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달깍.
"도착했습니다."
마부가 문을 열어주자, 데오가 비틀거리며 내렸다. 아직 술이 덜 깬 게 분명했다. 대문 앞, 하인들이 랜턴을 든 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도련님. 오셨습니까?"
"피곤하시지요? 어서 안으로 드세요."
"이안 도련님 먼저 집무실로 올라오라 하십니다."
일사불란하게 외투를 받고 물수건을 챙겨줬다. 이안은 화분을 하인에게 맡긴 다음, 바로 위층으로 향했다.
똑똑.
"들어와라."
노크 소리와 거의 동시에 허락이 떨어졌다. 어지간히 기다린 모양이지. 안으로 들어서자 데르가가 깃펜 움직이던 것을 멈췄다.
"브로치."
인사보다 먼저 브로치 확인이 중요했다. 이안은 책상 가까이 가 가슴팍의 브로치를 내려놓았다.
"무슨 얘기를 했느냐?"
"특별한 건 없었습니다. 오찬은 관사의 응접실에서 진행됐고, 주로 수도 얘기를 했습니다. 식사 후에는 근처의 공원으로 가서 학식 토론을 이었습니다."
"그래? 그뿐이다?"
데르가는 콧수염을 쓸어내리며 브로치를 집어 들었다. 옆에는 투명한 액체가 담긴 유리통이 있었는데, 마력석을 활성화시키는 물약이었다.
퐁당.
액체에 잠긴 마력석이 빛을 발했다. 이안이 마력을 불어넣었을 때와 같은 반응. 잠시 후, 천천히 고동에서 퍼지는 파도 소리처럼 목소리가 울렸다.
[…이곳은 관사인가요?]
[수도에서 공무원이… 파견되는… …쓰는 곳이랍니다. 깔끔하고… 제집처럼… 있습니다.]
"제집처럼 무어라 한 거냐?"
"제집처럼 지내고 있다 한 것 같습니다."
하급 마력석이라 그런지 음성이 깔끔하지 않았다. 이안은 속으로 한숨을 삼켜야 했다.
'이런 식으로 정확하지 않을 부분을 꼼꼼히 따질 요령이구나.'
피곤한데, 확 그냥 마력을 쏟아내서 부숴 버릴까? 이안이 진지하게 고민하던 차.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백작 부인 메리였다.
"잠깐 저 좀 보시지요."
"무슨 일인데 그러하오?"
굳은 입매가 분노를 담고 있었다. 백작은 브로치를 건져내며 인상을 찡그렸고, 부인은 성큼성큼 다가와 이안을 노려봤다. 도저히,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저 천한 것이 바깥으로 나돌 때마다 첼을 붙일 생각이신가요? 수업까지 빼면서 하는 일이 고작 저것을 따라다니며 감시하는 거라니요!"
"지금 어디서 바락바락!"
"안 하게 생겼습니까?"
저택에 도착한 첼의 꼴이 말이 아니긴 했다. 물에 빠진 돼지처럼 땀에 푹 절어서는, 휘청휘청 걷는 모습이 영 형편없었으니.
메리는 두 번 다시 아이를 감시역으로 보내지 않겠노라 선언했고, 데르가는 언성을 높였다. 안 그래도 쌓인 게 많은 사이였는데, 불씨가 붙는 게 느껴질 정도다.
"저기."
이안은 둘을 가만히 지켜보다 끼어들었다. 귀 따가운 부부 싸움을 더 듣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먼저 물러나 보겠습니다. 아버지. 내일 다시 뵙겠습니다."
그리고 홀라당 미끄러지듯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자주 있는 일인지, 하인들이 몸을 웅크리며 복도를 빠르게 내지르고 있었다. 총총, 아래로 내려온 이안은 해나와 마주했다.
"해나."
"이안 님. 화분은 방에 가져다 두었습니다."
"고마워. 덕분에 일을 잘 끝냈다."
어머니를 잘 만났다는 뜻이었다. 해나가 그의 뒤를 따르며 조잘거렸다.
"막상 전언하니 공원이 크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손님들 거주지인 포트로가 3구역과 제일 가까운 입구로 말씀드렸답니다."
이안은 방문을 열며 아이를 돌아봤다. 어쩐지. 쉽게 만났다 했더니, 해나가 일 처리를 훌륭하게 해낸 것이다. 똘똘하니 참으로 도움 되는 아이다.
"그래. 고맙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하렴."
"네. 도련님. 감사합니다!"
해나는 랜턴 불을 정리해 준 후, 꾸벅 인사하고 나갔다.
첼처럼 녹초가 된 것은 아니지만, 이안 역시 다리가 저려서 고단했다. 침대 위로 풀썩 쓰러지며 중얼거렸다.
"이러면 곤란한데…. 첼을 앞세워서 훈련장에 나가볼까?"
체력도 단련할 겸 슬슬 움직일 때가 되었다. 격동의 때가 올 것이 분명했으니.
이안은 난생처음으로 엎드린 채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제14화. 훈련장
백작 부부의 고성은 새벽이 가도록 수그러들지 않았다. 덕분에 다음 날 아침. 식당에 나온 것은 첼과 이안 두 사람뿐. 피로한 몸으로 들어서던 첼이 멈칫거리며 눈을 굴렸다.
"형님. 좋은 아침입니다."
"..."
이안이 먼저 인사를 건넸으나,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찌하여 아버지, 어머니 자리가 비었는지 모를 일이다.
"두 분께서는 오늘따라 늦으시네요. 저희끼리 먼저 먹고 있죠. 어서 앉으세요."
마주 보는 것도 불편한데, 밥까지 먹으라고? 아침부터 체할 일 있나? 첼이 슬그머니 돌아가려 하자 이안이 낮은 목소리로 붙잡았다.
"제가 의자까지 빼드려야 합니까?"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우물쭈물 변명을 생각하던 첼이 체념하고 자리에 앉았다. 불과 저번 주까지만 하더라도 빌빌대던 역할은 이안의 것이었거늘. 어찌하여 상황이 이리 역전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때, 그 금빛 눈은 대체....'
혹시 저주일까? 아버지가 천려족을 멸하기 위해 이안의 몸에 저주를 심어놓고 보내는 건 아닐까? 무지에서 비롯된 온갖 상상력이 첼의 머릿속에서 뒤엉켰다.
이안은 샐러드를 먹으며 그를 지긋이 쳐다봤다.
"형님."
"…으응?"
"어제 보니까 체력이 많이 약하신 것 같더라고요. 혹시 따로 받는 훈련이 있으십니까?"
훈련이라니. 학교에서 하는 체력 단련도 꾀병 내어 빠지기 일쑤였다. 그런 첼이 따로 움직일 리가 없지 않은가.
이안은 짐짓 걱정스러운 투로 권했다.
"어제 보니 형님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체력이 너무 안 좋은 것 같습니다. 데르가 백작 가문에 자식이라고는 우리뿐인데, 둘 다 이러면 천려족에서 어찌 생각할지 심히 염려되더군요."
뭔가 불길한 걸 느낀 걸까. 첼이 나이프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이안 역시 생긋 웃으며 식기를 정리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같이 훈련장에 나가보는 건 어떻습니까?"
첼이 기겁하며 입을 딱 벌렸다.
훈련장? 사병들이 검과 창을 휘두르는 그곳?
"형님이 말씀하시면 아버지께서는 반기시겠죠. 분명 차기 백작으로서의 소양에 맞는다 칭찬하실 겁니다."
사실 데르가는 걱정이 많았다. 천려족과 반 전시 상태인 만큼 공자들의 강한 모습이 중요했는데, 첼은 1공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쪽과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하여서 백작이 선택한 방법은 단장의 권세를 높여주는 것이었다. 데오가 그 수혜자 중 한 명인 셈이다.
"그, 그러시긴 하겠지...."
검을 휘두르는 건 고사하고 뜀박질도 싫어하는 첼이었다. 어떻게 거절할까 고민하던 것도 잠시. 이안은 재빨리 기회를 잡아챘다.
"좋습니다. 그러면 식사 후 구경을 먼저 하도록 하지요. 저택 후문만 나가면 바로 있다 하던데요."
"식사 후 바로?"
"왜요? 그럼 물리시겠습니까?"
밥이라도 먹고 갈 것인가, 아니면 빈속으로 갈 것인가. 택일하라는 의미였다. 첼은 입을 꾹 다물며 빈 부모님의 자리를 원망스레 힐끔거렸다.
이안은 언제나 마찬가지로 음식을 덜어 먹었다. 오늘은 남는 것이 꽤 많을 것이다.
* * *
저택 후문으로 나가자마자 보이는 훈련장.
아주 오래전 선대부터 써왔던 건물인지라 낡았지만, 군의 위용이 그대로 담겨있는 잿빛 벽이 인상적이었다. 바람에 휘날리는 바리엘 국기와 브라츠 가문의 깃발이 위풍당당했다.
"데오."
"첼 도련님?"
훈련장 안으로 들어가자 벤치에 반쯤 누워있는 데오를 발견했다. 여전히 부상을 핑계로 훈련에 참가하지 않고 있는 게 분명했다.
평소 얼씬도 않던 두 아이의 방문에, 데오는 놀란 듯 몸을 일으켰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저기. 훈련장 구경을 좀 하려고 해."
"도련님이요? 왜요?"
데오의 대꾸에 뒤에 서 있던 이안이 나섰다. 태도가 불손하다 못해 시건방지다.
"소백작이 훈련장에 오는 게 무엇 그리 유별난 일이라고 되묻는가?"
"지금껏 처음인지라."
"전날 외출로 체력의 모자람을 느꼈으니, 앞으로 함께 수련하고자 하네. 호위가 술 먹고 곯아떨어지더라도 제 몸 하나는 지킬 수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관사에서 와인 처먹고 쓰러진 데오를 꾸중하는 말이었다. 이안 입장으로는 참으로 다행이었지만, 어쨌거나 그는 임무에 소홀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사내는 피식 웃으며 시커먼 이를 혀로 훑었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지?'
데오로서는 별로 탐탁지 않은 변화였다.
그럴 가능성은 작지만, 혹여나 첼이 무예에 관심과 재능을 보인다면 단장에게 부여된 권한 일부가 제한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뭐. 아직 어린 데다 포동포동하게 오른 몸집으로 보아,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만....
"예. 그러면 따라오십시오. 구경이 뭐 그리 어렵겠습니까."
데오는 느긋하게 앞장서서 걸었다. 널찍한 터 안쪽에서 사병들이 자유롭게 훈련하고 있었다. 대부분 웃통을 깐 채 검을 휘두르거나, 마차 바퀴를 둘러업고 뛰는 등, 날것 그대로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으아아악!"
"한 번 더!"
"밀어! 더 세게!"
"으아악!"
개인 훈련을 위해 모인 자들이었다. 열기가 더욱 짙은 것이, 곳곳에서 괴성이 터져 나왔다. 첼은 표정을 관리하려 했으나 영 불편한 모양이다.
"이쪽이 제일 큰 훈련장이고, 저쪽이 창고, 그 뒤가 휴게실입니다. 밤샘으로 단련할 시에는 휴게실에서 숙식할 수 있습니다. 음. 그리고...."
귀찮은 티가 역력한 데오의 설명을 한 귀로 들으며, 이안은 안쪽을 쭉 둘러봤다. 구석에서 젊은 자들이 머리를 박은 채 엎드리고 있었다.
"저기는 무엇 하는 것인가?"
대부분 성인인 사병들과 달리, 그들은 앳돼 보였다. 많아 봤자 열여덟 안쪽일 정도로. 데오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고아들입니다."
"고아?"
세금 충당하기도 힘든 브라츠 가문이 보육원을 운영할 리 만무했다. 보호자 없이 길바닥을 전전할 고아가 살아남는 방법은 딱 하나. 바로 데르가의 사병이 되는 것뿐이다. 군대에 들어오면 일단 밥과 누울 자리는 주니까.
데오가 웃으며 중얼거렸다.
"이안 님도 재수 없었으면 여기서 저를 봤겠습니다."
무례하나, 틀린 말은 아니다.
이 몸은 천민 출신 어미를 둔 사생아. 버려진다고 하더라도 이상할 것 없는 출신 성분이었다. 그랬다면 이안 역시 이쪽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겠지.
"자네가 생각하기에는 그런가? 형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안의 물음에 첼이 얼굴을 굳혔다.
"…데오. 그리 말하지 말게."
제발, 이안에게 패륜적인 말 좀 그만하라 이것이다.
다시 한번 금빛 눈을 보이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르지 않나? 두려움에 기반한 꾸중이었으나, 데오는 의외라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때, 훈련장 한가운데 땡볕에서 소란이 일었다.
"대가리 제대로 박아!"
촤악!
교관으로 보이는 사내가 가는 채찍을 사정없이 휘갈겼다. 아이들의 팔과 등, 허벅지에 붉은 자국이 선명했다.
'소년병에 학대까지. 단단히 미쳤군.'
데르가, 이자는 정신이 어떻게 됐단 말인가? 이안은 감히 상상도 못 한 처사다. 그가 황제로 있던 바리엘에서는 소년병이란 나라가 망하기 직전에나 나오던 전력이었다.
이안은 잠깐이라도 아이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싶어 데오를 불렀다.
"데오, 네 말대로 재수 없었으면 내 동료가 되었을 자들이다. 격려라도 할 겸 잠시 그늘로 부르지."
"예? 진심입니까?"
"두 번 말해야 알아듣는 편인가?"
"그건 안 됩니다. 훈련 중에는 백작님이 오시더라도 멈출 수 없습니다. 기강을 위한 방침이니 이해하시죠."
기강은 개뿔. 이안은 대답 대신 가까운 벤치에 앉아 그쪽을 지켜봤다. 망할 훈련이 끝나면 바로 불러서 안위를 살필 참이었다. 첼 역시 머뭇거리며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으아아악!"
"제대로 못 해? 굶고 싶나?"
"아닙니다! 할 수 있습니다!"
"팔 똑바로 들어!"
"아아아악!"
절규가 처절했다. 주위 훈련 소리에도 묻히지 않을 만큼. 팔을 뒤로 한 채 머리로만 지탱하던 몸들이 하나둘씩 옆으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버텨!"
그들 중 유독 이안의 눈에 들어오는 한 아이.
산발의 붉은 머리칼을 대충 묶었는데, 그 사이로 보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독기 그 자체다. 서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걸로 세상을 보는 듯한 시선.
"저 아이...."
이안은 저도 모르게 입을 떼었다.
붉은 머리칼과 눈동자. 체격은 날렵한 편이었는데, 몸이 달달달 떨리는 와중에도 끝까지 버티는 모습이었다.
이안의 시선을 따라간 데오가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
"베릭입니다."
딱히 특출난 신체 능력이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교관들도 지독하다며 혀를 내두를 정도로 집요한 아이였다. 선별 전투에서 체급이 두 배 가까운 상대와 맞붙었지만, 귀를 물어뜯고서 승리를 쟁취할 정도였으니까. 물론 그 벌로 사흘간 금식 처분을 받았다.
이안은 다리를 꼰 채 베릭을 주시했다.
"흐윽...."
남은 사람은 단둘. 베릭과 다른 아이의 목이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휘었다. 교관은 시계를 확인하며 침묵했다. 둘 중 하나가 남을 때까지 기다릴 참인 듯싶다.
"으아아악!"
악을 질러가며 버티는 베릭. 그걸 기점으로 상대 아이는 힘을 잃고 옆으로 쓰러졌다. 땀에 젖은 상체가 모래로 범벅이 되었다.
삐익!
"그만."
교관의 말에 베릭의 무릎이 땅에 닿았다. 숨을 씩씩거리며 일어서지 못하던 아이는 고개만 겨우 돌려 침을 뱉었다. 이마는 피로 엉망이다. 모든 걸 쏟아냈는지 엎드려서는 꼼짝도 못 했다.
"그럼 베릭이라는 애가 저 중에서 1등이야?"
질겁하며 그걸 본 첼이 물었다.
"그건 또 아닙니다. 악쓰는 것이 쓸 만은 하다만, 딱 거기까지입니다. 실력이 성질을 따라오지 못해요. 특히 전투에서는."
교관이 베릭의 머리에 물을 부었다. 그런데도 아이는 일어날 수 없는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일찍이 포기한 다른 동료들은 움직이는 데 문제가 없었다.
"저런 열의라면 훈련에 모범적일 텐데?"
"…체질이라는 게 있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안 되는 것들은 안 됩니다. 타고난 능력에는 한계가 있어요."
매일 먼저 훈련장에 나와 제일 늦게 나가도 성장이 더뎠다. 독기를 물어서 버틸 수 있는 건 누구도 따라갈 수 없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적의 칼날 앞에서 이만 꽉 문다고 되는 게 아니다.
"그러니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할 텐데요. 각자 쓸만한 곳이 따로 있으니까. 베릭도 전선보다는 특수임무에 적합한 것 같아 따로 뺄 생각입니다."
데오는 첼과 이안에게 들으라는 듯 덧붙였다.
병력 관리 쪽은 자신을 비롯한 적임자가 잘하고 있으니, 너희들은 곱디고운 손으로 펜대나 쥐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 말을 알아듣기에 첼은 너무 아둔했고, 이안은 다른 생각에 잠겨있었다.
'뭔가 이상해.'
아까의 그 눈빛은 정말이지, 뭐랄까.
신념과 명예를 위해 죽고자 하는 기사 자체였다. 전쟁의 불구덩이가 생생히 떠오르는 기백. 성인도 안 된 아이가 저런 성정을 가진 게 놀랍지 않은가.
그리고 무엇보다… 악을 내지를 때 순간적으로 희미한 마력의 기운을 감지한 것이다.
'여러모로 마검사 특징인데.'
마력을 다루는 검사.
몸 안의 기를 마력이 막고 있어 각성 전에는 성장이 더디다. 하지만 한번 각성하고 나면 어지간한 인간과는 비빌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전력일 터.
'발굴하려면 내재한 마력을 자극해 줄 마력운용자가 필요하다. 그 자체가 귀하니 평생 자신이 마검사인 줄도 모르고 죽어간 자들이 많겠지.'
"훈련이 끝난 것 같으니 이제 불러보게."
이안은 데오를 향해 지시했다.
두 번의 거절은 용납지 않겠다는 듯 아주 단호하게.
제15화. 베릭
열일곱의 베릭은 좀 별난 아이였다. 붉은 머리칼을 닮아 성정이 불같아서 그런지, 함께 훈련받는 동료들이 좋아하지 않았다. 맨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그랬다.
군기반장이 눌러놓겠다며 싸움을 걸자, 팔과 다리가 부러질 때까지 굴복하지 않고 뻗어댔다. 결국, 기절로 마무리했지만.
'이기진 못해도 지지는 않는 자식'.
훈련생 모두가 뒤에서 그를 그리 불렀다.
"휴식."
"하아아."
"그늘로 이동."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는 훈련장. 교관의 휴식 명령에 다들 비틀거리며 움직이는 와중, 아무도 베릭을 일으켜 주지 않았다.
베릭 역시 기대하지 않았는지, 눈을 감으며 숨을 고를 뿐이다. 조금 지나면 스스로 움직일 거니까.
"베릭?"
베릭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낯선 목소리에 눈을 치켜들었다. 금빛 머리가 화사하게 빛났지만, 그뿐이다. 눈이 흐려 잘 보이지 않았다.
"일어설 수 있겠나?"
"…너 누군데."
"이안."
"꺼져."
브라츠 백작에게 서자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애송이가 바로 그자라는 건 몰랐다.
베릭의 관심 밖이었다. 합숙한 지 벌써 반년 되어가는, 침상 동료 이름도 모를 정도니까. 한 달 전 저택에 들어와 산송장처럼 살던 아이를 알 턱이 없다.
'성격이 더럽군.'
반면 이안은 그를 내려다보며 가만히 생각했다. 아무리 봐도 마검사의 특징이랑 부합한단 말이지.
편견이라 할 수도 있겠으나, 어찌 된 일인지 그가 봐왔던 마검사는 성격이 죄다 저러했다. 뭐든 베어버리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안달 나 사고 치기 일쑤였지.
"태도가 참으로 불손하다."
"아...."
이안은 그의 얼굴에 물을 흘려주며 꾸중했다. 베릭은 시원한지 눈을 감은 채 입을 벌릴 뿐이다.
이안이 뒤를 힐끔 돌아봤다. 그늘에서 첼과 데오, 훈련생들이 그를 의아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서자가 대체 무엇을 하려는지, 감도 못 잡겠다는 표정이다.
'한번 시험해 볼까?'
이안은 그들을 등지고서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물을 먹여주는 척, 베릭의 턱을 잡았다. 맞닿은 손끝으로 그의 마력이 흘러내렸다.
"...."
인상을 찡그리고 있던 베릭의 얼굴이 점점 편안해졌다. 뭐라고 해야 할까. 몸 전체를 꽉 채우고 있던 핏덩이가 조금씩 녹는 느낌이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물이 주는 해방감이라 생각한 것인지, 그는 땅에 흘린 것이라도 핥아먹을 기세였다. 이안은 남은 것을 흩뿌리고 일어섰다.
'됐다.'
일반인은 순수한 마력을 받아낼 수 없다. 힘을 담아내는 그릇의 밀도 차이 때문이다. 마력운용자는 그것이 탄탄하여 마력이 새지 않지만, 일반인은 구멍이 숭숭 뚫린 것과 같아 담아내지 못했다.
치유와 환각 마법이 대우받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일반계 공격 마법이야 대상이 누구이든 한번에 쏟아부어 그릇을 깨뜨리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치유, 환각같이 대상이 받아낼 수 있게끔 마력을 변형하는 것은 고급 중의 고급 기술이었으니.
아무튼, 베릭은 어떠한가?
마력을 고이 받아내는 것도 모자라 반응이 즉각적이었다. 아주 희미한 힘이었음에도, 어미 젖을 찾는 갓난아이처럼 필사적이기도 했다.
'싹수가 있어.'
예상치 못한 수확이었다. 이런 곳에 마검사의 싹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이안은 마력을 풀며 첼과 데오 쪽으로 향했다. 첼은 땀을 뻘뻘 흘리며 벌써 지친 기색을 보였다. 아무것도 안 하고, 그저 서 있기만 했는데.
"형님.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돌아가시지요."
실로 기다린 말이었다. 첼의 안면이 화악 밝아지며 상기됐다.
"그, 그럴까?"
"그리고 내일부터 나와 훈련하면 되겠습니다."
이어서 다시 진흙에 처박힌 것처럼 어두워졌다. 아직 아이라 그런 것인가? 어찌 저리 얼굴에 드러나는 감정이 노골적인지 모르겠다.
"차기 백작님이라면 그리하셔야지요."
이안은 방싯 웃으며 덧붙였다. 여전히, 베릭은 훈련장 바닥에 누워 마력의 잔여감을 느끼고 있었다.
* * *
"첼과 훈련장에 나간다고?"
데르가가 되물었다. 마침 마력석 브로치에 담긴 모든 말을 완벽하게 정리한 때였다. 분명 해 떴을 때 불러왔건만, 바깥은 어느새 별로 촘촘했다.
이안은 종일 말하느라 쉬어버린 목을 가다듬었다.
"예. 저택 후문 바로 앞이지만, 문을 나서야 하기에 아버지께 허락을 구합니다."
데르가가 유리통에서 마력석을 꺼내 마른 천으로 닦았다. 표정은 심드렁한 것 같기도 하고, 뭔가 의뭉스러운 듯 같기도 했다.
"다른 의도는 없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바깥 한번 다녀오는 데도 체력이 많이 소진됩니다. 가문의 두 영식 모두 이런 꼴이라면 천려족에게 멸시를 당할 것이고, 무엇보다 국경을 넘어 사해를 지날 때 버티지 못할 것 같아 그렇습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데르가는 서류 더미를 옆으로 치우며 한마디 던졌다. 시험하는 듯한 말투가 아주 거만했다.
"바깥을 자주 나돌면 들떠질 것이다."
혹여 네가 다른 마음먹을지 어떻게 알지? 라는 질문이었다. 주기적으로 몰린을 만나러 가는 것도 솔직히 불안하건만, 계속해서 기회를 주는 건 탐탁지 않았다.
이안은 주머니에서 서신을 꺼냈다.
"일전에 주신 주머니. 그 답신입니다."
이안의 어미에게 주는 편지. 그는 그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어머니가 있는 이상 허튼짓 못 할 거라는 건, 데르가 당신이 더 잘 알지 않느냐고.
데르가는 곱게 접힌 종이를 살짝 펼쳤다.
"어머니에게 제가 아직 글 쓰는 것이 미숙하다고 덧붙여주시기 바랍니다."
그쯤이야. 데르가는 이미 집사로부터 가정교사가 수업 시간에 답장을 작성했노라 들은 상태였으니까.
바스락.
편지를 펼쳤다. 필체가 엉망이었으나, 그 안에 담긴 애정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여기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백작님과 마님 그리고 도련님 모두 저를 잘 돌봐주고 계셔요. 어머니가 부탁하신 건 제가 꼭 구해보겠습니다. 부디 돌아오는 그날까지 무탈하시길. 짧은 노랫말과 함께 그리움을 보냅니다. 하늘에서 달이 떨어지면 해가 떠오르지. 영원한 어둠은 없노라.
마지막 줄이 모자간의 암호인 듯싶다.
데르가는 이안이 구룻잎을 구해오겠다 다짐한 문장을 보고 수염을 매만졌다. 은근한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감추기 위한 행동이었다.
"어미가 뭘 부탁했느냐?"
"아버지는… 주머니를 보지 않으셨습니까?"
시험하듯 질문한 것인데,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데르가가 고개를 들어 이안의 얼굴을 살폈다. 보기 드물게 날이 선 것이, 데르가에게 비밀로 해달라는 어미의 전언을 신경 쓰고 있는 게 분명했다. 데르가의 입가에 숨길 수 없는 미소가 돌았다.
"내가 그리 한가해 보이더냐?"
"…아닙니다. 저는 모르겠습니다만, 천려족 여인들이 주로 한다는 머리 장신구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 역시 이안의 계산이었다.
어미의 부탁을 숨겨야 하는 상황에서, 과연 데르가가 서신을 확인했을지 의심하는 연기. 경계하듯 일부러 눈까지 깔고 목소리를 떨어보는데....
아. 도저히 못 해 먹겠다. 연기는 정말이지 취향도 아니고 재주조차 없구나.
그런 이안에게 깜빡 속아 넘어가는 데르가는 또 얼마나 멍청한 것인지.
"허락해 주시면 당장 내일부터 훈련장에 나가겠습니다."
이안은 말을 애써 돌렸다. 이미 첼을 달달 볶아 그를 통해 데르가의 허락을 받은 뒤였지만, 확실히 정리하기 위해서.
데르가는 수염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여나 훈련을 빙자하여 첼에게 해 입힐 생각은 말거라. 그랬다간 데오가 그 자리에서 네 목을 잘라버릴 것이다."
아이에게 끔찍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는구나. 이안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허리를 숙였다. 감사하다는 말도 잊지 않고서.
"참. 몰린 경은 또 언제 만난다 했지?"
"모레입니다."
모레 다시금 그들을 만나러 나갈 것이다.
이안의 말에 데르가가 뭔가를 생각하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아마 백작 부인의 반대로, 그때는 첼을 동행시키지 못할 터.
"알겠다."
데르가는 어서 나가보라며 손을 내저었다. 몸을 돌리는 순간에도, 이안은 그의 책상 위를 살피는 걸 잊지 않았다.
저것 중에 분명 세금과 관련된 게 있겠지....
달깍.
이안은 어두운 복도에 서서 몰린을 떠올렸다. 그들이 원하는 이안의 가치가 대체 무엇일까.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아무래도 데르가를 끌어내리려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첼 대신 이안을 내세우는 것까지도 대충은.
'그렇다면 역시 세금 문제가 제일이지. 저들도 데르가의 탈세를 의심하고 있는 거다.'
하지만 위험하기도 한 것이, 황궁을 상대로 한 탈세는 중죄 중의 중죄였다. 재수 없다면 모반 혐의를 적용하여 브라츠 성씨를 가진 모두가 처형될 수도 있다.
이안이 입적하지 않는다면… 노예로 전락하는 벌을 받게 되겠지.
'무엇이 되었든 일단 위험해.'
브라츠 성(姓)이 사라지면 가문도 사라지는 것이니 이안의 존재 가치 또한 없어지게 된다. 앞으로의 생존에 위험이 따른다는 뜻이다.
사활을 건 줄타기.
데르가는 이안을 사막으로 팔아넘기려 하고, 몰린은 브라츠를 먹으려 하고 있다. 둘 사이에서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할 터다.
'그런데 보니까, 저택 안에 눈과 귀를 심어둔 것 같은데 말이지. 특히 편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아는 눈치였어.'
"이안 님?"
하인이 랜턴을 들고서 그를 불렀다. 침실로 돌아가지 않겠냐는 부름이었다. 이안은 그의 뒤를 따라 복도를 가로질렀다. 저택의 제일 높은 곳이라 그런가. 창 너머로 아직 아른거리는 훈련장의 불빛이 보였다.
"다들 늦게까지 고생하는군."
이안의 따스한 중얼거림에, 앞서던 하인이 슬며시 웃었다. 이안이야말로 종일 데르가 집무실에 잡혀 제일 고생하지 않았던가? 식당에서 매일 같이 깨끗한 음식을 내려주던 아이에게, 하인은 은근히 친밀감을 느꼈다.
"침실에 활동복을 따로 구비해 두었습니다."
"그래. 고맙네."
"평안한 밤 되십시오. 이안 님."
한편, 훈련장에는 몸이 여전히 달아오른 사내들이 검과 창을 휘두르고 있었는데 그중 제일 눈에 띄는 것은 붉은 머리의 베릭이었다.
"저 새끼 오늘 뭘 잘 못 처먹었나?"
"그러니까. 힘이 넘치네."
"낮에만 해도 죽어가더만."
해가 지면 촛불이 꺼지듯 온몸의 기력이 사그라들던 베릭이었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모두 숙소로 돌아간 이후에도 검 휘두르는 것에 멈춤이 없었다.
쉬이이익!
촤악!
잇는 힘껏 허수아비의 목을 잘라낸 베릭. 처음으로 제 뜻대로 검이 움직이는 기분이었다. 거친 숨이 환희와 쾌락으로 젖어있었다.
"하하…. 이거지, 씨발."
대체 뭘까. 훈련의 성과가 슬슬 나타나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낮에 계속 쓰러져 있어서? 어찌하여 햇빛 아래 금발 아이가 떠오르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베릭은 다시 한번 검을 쥐었다.
제16화. 마검사
훈련장의 분위기가 조금 어색했다. 겉으로는 어제와 다를 바 없이 곳곳에서 열기가 솟구쳤지만, 알게 모르게 모두의 신경은 한곳으로 향했으니.
바로, 그들이 모시는 가문의 도련님들이었다.
"몸은 제대로 풀어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상 위험이 커요."
"으으. 이렇게?"
도련님들의 체력 단련은 데오의 몫으로 떨어졌다. 여전히 부상을 핑계로 놀고 있는 자는 그뿐이었고, 무엇보다 성정과 별개로 실력은 우수한 자인지라 데르가가 믿고 맡긴 것이다. 그의 임무에는 이안을 감시하는 것과 문제 시 즉결처분까지 포함일 터.
"형님. 팔을 더 뒤로 뻗으세요."
"아, 안 되는걸? 너무 아파."
하지만 이안은 겉보기에 아주 성실히 첼을 도왔다. 데오가 있는 이상 모든 행동은 데르가의 귀로 들어가지 않겠는가? 오해를 사는 건 어리석었고, 방심을 부르는 건 현명한 처사다.
"기초 체력부터 시작할 건데, 중간에 포기할 수 없습니다. 한 시간 정도 달린 후 목검 자세를 봐드리겠습니다."
콧잔등이 축축해진 첼이 죽을상으로 입을 비죽였다. 시간이 갈수록 해는 더 뜨거워질 게 분명했다. 데오는 시계를 확인하며 두 아이의 표정을 살폈다.
'거칠게 굴리면 이 짓도 며칠 하고 말 것이다.'
귀찮은 것도 귀찮은 것이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둘은 훈련장에 얼씬도 하지 말아야 했다. 이안은 천려족으로 팔려가니 그렇다 쳐도 특히나 첼. 저 아이는 해가 지날수록 브라츠 백작을 따라 손 거드는 일이 많아지지 않겠는가. 혹여 사병 통솔권이라도 넘어가면 밥그릇 뺏기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나저나 기사들은?"
천천히 몸을 풀던 이안이 질문했다. 어제도 생각했던 거지만, 훈련하는 자들 대부분이 거칠고 투박한 느낌을 풍겼다. 기사 특유의 정제된 분위기를 가진 자는 보이지 않았으니.
'데오 저자부터가 기사가 아니니 당연하겠지만.'
데오는 작위가 없는 것 같았다. 집안 사용인들 모두가 그를 제각각 불렀기 때문이다. 수많은 호칭 중 '기사'라는 단어는 들어보지 못했으며, 가문의 와펜 따위도 붙인 꼴을 못 봤다.
"그 작자들은 고귀하신 몸이라 전용 훈련장에서 따로 지냅니다. 이쪽은 다 곡괭이 잡다가 검 잡은 놈들뿐이지요. 왜요? 기사에게 수업받고 싶습니까?"
데오가 막대기로 바닥을 툭툭 치며 웃었다. 오늘따라 유독 치아가 시커멓구먼. 말투가 껄렁껄렁한 것이, 트집 잡히기만을 바라는 사람 같다.
"되었네. 각자 맞는 선생이 따로 있지 않겠는가?"
데오 너는 초심자에게 딱 어울리는 수준이라 돌려 말한 것이다. 하지만 거기까지 이해하지 못했는지, 그는 귀만 심드렁하게 후비며 등 돌렸다.
"자아. 그럼 뛰겠습니다."
기사 없는 영지는 없다. 어느 영지든지 기사들은 정예 중의 정예였다. 그건 브라츠 영지도 마찬가지. 은밀히 호위와 명령을 수행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타앗!
'변경이니 최대로 잡으면 열 명 정도.'
황궁의 지방 견제로 인해 귀족들이 유치할 수 있는 기사 수는 정해져 있었다. 흔히들 인정하는 기사라 함은, 실력과 경험으로 공인된 자들이기 때문이다. 크고 작은 마물 전투나 타국과의 전쟁 등등. 오합지졸 농민 출신 검사와는 비교되지 않을 전력이다.
'실력이 꽤 좋은가 보지.'
변경에서, 그것도 천려족과 대적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보름 가까이 이곳에서 지냈건만 단 한 번도 기척을 느낀 적이 없었다. 철저히 데르가의 그림자라는 뜻이다.
"계속 뜁니다!"
"허억…. 허억...."
첼이 침을 질질 흘리며 발을 끌었다. 고작 두 바퀴째 일어난 일이었다. 이안은 가볍게 숨을 고르며 그를 앞서갔다.
터덜터덜 걷는 데오가 이안을 힐끔거렸다.
'꼴에 호흡 조절하는 법도 아는군.'
체력이 좋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영특하게 몸 놀리는 법을 알고 있었다. 점점 뒤처지는 첼과 달리 이안은 꾸준히 데오의 뒤를 따라붙었다.
그리고 그 반대편.
검을 들고 대련 중인 두 아이.
"으아아악!"
"베릭, 이 미친, 아니!"
타악! 타악!
몰아치듯 검을 휘두르는 아이는 베릭이었다. 상대는 뒷걸음질 쳤지만, 이는 압도적인 힘의 차이에서 오는 밀림이 아니라 그저 몰아쳤기에 나오는 반응이었다.
그걸 안 베릭의 표정이 개운치 않았다.
"시발!"
이상했다. 어젯밤만 하더라도 몸이 날아갈 것처럼 가볍지 않았던가? 자고 일어나니 먹지도 않은 약빨이 떨어진 기분이다. 베릭은 점점 사라져가는 묘한 감각을 붙들기 위해 필사적으로 검을 찔렀다.
"야! 적당히 하라고!"
타악!
받아주던 동료가 짜증을 이기지 못하고 소리쳤다. 동시에 맞부딪힌 검이 원을 그리며 날아갔다. 그제야 베릭은 멈추며 숨을 골랐고, 동료는 재수 없다며 침을 뱉었다.
"그러니까 하기 싫다고 했잖아!"
"아침에 내기에서 진 건 너야. 메이럴."
누구도 베릭과 대련을 원하지 않았다. 설렁설렁하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실전을 방불케 하는 베릭의 기세에 다친 훈련병들도 몇 있었다.
동료들이 낄낄대며 메이럴을 놀려댔고, 그는 욕설을 중얼거리며 휴게실로 들어갔다. 혼자 남은 베릭이 떨어진 목검을 주워들었다.
"베릭."
이제는 익숙한 목소리다. 그가 붉은 눈동자로 이안을 쳐다봤다. 땀에 젖은 그가 말갛게 웃고 있었다.
"뭡니까."
"이제는 꺼지라고 안 하는구나."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확실히 그때 맛이 갔긴 갔나 보군. 저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니."
사실 아까 전에 알았다. 지난날, 자신에게 물을 부어준 것이 서자 이안이라는 것을. 가주의 영식들이 훈련장에 나온다며 사방에서 씹어대니, 저도 모르게 들은 것이다.
이안이 방긋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뭐. 괜찮다. 땡볕 아래에서는 모두가 눈머는 법."
베릭은 대꾸할 마음이 없었다. 경을 치려면 쳐라, 이런 태도였다. 사실 어린 서자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만은. 천천히 검을 끌며 그늘로 이동하자, 이안이 따라붙었다.
베릭이 인상을 찌푸린 채 돌아봤다.
"첼 형님이 오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거든. 천천히 쉬면서 걸으려 한다."
뒤에는 데오가 첼을 거칠게 잡아끌고 있었다. 더는 못 가겠다며 쓰러지면 일으키고, 다시 넘어지는 것으로 정신이 없다.
"좀 먹을래?"
이안은 주머니에서 잘 말린 육포를 꺼냈다. 하인들이 훈련할 때 배곯지 말라고 챙겨준 것이다. 사람의 환심은 이토록 근본적인 데서 온다.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이 시작이요, 그것이 기본적일수록 효과가 좋다.
하지만.
"싫은데. 요."
"어찌하여?"
"먹을 이유가 없으니까."
베릭은 망설임 없이 쳐냈다.
의외였다. 아무리 데르가가 사병 확충에 신경을 쏟고 있어도 고아 출신 병사가 풍족하게 지낼 리 없었다. 그저 바깥에 있었을 때보다 입에 풀칠은 한다 정도겠지.
"그만 비키. 시죠."
"말이 영 이상하구나. 존대할 거면 제대로 하거라."
"...."
그래도 녀석은 단호했다. 자신이 서자 이안인 것을 알면서도 행동에 변화가 없다라. 친절과 호의를 철저히 거절하는 자세였다.
까탈스럽다 생각하는 것도 잠시. 이안은 이것이 오히려 잘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래. 심복보다는 수족이 필요한 거니까.'
사사로운 것에 관심이 없다면, 높은 확률로 자신만의 신념이 있을 것이다. 그것만 충족시켜주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계약을 맺을 수 있겠지.
물론 정석은 신뢰와 믿음을 바탕으로 주종관계를 얻는 것이지만.
드르륵.
베릭은 붕대로 자신의 오른손과 목검을 칭칭 감았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휴게실 문을 열고서 동료를 불렀다. 정확히는 방금까지 대련하던 메이럴이라는 자를.
"메이럴. 나와."
"더위를 처먹었나, 어디서 이름을...."
"승부가 나지 않았어."
정녕 미친놈 아닌가. 메이럴이라는 아이가 인상을 팍 찌푸리자, 맞은편의 거구 사내가 대신 일어섰다. 체격이 베릭의 두 배는 되어 보였다.
"…어제부터 자꾸 까부네. 응?"
"꺼져. 너한텐 볼일 없으니까."
"메이럴도 너한테 볼일 없다잖아!"
콰앙!
남자가 베릭의 머리를 잡고 그대로 벽에 찍어 눌렀다. 아주 순식간의 일이었다. 베릭은 익숙한지, 주춤하지 않고 치고 나와 목검을 휘둘렀다.
"꺼지라고!"
퍼억! 퍽!
이안은 육포를 질겅거리며 그 모습을 지켜봤다.
확실히 베릭의 성격이 정상은 아니다. 폭력에 대해 두려움이 전혀 없는 것처럼 굴지 않나. 게다가 강한 힘과 승부에 집착하는 면모까지.
퍼억! 퍽!
안타까운 것이라면, 기세와 달리 현실은 냉정하다는 것. 베릭이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체격이 두 배나 차이나는 사내를 이길 순 없었다.
"미친! 새끼가! 작작 좀! 하라고!"
퍽! 퍽!
빠악!
공을 차듯 남자가 베릭의 복부를 내려 찼다.
으음. 저건 좀 아프겠는데? 이안이 속으로 걱정함과 동시에 베릭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사내는 별것 아니라는 듯 손을 털며 낄낄댔다.
"자꾸 까불면 오래 못 산다? 일찍 죽으면 고맙겠지만. 하하하!"
"끄어억...."
베릭은 대자로 누운 채 숨만 꺽꺽댔다. 이안이 그의 얼굴로 가 쪼그려 앉았다. 베릭의 시선으로 금빛 머리칼이 흘러내렸다.
"저놈 혼내줄까?"
이안의 속삭임에 베릭이 눈을 감았다.
"…꺼지라고 시발."
"왜? 이기고 싶지 않아? 세상에 이기는 방법은 여러 가지거든."
아무리 서자라 한들, 이안의 말 한마디면 저런 훈련병 하나쯤은 가볍게 처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베릭은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그런 건 의미가 없으니까."
강한 힘. 오직 그것만이 세상을 살아가는 기준이었다. 아비의 폭력에 가족 모두가 무릎 꿇고 빌 때도, 강도의 무자비한 칼질로 집안이 피로 물들어도, 베릭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저 지켜볼 뿐.
이러한 사정까진 몰랐지만 이안은 그 뜻을 알아챘다.
"그래. 그게 네 의미구나."
그때, 저 멀리서 첼이 뒤로 쓰러졌다. 난감해하는 데오와 주위의 사내들이 삼삼오오 몰려들어 첼의 몸을 흔들어댔다. 베릭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대꾸했다.
"진짜 한 번만 더 말 걸면 죽인다."
"근데 꼴이 이러해서…. 쯧쯧."
"아이씨-"
이안은 베릭의 눈에 손을 올렸다. 쪼그려 앉은 채 숙이고 있어서 다른 사람들에겐 본인의 얼굴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첼이 뒤로 쓰러지는 바람에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나한테 아주 괜찮은 방법이 있는데 말이지."
손바닥 아래로 베릭의 시선이 느껴졌다. 뜨겁다 못해 활활 타오르는 기백이다. 동공이 괜히 붉은색이 아닌 것 같다.
"네가 원하는 그 강한 힘. 내가 줄 수도 있거든."
"헛소리하네. 미친 새끼가."
"너에게 필요한 것을 준다면, 너 역시 나에게 필요한 것을 줘야 한다."
자못 진지한 목소리였다. 베릭이 침묵하자, 이안은 낮게 웃었다. 차마 대답하지 못 하는 게 의외였다. 그저 흘러가는 말이라도 쉬이 못 하는 걸 보면, 경박한 말투와 달리 진중한 성격인 듯 싶다.
지이잉.
이안은 망설임 없이 마력을 흘러 넣었다. 어제보다는 조금 더. 하지만 여전히 각성하기에는 모자라다. 마검사가 스승을 모시는 기간이 최소 1년이니, 그 역시 그만한 시간을 공들여야 할 것이다.
"...!"
베릭의 손끝이 꿈틀거렸다. 몸을 잠식한 고통이 순식간에 물에 씻겨가는 기분이었다. 시원하다 못해 차가운 것이 정신을 깨웠다. 베릭은 쿵쿵 뛰는 심장 소리를 귀로 들으며 벌떡 일어났다.
"어허."
놀라서 손을 떼는 이안. 그 틈으로 아이의 금빛 눈동자와 시선이 부딪혔다. 맞물리는 것도 잠시.
베릭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죽었던 신경이 살아나는 것처럼 모든 게 예민하다. 자신을 때려눕혔던 사내가 팔짱을 낀 채 첼을 구경하고 있었다.
"쯧쯧. 처음부터 저러면...."
"이래서 브라츠 백작님이...."
목소리가 늘어지듯 귓가에 맴돌았다. 베릭은 눈을 반짝이며 반사적으로 뛰었다. 마치 맹수가 신호를 받고 튀어 나가는 것 같다. 목검도 거추장스러운지, 던져버리고 주먹을 뻗었다.
타앗!
"으아아악!"
"...?"
기합 소리에 고개를 돌리는 사내. 그가 마주한 것은 피 칠갑이 된 채로 달려드는 베릭이었다. 어찌 된 일인지, 바람 한 점 불지 않건만 그의 머리칼이 휘날렸다.
오직 이안만, 그게 마력의 흐름임을 알았다.
제17화.적
순식간이었다. 갑작스러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사내의 몸뚱이가 뒤로 나동그라졌다. 베릭은 그 위에 올라타 무자비하게 주먹을 꽂아 찍었다.
퍼억! 퍼억!
"어...."
옆에 서 있던 일행들이 잠시 멍하게 그 모습을 지켜봤다. 아무리 급습을 당했다고는 하나, 고작 주먹 한 방에 쓰러질 덩치가 아니지 않은가. 금방이라도 아까처럼 베릭의 머리채를 잡고 던질 것 같은 자인데.
일방적으로 당하고만 있다.
"저, 저거 말려! 말려!"
"미친! 뭐 하는 거야! 베릭!"
"이 새끼가 처 돌았나!"
하지만 깔린 녀석의 반응이 이상했다. 기절한 것처럼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고 처참하게 무너져내렸다. 동료들은 그제야 기겁하며 베릭에게 달려들었다.
"비켜-!"
"정신 차려!"
베릭의 숨결은 거칠고 불규칙적이었다. 약이라도 먹은 것처럼 기세가 맹렬하다. 훈련생 다섯 이상이 붙어서 겨우 그를 끌어내릴 수 있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무슨 일이지?"
소란에 데오와 교관들이 달려왔다.
널브러진 거구의 사내와 피를 갈구하는 베릭. 무기 없이 주먹만으로 일어난 상황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거꾸로 베릭이 쓰러져 있으면 이해라도 하겠다만.
"하아… 하아…. 하하하!"
"이거 완전 미쳤습니다! 교관님!"
"베릭 이 자식이 갑자기 달려들었어요!"
베릭은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웃음을 터트렸다. 시원하다는 표정이 아주 가관이다. 그의 몸을 몸으로 누르고 있던 훈련생들이 질색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교관이 발로 그의 턱을 올렸다.
"베릭."
"아. 시발, 이 맛이네."
"베릭!"
"대련 중에 끝났다고 등 보인 새끼가 등신이지!"
바락바락 내지르는 괴성이 소름 끼치게 뜨거웠다. 교관은 대꾸할 가치가 없다는 듯 얼굴을 발로 깠고, 이내 베릭의 고통스러운 신음이 터졌다.
"저자는 의무실로 옮기고, 베릭은 포박하여 처벌실로."
교관의 말에 다들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질질 끌려가는 베릭과 이안의 시선이 맞물렸다. 이안의 덤덤한 표정과 달리, 그는 보물을 발견한 모험가처럼 흥분한 눈빛이었다. 만족스러운 쾌감에 어쩔 줄 모르나 보다.
'확실히 미친놈이군.'
이안 역시 훈련생들의 말에 동감하는 바다. 지금껏 봤던 마검사 중 손에 꼽을 정도로 지랄 맞는 녀석인 것 같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만큼 전투에 있어서 두려움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지. 죽음을 두려워 않는 전사에게 적수는 없다.
"이안 님."
"아."
데오가 이안에게 다가오며 눈썹을 찡그렸다.
"저놈이 뭔 짓 했습니까?"
내용과 달리 전혀 걱정하는 말투가 아니었다. 그저 형식적으로 묻는 것에 가까웠다. 이안은 소매를 툭툭 털며 대답했다.
"아니. 욕이나 한 사발 얻어먹었네."
"…오늘은 아쉽지만 마무리해야겠습니다. 첼 도련님 상태도 그렇고, 훈련장이 어수선하여."
첼이 그늘에 대자로 뻗어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통통하게 오른 배가 힘들게 오르락내리락했다. 그저 움직인 것에 의의를 두는 셈이다.
그뿐만 아니라 사내가 깔려 있던 자리에 피가 낭자했으니, 확실히 오늘은 공친 것이 분명했다. 이안의 목적이 훈련에만 있다면 말이다.
"그러지. 근데 저 베릭이라는 자 말일세."
등을 돌리던 데오가 이안의 부름에 멈추었다.
"처벌은 어떻게 되나?"
"워낙 말썽이 많은 녀석이라 회의를 해봐야 알 것 같지만, 아마 채찍 맞고 쫓겨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껏 지급했던 급료 역시 피해 보상이라는 명목으로 몰수당할 터. 이안은 무표정으로 걸음을 옮겼지만, 속으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나, 잘 되었다.'
지금 베릭의 신분은 데르가 브라츠의 사병. 하지만 쫓겨나가 자유로워진다면 관계 맺는 게 훨씬 수월할 것이다. 맹목적으로 강함을 쫓는 자이니, 분명 방금 느낀 의문스러운 현상에 이안을 찾아오겠지.
'저런 성정으로는 채찍 맞은 당일에 기어서라도 찾아올 것 같군.'
이안은 베릭이 사라진 훈련장 뒷문을 쳐다보며 설레설레 고개 저었다.
불꽃같은 자다. 「계약 마법」이 가능하다면 그걸로 제어하겠지만, 당장 이안에게는 무리였다. 짐승 다루듯 이리저리 잘 구슬려야 할 것이다.
"헉, 헉...."
"형님. 괜찮으십니까?"
"…나는, 나는 못 하겠다. 진짜 못 하겠어!"
첼이 거의 울부짖으며 짜증을 부려댔다. 이안의 금빛 눈을 보고 나서는 큰 목소릴 낸 적이 없는데. 진실로 힘에 부치는 모양이었다.
"알겠습니다. 형님은 앞으로 알아서 하세요."
다만 너 때문에 백작이 자신의 단련 기회를 끊어버린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의미로 미소를 보였다.
알아들었는지는 모르겠다. 첼은 땀을 훔쳐내며 꼼지락 일어섰다. 바닥의 피 웅덩이는 끔찍했고, 어디선가 들리는 채찍 소리와 괴성도 두려웠다.
훈련장은 정말이지 자신과 맞지 않는 곳이라, 첼은 다시 한번 깨달았다.
* * *
그리고 다음 날.
몰린 경과 함께하는 공식적인 세 번째 오찬이 시작되었다. 한층 더 만개한 정원의 꽃들로 주위가 화사했다. 몰린과 맥, 드고르는 이전보다 훨씬 편하게 식사를 주도했다.
"그래서 제가 그때 영애께 부탁드렸지요."
"아하. 그 얘기는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부인께서도 분명 알 것 같았어요."
전처럼 의미심장한 말을 흘리지도 않았고, 데르가와 기 싸움을 하지도 않았다. 이안을 시험하는 듯한 화두 역시 쏙 들어가 보일 생각이 없다. 백작 부인 메리를 중심으로 시답잖은 사교계의 가십거리만 입에 올렸다. 분명 이안과 뒤에서 통하였기에 나타난 변화다.
한참 침묵하던 데르가가 한마디 던졌다.
"몰린 경."
"네. 브라츠 백작님."
"이안이 영지 구경은 잘 시켜주던가요?"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었으나, 이렇다 할 흔적이 없다. 첼과 데오는 아무것도 모르고, 브로치는 바쁜 와중에 세 번이나 확인했다. 하지만 꼬투리 잡을 것이 전혀 없다.
"첫 나들이라 오찬 후 공원에 갔었지요. 날씨가 아주 좋아 걷는 재미가 있었답니다. 학식 토론도 훌륭하여 그날의 추억이 선명합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오."
"아참. 이안 님. 오늘은 저번에 말씀하셨던 방을 구경시켜주시겠습니까?"
방? 무슨 방? 이안이 짧은 순간 기억을 되살렸다.
몰린이 처음 외출을 제안했을 때, 그가 장난식으로 묻지 않았던가. 자신의 방을 구경하지 않겠냐며.
이안은 데르가를 힐끔거리며 웃었다. 접시 위의 스테이크가 깔끔하게 사라진 상태. 허락만 떨어진다면 이대로 일어서서 식사를 마무리하는 게 좋겠다.
"괜찮을까요, 아버지?"
"저도 함께하고 싶지만...."
데르가가 동행하려 했으나, 정원 입구에서 서성이는 보좌관의 존재감이 강력했다. 낑낑대는 강아지처럼 이리저리 움직여서 더 그런 것 같다. 분명 급한 업무가 남은 것이다.
"부인께서 손님 접대를 마무리하시오."
그는 속으로 혀를 끌, 차고서 메리 부인을 쳐다봤다. 당부하듯 지시하는 태도가 강압적이다.
"네. 그러지요."
한바탕 싸운 이후로는 더더욱 냉기가 돌았다. 그나마 손님들 앞인지라 체면 챙기는 것이 저 정도.
메리 부인은 냅킨으로 손을 닦으며 화사하게 웃었다. 무대 위 배우가 표정을 바꾸는 것 같다.
"그럼 이만 일어날까요?"
"좋습니다. 오늘도 잘 먹었습니다. 좋은 식사였어요."
모두 식기를 내려놓자, 뒤에 대기하고 있던 하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중 한 명이 기다렸다는 듯 부인에게 다가와 뭔가를 속삭였다.
"아."
"무슨 일이시지요? 부인?"
"죄송합니다. 메렐로프 부인의 시종이 정문에서 기다리고 있다 하는군요."
"이웃 영지의 메렐로프 백작 부인 말씀이십니까?"
맥이 조금 놀란 듯 되물었다. 메렐로프 백작이라. 변방이다 보니 사교계에서 그리 유명할 것 같지는 않은데…. 메리 부인의 태도로 보아 상당히 잘 아는 눈치였다.
메리 부인 역시 동의한다는 뜻으로 웃었다. 비웃음이 잔뜩 섞인 웃음이었다.
"네에. 제가 받을 게 있어서. 이안. 손님들을 먼저 방으로 모시겠니? 홍차를 먼저 올리겠습니다."
부인이 우아하게 양해를 구했다. 데르가 역시 마지막 인사를 하고서 집무실로 올라갔고, 이안은 손님들과 함께 별채 방에 당도했다.
끼익.
"역시 방은 주인을 닮는다더니만, 아주 화사합니다."
맥이 주위를 둘러보며 칭찬했다. 소파에 둘러앉은 세 사람. 이안은 양피지와 펜대를 가져오며 자신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붉은 브로치가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두가 알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맥 경."
"필체를 연습한다 하시던데. 구경해도 됩니까?"
"물론이지요."
맥과 드고르는 공백을 메꾸기 위해 끝도 없이 떠들어댔다. 메리 부인이 오기까지 얼마 없는 시간. 이안은 펜대를 잡고서 간단한 문장을 써 내려갔다.
-제가 무엇을 하면 됩니까?
-혹 데르가 백작의 서재에 출입이 가능합니까?
-마력석 재생을 위해 줄곧 올라갑니다만.
집무실을 찾는 서두. 이안이 예상했던 세금 관련 문제일 가능성이 컸다. 몰린은 쉬운 말을 고르듯 잠시 멈칫거렸다.
-영지에서 수확되는 곡물의 총 수확량과 몬느에 산맥의 탄광 생산량을 확인해야 합니다. 또한, 작년 여름부터 현재까지의 농민 세율확인서도요. 필사가 좋겠지만 어렵다면 숫자만 표기하여 인장을 찍어 오면 됩니다.
보유한 탄광이 있긴 있었구나. 그래봤자 석탄이니 큰 재산은 아닐 터.
상세한 목록이 없더라도 인장이 찍혀있으면 내부고발자의 신고로 간주하여 강제 수색이 가능했다.
그토록 귀족들이 인장을 귀하게 여기는 이유였으며, 보편적인 충성심의 척도로 인장을 맡기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브라츠 가문이 세금을 횡령했다는 말씀입니까?
-아직 심증만 있습니다.
이안은 머뭇거리는 척 연기하며 물었다.
-횡령은 가문을 멸하는 중죄인데요.
멸문하지 않겠다는 맹세가 필요했다.
브라츠 성이 사라지면, 이안의 자리 또한 사라지는 것이니까. 그뿐인가? 데르가의 피가 섞인 이상 황궁 노예가 될 가능성이 컸다. 횡령한 세금을 충당하기 위해 인생을 바쳐야겠지.
-제가 입적을 반대하면 이안 님은 브라츠 가의 사람이 아닙니다. 극형은 면할 것이고, 국경 또한 넘을 일 없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이것들 봐라?'
역시나 몰린은 원하는 답을 내주지 않았다. 이안이 이후 처리 과정을 모를 것이라 생각함과 동시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태도였다.
마력운용자라면 몰라도, 평범한 사창가 출신 아이에게는 그것이 대가로 충분하다 여기는 것 같다.
'당연한 선택이다만, 좀 곤란한데.'
입지가 입지인 터라, 대놓고 가문의 존속을 요구할 수 없었다. 일단 데르가를 끌어내리려면 황궁 쪽 힘이 무조건 필요한데. 그렇다고 엄하게 생각이 깊다는 걸 들키면 곤란해질 것 같았다.
"아."
골똘히 생각하던 이안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탄성이 흘렀다.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맥과 드고르가 돌아봤다.
"이안 님?"
"죄송합니다. 혀를 씹었어요."
"조심하세요. 작은 상처가 아픈 법이랍니다."
몰린의 다정한 걱정이 다정하게 들리지 않았다. 이대로 끌려간다면 살길은 어디에도 없다. 이안은 방금 떠올린 수를 가다듬으며 글자를 써내렸다.
-그렇다면 한 가지 제안할 게 있습니다.
-부디 편하신 대로.
황궁의 처단에서 신변을 보호할 방법이자, 영지의 소유권을 지킬 방법. 적의 적은 친구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데르가와 황궁의 공통된 적이 아직 남아 있었다.
-입적은 하지 않되, 천려족은 만나겠습니다.
제18화. 준비
입적은 않되, 천려족을 만나겠다?
몰린의 표정이 볼만했다. 당황과 황당 사이의 어떤 감정. 그는 턱수염만 연신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닫았다. 이안이 무슨 의도인지 파악하려는 것이다.
천려족을 만난다는 건 곧 국경을 넘는다는 뜻. 이안 입장에선 죽는 길이 아닌가.
그의 머뭇거림에 맥과 드고르 역시 고개를 빼고서 양피지를 들여다봤다. 마찬가지로 표정이 볼만하게 변했다.
-천려족을 만나겠다는 뜻이 무엇인지 모릅니까?
-잘 압니다. 하지만 황궁에서 조사 나오면 아버지는 분명 저를 의심할 것입니다. 브라츠 영지에서 중앙 사람이라고는 몰린 경 일행뿐인데, 저택에서 가깝게 지낸 자는 저잖습니까. 혹시 심어둔 눈과 귀가 있다 한들, 제가 먼저 의심받는 건 자명한 사실입니다.
당연한 수순이었다.
황궁에서 친히 보름 가까이 내달려 조사관을 보냈다면 어느 정도 확실한 증거가 있다는 뜻이고, 확실한 증거라 하면 브라츠 저택에서 흘러나왔다는 의미다.
-저를 가만두지 않으실 겁니다. 조사관이 들이닥치는 순간 어떻게 될지 몰라요. 아버지의 성격상, 칼로 베며 심문하시겠지요. 그러니 저는 국경을 넘겠습니다.
세 남자가 시선을 주고 받았다.
사실상 아이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아비한테 죽든, 노예가 되든, 국경을 넘어가든 말이다. 그들이 원하는 건 브라츠 가문의 몰락이요, 그로 인해 차지할 영지의 가치였으니까.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안이 이것을 모를 리 없다.
화친이 유지되는 상황에서도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데, 가문이 사라진다면 그쪽에서 어떻게 나올 줄 안단 말인가? 차라리 어딘가에서 몸을 숨기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하면.
이안은 그들의 생각을 꿰뚫고서 문장을 이어 적었다.
-저와 어머니를 숨겨주시겠습니까?
몰린은 덤덤하게 양피지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지만, 맥과 드고르는 난감하다는 게 여실히 보였다.
몇 대째 내려오는 브라츠 가문을 함락시키는 일이다. 한시가 급하고 위험할 터인데, 서자와 어미까지 보호하기에는 부담이 컸다. 무엇보다 그들은 외지인이었다.
-브라츠 영지는 아버지의 손아귀 안에 있어요. 무리인 것을 잘 압니다. 그러니 저는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일단 국경을 넘겠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해요.
데르가가 건재한 이상, 이안의 뼈는 국경밖에 묻힐 수밖에 없었다. 도망친다 한들 갈 곳이 없으니까.
하지만 브라츠가 멸문당한다면? 아니. 적어도 가주 데르가만이라도 없어진다면?
이안은 돌아올 수 있다.
그리고 이전처럼 살아갈 수 있으리라.
'위험하지만 나쁜 선택은 아닐지도.'
맥이 눈썹을 매만지며 생각했다.
여기 있으면 아비에게 죽거나, 노예가 되거나 둘 중 하나겠지만 떠난다면....
'희망이 생긴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 모두의 기억이 흐려질 때쯤. 마을 사람들 틈에 섞여 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소리 없이 이안에게 박수를 보냈다. 펜을 가져와 끄트머리에 적는 글씨체가 반쯤 누워있었다.
-진정으로 운명을 개척하는 선택이다! 선생님. 저는 이만하면 들어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안의 도움으로 당장 증거를 확보하는 게 우선 아닙니까. 데르가 저자, 눈치가 보통이 아닙니다. 지체할 시간이 없어요.
몰린은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화친이 진행되면....
맥이 뒤이어 쓰려 하자, 드고르가 펜을 저지했다. 가볍게 도리질하며 꾸중하는 시선이다.
자신의 실수를 알아챈 맥이 이안을 돌아봤다. 안색을 살피는 시선이 영 멋쩍어 보였다. 이안은 대답 대신 문장을 완성했다.
-화친이 진행되면 여러모로 이득.
중앙 조사단과 데르가의 마찰로 영지가 어수선해질 거다. 그런데 그 틈에 천려족까지 기승을 부리면 곤란했다. 일단은 약속된 화친은 진행하는 게 안전하지 않겠는가? 후에 가주가 바뀌더라도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었다.
"이안 님. 바깥으로 자주 나가봅시다. 꽃이 만개할 때 떠날 것인데, 그 전에 아름다운 브라츠 영지를 눈에 담아두시어야지요."
모든 것이 차질 없게, 원래 예정된 봄날 모든 것을 진행하겠노라 말하는 것이었다.
몰린은 종이에다 손끝으로 자신의 가문 인장을 그려 넣었다. 명예를 중시하는 자들이 맹세할 때 하는 행동이다. 가문의 이름을 거는 만큼 절대적인 약속. 이안의 희생 아닌 희생에 고마워하는 눈치였다.
'인장이 특이하군.'
이안이 별 감흥 없이 그의 손짓을 새겨보던 때였다.
똑똑.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후식을 들이겠습니다."
"들어오시게."
다행히 메리 백작 부인이 아니다. 쟁반 가득한 찻잔과 주전자를 옮기는 하인들이었다. 그들이 분주하게 방으로 들어오자, 맥은 양피지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서 물었다.
"궐련을 한 대 태우고 싶은데요. 이안 님."
"피우셔도 됩니다. 창문만 열어주세요."
"고맙습니다. 이보게, 뚜껑 있는 재떨이를 가져다줘."
"네. 금방 갖다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부인이 좀 늦으시는군?"
메리 부인이 늦어진다면 담뱃잎과 함께 종이를 태울 생각이었다. 찰칵찰칵. 맥이 버릇처럼 라이터를 깔짝이며 묻자, 하인이 어색하게 웃었다.
"메렐로프 부인께서 이것저것 많이 보내셨더라고요."
"자주 그리 교류하시나?"
"네? 으음. 일주일에 두어 번씩 하인들이 오갑니다."
하인은 공손하게 금빛 재떨이를 대령했다. 창문을 열던 맥이 문득 익숙한 화분을 발견했다.
"그때 공원에서 산 화분이군요."
"희한한 꽃이에요. 만개한 상태로 오래가더군요."
"저택 사람들도 이게 뭔지 모른답니까?"
"네. 다들 처음 보는 식물이라 합니다. 혹여 독성이 있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흐응. 맥이 담배 연기를 훅 내뱉으며 시선을 옮겼다. 하인들이 모두 나가자, 재떨이에 고이 접은 양피지를 구겨 넣었다. 그리고 지그시 불을 지지며 끄트머리를 태워갔다. 희미한 연기가 창밖으로 휘날리며 사라졌다.
똑똑.
이번에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문이 열렸다. 메리 부인이었다. 그녀는 민망하다는 듯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늦어서 죄송하네요. 손님들 두고 예의가 아닌데."
"아닙니다. 부인. 메렐로프 백작 부인께서 귀한 선물을 보내셨나 봅니다."
"그쪽이 하완 왕국과 가깝다 보니 이것저것 신기한 게 많이 들어와서요."
"그렇습니까? 중앙에서도 보기 힘든 물건이 많겠군요."
맥이 구경하고 싶다는 뉘앙스로 물어봤으나, 메리 부인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여인들 쓰는 것이라 흥미가 없으실 겁니다. 그나저나...."
그녀는 차향을 음미하려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멈칫거렸다.
"이게 무슨 냄새지?"
"죄송합니다. 부인. 궐련을 태웠어요."
"어머. 그러셨구나."
이안을 노려보려던 눈초리가 사르륵 풀렸다. 순간적으로 방 관리가 안 된 줄 안 것이다. 메리는 화사하게 웃으며 다시금 가십거리를 꺼내 들었다.
* * *
한 시간.
오찬을 마치고 몰린 일행이 돌아가기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게다가 초반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메리 부인과 함께한 자리. 덕분에 브로치 확인하는 시간이 훨씬 짧았다.
데르가는 마력통에서 보석을 꺼내며 물었다.
"공백이 좀 있군. 설명해 봐라."
특히 부인이 들어오기 전까지.
데르가는 차려자세로 서 있는 이안을 날카롭게 훑었다. 딱히 긴장하거나 당황해하는 기색이 없어 보였다.
"맥과 드고르 경이 대화하는 걸 듣고 있었을 뿐입니다. 날씨가 너무 좋아 밖을 구경했고요. 전체적으로 평화롭고 조용한 분위기였습니다."
달그락달그락.
데르가가 브로치 굴리는 소리만 조용히 울렸다. 한껏 의심하는 표정이었으나, 이안은 알고 있다. 그것이 저를 겁주고 누르기 위한 협박이라는 것을.
"확인이 끝나셨으면 내려가도 되겠습니까? 가정교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 친필 서신을 쓴다고 했지?"
"네. 미흡하지만 노력해보겠습니다."
이미 무엇을 써야 할지는 다 준비되어 있었다. 브라츠 가문과 천려족의 화합을 함께 도모하자는, 필체 감별 외 하등 의미 없는 내용투성이일 것이다.
"나가 봐라."
"아버지."
이안의 부름에도 데르가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저 눈썹만 까딱거리며 말하라는 허락을 보였다.
"어머니께서 편지를 받으셨을까요?"
"…쓸데없는 걸 묻는구나."
쓸데없지 않다. 데르가에게 이안의 족쇄가 어미인 것을 의식적으로 되새기는 중이니까. 제 손에 목줄이 꽉 쥐어져 있노라 자만하게 만드는 거다. 하지만 그 끝에는 아무것도 없겠지.
"죄송합니다. 그럼."
이안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서 집무실을 나섰다.
몰린 경이 필요한 것은 횡령의 단서. 자세한 것은 황궁 조사관이 밝힐 일이니,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인장만 찍으면 문제없다.
'브로치는 책상 가운데 서랍. 따로 잠금장치가 없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말이지.'
각도 상 이안은 데르가의 정면이었기에 서랍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귀한 마력석을 보관하는 장소였고, 무엇보다 데르가의 서재에는 금고로 보이는 게 딱히 없었으니. 금고가 있다 하더라도 책상과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컸다.
어떻게 하면 책상을 뒤질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차.
"이안 님."
"해나?"
계단을 내려오니 해나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조심스러운 목소리와 좌우를 둘러보는 시선이 심상치 않다. 누가 보고 있는가 확인하는 자세다.
"무슨 일이지?"
"혹시 베릭이라는 자를 아십니까?"
"베릭?"
알다마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해나는 그럴 줄 알았다며 속삭였다.
"베릭이라는 자가 이안 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정문에서 농성 중이라 합니다."
그 모습이 상상되어 피식 웃음이 났다. 어미도 못 만나는 귀한 몸이건만, 사병단에서 쫓겨난 시정잡배를 만나게 해주겠는가?
"잠깐 보고 올 테니 교사에게 말 좀 전해다오."
"네. 이안 님."
해나는 후다닥 별채로 뛰어갔고, 이안은 정문으로 향했다. 확실히 정원관리사들과 문지기들의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이안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자, 경비가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어쩐 일이십니까?"
"내 손님이 찾아왔다고 하던데."
"그것이-"
문지기는 코를 긁적거리며 설명했다.
"전 훈련생 신분인데, 아무래도 저택에 앙심을 품고 있는 듯하여 물렸습니다."
이안을 찾아온 게 아니라, 그저 저택으로 들어가기 위해 구실로 삼았다 오판한 게로구나. 그래서 중간관리자 정도에서 보고가 마무리된 거다.
"건방지구나."
"네?"
이안이 인상을 찡그렸다. 난데없는 꾸중에 그가 눈을 끔뻑였다.
"아랫것들이 감히 주인의 손님을 함부로 가려? 나를 찾아왔다 하면 당연히 위에 묻고 상황을 진행해야지 그대가 무엇인데?"
'위'라 하면 데르가를 뜻하는 것이지만, 상관없었다. 숨길 일이 아니었고, 숨길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베릭을 수족으로 부린다 함은 곧 거둬들이겠다는 것이니까.
"…죄, 죄송합니다."
이안은 눈을 흘기며 고갯짓했다.
"문을 열어라."
"하지만...."
"나가지 않는다."
단호한 이안의 말에 문지기가 정문을 열었다.
끼익.
조금 떨어진 곳에 베릭이 반쯤 드러누워 있었다. 이안을 만날 때까지 여기서 먹고 잘 생각이었나 싶다.
"야!"
베릭이 금빛 머리를 발견하자마자 반사적으로 튀어왔다. 그 앞을 문지기의 창이 막았다. 하지만 베릭은 그들을 투명인간 취급하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너! 뭐야!"
그날의 금빛 눈과 의문스러운 힘을 말하는 거겠지.
이안은 방긋 웃으며 문 앞에 섰다. 문지기들에게 이른 대로 저택 밖으로는 나가지 않은 셈이다.
"몸이 아주 근사해졌구나."
줄줄이 그어져 있는 채찍 자국이 선명했다. 이안은 가까이 오라는 뜻으로 손짓했고, 그들은 저택과 바깥의 경계에서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다들 잠시 물러가."
"하지만-"
"집사를 부를까?"
이들을 직접 관리하는 건 데르가가 아니라 집사였다. 보고가 중간에 끊어졌다는 게 알려지면 크게 혼날 것이 분명했다.
그것도 다름 아닌 이안을 찾아온 자다. 다른 것들은 몰라도 서자에 관해서는 사소한 것이라도 관리하라는 명이 있었다.
"잠깐 동안만입니다."
문지기들이 조금 떨어졌다. 작게 말하면 들리지 않지만, 문제가 생길 시 빠르게 대응 가능한 거리. 이안은 베릭의 귀를 끌어당겼다.
"너. 내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구나."
"잔말 말고 그때 그게 뭔지부터-"
"나도 네가 필요하다."
이안은 베릭의 말을 잘라먹으며 속삭였다.
"그러니 지금부터 나를 따라라."
제19화. 정보원
"당장 잘 곳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 걸 잘 안다."
그간 받았던 급료는 피해 보상금이라는 이름으로 몰수되었을 게 빤했다. 말 그대로 맨몸 신세인 베릭이었다.
이전에 빌어먹던 주점에서 죽을 얻어먹었지만, 몇 날 며칠이고 이리 살 수는 없었다. 베릭이 눈썹을 찌푸리며 이안을 노려봤다.
"시발, 너 약 썼어?"
"그 정도였나 보군."
"가만 생각해 보니까 너만 만났다 하면 몸 상태가 그랬어. 뭔지 모르겠지만 사실대로 털어놓는 게 신상에 좋을 거다. 난 그딴 식으로는 안 싸우니까."
핏줄로 투지가 끓어오르는 기분. 주먹을 꽂아 넣을 때는 쾌감에 정신을 잃을 뻔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적인 반응이 아니지 않은가. 두 번의 경험에서 공통점이라고는 저 금발 머리 자식뿐이었으니.
"흐음."
이안은 느긋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조금 아쉽다는 태도였다.
"자세는 좋다만, 생각보다 아둔하구나."
"뭐?"
느닷없는 말에 베릭이 황당해서 멈칫거렸다. 이안은 팔짱을 끼며 문에 기대었다. 그리고 잘 생각해 보라는 듯 제 관자놀이 부근을 툭툭 두드렸다.
"처음 만났을 때 부어준 물은 내 것이 아니라 훈련생 중 한 명의 것이었다. 또한 육포는 그쪽이 거절하지 않았던가?"
그 외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다. 베릭의 얼굴이 점점 혼란스럽게 변했다. 사실 반쯤 확신하고 찾아온 것이기 때문이다.
"궁금한 걸 알려줄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전에 약속해야 한다."
사아악.
이안의 눈동자가 금빛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이전처럼 베릭에게 마력을 흘려보내지는 않았다. 여기서 망아지처럼 날뛰면 일이 어그러질 수 있으니까.
"먼저, 금안에 대해 함구할 것."
"아니, 그래! 이거!"
베릭이 펄쩍 뛰며 소리치자 뒤에 서 있던 경비들이 의아하게 돌아보았다. 이안은 뒤돌고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불손하게 굴지 말 것."
이안은 담담하게 베릭을 쳐다보며 경고했다. 마검사라는 힘이 필요해서 봐준 부분이 많았으나, 베릭은 그 정도가 과했다. 성격상 데르가 앞에서도 똑같이 행동할 것 같다만.
'그래서 마검사가 귀한가?'
제명을 재촉하다 못해 죽여주십사 목을 들이미는 성질머리. 아직 아물지 않은 채찍 상처가 그 증거였다. 베릭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그것뿐?"
"마지막으로. 온갖 위험에서 나를 호위해 주길 바란다. 그리하면 그날의 힘을 온전히 네 것으로 만들어주지. 혹여 오해할까 봐 덧붙이자면, 나는 그저 네 안에 숨어있는 힘을 끄집어낸 것뿐이다."
외부 힘에 의존하는 걸 질색하는 듯 보였으니, 못 박아 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베릭은 놀란 눈치로 눈을 끔뻑였다.
"내 힘이라고?"
"제안은 여기까지. 하겠다고 하면-"
"할게!"
"목소리를 제발 낮춰."
더 생각할 것도 없다며 소리치는 베릭의 작태에, 경비병들이 의심스러운 낯을 띄기 시작했다. 서로 수군덕거리며 뭔가를 의논해댔다.
"나와 함께한다는 것은 국경을 넘는 것도 포함이다. 다시 돌아올 때도 네가 필요할지는 모르지만."
"돌아와? 여기로?"
화친으로 팔려나간 제물이 어찌하여 다시 브라츠로 돌아올 수 있나? 아무리 베릭이라도 그것이 불가능인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대답은 명쾌했다.
"국경 넘는 게 뭐 대수라고. 어차피 집도 가족도 없는데 어딘들."
"죽을 수도 있음을 명심해라."
"여기 있으면 굶어 죽어."
그래. 곧 죽어도 존대는 안 하는구나. 이안이 어이없이 웃으며 그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이려다가 말았다. 몇 번이고 상소리를 들었는데, 이만하면 발전했다 싶었으니.
"그러니까 이제 시원하게 말해봐."
베릭의 눈이 뜨겁게 일렁였다. 강함을 추구하는 단순한 눈빛이었다. 이안은 잠시 쉬운 말을 고르다 물었다.
"마검사라고 들어는 보았나?"
"아니."
"그렇다면 마력은?"
"그것도."
"...."
서로가 서로를 기이하게 쳐다보며 침묵했다.
이안이 황제로 있던 시대에도 무교육자라면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하물며 이곳은 100여 년 전의 시골 변경. 고아로 길바닥을 전전하던 베릭이 모르는 게 당연할지도.
"이안 님.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습니다."
"교대할 시간인지라."
둘이 대화를 멈추자, 경비병들이 이때다 싶어 끼어들었다. 이안은 턱을 매만지며 베릭에게 당부했다.
"곧 부를 터이니 기다리고 있어."
"어? 저기? 잠깐만."
"얌전히 말이야."
마지막 말은 거의 부탁하다시피 덧붙였다. 경비병들이 거대한 문을 천천히 밀어 닫으려 하자, 베릭이 따라붙듯 뛰어들었다. 긴 창에 가로막혀 무산되었지만.
'분명 기다리라고 했는데.'
어찌 명령과 동시에 어기고 마는가. 안 그래도 할 것이 많은데, 신경 써야 할 게 하나 더 늘고 말았다.
이안은 혀를 끌끌 차며 별채 쪽으로 움직였다. 시간이 어중간해서 그런지, 복도에는 하인 한 명 보이지 않았다. 다들 청소 후 쉬러 간 모양이다.
똑똑.
"이안입니다."
이안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문을 열었다.
분명 교사가 기다리고 있으리라 생각했거늘, 방은 텅 비어 있었다. 코트와 가방 그리고 반쯤 식어 있는 찻잔으로 보아 돌아간 것은 아닐지언데.
"…어딜 간 거지? 선생님?"
화장실이라도 갔나 싶지만, 인기척이 아예 없었다. 이안은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누웠다가, 문득 고개를 들고 교사의 가방을 주시했다.
'데르가가 나를 감시하기 위해 붙인 자다. 분명 쓸만한 정보가 있을지도.'
이안은 그의 가방을 뒤적거리며 종이뭉치를 확인했다. 대부분은 수업을 위한 참고자료였다.
나머지는 라는 논문이었는데, 중간에는 작년에 발간된 학술지도 끼어있었다. 놀랍게도 발행처가 바리엘 대학이다.
'대학을 나왔다고는 하더니만, 그게 바리엘이었군.'
수재 중의 수재가 어찌하여 브라츠 변경에 있는 것인지는 짐작 가능했다. '대사막'이 천려족의 주둔지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블라스터해'는 사막의 끄트머리, 동방과 맞닿은 바다다.
스윽.
가방의 밑바닥까지 털어봤지만, 특별한 건 없었다. 이안은 자료를 잘 정리해 넣은 다음 낡은 코트를 뒤적거렸다. 주머니에 쓰레기가 들어있는 것 외에는 깔끔했다.
"음?"
소매 안쪽 깊은 곳. 의상실 라벨이 붙어져 있다. 옷을 디자인하고 만든 자의 이름이었는데, 옆에 찍힌 인장이 어딘가 익숙했다.
'…몰린 경이 썼던 인장과 비슷한 것 같은데.'
손끝으로 하나씩 선을 따라가며 그려봤다. 기억 속 몰린의 손짓과 많이 유사했다.
그 순간 다시 눈에 들어오는 '바리엘 대학'의 학술지. 바리엘 대학은 국가 운영 기관이었기에, 정부 쪽 사람과 연 닿을 기회가 많지 않은가? 이안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몰린 경의 눈과 귀가 가정교사였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얼추 알 만했다. 천려족에게 서신을 보내는 등의 정보는 하인들이 알 수 없지 않나. 이안은 코트를 정리하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소파에 앉았다.
'교사는 알고 있을까? 내가 몰린 경과 손잡았다는 걸?'
단순한 정보원이라면 거기까지는 알릴 필요가 없을 것이고, 그 이상이라면 뒤에서 이중으로 이안을 감시하고 있는 터.
그때였다.
끼익.
"이안 님?"
허겁지겁 들어오던 교사가 이안을 발견하고 흠칫거렸다. 살짝 배인 땀과 상기된 얼굴. 아무래도 굉장히 아슬아슬한 일을 하고 온 모양인데.
이런 경우는 보통 밀회이거나 염탐이거나 혹은 도둑질. 맨몸인 것으로 보아 염탐일 가능성이 컸다.
"볼일이 있어 좀 늦었습니다. 어디 다녀오십니까?"
"화, 화장실을요."
"화장실이라면 방에도 있는데요."
"그것이, 음...."
눈알이 데굴데굴 굴러갔다. 이안은 되었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책상에 앉았다.
"오늘 서신을 써야 합니다. 아버지께 들으셨죠?"
"네. 그렇지요. 내용은 전달받았고, 이미 써 왔습니다. 이안 님은 따라 쓰시기만 하면 됩니다."
안도의 한숨 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이안이 별로 관심 두지 않아 다행이라는 태도다.
어쩌면 저리도 서툴까. 정보원을 교사로 심어두었다기보다, 교사가 알고 보니 먼 방계였다는 가설이 차라리 더 그럴듯해 보였다.
"선생님. 오늘 늦을 것 같은데 댁에 연락을 넣어두라 할까요? 시간이 애매하여 저녁이라도 하고 가시죠."
이안은 그를 떠보기 위해 물었다. 그러자 교사는 땀을 훔쳐내며 곤란한 티를 냈다.
"괜찮습니다. 딱히 기다리는 사람이 없어서. 식사는 집에 가서 하겠습니다."
독신. 나이는 서른 후반인데 홀몸으로 타지에서 고생하는 가난한 귀족이라. 연구에 미쳐 여기까지 달려온 인생이 눈에 훤하게 보였다.
황궁에 있었을 때, 아주 가끔 저런 자들이 괄목할만한 성과를 보이곤 했지.
'수업에 의욕 없던 것도 이해가 된다.'
빨리 끝내고 돌아가서 제 연구를 해야 하니까.
이안은 글자를 베껴 쓰면서도 교사를 면밀히 주시했다. 확실히 켕기는 게 있는지, 그 역시 분위기가 묘하게 날 서 있었다.
사각사각.
양피지 긁히는 소리가 조용히 울리는 방 안. 이안은 가만히 생각했다.
'눈치가 몰린의 지시로 뭔가를 하려 한 듯싶거늘. 데르가의 집무실에 다녀오기에는 시간이 촉박했을 것이다.'
이안의 방은 별채 3층이었고, 데르가의 집무실은 본채 꼭대기였다. 제자가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거길 다녀올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분명 별채 어딘가에서 볼일을 봤다는 뜻.
1층은 간이 주방과 하인들이 쓰는 욕실 그리고 창고 따위가 있었고 2층은 집사와 아랫것들의 숙소가 있었다. 3층 이상으로는 다 손님방이요, 빈방이다.
"집사...."
집사의 방에 들린 건가? 이안은 일부러 말을 흘린 채 교사를 돌아봤다. 그는 소리 없이 대답하는 재주가 있는 듯하다. 얼굴이 시커멓고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집사가 오늘은 간식을 들이지 않는군요. 출출하지 않으십니까?"
"괘, 괜찮습니다."
이안은 피식 웃으며 나머지 서신을 써 내려갔다. 몰린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가능성을 여러 개 열어두는 게 안전했다.
이안이 실패라도 한다면, 그것도 데르가에게 들켜서 엎어진다면 뒷감당을 어찌하겠는가? 아마 교사에게도 모종의 지시가 떨어졌을 터.
'집사한테 볼일이 있나 본데.'
마스터키? 하지만 가주 중 집사에게 인장 접근권을 허락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차라리 금전 출납권을 맡기는 거라면 또 몰라. 데르가 성정 상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직접 알아보는 수밖에.
이안은 능숙하게 필사하며 교사를 쳐다봤다. 일단은 몰린과 손잡은 걸 모르는 눈치다. 저리 안절부절못하며 땀을 흘려대니.
그렇다면 이안도 딱히 밝힐 이유가 없다. 방긋, 웃는 아이의 얼굴에 교사는 안심한 듯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제20화. 문
"이안의 몸이 안 좋다고?"
"네. 백작님. 아침부터 배가 아프다 하시어 계속 침대에 누워계십니다."
브라츠 백작은 커프스단추를 잠그며 인상을 찡그렸다. 아침부터 식당 분위기가 미묘하다고는 생각했다. 아랫것들이 이상하게 먹는 것을 계속 힐끔거리지 않나.
백작은 하인들이 보고를 망설였다고 오인했다. 실상은 이안이 식사를 거름으로써 굶주린 상태라 그런 것이거늘.
"의사는?"
아들의 건강을 걱정하기보다, 화친 제물에 흠이 생길까 봐 우려하는 말투였다. 집사는 안도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진찰을 마쳤는데, 크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니라 합니다. 스트레스성 같다고 하더군요. 오늘내일 경과를 지켜보고 약을 짓겠다 했습니다."
"꾀병을 부리는 건가?"
"글쎄요. 요즘 들어 무리하신 건 사실이니까요. 원체 허약하시지 않습니까."
바람 불면 날아갈 것 같은 몸뚱이로 이리저리 어찌나 쏘다니던지. 처음 저택에 온 아이와 동일인물이라 짐작할 수 없을 정도였다. 데르가는 킁, 하고 콧방귀를 끼며 대꾸했다.
"어제 정문에서 소란이 있었다고 하던데."
"네. 백작님. 체벌을 준비할까요?"
"체벌은 무슨. 의사나 계속 붙여주면서 몸 관리 잘 해주거라. 곧 국경 넘을 놈이 미련 쌓아봤자 짐이라는 걸 아직도 몰라. 쯧쯧."
지금 저에게 얽히는 모든 것이 족쇄가 됨을 모르는 걸까?
마침 잘 되었다. 어미 하나로 아이를 잡아두기에는 슬슬 신경 쓰이던 참이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어미 필리아가 잠잠해졌기 때문이다.
이전처럼 아이를 만나게 해달라고 난리 치는 일도 없었고, 이안도 필리아의 안부를 묻는 게 예전 같지 않다.
'초반에 어미가 보고 싶다며 자지러지던 때와 비교하면 확실하지. 감정이 서서히 무뎌지고 있는 게야.'
게다가 이안은 주에 두세 번씩 몰린과 따로 만나고 있었다. 노인의 숨겨진 의도가 있는 게 분명하거늘 브로치는 언제나 깨끗했다.
이쯤 하니 슬슬 뭔가 수작질에 걸려들고 있다는 의심이 든다. 본능적으로 날선 감각 같은 것이다.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에릭?"
"베릭입니다. 백작님."
"이안이 만나고 싶다 하면 만나게 해주고, 최대한 형편을 들어주어라. 고아라고 했지?"
그는 어젯밤 교사가 가져온 필체 확인용 서신을 들어보았다. 지나가던 개가 봐도 까막눈의 글씨체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반듯해지긴 하다만….
데르가는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런 말이 있지. 연인을 잃으면 심장을 잃은 것과 같고, 친구를 잃으면 폐를 잃은 것과 같다고."
발은 어미라는 밧줄로 묶었으니, 이제는 친우라는 이름으로 손목을 묶어봐야겠다. 앞으로 남은 한 달 반간, 저놈이 국경을 넘어서도 브라츠 가문을 위해 한 몸 희생하게끔 모든 걸 단단히 준비해야 했다.
"이안에게 숨 쉬는 법을 알려줘. 친구가 얼마나 큰 힘이 될지 궁금하군."
그래야 나중에 숨통을 조이면 그 고통과 공포가 배로 돌아올 것이다. 데르가의 지시에 집사가 허리를 꾸벅 숙임으로 대답했다.
"저택 관리에 있어서 문제는 없겠지."
"물론입니다."
"집사. 나는 자네를 참 신뢰해."
"믿음에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기대하네."
"그럼. 나가보겠습니다."
타악.
집사가 나갔다. 데르가는 왁스 거치대에 불을 붙였다. 안쪽의 붉은색 왁스가 천천히 녹아내리기 시작하자, 서랍을 열었다.
드르륵.
그는 익숙하게 안쪽으로 손을 뻗었다. 둥근 홈이 느껴진다. 검지의 다이아몬드 반지를 돌려서 안으로 밀어 넣었다.
달깍.
그러자 명쾌한 소리와 함께 비밀 서랍이 하나 더 열린다. 겉으로 보기에는 별것 아닌 장치였지만, 사실 안쪽으로는 전류가 흐르고 있었다. 무턱대고 아무거나 쑤셔댔다가는 그 자리에서 전기 통구이가 되고 말 것이다.
예를 들어, 데르가가 집사에게 준 가짜 키 같은.
'이번 집사는 그래도 꽤 오래 가는군.'
예전에, 아주 예전에 집사 한 명이 데르가 집무실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적이 있었다. 몇 대째 내려오던 브라츠 가문의 쥐덫이 제대로 발동한 게다. 천려족과 내통한 것으로 의심되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
'예전 집사보단 눈치 빠른 자이니 알고 있을 수도.'
데르가는 인장 보관 장소라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은근히 이곳에 귀한 물건을 보관하고 있다 알려댔다. 이안의 앞에서도 브로치를 대놓고 꺼내지 않았는가.
스윽.
데르가는 서신 봉투 위에 왁스를 부은 다음, 브라츠 가문 인장을 가볍게 찍어 눌렀다. 가문을 대표하는 범의 모습이 생생하게 새겨졌다.
* * *
이안은 포근한 침대에 반쯤 누워있었다. 별채에 혼자 남으려고 수작을 부린 것인데, 예상외로 집안 사람들이 더욱 지극정성이다. 의사가 다녀간 뒤로 하인들이 온갖 먹을 것을 줄줄이 대령하는 탓에, 평소보다 더 복작복작하게 오전을 보낸 것 같다.
"해나? 밖에 있는가?"
"네. 도련님."
이안은 웃옷을 챙겨입으며 해나의 존재를 확인했다.
현재 시각은 오후 3시. 저택 하인들이 늦은 점심을 끝내고 본채 청소를 시작하는 시간이었다. 아직 아래층에 몇몇이 남아있지만, 그나마 제일 인기척이 드물 때가 지금이다.
"가자."
"네. 도련님."
이안은 해나의 도움으로 집사 방을 뒤지기로 했다. 망을 보고, 혹여 누군가 다가온다면 시선을 잡아주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말입니다. 정말 은화를 주시는 겁니까?"
당연히 위험 부담이 큰일이기에, 먹을 것 외 보상을 주기로 했다. 한배 탄 중앙처 귀족이 셋이나 있는데 은화 좀 못 얻을까.
"그래. 걱정하지 마라."
"걱정이 아니라, 은화를 받으면 무얼 사 먹을까 고민되어서 그렇습니다."
해나가 민첩하게 움직이며 복도 좌우를 살폈다. 아무도 없다. 이안 역시 발소리를 최대한 죽이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복도를 꺾고 사람이 드문 뒤쪽 계단을 이용하려고 할 때였다.
"아니. 그게 말이나 되니?"
"안 되지. 얘. 너 사기 당했어. 아하하!"
인기척이 들렸다. 하인 숙소 방문이 닫히고, 점점 멀어지는 것으로 보아 잠시 들린 것 같다. 해나가 먼저 내려가서는 문제없다는 듯 동그라미를 그렸다.
"저는 아래쪽 계단에서 지키고 있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큰소리를 낼 터이니 조심하세요."
"그래. 고맙-"
덜컥.
이안이 손잡이를 돌리다가 멈칫거렸다. 저택 안에서 잠긴 방은 좀처럼 찾기 힘들었다. 심지어 백작의 침실조차 언제나 열려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앞을 지키는 자들이 서 있긴 하지만.
"잠겼습니까?"
"…열리지 않아."
교사도 이러했나? 그날 눈치로 봐서 실패했을 거라 짐작하긴 했다. 하지만 이렇게 들어가지도 못했을 줄이야. 이안이 마력을 쓸까 말까 고민하자, 해나가 비키라는 듯 손짓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그리고 실핀으로 이리저리 문구멍을 들쑤시는 게 아닌가. 이안은 의구심 짙은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렇게 해서 문이 어떻게....
달깍.
"열려?"
"열렸습니다."
해나는 간단한 일이었다는 듯 손을 탈탈 털었다. 이안이 굉장히 놀란 눈치로 돌아보자, 아이는 실핀을 다시금 머리에 꽂으며 웃었다.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저 형제가 많다고."
"…그런데?"
"형제가 많은 집은요, 시도 때도 없이 문이 잠기고 열립니다. 불만이나 장난을 그렇게 표현하거든요. 이런 간단한 손잡이는 포크로도 열지요."
"내가 보았을 때는 재능인 것 같다만."
"이런 것도 재능이라 하면 동네 꼬맹이들 다 자지러집니다. 어서 일보세요."
해나는 자신이 사창가 근처에 산다는 건 인지하고 있어도, 그로 인해 영향받았다는 건 인지하지 못했다. 이렇게 문을 따거나, 몰래 전언하거나, 술과 물 따위를 바꿔 치는 건 평민들에게는 낯선 행위였다.
끼익.
이안은 일단 해나를 뒤로하고 집사의 방에 들어갔다. 침대와 책상 그리고 옷장 하나가 다인 조촐한 방이었다. 단정하다 못해 남루하게 느껴질 정도로 뭐가 없다.
"흐음."
이안은 방을 시원하게 가로지르며 둘러봤다.
뭘까. 교사가 집사에게서 뭘 얻고자 했을까.
옷장 문을 확 열자, 벽면에 열쇠 꾸러미가 달려있었다. 어림잡아 수십 개씩 열 묶음 이상. 아무래도 저택의 모든 열쇠가 여기 있는 것 같았다.
짤랑-
열쇠마다 용도가 적혀있었다. 1층 왼쪽 첫 번째 다용도실, 두 번째 다용도실…. 이안은 슥슥 넘기며 본채 집무실 묶음을 찾았다.
'여기 있군. 집무실, 집무관 간이침실.'
그리고 문득 그사이에 끼어있는 이상한 열쇠. 끄트머리에 구슬이라도 달린 듯 뭉툭했다. 어디에 쓰이는 것인지 적혀있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꽤 무거운 것이 일반 열쇠와 재질이 다른 것 같았다.
똑똑.
그때, 바깥에서 해나가 문을 급하게 두드렸다. 누군가 이 층으로 올라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안은 옷장 아래 상자를 열었다. 잡다한 서류와 신분증 그리고 영지 내 자유통행증이 들어있었다.
똑똑-!
한층 더 급해진 노크. 이안은 어쩔 수 없이 옷장을 정리하고서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힘과 동시에 계단을 올라온 하인과 눈이 마주쳤다.
"이안 님? 해나?"
"어쩐 일로 나와 계세요? 몸은 좀 어떠시구요?"
눈만 데굴데굴 굴리는 해나. 이안은 자연스럽게 시선 방향 그대로 걸으며 대답했다.
"종일 누워 있으려니 불편해서. 간단히 산책 좀 하려 한다."
"안 됩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절대 움직이지 말라 하셨습니다."
하인들은 부산을 떨며 이안의 등을 떠밀었고, 해나가 그 뒤를 총총 따랐다. 그들은 눈빛으로 신호를 주고받았다.
'원하는 걸 찾으셨습니까?'
'잘 모르겠다.'
기억에 남는 거라고는 낯선 모양새의 열쇠와 영지 내 자유통행증뿐이다. 책 한 권 없었으니, 교사가 뭔가를 얻고자 했다면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이안 님이 얼른 낫지 않으시면 저희가 혼나요."
"해나. 이안 님 귀찮게 하지 말고 나와."
"엇, 저기, 언니들! 잠시만-"
쾅!
하인들은 당부하고서 해나를 끌고 나갔다. 다시 조용해진 공간. 이안은 창가에 앉아 화분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뭉툭한 열쇠와 통행증 그리고 교사. 아무래도 그가 원한 게 무엇인지는 다음 수업 때 넌지시 찔러보아야 할 것 같다.
'어쩌면 열쇠 자체가 없는 걸 수도.'
데르가는 분명 브로치를 꺼낼 때 별다른 행동 없이 손만 넣었다. 지문 인식 같은 마력 기기가 있긴 하지만, 지금 시대에서 데르가가 가질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그때 문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쿵! 쿵!
복도를 울리는 발걸음 소리가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이안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문 쪽을 쳐다봤다.
데르가인가? 꾀병을 부렸다고 성질내러 오는 걸 수도 있겠다.
쿵!
문 앞에 멈춘 인기척. 이내 주먹으로 문을 때려 부술 듯이 내리쳐댔다. 이안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냐?"
"들어가도 된다는 뜻이겠지?"
익숙한 목소리임을 알아채기 무섭게, 문이 활짝 열렸다. 틈으로 보이는 붉은 머리와 눈동자.
"안녕허냐?"
한껏 의기양양한 표정의 베릭이 서 있었다.
제21화. 다이아몬드
"뭐...."
좀처럼 당황할 일 없는 이안이 말까지 더듬었다. 베릭은 휘파람까지 불어대며 안으로 성큼 들어왔는데, 물 흐르듯 아주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너, 분명 내가 기다리라고 했을 텐데?"
"난 잘 기다리고 있었어. 불러서 왔다고."
"누가?"
"집사라던데."
"뭐?"
"주점에 와서 언제든지 저택에 들어가도 된다더만. 그 얘기 듣자마자 바로 튀어왔지. 문제 있나?"
이안의 표정이 조금 복잡해졌다. 단순히 베릭이 거짓말하는 것 같진 않았다. 녀석 성미에 몰래 들어왔을 리는 없을 테고. 정문을 무사히 통과했다는 게 바로 그 증거니까.
베릭은 가만 서서 이안을 내려다봤다.
"...."
스리슬쩍 왼쪽으로 움직이는 시선. 베릭은 테이블에 놓인 과일과 빵 따위를 힐끗거렸다. 이안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먹어."
"앗싸. 사양하지 않겠다."
베릭은 게걸스럽게 두 손으로 음식을 입안에 밀어 넣었다. 그걸 가만히 보고 있자니, 이안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눈치챘다.
"그것만 말하던가?"
"너랑 계속 같이 있다가 보고하래."
"그걸 성실히 할 생각은 아니지?"
와구와구.
베릭이 과일을 씹어대며 이안을 빤히 쳐다봤다. 지금 자신을 뭐로 보고…. 검을 쥔 자는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았으며, 검의 방향 역시 한 곳만을 향하기 마련이었다.
"됐고, 빨리 말해봐. 그날 그거 뭔데."
"아. 맞다."
마력인지 뭔지 궁금해서 숨넘어갈 지경이다. 하지만 어쩌겠나. 이안이 함구하라 해서 죽은 듯이 그리 지냈다. 물론, 주위에 알 만한 사람이 없던 탓도 있지만.
"좋아. 잘 들어라."
이안은 베릭을 마주하고서 그가 내재한 경이로운 힘을 설명해 줬다.
세계의 원천이자 신의 존재를 감히 짐작게 하는 미지의 에너지. 베릭의 붉은 눈동자가 햇살처럼 화사하게 반짝였다.
"…말도 안 돼."
"따라서 마력이 몸의 기운을 막고 있었으니, 남들보다 뒤처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훈련해 봤자 제자리였겠지."
"그, 그걸 네가 뚫어준다고."
"…너는 경칭이 뭔지 모르는가?"
"와씨, 진짜 대박이네...."
베릭은 제 손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서성거렸다. 기쁨과 흥분으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훈련장에서 느꼈던 이질적인 힘이 정녕 자신의 것이라. 그는 벽에 머리를 박고서 웃음을 터트렸다.
"말이 안 통하는군."
"당장 시작할까? 난 뭘 하면 될지 알려줘."
이안은 그를 빤히 쳐다보며 침묵했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마력을 넣어주고 싶은데, 여기서 행패라도 부렸다가는 곤란하지 않은가.
그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베릭은 참기 힘들다는 듯 다리를 달달 떨어댔다.
"손."
"손!"
이안의 손바닥에 베릭의 손이 놓였다. 그는 손을 단단히 잡으며 경고했다.
"자제하는 법을 배워. 그렇지 않으면 며칠 동안은 죽어라 체력 훈련만 시킬 것이다."
"걱정 말고 어서!"
지이잉.
베릭의 대답을 듣자마자, 이안은 마력을 발동시켰다. 녹안이 금빛으로 변하면서 머리칼이 부드럽게 흩날렸다. 서로 맞닿은 부분을 타고 마력이 흘러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쿠웅! 쿵!
"어머."
"이게 무슨 소리지?"
아래층에서 볼일을 보던 하인들이 낯선 굉음을 듣고서 멈칫거렸다. 아무래도 이안의 방에서 난 소리 같은데....
똑똑.
"이안 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대답이 조금 늦다. 하인이 문고리를 돌리려는 순간, 이안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다. 테이블이 박살 났어."
"네? 어쩌다가요?"
멀쩡한 테이블이 어찌하여?
벌컥!
하인이 놀라서 문을 열자, 보이는 광경은 장관이었다. 산산조각이 난 가구들과 열 뻗친 이안 그리고 엎드려뻗쳐 자세인 붉은 머리칼 남자. 거꾸로 된 얼굴이지만 분명히 웃고 있었다.
"…저기."
"되었네. 나중에 청소나 해줘."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이안이 나가보라는 듯 손짓하자, 하인은 고장 난 기계처럼 삐거덕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 * *
"이안."
다음 날 아침 식사.
이안은 칼질을 멈추고 데르가를 쳐다봤다. 그와 동시에 백작 부인과 첼 역시 둘을 주시했다.
"새로운 친구를 만든 모양이더군."
모두 알고 있으면서 다시금 묻는 저의가 무엇이란 말인가. 이안은 나이프를 옆으로 치우며 웃었다.
"네. 아버지. 베릭이라는 자입니다. 훈련장에서 만났는데, 마음이 잘 맞더군요. 아마 첼 형님도 얼굴 보면 알 것입니다."
대답을 얼마나 상세하고 투명하게 하는가가 궁금한 것이다. 데르가는 계속해 보라는 듯 눈썹을 까딱거렸다.
"훈련장에서 쫓겨나 이제는 못 보는구나 싶었답니다. 아버지 덕분에 즐거운 시간 보냈습니다."
"쫓겨나? 왜?"
가만히 듣고 있던 백작 부인 메리가 되물었다. 데르가와 달리 그녀는 어제 베릭이 저택에 든 것조차 모르는 눈치였다.
"동료를 폭행했거든요."
"세상에. 끔찍하여라. 그런 자를 가까이 두다니. 너도 참 어지간하구나. 성격이 잘 맞니?"
비꼬는 뉘앙스에도 이안은 웃기만 했다. 어쨌거나 베릭을 옆에 두는데 성공했으니까. 훗날 일이 터지면 이자들의 목을 베는 것이 바로 그 아이일 것이다.
"한 달 내로 글자를 떼지 못하면 그놈과 놀았다 여기고 목을 비틀어버리겠다."
"…네. 아버지."
여러모로 알뜰하게 써먹을 속셈이군. 족쇄로도 모자라 채찍으로 쓸 생각인 듯싶다. 이안은 순종한다는 뜻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두툼한 데르가의 손가락만 보였다.
'다행히 가구 박살 낸 건 모르나 보네.'
하인이 비밀에 부쳐준 모양이다. 먹을 것을 나눠주는 것도 그러하지만, 해나와 가깝게 지내다 보니 아랫것들 사이에서 이안의 입지가 영 나쁘지는 않았다.
'음?'
그러다 문득, 그의 손가락에서 빛나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굵은 알과 화려한 금박 디자인. 지금껏 봐온 데르가는 장신구에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는데, 이상하게 저것만은 매일 끼고 있었지.
'결혼반지인가?'
이안은 백작 부인의 손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녀의 왼손에는 다이아몬드가 없었다. 오팔과 진주, 루비 따위는 있었지만.
'커팅이 너무 조잡하지 않은가.'
계속 관찰하던 그는 다이아몬드 커팅이 묘하다는 걸 알아챘다. 자고로 보석이란 빛의 반사를 극대화하여 화려하게 보이는 게 목적인데, 데르가의 것은 그것과 멀게끔 둥글게 깎여있는 것이다.
마치 보여주기보다 어디에 넣기 편하게....
달그락.
"쯧쯧."
"아직 그런 실수를 하면 어쩌니?"
"아. 죄송합니다."
이안은 저도 모르게 포크를 놓치고 말았다. 백작과 부인의 매서운 눈초리에 서둘러 사과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이내 살얼음 같은 식사 시간이 끝나고, 다들 식당을 떠났지만 이안은 움직이지 않았다. 하인들이 쭈뼛대며 다가와 물었다.
"이안 님. 식사가 모자라셨나요?"
"곧 선생님 오시니 간식을 든든하게 올리겠습니다."
그릇을 치워야 하는데, 이안이 저리 버티고 있으니 움직일 수가 없다. 그는 가만히 밖을 쳐다보다가 중얼거렸다.
"아버지가 끼고 있는 반지, 결혼반지는 아니지?"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말씀이신가. 하지만 하인들은 최대한 아는 선에서 대답했다.
"아닌 거로 알고 있습니다. 마님이 끼신 루비가 결혼반지라 하시던데요."
마력 브로치가 붉은색인 이유였다. 이안은 턱을 괸 채 테이블만 톡톡 두드렸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심증은 굳어졌다.
'책상 아래로 손만 뻗었던 몸짓 하며, 집사가 가진 의문의 열쇠 그리고 그 머리와 굉장히 유사한 다이아몬드 반지라.'
넣고 돌리는 형식이 아니라 그저 어딘가를 누르기만 하면 되는 것 같다. 금고가 다이아몬드에만 반응하는 걸까? 아니지, 그렇다면 집사의 열쇠 또한 보석이 박혀있어야 했다.
둘의 차이점이라면....
'재질.'
데르가는 절대 마스터키를 다른 누군가에게 맡기는 자가 아니다. 집사가 들고 있는 건 신뢰의 증거라기보다 시험의 한 조각이라 볼 수 있을 터.
보안과 직결하여 생각했을 때 떠올릴 수 있는 건 딱 하나뿐이다. 바로 안쪽에 전기가 흐르고 있을 가능성.
"하."
그것참 고약하고 깜찍한 잠금장치다.
하인들은 서로 눈치만 살피며 이안을 힐끔거렸으나, 그는 꼼짝하지 않았다. 한참 후, 움직인 것은 교사가 올 시간이 다 되어서였다.
끼익.
방문을 연 이안이 베릭을 보며 지시했다.
"나가."
"엥? 왜?"
쿵!
물구나무선 채 팔굽혀펴기하던 베릭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이안은 그러든지 말든지, 책상을 정리했다.
"곧 가정교사가 온다."
"뭐 어때? 좀 있으면 안 되나? 방이 이렇게 넓은데."
"중요하게 할 얘기가 있어. 하인이 간식을 가져오면 네가 받고 돌려보내."
"그렇다면 말이 다르지. 좋아!"
마침 배가 고팠다며, 베릭은 웃옷을 집어 들고 나갔다.
곧이어 교사가 제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그는 문 쪽을 힐끔거리며 이안에게 물었다.
"도련님. 바깥의 저자는 누굽니까?"
"일단 앉으시지요.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요."
평소답지 않게 무게 잡는 이안이 낯설었다. 교사는 옷을 벗지도 못한 채 소파에 앉았다.
'금고의 열쇠를 알아냈으니, 남은 것은 계획뿐.'
해나와 베릭을 이어서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더 필요했다. 데르가와 가까이, 오래 마주할 수 있는 인물로.
"무슨 일이시죠?"
"선생님. 몰린 경과 아는 사이입니까?"
훅 들어온 질문에 교사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아, 아, 아니요?"
"바리엘 대학을 나오신 것만으로도 접점이 있었을 것 같은데, 보니까 동향이시더라고요."
맨날 심드렁한 사람이 이런 표정을 지을 줄도 아는군. 이안은 속으로 살짝 웃으며 등받이에 기댔다.
"그, 그럴 리가요! 그런 우연이!"
"그렇다면 아버지에게 보고드려도 되겠군요?"
"저기! 그게, 아니라!"
강한 부정은 곧 긍정이요. 교사는 입술만 잘근잘근 씹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데르가에게 이 사실이 알려지면 실로 곤란했다. 목이 잘리지는 않겠지만, 일단 일자리를 잃을 것이요, 얼마 안 가 브라츠 영지에서 쫓겨날 게 분명하니까. 대사막을 연구하기에 이만한 곳이 없는데 말이다.
"…도련님 뭔가 오해가 있으신 듯합니다."
"아니요. 아버지가 선생님을 통해 저를 감시하고 있다는 것과 뒤에서는 몰린 경과 통하고 있다는 게 거의 확실해서요."
평소 느릿느릿하고 매사에 관심 없어 보이던 이안이 맞나? 교사는 놀라서 말문이 막힌다는 게 뭔지 몸소 체감했다.
"게다가 몰린 경의 사주를 받고 집사 방에 침입하려 하셨죠."
"잠깐! 그건 아닙니다! 하나씩 다 말씀드릴 테니까, 진정, 진정하세요."
"선생님. 진정은 선생님이 하셔야지요."
이안은 차를 들어 보이며 생긋 웃었다. 교사는 더듬더듬, 말을 신중하게 고르며 자신을 변호했다. 아주 처음, 브라츠에서 몰린을 만난 것부터 시작이다.
"데르가 백작님과 도련님 얘기를 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 하지만 그건 일반적인 학부모라면 다 하는 과정이고요. 본래 첼 도련님을 맡았을 때는 첼 도련님 얘기를 하곤 했습니다."
"흐음. 그래요?"
편지 얘기는 하지 말자. 그것까지 알릴 필요는 없다.
"그러다 이안 님도 함께 맡게 되었고, 중앙에서 심사가 온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정말 몰린 경이 오실 줄은 몰랐어요. 당숙이신데, 사실상 제가 본가를 나온 이후로는 처음 뵙는 거였습니다."
"오래되셨나 봐요."
"10년 가까이 되었죠."
10년 동안 학문에 매진했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듯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래서 안부를 주고받다가, 이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연구라는 게 돈이 생각보다 많이 들어서…. 그저 저택 안의 얘기를 전해주면 생활비를 보태주신다고 하였어요. 저로서는 거절할 방도가 없었고, 그리 중요한 얘기를 한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게 아니면 아버지가 알아도 상관없겠어요."
"도, 도련님!"
사색이 되어 눈이 뒤집힐 것 같다. 그저 주도권을 쥐기 위해 흔드는 말이었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격렬하다. 인생을 바친 연구가 뒤에 버티고 서 있어서 그렇겠지.
이안은 한숨을 내쉬며 웃었다.
"제가 한마디만 더 했다가는 쓰러지시겠어요."
"제발요. 백작님께는 비밀로 해주세요."
"선생님. 제가 왜 아버지에게 바로 말하지 않고 선생님께 얘기를 꺼냈는지...."
교사의 빛바랜 동공이 흔들렸다. 이런 쪽으로는 눈치가 영 빠릿빠릿하지 못하다.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제22화. 교사
"부탁드릴 게 있어서 그렇습니다."
이안의 말에 교사가 멈칫거렸다. 자신은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 신세였다. 서자라고는 하나 볼모 신분인 이안보다 더 별 볼 일 없는 인물이리라.
그런데 그런 자신에게 대체 뭘 기대할 수 있나?
"어떤...?"
"다음 주중으로 아버님과 면담하세요. 어떤 내용이든지 상관없지만, 장소는 집무실이 아닌 정원에서. 그리고 시간은 30분 정도가 적당하겠군요."
그사이 몰래 집무실에 들어갈 수 있도록 아주 넉넉하게 말이다. 인장을 찍어내야 했으니 왁스 녹이는 시간까지 포함이었다.
교사는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몰라도 됩니다. 자세한 사정은."
"그, 그것만 하면 몰린 경과의 관계를 비밀로 해주시는 겁니까?"
"물론. 집사의 방을 털려고 한 것까지."
"아닙니다! 저, 정말 오해입니다!"
교사가 펄쩍 뛰며 손을 내저었다. 이미 들킬 대로 들킨 상황에서, 저렇게 말하는 거 보면 속내가 따로 있었나 보다.
"그럼?"
"귀물을 훔치려 한 것이 아니라-"
교사가 입을 벙긋거렸다. 목구멍까지 고백이 올라왔지만, 차마 못 뱉는 듯싶었다. 이안이 채근하는 눈빛을 보내자 어쩔 수 없이 한숨과 함께 토했다.
"통행증이 필요했습니다."
"통행증?"
"브라츠 영지 최전선은 민간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거든요. 저로선 대사막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곳인지라 꼭 필요했습니다. 특히 3번 탑과 4번 탑 사이의 관측이 필요한데, 백작님은 안전상의 이유로 허가해 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집사가 가진 통행증이라면?
데르가가 직접 찍어낸 것이라 제한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백작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집사가 대리인 역까지 해내야 하니까. 교사는 연구의 완성도를 위해 집사의 통행증을 훔치려 한 것이다.
"그래요?"
이안은 턱을 괸 채 곰곰이 생각했다. 이토록 한 가지 주제에 미친 인간들을 많이 봐왔다. 삶이 꺾이는 한이 있어도 연구 의지가 꺾이는 경우는 거의 없지.
"연구는 어디까지 되었습니까?"
"이곳에 온 지 벌써 오랜 시간 지났습니다. 브라츠 쪽의 기후 변화는 거의 다 측정하였고, 이제 블라스터로 떠나서 다시금 연구를 진행할 생각입니다."
논문 주제가 였다. 당연히 그쪽으로 가서 또 기약 없는 시간을 보내야 할 것이다.
순간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요? 그러면 하나만 물읍시다."
"어떤 것을...."
"늦봄에는 내가 이곳을 떠나 대사막, 천려족의 주둔지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때의 기후를 계산할 수 있겠습니까?"
사막이라고 해서 사시사철 밤낮으로 덥기만 한 게 아니었다. 극한으로 치닫는 기온 가운데 모래 폭풍은 또 얼마나 불어대는가.
이안의 물음에 교사가 난감하게 중얼거렸다.
"정밀하게는 어렵습니다. 시간도 좀 걸리고요."
"괜찮습니다. 어차피 제가 떠나기까지만 알면 됩니다. 사막 지도도 있을 것 같은데."
"10년 전 것이지만 있긴 있습니다."
"따로 준비해 주었으면 싶네요. 그렇다면 통행증을 구해다 드리지요."
"네? 통행증을요?"
통행증에는 인장이 필수적이었으니 몰린 경 것을 찍어주는 김에 하나 더 찍으면 될 일이다.
이안의 자신만만한 태도에 교사가 눈을 끔벅였다. 듣기로는 들었는데, 이해가 잘 안 되나 보다.
"어떻습니까? 사막의 모든 것을 내게 알려주면 나 또한 선생님께 모든 것을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그렇게만 해주시면 감사하지요."
이안은 방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좋습니다. 그럼 거래를 맺읍시다."
교사는 아이의 손을 빤히 쳐다봤다.
잡아도 될까? 또 다른 속셈이 있는 건 아닐까? 이안의 목숨은 데르가의 손아귀 안에 있는데, 괜히 이쪽에 협력하였다간 추방형을 참수형으로 갚게 되는 게 아닐까? 학자인지라 이런 쪽으로는 영 알 길이 없었다.
"저는 저대로 살려는 것이고, 선생님은 선생님대로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차피 통행증을 쓰는 즉시 국경을 넘으실 것 아닌가요?"
"…맞습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망설일 이유가 없다. 문제가 생긴다고 한들, 대사막을 횡단하고 있을 테니까.
교사는 결연에 찬 눈빛으로 이안의 손을 맞잡았다. 중년과 아이의 거래가 이토록 비장할 줄이야. 이안은 방싯 웃으며 책상 쪽을 가리켰다.
"그러면 선생님. 자세한 얘기는 공부하면서 해볼까요?"
* * *
교사가 데르가를 불러낼 구실은 정해졌다.
갑작스럽게 가정교사를 관두게 되었다는 것. 어차피 통행증을 받는 즉시 브라츠를 떠날 것이기에, 영 거짓말은 아니었다.
이안은 젖은 손수건을 주머니에 잘 챙겨 넣으며 해나를 돌아봤다. 두꺼운 가죽 장갑 역시 필수다.
"해나. 부탁한 것은?"
"여기 있습니다."
속닥속닥, 베릭 뿐이었으나 굉장히 조심하는 목소리였다. 해나는 손에 쏙 들어가는 나무 열쇠를 꺼냈다. 하나는 집무실용이었으며 하나는 서랍금고용이었다.
"목수 아저씨께는 다음 주 중으로 값을 치른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늦어져도 술 한 병이면 좋다 하고 넘어가시겠지만요."
해나는 그날 이후, 다시금 집사의 방에 숨어들었다. 그리고 진흙을 이용해 열쇠 본을 땄고, 부도체인 나무로 제작을 의뢰한 것이다. 겉면에는 고무액까지 발려있었다.
"수고 많았어."
"그럼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끼익.
해나가 나가고, 이안은 시계를 확인했다. 교사와 약속한 시각이 거의 다 되었다. 데르가의 집무실이 비어있는 동안, 신속하게 빠르게 인장 두 개를 찍어야 했다.
"준비되었지?"
"하아. 내가 왜 이런 일까지."
타닥타닥!
베릭은 툴툴대면서도 이안의 뒤로 따라붙었다. 기척 줄이는 솜씨가 제법이다. 둘은 별채를 벗어나 본채 위층까지 들어서는 동안, 아무와도 마주치지 않았다. 돌아 돌아온 것도 있지만 해나가 사용인들 일정을 알려준 덕이었다.
"저기 있다."
창문 너머로 익숙한 남자 뒤통수가 보였다. 앞장서서 걷는 데르가와 그 옆의 교사. 집사까지 아주 훌륭하게 모여있었다. 교사가 쩔쩔대며 뭔가를 말하자, 데르가는 단번에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이제 넌 여기서 단단히 지켜. 내가 나오기 전까지 아무도 올려보내면 안 돼."
지이잉-
그리고 그에게 흘려보내는 마력. 이안의 금빛 눈동자가 빛남과 동시에 머리칼이 휘날렸다. 베릭은 빠르게 도는 피를 느끼며 웃음을 흘렸다.
"누가 오면 좋겠다는 표정이군."
"그렇게 보여? 잘 봤네."
"중요한 일이다. 베릭. 사고 치면 감당할 수 없어."
"어차피 들통나면 나 잘라먹을 거잖아. 말은."
베릭이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일이 틀어져서 누군가가 접근한다면, 그는 소란을 일으켜 시선을 집중시키는 역할이었다. 예상 시나리오로는 아래층 첼의 방에서 금화를 훔치려 했다는 게 자연스럽겠지.
"금방 나오겠다."
그러한 이유로, 이안은 베릭의 몸에 한계치의 마력을 밀어 넣었다. 쉽게 도망갈 수 있게, 혹은 채찍을 맞더라도 이전보다 회복이 빠르게끔.
타닥타닥!
끼익.
이안은 준비한 열쇠로 집무실을 따고 들어갔다. 최근 거의 오지 못했건만, 달라진 게 없다.
타악!
그는 망설임 없이 데르가의 책상으로 직행했다. 그리고 제일 큰 서랍을 열어 안쪽을 살폈다.
'있다.'
틈에 난 홈. 손만 뻗으면 바로 다이아몬드를 밀어 넣을 수 있는 위치에 구멍이 나 있었다. 이안은 조심스럽게 준비한 나무 열쇠를 꺼냈다.
지이잉-
그리고 혹시 몰라 몸속 마력을 죄 끌어모았다. 고무를 바른 나무라도 전압이 높으면 위험할 수 있지 않은가. 손끝으로 다른 에너지가 들어온다면 반사적으로 방어막을 칠 요령이었다. 서자의 몸으로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달깍-
구멍 안쪽으로 열쇠가 들어가는 느낌이 깔끔했다. 쭉 밀어 넣자 비밀 서랍이 하나 더 나타났다.
"아."
안쪽에는 인장과 마력 브로치 그리고 금괴 두 개와 낡은 편지들 따위가 놓여있었다. 이안은 무릎을 꿇고서 안쪽을 살폈다.
초 위에 왁스 거치대를 올렸다. 숟가락이 달구어지는 동안, 이안은 편지를 살펴보기로 했다.
'…이건 천려족과 주고받은 서신인가?'
젠장맞게도 모두 천려족 언어로 쓰여 있어 해독이 불가했다. 띄엄띄엄 아는 단어가 있긴 하지만 너무 단편적이다.
'다음… 여자 왕… 이후에?'
대체 무슨 소리인지 원! 다른 외국어라면 몰라도 변방의 야만족 언어까지는 이안의 능력 밖이었다. 대신 그는 나중에라도 알아볼 셈으로 양피지에 단어를 옮겨 적었다.
스윽스윽!
숟가락이 달구어졌는지, 왁스 덩어리가 액체로 녹아내렸다. 이안은 왁스를 붓고서 인장을 찍었다.
콰앙! 쾅!
중앙으로 보낼 서신에 한 번, 그리고 교사에게 줄 통행허가서에 한 번. 그렇게 다 찍고 나서는 능숙하게 왁스 뒤처리를 진행했다. 굳기 전에 젖은 면으로 닦아내는 게 포인트였다.
치이익.
달구어진 쇠숟가락이 희미한 연기를 내며 급속도로 식어갔다. 돌아온 데르가가 열감을 느끼면 안 됐기에, 이안은 입김을 불어가며 쇠를 식혔다.
"됐다."
모든 정리가 순조로웠다. 물건들을 원위치시키고, 인장이 잘 찍혔는지까지 확인을 마쳤다. 이제 자리를 뜨면 되는데....
덜컹-
어디선가 들리는 인기척.
이안의 몸이 저절로 굳어버렸다. 문밖에서 나는 소리인가? 아니다. 그렇다면 좀 더 시끄럽고 경박해야 했을 것이다. 베릭이 소란을 일으켰다는 뜻이니까. 그렇다면 남은 장소는 한 곳....
"백작님. 계십니까?"
집무실에 달린 보좌관의 사무실이다. 이안은 기척을 최대한 죽이고 커튼 뒤로 숨어들었다. 어째서 저자가 여기 있는지 모르겠다. 데르가 없이 혼자 방에 남는 경우가 없을 것인데?
"백작님?"
끼익.
안쪽 작은 사무실 문이 열리며 부스스한 보좌관의 모습이 보였다. 암막 커튼이라 다행이었다. 아마 쉬폰이었으면 바로 들켰을지 모른다.
"이상하다. 방금 소리가 들렸는데...."
방금 일어난 것 같이 퉁퉁 부은 눈. 어제 야근 후 여기서 곯아떨어졌나 보군, 하필이면.
"...?"
보좌관은 심상치 않은 기척을 느꼈는지, 이안이 숨어있는 커튼을 쳐다봤다. 그리고 조심조심, 발걸음을 떼고 다가왔다.
바스락.
이안의 손에 쥔 양피지 종이는 너무 얇아서, 숨 쉬는 행동에도 소리를 내버렸다. 이는 보좌관을 더욱 긴장하게 했고, 이안을 곤란하게 했다.
"거기 누구 있소?"
이안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쳐다봤다. 쨍한 하늘. 햇빛이 화사하게 쏟아졌다. 이상하게 모든 게 고요했다. 그의 습관이자 태도였다.
긴장 대신에 평정을. 걱정 대신에 행동을.
실수는 수습할 수 있지만, 실패는 수습할 수 없다.
지이잉-
"으어어억!"
이안은 보좌관이 커튼을 잡자마자, 마력을 때려 박았다. 응축되었던 바람이 터지듯 주위로 에너지가 휘날렸다.
동시에 보좌관은 코피를 터트리며 뒤로 쓰러졌고, 놓친 커튼이 뒤로 흩날렸지만, 그곳에 누가 서 있는지 보지 못했다.
쿠웅!
뒤로 엎어진 그는 흰자만 보이며 널브러졌다. 이안은 커튼을 잘 갈무리하고, 조용히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끝?"
계단에 앉아 있던 베릭이 이안을 보고서 벌떡 일어섰다. 이안은 고개만 짧게 주억거리고 앞장서서 계단을 뛰쳐 내려갔다. 창문으로는 여전히 세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힐끗, 교사가 위를 쳐다보고서 이안과 눈을 맞췄다.
담담한 아이의 표정이, 모든 게 잘 되었음을 알려주는 대답이었다.
제23화. 전사
"중앙 출신들은 끈기가 부족하단 말이지."
데르가는 인상을 팍 찌푸리며 집무실 계단에 올라섰다. 꽤 오랜 시간, 그것도 성실히 해온 건 기억 속에서 지워졌나 보다. 집사 역시 난감하다는 듯 웃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렇게 갑자기 그만둔다니요."
"브라츠에 바리엘 대학 출신 학자가 있나?"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아니면 다른 곳에서라도 모셔와야지요."
괜히 귀찮게 되었다. 바리엘 대학 출신 중에서 저만치 싼 값에 교사로 부릴 수 있는 자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괜히 몇 년간 급여를 동결했나 싶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적당히 올려주면서 꾀는 것인데. 뭐, 연구 때문에 타국으로 간다니 돈 문제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비싸겠지?"
"아무래도요. 지금까지 나갔던 수업료의 열 배 이상은 주셔야 할 듯합니다. 그래도 한다고 할지가 문제지만...."
젠장! 데르가는 짜증을 잔뜩 담아 발을 굴렀다. 집무실에 거의 도착할 즈음에, 그는 문득 여태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보좌관을 떠올렸다.
"보좌관은 아직까지 자고 있는 것인가?"
"어제 새벽에 잠드셨으니 고단하실 겁니다."
"팔자 한번 끝장나는군. 깨워서 집으로 돌려보내."
끼익.
문을 여는 순간, 데르가가 멈칫거렸다. 집사의 의아한 시선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매일 그림처럼 똑같던 모습이 뭔가 묘하게 변해 있었으니.
"…뭐야?"
기분 탓이 아니었다. 바닥에 대자로 누워있는 보좌관과 살짝 흐트러진 서류 더미. 데르가의 뒤로 쫓아 들어온 집사가 너무 놀란 나머지 입을 틀어막았다.
"세상에! 이게! 괜찮으십니까?"
바로 보좌관의 상태를 살피는 집사와 달리, 데르가는 곧장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안쪽 비밀 금고를 확인하여 인장과 각종 귀물이 그대로 있는지 확인했다.
"주인님! 의사를 부를까요?"
"…죽었나?"
데르가의 음성이 한껏 날카로웠다. 책상 앞에서 널브러졌다면 딱 하나의 가정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이 전 집사처럼 쥐덫에 걸린 것이다.
"숨이 붙어 있습니다."
"의사를 불러라. 그리고 눈뜨는 즉시 나한테 보고하고. 어디 도망가지 못하게 사람을 붙여놔."
"네. 알겠습니다. 밖에! 누구 있느냐!"
"무슨 일이신가요?"
한바탕 난리가 났다. 사용인들이 달려와 보좌관을 옮기는 동안 데르가는 샅샅이 집무실 물건을 점검했다. 다행히 뭔가 사라지거나 바뀐 것은 없었다.
피해가 없다는 걸 알아서일까. 머리가 차분해지자 이번에는 울컥, 배신감이 치솟았다.
"…괘씸한!"
"아이고, 주인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
"내가 너를 어떻게 거뒀는데! 이런 식으로!"
퍼억!
데르가는 기절한 보좌관의 얼굴을 후려치며 짜증 섞인 분노를 터트렸다.
한편, 별채로 돌아온 베릭이 사과를 베어 물며 물었다.
"시끄럽네. 들킨 거 아니야?"
느긋하게 휴식하던 하인들이 죄다 소집되어 본관으로 뛰어 들어갔다. 정원을 가로지르는 마차. 분명 의사가 타고 있겠지. 이안은 창문에 몸을 기대고 그걸 흥미롭게 지켜봤다.
"들켰지. 안에 보좌관이 있었거든."
"조졌네. 이제 목 떨어지겠어."
"무섭나 봐?"
"이대로 죽으면 나만 등골 빨린 거니까."
영 틀린 말은 아니군. 베릭의 말에 이안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안은 나무 열쇠를 부러트린 다음, 베릭에게 작은 주머니를 건넸다. 안쪽에는 밀고용 종이가 잘 말려있었다.
"열쇠는 나가서 아무도 모르게 태워버려. 그리고 이건 몰린 경에게 전달. 무조건 직접 전달해야 한다. 주소는 알려줬지?"
마지막 마무리였다. 베릭은 그것을 품에 끼워 넣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몰린 경에게 전해주고 금화 얻어오기.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집에 들러서 필리아에게 말 전하기."
"훌륭해."
이안의 생모인 필리아에게 전언하는 것이다.
이제 슬슬 때가 되었다고. 몸 숨길 준비가 되었으면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라고. 그녀의 거처는 베릭을 통해 이안만이 알게 될 터. 이제 국경을 넘어간다 한들 걸리는 게 하나도 없었다.
"내일부터는 제대로 대련하자."
"임무를 무사히 완수하면."
"그래? 좋아. 나중에 딴말하지 마."
걸리는 게 있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완수할 표정이었다. 이안은 그에게 사과를 하나 던져주며 웃었다.
"내일 보자고."
끼익.
이제 말은 떠났다.
남은 것은 저쪽 말이 어떻게 나올지 관찰하는 것. 가만 생각해 보니 보좌관에게 들킨 게 영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갈무리했다고는 하나 급한 상황이라 놓친 부분이 있을 수도 있어. 데르가라면 분명 그걸 알아챘겠지. 보좌관으로 시선을 돌릴 수 있을 거다.'
보좌관이 일어나서 증언하면 또 다른 국면에 들어서겠지만, 그 말을 데르가가 믿을지부터가 문제였다. 아마 자리를 보전하고 있는 사이, 백작은 백작 나름대로 결론을 지을 것이고, 그건 하늘이 두 쪽 나도 바뀌지 않을 테니까.
똑똑.
노크 소리에 이안이 고개를 돌렸다.
"이안 님. 들어가겠습니다."
"오. 선생님."
교사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문으로 들어섰다. 데르가와 얘기하면서 기가 쭉쭉 빨린 듯싶다.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 고용인과 그만두고 싶어 하는 사용인 간의 대화가 눈에 훤했다.
"아버지와 말씀은 잘 나누셨습니까?"
"예에...."
"오늘이 마지막 수업이라 하시니 아쉽습니다. 그간 훌륭한 가르침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그 뜻으로 약소한 선물을 준비했는데요."
이안은 능청을 떨며 그의 앞에 반으로 접힌 종이를 꺼냈다. 브라츠의 인장이 찍힌 통행증이었다. 교사는 안도의 한숨을 뱉어내며 연거푸 마른세수를 해댔다.
"하아. 세상에."
"마음에 안 드십니까?"
"아니, 아까 눈 마주쳤을 때 좀 웃어주시지 그러셨습니까! 무슨 문제 있는 줄 알고 어찌나 간 졸였던지."
교사는 생명줄이라도 되는 듯 통행증을 가슴에 품었다.
"블라스터로 건너가셔서 좋은 연구 계속하세요. 다들 관심 두지는 않지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선생님 같은 분들이니까요."
이안은 진심으로 그를 격려했다. 평생을 바쳐서 일구어낸 학문은 바리엘의 근본이 된다. 그리고 언젠가, 이안을 위한 원동력이 되어줄 것이다.
교사는 무슨 말로 화답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가방을 뒤적거렸다.
"이거, 그때 말씀하신 자료입니다."
대사막의 지도와 예상기후였다. 오아시스 표기를 비롯한 모래 산의 고도까지 꼼꼼하게 적혀있었다.
"말씀하신 날짜를 계산해 보니 북동쪽, 이쯤 하여 모래폭풍이 생성될 확률이 높습니다. 천려족의 동선은 정확히 모르겠지만, 아마 재수있으면 잘 비켜 갈 것입니다."
그 외 일교차는 불지옥과 냉지옥이라 불릴 만큼 엄청났다. 이안은 숫자로 가늠할 수 있는 고생길에 한숨을 내 삼켰다.
"표정이 안 좋으십니다."
"다 때려치우고 싶을 정도네요."
"그래도 다 사람 사는 곳이니까요."
아까 한 위로의 화답인가? 이안은 종이를 고이 접어서 서랍에 넣었다.
"당장 오늘 떠나십니까?"
"네. 한시라도 기다릴 수 없어서요."
이안은 마지막 만남을 장식하듯 손을 내밀었고, 교사는 머뭇거리다 붙잡았다. 서로의 행운을 빌어주는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아차. 가기 전에."
"네?"
또 뭐가 남았냐는 표정이었다.
이안은 어제 데르가의 집무실에서 베껴낸 천려족 서신을 꺼냈다. 문장이 아닌 드문드문 단어 위주의 필사였다.
"이거 해석 좀 해주시겠습니까?"
교사는 가만히 종이를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후 여 족장 다음으로 올 자가 누구인가?"
읽으라고 해서 읽었다만, 교사는 영 의미를 모르겠다는 듯 웃었다. 이안 역시 마찬가지.
하지만, 이게 비밀 금고에 들어있었던 만큼 굉장히 중요한 서신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 * *
"얘기 들었어?"
"보좌관님 말이지? 어후. 세상 참 무섭다니까."
"그러게. 듣자 하니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대."
"사람 속 알 길 없다지만, 정말 놀랍다."
저택의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집사가 단속을 열심히 해댔지만, 어디 그게 쉬운 일인가? 사용인들은 둘 이상 모였다 하면 보좌관 사건을 입에 올렸다.
"…그래서, 아직 안 깨어났다고?"
"네. 도련님."
이안은 멀어져 가는 사용인들의 수다를 뒤로하고 해나에게 물었다. 아이는 옆에서 겉옷을 든 채로 따라붙었다. 저 뒤로는 모래주머니를 잔뜩 인 베릭이 기다시피 따라왔다.
"백작님이 집에 돌려보내지도 않으시고 집무실 안쪽 사무실에 자물쇠를 걸었어요. 경비도 복도에 둘, 문 앞에 하나 세워두었고요. 사용인들은 절대 접근 금지랍니다."
해나는 속삭이며 주워들은 것들을 풀어놓았다. 마력을 있는 대로 때려 박았으니, 쉽게 일어나지 못할 건 당연했다. 해나는 참으로 궁금하다는 듯 되물었다.
"대체 어떻게 하신 겁니까?"
뭘 어떻게 했기에 보좌관을 저리 쓰러트렸나 묻는 것이다. 해나는 이안이 마력운용자인 것을 모르기에, 궁금해서 몸이 뒤틀릴 지경이었다.
"자. 이걸 받거라."
"헉! 금화!"
이안은 대답 대신 주머니에서 금화를 건넸다. 베릭이 가져온 것인데, 이안이 전한 밀고장이 몰린에게 잘 전달되었다는 증표였다.
"네 수고비와 목수의 몫이니 잘 전달하거라."
"너무 많은데요. 우와."
"그래? 그럼 거슬러 주렴."
"아닙니다. 헤헤. 무슨 섭한 말씀이셔요."
많다는 인사치레가 곧 거절은 아니다. 해나는 배시시 웃으며 금화를 앞니로 씹어댔다. 그리고 재빨리 안주머니에 넣고서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뒤로 물러섰다.
"베릭. 빨리 와."
"아니, 제대로 된 훈련 한다며...."
"그게 제대로 된 게 아니면? 무게를 더 올릴까?"
"…닥치겠다."
"너는 성격이 급하니 이런 방식이 딱이다. 한계치를 조금씩 늘리는 거지. 두 바퀴만 더 돌고서 검을 잡아보자."
"주인 한번 잘 만났네!"
"칭찬 고맙군. 나도 쓸만한 수족을 만났어."
베릭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이안을 쏘아본 다음, 힘겹게 한 발 내디뎠다. 이제는 가정교사 수업도 없는지라, 온종일 베릭과 운동에만 전념하면 된다. 데르가 역시 어제 사건 때문에 집무실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그런데 그때.
타닥타닥-!
정문 쪽에서 발굽 소리가 들렸다. 의사가 다시 들어온 건가 싶지만, 이상하게 소란스럽다. 이안은 나무 아래 멀뚱히 서서 시선을 고정했다.
"아."
흑마(黑馬)인가 싶었지만, 아니다.
사막을 횡단하는 데 있어 필수인 이동수단, 쿠실레였다. 말과 낙타의 중간쯤 되는 동물인 쿠실레는 천려족의 대표적인 반려동물이었다. 그 말인즉-
"누구지요?"
해나의 물음에 이안이 뜸을 들였다.
안장 위에 올라탄 늠름한 전사들. 붉은색 안료를 얼굴에 바르고, 금빛 장신구로 존재감을 알리는 저들은 바로....
"천려족이다."
제24화. 네르사른
"세, 세상에! 천려족이 여긴 무슨 일로...?"
그건 이안도 궁금한 터였다. 대체 어찌하여 이곳까지 천려족이 당도한 것인지. 그들의 주둔지에서 브라츠 영지까지는 꼬박 사흘을 달리고 달려야 하는 거리 아닌가. 분명 사소한 이유로 쿠실레를 몰지 않았을 것이다.
'갑작스러운 방문인 듯싶은데.'
만약 약속된 만남이었다면 해나가 모를 리 없다. 전날부터 손님맞이에 바빴을 테니까.
이안은 저에게로 향하는 천려족의 시선을 알아챘다.
"이, 이쪽을 보는데요."
"끄억...."
베릭은 뒤에서 힘부친 신음만 흘려댔다. 그들은 저들끼리 무어라 속닥이더니, 이내 둘로 갈라졌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는 정문을 통과하여 본채로, 그 아래 부하들은 이안에게 다가왔다.
"오, 옵니다! 이쪽으로 옵니다!"
브라츠 영지민이라면 해나처럼 반응하는 게 당연했다.
오랜 시간 애매한 휴전을 맺고 있는 적군이자, 미지의 존재들이며, 초월적인 힘을 가진 야만인. 당황과 두려움 그리고 흥분의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해나. 호들갑 떨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천려족인걸요! 새, 새는 또 왜 저리 큽니까?"
"여기까지 아무런 방해 없이 왔잖느냐. 적의는 없을 거다."
해나를 안심시키는 사이, 천려족 사내가 이쪽을 살폈다.
"실례하오."
가까이 다가온 사내가 쿠실레 위에서 이안을 내려다봤다. 쌍꺼풀 없이 날카로운 눈매가 가히 위압적이다. 그들은 이안의 머리칼과 이목구비를 집요하게 살폈다.
"그대가 브라츠 백작의 둘째 영식, 이안이오?"
"그러하온데. 그대들은 뉘신가?"
해나가 이안의 뒤로 슬그머니 숨었다. 변방인 치고는 바리엘어를 상당히 유창하게 구사했다.
"천려족에서 급히 전할 서신이 있어 이리 왔소. 백작님과 함께 뵈어야 할 것 같은데, 지금 같이 올라가면 좋겠소."
급히 전할 서신이라.
이안의 동행을 요구하는 것으로 봐서 분명 화친과 관련되어 있을 터. 이안은 해나에게 눈짓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훈련이 끝나면 베릭에게 과일과 시원한 물을 주거라."
그와 동시에 베릭의 얼굴이 팍 구겨졌다. 본인이 없다 한들 훈련을 계속하라는 뜻이었으니.
"이안 님! 이안 님!"
아니나 다를까, 본채에서 하인들이 튀어나오며 이안을 불러댔다. 그는 천려인을 뒤로 하고 데르가의 집무실로 올라갔다. 한껏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집사가 난감하게 손을 모으고 있었다.
"아버지. 부르셨습니까?"
"이리 가까이 오거라."
아까 먼저 본채로 들어갔던 우두머리가 소파에 앉아있었다. 목덜미 아래로 굵직한 상처가 셀 수 없이 많았다.
데르가는 한껏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이안의 어깨를 붙잡았다.
"이안. 인사 올리거라. 천려족 사신 네르사른이다. 족장 카칸티르의 동생이지."
백작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정신 바짝 차리라는 채근이었다. 이제껏 해온 모든 것이 이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습이지 않았던가.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안 브라츠입니다."
새까만 눈동자가 이안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는 이내 기도하듯 손을 모으고 화답했다. 천려족의 예법이었다.
"발라메이 친 네르사른이오."
"한데 무슨 일인가?"
데르가는 이안이 못 미더운지, 냉큼 끼어들었다. 아직 차가 나오지도 않았지만, 네르사른은 개의치 않고 대답했다.
"화친 일정 조율이 필요하오."
빙빙 돌릴 것 없이 단도직입적이다. 그들의 천성 탓도 있겠지만, 그만큼 상황이 급하다는 걸 의미했다.
"윈첸 부족장님의 건강이 갑자기 악화되었소. 연로하셔서 지병이 없던 것은 아니나, 앓아누우신 것은 처음이오. 앞날은 신께서만 알고 계시니, 준비할 수 있는 건 모두 해두려 하오."
천려족의 장례 풍습 탓이다. 그들은 가족이 죽으면 1년간 칩거하여 신께 안식을 빌었고, 우두머리가 죽으면 모든 부족민이 함께해야 했다.
이제껏 족장들의 죽음은 반란으로 인한 것이었으니, 자리에서 쫓겨난 자들은 그 예우를 받지 못하고 가족끼리만 의식을 치렀다.
하지만 윈첸이라는 부족장은 어떠한가?
감히 데르가조차 그녀의 시작이 언제인지 알 수 없는 천려족의 뿌리였다. 단체로 칩거한다면 당연히 화친 행사 역시 불가능. 이로 인해 날짜를 조율하고자 급히 달려온 것이다.
'적진인 걸 고려하고서도 족장의 동생이 올 만하다.'
"시기를 앞당긴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렇소."
부족장 윈첸은 거짓을 구별하는 집시였다. 공동체에 새로운 화친 제물이 들어오는 이상, 능력으로 이안의 불순함을 가리고자 했다.
"해서, 백작님과 이안 님께 양해를 구하고자 하오. 평화를 위한 배려라 생각해 준다면 고맙겠소."
부탁하는 처지인지라 공손한 단어를 사용했지만, 뉘앙스는 상당히 애매했다. 거절하면 화친은 없고, 평화 대신 다시금 피비린내를 맡게 될 것이라는 반협박 아닌가.
데르가는 헛기침으로 불쾌감을 숨기며 물었다.
"한 달하고 며칠밖에 남지 않았소. 얼마나 당기길 원하는가?"
"최대한 간소화하여 진행했으면 하오."
네르사른은 당장 돌아오는 주말이라도 가능하다 덧붙였다.
백작은 대답 대신 잠깐 침묵하는 것을 택했다. 이렇게 되면 상당히 곤란한 것이, 당장이라도 몰린 경을 중앙으로 올려보내 입적을 진행해야 했다.
'시간을 못 맞춘다면 어쩔 수 없군....'
화친을 먼저 맺는 수밖에.
어차피 입적이란 서류상의 절차이기 때문에 천려족과는 상관없는 문제였다. 그들은 이안에게 데르가의 피가 섞여 있는지를 궁금해할 것이요, 수백 장의 문서보다 윈첸의 한마디를 곧이들을 테니까.
"…며칠 동안 달려와 고단하지 않소?"
"괜찮소. 이 정도는."
"그대는 그러할지라도 쿠실레는 아닐 텐데?"
대사막으로 돌아가면 다시 모래폭풍을 헤치고 내달려야 한다. 피로가 누적된 쿠실레에게는 꽤 고단한 일정이 될 게 분명했다.
"오늘 하루 묵고, 내일 아침 떠나면 어떻겠소."
그때 답을 주겠다는 의미였다. 데르가로서는 몰린 경과 이 일을 의논한 다음 날짜를 정하는 게 맞는 처사였다.
미적거리는 대답에 네르사른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지만, 거기까지였다.
"…친절 고맙소."
"무슨. 우방의 친구에게는 당연한 일. 집사! 손님들께 방을 내드려라!"
바깥에서 대기하던 집사가 냉큼 들어와 손님들을 안내했다. 네르사른과 부하들이 집무실을 떠나고, 이안은 데르가를 돌아봤다. 그는 손톱 끝을 잘근잘근 씹으며 사념에 잠겨있었다.
'그리 고민할 일인가? 의외군.'
입적 확인서는 황궁에서만 발행 가능하니, 지금 당장 신청하여도 시간이 걸리는 일. 천려족에서 먼저 날짜를 변경한 것이라 그들에겐 늦게 주어도 무방하다.
화친식 준비 역시 이제 막 시작되었을 터. 중요한 것은 협약서 그 자체인지라 뜻만 맞는다면 네르사른의 말대로 당장 주말에 가능했다.
'뭘 얻어내고자 하는 건 아닌 것 같고.'
여지가 없다. 교류 목록은 이미 다 정해졌고, 윈첸이 죽으면 당장 화친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이번 건은 데르가 입장에서도 최대한 협조하는 게 여러모로 이득이었다. 그래야 나중 거래에서 우위를 선점할 것 아닌가.
"아버지?"
이안이 그를 불렀다. 손톱 뜯는 것이 점점 심해졌기 때문이다. 걱정되기보다 의아하다는 물음이었다. 아이의 목소리에 백작은 문득 정신을 차렸다.
"…아직 안 나갔느냐?"
"저도 손님 접대를 해야 할지 여쭙습니다."
언질이 있어야 나갈 것 아닌가.
이안의 말에 데르가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괜히 부스럼 만들지 말고 방에 처박혀 있으라는 뜻이었다.
"네르사른은 족장이 아끼는 동생이다. 눈치가 보통이 아닌 자니 어설프게 대할 생각 말거라."
"명심하겠습니다."
"밖에 누구 없나?"
"네. 주인님."
"마차를 준비해! 어서!"
데르가가 코트를 집어 들며 소리쳤다. 바로 몰린 경에게 달려가 상황을 공유하려는 듯싶다.
이안은 몸을 돌리며 사무실 문을 힐끔거렸다. 여전히 굳게 잠긴 간이침실. 보좌관이 공석인 지금, 여러모로 정신이 없을 것이다.
'타이밍 한번 대단해.'
시간을 더 끌었더라면, 몰린 경이 밀고장을 받지 못한 채 수도로 돌아갈 뻔했다. 어찌 된 게 신의 가호를 받는 기분이 들었다.
이안이 희미하게 웃으며 밖으로 나오자, 뻗어있는 베릭이 보였다. 해나는 그 옆에서 열심히 부채질 중이었다.
"도련님! 일은 다 보셨습니까? 대체 무슨 일이래요?"
"별것 아니다. 화친식 날짜가 변경될 것 같아. 정원을 그새 다 돈 것이냐?"
"보면 몰라? 죽겠다고, 젠장! 우에엑...."
"그 천려족, 저택에서 오래 머물 건 아니겠죠? 아까 집사님 안내를 받으며 별채로 건너갔습니다."
해나는 부채질을 멈추지 않고서 쫑알댔다. 이방인을 본채에 둘 수 없는 데다, 최근에는 집무실에서 불미스러운 일까지 있지 않았던가. 반면, 별채에는 손님맞이용 방이 수두룩했다. 아마 이안의 위층으로 배정받았을 것이다.
'감시가 살벌하겠군.'
밤새 병사들이 건물을 두르고 서서 지키겠지. 그래도 이안이 마음만 먹는다면 충분히 접촉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저들은 '화친' 대상이니까. 문 바로 앞까지 경비를 세워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도련님. 집사님께 말해서 오늘만 방을 바꿔달라 할까요?"
해나가 걱정스레 물었다. 천려족과 한 건물을 쓰게 하자니 영 불안한 모양이다. 이안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었다.
"되었다. 앞으로는 내가 함께 지낼 자들이니까. 베릭, 너는 정신 차리고 나를 따라와. 해나는 이제 네 할 일을 하거라."
단호한 명령에 베릭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가만히 지켜보던 이안이 그의 이마를 붙잡고 마력을 밀어 넣어 줬다.
지이잉-
"정신 차리라니까."
"젠장. 병 주고 약 주고...."
"채찍과 당근이라 생각해라."
퉤! 베릭은 쓴 침을 뱉으며 겨우 발을 떼었다. 차츰 걸음걸이가 멀쩡해졌다. 별채 건물로 들어서니, 사용인들의 불안한 수다가 들려왔다.
"봤니? 생각보다 덩치가 훨씬 크더라!"
"그러니까 병사 열댓이 달려들어도 안 된다는 말이 나오지. 어후. 짐승 같아."
"음식은 뭘 올리게 될까? 집사님이 별말 안 하셨지?"
"야만족이니 생고기를 주면 알아서 먹지 않을까?"
무지한 것인가 사악한 것인가.
이안은 혀를 끌끌 차며 인기척을 냈다. 하인들은 별로 놀란 기색 없이 이안을 맞이했다.
'무지한 것이군.'
"손님이 들었다지?"
"마땅한 방이 없어서 도련님 위층으로 모셨습니다. 오늘은 본채에서 주무시어요."
"아니면 불침번을 세우라 할까요?"
"문을 꼭 잠그고 주무셔야 합니다!"
이안은 한 귀로 흘리려고 노력하며 지시했다.
"됐고, 간단한 요깃거리와 와인을 정성껏 준비해서 올려라. 이건 식사가 아니니 집사에게 말할 것 없다."
바람처럼 들이닥친 탓에 집무실에서 차 한잔 대접 못 한 바다. 며칠을 꼬박 달려온 손님에게, 귀족으로서 있을 수 없는 예절이지. 데르가는 얼씬도 말라 했지만, 이안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똑똑.
"이안 브라츠입니다. 실례하겠습니다."
"…들어오시오."
쟁반을 든 하인들과 함께 방으로 들어섰다. 마치 우리에 갇힌 짐승들처럼 그들은 죄다 자리에 서 있었다. 하인들이 쭈뼛거리며 테이블에 음식을 세팅했다.
"먼길 오시느라 시장하실 텐데, 요기라도 하십시오. 갑작스러운 방문이라 다들 준비가 좀 더딥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이안의 인사에 네르사른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한껏 신기한 생물체를 보듯 위에서 내려다봤다. 서로가 서로를 생소한 짐승으로 여기는 시선이라.
"아까 봤을 때, 백작님과 영 닮지 않아서 의아했소. 대제국의 귀족들은 핏줄이 어찌 되었기에 이다지도 다른 건가 싶었지."
우두머리의 원색적인 농담에 부하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네르사른은 깔끔하게 고개를 돌리며 그들에게 눈짓했다. 먹을 것을 들라는 신호였다.
"한데 이리 보니, 확실히 귀족이 맞군."
칭찬인 듯 아닌 듯. 존대하는 듯 아닌 듯. 미묘한 뉘앙스가 계속되었다. 네르사른이 방긋 웃으며 덧붙였다.
"칭찬이오. 이안 도련님."
데르가가 목줄을 쥔 자라면, 이자들은 목에 검을 들이대고 있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너희들의 검이 곧 내 검이 될 것이다.'
이안은 마주 서서 환히 웃은 다음, 덤덤하게 다가갔다.
제25화. 증명
네르사른은 술로 목을 축이며 이안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들과는 정반대의 흰 피부, 금발 그리고 녹안이라. 골격은 또 어떠한가. 마치 다른 생명체를 보는 것처럼 흥미로운 눈빛이다.
"보내온 서신으로 봐서는 더 어릴 줄 알았는데."
워낙에 개발새발로 갈겨쓴 필체 탓이다. 상당히 정중하게 말하긴 했어도, 이안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차렸다.
"아직 모자람이 많습니다. 천려족에 누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니, 너르게 양해해 주십시오."
모지리인 줄 알았다 이거다. 네르사른은 눈썹을 살짝 휘며 제 일행들을 돌아봤다. 거참 재미있다는 미소가 걸려있었다.
"어머니가 둘째 부인이라던데. 맞소?"
"네. 그렇습니다."
데르가는 그들에게 필리아의 존재를 죽음으로 위장했다. 이안이 아주 어렸을 때 생모가 죽었고, 저택에서 지금껏 살았다는 게 설정이었으니까.
첩지는커녕 아들 뺏긴 채 살아있다는 건 짐작도 못 할 거다.
"아무래도 부인을 많이 닮았나 보군."
"그러게요. 백작한테 저런 얼굴이 나왔다는 게...."
"수! 다물어라."
"앗. 죄송요."
일행 중 제일 어려 보이는 여자였다. 수는 멋쩍게 손을 들어 보이며 사과했다. 하대하는 백작의 호칭에서, 그들이 브라츠 가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저쪽은 수, 내 처조카이며 이쪽은 간샤, 무주룬일세."
게다가 사과도 없다. 네르사른은 대충 일행을 소개하며 말문을 돌릴 뿐이다. 아마 별일이 없다면, 그러니까 국경을 넘어서도 목숨을 부지한다면 이안의 남은 생을 함께 할 자들이었다.
"예상보다 일찍 고향을 떠나게 되어 아쉽겠소."
"글쎄요. 화친으로 동맹을 견고히 하는 경사가 앞당겨진 것이라 생각하면 영광이지요. 물론, 윈첸 부족장님의 병환은 굉장히 안타까운 일이지만요."
네르사른이 말꼬리를 잡으려다 말았다. 군더더기 없는 이안의 덧붙임 덕분이었다. 어려도 귀족은 귀족이라는 것인가. 제국인 특유의 화술이 여실했다.
"한데, 부족장님께서는 갑자기 그러신 것입니까?"
"워낙 연세가 많으신 터라 갑자기라는 말이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따지자면 그것뿐이오."
"오해 없이 들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기왕 여기까지 오셨으니, 네르사른 님이 원하신다면 주치의를 불러드리겠습니다."
천려족도 나름대로 의료 체계가 갖춰져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부족 단위의 공동체에서 해봤자 얼마나 하겠나? 민간요법 위주로 약초 달이는 게 다일 것이다. 변방이라고는 하나, 제국의 일부인 브라츠의 의사와는 비교가 안 되겠지.
"말은 고맙소만, 거절하겠소. 우리는 우리만의 방식이 있어서."
수백 년간 이어온 저들의 전통이 있다는 뜻이었다. 애초에 크게 다칠 일 없는 신체이기도 하거니와, 죽음 역시 신의 뜻이라 생각하는 기조가 깔려있어서 그렇다.
"아니면, 네르사른 님. 그거라도 부탁해 보는 건 어떨까요? 붉은초를...."
간샤라는 남자가 슬쩍 끼어들었다가, 네르사른의 살벌한 시선에 입을 다물었다.
붉은초? 그게 무엇이지? 이안은 덤덤한 표정으로 머리를 굴려보았으나,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어쨌거나, 갑작스러운 방문인데도 이리 환대해 주어 고맙소. 백작님께도 꼭 전해주시기를."
그는 이제 물러가 달라는 뉘앙스로 감사 인사를 남겼다. 하지만 이안은 물러서지 않았다. 아직, 제일 중요한 볼일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물론입니다. 그리고 사실, 이렇게 찾아온 것은 부탁드릴 게 있어서 그렇습니다."
"부탁?"
사실 이들이 찾아오지 않았으면 좀 성가실 뻔했다. 베릭과 함께 국경을 넘으려면 그가 정보원 겸 감시역으로 자처하여 데르가의 신임을 얻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베릭' 그 자체에 있었다.
도무지 머리 쓰면서 사람 꾀는 법을 모르니, 데르가의 신임을 사게끔 하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여차했다가는 혼자 대사막을 건너 천려족 주둔지로 오라 할 판이었다.
"대사막을 함께 가고 싶은 친구가 있습니다."
"혹시 아까 옆에 있던 하인과 붉은머리 말입니까?"
이안이 해나, 베릭과 함께 있는 걸 본 자는 무주룬이었다. 그의 말에 이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붉은머리만입니다. 고아라 가족이 따로 없어요."
"세상 모두가 시간이 지나면 부모를 잃습니다."
"제 말은 가여운 자라는 뜻이 아니라, 브라츠에 미련이 없으니 대사막을 위해 일할 수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네르사른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대사막은 기후도 기후지만, 사는 방식 자체가 치열했다. 그저 놀고먹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아마 그곳에서 이안이 환대받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평생 귀하게 자란 귀족이 그곳에서 할 수 있는 한정되어 있을 테니까.
"우릴 위해 일을 한다? 글쎄. 무엇을 말이오? 모래웅덩이를 헤엄칠 수 있소? 전갈 독에 내성이 있소? 그것도 아니면 물 없이 싹을 틔우는 일은?"
천려족의 삶이 어떤지, 단편적으로 느낄 수 있는 나열이었다. 그들 입장으로는 축내는 것 없이 함께한다는 것만으로도 민폐이리라.
하지만 이안은 기죽지 않았다.
"전투에 능하고 체력이 좋습니다."
"전투에 능하다? 하하하!"
네르사른은 처음으로 순수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천려족 앞에서 개인의 전투 능력을 논하다니. 그들은 무기와 마법 없이는 절대로 대적할 수 없는 종족이었다.
"인제 알겠군. 이안 님은 농담을 즐기는 분이라는 걸."
"농담이 아닙니다."
이안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를 마주했다. 장난이 아니라는 걸 전하는 것이다. 네르사른은 점점 웃음기를 지우더니, 이내 이안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몸집도 작은 것이 꽤 당돌해.'
예의도 있었다.
백작도 안 한 접객을 챙기고, 재수 없긴 하지만 윈첸을 위해 의사를 불러주겠다며 친절을 전했다. 이 모든 게 살기 위해 알랑방귀를 뀌는 것 같지는 않다. 그저, 적의(敵意) 없이 도리를 다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별개의 문제.
짐짝은 이안 브라츠 하나로 족했다.
"이안 브라츠. 그대는 화친의 증표라지만, 그 붉은머리는 우리에게 무슨 쓸모가 있소? 밥값을 할 줄 모른다면 데려갈 수 없소."
"그건 아직 모르는 일 아닙니까."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지. 그 조그만 녀석이 전투에 능하다니. 이 무슨...."
"믿기 어렵겠다면-"
이안이 말허리를 끊었다. 여전히 당돌한 것이 쉽게 물러서지 않을 듯했다.
"어떻게 증명하면 되겠습니까."
'이것 봐라.'
네르사른은 잠시 고민하다가 수를 돌아봤다. 입안 가득 빵을 씹어대던 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귀찮은 일임을 직감한 것이다.
"좋소. 전투에 능하다고 했지. 수와 대련하여 이기면 데려가겠소."
"왜 하필 저예요? 간샤도 있고, 무주룬도 있는데!"
"체급이 맞지 않느냐."
"으으. 진짜!"
며칠 달려와서 쉬지도 못하고 대련이라니.
수는 진심으로 짜증 난다는 듯 눈를 부라렸다. 하지만 네르사른과 일행들은 자주 있는 일이라는 듯 신경 쓰지 않았다.
"어떻소? 괜찮겠소?"
"기회를 주셨으니, 감사할 따름이지요."
"천려족의 대련에는 항상 피가 따르지. 참고하시오."
"베릭도 피 흘리는 걸 좋아해서요. 마음에 들어 할 겁니다."
이안은 그렇게 대답하면서 수를 살폈다.
아무리 체구가 작은 여자라고는 하나, 네르사른이 적진으로 찾아오며 데려온 전력이다. 절대 만만하게 볼 자가 아닐 것이다.
"그럼 저녁 식사 후에 뵙겠습니다. 쉬세요."
"고기! 고기를 많이 부탁해. 아니, 부탁할게요!"
"알겠습니다. 수."
이안은 예의 바르게 인사한 다음, 방을 나섰다. 문을 닫고 복도를 돌자마자 옹기종기 모여있는 하인들을 발견했다.
"이안 님! 왜 이렇게 늦으셨어요?"
"무슨 일 난 줄 알았습니다."
다들 서성거리며 그를 걱정하고 있었다. 이안은 그저 웃으며 저녁 식사를 당부했고, 이내 소파에 몸이 구겨져서 자고 있는 베릭을 깨웠다.
"베릭."
"어어...."
"저녁 먹고 천려족과 대련해야 해."
그 말을 듣자마자, 베릭은 전기가 통한 것처럼 눈을 번쩍 떴다. 지금 뭐라고? 누구랑?
"아까 봤던 자 중 여자가 한 명 있었지? 그자를 이겨야 함께 대사막으로 갈 수 있다. 아니면 너 혼자 따라와야 할 것이다."
베릭이 눈을 반짝였다. 홀로 사막 횡단 같은 상황은 안중에도 없는지, '그' 천려족과 한판 뜨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즐거운 모양이다.
"그런데 여자랑?"
"우습게 보면 큰일 난다. 족장의 동생이 브라츠로 들어오면서 데려온 자야. 아주 날래 보였어."
간샤와 무주른은 확실히 호위 목적이 맞다. 전사의 투지와 기백이 그대로 느껴지는 분위기, 분명 사자 우리에 떨어트려도 살아남으리라.
하지만 최대한 급하게 이동해야 하는 이번 전언의 특성상, 문제가 생기면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일 전력이 필요했다. 수의 가벼운 체격이 주는 확신이었다.
베릭은 쿠션에 얼굴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달리기도 아니고, 빨라서 뭐해? 잡히면 끝날 거."
"잡을 수나 있으면 다행이지."
"엥?"
이안은 창밖을 보며 잠시 고민했다.
그래, 잡을 수나 있으면....
"베릭. 내 말을 잘 들어라. 이기는 법을 가르쳐줄 테니."
이안은 소파 맞은편에 앉아서 가능한 전술을 모두 나눴다. 하늘이 조금씩 어둑해지고, 저택의 횃불이 창가의 붉은 꽃을 밝힐 때까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