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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 *

"메렐로프에서는?"

"서신 전달도 거부했다 합니다."

"개새끼들. 이래서 장사치들은 상종할 게 못 돼."

데르가는 이를 바득거리며 이웃 영지인 메렐로프 백작을 떠올렸다. 변경을 책임지고 있는 데르가처럼 메렐로프 역시 그러했다.

다만, 천려족과 대립하고 있는 브라츠와 달리, 메렐로프는 하완 왕국이라는 이국의 교류지로서 임무를 다하고 있었다.

"그쪽은 어차피 병사도 시원치 않습니다. 다들 상업에 종사하는지라 일꾼도 영 별로고요. 이참에 중앙군 밟고 독립하면 그쪽도 밀어버리는 게 낫겠습니다."

데오가 검에 묻은 피를 닦으며 중얼거렸다. 독립하면 필연적으로 영지의 몸집을 불리기 위해 주변 영지를 잡아먹어야 했다. 이를 잘 아는 메렐로프 백작으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으나, 데르가는 뻔뻔하게도 배신감을 느꼈다.

병사를 보내지는 않더라도 중재하기 위해 나설 수는 있을 터인데, 메렐로프는 불똥이라도 튈까 봐 모르쇠, 이쪽으로는 눈길조차 안 주는 상황이다.

"부숴라! 더 큰 나무를 가져와!"

"화살촉에 기름을 묻혀! 불을 붙여!"

"쏴라! 계속 쏴라!"

"와아아! 나와라, 개새끼들아!"

"나아가라! 계속 나아가라!"

"으아아악!"

쿵! 쿵쿵!

천려족을 상대할 생각만 해왔지, 이렇게 저택을 함락해야 할 처지가 될 줄은 몰랐다. 데르가는 공성기 하나 없는 상황에 어이없어하면서도 계속해서 불화살을 쏘아 올렸다.

부우우. 부우우우.

그때였다. 묵직한 뿔나팔 소리가 브라츠에 닿았다. 모두 일제히 멈칫거리며 뒤를 돌아봤다. 먼 언덕 지평선, 개미처럼 뭔가가 바글거리며 올라오고 있었다. 황궁의 깃대를 든 중앙지원군이었다. 데르가는 인상을 찡그리며 사병들을 더욱 거세게 닦달했다.

"서둘러라! 서둘러!"

"저쪽 끝부터 이쪽까지 구덩이를 더 깊게 파라!"

"이쪽으로 오는 다리를 막아버려!"

"빨리, 빨리!"

중앙군이 당도했다는 걸 저택 안에서도 인지했는지, 드디어 안쪽에서도 반응이 보였다. 브라츠의 깃발이 내려가고 황궁 조사단의 깃발이 걸린 것이다.

"개새끼들이...."

데르가는 끓어오르는 분노에 이성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다 죽여버리겠다. 자신의 영지에 밀고 들어온 외부인을 깡그리 산 채로 태워버리겠노라.

"가자! 다 죽여라!"

"이쪽 고지를 최대한 끼고 움직여!"

"죽여라아아아!"

한평생을 살아온 터전. 지형에 관해서라면 눈 감고도 훤했다. 제아무리 중앙군이라 한들, 전투에 있어 절반은 먹고 들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쉬이이익.

거대한 매들이 브라츠 영지 상공을 크게 돌았다. 하지만 사병들은 죽음을 몰고 오는 적군을 보느라 알아채지 못했으며, 오직 신을 바라보고 있는 영지민들만 매의 존재를 확인했다.

"들여보내 주시오! 은행 문을 좀 열어주오!"

"아아. 밀지 말라니까!"

"야! 나 여기 직원이야! 시발롬들아!"

"청소부가 무슨, 개소리를 하고 있어? 비켜!"

"살려줘! 중앙 놈들이 저택 사람들을 죄다 죽였대! 불태워 죽였다고! 군대가 오면 사지를 찢는다 했어!"

"아아악! 밟지 마!"

하이만 뱅크가 들어서 있는 포트로가. 불가침 성역으로 들어서려는 영지민들의 절박한 소리가 곳곳에서 울렸다. 집을 떠날 수 없는 자들은 빗장을 굳게 걸어 잠그고 기도를 올릴 뿐이다.

"누나."

"응?"

두 손을 맞잡은 채 기도하던 해나가 동생의 부름에 눈을 살며시 떴다. 손바닥만 한 틈으로 새어 나오는 빛줄기.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동생은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엄청 커다란 새다."

"새...."

해나 역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어디서 본 듯한 기시감. 해나는 곧이어 저택에서 봤던 천려의 새임을 깨달았다.

제40화. 돌아오다

천려에서 스스로 전사라 칭하는 자들은 모두 대사막을 내달리고 있었다. 카칸티르를 선봉으로 하여 모래바람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안 역시 후드를 뒤집어쓴 채 그의 뒤를 바짝 쫓았다.

베릭은....

"우헤. 우헤헥."

"시끄럽다. 입 좀 다물라."

이안을 호위하는 전사의 뒤에 딱 붙어서 연신 웃음만 흘리고 있었다. 저를 두고 가지 않아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짐짝처럼 천에 돌돌 말려서는 끈으로 고정된 상태였지만.

"이안 경. 이거 정말 들고가도 되겠습니까?"

"어쩌겠나. 두고 가면 사고 치겠다 하는데."

"미친놈. 쉬라고 해도 싫다 하네."

"그게 쉬는 거냐? 열외당하는 거지!"

베릭은 기적적으로 상체를 일으킬 수는 있었으나, 걷는 것도 버거워했다. 역시 두고 가는 편이 낫겠다며 다 같이 의견을 조율하던 중, 녀석이 폭탄선언을 해버린 것이다.

두고 가면 혀 깨물고 죽어 버리겠다는.

어이가 없지만, 베릭이라면 진짜 할 것 같아서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럼 이건 전투에 참가하는 거냐? 계속 쿠실레 뒤에 매달려서 옮겨 다니기만 하는 거지. 뭐, 화살 날아오면 네가 방패나 좀 해주라."

"응. 싫어. 내가 봤을 때 이틀이면 이거 나아."

"대가리가 맛 갔구만."

"진짜임. 느낌이 와."

이안은 전사와 떠들어대는 베릭의 말을 듣고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필시 저놈, 마검사 외 숨겨진 비밀이 있으리라. 자연의 기운을 타고났다는 천려족 조차 저 정도의 회복력을 보이진 못했다.

이안은 계속 곁눈질로 베릭을 살폈고, 베릭은 그걸 알아채고서 히죽 웃었다. 기분이 어지간히 좋은 모양이다.

타닥타닥!

"카칸! 바리엘이 보입니다!"

"가자!"

앞서 내달리던 전사 한 명이 소리쳤다. 화친 협약을 맺었던 작은 신전이 보이기 시작했다. 카칸의 외침에 일제히 쿠실레 속도를 올렸다.

히이잉!

순식간에 신전을 스쳐, 국경으로 여겨지는 두 개의 바위도 지나쳤다. 베릭은 구룻잎을 잘근잘근 씹어대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돌아왔다!"

"좋냐? 베릭?"

"그래! 기분 째져!"

전사들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뒤를 힐끔거리던 카칸티르 역시 마찬가지. 그는 쿠실레 고삐를 천천히 잡아당기며 속도를 늦췄다. 수와 만나기로 한 약속지점이었다.

"다들! 여기요!"

"수!"

수의 등장에 다들 반가워하며 다가갔다. 그녀는 동료들과 포옹하는 것도 잠시, 이내 전세를 바로 보고했다.

"브라츠 사병이 꽤 쓸만합니다. 수세가 밀리는데도 지형지물을 이용해서 잘 막아냈어요. 물론, 그것 외에는 나은 부분이 없는지라 어쩔 수 없이 전세가 기울었지만요. 저택 탈환 포기하고 숲으로 들어갔으면 말 끝난 거 아니겠습니까? 아주 박 터지다 못해 처절하게 싸워댔습니다."

"데르가는?"

천려족 입장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이었다. 카칸티르의 분노가 그대로 담겨있는 물음에, 수가 방긋 웃었다.

"아직 살아있습니다. 중앙군이 추격을 멈추지 않았거든요. 저택으로 딱히 들어오는 기별도 없어 보이고."

"좋다, 수. 합류하도록 하라. 브라츠 안쪽으로 들어간다."

카칸티르의 지시에 다들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점점 더 브라츠의 중심으로 내달렸다. 브라츠를 가로지르는 강은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형체를 알 수 없는 시체가 사방에 즐비했다.

그뿐이던가.

가을 추수를 앞둔 밭은 반파된 주거지의 잔해로 엉망이었고, 비명과 울음이 한데 섞여 인간이 낼 수 있는 제일 끔찍한 소리가 귀를 찔러댔다. 어디서 들리는 것이라, 짚을 수도 없을 지경이다.

"아아아악!"

"여기 누가 도와줘요! 도와주세요!"

"잠깐만, 잠깐! 도둑이야! 도둑!"

"이 새끼가 돌았나! 내 빵 내놔!"

퍼억! 퍽!

검이 베고 간 자리에서는 인간의 밑바닥이 흘러내렸다.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의 발을 밟는 것 따위는 당연하다는 듯, 약자가 약자를 그리고 다시 약자를 누르는 일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생각보다 더 처참하군."

"그렇습니까? 저는 딱 생각만큼 처참한 것 같습니다."

카칸티르의 말에 이안이 대답했다. 수많은 전쟁을 겪었던 이안이었기에, 익숙했으나 여전히 불편했다. 어쩔 수 없는 역사의 흐름 속 한 부분이라 한들 말이다.

네르사른은 멀리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며 중얼거렸다.

"이 정도면 서로에게 꽤 치명타인 것 같은데요."

"그래. 아주 완벽하다."

중앙군과 데르가의 사병. 두 세력이 최대한 궤멸하여 쓰러지기 일보 직전으로 가는 것이 이안과 천려족에게는 최선이었다. 그래야만 천려족의 존재가 더욱 크게 다가올 것이며, 이안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헉! 저, 저것 봐!"

그때였다. 거리를 수습하던 영지민들이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천려족의 행렬을 알아챈 것이었다.

"야만족이다! 야만족이 쳐들어왔다!"

"오, 신이시여! 대체 왜! 왜!"

"다들 도망쳐! 도망쳐!"

"으아아앙!"

다들 아이를 품에 안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몇몇은 아예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질겁한 채 기도만 올릴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중앙군과의 전투로 이미 초토화가 된 상태다. 엎친 데 덮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않나. 야만족까지 가세하면 그들에게 남은 것은 절망뿐이다.

"피도 눈물도 없는 것들! 이때다 싶어서 쳐들어왔지? 짐승 같은 놈들아! 꺼져! 꺼지라고!"

"여보! 그러지 말아요! 제발!"

"그래, 죽여라! 다 죽여! 죽이고 신 앞에서 심판받아 보자! 죽여어어어!"

"천려족이 쳐들어왔다! 천려족이다!"

"저 새끼들은 은행도 털 새끼들이야, 어서, 어서 계속 달려! 달려!"

아수라장이 따로 없다. 카칸티르의 표정은 덤덤했으나, 전사들은 자못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도와주러 온 것은 아니지만, 말마따나 습격한 것도 아니었으니. 그들은 아주 천천히 쿠실레를 몰고 저택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으아앙!"

쿵!

내달리던 영지민들 사이로, 한 아이가 넘어졌다. 손을 놓친 부모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카칸티르는 쿠실레를 멈추고서 아이를 내려다봤다.

"흐윽...."

올망졸망한 눈망울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아이가 입을 꾹 다물며 달달 떠는 동안에도, 카칸티르는 말없이 아이를 내려다볼 뿐이다. 도망치던 영지민들 역시 멀찌감치 떨어져 그 상황을 지켜봤다.

"앞에 아이가 있다. 쿠실레를 잘 몰아라."

"예. 카칸."

타닥타닥.

일으켜주거나, 몸 상태를 묻는 자상함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뒤쪽의 일행에게 지시하여 그 작은 아이를 바위라도 되는 마냥 갈라져서 스쳐 지나갔다. 아이는 고개만 쳐든 채 놀라서 굳어버렸다.

"자. 일어나거라. 바닥이 차다."

이안은 지나가면서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후드 속 보이는 얼굴은 천려족이 아닌, 익숙한 금발과 녹안이다. 아이는 꼬질꼬질한 손으로 저도 모르게 이안을 붙잡았다.

"착하구나."

이안은 아이를 안은 채 천천히 쿠실레를 몰았다. 그리고 저 멀리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서 있는 영지민에게 손짓했다.

"와서 아이를 데려가시오. 부모가 거기 있는가?"

"저, 저, 저요! 제가 아비입니다!"

"아비 된 자가 게 서서 무엇 하나."

이안의 부름에 한 사내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달려왔다. 그리고 움찔거리며 아이를 건네받았다. 살짝 걷힌 후드 속 모습이 익숙하다.

"…이안 님?"

"나를 아는가?"

"저, 저 마구간지기입니다. 기억 안 나십니까?"

"아아. 그래. 자네군."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낯이 익다. 자잘한 상처는 차치하고서라도 워낙에 흙먼지를 그대로 뒤집어쓴 터라, 쉽게 알아보지 못했다. 이안은 마구지기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웃었다.

"오랜만일세. 살아있어 다행이야."

"…어, 어찌 된 일입니까?"

"나중에. 지금은 좀 바빠서. 다만 천려족은 브라츠를 도우러 온 것이니 너무 두려워 말고, 이웃들에게도 전해주게나. 그럼, 몸조심하게."

고개를 돌려보니, 앞서가던 천려족들이 모두 이안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가운데 묶인 채 매달려 있는 베릭까지. 이안은 원래 있었던 자리로 돌아가는 것처럼, 너무도 자연스럽게 쿠실레를 몰았다.

"이, 이봐. 뭐라던가?"

"아는 놈이야?"

천려족의 모습이 사라지자, 다들 마구간지기에게 달려와 한마디씩 물었다. 앞으로 저들의 운명은, 이 고향은 어찌 되는 것인지 궁금해서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다.

"이안… 님인데?"

"이안? 백작님 서자 말이야?"

"천려족에 팔려갔… 어?! 그렇네! 사막 넘어갔네!"

"서자가 뭐라던가? 응? 무어라 길게 말하더만."

다들 잊고 있었던 서자의 존재를 깨닫고 탄성을 내질렀다. 마구간지기는 제 자식을 꼭 끌어안으며 사라진 이안의 뒤를 눈으로 좇았다. 대사막으로 건너기 전, 마치 미래를 아는 것처럼 저택 일을 그만두라, 해나에게 이르지 않았나.

'꼭 그것 때문에 관둔 건 아니지만은....'

어쨌거나 저택을 나온 자들은 대부분 화를 면했고, 남았던 자들은 조사단에 의해 죽고 말았다.

백작 부인과 영식조차 생사가 불분명한 상황에서, 사용인들의 실낱같은 목숨은 하찮다 못해 땅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었으니.

"그, 천려족이 도와줄 것이라고… 했네."

"천려족이 도와?"

"무슨...."

영지민들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아무도 대놓고 반박하는 말을 꺼내지 못했는데, 현실이 그만큼 절망적이어서 그러했다.

조국인 바리엘과 가주인 데르가가 싸우는 이 상황 속에서, 그들을 말려줄 만한 세력이 또 어디 있던가?

"비켜라. 그대들에게는 볼일이 없다."

"달려, 계속 앞으로!"

"야만족이다! 야만족 놈들이 쳐들어왔어!"

"아, 거 새끼들 자꾸 야만족, 야만족 이 지랄. 저것만 죽이고 가면 안 되겠습니까?"

"꺄아아악! 짐승족들이다! 살려주세요!"

"닥쳐. 무구룬. 한눈팔지 마라."

"저택이 앞에 보입니다!"

한편, 계속해서 마을을 가로지르던 천려족은 드디어 브라츠 저택에 당도했다. 가문의 깃발 대신 그을린 조사단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누가 전투의 승자인지를 여실히 알려주는 모습이다.

히이잉!

카칸티르가 쿠실레의 목줄을 잡아당겨 완전히 멈췄다. 저택 앞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허겁지겁 창을 들이밀었다. 투구와 갑옷에는 피가 낭자했고, 사지 성한 곳이 없어 보였다.

"누, 누구냐!"

"변방의 야만족인가! 여기까진 어떻게 왔지?"

처억!

절뚝이며 소리치는 모습이 퍽 안쓰럽다.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한 전사 한 명이 검을 뽑으며 앞으로 나오려 하자, 이안이 막아섰다. 그리고 미안하다는 시선을 보이며 한발 앞장섰다.

"나는 브라츠 백작의 서자, 이안이다. 이쪽은 위대한 사막의 전사들, 천려족일세. 대항하러 온 것이 아니니, 그대들의 주인에게 '우리'의 존재를 알려라."

병사들이 이안의 금발과 녹안을 보고 멈칫거렸다. 확실히 저 용모는 바리엘의 사람이다. 그들의 시선은 이안 뒤에 단단히 버티고 있는 전사들에게 향했다.

대자연의 기백을 그대로 담은 자들이었다. 범접할 수 없는 포식자의 아우라가 날것 그대로 느껴질 정도다. 병사들은 주춤거리며 중얼거렸다.

"…자, 잠깐 기, 기다리시오."

물러나라 하면 당장이라도 제 머리통을 손으로 으깰 것 같으니. 병사는 더듬거리며 뒷걸음질 쳤고, 이내 보고하기 위해 안쪽으로 달려 들어갔다.

남은 그의 동료들이 어정쩡한 자세로 검을 잡았다.

히이잉!

비록 쿠실레의 울음소리에도 움찔거리며, 식은땀을 흘려댔지만 말이다.

제41화. 돌아온 이유

정문 밖의 병사들은 여전히 검을 들고서 경계 태세를 유지했고, 안쪽에서 들려올 명령을 기다렸다.

대립하는 두 세력 간의 분위기가 극명했다. 부들거리는 손과 발로 겨우 서 있는 쪽과 여유롭게 구룻잎을 씹으며 기다리는 천려족.

끼이익.

이내 문이 열렸다. 그들은 양옆으로 갈라지며 낯선 자들의 입성을 허락했다.

"이안과 족장만 들어오라!"

"들어오라?"

"말이, X발 듣기 좋네."

"...."

병사는 바리엘의 중앙군 소속이었고 저들은 변방의 야만인이었다. 당연한 태도와 말투였으나, 전사 한 명이 보란 듯이 비아냥거리며 시비를 털어댔다.

그러자 다른 전사들 역시 피식 웃으며 동조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상당히 위압적이고 거친 모습이었으나, 이번만큼은 이안도 말리지 않았다.

"호위는 들이게 하라."

"그건 아니 된다."

"네놈이 단장이고, 대장인가?"

"…이미 위에서 명령이 내려온 것이다."

"다시 물어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대의 주군 마음이 바뀔 수도 있지 않나. 우리의 마음이 바뀔 수 있듯."

이안의 담담한 말에 병사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대항할 의지가 없다 했지만, 이런 식으로 나오면 어찌 될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중앙군은 이미 데르가와의 전투로 전력 손실이 상당했기에, 추가적인 무력 충돌은 최대한 피해야만 했다.

게다가 상대는 호전적인 야만족으로 브라츠를 위협하는 천려. 훗날은 어찌 될지 모르겠으나, 지금 당장 이 저택을 밀어버리는 것쯤은 간단하지 않겠나.

이안은 카칸티르를 돌아보며 제안했다.

"카칸. 네르사른 님과 수 그리고 저. 이렇게 넷이서 들어가면 될 듯합니다."

"나는! 이안, 나도 있어! 여기 베릭 있네?"

"그래. 경의 뜻대로 하지."

"자. 어서 가서 다시 물어보거라."

"이아아안! 귀먹었냐?"

짐짝처럼 매달린 베릭이 저도 데려가 달라며 몸을 꿈틀거렸으나, 열외는 열외였다.

이안의 압박에 병사가 다시금 안쪽으로 들어갔고 이내 만족할 만한 소식을 가져왔다.

"안으로 드시오."

"다녀오겠다. 다들 여기서 기다려라."

"네. 카칸!"

끼이익.

정문이 천천히 닫혔다. 두어 달 만에 돌아온 브라츠 저택은 기억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고즈넉하고 싱그러운 기운은 온데간데없고, 패전의 기운이 짙게 물들어 있었다.

멀리 보이는 별채는 통째로 타버린 것처럼 새카맣다. 이안은 그 옆에 쌓인 형체 모를 것들을 쳐다봤다. 대체 저것들이....

"자네가 이안 브라츠인가?"

그때, 한 여자가 부하들의 호위를 받으며 본채에서 걸어 나왔다.

옷차림새로 보아 조사단장이다. 분홍빛 머리를 하나로 묶은 채, 온갖 곳이 붕대를 감고 있는 모습. 저택 안에서도 나름 치열한 싸움이 있었던 것 같다. 그녀는 담배를 물며 웃었다.

"아. 입적이 안 되었으니 그저 이안이라 불러야겠군. 몰린 경에게 얘기 들었어. 나는 단장, 에리카일세."

"몰린 경의 부하이십니까?"

"부하? 뭐. 따지자면 그렇다 볼 수 있지. 자, 일단 안으로 들어오게나. 누추하지만 땅바닥보다는 낫지 않겠어?"

에리카는 저택이 마치 제 것이라는 듯 앞장서서 안내했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안은 저자가 몰린이 점지한 차기 영주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조사단장이라는 직위도 그렇고, 여기서 일 처리를 직접 보는 자이니 그 대가로 차기 영주 자리는 타당한 대가일 것이다.

"어찌 된 일입니까?"

응접실에 도착한 이안은 일단 시치미를 떼며 간을 보았다. 저택 안쪽은 미처 날아가지 못한 피 냄새가 가득했다.

"보시다시피, 출혈이 좀 있었지만, 정리는 거의 다 되어 간다네. 탈세 혐의도 확인하였고, 증거도 찾았어. 데르가의 팔다리만 자르면 될 일이지."

이안이 눈썹을 까딱거렸다. 반역자의 처형은 대부분이 교수형이었다. 칼날로 인한 죽음은 귀족에게 명예였기 때문에 대부분은 밧줄을 이용하곤 했다.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려 발버둥 치는 모습 또한 세간에 보이기 힘든 수치였으니까 말이다.

에리카는 장난이라는 듯 깔깔대며 웃었다. 그녀는 정문 입구부터 응접실까지, 카칸티르에게 시선 한번 주지 않고 있었다. 오만하게도.

"뭐, 그냥 비유적인 표현이네. 그놈이 데리고 있는 기사들이랑 단장이 있거든. 데오라 그랬나? 실력이 꽤 괜찮아. 이런저런 놈들을 수족으로 부리면서 계속 꽁무니만 빼고 있으니, 팔다리를 잘라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후우, 에리카가 담배 연기를 이안의 얼굴에 내뱉었다. 그러곤 그제야 카칸티르를 힐끔거리며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 그러면 뭐,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나? 듣자 하니, 데르가에게 원한이 많다고는 하던데. 역시 처형식이 궁금해서 그런가?"

이곳은 이안이 있기에 안전하지 않았다. 브라츠라는 가문이 사라지기 직전인 지금, 아무리 입적하지 않았다고는 하나 그에게 데르가의 피가 흐르고 있음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아니면, 몰린 경의 서신을 기다리나?"

그저 몰린 경에게 밀고장을 줌으로써 협조했다는 사실. 그것만으로 이리 우호적인 대접을 받는 것이다. 승기를 붙잡은 자들의 관용이기도 했다.

에리카가 쩝쩝 입맛을 다셨다.

"뭘 원하지? 나는 딱히 받은 지시가 없는데."

"몰린 경의 안부를 전해 들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다른 볼일이 있습니다."

"음? 그래?"

에리카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천려로 팔려간 서자가 볼일이라고 해봤자 대체 무엇이 있겠냐는 듯이.

"저에게는 브라츠가 고향입니다. 사달이 났다는 걸 알고 걱정되어 밤잠을 설칠 정도였지요. 그것은 브라츠와 동맹을 맺었던 천려족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여, 이리 동행한 것입니다."

에리카는 카칸티르를 힐끔거렸다. 그러곤 턱을 가볍게 갸웃거리며 웃기만 했다. 아직 이안이 하는 말의 의중을 알아채지 못한 것 같다.

"야만족은 브라츠와 사이가 나쁘지 않나?"

그녀의 말에 이안이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명백히 무시하는 비웃음이다. 에리카는 정색하며 담배를 테이블에 비벼 껐고, 이내 뒤에 서 있던 부하들이 검 손잡이를 붙잡았다.

"브라츠와 천려족은 오래전부터 화친을 맺어 교류하는 사이였습니다. 형제 그 이상의 관계지요."

"형제? 하. 개 풀 뜯어 먹다 뒈지는 소리. 브라츠와 천려가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인 것은 중앙의 행정부라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네놈이 그 증거 아니냐? 산 채로 대사막에 팔려간 천한 몸뚱이."

"화법이 인상 깊군요. 의외입니다. 요즘에는 조사단장도 천민 출신을 뽑나 봅니다."

"뭐!?"

이안의 담담한 말에 에리카가 꽥 소리를 질러댔다. 말하는 꼬락서니가 너무 천박하단 것을 돌려 먹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카칸 역시 웃음으로 이안의 말에 동의하는 뜻을 보였다.

"이보시게. 단장."

"이보시게, 단장?"

"나는 대사막의 중심이다. 천박한 말 따위 그만 쏟아내고, 데르가의 탈세 혐의를 확인했으면 서둘러 처형식을 올리고 떠나라. 브라츠 영지의 뒷수습은 우리가 할 것이다."

"미쳤나, 이것들이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에리카 님! 더 들을 것도 없습니다!"

채앵! 챙!

에리카의 부하들이 검을 빼 들었다. 카칸티르와 네르사른 그리고 수는 그저 멀뚱멀뚱 보고 있기만 했다. 흥분한 그들과 달리 실로 차분한 분위기다.

"짐승 핏줄인 새끼들이 여기가 어디라고!"

쉬이익!

개중 가까운 남자가 카칸티르에게 달려들며 검을 휘둘렀다. 카칸티르는 맨손으로 아주 가볍게 그의 손목을 낚아챘고, 이내 무덤덤한 표정으로 힘을 주기 시작했다.

"어...?"

아드드득.

"으아아아악!"

단 한 손으로, 사람의 손목을 비틀어 버린 것이다. 그에 그치지 않고, 카칸티르는 놈의 머리채를 붙잡아 테이블에 꽂아 내렸다. 에리카가 버렸던 꽁초 가루가 남자의 얼굴에 그대로 묻어났다.

쿵! 쿠웅! 쿵!

한 번, 두 번, 세 번.

거세게 내리칠 때마다 묽은 피가 터졌고, 이내 테이블 아래 카펫이 흥건하게 젖었다.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났던 에리카가 새된 고함을 질러댔다.

"미, 미쳤지? 나는 황궁의 사자다! 이건 황궁에 대한 모욕이야!"

"모욕이라니. 말은 똑바로 하는 게 좋을 거다. 내 손에 맞고 살아있는 것 자체가 영광이고 자비니까."

틀린 말은 아닌 듯싶었다. 족장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카칸은 단 한 번의 패배도 겪지 않았으며 그가 상대했던 자들은 모두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으니.

에리카는 금방이라도 눈이 뒤집힐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이안을 노려보며 경고했다.

"…아비와 함께 목이 잘리고 싶은가? 네놈 몸에 데르가의 피가 흐르고 있음은 모두가 안다! 너를 죽인다 한들 그 누구도! 내게 죄를 물을 수 없어!"

"말씀하신 대로, 저는 데르가의 피를 이었지만 브라츠 가문의 사람은 아니지 않습니까."

"어디 황궁에서도 그렇게 지껄여 보시지? 그런 잔꾀가 통하는지 말이야!"

"뭐, 황궁 노예로 전락하는 게 일반적이긴 하겠습니다만, 신중히 상황을 읽어야지요. 무엇보다 저는 접경한 천려족과 교류하는, 유일한 '제국인'이지 않습니까."

이곳은 황궁에서 보름 거리나 떨어진 변경.

차기 영주로 누가 오든, 외부 세력으로부터 바리엘의 국경을 지켜내는 것이 영주의 덕목이었다. 지금처럼 급박한 상황에서, 천려를 등에 업은 자가 누구인가?

이안은 제대로 보라는 듯 고개를 가볍게 들었다.

"또한, 화친으로 인해 제 소속은 바리엘의 브라츠가 아니라 대사막의 천려입니다. 아. 검은 내리는 게 좋겠어요. 그대들의 안위를 위하여."

일당 수십을 거뜬히 이겨내는 괴물들이다. 덩치부터가 확연하지 않나. 카칸티르의 가벼운 몸짓에도 에리카의 부하는 실신해 버렸다. 그들이 무기까지 들면 어떤 피바람이 불지, 아무도 짐작할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에리카 단장님의 임무는 데르가의 탈세 혐의 조사와 처벌이지, 브라츠 영지의 뒷수습은 아니지요. 할 일 다 하시면 올라가는 게, 그리 불쾌하십니까?"

"나는, 데르가를 잡기 위해서!"

"영지를 쑥대밭으로 만드셨더군요. 과하십니다. 데르가의 피만 흘리면 될 것을, 영지민들의 비명이 가득해요."

"과한 것은 네놈이다! 처지를 똑바로 직시해!"

데르가의 핏줄이며, 천민이었고, 대사막의 제물인 하찮은 존재. 백작의 정식 재판이 열리면 이안이 노예로 팔려감은 기정사실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데르가가 해 처먹은 세금을 메꿔야 하니까.

"잘 압니다. 처지."

이안의 말에 카칸티르가 안주머니에서 서신을 한 장 꺼냈다. 그리고 피가 낭자한 테이블 위에 툭, 하고 던졌다.

"우방인 천려의 입장이오. 데르가의 사정은 제국 내의 일이지만, 우리는 어쨌거나 브라츠와 동맹을 맺었소. 그 누구보다 브라츠의 평화를 원하지."

"하! 뻔뻔하기 짝이 없군."

"태도를 정중히 하는 게 좋을 텐데. 여기서 죽으면 제일 아쉬울 게 그대 아닌가?"

단순하지만 확실한 경고였다. 에리카는 입술을 꽉 깨물며 다시금 검을 다잡았다. 그리고 문득, 천려인들은 아직까지 아예 무기를 꺼내지도 않았음을 깨달았다. 맨손으로도 충분하다 여기는 것이다.

"동맹 서약대로라면, 우리는 데르가의 편에서 힘을 실어주어야 하오. 하지만 데르가는 죄인이고, 브라츠는 바리엘의 조각이지. 따라서 그대들을 도우려 하는데...."

카칸티르는 이안을 힐끔거렸다.

모든 것은 미리 말을 맞춘 대로다.

"그대와 우리를 연결하는 인물로 적합한 것이 이안이라 생각해, 브라츠의 모든 권한을 이안에게 위임하였으면 하는데. 어찌 생각하나?"

"…지금 내가 잘못 이해했나? 가주가 되겠다고 말하는 것으로 들리네만?"

이안과 천려족은 대답 없이 에리카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녀는 어이가 없어 말문이 탁 하고 막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벌써부터 그러기엔 이르다는 듯이, 이안이 방긋 웃었다.

제42화. 추격

"미쳐도 단단히… 아니 더럽게 미쳤군."

에리카는 참지 못하고 다시금 담배를 꺼내 물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는데,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것이다.

천려족을 대동한 의미가 무엇이겠나?

여차했다가는 무력 또한 불사하겠다는 걸 시사했다. 전투의 여파로 반쯤 나가떨어진 중앙군과 달리, 천려의 전사들은 투지로 몸이 달구어진 상태다.

'무엇보다 개 같은 건, 이안의 핏줄 외에는 흠잡을 것 없는 상황이란 거지.'

당장 저택 정문만 나서도 중앙군을 처절하게 저주하는 영지민들의 비명이 낭자했다. 그들과 맞선 것은 데르가의 사병이었으나, 영지민들에게는 가족이었고 친구였으며 이웃이다.

'당분간 영지민들의 반발과 증오가 깊을 것이다. 하지만 브라츠의 피를 이어받은 후손이 전면으로 나선다면 통솔이 효율적으로 가능하겠지. 그리고 무엇보다 변방에서 제일 중요한 접경 야만족이 지지하고 나섰으니.... 하, X발.'

머리가 지끈거렸다.

중앙군이 추가로 차출된다면 분명 천려를 몰아내고 브라츠에서 완벽한 승리를 쟁취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 영광의 순간에 에리카와 단원들이 함께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희생자라는 이름으로 빛바랜 추모 따위나 받으며 방점을 찍을 테니까.

에리카의 입술이 뒤틀렸다.

"…영주 임명은 황제의 소관이네."

"알고 있습니다. 황제의 임명이 있기 전에, 그 아무도 권한이 없지요."

아무도 없고, 누구나 있다.

에리카가 할 수도 있지만, 그 말은 이안도 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담배를 잘근잘근 씹으며 카칸티르를 노려봤다. 그는 느긋하게 계속해서 이안의 필요성에 대해 늘어놨다.

"이안은 브라츠 영지에서 나고 자랐으니, 재건하는 데 있어서도 큰 도움이 될 것이네. 이안이 아니면 천려족은 바리엘의 그 어떤 세력에게도 우선협상권을 내주지 않을 것이며, 평화를 위해서는 처음부터 알아가는 단계를 거처야 할 것이다."

사실상 단교를 뜻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이건 전쟁이란 뜻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천려족의 족장 입에서 나온 말이니만큼 무게 또한 무거웠다.

"싸고 도네. X발 거."

"이안 경의 말대로 천민 출신이 맞나 보군."

"그 입, 닥치지 못하나? 변경 새끼들이 진짜...."

카칸티르가 살벌한 눈빛으로 에리카를 쏘아붙였다. 하지만 그녀도 지지 않고 고개를 쳐들었다.

밑바닥에서 여기까지 올라오려고 얼마나 개고생을 했던가. 영주라는 인생 목표를 앞에 두고 눈 뜬 채 통째로 뺏기게 생기지 않았나.

"…몰라서 일러주는데, 나 죽이면 바리엘에 선전포고하는 거나 마찬가지인 거 알지?"

"오호. 그거 일러주어 고맙군. 아니었으면 당장 목을 분지를 뻔했어."

"끄윽...."

꽈악.

카칸티르는 쓰러져 있는 남자의 목덜미를 발로 누르며 웃었다. 부하는 본능적으로 숨을 껄떡이며 몸을 떨어댔다. 에리카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좋아. 그대들이 뭘 원하는지는 대충 알겠네."

에리카는 한발 물러나는 척, 팔짱을 끼며 말을 돌렸다. 그녀는 몰린에게 조사단장 역을 권유받았을 때부터 이곳 영지의 내정자였다. 이안이 노리는 영주 임명서에도 자신의 이름이 적혀 내려오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러니 여기서 물러날 순 없다.

"하지만 나는 아직 데르가를 비롯해 메리 부인과 첼의 신병을 확보하지 못했다. 대항한 사병들 역시 모조리 잡아들여 황명의 위엄을 세워야 할 의무가 있어."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임무를 완수하기 전에는 저택에서 물러날 수가 없다. 그대가 진정으로 브라츠의 고통을 덜기 위함이라면, 알아서 하시게나. 하지만 오직 평화만을 위해 움직이길 바라네. 그렇지 않다면 황궁의 검이 중앙에서 여기까지 날아들 테니까."

중앙에서 에리카를 이곳 영주로 임명한다는 전언이 도착할 때까지. 그때까지면 버티면 되는 일이다. 권한을 받게 된다면 건방지게 나불거리는 저 주둥이들을 모두 박살 내리라.

"좋습니다. 그렇다면 데르가 체포에 저희도 힘을 보태지요."

이안은 만족스러운 회담이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은근슬쩍 발 밀어 넣는 게 성공적이었으니.

에리카의 말마따나 데르가를 비롯해 저택 주요 인물들을 잡기만 하면, 중앙군이 여기서 주둔할 명분을 가져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또한 수습 역시 저희가 주도하겠습니다. 조사단과 중앙군은 영지민들의 원성을 사지 않으셨습니까. 효율적인 진행을 위해 물러서시지요."

혹여, 데르가를 구하기 위한 속내가 아닐까?

에리카는 문득 떠오르는 가정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는 타다 만 담배 꽁초를 튕기며 부하들에게 눈짓했다.

"허튼수작이라도 부리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에리카, 몰린 경과 그리 친밀한 사이는 아닌 듯 싶습니다?"

"뭐?"

"저와 데르가의 사이를 잘 모르는 것 같아 하는 말입니다.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데르가를 데리고 와서 증명해 보이지요. 제가 중앙에 얼마나 진심인지."

이것은 후에 이안의 입지를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순간이었다. 데르가의 핏줄이지만 그를 완강히 부정하는 것. 몰린에게 넘겨준 밀고장으로 초석을 쌓았으니 더욱 단단하게 고정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하. 데르가를 데리고 와? 어디 한번 해볼 수 있으면 해봐. 중앙군도 추적에 고전하여 산속을 헤매고 있거늘."

얼추 상황이 정리되자, 카칸티르가 옷을 여미며 뒤돌았다. 그리고 웃음기가 잔뜩 묻은 목소리로 단언했다.

"사냥은 우리 전문이니, 그대들은 여기서 저 여자 수발이나 들고 있거라."

카칸티르가 고갯짓으로 가리킨 것은 목이 부러진 에리카의 부하였다. 이안 역시 천려족을 따라나서며 가볍게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럼. 곧 다시 뵙겠습니다."

콰앙!

에리카는 문이 닫히자마자 담배를 뱉으며 부하에게 달려갔고, 이내 이를 아득바득 갈아댔다.

"당장 전서구를 내와라!"

"네, 에리카 님."

주군의 새된 명령에 부하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중앙으로 서둘러 급서를 보내야 했다. 여기서 에리카를 지켜줄 것은 황제의 인장이 찍힌 영주임명권, 그것 하나뿐이었으니.

몰린이 재깍재깍 일 처리를 잘 해주기만을 기대해야 했다.

* * *

다음날, 브라츠에서 그리 멀지 않은 숲속.

바위 틈틈이 몸을 숙인 사병들이 검을 다잡은 채 침만 꿀꺽 삼켰다. 바스락바스락, 짐승의 것인지 적군의 것인지 모를 기척만 사방에서 들려왔다.

언제 적의 공격이 쏟아질지 모른다는 긴장감 때문일까. 데르가는 온몸이 흠뻑 젖어서는 저도 모르게 몸을 부들부들 떨어대고 있었다.

"백작님. 이쪽으로."

온몸이 피투성이인 데오가 앞장서서 걸었다. 기어가다시피 납작 엎드린 탓에, 얼굴에는 억센 풀 자국이 잔뜩이었다.

"하아, 하아, 어디까지 내려갈 건가?"

"메렐로프 쪽에서는 성문을 아예 걸어 잠갔다 하니, 그쪽을 돌아 하완 왕국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말이 하완 왕국행이지, 망명이나 다름없었다. 그쪽에 당도한대도 안전상의 이유로 최대한 정체를 숨기고 살아가야 했다. 평생 살아온 터전을 비롯해 귀족으로서의 긍지와 영예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난 것이다.

"젠장."

백작은 뒤를 힐끔거리며 저를 따르는 사병들을 확인했다. 반의반 이상으로 줄어든 전력. 그것도 성한 곳 없이 팔다리 한 짝씩 떨어진 모습들이다. 잘 싸웠다고 여기기에는 패배의 색이 짙었다.

잘그락.

백작은 괜스레 등에 매달린 보따리를 만지작거렸다. 비밀리에 따로 숨겨놓았던 비상금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작고 큰 보석과 금화들. 앞으로 데르가의 모든 걸 책임져줄 중요한 자산들이다. 신이 도와준다면 이걸 발판삼아 다시 브라츠로 돌아올 수도 있을 터.

사사삭.

"잠깐. 멈춰라."

"멈춰라."

"뒤에! 멈춰!"

데오는 인기척을 느끼고 멈칫거렸다. 그와 동시에 줄줄이 소시지처럼 달려오던 사병들도 자세를 낮추며 주위를 경계했다.

끼이이익!

가까운 아름드리나무 위에서 난 소리다. 데르가와 데오가 동시에 고개를 쳐들었다. 사슴만 한 매가 눈을 부라리며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아."

저것이었구나. 데르가는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퍼억!

제 옆을 호위하며 걸어가던 사병의 고개가 왼쪽으로 꺾이며 쓰러졌다. 관자놀이에 단검이 날아와 박힌 탓이다.

'어?'

즉사였다. 죽은 자도 자신이 죽었다는 걸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건 옆에서 보고 있는 데르가도 마찬가지였다. 문자 그대로, 찰나의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에.

"어어어...."

"으아아악!"

"적군이다! 적군!"

"다들 진정해! 진정하고 방패를 들어라!"

데오가 소리쳤지만 이미 죽음의 경계를 한번 맛봤던 사병들은 이리저리 흩어지며 비명만 질러댔다. 그나마 정신 제대로 박혀있는 기사 몇 명이 활과 검을 다잡았다.

"오른쪽입니다!"

"오른쪽에서 날아왔어!"

"백작님을 보호하라!"

"고개를 숙이십시오!"

언제고 다시 검이 날아들지 모른다는 공포심. 데르가는 덜덜 떨며 기사들의 등 뒤로 몸을 가렸다.

"어이. 데르가."

쉬익!

챙!

데르가로 날아드는 화살. 기사가 재빨리 검으로 쳐내며 주인을 보호했다.

나뭇잎들 사이로 비처럼 내리는 빛줄기. 둔덕 위, 모래색의 후드를 뒤집어쓴 자들이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오랜만인데, 많이 변했군그래."

"카, 카칸티르!"

"천려다! 천려족이다!"

붉은 안료는 마치 피를 뒤집어쓴 것처럼 보이게 했다. 데르가는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저의 도움을 단칼에 내치지 않았던가. 기사 벨의 머리까지 보내면서.

"왜, 왜 여기 있는 거지?"

"궁금한가?"

"젠장! 백작님, 뛰십시오!"

"알렉스! 방어진을 쳐!"

기사들이 데르가의 팔을 잡아끌며 소리쳤다. 카칸의 옆에 서 있는 전사들이 모두 활시위를 당겼기 때문이다.

카칸티르가 데르가의 뒤쪽을 고갯짓하며 웃었다.

"궁금하면 자네 아들에게 물어보지 그러나."

그 순간, 데르가와 사병들의 긴장감이 뚝 하고 끊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들은 바람이 세차게 부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

솨아아아.

흡사 숲에 사는 정령의 모습 같다. 한 올 한 올 빛나는 금발의 머리가 바람에 휘날리고, 녹안의 눈빛은 아름답게 휘어있었다.

이안이다. 천려로 팔아넘겼던 그의 아들.

"저, 돌아왔습니다."

"이안…! 너! 너 이놈!"

놀란 것도 잠시, 데르가는 몰린과 결탁하여 저를 이 꼴로 만든 것이 이안임을 기억해 냈다. 영지의 가주로서 명예롭게 살던 자신을 바닥으로 끌어 내린, 저주스러운 제 혈육 덩어리. 과거의 수치이자 미래의 증오가 바로 이안이었다.

"죽일 것이다, 이안! 산산이 도륙 내어 네 어미에게 고기를 먹일 것이다! 그리고 둘 다 산채로 불구덩이에 넣어주마! 살아있는 것이 지옥처럼 느끼게 해주겠어!"

바락바락 내지르는 데르가의 분노가 숲을 가득 울렸다. 이안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 여유로운 미소에, 데르가는 더욱더 혈압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네 이놈!"

"백작님!"

타다다닥!

데르가는 저도 모르게 검을 다잡고 이안에게 달려갔다. 지치고 다친 몸이었지만, 데르가는 단숨에 뛰어올라 이안의 목덜미를 노렸다. 그리고 그의 뒤를 호위하듯 따르는 데오.

채애앵! 챙!

데르가의 검을 날려버린 건 수였으며, 바로 이어서 들어오는 데오의 것은 베릭이 막아냈다.

"아."

반동으로 인해 조금 아프다는 듯, 베릭이 인상을 찡그리며 제 배를 내려다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히죽 웃으며 데오에게 손을 흔들었다.

"안녕. 개새."

"…개, 개새?"

"나 기억 안 나? 난 너 기억나."

베릭은 검을 크게 휘두르며 데오에게 달려들었다.

"훈련장에서. 네가 나 졸라게 팼잖아?"

제43화. 자루에 담긴 것

채앵!

베릭이 휘두른 검을 데오가 힘겹게 막아냈다. 아무리 그간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한들, 옆구리에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상태니, 상처가 둘 사이의 밸런스를 잡아준 것 같았다.

"오우."

"베릭. 괜찮아?"

이안의 부름에 베릭이 뒤를 돌아봤다. 씨익 웃는 모습이 여간 즐거워 보이는 게 아니다.

"뉘예뉘예. 그러니까 말 걸지 마세요. 주인님."

퉤, 하고 뱉는 침에는 피가 섞여 있었지만, 저가 괜찮다는데 누가 뭐라 하겠나. 그는 다시금 전광석화처럼 데오에게 달려들었다. 검이 커다란 반원을 그리며 데오의 급소를 집요하게 노려댔다.

챙! 채앵!

"백작님!"

데오는 그걸 간신히 피하면서도 제 주인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 모습이 꽤 불쾌했는지, 베릭의 입가에서 미소가 천천히 잦아들었다.

데르가는 앞뒤 잴 것 없이 다시 이안에게 덤볐다.

"죽어라! 이안!"

피잉! 쉬이익!

백작의 저주는 신호탄이 되었다. 천려의 전사들이 일제히 활을 쏘았고, 활 대신 검을 쥔 자들은 이끼 낀 바위를 짚으며 훌쩍 넘어 달렸다.

영락없이 피식자를 눈앞에 둔 포식자였다.

한 발 한 발이 강력하고 정확했으며 파괴적이었다. 살육의 즐거움을 그대로 느끼는 듯한 분위기가 가히 이질적이다.

촤아악!

푸욱!

"으아아악! 살려줘!"

"그래. 잘 뛰네. 어서 더 도망쳐 봐."

"몰아, 저쪽으로 몰아!"

"겐달로! 그놈은 내가 잡았다고!"

전사들은 뿔뿔이 흩어지는 사병들의 숨통을 어렵지 않게 끊어놓았다. 데르가라면 몰라도 이놈들은 죽으나 사나 상관없는 자들 아닌가. 이슬로 축축해진 흙이 피를 머금었다.

"아차차. 시체 가져가야 한다 그랬나?"

"머리만. 몸통은 못 들고 가지. 귀찮잖아."

채앵! 챙!

"저쪽은 좀 쓸 만해 보이는군."

"벨이라고 했나? 기사 양반 친구인 것 같은데."

잔챙이들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정예로 꼽히는 기사들 주위로 천려의 전사들이 어슬렁거리며 모여들었다. 사냥감의 숨통을 노리는 늑대 무리와 같다.

한편, 데르가는 꺽꺽 넘어가는 숨을 쉬어대며 침을 흘려댔다. 수는 백작의 공격을 쳐내기만 할 뿐, 어떤 반격도 하지 않았다. 그저, 제풀에 지쳐 저리된 것이다.

"이…안…! 우에엑."

"가지가지 하십니다. 아버지."

"너, 대체 어떻게...."

수는 데르가의 머리채를 붙잡고 바닥에 짓이겼다. 이안의 발치 아래 납작 엎드리게 된 데르가는 벌게진 얼굴로 버둥거렸으나 소용없었다.

이안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중얼거렸다.

"용기인지, 욕심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찌 윈첸이 버티고 있는 대사막에서 부마트와 결탁하였습니까. 이러나저러나 저로서는 상관없는 일이긴 합니다만, 아들 된 도리로서 영 보기 힘듭니다."

서걱.

서슬 퍼런 칼날 소리에 데르가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수가 담담한 표정으로 데르가의 머리카락을 잘라내고 있었다.

저의 식구를 꾀고 정신적 지주를 죽이려 한 원수 중의 원수. 동맹을 맺어놓고 뒤에서는 검을 갈던 배신자 중의 배신자.

"뭐, 뭐 하는! 뭐 하는 게냐!"

"목 대신 자르는 것이오. 아직 시기가 아니니."

완벽한 복수와 작전을 위해서라면 참아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달래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잘라야만 했다.

"이런, 미천한,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은가!"

"시끄럽소. 돼지 멱 따는 기분이 드는군."

"무, 무어라? 이 천박한 것이!"

"머리카락이 싫다면 목을 잘라줄까?"

수는 단검을 데르가의 목울대에 세우며 중얼거렸다. 살벌하고 뜨거운 분노가 뚝뚝 흘러내렸다. 데르가는 침을 꿀꺽 삼키며, 허망한 눈동자를 돌렸고, 때마침 데오의 목에서 핏줄기가 솟아오르는 걸 목격했다.

"으윽...."

"데, 데, 데오...!"

놀이라도 하는 것처럼 데오를 중심으로 천천히 도는 베릭. 연습이라도 하는 것처럼 사정없이 급소를 찔러댔다. 데오는 눈을 부릅뜬 채 앞으로 고꾸라졌다.

쿵!

"으아아악!"

이어서 왼쪽. 천려인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기사들도 마찬가지다. 틈을 보이기가 무섭게 물어뜯기는 목덜미. 정예라 여겼던 기사들조차 속수무책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버지가 죽을 곳은 이곳이 아니니까."

이안은 데르가의 볼을 매만지며 화사하게 웃었다. 그러자 수가 검은색 복면을 데르가의 머리에 뒤집어씌우고 끈으로 쪼였다.

퍼억! 퍼억!

"으아아악!"

이내 사정없이 쏟아지는 매질. 시체를 정리하던 전사들도 오고 가다 데르가의 등짝을 밟으며 욕을 한 사발씩 뱉어댔다.

퍼억! 퍽!

"X발놈, 감히 윈첸 님을...."

"이거 언제 죽입니까? 이안 님?"

"그냥 지금 해버리면 안 되나?"

데르가는 진즉에 기절했는지, 아랫도리를 적시고서 손만 부들부들 떨어댔다. 첼이 누굴 닮았나 했더니 제 아비 판박이었던 모양이다.

이안은 카칸티르를 힐끔거리며 대답했다.

"일단 중앙에 넘겨주고, 후에 기회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주도권만 가져온다면 데르가의 처형식쯤이야 천려가 원하는 대로 해줄 수 있었다. 다만 우선은 황궁이 원하는 대로 바쳐서 신임을 얻는 게 중요했다. 에리카 말고, 보름 거리에 떨어진 바리엘의 중심들 말이다.

입맛 다시는 전사들과 달리, 카칸티르는 멀찍이 떨어져 고개만 끄덕였다. 모두 이해한다는 의미였다.

"다들 정리해라."

"네. 카칸."

"카칸! 저 멀리 중앙군의 흔적이 보입니다."

"한발 늦었다 이거여!"

베릭이 킥킥 웃으며 검에 묻은 피를 바지에 슥슥 닦아댔다. 만족스러운 몸풀기였는지, 표정이 한껏 더 가벼워 보였다.

"베릭. 상처는? 여기서 덧나면 치료하기도 어려워."

의료진은 한정되어 있었고, 전투로 인해 다친 영지민들은 너무나 많았다. 거기에 베릭까지 더하면 곤란하지 않겠나.

하지만 베릭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코만 훌쩍거리며 웃옷을 들어 보였다. 천려 의원이 감아준 붕대가 그대로였다.

"나 진짜 괜찮은데?"

"…대체 어떻게?"

"나도 몰라. 칼질할 때마다 스트레스 풀리니까, 그거 때문에 회복력이 빨라지는 건 아닐까? 만악의 근원은 스트레스니까!"

쉬익, 쉭! 절도 있게 휘두르는 검과 달리, 말은 장난스럽기 짝이 없다. 이안은 유심히 베릭의 상처를 쳐다봤으나 당최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내려갑시다!"

"중앙군 뺑이 좀 치게 조용조용!"

"네가 제일 시끄럽다. 아하하."

포댓자루에 담긴 데르가를 들쳐 메고 소리치는 전사.

이안은 목 잘린 시체들을 지나쳐 브라츠의 저택으로 향했다. 그들 위로 천려의 매들이 계속해서 맴돌았다.

* * *

"에리카 님, 에리카 님!"

"천려족이 돌아왔습니다!"

쿠당탕탕!

에리카는 부하의 외침에 바로 창가로 가서 커튼을 걷었다. 정문으로 위풍당당 들어오는 천박한 야만족들. 죄다 피를 뒤집어쓰고 있는 데다, 뭔지 모를 포댓자루를 들고 있었다.

"중앙군은?"

"전서구가 날아왔는데, 숲에서 야영을 할 것 같습니다. 데르가와 그 사병들의 흔적을 찾았다 합니다."

까득. 에리카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같은 숲에 들어갔다 귀환한 녀석들의 표정이 유독 밝아 보여서 그런 것 같다.

쿠실레에서 내린 이안은 몇몇 전사들과 함께 본채로 들어섰다.

"잠깐, 에리카 님의 허락을 구하고-!"

"시끄럽다. 저택에 전세 냈나?"

"예의를 지켜! 우리는 황궁 조사단이란 말이다!"

"그래? 우리는 대사막의 중심이다. 꺼져."

복도 쪽에서 소란이 들려오는 걸로 보아, 부하들이 이안의 무리를 막아선 듯했다. 에리카는 한숨을 삼키며 집무실 문을 열었다. 널찍한 복도는 사내들로 인해 바글바글했다.

"무슨 소란이지?"

"에, 에리카 님."

이안은 땀으로 젖은 머리칼을 가볍게 정리하며 고개를 숙였다. 분명 예의 있는 몸짓인데, 전혀 존중이나 경의가 담겨있지 않았다.

"무슨 소란인지 물었다. 이안."

"데르가의 뒤를 쫓다 돌아왔으니, 볼일이 무엇 있겠습니까?"

이안의 눈짓에 전사가 자루를 냅다 바닥에 던져버렸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복도가 쿵, 울릴 정도다. 에리카의 부하가 주춤거리며 다가가 자루 입구를 칼로 잘라냈다.

"흐익!"

안에서 굴러나오는 것은 사병들의 머리였다. 뜯겨나간 것도 있었고, 깔끔하게 잘린 것도 있었다. 역해진 에리카가 입가를 가리자, 전사가 능청스럽게 웃었다.

"이런. 실례했소이다. 브라츠를 피바다로 만들었기에, 이런 것도 익숙한 줄 알았소."

"입 닥쳐! 이것들이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아, 진짜는 여깄지."

쿵!

다시 내던지는 포댓자루 하나. 소리가 남달랐다.

이번에는 에리카가 직접 입구를 열어 안쪽을 살폈다. 복면을 뒤집어쓴 데르가가 꼼꼼하게 포박되어 있었다.

"데, 데르가?"

"진짜입니까?"

"맞는 것 같습니다."

실신했지만, 목숨에는 지장이 없어 보였다. 조사단원들이 머뭇거리며 에리카를 돌아봤다.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이제 좀 믿을 만하십니까?"

"…흥. 재주가 영 없는 건 아니었군. 데르가를 지하 감옥으로 옮겨라!"

"아, 네!"

단원들이 데르가를 끌어당겼으나, 워낙 뚱뚱한 몸뚱이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겨우겨우 등에 짊어져도 한 걸음 떼기가 무섭게 앞으로 고꾸라졌다.

"조심, 조심!"

"으악!"

쿵!

그걸 보며, 어찌 비웃지 않을 수 있겠나. 천려족은 피식 웃으며 소리쳤다.

"도와줄까? 그대로 가다간 지하실까지 굴러갈 것 같은데. 데르가보다 먼저 죽겠어."

"하하하하!"

"우리가 잡아 오길 잘했네. 아니었으면 어떻게 갖고 왔겠어? 간호 다 해준 다음에 두 발로 좀 걸어보시오, 했으려나?"

침묵하던 카칸티르마저 웃음을 숨기지 못했다. 에리카의 얼굴이 곧 터질 것처럼 붉게 달아오르자, 이안은 넌지시 말을 돌렸다.

"그래, 이제 데르가도 잡아 왔으니 어쩌실 예정입니까? 가능하다면 서둘러 처형식을 치르고 떠나주셨으면 합니다만."

"말이 아주 건방지군, 이안. 나는 아직 임무가 다 끝나지 않았다. '브라츠'라는 성을 가진 자들을 모두 처단해야 해."

"그렇다는 말은?"

"그중 주요 인물인 메리 부인과 첼을 아직 못 찾지 않았나. 그대들도 한가하다면 마을로 내려가서 찾아보지. 그 참에 거기서 지내도 좋고."

"밖으로 나갔을 가능성은요?"

"거의 없네. 사라진 날을 특정할 수 있어. 그날은 성벽을 나간 여인이 없었으니까."

그러곤 에리카는 하나로 묶은 머리를 휘날리며 당당하게 집무실로 되돌아갔다. 저 자리가 꼭 그곳이라는 걸 은연중에 주장하는 것이다. 데르가를 어쩌지 못하는 부하들만 복도에 남아 난감하게 쩔쩔맬 뿐이다.

"저자들을 도와 데르가를 옮겨주어라."

"네. 카칸."

카칸티르는 부하에게 지시 후, 이안에게 고갯짓했다. 잠깐 얘기 좀 했으면 좋겠다는 시선이었다. 이안은 흔쾌히 그의 뒤를 따라 복도 뒤쪽으로 자리를 옮기려다 멈칫거렸다.

"왜?"

베릭이 눈치도 없이 동행한 탓이다.

이안은 주위의 시선을 잠시 보는 척, 고개를 좌우로 돌린 다음 지시했다.

"너는 따라오지 말고, 필리아에게 가보거라."

"아아아! 맞다! 네 친엄마?"

"그래. 베릭 네가 은신을 도왔으니 길을 알지 않느냐."

"알지, 그럼."

자신 있는 대답과 달리 표정은 당황스러워 보였다. 설마 잊은 거 아니겠지? 이안이 무어라 말을 덧붙이려 하자, 베릭이 후다닥 저택 밖으로 달려 나갔다.

"이안 경."

"네. 카칸."

이안은 베릭을 내버려 두고서 카칸티르와 마주했다. 그의 표정이 자못 딱딱하게 느껴졌다.

제44화. 비밀 공간

브라츠 역사상 이토록 혼란스럽고 어색한 나날은 없었을 것이다. 하나의 바리엘이라 여겼던 민족끼리 검을 겨눈 것도 모자라, 죽을 거라 예상했던 서자는 귀환했다. 그것도 평생의 적이라 여겼던 천려족을 등에 업고서.

"세상이, 망하려나...."

늙수그레한 노인이 브라츠 저택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참으로 이질적인 광경 아닌가? 황궁 깃발을 든 병사들과 천려의 전사들이 함께 주둔해 있다니. 그것도 저택 본관 한 곳에서 말이다.

노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머리 없는 시체를 수레에 담아 치웠다.

끼익.

저택 안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 더 난감한 분위기였다. 물과 기름처럼 어울릴 수 없는 서로의 존재도 존재지만, 제일 큰 문제가 있었으니.

"메리 백작 부인과 첼의 시체가 안 보입니다."

"머리 잘린 시체들까지 잘 본 것인가?"

"옷차림새와 손톱 끝까지 확인했지만, 귀족의 것이라 여겨질 만한 건 없었습니다. 강을 떠내려간 시체는 아직 건지지 못해서, 아마 그쪽에 섞여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부하의 보고에 에리카가 손톱을 물어뜯었다. 데르가의 신병은 확보했으나, 그의 처와 자식인 메리와 첼은 도저히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사지가 찢긴 것들도 확인해 보라."

"알겠습니다."

"꼭 시체를 찾아야 한다. 저택도 꼼꼼하게 뒤져."

죽었다면 시체까지 확인해야만 임무를 완수했노라 말할 수 있을 터다. 게다가 영지를 좀 뒤집었는가? 뒤처리가 깔끔하지 못하면 중앙의 신임이 흔들릴 수도 있다.

"…그리고 만약 시체를 찾는다면, 알지?"

"황궁에서 임명장이 올 때까지, 잘 숨겨두겠습니다."

메리와 첼이 죽었다면, 데르가의 처형을 미룰 이유가 없어진다. 그렇다면 브라츠에 머물 명분도 없어지는 것. 천려족이 점령한 영지를 그녀가 다시 입성할 수 있을지가 불분명하지 않은가.

'제기랄!'

에리카는 다시 손톱을 물었다. 잘게 짓이겨진 손톱 찌꺼기가 입안에서 마구 굴러다녔다.

한편, 복도 뒤쪽 작은 방.

카칸티르와 네르사른 그리고 이안은 빙 둘러 앉아있었다. 먼저 입을 뗀 것은 네르사른이었다.

"이안 경. 에리카 말입니다. 아무래도 작위 임명장을 기다리는 눈치 같지 않습니까?"

"저도 그렇게 느꼈습니다. 사실 변경 끝자락까지 오는 강행군인지라, 조사단장으로 임명됐을 때부터 내정되어 있었을 겁니다."

"에리카가 여기 내려온 지 보름이 다 되어 갑니다. 곧 있으면 임명장이 도착할 것이고,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 주둔하는 것이 곤란해집니다."

네르사른의 말에 이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리카가 말했듯이 작위 임명은 황제의 소관이다. 제아무리 게일 2황자가 에리카를 밀어준다고 한들, 성과가 있어야 하지 않겠나.

"데르가를 체포한 것이 오늘이니, 당장 오늘 전서구를 날린다 하더라도 보름 가까이 걸릴 것입니다. 그 부분은 걱정 안 해도 됩니다."

황제의 명은 무겁고 귀한 것인지라, 전서구를 이용할 수 없고 오로지 파발로만 내려지기 때문이다.

네르사른이 머릿속으로 날짜를 계산하며 조금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쨌거나 에리카가 영주가 되는 것은 기정사실 아닌가. 천려는 이미 많은 것을 투자했네. 그런데 전부 생으로 날릴 판이야."

이안을 밀어줌으로써 도모할 미래의 이익 그리고 데르가의 직접적인 처단 등등. 천려는 이번 계획에서 많은 것을 양보한 셈이었다.

"아니요, 카칸. 상황의 흐름이 좋습니다."

"설명할 수 있겠나?"

"우선 메리와 첼의 신병이 확보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게 좋은 거라고? 덕분에 저자들도 이 저택에 엉덩이 들이밀고 눌러앉았거늘."

"에리카가 스스로 불지 않았습니까. 그녀의 임무는 브라츠 가문의 궤멸이요, 그들의 신병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이쯤 하자 먼저 알아차린 네르사른이 탄성을 내질렀다.

"아… 그렇다면?"

저들이 여기에 남아있는 것은 메리와 첼이 영지 안에 있을 거라는 명제가 깔려있었다.

하지만 밖으로 나갔다는 것만 확인한다면, 그들은 의무적으로 메리와 첼을 뒤쫓아야 했다.

미끼가 되어주는 것이다.

"또한, 중앙에서는 절대 저를 내치지 못할 겁니다."

"근거는?"

"카칸께서 궁금해하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요."

이안이 마력운용자라는 것. 천출이지만 감히 에리카를 밀어낼 수 있노라고, 이안은 자신 있게 주장했다.

"그래. 좋아. 이제 겨우 데르가를 잡았을 뿐이니, 더 지켜보겠네."

"감사합니다. 카칸."

"그러면 우리는 이제 뭘 해야 하지? 단장의 말대로 마을로 나가 시체를 뒤져봐야 하나?"

"아니요. 대신 부상자들을 도와주시면 됩니다. 전투가 일단락되었으니 당분간은 재건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될 겁니다. 영지민의 지지 역시 변경에서는 중요한 초석 중 하나니, 그리 해주십시오."

카칸티르의 눈이 가늘게 휘었다.

이거 보면 볼수록 깜찍한 놈 아닌가. 손 안 대고 코 푸는 것처럼 천려의 힘을 이용해서 바리엘에 온갖 도움은 다 퍼주고 있다.

고작 열여섯이라고 했나? 믿기지가 않는다. 하지만 그맘때의 아이처럼 이안은 배시시 웃으며 카칸티르의 눈빛을 받아냈다.

'뭘 그리 보시나. 틀린 말도 아닌데.'

그래, 틀린 말은 아니다.

중앙 입장에서 변경은 세금 잘 내고, 국경을 잘 지키기만 하면 어떻게 굴러가든 상관없는 땅덩어리였다. 그만큼 황궁의 입김에서 독립적이라는 의미다.

그러니 무탈하게 영지를 잘 굴리려면 그만큼 능력 있고 인정받는 가주가 필요할 터. 이 경우 후자를 위한 일이라 보면 될 것 아닌가.

"그럼 경은?"

"저는 볼일이 좀 있습니다. 듣자 하니, 데르가가 별채에 불을 내고 도망쳤다 하더군요. 아마 에리카 단장이 말한 '메리와 첼의 실종 시점'이 바로 그때일 것입니다."

영지 안에도 없고, 바깥으로 나간 것도 아니라면….

저택 어딘가에 숨어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대저택에 비밀 통로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니. 문제는 단서를 얻을 만한 사용인들이 죄다 죽어버렸다는 것이다.

"베릭이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오면 움직이겠습니다. 카칸께서는 전사들과 좀 쉬신 다음 내려가시죠."

카칸티르는 포도주를 병째 마시며 이안을 돌아봤다. 여기까지 한배를 타고 온 이상, 별다른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 오후.

심부름을 떠났던 베릭이 도착하자마자 본 것은 쿠실레 두 마리를 몰고 있는 이안이었다.

"왔느냐?"

"뭐해? 또 나가?"

"내가 살던 곳을 알고 있겠지?"

서자 이안이 살았던 곳. 사창가 중의 사창가라는 것만 알지, 정확한 주소는 몰랐다.

"알고는 있지. 근데 왜? 필리아는 숲에 잘 있더만. 혼자 먹고 자고 잘 하는지 안색도 좋아 보였어."

"쉿. 조심하라 일렀거늘."

"괜춘괜춘. 아무도 안 들어."

천려족도 이안의 생모가 살아있다는 걸 몰랐다. 이제 와서 약점이 될 만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먼저 밝히기에도 난감한 건 사실이었다.

"아무튼 거긴 왜?"

"지금부터 해나를 찾아볼 것이다."

메리와 첼, 아무리 생각해도 저택의 비밀 통로가 의심스러웠다. 여인과 아이의 몸으로 그 혼란을 어찌 뚫었겠느냔 말이다. 죽었다면 시체도 일찌감치 발견되었을 터다.

에리카의 얄팍한 속임수일지도 모르겠으나, 우선은 확인할 수 있을 때까지 확인해야 했다.

타닥타닥.

"이쪽인가?"

"으흥. 아마도."

베릭은 코를 가볍게 막으며 앞장섰다. 골목골목이 미로처럼 얽힌 뒷길이었다. 미약이 아니더라도 어수룩한 자라면 바로 주머니가 털릴 정도로 외부와 단절되어 있다.

"여기."

"이곳이라고?"

세상에나. 이안은 최대한 표정을 관리하며 혀를 찼다.

반지하로 내려가자 개미굴처럼 방들이 뻗어있다. 개중 하나가 이안과 필리아의 거처였던 모양이다. 쥐들이 들끓고 곰팡내가 전쟁의 냄새를 덮는 곳.

"왜? 설마 전에 살던 곳을 말하는 거였나? 거긴 나도 모르지."

아마 이안이 브라츠 저택으로 들어가면서 이사를 했었나 보다. 필리아를 경제적으로 옥죄기 위해 데르가의 알력 행사가 있었고, 그 결과가 이곳이었다.

"쯧."

이안은 혀를 한 번 찬 뒤,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주인을 잃은 보금자리는 얻을 만한 게 없어 보였다. 그는 길목으로 나가 베릭에게 고갯짓했다.

"해나를 수소문해라."

"내가?"

"그럼? 내가 하리?"

"…이봐, 거기 지나가는 놈팽이! 말 좀 묻지."

베릭이 여기저기 떠돌며 사람들을 잡아 세울 때, 이안도 꼼꼼히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워낙 어지럽고 처참한 광경인지라, 안타까운 것 외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안! 이쪽이래!"

동생이 총 다섯이라는 해나의 가족은 꽤 유명했다. 게다가 해나는 저택에서 일하던 사용인이었으니, 이웃들 사이에서 유독 눈에 띄었던 것 같다.

"계단 올라가서 2층."

계단에 발을 올리자마자, 아이의 울음이 들려왔다.

으애앵!

"에고. 또 왜 우니."

"해나?"

갓난아이를 안고 어르고 있던 해나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이안과 베릭을 알아보고서 놀란 미소를 지었다.

"도련님! 베릭!"

"무사해 보여서 다행이구나."

"돌아오셨군요! 이안 님도 살아계셔서 다행입니다!"

"집에 피해는 없고?"

"네. 저희야 뭐, 병사로 들어간 가족이 없어서…. 부모님께서 저택에서 나오길 천만다행이었다고 매일 밤 감사 기도 올리셔요."

하지만 살짝 마른 얼굴로 보아 고생은 한 것 같다. 창문을 비롯해 이안이 밀고 들어온 문에도 나무판이 못질 되어 있었다. 한창 전투가 발발할 때, 밖에서 침입하지 못하게끔 한 것이다.

이안이 살짝 웃으며 아기의 손을 매만졌다.

"얘기로만 듣던 동생이구나."

"네. 얘 말고도 많아요. 그런데...."

해나가 봇물 터지듯 마구 말을 쏟아냈다.

"여기는 저 찾으러 오신 겁니까? 무엇보다 이리 돌아오셔도 괜찮으세요? 이안 님도 데르가 님의 아들이지 않습니까. 천려족과 함께 돌아왔다는 얘기가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그래. 괜찮다. 그것보다 물어볼 게 있어."

해나는 아기를 달래며 이안에게 의자를 빼주었다.

"저택 안에 은밀히 내려오는 괴담이나 소문이 있는지 궁금하다."

"네? 갑자기요?"

"어딘가 비밀 통로가 있는지 궁금해서 묻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몇 층 복도 끝에서 귀신이 나온다거나, 주인이 출입을 금지한 방에서 사람 말이 들린다는 것 등등. 이런 말들은 대부분 비밀 통로를 오가는 와중에서 파생되는 소문이었다.

"음. 글쎄요. 괴담 같은 것은 들어본 적 없고요. 비밀 통로나 공간에 대해서는 더더욱 모르겠습니다."

"당연하지. 네가 알면 그게 비밀 공간이겠어?"

"베릭 님은 여전하시네요."

베릭과 해나가 장난스러운 시선을 나누었다. 반면 이안은 난감하다는 듯 팔짱을 끼고 등을 기댔다.

"…집사가 있었으면 참 좋았겠는데."

하지만 아쉽게도 그는 팔이 잘린 채로 발견되었다. 중앙군에게 당한 것이 아니라, 이웃 영지인 메렐로프 병사에게 당한 것이었다.

도망치다가 접경지를 잘못 들어선 모양인데, 메렐로프 쪽에서는 시체 인도를 가장하여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브라츠를 들렀다 돌아갔다.

"집사님도 돌아가셨습니까?"

"아. 그래."

해나는 어색하게 미소지으며 제 동생에게 시선을 내렸다. 이안은 그 잠깐의 미묘한 낌새를 놓치지 않았다.

"왜 그러느냐?"

"네? 아니요. 그냥, 안타깝지 않습니까. 저택에서 살던 사람들 대부분 죽었다 하니...."

그것이 정말 다인가?

이안이 날카로운 눈으로 해나와 시선을 맞췄다. 그러자 해나는 정말 못 당한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제45화. 지하

"그, 돌아가신 집사님에게는 조금 죄송한 게 있어서 그렇습니다."

"뭐가?"

"…저택 나오면서 물건을 잠깐 빌렸거든요."

훔쳤다는 말을 예쁘게도 표현했다. 이안이 헛웃음을 터트리며 계속 말해보라는 듯 쳐다봤다. 괘씸하기보다 진짜 어이없는 반응이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안 님이 당부하셨지 않습니까? 그만두라고."

"그래그래. 내가 그러했다."

"저택은 나가야 하지, 일자리 새로 구할 때까지 돈은 필요하지. 근데 제가 이안 님 부탁으로 몇 번 집사님 방을 들어갔었잖아요."

그때 점찍어둔 걸 관두면서 가져왔다는 말이었다. 거참, 맹랑하기 짝이 없다. 물건이 사라지면 당연히 관둔 자를 의심할 게 분명할 텐데?

"그때 저 말고도 열댓이나 관두었습니다. 다른 이유지만, 부인께서 엄청 예민해지셨거든요. 하루가 멀다고 매질이 심해져서 저택 분위기가 엉망이었어요."

"메리 부인이? 어쩌다가?"

"저는 맞은 적이 없어서 모르겠는데요,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신 모양입니다. 팔이랑 다리에 이상한 반점도 많이 나고, 아무튼 계속 붙어있다가는 매질로 죽겠구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어차피 관둘 거, 사람들 틈에 섞여서 나가면 모르겠거니 싶었다. 집사의 물건 중 유일하게 자물쇠가 걸려있어서 귀한 거라 짐작하고 챙긴 것이다.

이안이 짐작하여 되물었다.

"그런데 별로였던 것 같구나. 표정이 영 안 좋아."

"예에. 글쎄 이제껏 모아둔 서신이랑 그림 따위였습니다. 추억을 훔친 기분이지 뭐예요. 차라리 돈이었으면 이런 기분도 안 들었을 터인데."

해나는 죄책감에 잠까지 못 이루었노라 고백했다. 그리고 동생을 내려놓은 다음, 서랍 아래 칸을 열어 종이봉투더미를 꺼내왔다.

"혹시 장례를 하실 거면, 같이 가져가서 태워주시겠어요? 저가 갖고 있다간 정말 천벌 받을 것 같습니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연스럽게 베릭에게 넘겨주었고, 베릭 역시 습관적으로 봉투 안을 열어 헤집었다. 뭐 쓸 만한 게 없나 싶은 손짓이었다.

"베릭."

"엥? 왜? 보면 안 돼?"

"수고스럽다. 잘 넣어두거라."

이안이 혀를 쯧, 차려고 하는데 베릭의 손가락 틈으로 종이 한 장이 떨어졌다. 갓 고용된 집사가 업무를 효율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참고한 저택 조감도였다.

"줘. 집어넣게."

"잠깐만."

"와. 나보고는 보지 말라고 하더만."

"시끄럽구나. 가만있어 보아라."

이안이 아는 것과 그리 다를 바 없는 브라츠 저택의 조감도였다. 상세하게 층별로 나뉘어 있고, 방 한 칸의 창문과 문 위치까지 완벽했다. 그런데 왜....

"왜 위화감이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위화감? 그게 뭔데?"

"뭔가 조화롭지 않다는 뜻이다."

"어디 한번 봐요. 음음."

이안의 말에 베릭과 해나가 고개를 들이밀고 눈에 쌍심지를 켰다. 해나는 저택에서 일했던 기억을 토대로 꼼꼼하게 비교해 봤으나, 크게 다른 점을 찾진 못했다.

"특별히 이상한 점은 없는데요? 지금이랑 다를 바가 없습니다."

"다른 거라면 이거네. 이때는 정원이 휑했다는 거?"

"정원이 휑해?"

베릭이 짚은 것은 조감도에 그려진 나무 한 그루였다. 단순하게 그려진 그림이었으나, 이안은 그것이 별채에서 가장 가까운 버드나무인 것을 알아챘다.

"보통 이런 조감도는 조경을 생략하곤 한다. 덤불이니 나무니 세세하게 그리다 보면 끝이...."

이안은 말을 흐렸다. 그래, 조감도는 조경을 그리지 않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어째서 여기에는 이 나무가 그려져 있나?

그저 작성자의 의미 없는 그림일 수도 있지만, 이건 저택 관리자에게 내려지는 문서였다. 의미를 부여하는 게 더 자연스러울 터.

"베릭. 서둘러 저택으로 돌아가자."

"왜! 나도 알려줘."

"해나, 또 연락하겠다. 저택이 정리되는 대로 도와줄 사람들이 필요해. 가능하다면 그만두었던 사용인들이 다시 돌아왔으면 좋겠다."

"수소문해보겠습니다. 저는 당연히 좋아요. 이제 뭘 어찌 먹고 살아야 하나 했는걸요."

이안은 해나의 말에 방긋 웃으며 소매 단추를 뜯어주었다. 화친식 때 입었던 옷이었다. 단추 하나만으로 당장 굶주림은 채울 수 있을 것이다. 이 판국에 보석을 받아줄 만한 곳이 건재하느냐는 다른 문제지만 말이다.

"일종의 계약금이다."

"가, 감사합니다. 도련님은 정말이지 신기하네요. 저희가 굶을 때마다 나타나서 도와주세요."

"그게 내가 너를 만난 이유인가 보지."

"그럼 저도 이안 님을 만날 이유를 찾아보겠습니다. 아마 마구간지기 아저씨는 안 다치신 것 같아요. 어제 지나가다 본 것 같거든요."

"아아. 그래. 나도 그자는 보았다."

"들어가십시오.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래. 수고하거라."

이안은 해나와 인사를 마무리하며 저택으로 내달렸다. 말에서 내릴 생각도 없이 바로 별채로 돌아가 조감도의 나무를 찾았다.

'저건가 보군.'

가지가 축 처진 것처럼 아래로 내려져 있는 게 특이했다. 그 아래, 천려족들이 삼삼오오 모여서는 구룻잎을 태워 먹고 있었다.

"이안 님?"

"어쩐 일이십니까?"

"잠시 망을 좀 봐주겠나?"

"망이요? 야야. 네가 가봐."

바싹 타버린 별채와 군데군데 파인 구덩이. 분명 화재로 인해 죽은 사용인들의 시체가 묻혀 있을 것이다.

음산한 기운 때문일까? 중앙군과 조사단은 별채 쪽으로 눈길도 안 줬지만, 혹시 모를 일이다.

"중앙군과 조사단이 보지 못하게 해주게."

"으음. 알겠습니다. 여기서 일 보시나요?"

"그래. 잠시만 비켜주게."

천려족들은 별다른 의문을 달지 않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리고 벽을 끼고서 사주경계에 들어섰다. 베릭은 조감도를 거꾸로 든 채 나무와 그림을 계속해서 비교했다.

"여기 맞아?"

"맞아. 그러니 서 있지 말고 땅 좀 파봐라."

"에고고. 진짜 삽질하네, 삽질해. 주인 잘~ 만났다!"

나무는 특정했으나 딱 거기까지였다. 분명 숨겨진 뭔가가 있는 것 같은데 당최 흔적이 남아있지 않았다. 베릭은 단검을 꺼내서 바닥을 꼼꼼히 긁어내렸다.

"근데 메리랑 첼을 찾으면 직접 죽일 거야?"

"그럴 리가. 그리 죽일 수는 없지."

이안은 잔디를 손끝으로 매만지며 대답했다. 풀의 억세기가 뭔가 다르다.

"오히려 당분간은 살려두는 게 좋다."

"무슨 뜻인데?"

"그래서 멀리, 아주 멀리 도망치게 하려고."

가짜 잔디다.

이안은 베릭에게서 단검을 가져와 틈새에 밀어 넣었다. 지렛대처럼 들리는 땅. 멀리서 구룻잎만 씹어대던 천려들도 의아하게 쳐다볼 정도였다.

끼익.

비밀 공간으로 통하는 계단이 나타났다. 나선형 돌계단으로 나 있는 지하실. 바닥을 손으로 쓸어보니 축축했다. 문과 땅 사이에 이음새가 생긴 지 얼마 안 됐다는 뜻이다.

즉, 최근에 누군가 여길 이용했다는 거지.

"찾았다. 베릭. 얼른 준비해라."

"알았어, 왜 이렇게 급해?"

"한심하긴. 브라츠를 쫓는 게 우리만이 아니잖느냐."

"또 누구? 에리카?"

"그래. 아무도 눈치 못 채게 랜턴 가져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