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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가비누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소년은 아무런 설명도 해 주지 않았지만, 나는 깨운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창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먼발치에서 좀비들의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여느 때처럼 포식자가 울부짖는 괴성이 아니었다.

비명에 가까웠다.

그들은 사냥당하고 있었고, 저런 게 가능한 무리는 손에 꼽았다.

기사단이었다.

예정대로 일이 흘러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생존자인 것 같아요."

간단한 답이었지만, 소년은 힘겹게 입을 떼었다.

마치 불청객이 다가오는 것처럼 껄끄러운 표정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잠든 두 사람을 깨워서 맞서야 하나요?"

"맞선다?"

나는 소년의 대답이 의외라는 듯이 반응했다.

환영하거나, 돕거나, 무시하거나, 여러 행동들이 있지만 싸운다는 대답이 첫마디로 나올 줄이야.

"우리가 지닌 식량이나, 거점을 노리는 약탈자일 가능성도 있잖아요."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만약 그렇다면 준비를 해야 해요. 우리는 사람이 적고, 이 기숙사는 수비에 취약하니까요."

나쁘지 않은 판단이었다.

그저 목숨을 연명할 목적으로 가진 것을 내놓는 얼간이들보다도 나아 보였다.

'탈레온과 가비누는 지나가던 엑스트라에 불과하지만, 성장하고 있어. 어쩌면 이들을 이끄는 게, 네임드와 함께하는 것보다도 나은 선택일지도 몰라.'

네임드라고 끝까지 살아남는 게 아니었다.

그들에겐 뛰어난 재능이 있었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지식이 필요하다.

운도 따라 주어야 하며, 동료도 모아야 했다.

수차례의 게임 플레이를 통해 얻은 경험으로, 그러한 경험들은 내 뇌리에 깊게 자리 잡았다.

"저들이 이곳에 온다면 내가 상대하마. 가비누, 넌 자고 있는 두 사람을 깨워라. 그리고 내가 신호하기 전까지는 방에서 기다려."

"만약 저들이 당신을 없애려 한다면요?"

나는 침묵했다.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단언할 수는 없었다.

기사단과의 접촉까지는 계획이지만 이후로는 임기응변이었다.

떨고 있던 가비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땐 판단을 해야겠지. 어느 쪽이던 너희들이 살 수 있는 방향으로 움직여라."

소년은 머뭇거리다가 이내 몸을 돌렸다.

그가 방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하곤 바깥의 사정에 집중했다.

문틈으로 눈가를 갖다 댔다.

기사단은 이제 내 시야에도 들어올 정도로 가까워졌다.

수는 총 4명.

여성 한 명과 남자 셋이었다.

'별의 기사단이군.'

아카데미를 수호하는 기사단은 세개의 그룹으로 나뉘었다.

그들은 하늘에 뜬 천체에서 이름을 따 왔으며 각각 태양, 달, 별로 불리었다.

공동체들마다 성격이 다르지만, 당장 눈앞에 닥친 별의 기사단은 개중에선 온건파에 해당했다.

생존자를 가리지 않으며 그들을 약자로 인식하고 보호하려 한다.

적어도 인내심이 닿는 한 말이다.

[메인 퀘스트 – 기사단과의 조우]

[클리어 목표 – 기사단을 제거하여 위험을 없애거나, 그들과 합류하여 아지트로 이동해라.]

[난이도 – (A-)]

[보상 - 30코인.]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퀘스트의 내용에도 명시되어 있었다.

기사단은 플레이어에게 구원이 아닌 위험이었다.

(A-) 랭크의 난이도는 내 현재 수준을 반영하여 책정된 랭크였다.

이만하면 웬만한 고인물도 쉽게 해결할 수 없었다.

계획이 필요하다.

어느 정도의 운도 따라 주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제거하는 방향은 내 힘만으론 불가능하다.

함정을 파 놓고 그쪽으로 유인해야 한다.

물론 그들이 호의적이라면 구태여 위험을 감수할 필요도 없었다.

하나 내겐 게임을 플레이하며 얻은 경험이 있었다.

기사들이 얼마나 양아치 같은 집단인지 신물이 날 정도로 깨달았다.

"여기가 기숙사 4동 맞지?"

"지도에 따르면 틀림없어."

"한데 무서울 정도로 조용하네. 누가 들어가 볼래?"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다면 내가 먼저...."

그들이 들어올 순서를 정하고 있던 와중에, 내 쪽에서 먼저 문을 열었다.

일동이 놀라워하며 숨을 삼켰다.

한 남자는 감정이 곧바로 행동으로 이어져 검을 뽑으며 겨눈다.

"누구냐?"

"보시는 대로 생존자입니다. 아카데미 학생이죠."

"아카데미의 정복을 입고 있지 않은데?"

"원한다면 갈아입고 나올 수도 있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너 혼자서 살아남은 거냐?"

"일단 안쪽으로 들어오세요. 바깥에서 얘기를 나누기엔 좋은 날씨가 아니잖아요."

내 부탁과는 달리 그들은 선뜻 들어오지 못했다.

의심하는 눈초리였다.

나를 바라보던 시선을 옮겨서는 안쪽의 통로와 계단을 살펴봤다.

함정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거겠지.

'여기까지 오는 동안 당한 일들이 있었을 거야. 분명 안 좋은 일투성이였겠지.'

저들의 시선이 곱지 않은 것에 대해선 별다른 분노를 느끼지 않았다.

입으로만 결백하다고 말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었다.

이 세계에서 거짓이란 진실만큼이나 차고 넘칠 정도로 많지 않은가?

나는 반쯤 열려 있던 문을 활짝 열었다.

"이걸로도 못 믿겠다면 들어오지 않으셔도 상관없어요. 다만 오늘 밤을 밖에서 보내는 건 그다지 현명한 판단은 아니란 생각이 드네요."

"...이 아이 말이 맞아. 게다가 우린 쉬어야 해. 여기까지 오느라 체력을 너무 많이 썼어."

맨 끝에 있던 여성이 대꾸했다.

투구 속에 비친 그녀의 눈가는 무척 초췌해 보였다.

몸이 앞뒤로 넘실거렸다.

보다 못한 동료가 그녀를 부축하며 중심을 잡아 줬다.

"...실례하마."

처음 대화했던 남성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그들을 들여보낸 다음에 문을 닫았다.

'생각했던 것보다도 심각하네.'

기사단이 입고 있던 은빛 갑옷은 군데군데 핏자국으로 더럽혀졌다.

탐색하는 와중에 전투가 있었던 거겠지.

하지만 몇몇 흔적은 좀비와 싸운 것뿐만이 아니라 다른 흔적도 엿보였다.

사람의 피처럼 보였다.

좀비의 것은 누런 황색이나, 옅은 초록빛을 띤다.

거무칙칙한 얼룩과는 관련이 없었다.

[영리함]은 내 추론이 정답이라며 말해 주었지만, 그걸 발설하면 입장이 곤란해졌다.

'부상을 입혔거나, 또는 죽였거나.'

사람에게 검과 마법을 사용했다면, 그것만으로 조심할 이유는 차고 넘쳤다.

나는 얻은 정보를 머릿속에 각인시키며 입을 열었다.

"기사단이시죠?"

"소개가 늦었구나. 내 이름은 오스틴이라고 한다."

자신을 오스틴이라고 소개하는 남성은 여전히 검을 내려놓지 않았다.

검은 기름과 피를 빨아들여 날카로움이 처음만 못했지만, 자신 정도는 거뜬히 베어 버릴 것 같았다.

'녹초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싸워선 안 돼. 최소 미티오스이거나, 베투스 등급일 테니까.'

THE Survival의 세계에서 강함의 기준은 등급으로 나뉘었다.

그중에서도 미티오스는 7등급에 해당했고, 베투스는 6등급이었다.

노비스인 자신과는 격이 달랐다.

적어도 지금 당장은 말이다.

'게다가 오스틴이라면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인간이다.'

기사단이 기숙사를 방문할 때마다 매번 같은 인물이 오지는 않았다.

그때마다 달라진다.

오스틴은 개중에서도 위험한 캐릭터였다.

꽝 중에서도 꽝.

이 세계에 어떠한 악의가 있는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다.

"생존자는 네가 전부인 거냐?"

"안쪽에 제 동료들이 몇 명 있어요. 아, 안심하세요. 저보다도 어린 아이들이고, 계란으로 바위를 칠 정도로 무모한 성격도 아니니까요."

오스틴이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그는 그제서야 자신이 위협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검을 집어넣었다.

"미안하다. 이곳까지 오는 여정이 조금 힘들었거든."

"어디서 오신 건가요?"

"라인 타워. 우린 그곳에서 생활하고 있단다."

라인 타워라면 기숙사 4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대략 40km쯤이었나?

잿빛 구름이 걷히고, 안개가 줄어든다면 이 거리에서도 보일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일단은 내 동료들이 쉴 만한 공간을 내어 주겠니? 아니, 아니다. 우선 이 기숙사의 사정부터 듣는 게 먼저겠구나."

오스틴은 대답하던 도중에 요지를 뒤바꿨다.

학생 몇 명만이 생존해 오던 공간.

좀비가 남아 있다고 확신하는 게 자연스런 발상이었다.

하지만 우린 그 대부분의 사례에서 벗어나 있었다.

"이곳에 괴물은 없습니다."

"없다고?"

"정확히는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는 얘기지만 말이죠."

내 얘기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들 모두가 불신이 가득한 눈빛을 보였다.

부축을 받던 여성이 동료의 손을 떨쳐 내곤 앞으로 다가왔다.

양손에 마력을 모았다.

노란빛의 구슬이 사방으로 찢겨지며 먼지처럼 변하였고, 그것들이 기숙사 전체로 뿔뿔이 흩어졌다.

탐색 마법이었다.

몇 분간 기다리자 여성의 표정 위로 당혹감이 번져 나갔다.

그녀의 눈동자가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사실이야. 4층까지 확인해 봤는데 괴물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어. 덤으로 1층에 있는 저쪽 방에는 3명이 있어. 그리고 이 아이까지 더해서 4명이 기숙사에 있는 전부야."

그녀가 선언하자 남은 사람들이 혀를 내둘렀다.

겨우 넷으로, 그것도 아직 채 성장하지 않은 풋내기들이 건물을 점령했다.

이 사실을 쉽게 받아들일 사람은 없었다.

"괴물이 몇 마리 없었을 거야. 그래서 가능했던 거라고."

"무장을 완전히 갖춘 건가? 아니, 그렇다고 하더라도 말이지."

"교수나 다른 기사단이 리더로 있었을지도 모르고."

"바보야, 그랬다면 이 아이가 우릴 맞이하지는 않았을 거야."

"적당히 해!"

마법을 썼던 여성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대단한 박력이었다.

갑론을박을 펼치던 기사들이 몸을 파르르 떨며 말을 아꼈다.

"애 앞에서 꼴사납게 무슨 짓거리야?"

적절한 타이밍에 끼어들어 주었다.

나는 저들의 논쟁에 어떠한 해명도 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그것보다도 여성에게 눈길이 갔다.

그녀가 쓰고 있던 투구를 벗으며 맨 얼굴이 드러났다.

'이 사람이었던 건가.'

그녀는 내가 알던 사람과 닮아 있었다.

따지고 보면 그건 당연한 이치였다.

같은 부모로부터 이어진 혈연관계.

즉 자매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루실 레인우드.

레인우드 가문의 장녀임과 동시에 별의 기사단 소속 상급 기사였다.

"언니!"

방에서 대기하라고 했던 타니아가 뛰쳐나왔다.

문틈으로 상황을 지켜보다가 언니의 존재를 확인한 것이다.

"타니아!"

두 사람은 마치 몇 년 동안 만나지 못했던 것처럼 재회를 만끽했다.

서로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나는 말없이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타니아라면 네 동생 아니야?"

둘러싼 사람들은 놀라워하는 얼굴이었다.

행방을 알 수 없던 가족과 재회한 것이다.

'좋은 일이야. 그러고 보니까 조슈아에게도 가족이 있었어. 부모님 그리고 여동생... 만날 일은 없을 거야. 아카데미에 입학하지도 않았고, 그녀는 훗날 가문의 부활을 위해 정략결혼을 하게 될 몸이니까. 분명 본가에서 신부 수업이라도 받고 있겠지.'

가족이란 단어는 지금의 나에게는 너무나 먼 단어였다.

생물학적으로 이어진 관계.

그 이상은 되지 못했다.

얼굴을 떠올리려고 노력해도 희미한 잔상만이 아지랑이처럼 피어 올랐다.

'계획만을 생각해, 강민혁. 다른 걸 생각할 여유도 없잖아.'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가 감동의 도가니에 빠져 있을 때.

나에겐 살아남았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 * *

한바탕 난리를 치른 기사들과 학생들은 휴식을 취하는 부류와 담소를 나누는 두 부류로 나뉘었다.

가비누와 탈레온은 자신의 방에 돌아갔고, 기사들 쪽에서도 두 사람이 휴식을 취했다.

남은 사람들은 식당으로 모였다.

"어떻게 여기까지 살아남은 거야?"

루실은 기사들 중에서도 누구보다 피로해 보였지만, 동생을 만났다는 기쁨에 활기를 되찾았다.

그건 타니아도 마찬가지라 두 사람은 다소 부담스러울 정도를 서로를 가까이했다.

"말하자면 사정이 좀 길어."

"괜찮으니까 편히 말해. 네 얘기라면 얼마나 길어지더라도 끝까지 들어 줄 테니까."

타니아는 미소를 짓고는 조슈아를 바라봤다.

그는 기다란 식탁에서도 맨 끝에 홀로 앉아 있었다.

'내가 아니야.'

상황을 설명하는 역할은 본디 리더가 하는 것이 옳았다.

조슈아는 집단의 책임자였다.

그녀 스스로도 인정하는 사실이었지만, 타인이 보았을 때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조슈아는 기사들 앞에서 자신의 이름을 소개했다.

그 이름을 듣곤 기사 중 한 사람이 루실의 귓가에 대고 무어라 속삭였다.

확실히 듣지는 못했으나 몇 글자만은 또렷하게 들렸다.

나태한... 조슈아.

그 몇 마디가 조슈아라는 인간의 평가를 얼마나 떨어뜨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내색은 안 했으나 기사들은 그를 껄끄럽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현재로 이어져 그는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다.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대로 떠드는 건 쉬웠지만 타인의 공로를 가로채는 기분이라 찝찝했다.

'가비누와 탈레온이 보았다면 투덜거렸을 거야. 창피한 줄 알라면서.'

타니아는 생각했다.

한곳에 집중된 의식을 다른 곳으로 옮길 방법.

그녀는 간단한 방법 하나를 떠올리고는 곧장 실행에 옮겼다.

"선배, 제가 이분들에게 사정을 설명해 드려도 괜찮을까요?"

타니아는 자신에게 향해 있던 시선을 조슈아에게 옮기는 데 성공했다.

그건 허락을 구하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이 기숙사 안에 체계가 어떻게 잡혔는지 한눈에 보여 주었다.

외딴섬에 있던 조슈아가 웃었다.

즉흥적으로 짜낸 발상치고는 몹시 훌륭하다 생각했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루실과 오스틴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래, 거기에 더해서 물도 좀 갖다드려. 표정을 보아하니 마실 게 필요해 보이거든."

12화

"루실, 알려 줄 것이 있어. 저 아이의 이름은 조슈아야. 아카데미의 문제아 중 한 사람이지. 녀석은 나태하고, 본인밖에 모르는 파렴치한이야. 그 불성실한 태도 때문인지 몰라도 아직까지 노비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소문도 있어."

루실은 동료가 해 주었던 얘기를 떠올렸다.

하나같이 소년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것들뿐이었다.

그러한 정보는 소년을 알아보는 데 참고 정도로만 쓰여야 했다.

타인의 평가에 의지하여 누군가를 바라보는 것은 편협한 시선이지 않은가?

'난 이 아이를 본 적 있어.'

하지만 그 정보가 자신이 알던 사실과 더해진다면 고민해 봐야 했다.

그녀는 잠들어 있던 밑바닥의 기억을 더듬거렸다.

물속에 진흙을 건드린 것처럼 뿌연 흙먼지가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먼지는 점차 가라앉았다.

티끌이 사라지자 과거의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였다.

그날은 아카데미 교정을 거닐고 있었다.

기사단의 임무 중에는 영지의 순찰도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조슈아하고는 언제나 같은 장소에서 마주쳤다.

'농땡이를 피우고 있었지. 그는 학생이란 본분을 소홀히 한 거야.'

성실함을 중요히 생각하는 그녀로선 용납되지 않는 행동이었다.

하여, 조슈아를 외면하였다.

정문에서 마주쳤을 때 그는 예전과는 달랐으나 어떤 속임수가 있다고 판단했다.

'꾸며진 모습이 틀림없어. 속은 내가 알던 그대로겠지. 게다가 여기에는 타니아가 있어. 그 아이가 사람들을 지킨 거야.'

더군다나 이곳에는 동생인 타니아도 있었다.

그녀의 훌륭한 용모와 뛰어난 마법 실력은 언니로선 자랑스런 일이었다.

분명 곤경에 처하여도 뚝심 있게 행동했겠지.

하나 진실은 달랐다.

그걸 동생의 입으로부터 듣자 충격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러니까, 저 소년이 너와 다른 사람들을 이끌고 있으며, 기숙사의 괴물들을 사냥한 것도 저 소년의 역할이 크다는 뜻이지?"

"그렇다니까. 언니, 제대로 안 듣고 있었어?"

루실은 잊고 있던 피로감이 몸을 덮치는 기분이었다.

리더라고 생각했던 동생은 3층에서 꼼짝없이 갇혀 지냈고 그걸 구해 준 게 조슈아였다고 한다.

이어서 그는 일 층으로 내려와 생존자를 단합시키고는 아래로 내려오던 괴물들도 상대했다.

엄청난 성과였다.

그건 학생이 해낼 만한 일이 아니었고 다 큰 성인이라도 어려운 일들이었다.

'타니아는 절대로 과장을 하거나, 허풍을 늘어놓을 아이가 아니야.'

동생의 솔직한 성격은 언니인 그녀가 잘 알고 있었다.

전부 사실일 터였다.

갑작스레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위기 상황에서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변화하는 생물이었다.

잠들어 있던 재능이 깨어나거나, 개차반이던 성격이 달라지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으리라.

하지만 소년은 그 정도를 넘어선 것 같았다.

'말이 돼?"

불신이 사라지자 돌아오는 것은 경이로움과 두려움이었다.

"특이한 아이이긴 했지."

오스틴이 불쑥 입을 열었다.

"우릴 만났던 생존자들을 기억해? 죄다 우리를 칭송하며 아첨을 떨었지. 평화로울 때는 눈길조차 주지 않던 족속들이 말이야. 그게 아니라면 두려워했어. 우리가 가진 걸 뺏을까 걱정했던 거야. 한데, 저 소년의 눈빛에선 그런 감정이 읽히지 않았어."

소년은 기사단을 마주하고도 침착했다.

그건 지금도 변함이 없어서 식탁 끝에서 무뚝뚝하게 앉아 있었다.

랜턴의 미약한 불빛에 의지하며 책을 읽는 중이었다.

책은 보기만 해도 질릴 정도로 두꺼웠다.

"자제력이 좋은 건가? 나라면 억울하다고 하소연했을 거야. 내가 이룬 것이 누군가에게 빼앗기는 기분을 참을 수가 없거든. 특히나 저 나이에는 그런 경향이 심하지."

"설마, 날 탓하는 거야?"

루실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사실 그대로를 말하는 거지. 우린 직감적으로 저 소년의 배짱을 알아봤지만, 그의 과거를 끄집어서 덮어 버리려 했잖아. 그리고 넌 동생을 편애하는 마음에 잠시 냉정함을 잃었어. 아, 물론 이건 아가씨의 잘못이 아니니까 안심해."

오스틴이 타니아 쪽을 바라보며 괜찮다며 손짓했다.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그쳤다.

"선배는 영리해요. 기다리면 자기한테 기회가 돌아오리라는 걸 아신 거에요."

"오, 신동이라 소문난 네가 그렇게까지 높게 평가해?"

"네, 그리고 전 아직까지도 두 분이 선배를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타니아는 사정을 설명할 때 몇몇 부분은 감추고 얘기했다.

빛 속성을 다룬다는 점.

아래층에 삼중 술식을 단신으로 해석한 점.

그에게 직접 부탁받았으며 조슈아는 그러한 능력들이 나중에 밝혀지길 바라는 눈치였다.

"네 동생이 홀딱 반한 것 같은데?"

"농담하지 마! 타니아, 혹시라도 이상한 마음 품고 있는 건 아니지?"

"뭐? 아냐. 나는 그저...."

"저 아이의 가문인 팔라리온은 영지를 잃은 몰락 귀족이야. 게다가 등급은 노비스이고. 우리 레인우드와는 절대로 이어질 수 없어."

루실은 흥분한 목소리로 신신당부했다.

귀족에게도 엄연히 서열이란 것이 존재하였다.

그녀는 세상이 이 꼴이 되었어도 가문의 영향력이 중요하다 믿는 입장이었다.

"결국 사태가 끝났을 때 남는 것은 권력이니까."

"...언니."

오스틴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잔에 물을 따랐다.

그리고 그걸 마시며 조슈아를 힐끗 보았다.

표정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흡사 인형을 의자에 앉혀 놓은 것 같았다.

식탁의 끝과 끝은 제법 먼 거리였지만 목소리가 닿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다.

"이봐, 괜찮다면 이쪽으로 합석하는 게 어때? 그쪽은 너무 어둡잖아."

조슈아가 고개를 돌렸다.

읽고 있던 책을 덮고는 이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때까지도 소년은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 * *

내가 반대편으로 다가가자 루실은 냉소적인 표정으로 쏘아보았다.

그러다가 동생인 타니아의 손목을 붙잡고는 밖으로 나갔다.

나는 웃어넘겼다.

기사단과 합류하였을 때 마주할 난관 중 하나가 바로 그녀였으니까.

당장 관계를 회복할 필요는 없었다.

그럴 기회라면 나중이라도 생길 걸 아니까.

그보다도 눈앞의 남자와 관계를 다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구원자가 아니야. 같은 생존자이지. 그리고 생존자라면 언제든 선을 넘을 수 있어.'

절박한 상황에선 기사라는 명함 따윈 허울에 지나지 않았다.

게임을 통해 겪어 왔던 기사들 중에 긍지를 목숨 앞에 둘 인간은 손에 꼽으니까.

나는 오스틴을 살펴봤다.

우락부락한 몸집이 힘깨나 쓸 것 같은 인상이었다.

그의 허벅지는 통나무만 하였고, 팔뚝은 자신보다 배로 큰 것 같았다.

'정문에서 검을 뽑고 들어섰을 때는 오금이 저렸었지.'

고개를 흔들며 상념을 떨쳐 냈다.

이제부터 이 인간의 진의를 알아보는 게 눈앞의 숙제였다.

"노련하네. 5학년이라면 이제 겨우 18살일 텐데. 내가 봐 왔던 학생들은 모두 질질 짜거나, 살려 달라고 애원했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그런 모습을 목도하면 역겨움이 먼저 끓어 올라. 사람들은 필요할 때만 기사도를 찾거든."

오스틴이 신세를 한탄했다.

이 시대의 기사들도 귀족이나 왕으로부터 봉토를 하사받아, 다음 세대로 세습해 주는 것은 똑같았다.

문제는 이곳이 왕립 아카데미라는 점이었다.

귀족의 자제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며, 심지어는 왕족도 이곳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들 대부분은 기사라는 명함 하나만으론 영향력을 과시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남아 있는 이유는 하나였다.

이곳 아카데미에는 사교계의 거물들이 활약하는 무대였고, 그들에게 눈도장 찍기에 이보다 좋은 장소가 없었다.

상황이 이쯤 되면 포기하는 게 옳겠지만, 아마 대부분은 미련을 버리지 못할 거야.

재난 상황은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기 좋았다.

극한의 위기 속에서 받는 도움은 보다 오래 기억되기 마련이니까.

감정이 풍부해진다.

기사들은 틈을 노리고 있었고, 오스틴도 처음에는 그런 부류 중에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환멸감에 빠져 있는 모양이었다.

학생에 대해 얘기하는 오스틴의 눈빛은 날카롭고, 자비가 없어 보였다.

"다행이네요. 저를 보고도 구역질을 안 하시는 걸 보면, 저는 예외인 것 같으니까요."

"뭐라고? 하하! 그래, 너는 다르지."

그는 모를 것이다.

내 곱상한 외견과 달리 속 알맹이는 그보다도 오래 살아왔다는 걸.

"당신도 루실 기사와 생각이 같나요?"

"나와 루실은 서로 공유하는 것들이 많지. 그중에서 어떤 걸 묻는 걸까?"

"하나를 꼽자면 귀족이 우월하다는 사상이죠."

"너도 귀족이지 않던가?"

"제 가문을 욕보이기는 싫지만, 팔라리온은 망조의 길에 들어섰죠. 되돌리긴 쉽지 않을 테고, 적자인 저도 가문을 재건할 마음이 없어요."

오스틴이 놀란 듯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이곳 세계의 사람들 대부분이 가문을 대하는 신념이 강한 편이었다.

나는 방금 그 신념과 동떨어지는 대답을 한 것이다.

"보면 볼수록 특이해. 종잡을 수가 없어. 하지만... 그런 남들과 다른 사고방식이 네가 여기까지 살아올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구나."

"감사합니다. 그런데 아직 대답을 듣지 못했어요."

"아, 그러고 보니 네가 질문을 했었지. 내 의견을 묻는다면... 나도 그런 편이다. 귀족이 평민보다는 훌륭하다 믿고 있어. 하나 그렇다고 뛰어난 평민이 없다고도 얘기는 안 해."

나는 오스틴을 시험하고 있었다.

넉살 좋은 모습에 넘어가선 안 된다.

게임을 할 때 경험한 오스틴이란 인간은 신뢰하기 어려운 인간이었다.

"결례인 줄 알지만 당신의 기준에서 전 어디에 해당하나요?"

"나는 너에 대해서 잘 모른다. 모두 남들로부터 들은 얘기밖에 없지. 첫인상만 따지자면 놀랍기는 하지만 말이다. 옳거니, 네가 왜 내 평가를 원하는지 알겠다. 우리와 함께하고 싶은 거지? 이 앙큼한 녀석 같으니라고."

오스틴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나는 저 웃음 속에 숨겨진 생각을 읽어야 한다.

이들은 인명 구조를 위하여 탐색대를 꾸린 게 아니었다.

본래 목적은 아카데미 안에서 나뉘어진 세력권의 확인과 식량 탐사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들을 버리고 갈 수도 있다.

온건파에 해당하는 별의 기사단이지만 내부 사정은 매번 바뀌었다.

현재는 어떨까?

라인 타워의 수용 인구가 한계에 다다랐을 수도 있었다.

그리 되면 타니아는 논외로 치더라도 나와 두 소년의 안전은 보장받지 못했다.

"우리를 데리고 가실 생각인가요? 제 생각에는, 어쩌면 두고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오스틴은 즉답하지 않았다.

뜸을 들였다.

조금 전까지 했던 대화들이 꿈이었던 것처럼 어색함이 감돌았다.

[냉정함]은 내 가슴속에 피어오르는 불안감을 모두 잠재워 버렸다.

덕분에 떨지 않았다.

서로가 시선을 피하지 않았고 그 몇 초는 몇 시간이라고 느낄 정도로 길었다.

죽일 생각인가?

이 기숙사에는 이제 삼 일 치 정도의 식량이 남아 있었다.

그것이 사람을 죽일 이유로 충분한지 따져 보았다.

말이 안 된다.

하나 그건 강민혁의 상식으로서 그럴 뿐, 이 세계의 방식은 달랐다.

게임을 플레이해 오며 이미 이보다도 작은 걸 손에 넣기 위해 피를 흘리는 걸 보았다.

내가 먼저 행동할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나는 책 위로 손을 얹었다.

그가 칼집에서 검을 뽑아 휘두르는 것보다도 더 빨리 마법을 시전할 자신이 있었다.

그럼에도 승산은 적다.

[강심장]은 하다못해 팔 한 짝이라도 뜯어내 보자며 격려했다.

말은 쉽지....

"아직은 모른다."

오스틴은 웃지 않았다.

그 대답이 고심 끝에 내놓은 것임을 알아차렸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적어도 오늘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게다가 넌 내 동료의 동생을 구해 준 은인이고. 기사는 명예를 쉽게 저버리지 않지. 모두가 아는 사실이야."

안다.

그리고 처음 명예를 저버리는 것은 어렵지만, 한 번 버리면 다음번은 쉽다는 것도 안다.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을 나가 버렸다.

나는 한숨을 토해 냈다.

역시 밸런스 망겜이야. 좀비는 더 강해지고, 사람은 속을 더 알 수 없게 되니까.

13화

다음 날이 되었을 때.

오스틴은 나와 함께 다시 한번 기숙사를 점검했다.

그건 언뜻 보기에 불필요한 행동처럼 보였다.

이미 루실이 마법을 통하여 내부의 상황을 확인하지 않았던가?

나와 단둘이 있길 원한 거야.

자신을 이곳의 리더로서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하나 그것을 온전히 좋은 뜻으로만 해석할 수는 없었다.

사람이 많은 자리를 피한다는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조슈아, 단도직입적으로 물으마. 이곳에 물자가 어느 정도 남아 있지?"

어설픈 거짓말은 탄로 나기 쉬웠다.

하여, 솔직하게 대답했다.

"식량은 3일 치가 남았어요."

보관소에서 얻었던 연금술 재료들과 휴게실에서 얻은 술과 담배에 대해선 침묵했다.

그가 길게 자란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너를 따르는 어린 두 기사의 대답과 똑같구나."

오스틴은 이미 정보를 손에 쥔 채로 자신을 떠본 것이었다.

예상하고 있었다.

하나 너무나도 쉽게 실토하자 김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일말의 동요는 [강심장]이 재빨리 집어삼켜 버렸다.

"불쾌하게 생각하지 말아 줬으면 한다. 이것도 서로의 신뢰를 확인하는 방법 중에 하나니까. 그리고 이 대화와 관련하여 네가 너의 동료들을 의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두 소년에게는 입단속을 시켰으나 기대감은 크지 않았다.

그들에게 기사란 목표이자 동시에 우상이었다.

선악을 철저히 구분하며 긍지와 명예를 아는 존재.

책에서 읽었던 내용 그대로 환상을 품은 채로 바라봤을 것이다.

보진 못했으나 광경이 그려졌다.

두 소년은 존경심을 담은 눈빛으로 오스틴을 바라봤겠지.

탓할 생각은 없다. 어차피 오래가지 못할 이미지야. 그걸 내 손으로 부술 필요는 없겠지.

그보다는 능청스럽게 시선을 유도하는 오스틴이 더 거슬렸다.

생사를 넘나들며 형성된 관계에 잿가루를 뿌려 댔다.

우리가 분열되길 바라는 것처럼.

오스틴의 입장에선 손 안 대고 코를 풀 수 있는 상황을 원했을 것이다.

"그 아이들이 절 내치지 않는 한, 제가 먼저 손을 놓을 일은 없을 겁니다"

"멋진 유대감이구나. 우리보다도 나아."

"제가 질문 하나를 받았으니, 이젠 제 쪽에서 할게요. 상관없으시죠?"

오스틴은 껄끄럽다는 듯이 뒷목을 만졌다.

"그래."

"타워에서 출발했을 때 받은 임무가 뭔가요? 자유로운 탐색? 아니면 생존자의 구출?"

그가 난감하다는 듯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

피하고 싶은 대답이겠지만, 그는 입을 열어야만 하는 의무가 있었다.

"식량을 찾으러 나왔다. 타워에 비축된 양이 얼마 남지 않았거든. 이 사태가 언제 끝날지도 모를 마당에 잠자코 기다릴 수가 없었지. 하여, 우리 같은 탐색대가 편성되어 아카데미를 뒤지는 도중이었다."

나는 타니아와 얽혀 있는 시나리오를 떠올렸다.

게임의 흐름대로라면 기사단은 그녀를 데리고서 거점으로 귀환할 것이다.

여기서부터가 중요하다. 지금의 내겐 두가지의 선택지가 생겼어.

첫 번째론 타니아에게 베푼 은혜를 앞세워 그들을 따라가는 방법이었다.

루실의 방해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동생이 부탁하면 한발 물러설 정도의 아량은 있으니까.

하지만 구걸하듯이 들어간 기사단에서 자신을 환영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타워 안의 사람들도 조슈아의 추태를 들먹이며 외면하고 내몰겠지.

이건 장기적인 플랜이 아냐.

[영리함]도 다른 방법을 권유하였다.

그렇다면 내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성공한다면 큰 보상을 얻겠지만, 오스틴을 설득시키지 못한다면 노여움을 살 것이다.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있는 게 우선이다. 이들을 이용하여 가까운 거점을 공략해야 해. 어디가 좋을까? 트라이덴, 그곳으로 가야 한다.

이젠 혓바닥으로 눈앞의 기사를 구워삶을 시간이다.

오스틴의 숨소리가 크게 들려왔고, 정적 속에서 가슴이 조여 오는 기분을 느꼈다.

[냉정함]이 예민해진 신경을 안정시켰다.

"제가 식량이 있는 곳을 알고 있습니다."

오스틴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방금 자신이 한 말의 의중을 파악하려 애를 쓰는 눈치였다.

"무슨 뜻으로 꺼낸 얘기지?"

"이대로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제가 알려 드릴 장소까지는 찾아보는 게 어떤가 해서요."

나는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의 굽어보는 시선에선 적지 않은 위압감이 전해져 왔다.

[강심장]이 의식을 붙들었다.

"그곳이 어디냐?"

"트라이덴 마을. 한 번쯤은 들어 보셨을 거예요."

아카데미 안에는 교육 시설만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본래 대귀족의 영지였던 이곳은 아카데미가 들어서는 과정에도 대다수의 마을이 남아 있었고 심지어는 도시도 있었다.

그중 트라이덴 마을은 기숙사 4동으로부터 멀지 않은 장소에 있었다.

기억하기로는 50명 정도만이 사는 소규모의 정착지였다.

"그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곳에 식량이 남아 있을 거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는구나. 이런 사달이 일어났으니 마을 사람들이 죄다 들고 도망갔을 거야."

아니, 그의 추측은 틀렸다.

트라이덴 마을은 게임이 시작한 시점에서 이미 폐허가 되었다.

내부에서 탄생한 좀비 3마리가 하룻밤 사이에 저지른 일이었다.

하나 그는 이 정보를 모른다.

알려 준다고 곧이곧대로 믿을 리도 없었다.

오스틴에게 조슈아는 조금 뛰어난 학생에 불과하니까.

"아뇨, 있습니다."

"어떻게 확신하는 거지?"

"이곳 기숙사 4동으로 오는 과정에서 트라이덴 마을을 경유했습니다. 이미 엉망이 되었더군요. 다행인 점은 마을이 그 꼴이 되고 나서는 누구도 다녀간 흔적이 없었다는 점이죠."

나는 거짓을 섞었다.

상대 입장에서는 내가 손에 든 패를 볼 방법이 없다.

그저 가늠할 뿐이다.

오스틴이 뜸을 들였다.

"네가 그걸 본 시점이 언제냐?"

"2주 전입니다."

"꽤나 지났군. 이미 누군가가 다녀갔을 수도 있어."

"제 생각은 다릅니다. 마을 안에는 괴물들이 득실거렸고, 웬만한 수준이 아니고서야 감히 들어갈 생각조차 못 할 상태였죠. 하지만 그 정도 레벨의 사람들이라면 굳이 트라이덴처럼 작은 마을을 목표로 삼지 않고 더 큰 곳을 노리겠죠."

철벽처럼 굳건했던 오스틴의 표정이 처음으로 무너졌다.

학생이 건넨 제안이라며 웃어넘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물러서기는 어려울 거다.

기사단 안에도 파벌이란 게 존재한다.

그 안에서 영향력을 키우려면 실적이 필요했다.

오스틴은 빈손으로 돌아가길 원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는 부류였다.

"마을까지의 길 안내는 제가 해 드리죠."

"네가 직접 말이냐?"

"그러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요."

트라이덴 마을은 기사들의 목적과는 별개로 한 번은 들러야 할 장소였다.

그곳에 생존의 필수품과 독창성을 강화하기 위한 장비가 숨겨져 있었다.

얻어야만 한다.

나는 식량을 미끼로 기사단이란 호위병을 고용하는 것이다.

이들이 신뢰할 수 있냐는 인물인 것은 둘째 치더라도, 실력은 학생들보다 나을 테니까.

오스틴이 미소를 지었다.

"알겠다. 네 제안을 받아들이지."

"이제부터 바쁘시겠네요. 동료들을 설득해야 할 테니까."

"아니, 그럴 필요는 없다. 리더의 명령에는 복종하는 게 도리이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글쎄요."

나갈 채비를 해야 했다.

근 한달 만에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그래 봐야 여기나 바깥이나 세상이 지랄맞은 것은 똑같았다.

* * *

[신은 인간이 스스로를 구제하리라고 믿는다.]

[신은 복수가 잘못된 방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신자는 끊임없이 단련해야 한다.]

나는 속독을 통하여 지니고 있던 성서를 완전히 해독했다.

그 결과 두 가지의 주문을 추가로 획득했다.

[주문 섬광을 획득하였습니다.]

[주문 평정을 획득하였습니다.]

강한 빛을 내뿜는 섬광과 마음을 안정시키는 평정.

공격력은 없지만 상황에 따라 써먹기 나름이었다.

나는 밖으로 나왔다.

이미 다른 사람들이 먼저 나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탐색 팀으로 편성된 것은 기사 셋과 학생 둘이었다.

학생에 포함된 조슈아는 기숙사를 떠나기 전 남아 있던 이들과 마주했다.

"얌전히 지키고 있어. 모레쯤에는 돌아올 테니까."

"그렇게나 오래 걸리는 건가요?"

타니아가 몸을 축 늘어뜨렸다.

그녀는 언니인 루실에 의하여 강제로 남는 쪽이 되었다.

"따라오면 위험한 일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기숙사는 전보다도 훨씬 안전하고 말이야."

조슈아는 입구 근처에 서 있던 기사를 눈짓했다.

"제가 보기에 저 사람은 선배와 비교될 수가 없어요."

"...그러냐?"

그녀가 똥이라도 밟은 것처럼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아무튼 그리 알고, 너는 가비누와 이곳에서 대기해라."

"저도 따라가고 싶었어요!"

"알아. 하지만 네 탐색 중에 네 언니와 트러블은 최대한 피하고 싶거든."

루실 레인우드는 동생인 타니아와 함께할 시 능력이 반감되었다.

이 디버프를 없애려면 그녀가 동생을 인정할 수 있는 배경이 필요했다.

자매의 문제로 이리저리 치이고 싶지는 않아. 게다가 루실의 미운털을 벗겨 내는 게 먼저일 필요가 있어.

조슈아는 몸을 틀었다.

준비를 마친 기사들이 정문 앞에 모여들었다.

오스틴은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는가 싶더니 어느샌가 자신에게 다가왔다.

"마을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을 알려 줬으면 한다."

"북서쪽의 길을 쭉 올라가다가 다리를 건너면 바로 보일 거예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대열의 앞으로 돌아갔다.

잠시 뒤에 기사들이 앞장서서 출발했고 나와 탈레온이 뒤를 따랐다.

"전부 쓸어 버리면서 가는 것 아니었나요?"

탈레온은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기사들의 움직임에 당황했다.

자세를 낮추며 주변을 경계했다.

오스틴이 전방을 살피고 남은 두 사람이 좌우를 확인하는 식이었다.

만약 괴물이 근처에 있을 때면 손을 통하여 수와 방향을 오스틴에게 보고했다.

그러면 오스틴은 그 자리에서 죽일지, 지나칠지를 판단했다.

되도록이면 좀비와의 전투를 피하고 싶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처음 몇 번은 쉽게 쓰러뜨리겠지. 하지만 인간의 체력은 무한하지 않아. 우리가 가는 방향에 괴물이 얼마만큼이나 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직진한다고? 그건 자살이나 다름없다."

탈레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소년도 괴물과 싸우며 그들의 무서움을 피부로 느껴 봤다.

우습게 볼 만한 상대가 아니란 것쯤은 이해하고 있을 터였다.

얼마만큼 왔지?

한 시간쯤 이동하였을 때 뒤를 돌아보았다.

제법 멀어졌을 거라 기대했던 기숙사는 여전히 시야에 훤히 들어왔다.

500m쯤 이동했을까?

조금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잘 다듬어진 가도를 두고서 일부러 경사가 심한 수풀 쪽으로 나아갔다.

좀비들이 길목을 점령했기 때문이었다.

잡초를 짓밟고 잔가지를 부러뜨리며 나아가자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발에 납덩이를 매단 것처럼 무거워졌다.

[인내심]은 대수롭지 않은 수준이라며 웃어넘겼다.

나는 괜찮지만, 누군가에게는 치명적일 거야.

그 예감은 무섭게 들어맞았다.

탈레온이 움푹 파인 땅을 미처 보지 못하고 발을 집어넣었다.

땅은 마치 소년을 빨아들이듯 잡아당겼고, 그가 입 밖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으아악!!"

소년의 비명은 경보가 되어 주변에 있던 좀비들을 불러 모았다.

기사들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상황을 알아보기도 전에 검부터 뽑아 들었다.

나 또한 누구보다 먼저 지니고 있던 몽둥이를 들었다.

[냉정함]이 머리를 차갑게 식히며 주위에 좀비 세 마리가 있다는 사실을 각인시켰다.

그리고 그들 중 하나가 바로 뒤에 있단 사실도 일깨웠다.

소리를 들어라.

슬쩍 들린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며 격렬한 것으로 바뀌었다.

재빨리 뒤편으로 몽둥이를 휘둘렀다.

무언가에 부딪친 촉감이 손끝을 타고 전해진다.

몸을 돌리자 좀비가 한쪽 다리를 꿇은 채로 이쪽으로 다가왔다.

침착히 머리를 노렸다.

한 번, 두 번.

가차 없이 내려찍는 사이에 녀석은 신음도 내지 못하고 머리가 부서졌다.

나는 몽둥이에 들러붙은 살점과 녹색의 피를 나무에 비벼 닦고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런 염병할."

앞쪽도 상황이 정리가 된 모양이었다.

그와 동시에 한 기사가 뒤로 다가와 탈레온의 멱살을 붙잡았다.

그의 이름은 제니트였다.

오스틴의 부하 중 한 명으로, 녹색 빛이 감도는 머리가 특징인 사내였다.

"하마터면 너 때문에 큰일 날 뻔했잖아."

"죄, 죄송합니다."

"이게 사과로 끝날 일이야? 이래서 애송이를 데리고 오면 안 된다고 누누이 말했건만."

탈레온이 공중에 뜬 채로 발을 동동 굴렀다.

낯빛이 빨개졌다.

나는 두고 보지 못하고 제니트의 오금을 세게 걷어찼다.

갑옷이 보호해 주지 못하는 장소 중 한 곳이었다.

그가 충격에 못 이겨 탈레온을 잡고 있던 손을 놓쳤다.

"목소리가 너무 커, 기사 나으리."

"뭐라고?"

"당신 때문에 세 마리로 끝날 적이 배로 늘 것 같다는 얘기야. 흥분을 가라앉혀. 그 정도 자제력은 있잖아."

"하, 노비스 주제에 감히 이 몸을 가르치려고 드네. 오냐, 한번 해보자."

나는 책을 들었다.

여차하면 마법을 사용해서라도 막을 심상이었다.

그러나 그런 결심은 누군가의 개입으로 흐지부지 끝나 버렸다.

오스틴이 쓰러져 있던 제니트를 깔아뭉갰다.

그리곤 그의 두꺼운 주먹이 제니트의 투구를 힘껏 후려쳤다.

콰직!

둔탁한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투구에 씌워진 금속 판자가 찌그러졌고, 내려친 주먹에선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다소 거친 방식이지만 말을 듣게 하는 데 저것만 한 게 없지.

이 세계의 기사는 온화한 성품과는 거리가 멀었다.

선량하며 약자를 보호한다는 이미지 또한 환상에 가까웠다.

양아치 집단.

때때로 이들이 산적이나, 해적과 같은 잡배들과 무엇이 다른지 헷갈렸다.

영지와 고용인을 소유했다는 부분 정도일까?

나는 덤덤하게 바라봤다.

게임을 하며 기사단이 말보다 폭력을 앞세우는 장면이 어디 한둘이냐?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탈레온은 제니트에게 붙잡혔다는 사실보다도 이들의 행태에 더 경악했다.

견습일 때는 기사도에 충실한 나이이니까... 콩깍지가 알아서 벗겨지겠네.

오스틴이 쓰러진 제니트의 상체를 일으켰다.

"내가 거점을 떠나기 전에 뭐라고 했었지?"

제니트는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그의 오른쪽 뺨이 삽시간에 부어올랐다.

입 안쪽이 터진 모양인지 살짝 벌린 입 틈 사이로 피가 새어 나왔다.

"두 소년과 동행하는 것은 내 판단이며, 문제가 생길 때는 나에게 따져 물으라고 했다."

"...확실히 들었어."

"그런데 지금 뭐 하는 짓거리이지? 분별력을 잃을 정도로 큰일이었던 거냐?"

"아니, 아니었어."

"그래, 아니었지. 괴물은 고작 세 마리였어. 이런 건 주의로 끝내면 된다. 다음부턴 생각하고 행동해라."

오스틴이 거기까지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찢어진 장갑을 가볍게 털어 내자 핏방울이 수풀 위로 튀었다.

상황은 얼추 마무리되었다.

하나 아직 볼일이 남았다는 듯이 오스틴은 전방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의 차가운 시선이 자신을 위아래로 훑었다.

여느 때처럼 웃음기가 실린 표정이 아니었다.

"판단이 빠르구나. 무기를 집는 속도가 우리보다도 빨랐어."

과연, 그 짧은 시간 속에서 그런 점을 파악했을 줄이야.

날카로운 분석력이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능청스럽게 입을 떼었다.

"운이 좋았어요."

"운이라, 운도 그것에 걸맞은 사람에게나 나타나는 법이지. 하나만 더 물으마. 내가 제니트를 막지 않았더라면 어쩔 작정이었냐?"

"모르죠. 저는 넘어간 일에 미련을 두는 타입이 아니라서."

"그렇다면 막지 않을 걸 그랬어. 좋은 볼거리를 놓친 기분이 들거든."

나와의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오스틴은 떨고 있던 탈레온을 다독이곤 제니트와 함께 앞쪽으로 돌아갔다.

그 움직임을 눈으로 쫓아가자 루실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빛에선 의구심이 가득했다.

마치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에 충격받은 것처럼 보였다.

천천히 증명하면 될 일이지. 이제 시작인 거고.

시선을 피하고는 탈레온을 살폈다.

얼굴에 피로한 기색이 짙고 안색이 퍼렇다.

느닷없는 실수에 가슴이 철렁했을 것이고, 제니트의 고함에 정신이 달아났을 것이다.

아주 조금이지만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입술을 깨문 것은 소년 나름대로 눈물을 참아 보려는 시도처럼 보였다.

"...죄송해요. 괴물 몇 마리 죽인 것 정도로 우쭐하고 있었나 봐요. 저보다는 타니아가 따라왔어야 했어요. 이런 실수를 저지르다니."

"신경 쓸 필요 없어. 길이 울퉁불퉁해서 우리 중 누군가는 발을 헛디뎠을 거야. 그게 이번에는 너였을 뿐이고."

위로가 되었을까?

잘은 모르겠다.

탈레온이 감정을 정리할 틈도 없이 기사들이 걷기 시작했다.

그가 서둘러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나 또한 다시 움직였다.

트라이덴 마을까지는 아직 한참 남아 있었다.

14화

"어떤 것 같아?"

오스틴이 옆에 있던 루실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녀는 질문의 의도를 알아차린 모양인지 눈썹을 꿈틀거렸다.

"조슈아에 대한 얘기다."

"알고 있어. 넌 눈치도 없어? 내가 정말로 네 말뜻을 몰랐다고 생각해?"

루실이 날카롭게 대꾸했다.

그러고는 손으로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조용히 대답해. 뒤쪽에 들리지 않도록. 지금부터 할 얘기는 저 애들이 듣지 못하도록 하는 게 중요하니까."

오스틴이 주의하라며 당부했다.

그녀는 내키지 않았지만 큰소리로 떠들 주제가 아니란 점에는 동의했다.

"네 동생이 말했던 대로야. 저 아이는 뛰어나. 위기 대응 능력이 탁월하다는 뜻이야."

기숙사를 떠난 뒤로 다섯 시간이 흘렀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총 3번의 전투가 있었고 그때마다 조슈아는 활약했다.

좀비를 쓰러뜨리고 옆에 있던 소년을 지휘했다.

그건 같은 리더인 오스틴이 보기에도 몹시 훌륭하여 본받고 싶을 지경이었다.

"트라이덴 마을에서의 탐색이 끝나면 타워로 데리고 가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어."

"진심이야?"

"아직까지는 반반이지. 내가 본 학생들 중에서 저토록 영민한 아이는 없었으니까. 네 동생을 포함해서 말이야."

"놀릴 생각이라면 그만둬."

오스틴이 지닌 당초 계획은 이랬다.

자신의 동생인 타니아 레인우드와 함께 새벽에 기숙사를 빠져나간다.

그 과정에서 학생들이 차지한 식량도 빼앗을 심상이었다.

죽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배려라 생각했다.

몇몇 집단은 일어날지 모를 복수를 염두에 두고 싹을 잘라 두지 않던가?

학생이라도 가차 없었다.

적어도 자신들은 최소한의 양심을 지킨다고 믿었다.

하나 그 계획은 실행에까지 옮기지 못했다.

오스틴이 밤중에 조슈아와 대화를 나누곤 심경의 변화가 생겼다.

"넌 저 아이를 과대평가하고 있어."

"그럴지도 모르지. 만약 내 판단이 틀렸다면, 그때는 책임을 질 테니까 걱정하지 마."

"무슨 의미야?"

"최대한 이용하고 버리자는 얘기이지."

"손에 또 피를 묻히겠다는 이야기야? 분명히 말해 두겠는데, 또다시 네 판단대로 함부로 움직이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루실은 기숙사를 향해 오며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사람을 죽였다.

사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자신들의 실수였다.

오스틴은 사람들이 무기와 갑옷을 노리는 약탈자라고 판단했다.

근거는 부족했으나, 누구도 반박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었어.'

오스틴은 틀렸다.

그로 인한 부대의 타격은 심각했다.

분노한 마을 사람들의 공격으로 동료를 한 명 잃었다.

그리고 죄책감을 얻었다.

"난 그 일로 네게 불만이 아주 많으니까."

"몇 번이나 사과했는데, 그걸로는 부족한 모양이네. 아무튼 이제부터라도 처신 잘할 테니까, 좋게 봐주라고."

오스틴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는 재빨리 화제를 돌리려고 애를 썼다.

"다리가 보이기 시작했군."

가로막고 있던 수풀을 손으로 걷어 치우자 언저리에 다리가 보였다.

강 위에 세워진 그것은 마을의 출입구로 사용되었던 모양인지 팻말이 설치되어 있었다.

"많아."

오스틴이 한숨을 토해냈다.

다리 위에는 이곳까지 오며 상대했던 괴물보다 많은 숫자가 막고 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고개를 돌리자 어느샌가 모인 동료들이 뒤편에서 기다렸다.

다들 피로에 찌든 얼굴로 출발했을 때와 달리 몰라보게 수척해졌다.

5시간의 강행군이었다.

그사이 몇 번의 휴식은 있었지만, 제대로 된 것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언제 어느 때 괴물이 덮쳐 올지 몰랐기에 장비를 그대로 입은 채로 쉬었고, 푹신한 의자가 아닌 썩은 그루터기에 몸을 의지했다.

"이 다리를 이용할 생각이 아니라면 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그곳에 길이 하나 있죠. 하지만 거기까지 가는 데 다시 몇 시간이 소요될 겁니다."

이런 우울한 상황에도 누군가는 계획을 재정비했다.

루실인가?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시선을 옮기자 조슈아와 시선이 마주쳤다.

오스틴은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망설였다.

의논해야 될 동료들은 뒤쪽 그늘에서 숨을 돌리고 있었으며, 아직 어린 그가 앞으로 다가왔다.

"넌 철인이냐? 힘들지도 않아?"

"힘들죠. 발에 물집이 잡혀서 걸을 때마다 아파요."

"그럼 쉬어도 된다. 저길 봐라. 너보다도 어른이란 녀석들이 주저앉은 모습을."

"상관없어요. 아직 체력이 남아 있는 사람이 계책을 세우면 되니까."

"허, 참."

오스틴도 몸이 천근이었지만 조슈아의 태도에 흥미가 솟았다.

"조금 전의 대화로 돌아가서 말인데, 네가 조언한 두 개의 길 외에도 강을 건너는 건 어떠냐?"

"다리 밑을 차지한 강은 폭이 넓고 수심이 깊어요. 물살이 약해서 수영으로 못 건너갈 수준은 아니지만, 그때는 짐을 버려야겠죠. 입고 있던 갑옷과 투구를 포함해서."

"그건 곤란하지. 결국 정면으로 돌파하는 방법밖에 없겠군."

어느 쪽이든 안전이 보장된 길은 없었다.

지금부터 저 좁은 다리를 공략해야 한다는 사실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식량은 있을까?

그저 가능성에 지나지 않는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니.

속으로 한탄을 쏟아 내며 들판 위로 아무렇게나 앉았다.

장갑과 신발을 벗어 던지자 고약한 악취가 흘러나왔다.

찢어진 살갗이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한 탓에 곪아 가는 중이었다.

"크윽."

상처는 손가락으로 툭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끔찍할 정도로 아팠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타워를 떠나기 전에 가져온 포션을 입 안으로 들이켰다.

통증은 한결 나아졌지만, 근본적인 치료법은 되지 못했다.

쉬어야 한다.

이대로 행군을 계속하면 몇 달간 목발 신세를 지거나, 상처를 도려내야 할지도 모르리라.

되도록이면 그런 불상사는 피해야 했다.

재난 상황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것만큼 치명적인 상황은 없을 테니까.

'목적지가 눈앞에 보이건만.'

트라이덴 마을은 이제 코앞이었다.

보름에 걸친 임무의 종착점.

저 안에 가축과 식량이 남았는지 확인해야 한다.

설령 빈손으로 나오더라도 임무를 수행했다는 사명감만으로도 보람이 넘칠 것 같았다.

"어때, 사정은?'

루실이 다가왔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짓누르던 체인메일을 벗어 던지고는 갬비슨 차림으로 다가왔다.

무게가 가벼워진 만큼이나 표정에 활기가 돌았다.

오스틴은 그녀를 따라 할까 싶었으나, 곧 포기했다.

"좋지 않아. 조슈아와 상담해 보니까 다리를 건너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겠어."

"어렵겠는데."

"이대로 돌아가는 것도 방법이겠지. 마을에는 들어갔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하고."

"그럴 생각이라면 진작에 그랬어야지!"

루실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평소라면 이런 농담에도 점잖게 반응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여유가 없었다.

기사단은 너무 오래 움직였고, 죽음이 꿈틀거리는 광경을 마주하였다.

피폐해진 정신은 육체마저 좀먹기 시작했다.

그녀는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매번 다음을 생각할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재능이라고.

'...저 아이는 지치지도 않나.'

이 집단에서 유일하게 한 명이 그것을 해내고 있었다.

조슈아 팔라리온.

초췌한 안색은 그의 체력이 떨어졌다는 증거였지만, 눈빛만은 생기가 넘쳐흘렀다.

그가 갑작스레 허공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마법사인 그녀는 그가 무엇을 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마법이었다.

소년의 전신에서 흘러나온 기운이 황금빛을 띠며 빛이 났다.

태어나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름다운 색이었다.

'뭘 하려는 거지?'

기운은 조슈아에 의지에 따라 조금씩 형태를 갖추었다.

장인이 한 땀, 한 땀 철을 벼려 내듯이 깎여 나간 기운은 어느샌가 창이 되었다.

입을 벌리며 감탄했다.

마력으로 모양을 가다듬는 술식은 난이도가 높지 않았다.

이 기술이 고수와 초보를 가르는 기준은 속도였다.

그리고 조슈아가 보여 주는 솜씨는 노비스를 한참 뛰어넘었다.

'저건 대충 보더라도 7등급인 미티오스 레벨이야!'

그는 완성된 그것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자, 잠깐만."

조슈아는 그것을 어디론가 던질 자세를 취하였고, 루실은 뒤늦게 불러 세웠다.

하지만 늦었다.

창이 소년의 손을 떠났고 끈적한 공기를 가로지르며 나아갔다.

발사대도 없건만, 무시무시한 속도였다.

팅! 팅!

"음?"

재빨리 몸을 일으키고 있던 그때였다.

흐릿한 의식을 일깨울 정도로 맑은 소리가 여러 번 들려왔다.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소년이 바라보던 시야를 공유했다.

"어떻게 된 거야?"

* * *

녹초가 되면 판단은 둔해지고, 창의성을 발휘하지 못한다.

무거워진 몸뚱이가 생각하길 거부하는 것이다.

기사들을 바라봤다.

파리한 안색이 마치 산송장처럼 느껴졌다.

오스틴은 뒷일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당면한 문제들보다 본인의 몸뚱이가 썩어 가는 점을 걱정했다.

무리도 아니지.

오스틴은 주위를 살필 여유가 없어 보였다.

다른 두 기사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는 다리를 바라봤다.

트라이덴 마을 주변과 관련된 지형이라면 샅샅이 꿰고 있었다.

그리고 들어갈 방법까지도.

저들에게 맡겨 봐야 시간만 지체될 뿐이야.

하늘을 바라봤다.

우중충한 먹구름 사이로 미약하게나마 햇빛이 보였다.

아직 낮이었다.

밤이 되기 전에 마을로 들어가야 한다.

날이 어두워지면 사람의 감각은 옅어지고, 반면에 저들은 강해진다.

나는 기사들을 설득하기보다 내 계획에 강제로 끌어들일 작정이었다.

노려야 할 것은 다리 앞에 세워진 종이다.

다리 앞에는 나무로 된 지지대 위로 종이 걸려 있었다.

저 종의 의미는 자신이 마을의 손님이란 것을 알리는 신호였다.

이제는 제 기능을 할 일이 없는 물건이다.

부술 생각이었다.

게임 내에서 딱 한 번만 허락되는 입장권.

나는 마력으로 창을 만들었다.

곧바로 던져야 할 차례가 찾아왔지만 실패에 대한 부담감은 없었다.

신체적인 결함은 마력으로 커버하면 될 뿐이다.

자세를 잡고서 창을 던졌다.

뒤편에서 루실이 무언가 말하였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팅! 팅!

창과 충돌한 종이 좌우로 크게 흔들리며 맑은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좀비들을 끌어들였다.

"이 틈에 가야 합니다."

내가 벌인 일을 설명하기에 그 이상의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뒤편을 흘겨보았다.

기사들은 어느샌가 벗어 둔 장비를 챙겨 입고는 등 뒤로 다가왔다.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절망 속에 희망이라도 본 사람의 얼굴이었다.

"넌 리더가 아니야. 이런 식의 돌발 행동은 곤란해."

오스틴이 소리쳤다.

"그래서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인가요? 잔말 말고 따라오세요."

"뭐! 아니, 잠깐."

나는 다리를 향하여 필사적으로 뛰었다.

뒤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세 기사는 자신을 가볍게 앞지르곤 다리 위로 나아갔다.

다리 위에는 여전히 괴물 몇 마리가 남아 있었지만 기사들은 주저하지 않았다.

검을 뽑았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괴물이 비명을 내지르며 줄어들었다.

무자비한 검격이었다.

컨디션이 엉망이더라도 기사단에 가입한 저들의 솜씨는 학생의 그것을 월등히 넘어섰다.

탈레온은 그 기술에 매료되어 검을 휘두를 생각조차 못했다.

"루실, 제니트."

오스틴은 두 사람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검지와 약지를 앞으로 쭉 뻗고는 손목을 까닥거렸다.

흩어지라는 의미였다.

[영리함]은 그의 결단이 어떤 심정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려 주었다.

'먼저 물건을 찾아내 독차지할 생각이군.'

마을까지 동행한 것은 사실이나 그들은 아직 우릴 공동체로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빌미를 줄 생각이 없던 것이다.

적자생존.

나는 잊고 있었던 단어를 되새기며 미소를 지었다.

그는 모를 것이다.

나 또한 오스틴을 적으로 간주했다는 걸.

'그의 밑에서 함께하는 것은 위험하다. 여차하면 우릴 미끼로 무슨 짓이든 할 인간이야.'

마을 안에서라면 상대가 기사라도 상대할 방법 몇 가지는 있었다.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없애야 한다.

잠깐 동안 그것이 가져올 무게감을 생각했다.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소년이 나를 불렀다.

"조슈아 경, 저들과 멀어지고 있어요."

탈레온은 우려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래도 나뉘어서 탐색할 모양이야"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오스틴을 따라가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아니, 우린 저 셋 중 누구도 쫓지 않을 거야."

탈레온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떤 상상을 하였는지 모르겠으나, 몸을 흠칫 떨었다.

"따라와라. 우린 저들과 떨어져서 행동한다."

15화

기사들이 다리를 뚫어 준 덕분에 마을 내부로는 손쉽게 들어왔다.

주변을 살폈다.

앞서 나갔던 기사들은 모두 어디론가 사라졌다.

사냥감을 잃은 굶주린 괴물들은 이제 타겟을 바꾸어 이쪽으로 달려들었다.

나는 동요하는 탈레온의 팔목을 붙잡고는 가장 가까운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빗장을 걸어 잠그고는 가구들을 쓰러뜨려 막았다.

쾅쾅!

따라온 좀비들이 세차게 문을 두들겼다.

강렬한 충격에 막아 놓은 의자와 식탁들이 위아래로 들썩였다.

만약 뚫린다면 2층으로 올라간 다음에 계단을 부숴야 해.

문이 부서지는 경우도 생각해 놓았다.

다행히도 그럴 필요까지는 생기지 않았다.

제풀에 지친 좀비들이 휴전이라도 하자는 듯 잠잠해졌다.

나는 창문으로 다가갔다.

놈들은 여전히 문 앞을 지키고 있었고, 우리를 포기하지 않았다.

여기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기억했어. 당분간은 문 근처를 벗어나지 않을 거야.

천천히 창문에서 멀어졌다.

그리고는 안쪽에서 쉬고 있던 탈레온에게 다가갔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마에서부터 시작된 땀이 입고 있던 겉옷을 축축하게 적셔 놓았다.

"바보 같은 행동이었어요. 적어도 기사들 중 한 명과는 떨어지지 않으면 안 됐다고요!"

탈레온이 초조한 얼굴로 쏘아붙였다.

"그들을 너무 믿지 마라. 목적이 일치할 뿐,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입장이야."

"기사들은 정의로워요."

"교과에서나 나오는 얘기이지. 그들도 기사이기 이전에 사람이야. 사람은 위기의 순간에는 이기적으로 변해. 조금 전 오스틴이 보여 준 수신호가 뭔지 알아?"

탈레온이 모르겠다는 고개를 내저었다.

"흩어지라는 뜻이야. 그렇다면 왜 흩어지라고 했을까? 그건 물자를 찾는데 용이하다는 점도 있겠지만 첫 번째로는 우리와 협력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야."

"우린 저들이 싫어할 어떤 일도 하지 않았어요."

"반대로 좋아할 만한 일도 하지 않았지."

침묵이 맴돌았다.

탈레온은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모양이었지만 상념을 떨쳐 냈다.

언제나 그렇듯 살아남는 게 먼저였다.

"계획은 있어요?"

"있지. 난 계획 없이 움직이지 않아."

건물 안에는 사람들이 미처 옮기지 못한 물자가 남아 있을 것이다.

하나 자신의 목적은 그게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특권이나, 개개인이 몰래 빼돌린 창고를 찾아야 한다.

지하에 숨겨진 땅굴과 마을 끝에 위치한 성당.

땅굴에는 식량이.

성당에는 독창성을 강화할 성서가 숨겨졌다.

우리 둘로서 탐색할 수 있는 곳은 땅굴 정도다. 성당에는 좀비들이 많이 있어. 기사들을 끌어낼 방법이나, 동기가 있다면 모를까 당장은 어렵다.

생각을 정리하던 사이에 지루함을 못 이긴 탈레온이 말을 붙였다.

"...뭘 하면 되나요? 아, 괜한 질문이었네요. 우린 여기에 물자를 찾으러 왔는데."

그가 쉬고 있던 의자에 일어나서는 가까운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먼지가 피어올랐다.

잡동사니 몇 개를 움켜쥐고는 퉁명스런 얼굴로 그것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소년은 그렇게 일 층 전부를 뒤엎고 나서야 휴식을 가졌다.

그러면서 거들어 주지 않는 자신에게 불평 가득한 목소리를 토해 냈다.

"좀 도와주세요. 저 혼자 찾는 거 힘들어 죽겠으니까."

"나는 홀을 뒤지라고 한 적이 없는데?"

"예? 그렇지만 우리가 마을에 온 목적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서 아니었나요?"

"맞아."

탈레온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지하로 내려갈 거야."

"무슨 소리예요. 여긴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밖에 없는데, 지하라니."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지."

소년은 모를 것이다.

그리고 기사들도 모를 것이다.

트라이덴 마을에는 마을 사람들만을 위해 마련된 대피소가 존재한다는 걸.

지하로 향하는 입구는 건물마다 하나씩은 꼭 존재한다.

언뜻 보기에는 평범한 마룻장 사이로 작은 홈이 있고, 그걸 잡아당기면 열리는 식이었다.

있다!

나는 홈 사이에 손가락을 집어넣고는 위로 잡아당겼다.

밑으로 내려가는 사다리가 보였다.

[숨겨진 장소를 발견하였습니다.]

[트라이덴 마을의 대피소.]

[코인 10개를 획득합니다.]

[현재 보유 코인 개수 – 30]

기숙사에서 클리어한 업적과 합하여 총 30개가 모였다.

높은 등급의 도구를 사기에 모자라지만, 당장에 필요한 자금은 충당되었다.

"...세상에."

어느 틈엔가 뒤로 다가온 탈레온이 감탄했다.

"이런 건 도대체 어떻게 알고 계신 거예요?"

"예전에 어떤 사람에게 들었던 게 떠오른 것뿐이야."

소년은 두려운 기색이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암흑만이 존재할 뿐이며 선두로 나서기에는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나는 앞장섰다.

지체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이렇게 생각하는 와중에도 기사들은 마을을 누비며 물자를 확보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본인들이 만족했을 때 우리의 신변과는 상관없이 마을을 떠날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버리지 못할 가능성이 더 크겠지.

그들이 자신을 버리지 못한다면 이유는 하나였다.

자신이 쓸모가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나 또한 그들이 가치가 있을 때까지는 이용할 생각이다.

[냉정함]이 계획을 실행하는 데 집중하라며 다독였다.

그 말이 옳았다.

술식을 이용하여 어둠을 밝힐 정도의 작은 반딧불이를 만들어 냈다.

사다리를 붙잡고는 녀석들이 비추는 불빛에 의지하며 한 발씩 내려갔다.

끼익!

관리가 부실했던 모양인지 몸을 옮길 때마다 위태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부서지지는 않을까?

지상과 지하 사이의 높이가 어느 정도였지?

막연한 불안감이 엄습해 올 때마다 [강심장]은 공포로부터 자신을 지켜 주었다.

든든하네.

어느샌가 다리가 바닥에 닿았다.

반딧불이에게 마력을 주입하여 불빛의 강도를 높였다.

통로가 드러났다.

상하좌우 어디를 보더라도 갈색빛의 토양이 깊게 자리 잡았다.

거칠고 구불구불한 모양새가 자연적인 느낌과는 거리가 멀었다.

누군가가 곡괭이 따윌 이용하여 깎아 낸 듯한 흔적이 엿보였다.

"세상에, 대피소라기에는 엄청 큰데요? 어디까지 연결된 걸까요?"

탈레온이 분위기에 압도된 모양이었다.

"입구는 각각 다르지만, 쭉 나아가면 광장으로 모여들게 되어 있다. 가자, 감탄하고 있을 시간이 없어. 그리고 한 가지 충고하겠는데 나보다 앞서 나가지 마라."

"무슨 뜻이에요?"

이 땅굴은 각 건물마다 입구가 하나씩 있기에 노출되기 쉽다는 약점이 있었다.

침입자가 곧잘 나타난다는 얘기였다.

하여 마을 사람들은 그들에 대비하여 함정을 준비했다.

이곳에서부터 광장까지는 몇 분이면 도착하지만, 그 사이에 있는 함정은 수 개에 이르렀다.

나는 시범 삼아 그중 하나를 탈레온에게 보여 주었다.

벽과 벽 사이에 연결된 끈.

걷는 도중에 건드리면 숨겨져 있던 화살이 튀어나오는 형식이었다.

툭, 쏴악!

벽 틈에 숨겨져 있던 화살이 튀어나와 반대쪽 벽에 꽂혔다.

그걸 본 탈레온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지금 뭐가 지나간 것 같은데."

"화살이다. 내 자세를 의식하며 따라와라. 놓치면 다치거나, 최악의 경우엔 죽을 거다. 덧붙여서 함정의 위치도 기억해라. 어디에 뭐가 있었는지 잊지 마."

"나갈 때도 조심하기 위해서인가요?"

"그것만은 아니다... 따로 쓰일 일이 있을 거야."

이 함정은 유용하다.

좀비를 상대할 때도, 사람을 상대할 때도.

가능성은 있다.

기사들도 땅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곳에 남아 있는 물자를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

나 또한 넘겨 줄 생각은 없었다.

탈레온을 몸을 부르르 떨면서 내 등 뒤에 찰싹 달라붙었다.

우린 계속해서 나아갔다.

함정을 확인하며 걷느라 시간을 붙잡아 먹었지만, 분명 광장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조슈아 경, 궁금한 게 생겼어요."

"말해 봐라."

"이곳이 대피소라면 마을 사람들은 전부 어디로 갔죠? 적어도 몇 명은 정찰병으로서 보초를 서야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나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느낀 불길한 낌새는 무척 합리적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생존자가 있다면 그들의 역할 중에는 보초가 필수적일 테니까.

아직 미숙한 소년이 보기에도 이 땅굴은 지나칠 정도로 고요했던 것이다.

"한 가지 더 충고할 것이 생겼다."

"뭔가요?"

"소리 지르지 말아라. 기숙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끈적한 썩은 내가 앞쪽에서 바람을 타고 느껴졌다.

얕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분명 질릴 정도로 겪어 왔지만, 매번 그렇듯이 완벽하게 적응하지는 못했다.

[냉정함]은 슬슬 익숙해지라며 딴죽을 걸었다.

나는 반박하고 싶었다.

저걸 듣고 무표정하게 보이는 게 이상한 거겠지.

오히려 정상은 자신이며, 특성들이 비정상이라고.

어쨌든 해야 할 일은 매번 같았다.

광장에 도착하자 짐작했던 대로 좀비가 나타났다.

몸 어딘가가 부서져서는 바닥에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변한 직후 땅굴을 돌아다니며 함정에 걸린 것이다.

큰 위협은 아니었으나, 만약의 사고에 대비하여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마무리해라, 한 놈도 빠짐없이."

탈레온은 검을 뽑고는 조심스레 다가가 좀비의 머리에 찔러 넣었다.

제법 능숙했다.

몇 차례 치렀던 전투가 소년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나도 구경만 하지는 않았다.

들고 있던 몽둥이로 머리를 내리쳤다.

잔당들을 처리하자 비로소 광장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최근까지 살아 있었던 모양이야.

모닥불을 지핀 흔적이 있었다.

겹겹이 쌓인 나무들은 오랫동안 타올랐던 건지 심하게 그을렸다.

그 위에 올려진 냄비가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안에 든 내용물을 살피자 수프 위로 벌레가 우글거렸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요?"

탈레온이 광장을 뒤적이며 물었다.

"괴물에게 상처를 입은 사람을 끌고 온 탓이다. 치료할 수 있다고 믿었겠지. 하지만 실패했고, 모두 죽게 된 거야."

"...안타깝네요. 그 말은 그들이 살기 위해서는 부상자를 버려야 했다는 뜻이잖아요. 마을 사람들에겐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거예요."

"그렇겠지."

좀비에게 물리거나 긁힌 상처로 균이 침투된다.

그리되면 길어 봐야 이틀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성을 잃게 되고, 사람들을 공격한다.

놈들의 공격성은 어린아이나 노인 같은 약자를 따지지 않았다.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오래 머무는 것은 좋지 않겠어.

상태 이상에 빠질 위험이 있었다.

내겐 특성이 있어 상관없지만, 소년에겐 위험하다.

탐색에 서둘렀다.

소리에 집중해야 한다.

이곳에서 얻고자 하는 것은 살아 있는 생물이었기에 필요한 행동이었다.

꼬꼬! 꼬꼬꼬.

어른 한 명이 겨우 지나갈 정도의 구멍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몸을 납작 엎드리고는 안쪽으로 기어갔다.

"큭!"

구멍을 통과하기 직전에 날카로운 무언가가 쑤셔 오는 느낌이 들었다.

녀석의 정체를 살펴봤다.

닭이었다.

머리에 달린 붉은 볏과 검푸른 꼬리깃이 낫 모양으로 쭉 뻗어 있었다.

조금 전 팔뚝을 쿡쿡 찔러 온 것은 놈의 부리였다.

"다행이다. 아직 살아 있어."

마을 사람들은 괴물들로부터 대피하며 이곳에 가축을 데리고 내려왔다.

닭과 돼지였다.

안타깝게도 돼지는 발견하지 못했다.

배고픔을 참지 못한 사람들이 진작에 삶아 먹은 것이라 추측할 뿐이다.

수컷과 암컷이 각각 한 마리씩. 나머지는 모두 죽었군. 그리고 계란이 3개. 다행히도 알을 낳을 수 있는 종자인 모양이야.

종말이 닥친 세계에서 가축이 지닌 가치는 엄청났다.

장인의 무기나, 고대의 마법서를 가지고 오더라도 고심할 정도니까.

닭을 길러 내야 한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몇 달 뒤에는 식량을 얻게 된다.

그것들은 배를 채울 뿐만 아니라, 생존자들과의 거래에도 사용되었다.

이건 투자였다.

성공이 보장된 투자.

생존을 위해서는 미래를 볼 줄 알아야 한다.

코인을 쓸 차례이군.

나는 시스템을 통하여 상점을 오픈했다.

이곳에선 코인을 통하여 게임의 기능들을 활성화하거나, 아이템의 구매가 가능했다.

이리만 본다면 코인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코인은 만능이 아니었다.

우선 코인을 구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대게 피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하거나, 지식과 정보가 필요했다.

그리고 어렵게 얻은 코인으로 구매하는 것 또한 게임에선 당연시되던 시스템이다.

인벤토리조차 사야 한다니.

인벤토리, 흔히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 아공간 보관 시스템.

THE Survival는 공짜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제공해 주지도 않는다.

처음 1칸을 개방하기 위해서는 코인 10개.

다음에는 칸을 열 때마다 배로 들어간다.

내가 살 수 있는 인벤토리는 두 칸.

[코인 30개를 사용하여 인벤토리(2칸)를 활성화하였습니다.]

인벤토리는 무게와 부피 상관없이 어떤 것이든 하나씩만 보관이 가능했다.

나는 아래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수탉의 모가지를 붙잡았다.

큭, 부리에 또 찔렸다.

굶주린 탓인지 성격이 무척 사나웠다.

반면에 암탉은 알을 품는 것에만 몰두하여 얌전했다.

수탉과 암탉은 필수적으로 챙기고. 계란은 가는 길에 부서질 테니 이 자리에서 먹는 편이 좋겠지.

계란 두 개는 그 자리에서 깨고는 입으로 삼켰다.

비리다.

신선한 계란은 고소함이 먼저 느껴진다고 들었는데.

내 입맛과는 영 거리가 멀었다.

남은 계란 하나는 탈레온에 맛보여 줄 생각이었다.

"괜찮은 거냐?"

탈레온은 구석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핏기 없는 창백한 안색이었다.

"죄송해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이해한다. 그럼 이건 내가 먹어야겠군.'

"먹다니, 어떤걸요?"

그에게 계란을 보여 주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계란! 어디서 구하셨어요?"

"안쪽에 있었다."

"제가 먹어도 되는 건가요?"

"나는 이미 먹었다. 그리고 밖의 사정이 저래서는 들고 가다가 깨지기만 할 뿐이야."

"그럼 사양하지 않고 먹겠습니다!"

탈레온은 매우 경건한 자세로 계란을 받고는 입안에 털어 넣었다.

행복한 표정이었다.

오랜만에 흡수된 단백질로 몸이 충만해진 모양이다.

"기숙사에서 먹던 빵보다도 훨씬 맛있네요."

"다행이군. 쓸 만한 건 좀 찾았어?"

"물과 와인 그리고 치즈 덩어리를 몇 개 구했어요."

"나쁘지 않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어."

나는 근처에 떨어진 도끼를 잡아서는 소년에게 던졌다.

"검을 버려라. 네 것은 너무 녹슬었어. 그런 상태로는 싸울 때 문제가 생긴다."

"꼭 그래야 하나요? 기사에게 검은 생명과도 같은데."

"빨리 죽는 게 소원이라면 말리지는 않으마."

탈레온은 망설이다가 이내 검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굳은 얼굴로 바닥에 버려진 도끼를 집었다.

화악! 내 앞에서 몇 차례 휘두르며 감각을 익히는 데 집중했다.

자세가 나쁘지 않았다.

검을 다루는 기본기에 충실했다면, 다른 무기도 금방 익힐 수 있으리라.

무기를 가려서는 안 된다. 언제든 원하는 무기를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나도 시체로부터 단검 몇 개를 찾아내러 허리에 찼다.

음식을 손질하는 데 썼던 것인지 도신이 깔끔하다.

"돌아가자."

"더 둘러보지 않으셔도 되겠어요?"

"기사들이 언제 떠날지 모르니까 먼저 기다리는 편이 좋아. 원하던 것도 얻었고 말이야. 무엇보다도 너나, 나나 이 자리에 오래 있는 것이 현명한 선택은 아닌 것 같다."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건물로 나가는 출구는 여러 갈래로 뻗어 있었지만, 우린 왔던 곳을 택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아시겠어요?"

"그래."

[영리함]이 갈림길을 외워 놓았다.

길을 따라 걸었다.

이번에도 함정을 조심하면서 천천히 나아갔다.

모든 것이 계획 안에서 순조롭게 진행되어 가는 중이었다.

이런 때일수록 늘 불안하다는 말이지.

THE Survival.

이 게임이 그리 간단히 선물을 내려 줄 리가 없었다.

탁!

갑작스레 걸음을 멈춰야 했다.

바닥에서 돌이 튕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슈아 경."

잘못 들은 게 아닌지 탈레온도 굳은 표정을 지었다.

좀비는 아니었다.

이 통로는 우리가 광장으로 향하여 이용했던 곳이었다.

지나던 와중에 놈들은 없었다.

지하로 내려오는 입구 또한 닫아 놓았다.

사람이군.

기사일까?

아니면 마을에 살아남은 생존자일까?

알 수 없다.

나는 재빨리 반딧불이를 회수하고는 몽둥이를 움켜쥐었다.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내 심장의 고동도 점점 더 격해졌다.

16화

"이봐, 거기 아무도 없어?"

싸늘한 목소리가 동굴의 벽과 부딪치며 메아리쳤다.

낯익은 톤이었다.

[영리함]이 상대가 누구인지 일깨워 주었다.

...제니트.

마을로 오던 와중에 몇 번이나 시비를 걸어왔던 기사였다.

한데 묘한 일이었다.

오스틴은 흩어져서 물자를 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우리가 들어왔던 건물에 분명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일부러 우릴 찾은 거야.

그의 말을 되짚어 봤다.

누군가 있다는 확신에 가득 찬 물음이었다.

조금 전까지 불지 않았던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나는 옆에 있던 탈레온에게 속삭였다.

"기사인 모양이다."

"그렇다면 적이 아닌 거군요?"

"아니, 그건 몰라."

좀비 아포칼립스 게임에 등장하는 뻔하디뻔한 클리셰였다.

사람도 적이었다.

그들은 총이 아닌 검과 마법으로 협박했다.

무법자가 활개 칠 정도로 법과 질서가 어지러운 세상.

귀족이란 작자들은 현대의 정치인들보다도 속물적인 이들이었다.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여기는 나에게 맡겨라. 문제가 생길 것 같다면 준비하고."

"문제라면?"

"싸울 준비 말이다."

소년이 들고 있던 도끼에 눈짓했다.

그가 곤혹스런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괴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이에요."

"콩깍지가 덜 벗겨졌군. 잘 들어라. 머리가 텅텅 빈 괴물들보다도 사고를 할 줄 아는 인간이 훨씬 더 무서운 거야. 살살 구슬려서 뒤통수치거나, 대놓고 뒤통수치거나. 지 뱃속을 채우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게 사람이다."

"하지만 조슈아 경은 절 구해 주셨잖아요."

"그건 내가 엄청 착해서 그런 거지. 그러니까 나한테 잘해라."

앞쪽에서 불빛에 반사된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횃불을 들고 있었다.

[야행성] 덕분에 밤눈이 밝은 게 도움이 된다.

상대방의 기척이 강해지는 것을 느끼며 곧 그와 마주치리라는 판단이 섰다.

"나오지그래. 거기 있는 거 알고 있다."

기척을 읽혔다.

과연, 기사라는 타이틀은 폼으로 단 게 아니었다.

나는 천천히 통로 한가운데로 다가갔다.

"제니트 경, 여긴 어쩐 일로 온 겁니까?"

"너희들이 걱정되어서 뒤따라온 참이다."

"탈레온을 두들겨 패려고 했던 당신이 말인가요?"

"그 일을 사죄하고 싶거든. 네 동료는 어디 있지? 혼자는 아닐 텐데."

제니트가 다가왔다.

입고 있던 갑옷에서 요란한 쇳소리가 들려온다.

"거기까지입니다, 제니트 경."

그가 멈춰 섰다.

투구에 드러난 눈동자가 얼어붙을 정도로 차가웠다.

몽둥이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그 자세는 무슨 의미이지?"

"글쎄요, 어떤 의미일까요?"

뒷일을 생각했다.

상대를 설득하여 변심하게 만들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저 다혈질적인 기사는 스스로의 고집을 꺾을 인간으론 보이지 않았다.

'없애야 한다.'

종말이 찾아왔어도 사람답게 살아남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나는 도덕을 지키려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그게 성인군자가 되겠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나는 한차례 호흡을 가다듬고는 마력을 끌어 올렸다.

가면을 쓰고 있을 이유가 사라졌다.

"그냥 우리 숨기는 것 없이 까놓고 얘기해 봅시다."

"음?"

"왜, 아직까지 빈손인 겁니까?"

오스틴은 제니트에게 물자를 찾으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그는 우리와는 다른 건물로 들어섰다.

빈손인 건 이상했다.

물 한 병이라도 들고 있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답은 간단하다.

제니트는 처음부터 다른 걸 찾는 데 몰두하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당신, 명령을 수행하지 않았군."

"이야, 눈치 한번 겁나게 빠르네. 오스틴이 널 살려 놓자고 한 판단도 이해가 된다."

제니트는 더 이상 살기를 숨기지 않았다.

그가 검을 뽑으며 한 걸음 다가서자 뜨거운 열기가 몸을 휘감았다.

"걔가 기숙사를 떠나기 직전에 그러더라. 마을에 도착하더라도 우리 할 일에만 충실하라고. 너희들이 뭘 하던 놔두라는 거야. 하, 병신 같은 새끼. 너희들이 여기서 뭘 찾아낼 줄 알고 놔둬."

그가 양손을 좌우로 크게 뻗었다.

"봐 봐, 그 증거로 이런 땅굴을 너희가 먼저 발견했잖아. 크기를 보니까 마을 사람들이 만들어 둔 은신처 같은데, 쓸 만한 게 숨겨져 있겠지. 음? 네 어깨에 멘 배낭, 조금 무거워 보인다? 살짝 아래로 처졌어."

눈썰미가 훌륭하다.

배낭에는 탈레온으로부터 나눠 받은 식량이 들어 있었다.

들킨다면 고문을 해서라도 남은 식량의 행방을 알아내려 할 것이다.

"보여 주지 않을래? 보여 주면 봐줄지도 몰라."

"궁금하면 성의를 보여. 이 상황에서 공짜 찾지 말고."

"오, 세게 나온다? 나랑 붙는 거 자신 있나 봐?"

"어차피 보여 줘도 죽일 생각인 주제에."

제니트가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모니터 너머로만 보아오던 NPC의 광기가 생생히 느껴졌다.

몸이 떨린다.

꾸며진 감정이 아니었다.

나는 현실과 게임 사이의 괴리감을 맛보는 중이었다.

"와, 소름 돋네. 정답이야. 어차피 너희만 정리하면 이 마을에 있는 건 전부 우리 거잖아."

나는 머리를 쓸어 넘겼다.

상대는 기사였다.

수준으로 짐작하면 베투스인 6등급에 해당하였고, 나와는 세 단계나 격차가 난다.

이곳이 결투장이라면 손쓸 도리도 없이 패배할 것이다.

하나 규칙이 없는 장소라면 자신에게도 승산은 충분했다.

"나랑 같이 조용히 지상으로 올라갈 생각은 없어? 리더의 명령을 따르라고."

"너 그걸 협박이라고 하냐?"

"충고하는 거지."

"하, 어이가 없네. 내가 오스틴에게 좀 얻어맞았다고 벌벌 떨 놈으로 보이냐? 일단은 대가리 취급해 주고 있지만 틈이 생기면 빼앗을 거야. 일 처리하는 모습을 보면 답답해서 울화병이 생길 것 같거든."

나는 가볍게 숨을 토해 냈다.

시간 끌기는 이만하면 충분했다.

[냉정함]이 그사이에 제니트의 무장을 파악했다.

왼손에는 횃불, 오른손에는 장검을 들고 있었다.

등에는 나무로 된 소형 방패가 있었지만 꺼낼 가능성은 낮았다.

횃불을 놓으면 그로서는 어둠에서 시야를 확보할 방법이 사라진다.

'활과 화살도 보이지 않는다. 허리에 찬 단검은 던지기에 적합한 투척용이야. 경계할 필요가 있겠어. 갑옷은 대부분의 부위를 보호하지만 팔꿈치나 오금, 발목 쪽은 드러났다. 물약은 없군. 아마도 여기까지 오며 전부 써 버린 거겠지.

동굴의 구조를 다시 한번 더 확인했다.

좌우의 폭은 좁지만 천장이 높아서 검을 휘두르는 데 무리가 없었다.

숨거나 피할 곳도 부족하다.

이대로 물러선다면 광장으로 돌아가게 되고 넓은 공터에서의 전투는 피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주도권을 넘기는 순간.

그가 들고 있던 서슬 푸른 칼날이 목을 날려 버릴 것 같았다.

"머리를 굴리고 있군. 그 잘난 머리가 너의 승리가 몇 퍼센트라고 하든?"

"100%라고 하는데?"

"하하, 미친 새끼."

제니트가 자세를 잡고서는 앞쪽으로 도약하며 검을 휘둘렀다.

쾅!

몽둥이를 휘둘러 맞받아쳤다.

[강심장]이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도록 도왔다.

서로의 무기가 부딪칠 때마다 둔탁한 충격이 손목에 전해졌다.

관절이 끊겨 나가는 느낌이었다.

몇 차례 합을 겨룬 것만으로 내 몸은 고통에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인내심]이 통증을 억제했다.

나는 천천히 뒤로 후퇴하며 탈레온이 숨어 있던 바위 틈까지 유인했다.

"염병할! 너 따윈 기사도 아니야."

소년이 기세 좋게 뛰쳐나왔다.

그리고는 앞에 선 기사에게 거침없이 도끼를 휘둘렀다.

기사에 대한 존경심이 넘치던 소년도 조금 전 대화를 엿듣곤 태도가 달라졌다.

"너무 뻔해."

제니트가 휘두른 검격에 소년은 튀어나왔던 벽까지 밀려 나갔다.

감탄이 나올 만한 완력이었다.

소년은 재빨리 일어나 나와 제니트 사이에 끼어들어 전위를 차지했다.

"얼마나 버티면 될까요?"

"힘 닿는 데까지."

"예? 당장이라도 의식이 날아갈 것 같은데."

"약한 소리 하지 마, 기사가 목표라면서. 눈앞의 선배님이 친절히 가르쳐 주고 있잖아. 이런 기회 좀처럼 없어."

탈레온은 우는 목소리를 내며 어떻게든 검을 겨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받아치는 게 고작이었다.

수읽기에서 소년은 경험 많은 기사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제니트는 끊임없이 간격을 좁혀 왔고, 검을 휘두르는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몇 초만 더 버텨라.'

나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영리함]이 술식의 계산을 끝냈다.

지니고 있던 십자가를 높게 쳐들자 강렬한 빛이 동굴을 환하게 비추었다.

오기 전에 익혀 둔 [섬광]이었다.

"크윽!"

미리 예상하지 못했다면 시력을 빼앗을 정도의 힘이었다.

나를 제외한 두 사람이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크아악!"

"조, 조슈아 경. 눈이!"

정면에서 마주 본 제니트는 물론이오.

등지고 있던 탈레온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나는 서둘러 뛰쳐나가서는 조금 전 광장에서 챙겨 둔 단검 한 자루를 꺼냈다.

그리고는 횃불을 쥐고 있던 제니트의 왼팔에 찔러 넣었다.

"으아악! 손이."

선혈이 치솟았다.

그가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횃불을 놓쳤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그것을 한번 짓밟고는 힘껏 걷어찼다.

나무토막이 지면을 구르며 남아 있던 불씨를 완전히 잦아들었다.

어둠이 찾아왔다.

본디 두려움을 안겨 줘야 할 암흑이 이처럼 반가운 건 처음이었다.

제니트는 이제 어둠 속에서 궁지에 몰린 기분을 맛볼 것이다.

"뭐야, 횃불은 어디 갔어? 너희들, 절대로 가만히 두지 않겠어!"

아무리 훈련된 전사라도 어둠이 가져다주는 두려움은 강력했다.

시야를 빼앗긴다.

싸우는 도중이라면 상대가 무엇을 할지 모르기에 필요 이상으로 예민해졌다.

제니트가 마구잡이로 검을 휘둘렀다.

검은 애꿎은 허공을 베어 넘겼다.

"보이기 시작했냐?"

나는 탈레온의 어깨를 힘껏 붙잡았다.

"예, 어렴풋이 보여요."

등지고 있었던 덕분에 탈레온이 제니트보다 먼저 시야를 회복할 수 있었다.

소년을 데리고는 광장으로 향했다.

"잘 따라와라."

"광장으로 가면 위험한 것 아닌가요?"

"녀석은 그전에 죽을 거야."

우린 광장 근처까지 다다랐다.

제니트는 포기하지 않고 쫓아왔다.

욕설을 토해 내며 어디까지라도 따라올 기세였다.

쏴악! 나는 서둘러서 탈레온의 어깨를 짓누르고, 스스로도 몸을 숙였다.

어둠 속에서 은빛에 무언가가 공기를 가로질렀다.

단검이었다.

표적을 노리고 던진 것이 아니라, 누구라도 맞으라는 일념으로 던졌다.

단검의 개수는 여섯 개.

벽에 부딪힐 때 터지는 금속음으로 그가 사용한 단검의 수를 확인했다.

"모두 떨어졌군."

이제 그에게 남은 수단은 없었다.

팔목의 출혈은 치명적인 수준이었다.

이대로 도망치더라도 제풀에 쓰러질 것이며, 지금에 이르러선 맞붙어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럼에도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길을 택했다.

콰광!

마치 동굴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들려왔다.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의 진동이 일어났다.

지나온 통로에서 먼지가 쏟아져 나왔고, 그것을 해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헉, 헉."

제니트는 바위에 깔려 있었다.

커다란 바위는 그의 하반신을 짓뭉갰다.

"...함정? 이런 게, 왜 여기 있어?"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는 말 몰라? 신중히 다녀야지."

"너희가 설치해 놓은 거냐?"

"아니, 마을 사람들이."

"미친! 그런데 왜 너희들은 안 걸렸어?"

나는 허리를 숙이고는 바위에 깔린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기숙사 4동에서 스타트했을 때, 트라이덴 마을을 탐색하는 것은 정석이다. 당연히 탐색해야 될 마을에 뭐가 있고, 어떤 공략법이 있는지 확인하는 건 기본이고."

"뭔 개소리야!"

"이래서 뉴비들은 설명을 해 줘도 모르지."

이해시킬 마음은 없었다.

결과가 바뀌었다면 이 기사가 자신들에게 인정을 베풀었을 리는 없었다.

어떤 일을 당했을까?

게임을 플레이해 왔던 경험에 미루어 볼 때.

나는 그에게 고문을 당했을 것이다.

"야, 조금 전은 장난인 거 알지? 부탁이니까 꺼내 줘."

제니트가 태도를 바꿨다.

나는 땅에 떨어진 그의 부러진 장검을 들어 올렸다.

"다른 기사들이 따로 꾸미는 일은 없어? 솔직히 말해 봐."

"없어! 적어도 내가 듣기론."

"계속 말해. 네가 살아야 할 가치를 증명해 보라고."

"시발! 날 가지고 놀 작정인 거지?"

"눈치가 좋네."

제니트가 남은 힘을 쥐어짜 내어 내 발밑으로 침을 뱉었다.

나는 죽어 가던 그의 목덜미에 칼날을 올려놓았다.

"단번에 죽여 주마. 내 마지막 자비다."

검으로 제니트를 베었다.

이 세계로 넘어와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다.

정당방위였다.

그럼에도 한줌의 죄책감이 자신을 괴롭혔다.

[냉정함]이 자신의 선택을 존중하며 위로해 주었다.

"이걸로 끝은 아니겠지."

나는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죄책감이 희미해질수록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이 떠올랐다.

제니트를 내려보았다.

그는 이제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죽었다.

내가 죽인 것이다.

이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그렇기에 너무 오래 괴로워해서는 안 된다.

17화

[숨겨진 업적을 클리어했습니다.]

[전화위복!]

[코인 15개를 획득했습니다.]

전화위복은 현재보다 수준이 높은 상대를 쓰러뜨렸을 때 얻은 업적이었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리스크를 줄여야 한다.

이 세계에서의 목표는 생존이었다.

"조슈아 경, 괜찮으신가요?"

탈레온이 걱정스런 시선으로 다가왔다.

조슈아는 반딧불이를 다시 소환하여 주변을 밝혔다.

"부상은 없다."

"아니, 그게 아니라 사람을 죽인 것 말이에요."

"이 녀석은 우릴 죽여도 미안해하지 않았을 거야."

THE Survival에서의 생존이란 늘 죽음과 함께한다는 얘기였다.

게임을 플레이하던 당시 강민혁으로서 몇 명이나 죽였던가?

모르긴 몰라도 만 명은 가볍게 넘는다.

이 세계에 빙의하였을 때.

이러한 상황을 피할 수 없다고 각오를 해 두었다.

"이젠 어떻게 할 건가요? 동료를 죽였으니, 오스틴이 우릴 가만히 두지 않을 거에요."

"너무 걱정하지 마라. 생각보다 잘 넘어갈 테니까."

제니트는 명령을 위반했다.

트라이덴까지 오는 과정 중에서 두 사람은 몇 번이나 부딪혔다.

그때마다 오스틴은 주먹을 사용했다.

부대에서 풍기 문란은 대단한 중죄였다.

기사들의 리더의 경우에는 이런 이들에 한해 즉결 처분까지 가능했다.

"일단 이 녀석의 몸부터 뒤져야 한다."

나는 허리를 숙였다.

죽은 제니트로부터 챙겨 갈 것이 없는지 조사했다.

바위 때문인지 갑옷을 벗기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남은 것은 장검이었다.

하나 이쪽도 마구잡이로 휘두르던 과정 속에서 벽과 부딪혀 도신이 부러졌다.

불평을 토해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세상으로 가는 길에 선물이라도 남겨 줬으면 좋았을 텐데. 끝까지 도움이 안 되는 녀석이군.'

조슈아는 탈레온과 함께 들어왔던 입구로 향하였다.

닿아 놓았던 통로가 열려 있었다.

곧장 올라가지 않고 침착하게 좀비가 들어왔는지 확인했다.

"탈레온, 배낭을 보여 줘라."

"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년은 당황하면서도 어깨에 메고 있던 배낭을 건네는 걸 잊지 않았다.

손으로 받고는 내용물을 살폈다.

광장에서 소년 나름대로 식량을 구했지만 양이 많지 않았다.

닭이 제 역할을 하려면 시간이 걸린다.

그동안 버틸 식량을 구해야 했다.

'기사들이 식량을 나눠 줄 거라는 기대는 포기해야 한다. 그렇다면... 해 보는 수밖에 없나.'

사다리에 몸을 실으며 생각했다.

게임을 할 때도 늘 공략처럼 흘러가지는 않았다.

재난 상황인 만큼 즉흥적인 사건도 생겼다.

제니트와의 충돌은 내겐 그런 종류였다.

이 상황은 이용할 수 있었다.

연기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조건이 따라붙지만, [냉정함]이 있다면 문제없으리라.

* * *

루실은 건물 안에 있던 의자에 앉아 조금 전의 일에 대해 회상했다.

입구를 뚫어 냈을 때의 일이었다.

조슈아는 다리 앞에 종이 있다는 걸 발견해 내고는 그것을 이용해 괴물들을 유인했다.

같은 풍경을 보고도 자신은 그러한 발상에 다다르지 못했다.

리더인 오스틴도 마찬가지였다.

더불어 괴물들이 청각에 예민하다는 이번에야 겨우 깨달았다.

'얼마나 여유가 없었으면, 그걸 알아차리지 못한 거지?'

사냥꾼이나, 용병으로서 활동할 때도 상대에 관한 정보를 모으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루실은 그러지 못했다.

지독한 날씨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시체를 마주할 때면 이성적으로 서 있는게 불가능했다.

그는 어떻게 버텨 냈을까?

이곳까지 오는 동안 조슈아의 눈빛은 언제나 강인했다.

훈련을 받아 온 자신조차 감히 해내지 못한 일은 그가 해내는 중이었다.

'타니아의 말대로 예전과는 달라졌을지 몰라.'

동생인 타니아가 말했다.

그는 아카데미의 수준 낮은 교육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여 수업에 빠진 것이라고.

믿기 어렵다.

하지만 동생은 타인을 과장할 성격이 아니었다.

오히려 냉정한 편에 가까웠다.

'아니면 처음부터 천재였을지도 모르고.'

조슈아가 보여 주었던 마력 변형의 술식은 천재의 편린과 같았다.

마력의 양이 과하지 않고 적절히 뽑아내고는 신속하게 그것들을 엮어 냈다.

루실은 떠올렸다.

자신은 단 한 번도 조슈아의 실력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땡땡이치던 모습만을 보고서 그의 능력을 폄하하였을 뿐이다.

'현재의 팔라리온은 어떨지 몰라도, 과거에는 마법사로서 천부적인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팔라리온 가문은 빛이란 속성을 처음으로 발견한 마법사 가문이었다.

초대 가주는 인류 최고 등급인 데우스(1등급)에 도달했으며, 가문의 영향력이 막강하던 시절에는 누구도 그들을 넘보지 못했다.

그들이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엉망이지.'

현대의 팔라리온 가주는 무능한 인간이었다.

영지민의 원성을 한 몸에 받았고, 제 자식들을 출세의 도구로만 삼았다.

하여 아들은 아카데미로, 딸은 타 귀족에게 정략결혼을 강요받고 있다고 들었다.

"우스운 일이야. 내가 왜 무시하던 인간의 일로 고민하고 있는 거지?"

루실은 혼란스러웠다.

교정에서 보여 줬던 조슈아의 한심스런 모습은 결코 착각이 아니었다.

그는 불성실한 인간이었다.

자기만 만족한다면 남들의 반응 따윈 상관없다던 무심한 시선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러한 성격들은 이런 재난 상황에선 장애가 되기 십상이었다.

"만약... 예전과는 달라졌다면."

조슈아가 개심했다면, 태도를 고쳐야 하는 것은 자신이었다.

사정이야 어쨌든 그는 동생을 구해 준 은인이었다.

사과해야 한다.

그때가 되면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창피할 것 같았다.

그녀는 더 이상 고집부리지 않기로 결심했다.

"먼저 도착해 있었네?"

오스틴이 합류 장소에 도착했다.

그가 어깨에 짊어진 가방은 두둑이 채워 넣었는지 밑바닥이 묵직해 보였다.

"열 명이 닷새는 먹을 정도의 양이야. 이만하면 돌아간 뒤에도 체면은 설 거야. 그쪽은?"

"나도 많지는 않지만 물자를 구했어."

"이제 제니트만 남은 건가?"

"아니지, 그 아이들도 남았잖아."

오스틴이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조슈아를 말하는 거야? 그 아이가 아무리 실력이 좋더라도, 고작 둘로는 이 마을에서 살아남기 힘들 것 같은데."

"어째서 흩어지라고 지시한 거야? 우리들 중 누군가는 그 아이들과 함께해야 했어."

"그게 너무 갑작스러워서 말이야. 설마, 그 아이가 입구를 뚫을 줄은 상상도 못 했거든."

"죽길 바라서 한 행동은 아니고?"

"설마, 아무리 나라도 아이들을 상대로 지독한 짓거리는 안 한다고."

"...후."

루실은 자리에 일어나서 창가를 내다봤다.

바깥에선 괴물들의 숫자가 늘어나 마을이 어수선해졌다.

"입구에 유인했던 놈들도 죄다 돌아온 모양이야."

"탐색하는 과정 중에 몇 마리를 해치워서 그런가? 신중하지 못했네."

괴물들은 약하다.

검에 쉽게 베이고, 마법으로도 태워졌다.

몇 마리 정도라면 맨몸으로도 쓰러뜨릴 자신감이 있었다.

하나 얕보아서는 안 된다.

그들의 이빨과 발톱은 하나하나가 맹독이 깃든 것처럼 위협적이다.

그녀는 저들에게 공격당하여 광기에 잠식된 동료를 몇 명인가 보았다.

"우린 벌써 셋이나 잃었어. 앞으로도 더 잃을지 모르고."

루실이 애석함에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타워에서 나올 당시 탐색대의 인원은 총 7명이었다.

"산 사람이라도 살아야지. 죽어 간 동료를 생각해 봐야 의미 없어."

"네가 신중했더라면 죽지 않아도 되는 사람도 있었어."

"그러니까 말했잖아, 미안하다고."

루실은 그의 태도가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그 아이들은 어쩌지?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려 준 적이 없잖아."

"네 마법으로 탐색해 봐."

"컨디션이 좋을 때는 넓게 탐색할 수 있는데 지금 같은 상황이면 어려워."

차갑게 식은 밤공기가 주변을 에워쌌다.

밖에서는 괴물들의 울음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온다.

술식의 기본 요소 중 하나는 집중력이었다.

이런 환경에서는 평소 기량의 절반도 발휘하기 어려웠다.

10m는 가능할까?

루실은 고개를 저었고 본인의 나약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찾으러 갈 수도 없어. 죽었는지 모를 사람을 찾다가 우리도 곤경에 처할 수 있으니까."

오스틴이 딱 잘라 말했다.

그녀는 그의 냉정함이 대의를 위해서가 아닌,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임을 느꼈다.

우리는 포위되었다.

괴물들은 마치 건물 안에 사람이 있다는 걸 눈치챈 것처럼 근처를 맴돌았다.

어느 순간부터 오스틴은 창문을 통하여 망을 보는 것을 그만두었다.

시선이 마주치는 걸 기피하는 것이다.

"어떻게 할 생각이야?"

"조금만 더 기다릴 생각이다. 그럼에도 제니트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녀석을 두고 갈 거야."

"일이 왜 그렇게 되는 건데. 찾는 게 정답 아니야? 그리고 그 아이들은 또 왜 빼는 거고."

"죽었을 가능성이 높아. 양쪽 모두."

"그래서 버리겠다?"

"그래, 가능성이 높은 쪽을 택하자는 거지."

"좋아, 그럼 돌아가는 길은 외우고 있어?'

오스틴은 침묵했다.

트라이덴까지 오던 도중에 짙게 깔린 안개 속을 걸었다.

조슈아는 길목마다 세워진 건물로 위치를 짐작했으나, 오스틴에게는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기에 그는 계획을 바꾸고 싶지 않았다.

"모르는구나."

루실은 그의 침묵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오스틴은 불쾌한 표정이었으나 반박하지 못했다.

"식량을 구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 아이가 없다면 궁지에 몰린 거나 마찬가지라는 뜻이네."

"적당히 해. 언제부터 네가 조슈아에 편을 들었다고 그래."

"편을 드는 게 아냐. 사실 그대로를 얘기하는 것뿐이지."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일곱이었던 동료가 넷으로 줄어들었기 때문일까?

두 사람은 예민한 상태였다.

루실은 속으로 집어삼킨 침이 화끈거리는 게 느껴졌다.

"차라리 직접 찾으러 밖에 나가 보는 건 어때? 그 아이들만이 아니야. 제니트도 예정보다 늦어지고 있어."

"오지 못한다면 버릴 뿐이다. 결국 그 정도밖에 안 된다는 얘기이니까."

"잠깐만 무슨 말을 그딴 식으로 해? 제니트가 고집불통이긴 하더라도 동료였어."

"살아남으려면 냉정해질 필요가 있어. 그게 어떤 관계라도 끊어 낼 수 있어야 하지."

"나도 버리겠다는 뜻처럼 들리는데?"

"하하, 그럴 일은 걱정하지 마. 넌 명망 높은 가문의 여식이고, 마법사로도 크게 도움이 되니까 말이지."

루실은 눈살을 찌푸렸다.

오스틴은 판단은 동료와의 인연을 중시하지 않았다.

언뜻 냉철해 보이는 결정도 따지자면 개인을 우선할 뿐이다.

점차 불신이 쌓여 갔다.

이 사람을 믿어도 될까?

'부디 이 불만이 폭발하는 일은 없게 해 주소서.'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전신을 덮친 무기력함에 파묻혀 쓰러질 것만 같았다.

쾅!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음?"

두 사람은 누가 할 것 없이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소리가 났던 방향으로 다가가 상황을 살폈다.

조금 떨어진 건물의 문이 어떠한 충격으로 산산조각이 났다.

"으어어어!"

괴물들이 뚫린 문으로 무섭게 빨려 들어갔다.

제니트인가?

하지만 곧 머릿속에서 그에 대한 가능성을 지워 버렸다.

성격이 급한 제니트라면 무작정 돌진하여 괴물들과 전면전을 펼쳤을 테니까.

하나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아!"

루실은 서둘러 마법을 준비하였다.

소동이 일어난 건물과는 멀지 않았기에 지금의 능력으로도 충분하다는 판단이 섰다.

그녀의 몸에서 생겨난 파동이 벽과 벽 사이를 통과하며 뻗어 나갔다.

"두 사람이야! 푸른색 지붕인 집 안에 있어."

"...쳇."

오스틴은 검을 뽑아 들었다.

괴물들의 시선이 딴 곳에 쏠린 지금이 기회였다.

숨어 있던 건물 밖으로 나와서는 길거리에 있던 좀비를 쓰러뜨렸다.

루실은 그런 오스틴을 곁을 따르며 바람으로 만들어 낸 칼날로 엄호했다.

"여기서부터는 천천히 따라와."

건물 근처까지 다다랐을 때.

아주 잠깐이나마 두 사람에게는 평화가 찾아왔다.

문을 따고 들어가는 순간까지도 공격을 받지 않았다.

"헉헉."

숨이 거칠어졌다.

식은땀이 몸 곳곳에서 흘러나와 갑옷 안쪽을 미적지근하게 적시고 있었다.

그 찝찝한 기분을 뒤로하고서 루실은 소년들을 찾기 시작했다.

"...너희들 여기 있지?"

나지막한 목소리로 부르자 방 안쪽에서 실루엣이 꿈틀거렸다.

조슈아와 탈레온이었다.

한데 다가오는 조슈아의 얼굴이 잔뜩 격양되어 있었다.

이윽고 그의 손목이 오스틴의 멱살을 부여잡고는 벽으로 몰아세웠다.

"당신 어째서 날 죽이려고 했지?"

오스틴은 당황하여 소년의 손을 뿌리치지 못한 채로 대답했다.

"무슨 소리냐?"

"제니트가 우리를 미행했습니다. 그리고 습격했죠. 우린 제대로 된 탐색도 못 하고, 겨우 목숨만 건진 채로 도망쳤다는 말입니다."

오스틴은 돌아가는 상황을 즉시 이해했다.

망할 제니트!

입 밖으로 욕지거리를 토해 내려던 것을 겨우 참아 냈다.

그가 명령없이 독단적으로 처리한 일로 인하여 발목이 잡혔다.

"우선 진정해라. 믿기 어렵겠지만, 나는 제니트에게 그러한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

"그걸 어떻게 증명할 생각입니까?"

"방법은 없다. 하지만 제니트가 돌아온다면 증명할 수 있을 거다. 그 녀석은 지금 어디 있지?"

조슈아는 잡고 있던 멱살을 내려놓고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한차례 호흡을 가다듬자 달아오른 얼굴이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가라앉았다.

"모릅니다. 막 따돌리고 온 참이라. 살아 있다면 저희를 쫓아올 것이고, 죽었다면 어딘가 쓰러져 있겠죠."

오스틴은 땅이 꺼질 듯 한숨을 쉬었다.

소년의 모습을 찬찬히 뜯어 보았다.

군데군데 조그마한 상처가 있었고, 개중에는 칼날에 긁힌 듯한 자상도 보였다.

괴물은 무기를 다루지 못했다.

옷에 묻은 흙먼지는 그들의 도주가 얼마나 처절했는지 알려 주었다.

'설마, 직접 손을 쓸 줄 이야. 내 착오다. 병신 같은 새끼! 끝까지 걸리적거리는구나.'

부하를 관리하지 못한 자신의 실수였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한들.

원래라면 이런 소년에게 쩔쩔맬 이유는 없었다.

'귀족들이 저지른 잘못을 쉬쉬하는 거야 늘 있는 일이다. 이번에도 그럴 수가 있었어. 살인이라고 할지라도 말이지.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우린 조슈아가 필요해.'

제니트가 저지른 비행이 얼마나 악독하든 간에 핑계 몇 마디면 용납이 되었다.

자신도 어물쩍 넘어갔을 것이다.

그건 제니트가 살아남는 데 그만한 가치를 지녔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하나 이 소년 앞에선 그게 통하지않았다.

조슈아는 길잡이로서 본인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벽히 수행해 냈다.

당장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자신과 루실은 그것과 관련된 논쟁을 펼치지 않았던가?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제니트가 눈앞에 있다면 모가지를 비틀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네 생각을 묻고 싶다"

루실이 끼어들며 말을 꺼냈다.

"동이 틀 때까지 제니트를 기다려 보죠."

"만약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때는 책임을 피하기 어려울 겁니다."

18화

나는 기사들과 멀찍이 떨어져 부서진 의자에 앉았다.

즉흥으로 보여 준 연기치고는 훌륭했다.

[냉정함]이 어떠냐는 듯 반응을 물어 왔지만 노닥거릴 시간이 없었다.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오스틴은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은 제니트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루실은 난처한 표정이었다.

'나를 필요로 하고 있군.'

그들은 나와 탈레온을 손쉽게 제압이 가능했다.

그럼에도 머뭇거리는 이유는 간단하다.

죽이는 것보다야 살리는 게 가치가 높았다.

'저들 중 누군가는 감정적인 이유로 돕고 싶어 할지라도, 나로서는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상념에 빠져 있던 중에 탈레온이 다가왔다.

소년은 돌아가는 사정을 파악하지 못하고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이대로 탈출하는 게 아니었나요? 게다가 제니트는 우리 손으로...."

"목소리 낮춰라."

탈레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재차 말을 이었을 때는 조금 전보다 목소리가 작았다.

"제니트가 우릴 공격한 것은 혼자서 벌인 일이라고 털어놨어요. 저 둘은 무관할 거예요."

"그래, 네 말이 맞겠지."

"한데 굳이 그의 죽음을 속여 가면서까지 저들과 마찰을 빚을 필요가 있을까요?"

"있지. 이유야 차고 넘쳐."

소년은 모를 것이다.

기숙사에서부터 트라이덴까지 우리 그룹이 얼마나 저울질을 당했는지.

만약 그 과정에서 밉보이거나, 가치를 드러내지 못했다면 무슨 짓을 당했을지.

"서로가 협력하여 위기를 넘길 수 있다면 좋겠지. 모두가 이타적이고, 타인을 존중할 줄 안다면 의심 따윈 하지 않아도 될 거야."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기사들이 행동으로 보이지 않았을 뿐.

저들의 상상 속에서 우린 몇 차례나 죽임을 당했고, 이용당했다.

되갚아 줄 생각은 없었다.

단지 저들처럼 실리를 따라 행동할 뿐이다.

"괘씸죄. 일단은 그렇게 알아 둬라."

"...여전히 잘 모르겠어요."

"둔한 놈. 나랑 처음 만났을 때, 기고만장했던 모습은 어디로 갔냐?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하다. 뭐, 그런 거냐?"

"아, 아니에요. 그때는 제가 리더이다 보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을 뿐이에요."

"너는 나만 믿고, 어디 구석진 자리에서 눈이라도 붙여라."

나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소년은 난감해하며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시선을 옮긴 곳에는 두 기사가 문답을 주고받는 중이었다.

애써 엿들을 필요는 없다.

이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로 표정만 읽으면 충분하다.

시간이 흘렀다.

그들은 아직까지 새로운 제안을 해 오지 않고, 속절없이 제니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이 대치가 길어질수록 어느 쪽이 조바심이 생기는지는 분명했다.

"조슈아."

오스틴이 불렀다.

천천히 두 사람이 서 있던 장소로 다가갔다.

"예."

"아무래도 제니트가 당한 모양이다."

"그럼 오스틴의 무죄를 증명해 줄 사람도 사라졌네요."

"나는 결백하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어물쩍 넘어가려고 해 봐야 소용없겠지. 상대가 너라면 말이야."

곤욕스러워 보이는 그를 향해 살짝 웃어 주었다.

기사가 저자세로 나온다면 그것만으로 어깨에 뽕이 차올라 타협하는 이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어림도 없었다.

최대한 뜯어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덮쳐 오는 피로감까지 꾹 참아 가며 이 순간을 기다렸다.

잘 버텨 준 [인내심]도 쉽게 양보하지 말라며 경고했다.

"불미스런 일이 생겼으니 나로서도 책임을 지고 싶지만, 일단은 기숙사로 돌아가는 게 먼저가 아닐까? 너흰 우리들의 호위를 받아서 안전성을 높이는 거야."

나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땅이 꺼질 듯 한숨을 토해 내며 어질러진 가구 사이에서 앉을 만한 곳을 찾았다.

툭!

지저분한 소파에 몸을 기대고는 말을 이었다.

"호위라면 정확히 어떻게 해 주시는 건가요? 설마, 마을에 올 때처럼 행동하는 것이라면 그건 호위가 아닙니다. 우린 충분히 1인분을 했습니다. 아, 저는 입구를 열었으니 2인분은 되겠네요. 그러니 그 말로 퉁 칠 생각이라면 전 거절할 겁니다."

"우리가 없더라도 돌아갈 수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데."

"제가 못 할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겁먹을 필요는 없었다.

오스틴은 속내를 잘 숨겼지만, 속으론 필사적이란 걸 안다.

이따금씩 미간에 주름이 졌다.

눈빛은 이글거렸으며, 손가락 마디를 어색하게 구부렸다.

"쉽지 않을 거다."

"딱 잘라 아니라고는 말씀 못 하시네요."

"날 너무 자극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내겐 쉬운 길이 있어. 그걸 하지 않는 건 단지, 네 능력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오스틴이 허리띠에 찬 검을 눈짓했다.

옆에 있던 루실의 안색이 변했다.

나에 대한 감정은 제쳐 두고서라도, 살인은 그녀가 원하던 결말은 아니었다.

"협박이라면 그만두세요. 안정성을 높이려고 협조를 구하는 사람이, 스스로 확률을 죽여 버리는 짓을 하다니. 이치에 맞지 않네요."

"...하."

오스틴은 주저했다.

체면 때문이라도 오기를 부려 가면서까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해한다.

이 세계는 현대보다도 서열이란 것에 사고방식이 단단히 묶여 있었다.

귀족이 있고, 평민이 있으며, 그 밑으로 노예도 존재한다.

나와 오스틴은 기사와 학생이란 직위에 차이가 있었고, 가문의 명성까지 올라간다면 비교가 안 됐다.

"이대로라면 도돌이표가 될 뿐이야.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옆에 있던 루실이 끼어들었다.

"리더는 나야. 왜, 그런 문제를 나와 상의도 없이 결정하려는 거야!"

"얌전히 있어. 네가 하지 못할 말을 대신해 주는 거니까."

두 사람은 티격태격 싸우다가 오스틴이 한발 물러서며 끝났다.

나는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일전에 느꼈던 혐오감은 옅어지고,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저희는 제니트에게 쫓기느라 이 마을에서 얻은 것이 많지 않아요. 두 분이 물자를 찾는 걸 도와주세요."

트라이덴 마을에서 자신이 목표로 삼았던 곳은 두 곳이었다.

첫 번째로는 이미 들렀던 땅굴에 있던 광장.

두 번째가 마을 안쪽에 위치한 성당이다.

하지만 성당은 나와 탈레온의 힘만으론 역부족이었다.

'제니트가 만들어 준 구실을 써먹지 않을 수가 없지.'

[영리함]은 자신의 비열함에 혀를 내둘렀다.

올바르지 못한 일이었다.

탈레온의 우려대로 저 두 사람은 제니트의 습격과는 무관할 테니까.

'이런 방법도 필요할 때는 써야겠지.'

게임을 플레이하며 여러 방면으로 시험해 보았다.

왜, 고결함을 지켜 보지 않았겠는가?

나 또한 인간 찬가를 믿으며, 가진 것 이상을 베풀며 살아남으려고 한 적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그리고 게임이 현실이 된 내게 실패한 플랜을 따를 이유는 없었다.

"좋아, 그렇게 할게."

루실이 대답했다.

"잠깐만! 왜 멋대로 정하는 거야."

오스틴이 노발대발했다.

"이건 내 결정이야. 너와는 상관없는! 그러니까 떠나고 싶다면 마음대로 해."

"제정신이야? 조슈아를 경멸했던 네가 저 아이의 의견에 따르겠다고?"

"그게 살 확률이 높아 보인다고 판단했거든."

루실의 평가가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달라졌다.

자신은 그 계기가 다리를 건넜을 때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잠시 동안 주위를 가만히 살폈다.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손해라는 것을 알기에 무기를 꺼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여기서 300m 떨어진 방향에 성당 하나가 있습니다. 거기까지 갈 계획입니다."

"알았어. 가는 방향은 아니?"

"길거리는 위험하니 건물 아래로 갈 겁니다."

"어떻게?"

"제니트로부터 도망치다가 안 사실인데 마을과 마을 사이를 잇는 땅굴이 있었어요."

"그런 게 있었다고?"

"예, 아무래도 피난처로 활용하려고 만들어진 것 같던데, 생존자는 없는 것 같았어요."

"...세상에."

땅굴로 들어가는 계단은 건물마다 존재한다.

당연히 지금 숨어든 이곳에도 있었다.

제니트가 죽은 통로는 경유하지 않기에 들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더불어 광장에 숨겨진 보물도 현재는 내 수중에 있다.

문제없다.

이제 그곳은 비밀 통로로써의 역할, 딱 거기까지였다.

"안내해 줘. 따를 테니까."

루실은 재촉하듯이 말했다.

그녀는 알고 있을까?

방금 전의 발언이 게임 내 시스템에 변화를 주었다는 걸.

[숨겨진 업적을 클리어했습니다.]

[굴복!]

[코인 15개를 획득했습니다.]

[후천적 특성 (언변술 하) -> (언변술 중)으로 강화되었습니다. 자신의 대화로 타인이 보다 쉽게 감화됩니다.]

[후천적 특성 (카리스마 하)를 획득했습니다. 자신의 영향력이 강해집니다.]

[총 보유 코인 30개]

후천적 특성의 강화와 획득.

본래라면 얻는 것도 어렵고, 강화하는 것은 더 힘들지만, 이번에는 상대가 기사이기에 가능했다.

명백히 지금의 조슈아보다도 강하다.

그런 상대에게 주도권을 얻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말실수 한 번에 천당과 지옥을 경험한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강심장]이 재빨리 진정시키지만, 숨이 답답해지던 감각만은 목구멍에 남아 있었다.

다음으로 확인할 것은 업적이다.

[굴복]

이 업적은 자신보다 직위가 높은 상대를 압도했을 때 코인을 지급했다.

꼭 싸움일 필요는 없다.

어떤 쪽이든 상대가 인정하고, 포기한다면 클리어되었다.

'따지자면 굴복이란 표현보다는 설득에 가깝지만... 뭐, 상관없나.'

나는 구석에서 잠들고 있던 탈레온에게 다가갔다.

소리를 듣고 인기척을 느꼈는지 소년은 깨우기도 전에 슬며시 눈을 떴다.

"어떻게 됐나요?"

"저들이 내 계획에 따라 주기로 했어."

"...정말인가요?"

"그래."

"세상에, 가비누와 타니아에게 이 상황을 들려준다면 믿을까요?"

"가비누는 믿지 않을 거다. 타니아는 냉큼 믿겠지."

탈레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기사들과 의견을 나누는 과정에서 있었던 사정을 설명했다.

핵심은 땅굴로 되돌아가는 점이었다.

소년은 놀라는 눈치였다.

나는 그에게 단단히 입단속 시키며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지하로 내려가는 길로 안내하겠습니다."

루실이 고개를 끄덕였다.

뒤편에 있던 오스틴은 불쾌한 얼굴이었으나, 심경에 변화가 있었는지 걸음을 옮겼다.

"솔직히 말해서 아직 내 기분이 풀린 건 아니다. 나는 이 상황이 유쾌하지 않다는 얘기다. 너는 네가 가진 권한을 넘어서 우리들을 휘두르려고 하고 있는 거다. 보복이 두렵지 않은 거냐?"

"두렵습니다. 하지만 오스틴, 당신도 잘 알 겁니다. 이런 엿 같은 상황에서 내리는 선택들 대부분은 누군가의 반감을 살 수도 있다는 걸. 전 보았습니다. 다리를 건넜을 때, 당신이 두 사람에게 내리는 수신호. 제가 그 뜻을 모를 줄 아셨습니까?"

오스틴이 몸을 떨었다.

빈틈이란 것을 모를 것 같던 사내의 얼굴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러니 억울해할 필요 없습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끝까지 살피지 않고 계단이 있던 장소로 향했다.

뒤에서 걸어오던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오스틴이 제자리에 얼어붙어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신경 써 줄 필요는 없다.

[외톨이] 특성도 없는 인간이 혼자라는 고독함을 견디긴 쉽지 않으니까.

"지하에 이런 곳이 있을 줄이야. 상상도 못 했어."

루실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우리는 다시 한번 지하로 내려갔다.

어둡고 축축한 공간 속에서 나는 길잡이의 역할에 충실했다.

반딧불이를 소환하였다.

그러자 루실이 아! 하는 짧은 신음과 함께 호기심을 내비쳤다.

마법사에게 성 속성이란 보기가 무척 드문 속성이니 관심이 가는 건 당연하다.

"...음."

루실은 입을 우물거렸다.

뭔가 묻고 싶어 한다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초면에 만났을 때 생긴 어색함이 벽처럼 가로막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나는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 말했다.

"응?"

"제 억지를 받아 주신 점 말이에요. 오스틴의 판단이 맞아요. 당신들은 저희를 돕지 않아도 상관없죠."

"아냐, 우린 네가 필요해."

"제니트는 찾지 않을 생각인가요?"

"오스틴이 포기했어."

"그의 생각을 묻고 있는 게 아니에요. 당신 생각을 묻는 거지."

루실이 한숨을 내쉬었다.

"찾아보고는 싶지. 그렇지만 나는 부대의 부관으로서 상관의 의견을 존중해야만 해."

나는 생각했다.

THE Survival의 어느 루트에서도 그녀는 부대에 불만이 매우 크다.

그건 동료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마음은 오스틴이란 인간과 결코 공유할 수 없는 것이지.'

그녀의 인내심은 한계에 다다랐다.

아주 작은 자극에도 폭발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사건이 필요했다.

[영리함]이 몇 가지 제안을 던져 주었고, 개중에 쓸 만한 것을 골랐다.

'그에게는 마지막 기회가 될 거야.'

우린 땅굴을 통해 광장을 지나갔다.

탈레온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뒤따르던 기사들은 땅굴의 규모에 감탄하면서, 한편으론 시간을 내어 달라고 부탁했다.

광장을 뒤져 볼 심상이었다.

'처음 마주한 사람이라면 이곳에 보물이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겠지.'

하지만 늦었다.

닭이란 보물은 내 것이었다.

식량은 사람들이 먹다 남은 찌꺼기가 전부였고, 그마저도 상하고 부패되었다.

무기와 방어구는 그들이 입고 있던 것보다도 못했다.

이윽고 돌아온 오스틴과 루실의 안색은 최악이었다.

시체를 뒤지는 수고에도 빈손으로 돌아온다면 누구라도 저런 표정일 것이다.

"저는 보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빌어먹을! 뭔가 있을 것 같았다고. 그런데 괴물이나, 사람들의 시체밖에 없다니."

오스틴이 땅에 떨어진 깡통을 세게 걷어찼다.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한쪽 방향에서 아직 죽지 않은 좀비의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에게 미간을 모았다.

한데 오스틴은 미안한 기색도 없이 혀를 찰 뿐이었다.

"따라오세요. 이쪽입니다."

나는 성당이 있는 통로로 걸어 나갔다.

함정을 회피하며 앞으로 똑바로.

길은 틀리지 않았다.

두 사람 중 누군가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다행히도 피로가 쌓인 탓인지 그 둘은 의심을 하기보다 하품을 늘어놓길 반복했다.

지쳤겠지.

다리 앞에서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이후로도 강행군이었으니까.

속으로 [인내심]에게 감사했다.

"여기예요."

나는 사다리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올라가기 전에 얘기했다.

"위로 올라가면 괴물이 있을 겁니다."

"...얼마나?"

"저도 정확히는 모릅니다."

사실 알지만 모른 척했다.

솔직히 털어놓는다면 뒷걸음칠 게 뻔했으니까.

시작하기 전부터 공포에 주눅 들면 곤란하다.

그러니 숨겼다.

내 계산대로라면 이 두 사람 중 한 사람만 있으면 충분했다.

[서브 퀘스트 – 트라이덴 성당의 구원]

[클리어 목표 – 성당 안에 있는 좀비들을 모조리 제거하라.]

[난이도 – B]

[보상 – 성직자의 숨겨 둔 보물, 코인 5개.]

19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