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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화 검증은 충분히 됐습니다. (3)

욕망에 빠진 사람은 때로 정확한 예감을 무시하고 냉철한 판단을 하지 못하게 된다.

지금 즈발터와 란돌프가 그랬다.

더 높은 경지에 오를 수 있는 새로운 돌파구를 발견한 상황 앞에서는 경험도, 본능에 따른 직감도 아무 소용 없었다.

두 사람은 신이 나서 바로 기사들을 소집했다.

"근래에 지셀이 작은 깨달음을 얻어 가문의 마나 연공법을 개량했다고 한다. 이전에 쓰던 방식보다 더 효과가 좋다고 하니 다 같이 수련해 보도록 하자."

즈발터의 말에 기사들은 웅성거리며 불안해하는 기색을 띠었다.

대공자가 제법 강하다는 건 이제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워낙 기행이 심하고 파격적인 행동을 일삼는 사람인지라, 그를 신뢰할 수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였다.

마나 연공은 조금만 흐름이 뒤틀려도 큰 곤경을 치르는 섬세한 분야다.

그런 걸 저 막 나가는 대공자가 개량했다니 불안부터 앞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기사들의 불안감을 느낀 란돌프가 자신 있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이미 영주님과 내가 충분히 검토한 사항이다! 안전하게 수련을 진행할 생각이니 전혀 겁먹을 필요 없다!"

그제야 기사들은 조금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영주와 기사단장이 검토했다면 믿을 만하다. 이것이 바로 신용의 힘이었다.

하지만 단 한 명의 기사는 영주와 기사단장의 장담도 믿지 않았다.

바로 마수의 숲 경비대장인 스코반이었다.

'뭐? 대공자가 개량했다고? 아니, 그 인간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그걸 익혀 보겠다고? 다들 미친 거 아냐? 학습 능력이 없어?'

그는 호메른의 명령에 따라, 군수 물자를 보급할 겸, 지셀이 숲 하나를 들어먹었다는 소식도 전달할 겸 북방 요새에 와 있던 참이었다.

요새에 도착한 지는 꽤 오래되었지만, 란돌프가 이왕 온 김에 경계 근무 좀 서고 가라고 붙잡는 바람에 이곳에 죽치고 있었던 것이다.

워낙 기사가 부족한 영지다 보니 다들 이런 식으로 보직과 상관없이 이런저런 일을 강제로 맡곤 했기에 당시엔 얌전히 받아들였다.

하지만 설마 그사이에 지셀의 음험한 거동을 마주하게 될 줄이야.

'대공자님이 개량했다고 했으니 이전보다 나아지긴 했겠지. 그런데 분명 뭔가 반작용이 있을 거야.'

스코반은 페르디움의 기사들 중 지셀과 가장 많이 엮였던 사람이었다.

그때마다 고통스러운 과정을 체감했던 그는, 분명 지셀이 던지고 간 마나 연공법도 평범하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다른 사람 다 익히고 문제점이 해결된 뒤에 익혀도 늦지 않아. 난 빠진다!'

결심을 한 스코반이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영주님! 저는 이제 돌아가 봐야 합니다! 영지에 기사가 너무 부족합니다. 그리고 솔직히 조금 더 검증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대답은 즈발터가 아니라 란돌프에게서 나왔다.

"야, 너 마수의 숲 경비한답시고 맨날 빈둥빈둥 놀잖아. 가긴 어딜 가. 네가 이거 익히고 돌아가야 영지에 남은 기사들한테 전수할 거 아냐. 아니, 그리고 내가 검증했다는데 뭔 검증이 더 필요해? 까라면 까, 이 새끼야."

스코반은 바로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란돌프는 지셀처럼 큰 사고만 안 쳤다 뿐이지, 성질 더럽고 말이 안 통하기로는 지셀과 막상막하인 사람이다.

길 가는 데 산이 있어 방해된다 싶으면 기사들한테 삽 한 자루만 쥐여 주고 산을 깎게 할 정도로 저돌적이고 무식하다.

그런 사람이 저리 말하니 도망가기는 글렀다.

스코반은 울상을 지은 채 다른 기사들과 함께 지셀표 마나 연공법을 익히기 시작했다.

기사들이 익힌 마나 연공법은 다 제각각이었다.

페르디움의 마나 연공법을 익힌 자도 있었고, 자신의 가문이나 스승을 통해 다른 것을 익힌 자도 있었다.

하지만 지셀은 기존에 익힌 마나 연공법을 개량된 마나 연공법으로 쉽게 바꾸는 방법까지 책자에 설명해 두었다.

그 방법을 따르니 개인마다 속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다들 새로운 마나 연공법에 조금씩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오오, 이거 제법 괜찮잖아?'

'기존 마나 연공법과 충돌하지 않고 이렇게 쉽게 갈아탈 수 있다니. 이게 말이 되나?'

'확실히 마나를 흡수하고 방출하는 속도가 훨씬 빨라졌어. 예전과는 비교가 안 돼.'

새로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지 효과가 확실하게 눈에 보였다.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조금씩 수련의 강도를 올려 갔다.

익히는 재미가 있으니 손을 떼기 어려웠다. 특히 전보다 파괴력이 월등하게 강해진 것이 보이니 수련에 중독될 수밖에 없었다.

'아, 강해지는 게 눈에 보이는데 어떻게 참냐고. 저 새끼보다 내가 더 강해져야지.'

강함이야말로 기사의 미덕이다. 한번 경쟁이 붙자 그 속도는 더욱더 빨라져 갔다.

다들 미친 듯이 새로운 마나 연공법을 수련하니 누구도 막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즈발터와 란돌프는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허허, 다들 이렇게 수련에 빠진 게 얼마 만인가? 지셀이 아주 큰 일을 해냈어. 정말 효과가 있을 줄이야. 대견스럽구나."

"크흐흐, 형님! 저는 야만인들하고 한번 붙고 싶어서 벌써 몸이 근질거립니다. 이놈들 요새 왜 안 들어오지?"

두 사람은 이미 상급의 기사라 발전 속도가 조금 더디긴 했다. 하지만 조금씩 벽을 허물고 있는 것이 느껴지니 그 정도로도 만족스러웠다.

아예 막힌 것과 길이 보이는 건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났으니까.

그렇게 다들 미친 듯이 수련에 전념한 지 한 달째가 되던 날.

실력이 가장 부족했던 몇몇 기사들에게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우에에엑!"

"쿨럭!"

마나를 사용하면 할수록 갑자기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기사들이 늘어났다.

조금 쉬면 괜찮아졌지만, 수련을 멈추면 쌓인 마나가 강제로 몸 밖으로 뿜어져 나갔다. 그렇게 되니 다시 피를 토할 수밖에 없었다.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마나를 소모해도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마치 폭발하는 듯한 강력한 힘을 동반했기에 몸이 견딜 수가 없던 것이다.

마나 소모를 막으려 해도 제대로 제어조차 되지 않으니 종국에는 모든 기사들의 상태가 심각해졌다.

"이, 이게 무슨 일이냐!"

기사들이 전부 쓰러지자 북방 요새는 난리가 났다.

안절부절못하는 즈발터에게 란돌프가 떠듬거리며 말했다. 그의 안색도 즈발터와 마찬가지로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형님.... 우리가 지셀 그놈한테 속은 거 같습니다."

"속다니? 뭘 속았단 말이냐?"

어리둥절해하는 즈발터에게 란돌프가 자신의 추측을 말해 주었다.

"이놈이 마나 연공법에 수작질을 부린 게 분명합니다. 우리 모두 다 죽이려고요!"

"우리를 죽인다고? 대체 왜?"

"우리가 다 죽어야 그놈이 페르디움 영지를 차지할 거 아닙니까! 명분을 손에 쥔 후계자는 그놈밖에 없으니까요! 이 패륜아 새끼!"

즈발터는 이마를 짚고 비틀거렸다. 듣고 보니 정말 그럴듯한 이유였다.

방법도 완벽했다. 독살도 아니고 죄다 스스로 수련을 하다가 죽으면 완전 범죄나 마찬가지였다.

피눈물을 흘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약간 믿었던(?) 아들이 이런 어마어마한 짓을 저지를 줄이야.

절망하던 즈발터는 문득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괜찮잖아?"

괜찮다고는 해도 완전히 멀쩡한 건 아니다. 마나를 강력하게 방출하면 속이 진탕되고 입가에 피가 한 줄기 정도는 흘렀다.

그러나 그 외에는 딱히 문제라 할 만한 게 없었다.

'내상 문제는 그저 갑작스러운 마나 상승에 의한 반동 정도일 수도 있는 거지.'

즈발터는 정말로 마나 연공법이 문제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지금도 확실히 조금이나마 강해지고는 있었으니까.

하지만 란돌프는 즈발터와 생각이 달랐다.

"우리는 상급 기사지 않습니까! 다른 기사들보다 마나 양도 많고 더 강하니까 아직 버티고 있는 겁니다! 시간이 지나면 결국 우리도 쓰러질 겁니다!"

란돌프의 절규에 즈발터는 반박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아무리 권력이 중요하다지만 가문의 기사들까지 다 죽일 생각을 하다니!

'어차피 물려받을 영지인데 그걸 못 기다린다는 말이냐! 아아, 내가 자식을 잘못 키웠구나. 여보, 곧 당신을 보러 갈 거 같소.'

하지만 이대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건방진 아들놈한테 따끔한 맛을 보여 줘야 한다.

바로 모든 병력을 모아 펜리스 영지에 정의의 철퇴를 내리쳐....

"영주님! 영주님!"

그때, 가신 하나가 헐레벌떡 달려와 서신을 건넸다.

"이게 무엇인가?"

"대공자가 보내온 것입니다. 중요한 내용이니 바로 확인하라고 했습니다."

"그놈이 선전 포고까지 했다는 말이냐!"

"아뇨, 그런 말은 못 들었는데요.... 저도 아직 무슨 내용인지 모릅니다."

즈발터는 바로 지셀이 보내온 서신을 확인했다. 시선이 내려갈수록 그의 표정도 점차 기묘해졌다.

거기에는 지금 사태를 예측이라도 한 듯, 마나 연공법의 문제점과 해결 방안이 적혀 있었다.

요약하자면 마나를 열심히 쌓아서 일정 경지를 넘어야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요새 다들 육체 수련을 게을리하는데, 조금이라도 오래 버티고 싶으면 육체 단련도 병행해야 합니다.]

한 마디로 죽기 싫으면 육체와 마나 모두 죽어라 수련을 해서 강해지는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끄으응! 그러면 진작 말을 했어야지!"

즈발터가 투덜거리며 시선을 다음 문장으로 옮겼다.

[미리 설명했다면 아무도 개량된 연공법을 배우지 않으려고 했겠죠. 빠르게 강해져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숨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치 자신의 투덜거림에 답하기로 하는 듯한 문장에 즈발터가 혀를 차며 몸을 일으켰다.

"젠장! 다들 일어나라! 죽기 싫으면 정말 죽어라 수련해야 해! 안 그러면 진짜 죽는다! 란돌프 너도 일어나! 울지 말고, 이 새끼야!"

언제나 근엄하게 행동하던 즈발터도 마음이 급하니 말이 험하게 나왔다.

아프다고 누워만 있으면 진짜로 약해져서 죽는다. 고약해도 이렇게 고약한 마나 연공법은 생전 처음 보았다.

지셀이 반란을 일으키려고 한 게 아니라서 다행이긴 하지만, 여전히 속에서 열이 끓어올랐다.

이제 북방 요새의 기사들은 죽어라 수련하면서 피곤해진 몸으로 야만인들까지 상대해야 한다.

그야말로 인세에 다시 없을 극한의 수련 환경에 빠져 버린 것이다.

스코반은 바닥에 쓰러진 채 피를 토하고 눈물을 흘리며 생각했다.

'어쩐지 존나 하기 싫더라.... 그러니까 내가 엮이지 말자고 했잖아....'

안타깝지만 후회는 언제나 늦었다.

* * *

북방 요새에서 난리가 났던 그때, 펜리스 영지는 내기 결과를 확인하느라 시끄러웠다.

영지의 가신들이 하나둘 시연 장소로 모이기 시작했다.

총관인 클로드는 괜히 손톱을 깨물며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옆에 서 있는 웬디에게 물었다.

"불가능하겠지? 보통 마나를 익히려면 얼마나 걸려?"

"천재가 아니면 최소 몇 년은 걸립니다."

"그렇지? 그런데 용병들이나 새로 온 놈들 중에 천재는 없었잖아.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 맞지?"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영주님이 그간 한 일은 전부 비상식적이었습니다."

클로드도 바로 그래서 불안했다.

지셀은 언제나 비상식적인 일을 해내서 상식적인 사람들을 멍청이로 만들었다.

클로드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래도 이번엔 정말 불가능할 거야.'

중간중간 슬쩍 기사들을 확인해 본 바로는 다들 병자처럼 맛이 가 있었다. 분명 무리한 수련 때문에 몸이 상한 게 분명했다.

가신들이 모두 모이고 마지막으로 지셀까지 시연장에 참석했다.

지셀은 여유로운 태도로 모두를 둘러본 뒤 손을 들고 선언했다.

"총관과의 약속대로 기사들이 마나를 사용할 수 있는지 확인하겠다. 이 시간 이후로는 출정에 반대하는 의견은 받지 않겠으니 그리 알도록. 기사들을 들여라."

지셀의 말에 그간 수련을 하고 있던 기사들이 하나둘씩 시연장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들을 본 가신들은 깜짝 놀랐다.

"허, 이럴 수가...."

"어떻게 저런 상태로...."

멋있어서 놀란 게 아니다. 웬 해골들이 잔뜩 들어오니 놀란 것이다.

기사들은 모두 초췌하고 피골이 상접한 모양새였다. 오며 가며 가끔 봐서 상태가 안 좋은 건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상태가 더 심각해진 거 같았다.

지셀은 사람들의 반응을 무시한 채 말을 이었다.

"자, 총관이 호명해서 확인하도록."

기사와 무기를 직접 선정해서 시연시키는 역할은 클로드가 맡기로 했다.

워낙 의심이 많은 놈이라 지셀도 흔쾌히 그것을 허락했다.

클로드는 신중하게 고민하더니 그나마 확실하게 아는 놈을 불렀다.

그가 아는 한, 고든은 몸은 좋지만 마나 연공법을 빠르게 이해할 능력은 없었다.

"고든! 고든이 나와서 시연을 해라!"

이름이 불리자 웬 비쩍 마른 대머리가 비틀거리며 앞에 나섰다.

클로드는 대머리를 위아래로 몇 번 훑어보더니 말했다.

"뭐야? 너 말고 고든 나오라니까? 근육 빵빵한 오줌싸개 고든 말이야!"

"제가 고든인데요...."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뜯어보니 고든이 맞았다.

당황해서 잠시 할 말을 찾던 클로드가 겨우 입을 열었다.

"너.... 몸이 왜 그래?"

고든은 울먹이며 말했다.

"몸이 너무 아파서 근손실이 왔어요...."

"...."

동정하는 눈빛을 내비치던 클로드는 고든에게 검 하나를 넘겼다.

"이걸로 저기 있는 것을 베어 봐라."

클로드가 가리킨 곳에는 이번 내기에 쓰려고 일부러 만든, 길고 두꺼운 철 주괴가 하나 놓여 있었다.

시연장에 있는 모두가 잔뜩 긴장해서 숨을 죽이고 고든을 주시했다.

그는 검을 들고 철괴 앞에서 크게 심호흡을 했다.

"흡!"

고든이 정신을 집중하자 그가 든 검신에 희미한 푸른 빛이 서렸다.

그리고 검날이 단번에 철괴를 내리쳤다.

카가가가각!

174화 얼마 남지 않았다. (1)

덜컹!

단 위에 올려져 있던 철괴가 반토막이 나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우와아아!"

"베었다! 정말 고든이 철괴를 베었어!"

결과를 본 사람들의 환호성이 시연장에 울려 퍼졌다.

고든의 실력이 부족한 탓에 철괴의 단면은 억지로 톱질을 한 듯 거칠었지만, 어쨌든 그가 철을 벤 건 틀림없었다.

클로드는 입만 벌린 채 얼이 빠져버렸다.

'정말 검으로 철괴를 잘랐어? 이 짧은 시간에 마나를 사용할 수 있게 됐다고?'

혹시나 무기의 중량을 이용한 부정행위라도 있을까 봐 무기도 클로드가 직접 준비했다.

그가 준비한 일반적인 롱 소드로 저 두꺼운 철괴를 베었다는 건 고든이 정말 마나를 사용했다는 증거였다.

그의 머릿속에 새로운 희망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더 안전한 방향으로 가기 위해 출정을 반대했지만 이러면 얘기가 달라진다.

'초급 기사 수준이라 해도 그 수가 수백 명이면 엄청난 전력이다!'

이번에 지셀이 가르친 기사들의 숫자는 무려 사백 명.

델파인 공작가를 제외한다면 어느 영지도 이렇게 많은 기사를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비록 다른 곳보다 질은 떨어질지언정, 숫자로는 절대 뒤지지 않다는 뜻이다.

'새로운 전략을 수립해야 해. 저렇게 많은 기사라니! 할 수 있다!'

클로드가 흥분으로 발개진 얼굴을 들어 지셀에게 뭐라 말하려는 순간.

"우에에에엑!"

고든이 피를 토하며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피거품을 물고 부들부들 떠는 고든을 사용인들이 잽싸게 들것에 실어 날랐다.

"...."

분위기가 단번에 싸늘해졌다. 환호하던 가신들도 입을 다물었고 클로드의 가슴도 싸늘하게 식어 버렸다.

어색해진 침묵을 깨고 지셀의 목소리가 울렸다.

"왜? 뭐가 문제야? 피 토하고 쓰러진 사람 처음 봐?"

"...."

다들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서로 눈치만 보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문제인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가신들은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궤변가를 상대할 때는 이쪽도 똑같이 궤변의 전문가한테 맡기는 게 낫다.

클로드는 전문가답게 생각을 빠르게 정리한 뒤 입을 열었다.

"저건 기사가 아니잖습니까! 기사가 아니라 사기라고 하는 게 더 잘 어울리겠네요. 아니, 100% 사기입니다."

"뭐가 사기인데?"

"저런 상태로 무슨 전쟁입니까! 칼 한번 휘두르고 쓰러지는데!"

"어쨌든 마나 썼잖아? 마나 쓰면 출정하기로 약속했잖아? 다른 건 조건에 없었는데?"

지셀의 뻔뻔한 대답에 클로드는 할 말을 잃었다.

틀린 말은 아니다. 내기 조건은 '마나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지 '마나를 쓰고 나서 쓰러지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사기를 당했다는 억울함은 지워지지 않았다.

답답해서 발만 동동 구르던 클로드는 옆에 있는 웬디에게 물었다.

"야, 네가 좀 말해 봐. 저게 정상이야? 응? 정상이냐고!"

"...아니, 갑자기 저한테 그러시면."

언제나 차분하고 무표정하던 웬디도 클로드의 물귀신 작전에 당황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상황이 안 좋은 건 알겠지만, 왜 자기를 끌어들인단 말인가?

하지만 클로드는 필사적이었다.

"말 좀 해 보라니까! 솔직히 너 저기 있는 애들 혼자서 다 이길 수 있지? 그렇지? 솔직히 말해 봐."

"아니, 제가 어떻게 그런 말을...."

"전쟁이 장난이야? 이러다가 쟤네 다 전쟁에 끌려가서 죽게 생겼다고! 사람 살린다 치고 말을 좀 해 봐! 저렇게 이상한 놈들이라도 살아갈 자격은 있다고!"

클로드의 말에는 틀린 점이 없었다. 아무리 봐도 정상적으로 싸울 수 있을 거 같지 않았다.

결국 웬디는 한숨을 쉰 뒤 조그맣게 말했다.

"저 혼자.... 다 이길 거 같긴 합니다."

그녀의 말에 가신들은 탄식을 토해 냈다.

병실에 누워 있는 자들은 시연장에 나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곳에 있는 기사들은 무려 이백여 명이었다.

그 많은 수를 웬디 혼자 이길 수 있을 정도로 약하다면 기사라고 부르기는 어려웠다.

자신들을 무시하는 발언에 기사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총관의 호위라 해도, 일개 하녀에 불과한 자가 기사들을 무시하다니!

폼 잡기 좋아하는 루카스가 참지 못하고 나섰다.

"너! 감히 우리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당장 나와서 결투를.... 쿨럭! 크윽, 분하다!"

루카스는 말을 하다 말고 피 기침을 토하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요새 몸이 너무 안 좋아서 조금만 흥분해도 머리에 피가 몰려 코피가 쏟아졌다.

옆에 있던 기사들이 루카스를 부축하며 한마디씩 건넸다.

"흥분하지 마, 혈압 올라. 숨 크게 쉬어."

"야, 그냥 네가 참아. 너 쟤 못 이겨."

"맞아, 쟤 엄청 세. 덤비면 너 그냥 죽어."

기사들의 한심한 모습을 본 클로드는 울상을 지으며 지셀에게 말했다.

"쟤네 말고 다른 병력은 더 없어요?"

"없는 거 네가 제일 잘 알지 않나?"

"전에 회의할 때 부족한 병력은 알아서 채우신다고 하셨잖아요!"

"아,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는 거야. 병력도 때가 되면 채울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클로드는 이마를 짚었다.

솔직히 펜리스 영지에서 구할 수 있는 병력이라고 해 봐야 뻔했다. 브랜포드 후작에게 부탁하든가, 페르디움의 병력을 빌려 오든가.

하지만 이쪽에서 먼저 공작파의 귀족을 치겠다는데 브랜포드 후작이 병력을 빌려줄 리가 없다.

북방을 막아야 하는 페르디움이 빌려줄 수 있는 병력도 한계가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병력을 구해 온다는 건 반대 의견을 무마하려고 내뱉은 거짓말 같았다. 저 엉터리 반쪽짜리 기사들로만 전쟁을 할 생각이 분명했다.

"저런 얘들 데리고 전쟁을 하겠다고요? 저게 기사예요? 저런 기사를 어디에 써먹습니까?"

하지만 지셀은 티끌만큼도 걱정하지 않는 듯했다.

"괜찮아. 지금은 마나 연공법을 빨리 익히려고 무리하게 수련을 해서 그래. 당분간 휴식을 취하며 체력을 회복할 거다."

북방 요새에 있는 기사들과 다르게 이들은 쉴 틈도 없이 마나를 쌓는 족족 뽑아내었다.

마나를 써 본 적이 없다 보니, 마나를 사용하는 감각 자체에 익숙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무리를 해서 몸이 망가졌을 뿐, 휴식만 충분히 취하면 금세 회복될 터였다.

물론 너무 오래 쉬면 문제가 생기겠지만, 어차피 수명을 늘리려면 다들 알아서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지셀이 완성한 무한 굴레 수련법의 자세한 원리를 모르는 클로드와 가신들은 계속 반대했지만, 지셀은 완고했다.

"그만. 약속대로 기사들이 마나를 사용했으니 출정 계획은 확정되었다. 더 이상의 반론은 받지 않겠다. 반박 시 너희들 말이 틀리니 출정 준비나 제대로 끝마쳐 놓도록."

내기 결과 클로드와 알포이의 노예 생활 기간이 10년 늘어난 건 덤이다.

몇 번의 실랑이 끝에 지셀을 설득하는 것과 자신의 인생을 동시에 포기한 클로드가 물었다.

"바로 출정하실 생각입니까?"

"아니, 드워프한테 만들게 한 물건들이 제대로 완성되는지도 확인해야 하고, 기사들도 전술 훈련을 더 해야 하거든. 그리고 아직 적당한 시기가 오지 않았어."

"무슨 시기요?"

"싸우기 좋은 시기. 그런 게 있어. 조금만 더 기다리면 온다."

"...알겠습니다."

클로드는 막상 출정하기로 결정되자 살짝 빼는 지셀의 모습에 희망을 품었다.

바로 내일이라도 카발디 백작령에 쳐들어갈 것처럼 급하게 굴더니, 막상 싸우게 되니까 겁이 나는 걸지도 모른다.

그런 식으로 고민하다가 출정을 취소하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없었다.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는 클로드를 보며 지셀이 물었다.

"그나저나 식량 수매는 계속하고 있지?"

클로드는 마침 잘됐다는 표정을 지으며 지셀에게 하소연했다.

"저기, 영주님. 이제 사들이는 건 그만하시는 게 어떨까요? 페르디움에 나눠 주고서도 넘치도록 쌓여 있습니다. 게다가 저 괴물 밀도 곧 수확기에 들어서고요. 이번에도 수확량이 엄청날 겁니다."

식량이야 많아서 나쁠 건 없다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식량이 소모량 이상으로 늘어나다 보니 보관하기도 곤란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지셀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북부 사람들이 아예 굶을 정도로 싹싹 긁어 와. 웃돈을 주고서라도 최대한으로 구매해. 알았지?"

"도대체 왜 그러시는데요! 지금 쌓인 것만으로도 펜리스와 페르디움 두 영지에서 10년은 넘게 먹을 수 있을 겁니다. 먹어 치우기 전에 썩어서 버릴 수준이에요!"

지셀은 기이할 정도로 식량 저장에 집착했다.

몇 번이나 가신들이 팔아서 돈을 마련하자고 해도 요지부동이었다.

분명 식량을 잔뜩 팔면 큰돈이 들어올 텐데도, 굳이 다른 돈줄까지 마련해 가며 식량을 끌어모았다.

가신들로서는 그 이유를 도무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정말 굶어 죽은 유령이라도 달라붙은 건가?'

답답해하는 클로드에게 지셀이 심드렁하게 답했다.

"내가 다 계획이 있어서 그래. 어차피 내가 뭘 말해도 안 믿을 거잖아?"

"그건.... 그렇죠."

"그래, 그러니까 그냥 계속 사. 내가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무조건 풀 매수야."

"에휴, 알겠습니다."

클로드는 논쟁하기도 포기했다. 그냥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너 하고 싶은 거 다 하세요.'

최악의 경우 자신이 나서서 수성을 지휘하면 된다. 공성은 몰라도, 수성에 필요한 병력 정도는 페르디움에서 끌어올 수 있을 것이다.

클로드는 혹여나 영주가 전쟁에서 죽고 페르디움이 망할 경우를 대비해서 도망갈 루트까지 빈틈없이 다 짜 놓은 상태였다.

그나마 유일하게 믿었던 클로드마저 설득에 실패하자 가신들은 우울한 얼굴로 한숨만 내쉬었다.

그들을 보며 지셀이 빙그레 웃었다.

'좋아, 다들 아주 잘하고 있어.'

제삼자가 보면 불가능한 일을 해내라는, 무리한 명령만 내린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지의 가신들, 마법사들, 드워프들, 영지민들, 기사들과 병사들까지, 다들 불평불만을 입에 달고 살며 반대란 반대는 다 하면서도 막상 시키는 일은 잘들 하고 있다.

겉보기에는 엉망진창처럼 보이지만 내실은 놀라울 정도로 잘 쌓이고 있었다.

그만큼 이들의 능력이 출중하다는 증거였다.

지셀 혼자서는 이루어 낼 수 없는 구상들이 이들 덕분에 실현되어 가고 있었다.

'고마운 일이지. 그렇지만 조금 더 바쁘게 움직여 보자고.'

지셀이 기다리는 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

그전까지 모든 준비를 끝내야 한다.

* * *

기사들은 몸을 회복하기 위해 휴식에 들어갔지만, 다른 이들은 그러지 못했다.

영지를 개발하고, 전쟁 물자들을 끌어모으느라 모두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다들 쉴 새 없이 일하는 중에 기쁜 소식이 추가로 들려왔다.

"영주! 영주! 성공했소! 드디어 성공했다는 말이오!"

갈바릭과 드워프들이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지셀을 찾아왔다.

그런 그들을 보며 지셀이 흠칫 놀라 물었다.

"누구...세요?"

"나요! 나! 갈바릭! 일은 잔뜩 시켜 놓고 누군지도 못 알아본다니!"

가장 앞에 선 자가 성질을 부리며 외쳤다.

험한 일정을 보내느라 고생한 탓일까?

갈바릭과 드워프들의 얼굴은 누군지 못 알아볼 정도로 변해 있었다.

비쩍 마르고 눈은 퀭한데 키까지 작으니 마치 수염 난 고블린 같았다.

지셀은 당황하며 웃었다.

"아하하, 갈바릭이었구나. 어휴, 며칠 사이에 확 삭아 버려서 못 알아봤지 뭐야? 드워프는 수명이 길다고 들었는데 그거 다 거짓말이었나 봐."

능청을 떠는 지셀을 노려보며 갈바릭이 이를 악물었다. 그의 수염이 부들부들 떨렸다.

"젠장! 잠도 못 자고 일을 하고 있으니 당연하지 않소! 이러다가 다 죽게 생겼다고!"

돌격대에 들어가기 싫어 매일같이 이를 갈며 일을 하긴 했지만 진짜 도망가고 싶었다.

실제로 탈출을 시도하다가 잡혀 온 드워프들도 있었는데, 놀랍게도 가장 추노에 적극적이었던 건 알포이였다.

다른 노예만 도망가는 건 못 봐주는 고약한 심성 때문이다.

"특히 그 알포이란 놈은 사람 새끼도 아니야! 그런 놈이 제일 나쁜 새끼야! 영주 앞잡이 같으니라고!"

지셀은 그런 갈바릭의 분노를 한 귀로 흘리며 되물었다.

"그래, 그나저나 뭘 성공했다고?"

그러자 갈바릭은 언제 화를 냈냐는 듯 환한 웃음을 띠며 말했다.

"드디어 그 열기구란 것을 완성했소이다!"

175화 얼마 남지 않았다. (2)

열기구가 완성됐다는 말에 지셀의 표정이 환해졌다. 하늘을 나는 기구는 다양한 용도로 쓸 수 있기에 그도 내심 열기구가 완성되기를 기다려 왔던 것이다.

"좋아, 역시 드워프야. 어때? 내 말대로지? 하늘을 나는 기구를 만들 수 있다니까."

"그렇소! 진짜 영주가 가르쳐 준 걸 토대로 열기구가 완성되었단 말이오! 으하하하!"

갈바릭은 크게 웃었다. 비록 지셀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새로운 기술을 터득했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까.

그는 기쁜 마음에 지셀을 향해 칭찬을 마구 쏟아 내었다. 돈도 안 드는데 칭찬 몇 마디 해 주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정말 대단하오! 이런 대단한 걸 생각해 낼 줄이야!"

"그러게, 대단하네."

"좀 더 기뻐하시오! 우리가 대륙 최초로 하늘을 나는 기구를 만들었단 말이오!"

"그래, 그래. 우리가 최초지."

전생에서 수도 없이 열기구를 봤던 지셀은, 기뻐서 날뛰는 갈바릭에게도 메마른 대답만 흘렸다.

사실 그가 생각하기엔, 개발에 성공하는 건 당연한 결과고 딱히 신기한 점도 없었다.

하지만 갈바릭과 드워프들이 보기엔 전혀 달랐다. 열기구 개발은 정말 역사에 길이 남을 위업이었다.

"드디어 인류가 마법을 벗어나 스스로의 힘으로 하늘을 날게 되었소! 이것은 진정 기술의 승리라 할 수 있단 말이오! 으하하하하!"

현시대에 하늘을 나는 것은 불가능한 일로 여겨졌다. 하늘을 날려면 오직 마나를 이용하여 법칙을 거스르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마법을 쓰지 않고 순수하게 기술만을 이용해서 하늘에 뜨는 기구를 만들어 냈으니, 기술에 목숨 거는 드워프들이 기뻐할 만했다.

모든 드워프들이 지셀을 보며 환호성을 보냈다.

"역시 영주는 대단하오! 그런 작은 현상까지 놓치지 않는 관찰력이라니!"

"그것보다 그 현상을 이용해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 내는 발상이 더 대단하오! 그런 사고방식은 보기 드물지!"

"내 다시는 영주의 지식을 의심하지 않겠소! 영주는 천재요! 천재 지식인!"

"도대체 어렸을 때부터 공부를 얼마나 많이 했길래 이런 걸 알고 있다는 말이오!"

극찬이 쏟아지자 지셀은 괜히 다른 곳을 보며 볼을 긁었다.

왕국 최고의 의사라는 말을 들은 지 얼마나 지났다고, 천재 지식인 소리까지 듣기 시작했다.

이러다 묘비에 위대한 학자라고 새겨질 판이었다.

'아, 이거 좀 민망한데.'

지셀의 전문 분야는 싸움질이고, 다른 건 다 전생에서 주워들은 지식을 끼워 맞춘 것일 뿐이다.

그래도 이렇게 좋아하는데 분위기를 깰 수는 없었다.

"흠흠, 그냥 우연히 알게 된 거다. 공부는 무슨...."

"역시! 진정한 천재는 굳이 오래 공부할 필요 없지!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하지 않소!"

"아니, 그런 뜻이 아니고...."

"그래도 아깝군, 아카데미를 다녔다면 수석이 됐을 게 분명한데! 왕립 아카데미 수석이라고 하면 꽤 높이 평가받지 않소?"

수석이 되긴 했겠지. 공부가 아니라 사고 치는 걸로.

민망해진 지셀은 손을 휘저으며 화제를 돌렸다.

"테스트는 제대로 끝났겠지? 안전 문제는 없나?"

"걱정하지 마시오! 양과 오리, 수탉을 태워서 20분의 비행을 마쳤고 그 뒤에 다시 마법사가 탑승해서 확인했소이다. 안전은 확실하오! 처음 만들었던 게 조금 작은 편이라 시연용은 조금 더 크고 튼튼하게 만들었소이다!"

왜 양과 오리, 수탉인지는 모르겠지만.... 마법사도 타서 확인해 봤다고 하니 어쨌든 안전에는 문제가 없을 거 같았다.

"좋아, 그러면 바로 시연을 시작하지. 모두 모이라고 해."

소집령이 떨어지자 영지의 가신들이 순식간에 모여들었다.

넓은 공터에 모인 이들은 다들 기대 섞인 눈빛으로 공터 한가운데 가라앉아 있는 기구를 훔쳐보았다.

이미 드워프가 멋진 걸 만들었다는 소문이 영지 전체에 널리 퍼져 있었다. 하늘에 뭔가가 떠 있으니 소문이 안 나려야 안 날 수가 없었다.

특히 클로드는 잔뜩 흥분해서 침까지 튀기며 지셀에게 물었다.

"영주님! 정말 정찰용으로 만든 거 맞습니까? 드워프들이 그렇게 말하던데요! 맞죠? 수성할 때 저거 쓰면 적군 확인하기 좋을 거 같던데요!"

"어, 그래.... 주로 그런 용도로 쓰긴 하지."

"크흐흑, 저는 영주님이 마음을 바꾸실 줄 알았다고요! 그렇죠! 병자들을 데리고 싸울 수는 없죠!"

클로드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삼키며, 눈에 고인 눈물을 닦아 내었다.

갈바릭에게 들은 대로라면 열기구는 수성에 정말 효과적인 물건이었다.

수성할 때 문제가 되는 건 성벽 너머에서 적군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확인이 어렵다는 점이다.

하지만 열기구를 이용하면 적 군대의 움직임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출정한다던 영주가 이런 걸 만들어 냈다는 말은 즉 마음이 바뀌었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혼자 기뻐하는 클로드를 보고 지셀이 혀를 차며 물었다.

"좋냐?"

"아, 당연하죠!"

클로드는 인생의 진리를 하나 깨달았다. 아무리 망나니라도 정성 어린 설득을 이어 가면 다 알아듣는 법이다.

'우리 영주님이 달라졌어요. 드디어 사람 말을 듣기 시작했어요.'

감격해서 훌쩍이기 시작한 클로드의 옆에서 벨린다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도련님, 저거 정말 떠요? 하늘을 날 수 있어요?"

"그럼, 당연하지. 이미 테스트까지 다 마친 거거든."

"우와, 그러면 우리 이거 타고 나들이 가요! 나들이! 재미있겠다!"

"그거 좋지, 이거 타면 정말 재미있거든. 그 전에 일단 시연부터 하자고. 자, 시작해라!"

지셀이 신호하자 알포이가 열기구의 공기 주머니 쪽으로 다가갔다. 그는 자신에게 집중된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며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시제품을 만들 때 같이 참여한 사람으로서, 열기구에 관심이 쏠리는 건 곧 자신에게 관심이 쏠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바람 계열 마법으로 빠르게 공기를 채운 그는 공기 주머니가 부풀자 바로 손에서 불을 뿜어 냈다.

공기를 데우는 장치도 있긴 하지만, 더 빠르게 가열하려면 마법을 쓰는 게 나았다.

화르르륵!

마력의 불로 공기가 빠르게 데워지자 주머니가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오오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탄성을 내질렀다.

알포이가 자랑하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잽싸게 바구니에 올라타 공기 구멍과 연결된 연료통에 불을 붙였다.

열기구가 떠 있는 내내 마법사가 마력을 뿜고 있을 수는 없으니, 건초와 양모, 기름 등을 채워 넣어 태우는 것이다.

긴 줄로 땅에 고정된 열기구는 약 20m 정도 떠오른 뒤 멈췄다. 잠시 침묵하던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도 하늘에 두둥실 떠 있는 열기구를 보며 환호했다.

"와! 정말 하늘을 날았다!"

"대단해! 어떻게 저런 물건을 만들 수가 있지?"

"역시 영주님이다! 역시 드워프들이야!"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드워프들은 의기양양해서는 뒷짐을 지며 헛기침을 했고, 지셀도 만족스러운 웃음을 내보였다.

약 십여 분간의 비행을 마친 알포이가 땅에 내려오자마자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줄을 끊고 비행을 할 건데, 타 볼 사람? 크기가 그리 크지 않아서 한 사람만 태워 줄 거야!"

알포이는 특별한 장난감을 가진 어린아이처럼 기고만장한 어조로 말했다.

그 모습을 본 다른 마법사들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알포이는 시험 비행에 성공한 뒤, 절대 저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 아주 유치하기 짝이 없는 놈이었다.

사실 마법사가 없어도 열기구를 작동하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알포이는 온도를 빠르게 조절하려면 마법사가 타는 게 낫다고 주장하며, 열기구가 뜰 때마다 무조건 한 자리를 차지했다.

놀거리가 없는 페르디움에서 열기구는 몇 안 되는 장난감이었기 때문이다.

"자자, 탈 사람은 빨리 순서 정해! 몇 번이나 비행에 성공했으니 안전은 보장할 수 있다고!"

방금 알포이가 열기구를 타는 모습을 눈으로 직접 확인했으니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사람들은 앞다투어 손을 들었다.

"저요, 제가 탈래요!"

"영주님! 제가 먼저 위험한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외침은 한 사람의 포효에 묻히고 말았다.

"무슨 소리! 차기 펜리스 기사단장인 내가 먼저 타야지! 죽고 싶지 않으면 다 꺼지라고!"

목소리의 주인공은 요 며칠 연무장에 처박혀 수련만 하던 카오르였다.

그는 열기구를 보자마자 눈을 빛냈다.

이렇게 흥미진진한 건 무조건 먼저 타야 한다. 그건 사나이의 신념과도 같은 거였다.

"결투로 해! 결투로 정하자고! 이기는 놈이 먼저 타는 거야!"

카오르의 말에 사람들이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저 꼴통이랑은 칼은커녕 말도 섞지 않는 게 좋다.

하지만 모두가 물러난 건 아니었다. 벨린다와 길리언은 바로 무기를 꺼내 카오르에게 다가갔다.

일촉즉발의 순간, 지셀이 혀를 차며 말했다.

"다 태워 줄 테니 싸우지들 마라. 카오르부터 먼저 타."

저렇게 노골적으로 욕망을 내비치니 그냥 먼저 태우고 치워 버리는 게 나았다.

"크, 역시 영주님이 뭘 아시는구만."

카오르는 의기양양해서는 열기구에 올라탔다. 다른 사람들은 무척이나 부러워하며 입을 삐죽였다.

카오르가 타자마자 알포이가 다시 열기구를 띄웠다.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 밧줄을 끊고, 바람을 타고 움직인다는 것이었다.

혹시 모를 사고를 막기 위해 안전하다는 것이 확인된 고도에서 몇 분만 있다가 내려오기로 했다.

"우와! 이거 기분 죽이는데!"

열기구가 꽤 높이 떠오르자 카오르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감탄을 내뱉었다.

사람들은 바람을 타고 움직이는 열기구를 올려다보며 졸졸 따라갔다. 워낙 신기하다 보니 다들 걷는 게 힘든 줄도 몰랐다.

카오르는 밑에서 따라오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들이 마치 인형처럼 조그맣게 보였다.

'높이 올라가면 다른 사람을 이렇게 내려다볼 수 있는 거지.'

올라와 보고서야 알았다. 자신에게는 높은 곳이 더 잘 어울린다.

순간 카오르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자신의 번뜩이는 생각을 곧바로 알포이에게 전했다.

"이거 진짜 기분 죽이네. 야, 더 높이 올라가자. 아주 하늘 끝까지 가 보자고."

"뭐? 더 높이 올라가자고?"

"그래, 더 높이 올라가서 저 개미 같은 놈들을 내려다보자고! 지금은 우리가 하늘의 주인이다!"

"그거 좋은 생각이야. 아니지, 아예 이거 타고 마탑으로 도망갈까?"

똑같은 놈 둘이 만났으니 반대 의견이 나올 리가 없다.

카오르의 말에 동의한 알포이는 온도 조절도 그만두고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표정은 카오르의 표정보다도 훨씬 더 거만했다.

'크으, 이렇게 내려다보니 속이 다 시원하네! 역시 마탑의 후계자는 이런 자리에 있어야지! 나를 올려다봐라! 나를 추앙하란 말이다!'

그렇게 등신 두 명이 히죽대는 동안, 통제를 잃은 열기구는 하염없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열기구의 높이가 너무 높아지자, 열기구를 따라가던 사람들의 얼굴에도 알쏭달쏭해하는 기색이 묻어났다.

그저 높이만 높아진 것이 아니었다. 열기구의 공기 주머니가 강한 바람을 맞아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왜 저러지? 너무 흔들리는데?"

"뭔가 문제가 생긴 건가?"

"높이도 좀 위험해 보이는데...."

웅성거리는 사람들 뒤에서 지셀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확실히 뭔가 이상했다. 왜 저렇게 높이 올라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열기구가 크게 흔들리더니 아래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주머니가 줄어들고 있어!"

"저거 지금 떨어지는 거야?"

"어, 어? 점점 빨라진다!"

처음에는 공기 주머니에 공기가 남아 있어 천천히 떨어졌다.

하지만 떨어지는 물건에는 가속도가 붙는 법.

공기 주머니가 홀쭉해지자, 열기구도 점점 더 빠르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누가 도와줄 수도 없었다.

열기구가 높이 떠 있어서 잘 보이는 거지, 실제 거리는 꽤 떨어져 있었으니까.

모두가 혼란에 빠져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알포이의 외침이 들려왔다.

"살― 려― 줘―!"

뒤이어 카오르의 외침도 들렸다.

"야이―! 시바―! 좆! 됐! 다!"

떨어지는 열기구를 멍하니 바라보던 지셀이 중얼거렸다.

"아, 불량품이었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발명이라는 건 실패 없이 한 번에 완성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지셀이 혀를 차는 와중에도 열기구는 빠르게 떨어지고 있었다.

"으아아아아!"

알포이는 열기구의 바구니를 꽉 잡고 비명을 질렀다.

거지 같은 영지에 와서 노예로 고생만 하다가 죽게 생겼다. 억울하고 분해서 손에 힘이 절로 들어갔다.

'마탑에 있을걸! 그때는 행복했는데!'

하지만 그 생각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떨어지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죽음의 공포로 머릿속이 하얘졌기 때문이다.

그때 천둥과도 같은 카오르의 외침이 들려왔다.

"야! 정신 차려! 이대로 떨어지면 진짜 죽는다고! 이러다가 다 죽어!"

"으아아아! 몰라! 나 무서워!"

알포이는 눈을 감고 바들바들 떨며 연신 소리만 질러 댔다.

마탑에서는 연구만 하고 살았던 데다, 펜리스 영지에 와서도 줄곧 공사장에서만 살았으니 실전 경험은 전혀 없었다. 그러니 위기 대응 능력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 면에서는 산전수전 다 겪고 살아온 카오르가 그나마 나았다.

카오르는 정신을 차리려고 부러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너 마법사잖아! 하늘을 나는 마법 같은 거 못해? 떨어지기 직전에 잠깐만 뜨면 돼! 그러면 살 수 있다고! 생각을 해!"

"어? 뭐?"

살 수 있다는 말에 알포이의 눈빛이 조금이나마 살아났다.

방법이 있다. 3서클 부유 마법 '레비테이션'.

중력 마법은 7서클이라 쓸 수 없지만, 3서클 마법은 알포이도 충분히 시전할 수 있었다.

3서클치고는 마력이 과도하게 드는 게 단점인 마법이라 오래 떠 있을 수는 없지만, 낙하 속도를 줄이는 정도는 가능할 것이다.

"이, 있어! 있어! 잠깐은 떠오를 수 있어!"

알포이의 외침에 카오르가 화색을 띠며 말했다.

"좋아, 잘 들어! 우리는 곧 여기서 뛰어내릴 거야!"

난데없는 자살 선언에, 알포이는 카오르를 미친놈 보듯이 바라보았다.

176화 새로운 훈련을 시작한다. (1)

여기서 뛰어내린다고? 어차피 죽을 거 마음고생하지 말고 더 빨리 죽자는 말인가?

알포이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뭐? 왜? 왜 뛰어내리는데?"

그렇지 않아도 떨어지는 속도가 점점 빨라져 눈도 뜨기 힘들 정도였다.

지금도 밖으로 튕겨 나갈까 봐 바구니를 양손으로 꽉 잡고 있는 상황인데, 자진해서 뛰어내리겠다니!

그런 무서운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카오르는 설명할 시간도 아깝다는 듯 빠르게 말했다.

"여기 타서는 땅과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제대로 볼 수 없잖아! 때를 잘 맞춰서 마법을 쓰더라도 공기 주머니랑 엉키면 무슨 사고가 날지 몰라! 나가서 쓰는 게 안전해!"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기구와 엉켜서 떨어지면 더 위험할 수가 있었다.

"아, 알았어! 그럼 나 혼자 뛰어내려?"

"미쳤냐! 내가 잡고 뛸 테니까 내가 하라는 대로 해!"

카오르는 말을 끝내자마자 바로 알포이의 허리를 붙잡고 기구에서 뛰어내렸다.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맨몸으로 높은 하늘에서 뛰어내리는 건 엄청난 공포를 안겨 준다.

몸을 때리는 강한 바람에 알포이는 눈을 질끈 감고 다시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아아아! 살려 줘!"

"닥쳐! 제발 좀 닥치라고! 내가 거리를 확인할 테니까 신호하면 바로 마법을 써! 알았어? 바둥거리지 좀 마! 어딜 만져!"

"으아아아! 알았어!"

카오르는 눈을 부릅뜨고 정신을 집중했다.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된다. 엄청난 높이에서 떨어지며 가속도가 붙은 상황에서는 소드마스터 할아버지라 해도 살아남기 어렵다.

땅에 부딪히기 직전까지 아슬아슬하게 버틸 필요는 없었다. 자신의 몸이 버틸 수 있는 높이에만 들어가면 된다.

이번에 수련을 하며 경지도 조금 올랐기에, 어지간한 높이는 마나만 둘러도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

정 안되면 팔 하나 정도는 부러질 각오도 하고 있었다.

부우우웅!

지면과 가까워질수록 낙하 속도는 더욱더 빨라졌다. 눈 한 번만 깜빡여도 지면과의 거리가 훅훅 줄어들었다.

치밀하게 거리를 계산한 카오르는 버틸 만한 높이에 들어서자마자 크게 외쳤다.

"지금이야!"

눈을 꽉 감고 있던 알포이는 카오르의 신호를 듣고 바로 손을 뻗어 마력을 뿜어냈다.

정말 혼신의 힘을 다했다. 마법을 익힌 뒤로 이 정도로 절실하게 마법을 쓴 적은 없었다.

마법은 집중이 흐트러질수록 실패할 확률이 높아지는 법이지만, 마탑의 후계자답게 알포이는 목숨을 걸고 마법을 성공시켰다.

덜컥!

떨어지던 두 사람의 몸이 순간 공중에 멈췄다.

"크윽!"

"으에엑!"

힘의 방향이 갑자기 바뀌니 몸이 멀쩡할 리가 없다. 두 사람은 머리를 망치로 친 듯한 고통과 내장이 뭉개지는 듯한 느낌을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땅에 떨어져서 몸이 박살 나는 것보다는 낫다.

성공을 예감한 카오르는 온 힘을 다해 마나를 끌어올렸다.

이제 자신의 몸을 방패 삼아 땅에 부딪히는 충격만 버티면 된다.

그러면 되는데....

부우우우웅!

두 사람의 몸이 다시 빠르게 위쪽으로 떠오른다.

"어? 어? 야, 멈춰! 멈추라고 이 미친놈아!"

알포이는 몸에 충격이 오는 순간 너무 무서워서 정신을 반쯤 놓았다.

눈도 감고 있었던 탓에 땅바닥과 거리가 어느 정도 남았는지 전혀 몰랐다.

살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마법을 시전한 것이 오히려 문제가 되었다.

"멈추라고! 이 등신아!"

카오르의 호통에 알포이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이미 엄청난 높이로 떠오른 뒤였다.

"미, 미안.... 나도 모르게 너무 힘을 줘서...."

"됐어! 정신 바짝 차려! 성공할 뻔했으니까 다시 하면 돼! 내가 다시 신호를...."

"미안.... 이제 마력이 다 떨어졌어...."

"뭐?"

"아까 시연하느라 마력을 많이 썼는데.... 지금 너무 무리해서 마법을 쓰는 바람에.... 크흑...."

알포이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이미 살아남기를 포기한 말투였다.

카오르는 열이 뻗쳤다. 유일한 기회를 멍청이처럼 날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야이! 등신아! 딱 속도만 줄일 정도로 뜨고 멈췄어야지!"

"미안.... 너무 무서워서.... 그래도 혼자가 아니라서 가는 길 외롭지는 않을 거 같아.... 같이 죽자...."

"입 닥쳐! 난 안 죽어!"

카오르는 이를 악물고 알포이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남아서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야 겨우 상승의 마나 연공법과 검술을 익혔는데 이대로 죽기에는 너무나 억울했다.

하지만 너무 높이 올라왔다. 이 상태로 부딪치면 몸이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선택해야 했다. 둘 다 죽을 건지, 아니면 한 명이라도 살 수 있는 확률에 걸어 볼 건지.

'젠장!'

알포이를 쿠션 삼아 버텨 볼까 고민했지만 그 생각은 이내 접었다.

미안해서가 아니다. 너무 허약한 놈이라 쿠션 역할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시도해 봤자 알포이가 충격을 버티지 못하니 같이 죽는 건 마찬가지였다.

'멍청한 새끼! 마법도 제대로 못 쓰는 새끼! 바네사보다 멍청한 새끼!'

속으로 실컷 욕을 한 카오르는 자세를 바꿨다.

자신은 마나로 몸을 강화할 수 있다. 실력도 전보다 늘었으니 자신이 먼저 떨어지며 충격을 완화한다면 알포이는 운 좋게 살아남을지도 모른다.

'둘 다 죽을 필요는 없지. 같이 죽을까 했는데 너라도 살 수 있으면 살아라. 너도 등신이지만, 그래도 나보다는 더 쓸모 있을 테니까.'

마음을 정하고 고개를 드니 저 멀리서 사람들이 뛰어오는 게 보였다.

하지만 와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저들도 이런 상황에서는 손쓸 방법이 없을 것이다.

가장 앞에 선 지셀과 벨린다, 길리언을 본 카오르는 속으로 작별 인사를 건넸다.

'집사장, 매일 시비 걸어서 미안하다. 잘 먹고 잘살아라. 돈은 없고, 내 숙소에 있는 남은 술이라도 너 가져. 작별 선물이다.'

'영감, 한판 뜨고 싶었는데 결국 못했네. 그래도 싸우면 내가 이기는 거 알지?'

'영주, 같이 놀아서 재밌었다. 덕분에 실력 좀 늘었는데 써먹지도 못하고 죽게 생겼네.'

'아쉽지만 후회는 없다. 나름 즐거웠다.'

이제 그의 몸은 지면과 충돌해 완전히 박살 나고 말 것이다.

카오르는 눈을 감았다. 한 방울 눈물이 눈가에 맺혔다.

'할머니, 곧 보러 갈게.'

살기를 포기하고 알포이라도 살리려고 한계까지 마나를 끌어올렸을 때, 지셀의 목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카오르! 힘을 빼! 마나를 가라앉혀라!"

'왜? 뭐 하게? 그냥 죽으라고?'

의아해하면서도 카오르는 반사적으로 지셀의 말에 따랐다. 몇 번이나 지셀에게 얻어터지며 몸에 각인된 훈련 효과였다.

파아악!

지셀은 두 사람 쪽으로 손을 뻗으며 마나의 실을 뿜어내었다.

가속도가 붙었으니 어설픈 힘으로는 붙잡지도 못할 터였다. 단번에 3단계의 코어까지 폭발시켜 낼 수 있는 한 최대의 힘으로 두 사람을 붙잡았다.

투두둑!

마나의 실들이 버티지 못하고 끊어지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두 사람이 떨어지는 속도는 확연하게 줄어들었다.

"카오르! 알포이를 집어 던져!"

지셀이 외치자마자 카오르는 알포이를 휙 집어 던졌다.

진작부터 던져 버리고 싶었기에 망설임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저 새끼는 정말 죽어도 싼 새끼다.

지셀은 양손으로 계속 마나를 뿜어내, 카오르와 알포이의 낙하 속도를 줄여 나갔다.

"길리언! 벨린다!"

지셀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길리언과 벨린다가 공중에 뛰어올랐다.

길리언은 카오르를 받자마자 바로 땅바닥으로 던져 버렸다. 충격을 분산시키기 위함이었다.

쿠웅!

"케엑! 영감, 너!"

온몸을 강타하는 고통에 카오르가 비명을 내질렀다. 길리언은 코웃음을 치며 다리에 마나를 둘러 안전히 착지했다.

하지만 알포이를 맡은 벨린다는 길리언처럼 쉽게 해결하지 못했다.

허약하기로는 영지에서 최고 수준을 다투는 알포이다. 그냥 개복치 수준이다. 카오르처럼 바닥에 내리치면 그대로 죽어 버릴지도 몰랐다.

"아오!"

벨린다는 짜증스러운 외침을 내뱉으며 알포이를 낚아채듯이 안고, 허공을 몇 번이나 돌았다.

적당히 힘을 해소하고 땅에 착지하자 알포이가 주저앉으며 외쳤다.

"사, 살았다! 살았어! 집사장 고마워! 으하하하! 살았다!"

"으하하하! 영주는 역시 대단하네! 수고했어, 영감! 쿨럭!"

카오르도, 알포이도 바닥에 드러누운 채로 쉬지 않고 웃었다. 죽다 살아났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까.

지셀은 안도의 숨을 내뱉은 뒤, 두 사람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괜찮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러자 카오르와 알포이는 서로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새끼 때문이야! 마법도 제대로 못 쓰는 멍청한 새끼!"

"저놈이 먼저 올라가자고 했어! 저 새끼 순 나쁜 새끼예요!"

실랑이하는 둘을 말리며 자초지종을 듣고서 지셀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고도가 높아지니 열기구의 공기 주머니가 버티지 못한 거 같았다.

애초에 약속된 안전 고도를 넘어서 올라간 탓이니 온전히 열기구의 결함만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꼴통 둘이 위험을 자초한 거였으니까.

하지만 사고는 언제 어떻게 일어날지 모른다. 높이가 높이인지라 한번 사고가 나면 위험하니, 안전성을 더 강화해야 할 필요는 있었다.

잠시 후, 땅에 떨어진 열기구를 살펴보던 드워프들이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자신 있게 만들었는데 사고가 났으니 기가 죽을 만도 했다.

"무슨 문제였지?"

"그게.... 높은 고도의 바람을 버티지 못했는지, 아니면 공기가 너무 뜨거워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공기 주머니의 결합부가 뜯어지고, 천도 찢어졌습니다."

지셀의 물음에 갈바릭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대들 때는 언제고, 자신들이 불리하니 공손해진 것이었다.

지셀은 몇 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원하는 높이까지는 문제없다는 건 확인했지만, 그래도 보강하는 게 낫겠지. 공기 주머니는 세 겹으로 만들고 어망으로 외부를 감싸서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도록 해. 다른 부분에서도 더 튼튼하고 안전하게 만들 방법도 생각해 보고."

"알겠습니다."

열기구의 보강과 추가 제작을 맡긴 지셀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자, 약간의 사고가 있었지만 그래도 비행은 문제없는 거 다들 봤지? 이 두 사람이 무리해서 그런 거지, 적당히 올라가면 안전하니까 다들 걱정하지 마. 다음 시연 때 타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하고."

사람들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런 위험한 건 절대 타고 싶지 않았다.

어색해진 분위기 속에서 뒷정리를 끝낸 사람들은 하나둘씩 자리를 떠났다.

가뜩이나 일도 바쁜데 열기구도 구경하고 사고도 구경하느라 시간을 너무 허비했다.

클로드는 집무실로 돌아가며 웬디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눴다.

"드워프가 만드는 것도 무조건 완벽한 건 아니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좀 구린 거 같지 않아?"

"...총관님, 잠깐만."

"드워프 명성도 사실 다 거품 아닐까? 예를 들면 이런 거지. '너희는 키가 작지만, 손재주는 좋더라.' 이런 식으로 그냥 종족 자체를 포장해 주려고.... 아, 왜 밀어! 천천히 좀 걷자! 나 다리 아프다고!"

웬디는 클로드를 억지로 떠밀며 재빨리 자리를 떴다. 하지만 드워프들은 이미 그 깐족거림을 다 들은 뒤였다.

"으으.... 자존심 상해."

갈바릭은 몇 번이나 입술을 깨물었다.

이 영지에 와서 처음 만든 작품이 실패했다.

물론 카오르와 알포이가 무리하게 올라간 건 맞지만, 몇 번이나 안전 시험을 하면서 그런 위험을 예측하지 못한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이건 장인인 드워프들에게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뼈에 사무치는 실수였다.

"자, 빨리 가자고. 진짜 밤을 새워서라도 완벽하게 만들어야 해."

갈바릭의 말에 드워프들이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일이 많고 적고의 문제가 아니다. 드워프들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지셀이 드워프들을 크게 타박하지 않은 것도, 그들의 이런 성미를 잘 알기 때문이었다.

공방으로 돌아가는 와중에 갈바릭은 괜히 땅바닥을 발로 차며 투덜거렸다.

"어휴, 이 먼지 봐라. 물 좀 뿌려야겠네. 이 동네는 비도 안 오나? 사방이 흙먼지야."

요새 들어 날씨가 확 건조해진 느낌이었다. 비가 안 온 지 꽤 된 거 같은데 다들 아무 문제 없다는 듯이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주변에 물어봐도, 전보다 약간 심해지긴 했지만 큰 차이는 없다는 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그런데 왜 갈수록 더워져?"

불과 온도에 익숙한 드워프는 남들보다 날씨의 변화에 더욱더 민감했다.

북부는 서늘하다고 들었는데 서늘하기는커녕 뜨겁고 건조하기만 하다. 이건 사막 날씨와 다를 게 없었다.

척박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처음 왔을 때보다 이상하게 더 심해지는 느낌이었다.

"쯧쯧, 이런 데서 다들 어떻게 살고 있었는지 모르겠네. 아, 그런데 나도 여기서 계속 살아야 하는구나. 정말 싫다."

따뜻하고 날씨 좋은 남부에서 온 갈바릭은 북부의 환경에 영 적응하지 못했다.

"후, 날씨도 더럽고 하는 일도 더럽고, 진짜 거지 같은 동네야. 아, 총관 그 새끼는 생각할수록 얄밉네."

갈바릭의 투덜거림은 공방에 도착할 때까지 끝이 나지 않았다.

사실 날씨가 문제라기보다는 열기구가 실패해서 속이 쓰린 게 더 컸다.

그냥 화풀이할 곳이 없어서 날씨 핑계로 화풀이를 한 셈이었다.

드워프들이 투덜거리며 다시 열기구 제작을 시작할 때, 지셀은 쉬고 있는 기사들을 찾아가 말했다.

"다들 푹 쉬었지? 이제부터 새로운 훈련을 시작한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 말에 기사들은 귀를 의심했다. 쉰 지 얼마나 됐다고 또 훈련을 한다는 말인가?

솔직히 진짜 하기 싫었다.

용감한 이들 몇몇이 손을 들고 외쳤다.

"괜찮습니다!"

"저희는 시간 많습니다!"

지셀은 씨익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안 괜찮아. 우리는 시간이 없어. 모두 집합해."

'이럴 줄 알았으면 기사 같은 거 하는 게 아니었는데.'

기사들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어기적어기적 자리에서 일어났다.

177화 새로운 훈련을 시작한다. (2)

훈련장으로 이동하며 기사들은 입을 삐죽댔다.

영주님은 뭐가 항상 저렇게 바쁠까?

우리는 조금 천천히 해도 되는데.

"끄으응, 아직 몸이 다 회복되지 않은 거 같습니다."

"아이고, 너무 아프다!"

몇몇 기사들이 엄살을 부렸지만, 지셀은 못 들은 척 훈련장으로 이동했다.

자신이 나서지 않아도, 어차피 길리언이 뒤에서 험악하게 인상을 쓰며 기사들을 떠밀고 있었으니까.

훈련장에 도착한 기사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 키만 한 단이 수십 개쯤 세워져 있었는데, 도대체 무슨 훈련을 위한 기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기사들의 궁금증을 풀어 주듯, 지셀이 중앙에 있는 단에 올라가 말했다.

"이제부터 낙법 훈련을 실시하겠다."

그러자 기사들은 더욱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낙법 정도는 다들 한두 가지는 익히고 있었다. 마나 연공법만 몰랐을 뿐, 내내 싸움질만 하던 용병들이니 당연한 일이다.

기사들은 피식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희 낙법 할 줄 압니다!"

"에이, 우리 너무 무시하신다."

"우리도 기본적인 건 다 할 줄 안다고요."

그러자 지셀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 내가 가르쳐 주는 건 무조건 익히고 있어야 해. 잔말 말고 따라 하도록."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지셀은 단에서 직접 뛰어내리며 시범을 보여 줬다.

한쪽 팔과 어깨로만 착지해, 바로 몸을 굴려 충격을 흘리는 측방 낙법의 일종이었다.

그걸 본 기사들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에이, 이제 우리도 마나 쓸 수 있는 기사인데 멋없게 그게 뭡니까?"

"맞습니다. 그거 너무 허접해 보입니다. 쓸 일도 없을 거 같은데요?"

"기사가 품위 없이 땅을 막 데굴데굴 구르는 거.... 그건 좀 구린 듯?"

"다른 걸로 알려 주시면 안 됩니까? 측방 낙법도 좀 멋진 거 많지 않습니까."

기사가 된 뒤로 속에 헛바람이 든 자들이 입을 모아 떠들었다.

누구나 바라던 마나까지 익혔으니 이제 겉멋 좀 부리면서 살고 싶은데, 하필이면 저렇게 보기 흉한 기술을 알려 주다니.

모양새가 웃겨 보이기도 했지만, 저런 허접한 기술을 쓸 일도 없을 것 같았다.

어물쩍 반발하는 기사들에게 지셀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진짜로 살아남는 데 필요한 기술은 별로 예뻐 보이지 않는다. 효율이 우선이거든. 다들 한 번씩 해 봐라."

동작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기에 기사들은 쉽게 따라 했다.

단이 겨우 사람 키 정도 되는 높이였기에 위험할 일도 없었다. 그들은 그냥 기초 훈련인 줄 알고 편하게 훈련에 임했다.

지셀은 주위를 돌아다니며 기사들의 자세를 확인하다, 자세가 틀린 자를 발견하면 직접 교정해 주었다.

원래 몸을 쓰던 자들이고 다른 낙법도 알고 있었던 덕분에 새로운 방식에도 금세 익숙해졌다.

"흠, 좋군. 다들 빠르게 익혔어."

지셀의 말에 기사들은 크게 웃었다. 이런 건 정말 초보들이나 할 만한 훈련이었다.

"영주님, 이건 훈련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하루도 안 걸리는 훈련이 어디 있습니까?"

"아, 우리 영주님 심심하셨나 보다. 그냥 솔직하게 말씀하시지."

"오랜만에 한잔할까요?"

대부분 용병이었다 보니, 기사가 된 뒤에도 건들거리는 태도는 쉽게 바뀌지 않았다.

길리언이 인상을 쓰며 나서려 하자 지셀은 웃으며 손을 저었다.

"됐다. 노는 건 나중에 하도록 하지. 조금 더 익숙해지도록 연습해라. 앞으로 자주 써야 할 테니까."

기사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이런 걸 뭐 자주 씁니까? 낙법이라기에는 팔에 오는 충격이 조금 큰데요. 다른 자세는 안 알려 주시나요?"

낙법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싸울 때 어떤 방향, 어떤 자세로 넘어지거나 떨어질지는 순전히 운에 따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지셀이 알려 준 낙법은 효과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셀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내가 알려 주는 건 이거 하나다. 나머지는 너희들이 쓰고 싶은 걸 써라."

왜 이런 안 좋은 낙법을 가르치는지, 왜 다른 낙법은 가르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기사들은 반문하지 않았다.

그저 몸을 회복 중이니 심한 훈련은 안 시키는 모양이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금세 익숙해진 기사들은 단 위에서 대충 떨어지며 옆으로 굴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셀은 대기하고 있던 사용인들에게 말했다.

"단을 조금 더 높여라."

미리 준비시켜 두었던 듯, 나무로 만든 낮은 단이 원래의 단 위에 올라갔다.

높이가 조금 더 높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위협적인 수준은 아니었다. 기사들은 이번에도 어렵지 않게 성공했다.

오히려 높이가 높아지니 더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마음을 아는 듯, 지셀이 다시 말했다.

"다시 단을 조금 더 높여라."

확실히 아까보다 더 재미있어졌다. 그간 쉬느라 심심했던 기사들은 즐겁게 훈련에 임했다.

그런데 잠시 뒤에도 같은 말이 이어졌다.

"조금만 더 높여 봐."

"한 번 더 올려."

"옳지, 조금만 더."

"그냥 확 더 높여라."

어느 순간부터는 마나를 쓰지 않으면 버틸 수 없을 정도로 높이가 높아졌다.

높다랗게 쌓인 단들을 보며 기사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처음에는 단을 잡고 올라가고, 중간에는 짧은 사다리를 이용했다. 하지만 이제는 긴 사다리를 사용해야 올라갈 수 있을 정도였다.

마나가 없는 보통 사람이라면 떨어지는 순간 팔다리가 박살 날 것이다.

"...."

기사들의 머릿속에 온갖 의문이 휘몰아쳤다.

도대체 왜 저렇게 높은 곳에서 떨어져야 하는 걸까? 저런 높이에서 떨어지는데 낙법이란 게 의미가 있는 걸까?

다들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자 지셀이 재촉하듯 말했다.

"뭐 해? 계속 훈련해야지. 왜 구경만 하고 있어?"

기사 중 하나가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영주님, 아무래도 낙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높이가 아닌 거 같은데요."

"무슨 소리야? 다들 이제 마나 쓸 수 있잖아. 이 정도는 아직 안전해."

"마나로 몸을 보호하는 게 전제라면 낙법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래야 버틸 수 있으니까. 떨어지는 순간 지면에 닿는 쪽 팔과 어깨에 모든 마나를 집중시켜라. 마나로 특정 부위를 강화하는 것도 겸사겸사 연습하는 거야."

눈치 빠른 기사 하나가 떠듬거리며 물었다.

"그, 그러면 다른 낙법이 필요 없다는 이유가...."

지셀은 기특하다는 듯 기사를 보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높은 높이에서 떨어지면 다른 방식은 의미가 없지. 하지만 내가 알려 준 낙법을 쓰면 딱 한쪽 팔만 박살 나고 일어나서 검을 들고 싸울 수 있다."

언제나 억울하면 못 참는 고든이 벌떡 일어나 외쳤다.

"아니, 이런 훈련이 왜 필요한데요! 거인하고 싸우는 것도 아니고!"

"대결에서 쓰려고 하는 게 아닌데?"

"그럼 뭔데요?"

"성벽에서 뛰어내리거나 떨어질 때를 대비해서 하는 훈련이지."

"...."

성벽은 위에서 지키라고 올라가는 거지, 뛰어내리라고 올라가는 게 아니다.

낙법이고 나발이고, 성벽에서 뛰어내리면 높은 확률로 적에게 포위되어 죽게 된다.

아무래도 영주가 예전 전쟁에서 몇 번 뛰어내리더니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그거.... 꼭 해야 합니까? 높은 곳에서 떨어질 일이 있습니까?"

다른 기사의 물음에 지셀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싸우다 보면 무슨 일이 생길지 아무도 모르는 거지. 그런 일에 대비해서 훈련을 하는 거다. 조금이라도 생존 확률을 높이고 싶으면 미리 연습하는 게 좋아."

"끄응...."

기사들은 지셀의 말에 반박하지 못하고 하나둘 단에 오르기 시작했다. 기사들의 낯빛은 하나같이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이제는 처음처럼 여유 있게 웃으며 훈련할 수가 없었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팔뿐만 아니라 다른 곳도 박살이 날 수도 있었다.

곳곳에서 떨어지는 기사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으아아아! 안아 줘요!"

"너무 아프잖아!"

"우리는 초급 기사라고요!"

아무리 마나를 쓸 수 있어도, 초급 기사인 이들이 버틸 수 있는 높이에는 한계가 있었다.

거기다 그들이 익힌 연공법의 특성상 마나를 전부 쓰면 피를 토하게 되니, 마나를 아껴서 땅에 부딪히기 직전에만 순간적으로 쓸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마나 운용 능력도 빠르게 늘고 있었지만, 반대로 몸과 정신은 다시 피폐해져 갔다.

"으으, 내 팔이 보라색으로 변하고 있어."

"이게 진짜 효과 있는 거 맞아? 그냥 우리를 다 성벽에서 밀어 버릴 계획인 게 아닐까?"

기사들은 곡소리를 내며 훈련을 이어 갔다. 다들 한쪽 팔이 피멍으로 물든 지 오래였다. 자칫 낙법에 실수한 이들은 몸 전체가 시퍼렇기도 했다.

그나마 실전이 아니기에 지셀이 어느 정도 높이를 조절해서 피멍 정도로 끝난 것이었다.

그렇게 며칠간 구른 기사들은 마침내 '한쪽 팔만 부서지고 살아남기' 낙법을 완벽하게 익힐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다음 훈련을 진행한다. 조금 더 실전에 가깝게 말이지."

"예?"

지셀이 기사들을 끌고 간 곳에는 정말 높은 단이 세워져 있었다.

그 높이는 단은 일반적인 성벽 수준이 아니라, 왕도 카르데니아의 성벽 정도로 아주 높았다.

기사들은 단을 올려다보고 확신했다.

초급 기사 수준인 자신들은 여기서 떨어지면 무조건 죽는다고.

당연히 극렬한 반응들이 튀어나왔다.

"영주님! 여기서 떨어지면 낙법이고 뭐고 못 버팁니다!"

"우리 그냥 다 죽는 겁니다!!"

"뭐가 또 마음에 안 드시는 건데요!"

지셀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부드럽게 말했다.

"괜찮아. 저기서 어떻게 그냥 뛰어내려? 나 그렇게 무모한 사람 아니야. 줄을 내려 줄 테니 그걸 타고 빠르게 내려가는 연습을 하는 거다."

"아하, 그렇구나."

기사들은 그제야 조금 안심했다. 줄을 타고 성벽을 오르내리는 것은 흔하면서도 중요한 훈련이었으니 지셀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셀은 단의 최상층에 길게 뻗은 발판을 놓고 능숙하게 긴 줄을 묶어 아래로 늘어트렸다.

"자, 한 명씩 타고 내려가라."

펜리스 성벽에서도 몇 번 해 본 것이기에 기사들에게는 그다지 어려운 훈련은 아니었다.

차이점이라면 허공에 줄 하나만 믿고 매달린 터라 발을 디딜 곳이 없고, 너무 높아서 조금 무섭다는 것 정도?

첫 번째로 호명된 기사가 줄을 잡고 빠르게 내려갔다.

익숙해서 쉽게 내려가는 게 아니라, 무서운 걸 조금이라도 빨리 끝내려는 의도였다.

열심히 내려가던 기사는 어느 순간 움직임을 멈추고 식은땀을 흘렸다.

'줄이... 짧다? 왜 짧지? 이런 건 짧으면 안 되는 거잖아?'

아직 땅에 닿으려면 한참 남았는데 줄이 좀 짧았다.

기사는 잽싸게 다시 올라가며 외쳤다.

"영주님! 줄이 짧아요! 뭔가 문제가 있는 거 같습니다!"

위쪽에서 지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문제없어. 그게 맞아. 줄 끝까지 내려가면 배운 대로 뛰어내려."

사자는 자기 새끼를 강하게 키우려고 절벽에서 굴린다고 한다. 하지만 기사는 사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싫어요! 여기서 어떻게 뛰어내려요! 이런 훈련은 도대체 왜 하는 겁니까!"

"다 필요하니까 하는 거다. 어? 이놈 봐라? 올라와? 안 뛰어내리고 올라와?"

지셀은 잽싸게 허리춤에서 검을 뽑았다. 그간 좀 배웠다고 기사가 너무 빠른 속도로 올라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휘릭!

지셀이 검을 휘두르자 줄이 끊어지고, 줄을 타고 올라오던 기사가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 진짜 좆같아!"

입으로는 욕을 하면서도, 기사는 순식간에 낙법 자세를 잡았다. 그간의 지옥 훈련 덕분이었다.

위기 상황에 몸이 저절로 움직이는 거.... 솔직히 훈련은 짜증 나지만 효과는 정말 확실했다.

기사는 배운 대로 온 힘을 다해 마나를 팔에 집중했다.

안 그러면 진짜 죽는다. 목숨을 건 위기에 부딪히자 작은 깨달음마저 얻어 버렸다.

화아악!

기사는 고도로 정신을 집중해 시간이 느려지는 현상까지 체험했다.

콰아아아앙!

"크어억!"

기사는 지면과 충돌하자마자 몸을 데굴데굴 굴리며 최대한 충격을 해소했다.

과연 살아남으려면 겉멋 따위는 필요 없었다. 분하지만 지셀이 한 말이 맞았다.

고통이 어마어마했지만 팔이 부러지지는 않았다. 정말로 그간의 훈련이 도움이 된 것이다.

"사, 살았다! 살았다고! 으하하하! 쿨럭!"

기쁜 웃음을 터트리던 기사는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팔이 부서지지 않았다고 해도, 땅에 부딪힌 충격이 없는 건 아니다.

충격을 완전히 흘리려면 더 많은 마나와 섬세한 기술이 필요하지만, 초급 기사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지셀은 뒤에 대기하고 있는 기사들을 돌아보며 웃었다.

"봤지? 다 되잖아? 다음."

기사들은 눈물을 흘리며 새로 맨 줄을 잡고 내려갔다.

이런 비정상적인 영지의 기사 따위는.... 정말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렇게 기사들은 다시 피를 토하는 훈련을 시작했다.

178화 드디어 그 시기가 왔군. (1)

기사들이 훈련에 전념하는 동안 열기구의 보강 작업도 끝이 났다.

자존심을 한번 구겼던 갈바릭은 가슴을 탕탕 치며 호언장담을 했다.

"확실하게 보강이 끝났소이다! 이번에는 절대 사고 날 일이 없을 거요! 어디서 공격을 받거나 꼴통 같은 놈들이 이상한 짓만 안 한다면 말이오!"

과연 드워프들이 자존심을 바짝 갈아 넣었는지, 보강된 열기구는 무사히 비행을 마쳤다.

하지만 드워프들에게 맡긴 건 열기구뿐만이 아니다.

지셀은 나머지 것들에 대해서도 바로 확인에 들어갔다.

"블러드 퓌톤으로 제작한 언더 아머는? 그것도 급하다고 했는데."

"그건 다 끝났소이다. 자르기가 어찌나 힘들던지, 마법사들까지 엄청나게 고생했소."

드워프들은 마법사들과 함께 블러드 퓌톤의 가죽으로 목과 가슴, 팔과 다리 등 중요한 부분을 가릴 수 있는 옷을 만들었다.

한정된 재료로 수백 벌을 만들어야 했기에 전신보다는 급소를 가리는 것에만 중점을 두었다.

갑옷 안에 받쳐 입으면 어지간한 병사들에게는 죽지 않을 것이다.

블러드 퓌톤의 가죽은 마나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자르기가 무척이나 힘든 소재니까.

"역시 드워프들이야. 기사들이 쓸 갑옷도 다 끝났겠지?"

"부족한 수량은 다 채웠소. 차라리 그게 제일 쉽더군."

갈바릭의 말에서는 절절한 진심이 묻어났다.

갑옷을 만드는 일이 정말로 제일 쉬웠다. 가장 많이 해 본 일이기도 했고, 이미 있는 갑옷을 정비하거나 부족한 수량만 채우면 됐기 때문이다.

지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들에게 보급할 기본적인 무구는 완성됐다.

하지만 그렇다고 준비가 다 끝난 건 아니다.

"열기구도 어떻게 보강해야 할지 알았으니 추가 생산을 해야지. 언제 적들이 쳐들어올지 몰라. 최대한 빨리 만들어야 해."

드워프들도 늦게 도착했고, 중간에 자재가 부족했던 탓에 일을 시작한 날짜 자체도 지셀이 당초 계획했던 기간보다 조금 늦어졌다.

그런데 열기구를 보강하느라 시간을 또 잡아먹었다.

일정이란 게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다 보니 완벽하게 맞추는 건 쉽지 않다.

그런 것까지 고려해 일부러 시간을 촉박하게 잡았지만, 항상 시간에 쫓기는 지셀로서는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일정이 마음에 안 드는 건 갈바릭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역사에 남을 만한 기구를 만들었는데, 좀 쉬었다 하면 안 되오? 일이 너무 많아서 다 죽게 생겼소이다! 자꾸 이러면 우리 파업할 거야! 노동자의 휴식 권리를 보장하라! 보장하라!"

"안 돼. 시간 없다고 몇 번이나 얘기했잖아. 대신 이번 일정만 맞추면 휴가 줄게."

"휴가? 진심이오?"

휴가라는 말에 갈바릭이 눈을 빛냈다.

바빠서 잠도 제대로 못 자는 상태에서 휴가라는 말을 들으니 가슴이 뛰었다.

신분만 노예인 게 아니라 진짜 노예처럼 구르고 있는 그에게, 휴가라는 건 절대 거절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얼마나 줄 생각이오?"

"일주일 주지. 우리 영지에서 휴가를 일주일이나 받는 건 흔한 일이 아니야."

갈바릭은 바로 협상에 들어갔다.

"한 달 주시오!"

솔직히 지금 드워프들이 제일 일을 많이 하고, 중요한 일도 모조리 도맡은 건 맞기에 지셀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러면 2주를 주지."

"3주는 되어야겠소!"

"일주일을 주겠다."

"왜 다시 줄어?"

보통 이러면 3주엔 안 맞춰 주더라도 2주보다는 더 줘야 하는 거 아닌가?

듣도 보도 못한 생소한 협상법에 갈바릭이 당황하자 지셀이 툭 던지듯 말했다.

"사흘 정도로 할까? 안 쉬면 더 좋고."

"...일주일 받겠습니다."

갈바릭의 말투가 다시 공손해졌다.

일주일이라도 약속받아서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하지만 눈물이 나는 건 참을 수가 없었다.

'그냥 2주라고 할 때 받을걸.'

그래도 일주일쯤 쉬면 숨은 돌릴 수 있을 거다. 일이 지금보다 더 늘어나지 않는다면.

휴가를 핑계로 일을 더 받기 전에 갈바릭은 잽싸게 도망가 버렸다. 지셀을 완전히 파악한 것이다.

갈바릭이 떠나자 지셀은 그간 이룬 성과를 다시 한번 점검했다.

영지로 돌아온 뒤 정말 정신없이 움직이며 많은 것을 준비했다.

이주민이 유입되고, 거주지와 공방, 농경지가 확대되었다. 다른 시설도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드워프들이 들어온 뒤 다양한 장비와 도구들도 금세 양을 불렸다.

기사단 훈련도 순조롭게 진행 중이다.

지셀이 미래의 지식을 이용해 돈을 불리고, 사람들이 몸을 갈아 넣을 정도로 열심히 일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모두가 힘을 합한 덕분에 평범한 영지의 발전 속도를 몇 배나 뛰어넘는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이것으로 충분한가?

지셀은 고개를 저었다.

'부족하다.'

만약 다른 영지였다면 즐거운 마음으로 발전을 즐겼을 것이다.

하지만 싸워야 할 강력한 적이 있는 지셀에게 그런 마음은 사치였다.

지금도 지셀의 재산은 빠르게 줄어들고 있지만 거둬들이는 세금은 거의 없었다.

펜리스 영지의 생산품이라고 해 봐야 화장품이 전부였다. 공방에서 생산되는 것은 대부분 전쟁 물자고, 식량도 다른 데 팔지 않고 오히려 사들이는 중이다.

초급 기사들이 순식간에 늘어났지만, 달리 말하면 군사력 또한 기사단 하나가 전부다.

수천, 수만의 병력을 가진 대영주들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것이다.

그래서 지셀은 쉴 수가 없었다.

'절대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된다. 피해를 최소화해야 해.'

지금 펜리스 영지는 극단적으로 개발을 추구하고 있어, 한 번만 삐끗해도 무너질 것이 확실했다.

클로드의 말처럼 이런 아슬아슬한 상태로는 정상적인 영지라 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이번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무척 중요했다.

완벽한 승리, 아니면 완벽한 패배.

둘 중 하나일 뿐이다.

충분한 전력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기려면, 적이 예측할 수도 없는 위험한 작전을 감행해야 한다.

'준비는 거의 다 끝났다. 싸워야 할 시기도 곧 올 거야.'

생각을 정리한 지셀은 밖으로 나와 하늘을 바라보았다.

'더워지는군.'

아직은 다들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북부는 본래도 날씨가 변덕스럽게 바뀌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래를 겪고 온 지셀은 지금의 날씨 변화가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다.

때가 가까워졌음을 느낀 지셀은 가신들을 소집해 새로운 지시를 내렸다.

"지금 하고 있는 공사는 당분간 전부 멈춘다."

모두가 당황해서 서로를 돌아보았다.

시간이 없다고 재촉할 때는 언제고, 이젠 또 공사를 멈추라고 하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일을 안 해도 돼서 좋은 기분보다는 또 무슨 사고를 칠까 두려운 마음이 앞섰다.

클로드가 겁먹은 어조로 조심스레 물었다.

"갑자기 공사를 멈추라뇨? 다음 이주민들을 받으려면 거주지 작업은 더 속도를 내야 합니다."

"아예 그만둔다는 게 아니야. 드워프들은 열기구 제작에 집중하고, 나머지는 모두 수로와 저수조 건설 작업, 저수지 확장 작업에 투입한다."

클로드와 가신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수로와 저수지는 농사에 꼭 필요한 시설이기도 하고, 예전부터 지셀이 몇 번이나 강조했었기에 새로운 경작지를 작업할 때도 제일 먼저 처리했던 작업이었다.

수로와 저수지는 굳이 늘리지 않아도 충분히 현재 생산량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정비되어 있었다.

영지의 작업 현황을 꿰뚫고 있는 클로드가 다시 물었다.

"지금도 혹시 모를 재난에 대비해서 여유분을 충분히 갖춰 둔 상태입니다. 이곳뿐만 아니라 각 마을의 공동 수조에도 물을 저장해 두었고요."

그 말에 지셀은 고개를 저었다.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알고 있지만, 전생에 이곳 상황을 직접 확인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기록으로만 봤을 뿐.

직접 체감해 보지 않은 사건은 무조건 기록으로 예상한 것보다 더 크게 준비해야 한다.

"여유 있어서 나쁠 건 없잖아? 이미 기반은 닦아 둔 상태니 늘리는 건 어렵지 않고 말이야. 주변 강줄기를 모두 끌어 쓴다 생각하고 작업해. 하는 김에 페르디움에도 자금과 인부를 지원해 줄 테니 몇 개 더 만들라고 해."

그 말에 클로드는 고개를 몇 번 끄덕이고 물러났다.

물을 다스리는 건 영주의 중요한 책무 중 하나다. 특히 북부와 같이 척박한 곳이라면 중요성은 더 커진다.

과할 정도로 해도 나쁠 건 없다는 뜻이다.

지셀은 클로드에게 물었다.

"식량 상황은 어떻지? 계속 구매하고 있나?"

그 말에 클로드가 아주 질렸다는 표정을 대놓고 지었다.

그놈의 식량 얘기는 회의 때마다 들었다. 이제 식량의 '식'자만 나와도 토할 거 같았다.

"창고가 터질 거 같아서 계속 확장 중입니다. 식량이 너무 남아돌아서 돌아다니는 동네 개들하고 고양이들까지 살이 뒤룩뒤룩 쪘을 정도입니다. 이번 수확까지 끝내면 영주님은 북부의 식량왕으로 불릴 겁니다."

영지민들이야 항상 굶다가 배불리 먹게 되었으니 사기도 높아지고, 영주를 칭송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클로드의 입장에서는 그저 좋다고 넘어갈 수만은 없었다. 너무 많은 돈이 식량 구매로 쓰이고 있다. 이제는 돈이 아까울 지경이었다.

클로드도 처음에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수성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많은 식량이 필요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많아도 너무 많았다. 양으로만 따지면 10년도 넘게 성에서 버틸 것이다. 그전에 썩어서 다 버리겠지만 말이다.

가신들이 몇 번이나 말려도 지셀이 귓등으로도 듣지 않으니 이 부분은 더 말해 봤자 피곤할 뿐이었다.

지셀은 고개만 몇 번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3천 명의 병력에 맞춰 보급을 준비해라. 곧 출정할 것이다."

그 말에 클로드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영지의 병력은 급조한 기사단을 합해도 500여 명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우리 영주님, 산수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구나!'

* * *

펜리스 영지에서 대규모로 식량을 사들이고 있다는 소식은 해럴드의 귀에도 들어갔다.

"뭐? 지셀 그놈이 계속 식량을 구매하고 있다고?"

"네, 덕분에 북부의 식량값이 많이 오른 상태입니다. 다른 지역에서 오는 상단들의 식량들까지 마구잡이로 구매하고 있습니다."

부관의 보고에 해럴드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하하하하, 멍청한 놈! 곧 수확이 끝나면 가격이 내려갈 텐데, 그것도 못 기다린다는 건가! 룬스톤과 화장품으로 돈 좀 벌었다고 아무 생각 없이 쓰는구나!"

"아무래도 전에 농업을 개선한다고 영지를 뒤집더니, 오히려 수확량이 줄어든 모양입니다. 거기에 이주민까지 몰려오니 식량이 굉장히 부족한 거 같습니다."

"당연하지. 애초에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예상했던 결과지. 굶기 싫으면 식량을 계속 구매해야 할 거다."

지셀이 영지를 봉쇄한 덕분에 아직은 펜리스 영지의 식량 생산량에 관한 소문이 퍼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다들 지셀의 농업 개선이 실패한 줄로만 알고 있었다.

'수확량 증가는 나조차 성공하지 못한 문제인데 그런 애송이가 성공할 리가 없지.'

해럴드는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가뜩이나 거슬리던 놈이 큰 손해를 보았다 생각하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부관에게 물었다.

"우리 식량은 여유분이 얼마나 남아 있지?"

"저번 전쟁 때 보급은 디갈드가 맡았었기에 아직 충분합니다. 이번에 수확까지 하면 꽤 많이 남을 겁니다."

"좋군. 그러면 우리 영지의 여유분도 이번에 비싸게 팔아 치워라. 그 건방진 놈한테 손해 좀 단단히 끼쳐 줘야겠어."

"알겠습니다. 우리 걸 먼저 구매하도록 상단들에게 손을 좀 쓰겠습니다."

부관의 말에 해럴드는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데스몬드는 레이폴드와 함께 북부 최고의 식량 생산량을 자랑하는 영지이다.

주 수입원 중의 하나가 식량 판매였으니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하늘이 돕는군. 저번 전쟁 때문에 예산이 빠듯했는데 말이야."

해럴드가 보기에는 정말 하늘이 도운 기회였다.

페르디움에 패배한 여파가 아직도 남아 있는 상황에서, 다시 전력을 정비하고 아멜리아를 지원하느라 돈을 어마어마하게 쓰고 있었다.

그뿐인가? 북부의 영지들을 손에 넣으려고 뿌리는 돈도 만만치 않았다.

이러니 아무리 데스몬드 영지라도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다.

만약 공작가와 카발디 백작이 지원해 주지 않았다면 무장을 다시 맞추지도 못했을 것이다.

가장 주력 상품인 식량은 수확기가 다가오니 비싸게 팔기도 힘들었다.

그런데 이런 천금 같은 기회가 올 줄이야.

부족한 자금도 채우고 지셀에게 손해도 입힐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었다.

"역시 그간 성공했던 건 그저 운이 좋아서였군. 애송이 주제에 너무 설치긴 했지. 현실의 벽에 부딪히니 한계를 보이는군. 식량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모르고 있으니 화장품 따위의 사치품이나 만들고 수도에 놀러 갔겠지."

해럴드는 공작가도 극찬한 화장품을 애써 폄하했다. 그는 그래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자존심이 상해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식량만 휘어잡으면 모두의 숨통을 압박할 수 있어. 이 북부에서는 식량이 가장 중요하다. 화장품 따위보다 훨씬."

북부의 식량 상황은 데스몬드와 레이폴드가 좌지우지한다.

다른 지역에서 구해 오면 운송비가 붙어 훨씬 더 비싸지니 당연한 일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식량으로 전부 목을 죄고 싶지만, 경쟁자인 레이폴드가 있어 그 방법은 쓰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아멜리아의 반란만 성공하면 북부의 식량은 우리가 완전히 쥘 수 있다."

약점이 잡힌 북부의 영주들은 싸우지도 않고 무릎을 꿇을 것이다.

그렇기에 공작가와 해럴드도 아멜리아의 반란에 가장 신경 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만 아니었다면 지셀 따위, 진작에 어떤 명분이든 만들어서 쓸어 버렸을 것이다.

"후후, 지금은 식량을 팔아 줄 테니 배불리 먹고 있어라. 때가 되면 잡아먹어 줄 테니."

해럴드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느낌이 아주 좋았다.

179화 드디어 그 시기가 왔군. (2)

아멜리아는 악티움 상단의 상단주, 콘라드의 말을 듣고 인상을 찌푸렸다.

"이번에도 펜리스에서 식량을 요청했다고?"

"네, 그렇습니다."

"그 정도로 펜리스와 페르디움의 상황이 안 좋은가?"

"그건 아닐 겁니다. 이미 북부의 영주들이 지원해 준 것도 있고, 친왕파에서도 지원을 받지 않았습니까? 굳이 예측해 보자면 이주민들 때문에 미리 확보하려는 거 같습니다."

"친왕파가 얼마나 지원해 줬지?"

"갑자기 결정된 일이라 정확한 수량은 알 수 없습니다만.... 그래도 브랜포드 후작이 나선 거니 올해를 넘기기에는 충분할 겁니다."

콘라드는 펜리스와 거래를 하면서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마다 아멜리아에게 보고했다. 이번 건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식량을 팔았을 때는 별생각이 없었지만, 상황을 살필수록 뭔가 이상했다.

친왕파에서 꽤 지원을 많이 받았을 텐데도, 여전히 식량을 미친 듯이 사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부의 식량 가격이 오를 정도로 식량을 사 가는 양이 늘어나니 보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멜리아는 눈을 내리깔고 고민에 잠겼다.

'이번에는 무슨 생각인 거지?'

곧 수확기가 다가온다. 아무리 척박한 북부라도, 수확기 직후에는 식량 가격이 내려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미 충분한 식량을 보유한 지셀이 그 잠깐도 기다리지 못하고, 가격이 오를 정도로 계속 사들이고 있는 이유가 신경이 쓰였다.

"다른 상단들의 행보는 어때?"

"신이 나서 식량을 팔고 있습니다. 곧 가격이 떨어질 게 분명하니까요. 그전에 한몫 잡아 보겠다는 심산이죠."

다른 지역의 상단들이 식량을 팔 때 반드시 들르는 지역이 바로 북부다.

운송비를 제하더라도 이곳에서는 다른 곳보다 훨씬 높은 가격에 팔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예년보다 가격이 더 올랐으니, 상인이라면 누구나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할 게 뻔했다.

잠시 침묵하던 아멜리아가 다른 걸 물었다.

"요새 날씨는 어떻지? 올해 농사가 어떨 거 같아?"

"작년보다는 조금 더 건조해지기는 했지만, 크게 우려할 정도는 아닙니다. 이런 날씨는 자주 있었으니까요."

"흠...."

북부에는 흉년이 자주 드는 편이었지만, 레이폴드와 데스몬드는 그런 일이 드물었다.

흉년이 들어도 다른 영지에 내다 팔 여유분이 없는 정도일 뿐, 영지민들은 굶을 일이 없었다.

그렇기에 콘라드도 '우려할 정도는 아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대답을 듣고도 한참을 고민하던 아멜리아는 곧 고개를 들고 단호하게 말했다.

"식량 판매는 중지하도록. 펜리스뿐만이 아니라 다른 곳에도 전부. 일단 따로 쌓아 두도록 해. 아무도 모르게 말이야. 다른 지역의 상단에서 들어오는 것도 여력이 되는 대로 사 두고."

갑작스러운 명령에 콘라드는 살짝 당황하며 답했다.

"곧 수확을 시작하면 가격이 금방 떨어질 겁니다. 지금 팔아야 이득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것이야 비축해 두면 그만이지만, 다른 상단의 것까지 구매하는 건 손해가 큽니다."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해."

"...혹시 무엇 때문에 그러시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언제부터 내 말에 토 달면서 일했지?"

"...죄송합니다. 바로 시행하겠습니다."

잔뜩 굳은 콘라드의 얼굴을 보고 아멜리아는 혀를 찼다. 제법 아끼는 수하이니 이 정도는 설명해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확인할 게 있어."

"무엇을 말입니까?"

"그놈이 지금까지 성공한 게 단순히 운 덕분이었는지, 아니면 정말 실력으로 얻은 결과인지 말이야. 손해는 감수할 테니 얘기한 대로 진행해."

"...알겠습니다."

콘라드는 설득하기를 포기했다. 아멜리아는 한번 결정을 하면 어지간해서는 뒤집지 않는 사람인 걸 잘 아는 탓이다.

아무리 아끼는 수하라 하더라도, 그녀가 결정한 일에 토를 달며 선을 넘으면 목숨으로 죄를 물은 적도 많았다.

명령이니 어쩔 수 없이 따라야겠지만, 큰 손해를 보겠다는 생각이 들어 콘라드는 속으로 혀를 찼다.

콘라드가 쓰린 속을 부여잡고 물러난 뒤에도 아멜리아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지셀.... 이번에는 무슨 꿍꿍이인지 한번 지켜보도록 하지.'

* * *

3천 명분의 보급품을 준비하라는 말에 클로드가 배를 잡고 웃었다.

"영주님! 우리 병력은 기사를 포함해도 500명밖에 없습니다! 3천이라니요. 으하하하! 웬디야, 집사장이 숫자는 제대로 안 가르쳐줬나 봐! 아악!"

벨린다한테 한 대 얻어맞고 나서야 진정한 클로드는 아픈 눈두덩을 비비며 다시 물었다.

"진짜 3천 명 맞습니까?"

"응."

"우리 병력은 그만큼이 안 되는데요?"

"전에도 말했잖아. 내가 알아서 구해 오겠다니까."

"어디서요? 페르디움에는 그만한 병력도 없지만, 있다 해도 북방 경계 때문에 뺄 수가 없을 텐데요."

"아, 괜찮아. 빌려줄 곳 많아. 곧 여기저기서 빌려준다고 할 거야."

"끙.... 또 시작이시네."

특별한 관계이거나, 마땅한 대가를 치르지 않고서야 병력을 빌려주는 영주는 없다. 영지민까지 넘겨주었던 친왕파도 병력만큼은 지원을 안 해 주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영주는 병력을 구할 수 있다고 저렇게 자신만만하게 얘기하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제 따지는 것조차 피곤해진 클로드는 확인차 물었다.

"그런데 우리 수성하기로 한 거 아니었나요? 제 착각이었나요?"

"난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그 열기구 때!"

클로드는 소리 높여 따지다 말을 멈췄다.

생각해 보니 영주가 그런 말을 한 적은 정말 없었다. 혼자서 그냥 설레발치면서 그렇게 믿었을 뿐이다.

"...네, 그냥 제 착각이었네요. 그러면 병력은 언제 빌려 오실 겁니까?"

"곧. 거의 다 됐다. 조금만 더 기다려."

클로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영지에 돌아왔을 때부터 말하던 그놈의 '시기'가 다가온 모양이었다.

도대체 어떤 시기이기에 그렇게 자신만만했던 건지 두 눈 똑바로 뜨고 확인할 생각이었다.

만약에 별게 아니면 정말 온 힘을 다해서 놀려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래도 정말 3천의 병력을 빌려 올 수만 있다면....'

엉터리라고는 해도, 잠깐이나마 기사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인원이 어림잡아 4백 명이다.

거기에 3천의 병력이 추가된다면 승산이 대폭 올라갈 것이다.

'물론 카발디 백작이 이쪽 머릿수에 겁먹고 농성에 들어가면 그때는 장담할 수 없겠지만....'

클로드는 복잡해지는 생각을 끊어 내듯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어떤 것도 확실치가 않았다.

"알겠습니다. 일단 3천 명에 맞춰서 출정 준비를 마저 해 놓겠습니다. 식량은 넘쳐나니 큰 문제 없을 겁니다."

"좋아,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으니 다들 맡은 임무에 소홀함이 없도록 해라."

가신들은 고개를 숙이며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영주의 말투를 듣자니 정말 얼마 지나지 않아 출정할 거 같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영주가 이것저것 준비시키고, 병력을 빌려 온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자세한 내용을 들은 적이 없다 보니 그저 모든 게 혼란스럽고 믿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이들이 무슨 힘이 있겠는가? 까라면 그냥 까는 거지. 총관 정도나 되니까 영주 앞에서 깐족거리는 거다.

불안해하는 사람들을 보며 지셀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알게 될 거다.'

지셀이 예상한 대로, 시간이 지날수록 펜리스 영지의 사람들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뭐야? 요새 왜 이렇게 덥지?"

"요 몇 년간 이 정도로 심한 적은 없었는데?"

"이러다 가뭄이 심하게 오는 거 아니야?"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날씨에 민감하다. 날씨는 그 해의 수확량이 얼마나 되는지와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하루가 다르게 공기가 뜨거워지고 건조해지자 영지민들은 덜컥 겁을 먹었다.

언제나 굶고 살다 이제 겨우 배를 채운 이들에게 가뭄은 악몽 같은 기억을 되살리는 최악의 재난이었다.

다들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서는 매일같이 경작지를 둘러보기 바빴다.

그러나 그 걱정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아, 괜한 걱정이었네. 그냥 좀 더운 것뿐이었나 봐. 몸이 허해졌나?"

"밀이 아주 그냥 쌩쌩한데? 곧 다시 수확할 수 있겠어."

영주가 만든 괴물 밀은 날이 덥든 건조하든 상관없이 아주 우람하게 잘 익어 있었다.

솔직히 지금 당장 수확해도 괜찮아 보일 정도였다.

얼마 전에 수로 정비도 다시 한 덕분에 물을 대는 것 또한 별문제가 없었다.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넘어간 펜리스 영지와 다르게 다른 영지는 곳곳에서 난리가 나기 시작했다.

정보 수집을 담당하고 있는 로웰은 매일같이 대전에 나가 주위 영지의 상황을 보고했다.

"날씨가 심상치 않습니다. 큰 가뭄이 올 징조로 보입니다. 각 지역의 영주들도 다들 걱정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초기에는 조금 우려스럽다는 수준으로 보고가 끝났다. 거기다 밀도 잘 자라고 있으니 가신들은 날씨 문제를 크게 체감하지 못했다.

저수지와 저수조에는 아예 강줄기를 끌어와 물을 가득 채워 놓았으니 물 걱정도 없었다.

다들 그냥 날씨가 좀 더운 걸 가지고 로웰이 호들갑을 떠는 줄로만 여겼다.

하지만 로웰의 보고는 날이 갈수록 과격해져 갔다.

"강의 수위가 빠르게 낮아지고 있습니다! 작물들의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상단들이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식량이 모자라는 모양입니다."

"시, 식량 가격이 폭등하고 있습니다!"

이전보다 훨씬 심각해진 보고 내용에 가신들은 입을 쩍 벌리고 지셀을 바라보았다.

펜리스 영지는 식량을 쌓아 둘 곳이 부족해 창고까지 대규모로 증축했는데, 다른 영지에서는 식량이 모자라서 난리란다.

정말로 흉년이 들었다면 그럴 만도 했다. 이미 북부의 모든 식량은 펜리스 영지에서 웃돈까지 주고 다 빨아들인 상태니까.

다른 상단이 구하고 싶어도 구할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펜리스에서만 지내는 가신들은 로웰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바로 전날만 해도 식량을 너무 많이 쌓아 둬서 '다 먹지도 못하고 썩어서 버리게 생겼다' 하며 영주를 욕했는데, 갑자기 전국에 식량이 모자라게 되었다니?

'우리는 괜찮은데? 거짓말하는 거 아니야? 영주가 거짓말하라고 시켰나?'

'상태가 안 좋은 작물들도 가격이 폭등했단 말이지. 설마 진짜 가뭄이 들었단 말인가?'

반신반의하던 가신들은 며칠 뒤 새로 올라온 보고에 확신하게 되었다.

"각지의 기근석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가뭄이 확실합니다! 심각한 상황입니다!"

가뭄을 알리기 위해 강에 박아 놓은 기근석이 모습을 드러냈다면, 강물까지 바닥을 보이고 있을 정도로 상황이 심각하다는 뜻이다.

이 정도의 가뭄은 척박한 북부에서도 수십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재난이었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북부 외 다른 지역도 가뭄에 시달리고 있었다.

"왕국 전역이... 이상 기후가 왕국 전역을 덮쳤습니다. 정상적으로 작물을 수확하기 어려울 거 같습니다.... 루타니아뿐만 아니라 우리 왕국에 인접한 타국의 영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최악의... 가뭄입니다."

이 정도면 단순한 흉년이라 넘길 수가 없었다.

가뭄으로 왕국 전역에 흉년이 드는 건 정말 드문 일이었다.

가신들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펜리스에는 식량도 잔뜩 쌓여 있고 물도 너무 많아서 도무지 체감이 안 됐는데, 다른 영지는 전부 가뭄 때문에 난리가 났다고 한다.

영주가 악바리처럼 사람들을 굴렸던 게 꼭 이 사태를 예견하고 그랬던 것 같았다.

클로드는 당혹감과 불안감으로 손을 부들부들 떨며 물었다.

"여, 영주님, 이게 무슨 일이죠? 어떻게 된 겁니까? 설마 진짜 가뭄이 들 거라고 예상하신 겁니까?"

모두가 클로드의 말에 동감하며 지셀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영주가 한 일은 어디서 주워들은 게 있었다거나, 운이 좋았다는 정도로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날씨를 예견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미래를 예견하는 건 전설에나 나오는 예언자에게나 가능한 일이었기에.

모두가 놀라는 와중에도 지셀은 턱을 괴고 눈을 감은 채 웃기만 했다.

뭐라 말해야 할까? 내가 사실은 미래를 안다고?

실제로 그리 말할 수는 없겠지만, 상상만 해도 재미있었다.

지셀이 웃기만 하자 클로드가 대답을 재촉했다.

"아니, 웃고만 있지 마시고요! 가뭄이 들 걸 도대체 어떻게 안 겁니까?"

한참 뜸을 들이던 지셀은 툭 하니 던지듯 답했다.

"날이 더워서."

"네?"

"날씨가 너무 더우면 가뭄이 오잖아. 얼마 전부터 계속 더웠고. 아니야?"

"아니, 그냥 날씨가 덥다고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준비를 시킨다고요? 그게 말이 됩니까!"

"아, 더운데 어쩌라고. 난 더운 거 싫다고."

"...."

지셀의 억지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까, 날씨가 좀 덥다고 혼자 호들갑을 떨며 준비한 게 우연히 맞아떨어졌다는 뜻이지?'

걱정을 심각하게 달고 사는 사람이나 가능할 법한 발상이다.

이것도 믿기 힘든 건 마찬가지지만, 미래를 예견했다는 것보다는 그나마 신빙성이 있었다.

만약 그 예상이 틀렸다면 펜리스 영지는 썩은 식량을 잔뜩 떠안고 큰 손해를 볼 뻔했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욕이 나오지만 말이다.

잠시 사람들의 침묵을 즐기던 지셀이 로웰에게 물었다.

"페르디움의 상태는 어떻지?"

"어, 음.... 다른 곳과는 좀 다릅니다."

"자세히 말해 봐."

로웰은 보고서를 뒤적거리더니 짜게 식은 표정으로 답했다.

"페르디움의 총관 호메른 남작은 영지 상황을 보고받더니...."

"받더니?"

"흠흠. '아, 올해도 농사 망쳤네. 그런데 어차피 우리는 매년 농사 망쳤잖아? 지금은 식량 많으니까 괜찮아. 떨어지면 대공자한테 또 달라고 하지 뭐.' ...라고 말했습니다."

"...그래. 그쪽 저수 상황은 어떻지?"

"저수량이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마수의 숲에서 흘러나오는 강줄기와 저희가 만들어 준 저수조 덕분에 그럭저럭 버틸 만한 모양입니다. 다른 영지보다는 상태가 낫습니다."

"좋아, 큰 문제는 없을 거 같군."

페르디움은 원래도 없이 살던 곳이라 이번 가뭄도 '항상 이랬는데' 하는 정도로 넘길 수 있었다.

가뭄이 길어지면 물이 부족해지긴 하겠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버틸 수는 있을 것이다.

솔직히 저수조나 수로를 더 많이 만들어 주고 싶었지만, 페르디움은 아버지의 영지니 참견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페르디움이 그럭저럭 버틸 만하다는 걸 확인하고 안심한 지셀은 다른 걸 물었다.

"다른 영지들의 상황은?"

"최악입니다. 레이폴드와 데스몬드는 평년 대비 절반도 수확하지 못할 거 같습니다. 그나마 그쪽은 비축해 둔 게 꽤 있을 테니 버티겠지만... 다른 곳에서는 아사자가 속출할 거라 예상됩니다."

"흠, 그건 안타까운 소식이로군."

"다들 식량을 구하려고 난리입니다. 지금 팔면 열 배 이상의 가격을 받을 겁니다."

로웰의 말에 가신들은 모두 눈을 빛냈다.

원래부터 식량 생산성이 좋지 않은 북부다. 이 가뭄을 버텨 낼 리가 없었다.

반면 펜리스에는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많은 식량이 쌓여 있다. 게다가 곧 괴물 밀을 심어 둔 밭에서 또 엄청난 양의 식량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이 기회를 잘만 이용한다면 어쩌면 왕국에서 제일을 다투는 부자 영지가 될지도 모른다.

가신들의 희망 어린 눈빛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지셀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팔 생각이 없다."

클로드는 문득 지셀이 매번 읊었던 '시기'라는 말을 떠올렸다.

"영주님 혹시... 전쟁을 하기 좋은 시기라는 게...."

작물이 말라비틀어지고 있으니, 카발디 영지에서도 병사들을 제대로 먹이지 못할 것이다.

굶주린 병사들은 사기가 떨어져 제대로 싸우지도 못할 게 뻔했다.

지셀은 씨익 웃으며 답했다.

"그래, 드디어 그 시기가 왔군."

180화 드디어 그 시기가 왔군. (3)

가뭄이 오기 전, 지셀은 브랜포드 후작에게 서신을 하나 보냈었다.

[날씨가 더운 걸 봐서는 곧 가뭄이 올 거 같습니다. 미리 식량을 비축하고 대비하십시오. 준비 안 하시고 후회하셔도 전 모릅니다.]

깔끔하다. 구구절절한 인사치레도 없이 정말 본론만 딱 쓰인 것이, 편지가 아니라 쪽지에 가까웠다.

당연히 서신을 받은 브랜포드 후작의 감상도 깔끔했다.

"...이놈은 갈수록 미쳐 가는 건가?"

다짜고짜 식량을 모아 대비하란다. 그것도 별다른 이유 없이 그냥 더워서 그렇단다.

이런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는가. 그런 사람은 사기꾼한테 사기나 안 당하면 다행일 일이다.

'이놈이 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걸까?'

브랜포드 후작은 지셀의 서신을 흔들며 집사에게 물었다.

"다른 귀족들에게도 이 서신을 보냈나?"

"지금 파악한 바로는 에일즈버 백작가에도 보낸 걸로 보고 있습니다."

"그쪽의 대응은?"

"에일즈버 백작은 무시했지만, 백작 부인이 사재를 털어서 식량을 모으고 있습니다."

"흠.... 그 정도로 펜리스 남작을 믿는 건가?"

브랜포드 후작의 고민이 깊어졌다.

메리엘은 평범한 귀부인이 아니다. 그녀가 직접 움직였다는 건 무시하지 못할 신호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지셀의 제안을 따르는 건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만약 식량을 모아 뒀는데 별일이 안 생긴다면, 손해도 손해지만 엄청나게 비웃음을 당할 것이다.

다른 사람이 보낸 것이었다면 무시하고 그냥 편지를 찢어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보낸 사람이 하필 지셀이라, 이상하게 잡지식이 풍부한 놈이 한 말이라 무조건 무시하기도 찝찝했다.

"...회의를 준비해라. 다른 이들의 생각도 들어 봐야겠다."

그 말에 집사는 살짝 놀랐다.

브랜포드 후작은 어지간한 문제로는 회의를 하지 않는다. 그만큼 자신의 판단에 자신이 있다는 뜻이었고, 실제로도 그의 판단은 대부분 옳았으니까.

하지만 펜리스 남작이 엮이면 매번 머리가 아플 정도로 고민을 하게 된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난 놈은 난 놈이었다.

잠시 후 회의실에 모인 가신들도 상황을 전해 듣고는 대부분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다.

"가뭄의 징조는 없습니다. 수확기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설마 그사이에 별일이 있겠습니까?"

"맞습니다. 이 정도면 그냥 날씨가 좀 따뜻한 거죠. 가뭄을 걱정할 정도는 아닙니다."

"펜리스 남작이 그냥 지레 겁먹고 호들갑을 떠는 게 분명합니다."

부정적인 반응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니, 브랜포드 후작의 마음도 급격히 기울었다.

가뭄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식량을 엄청나게 쌓아 놓아야 한다.

곧 가격이 내려갈 식량을 지금 사 놓는다는 건, 혹시 지셀이 틀렸을 때 큰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렇다고 무시하기엔 또 찜찜하단 말이지....'

브랜포드 후작이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을 때, 잠자코 듣고만 있던 로잘린이 나섰다.

"식량을 구매하는 게 나을 거 같습니다."

"어째서냐?"

"펜리스 남작이 이상한 사람이긴 하지만.... 우리에게 망신을 주기 위해 그런 고약한 장난을 칠 사람은 아닙니다. 분명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을 겁니다."

"헛소리일 확률이 높다. 날씨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까."

"하지만 제 병을 고치고, 놀라운 제품을 만든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에일즈버 백작 부인께서도 그를 믿고 식량을 구매하는 것일 테고요."

"난 정확한 근거도 없이 감만 믿고 벌이는 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도 그냥 무시하기는 찜찜하신 거지요? 그 사람은 날씨만큼이나 예측이 어려운 사람이니까요."

그 말도 맞다. 도무지 제정신이라고 볼 수 있는 놈은 아니었다.

잠시 눈을 감고 고민하던 브랜포드 후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가격에 사면 자칫 큰 손해를 볼 수도 있다."

"제가 운영하는 상단의 돈으로 진행하겠습니다. 그렇다면 혹여 그가 틀리더라도 아버지가 망신당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혹시 모르니 왕실의 비축분도 미리 확보해 두겠습니다."

"네가?"

"네, 이번에 받은 투자금으로요."

로잘린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그녀는 이미 지셀에게 건네었던 30만 골드를 모두 회수한 상태였다.

귀족들에게 화장품의 일부 '수익 권리'를 10년간 넘기는 방식으로 말이다.

수도 인근부터 지점을 늘려가니 화장품 매출이 빠른 속도로 늘고 있었다. 그야말로 든든하고 망할 리가 없는 투자처였다.

브랜포드 후작가가 보증하고 인기가 엄청난 제품이니 수많은 귀족이 투자를 감행했다.

로잘린은 그렇게 순식간에 원금을 회수한 것도 모자라, 남은 돈을 다시 굴려 이득을 보고 있었다.

후작가의 가신들은 그녀의 수완을 칭송하기 바빴고, 돈에 관련된 얘기라면 모두 그녀에게 한 수 접어 주었다.

가뭄에 대비하는 것도 어찌 보면 투자요, 돈에 관련된 이야기이니 로잘린의 발언에 더욱 힘이 실렸다.

브랜포드 후작도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네가 적정하다고 생각하는 선에서 식량을 구매하도록 해라. 필요하다면 내 이름을 팔아도 좋다."

"감사합니다."

"만약 지셀 놈의 경고가 그냥 헛소리라면 어떻게 식량을 처리할 생각이냐?"

"델파인 공작가와 대립하고 있는 이상 군량미를 쌓아 둬서 나쁠 건 없어요. 그래도 남는다면 빈민들에게 나눠주고 후작가의 명성을 쌓는 방법도 있고요."

"흠, 나쁘지는 않지만.... 손해는 확실하겠구나."

"아니면 몇 년간 페르디움의 지원품으로 밀어 넣어도 괜찮겠지요. 왕실과 친왕파의 지원 자금을 저희가 대신 받는 거예요. 식량밖에 못 받아서야 페르디움에 큰 도움은 안 되겠지만, 그건 펜리스 남작이 책임져야 하는 일이죠."

딸의 입에서 여러 방책이 거침없이 흘러나오자 브랜포드 후작은 흡족해하며 미소를 지었다.

병을 고치고 난 뒤로 그녀의 상재가 더 빛을 발하고 있었다.

상황을 꿰뚫는 판단력도 좋고 후속 조치도 마음에 든다.

로잘린 덕분에 후작가의 힘은 지금도 더 강해지고 있었다.

정말 지셀 그놈이 찾아와서 다행....

'어우,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속으로 기겁하며 고개를 몇 번이나 저은 브랜포드 후작은 곧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일은 로잘린에게 일임할 테니 모두 그리 알도록 하라. 집사는 친왕파의 귀족들에게 펜리스 남작의 말을 전하거라. 강요는 아니니 각자의 판단에 맡긴다는 말도 함께 전하도록."

"알겠습니다."

후작의 명령에 따라 친왕파 귀족들에게 정보가 전달되었지만, 실제로 식량을 구매하는 귀족들은 몇 되지 않았다.

북부와 달리, 친왕파에 속한 귀족들은 식량 부족으로 고민해 본 적이 별로 없다. 그러니 이번에도 지셀의 의견을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원래부터 식량 비축을 계획하고 있던 소수의 귀족을 제외한다면, 로잘린과 메리엘만이 적극적으로 식량을 구매할 뿐이었다.

귀족들 대다수가 지셀을 비웃었지만, 얼마 후 정말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날씨가 갈수록 이상해지고 있습니다."

"폭염입니다! 강물이 마르고 있습니다!"

"왕국 전역이 가뭄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흉년이 확실합니다!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왕실의 대신들마저 혼비백산이 되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날씨를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미 강도 호수도 다 말라 버렸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수확기가 바로 코앞인데도 다들 발만 동동 구를 뿐 어떠한 대책도 세우지 못했다.

그 와중에 브랜포드 후작가의 가신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만약에 지셀이 말해 주지 않았다면, 로잘린이 그 말을 믿고 준비하지 않았다면 그들 또한 엄청난 손해를 볼 뻔했다.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한 게 아쉬울 정도였다.

"도대체 펜리스 남작이 이걸 어떻게 알았단 말입니까?"

"평생 농사를 짓고 사는 농부들도 몰랐습니다. 날씨가 너무 갑자기 변했어요."

"점성술의 대가라는 소문도 있습니다. 별을 읽을 수 있다는 말이지요!"

호들갑을 떠는 가신들 사이에서 브랜포드 후작은 미간을 좁히고 생각에 잠겼다.

수많은 마법사들과 학자들도 이번 가뭄을 예측하지 못했다. 그 정도로 날씨가 급격하게 변했기 때문이다.

'이놈이 도대체.... 어떻게 이걸 안 거지?'

이상한 놈인 건 알고 있었지만, 미래를 예견하는 능력까지 지니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직접 겪고서도 믿지 못할 상황에 혀만 차던 브랜포드 후작의 머릿속에, 순간 소름 끼치는 가정이 떠올랐다.

'하마터면.... 우리 모두 죽을 뻔했구나.'

만약 미리 대비하지 않았다면 친왕파의 영지는 전부 식량 부족으로 시름에 잠겼을 것이고, 공작가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셀 덕분에 조금이나마 버틸 힘을 얻게 됐다.

자원이 넘치는 공작가는 큰 피해 없이 수습이 가능할 테지만, 공작가를 따르는 영주들은 당분간 힘이 빠질 게 분명했다.

'다행이군. 다시 정비할 시간을 벌었어.'

이 재난을 버티기만 한다면, 공작가에게 점점 밀리고 있는 흐름을 조금이나마 만회할 수 있었다.

'강제로라도 식량을 사들이라고 명령했어야 했는데.'

친왕파 귀족들이 대부분 지셀의 말을 무시했지만 탓할 수는 없었다. 누구라도 믿기 힘든 얘기였고, 후작 본인도 반신반의했으니까.

그래도 왕실과 후작가, 에일즈버 백작가가 엄청난 식량을 쌓아 두었으니 굶어 죽는 상황까지는 가지 않을 것이다.

'설마 이것까지 예상한 건 아니겠지?'

지셀이 만들어 준 절호의 기회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자꾸만 고개를 들었다.

만약에 친왕파의 귀족들이 전부 단단히 준비했다면 공작파와 대등한 세력을 이뤘을지도 모른다.

이 점이 너무나도 안타깝고 아쉬웠다.

그놈에게 미리 들었음에도 고작 이 정도밖에 준비를 못 했다는 사실이.

'아니, 아니지. 지셀 그놈도 확신이 없었을 것이다. 진짜로 이런 사태를 예견했다면 더 강하게 나왔겠지.'

브랜포드 후작은 아쉬운 마음을 털어 냈다.

자칫 친왕파가 공작가에게 완전히 밀릴 수도 있었는데, 이 정도로 끝났으니 다행인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델파인 공작, 꽤 아쉽겠구려. 하늘이 우리를 돕는 모양이오. 웬 이상한 놈을 보내서 말이오.'

* * *

루타니아 왕국의 분위기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이상 기후로 인해 대부분의 영지에서 농사를 망쳤다. 왕국 역사상 최악의 흉년이라고 모두가 울부짖을 정도였다.

펜리스처럼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가뭄에 대비한 곳은 거의 없었다.

식량 가격이 미친 듯이 폭등했고 사람들의 절망 어린 목소리가 왕국 곳곳에 울려 퍼졌다.

지셀이 회귀하기 전에는 역사서에까지 기록되었던 '대기근'의 시작이었다.

'흠....'

지셀은 로웰의 보고를 받으며 생각에 잠겼다.

누구는 재앙이라 부르고 누구는 대환란이라 부르던, 대륙의 모든 이가 고통에 빠지는 시기.

전생에는 이번 가뭄이 환란의 전조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았다.

루타니아 왕국에서만 일어난 재난이 아니라, 대륙 곳곳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 말이 맞는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아무런 피해를 보지 않은 곳도 분명 존재했으니까.

대환란의 시기를 떠올리자 묘하게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역시 하루도 방심해서는 안 돼. 그날까지 더욱더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해.'

그가 아는 한, '그날'은 조금 더 시간이 지난 뒤, 은밀하고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그 충격에서 버티려면 지금보다 더 확실하고 철저하게 준비해야 했다.

물론 그 전에 델파인 공작한테서 살아남아야겠지만 말이다.

정기 보고를 마친 로웰에게 지셀이 나지막이 물었다.

"친왕파의 식량 상황은 어떻지?"

"왕실과 브랜포드 후작, 에일즈버 백작이 어느 정도 확보한 상태긴 합니다만.... 다른 귀족들은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그건 좀 아쉽군."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결과다. 이런 엄청난 일이 일어난다고 말해 봐야, 순순히 믿을 사람은 없으니까.

지셀 자신도 다른 사람을 설득할 자신이 없었기에 그냥 결론만 대충 적어 보낸 것이었다.

적어도 로잘린과 메리엘이라면 속는 셈 치고 움직일 거라 생각했다. 두 사람은 이득에 관해서는 감이 상당히 좋은 편이었으니까.

역시 그의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이번 일로 인해 다른 귀족들도 다음부터는 자신의 말을 쉽게 무시할 수 없을 테니 상황이 그렇게까지 나쁘진 않았다.

'공작파에 속한 귀족들은 빠르게 회복할 거야.'

전생에는 이번 가뭄 이후 친왕파 세력이 엄청나게 궁지에 몰리게 된다.

똑같은 재난 상황이라도 공작가 측은 비축해 놓은 것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아 그만큼 회복도 빨랐기 때문이다.

비축 물량만으로 부족한 부분들은 다른 왕국과의 교역을 통해 빠르게 메꿔 나갔다.

심지어 공작가는 좋은 기회를 살리기 위해, 그쪽 세력의 위험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마자 피해를 감수해 가며 친왕파를 몰아붙였다.

회복하기는커녕 안정되지도 않은 친왕파는 순식간에 세력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두 세력간 대립 구도의 승세는 이때부터 완전히 공작가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친왕파가 조금 더 버틸 수 있겠지. 공작가도 고민을 할 테고 말이야.'

지셀 덕분에 친왕파도 상당히 많은 식량을 보유하게 됐다. 덕분에 공작가도 전생처럼 곧바로 친왕파를 밀어붙이기는 힘든 상태가 되었다.

이제는 누가 먼저 피해를 복구하느냐의 싸움이었다.

그 때문에 현재 공작가와 브랜포드 후작은 각자의 파벌에 식량을 풀고 사태를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친왕파와 공작파 간의 마찰도 잠깐이지만 소강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드디어 지셀이 원하는 판이 펼쳐진 것이다.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돼. 남들이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움직여야 한다.'

적이 준비를 다 끝낼 때까지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생각은 전혀 없다.

로웰이 물러간 뒤, 혼자 남은 지셀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철광산을 차지하기 위해, 적들이 혼란한 틈을 타서 먼저 공격하는 건 맞다. 장기 목표를 위한 계획의 일환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직 그런 대의로만 움직이는 건 아니었다.

'카발디 백작.'

전생에 공작가는 데스몬드 백작에게 페르디움을 멸망시키라고 명했다.

그리고 데스몬드 백작은 자신의 병력을 아끼기 위해 다른 영주들을 이용했다.

그중 한 곳이 바로 카발디 백작령이다.

페르디움을 멸망시키기 위해 데스몬드에게 지원군을 보내고, 페르디움이 철광석을 수급하지 못하도록 막았던 곳.

전생의 원수 중 하나이자 미래의 확실한 적.

과거를 떠올릴수록 지셀의 얼굴에 새겨진 미소는 점점 잔혹하게 일그러졌다.

"드디어... 죽일 때가 왔구나."

그래, 한 놈씩 차근차근 잡아 죽일 시간이 왔다.

181화 어때? 금방 구했잖아? (1)

루타니아 왕국 전역이 가뭄으로 고통받고 있었지만, 북부는 다른 지역보다 상황이 더 처참했다.

북부 최대의 곡창 지대를 끼고 앉은 레이폴드와 데스몬드가 식량 수출을 전면 금지했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척박하고 가난한 지역이라 그 피해는 더 컸다. 중앙 귀족들도 이번에는 자기들 앞가림하느라 바빠서 지원을 바라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아사자가 속출하는 상황에 영주들이 해결책을 찾아 고심하고 있을 때, 한 가지 소문이 빠르게 퍼져 나갔다.

"펜리스 영지에 식량이 그렇게 많다더라."

"이주민들 때문에 가격이 오를 정도로 식량을 쓸어 갔다는 말은 들었지."

"그 정도면 분명 여유분이 남아 있을 거야. 그거라도 얻어 내야 해."

북부의 모든 눈이 펜리스 영지로 향했다.

펜리스의 영주는 젊은 애송이고 군사력도 형편없는 곳이라 보기만 해도 군침이 절로 흘렀다.

그곳만 차지하면 당장 이 힘든 시기를 넘길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펜리스 영지를 먹고 싶어도 영주들은 전쟁을 걸 수가 없었다.

"젠장! 그 애송이 놈의 뒤에는 브랜포드 후작이 있잖아!"

"운도 좋은 새끼! 화장품 때문에 그런 거물의 총애를 받다니!"

"도대체 친왕파는 그런 놈을 왜 받아들인 거야?"

브랜포드 후작과 친왕파가 지셀의 뒤에 있기 때문이었다. 펜리스를 친다는 건 그들도 적으로 돌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위험을 감당할 만한 영주들은 북부에 없었다.

전쟁을 일으켰다가는 자멸할 게 뻔히 보이니 영주들은 대신 거래를 제안해 보기로 했다.

힘이 곧 정의인 듯 구는 영주들치고는 대응 방식이 드물게 평화적이었다.

그렇게 각지의 영주들과 수많은 단체에서 펜리스로 사신을 보냈다.

당연히 그들은 쉽게 식량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제 아비를 생각해서라도 우리를 극진히 대접할 수밖에 없을 거야. 가뭄이 끝나면 다시 우리한테 지원을 받아야 하니까."

"그렇지, 북부는 언제나 끈끈한 의리로 맺어진 사이 아닌가! 솔직히 그간 페르디움은 우리 덕분에 먹고 살았지."

"양심이 있으면 우리한테 절을 해도 모자라고말고! 에헴!"

페르디움을 지원하는 것은 야만인들에게서 지켜 주는 데 대한 당연한 대가인데도, 영주들은 마치 자신들이 너그럽게 도와준 것처럼 생색을 내고 있었다.

그것도 겨우 숨만 쉴 수 있을 정도로 쥐꼬리만큼만 지원했으면서 말이다.

심지어 저번 전쟁에서는 도와 달라는 페르디움의 요청을 모른 척하기까지 했지만, 그런 것은 이미 그들의 머릿속에서 지워져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오만한 판단은 펜리스에 도착하자마자 박살 나기 시작했다.

클로드는 사신들을 맞이하며 먼저 양해를 구했다.

"안타깝지만 손님이 너무 많이 오셔서 묵을 곳이 없습니다."

"숙소가... 없다고요?"

"네. 대신 아주 크고 멋지고 감탄이 절로 나오는 천막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곳에서라도 묵으시겠습니까?"

클로드의 말에 사신들은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어찌 사신을 이렇게 대접하시오! 나는 영주님에게 모든 권한을 받은 사람이란 말이오!"

"이건 법도와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입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무례란 말이오! 본 영지를 무시하는 것이오?"

격렬한 항의에도 클로드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귀만 팠다. 진짜 묵을 곳이 없는데 어쩌란 말인가?

작은 성이 미어터질 정도로 사신단이 몰려오는데 숙소가 남아날 리가 없었다.

클로드도 처음에는 허름한 사용인들의 숙소라도 내주려 했지만, 지셀이 반대했다.

― 속이 시커먼 외부인들 때문에 우리 사람들을 힘들게 할 수는 없지. 정 들일 자리가 없으면 밖에 천막이라도 쳐 줘라.

영주가 그렇게 말하는데 자신이 뭘 어쩌겠는가. 그런데 계속 항의를 받으니 이제는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아, 저도 이러고 싶진 않지만 정말 자리가 없는데 어떻게 합니까? 지금 손님들이 너무 많이 몰려와서 어쩔 수가 없다니까요? 무슨 유명 맛집도 아니고, 왜 이렇게 많이 왔대? 아휴, 진짜 귀찮아 죽겠네."

총관이라는 놈이 이렇게 배 째라는 식으로 구니, 사신들도 달리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다.

"끄으응... 일단 그렇게 합시다."

조금 늦게 도착한 사신들은 정말로 천막을 치고 밖에서 지내야 했다.

크기만 크고 안에는 아무것도 없는 천막에서 지내자니 감탄은커녕 매일같이 욕만 나왔다.

불편한 잠자리 탓에 몸이 뻐근한데 지셀은 이들을 바로 만나 주지도 않고 기다리게만 했다.상상도 못 했던 대우에 그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애송이 주제에 식량 좀 쌓아 뒀다고 하늘 높은 줄 모르는구나!"

"귀족의 예의도 모르는 망나니 놈 같으니라고! 얼마나 더 오만방자하게 나오나 보자!"

불평불만이 터져 나왔지만 돌아가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

당장 펜리스 영지가 아니면 식량을 구할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쉬운 쪽이 이 악물고 참는 수밖에.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사람이 모일 만큼 모였다 생각될 즈음 지셀은 이들을 동시에 한자리로 불렀다.

대전이 좁아 사신들은 수행원도 떼어 두고 책임자 몇 명만 겨우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럼에도 대전은 시장통처럼 북적거렸다.

사신들은 미칠 듯이 불쾌했지만, 최대한 감정을 숨겼다.

지셀은 그들을 슥 둘러보고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어요?"

"...???"

장사치와 같은 지셀의 말에 사신들은 다들 할 말을 잃었다.

본래 그들이 세운 계획에 따르면, 적당히 설득과 협박을 곁들여 애송이에게서 어떻게든 식량을 잔뜩 뜯어내야 했는데.

'아니, 이런 분위기에서 어떻게 협상을 한단 말인가?'

'젠장! 얼마를 불러야 하지? 다른 놈들도 지금 식량을 잔뜩 노리고 있을 텐데?'

'미치겠군. 가격 경쟁을 해야 할 판이야.'

무릇 영지 간의 거래는 비밀리에 이루어지는 법이다. 그래야 다른 영지와 거래할 때도 '저기는 이 조건에 해 줬잖아요' 하는 뒷말이 나오지 않는 법이니까.

그런데 이렇게 여러 영지의 사람들을 한꺼번에 모아 두면 협상이고 뭐고 다 필요 없다.

제일 값을 높이 부르는 놈이 우선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당황하는 것도 잠시, 분위기가 경매로 넘어가기 전에 사신 중 몇몇이 서로 눈짓을 교환하고는 앞으로 나섰다.

험한 북부에서 지금까지 주둥이로 먹고산 자들다운대응이었다.

"크흠, 짐바르 영지에서 왔습니다. 저희는 정식으로 펜리스 영지에 식량 지원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요청?"

"그렇습니다. 저희는 오랜 시간 동안 페르디움에 많은 지원을 해 왔습니다. 그 덕에 남작님께서도 이리 성장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하실 수는 없으실 겁니다. 지금은 저희의 사정이 어려워진바, 그간 저희가 보여 드린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사신은 구구절절 자신들이 얼마나 페르디움을 위해 힘을 써 왔는지 말을 이었다.말이야 길고 길었지만 요약하자면 '우리 덕에 그간 먹고 살았으니 이제는 좀 내놔라'라는 뜻이었다.

다른 사신들도 그에 맞춰 지셀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북부는 언제나 고통을 같이 나눠서 지고 살았습니다. 페르디움도 저희와 함께했기에 그간의 어려움을 버틸 수 있었던 겁니다."

"이제는 남작님이 베푸셔야 할 때입니다."

사신들은 앞다투어 '아무튼 네가 책임져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식량을 구하러 온 자들의 발언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건방진 태도였다.

오랫동안 페르디움을 상대할 때 주도권을 잡고 있었던 버릇이 그대로 나오는 것이었다.

지금이야 입장이 조금 바뀌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들이 다시 우위에 설 수밖에 없다.

가난한 페르디움은 자신들에게 지원을 받아야 먹고살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 앞으로의 관계를 생각하면 지셀이 모질게 나오지 못할 거라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그 판단은 지셀이 서늘하게 웃으며 내뱉은 말로 완전히 박살 났다.

"그건 우리 아버지한테 가서 말해야지, 왜 나한테 대가를 달라고 해? 내가 지원을 받는 것도 아닌데."

지셀의 말에 잠깐 당황하던 사신들은 다시 강하게 나갔다.

"남작님이 그곳의 후계자이지 않습니까? 미래에는 어차피 저희 쪽에서 지원을 받아야 하실 텐데요."

"그렇습니다. 가뭄은 잠깐이지만 차후에는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그간 맺어온 동맹의 의리를 모른 척하지 마시지요. 우리는 유서 깊은 동맹 사이 아닙니까."

"지원이 필요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정말로 지원이 끊기면 남작님뿐만 아니라 페르디움 백작님도 곤란해질 겁니다."

사신들은 스스로 한 말에 설득되어 다시 자신감을 찾았다.

그래, 이 애송이가 지금 식량을 갖고 우위에 서려 해도 그건 잠깐일 뿐이다.

가뭄이 해결되면 그다음은? 자신들의 지원이 없이 감히 북방을 혼자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고작 그 정도 생산력과 병력으로?

어림도 없는 소리. 그게 가능했다면 페르디움이 그렇게 힘들게 살 리가 없다.

자신만만한 사신들의 얼굴을 노려보며 지셀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렇게 동맹이니, 의리니 강조하시는 분들이 전쟁 때는 우리를 모른 척하셨다?"

"...."

그 말에 사신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솔직히 페르디움 따위야 누가 차지하든지 상관없었다. 그런 전쟁에 끼어들어 병력과 자원을 소모할 멍청이는 없었다.

원래 정치란 게 그런 거다. 이 애송이가 아직 어려서 그런 걸 모르고 과거의 일로 꽁해 있는 것이다.

사신들이 반박하려고 할 때 지셀이 툭 던지듯이 말했다.

"2만 골드."

"네? 2만 골드라니요? 혹시 식량값입니까?"

"아니, 식량과 상관없이 페르디움의 지원 영지들은앞으로 매년 2만 골드씩 나한테 방위비를 내도록. 내지 않거나 납부가 밀리는 영지에는 야만인들이 들어갈 수 있게 길을 뚫어 유도하겠다."

페르디움 백작이 그런 걸 허락할 리가 없지만, 다른 영지 사람들은 백작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모른다.

그러니 지셀의 선언에 다들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그, 무, 무슨 소리를!"

2만 골드라는 방위비도 어처구니가 없지만, 길을 뚫겠다고 협박을 하다니! 완전히 미친놈이었다.

'아니 애초에, 방위비를 받아도 페르디움에서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왜 자기가 받겠다고 해? 너 뭐 돼?'

사신들은 당혹감과 굴욕감이 섞인 표정으로 즉시 반발했다.

"불가합니다! 우리는 이미 충분한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페르디움 백작은 변경을 지켜야 하는 변경백입니다. 그게 의무란 말입니다!"

"그건 왕국법으로 규정되어 있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많은 혜택을 받는 거 아닙니까!"

사신들의 거센 항의에도 지셀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혜택은 쥐뿔, 다들 우리 위험할 때 모른 척했잖아."

"그러니까 그때는 다 사정이...."

"한낱 용병도 한 일에 대한 대가를 받는다. 앞으로는 희생에 따른 정당한 대가를 받을 생각이니 따지지 말도록. 그간 허접한 지원 가지고 우리 영지 휘두르는 거 아주 지겨웠거든."

"그 무슨 무례한 소리를...!"

"그만, 더 이상 떠들면 식량 거래도 하지 않고 쫓아내겠다. 말 길게 하기 귀찮다. 아, 내가 진짜 착해졌다니까. 이렇게 말이 많아도 다 상대해 주고."

"이, 이익!"

쫓아낸다는 협박에 사신들은 일단 입을 닫았다. 당장은 식량을 얻어 내는 게 더 중요했으니까.

하지만 속에서는 열불이 올라 참을 수 없었다. 몇몇 이들은 서로 눈짓을 하며 이를 갈았다.

'두고 보자, 이번 가뭄만 해결되면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

'애송이 놈이 친왕파를 믿고 너무 까부는구나. 방위비? 우리가 그까짓 걸 낼 거 같으냐?'

'우리가 힘을 합치면 네놈 따위 천천히 말려 죽이는 건 일도 아니다.'

펜리스가 얼마나 빨리 발전하고 있는지 모르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군사력도 약하고 별 볼 일 없는 영지에서, 그저 이주민 때문에 식량을 쌓아 둔 게 운 좋게 터졌을 뿐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다른 사신들은 그들이 당하는 꼴을 보고 침묵을 지켰다.

그나마 페르디움 핑계를 댈 수 있는 자들도 저리 당하는데, 아무 관계도 없는 자신들은 나서 봐야 엄한 꼴만 보게 될 것이다.

조용해진 대전을 둘러보며 지셀은 히죽 웃었다.

"자, 그러면 이제 거래를 시작해 볼까?"

눈치를 보던 사신 한 명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잽싸게 손을 올렸다.

"밀 한 자루에 10실버를 드리겠습니다!"

기근 전 밀 한 자루가 평균 3실버였다. 수확기를 거치면 1실버까지 떨어진다.

10실버면 몇 배나 높게 부른 것이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끼어들며 외쳤다.

"우리는 11실버를 내겠습니다!"

"우리는 12실버!"

"13실버를 내겠습니다!"

다들 마음이 급해 앞다투어 가격을 올리기 시작했다.

펜리스 영지에서 식량을 쌓아 놨다는 소문은 무성했지만, 여유분이 정확히 얼마나 있는지 모른다.

혹시 다른 쪽에서 먼저 사가면 자신들이 살 분량이 없을까 봐 너도나도 목소리를 높였다.

시장통처럼 시끌벅적해진 대전 한가운데에서, 누군가가 나지막이 말했다.

"1골드."

"...!"

어마어마한 가격에 다들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로브를 입은 한 중년 남자가 거만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를 바라본 지셀은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182화 어때? 금방 구했잖아? (2)

남자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즐기다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진홍의 마탑에서 온 글렌입니다. 식량은 가능한 만큼 전부 구매하도록 하지요."

그의 정체를 듣고 사람들은 더욱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진홍의 마탑은 현재 북부 제일의 마탑이라 불리는 곳이다.

거기다 글렌 본인도 꽤 유명하다. 5서클에 이른 마법사로 마탑의 대외적인 일을 도맡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글렌은 이 정도면 되지 않겠느냐는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과연 다른 사람들은 마른침만 삼킬 뿐 제대로 입을 열지 못했다.

'밀 한 자루에 1골드를 내겠다고? 북부 제일의 마탑이라더니, 정말 돈이 많긴 많은가 보구나.'

'미친놈들! 그 가격에 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고! 돈 많다고 자랑하는 거야?'

가난한 북부의 영지들로서는 도저히 맞출 수 없는 가격이었다.

어떻게든 다음 수확기 때까지 버티려고 식량을 사는 건데, 그 가격으로 샀다간 수확기가 오기도 전에 영지가 파산하고 말 것이다.

하지만 마탑은 사람 수도 상대적으로 적고, 돈도 넘쳐 나게 많으니 여력이 충분했다.

마탑에서 모든 권한을 부여받은 글렌은 자신만만하게 말을 이었다.

"아, 룬스톤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그것도 전부 우리가 사겠습니다."

룬스톤 얘기가 나오자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탐욕스러운 빛이 깃들었다.

'정말 이 애송이 영주가 룬스톤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지?'

'아, 그걸 진작에 뺏었어야 했는데.'

'크으, 그런 보물이 이딴 놈에게 있다니. 아깝다. 정말 아까워.'

다른 이들도 룬스톤에 대해 알고는 있었다. 당시 소문을 들은 영주들이 다들 그걸 어떻게 뺏어 올까 고민했었기 때문이다.

지셀이 마탑하고만 거래를 해서 확신하지는 못해도, 아예 근거 없는 소문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물론 브랜포드 후작이 지셀의 후견인이 됐다는 소식을 듣고 다들 포기했지만 말이다.

글렌은 지셀의 대답을 기다리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지금은 무조건 식량이 최고야. 시간이 지나면 돈을주고도 못 구한다. 겸사겸사 룬스톤도 얼마나 남아 있는지 봐야겠어. 돈이야 나중에 다시 뺏어 올 수 있으니까.'

겉으로 드러나지만 않았을 뿐이지, 진홍의 마탑은 델파인 공작가가 키운 곳이다.

당연히 데스몬드 백작이 언젠가는 지셀을 칠 걸 알기에 돈을 쓰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공작가와의 관계를 제외하고서라도, 진홍의 마탑 입장에서 지셀은 무척이나 거슬리는 놈이었다.

'적염의 마탑이 아직도 버티고 있어. 이놈이 룬스톤을 제공해 주는 게 분명해.'

그들은 적염의 마탑을 망하게 하려고 많은 돈을 들여 숨통을 조이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서 룬스톤을 구했는지 아직도 멀쩡하게 활동을 하고 있으니, 진홍의 마탑으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지셀은 피식 웃었다.

'진짜 웃기는 놈들이네.'

진홍의 마탑은 어차피 공작가에서 부족한 걸 지원받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뻔뻔하게 찾아와서 식량과 룬스톤을 팔라고 하다니.

역시 여러 의미로 대단한 놈들이긴 했다.

'조금이라도 더 식량을 수급하려고 하는 거겠지. 룬스톤의 남은 양도 확인할 겸 말이야.'

룬스톤 함정에 당했으니 더 치가 떨릴 것이다. 어떻게든 남은 양은 모두 뺏고 싶을 터였다.

지셀은 눈을 가늘게 뜨고 사람들의 면면을 살폈다.

'많이도 왔네.'

진홍의 마탑처럼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은 공작가의 꼬리들이 꽤 있었다.

이미 공작가와 손을 잡은 곳, 영주도 모르게 가신들이 전부 넘어간 곳, 아니면 선만 대 놓고 간만 보는 곳 등 다양하다.

지셀은 진홍의 마탑을 포함해 공작가와 관련이 있는 영지를 모두 호명한 뒤 말했다.

"이 영지들에는 식량을 안 팔 테니 모두 돌아가도록."

글렌은 물론이거니와 호명이 된 영지 사람들은 하나같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가격 협상도 안 하고, 돈을 몇 배나 더 주겠다는데도 안 팔겠다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왜 우리한테만 안 파신다는 겁니까!"

"이유라도 말씀을 해 주십시오!"

대전을 가득 채우는 항의 소리에도 지셀은 고개를 저었다.

"돌아가, 이유는 묻지 말고. 내 마음이니까. 모두 끌어내라."

지셀이 손짓하자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호명된 사람들을 끌어냈다.

끌려가던 자들의 반응은 가지각색이었다. 협박을 하는 놈들이 있는가 하면, 인정에 호소하는 자들도 있었다.

"우리는 절대 이 일을 잊지 않을 것이오!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오!"

"브랜포드 후작을 믿고 이러시나 본데 언제까지 그렇게 할 수 있는지 두고 보겠소!"

"제발 부탁드립니다. 영지민들이 굶고 있습니다!"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선처를 베풀어 주십시오!"

가만히 듣고 있던 지셀은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라는 말에 저도 모르게 콧방귀를 뀌었다.

땅이 척박한 만큼 악덕하기로 유명한 북부의 영주들이다. 그들에게 식량을 팔아 봐야 절대 영지민들에게는 식량이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굶은 영지민들이 폭동을 일으킬까 우려하며 군대를 유지하는 데에만 신경을 쓸 게 뻔했다.

그들에게 영지민들은 노예와 다를 게 없었으니까.

페르디움이 가난해도 지금껏 버틸 수 있었던 건, 즈발터가 영지민들을 착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걸 잘 알고 있는 지셀에게 그런 호소가 통할 리 없었다.

호명된 사신들은 다 끌려갔지만 글렌은 기사들의 손을 쳐 내고 꿋꿋하게 버티며 노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보시오, 남작! 지금 진홍의 마탑을 무시하는 것이오! 내가 누구인지 정녕 모른단 말이오!"

글렌의 전신에서 험악한 기세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자신은 북부 제일 마탑의 장로다. 어지간한 귀족들도 예의를 지키고 한 수 접어 준다.

한데 한낱 남작에 불과한 애송이가 이렇게 방자하게 구니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셀의 답은 더 가관이었다.

"네가 누군데?"

"뭐, 뭐요? 나를 모른단 말이오?"

다른 지역이라면 몰라도, 이 북부에서 어찌 자신을 모를 수 있다는 말인가?

직접 본 적은 없어도, 마탑의 외교를 담당하는 자신의 이름을 못 들어 봤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저렇게 나온다는 건 자신과 마탑을 싸잡아 무시하는 행동이었다.

드높은 자부심에 금이 간 글렌은 지셀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런 대우는 처음이라 도무지 감정을 조절할 수가 없었다.

"남작! 다시 한번 나를 보고 똑똑히 말해 보시오. 내가 누구인지 정말 모르겠소?"

지셀은 뚱하니 그를 보며 고개를 좌우로 까닥거리다가 말했다.

"정말 모르겠는데.... 클로드, 넌 누구인지 알겠어? 유명한 사람인가?"

'아이 씨,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클로드는 곤란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글렌이 누구인지 잘 안다. 유명인들의 신상 명세를 파악해 놓는 건, 영지를 다스리는 자들의 기본 소양이니까.

아무리 막 나가는 사람이라도 영주가 그걸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저렇게 구는 건 상대방을 도발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도대체 뭘 원하는 거야?'

클로드는 한숨을 내쉬며 일단 지셀의 장단에 맞춰 주었다.

"글쎄요.... 저도 처음 듣는 이름인데.... 스크롤 파시는 분인가? 시장에서 본 거 같기도 하고.... 그런데 자의식이 좀 강하신 분 같네요. 나는 창피해서 저런 말은 못 할 거 같은데. 어우, 지금 대리 수치심 느껴서 손이 막 오그라들잖아요."

지셀은 저도 모르게 크게 웃고 말았다. 대충 이러라고 눈치를 주긴 했지만, 기대 이상의 반응이었다. 역시 깐족거리는 실력은 이놈이 대륙 최고였다.

툭.

글렌은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완전히 끊겨 버렸다. 마탑의 장로인 그는 이런 굴욕을 절대 참을 수가 없었다.

"이놈들! 감히 내가 누구인지 알고!"

구우웅!

5서클에 이른 마법사의 전신에서 무시무시한 마력이 사방으로 뿜어져 나왔다.

분노로 머리가 돌아 버린 글렌은 아예 힘으로 압박하기로 했다.

이까짓 허접한 남작령에서 누가 감히 자신을 막을 수 있다는 말인가?

"으허헉!"

주변에 있던 사신들은 그 기세에 놀라 멀찍이 물러났다.

쿠웅!

글렌이 악귀와도 같은 표정을 지은 채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그 순간.

차차창!

벨린다와 길리언, 카오르가 갑자기 나타나 글렌의 목에 검을 들이밀었다.

동시에 대전의 문을 기사들이 막았고 모두가 검을 뽑아 사방을 포위했다.

클로드는 웬디의 뒤로 잽싸게 숨었다.

"헛!"

뜨겁게 끓어오르던 글렌의 가슴이 순간 차갑게 식어 버렸다.

너무 흥분한 탓인지, 세 사람이 다가오는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만약 전쟁터였으면 바로 목이 달아났을 것이다.

'펜리스에... 이런 실력자들이 있다고?'

군사력도 형편없고 기사도 제대로 없는 영지라고 들었다. 그런데 언제 이런 실력자들을 구했단 말인가?

글렌의 목에 검을 들이댄 세 사람이 지셀을 보며 입을 열었다.

"도련님, 죽여도 돼요?"

"영주님, 명만 내려 주십시오."

"야, 다들 봤어? 내가 제일 빨랐지? 그렇지? 나 존나 쩔지 않냐?"

글렌은 몸이 굳어 입술만 깨물 수밖에 없었다.

확연한 살기가 느껴진다. 만약 여기서 한 발자국만 더 나가도, 아니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목숨을 잃을 게 분명했다.

"이, 이 미친놈들이 감히...."

마탑의 장로에게 이따위로 구는 놈들은 난생처음 보았다.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못 이겨 몸을 떨고 있는 와중에, 지셀의 너털웃음이 들려왔다.

"더 할 건가? 나야 환영인데. 주변에 증인도 많고 말이야."

그 말에 글렌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렇게 무시를 당한 건 처음이라 너무 흥분했다. 만약 정말로 손을 썼다면 상당히 문제가 커졌을 것이다.

아직은 아니다. 자신들은 공작가의 숨겨진 칼이다. 친왕파와 싸울 때,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나 그들의 뒤를 칠 비밀 무기.

지금은 친왕파의 눈에 들어서는 안 된다.

개인적인 판단에 따라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언제 공작에게 목이 날아갈지 모른다.

"후우...."

크게 심호흡을 하며 감정을 가라앉힌 글렌은 지셀을 노려보며 말했다.

"우리 마탑에서는 절대 이 일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오. 각오하시오, 남작."

"기대하지."

"반드시 후회하게 해 주겠소."

글렌은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렸다.

어차피 데스몬드 백작이 이 영지를 칠 예정이다. 그때 기필코 한 손 거들어 직접 지셀을 죽여 버리기로 다짐했다.

마법사들은 절대 원한을 잊지 않는다. 이 애송이에게 마법사들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 줄 것이다.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쫓겨나고 글렌마저 자리를 뜨자 남은 사람들은 눈치만 보기 시작했다.

'뭐지? 저 사람들은 왜 쫓아낸 거지?'

'우리는 왜 남긴 거지?'

'북부 제일의 마탑과 척을 지다니! 정말 간덩이가 부은 놈이구나!'

쫓아내는 기준을 모르니 이들로서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딱 한 가지 확실한 점이 있다면, 외교 관계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이 미친놈과는 협상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불안해하는 그들을 보며 지셀이 부드럽게 말했다.

"분위기가 잠깐 좋지 않았네. 사실 나는 마음이 약한 사람이야. 북부에서 수많은 사람이 굶고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파서 잠도 못 잘 지경이지. 난.... 평화주의자거든."

그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생각했다.

'진짜 미친놈인가?'

'그러면 아까 그 사람들은 왜 쫓아낸 건데?'

'제정신이 아니라는 소문을 듣긴 했지만, 진짜일 줄이야....'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깨고 지셀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 돈은 받지 않겠다."

그 말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지금은 식량값이 금값이다. 아니, 금을 가져다 바쳐도 사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런데 돈을 받지 않겠다니?

눈치를 보던 사람 중 한 명이 살짝 물었다.

"그, 그러면 영지의 다른 자원과 교환할 생각입니까?"

펜리스 영지도 자원이 부족하기로 유명하니, 그럴 가능성도 충분했다.

하지만 지셀은 그 질문에도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자원도 받지 않겠다."

그 말에 남은 사람들의 표정이 환해졌다. 돈도, 자원도 안 받는다면 이쪽에서 줄 건 관심과 사랑밖에 없다.

'이놈 참 기특한 놈이다. 이렇게 마음 약한 놈이면서 처음에는 센 척한 거였구나.'

'어휴, 젊어서 그런지 하는 짓이 참 귀엽네.'

사신들은 멋대로 생각하며 시꺼먼 속내를 숨겼다.

'일단 식량만 얻으면 된다. 방위비야 무시하면 그만이지.'

'이번 가뭄만 버티면 되는 문제니까. 버릇은 나중에 고쳐 줘야지.'

'지금이야 운 좋게 식량이 쌓였을 뿐이지. 네가 계속 그렇게 잘나갈 거 같으냐?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단다.'

사신들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볼을 씰룩였다. 그때, 지셀이 툭 던지듯 말했다.

"돈 대신 병사를 받겠다. 각 영지의 크기에 맞춰 적당한 수의 병사를 보내도록."

그 말을 들은 사신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183화 어때? 금방 구했잖아? (3)

다들 좋았던 기분이 팍 가라앉아 버렸다. 병사를 빼 가겠다는 말을 대놓고 하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이놈이 보자 보자 하니까 정말 선을 넘는구나.'

'세상에 식량을 주는 대가로 병사를 달라는 놈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도대체 얼마나 내놓으라는 거지? 아니, 얼마가 되었든 우리 영주님이 허락하지 않을 텐데.'

군사력이 약하면 외부의 위협은 물론이고 불만 많은 영지민들을 통제하기 힘들다. 어찌 보면 군사력은 영지를 유지하는 근간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싫다고 말하기도 힘들었다. 괜히 입 잘못 놀린 자들이 곧바로 쫓겨나는 꼴을 방금 눈앞에서 보았으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지셀이 부드럽게 말했다.

"아, 그렇게 많이 달라는 건 아니야. 최소치는 50명이다. 작은 남작령은 그 정도만 보내 주고, 규모가 있는 곳은 조금 더 많이 주고. 서로 부담되지 않는 선에서 하자는 거지. 대신 식량은 각 영지의 규모에 맞게 6개월 치를 제공해 주겠다."

병사를 내놓으라는 첫 발언에 비하면 생각보다 합리적인 제안이었다. 식량 6개월 치란 말에 사신들의 일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남작령에서는 50명도 그리 적은 수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못 줄 정도로 많은 수도 아니었다.

병사 50명을 넘기고 6개월 치의 식량을 얻을 수 있다면 오히려 남는 장사였다.

다시 눈치 게임이 시작되었다.

빠르게 계산을 끝마친 작은 남작령의 사신이 번쩍 손을 들었다.

"저희는 50명을 제공하겠습니다!"

"빠른 결정 마음에 들어. 제일 먼저 말했으니 8개월 치를 주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분위기는 이제 완전히 지셀에게 넘어갔다. 첫 기회를 놓친 사신들은 다급하게 외쳤다.

"저희는 100명을 제공하겠습니다!"

"거기 백작령이잖아? 덩치도 크면서 고작 100명 준다고? 200명으로 해."

"어, 그게...."

"싫으면 관두든가. 나가 봐."

"아닙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한번 물꼬가 트이자 다음부터는 거칠 게 없었다.

다들 앞다투어 자신들의 영지 규모에 맞게 병사들을 제공하기로 했다.

그런 열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아무런 말을 못 하고 있는 자가 있었다.

지셀은 우물쭈물하고 있는 그자를 바라보며 알은척을 했다.

"어이, 오랜만이야. 백작님하고 고모님은 잘 계시지?"

"고, 공자님. 아니, 남작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긴장한 표정으로 인사하는 자는 바로 로게스 백작령의 총관이었다.

예전에 지셀과 결투를 했던 그의 사촌 동생, 케인이 후계자로 있는 곳.로게스의 총관은 땀을 뻘뻘 흘리며 물었다.

"저희는 어느 정도 보내야 할까요?"

로게스 백작령은 페르디움만큼이나 가난했다. 페르디움처럼 북방의 야만인이나 마수의 숲을 막아야 해서도 아니었다.

거기는 그냥 가진 게 없어서 가난했다.

무장병은 천 명이 안 되는 수준이고 징집병까지 끌어모아도 이천 명이 채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로게스는 전생에 페르디움을 편들어 주다 함께 멸망했다. 지셀은 그 의리와 은혜를 잊지 않았다.

"그래도 친척인데 야박하게 굴 수는 없지. 로게스에는 그냥 1년 치 식량을 주겠다."

"오, 오오!"

로게스의 총관은 기쁜 웃음을 지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다 인맥, 인맥 노래를 부르는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무척이나 부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왜 저기만 공짜로 주냐고 따질 수도 없었다. 페르디움 백작의 누이가 로게스 백작 부인이니 명분은 충분하다.

"아, 그런데 그냥 주면 모양새가 좀 그러니까 딱 병사 한 명만 받을게."

로게스의 총관은 환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식량을 그렇게 준다는데 기사도 아닌 병사 한 명이 뭐가 문제겠는가?

완전 눈 가리고 아웅일 뿐이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지셀이 사악하게 웃었다.

"케인. 로게스의 후계자를 여기로 보내. 그놈이 내 돈을 안 갚았거든."

"돈을 안 갚았다고요?"

로게스의 총관은 처음 듣는 얘기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나한테 천 골드를 빌렸는데 안 갚았어. 이래서 가족하고도 돈거래 하는 거 아니라니까. 실망이야, 정말."

"헉, 처, 천 골드 말입니까?"

천 골드라니! 어떻게 그런 큰돈을 빌릴 수가 있다는 말인가?

로게스의 총관은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지셀이 망나니였다는 건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케인과 함께 영지 사람들을 괴롭히고 놀러 다녔던 건 유명한 얘기였으니까.

그러니 그의 말이 진실인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응, 케인 그놈이 말하지 않았나 보네."

"요새 공자님은 조용히 영지에서 학문에 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놈이 공부를 한다고? 그거 진짜 웃기는 얘기인 거 알지?"

"...."

로게스 총관은 할 말이 없어 고개를 떨구었다.

사실 공부는 그저 변명일 뿐, 케인은 그냥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고 있었다.

누가 왜 그러는지 물어봐도 대답을 하지 않으니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다들 그저 철이 조금 들었나 보다 여기고 넘어갈 뿐이었다.

예전과는 달리 사람들도 안 괴롭히고 조용히 살고 있었으니까.

사실 케인은 철이 든 게 아니라, 무서워서 나오지 않는 거였다.

그런 큰돈을 부모님께 달라고 할 수도 없었고 구할 방법도 없었다. 그러니 밖에 나가지도 않고 숨어 있을 뿐이었다.

사실을 말하기에는 너무 창피하기도 했고, 오히려 소문이 날까 봐 더욱더 조용히 있었던 이유도 컸다.

케인이 돈을 안 갚고 버티는 이유는 그거였다. 영지에 처박혀 있으면 괜찮겠지, 하는 얄팍한 믿음.

하지만 그걸 지셀이 배려해 줄 이유는 없었다.

"그거야 직접 확인하면 될 일이고. 어쨌든 그게 내 조건이다. 1년 치 식량을 받고 싶다면 케인을 보내."

"그, 그래도 어떻게 케인 공자님을...."

영지의 후계자인 그를 펜리스로 보내는 건 인질로 삼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겨우 총관이 수락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땀을 뻘뻘 흘리는 그를 보며 지셀이 부드럽게 말했다.

"가서 백작님하고 상의해 봐. 요새 내 활약을 들어서 잘 알고 있을 테니 허락할 거야. 여기서 나와 같이 훈련도 하고 공부도 하고 그런 거지. 앞으로 영지를 이끌어 갈 후계자들끼리 같이 힘을 합쳐 보자는 좋은 의미야. 우리는... 사촌이잖아?"

"그렇군요! 그런 뜻이라면 백작님도 당연히 허락하실 겁니다."

로게스의 총관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페르디움과 로게스는 피로 이어진 혈맹이나 마찬가지다.

지셀과 힘을 합치는 건 케인에게 이득이면 이득이지, 절대 손해가 아니었다.

지금의 지셀은 브랜포드 후작을 등에 업은, 루타니아 귀족계의 떠오르는 신성이었으니까.

"알겠습니다. 제가 백작님께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케인 공자님에게도 절대 나쁜 일은 아닐 테니까요."

"그래, 그래. 서로에게 정말 좋은 일이라고."

물론 지셀의 속마음은 전혀 달랐다.

'오면 뒤졌어, 이 새끼.'

감히 용병왕의 돈을 떼먹는다?

그런 일은 하늘 아래 있을 수가 없다.

전생에서는 일국의 왕이라도 그런 간 큰 짓을 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결투할 당시엔 힘이 조금 모자랐던 탓에 교육이 덜 된 모양이었다.

지셀과 로게스 총관과의 대화를 들은 사람들은 자신의 권한이 허용하는 한 많은 병사를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괜히 미적거렸다가 영지의 후계자를 보내라는 말이 나오기라도 하면 난리가 날 것이기 때문이다.

협상이 끝나자 지셀은 재차 강조했다.

"병사만 보내는 건 아닌 거 알지? 그 가족들까지 모두 보내."

그러자 사신들은 당황했다. 병사만 보내면 될 줄 알았는데, 가족들까지 모두 보내라니?그렇게 되면 예상보다 더 많은 영지민이 빠져나가 버린다.

합리적인 거래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전혀 합리적이지가 않다. 평시였다면 손해도 이런 손해가 없었다.

예상치 못하게 영지의 노동력을 뺏기게 된 이들의 표정은 절로 떨떠름해졌다.

지셀은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쯧쯧, 여전하군.'

이들에게 영지민은 노예나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노예보다 더 낫다. 세금도 거둘 수 있고, 자신이 먹여 살리지 않아도 되니까.

그러니 가족과 생이별을 시켜도 어떠한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다들 그런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시대이니 욕할 것도 안 된다.

하지만 시대가 그렇다고 해도 지셀은 양보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떨어져 사는 가족들은 병사들의 약점이 된다. 그렇게 되면 병사들이 제힘을 발휘할 수가 없다.

지셀은 그런 문제를 원천 차단할 생각이었다.

머뭇거리던 사신들은 어쩔 수 없이 병사들의 일가족까지 같이 보내기로 합의했다. 그들을 넘겨야 남은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겉보기와 달리 속마음으로는 천불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젠장, 두고 보자. 이번 어려움만 넘기면 반드시 가만두지 않겠다.'

'애송이 새끼가 친왕파 귀족들을 믿고 날뛰는구나.'

'진작에 여기를 쳐서 식량과 룬스톤을 뺏었어야 했는데.'

소문을 듣자마자 연합을 해서라도 이곳을 치고 모두 뺏었어야 했다.

서로 욕심 때문에 눈치를 보고 진위를 확인하느라 늦어 버렸다.

이제는 공격할 수도 없다. 친왕파의 고위 귀족들이 뒤에 있는 데다, 각 영지에서 넘기기로 한 병력을 합하면 물경 3천에 가까운 수였다.

식량 하나로 단번에 수천의 병사와 영지민들을 획득해 버린 것이다.

지셀은 쐐기를 박듯이 말을 이었다.

"영지민들을 이주시키는 데는 시간이 걸릴 테니 병사들부터 최대한 빨리 보내도록. 보름 내로 도착하지 않으면 없던 일로 하겠다."

"아, 알겠습니다."

"그리고 제대로 된 상비군으로 보내라. 만약 엉터리 병사를 보내면 바로 돌려보낼 테니까."

"알겠습니다."

대충 징집병으로 채우려 했던 사신들은 수작을 부릴 생각도 버렸다. 괜히 지셀에게 꼬투리를 잡혀 거래가 취소되면 영지 전체가 굶게 되기 때문이다.

사신들은 바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시간이 빠듯하니 한시라도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

모든 거래가 끝나자 지셀은 흡족한 표정으로 클로드를 돌아보았다.

"어때? 금방 구했지? 쉽잖아? 영지민도 많이 늘어났고 말이야."

"...."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본 클로드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대단한 수완이었다. 돈으로도 구하기 힘든 것이 사람인데, 그 문제를 순식간에 해결했다.

거기에 지금까지 받은 이주민들과는 달리, 전투력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훈련받은 병사들을 얻어 냈다.

영지의 병력과 합하면 무려 3천이 넘어가는 수였다. 정말 장담한 대로 그 병력을 마련한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가뭄을 예측하지 못했다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클로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운이든 진짜 능력이든, 이 새끼는 정말 대단한 새끼다.

그래서 이번에는 깐족거리지 않고 엄지를 들어 올렸다.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하세요.'

거만한 미소를 지은 지셀은 길리언에게 새로운 지시를 내렸다.

"새로 오는 병사들은 최대한 빨리 통제에 따를 수 있게 제식 훈련 위주로 시키도록. 지역을 가리지 말고 다 섞어서 부대를 편제해라. 어차피 보병들만 보낼 게 뻔하니까."

"알겠습니다."

부족한 병사들을 채웠다. 비록 반쪽짜리지만 수백에 이르는 기사들도 만들었다.

친왕파와 공작파, 양쪽 다 자기들 앞가림하느라 바빠 이곳에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다.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다. 오직 이 순간을 위해 차곡차곡 준비해 왔다.

지셀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전쟁을 시작하겠다."

* * *

각 영지에서 보낸 병사들은 빠르게 도착했다. 영주들도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니 불쾌함을 참고 거래를 빨리 마무리 짓고 싶어 했다.

급하게 쫓겨나듯이 넘어온 병사들은 얼떨떨한 기색이었다. 갑자기 살 곳이 바뀌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당황하는 것도 잠시, 풍부하게 제공되는 식량을 보자 병사들의 얼굴에는 금세 화색이 돌았다.

'와, 식량 많다더니 사실이었구나.'

'이런 곳에서 계속 살게 된다고? 이게 꿈이야, 생시야?'

식량이 떨어져 보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던 이들에게 펜리스는 꿈의 영지였다.

악덕 영주 밑에서 항상 굶고 가난에 허덕이던 기억밖에 없다 보니, 고향에 대한 미련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배부르게 먹을수록 새로운 영지에 대한 애착이 더 커졌다. 거기에 가족들까지 곧 이곳으로 올 예정이란다.

안 좋으려야 안 좋을 수가 없었다.

병사들이 만족스러워하니 그들을 통제하는 데도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이주해 온 병사들은 고작 일주일 만에 제대로 군기가 들었다.

기본 훈련은 이미 되어 있으니 큰 어려움도 없었다. 그저 펜리스의 군율에 적응시키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으니까.

역시 잘 먹이고 잘 재우는 게 최고였다.

그러나 병사들의 기분은 며칠 만에 급속도로 가라앉았다. 지셀이 출정을 한다며 모든 병사를 소집했기 때문이다.

'오자마자 전쟁이라고? 어디를 치려는 거지?'

'미치겠네. 그런데 우리 숫자 좀 많은 듯?'

불안해하는 병사들과 다르게 지셀은 사열한 군대를 보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출정 병력이 기사들을 포함해 무려 3천에 이르는 수였다. 보병들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북부에서 대영주들을 제외하면 이 정도 병력을 거느리는 곳은 없다고 봐도 된다.

병사들도 자신들의 숫자가 생각보다 많으니 그나마 안심하는 눈치였다.

지셀과 같이 군대를 둘러보던 클로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다 좋은데 선전 포고도 안 하고 쳐들어가시나요?"

"당연하지. 준비할 시간을 뭐 하러 줘? 이번 전쟁은 속도와 타이밍이 생명이야. 다른 쪽에서 개입하기 전에 끝내야 하거든. 선전포고는 가서 하면 된다."

"끄응...."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선전 포고도 없이 기습을 했다가는 많은 지탄을 받을 것이다.

무엇보다, 적들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명분을 주게 된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게 싫어서 다들 그런 쓸데없는 예의를 지키는 것이다.

선전 포고를 해 줘야 정치질도 하고 주변에 도움도 요청하고 준비도 할 게 아닌가?

하지만 지셀은 진심으로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그런 예의 따위는 모두 집어 던지는 야만의 시대가 곧 올 테니까.

클로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지셀을 뜯어보다 고개를 몇 번 젓고는 말했다.

"그런데 저분은 정말 데려가실 겁니까?"

부대의 한쪽 구석에는 로게스 영지의 후계자, 빚쟁이 케인이 나라 잃은 표정을 지은 채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