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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화 장사 좀 하러 왔지. (3)

"귀족이 아니라 사용인들한테 보낸다고요?"

"어, 펜리스 남작이라고 크게 써서 보내."

"아... 아하? 알겠습니다."

클로드가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미심쩍은 눈으로 둘을 바라보던 벨린다가 끼어들었다.

"아니, 뭐예요? 뭔데요? 설명 좀 해 줘요. 총관님은 알아들은 거 맞아요? 모르는데 아는 척하는 건 아니죠?"

대놓고 그를 무시하는 발언에 클로드는 바로 발끈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세이론 아카데미 수석 출신에, 영지 총관 업무까지 전부 처리하는 제가 그렇게 멍청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흥, 매일 도련님한테 당하는 주제에."

"그건 영주님이 상식을 벗어난 분이라 그런 거고요!"

클로드가 답답한 듯 가슴을 퍽퍽 두드렸다.

하지만 벨린다뿐만 아니라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클로드가 그러든지 말든지, 지셀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지셀이 별거 아니라는 말투로 설명해 주었다.

"벨린다도 내가 처음에 화장품 줄 때는 기뻐했잖아. 어디 제품이냐고, 비싼 거 아니냐면서."

"그...랬죠."

"그런데 왜 나중에는 거절했어?"

"그야 당연히 도련님이 직접 만들었다고 했으니까요. 그런 거 배운 적도 없으면서.... 아, 그렇구나!"

벨린다가 그제야 지셀의 말뜻을 깨닫고 감탄했다.

펜리스 성 사람들은 그가 약학이나 연금술 같은 분야에 무지하다는 걸 익히 알고 있다. 그러니 그가 만들었다는 화장품도 믿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수도에 사는 사람들은 다르다.

"사용인 중에는 귀족 이름을 달고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믿는 사람이 한둘은 있을 거야."

"여기 사람들은 도련님이 누구인지 모르니까요."

"그렇지."

어차피 화장품을 받은 사람 모두가 쓰지는 않겠지만, 한 사람이라도 써서 효과를 본다면 금세 소문이 퍼질 것이다. 펜리스 영지에서 그랬듯이 말이다.

1차 화장품 테스트의 일등 공신, 길리언이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기사를 잡으려면 말을 먼저 잡아야 한다는 말씀이시군요. 공략하기 쉬운 주변 인물들부터 포섭하겠다니, 역시 영주님이십니다."

"...그런 깊은 뜻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틀린 말은 아니네."

지셀이 멋쩍은 듯 목뒤를 슥슥 쓸어내렸다.

"듣고 보니까 당연한 말인데, 제가 왜 그런 생각을 못 했을까요? 사용인들하고 제일 많이 붙어 있는 사람은 저인데."

벨린다가 아쉬운 듯 투덜거렸다. 지셀이 피식 웃었다.

"그거야 나를 못 믿어서 그렇겠지. 그래서 내가 일일이 설명하는 거 싫어해. 어차피 말해 봤자 안 믿더라고."

"...."

정곡을 찌르는 말에 사람들은 입을 딱 다물었다.

민망한 표정으로 헛기침만 하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클로드가 혀를 찼다.

"쯧쯧쯧, 마지막까지 영주님 곁을 지켜야 할 가신들이 영주님 말을 못 믿고 하는 일마다 의심하면 어떻게 합니까? 이래서야 영지가 제대로 돌아가겠습니까? 알포이처럼 굴지 마세요."

"...."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일 의심 많은 놈한테 저런 말을 들으니 굉장히 열이 뻗친다.

하지만 지셀이 설명하기도 전에 의도를 알아차린 사람이 클로드밖에 없으니, 반박하기도 어려웠다.

사람들이 노려보자 클로드는 두 손가락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짚어 보이며 말했다.

"지능의 차이가... 느껴지십니까?"

사람들 사이에서 살기가 피어올랐다.

클로드는 짐짓 모른 척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상품은 예쁘게 포장해서 귀족가에 보내겠습니다."

"그렇지. 귀족이라고 전부 다 챙길 필요는 없고, 잘나가는 사람 위주로 골라서 보내."

"그러면 귀족들한테는 무슨 선물을 보낼까요? 아예 안 보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귀족들을 무시하고 사용인들에게만 선물을 보내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아무거나 하나라도 쥐여 줘야 명분이 서는 법이었다.

지셀은 잠시 고민하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수도에 와서 인사드린다는 핑계로 적당히 만드라고라 뿌리나 하나 사서 보내."

"...만드라고라 뿌리요?"

"응. 굳이 더 좋은 거 보낼 필요 없잖아? 내 이름하고, 우리 상단에서 화장품을 보냈다는 것만 알리면 되니까. 최대한 싼 놈으로 보내라."

클로드는 난감해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만드라고라 뿌리는 자양강장제로 유명하긴 하지만, 수도의 귀족들에게 선물할 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아무리 귀족들의 환심을 살 필요는 없다고 해도... 뒤에서 무슨 말이 돌지 걱정되었다.

"뭐, 어쩔 수 없죠. 알겠습니다. 그러면 서신에는 뭐라고 쓸까요? 뭐 쓰고 싶은 말 있으세요?"

"이 몸, 수도에 등장."

"...제가 알아서 잘 써서 보내겠습니다."

지셀이 혀를 차며 답했다.

"그래, 그 정도는 이제 좀 알아서 해라. 내가 편지 글줄까지 하나하나 생각하리?"

"알겠다고요."

클로드는 투덜거리면서도 정성껏 서신과 선물을 준비했다.

선물을 보낸 뒤에는 입질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밖에 할 일이 없었다.

무료함을 견디지 못한 일행이 수도를 구경하고 맛집을 찾아다니는 동안, 지셀은 혼자 저택 안에 남아 생각에 잠겼다.

'슬슬 효과를 본 사람이 나오기 시작했을 텐데.'

다른 사람들은 지셀이 그저 화장품을 팔아 돈을 벌러 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틀린 건 아니지만, 지셀이 노리는 건 그저 돈뿐만이 아니었다.

'얼마나 걸리려나....'

까악! 까악!

지셀은 까마귀들을 향해 모이를 휙 흩뿌렸다. 정원에 있는 까마귀들이 지셀이 던져 준 모이를 받아먹겠다고 푸드덕거리며 소란을 피웠다.

* * *

에일즈버 백작은 수도의 권세가 중 한 명이다.

높은 직책을 맡았다든가 다스리는 영지가 큰 건 아니었지만, 대대로 많은 귀족가와 혈연을 이어 온 덕분에 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과 사업체, 인맥들도 그의 뒤를 든든하게 받쳐 주는 힘이었다.

그런 그에게 잘 보이겠다고 선물을 보내는 사람은 셀 수 없이 많았다. 따로 시간을 내어 목록을 정리해 둬야 할 정도였다.

"다음은... 펜리스 남작?"

"네, 수도에 처음 왔다고 인사차 보냈답니다."

"흠, 그래."

에일즈버 백작은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서신을 뜯어보았다.

그런데 그 내용이 예사롭지 않았다.

"오...."

문장 하나하나가 눈길을 잡아끌었다.

어찌나 고급스럽게 자신을 칭송하는지 마치 황제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허어, 데리고 있는 문장관의 글솜씨가 보통이 아니구나. 아니면 직접 쓴 건가? 어쨌든 대단한 글줄이로다. 기특한지고, 허허허."

이렇게 되자 선물이 무엇일지 기대가 된다.

무슨 제국의 황제를 대하는 듯한 공경과 예를 표했으니 그 선물도 범상치 않을 게 분명했다.

기대가 잔뜩 섞인 얼굴로 그가 하인을 재촉했다.

"어서, 어서 뭔지 열어 보아라."

무엇이 들었는지 모르니 직접 열어 볼 수는 없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하인이 나무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상자 안을 들여다보고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목갑에는 다 말라비틀어진 만드라고라 뿌리 하나가 다소곳하게 누워 있었다.

"...만드라고라? 달랑 그거 하나야?"

"예, 예. 이거 하나입니다."

에일즈버 백작은 당황스러워하며 급하게 손짓했다.

"가져와 봐. 그거 가져와 봐."

그는 만드라고라 뿌리를 들어서 이리저리 살폈다. 빈 목갑도 흔들어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확인해도 정말 그것뿐이었다.

"에라이! 입만 산 놈이었구나! 이 새끼 이름 기억해 둬라! 이래서 돈 없는 시골 놈들은 안 된다니까!"

에일즈버 백작은 만드라고라 뿌리를 목갑째 휙 집어 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회라도 좀 놀러 가서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며 흉을 볼 생각이었다.

자리를 뜨는 그를 집사가 급히 붙잡았다.

"남작이 사용인들에게도 선물을 보냈는데 어떻게 할까요?"

"뭐? 뭔데. 풀뿌리라도 보냈어?"

"남작이 운용하는 상단에서 만든 미용 크림이라고 합니다."

에일즈버 백작은 코웃음을 쳤다.

시골 상단 주제에 무슨 화장품 같은 고급 상품을 만들 수 있다는 말인가?

사용인들에게 줬다는 걸 보니 과일 껍질이나 갈아 만든 싸구려가 분명했다.

"서민용 화장품인가? 그냥 알아서 나눠 줘. 버리고 싶으면 버려도 된다고 해라. 아, 저것도 필요한 사람은 갖다 쓰라고 해. 집사가 먹든가."

"감사합니다!"

집사는 반색하며 웃었다. 백작에게는 싸구려 쓰레기지만, 평민들에게는 만드라고라 한 뿌리도 귀한 물건이었다.

에일즈버 백작은 몇 번 혀를 차고는 쌩하니 나가 버렸다.

그렇게 에일즈버 저택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에게 지셀이 보낸 화장품이 지급되었다.

화장품 용기에는 펜리스 남작의 이름과 상단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대다수는 에일즈버 백작과 같은 이유로 의심스러워하며 쓰지 않았다.

하지만 몇몇은 대문짝만하게 새겨진 귀족의 이름에 호기심을 느끼고 조금씩 사용해 보았다.

지셀이 생각한 대로였다.

그렇게 열흘 정도가 지났을 무렵.

열심히 화장을 하던 메리엘 에일즈버 백작 부인이 새침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오늘따라 화장이 잘 안 먹네."

얼굴에 바른 분이 오늘따라 유독 들뜨는 느낌이었다.

"세월은 어쩔 수가 없네. 늙고 싶지 않은데."

하루하루 갈수록 피부 상태가 나빠진다.

좋다는 음식을 찾아 먹고 비싼 미용 제품들을 사다 쓰며 피부를 관리하고는 있지만, 갈수록 효과가 떨어졌다.

중년에 접어든 나이가 새삼 안타깝고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지금도 이렇게 아름다운데 말이야."

메리엘은 거울을 보며 아쉬워했다.

그녀는 지금도 왕국 최고의 미인이라면 한 손에 꼽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젊은 시절에는 수많은 귀족가 자제들에게 청혼을 받았다. 그녀를 레이디로 모시겠다고 다투던 기사는 셀 수도 없이 많았다.

지금은 나이가 들었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이 메리엘의 아름다움을 칭송했다. 그녀는 왕국의 유행을 선도하는 귀부인 중의 귀부인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나이가 들수록 탄력이 없어지는 피부와 조금씩 늘어나는 주름이 너무 신경 쓰였다.

"젊었을 적에는 화장을 하지 않아도 매끄럽게 빛이 났었는데. 하아...."

주름을 가리려고 분칠을 진하게 하니 피부가 더 뻣뻣해지는 거 같았다.

"마나 연공법을 좀 쉬운 거라도 찾아서 배울 걸 그랬나? 그러면 젊음이 오래간다던데."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누구도 세월을 비켜 갈 수는 없었다.

메리엘은 속으로 혀를 차며 방을 나섰다.

"준비 다 됐지? 늦지 않게 지금 출발하자."

오늘은 오랜만에 살롱에 참석하기로 했다.

메리엘이 아침부터 부단히 공을 들여 치장한 이유였다.

귀족의 사교 모임이란 보통 날붙이만 들지 않았다 뿐이지, 전쟁이나 마찬가지다.

상대방의 옷차림과 화장, 손톱만 한 장신구까지 하나하나 살피며 자신과 비교하는 것이다.

메리엘은 한 번도 그 전쟁에서 진 적이 없었다.

하녀들의 배웅을 받으며 저택을 나서려던 메리엘은 순간적으로 묘한 위화감을 느끼고 멈춰 섰다.

'뭐지?'

그녀는 복도 양옆으로 늘어선 하녀들을 죽 훑어보았다.

곧 메리엘은 자신이 느낀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피부가....'

대부분은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귀족들처럼 관리할 수 없는 하녀들이 피부가 좋아 봤자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유독 몇 명의 피부가 확연히 눈에 띌 정도로 좋아 보였다.

보통 피부의 탄력 같은 건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르고 넘어가기 십상이지만, 메리엘의 눈길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메리엘은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촉촉하게 수분을 머금은 피부가 빛을 내고 있었다.

피곤에 찌들어 안색이 우중충한 다른 하녀들과는 달랐다.

그녀는 가장 피부가 촉촉해 보이는 하녀의 앞에 다가가 말했다.

"너."

지목당한 하녀가 주눅 든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최근에 뭘 먹었는지, 어떻게 씻었는지, 언제 얼마나 잤는지 모두 말해 보아라. 피부에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되는 다른 이유가 있으면 그것도."

아랫사람에게도 언제나 귀부인다운 우아하고 자비로운 태도를 보이던 메리엘이,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무시무시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123화 장사 좀 하러 왔지. (4)

"그, 그게... 얼마 전 선물로 들어왔던 화장품이 있었는데...."

"화장품?"

"네, 네. 피부 미용 크림이라고 해서.... 어떤 남작님이...."

평소와 다른 메리엘의 모습에 하녀는 당황해서 말을 자꾸 더듬었다.

답답해진 메리엘은 하녀장을 돌아보며 어찌 된 상황인지 물었다.

"얼마 전 펜리스 남작이라는 분이 각 귀족가에 선물을 돌렸습니다. 백작님께도 따로 선물과 서신을 보낸 걸로 압니다."

"펜리스 남작? 처음 듣는 이름이네."

"이번에 수도에 처음 올라오신 분 같습니다."

"그래서 선물을 돌린 건가. 그런데 남편한테는 보내고 나한테는 안 보냈다고?"

에일즈버 백작이 권세가 높다고는 하지만, 메리엘보다는 못했다.

그녀는 왕국에 몇 없는 후작가의 장녀이기도 하고, 수도의 사교계를 완전히 휘어잡고 있으니까.

"남편이 아니라 나한테 잘 보여야 할 텐데, 한심하긴. 아무리 수도 사정을 잘 모른대도 그렇지...."

시골에서 막 올라와 누가 실세인지 미처 파악하지 못한 탓이겠지만, 자존심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손부채질로 열이 오른 얼굴을 식히며 그녀가 다시 물었다.

"그이한테는 더 좋은 화장품을 선물해 준 거야?"

"아닙니다. 백작님에게는 만드라고라 한 뿌리를 보냈다고 합니다."

메리엘이 헛웃음을 흘렸다.

"겨우 만드라고라 하나? 엄청 가난한 귀족인가 봐. 그런데 이런 화장품은 어디서 구한 거지? 하녀들에게 전부 선물할 정도로 많다는 거잖아."

"펜리스 남작의 상단에서 직접 개발했다고 들었습니다."

"직접... 개발했다고?"

메리엘이 감탄과 비웃음이 섞인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수도 사정도 모르는 시골 영주의 상단이 화장품을 개발했다니.

평소였다면 비웃고 무시했을 말이다.

하지만 화장품이 실제로 효과가 있다는 걸 확인한 지금은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메리엘은 잠시 고민하다 빠르게 결정을 내리고 하녀장을 돌아보았다.

"오늘 모임은 취소해. 몸이 안 좋아서 못 간다고 전해라. 그리고 너, 날 따라오도록."

그녀는 피부가 가장 좋아 보이는 하녀를 데려다 화장품을 어떤 식으로 사용했는지 자세하게 물어보았다.

메리엘은 적당한 돈을 주고 받아 온 화장품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으음, 이걸 써야 하나 말아야 하나."

효과가 없으면 차라리 다행이다. 만에 하나라도 부작용이 생긴다면 앞일이 피곤해진다.

수많은 귀부인과 영애들의 비웃음을 사는 건 물론이고, 지금껏 쌓아 왔던 명성까지 모두 곤두박질칠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직감은 끊임없이 외치고 있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고.

누구보다 먼저 차지해야 한다고.

"그래, 부작용이 생긴 사람은 하나도 없었어. 몇 명은 티가 날 정도로 상태가 좋아졌고. 한번 써 보자."

메리엘은 깨끗하게 세수를 하고 천천히 크림을 얼굴에 바르기 시작했다.

'아, 이건.... 아침 이슬을 바르면 이런 느낌일까?'

처음에는 잠깐 끈적거리는 느낌이 들었지만, 금방 피부에 흡수되었다. 곧 피부 속에서부터 수분이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이거다.

확신이 든 메리엘은 화장품을 얼굴에 골고루 펴 바른 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하루 이틀 만에 극적인 효과가 날 수는 없다. 하지만 자고 일어난 메리엘은 미세한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분명해. 효과가 있어. 겉으로는 티가 안 나지만 달라졌다. 부작용도 지금까지 없는 거 보니 효과는 확실해.'

조금 더 지켜보겠다고 시간을 끄는 건 미련한 짓이다. 메리엘은 좋은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바로 하녀장을 불러 물었다.

"펜리스 남작과 상단이 어디에 머물고 있지?"

"수도 외곽의 폐가에 머물고 있습니다."

"외곽의 폐가.... 설마 그 유령의 집? 까마귀 저택?"

"네, 그렇습니다."

"정말 돈이 없는 모양이네. 오히려 잘됐어. 후후후."

메리엘은 이 화장품을 독점할 생각이었다.

시골에서 막 올라온 귀족이 만든 제품이 팔려 봐야 얼마나 팔리고 있겠는가. 아직 인지도도 없고 가격도 그리 비싸지 않을 것이다.

지금 독점 계약으로 묶어 버리면 유통되는 물량을 이쪽에서 통제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것뿐만 아니라, 재력과 권력을 쌓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당장 펜리스 남작을 만나러 가자."

메리엘은 짧은 고민 끝에 외출할 준비를 하라고 명령했다.

* * *

화려한 사두마차가 수도 한복판을 가로질렀다. 호위 기사 몇몇이 앞서가며 앞길을 텄다.

밀려난 사람들이 투덜거리다 마차에 찍힌 귀족가의 문장을 확인하고 입을 닫았다.

저택 현관 옆에 세워 둔 간이 상담소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던 클로드는 그 광경을 보고 입을 쩍 벌렸다.

"뭐, 뭐야.... 왕비님이라도 행차하는 건가? 그런 거라면 사전에 연락이 왔을 텐데?"

아니라는 걸 알아도, 화려한 마차와 호위들의 분위기에 주눅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마차가 저택 앞에 멈춰 서고, 안에서 하녀장이 내렸다.

하녀장은 나름대로 정리를 한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후줄근한 현관을 못마땅한 눈으로 훑어보다 입을 열었다.

"에일즈버 백작 부인이십니다. 펜리스 남작님이 이 저택에 기거하신다 들었는데, 맞습니까?"

"예? 아, 예. 맞습니다."

클로드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턱을 치켜든 하녀장은 어지간한 귀족들만큼이나 고급스러운 차림새였다. 호위 기사들의 수나 무장도 범상치 않았다.

세이론에서도 귀부인들을 많이 봤지만, 이 정도로 위세가 대단한 사람은 없었다.

'백작 부인이 이 정도라고? 역시 강대국은 다르긴 다르구나.'

사실 루타니아에서도 메리엘만큼 영향력이 큰 귀부인은 손에 꼽혔지만, 아직 수도 사정을 제대로 모르는 클로드는 알 리 없는 일이었다.

호위 기사 중 하나가 마차 문을 열고 메리엘이 쉽게 내릴 수 있도록 도왔다.

저택 주변을 지키던 용병들이 메리엘을 보고 저도 모르게 입을 떡 벌렸다.

'허매....'

화려한 장미가 연상되는 미모였다.

꽤 나이가 들어 보였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우아하고 기품 있는 분위기가 풍겼다.

북부의 시골에서 촌스럽게 살아온 용병들 따위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처럼 보였다.

그들도 북부에서 귀부인이나 귀족 영애들을 본 적이 있긴 하지만, 메리엘에 비하면 그들도 평민이나 다름없었다.

메리엘은 그들의 시선을 익숙하게 받아넘기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녀장이 다시 나서서 방문 목적을 말하려 했지만, 그녀는 손을 들어 제지하고 직접 입을 열었다.

"에일즈버 백작가의 메리엘이에요. 펜리스 남작님을 만나러 왔어요."

"...."

클로드와 용병들은 멍하니 입만 벌리고 있었다. 침이라도 흘릴 기세였다.

벨린다의 발길질이 날아왔다.

"아악!"

클로드는 정강이를 얻어맞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뭐 해요? 손님 왔잖아요!"

벨린다는 짜증 섞인 한마디를 던지고 혀를 차며 저택 안으로 돌아갔다.

클로드는 아픈 정강이를 비비며 잽싸게 머리를 굴렸다.

유령이 나온다고 소문난 저택에 귀족가의 부인이 찾아올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화장품이 효과를 봤구나!'

클로드는 한껏 양손을 비비며 허리를 숙였다.

"혹시 화장품을 사러 오셨습니까? 제가 안내를...."

"펜리스 남작님을 만나러 왔어요."

"일단 제가 먼저 설명을...."

"펜리스 남작님을 만나러 왔어요."

메리엘은 우아하게 웃으며 같은 말만 반복했다.

영주를 직접 만나기 전까지는 물러서지 않을 기세였다.

클로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들어가시지요. 지금 정원에 계실 겁니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꼴통 영주가 괜히 사고 칠까 불안해서 가능한 자신의 선에서 처리하고 싶었지만, 이렇게 되면 다른 방도가 없었다.

"고마워요."

메리엘은 살짝 웃어 보이고는 몇 명의 하녀들과 기사들만을 대동한 채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정원에 들어서자마자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회색빛으로 죽어 있는 정원과 저택 주변을 날아다니는 까마귀들이 상당히 거슬렸다.

자신은 아무리 돈이 없어도 이런 곳에서는 하루도 살 수 없었다.

'그만큼 돈이 없다는 거겠지. 거래하기는 쉽겠네.'

그녀는 조금 마음을 편하게 먹고, 저택 사용인의 안내에 따라 정원에 들어섰다.

지셀은 정원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까마귀들에게 먹이를 주고 있었다.

"영주님, 에일즈버 백작 부인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음, 그래?"

지셀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까마귀 하나가 그의 어깨 위에 여유롭게 내려앉았다.

"반갑습니다. 지셀 펜리스입니다."

까악!

메리엘은 까마귀 울음소리에 흠칫 놀라 몸을 떨었다.

'이자가 펜리스 남작이라고? 너무 젊잖아.'

지셀을 위아래로 훑어본 메리엘은 살짝 당황했다. 훤칠한 외모에 나이도 젊어 보인다.

이 나이에 남작의 위와 봉토를 받는 경우는 드물다.

제법 힘이 있는 가문 출신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만....

펜리스라는 이름이 영 귀에 익숙하지 않은 걸 보면, 중앙까지 힘을 뻗치지 못하는 그저 그런 귀족일 확률이 높았다.

'그냥 운 좋게 작은 영토 하나 얻었나 보군. 아버지가 영지를 쪼개 줬겠지.'

그래도 시골 귀족 주제에 자신을 보고도 침착함을 유지하는 태도 하나는 높이 살 만했다.

메리엘은 복잡한 심사를 숨긴 채 살짝 고개를 숙였다.

"에일즈버 백작가의 메리엘이에요.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남작님의 상단에서 만든 화장품에 관해서 얘기를 나누고 싶어서 왔어요."

"호오, 그렇습니까?"

지셀이 눈을 빛냈다.

귀부인들이란 우아한 척하며 말을 빙빙 돌리는 게 특기인 사람들이라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성격이 화끈하다.

"들어가서 말씀 나누시죠."

여유롭게 저택으로 앞서 들어가던 지셀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거물이 걸려들었네.'

에일즈버 백작가라는 이름을 들으니 기억이 났다. 눈앞에 있는 귀부인은 수도 사교계를 손안에 쥐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어떤 화장품을 쓴다는 소문만 퍼져도 순식간에 팔려 나가 수도 전체에서 품절이 될 정도로.

콧대 높은 귀부인이 직접 찾아온 걸 보면, 본래 목적을 생각보다 빠르게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 * *

메리엘은 응접실에 들어와 자리에 앉자마자 바로 본론을 꺼냈다.

"이제 막 화장품을 개발해서 수도로 들어오신 거죠? 그 제품에 대해 독점 계약을 맺고 싶어서 왔어요."

역시 꽤나 화끈한 사람 같다.

"독점 계약이라 하시면?"

"말 그대로예요. 제작되는 물량을 제가 전부 사겠어요. 개발만 하시면 유통은 제가 맡는다는 말이지요."

그녀는 살짝 협박도 곁들였다.

"수도에서 자리를 잡고 싶다면 뒷배가 필요할 거예요. 다른 귀족들과 상단들이 견제할 테니까요. 제 힘으로 그걸 막아 드릴 수 있어요. 반대로 거절하신다면 수도에서 장사하기가 쉽지는 않을 거예요."

쓸데없이 밀고 당기기 따위는 하지 않았다.

지셀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저야 화장품을 많이 팔 수만 있으면 상관없긴 합니다만.... 가격이 조금 비싼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메리엘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지금 누구 앞에서 돈 얘기를 꺼내는 거야?'

이래서 뭘 모르는 사람들과는 길게 말을 섞을 수 없는 것이다.

"에일즈버 백작가는 수도에서도 손꼽히는 부호랍니다. 제가 못 하면 다른 사람도 못 할 거예요. 얼마죠?"

"개당 100골드요."

"뭐...라고요? 몇 개에 100골드요?"

메리엘이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지셀이 확실하게 다시 한번 강조했다.

"'개당' 100골드입니다."

메리엘의 우아한 미소에 금이 가는 순간이었다.

124화 장사 좀 하러 왔지. (5)

"말도 안 돼요!"

메리엘은 어마어마한 가격에 당황해 말까지 더듬거렸다.

"100골드라니! 너무 비싸요. 그렇게 비싸면 누가 사겠어요?"

"비싸다뇨. 그 유명한 명품 '샤르넬'도 100골드 이상 받지 않습니까."

"그건 보석이잖아요! 화장품처럼 쓰는 대로 닳지 않아요."

"하지만 이건 그 이상의 명품이 될 겁니다."

지셀이 자신만만하게 대꾸했다. 메리엘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정말 그 가격에 팔릴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럼요. 백작 부인께서 이곳에 찾아온 것만으로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

메리엘은 반박하지 못했다. 100골드는 물론 조금 부담스럽긴 하지만, 돈 많은 귀부인이라면 못 낼 것도 없는 가격이다.

"그, 그러면 수도에서의 유통만이라도 저랑 계약하는 건 어때요? 제가 도우면 수도에서 자리 잡기도 훨씬 수월할 거예요."

지셀은 그 제안에도 어깨만 으쓱였다.

"이건 시궁창에 진열해도 팔릴 물건입니다."

메리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지셀의 말대로였다.

이건 한번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면 무조건 팔릴 제품이었다.

독점하려면 아예 기술을 빼앗고 입을 막아야 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 정도로 악독한 사람은 아니었다.

"후우...."

메리엘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물건이 너무 좋아도 문제였다. 화장품만큼 매력적인 대가를 내놓아야 할 텐데, 그럴 만한 게 없었다.

클로드는 그녀에게서 풍기는 처연한 분위기에 홀려, 그냥 달라는 대로 주자고 지셀의 등을 쿡쿡 찔렀다.

하지만 지셀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호구 노릇을 할 순 없지.'

그래도 메리엘과는 관계를 이어 나가는 편이 좋다.

지셀은 짧은 고민 끝에 유통권 대신 다른 걸 주기로 했다.

"백작 부인께서 역시 감이 좋으신 거 같습니다. 가장 먼저 찾아오셨거든요. 독점 계약은 힘들겠지만, 대신 사교계의 명성을 가져가실 수 있게 해 드리죠."

"명성이라면?"

지셀이 응접실 한쪽 구석에 따로 준비해 두었던 큰 상자 하나를 메리엘 앞으로 밀어 놓았다.

메리엘은 의아해하며 상자를 열어 보았다. 상자 안에는 화장품 50여 개가 들어 있었다.

"이건...?"

"소문이 더 퍼지기 전에 먼저 유행을 이끄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부인의 명성이 꽤 오래 갈 겁니다. 선물이 비쌀수록 그 가치도 커질 거고요."

메리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저를 이용해서 화장품을 홍보하겠다는 말씀이군요?"

"어차피 소문날 바에는 서로 좋은 게 좋지 않겠습니까? 저는 시간을 아끼고, 부인께서는 명성을 쌓고 말이지요. 이건 저희 제품을 제일 먼저 알아봐 주신 데 대한 감사의 표시입니다."

그녀에게도 나쁜 제안은 아니다. 사교계에서는 누가 먼저 유행을 선도하느냐도 평판에 대단히 큰 영향을 미친다.

이 화장품을 가장 먼저 발견하고 주변에 권유하는 것만으로도 과연 안목도 좋다는 평판을 얻게 될 것이다.

이러면 가격이 비싼 것도 장점이 된다. 아무나 쉽게 쓰지 못하는 화장품이어야 쓰는 사람의 위상이 높아질 테니까.

"좋아요. 그 제안 받아들이지요."

그녀는 흔쾌히 수락하며 상자를 챙겼다. 독점 계약이 안 된다면 명성이라도 챙기겠다는 심산이었다.

"저는 이만 가 볼게요. 홍보는 걱정하지 마세요."

메리엘은 미적거리지 않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 소문이 나기 전에 빨리 연회에 참석해서 선수를 쳐야 한다.

돌아가자마자 초대장을 모조리 뒤져 가장 날짜가 빠른 모임부터 참석할 생각이었다.

지셀은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살펴 가시길."

그의 어깨 위에 앉은 까마귀도 지셀을 따라 고개를 숙였다.

까악!

* * *

메리엘이 나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장품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졌다.

화장품의 효과는 확인하지도 않고, 그녀가 보증한다는 이유만으로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엄청나게 높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귀족들은 망설이지 않고 화장품을 사들였다.

비싸서 계속 쓰는 건 힘들어도, 메리엘이 쓰는 제품이라고 하니 한 번쯤은 사서 써 볼 만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밀려 들어오는 주문에 클로드와 벨린다는 환호성을 질렀다.

"대박이다! 대박이야!"

저택에는 금화가 산처럼 쌓였다. 이 돈만으로도 영지를 일 년은 먹여 살릴 수 있을 정도였다.

"으하하하! 영주님, 아예 다 때려치우고 그냥 여기서 장사나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게 제일 편하네!"

돈 세는 재미에 빠진 클로드가 헛소리까지 지껄였다.

"이렇게 비싼데도 엄청나게 잘 팔린다고요! 더 만들어 와야 하는 거 아닙니까?"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한다.

왕국 전체로 소문이 퍼지기 전에 미리 수도에 지점을 제대로 내고, 영지에서 주문받은 물량을 각지로 보낼 준비도 하려면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클로드는 물론 주변 사람들 모두가 재촉하며 난리를 피웠지만 지셀은 까딱도 하지 않았다.

"기다려. 아직 할 게 더 남았어."

"남긴 뭐가 남아요! 빨리 영지로 돌아가서 물량 뽑아야 한다니까요?"

클로드가 박박 우겨도 지셀은 요지부동이었다.

"흐음.... 슬슬 소식이 들어올 때가 됐는데. 아직 소문을 못 들은 건가?"

메리엘 덕분에 예상했던 것보다 소문도 빠르게 퍼지고 물건도 금방 팔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진짜로 노리는 상대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며칠이 더 지나고 1차로 가져온 물량이 동날 때쯤, 말끔하게 빼입은 초로의 신사가 저택에 찾아왔다.

"미흡하나마 브랜포드 후작가에서 집사 자리를 맡고 있습니다. 펜리스 남작님 되십니까?"

지셀의 눈이 반짝였다.

기다리던 물고기가 드디어 낚싯줄에 걸려들었다.

* * *

지셀은 브랜포드 후작가에 일부러 선물을 보내지 않았다. 그래야 그쪽에서 직접 찾아올 테니까.

브랜포드 후작은 왕실의 궁내부 장관으로, 델파인 공작가와 대립하는 친왕파의 수장이자 왕국 최고의 권세가다.

왕실의 대소사는 모두 그의 손을 거친다는 평가도 나올 정도였다.

동부의 대영주로서 기반도 단단하고, 입궁 전에 군 지휘관을 역임한 덕분에 군부에도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그런 가문의 집사가 겨우 화장품 몇 개 사자고 지셀에게 찾아오다니. 다른 귀족들이 알면 기겁할 일이었다.

형식적인 인사가 끝나자마자 집사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이 화장품을 쓰면 피부가 깨끗해지는 게 맞습니까?"

"애매한 질문이네. 피부 상태가 좋아지는 효과는 있지. 이미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 있지 않나? 뭐가 알고 싶은 건데?"

"혹시 이걸 써서 피부가 일시적으로 좋아졌다가 다시 나빠질 수도 있습니까?"

"글쎄. 피부는 관리하기 나름이라 꾸준히 쓰는 만큼 효과가 있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집사는 집요할 정도로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성분은 뭔지, 부작용 사례가 없는지 등등.

지셀은 귀찮다는 표정으로 손을 내저으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브랜포드 후작가에서 왔다고 했지. 후작 영애께서 써 보시려는 건가?"

"그건...."

집사가 곤란해하며 말끝을 흐렸다. 지셀이 하찮은 것 보듯 그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뭘 숨겨? 후작 영애께서 가면을 쓰고 집에만 계신다는 얘기는 이미 들었네. 다들 쉬쉬하고 있긴 하지만 그게 어디 숨겨질 일인가? 내가 이곳에 온 지 얼마 안 됐다고 그 정도도 모를 거 같아?"

"...그렇습니다. 아가씨께서 쓰실 예정입니다."

"그래, 솔직히 말하니까 얼마나 좋아."

지셀이 낄낄대며 화장품을 꺼내 놓았다.

"일단 두어 개 가져가서 써 봐. 내 지식을 전부 쏟아부어서 만든 제품이야. 내가 약초학하고 의학에 좀 일가견이 있거든."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다. 어쨌든 지금은 지셀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첨단 지식을 잔뜩 알고 있다.

원리는 모르고 결과만 아는 게 문제지만.

지셀은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이걸 써도 효과가 없다면 다른 방법을 써야 한다는 뜻이니까 그때 다시 얘기해 보자고."

"...알겠습니다."

돌아가는 집사의 뒤에 대고 지셀이 덧붙였다.

"참고로 나는 '영원의 형벌'을 고치는 방법도 알고 있어."

집사는 그 말을 못 들은 척 아예 대꾸도 하지 않았다.

'영원의 형벌'이 불치병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고 있기에, 지셀이 허풍을 떤다 생각한 것이다.

익숙한 반응에 지셀은 입꼬리를 삐죽이며 투덜거렸다.

"사람 참, 못 믿기는. 그때 그 사제라도 데려와야 하나."

* * *

브랜포드 후작은 집사가 가져온 화장품을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이게 요새 유명한 피부 미용 제품인가?"

"네, 에일즈버 백작 부인께서 말씀하신 제품입니다."

브랜포드 후작은 시큰둥하게 중얼거렸다.

"별로 효과가 있을 거 같지는 않군."

왕국을 좌지우지하는 권력가인 그였지만, 최근 신경에 거슬리는 문제가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델파인 공작가.

왕실에 충성하던 델파인 공작이 최근 들어 세력을 이루며 공격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었다.

친왕파는 공작파 귀족들에게 연일 당하며 순식간에 세력이 줄어들어 갔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딸이 앓고 있는 고질적인 피부병이다.

"이것도 효과가 없으면 이제 남은 방법은 없는 건가?"

델파인 공작의 일이 최근의 골칫거리라면 딸의 일은 예전부터 있었던 문제다.

어느 날부터인가 딸의 얼굴과 몸에 반점 같은 게 마구 돋아났다.

그것뿐이라면 모르겠지만, 햇빛에 닿으면 증상이 더 심해져 가려움으로 잠을 못 이룰 정도였다. 밖에 나가는 것도 불가능해졌다.

그렇다고 심각한 병에 걸린 것도 아니었다. 뭐가 문제인지 아무도 이유를 알지 못했다.

사제에게 신성 치료를 받으면 잠깐 호전되지만 그때뿐이고, 금세 다시 재발했다.

효과가 좋다는 약도 죄다 구해서 먹어 봤지만 증상은 여전했다.

"내가 직접 가져다 주겠다."

브랜포드 후작은 천천히 딸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딸은 외부와 관계를 모두 끊고 어두운 방에서 홀로 지내고 있었다.

집안일을 돌보던 사람이 두문불출하고 있으니 집안의 분위기도 우중충해졌다.

다른 사람들에게 흉한 얼굴을 보여 주고 싶지 않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아버지인 자신조차도 갈수록 심해지는 상태를 확인할 때마다 눈이 찌푸려질 정도니까.

하지만 더 이상은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결혼을 더 늦출 수는 없다."

브랜포드 후작은 공작파의 독주를 막아서기 위해 중립 귀족 가문과 정략결혼을 추진했다.

하지만 딸은 계속 시간을 달라며 결혼을 미루고 있었다.

"쯧, 배려해 주는 것도 한계가 있지."

브랜포드 후작도 딸의 마음을 생각해 지금껏 결혼 날짜를 늦춰 왔지만, 언제까지고 미룰 수는 없었다.

델파인 공작가의 세력이 더 커지기 전에 친왕파 세력을 굳건히 할 필요가 있었다.

덜컥.

방문을 열자 촛불 몇 개만이 후작을 반겼다.

창문은 굳게 닫혀 커튼으로 가려져 있고, 비싼 마법 등은 어디로 치웠는지 보이지 않았다.

후작의 딸, 로잘린은 희미한 촛불 빛에 의지해 책을 보고 있었다.

'이래서야 탑에 갇힌 죄수와 다를 게 없군.'

슬쩍 방을 둘러본 브랜포드 후작은 내심 혀를 차면서도 겉으로는 티 내지 않고 무심하게 화장품을 건넸다.

"로잘린, 이걸 써 보거라. 요새 인기가 많다는 미용 크림이다. 피부에 좋다고 하더구나."

로잘린은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게 소용이 있을까요?"

담담했지만,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감정이 느껴지는 말투였다.

브랜포드 후작은 붉게 충혈된 딸의 눈을 잠시 바라보고는 다시 말했다.

"에일즈버 백작 부인께서 추천한 거다."

"...."

그 말에 로잘린은 입을 닫았다.

메리엘이라면 로잘린도 잘 알았다. 어렸을 때부터 동경해 온 사람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확실한 제품만 사용하며 사교계의 유행을 선도해 왔다. 쓸모없는 걸 추천해 줬을 리는 없었다.

"두고 가세요."

"알겠다. 그리고 결혼은 곧 진행할 생각이다. 그렇게 알고 있어라."

그 말에 로잘린이 감정을 꾹꾹 억누르며 답했다.

"이런 상태로 결혼을 하라고요? 이런 꼴로는 평생 사랑받지 못하고 괴물 취급이나 당할 거예요. 제가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사고 무시당하면서 살기를 바라세요?"

브랜포드 후작은 차갑게 그녀의 말을 잘랐다.

"가문을 위한 일이다."

"제 인생은 중요하지 않은가요?"

"가문이 더 중요하다."

그러자 로잘린은 다른 말을 꺼냈다.

"상대측 공자님이 과연 제 얼굴을 보고 만족할까요? 후에 영주에 오르면 강제로 결혼을 밀어붙인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을까요? 그때도 두 가문의 동맹이 공고할 거라 생각하시나요?"

브랜포드 후작은 가소롭다는 듯 말했다.

"제까짓 게 감히 원망해 봤자 어쩌겠느냐. 어차피 가문끼리의 결합은 다 그런 법이다. 영주에 오를 나이가 되면 그 정도 이득은 충분히 계산할 수 있을 터."

로잘린이 개인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반면, 브랜포드 후작은 철저하게 정치적인 관점에서 판단하고 있었다.

어느 한쪽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람마다 추구하는 관계의 성격이 다른 거니까.

브랜포드 후작은 말을 마치고 그대로 몸을 돌려 방에서 나갔다.

"하아...."

로잘린은 한숨을 내쉬고 천천히 일어나 얼굴에 화장품을 바르기 시작했다.

화장품을 바르는지 눈물을 바르는지 구분도 못 할 지경이었다.

* * *

화장품을 바르기 시작하고 며칠 뒤.

로잘린은 전부 포기하고 화장품을 한쪽으로 치워 버렸다.

'역시, 소용없구나.'

화장품을 바르면 피부가 좋아지기는 했지만 반점이 없어지지는 않았다.

울긋불긋한 건 여전한데 피부에 윤기만 흐르니 오히려 더 이상해 보였다.

쨍그랑!

거울을 보던 로잘린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탁자 위에 놓인 잔을 집어 던졌다.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방 밖까지 퍼져 나갔지만, 아무도 로잘린의 방에 접근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어두운 방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그저 언젠가는 이 고통이 끝나기만을 바라면서.

그 시각, 브랜포드 저택의 정문에 누군가가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어이, 후작님 지금 계시지? 다 알아보고 왔으니까 없다고 하지 말고."

경비병은 딱딱한 어투로 방문자에게 물었다.

"누구십니까?"

"펜리스 남작이 찾아왔다고 전해라. 지금 좀 뵙자고."

브랜포드 후작가를 찾아온 사람은 바로 지셀이었다.

125화 제가 한번 해 보겠습니다. (1)

경비병은 무심한 얼굴로 업무 지침에 따라 말했다.

"후작 각하께서는 지금 왕성에...."

"자택에 계신 거 다 알아보고 왔다. 어서 전해라."

"아니, 그게...."

경비병은 당황했다.

브랜포드 후작은 이렇게 무작정 찾아온다고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미리 사람을 보내 약속을 잡고, 몇 달은 기다려야 겨우 만날 수 있다.

지금도 후작을 만나겠다고 기다리고 있는 귀족들만 수십 명이었다.

"일단 방명록에 이름과 용건을 남기시면, 따로 사람이 찾아가 이후 일정을...."

"정말 중요한 일로 왔으니까 안에 기별이라도 넣어 봐라. 그래도 돌아가라고 하면 돌아가겠다."

"아니, 좀.... 후우."

경비병은 한숨을 내쉬며 화를 삭이고 용건을 물었다.

"찾아온 용건을 말씀해 주시면 안에 전달하겠습니다."

"로잘린 아가씨 일 때문에 왔다고 전해. 며칠 전에 여기서 내 화장품을 사 갔는데, 경과도 좀 확인하고 도울 수 있는 부분은 도와줄 생각이다."

로잘린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경비병은 순식간에 표정을 굳혔다.

한때 후작가에서는 로잘린의 피부병을 호전시키기 위해 미용 제품이든 약이든 가리지 않고 찾았다.

욕심에 눈이 먼 자들이 요행을 바라고 찾아와 검증되지 않은 약과 방법들을 추천하고, 아예 엉터리 약을 가져다 팔아먹기도 했다.

로잘린은 매번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자들을 전부 받아 주었다. 그러나 효과는 없었다.

상태가 더 나빠지는 건 예사였고, 독 때문에 죽다 살아난 적도 있었다.

그리고 브랜포드 후작은 딸의 주변에 꼬여 든 벌레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그것을 뻔히 아는 경비병의 눈에 지셀은 알아서 죽을 자리로 기어들어 온 놈으로밖에 안 보였다.

경비병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무슨 뜻인지는 알겠는데.... 그냥 포기하십시오. 자칫 잘못하면 목이 달아납니다."

"나는 괜찮으니까 어서 전해라."

"제가 안 괜찮습니다. 사람을 함부로 들였다가는 저도 죽습니다. 말만 전해도 죽을 겁니다."

경비병은 살려 달라는 듯 애절한 표정으로 사정사정했다.

급기야 눈을 꼭 감고 버티는 경비병을 보고 지셀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러면 집사라도 좀 불러 봐. 며칠 전에 화장품 팔았던 사람이 찾아왔다고. 후작님은 몰라도 집사는 만날 수 있을 거 아냐?"

"그게...."

"쓰읍, 빨리!"

지셀은 마구잡이로 밀어붙였다.

브랜포드 후작은 한번 자리를 비우면 며칠은 보기 힘들다. 마침 집에 있는 지금이 아니면 언제 기회가 생길지 모른다.

결국 경비병은 지셀의 등쌀에 떠밀려 집사를 불러왔다.

집사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지셀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화장품은 써 봤나? 어땠어?"

"소용없었습니다."

지셀은 놀라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내가 좀 알아봤는데, 후작 영애를 치료하려면 화장품 말고 다른 방법을 써야겠더라고."

"다른 방법이라니요?"

"그건... 지금 여기서 할 말은 아닌데. 후작님께 말씀드려야지."

지셀은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선 채 히죽 웃었다.

"지금 당장 후작님에게 전해. 내가 좀 보잔다고, 따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그래도 거절하면 뭐 별수 없지. 누구 손해가 더 클지 모르겠네."

집사가 잠시 고민하다 경고했다.

"허언이면 위험할 겁니다. 후작님은 귀족이라고 봐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지셀은 답답해하며 눈을 찌푸렸다.

"어차피 그쪽은 밑져야 본전 아니야? 빨리 전하기나 해.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귀족답지 않게 경박했지만, 묘하게 자신감이 넘쳤다. 그 모습에 집사는 마음이 흔들렸다.

비록 로잘린에게는 별 효과가 없었지만, 귀족들이 극찬하는 화장품을 직접 만든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해결할 수 있다고 저리도 자신하니 마지막으로 맡겨 봐도 괜찮을 거 같았다.

"우리 쪽에서는 밑져야 본전이지만 남작님에게는 그게 아닐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정 원하신다면, 제가 후작님께 말씀을 드려 보지요."

"그래, 그래. 이제야 좀 말이 통하네."

집사는 그대로 몸을 돌려 브랜포드 후작을 찾아갔다.

집무실에서 잔뜩 쌓인 서류들을 보고 있던 브랜포드 후작이 집사의 보고를 듣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펜리스 남작? 그게 누구냐."

"며칠 전에 사 왔던 화장품을 만든 자입니다. 에일즈버 백작 부인이 뒤를 봐주는 젊은 귀족 말입니다."

"아, 그래. 기억이 났다. 그런데 다짜고짜 날 만나러 왔다고?"

"그렇습니다. 아가씨의 병을 고칠 수 있다고 합니다."

브랜포드 후작이 눈을 가늘게 떴다.

"건방진 놈이구나. 여기가 어디라고 멋대로 찾아와 만나자고 하는 건지."

후작은 딸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말에 신경 쓰기보다, 예고도 없이 자신을 만나러 왔다는 말에 더 불쾌함을 표했다.

약속도 잡지 않고 만나 달라고 할 정도로 이곳이 쉬워 보였던가?

이건 그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돌려보내라. 앞으로도 찾아오지 말라고 확실히 경고해."

후작의 단호한 태도에도 집사는 포기하지 않고 부드럽게 그를 설득했다.

"이제 막 시골에서 올라온 귀족이라 후작님에 대해 잘 모르는 거 같습니다. 그래도 저렇게 자신 있어 하는데 한번 맡겨 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브랜포드 후작은 순간 눈썹을 찡그렸지만, 화를 내지는 않았다.

오랫동안 자신을 모셔 온 집사가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분명 이유가 있을 터였다.

집사는 후작의 마음이 흔들리는 걸 눈치채고 조금 더 간곡하게 청했다.

"요즘 아가씨의 상태가 점점 더 안 좋아지고 있지 않습니까. 펜리스 남작의 화장품이 효과가 좋다는 소문이 근방에 자자합니다. 그런 제품을 직접 만든 귀족이니 색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브랜포드 후작은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글쎄, 그게 의미가 있는가?"

후작도 처음부터 손을 놓고 있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후작가의 권세를 동원해도 로잘린의 병세엔 차도가 없었다.

아버지로서 안타깝긴 하지만, 후작은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딸은 귀족가의 안주인으로서 살게 될 터.

불편하기야 하겠지만, 햇빛을 보지 못하는 것뿐이라면 사는 데 큰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다.

"집안이 편안해야 후작님께서도 바깥일을 하시는 데 마음이 편하지 않겠습니까? 허언이라면 그때 가서 벌을 내리면 됩니다."

집사가 재차 말하자, 후작은 피식 웃었다.

"목을 베면 메리엘이 슬퍼할 텐데."

"부인께서도 이해하실 겁니다. 실패한다면 후작님께 허언을 한 셈이니까요."

후작은 거짓을 고하거나 자신의 권위에 도전한 자를 단 한 번도 용서한 적이 없었다.

메리엘이 뒤를 봐주는 자라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의 위세가 크다고는 하지만, 브랜포드 후작에게는 미치지 못하니까.

"데리고 와라. 만나 보고 돌려보낼지 판단하겠다. 그리고 펜리스 남작에 관한 정보도 가져오도록."

"네, 알겠습니다."

잠시 후, 브랜포드 저택의 문이 활짝 열렸다.

지셀을 감시하고 있던 경비병이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무작정 찾아온 사람을 후작이 받아 주는 일은 드물었기 때문이다.

지셀은 당연한 결과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의기양양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 * *

브랜포드 후작은 상석에 앉아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그가 비꼬는 어조로 물었다.

"요새 화제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 직접 찾아올 줄이야. 그래, 내 딸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고?"

지셀도 구구절절 예의를 따질 생각은 없기에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제가 영애께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겁니다."

"자신감은 대단하다만, 내가 널 어떻게 믿고 딸을 맡기겠느냐?"

"집사에게 듣지 못하셨습니까? 저는 '영원의 형벌'도 고친 적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보셨던 어중이떠중이들하고는 다릅니다."

브랜포드 후작은 천천히 옆에 놓인 서류를 집어 들고 읽었다.

"그래, 레이폴드에서 사제 하나가 그런 소리를 지껄인다는 소문이 있긴 하구나. 하지만 그게 정말 네가 한 일이라는 증거는 없지."

'역시 브랜포드 후작가군. 변방의 영지들까지 지켜보고 있었다니.'

브랜포드 후작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북부의 망나니, 방구석 소드마스터, 허언증, 바보들의 친구, 열등감 덩어리, 미치광이.... 너 같으면 이런 별명이 붙은 사람을 믿을 수 있겠느냐?"

지셀은 표정이 보이지 않게 고개를 숙이며 혀를 찼다.

'꼼꼼하게도 기록해 놨네.'

망나니이니 뭐니 해도 지셀은 영주의 직계다. 당연히 그에 관한 정보도 모아 두었을 것이다. 평판이 좋지 않다는 것마저도 일종의 정보니까.

그는 혹시나 흠이 잡힐까 얼른 표정을 가다듬고 다시 고개를 들어 후작을 마주 보았다.

"영애의 병은 사제들도 치료하지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뭐, 신성력이 만능은 아니죠."

"신전에서 들으면 기겁할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구나."

브랜포드 후작이 흥미로운 것을 발견한 표정으로 의자에 몸을 기댔다.

"너는 내 딸을 본 적도 없다. 그런데 무슨 증상인 줄 어떻게 알고 도와주겠다는 것이냐?"

"이미 알게 모르게 소문이 퍼져 있지 않습니까. 제가 한번 해 보겠습니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브랜포드 후작은 헛웃음을 짓더니 한쪽 손으로 턱을 괴며 물었다.

"겁이 없는 건지, 아니면 이제 막 수도에 올라와서 눈치가 없는 건지 모르겠구나. 그래, 그렇게 말하는 걸 보면 목숨을 걸 각오도 되어 있겠지?"

"사람을 돕는 데도 목숨을 걸어야 합니까?"

"왜, 자신 없느냐?"

브랜포드 후작은 입가에 차가운 웃음을 띠고 말했다.

"페르디움 백작이 변경에서 고생이 많은 걸 알고 있다. 네 아비를 봐서 한 번은 용서해 주겠다. 더 이상 선을 넘지 말고 물러가거라. 여기는 네 영지가 아니다."

페르디움 백작은 비록 찢어지게 가난하기는 하지만, 왕실에 충성하고 명예를 아는 귀족이다.

친왕파 귀족들 사이에서는 페르디움에 지원을 더 늘려야 한다는 말이 나온 적도 있었다.

델파인 공작가와 세력 다툼을 하느라 흐지부지되긴 했지만 말이다.

'한 번 정도는 괜찮겠지.'

브랜포드 후작은 페르디움 백작의 얼굴을 보아서 이번에는 지셀을 용서해 줄 생각이었다.

아들의 무례를 넘어가고 목숨을 살려 주었으니, 지원을 더 해 주지 않은 것을 보상하고도 남을 것이다.

하지만 지셀은 그의 배려를 무시하고 역으로 물었다.

"따님을 치료할 생각이 없으십니까?"

브랜포드 후작은 심드렁하게 답했다.

"치료하면 좋겠지만, 치료하지 못하더라도 상관없다. 생명에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으냐."

"당사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제가 확실히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끝까지 고집을 부리는 지셀 곁에서 벨린다와 클로드만 안색이 핼쑥해졌다.

전전긍긍하는 지셀의 수하들을 흘깃 보고 브랜포드 후작은 피식 웃었다.

수하들이 불안해하는데도 지셀은 제 말을 철회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렇게까지 경고했는데도 굳이 하겠다는 걸 보면 최소한 용기 하나는 알아줄 만했다.

"그래, 그렇게까지 원한다면 한번 해 보거라. 성공하면 적당히 사례하지. 집사."

"네, 후작님."

"펜리스 남작의 치료에 지원을 아끼지 말도록. 일이 끝나면 남작의 처우는 내가 직접 결정하겠다."

"알겠습니다."

"이만 물러들 가라."

브랜포드 후작이 손을 휘저었다. 얼굴에는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의 머릿속에서 딸과 지셀에 대한 생각은 벌써 한구석으로 밀려났다.

후작이 델파인 공작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며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지셀이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적당한 사례는 필요 없습니다."

"뭐?"

자리를 떠나려던 브랜포드 후작이 지셀을 돌아보았다.

"사례가 필요 없다는 뜻이냐? 그건 네가 결정할 게 아니다. 일의 성패에 따라 내가 결정하는 것이다."

브랜포드 후작은 속으로 혀를 차며 집사에게 손을 휘저었다. 병사들이라도 불러 내쫓으라는 뜻이었다.

그때, 기막힌 말이 들려왔다.

"적당한 거 말고, 제가 원하는 걸로 하나 들어주십시오."

126화 제가 한번 해 보겠습니다. (2)

"뭐?"

브랜포드 후작이 잘못 들었나 싶어 눈을 찡그리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석상처럼 굳어 입만 뻐금거리고 있었다.

언제나 침착함을 잃지 않던 후작가의 집사마저도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감히 후작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다니!

왕국의 이인자인 재상도 저렇게 대놓고 말하지는 못한다. 그와 비슷한 위치에 있는 권력자들도 넌지시 그 의중을 비칠 뿐.

후작에게 이렇게 노골적으로 뭔가를 요구하는 미친놈은 단연코 처음이었다.

브랜포드 후작은 몸을 완전히 돌려 지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다시 말해 보거라."

지셀도 당당하게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후작님은 왕국에서 그 위세가 높다고 알고 있습니다. 제가 성공하면 부탁 하나 정도는 들어주실 만하지 않습니까."

"감히 네까짓 놈이 내 딸의 약점을 빌미로 거래를 하겠다는 것이냐?"

"네, 후작님에게는 제 부탁 하나 들어주는 정도야 어려울 거 없지 않습니까?"

맞다, 어려울 건 없다. 아마 어지간한 건 다 들어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딸을 빌미로 자신에게 거래를 거는 꼴을 봐줄 수는 없었다.

브랜포드 후작의 눈에 살기가 깃들기 시작했다.

"장사치다운 제안이지만, 계산은 못 하는 모양이구나. 고작 딸을 치료해 주는 정도로 내게 대가를 요구하다니. 설마 그게 그 정도로 가치 있는 일이라 생각하느냐?"

살얼음 같은 목소리에도 지셀은 개의치 않았다.

"네,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족도 못 지킨다면 권력이 있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놈!"

도발이나 다를 바 없는 말에 다들 경악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오직 브랜포드 후작의 노성만이 주변을 가득 채웠다.

벨린다가 창백한 표정으로 지셀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이 사람 무섭기로 유명한 후작인 거 알잖아요! 왜 자꾸 시비를 걸어요!'

클로드도 반대쪽 소매를 잡아당겼다.

'제발 그만해, 미친놈아....'

눈에서 식은땀이 눈물처럼 흘렀다.

하지만 지셀은 두 사람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고 소매를 휙 잡아 빼며 말했다.

"아, 놔 봐. 후작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정말로 치료를 포기하실 겁니까?"

지셀은 허리를 당당하게 펴고 브랜포드 후작에게 선택권을 넘겼다.

'이거 참... 정말 미친놈인가?'

브랜포드 후작은 헛웃음을 지었다. 너무 황당한 상황을 마주하니 화조차 순간 식어 버렸다.

도발도 이런 도발이 없다.

후작이 권력을 쥔 뒤로 이렇게 당황스러운 상황에 놓인 건 처음이었다.

"크크큭."

브랜포드 후작은 입매를 비틀며 기이한 웃음을 흘렸다.

"좋다. 한번 해 봐라. 만약 성공한다면, 네가 원하는 걸 무엇이든 들어주겠다. 하지만...."

그가 싸늘한 눈으로 지셀을 노려보았다.

"나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대가는 그리 싸지 않다. 네 목숨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뜻이지. 무게를 더 얹어야겠다."

"뭐든 말씀하시지요."

브랜포드 후작이 씹듯이 내뱉었다.

"네 가문을 걸어라."

지셀을 따라온 자들은 얼굴이 모두 창백해졌다.

후작의 말이 주위를 무겁게 짓누르는 것 같았다.

가문을 걸라는 말은, 지셀이 실패하면 페르디움 전체를 망가트리겠다는 뜻이다.

지셀 혼자 책임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지셀은 뭐가 문제냐는 듯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그 정도는 해야 후작님 쪽과 균형이 맞겠군요. 그렇게 하시죠."

브랜포드 후작은 잔인한 웃음을 지었다.

"시간은 얼마나 필요하지?"

"보름이면 충분합니다."

갈수록 점입가경이다.

후작가에서도 일 년이 넘게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보름 만에 해결하겠다고?

브랜포드 후작은 실소를 참으며 집사를 돌아보았다.

"집사."

"네."

"왕실의 재무관에게 보름 뒤에 페르디움의 지원을 끊을 준비를 하라 일러라."

왕이 아님에도 후작은 마치 자신이 왕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그만한 권력이 있었다.

강대한 기반이 있는 대영주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이 자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집사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에게 이런 일은 익숙했다.

살벌한 명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무관장."

이번에는 갑옷을 입은 덩치 좋은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네, 후작 각하."

"수도에 있는 펜리스 남작의 저택을 포위해라. 이 시간 이후로 모든 자의 출입을 금한다."

"알겠습니다."

"이곳에 온 펜리스 남작과 수하들도 보름 동안 일체 외출을 금지한다. 보름 후 결과를 보고 처형 여부를 결정하겠다."

벨린다와 클로드는 얼굴이 순식간에 핼쑥해졌다.

별생각 없이 찾아왔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왕실에서 움직인다면 변방의 영주인 펜리스와 페르디움 따위는 순식간에 박살 날 것이다.

그리고 주요 인물들도 모두 줄줄이 생선 엮듯이 끌려가 목이 달아날 게 뻔했다.

'저 미친 인간 때문에 이게 무슨 일이야.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클로드는 울상을 지으면서도 차마 입을 열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건 지금 장난이 아니다. 평소처럼 주접을 떨며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조용히 지셀의 뒤에 서 있기만 하던 길리언도 눈을 내리깔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실패할 때를 대비해서 수도를 탈출할 방법도 찾아 둬야겠군.'

지셀은 수하들이 속으로 전전긍긍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브랜포드 후작만 뚱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후작은 겁먹은 시늉조차 하지 않는 그를 보며 건조하게 내뱉었다.

"어디 하고 싶은 대로 해 봐라, 지셀 페르디움."

* * *

지셀의 저택이 후작가의 병력에 포위당하게 되면서, 화장품 판매도 중지되었다.

겁을 먹은 귀족가의 하인들은 항의도 못 하고 돌아갔다.

소식을 들은 귀족들 사이에서 난리가 났다.

가뜩이나 요새 물량이 점점 부족해진다는 소문이 돌아 마음이 급한데, 어떤 놈이 감히 귀족들의 행사에 훼방을 놓는단 말인가?

수도에서 힘깨나 쓴다는 귀족들이 직접 저택을 찾아갔다.

"너희들 뭐야? 누가 보냈어? 당장 문 안 열어? 이 새끼들이 여기가 어디인지 알고!"

한 귀족이 저택을 둘러싼 병사들에게 손가락질하며 소리를 쳤다.

하지만 저택을 포위하고 있던 기사는 귀족들이 화를 내는 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저 포효하는 사자가 그려진 브랜포드 후작가의 깃발을 높이 들어 올렸을 뿐.

"...."

그제야 깃발에 수놓인 문장을 확인한 귀족들은 당황해 입을 꾹 다물었다.

저택을 막은 게 브랜포드 후작가인 줄 알았다면 오자마자 소리부터 지르지 않았을 텐데.

아니, 애초에 찾아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귀족들은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후작님께서 남작에게 볼일이 있으셨구먼. 수고들 하시게."

그러고는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

귀족들까지 자리를 뜨고 난 뒤, 저택 주변에는 개미 한 마리도 얼씬대지 않았다.

지셀과 브랜포드 후작의 내기에 대한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다.

이야기를 전해 들은 귀족들은 하나같이 혀를 찼다.

지방에서 올라온 촌놈이 겁도 없이 후작에게 시비를 걸다니.

후작의 성정으로는, 지셀이 실패했다간 바로 목을 날려 버릴 터였다.

귀족들은 지셀이 도박에 성공하기를 빌었다. 딱히 그를 걱정해서라기보다는, 효과 좋은 화장품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메리엘은 지셀과 사업으로 엮여 있는 만큼,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니, 걔는 도대체 왜 그랬대? 차라리 나를 통해서 말을 전했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거 아냐!"

지셀은 메리엘을 통해 여러 귀족을 소개받으면서 나름대로 인맥도 쌓았다.

그녀가 후견인 비슷한 노릇을 하며 지셀의 뒤를 봐준 것이다.

하지만 메리엘이 아무리 수도에서 위세가 높다 해도 브랜포드 후작에게 비할 수는 없었다.

"끄응, 그 사람은 진짜 바늘 하나도 안 들어갈 사람인데. 겁도 없이 무슨 짓이람?"

수도 귀부인들을 죄다 동원한다면 어찌어찌 지셀 하나 정도는 살려 낼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러면 메리엘이 브랜포드 후작에게 정치적으로 빚을 지게 되는 셈이다.

귀족들의 거래란 그런 법이니까.

그녀는 답답한 마음에 손톱만 깨물다가 문득 문제를 깨닫고 남은 화장품을 확인했다.

"다섯 개밖에 안 남았잖아?"

지셀이 선물로 줬던 화장품은 처음 홍보할 때 여기저기 뿌리며 생색을 내는 데 다 썼다. 이제 남은 양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녀는 울상이 되어서는 하녀들에게 웃돈을 주고 남은 화장품을 모두 사들였다.

이런 일은 수도 여기저기서 비슷하게 일어났다.

판매가 완전히 막혀 버리자 다른 귀족들도 하녀들이 쓰다 만 화장품을 구하느라 바빴다.

수도가 이렇게 지셀과 화장품 때문에 들썩이는 동안, 카오르는 뜬금없이 저택 안에 갇힌 채 이만 갈고 있었다.

"젠장, 답답해 미치겠네."

평소 성질대로였다면 바로 포위한 병력을 들이받고 빠져나갔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이렇게 된 이유가 뻔했기 때문이다.

"그 꼴통 영주가 또 사고를 친 게 분명해."

그는 용병들 관리에 저택 경비까지 맡고 있어서 이번에는 지셀과 같이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꽤 오래 곁에서 지켜본 바에 따르면, 뭔가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면 십중팔구는 영주 탓이었다.

"이번에는 유독 심각하긴 한데."

카오르는 인상을 찡그렸다.

저택을 막아선 병력은 그 기세가 범상치 않았다.

저런 실력 있는 자들이 저택을 포위한 걸 보면, 지금 영주도 무척이나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을 터였다.

용병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다가와 물었다.

"여기까지 쳐들어온 걸 보면 대장이 또 사고를 친 모양인데요. 구하러 갈까요?"

"쓰읍, 구하긴 뭘 구해? 너 쟤들 상대로 빠져나갈 자신은 있냐?"

"그건 아니지만...."

"아직은 괜찮을걸. 쟤들도 바로 안 쳐들어오고 저기서 그냥 보고만 있는데 뭘. 그리고... 그 인간이 이렇게 순순히 당하고 있을 리가 없잖아."

"...이미 당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하는 소리지. 이렇게 되면 이유는 둘 중 하나야. 하나는 그 인간도 그냥 얻어터질 정도로 상대가 강하거나...."

"다른 하나는요?"

"꼴통 영주가 상대를 엿 먹이려고 일부러 당해 주고 있는 거지."

"아하."

나름 지셀과 오래 함께한 카오르는 제법 진실에 가까운 추론을 해 냈다.

하지만 추론은 추론일 뿐.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대비를 하긴 해야 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음...."

팔짱까지 끼고 한참을 고민하던 카오르는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술이나 마시자."

"네?"

"그냥 술이나 마시자고. 아, 몰라. 생각 많이 하니까 머리 아파. 영주야 뭐 알아서 잘하겠지. 무슨 일 생기면 그때 가서 생각하자."

용병들은 카오르의 말에 희색이 만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럽시다! 일단 술이나 마시면서 다음 계획을 구상해 보죠!"

"나도 찬성이야! 우리까지 당장 머리 아플 필요는 없잖아?"

"뭐 수틀리면 밖에 있는 놈들 다 때려잡고 도망가면 되겠지! 으하하하!"

용병들은 그냥 오늘을 즐기기로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인들이 수레 한가득 술통을 싣고 저택에 들어갔다.

후작가의 기사는 그 꼴을 보고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언제 공격당할지도 모르는데 술이나 퍼마시면서 논다고? 미친놈들인가?'

후작가에서 보낸 자들이 뭐라고 생각하건, 저택에서는 성대한 술 잔치가 열렸다.

카오르는 술잔을 높이 들고 외쳤다.

"오늘의 걱정은 누가 해결해 준다?"

"내일의 나!"

"내일의 걱정은 누가 해결해 준다?"

"모레의 나!"

"그러면 걱정은 일단 내일로 미루고... 영주의 무사 귀환을 위하여!"

"위하여!"

걱정 없는 사나이들이 낄낄대며 술잔을 부딪쳤다.

127화 결과로 보여 주면 돼. (1)

브랜포드 후작과 대화를 마친 뒤, 지셀과 일행들은 집사를 따라 로잘린을 찾아갔다.

도망칠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는 듯이 후작저 곳곳에 병사들이 빈틈없이 배치되었다.

그 모습을 불안하게 힐긋대던 벨린다가 지셀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속삭였다.

"도련님! 도대체 무슨 생각이에요? 일이 왜 이렇게 커졌냐고요!"

뜬금없이 찾아와서는 딸의 증상을 치료해 줄 테니 원하는 걸 들어 달라니.

누가 들어도 황당하기 이를 데가 없는 제안이었다.

'아니, 원래 이런 사람이긴 했지. 그렇지만 이번에는 상대가 너무 좋지 않아. 왕국 최고의 권력가에게 강매라니!'

귀족들 중에도 성질 더러운 자들은 사용인들이 작은 실수 하나만 해도 목을 날리곤 한다.

권력이 강한 귀족일수록 더욱더 잔인하게 구는 편이다.

'마탑과 똑같이 생각해서는 안 돼. 적어도 마법사들은 함부로 귀족을 죽이려 하지는 않으니까....'

그리고 결정적으로, 브랜포드 후작은 마탑처럼 지셀의 도움이 아쉬운 처지가 아니었다.

'으으, 요새 별일이 없어서 너무 쉽게 마음을 놓았어.'

최근 지셀이 하는 일마다 잘 풀리고 매번 승승장구하다 보니, 그가 무슨 짓을 해도 안일하게 넘긴 게 화근이었다.

'일단 후작가에 찾아오기 전에 무슨 일인지 물어보고 말렸어야 했는데!'

벨린다는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며 지셀을 노려보았다.

길리언은 고개를 숙여 시선을 숨기며 퇴로를 확인했다.

"일이 잘못될 거 같으면 미리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앞장서서 길을 내겠습니다."

모두의 걱정에도 지셀은 그저 웃기만 했다.

여전히 자신만만한 지셀의 미소를 보고 다들 그냥 한숨만 내쉬었다.

언제나처럼 어떻게든 성공하길 비는 수밖에.

클로드는 일이 잘못되면 후작의 딸을 인질로 삼을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후작 성격을 보아하니 안 통할 거 같긴 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지.'

납치를 하려면 납치 대상에 대해서 알아보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브랜포드 후작이야 워낙 유명해서 다른 왕국 사람인 클로드도 알고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후작 영애, 로잘린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클로드는 옆에 가는 집사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아가씨는 어떤 분이신가요?"

"북부에서 오셔서 잘 모르실 수도 있겠군요. 수도에서는 예전에 꽤나 유명하셨습니다."

"뭘로요?"

클로드가 티 나지 않게 입술을 앙다물었다. 설마 뭐 검술이나 마법 이런 건 아니겠지? 그러면 인질로 잡기 힘들어진다.

집사는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무척 총명하셨습니다. 본가로 돌아가신 후작 부인을 대신해서 집안의 대소사를 모두 직접 챙기셨지요."

"그냥 집안일 말고 다른 건 안 하셨고요?"

집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버럭 호통을 쳤다.

"어허, 후작가의 행사를 단순한 집안일이라 치부하시다니요! 한 영지의 총관이란 분이, 귀족가를 관리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모르십니까!"

"아... 죄송...."

클로드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웅얼거렸다. 집사가 그를 노려보다 설명을 이어 갔다.

"크흠, 어쨌든 그것뿐만 아니라 여러 단체를 후원하고 계시기도 합니다."

집사는 자랑스러워하며 로잘린이 얼마나 대단한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리 아가씨에 대해 말하자면...."

지셀의 측근들은 집사의 설명을 듣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일개 개인이 하는 일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그녀에게 붙은 직함이 많았다.

'카르데니아 직물공 길드 후원자.'

'카르데니아 석공 길드 후원자.'

'카르데니아 목수 길드 후원자.'

'카르데니아 조각가 길드 후원자.'

'카르데니아 유리 공예 길드 후원자.'

'카르데니아 자연철학 협회 후원자.'

'카르데니아 천문학 협회 후원자.'

'상냥한 귀부인들의 독서 토론회 (전)부회장.'

'상냥한 귀부인들의 차 품평회 (전)부회장.'

...등등.

자연학과 문학, 예술, 철학 단체에 이르기까지. 그녀가 지분을 쥐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분야는 지대했다.

병에 걸린 뒤에도 여전히 후원을 멈추지 않고 운영에 관여하고 있다고 한다.

클로드는 입을 꾹 다물고 눈알만 이리저리 굴렸다.

'지금 치료하러 가는 사람이 그런 사람이라는 거지. 잘못되면 진짜 다 죽겠는데?'

집사는 이뿐만이 아니라는 듯 열정 넘치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게다가 성격은 또 어떻습니까? 항상 차분하시고 누구에게나 상냥하시고 마음씨도 너무 곱고 여리셔서 험한 말 한 번 입에 안 올리는 분이셨습니다."

"마음씨가 고우시다니, 그건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클로드는 눈을 빛냈다. 그런 성격이라면 실수를 해도 살려 줄지 모른다.

"그럼요. 수도에 사는 어려운 사람들에게도 주기적으로 생필품을 베풀고 계십니다. 병 때문에 칩거만 안 하셨다면 지금쯤 더 많은 일을 하고 계셨을 겁니다."

지셀의 측근들은 어느새 집사의 말에 홀려 감탄만 내뱉고 있었다.

들으면 들을수록 대단한 사람이었다. 아버지인 브랜포드 후작 못지않게 큰 권력을 틀어쥐고 있는 게 아닌가!

하지만 지셀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표정이 심드렁했다.

아니, 아예 아무 관심도 없어 보였다. 집사의 말을 듣는 것 같지도 않았다.

클로드는 그를 흘겨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어디서 저런 자신감이 나오는 건지.'

가끔가다 보이는 저 허세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아가씨의 성격이 좋다니 불행 중 다행이었다.

벨린다도 다소 마음이 놓였는지 조금 편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곧 결혼하신다고 들은 거 같은데 맞나요? 몸이 편찮으신데도 진행할 예정이셨나 봐요?"

브랜포드 후작가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사람들은 수도 없었다.

조만간 후작의 딸이 결혼한다는 소문도 이미 수도에 널리 퍼져 있었다.

수도에 온 지 얼마 안 된 지셀의 일행들도 알고 있을 정도였다.

벨란다의 물음에 집사는 조금 불쾌해하며 답했다.

"솔직히 건강 문제만 아니었어도 그런 가문과 혼담이 오가지는 않았을 겁니다. 상대 공자님은 수도에서도 유명한 한량인데.... 크흠, 내가 무슨 말을."

"아, 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마음에 안 드는 사람과 결혼을 하시는 건가요?"

"아니, 뭐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고...."

집사는 우물쭈물하며 말끝을 흐렸다.

클로드는 속으로 혀를 차며 말을 돌렸다.

"그래도 좋은 분이시라니, 남편분과도 잘 지내실 수 있을 겁니다. 이런 훌륭한 분이 계신 건 후작가의 큰 복입니다. 하하하."

쉬지 않고 칭찬을 이어 가던 집사는 그 말에 안색이 순간 어두워졌다.

"...예전에는 그러셨죠."

"...?"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클로드가 다시 묻기도 전에 일행은 로잘린의 방 앞에 도착했다.

똑똑.

집사가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다. 방 안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야? 아직 식사하기에는 이른 시간인데."

목소리를 들은 클로드는 순간 이상함을 느꼈다.

감정을 억누르는 듯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서 알 수 없는 증오와 원한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뭔가 이상한데. 목소리가 왜 저래?'

이상함을 감지한 것은 클로드뿐만이 아니었다.

지셀 또한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집사는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하려는 듯 헛기침을 하고는 큰 소리로 말했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후작님의 명령으로 아가씨의 피부를 봐 줄 사람이 왔습니다. 펜리스 남작이라고 합니다."

"...돌려보내."

그녀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집사는 이대로 돌아갈 수 없었다.

이미 후작이 지셀에게 치료를 시작하라고 명령했다. 이 저택에서 그 말을 거역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설령 당사자인 로잘린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집사는 크게 한숨을 내쉰 뒤 다시 말했다.

"후작님의 명입니다."

"...돌아가라고 했어."

"죄송합니다. 문을 열겠습니다. 다들 조심하십시오."

"네? 대체 뭘 조심...."

집사는 눈을 꼭 감고 문을 벌컥 열었다. 그러고는 곧바로 몸을 날려 문 뒤로 숨었다.

뒤따라온 사용인들도 집사의 뒤로 후다닥 붙었다.

휘리리릭!

문이 열리자마자 어두운 방 안에서 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날아왔다.

"엥?"

지셀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살짝 옆으로 꺾었다.

정면에서 날아오던 물건은 지셀의 얼굴을 스쳐 지나가 바로 뒤에 있는 클로드에게 향했다.

"으헉!"

클로드는 깜짝 놀라며 눈을 감았다. 다행히 옆에 있던 웬디가 날아오던 물건을 빠르게 낚아챘다.

"촛대?"

웬디의 손에는 화려한 장식이 새겨진 촛대가 들려 있었다.

만약 날아오는 걸 그대로 얼굴에 맞았다면 클로드는 크게 다쳤을 것이다.

그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뭐야! 마음씨가 여리고 곱다며?'

성격이 좋기는커녕, 인간성마저 의심될 정도로 폭력적인 인사법이었다.

귀족가의 영애들은 남들 앞에서는 절대로 이런 짓을 하지 않는다.

이건 그들 자신뿐만 아니라 집안까지 욕을 먹이는 일이니까.

그런데 후작가의 여식이 이런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집사는 민망한 듯 연신 헛기침을 하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흠흠, 원래는 이러시는 분이 아닌데... 요새 조금 신경이 날카로워지셔서...."

'문을 열면서 자연스럽게 피했던 걸 보면 한두 번 당한 일이 아닌 거 같은데?'

사용인들도 집사의 뒤에 바짝 붙어서 벌벌 떨고 있었다.

클로드가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자 집사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따지려고 그가 막 입을 열려던 찰나, 방 안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돌아가라고 했잖아! 또 무슨 치료야! 나 좀 가만히 내버려 두라고!"

휘리리릭!

어두운 공간에서 뭔가가 자꾸 날아온다.

촛대, 책, 컵, 그릇, 액자, 도자기, 향로 등등 무게가 있는 물건이라면 종류를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튀어나왔다.

집사와 사용인들은 여전히 문 옆에 붙어서 피해 있는 상황. 날아오는 물건들은 전부 지셀 일행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그들이 어디 보통 사람들인가. 날아오는 족족 다 피하거나 쳐 냈다.

곧 방 안에서 당황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들 뭐야? 뭐냐고! 죽고 싶어? 찢어 죽이기 전에 당장 안 꺼져? 집사, 뭐 해! 병사들 불러와!"

험한 말은 한 번도 안 해 봤다던 사람 입에서, 찢어 죽인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온다.

욕을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절대 아니었다.

"음...."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지셀은 정말 당황하고 말았다.

전생에 본 기록에는 로잘린 브랜포드가 이렇게 성질이 더러웠다는 말은 없었기 때문이다.

놀란 이유는 다르지만, 일행들도 지셀과 똑같이 얼빠진 표정으로 집사를 바라보았다.

탁.

집사는 은근슬쩍 문을 다시 닫으며 헛기침을 했다.

"크흠, 아가씨께 잠시 열을 식힐 시간을 드려야겠습니다."

클로드가 더 참지 못하고 따졌다.

"아니, 아가씨 성격도 좋고 마음씨도 좋으신 분이라면서요! 험한 말도 안 한다면서요!"

"...예전에 그랬다는 거죠."

"뭐라고요?"

"병이 들기 전에는 정말 천사나 다름없는 분이셨습니다. 믿으십시오."

"와... 어이가 없네."

당당하게 말하는 집사의 모습이 유독 뻔뻔스러워 보였다. 클로드는 황당함에 할 말을 잃었다.

성격이 저렇게 지랄 같은데도, 모시는 아가씨라고 무작정 편을 들어주고 있으니.

잠시 후 방 안이 잠잠해졌다. 집사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이제 좀 진정하셨을 겁니다."

끼익....

집사는 아주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이번에는 다행히 아무것도 날아오지 않았다.

지셀 일행은 그제야 안심하고 방 안의 상황을 조심스레 살폈다.

방 안에는 한 여자가 어둠을 등지고 서 있었다.

그녀가 입은 옷은 후작가의 딸이라는 신분과는 어울리지 않는 수수한 평상복이었다.

얼굴에는 피부가 드러나지 않도록 가면을 뒤집어쓰고, 손에도 장갑을 꼈다.

복도의 불빛이 열린 문을 통해 가면을 비추었다.

그 가면의 틈 사이로, 사람들을 노려보는 매서운 눈빛이 새어 나왔다.

꿀꺽.

모두는 마른침만 삼킬 뿐 섣불리 방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로잘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감정을 억누르는 목소리가 어두운 방 안에 깔렸다.

"돌아가. 다 죽여 버리기 전에."

128화 결과로 보여 주면 돼. (2)

스산한 경고에 다들 어쩔 줄 몰라 했다.

하지만 지셀은 그녀의 경고를 무시하고 방 안으로 성큼 걸음을 옮겼다.

권세 높은 귀족 영애가 사는 공간이라기에는 너절한 공간이었다.

'이런 데서 살고 있다고?'

지셀 일행에게 안 좋은 모습을 보인 게 부끄러운지 집사는 살짝 표정을 굳혔다.

"아가씨, 후작님의 명입니다. 보름 동안 펜리스 남작님이 아가씨의 피부를 치료할 것입니다."

"...."

"의학과 약초학에 조예가 깊으신 분입니다. 수도에 유행하는 화장품도 이분이 직접 만드셨습니다."

"...."

집사가 설명을 이어 가도 로잘린은 아무런 말도 없이 숨만 몰아쉬었다.

가면을 썼기에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풍기는 분위기만 봐도 표정이 어떤지 느껴질 정도였다.

지셀은 그 모습을 보고 혀를 찼다.

'이렇게 살았다는 기록은 없었는데.... 하긴 널리 알려질 만한 이야기는 아니군. 철저히 입단속을 했겠지.'

전생에 본 기록에는 로잘린이 어떻게 생활했는지에 관한 내용은 얼마 없었다. 주로 결혼한 뒤 조용히 숨어 살았다는 말 정도.

그나마 남은 기록도 집사가 말했던 과거의 성격 좋았던 행적뿐이었다.

'뭐, 나하곤 상관없는 일이지. 병만 치료하면 다시 볼 일도 없는 사이에.'

지셀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부드럽게 말했다.

"지셀입니다. 앞으로 아가씨의 병을 치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로잘린이 음산한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

"필요 없으니 나가세요."

얼음장처럼 차가운 말투였다. 그나마 귀족을 상대한다고 존댓말을 써 주는 게 감사할 정도였다.

지셀은 그녀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로잘린의 두 눈에는 원망과 증오가 가득 차 있었다.

'역시 좋지 않아.'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과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섞여 그녀의 마음을 시커멓게 태우고 있었다.

지셀은 이런 눈빛을 보이는 사람들을 자주 보아 왔다.

이런 사람이 참고 참다 결국 폭발하면 여럿 골로 보내곤 한다.

'그래도 어떻게든 억누르고 있는 모양이네.'

전생에도 로잘린이 미쳐서 누군가를 함부로 죽였다는 기록은 없었다.

아마 이런 식으로 자신을 고립시켜 가며 버티는 것 또한 그런 사고를 막기 위해서일지도 몰랐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거부 반응이 너무 과한데?'

병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은 치료해 주겠다는 말을 들으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매달리는 게 정상이다.

이렇게까지 거부하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의아해하는 기색을 눈치챈 집사가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아가씨께서 그간 치료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러시는 겁니다."

"허...."

지셀은 집사가 생략한 말을 알아듣고 혀를 찼다.

'그놈들 때문에 처음 본 나까지 못 믿는 거네.'

로잘린의 마음도 이해는 갔다. 혹시나 부작용으로 어딘가 잘못되고 평생 그렇게 살아야 한다면 죽는 것보다 더 무서울 것이다.

'어쩔 수 없지. 일단은 믿음부터 사는 게 우선이다. 하여튼 어중이떠중이들이 문제라니까.'

지셀은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께서 그간 고생이 많으셨군요. 하지만 저는 그런 의사들과는 다릅니다."

로잘린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물었다.

"어떻게 다르다는 거죠?"

"저는 이 치료에 제 목숨을 걸었습니다."

"풋."

지셀은 정말 진지하게 말했지만 돌아온 건 비웃음뿐이었다.

로잘린은 숨길 생각도 하지 않고 어깨를 들썩이며 웃다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보세요, 남작님. 저를 치료하던 다른 의사들 중에 목숨을 건 사람이 없었을 거 같나요?"

"...."

"부와 명성을 얻어 가려고 찾아온 자들이 하는 말은 항상 뻔하죠. '목숨을 걸고 반드시 영애의 병을 치료하겠습니다!'"

"...."

"그 사람들이 죄다 어떻게 죽었는지 알려 드려야 하나요?"

로잘린은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결국 언성을 높였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지셀의 가슴을 쿡쿡 찌르며 말을 이었다.

"화장품 장사가 잘되니까 본인이 아주 대단하고 특별한 사람 같아요? 뭔가 착각하시나 본데, 당신 목숨은 제가 먹다 버린 음식물 쓰레기와 다를 게 없어요. 걸어 봤자 전혀 가치가 없다는 뜻이죠."

"아, 아가씨! 이러시면 안 됩니다!"

무례한 언사에 집사마저 땀을 뻘뻘 흘리며 만류했다.

하지만 그녀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계속 비아냥거렸다.

"아, 다른 점이 있긴 하네요. 귀족 의사는 없었죠. 남작님이 최초로 목이 날아가는 귀족이 되겠네요. 재미는 있겠어요."

"...."

"뭐, 귀족이라고 해 봐야 그냥 화장품이나 만들어 파는 형편없는 인간이죠. 죽어도 별문제는 없을 거 같은데, 본인 생각은 어떠세요?"

자신의 신분도, 상황도, 주변 사람들도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쉴 틈 없이 쏟아지는 독설에 지셀은 끼어들 틈도 찾지 못하고 얼빠진 표정만 지었다.

'혹시 지금 나한테 화풀이를 하는 건가?'

그동안 다들 그녀를 피해 다녔을 테니 그녀도 쌓인 짜증을 풀 곳이 없었을 터. 이해 못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셀 옆에는 그가 욕먹는 걸 참지 못하는 벨린다가 있었다.

"아가씨! 말씀이 너무 심하시잖아요! 우리 도련님이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초면에 그런 말씀을 하세요!"

그녀가 앞으로 나서며 크게 외쳤다.

로잘린은 벨린다 쪽을 돌아보더니 한참을 말이 없었다.

그리고 거칠어지는 숨소리.

왠지 증오에 가득 찬 로잘린의 눈빛을 보고 벨린다는 당황해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아, 나 뭐 실수한 건가? 가만히 있을걸.'

지셀도 뒤늦게 문제를 깨닫고 로잘린의 기색을 조심스레 살폈다.

지금 벨린다는 화장품을 열심히 발라서 피부에 반짝반짝 윤이 났다.

가뜩이나 피부 문제 때문에 신경질적으로 변한 로잘린이다. 피부가 유난히 좋은 벨린다를 보고 심경이 편할 리가 없었다.

지셀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서서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하하, 아가씨. 잠시만 제 말을 들어...."

"나가."

"아니, 그러지 마시고요. 제가 치료를...."

"나가! 나가라고!"

로잘린은 비명을 지르며 다시 방 안의 물건을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집사가 다급하게 지셀의 팔을 잡아끌며 말했다.

"이, 일단 나가시죠. 아가씨께서 화가 좀 풀리시면 그때 다시 찾아뵙는 게 나을 거 같습니다."

"그래, 그래야겠다."

지셀도 날아오는 물건들을 쳐내며 일단 밖으로 나갔다.

탁.

문이 닫힌 뒤에도 한참 동안 방 안에서 물건이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셀은 턱을 긁으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 화를 가라앉히고 대화가 좀 통해야 치료를 시작할 텐데 말이지."

"그냥 돌아가시죠. 저런 상태인데 무슨 치료를 합니까? 곁에 가지도 못하겠는데요. 치료받을 사람이 싫다는데 브랜포드 후작님도 뭐라고 하지는 못할 겁니다."

클로드의 말에 다른 일행도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지셀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어. 그냥 놔준다는 보장도 없고 말이지."

애초에 목적이 있어서 위험을 무릅쓰고 온 건데 겨우 한 번 거부당했다고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다.

클로드는 답답하다는 듯 혀를 차며 말했다.

"아니, 저런 사람을 도대체 어떻게 설득하려고요. 이미 당한 게 너무 많아서 불신만 남은 상태 같은데요? 말이 안 통해요, 말이."

"으음, 그러니까 일단 화를 좀 가라앉히고...."

"그게 되겠습니까? 이미 병 때문에 속이 썩어 문드러진 거 같은데요."

"...대화를 시도해 봐야지."

"지금도 해 봤는데 안 통하잖아요."

지셀이 인상을 찡그리며 클로드를 노려보았다. 클로드는 움찔하며 시선을 돌리고 딴청을 부렸다.

지셀은 잠시 고민하다가 좋은 해결책을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강제로 치료하자."

사람들은 순간 자기 귀를 의심하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벨린다가 확인차 다시 물었다.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강제로 붙잡고 치료하자고."

"...그래도 되나요?"

"어차피 허락도 받았는데 무슨 상관이야? 결과로 보여 주면 돼. 그렇지?"

지셀이 집사를 돌아보며 동의를 구했다. 집사가 더듬거리며 답했다.

"그, 그래도 강제로 하는 건 좀... 시간을 두고 설득하는 건 어떻습니까?"

"지금 독이 바짝 올라서 대화 자체가 안 되는데 언제 설득을 해? 보름밖에 시간이 없는데?"

"어, 저기... 그게...."

"보름 동안 손가락만 빨다가 죽을 수는 없잖아.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협조나 잘해. 당신이 우리 목숨 책임질 것도 아니잖아?"

"아, 알겠습니다."

집사까지 동의했으니 이제 거칠 건 없었다. 지셀은 바로 지시를 내렸다.

"좋아, 일단 준비할 약재부터 알려 주지. 최상급 만드라고라 뿌리를 매일 두 번씩 먹을 수 있는 양으로 사 오도록 해."

"만드라고라 뿌리 말입니까?"

집사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황당해했다.

만드라고라 뿌리는 자양강장제로 유명하지만, 주로 남자들이 먹는 약재였다.

열기가 워낙 강해 여자들이 먹으면 오히려 몸에 더 안 좋다는 게 정설이었다.

지셀은 사람들이 품은 의문을 짐작하면서도 굳이 설명하지 않고 제 할 말만 했다.

"그래, 후작 영애를 치료하려면 그게 꼭 필요해. 거기에 몇 가지 약초도 더 구해 오고."

집사는 불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브랜포드 후작이 허락한 이상 자신이 반대해 봐야 소용없었다.

* * *

지셀이 요구한 약재들은 대부분 희귀하고 비싼 종류였다.

하지만 후작가에서는 하루는커녕 반나절도 채 지나지 않아 약재를 구해 달여 왔다.

브랜포드 후작가의 재력과 권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감탄하며 지셀은 탕약의 상태를 꼼꼼하게 확인했다.

"좋아, 이제 아가씨에게 가자."

벨린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방 안에는 어떻게 들어가시려고요? 문을 안 열어 주면 손쓸 방법이 없잖아요."

"정 안 되면 부수고 들어가야지. 그래도 모양새가 안 좋으니 그 전에 집사가 힘 좀 써 보지?"

"예? 제가요?"

집사가 당황해서 지셀을 바라보았다.

"그럼 누가 해? 아니면 후작님한테 그냥 없었던 일로 하자고 할까? 책임질 수 있겠어?"

집사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은 다시 우르르 로잘린의 방으로 몰려갔다.

똑똑.

집사가 문을 두드리자마자 방 안에서 로잘린이 짜증을 가득 담아 외쳤다.

"뭐야? 내가 오지 말라고 했지?"

집사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아, 아가씨를 모실 새로운 사용인들을 데려왔습니다."

"뭐? 시키지도 않은 짓을 왜 해!"

"하지만... 요새 사용인들이 조금 부족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새로 뽑아 왔습니다. 앞으로 아가씨를 모시게 될 자들이니 인사는 드려야 할 것 같아서 여쭙는 겁니다."

로잘린은 잠시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아무리 그녀가 사람을 피해 방 안에서만 지내도 전속 하녀들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식사와 목욕물을 준비하고, 입을 옷을 정리하고 방을 청소할 사람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녀들은 최대한 빠르게 일을 처리하려고 노력했지만, 로잘린은 그 짧은 시간도 참지 못했다.

그녀는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생기면 격하게 신경질을 내곤 했다.

그녀에게 당한 사용인들이 겁을 먹거나 울분을 견디다 못해 나가는 일도 잦았다.

"들어오라고 해."

한참 뒤, 로잘린이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천천히 열리고 여자 두 명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은 단아하면서도 기품 있는, 브랜포드 후작가의 전속 사용인 복장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로잘린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벨린다라고 합니다."

"웬디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두 사람의 얼굴을 천천히 살피던 로잘린이 인상을 썼다.

"이게 지금 무슨 짓이지?"

분명 아까 의사란 놈과 함께 있던 여자들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새로 온 사용인이랍시고 나타나다니, 뻔뻔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랑 장난하는 거야? 둘 다 죽고 싶어?"

로잘린이 이를 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벨린다는 입가에 띤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오늘부터 아가씨를 지극정성으로 모시겠습니다. 제가 이런 일에는 경험이 많답니다."

"모시기는 대체 뭘 모신다는 거야?"

"치료를 시작하겠습니다. 마음의 준비를 부탁드립니다."

"뭐? 누구 마음대로...."

로잘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벨린다와 웬디가 번개같이 움직였다.

129화 결과로 보여 주면 돼. (3)

덥썩!

벨린다는 로잘린의 양어깨를 휙 밀어 침대에 강하게 내리눌렀다.

"이게 무슨 짓이야!"

로잘린이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웬디가 그녀의 발을 붙잡아 강하게 내리눌렀다.

"놔! 놓으라고!"

로잘린은 침대 위에서 바둥거렸지만 두 사람의 힘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집사! 뭐해! 병사들을 불러! 이 새끼들 다 잡아가라고 해! 다들 뭐 하는 거야!"

로잘린은 저택이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다.

집사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피했다.

이렇게 강제로 치료하는 건 과하다고 생각하지만, 브랜포드 후작의 명령이 떨어졌으니 치료를 안 할 수도 없었다.

'실패하면 피바람이 불겠구나.'

만약 치료가 실패하면 지셀 일행만 책임을 지고 끝나는 게 아니다.

명령을 외면한 병사들과 사용인들까지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집사는 후작에게 지셀을 추천했던 걸 후회했다. 이렇게까지 일이 엉망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발버둥을 쳐도 안 되고 소리를 질러도 안 통하니 로잘린은 곧 힘이 빠져 버렸다.

그녀가 이를 갈며 숨만 헐떡거리고 있을 때, 지셀이 느긋하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거 무슨 맹수를 잡는 것도 아니고.... 그러게 순순히 치료를 받으시면 좋지 않았습니까."

로잘린은 살기 어린 눈으로 지셀을 노려보며 외쳤다.

"너!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줄 알아? 내가 누구인지 알고!"

"뭐... 치료하러 왔는데 설마 환자가 누군지도 모르겠습니까."

"죽여 버릴 거야!"

"어차피 치료 못 하면 저 죽습니다."

"이... 이 미친 새끼...."

로잘린은 기가 차서 욕도 제대로 내뱉지 못했다.

세상에 이렇게 말이 안 통하는 새끼는 처음 봤다.

"일단 상태를 좀 확인하겠습니다. 어이, 여기 방 좀 밝혀 봐."

지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사용인들이 우르르 방으로 들어와 커튼을 걷고 사방에 불을 밝혔다.

주변이 밝아질수록 가면에 가려진 눈동자의 떨림도 점차 커져 갔다.

"지, 지금 뭘 하려고...."

"잠깐 얼굴 상태를 확인하겠습니다. 가면을 좀 벗어 볼까요?"

"하, 하지 마...!"

지셀이 다가오자 로잘린은 다시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햇빛이 들어오잖아! 지금 가면을 벗을 수는 없어!'

하지만 지셀은 그 거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

"부끄러우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치료하려면 가면은 벗으셔야 합니다."

"필요 없다고!"

"예예, 맞습니다. 가면 같은 건 필요 없죠. 앞으로 이런 흉물스러운 건 다시 쓰지 않으셔도 되게 고쳐 드리겠습니다. 저를 전적으로 믿으셔야 합니다. 믿는 자에게 복이 오나니."

헛소리를 늘어놓으며 가면을 벗긴 지셀은 드러난 얼굴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로잘린의 얼굴은 화상을 입은 것처럼 시뻘겋게 익고 피부가 벗겨져 있었다.

그간 치료를 받으면서 상태가 악화됐다더니, 설마 이렇게 심각할 줄이야.

다른 사람들도 깜짝 놀라며 입을 막았다.

"아악!"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받은 로잘린이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 쳤다.

그 잠깐 사이에 로잘린의 피부는 아까보다 훨씬 상태가 나빠져 있었다.

지셀은 황급히 제 몸으로 로잘린을 가리고는 사용인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빨리 커튼 쳐!"

로잘린은 커튼을 닫고 나서도 한참 동안 진정하지 못하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개, 개자식...."

욕밖에 나오지 않았다. 치료하러 왔다는 놈이 병을 더 키우는 게 말이나 되는가.

로잘린의 살기 가득한 눈빛을 보고 지셀은 살짝 고개를 돌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거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심각한데?'

사용인들이 커튼을 걷는 것을 미리 막지 못한 건 확실히 자신의 실수였다.

하지만 전생에 봤던 기록에는 이렇게까지 상태가 심각하다는 말은 없었다.

그래도 병 자체가 달라진 것은 아니니 생각해 둔 치료법은 통할 것이다.

로잘린이 버틸 수만 있다면 말이다.

"으음, 확인은 끝났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치료를 시작하도록 하죠."

지셀이 손짓하자 대기하던 사용인들이 약을 가지고 왔다.

"이제부터 이 약을 아침, 저녁으로 마실 겁니다."

로잘린은 인상을 찌푸렸다.

약탕에서는 아주 고약한 냄새가 풍겼다. 도대체 무슨 약초를 섞었는지 색도 시커멨다.

"내가... 그딴 걸 마실 거 같아?"

"마시게 될 겁니다."

"...?"

지셀은 한 손으로 약 그릇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목 근육을 몇 번 건드렸다.

그러자 로잘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입이 벌어졌다.

그녀가 아무리 애를 써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지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로잘린의 입 안으로 약물을 쏟아 넣었다.

벌컥벌컥!

다소 흐르긴 했지만 약물은 그녀의 목구멍으로 잘 넘어갔다.

"우우욱!"

그녀는 약이 전부 넘어가자마자 헛구역질을 해 댔다.

혀가 마비될 정도로 충격적인 맛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약을 섞어야 이런 지옥에서 퍼 올린 것 같은 맛이 날 수가 있을까?

전부 토해 내고 싶었지만, 어디를 어떻게 건드렸는지 속에서 올라오지도 않았다.

"개자식... 마셨으니까 이제 풀어! 이제 끝났잖아!"

"끝이라니, 그럴 리가요. 이건 치료를 도와주는 약일 뿐입니다. 본격적인 치료는 시작도 안 했습니다."

"네가 나한테 이러고도 무사할 거 같아?"

"어차피 아가씨를 치료 못 하면 죽는다니까요. 아가씨가 성질을 부리는 건 문제도 아닙니다."

말이 안 통하자 로잘린은 이를 갈았다.

"반드시 죽여 버릴 거야."

"치료가 끝나고 나면 생각이 바뀌실 겁니다."

그녀는 반항해 봐야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숨만 거칠게 몰아쉬었다.

그러나 두 눈에는 정말 지셀을 죽여 버릴 듯이 살기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상황이 안정된 것을 느끼고 집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치료가 가능하겠습니까?"

"뭐... 대충 아는 병이니까."

확신 어린 말에 주변에 있는 사람이 모두 놀랐다.

집사는 다급하게 재차 확인했다.

"정말 이 병을 알고 계시는 겁니까?"

"아, 그렇다니까."

다들 의아해했지만, 지셀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문제를 푸는 원리는 모르지만, 답은 알고 있으니까. 조사를 엄청 많이 했거든.'

브랜포드 후작은 유명한 만큼 정보도 많았다. 로잘린의 병과 치료법에 대해서도 잘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내가 미래에서 다 보고 왔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지셀은 궁금해하는 사람들의 눈빛을 피해 바로 치료를 시작하려고 했다.

하지만 집사는 원인을 알 수 있는 기회를 놓치려 하지 않았다.

"원인이, 원인이 무엇입니까? 유명한 의사며 사제들도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지셀은 내심 당황했다.

'몰라.... 뭐야, 그거....'

사실 원인 따위는 그도 잘 모른다. 문제와 답은 아는데 풀이 과정을 모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연한 일이다.

'그냥 휙 뒤로 넘겨서 답만 봤는데.'

그놈의 학자들은 기록을 어찌나 좋아하는지, 병이 난 원인과 치료법을 찾는 실험 과정을 문서로 수백 장씩 남겨 두었다.

'그거 너무 글이 길었다고....'

아무리 초인의 경지에 올라 기억력이 비약적으로 좋아졌어도 안 본 걸 알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모른다고 할 수는 없는 법.

지셀은 일단 아는 대로 대충 포장해서 넘기기로 했다.

"아, 그게 그러니까... 균형이 무너져서 그래."

"균형이요?"

"그렇지, 아가씨 몸이 너무 차가워서 문제가 생긴 거야."

로잘린의 증상은 차가운 기운으로 마나 로드가 막혀서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러니 치료법도 단순했다. 그 기운만 마나로 녹여서 뚫어 주면 끝난다.

'그 기운이 왜 생긴 건지는 나도 모르는데.'

사람들이 모르는 부분을 꼬치꼬치 캐묻기 전에 지셀은 얼른 말을 끝맺으려 했다.

"그러니까 그 기운을 없애면...."

그때, 로잘린이 키득거리며 지셀을 비웃었다.

"나는 지금도 몸에 열이 많아. 이 돌팔이야."

집사도 끼어들어 한마디를 덧붙였다.

"맞습니다. 아가씨는 몸이 항상 뜨겁고 더위를 잘 타십니다."

그 말에 다들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지셀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러게, 몸이 차가운데 왜 열이 날까?

"아하하, 아가씨 당황하셨어요? 몸이 차가운데 열이 나서 많이 놀라셨구나."

"당황한 건 너겠지."

지셀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뻔뻔하게 대답했다.

"아가씨 몸 안쪽이 너무 차갑다 보니까 열이 밖으로 빠져나가서 그런 겁니다. 가뜩이나 열을 받은 피부에 햇빛까지 닿으니 견디질 못하는 거죠."

지셀은 자기가 아는 이론과 지식을 모조리 때려 박아 그럴듯하게 포장했다.

다들 그럴듯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토... 통했나?'

로잘린마저도 아무런 말이 없는 걸 보면 정말로 통한 모양이었다.

'휴... 의사 아무나 하는 거 아니네.'

지셀은 한시름 놓고 다시 치료를 시작하려고 했다.

그때 가만히 있던 클로드가 끼어들었다.

"그럼 이거 왜 걸리는 거예요?"

'아니, 이 새끼가?'

아, 몰라. 모른다고. 왜 걸리는지까지 내가 어떻게 알아? 그냥 치료해서 고치기만 하면 될 거 아냐!

...라고 쏘아 주고 싶은데 보는 눈이 너무나 많다.

지셀은 부드럽게 웃으며 클로드의 어깨를 잡았다.

"우리 총관이 궁금한 게 참 많구나. 그러니까 이게 왜 걸리냐면...."

"악! 영주님 아파요! 어깨 빠지겠네! 살살 잡아요!"

"...그냥 타고나는 거야."

타고났다고 하니 다들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딱히 반박할 말도 없었다.

'타고났다는데 뭐 어쩔 거야?'

지셀은 그 한마디로 모두의 입을 막았다.

"시간 없으니까 설명은 이쯤 해 두지. 더 묻지 말도록."

그 말에 다들 입맛을 다시며 뒤로 물러났다.

'후, 이제야 시작이군.'

어찌어찌 치료를 시작하게 됐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모를까, 지금처럼 악화된 상태에서 치료하는 건 무척이나 위험하다.

거기다 로잘린이 그를 전혀 믿지 못하는 것도 문제였다.

이 치료는 마음의 대비를 해도 버티기 어려울 정도로 고통스러울 것이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의 고통. 버티지 못하면 정말로 죽을 수도 있었다.

'전생에는 어떻게든 버텨 내긴 한 모양이지만.... 지금은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군. 그때는 끊임없이 멸시당한 분노 덕분에 버틸 수 있었을 텐데.'

아이러니하게도 전생에 이 치료법을 발견한 사람은 로잘린 본인이었다.

그녀는 정략결혼을 한 뒤에도 밖으로 나서지 못하고 숨어 살았다.

권세가의 딸이라 대놓고 함부로 대하지는 않았겠지만, 사방에서 쏘아 보내는 경멸의 눈빛을 그녀가 모를 리는 없었다.

그런 수모를 계속 겪으면 갈수록 독해지는 건 당연한 일.

그녀는 총명한 머리와 강한 집념으로 기어코 치료 방법을 찾아내고 만다.

'하지만 그때 가서 고쳐 봐야 너무 늦었지.'

다행히 병은 고쳤지만, 결국 그 당시의 치료는 반쪽짜리 성공으로 끝나고 만다.

마나 로드가 막혀 있었던 탓에 몸이 망가질 대로 망가져 버린 것이다.

그녀는 기껏 병을 고치고 나서도 밖으로 나서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다가 몇 년 뒤 세상을 떠나 버렸다.

그러니 당장 고통스러워도 버티기를 바라는 수밖에.

'제발 좀 버텨 주십쇼. 실패하면 아가씨만 죽는 게 아닙니다.'

절대 실패해서는 안 된다. 그랬다가는 로잘린도 죽고 자신도 곤란한 상황에 빠질 테니까.

130화 결과로 보여 주면 돼. (4)

'후....'

지셀은 로잘린의 손을 잡고 숨을 가다듬었다.

'지금은 전생에 비해 오기와 정신력도 부족할 테고, 치료 기간도 짧아 그만큼 충격이 클 텐데. 과연 버틸 수 있을지....'

사람도 검처럼 시련을 겪으며 담금질 되어야 강해진다.

망나니였던 자신도 그런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강인한 정신을 얻지 않았던가.

지금의 로잘린은 그저 소심하고 유약한, 흔하디흔한 귀족 영애일 뿐이었다.

'최대한 조심해서 뚫는 수밖에.'

지셀은 로잘린의 몸 안으로 마나를 천천히 흘려 넣었다.

"제 마나를 집어넣으면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질 겁니다. 아파도 잘 버티셔야 합니다. 그래야 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뭐?"

"시작하겠습니다."

갑자기 진지해진 지셀의 목소리에 로잘린은 마른침을 삼켰다.

'설마... 이거 위험한 건가?'

로잘린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뭘 버티라는 건데? 뭐가 아프다는 건데?"

지셀은 대답하지 않고 마나를 움직이는 것에만 집중했다.

아무리 좋은 영약을 먹어도 그 기운을 온전히 몸에 흡수하지는 못한다. 몸에 남는 것은 극소량뿐이다.

'기운이 흩어지기 전에 잡는다.'

지셀의 마나가 순식간에 로잘린의 몸 전체로 퍼지며 약의 기운을 쫓기 시작했다.

'이제 뚫는다.'

열기와 섞인 지셀의 마나가, 그녀의 몸 곳곳에 굳어 있는 차가운 기운을 강제로 뚫기 시작했다.

파가각!

로잘린은 몸 안에서 무언가가 깨지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바로 뒤를 이어 끔찍한 고통이 몰려왔다.

"아아아악!"

온몸을 덮쳐 오는 고통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묵직한 기운이 몸 곳곳을 창으로 찌르는 것 같았다.

아니, 찌른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뾰족하고 날카로운 창이 온 내장을 헤집으며 찢어발기는 것만 같았다.

조금 전 먹었던 약의 역겨운 맛은 머릿속에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살면서 이런 고통은 단연코 겪어 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아플 줄 알았으면 미리 도망쳤을 것이다.

로잘린은 지셀에게서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잡힌 손목을 비틀어 빼며 발버둥 쳤다.

"아아악! 자, 잠깐만!"

시중을 들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집사와 사용인들이 그 모습을 보고 당황했다.

치료를 받는데 왜 저렇게 고통스러워할까?

이거 진짜 돌팔이 아닌가?

"도련님! 이거 정말 괜찮은 거예요?"

벨린다가 발버둥 치는 로잘린의 몸을 꽉 붙잡으며 눈을 꾹 감았다.

식은땀을 흘리며 마나를 통제하던 지셀이 말했다.

"발버둥 치면 더 아프고 위험합니다. 저를 믿고 참으셔야 합니다."

"싫어! 제발! 제발 그만해! 아아아아악!"

애초에 믿음도 없는 관계다. 아무리 믿고 버티라고 해 봤자 쉽게 될 리가 없다.

고통에 괴로워하는 그녀를 보며 지셀 또한 표정을 굳혔다.

'역시 쉽지 않아.'

답을 알고 있기에 자신 있게 시작했지만 그게 쉽다는 뜻은 아니다.

'시간도 최대한 단축하고 효과도 확실한 방법을 쓰고 있긴 하지만.... 고통은 그대로일 테지.'

그녀가 과연 끝까지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로잘린의 꽉 깨문 입술에서 피가 터졌다. 하지만 다른 고통이 더 심해 입술의 상처는 의식하지도 못했다.

"으으으윽!"

그녀의 몸이 격렬하게 떨렸다. 신체 내부의 상태를 확인한 지셀이 바로 손을 뗐다.

만약 여기서 더 무리했다가는 로잘린의 상태가 위험해질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원래 목표보다 훨씬 더 적은 부분만 뚫고 멈췄다.

이런 경우가 있을 가능성까지 계산해서 기간을 보름으로 잡았지만 지금 보니 그것도 조금 빠듯해 보였다.

"이번에는 여기까지 하시죠. 잘 참으셨습니다."

생각보다 진도가 안 나갔지만, 아직 첫날일 뿐이다.

조금 더 속도를 내면 충분히 보름 안에 끝낼 수 있다.

문제는 그녀가 과연 끝까지 버틸 수 있냐는 것.

"저녁에 다시 치료를 시작하겠습니다."

로잘린은 숨만 헐떡이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벨린다와 웬디가 조심스럽게 제압을 풀자 그녀는 그대로 침대에 쓰러지고 말았다.

치료가 끝난 거 같자 집사는 다급하게 말했다.

"어서 아가씨를 살펴라."

사용인들이 재빨리 다가가 그녀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대충 정리가 끝나자 지셀은 화장품을 듬뿍 떠서 로잘린의 얼굴에 덕지덕지 바르기 시작했다.

어찌나 많이 바르던지 이 상태면 하루에 한 통씩 쓸 기세였다.

그걸 본 집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저기 너무 많이 바르는 거 아닙니까?"

"이 정도는 발라 줘야 해."

기절한 듯이 누워 있던 로잘린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그건... 발라봤는데 소용없었어.... 이 돌팔이 새끼야...."

"몸 안쪽의 기운을 제대로 잡지 않아서 그런 겁니다. 이 화장품은 치료가 끝날 때까지 피부의 열기를 잡아 줘서 빠르게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효과 자체는 거짓말이 아니지만, 이 정도로 많이 바를 필요는 없었다.

'부가 수익을 챙길 수 있는 기회인데 놓칠 수 없지.'

지셀은 내심 미소를 지었다.

화장품을 매일 이렇게 바르면 상당히 많이 필요할 것이다.

지셀은 로잘린의 치료가 끝나면 치료비를 칼같이 받아 낼 셈이었다.

돈 많은 집이니 화장품 몇 통 값 정도는 별말 없이 낼 거다.

속으로 희희낙락하는 지셀을 보며 로잘린은 이를 갈았다.

화장품을 바르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보름이 아니라 일 년도 발라 줄 수 있었다.

그 고약한 약도 먹어야 한다면 먹을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고통은 정말,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이걸... 또 한다고?"

"네."

"보름 내내...?"

"네."

"꺼져.... 제발... 그만해...."

그녀는 움직일 기력도 없어서 눈물만 글썽이며 중얼거렸다.

도대체 이런 고통을 어떻게 보름이나 버틴단 말인가!

누가 와서 제발 눈앞의 이 새끼를 죽여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지셀은 못 들은 척 다시 가면을 그녀의 얼굴에 씌워 주고 말했다.

"그럼 저녁때 다시 뵙겠습니다. 다들 아가씨의 방을 잘 지키도록."

용병들은 로잘린이 방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교대로 문 앞을 지켰다.

집사는 이걸 계속해도 되는지 불안했지만 당장 말리지는 않았다.

집사가 신경을 써 준 덕분에 지셀과 일행들은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

식사 시간에는 최고급 음식만 나왔고, 갈아입으라고 주는 옷은 명품 중의 명품뿐이었다.

일행들이 손만 살짝 들어도 원하는 게 바로 앞에 준비되었다.

그러나 일행들은 천국과도 같은 대접을 받으면서도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아아아아악!"

바로 로잘린의 고통 때문이었다.

막힌 마나 로드를 뚫어 갈수록 그녀의 비명 소리도 커져만 갔다.

"그만! 제발 그만하라고! 아아악!"

"조금만 더 버티십시오!"

지셀이 아무리 말해도 그녀의 귀에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지금 자신이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게 치료일 리가 없었다.

"죽여 버릴 거야! 반드시 죽여 버릴 거야! 아아아악! 멈춰!"

"지금 바로잡지 않으면 진짜 죽을 겁니다."

"필요 없으니까 멈추라고!"

거부와 협박이 이어졌지만 지셀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는 공격 대상을 바꿨다.

"당장 이딴 약 따위는 그만 가져와. 보름 뒤에 내가 널 죽여 버리기 전에."

약을 준비해 온 사용인들은 로잘린의 협박을 받고 얼굴이 창백해졌다.

브랜포드 후작이 지셀에게 협조하라고 했으니 그의 요청을 거부할 수는 없다.

일을 그만두고 도망가면 후작의 명을 어겼으니 죽는다.

하지만 계속해도 아가씨에게 죽는다.

"살려 주십시오!"

사용인들은 황급히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옆에서 지켜보던 집사가 지셀을 말렸다.

"일단 잠시 멈추시지요. 아가씨께서 이렇게 힘들어하시고 거부를 하시니 후작님과 다시 상의하는 게...."

지셀이 집사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을 끊었다.

"잠시 멈추자고? 거부? 다시 상의?"

그는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띠었다.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돼? 지금 이걸 멈출 수 있을 것 같아?"

"그, 그게...."

"헛소리하지 마. 나는 지금 여기에 내 목숨과 가문까지 걸었어."

이들을 설득하겠다고 실랑이하며 시간을 끌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다들 이도 저도 못 하는 상황을 두고 볼 수만도 없었다.

지셀이 사용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약재와 도구들을 모두 이 방으로 가져와라. 앞으로 내가 직접 약을 준비하겠다."

"직접... 말씀입니까?"

집사가 민망한 듯 눈치를 봤다.

귀족인 지셀이 그런 허드렛일까지 맡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후작가의 체면이 크게 떨어질 것이다.

하지만 아가씨가 이 정도로 강경하게 나오는데 달리 방법이 없긴 했다.

"으으으...."

로잘린은 살기 어린 눈으로 지셀을 노려보았다.

자신의 명령이 저놈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일국의 왕자라 할지라도 감히 자신을 이렇게 대할 수는 없었다.

"그만하라고! 말귀를 못 알아들어? 내가 그만하라고 하잖아!"

"치료를 시작하겠습니다."

"필요 없어! 내 얼굴이야! 필요 없다고! 다 꺼져! 어디서 이런 돌팔이를 데리고 와서!"

이런 거추장스러운 실랑이를 받아 줄 지셀이 아니다.

그는 바로 로잘린의 손목을 붙잡았다.

"놔! 놓으라고! 죽여 버릴 거야! 아버지 불러와! 당장 불러오라고!"

그녀는 다시 발버둥을 쳤지만 이미 벨린다와 웬디에게 제압당한 상태라 소용이 없었다.

지셀은 이전에 그랬듯 강제로 약을 먹이고 치료를 시작했다.

"아아아아악!"

어떻게든 발버둥 치며 피하려고 했던 의지마저도 몸속을 헤집는 통증에 무너졌다.

로잘린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모든 걸 놓아 버렸다.

"커억, 컥!"

그때였다. 로잘린의 입에서 피가 새어 나왔다. 희번덕거리던 눈동자도 눈꺼풀에 가려졌다.

"아가씨!"

옆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지켜보던 집사가 경악의 비명을 질렀다.

"으으으으윽!"

그녀는 죽음이 엄습해 오는 공포를 느끼고 비명처럼 신음을 흘렸다.

'더, 더 이상은....'

그 순간 지셀의 표정도 왈칵 일그러졌다.

'젠장, 더 하면 죽겠군.'

지셀은 이를 악물고 마나를 조금씩 줄여 나갔다.

그가 실수한 건 아니었다. 그녀의 마나 로드가 뚫는 힘을 버티지 못하고 찢어진 것이었다.

가뜩이나 칩거 생활을 오래 하며 체력이 약해진 몸에 충격까지 더해지니 속이 진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예 포기해 버린 탓도 있지.'

그간 로잘린이 치료를 거부하긴 했지만 그건 싫은 걸 피하려는 의지는 남아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계속되는 고통으로 그런 의지마저도 약해진 탓에 충격을 버티지 못하게 된 것이다.

로잘린의 몸과 정신이 한계에 다다른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된 이상 상대방이 죽지 않도록 더 조심스럽게, 천천히 치료해야 한다.

'위험해. 이러다가는 시간 안에 못 끝내겠는데.'

시간을 잘못 잡은 걸까?

아니다. 시간은 부족하지 않았다.

상태가 기록보다 나빠서?

생각보다 나쁜 건 맞지만 치료할 수 없는 수준은 아니었다.

답은 하나.

로잘린의 의지가 문제였다.

치료를 받을 생각이 없으니 몸이 버틸 수 있는 한계보다 더 일찍 포기해 버린다.

로잘린을 붙잡고 있던 벨린다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도련님! 멈춰야 해요!"

131화 결과로 보여 주면 돼. (5)

"쿨럭! 컥!"

로잘린은 눈이 풀린 채 연신 피를 토했다.

벨린다와 웬디가 힘을 풀었음에도 그녀는 더 이상 발버둥 치거나 빠져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흐느적거리며 입가에서 피만 토해 낼 뿐이었다.

"그만해.... 미친놈아...."

가느다랗게 중얼거리고 로잘린은 결국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벨린다가 다시 다급하게 외쳤다.

"도련님!"

"알아, 거의 끝나 가."

지셀은 소량의 마나로 찢어진 마나 로드를 감싸 보호하는 식으로 조치했다.

다른 사람의 몸에 마나를 남겨 두면 그 사람의 마나와 충돌할 위험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방도가 없었다.

용병왕 시절, 상황이 급박할 때는 가끔 이런 식으로 치료하기도 했다.

상황이 지금보다 나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후...."

지셀은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치료는 여기까지다. 더 진행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아가씨! 아가씨!"

지셀이 물러나자마자 집사와 사용인들이 우르르 로잘린 곁으로 달려갔다.

집사는 입 안에 고인 피까지 모두 빼내고 닦은 뒤에야 분노에 찬 눈으로 소리를 질렀다.

"이게 무슨 치료입니까! 정말 아가씨를 죽일 셈입니까!"

피를 토한 건 몸속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다. 도대체 얼굴을 고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속을 뒤집었단 말인가?

'멈춰야 한다. 이대로는 아가씨의 목숨이 위험해!'

"제가 후작님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쯤에서 멈추십시오!"

"그럴 순 없어."

"그만하십시오! 더 이상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집사가 난리를 치는데도 지셀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오히려 차가운 표정으로 반문했다.

"당신이 후작보다 위인가?"

"뭐, 뭐라고요?"

"후작이 허락했는데 멈추긴 누구 마음대로 멈춰?"

"아니, 하지만...."

"어차피 아가씨는 이 상태로 두면 오래 못 산다. 젊은 나이에 요절하는 걸 보고 싶지 않으면 방해하지 마라."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요! 그리고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당신하고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지셀은 피식 웃으며 답했다.

"왜 상관이 없어? 이번 일에 얼마나 큰 게 걸려 있는데."

"이이이익!"

집사에게는 이 일을 멈출 권한이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분노를 토해 내는 게 전부였다.

지셀은 시끄럽게 떠드는 집사를 무시하고 로잘린의 얼굴에 화장품을 발랐다.

가면을 다시 씌우는 동안에도 그녀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숨만 몰아쉬며 누워 있을 뿐.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던 지셀은 착잡한 목소리로 말했다.

"치료는 이제 멈출 수 없다."

몸속을 헤집을 대로 헤집어 놓았다. 만약 이대로 멈춘다면 몸 상태는 치료를 시작하기 전보다 더 심각해질 것이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끝까지 가 보는 수밖에.

* * *

다음 치료가 시작되기 전, 집사는 씩씩거리며 기사단장을 찾아갔다.

'위험한 놈이다. 실패했을 때도 순순히 잡힐 놈 같지 않아. 망나니라는 소문이 괜히 난 게 아닌 거지. 사고를 치기 전에 단단히 대비를 해야겠어.'

집사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사고가 터지면 바로 지셀 일행을 제압할 수 있게 준비해 두기로 했다.

"톨레오 경! 잠시 시간이 되십니까?"

"오, 무슨 일이십니까?"

후작가의 기사단장 톨레오는 집사를 정중하게 맞이했다.

대외적인 직급은 자신이 더 높아도 브랜포드 후작의 심복을 함부로 무시할 수는 없었다.

집사는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지금 아가씨를 치료하러 온 사람에 대해서 할 말이 있습니다."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아무래도 대비를 조금 강화해야 할 거 같아서 말입니다."

톨레오는 뭐가 문제냐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이미 일이 실패했을 때를 대비해서 병사를 배치하지 않았습니까?"

"그걸로는 조금 부족할 거 같습니다. 저택의 경비를 강화하고 기사들을 빌려주십시오."

"흠, 그건 너무 과하지 않겠습니까?"

집사는 고개를 저으며 그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아가씨가 피를 토했다는 말을 듣고 톨레오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펜리스 남작이 비록 망나니라 하나 그 수하들은 이번에 전쟁을 경험하고 승리한 자들입니다."

"고작 변경의 작은 다툼이었을 뿐입니다."

"이 늙은이의 감이라 해 두지요. 몇몇은 기세도 좋고, 후작가의 위세를 보고서도 별로 주눅이 들지 않은 것 같더이다."

집사가 진중한 어조로 경고했다.

"흠, 북부의 촌놈들이라 이곳에 대해 잘 몰라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알겠습니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확실하게 저택을 포위하겠습니다. 실력 좋은 놈들도 몇 명 뽑아 가까이 붙여 주고요."

"고맙습니다. 그럼 전 다시 아가씨께 가 보겠습니다."

떠나는 집사의 뒤에서 톨레오가 조용히 손짓했다. 그 신호를 보고 기사 네 명이 자연스럽게 집사의 뒤를 따라갔다.

그때를 기점으로 저택의 경비는 더욱더 강화되었다.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도망치지 못할 정도로.

* * *

지셀이 다시 로잘린의 방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집사가 기사들을 끌고 돌아왔다.

그 모습을 본 지셀이 입가에 비웃음을 띤 채 물었다.

"방해할 생각인가?"

"위험하면 바로 개입할 생각입니다."

"치료 중에 방해하면 아가씨의 목숨이 위험할 테니 잘 판단해라."

집사는 이를 갈았다.

마나를 넣어서 치료하는 중에는 건들면 안 된다.

한마디로 그 시간 동안은 아가씨가 인질이나 마찬가지란 뜻이었다.

지셀은 집사가 무슨 반응을 보이든 아랑곳하지 않고 방 안에 들어갔다.

로잘린은 평소처럼 발광하지도 않고 그냥 침대에 상체를 기대고 앉아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빈 허공만을 바라보는 그녀에게 지셀이 무심하게 말했다.

"치료를 시작하겠습니다. 이번에도 잘 버티셔야 합니다."

벨린다와 웬디가 다 죽어가는 표정으로 로잘린에게 다가갔다.

평소처럼 붙잡으려고 할 때, 로잘린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잠깐."

두 사람이 걸음을 멈추고 어떻게 하냐는 듯 지셀을 바라보았다.

지셀은 살짝 고개를 끄덕여 그들을 뒤로 물렸다.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묻고 싶은 게 있어."

"무엇입니까?"

"이 치료.... 죽을 수도 있지?"

지셀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못 버티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단지 고통스러운 정도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말하자 집사와 기사들의 얼굴이 분노로 물들었다.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숨기고 치료를 시작했단 말인가!

'네놈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말아라.'

집사는 입술을 실룩거리며 숨을 가다듬었다.

반면 로잘린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참 웃기는 상황이다. 죽기 싫어서 치료를 거부했는데, 죽을 수도 있다니.

아버지는 자신의 의견을 물어보지도 않고 허락을 했다.

눈앞에 있는 의사란 놈은 하기 싫다는 데도 끝까지 하겠단다.

"그런데... 지금 치료를 안 해도 어차피 죽는다고?"

"그것도 맞습니다. 몸이 점점 약해져 나중에는 거동도 힘들어질 겁니다."

그녀는 지셀의 대답에 피식 웃었다.

"사기꾼 같아서 도무지 믿을 수가 없네."

"믿지 않으셔도 사실입니다."

지셀은 굳이 그녀를 설득할 생각이 없었다.

미래에 죽는다고 아무리 말해 봤자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왜 가문과 목숨까지 걸고 이렇게까지 하는지는 물어보지 않을게. 어차피 아버지한테 원하는 게 있으니 내 병을 이용하는 거겠지."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 치료를 버틸 수 있을까? 아까도 난 분명 죽을 뻔했는데?"

"의지만 있으면 버틸 수 있습니다."

무작정 정신력으로 버텨 보라는 뜻이 아니다.

그녀는 전생에 이 치료를 견뎌 내었다. 더 조잡하고 더 고통스럽고 더 오래 걸리는 치료를 말이다.

분명 버틸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 그게 지금은 드러나지 않아서 문제지.

로잘린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버티지 못하면 죽는 거고?"

"매우 높은 확률로요."

"기절이라도 시키고 하는 건 어때?"

"그럼 더 높은 확률로 죽습니다."

의식을 잃은 채로 진행하다가는 갑작스럽게 숨이 끊어질 수도 있다.

반드시 깨어 있는 상태에서, 본인의 의지로 버텨야 한다.

"...말은 참 쉽네. 지금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사흘 지났습니다."

"사흘, 사흘이라...."

고작 사흘밖에 지나지 않았다니.

그렇다면 이 짓을 열흘이나 넘게 더 해야 한다는 거 아닌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러면 시작하기 전에 몸이 괜찮은지나 확인해 봐. 나는 아직도 속이 안 좋은데 정말 치료해도 되겠어?"

지셀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평소처럼 의자를 끌어 옆에 앉아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눈을 감고 천천히 마나를 흘려보내 꼼꼼하게 몸 안을 살폈다.

'나쁘진 않군.'

응급처치가 잘 통했는지 상태는 그럭저럭 괜찮아져 있었다. 이 정도면 이 악물고 악으로 깡으로 버틸 만했다.

'평소와는 분위기가 조금 다르군. 어차피 벗어날 수 없으니 생각이 바뀐 건가?'

차라리 반항을 포기하고 얌전히 믿고 따라와 주면 좋으련만.

시간이 조금 빠듯하긴 하지만, 로잘린만 버텨 주면 완치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오늘은 잘 넘어갔으면 좋겠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지셀도 한 번 치료할 때마다 진이 다 빠지고 있었다.

그 정도로 이 치료 방식은 엄청난 집중과 심력을 소모하는 것이다.

지셀이 천천히 마나를 거두며 손을 떼려 하는 그때였다.

로잘린은 자유로웠던 오른손을 옆에 있는 큰 베개 밑으로 밀어 넣었다.

"응?"

너무 몰입하느라 순간 그 움직임을 놓쳤던 지셀이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로잘린의 손에 들린 화려한 단검이 그의 관자놀이를 향해 빠르게 꽂혔다.

"도련님!"

"영주님!"

"으허헉!"

그 순간, 벨린다와 길리언, 가까이 있던 집사마저 기겁하며 소리쳤다.

툭.

지셀은 가볍게 손가락 사이로 단검을 붙잡고 수하들을 돌아보았다.

"뭐? 왜?"

"아니.... 조심하시라고요."

"에이, 내가 이런 공격에 당할 사람인가."

로잘린이 이를 갈며 말했다.

"화장품도 만들고, 마나도 다룰 줄 알고, 검술도 익힌 거 같고.... 당신, 의사 주제에 별걸 다 할 줄 아네?"

지셀이 어깨를 으쓱하며 젠체했다.

"제가 좀 다재다능합니다."

"마지막 경고야. 이딴 치료는 그만해. 이건 치료가 아니라 고문이야."

"아가씨의 병은 이렇게 치료해야 합니다."

"치료? 이 짓을 계속하다가는 정말 죽고 말 거라고!"

두 사람은 말을 멈춘 채 서로를 노려보았다.

주변 사람들도 두 사람의 대치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흠?'

지셀은 가면에 가린 로잘린의 눈을 보고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두 눈에는 살의와 광기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지셀이 묘한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죽기 싫다는 분이 항상 머리맡에 칼을 품고 계셨군요."

"...."

"사실은 이렇게 살기 싫은 게 아닙니까? 이런 꼴로 사느니 차라리 죽고 싶다고 생각하고 계신 거잖습니까."

"...."

로잘린의 입매가 기이하게 비틀렸다. 그녀의 눈은 여전히 살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132화 결과로 보여 주면 돼. (6)

지셀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평생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지만, 막상 죽기도 두려우신 거겠죠. 뭐, 잘하신 겁니다. 이도 저도 아닌 그런 마음으로는 칼을 휘둘러 봐야 겉가죽만 조금 베이고 말 테니 말입니다."

"...입만 산 돌팔이 새끼."

두 사람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집사는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고 분노를 토했다.

"말씀이 과하십니다!"

지셀은 그를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정말 죽을 거 같아서 걱정되십니까?"

"그만하시오! 남작!"

"스스로는 결단을 내리지 못하시겠다면 제가 대신 정해 드리지요. 어차피 죽을 거라면, 차라리 마지막 희망을 품고 치료를 받다가 죽으십시오."

"펜리스 남작!"

분위기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집사와 기사들이 흉흉한 기세를 내뿜었다.

지셀의 측근들도 그에 대응하듯 기세를 내뿜으며 대치하기 시작했다.

그때,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브랜포드 후작과 기사단장 톨레오가 나타났다.

"후작님!"

집사는 반색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브랜포드 후작을 찾아가 지셀을 추천한 건 자신의 실수였다고 사죄의 말을 올렸다.

아가씨의 생명이 위험할지도 모르니 치료를 당장 멈춰야 한다고도 말했다.

그 말에 브랜포드 후작도 직접 상황을 확인하러 치료 시간에 맞춰 찾아온 것이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대체 이게 무슨 꼴이냐. 마녀사냥이라도 하는 중인가?"

로잘린은 머리가 산발이 되고, 옷 앞섶에는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침대에도 피가 범벅이었으니 그렇게 느낄 만도 했다.

"아버지...."

로잘린은 브랜포드 후작을 보고도 전혀 반가워하지 않았다.

자신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멋대로 치료를 진행하는 사람이다.

아무리 귀족가의 일원으로서 가주의 명에 따라야 한다고 해도, 머리끝까지 솟아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딸이 피 토하는 걸 구경이라도 하러 오셨나요? 아니면 시집을 보내야 할 상품이 멀쩡한지 확인이라도 하러 오셨나요?"

단검까지 들고 눈을 희번덕거리며 말하는 그녀를 보고 모두가 숨을 들이켰다.

"아, 아가씨! 가주님께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집사가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예전에는 그렇게 상냥하고 품격 높았던 아가씨가 이 지경이 되다니!

병에 걸린 뒤로 성격이 날카로워진 것도 있지만, 아무래도 저 지셀이란 놈 때문에 더 심해진 거 같았다.

로잘린의 사나운 말투에 브랜포드 후작은 눈썹을 살짝 찡그리고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집사 말대로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이는군. 위험한 거 같으니 원한다면 치료를 중단하겠다."

충격적인 선언에 로잘린은 당황해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지셀은 겉으로 티 나지 않게 살짝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이제 겨우 독심을 갖췄는데 치료를 중단해도 된다니.

가뜩이나 치료에 반발하던 로잘린이 그 제안을 거부할 리가 없었다.

'여기까지인가?'

본인이 강한 의지로 버티지 않으면 이 치료는 버틸 수가 없다.

전생의 그녀는 죽음의 공포와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할 만큼 단단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필요한 건 다른 쪽에서 알아봐야겠군.'

브랜포드 후작에게 부탁할 게 몇 가지 있었지만 이제 글렀다. 다른 기회나 방법을 노려 볼 수밖에 없다.

그때, 침묵을 지키던 로잘린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제가 그만두면 펜리스 남작님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브랜포드 후작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네가 거부했으니 그를 구속할 명분은 없다. 명분은 펜리스 남작에게 있으니 그는 그대로 돌아갈 것이다."

그 말에 집사는 조금 아쉬운 표정을, 지셀의 측근들은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후작씩이나 되는 사람이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을 번복하지는 않을 터였다.

하지만 로잘린은 가면을 붙잡고 헛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들 자기 멋대로... 그렇게 날 모욕하고 고통스럽게 했는데 멀쩡히 떠난다고?"

웃는지 우는지 모르게 어깨를 들썩거리던 그녀는 고개를 들고 지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당신, 정말 마음에 안 들어. 뭐든 다 안다는 양 지껄이는 것도, 당신만이 옳다는 듯 밀어붙이는 것도."

회귀했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 지셀은 그저 침묵할 뿐이었다.

"이 엉터리 치료도 믿을 수가 없어.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 게 어떻게 치료야?"

"어차피 끝난 일 아닙니까. 믿지 못하겠다 하셔도, 이제 와서 그런 말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 말에 로잘린은 이를 갈며 분노를 토해 냈다.

"끝내? 시작은 아버지와 네놈이 멋대로 해 놓고, 누구 마음대로 끝내! 내가 하라면 하고 그만하자면 그만하는 인형처럼 보여?"

'응?'

챙그랑.

그녀는 바닥으로 단검을 집어 던지고 브랜포드 후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치료는 계속할 거예요."

"아가씨! 정말 죽을 수도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갑작스럽게 태세를 전환한 로잘린의 발언에 집사가 깜짝 놀랐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하기 싫다더니 갑자기 왜 저런단 말인가?

그녀는 사람들의 반응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치료에 실패하면 저 돌팔이는 당연히 가만두지 않으시겠죠? 얼마나 고통스럽게 죽일지는 제가 정할 거예요."

브랜포드 후작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네 뜻대로 해라."

"제가 치료를 받다가 죽으면 이자를 갈기갈기 찢어서 죽여 주세요."

"그렇게 하마."

살벌한 발언에 모두가 마른침을 삼켰다.

오직 지셀만이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꽉 깨물었다.

'좋아, 좋아. 독이 아주 바짝 올랐네? 누구 딸인지 잊고 있었어.'

아주 좋은 반전이다.

지금 로잘린의 머릿속에서 치료 따위는 이미 지워진 지 오래였다.

지셀이 실패할 걸 확신하고, 어떻게든 그를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이겠다는 증오와 분노만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고통을 버티기에는 이런 독심보다 더 좋은 게 없다.

로잘린은 눈을 번뜩이며 지셀을 바라보았다.

"열흘 정도 남았다고 했지? 그것만 버티면 네놈을 반드시 죽여 버릴 거다."

"그때까지 아가씨가 살아 계셔야 그 모습을 볼 수 있겠군요. 이제 버텨 볼 의지가 좀 생겼습니까?"

"당신, 절대 곱게는 못 죽을 거야. 내가 장담할게."

지셀은 어깨를 으쓱이며 미소 지었다.

"실패한다면야, 얼마든지 받아 드리죠. 그 눈빛 보기 좋군요."

여유를 잃지 않는 그를 보고 로잘린은 코웃음을 치며 집사에게 말했다.

"치료할 때마다 밧줄로 내 팔과 다리를 침대에 단단히 묶어."

"네?"

"그리고 입에 물 재갈도 준비해 놔."

"꼭 그렇게까지...."

"그럼 내가 치료받을 때마다 쟤들한테 붙잡혀서 미친년처럼 발버둥 쳐야겠어? 할 거면 제대로 해야지."

"아, 알겠습니다."

집사는 당혹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지셀은 내심 감탄했다.

'독기가 대단하네. 사자의 자식은 역시 사자일 수밖에 없다더니. 아, 그러고 보니 브랜포드 후작가의 문장도 사자였지. 잘 어울리긴 하네.'

아무리 분노에 휩싸인 상태여도 실제로 목숨을 걸기는 쉽지 않다.

특히나 지금처럼 도망칠 구석이 있는 상태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로잘린은 보통 강단이 아니었다. 일단 독을 품고 마음을 먹고 나서는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가 다시 지셀을 노려보았다.

"어디 우리 한번 끝까지 가 보자고."

치료가 끝나면 반드시 지셀을 죽이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물론 그런 모습에 겁먹을 지셀이 아니다.

"좋습니다. 저도 최선을 다할 테니 아가씨도 잘 따라와 주셨으면 합니다. 이제 마음 편하게 치료에 집중할 수 있겠군요."

그는 오히려 잘 됐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 * *

"끄으으윽!"

그날 이후로 로잘린은 정말 잘 버텨 주었다.

초반에 그녀를 우습게 본 걸 사과하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로잘린의 의지력 덕분에 치료가 조금 편해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모든 문제가 사라진 건 아니었다.

"남작님! 좀 살살 하시면 안 됩니까?"

"남작님! 정말 다른 방법은 없는 겁니까?"

"남작님! 아가씨의 얼굴 상태가 더 나빠지는 거 같습니다!"

'아나, 진짜 이 영감이....'

가뜩이나 마나로 치료하는 과정에 신경 쓸 게 많아 골머리를 썩이는 지셀에게 집사는 매일 같이 잔소리를 해 댔다.

그러기를 일주일째, 신경이 날카로워질 대로 날카로워진 지셀이 참다못해 외쳤다.

"다 나가."

"네?"

"다 나가라고. 집중이 안 되니까."

집사가 발끈하며 대답했다.

"아니, 그래도 우리가 지키고 있어야 갑자기 문제가 생겼을 때 대응을...."

"그냥 나가. 다 엎어 버리기 전에."

지셀은 같잖은 예의는 때려치우고 슬슬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집사와 기사들이 그럴 수 없다고 반발했지만, 로잘린이 깔끔하게 정리했다.

"다들 그렇게 해. 나중에 이걸로 핑계 대면 재미없으니까."

시중을 들던 사용인들과 지셀의 측근들까지 모두 쫓겨났다.

그녀와 지셀만 남은 방 안에서 목숨을 건 치료가 이어졌다.

"끄으으윽!"

'젠장, 조금만 더!'

로잘린은 매일 같이 속이 진탕 되어 피를 토하기 일쑤였다.

지옥 같은 고통을 겪는 로잘린에 비할 바는 못 되나, 심력을 바닥까지 끌어다 쓰는 지셀도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다.

'조금 더 무리해서라도 빠르게 뚫어야겠어.'

본래도 약했던 그녀의 몸은 치료가 이어질수록 점점 더 약해지고 있었고, 막힌 지점을 하나하나 뚫는 방식은 너무나도 더뎠다.

'죽지만 않으면 되잖아?'

죽으면 안 된다는 건 바꿔 말하면, 정말 죽기 직전까지 가도 살아만 있으면 된다는 뜻이었다.

어차피 시간 내에 성공하지 못하면 자신도 죽고, 치료를 끝까지 마치지 못한 로잘린도 죽는다.

'힘드네. 하긴, 언제는 쉬운 일이 있었나.'

지셀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단숨에 뚫는다.'

그는 그나마 제일 상태가 나은 영역을 확인하고 막힌 기운을 거침없이 찢어발겨 버렸다.

투둑! 투두두둑!

로잘린의 마나 로드가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죄다 터져 나갔다.

"끄르륵!"

그녀의 눈이 뒤집히며 재갈로 막힌 입에서 피가 벌컥벌컥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로잘린은 꿋꿋하게 버텼다.

지셀은 내심 감탄했다. 마나를 다루지도 못하는 여자가 이렇게까지 버티다니.

'좋아, 성깔 하나는 인정하지.'

지셀은 더욱더 과감하게 마나를 움직이며 그녀의 몸속을 헤집었다.

"끄으으윽!"

서로의 목숨을 담보로 한 치료.

지셀은 봐주지 않고 그녀를 밀어붙였고 로잘린 또한 이를 악물며 버텨 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두 사람의 몰골은 점점 더 피폐해져 갔다.

그리고 후작과 약속했던 보름째 되는 날.

로잘린은 악착같이 버텨 결국 살아남았다.

지셀이 손을 떼자마자 그녀는 희열 어린 미소를 지었다.

"넌 이제 죽었어...."

그러고는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후우...."

한숨을 내쉰 지셀은 기절한 그녀의 얼굴을 닦고 다시 가면을 씌워 주었다.

그리고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밤을 지새웠다.

그렇게 마지막 날이 지나고....

덜컥!

날이 밝자마자 브랜포드 후작과 기사들이 문을 강제로 열고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