용해야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그렇게 하기엔 시간이 너무 걸려. 당장 돈이 필요해서 들어가는 거니까, 돈을 빨리 버는 방법을 택해야지."

벨린다가 치솟는 분노를 간신히 누르고 부들부들 떨며 되물었다.

"그러니까 그 '소문'에 따르면 '무언가'가 여기에 있다는 거죠?"

"그래. 여기서 우선 돈이 될 만한 자원을 구하고, 그 돈으로 다시 영역을 확장해 나가는 거야. 돈으로 돈을 벌게 되는 셈이지. 간단한 계획이지? 하하하."

벨린다는 해맑게 웃는 그를 한 대 치고 싶은 마음을 힘겹게 내리눌렀다. 길리언은 침통한 얼굴로 한숨만 내쉬었다.

카오르는 뭐가 됐든 돈만 받고 재미있으면 된다는 태도였다.

혼란에 빠진 수하들을 둘러보며 지셀은 단호하게 말했다.

"당장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이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야. 문제가 생기면 전부 내가 책임질 테니까."

그 단호한 눈빛을 보고 벨린다와 길리언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모두 날 믿고 따라와. 각자 최선을 다하면 분명히 성공할 거야."

벨린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힘 빠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게 정말 사춘기의 마지막 반항이 됐으면 좋겠네요. 이제 그럴 나이 아니잖아요."

"그 소문이 맞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공자님이 하시겠다니 최선을 다해 도와드리겠습니다."

길리언이 굳은 결심이 서린 얼굴로 말했다. 카오르는 여전히 낄낄댔다.

"영지의 후계자가 감옥에 갇히는 것도 보는 재미는 있겠군요. 그 전에 잔금은 꼭 처리해 주시죠."

모두가 반쯤 체념하고 있었지만, 오직 지셀만이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엄청난 돈이 들어올 거야.'

지셀이 목표로 삼은 곳은 숲의 초입에서 가장 가깝고, 현금화가 가장 쉬운 자원이 있는 장소였다.

전생에 알게 된 정보라 출처를 밝힐 수 없었을 뿐, 헛소문 따위가 아니라 확실한 정보였다.

'전생에 델파인 공작가가 발견한 자원이었으니까.'

왕국을 전복하고 새로운 왕조를 연 델파인 공작가는, 전 왕국의 힘을 모아 대대적으로 마수의 숲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델파인 공작가에 원한을 품고 있던 지셀도 마수의 숲에 대해 조사를 시작했다.

대체 왜 저렇게 힘을 쏟는지, 혹시 그들을 방해하고 괴롭힐 거리가 있는지 찾아본 것이다.

'공작가도 자원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에는 모르고 있었다. 마수의 숲에 들어간 건 다른 목적 때문이었을 거야.'

그 이유는 끝까지 알아내지 못했지만, 대신 숲에 있는 주요 자원의 위치가 기록된 지도와 일지를 얻어 냈다.

전생에 외워 놓고 정작 쓰지 못했던 정보를 이렇게 쓰게 될 줄이야.

'네놈들이 고생해서 얻은 정보들은 고맙게 써먹어 주지.'

전생에 델파인 공작가는 마수의 숲을 개척하면서 엄청난 재화를 얻었다.

이번 생에는 그것들을 지셀 자신이 독차지할 생각이었다.

그 재력은 페르디움을 둘러싼 음모를 막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다.

"자, 그럼 바로 일 시작하자고."

지셀의 말에 모두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길리언은 영지 인근에서 용병들을 관리하며 서로 방해가 되지 않도록 간단한 훈련을 시켰다.

벨린다는 인부들을 지휘하며 주둔지 건설에 힘썼다.

지셀이 시켜서 준비는 하고 있지만 그들의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특히 벨린다는 매일 밤을 걱정으로 지새워 눈 밑이 거무죽죽하게 변할 정도였다.

"소문대로라면 어떤 몬스터가 나올지 몰라. 도련님이 거기서 죽으면.... 죽어서도 멍청하다고 욕을 먹을 거야."

사실 그간 지셀이 사람들에게 욕을 먹을 때마다 화도 나고 가슴이 아팠다.

자신이 봤을 때는 귀엽기만 한데, 다른 사람들은 그 귀여움을 이해하지 못했다.

욕을 하도 먹으니 자신이 가정교사로서 지셀을 잘 가르치지 못했다는 생각도 아주 가끔(?) 들었다.

그런데 위험한 곳에 들어가 목숨을 잃기까지 한다면... 자신에게 지셀을 부탁한, 돌아가신 페르디움 백작 부인을 뵐 낯이 없다.

"조금이라도 위험하면 그냥 강제로 끌고 나와야겠어."

벨린다는 지금껏 모아 둔 독을 모두 꺼내 면밀하게 살폈다.

"어디 보자... 어떤 걸 발라 놔야 우리 도련님이 안 죽고 기절만 할까?"

지셀의 실력이 예전보다 향상된 거 같으니 독을 잘 골라야 했다.

벨린다는 꼼꼼하게 독을 선별해 단검에 정성스럽게 발랐다.

상황 보고 급하다 싶으면 뒤에서 푹 찌른 뒤 업고 도망갈 생각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걱정하는 걸 잘 알고 있지만 지셀은 명령을 번복하지 않았다.

언제나 자신만만하고 여유로웠던 그도 이번만은 긴장의 끈을 놓지 못했다.

마수의 숲은 위험하다. 그 강력한 델파인 공작가도 전생에 여러 번 실패했을 정도다.

지금 지셀의 힘으로 성공하기는 사실 불가능에 가까웠다.

믿고 있는 것은 오직 전생의 경험과 정보뿐.

그걸 토대로 몇 번이고 계획을 검토하고 가능성을 따져 보아, 가장 빠르고 안전하고 확실한 루트를 선정했다.

'하지만 정보는 정보일 뿐... 현실에서는 어떤 변수가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 해도 영지를 살리려면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다른 모든 방법은 시간이 따라 주지 않았으니까.

이미 델파인 공작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여유를 가지고 대응했다간 모두가 죽는다.

목숨을 걸어서라도 빠르게 움직여야만 했다.

'반드시... 반드시 성공해서 영지와 가문을 지킬 것이다.'

지셀이 끊임없이 계획을 검토하고 수정하는 동안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벨린다와 길리언은 자신들이 맡은 준비가 끝나자 지셀을 찾아왔다.

사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말려볼 생각으로 찾아왔지만, 지셀의 얼굴을 본 순간 그들은 하려던 말을 속으로 삼켰다.

평소의 장난기라고는 온데간데없는 표정.

서늘할 정도로 차가운 그의 얼굴은 죽음을 불사한 각오마저 보이는 듯했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은 현 상황과 작업의 진행도만 보고했다.

"도련님... 일단 주둔지는 숙식 정도는 가능한 수준까지 작업이 끝났어요. 그런데 더 이상 시간을 끌 수는 없을 거 같아요."

"용병들의 훈련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지의 가신들이 병사를 움직여 압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음."

지셀은 잠시 고민했다.

더 단단히 준비하면 좋겠지만, 당장은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그나마 영지의 대공자라 이 정도라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더 시간을 끌 수는 없겠지."

언제나 아쉬운 건 시간뿐이었다.

이번 계획만 성공하면 그 시간을 어느 정도 벌 수 있을 터였다.

길게 숨을 내쉰 지셀은 곧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용병들을 소집해라."

29화 온 힘을 다해 나를 따라와라. (1)

완전 무장을 한 용병들이 지셀의 명령에 따라 순식간에 한자리에 모였다.

다들 나름대로 긴장했는지, 용병들 주제에 오와 열을 맞추고 있었다. 짧은 기간이나마 훈련한 성과가 있었다.

지셀은 그들을 이끌고 바로 마수의 숲과 가까운 주둔지로 이동했다.

"역시 아직은 상태가 좀 아쉽네."

주둔지는 당장 숙식을 해결할 수 있게 기초만 빠르게 잡아놓은 상태였다.

완성된 뒤에 출발하면 좋았겠지만, 그때까지 기다릴 만한 여유가 없었다.

지난 며칠 사이에도 가신들이 의심 어린 눈빛을 품고 몇 번이나 찾아왔었다.

그때마다 지셀과 벨린다가 대충 둘러대며 그들을 돌려보냈지만, 슬슬 인부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나고 있어 더 버티기는 힘들었다.

"어차피 숲에 들어가 있는 동안에도 주둔지 건설 작업은 계속 진행할 예정이니까...."

지셀은 용병들을 둘러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모두 소문은 들어봤겠지만 숲은 위험하다! 내가 말하는 대로 잘 따라야 희생이 적을 것이다. 절대 개인행동은 하지 말고 긴장을 늦추지 말도록!"

갑작스럽게 무장 병력을 이끌고 나타난 지셀을 보며, 숲 입구를 지키고 있던 병사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저 미친놈이 뭐라는 거야 지금.... 숲에 들어가겠다고?'

병사들은 얼빠진 얼굴로 어떻게든 막으려 했지만, 이백여 명에 가까운 용병들을 막기에는 힘이 부족했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숲에 들어가기 직전, 지셀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었다.

'일이 성공하면 모든 시선이 이곳으로 몰릴 것이다.'

델파인 공작가가 페르디움이 커지는 상황을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었다.

아니, 공작가까지 갈 것도 없이 주변 영주들부터 호시탐탐 이곳을 노리게 될 것이다.

어찌 보면 지셀의 행동은 스스로 위험을 불러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멈출 수는 없지.'

죽음이 다가오는 걸 뻔히 아는데, 아무것도 못 한 채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한다. 살길은 그것뿐이야.'

다시 한번 마음을 강하게 가다듬은 지셀은 눈을 뜨고 손을 높이 들었다.

모두를 이끌고 숲에 들어가려는 찰나, 누군가가 크게 외치며 그들 쪽으로 달려왔다.

"대공자님, 안 됩니다!"

"오, 스코반?"

달려오는 자는 현재 마수의 숲 경비대장으로 있는 스코반이었다.

오크 토벌 이후 술에 취해 살다가 좌천 아닌 좌천을 당한 것이다.

지셀은 오크 토벌을 함께한 의리로 그가 달려와 숨을 고를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헉헉, 대공자님. 설마 숲에 들어갈 생각이십니까?"

"그렇지, 지금 들어갈 거야."

"안 됩니다! 영주님의 명령을...."

"스코반, 부탁 하나만 하지."

"네?"

"내 덕분에 전에 돈 좀 벌었잖아? 그 의리를 생각해서 좀 들어줘."

부탁이라는 말에 스코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공자가 자신에게 무언가 부탁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지셀은 그냥 다짜고짜 물건을 뺏어가거나, 귀찮은 일을 강제로 시키는 인간이었다.

지셀은 당혹스러워하는 스코반을 보며 웃었다.

"당분간 병사들 입을 막고 내가 이곳에 들어간 걸 비밀로 해야 해. 영지의 병력이 바로 날 따라올 수 없게 말이야. 자칫하면 우리끼리 칼부림이 날지도 몰라. 이건 농담이 아니야."

"하, 하지만 이미 용병들이 영지에 진입한 걸 수비대가 봤지 않습니까? 곧 보고가 들어갈 겁니다."

"그러니까 전에도 내가 말했잖아. 현장에서는 일선 지휘관이 알아서 판단하고 행동하는 거라고."

"그, 그 말은..."

"적당히 둘러대라는 말이지. 우리는 숲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이동한 거야. 어때? 할 수 있겠어?"

'거, 거절해야 해!'

만약 거짓말을 한 게 걸린다면 자신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스코반은 의미심장하게 웃는 지셀을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눈빛에는 마치 오크 토벌을 할 때처럼 자신감이 넘쳤다.

그때도 그랬다. 대공자는 제멋대로 지휘권을 달라고 하고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밀어붙였다.

하지만 덕분에 희생 없이 오크들을 모두 죽일 수 있었다.

저 눈빛을 보니, 다시 한번 그를 믿어 보고 싶은 마음이 불쑥 들어 버렸다.

결국 스코반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어차피 눈앞의 대공자는 말려도 듣지 않을 인간이었으니까.

"역시 화끈하네. 좋아, 그럼 시간을 좀 벌어 달라고. 능력 한번 보겠어."

지셀은 뒤늦게 스코반을 따라온 리카르도에게도 알은체했다.

"여, 리카르도! 스코반의 부관이 된 거야? 진급 축하해. 여전히 잘생겨서 좋겠네."

리카르도는 미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물었다.

"대공자님, 어디 가세요?"

"마수의 숲."

"거기 멋대로 들어가시면 경비대인 저희도 죽어요!"

"괜찮아, 너희들 죽기 전에 돌아올게."

리카르도는 그 말에 기겁하며 외쳤다.

"대체 저한테 왜 그러세요!"

"내가 뭘 어쨌다고. 저번에도 그러더니 오늘도 또 그러네."

지셀은 혀를 몇 번 차고는 말을 이었다.

"어쨌든 몬스터 튀어나올 수도 있으니 입구 잘 지켜라. 갔다 온다."

지셀은 또 다른 사람이 그를 잡을세라 얼른 숲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 들어가자!"

지셀을 따라 용병들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스코반과 리카르도, 그리고 나머지 병사들은 그저 넋이 나간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누구도 개척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마수의 숲.

그곳에 지셀의 원정대가 드디어 첫발을 내디디는 순간이었다.

* * *

말은 한 마리도 끌고 오지 않아 모두 직접 걸어서 움직여야 했다.

몬스터의 습격에 말이 겁먹어서 날뛰거나 도망치면 오히려 더 방해된다.

짐들도 모두 수레 여러 대에 담아 용병들이 직접 끌고 있었다.

마수의 숲도 초입부는 일반적인 숲과 다를 게 없었다.

작은 산짐승들이 몇 마리 눈에 띄었고 벌레 우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용병 중에는 별거 아닌데 소문이 과장된 게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숲 안쪽으로 조금 더 들어간 뒤에는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부터가 진짜였군."

누군가가 무심코 중얼거린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숲은 고요했다. 언제부터인지 벌레 우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숨 막힐 듯한 침묵만이 이어졌다.

조금 더 들어가자 나무들의 크기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높이 솟은 나무들은 그에 어울리는 큰 나뭇잎으로 하늘을 빽빽하게 가렸다.

어둡다.

나뭇잎 사이사이 아주 작은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햇빛이 없었다면 아예 앞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용병들 사이에서 조그맣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래서 어둠의 숲...."

마수의 숲에 붙은 다른 이름은 어둠의 숲.

그 이름에 걸맞게 숲에는 어둠이 묵직하게 깔려 있었다.

분명 한낮임에도 흩어지지 않고 발밑에 넓게 펼쳐진 안개가 음산한 기운을 풍겼다.

서늘한 숲의 공기가 일행을 감싸고 흘렀다.

"램프를 켜라."

지셀의 말에 따라 몇몇 용병들이 램프에 불을 붙였다.

용병들은 램프를 들며 한마디씩 수군거렸다.

"그런데 램프는 왜 이렇게 많이 들고 왔대?"

"허세지, 허세. 횃불 쓰기는 창피한가?"

횃불보다야 램프가 훨씬 편하긴 하지만, 램프는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 지셀은 램프를 무려 수백 개나 준비해 온 것이다.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모르는 상자도 몇 개나 쌓여 있었다.

용병들은 역시 귀족이라 씀씀이가 헤프다며 은근히 지셀을 욕하기 바빴다.

램프를 나눠 들고 시야가 충분히 확보되자 일행은 다시 천천히 움직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길이 끊기자, 지셀은 용병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곳부터 길을 낸다. 나무를 베고 풀을 쳐 내라."

지금까지는 그나마 사람이 다닌 흔적이라도 있었는데, 이제는 아무것도 없었다.

목적지까지 길을 내려면 기초 작업을 해 두어야 했다.

시간이 꽤나 걸리겠지만, 지금 길을 확실히 확보해야 인부들이 목책을 세우고 길을 다질 수 있을 터였다.

지셀은 앞장서서 도끼를 들고 나무를 베기 시작했다.

도끼질 소리가 숲에 울려 퍼졌다.

"뭐야? 고용주도 직접 나서네?"

"저게 그 솔선수범이라는 거지? 귀족의 품격 같은 건가? 크크큭."

"얼마나 하겠어? 그냥 잠깐 의욕이 넘쳐서 저런 거겠지."

용병들은 나무를 베며 지셀을 비웃기 시작했다.

귀족이라는 신분에 어울리지 않게 나서서 힘을 쓰니 존경심보다는 비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나무는 제법 잘 베네."

"그래 봤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만두겠지. 가끔 저렇게 나대는 귀족들이 있잖아?"

"하긴 집에서 검술만 수련했을 테니 몸이 근질거리긴 하겠네. 하하하."

여기저기서 수군거림이 이어졌지만 켈베로스 용병단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고용주가 한번 주먹질을 시작하면 쉽게 안 끝난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다른 용병들에게 그 사실을 말해 줄 의리는 없었다. 이런 건 몸으로 직접 익혀야 기억에 오래 남는 법이다.

벨린다는 얼굴을 찌푸리며 지셀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아이참, 도련님이 왜 이런 일까지 해요? 돈 주고 고용했으면 사람을 써야죠."

"괜찮아. 한 사람이라도 도와야 빨리 끝나지."

"이상하다. 도련님 원래 이런 사람 아니었는데? 귀한 몸이라고 씻는 것도 직접 안 하시면서."

"...기억 안 나."

벨린다에게는 불과 며칠 전 일이었지만, 지셀에게는 오래전, 철없던 시절의 잊고 싶은 과거일 뿐이었다.

두 사람이 투덕거리는 사이에도 용병들이 힘을 쓴 덕에 나무들이 하나둘 쓰러졌다.

나무를 베어 생긴 빈틈으로 햇빛이 들어오기 시작하니 일행의 분위기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지셀은 나무를 베면서도 끊임없이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그 일지에 나온 내용과 다른 점이 있으면 안 되는데.'

지셀은 전생에 마수의 숲을 조사하다 델파인 공작가의 개척단이 쓴 일지를 구하고, 그것을 닳고 닳도록 읽고 외웠다.

영지를 되찾고 자원을 차지하려는 마음도 있었지만, 페르디움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계속 읽게 된 것도 있었다.

마수의 숲은 페르디움 영지의 발전을 막은 원흉 중 하나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페르디움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도 했으니까.

'시간 차이는 있지만, 생태계나 몬스터의 서식지가 그리 많이 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언제 어디서 어떤 몬스터가 나왔고 얼마나 피해를 보았는지까지 상세하게 나와 있는 그 문서를 믿고 이번 일을 시작했다.

만약 그 정보가 틀렸다면 돈을 벌기는커녕 용병들까지 전멸하고 말 것이다.

최대한 신중하게 움직여야 했다.

작업에 열중하다 보니 시간이 금세 흐르고 긴장도 조금씩 풀어지기 시작했다.

"이거 그냥 음침하기만 한 거 아냐?"

"그러게. 다들 그냥 겁먹어서 안 들어온 거 같은데."

"이런 식으로 길만 내는 거면 위험 수당 받은 게 조금 미안하네."

용병들은 시끄럽게 떠들며 작업에 속도를 냈다.

목적지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니 일이 쉽게 끝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조금 더 들어가자 가장 앞서가던 지셀이 모두를 멈춰 세웠다.

"모두 전투 준비를 해라."

"응? 왜요?"

"아무것도 없는데?"

용병들은 지셀 너머로 보이는 숲을 뜯어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고 흔한 짐승의 울음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아주 두껍고 큰 나무들이 빽빽하게 시야를 가리고 있을 뿐이었다.

"가까이 가지 말고 뒤로 조금씩 물러나. 공격할 준비를 하라고."

지셀이 반복해서 말했다.

길리언은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지만,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벨린다를 바라보니 그녀도 어깨를 으쓱하며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결국 그는 지셀에게 나지막하게 물었다.

"공자님, 무슨 일이십니까? 주변에서는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습니다. 몬스터가 숨어 있는 거 같지는 않습니다."

길리언은 주변 기척을 감지하는 데 상당히 뛰어나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예전에도 살쾡이 밀매단의 암살자들을 손쉽게 찾아내지 않았는가.

그러나 지셀은 고개를 저었다.

"숨어 있는 게 아니야."

전생에 일지에서 본 문구가 그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굵은 덩굴에 감싸인 나무들이 가득한 곳에 도착했을 때....]

과연 눈앞에 빽빽하게 서 있는 나무들은 모두 굵은 덩굴에 감싸인 상태였다.

길리언은 재차 물었다.

"주변에는 나무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데, 대체 뭘 경계하고 계신 겁니까?"

[그것들은 전혀 기척이 없었다. 왕국의 제일가는 검사이자 소드마스터의 칭호를 받은 발자크 백작 또한 기척을 느낄 수 없었으니....]

지셀은 신중하게 눈앞의 나무들을 관찰하며 답했다.

"우리 눈앞에 있는 것."

30화 온 힘을 다해 나를 따라와라. (2)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셀이 길리언의 질문에 답하기도 전에, 용병 몇 명이 웃으며 두 사람을 제치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우리 고용주께서 갑자기 겁을 먹으셨구먼."

"아무것도 없는 거 같은데 왜 갑자기 멈춘 거야?"

"이런 일은 그냥 우리한테 맡기고 쉬고 있으라고. 그러려고 고용한 거 아니야?"

그들은 지셀을 한껏 비웃으며 도끼를 흔들었다.

언제나 무리에서 통제가 되지 않는 사람들은 있는 법이었다.

이들이 보기에 지셀은 나이도 젊고 경험도 부족한, 한마디로 애송이였다.

그저 목적지만 알려 주면 자신들이 알아서 모실 텐데, 자꾸 이래라저래라하니 우스울 뿐이었다.

실제로 지셀의 말을 듣고 전투 준비를 한 건 오직 켈베로스 용병단밖에 없었다.

다른 용병들은 멀뚱히 서서 고용주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지 구경 중이었다.

"멈춰."

지셀이 차가운 표정으로 나직하게 말하자 앞서 나가던 용병들이 엉거주춤 걸음을 멈췄다.

"도대체 뭐가 있다고 그러는 거요?"

"소문만큼 위험해 보이지도 않는데 빨리 길이나 냅시다."

"별로 멀지도 않다면서요?"

용병들이 투덜거려도 지셀은 표정을 굳히고 말을 이었다.

"천천히 이쪽으로 돌아와라. 거기 있으면 죽는다."

도대체 지셀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용병들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하지만 지셀은 긴장한 채 용병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한쪽 손을 들었다.

"모두 전투 준비를 해라, 이 멍청한 새끼들아.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들어."

험악한 언사에 용병들은 마지못해 무기를 들었다.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어쨌든 고용주의 명령이니 계속 거부할 수는 없었다.

지셀은 천천히 자세를 낮추고 뛰쳐나갈 준비를 했다.

그 앞에 선 용병들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이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저렇게 긴장하고 있으니 따르는 척은 해 줘야 했다.

"야, 가자. 우리 고용주께서 겁이 참 많으시네."

용병들이 실실 웃으며 몸을 돌렸을 때.

의구심 어린 눈으로 지셀을 바라보던 길리언과 벨린다가 갑자기 표정을 굳히고 고개를 돌렸다.

카오르 또한 욕을 내뱉으며 검을 뽑아 들었다.

[우리는 그것이 움직일 거라 예상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우리는 무방비한 채 안쪽으로 들어갔고, 꽤 깊이 들어가자....]

그제야 용병들도 무언가 움직이는 기척을 느꼈다.

[그것들이 우리를 공격했다.]

나무를 감싸고 있던 덩굴들이 소용돌이처럼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번개 같은 속도로 앞선 용병들을 향해 뻗어 나왔다.

그와 동시에 지셀의 몸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덩굴이 한 용병을 공격하려는 순간, 지셀의 검이 빠르게 움직였다.

서걱!

용병을 잡으려던 덩굴이 검에 베이며 끈적하고 검은 액체를 흘리기 시작했다.

"뭐, 뭐야!"

갑작스러운 공격에 놀라 일행들은 대부분 반응하지 못했다.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몸이 굳은 채 그저 바라만 보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지셀만은 당황하지 않고 빠르게 움직였다.

서걱!

다른 용병을 향해 날아오던 덩굴이 또 하나 잘렸다.

하지만 날아오는 덩굴은 이미 수십 가닥이었고, 지셀 혼자서는 그것들을 전부 막아 낼 수 없었다.

"으아아악!"

미처 피하지 못한 용병 몇 명이 덩굴에 잡혀 끌려갔다.

지셀은 자신이 구한 용병들의 멱살을 잡아 뒤쪽 일행들에게 집어 던지고 곧바로 덩굴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잡혀간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미 길은 막혀 있었다.

'쯧, 늦었나.'

수십 가닥의 덩굴이 사방을 에워싸며 그에게 날아왔다.

지셀은 검을 단단히 쥔 채 공중으로 뛰어오르며 몸을 한 바퀴 돌렸다.

가가가각!

그를 포위하듯 다가오던 덩굴들이 모조리 잘려 나갔다.

덩굴 조각과 함께 바닥에 착지한 지셀은 미끄러지듯이 반원을 그리며 뒤로 물러났다.

"도련님!"

"공자님!"

벨린다와 길리언, 카오르가 잽싸게 지셀 주변으로 다가왔다.

"정신들 차려! 대열을 갖춰라!"

지셀이 고함을 지르자 멍하게 있던 일행들이 무기를 들고 재빨리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으아아악!"

"살려 줘!"

끌려간 용병들은 소리를 지르며 발버둥 쳤다.

어떻게 해야 하나 다들 고민에 빠져 있을 때, 덩굴과 연결된 나무들이 조금씩 들썩이기 시작했다.

"뭐, 뭐야!"

곧 거대한 나무의 껍질들이 갈라지며 마치 찌그러진 입과 비슷한 모양이 나타났다.

나무들은 각자 자기가 잡은 용병들을 입에 넣고 씹기 시작했다.

"끄아아악!"

소름 끼치는 소리와 비명이 뒤섞여 숲에 울려 퍼졌다. 동료가 산 채로 잡아먹히는 모습을 본 다른 용병들이 기겁하며 외쳤다.

"나무들이 움직인다고?"

"설마 저거, 엔트야?"

지셀은 용병들의 경악 어린 목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엔트(Ent)는 몬스터라기보다는 정령이나 요정에 가까운 숲의 수호자다.

그들은 평화를 사랑하고 때로는 오래된 지식을 알려 주며, 숲의 종족들을 지켜 주는 역할도 한다.

이렇게 생명체를 생으로 잡아먹는 흉측한 존재가 절대 아니다.

잡은 용병들을 통째로 씹어 삼킨 나무들은 들썩이며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흉측하게 벌린 입 위로 두 개의 구멍이 갈라지듯 나타났다.

그 사이로 보이는 검은 눈동자.

그 악의에 가득 찬 눈동자를 본 용병들의 전신에 소름이 돋아났다.

[그것은 엔트가 아니었다. 얼핏 보면 엔트를 닮았지만 엔트와 달리 불온하며 험악하고 지독할 정도로 불쾌한 그것들에, 우리는 고대어에서 비롯된 이름을 붙여 주었다.]

지셀은 눈앞의 나무들을 보며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디루스 엔트."

[다행히 발자크 백작이 활약하여 그것들을 모두 물리쳤지만 이미 병사 대부분이 기습에 당한 뒤였다. 선발대를 잃은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전초 기지로 돌아갔다.]

왕국의 힘을 모아 개척을 시작했던 전생의 루타니아 왕국도 처음 실패를 경험했을 정도로 디루스 엔트의 기습은 치명적이었다.

[그것들은 마수의 숲을 감싸듯 널리 퍼져 있다. 즉 이것들은 마수의 숲을 지키는 수문장이나 마찬가지였다. 모르면 당할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

그 문구를 기억해 낸 지셀의 얼굴에 섬뜩한 미소가 지어졌다.

"우리는 해볼 만하겠네."

눈앞에 대놓고 서 있는데도 모두가 몬스터의 기척을 느낄 수 없던 이유는 단순했다.

움직이기 전까지는 그저 나무일 뿐이니 아무도 의심하지 못했던 것이다.

쿠오오오오!

수십의 디루스 엔트들이 괴성을 지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굵은 가지들은 덩굴과 엮여 팔처럼 내려왔고, 땅에서 뽑혀 나온 뿌리들 또한 서로 엮이며 다리가 되었다.

그 모습을 본 용병들의 얼굴이 긴장으로 물들었다.

"나, 나무들이 움직인다."

"엔트도 아니고 도대체 저게 뭐지?"

"젠장, 저렇게 있는데 누가 알아차리겠어?"

애초에 나무와 비슷한 존재들이기에 숲과 동화되어 모두를 속일 수 있었다.

모르면 당할 수밖에 없는, 그야말로 사고의 허점을 찌르는 몬스터였다.

크아아아아아!

움직일 수 있는 형체를 갖춘 디루스 엔트들이 모두 지셀을 노려보며 분노의 외침을 토해 내었다.

사냥감들이 깊숙하게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피하지 못할 정도로 들어오면 모두가 포위해서 공격한 뒤 잡아먹는 것이 이들의 습성이었다.

하지만 사냥감이 눈치채고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면 놈들도 직접 뿌리를 뽑고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쓰지 않아도 될 힘을 쓰게 되었으니 그 분노가 지셀에게 쏟아질 수밖에 없었다.

크아아아아!

디루스 엔트들의 입에서 다시 한번 괴성이 터져 나왔다.

"1열! 방패를 들어라! 최선을 다해 공격을 막아!"

지셀의 외침에 따라 선두에 있는 용병들이 방패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은 절대 편해 보이지 않았다.

"저렇게 큰 놈들이랑 싸운다고?"

마수의 숲을 이루는 나무나 마찬가지인 놈들이다.

숲에 사는 몬스터보다 훨씬 클 수밖에 없었다.

거대한 크기에 질려 주춤거리는 용병들을 향해, 디루스 엔트들이 덩굴을 쏘아 냈다.

텅! 터엉!

"으아아앗!"

방패를 들고 있던 용병들이 넘어지거나 뒤로 밀려났다.

디루스 엔트들은 덩치만큼 힘도 엄청났기에, 그것들의 공격에 버티지 못한 것이다.

뒷줄에 대기하던 용병들이 다급히 화살을 쏘았다.

화살들이 디루스 엔트들의 몸에 박혔지만 단단한 나무껍질을 뚫지는 못했다.

"어, 어떡하지?"

"나무잖아! 아예 통째로 베지 않는 이상 소용이 없어!"

용병들이 혼란스러워하는 그때, 지셀이 다시 외쳤다.

"모두 램프를 집어 던져라!"

나무의 약점은 불이다.

모두가 알고 있는 상식이지만 이곳에서 쓰기엔 위험한 방법이다.

"도련님! 미쳤어요? 차라리 도망가요!"

"공자님! 숲을 태우면 안 됩니다!"

벨린다와 길리언이 기겁하며 외쳤다.

불을 써서 저것들을 물리치더라도 숲이 타 버리면 아무 의미가 없다. 오히려 더 큰 위험을 불러오는 셈이었다.

서식지를 잃은 몬스터들이 사방으로 뛰쳐나갈 테고, 숲과 가장 가까운 페르디움 영지는 쑥대밭이 되고 말 것이다.

그렇기에 역대 페르디움 영주들도 숲을 태워 경작지로 쓰는 방법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셀은 상관없다는 듯 램프를 집어 던지며 외쳤다.

"괜찮아! 저놈들이 불을 먹을 거다! 어서 던져라! 가장 뒷줄은 불화살을 준비해!"

파삭!

디루스 엔트의 몸에 부딪힌 램프가 깨지며 기름이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본 용병들은 너도나도 램프를 집어 들어 마구 던졌다.

"에라, 모르겠다! 빨리 던져!"

"숲이 다 타든 말든 우리랑 뭔 상관이야! 고용주가 하라는데!"

그들도 숲이 타면 안 되는 걸 알고 있지만, 자신들의 목숨이 우선이니 거칠 것이 없었다.

크오오오!

디루스 엔트들은 불쾌한 괴성을 내지르며 팔과 연결된 덩굴들을 마구 휘둘렀다.

하지만 선두에 선 용병들은 온 힘을 다해 방패로 막으며 버텼다.

덩굴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디루스 엔트들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천천히 일행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예 용병들을 짓이기려는 의도가 명확히 보였다.

"쏴라!"

그때 지셀이 외쳤다.

사방을 에워싼 디루스 엔트들에게 불화살이 쏘아져 나갔다.

크오오오오오!

기름으로 범벅이 된 디루스 엔트들의 몸에서 순식간에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그것들은 걸음을 멈추고 괴로운 듯 주춤거렸다.

사방으로 불이 번지며 모든 것이 화마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뒤쪽에 있던 디루스 엔트들이 불길을 헤치고 달려왔지만, 다시 던져지는 램프와 불화살에 모두 불이 붙을 수밖에 없었다.

크오오오!

괴로운 비명을 내뿜는 디루스 엔트들을 보며 용병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이대로 다 태우고 도망가면 되는 건가?"

"나는 이 영지를 바로 뜰 거야. 숲이 다 타면 몬스터 천지가 될 거라고. 여기는 이제 망했어. 고용주는 진짜 미친놈이야."

"잠깐, 그런데 뭔가 이상한데?"

치이이이이익!

괴로움에 몸을 꿈틀거리던 디루스 엔트들의 몸에서 뿌연 수증기들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부, 불이 꺼지잖아!"

"뭐야! 불도 안 통하는 거야?"

불길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며 점점 불이 꺼져 갔다.

불이 꺼지며 생기는 수증기들이 사방을 메우며 시야를 가렸다.

그 연기마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흩어졌다.

꿀꺽.

용병들은 긴장해서 마른침을 삼켰다.

곧 다시 모습을 드러낸 디루스 엔트들을 바라보고 그들은 경악하고 말았다.

"저, 저게 뭐야...."

나무껍질이 다 타거나 떨어져 속살을 드러낸 그것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기괴함의 극치였다.

온통 검은색으로 이루어진 속살은 말랑말랑한 푸딩처럼 촉촉하고 매끄러워 보였다.

몸 가운데 뚫린 눈이나 입 안에 보이는 날카로운 이빨이 매끄러운 검은 피부와 합쳐져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다.

치이이익.

더 놀라운 점은 그것들이 바닥과 주변의 잔불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밟고 만지는 것이었다.

검은 피부에 닿으면 불은 허무하게 꺼져 버리고 말았다.

"부, 불이 그냥...."

용병들은 기겁했다.

가뜩이나 강한데 이제는 불도 안 통하는 몬스터로 변해 버린 것이다.

"그, 그렇지. 저건 단순한 나무가 아니지."

용병들은 그제야 상대가 무엇인지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나무처럼 보이지만 완전한 나무는 아니다.

단단한 껍질로 감싸여 있을 뿐, 이리저리 움직이며 사냥감을 잡아 씹어 삼키는 생명체다.

[그것들의 외피는 단단한 나무껍질과 다를 바가 없다. 그만큼 불에 약하지만, 병사들의 무기는 제대로 통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내피는 달랐다. 무려 4서클의 화염 마법에 저항할 정도로....]

"미쳤어. 여기는 오면 안 되는 숲이야."

"처음 만나는 몬스터가 저 정도면 다른 놈들은 어떻다는 거야?"

"돌아가야 해. 개척 따위,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어."

용병들은 겁에 질려 전의를 상실했다.

반면, 지셀은 기억을 더듬다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속살은 아주 야들야들해 보이는군."

용병들은 지셀을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믿었던 불마저 통하지 않는데 어쩌자고 저런 여유를 부린단 말인가?

고용주 놈은 보면 볼수록 제정신이 아니었다.

31화 온 힘을 다해 나를 따라와라.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