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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블리딩 커스(1성)>

적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해서 출혈이 발생했을 때 1할의 확률로 상대의 육체 능력을 감소시킨다.

"오!"

특성의 설명을 본 라온이 탄성을 흘렸다.

1할의 확률이 조금 아쉽긴 하지만,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특성이었다.

"능력치에 특성까지 진짜 아낌없이 주는 나무네. 고맙다."

모든 능력치 2에 근력과 민첩성 기력이 추가로 상승했다. 거의 모든 능력치가 3이 오른 효과에 새로운 특성까지.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별명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별 특성도 아니로군. 저 정도라면 본왕이 가진 능력 중 최하급이다.

"그거야 쓰는 사람 나름이지."

라온이 씩 미소 지었다. 라스는 냉기를 사용하지만, 자신은 검을 사용하고 기습에 능하다.

전생의 기술과 경험을 이용한다면 <블리딩 커스>의 효과를 최대한으로 이용할 수 있다.

"딱 좋아."

라온이 어깨를 돌리며 일어섰다. 다시 겉옷을 걸치고 숙소 문을 열었다.

-뭐냐.

"수련 좀 하러 가려고."

-또?

"육체의 변화를 확인하고, 적응해야지."

-네놈 때문에 본왕도 잠을 못 자지 않느냐!

"나중에 자."

-이런 용암에 튀겨 죽일!

기분이 좋으니, 라스가 내뱉는 욕설과 저주도 음악처럼 들렸다. 콧노래를 부르며 연무장으로 달려갔다.

* * *

두 달 뒤 새벽 공기가 스산한 연무장.

라온은 가장 먼저 연무장에 나와 검술을 수련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버렌과 마르타가 거의 동시에 들어왔다.

"쯧!"

"저건 진짜 잠도 없나…."

버렌은 혀를 차고 바로 검을 쥐었고, 마르타는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풀었다.

"하암."

아침에 약한 루난은 느지막하게 나와 어린 참새처럼 하품했다.

시리아의 어둠에서 완벽하게 벗어났는지 눈동자가 예전보다 밝아졌다. 그래도 맹하긴 했지만.

뒤늦게 나온 수련생들도 가볍게 수다를 떨며 훈련 준비를 했다.

그렇게 평소와 같은 하루가 시작될 때였다.

콰앙!

연무장 문이 거칠게 열리고 리메르가 들어왔다.

"교관님. 문은 차는 게 아니라, 여는 겁니다."

"괜찮아. 내 거니까."

리메르는 콧등을 찡그린 버렌에게 손을 휘젓고 단상 위로 가뿐하게 올라갔다.

"훈련 중이니 귀만 열어놓고 들어라."

그는 손뼉을 쳐서 시선을 모아놓고 훈련을 계속하라 지시했다. 아직 어린 수련생들에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걸 어떻게 합니까?"

"우리가 익스퍼트도 아니고!"

"그냥 빨리 말이나 해줘요!"

수련생들은 먼저 말을 하라고 손을 흔들었다.

다만 라온은 검술에 집중을 하면서도 리메르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고 있었다.

"그럼 말하지. 너희들에게 임무가 내려왔다."

"헉!"

"임무!"

"임무요?"

임무라는 단어에 수련생들의 눈동자가 별을 박아 놓은 듯 번쩍였다. 방계들은 당연했고, 버렌이나 마르타도 입을 벌렸다.

물론 라온은 계속 검을 휘둘렀고, 루난은 그 옆에서 멍하니 하품했다.

"그래. 너희들의 첫 번째 임무다."

"우와아아아!"

"임무다!"

"드디어 실전인가?"

"후우, 후우…."

수련생들 반응은 다양했다. 기대감에 소리를 지르기도 했고, 주먹을 움켜쥐기도 했으며, 흥분하여 숨을 헐떡이기도 했다.

"물론 너희들만 가는 건 아니다. 물가에 애들만 보낼 수 없으니, 나와 교관들이 함께 가게 될 거다."

다들 예상했는지 수련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첫 임무라….'

라온은 리메르의 말을 들으며 전생의 첫 임무를 떠올렸다.

'8살이었던가.'

지금보다도 훨씬 어린 나이에 홀로 임무를 떠났다. 살인은 아니었지만, 적진에서 정보를 캐내는 임무였기에 위험도는 굉장히 높았고, 실제로 죽을 뻔했었다.

첫 임무에 교관들이 따라간다니, 역시 지그하르트는 생각보다 냉정하지만은 않은 가문이었다.

"이, 임무는 뭔가요?"

도리안이 입술을 떨며 손을 들어 올렸다. 5연무장 최고의 겁쟁이답게 벌써 겁에 질려 있었다.

"지그하르트 보호 구역을 조금 벗어난 곳에 설호라는 이름의 산채가 하나 있다."

산에 세워진 산적들의 소굴을 산채라고 말한다. 설호채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 없는 걸 보면 규모가 큰 곳은 아닐 거다.

"남북맹에 살짝 걸쳐 있던 놈들로, 산길을 열어 약간의 통행료를 받아먹고 살았는데, 최근 들어 행패가 심해졌다. 상인들의 물품을 모조리 뺏거나, 죽이는 경우도 많아졌다고 하더군."

"그럼 임무는 산적 소탕이군요!"

"제대로 된 임무잖아!"

"산적이라…."

"오마 중 하나인 남북맹에 걸쳐 있다잖아. 위험할 수도 있어."

남북맹은 지그하르트가 속한 육황과 대립하는 오마 중 하나다.

남서쪽을 가득 채운 테루칸 산의 산적들과, 북동쪽에서 흘러 내려오는 레이블 강의 수적들이 하나로 뭉친 도적들의 세력이다.

남북맹에 속한 산적과 수적들은 대부분 오러를 사용할 수 있는 강자로 평범한 산적과 수적을 생각하고 덤볐다간 단숨에 목이 날아갈 거다.

특히 남북맹을 이끄는 남북맹주는 산적과 수적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의 초고수로 대륙십천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수련생들은 첫 임무 그리고 남북맹이라는 이름에 긴장했는지 마른침을 삼켰다.

"자자, 아직 내 말은 안 끝났어."

리메르가 다시 손뼉을 쳤다.

"너희들의 말대로 임무는 산적 토벌이었다."

"…이었다? 그거 과거형 아닙니까?"

"맞아. 토벌이었는데, 어제 바뀌었거든."

"예?"

"왜, 왜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왜 임무가 바뀐 거죠?"

"산적 놈들이 산채 남쪽에 있던 마을을 습격해서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불까지 지른 뒤 도망갔으니까."

평소 리메르와 어울리지 않는 차가운 목소리에 수련생들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우리의 임무는 산적 토벌이 아니라, 설호채 산적의 추적 및 말살이다."

수련생들은 리메르의 가라앉은 눈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출발은 언제입니까?"

버렌이 손을 들어 올렸다.

"오늘 저녁이다.

"저녁이면 너무 빠른 거 아닙니까?"

"말했듯이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산채를 공격하는 게 아니라, 도망친 산적을 추적해야 하기에 시간이 많지 않다. 그리고 가문의 임무에 빠르고, 느리고는 없어. 내려오면 그저 따를 뿐이다."

"…그 말이 맞군요. 죄송합니다."

버렌은 드물게도 인정하며 고개를 숙였다.

"너희들에게 가장 익숙한 건 수련검이지만, 임무에도 그걸 쓸 수는 없지."

리메르가 눈빛을 보내자 교관들이 검을 다섯 자루씩 가지고 왔다.

"오크와 실전을 치를 때 주었던 진검이다. 무게도, 검신의 형태와 길이도 너희들이 사용하던 수련검과 같지. 오늘부터는 그 검을 사용하도록 해라."

"진검…."

"조, 좀 떨리네."

"뭘 떨어. 당연히 거쳐야 할 관문인데."

수련생들은 한 명씩 진검을 받았다. 정도는 다르지만 모두 손을 떨었다.

"라온. 네 검이다."

"감사합니다."

라온이 두 손을 올려 진검을 받았다. 수련검과 같은 무게라고 했지만, 기분 탓인지 조금 더 무거운 것 같았다.

리메르는 옅게 웃고서 다시 단상 위로 올라갔다.

"지그하르트의 문양은 새겨져 있지 않지만, 그 검은 가문에서 내려온 진검이다. 임시지만 너희를 지그하르트의 검사로 인정하겠다는 뜻이다."

"지그하르트의 검사…."

"인정이라니."

수련생들이 진검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임시라도 지그하르트의 검사는 검사. 어떤 상황에서도 부끄럽지 않게 준비를 단단히 하도록."

리메르는 돌아가서 출발 준비한 뒤 저녁 식사 전에 다시 모이라고 말했다.

"저희가 준비해야 할 건 무엇입니까?"

버렌이 그 뒤를 따라가며 물었다.

"그건 직접 생각해라. 임무만이 아니라, 임무를 준비하는 이 순간도 네 성장과 경험이 되니까."

리메르는 가볍게 손을 흔들며 대꾸했다.

"음, 확실히 그렇겠군요."

버렌은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섰고, 리메르는 그대로 휴게실로 들어가 버렸다.

"흐음…."

라온은 리메르의 표정을 보고 방금 한 말이 그의 진심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귀찮았네.'

좋은 말이지만, 대답해주기 귀찮아서 방금 지어낸 게 분명했다.

'나랑은 상관없지만.'

라온은 수많은 임무를 완수했던 최고의 암살자였다. 추적과 척살을 위해 필요한 준비물은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조금이지만 떨리네.

정말 오랜만에 임무라는 말을 들어서일까. 살짝 가슴이 뛰었다.

* * *

라온은 짐을 챙기기 위해서 별관으로 돌아갔다. 정원을 가꾸던 실비아와 헬렌이 벌떡 일어나 미소를 지었다.

"이 시간에 웬일이야? 설마 엄마가 보고 싶어서?"

"그건 아니고."

"너무 단호하네."

실비아가 옅게 웃으며 다가오다가 멈춰 섰다. 시선이 라온의 허리춤에 걸린 진검을 향했다.

"그 검은…."

"임무가 떨어졌어."

"예? 임무요?

"이, 임무? 수련생에게 무슨 임무가…."

실비아가 눈을 부릅뜨고, 헬렌이 쥐고 있던 손질용 낫을 떨어뜨렸다.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어. 교관이랑 같이 가는 첫 임무니까."

"아…."

교관이랑 함께 가는 임무라고 하자, 실비아와 헬렌의 얼굴에 혈색이 돌아왔다. 무엇인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벌써 첫 번째 임무를 할 때가 됐다니, 우리 아들 다 컸네."

허리를 숙여 껴안으러 다가오는 실비아를 피했다.

"지금 엄마를 피한 거야?"

"미안하지만 시간이 없어. 오늘 저녁이 출발이야."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민망하기도 했지만, 실제로 준비할 시간이 필요했다.

"바로 간다고? 무슨 임무인데?"

"범죄자 추격?"

"어떤 범죄자?"

"도둑."

실비아와 헬렌이 걱정할 것 같아서 산적이 아니라, 도둑이라고 말했다.

"도둑이라고 해도 방심하면 안 돼.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도 무는 법이니까."

"알겠어."

"추적이면 꽤 걸릴지도 모르겠네."

"그러게요. 음식을 준비해야겠어요."

도둑을 쫓는다고 말하자 두 사람의 긴장이 조금은 풀린 것 같았다.

"그럼 일단 육포부터 담자."

"네. 영양용으로 말린 과일이랑 빵도 좀 챙겨야겠어요."

실비아와 헬렌은 음식은 본인들에게 맡기라고 말하고서 그대로 별관으로 들어가 버렸다.

라온이 분주해진 주방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이곳에 오면 마음이 편해진다. 임무에 대한 약간의 흥분과 긴장도 가라앉았다.

'내 것만 챙기면 되겠는데.'

실바아나 헬렌이 먹을 거 하나는 잘 챙겨주기 때문에 식량은 딱히 챙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러면….'

범죄자들을 추적할 준비물과 의복, 신발, 로브 정도만 챙기면 된다.

라온은 방 안으로 들어가서 가벼운 배낭에 임무에 필요한 물건들을 하나씩 집어넣고, 침대 밑에 두었다.

"흐음…."

바닥에 앉아 불의 고리를 운용하여 마음을 가라앉혔다.

'남북맹 소속이 아니라, 걸쳐 있는 거면 그리 강하지는 않을 거야.'

첫 번째 임무로 내려온 이상 산적들의 무력은 그리 높지 않을 거다.

'관도는 이미 막혔을 테니, 산에 숨은 산적들과 싸우는 모양새가 되겠지.'

산적의 주 무대는 산. 아무리 이쪽의 무력이 강해도 산에서 그들을 찾고 상대하는 건 쉽지 않다.

처음에는 수련생들이 산적들을 찾지 못할 테고, 결국 교관들이 이끈 이후 산적과 만나 싸우는 방식이 될 것이다.

'그럴 필요는 없지.'

아무리 훈련의 일환이라고 해도 임무는 임무. 홀로 범죄자들을 잡던가, 죽인다면 분명 보상이 내려올 것이다. 실적을 쌓아야 하는 자신에겐 분명한 기회였다.

"후…."

라온이 불의 고리로 정화한 탁기를 뱉어내며 눈을 떴다.

한 번 해보지 뭐.

* * *

그날 저녁.

라온은 부둥켜안고 놓아주지 않는 실비아 때문에 예상보다 늦게 연무장으로 향했다.

수련생들이 먼저 와 있었는데, 대부분 긴장하여 목각인형처럼 굳어 있었다.

버렌은 주먹을 꽉 말아쥔 채 하늘을 보고 뭐라 중얼거렸다. 들어보니 이번 임무에서 꼭 공을 세우겠다는 뜻이었는데,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반대편 의자에는 마르카가 앉아 있었다. 다리를 꼰 채로 눈을 감고 있다가 옆에 수련생이 지나가면 눈을 부라렸다. 평소보다 거친 모습을 보니, 그녀도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반면에.

루난은 멍하니 서서 손에 든 아이스크림 상자만 보고 있었다. 먹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있는 느낌이다.

"지금 먹을 거 아니라면 배낭에 넣는 게 좋지 않을까? 손을 쓸 수 없잖아."

"…응."

루난은 라온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 고개를 끄덕이고 아이스크림 상자를 배낭에 넣었다.

살짝 눈망울이 떨린다. 아이스크림 상자가 손에 없다는 것에 작은 불안감을 느끼는 것 같다.

'대단하네.'

버렌이나 마르타도 긴장하고 있는데, 루난은 평소 그대로다. 그녀의 관심을 끄는 건 오직 아이스크림이 깨지냐 마느냐인 것 같다.

어이없는 모습이지만, 시리아의 세뇌에서 확실하게 벗어난 것 같아서 안심되었다.

-나중에 소녀가 아이스크림을 꺼낼 때 나를 부르거라.

'하.'

라스가 새로운 맛을 먹고 싶다고 중얼거릴 때 리메르가 문을 걷어차고 들어왔다. 평소와 같은 넝마가 아니라, 제대로 된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는 교관들과 함께 단상 위로 올라갔다.

"정렬!"

라온이 단상 앞에 서서 지시를 내리자, 수련생들이 줄을 맞추어 섰다.

"수련생 43명. 열외 없습니다."

"좋아."

리메르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준비는 됐나?"

"예!"

수련생들은 긴장을 잊기 위해서 연무장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지금부터 실전이다."

리메르가 일어섰다. 항상 그의 입가를 장식하던 미소가 사라졌다.

"우리가 쫓는 놈들은 수십의 생명과 재산을 강탈하고, 한 마을을 불사른 뒤 도망친 극악의 범죄자들이다.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만나는 순간 바로 목을 날려라. 내가 허락한다."

"으음…."

"으…."

태풍이 치솟은 듯한 강렬한 기세에 수련생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밖은 전쟁터이자, 지옥이다. 방심하지 말고, 항상 마음을 굳게 다져라."

"예에!"

수련생들은 바짝 긴장한 채로 처음보다 더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다고 긴장해서도 안 된다. 긴장하면 몸이 굳고 평소의 움직임을 이뤄낼 수 없으니까. 방심하지 말라고 했지. 긴장하라고는 하지 않았어."

"하아아…."

리메르가 다시 웃음을 흘렸다. 어깨를 토끼 귀처럼 세운 수련생들이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 수석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의 시선이 중앙에 선 라온을 향했다. 부드러운 웃음. 믿음과 신뢰가 엿보이는 눈빛이다.

"라온 지그하르트. 잘 할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라온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긴장도, 방심도 없는 잔잔한 눈빛에 리메르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긴장할 필요도, 방심할 필요도 없지.'

내가 다 끝낼 테니까.

54화

라온과 수련생들은 교관을 따라 차원 관문을 통과해 하루 만에 지그하르트 영지의 최남단으로 이동했다.

원래라면 천천히 이동하며 노숙을 비롯한 이런저런 경험을 쌓았겠지만 갑작스럽게 임무가 바뀌어서 어쩔 수 없이 최대한 빠르게 이동했다.

첫 임무의 긴장감 때문인지 수련생들의 얼굴이 어두워진 하늘보다 더 껌껌해 보였다.

"오늘은 저곳에서 쉬고 간다."

리메르가 언덕 아래로 보이는 마을을 가리켰다. 작은 마을이지만, 지붕 위로 피어나는 회색 연기가 정겨워 보였다.

지그하르트 영지에 속해 있기에 마을 입구에는 불타는 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교관님. 휴식이 아니라, 바로 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버렌이 리메르의 옆으로 나오며 물었다.

"너희들의 꼴을 봐라. 고작 차원문을 넘는 것으로 체력을 전부 소모했는데, 추적할 수 있겠어?"

"음…."

버렌이 뒤를 돌아보고 침음을 삼켰다.

차원 관문은 장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대신 많은 체력과 정신력을 소모한다.

수련생 대부분은 처음으로 차원 관문을 이용했기 더 지쳐 있었다.

"오늘 밤이 마지막 휴식이다. 내일 새벽부터 휴식이나, 취침 없이 추적할 테니, 걱정하지 마라."

"그래도 저희가 늦는다면 다른 피해가 일어날 수도…."

"설호채 산적들은 조금이지만 남북맹에 발을 걸쳐 놓은 놈들이다. 너희들의 무력이 높다고 무조건 이긴다는 생각을 버려. 지친 상태에서 마주쳤다간 오히려 너희가 당할 수도 있다."

리메르의 차가운 눈빛이 수련생들에게 매섭게 내리꽂혔다.

"출발할 때 말했지? 방심하지도, 긴장하지도 말라고. 지금 너희는 그 무엇도 되어 있지 않아. 오늘 쉬면서 다시 마음을 다잡아라."

"예…."

"그럼 가자."

그가 먼저 마을로 향하고 그 뒤를 라온과 수련생들이 따랐다.

"음?"

라온이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마을 안에서 익숙하면서도 강렬한 기파가 느껴졌다.

"교관님."

"왜?"

"마을 안에 혹시 가문의 검사가 있습니까?"

"너 진짜 감 하나는 죽여주네."

리메르가 휘파람을 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느꼈어?"

"내부에서 마을과 어울리지 않는 강한 기세가 느껴졌습니다."

"맞아. 가문의 검사가 와 있다. 혹시라도 산적 놈들이 북상해서 습격할 수도 있으니까."

"아…."

지그하르트는 세력권에 있는 마을이나, 도시를 확실하게 보호하기로 유명한 집단이다. 마을 주변에 문제가 생기자마자 바로 검사를 보낸 것 같았다.

"네 감각은 정말 신기하네."

"으음…."

"흥!"

리메르의 감탄에 버렌이 인상을 찡그리며 자신도 검사의 기척을 느끼려고 노력했고, 마르타는 별거 아니라는 듯 코웃음을 쳤다.

"지그하르트 검사님들이 오셨다!"

"와아아아!"

마을 앞에 도착하자 마을 사람들이 교관들의 전투복에 그려진 불타는 검 문양을 보고 환호를 지르고 손을 흔들었다.

"문을 열어라!"

제대로 확인조차 하지 않고, 마을의 문이 열렸다. 이곳에서 지그하르트의 이름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로베르트도 비슷했지.'

전생에서 가끔 로베르트의 문양을 지닌 채로 움직일 때 남부의 사람들도 저들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었다.

"후우욱."

라온은 오랜만에 타오르는 복수심을 가슴 아래에 묻고 마을에 들어갔다. 저녁을 짓는 냄새가 잔잔하게 풍겨 나왔다.

"지그하르트의 검들을 환영합니다. 자르텐 마을 촌장 케먼입니다."

회색 머리칼이 가득한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리메르라고 합니다."

"지그하르트의 광검!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촌장은 영광이라고 말하며 몇 번이고 고개를 숙였다. 리메르는 웃는 얼굴로 촌장을 대한 뒤 몸을 돌렸다.

"숙소를 안내해주신다고 한다. 오늘이 너희가 편히 잘 수 있는 마지막이다. 집합은 해 뜨기 전. 모두 늦지 말도록."

"저는 아직 체력이 넘칩니다. 주변 지형을 파악해놓겠습니다."

버렌이 손을 들어 올렸다. 눈빛이 번쩍였다.

"좋은 기세야. 네가 미리 길을 알아둔다면 편하겠지. 근데 너 이 주변 지리 잘 알아?"

리메르가 퉁명스런 눈빛으로 버랜을 내려다보았다.

"지, 지도로는…."

"이 마을 주변은 숲과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지도를 봤다고 해도 직접 가보면 어디가 어디인지 제대로 알 수 없지. 그런 상태에서 갑자기 산적이 기습한다면? 넌 제대로 반격도 하지 못하고 목이 날아갈 거다."

리메르가 버렌의 머리를 툭 치며 웃었다.

"네 마음은 알지만 조급해지면 역으로 놈들에게 기회를 주게 된다. 말했듯이 놈들은 이 지역을 벗어나지 못해. 천천히 마음을 가라앉혀라."

"아, 알겠습니다."

버렌과 방계 수련생들이 어색한 눈으로 고개를 숙였다.

"내일부터는 쉬고 싶다고 해도 쉴 시간이 없을 테니, 푹 쉬어둬. 내일 새벽부터 바로 수색 작업을 시작한다."

"예!"

"그럼 가자."

수련생들은 리메르를 따라 마을 회관이 있는 중앙으로 이동했다.

* * *

다음날 새벽.

리메르가 선언한 대로 휴식 없이 남하하는 강행군이 계속되었다. 식사도 움직이며 건량으로 먹었고, 잠도 3시간 이상 자지 못했다.

거기다 갑작스럽게 시야를 꽉 막는 폭설이 내려 수련생들의 걸음은 거북이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느려졌다.

"흐음."

라온이 어깨를 뒤덮은 눈을 털어내며 수련생들을 쭉 둘러보았다.

"후우."

"하늘에서 내리는 똥가루 같으니라고!"

버렌이나, 마르타도 무릎까지 차오른 눈 때문에 제대로 걷지 못했다.

"아오, 죽겠다!"

"폭설이 대체 언제까지야!"

"속도가 안 나."

두 사람이 힘들어할 정도이니, 다른 수련생들은 당연히 눈과 얼음에 막혀 허우적댔고, 이동 속도는 평소의 절반조차 되지 않았다.

"후후."

딱 한 명. 루난만 즐겁다는 듯 눈덩이를 모으며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건 이 녀석이 특이한 거다.

어쨌든 이대로라면 정말 산적들을 놓칠 가능성도 있었다.

리메르와 교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옆에서 지켜만 보았다.

보호자 역으로 왔으니, 조언은 사치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결국 여기선 자신이 나서야 했다.

"정지."

라온이 가장 앞으로 나오며 모두를 멈춰 세웠다.

"많은 눈이 깔린 바닥에서는 발목에 힘을 줘선 안 된다. 속도도 느리고, 체력 낭비만 하게 돼."

라온은 수련생들을 쭉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발목과 무릎에 힘을 빼고, 풀잎을 튕기듯이 눈을 밟아. 가람보법을 익혔으니 조금만 연습해도 할 수 있을 거야."

시범을 보이듯이 눈을 부드럽게 밟고 앞으로 나아갔다. 다리가 평범하게 걸을 때보다 훨씬 부드럽게 나아갔다. 흡사 빙판을 미끄러지듯이.

"어?"

"와."

그 모습을 본 수련생들은 헉 소리를 뱉었다.

라온은 모두가 눈 걸음을 따라 할 수 있도록 몇 번 더 시범을 보여주었다.

"지금부터는 한 줄로 움직인다. 버렌 앞으로 나와."

"왜지?"

"눈보라나 바람이 심하게 불 때는 한 줄로 움직여서 바람의 영향을 줄이는 게 기본이다. 네가 앞에서 다른 아이들을 이끌어."

"음!"

이끌라는 단어에 버렌의 눈빛이 반짝였다.

"나머지는 버렌의 등을 보고 일렬로 서."

가장 앞에 버렌, 중간에 마르타 후미에는 루난이 서는 한 줄이 만들어졌다.

"선두는 한 시간마다 교체한다. 출발."

라온은 그 줄에 끼지 않고, 옆으로 빠져나와서 수련생들을 이끌었다.

눈 걸음을 익힌 수련생들이 한 줄로 움직이자, 이동 속도가 2배 가까이 빨라졌다.

"허."

"지, 진짜 빠르네. 평소랑 별다를 게 없어."

"라온은 이걸 어떻게 안 거냐?"

"신기한 녀석이라니까."

수련생들은 누구보다 가뿐하게 눈을 헤치는 라온을 보며 탄성을 흘렸다.

"제대론데요?"

"그러게요. 가르치는 방식이 굉장히 효율적입니다. 꼭 행군이라도 해본 것처럼."

"힌트를 좀 주려고 했는데, 필요 없었네."

뒤에 있던 교관들도 라온의 등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리메르는 라온과 수련생 모두를 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 * *

라온과 수련생들은 눈폭풍을 헤치고 한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만 마을은 화마에 휩쓸려 반 이상이 꺼멓게 타 있었고, 살아 있는 생명은 아무도 없었다.

남녀노소 이름과 얼굴을 알 수 없는 시체들로 마을 한 편이 가득했다.

설호채 산적들이 습격했다는 그 마을이었다.

"우우욱!"

"우웩!"

수련생 중 비위가 약한 아이들은 구역질을 했고, 비위가 강한 아이들도 인상을 찌푸리거나 고개를 돌렸다.

다만 라온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리메르 옆에서 시체를 살폈다.

'먼저 칼로 베고 태웠군.'

불에 타 죽은 게 아니라, 칼에 베여 먼저 숨이 끊어진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들었던 대로 놈들은 이곳을 습격해서 재물을 빼앗은 뒤 달아난 것 같다.

'다만….'

산길을 다 닦아 놓아서 돈만 받아먹으면 되는 산적 놈들이 무엇을 노리고 이곳에 습격했는지는 모르겠다.

"너 괜찮냐?"

계속 시체를 보고 있자, 리메르가 걱정되는 얼굴로 다가왔다.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아닌 게 아니라, 수련생 중에서 시체를 코앞에서 보고 있는 사람을 라온과 마르타 뿐이었다.

'역시….'

예전부터 느꼈지만 마르타는 시체를 자주 보았던 것 같다. 혹은 직접 죽였거나.

"크읍."

버렌이 입술을 깨물며 다가와 시체를 살폈다. 억지로 참는 게 보였다.

"음…."

루난은 힘들어하면서도 시체의 상흔을 살피며 산적들의 검을 파악하려 했다.

피를 보기만 해도 겁먹을 때와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이젠 걱정할 필요 없을 것 같다.

"이게 설호채 산적들이 한 짓이다. 절대 잊지 말고 마음에 새겨라. 놈들을 만났을 때 절대 검을 늦추지 않도록. 다시 출발한다."

"예!"

리메르는 마지막 조언에 수련생들의 눈빛이 시퍼렇게 번쩍였다. 첫 임무의 떨림이 분노의 기세가 되었다.

이틀 뒤.

라온과 수련생들은 설호채 산적들이 숨어있다고 예상되는 루텐산 지역에 도착했다.

이틀만 더 가면 길목을 차단한 관도였고, 가문의 검사들이 포위망을 좁히고 있었기 때문에 산적들이 이 근처에 숨어있는 건 확실했다.

"모두 주목."

리메르가 손뼉을 쳐서 수련생들을 모았다.

"이곳이 우리의 거점이다. 지금부터 조를 짜서 놈들의 위치를 추적한다."

그가 직접 조를 짜주었다. 라온은 루난과 같은 조가 되었다.

3명에서 4명인 다른 조에 비해서 숫자는 적었지만, 무력 면에서는 오히려 압도했다.

"피리도 하나씩 받아 가도록."

리메르가 은색의 피리를 조당 하나씩 건네주었다.

"훈련받은 사람만 소리를 들을 수 있는 피리다. 위험한 일이 생기면 불어라. 너희를 지켜보던 교관들이 바로 움직일 테니까."

"예!"

"다만 무조건 피리를 불기보다는 할 수 있는 일은 직접 하도록 노력해봐라. 조끼리 연합을 해도 좋고, 우리의 도움 없이 한 번 붙어도 괜찮다. 다만 놈들의 검에는 자비가 없으니, 절대 방심하지 말도록."

"알겠습니다!"

수련생들은 산적들이 습격했던 마을의 참상을 되새기고 각자가 선택한 방향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다만 라온은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 서 있는 산길부터 동쪽의 루텐 산, 서쪽의 낮은 구릉과 그 옆의 빽빽한 숲을 모두 둘러보았다.

'저 산.'

그의 시선이 루텐 산을 향했다. 산에서는 이곳을 내려볼 수 있고, 그 뒤로 빠져나갈 수도 있으니, 저쪽이 정석이라면 정석이다.

하지만 정석이기에 저 산은 아니다.

포위망이 좁혀오고, 추적자가 있다는 걸 아는 산적 놈들이 산에 숨었을 리가 없었다.

숲도 비슷하다. 빽빽하고 우거진 숲이라 쉽게 들키진 않겠지만 도망치기 힘들다.

'그럼 아마….'

라온이 눈이 마지막으로 구릉을 향했다. 너무 대놓고 보이는 곳이지만, 저 안쪽에 다른 지형이 있을지도 모른다.

일단 저곳부터 살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라온."

마음을 정하고 일어났을 때 같은 조인 루난이 다가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 가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왜 자신을 루난과 묶었나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마음이 여린 루난을 챙기라는 뜻 같았다.

"이쪽으로 가자."

"응."

라온이 루난을 데리고, 구릉으로 올라갔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아무것도 없어 보였던 구릉 안쪽에 아래에서 보이지 않던 숲이 하나 있었다. 빽빽하지는 않지만, 내부가 꽤 깊어 보였다.

시선을 낮추고 숲의 입구를 살폈다. 야생동물이 많은지 작은 발자국이 가득해서 인간의 흔적을 찾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건 평범한 사냥꾼이나, 추적자일 뿐. 라온은 달랐다.

최고의 암살자가 되려면 단순히 살인만 잘해서는 되지 않는다. 추적도, 감각도. 정보 수집도 전부 최상급이 되어야만 최고의 암살자가 될 수 있다.

라온은 포기하지 않고, 숲을 천천히 나아가며 산적들의 흔적을 살폈다. 놈들은 산과 숲의 프로지만 인간인 이상 흔적이 남지 않을 수가 없었다.

'찾았다!'

라온의 눈빛이 빨갛게 타올랐다. 바닥이 아니다. 어깨높이의 수풀에 사람이 지나갔던 흔적이 아주 작게 남아 있었다.

"지금부터 숨 소리도 내지 말고 따라와."

"응."

라온은 루난의 대답을 들으며 자세를 낮췄다. 간신히 발견한 흔적을 따라 산적들의 위치를 가늠하며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정지."

라온이 뒤로 손을 뻗었다.

"왜?"

"함정이 있어."

바로 앞에 투명한 실로 만들어놓은 함정이 있었다. 이걸 지나가는 순간 다리가 잘리고, 안쪽에 신호가 가게 될 거다.

'그런 꼴은 못 보지.'

라온은 신호가 울리지 않도록 함정을 해제하고 전진했다.

-그걸 보았다고?

라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정말 뭐 하는 인간인지 모르겠군. 긴 세월을 살아온 본왕의 시선으로도 알 수가 없도다.

'운이 좋았어. 햇볕에 비쳤거든.

-흥. 웃기는 소리.

라스는 안 믿는다며 코웃음을 쳤다. 마음대로 생각하라고 말한 뒤 조금 더 깊은 숲으로 들어갔다.

산적들의 흔적이 많아졌다. 놈들의 위치를 다시 잡기 위해 바닥을 살피다가 이상한 흔적을 발견했다.

'이건….'

상황과 맞지 않는 작은 발자국이 있었다. 아이의 발자국 같았다.

'그 마을의 아이인가?'

아무래도 그 마을에서 아이들을 납치해 인질로 쓰려고 한 것 같았다.

'지독한 놈들.'

숨을 내쉬어 돋아나는 분노를 가라앉혔다.

"루난."

"응."

"지금부터는 걸음 소리도 내면 안 돼. 나처럼 걸어."

루난에게 소리가 나지 않는 걸음을 가르쳐 주었다. 가람보법의 응용으로 알려주니, 금방 따라 할 수 있게 되었다.

"피리는?"

"지금은 아니야."

인질이 없다면 모를까. 아이들이 잡힌 상태에서 피리를 불었다간 교관들이 오며 소리를 울릴 수도 있다.

지금 상황에선 아이들과 산적들의 위치를 보고 피리를 부는 게 맞다.

"내가 신호를 주면 바로 피리를 불어."

"응."

루난이 피리를 꼭 쥔 채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라온이 앞을 가리키며 자세를 낮췄다.

"이제 거의 다 왔어."

* * *

자세를 낮춘 채로 10분가량 숲을 가로지르자, 산적들의 흔적이 곳곳에 보이기 시작했다.

'이젠 그냥 막 다녔군.'

구릉과 숲의 초입에는 극한으로 흔적을 줄였고, 중간에는 함정을 설치했지만, 여긴 아니다.

들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난잡한 흔적이 가득했다.

'역시 잘못 본 게 아니야.'

주변을 살핀 라온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곳에도 아이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산적들이 아이를 인질로 잡고 있어."

"인질?"

"그래. 일단 상황부터 파악하고, 피리를 불지, 우리끼리 움직일지 결정하자."

"응."

루난은 무슨 말을 해도 믿을 것처럼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자."

라온이 고갯짓을 하고 기다시피 앞으로 걸어갔고, 그 뒤를 루난이 따라갔다.

10분 정도 기었을까. 앞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라온의 눈빛이 그림자처럼 어둡게 가라앉았다.

놈들이다.

55화

라온은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기어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담처럼 시야를 막은 수풀 사이로 두 명의 산적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농담 따먹기를 하는지 자기들끼리 낄낄 웃었다.

'실력은 낮아.'

육체는 제법 발달했지만, 오러는 느껴지지 않았다. 마나를 사용하지 못하는 하급 무인이다.

둘을 넘어 그 뒤를 보았다.

시시덕거리는 두 산적 뒤에 덩치가 큰 산적이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아이 하나가 나무에 묶여 있었다.

아이는 얇은 옷 하나만 입고 있어서 얼굴과 손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흐끅."

아이가 추위를 참지 못하고, 신음을 흘리니 옆에 있던 산적이 뺨을 툭툭 쳤다. 손이 닿는 것만으로 아이는 부들부들 떨며 몸을 움츠렸다.

쯧.

라온이 눈매를 짧게 혀를 찼다. 이곳에 오면서 예상했던 대로 산적들은 아이를 인질로 잡고 있었다.

적이 공격해오면 저 아이의 목에 칼을 대고 위협하려 했을 거다.

'몇 명 더 있겠지.'

하나뿐인 인질을 경계서는 곳에 둘리가 없다. 저 안쪽. 산적들이 모여 있는 곳에 다른 인질이 있을 게 분명했다.

'어떻게 할까.'

모두에게 알리고 함께 움직였다간 산적들에게 들킬 게 분명했다.

아직 들키지 않은 지금 인질을 구하고 산적들을 암살하듯 소탕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그리고 놔두기 힘들어.'

아이의 입술이 파랗게 질렸다. 저대로 놔두었다간 동사하게 될지도 모른다.

"...."

라온이 고개를 돌렸다. 루난은 인질을 보고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지 눈동자를 떨었다.

"괜찮아."

기막을 펼쳐서 소리가 빠져나가는 걸 막은 뒤 속삭였다.

"해결할 방법이 있어."

"방법?"

"대신 네가 도와줘야 해."

"응."

루난이 뭐든 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신호를 주면 일어서서 네 모습을 드러내고, 마나로 소리를 막아줘. 할 수 있지?"

"응."

루난은 이유도, 방법도 묻지 않고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에 내가 알아서 할게. 우리 둘이면 저 아이를 구할 수 있어."

"알겠어."

아이를 구할 수 있다고 하자, 루난의 고갯짓이 평소보다 훨씬 힘이 넘쳤다.

"그럼."

라온은 루난은 그 자리에 두고, 그림자 보법을 밟아 아이가 묶여 있는 나무의 근처로 이동했다.

"언제까지 여기 박혀 있어야 하냐?"

"지그하르트 그 미친놈들이 벌써 검사를 파견했다잖냐. 길이 전부 막혔대."

"시발. 우리 다 뒈지는 거 아냐?"

"채주가 남북맹 사람을 불렀다고 했으니, 기다리면 안내자가 오겠지."

산적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있다고는 생각도 못 하고 본인들의 사정을 떠들어댔다.

"입 닥쳐라."

나무 옆에 앉은 산적의 말에 경계를 서던 산적들이 입을 합 다물었다.

'저 녀석은 좀 다르군.'

나무 옆에 앉은 산적의 단전에서 오러가 느껴졌다. 그래도 소드 비기너 수준이었지만.

라온은 한 번의 걸음으로 인질 옆에 있는 덩치 큰 산적 곁으로 이동했다.

루난은 이미 준비를 끝내고 가는 숨을 쉬고 있었다.

'후우우….'

가볍게 숨을 고르고, 무릎을 굽혔다. 언제라도 움직일 수 있는 자세를 취하고 손가락을 들어 올려 작은 불을 만들었다.

부스슥!

그 신호를 받은 루난이 수풀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뭐, 뭐야!"

"누구냐!"

경계를 서던 산적들이 루난을 보자마자 허겁지겁 무기를 챙기고 일어섰다.

"여자아이? 왜 여기…어?"

나무 옆에 있던 산적이 혹시 모를 생각에 아이를 잡으려고 한 순간 라온은 이미 그의 뒤에 서 있었다.

푸칵!

검을 뽑음과 동시에 산적의 목을 갈랐다.

"끄흡…."

산적은 아이를 잡지도, 허리춤의 검을 뽑지도 못한 채 목이 떨어져 나갔다.

목을 잃은 산적의 몸에서 피 분수가 뿜어지기 전에 라온이 땅을 박찼다.

"무슨…."

두 산적 중 우측에 있던 놈이 먼저 몸을 돌린다. 발목을 회전시켜 방향을 바꿨다. 우측으로 돌진해 검을 내질렀다.

퍼억!

라온은 산적의 심장을 베자마자, 검을 휘돌려 마지막 남은 산적의 목을 겨누었다.

"뭐, 뭐야…."

홀로 살아남은 산적은 목에 닿은 검을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소리를 내도, 움직여도 죽는다."

"끄읍…."

눈치가 없는 건 아닌지 산적은 마른침을 삼키고 입을 다물었다.

"루난. 아이를 풀어줘."

"응!"

루난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고 아이에게 다가갔다.

"지금부터 묻는 말에 대답해라. 거절할 때마다 뼈를 하나씩 뽑아주마."

라온은 산적의 팔을 꺾으며 바닥에 내리찍었다.

"아, 알겠습니다."

산적은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검을 휘두른 라온에게 질렸는지 고개만 끄덕였다.

"설호채 맞지?"

"마, 맞습니다"

"총인원은?"

"서, 서른아홉입니다."

"나머지는 어디에 있지?"

"저 숲 안쪽에 있습니다."

산적은 턱으로 숲 안쪽을 가리켰다.

'확실히.'

숲 깊은 곳에서 여러 기척이 움직이고 있었다. 위치가 위치인지라 놈들은 기척을 숨기지 않았다.

"경계 교대는 언제지?"

"세, 세 시간 후쯤."

"인질은?"

"저 안에 한 명이 더 있습니다."

"역시."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대로 다른 인질이 있기에 저 아이를 경계를 서는 곳에 두었던 것 같다.

'36명이 모여 있으면 지금처럼은 안 되겠어.'

암살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36명이 눈에 불을 켜고 있는 곳에서 인질을 구출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라온?"

루난이 아이에게 로브를 입히고 다가왔다.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었는지 아이의 얼굴이 깨끗해졌다.

"거, 검사님. 저 안에 제 동생이 있어요."

아이는 라온의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박았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아 입술에서 피가 나고 있으면서도 끝까지 말을 이었다.

"제발 제 동생을 구해주세요!"

"걱정하지 마."

루난이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라온이 전부 해결해줄 거야."

"루난.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야."

"그래도 해줄 거잖아."

"음."

라온은 헛기침을 했다. 루난의 눈빛은 투명했다. 완벽한 신뢰. 부담스러울 정도의 믿음에 헛기침이 나왔다.

"산적만 처리하는 건 상관없지만 인질인 아이를 안전하게 구하려면 사람을 부르는 게 나을 것 같아. 산적 36명에 채주까지 있으니, 위험할 수도 있어."

"그럼 피리를 불까?"

"그래."

루난이 아이의 손을 잡은 채로 일어섰다. 그녀가 뒤로 물러서서 리메르에게 받은 피리를 불었다.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세게 불었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확실히 들리지 않네.'

피리는 바로 옆에 있어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왜 이 피리를 줬는지 알 수 있었다.

"무음적 소리다! 전부 일어나! 추적자가 왔다!"

피리 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숲 안쪽에서 걸걸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게 무슨…."

라온이 마른침을 삼켰다. 저 반응. 피리 소리를 들은 게 분명했다.

'저 정도로 감이 좋은 놈이 있었다니….'

자신조차 듣기 힘든 피리 소리를 저 멀리서 들을 줄은 몰랐다. 일이 꼬였다는 생각에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루난. 아이랑 저쪽으로 숨어."

라온은 서쪽의 수풀 쪽을 가리켰다.

"라온은?"

"여기서 시간을 끌어 볼게."

루난에게 대답을 하며 팔을 제압한 산적을 수풀 쪽으로 끌어당겼다.

"괜찮으니까. 날 믿어. 그리고 혹시라도 틈이 보이면 다른 인질을 구해."

"알겠어."

괜찮다고 말하니 루난이 고개를 끄덕이고 우측 수풀 안으로 들어갔다.

쿠구구구!

숲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가지각색의 복장을 한 산적 34명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뭐, 뭐야! 대체 언제…."

"이런 시발!"

"어떤 새끼야!"

가장 강한 기운을 가진 턱수염 장한이 죽은 산적들을 보고 이를 바드득 갈았다.

'인질은…저쪽이군.'

라온은 수풀에 숨은 채로 인질의 위치를 확인했다.

가장 우측에 있는 산적이 어린 여자아이의 목덜미를 쥐고 있었다. 다행히 루난이 숨은 수풀 바로 옆이었다.

"나와라!"

턱수염 장한이 발을 구르며 눈을 부라렸다.

"나오지 않는다면 저 녀석의 목을 베어주지."

그가 대도를 뽑아 인질인 여자아이를 겨누었다.

"쯧."

라온이 제압한 산적의 목을 잡고, 수풀에서 일어섰다.

"꼬마? 이걸 네놈이 했다고?"

"그렇다."

"미친! 이런 어린 새끼한테…."

"부, 부채주님…."

목을 쥔 산적이 앞의 남자를 부채주이라 불렀다. 저 덩치가 산적들의 부두목이고, 피리 소리를 들은 놈인 것 같다.

"무음적으로 누굴 부른 거냐."

놈은 리메르가 준 피리의 이름도 알고 있었다. 어딘가의 교관이었던 모양이다.

"누굴 부르든 무슨 상관이지?"

"어린놈이 뒈지고 싶어서 환장했구나."

부채주가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인질 교환을 원한다."

라온은 부채주와 산적 사이의 시선을 검으로 막으며 말했다.

"인질 교관?"

"그 아이를 넘겨주면 이놈을 돌려주지."

"크하하하하!"

부채주가 어깨를 들썩일 정도로 코웃음을 쳤다.

"그딴 새끼가 뒤지든 말든 알 바 아니야. 그놈에겐 저 애새끼와 달리 인질의 가치가 없다."

"그래. 그렇군."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 검을 틀어 산적의 목에 가져대 댔다.

"말했을 텐데, 우린 그놈이 죽어도 아무 상관 없다. 이 계집아이의 모가지가 떨어지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당장 검을 내려놔."

"글쎄."

왼손 새끼손가락으로 작은 불씨를 피워내 루난에게 신호를 보냈다.

"이 녀석이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는 네가 아니라, 내가 정해."

라온이 검날로 산적의 경동맥을 베었다. 목에서 엄청난 양의 핏물이 치솟아 순간 산적들의 시야를 가렸다.

'지금!'

라온은 허리춤에 꽂아놓은 단검을 들었다. 설화의 감각과 기감을 최대한으로 열어 아이를 안고 있는 산적의 기척을 느꼈다.

만화공의 기운을 가득 담아 산적을 향해 단검을 쏘아냈다.

퍼어억!

하늘로 솟구친 핏물이 가라앉을 때 이마에 단검이 박힌 산적이 쓰러지는 게 보였다.

"이런! 염병할!"

"마, 막아!"

부채주와 산적들이 자유가 된 아이를 노리고 움직일 때 수풀에 숨어있던 루난이 일어섰다. 뽑아든 검에 은빛 냉기가 일었다.

"서리연."

그녀가 검을 휘두르자, 달려들던 산적들의 발밑에 서리가 깔렸다.

"저, 저년은 뭐야!"

"냉기?"

"속성 오러다!"

산적들은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다리를 멈췄다. 그 한순간의 머뭇거림. 그거면 충분했다.

터어엉!

라온이 땅을 박차고 아이를 향해 튀어 나갔다.

"멈춰!"

중간에 있던 산적이 검을 내리쳤다.

터엉!

라온은 손바닥으로 검면을 쳐낸 뒤 산적의 목을 베었다. 바람을 탄 듯한 기세. 리메르를 보는 듯했다.

"이놈!"

부채주가 경로를 막기 위해 거대한 도를 내리쳤다.

라온은 발목을 틀어 아이의 앞에 선 뒤 검을 내질렀다.

쩌어엉!

얇은 검과 거대한 도가 맞부딪쳤지만, 밀려난 건 도다.

"크흡!"

부채주가 이를 악물고 뒷걸음질 쳤다.

"됐어."

그 사이에 루난이 다가와 여자아이를 안아 들었다.

"세린!"

"오, 오빠!"

아이들은 서로 부둥켜안으며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이제 괜찮아."

루난이 아이들을 안고 뒤로 물러섰다. 드물게도 작은 미소를 지었다.

'저 녀석.'

뒤를 힐끔 보며 픽 웃었다. 루난은 이쪽의 마음을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대로 움직여주었다. 보기와 다르게 눈치가 빠른 녀석이다.

"애새끼들 주제에! 내가 누구인지 알고!"

부채주가 이를 바드득 갈며 도를 휘돌렸다. 그 뒤에 있는 산적들도 모두 검을 뽑아 들고 살기를 피워냈다.

"곧 죽을 놈의 이름 따위 궁금하지 않아."

라온의 검 위로 만화공의 새빨간 불꽃이 타올랐다.

"와라."

56화

"쳐라!"

부채주의 지시에 산적들이 무기를 휘두르며 달려왔다.

라온은 목을 살짝 트는 것으로 산적의 공격을 피한 뒤 검을 내질렀다. 직선으로 뻗어나가는 최단의 투로.

"허억!"

산적은 피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심장이 꿰뚫려 쓰러졌다.

티익!

틈을 노리고, 우측에 있던 산적이 창을 찔러왔다. 검면으로 흘린 후 창대와 산적의 목을 동시에 베어버렸다.

산적은 본인의 죽음을 믿지 못하는 듯 눈을 감지도 못하고 숨이 끊어졌다.

-그 나이에 어떻게 그런 단호함을 가질 수 있는 것이냐.

'이런 놈들은 살려둘 가치가 없으니까.'

라온은 차가운 눈으로 산적들을 훑었다.

저놈들은 마을 하나를 불태우고, 아이들을 인질로 잡은 악귀들이다. 죽여도 죄책감 따위는 들지 않았다.

"뭐 하는 거야! 한꺼번에 덤벼! 애새끼일 뿐이라고!"

"죽어엇!"

"으아아아!"

검과 창, 도를 든 산적 스무 명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화아아아!

라온이 검을 세운 순간 바닥에서 은빛의 냉기가 피어나 산적들을 휘감았다. 루난이다. 그녀가 냉기를 뿌려 산적들의 움직임을 느리게 만들었다.

터엉!

고개를 살짝 끄덕여 루난에게 인사를 한 뒤 검을 든 산적의 좌측으로 이동했다.

"이, 이놈!"

산적들이 동시에 무기를 내리쳤다. 라온은 피하지 않고, 앞으로 돌진했다.

산적들의 검이 허공을 스쳐 지나간 사이 검을 올려 그었다.

붉게 물든 칼날이 산적 둘을 동시에 베어버렸다.

"주, 죽어!"

뒤에 있던 산적이 창을 내리찍었다. 시퍼런 창날이 라온의 심장을 향해 쏘아졌다.

라온이 허리를 숙였다. 창날에 잘려 나간 머리칼이 허공에 흩날렸다.

"흐아압!"

그 뒤를 이어 검을 든 산적과 도끼를 든 산적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촤악!

라온은 미끄러지듯 뒤로 물러나 방심하던 산적의 목을 베었다.

"따라잡아!"

"저, 저 쥐새끼 같은 놈!"

"올 필요 없어."

라온이 가람보법을 밟으며 발목을 돌렸다. 그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며 벼락처럼 튀었다.

"이쪽에서 갈 테니까."

라온은 쫓아오던 산적들의 아래쪽으로 파고들어 연성검법을 그었다.

촤아악!

질풍처럼 몰아친 검술 연계에 산적 네 명의 목이 날아갔다.

"후."

라온이 검술을 끊고, 잠시 숨을 돌리려는 순간 뒤편에서 강렬한 살기가 치솟았다.

'놈이다.'

지금까지 나서지 않고 기회를 노리던 부채주다. 뒤를 돌지 않고 그대로 허리를 젖혔다.

부채주의 대도가 앞머리를 가르고 지나갔다. 금빛 머리칼이 허공에 흩날렸다.

"이, 이걸 어떻게!"

"잘."

당황하는 부채주의 목을 향해 검을 올려 쳤다.

쩌어엉!

자세가 제대로 잡히지 않아 힘이 실리지 않았지만, 부채주는 검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뒤로 튕겨 나갔다.

"쳐! 놈을 찢어버려!"

"으아아아아!"

부채주와 각종 무기를 든 산적들이 파도가 되어 밀려온다. 녹슨 검과 창이 심장을 노렸고, 두꺼운 도끼가 머리를 찍어왔다.

쿵!

라온이 숨을 들이마시며 진각을 밟았다. 만화공의 기운이 담긴 검을 좌에서 우로 내리그었다.

만화공. 염풍.

바람을 탄 열기의 칼날이 부채주와 산적들을 동시에 갈라버렸다.

"끄으윽…."

"어, 어?"

산적들은 본인들의 죽음을 믿지 못한 채 반으로 갈라져 넘어갔다.

"으아아악!"

"괴, 괴물이야."

"어떻게 저런 아이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산적들은 무기를 든 손을 덜덜 떨며 뒷걸음질 쳤다.

"너희들의 두목은 지금…."

"하, 어이가 없네."

수풀을 가르고 상의를 풀어 헤친 남자가 나왔다. 30살 정도 되었을까. 젊은 얼굴에 흉악한 기세가 함께 했다. 강한 악의만으로 알 수 있다. 이놈이 모든 일의 원흉이라는 것을.

"두목!"

"채주!"

겁에 질렸던 산적들의 얼굴에 희망이 깃들었다. 역시 저 남자가 설호채주였다.

"어린 새끼한테 다 뒈지는 게 말이 돼? 이래선 남북맹에 들어가 봐야 창피만 당하겠네."

남자는 허리춤에 대롱대롱 매달린 술병을 입에 물고, 킥킥 웃었다. 산적들이 죽었어도 딱히 분노하지 않는다. 그저 이 상황이 흥미로운 것처럼 보였다.

"얼굴이랑 복장이 귀티 넘치는군. 잘 나가는 집안에서 나온 건가?"

산적 두목은 히죽이며 라온과 루난을 차례로 가리켰다.

"차라리 잘 됐어. 선물이 좀 모자랄까 봐 걱정했는데, 너희를 인질로 삼아야겠다. 하늘도 이 브칸을 버리진 않는군."

스스로 브칸이라는 이름을 밝힌 산적 두목이 등에 걸친 도를 뽑았다. 통나무처럼 두꺼운 도가 나뭇잎처럼 빙빙 돌아갔다.

'브칸이라면 두목이 맞군.'

리메르가 말해주었던 설호채주의 이름과 일치했다. 무력이 오러 유저 중상급인 것도 같았다.

지금까지 싸웠던 적 중 가장 강한 상대.

하지만 긴장되진 않았다. 가볍게 이길 수 있는 상대였으니까.

"덤벼봐. 도련님이시니, 몇 수 정도는 봐주지."

브칸이 킥 웃으며 네 손가락을 모아 까딱였다.

"좋다."

라온이 루난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눈빛을 보내고 앞으로 나왔다.

"어디 꼬마가 얼마나 강…."

브칸이 방심하고 주절거릴 때 놈의 목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치이이잉!

만화공의 기운을 가득 담은 검날이 브칸의 목을 향해 솟구쳤다.

"허!"

브칸이 헛바람을 흘리며 도를 휘돌렸다. 풍차처럼 돌아간 도가 검의 궤도를 비껴냈다.

쩌어엉!

강렬한 충격음과 함께 라온과 브칸이 동시에 밀려났다.

"호, 이 정도란 말이지?"

브칸의 눈동자가 굶주린 짐승처럼 번들거렸다.

"아주 재밌겠어!"

놈이 웃음을 터트리며 돌진해왔다. 도에 회전력을 더해 그대로 내리쳤다.

라온은 맞부딪치지 않고, 허리를 틀어 공격을 피했다.

콰아아앙!

바닥을 친 도가 땅을 쩍 갈랐다. 위력이 엄청났다.

"크하하하!"

브칸은 미친놈처럼 웃으며 연속으로 도를 내리쳤다. 거대한 도가 공간을 장악하자, 점점 움직일 공간이 줄어들었다.

"그렇게 피하기만 하면 칼 맞고 뒈질 텐데?"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라온은 침착한 눈빛을 발하며 계속 보법을 밟고, 도격을 차단했다.

"쯧, 그 정도라면 이제 볼 필요 없겠군."

브칸이 입을 삐죽 내밀고, 도를 휘돌렷다. 바람을 탄 대도가 푸른빛으로 번쩍이며 강렬한 기운을 폭발시켰다.

"그대로 죽어라!"

그의 도가 하늘로 올라가며 움직임이 커진 순간 라온의 눈에 붉은색 벼락이 내리쳤다.

만화공 일화.

화령.

은빛 칼날의 끝에서 피어난 화염의 봉오리가 바람을 타고 피어났다.

쩌어억!

작은 불꽃에 어린 사나운 기운이 브칸의 도를 베고, 그의 허리를 뜯어냈다.

"끄아아아악!"

브칸이 옆구리에 박힌 검을 부여잡고 비명을 내질렀다.

"이, 이놈!"

괜히 두목인 건 아닌지 검날을 잡고 밀어내는 힘이 엄청났다.

"뒈져!"

브칸은 왼손으로 옆구리에 박힌 검을 쥐고, 오른손에 든 도로 목을 노려왔다.

"소용없다."

라온은 목을 살짝 트는 것으로 반쪽 난 도를 피하고, 브칸의 힘을 역으로 이용하여 검을 우측으로 더 밀어버렸다.

"끄어억!"

브칸의 허리에서 살벌한 양의 피가 솟구쳤다. 놈은 잡고 있던 검을 놓고 뒷걸음질 쳤다.

"뭐. 뭣들 하는 거야 놈을 죽여! 여기서 다 뒈지고 싶어!"

"으헉!"

"가, 가자!"

"채주님을 구해!"

놈의 외침에 남은 산적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후우."

라온이 숨을 고르며 검을 휘돌렸다. 지그하르트 기본 검술을 펼쳐 돌진해온 산적의 목을 베고, 다리를 그었다.

"컥!"

"끄아악!"

"으억!"

산적들의 벽이 비명을 지르며 무너졌다.

'놈은?'

라온은 검을 휘돌리며 브칸의 위치를 찾았다. 놈은 없었다. 기감에도 위치가 잡히지 않았다.

'도망쳤어!'

부하들을 방패로 삼고 도망치는 두목이라니, 산적답다면 산적다운 모습이다.

으득.

라온이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며 기세를 피워냈다.

'시간이 없어.'

이쪽과 달리 브칸은 주변 지리를 모두 파악해두었을 거다. 한 번 놓치면 잡기 힘들다.

후우우욱.

만화공을 최대한으로 끌어 올려 검을 내리쳤다.

붉게 물든 칼날이 벼락처럼 떨어지자, 라온의 앞에 있던 산적들의 목이 모조리 떨어졌다.

"끄륵…."

"어억!"

산적들은 본인이 당했다는 것도 모른 채 멍한 눈으로 쓰러졌다.

"으아아악!"

"아, 안 돼! 저건 못 이겨! 괴물이라고!"

"채, 채주님! 채주님! 어?"

"그 개새끼 도망갔어!"

"하, 항복! 항복하겠습니다!"

이제 얼마 남지도 않은 산적들이 비명을 질렀다. 채주가 도망갔다는 것까지 알자 모두 무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었다.

"루난!"

라온이 항복한 산적들을 쭉 살핀 후 루난을 보았다.

"난 채주를 쫓을게. 이놈들 헛짓하면 망설이지 말고 죽여."

"응."

루난은 아이들을 꼭 안은 채 시원하게 대답했다. 산적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럼."

라온이 불의 고리와 만화공을 운용하며 땅을 박찼다.

산적들이 나왔던 숲으로 들어가며 기감을 열고, 눈동자를 굴렸다.

'어디지?'

산적 놈들이 숲을 마구 사용해서 흔적을 찾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소리는 숨기지 못했다.

'남서쪽.'

설화의 감각으로 키운 청각이 남서쪽에서 수풀이 움직이는 소리를 잡아냈다.

터엉!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질풍처럼 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브칸의 기척이 잡히고, 놈의 등이 보이기 시작했다.

'뭐야.'

브칸은 혼자가 아니었다. 여자 하나를 품에 안고 미친 듯이 숲을 달리고 있었다.

"거기까지다."

라온은 가람보법을 최대한으로 밟아 브칸의 앞을 막아섰다.

"시발! 어떻게 쫓아온 거야!"

브칸이 입술을 떨며 뒤로 물러섰다.

"오지 마! 오면 바로 죽여버릴 테니까!"

놈은 여자의 목에 대도를 올리며 위협했다.

"이제 나도 눈에 보이는 거 없어. 수틀리면 바로 죽인다!"

"그럼 너도 죽는다."

라온은 브칸의 협박에 굴하지 않았다. 만화공과 불의 고리를 운용하며 천천히 다가갔다.

'인질이 있다고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게 최악이지.'

인질이 아무 소용도 없다는 모습을 보여야 저쪽이 역으로 당황하는 법이다.

그리고 저 인질은 정말 아무 의미도 없었다.

"빌어먹을!"

채주는 악을 내지르며 품에 안고 있던 여자를 던져버렸다.

"흡!"

라온은 앞으로 달려가 땅에 떨어지는 여자를 왼손으로 받아들었다.

"고, 고마워요."

깔끔한 얼굴의 여자가 고개를 까딱인 순간 그녀의 소매에서 파란색 뱀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됐어!"

브칸의 환호 소리가 들려왔다.

"뭐가 돼?"

라온이 차갑게 웃고서 오른손에 든 검을 내리찍었다.

퍼억!

뱀의 머리를 꿰뚫은 칼날이 여자의 심장까지 찍어 눌렀다.

"끄륵, 어떻게!"

"아까 산적의 총인원이 39명이라고 했거든. 네가 그 마지막 한 명이잖아."

"그, 그걸 세는 미친놈이…."

어처구니가 없었던지 여자는 죽으면서도 눈을 감지 못 했다.

"인질 치고는 얼굴도 깔끔했고."

사실 그게 전부가 아니다. 여자의 손가락에는 끼워진 붉은 선의 반지. 저건 뱀 술사의 표식이다.

산적의 숫자도 숫자지만, 저 반지와 깔끔한 얼굴을 보고 그녀가 인질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너, 너 대체 뭐야!"

설호채주 브칸이 악을 내질렀다. 도망쳐도 소용없다는 걸 알았는지 주저앉은 채로 턱을 덜덜 떨었다.

"너희가 죽일 때는 좋았겠지."

라온은 여자의 심장을 부순 검을 뽑아 들고 브칸에게 다가갔다.

"꺼, 꺼져!"

브칸이 악을 내지르며 도를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처음 보았을 때 흉폭했던 그의 눈빛이 겁에 질린 듯 흔들렸다.

"마을을 습격하고, 약탈한 걸로 모자라 아이들까지 인질로 잡다니, 악마도 하지 않을 짓이다."

-미안하지만 그 정도는 할 악마들이 꽤 있다. 아니, 수없이 많다.

"...."

라온은 라스의 말을 무시하고 브칸에게 다가갔다.

"닥치라고!"

브칸이 메뚜기처럼 일어서며 도를 내질렀다. 오러가 가득 담겨 도의 날이 퍼렇게 빛났다.

불의 고리는 이미 놈의 무학을 모조리 파악한 상태다. 가볍게 회피한 뒤 검을 그었다.

촤아악!

브칸의 오른팔이 땅으로 떨어졌다.

"끄아아악!"

"넌 비명을 지를 자격도 없다."

"자, 잠깐만 영약을 주겠다! 그 마을에서 가져간 영약을… 꺽."

라온은 망설임 없이 브칸의 목을 베어버렸다. 추한 산적의 머리가 툭 떨어져 굴러갔다.

"하아…."

가쁜 숨을 내쉬며 검을 집어넣었다.

'영약이라고 했지.'

놈은 영약 때문에 마을을 습격했다고 했었다. 분명 몸에 그 영약이 있을 것이다.

브칸이 입고 있던 옷을 뒤지니 작은 주머니 하나가 나왔다.

"이거로군."

주머니를 열었다. 아직 피지 않은 꽃봉오리 하나가 들어 있었다. 특이하게도 색의 잎이 반은 푸르고, 반은 붉었다.

"이딴 것 때문에."

라온이 꽃봉오리를 만지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건 투톤 플라워라는 영약으로 화속성과 수속성의 기운을 모두 가진 영약이다.

희귀하지만, 마을 하나를 몰살시킬 만큼 엄청난 영약은 아니었다.

"쯧."

브칸 놈을 너무 쉽게 죽인 게 아쉬웠다.

-인간의 욕심이란 그런 것이다. 본왕은 마계에 있을 때보다 인간계에 왔을 때 더 많은 욕망을 보는 것 같다. 즐거운 세상이도다.

라온은 라스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무시하는 게 아니라, 그의 말이 맞아서 할 말이 없었다.

"음?"

씁쓸한 입맛을 다시고 돌아가려 할 때였다.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리며 만화공에 적혀 있던 한 지식이 떠올랐다.

투톤 플라워.

이 피지 않는 꽃의 진짜 모습은 이게 아니었다.

'그것만 있다면 훨씬 엄청난 효과의 영약이… 어?'

만화공의 지식 덕분에 투톤 플라워의 진짜 모습을 깨달은 순간 남쪽 수풀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바스스.

수풀을 열고 한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호피 가죽조끼를 입고, 이마에는 황색 두건을 둘렀다. 사냥꾼 같기도 했고, 산적 같기도 했다.

"어라? 이미 다 끝났네?"

그는 발밑에 죽어 있는 설화채주를 보고 입맛을 다셨다.

"지그하르트의 포위망을 뚫고 구하러 온 바람이 없구만."

호피 조끼의 남자가 고개를 들어 올려 라온과 눈을 마주쳤다.

"네가 한 거니? 대단하네."

"남북맹인가."

황색 두건은 오마 중 하나 남북맹의 표식이다.

이 자리에 나타난 것 그리고 설화채주를 보고 아쉬워하는 것 모두 그가 남북맹 소속이라는 걸 알려주었다.

"렉터라고 하지."

그는 숨길 생각이 없는지 본인을 그대로 소개했다.

'렉터.'

렉터라는 이름을 들은 라온이 인상을 찌푸렸다. 전생에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다.

검 하나를 들고 남북맹에 들어가 10년 만에 대형 산채의 주인이 된 천재 검사.

렉터는 설호채주와는 격이 다른 진짜 무인이었다.

"그 녀석이 가지고 있던 영약은 네가 챙긴 건가?"

"그렇다면?"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투톤 플라워를 보고 있을 때 왔기 때문에 숨길 수도 없었다.

"당당하네. 하긴 나이에 맞지 않게 판단력도 좋고."

그의 시선이 뱀 술사 여자를 향했다.

"무력도 뛰어나니까. 그런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거겠지."

목을 잃은 브칸의 시체를 훑은 렉터의 눈이 다시 라온에게 향했다.

"명가의 후예. 그것도 육황 지그하르트의 직계겠지. 화검의 문양이 없는 걸 보면 아직 수련생일 테고. 흐음, 어떻게 할까?"

그가 허리춤의 검을 만지작거리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죽일까?"

57화

라온이 입술을 깨물었다. 렉터의 입에서 죽인다는 말이 나오자마자, 폭풍 같은 살기가 전신을 휩쓸었다.

고오오오!

다만 평생을 암살자로 살아온 자신에게 살기는 큰 의미가 없었다. 네 개의 불의 고리를 공명시켜 몸을 짓누르는 살기를 밀어냈다.

"오호!"

렉터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살기를 버틴 게 놀라운지 입을 둥글게 벌렸다.

"이거 새싹이 아니라, 이미 봉오리인데?"

그는 헛웃음을 흘리며 검집을 툭툭 쳤다. 뽑을까 말까를 고민하는 것 같았다.

'이길 수는 없어.'

암살이라면 죽일 수 있지만, 지금의 무력으로 렉터를 꺾는 건 무리다. 다만 라온에겐 믿는 구석이 있었다.

스르릉.

라온이 먼저 검을 뽑았다.

"검을 뽑아 덤벼라."

가라앉았던 기세를 끌어 올리며 은빛 칼날로 렉터를 겨누었다.

"내가 이거 뽑으면 너 죽는데?"

"약자가 죽는 건 당연한 이치다."

"하, 무슨 어린놈의 기상이 저래?"

렉터가 탄성을 흘리며 박수를 쳤다. 그의 손은 이제 완전히 검집에서 떨어졌다.

"네 기상을 보니, 싸울 마음이 사라졌어. 지금 여기서 죽이기엔 아까운 놈이야."

"무인은 죽을 자리를 고르지 않는다."

"와, 미쳤네. 너 어린애 맞냐? 무슨 명언집이라도 보는 거야?"

"...."

"뭐, 사실 그 이유만은 아니고."

렉터의 시선이 라온을 너머 나무 위를 향했다.

"그 영약을 회수한다고 해도 내가 죽으면 의미가 없으니까."

그는 나무를 향해 고개를 까딱이고 뒤로 훌쩍 물러섰다.

'역시.'

라온이 입맛을 다셨다. 지금 자신의 뒤에는 교관들이 모두 몸을 숨기고 있다.

리메르의 위치는 잡히지 않았지만, 그의 성격상 분명 근처에 있을 거다.

렉터는 리메르와 교관들의 기척을 느끼고 물러난 거다.

"네가 남북맹 소속이었다면 정말 재밌었을 텐데, 이름이 뭐지?"

"...."

라온은 대답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렉터의 질문에 옛 생각이 났다.

전생에서 암살자로 살아올 때 적에게 저런 말을 듣기도 힘들었지만, 듣는다고 해도 말을 할 수 없었다.

항상 입을 다물고 도망치거나, 죽이기 위해 달려들었다.

적이. 그것도 대륙에 명성을 떨친 강자가 이름을 묻는 것에 가슴이 살짝 떨렸다.

"이름도 말해주지 않는…."

"내 이름은 라온. 라온 지그하르트다."

라온은 천천히 눈을 뜨며 당당하게 이름을 밝혔다.

"라온이라. 훗날 네 이름이 테루칸 산과 레이블 강에 들려오길 기다리마."

그는 씩 웃고서 그대로 산을 내려갔다. 혹시라도 돌아올지 몰라 기감을 열어두었지만, 정말 사라져버렸다.

"후."

라온이 한숨을 내쉬며 검을 집어넣었다.

'잘 먹혔군.'

렉터는 곱상한 외모와 달리 남자다운 성격을 가졌다.

힘에서 밀린다는 걸 알고도 당당하게 나가니. 오히려 호감을 쌓은 것 같다. 로베르트 가문에서 본 정보대로였다.

'안 싸우고 끝나서 다행이야.'

렉터는 강하다. 리메르와 함께 싸운다면 이길 수는 있겠지만, 교관 몇 명이 죽었을 거다. 싸움 없이 끝난 게 최선이다.

라온은 영약을 품에 집어넣고, 설호채주의 목을 두꺼운 보자기에 넣었다. 실적을 위해서 채주의 머리는 직접 챙겨야 한다.

"그럼 돌아가죠."

나무 위를 올려보며 빙긋 웃었다.

* * *

리메르는 아이들이 수색을 시작했을 때부터 산적들의 위치를 파악했었다.

우거진 숲과 높은 산이라는 함정을 지우고 보면 바로 산적들이 어디에 숨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다만 그건 많은 경험을 쌓은 그의 이야기고, 수련생들은 달랐다.

예상했던 대로 수련생들은 먼저 산과 숲으로 움직였다.

버렌과 마르타도 다르지 않았다. 두 사람은 각기 산과 숲으로 방향을 정한 뒤 멧돼지처럼 수색을 시작했다.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에 놀랍지도 않았다.

다만 라온과 루난은 길 위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다른 수련생들이 한참 전에 방향을 정하고 수색을 시작했을 때야 이동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방향은 숲도, 산도 아닌 구릉이었다.

저 녀석들이?

일부러 구릉 옆에 있는 숲이 보이지 않는 곳을 거점으로 골랐는데, 저길 어떻게 알고 가는 건지 모르겠다.

역시 라온인가.

라온이 뛰어난 판단력으로 산적들이 구릉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것 같다.

다만 산적들은 산에서 생활하는 놈들답게 대부분의 흔적을 지웠다. 교관들도 찾기 힘든 수준이니, 라온과 루난이 산적의 기척을 발견하기는 무리였다.

하지만 라온은 구릉 위의 숲을 쭉 둘러보고 무엇을 발견한 사람처럼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인간의 흔적을 하나씩 발견하며 산적들이 숨어 있는 방향을 향해 천천히 나아갔다.

뭐 저런 놈이 다 있지?

리메르가 입을 쩍 벌렸다. 이제 첫 임무에 나온 녀석이 추적자처럼 산적의 흔적을 찾아간다.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그냥 가는 것도 아니다. 자세를 낮추고, 발 앞꿈치로만 걸어서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허, 함정까지 지워?

라온과 루난은 산적들이 설치한 함정까지 해제하며 결국 산적들이 숨어 있는 곳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자신조차 알지 못했던 인질이 잡혀 있었다.

어떻게 할래?

리메르는 인질이 잡혀 있는 나무 근처로 이동했다. 혹시라도 라온이나 루난이 실패하면 바로 움직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움직일 필요는 없었다.

라온은 루난을 미끼로 삼아서 경계를 서는 산적들의 시선을 돌린 뒤 인질을 잡은 산적의 목을 베었다.

꿀꺽.

예리하면서도 단호한 일격에 순간 소름이 돋았다. 기막을 쳐서 소리를 죽이고, 앞의 산적까지 처리하는 모습도 완벽했다.

그 뒤 산적 하나를 살리고 정보를 모으는 모습까지. 그야말로 프로를 보는 듯했다.

다만 하나의 실수. 아니, 하나의 우연이 있었다.

무음적. 훈련받은 자만이 들을 수 있는 그 피리를 부채주가 감지했기 때문이다.

라온은 그 위기의 순간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바로 새로운 작전을 짠 뒤에 루난과 아이를 숨겼다.

부채주와 산적들의 방심을 유도한 뒤 단숨에 뛰어들어 두 번째 인질까지 구해냈다.

그 뒤로는 전투였다.

리메르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라온이 전위, 루난이 후위에 선 전투를 지켜보았다.

위험한 순간에 나서려고 다리를 풀었지만, 기회가 없었다.

루난이 서리를 깔고, 라온이 검을 들자 산적들은 무기를 제대로 휘두르지도 못하고, 죽어갔다.

똥폼을 잡고 나온 채주는 라온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부하들을 내팽개치고 도망쳤다.

저건 내가 잡아야겠네.

인질 둘을 지키면서 산적을 처리하고, 채주까지 잡기엔 시간이 부족하다.

채주를 놓칠 수는 없기에 리메르는 채주가 도망친 곳으로 움직였다.

인질? 아니, 저것도 산적이군.

채주는 여자 산적을 인질처럼 들고 구름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럼 잡으면….

설호채주가 반항조차 할 수 없도록 기습하려고 할 때 뒤에서 누군가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라온이다.

녀석은 채주가 있는 방향으로 사자처럼 돌진했다.

채주는 당황한 척하면서 여자 산적을 던졌다. 라온은 속도를 늦추며 그녀를 받았다.

이런….

리메르가 인상을 찌푸렸다. 저 여자는 뱀술사다. 뱀에게 물리기 전에 라온을 구해야 했다.

하지만.

뱀이 튀어나오는 순간 라온의 오른손이 움직였다.

퍼억!

알고 있었다는 듯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검으로 뱀과 여자의 심장을 뚫어버렸다.

"와아."

리메르는 본인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뱀을 죽이다니, 저건 미리 알지 않는 이상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뭐 저런 녀석이 다 있지?

이젠 감탄 수준이 아니라, 정신이 멍해질 지경이다.

수십 년 동안 전장을 나돌아다니며 수많은 재능을 봐왔지만 저런 괴물은 처음이다.

라온은 설호채주의 목까지 베어버린 후 그가 가지고 있던 영약까지 챙겼다.

그래. 잘했다.

박수를 쳐 주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다. 옆을 보니 다른 교관들도 어이가 없는지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다 끝났다고 생각할 때 강렬한 기세를 두른 젊은 미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황색 두건에 막강한 기도. 남북맹의 무인이었다.

역시 남북맹과 관계가 있었군.

설화채 산적들이 왜 숨어 있나 했더니, 남북맹의 무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남북맹의 무인은 스스로의 이름을 렉터라고 밝혔다.

아는 이름이다.

남북맹에 입맹한 지 10년 만에 채주가 된 젊은 천재 검사.

라온은 렉터의 앞에서도 기가 죽지 않았다. 먼저 덤비라고 말하며 검을 뽑았다.

저 녀석.

렉터의 강함을 몰라서가 아니다. 지그하르트 무인으로서 물러서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렉터는 어이없어하면서도 라온의 기개에 감탄했다.

그리고 스스로 물러섰다.

물론 놈은 자신과 교관들이 숨어 있다는 걸 알고 물러선 거지만 그 이유 중에는 라온에 대한 호의도 있었다.

"나는 라온, 라온 지그하르트다."

아.

본인보다 훨씬 강한 자에게도 인정을 받고, 당당히 이름을 내뱉는 라온의 등을 보자 등골 사이로 소름이 돋아올랐다.

옛날 글렌을 처음 만났을 때의 장면이 데자뷔처럼 머릿속을 흘러갔다.

리메르가 꽉 주먹을 말아쥐었다.

왕.

아직 어리고 약하지만, 드디어 새로운 왕의 씨앗이 싹이 튼 것 같았다.

* * *

라온은 루난과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무음적을 듣고 달려온 교관들이 남아 있던 산적들을 제압한 상태였다.

"왔구나."

"대단한 일을 해냈어."

"너 진짜 정체가 뭐냐?"

교관들은 감탄, 놀람 그리고 경악이 어린 시선으로 혀를 내둘렀다.

"라온."

루난이 두 아이를 안은 채 다가왔다. 로브를 뒤집어쓴 아이들은 실컷 울었는지 눈이 땡땡 부어있었다.

"루난. 정말 잘해줬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그녀가 적절하게 나서준 덕분에 아이들을 다치지 않게 구해낼 수 있었다.

"응."

루난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손으로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는 걸 보니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음…."

라온은 두 아이의 머리를 툭 치려다가 손에 피가 묻은 걸 보고 멈췄다.

"이제 괜찮아."

아이들의 어깨를 잡아주며 옅게 웃어주었다. 그 이상의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으아아앙!"

남자아이는 여동생을 꼭 끌어안은 채 울음을 터트렸다. 오빠로서 참고 참던 울음이 터진 것 같았다.

"너희들은 이만 내려가라."

교관들은 땅을 파며 구릉 아래의 거점을 가리켰다.

"교관님들은요?"

"이곳의 정리를 끝내고 가겠다. 나머지는 맡겨라. 정말 수고했다."

교관들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알겠습니다."

라온은 고개를 끄덕이고 루난과 아이들을 데리고 산적들의 악취로 가득한 숲을 나섰다.

-저런 꼬맹이들을 위로하는 방법도 모른다는 말이냐.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 큰 기근이 찾아온 적이 있었다. 본왕은 배고픔에 시달리던 어린 마족들을 불쌍히 여겨 겨울성의 문을 열고….

'아저씨. 됐어요.'

-거기다 저런 산적 따위를 죽이는데, 이리 오랜 시간이 걸리다니, 본왕이 붙어 있다는 게 창피하기 그지없도다. 너라는 놈은 가진 힘도 제대로 이용 못 하고 있어.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데?'

-멍청한 놈. 첫 일격이다. 첫 일격. 첫 일격에 응축시킨 힘을 폭발하듯 내질러야 한다.

'폭발?'

-그렇다. 인간의 마나 회로는 신비한 바가 있어서 마나를 증폭시켜서 움직여도 괜찮….

라온은 라스를 슬슬 긁어서 더 효율적인 마나 운용법을 빼내기 시작했다. 역시나 아낌없이 주는 라스였다.

* * *

라온이 루난과 아이들을 챙겨서 거점으로 돌아왔을 때 중앙에서 큰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산이 맞다. 놈들은 분명 저 위에 숨어 있어."

"지랄하네. 산은 네 머리 스타일처럼 뻔해. 산적이라고 무조건 산에 있다는 건 멍청한 생각이지. 서쪽의 빽빽한 숲에 숨어 있는 게 확실해."

"네 방식은 너무 충동적이다. 제대로 된 독도법과 추적술을 사용하지 않고 감에 의존하는 건 위험하다."

"내 감이 네 판단보다 우위니까 입 닥쳐. 내일은 무조건 서쪽 숲이다."

버렌과 마르타가 서로가 확인한 방향에 산적이 있을 거라고 싸우는 중이었다.

"어휴, 또 시작이네."

"저 둘은 진짜 만났다 하면 싸우잖아."

"근데 진짜 어디가 맞는 거지?"

수련생들은 으르렁거리는 두 사람을 보며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흠!"

루난이 헛기침을 하자 모두의 시선이 라온과 루난 그리고 아이들을 향했다.

"그 아이들은 뭐지?"

"산적을 찾으랬더니, 어디서 가출한 애들이라도 찾은 거냐?"

버렌과 마르타는 두 아이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글쎄. 누굴까?"

라온은 산적 두목의 머리가 담긴 보자기를 내려놓으며 씩 웃었다.

58화

"그, 그 아이들이 산적에게 잡혀 있던 인질이라고?"

버렌의 푸른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부풀었다.

"인질을 구했다는 건 산적 놈들을 발견했다는 뜻이잖아! 거짓말하지 마!"

마르타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지 말라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두 사람. 아니, 거점에 있는 모든 수련생은 라온과 루난이 산적에게서 아이를 구해왔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벙찐 눈이 되었다.

"마음대로 생각해."

라온은 피식 웃고서 아이들을 모닥불 근처로 데리고 갔다.

"일단 여기서 쉬어."

아이들을 불 앞에 앉히고 실비아와 헬렌이 싸준 육포를 건네주었다.

"이거로 배 좀 채우고."

"가, 감사합니다."

"감사함다."

남자아이가 고개를 숙이자, 여자아이가 똑같이 머리를 꾸벅였다.

두 아이는 멍하니 있다가 육포를 오물거리기 시작했다. 서글픔이 밀려오는지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도리안."

"에? 예!"

"담요 있어? 깨끗한 걸로."

"당연히 있습죠."

"고맙다."

도리안이 배 주머니에서 긴 녹색 모포 하나를 꺼냈다. 모포로 두 아이의 어깨를 덮어주었다.

"이것도 먹어."

루난이 무릎을 꿇어 아이들과 시선을 마주했다. 가방에서 아이스크림 상자의 뚜껑을 꺼내서 내밀었다.

딱 두 개 남은 구슬 아이스크림. 그것도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맛만 남았지만, 손짓에는 머뭇거림이 없었다.

"이게 뭐야?"

여자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이스크림이야."

루난은 시원하고 맛있어라고 말하며 아이의 손을 닦아 주고 아이스크림을 건네주었다.

"악!"

여자아이는 아이스크림 슬쩍 혀를 대보고 비명을 질렀다. 물론 기분이 좋은 비명이다. 아기 고양이처럼 작은 혀를 날름거리며 아이스크림을 먹기 시작했다.

"오욱!"

남자아이도 아이스크림을 한 입 먹고 눈을 부릅떴다. 다만 계속 먹지 않고, 아이스크림을 맛있게 먹는 여동생에게 남은 아이스크림을 넘겨주었다.

라온은 두 아이의 모습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혀끝이 썼다.

'어른이 되었군.'

산적들과 있을 때도 그렇고 아이스크림을 먹고도 동생을 먼저 챙기는 걸 보니, 부모를 잃은 소년은 이미 어른이 되어 있었다.

데루스 로베르트의 지시만 따르던 전생의 자신보다 나은 것 같아 라온은 남자아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허, 본왕조차 빠뜨린 아이스크림의 유혹에서 벗어나다니, 크게 될 녀석이도다. 저 녀석 포섭해라. 마음에 든다.

라스는 저 남자아이를 부하로 삼고 싶다고 중얼거렸다.

"흑!"

훌쩍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도리안이 눈물을 글썽이며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거, 이거 다 먹어라!"

녀석은 배 주머니에서 평소에 챙겨 먹던 간식을 모두 꺼내 아이들 앞에 쌓아놓았다. 정이 많은 녀석이다.

"아이들을 구한 건 구한 거고, 남은 산적들을 처리해야지. 인질을 구출한 걸 확인했으면 분명 도망칠 거다."

"그래. 그 새끼들 어디 있어. 그 인간쓰레기 놈들의 모가지를 모조리 부러뜨려줄 테니까."

과자를 먹는 아이들을 보고 있을 때 버렌은 열기를, 마르타는 분노를 띤 눈빛으로 다가왔다. 빨리 산적에게 안내하라는 듯 검집을 두드렸다.

"괜찮아."

"괜찮다니! 임무는 확실하게 끝을 내야…."

"이건 또 무슨 일이래?"

버렌이 따지려고 할 때 산쪽의 수풀에서 리메르와 교관들이 튀어나왔다. 산적들의 흔적 정리를 위해 남은 3명의 교관만 보이지 않았다.

"웬 아이들?"

그와 교관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 알고 있었으면서.'

라온이 입매를 살짝 찡그렸다. 아직 오러가 적어 리메르의 위치를 정확하게 잡지 못했지만, 그는 분명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뭘?"

리메르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시치미를 떼며 어깨를 으쓱였다.

"라온이랑 구했어요."

루난이 리메르에게 다가가서 고개를 끄덕였다.

"구했다고 이 아이들을?"

"네."

"어떻게?"

"다른 교관들에게 듣지 않으셨습니까?"

"아, 그러고 보니 3명이 안 보이네. 어디 갔지?"

"하아,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라온이 한숨을 내쉬며 일어섰다. 리메르의 표정을 보니,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말해주길 원하는 것 같았다.

"저희는 구릉 안쪽에 있는 숲에서 산적들의 흔적을 발견한 뒤 추적을 시작했습니다. 거의 보이지 않는 흔적이었지만 끝까지 쫓으니 결국 숲 깊숙한 곳에서 산적들을 발견했고."

차근차근 오늘 추적을 하며 있었던 일들을 모두 설명했다.

"…그렇게 설호채주를 죽인 뒤에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그의 설명을 들은 공터에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마, 말도 안 돼…."

버렌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내가 헛짓을 하는 동안 임무 그 자체를 끝내버렸다니….'

자신이 시간 낭비를 하는 동안 라온은 인질을 구하고 산적들을 모조리 죽였다고 한다. 믿기 힘들지만, 상황상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젠장!"

수련이나 대련은 몰라도 실전 임무에서만큼은 라온보다 뛰어난 성과를 내리라 다짐했지만, 이번에도 실패했다.

아니 실패 정도가 아니라, 아예 상대가 되지 않았다. 자만했던 스스로가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제기랄! 빌어먹을!"

마르타는 뒤를 돌아 주먹으로 나무를 후려쳤다. 나무껍질이 갈라져 땅으로 쏟아졌다.

'저건 거짓말이 아니야.'

지금까지 보았던 라온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성격이다. 그는 정말 루난과 둘이서 인질을 구하고 산적들을 소탕한 뒤 돌아온 게 분명했다.

'병신 같은!'

자신이 버렌과 유치한 말싸움을 벌이는 동안 라온과 루난이 목숨을 걸고 싸웠다는 걸 알게 되니 눈물이 나올 정도로 분했다.

'이번에 끝내려고 했는데.'

이번 임무를 완벽하게 마쳐서 라온을 따른다는 약속을 무효로 만들려고 했지만, 완패다. 변명할 말이 없었다.

"후우욱…."

마르타는 라온에게 패했음을 인정하면서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호, 혼자 산적들을 모조리 죽였다고?"

"그것도 직접 추적하고 인질을 구했다니…."

"진짜 뭐 하는 놈이야!"

수련생들의 턱이 파르르 떨렸다.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라온과 루난을 바라보았다.

"정말인가?"

교관 중 한 명이 라온에게 다가갔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 다른 아이들을 살피고 있었던 교관인 것 같다.

"설호채의 채주의 무력 수위는 소드 유저 중상급인데, 어떻게 이긴 거지? 혹시 잘못 본 거 아닌가?"

"아닙니다."

"어떻게 확신하지?"

"직접 보시죠."

라온은 전리품이라고도 할 수 있는 보자기를 가리켰다.

"음."

교관은 고개를 끄덕이고 보자기를 열었다.

'붉은 머리에 눈가에 큰 상처.'

임무를 받았을 때 전해진 설호채주의 인상착의와 일치했다. 라온을 돌아보는 그의 눈동자가 격하게 출렁였다.

"…확실하군."

교관이 마른침을 삼키고 라온에게 다가갔다.

"음, 임무를 위한 확인이었으니, 기분 나빠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물론입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자, 교관은 마주 인사하고서 리메르에게 돌아갔다.

'아마 리메르가 시켰겠지.'

라온은 리메르의 장난기 있는 눈빛으로 보고 그가 시켰음을 알 수 있었다. 아마 믿지 않거나, 반신반의하는 사람들에게 확인을 시켜주기 위해서인 것 같다.

그 덕분인지 자신과 루난을 보는 수련생들의 눈빛에는 감탄과 놀람이 어려 있었다.

'왜일까.'

리메르는 단순한 교관과 수련생의 관계 이상으로 자신에게 잘해주었다. 전생에서 만났던 교관과는 너무 달라서 솔직히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르겠다.

"그럼 임무 끝인가?"

"근데 우린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어음, 이대로 가도 되나…."

수련생들은 이제 집에 돌아가서 편히 잘 수 있다는 생각에 좋아하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에 얼굴에 그늘이 져 있었다.

"뭘 그렇게 실망하고 있어."

리메르가 어색하게 선 수련생들을 보며 픽 웃었다.

"첫 임무에서 제 능력을 발휘하거나 활약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 여기 있는 교관들도 첫 임무에선 실수 연발이거나,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교관들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라온하고 루난은 뭐에요?"

"맞아요. 저 둘이 다 끝냈잖아요."

"그 뭐 가끔 괴물들이 있잖아. 이미 익숙해졌으면서 뭘 그래. 사실 나도 첫 임무부터 활약하긴 했지. 아주 난리가 났었어. 검 하나 들고 적진에 쳐들어가서…."

리메르가 낄낄 웃으며 본인의 첫 임무 활약상을 말하기 시작했다.

-저 귀때기 놈 사연은 별로 대단하지도 않다. 본왕이 마계에 있을 당시 첫 전투에서 성 하나를 얼린 건 마계 전체에 내려오는 전설….

"하아…."

라온이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두 수다쟁이의 말을 듣고 있자니, 고막이 아프기 시작했다.

* * *

리메르는 임무 종료를 선언하며 내일 가문으로 복귀한다고 말했다.

수련생들은 바로 식사를 준비했고, 루난과 아이들은 어느새 친해져서 함께 밥을 먹었다.

따로 떨어져서 죽인지, 스튜인지 모를 저녁을 먹고 있을 때 리메르가 다가왔다.

"수고했다."

그는 건더기만 가득 담긴 그릇을 든 채로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임무였으니까요."

"검사의 자격을 얻고도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는 녀석들이 산더미 같은데, 너 정도면 훌륭하지. 물론 조금 부족한 모습이 있었지만."

리메르가 죽을 한 입 떠먹었다. 맛 더럽게 없네라고 중얼거리며 그릇을 옆에 두었다.

"산적은 이야기 속에 나오는 것처럼 쉬운 상대가 아니야. 산을 엘프급으로 잘 이용하고, 독하기는 오크에도 밀리지 않지. 남북맹 소속이거나, 그곳을 노리는 놈들은 더 그렇고."

"예."

라온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을 구하는 임기응변은 확실히 좋았지만, 그곳에 익스퍼트 이상의 무인이 있었다면 죽는 건 너와 루난이었을 거다."

"역시 보고 계셨군요."

"뭐, 어쩌다 보니."

리메르는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오늘은 잘했다. 다만 앞으로는 상대의 무력과 숫자 그리고 인질이 있는지 없는지. 인질의 상태는 어떠한지를 확인한 후 홀로 움직일지 다른 사람을 부를지를 판단해라. 너는 수석이야. 앞으로 그 판단력을 키우는 게 좋을 거다."

틀린 말이 아니다. 죽이는 건 수없이 해봤지만, 인질 구출은 처음이라 조금 모자람이 있었다.

지그하르트에선 혼자 움직이는 것보다 동료와 함께 움직일 일이 많으니, 때에 맞는 판단력을 키워야 한다.

"그리 얼굴을 굳힐 필요는 없다. 너와 루난은 최적의 움직임을 보였으니까. 넌 크게 될 거야."

"감사합니다."

리메르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라온은 조용히 눈을 내리감아 그의 칭찬을 받았다.

"아, 그리고 저 아이들은 가문으로 데리고 갈 거 같다. 가족이 모두 죽어서 갈 곳이 없다고 하더군."

"그렇습니까…."

라온이 손으로 바닥을 긁었다. 남인데도 이상하리만큼 가슴이 쓰렸다.

"루난과 꽤 친해졌으니, 슬리온 가에서 맡아달라고 한 번 물어볼 생각이다."

"그것도 괜찮겠네요."

아이들은 루난을 잘 따랐다. 그렇게 된다면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라온 지그하르트."

까끌한 가슴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죽을 먹으려 할 때 식사를 끝낸 버렌이 다가와 삐죽이던 입을 열었다.

"인정한다. 오늘은 완패다. 내가 고장 난 시계처럼 어긋나 있는 동안 너와 루난이 임무를 끝내버렸어. 하지만!"

그는 떨리는 주먹을 들어 올렸다.

"난 포기하지 않는다. 수천 개의 수련화를 버리더라도 널 따라잡을 거다!"

"어…."

버렌은 대답을 듣지도 않고, 몸을 돌렸다. 그대로 방계 수련생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뭐지?"

웬 수련화?

무슨 말인지 몰라서 밥이나 먹으려고 수푼을 들었을 때 우측 나무 기둥에서 콧방귀를 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르타였다. 그녀는 차가운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한심해."

그녀는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정확한 대상을 말하지 않고서 숲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너 참 귀찮게 사는구나."

리메르가 히죽 웃으며 스프 그릇을 내려놓았다. 맛없다고 했으면서 그릇은 텅 비어 있었다.

"누구 때문인데요."

라온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교관을 시켜 수련생들을 자극해놓고 모른 척 너스레를 떨었다.

"누구 때문인데?"

리메르는 킥킥 웃으며 되물었다.

"원래 네 나이 때는 라이벌이 있어서 잘 크는 법이야. 나중에는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동료가 되어 줄 테니, 친하게 지내."

그 말을 남기고 녹색 바람과 함께 훌쩍 사라졌다.

-라이벌이라….

리메르가 떠나자마자, 라스가 팔찌에서 튀어나왔다.

-본왕에게도 6명의 라이벌이 있었다. 물론 가장 강한 건 본왕이지만, 놈들도 나름…."

"...."

라온이 한숨을 내쉬며 다 먹은 그릇을 겹쳤다.

내 주변에는 왜 이리 미친 사람이 많은지….

* * *

라온과 수련생들은 일주일 만에 가문으로 복귀했다. 임무에 활약하지 못한 걸 신경 쓰는 수련생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편하게 잘 수 있다는 생각에 얼굴에 미소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쿠구구구!

철탑을 겹쳐놓은 듯한 지그하르트 정문이 웅장하게 열렸다. 문지기가 길을 비켜줄 때 안에서 2m가 넘는 거구의 사내가 나왔다. 외총관 일리운이었다.

"루난 슬리온, 라온 지그하르트."

그는 맨 뒤에서 서 있던 라온과 루난을 부르며 두 눈을 빛냈다.

"가주께서 너희 둘을 호출하셨다. 지금 당장 가주전으로 입전할 준비를 해라."

"호출?"

라온이 두 아이의 손을 잡은 루난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루난도 그 이유를 모르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 놀랄 필요 없다."

외총관 일리운이 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첫 임무에서 가장 큰 활약을 한 수련생들에게 상을 내리는 건 지그하르트의 전통이니까."

"맞아. 칭찬해주려고 부르시는 걸 테니, 긴장 안 해도 돼."

리메르가 살짝 들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별일 아니라고 중얼거렸다.

다만 리메르와 일리운 모두 하지 않은 말이 있었다.

첫 임무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인 수련생들을 칭찬하는 건 실제 있는 일이지만, 그 수련생을 가주전에 부르는 건 처음 있는 일이라는 것을.

59화

라온은 돌아오자마자 단련을 하려던 계획을 수정하고 가주전으로 향했다.

가주전 알현실의 거대하면서도 고풍스러운 문은 여러 번 보았어도 어깨를 짓누르는 압박을 보내왔다.

문의 크기 때문이 아니라, 안에 있는 절대자의 존재 때문인 것 같았다.

"긴장할 필요 없어. 오늘은 좋은 소리만 해주실 테니까."

뒤에 서 있던 리메르가 씩 웃으며 어깨를 두드렸다.

"흐흥."

옆에서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루난의 콧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을 구할 때는 떨려 했지만, 가주를 앞에 두고서는 조금의 긴장도 하지 않았다. 역시 특이한 녀석이다.

쿵.

거인의 발소리 같은 굉음과 함께 알현실의 문이 열렸다. 폭풍 같은 강렬한 기세가 치솟으며 문이 완전히 개방되었다.

용광로의 불꽃처럼 끊임없이 뿜어지는 기세를 견디고 알현실로 들어갔다.

고오오오!

글렌은 항상 그렇듯 황금색 옥좌에 앉아 이쪽을 굽어보고 있었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리메르의 인사를 시작으로 라온과 루난이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칭찬이라고 하지 않았나?'

라온이 콧등을 찡그렸다. 칭찬 때문에 불렀다고 하기에는 전해지는 기파가 거셌다.

"일어서라."

글렌이 위엄 서린 목소리를 울리며 손을 저었다.

"라온 지그하르트, 루난 슬리온. 첫 임무에서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고 들었다."

"그저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

라온이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루난이 따라 고개를 내렸다.

"전해 듣기는 했다만, 너희가 무엇을 했는지를 말해보라."

"예. 거점에 도착했을 때 산적들이 숨어 있을 거라 예상되는 장소가 총 4곳이었습니다. 산에 있는 산적들은 짐승과도 같은 능력을 보이지만, 추적을 피하기 위해 산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별 관심 없어 보이는 글렌에게 임무에서 있었던 일들을 모두 말해주었다.

그는 고개를 까딱이지도, 눈을 빛내지도 않았다. 민망할 정도의 무반응으로 모든 말을 들었다.

"들었던 것과 같군. 첫 임무에서 긴장하지 않고 적을 처리한데다가 인질을 구하는 건 확실히 범상치 않은 실적이다. 다만."

글렌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주먹구구식이었다. 조금의 실수만 있었다면, 산적들이 강했다면 혹은 너희 둘의 합이 맞지 않았다면 그 아이들은 죽고, 너희도 큰 부상을 입었을 것이다."

그의 무거운 음성이 머리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계획은 중요하다. 너희들처럼 아무런 경험이 없는 수련생일수록 계획을 이중삼중으로 세우고 움직여야 하지."

"예…."

"사실 처음부터 흔적을 발견했으면 다른 수련생과 상의를 하고, 그들에게 지시를 내려야 했음이 옳다. 혼자서 모든 일을 처리하기에 네 경험과 무력은 미천해."

"죄송합니다."

라온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이게 칭찬인가?'

분명 칭찬이라고 들었건만 처음에만 약간의 칭찬이 나왔을 뿐 계속 지적이었다.

"다만 문제가 많은 방식이라고 해도 너희들이 성공했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지."

글렌이 옆으로 턱짓하자, 그의 집사 로엔이 황금색 판을 가지고 와서 앞에 섰다.

"훌륭히 임무를 완수하고, 인질을 구한 너희들에게 동색의 패를 하사한다."

"고생하셨습니다."

로엔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라온과 루난에게 동패를 내려주었다.

"감사합니다."

라온과 루난은 두 손으로 패를 받고, 글렌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 잠시 하나 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지?"

"이 영약은 어떻게 합니까?"

라온이 설호채주에게서 가져온 투톤 플라워를 꺼냈다. 아직 피지 않은 꽃봉오리가 동그랗게 말려 있었다.

글렌은 투톤 플라워를 지그시 내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네가 구한 것이니. 네 것이다. 가져가라."

"…예."

라온이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름 희귀한 영약인데, 그대로 넘겨줄 줄은 몰랐다.

"이만 가보거라."

그는 할말을 다했다는 듯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턱을 괴었다.

라온과 루난은 고개를 꾸벅이고, 뒷걸음질로 알현실을 나갔다.

세 사람만 남은 알현실에 잠시 침묵이 일었다.

"푸흡."

리메르는 조용한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지? 거기다 넌 부르지도 않았는데, 왜 따라온 거냐."

"아니, 라온이 어떻게 활약했는지 직접 듣고 싶었으면 솔직하게 말하시지 뭘 그리 핑계를 대십니까."

리메르가 인상을 찌푸린 글렌을 보며 히죽였다.

'진짜 솔직하지 못하시다니까.'

이미 보고서를 보내놓았기 때문에 글렌은 이번 임무에서 일어난 일을 모두 알고 있었다.

손자를 걱정하여 혼을 내는 척하며 조언을 하는 글렌의 모습에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이게 할아버지의 심술?"

"닥쳐라."

"흡!"

리메르가 양손으로 입을 착 막았다.

"이제 가주님도 라온을 후계자 후보 중 하나로 생각하시는 것 같군요."

"뭐?"

"수련생 때는 동료들을 챙기는 것보다 개인이 중요한 시기죠. 그런데 라온에게 동료들을 지도해보라고 하셨던 건 먼 미래. 라온이 지그하르트의 왕좌 자리에 도전할 때를 대비한 것 아닙니까?"

"...."

리메르의 날카로운 지적에 글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그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라온을 정말 아끼시는 것 같네요. 도련님들 키울 때도 그러시진 않았던 거 같은데…."

"시끄럽다."

"이제 좀 솔직해지시는 게 어떨까요? '손자야 수고했다. 한번 안아보게 이리 오거라. 우쭈쭈'라고 하시면 라온도 참 좋아할…."

"리.메.르."

글렌의 기세가 거세졌다. 알현실만이 아니라, 가주전 전체에 진동이 일기 시작했다.

"흡!"

리메르는 웃음기를 지우고, 뒤로 쭉 물러섰다.

"후후."

글렌의 기운이 폭발하기 직전까지 끓어올랐을 때 로엔이 부드럽게 웃으며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보기 좋네요."

"뭐가 보기 좋다는 것이냐."

"두 분이 장난치시는 모습을 보는 게 거의 30년 만이지 않습니까. 가주님이 그런 반응을 하시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고."

로엔의 주름진 눈가에 옛 세월의 추억이 어려 있었다.

"음…."

"오, 역시 로엔 님은 뭘 아시네요."

글렌이 기세를 가라앉혔고, 리메르는 지웠던 미소를 다시 그렸다.

"아, 그리고 라온이 말하지 않은 게 있습니다."

"남북맹 말인가?"

"예. 그곳의 젊은 채주가 라온의 이름을 듣고 갔습니다."

"왜 안 막았지?"

"라온의 기백에 그쪽이 먼저 물러났습니다. 저희 영지도 아니고, 라온을 인정해주니까 잡기 좀 그렇더라구요."

"흥."

글렌은 콧방귀를 끼었지만, 그리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제가 바라는 건 다른 게 아니라, 손주를 좀 솔직하게 대했으면 하는 정도입니다."

"난 항상 모든 사람을 솔직하게 대한다."

"에이 아니죠. 솔직하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리메르가 연기를 하듯이 뒷짐을 지고 엣헴 기침했다.

"라온. 훌륭히 임무를 완수해서 내가 다 뿌듯하구나. 우리 손자 할애비에게 뽀뽀. 딱 이렇게 하면 라온도 좋고, 가주님도 좋고, 보고 있는 나도 좋고! 다 좋잖아요!"

"후…."

글렌이 한숨을 내쉬고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세상을 뒤덮을 듯한 무시무시한 기파가 알현실을 가득 채웠다.

"저, 전 이만 가볼게요. 술이 아니,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리메르는 뒤통수를 매만지며 슬쩍 뒷걸음질을 쳐서 알현실을 나갔다.

"쯧, 점점 능글맞아지는군."

글렌이 혀를 차고 손을 내렸다.

"그래도 전 보기 좋습니다. 두 분이 대륙을 질타할 때의 모습을 보는 듯했습니다."

로엔이 옆으로 물러서며 옅게 웃었다.

"흠."

글렌은 말은 하지 않고, 팔짱을 끼고, 등을 기댔다.

"이렇게 된 게 라온 도련님 덕분인 거 같으니, 저도 그분에게 조금 더 정이 가더군요."

"속으로 정이 가는 거야 상관없지만, 후계자도, 그 밑의 아이들도 모두 평등하게 대하는 게 옳다."

"맞는 말씀이십니다."

로엔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가 일어나며 글렌을 보았다. 하는 말과 반대로 그의 입가는 평소보다 조금 더 올라가 있었다.

* * *

라온은 가주전을 나오자마자, 별관으로 향했다.

바로 수련을 할까도 했지만, 걱정하고 있을 실비아와 시녀들을 안심시키는 게 먼저라는 생각이었다.

'나도 좀 변했네.'

전생이었다면 누가 기다리더라도 신경 쓰지 않고 필요한 일을 하러 움직였을 거다.

하지만 되살아 난 이후는 달랐다. 처음으로 애정을 준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는 게 옳았다.

별관 앞에 도착하자, 안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여긴 이래야지.'

별관은 시끄럽고 활기찬 게 제 모습이다. 벌써 마음이 편해지기 시작했다.

라온이 밝은 안색으로 별관의 문을 열었다.

"어?"

눈을 부릅떴다. 별관 안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이 하나 있었다.

"도리안?"

도리안이 로비에 서 있었고, 실비아와 헬렌, 시녀들이 그를 둘러싼 상태였다.

"오, 도련님 오셨습니까?"

"네가 왜 여기에 있냐?"

"아, 마님께서 임무가 끝나면 들려서 무슨 일이 있었나 말 좀 해달라고 하셨거든요."

"그, 그러면…."

"예. 라온 님의 감동적인 활약을 전부 말해드렸습니다. 크흑!"

도리안이 눈꼬리에 걸려있던 눈물을 훔쳤다.

"도련님."

"아, 우리 라온 도련님이."

정말 전부 말했는지, 시녀들이 소매를 눈가를 닦고 있었다.

'이런….'

실비아와 헬렌이 걱정할까 봐 대충 넘어가려고 했는데, 저쪽에서 직접 호출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라온!"

"도련님!"

실비아와 헬렌이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동시에 다가왔다.

"아, 그게 내가 나서려고 한 건 아니었…."

"잘했어!"

핑계를 대려고 할 때 실비아가 자신을 꽉 껴안고, 등을 팡팡 두드렸다.

"응?"

예상과는 다른 반응에 라온이 눈을 부릅떴다.

"설마 내가 그걸 혼낼 줄 알았어?"

"평소에 조심하라고만 하니까."

"옛 지그하르트의 선조가 처음 검을 들었던 건 약자를 지키기 위해서였지. 그 이후로 지그하르트는 약자를 보호하고, 영지에 사는 사람들을 지켜왔어."

실비아의 붉은 눈동자에서 루비 같은 빛이 반짝였다.

"내 목표도 옛 지그하르트 정신이 깃든 검사였는데, 목숨을 걸고 인질을 구한 널 혼낼 리가 없잖아."

그녀가 손을 꽉 잡아주었다. 그 따스함에 피로가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엄마는 네가 정말 자랑스러워."

"음음!"

"정말이에요!"

"저 내일 본관에 갈 일 있는데, 자랑하고 올게요!"

실비아가 다시 한번 안아주었고, 헬렌과 시녀들은 옆에서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 수가 없네.'

라온이 옅게 한숨을 뱉었다.

'감정이란 정말이지 어려운 것 같아.'

다만 이들의 따스함이 싫지는 않았다.

'그건 그렇고 도리안 이놈을.'

도리안을 찾으려고 고개를 돌렸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 겁쟁이 놈은 한참 전에 도망갔다.

'이런!'

정말이지 발 하나는 빠른 놈이다.

* * *

라온은 별관에서 식사를 마친 뒤 옷을 갈아입고 5연무장으로 향했다. 실비아나 헬렌이 오늘은 쉬라고 했지만, 몸을 움직이고 싶었다.

"저 아이인가?"

"맞네. 라온 지그하르트."

"체격도 별로고, 기세도 은은한데…."

"그래도 홀로 산적들을 때려잡은 건 사실이지."

"하긴 리메르가 허세는 있어도 그런 거짓말은 하지 않으니까."

연무장으로 가는 동안 검사들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이번 임무에 대한 소식이 이미 가문 전체에 퍼진 것 같았다.

'하여튼 그 사람은….'

빨간 머리 엘프 짓이 뻔했기에 한숨을 내쉬었다.

"소드 유저 중상급이 낀 30명의 산적을 홀로 처리하다니, 범상치 않은 실적이다."

"병에 걸려 죽느니 마느니 했었는데, 운도 끼어 있겠지."

매번 욕이나, 무시를 듣다가 거의 처음으로 칭찬이 섞인 말을 들으니, 조금 어색했다.

다만 마음과 기분은 자신이 정하는 법. 남이 뭐라 하든 신경 쓸 필요 없었다.

라온은 검사들이 중얼거리는 말을 흘려들으며 5연무장으로 들어갔다. 당연히 연무장엔 아무도 없었다.

가볍게 몸을 풀고,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천천히 들어 올려 단전 앞에 검을 두었다, 중단세. 검을 든 기본자세를 유지한 채로 지난 싸움을 기억했다.

'조금 느렸어.'

산적들이 벽이 되었다지만, 설호채주의 목을 베어버릴 기회는 처음부터 있었다. 아이들과 산적들을 신경 쓰느라 반응이 늦어서 많은 시간을 써 버렸다.

실전에서 중요한 건 본래의 실력을 어떻게 발휘하느냐다. 이번 전투는 실패라고 봐도 좋았다.

'다만….'

그걸 알았으니까.

무엇이 문제인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알았으니, 지금이라도 그걸 메우면 된다.

'오러와 육체가 조금이지만 따로 놀고 있어.'

육체는 생각대로 움직이지만, 오러는 살짝 늦게 따라온다.

오러와 육체는 가위의 두 날처럼 동시에 움직여야 한다.

후우우욱.

라온이 숨을 고르고, 천천히 검을 세웠다. 단전에서 피어난 오러가 검을 따라 움직인다. 느린 움직임이지만, 허공이 사정없이 갈라졌다.

얼마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라온의 등이 땀으로 젖어갔다. 느린 움직임을 취했기에 더욱더 많은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라온은 만화공의 기운이 모두 소모될 때까지 느린 검을 휘둘렀다.

오러가 다 소모되면 연공실에 가서 연공을 한 뒤 다시 나와 또 검을 휘둘렀다. 그렇게 복귀한 첫날이 땀으로 젖어갔다.

* * *

지그하르트 영지 내 뒷골목에 박혀 있는 작은 주점. 여러 사람의 목소리로 떠들썩해야 할 주점에서는 한 남자의 음성만 들려왔다.

"…그렇게 우리 애들이 산적에게 묶여 있던 아이들을 구해냈지. 산적 두목의 도에 오러가 어려 있지만, 라온은 그 도를 반으로 갈라버렸다고!"

붉은 머리 엘프가 테이블에 올라가 연설하듯 라온과 루난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얼굴이 빨개진 걸 보니, 거하게 취해 있었다.

"오오!"

"리메르 이제 적성을 찾은 거야? 애들 잘 가르쳤네."

"에이, 그게 아니라 제자들을 잘 만난 거지."

"하긴. 좋은 스승이 될 엘프는 아니니까."

검사도 아니고, 평범한 주민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키득거렸다.

"둘 다야. 둘 다! 내 제자들이 지금 지그하르트 수련생들 중 제일이라고. 아니, 육황 어디가 와도 안 지지!"

리메르가 히죽 웃고서 맥주를 입에 퍼부었다. 당연하다고 말하는 사람들과 6 연무장이나, 다른 세력도 만만치 않다는 사람들이 말싸움을 시작했다.

"어이, 싸우지 말고 재미난 이야기를 들었으면 이야기 값이나 내놔. 5번 마에 걸었다가 다 잃었다고, 오늘 복수전을…."

그가 얼굴을 찡그리며 빈 맥주잔을 내려놓을 때 테이블 위로 금화 하나가 딱 떨어졌다.

"응?"

리메르가 금화를 보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험악한 얼굴에 떡 벌어진 어깨, 전장의 장수 같은 인상의 사내. 6 연무장의 수석 교관인 메툰이었다.

"메툰? 오랜만이네."

"그래."

메툰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어쨌든 고마워."

"...."

"어, 이제 좀 놓지?"

메툰이 테이블에 내려놓은 금화를 주우려고 했지만, 그의 손가락 때문에 들리질 않았다.

"방금 그 말 책임질 수 있나?"

"무슨 말?"

"5 연무장이 지그하르트 수련생 중 최강이라는 말."

"당연히 우리 애들이 최고지."

"넌 내기를 좋아했지."

메툰의 눈동자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나와 내기 하나 할까."

60화

"내기?"

리메르가 메툰의 위아래를 살피며 눈매를 좁혔다.

"갑자기 무슨 내기를 하자는 건데?"

"5 연무장이 정말 지그하르트 수련생 중 최강인지를 증명하는 내기."

"아아, 맞짱 뜨자고?"

"지그하르트의 교관 된 자로서 그런 상스러운 말은 사용하지 마라."

"싸우자는 거나, 맞짱이나. 결국 붙자는 말이잖아. 직관적으로 가자고."

리메르가 픽 웃으며 빈 맥주잔을 입에 털었고, 메툰은 석상처럼 입매를 굳혔다.

두 사람은 같은 수석 교관이었지만 성격이 너무나도 달랐다.

"오, 리메르랑 메툰이 붙는 건가?"

"쟤네들이 붙는 게 아니라, 제자들을 붙인다는 거잖아!"

"그럼 5 연무장이랑 6 연무장? 대박인데?"

주점에 있던 사람들이 모조리 일어나 리메르와 메툰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내 전 재산을 메툰 쪽에 건다!"

"에이, 이건 리메르지! 마르타, 버렌, 루난에 그 셋을 이긴 라온까지 있잖아!"

"맞아. 6 연무장에 방계는 많지만, 직계는 한 명도 없다고. 해보나 마나 5 연무장이 이길걸?"

"너희들이야말로 정보가 깡깡이네. 얼마 전에 6 연무장에 케인 님 들어가신 거 몰라?"

직계가 들어왔다는 말에 주점 사람들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어? 임무 나갔다가 부상당하신 거 아니었어?"

"그게 벌써 1년하고도 6개월 전이다. 인마."

"오, 그럼 해볼 만하겠는데? 케인님도 재능 넘치기로 유명하셨잖아. 특히 감각이랑 오러의 순도가."

"할 만한 정도가 아니라. 6 연무장이 더 유리하지. 케인 님이랑 그분을 따르는 방계들은 이미 16살이라고."

"이거 재밌겠다!"

"가자! 당장 판을 올려!"

주점 사람들은 이미 내기가 성립된 것처럼 5 연무장과 6 연무장의 이름을 외치고 돈을 꺼내기 시작했다.

"와, 이거 안 하면 맞아 죽겠는데?"

리메르는 피식 웃었다. 말과는 달리 즐거운 얼굴이다.

메툰은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던 건지 묵직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맞짱 뜨자는 거야?"

"맞짱이 아니라…."

"사소한 건 그냥 넘어가고."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오웬 왕국 때문인가?"

리메르가 턱을 긁적이며 맥주잔을 들었다.

"맞다. 오웬 왕국이 6 연무장을 보고도, 5 연무장에만 대련을 신청했던 일 때문에 아이들의 자존심이 구겨졌지."

"그건 걔들이 대충 수련해서잖아."

"네 말도 맞다. 나도, 수련생들도 모두 최선을 다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라."

메툰이 반쯤 풀린 리메르의 눈을 보며 말을 이었다.

"5달 전 케인 지그하르트가 편입한 이후로 6 연무장은 변했다. 모두 새벽부터 나와 밤까지 수련했고, 최근에는 지옥주 훈련까지 통과했지.

"엑? 지옥주를?"

리메르가 입을 떡 벌렸다.

"그래. 단 한 명의 낙오도 없었다."

"그건 대단하네."

지옥주는 지그하르트 훈련 중 빡세기로 유명한 훈련이다. 정규 검사도 낙오가 나오는 훈련인데, 모든 수련생이 버텼다는 게 놀라웠다.

"이제 그 아이들에게도 성취감이라는 걸 느끼게 해줄 때라고 생각했다."

"그 희생양을 우리 5연무장으로 삼겠다?"

"...."

메툰은 대답하지 않은 것으로 대답을 했다.

"마음에 드네."

리메르가 히죽 웃으며 테이블을 두드렸다.

"방식은? 일대일 대련인가?"

"아니. 일대일 대련으로는 아직 5 연무장을 이기지 못한다."

메툰이 고개를 저었다.

"음? 그럼 어떻게 붙자고?"

"결투에 일대일 방식만 있는 건 아니지."

"아!"

리메르가 히죽 웃으며 테이블을 툭툭 두드렸다.

"단체전인가?"

"그래. 5 연무장의 숫자는 43명, 우리도 43명을 준비시키겠다. 임의로 정해진 장소에서 붙이기로 하지."

"전면전이라고 하긴 좀 그렇고. 국지전인가?"

그는 괜찮겠어라고 중얼거리며 메툰이 내려놓은 금화에 다시 손을 올렸다.

"다만 이쪽에도 제안이 있다."

"제안?"

"6 연무장의 숫자는 우리보다 2배 이상 많지?"

"그렇다."

"그럼 좀 더 기회를 주는 게 좋잖아. 그쪽은 60명을 준비해."

"뭐?"

"이쪽은 그대로 43명. 그쪽은 60명으로 붙자고."

"우리를 무시하는 건가?"

메툰의 기세가 짚불처럼 타올랐다. 테이블이 부르르 떨렸다.

"무시가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거다. 무력과 경험이 모자란 건 너도 인정하지 않나?"

"음."

"거기다 직계나 봉신가, 상위 방계 아이들도 우리가 더 많지. 60명으로 싸운다고 해도 너희에게 뭐라 할 사람은 없어."

메툰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그렇게 하지."

"날짜와 위치도 네가 정해."

"나한테? 내가 속이면 어떻게 하려고…."

메툰의 묵직한 눈빛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네가 이런 걸로 사기를 칠 위인은 아니니까."

금화에 올려진 메툰의 손에 힘이 빠졌고, 리메르가 그 틈에 금화를 날름 챙겼다.

"다만 네가 하나 착각하는 게 있다."

금화에서 손을 뗀 메툰이 고개를 틀었다.

"착각?"

"케인 지그하르트는 부상으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1년 반 동안 매일 오러 연공과 감각을 개발했다."

"어?"

"녀석의 감각과 오러 양은 정식 검사에게도 뒤지지 않아."

그는 자신감이 넘치는 눈빛으로 리메르를 내려보았다.

"준비 단단히 하는 게 좋을 거다. 케인 한 명에게 다 쓸릴 수도 있으니까. 이건 내기의 계약금이다."

메툰이 품에서 꺼낸 금화 주머니를 리메르 앞에 밀어놓고, 주점을 나갔다.

"우와아아!"

"우리도 구경 가도 되나?"

"당장 판을 열어! 6 연무장에 내 전 재산을 건다!"

"난 5 연무장!"

"전 재산도 얼마 안 되는 놈들이. 난 우리 집을 건드아!"

내기가 성립되자 주점의 천장이 들썩일 정도로 난리가 났다.

"흐흠."

리메르는 금화 주머니를 툭툭 치며 빙긋 웃었다.

"꽁돈은 역시 좋다니까."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던 것처럼 여유로웠다.

"그럼 도박장이나 가볼까."

* * *

아직 해가 떠오르지도 않은 어둑한 새벽.

검은 커튼이 내려앉은 듯한 별관 공터에 라온이 두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어깨 위로 풀잎보다도 가는 붉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열기 띈 태양이 떠오르는 것과 반대로 라온의 육체에서 피어나는 붉은 기운은 점차 줄어들었고, 끝내 완벽하게 사라졌다.

그 순간 라온이 두 눈을 떴다.

번쩍.

천공으로 솟구치는 태양처럼 그의 붉은 눈동자가 진한 열기로 타올랐다.

"후우우…."

라온이 호흡으로 육체에 남은 탁기를 뱉어내자, 이글거리던 눈동자가 평소대로 돌아왔다.

'시간 참 빨리도 지나가네.'

꾸물꾸물 올라가는 태양을 보며 몸을 일으켰다.

첫 임무를 다녀온 지 3일이 지났다.

3일 동안 수련한 덕분에 육체와 오러의 움직임이 조금이나마 비슷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챠앙!

라온이 손목과 발목을 돌린 뒤 검을 뽑았다. 만화공을 운용하며 연성 검술을 처음부터 끝까지 펼쳤다.

육체 바로 뒤를 오러가 따라간다. 흡사 그림자 같은 움직임. 완벽하진 않지만, 3일 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졌다.

'일단 이 정도만 맞춰두는 게 좋겠어.'

평생을 해야 할 수련이니까.

오러와 육체의 흐름을 완벽히 맞추는 건 며칠로 될 수련이 아니다.

결국 검과 정신을 하나로 만드는 검신합일이 되어야 하니, 앞으로도 꾸준히 수련해야 한다.

라온은 지그하르트 기본 검술을 처음부터 끝까지 펼친 뒤 검을 집어넣었다.

하늘을 보니, 태양이 상당히 높게 올라가 있었다.

'살짝 늦었네.'

새벽 개인 훈련이 거의 끝날 시간이었다. 오전 정규 훈련 시간이 되기 전에 연무장에 가야 할 것 같았다.

라온은 땀을 흘린 옷을 갈아입고, 5연무장으로 달려갔다. 연무장 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할 때 안에서 수련생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녀석이 어쩐 일로 없지?"

"임무를 혼자 끝내셨는데, 새벽 훈련할 맛이 나시겠어."

"쯧, 사실 거기에 누가 있어도 할 수 있는 일이었는데."

"그러니까. 오러 유저라고 해도 산적인데, 얼마나 강하겠어. 운이 좋았던 거지."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다. 방계 수련생. 그것도 달라진 버렌에게 적응하지 못하고 떨어져 나간 녀석들이다.

'한심한 놈들.'

라온이 혀를 찼다. 저런 패배자들의 말은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자신이 들어가는 순간 눈을 피하고 도망갈 테니까.

'근데 연무장이 살짝 춥네.'

연무장의 기온이 평소와 다름을 느끼고 들어가려 할 때 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심하다."

버렌의 음성이었다. 우아한 발소리가 수련생들의 앞에서 멈췄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그럼 넌 당시에 산적들의 흔적을 찾았나? 아니면 산적들에게서 아이들을 구했나? 그것도 아니면 산적의 목이라도 베었겠지?"

"그, 그게…."

"버렌 님. 저희는 그냥 자, 장난으로…."

수련생들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어버버 주절거리기만 했다.

"질투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감정이다. 다만 그걸 입에 담는 순간 인간의 추함은 바닥을 찍게 되지. 이건 내가 직접 해보았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정신 차려라."

타악!

버렌의 말이 끝나자마자, 누군가가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하, 저 새끼 없었으면 내가 너희들 대가리를 깨버리려고 했는데."

마르타다. 이를 가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가 수련생들의 옆에서 들려왔다.

"주제 파악 좀 하자. 너희가 산적 두목을 만났으면, 깝치다 뒤지거나, 지켜보던 교관들에게 개처럼 끌려갔을 거야."

"마, 마르타 님…."

"너희들 임무를 끝내고 휴가를 받았을 때 뭘 했지? 임무에 다녀왔으니, 좀 쉬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훈련도 설렁설렁했겠지? 아예 안 하던가."

"그게…."

"으음."

수련생들은 정곡을 찌르는 마르타의 말에 쩝쩝 소리만 냈다.

"임무를 혼자 끝내버린 그 자식은 너희들이 집으로 돌아가 발 뻗고 잘 때도 연무장에 나와서 수련했다. 심지어 돌아온 당일에도."

"저, 정말입니까?"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던가."

마르타는 찬웃음을 흘리며 수련생들을 비웃었다.

"라온의 행적을 잘 아는군. 스토킹이라도 했나?"

"뭐? 이 새끼가 어따 주둥이를 놀려!"

버렌의 농담 같은 말에 마르타가 벽을 후려쳤다.

"맞잖아. 보지도 않고, 그걸 어떻게 알지?"

"그 아가리를 묶어버리면 알지 않을까?"

버렌과 마르타가 싸울 듯이 기세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후우.

라온은 가슴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는 듯한 뭔지 모를 감정을 느끼며 연무장의 문을 열었다.

시끄럽고, 분주하던 연무장이 조용해졌다. 멱살을 쥐고 싸울 것 같았던 버렌과 마르타가 고개를 홱 돌렸다.

"라온."

두 사람을 보고 있을 때 눈이 은빛으로 반짝이는 루난이 다가왔다. 어깨 위로 새하얀 서리가 피어나고 있었다.

'이 녀석이었군.'

연무장의 기온이 왜 내려갔나 했더니, 루난이 살벌한 양의 냉기를 뿜어내고 있었던 것 같다.

"임무 좀 혼자서 해냈다고 뵈는 게 없나 봐? 새벽 훈련에도 늦고."

마르타는 조금 전에는 자신의 편을 들어줘 놓고 지금은 비꼬기 시작했다.

"집에서 했으니, 걱정할 필요 없어."

라온은 가볍게 대답하고 연무장의 중앙에 섰다.

"곧 정규 훈련이 시작된다. 전부 정렬하도록."

수련생들이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라온의 뒤로 모이기 시작했다.

"훈련 시작 전까지 몸을 풀어라."

몸을 풀라고 말하며 목을 돌리는 라온의 입가에는 누구도 알기 힘들 정도로 작은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 * *

첫 임무를 완수한 후 두 달이 지났다.

라온을 보는 주변 시선이 조금 달라졌지만, 그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고, 연성검법과 가람보법의 조화에만 열중했다.

-지겹도다. 이미 익힌 검술과 보법만 반복하다니, 네놈에겐 지루하다는 감정이 없는 게냐?

'그럴 리가.'

라온이 픽 웃었다.

'중요한 훈련이니까. 참는 거야.'

기초가 중요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대부분은 알면서도 기초 단련을 포기하고 고급 무학에 몰두하는 실수를 범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경쟁심.

'내가 뒤떨어지는 것 같으니까.'

이쪽이 평범한 검술과 보법만 반복할 때 저쪽이 검기를 쓰고, 검풍을 날린다면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불안할 수밖에 없다.

'거기다 더럽게 지루하지.'

기본 검술과 보법은 단순하고 간단하다. 평범한 재능의 수련생이라고 해도 일주일이면 그 형을 익힐 수 있을 정도.

그걸 몇 달 혹은 몇 년간 반복해서 수련하는데, 즐거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라온 역시 마찬가지. 기초 검술과 보법을 계속 반복하는 건 그에게도 괴로울 정도로 힘든 일이다.

'하지만 해야 하는 일이지.'

기초를 열심히 수련하는 건 절벽에 사다리를 만드는 것과 같다.

손과 발로 오르는 녀석들이 일단 먼저 가겠지만, 훗날에는 사다리를 세운 자신이 더 높고 빠르게 절벽을 오를 것이다.

참을성만큼은 세상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라온은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개인 시간에는 항상 기초 검술과 보법, 불의 고리를 운용했다.

"와, 진짜 지겹지도 않나?"

"어떻게 연성검법만 반복하는 거지?"

"미쳤다. 미쳤어…."

"난 저렇게 못 산다. 못 살어."

수련생들은 기본 검술을 반복하는 라온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조롱이나 놀리는 게 아닌 순수한 감탄이었다.

"그러게. 어떻게 저것만 반복하냐. 머리가 반쯤 돌아간 거 아닐까?"

경쾌한 목소리에 수련생들이 뒤를 돌았다.

"허억!"

"교, 교관님!"

"이렇게 일찍 웬일이십니까?"

"안녕."

수석 교관 리메르가 씩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기본이 지겨운 건 사실이지만, 저 녀석은 높이 올라갈 거다. 기초를 끊임없이 닦은 검사 중에 위에 서지 못한 사람은 본 적 없거든."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 단상 위로 올라갔다.

"자, 모두 주목!"

리메르가 손뼉을 치고 모두의 시선을 모았다. 수련생들이 개인 수련을 멈추고 그의 앞으로 달려갔다.

"무슨 일이십니까?"

버렌이 손을 들어 올렸다. 리메르가 새벽 개인 훈련 시간에 나온 게 신기한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아, 예전에 말했어야 했는데, 깜빡한 일이 있어서."

"예? 깜빡이요?"

"또 뭘 잊으신 겁니까?"

수련생들은 별일이 아니라 생각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질문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그들의 생각을 한참 뛰어넘었다.

"6 연무장이랑 한 판 뜨기로 했거든."

"떠요? 6 연무장이랑? 서, 설마 대련한다는 말씀이십니까?"

"대련이라기보다는 전면전 느낌이지. 너희 43명과 그쪽 60명이 동시에 붙을 거야."

"언제입니까?"

버렌의 얼굴이 나무껍질처럼 굳어졌고, 다른 수련생들도 마른침을 삼켰다.

리메르는 그 표정을 즐기듯 히죽 웃었다.

"내일."

61화

6연무장과의 전투 훈련.

버렌도 들어보았던 소문이다. 2달 전에 술집에서 나온 이야기였는데, 그 뒤로 별말이 없어서 헛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일? 내일이라고?

버렌은 본인의 청각에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미친 소리를 들을 리가 없으니까.

"교관님."

"응."

"지금 내일이라고 하셨습니까?"

"응."

"루난 따라 하지 마시고. 확실하게 말씀해주십시오. 정말 내일입니까?"

"아, 그렇다니까."

리메르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당당한 표정이다.

"대련도 아니고, 전면전인데 내일?"

"숫자가 그렇게 많지는 않으니, 전면전까지는 아니고 국지전이라고 생각하는 게…."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버렌이 쿵 발을 굴렀다.

"당장 내일이 대결인데, 오늘 말해주다니, 이런 법이 어디에 있습니까! 설마 이전에 술집에서 나온 소문이 진짜였던 겁니까?"

"오, 알고 있었네. 그거 나랑 메툰 이야기야."

"이런 젠장!"

일대일 대련이면 몰라도 전면전이라면 연무장의 자존심을 건 결투다. 그걸 하루 전에 말하다니, 어이가 없어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하아, 이래서 너희들을 애송이라고 하는 거야."

리메르가 쪼그려 앉은 채로 혀를 찼다.

"전쟁이나. 전투라는 게 '안녕하세요? 우리가 지금부터 싸움을 걸겠습니다. 주의하세요!'라고 말하며 예의 바르게 시작되냐? 아니야. 대부분의 전투는 갑작스럽게, 생각지도 않은 상황에서 벌어진다."

그는 볼품없는 자세에서 주변을 압도하는 날카로운 기세를 뿜어냈다.

"일단 전쟁이 일어나면 밥을 먹다가도, 잠을 자다가도, 똥을 싸다가도 튀어 나가야 한다. 적이 누구인지, 숫자가 어떻게 되는지도 모른 채 일단 칼부터 뽑고 보는 거야. 하루 전에 알았다면 대응할 시간은 충분한 편이지."

"으음!"

"그게…."

버렌과 수련생들은 할 말이 없는지 입을 다물었다.

'맞는 말이야.'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임무도 갑작스러운 게 훨씬 많으니까.'

암살 역시 마찬가지다.

당연하게도 목표물이 집에 있을 때보다 외부에 나왔을 때 암살에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

목표물이 집에서 나와 어딘가로 떠나게 되면 그제야 계획을 짜서 움직이는 경우도 흔했다.

즉석 해서 암살 계획을 짜고, 행동하는 건 암살자에게 필수 덕목이었다.

"거기다 6 연무장도 어젯밤에 알려줬어. 너희와 별 차이 안나."

"그, 그 말씀을 미리 하시지 그러셨습니까."

"설명하기 전에 네가 화부터 냈잖아. 그렇게 화내는 거 오랜만에 본다."

리메르가 낄낄 웃었다.

"윽! 죄송합니다."

버렌이 민망한 듯 귓불을 빨갛게 물들인 채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전부 알아들었을 테니, 지금부터 설명을 시작한다."

리메르가 뒷짐을 지고 일어섰다. 나름 폼을 잡으려는 것 같았지만, 그렇게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전투 시작은 내일 새벽 6시. 우리는 43명이고, 저쪽은 60명이다. 승패는…."

"그러고 보니 왜 저쪽은 60명입니까?"

"거의 1.5배가 많은데…."

수련생들은 6 연무장 인원이 훨씬 많은 걸 듣고서 목을 바짝 세웠다.

"말했잖냐. 전쟁이라는 게 숫자를 딱딱 맞춰서 싸우는 게 아니라고. 나중에 다수의 적을 만났을 때 우리보다 많다고 비겁하다고 할 거야? 아니잖아."

"끙…."

"마, 맞는 말이긴 한데."

수련생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들은 계속 리메르에게 말리는 기분을 느꼈다.

"다시 설명을 시작한다. 우리 43명과 저쪽 60명이 동시에 움직인다. 적을 모조리 무력화시키거나, 상대 진형의 깃발을 차지하게 되면 승리. 어떻게 보면 대련보다 간단해."

그는 너무 쉽다고 중얼거리며 내일 새벽에 바로 알려주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여기라 말했다.

"음, 생각해보니까.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 같은데."

"하긴 6연무장 수련생의 절반은 여기서 떨어진 애들이니까. 직계도 없고."

"너 모르냐? 몇 달 전에 케인 님이 6 연무장에 들어가셨잖아."

"케, 케인 지그하르트 님이면 우리보다 2살이나 많으시잖아! 그 사람을 어떻게 이겨!"

"괜찮아. 그분 부상이 심해서 병상에 1년 동안 계셨어. 아직 다 회복 못 하셨을걸?"

"오, 그럼 할 만하지."

케인이 아직 부상을 회복하지 못했다는 말에 수련생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다."

버렌이 고개를 저었다.

"케인 지그하르트는 이미 부상을 모두 회복했다. 회복 중에도 오러 연공과 감각 훈련을 지속해서 지금 그의 무력은 소드 유저 상급 수준이다."

"소, 소드 유저 상급?"

그의 말에 수련생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흥, 그래서 어쩌자고. 겁나면 빠져. 케인인지 뭔지는 내가 맡을 테니까."

"겁나는 건 아니다. 정보를 말해줬을 뿐이다. 그리고 너 혼자선 무리야."

"아앙?"

마르타와 버렌의 다툼에 수련생들의 얼굴에 혈색이 돌아왔다.

"우리한테도 버렌 님, 마르타 님, 루난 님이 있잖아. 뭐, 라온도 있고."

"솔직히 어렵지 않게 이길 거 같은데? 저 두 명이 케인 님을 막고, 나머지만 쓸어버리면 되잖아."

"가능해. 우린 오웬 왕국 기사들에게도 이겼고, 이번에 임무도 완수했으니까."

수련생들은 6 연무장 수련생 정도는 가볍다고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음, 너무 쉽게 보았다간 큰코다칠 텐데."

리메르의 입꼬리가 서늘하게 올라갔다.

"검사들의 실력을 한 번에 크게 올려주는 지옥주라는 훈련이 있거든. 6 연무장 수련생들은 그 지옥주를 단 한 명의 낙오도 없이 견뎌냈어. 그것도 너희들 때문에."

"저희 때문에요?"

"최근 가문에서 가장 많은 주목을 받는 게 5 연무장이니까. 그 아이들은 너희를 따라잡기 위해서 눈에 불을 켜고 있다. 만만하게 보았다간 허무하게 질걸?"

그는 오랜만에 진지한 조언을 해주었다.

"에이! 우리는 매일매일이 지옥 주였잖아요."

"여기서 떨어진 녀석들이 강해져 봤자지. 재능이 달라. 재능이."

"그래. 우리는 지금까지 패하거나 실패한 적이 없다고."

"케인 님만 막으면 무조건 이길 수 있어!"

조언을 듣고서도 수련생들의 자만심은 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자신감 좋네."

리메르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지더라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한 미소다.

"마지막으로 전면전은 작은 전쟁과도 같다. 즉, 리더의 지시가 가장 중요하지. 내일은 전부 라온의 지시를 따르도록."

"예!"

"…예."

"알겠습니다."

평소에 라온을 따르던 수련생들은 바로 대답했고, 버렌이나, 루난을 따르는 수련생들은 한 박자 늦게 입을 뗐다.

'귀찮겠네.'

라온이 콧등을 찡그렸다. 6 연무장을 꺾는 건 어렵지 않지만, 수련생들을 통제하는 건 귀찮았다.

"오늘 훈련은 자율이다. 이곳에서 작전을 짜든 훈련을 하든 알아서 내일 전투를 준비해라."

리메르는 평소처럼 가볍고 건들거리는 분위기로 돌아갔다.

"수석 교관님. 가장 중요한 걸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버렌이 손을 들어 올렸다.

"뭐지?"

"전투가 벌어지는 위치가 어디입니까."

"아, 그거."

리메르가 손뼉을 쳤다.

"저기 본관 뒤의 북망산."

그가 라온을 내려다보며 능글맞게 웃었다. '너 북망산 잘 알잖아. 부탁해.'라는 느낌의 웃음이었다.

"후."

라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래도 리메르는 이쪽의 승리에 도박을 건 것 같았다.

상황을 최악으로 만들고, 도박은 5 연무장에 걸다니 진짜 신기한 인간. 아니, 엘프였다.

'저러니 망하지.'

매번 도박장이나, 마장에서 돈을 잃고 오는 이유가 있었다.

"그럼 난 간다."

리메르는 소풍을 떠나는 아이처럼 손을 흔들고 연무장을 떠났다.

"정렬."

라온은 한숨을 내쉬고, 수련생들을 연무장 중앙으로 모았다.

"내일 있을 단체전을 위해서 지금부터 계획을 짠다. 6 연무장의 정보를 아는 사람 있나?"

"제, 제가 좀 압니다."

수전증이 시작된 도리안이 마른침을 삼켰다.

"모두 알다시피 현재 6 연무장의 수석은 케인 지그하르트 님입니다. 저희보다 2살 많은 16살이지만, 임무에 나가셨다가 큰 부상을 당해서 1년 넘게 병상에 계셨다가 복귀하셨습니다."

"부상이라…."

"아까 들으셨던 대로 무력 수준은 소드 유저 상급이고, 인망이 있어서 현재 6 연무장 수련생은 모두 그분을 따르고 있습니다. 특히 방계 세 명이 강한데…."

도리안은 여기저기 발을 걸쳐놓은 녀석답게 6 연무장에 대한 정보를 술술 불었다.

"그 정도면 계획을 짤 필요도 없겠네."

"역시 케인 님 빼고는 무시해도 되겠어."

"그렇지. 최강자 4명 중 2명이 케인 님을 막고, 나머지는 우리끼리 쓸어버리자고."

수련생들은 히죽 웃으며 계획을 짤 필요도 없겠다고 떠들어댔다.

"확실히 케인만 막는다면 어렵지 않게 이길 수 있을 거다."

버렌도 패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지 각자 움직이자고 말했다.

"계획은 지랄. 귀찮게 머리를 쓸 필요 없이 힘으로 털어버리면 그만이야. 나한테 맡기면 혼자서라도 쓸어줄게."

마르타가 꽉 말아쥔 주먹을 들어 올렸다.

두 사람은 2달 전 임무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것 때문에 이번 전투에서는 활약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흐음…."

라온이 모두의 의견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리하자면 힘의 차이가 나니까. 전략이나, 작전은 필요 없고 그냥 밀어버리면 된다. 케인만 어떻게 해서든 막자. 이거지?"

"그래."

"어떻게 싸워도 이긴다니까."

"오전 내로 끝내고 점심이나 먹자고."

수련생들은 이미 승리한 것처럼 미소를 지었다. 조용히 있는 건 평소와 같은 루난과 할 말을 전부 쏟아낸 도리안뿐이었다.

"그래. 그렇게 하자."

라온은 수련생들을 쭉 둘러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 웬일로 시원하네."

"그럼 개인 훈련인가?"

"내일은 몇 명 쓰러뜨리나 내기할래?"

수련생들을 히죽 웃으며 개인 훈련을 하기 위해 각자 움직였다.

-멍청한 놈들이로군.

'그래.'

라온이 서늘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 녀석들은 뒤에서 쫓아오는 사람의 무서움을 전혀 몰라.'

리메르의 말대로 큰코다쳐봐야 정신을 차릴 것 같다.

* * *

같은 시간. 6 연무장.

머리와 옷에 먼지가 가득 낀 100여 명의 수련생이 연무장 한가운데 모여 있었다.

"너희는 포기율 70%가 넘는 지옥주를 전부 견뎌냈다.

6 연무장 수석 교관 메툰의 근엄한 목소리에 수련생들이 허리를 곧게 세웠다.

"그것도 너희들의 선택으로. 그 이유를 기억하나?"

"5 연무장 때문입니다!"

수련생들이 동시에 소리쳤다. 5 연무장보다 규모가 큰 6 연무장이 흔들릴 정도로 우렁찬 목소리였다.

"맞다. 가문에서 가장 많은 주목을 받고, 너희를 무시했던 오웬 왕국도 먼저 대련을 신청했던 5 연무장. 그들을 쓰러뜨리기 위해서였다."

메툰이 수련생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눈동자가 이전과는 비할 수 없이 단단해져 있었다.

"이제 그 기회가 왔다. 무시당하기는커녕 관심조차 받지 못했던 너희들이 5 연무장을 꺾을 기회가."

그의 목소리가 연무장을 울림과 동시에 수련생들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43대 60이라고 해도 가문의 모두가 그 아이들의 승리를 점칠 거다. 하지만 난 승패는 반반이라고 생각한다. 내일 너희들이 쌓아 올린 것들을 보여주고 와라!"

"예!"

수련생들이 연무장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케인 지그하르트."

메툰이 6 연무장의 유일한 직계를 불렀다. 중앙에 서 있던 금발벽안의 소년이 한 발 앞으로 나왔다.

"부탁한다."

"믿고 계십시오."

케인이라 불린 수련생이 당당한 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5 연무장 보다 6 연무장이 더 강하다는 걸 모두에게 보여주고 오겠습니다."

"그게 전부가 아니다."

메툰이 살짝 고개를 저었다.

"6 연무장의 수석인 네가 5 연무장의 수석인 라온 지그하르트를 꺾어야 한다."

"...."

"왜 자신이 없느냐?"

"아닙니다."

케인의 눈빛이 사납게 번뜩였다.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 말씀드리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 녀석은 절 이길 수 없습니다. 제 능력이 더 우위에 있으니까요."

"좋은 자신감이다."

메툰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케인만이 아니다. 모두 지금까지의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라."

"예!"

그날 6 연무장의 불은 밤늦도록 꺼지지 않았다.

* * *

"흐음…."

라온은 내일 전투가 이루어질 북망산의 지도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아는 곳이네.'

리메르를 따라 북망산에 간 이후 산 주변을 돌며 수련을 했기 때문에 주변 지리는 모두 알고 있었다. 지리적인 면에서 자신이 6 연무장보다 훨씬 유리했다.

'다만….'

애들 상태가 좋지 않아.

수련생들은 계속된 승리와 성취에 도취 되어 있다.

특히 몇 가지 일은 자신이 혼자 한 일임에도 함께 그 자리에 있었던 것만으로 본인들의 힘이 강해졌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물론 강하긴 하지.'

리메르의 교육 방식 덕분에 수련생들이 비슷한 나이의 검사나 기사보다 강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압도하거나, 무시할 정도는 절대 아니다.

보지 못한 사이에 큰 성장을 이루는 아이들의 특성상 방심했다가는 그대로 패하게 될 거다.

-그게 다 제대로 된 실전을 겪어보지 못해서 그렇다. 자신보다 약한 자에게 죽을 상황을 겪어봐야 알 수 있는 법이지.

라스가 라온의 생각을 알아차린 듯 비웃음을 흘렸다.

-그 멍청이들을 보고 있으니, 본왕이 마계 있을 때가 생각나는군. 본왕 앞에서 건방을 떨던 고위 마족 놈의 뿔을 잡아 뽑아서….

"아, 시작됐군."

-본왕이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이야기를 해주는데 또 말을 끊고….

"예에."

-끄으윽! 라온 지그하르트!

라온은 손을 휘휘 젓고 침대에 누웠다. 청각을 막고, 눈을 감았다.

뭐, 이 녀석 말도 틀리진 않지.

5연무장 수련생들에게 패배를 경험하게 해서 본인들이 특별하지 않다는 걸 알려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리메르도 어느 정도 그걸 노렸을 거다. 물론 패배하지는 않고, 패할 정도가 되었다가 이기기를 원하고 있겠지만.

'재밌겠네.'

라온이 옅게 미소를 지었다.

'딱 좋은 기회야.'

아직 자신을 따르지 않는 수련생들에게 뛰어난 지휘관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줄 기회였다.

내일 전투가 끝난 후 5연무장 수련생들은 단 한 명도 빼놓지 않고, 자신의 지시를 무조건 따르게 될 거다.

"그러면 일단은 정보를 훔쳐야겠네."

라온의 눈동자가 하늘에 뜬 달처럼 은은하게 빛났다.

* * *

다음날 북망산 동쪽 중턱.

케인 지그하르트와 6 연무장의 수련생 59명은 노란 깃발 주변으로 둥글게 모여 있었다.

"마지막으로 작전을 말한다."

케인이 북망산 지도를 보며 날카로운 음성을 흘렸다.

"5 연무장 수련생들이 있는 곳은 서쪽이다. 녀석들은 아직도 뭉치지 못했어. 라온, 버렌, 루난, 마르타 네 개의 파벌로 나뉘어 있지."

그는 5연무장의 수련생들이 아직 뭉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분명히 따로 움직일 거다. 특히 마르타는 홀로 돌진해올 거야. 던."

"예."

케인의 부름에 옆에 있던 덩치 큰 수련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습했던 대로 1조를 데리고 가서 막아. 차륜전으로 간을 보듯이 상대한다면 이길 수 있다."

"알겠습니다."

"버렌은 예리하면서도, 체계적인 검술을 사용하지. 데칼!"

"예!"

원숭이처럼 팔과 다리가 긴 수련생이 손을 들어 올렸다.

"네가 가라. 감각검을 익힌 2조와 함께라면 버렌을 꺾을 수 있을 거다. 방계와 함께 움직일 테니, 3조도 함께 데리고 가도록."

"옙!"

케인이 마지막으로 우측에 선 녹색 단발의 여자를 보았다.

"카린. 네 상대는 루난이다. 종잡을 수 없는 아이지만, 라온의 말만큼은 잘 따른다고 한다. 이곳에서 대기하다가 4조와 함께 내 지시대로 움직여."

"응."

"마지막으로 나와 5조는 여기서 대기하며 라온을 막는다."

케인 지그하르트가 지도를 들고 허리를 쭉 폈다.

"놈들의 움직임은 어떻게 파악하려고? 위치를 잘못 잡으면 다 망하잖아."

"괜찮아."

그가 자신감이 담긴 미소를 흘렸다.

"관찰안을 사용할 거니까."

관찰안은 먼 곳의 적의 위치와 기운을 느낄 수 있는 기예. 이런 국지전에서 사용하기에 최적의 능력이었다.

일대일이면 몰라도 이런 국지전에서 가장 중요한 건 정보와 탐지다. 탐지 능력은 라온이 아니라 다른 교관들과 싸워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지옥 주를 버틴 우리의 의지를 보여줄 시간이다. 오늘 이후 지그하르트 최고의 수련장은 6연무장이 될 거다!"

"우아아아아아!"

케인의 힘찬 목소리에 6연무장의 수련생들이 함성을 질렀다.

다만 주먹을 꽉 쥔 케인도, 의지를 불태우는 수련생들도 모르는 게 하나 있었다.

나무 위에서 그들을 굽어보는 붉은 눈이 있다는 것을.

62화

전투가 시작되기 30분 전.

라온을 제외한 5연무장 수련생 42명이 모두 서쪽 거점에 모였다.

"라온이 안 보이는군."

버렌이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루난. 라온은 어디 있지?"

"몰라."

나무 밑동에 앉아 있던 루난이 틱 고개를 틀었다. 안 와도 상관없는 게 아니라, 무조건 올 거라 믿는 눈빛이었다.

쯧.

버렌이 쯧 혀를 찼다. 빨리 와서 작전 지휘를 해야 할 놈이 보이지 않으니 조바심이 났다.

"일단 모여. 녀석이 오기 전에 지리라도 확실하게 익혀둬."

"예."

"알겠습니다."

수련생들 대부분이 펼쳐놓은 지도 앞에 모였지만, 마르타는 나무 위에서 과일을 먹고 있었고, 루난은 앉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너희라도 봐라. 일단 이쪽…."

버렌은 수련생들에게 적이 기습을 할 만한 장소나, 위험할 수 있는 장소를 쭉 말해주었다.

다만 그렇게 진지하게 지도와 지형은 살피지 않았다.

'뭘 해도 이길 수 있으니까.'

6 연무장에 엘리트들 몇 명이 들어왔다고 해도 대부분은 5 연무장 시험에서 떨어진 녀석들이다.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 수련해왔고, 대련 경험도 많이 쌓여서 지고 싶어도 질 수가 없었다.

수련생들이 적당히 지리를 익히고, 몸을 풀었을 때 라온이 거점으로 올라왔다.

"라온."

"수석이 지각이라니, 한심하네."

루난이 가장 먼저 달려 나갔고, 마르타는 눈을 흘겼다.

"빨리 와서 작전을 짜지 뭘 하고 있었던 거냐!"

버렌이 발을 구르며 눈매를 좁혔지만 라온은 별 반응 없이 깃발이 박힌 곳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잖아. 너희가 6 연무장에 질 일이 있겠어?"

라온은 잘려 나간 나무 밑동에 앉아 피식 웃었다. 뭔가 자신감을 주는 것 같기도 했지만, 비꼬는 것 같기도 했다.

"흠, 뭐."

"사실 그렇긴 하지."

"솔직히 상대가 약해."

"케인 님만 아니면 단숨에 쓸어버릴 수 있으니까."

다만 수련생들은 그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는지 더 높게 차오른 자심감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해서 다행이네. 그럼 각자 알아서 싸워봐."

"그, 그냥 싸우라고?"

"작전 없이?"

"그냥 이길 수 있다며. 꼴사납게 작전 같은 걸 왜 짜."

"잘 생각했어. 마음에 드네!"

살짝 당황한 수련생들의 중심으로 마르타가 뛰어내렸다.

"너희들이 나설 필요도 없이 내가 혼자 다 깨부수고 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오러를 끌어 올렸다.

"너 진심이냐?"

버렌은 눈매를 가늘게 좁히고, 라온에게 다가갔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잖아."

"음…."

라온은 물음에 버렌이 입맛을 다셨다. 솔직히 틀린 말은 아니다.

라온과 루난이 케인을 견제하는 동안 마르타와 자신이 양쪽으로 움직이면 6 연무장의 방어선은 초토화될 테니까.

"너도 너를 따르는 방계들하고 움직여. 이후는 맡기지."

"넌 뭘 하려고?"

"케인이 기습할지도 모르니, 여기서 깃발을 지켜야지."

"나도 여기 있을 거야."

라온은 뒤에 있는 붉은 깃발을 가리키자, 루난이 깃발 아래에 털썩 주저앉았다.

"좋다. 너희 둘이면 충분하겠지."

버렌은 고개를 끄덕이고, 뒤로 물러났다. 평소 그를 따르던 방계 수련생들에게 위로 가자고 지시를 내렸다.

"우리는 아래로 가자."

"임시 시험에서도 떨어진 녀석들쯤이야. 가볍지."

"하긴 진검이나 들어봤겠어?"

봉신 가문의 수련생들과 추천생들은 아래쪽으로 가자며 시시덕댔다.

삐이익!

모두가 준비를 마쳤을 때 산 정상 쪽에서 전투 시작 신호가 울렸다.

이제 한쪽의 깃발이 뜯어지지 않는 한 싸움은 끝나지 않는다.

"잠깐."

수련생들이 달려 나가려 할 때 뒤에서 라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가 뒤를 돌아보았다.

"수석으로서 마지막 작전 지시를 내린다. 너희 마음대로 하되. 상황이 좋지 않아서 후퇴하라고 명령하면 무조건 돌아오도록."

"미안하지만, 그럴 일은 없어!"

마르타가 대지를 부수며 중앙으로 내달렸다.

"이쪽도 마찬가지다. 가자!"

버렌이 방계 수련생들을 이끌고 위쪽으로 올라갔고, 추천생과 봉신 가문의 수련생들은 아래로 달렸다.

"라온. 이길 수 있어?"

루난이 깃발을 툭툭 치며 물었다.

"저대로라면 힘들지."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세 방향으로 달려가는 수련생들을 보며 눈을 내리감았다.

탈탈 털려서 돌아올 거야.

* * *

쿠웅!

마르타가 붉은 천을 본 황소처럼 정면으로 돌진했다.

'혼자서 다 처리해주지.'

다른 수련생들이 나설 것도 없다. 혼자서라도 6 연무장의 떨거지들은 모조리 쓸어버릴 수 있다.

우거진 수풀을 모조리 뚫어버리고 달려간 지 5분 정도 지났을 때 수련생 아홉 명이 보였다. 가죽 갑옷에 적힌 6이라는 숫자. 6 연무장의 수련생들이었다.

"잘 만났다!"

마르타가 혀를 핥으며 땅을 박찼다. 허공에 뜬 채로 타이탄의 오러를 둘러 주먹을 내리찍었다.

콰아아앙!

유성처럼 떨어진 주먹이 대지를 뭉개자, 6연무장의 수련생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마르타 지그하르트."

중앙에 있던 덩치 큰 수련생이 검을 들어 올리며 마르타의 이름을 불렀다.

"너희들이 선발대인가?"

마르타는 손목을 빙빙 돌린 후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귀찮으니, 한 번에 덤벼."

"던 지그하르트입니다. 저는 방계의…."

"쓰러질 놈의 이름은 필요 없어!"

"음…."

던이라 이름을 밝힌 수련생은 도발에 걸리지 않았다. 담담한 표정으로 검을 중단에 놓았다.

"좀 하긴 하나 보네!"

마르타가 피식 웃고서 던을 향해 쇄도해 검을 내리쳤다.

콰앙!

검과 검이 부딪치며 폭발하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 제자리에 선 마르타와 달리 던은 뒤로 다섯 걸음이나 밀려났고, 손을 덜덜 떨었다.

"쯧."

마르타가 튕겨 나간 던을 보고, 혀를 찼다.

'한 번에 보내려고 했는데.'

방금 일격으로 끝내려고 했는데, 던이라는 놈은 몇 걸음 물러난 걸로 자신의 검격을 버텨냈다. 쉽게 볼 상대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어렵게 볼 상대도 아니지.'

마르타가 타이탄의 오러를 끌어 올려 육체를 강화했다. 기세가 폭발적으로 상승했다.

"으음!"

"크으…."

던과 6 연무장의 수련생들이 그 기파에 신음을 흘렸다.

"귀찮게 굴지 말고, 곱게 곱게 가자!"

마르타가 흑진주 같은 눈동자를 빛내며 검을 올려 쳤다. 검에 담긴 막대한 기운이 화산처럼 폭발했다.

"3형!"

던이 검을 중단으로 내리고, 뭔지 모를 지시를 내리자, 뒤에 빠져 있던 4명의 수련생이 그의 옆으로 붙어 검을 모았다.

콰아아앙!

마르타의 검과 다섯 명의 검이 맞부딪치며 새빨간 불꽃이 치솟았다.

"크윽!"

"버텨!"

강렬한 압박에서도 수련생들은 이를 악물고 물러서지 않았다.

"피라미가 모여봤자지!"

마르타가 코웃음을 치며 검을 내질렀다. 조금 전보다 더 강한 기운이 그녀의 검날을 뒤덮었다.

콰앙!

대지가 폭발한 듯한 소리가 울리며 수련생들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후우."

"크으."

하지만 그들은 밀려날지언정 쓰러지지 않았다. 신음을 흘리며 끝까지 버텨냈다.

"오냐. 누가 이기나 한번 보자!"

마르타가 입술을 깨물고, 연속해서 검을 내리쳤다.

"2형! 5형!"

던은 방어 자세와 사람을 바꾸면서 마르타의 공격을 끊임없이 막아냈다.

"쯧, 다른 놈부터 조져주마!"

"그 정도는 당연히 대비되어 있다!"

마르타가 중앙에 서 있는 던을 피해 우측에 있는 단발머리 여자를 공격하려 했다.

하지만 던과 수련생들이 시계바늘처럼 부드럽게 회전해 그녀의 검을 막아섰다.

"크…."

마르타가 입술을 깨물었다. 대비했다는 놈의 말대로 다른 쪽을 공격하려고 하자마자 수련생이 물러서고, 던이 앞으로 나왔다. 안으로 파고들 수가 없었다.

'막는 연습만 한 건가?'

방어 연습만 해댄 건지 수비가 바위처럼 단단했다. 어설프게 공격했다간 오러만 동날 것 같았다.

"후, 귀찮게 하네."

마르타가 한 발 뒤로 물러서서 타이탄의 오러를 전력으로 끌어 올렸다. 손에 든 검이 세차게 진동하며 옅은 황색 빛을 펼쳐냈다.

"나름 한다는 건 인정해주지. 하지만 여기까지다."

"10형!"

던은 대답하지 않고, 지금까지 부르지 않았던 번호를 외쳤다. 여덟 명의 수련생이 모두 던의 뒤에 붙었다.

"소용없어!"

마트타가 땅을 박차고, 검에 가득 담긴 타이탄 오러를 수직으로 쏟아부었다.

"뒈져!"

"버텨라!"

던의 외침과 동시에 수련생들의 몸이 같은 빛으로 번쩍였다.

콰아아아앙!

산을 울리는 굉음이 터지고, 바닥의 흙모래가 분수처럼 비산했다.

"허!"

떨어져 내리는 모래비 속에서 마르타가 눈을 부릅떴다.

"버텼다고?"

던과 수련생들은 거친 숨을 내쉬고, 뒤로 사정없이 밀려났지만 단 한 명도 떨어져 나가지 않고, 자신의 전력을 받아냈다.

"이런 미친 새끼들이!"

"흐아압!"

마르타가 눈에 광기를 담고 연속해서 검을 내리쳤다. 던과 수련생들은 비틀거릴지언정 검을 놓지 않았다.

"이 자식들…."

"세상의 주인공은 너만이 아니다."

"뭐?"

"우리도 피땀을 흘리며 노력해왔다. 쉽게 이길 생각하지 마라!"

마르타의 이마에 힘줄이 섰다.

"시끄러워!"

악을 내지르며 검을 휘둘렀다.. 남은 기운을 끌어모았지만, 던의 방어를 뚫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방어가 점점 더 단단해지는 것 같았다.

"이익!"

"우리는 네 오러와 검술을 막기 위해 계속 합을 맞췄다. 검진만 유지된다면 절대 지지 않아."

"검진…."

놈들이 검진을 이뤘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걸 힘으로 깨부수려 했는데, 이렇게까지 막힐 줄은 몰랐다.

'위험한데….'

마르타가 검을 옆으로 빼며 눈매를 좁혔다. 방금 너무 많은 기운을 사용했는지 오러가 떨어지고 있었다.

반면 아홉이 뭉쳤기 때문인지 6연무장 수련생들은 오러의 회복 속도도 빨랐다.

'시간을 좀 끌어야겠어.'

좋아하지 않는 방법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힘이 빠지고 있다. 산개!"

조금 물러나서 오러를 회복시키려고 할 때 던이 검을 들고 앞으로 돌진해왔다. 눈치가 더럽게 빠른 놈이다.

"감히!"

마르타는 뒤로 빼던 검을 휘돌려 던의 머리 위로 내리찍었다.

쩡!

던이 이를 악물고 충격을 버텨냈다. 손이 바르르 떨렸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지금이다!"

그의 지시에 4명의 수련생이 상하좌우로 검을 날려왔다.

"칫!"

마르타가 검날을 비틀어 수련생들의 검을 모조리 튕겨냈지만, 공격은 물밀듯이 계속되었다.

'틈이 없어.'

검을 휘두르면 던이라는 놈이 방어하고, 나머지가 다시 공격해온다. 톱니바퀴처럼 이어지는 전개에 숨 쉴 틈이 없었다.

'젠장!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어!'

너무 쉽게 봤다. 떨거지라 생각했는데, 이 정도로 준비했을 줄은 몰랐다.

쩌엉!

빈틈을 노리고 내지른 검이 던이라는 놈에게 또 튕겨 나갔다.

"후우…."

마르타가 쏘아지는 검날을 피해 거친 숨을 뱉었다.

'망할!'

상황이 좋지 않기 때문일까. 라온의 말이 생각났다. 너희라면 무조건 이길 수 있지 않냐는 말이.

'그 새끼. 다 알고 있었을 거야.'

자신이 이렇게 고전할 걸 알고 비꼬았던 게 분명했다.

'그러니 무조건 이겨야 하는데.'

마르타가 주먹을 바득 쥐었다. 어떻게든 뚫어서 라온의 코를 납작하게 해줘야 하는데, 길이 보이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이대로 패배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전투 중에 다른 생각을 하는 거냐!"

상대를 어떻게 꺾을지 고민할 때 방어만 하던 던이 들소처럼 돌진해왔다.

쾅!

강렬한 어깨 박치기에 마르타가 뒤로 튕겨 나갔다.

"지금이다!"

던의 지시에 수련생들이 자세를 잡지 못한 마르타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좋다! 여기서 쓰러지더라도 너희들은 조진다!"

마르타가 검을 거꾸로 들고, 짐승처럼 달려들려고 할 때 바닥에서 은빛 냉기가 피어났다.

"이, 이건!"

수풀 뒤쪽에서 보라색 눈동자를 반짝이는 루난이 튀어나왔다.

"네, 네가 왜 여기에…."

"라온이 후퇴하래."

루난이 검으로 반원을 그리자, 땅에 그려진 냉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안 돼!"

"명령."

"난 아직 지지 않았…."

"명령."

"크으, 제기랄!"

마르타는 루난의 투명한 눈을 보고 손을 내렸다. 입술을 씹으며 물러섰다.

루난은 서리로 갈라놓은 던과 수련생들을 잠시 보다가 마르타의 뒤를 쫓아갔다.

"그 마르타가 물러나다니!"

"이, 이겼어! 우리가 이겼다고!"

"와아아아!"

수련생들은 지옥 주를 버틴 보람이 있다고 소리치며 환호를 질렀다.

6 연무장 수련생들의 환호는 중앙만이 아니었다. 버렌이 있던 위쪽과 방계 수련생들이 움직였던 아래에서도 들려왔다.

쿵!

수련생들이 승리의 환호를 지르고 있을 때 나무 위에서 케인 지그하르트가 뛰어내렸다.

"케인 님!"

던이 활짝 웃으며 케인에게 달려갔다.

"수고했어."

"다른 곳도 이겼습니까?"

"그래. 예상대로 라온과 루난은 움직이지 않았고, 세 곳 모두 우리가 이겼다."

"우와아아아!"

"진짜 이기다니!"

"아, 실감이 안 나네."

수련생들은 서로 얼싸안으며 환한 웃음을 터트렸다.

"아직 기뻐하긴 일러."

케인이 손을 들어 올리자, 수련생들의 웃음이 뚝 그쳤다.

"적의 깃발을 뽑을 때까지는 방심해선 안 돼."

그의 푸른 눈동자가 별빛처럼 반짝였다.

"마지막까지 계획대로 간다."

* * *

라온은 자신의 앞에 선 5 연무장 수련생들을 차례로 훑어보았다.

땀과 흙이 뒤덮여 거지꼴이었고, 근육이 떨렸으며, 눈동자에는 당황이 그대로 드러났다. 패잔병들의 모습 그 자체였다.

뒤늦게 온 버렌과 방계 수련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체계적인 검술을 익힌 버렌은 감각검을 익힌 수련생들에게 막혀 본래 능력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계속 밀리기만 했을 거다.

"어땠지? 예상대로 쉬웠나?"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버렌은 입술을 깨물었고, 마르타는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다른 수련생들도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땅만 내려다보았다.

"너희들이 착각하고 있는 게 뭔지 알려줄까?"

라온의 붉은 눈이 달빛처럼 이지러졌다.

"너희는 세상은 멈춰 있고, 너희만 달라진다고 생각하고 있어. '한번 이긴 상대면 또 이길 수 있겠지. 저 녀석들 대부분은 시험에서 떨어졌으니까. 오웬 왕국에게 무시를 당했으니까. 뭘 해도 우리가 이기겠지.' 이게 너희들의 생각 아닌가?'

"...."

이번에도 수련생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라온이 말했던 그대로였으니까.

"세상은 너희의 생각보다 더 빠르게 변한다. 오늘 이긴 상대에게 내일 질 수도 있고, 모레에는 상대가 되지 않을 수도 있지. 그런데…."

라온의 목소리가 한층 더 가라앉았다. 지하에서 올라오는 듯 등골이 오싹한 음성이었다.

"주제도 모르고 무조건 이긴다? 상대의 전략도 모르는데 꺾을 수 있다? 혼자 가서 다 꿇릴 수 있다고? 이기긴커녕 자만심에 취해 오러와 체력을 낭비하고, 가진 기술까지 보여주고 왔지. 참 대단들 해."

그의 시선이 버렌과 마르타를 지나 수련생 한 명 한 명을 직시했다. 수련생들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사자는 토끼를 잡을 때도 전력을 다한다. 하지만 너희는 사자가 아니고, 저들은 토끼가 아니야. 저 수련생들도 매일매일 삶을 갈아 검을 닦은 검사다. 조금 앞서 있다고 무시할 자들이 아니야."

"크으…."

"으윽…."

버렌과 수련생들이 고개를 푹 숙였다. 창피한지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마르타도 인상을 구길 뿐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럼 지는 거야?"

뒤에 서 있던 루난이 옆으로 다가왔다.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지."

라온의 덤덤한 말에 수련생들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네, 네 말대로 우리는 많은 체력과 오러를 소모했는데?"

"이미 떨어진 녀석도 4명이나 되고."

"이건 일대일 대련이 아니라, 단체전이다. 너희들이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렸다면 기회는 있어."

"정말이냐?"

"그 바위 같은 놈을 뭉갤 수 있다면 뭐든 하겠어!"

버렌과 마르타가 뿌득 소리가 나도록 주먹을 움켜쥐었다. 수련생들의 눈동자가 다시 빛나기 시작했다.

"아직 눈은 살아 있네."

라온은 열기가 피어나는 수련생들의 눈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너희들이 이길 방법을 알려주지."

63화

"너희들이 왜 졌다고 생각해?"

라온의 나지막한 물음에 수련생들은 입을 열지 못했다.

"무력? 인원? 판단? 모두 아니야. 저쪽의 인원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무력과 전투 경험은 우리가 위지. 일방적으로 밀릴 수가 없었는데, 왜 졌을까?"

"…정보인가?"

버렌이 천천히 입을 뗐다.

"잘 알고 있네."

라온이 버렌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6 연무장은 우리 개인의 성격과 무력 수위 그리고 북망산의 지형을 모두 파악해두고, 각각의 상대에 맞는 전략을 짰다. 반면 우리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지. 당연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말이야."

"하, 하지만 시간이…."

"시간이 없긴 했지만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야. 솔직히 말해서 하루면 최소한의 정보는 파악할 수 있는 시간이다. 리메르 교관도 그 능력을 키우라고 일부러 하루 전에 알려줬던 거고."

라온은 수련생들을 차례로 훑으며 코웃음을 쳤다.

"거기다 너희는 시간이 없다고 포기한 게 아니라, 가볍게 이길 수 있다고 마음을 놓았잖아. 시간은 핑계가 안 돼."

"윽!"

"그, 그게…."

수련생들은 뚫린 입으로도 말을 하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5 연무장 수련생 개개인이 강하다고 해도 저들과 압도적인 차이는 아니야. 미리 전략을 짜둔 6 연무장에게 패한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이미 다 끝난 게…."

"끝나기는 무슨! 입 닥쳐."

"흡!"

마르타가 인상을 찌푸리자, 손을 떨던 도리안이 입을 합 다물었다.

"실제로 당한 사람도 있고, 체력과 오러도 많이 빠졌지. 불리한 건 사실이야. 다만…."

라온이 6 연무장 수련생들이 공격 준비를 하고 있을 곳을 보며 두 눈을 빛냈다.

"정보가 있는 건 저들만이 아니지."

"너 뭔가를 알고 있던 거냐?"

"6 연무장의 수석 케인 지그하르트가 지금까지 모든 지시를 내렸다. 너희에게 상성에 맞지 않는 적을 붙여준 것도 그의 솜씨지."

"케인 지그하르트? 그 녀석이 어떻게?"

마르타가 이를 바득 깨물었다.

"케인 지그하르트는 시야와 감각이 뛰어나. 멀리서 너희들의 이동 방향을 파악한 뒤 상성에 맞는 수련생들을 보낸 거다."

"크윽, 케인 지그하르트…."

자존심이 구겨진 버렌이 신음을 흘렸다.

"단순한 투로에 힘과 맷집이 좋은 마르타에겐 공격을 버틸 수 있는 검사를 보내서 오러를 소모 시키게 만들었고. 정직하고, 체계화된 검술을 사용하는 버렌에겐 감각검을 익힌 검사를 보내 손을 쓸 수 없게 만들었지."

라온은 왜 5 연무장이 밀릴 수밖에 없었는지를 정확하게 말해주었다.

"그럼 이길 방법은 뭘까? 간단해. 상대를 바꾸면 된다. 버렌과 마르타가 서로의 상대를 바꾼다면 어렵지 않게 이길 수 있지."

"그건 안 돼! 그런 식으로 이기면 화병 나서 못 견뎌!"

"…미안하지만 나도 마찬가지다. 도망쳐서 얻을 승리 따위는 의미가 없어."

마르타와 버렌 그리고 방계 수련생들이 모두 입을 꽉 다물었다.

"그래. 그럼 두 번째 안이다."

라온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공격 방식을 다르게 한다."

"공격 방식?"

"마르타가 상대한 검진은 분명 단단하지만, 오러의 이동이 미흡해. 감각을 열어서 오러의 이동을 끝내지 못한 곳을 치면 어렵지 않게 뚫을 수 있을 거다."

마르타에게서 고개를 돌려 버렌을 보았다.

"완벽과 체계를 추구하는 네 검은 생각 없이 그저 본능적으로 휘두르는 감각검의 좋은 먹이가 된다."

"음…."

버렌이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각검은 본능에 의지하는 검술이라, 가짜 초식에 속는 경우가 많다. 미끼로 던진 허초에 상대가 뛰어들 때를 노려. 너라면 할 수 있을 거다."

수련생들은 튀어나올 것처럼 눈을 크게 뜨고 라온을 바라보았다.

"뭐, 뭐야?"

"넌 여기에 있었잖아."

"그걸 다 어떻게 알았어?"

"도대체가…."

이곳에 가만히 앉아만 있던 그가 모든 전장을 파악하는 모습은 6연무장에 패배한 것 이상으로 경악스러웠다.

"너 대체 뭐 하는 놈이냐?"

"무슨 감각이…."

마르타와 버렌도 놀랐던지 입을 떡 벌렸다.

"그런데 저쪽의 작전이 바뀌면 어떻게 합니까?"

도리안이 손을 올리고 질문했다. 겁이 많다 보니 걱정되는 것도 많은 것 같다.

"네 말도 일리가 있지만, 저들의 작전은 변하지 않아."

"어째서요?"

"이미 한 번의 성공을 맛봤으니까. 그 달콤함을 아는 녀석들은 더 완벽한 승리를 위해 같은 작전을 반복할 거다."

확신을 담은 라온의 눈빛에 수련생들의 머리가 쭈뼛 섰다.

"그런데 케인의 감각이 좋다며 놈이 빠르게 반응해서 중앙이나, 위쪽에 지원을 가면 어떻게 하려고?"

"괜찮아. 내 감각이 케인보다 더 좋으니까.

라온이 중앙에 있는 케인의 기척을 느끼며 빙긋 웃었다.

"그리고 그는 이쪽으로 오게 될 거야."

* * *

6 연무장 수련생들을 살피고, 5 연무장 거점으로 온 메툰이 인상을 찌푸렸다.

"거만한 아이로군."

라온 지그하르트가 침착하고 냉정하다는 소리를 들어 조금 걱정했는데, 그럴 필요 없을 것 같다.

'케인보다 감각이 좋다니, 어이가 없어.'

케인 지그하르트의 가장 큰 장점은 뛰어난 검술이나, 막대한 양의 오러가 아니다.

감각.

그는 상대의 기척과 상태를 읽는 감각과 시야가 굉장히 뛰어났다.

숨어 있는 교관의 위치마저 찾을 정도이니, 그의 감각은 이미 수련생 수준을 벗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라온이 그런 케인보다 감각이 좋다고 말했다. 솔직히 코웃음만 나왔다.

"금방 끝나겠어."

라온과 5 연무장의 태도를 보니 예상보다 훨씬 쉽게 승리를 가져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이들 회식이나 준비해주어야겠군.'

승자에겐 마땅한 보상이 따르는 법. 메툰이 6 연무장 수련생들에게 맛있는 회식을 열어주겠다고 생각하며 돌아가려 할 때였다.

"거만한 건 너 아니냐?

등 뒤에서 바람을 탄 듯 경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메툰은 당황하지 않고, 뒤를 돌아보았다. 붉은 머리칼의 엘프가 능글맞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제야 나타난 거냐."

"아니, 아까 전부터 와서 구경하고 있었지."

"지각해놓고 핑계를 대는 건 여전하군."

"아니라니까."

메툰은 리메르의 가벼운 목소리에 인상을 찡그렸다.

"그런데 방금 한 말은 무슨 뜻이지?"

"방금 한 말?"

"나한테 거만하다고 했잖느냐."

"아, 그거."

리메르가 목을 긁으며 픽 웃었다.

"이쪽은 아직 칼도 안 뽑았는데, 싸움이 끝났다고 하니 거만하다는 말이 안 나올 수가 없지."

"칼도 안 뽑았다? 너희는 정면으로 부딪쳤고 이미 깨졌다. 체력도 오러의 소모도 이쪽보다 훨씬 심하지. 가망이 없다."

"그건 네 생각일 뿐이고."

"너도 그렇고 저 아이도 그렇고 허세를 부리는 건 똑같군."

메툰은 수련생들에게 작전 지시를 내리는 라온과 리메르를 차례로 보며 고개를 저었다.

"케인은 교관들의 기척도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감이 좋다. 이 작은 전장에서 녀석보다 뛰어난 전략을 제시할 수 있는 수련생은 없어. 기척을 파악하기는커녕 이대로 끝날 거다."

"교관의 기척을 파악한다라…."

리메르가 히죽 웃으며 말꼬리를 길게 늘어뜨렸다.

"라온은 교관이 아니라, 내 기척도 파악한 적 있는데."

"뭐?"

"네가 거만하다고 무시한 라온 지그하르트가 내가 숨어 있던 곳을 찾은 적이 있다고."

"거, 거짓말!"

메툰의 눈빛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말이 안 돼.'

단전을 다쳤다고 해도 리메르는 엘프다. 기척을 감추고 숨으면 자신조차 찾기 힘든데, 저런 어린 수련생이 감지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난 거짓말 안 해."

"개소리 마라. 네 말 중 거짓말이 아닌 걸 찾는 게 빠를 테니까."

"아, 그럼 수정하지. 난 저 아이들에 관해서는 거짓말 안 해."

리메르가 고개를 끄덕이고 씩 웃었다.

"음…."

메툰이 침음성을 삼키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설사 네 말대로 라온 지그하르트가 케인보다 뛰어난 감각을 가졌다고 해도 이미 늦었다. 승패는 이미 기울었어."

"뭐, 확실히 힘들긴 하지. 넷이 탈락했고, 대부분 힘이 빠졌으니까. 그렇지만 라온은 날 실망시킨 적이 한 번도 없거든."

리메르가 수련생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라온을 보면 피식 웃었다.

"네 제자들이 너처럼 마음을 놓고 있다간 순식간에 잡아 먹힐걸?"

* * *

한 번의 승리를 경험한 6 연무장의 수련생들을 아침과 똑같이 원을 그리고 모여 있었고, 그 중심에는 북망산의 지도와 케인이 있었다.

"이곳에 5 연무장의 깃발이 있다."

케인이 손가락으로 서쪽 끝을 가리켰다.

"거기만 치면 끝이로군."

"진짜 5 연무장을 이길 수 있다니, 노력한 보람이 있네."

"이 일이 끝나면 모두 우리를 다시 보겠지."

수련생들은 벌써 결투가 끝난 것처럼 입가에 웃음을 그렸다.

"아직 기뻐할 때가 아니라고 말했잖아."

케인이 발을 굴러 들뜬 수련생들의 시선을 모았다.

"라온 지그하르트 그리고 루난 슬리온이 건재하다. 특히 라온은 5연무장에서 가장 강한 녀석이지. 마음 놓았다간 당하게 될 거다."

"하지만 버렌과 마르타는 많은 힘을 소모했고, 저쪽 수련생 넷이 이미 탈락했잖아요."

"유리한 건 사실이지만 방심하지 말라는 거다."

"아까처럼 케인 님이 저쪽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지시를 내리면 간단하게 이길 수 있을 겁니다."

"그래요. 믿고 있습니다!"

"음, 그렇긴 하지만…."

수련생의 말에 케인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냉정한 척하지만, 아직 성숙하지 못한 모습이 드러났다.

"어쨌든 방심은 금물이다. 끝까지 전력을 다해서 싸워."

"알겠습니다!"

수련생들이 우렁차게 대답하고 일어섰다.

"그럼 녀석들이 움직일 방식은 두 가지… 음?"

지도를 가리키던 케인이 서쪽을 보며 눈을 치켜떴다.

"온다."

"네?"

"5 연무장 수련생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어."

"어떻게요?"

케인은 대답 없이 눈을 감았다. 감각을 열어 다가오는 수련생들의 기운을 느끼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까와 같아. 마르타가 중앙, 버렌이 위, 나머지가 아래다."

"아직 정신 못 차렸네."

"지고 싶다고 빌면 지게 해줘야지."

"라온도 버렌과 마르타는 통제 못 하는 건가?"

"다 끝났네."

수련생들은 부나방처럼 달려드는 5연무장 수련생들을 비웃었다.

"처음 계획대로 간다. 버렌 지그하르트와 방계들은 데칼과 2, 3조가 마르타는 던과 1조 그리고 아래는 푸욘. 나와 카린은 라온과 루난을 대비한다."

"알겠습니다!"

6연무장 수련생들이 우렁차게 대답한 뒤 정해진 상대를 꺾기 위해 달렸다.

"이쪽도 끝낼 준비를 하자."

케인이 일어서며 뒤를 힐끗 보았다. 카린이 고개를 끄덕이고 검을 뽑았다.

"그럼 어느 쪽이 제일 먼저…음?"

그는 아래쪽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루난도 움직였군.'

아래 방향에서 냉기의 기척이 느껴졌다. 루난 슬리온이었다.

"카린."

"맡겨주세요."

카린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루난이 움직인 방향으로 달려 내려갔다.

'카린이라면 막을 수 있겠지.'

카린은 루난과 같은 상위 봉신가의 후계자다. 루난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 쉽게 밀리진 않을 거다.

쾅! 콰앙!

중앙에서 묵직한 바위가 맞부딪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마르타와 던이 다시 격돌하는 소리였다.

쿠어아앙!

얼마 지나지 않아 위쪽에서도 버렌과 데칼이 부딪치는 쨍한 소리가 울렸다.

"자아, 보자."

케인은 호위 두 명을 세운 뒤 눈을 감고, 기감을 넓게 열었다.

혹시라도 밀리는 곳이 있다면 지원을 보내야 하기에 위, 중앙, 아래 전부 오러를 뿌려 전투 상황을 파악했다.

어?

세 방향을 모두 살핀 케인이 눈을 부릅떴다.

"뭐, 뭐야! 왜 다 지고 있어!"

위, 중앙, 아래할 거 없이 모두 5연무장에 밀리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있나?"

오전과 똑같은 상대와 싸우는데 일방적으로 밀리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라온 지그하르트.'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64화

마르타 지그하르트는 전방을 향해 달리며 라온에게 들은 지시를 생각했다.

-너와 방어 검진의 상성은 좋지 않아. 상대를 바꾸는 게 가장 좋다.

'절대 안 해!'

상대에게 도망치라는 말에 바로 욕설을 내뱉었다. 라온은 당황하지 않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른 지시를 내리지. 검진을 부숴라.

-검진을?

-상대의 검진은 완벽하지 않아. 아니 완벽할 수가 없지. 수련생 수준이니까.

-어떻게 완벽하지 않다는 건데?

-그들은 9명의 오러를 응집시켜서 널 막았다. 즉, 검진 내부에서 오러의 이동이 일어난다는 뜻이지.

-그러면….

-그래. 그 틈을 노린다면 많은 오러를 소모한 지금의 힘으로도 검진을 부술 수 있다.

그 말에 등줄기로 소름이 돋아올랐다.

'이놈은 뭐지?'

앉은 자리에서 적의 약점을 파악하고, 공략법을 내놓다니, 뭐 이런 괴물이 있나 싶었다.

-나는 약점이 아니라, 정면에서 이기길 원하는데.

라온의 말에 압도되기 싫어서 생각과는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그래. 제 체력을 찾고, 오러를 회복한다면 이길 수 있겠지. 넌 뛰어나니까. 하지만 지금 당장은?

역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체력과 오러가 떨어진 지금 그 체력 괴물들을 이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말했듯이 이건 일대일 대련이 아니라, 팀의 대결이다. 선택해. 확신도 없는 승리를 위해 자존심을 선택할지 팀의 승리를 선택할지를.

그 말을 들은 마르타는 대답 없이 일어섰다.

'예전이라면 그런 말 따위 무시했겠지.'

라온에 패배하기 전 자만으로 넘치던 시절이라면 녀석이 뭐라 지껄이더라도 계속 싸웠을 것이다.

하지만 한 번의 패배를 경험했고, 이번에는 두 번째 패배를 당할지도 모른다. 지는 것보다는 어떻게든 이기는 게 나았다.

'던이라고 했었지.'

멀리서 아까 싸웠던 던이라는 놈이 보였다. 바위처럼 단단한 기세는 여전했다. 당장에 주먹으로 깨부수고 싶었지만, 어금니를 깨물며 참았다.

"이길 수 없다는 걸 알고도 온 건가? 멍청하군."

"주둥이를 함부로 놀렸다간 다치게 될 거야."

옛날의 나처럼.

마르타가 땅을 박차고 던에게 뛰어들었다.

"4형!"

뒤에 있던 수련생들이 던의 옆으로 붙으며 오러를 모았다.

"음!"

마르타는 들어 올린 검을 내리치지 않고 기감을 펼쳤다.

6 연무장 수련생들의 오러가 던에게 모여드는 게 느껴졌다.

'정말 느리잖아.'

라온의 말대로다. 오러의 크기가 크다 보니, 그 움직임이 굼벵이처럼 느렸다.

"흐읍!"

마르타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우측으로 돌았다.

"소용없다!"

던은 허리를 돌려 앞을 막아섰다. 이전과 같은 구도. 하지만 다른 점도 있었다.

무지성으로 검격을 때려 박던 마르타가 아직 오러가 응집되지 않은 던의 우측 옆구리를 향해 검을 내리친 것이다.

콰아앙!

검과 검이 맞부딪치며 강렬한 파동이 일어났다.

그 충격에 마르타가 뒤로 밀려났지만, 뿌리 깊은 나무처럼 단단하던 던과 수련생들의 검진도 크게 출렁였다.

"크흡!"

"크으…."

던과 수련생들이 신음을 흘리며 흔들리는 검진을 다잡았다.

마르타의 눈동자가 흑진주처럼 번쩍였다.

'그 녀석의 말이 맞았어.'

라온의 말대로다. 아직 오러가 모이지 않은 곳의 방어력은 다른 곳보다 확연히 낮았다.

"정말 이게 공략법이었군."

헛웃음이 나왔다.

공략법이 너무 쉬워서?

아니다. 깃발이 꽂혀 있는 거점에서 저 검진의 약점을 알아본 라온 지그하르트. 그 괴물 녀석에게 소름이 돋았기 때문이다.

"한 번 우위를 점했다고 자만하지 마라!"

"한 번? 지랄하네. 앞으로 계속이다!"

마르타가 기합을 내지르며 앞으로 뛰어들었다.

공격하는 척하며 좌측으로 빠진 뒤 오러를 이동시키지 못한 던의 하체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쩌어엉!

던이 재빠르게 검을 내리찍었지만, 상체가 크게 흔들리며 검진을 이룬 수련생들이 옆으로 튕겨 나갔다.

"이제 다 끝났어!"

마르타가 야수와 같은 기세를 뿜어내며 검진이 깨진 던을 향해 달려들었다.

* * *

버렌은 검을 든 손목을 빙글 돌리며 고개를 들었다.

방계에서 손꼽히는 수련생 데칼이 사나운 눈빛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까는 졌지.'

데칼과 일곱 명의 수련생이 동시에 달려들고, 검술을 파훼하는 감각검을 사용하니 놈들을 이겨낼 방법이 없었다.

인원이 차이 나다 보니, 다른 녀석들도 도와줄 상황이 되지 않아서 계속 밀리기만 했다.

5 연무장을 쓰러뜨리기 위해 확실한 계획을 짰다는 게 정말이었다.

'이젠 그냥 당하진 않아.'

후퇴는 한 번으로 족하다. 쓰러지더라도 저놈들을 모조리 때려눕힐 것이다.

"천하의 버렌 지그하르트 님이 도망치다니. 역시 다굴에는 장사가 없나 봅니다."

데칼이 씩 웃었다.

"이번에는 검사답게 끝까지 싸워주시길 바랍니다!"

그의 손짓에 뒤에 있던 수련생들이 쥐떼처럼 달려들었다.

"흐아압!"

데칼 역시 중심을 파고들어 검을 내질렀다.

여덟 명이 휘두르는 검은 조화롭지는 않았지만, 하나하나가 가장 약한 빈틈을 노려왔다.

"후욱!"

버렌이 오러를 끌어 올리며 보법을 밟았다. 물 흐르듯이 옆으로 움직이며 현상 검법을 펼쳤다.

그의 검이 우측의 데칼을 노리고 휘어졌다.

"지금이다!"

"몰아쳐!"

버렌의 검이 뻗어나가는 순간을 노리고 감각검을 익힌 수련생들이 안으로 파고 들어왔다.

하지만 그건 버렌이 깔아놓은 함정이었다.

퍼어억!

데칼을 노리던 수련검이 초승달처럼 휘어지며 안으로 들어온 수련생들의 팔목과 가슴을 후려쳤다.

"크헉!"

"아악!"

순식간에 두 명의 수련생들이 손목과 가슴을 부여잡고 바닥을 뒹굴었다. 상태를 보니 저대로 이탈이다.

"흐읍!"

버렌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가람 보법을 밟아 이동하며 다시 현상 검법을 내리쳤다.

어깨 전체를 사용하는 큰 동작에 세 명의 수련생들이 본능처럼 빈틈을 찔러왔다.

'걸렸어.'

버렌의 푸른 눈동자가 번쩍였다. 팔꿈치가 부드럽게 휘어지며 다가온 수련생들의 가슴을 사정없이 찍어버렸다.

뻐어어억!

한 번의 검격으로 세 명의 수련생들이 날아갔다.

"크헉!"

"으윽…."

끝에 맞은 녀석은 일어섰지만, 두 명은 이미 기절한 상태였다.

"이, 이런!"

데칼이 뒤늦게 쫓았지만, 버렌은 옆으로 물러난 상태였다.

"대, 대체 뭡니까! 갑자기 허초를 섞다니!"

"그러게 말이야."

버렌이 콧등을 찡그렸다.

'허초를 섞는 것만으로 이렇게 달라질 줄이야.'

감각검은 체계가 아닌, 본능에 의지하는 검술. 아직 완성에 이르지 못한 수련생들은 허초에 낚여서 파닥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놈은 이걸 어떻게 안 거지?'

라온은 분명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서 모든 상황을 내려다보는 녀석의 감각과 지식에 닭살이 돋았다.

'마르타도 나와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겠지.'

아마 이 아래에서 싸우고 있는 마르타도 똑같은 생각을 할 게 뻔했다.

'양파 같은 놈.'

라온은 이만큼 알았다 싶으면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양파처럼 까도 까도 색다른 녀석이다.

"아직 안 끝났습니다!"

"흐아압!"

데칸이 이를 악물고 달려들었다. 남은 3명의 수련생들도 함께 돌진해왔다.

후우웅!

버렌이 검을 앞으로 내질렀다. 위력은 강했지만, 여러 개의 빈틈이 보일 정도로 동작이 컸다.

"허초다. 신경 쓰지 마! 어?"

데칼이 눈을 부릅떴다. 무시하고 나아가려 했지만, 버렌이 펼친 검격의 궤도는 변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진짜다."

"이, 이런!"

뒤늦게 수비로 전환했지만, 이미 늦었다.

콰아앙!

막강한 위력의 검격에 데칼이 수련검을 부러뜨린 채 뒤로 날아갔다.

"대결은 이미 끝났다."

버렌이 남은 수련생들을 보며 푸른눈을 빛냈다.

"우리가 이겼어."

그 괴물이 있는 이상 5 연무장은 질 수가 없다.

* * *

"이, 이게 뭐야!"

메툰은 동시다발적으로 밀리기 시작하는 6 연무장 수련생들을 보며 튀어나올 정도로 눈을 부릅떴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한곳이 밀리는 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위, 중앙, 아래 세 곳이 모두 밀리고 있었다. 그것도 한 번씩 이겼던 상대들에게.

"내가 말했잖냐. 아직 안 끝났다고."

옆에 드러누운 리메르는 얄밉게 하품을 하며 중얼거렸다.

"너 무슨 짓을 했지?"

"내가 한 게 아니라, 라온이 했지."

"뭐?"

"네가 보기 전에 라온이 저 녀석들에게 조언을 했거든. 그게 잘 먹혀든 거지."

"고작 수련생의 조언 하나에 상황이 이렇게 바뀐다고?"

"고작 수련생이 아니라, 라온의 조언이니까."

리메르가 피식 웃으며 홀로 깃발을 지키고 있는 라온을 가리켰다.

"수련생 중에 라온을 따르지 않는 녀석도 있고, 라온을 싫어하는 녀석도 있지만, 저 녀석의 무력과 판단은 모두 믿어. 아마 오늘 이후에는 신의 목소리처럼 따르겠지."

"으음…."

메툰이 신음을 흘렸다. 그 말대로라면 신뢰를 받고 있다는 뜻이다.

다만 신뢰를 얻은 것보다 그의 조언이 확실하게 먹혀들어 갔다는 게 더 놀라웠다.

"무슨 조언이었지?"

"궁금해? 궁금하면 금화를… 아, 알겠어."

리메르는 사정없이 굳어진 메툰의 표정을 보고 손을 저었다.

"일단 위에서는…."

그는 메툰에게 라온이 수련생들에게 해주었던 조언을 말해주었다.

"미친…."

메툰이 손가락을 바르르 떨었다.

'수련생이 어떻게 그런 조언을 할 수 있지?'

하나도 버릴 게 없는 완벽한 공략법이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건 저 먼곳에서 기감만으로 상대의 약점을 파악했다는 점이다.

리메르의 말이 맞았다. 거만한 건 라온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그는 케인보다 더 감각이 뛰어나다고 말할 자격이 있었다.

'다만.'

메툰이 움직이기 시작한 케인을 내려다보며 확신에 찬 미소를 지었다.

'대결은 아직 안 끝났어.'

* * *

깃발 아래에 앉아 있던 라온이 두 눈을 떴다.

'다 잘하고 있군.'

기척은 죽여 놓았지만, 전황을 지켜보기 위해 활짝 열어놓은 기감을 풀며 빙긋 웃었다.

데칼을 꺾은 버렌은 감각검을 익힌 수련생들을 폭풍처럼 몰아쳤고, 마르타는 검진을 깨부수고 남은 수련생들을 후려 패고 있었다.

그리고 루난은….

상대로 나온 6 연무장의 상위 수련생과 빙판 대결을 펼치는 중이었다.

'뭐. 상관없지.'

지지는 않을 것 같으니 괜찮을 것 같았다.

'자, 그럼…."

라온이 일어섰다. 가볍게 몸을 풀자, 수풀이 흔들리고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검사가 나타났다.

'케인 지그하르트.'

6 연무장의 수석이자, 자신보다 2살이 많은 직계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럴 줄 알았지.'

모든 방향에서 밀리고, 자신의 기척은 드러내지 않았으니, 저 녀석이 움직일 방향은 하나였다.

상대의 깃발을 챙기는 것.

"역시 이곳에 있었나. 라온 지그하르트."

케인이 입술을 깨물었다. 어느 정도 예상한 듯 놀란 표정은 아니었다.

"수련생들에게 마법을 부릴 줄은 몰랐다. 인정을 받지 못한다고 들었는데, 헛소문이었군."

그가 천천히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다만 여기서 끝이다."

"끝?"

"네 오러가 화속성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말과 함께 케인의 검날 위로 붉은 화염이 타올랐다.

"아쉽게도 내 오러는 최상급 화속성의 오러고, 오러량은 정식 검사 이상이다. 상성 상 넌 날 이길 수 없다."

"상성이라."

라온이 픽 웃으며 검을 뽑았다. 검날을 빨갛게 물들이던 만화공의 기운이 작은 꽃을 피워냈다.

화아아!

케인의 검에 타오른 불꽃보다 훨씬 작았지만, 색의 진하기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 가문은 싸우기 전에 참 말이 많다니까."

라온이 불꽃과 같은 색의 눈동자로 선언했다.

"덤벼. 불꽃 한 송이가 네 불길을 집어삼키는 걸 보여줄 테니까."

65화

메툰은 야생동물 수준으로 기척을 죽인 라온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라온은 일부러 실력을 죽이고 있었던 건가?"

"숨긴 게 아니라 애들 정신 좀 차리게 해주려고 한 거지."

리메르가 흥하고 콧김을 불었다.

"정신을 차리게 한다고?"

"우리 애들이 요즘 주목 좀 받았다고, 본인들이 정말 강해진 것처럼 착각하기 시작했거든. 비슷한 실력을 가진 사람들이 쌔고 쌨다는 걸 모르고, 항상 앞서 있다고 자만한 거지."

그는 픽 웃으며 라온을 가리켰다.

"5 연무장 수련생 중에서 본인의 실력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건 라온 한 명이야. 그래서 좀 정신을 차리게 해주고 싶었어."

"잠깐! 그럼 너 설마 그 주점에 있었던 것도…."

"어. 일부러 네가 다니는 주점으로 갔어. 널 자극해서 5 연무장이랑 6 연무장의 싸움을 붙여보고 싶었거든."

"리메르…."

"그렇게 보지 마. 너희도 우리를 노리고 있었잖아."

리메르는 부드러운 미소를 유지한 채 메툰을 돌아보았다.

"음…."

"네가 잘 가르친 것도, 아이들의 피땀 흘린 노력도 아주 잘 보고 있었어. 앞으로 누구도 너희들을 무시하지 않을 거야."

"흥."

메툰은 콧등을 찡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살짝 얼굴이 붉어진 걸 보면 칭찬이 마음에 든 것 같았다.

"그런데 리메르 너도 착각하고 있군."

그가 쓱 고개를 돌렸다. 눈빛이 살아 있었다.

"착각? 무슨 착각?"

"아직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메툰이 쓱 손을 올려 라온의 앞에 선 케인을 가리켰다.

"라온이 익힌 오러는 중상급의 화속성 연공법으로 특별할 게 없지. 하지만 케인은 화속성 기질을 타고났고, 최상급의 연공법을 익히고 있다. 상성 상 라온은 케인을 이길 수 없어."

메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케인의 칼날 위로 뻘건 불길이 타올랐다.

"아, 또 이렇게 실수를 하는군."

"알았으면 됐다. 결과는…."

"아니, 나 말고 너 말이야."

리메르가 낄낄 웃었다. 슥 고개를 돌려 검을 뽑기 시작한 라온을 가리켰다.

화악!

라온의 검날 위로 작디작은 불꽃이 솟아올랐다.

"잘 보고 있어."

리메르의 눈동자가 라온의 칼날 위에 치솟은 불길처럼 빨갛게 타올랐다.

"작은 불이 큰불을 먹어 치우는 모습을."

* * *

케인 지그하르트는 라온의 칼에 솟구친 작은 불꽃을 보고 눈매를 좁혔다. 한 송이 꽃처럼 아름답지만, 너무도 작았다.

'작아.'

칼날의 끝만 겨우 덮을 정도로 작은 불꽃. 누군가를 베기에도 힘들 정도로 옅은 불길이었다.

'그래도 무언가가 있는 건 분명해.'

5 연무장의 수석을 땅따먹기로 땄을 리는 없으니까.

지금까지 라온이 이겨온 상대를 보면 저 기운이 평범하지 않은 건 확실하다.

'하지만 내가 더 강해.'

부상당한 이후 2년 동안 오러 연공을 멈추지 않았다. 검술이라면 모를까 오러의 양은 검사들에게도 지지 않는다.

거기다 라온의 불을 잡아먹을 수 있는 최상급 화속성 오러를 익히고 있으니, 승부는 이미 결정된 거나 마찬가지다.

방심만 하지 않는다면 이 불리한 전황을 뒤집고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

"간다!"

케인이 검을 고쳐 잡고서 땅을 박찼다.

'힘으로 깨부숴야 해.'

라온의 검술 재능은 유명하다. 검술로 끌려가지 않도록 속도와 힘으로 단숨에 끝내야 했다.

"흐아압!"

불길을 담은 검으로 라온의 어깨를 내리찍기 직전 녀석이 고개를 들었다.

어?

잔잔한 눈.

지금 상황과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가라앉은 눈에 소름이 돋아올랐다. 놈이 작은 불꽃이 타오른 검을 세웠다.

'이미 늦었다.'

허리와 허벅지에 힘을 주고, 검을 끝까지 내리쳤다.

캬아앙!

검과 검이 부딪치는 순간 오러를 전력으로 불태웠다.

콰아아아!

검날에서 피어난 불길이 라온을 집어삼킬 듯이 타올랐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른 일이 벌어졌다.

찌지지직!

라온의 검극에 피어난 작은 불꽃이 검면 전체를 태우는 거대한 불꽃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뭐, 뭐야!"

케인의 눈동자가 찢어질 듯 벌어졌다.

'이게 말이 돼?'

저 작은 불꽃이 자신의 불꽃을 역으로 먹어 치우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검 뒤에 있는 라온과 눈을 마주쳤다. 이전보다 더 가라앉은 눈동자. 녀석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으아아아아!"

케인이 이를 악물었다. 단전에 차오른 모든 기운을 끌어 올려 검을 그었다.

허공에 붉은 선이 그어질 정도의 격렬한 오러가 폭발했지만, 라온은 오히려 한 걸음 나아갔다.

우우웅!

그의 검이 변해간다. 묵직한 바위에서 예리한 바람으로.

은빛 칼날이 맹수의 어금니처럼 파고들어 왔다.

"흡!"

케인이 다급하게 오러를 끌어 올리며 중단으로 검을 내렸다.

쩌어어엉!

막았다.

분명히 막았는데, 왜 내 검이….

단 일격이다. 한 번의 휘두름으로 수련검이 깨져버렸다. 저 작은 불꽃에 저런 막대한 힘이 실렸다는 게 믿기질 않았다.

"아직이다."

다시 바람 소리가 들리고, 허리가 바스러지는 통증이 일었다.

"커허헉!"

케인은 라온이 후려친 주먹을 이겨내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꽂혔다.

"끄으으윽!"

갈비뼈가 우그러진 듯한 통증을 참으며 일어설 때 머리 위에서 라온의 목소리가 들렸다.

"상성?"

담백한 표정의 라온이 고개를 모로 꺾었다.

"상성이 뭔데."

* * *