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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화 뭘 또 만들어요? (2)

상식을 벗어난 행동은 때로 누구도 생각지 못한 새로운 돌파구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항상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영주는 농사로 한번 성공했다고 자신감에 차 있지만, 아마 성공할 확률은 그리 높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은 한다.

이성은 내기를 해서 판을 뒤집어야 한다고 소리치는데, 똑같은 상황에서 크게 당한 적 있어서 그런지 괜히 찝찝했다.

클로드는 몸을 사리며 알포이를 끌어들였다.

"알포이도 걸고 하면 안 될까요?"

"미친 새끼야! 나를 왜 걸어!"

"아니, 10년씩 나눠 걸자는 거지. 성공하면 자유, 패배해도 20년이 아니라 10년만 추가되는 거잖아. 난 준비가 되어 있는데 알포이 님의 생각은?"

"닥쳐! 이제 도박 안 할 거야!"

"이런, 생각보다 정신을 빨리 차렸네요. 역시 마법사라 그런가? 은근히 냉정해."

클로드는 고개를 저으며 손을 들었다.

"이번에는 안 따라가렵니다. 판돈이 조금 부족해서 말이죠."

솔직히 생각이 없는 건 아니지만, 20년은 좀 손이 떨린다.

그러자 지셀이 살짝 조건을 낮춰 줬다.

"그러면 10년은 어때? 인심 썼다."

"아니요. 이번은 그냥 죽을래요."

허세 부리기는.

클로드가 입 모양만으로 꿍얼거렸다. 하지만 끝까지 하겠다고 나서지는 않았다.

허세라고 생각하다 내기에서 진 게 바로 얼마 전이다.

지셀은 아쉬운지 혀를 차고는 새로운 서류를 건넸다.

"이것들도 같이 준비해."

"하, 진짜 일 좀 그만 주세요."

클로드는 소용없는 줄 알면서도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서류를 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름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뒷장에는 괴상한 시설의 설계도들까지.

"이건... 뭡니까?"

"뭐긴 뭐야. 약초들이지. 북부 지역 상단들에 쫙 연락해서 다 쓸어 와. 그 뒤에 설계도는 대장장이한테 넘겨서 만들게 하고."

"약초를 이렇게 많이 모아서 어디에 쓰시려고요?"

"아까부터 얘기했잖아. 특산품 만들 거라니까. 잔말 말고 준비나 잘해 놔라."

지셀은 전생에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상품을 만들 생각이었다.

제작법을 완벽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중요한 부분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완성했을 때 벌어들일 돈을 생각하면 개발에 드는 비용은 별것 아니었다.

물론 돈을 벌려면 클로드의 말대로 식량과 룬스톤을 파는 게 제일 쉬운 길이다.

하지만 룬스톤이라면 몰라도, 식량은 미래를 위해 비축해 둬야 했다.

귀족들은 흔한 물건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들에게 뭔가 팔아먹으려면 식량보다는 조금 더 특별한 물건이 필요했다.

"에휴, 이상한 약 만들어서 팔면 돌팔이라고 욕만 먹을 텐데."

하지만 지셀의 계획을 알 리 없는 클로드는 한숨만 내쉬며 서류를 넘겨 보았다.

대부분 저번 계획에서 빠졌던 영지 개선 방안이거나, 기존 계획을 보강한 구상 따위였다.

'...도망가고 싶다.'

하지만 나는 자유롭지 못한 노예지.

클로드는 고개를 푹 떨구었다. 앞으로 혹사당할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지셀은 알포이와 마법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너희는 인원을 적당히 나눠서, 수로를 파고 상수도와 저수조 시설을 만드는 지역에 들어가라. 오래된 우물이 마르지 않았는지 확인하고, 수질이 나쁜 곳에는 정화 마법도 걸어 놔. 전부 새로 정비할 거니까. 작업 책임자는... 알포이다."

"거기는... 왜요?"

"왜긴. 인부들이 일하려면 길을 막은 바위 같은 건 마법으로 부숴 놔야지. 겸사겸사 땅도 같이 파고."

토목 공사는 인력도 많이 들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 작업이다.

마법사들이 힘을 쓴다면 공사 시간을 엄청나게 단축할 수가 있었다.

당연히 알포이는 반발했다.

"우리 마법사입니다! 노동자도 아닌 우리가 그런 걸 왜 합니까! 그런 건 그냥 인부들 시키세요!"

그들은 이전에도 몇 번 대규모 공사에 끌려가 힘을 쓴 적이 있었다.

그때도 강압적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겉으로는 협조를 구하는 시늉이라도 했는데.... 이제는 대놓고 부려 먹겠단다.

알포이의 항의에 지셀은 심드렁한 얼굴로 답했다.

"그러면 뭐 우아하게 구경이나 하려고 그랬어? 10년 동안 열심히 일하기로 했잖아. 이제부터 적극적으로 영지 건설에 동참해."

"안 해! 난 위대한 마법사라고! 감히 마탑의 후계자인 나를 시골 영주 따위가!"

"그냥 노예 시장에 팔아 버릴까? 계약서도 있으니 법으로도 문제없고.... 마법사 노예는 희귀해서 노예 상인들이 좋아할 거 같은데. 소문나면 웃기겠네. 마탑의 후계자를 노예로 부릴 수 있다고? 아, 이건 못 참지."

"죄송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알포이는 지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허리를 직각으로 숙였다. 놀라울 정도로 빠른 태세 전환이었다.

'으으으, 두고 보자. 내가 이렇게 당하고만 있을 줄 알아?'

자괴감이 치솟아 뒷골까지 짜릿했다. 알포이는 눈물을 글썽이며 이를 갈았다.

'곧 장로님이 오신다. 내가 당한 일을 아시면 네놈을 가만두지 않으실 거다!'

마탑의 지부는 거의 다 완성되었다.

곧 지부장을 맡을 장로와 함께 마법사들이 추가로 도착할 것이다. 알포이는 장로에게 부탁해 노예 계약을 무를 생각이었다.

'그 전까지만 참는다. 아오!'

일을 잔뜩 받은 클로드와 마법사들은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기도 전에 알포이는 클로드에게 삿대질을 해 댔다.

"너 때문이야! 그딴 내기를 해서 지니까 이렇게 된 거 아냐! 똑바로 알지도 못하면서 왜 내기를 해? 아카데미 수석이라는 말도 거짓말이지? 이 엉터리 도박쟁이야!"

클로드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비아냥거렸다.

"그게 왜 나 때문이야? 내가 당신네더러 내기하라고 협박하길 했나, 애원하길 했나."

"네놈이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구니까 당연히 믿고 간 거라고!"

"누가 믿으랬어? 아니 애초에, 저건 정상적인 농사법도 아니잖아. 마법을 같이 썼는데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당신들이야말로 마법사 맞아?"

"뭐? 지금 이게 다 우리 탓이라는 소리냐?"

"그럼 아니야? 마법사면 그런 것도 금방 알아냈어야지. 당신들이 중간에 눈치만 챘어도 어떻게든 무승부로 만들었을 텐데. 어휴, 엉터리 마법사."

"엉터리? 이 새끼가 지금 마탑의 마법사한테 건방지게!"

"네, 다음 노예. 난 그래도 아직 이 영지의 총관이거든?"

"총관은 마법 맞아도 안 죽는대냐?"

"어쭈, 식충이들 주제에 지금 협박하는 거야? 해보시든가."

"뭐? 식충이? 이 새끼가!"

알포이가 부들부들 떨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뒤에 있던 마법사들도 클로드를 노려보며 같이 마력을 끌어올렸다.

"어이쿠, 진짜로 마법 쓰게? 웬디, 뭐 해! 쟤들이 나 괴롭히잖아!"

웬디가 혀를 차며 단검을 꺼냈다. 클로드는 후다닥 그녀 뒤로 물러섰다.

"드루와! 드루와, 이 새끼들아!"

양측이 서로 노려보며 빈틈을 찾는 일촉즉발의 상황.

영지를 둘러보려고 느긋하게 나오던 지셀이 그 꼴을 보고 혀를 찼다.

"쯧쯧,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쌈박질이나 하고, 잘하는 짓이다. 폭력 쓰지 말고 대화로 해결해라, 대화로. 내가 주먹 들 일 없게 해. 비폭력 평화주의를 지향할 수 있게 도와줘라, 좀."

지셀의 말에 양측 다 표정을 구기며 뒤로 물러섰다.

들어도 영주 놈에게 저런 말을 듣다니 억울해서 눈물이 나올 거 같았다.

"뭐 해? 한가해? 시간이 남아돌아? 일거리가 부족했나 보지?"

"지금 갑니다, 가요!"

클로드와 마법사들은 지셀이 또 무슨 일거리를 던져 줄까 봐 깜짝 놀라 후다닥 자리를 피했다.

지셀은 그들의 의기소침한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고는 영지 순행에 나섰다.

* * *

지셀은 밀 재배에 성공하고도, 다른 영지에서 식량을 사 오는 걸 멈추지 않았다.

어찌나 식량을 박박 긁어모으는지 가신들도 기겁을 할 지경이었다. 마치 굶어 죽은 유령이라도 하나 달라붙은 것만 같았다.

이런 상황이니 밀 수확까지 끝나면 펜리스 영지에는 식량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쌓일 것이다.

"이제 먹고살 걱정은 아예 안 해도 돼. 영주님이 이렇게까지 해 주시는데 조금만 더 힘내 보자고."

"겨울인데도 이렇게 자라다니, 신기해 죽겠어. 우리 영주님은 모르는 게 없나 봐."

"3개월이면 수확할 수 있다는데? 이 엄청난 양을 1년에 네 번이나 수확할 수 있다니."

영지민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지셀을 칭송하며 맡은 일에 전념했다.

영주가 계속 돈을 푸니 일거리를 노리는 사람도 끊임없이 모여들었다.

영지 전체에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활력이 돌았다. 펜리스 영지는 빠르게 발전해 갔다.

인부들이 게으름 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해서 마탑의 지부도 금세 완성되었다.

곧 적염의 마탑 다섯 장로 중 한 사람이 스무 명의 마법사들을 이끌고 펜리스 영지에 찾아왔다.

장로는 지셀을 보자 반갑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허허, 잘 지내셨습니까? 아주 신수가 훤해 보이십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반말을 찍찍 갈기던 장로도 공적인 자리에서는 존대해 주었다.

펜리스 영지에서 지내게 된 이상 영지의 주인에게 기본적인 예의를 지켜야 했다.

지셀도 마탑의 장로를 반갑게 맞이했다.

마법사들은 영지를 방어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만, 역시 대규모 공사에 가장 큰 힘이 되었다.

"장로님이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허허, 지부를 맡아서 이끌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룬스톤 거래도 관리해야 하고요."

장로의 안색은 조금 어두웠다.

사실 이 문제로 마탑에서도 말이 많았다. 가겠다는 장로들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한 지부를 책임지는 중책이라고 하더라도, 미쳤다고 이런 쓰레기 같은 곳에 박혀 있기를 바라겠는가.

결국 누가 갈지 제비뽑기로 정했는데, 당첨되어 온 장로는 우울증 초기 증세까지 보이고 있었다.

그의 불편한 심정을 눈치챈 지셀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랬다.

"굳이 그러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곳은...."

그때 그의 말을 끊고 누군가 비명을 지르며 달려왔다.

"으아아! 장로님! 장로님! 저 알포이입니다!"

"음? 알포이?"

장로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오만하고 시건방진 마탑주의 후계자가 이렇게 자신을 반갑게 맞아 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허겁지겁 달려온 알포이가 의아해하는 장로에게 재빨리 외쳤다.

"장로님! 저 좀 살려 주십시오! 이 영주 놈이 저에게 노예...!"

지셀 옆에 있던 벨린다가 순식간에 다가가 알포이의 머리를 잡고 목을 돌려 버렸다.

빠각!

목이 돌아간 충격으로 알포이는 말을 하다 말고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아, 아니! 이게 지금 무슨 일...!"

그때, 지셀이 장로의 등을 살짝 감싸며 자연스럽게 알포이를 가리고 섰다.

"하하하, 요새 일을 열심히 하다 보니 좀 피곤한 모양입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지금 목이 돌아갔...."

"괜찮습니다. 요새 이런저런 연구를 하고 있는데 뭔가 잘못됐는지 이상한 행동을 자주 합니다. 그때마다 기절시켜 달라고 알포이가 먼저 부탁한 겁니다. 어이, 뭐 해? 어서 데리고 가."

벨린다가 알포이를 들고 후다닥 사라졌다.

무슨 상황인지 몰라 눈만 끔뻑이는 장로에게 지셀이 은근하게 속삭였다.

"장로님 같은 분이 이런 시골에서 지내시는 건 조금 그렇지 않습니까? 아직은 부족한 게 많은 영지라서요."

"그건 그렇지만...."

"차라리 지부장은 알포이로 하고 장로님은 가끔 와서 확인만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마법사가 스무 명이나 늘어났는데 별일 있겠습니까?"

5서클 마법사가 있으면 확실히 영지를 지키는 데는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딱 그뿐이다.

어차피 지식수준도 바네사가 훨씬 높은데, 의욕도 없는 자를 장로라고 우대하느니 알포이를 책임자로 두고 마음껏 부려 먹는 게 낫다.

"아무래도 영지가 요새 시끄러워서요. 이런 상태로는 장로님을 모시기에 부족함이 많아요. 제 마음이 안 좋습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돌아가시지요."

"으음, 그래도 마탑에서 결정한 일인데...."

"그거야 제가 나중에 직접 찾아뵙고 탑주님께 잘 말씀드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나머지는 저에게 맡기시고 그냥 돌아가시지요. 지금 당장."

장로는 뭔가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말 자체는 공손하지만, 분위기는 뭔가 협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친절한 듯하지만 묘하게 번들거리는 지셀의 눈빛이 '돌아가지 않으면 상당히 피곤해질 거'라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그, 그럴까요? 그럼 그냥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것 참....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네."

"네, 이번에 캐 온 룬스톤 일부를 팔 테니 그거 들고 돌아가시죠. 약속대로 시세만 받겠습니다. 그런데 요새 조금 오른 거 아시죠?"

진홍의 마탑이 사재기를 해서 그런지 룬스톤 가격은 자꾸 올라가고 있었다.

그나마 적염의 마탑은 지셀 덕분에 겨우 숨을 돌리고 있었다.

룬스톤을 다른 데에서 구해 오기 전까지는 지셀이 하라는 대로 끌려다닐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안 그래도 어떻게 룬스톤 얘기를 꺼내나 생각하던 장로가 화색을 띠었다.

"좋습니다. 그러면 탑주님께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권한으로 알포이에게 지부장의 자리를 넘기도록 하죠."

어차피 거부권이 없다.

장로는 조건을 수락하고 허겁지겁 돌아갔다.

그간의 경험을 통해 말이 안 통하는 지셀과 오래 얘기를 나눠 봐야 손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안 그래도 오기 싫었는데 이렇게 가라고 등을 떠밀어 주니 장로 입장에서는 잘된 일이었다.

"후, 이제 얼추 숫자는 맞췄군."

장로를 보낸 지셀은 미소 지었다.

총 스물여섯 명의 마법사가 지부를 핑계로 영지에 계속 머물게 되었다. 어지간한 대영주들도 보유하기 힘든 숫자다.

각자 경지는 높지 않지만, 오히려 그 편이 여기저기 써먹기 좋다.

새로 온 마법사들은 장로가 갑자기 떠나니 조금 당황했지만, 별걱정은 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북부 제일의 마탑에서 온 마법사라는 자신감 덕분이었다.

오만한 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마법사들을 보니 지셀은 내심 헛웃음이 났다.

하지만 속내를 감추고 상냥하게 웃으며 두 팔 벌려 환영했다.

"먼 길 잘 오셨습니다. 환영합니다. 앞으로 영지를 위해 잘 부탁드립니다."

영주까지 나와서 환대할 만큼 대접받는다는 생각에 마법사들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한적한 시골에서 휴양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왔겠지만, 지셀의 생각은 달랐다.

'공사가 더 빨리 끝나겠네.'

이들은 영지의 좋은 노동력이 될 것이다.

112화 뭘 또 만들어요? (3)

알포이는 영지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공사에 매일 참여했다.

마력은 항상 바닥인 데다 채울 새도 없고, 피로가 쌓여 눈 밑이 퀭해졌다.

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멈출 수가 없었다.

요령을 피우다 들키면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르니까.

"아니, 도대체 이게 뭡니까? 일도 적당히 시켜야지! 너무 많지 않습니까!"

"자랑스러운 적염의 마탑에서 온 마법사들에게 이런 일이나 시키다니! 이런 하찮은 일을 하려고 온 게 아니란 말입니다!"

새로 투입된 마법사들은 매일같이 알포이에게 쏘아 댔다.

하지만 아무리 그들이 항의해도 알포이는 다 죽어 가는 표정으로 고개만 저었다.

"주인님... 아니, 영주님이 시키니까 해야지...."

"비겁한 변명입니다!"

새로 온 마법사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마탑주의 후계자로서 항상 자신감이 넘치던 알포이가 왜 이렇게 변했단 말인가.

이상한 건 알포이만이 아니었다. 다른 마법사들도 입을 꾹 닫고 일만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말씀 좀 해 보십시오! 대체 왜 이런 허드렛일을 순순히 하고 계시는 겁니까!"

"그야... 재미있으니까...."

"재미있는데 왜 우시는데요!"

"눈물이 날 정도로... 재미있으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십쇼!"

새로 온 마법사들은 참다못해 들고일어났다.

마탑에서 영주의 말에 잘 따르라고 당부하기도 했고, 지부장도 솔선해서 일하니 며칠간은 꾹 참고 시키는 대로 했지만....

계속 이런 식으로 이용당할 수는 없었다.

자존심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먼저 와 있던 마법사들의 모습을 보면 볼수록 불길한 예감이 자꾸 들었다.

하나같이 눈 밑이 거무죽죽하고, 공사장만 전전해서인지 꾀죄죄하다.

항상 깔끔하고 우아한 마법사들이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는 꼴이었다.

"같이 갑시다!"

"어디를?"

"영주님한테 가서 이런 일 못 한다고 따져야죠! 그래도 거부하면 마탑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지부장님도 같이 가시죠? 강하게 얘기합시다!"

"몰라.... 뭐야, 그거.... 무서워...."

"이이익!"

마법사들은 소극적으로 반응하는 알포이를 보고 이를 갈았다.

이래서야 어디 가서 마탑의 후계자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한심하군. 우리는 더 이상 당신을 탑주님의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겠소!"

"이 일은 내 반드시 탑주님에게 얘기할 것이오!"

"우리끼리라도 영주한테 찾아갑시다!"

마법사들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떠났다.

영주를 협박해서라도 일을 그만두거나 이곳을 떠날 셈인 듯했다.

마법사들에게 심한 모욕을 당하면서도 알포이는 그저 멍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나 마법사들이 완전히 시야에서 벗어나자, 알포이와 남아 있던 마법사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크크큭, 멍청한 놈들."

그들은 떠난 자들이 혹시나 웃음소리를 듣고 돌아올까 봐 숨죽여 웃었다.

자칫하면 연기한 보람이 없어질지도 모른다.

"나만 죽을 수는 없지."

"어디 한번 당해 보라지."

자신들만 노예가 될 수는 없다는 마음 하나로 갖은 모욕을 당하면서도 꾹꾹 참아 왔다.

"크크큭, 여기 영주가 얼마나 무서운 새끼인데. 저놈들 이제 큰일 났다."

"시건방진 놈들이, 여기가 어디인 줄 알고 저렇게 목에 핏대를 세워."

"어휴, 난 조마조마했다니까? 계약하고 오면 일은 전부 저놈들한테 떠넘기자고."

"그래,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지 쟤들도 알아야지."

"하여튼 꼭 매를 맞아야 정신을 차려요."

마지막 희망이었던 장로도 떠났다.

어차피 도망도 못 갈 바에는 인원이라도 좀 늘어나는 게 나았다. 그럼 조금이라도 더 잘 수 있지 않겠는가.

잔머리 굴리는 속도만 빨라진 마법사들이었다.

그들이 예상한 대로, 지셀은 항의하는 마법사들을 뚱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리는 이제 이런 일 못 합니다!"

"제대로 대우해 주십시오! 안 그러면 마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턱을 쓰다듬던 지셀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내가 분명 알포이에게 관리 잘하라고 했는데.... 알포이가 안 말렸나?"

"말리긴 무슨! 여기 같이 오자고 해도 거절하더군요. 그 사람 완전 바보가 되었어요. 침을 질질 흘리면서 멍하니 앉아 있기나 하고! 매일 공사만 하니까 사람이 한심하게 변한 거 아닙니까!"

그러자 지셀은 이마를 부여잡고 킥킥 웃었다.

"하, 이 새끼 누가 마법사 아니랄까 봐, 머리 굴리는 것 보게. 웃기는 놈."

"이보세요! 영주님! 우리 말이 말 같지 않습니까?"

지셀이 웃는 이유를 모르는 마법사들은 그가 자신들을 무시한다 느낀 듯 더 화를 냈다.

"아, 너무 흥분하지 마. 그래, 계속 공사에 투입할 거면 그냥 돌아가겠다, 그 말이지?"

"그렇습니다!"

"탑주님에게 얘기 안 들었어? 우리 영지 일에 무조건 협조하라고 했을 텐데. 공사 얘기도 분명 했을 거 아냐?"

"세상에 그렇다고 정말 마법사들을 공사판에 밀어 넣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어느 귀족도 감히 그렇게는 못 합니다!"

"마탑주님과 내가 충분히 상의한 뒤에 계약한 건데도? 이러면 계약 위반이야. 내가 룬스톤을 엄청나게 공급해 주고 있잖아. 그 혜택을 당신들도 보고 있고."

"그건 알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영주님이라도 강제로 우리를 부릴 수는 없습니다! 앞으로 영지 방어와 연구에만 신경 쓰겠습니다."

뻣뻣하게 고개를 세운 마법사 스무 명을 앞에 두고 지셀은 잠깐 고민했다.

지금 이들은 계약의 중요성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냥 돌려보내면 어차피 이들은 마탑주한테 큰 벌을 받을 것이다. 계약을 위반한 거니까.

"하아, 이거 마탑주님이 너무 설렁설렁 설명했나 보네. 마법사들의 자존심이란 참 어렵단 말이야."

마탑에서 다시 교육받고 오게 하면 정신은 차리겠지만, 시간 낭비가 너무나 크다.

가뜩이나 할 일도 많은데 마법사가 빠지면 계획만 더 늦어질 것이다.

"흐음, 어떻게 할까?"

알포이가 마법사들을 지셀에게 보낸 의도는 뻔히 보였지만, 강제로 노예 삼는 건 그다지 끌리지 않았다.

비폭력 평화주의자로서 할 일이 아니니까.

그렇다고 전처럼 내기를 걸 시간도 없었다.

"후우. 마음은 아프지만, 시간이 없으니 별수 없네."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아, 잠시만 기다려 봐."

지셀은 손짓으로 마법사들을 진정시키며 문밖을 향해 소리쳤다.

"어이, 거기 누구 몽둥이 있으면 하나만 가져다줘라."

곧 문이 열리고 병사 한 명이 예쁘게 깎은 몽둥이를 들고 왔다.

나뭇결 하나하나에서 장인의 숨결이 느껴졌다.

지셀이 몽둥이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구경하는 꼴을 보고 마법사들이 얼굴을 와락 구기며 외쳤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이건 너무 무례하지 않습니까!"

"무례라니, 누가 무례한지 모르겠네. 그래,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지. 우리 내기 하나 할까?"

"뭐요?"

"동시에 덤벼. 나한테 상처 하나라도 내면 원하는 대로 해 주지. 대신 지면 계약서 하나에 서명해 줘야겠어."

"그게 무슨?"

"아, 말 길어지는 거 귀찮으니까 빨리빨리 가자. 진짜 눈곱만한 생채기라도 내면 앞으로 편하게 지내게 해 줄게. 룬스톤도 달라는 대로 다 주고, 원하는 사람은 바로 마탑으로 돌려보내 주지."

그 말에 마법사들이 눈을 빛냈다.

각자 높아 봐야 3서클 수준의 고만고만한 놈들이지만, 무려 스무 명이다.

아무리 서클이 낮아도 이 정도 숫자면 웬만한 기사도 순식간에 다져 버릴 수 있었다.

"그 말 후회하게 될 겁니다."

마법사들은 모두 동시에 마력을 끌어올렸다.

가뜩이나 요즘 지셀에게 쌓인 게 많았는데, 이런 기회를 마다할 리가 없었다.

스무 명이나 되는 마법사들이 마력을 끌어올리자 주변에 있는 물건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셀은 그 모습을 보고도 방긋 미소 지을 뿐이었다.

"아, 노예는 더 안 늘리려고 했는데. 진짜 착하게 살고 싶은데 세상이 안 도와주네."

마법사들이 내뿜는 마력의 흐름을 가르며 지셀의 몽둥이가 우아하게 움직였다.

그날, 영지에 노예 스무 명이 추가되었다.

* * *

총 스물여섯 명의 마법사들이 울면서 공사에 전념한 지도 며칠이 지났다.

클로드가 찾아와 지셀에게 보고를 올렸다.

"분부하신 약재는 모두 도착했습니다. 도구들도 준비가 끝났습니다."

"좋아, 바로 시작하지."

"도대체 뭘 만드시려고요? 특산품이란 게 뭐... 저기 밀처럼 마나를 머금은 약초라도 됩니까?"

클로드는 진심으로 궁금해하며 물었다.

지셀이 넘겨준 설계도를 나름대로 뜯어보았지만, 무언가를 끓이고 분해하고 섞고 녹이고.... 아무리 봐도 연금술사들이 이상한 거 만들 때나 쓸 만한 조합이었다.

"귀족들이 좋아할 만한 물건이지. 미리 알면 재미없으니까 기대하고 있으라고."

'아오.... 이걸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클로드는 한마디 쏘아 주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지만 꾹 참았다.

지셀에게 된통 당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지금은 몸을 사리고 패턴을 지켜봐야 할 때였다.

'확률적으로 사람이 매번 성공할 수는 없잖아. 경과를 좀 보다가 다시 내기할 각을 좀 잡아야겠다.'

도박 중독자들이 흔히 하는 착각이었다.

저번에 성공했으니 이번에는 실패할 확률이 높다고 믿는 것이다.

아카데미 수석 출신이어도 그 오류에 빠지는 건 마찬가지였다.

클로드는 얼른 다시 내기를 걸어서 노예 계약을 풀 생각에 빠져 혼자 히죽댔다.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흘겨보던 지셀은 혀를 쯧쯧 차며 바로 자리를 옮겼다.

'약재 개발실'이라 이름 붙인 구역은 이름만 거창할 뿐 사실 별거 없었다.

한쪽에는 약재들이 가득 쌓여 있고, 반대쪽에는 지셀이 설계한 도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거 정말 연금술사들 작업실 같은데?"

지셀이 감탄하며 개발실을 둘러보았다.

실제로 그가 만들려는 건 미래에 마법사와 연금술사가 힘을 합쳐 개발한 제품이니, 연금술사의 작업실이라는 게 틀린 말도 아니었다.

"마법사들을 불러와."

뜬금없이 끌려온 마법사들은 지셀의 명령에 따라 도구들에 마법진을 새기기 시작했다.

낯빛이 거무죽죽해진 알포이는 입을 앙다물고 마법진을 그려 나갔다.

몇 가지 마법진이 약초의 효과를 끌어내거나 불순물을 제거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까지는 알아차렸지만, 그 이상은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어차피 물어봐도 또 말도 안 되는 소리나 해 대겠지.'

마법진까지 새긴 기구를 어디에 쓸 건지 궁금했지만 호기심을 꾹 참았다.

'뭔지 절대 안 물어볼 거야. 두고 봐, 진짜 안 물어볼 거니까. 물어보면 내 손해라고.'

비교적 그리기 쉬운 마법진들이라 작업은 하루 만에 끝이 났다.

호기심은 마법사의 본능.

마력을 상당히 소모해 피곤함에 절어 돌아가려던 그때.

알포이는 결국 참지 못하고 묻고 말았다.

"이거 뭡니까? 뭐 만드는 거예요?"

"끝내주게 돈이 되는 물건. 맞혀 볼래? 맞히면 자유, 틀리면 10년 추가...."

"됐습니다! 그런 거 안 합니다!"

알포이는 씩씩거리더니 혼자 욕을 중얼거리며 자리를 떠났다.

"첫 도박에서 진 충격이 큰가 보네. 저렇게 단호하게 거절하다니."

지셀은 감탄 반, 아쉬움 반으로 혀를 차며 인부들을 불러 일을 시켰다.

어떤 이는 약재를 분류하고, 어떤 이는 물을 끓이고, 어떤 이는 불을 관리했다.

인부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른 채, 아무 생각 없이 맡은 일만 반복했다.

"영주님이 또 뭘 만드는 거지?"

"무슨 약 같은 걸 만들려나 봐."

"우리야 뭘 알겠어. 그냥 시키는 대로 하는 거지. 몸에 좋은 거 아니겠어?"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가장 끝에 있는 도구에서 걸쭉한 검은 물이 흘러나왔다.

지셀은 그 물을 손가락에 찍어 냄새를 맡아 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색이 아니었는데. 어디가 틀린 모양이네. 냄새도 안 좋고."

한 번에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는 않았다.

전생에 주워들은 지식만 가지고 복잡한 과정을 구현하려니, 틀린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셀은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아예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새로운 걸 창조하는 것보다는 당연히 쉬울 테니까.

큰 틀은 확실히 알고 있으니, 세부적인 부분을 수정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지셀은 며칠 동안 기억을 더듬으며 조금씩 약재의 배합 비율과 반응 시간을 조율하고 마법진을 조정했다.

몇 번의 실험 끝에 드디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오오, 완벽해. 그래, 바로 이거야."

이전과는 달리 새하얀 추출물을 보고 지셀은 흐뭇하게 웃었다.

제품이 완성된 것도 기쁘지만, 더 좋은 점은 사실 따로 있었다.

전생에 이 제품은 델파인 공작가의 가장 큰 돈줄이었다.

지금쯤 어디에선가 이 제품을 열심히 개발하고 있을 놈들을 떠올리며 지셀은 코웃음을 쳤다.

"어디 한번 잘해 봐라, 새끼들아. 이미 늦었지만."

113화 인생 한 번 더 걸어 볼까? (1)

이제 남은 건 대량으로 생산한 뒤 제대로 상품화시키는 것뿐이다.

"일단 이걸 열심히 저어라."

인부들은 지셀이 시킨 대로 추출물을 열심히 휘저었다.

한참을 저으며 식히자, 추출물은 점점 점도가 높아졌다.

지셀은 손가락으로 그걸 살짝 퍼서 비벼 보았다.

추출물은 녹아들듯 순식간에 피부에 흡수되었다.

인부들이 지셀 곁에 슬금슬금 다가와 물었다.

"그, 그게 뭡니까? 영주님."

다른 영지였다면 평민인 이들이 감히 영주에게 말을 걸 수 있었을 리가 없다.

아니, 애초에 말 걸 생각조차 못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간 지셀이 털털한 모습으로 영지민들과 격식 없이 대화해 온 덕분에, 간단한 질문 정도는 다들 부담 없이 할 수 있게 되었다.

"몸에 바르는 약인가요?"

"향기가 무척이나 좋습니다요."

지셀은 뿌듯한 표정으로 답했다.

"아아, 모르는가? 이건 '에센스'라고 한다. 약초에서 좋은 성분만 뽑아 농축한 것이지."

"그걸 어디에 씁니까?"

"귀족들이 피부 관리할 때 쓰지. 미용에 목숨 거는 인간들이 많거든."

"...아, 예."

인부들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러려니 고개를 주억였다.

귀족들이나 쓰는 물건을 그들이 어찌 알겠는가.

보통 귀족들은 약초와 과일의 좋은 성분을 뽑아내어 바르거나, 얼굴에 증기를 쐬는 방식을 주로 사용한다.

부유한 가문이라면 신성력이나 마법을 쓰기도 하고.

하지만 대부분은 큰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

꾸준히 하면 피부가 좋아지기는 하지만, 들이는 돈과 시간에 비하면 효과가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 제품은 다르다. 피부가 안 좋을수록 효과가 극적으로, 빠르게 나타난다.

"후후, 이건 이제 귀족들의 필수품이 될 거다."

지셀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귀족들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외모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깨끗한 피부는 부의 상징이기도 해서, 조금이라도 미용 효과가 있다고 알려지면 유행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전생에는 이 제품이 대륙을 휩쓸면서 델파인 공작가가 엄청난 돈을 쓸어 담았다.

"테스트를 좀 해 봐야겠네."

직접 써 본 바로는 전생에 봤던 것과 똑같아 보였다.

그래도 정말 효과가 있는지 확인은 해야 했다.

"역시 벨린다가 평가를 제일 잘해 주겠지?"

벨린다는 은근히 꾸미는 걸 좋아한다.

피부 미용에도 관심이 많은 편이라, 북부의 가난한 영지에서 일하는 하녀장치고는 피부가 희고 고운 편이었다.

지셀은 낮고 널찍한 유리병에 에센스를 담아 벨린다를 찾아갔다.

"벨린다, 이거 줄게. 한번 얼굴에 발라 봐."

"이게 뭔데요?"

"화장품이야, 화장품. 피부에 아주 좋은 거야."

"어머, 진짜요? 어디서 샀어요? 이런 거 엄청 비싼데.... 저 주려고 사신 거예요? 어디 제품이에요?"

벨린다는 깜짝 놀라 질문을 쏟아 냈다.

지셀은 돈을 팍팍 쓰는 듯하면서도, 사치품에는 극도로 돈을 아꼈다.

옷도 대충 입고 다니고 잘 꾸미지도 않는다.

그런데 이런 비싼 화장품을 사 왔다고? 그것도 귀족들이나 쓰는 제품을?

'지금까지 키운 보람이 있네....'

조금 감동했던 벨린다는 이어진 대답에 기분이 순식간에 가라앉아 버렸다.

"이거 내가 만들었어."

"...."

지셀은 뭐가 문제냐는 듯 당당했다.

벨린다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저기, 도련님. 화장품은 아무거나 사용하면 안 되는 거 모르세요?"

"알지. 그래서 효과 확실한 거 만들어 왔다니까?"

"저는 도련님한테 화장품 만드는 법 같은 거 가르쳐 준 적 없는데, 대체 어디서 배운 거예요!"

벨린다는 지셀이 어렸을 때부터 그를 가르쳐 왔다.

하지만 연금술을 비롯해 약재를 다루는 법을 가르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런데 뜬금없이 화장품이라고 가져오면 그걸 누가 믿겠는가?

"아무거나 발라서 피부가 엉망이 되어 버리면 되돌릴 수도 없는 거 아시죠?"

피부 미용에 드는 돈이 워낙 비싸다 보니 조금이라도 싼 재료를 찾아다니는 사람도 많았다.

납이나 수은 따위를 얼굴에 바르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대부분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냥 효과가 없는 걸로 끝나면 다행이었다. 피부가 더 나빠지거나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 죽는 사람도 종종 있었다.

돌팔이 약제사들이 귀족의 얼굴을 고름투성이로 만들었다가 목이 달아나기도 했다.

"역시 안 바를래요. 저 지금도 피부 좋거든요?"

마나를 다루면 조금이나마 회복력이 좋아지고 노화가 늦어진다.

벨린다도 마나를 다룰 정도의 실력자라 피부 상태가 좋은 편이었다.

그래도 관리하면 지금보다 더 좋아질 테니, 지셀은 조금 더 밀어붙였다.

"이거 바르면 그거보다 더 좋아진다니까? 막 얼굴에서 빛이 날 거라고. 한번 믿어 봐!"

"싫어요! 피부 망가지면 신성력이나 마법으로도 고치기 힘들다고요."

신성력도, 마법도 부르는 게 값이라 아무나 쓸 수 없었다.

쓴다고 무조건 효과를 보는 것도 아니었다.

질병을 치유하고 재생력을 높이니 부수적인 효과로 조금 상태가 좋아지는 정도였다.

"마음만은 고맙게 받을게요. 그런데 저는 진짜 못 바르겠어요. 피부가 얼마나 중요한데요."

"아니, 왜 안 믿어? 나 몰라? 농사도 끝내주게 성공했잖아!"

지셀이 툴툴댔다.

한번 시험해 보지도 않고 퇴짜를 놓다니.

빈말이라도 발라 보겠다고 해 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그에 대한 대답은 벨린다가 속 시원하게 해 줬다.

"그때야 믿든 안 믿든 그냥 지켜보면 되는 거였잖아요. 이건 제 얼굴로 실험을 해야 하는 건데, 누가 나서겠어요?"

하긴, 그냥 속으로 욕하며 결과를 지켜보는 것과 자기 얼굴로 실험하는 건 차이가 컸다.

피부 관리 쪽은 만에 하나라도 잘못되면 정말 되돌릴 수 없으니까.

"음...."

지셀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바르라고 억지로 떠넘겨도 아마 몰래 버리겠지.

자신은 새로운 힘 때문에 재생력이 더 좋아져서 피부가 너무나 매끈하다.

워낙 잘 만든 제품이니 이걸 쓰면 피부가 좋아지긴 하겠지만, 극적인 효과가 보이진 않을 거라는 뜻이다.

역시 다른 사람을 찾아봐야 하나.

벨린다가 도망치듯 떠나고 나서도 지셀은 한참 주변을 서성였다.

지나가던 웬디가 그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지셀이 반색하며 그녀를 손짓해 불렀다.

"어이, 웬디. 마침 잘 만났다. 선물 하나 줄게. 이거 발라 봐."

"이게 무엇인가요?"

"피부에 아주 좋은 크림이야. 내가 만들었어. 한번 써 봐. 나 믿지?"

"제가 지금 바빠서.... 죄송합니다."

웬디의 신형이 흔들리더니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니, 이게 마나까지 써서 도망갈 일이야? 어차피 클로드한테 갈 거면서."

지셀은 혀를 차며 클로드를 찾아갔다.

집무실로 들어가자마자 웬디가 기둥 뒤로 숨는 게 보였다.

하는 수 없이 클로드에게 넘기니, 클로드가 화장품을 받아 들고 의심스러운 눈으로 뜯어보았다.

"그러니까 이게 우리 영지의 특산품이 될 거라고요? 피부 미용을 위한 화장품이?"

"그렇지. 귀족들이 엄청나게 좋아할 거야. 없어서 못 살 정도가 될걸?"

"흐... 흐흐흐."

클로드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내기할 각이 섰다!'

그는 아카데미에서 귀족 자제들과도 친분을 나누었다.

그렇기에 귀족들이 피부 미용에 얼마나 공을 들이는지 알고 있었다.

귀족들은 효과 좋은 화장품을 하나 알게 되면 보석을 궤짝으로 내서라도 사려고 한다.

하지만 화장품은 아무나 만드는 게 아니다.

의학, 약초학, 연금술을 통달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제대로 된 제품을 만들 수 없었다.

'영주님은 책을 안 읽어. 공부하고는 담을 쌓은 사람이지.'

집무실에 꽂혀 있는 책이라고 해 봤자 군사학 몇 권이 전부다. 그마저도 먼지가 쌓여 있다.

그런 사람이 화장품을 만들었다니, 엉터리가 분명했다.

클로드는 내심을 감추고 조심스레 물었다.

"으음, 이게 특산품이라.... 다른 영지에는 없는 거 맞아요?"

"그럼, 내가 최초로 만들었으니까."

'역시!'

영주가 처음 만들었다는 말은 진짜일 거다.

최근에 이런 물건이 나왔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으니까.

'이게 팔릴 리가 없지.'

약학이고 뭐고 아는 게 없는 영주가 직접 만들었다는데, 효과가 있을 리가 없다.

설령 정말로 효과가 있더라도, 이름도 모르는 촌구석 영지에서 나온 화장품을 어떤 귀족이 믿고 써 주겠는가?

백 번을 다시 생각해 봐도 망할 게 뻔했다.

클로드는 노예 계약을 취소할 생각에 희희낙락한 마음을 숨기고 짐짓 울상을 지었다.

"제 얼굴을 곰보로 만들려고 그러시는 거죠? 밖에도 못 나가고 일만 하게 하려고요. 아니, 어차피 지금도 노예인데 꼭 그렇게까지 하셔야겠어요?"

"이거 진짜 효과 좋다니까! 나 못 믿어? 농사도 성공시켰잖아!"

"그건 별개지요. 분야도 완전히 다르고요. 저만 그런 게 아니라, 아무도 이런 건 안 쓸걸요? 뭘 믿고 쓰겠어요."

도발적인 말투에 지셀이 '이놈 봐라?'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러면 내기할래? 정말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말이야."

"아, 나 도박 끊었는데.... 몇 년이요?"

"지난번에 말했잖아. 20년. 대신 내가 지면 10년 깎아 주고, 거기다 5천 골드도 얹어 줄게."

"으음...."

클로드는 잠시 고민했다.

엉터리인 게 분명하지만, 판돈이 세니 살짝 겁이 났다.

'부담을 좀 줄여야겠다.'

"좋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뭘 기다려?"

"저랑 같이 내기할 사람 좀 데리고 오겠습니다."

클로드는 잽싸게 알포이를 찾아갔다.

알포이는 그를 보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 클로드의 내기에 휩쓸려 손해를 봤다는 원망이 가시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클로드는 사나운 눈빛을 가볍게 흘려보냈다.

몇 번 투덕거리다 보니, 알포이가 꽤 만만해진 것이다.

"뭐야? 왜 왔어?"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는데 들어 볼래?"

"꺼져, 네 말 안 들어."

"어허, 그러지 말고 좀 들어 봐. 좋은 기회가 왔어. 노예 탈출의 기회."

"노예... 탈출? 좋은 기회?"

"그래, 영주님이 특산품이랍시고 화장품을 직접 만들었는데...."

클로드는 자신이 아는 점과 추측한 바를 열심히 얘기하며 알포이를 설득했다.

"마탑에서도 이런 거 시도한 적 있지?"

"...하긴 했었지."

마법 연구에 돈이 많이 들다 보니, 마탑은 다양한 사업을 벌이는 편이다.

당연히 화장품을 만들어 보겠다고 시도하는 마탑도 많았다.

일단 성공만 하면 돈을 쓸어 담을 수 있는 분야니까.

하지만 딱히 이렇다 할 성과를 낸 곳은 없었다.

그 마탑에서도 실패할 정도로 효과적인 화장품을 만드는 일이 어렵다는 뜻이다.

클로드가 뱀 같은 혀를 현란하게 움직였다.

"마탑에서는 어땠어? 쓸 만한 걸 만들었나?"

"6서클이신 탑주님도 화장품은 못 만드셨어. 고급 비누는 만드셨지만."

"똑똑하기로 유명한 마법사들과 연금술사들도 못 만드는 걸 우리 영주님이 혼자 만들었단다. 이게 가능한 일 같아?"

알포이는 고개를 저었다.

"혼자 만드는 건 정말 말도 안 돼. 누구한테 도움이라도 받은 거 아니야?"

"누구 도움을 받았겠어? 그럴 능력이 있는 사람이면 우리 영주 말고 돈 많고 권력 있는 사람한테 찾아갔겠지."

"...."

"어때? 인생 한 번 더 걸어 볼래?"

"난 도박 끊었는데...."

클로드가 하찮은 것 보듯 알포이를 내려다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겨우 한 번 해 놓고 끊긴 뭘 끊어? 도박은 일단 시작하면 끊는 게 아니라 참는 거야. 기회가 오면 언제든지 베팅하는 게 인생이라고."

"으음...."

잠시 고민하던 알포이가 곧 굳은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번에는 진짜 너 믿고 걸어 본다."

"날 믿지 말고 너 자신을 믿어. 네가 지금까지 쌓아 온 지식과 경험을 믿으란 말이야. 넌 마탑의 후계자고, 이 영지 최고의 마법사지. 넌 언제나 최고야, 브로."

클로드가 주먹으로 알포이의 심장께를 툭 쳤다.

괜히 가슴이 뜨거워지는 느낌에 알포이가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난 알포이. 포기를 모르는 남자지."

도박쟁이들치고는 상당히 거창한 대화였다.

하지만 주변에 있던 마법사들은 두 사람의 대화에서 사나이들의 뜨거운 우정과 열정을 느꼈다.

"우리도 끼워 줘! 다 같이 힘을 모으자고!"

"좋아, 다 같이 가자! 이번에야말로 영주님의 허세를 완전히 박살 내는 거야. 우리는 승리한다!"

클로드와 스물여섯 명의 마법사는 비장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다들 제정신이 아니야...."

클로드를 호위하다가 그 꼴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게 된 웬디만 질색을 했다.

114화 인생 한 번 더 걸어 볼까? (2)

박력 있게 쳐들어온 마법사들을 보고 지셀이 같잖다는 표정을 지었다.

"단체로 무슨 일이야?"

"내기하러 왔습니다! 우리 전부 영주님의 화장품이 쓸모없다는 쪽에 걸겠습니다."

"흐음, 사람이 너무 많은데.... 조건은?"

대표로 나선 클로드가 씨익 웃으며 답했다.

"저희가 이기면 노예 계약은 해지하고 2천 골드씩 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너희가 지면?"

"그러면 각자 10년씩 추가하겠습니다."

지셀은 괜히 빼는 척 다시 물었다.

"내가 내기를 안 받아들이면 어떻게 할 건데?"

그 모습에 클로드와 마법사들이 눈을 빛냈다.

저 막 나가는 영주가 처음으로 자신 없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승리할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였다.

"영주님이 먼저 내기를 하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와서 거절하시는 건 명예롭지 못한 행동입니다. 그만두실 거면 5년씩 빼 주시죠."

"아, 그건 곤란하고...."

지셀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10년씩 더 추가하기 미안해서 그런 건데... 다들 이렇게 의지가 확고하니 어쩔 수 없네. 내기를 받아들인다."

"이예!"

클로드와 마법사들은 주먹을 쥐고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좋습니다! 그럼 기한을 정해 주시죠."

"음, 한 달 정도면 되려나?"

지셀은 자신 있게 툭 내뱉었다.

보름이면 효과가 나타나기 충분하지만, 피부 상태는 사람마다 다르기에 넉넉하게 한 달로 잡았다.

클로드는 희희낙락하며 내기의 증인으로 삼을 가신들을 잔뜩 불러왔다.

영지를 시찰하러 나가 있는 길리언과 연무장에서 수련 중인 바네사를 제외하고 모두 대전에 모였다.

당연히 벨린다는 악을 쓰며 반대했다.

"내기는 또 무슨 내기예요! 저놈한테 물들었나 봐! 화장품을 도대체 어떻게 증명할 건데요?"

농사야 눈에 보이는 싹이 움트고 열매가 달리지만, 화장품은 효과를 평가할 만한 객관적인 기준이 없었다.

잘 먹고 잠만 푹 자도 좋아지는 게 사람 얼굴이다.

달리 말하면 억지로 피부를 엉망으로 만들 수도 있다는 뜻이다.

"설마 저놈들한테 줄 건 아니죠? 무슨 짓을 할 줄 알고요!"

지셀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당연히 클로드와 마법사들은 테스트에서 빠져야지. 저놈들은 내기에서 이길 수 있다면 똥도 얼굴에 바를 놈들이거든."

마법사들은 자존심이 상했지만 반박하지 못했다.

여차하면 진짜 똥칠할 생각까지 하고 있었으니까.

지셀의 말에도 벨린다는 화를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러면 누가 실험할 건데요? 뾰루지 하나만 나도 저놈들은 이겼다고 난리를 피울 거라고요!"

"흐음, 그건 그렇지.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한데...."

지셀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자리에 와 있던 사람들은 모두 혹시나 눈이 마주칠까 봐 얼른 고개를 숙였다.

검증되지도 않은 제품을 자기 얼굴에 실험해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가 좋으려나...."

모두에게 강제로 바르라고 안겨 주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사람들이 겁먹고 안 바르기라도 하면 내기 결과가 애매해진다.

클로드와 마법사들이 효과가 없다고 우길 여지를 주게 되니까.

신제품이 아무리 효과가 좋다고 해도, 며칠 정도는 꾸준히 발라야 효과가 난다.

지셀은 강제로 다 바르게 하는 것보다는 제대로 테스트할 사람을 우선 구해 보기로 했다.

"카오르, 네가 한번 발라 볼래? 며칠 훈련 빼 줄게."

마나도 익히고 있어 외부 조건에 영향을 덜 받을 테니, 적당한 후보였다.

하지만 카오르는 코웃음을 치며 건방진 표정으로 거절했다.

"사나이는 그딴 거 안 바릅니다."

"너 밤마다 얼굴에 과일 껍질 붙이는 거 누가 모를 줄 알아?"

"그건! 과일을 먹다가 우연히 붙은 겁니다!"

카오르는 지셀에게 져서 합류하기 전에도 종종 얼굴에 과일 껍질을 붙이고 잤다.

페르디움에 오고 나서도 가끔 그랬으니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어쨌든! 그건 안 바릅니다. 전 이제 그런 거 안 합니다."

본래도 피부 관리에 신경 쓰던 사람이, 정체도 모르는 걸 얌전히 바를 리가 없었다.

강경한 거부에 지셀은 어깨만 으쓱였다.

싫다는 사람에게 강요할 마음은 없었다. 믿을 만한 사람을 찾아 보면 그만이니까.

"실험해 줄 사람은 따로 찾아 봐야겠네. 아무튼 내기는 진행할 거니까 다들 그렇게 알고 있어."

"뭘 찾아요! 영주 체면이 있지, 내기한답시고 사람 찾아다니는 게 말이 돼요?"

벨린다가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성질을 냈다.

지셀이 황당해하며 고개를 기우뚱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안 한다잖아. 그러면 벨린다가 해 줄래?"

"아니, 그건 좀...."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자 그녀는 당황해서 고개를 푹 숙였다.

'으으, 어쩔 수 없지. 일단 바르는 척하고 방법을 찾아야겠다.'

벨린다는 고개를 들고 당당하게 손을 내밀었다.

"알겠어요. 제가 할 테니 한 통 줘 봐요."

받아도 바를 생각은 없었다.

그냥 최대한 잠을 많이 자고 마나 연공을 열심히 하다가, 내기가 끝나는 날 마나를 이용해 피부를 바짝 당겨 볼 속셈이었다.

그러면 잠깐이라도 확실히 피부가 좋아 보이는 효과가 나올 것이다.

"잠깐! 집사장은 안 됩니다."

클로드가 나서며 벨린다의 행동을 제지했다.

"왜요?"

"지금도 집사장은 피부가 꽤 좋잖아요? 눈가에 나이 주름은 조금 있긴 하지만...."

"조용히 안 해요?"

"어쨌든 집사장은 안 됩니다. 무슨 수를 쓸지 모르는 사람이에요. 다른 사람으로 해 주십시오. 피부가 안 좋아서 확실히 티가 날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도박장에서 몇 년을 구른 클로드답게, 갑자기 태도를 바꾸는 벨린다를 보고 바로 수상함을 감지한 것이다.

'아오, 저놈 진짜....'

벨린다는 씩씩거리며 클로드를 노려봤다.

잔망스러운 놈이 눈치는 빨라서 아주 결정적일 때 훼방을 놓는다.

지셀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른 사람을 찾아 보도록 하지. 이제 다들 나가서 일 봐."

벨린다가 한숨을 내쉬며 나가고, 다른 사람들도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도망치듯이 떠났다.

다들 거부했지만 지셀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를 믿고 흔쾌히 사용해 줄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용병들하고 사용인들은 좋아하지 않을까? 이런 건 귀족들이나 쓰니까 말이야. 뭐, 적어도 몇 사람 정도는 믿어 주겠지."

지셀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이거 한번 써 볼래?"

"죄, 죄송합니다."

"이거 한번 발라 볼래? 진짜 끝내주는 제품인데. 귀족들이나 바르는 거라고."

"용서해 주십시오!"

사람들은 모두 지셀이 만든 화장품을 꺼림칙하게 여겼다.

뭔지도 모르는 걸 바르라 하니 당연한 현상이었다.

"다들 지금 상태에 만족하면서 사는 건가? 상태가 좀 안 좋은 사람들만 모아서 줘 볼까?"

피부 상태가 안 좋은 사용인들과 용병들을 따로 모아서 줘 봤지만, 다들 마지못해 받거나 정말 싫어하는 기색이라 도로 뺏었다.

이래서는 제대로 된 테스트가 되지 않는다.

"하, 미치겠네. 나중에 귀족들한테 파는 것도 문제겠는걸? 내가 지금 델파인 공작만큼 이름값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델파인 공작가는 그 이름만으로도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었다.

회귀 전엔 공작가에서 새로 개발한 제품이라고 발표하자, 너도나도 화장품을 사려고 달려들었었다.

하지만 펜리스 영지는 변방 중의 변방, 그 영주인 지셀의 인지도 또한 바닥이었다.

그런 곳에서 만든 걸 누가 믿고 쓰겠는가.

지셀을 잘 아는 수하들도 이 모양인데, 귀족들은 아예 존재 자체를 무시할 게 뻔했다.

"테스트가 끝나면 수도로 올라가서 홍보할 방법을 찾아봐야겠어."

지셀은 혀를 찼다.

만들기만 하면 끝날 줄 알았는데, 살 사람을 찾아다녀야 하게 생겼다.

"일단 그건 나중에 생각해 보자. 지금은 테스트가 우선이다."

지셀은 열심히 성 안팎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자신이 만든 화장품을 권했다.

초반에 잡혔던 사람들이 투덜거리는 소리가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슬슬 지셀을 피해 다니기 시작했다.

"영주님이 들고 다니는 그거.... 받았어?"

"으음, 일단 받긴 했는데 표정 보더니 다시 뺏어 가더라."

"갑자기 왜 그런 걸 만들어서 판다고 하실까?"

"우리 영주님 가끔가다 이상해지잖아. 저번에도 독 마시고 죽을 뻔했고."

영주가 농사를 성공시킨 것은 영지 전체에 잘 알려져 있다.

그때는 지셀의 새로운 시도가 유효했음을 다들 인정했다.

하지만 그게 지셀의 본래 실력인지, 요행이었는지는 아직도 반신반의하는 사람이 많았다.

워낙 기행이 잦은 사람이다 보니 온전히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아슬아슬하게 믿음과 불신을 오간다고 해야 할까?

새로운 시도가 성공할지도 모른다고는 생각하지만, 그걸 자기 몸으로 실험해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영주가 다시 이상해졌다는 소문은 금세 영지 전체로 퍼져 나갔다.

부정적인 여론이 시작되니 더더욱 지원자를 찾기 어려워졌다.

"이 새끼들이.... 그냥 죄다 강제로 발라야겠다."

지셀이 저도 모르게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며칠이 지났음에도 테스트에 단 한 명도 지원하지 않았다.

처음에 가졌던 여유와 자신감은 박살 난 지 오래였다.

웬만하면 평화로운 방법을 쓰려고 했는데, 다들 이렇게 비협조적이니 어쩔 수가 없었다.

단체로 바르게 한 뒤 전체적인 표본을 구하는 게 더 빠를 터였다.

지셀이 강제로 테스트를 진행하려고 마음먹은 그때, 구세주가 불쑥 나타났다.

"영주님, 그거 제가 한번 써 보겠습니다."

"오, 길리언!"

영지를 시찰하러 나가 있었던 탓에 길리언에게는 바로 권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 충직한 남자는 소문을 듣자마자 먼저 찾아와 실험을 자처한 것이다.

지셀은 길리언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주름도 꽤 있고, 피부도 거칠고....'

가만 보니 테스트에 아주 적합한 인물이다.

길리언도 마나를 다루지만, 세월의 흔적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거기다 매번 밖에서 훈련하고 험하게 살아온 탓에 피부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훌륭한 시험자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지셀은 확인차 물었다.

"괜찮겠어? 다른 사람들은 다 피해 다니던데. 이거 내가 만든 거라고."

"외모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상관없습니다."

길리언도 믿는다는 말은 안 한다.

못마땅했지만, 그래도 자원한 게 어디냐 싶어 지셀은 슬쩍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주섬주섬 통 하나를 꺼내 길리언에게 건넸다.

"어떻게 사용하면 됩니까?"

"그냥 자기 전에 세수하고 얼굴에 바르고 자면 돼. 꼭 얼굴만이 아니라 다른 데 발라도 좋을 거야."

"알겠습니다."

그날부터 길리언은 지셀이 준 화장품을 꾸준히 바르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이것도 영주가 내린 명령이었으니까.

사흘이 지나자 주변에서 조금씩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영감, 요새 여자 생겼어? 얼굴 좋아 보이네. 어디서 만났어?"

"헛소리하지 마라. 모가지 날려 버리기 전에."

건들거리며 묻는 카오르에게 길리언은 건조하게 대답했다.

항상 똑같이 훈련하고 영지 개발 상황을 감독하느라 바쁜데 언제 여자를 만나겠는가.

그냥 하루하루 영주님께 도움이 되기 위해 살아갈 뿐이었다.

이틀 정도가 더 지나자 주변의 반응이 확실히 달라졌다.

용병들은 길리언을 볼 때마다 수군거렸다.

"뭐야? 뭔가 좀 젊어진 거 같지 않아?"

"피부 탱탱해진 것 봐. 혼자 좋은 거 먹나?"

"아니, 갑자기 얼굴이 저렇게 좋아져? 설마 저거... 대장이 만든 그 화장품을 쓴 건가?"

길리언의 얼굴에 이전과 달리 윤기가 흘렀다.

주름은 그대로였지만, 피부의 결이 달라지니 확실히 전보다 젊어 보였다.

햇볕에 타 칙칙해 보이던 피부색도 오히려 활력 넘치는 구릿빛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평생 관리를 한 적이 없으니 효과가 더 극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길리언도 왜 이렇게 됐는지 금세 깨달았다.

"영주님이 만든 게 정말 효과가 있었군. 역시 영주님은 대단하구나."

실제로 효과가 있다는 걸 알게 된 뒤 그는 더 열심히 화장품을 사용했다.

그 전까지는 한 손가락으로 떠서 바르던 걸 두 손가락으로 늘렸다.

피부에 신경 안 쓴다곤 했지만 주변에서 하도 말을 하니, 자기 전이나 아침에 방에서 나가기 전에 거울을 괜히 한 번 더 보게 되었다.

"나이를 먹어도 신경 쓰이는 건 똑같구나."

하루하루 달라지는 자기 얼굴을 보며 길리언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는 사람들이 물어볼 때마다 영주님이 만든 화장품의 효과라고 설명해 주었다.

소문은 이번에도 빠르게 퍼져 나갔다.

길리언처럼 피부가 안 좋은 사람도 사흘 만에 효과를 볼 정도로 대단한 화장품이다! 그야말로 화장품계의 대혁명이다!

그리고, 길리언에게 시제품을 넘긴 지 일주일째 되던 날.

쾅!

지셀의 집무실 문이 부서질 듯 큰 소리를 내며 열렸다.

업무를 보고 있던 지셀은 갑자기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들었다.

벨린다를 비롯해 클로드와 웬디 등 영지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다.

"무슨 일이야?"

지셀이 재미있어하며 묻자 벨린다가 가쁜 숨을 고르며 외쳤다.

"나도 그거 줘요!"

115화 인생 한 번 더 걸어 볼까? (3)

"뭘?"

지셀은 뻔히 알면서도 괜히 모른 척 장난스럽게 웃으며 대꾸했다.

벨린다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치며 말했다.

"나도 그거! 화장품 주세요! 좀 많이 주세요. 관리 열심히 해야 할 나이거든요."

"전에는 필요 없다며?"

"무슨 말씀이세요? 저도 지원했었잖아요. 저 놈팡이들이 막아서 못 받은 거지. 호호호, 우리 도련님은 정말 못 하는 게 없다니까?"

벨린다가 뻔뻔하게 받아쳤다.

지셀이 피식 웃으며 옆에 쌓여 있던 화장품 중 몇 개를 집어 던져 주었다.

어차피 여러 사람에게 테스트해 볼 생각으로 넉넉하게 준비해 놨으니까.

"꺅! 고마워요!"

그녀는 싱글벙글 웃으며 화장품을 품에 꼭 안고 냉큼 자리를 떠났다.

그 뒤를 이어 카오르와 용병들이 당당하게 앞으로 나섰다.

"저희도 좀 주십시오."

"사나이는 이런 거 안 바른다며. 그리고 너희들은 원래 꾸미는 거 관심 없었잖아?"

용병들이야 특이한 몇 놈 말고는 평소에 외모 관리에 큰 관심이 없었다.

험악한 놈이 관리해 봤자 매끈하고 험악한 놈이 될 뿐이니까.

한데 묶여서 같은 취급 당하는 게 억울했는지, 카오르가 옆에 있는 용병을 팔꿈치로 쿡 찔렀다.

"...꼬시고 싶어서요."

"뭐?"

"여자한테 선물로 줘서 꼬시려고요!"

"...그래. 솔직해서 좋네."

절절히 흘러나오는 욕망에 지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쓸 만큼 챙기고, 다른 용병들에게도 나눠 줘. 대신 선물 받은 사람도 부작용이 있으면 보고하라고 해."

"이예!"

지셀은 시제품 상자 몇 개를 상자째로 건네주었다.

용병들은 화장품을 받아 들자마자 환호성을 지르며 우르르 나갔다.

"웬디는 성의 다른 사용인들에게도 나눠 주도록. 경과 확실히 보고하라고 해."

"알겠습니다."

지셀은 웬디에게도 몇 상자를 챙겨 주었다.

구경하고 있던 다른 가신들도 한두 통씩 얻고 희희낙락하며 돌아갔다.

오직 클로드와 마법사들만이 손톱을 깨물며 불안해하고 있었다.

지셀은 그들을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너희는 안 돼. 지금은 내기 중이니까."

"으으... 치사해."

아직 내기의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길리언이 큰 효과를 보았다고 소문이 퍼져 가니 클로드와 마법사들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화장품을 얻어서 확인해 보려고 달려왔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일단 돌아가자. 벌써 겁먹을 필요는 없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고."

클로드가 마법사들을 달래며 물러났다.

고작 한 사람이 효과를 본 것뿐이다. 길리언은 마나를 다루는 사람이니 다른 요인으로 좋아진 걸 수도 있다.

마법사들은 클로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안정시켰다.

사람들이 한차례 집무실을 휩쓸고 지나간 뒤, 길리언이 지셀을 찾아왔다.

지셀은 반색하며 그를 맞았다.

"오, 길리언. 어서 와."

모두가 거부할 때 스스로 나서서 효과를 보여 준 남자다.

덕분에 지원하는 사람이 늘어 테스트도 한결 수월해졌다.

"확실히 피부가 좋아졌네. 어때, 쓸 만하지?"

"그렇습니다. 한층 젊어진 느낌입니다."

길리언은 자신감 넘치는 웃음을 흘렸다.

예전에 비해 매끈해진 피부 결에서 반짝반짝 윤이 나는 것 같았다.

"그래, 무슨 일이야? 화장품은 이미 받아 간 게 아직 남았을 텐데. 훈련 보고인가?"

"...저도 하나만 더 주십시오."

"응?"

"딸한테 좀 보내 주고 싶습니다."

"아, 그렇군. 이게 부모의 마음인가."

레이첼은 엘레나와 함께 페르디움에 있으니 얼굴을 못 본 지도 꽤 되었다.

직접 보살피지 못하는 딸에게 좋은 선물이라도 보내 주고 싶은 게 부모의 마음이리라.

지셀은 마음껏 쓰라고 여러 개를 건네주며 웃었다.

"덕분에 사람을 많이 구했어. 길리언의 공이 커. 영지 사정이 나아지면 엘레나와 레이첼도 데리고 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감사합니다. 다른 사람들도 써 보면 모두 만족할 겁니다."

길리언이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지셀이 그를 마주 보며 웃었다.

사람이 많이 참여했으니 이제 효과를 제대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흠, 그러고 보니... 바네사도 좀 가져다줘야 하나. 요새 계속 수련만 하고 있다던데."

지셀은 연무장에 처박혀 수련과 연구만 하고 있는 바네사를 친히 찾아갔다.

그녀는 현재 6서클의 경지를 돌파하기 위해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예고도 없이 찾아가자 그녀는 깜짝 놀라며 얼굴을 붉혔다.

"앗, 여, 영주님.... 갑자기 무슨 일로...."

"와, 너...."

지셀은 바네사를 보고 흠칫 놀랐다.

얼마나 수련과 연구에만 집중했는지 그녀의 꼴은 가관이었다.

머리는 완전히 떡이 되어 산발이었고, 옷은 대체 언제 마지막으로 갈아입었는지 꼬질꼬질했다.

지셀은 헛기침을 하며 바네사에게 화장품을 건넸다.

"소문 들었나? 이게 그 화장품인데, 시간 날 때 좀 발라 봐."

"네, 넵!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연구도 좋지만 잠도 좀 자고, 밥도 먹고, 좀 씻기도 하고."

바네사가 고개를 숙이고 슬쩍 미소를 지었다.

어디다 쓰는 물건인지는 둘째 치고, 무언가를 선물 받은 건 처음이었다.

지셀은 집무실로 돌아가려다 연무장 문을 닫기 전에 문틈으로 살짝 안을 확인했다.

그녀는 화장품을 한쪽 구석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책더미 사이로 스르르 들어갔다.

그리고 수백 권의 책 사이에 주저앉아 다시 연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와, 저걸 어떻게 다 읽어? 저게 다 머리에 들어가?"

마법사들은 클린 마법을 쓰면 최소한의 청결은 유지할 수 있다.

그렇기에 대부분은 남한테 지저분한 꼴을 보이는 걸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하지만 바네사는 청결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못할 정도로 연구에 몰입하고 있었다.

"하긴, 이렇게 본격적으로 공부할 기회가 없었겠지. 그래도 정말 대단하군."

마탑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그녀다.

온전히 수련과 연구에만 시간을 쏟을 수 있는 상황이 되었으니 얼마나 기쁘겠는가.

"조만간 마력도 최대한 올려 줘야겠어. 아주 믿음직스럽단 말이지."

지셀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못 받은 사람 중에 필요한 사람 있으면 전부 찾아오라고 해."

지셀의 명령이 성 곳곳에 빠르게 퍼졌다.

뒤늦게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이 넘쳐 났고, 시제품은 빠르게 동이 났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영주님이 주신 거 써 봤어? 대박이야! 지금 전부 난리야."

"어머, 야. 나 이틀 만에 피부 탱탱해진 것 봐라. 열 살은 어려진 거 같지 않아?"

"아니, 그건 좀.... 그래도 열 시간 정도는 젊어진 거 같아."

"귀족들이나 쓰는 물건인데 이 기회가 아니면 언제 발라 보겠어."

"이거 재료가 엄청 비싼 거래. 아껴 써야 해. 이럴 줄 알았으면 하나 더 받아 올걸."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지셀이 만든 화장품 얘기로 꽃을 피웠다.

피부 관리를 안 하던 사람들이라 효과가 눈에 띌 정도로 좋았다.

지셀은 며칠 동안 화장품을 사용한 사람들에게 경과 보고서를 꾸준히 받았다.

"좋아, 대부분 긍정적인 반응이군."

결과는 대호평.

나쁜 말을 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오히려 몇 개만 더 달라는 요청이 줄을 이었다.

귀족들이나 쓸 법한 물건을 경험해 본다는 인식도 화장품의 인기에 한몫했다.

자고로 비싼 걸 싫어하는 사람은 없는 법이니까.

성의 분위기가 들뜰수록 클로드와 마법사들은 점점 더 불안해했다.

"젠장! 요새 사람들 얼굴 봤어? 점점 매끈해지고 있잖아! 이거 정말 효과 없는 거 맞아? 어떻게 할 거야!"

알포이가 초조하게 외쳤다. 클로드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걱정하지 마. 아직 결과가 나온 것도 아니잖아. 왜 이렇게 급해? 도박에서 조급함은 금물이라고. 마지막 패를 까기 전까진 결과가 어떨지 아무도 모르는 법이야."

"사람들이 다들 칭찬만 하고 있잖아! 얼굴도 진짜 좋아지는 거 같다고!"

"그거야 분위기에 휩쓸려서 그래. 잠을 잘 잔 것뿐인데도 왠지 더 좋아 보이는 거지. 게다가 넌 모르겠지만 저기에는 엄청나게 비싸고 좋은 약초들만 들어갔어. 그러니 일시적으로 좋아 보일 수도 있지."

"뭐? 그러면 진짜 효과 있는 거잖아!"

클로드는 같잖다는 표정을 지으며 코웃음을 쳤다.

"그냥 좋은 거 다 때려 박는다고 성공할 거면 마탑에서도 벌써 오래전에 성공했겠지. 약초 아무거나 섞어 바르면 피부 더 안 좋아지는 거 몰라? 좋은 것도 마구 섞으면 독이 된다고. 그래서 귀족들도 조심하는 거고."

"그건 그렇지만...."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푹 쉬고 있어. 아니,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 봐. 너나 나도 아니고, 영주님이 성공한다니 말이 안 되잖아. 안 그래?"

"그, 그렇지."

알포이는 불안한 기색을 보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드는 박력 있게 책상을 내리치며 말을 이었다.

"우리는 지식인이라고, 지식인! 언제나 냉철한 이성과 지성으로 판단하는 사람들! 저런 무지하고 비상식적인 인간한테 휘둘리면 안 된단 말이야."

그 말에 알포이는 다시 자신감을 찾은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떴다.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클로드의 말은 확실히 틀리지 않았다.

영주는 어느 한 분야의 전문가도 아니고, 다방면으로 지식을 쌓은 사람도 아니다.

저렇게 말도 안 되는 일을 두 번이나 연달아 성공시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알포이를 따라 마법사들까지 떠나가자 클로드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정말 피곤하군. 다들 저렇게 심약한 주제에 내기를 왜 하는지.... 무서우면 애초에 하지를 말았어야지. 쯧쯧쯧."

뒤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던 웬디는 경악에 찬 눈으로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네가 꼬셨잖아!'

다른 건 몰라도 저 뻔뻔함과 주둥이는 정말 인정할 수밖에 없다.

웬디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클로드를 재촉했다.

경멸스럽기는 하지만 어쨌든 지금은 그가 펜리스 영지의 총관이니까.

"총관님, 일이 많이 밀렸습니다. 다음 일정은 군수 창고 건설 상황을 확인...."

그런데 갑자기 클로드가 몸을 배배 꼬며 손톱을 깨물기 시작했다.

웬디는 입을 다물었다. 꼴을 보아하니 옆에서 하는 말은 들리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젠장, 어떡하지? 진짜 효과가 있는 거 같은데. 와, 미치겠네. 설마 저것도 성공하는 건 아니겠지?'

웬디는 매일같이 클로드 옆에 붙어 있었다.

하루하루 달라지는 웬디의 피부 상태를 바로 옆에서 보고 있으니, 완전히 망했다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이거 훼방을 놓을 수도 없고!'

솔직히 방해할까 생각도 했다.

마법사들과 같은 편이니, 방법은 무궁무진했다.

아예 씻지 못하게 물을 없애 버리거나, 부패 마법을 이용해 공기를 더럽히면 간단하다.

'걸리면 최소 30년 이상 감옥에 갇히겠지.'

하지만 지셀의 성격상, 뭔가 이상한 기미가 보이면 증거가 없어도 일단 감옥에 처넣는 것부터 할 게 뻔했다.

이젠 화장품을 받아 간 사람이 많아서 훼방을 놓는 것 자체도 불가능해졌다.

성에서 일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용병들과 가신들까지 다 받아 갔으니, 그 사람들을 모두 막으려면 영지 전체에 손을 써야 했다.

대마법사가 아닌 이상 도무지 방법이 없었다.

'하, 씨. 어떡하지?'

발을 동동 구르던 클로드는 웬디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괜히 투덜거렸다.

"뭐, 왜! 이 배신자야. 너 화장품 바르더라? 어휴, 얼굴 매끈해진 것 봐."

웬디는 경멸 반, 안쓰러움 반 섞인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돌렸다.

얼마 동안 같이 지내면서 느낀 바로는, 저 주둥이는 상대할수록 손해였다.

초조해하던 클로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 몇 사람 정도는 분명 부작용이 있을 거야. 화장품이라는 게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지. 그런 제품을 영주님이 만들 수 있을 리가 없어. 마지막 날에 확인하면 돼.'

몇 사람만 부작용이 나와도 우기면서 무승부로 밀어붙일 수 있다.

조금이라도 위험한 제품은 귀족들이 거부할 테니 그것만으로도 상품의 가치가 없어진다.

'아직 결과도 안 나왔는데 벌써 겁먹을 필요는 없지. 이런 긴장감이 도박의 묘미인데, 나도 많이 약해졌군. 후후후.'

도박쟁이가 흔히 하는 현실 부정이었지만 클로드는 깨닫지 못했다.

"가자, 가. 일은 해야지."

내기 때문에 일을 소홀히 했다가는 분명 무시무시한 보복을 당할 것이다.

영주는 대범한 거 같으면서도 의외로 집요한 구석이 있었으니까.

어떻게든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서 발버둥 치는 클로드와 달리, 지셀은 쌓여 가는 서류들을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부작용 0건."

그 많은 사람들이 보름이 넘게 사용했음에도 부작용이 단 한 건도 없었다.

아무래도 세세한 제조법을 기억하는 게 아니라 오래 걸릴 거라고 예상했었는데, 각오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성공한 셈이었다.

화장품을 만드는 데 성공한 것도 기쁜 일이지만, 사람들이 화장품을 쓰면서 즐거워하는 게 보기 좋았다. 그 정도로 사람들이 마음의 여유를 찾았다는 뜻이니까.

지셀은 잠시 고민하다가 가신들에게 새로운 명령을 전달했다.

"그동안 다들 일만 하느라 너무 바쁘게 달렸다. 조만간 연회를 열 생각이다. 시간이 촉박하더라도 적절하게 휴식을 취해야 계속 싸울 수 있는 법이지."

가신들은 모두가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그 흔한 만찬조차 단 한 번도 연 적 없는 영주가 갑자기 연회를 열겠다니.

'저 일에 미친 영주가 웬일이래?'

놀라는 가신들을 보며 지셀은 말을 이었다.

"연회 날은 내기 마지막 날로 하겠다. 성의 사용인들과 영지민들이 모두 즐길 수 있게 술과 고기를 준비해라. 근무해야 하는 사람도 있을 테니 연회는 이틀간 진행한다."

내기 결과를 보는 김에 겸사겸사 휴식도 취하겠다는 뜻이었다.

사실 이번 내기도 영주의 승리라는 게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였다.

농사 때야 싹이 날 때까지 결과를 알 수 없었지만, 화장품은 다르다.

쓰는 사람 얼굴을 매일 지켜볼 수 있으니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바로 눈에 보였다.

사용인들까지 연회에 참가할 수 있다는 소식에 한껏 들뜬 사람들 사이에서 클로드와 마법사들만이 우울함에 잠긴 채 돌아다녔다.

그들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매일매일 여신께 기도를 올렸다.

"제발 세상이 멸망하게 해 주세요. 마왕이라도 하나 보내 주세요."

내기에서 또 지느니 그냥 다 같이 죽는 게 낫다는 심보였다.

116화 인생 한 번 더 걸어 볼까? (4)

바쁘게 지내다 보니 연회 날이 성큼 다가왔다.

지셀 또한 오늘 하루만큼은 일을 잊고 편히 쉬기로 했다.

"가끔은 마음 편하게 놀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지셀도 노는 걸 좋아한다.

용병왕 시절에는 귀찮은 일은 다 수하들에게 맡기고, 지셀은 재미있어 보이는 일만 골라서 했다.

하지만 지금은 할 일이 너무 많으니 화끈하게 놀고 싶어도 그럴 여유가 없었다.

"쯧, 빨리 다 쓸어버려야 마음 편하게 쉬지."

지셀은 투덜거리면서도 만면에 미소를 띠고 연회장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펜리스 성의 연회장은 그다지 넓지 않았지만 가신들과 사용인들의 수가 적은 편이라 연회를 여는 데에는 문제없었다.

몇몇 가신들이 품위가 떨어진다면서 사용인들을 들여서는 안 된다고 반대했지만, 지셀은 개의치 않고 밀어붙였다.

그는 놀 때는 다 같이 시끄럽게 놀아야 재미있다는 주의였다.

"나중에 아주 큰 광장을 만들어서 영지민들까지 다 모여도 재미있겠어."

마음 같아서는 이번에도 영지민들까지 부르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사람이 적은 영지라고 해도 영지민들을 전부 성내에 들일 수는 없었다.

지셀은 아쉬운 마음에 집집마다 술과 고기를 나누어 주었다.

공짜로 술과 고기를 얻게 된 영지민들도, 귀족들만 즐기던 연회를 직접 경험하게 된 사용인들도 기쁜 마음으로 영주를 칭송했다.

놀거리가 없는 가난한 영지다 보니 남녀노소 빼놓지 않고 모두 연회 날만을 기다렸다.

딱 한 무리만 제외하고 말이다.

클로드와 마법사들은 연회장 구석에 모여 저들끼리 수군거렸다.

그들은 낯빛이 거무죽죽하게 죽어 있었다.

"제발 한 명이라도...."

"분명 부작용을 겪은 사람이 있을 거야."

"하나라도 놓쳐선 안 돼. 반드시 찾아내서 무승부로 몰고 가야 한다."

그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혈안이 되어 부작용이 있는 사람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언제나 이성과 합리를 추구한다던 사람들이 보일 만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그만큼 불안하다는 뜻이었다.

'여신께서 마왕은 보내 주지 않으셨지만 그래도 뾰루지 하나 정도는 보내 주셨을지도 몰라.'

클로드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연회장 입구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들어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꼼꼼히 뜯어볼 속셈이었다.

* * *

기본적인 음식들의 세팅이 끝나고 급조된 악단이 자리를 잡을 때쯤, 지셀이 연회장에 들어왔다.

"아직 시작 안 했나? 그냥 대충 시작해. 노는데 뭐가 이렇게 까다로워."

원래 가장 높은 사람은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이지만, 지셀은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다.

영주가 의자에 털썩 앉아 고기를 뜯기 시작하자 가신들이 당황해 외쳤다.

"어서 시작해라!"

악단이 급하게 곡을 연주했다.

삑! 삑! 삐익!

급히 모은 사람들이라 다들 실력이 그리 좋지 않았다.

음정이나 겨우 제대로 맞추는 수준이었는데, 준비할 시간도 없이 갑자기 연주를 시작하니 그마저도 제대로 맞지 않았다.

덜컹!

문이 열리자마자 연회가 시작하기만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귀족처럼 화려하게 꾸미진 않았지만 다들 나름대로 깨끗한 옷을 입고 한껏 신경을 쓴 티가 났다.

공통점을 한 가지 더 꼽자면, 모두 얼굴이 반짝반짝하게 윤이 난다는 점이었다.

"앗, 아아...."

클로드는 고개를 돌려 버리고 말았다.

왠지 눈이 시큰한 건 틀림없이 조명 탓이다.

질 것 같아서 눈물이 난 게 아니다!

"아오... 씨."

클로드는 욕을 짓씹으면서, 연회장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열심히 훑어보았다.

여기도 깨끗, 저기도 깨끗, 매끈매끈하다.

피부색과 주름에 따른 차이는 있어도 피부 상태가 나빠 보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상태가 안 좋은 것은 클로드 옆에서 다급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마법사들 뿐이었다.

사람들이 거의 다 모였을 즈음 지셀이 손을 들어 음악을 멈추었다.

솔직히 귀가 아파서 듣기가 힘들었다.

"그동안 바쁘게 돌아가는 영지의 일에 최선을 다해 주어 모두 고맙게 생각한다. 앞으로도 계속 바쁠 테니 내일까지는 푹 쉬도록."

참으로 담백한 연회사였지만 다들 그러려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영주가 귀족답지 않게 허례허식이 없다는 건 이제 유명한 사실이었으니까.

지셀은 클로드와 마법사들을 향해 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영지의 총관과 마법사들이 나와 내기를 했다는 건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화장품 얘기가 나오자 사위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드디어 승패가 뻔한 내기의 결과를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화장품에 대한 평가는 아무래도 주관적일 수밖에 없겠지. 여기 있는 대부분이 모두 사용한 걸로 알고 있다."

지셀은 의자에 기대며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부작용이 있는 자는 앞으로 나서라. 내가 충분한 보상을 해 주겠다."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사실 부작용이 있어도 누가 영주 앞에 나서겠는가?

다행스러운 점은 정말 부작용이 없었다는 점이다.

"딱 봐도 없는 거 같긴 하네. 내기의 결과 판정은 이곳에 있는 자들에게 맡기겠다. 모두 화장품에 대해 솔직하게 말해 보도록."

처음에는 머뭇거리던 사람들이 눈치를 보다 하나둘씩 나섰다.

"정말 효과가 좋습니다. 이런 제품은 처음 봤습니다."

"피부가 전보다 훨씬 좋아졌어요. 확실히 효과가 있는 거 같아요."

"부작용도 없었습니다! 이건 완벽한 화장품입니다!"

"하나만 더 주시면 안 되나요? 제발요!"

한두 사람이 의견을 말하기 시작하자 곧 다들 왁자지껄 떠들며 화장품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제품의 성능이 확실하니 다음에는 못 구할 거 같다며 안타까워하는 반응도 많았다.

종국에는 화장품에 대한 칭송이 영주에 대한 칭송으로 변해 버렸다.

"정말 대단합니다! 새 농사법을 보여 주셨을 때도 경이로웠는데, 이런 제품까지 만드시다니요!"

"이건 정말 대박 날 겁니다! 우리 영지의 특산품이 될 거예요!"

"다른 것도 만들어 주세요! 이제 뭐든 다 믿을게요!"

칭찬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지셀은 거만하게 늘어져 앉은 채 더 칭송하라는 듯 배부른 표정을 지었다.

사람들이 지쳐서 칭찬이 시들해질 즈음, 지셀은 클로드와 마법사들을 돌아보았다.

"어때? 결과는 나온 거 같은데?"

"으, 으으...."

클로드와 마법사들의 얼굴이 삽시간에 창백해졌다.

그렇게 기도를 했는데 뾰루지 하나 난 사람이 없다니!

정말 효과가 있는 화장품을 만들 줄이야.

이제는 우길 수도 없었다.

클로드는 떨리는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연회장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패배 선언을 기다리는 듯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하...."

잠시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쉰 클로드는 자조적인 웃음을 내뱉었다.

"이거 참, 어쩔 수가 없군요. 영주님이 또 성공할 줄이야. 도대체 그런 건 어디서 배워 온 겁니까?"

이유야 어쨌든 패배를 받아들여야 했다.

그것이... '승부사'니까.

물론 개소리였다.

"좋습니다. 제가 졌습니다."

이제 20년 노예가 됐다.

뭐, 인생 걸고 도박을 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클로드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패배를 인정하자 주변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20년 노예 생활을 저렇게 담담하게 받아들이다니.

역시 펜리스 영지의 총관을 맡을 정도로 비범한 사람이었다. 제정신이 아니라는 뜻이다.

클로드는 정말 어쩔 수 없다는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가 주먹을 살짝 알포이에게 내밀며 말했다.

"졌지만 잘 싸웠어. 그래도 정말 멋진 승부였어. 그렇지, 브로?"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서 있던 알포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패배를 인정하고 환하게 웃고 있는 클로드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킥."

알포이는 피식 웃고는 자기 주먹을 클로드의 주먹에 가져다... 대려다가 갑자기 활짝 펼쳤다.

화르르륵!

알포이의 손바닥에서 불꽃이 넘실거리며 뿜어져 나왔다.

"으헉!"

기겁하는 클로드의 뒷덜미를 웬디가 빠르게 잡아당겼다.

얼굴이 타는 건 피했지만 덕분에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헤이, 브로!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클로드는 엉덩이를 문지르며 고개를 들었다.

알포이와 마법사들의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어, 어? 잠시만. 지금 공격하려고? 영주님 앞인데? 오늘은 즐거운 날이잖아!"

"죽인다."

알포이와 마법사들이 마력을 끌어올렸다.

상황이 심각해진 걸 깨달은 웬디가 잽싸게 클로드를 들고 연회장 밖으로 도망갔다.

아무리 그녀라도 마법사 스물여섯 명을 정면에서 당해 낼 수는 없었다.

"잡아 죽여!"

알포이와 마법사들이 우르르 그 뒤를 쫓아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만 지었다.

지셀은 가볍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자, 저쪽은 신경 쓰지 말고 마음껏 놀아. 저놈들은 내가 잡으러 가 볼 테니까."

영주까지 빠지게 되자 사람들은 마음 편히 연회를 즐겼다.

웬디는 연회를 놓치게 된 아쉬움에 속으로 투덜거리며 클로드를 업고 영지 곳곳으로 도망 다녔다.

"뛰어! 잡히면 죽는다!"

"닥치세요."

분노에 찬 알포이와 마법사들은 쉬지 않고 두 사람을 쫓았다.

그 추격전은 지셀이 개입해 모두를 제압한 뒤에야 겨우 끝이 났다.

* * *

"문제가 있습니다."

이제 20년 노예가 된 클로드가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디서 얻어맞고 왔는지 꼴이 엉망이었다.

"너는 문제가 없는 날이 없지? 그래, 이번엔 뭐가 문제냐?"

"화장품이 성공한 건 축하할 만한 일입니다. 누구든 한번 써 보면 감탄을 금치 못하겠죠. 저도 몇 개 좀 주십시오. 안나한테 보내 주게요."

"성공했는데 뭐가 문제라는 거야?"

"대량으로 생산하기에는 재료 단가가 너무 비쌉니다. 그렇다고 소량으로 생산하면 속도가 느립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이 화장품에는 수많은 약재가 들어갔다.

그중 가장 비싼 건 '요정의 축복'이라 불리는 꽃이었다.

길리언의 딸을 치료할 때도 썼던, 같은 무게의 금보다 비싼 꽃.

실제로 들어가는 건 아주 소량이긴 하지만 그래도 제작 단가가 만만치 않았다.

"괜찮아. 귀족들한테 더 비싸게 팔면 되니까. 어차피 그 제품은 귀족들이 주 수요층이다."

"고급화 전략 좋죠. 그런데 그것도 귀족들이 사야 돈을 벌 거 아닙니까? 성의 사용인들도 거부했던 물건입니다. 길리언이야 충성심으로 쓴 거죠. 귀족들은 그렇지 않을 겁니다."

"이제 홍보를 해야지."

"어떻게요? 여기는 시골 영지라 귀족들도 없습니다."

지셀은 생각해 둔 바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수도로 갈 거야."

"네?"

"사교를 즐기는 귀족들은 죄다 수도에 모여 있잖아? 거기서 인맥을 쌓고 화장품을 팔아 봐야지."

"하아.... 수도 귀족들은 깐깐하기로 유명하잖아요. 그 사람들이 뭘 믿고 영주님 제품을 사겠어요? 제대로 팔리지 않으면 손해만 보고 본전도 못 건질 겁니다."

"강제로 바르게 하면 어때?"

"네?"

클로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귀족한테 강제로 바르게 한다니, 가능한 일인가?

"한 보름 정도 납치해서 가둬 뒀다가 피부가 좋아지면 풀어 주는 거지."

"미치셨어요?"

"그래도 피부 좋아지면 고마워하지 않을까?"

"고마워하긴 개.... 아니, 아닙니다. 일단 죽이고 나서 생각하지 않을까요. 뒤늦게 깨닫는 거죠. 어? 이거 독이 아니었네?"

"흐음, 역시 별로인가."

"당연하죠. 제발 상식적으로 삽시다."

사실 지셀도 이번 일을 겪으면서 확실히 문제가 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델파인 공작가만 한 명성이 없는 이상 귀족들에게 파는 건 매우 힘든 일이 될 것이다.

"일단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보자고. 어차피 제품은 꾸준히 만들어 둬야 하니까 재료는 계속 주문해."

"끙... 하긴 이런 걸 개발해 놓고 안 팔 수도 없죠."

클로드도 판매 자체를 반대하는 건 아니다.

이렇게 효과가 확실한 제품은 대륙 어디에도 없다.

역시 가장 좋은 건 수도의 귀족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는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왕국의 유행을 선도하는 자들이었으니까.

귀족들에게 팔리기 시작하면 엄청난 돈방석에 앉게 될 것이다.

처음 한두 사람만 써 준다면 말이다. 그러기만 하면 너도나도 돈을 싸 들고 찾아올 텐데, 그 처음이 문제였다.

"초반에는 잘 안 팔릴 게 뻔하니 입소문을 탈 때까지는 조금 적게 만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니야, 일단 쟁여 놔. 누군가 써 주기만 하면 바로 엄청나게 팔릴 거야. 그때 가서 준비하려면 너무 오래 걸려."

"그렇긴 합니다만.... 안 팔릴수록 적자가 심해집니다. 단가가 너무 비싸요. 제대로 팔리지 않으면 본전도 못 건집니다. 보관하는 데도 한계가 있고요."

"괜찮아. 수도에 가서 직접 부딪쳐 보면 어떻게든 될 거야. 정 안 되면 방문 판매라도 해야지. 그렇게 파는 사람들도 있지 않나?"

"...판매 전략이 어질어질하네요."

방문 판매고 뭐고, 시골 촌놈이 파는 화장품을 누가 사 줄지 의문이었다.

멀쩡히 화장품 홍보만 하면 몰라도, 지셀은 화장품 사라고 칼 들고 협박이라도 할 거 같았다.

이러다 소문나면 지셀만이 아니라 그 주변 사람들의 체면까지 깎이게 생겼다.

"방문 판매는 일단 조금 더 생각해 보시죠. 그냥 귀족들과 친분을 쌓는 게 더 낫겠네요."

"그 방법도 써 볼까 고민 중이긴 해. 하, 친구 사귀는 거 쉽지 않은데."

"...그렇죠. 쉽지 않죠."

클로드는 이번 일에는 내기를 걸지 않았다.

어차피 효과가 확실한 제품이니 언젠가는 입소문이 날 것이다.

그러다 보면 분명 달라붙는 귀족도 생기고 친분도 생길 것이다.

다만 금방 그렇게 될 리 없으니, 그때까지 쌓일 재고로 손해를 볼 게 아까운 것뿐이었다.

"그러면 언제 출발하실 겁니까? 어느 정도 수량을 채우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텐데요."

"웬만큼 팔 수 있을 정도로 쌓이면 출발해야지. 테스트하는 중에도 계속 만들고 있었으니까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휴, 알겠습니다. 잘 다녀오십시오. 좋은 친구 많이 사귀시고요. 어휴, 잘 팔렸으면 좋겠네."

클로드는 기쁜 마음을 애써 감추고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수도에 갔다 오는 데만 해도 한 달이 걸린다.

홍보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생각하면, 영주는 꽤 오래 자리를 비우게 될 터였다.

클로드는 지셀이 없는 틈을 타 휴식도 좀 취하며 지친 심신을 달랠 생각이었다.

'빨리 꺼져 주세요.'

하지만 지셀에게서 나온 대답은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다녀오긴 뭘 다녀와? 너도 같이 갈 거야."

117화 내가 다 먹는 게 낫다. (1)

"저도 간다고요? 제가 왜요?"

"그럼 나 혼자 가서 장사하리? 같이 가서 어떻게 팔지 고민해야 할 거 아냐."

"아니, 저 할 일 많다고요! 바쁜데 어딜 가요!"

"웃기지 마. 나 없으면 바로 엎어져서 쉴 거잖아."

지셀은 클로드가 어떤 놈인지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아, 아니에요! 저 열심히 할 거거든요?"

"말은 잘한다."

지셀이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뭐, 그 거짓말이 진짜여도 말이지. 어차피 쭉 장사하려면 한 번은 네가 와서 봐야 해. 수도부터 시작해서 왕국 전역에 팔 건데, 관리할 사람이 알아야 할 거 아니야."

"그럼 지금 여기 일들은요?"

"일단 큰 틀은 잡혔으니까 잠깐 감독하는 정도는 다른 사람도 할 수 있을 거야. 당분간 일 맡길 사람이나 구해 놔."

"으으으...."

클로드는 할 말이 없어 머리만 감싸 쥐었다.

사람을 구하더라도 일이 줄어드는 건 아니다.

자리를 비운 동안 작업 상황이 어땠는지 확인해야 하니 오히려 일이 늘어날 것이다.

그렇다고 가지 않을 수도 없었다.

지셀의 말대로 앞으로 화장품 판매를 총괄하려면 수도에 가서 판매처도 찾고, 유통 준비도 해야 한다.

현재 펜리스 상단의 상단주 역할까지 클로드가 맡고 있으니까.

물론 파는 건 하나도 없이 무언가를 사 오기만 하는 유령 상단이지만 말이다.

가기 싫어서 몸을 배배 꼬던 클로드의 머릿속에 번뜩이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잠시만요. 굳이 우리가 직접 팔아야 해요?"

"직접 안 팔면 어떻게 하려고."

"그냥 신용 좋고 큰 상단에 팔죠? 그러면 그쪽에서 어떻게든 검증해서 귀족들한테 팔 겁니다."

화장품은 그 정도로 효능이 확실한 물건이었다.

거대 상단이라면 사람을 구해 검증하기도 쉬울 것이다.

하지만 지셀은 클로드를 한심하게 보며 혀를 찼다.

"내가 왜?"

"아니, 그냥 큰 상단에 넘기면 편하잖아요?"

"우리도 상단이 있는데 그걸 아깝게 왜 넘겨?"

"우리 상단은 그냥 이름만 상단이지 인지도도 없고, 뭐 사 올 때 편하게 사 오려고 만든 것뿐이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화장품을 시작으로 크게 키워야지. 직접 팔면 이윤도 우리가 다 먹을 수 있는데 왜 다른 상단을 끼워? 난 내 걸 남에게 넘긴 적이 없다."

클로드가 헛웃음을 지었다.

"와, 욕심 뭐야...."

"그리고 다른 상단에 맡기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최대한 빠르게 판로를 만들고 돈을 마련해야 한다. 상단도 키워야 하니까 잔말 말고 그냥 따라와."

"아니, 돈도 많으신 분이 왜 그렇게 급하세요? 룬스톤도 아직 많이 남았잖아요."

투덜거리는 클로드에게 지셀이 담담한 어조로 답했다.

"부족해. 시간과 돈은 언제나 부족하다."

'공작가가 언제 움직일지 모른다. 그 전에 준비를 끝내야 해.'

당장 펜리스 영지가 공격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데스몬드는 지난 전쟁에서 진 걸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이쪽보다는 레이폴드를 하루빨리 차지하는 데 더 힘을 쏟을 테니까.

그 틈을 이용해 최대한 빨리 영지의 힘을 키워야 한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면 지금 있는 돈도 부족하다.

'룬스톤도 슬슬 한계가 보이고.'

아직 룬스톤이 떨어진 건 아니지만, 룬스톤을 대량으로 써야 하는 계획이 남아 있었다.

마탑에 넘겨줄 양까지 생각하면 아슬아슬하다.

'다시 마수의 숲에 갈 여유가 없어.'

마수의 숲을 새로 개척하기에는 아직 전력이 부족했다.

힘을 키우기 전까지는 마수의 숲 외에 다른 기반을 활용해야 했다.

'연계할 세력도 만들어야 해. 발목이라도 잡아 줄 놈들이 필요하다.'

그저 화장품만 팔기 위해서 수도에 가는 건 아니었다.

델파인 공작가의 강대한 세력과 맞붙으려면 반대 파벌의 힘이 필요하다.

'나 혼자서 공작가와 싸울 필요는 없지. 왕실도 델파인 공작이라면 이를 갈고 있을 테니까.'

지금이면 친왕파와 공작가의 대립이 점점 심화되고 있을 때니 이용하기도 좋다.

그들을 만나서 손을 잡아야 한다.

'전쟁은 내가 원하는 시간, 원하는 곳에서 시작할 거다. 전쟁을 걸어도 내가 먼저 건다. 내 땅에서 싸울 일은 절대 없어. 네놈들의 기반까지 박살 내 주지.'

지셀이 주먹을 꾹 쥐었다.

영지를 키우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그것도 결국 공작가를 상대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하지만 속내를 모르는 다른 사람들은 매사 조급해하는 지셀을 이해하지 못했다.

클로드도 마찬가지였다.

식량 문제도 해결했고, 룬스톤도 있고, 이젠 특산품까지 개발했다.

이대로만 있어도 펜리스 영지는 점점 발전할 것이다.

그런데 지셀은 뭐가 그렇게 급한지, 꼭 항상 뭔가에 쫓기는 사람 같았다.

'이거 그거네. 백 퍼 누구한테 원한 산 거야. 아오, 미치겠네.'

지셀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기껏 히트 상품을 개발했는데 다른 상단에 넘기는 건 남 좋은 일만 하는 셈이니까.

하지만 클로드는 화장품을 직접 팔러 다니기는 죽어도 싫었다.

가뜩이나 피곤한데, 상단 업무까지 늘어나면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화장품이 팔리기 시작하면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바빠질 것이다.

"아! 진짜! 수도 갔다 오면 또 일이 어떻게 됐는지 점검해야 하잖아요! 나 혼자 언제 다 해요! 거기다 상단 일까지 하라고요? 싫어요! 싫다고요! 나 못해요! 그냥 죽이십쇼!"

급기야 클로드는 바닥에 드러누울 기세로 대들기 시작했다.

"사람을 더 뽑으라니까. 다른 관리들한테 좀 일을 나눠 주면 되잖아."

지셀의 말에 클로드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치며 울상을 지었다.

"지금 그 사람들은 자기 일만도 벅차서 겨우 하고 있습니다. 맡은 분야 말고 다른 일은 아예 몰라서 서로 돕지도 못해요. 일도 뭘 알아야 할 거 아닙니까."

"음...."

지셀이 생각해도 확실히 업무량에 비해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 수가 너무 적었다.

중요한 일은 지셀이 직접 진행하고, 클로드를 영입해 총관리직을 맡겼지만 여전히 동시에 진행되는 일이 너무 많았다.

아무리 두 사람이 뛰어나다고 해도 인간인 이상 한계는 있었다.

지셀도 그걸 알지만, 시간은 촉박하고 할 일은 많으니 계속 클로드를 쥐어짤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어. 그냥 네가 더 굴러.... 음? 잠시만."

문득 지셀은 한 사람을 떠올렸다.

그리 믿을 만한 놈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 영지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업무의 대부분은 처리할 수 있는 놈이었다.

그놈이라면 클로드의 보조로 적합할 것이다.

지셀은 갑자기 인자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요새 힘들지? 사람 하나 소개해 줄까? 너 도와줄 만한 애를 하나 아는데."

"여자예요? 예뻐요?"

"남자야."

"...싫은데요."

"그럼 계속 혼자 하든가."

클로드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이놈의 영주는 항상 선택지가 있는 것처럼 물어보지만 사실 답은 정해져 있다.

그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누군데요? 영지 일을 맡기려면 진짜 최소한의 지식은 있어야 해요."

고양이 손 하나라도 아쉬운 판이긴 하다.

하지만 영지 운영을 맡기려면 최소한 글을 알아야 하고, 숫자 계산도 가능한 사람이라야 한다.

"그건 만나서 한번 확인해 봐. 바로 움직이자."

"...지금요?"

"시간은 금이라니까."

"아니, 뭐 이렇게 급하게.... 미리 연락이라도 해 두고 가야죠. 만나서 일하라고 하면 한대요? 그 사람이 거절하면 어떻게 하려고요."

지셀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거절하면 죽는 거지."

* * *

지셀은 클로드와 함께 옛 디갈드 백작의 성을 찾아갔다.

가는 길에 겸사겸사 영지를 둘러보던 두 사람은 영지 상황을 확인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와, 여기도 상태가 만만치 않네요. 우리 영지 보는 줄. 아니, 이제는 우리가 훨씬 더 낫군요."

디갈드 영지는 전쟁에서 진 뒤 제대로 복구되지 않은 상태였다.

페르디움도 돈과 사람이 부족해 디갈드 영지 쪽에는 거의 손을 대지 못했다.

그나마 지셀이 준 룬스톤으로 영지민들에게 구호물자를 보내 겨우겨우 버티고 있었다.

기껏 땅을 넓혔는데 세금은커녕 돈만 더 나가는 골치 아픈 상황이었다.

"나중에 식량이라도 좀 보내 줘야겠군. 아니면 그냥 여기까지 내가 먹는 게 나으려나?"

"아주 대놓고 불효자네요."

"아깝잖아. 페르디움에 맡겨 두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지셀은 차후 펜리스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면 디갈드 영지까지 받아 오기로 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땅을 놀리자니 아까웠지만 당장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지금은 펜리스를 발전시키는 데 온 힘을 다해도 모자라다.

지셀은 디갈드 성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지하 감옥으로 내려갔다.

"흐음, 그놈이 어디 있으려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놈은 빼 가지 말라고 했는데."

직접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하급 관리들은 이미 페르디움에서 죄다 데려간 상태였다.

하지만 한 사람은 지셀의 부탁으로 그대로 감옥에 처박혀 있었다.

"와, 못 보던 친구들이 많이 늘었네. 개판이네, 개판이야."

감옥은 빈방 없이 꽉 들어차 있었다.

죄수들 대부분은 엉망이 된 영지에서 깽판을 치다가 새로 잡혀 온 범죄자들이었다.

지셀은 혀를 차며 죄수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다 겨우 찾던 사람을 발견했다.

남자는 그래도 특별 취급을 받고 있었던 건지, 그나마 깨끗한 방에 혼자 멍하니 주저앉아 있었다.

바로 엉터리 숫자 계산으로 지셀을 웃겨 살아남았던 로웰이었다.

"음, 이름이 로웰이었나? 그래도 아직 살아 있었네."

해골처럼 비쩍 마른 로웰이 지셀의 목소리에 번쩍 고개를 들었다.

"누, 누구...."

"나야, 나. 기억 안 나?"

"으허허헉!"

로웰은 엉덩걸음으로 후다닥 물러나 뒤에 있는 벽에 달라붙었다.

어두워서 한 번에 알아보진 못했지만, 저 얼굴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페르디움에서부터 디갈드까지 짓쳐들어와 항복한 백작과 가신들을 모조리 죽인 자.

로웰에게 지셀은 끔찍하게 두려운, 사신과 같은 존재였다.

"저, 저기, 왜, 왜 오셨어요? 서, 설마 이제 저 죽이시려고요?"

감옥에 갇힌 직후에는 겨우 살았다고 안도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예감이 좋지 않았다.

같이 갇힌 사람들은 모두 풀려났는데 자신만 계속 갇혀 있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불안한 마음으로 매일 밤을 지새웠다.

나중에 사형에 처하려고 자신만 감옥에 내버려 두는 게 아닐까 하는 공포 때문에.

그리고 결국 그의 목숨줄을 쥔 악마가 눈앞에 다시 나타났다.

"살려 주세요! 저 진짜 죄 없어요! 시키는 대로 한 거예요! 전 그냥 열심히 일했습니다!"

지셀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예전에 물었던 질문을 다시 던졌다.

"그럼 750 곱하기 1920은 뭐지?"

"144만!"

빛과 같은 속도로 답이 나왔다.

로웰은 감옥 안에서 매일 그날의 대답을 후회하며 곱씹었다.

이렇게 말할걸!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클로드는 순식간에 나온 대답에 깜짝 놀랐다.

"아니, 뭐야? 뭐가 저렇게 빨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이 정도로 머리가 좋은 놈이라면 조금만 가르쳐도 금방 적응하겠는데?'

클로드가 얼른 지셀에게 말했다.

"이놈 저 주십쇼. 제가 잘 쓰겠습니다."

"어때? 마음에 들어?"

"예.... 근데 생긴 건 그냥 해골 병사 같네요. 여기 식사가 별로인가 보네."

"감옥에서 못 먹어서 그렇겠지. 잘 먹이면 될 거야.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진짜 데려갈 거야?"

미묘하게 수상한 대화였다.

마음에 든다? 나를 달라고? 잘 먹이고 잘 쓰겠다고?

로웰은 자기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벽에 막혀 도망치지 못했다.

그때, 지셀이 창살을 잡고 조용히 말했다.

"너, 나랑 같이 일 좀 하자."

"무, 무슨 일 말입니까?"

"그거 알려 주기 전에.... 20년짜리 노예 계약서 하나 쓰지 않을래? 20년 동안 열심히 일해 보자는 뜻으로."

"20년...이요?"

살아날 수만 있다면 20년이든 30년이든, 노예살이도 마다할 처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말 직전에 이어진 대화의 흐름이 너무 꺼림칙해서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지셀은 잠깐 고민하다 혀를 차며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 노예 계약이 싫다면야 강요할 수는 없지. 그럼 다른 거 골라 봐. 1번, 감옥에서 굶어 죽기. 2번, 사형. 선택지를 더 주다니, 나도 참 착해졌다니까."

분명 강요는 아니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제안이었다.

118화 내가 다 먹는 게 낫다. (2)

"그, 그냥 노예 계약 하겠습니다."

"잘 생각했다. 어이, 이놈 풀어 줘."

간수가 다가와 잠겨 있던 문을 열어 주었다.

클로드는 드디어 일을 시킬 사람이 생겼다는 것에 크게 기뻐했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우리 화끈하게 해 보자고, 브로."

"대체 뭘 화끈하게...."

로웰은 자신의 어깨를 툭툭 치는 클로드를 피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가까이 다가갈 때마다 자꾸 소름이 쫙쫙 돋는 게, 이 사람하고 엮여서 좋을 게 없다는 직감이 들었다.

* * *

펜리스 영지로 돌아가는 길. 로웰은 지셀이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듣고 조금 안심했다.

'마지막 기회다!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 줘야 해.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

그는 자기 능력을 보이기 위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었다.

그걸 들은 클로드는 로웰의 방대한 지식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영지민을 수탈하는 법, 범죄 조직을 이용하는 법, 돈놀이를 하는 법, 심지어는 다른 귀족을 이용하고 파산시키는 법까지.

세상 모든 편법과 악행을 다 꿰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도 가끔 요령을 부리긴 하지만, 로웰 정도는 아니었다.

"와, 너 진짜 쓰레기구나. 너 같은 놈은 처음 봐. 진정한 적폐가 이런 거구나."

클로드의 말에 로웰은 자랑스러운 듯 환한 미소를 지었다.

디갈드에서 쓰레기란 말은 최고의 칭찬이었다. 영지민들에게서 많은 돈을 긁어낼수록 영주의 마음에 들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짜내겠습니다."

"...이 영지는 진짜 정상인 놈이 없다니까."

클로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놈은 지셀이 디갈드처럼 영지를 운영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지셀이 클로드에게 웃으며 경고했다.

"정신 교육 제대로 해야 할 거다. 같이 목 날아가기 싫으면 말이야."

"...네."

클로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도 희망이 보였다. 정신머리는 좀 나간 것 같지만, 영지 운영을 해 봤던 놈이니까. 경력자는 환영이다.

머릿속에 가득한 적폐를 깨끗하게 씻어 내고 잘 가르치면 큰 도움이 될 터였다.

하지만 자기 문제가 뭔지 전혀 깨닫지 못한 로웰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면서도 어리둥절한 표정만 지었다.

'일을 맡으면 돈을 쭉쭉 뽑아내야지. 저 괴물 같은 인간도 한번 돈맛을 보면 태도가 달라질 거야.'

로웰은 자신만만하게 지셀을 따라갔다.

하지만 그의 기대는 펜리스 영지에 도착한 순간 박살이 나고 말았다.

"뭐, 뭐야? 영지가 왜 이럽니까? 여기 펜리스 영지 맞습니까? 다른 영지 아닙니까?"

지금 상단이 와 있는 건가? 그것도 성문 앞에 줄지어 들어간다고?

저건 뭐야? 왜 식량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지?

척 봐도 새로 지은 듯한 건물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거기에 영지민들의 분위기는 또 왜 이렇게 밝은 건지.

'아니, 이럴 리가 없는데?'

로웰은 쉽사리 진정하지 못하고 영지를 둘러보느라 바빴다.

디갈드가 고향인 그에게 이런 광경은 무척이나 어색하고 생소했다.

놀라고 있는 로웰의 어깨를 툭툭 치며 클로드가 거만하게 으스댔다.

"모두 이 몸의 작품이지."

"아, 만지지 마시고요.... 정말입니까? 총관님이 이렇게 발전시켰다고요?"

로웰이 너무 호들갑을 떠니 조금 민망해진 클로드가 소심하게 정정했다.

"이 몸과 영주님의 작품이다."

영지가 이렇게 엄청난 속도로 발전한 건 지셀의 자금력과 추진력 덕분이다.

아무리 뻔뻔한 클로드라도 그것까지 부정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뒷생각 안 하고 일만 벌이는 영주님 뒤치다꺼리한 건 나지.'

그러니 영지가 발전한 데에는 자기 지분도 반 정도는 있다고 클로드는 생각했다.

"영지가.... 어떻게 이런...."

로웰은 넋이 나간 채 영지를 둘러보았다.

어렸을 때부터 피죽도 제대로 못 먹고 자라 고생만 했다.

어떻게든 성공하고 싶어 글을 익히고 공부를 했다.

훌륭한 행정관이 되어 굶는 사람이 없는 영지를 만들고 싶었다.

분명 그런 꿈을 꾼 적도 있었다.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평민으로서는 제법 높은 자리에 올랐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영주가 마음먹지 않는다면 영지는 절대 변하지 않는다.

로웰은 결국 현실을 받아들이고 살기 위해 영주가 원하는 대로 일해 왔다.

다들 그렇게 사는 줄로만 알았다.

그랬는데....

"왜 이렇게 넋이 나가 있어? 오랜만에 와 보니까 어때?"

상념에 잠겨 있던 로웰은 지셀의 목소리를 듣고 퍼뜩 놀라 고개를 저었다.

"노, 놀랍습니다. 이곳이 이렇게 활기차게 바뀌다니...."

그는 백작령 전체 운영을 맡았던 시기에 이곳에도 몇 번 와 본 적이 있었다.

그 시절, 이곳을 다스리는 영주는 그야말로 악마와 다를 게 없었다.

참다못해 도망가는 경우는 차라리 양반이었다. 삶을 포기해 떠날 생각조차 못 하는 이들로 가득했다.

그랬던 곳이 단 몇 달 사이에 이렇게 변하다니. 제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제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할 거다. 예전처럼 영지를 관리하려 했다가는 바로 목을 베겠다."

지셀이 로웰을 싸늘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로웰은 긴장한 듯 표정을 굳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지 발전에 도움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디갈드 백작이 시켜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해도, 네게 죄가 없는 건 아니다. 앞으로 영지민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도록."

"명심하겠습니다."

오히려 바라던 일이다. 로웰은 언제나 이런 영지에서 일하기를 꿈꿔 왔다.

무엇보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무서워서 나쁜 짓을 할래도 엄두가 나지 않는다.

눈을 가늘게 뜨고 로웰을 뜯어보던 지셀이 클로드를 돌아보며 물었다.

"어떻게 쓸 생각이지?"

클로드는 잠시 고민하더니 곧 시원시원하게 내뱉었다.

"일단 나쁜 짓은 두루 꿰고 있는 것 같으니 첩보관 자리에 올리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행정부 서기관도 겸해서 제 업무를 보조하게 하고요."

첩보관은 잔머리가 잘 돌아가고, 범죄자들의 사고방식에 익숙해야 한다.

그야말로 로웰이 적임자였다.

대부분의 업무를 해 봤다고 하니, 조금만 영지 사정에 맞게 가르치면 될 것이다.

그 정도만 맡겨도 클로드로서는 일하기가 훨씬 수월해진다.

지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디갈드 백작 밑에서 나쁜 짓이란 나쁜 짓은 다 하던 놈이었으니 그쪽은 더 잘 알겠네. 클로드 말대로 하자."

"감사합니다!"

로웰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결심했다. 이번에는 진짜 열심히, 제대로 살아 보기로.

"당분간은 우리 영지에서 정보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철저히 봉쇄해야 할 거야."

"알겠습니다."

지셀은 농작물의 싹이 트기 전에 영지를 한번 싹 청소했다.

첩자들을 솎아 내고 상단들도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꼭 필요한 외부 인력은 돈을 더 주겠다고 달래 가며 반쯤 구금시켜 두었다.

새로운 경작지에 아예 벽을 치고 영지민들을 모아 경계를 세워 두기까지 했다.

"숨길 수 있을 만큼 숨기는 게 낫겠지."

데스몬드에서도 아멜리아를 지원하느라 지셀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것이 봉쇄령과 맞물려 영지의 정보는 물샐틈없이 차단되었다.

지셀은 클로드에게도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곧 1차 목표로 세운 물량이 준비될 거야. 보름 정도 뒤에 출발할 거니까 그 전에 기존 업무가 차질 없이 진행되도록 이놈 잘 교육해 놔. 필요한 자재들도 미리 준비해 놓고."

"알겠습니다. 야, 빨리 가자. 너 할 거 많아."

클로드가 로웰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괜히 친한 척을 했다.

내기 건으로 마법사들과도 사이가 틀어져서 주위에 말이 통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 와중에 제법 똘똘한 놈이 밑에 들어오니 조금은 마음이 든든해졌다.

"아우, 왜 자꾸 달라붙으시는데요."

"달라붙긴 누가 달라붙어. 좀 친하게 지내자는 거지. 괜히 예민하게 구니까 수상하네. 너 뭐 숨기는 거 있냐?"

"아, 그런 거 없습니다. 찝찝해서 그렇지."

티격태격하며 떠나는 두 사람을 바라보던 지셀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영지가 커질수록 다뤄야 하는 정보의 양도 방대해진다.

언젠가는 전속으로 정보 관리를 맡을 사람이 필요했는데 클로드가 그 부분을 잘 포착했다.

제대로 써먹으려면 잘 가르쳐야겠지만, 그거야 클로드가 알아서 할 일이고.

'잘못 가르치면 자기만 더 피곤해지는 거지, 뭐. 사람도 붙여 줬겠다, 일을 좀 더 시켜 볼까.'

클로드가 들으면 기겁할 생각을 하며 지셀도 발걸음을 돌렸다.

수도에 가기 전에 처리해 둬야 하는 일이 아직도 잔뜩 남아 있었다.

* * *

클로드는 보름이 다 되기도 전에 지셀을 찾아왔다. 얼굴에는 곤란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지셀이 먼저 말했다.

"돈 떨어졌지?"

"돈이 점점 바닥을 드러내고 있습.... 어? 알고 계셨습니까?"

"흠, 그럴 때지. 걱정하지 마. 화장품만 팔리기 시작하면 금방 해결될 거야."

"그 전에 돈이 똑 떨어질 거 같은데요?"

"그때까지는 룬스톤을 캐다 팔면 되지."

클로드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렸다.

"아니, 지금 당장 쓸 돈이 없다니까요. 룬스톤을 캐 와도 현금화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생각하셔야죠. 진행 중인 사업 중에 몇 개는 잠깐 멈추는 게 어떨까요? 아니면 수도에 가는 걸 조금 늦추든가요."

"싫은데?"

클로드는 주먹을 꾹 쥐고 부들부들 떨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싫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잖아요. 돈이 없는데 어떻게 일을 시키려고요?"

"잠깐 따라와."

"...왜요? 때리시려는 건 아니죠? 제가 틀린 말 한 건 아니잖습니까."

"돈 줄게."

"네?"

클로드는 어리둥절해하면서도 돈을 준다는 말에 얌전히 지셀을 따라갔다.

이미 돈 관리는 전부 자신에게 넘겼는데, 대체 돈이 어디서 난 걸까?

지셀은 자신의 집무실에 딸린 개인 창고로 클로드를 데리고 갔다.

창고는 큰 옷장과 궤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돈 주신다더니.... 옷 자랑 하려고 데리고 오셨어요?"

지셀은 경계하듯 방 안을 슥 둘러보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야, 너 이거 우리 아버지한테는 비밀이다. 소문나면 죽을 각오 해."

말을 끝내자마자 지셀이 옷장과 궤짝을 활짝 열었다.

휘황찬란한 보석과 값나가는 장식품, 금화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일단 절반만 가져가. 그 정도면 당분간 버틸 수 있을 거야. 상단들 많이 오니까 이건 현금화도 쉽잖아?"

재화로 가득 찬 방을 둘러보던 클로드가 황당하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도, 도대체 이게 뭡니까? 언제 이렇게 돈을 꼬불쳐 두셨어요?"

클로드가 알기로 지셀은 룬스톤 외에 자금줄이 없다.

그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부자인 건 맞지만, 이렇게 큰돈을 뒷주머니로 모아 둘 방법은 없었다.

지셀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 이건 전리품이야. 디갈드 백작하고 그 휘하 가신들 개인 재산."

"...네? 전리품이요?"

"점령한 날 아예 영지를 싹 털었거든. 가신들 저택하고 창고까지 다 뒤져서 긁어 왔어. 비상금으로 쓰려고."

"미, 미친...."

클로드는 순간 머리가 띵해져서 비틀거렸다.

지셀이 왜 소문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는지 이해가 갔다.

창고 가득 쌓인 재물의 정당한 소유자는 지셀의 아버지, 즉 페르디움 백작이었다.

아무리 큰 공을 세웠다고는 하지만, 지셀은 어디까지나 영주가 아니라 일개 지휘관이었을 뿐이다.

지금 지셀은 점령지의 재산을 몰래 빼돌렸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거 걸리면 사형인 거 아시죠?"

영주의 재산을 몰래 착복하는 건 반란과 동급으로 취급한다.

아무리 지셀이 소영주라고 해도 처벌을 완전히 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지셀은 클로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눈을 부라렸다. 어디 감히 그런 소리를 하냐는 눈빛이었다.

"무슨 소리야. 내가 페르디움에 룬스톤을 얼마나 많이 줬는데. 뺏어 온 게 아니라 바꾼 거야, 바꾼 거. 세상에 룬스톤을 공짜로 주는 사람이 어디 있어?"

클로드는 헛웃음조차 짓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뛰는 클로드 위에 나는 지셀이 있었다.

119화 내가 다 먹는 게 낫다. (3)

공짜가 아니라는 말은 룬스톤을 준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전리품을 챙겨 왔다는 뜻이다.

식은땀을 흘리던 클로드가 조심스레 물었다.

"페르디움 백작님이나 그 가신들은 전혀 모릅니까?"

"모르지. 디갈드가 워낙 가난한 걸로 유명하잖아. 전쟁 비용으로 재산을 거의 다 쓴 줄 알걸? 내가 그렇게 보고하기도 했고."

지셀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디갈드로 달려왔다.

디갈드 백작을 죽여서 후환을 없애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귀족들의 재산을 죄다 챙기려는 속셈이 컸다.

아무리 가난한 영지라 해도, 귀족은 귀족이다.

거기다 디갈드 영지는 영지민을 수탈하기로 유명했다. 그만큼 영주와 가신들이 숨겨 둔 재산이 많았다.

클로드가 궤짝에 담긴 금화를 살피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정말 많군요. 영지 상태가 그 꼴이었던 것도 이해가 갑니다."

"아, 이게 다 디갈드에서 나온 건 아니야. 돌아가는 길에 남작령들도 다 털었거든."

"...네?"

"전쟁 참여한 놈들은 다 털었지. 어차피 가는 길이니까 겸사겸사."

"와.... 그걸 혼자 다 먹었다고요?"

"그럼 누구랑 나눠 먹냐? 난 내 걸 남한테 뺏기는 게 제일 싫어."

부끄러움 한 점 느껴지지 않는 발언에 클로드는 눈을 감았다.

'아버지가 남이냐? 그리고 원래 아버지 거잖아.... 진짜 이건 귀족이 아니라 산적 새끼인가.'

세이론 왕국에서도 욕심 많은 귀족은 숱하게 봐 왔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돈을 밝히는 놈은 단연코 처음이었다.

"저기, 혹시 출생의 비밀 같은 거 있으신 건 아니죠?"

"뭔데. 무슨 뜻이야?"

지셀이 노려보자, 클로드는 손사래를 치며 변명했다.

"아니, 페르디움 백작님한테도 말을 안 하셨다니까 그렇죠. 꼭 이렇게 혼자 다 먹어야 해요? 아버지 섭섭하시게."

"장담하는데, 다 내가 쓰는 게 훨씬 낫다."

페르디움이 챙겨 봤자 또 어영부영 새는 바가지나 때우다가 전부 날릴 게 뻔했다.

그들은 미래를 대비하기는커녕 현재를 견디기도 벅찬 상황이었으니까.

그럴 바에는 자신이 필요한 곳에 확실히 쓰는 게 나았다.

덕분에 페르디움도 그 혜택을 보고 있지 않은가.

얘기를 듣고 있던 클로드가 눈을 반짝였다.

놀라긴 했지만, 이 기회를 멍청하게 넘길 수 없었다.

"후후, 당장 일을 줄여 주시지 않으면 이 사실을 페르디움에...."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셀이 팔을 걷어 올리며 사악한 웃음을 지었다.

"옳지, 그 말 하기를 기다렸다. 말로만 하는 경고는 영 시원찮아서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네? 으아아악!"

잠시 후, 클로드는 창고 구석에서 훌쩍거리며 일어났다.

"죽을 때까지 조용히 있겠습니다."

"좋아, 그 마음 잊지 말도록. 사실 말해도 상관없긴 하지만, 모양새가 좀 안 좋잖아? 굳이 얼굴 붉힐 필요는 없지."

지셀이 웃으며 손뼉을 쳤다. 기다렸다는 듯 창고 문이 열리며 웬디와 용병 몇 명이 들어왔다.

"어?"

클로드는 깜짝 놀랐다.

지셀과 자신이 들어올 때만 해도 분명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용병들이 대체 언제부터 대기하고 있었는지 감도 오지 않았다.

그가 놀라거나 말거나 웬디와 용병들은 인사를 한번 하고 재화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클로드는 황당해하다 곧 고개를 저었다.

'완전히 읽혔네, 정말.'

돈이 떨어질 것도, 그래서 자신이 찾아올 것도 이미 예상한 모양이었다. 짐꾼 노릇을 할 용병들도 미리 불러 두고.

지셀은 클로드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웃었다.

"또 돈 떨어지면 말해라.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말고 일이나 열심히 해. 돈은 내가 구해 줄 테니."

"...쳇."

클로드는 고개를 돌린 채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어쩐지 자존심이 상했다.

제멋대로에 엉망인데도, 뭔가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든 해결책을 제시한다.

방식은 영 상식 밖이지만, 그 비상식이 또 잘 통한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크흠, 요 절반 정도면 당분간은 문제없겠네요."

"그래, 얼른 떠날 준비 해."

클로드는 지셀에게 받은 돈으로 급히 필요한 자재 따위를 사들였다.

꾸준히 관리해야 하는 업무는 로웰에게 철저히 숙달시켰다.

클로드가 수도로 떠날 준비를 하는 동안 지셀은 페르디움으로 향했다.

자리를 비운 사이 영지의 병력을 관리하고 기초 훈련을 시킬 사람이 필요했다.

'란돌프 단장님이라면 적당히 관리할 수 있겠지.'

가장 좋은 건 자리를 비운 사이 용병들이 마나를 쌓을 수 있도록 마나 연공법을 알려 주는 것이지만, 그러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자가 태반이었기에 연공법을 가르치려면 바네사에게 그랬던 것처럼 하나하나 잡아 주어야 한다.

한두 명이면 모를까, 몇백 명이나 되는 용병들이 스스로 연공할 수 있을 때까지 봐주려면 당장 지셀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연공법을 가르치기 전에 계약도 새로 맺어야 하니까. 지금은 다른 부족한 부분을 먼저 가르치는 게 낫겠지.'

란돌프라면 기초 군사학처럼 정규군에게 필요한 기본 소양 정도는 가르칠 수 있을 것이다.

용병들뿐만 아니라 새로 충원한 병사들도 가르쳐야 하니 겸사겸사 부탁할 생각이었다.

* * *

란돌프는 이야기를 듣고 별 반대 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즈발터는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수도로 가겠다니? 너는 영주다. 영주가 고작 장사 때문에 자리를 비우겠다고?"

"네, 중요한 일이라 제가 직접 가야 합니다."

"허어, 어찌 영주가 한낱 장사치처럼 직접 물건을 들고 움직인단 말이냐. 사람들이 비웃을 것이다."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건 제 체면이 아닙니다."

즈발터는 아들의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처음 봉토를 받아서 그런지 자신이 영주라는 자각이 아예 없는 듯 보였다.

"그런 이유라면 파견할 수 없다. 너도 영주가 됐으니 그 책무가 얼마나 무겁고 중요한지 알아야 한다."

본래 즈발터도 이렇게까지 꽉 막힌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지셀이 영주라는 자리의 무게를 전혀 모르는 듯하니, 이렇게 간접적으로라도 가르칠 셈이었다.

물론 지셀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식량 1년 치."

"응?"

"갔다 와서 페르디움 영지의 1년 치 식량을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생각해 보니 너도 북부를 벗어나 견문을 넓힐 때가 온 거 같구나. 잘 다녀오거라. 란돌프는 준비가 되는 대로 보내마."

즈발터는 인자하게 웃으며 아들의 어깨를 두드렸다.

거부하기에는 너무 큰돈이었다.

* * *

즈발터를 가볍게 제압하긴 했지만, 영지에 돌아오고 나서도 격한 반대에 부딪혔다.

상행을 떠난다고 하니 체면 차리기에 바쁜 가신들은 물론, 지셀을 잘 아는 벨린다와 길리언마저도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그냥 다른 사람 보내요! 그걸 왜 도련님이 해요?"

"영주님, 영주님께서 직접 나서시면 다들 비웃을 겁니다. 상단주는 총관인데 어찌 영주님께서 직접 움직이신단 말입니까?"

"안 돼, 내가 직접 해야 제일 빨라. 장사만 하러 가는 게 아니라, 수도에서 할 일도 있고."

두 사람이 몇 번 더 설득해 봤지만 지셀은 언제나처럼 요지부동이었다.

벨린다와 길리언은 포기하고 한숨만 내쉬었다.

이렇게 된 이상 늘 그랬듯 같이 가서, 이상한 짓을 하려고 하면 몸을 던져서 막는 수밖에 없었다.

며칠 뒤, 지셀은 짐이 가득 실린 수레 여러 대를 훑어보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1차 물량은 이 정도면 적당하겠어."

"정말 다 팔 수 있을까요?"

"홍보만 잘되면 문제없어. 일단 써 보면 귀족들이 환장할 거다. 걱정하지 마."

자신만만한 지셀의 말에 클로드가 턱을 긁적였다.

화장품의 효능은 확실하니, 언젠가는 소문이 나긴 할 것이다.

하지만 초도 물량이 너무 많았다.

오래 보관할 수 있는 물건도 아닌데, 도대체 이걸 어떻게 다 판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화장품을 실은 수레들에도 보통 돈이 들어간 게 아니었다.

물건이 상하지 않게 한다고 수레마다 냉동 마법진을 새겼다. 마법진을 유지하기 위해 룬스톤도 하나씩 박아야 했다.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귀족들이 안 사면 엄청난 손해라고요. 냉장 보관이 만능은 아니에요."

"아, 걱정하지 말라니까. 하나도 안 남기고 다 팔 수 있어. 쉽게 썩는 것도 아니고."

"에휴, 그러시겠죠. 영주님은 다 계획이 있으시겠죠."

클로드는 자포자기해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 상대해야 할 사람들은 영주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귀족들이다.

이 성질 더러운 영주가 그들을 어떻게 설득해서 홍보를 할지 예측조차 할 수가 없었다.

"도련님! 이쪽도 준비 다 됐어요!"

벨린다가 다가와 생글생글 웃으며 보고했다.

그 뒤에는 스무 명쯤 되는 사용인들이 짐을 잔뜩 진 채 서 있었다.

"하아.... 이렇게 많이 안 가도 된다니까?"

"명색이 귀족인데 이 정도는 따라가야죠. 기선 제압 모르세요? 수도에서는 조금이라도 얕보일 틈을 보이면 안 돼요."

지셀이 뭐라고 말하려는 찰나 벨린다가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자칫하면 촌놈이라고 무시당한다고요. 가뜩이나 귀족이 장사치 노릇 한다고 비웃을 게 뻔한데!"

틀린 말은 아니라 지셀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입을 다물었다.

때마침 길리언과 카오르도 완전 무장을 한 용병 오십여 명을 이끌고 와 지셀 앞에 도열했다.

"저희도 준비 끝났습니다. 영주님."

"뭐야, 용병도 이만큼 데려가자고? 이렇게 많이 안 가도 된다니까."

"수도까지는 길이 멉니다. 비싼 물건을 옮기는데 이 정도 인원은 있어야 합니다. 또 영주님도 편히 모셔야 합니다."

길리언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듯 표정을 단단히 굳혔다. 지셀은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뭐 이왕 준비한 거 다 같이 수도 구경이나 한번 하자. 이제 더 갈 사람은 없는 거지?"

벨린다와 길리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맞다. 도련님, 이거 뭐라고 불러요? 이름은 지었어요?"

"이름?"

"네. 소개하고 홍보도 하려면 이름이 있어야죠."

"그건 그렇지. 음... 러블리 블링블링, 이런 거 어때? 예쁘지 않아?"

지셀의 말에 클로드가 배를 잡고 웃었다.

"우와! 작명 센스 뭐야! 소녀 감성 뭐야!"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조금 전까지 가슴속에 맺혀 있던 걱정과 근심이 싹 사라져 버렸다.

지셀이 무표정한 얼굴로 노려보자 클로드는 얼른 시선을 피하며 모른 척했다.

벨린다가 혀를 차며 말했다.

"그건 좀.... 귀족들은 이름에도 품격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고요."

"블링블링이 어때서? 난 예쁜데. 그렇게 별로야?"

지셀이 길리언을 홱 돌아보았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길리언은 이를 악물고 답했다.

"괜찮...습니다."

지셀은 클로드 옆에 서 있던 웬디와도 눈을 맞추었다.

그녀는 최대한 무표정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입꼬리가 실룩이는 건 막지 못했다. 물어볼 필요도 없는 표정이었다.

"도련님, 진짜 그건 아니라니까요."

벨린다가 눈을 찌푸리자 지셀은 입맛을 다시며 화장품의 원래 이름을 말해 주었다.

"데네브."

데네브는 전생에 델파인 공작이 화장품에 붙인 이름이었다.

고대에 전해지던 별의 이름을 따온 거라고 들었다.

멋지긴 했지만, 델파인 공작이 붙인 이름이라 영 정이 안 갔다.

그래서 이 이름 말고 자신이 붙인 '러블리 블링블링'을 써 보려고 한 건데 씨알도 안 먹힌다.

"으음, 뭐 나쁘진 않네요. 귀족들이 좋아할 만한 느낌이에요."

벨린다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서 듣고 있던 카오르는 삐딱하게 고개를 꺾으며 생각했다.

'러블리 블링블링? 나는 이게 더 괜찮은 거 같은데.'

역시 사람의 취향은 다들 달랐다.

어쨌든 이름도 정해졌겠다, 이제 수도로 가서 제대로 파는 일만 남았다.

지셀은 말에 올라타 모두를 둘러보았다. 믿음직한 사람들을 보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한껏 웃음 지은 지셀이 말고삐를 채치며 크게 외쳤다.

"자, 이제 수도로 가자!"

120화 장사 좀 하러 왔지. (1)

루타니아 왕국의 수도 카르데니아는 강대국의 위용을 보여 주듯 거대했다.

성벽 주변을 둘러싼 해자에는 물이 가득 차 있어 마치 넓은 강처럼 보였다.

누가 쳐들어와도 막아 낼 수 있을 것 같은 위엄이 느껴진다.

지셀을 따라온 용병들은 처음 보는 압도적인 광경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와... 엄청나. 여기가 말로만 듣던 카르데니아...."

"다른 영지의 성은 완전히 장난감 수준이었네. 우리 영지에 있는 건 성이 아니었어. 그냥 토굴이었어."

"크기도 크지만, 생긴 것도 뭔가 좀 다른 거 같은데? 더 멋있는 거 같지 않아? 짓는 데 돈 많이 들었겠다."

카르데니아는 수백 년 동안 왕국의 수도로서 발전해 왔다.

고전적인 양식의 건물들과 새로 지어진 건물이 섞인 독특한 분위기가 특징이었다.

페르디움보다는 사정이 나았다고 해도 그들이 지내던 영지 또한 결국 변방의 가난한 영지에 불과했다.

이렇게 거대한 도시가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말 많던 벨린다도 눈만 껌뻑이며 입을 열지 못했고, 타국에서 용병 생활을 오래 한 길리언조차도 감탄을 내뱉었다.

"어우.... 보기만 해도 주눅 드네."

용병들은 성벽을 올려다보며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보기만 해도 전의가 사라지는 위용이었다.

이 성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성벽을 넘을 수는 있을지 의문이었다.

아니, 넘기는커녕 벽에 흠집도 못 낼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영주가 제발 여기에서는 사고를 치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

"우, 우와.... 뭐야?"

구경하던 사람들의 입에서 갑자기 감탄이 터져 나왔다.

노을로 사방이 붉게 물들었다.

그 붉은 빛은 도시 안에 수도 없이 높게 솟아오른 첨탑의 창에 반사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마치 도시 전체가 스스로 붉은 빛을 뿜어내는 것만 같았다.

다들 넋이 나간 채 경이로운 광경을 구경하고 있을 때, 지셀만은 차가운 눈빛으로 성을 노려보고 있었다.

'카르데니아....'

난공불락, 불패의 요새, 여신의 가호를 받는 도시.

수없이 다양한 말로 칭송되던 이곳은... 바로 그의 손에 무참히 박살 났었다.

용병왕의 군대는 선전 포고를 하자마자 순식간에 카르데니아를 덮쳤다.

지셀은 개전 후 단 일주일 만에 길목에 있는 영주들을 모두 뚫어 버리고 카르데니아를 점령했다.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속도와 파괴력이었다.

당시 지셀은 참모들과 함께 왕성으로 들어가는 가장 빠른 경로를 잡아서 파고들었다. 카르데니아가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뚫린 이유다.

물론 어디까지나 그의 복수 대상이 오직 새로운 왕에 오른 델파인 공작 하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카르데니아를 점령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지만... 결국 실패했지.'

그의 목표는 카르데니아를 점령하는 게 아니라, 델파인 공작을 죽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셀이 왕성에 들어갔을 때 델파인 공작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왜 왕위에 오른 델파인 공작이 왕성에 없었는지, 지셀은 지금도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저 실패했다는 것만 알 뿐.

분노한 지셀은 델파인 공작을 찾기 위해 왕국 전역을 헤집었다.

'내 실수였다. 물러나서 다시 전선을 유지했어야 했는데.'

북부를 불태우고 남부를 짓밟았다. 서부를 학살하고 동부를 약탈했다.

그때부터 그는 용병왕이라는 칭호보다는 복수에 미친 악귀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루타니아 왕국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숨어 있던 강자들이 나타나 그의 앞을 막았다.

으드득.

상념에 잠겨 있던 지셀이 저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카르데니아 성에 드리운 노을의 붉은빛은 그 시절 지셀의 수하들이 흘렸던 피의 빛깔과 닮아 있었다.

아직도 지셀은 목이 잘리던 감각, 그 순간 느꼈던 감정까지 다시 생생히 떠올릴 수 있었다.

'이번 생에는 반드시 네놈들을....'

― 히이이이잉!

"도련님!"

"영주님!"

다급하게 부르는 목소리에 지셀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말들이 그가 뿜어낸 살기를 느끼고 공포에 질려 발버둥 치고 있었다.

"워, 워."

지셀은 바로 살기를 갈무리하고 말들을 진정시켰다.

벨린다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다른 사람들도 살짝 긴장한 눈치였다.

관광 명소를 구경하다가 갑자기 이 난리가 났으니 당황스러워할 만도 했다.

감정을 추스른 지셀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긁었다.

"그게...."

"그게?"

"어.... 저 성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랬지."

"아니, 마음에 안 들 이유가 뭐가 있어요?"

"우리 성보다 크고 멋있잖아. 그게 마음에 안 들어. 꼭 잘난 척 으스대는 거 같아서."

지셀은 어깨를 으쓱이며 능청스럽게 둘러댔다.

일행은 모두 황당해 얼이 빠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지금... 저 성이 질투가 나서 살기까지 뿜었다는 거지?"

"진짜 성격 특이하다니까. 이해할 수가 없어."

여기저기서 수군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말도 안 되는 핑계였지만, 지금까지 지셀이 워낙 괴짜 같은 이미지를 쌓아 온 탓인지 다들 그럴 수 있다고 납득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벨린다와 길리언만은 그의 변명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지셀은 얼핏 보면 자기 멋대로 구는 것 같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나름의 행동 원리와 계획이 있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뜬금없는 이유로 살기를 내비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두 사람이 걱정스러운 듯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지셀은 손을 저어 제지했다.

"됐어, 됐어. 그냥 딴생각을 하다가 너무 몰입했을 뿐이야. 빨리 들어가자."

영주가 그렇게 말하는데 물고 늘어질 수도 없었다.

일행은 더 이상 아무 말도 못 하고, 앞서가는 지셀을 황급히 따라갔다.

해가 졌는데도 성문 앞에는 사람이 많았다. 검문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왕도이니만큼, 경계도 삼엄하고 검문도 철저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신분 패를 보여 주십시오."

철갑을 두른 기사 하나가 지셀과 일행들의 앞을 막아섰다.

표정에 미동조차 없는 게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거 같은 인상이었다.

주변에 있는 기사들도 다를 바 없었다.

예전 브리반트로 갈 때 보았던 검문소의 병사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기사는 지셀의 신분 패를 받아 이리저리 뜯어보다가 품에서 지도 하나를 꺼내 쫙 펼쳤다.

"페르디움 변경백의 봉신, 지셀 펜리스 남작. 확인했습니다. 왕도에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기사가 턱을 치켜들고 위압적으로 내뱉었다.

그 꼴을 보고 벨린다와 길리언이 뒤에서 인상을 썼다.

평소 같았으면 무례하다고 호통이라도 쳤을 텐데, 여기서는 그래도 되는지 망설여졌다.

거대한 성이 내뿜는 기세에 주눅이 든 탓이었다.

하지만 지셀은 두 사람과 달리 고개를 건들거리며 편하게 말했다.

"장사 좀 하러 왔지."

"상단의 총책임자는 누구입니까?"

기사는 지셀이 그저 소유 상단과 동행한 걸로 알고 형식적으로 되물었다.

"이 몸이 총책임자다."

"...남작님이 직접 장사를 하신다고요?"

"왜? 그러면 안 돼?"

"아니, 아닙니다. 그럼 일행의 인적 사항과 상품 목록을 알려 주십시오."

지셀이 턱짓으로 클로드를 가리키며 답했다.

"인적 사항은 쟤가 알고.... 상품은 뭐 목록이랄 것도 없는데. 화장품이야. 내가 직접 만든 거."

"예?"

상상도 못 한 대답에 기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마저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미미한 변화였다.

하지만 기사를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던 지셀 일행은 그 찰나의 움직임을 확인하고 묘한 승리감을 느꼈다.

'그래, 너희도 황당하지?'

기사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수레들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병사들까지 동원해 철저하게 뒤지는 모습을 보고 지셀이 내심 감탄했다.

'군기가 바짝 들었네. 우리 영지 병사들도 저래야 하는데.'

몇 대의 수레를 확인한 기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화장품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이 몸이 만든 거지."

"독성이 있는 물건은 아니겠죠?"

"그냥 화장품이라니까. 못 믿겠으면 하나 열어서 확인해 봐."

기사는 통 하나를 들어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었다.

향을 맡아 보고, 손가락으로 조금 떠서 문질러 보면서도 기사는 의심스러운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음, 향기는 괜찮군요. 피부에 닿아도 괜찮은 것 같고...."

"하나 줄까? 수도에 온 기념으로."

기사는 고개를 저었다. 향기는 좋지만, 이런 수상한 물건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지셀은 얄밉게 웃으며 다시 물었다.

"그거 비싼 건데,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받아. 기사들 박봉으로는 구경도 못 할 고급품이라고."

도발적인 말에 기사는 인상을 찡그렸다.

"필요 없습니다."

"그래, 뭐 싫으면 말고. 나중에 다른 말 하지 마라? 나 원망하기 없기?"

"그럴 일 없습니다."

자꾸 약 올리는 지셀에게 말려든 기사가 흰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카오르가 그걸 보고 킥킥거렸다.

"이야, 이제 좀 사람처럼 보이네. 표정이 하도 안 변해서 목각 인형인 줄 알았지."

그러자 기사는 눈빛에 살기를 담아 카오르 쪽을 돌아보았다.

카오르와 크게 다를 게 없는 다른 용병들도 입꼬리를 실룩거리고 있었다.

기사는 신경질적으로 출입자 명단에 몇 글자를 적어 넣고 거칠게 내뱉었다.

"통과!"

지셀은 피식 웃으며 일행에게 손짓했다.

"자, 들어가자. 무사통과다."

벨린다는 지셀 뒤를 졸졸 따라가며 기사를 안쓰럽게 쳐다보다 기어코 한마디를 던졌다.

"기사님, 지금 안 받은 거 후회할 거예요."

"뭐?"

벨린다는 더 말을 잇지 않고 쏙 지나쳤다.

그 뒤에 들어가던 클로드는 기사에게 살짝 윙크를 했다.

"대체 뭐야, 저 이상한 놈들은."

기사가 황당해하든 말든, 일행은 성에 들어오자마자 감탄하기 바빴다.

"우와아!"

세 겹이나 되는 성벽을 지나 들어온 성안은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지금까지 가 봤던 영지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번화한 곳이었다.

별의별 물건을 파는 상점이 거리에 가득했고 골목마다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난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은 처음 봐."

한 용병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보기만 해도 어지러워질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도시 자체가 살아 있는 하나의 생명체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브리반트와는 다르게 지셀 일행이 시끄럽게 떠들어도 다들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들과 비슷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셀은 일행이 주변을 실컷 구경하게 내버려 두고, 완전히 어둠이 내려앉기 전에 큰 여관을 두 곳이나 잡았다.

한곳에 머물기엔 인원이 너무 많고, 수레를 보관할 곳도 마땅치 않았던 탓이다.

그러고는 여관에 짐을 풀자마자 클로드를 불러 해야 할 일을 확인했다.

"일단 지낼 곳부터 마련해야겠어."

사람과 짐이 한둘이 아니라 여관에서 계속 묵자니 비용도 많이 들고, 움직이기도 불편했다.

다른 상단들처럼 수도에 적당한 근거지를 마련해야 했다.

클로드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어차피 물건을 판매할 상점도 필요하니까요. 괜찮은 건물이 있는지 찾아봐야겠네요. 그 뒤에는.... 홍보를 슬슬 시작해야겠죠? 연회에 참석해서 귀족들과 친분을 다지는 건 어떻겠습니까?"

심드렁한 대답이 돌아왔다.

"굳이?"

121화 장사 좀 하러 왔지. (2)

마뜩잖은 반응에 클로드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화장품을 팔려면 귀족들하고 친해져야 하는 거 아닙니까?"

"가난한 남작하고 친하게 지낼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그리고, 친하다는 이유만으로 귀족들이 믿고 쓰겠어? 아마 다 갖다 버릴걸. 너도 처음엔 쓰기 싫어했잖아."

"그래도 귀족들에게 팔려면 일단 이런 게 있다고 알리기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셀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맞는 말이지만, 우리가 나서서 알리는 건 소용이 없어. 귀족들이 알아서 찾아오게 해야지. 일단 지낼 곳부터 구하자. 홍보는 그 뒤에 해도 늦지 않으니까."

클로드가 찝찝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돈이 좀 들긴 하겠지만, 왕성 근처... 중심가에 있는 건물을 사는 게 어떻겠습니까?"

"중심가?"

"네, 저택도 괜찮고요. 아니, 귀족들에게 고급 품목을 팔기에는 오히려 화려한 저택이 더 좋습니다."

귀족들은 평민들이 드나드는 일반적인 상점에 절대 직접 찾아가지 않는다.

혹시 그런 곳에서 파는 물건이 필요하다면 하인을 보내서 사 온다.

비싸고 좋은 물건은 사교 모임에 나가듯 직접 만나서 거래하고.

"맞아요. 저택이든 상점이든, 귀족들만 상대할 거면 최대한 화려하게 꾸미는 게 좋아요."

벨린다도 옆에서 거들었다.

정론이었다. 하지만 지셀의 반응은 여전히 시큰둥했다.

"이 동네에서 중심가에 좋은 저택을 구하려면 우리 영지의 1년 예산 정도는 써야 할걸? 여기 물가 비싼 거 몰라?"

클로드가 아쉬운 듯 입을 비죽이며 되물었다.

"그렇긴 하지만... 어차피 수도에 자리는 마련해야 하잖습니까."

"당연히 정원이 있고 넓은 저택을 구해야지. 인원들도 묵고 수레도 보관해야 하니까. 싸면 더 좋고. 장소는 외곽 쪽으로 알아보면 될 거야."

"그럼 물건은 어디서 파시려고요?"

"저택 산다니까. 물건이야 당분간은 거기서 팔아도 돼."

"고급품을 파는 것치고는 너무 없어 보이잖아요. 귀족들이 뭘 믿고 사 주겠어요."

지셀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런 건 아무 상관 없어. 곧 돈다발 싸 들고 몰려올 테니까 걱정하지 마라."

"어휴, 돈도 많으신 분이 이럴 때는 또 엄청 짠돌이시라니까. 일단 매물이 있는지 알아보죠. 나중에 손님 안 와도 제 책임 아닙니다."

다음 날부터 클로드는 괜찮은 저택을 찾아 왕도 전체를 뒤지기 시작했다.

왕성 근처 중심가는 가격도 엄청났지만, 애초에 매물 자체가 없었다.

그래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왕성을 중심으로 야금야금 범위를 넓혀 가던 클로드는, 결국 외곽에 있는 큰 저택 하나를 찾아냈다.

"원하시는 대로 싸고, 넓고, 정원이 딸린 크고 멋진 저택입니다요."

중개업자는 실실 웃으며 눈앞에 있는 집을 설명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주변을 돌아보며 찝찝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넓긴 넓다. 정원도 있다. 저택도 높고 크다. 결정적으로 가격도 싸다.

문제는... 저택 전체에서 마치 뱀파이어가 사는 집처럼 음침한 기운이 감돈다는 거였다.

정원의 꽃은 생명력을 모두 빨린 듯 회색빛으로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대낮인데도 주변에 빽빽한 나무 그림자에서 기분 나쁜 기운이 새어 나오는 듯했다.

벨린다는 무표정한 얼굴로 중개인을 바라보았다.

"이게 최선이에요?"

"넓고, 크고, 싼 집은 수도에 이거밖에 없어요."

"아니, 대체 저택 상태가 왜 이 모양이에요?"

"하하, 사람 손을 안 타서 그럴 겁니다. 여기가 소문이 좀 안 좋아서 말입니다. 하지만 그냥 소문일 뿐입니다. 별거 없어요."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원혼이 이곳에 머물고 있다는 소문이 있단다.

어쩐지 이렇게 큰 저택인데 주변에 사람 그림자도 안 보인다 했더니.

벨린다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외쳤다.

"도련님, 그냥 다른 데 찾아 봐요! 이런 데서 찝찝하게 어떻게 살아요! 자 봐야 피로만 쌓인다고요!"

벨린다의 말에 반응하듯 저택에서 까마귀 떼가 푸드덕거렸다.

까악! 까악!

"봐요, 쟤들도 제 말이 맞다잖아요!"

지셀은 벨린다가 반대하거나 말거나 주변을 꼼꼼하게 둘러본 뒤 중개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 집으로 하지. 얼마야? 싸다며?"

"도련님! 이 집에서 잤다가는 마나가 다 빨려 죽을지도 모른다고요!"

"그럴 리가 있나. 뭐가 나와 봐야 언데드나 좀 나오겠지. 그냥 때려잡으면 되는 게 뭐가 무서워?"

지셀은 건들거리며 중개인을 툭툭 쳤다.

"왜 대답을 안 해? 얼마냐고."

"아이고,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이 집이... 원래 토지까지 합해서 천 골드는 가볍게 넘는 집입니다. 그래도 관리가 좀 안 된 걸 감안해서 그냥 딱 500골드에 드리겠습니다."

중개인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이 애물단지를 팔게 된다는 생각에 속이 다 후련했다.

옆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말리는 걸 감안해서 과감하게 가격을 내려 불렀으니, 안 사고는 못 배길 것이다.

이 정도면 거의 거저 주는 거나 마찬가지지만, 뭐... 팔리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중개인은 미처 몰랐다.

지셀이 얼마나 비상식적인지.

"200골드."

"네?"

"200골드 아니면 안 사."

지셀이 히죽 웃으며 덧붙였다.

중개인은 기겁해서 손을 내저었다.

"아니, 그건 안 됩니다! 세상에, 이런 저택을 200골드로 사겠다고요? 500골드도 진짜 많이 깎아 드린 겁니다!"

"저택이 크면 뭐 해, 어차피 안 팔리잖아. 그럼 다른 데다 팔든가."

"아니, 그건.... 저희가 솔직히 다른 일이 바빠서 내버려 둔 거지, 팔려면 팔 수 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밀어 버릴 수도 있고요. 못 할 거 같습니까?"

나름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중개인은 배짱을 부려 보았다.

물론 지셀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지셀이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누가 못 한대? 하려면 할 수야 있겠지. 그런데 지금까지 안 한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그건...!"

"이미 안 좋은 소문이 퍼졌는데 저택을 허물려면 인부들한테 돈도 더 줘야겠지. 그렇게 해서 싹 밀어 버렸다 쳐도, 유령이 나온다고 소문난 땅인데 살 사람이 있긴 하겠어?"

"그게...!"

"아무리 생각해도 수지 타산이 안 맞으니까 지금까지 그냥 내버려 둔 거 아냐?"

"그러니까...!"

속셈을 죄다 간파당한 중개인은 눈만 뒤룩뒤룩 굴리며 식은땀을 흘렸다.

지셀이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속삭였다.

"아, 이 친구 말이 잘 안 통하네. 이 정도까지 말했으면 적당히 빨리빨리 움직여야지."

"아니, 그래도 200골드는...."

"음, 절실함이 덜하네. 알겠어. 우리 다른 데 보러 가자."

지셀이 몸을 돌리자 일행도 미련 없이 그 뒤를 따랐다. 말리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자, 잠시만요! 가격을 좀 더 깎아 드리겠습니다."

중개인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소리치고 나서도 아차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느긋하게 뒤를 돌아본 지셀이 경고했다.

"잘 생각하고 말해야 할 거야. 기회는 한 번뿐이야. 마음에 안 들면 이번에야말로 진짜 갈 테니까."

"...."

300골드를 부르려던 중개인은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호구 잡을 수 있을까 했더니 잡히게 생겼다.

중개인은 이 저택을 팔아 치우기 위해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귀족에게 잘 부탁드린다며 공짜로 넘기려고까지 해 봤지만, 정중하게 하지만 깔끔하게 거절당했다.

이 골치 아픈 땅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생각하느라 요즘은 잠도 제대로 못 잔다.

최근 유난히 이마가 넓어진 것도 기분 탓만은 아닐 것이다.

'그냥 팔자. 그러면 최소한 밤에 잠은 편히 자겠지!'

잠시 고민하던 중개인은 결국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200골드에 팔겠습니다."

"잘 생각했어."

까악! 까악!

새 주인을 반기듯 까마귀들이 저택 상공을 빙빙 돌며 울어 댔다.

* * *

계약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싸게 큰 저택을 사고 싶은 지셀과 빨리 팔아 버리고 싶은 중개인의 마음이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벨린다와 클로드는 계약서를 쓰는 내내 지셀 뒤에서 한숨을 내쉬며 투덜댔다.

"도대체 왜 이런 집을 사는 거예요! 차라리 좀 작아도 마음 편한 집을 사야죠."

"이런 집에 누가 물건을 사러 오겠습니까?"

지셀은 사람들의 원성을 뒤로하고 해맑게 웃었다.

"괜찮다니까. 그런 거 다 미신이고 헛소문이야. 이 가격에 이렇게 크고 넓은 저택을 살 수 있을 거 같아? 아껴 살아야지."

"아휴, 도련님 고집을 누가 말려요."

"자, 일단 들어가 보자."

지셀이 힘차게 문을 열어젖혔다.

끼이이아아아악!

비명 같은 소리에 클로드가 어깨를 움츠렸다. 이놈의 집은 문이 열리는 소리도 소름 끼친다.

지셀은 주변을 둘러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 엄청 넓잖아? 청소랑 수리만 좀 하면 되겠는데? 적당히 꾸미면 정말 괜찮..."

"으아악! 저거! 저거 뭐야! 괴물이다!"

"꺄아아악! 공격해! 공격!"

갑자기 벨린다와 클로드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아이 씨! 깜짝이야! 뭐야?"

지셀이 짜증을 내자, 클로드가 로비 한쪽 구석을 가리키며 법석을 떨었다.

어둠 속에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무언가가 서 있었다.

반사적으로 칼자루에 손을 얹었던 지셀이 그걸 자세히 뜯어보고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뭐야, 그냥 갑옷이잖아."

낡은 갑옷 위에 풍성한 먼지떨이가 걸려 있었다. 어두운 구석에 있으니 절묘하게 사람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제야 괴물의 정체를 확인한 다른 일행도 안심하고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자, 지낼 곳이 생겼으니 이제 청소랑 수리부터 하자. 인부들도 구해 보고. 집 안에 있는 까마귀 새끼들도 다 내쫓고."

까악?

지셀의 명령에, 사람들은 한숨을 내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얼마 후, 인부를 구하러 나갔던 용병 몇 명이 곤란한 표정을 지은 채 돌아왔다.

"인부들을 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이 워낙 널리 퍼져 있다 보니, 웃돈을 준다 해도 인부들이 오려고 하질 않았다.

정말 돈이 급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다들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이 직접 자재를 사다가 용병들과 사용인들을 시켜 수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지셀을 따라온 인원이 많았던 덕에 저택 수리는 사흘 만에 끝이 났다.

물론 다른 귀족 저택처럼 화려하고 멋지게 꾸민 건 아니었다.

그저 당장 머물 수 있도록 생활용품을 채워 넣고 청소만 깨끗하게 했다.

그래도 처음보다는 음침한 분위기가 훨씬 덜해졌다.

회색빛으로 변해 버린 정원까지 싹 갈아엎으면 유령 저택이라는 이미지도 완전히 사라질 테지만, 정원 관리는 내부와는 달리 짧은 기간 안에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정원은 나중에 정비하자고. 저놈들도 그때 같이 손을 써 보지. 당분간은 저놈들하고 같이 살아야겠네."

까악! 까악!

안타깝게도 까마귀들을 전부 내쫓지는 못했다.

안에 살던 놈들을 모두 내쫓고 창을 새로 달자 저택 안에는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쫓겨난 놈들이 그대로 정원에 자리 잡고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적당히 사람 살 만한 구색은 갖췄으니 이제 화장품 홍보를 시작하자. 빨리빨리 팔아야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연회도 참석 안 하신다면서요."

"수도에 있는 귀족 저택마다 선물로 쫘악 돌리자고."

"...화장품을요?"

"응."

"허허...."

클로드가 버럭 고함을 지르려다 간신히 참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러니까... 그냥 선물로 돌리면 홍보가 된다는 말씀이시죠?"

"그렇지."

클로드가 참지 못하고 결국 빽 소리를 질렀다.

"아니! 써 달라고 사정을 해도 쓸까 말까인데, 선물로 준다고 쓰겠냐고요! 찝찝해서 그냥 버리지!"

"귀족들은 당연히 그렇겠지."

"그걸 아시는 분이!"

지셀이 턱을 쓰다듬으며 씨익 웃었다.

"귀족이 아니라, 그 밑에서 일하는 사용인들한테 보낼 거다."

122화 장사 좀 하러 왔지.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