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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화 어려운 부탁은 아닙니다. (1)

브랜포드 후작은 어두운 방을 둘러보며 눈썹을 찡그렸다.

'개판이군.'

퀴퀴한 냄새와 섞인 피 냄새가 그간 얼마나 상황이 심각했는지를 알려 주었다.

침대에 누워 있는 로잘린은 보름 전에 비하면 무척 마르고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창문을 열어라."

촤악!

후작을 뒤따라온 기사들이 창문을 열었다. 혹시 모르는 일을 대비해 커튼은 걷지 않았다.

불어 들어온 바람에 커튼이 휘날리자 사용인 몇 명이 로잘린에게 빛이 비치지 않게 창문 앞을 막아섰다.

지셀은 방 한쪽에 팔짱을 끼고 앉아 있었다. 그도 눈 아래가 거무스름해져서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도련님! 괜찮으세요?"

"영주님!"

지셀의 측근들도 급하게 들어와 그를 챙겼다.

"아가씨!"

쫓겨났던 집사도 불안한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로잘린은 천천히 눈을 뜨고 상체를 일으켰다.

"아...."

그녀는 무심코 탄식을 내뱉었다.

이제 끝났다는 안도감과 고통의 후유증이 뒤섞인 복잡한 음성이었다.

로잘린은 바로 지셀을 가리키며 말했다.

"당장... 저놈 잡아...."

이제 끝이 났으니 잡아 가둬도 된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간 자신이 겪었던 고통과 모욕을 그대로 갚아 줄 생각만이 가득했다.

"뭐 해! 당장 붙잡으라니까!"

로잘린의 고함에 기사들이 어쩔 줄 몰라 하며 기사단장을 돌아보았다.

톨레오가 말없이 손짓으로 명령을 내렸다. 기사들은 바로 퇴로를 막고 주변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지셀의 측근들은 표정 관리를 하며 슬금슬금 지셀을 둘러싸고 주위를 경계했다.

"도련님! 이제 뭐 어떻게 할 거예요!"

벨린다가 다그치듯 속삭여도 지셀은 피곤한 표정만 지은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클로드는 내심 혀를 차며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기 시작했다.

'확 수틀리면 저 둘 중 하나를 인질로 잡아야겠다.'

그러나 톨레오도 후작가의 기사단장 자리에 거저 오른 사람이 아니다.

이미 기사들은 지셀 일행이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자마자 로잘린과 브랜포드 후작에게 바로 뛰어들 수 있게 대비하고 있었다.

양측의 대치로 긴장감이 고조되던 그때, 브랜포드 후작이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가면을 벗어라."

로잘린이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이런 엉터리 치료라도 결과를 봐야 명분이 생기겠죠. 결과야 뻔하겠지만."

그녀는 거칠게 가면을 벗어 옆으로 집어 던졌다.

창문이 열려 있지만 지금은 얼굴을 숨겨야 한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간 온갖 모진 꼴을 다 당했는데 이제 햇빛 조금 받는 게 대수겠는가.

"됐지! 다 봤지? 이제 잡아! 어서!"

로잘린이 눈을 부라리며 소리를 질렀지만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오...."

당황해하는 듯, 감탄하는 듯 이상한 소리만 내뱉을 뿐이었다.

로잘린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지금 다들 뭐 하는 거야! 아버지 명령이 아니면 안 움직이겠다는 거야?"

"아, 아가씨.... 아가씨! 아가씨!"

집사는 눈물을 흘리며 로잘린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것이 신호가 된 양 방 안에 있던 사용인들과 기사들도 저마다 탄성을 질렀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그녀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왜, 왜 그러는데? 다들 왜...."

로잘린은 마른침을 삼켰다. 문득 한 가지 깨달음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심장 박동이 점차 빨라졌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창문 앞을 막고 있는 사용인들에게 손짓했다.

사용인들은 주저하다가 조심스럽게 옆으로 움직였다.

커튼의 틈 사이로 새어 들어온 햇빛이 로잘린의 볼을 밝게 비췄다.

로잘린은 따뜻한 기운에 움찔했지만, 아무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제 볼을 쓰다듬었다.

"서, 설마...."

그녀는 불안감과 희망을 동시에 억누른 채, 목이 멘 소리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

"거, 거울을...."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사용인들이 허겁지겁 거울을 찾아왔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의 얼굴을 잘 볼 수 있도록 가까이 가져갔다.

"아...."

정말 오랜만에 보는 거울이었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산발이 된 머리며 피에 엉망이 된 옷은 귀족 가문의 영애라기보다는 빈민가의 여자 같았다.

하지만 그런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로잘린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볼을 쓰다듬었다.

뚜렷한 이목구비, 깨끗하게 변한 피부가 보인다.

아직 몇 군데에 붉은 반점이 희미하게 남아 있지만 크게 신경 쓸 정도는 아니었다.

"내, 내 얼굴...."

햇빛을 받아도 아무 이상이 없었다. 그녀는 믿을 수 없는 결과에 눈을 의심하며 한참 동안 거울만 바라보았다.

집사는 계속 눈물을 흘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다 나았습니다. 이제 다 나았습니다. 치료가 정말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는 눈물을 쓱 닦아 내고 평소처럼 담담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바로 갈아입으실 옷을 가져와라."

집사의 손짓을 받고 사용인 중 몇 명이 재빨리 방을 나섰다.

"아아...."

로잘린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 고문 같던 치료가 정말 효과가 있었다니.

"꾸, 꿈이지...? 이거 지금... 다들 장난을...."

애초에 기대하지 않았기에 지금의 결과에 더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만약 이게 꿈이라면 이보다 더 잔인한 악몽은 없을 것이다.

로잘린은 지셀을 바라보며 말을 더듬었다.

"거, 거짓말이지? 이거... 지금 무슨 약 같은 걸로 환각을...."

"그런 게 아닙니다."

지셀은 로잘린에게 다가가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치료는 끝났습니다. 힘드셨을 텐데 정말 잘 버티셨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그 한마디에 로잘린은 결국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아...."

로잘린은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간 억눌러 왔던 아픔이 폭발하듯이 솟구쳐 올라왔다.

드디어 이 악마 같은 병에서 벗어났다.

드디어 어둠 속에서 나와 빛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울지 않으려 해도 그간의 설움이 몰려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고 말았다.

"끄으...."

"아가씨...."

입을 막고 울음을 참는 로잘린을 집사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지켜보았다.

냉혈한 같던 브랜포드 후작도 이 순간만큼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저기, 아가씨가 감정을 추스를 시간을 조금 주시는 게 좋을 거 같은데요. 우리 때문에 마음껏 울지도 못하고 있잖아요?"

벨린다가 혀를 차며 운을 떼었다. 집사도 마구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동의했다.

"그, 그럽시다. 잠시 자리를 좀 비켜 줍시다. 어서, 어서요."

사람들이 브랜포드 후작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브랜포드 후작은 가만히 로잘린을 바라보다가 별다른 말 없이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자, 자. 빨리 나갑시다."

집사에게 떠밀려 사람들이 우르르 방에서 나섰다.

방문이 닫히자 그제야 로잘린의 울음소리가 더 커지기 시작했다.

"이것 보라니까요. 다들 센스가 없는 건지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건지...."

벨린다가 혀를 차며 중얼거리다 후작의 눈길을 받고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는 코웃음을 치며 지셀을 바라보았다.

"정말 치료에 성공했군. 놀라운 실력임은 인정하겠다."

결과적으로 내기에 진 셈이 됐지만, 생각보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오래도록 고통받은 딸이 치료가 됐으니 나쁠 리가 없었다.

지셀은 말없이 어깨만 으쓱했다.

집사가 제일 먼저 지셀에게 다가가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남작님의 의술은 정말 왕국 제일입니다! 그간의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아니, 그건 아닌데.'

이거 잘못하면 천하의 명의로 소문나게 생겼다. 귀족들이 죄다 찾아오면 어떻게 하지?

'에이, 설마.'

지셀은 내심 당혹스러워하면서도 겉으로는 자신만만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지셀의 측근들은 그제야 한시름 놨다는 표정을 지었다.

벨린다는 후작의 얼굴을 힐끗 보면서 고소를 지었다.

'저 뚱한 표정 좀 보라지. 불만 있으면 어디 얘기해 보시라고요.'

이런 분위기라면 저 무서운 후작도 자신들에게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다.

클로드는 속으로 혀를 찼다. 위기를 넘겨 기쁘긴 했지만, 이번에도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가 안 갔다. 상식이 마비되는 것만 같았다.

'와, 진짜 매번 봐도 매번 놀랍다. 이게 성공한다고?'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지셀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아무리 봐도 반쪽짜리 지식인 거 같은데.'

지셀이 벌이는 기행은 마치 문제의 답만 어디서 쏙 빼 온 것 같았다.

정작 본인도 원인은 모르면서 결과만 내는 괴상한 현상.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건지, 몇 번이나 직접 당했는데도 여전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껄렁대는 지셀 일행을 보고 브랜포드 후작은 눈썹을 한번 찡그렸다.

"로잘린에게는 나중에 따로 나를 찾아오라고 해라. 일단 가신들을 소집하도록. 펜리스 남작과의 거래를 마무리할 것이다."

"오!"

브랜포드 후작의 말에 주변 사람들이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일을 마무리한다는 말은 펜리스 남작의 공을 인정하고 원하는 걸 들어주겠다는 뜻이었다.

지셀이 과연 무엇을 요구할지, 다들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훔쳐보았다.

* * *

잠시 후, 대전에 후작가의 주요 가신들이 모였다.

집사가 지셀과 그의 측근들을 직접 정중하게 안내했다.

브랜포드 후작은 가장 상석에 앉아 턱을 괴고 일행을 내려다보았다.

"제법 놀라운 결과였다. 허세인 줄 알았는데, 그저 말뿐인 애송이는 아니었군."

듣고 있던 가신들이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브랜포드 후작이 한 것치고는 굉장히 후한 칭찬이었다.

"방법이 괴이하긴 했지만 어쨌든 약속은 약속. 이제 원하는 걸 말해 보거라."

사람들은 다들 궁금해하는 얼굴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브래포드 후작과도 같은 권세가에게 원하는 것이 작은 일일 리가 없었다.

도대체 얼마나 큰 걸 얻으려고 그렇게 막 나갔던 걸까?

대전이 긴장과 호기심으로 가득 찼다.

지셀은 조용히 심호흡을 하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 큰 걸 원하는 게 아닙니다."

브랜포드 후작은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개의치 말고 말해 보거라. 네가 무엇을 원하든 대부분은 가능할 것이다."

지셀은 다행이라는 듯 살짝 웃으며 말했다.

"제 후견인이 되어 주십시오."

"...뭣?"

브랜포드 후작이 당황하며 되물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까지 모두 놀라 입을 쩍 벌렸다.

브랜포드 후작이 확인차 다시 물었다.

"지금 후견인이라 했느냐?"

"그렇습니다."

"후원 좀 해 달라는 걸 잘못 말한 게 아니고?"

"아닌데요?"

"허...."

언제나 무표정하던 브랜포드 후작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마저 모두 주인과 비슷한 표정으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오직 벨린다만이 대견스러워하는 눈길을 보냈다.

'와, 역시 우리 도련님!'

지셀이 어릴 적에, 하나를 줬으면 둘을 뺏어 와야 한다고 가르치기는 했다.

하지만, 둘 정도가 아니라 죽을 때까지 빨아먹겠다고 선언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그것도 저런 무서운 후작에게 말이다.

'누구한테 배웠는지 정말 잘 배웠네.'

누가 들어도 기겁할 요구를 해 놓고도 당당하게 서 있는 지셀을 보고 브랜포드 후작이 침음성을 흘렸다.

"으음...."

단순히 후원을 해 주는 것과 후견인을 자처하는 건 차원이 다른 일이다.

후견인이 되면 앞으로 지셀이 무슨 사고를 쳐도 브랜포드 후작이 책임지고 사태를 수습해야 한다.

큰 걸 원하지는 않는다더니, 앞으로도 두고두고 필요할 때마다 뽑아 먹겠다는 뜻이 아닌가.

이놈 참, 보통 뻔뻔한 놈이 아니었다.

134화 어려운 부탁은 아닙니다. (2)

'이 당돌한 놈이 애초부터 작정을 하고 왔구나.'

브랜포드 후작은 내심 헛웃음을 지었다. 지셀의 뻔뻔함에는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평소 같았으면 누가 그런 의중을 내비치기만 해도 당장 불호령을 내렸을 테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툭... 툭... 툭....

브랜포드 후작이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두드렸다.

대전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 말을 못 한 채 그의 대답만 기다리고 있었다.

브랜포드 후작은 지금까지 누구의 후견인을 자처한 적이 없었다.

자칫하면 지금까지 쌓아온 명예와 권위가 순식간에 무너질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지셀은 고민하는 후작을 보고 내심 혀를 찼다.

'아니, 뭐든 다 들어주겠다면서. 왜 저렇게 고민을 해.'

입꼬리를 삐죽대며 투덜대는 지셀을 브랜포드 후작은 무심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욕심이 보통 큰 놈이 아니다. 후견인이 되면 골치 아픈 일이 많겠지.'

브랜포드 후작은 눈을 감고 조금 더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근래 본 젊은 귀족 중에서는 개중 출중하기는 하군.'

전쟁 이후로 나름대로 활약했다는 보고는 들었지만, 망나니 시절과 대비되어 좋게 봐 준 게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나 지셀의 기행을 직접 확인하니 그 보고가 오히려 그를 과소평가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거슬리는 부분이 없는 건 아니지만... 밀어줘도 괜찮을 것 같다.'

화장품 때문에라도, 지셀은 몇 년만 지나면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세력으로 성장할 게 분명했다.

거기다 지셀의 아버지인 페르디움 변경백은 디갈드의 영지까지 흡수한 상태.

적당히 지원을 추가해서 조금만 더 끌어올려도 친왕파에 꽤 도움이 될 것이다.

브랜포드 후작은 숙고 끝에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좋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대전 안에 있던 모두가 당황했다.

아무리 약속을 했다지만 저런 말도 안 되는 부탁을 정말 들어줄 줄이야!

사람들이 놀라건 말건, 브랜포드 후작은 자세를 바로 하며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을 증인으로 선언한다. 나, 브랜포드 후작은 지셀 펜리스 남작의 후견인으로서 그의 뒤를 받쳐 줄 것이다. 남작의 적은 곧 나의 적이 될 것이며, 누구든 그를 대할 때 뒤에 내가 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브랜포드 후작이 형형한 눈빛으로 마지막 질문을 건넸다.

"너 또한 모든 일을 처리할 때 나의 명예까지 고려해야 할 것이다. 동의하겠느냐?"

"네, 언제나 후작님의 명예에 해가 되지 않도록 행동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지셀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됐다!'

이제 브랜포드 후작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었으니 미뤄 두었던 중요한 일들을 처리할 차례였다.

'저 사람 성격에 그저 약속했다는 이유만으로 승낙하진 않았을 거야. 나와 손을 잡으면 이득이 있다고 생각했겠지.'

브랜포드 후작은 산전수전 다 겪은 노회한 정치가다.

정말로 지셀을 받아들이기 싫었다면 얼마든지 핑계거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위치였다.

그런데도 굳이 그를 받아 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친왕파의 기수로 활용할 생각이려나.'

공작가 세력과 직접적으로 대치하게 되는 자리에 지셀을 세울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지셀은 이미 그들과 척지게 된 상황.

설령 후작이 그를 이용하려 하더라도 굳이 피할 이유는 없었다.

앞으로 후작에게 노골적으로 도움을 요청할 핑계가 생기는 셈이니 오히려 좋다.

브랜포드 후작이 대놓고 지셀의 뒤를 봐준다면, 델파인 공작도 페르디움 영지에 손을 쓰기가 상당히 곤란할 것이다.

'이걸로 시간을 조금 더 번 셈이다. 그놈들 무척 당황하겠지? 크크큭.'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이다. 전생에 친왕파는 결국 델파인 공작가에 잡아 먹히고 말았으니까.

하지만 지금 당장은 브랜포드 후작이 든든한 방패가 되어 줄 터였다.

브랜포드 후작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가신들 또한, 앞으로 펜리스 남작을 대할 때는 그 뒤에 내가 있다는 걸 잊지 말도록. 집사는 왕실과 각 귀족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라."

"예, 후작님."

집사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지셀이 주변에 있는 후작가의 가신들을 쓱 둘러보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경악, 불신, 불쾌 등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가신들의 표정을 하나하나 뜯어보던 지셀이 씨익 웃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표정들이 어째, 제가 마음에 안 드시는 거 같은...."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가신들이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아, 저하고는 눈도 마주치기 싫으시다는...?"

지셀이 장난스럽게 되물었다. 가신들은 사색이 되어 얼른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아니셨구나! 전 또 다들 저를 싫어하시는 줄 알았죠!"

"하, 하.... 설마요."

가신들은 불만스러운 속내를 감추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후작가의 가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수도의 귀족들 앞에서도 꼿꼿이 고개를 들고 다니던 사람들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지셀은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으며 거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브랜포드 후작은 그 모습을 보고 어처구니가 없어 웃었다.

'참 신기한 놈이긴 하구나.'

세상 살면서 저렇게 노골적으로 뻔뻔한 놈은 정말 처음 봤다.

'그래도 저 정도로 강단 있는 놈이면 밀어주는 맛은 있겠군.'

후견인을 요청할 정도라면 자신에게 바라는 게 많을 것이다.

그 부분에 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할 때, 문을 지키던 병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브랜포드 후작이 의아해하며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나중에 따로 찾아오라는 말을 전하지 않았나?"

"분명 전해 드렸습니다만...."

집사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답했다.

"뭐, 여기까지 왔는데 굳이 돌려보낼 필요는 없겠지. 들여라."

끼이익.

병사가 조심스럽게 대전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로잘린이 단아한 드레스를 차려입고 도도하게 턱을 치켜든 채 서 있었다.

지셀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새 화장을 한 건지, 로잘린의 얼굴은 붉은 기 하나 없이 깨끗했다.

차가운 눈빛과 굳게 다문 입매에서 강단 있는 성격이 그대로 묻어났다.

그 분위기만큼은 브랜포드 후작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었다.

저벅.

로잘린이 우아하게 대전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집사가 반가워하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아이고, 아가씨! 벌써 움직이시다니,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오랜만에 이렇게 차려입고 화장까지 하시니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창피하게 왜 그.... 아니야, 고마워. 그간 고생 많았어."

로잘린은 희미하게 웃으며 짧게 답하고는 브랜포드 후작에게 인사를 올렸다.

"아버지, 경황이 없어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네요. 펜리스 남작과는 얘기가 다 끝나셨나요?"

"그래, 너를 치료해 준 것에 대한 보상으로 내가 저놈의 후견인이 되어 주기로 했다."

그 말에 로잘린이 눈을 크게 뜨고 지셀을 바라보았다.

아버지에게서 그런 보상을 얻어 낸 사람은 지셀이 처음이었다.

'역시 범상치 않은 인간이긴 하네.'

미묘한 웃음을 지은 그녀는 곧 지셀에게 다가갔다.

로잘린이 다가올수록 지셀은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무척이나 신경 쓰인다.

'평소처럼 짜증을 안 내니 뭔가 수상하네. 감사 인사를 할 사람처럼은 안 보이는데 무슨 생각인 거지?'

지셀은 문득 치료 중에 그녀가 이를 갈며 했던 말을 떠올렸다.

― 이 돌팔이 새끼!

― 당신, 반드시 죽여 버릴 거야.

― 절대 곱게 못 죽을 거야. 내가 장담할게.

'으음, 그거 진심이었던 거 같은데. 설마 진짜 죽이겠다고 덤벼들지는 않겠지?'

아버지인 브랜포드 후작의 힘 없이도 그녀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그런 사람이 독기까지 갖추었으니, 만약 그녀가 아직도 지셀에게 악감정을 품고 있다면 상당히 피곤해진다.

은혜를 입은 사이에도 자존심이 상했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를 죽이는 미친 자들이 많은 세상이다.

심지어 지셀은 그녀가 화끈하게 욕하는 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화끈하게 행동했다.

'뭐... 따귀 한 대 정도는 맞아 줄게.'

생각해보니 그래도 귀족가의 영애인데 너무 심하게 대하긴 했다.

자신이야 본래도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이라지만, 상대는 아닐 테니까.

'아니 그래도, 난 다 치료를 위해서 그런 거라고. 그래도 마지막에 분위기 괜찮았잖아?'

로잘린이 움직이는 동안 모두가 긴장한 채 침묵을 지켰다.

순식간에 분위기를 휘어잡은 로잘린이 지셀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남작님."

그녀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곧 가슴에 손을 얹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천형처럼 저를 옭아매고 있던 병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갑작스러운 감사 인사에 지켜보고 있던 모든 사람이 경악했다.

'아, 아가씨가 사과를 하시다니!'

지셀도 꺼림칙한 표정을 지으며 살짝 고개를 뒤로 뺐다.

'이 여자가 안 어울리게 왜 이래?'

고개를 든 로잘린은 순진무구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머? 다들 왜 그런 눈으로 바라보세요? 무슨 일 있나요? 아, 오랜만에 제 얼굴을 봐서 그런가 보네요. 아이참, 부끄럽게."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뻔뻔한 태도에 사람들은 눈만 껌뻑거렸다.

지셀이 참지 못하고 살짝 떠보듯이 물었다.

"저기... 정말 괜찮으세요?"

"네? 뭐가요?"

"어제까지만 해도 저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제가 언제요? 저는 그런 험한 말 안 해요."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고...."

"어머, 치료하는 게 많이 힘드셨나 봐요. 환청을 들으신 거 같은데요."

로잘린은 제 뒤를 따라온 하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내가 그런 말 했었어?"

하녀는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아닙니다. 하신 적 없습니다."

"이것 보세요."

지셀은 황당함에 입을 떡 벌렸다.

'단검으로 내 대가리 찍으려고 한 게 아직도 눈앞에 생생한데 이렇게 시치미를 뗀다고? 이건 새로운 괴롭힘 방법인가?'

그는 한껏 억울해하는 어조로 말했다.

"아니, 저보고 돌팔이라고, 갈기갈기 찢어서 죽이겠다고 하셨잖습니까!"

촤르륵!

지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로잘린이 부채를 펼쳐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부채로 일그러지는 입매를 가린 채, 두 눈만 내보이며 말했다.

"아이참, 그런 적 없다니까요? 남들이 들으면 오해하게 자꾸 왜 그러세요! 아무리 은인이셔도 그렇지, 레이디의 명예를 이렇게 깎아내리시면 곤란해요."

말투는 상냥한데 눈에서는 무시무시한 살기가 쏘아져 나온다.

이글거리는 그 눈을 본 지셀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그래요. 제가 잘못 들은 거 같네요."

'없었던 일로 치고 싶은 건 알겠는데... 지금 그게 의미가 있나? 소용없을 거 같은데.'

촤륵!

로잘린은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자 부채를 다시 접고 상냥하게 말했다.

"혹시 치료 중에 제가 무례를 범한 게 있다면 용서하시길."

"...괜찮습니다. 고통이 심했을 텐데 끝까지 버티신 것 자체가 대단하신 겁니다."

어지간한 장정도 버티지 못할 치료를 버텼으니 그 점만큼은 인정해 줘야 했다.

로잘린은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치료해 주신 은혜는 반드시 갚도록 하겠습니다. 제 능력을 전부 써서라도 말이에요. 필요한 게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없습니다."

지셀은 칼같이 거절했다.

135화 어려운 부탁은 아닙니다. (3)

예상치 못한 대답에 로잘린이 살짝 당황하며 말을 이었다.

"대가도 치르지 않고 그냥 넘어가면 제가 체면이 서질 않아요. 부담 없이 말씀하셔도 괜찮아요."

"정말 괜찮습니다. 아가씨께서 나으신 것만으로도 저는 충분합니다."

솔직히 이 무서운 여자랑 더 엮이고 싶지 않았다. 치료도 끝났으니 볼 일도 없다.

필요한 건 이제 후견인이 된 브랜포드 후작에게 받아 내도 충분하다.

하지만 로잘린은 지셀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좋은 게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버지께서 대가를 주셨더라도, 은혜를 입은 사람은 저인걸요. 아, 그러면 제가 앞으로 펜리스 남작님의 개인 후원자가 되어 드릴게요."

그 말에 가신들은 깜짝 놀랐다.

로잘린은 그간 병 때문에 숨어 살면서도 기존에 후원하던 단체들을 계속 관리해 왔다.

그녀가 그 단체들과 엮인 인력과 재력을 휘두르면 수도 경제의 절반 정도는 순식간에 마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아가씨가 움직이면 후작님뿐 아니라 아가씨의 외가에서도 뒤를 봐주게 된다.'

로잘린의 어머니인 브랜포드 후작 부인은 지금 후작과 별거 중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왕국의 재상이고 오빠들은 왕실의 행정관과 수도의 대법관이다.

그런 대단한 집안에서 곱게 자란 탓에 브랜포드 후작 부인은 냉혈한 같은 남편의 성격을 견디지 못했다.

그러나 결혼 자체가 정치적인 목적에서 이루어진 결합이었으니 이혼도 불가능했다.

결국 후작 부인은 그대로 친정에서 머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딸인 로잘린에게는 때마다 좋은 약을 챙겨 주고, 편지도 수시로 주고받고 있었다.

로잘린의 외할아버지인 재상도 손녀를 끔찍이 아꼈다.

로잘린이 후원자가 된다는 건, 즉 그녀의 외가에서도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는 엄청난 일이었다.

"어때요? 이 정도면 괜찮은 보답이 될까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는 로잘린에게 지셀은 다시 한번 깔끔하게 거절했다.

"말씀만 고맙게 받겠습니다."

지셀도 그녀의 뒷배경을 알고는 있지만, 굳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앞으로 브랜포드 후작이 다 도와줄 텐데 로잘린이 후원해 줄 게 뭐가 있겠는가?

받아들이면 돈이야 얼마쯤 얻을 수는 있을 거다. 하지만 로잘린과 엮이면 피곤해질 게 뻔히 보였다. 이쯤에서 선을 그을 생각이었다.

로잘린은 정말 보답을 하고 싶었는지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계획해 두신 일이 많지 않으신가요? 제가 도와드릴 수 있어요."

"정말 괜찮...?"

촤르륵!

거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또 부채가 펴진다.

"후우우...."

끓어오르는 화를 참는 듯 잠시 심호흡을 한 그녀가 이번에도 두 눈만 내보이고 말했다.

"받아 주실 거죠?"

온몸이 찌릿할 정도의 살기가 전해져 온다.

지셀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엮이면 피곤해질까 봐 피한 건데, 계속 거절하면 더 피곤해질 거 같다. 아무래도 이미 엮인 모양이다.

"...감사합니다."

기간 내에 치료를 마치겠다고 모욕을 주어 가며 강제로 끌고 온 건 사실이다. 그러니 이 정도는 받아 주는 게 나을 거 같았다.

'뭐 언젠가는 도움받을 일이 있겠지. 선택지가 많아서 나쁠 건 없으니까.'

"후훗, 실망하지 않으실 거예요."

촤륵.

부채가 접히고 다시 상냥한 얼굴이 드러났다.

도대체 부채 뒤에서는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가신들은 침만 꿀꺽 삼키고 아무런 말을 못 했다.

반대하고 싶지만, 로잘린은 브랜포드 후작과는 다른 의미로 무서우니 뭐라 할 수가 없었다.

그때, 가신 하나가 옆 사람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아가씨 성격이 원래 저랬나? 병이 나아서 성격이 좋아졌다기엔 너무 갑자기 변하셨...."

"쉿!"

옆 사람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당황하며 고개를 확 돌려 버렸다.

눈치 없는 가신은 그제야 오싹한 예감을 받고 시선을 천천히 옮겼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로잘린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입술을 실룩거리며 허리춤에 맨 단검을 매만지고 있었다.

바로 지셀의 머리를 뚫어 버릴 뻔했던 그 단검이었다.

'아, 망했다. 성격이 좋아진 게 아니라 펜리스 남작 앞이라 착한 척하는 거였구나.'

가신은 바로 고개를 숙이고 식은땀을 흘렸다. 어쩌면 조만간 비자발적으로 은퇴하게 될지도 모른다.

살기가 풀풀 날리는 그녀의 뒷모습을 어색하게 바라보던 지셀이 조심스럽게 불렀다.

"저기, 아가씨?"

"네, 남작님."

로잘린은 천사 같은 얼굴로 활짝 웃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지셀은 고구마를 먹은 듯 속이 답답해졌다.

본래 성격이 아닌 걸 뻔히 아는데, 안 어울리게 자꾸 상냥하고 밝은 모습만 보여 준다.

'안 보여, 진짜 표정이 아예 안 보여.'

"...."

"왜 그러세요? 남작님."

반짝반짝 빛나는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지셀은 슬쩍 시선을 피하며 얼버무렸다.

"...아니, 별거 아닙니다."

로잘린은 그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한 눈빛으로 생긋 웃었다.

대화를 지켜보던 브랜포드 후작은 심드렁한 어조로 말했다.

"감사 인사는 대충 끝난 거 같군. 그래, 처음부터 막무가내로 들이댔던 걸 보아하니 후견인으로서 내게 바라는 일이 있는 거겠지?"

지셀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펜리스 영지에 가장 부족했던 부분을 채울 수 있게 되었다.

"후작님이 도와주셨으면 하는 일이 있습니다."

"나를 찾아온 걸 보면 쉬운 일은 아니겠군."

"예, 하지만 후작님에게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겁니다."

왕국 최고 권력자 정도는 되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난리를 피우면서까지 도움을 청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브랜포드 후작은 한쪽 입꼬리를 살짝 치켜올렸다.

"그 입에서 또 무슨 말이 나올지 궁금하구나. 좋다, 원하는 걸 말해 보아라."

지셀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내보였다.

다른 건 몰라도 이런 화끈함은 참 마음에 든다.

구구절절 설명하고 시간을 질질 끌 필요가 없으니까.

"사람들이 듣는 게 곤란하다면 자리를 옮겨주겠다."

"어차피 다들 알게 될 테니 상관없습니다."

다들 조용히 숨을 죽이고 지셀을 바라보았다.

후견인을 요청한 목적은 뻔했다. 원하는 게 한둘이 아니라는 뜻이다.

첫 번째 부탁은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일일 터.

아마도 그 일을 직접 처리하게 될 후작가의 가신으로서, 과연 지셀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할 수밖에 없었다.

지셀은 한순간도 고민하지 않고 바로 답했다.

어젯밤 치료를 마친 뒤부터, 후작에게 무엇을 부탁해야 할지 충분히 오래 고민했다.

"사람이 좀 필요합니다."

지금 펜리스 영지에서 가장 큰 문제는 인력 부족이었다.

후작이 후견인 자리를 받아 주지 않았다면, 대신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부탁했을 것이다.

브랜포드 후작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사람이 필요하다고?"

"펜리스 영지는 제가 맡기 전에는 황무지나 다름없는 땅이었습니다."

"알고 있다."

"영지를 발전시키기 위해 이것저것 시작한 일이 많은데, 정작 일할 사람이 부족합니다."

"심정은 이해한다만, 인구를 늘리는 건 사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설령 일국의 왕이라도 사람을 새로 만들 수는 없다.

하지만 지셀은 방법이 있다는 듯 고개를 젓고 말을 이었다.

"왕실 직할령의 사람들을 저희 영지에 나눠 주십시오."

그 말에 브랜포드 후작은 눈썹을 찡그렸다. 후작가의 가신들도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다른 영지도 아니고, 왕실의 백성들을 내놓으라고 하다니.

가신 중 하나가 불쾌한 표정으로 한마디를 던졌다.

"왕실에서 허락할 리가 없습니다."

아무리 후견인이라고 해도 그렇지, 처음부터 저런 무리한 요구를 하다니.

가신들의 얼굴에는 비웃음과 조롱이 섞여 들기 시작했다.

옆에서 구경하던 로잘린도 흥미로운 눈빛을 보냈다.

'부탁치고는 너무 큰 일인데?'

노동력과 세금, 병력까지 전부 그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 그렇기에 인구는 곧 그 영주의 힘이다.

어느 누가 자신의 힘을 대가도 없이 나눠 주겠는가?

심지어 왕실은 델파인 공작가를 견제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자신들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일을 허락할 리가 없다.

하지만 지셀은 사람들이 뭐라 떠들든 무시하며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후작이 자신의 부탁을 들어줄 거라고 확신하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브랜포드 후작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아무리 내가 후견인이라지만 들어줄 수 있는 문제가 있고 없는 문제가 있다. 왕실의 재산을 나눠 달라니, 너는 그게 정말로 가능하리라 생각하느냐?"

"네,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째서?"

"어차피 밀어줄 거라면 확실하게 밀어주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북부 대표로 저를 내세워 주십시오. 다른 사람 말고요. 지금 생각하시는 곳도... 솔직히 마음에 안 드시지 않습니까?"

"하, 하하하하!"

브랜포드 후작이 난데없이 웃기 시작했다.

딸인 로잘린도, 평생을 함께한 가신들도 그 모습에 당황했다.

그들은 후작이 저렇게 호탕하게 웃는 모습은 거의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무표정하고 냉혹한 저 후작이 저렇게 즐겁다는 듯 웃을 줄이야!

대체 왜 웃는지 이유를 알 수 없으니 더더욱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실컷 웃던 브랜포드 후작은 갑자기 날카로운 눈으로 지셀을 노려보았다.

"대체 어떻게 알았느냐? 첩자라도 박아 놓은 것이냐?"

"그저... 혼자 고민하고 예측해 봤을 뿐입니다. 제 생각이 맞는다고 확신한 건 지금 후작님의 반응을 보고 난 다음입니다."

브랜포드 후작은 최측근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사람들을 물리려고 손을 들었다가 멈칫했다.

비밀리에 진행해 온 일이지만 이미 모든 준비는 끝났다.

본격적으로 일이 진행되면 어차피 곧 모두가 알게 될 일이다.

심지어 지금까지 변방에서 머물던 지셀마저도 어느 정도 짐작하는 모양이니 이제 숨기는 건 별 의미가 없었다.

'아니, 저놈도 감을 잡았는데 수도에 산다는 놈들이 이걸 몰라?'

브랜포드 후작은 못마땅한 눈으로 가신들을 훑어보다 혀를 찼다.

그러고는 낮은 목소리로 지셀에게 물었다.

"그래, 내가 생각하는 영지가 어디인 거 같으냐?"

"적염의 마탑이 있는 브리반트 영지 아닙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지? 북부에는 대영주인 레이폴드와 데스몬드도 있다."

"레이폴드는 독선적이고 데스몬드는 의심스러울 테니까요. 그 외에는 다 악덕 영주 아니면 거지들 아닙니까? 후작님의 눈에 차지는 않았을 겁니다."

후작이 흥미 어린 눈빛으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브리반트는 밀어줄 가치가 있다는 뜻이냐?"

"브리반트 백작은 친왕파와 가깝게 지내고, 마탑이 있으니 영지를 방어하는 데에도 유리하니까요. 마탑 덕분에 돈도 꽤 벌어서 풍족한 편이고 말입니다."

지셀이 덤덤하게 설명했다. 후작이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되물었다.

"그걸 알면서도 네놈을 대신 밀어 달라는 거냐?"

"네, 후작님에게도 그게 낫지 않겠습니까. 제 쪽에는 후견인으로서 힘을 쓰시기도 쉬울 텐데요."

136화 어려운 부탁은 아닙니다. (4)

브랜포드 후작은 마치 진위를 가늠하듯 눈을 가늘게 뜨고 지셀을 살폈다.

지셀 또한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브랜포드 후작을 마주 보았다.

'엄한 놈 밀어줘서 털리지 말고 준비한 거 다 나한테 내놓으쇼.'

델파인 공작가가 여기저기 손을 뻗치고 있는 걸 알게 된 뒤로, 친왕파도 부랴부랴 북부 지역에서 영향력을 늘리려고 고심했다.

그렇게 고르고 골라 선정된 곳이 브리반트 영지였다.

'거기는 다 좋은데, 이미 델파인 공작가의 손아귀 안에서 놀고 있어서 문제지.'

전생에도 왕실과 친왕파는 브리반트 영지에 엄청난 재원을 투입했다.

심지어 왕실 직할령의 인구까지 넘겨주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델파인 공작은 친왕파가 그런 결정을 내릴 거라고 예측한 지 오래였다.

그가 공을 들여 적염의 마탑을 약화시킨 것도 장기적으로 친왕파의 힘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마탑은 내가 룬스톤을 제공해서 그나마 숨을 붙여 놨지만.... 영지 전체가 넘어간 수준인데 마탑 하나 가지고 뭘 어쩌겠어.'

이미 브리반트 영지의 봉신들과 가신들 대부분은 공작가에 회유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브리반트 영지에 아무리 지원해 줘 봐야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만약 친왕파가 지셀을 지원하게 된다면?

델파인 공작가에서 그동안 쓴 시간과 돈은 아무 의미 없게 된다. 그저 헛수고를 한 셈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시간 들여서 천천히 키울 생각하지 말고, 준비하고 있는 거 전부 다 나한테 줘. 대신 싸워 주는 건 내 특기라고.'

자신만만한 지셀을 보며 브랜포드 후작은 머릿속을 복잡하게 굴렸다.

브리반트 백작은 착하지만 나태하고 소심한 자다. 후작이 보기에는 마탑의 세금과 기술에 기대어 사는 기생충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놈이라면....'

그저 권력을 등에 업고 일을 좀 편하게 하려고 후견인이 되어 달라 한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보니 그 정도가 아니었다. 브랜포드 후작이 친왕파의 수장이라는 것까지 생각해서 들이댄 것이다.

다소 잡음이 있긴 하겠지만, 지금이라도 지원 대상을 지셀로 수정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수장이 후견인을 맡은 인재라는 명분이 있으니까.

어차피 친왕파도 브리반트 영지가 특별히 마음에 들어 선택한 건 아니었다. 북부의 다른 영지는 더 개판이기에 어쩔 수 없이 선정한 것뿐이다.

'그래, 목숨까지 걸면서 덤벼든 이유가 있었구나.'

갈수록 마음에 드는 놈이다. 나태한 브리반트 백작보다는 훨씬 나았다. 밀어줄 거면 이런 놈을 밀어주는 게 맞았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 것과 별개로, 파벌 전체를 움직이는 계획을 그 혼자 멋대로 결정할 수는 없었다.

거기에, 위험 요소도 무시할 수 없었다.

'만약 이놈이 공작가의 끄나풀이라면 위험하다.'

친왕파의 힘을 모조리 퍼부어 키운 자가 첩자라면 델파인 공작가의 힘만 더 강해지는 꼴이 된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하지만 너를 믿고 밀어주기에는 위험 요소가 크다."

지셀이 뚱하게 받아쳤다.

"브리반트 백작은 믿을 만합니까?"

"백작에 대해서는 충분한 조사를 거쳤다."

"저에 대해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간 알려진 평가와 많이 다르다는 건 알겠군."

사실 지셀을 믿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대체 어째서 자신을 숨기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아오, 확 그냥 내가 미래에서 왔소 하고 말해 버려?'

지셀은 답답한 마음을 누르고 무덤덤하게 말했다.

"저를 믿을 수 없다면 제 아버지를 믿어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전 페르디움의 후계자이자 봉신입니다."

"흠."

후작은 턱을 쓰다듬으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확실히 페르디움 백작은 믿을 만했다.

오랜 세월 동안 묵묵하게 변경을 지키며 왕실에 충성해 온 자.

친왕파 귀족 중 일부는 브리반트 백작보다 차라리 그 책임감 강한 남자를 키우는 게 낫지 않겠냐고 제안했을 정도였다.

페르디움 영지가 워낙 가난한 탓에 지원해 주는 의미가 없다 싶어 후보 명단에서 지우긴 했지만.

'어처구니가 없군. 겨우 한 놈 때문에 파벌 전체를 움직일까 고민하게 되다니.'

브랜포드 후작은 내심 헛웃음을 지었다.

말도 안 되는 선택지를 두고 고민하는 게 스스로도 어이가 없는데, 더 어이없는 부분은 따로 있었다.

저놈이 제시한 황당한 선택지에 구미가 당긴다는 거다.

고민하는 그에게 지셀이 다시 말했다.

"페르디움과 디갈드 사이의 전쟁에 관해서도 보고를 들으셨겠지요."

"갑자기 그 얘기는 왜 꺼내는 거냐?"

"영 불안하신 듯해서요. 그 전쟁, 누군가가 디갈드를 뒤에서 충동질한 거 같더군요. 보여 드릴 증거는 없습니다만... 저는 데스몬드 백작이 병력을 지원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증거가 없진 않다. 당시 사로잡았던 데스몬드의 기사가 아직 지셀의 손 안에 있으니까.

하지만 아직은 그자를 공개적으로 드러낼 수 없었다. 그건 나중에 써야 할 데가 따로 있었다.

하지만, 심증만으로도 후작을 설득하기에는 충분했다.

"...그 말은...."

"데스몬드 백작은 의심스러운 자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같은 자를 적으로 두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차피 지셀이 친왕파에 붙었다는 건 금방 소문이 날 것이다. 그렇기에 델파인 공작과 척진 사이라는 걸 굳이 감출 필요는 없었다.

브랜포드 후작은 집사에게 손짓했다.

"페르디움에서 있었던 전쟁에 관한 자료를 가져와라."

브랜포드 후작은 집사가 가져온 자료를 꼼꼼하게 훑어보았다.

특별한 것 없이, 북부에서 흔히 벌어지는 고만고만한 규모의 영지전이었다.

단 하나 의심스러운 건.

'디갈드에서 보낸 병력의 규모가 이쪽에서 예측했던 것보다 컸다....'

징집을 과하게 하고 용병을 많이 고용한 탓이라고 알려졌지만, 보고서를 작성한 자는 데스몬드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있었다는 사견을 덧붙였다.

만약 데스몬드 백작이 디갈드를 도와준 것이라면 퍼즐이 맞아떨어진다.

그렇지 않아도 친왕파는 데스몬드 백작이 공작가 쪽에 붙은 게 아닌지 의심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브랜포드 후작이 다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긴장한 채 침묵을 지켰다.

특히 클로드는 입술까지 깨물며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가장 큰 문제가 인구 문제였는데. 브랜포드 후작이 도와만 준다면 수십 년 걸릴 일을 빠르게 해결할 수 있다. 어마어마한 기회야.'

산에서 화전민을 끌고 와도 여전히 일할 사람이 부족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인구 문제는 쉽사리 해결할 수가 없었다.

'농노들이 대부분이라, 도망치는 게 아니고서야 우리 영지에 못 오지.'

펜리스 영지가 살기 좋다고 소문이 나도 허락받은 자유민이 아니라면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다.

예전에 펜리스 영지에서 도망갔던 영지민들을 돌려받기도 쉽지 않았다. 주변 영주들은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내어 주지 않고 있었다.

'아니, 분명히 영지 안에서만 돌아다니던 사람이 대체 이런 정보는 또 어디서 얻어 온 거야?'

그는 생경한 것을 보듯이 지셀을 바라보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브랜포드 후작이 눈을 뜨더니 물었다.

"혹시 다른 부탁이 또 있느냐?"

"그렇습니다. 페르디움은 전쟁을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돈을 아무리 벌어도 영지를 안정시키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거 같습니다."

"그래서?"

"3년간 페르디움과 그 봉신들의 세금 납부를 유예해 주시기 바랍니다."

"...."

가신들은 표정을 구기며 저들끼리 웅성거렸다.

돈을 아귀처럼 쓸어 모으고 있으면서 세금 납부를 유예해 달라니!

아무리 세력이 큰 대영주라도 세금을 못 내겠다고 하지는 않는다. 만약 내지 않는다면 수많은 귀족과 관료들에게 비난당할 것이다.

체면이 깎이는 것 이전에, 왕실에서부터 가만히 있지 않을 게 뻔했다.

고작 돈 몇 푼 아끼려다 적을 만드는 셈이 되는 것이다.

'단순한 욕심 때문에 그럴 놈 같지는 않고....'

후작은 지셀의 의도를 알 수 없어 속으로 혀를 찼다.

지금까지 본 지셀은 그 정도로 멍청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뭘 노리는 건지 짐작하기에는 그를 겪은 시간이 너무 짧았다.

하지만 지셀에게 여러 번 당해 봤던 클로드는 본능적으로 일이 더 많아질 미래를 깨닫고 죽상을 지었다.

'세금을 안 내겠다고?'

지셀은 그런 식으로 돈을 아끼는 사람이 아니다.

이건 분명히 엄청난 금액이 필요한 계획을 세워 두었다는 뜻이다. 세금 낼 돈까지 아껴야 할 정도로!

'아휴, 또 죽어나겠네. 이제 화장품도 팔기만 하면 되는데 뭐가 부족해서 자꾸 일을 벌이는 거람.'

왜 나 클로드는 행복할 수가 없어!

브랜포드 후작은 얼굴색이 시커멓게 죽어 가는 클로드를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부하가 저렇게까지 질색하는 걸 보면 그다지 변변한 이유는 아닌 모양이었다.

이쯤 되니 지셀이라는 놈이 어디까지 갈지 궁금해졌다.

"또 필요한 게 있느냐?"

"일단은 이 정도면 될 거 같습니다. 이전 부탁을 후작님께서 허락하시면... 나머지 문제는 알아서 해결될 테니까요."

굳이 필요한 걸 꼽자면, 귀족들의 비난을 막아 주는 것 정도였다.

직할령의 영지민들을 받아 오는 것도, 세금을 내지 않는 것도 다른 귀족들이 시비를 걸어오는 빌미가 된다.

하지만 브랜포드 후작이 그를 밀어준다면 아무도 감히 불만을 내뱉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굳이 지셀이 막아 달라고 부탁할 필요가 없었다.

지셀의 말뜻을 알아들은 브랜포드 후작이 피식 웃었다.

'나를 찾아올 수밖에 없었겠군.'

왕실과 친왕파 귀족들을 설득해서 지원할 영지를 변경하고, 세금 납부를 유예해 주고, 다른 귀족들의 공격에 대한 방패 역할까지 해야 한다.

자신이 아니면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꼴을 보아하니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도움을 받기 위해 후견인이란 핑계를 내세운 것 같았다.

'배포 하나는 정말 보통이 아닌 놈이구나.'

그게 대영주의 자리든 아니면 그보다 더 큰 권력이든 간에, 자신을 이용해 무언가를 노리는 게 분명했다.

만약 로잘린의 일이 아니었더라도, 어떻게든 기상천외한 방법을 들고 찾아왔으리라.

눈앞의 놈이라면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후작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빠졌다. 이왕 이렇게 된 것, 관계를 조금 더 확실히 묶어 놓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여동생이 하나 있다고 들었다."

"네."

"친왕파의 유력 귀족 중 하나와 사돈을 맺는 건 어떻게 생각하느냐? 우리 집안과 연을 맺어도 괜찮겠지. 네가 좋다 하면 방계에서 적당한 사람을 찾아 주겠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저 고고하고 냉철한 브랜포드 후작이 중매를 서 주겠다고 자처하다니!

페르디움 같은 영세한 가문이 거절하기에는 너무나 영광스러운 제안이다.

다들 지셀이 단숨에 수락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셀은 대답 없이 고개를 숙이며 이마를 짚었다.

이런 제안을 해 올 줄이야. 이건 완전히 동생을 인질로 잡겠다는 뜻이 아닌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던 그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감사한 말씀입니다만, 거절하겠습니다."

137화 어려운 부탁은 아닙니다. (5)

좋았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후작가의 가신들은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그대로 드러냈다.

'건방지긴! 돈 좀 번다고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구나.'

'어째서 저런 인물의 후견인이 되어 주셨단 말인가.'

하지만 브랜포드 후작은 가신들과 다르게 의외로 불쾌해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대신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이해할 수가 없구나. 너에게도 나쁜 제안이 아닐 텐데? 내 믿음도 살 수 있고, 너희 가문에도 좋은 일이 아니냐."

지셀은 고개를 저었다.

용병왕 시절, 가문과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지 못한 것을 얼마나 한탄했던가.

회귀한 뒤 그의 목적은 하나였다. 가문과 영지를, 내 사람들을 지키는 것.

그런데 당장 필요한 걸 얻겠다고 가족을 파는 건 모순된 짓이다.

"원하는 걸 얻겠다고 가족을 팔 생각은 없습니다."

"허...."

하지만 지셀의 생각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의 대답에 다들 황당하다는 표정만 지었다.

정략결혼은 이 시대에 당연한 일이다. 가문의 힘을 더욱 키우는 가장 쉽고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후작의 제의는 페르디움같이 빈곤한 가문은 꿈도 못 꿀 만큼 좋은 기회였다. 해 준다고 할 때 받아야 한다.

그런데 가문의 후계자라는 놈이 저런 철부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니. 아직 젊어서 세상 물정을 모르는 건가?

브랜포드 후작은 재미있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다시 물었다.

"결혼은 가주가 결정하는 거지 본인이 결정하는 게 아니다. 내가 당장 페르디움 백작에게 서신을 보낸다면 어쩌겠느냐? 네 아버지가 거절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구나."

"동생이 싫다고 하면 제가 막을 겁니다."

"아버지가 허락해도?"

"네."

"원하는 걸 얻지 못하게 되더라도 말이냐?"

"다른 방법을 찾으면 그만입니다."

너무나도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대답이었다.

'감히 가주의 명령을 거부하겠다고?'

후작가의 가신들은 모두 지셀을 미친놈 보듯이 바라보았다.

단 한 사람, 로잘린을 제외하고 말이다.

'저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구나.'

귀족이라면 누구라도 유혹을 떨쳐 버리기가 힘든 제안이었다. 그런 것을 저리 쉽게 거절하다니.

'...등신 같은데 멋있어.'

이런 좋은 기회를 쳐내는 건 분명 바보 같은 짓이다.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는데도 저 당당함이 부럽고 멋져 보였다.

아무리 돈이 많고 능력이 있어도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 로잘린마저도 넘지 못하는 벽.

하지만 지셀은 그딴 건 신경 쓰지도 않는다는 듯 당당했다. 그 대답은 로잘린의 가슴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브랜포드 후작은 가만히 지셀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넌 정말 귀족답지 않구나."

"그런 얘기 자주 듣습니다."

"그래, 네 신념은 잘 들었다."

브랜포드 후작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싫다면야 어쩔 수 없지. 나중에라도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 말해라."

"예, 뭐...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부탁드린 건은...?"

'뻔뻔한 놈 같으니.'

후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말하는 꼴이 괘씸하긴 하지만, 델파인 공작가의 사람들과는 확실히 결이 달랐다.

이 정도면 믿어 볼 만하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낌새를 보이면 지원을 끊고 병력으로 밀어 버리면 된다.

"모두 들어주도록 하지."

브랜포드 후작의 말에 가신들은 깜짝 놀랐다. 정말 이런 말도 안 되는 부탁을 들어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셀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브랜포드 후작은 서늘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잊지 마라. 이제 네가 발을 들이는 세상은 지금까지와는 다르다. 한 번의 실수로도 영지가 쑥대밭이 되고 목이 날아갈 수 있다. 너뿐만 아니라 네 가문 사람들까지."

서슬 퍼런 경고에 지셀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공식적으로는 페르디움에 지원하는 방식이 될 것이다. 가주는 네 아버지니까."

"알겠습니다."

"왕실의 전력을 쏟아붓는 계획이다. 너 하나를 믿고 바꾸는 거니 실망시키지 말도록."

레이폴드와 페르디움, 이 두 곳만 버텨 줘도 북부에서 공작가 세력을 견제할 수 있을 것이다.

다소 방어에 치중한 전략이지만, 친왕파 세력이 점점 공작가에 밀리고 있기에 공격적으로 나가기는 어려웠다.

브랜포드 후작은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브리반트 영지에 보내기로 계획된 지원을 페르디움 쪽으로 보내 주겠다. 일단은 군수 장비와 식량부터 처리하지. 왕실 직할령의 주민들은 시간을 두고 순차적으로 이주할 것이다."

"감사합니다."

"네놈 말하는 꼴을 보아하니 왕실 직할령에서 보내는 수만으로는 부족할 테지. 왕실뿐만 아니라 친왕파의 영주들에게도 주민들을 일부 지원해 달라고 얘기해 두마. 그리 알거라."

지셀이 미소지었다. 생각보다 훨씬 더 좋은 결과였다.

하지만 가장 기뻐한 사람은 지셀이 아니라 오히려 벨린다였다.

"정말 잘 됐어요!"

그녀에게 페르디움은 마음의 고향이나 마찬가지였다.

지셀의 어머니를 따라온 뒤 내내 페르디움에서 지내며 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 도련님은 어떻게 이런 일을 벌였을까? 안 말리길 잘했어.'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다. 그전에는 쥐어패서라도 지셀을 말리고 싶었는데 일이 잘 풀리니 또 그냥 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브랜포드 후작이 말을 이었다.

"인구 이전 계획은 5년 정도로 보고 있다. 규모에 비해 그 정도면 빠른 편이지만, 당장 네가 원하는 만큼 채워지지는 않을 텐데."

최소한 몇만 단위의 인구를 옮겨야 한다.

이주할 사람들을 선별하고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지셀도 그 정도는 예상했기에 준비해 두었던 말을 바로 꺼냈다.

"그러면 노예라도 대량으로 사고 싶습니다. 수도만이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파는 것까지 포함해서요."

"흐음, 노예라...."

브랜포드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살 능력만 있다면,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는 데는 노예를 쓰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굳이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건 일일이 노예상들을 찾아다니기 힘들기 때문일 터.

"좋다, 각 지역의 노예상들에게 공문을 보내 주마. 영지민을 늘리는 게 목적이니 가구 단위로 알아보면 되겠군."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왕 도와주시는 거, 특별한 노예들도 좀 구해 주십시오."

"특별한 노예?"

"네, 엘프와 드워프 노예들도 최대한 많이 사고 싶습니다."

"...."

지금껏 무슨 부탁이든 흔쾌히 수락했던 브랜포드 후작도 이 발언에는 선뜻 답을 주지 못했다.

엘프와 드워프 노예들은 갖고 싶다고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다. 특별 관리에 들어가는 대상이라 대귀족들이나 왕실이 아니면 구하기 어렵다.

그나마 구할 수 있다 해도, 수 자체가 무척이나 적으니 가격 또한 어마어마하게 비싸다.

이종족 노예 한 명을 구할 값이면 평범한 인간 노예 백 명 이상을 살 수 있을 정도다.

"바라는 것도 많구나. 대귀족들도 구하기 어려운 이종족 노예들을 한둘도 아니고 대량으로 구하고 싶다고?"

"네, 파는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네요."

"차라리 고급 기술을 익힌 노예를 사는 게 더 싸게 먹힐 것이다."

"그 방법도 쓰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종족 노예도 많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엘프와 드워프들은 그 종족 특성상 인간보다 뛰어난 점이 있다.

지셀은 그들을 활용하는 방안도 다양하게 생각해 놓았다.

양을 당장 늘릴 수 없다면, 질을 높이면 되지 않겠는가?

물론 그 가격을 감당할 수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지만.

브랜포드 후작은 바로 그 점을 짚었다.

"그만한 돈이 있느냐? 요즘 돈을 좀 번 모양이다만, 그 정도로는 원하는 만큼 구하지 못할 것이다."

지셀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답했다.

"저도 당장 그만한 현금을 마련하는 건 사실 힘듭니다. 하지만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지셀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브랜포드 후작을 향해 당당하게 말했다.

"저 보증 좀 서...."

"거절한다."

"...."

브랜포드 후작은 지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단칼에 거절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다른 사람들도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특히 로잘린은 이번에도 큰 충격을 받았다.

이렇게 스케일이 큰 일을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벌이는 것도 대단하지만, 그걸 남의 신용으로 하려고 한다는 점이 특히나 범상치 않았다.

'...역시 등신 같은데 멋있어.'

장내가 침묵으로 물들자 벨린다가 지셀의 소매를 다시 잡아당겼다.

'아오, 미치겠네. 지금 다른 부탁도 엄청난데! 다 들어준다는데 도대체 왜 그래요?'

안 말리길 잘했다는 생각은 취소다.

1절만 하고 끝내야 하는데 도대체 몇 절까지 하는지 모르겠다.

지셀은 벨린다의 손을 뿌리치며 다시 말했다.

"금액이 워낙 크니 우려하시는 것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제가 다 갚을 수 있습니다."

"...."

브랜포드 후작은 할 말을 잃었다.

보증 좀 서 달라는 놈들은 꼭 저렇게 말한다. 안 그런 놈을 본 적이 없다.

"안 되나요?"

지셀은 눈을 반짝이며 순진무구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브랜포드 후작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아무리 후견인이 되어 주었어도 그렇지, 지옥 끝까지 같이 가자는 거 같았다.

하다 하다 이젠 보증까지 서 달라고? 이 새끼는 진짜 웃기는 새끼다.

"거절한다. 두 번 묻지 마라."

"에이."

칼날을 품은 듯 단호한 목소리에 지셀이 입맛을 다시며 아쉬워했다.

'역시 이건 안 되네.'

워낙 돈이 많이 드는 일이라 슬쩍 던져 봤는데 역시 씨알도 안 먹힌다.

실망하며 고개를 돌리던 지셀의 눈에 한 사람이 들어왔다.

멋지게 나타나 후원자가 되어 주겠다고 약속한 사람이 말이다.

촤르륵.

로잘린은 지셀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바로 부채를 꺼내 얼굴을 가렸다.

지셀은 우수에 젖은 눈빛을 내비치며 로잘린을 불렀다.

"아가씨."

그녀는 지셀의 부름에 흠칫 놀라 발을 헛디뎠다. 잠깐 비틀거리다 곧 중심을 잡은 로잘린이 옆에 있는 하녀에게 말했다.

"몸이 아직 다 안 나은 거 같아. 방으로 돌아가야겠어. 어서 가자. 빨리, 빨리."

로잘린은 사용인들의 부축을 받으며 대전을 빠져나갔다.

계속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로.

지셀은 다급하게 그녀를 불렀다.

"저기, 아가씨? 후원자가 돼 주신다면서요."

'후원자가 되어 준다고 했지, 보증을 서 준다고는 안 했어!'

이종족 노예를 대량으로 구입하려면 왕국의 한 해 예산은 족히 들 것이다.

아무리 화장품이 잘 팔려도 그만한 돈을 갚을 수 있을 리가.

보증을 선다는 건 파산을 예약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남작님, 지금 제가 몸이 좀 안 좋아서... 나중에 다시 뵈어요."

"아가씨! 아가씨!"

애타는 지셀의 부름을 못 들은 척하며 로잘린은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음...."

지셀은 아쉬워하는 기색을 감추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눈을 마주치는 사람마다 죄다 고개를 돌리고 피한다.

'진짜 갚을 수 있는데 다들 안 믿어 주네. 돈 들어갈 곳 많은데. 쩝.'

어쩔 수 없다. 버는 돈을 박박 긁어모으는 수밖에. 당분간은 빠듯하게 살아야 할 거 같았다.

마음을 정리한 지셀은 현실을 받아들였다.

"알겠습니다. 돈은 제가 알아서 마련하겠습니다."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브랜포드 후작은 여느 때처럼 건조한 음성으로 말했다.

"더 부탁할 건 없는 거 같군. 네가 말한 일들을 정리하려면 며칠은 기다려야 할 거다."

"알겠습니다. 연락을 주시면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 외에 수도에서 볼 일이 있는가?"

138화 기다리고 있어라. (1)

"딱히 없습니다. 일이 마무리되면 바로 영지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애초에 화장품을 팔 겸, 후작과 연을 이으려고 수도에 왔다.

목적을 이뤘으니 더 있을 필요도 없다.

노예를 구하고, 영지민들을 이주시키는 일정까지 정해지면 바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브랜포드 후작은 다른 생각이 있는 모양이었다.

"잘됐군. 조만간 연회를 열어 주마. 귀족들과 서로 얼굴을 익히고 친분을 다지는 데는 모임에 참석하는 게 제일 빠르지. 로잘린과 함께 유력 귀족들의 모임에도 참석하는 게 좋겠군."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굳이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인맥이라면 브랜포드 후작과 메리엘만으로도 충분하다.

어차피 목적도 다 이뤘는데 다른 귀족을 만나서 뭐 하겠는가? 귀찮기만 하고 시간 낭비일 뿐이다.

하지만 브랜포드 후작은 지셀의 거절을 무시하고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후견인이 되었으니 같은 파벌의 귀족에게 인사하는 게 예의다. 그래야 그들도 앞으로 너를 도와줄 게 아니냐. 다른 파벌의 귀족과도 얼굴을 익혀 두면 도움이 될 것이다."

지셀은 내심 코웃음을 쳤다.

'참나, 이 왕국에서 나보다 귀족들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얼굴만 잘 모른다 뿐이지 좀 잘나간다는 귀족들의 정보는 대부분 다 알고 있었다.

그러니 다른 귀족들과 굳이 친분을 쌓아야 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괜찮습니다. 저는 그냥 저택에서...."

"참석해라."

브랜포드 후작의 강압적인 명령에 지셀이 불만스럽게 입술을 삐죽댔다.

이렇게까지 나오면 참석할 수밖에 없다.

'아, 진짜 귀찮은데....'

지셀은 속으로 투덜거리다 생각을 바꿨다.

이렇게까지 하는 건 정말 확실하게 밀어줄 생각이라는 뜻이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어차피 돌아다닐 거라면 이곳저곳 둘러보면서 뭔가 건질 게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카르데니아는 왕국의 수도인 만큼 다른 영지보다 발전되어 있다.

펜리스 영지에 적용할 만한 점이 있는지, 앞으로 들이기로 계획한 것 중에 단점은 없는지 영감을 얻을 수도 있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러면 뭐... 당분간 좀 쉬다 가겠습니다."

"준비되는 대로 사람을 보내겠다. 사고 치지 말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도록."

이제 브랜포드 후작도 지셀이 어떤 사람인지 어렴풋이 깨달은 모양이었다.

사고 치지 말고 있으라는 것을 보면 말이다.

* * *

며칠 뒤 브랜포드 후작가에서 성대하게 연회가 열렸다.

누구나 참석할 수 있게 공개적으로 열린 연회다 보니 귀족들이 엄청나게 몰려들었다.

먼저 도착한 귀족들은 서로 대화하며 연회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특히 로잘린과 친했던 귀부인들은 모두 그녀에 관해 얘기하기 바빴다.

"얘기 들으셨어요? 로잘린의 병이 다 나았다면서요."

"저도 듣긴 했는데, 헛소문 아니에요? 다 나았으면 진작 모임에 참석했을 텐데 왜 아직도 안 나타났겠어요?"

로잘린의 병이 나았다는 소문은 벌써 수도에 쫙 퍼졌다.

하지만 막상 당사자가 공식 석상에 등장하지 않으니 소문의 진위를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귀부인들의 화제는 로잘린에서 지셀로 이어졌다.

"펜리스 남작의 화장품을 써서 피부병이 고쳐졌대요."

"에이, 그게 말이 되나요? 사제나 의사들도 못 고친 걸 어떻게 화장품으로 고치겠어요."

"그래도 그 화장품, 효과는 좋잖아요?"

로잘린의 치료가 끝나자마자 까마귀 저택의 포위가 풀리고, 화장품 판매도 재개되었다.

판매는 여전히 잘되고 있지만, 화장품을 사는 사람 중 누구도 그걸로 병을 고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화장품의 인기가 워낙 좋다 보니 그냥 흥밋거리로 소문이 퍼졌을 뿐이다.

"오늘 연회도 펜리스 남작 때문에 연 거 아닌가요?"

"맞아요, 브랜포드 후작님이 후견인이 되어 주기로 했대요."

"그것도 헛소문 아니에요?"

귀족들은 하나같이 반신반의하며 소문에 관해 입방아를 찧었다.

브랜포드 후작이 뭐가 아쉽다고 그런 촌놈의 후견인이 되어 준단 말인가?

하지만 후작과 가까운 친왕파 귀족들의 입에서 나온 얘기라 거짓으로 치부하기도 어려웠다.

연회에 참여한 자들은 대부분 지셀과 로잘린에 관한 소문을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는 상태였다.

"브랜포드 후작님 드십니다!"

연회장 입구를 지키던 시종이 크게 외쳤다.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며 예를 갖췄다.

브랜포드 후작이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들어와 연회장 상석에 앉았다.

곧 귀족 여럿이 인사를 위해 다가갔다.

브랜포드 후작은 연회나 모임에 참석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러다 보니 눈도장을 찍을 수 있는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귀족들이 수도 없었다.

"후작 각하, 이것은 제 성의입니다."

"서부 지역에서 귀하다고 소문난...."

귀족들은 가져온 선물들을 앞다투어 진상했다.

하지만 브랜포드 후작은 선물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을 주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고맙소."

반응은 딱 이 한마디뿐이었다. 그래도 다들 얼굴도장을 찍었다는 생각에 기뻐했다.

한쪽에는 선물이 미친 듯이 쌓여 갔다. 선물들의 가치만 따져도 어지간한 영지의 몇 년 치 예산은 될 것이다.

지루할 정도로 긴 선물 공세가 서서히 잦아들 즈음, 입구에 선 시종이 지셀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

"펜리스 남작님 드십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입구 쪽으로 모였다. 브랜포드 후작이 의도한 대로였다.

관례에는 조금 어긋나지만, 왕국의 최고 권력자라는 이름은 그런 작은 비난 따위에 흔들릴 정도로 가볍지 않았다.

쿠웅!

문이 열리고 지셀이 연회장 안으로 들어왔다.

브랜포드 후작이 지셀의 얼굴을 보고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누가 봐도 불편해하는 표정.

겁을 먹고 긴장해서 나오는 표정이 아니라, 지금 상황이 아주 귀찮고 마음에 안 든다는 티가 팍팍 나는 얼굴이었다.

게다가 수많은 귀족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는데도 태도가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역시 재미있는 놈이로다.'

즐거워하는 브랜포드 후작과 달리 지셀은 귀찮음과 짜증을 참느라 고생하고 있었다.

'아오, 이거 언제 끝나나.'

자신에게 시선이 집중되는 걸 싫어하지는 않지만, 그가 원할 때나 그런 거다.

지금처럼 귀족들 사이에 억지로 끌려와서 예의를 지켜야 하는 상황이 성미에 맞을 리가 없었다.

지셀이 브랜포드 후작 옆에 다가가 서자, 후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모두를 둘러보았다.

"미리 소식을 들은 사람도 있겠지만, 본 후작은 펜리스 남작의 후견인이 되어 주기로 했소이다. 앞으로도 그를 볼 때는 나를 대하듯이 해 주시오."

말만 부탁조일 뿐, 사실상 명령이나 마찬가지였다.

연회장 여기저기서 귀족들이 저들끼리 웅성거렸다.

"정말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아무리 페르디움 변경백의 후계자라지만... 그 영지는 별 쓸모없는 곳 아닌가?"

"나이도 너무 젊소이다. 저런 젊은이가 무얼 할 줄 안다고?"

펜리스 남작이 화장품으로 요새 조금 유명해지긴 했지만, 달리 말하면 고작 장사치에 불과하다.

브랜포드 후작과 어울리기에는 근본이 부족했다.

후작과 같은 파벌인 친왕파의 귀족들조차 몇몇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처럼 한시가 급한 때에 저런 자를 밀어주다니. 브리반트 백작보다 나은 구석이 하나도 없지 않소?"

"브랜포드 후작께서 생각이 있겠지요."

"아무래도 딸을 치료해 준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부탁을 들어준 거 같네만...."

그들은 지셀을 흰 눈으로 보며 혀를 찼다.

저놈 하나 때문에 왕실과 친왕파가 주도하던 계획이 완전히 틀어졌다.

브리반트 영지를 내버려 두고 그보다 훨씬 못한 페르디움을 지원하자니.

결국 끝까지 밀어붙인 브랜포드 후작의 뜻대로 결정이 나긴 했지만, 아직도 물밑에서는 이런저런 말이 많았다.

즉, 브랜포드 후작은 지셀 때문에 정치적인 부담을 짊어지게 된 것이다.

"후견인 일도 그렇소. 이왕 누군가를 밀어줄 거면, 좋은 집안의 자제들이 얼마나 많소이까?"

"도통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릇에 비해 총애가 너무 과해요."

"어허, 그냥 지켜보자니까요?"

이번 일 때문에 친왕파 귀족들끼리 서로 얼굴을 붉히는 일이 잦아졌다.

그러니 지셀을 싫어하는 쪽은 계속 속이 끓을 수밖에 없었다.

브랜포드 후작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아, 그리고 내 딸 로잘린이 펜리스 남작 덕분에 병을 떨치고 일어났소. 이 자리는 내 딸 로잘린의 쾌유를 축하하는 연회이기도 하니 모두 즐겨 주면 좋겠소이다."

그 말을 신호로 연회장 문이 열렸다. 시종이 뒤늦게 소리 높여 외쳤다.

"로잘린 브랜포드 영애 드십니다!"

로잘린이 천천히 연회장 안으로 들어왔다.

사람들이 순식간에 그녀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다들 정말로 로잘린의 병이 다 나았는지 궁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가 걸음을 옮김에 따라, 가까이에서 로잘린의 얼굴을 확인한 사람들의 입에서 차례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오오!"

"정말이다! 정말 다 나았어!"

"예전 모습 그대로예요! 아니, 피부는 더 좋아진 거 같은데요?"

사람들은 열광하기 바빴다.

사제들도, 의사들도 포기한 피부병을 고치다니, 도대체 얼마나 뛰어난 화장품이길래 이런 효과를 보인단 말인가!

"허어, 일개 화장품이 사제보다 낫다는 말이오?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구려."

"다른 건 몰라도 펜리스 남작이 그 기술 하나는 뛰어난 게 확실합니다."

"전설입니다! 그 화장품은 전설이 될 거예요!"

로잘린이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자 사람들은 더욱더 크게 환호했다.

귀부인들과 함께 있던 메리엘은 만면에 화색을 띠고 양손을 꼭 맞잡았다.

'정말 나았구나. 브랜포드 후작도 정말 짓궂다니까. 미리 좀 보여 주면 어디 덧나나?'

서운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다시 로잘린과 교류를 이어 갈 수 있다는 기쁨이 더 컸다.

로잘린은 살짝 고개를 숙여 모두에게 인사를 건넸다.

벅찬 마음에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이런 날이 다시 올 줄이야....'

모두의 앞에 이렇게 다시 서길 얼마나 꿈꿔왔던가.

로잘린은 고개를 돌려 아래에서 고개를 들고 있는 지셀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 숨어 살 수밖에 없게 된 뒤로 포기했던 즐거움을 되찾아 준 사람.

그가 아니었으면 자신은 지금 여기에 서 있지 못했을 것이다.

지셀은 로잘린과 눈이 마주치자 장난스럽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로잘린이 인사를 끝내자 브랜포드 후작이 연회의 시작을 알렸다.

"그럼 모두 연회를 즐기시길."

곧 악단의 연주가 시작됐지만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두 지셀만 바라보고 있었다.

연회장에 울려 퍼지는 것은 음악 소리뿐, 기침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고위 귀족들이 움직이지 않고 있는 탓이었다.

그들보다 급이 낮은 귀족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뒤로 물러나 눈치만 보았다.

분명 즐거워야 할 연회인데도, 사방에 긴장감이 가득 깔려 있었다.

139화 기다리고 있어라. (2)

어느새 지셀의 옆에 선 로잘린이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후훗, 남작님께서 인기가 많으시네요."

지셀은 피곤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런 인기는 사양입니다. 시선들이 얼마나 뜨거운지 화상 입게 생겼어요."

"오늘 제 병이 나은 것도 확인하고, 아버지가 남작님의 후견인이 됐다는 공표까지 들었으니 다들 가만히 있지 않겠죠. 지금 다들 몸이 들썩이는데 참고 있을걸요?"

"그래서 연회는 괜찮다고 했던 건데. 이제 더 유명해지겠군요."

투덜거리는 지셀을 보고 로잘린은 조그맣게 웃었다.

이번 연회처럼 파벌과 위계를 막론하고 다양한 인맥을 쌓을 수 있는 자리는 드물다.

그런데 이런 귀한 자리를 진심으로 귀찮아하다니, 보면 볼수록 신기한 사람이긴 했다.

"그래도 남작님 보러 오신 분들에게 인사는 드리셔야죠."

"예, 그래야죠."

지셀은 불만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번 연회의 주인공은 지셀이다.

친왕파와 본격적으로 손을 잡은 상황이니, 같은 배를 탄 사이에 한 번쯤은 인사를 해야 한다.

나름대로 친왕파를 대표한다는 사람들이 이번 연회에 다 모여 있으니 하나하나 찾아갈 필요가 없는 건 좋지만....

그 사람들 중에 누구한테 먼저 인사하느냐는 여전히 문제였다.

'큰 계파는 셋이군.'

같은 친왕파라 해도 계파가 없을 수는 없다.

공작가에 맞선다는 목적이 같아 뭉쳤을 뿐, 서로의 이해득실이나 성향이 다 맞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지셀은 각 계파를 대표하는 사람들을 슬쩍 훑어보았다.

'에일즈버 백작 부부와는 안면이 있고.'

메리엘을 필두로 하는 계파는 수도의 상계를 틀어쥐고 있다.

돈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귀족들의 모임인 셈이다.

'저쪽이 빌로어 노튼 백작....'

왕국 재상의 장남이자 수도의 대법관으로 왕국의 관료들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법과 행정을 주무르는 만큼 이 계파의 정치적 힘은 막강할 수밖에 없었다.

'모리스 맥쿼리 후작까지 왔군.'

왕국의 보안무관장이자 왕국군의 총사령관.

왕실의 실질적인 군사력을 책임지고 있는 계파로, 각 군의 지휘관들은 대부분이 맥쿼리 후작을 따르고 있었다.

'이런 거물들이 연회에 참석할 정도로 브랜포드 후작의 힘이 세다는 거지.'

왕국의 행정, 군사, 자금을 움직이는 대부분의 고위 귀족이 여기에 모여 있었다.

이들이야말로 강대국 루타니아를 움직이는 실세 중의 실세라 할 수 있었다.

뒷배가 든든해진 건 좋은 일이지만, 지금만큼은 후작의 영향력이 큰 게 원망스러웠다.

"후우...."

지셀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누구와 먼저 인사하든 다른 쪽은 체면이 깎인다고 생각할 게 뻔했다.

하나하나 강대한 권력을 가진 자들이라 미움을 사면 앞으로 귀찮아질 수도 있었다.

메리엘은 지셀과 눈이 마주치자 부채로 입을 가리며 눈웃음을 지었다.

그가 어떻게 행동할지 흥미로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쩝, 구경하는 사람은 재미있겠지.'

지셀은 고개를 저으며 옆으로 눈을 돌렸다.

카르데니아의 시장, 의전 장관과 무언가를 속삭이고 있던 빌로어 노튼 백작은 시선이 마주치자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가 조카인 로잘린을 귀애한다는 건 수도에 모르는 자가 없었다. 아마도 지셀이 로잘린의 병을 고쳐 주어서 호의를 품은 모양이었다.

빌로어의 반대쪽에는 수염이 덥수룩한 모리스 맥쿼리 후작이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아, 저런 인간이 삐지면 골치 아픈데.'

브랜포드 후작도 지셀의 선택을 보려는지 아무런 중재도 해 주지 않고 있었다.

'아흐, 진짜 별걸 다 하네. 그래, 한다, 해.'

지셀은 결정을 내리고 한 걸음 내디뎠다. 모든 귀족이 긴장한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지셀은 에일즈버 백작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실세는 메리엘이지만 대외적으로는 에일즈버 백작이 가주이니까.

"펜리스 남작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오오, 그래. 나야말로 잘 부탁하네. 앞으로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만 하게."

"감사합니다."

에일즈버 백작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다른 계파의 수장들에 비해 한 끗발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는 그였다.

그런데 브랜포드 후작이 밀어주는 지셀이 가장 먼저 그에게 인사를 하다니.

이건 그의 체면을 아주 크게 살려 주는 일이었다. 그 어떤 금은보화보다 값진 선물이었다.

말라비틀어진 만드라고라 뿌리 따위는 싹 잊을 만큼.

"후후훗, 동생이 참 의리가 있네."

메리엘이 부채를 살살 부치며 웃자 지셀이 어깨를 으쓱였다.

"공적인 자리에서는 그렇게 부르시면 안 되지 않습니까?"

"뭐 어때? 어쨌든 우리 체면을 살려 줘서 고마워."

지셀은 한숨을 내쉬며 투덜거렸다.

"그놈의 체면이 뭐라고.... 아, 정말 피곤하네요."

"그래도 수도에 자리를 잡을 거면 익숙해져야지. 이번에도 그래. 우리야 고맙긴 하지만, 동생은 앞으로 꽤 귀찮아질걸."

메리엘이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 눈동자만 움직여 모리스 쪽을 가리켰다.

그는 불쾌한 마음을 감추지 않고 지셀을 노려보고 있었다.

"크흠!"

모리스는 지셀이 들으라는 듯 크게 헛기침을 했다.

'감히 왕국의 군사력을 휘어잡고 있는 날 무시하다니!'

기껏해야 돈이나 조금 만지는 에일즈버 가와 같은 파벌로 엮인 것도 불쾌한데, 그들에게 우선순위에서 밀릴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장사나 하는 촌놈이라 그런가? 끼리끼리 잘 노는군."

"그래도 머리가 있는 놈이면 두 번째는 후작님을 찾아오겠지요."

곁에 있던 귀족들이 모리스를 달랬다.

하지만 그 노력이 무색하게도, 지셀은 다음으로 빌로어에게 말을 건넸다.

빌로어는 자신이 두 번째라는 건 별로 개의치 않는지 연신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맞이했다.

"로잘린을 치료해 줘서 정말 고맙네. 애 엄마가 걱정하느라 속이 다 상했는데, 덕분에 우리도 큰 시름을 덜었어."

"일이 잘 풀려 저도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후작님에게 부탁한 얘기도 들었네. 노예상과 세금 문제는 최대한 빨리 처리되도록 내가 힘써 보지."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담소를 나누는 두 사람을 보고 모리스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채 연신 콧김을 뿜어냈다.

자신이 뒷전으로 밀리다니, 수도의 유력 귀족들이 죄다 모여 있는데 이 무슨 큰 망신이란 말인가!

뒤늦게 지셀이 다가오자 모리스는 인상을 쓰며 가시 돋친 말을 던졌다.

"변경백의 아들이라면 당연히 왕국의 총사령관인 나부터 찾아와야 하거늘. 북부 촌놈이라 뭐가 중요한지 모르나 보지?"

"제가 아직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앞으로 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지셀이 여유롭게 넘기자 모리스는 더더욱 분통을 터트리며 이를 갈았다.

"너, 브랜포드 가에서 밀어준다고 기고만장해하지 마라. 내가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너 따위는 쳐낼 수 있다."

"그럴 일이 없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지켜보겠다."

으르렁거리는 모리스를 뒤로 하고 지셀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크흠!"

모리스는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연신 술잔을 들이켰다.

브랜포드 후작이 겨우 애송이 촌놈 따위를 밀어준다는 것도 못마땅했는데, 실제로 만나 보니 더 마음에 안 든다.

씩씩거리는 모리스의 옆에서 다른 귀족들이 그를 달래기 바빴다.

"아무래도 에일즈버 백작 부인과 친분이 있어서 그런 거 같습니다."

"노튼 백작과 브랜포드 후작은 사돈지간이 아닙니까? 펜리스 남작도 어쩔 수 없이 그랬을 겁니다."

사람들은 불쾌해 보이는 모리스의 눈치를 보면서도 슬금슬금 자리를 옮겼다.

지셀을 소개하려고 연 연회긴 하지만, 다른 귀족들에게도 인맥과 친분을 쌓는 기회였다.

로잘린은 자리에 돌아와 물을 들이켜는 지셀에게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순서는 뭔가 의도하신 건가요?"

"...그냥 마음 가는 대로 간 것뿐입니다."

"후훗, 그래 보이지 않던걸요."

"정말인데."

"그래요, 그것도 남작님한테 어울리긴 하네요."

지셀과 로잘린의 대화는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분위기가 조금 풀리자 눈치를 보던 귀족들이 두 사람에게 몰려왔기 때문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펜리스 남작님."

"이거 약소한 선물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저는...."

귀족들이 앞다투어 다가와 지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선물을 건네는 자도 있었다.

당연히 지셀은 거부하지 않고 모두 받아 주었다.

물론 그들이 진심으로 지셀을 존중해서 그런 행동을 하는 건 아니다.

그들의 눈빛에는 은은한 경멸이 서려 있었다.

'잘난 척하지 마라. 촌놈 새끼야. 나중에 제대로 한 방 먹여 주마.'

'천박한 장사치 주제에.'

갑자기 튀어나온 지셀을 진심으로 인정하는 자는 없었다.

지셀에게 다가오는 자들은 대부분 브랜포드 후작과 어떻게든 연을 잇고 싶어서 그를 이용하고자 하는 자들이었다.

지셀도 그런 분위기를 알고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아무 의미도 없는 자들에게 심력을 소모할 필요는 없으니까.

'아우, 귀찮아 죽겠네. 빨리 돌아가서 쉬고 싶다.'

하지만 귀찮다고 여기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귀족들에게 적당히 예의만 차리면서 시간을 죽여야 했다.

지셀이 체면 같은 데 신경을 안 쓴다고 해도, 그건 굳이 나서서 좋은 평판을 쌓지 않는다는 뜻이지 일부러 깎아내린다는 뜻은 아니었다.

귀족들의 인사가 한 차례 끝나자 이번에는 유력한 가문의 영애들이 우르르 다가왔다.

그들에게 지셀은 아주 좋은 먹잇감이었다.

가주의 명에 따라 이상한 놈과 정략결혼하느니 눈앞에 있는 촌놈을 휘어잡고 사는 게 훨씬 나은 선택이었다.

'집안도 별로고 시골 촌놈이지만 어쨌든 영주잖아? 나이도 젊고, 얼굴도 괜찮고.'

'조건이 조금 아쉽긴 하지만, 브랜포드 후작가가 밀어주는데 함부로 무시당하지는 않겠지.'

그러니 다들 지셀을 에워싸고 말을 걸기 바빴다.

"남작님은 약혼자나...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신가요?"

"없어요."

"그럼 약혼하거나 누군가를 사귈 예정은 있으세요?"

"없어요."

"에이, 그건 있어야죠! 농담도 잘하시긴."

"없어요."

지셀은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대충대충 대답했다.

그런데 그게 또 다른 남자들과 달라 신선한 매력으로 다가온 모양이다.

영애들은 꺄르륵 웃으며 계속 질문을 던져 댔다.

어느 순간 영애들한테 뒤로 밀려난 로잘린은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이를 갈았다.

"참자, 참자. 오늘은 좋은 날이니까.... 아니 근데 이 예의 없는 것들이!"

누군가는 즐거워하고, 누군가는 질투하고, 누군가는 험담을 하고, 누군가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다른 사람을 훔쳐보는 모습은 흔한 귀족들의 연회와 크게 다를 게 없는 광경이었다.

초대받지 않은 한 사람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문을 지키던 시종이 떨리는 목소리로 누군가의 이름을 외쳤다.

"...자작님 드십니다!"

뚝.

그 이름이 연회장에 울려 퍼지자마자 제멋대로 떠들던 모든 사람이 순식간에 입을 닫았다.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에이, 설마. 잘못 들은 거겠죠."

사람들은 억지웃음을 지으면서 문 쪽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딱... 딱....

바짝 마르고 강퍅하게 생긴 중년 남자가 천천히 연회장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한쪽 다리가 잔뜩 굽어 있어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신체적 결점을 무마하고도 남을 정도로 남자가 내뿜는 기세는 단단하고 강렬했다.

딱... 딱....

모두가 침묵을 지키는 연회장에 지팡이 소리만이 가득 찼다.

들어오는 남자를 노려보며 브랜포드 후작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지셀 또한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표정을 굳혔다.

지셀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살기를 내리눌렀다.

'저놈....'

실제로는 처음 보지만 그 이름은 전생에 지겹도록 들어왔다.

교활하고 악독한 계략으로 적들에게 '절름발이 악마'라고 불렸던 남자.

'라울 요제프 자작!'

델파인 공작의 최측근이자 공작가의 참모인 그가, 정적인 친왕파의 연회장에 나타났다.

140화 기다리고 있어라. (3)

라울 요제프 자작의 뒤에는 체격이 건장한 남성이 뒤따르고 있었다.

가면을 쓰고 있어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고, 품이 넓은 로브로 머리카락과 체형도 전부 가렸다.

딱... 딱....

라울은 한쪽 다리를 절며 천천히 브랜포드 후작에게 다가와, 그를 잠시 올려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입니다. 브랜포드 후작님."

"여기는 무슨 일인가? 요제프 자작."

브랜포드 후작이 무심하게 답했다. 라울이 히죽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어린 사자를 하나 거둬들이셨다고 들어서 말입니다. 얼굴이나 한번 보려고 왔습니다."

"공작가에서 관심을 둘 정도는 아니네."

"젊은 나이에 뛰어난 제품을 개발하고 브랜포드 후작 각하의 지지까지 받는 인재인데, 어찌 관심을 두지 않겠습니까?"

브랜포드 후작은 미간을 좁히며 혀를 찼다.

"그냥 관심으로 끝나기를 빌지. 뒤에 가면을 쓰고 있는 자는 누구지?"

"제 호위 기사입니다."

기사단장인 톨레오가 가면을 쓴 남자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자작님의 호위 기사라 해도, 연회장에 정체 모르는 자를 들일 수는 없다. 잠깐이라도 좋으니 가면을 벗어라."

톨레오의 말에도 남자는 아무런 반응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이놈! 당장 벗으라 하지 않았느냐!"

버럭 외치는 톨레오를 브랜포드 후작이 만류했다.

"됐다. 자작이 설마 여기서 사고라도 치려고 데리고 왔겠느냐. 그냥 넘어가라."

연회의 주인이 괜찮다는데 더 나설 수는 없었다. 톨레오는 입술을 깨물고 뒤로 물러났다.

브랜포드 후작은 그것으로 용건은 끝났다는 듯,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내쫓지는 않겠지만 환영하지도 않는다는 뜻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내쫓고 싶지만, 아무리 정적이라 해도 연회에 찾아온 귀족을 정당한 이유도 없이 내칠 수는 없었다.

라울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뻔뻔하게 중얼거렸다.

"흐음.... 혹시 제가 자리를 잘못 찾아온 겁니까?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군요."

그가 지셀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딱... 딱... 딱....

지팡이 소리가 울릴 때마다 귀족들이 더러운 것을 피하는 것처럼 엉거주춤하며 자리를 피했다.

'괜히 엮여서 좋을 거 없어. 눈도 마주치지 말자.'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라지. 사람이 아니라는 소문도 있어.'

어느새 인파가 자연스럽게 흩어지고 자작과 지셀 사이에 길이 생겼다.

브랜포드 후작은 라울의 뒷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남부에 있었던 걸로 아는데. 대체 어떻게 시간을 맞춰 온 거지?'

연회를 열겠다고 공표한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다.

남부에서 소식을 듣자마자 출발했어도 이 시간에 도착할 수는 없었다.

'미리 와 있었단 뜻인데.'

공작가의 주요 인사 중 하나인 그가 수도에 와 있었는데도, 자신에게는 전혀 보고가 들어오지 않았다.

라울이 지금 이곳에 나타난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였다.

'이놈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의 눈과 귀까지 가렸다. 델파인 공작가의 손길이 수도에까지 뻗쳤다는 뜻이다.

브랜포드 후작이 고심에 빠진 사이, 라울은 느긋하게 지셀의 앞에 바로 섰다.

지셀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영애들은 기겁하며 자리를 피한 지 오래였다.

"반갑군. 라울 요제프 자작이라고 하네."

지셀은 건성건성 고개를 끄덕였다.

"펜리스 남작입니다."

"자네에 대해 알아보니 흥미로운 얘기가 제법 많더군. 북부에서 꽤 활약했다지?"

데스몬드 뒤에서 디갈드를 충동질하게 시킨 주제에 소문을 들은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 뻔뻔한 모습에 지셀은 대놓고 코웃음을 쳤다.

'연기하기는. 알아보기는 뭘 알아봐? 네놈들이 저지른 일이니까 당연히 잘 알겠지.'

라울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자리를 좀 옮기지 않겠나?"

"자리를 말입니까?"

"긴밀하게 할 얘기가 있어서 말일세."

지셀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무슨 말을 할지 솔직히 궁금했다.

두 사람은 연회장의 가까운 곳에 마련된 별실로 자리를 옮겼다.

라울은 지셀을 보며 웃었다.

나름대로 친절하게 대하려고 하는 듯하지만, 강퍅한 인상 때문에 마치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네."

"긴장한 것처럼 보이십니까?"

무표정한 얼굴로 라울을 바라보던 지셀이 입꼬리만 살짝 끌어 올렸다.

묘하게 으스스한 미소를 마주하고 라울이 의아해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날 알고 있나? 표정이 꼭... 반가워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저도 자작님에 관해 전해 들은 말이 꽤 있어서요."

전생에는 공작가를 쳐부수는 게 목표였던 만큼, 그의 참모인 라울에 관해서도 깊이 조사했다.

그는 신체적 장애가 있음에도 공작의 측근 자리를 차지할 정도로 머리가 좋고, 잔혹했다.

'페르디움을 공격한 것도 이놈 작품이겠지.'

지셀은 끓어오르는 살기를 내리누르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라울은 그 모습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말을 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우리는 자네가 만든 화장품에 관심이 있어."

"화장품 말이십니까?"

"사실 우리도 비슷한 걸 개발하고 있었거든. 그런데 효과가 확실한 제품이 나왔다는 소문이 돌기에, 진짜인지 확인하려고 수도에 올라왔지. 그런데 설마 병까지 치료할 정도로 효과가 좋을 줄이야."

라울이 감탄하는 듯, 짜증 내는 듯 애매한 어조로 내뱉었다.

전생에는 델파인 공작가가 내놓았던 제품이니, 아깝고 애가 탈 만했다.

"그래서요?"

"솔직히 의외였어. 아무것도 없던 영지에서, 망나니로 유명하던 자네가 그런 걸 만들었다는 것이."

"뭐, 따로 공부를 좀 했습니다. 세간의 평가가 전부는 아니죠."

"그렇군, 맞는 말이야."

라울의 눈빛에 순간 날이 섰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지셀을 뜯어보았다.

'이놈이 북부 쪽 계획을 전부 망쳐 놨다는 거지.'

아멜리아의 반란 준비도, 페르디움을 고립시키는 계획도, 적염의 마탑을 약화시키는 일도.

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해럴드는 꼼꼼하고 신중한 성격이지. 웬만한 방해 요소도 다 파악해 뒀을 거다.'

그런 해럴드가 이놈 때문에 일을 계속 실패했다.

단순한 망나니, 관심조차 줄 필요가 없던 한심한 놈이 대계를 방해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라울 자신도 그랬으니까.

'갑자기 이놈을 밀어줄 줄이야.'

라울은 속으로 혀를 찼다.

친왕파는 분명 처음에는 브리반트 영지를 밀어주려고 했다.

그걸 알고 있기에 라울은 적염의 마탑을 약화시키고, 브리반트의 가신들을 하나둘씩 회유해 영지 전체를 장악해 갔다.

라울이 계획한 대로 돌아갔다면 친왕파는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셈이 됐을 것이다.

계획은 완벽했다.

이 지셀이란 놈이 튀어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지셀은 어느 날 갑자기 각성이라도 한 듯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 결과 데스몬드의 전력은 반토막이 났고, 아멜리아의 반란 계획도 급하게 앞당겨야 했다.

그래서 그는 지셀이 화장품을 판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직접 수도에 올라왔다.

지셀을 직접 보고 어떤 놈인지 판단하려고 말이다.

겸사겸사 이전에 일을 방해한 책임을 물어 적당히 손을 봐주려고 했지만, 그러기도 전에 지셀이 친왕파에 붙어 버렸다,

'설마 모든 걸 알고 친왕파에 붙었을 리는 없고.... 운도 좋은 놈이로군.'

쓸데없는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왕실과 친왕파를 확실하게 고립시키고 칼을 뽑을 계획이었다.

공작가의 힘이 부족한 건 아니지만, 아직 전쟁을 하기에는 일렀다.

그들의 계획을 완전히 망친 원흉인데도, 당장 건들 수도 없게 된 것이다.

실패를 모르던 라울이 단 한 사람 때문에 몇 번이나 일을 망칠 거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진짜 망나니라면 저런 일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어. 정보가 잘못된 게 틀림없다.'

몰라서 당했을 뿐이다. 애초에 이런 인재가 있다는 걸 알았다면 북부를 흡수하는 계획도 달리 세웠을 터.

이제는 지셀이라는 존재가 수면 위에 드러났으니 두 번은 실수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판도가 짜인 뒤이니 수습하는 데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차피 망친 일은 되돌릴 수 없다. 그러나 이렇게 뛰어난 인재라면 그냥 죽이기는 아까웠다.

"이런 뛰어난 젊은이가 북부에 숨어 있을 줄은 몰랐네. 이왕 이렇게 만난 것,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은데."

"화장품 독점 계약이나 기술 공유라면 안 합니다."

"화장품이 탐이 나긴 하지만 지금 하는 제안은 그런 하찮은 게 아니야."

"그럼 뭡니까?"

"델파인 공작가로 들어오게."

갑작스러운 제안에 지셀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웃었다.

지금도 눈앞에 있는 라울을 당장 죽이고 싶어 몸이 근질거린다.

가까스로 살심을 억누르고 있는데 이런 개소리를 들으니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라울은 지셀의 반응에 살짝 눈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거리가 너무 멀어서 불안한가? 남부에서 괜찮은 영지를 내줄 수 있네. 자네 아버지한테도."

"아버지도 말입니까?"

"페르디움 백작이 척박한 곳에서 야만인들과 싸우느라 고생이 많다는 건 알고 있네. 그런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는 좋은 영지로 옮겨오는 건 어떤가. 자네와 자네 아버지가 공작가의 봉신이 된다면 얼마든지 지원해 주지."

"무서운 분들이 많이 모여 계신 자리에서 너무 위험한 말을 하시는군요."

라울은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뭐 어떤가? 정치란 게 원래 그런 것이지. 다른 귀족들의 압박은 너무 걱정할 필요 없네. 내가 책임지고 해결해 주도록 하지."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과연 델파인 공작가의 참모라고 해야 할까.

아예 좋은 땅으로 영지를 교체해 주겠다니, 실제로 델파인 공작가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제안이기는 했다.

하지만 마수의 숲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뻔히 아는 지셀에게는 개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모든 걸 편하게 뺏고 개처럼 굴리겠다는 말을 참 우아하게도 지껄이네.'

믿을 수 없는 놈의 품에 들어가 안락을 꾀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지금도 암중에서 왕국 곳곳에 수작을 부리고 있는 놈들이다.

거기에 알 수 없는 배후 세력까지 끌어들인 놈들을 어떻게 믿고 몸을 의탁하겠는가.

"죄송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북부도 생각보다 괜찮은 곳이거든요."

완곡한 거절이지만 목소리는 단호하다.

라울은 의자에 몸을 기대며 차가운 얼굴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감히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다니.

설마 친왕파가 델파인 공작가보다 세가 강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지금 여기는 우리 둘뿐이니 허심탄회하게 말하지. 친왕파의 세력은 우리 공작가에 미치지 못하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내 제안을 거절한다는 말인가?"

"네. 관심 없습니다."

"기회는 이번 한 번뿐이네. 받아들이지 않으면 틀림없이 후회하게 될 걸세."

"글쎄요.... 그러지 마시고 자작님이 이쪽으로 오시는 건 어떻습니까?"

능청스러운 대답에 라울은 헛웃음을 지으며 턱을 몇 번 쓰다듬었다.

무지한 것인가? 아니면 겁이 없는 것인가?

'쯧, 기회를 줬음에도 죽을 자리를 고르다니.'

141화 기다리고 있어라. (4)

가끔 이런 멍청한 놈을 보면 답답해졌다.

쓸 만한 재능을 쥐고 태어났으면서도 방향을 잘못 잡아 허무하게 목숨을 잃는 놈들 말이다.

'뭐 어쩌겠는가. 눈치 없이 태어난 걸 원망해야지.'

라울은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각오는 잘 들었네. 다음에 만날 때는 이렇게 좋은 분위기일 거라고 장담할 수가 없군."

"그런가요? 저는 분위기가 정말 좋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방긋 웃으며 말하는 지셀을 보며 라울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왜 저 말이 절절한 진심으로 들리는 걸까?

굴러들어 온 기회도 스스로 차 버린 놈이 다음에 봐서 뭐 하려고.

그때는 어차피 목이 날아갈 텐데 말이다.

라울은 속으로 혀를 차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그래, 만나서 반가웠네. 기회가 되면 또 볼 수 있겠지."

"예. 다음에 꼭 다시 만나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지셀 또한 일어나서 라울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리고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지셀의 눈빛에는 이글거리는 살의와 파괴 욕구가 그대로 묻어났다.

그 눈빛을 보고 라울은 깨달았다.

'이놈, 진심이구나.'

그가 진심으로 친왕파와 손잡고 공작가에 대항하려고 하는 것을.

하지만 동시에 의아함이 치솟았다. 아무리 친왕파와 손잡았다 한들, 시골에서 막 수도에 온 자가 보이기에는 너무 과한 적개심이었다.

'설마... 우리에 대해 알고 있는 건가?'

라울은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른 의문에 지레 놀라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친왕파의 유력 귀족들도 자신들이 어디에 어떻게 세력을 뻗치고 있는지 전혀 모른다.

그렇기에 브리반트 영지를 지원하려고 했던 게 아닌가.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아무런 말도 안 하고 있자, 가면을 쓴 남자가 끼어들었다.

"악수가 너무 길군. 볼일이 끝났다면 이제 돌아가지."

"그래, 눈빛이 묘해서 계속 보게 됐군."

라울은 손을 놓고 밖으로 향하다가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몸을 반쯤 돌려 지셀을 노려보며 말했다.

"펜리스 남작, 다음에도 그런 눈으로 나를 쳐다보면 눈을 뽑아 버리겠다."

지셀은 전혀 주눅 들지 않고 그 눈빛 그대로 답했다.

"남은 다리도 다치지 않도록 조심해서 돌아가십시오."

예의 없는 말에도 라울은 의외로 분노하지 않았다. 그저 재미있다는 듯 피식 웃을 뿐이었다.

"브랜포드 후작이 마음에 들어 할 만하군. 앞으로 얼마나 활약할지 기대하겠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라울과 가면의 남자는 방을 빠져나갔다.

두 사람이 떠나자마자, 힐긋대며 별실을 훔쳐보던 귀족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브랜포드 후작도 자리를 지키는 대신 톨레오를 보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듣고 오라 했다.

"음...."

일단 다들 몰려오긴 했지만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남의 얘기를 대놓고 캐묻기는 창피했기 때문이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고, 결국 제일 성질이 급한 모리스가 지셀을 압박하듯이 물었다.

"그래, 저 절름발이 놈이 무어라 하던가?"

지셀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머뭇거렸다.

그러자 구경하는 귀족들은 더 애가 타 재촉했다.

"어서 말해 보게! 무슨 얘기를 나누었나?"

지셀은 주변을 둘러보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와 제 아버지를 델파인 공작가의 봉신으로 받아들이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귀족들이 흠칫 놀라며 표정을 굳혔다.

친왕파의 연회에 찾아와서 이렇게 대놓고 영입 제안을 하다니.

델파인 공작가가 친왕파의 귀족들을 아예 무시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모리스는 눈을 부라리며 크게 노성을 토해 냈다.

"북부와 남부는 거리가 멀어 제대로 교류할 수도 없다! 너는 세금만 뜯기는 꼴이 될 것이야!"

"남부에 좋은 영지를 새로 마련해 준다고 했습니다. 저와 제 아버지 둘 다에게 말입니다."

"허어!"

영지를 새로 주겠다니? 말도 안 되는 조건에 놀라 귀족들은 제대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모리스도 당황해 눈을 내리깔았다.

친왕파는 그런 제안을 쉽사리 할 수가 없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이런 애송이한테 그런 후한 조건을 거는 건 무리였다.

브리반트 영지에 갈 지원을 그쪽으로 돌린 것만으로도 그들은 최선을 다한 셈이었다.

'아버지한테까지 영지를 주겠다니, 이놈이 그럴 정도로 가치가 있나?'

이제 막 합류한 귀족을 대놓고 뺏기는 건 큰 망신거리는 맞다.

하지만 아무리 공작가에 여유가 있더라도 그저 적 파벌에 망신을 주겠다는 이유만으로 영지를 떼어 줄 리는 없다.

모리스는 침음을 흘리다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제안을 받아들였나? 공작가의 봉신이 되기로 한 거냐는 말이다."

젊은 귀족이라면 누구라도 쉽게 거절하지 못할 제안이었다.

거기다 페르디움은 토지도 척박하고 항상 야만인과 싸워야 하는 영지다.

그 고생에서 탈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거절하는 건 바보짓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지셀은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툭 내뱉었다.

"거절했는데요."

"역시 제안을 받아들였구나! 네놈이.... 응? 뭐라고? 거절했다고?"

"네, 거절했습니다."

"...어째서냐?"

"이미 친왕파에서 후원을 받고 있는데 굳이 그쪽으로 갈 이유는 없죠."

모리스가 미간을 좁혔다.

"솔직히 의심스럽군. 공작가는 강력한 뒷배경이 되어 줄 거다. 조건도 너 같은 애송이에게는 아까울 정도로 후하지. 그런데도 굳이 제안을 거절하고 친왕파에 남는다고?"

"의심스럽다는 말씀은...?"

"공작가에 속하기로 하고는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말이다."

지셀은 쓴웃음을 지었다. 공작가와 그의 악연을 모르는 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만했다.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제가 정말 공작가와 손을 잡았다면, 영입 제안을 받았다는 말도 하지 않았겠죠."

일리 있는 말에 같이 있던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후작님. 악의를 품었다면 굳이 의심을 사진 않겠지요."

"아직 젊어서 눈앞의 이득에 연연하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 조건을 거절하다니, 이렇게 의리 있고 기개 넘치는 청년은 오랜만에 봅니다!"

귀족들은 부러 과장되게 감탄을 토했다.

그렇지 않아도 요새 점점 공작가를 지지하는 귀족들이 많아지는 추세였다.

그런 상황에서 지셀이 친왕파에 남은 건, 친왕파 또한 공작가에 뒤지지 않는 세력이라는 방증이 되어 줄 터였다.

과할 정도로 쏟아지는 칭찬을 한 귀로 흘리며 지셀이 말을 이었다.

"돌아갈 때 경고한 걸 보면 아무래도 저와 제 아버지의 영지를 가만두지 않을 모양입니다. 앞으로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으으음...!"

귀족들은 다시금 침음성을 흘렸다.

그렇게 대놓고 협박을 하다니. 전혀 귀족답지 않은, 품격 없는 행동이다. 하지만 요제프 자작이라면 그럴 만한 놈이었다.

'그놈에게 찍힌 사람을 돕다가 자칫 발목이 잡힐 수도 있는데....'

몇몇 귀족들은 내심 불안해하며 분위기를 살폈다.

위험을 생각하면 지셀과 엮이지 않는 것이 좋지만, 정치는 하나를 받으면 하나를 줘야 하는 법이다.

어쨌든 이 젊은 귀족이 친왕파의 체면을 살려 줬으니 피할 명분은 없었다.

몇몇 귀족이 앞에 나서며 말했다. 주로 에일즈버 백작 계파와 노튼 백작 계파의 귀족들이었다.

"걱정하지 말게. 만약 공작가가 수작을 부린다면 내 최선을 다해 도와주지."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시게나."

"공작가도 함부로 북부를 도모하지는 못할 걸세."

여러 귀족들이 앞다투어 지셀에게 지원을 약속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지셀은 적당히 예의를 차리며 귀족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막상 때가 되면 지금 한 말을 지키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약속을 받아 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이 약속이야말로 차후에 지셀이 이용할 수 있는 명분이 될 테니까.

그렇기에 모리스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지셀만 노려보고 있었다.

옆에 있던 귀족이 살짝 그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래도 젊은 친구가 의리 하나는 대단하지 않습니까? 공작가의 제안을 거절하다니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요새 젊은이 중에 저런 사람은 보기 드물죠."

"덕분에 친왕파의 체면이 살았으니, 저희도 어느 정도는 힘을 실어 주는 것이...."

하지만 그런 말에도 모리스는 여전히 탐탁지 않은 얼굴이었다.

"됐네. 애송이 하나가 분위기를 쥐락펴락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군. 브랜포드 후작과 노튼 백작이 밀어주기로 했으니 알아서 잘들 하겠지."

모리스는 그 말을 끝으로 휙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눈치를 보던 같은 계파의 귀족들 또한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라갔다.

모리스가 떠나갔음에도 귀족들은 지셀을 칭찬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지셀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의외의 소득이네. 오늘 연회에 참석하기를 잘했어.'

갑작스럽게 나타난 라울 덕분에 다른 귀족들에게서 지지와 호감을 이끌어 냈다.

솔직히 연회랍시고 모이는 건 귀찮기만 했는데, 지금은 참석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정말 아깝군.'

라울을 실제로 만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았다.

그렇기에 이번 만남이 더욱더 아쉽게 다가왔다.

방해꾼만 없었다면 라울을 죽일 수 있었을 텐데.

지셀은 라울 옆에 서 있던 남자를 떠올리며 아쉬움을 달랬다.

'설마 그놈이 옆에 있을 줄이야.'

다들 라울의 호위 정도로만 생각했겠지만, 자신은 그가 누군지 잘 알았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던 거지. 잊자.'

지셀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라울을 만난 것도 큰 소득이지만 가면의 남자를 본 건 더 큰 수확이었다.

공작가를 부수는 데 큰 걸림돌이 될 존재를 직접 대면하고 실력을 눈으로 확인할 기회가 올 줄이야.

'네놈이 그 정도였구나.'

지셀의 눈에 언뜻 살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 * *

라울과 가면의 남자는 마차를 타고 천천히 후작가를 빠져나왔다.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지자 조용한 마차 속에서 가면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어떤가? 직접 본 소감은."

"역시, 아무리 꼼꼼하게 알아보고 정보를 모아도 직접 한 번 보는 것만 못한 거 같아. 정보와는 많이 달라. 해럴드가 실수한 건가?"

"그건 더 알아봐야겠지. 그래서 평가는?"

"그간의 활약과 나이를 생각하면 나쁘지 않아. 중급 변수라 생각해도 될 거 같다."

"너답지 않게 후한 평가로군."

"뭐, 아직 젊어서 그런지 혈기도 왕성하고 겁도 없는 거 같지만.... 그게 단점일 수도 있겠지. 티 나게 적개심을 내보이는 걸 보면 말이야."

가면의 남자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툭 던지듯 말했다.

"위험 평가를 한 단계 더 올려라."

"이유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놈, 아까 널 죽이려고 했던 거 같다."

그 말에 라울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고? 사람들이 잔뜩 모인 저런 자리에서? 애송이 남작 주제에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그게 정말인가?"

"확실하지는 않다. 단지 얼핏얼핏 희미한 살기를 느꼈다. 너, 저놈한테 원한이라도 산 일이 있나?"

"오늘 처음 보는 놈인데 원한은 무슨."

"이상하군. 잠깐이었지만 분명 살기를 느꼈어. 그리고 중간중간 내 실력을 가늠하는 듯했다."

"당신을?"

"그래, 나를 뚫고 널 죽일 수 있을지 없을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

그 짧은 사이에 그런 시도를 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놈, 정말 소문대로 미친놈이었구나.

142화 기다리고 있어라. (5)

라울은 살기 같은 건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자리에 같이 있던 남자가 그렇게 말하니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상대는 왕국 최고의 실력자니까.

라울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실력은 어느 정도인 거 같나?"

"정확히는 모르겠다."

"당신이 상대 실력을 가늠하지 못한다고?"

라울이 되묻자 남자가 진저리를 치듯 고개를 저었다.

"뭔가 어긋난 느낌이었다."

"어긋난 느낌이라니?"

"움직임과 호흡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아. 그런데 그냥 보면 또 그렇게 강해 보이지 않으니...."

"그래서 대체 얼마나 강하다는 건가?"

남자는 기억을 되짚어 보고는 툭 내뱉었다.

"전쟁에서 직접 활약했다는 말은 진짜인 거 같다."

"으음...."

라울은 턱을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망나니로 소문이 자자한 놈 실력이 그렇게 뛰어나다고? 당신이 잘못 본 게 아닌가?"

"아니, 확실해. 전쟁에서 활약하기에는 충분하다. 육체와 마나가 부족해도 기교가 뛰어나면 보완할 수 있으니까."

그 말에 라울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지금 싹을 밟았어야 했나? 아직은 그렇게까지 명성이 높지도 않으니 수습할 수 있었을 거 같은데.'

죽이면 분명 친왕파 귀족들이 난리를 피웠겠지만, 명분 있는 결투라고 포장할 자신이 있었다.

자신뿐만 아니라 옆에 있는 자도 같은 판단을 내렸다고 하면 델파인 공작도 이해했을 것이다.

두 사람은 그만한 신임을 받고 있었다.

라울은 결국 참지 못하고 푸념을 내뱉었다.

"그냥 오늘 죽였어야 했나."

가면의 남자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말했다.

"나도 잠깐 고민했다. 나이에 비해 그간 이룬 일들이 너무 뛰어나."

"그런데 왜 안 죽였지? 뒷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해 주었을 텐데."

"...일격에 죽일 틈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아니지. 틈은 있는데 확신이 들지 않았다고 해야겠군. 지금 생각하면 일부러 틈을 내보인 거 같기도 하고."

"뭐?"

라울이 당혹스러운 어조로 되물었다. 남자는 무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일격에 죽이지 못한다면 브랜포드 후작의 병력들이 들이닥쳤을 거다. 그러면 얻는 것 없이 일만 커졌겠지. 그래서 마음을 거뒀다. 지금 소란을 일으켜서 좋을 건 없으니까."

"일격에 죽일 수 있다는 확신이 안 들었다고? 당신이?"

"그래."

라울은 믿지 않았다. 아니, 믿을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돼. 저 나이에 그런 실력을 지녔을 순 없어. 잘못 본 게 아닌가?"

"그럴 수도 있겠지. 그저 그놈이 보이는 기세와 배포 때문에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확신도 없이 검을 휘두르는 건 멍청한 짓이지."

라울은 미간을 좁혔다. 그 얼굴에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꼭 일격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이 몰려오기 전에 죽일 순 없었나?"

가면의 남자는 잠깐 기억을 더듬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열 번."

"열 번이라니?"

"내가 느낀 게 사실이라면, 최소 열 번은 휘둘러야 죽일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그 정도 실력이라면 첫 공격을 받자마자 나와 맞붙지 않고 바로 연회장으로 도망갔겠지."

"그러면 확실히 곤란해졌겠지만...."

"그래, 그러니 그만 잊어라. 나중에 다시 기회가 오겠지."

라울이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암살은 가능하겠나?"

남자가 눈을 가늘게 뜨며 라울을 노려보았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씹듯이 내뱉었다.

"나더러 직접 하라는 말은 아니겠지."

"설마. 세상에 그런 인력 낭비가 어디 있겠나. 그냥 성공할 가능성이 있을지 물어보는 걸세."

"...암살자 실력에 따라, 성공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굳이 건드려서 좋을 게 없다. 너도 잘 알 텐데."

"나도 굳이 일을 망쳐 가면서까지 저놈을 죽일 생각은 없어. 그냥 아쉬워서 해 본 말이야."

지셀은 후작의 딸까지 치료하면서 수도 귀족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암살 시도를 했다가 자칫 흔적이 남기라도 하면 곤란해진다.

지금은 최대한 현재 상태를 유지하면서 물밑에서 수도 귀족들을 포섭해야 했다.

"쯧, 친왕파에 합류하기 전에 죽였어야 했는데.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어. 하필 가장 쉽다고 생각했던 북부 공략이 가장 늦어질 줄이야."

"해럴드도 한 방 먹었으니 신중하게 움직이겠지. 그 정도 능력은 되는 인물이지 않은가."

"당연히 그래야지."

라울은 싸늘한 어조로 내뱉으며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지셀이 이름을 알리기 전에 해럴드가 북부를 손에 넣었다면 이렇게 골치 아픈 일도 없었을 텐데.

그 점이 다소 아쉬운 건 사실이었다.

라울은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혹시 모르니 해럴드에게 주의는 줘야겠어. 지셀 페르디움 본인의 무력도 강하니, 한 영지의 기사단장급으로 생각하고 계획을 짜라고."

"북부제일검."

"...갑자기 무슨 말인가? 북부제일검이라니."

"지셀 페르디움의 무력 말이다. 북부제일검, 레이폴드 기사단장 수준으로 상정하라고 해라."

그 말에 라울은 눈을 크게 뜨고 반문했다.

"평가가 너무 후한 거 아닌가? 저 나이에 기사단장급으로 잡는 것도 과한 편인데."

"무인의 감이라고 해 두지. 너는 이런 말을 싫어하겠지만."

"흠...."

라울이 턱을 매만지다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 단단히 준비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전해 두지."

"어차피 우리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큰 의미는 없겠지만 말이지. 전쟁은 혼자 하는 게 아니니까."

"일인 군단이라 불리는 당신 입에서 전쟁은 혼자 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 나오다니. 영 어울리지 않는데?"

라울의 비웃음 섞인 말에 가면의 남자는 조용히 답했다.

"왕실에 나 같은 놈이 하나 더 있지 않나. 그놈과 내가 서로를 견제하는 한 전쟁의 승패는 다른 사람들의 손에 달린 일이지."

잠시 입을 다물었던 남자가 자조적으로 읊조렸다.

"지겨워 죽겠군."

그 말을 끝으로 가면의 남자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 * *

라울이 돌아간 뒤, 한동안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연회가 이어졌다.

막 파벌에 합류한 애송이가 공작가의 제안을 쳐냈으니 친왕파 귀족들은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삼삼오오 모여 지셀의 기개를 칭찬하고 떠들며 술을 마셨다.

밤이 깊어지자 왕자와 고위 귀족들을 필두로 귀족들이 하나둘 돌아가며 연회는 자연스럽게 끝났다.

"휴우, 피곤하긴 하네."

지셀은 목에 딱 붙는 옷깃을 잡아당겨 느슨하게 하며 고개를 저었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치고받고 싸우는 것보다 사람들 상대하는 게 더 힘들다.

억지로 웃을 때마다 등에 소름이 돋는 것이, 영 체질에 안 맞는다.

언제 빠져나갈지 때를 노리고 있던 그에게 로잘린이 다가왔다.

"오늘 고생 많으셨어요."

"네, 뭐.... 아니라고는 못 하겠네요. 그래도 나쁘진 않았습니다."

"후훗, 이렇게 한 사람이 주목받는 연회도 흔치 않지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저도 제가 이렇게 인기가 많은 줄은 몰랐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라울의 제안을 거절한 뒤로 귀족들은 지셀을 놔주지 않았다.

여기서 쌓은 인맥이 언젠가는 도움이 될 테지만, 지금은 빨리 돌아가서 쉬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지셀이 적당히 대화를 끊고 돌아가려던 그때 로잘린이 물었다.

"남작님의 목표는 무엇인가요?"

"네?"

"남작님이 무엇을 보고 계시는지 궁금해서요."

"그냥... 뭐, 남들하고 다를 거 없습니다. 잘 먹고 잘사는 게 목표죠."

지셀은 대충 둘러댔다.

그의 진심을 누구에게 말할 수 있을까?

델파인 공작가를 쓸어 버리고 죄다 쑥대밭으로 만드는 게 목표라고, 그 배후에 있는 놈들도 다 찾아서 박살 내 버리려고 미래에서 되돌아왔다고....

앞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을 거라고.

'얘기하면 지셀 페르디움이 미쳤다면서 난리가 나겠지.'

어쩌면 역사에 자신은 전쟁광이자 학살자로 기록될지도 모른다.

그런 피비린내 나는 미래를 굳이 입 밖에 낼 필요가 있을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고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뿐.

그에게는 친왕파라는 권력자들도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지셀이 생각에 잠기려던 찰나, 로잘린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평범한 목표네요. 그런 것치고는 하시는 일들이 모두 범상치 않아 보이는데요."

"뭐, 그냥 성격이 급해서 빨리빨리 처리하는 쪽을 선호할 뿐입니다. 제가 한 일이라고 해 봐야, 결국은 다 영지를 부강하게 만드는 일 아닙니까? 별거 없습니다."

"흐음...."

로잘린은 그의 말을 전혀 믿지 않는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뜯어보았다.

지셀은 그런 그녀가 조금 불편했다. 자신의 본심을 가늠하고 깊이 파고드는 저 눈빛이 말이다.

"전 피곤해서 이만 가 보겠습니다. 다음에 또 뵙도록 하지요."

서둘러 자리를 피하려는 그에게 로잘린이 은근한 어조로 말을 건넸다.

"제가 남작님의 후원자라는 것 잊지 마세요. 언제든지 도움이 필요하면 말씀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아가씨께서 귀찮으실 일은 많지 않을 겁니다."

지셀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로잘린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 마음에 감사하고도 있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목표를 이루려면 자신은 시간이 지날수록 과격하게 움직일 수밖에 없다.

어쩌면 왕실을 위협하는 세력이 되어 모두에게 견제당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 정도는 되어야 델파인 공작가랑 싸워 볼 만할 테지.'

그 사이에 브랜포드 후작이나 로잘린이 참견하고 간섭해 오는 건 원하지 않는다.

호의는 여기까지. 서로 필요한 것만 취하고 각자의 길을 가는 게 좋다.

괜히 그에게 휘말려서 죽는 꼴을 보고 싶진 않았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오늘 즐거웠습니다."

자리를 뜨는 지셀의 뒷모습을 보며 로잘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나름대로 노리는 게 있어서 도와준 거겠지만, 그 덕분에 자신은 새로운 인생을 얻었다.

어떤 보답을 해도 모자랐다. 오래오래 연을 이어 가며 도와주고 싶었는데 저렇게 칼같이 끊어 내다니.

로잘린은 언제 지셀을 지켜봤냐는 듯 휙 몸을 돌려 방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잠이 오지 않을 거 같았다.

* * *

지셀은 돌아가는 마차에 타자마자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아쉬움에 한숨을 내쉬었다.

'속이 답답하군.'

가면을 쓴 남자가 예상했던 대로 지셀은 그 자리에서 라울을 죽일지 말지 고민했다.

뒷일은 그때 가서 수습하면 된다. 아니, 뒷일을 생각하지 말고 죽여야 한다.

'무슨 손해를 보더라도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는데.'

델파인 공작가가 지금처럼 성장할 수 있었던 건 라울의 계책 덕분이었다.

이미 수많은 이권이 공작가에 넘어갔고, 왕국 전역에서 공작가를 지지하는 영주들도 늘어나고 있었다.

왕국 곳곳에서 일어나는 분란도 대부분 라울이 뒤에서 조종한 것이다.

'그놈만 아니었다면....'

지셀은 가면을 쓴 남자를 떠올리고 이를 악물었다.

그는 대화하는 중에 몇 번이나 라울을 죽이려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가면의 남자가 호흡을 끊고 들어왔다.

놀랍게도 남자는 지셀의 미세한 움직임을 읽고 그에 맞춰 움직였다. 허튼짓을 하면 죽이겠다는 미약한 살기까지 담아서.

그래서 지셀은 차마 라울을 공격하지 못했다.

'과연 소문대로 뛰어난 자다. 아니, 소문 이상이야.'

지셀의 마나 운용 능력과 통찰력은 용병왕 시절과 별 차이가 없다.

그의 호흡에 간섭할 수 있는 자는 왕국 전체를 통틀어도 한 손에 꼽힐 정도로 적다.

7서클 이상 대마법사, 또는 소드마스터의 칭호를 받은 자.

'루타니아에도 소드마스터는 둘뿐이지.'

한 사람은 왕실기사단장으로, 언제나 국왕의 곁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델파인 공작의 최측근이자 가장 충성스러운 검, 명실공히 왕국의 최강자라 불리는 남자.

'왕국제일검, 소드마스터 발자크 백작.'

지셀은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소리 없이 웃었다.

즐거워서 웃는 게 아니다. 타오르는 분노를 억누르기 위한 웃음이었다.

죽여야 하는 놈들을 그냥 보내 줬으니 피가 끓어 견딜 수가 없었다.

'전생의 경지만 되찾았다면....'

그랬다면 어떻게든 죄다 목을 베어 버렸을 것이다.

그 사실이 못내 아쉬워 속이 계속 뒤집혔다.

'이미 지나간 일이다. 잊자. 지금은 더 빠르게 강해지고 세력을 키우는 것만 생각해야 해.'

과거로 돌아온 이후 한시도 게으름을 부린 적이 없다. 그로서는 지금 상태가 최선이었다.

단지 그 최선이 발자크 백작과 맞붙기에는 부족했을 뿐이다.

"후우...."

지셀은 살기를 갈무리해 가슴속에 꾹꾹 눌러 담았다.

오늘 느낀 무력감과 분노를, 이 굴욕을 언젠가 마음껏 터뜨리리라 다짐하면서.

'다음번에는.... 이렇게 조용히 끝나진 않을 거다.'

두 사람은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자신과 공작가가 모든 걸 걸고 맞붙었을 때.

그때야말로 누가 진정 왕국의 최강자인지 가려질 터였다.

143화 정말 좋은 기회라니까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