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16

161화 먼저 때리는 게 낫다니까? (3)

황당해하는 지셀에게 클로드가 다급하게 말했다.

"언제 출정하실 건데요? 조금 천천히 하면 안 될까요? 우리도 데스몬드 백작의 움직임을 보면서 계획을...."

지셀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지금도 예상보다 일정이 늦어졌어. 무조건 지금 당장 준비를 시작해야 해. 다음 수확기가 끝나는 대로 출발할 거다."

다음 수확기라고 해 봐야 몇 달 남지 않았다. 너무 급했다.

클로드가 빽 비명을 질렀다.

"왜 꼭 그때여야 하는데요!"

"내가 원하는 때에 싸워야 하니까."

지셀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단순히 그곳을 빨리 차지하고 싶어서 서두르는 것이 아니다.

철광석을 빨리 얻으면 좋기야 하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최적의 타이밍을 찾는 것이다.

급하다고 아무렇게나 일을 처리하면 실패 확률만 더 높아지는 법.

적어도 지셀에게는, 단 한 번뿐이더라도 실패는 곧 파멸을 의미했다.

'피해가 최대한 적도록 압도적으로 승리해야 해. 위험을 줄이고 가장 빨리 철광산을 차지하는 방법은.... 그때 공격하는 것뿐이다.'

미래를 아는 지셀만이 세울 수 있는 계획이었다.

앞으로도 모든 상황을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여야 한다. 지셀은 그러기 위해 브랜포드 후작을 끌어들이고 친왕파에 합류했다.

하지만 이건 지금 설명해 봐야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고 믿지도 못할 것이다.

지금까지 그랬듯, 결과가 나온 뒤에도 그저 운이 좋았다고 치부할 가능성이 컸다.

지셀의 단호한 태도에 발만 동동 구르던 클로드가 애처롭게 말했다.

"영주님, 저랑 이번에도 내기 하나 하시죠?"

"무슨 내기?"

"제 방식대로 영지를 지킬지, 영주님이 생각하신 대로 출정을 할지 내기로 정하는 겁니다."

클로드의 얼굴에는 정말 다급한 기색이 역력했다.

목숨을 걸고 이 영지를 지키기 위해서는, 더 이상 영주의 미친 짓에 끌려다니면 안 된다.

현실을 살아가는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그래야 했다.

울음까지 섞인 클로드의 목소리에 지셀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자세히 말해 봐."

클로드는 내심 안도하며 신이 나서 말했다.

"사실 영주님이 하라고 명령하시면 무조건 따르는 게 맞긴 합니다만.... 아무래도 상황이 너무 좋지 않으니까요. 다들 불안해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는 지셀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영주의 명령이라 어쩔 수 없이 따라오는 건 의미가 없었다.

앞으로 상대해야 할 적들은 그런 마음가짐으로는 절대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열의를 심어 주기 위해서라면 내기 정도야 백 번이고 천 번이고 해 줄 수 있었다.

"그래, 그러면 어떻게 할까?"

"말씀하신 대로 출정 준비는 확실히 하겠습니다. 대신...."

"대신?"

"두 달 안에 모두가 마나를 다루지 못한다면 출정을 취소해 주십시오."

"출정을 취소하라고?"

"네, 그리고 수성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는 겁니다. 준비만 확실히 되면 진짜 데스몬드가 쳐들어오더라도 제가 어떻게든 막아 낼 수 있습니다. 저 그 정도 능력은 있다니까요?"

지셀은 내심 혀를 찼다.

클로드가 능력 있는 사람이라는 건 잘 안다.

하지만 공작가를 상대할 수 있을 만큼 확실히 대비해 두지는 못할 게 확실했다.

왕실과 친왕파조차 공작가의 모든 저력과 계획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데, 클로드가 어찌 알고 대비하겠는가.

공작가의 힘이 모두 드러났을 때는 늦는다.

하지만 이건 지셀이 어떻게 해도 가신들을 이해시킬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나마 지금도 데스몬드 백작이 진짜로 움직이고 있어서, 수성 준비를 할 정도로 위기감을 심어 줄 수 있었던 것이다.

"흐음...."

지셀이 잠깐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클로드는 조마조마해하는 얼굴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적이 대놓고 영지에 쳐들어올 준비를 하는 상황이다.

그 와중에 영지 전체의 운명을 걸고 도박을 하겠다는데, 아무리 상대가 영주라 해도 그러십시오 하고 따를 수는 없었다.

지셀이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클로드가 잽싸게 말을 이었다.

"아, 그거론 좀 부족한가요? 그러면 저랑 알포이랑 노예살이 10년씩 더 걸게요."

"야이! 미친! 나를 왜 걸어!"

알포이가 옆에서 기겁했지만, 클로드는 모르는 척했다.

혼자보단 둘이 더 마음이 편하니까.

알포이는 발악하며 방해하려다 주변 사람들의 무시무시한 눈빛을 받고 입을 닫았다.

다들 알포이를 대신 걸고 영주의 출정을 말리려는 것이었다.

'아, 이 망할 영지. 마탑으로 돌아가고 싶다. 총관 저 새끼가 이겨야 하는데.'

울먹이는 알포이를 힐끗 바라본 지셀이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와, 10년을 또 건다고? 진짜 괜찮겠어?"

"상관없습니다."

클로드는 진심 어린 목소리로 답했다. 인생을 건 게 하루 이틀이 아니라 이제는 얼마나 저당 잡혔는지 감도 안 온다.

그래도 올해 죽는 것보다는, 노예처럼 굴려지더라도 몇십 년 더 살고 죽는 게 낫다.

지셀은 다시 생각해 보라는 듯 말했다.

"차라리 성공할 수 있게 최선을 다해 도와주는 게 낫지 않아? 생각해 봐. 마나를 다룰 수 있는 전력이 수백 명이라니. 그거 정말 대단하지 않아? 엄청날 거라고."

그 말에는 누구도 반박하지 못했다.

백작령인 페르디움에도 기사는 서른 명이 채 되지 않았다.

그런데 마나를 다룰 수 있는 수백 명이 한 영지에 모여 있다면?

개개인의 무력이 기존의 기사들보다는 조금 약하다 해도, 그들이 한데 뭉치면 파괴력은 엄청날 것이다.

상상만 해도 흐뭇하지만, 그건 정말 상상에서나 가능할 일이다.

클로드는 헛된 기대 따위는 집어 던졌다. 그런 걸 믿기에는 너무 고달프고 험한 세상을 살아왔다.

"당연히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준비할 겁니다. 단지 영주님의 출정 의지가 확고하신 게 문제지요. 그러니 일단 시도는 해 보되, 기사단이 준비되지 않으면 포기하자는 겁니다."

사실 영주가 전쟁까지 결심했는데 내기까지 걸어 가며 반대하는 건 무례한 일이다.

하지만 다른 가신들도 이번에는 클로드의 무례를 지적하지 않았다.

격식 없는 분위기에도 상당히 익숙해졌을뿐더러, 이번만은 무례하더라도 영주를 말리는 것이 우선이었다.

'예의도 살아서 차리는 거지.'

'영주 앞에서 무기를 꺼내 들고 칼부림을 하는 데 비하면 저 정도야....'

다른 가신들도 클로드의 의견에 동의하는 듯 보이자, 지셀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총관의 말대로 하지. 어차피 다들 직접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테니까."

그는 얘기하다 말고 슬쩍 미간을 좁혔다.

"그런데 다들 이번 내기는 안 말려?"

평소에는 내기를 하겠다고 하면 누군가가 득달같이 달려들어 말리곤 했는데,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심지어 영주의 명이라면 불구덩이에도 뛰어들 길리언마저도 애꿎은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이번에는 클로드가 이기길 바라고 있는 것이다.

"에잉, 다들 이렇게 믿음이 없을 줄이야."

지셀은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아무리 비상식적인 일이라도 그렇지, 이렇게 한 사람도 안 믿어 줄 줄이야.

"전 믿습니다."

"어?"

의외로 앞에 나선 건 카오르였다.

사실 그도 딱히 지셀을 믿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그는 출정에 찬성하는 쪽이었다.

왜냐하면....

"요새 몸이 좀 근질거렸는데 이왕 싸울 거면 화끈하게 빨리 나가서 싸우자고! 내가 다 죽여 줄 테니까!"

최근에 싸울 일이 없었으니 심심했던 것이다.

사람들이 경멸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자 그 뻔뻔한 카오르도 잠깐 당황했다.

"뭐? 왜? 내가 틀린 말 했어? 야, 너희 영주님 말이 우습게 보여? 응? 가자고 하면 가는 거지 왜 이렇게 반대가 많아? 이 충성심도 없는 것들 같으니라고."

영주를 제일 우습게 보는 놈이 괜히 무안하니까 영주까지 팔아먹는다.

카오르의 망나니짓을 보다 못한 벨린다와 길리언이 그의 앞을 막았다.

"재미로 싸울 거면 그냥 나랑 데스몬드 백작인지 아몬드 백작인지 목이나 따러 가자고요."

"낄 데 껴라. 좀."

두 사람이 무시무시한 눈으로 압박을 하자 카오르가 건들거렸다.

"하, 참! 허? 한번 해보자는 건가? 오늘 술 대신 피 좀 마셔 볼까?"

말은 거칠게 하지만 눈은 내리깐 채였다.

두 사람과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정말로 싸워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

아무리 카오르라도 두 사람을 동시에 상대하기는 좀 힘들었다.

지셀은 묘한 눈빛으로 카오르를 바라보았다.

저놈이랑은 뭔가 통하는 부분이 있긴 한데, 그게 왠지 자존심이 상하고 분하다.

그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결론은 난 거지? 내가 이기면 무조건 출정할 테니까 그리 알아 둬. 그때까지 준비는 확실히 해야 할 거야."

사람들이 무슨 생각으로 내기를 걸었는지는 뻔히 알지만, 출정을 늦출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지셀의 속내를 모르는 클로드는 한시름 놓은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어차피 수성이든 공성이든, 전쟁에 대비하려면 준비해야 하는 것들은 대체로 비슷하니까요. 그 부분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마나 집속진을 만들려면 어마어마한 룬스톤을 날리게 되겠지만, 적어도 엉터리 오합지졸들을 기사단이랍시고 데리고 나가는 건 막았다.

'그 정도 룬스톤이라면 어마어마하게 좋은 장비로 병사들을 무장시킬 수 있을 텐데. 아오, 아까워 죽겠네!'

그래도 출정하는 것보다는 나으니 그걸로 만족해야 했다.

클로드가 입을 닫자 지셀은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다들 지금까지처럼 전쟁 준비와 영지 개발 업무에만 전념하면 돼. 용병들의 마나 수련은 내가 직접 진행할 거니까. 뭐, 지금보다 더 바쁘게 움직여야 할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얘기를 듣는 순간, 모두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다. 지셀이 누구를 지칭하는지 깨달은 것이다.

시선을 한몸에 받은 알포이와 마법사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용병들에게 마나를 빨리 익히게 하려면 마나 집속진을 만들어야 한다.

그걸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마법사들뿐이다.

문제는 지금 영지의 수로와 저수지 공사부터 개간지 룬스톤 작업까지, 마법사들이 해야 할 작업이 잔뜩 쌓여 있다는 점이었다. 다들 잠잘 시간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알포이가 부들부들 떨며 물었다.

"그거... 꼭 해야 합니까?"

"당연하지."

"일이... 지금도 너무 많은데요...?"

"아니야, 넌 할 수 있어."

"못 합니다!"

알포이가 이를 악물고 외쳤다.

"더 이상 이렇게는 못 살겠습니다! 마탑과 펜리스 영지의 계약은 지부장의 권한으로 파기하겠습니다! 마탑으로 돌아갈 테니 막지 마세요! 진짜 갈 겁니다!"

알포이가 세게 나오자 마법사들도 같이 들고일어났다.

"그래요! 우리는 돌아갈 겁니다! 이제 그만합시다! 안 해요! 못 해!"

그러자 지셀은 부러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계약을 파기하겠다고? 감당할 수 있겠어? 마탑으로 돌아가면 마탑주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겠습니다! 아무튼 파기할 겁니다!"

지셀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마탑 지부장씩이나 되는 분이 계약을 파기하겠다니 어쩔 수 없지. 그런데 우리, 개인적인 계약은 아직 남아 있잖아."

"네?"

"우리 영지에서 나가고 싶으면 나가도 좋아. 조만간 노예상들이 오기로 했으니까 걔들하고 같이 가면 되겠네."

노예상과 같이 가면 목적지가 마탑이 아닐 확률이 매우 높았다.

아니, 높은 정도가 아니라 그냥 100%의 확률로 아주 먼 곳으로 갈 게 분명하다.

"싫어! 여기 정말 싫어 죽겠어!"

알포이와 마법사들이 얼굴을 감싸며 주저앉았다. 마법사의 체면이고 뭐고 없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인생이 완전히 꼬여 버렸다.

일하다가는 과로로 죽을 거 같고, 버티다가는 전쟁으로 죽을 거 같고, 도망갔다가는 노예로 팔려 갈 거고, 마탑으로 돌아가면 마탑주에게 죽을 거다.

그때, 안절부절못하며 보고 있던 바네사가 나섰다.

"영주님, 몇 개나 만들면 되나요?"

"일단은 백 개. 두 달 동안 용병들이 매일 번갈아 가면서 수련을 할 거니까, 아마 몇 번 더 만들어야 할 거야."

마법사들은 조금 안심했다. 사람 수에 맞춰 만들라고 할 줄 알고 걱정했는데, 백 개라면 그래도 지난번 밀알 개량 때보다는 반으로 줄어든 분량이었다.

하지만 지셀의 요구사항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일주일 안에 다 만들어야 해. 그래야 빨리 시작할 수 있거든."

살인적인 일정에 마법사들의 안색이 다시 허옇게 질렸다.

다른 사람들은 안쓰러워하면서도 차마 그들을 편들어 주지 못했다.

영주의 결심이 확고하니, 마법사들을 편들어 주다가는 자칫 영지의 공사와 개간지 작업이 뒤로 밀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바네사는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마법사들을 달랬다.

"알포이 님, 충분히 할 수 있어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알포이 님은 북부 제일 마탑의 후계자잖아요? 다른 마법사 분들도 유능하시고요."

달래는 듯한 말투에 알포이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마탑의 하녀였던 사람한테 위로를 받으니 자존심이 살짝 상한 것이다.

그때 클로드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헤이, 브로. 넌 최고의 지성인이자 마법사잖아! 이 정도야 쉽지 않겠어? 왜 갑자기 약한 모습을 보이고 그래? 요새 좀 피곤하긴 한가 보지?"

다른 사람들도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한마디씩 던지기 시작했다.

"일이 많긴 하지요. 하지만 적염의 마탑에서 오신 분들이라면 가능할 겁니다."

"그럼요, 누가 뭐라 해도 최고의 마탑에서 온, 최고의 재능을 타고난 분들 아니겠습니까?"

"미래의 대마법사님께서 엄살이 조금 심하신 거 같습니다. 허허허."

어차피 하기로 결정이 난 일이다. 그런데 마법사들이 괜히 파업하면서 버티면 다른 사람들도 피곤해진다.

말 몇 마디로 그 꼴을 막을 수 있다면 남는 장사였다.

"흐, 흥! 다들 아부는...."

사람들이 칭찬을 마구 쏟아내자 알포이가 은근히 허리를 세우고 코 밑을 훔쳤다.

162화 체질 개선에 들어간다. (1)

알포이가 원래 이렇게 칭찬에 약한 사람은 아니었다.

마탑에서 지낼 적 그는 오만하고 자신감 넘치는 남자였다.

배경과 재능, 그 어떤 것도 부족하지 않다고 자신하며 살아왔다.

'그래, 나는 알포이. 포기를 모르는 남자지.'

사실 지셀 옆에 온 뒤로 내내 고생만 하다 보니 자존감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요새는 왜 사는지도 모르겠고 종종 뜬금없이 울적해지기도 했다.

그런데 오랜만에 칭찬 세례를 들으니 왠지 마탑 시절의 자신감이 되살아나는 것만 같았다.

"당연히 할 수 있지! 그냥 뭐... 피곤하긴 하니까 영주님 한번 떠본 거지, 사실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야. 그런 것도 못 하면 마탑의 후계자라고 할 수 있겠어?"

알포이가 거만하게 말하자 옆에 있던 마법사들이 경악하며 그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알포이를 오래 겪어 온 만큼, 그의 단점도 잘 알고 있었다.

허세가 가득하고, 주변에서 띄워 주면 정신을 못 차리는 성격이라는 걸.

불길함을 느낀 마법사들이 말리기도 전에 다시 칭찬이 마구마구 쏟아졌다.

"역시, 역시 마탑의 후계자다운 기개입니다. 저런 기개는 아무나 보일 수 없지요."

"이러니 적염의 마탑이 북부 최고라 불리는 거 아니겠습니까?"

"저런 분이 후계자라니. 마탑의 장래가 참으로 밝습니다."

지셀도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분위기를 잔뜩 띄웠다.

"넌 정말 최고야, 알포이."

이렇게까지 칭찬하면 말 다 한 거다. 그가 누군가에게 최고라 칭하는 건 절대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치... 뭐 언제는 아니었나."

알포이가 새침한 표정을 지으면서 슬슬 허세를 부리기 시작했다.

클로드는 거기에 쐐기를 박듯, 알포이의 손을 가리키며 말했다.

"헤이, 브로! 마법을 사용하는 너의 그 손이 어떤 손인지 알아?"

"...오른손?"

"그런 뜻이 아니고 이 등신아.... 아니, 너의 손에서 시작되는 마법은 이 영지에 기적을 일으킬 거잖아! 그러니 네 손이야말로 바로 기적의 손이지! 오른손 왼손이 문제가 아니라고! 이 등신...."

"와아아! 기적의 손, 알포이!"

사람들이 클로드의 말을 자르며 환호했다. 이왕 감정 노동을 시작했으니 마지막까지 확실히 하는 게 나았다.

짝짝짝짝.

박수까지 쏟아지자 알포이는 완전히 자신만만해졌다.

그 모습을 본 클로드는 짠한 눈빛을 감출 생각도 하지 않으며 웬디에게 속삭였다.

"쟤는 사회의 쓴맛을 더 봐야 해. 마탑에서만 곱게 대우받고 자라서 그런지 영 눈치가 없어. 도대체 마탑주가 어떻게 키운 걸까?"

'니가 제일 나쁜 새끼야.'

웬디는 대답도 안 하고 그냥 속으로만 생각했다.

사람들의 박수와 환호가 계속될수록 알포이의 콧대도 점점 높아졌다.

당황한 마법사들이 그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분위기가 완전히 달아올랐을 때, 지셀이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기간 안에 처리할 수 있겠어? 최대한 빨리해야 하는데.... 천재 마법사 알포이한테도 힘든 일인가?"

그 말에 모두가 숨죽이고 알포이를 바라보았다.

알포이는 기대감이 가득한 사람들의 눈빛을 훑어보더니, 한 손으로 천천히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러고는 매우 건방지고 오만한 표정을 지으며 한 손을 들어 올렸다.

"다 이 알포이 님이 처리할 테니 안심하라고!"

"와아아아! 역시 알포이다!"

다시 큰 환호와 박수갈채가 알포이에게 쏟아졌다.

알포이는 턱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고, 다른 마법사들은 넋이 나간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 * *

'안 되는 걸 알면서 내가 왜 그랬을까?'

알포이는 룬스톤을 앞에 두고 후회 중이었다.

오랜만에 치사량에 가까운 칭찬을 받으니 도무지 못 하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막상 일거리를 마주하니 할 게 너무 많아서 시작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지금도 각 공사장에서 마법사들을 애타게 찾고 있고, 행정부에서는 빨리 개간지에 쓸 룬스톤을 달라고 독촉하고 있었다.

칭찬할 때는 언제고 막상 일하기 시작되니 다들 냉정할 정도로 압박만 준다.

특히 클로드는 악랄할 정도로 매시간 사람을 보내 일정을 확인했다.

― 어이, 기적의 손! 빨리 기적을 보여 달라고! 작업 언제 끝나냐고! 이 등신아!

'나쁜 새끼! 그런 달콤한 말로 감히 날 조종하려고 해? 그 새끼는 주둥이로 마법을 쓰는 게 분명해.'

천재 마법사인 자신이 그런 놈의 말에 넘어갈 줄이야. 마치 그놈의 입에서 '매혹' 마법이 시전된 것만 같았다.

주변 사람들이 들었다면 실컷 비웃었을 생각이었지만 알포이는 알지 못했다.

그는 손톱만 계속 물어뜯으며 불안한 표정으로 계속 중얼거렸다.

"안 돼. 도대체 이걸 언제 다 해? 마나 집속진을 일주일 안에 만들려면 다른 작업을 할 시간이 안 나. 그래도 일정이 안 맞아."

마법사들이 죄다 달라붙어도 도무지 일정을 맞출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다시 못 한다고 할 수도 없었다. 그의 자존심에 그런 건 허락되지 않는다.

마탑의 후계자인 알포이는 언제나 도도하고 완벽해야만 했다.

주저앉아 한탄만 하는 그에게 바네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기... 저한테 방법이 있어요."

"뭔데?"

"마법진은 제가 새길 수 있는데.... 마력이 문제거든요?"

어차피 지금도 마법진 작업은 바네사가 주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력이 현저히 부족하기 때문에 다른 이들이 그녀의 지시에 따라 작업할 수밖에 없었고, 속도가 그다지 나지 않았다.

알포이가 퉁명스럽게 답했다.

"근데 그게 왜? 네가 마법진 주도한다고 자랑하는 거야? 와, 잘난 척 뭐야. 야, 나 마탑의 후계자야, 후계자. 마법진 빼고는 다 내가 더 잘하거든? 그런 건 비주류라서 내가 공부를 안 한 거고."

"아뇨, 아뇨. 그, 그게 아니라.... 저한테 마력 전이를 해 주시면... 제가 최대한 빨리해 볼게요."

"뭐?! 싫어! 그걸 또 하라고? 미쳤어? 죽으면 어떻게 하려고!"

알포이와 마법사들은 기겁하며 물러섰다.

전쟁 때야 무슨 짓을 당할지 몰랐던 탓에 어쩔 수 없이 끌려다녔지만, 멀쩡한 정신으로 그런 위험한 짓을 할 생각은 절대 없었다.

하지만 바네사는 평소와는 달리 강경하게 밀어붙였다.

"안 그러면 우리 일정을 못 맞춰요! 우리가 못 맞추면 영지 개발에 전부 문제가 생길 거라고요! 알포이 님도 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했잖아요. 못하면 망신을 당할 거라고요!"

"마, 망신? 그건 안 되는데.... 아, 그러면 룬스톤으로 마력을 채우면서 하는 건 어때? 룬스톤은 많잖아."

영지의 재산인 룬스톤을 쓰라는 말에 바네사의 말이 한층 더 빨라졌다.

"그 비싼 걸 어떻게 막 써요? 아무리 룬스톤이라고 해도 마법사님들 마력보다 많지는 않잖아요. 마력 전이만큼 마력을 채우려면 엄청나게 써야 한다고요. 앞으로도 여기저기 쓸 일이 많아서 영주님도 허락 안 하실 거예요."

"와, 너 갑자기... 왜 이렇게 말을 잘해."

어쨌든 틀린 점 하나 없는 현실적인 말에 차마 반박하지 못하고 알포이는 머리만 벅벅 긁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바네사는 그런 그를 달래듯 말했다.

"전쟁 때처럼 마력을 전부 빼 내지는 않을 거예요. 그때처럼 위험하지도 않고... 일도 빨리 끝낼 수 있어요. 그리고 알포이님은 더 칭송받을 거예요."

"...."

"정말 빨리 끝내면 조금이라도 쉴 수 있다니까요? 망신당하는 것보다는 빨리 끝내고 쉬는 게 낫지 않아요?"

바네사의 강력한 설득에 알포이와 마법사들이 혹해서 조심스레 물었다.

"우리가 마력을 주면 얼마나 빨리 끝낼 수 있는데?"

"이틀! 이틀이면 할 수 있어요. 그러면 적어도 다시 이틀은 쉴 수 있어요. 남은 시간에 다 같이 하면... 경작지용 룬스톤 작업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거예요."

"정말... 이틀이면 끝낼 수 있다는 거지?"

"네!"

한참을 고민하던 알포이는 자존심과 휴식을 위해 죽음의 공포를 감수하기로 했다.

"살살... 해야 해?"

"넵!"

마력을 전이 받은 바네사는 놀라울 정도의 집중력을 발휘했다.

영지에 도움이 되고 싶다는 그녀의 집념은 결국 작은 기적을 만들어 냈다.

정말 이틀 만에 백 개의 마나 집속진을 만들어 낸 것이다.

누군가를 '기적의 손'이라 불러야 한다면 그 주인공은 알포이가 아니라 바네사였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알포이뿐이었다.

어쨌든, 강제로 일정을 당긴 만큼 다들 대가를 치르긴 했다.

마지막 공정을 끝내고 비틀거리는 바네사의 주변에는 이미 스물여섯 명의 마법사들이 쓰러져 있었다.

"으으.... 진짜 가능하다니...."

"미친.... 죽을 거 같아. 살살 한다며...."

"저거, 저것도 제정신이 아니야...."

그들의 몸은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말라 있었다.

처음에는 살살 하겠다던 바네사가 막상 마력 전이를 시작하자마자 미친 듯이 마력을 쪽쪽 빨아먹었기 때문이다.

어쩐지 개인적인 감정도 듬뿍 섞인 것 같았다.

거의 해골이 된 알포이가 바들거리며 말했다.

"이, 이거 다 했으니까... 정말 이틀은 쉬어도 되는 거 맞지? 꼭 내가 주도해서 성공한 거라고 해. 그래야 망신을... 안 당할 거 아니야."

"네, 네...."

바네사는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라던 대답을 들은 알포이와 마법사들은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하나같이 안색은 초췌했지만 그들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마력이 부족해서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영주라고 어쩔 도리가 있겠어?'

결과적으로 마법사들의 계획은 성공했다.

일주일 이상 걸리는 일을 이틀 만에 끝냈으니, 회복을 위해 최소 이틀은 누워 있을 수 있게 되었다.

마법진이 완성됐다는 소식에 지셀마저 깜짝 놀라서 달려왔다.

"헐, 정말 이틀 만에 이걸 다 했다고? 그런데.... 다들 괜찮아? 죽은 거 아니야?"

주변을 둘러본 지셀은 침을 꿀꺽 삼켰다.

빨리 끝난 건 좋은데 다들 상태가 무척 안 좋아 보였다.

그러자 걱정하지 말라는 듯 바네사가 웃으며 말했다.

"이틀 정도만 쉬면... 다시 일하는 건 문제는 없을 거예요. 다음 일은 경작지용 룬스톤이라 단순한 작업이거든요."

"그, 그래. 일단 너도 좀 쉬어야겠다."

"아, 아니에요. 알포이 님이 다 해서 저는 괜찮아요. 대신 조금 더 확인을...."

주르륵.

바네사는 말을 하다 말고 코를 한번 훔쳤다.

그러고는 손가락에 묻은 새빨간 액체를 보고 뭔가 다급하게 말했다.

"그, 그리고... 이 마법진은 이전 것들보다 더 오래 유지할 수 있어요.... 적어도 이 주는 갈 거예요...."

엄청난 소식이다. 지속 시간이 늘어나면 룬스톤을 그만큼 아낄 수 있기 때문이다.

과연 천재 마법사다운 실력이었다.

지셀은 알포이가 다 했다는 말은 눈곱만큼도 믿지 않았다. 알포이와 마법사들이 마법진 공부는 소홀히 했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런 소소한 걸 따질 여유는 없었다.

바네사의 코에서 흐르는 피가 점점 더 많아졌다. 그걸 본 지셀이 다급하게 말했다.

"확인은 내가 할 테니까 어서 쉬어. 너 지금 코에서 피가 줄줄 흐른다니까?"

"괜찮아요. 이건 갑작스럽게 많은 양의 마나에 노출되고, 과도한 의념을 발산한 영향으로 뇌에 부하가 걸려서 그런 건데, 해결 방법은...."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던 바네사는 갑자기 정신을 잃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바네사!"

지셀이 바네사의 어깨를 잡아 넘어지지 않게 지탱했다.

아무리 6서클에 올랐어도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마력도 부족한 데다, 정신력도 엄청나게 소모되는 일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바네사는 영지에 도움이 되고 싶어서 한계까지 힘을 끌어낸 것이다.

"하, 참...."

지셀은 자신의 품 안에서 정신을 잃은 바네사의 등을 토닥이며 웃었다.

평소에는 존재감도 없으면서 중요할 때는 누구보다 큰일을 해낸다.

그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져 고마움이 앞섰다.

그리고 이유야 어쨌든 위험한 마력 전이를 사용하다 쓰러진 알포이와 마법사들도 대견스러웠다.

"그래도 마탑의 후계자답게 할 때는 하네. 나중에 뭐 좀 챙겨 줘야겠어."

지셀은 사용인들을 시켜 마법사들을 옮기게 하고, 바로 길리언을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길리언, 이제 훈련과 치안 업무는 오전 조와 오후 조로 나눠야겠어."

"그 말씀은...?"

"그래, 이제 체질 개선에 들어간다."

지셀은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앞에는 은은하게 푸른 빛을 내는, 백 개의 마법진이 펼쳐져 있었다.

163화 체질 개선에 들어간다. (2)

마나 집속진이 만들어지는 동안, 대부분의 용병들은 종신 계약으로 계약 내용을 변경했다. 새로 합류한 자들도 영주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마나 연공법을 알려 주고 기사 작위까지 준다는데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얘기 들었어? 영주님이 가문의 마나 연공법을 알려 준다는 소문이 있던데."

"에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비전 중의 비전이 마나 연공법인데 그걸 누가 알려 줘? 너 같으면 알려 주겠냐?"

"그래도 우리가 영지 전력이 될 텐데, 나름대로 쓸 만한 걸 알려 주지 않을까?"

"뭐, 우리가 익히기 쉬운 걸 골라서 알려 주겠지. 어차피 몇 년은 수련해야 하니까 너무 기대는 하지 말자고."

확인되지 않은 소문도 퍼질 만큼 용병들은 마나 연공법을 크게 기대하고 있었다.

물론 이들에게 걱정거리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영지민들은 잘 모르겠지만, 경험 많은 용병들은 다시 전쟁이 일어날 거라고 확신했다.

대영주인 데스몬드 백작이 페르디움 같은 작은 영지에 한 대 얻어터지고도 가만히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럼에도 용병들은 목숨을 걸고 펜리스 영지에 남기를 택했다.

기사 작위와 마나 연공법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종신 계약으로 바꾸는 사이에도, 카오르와 켈베로스 용병단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아씨.... 어떻게 하지? 제안을 받아들이면 평생 여기에 묶여 있어야 하는데."

카오르는 단원들을 모아 놓고 머리만 벅벅 긁었다.

그의 실력이면 사실 어디를 가도 기사 작위 정도는 받아 낼 수 있었다.

용병으로서는 흔치 않게 마나도 익히고 있었고, 실력도 어지간한 기사보다는 뛰어났으니까.

하지만 딱딱한 생활도 싫고 자유롭게 살고 싶었기에 용병으로 남았던 것이다.

"야, 너희들은 어떻게 할 거야? 마나 집속진이 완성되기 전까지 결정하라는데."

카오르의 말에 몇몇 단원이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저희야 뭐... 단장님 따라가는 거죠. 기사 그거 돼 봐야 뭐가 좋다고.... 좋긴 하겠지만."

"마나 연공법도 뭐, 배우면 좋긴 한데...."

"배운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뭐... 대장 영주라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들도 가문의 연공법을 가르쳐 준다는 소문은 믿지 않았다. 그냥 시중에 떠돌아다니는 싸구려 연공법보다는 낫겠거니 생각할 뿐이었다.

애초에 마나를 다루는 건 쉽지 않은 일이라, 싸구려 기초 연공법조차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자가 태반이었다.

그래도 언제나 기상천외한 일들을 성공시켰던 영주가 호언장담했으니, 혹시나 정말 괜찮은 걸 이해하기 쉽게 가르쳐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있긴 했다.

단지 그 기대가 불안감을 누를 정도로 크진 않았을 뿐이다.

카오르는 반응이 영 시원찮은 단원들을 괜히 한 번 더 떠보았다.

"여기 남고 싶은 사람은 남아도 돼. 켈베로스 용병단은 탈퇴하는 걸로 하고."

그렇게 말해도 단원들은 섣불리 나서지 않았다.

애초에 켈베로스 용병단에서 탈퇴하려면 손모가지 하나는 두고 가야 한다. 괜히 저 말에 낚였다가는 더 피곤해진다는 걸 다들 잘 알았다.

"새끼들, 의리 있네. 그렇지, 용병이 의리 빼면 시체지, 시체."

카오르의 말에 단원들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표정을 감췄다.

배신하면 시체로 만들어 주겠다는 말로 들린다.

'나간다고 하면 지랄할 거면서.'

'배신자니 뭐니 하면서 손목 하나 달라고 하겠지?'

'아, 그래도 여기 있는 거 은근히 재미있긴 했는데.'

아쉬워하는 분위기가 슬슬 퍼지는 걸 느끼고 카오르는 입맛을 다셨다.

예전 같았으면 종신 계약 제안이 왔을 때 바로 떠났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냥 떠나기에는 어쩐지 아쉬웠다.

'아, 뭐 때문에 이러지? 정이라도 들었나?'

아무리 생각해도 정들 만한 이유가 없다.

영주부터 시작해 벨린다, 길리언, 클로드.... 하나 같이 죄다 이상한 놈들뿐이다.

이상한 놈들하고 어울리니 자신도 이상해진 것일까?

카오르가 해결되지 않는 고민으로 끙끙 앓고 있을 때, 단원 하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기... 솔직히 우리 여기 떠나면 또 북부에서 자잘한 의뢰나 받으면서 살 거 아닙니까."

"그렇지, 그냥 그렇게 일하면서 자유롭게 사는 거지."

"그런데 솔직히... 여기 재미있지 않습니까? 대장 영주도 이상한데 재미있잖아요."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펜리스 영지는 다른 영지와 궤를 달리하는 곳이다.

영주인 지셀도 다른 귀족들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가끔 막무가내에 꼴통처럼 굴기는 하지만, 같이 지내기 재미있는 사람이라는 건 확실했다.

카오르가 더 말해 보라고 눈짓하자 단원은 용기를 내어 말을 이었다.

"최소한 여기 있으면 싸움질은 원 없이 할 수 있을 거 같거든요. 그냥 빈둥빈둥 시간 보내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요?"

그 말도 맞다. 데스몬드와의 두 번째 전쟁도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고, 지셀의 성격상 그 뒤로도 여기저기 사고 쳐서 계속 싸움이 벌어질 게 뻔했다.

그리고 가까운 시일 내에 2차 마수의 숲 개척도 예정되어 있다.

펜리스만큼 빅 이벤트가 끊임없이 벌어지는 곳은 없었다.

카오르가 솔깃한 표정을 짓자 단원은 쐐기를 박듯이 말했다.

"그리고 북부에서 의뢰를 받고 다니다 보면 대장 영주랑 싸우지 말라는 법도 없잖아요. 그때는 다른 쪽에 붙어서 싸워야 하는데.... 감당할 수 있겠어요?"

"아, 그건 좀."

카오르는 자신도 모르게 한마디를 내뱉고 말았다.

'저 꼴통 영주랑 싸우라고?'

다른 놈은 무섭지 않은데 이상하게 지셀만은 꺼림칙하다.

죽을 때까지 얻어맞은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다시 싸우는 걸 본능이 거부했다.

그렇다고 재미있는 전쟁 의뢰를 받지 않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때 다시 펜리스 쪽에 붙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카오르는 팔짱을 끼고 고민에 잠겼다.

힐끗 단원들을 바라보자 모두 기대에 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 새끼들 솔직하지 못하다니까.'

한번 피식 웃은 카오르는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사실 이미 마음은 기운 상태였다. 그놈의 자존심 때문에 고민하는 척한 거지.

앞으로 더 재미있는 일들이 가득할 이 영지를 떠나면 평생 후회할 터였다.

"좋아, 까짓거 우리도 기사 하자!"

"오오오!"

카오르의 선언에 모두가 환호를 내질렀다.

떠돌아다니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평생 그렇게 살 수는 없지 않은가?

분위기 딱딱한 영지에 갇혀 사는 것보다는 이곳에 남는 게 훨씬 좋았다.

거기에 마나 연공법까지 가르쳐 주고 기사 작위까지 준다는데 거절하면 바보다.

영지가 작고 약한 건 흠이 되지 않는다. 어차피 다른 곳에서는 이런 조건으로 받아 주지도 않을 테니까.

카오르는 오만하게 말했다.

"기사단장은 이 몸이 할 테다. 다들 그렇게 알고 있어."

"길리언 교관은요? 그 아저씨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요."

"하! 그거야 실력으로 뺏으면 되지. 내가 마음만 먹으면 영감 정도는 순식간에 끝낼 수 있어. 그러니까 기사단장은 바로 이 몸이다."

"우와아아! 펜리스 기사단장 카오르!"

모두가 다시 환호를 내질렀다.

카오르가 멋져 보인다거나, 정말로 그가 길리언을 이길 거라 믿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그냥 재미있는 싸움 구경을 할 거 같아서였다.

자칭 펜리스 기사단장 카오르는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주먹을 번쩍 들어 올렸다.

* * *

"기사단장은 나다."

지셀의 말에 카오르는 눈만 껌뻑이다가 물었다.

"제가 아니고요?"

"응, 아니야."

"무슨 영주가 기사단장을 직접 합니까?"

"나는 다 직접 해."

"아니, 직접 하지 마시고 저 달라니까요."

"지금은 내가 하는 게 편해. 나중에 병력 더 늘어나고 새로 편제할 때 결정할 거니까 그렇게 알아."

지셀이 혀를 차며 말하자 카오르는 일단 한발 물러섰다.

"그러면 그때는 저 주시는 겁니다?"

"상황 보고. 경쟁자가 많아서 네가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그런데 너 싸움 잘 못 하지 않아?"

도발적인 말에 카오르가 삐딱하게 선 채로 투덜거렸다.

"저 싸움 잘합니다!"

"그러니까 그때 가서 보자고. 다른 사람들도 마나 익히고 실력을 본 뒤에 말이야."

"그때 가도 다를 거 없을 겁니다."

"그래, 그래. 기대할게. 어쨌든 결정 잘했어. 앞으로도 우리 잘해 보자고."

카오르가 지셀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종신 계약까지 마친 것을 기점으로, 켈베로스 용병단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지셀은 카오르의 어깨를 두드리며 책을 두 권 건네주었다.

"함께하기로 했으니 선물을 줘야겠지? 이거 받아."

"이게 뭡니까?"

"우리 가문의 마나 연공법과 검술서다. 물론 내가 어느 정도 너한테 맞게 개량을 좀 했지. 아마 지금 익히고 있는 것보다 쓸 만할 거야."

"헐."

카오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셀을 바라보았다.

기사단장 자리 내놓으라고 찾아왔는데 이런 선물을 줄 줄이야.

카오르는 싸구려 마나 연공법을 익혔지만 특출난 재능과 독기, 목숨을 건 실전으로 나름대로 경지에 올랐다.

싸구려 연공법만으로도 어지간한 기사들을 뛰어넘었으니, 자부심도 느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승의 마나 연공법에 목마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실력이 늘면 늘수록 벽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체계적인 지식 없이 감각적으로 익힌 자의 한계였다.

그래서 더 싸움을 즐겼고 위험한 곳을 찾아다녔다. 그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런 카오르에게 지셀이 건넨 책은 어둠 속에서 내려온 한 줄기 동아줄이나 다름없었다.

"저, 저한테도 줄 줄은 몰랐습니다."

길리언이나 자신 같은 경우는 이미 기사와 비슷한 수준에 올랐기 때문에 다른 용병들에게만 연공법을 알려 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걸 준비하고 있었을 줄이야!

지셀은 놀라는 카오르를 보면서도 자기 할 말만 이어 갔다.

"그간 보니 안 좋은 버릇도 많고 몸의 밸런스가 무너져 있더라. 마나를 제대로 쓰려면 몸 전체를 활용해야 하는데, 그러질 못해서 균형이 무너진 거야. 검술도 실전으로 익혀서 번뜩이는 재치는 있지만 기본기가 현저히 부족해. 내가 준 걸 열심히 익히면 금방 벽을 넘을 수 있을 거다."

"...왜 저한테 이렇게 해 주시는 겁니까?"

카오르는 진심으로 궁금해했다.

지셀이 넘겨준 건 천금을 줘도 구하기 힘든 것들이다.

아무리 페르디움 백작령이 우습게 보인다고 해도 그건 외적인 환경 탓이었다.

'페르디움 백작가의 연공법과 검술만 놓고 보면 절대 다른 곳에 비해 떨어지지 않아. 애초에 페르디움 백작도 상급의 기사로 평가받고 있고.'

페르디움이 북방을 지킬 수 있는 저력은 이 마나 연공법과 검술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겨우 몇 번 같이 싸웠다고 줄 만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심지어 같이 싸운 것이 용병 계약 때문이었다면 더더욱 그렇다. 그저 돈 받고 할 일을 다 했을 뿐이다.

의아해하는 카오르에게 지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 싸움 못 하잖아. 어디 가서 얻어터지지 말라고 준 거다."

카오르는 발끈하려다가 고개를 푹 숙이고 슬금슬금 책들을 품속으로 집어넣었다.

자존심 때문에 좋아하는 티를 안 내고 싶었지만, 기쁜 마음을 숨기기가 힘들었다.

웃으면 안 되는데 자꾸 웃음이 새어 나왔다.

카오르는 입술을 꽉 깨물고 괴상한 표정으로 감사 인사를 건넸다.

"저 싸움 잘합니다만.... 어쨌든 감사히 받겠습니다. 으흐흐흐."

"그래, 익히다가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보고. 아마 열심히 해야 할 거다. 다른 사람들한테 따라잡히기 싫으면 말이야. 재능있는 친구들이 많거든."

"크흐흐, 제까짓 놈들이 그래 봤자죠. 덤비는 놈은 죄다 박살을 내 주겠습니다."

빨리 돌아가서 익히고 싶은 마음에 카오르는 건성건성 고개를 숙이고 잽싸게 몸을 돌렸다.

원래 예의가 없는 놈이라 지셀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지금 어떤 마음일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집무실의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은 카오르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왠지... 코가 시큰거렸다.

어렸을 적 가족을 잃고, 먹고살기 위해 악착같이 살아왔다.

'나한테... 이렇게까지 잘해 준 사람이 있었나?'

없었다. 그는 죽이지 않으면 죽여야 하는 세상에서 살아왔다.

그래서 더 잔인하게, 더 미친놈처럼 굴었다. 그러지 않으면 밑바닥 인생인 카오르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어찌 보면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고, 어찌 보면 세상에 대한 불만이었는지도 모른다.

갑자기 몰려오는 생소한 감정을 누르려고 카오르는 이를 악물었다.

'그냥... 전쟁에서 써먹어야 하니까 알려 주는 거야. 앞에서 싸워야 하니까.'

애써 지셀의 뜻을 폄하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란 걸 카오르도 잘 알고 있다.

누구도 화살받이에게 이런 보물을 나눠 주지 않는다.

돈 몇 푼 쥐여 주고 전쟁터에 내몰면 그만이니까.

카오르와 지셀은 애초에 그런 관계였다.

'젠장....'

마수의 숲에서도, 전쟁에서도, 그 어느 곳에서도 지셀은 용병들을 소모품으로 대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한 사람이라도 살리려 했고, 언제나 가장 위험한 곳에 서 있었다.

목표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지언정, 적어도 치졸하게 행동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까짓것, 끝까지 한번 같이 가 봅시다.'

머뭇거리던 카오르는 손잡이를 놓고 지셀을 돌아보았다.

의아해하는 지셀의 얼굴을 가만히 보던 카오르는 천천히 허리를 깊게 숙였다.

생애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진심을 담아 건네는 감사의 인사였다.

164화 체질 개선에 들어간다. (3)

지셀은 카오르에게만 비전을 내준 게 아니었다. 길리언도 따로 불러 여러 권의 책을 건네주었다.

카오르가 봤다면 왜 자기보다 더 많이 줬냐고 난리를 쳤을 것이다.

"이건 무엇입니까?"

길리언의 물음에 지셀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길리언에게 맞게 개량한 마나 연공법하고, 내가 아는 무기술에 관해 정리한 책이야."

"영주님...."

길리언은 감격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지 않아도 지셀은 종종 자신과 카오르에게 각자 익히고 있는 마나 연공법에 관해 묻고는 했었다.

영주가 가진 마나 연공법이 더 뛰어난 걸 알고 있으니 두 사람은 딱히 숨기지도 않았다.

간간이 그에 관해 조언을 얻기도 했고.

지셀이 밤늦게까지 항상 무언가를 적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설마 그동안 자신에게 건네줄 비전서를 적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지셀은 그런 길리언을 보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나이도 훨씬 어린 나한테 마나 연공법이나 무기술을 배우는 게 자존심 상하지는 않아?"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영주님이 특별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이 영지에서 지셀과 대련을 가장 많이 해 본 자가 바로 길리언이다.

그가 아니면 영주의 대련 상대가 될 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몇 번 검을 맞대 본 뒤, 길리언은 지셀이 이른 깨달음의 경지가 까마득하게 높다는 걸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도무지 나이와 맞지 않는 실력에 가끔은 의아하기도 했다.

지셀이 종종 농담으로 던지는, 죽었다 살아났다는 말도 믿음이 갈 정도였다.

지셀은 고개를 몇 번 끄덕이더니 말을 이었다.

"길리언이 익힌 마나 연공법도 나쁘지 않더라. 그래서 그걸 기반으로 손만 조금 봤어. 무기술은 굳이 새로 익힐 필요는 없으니 쓰던 방식과 비교해서 괜찮은 것만 가져가고. 길리언은 이미 길리언만의 길을 완성해 가고 있으니까."

지셀은 길리언에게 줄 책을 쓸 때는 특히 더 신경을 썼다.

오래도록 쌓아 온 경험 덕에 길리언은 몇 번이나 한계를 극복하며 강해졌다.

하지만 그 바탕이 된 기술이 몸과 정신에 완전히 각인되어 버린 탓에, 이제 와서 더 나은 방법을 찾아도 다시 익히기는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지셀은 어떻게 해야 길리언의 장점을 극대화하며 한계를 더 넓힐 수 있을지 고민했다.

"...감사합니다."

길리언은 오랜만에 가슴이 뛰었다.

'욕심은 다 버린 줄 알았건만....'

길리언은 한계를 마주하고 은퇴한 지 오래였다. 단장직을 내려놓으며 강함에 대한 미련도 놓은 줄 알았다.

하지만 버린 줄 알았던 욕망은 불씨를 만나자마자 다시 타올랐다.

그가 속해 있던 라타토스크 용병단은 나름대로 유서가 깊은 단체였다.

역사가 오래된 만큼, 대대로 전해 내려온 마나 연공법도 존재했다. 단장과 주요 인물들은 모두 그 연공법을 익히고, 은퇴할 때는 다음 대에 마나 연공법을 전수해 왔다.

용병단이 구한 것치고는 꽤 수준 높은 마나 연공법이긴 했지만 지셀이 알고 있는 것에 비할 수는 없었다.

마나 연공법뿐만이 아니다. 지셀이 정리한 무기술은 대륙의 내로라하는 기사들도 군침을 흘릴 만한 것이었다.

'이런 보물들을 주실 줄이야.'

성 하나를 주고도 얻지 못할 보물들이었다. 그 가치를 아는 자들이 본다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차지하려고 애쓸 것이다.

혈육에게도 주기 아까울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건네주는 배포도 놀라웠다.

하지만 지셀이 그런 보물을 줄 정도로 자신을 믿어 준다는 것이 훨씬 더 감격스러웠다.

길리언은 조심스럽게 책들을 챙기며 고개를 숙였다.

"최대한 빠르게 익히도록 하겠습니다. 꼴통 놈들의 훈련도 더 강도를 높이겠습니다."

"그놈들은 좀 더 굴리는 게 좋겠지만, 길리언은 지금 훈련도 충분하니까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지셀이 걱정스럽게 말했지만 길리언은 고개를 저었다.

전쟁이 코앞이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조금이라도 더 강해져야 승리할 확률이 올라간다.

길리언은 비장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영주님의 적을 모조리 쳐부수는 게 제 역할이니까요. 아직은 부족합니다."

역시 곁에 있기만 해도 든든한 사람이다.

지셀은 배부른 사자 같은 미소를 지었다.

* * *

길리언과 카오르에게 비전을 전해 준 것과 달리, 지셀은 벨린다에게 따로 무언가를 주지 않았다.

대신 그녀를 만나 한 가지를 물었다.

"수련 안 한 지 얼마나 됐어?"

"음, 제대로 안 한 지는 아마... 한 십 년은 넘었죠?"

"왜?"

지셀이 궁금해하자 벨린다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왜긴요. 도련님하고 엘레나 아가씨를 제가 키웠잖아요? 두 분 다 좀 크고 나서 살 만하다 싶어질 즈음에는 도련님이 사고만 치고 다녀서 그거 수습하느라 바빴고요."

"...그래도 요즘은 사고 좀 덜 치잖아."

"빈도가 줄어든 대신 규모가 커졌죠. 뭐, 도련님 뒷바라지가 아니더라도 집사장 일이 많기도 하고요. 제대로 수련할 시간을 내기가 힘들어요."

수련하기는커녕 기존의 실력이라도 퇴보하지 않게 겨우겨우 유지하는 게 한계였다.

벨린다야말로 이곳에서 가장 현실적인 문제에 치이고 사는 장본인이라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싸우는 게 업이었던 길리언이나 카오르와 상황이 달랐다.

육아, 교육, 영지 관리 등 그녀가 페르디움에서 맡아 했던 일은 무척이나 많았으니까.

그리고 펜리스 영지에 와서도 집사장으로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지셀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음, 역시 수련이 부업이었어.'

벨린다의 마나 연공법과 기술은 언뜻 보기만 해도 훌륭하다.

길리언과 카오르에게 했던 것처럼 직접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간혹 그녀가 싸울 때 느껴지는 마나의 흐름만 봐도 대단하다는 게 피부에 와닿을 정도였다.

웬만큼 명성 높은 기사 가문의 연공법도 그녀가 익힌 것에는 비할 바가 못 될 것이다.

섣불리 손을 댔다가는 오히려 혼란만 줄 게 뻔했다.

'아마도 어머니의 가문에서 익혀 왔겠지?'

몰락 귀족이었다는 어머니의 가문에 어떻게 저런 마나 연공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벨린다는 어머니의 가문에 관해서는 통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지셀도 어머니에 관해 아는 게 많지 않았다. 회귀자라고 모르는 걸 저절로 알게 되는 건 아니었으니까.

'생각해 보니까 진짜 이상하네. 십 년이나 넘게 수련을 안 했는데도 실력이 저렇게 대단하다는 거지.'

아마 벨린다가 쉬지 않고 수련에 전념했다면 카오르 정도는 따귀 한 대만 때려도 목을 돌려 버릴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고 일을 그만두고 수련만 하라고 할 수도 없고....'

총관인 클로드와 집사장인 벨린다가 영지의 내정을 책임지고 있다 보니, 두 사람 중 하나라도 일을 놔 버리면 영지가 엉망이 될 것이다.

'역시 돈지랄밖에 방법이 없겠어.'

지셀은 결단을 내리고 바로 마법사들과 공예사들을 소집했다.

우선 벨린다의 침실에 마나 집속진을 깔아 주었다.

다른 사람들의 수련을 위해 준비한 것들과는 조금 달랐다. 효과를 높이고 유지 시간을 늘리기 위해, 기존 마법진에 쓰인 것의 몇 배나 되는 룬스톤을 들이부었기 때문이다.

마나 연공을 할 때 도움이 되는 팔찌도 잔뜩 만들었다.

집속진과 효과는 비슷하지만, 효율이 극히 떨어져 만들수록 손해인 그런 물건을 말이다.

당연히 룬스톤도 어마어마하게 들었다. 마법사들이 기겁하며 물을 정도였다.

"이걸 누가 쓰려고 이렇게 만드는 겁니까? 용병들한테 주시려고요?"

"아니, 집사장이 쓸 거야."

"한 사람이 쓰기엔 너무 많은 거 아닙니까? 영지의 일 년 치 예산을 훌쩍 넘기는데요."

"집사장은 무척 바쁜 사람이거든. 그러니까 틈틈이 수련할 수 있게 최고의 환경을 만들어줘야지."

지셀은 특히 공예사들에게 신신당부했다.

"팔찌에 '샤르넬'이라고 새겨 줘. 알지? 모양도 비슷하게 하고."

"저... 영주님.... 저희가 만들면 짝퉁이 되는 겁니다."

"어디에 가져다 팔 거 아니니까 괜찮아. 나 그런 사람 아니거든. 그냥 기분이라도 내자 이거지."

"...알겠습니다."

지셀이 준비한 선물을 받고 벨린다는 눈물까지 글썽거릴 정도로 기뻐했다.

그렇지 않아도 항상 수련할 시간이 부족해서 걱정이었다. 그런데 전용 마나 집속진이 생겼고 마나 연공에 도움이 되는 팔찌까지 받았다.

틈날 때마다 수련을 하면 훨씬 빠르게 마나가 모일 것이다.

"마나 연공에는 이것들이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거야. 몸 움직이는 건 잠깐이라도 시간을 빼서 수련하고. 당장은 이거밖에 방법이 없네."

지셀의 말에 벨린다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이거밖에'라고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다 못해 과하다. 자신을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지셀의 마음이 너무도 기꺼웠다.

"아깝게 뭐 하러 돈을 이렇게 많이 써요. 영지를 위해 써야죠."

"벨린다는 항상 남들 뒷바라지만 하느라 본인 수련은 제대로 못 했잖아. 이것도 부족한 거지."

말만 들어도 그간의 피로와 고생이 싹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어렸을 때는 그렇게 사고뭉치였는데 이렇게 대견스럽게 자라다니.

돌아가신 백작 부인께서 이 모습을 봤으면 정말 좋으련만.

벨린다는 눈물을 살짝 닦으며 말했다.

"이 팔찌.... 짝퉁이죠?"

"...티 많이 나?"

지셀이 멋쩍게 머리를 긁었다. 그 모습을 본 벨린다는 눈을 흘기다 밝게 웃었다.

"그래도 지금까지 봤던 팔찌 중에서 제일 마음에 들어요."

그녀에게는 세상 그 어떤 명품보다도 더 값진 선물이었다.

* * *

벨린다와 길리언, 카오르를 제외하면 따로 더 챙길 사람은 없었다.

마법사들은 원래도 지원을 많이 해 주고 있었고, 퍼거스는 나이 때문에 지셀이 예전부터 챙기고 있었으니까.

이제는 수습 기사가 된 용병들과 전생의 수하들을 가르칠 차례였다.

1차로 모인 수습 기사들을 보며 지셀이 진중하게 설명했다.

"이제부터 내가 가르칠 건 시중에 떠돌아다니는 허접한 마나 연공법이 아니다.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페르디움 가문의 마나 연공법이지."

듣고 있던 수습 기사들은 하나같이 경악했다.

'소문이 사실이었어! 정말 가문의 것을 가르치겠다니!'

지금 지셀이 하려는 건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충성을 맹세한 자에게도 가주의 허락 없이는 마나 연공법을 함부로 가르칠 수 없다. 그것을 어긴다면 혈육이라도 용서하지 않는 것이 이 시대의 법도였다.

지셀이 아무리 가문의 적장자라고는 하지만 아직 가주는 아니다.

그런데 한둘도 아니고 수백 명에게 그걸 가르쳐 주겠다니, 차라리 농담이라고 하는 게 더 믿을 만했다.

수습 기사 하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정말 가문의 것을 저희에게 가르쳐 주셔도 되겠습니까?"

가문마다 수하들에게 가르치는 마나 연공법도 따로 있다. 원본에 비해 현저히 수준이 떨어지지만, 이들은 그 정도도 감지덕지라고 생각했다.

밑바닥 인생인 그들에게 허락된 최대치는 정말 그 정도였다. 그 이상은 감히 욕심도 내서는 안 되는 줄 알고 살아왔다.

하지만 지셀은 뭐가 문제냐는 식으로 퉁명스럽게 답했다.

"못 가르칠 이유도 없지. 내가 가르치고 싶으면 가르치는 거다."

"어, 어째서 그렇게까지.... 밖에 알려지면 위험해지시는 거 아닙니까?"

"위험은 무슨, 전쟁에서 지는 게 더 위험하지. 이기려면 일단 너희부터 강하게 키워야 하고."

한 사람이라도 더 강해져야 하는 건 맞다. 그래도 너무 과한 처사였다.

유출도 문제지만, 혹여나 배신하고 영주에게 칼을 들이대는 자가 생기면 어찌할 생각인 건지.

지셀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 입꼬리가 처진 이들을 돌아보며 그가 피식 웃었다.

"너희들이 전쟁에서 죽지 않기를 바라기도 하고."

마수의 숲에서부터 함께한 자들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들은 지셀이 그간 어떻게 싸워 왔는지 바로 곁에서 지켜본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저 말이 진심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숙연해진 분위기 속에서 지셀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너희와 함께하고 싶어서다."

그제야 사람들은 깨달았다.

영주가 자신들에게 먼저 믿음을 주고 있다는 것을.

목숨을 파는 천한 직업이라 괄시받던 이들이었다. 지셀이 새로 찾아온 자들도 별다를 게 없었다.

그런 삶에서 벗어나고 싶어도 여건과 환경이 따라 주지 않았다.

그런데 영주가 지금, 자신들이 그토록 바라던 기회를 주고 있었다.

무언가를 받으면 무언가를 줘야 하는 법.

그것은 용병이나 기사나 다를 게 없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심장에 주먹을 가져다 대었다.

이제 막 기사가 된 이들이라 예법에 맞지 않는 어설픈 모양새였지만 마음만은 그 누구보다 진실했다.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은 이들은 마음을 다해 외쳤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이들이 지셀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이것뿐이었다.

그리고 지셀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165화 체질 개선에 들어간다. (4)

수습 기사들의 눈빛을 본 지셀은 내심 만족했다.

눈빛에서 확고한 의지와 열정이 느껴진다. 다들 이 기회를 놓치기 싫어하는 게 뻔히 보였다.

'이제 준비가 됐다.'

지셀은 바로 이런 걸 기다리고 있었다. 이 수련은 무척이나 위험했기 때문이다.

열기로 가득 찬 분위기에 기름을 끼얹듯 지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제대로 된 마나 연공법도 몇 년은 수련해야 마나를 쓸 수 있다고들 하지.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내가 아주 이해하기 쉽게 알려 주겠다. 두 달이면 다들 마나를 사용할 수 있을 거다."

측근들과 달리 이들은 하나하나 지셀이 직접 봐줄 생각이었다.

그냥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두면 이해도 못 할 테고,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 기간을 급격하게 단축하는 방법은 오직 지셀만이 알고 있었다.

"우와아아아!"

다시 한번 열성적인 환호가 터져 나왔다.

마나 집속진은 그저 마나를 조금 더 빨리 모을 수 있게 도와주는 것뿐이다.

마나 연공법을 익히고 사용하는 건 전혀 다른 얘기였다.

적어도 몇 년은 수련을 해야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겨우 두 달이라니!

믿을 수 없는 얘기를 연거푸 들으니 이게 정말 꿈이 아닌지 의심까지 들었다.

지셀은 거만하게 팔짱을 낀 채 자신 있게 말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이건 내가 직접 개량한 속성 마나 연공법이기 때문이다!"

"...."

달아올랐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이들도 기본적인 상식은 있다.

마나 연공법은 오랜 세월을 거쳐 부작용을 줄이는 방식을 찾아낸 것이다.

그런데 나이도 젊은 영주가 마나 연공법을 자기 멋대로 개량했다고?

아무리 영주의 실력이 뛰어나더라도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으니까.

수습 기사들이 눈치를 보며 불안한 기색을 내보였지만, 지셀은 모른 척하고 말했다.

"자, 그러면 시작해 보자. 나도 오랜만에 하는 거라 처음은 좀 튼튼한 놈이 좋겠는데.... 그렇지, 고든 너부터 나와라."

가장 먼저 호명된 '근육의 고든'이 기겁하며 고개를 저었다.

"저, 저요? 다른 사람부터 먼저 하면 안 될까요?"

"너 저번에 마나 집속진에 너보다 밀알이 먼저 들어가는 게 억울하다며? 이번엔 제일 먼저 들어가게 해 줄게. 빨리 나와."

고든이 주저하며 나오자 지셀은 그를 위아래로 뜯어보고는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근육을 이 정도까지 키웠으면 그래도 나름대로 인내심은 있겠지.'

바닥에 앉은 고든의 등에 지셀이 손바닥을 붙였다.

"자, 시작한다. 내가 강제로 마나를 끌어와 네 몸에 각인시킬 테니 마나가 움직이는 길을 잘 기억해라."

"아, 알겠습니다. 죽거나 폐인이 되거나 그러진 않죠?"

"못 버티면 그럴 수도 있어. 그러면 뭐 어쩔 수 없고."

"진짜 죽는다고요? 잠깐만요!"

구우우웅!

고든이 도망가기도 전에 지셀의 손을 통해 마나가 그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끄어어억!"

날카로운 칼날이 몸속을 헤집는 것 같은 고통에 고든이 비명을 질렀다.

배꼽 아래에 뭔가가 뭉치더니 곧 몸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그것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몸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으아아악! 잠깐! 잠깐!"

"마나 아깝게 다 날아가잖아! 입 닫아! 버텨라! 몸 안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 놓치지 말고 기억하란 말이다! 바네사는 잘 버텼는데 넌 왜 벌써 엄살이야!"

"으아악! 못 해요! 난 못해! 아파 죽겠어!"

편법이 괜히 편법이라 불리는 게 아니다. 빠르게 결과를 내는 만큼 그만한 대가가 필요하다.

몸에다 강제로 마나를 집어넣고 마나 로드를 만들어 내니 어마어마한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미칠 듯한 고통에 고든은 벌떡 일어나 도망가려 했다.

방금 막 생긴 충성도 정신과 함께 날아갈 판이었다.

하지만 그걸 그냥 두고 볼 지셀이 아니다.

덥석!

지셀은 그가 도망가지 못하게 한쪽 팔로 고든의 목을 감싸고 다른 한 손으로 계속 마나를 집어넣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마나 연공법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죽이려고 하는 거 같았다.

"꾸에에엑! 놔 줘! 으거어어억!"

"아, 좀 참으라니까! 일단 마나 로드라도 다 뚫어 놓자!"

근육이 많아서 잘 버틸 줄 알았는데 엄살도 이런 엄살이 없었다.

지셀은 계속 고든의 몸에 마나를 밀어 넣어 강제로 마나 로드를 만들었다.

"케엑! 쿨럭! 켁!"

계속되는 고통에 고든은 눈이 뒤집히고 입에서 피를 벌컥벌컥 토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지셀은 멈추지 않았다. 일단 마나 로드를 만들어야 집속진에서 수련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든은 버티지 못하고 결국 정신을 잃었다.

그러고 나서도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지셀은 이마에 흐른 땀을 닦으며 그를 풀어주었다.

털썩.

고든은 피거품을 물고 쓰러져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보며 지셀이 해맑게 웃었다.

"휴, 오랜만에 해서 그런가?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네."

"...."

세상 쉬운 일 없다더니 지금이 딱 그랬다.

대기하고 있던 수습 기사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다 같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그런 그들을 보며 지셀이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뭐야. 방금까지 넘치던 열정은 다 어디 갔어? 다음 사람 준비해야지?"

수습 기사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뭔가 굉장히 위험해 보이는데 꼭 그렇게 해야 합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고 싶은데?"

"그냥 정석대로 익히면 안 되나요? 책으로 주시거나 말로 알려 주시면 저희가 알아서 수련하다가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보고...."

나름 머리를 짜내 의견을 던졌지만 지셀에게는 택도 없는 말이었다.

"무슨 소리야? 그렇게 해서 언제 익혀? 수련을 몇 년이나 하려고. 아니, 어차피 말로 알려 줘 봐야 너희 대부분은 이해 못 할걸? 그래서 내가 지금 이해하기 쉽게 몸으로 가르쳐 주는 거잖아."

'아, 이해하기 쉽다는 게 그런 뜻이었구나.'

수습 기사들은 식은땀만 흘렸다.

일리는 있는 말이었다. 고통은 몸과 머리에 확실히 남는 법이니까.

마나 로드를 만드는 것도, 지금처럼 지셀이 강제로 뚫어 버리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긴 하다.

머리로는 알지만, 쓰러져서 피거품을 물고 있는 고든을 보면 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다들 이도 저도 못 하고 있던 그때, 쓰러져 있던 고든의 발작 증세가 더 심해졌다.

"컥, 커억, 쿨럭!"

그는 기절한 상태에서도 괴로워하며 피를 연신 토해 냈다.

강제로 주입한 마나가 몸 안을 엉망으로 만든 탓이었다.

의지력으로 그걸 버티며 흐름을 익혀야 하는데 초장부터 글렀다.

"이놈은 유독 엄살이 심하네. 덩치도 큰 놈이 왜 이렇게 약해?"

혀를 찬 지셀은 주변에 대기하고 있던 사용인들에게 손짓했다.

"어서 벨린다에게 데려가. 준비한 약초들을 먹이고 안정을 취하게 해라. 늦으면 죽을 수도 있으니까 빨리 가. 아, 벌써 죽었나?"

"알겠습니다. 아직 안 죽었습니다."

사용인들은 이런 결과를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침착하게 움직였다.

그 모습을 본 수습 기사들은 확신했다.

영주는 이렇게 될 걸 다 알고 준비까지 끝마쳤다는 것을.

전쟁 때 안 죽게 한다더니 수련을 하다가 죽게 생겼다.

'아, 어떻게 하지?'

'하긴 해야 하는데....'

'저거 너무 아파 보이는데.'

겁이 난다고 도망갈 수도 없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평생 후회하게 될 것이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어떻게든 버티고 배워야 했다.

그런데 막상 목숨을 걸려고 하니 발이 쉬이 떨어지지 않는다.

다들 주춤거리고 있을 때, 과묵하게 생긴 남자 하나가 성큼 걸어 나왔다.

"저부터 하겠습니다."

"음, 너는?"

"이번에 새로 합류한 루카스입니다."

지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른 척했지만 사실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전생의 수하였던 루카스.

한 자루의 창으로 훗날 마스터의 칭호까지 받았던 엄청난 재능의 소유자다.

언제나 팔짱을 끼고 무게를 잡으며 고독을 씹는 걸 좋아하는 남자였다.

그랬던 그가 뒤에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비웃었다.

"다들 평소에 잘난 척하더니 별거 없군. 이 정도 고통으로 마나 연공법을 익힐 수 있으면 싸게 먹히는 거지. 이 겁쟁이 새끼들아."

"이 새끼가...."

루카스의 도발에, 지셀과 오래 같이했던 용병들이 콧김을 씩씩 내뿜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누가 먼저 나서냐에 따라 주도권의 흐름이 달라진다.

그렇지 않아도 기존 용병들과 새로 온 자들끼리 매일 티격태격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잠깐 머뭇거리는 사이에 신참한테 순서도 뺏기고 도발까지 당했다.

열 받은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한껏 비웃은 루카스가 지셀의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준비됐습니다. 영주님 마음껏 해 보십쇼."

의연한 태도에 지셀이 미소를 지었다.

'과연 루카스. 내가 선택한 남자답다.'

지셀은 웃으며 루카스의 등에 손을 대었다.

그러자마자 괴상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흐어어어업! 으아아아아! 끄으으으읍! 허어어어어엇!"

"...아직 시작도 안 했다."

지셀은 한숨을 내쉬었다.

깜빡 잊고 있었다. 자신의 용병단에 정상적인 놈은 거의 없었다는 걸.

그러고 보니, 이놈은 전생에도 생채기 하나만 나도 아프다고 난리를 피우던 놈이었다.

그런 놈이 또 무게 잡기는 무척이나 좋아해서 더 웃겼지.

지금도 어차피 해야 할 거, 멋있어 보이기라도 하자 싶어 먼저 나섰을 것이다.

루카스가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긁었다.

"아, 아직 시작 안 했나요?"

"이제 시작이다. 고독한 엄살쟁이 루카스."

파아악!

"으아아아악!"

몰려오는 고통에 루카스가 소리를 질렀다. 입을 닫고 참아야 하는 것도 잊어버렸다.

그도 고든이 그랬듯 벌떡 일어나 도망가려 했지만, 지셀에게 잡힌 이상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셀은 루카스의 목을 붙잡고 귓가에 속삭였다.

"가만히 있어. 저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데 엄살 부리고 도망갈 거야? 너 쪽팔린 거 싫어하잖아?"

"윽, 으윽!"

그 말에 루카스는 이를 악물었다.

쪽팔린 건 싫다. 언제나 멋져 보이고 싶다.

'멋지고 폼 나게 살고 싶다아아아!'

그런 일념 하나로 버텼지만, 이 고통은 그렇게 쉽게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끄에에엑...."

결국 루카스는 정신을 놓아 버렸다.

게거품을 물고 쓰러진 그를 사용인들이 데리고 나갔다.

지셀은 고개를 몇 번 젓더니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다음?"

고든이 쓰러지고 루카스도 쓰러졌다. 하지만 분위기는 처음과 조금 달라졌다.

눈치를 보는 사람들을 내버려 두고 몇 사람이 용기 있게 나섰다.

"이번엔 제가 하겠습니다."

"제가 먼저 나왔습니다."

대부분 새로 합류한 자들이었다.

이들은 모든 걸 버리고 고향을 떠나왔다. 이제 돌아갈 곳도 없었다.

누구보다 강해질 수 있는 기회에 목마른 자들이라 목숨을 버릴 각오도 되어 있었다.

그러자 자존심이 상한 기존의 용병들도 앞다투어 나섰다.

"아닙니다!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야! 다들 비켜! 어디 신참이 먼저 나서고 지랄이야! 나부터 한다!"

창피하게 신입들에게 밀릴 순 없다는 일념에서였다.

'어차피 할 생각이었어! 조금 아플까 봐 망설였을 뿐이지.'

호기롭게 나선 이들을 보며 지셀은 그제야 만족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좋아, 아까보다는 훨씬 낫군."

앞으로 마주할 적들은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목숨 걸고 싸워도 부족할 정도다. 겨우 이 정도에 겁먹고 꺾이면 곤란하다.

자신과 함께 목숨을 걸고 싸울 자들만이 모든 걸 가질 자격이 있었다.

"빠르게 간다. 어떻게든 버텨라."

"으어어어억!"

"끼에에엑!"

지셀의 손길을 받은 수습 기사들이 고통에 몸부림쳤다. 호기롭게 나서긴 했지만, 호기만으로 버틸 수 있는 고통이 아니었다.

그래도 모두가 게거품을 물고 피를 토하며 기절하지는 않았다.

이를 꽉 깨물고 눈을 부릅뜨며 끝까지 버틴 자들도 있었다.

'흠, 이놈은 그럴 거 같았고. 이놈은 좀 의외인데?'

지셀은 눈을 가늘게 떴다.

전생의 수하들 중에 몇몇은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그런 놈들은 예상대로 잘 버텼다. 하지만 기존 용병들 중에서도 버티는 놈이 나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시작이 좋다. 물론 게거품을 물며 쓰러지는 자가 대다수였지만, 정신을 놓지 않은 사람도 생각보다 많았다.

지셀의 지시에 따르며 버틴 자들도 있었고, 자존심으로 정신만 겨우 붙잡고 있었던 자들도 있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이들은 모두 껍질을 벗고 한 걸음 나아갔다는 점이다.

"으으으으...."

"죽을 거 같아.... 이제 끝난 건가?"

사방에서 신음이 울려 퍼졌다. 급하게 증원된 사용인들이 쓰러진 이들을 치료실로 옮겼다.

다행히 죽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들것에 실려 가던 한 수습 기사가 버텨 냈다는 자부심과 후련함이 섞인 미소를 지으며 지셀에게 물었다.

"이제... 다 끝난 거죠? 이제 마나 쓸 수 있는 거죠?"

그러자 지셀이 코를 한번 훔치고는 답했다.

"뭔 소리야? 이거 한 번 했다고 어떻게 마나를 써. 오늘은 그냥 살짝 터만 잡은 거야. 길을 제대로 내려면 몇 번은 더 해야지. 집속진에서 수련도 하고 발산하는 법도 배워야 하고."

분명히 이거 버티면 마나를 쓸 수 있을 거라고는 했지만, 한 번이라고는 말 안 했다.

하지만 수습 기사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였다.

이렇게 아프고 죽을지도 모르는 짓을 또 한다고? 아니, 몇 번은 더 해야 한다고?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냥 죽여 줘...."

눈물을 글썽이던 수습 기사는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166화 체질 개선에 들어간다. (5)

수습 기사들은 마나 로드를 강제로 뚫는 고통에 시달리며 매일매일 초췌해져 갔다.

그들은 왜 영주가 유출 따위는 걱정하지 않았는지 절실히 깨달았다.

'이걸 다른 사람한테 어떻게 가르쳐.'

'이런 식으로 가르칠 수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도 없어.'

'할 줄 알아도 자칫하면 상대방이 죽어 버릴 거야.'

마나 로드가 강제로 만들어졌으니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말 그대로 이론은 모른 채 몸으로만 익힌 셈이었다.

수습 기사들이 초췌해지는 만큼 지셀의 안색도 거무죽죽해졌다. 그도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

'역시 한 번에 해치우는 건 쉽지 않아.'

거칠게 뚫는 거 같아도 지셀 나름대로는 수습 기사들이 죽지 않게 마나를 세심히 조절하고 있었다.

전생과 비교하면 마나 양도 현저하게 적은 탓에, 그 많은 인원을 다 관리하려면 마나 낭비도 없도록 신경 써야 했다.

그런 짓을 매일같이 마나가 바닥날 때까지 하고 있으니 몸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일정을 더 늘려야 하나? 이러다가 내가 먼저 죽어 버리겠네.'

오죽했으면 지셀도 중간에 포기할까 고민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지셀은 전생을 떠올리며 정신을 바짝 차렸다.

'시간 끌어서 좋을 건 없어. 하루하루가 목숨 빚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전생과 같은 후회를 반복할 수는 없다. 지셀은 이를 악물고 수습 기사들의 마나 로드를 뚫는 것에 집중했다.

이런 지셀의 각오는 말로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분위기로 풍겨 나왔다.

수습 기사들은 영주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동조되어 같이 이를 악물고 버텨 갔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자 그들의 눈빛은 잘 벼린 칼날과도 같이 날카로워졌다. 미약하게나마 마나를 느끼는 사람도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가장 기초적인 준비가 끝난 셈이었다.

지셀은 후련한 표정을 지으며 고통이 끝났음을 알렸다.

"지금까지 잘 버텼다. 이제 죽을 거 같은 고통은 끝이다. 앞으로 마나 집속진을 이용해 마나를 쌓고 움직이는 법을 알려주겠다."

"이야아아아!"

수습 기사들은 환호부터 내질렀다.

몇 번을 반복해도, 몸속을 헤집는 고통에는 익숙해지지 않았다.

독기를 품고 버티긴 했지만, 솔직히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

이제 그런 고통이 끝났다니 기쁠 수밖에 없었다.

수습 기사들은 본격적으로 마나 집속진을 이용해 수련하기 시작했다.

"이야, 드디어 마나 집속진에 들어와 보네."

"와, 마나가 정말 엄청나게 느껴지잖아?"

아무리 마나 로드가 생겼다 해도, 마나를 처음 다루는 사람이 마나를 흡수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마나 집속진의 어마어마한 힘 덕분에 수습 기사들은 숨만 쉬어도 마나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진짜야, 진짜로 내 몸이 마나를 받아들이고 있어!'

'고생 끝! 이제 행복 시작이구나!'

다들 마나 집속진에 앉아 헤실헤실 웃었다. 웃음을 참으려 해도 참을 수가 없었다.

'아, 마나를 다루는 기사가 됐는데 이걸 어떻게 참냐고.'

수습 기사들은 지셀에게 마나를 통제하고 발산하는 법도 차근차근 배워 나갔다.

아직은 마나를 다루기가 쉽지 않지만, 지셀이 몸에 새겨 준 마나 로드를 따라 조금씩 움직여 보기도 했다.

조금 지겹기는 해도 전날까지 겪었던 고통에 비하면 이건 천국이었다.

'난 영주님을 믿고 있었다니까. 다 계획이 있으셨던 거지.'

'어휴, 내 믿음이 부족했네.'

언제 영주를 욕했냐는 듯, 다들 속으로 지셀을 칭찬하기에 바빴다.

원래 기억이라는 게 그렇다. 아무리 고통스러웠어도, 그 고통이 지나고 난 뒤 보상이 좋으면 다 추억으로 남는 법이다.

모두는 앞으로도 이 행복이 지속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드디어 수습 기사들은 실제로 마나를 사용하는 과정에 들어갔다.

"자, 이제부터가 진짜다. 마나를 느끼고 쌓는다 해도 사용할 줄 모르면 의미가 없다. 고든! 앞으로 나와 지금까지 배운 대로 마나를 사용해 봐라."

지셀의 말에 고든이 자신만만하게 나섰다.

그리고 지금까지 배우고 익힌 걸 토대로 마나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아아! 이런 기분이었구나!'

고든은 마나가 온몸으로 퍼지자 황홀경에 빠졌다.

마나 양은 겨우 쥐똥만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육체가 강철같이 단단해지는 게 확실히 느껴진다.

무엇이든 부술 수 있고 무엇이든 막을 수 있을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금껏 모르고 살았던 신세계!

'이게 마나지! 지금의 나는 무적이다! 카오르 그 새끼도 이길 수 있을 거 같아!'

내친김에 고든은 모든 마나를 끌어올렸다.

이 강력함을 더욱더 확실히 느끼고 싶었다.

파아아악!

"오오오! 고든이 저런 기세를 내뿜다니!"

고든의 기세가 커질수록, 다른 수습 기사들도 빨리 해 보고 싶어서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우에에엑! 케에에엑!"

쥐똥만 한 마나를 전부 소모한 고든이 피를 엄청나게 토하며 주저앉았다.

"...?"

다들 당황해서 눈만 동그랗게 뜨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셀은 손뼉까지 치며 좋아했다.

"좋아! 잘했다! 바로 그렇게 쓰는 거야! 어때? 강력함이 막 느껴지지?"

고든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지셀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저기? 영주님? 저 지금 아픈데요? 저 피 토했는데요? 힘이 다 빠져 버렸는데요?"

"아, 그건 원래 그런 거야."

"...원래 그렇다고요?"

"일종의 부작용이야. 가진 마나보다 더 강력한 힘을 내는 대신에 몸에 무리가 많이 간다고 할까? 마나를 폭발시키는 방식이거든."

"부작용...이요? 설마, 마나 쓸 때마다 계속 피를 토하고 쓰러져요?"

"응, 그래도 걱정하지 마. 전부 다 소모해야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건데 열심히 수련하고 더 강해지면 괜찮아져."

"아, 나중에 괜찮아지는구나...."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지셀의 말에 고든도 안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뭔가 찝찝함이 느껴져 다시 물었다.

"그런데 열심히 수련 안 하고 강해지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지셀이 먼 산을 보듯 시선을 돌리며 읊었다.

"이미 몸에 쌓인 마나가 계속 폭발하려고 하다 보니,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소모될 거야. 그게 반복되면 결국 생명력까지 전부 빨려서 죽는 거지."

"... 죽는다고요?"

"그래. 그러니까 그걸 통제할 정도로 빨리 강해져야겠지? 강해질수록 마나를 쓸 수 있는 시간도 늘어난다. 그 말은 즉 수명도 같이 늘어난다는 거지."

"무, 무슨 그런 해괴한 마나 연공법이 다 있습니까?! 이거 페르디움 가문의 마나 연공법 아니었어요?"

"페르디움 연공법을 기본으로 내가 개량한 거지. 그나마 이건 너희들도 쉽게 익힐 수 있게 부작용을 조금 줄인 거야. 마나가 그렇게 심하게 폭발하는 건 아니거든."

"아.... 그렇구나. 약한 놈은 죽어 버리는 게 그나마 부작용을 줄인 거구나. 으허허허!"

고든이 눈물을 글썽이며 웃었다. 구경하던 수습 기사들의 눈에도 눈물이 글썽거렸다.

헛웃음을 흘리던 고든이 참다못해 결국 빽 소리를 질렀다.

"아, 처음엔 그런 말 없었잖아요! 이거 사기 계약 아닙니까? 당장 물러 주십쇼!"

지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와, 너 예전에는 자주 사기당했다더니, 이제 글도 배우고 많이 달라졌구나. 계약을 물러 달라니. 너 많이 변했어."

"으아아아! 뭔 소리예요! 그냥 안 배운 걸로 할 테니까 취소해 달라고요!"

"아, 아무리 나라도 취소는 못 해. 그냥 수련 열심히 해서 얼른 경지를 높이는 게 유일한 방법이다. 살고 싶으면 다들 지금보다 강해져야 할 거야."

고든을 비롯한 수습 기사들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도대체 어쩌려고 이런 미친 마나 연공법을 만든 거야?'

'하긴, 애초에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었지. 그걸 까먹었던 우리 죄다, 우리 죄.'

지금까지 영주와 측근들만 정신없이 바빴다면, 이제 수습 기사들도 정신없이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펜리스 기사단은 문자 그대로 강한 놈만 살아남는 기사단이 되었다.

제명에 죽고 싶으면 진짜 죽어라 수련해서 강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고통의 시작이었다.

* * *

데스몬드 백작, 해럴드는 집무실 안에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지셀과의 전쟁에서 잃은 전력을 다시 정비하느라 바쁘게 움직인 탓에, 그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불면증에 시달릴 정도로 바쁜 와중에도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공작가에서 온 서신의 내용이 유독 그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그놈이 브랜포드 후작을 후견인으로 두고, 친왕파에 들어갔다고? 브리반트 대신 지원까지 받기로 했다니...."

그가 지셀에 대해 마지막으로 받았던 보고 내용은 영지를 뒤집어엎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뒤로 첩자들이 전부 색출되고 펜리스 영지가 봉쇄되어 한동안 그쪽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런데 지셀이 어느 날 갑자기 수도에 나타나더니 화장품을 팔고 순식간에 유명 인사가 되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래도 설마 망나니 주제에 무슨 일을 벌일 수 있을까 싶어 무시하고 있었는데, 친왕파에 들어갔을 줄이야.

해럴드는 혀를 차며 서신을 노려보다가, 옆에 있던 부관에게 물었다.

"공작가에서는 지셀을 레이폴드의 기사단장 위르겐과 동급으로 취급하라고 했다. 이 정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지?"

"...저도 믿을 수는 없지만, 공작가에서 아무 근거 없이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이해할 수가 없군."

해럴드는 양손으로 제 머리를 부여잡았다.

위르겐은 왕국 전역을 통틀어도 손꼽히는 강자였다. 괜히 북부 제일의 기사라 불리며 대영지인 레이폴드의 기사단장 자리를 꿰차고 있는 게 아니다.

만약 공작가의 평가가 맞는다면 빅토르가 지셀에게 당한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지셀, 지셀! 이 망할 새끼 때문에!"

공작가는 지셀에 대한 경고만 한 게 아니다.

왜 이런 인물을 제대로 조사하지 못했냐는 질책과 함께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경고도 함께 보냈다.

실패 없이 승승장구만 하던 해럴드의 인생에 처음으로 겪는 수치였다.

지셀 하나 때문에 모든 일이 엉망이 되어 버렸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펜리스 영지에 쳐들어가고 싶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급한 일이 해럴드를 압박하고 있었다.

"레이폴드 백작 쪽의 움직임은 어떻지?"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게 확실합니다."

"역시 이쪽을 노리는 거겠지. 무슨 명분을 들먹일 건지도 예상되나?"

"페르디움을 공격한 데 대해, 페르디움의 동맹으로서 징치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울 것으로 보입니다. 적법한 명분도 없는 저희 쪽에서 제대로 절차도 밟지 않고 몰래 공격한 건 문제라고 주장할 듯합니다."

"미친 새끼."

정작 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페르디움을 모른 척한 주제에 뒤늦게 동맹이라고 들먹이는 꼴이 역겨웠다.

애초에 해럴드도, 자신이 디갈드를 도왔다는 사실을 영원히 숨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리 병력을 나눠서 잠입시켰다 하더라도, 그만한 대군이 움직였다. 상세히 조사하면 결국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는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정의는 승자의 것이니까. 빅토르가 이겼다면 의혹은 의혹으로만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전쟁에서 패배했고, 레이폴드 백작은 기다렸다는 듯 바로 이빨을 드러냈다.

해럴드가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하필 이럴 때 움직이기 시작하다니."

부관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아멜리아의 반란을 서둘러야 합니다."

"끄응...."

해럴드는 자기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냈다.

부관의 말에는 틀린 점이 없었다. 이미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 아멜리아에게 많은 자금과 수십 명의 기사들까지 지원한 상황이었다.

자칫 반란 전에 레이폴드 백작이 데스몬드에 전쟁을 걸면, 그 엄청난 자원들이 모조리 공중분해 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해럴드는 차마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위르겐, 위르겐을 상대할 자가 없어. 빅토르만 있었어도...."

북부제일검이라 불리는 레이폴드의 기사단장 위르겐. 그를 상대하기 위해 키워 왔던 빅토르가 지난 전쟁에서 죽고 말았다.

위르겐을 정면에서 상대할 자가 없으니, 반란을 일으켜도 성공하리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이번에 아멜리아의 반란마저도 실패하면, 해럴드의 목은 레이폴드가 아니라 공작가에 의해 날아갈 것이다.

가뜩이나 성격이 신중한 편인데 자신의 목숨까지 걸려 있으니 쉽사리 움직일 수 없었다.

부관도 그가 주저하는 이유를 알기에 최대한 객관적인 어조로 보고를 이어 갔다.

"예측하기로는 두세 달이면 레이폴드 쪽에서 전쟁 준비가 끝날 듯합니다."

"시간이 촉박한 건 안다. 하지만 실패하면 더 위험해. 아멜리아에게는 준비를 철저히 하라고 일러라."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났다고 합니다. 북부에 흩어져 있는 휘하 단체를 모두 소집해 두었으니 허가만 떨어지면 바로 움직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 말에 해럴드는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아멜리아가 똑똑한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모든 판세를 읽고 예측한 듯이 움직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흥, 여전히 눈치는 빠른 계집이군."

"그렇지 않아도 아멜리아 쪽에서 전언이 있었습니다."

"뭔가?"

"만약 위르겐 때문에 고민이라면 그쪽에서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그러니 신경 쓰지 말고 빨리 날짜만 잡아 달라고 합니다."

부관의 말에 해럴드는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가장 중요한 일을 신경 쓰지 말라니?

자신의 고민을 감히 아멜리아 따위가 넘겨짚었다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

"쯧.... 잘한다, 잘한다 했더니 아주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구나. 힘이 좀 생겼다고 간이 부은 건가? 건방진 년."

"아무래도 아멜리아 쪽도 급한 모양입니다. 레이폴드 백작이 전쟁을 일으키면 어마어마한 병력을 거느리게 될 테니까요."

전쟁이 일어난 후에는 아멜리아가 빈 성을 점령해 봤자 소용이 없다.

레이폴드 백작이 대군을 끌고 돌아오기만 해도 낙엽처럼 쓸려 나갈 테니까.

해럴드도 아멜리아가 초조해하는 이유는 이해했지만, 그런 이유만으로 섣불리 도박을 걸 수는 없었다.

아멜리아야 죽든 말든 상관없지만, 그녀가 실패하면 자신의 목도 달아난다.

"까불지 말고 기다리라고 전해라. 내 허락 없이 움직이는 건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펜리스 영지에 들어갈 다음 이주민들 사이에 첩자들을 섞어 넣어라. 그쪽도 아예 손을 놓고 있으면 안 되겠어. 기회가 되는 대로 영지에서 하는 일들을 방해하라고 해."

"알겠습니다."

펜리스 영지가 영지를 봉쇄하는 바람에 외부인이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수천의 이주민에 섞여 있는 첩자들까지 모두 솎아 낼 수는 없을 것이다.

부관이 고개를 숙이고 물러나자 해럴드는 미간을 좁히며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요새 갈수록 두통이 심해지고 있었다.

"지셀.... 지셀 페르디움."

그놈 때문에 모든 계획이 꼬일 대로 꼬여 버렸다.

당장이라도 쳐들어가 짓밟아 버리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해럴드와 아멜리아의 발은 레이폴드에 묶여 있고, 다른 영주들을 움직이고 싶어도 친왕파 때문에 섣불리 시도하기 어려웠다.

한 마디로 운 하나는 타고난 놈이었다.

"운 좋은 놈. 여유를 즐길 수 있을 때 즐겨 놔라. 레이폴드만 정리하면 다음은 네 차례다."

그놈은 겨우 잠깐의 시간을 벌었을 뿐이다. 놈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 죽을 운명이란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는데도, 속이 끓어올라 도무지 진정할 수가 없었다.

"기다려라. 그간 나댔던 걸 반드시 후회하게 해 줄 테니까."

시선을 내리깐 해럴드의 두 눈에서 기필코 지셀을 죽이겠다는 살기가 흘러나왔다.

167화 우리 한번 잘해 보자고! (1)

"멍청한 놈."

아멜리아는 해럴드의 서신을 받자마자 이를 갈았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신중한 것도 좋지만 적절한 때를 포착하는 것도 능력이다.

해럴드는 분명 유능한 사람이지만, 특유의 신중함이 지금은 오히려 그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지금 그렇게 고민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닌데. 위르겐은 우리가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그렇게 말했건만. 베르나프, 넌 어떻게 생각해? 베르나프?"

서신을 노려보던 아멜리아는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베르나프는 황홀해하는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멜리아는 이마를 짚고 눈을 감은 채, 숨을 크게 내쉬었다.

'하아, 내 잘못이지. 내 잘못이야.'

사실 베르나프가 본래부터 이렇게 돌대가리였던 건 아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오히려 총명한 편이었다.

하지만 요새는 아예 생각을 안 하고 산다.

어떻게 보면 아멜리아의 잘못이나 마찬가지였다. 계획은 다 그녀가 짜고, 베르나프는 아멜리아가 시키는 대로만 움직이게 했으니까.

생각을 할 필요가 없어진 뒤로 베르나프는 시도 때도 없이 아멜리아의 얼굴만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좋아서 그런다는데 차마 뭐라 할 수도 없었다.

"베르나프!"

냐앙!

"네? 넵!"

아멜리아와 바스테트의 호통에 베르나프가 깜짝 정신을 차리고 침을 닦았다.

아멜리아는 다시 한숨을 내쉬고는 빠르게 말했다.

"해럴드가 멍청하게 굴고 있으니 우리가 먼저 움직여야겠어."

"데스몬드 백작은 자신의 계획에서 벗어나는 걸 무척 싫어하지 않습니까? 이쪽에서 마음대로 움직였다간 성공하더라도 분명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일단은 허락을 하게 해야지."

"어떻게요?"

"해럴드에게 거짓 정보를 보낼 거야. 아버지가 병력을 다 모으면 그때는 정말로 손을 쓸 수가 없어. 그자도 시기는 대충 예상하고 있을 테니, 아슬아슬할 때 거짓 정보를 보내면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을걸."

"아하, 그러면 똥줄이 타서 더 말리지는 못하겠군요. 좋은 생각입니다."

"그래, 그리고...."

아멜리아는 서늘한 눈빛을 내비치며 말을 이었다.

"성공한 뒤에는 해럴드를 건너뛰고 공작가와 직접 연락할 방법을 찾아야겠어."

그 말에 베르나프는 침을 꿀꺽 삼켰다.

해럴드는 언제나 아멜리아를 무시하는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그러니 서로 간의 감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일단 같은 편이고 뒤에 공작가가 있으니 전쟁까지 갈 일은 없겠지만, 정치적으로 그를 제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뭔가 생각해 둔 방법이 있는 듯했다.

베르나프는 무슨 계획이 있는지 물어볼까 고민하다가 금세 관뒀다.

'들어 봤자 머리만 아프고 일만 많아지겠지?'

그가 모른 척 입을 닫고 있자 아멜리아가 다른 보고서를 주워 들고 물었다.

"지셀 쪽과 거래는 별문제 없지?"

악티움 상단에서 지셀과 거래해도 괜찮을지 물어봤을 때, 아멜리아는 큰 고민 없이 허락했다.

지금은 지셀을 방해하는 게 아니라 반란을 성공시키고 상단을 키우는 것이 중요했으니까.

그녀는 필요하다면 적과도 아무렇지 않게 손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아멜리아는 별생각 없이 확인차 물은 것이었으나, 베르나프는 조금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네, 예상대로 식량과 자재,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을 구매하고 있습니다. 다만...."

"다만?"

"그쪽에서 자꾸 가격을 1골드씩 깎는다고 합니다."

"뭐? 1골드? 몇백 골드가 아니고?"

"네, 1골드요."

"왜?"

"모릅니다. 그냥 무작정 깎아 달라고 한답니다. 그것도 딱 1골드만."

"...."

아멜리아는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 새끼가 지금 나 약 올리는 건가?'

사실 이번 일은 클로드가 개인적 욕심을 채우기 위해 벌인 짓이었지만, 아멜리아가 그걸 알 리가 없었다.

한 영지에 미친놈이 그렇게 잔뜩 몰려 있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몰려오는 두통에 미간을 문지르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일단 내버려 둬. 그리고 수도로 사람을 보내서 지셀의 화장품을 몇 개 구해 와."

"네? 그걸... 왜요?"

"어떤지 좀 보려고. 효과가 좋다고 하니 나도 한번 써 보게."

아멜리아도 지셀에 대한 공작가의 평가와 수도에서 있었던 일에 관한 정보를 이미 입수한 상태였다.

그놈을 생각할 때마다 열이 뻗치지만, 지셀이 이제는 브랜포드 후작까지 등에 업을 정도로 거물이 되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런 능력이 있는 놈인 줄 알았다면 2만 골드가 아니라 20만 골드라도 줬을 텐데. 짜증 나는 놈이지만 아깝긴 하단 말이야."

미묘한 뉘앙스를 풍기는 아멜리아의 발언에 베르나프가 살짝 불안해하며 물었다.

"그러면.... 혹시 뭐 다시 약혼이라도 진행할 생각이신가요?"

아멜리아는 자신이 원하는 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얻어 내는 사람이다.

지셀을 정말 아까워한다면 약혼을 다시 제안할 수도 있었다.

불안감이 절절 흐르는 베르나프의 목소리에 아멜리아는 피식 웃었다.

저렇게 자신의 마음을 잘 내보이기도 쉽지 않을 텐데.

"됐어. 능력이 있어도 재수 없는 놈인 건 사실이니까. 난 내 앞에서 그렇게 뻗대는 놈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 그리고...."

잠깐 침묵한 아멜리아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굳이 그런 놈 때문에 내 사람에게 상처를 줄 필요는 없겠지."

그 말에 베르나프는 얼굴이 활짝 폈다. 괜히 또 심장이 벌렁거리고 얼굴에 열이 올랐다.

가끔가다 겨우 듣는 말이지만, '내 사람'이라는 말은 왠지 자신에게만 특별히 해 주는 말 같았다.

아멜리아는 자리에 앉아, 바스테트를 품에 안고 와인을 잔에 따르며 말했다.

"뭐 해? 어서 움직여. 거사 준비는 실수 없이 확실히 하도록 하고."

"넵! 알겠습니다!"

베르나프는 상기된 얼굴로 군례를 취한 뒤 물러났다.

신이 나서 떠나는 그를 보며 아멜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좋을까? 참.... 바스테트, 너는 어떠니?"

냐앙.

바스테트도 그녀의 품에 머리를 비비며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내었다.

아멜리아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와인을 음미했다.

* * *

수습 기사들의 기초를 잡아 준 지셀은 숨 고를 틈도 없이 클로드를 닦달했다.

다음으로 계획한 일을 진행하려면 한시가 급했다.

"노예상들은 아직 연락이 없나? 어떻게 된 거야? 그놈들 내 돈 먹고 튄 거 아냐?"

"아, 어제도 물어보셨잖아요. 시간이 더 걸린다고 따로 전갈도 왔다니까요. 아무래도 가격이 가격이니만큼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거겠죠."

이종족 노예는 단 한 명만 데리고 움직여도 비용이 많이 든다.

그들을 노리는 산적들과 영주들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하나만 뺏으면 큰돈을 만질 수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결국 노예상들도 노예를 호위하는 데 만전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지셀이 요구한 이종족 노예는 한두 명도 아니었다.

수많은 지부에서 모아 와야 하는 만큼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그래서 드워프들만 빠르게 모아서 먼저 보내라고 신신당부했잖아. 다른 노예들은 다 뒤로 미뤄서라도."

"그건.... 휴. 신용이 생명줄인 사람들인데 잘 오고 있겠죠. 곧 도착할 겁니다."

클로드는 투덜거리는 지셀에게 한마디 하려다 꾹 참고 그를 달랬다.

"사람 보내서 어디까지 왔는지 확인하고 최대한 빨리 오라고 다그쳐. 시간 없다."

"에휴, 알겠습니다."

지셀에게 한껏 면박을 받은 클로드가 힘없이 물러났다.

"내일 또 물어봐야겠다."

지셀은 씨익 웃고선 연무장으로 향했다.

그는 영지에서 가장 바쁘게 돌아다니면서도 틈이 날 때마다 수련을 빼놓지 않았다.

적들의 실력을 알기에, 단 한 순간도 허투루 보낼 수 없었다.

쿠웅!

"후욱, 후욱."

무거운 갑옷으로 중무장한 지셀이 검을 들고 가쁜 숨을 내뱉었다.

이 갑옷은 그가 특별히 주문한 것으로, 보통 갑옷보다 훨씬 두껍게 통짜 강철을 두드려 만든 것이라 그 무게만 수백 킬로그램에 이른다.

드르르르륵.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셀의 몸 곳곳에는 쇠사슬이 묶여 있었다.

그 쇠사슬 끝에는 각기 무거운 추가 매달려 있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움직이기는커녕 무게에 짓눌려 숨쉬기도 어려울 정도의 무게를 온몸에 감아 놓고, 그 상태로 검술을 수련하는 것이다.

쿠웅!

발을 내디딜 때마다 사방이 울리며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지셀은 온몸을 압박하는 무게를 느끼며 천천히 검을 휘둘렀다.

검을 한번 휘두를 때도 아무렇게나 휘두르지 않는다.

그것은 수련이 아니라 그저 몸을 혹사하는 짓일 뿐이다

스으윽.

손끝의 움직임까지 신경 쓰며 가장 최적의 위치로 흔들림 없이 검을 움직였다.

그렇게 한 동작이 끝나면 다음 동작을 이어 하고, 움직임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그 동작을 수십, 수백 번씩 반복한다.

보통 사람은 절대로 따라 할 수 없는 수련 방법이지만 지셀에게는 언제나 해 왔던 일과였다.

그는 이런 노력으로 자신의 재능을 뛰어넘고 한계를 돌파했다.

'다시 한번.'

드드드득.

움직일 때마다 고통이 몰려온다. 근육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버텨라!'

지셀은 이를 악물고 참아 내었다.

근육이 찢어지고 회복되는 과정에서 더 질기고 단단하게 성장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회귀 후 새로 얻은 재생력 덕분에 어지간한 상처는 순식간에 나았다.

즉, 지금 이 순간에도 지셀의 육체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물론 상처가 크고 많아질수록 소모되는 마나의 양도 커졌지만, 지셀은 피로한 몸이 회복하는 동안 영지 업무를 처리하는 방식으로 훈련을 병행했다.

재생력만 믿고 휴식을 취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몸이 망가질 것을 알기에, 지셀은 항상 아슬아슬한 지점까지만 자신을 몰아붙였다.

그가 지금까지 쌓아 온 경험은 언제, 어디서 멈춰야 가장 효과가 좋은지 본능적으로 알려 주었다.

'조금만 더.'

그러나 비록 효과는 확실할지언정, 어지간한 근성과 정신력으로는 해낼 수 없는 고통의 수련이었다.

멈추고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지셀은 강해져야 하는 이유를 상기하며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했다.

전생에는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이를 악물고 모든 고통을 견뎌 냈다.

그리고 지금은.

소중한 것을 잃지 않겠다는 다짐이 그를 지탱하고 있었다.

그를 노리는 자들은 셀 수 없이 많았으니까.

가장 먼저 상대해야 할 적은 해럴드 데스몬드.

북부의 패권을 쥐려면 그와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그도 북부를 손에 넣기 위해 지셀을 노릴 것이고.

해럴드는 당장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라 더욱더 이를 갈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멜리아 레이폴드도, 지셀을 노리고 있을 터였다.

'아멜리아야말로 북부 제패의 가장 중요한 변수, 양날의 검이지.'

잠재력만으로 따지면 해럴드보다 더 위험한 적일지도 모르지만, 당장 없앨 수도 없었다. 지금 아멜리아를 노리는 건 오히려 손해니까.

적들의 시선을 그쪽에 잡아 놓고 시간을 버는 것이 우선이었다.

'치울 수 없다면 최대한 이용하는 수밖에.'

전생에 레이폴드를 짓밟았을 때, 우연히 아멜리아의 야망과 계획을 알게 되었다.

그 점을 잘만 이용한다면 차후의 판세에 큰 변수가 될지도 모른다. 그녀를 없애는 건 그다음의 일이다.

'적들이 그 둘만 있는 것도 아니니까.'

설령 그들을 해치운다 해도 그 뒤에는 더 위험한 놈들이 도사리고 있다.

일단은 델파인 공작가.

왕국 최고의 세력인 공작가 파벌 또한 지셀에게는 피할 수 없는 적이었다.

라울과 발자크 백작은 자신을 위험 요소로 판단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아이던.

전생에 대륙 7강에 올랐던, 또 다른 대륙 7강인 용병왕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그도 언젠가 지셀을 찾아올 것이다.

그가 '우리'라고 지칭했던 미지의 강자들과 함께.

'하루라도 빨리 전생의 경지에 올라야 한다.'

이 많은 적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힘이 필요하다.

카발디 백작령을 차지하고 철광석을 얻는 것 또한 그들과 계속 싸우기 위한 기반을 다지는 일일 뿐이었다.

'내가 강해져야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릴 수 있어.'

그래서 지셀은 이 고통스러운 수련을 포기할 수 없었다.

지셀이 쓰는 마나 연공법은 폭발적인 위력을 자랑한다. 불안정한 탓에 통제할 수 있는 양이 적다는 단점은, 블러드 퓌톤의 독을 섭취한 덕분에 크게 완화되었다.

이제는 폭발하는 힘을 버틸 수 있도록 육체를 단련할 차례였다.

"후우우!"

다시 한번 검을 휘두른다.

한계에 이른 근육이 찢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오늘은 아쉽지만 이쯤 해야겠군.'

지셀이 검을 내려놓고 잠깐 숨을 고르는 사이, 재생력이 금세 발휘되어 찢어진 근육들이 회복되었다.

그는 고통을 참으려고 이를 악물면서도 내심 혀를 찼다.

전생의 용병왕 시절에 마법사까지 초빙해 만들었던 전용 수련 공간이 새삼 아쉬워졌다.

아예 공간 자체를 무겁게 해서 전신의 근육을 자극하는 방식을 이용하면 지금보다 훨씬 수련 효율이 높아질 텐데.

'나중에 바네사에게 부탁해서 광범위 중력 마법이라도 깔아야겠어.'

그렇게 클로드를 닦달하고, 근육을 찢고, 서류를 정리하고, 다시 클로드를 닦달하기를 며칠.

마침내 지셀이 기다리던 소식이 들려왔다.

"드워프들이 도착했습니다!"

168화 우리 한번 잘해 보자고! (2)

드워프들이 도착했다는 말에 지셀이 반색하면서도 투덜거렸다.

"드디어 왔구나! 대체 얼마나 많이 데려왔기에 이렇게 늦은 건지 한번 보자고."

요즘 들어 이런저런 자잘한 문제로 일정이 미묘하게 늦어지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런 것까지 고려해서 일부러 계획을 빠듯하게 잡긴 했지만, 시간이 급한데 자꾸 걸림돌이 늘어나는 상황이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지셀은 바로 노예상들을 맞이하러 움직였다.

"오랜만입니다. 영주님."

노예상은 피곤에 전 얼굴로 지셀에게 인사를 건넸다.

노예들의 가격이 가격이다 보니 이동하는 내내 잠도 제대로 못 잘 정도로 신경을 곤두세웠던 탓이었다.

그 와중에 지셀은 계속 언제 오냐고 독촉하고, 당하는 사람으로선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아오, 다음에는 또 얼마나 다그칠까.'

이번 한 번으로 거래가 끝난 게 아니다. 남은 노예들을 옮길 때도 영주가 달달 볶아 댈 거라고 생각하니 절로 현기증이 일어났다.

지셀은 노예상의 인사를 대충 받아준 뒤 바로 드워프들부터 확인했다.

"오...."

무려 백여 명에 이르는 드워프 노예들이다.

키는 작지만 다부진 체격을 자랑하는 그들은 뚱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노예상은 조금 걱정 어린 말투로 물었다.

"그런데 정말 통제하실 수 있겠습니까? 드워프들은 제련할 때만 망치를 쓰는 게 아닙니다. 이렇게 많이 모이면 위험할 겁니다."

지금은 다들 수갑과 족쇄를 차고 있었지만, 일을 시키려면 결국 구속을 풀 수밖에 없다.

노예상은 그 부분을 문제 삼는 것이었다.

이 정도 수의 드워프들이 한꺼번에 무기를 들고 반항하면 그 피해가 상당할 테니까.

하지만 지셀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괜찮아, 괜찮아. 우리가 다 알아서 할게."

여유로운 대답에 노예상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영지 병력으로 통제가 가능하다는 건가?'

그러나 노예상의 눈에 들어온 펜리스 기사들의 모습은 무척이나 기괴했다.

"콜록! 콜록!"

"끄으으응...."

다들 무기를 들 수는 있을지 의심될 정도로 피골이 상접해 해골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연신 기침을 하다 그 충격에 코피를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다들 뭔가 아파 보인다. 무력 집단이 아니라 병자 집단이라고 하는 편이 맞겠다 싶을 정도였다.

'여기 영주님은... 네크로맨서인가?'

무덤에서 시체들을 꺼내와 살려 내면 딱 이런 모습일 거 같았다.

이 정도면 상단의 병력만으로도 영지 점령이 가능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거 돈이나 제대로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 얼마 안 있다가 망하는 거 아니야?'

불안해진 노예상이 다급하게 물었다.

"영주님, 대금은 준비되셨습니까?"

"아, 다 준비됐지. 난 돈 안 떼먹어."

지셀은 여유롭게 말하며 클로드에게 손짓했다.

클로드가 거대한 궤짝을 열자 그 안에는 금화가 가득 차 있었다.

노예상은 잽싸게 몇 개를 꺼내 진짜 금화인지 확인하고는 바로 마차에 궤짝을 실었다.

"다행이군요.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래, 멀리 안 나간다. 다음에는 더 빨리 왔으면 좋겠어."

"아휴, 그럼요. 최대한 빨리 오겠습니다."

노예상은 진심 어린 어조로 답했다.

'기사랍시고 데리고 있는 인간들 상태를 보니까, 이놈의 영지는 얼마 안 있다가 망할 거야. 확실해. 아무리 브랜포드 후작이라도 이런 영지는 못 지켜 주지. 다른 영지한테 털리기 전에 최대한 빨리 잔금 받고 정리해야겠어.'

그래도 큰 고객이니 가기 전에 조언 하나는 던져 줬다.

"드워프들은 자존심이 무척 셉니다. 말만 노예지 함부로 대하면 안 되는 건 아시죠?"

지셀도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알지. 다루기 참 힘들다는 것도."

"식사 질도 신경 쓰고, 술도 꾸준히 챙겨 줘야 할 겁니다. 워낙 깐깐한 놈들이라 어지간해서는 잘 안 움직여요."

드워프들은 법적 신분만 노예일 뿐이다. 귀족들도 이들을 함부로 다루지 못했다.

가족을 인질로 잡고 악독하게 다루는 놈들도 없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은 비위를 맞춰 주는 편이었다.

몸값이 비싸서 그렇기도 하지만, 드워프들은 기분이 상하면 제대로 물건을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드워프들이 만든 병장기나 공예품은 어마어마한 가격을 자랑하고, 드워프가 책임자로서 지휘하는 공방은 작업 속도도 굉장히 빨라진다.

그러니 잘 대해 주고 물건을 받는 것이 오히려 이득이었다.

"그럼 진짜 가 보겠습니다. 다음 납품은 대여섯 달 정도 걸릴 거 같습니다."

"뭐? 왜 그렇게 오래 걸려?"

"그것도 지금 최대한 단축한 겁니다. 엘프 노예를 노리는 놈들이 많거든요. 지금 지부에서 한 명 옮겨 오는 것도 조심스럽습니다. 아시잖습니까?"

"쩝, 최대한 더 빠르게 해 봐. 내가 조만간 자리를 비울 건데, 돌아올 즈음에는 다 데려왔으면 좋겠네."

"...언제 돌아오실 예정인데요?"

"글쎄....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몰라서. 그래도 때 되면 바로 알 거야. 그즈음에 놀라운 소식이 들릴 테니까."

'놀라운 소식은 또 뭔데.... 영지 망하는 소식?'

노예상은 속으로 비웃으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지셀의 말을 듣고 나니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서 일을 끝내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강해졌다.

그래야 영지가 망하기 전에 잔금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서둘러 돌아가는 노예상을 보고 지셀은 감탄했다.

"저 저, 서두르는 거 봐라. 우리가 카발디 영지 차지할 생각인 거 감 잡았나? 역시 큰돈 만지는 애들은 눈치가 빨라."

"그런 이유는 아닐 것 같은데요...."

클로드는 노예상이 그랬던 것처럼 주위를 둘러보았다. 피를 토하는 해골들이 주위에 한가득했다.

"영주님, 내기 잊지 않으셨죠? 수습 기사들이 마나 못 쓰면 전쟁 안 하기로 했습니다?"

"아, 알았어. 잔말 말고 일이나 해. 너도 결과 나오기 전까지는 준비 열심히 하기로 했잖아."

지셀이 짜증 섞인 목소리를 내며 드워프들을 향해 손짓했다.

"쟤들 구속이나 빨리 풀어라. 일 시킬 게 산더미다."

드워프들은 구속이 풀리자 의아해하면서도 설렁설렁 몸을 풀었다.

가장 앞에 선 수염이 덥수룩한 드워프가 비웃듯이 말했다.

"영주가 젊어서 그런가? 겁이 없구려. 병력도 보잘것없어 보이는데 이렇게 다 풀어 줘도 되는 거요?"

지셀은 앞에 나선 드워프를 보고 반가운 기색을 애써 감추려 노력했다.

'오랜만이야, 전설의 대장장이. 수명이 길어서 그런가? 전생에 봤던 얼굴이랑 똑같네.'

전생에 대륙을 덮친 재앙과 맞서 싸울 때, 눈앞의 드워프는 지셀을 꽤 많이 도와줬다.

실력도 뛰어나기에, 지셀은 노예상들에게 이 드워프만은 꼭 데리고 오라고 신신당부했었다.

하지만 여기서 반가운 티를 내 봐야 득 될 게 없었다.

미친놈으로 여겨지면 차라리 다행이고, 자칫 호구로 점찍히면 앞으로 드워프들을 다루기 어려워질 것이다.

지셀은 부러 코웃음을 치며 시비조로 말했다.

"왜, 한번 싸워 보시게?"

"뭐.... 우리 신분이 신분이니만큼 웬만하면 사고는 치지 않는 게 좋겠지만.... 북부 끝자락까지 왔으니 그냥 산으로 도망가는 것도 괜찮지 않겠나. 꼴을 보니 나 혼자 다 때려잡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지셀이 대답하기도 전에 옆에 있던 기사가 앞으로 나섰다.

훈련장에 있는 길리언과 카오르를 대신해 영주의 호위를 맡은 자였다.

"이놈! 감히 노예 주제에 영주님께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당장 무릎을 꿇고 사죄하지 않으면.... 쿨럭! 커억!"

용병 출신 기사는 말을 하다 말고 피를 토하며 무릎을 꿇었다. 기사가 된 김에 무게 한번 잡아 보려 했는데 아직 몸 상태가 따라 주질 않았다.

"...."

드워프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뭔가 굉장히 이상한 영지라는 느낌이 들었다.

지셀은 미간을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쟤 데리고 가서 쉬게 해라."

기사가 실려 나가자 지셀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을 이었다.

"어차피 도망가 봤자 소용없는 거 알잖아? 이종족 노예가 도망쳤다는 소문이 나면 노예상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닐 텐데. 여기서 편하게 지내는 게 좋지 않겠어?"

"...."

지셀의 말에는 틀린 점이 없었다. 이미 대륙은 인간들의 것이 된 지 오래다.

이종족들이 몇몇 지역에 모여 산다는 소문이 돌긴 하지만, 적어도 이곳 루타니아 왕국은 오롯이 인간만의 영역이었다.

루타니아에서 인간의 눈을 피해 숨어 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다른 왕국으로 도망간다 한들, 동족들이 숨어 사는 장소를 모르니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드워프는 대놓고 혀를 차며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법 머리는 돌아가는 모양이군. 뭐, 도망치면 우리 손해이긴 하지. 하지만 그렇다 해도 열심히 일하는 건 다른 문제요. 어떤 대우를 받느냐에 따라 품질도 달라지는 법이지. 그런데 영지 꼴을 보아하니 대우가 영 시원찮을 거 같은데."

드워프답게 자부심 넘치는 태도였다.

꼬장꼬장한 그의 말에 지셀이 물었다.

"갈바릭, 당신이 지금 대표인가?"

"음? 어떻게 내 이름을.... 아, 명단을 미리 받은 건가? 아무튼 일단은 내가 대표요."

드워프들의 대표가 되는 법은 간단하다. 가장 실력이 뛰어나면 된다.

전생에는 '전설의 대장장이'라는 별명까지 붙었던 갈바릭이니 틀림없이 대표로 뽑혔으리라 예상했는데, 역시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지셀은 갈바릭에게 검지를 세워 보이며 말했다.

"10년."

"뭐가 말이오?"

"10년간 나에게 전폭적으로 협조하면 영지 내에 드워프들의 자치 구역을 만들어 주고 노예 신분에서 해방해 주겠다. 영지민으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게 말이야. 이 정도면 좀 의욕이 나지 않아?"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어마어마한 몸값을 주고 사 온 드워프를 풀어 준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겨우 10년만 일하면 풀어 준다니. 인간보다 수명이 훨씬 긴 드워프들에게 10년은 무척 짧은 시간이었다.

노예로 살고 있는 드워프들이 정말 바라는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갈바릭은 지셀의 제안에도 코웃음을 쳤다.

"노예 해방 운동이라도 하려는 건가? 그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내가 여기 영주인데 말이 안 될 건 없지."

"우리한테 그런 사탕발림을 내뱉었던 인간이 없는 줄 아시오? 우리는 이제 그딴 빈말에는 넘어가지 않아."

하지만 지셀은 드워프의 날카로운 반응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넘겼다.

"내 말이 거짓이라고 해도 기껏해야 지금 상태가 유지될 뿐인데, 믿어서 손해 볼 건 없잖아. 믿는 자한테 복이 있다는 말도 있고."

"허, 무슨 말도 안 되는...."

지셀의 뻔뻔스러운 대답에 헛웃음을 흘리던 갈바릭이 이를 갈며 말했다.

"헛소리 마시오. 우린 노예요. 왕국법이 우리를 노예로 규정하고 있단 말이오. 한낱 시골 영주 따위가 노예 취급을 하지 않는다고 왕국 전체의 인식이 바뀌는 게 아니잖소."

"아, 왕국법 말이지. 그거 뭐 별거 있나? 다 사람이 만든 건데, 필요하면 고치면 되지. 내가 다 알아서 해 줄 테니까 신경 쓰지 마. 난 약속을 어긴 적이 없는 사람이야."

누가 들으면 반역죄로 몰아갈 수도 있는 발언이었다. 갈바릭은 당황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영주 옆에 있는 사람들은 영주의 망나니짓이 익숙한 듯, 하나같이 못 들은 척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 새끼 이거 미친 새끼 아니야?'

지셀은 황당해하는 갈바릭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공작가와 싸우는 이상 왕국을 한번 뒤집어엎을 수밖에 없다.

그 틈을 타서 자잘한 법 몇 개 뜯어고치는 건 문제도 아닐 터였다.

"물론 지금은 실감도 안 나고 믿지도 못하겠지. 그러니 지금 당장 구미가 당길 제안도 하나 더 하겠다."

"뭐, 뭐요."

"매일 똑같은 것만 만드는 거 지겹지 않아?"

"그렇긴 하오만...."

귀족들은 드워프들에게 오직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사치품만 만들라고 강요했다.

예술성뿐만 아니라 실용성도 중시하는 드워프들에게는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드워프들 사이에서는 차라리 공방에 박혀 기사들과 병사들이 쓸 장비를 대량 생산하는 게 낫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새로운 걸 만들어 볼 기회가 없으니 영감도 떠오르지 않게 되었다. 결국 창작욕마저 사그라들어 드워프들은 대부분 의욕 없이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는 것을.

지셀은 그 부분을 짚어 주었다.

"심지어 다 쓸모없는 것들 뿐이지. 고작해야 사치품일 뿐인데, 그런 거만 만들기는 재미없잖아?"

"그래서 어쩌라는 거요? 사치품 대신 장비를 만들어 달라는 말이오?"

갈바릭은 비실대는 기사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장비라도 좋은 걸 써야 하는 상태이긴 하군."

쓸모도 없는 공예품을 만들 바에는 무기와 방어구를 만드는 게 나았다.

자신이 만든 무기로 이름을 날리는 기사를 보는 것도 장인의 기쁨 중 하나기 때문이다.

비슷한 생각을 떠올린 드워프들의 입가에 쓴웃음이 맺혔다.

지셀은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당연히 병장기도 많이 만들게 될 거야.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고."

"그것만이 아니라면?"

지셀은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며 웃었다.

"내 머릿속에는 재미있는 게 많이 들어 있거든. 지금껏 세상에 나온 적 없었던 것들이지. 너희들도 보면 만족할 거야."

169화 우리 한번 잘해 보자고! (3)

"으하하하!"

갈바릭은 크게 웃었다. 자신만만하게 얘기하는 지셀이 귀엽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보시오, 영주. 아직 젊어서 잘 모르나 본데, 설계도가 없는 개념은 망상에 불과할 뿐이오. 구현하더라도 쓰기 어려운 물건 또한 마찬가지지."

갈바릭의 말에 다른 드워프들도 웃었다.

"맞아, 귀족들은 제대로 아는 것도 없으면서 바라는 것만 많다니까."

"어떤 귀족은 약초의 약효를 뽑아내는 도구를 만들어 달라고 하기도 했지. 그냥 포션이나 사서 쓰라고 했어. 내가 무슨 연금술사야?"

"내가 있던 곳의 영주는 땅이 좁은데 거주지를 늘릴 방법이 없냐고 물어보더라고. 아니, 내가 무슨 신이야? 땅을 어떻게 늘려."

"수확량을 늘려 보겠다고 마법으로 움직이는 쟁기를 만들어 달라던 귀족도 있었지. 아니, 그런 걸 만들어서 뭐 하냐고. 애초에 땅하고 종자가 형편이 없는데."

드워프들은 이전에 겪었던 귀족들을 까 내리며 혀를 찼다.

갈바릭은 지셀을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는 쓸모없는 물건을 만드는 걸 무척 싫어하오. 영주가 뭘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껏해야 장난감 수준이겠지."

갈바릭이 말을 마치자 주변에 침묵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다들 눈만 깜빡이며 갈바릭을 바라보고 있었다.

"...콜록."

한 기사가 소리 죽여 내뱉은 기침 소리를 제외하면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반응에 갈바릭은 조금 당황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뭐, 왜? 왜 다들 그렇게 쳐다보는 건데? 내 말이 이상해? 아, 여기 진짜 이상한 영지네."

지셀은 그런 갈바릭을 보며 피식 웃었다.

"인간들하고 너무 오래 살아서 그런가? 장인이니 예술혼이니 읊어 대면서 정작 사고방식은 인간보다 더 꽉 막혔네. 그런 상상력으로 작품을 만들 수는 있어?"

"뭐요?"

"뭐, 이해해. 매일 같은 일만 하면 무의식중에 그 정도를 자신의 한계라고 생각하게 되거든."

"지금 무슨 말을...."

"하지만 그래서야 그냥 손재주 좋은 기술자에 불과하잖아?"

"감히 우리를 모욕하다니!"

드워프들은 분노했다. 어떤 종족도 자신들의 기술은 따라올 수가 없다.

그렇기에 자신들이 노예의 신분임에도, 누구도 자신들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 눈앞의 젊은 영주는 진심으로 자신들을 우습게 보고 있었다.

"시끄럽다, 이것들아! 대표는 나야!"

버럭 소리를 질러 드워프들을 잠재운 갈바릭은 지셀을 노려보며 말했다.

"우리의 자존심을 건들지 마시오. 그래 봤자 영주에게 좋을 게 없소이다."

실제로 드워프들은 무척이나 자존심이 강한 종족이었다.

어쩔 수 없이 노예 신분은 받아들였지만 하찮은 대우만큼은 절대 받아들이지 않았다.

'쓸 만한 병장기라도 얻고 싶으면 우리를 대하는 태도를 바꿔야 할 것이다.'

드워프들의 날카로운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셀은 손가락을 까닥이며 말했다.

"따라와, 재미있는 걸 보여 줄게."

화를 낼 타이밍을 놓친 드워프들은 머뭇거리다 지셀을 따라갔다.

지셀이 그들을 데리고 간 곳은 거대한 공방이었다.

"이건...!"

공방에 도착한 드워프들은 신기해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방에 향긋한 냄새와 약초 냄새가 가득 차 있었다.

공방을 가득 채운 거대한 기구들 사이로, 흰색의 작업복과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들이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화장품을 만드는 공방이다. 정확히는 피부 미용 크림이지."

"화장품?"

지셀의 말에 드워프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화장품이 뭔지는 안다. 귀족들이 식사보다 더 신경 써서 챙기는 사치품의 일종이다.

어떻게 이런 시골 영지에서 그런 고급 상품을 만들고 있다는 말인가?

의아해하는 드워프들에게 지셀이 설명을 이어 갔다.

"우리 영지의 화장품은 왕국에서 최고로 꼽히지. 지금 수도에서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그 엄청난 매출로 너희들을 사 온 거고."

"뭐.... 돈 많은 거 자랑하려고 보여 주는 거요?"

"응."

"...."

"쯧쯧, 완전히 머리가 굳었네. 잘 봐라. 저 도구들을 이용해서 어떻게 화장품을 만들고 있는지. 비밀이지만 특별히 보여 준다."

그제야 드워프들은 정신을 차리고 공방 안을 꼼꼼하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한참이나 화장품 설비를 뜯어보던 드워프들의 낯빛이 서서히 창백해졌다. 손을 부들부들 떠는 자도 있었다.

"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한 거지?"

"정말 약초의 효능을 엄청나게 끌어내고 있잖아!"

"이게 정말 되는 거였어?"

드워프들은 제작에 있어서는 신에 비견되기도 하는 종족이다.

잠깐 설비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무슨 용도로 쓰이는지, 어떤 효과를 내는지 금세 파악할 수가 있었다.

중간중간 새겨진 마법진들의 역할도 설비의 구조를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귀족들 밑에서 일하는 동안 마법사들과도 많은 작업을 해 본 경험이 있었으니까.

흥분한 드워프들은 곧 한데 모여앉아 토론하기 시작했다.

"과연, 이렇게 순간적으로 열을 가하면 유효 성분이 파괴되는 부작용은 최대한 줄이면서 농축액을 만들 수 있어. 불순물은 따로 처리하는 건가?"

"여과기는 조금 아쉽군. 구멍을 지금보다 좁게 만드는 대신 여러 개를 뚫으면 효과가 더 좋을 거 같은데."

"여기서 순간적으로 냉각을 시켜서 이런 제형을 만드는 거로군! 설비는 조악하지만, 발상은 정말 아름다워!"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채 떠들던 드워프들은 동시에 지셀을 보며 외쳤다.

"아니, 이런 게 진짜 있네?"

"누구요! 누가 이런 생각을 한 거요!"

"제발 만나게 해 주시오! 이걸 만든 천재를 만나게 해 달란 말이오! 이 영지에 있는 게 맞소?"

드워프들의 진심이 빚어낸 뜨거운 열기 속에서, 지셀은 엄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갈바릭은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고 떠듬거렸다.

"영주가... 이걸 만들었다고?"

"그래, 바로 이 몸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지."

거짓말은 아니다. 미래에서 베껴 온 지식이지만 어쨌든 지셀의 머릿속에서 나오긴 했으니까.

그의 당당한 태도에 드워프들은 완전히 설득당했다.

드워프 중 몇 명이 상기된 얼굴로 다급하게 말했다.

"이거, 이거 내가 개량 좀 하게 해 주시오!"

"조금만 손을 보면 지금보다 몇 배나 더 효율이 높아지게 개량할 수 있소이다!"

"영주님! 보기만 해도 내 속이 미칠 거 같소이다! 제발!"

드워프들은 답답해했다. 왜 이런 뛰어난 발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설비는 이따위로 만족하고 있다는 말인가!

의욕이 넘치는 드워프들을 보며 지셀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머리가 좀 돌아가나 보네. 아주 좋은 자세들이야. 지금보다 생산량을 더 늘릴 수 있다는 거지?"

"그럼! 맡겨만 주시오! 최소 두 배 이상은 나오게 해 드리겠소이다!"

"그런데.... 아직 일할 마음이 안 드는 사람도 있는 거 같네."

모두가 자존심을 굽힌 건 아니었다.

갈바릭을 비롯해 드워프들의 절반 정도는 여전히 뻣뻣하게 서 있었다.

그들도 공방의 설비들을 보고 속으로는 감탄하긴 했지만, 영주와의 기 싸움에서 지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지셀은 그들을 보고 피식 웃더니 다시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따라와, 다른 것도 보여 줄게."

지셀이 그들을 이끌고 향한 곳은 최근에 지은 공동 주택 단지였다.

건축에 관심이 있던 몇 명의 드워프들이 곳곳을 구경하다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아니, 이런 집이 진짜 있네?"

"이런 생각을 하다니! 단순한 탑상형 주택이 아니잖아?"

지금의 공동 주택에는 특별히 뛰어난 기술이 들어가지 않았다. '집'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고정관념을 비틀었을 뿐이다.

그들은 다시 집을 두고 토론을 시작했다.

"이 부분은 대리석으로 만들면 더 낫지 않겠어? 그러면 내구성과 예술성이...."

"난방을 벽난로로 하는 것보다는 곳곳에 열기가 퍼질 수 있게 내장재를 바꿔서...."

"배수관은 이것보다 더 좋은 방식으로 바꿀 수 있어!"

드워프들에게 그간 잊고 있었던 영감이 몰려오고 있었다.

이거다, 이런 자극이 필요했다.

실컷 토론을 하던 그들은 지셀을 바라보며 외쳤다.

"이거 우리가 더 개량할 수 있게 해 줘!"

이미 눈이 돌아간 드워프들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갈바릭은 떠듬거리며 물었다.

"이, 이것도 영주가 생각한 것이오?"

"그럼, 바로 이 몸이 만든 것이지."

"도, 도대체 머릿속에 뭐가 들었길래...."

그들이 놀라는 건 기술 그 자체가 아니다. 중요한 건 상상을 실제로 구현한 점이다.

선구자는 그래서 역사에 남고 오래도록 그 이름이 회자되는 것이다.

지셀은 씨익 웃으며 다시 손짓했다.

"따라와, 다른 것도 보여 줄게."

이번에 이들이 도착한 곳은 대규모 농장이었다. 이미 한 번 수확을 한 뒤였지만 벌써 밀들이 다시 자라고 있었다.

"우, 우와아!"

시야를 가득 채운 푸른 밀밭을 보며 드워프들은 입을 쩍 벌렸다.

밀밭이 얼마나 넓게 퍼져 있는지 감히 가늠할 수도 없었다.

그뿐인가? 밀 하나하나의 크기가 기존의 것을 몇 배나 뛰어넘고 있었다.

이곳이 정말 척박하다고 소문난 북부의 땅이 맞는지 헷갈릴 정도였다.

지셀은 손가락으로 지평선을 따라 그으며 말했다.

"이 밀은 일 년에 최소 세 번 이상 수확할 수 있어. 곧 수확기니, 식량이 얼마나 생산되는지 직접 확인할 수 있을 거야."

믿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눈앞에 증거가 펼쳐져 있으니 안 믿을 수도 없었다.

갈바릭은 다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것도... 영주가 한 것이라고? 도대체 어떻게...."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고, 대충 룬스톤을 이용해서 종자를 개량하고 지력을 키운 거야. 중요한 건 이게 실제로 가능하다는 거 아니겠어?"

끄덕끄덕.

드워프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은 사실 농사에는 별 관심이 없다. 특별한 공학적 기술이 들어간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껏 없었던 개념을 떠올린 것, 그리고 그 상상을 현실에 구현해 낸 능력은 감탄할 만했다.

화장품과 공동 주택, 농사까지. 이걸 전부 한 사람이 만들어 냈다는 점이 중요했다.

하나만으로도 사람들의 생활과 인식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는 혁신적인 발명이었다.

그런 것을 이미 몇 개나 만든 사람이니, 앞으로 새로운 발명품을 또 얼마나 많이 생각해 낼 수 있겠는가.

드워프들은 주먹을 꾹 쥐었다. 오래도록 창작욕을 누르고 있었던 그들의 마음에 지셀의 발명품들이 불씨를 댕긴 것이다.

만약에 이런 작업에 처음부터 같이 참여했으면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지셀은 흥분으로 콧구멍까지 벌렁거리는 드워프들을 보며 말했다.

"어때? 내 머릿속에는 이거 말고도 대단한 계획들이 아주 많아. 실생활에 필요하고, 구현도 가능한 것들이지. 그걸 제대로 만들어 줄 사람들이 필요해서 너희를 데리고 온 거야. 나랑 같이 일해 볼 생각 있어?"

지셀의 말은 그간 창작욕을 제대로 채우지 못했던 드워프들의 가려운 곳을 정확히 긁어 주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은 그들의 고민에 결정타를 날렸다.

"내가 알고 있는, 남들이 모르는 지식과 기술도 알려 줄 수 있어."

지셀은 갈바릭이 넘어올 거라 확신했다. 그가 겪었던 갈바릭은 기술이라면 환장하는 드워프였으니까. 지금이라고 다르진 않을 터였다.

대답은 즉시 나왔다.

"하겠소!"

갈바릭을 비롯한 드워프들은 호기롭게 외쳤다. 새로운 기술을 알려 준다는데, 더 이상 뻗대 봐야 의미가 없었다.

이것은 그들에게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이자 본능이었다.

갈바릭은 애원하듯이 말했다.

"제발 알려 주시오! 영주가 원한다면 노예라도 되겠소!"

"...너희들은 이미 노예인데."

"말이 그렇다는 거요! 말이! 진심으로 영주가 하는 일에 함께하겠소!"

"10년간 전폭적으로 협조한다는 거지?"

"물론! 대신 영주도 약속을 지키시오!"

"나중에 말 바꾸기 없기다?"

"우리를 뭐로 보고! 드워프는 한번 약속하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키는 종족인 걸 모른단 말이오?"

갈바릭의 호언장담을 들은 지셀은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좋아, 좋아. 열심히 해 주면 나도 약속대로 10년 후 자유롭게 풀어 주도록 하지. 우리 한번 잘해 보자고!"

"우리도 잘 부탁하오!"

갈바릭이 지셀의 손을 맞잡고 악수를 하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펜리스 사람들은 드워프들을 불쌍하게 바라보았다.

170화 우리 한번 잘해 보자고! (4)

손을 맞잡은 지셀과 갈바릭은 뜨겁게 타오르는 눈빛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양쪽 다 무언가를 만들기 원한다. 거기에 의욕까지 넘친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갈바릭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질문을 쏟아 내었다.

"자, 무엇부터 하면 되오? 화장품 설비를 바꿔 드릴까? 아니면 공동 주택이란 것부터 손을 좀 봐 드릴까? 곧 수확기라 하니 농사 용품은 어떻소? 뭐든 말만 해 보시오. 우리가 영주님이 원하는 시간 내에 다 끝내 주겠소!"

"이야, 듣기만 해도 든든하네. 당연히 그것들도 해야지. 그런데 지금은 더 급하게 해야 할 게 있어."

"그게 무엇이오?"

"하늘을 나는 기구를 만들 거야."

"응? 뭐라고 하셨소?"

"하늘을 나는 기구를 만들 거라고."

잠깐의 침묵이 지나간 뒤, 갈바릭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고대 제국에서 썼다던 전설의 비공정 설계도라도 구한 거요?"

"아니, 그런 엄청난 건 없는데. 그거 그냥 전설 아니야?"

"그럼 어떻게 하늘을 날겠다는 거요?"

갈바릭은 황당해하며 혀를 찼다.

하늘을 나는 능력은 날개 달린 것들과 법칙을 무시할 수 있는 자들의 전유물이다.

엄청난 마력을 지닌 대마법사가 힘을 써서 무언가를 띄울 수는 있겠지만, 그걸 '기구'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어디서 대마법사를 초빙해 올 형편은 안될 거 같은데.... 어디 한 번 들어나 봅시다."

갈바릭과 드워프들이 반신반의하는 표정을 짓자, 지셀은 사용인을 시켜 작은 모닥불을 하나 피웠다.

"잘 봐."

지셀은 종이 하나를 모닥불 위에 던졌다. 당연히 종이는 빠르게 재가 되어 사라졌다.

멀뚱멀뚱 구경하던 갈바릭은 그 뒤로 한참이나 정적이 이어지자 머리를 긁으며 물었다.

"대체 뭘 보라는 거요?"

"종이가 타면서 재가 하늘 위로 뜨는 걸 보란 말이야."

지셀은 말을 하며 다시 종이를 집어 던졌다.

과연 종이가 타오르며 순간적으로 작은 조각들이 살짝 떠올랐다.

갈바릭은 여전히 이해를 못 하고 물었다.

"그게... 어쨌다는 거요? 그냥 바람이 불어서 살짝 떠오른 거 아니오?"

"그런데 왜 위로 올라가?"

"그건.... 어, 가벼워서?"

고개를 저은 지셀은 잘난 척하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건 그냥 개념을 쉽게 알려 주려고 보여 준 거다. 뜨거운 공기는 하늘로 떠오른다. 그 공기가 바로 가벼운 것들을 띄우게 되는 거지."

"...?"

듣도 보도 못한 생소한 이론에 드워프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불을 자주 다루는 만큼 저런 현상을 몇 번 본 기억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딱히 대수롭게 생각하지도 않았고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았다.

갈바릭은 못 믿겠다는 얼굴로 다시 물었다.

"그 뜨거운 공기가 왜 위로 올라가는 거요? 확실한 게 맞소?"

'나야 그건 모르지. 그게 왜 올라갈까?'

지셀이 만들려는 건 전생에 개발되었던 열기구였다.

거대한 주머니 안의 공기를 가열해 띄우는 열기구는, 전생에 군사 정찰용으로 자주 쓰이곤 했다.

당연히 지셀은 왜 공기를 가열하면 기구가 뜨는지 상세한 이론은 모른다. 그저 지나가듯 원리를 들은 게 전부였다. 자꾸 이렇게 물으면 솔직히 곤란하다.

"흠흠, 원래 세상 법칙이 그런 거야. 그렇게 만들어진 거지. 내가 사과를 던지면 왜 바닥에 떨어지는지 다들 모르잖아? 그냥 그게 세상의 법칙이니까. 안 그래?"

그러자 갈바릭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그건 이미 위대한 지혜의 드래곤, 슈바르츠실트가 알려 주지 않았소. 이 세상의 중심에는 강력하게 모든 걸 잡아끄는 에너지가 있고, 그 힘의 방향과 크기를 조절하는 게 바로 중력 마법이지 않소이까? 마족이 강력하고 수명이 인류보다 긴 이유도 마계는 중간계보다 이 에너지가 더 강하기에.... 귀족들은 아카데미에서 이런 걸 기본 소양으로 배우는...."

'...이 새끼가? 슈바.... 뭐?'

누가 드워프 아니랄까 봐, 아는 이론 얘기가 나오니 바네사보다 더 수다스러워졌다.

기본 소양이고 뭐고, 지셀은 아카데미 따위는 다니지 않았기에 슈바 어쩌고 하는 옛날 드래곤은 모른다. 벨린다도 저런 학문적인 내용은 몰라서 안 가르쳐 줬다.

그래도 중력이 뭔지는 대충 안다. 중력 마법을 수련에 쓰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세상에 왜 그런 에너지가 있는지, 어떤 원리로 작용하는지 연구하는 건 책상물림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지셀은 전생에도 학자 노릇을 할 사정은 안 되었고, 그나마 그가 알고 있는 지식은 대부분 용병 일을 하며 쌓은 경험에 의한 것이었다.

그런데 저딴 식으로 학문적 토론에 들어가면 말싸움에 들어가야 하고, 그건 지셀이 별로 좋아하는 방식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그냥 언제나처럼 깔끔하게 무시했다.

"자, 어쨌든 외워 둬. 뜨거운 공기는 위로 올라가고 차가운 공기는 아래로 내려온다."

"...그렇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걸로 어떻게 하늘을 나는 기구를 만들겠다는 거요? 불이 난 곳 근처에서 뭔가가 뜬다는 말은 들은 적도 없소이다."

"쯧쯧, 생각을 좀 해 봐. 공기는 사방에 퍼져 있는 건데, 조금 따뜻해져 봐야 금세 주변 공기하고 섞일 거 아니야. 그러니 주변 공기하고 섞이지 않게 데운 공기를 가둬 둬야지."

"공기를 가둔다고요?"

"그래. 아주 큰 공기 주머니를 만들어서 그 안에 공기를 채우고 가열시키면 주머니가 뜨겠지? 그 주머니에 사람이 탈 수 있는 바구니만 연결하면 된다. 그게 바로 열기구다."

"오... 열기구!"

드워프들은 뭔가 그럴듯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듣도 보도 못한 방법이었지만, 과연 가능할지 궁금함이 앞서긴 했다.

"그런데, 이게 정말 가능한 것이오? 보아하니 영주님도 직접 만들어 보진 않은 거 같은데.... 영지에도 열기구라는 건 하나도 없지 않소?"

"다른 일 하느라 바빠서 그래. 일단 처음에는 작은 걸로 만들어 보자고. 최대한 얇은 천을 쓰고 마법사들을 이용하면 공기는 쉽게 채우고 데울 수 있을 거야. 개념은 알려 줬으니 나머지 기술적인 건 스스로 찾아서 보완해야지."

"하늘에 뜨는 건 그리 한다 치고, 움직이는 건 어떻게 할 거요?"

"그거야 마법사들이 타서 바람 마법만 살짝 써도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긴 쉽지. 위치를 고정해야 할 때는 긴 줄로 땅과 연결해 놓으면 되고. 쉽게 생각하라고."

"알겠소! 한번 해 보겠소이다!"

드워프들은 긴가민가하면서도 조금은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만약 영주의 말대로만 된다면, 세계 최초로 하늘을 나는 기구를 만든 자로서 역사에 이름이 남게 될 것이다.

물론 처음 듣는 이론이기에 완전히 믿지는 않았다. 정말 가능한 건지 아직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새로운 도전에 의욕을 불태우는 드워프들을 보며 지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지금 바쁘니까 최대한 빨리 만들어야 해."

"맡겨만 주시오!"

자신만만하게 외친 갈바릭은 문득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이걸 하늘에 띄워서 어디다 쓸 생각이오?"

성공만 한다면 쓰일 곳은 무궁무진할 것이다. 거기에 새로운 개념은 다른 기술로의 발전으로도 이어진다.

대답이야 갈바릭도 뻔히 아는 내용이겠지만, 그래도 이 젊은 영주의 생각을 듣고 싶었다.

지셀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전쟁 때 정찰용으로 쓰면 무척 효과적이지. 그리고 추락할 위험에만 대비하면 물자 수송용으로도 쓸 수가 있어. 귀족들 놀이용으로 쓰면 돈도 꽤 들어올 거고."

"오, 역시 그렇구려. 알겠소. 더 필요한 건 없소이까?"

필요한 건 많았다. 새로운 합금도 만들어야 하고, 그걸 이용해 강력한 장비들도 생산해야 한다.

하지만 카발디 영지를 공격하기 전에 마무리하기는 불가능한 계획이었다. 애초에 원하는 만큼 합금을 생산하려면 철광석도 대량으로 필요했다.

"할 일이야 많지. 당장 급한 일이 몇 가지 있으니, 열기구를 제작하면서 같이 처리해 봐."

"뭐든 말만 하시오. 우리의 손놀림은 누구보다 빠르고 정교하니까!"

갈바릭의 호탕한 선언에 지셀은 엄지까지 치켜세우며 말했다.

"크, 역시 드워프들이야. 믿고 있었다고. 그러면 화장품 설비부터 개량하자. 계약 물량을 대려면 생산량을 더 늘려야 하거든. 바로 시작할 수 있지? 목표는 지금 생산량의 두 배야."

생각보다 규모가 큰 주문이었지만 드워프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힘들기야 하겠지만, 뛰어난 기술자인 그들에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좋소, 열기구와 화장품 설비 개량! 이 두 개부터 먼저 시작하겠소! 최대한 빨리 끝내 드리지!"

자신만만하게 말하고 돌아서는 갈바릭을 지셀이 덥석 붙잡았다.

"어디 가? 아직 말 다 안 끝났어."

"음?"

"공동 주택도 개량할 수 있다고 했지? 마법사들이 주로 공사장에 있으니까 협력해서 한번 연구해 봐. 어차피 열기구 테스트할 때도 마법사들하고 같이 일해야 할 거 아냐? 최대한 빨리 마을 하나를 더 만들어 줘."

"아... 음. 주택 개량을...."

"그래, 드워프 하면 또 건설 아니겠어?"

드워프들이 건설에 참여하면 거주지 작업 속도가 몰라보게 빨라질 것이다.

그들은 산속에 굴을 파 거주지를 만들 거나 지하 도시를 만들 정도로 건축 방면에서도 뛰어난 재주를 자랑하니까.

누구나 알고 있는 유명한 사실이었기에 갈바릭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끄응, 알겠소이다. 그럼 그거까지...."

그런데 지셀의 말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 맞다. 곧 수확기가 다가오잖아? 마법으로 움직이는 것까지는 힘들 테니, 일반 농기구라도 더 만들어 줘. 아직 나무를 깎아서 쓰는 지역에 전부 철제 농기구를 보급해야 해."

"저기, 그 정도는 영지의 대장장이들도 할 수 있지 않소?"

"영지에 대장장이가 거의 없어서 힘들어. 그래서 드워프들을 잔뜩 데리고 온 건데? 이왕 만드는 거 품질 좋게 만들면 좋잖아."

"어, 음.... 아, 알겠소."

드워프들의 등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일이 많아도 너무 많아졌다. 그런데 뱉은 말이 있으니 여기서 못 한다고 하기엔 자존심이 상했다.

"저기, 그러면 바로 일을 시작...."

갈바릭이 엄습해오는 불안감에 말을 돌렸다. 일 시작할 테니 그만 말하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지셀에게는 아직 할 말이 잔뜩 남아 있었다.

"아, 그리고 블러드 퓌톤의 가죽이 있는데 그걸로 기사들이 갑옷 안에 입을 내갑을 만들고.... 병장기도 부족해서 만들어야 하는데...."

지셀의 요구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드워프들은 얼굴이 창백해져서 앓는 소리를 내었다.

"당장 그것까지 하기에는.... 좀 힘들 거 같소이다."

그 소리를 들은 지셀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왜? 열심히 하기로 했잖아. 대신 난 10년 뒤에 자유민으로 풀어 주기로 했고. 기술만 알려주면 진짜 노예라도 되겠다며. 열심히 일만 했는데 기술도 배우고 신분도 바뀐다? 와, 이건 절대 못 참지."

"그, 그, 그건 그렇지만, 오자마자 일이 너무 많은 거 아니오?"

"우리 영지에서 이 정도는 당연한 건데."

지셀의 머릿속에는 드워프들을 효과적으로 굴릴 계획이 가득했다.

가뜩이나 할 일이 많아서 정신없이 돌아가는 영지다.

시간도 촉박하고 일은 산더미처럼 쌓인 와중에 마침 드워프들이 도착했으니, 죽어라 굴려서 결과물을 뽑아내야만 했다.

안 그러면 진짜 다 죽으니까.

지셀의 속내를 모르는 갈바릭은 연신 심호흡을 하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면... 일정이 어떻게 됩니까? 3개월? 아니, 최소 6개월은.... 사실 1년은 주셔야 합니다. 그 정도만 주시면 다 처리 가능합니다."

일이 너무 많으니 절로 말투가 공손해졌다.

일정이 문제다. 일정만 넉넉하면 된다.

밤낮없이 일하면 3개월쯤 걸릴 거 같았다. 하지만 살아 있으려면 밥도 먹고 잠도 자고 해야 하니 넉넉하게 1년을 불렀다.

하지만 지셀은 갈바릭의 질문에 황당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더니 곧 헛웃음을 지으며 그를 타박했다.

"무슨 소리야? 1년이라니. 우리 그렇게 시간 없어."

"네? 그러면 기간을 얼마나 생각하고 있으신 겁니까?"

지셀은 갈바릭의 양어깨를 부여잡고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한 달. 그 이상은 못 줘."

171화 검증은 충분히 됐습니다. (1)

드워프들은 기겁하며 동시에 소리쳤다.

"영주님! 한 달은 너무 부족합니다!"

"에이, 왜 그래? 최고의 기술자라 불리는 드워프들이 약한 소리 하기는. 내가 원하는 거 다 해 주겠다며? 이렇게 말이 바뀌면 곤란한데."

"끄응...."

드워프들은 정말 곤란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보통 인간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상식적인 수준 내에서 요구를 한다. 자신들의 실력이라면 얼마든지 그 조건을 맞출 수 있기에 장담한 것이었다.

솔직히 좀 흥분해서 이런저런 말을 내뱉은 건 인정한다. 그렇지만 설마 그 말을 다 걸고넘어질 줄은 몰랐다.

'아니, 보통 좋게 얘기하면 적당히 겸양도 부리면서 받아먹는 게 정상 아닌가? 그것도 귀족이면 더 그렇잖아?'

이렇게 주는 대로 족족 다 받아먹는 인간은 난생처음이었다.

진짜 먹고 싸고 자는 시간도 줄여 가면서 일해야 할 판이었다.

'아씨, 괜히 나댔다. 가만히 있을걸.'

드워프들이 울상을 지었다. 어쨌든 이미 약속한 건 사실이고, 꼴을 보니 거부도 안 받아 줄 모양이었다.

그래도 살면서 그렇게 일해 본 경험이 없기에 갈바릭은 엄살을 부리며 지셀을 떠보았다.

"영주님,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걸 한 달 안에 끝내려고 하다가는 우리 다 과로로 죽을 겁니다."

"안 해도 죽을 텐데."

"네? 왜요? 우리 죽이시게요?"

법적으로 노예이긴 하니, 말을 안 들었다고 죽여도 할 말은 없었다.

지셀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우리가 북부의 대영주인 데스몬드 백작한테 찍혔거든. 곧 전쟁이 일어날 거야. 내가 시킨 일 한 달 안에 안 끝나면 우리 다 죽어."

"...."

"솔직히 그간 귀족들 밑에서 여유롭게 놀면서 지냈지? 그런 나태한 정신력으로는 이 험한 북부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어."

하지만 드워프들에게는 데스몬드 백작의 이름도 그다지 통하지 않았다.

'전쟁이 일어나도 우리는 안 위험할 텐데....'

드워프들은 인간들끼리의 전쟁은 딱히 두려워하지 않는다.

영주들이 몸값 비싸고 쓸모 있는 드워프들을 죽일 리가 없기 때문이다.

전장에서 직접 무기를 들고 날뛴 수준이 아니라면 전리품 삼아 데려가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그걸 모르는 지셀이 아니다.

"한 달 내로 준비가 끝나지 않으면 전쟁 때 드워프들도 돌격대로 선봉에 서게 될 거야."

'와, 이거 진짜 미친놈인가?'

드워프들은 헛숨을 내쉬며 지셀을 흘겨보았다.

자신들의 몸값이 얼마인데 전쟁에 투입한다는 말인가? 어떤 영주도 그런 간덩이가 큰 짓은 못 한다. 그냥 빈말로 하는 협박이 틀림없었다.

드워프들의 의심스러운 눈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셀은 씨익 웃었다.

"이제 막 와서 아직 나에 대해 잘 모르지? 오늘은 자유 시간을 주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면 어떻게 해야겠구나 감이 올 거야. 나는 정말 좋게 좋게 가고 싶은데, 다들 내 말을 참 안 믿더라고."

지셀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떠났다.

드워프들은 얼떨떨하게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하나둘씩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한테 그런 협박이 통할 거라고 생각한 건가?'

별의별 귀족들을 겪어 본 드워프들은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흠흠, 그래도 아직 여기 분위기에도 익숙하지 않고, 영지에 대해 잘 모르긴 하니 한번 슥 둘러봅시다."

갈바릭의 제안에 드워프들은 영지를 돌아다니며 영주에 대해 물었다.

사람들은 순순히 그들이 알고 있는 것에 대해 말해 주었다.

"아, 영주님이요? 한번 결정하면 절대 뒤도 안 돌아보고 밀어붙이는 분이시죠."

"아버지 몰래 병력을 모아서 마수의 숲에 들어간 분이에요. 전쟁 때도 멋대로 나가서 적을 때려잡았다나? 며칠 전에는 아버지 영지의 숲도 그냥 털어왔어요."

"맞아, 맞아. 그리고 디갈드 백작하고 가신들이 항복했는데도 그냥 다 죽여 버렸어요."

"브랜포드 후작님은 아시죠? 그분하고 목숨 걸고 내기까지 하신 분입니다."

드워프들은 영지민들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뭔가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전해 들은 이야기는 하나같이 정상이 아니었다.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그렇게 행동할 리가 없었다.

결과가 좋으니 영지민들의 칭송을 듣는 거지, 그 과정을 뜯어보면 심란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들은 마지막으로 공사장에서 일하는 마법사들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무슨 마법사들이... 이렇게 꾀죄죄하지?'

건들거리는 꼴을 보니 이게 마법사인지 공사장 일꾼인지도 구분할 수가 없었다.

다 해진 로브를 입은 알포이가 짝다리를 짚고 서서 드워프들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작업 시간이 한 달이라고? 넉넉하네. 영주가 왜 그렇게 시간을 많이 줬대?"

"...그게 넉넉하다고 했소?"

"왜, 뭐. 우리는 이틀 만에 마나 집속진을 백 개나 만들었거든? 그런데 그 정도도 한 달 안에 못 해? 에이, 드워프 별거 아니네."

"아니, 그게 말이 되는 소리요?"

"왜 말이 안 되는데? 우리는 경작지에 박을 룬스톤도 일주일 만에 다 만들었어. 무려 수백 개를 말이지!"

알포이가 자랑스럽게 말하자 마법사들도 뿌듯하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갈바릭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신들 정말 마법사 맞소?"

그러자 알포이가 자세를 바로 하고 한 손을 들어 불덩이를 만들어 냈다.

"내가 바로 북부 제일 마탑이라 불리는 적염의 마탑 탑주의 후계자다. 포기를 모르는 불꽃 남자 알포이라고도 불리지."

드워프들은 알포이가 만들어 낸 불덩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런 이명은 들어 본 적이 없지만 어쨌든 진짜 마법사는 맞는 모양이었다.

갈바릭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마탑의 후계자나 되는 사람이 왜 여기서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오?"

알포이는 갑자기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그가 펜리스 영지에 묶이게 된 사정을 설명해 주었다.

무슨 일을 하게 될지도 모르고 강제로 끌려온 데다, 지금은 노예가 되어서 도망도 못 간다는 말에 드워프들은 다시 큰 충격을 받았다.

마탑주의 후계자와 마법사들도 도망을 못 가고 죽어라 일하는 영지라고?

그들은 드디어 부정하고 싶었던 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 영주는 진짜 미친 사람이었구나. 미쳤으니까 말도 안 되는 걸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거구나.'

알포이는 갈바릭의 어깨를 부여잡고 말했다.

"공사장에도 투입된다고 했지? 우리 잘해 보자. 여기가 다른 건 몰라도 밥은 진짜 많이 줘.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고."

완벽하게 영지에 적응한 사람다운 대사였다.

바쁜 노동으로 지친 알포이와 마법사들은 이제 밥만 배부르게 먹어도 만족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기이한 광기가 느껴지는 마법사들의 눈빛을 보고 드워프들은 꺼림칙한 표정을 지으며 한 걸음 물러났다.

'도망가야 해. 여기 있다가는 제명에 못 죽을 거야. 무조건 도망가야 해.'

그들의 속내를 꿰뚫어 본 알포이가 진지하게 말했다.

"도망갈 생각은 하지도 마. 어차피 도망쳐 봐야 다 잡혀. 여기 영주의 특기가 추격, 기습, 섬멸이래. 마법사인 나도 도망 못 갔는데 너희들이라고 도망칠 수 있을 거 같아? 그러니까 도망가지 말고 우리 오래오래 같이 있자."

알포이의 말에는 한 마디 한 마디마다 진심이 담겨 있었다. 일손이 많아야 조금이라도 숨 쉴 틈이 생길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드워프들을 위로하듯 말을 이었다.

"가끔 우리랑 같이 도박도 하고 술도 마시고 그러자. 생각보다 여기서 지내는 거 재미있어. 도박할 줄 모르면 내가 알려 줄게."

"...."

잠시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한참을 고민하던 갈바릭은 드워프들을 돌아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빨리 일 시작합시다. 시간이 없소."

돌격대로 전쟁에 끌려가지 않으려면 한 달 안에 어떻게든 일을 끝내야 했다.

* * *

지셀은 자신이 짰던 계획을 다시 점검하며 생각에 잠겼다.

'공작가와 싸우려면 이곳만 강해지는 건 의미가 없어.'

펜리스가 아무리 빨리 성장해도, 이미 어마어마한 전력을 갖춘 공작가의 전력을 당장 따라잡기는 힘들다.

그렇기에 친왕파까지 끌어들이지 않았는가.

현재 북방을 지키고 있는 페르디움 영지도 펜리스 못지않게 강해져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의 전란을 함께 버틸 수가 있다.

'그쪽도 최대한 빨리 키우는 수밖에. 이왕 하는 김에 페르디움도 같이 마나 연공법을 익히게 해야겠군.'

지셀은 바로 수십 대의 수레에 식량을 가득 싣고 아버지가 있는 북방 요새로 향했다.

북방 요새, 카이필러.

루타니아 왕국의 북부 최전방이자 페르디움 변경백이 지키고 있는 곳이다.

요새가 있는 작은 수원 근처를 제외하면 주변 대부분이 황무지라 황량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페르디움 백작가는 이 쓸쓸한 요새에서 수백 년 동안 야만인의 침략을 막아 왔던 것이다.

그 때문에 페르디움 영지는 끝도 없이 가난해졌다.

하지만 명예를 아는 가주들은 그 손해를 감수하고 요새를 지켜 왔고, 이는 곧 가문의 자부심이 되었다.

페르디움의 명예를 상징하는 장소를 지키고 있던 즈발터 페르디움 백작은, 지셀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노한 기색으로 나타났다.

옆에는 백작과 비슷하게 화가 난 기사단장 란돌프가 따라오고 있었다.

즈발터는 지셀을 보자마자 소리부터 질렀다.

"지셀! 내 이미 소식은 들었다! 그간 공을 세웠기에 봐주었더니 기어코 선을 넘었더구나! 어찌 영지의 숲을 마음대로 없애 버린다는 말이냐!"

호메른이 조금 과장해서 소식을 보내긴 했지만, 어쨌든 지셀이 페르디움 영지의 숲을 털어 간 건 사실이었다.

즈발터는 이번에야말로 용서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무리 일을 잘해도 영주이자 가주인 그의 권위를 침범하는 일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북방을 지키며 사람들을 이끌어 가려면 그 권위를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즈발터는 정말 검이라도 뽑을 양,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지셀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그 일은 죄송하게 됐습니다. 급하게 목재가 필요해져서 말입니다. 대가로 식량을 조금 더 가져왔습니다."

지셀이 끌고 온 수레에는 어마어마한 분량의 식량이 쌓여 있었다.

어찌나 많은지 요새에 머무는 병력 전체가 매일매일 배부르게 먹어도 몇 년은 버틸 수 있을 거 같았다.

"영지에도 따로 식량을 보냈습니다. 아마 내년까지는 영지민들이 식량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을 겁니다."

지셀이 여유롭게 웃으며 말하자 즈발터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감히 식량 따위로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것이냐!"

...라고 꾸짖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식량이었다.

하지만 식량 좀 준다고 바로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보는 눈도 많은 곳에서 그랬다가는 자신의 권위가 바닥까지 떨어질 것이다.

그렇다고 식량을 안 받을 수도 없었다. 굶는 건 이제 정말 지긋지긋하다.

일생일대의 위기 상황.

하지만 즈발터가 누구인가? 수도 없이 야만인과 싸워 온 백전노장이다.

그는 바로 란돌프에게 눈짓을 했다.

란돌프는 즈발터와 함께 수십 년을 함께한 사이. 척하면 척으로 알아들었다.

그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지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아휴, 우리 대공자님. 무슨 식량을 또 이렇게 가져오셨대? 여기 날씨가 많이 쌀쌀하죠? 감기 걸리기 전에 빨리 들어갑시다. 아, 형님. 뭐 하십니까? 어차피 우리는 목재 쓸 일도 없잖아요? 먹는 게 최고지. 안 그렇습니까?"

"흠흠, 그럴까? 그러면 이번에는 그냥 넘어갈까?"

"그럼요, 목재 그거 다 팔아도 식량 이만큼 못 삽니다. 그래도 아들이라고 가격을 잘 쳐 준 거죠."

"크흠흠, 좋다. 이번에는 내 그냥 넘어갈 테니 다음부터는 행동거지를 조심하도록 해라. 일단 들어가자."

두 사람은 그 말을 끝으로 휘적휘적 요새 안으로 들어갔다.

지셀이 어깨를 으쓱이자 옆에 있던 기사와 병사들이 소리 죽여 웃었다.

안타깝게도 다들 같이 지낸 지 오래되어서 두 사람의 연기는 통하지 않았다.

집무실로 이동한 즈발터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래, 여기까지 무슨 일이냐? 단순히 식량을 주고 사과하러 온 거 같지는 않고. 혹시 결혼 상대라도 생긴 거냐?"

보자마자 잔소리가 시작됐다. 지셀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런 거 아닙니다. 중요하게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지셀의 말에 즈발터와 란돌프는 괜히 움찔했다. 저 입에서 '중요한 말'이 나오면 언제나 큰 사고가 일어나곤 했다.

즈발터는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뭔지 모르겠지만 그냥 얘기 안 하면 안 되겠느냐? 나는 평화로운 지금이 정말 좋다."

그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제야 좀 먹고 살 만해졌다. 아무 일 없이 쭉 이렇게 살고 싶었다.

뭔가를 더 욕심내기에는 그간의 삶이 너무 고단했다. 사람은 적정선을 알아야 한다.

지셀은 평생에 걸쳐 얻은 깨달음과 소박한 소망이 묻어나는 아버지의 애원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입을 열었다.

"가문의 마나 연공법을 좀 바꿔야겠습니다."

즈발터의 인상이 콱 구겨졌다.

172화 검증은 충분히 됐습니다. (2)

가문의 마나 연공법을 바꾸자니, 살다 살다 이런 헛소리는 처음 들어 본다.

가문의 비전을 멋대로 바꾸는 건 둘째치고, 잘못되면 어쩌자고 그런 위험한 일을 한단 말인가?

즈발터는 의자에 몸을 기대며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바로 화를 내지는 않았다. 일단 자세한 내용을 들어 보고 판단해도 늦지 않으니까.

"다시 한번 말해 보거라."

위엄있는 즈발터의 말투에도 지셀은 주눅 들지 않고 답했다.

"가문의 마나 연공법을 바꿔야 합니다."

"마나 연공법은 비전 중의 비전이다. 그런데 뭘 어떻게 바꾼다는 말이냐. 어디 다른 좋은 연공법이라도 구해 온 게냐?"

탁.

지셀은 품에서 책 한 권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물끄러미 책을 내려다보던 즈발터가 물었다.

"이 책은 뭐냐?"

"가문의 마나 연공법을 제 식대로 개량한 걸 적어 두었습니다."

"허? 네가?"

즈발터는 쓴웃음을 지으며 지셀이 꺼낸 책을 내려다보았다. 어디 좋은 거라도 주워서 저런 얘기를 하나 했는데 직접 개량을 했다고 하니 조금 우스웠다.

즈발터는 혀를 차며 손을 휘저었다.

"됐다. 네가 나름대로 깨달음을 얻어서 좀 끄적인 모양인데, 연공법을 바꾸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어느 세월에 그걸 연구하고 개량한다는 말이냐."

즈발터는 지셀이 직접 개량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초안만 잡고 같이 연구하자는 뜻으로 착각했다.

어차피 시간 버릴 일이라 생각하고 거절을 했는데 지셀은 고개를 저었다.

"같이 연구하자는 게 아닙니다. 이미 개량을 끝낸 상태입니다."

"하, 그럼 검증도 안 된 걸 우리보고 익히라는 뜻이냐?"

"검증은 충분히 됐습니다."

"뭐? 무슨 검증?"

"제가 이미 익혀 봤습니다."

"허어!"

즈발터는 크게 기함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나 연공법을 바꾸는 위험한 짓을 한 것도 모자라 그걸 익히기까지 했다니!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는 증거였다.

"너, 너... 몸은 괜찮으냐?"

"네, 전혀 문제없습니다. 그리고 개량은 이미 오래전에 해 두었던 겁니다. 전쟁 때 제 실력을 보셨지 않습니까? 다 마나 연공법을 바꿔서 그럴 수 있었던 겁니다."

"...."

즈발터는 그 말에 즉각 반응하지 못했다.

확실히 망나니라 소문난 아들이 싸움을 잘해서 놀라긴 했다.

그런데 그게 몰래 수련한 게 아니라 마나 연공법을 바꿔서 그런 거였다고?

본인 입으로 한 말인데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지셀은 즈발터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는 이미 적이 많습니다. 지금보다 더 강해져야 합니다. 이 마나 연공법은 우리 가문과 영지를 더 강하게 바꿔 줄 겁니다."

"아니, 그래도... 대대로 전해져 온 연공법을 어찌 제멋대로 바꾼다는 말이냐!"

"강해지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죠. 아무리 선조부터 전해 내려온 마나 연공법이라도 안 좋다면 뜯어고치는 게 맞습니다."

그 말에 즈발터는 입을 떡 벌렸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맞지만, 그간 쌓아 왔던 가문의 전통과 권위를 너무 무시하는 발언이었다.

"그래도 우리 가문을 천년이나 지탱해 온 마나 연공법이다! 네가 개량한 게 가문의 것보다 뛰어나다는 보장이 어디 있느냐?"

그러자 지셀은 피식 웃었다.

"아니, 솔직히 우리 가문이 천년이나 됐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렇다니까? 아, 네가 태어난 해가 우리 가문이 천 년째 되는 해였어. 정말 경사스러운 날이었지."

"증거 있어요?"

"그게.... 이백 년 전에 자료가 다 소실이 되어서.... 나도 네 할아버지한테 들은 거다."

"그럼 이백 년 된 가문인가 보죠."

"...."

지셀의 일침에 즈발터는 입을 꾹 닫았다.

솔직히 그가 생각하기도 천 년은 말이 안 되는 거 같았다.

그냥 조상 대대로 계속 그런 말을 하며 계산을 해 왔기에 그렇게 알고 있을 뿐이었다.

왜 계산하는지도 다들 모르고 있었다.

사실 밖에서는 이런 얘기를 꺼내지도 않는다. 욕먹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저 가문 내에서만 배우고 가르쳐 가며 나름대로 자부심을 품고 살아왔다.

지셀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천 년이라는 건 그냥 건국 신화 같은 겁니다. 진짜일 리가 없잖아요. 다른 가문들에도 비슷한 거 하나씩 있지 않습니까? 델파인 공작가는 무슨 용의 후손이니 뭐니 하고요."

"그건 그렇지만...."

"너무 그런 거에 의미 두지 마세요. 솔직히 천년이든 이백 년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전쟁 나면 다 죽는 건 똑같은데. 데스몬드 백작이 단단히 벼르고 있을 겁니다."

"으음, 그렇지."

즈발터도 지셀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아들었다.

그에게 지금 가장 두려운 것은 데스몬드 백작과의 전쟁이다.

형편이 좀 나아지고 브랜포드 후작이 아들의 후견인이 되어 모른 척하고 있었을 뿐.

저쪽이 왜 가만히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안심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가만히 있어서 더 불안했다.

지셀은 고민하는 아버지에게 단호히 말했다.

"그러니까 빨리 이걸 익혀서 강해져야 합니다. 빠를수록 좋습니다."

"그래, 그러면...."

즈발터는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데스몬드 백작의 위협과 마나 연공법을 익히는 건 다른 문제였다.

"깜빡 넘어갈 뻔했네! 어쨌든 안 돼! 네가 지금 괜찮더라도 부작용이 언제 일어날지 모른다! 너도 수련을 멈추고 정석대로 해라! 뭐든 급하면 문제가 생기는 법이야!"

"그럴 시간 없습니다. 이걸 익혀야 더 강해집니다."

"가문의 마나 연공법은 다른 곳과 비교해도 절대 뒤처지지 않는다! 솔직히 우리가 가난한 걸로 비웃음당하면 당했지, 기사들 실력으로 욕먹은 적은 없었다!"

조용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란돌프도 끼어들었다.

"대공자님, 영주님과 저도 상급의 기사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페르디움 가문의 마나 연공법은 절대 부족하지 않습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페르디움의 마나 연공법은 다른 가문에 비해서 뒤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다른 가문과 비슷한 수준이라는 뜻일 뿐, 지셀의 기준에는 한없이 부족했다.

"가문의 마나 연공법은 한계가 있습니다."

"뭐?"

"이미 두 분 다 벽에 막히셨지 않습니까?"

"...."

즈발터와 란돌프는 차마 반박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지셀이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벽을 마주한 건 사실이었다. 이제는 아무리 수련을 해도 진전이 없었다.

수련하면 할수록 마치 무엇인가가 빠진 듯한, 공허한 느낌이 계속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연공법을 연구해도 무엇이 잘못됐는지 알 수가 없었다.

즈발터뿐만이 아니라 페르디움의 역대 가주들 모두가 느꼈던 문제였다.

"가문의 마나 연공법은 겉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수련을 하면 할수록 무언가 부족하다는 걸 느끼게 되죠."

지셀의 말에 즈발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은 중년의 나이에서야 느낀 걸 젊은 아들이 벌써 깨닫다니!

'혹시... 내 아들은 정말 천재인가?'

전쟁 때의 활약을 생각해 보면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새삼 자신을 뜯어보는 즈발터를 보며 지셀이 말을 이었다.

"저는 그 문제의 원인을 알아냈고 빠진 부분을 채웠을 뿐입니다. 만약 수정본을 익히신다면 벽을 넘을 수 있을 겁니다."

"네가... 그걸 도대체 어떻게 알았다는 말이냐."

"우연히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지셀은 만능의 변명을 사용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전생에 우연히 얻었던 고대의 마법서 덕분에 깨달음을 얻은 건 사실이었으니까.

반쪽짜리에 불과했던 그 마법서에는 고대 마법사들이 어떤 식으로 마력을 모았는지에 관한 설명이 적혀 있었다.

거기서 새로운 개념을 접한 지셀은 자신이 익혔던 마나 연공법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개량하는 데 성공했다.

어찌나 잘 맞았는지, 가끔은 이 마법서에서 가문의 마나 연공법이 파생된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반쪽짜리라는 게 너무 아쉬웠지.'

지셀은 그 작은 깨달음을 통해 마나 연공법을 개량하고 무려 대륙 7강의 자리에 올랐다.

피나는 노력과 타고난 재능 덕도 있었겠지만, 마법서가 없었다면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다시 찾아봐야겠어.'

지셀은 상념을 지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이상 설득할 생각은 없었다. 문제점을 말했고 문제의 해결책도 제시했다.

힘으로 억압하거나 실력을 보여 주겠다고 깔아뭉개고 싶지도 않았다.

'어차피 보면 익히게 될 테니까.'

기사의 습성을 잘 알고 있는 지셀은 여유 넘치는 어조로 말했다.

"뭐, 선택은 아버지의 몫이니까요. 더 강요는 안 하겠습니다. 책에 자세히 설명해 놨으니 한번 확인해 보세요. 문제가 있는 거 같으면 익히지 않으셔도 됩니다."

"으음...."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만약 익히기로 하시게 되면 페르디움의 기사들에게도 모두 전수해 주십시오. 지금은 쓸데없이 명예니, 전통이니 하면서 아낄 때가 아닙니다."

"으음...."

즈발터는 대답도 제대로 안 하고 침음만 흘렸다.

문제를 해결했다고 하니 내용이 궁금해 죽겠다. 그렇다고 바로 펼쳐 보기에는 체면이 발목을 잡는다.

고민에 빠진 즈발터를 보고 지셀은 피식 웃으며 고개만 꾸벅 숙이고 몸을 돌렸다.

건성으로 아들을 배웅한 즈발터는 지셀이 놓고 간 책을 힐끔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아들이 가져온 건데 얼마나 잘했는지 한번 볼까?"

란돌프도 옆에서 거들었다.

"뭐 굳이 익힐 필요는 없지만, 뭐라고 써 놨는지는 한번 보시죠?"

"크흠흠, 그래. 가져온 성의가 있으니까."

즈발터는 자리에 앉아 슬쩍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지셀이 세세하게 주석까지 달아 놓아 내용을 이해하기는 무척이나 쉬웠다.

한 장씩 넘어갈 때마다 즈발터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바뀌었다.

"허...."

절로 감탄이 나온다. 보기만 해도 그간 답답하던 속이 후련해지는 느낌이었다.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란돌프가 고개를 쓱 내밀며 달라붙었다.

"어떤데요? 저도 좀 봅시다. 형님."

"아, 붙지 마. 나부터 좀 보고!"

몇 번의 실랑이 끝에 내용을 다 읽은 즈발터가 깊이 생각에 잠긴 채 손만 움직여 란돌프에게 책을 넘겼다.

그리고 몇 분 뒤, 란돌프도 즈발터와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허...."

"흐...."

두 사람은 제대로 말도 못 하고 한숨만 내쉬었다.

실제로 익혀 봐야 효과를 알겠지만, 지셀이 가져온 연공법은 이론적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이걸 익히면 그간 그들을 가로막고 있던 벽을 뚫을 수 있을 거란 확신마저 들었다.

즈발터는 정신을 차리고 란돌프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가 보기엔 어때? 문제없을 거 같아?"

"놀랍습니다. 놀라울 정도입니다. 분명 이걸 익히면 더 강해질 겁니다."

"그렇지? 그런데 지셀이 도대체 어떻게 이런 걸 생각해 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고만 치던 놈이 어느 순간 사람이 바뀐 것처럼 달라지더니 놀라운 일만 해낸다. 자신의 아들인데도 아들 같지 않았다.

하지만 란돌프는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 눈썹을 들썩이며 답했다.

"진짜 깨달음을 얻었거나, 아니면 뭐 기연이라도 있었나 보죠. 지금 중요한 문제는 그게 아니라 이걸 어떻게 처리하냐는 겁니다."

"으음, 그런데 정말 위험하지 않을까?"

"순간적으로 마나를 폭발시키는 방식은 좀 위험할 거 같긴 합니다. 그래도 몸만 건강하면 문제없을 거 같은데요? 조금 더 두고 봐야겠지만, 이론상으로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래, 이론상은 그렇지. 이론상은.... 문제가 없다는 게 더 마음에 걸려."

즈발터는 말을 하면서도 찝찝한 기분을 지우지 못했다.

지셀과 엮인 일은 항상 결과가 좋았지만 그 과정이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즈발터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란돌프가 옆에서 재촉했다.

"형님, 뭘 그렇게 고민하십니까? 이 페르디움에서 가장 강한 건 저와 형님 아닙니까? 우리 둘이 봤을 때 문제없으면 된 겁니다."

"하, 그래도 그놈이 만든 거라 하니 좀...."

"대공자가 아무리 강해도 우리 둘보다 강하겠습니까? 연륜에 따른 안목은 우리가 위입니다. 애초에 전쟁 때 활약한 것도 이 마나 연공법의 폭발력 덕분인 모양이고요."

그 말에 즈발터는 눈을 감고 다시 생각에 잠겼다.

란돌프는 조마조마한 기색을 감추려고 애쓰며 즈발터의 결단을 기다렸다.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당장 개량된 연공법을 익히고 벽을 넘고 싶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즈발터는 이내 타협하듯 말했다.

"조금씩 단계를 올려 가며 수련해 볼까? 만약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멈추면 되잖아."

그러자 란돌프가 주먹을 꽉 쥐고 환한 웃음을 지었다.

"그렇죠. 이상하면 멈추면 됩니다."

지셀이 일부러 말하지 않은 부분이 있었으니, 이 마나 연공법은 한번 시작하면 멈출 수 없었다.

그걸 알아내기에는 경지가 부족했다는 것이 두 사람의 불운이었다.

즈발터는 몇 번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한번 익혀 보자. 기사들을 모두 불러와라. 다 같이 빨리 강해져서 나쁠 건 없지."

순간 이유 모를 섬뜩한 예감에 등줄기가 오싹했지만, 두 사람은 그저 기분 탓이려니 가볍게 넘겼다.

173화 검증은 충분히 됐습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