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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네르사른과 일행들은 방에서 식사를 받은 후, 그곳에서 계속 머물렀다. 저택 바깥을 지키는 병사들로 인해 괜히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물리적인 제한은 그들에게 문제가 아니었지만.

"어떻게 빠져나오려고?"

별채에서 조금 떨어진 뒤뜰. 4층의 불 켜진 창문에 인영이 아른거렸다. 저택의 모든 병사가 별채를 지키고 있는 터라, 뒤뜰은 적막했다.

"어?"

창문이 열림과 동시에 사람 형체가 아래로 뚝 떨어졌다. 베릭은 놀라서 굳었지만, 이안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 시간을 재기 시작했다. 1초, 2초, 3초....

"안녕!"

수풀에서 머리를 쑥 내미는 수. 꽤 먼 거리를 십여 초 만에 도착했다. 이 정도면 거의 짐승이나 다름없는 수준이다.

"흐음. 여기 좋네. 풀 냄새 오랜만이다."

"다른 분들은?"

"방에서 휴식 중. 내일 일찍 떠나야 하니까. 이래서 막내는 억울하다 이거야."

듣는 사람이 없자, 수는 이안에게 본격적으로 말을 편하게 했다. 국경을 넘어가면 이안이 받게 될 처지가 바로 이것이었다. 일행의 막내조차 가볍게 하대하는 위치.

베릭은 수를 힐끔거리다가 다시금 별채를 쳐다봤다.

"저 창문에서 뛰어내렸다고?"

"응. 왜?"

"올라갈 땐 어쩌려고?"

"올라갈 때도 저리 갈 건데?"

문제가 있냐는 얼굴이었다. 가볍게 웃음을 터트린 베릭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그래, 역시 천려족이구나. 이 정도는 되어야지!

"제한 시간은 5분. 그 안에 날 때려눕히면 인정."

"5분? 너무 짧은 거 아니야?"

"그 안에 못 하면 하루를 줘도 못 할 거니까."

"하, 어이없네. 너 좀 치냐?"

언제 봤다고 저리 편하게들 말하는가. 이안은 팔짱을 끼고서 살짝 뒤로 물러섰다.

사실 다른 참관자가 없다는 건 그들을 완벽하게 무시하는 태도였다. 하지만 그로 인해 이안과 베릭에게 이점이 되는 부분이 분명히 있었다.

"베릭. 이리와."

지이잉.

이안은 베릭의 뒤통수를 붙잡으며 마력을 쏟아부었다. 금빛으로 빛나는 눈동자는 베릭의 머리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이토록 마력 발동이 상대적으로 쉽고, 무엇보다-

"내가 아까 말한 거, 잘 기억해."

전술이라는 걸 구사할 수 있으니까.

수는 언제 시작할 거냐는 듯 귀를 후비적거렸다.

제26화. 수락

수가 제자리에서 몸을 가볍게 털었다. 그리고 이내 멀뚱멀뚱, 베릭을 쳐다봤다. 시작은 그쪽에서 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

"그럼 시간 잰다?"

잘깍.

수가 허리춤에 달린 회중시계를 설정했다. 그와 동시에 베릭이 달려들어 수에게 주먹을 날렸다.

"맞고 울지나! 마라!"

"그래!"

쉬익! 쉭!

허공을 가르는 주먹 소리가 서늘하게 울렸다. 몸짓 하나하나에 살기를 감아선 베릭. 꽤 필사적으로 움직이는 것과 비교하여, 수는 굉장히 여유로웠다. 한발씩 뒤로 빼는 것만으로 모든 공격을 피하고 있었다.

"자아. 1분 지났어."

"미친! 아니, 언제까지 도망만 칠 건데?"

"도망 안 치면? 네가 견딜 수 있겠어?"

"뭔 개소리! 씨발! 똑바로 해!"

주먹에 감정이 실리자 궤가 흐트러졌다. 이안은 잘 깎인 바위에 걸터앉아 그 모습을 지켜봤다. 수가 하는 말의 의미를 잘 알 것 같아서.

"내가 공격하면 이렇게 된다는 말이지!"

빠악!

재밌다는 듯 베릭의 턱을 후려치는 수.

주먹이 제대로 들어갔다. 베릭의 중심이 크게 흔들리고, 겨우 허벅지에 힘을 줌으로써 버텼다.

그가 멈칫거리며 수를 올려다봤다. 솔직히, 충격에 의한 충격이라기보다 의외성에서 오는 충격이 큰 것 같았다.

"너...."

"좀 그렇지 않아? 상대한테 손 하나 까딱 못하고 쥐어 터진다는 게. 뭐. 너만 좋다면 나도 좋지만."

"이런 미친, 또라이가 싸가지...."

빠악!

채 욕을 다 뱉기도 전이다. 다시금 베릭의 머리가 왼쪽으로 돌아갔다. 수는 재빠른 공격으로 쉴 틈 없이 베릭을 몰아붙였다.

이안은 턱을 괴고서 한숨만 낼 쉴 뿐이다.

'임자 제대로 만났군.'

저거, 저 성격상 대련이 끝나도 깔끔하게 마무리될지 모르겠다. 베릭은 사방에서 쏟아지는 타격에 가만히 서서 맞는 수밖에 없었다. 수십 마리의 벌들이 쏘아대는 것처럼 사방에서 수의 일격이 터져댔다.

퍼억!

"베릭. 괜찮아?"

"X발, 말 걸지 마."

"괜찮다니 다행이군."

그가 눈을 부라리며 이안을 노려봤다. 집중이 조금만 흐트러져도 상대는 급소를 파고들 것이다. 지금으로는 방어가 최선이다.

이안 역시 회중시계를 확인하며 별채 쪽을 힐끔거렸다. 창문에 네르사른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서 있었다.

"2분 남았다."

빠악! 빡!

이안의 안내에 수의 발길질이 더욱 격렬해졌다. 시간 끝나는 게 아쉬울 정도로 즐거운 표정이다.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지만, 3분의 대련으로 확실해진 게 있었다.

"수. 자네 정말 빠르군."

"당연하지. 네르사른 님이 괜히 날 데리고 온 줄 알아? 일족 중에서 나 따라올 자가 없어."

"그런데 그거 알고 있나?"

이안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묻어있는 탓일까? 수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뒤로 돌렸다. 문득, 어둠 속에서 이안의 눈동자가 금빛이라는 착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수십 번의 공격을 일방적으로 쏟아부었는데, 베릭은 아직 멀쩡해. 빠르기는 하되 영 실속이 없군."

아무리 마력의 힘이 깔려 있고, 베릭의 체력이 좋다고는 한들 일방적인 싸움이었다. 계속해서 처맞고 있는데, 베릭은 넘어가지 않았다.

정곡을 콕 찔린 수의 구릿빛 피부가 확 붉어졌다. 아마 본인도 인지한 문제점이었나 보다.

"너...!"

"어지간하면 피떡이 되어 있어야 정상인데."

"하! 봐주면서 했더니 이것들이 아주-!"

수가 흥분해서 새된 소리를 질렀다. 그와 동시에 발차기 축이 흔들리면서 공격에 군더더기가 생겼다. 뒷목을 감싸고 있던 베릭이 틈을 놓치지 않고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피는 안 터져도 X나게 아프다고."

"야! 놔! 안 놔?"

"너 같으면 놓겠냐?"

어정쩡하게 다리가 붙잡힌 수는 몸을 밀착해서 상체를 지탱하려고 했다. 하지만 베릭이 더 빨랐다. 재빨리 복부를 가격하여 수를 바닥에 밀쳐 눕혔다.

퍽!

"악!"

"시작 전에 분명히 말했다? 맞고 울지 말라고."

"울긴 누가 울어? 미쳤냐?"

그리고 퉤! 침 뱉는 솜씨가 아주 예술이다. 베릭은 그녀의 몸 위에 올라타서는 얼굴을 눌러서 고정했다.

"아주 피떡이 뭔지 보여주려니까. 기대해."

"꺼져! 꺼지라고! 빨간 대가리 주제에!"

"지랄하네. 너도 그렇게 만들어주마."

주섬주섬, 그는 한쪽 주머니를 뒤적거려 붉은 안료를 꺼냈다. 순간 무슨 의도인지 몰라, 수가 멈칫거렸다.

이안은 창문을 확인한 다음 천천히 둘에게 다가가 쪼그려 앉았다. 창가의 그림자가 3개로 늘어난 참이다. 네르사른과 간샤, 무주룬 모두 궁금한가 보다.

"수.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말거라."

이안은 결박당한 채 발버둥 치는 수를 진정시켰다.

"합의된 대련이라고는 하나 서로 피를 내면 좋을 게 없는 관계 아니겠는가? 간샤나 무주룬이 아니라 너를 보낸 것은 막내기도 하거니와, 상대에게 큰 피해를 입히지 않게끔 하려는 네르사른 님의 혜안이시다."

"아니거든! 닥쳐!"

"뭐. 사실을 받아들이는 건 네 일이니 뭐라 않겠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 네가 베릭에 의해 바닥에 누워있다는 것이고, 실제 전투였다면 죽었을 거란 사실이지."

수는 분하다는 듯 씨근덕거렸다.

베릭은 승리에 도취된 미소를 지으며 수의 얼굴에 안료를 퍼 발랐다. 피를 뒤집어쓴 것처럼 순식간에 엉망이 되었다.

"하니 돌아가서 아뢰라. 대외적인 이유로 너를 쓰러트리진 않았으나, 우리의 승리를 인정하면 말끔해지는 용액을 주마. 혹여 그대로 저택을 나선다면, 천려족은 꽤나 우스운 꼴로 브라츠 영지민들에게 기억될 것이다."

삑삑삑!

이안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회중시계 알람이 울렸다. 꼼꼼하게 다 바른 베릭이 몸에 힘을 풀자, 수는 그의 배를 걷어차며 일어섰다. 그리고 닦아내려 열심히 문질렀으나, 지워질 리 만무했다.

"으으으! 이게 뭐야!"

"우리 어머니께서 쓰는 특별 안료다. 물과 땀에 지워지지 않아서 애용하시더군."

수는 절망스러운 시선으로 이안을 올려다봤다. 흰 눈망울 외에는 모든 것이 붉었다. 그녀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마지막으로 베릭의 머리를 후려쳤고, 이내 도망치듯 별채로 튀어갔다.

따악!

"아오! 저게!"

혹이라도 생긴 걸까. 베릭은 뒤통수를 문지르며 수의 뒷모습에 욕설을 지껄였다. 이안은 그에게 마력을 더 넣어주며 위안했다.

"수고했다."

"근데 저거 저렇게 보내도 돼? 뒷말 안 나오게 원하는 대로 패줘야 하는 거 아니야?"

"단어가 상스러워."

"조져야 하는 거 아닙니까? 주인님?"

"…됐다. 수의 상태가 안 좋으면 분명 데르가가 눈치챌 것이다. 저쪽에서 수락한다고 한들 백작이 훼방 놓을지도 모를 일이고. 무엇보다 천려족은 가족의 유대감이 강한 자들 아닌가?"

진짜 죽어라 때려눕혔다간 국경 넘어서 어떤 보복을 받을지 모른다. 최대한 유혈 없이 허락을 받아내는 방법이 필요했다.

"근데 진짜 말한 것처럼 빤하네."

이안이 대련 전에 언급한 부분은 딱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상대가 공격 대신 회피만 할 때는 도발로 공격을 끌어낼 것. 따라갈 수 없는 상대를 뒤쫓는 것보다, 그쪽에서 오게끔 힘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두 번째는 버틸 것. 천려족은 호전적인 종족이다. 일방적인 전투에서 오는 고양감에 도취될 때까지 버티면 분명히 빈틈이 생길 거라 일렀다.

틈은 이안이 만들었지만 잡아채는 것은 베릭의 역할이었다.

"천려족이라 그런 게 아니라, 보통 그러하다. 몸놀림이 날쌘 자들은 생각보다 힘이 약하니까."

어느새 수는 창문을 넘어 방으로 돌아갔다. 벽 넝쿨 위로 붉은 자국이 남았으나, 아마 누구도 신경 쓰지는 않을 것이다.

이안은 고개를 까딱거리며 돌아가자는 신호를 보냈다.

"이안 님? 어디 다녀오십니까?"

"잠시 본채에."

"오늘 밤은 경비가 삼엄하니 밖으로 나오지 마십시오. 그리고 외부인도 들이지 말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경비가 베릭을 가로막으며 보고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베릭은 내일 오겠노라 말하며 저택을 나섰다. 이안은 제 방을 지나 한 층 더 올라갔다.

똑똑.

"이안입니다."

"…들어오십시오."

"안 돼요! 들어오지 말라고 해요!"

"수. 시끄럽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수라장이다. 간샤와 무주룬이 천으로 수의 얼굴을 닦아주고 있었다. 하지만 얼룩만 질 뿐, 차도가 없다.

"원하시면 지우는 용액을 드리고자 하는데요."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장난해?"

네르사른은 조용히 하라는 뜻으로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그리고 이안을 향해 돌아봤다.

"분명 대련을 허락했는데 이런 장난질이라니. 모욕이라고 느껴지는군."

"그러셨습니까? 그렇게 느끼셨다면 죄송하지만, 상처투성이에 퉁퉁 부은 얼굴로 브라츠를 나서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승부에는 가정이 없다네."

"하지만 수의 얼굴이 가정을 가능하게 하죠. 안료가 저토록 칠해질 정도면 굳이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네르사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수는 금방이라도 화병으로 뒤집힐 듯 이를 갈았고, 간샤와 무주룬은 알 수 없는 시선을 나누었다.

"아하하! 하하!"

침묵을 깬 것은 네르사른의 웃음이었다. 그와 동시에 간샤와 무주룬도 폭소했고, 울상인 것은 수뿐이었다.

"그래. 졌네. 불복하는 것만큼이나 추잡한 것은 없지. 베릭이라고 했나? 수가 아주 이를 갈던데. 꼭 대사막으로 데려가 노예처럼 부려야겠다고."

말은 저렇게 하지만 천려족에는 노예제가 없다. 모두가 가족이었으니까. 이안은 공손하게 말을 덧붙였다.

"무례는 용서해 주시되, 제가 네르사른 님의 의중을 잘 이해했다고 여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누군가의 부상과 그걸 알아챈 데르가 백작. 그게 공동체 관계에서 어떤 변수를 부를지 알 수 없었다. 재수 없다면 이안은 이안대로, 천려족은 천려족대로 난감해질 게 분명했다.

네르사른은 긴 담뱃대를 입에 문 채 웃었다.

"좋소. 화친식 때 쿠실레를 하나 더 데려오지."

베릭을 위한 이동수단을 가져오겠다는 뜻이다. 이안은 감사를 표하며 주머니에서 작은 통을 꺼냈다.

"씻으면서 물과 함께 섞어 쓰면 될 겁니다."

타앗!

수는 대꾸 없이 용액을 낚아채 가며 세면실로 뛰어 들어갔다. 간샤와 무주룬이 혀를 차며 웃었고, 네르사른은 이안에게 포도주를 건넸다.

"한잔하겠나?"

천려족은 아이라고 해서 제약을 두는 게 없었다. 그저 책임 아래 모든 게 자유로울 뿐. 이안은 실로 오랜만에 넘기는 포도주에 황홀함을 느꼈다.

* * *

"네르사른."

"네. 백작님."

여명이 터오는 새벽.

아직 도시는 잠들어 있었지만, 브라츠 저택만큼은 한낮처럼 분주했다. 바람처럼 온 손님들이 떠날 채비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본채 식당에 다 같이 모여 배를 든든하게 채웠다. 갈 길이 멀었다.

"그대들의 요청을 받아들이겠소. 화친식은 오늘로부터 일주일 후. 촉박하니 최소한의 준비로 일정을 소화하겠소."

"백작님의 이해에 천려족을 대신하여 감사드립니다."

"부족장께는 무운을 빈다 전해주시길."

데르가는 몇 시간 전, 한창 어두울 때 귀가했다. 몰린 경과 나눌 얘기가 깊었던 모양이다. 아마 오늘내일 중으로 몰린 경도 수도로 떠날 것 같다.

이안의 입적을 위해서라지만, 아마 그들은 입적신청서 대신 내부고발자 인장을 황제에게 보일 터.

"그럼, 다시 만날 날까지, 데모샤(신의 축복 아래)."

천려족은 저들의 인사를 남긴 다음 쿠실레에 올라탔다. 밤사이 멀끔해진 수가 두건을 뒤집어쓰고서 이안을 쳐다봤다. 이안이 살짝 웃자, 그녀는 보이지 않게 이를 드러내며 짜증을 부렸다.

"가자!"

"문을 열어라!"

히이잉!

쿠실레의 울음소리와 함께 발굽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이내 그들은 왔던 것처럼 순식간에 저택을 빠져나갔다.

데르가와 백작 부인, 첼 그리고 사용인들 대부분이 그 뒷모습을 지켜봤다. 아직 새벽의 몽롱함에서 깨어나지 못한 것 같다.

"화친식이 일주일 후다. 간소하게 하되 차질 없이 준비해야 할 것이다."

"네. 알겠습니다."

그런 그들을 재촉한 것은 집사였다. 하인들이 정신을 바짝 차리며 이안을 돌아봤다. 아이의 표정이 보이질 않았다.

제27화. 화친식

드디어 그날이었다.

이안은 침대에 앉아 바깥으로 터오는 해를 지켜봤다. 브라츠 영지에서 눈을 뜬 이후, 이 순간만을 위해 달려왔다.

똑똑.

"이안 님."

해나가 이안을 부르며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어제 운 것이 분명했다. 안 그래도 조그만 눈이 퉁퉁 부어서는 시선을 맞출 수가 없었다.

"해나. 세상에."

"짐은 다 싸셨어요?"

웃음이 새어나올 것 같지만, 한껏 진지한 아이의 물음에 이안은 고개만 끄덕였다. 꾸릴 것도 없다. 옷가지 조금과 잡다한 서적 몇 가지. 그리고 방에서 유일하게 '이안'의 것이라 여겨지는 화분.

"…짐이라도 많았으면 좋았을지 모르겠습니다."

저택에 남겨진 자들이 이안을 추억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이안은 웃으며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셔츠 하나만 해도 금화 두어 개 값어치는 훌쩍 넘어갈 것이다. 촘촘하게 박힌 흰색 자수와 금박들이 이안을 귀한 '것'처럼 보이게 했다.

"아버지는?"

"막 기침하셨습니다. 식당으로 모셔오라 하셨어요."

"그래. 나가지."

이안은 해나를 지나쳐 문을 나서려고 했다. 하지만 이내 등을 돌려 나지막이 당부했다.

"해나. 가능하다면, 내가 가고 나서 저택 일을 그만두었으면 한다."

"네? 그게 무슨...."

"힘들겠지만, 그것이 너에게 이로울 테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해다오. 물론, 백작이, 아니지. 백작님은 모르게끔."

해나가 의아하게 쳐다봤으나, 이안은 대답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이 이상은 해나의 선택이 중요했으니까.

식당엔 이미 완벽하게 치장을 마친 데르가와 메리 부인 그리고 첼이 앉아있었다.

"앉아라."

"네. 아버지."

마지막 식사다. 하지만 평소와 그다지 다를 것 없는 분위기였다. 이들에게 이안은 애초에 스며들지 못한 가족이지 않나.

"화친식의 순서는 잘 익혀두었겠지."

"문제없습니다."

"네가 살아 있는 이유를 항상 명심하거라."

"그럼요. 브라츠의 명예와 영광을 위해."

이안의 기분이 평소보다 좋아 보였다. 국경을 넘어가면 당장 목이 언제 떨어질지도 모르는데, 저런 여유가 대체 어디서 나온단 말인가?

"제가 다음 생일에 돌아오면-"

그는 고기를 한 점 썰어 먹으며 말했다.

살아만 있다면, 이안의 생일을 주기로 짧은 귀환이 주어질 것이었다. 데르가가 멈칫거리며 고기 씹는 것을 멈췄다.

"어머니를 뵈어도 될까요?"

"…이안."

"멀리 떠나는데 몰린 경도 못 뵙고, 어머니도 못 뵙고 가질 않습니까."

몰린은 천려족이 브라츠 저택을 떠난 아침, 급하게 짐을 꾸려 중앙으로 올라갔다. 어차피 이안과의 거래는 순조롭게 진행되어 마무리 수순이었으니, 딱히 인사할 것도 없었지만 말이다.

아마 아직도 그들의 마차는 들판을 내달리고 있을 터. 오고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한 달. 이안이 대사막에서 돌아올 때쯤 그들도 돌아올 것이다.

"흐음. 어미라."

데르가가 수염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어미의 부탁인 척, 구룻잎을 밀수해 오라는 전언을 말하는 게 분명했다. 메리 부인의 눈매가 사납게 휘었으나, 데르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 그쯤 하면 한 번쯤은 보게 해주지."

"감사합니다."

이안은 아직 모르는 걸까? 어미, 필리아가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걸? 항간에서는 옆집 마구간 지기와 눈 맞아 도망갔다 하고 또 다른 쪽에서는 도박 빚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팔려갔다는 말이 돌았다.

"백작님. 마차가 준비되었습니다."

식사가 거의 끝나갈 때쯤.

모든 준비가 끝났음을 알리는 집사의 안내가 들려왔다. 백작은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일어났다.

"가지."

데르가를 선두로 모두가 본채 밖으로 나섰다. 무장한 소수의 사병과 그들 앞에 당당히 서 있는 기사들. 이안은 이곳에 와서 처음 본 참이었다.

'숫자가 하나, 둘, 셋… 총 열이군.'

그때였다.

해나를 비롯한 사용인들이 눈물을 머금으며 이안에게 달려왔다. 그리고 손을 꼭 붙들며 아쉬움을 숨기지 못했다.

"꼭, 꼭 살아서 돌아오세요."

"생일날 맛있는 걸 해드리겠습니다."

"이안 님. 조심히 가세요."

몇 달 사이, 데르가 가족보다 이들과 쌓은 유대감이 더욱 깊었다. 이안은 방긋 웃기만 할 뿐, 이렇다 할 대답이 없었다. 해나가 엉엉 울어 젖히며 소리를 키우자 백작이 경을 쳤다.

"경사스러운 날 통곡이라니! 집사!"

"죄송합니다. 백작님. 주의시키겠습니다."

"어서 출발해!"

하지만 저택 사용인들 대부분이 이안을 둘러싸고 있는 터라, 콕 집어 체벌을 내리지는 못했다. 이안은 해나의 손등을 꼭 붙잡으며 인사했다.

"그동안 정말 고마웠다. 해나."

"도련님! 흐윽...."

"또 보자꾸나."

또 보자. 미래를 기약하는 말에 해나가 손바닥으로 눈물을 훔쳐냈다. 데르가의 살벌한 시선에, 이안은 시간 끌지 않고 마차에 올라탔다. 데르가는 저택의 분위기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연신 꿍얼거렸다.

"이럇!"

히이잉!

마부의 채찍질과 동시에 저택이 멀어졌다. 손바닥만 한 창문으로 브라츠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이안은 데르가를 힐끔거렸다. 저 품 안에 인장이 있으리라.

'보좌관은 아직도 못 일어났다지?'

의식불명에 빠진 지 일주일이 넘어갔다. 이만하면 깨어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보는 게 맞았다. 어차피 일어난다 한들, 이안은 사막에 있겠지만.

* * *

달그닥달그닥!

서너 시간쯤 달렸을까. 녹음 졌던 땅이 황폐하게 변해갔다. 대사막의 끄트머리에 다다른 것이다.

"도착했습니다. 백작님."

쉬이익.

문을 열자 마부의 목소리가 바람에 섞여 거칠게 휘날렸다. 푸른 하늘과 금빛 모래산. 저 멀리 서 있는 수십 마리의 쿠실레. 그리고 그들의 주인인 천려족.

"저긴...."

국경을 표시하는 거대한 바위 두 개가 놓여있었다. 데르가와 일행들은 그사이를 지나가며, 천려족에게 다가갔다.

'국경을 넘었다.'

세상에. 살면서 전쟁 아닌 일로 국경 넘은 일이 있던가? 이안은 조금 흥분되는 기색을 감추기 위해 무던히 애썼다.

가까운 곳에 흰색 돌로 세워진 작은 신전이 있었다. 어떤 장식물 없이, 그저 공간 그 자체로 존재하는 곳. 바람과 모래가 깎은 세월의 흔적이 여실했다.

"어서 오시게. 우방이여."

낮으면서도 힘 있는 목소리였다. 아무도 그가 족장이라 말하지 않았지만, 이안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절대적인 힘의 우위. 그걸 지닌 사내의 기운은 자연과 맞먹을 만큼 위대하고 묵직했으니.

"대사막의 천려족 족장, 카칸티르요."

"바리엘 제국의 데르가 브라츠 백작이오."

둘은 천천히 손을 맞잡았다. 이어서 그들의 부인과 자식들 역시 인사하며 예를 갖추었다. 주요 인물들이 신전 탁상에 둘러앉았고, 각자의 병사들은 태양 아래 서서 서로를 지켜봤다.

"먼저 그대들의 호의에 감사함을 표합니다."

"그대들의 어려움이 곧 우리의 어려움이라 약속하는 자리 아닙니까? 괘념치 마십시오."

주거니 받거니, 공식적인 자리라 데르가의 혀가 기름칠이라도 한 것처럼 움직였다. 카칸티르의 시선이 이안에게 닿았다.

"이자가 브라츠의 선물이군."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협약서를."

데르가는 서둘러서 지시했다. 같은 내용으로 서로 적어낸 협약서 양피지가 테이블에 놓였다. 금기할 조항과 서로 무역할 물품 내역, 그리고 이안의 처지에 대해 상세히 적혀있었다.

'천려는 브라츠에게서 화친 증표를 받으면 3년 안에 답으로 그들의 증표를 보낸다…. 천려와 브라츠는 화친조약을 맺는 순간부터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아니하고....'

장장 열댓 장에 달하는 내용이다. 데르가는 꼼꼼히 서류를 확인한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했습니다. 인장을 녹이는 동안, 검증하시죠."

"좋습니다. 다만...."

브라츠에서 준비한 것은 동질 물약이었다. 데르가의 혈육이 맞는지 확인할 수 있는, 그들이 아는 한 제일 확실한 방법이다. 천려족에게는 와닿지 않겠지만.

"윈첸 부족장님의 몸이 불편하셔서 동행하지 못했습니다. 저희 쪽 검증은 돌아가서 하는 것으로 하지요."

"편하신 대로요. 다만 입적 확인서는 황궁에서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니, 받는 즉시 사람을 시켜 보내겠습니다."

데르가는 자신의 피를 물약에 떨어트렸다. 이안 역시 마찬가지. 투명한 액체는 이내 푸른색으로 변했다. 브라츠 쪽 사람들은 '어떤가? 인정하는가?'라는 시선이었으나, 천려족은 시큰둥했다.

"그럼 이어서 필체 확인을 진행하겠습니다."

이안은 앞에 놓인 펜대를 잡았다. 그리고 더듬더듬, 서신으로 보냈던 내용을 서툴게 이어 썼다. 글씨체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보이기에는 영 엉망이다.

"확인되십니까?"

"네르사른."

족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뒤에 서 있던 제 동생을 불렀다. 허리를 숙인 채 다가온 그가 단검을 내밀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손바닥을 그어 피를 냈다.

스윽!

칼날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 카칸티르는 피로 자신의 이름을 쓰며 서약했다. 그걸 보던 데르가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하여간 야만인들.'

인장 찍는 걸 놔두고 사서 피를 본다니까!

백작은 인장을 찍고서 왁스가 마를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 둘은 서류를 교환한 다음, 다시금 손을 맞잡았다.

"브라츠의 무궁한 영광을."

"데모샤, 구룬 투(신의 축복 아래 행복)"

그리고 서로의 행운을 빌며 간소한 협약식을 마무리했다. 신전에서 사람들이 무사히 나오자, 병사들은 긴장을 풀었다.

"그럼 이만."

이안은 데르가를 바라봤다. 이제 이들은 마차를 타고 다시 돌아가겠지만, 이안은 천려족을 따라 사막을 건너야 했다. 데르가는 보여주기식으로 이안을 껴안았다.

"이안. 잘 지내거라."

"네. 아버지."

어깨를 끌어안는 손이 우악스러웠지만, 이안도 대충 맞춰주며 대꾸했다. 데르가 일행들은 미련 없이 뒤돌아 국경 바위를 되돌아갔다.

"이안."

수였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로 남겨진 짐을 내려다봤다. 카칸티르와 네르사른, 그리고 몇몇 전사들이 무언가를 의논하며 하늘을 살폈다.

"설마 이게 다야?"

"왜? 뭐가 모자란가?"

"아니, 그건 아니지만...."

"농담이다. 아직 다 안 왔어. 아, 마침 저기 오는군."

이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데르가가 사라진 길로 누군가 달려오고 있었다.

거칠고 뿌연 모래바람 사이로 보이는 붉은 머리. 그는 말에서 내려 푹푹 꺼지는 사막을 달려왔다. 말이 따라오려고 하자, 엉덩이를 차서 돌려보냈다.

"딱 맞춰 왔어."

"이안. 떠날 준비가 되었는가!"

네르사른의 외침에 수가 이안의 짐을 챙겼다. 사병 둘이서 나눠 든 것을 혼자 거뜬히 들었다.

"네. 준비되었습니다."

"족장님. 저놈이 제가 말했던 놈이에요. 우리 노예로 쓸!"

수가 이를 아득아득 갈며 족장에게 말했다. 그는 피식 웃으며 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고, 이내 이안을 돌아봤다. 여기저기서 듣기로는 족장이 야만적인 데다 꽤 난폭하다던데....

'생각보다는 아닌 것 같군.'

브라츠 영지민들이 만든 괴물의 형상이었던 모양이다. 이안이 보기에는 그저 작은 부족의 믿음직한 리더, 딱 이 정도로만 보였다. 뭐, 자세한 건 앞으로 가까이에서 지내봐야 알겠지만.

"서둘러야 하니 채비하게. 잘못했다간 모래폭풍을 만날 것이야."

여기서 대사막, 그들의 주둔지까지는 또 며칠을 달려가야 했다. 모래폭풍을 만나면 전력손실이 있을 수도 있고, 여정이 길어질 수도 있다.

"이아아안-!"

저 멀리 베릭이 소리쳤다. 카칸티르는 쿠실레 두 마리를 이안에게 내어주며 말없이 등을 돌렸다.

제28화. 일정

진정한 고요란 이런 것이구나.

뜨겁게 작열하는 태양과 쉼 없이 부는 바람. 쿠실레의 발굽 소리도 모래에 묻혀서는 흐트러졌다. 이안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지평선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평온을 느꼈다.

"으어...."

간혹 베릭의 다 죽어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신경 쓰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대사막에서 죽을 자는 서둘러 죽어야 하며, 살 자는 어떻게 해서든 살기에.

이안은 반쯤 남은 물통을 건네주며 물었다.

"괜찮나?"

"죽을 것 같은데...."

"이 정도로 죽을 건가?"

"그건 또 아니고...."

국경에서 대사막으로 들어온 지 겨우 하루. 변수가 있었다면 베릭의 더위 내성이었다. 열을 그대로 흡수한 것 같은 그의 붉은 머리칼이 축축 처졌다. 앞서가던 수가 뒤로 다가왔다.

"죽을 거면 여기서 내려주마. 네놈 쿠실레가 불쌍하니까."

수의 비아냥에 베릭은 인상만 찌푸렸다. 이곳은 국경 밖 무법지대고, 수는 천려족의 일원이었으며, 젠장맞게도 그가 따라온 주인이 '화친 제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가운뎃손가락 드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베릭이 헐떡거리는 와중에도 고민하며 꿍얼거렸다.

"잠깐."

히이잉-!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선두로 가던 길잡이가 멈추면서 행렬 역시 중지되었다. 길잡이는 바짝 마른 나뭇가지를 흔들며 바람을 점쳤다.

"왜 그러지?"

"모래 폭풍입니다. 생각보다 이동이 빠르군요."

"얼마나 가깝나?"

"너덧 시간이면 만나겠습니다."

족장을 비롯한 지도자들이 모여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쉽게도 낮인지라 별이 보이지 않았다.

"잠시 천막을 친다."

회의가 길어진다는 걸 뜻했다. 카칸티르의 명령에 커다란 그늘이 펼쳐졌고, 다들 본인의 쿠실레에 물을 먹이며 휴식했다. 이안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쿠실레를 돌본 다음 베릭의 입에 물을 넣어줬다.

"호위로 데려왔건만 아주 대단하군."

"이렇게 덥다는 말은 안 했잖아."

"사막을 몰랐다는 것도 예상 밖이다."

"사막 알아! 안다고! 아이씨. 물 더 줘봐."

이안은 베릭에게 물통을 넘긴 다음 작은 가방을 뒤적거렸다. 교사에게 받은 대사막의 지도와 기후 예상 목록이 고이 접혀있었다.

'어디까지 온 거지?'

행로가 변경될 때마다 나름대로 지도에 표기했다. 갈 만큼 왔다는 게 딱 맞을 것이다. 베릭이 골골대긴 하지만, 천려족은 봐주는 것 없이 빠르게 쿠실레를 재촉했다. 아마 윈첸 부족장의 건강을 염려해서 그런 것 같다.

"…모래 폭풍."

이안은 손가락으로 지도를 짚었다. 그들이 서 있는 곳에 A12라는 폭풍 경로가 겹쳐져 있었다. 출발일이 어제였으니, 오차범위 시간은 4시간 내외. 길잡이의 추측대로다.

"뭘 그렇게 봐?"

"수. 자네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군."

수는 말린 대추를 질겅거리며 웃었다.

"더위에서 태어나 모래를 맞으며 자란 전사니까."

"그래. 휴식은 언제까지지?"

"10분 내외. 슬슬 짐을 다시 올려."

그녀는 자신이 전사라는 것에 딴지를 걸지 않았다는 게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대추 두어 개를 건네주며 빙글 돌아나갔다.

"주목! 5분 후에 떠날 것이다. 폭풍을 피하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해!"

"쿠실레 머리를 어느 쪽으로 고정할까요?"

"동쪽으로."

"네. 알겠습니다."

족장의 지시에 다들 쿠실레의 머리를 오른쪽으로 고정했다. 정신없는 와중, 움직이지 않는 자는 딱 둘뿐이다. 이안과 베릭. 베릭은 반쯤 쓰러졌다는 게 맞겠지만.

"문제 있나?"

"방금 동쪽이라 하셨습니까?"

"그렇다."

"…남쪽이 아니라요?"

뜻밖의 말에 일족들이 행동을 멈추고 이안을 돌아봤다. 지금 저자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길잡이는 일족의 안전을 수호하는 자로, 선대의 지혜를 계승했다. 사막에 관해서라면 족장도 일단 수긍하고 보는 자란 말이다.

"저게 지금 뭐라는 거야?"

"사막 모래를 처음 밟았으면서 지껄이긴."

"내버려 둬라. 귀족 나으리들 특징 아니냐."

"아하하! 하긴, 그래! 위대하신 제국 출신이시니!"

저들만의 언어로 떠드는 탓에, 이안은 첫 번째 말을 제외하고는 뉘앙스로 내용을 유추했다. 족장 역시 심기가 불편하다는 눈치였다. 바로 목을 떨굴 것 같지는 않지만, 문제를 일으킨다면 데르가의 친형 절차를 밟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족장이 다가왔다.

"왜 남쪽을 언급하지?"

천려족의 중심지인 천려는 북쪽에 위치했다. 남쪽으로 가면 돌아가는 것으로, 시간과 수고가 더할 것이다. 그러니 이유가 궁금하겠지.

"저택에 대사막 연구자가 있었습니다. 그에게 받은 정보로는 지금 시각, 북동쪽에서 폭풍이 내려오는 것으로 추정되는데요. 크기가 큰 것 같으니 일단 피하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왔던 길을 돌아갈 수는 없어 남쪽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들은 어제 거대한 모래산을 넘었다. 경사가 너무 가팔라서, 내려가던 중 쿠실레 두 마리가 실수로 굴러떨어질 정도였다.

"족장님?"

시간이 촉박한 상황에서, 족장은 이안을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일족의 재촉에 그가 손을 내밀었다.

"그 정보, 줘보게."

"여기 있습니다."

생각보다 순순히 줘서 의외인 표정이었다. 혹여 이걸 빌미로 뭔가를 원한다면, 그때는 버리고 갈 셈이었는데. 족장은 종이를 들여다보더니 네르사른을 불렀다.

"네르사른, 해석해."

바리엘 필기체로 적힌 탓이었다. 카칸티르와 네르사른 그리고 길잡이가 모여서 머리를 맞대었다. 눈치로 보아, 의논 거리가 생긴 것 같다.

"왜 그러시는 거지?"

이안은 가까이 있는 수를 향해 속삭였다. 그녀는 일족의 눈치를 잠깐 보더니, 조용히 대답했다.

"폭풍이 북쪽에서 내려오는 건 확실했어. 근데 어제 구른 쿠실레 하나가 길잡이님 것이거든. 나뭇가지가 상하는 바람에 기운이 흐려졌나 봐."

집시의 세계란 참으로 신비하다. 보잘것없는 작대기로 어찌 날씨를 아는 걸까? 말을 자르며 묻고 싶었지만, 이안은 참을성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쪽으로 내려가면 안전하지만, 고생이 크다. 그에 반해 동쪽은 돌아가는 거리가 짧아. 폭풍을 만날지 안 만날지도 미지수고.'

부족장 윈첸의 위급함. 쿠실레 두 마리의 부상. 잔뜩 쌓인 교류의 물품들 그리고 사막에 익숙하지 않은 외지인까지. 족장으로서는 그나마 효율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동쪽 역시 폭풍 사정권이라는 걸 모르는 상황에서는.

"좋다. 그러면 그렇게 하지."

한참을 회의한 끝에, 결론이 났다. 카칸티르는 주위를 쭉 둘러보며 적합한 인재를 찾았다.

"잔갸룽, 탄, 투롬! 너희 셋은 동쪽으로 돌아서 먼저 천려로 들어간다. 폭풍 때문에 일정이 늦어질 거라 전하고, 부족장 소식이 있다면 다시 돌아와."

일행 중 체격이 제일 좋은 세 사람이다. 모래폭풍을 뚫고서 나아갈 수 있는 자들.

그들은 명령을 듣자마자 최소한의 짐만 챙긴 다음 쿠실레에 올라탔다. 사실 남은 자들도 폭풍을 견디려면 견딜 수 있었으나, 쿠실레와 그 등에 실린 물품들이 건재할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최대한 각도를 넓혀서 움직여라. 영원한 선인장과 기도하는 바위를 지나쳐서는 안 돼. 그 안으로 들어가면 폭풍이 거세다."

"네. 알겠습니다."

"먼저 갑니다!"

"천려에서 보겠습니다!"

히이잉-!

짤막한 인사를 나눌 새도 없다. 그들은 재빨리 쿠실레의 허벅지를 때려 달려나갔다. 순식간에 세 사람은 점으로 사라졌다.

"그럼 우리는...."

족장은 이안을 돌아봤다. 그리고 지도를 보란 듯이 접어 제품에 넣었다.

"남쪽으로 이동한다."

"남쪽으로 이동!"

다들 쿠실레의 머리를 재조정했다. 이안 역시 베릭의 옷깃을 잡아끌며 일으켰고, 족장은 그런 그를 도와 베릭을 쿠실레 위로 얹어주었다.

"누구지?"

"지도를 만든 사람 말입니까? 제 선생이신데요."

카칸티르는 무표정이었지만, 솔직히 속으로는 기술과 학문의 차이가 여실하다는 걸 체감한 참이다. 그들은 지도를 사막 곳곳, 직접 발로 누비며 작성했다. 몇몇 오아시스는 고작 몇 해 전에 발견한 것인데, 지도에는 '존재할 확률 85%' 따위로 표기되어 있는 게 아닌가.

"물을 아끼며 먹게."

그는 땀과 물로 축축한 베릭의 얼굴을 힐끔거리고서는 충고했다. 여정이 길어진 만큼 물도 부족할 테니까.

"네. 족장님."

이안은 이제 물 대신 마력을 불어넣어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이 다시 불기 시작했다. 이전과 다르게 낮고 짧게 부는 바람이었다.

* * *

"어?"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사막이 주는 낮의 폭염과 밤의 한파에 익숙해질 무렵. 앞장서서 걸어가던 길잡이가 침묵을 깼다. 어지간해서는 소리를 내지 않는 자였다.

그걸 신호로 뒤에 있던 카칸티르가, 또 그 뒤의 네르사른이 고개를 쳐들었고 어느새 일행 전부가 정면을 주시했다.

"나무?"

이안 역시 마찬가지.

지평선을 타고 녹색의 무엇인가가 보였다. 이내 천려족의 나팔소리가 울리고, 그들은 환희에 찬 소리를 질러댔다.

"도착했다! 천려다!"

"고생했소.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데모샤!"

"데모샤!"

쿠실레 위에서 반쯤 졸던 베릭도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안 그래도 구릿빛 피부가 더 시커메졌다.

"다 왔대?"

"그래."

목적지에 가까워지자 모래가 딱딱해졌다. 쿠실레는 이전보다 힘차게 걸었고, 이내 한 시간 안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카칸티르 족장님이시다!"

이안은 천려족의 땅을 쭉 훑어보았다.

변방의 야만족치고는 꽤 건축 기술이 발전해 있었다. 흰색 돌을 따라 세운 성벽 안에 천막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는데, 모래 위의 야자수는 크고 싱그러웠으며, 색색의 천들이 금빛 모래에 바래어 잿빛으로 휘날렸다. 도로 상태도 양호하다. 나름의 하수로도 있는 것 같고....

"카칸! 어서오십시오!"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쪽으로!"

"다들 물과 식사를 준비해!"

"저자가 이안인가? 아니면 저자?"

"딱 봐도 금발이지. 그 옆은 성질 있어 보여."

시끌벅적한 환영 인파에 다들 즐거운 인사를 나눴다. 먼저 출발해 일행 소식을 알렸던 세 사람 역시 여독을 풀고 일상에 복귀한 상태였다.

"윈첸 부족장님은?"

"상태가 호전되었다 합니다."

"다행이군."

카칸티르는 이안에게 따라오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그가 쿠실레에서 내려 걷자, 일족의 모두가 빤히 쳐다보며 호기심을 숨기지 못했다. 베릭은 잠이 덜 깬 눈을 비비며 이안의 뒤를 따랐다.

차악-

염주 달린 캐노피를 걷자 계피 향이 훅 올라왔다. 안쪽은 서늘하고 어두웠다.

가운데 놓인 침대 위에 누운 노인.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거죽은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너덜너덜했다.

"윈첸. 카칸티르가 돌아왔소."

"아…. 족장이시여. 면목이 없습니다."

"몸은 좀 어떠하오?"

저자가 천려의 뿌리라 여겨지는 부족장, 진실과 거짓을 밝혀낸다는 집시, 윈첸이다. 노인은 몸을 천천히 일으켜 앉았다.

"브라츠와의 조약으로 천려와 함께할 이안이오."

윈첸이 일어서자, 방 안으로 드는 빛 한줄기가 그녀의 얼굴에 앉았다. 곰팡이 핀 것처럼 뿌연 동공. 보지 못한다는 소문이 진짜였다.

"이안이 적합한 자인지 확인하려 하오."

"…이안. 내 질문에 대답하시게나."

"네. 부족장님."

노인은 입만 우물우물,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질문했다. 조금 뜻밖의 질문이었다.

"이안 브라츠는 신의 뜻으로 이곳에 왔는가?"

…사막에서는 이렇듯, 언제나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난다는 걸, 이안은 깨달았다.

제29화. 실라스크

대답이 늦어지자, 카칸티르가 이안을 돌아봤다. 이안은 고개를 살짝 아래로 내리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하늘을 섬기는 부족인지라 그리 질문한 것일까? 아니면 이안의 내면에 또 다른 이안이 들어서 있는 걸 알고서 질문한 것일까? 윈첸은 이안의 간단명료한 대답을 곱씹는 것처럼 입맛을 다셨다.

"데르가 브라츠의 피로 태어난 자가 맞고?"

"분명합니다."

"자네의 존재가 곧 평화를 뜻하는가?"

"맹세코, 평화만이 제 존재 이유입니다."

윈첸의 입가에 미소가 돌았다. 카칸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종들에게 무언으로 지시했고, 그들은 윈첸을 다시 이부자리에 눕혔다.

"그럼 물러나겠습니다."

"푹 쉬시게, 우두머리여. 요즘 사막의 폭풍은 너무 거칠어. 하늘이 더욱 뜨거워진 탓이지."

노인의 힘 없는 중얼거림만이 천막에 감돌았다. 이안이 밖으로 나오자, 긴장하며 굳어있던 천려 일족이 카칸의 표정을 살폈다.

"이안 브라츠와 일행에게 천막을 내주어라."

이안이 브라츠 가문의 자식이 맞는다는 걸 돌려서 공표한 것이다. 그리고 또한, 고단한 화친의 모든 일정이 공식적으로 완료되었음을 뜻했다.

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안을 불렀다.

"이안. 이쪽으로."

"나는? 같은 천막을 쓰나?"

"그러면? 뭐 귀한 몸이라고 방을 따로 내주리?"

수가 쏘아붙이자, 베릭이 이안에게 속삭였다.

"아무래도 전사치고는 속이 너무 좁다. 왜 나한테만 저러는지 모르겠다니까? 따지고 보면 그날 조롱을 시작한 건 네가 아닌가?"

"글세, 베릭. 직접 주먹을 꽂아 넣은 건 너지."

"어어? 이렇게 발을 빼겠다고?"

이안에게 내려진 천막은 생각보다 상태가 괜찮았다. 특별히 좋다고는 못하겠다만, 적국의 제물이라고 해서 하대하는 느낌은 없었다.

'거참 이상하다. 데르가의 친형이 국경을 넘어서 죽은 뒤로는 상당히 냉랭한 관계가 되었다고 하지 않았나?'

물론 그때의 족장과 지금의 카칸티르는 다른 사람이다. 쉽사리 바뀌는 우두머리의 특성상, 이들의 역사에서는 꽤 옛날 사람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더더욱, 인식이나 관계 방식이 바뀌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들은 브라츠 저택에서 들은 것만큼 무자비한 자들이 아니었다.

'냉정하되 냉혈 하지 않고, 자유롭되 야만적이지 않다.'

이것이 이안의 평가였다. 베릭은 모래로 엉망이 된 짐을 풀며 물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건데?"

"우선 좀 씻어야겠다."

"말고. 여기서 평생 살 건 아니잖아?"

그렇긴 하지.

하지만 이안이 바리엘로 돌아가려면 몰린이 중앙에서 감찰관을 이끌고 데르가의 목을 벤 이후여야 했다.

아마 지금쯤 겨우 중앙에 도착했을 터. 내려오고 거사를 치르려면 보름에서 한 달 정도 시간이 필요했다.

"여행 왔다고 생각해. 여기는 네가 이기지 못할 자들이 천지니까, 매일 한 명씩 상대해도 1년 금방이겠군."

"1년? 거짓말이지?"

"농이다. 보름. 길면 한 달이겠군."

베릭이 눈으로 쌍욕을 내뱉으며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떠도는 인생, 침대만 있다면 어디든 상관없다만, 사막의 더위는 도저히 적응이 안 됐다.

"이안."

차악-

수가 천막을 걷으며 들어왔다. 그녀는 옷가지와 간단한 요깃거리를 내놓으며 방 안을 둘러봤다. 부족한 건 없는지 살피는 눈치였다.

"일단 먹어. 다들 여독을 푸느라 정신없거든. 해가 지면 귀환식이 있으니 다시 부르러 올게. 아. 그리고-"

서둘러 나가려던 수가 멈칫거리며 뒤를 돌았다.

"잔갸룽이 그랬어. 폭풍, 정말 거셌다고. 그가 지금껏 만났던 것 중 제일 크고 위협적이었대. 맨몸으로 뚫은 거라 날아간 물건은 없지만, 만약 일행이 만났다면 곤란했을 거라고."

"그래."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이안이 미소 지으며 공을 카칸티르에게 돌렸다.

"족장님의 판단이 참으로 현명했다."

저들의 우두머리를 칭하는 말에 수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리고 슬쩍, 천막을 나가버렸다. 멍하니 그걸 보고 있던 베릭이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저게 나한테만 그러는 거 맞네."

"서운한가?"

"됐거든!"

베릭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침대로 뛰어들었다. 모래를 그대로 묻힌 채, 그는 바로 기절하듯 쓰러졌다. 장장 며칠 동안 밖에서 바람맞으며 지낸 탓이다. 이안 역시 고민하다가, 저도 모르게 잠에 빠져들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